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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반항(On the Duty of Civil Disobedience)

Bollnow 2024. 5. 6. 05:05

시민의 반항(On the Duty of Civil Disobedience)

Henry David Thoreau

 

<최소한으로 통치하는 정부가 최선의 정부>라는 주장을 나는 진심으로 받아들이며, 이러한 주장의 보다 신속하고 보다 체계적인 실현을 보고 싶다. 이렇게 되면 나는 굳게 믿거니와, 그것은 <전혀 통치하지 않는 정부가 최선의 정부>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러한 상태를 맞이할 준비를 갖추었을 때 그것은 그들이 갖게 될 정부일 것이다. 정부는 기껏해야 편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보통은 대부분의 정부가, 때로는 모든 정부가 편법이 아니다. 常備軍에 대해 제기되는 반대는 다양하고 중요하며 보급될만한 것이거니와, 이러한 반대는 결국 常備政府에 대해서도 제기될 수 있다. 상비군은 상비정부의 한 팔에 지나지 않는다. 정부는 인민이 그들의 의지를 집행하기 위하여 선택한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을 뿐이지만 인민이 이 정부를 통해 행동을 하기도 전에 정부 자체가 악용되고 변질되기 쉬운 것이다. 비교적 소수의 사람들이 상비 정부를 도구로 사용한 결과인 멕시코 전쟁을 보라. 처음에는 인민은 이러한 조치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미국정부-그것은 비록 일천한 전통이기는 하지만, 손상 없이 후손에게 전하려고 노력하면서 매순간마다 그 순수성을 조금씩 잃고 있는 전통 이외의 그 무엇인가? 그것은 살아 있는 단 한 사람의 생기와 힘도 갖지 못한다. 단 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는 정부를 자신의 의지에 따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민들에게는 말하자면 나무로 만든 총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라도 불필요하지는 않다. 인민은 그들의 정부에 대한 이상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복잡한 기계를 갖고 그 소음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정부는 어떻게 하면 성공적으로 사람들을 이용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고, 심지어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떻게 스스로를 이용하는가를 보여 준다. 우리는 모두 이런 점은 좋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는 방해 행위를 민첩하게 중단하는 것 이외에는 어떤 사업을 스스로 촉진하는 일은 결코 없다. <이 정부>는 나라를 자유롭게 유지하지도 못한다. <이 정부>는 서부를 개척하지도 못한다. <이 정부>는 교육을 시키지도 못한다. 미국인민들의 고유한 성격이 그동안 이루어 놓은 일을 수행한 것이며, 만일 정부가 때때로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미국인민들의 고유한 성격은 더 많은 일을 이루어 놓았을 것이다. 정부란 사람들이 서로 기꺼이 홀로 있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채택한 방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정부가 방편의 역할을 가장 잘 할 때 정부는 피통치자를 가장 잘 홀로 있게 한다.무역과 상업은, 그것이 고무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면, 입법자들이 끊임없이 그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입법자들을 조금이나마 그들의 의도에 따라 판단하지 않고 전적으로 그들의 행동의 결과만으로 판단해야 한다면, 그들은 철도 위에 장애물을 설치하는 말썽꾸러기에 포함시켜 처벌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한 시민으로서 실제적으로 말한다면, 무정부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과는 달라서, 나는 즉각 정부를 없애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즉각 더 나은 정부로 만들자고 요구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어떠한 정부를 존경할 것인가를 분명히 밝히면, 그것은 존경하는 정부를 획득하는 한 걸음이 될 것이다.

권력이 일단 인민의 손에 들어왔을 때, 다수의 지배가 허용되고 오랫동안 계속해서 지배할 수 있는 실제적인 이유는 결국 그들이 가장 정당하다거나 또는 이것이 소수자에게 가장 공정하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물리적으로 가장 강하다는 데에 있다. 다수가 지배하는 정부라도 모든 경우에 있어서 정의-심지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한도 내의 정의-에 바탕을 둘 수는 없다. 다수가 사실상 옳고 그름을 결정하지 않고 양심이 결정하는 정부는 있을 수 없는가?-다시 말하면 다수는 오직 편법적인 지배가 적용될 수 있는 문제만을 결정하는 정부는 있을 수 없는가? 시민은 잠시나마, 또는 최소한으로나마 자신의 양심을 정부에 맡겨야 하는가? 그렇다면 왜 모든 사람이 양심을 갖고 있는가? 우리는 먼저 인간이고 그 다음에 시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을 계발하는 것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계발하는 것만큼 바람직하지는 않다. 내가 가정할 권리를 갖고 있는 유일한 의무는 어떤 때에라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행하는 것이다. 단체에는 양심이 없다는 말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양심적인 사람들의 단체는 양심을 <가진> 단체이다. 법이 사람을 조금이라도 더 올바르게 만드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오히려 법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선량한 사람조차도 날로 불의(不義)의 하수인이 되고 있어 싸움터로 놀라울 만큼 질서정연하게 행진해 가는 대령, 대위, 하사관, 사병, 탄약 운반병 등의 군대 행렬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의 의지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상식과 양심에도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행군이 무척 어렵고 심장조차 뛴다. 그들은 그들이 말려든 일이 저주받을 일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인가? 그들은 도대체 인간인가, 또는 권력을 장악한 파렴치한 사람에게 이바지하는 움직이는 작은 요새나 탄창인가? 해군 기지를 찾아가서 해병(海兵)을 보라. 이것이 바로 미국 정부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다. - 그것은 인간성의 그림자이고 잔재이며, 산 채로 염()을 해서 세워 놓은, 말하자면 이미 장례 주악에 맞추어 무기 밑에 묻어 놓은 인간인 것이다. 다음 시와 같다고 할까.

 

그의 시체를 성채로 급히 운반할 때

북소리 들리지 않고 부고장도 없었다.

우리의 영웅이 묻힌 무덤 위로는

조포(弔砲)를 쏘는 병사도 없구나.

 

이러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다시 말하면 주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기계로서 몸으로 나라에 봉사하고 있다. 그들은 바로 상비군, 예비군, 간수, 경찰관, 민병대(民兵隊) 등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그 판단이나 도덕감이 어떻든 이를 자유로이 발휘하지 못하며, 오히려 나무나 흙이나 돌의 위치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에 사용할 목제인간(木製人間)을 생산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짚으로 만든 인간이나 흙덩어리 이상의 존경을 받지 못한다. 그들의 가치는 말이나 개의 가치와 같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조차도 보통은 훌륭한 시민으로 평가된다. 다른 사람들은 - 대부분 입법자, 정치가, 법률가, 장관, 그밖의 관직자로서 - 주로 머리로 나라에 봉사한다. 그런데 그들은 거의 도덕적 분별을 하지 않으므로, 신에 봉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지중에> 악마에 봉사하기 쉽다. 극소수의 사람들은 - 영웅, 애국자, 순교자, 위대한 의미에서의 개혁가, 그리고 <인간>으로서 - 그들의 양심에 의해 나라에 이바지하고, 따라서 대체로 나라에 저항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라로부터 적의 취급을 받는다. 현명한 사람은 인간으로서 유용하기를 바랄 뿐이고, <진흙>이 되어 <바람구멍 막이>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으며, 적어도 이러한 소임은 흙에 맡긴다. -

 

세계의 어떤 국가에 대해서나

지배받는 이차적인 존재로서,

또는 유용한 사용인(使用人)이나 도구로서

소유되기에는 나는 너무나 고결하게 태어났다.

 

동포에게 자기 자신을 모두 주는 사람은 쓸모없고 이기적으로 보이지만, 자기 자신의 일부분만을 주는 사람은 자선가나 박애주의자로 불린다.

오늘날 이러한 미국 정부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인간다울 것인가? 나는 수치감 없이는 이 정부와 관계를 가질 수 없다고 대답한다. 나는 잠시라도 <노예>의 정부이기도 한 이 정치적 조직을 <나의> 정부로 인정할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이 혁명의 권리, 다시 말하면 정부의 폭정이나 비능률이 너무나 커서 참을 수 없을 때에는 정부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정부에 반항하는 권리를 인정한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지금은 그러한 경우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1775년의 혁명은 그러한 경우였다고 생각한다. 만일 이 정부가 항구에 들어오는 외국 물품에 과세(課稅)를 하기 때문에 나쁜 정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 점에 대해 법석을 떨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물품 없이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기계에는 마찰이 있기 마련이고 이것은 악과 충분히 균형을 이루게 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러한 마찰 때문에 소란을 일으키는 것은 아주 좋지 않다. 그러나 마찰이 그 나름의 기계를 갖게 되고 억압과 강탈이 조직화될 때에는 더 이상 그러한 기계를 갖지 말자고 나는 말한다. 다시 말하면 자유의 피난처임을 장담해 오던 나라에서 그 국민의 6분의 1이 노예이고 나라 전체가 외국 군대에게 짓밟히고 정복되었으며 군법(軍法) 밑에 놓여 있을 때에는 양심적인 사람들이 아무리 빨리 반항하고 혁명을 일으키더라도 너무 이른 것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러한 의무를 더욱 절박하게 만드는 것은 이렇게 짓밟힌 나라는 우리들의 나라가 아니지만 침략군은 우리들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많은 도덕적 문제에 대해 권위자로 인정되고 있는 페일리는 그의 저서의 <시민 정부에 대한 복종의 의무>라는 장()에서 시민의 모든 의무를 편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 사회의 이익이 그것을 요구할 때에만, 다시 말하면 국민이 불편을 겪지 않고는 그 정부에 저항하거나 또는 그 정부를 변경할 수 없을 때에만, 이러한 경우에 한해서만, 기성의 정부에 복종하는 것이 신의 뜻이다. --- 이러한 원리를 인정한다면, 모든 개별적인 저항의 정당성은 한편으로는 위험과 불편의 양()에 대한 계산, 또 한편으로는 개선의 가능성과 경비에 대한 계산으로 환원된다.” 이에 대해서는 각자가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페일리는 편의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고 개인과 마찬가지로 인민이 그 대가가 어떻든 정의를 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일조차 없는 것 같다. 만일 내가 물에 빠진 사람으로부터 널빤지를 부당하게 빼앗았다면, 내가 물에 빠져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그 사람에게 널빤지를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페일리에 따르면 이것은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는 생명을 건질 수 있었을 사람이 생명을 잃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국민으로서의 그들의 존재를 대가로 치루더라도 노예 소유를 포기하고 멕시코 전재을 중단해야 한다.

그 실제에 있어서는 정부는 페일리에 동의한다. 그러나 현재의위기에 있어서 매사추세츠가 정확하게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성장한 창부, 화려하게 차려 입은 부정녀(不貞女)

옷자락은 제대로 거두고 있지만 영혼은 진흙 속에 끌리고 있다.

 

실질적으로 말해서 매사추세츠에서 개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남부에 있는 10만명의 정치가들이 아니라 여기에 있는 10만명의 상인과 농부들이며, 그들은 인간성보다는 장사나 농사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노예와 멕시코에 대해 정의를 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나는 멀리 떨어져 있는 적들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가까이에서 멀리 있는 적들에게 협력하고 그들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자들을 나무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없다면 멀리 떨어져 있는 적들은 해를 끼치지 못한다. 우리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기가 일쑤다. 그러나 소수도 실질적으로는 다수보다 더 현명하거나 더 낫지가 않기 때문에 개선은 그 속도가 느린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처럼 착해야 한다는 것보다는 어딘가에 절대적인 선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전체를 발효(發酵)시킬 것이기 때문이다.<의견상으로는> 노예제도와 전쟁에 반대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노예제도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수하며, 그들은 워싱턴과 프랭클린의 자손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가만히 앉아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그들은 심지어 자유의 문제보다는 자유무역의 문제를 앞세우고 저녁을 먹은 다음에 멕시코로부터의 최근의 권고와 함꼐 물가 시세나 조용히 읽다가 잠이 들어 두 문제를 잊기도 한다. 오늘날 정직한 사람과 애국자의 시세는 얼마인가? 그들은 주저하고 후회하고 때로는 청원을 하기도 하지만 진지하게 추진하여 효과를 거두는 일은 하나도 없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악을 몰아내서 더 이상 뉘우치지 않아도 되기를 태평하게 기다리고 있다. 기껏해야 그들은 값싼 투표나 하고 정의가 그들 옆으로 지나갈 때 허약한 모습으로 성공을 빌 정도이다. 덕있는 사람과 덕의 후원자의 비율은 1999이다. 그러나 어떤 물건을 잠시 간수하고 있는 사람과 거래하기보다는 그 진짜 주인과 거래하는 것이 훨씬 쉽다.

모든 종류의 투표는 약간의 도덕적 색채를 곁들여서 선과 악, 곧 도덕 문제를 가지고 노는 장기나 주사위 놀이 같은 일종의 놀이이며, 따라서 내기가 따르기 마련이다. 투표자의 성격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나는 아마도 내가 옳다고 생각한 대로 투표하겠지만, 내가 진정으로 그 정의가 승리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문제는 다수에게 맡기려고 한다. 그러므로 투표의 의무는 편법을 결코 넘어서지 못한다. <정의를 위해> 투표했다고 하더라도 정의를 위해 <행동>한 것은 결코 아니다. 투표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승리했으면 하는 당신의 욕망을 희미하게 표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은 정의를 우연의 자비에 맡겨 놓으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고 대다수의 힘을 빌어서 승리하게 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대다수의 행동에는 덕은 거의 없는 것이다. 대다수가 마침내 노예제도의 폐지를 위해 투표하게 될 때, 그것은 그들이 노예제도에 무관심하거나, 또는 그들의 투표로 폐지시킬 노예제도가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만이 노예인 것이다. 자신의 투표에 의해 자신의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의 투표만이 노예제도의 폐지를 촉진시킬 수 있다.

볼티모어인가 어디에서 대통령 후보자 지명을 위한 전당대회가 열리는데 주로 신문 편집자들과 직업적 정치인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들이 어떠한 결정을 하든 독립적이고 지성적이고 존경할 만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존경할 만한 사람의 지혜와 정직함을 믿을 것이 아닌가? 우리는 일부의 독립적인 투표에 의존할 수 있지 않은가? 이 나라에는 전당대회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른바 존경할 만한 사람도 그 입장이 유동적이어서 사실은 정부가 그에게 실망할 더 많은 이유를 갖고 있을 때에 오히려 정부에 대해 실망을 느낀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해서 지명된 후보자 중의 한 사람만을 <유용한> 사람으로 당장 선택해서, 그 자신이 선동가의 어떤 목적에도 <이용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그의 투표는 무정견한 외국인이나 매수했을지도 모를 고용된 원주민의 투표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 참으로 인간다운 사람, 내 이웃의 말을 빌린다면 남의 말에 놀아나지 않는 사람이여! 우리의 통계는 잘못되어 있다. 이 나라의 1천 평방 마일마다 인간다운 사람이 몇이나 있는가? 한 사람을 찾아보기도 어렵다. 미국은 사람들로 하여금 여기에 정착하게 할 매력을 하나도 갖지 못했는가? 미국인은 일종의 비밀공제회 회원으로 전락했다.군거(群居)의 기관이 발달했으나 지성과 발랄한 자신감은 분명히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고,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갖는 최초의 주요한 관심은 구호소가 잘 손질되어 있는가를 보는 것이고 합법적으로 성년복(成年服)을 입기도 전에 장차의 과부와 고아를 돕기 위한 기금 모집이나 하려고 하는 사람, 요컨대 점잖게 장사지내 줄 것을 약속하고 있는 상호보험회사(相互保險會社)의 도움이 있어야 비로소 살아갈 용기를 갖는 사람으로.

비록 가장 큰 악이라고 하더라도 악의 말살에 헌신하는 것만이 인간의 의무가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정당하게 다른 일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악으로부터 손을 씻고, 만일 더 이상 악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악을 실제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것은 적어도 인간의 의무이다. 만일 내가 다른 일이나 계획을 추구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면, 나는 적어도 우선 남의 어깨에 올라타고 앉아서 그러한 일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확인해야 한다. (만일 남의 어깨에 올라타고 앉았다면) 나는 우선 그를 해방시켜서 그 사람도 그 자신의 계획을 추구하도록 해 주어야 한다. 얼마나 엄청난 모순이 관용되고 있는가를 보라. 나는 우리 마을의 몇 사람이 나한테 노예 폭동을 진압하러 가라거나 또는 멕시코 전쟁에 나가라는 명령을 해봐라, 내가 가나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바로 이 사람들이 직접적으로는 그들의 충성심 때문에, 또한 간접적으로는 적어도 그들의 돈에 의해서 각기 대리인(代理人)들을 내보내고 있는 것이다. 정당하지 못한 전쟁에 가가시를 거부한 병사는 마치 나라가 죄를 지을 동안에는 나라를 채찍질할 사람을 고용할 정도로는 회개하지만 잠시라도 죄를 짓지 않을 정도로 회개하지는 않는 것처럼 자기 자신의 행동과 위신을 돌보지 않고 무시하는 사람들의 갈채를 받는다. 따라서 마침내 우리는 모두 <질서><시민정부>라는 이름 밑에서 우리 자신의 비열함을 존중하고 지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처음 죄를 지을 때에는 얼굴을 붉히지만 그 다음에는 무관심해지며, 부도덕한 것이 말하자면 도덕과는 <무관계>한 것으로 되고, 그것은 우리의 생활에 전혀 불필요한 것은 아닌 것으로 된다.

가장 광범하고 가장 유행하는 오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장 몰이해(沒理解)한 덕이 필요하다. 애국심이라는 덕이 일반적으로 모면하기 어려운 가벼운 잘못은 고상한 사람들이 가장 범하기 쉬운 것이다. 정부의 성격과 조치에 대해서는 반대하면서도 그들의 충성심을 바치고 후원을 하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이 정부의 가장 성실한 지지자이고, 따라서 개혁에 대해 가장 심각한 장애가 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람은 대통령의 요구를 무시하기 위해 합중국(合衆國)을 해체하라고 주()에 진정하고 있다. 왜 그들은 스스로를 그들 자신과 주의 연맹을 해체하고 그들의 세금 지불을 거부하지 않는가? 그들과 주의 관계는 주와 합중국의 관계와 같은 것이 아닌가? 또한 주가 합중국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 그들은 주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사람들이 단지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 의견>을 즐길 수만 있을 것인가? 그의 의견이 그를 괴롭히는 것이라면 거기에 어떤 즐거움이 있을 것인가? 만일 당신이 이웃 사람에게 단 1달러라도 사취 당했다면, 당신이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또는 사기를 당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또는 마땅히 돌려줘야 할 것을 돌려달라고 사정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당신은 돈을 모두 돌려받고 다시는 사기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당장 효과적인 조치를 취할 것이다. 원칙에 입각한 행동, 그리고 정의의 인식과 실천은 사물을 변화시키고 관계를 변화시킨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이며 과거의 어떤 것과도 부합되지 않는가. 그것은 나라와 교회를 분열시킬 뿐 아니라 가족을 분열시키며, 심지어 <개인>조차도 분열시킨다. 그 개인 속에 있는 악마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분리하는 거시다.

부당한 법들이 있다고 하자. 우리는 그 법들을 준수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또는 그 법들을 수정하려고 노력하면서 수정에 성공할 때까지는 그 법을 준수할 것인가, 또는 당장 그 법을 어길 것인가? 사람들은 일반저그로 이러한 정부 밑에서는 이 법을 수정할 수 있는 대다수를 설득할 때까지는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만일 저항한다면 치료법 자체가 해독보다 더 나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치료법 자체가 해독보다 더 나쁘다는 것은 정부 자체의 잘못이다. <정부>가 치료법을 더 나쁘게 만든 것이다. 왜 정부는 더욱 앞을 내다보며 개혁을 하려고 하지 않는가? 왜 정부는 현명한 소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가? 왜 정부는 상처도 입기 전에 울며 반항하는가? 왜 정부는 시민들로 하여금 좀더 날카롭게 정부의 잘못을 지적하고 정부가 시키는 일보다 <더 나은> 일을 하도록 격려하지 못하는가? 왜 정부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고 코페르니쿠스와 루터를 파문하고 워싱턴과 프랭클린을 반역자라고 부르는가?

정부의 권위를 고의적이며 실제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정부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유일한 범죄이며, 그렇지 않다면 왜 정부는 분명하고 적절하고 적합한 벌칙을 정하지 않았는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한 푼도 없는 사람이 주를 위해 9실링을 바치는 것을 단 한번이라도 거절한다면, 그는 징역을 살아야 하며, 내가 아는 어떤 법률도 그 형기(刑期)를 경하고 있지 않아서 형량은 그를 수감시킨 사람들의 재량에 따라서 결정될 뿐이다. 그러나 그가 90번에 걸쳐서 주로부터 9실링을 훔쳤다면, 그는 곧 자유의 몸이 된다.

만일 불의(不義)가 정부라는 기계의 불가결한 마찰의 하나라면, 그대로 내버려 두기로 하자. 아마도 이 기계는 천천히 닮아 버릴 것이고 - 분명히 이 기계 자체가 닳아서 없어질 것이다. 만일 불의가 그 나름으로 스프링이나 도르래나 로프나 기중기(起重機)를 갖춘다면, 아마도 당신은 치료법이 해독보다 더 나쁜지 그 여부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불의가 당신에게 다른 사람에 대해 불의를 행하는 하수인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이라면, 나는 말하거니와, 그 법을 어려라. 당신의 생명이 이 기계를 멈추는 제동기(制動機)가 되게 하라. 내가 해야 할 일은 내가 비난하고 있는 불의에 최소한 나 자신을 빌려주는 일은 없도록 한다는 것이다.

나라가 해독을 제거하기 위해 마련한 방법을 채택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나는 그러한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러한 방법은 시간이 너무 걸려서 한 사람의 생명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나에게는 그 밖에도 할 일이 있다. 나는 주로 이 세계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이 세계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이 세계가 좋든 나쁘든 이 세계 안에서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인간은 모든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일만 하면 된다. 그리고 인간은 <모든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나쁜 <>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이나 국회가 하는 일이 나에게 진정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내가 하는 일도 대통령이나 국회에 진정을 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대통령이나 국회가 나의 진정을 듣지 않는다면, 그 다음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경우, 나라가 마련해 놓은 방법은 없다. 나라의 헌법 자체가 악인 것이다. 이것은 거칠고 완고하고 비유화적(非宥和的)인 태도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러한 태토야말로 최대의 친절과 관심을 갖고 이러한 친절과 관심을 감사히 여기고 또한 받을 만한 정신을 대하는 것이다. 신체를 진동시키는, 탄생이나 죽음처럼 개선을 위한 모든 변화도 마찬가지이다.

노예제도 폐지론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당장 개인적 또는 재정적으로 매사추세츠 정부를 지원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하며, 정의가 그들을 통해 승리하도록 수고하지 않고 오히려 한 표 앞선 다수가 되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고 나는 서슴지 않고 말한다. 신이 그들의 편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다른 사람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게다가 그가 누구이든 그의 이웃보다 더 올바른 한 사람만 있다면 이미 한 표 앞서 다수가 성립된 것이다.

나는 1년에 한번씩 - 더 이상은 아니다 - 세금 징수원을 통해 이러한 미국 정부와 그 대리자인 주 정부(州政府)와 직접 대면하게 된다. 이것이 나와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미국 정부나 주정부를 대면하게 되는 유일한 방식이다. 그런데 이때에 정부는 분명하게 [나를 인정하라]고 말한다. 따라서 당신이 정부에 대해 거의 만족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효과적이며 현재의 상황에서 가장 불가결한 방식은 이때에 정부를 부정하는 것이다. 나의 점잖은 이웃인 세금 징수원이 내가 다루어야 할 바로 그 사람이며 - 결국 나는 종이와 다투는 게 아니라 사람과 다투기 때문이다 - 그는 정부의 대리인이 되기를 자원한 사람이다. 그가 존경하는 이웃인 나를 점잖은 이웃으로서 대해야 하지, 또는 미치광이이며 평화의 교란자로 대하고 좀 더 거치고 더 격렬한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이웃으로서의 우의에 대한 이러한 장애를 제거할 수 있을지를 고려한 다음에야 그는 정부의 공무원으로서, 또는 인간으로서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며 어떠한 일을 하고 있는가를 잘 알게 될 것이 아닌가. 만일 천 명, 아니 백 명, 아니 내가 그 이름을 댈 수 있는 열 명 - <정직한> 열 명 - 아니 정직한 단 <> 사람이라도 이 매사추세츠 주에서 <노예 소유를 포기하고> 실제로 노예제도의 방조자의 입장에서 물러남으로써 감옥에 갇히게 된다면,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한번 잘 한 일은 영원히 행해지기 마련이다. 그 시작이 아무리 초라하더라도 그것은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말하기만을 좋아한다. 말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인 것이다. 수십 개의 신문이 개혁에 가담하고 있으나 인간다운 사람은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고 있다. 카톨리나 감옥에 가두겠다는 위협을 받는 대신에 매일 의사당에서 인권문제 해결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나의 존경하는 이웃인 이 주의 사절(使節)이 노예제도라는 죄를 자매 주(姉妹州)에 전가하려고 애쓰고 있는 매사추세츠의 감옥 속에 앉아 있다면 - 비록 현재로서는 매사추세츠가 자매 주와 다를 구실은 푸대접을 받았다는 것뿐이지만 - 매사추세츠 주 의회는 이 문제를 오는 가을까지 전적으로 미루지는 못할 것이다.

사람을 부당하게 투옥하는 정부 밑에서는 올바른 사람이 있어야 할 참된 장소는 역시 감옥이다. 매사추세츠가 보다 자유롭고 덜 낙담한 사람들을 위해 마련해 놓은 오늘날의 떳떳한 장소, 유일한 장소는 감옥 안에 있으며, 그들은 이미 그들의 원칙에 따라 스스로를 주의 바깥으로 몰아낸 것처럼, 주는 법령에 의해 그들을 몰아내고 가둬두는 것이다. 도망 노예나 가석방된 멕시코인 죄수나 자기네 종족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온 인디언은 감옥 속에서, 다시 말하면 분리되어 있기는 하지만 보다 자유롭고 명예로운 곳, 매사추체츠 주가 주에 <협력>하지 않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집어넣는 곳, 노예의 나라에서 자유인이 명예롭게 살 수 있는 유일한 집에서 원칙을 찾아야 할 것이다. 감옥 속에서는 그들의 영향력이 상실되고 그들의 목소리는 더 이상 정부를 괴롭히지 못하며 적으로서 감옥의 벽안에 있을 수는 없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진리가 오류보다 얼마나 더 강한가를 모르며, 스스로 약간의 불의를 겪어본 사람이 얼마나 열렬하고 효과적으로 불의와 싸울 수 있는가를 모르는 것이다. 당신의 전부를 투표하라. 단지 한 조각의 종이가 아니라 당신의 영향력 전부를 갖고 투표하라. 다수에 순응하는 동안에는 소수는 무력하다. 그때에는 심지어 소수도 아니다. 그러나 소수가 그 무게 전체로 뭉칠 때에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된다. 당면한 양자택일 모든 올바른 사람들을 투옥하느냐, 또는 전쟁과 노예제도를 포기하느냐 하는 것이라면 정부는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주저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금년에 1천명이 세금을 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이 세금을 내서 나라로 하여금 폭력을 휘두르고 무고한 피를 흘리게 하는 것처럼, 폭력적이고 유혈적인 조치는 아닐 것이다. 만일 평화로운 혁명이 가능하다면 이것이야말로 평화로운 혁명에 대한 정의이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물었던 것처럼, 세금 징수원이나 그 밖의 공무원이 나에게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당신이 진정으로 무엇인가 하려고 한다면 사직하라]고 대답할 것이다. 국민의 충성을 거부하고 공무원이 사직을 할 때, 혁명은 완수된다. 그러나 피를 흘릴 경우도 생각해 보자. 양심이 상처를 입었을 때에도 일종의 유혈이 있지 않는가? 이 상처를 통해서 그 사람의 참된 사람다움과 불멸성(不滅性)이 흘러나와서 그는 피를 흘리며 영원한 죽음 맞이한다. 나는 지금 이러한 피가 흐르는 것을 본다.

내가 범법자의 재산 압수보다는 오히려 투옥에 대해 살펴본 것은 - 비록 두 가지가 모두 같은 목적을 가진 것이겠지만 - 가장 순수한 권리를 주장하고 따라서 부패한 정부에 대해서는 가장 위험한 그들이 일반적으로 축재에 많은 시간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정부의 혜택을 비교적 적게 받을 것이고, 따라서 약간의 세금이라고 하더라도 특히 그들이 특수한 육체노동으로 그 돈을 벌어야 하는 경우에는 엄청난 부담처럼 보이기 쉽다. 만일 전적으로 돈을 사용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정부조차도 그에게 돈을 요구하는 것을 주저할 것이다. 그러나 부자는 - 불유쾌한 비교를 하려고 하지는 않지만 - 언제나 그를 부자로 만들어 준 제도에 팔리기 마련이다. 절대적으로 말한다면, 돈이 많으면 그럴수록 덕이 적다. 돈은 사람과 의의 목적 사이에 끼어들어서 그를 대신해서 목적을 이루어주는데, 이러한 목적 달성은 분명히 대단한 덕은 아니기 때문이다. 돈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대답하려고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많은 문제들을 돈이 보류하게 하며, 한편 새로이 제기되는 유일한 문제는 어렵기는 하지만 불필요한 무제, 곧 어떻게 그 돈을 사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부자의 도덕적 근거는 발밑부터 흔들리게 된다. 이른바 <수단>이 늘어날수록 삶의 기회는 적어진다. 부자가 되었을 때 자신의 교양을 위해 할 수 있는 가난했을 때 꿈꾸던 계획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헤롯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신분에 따라 대답했다. 그리스도가 [세금으로 받은 돈을 보자]고 말하자, 그 중의 한 사람이 주머니에서 돈 한 푼을 꺼냈다. 만일 네가 시저의 모습이 새겨져 있고 시저가 통용 가치를 갖게 한 돈을 사용한다면, 다시 말하면 <그 정부의 사람으로서> 시저 정부의 혜택을 즐겨 누리고 있다면, 그가 요구할 때 그 자신의 것을 그에게 돌려주라. [그러므로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 돌려주라.] - 이 대답은 애매해서 이전보다 그들을 더 현명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그들은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자유롭다는 이웃과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그들이 이 문제의 중요성과 심각성 및 공공의 안녕에 대해 어떤 말을 하든, 결국은 현존하는 정부의 보호 없이는 지낼 수 없으며, 정부에 반항하는 경우에 재산과 가족에 미칠 결과를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 자신의 경우에는 정부의 보호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만일 정부가 세금 통지서를 보냈을 때, 정부의 권위를 부정한다면, 정부는 곧 나의 모든 재산을 빼앗아서 방비할 것이고 나와 나의 자식들을 끝없이 괴롭힐 것이다. 이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외면적인 면에서 사람들이 정직하게 살면서 동시에 즐겁게 사는 것은 불가능하게 한다. 재산은 모을 만한 하치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틀림없이 다시 없어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떤 곳을 빌리거나 무단 경작하여 약간의 수확을 거둬 곧 먹어 버려야 할 것이다. 당신은 자기 힘으로 살아야 하고 언제나 보따리를 싸놓고 떠날 준비를 갖추고서 당신 자신에게만 의존해야 하며 많은 일을 벌여 놓아서는 안 된다. 심지어 터키에서도 모든 면에서 터키 정부의 선량한 국민이 되기만 한다면 부자가 될 수 있다. 공자(孔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나라가 이성의 원칙에 의해 다스려진다면, 가난과 비참함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만일 한 나라가 이성의 원칙에 의해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와 명예는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이다.] 그렇다. 남부의 어느 먼 항구에서 나의 자유가 위협을 받을 때 내가 매사추세츠의 보호가 나에게 미치는가를 바라게 될 때까지는, 또는 내가 평화적인 사업에 의해 고향에서의 축재에 전념할 때까지는, 나는 매사추세츠에 대한 충성심 및 나의 재산과 새영에 대한 매사추세츠의 권리를 거부할 수 있다. 나로서는 이러한 정부에 복종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불복종의 벌을 받는 것이 모든 면에서 훨씬 보람있을 것이다. 나는 복종하는 경우에는 더욱 쓸모없는 인간이 되리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엇다.

몇 년 전에 나는 교회 때문에 정부와 관계를 갖게 되었다. 정부는, 우리 아버지는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참석하였으나 나 자신은 한 번도 참석한 일이 없는 교회의 목사를 돕기 위해 약간의 돈을 내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정부는 [돈을 내거나 감옥에 들어가라]고 말했다. 나는 돈내는 것을 거절했으나 불행하게도 다른 사람이 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왜 교장은 목사를 돕기 위해 돈을 내야하고 반대로 목사는 교장을 돕기 위해 돈을 내지 않아도 되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나는 주의 임명을 받은 교장이 아니라 자발적인 기부금으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왜 학교는 교회처럼 납세통지서를 내고 주정부의 후원을 받아서는 안 되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도시 생정위원의 요청에 따라 다음과 같은 진술을 서면으로 작성하는 데 동의했다. [여기에 주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지하시기 바람.] 나는 이 문서를 시청 서기에게 주었고 그는 이 문서를 갖고 있다. 주 정부는 내가 그 교회의 일원으로 간주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 후로는 한 번도 그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때에 원래의 의도를 관찰해야 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만일 그때에 열거할 방법만 있었다면, 나는 내가 가입 서명을 하지 않은 모든 단체를 자세히 밝히고 서명했겠지만, 나는 어디서 완전한 명단을 구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나는 6년 동안 인두세(人頭稅)를 내지 않았다. 나는 이 때문에 하룻밤 동안 감옥에 갇혔다. 2, 3 피트쯤 두꺼운 단단한 돌벽과, 1피트쯤 두꺼운 나무와 쇠로 된 문과, 빛이 흘러 들어오는 쇠창살을 바라보며 서서, 나는 나를 마치 마음대로 가둘 수 있는 단순한 살과 피와 뼈인 것처럼 다루는 정부의 어리석음에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정부가 나를 가두는 것을 상책으로 삼고 어떤 면에서든지 나를 이용하려고 생각하지 않는 점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나와 우리 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돌벽이 있지만, 우리 마을 사람들이 나만큼 자유로워지려면 더 단단한 벽을 기어 넘거나 부수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나는 잠시나마 갇혀있다는 느낌을 갖지 않았고, 따라서 그 벽은 돌과 회반죽의 낭비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우리 마을 사람들 중에서 오직 나만이 세금을 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들은 분명히 나를 다루는 방법을 몰랐으며 마치 버릇없이 자란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온갖 협박이나 온갖 아첨이 모두 실수투성이였다. 그들은 나의 가장 큰 소망이 감옥의 돌 벽 밖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이 부지런히 나의 명상(瞑想)의 문에 자물쇠를 잠그는 것을 보고 미소를 금할 수 없었다. 나의 명상은 허가나 방해를 받지 않고 그들을 따라 다시 나갔는데, 정말로 가장 위험한 것은 바로 나의 <명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를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나의 육신을 처벌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마치 어떤 사람에게 앙심을 푸고 있으나 그 사람에게 대들 수 없어서 그 사람의 개를 못살게 구는 소년처럼. 나는 정부라는 것이 멍청하고 은수저를 손에 든 외로운 여자처럼 수줍고 동지와 적을 분간할 줄 모른다는 것을 알았으며, 따라서 나는 그나마 남아 있던 존경심을 말끔히 잃고 정부를 불쌍히 여기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정부는 의도적으로 한 인간의 지성이나 도덕과는 대결하려고 하지 않고 오직 그의 육체나 감각과 대결하려고 할 뿐이다. 정부는 뛰어난 지능이나 정직성으로 무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물리적 힘으로 무장하고 있다. 나는 강요받기 위해서 태어나지는 않았다. 나는 내 나름대로 살아갈 것이다. 누가 가장 강한지 두고 보기로 하자. 다수에게 어떤 힘이 있을 것인가? 준수하고 있는 법보다 더 높은 법을 지키는 사람들만이 나에게 강요를 할 수 있다. 다수는 나에게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한다. 나는 군중의 강요를 받아서 이렇게 또는 저렇게 산 <참된 인간>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그렇게 사는 것은 어떠한 인생일까? 정부가 나에게 [돈을 내든지 네 목숨을 바치든지 하라]고 할 때, 내가 서둘러서 돈을 내야 할 까닭이 무엇인가? 정부는 대단한 곤경에 놓여서 쩔 바를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정부를 도와 줄 수는 없다. 정부 스스로가 자신을 도와야 한다. 내가 나 자신을 돕는 것처럼. 곤경에 놓였다고 해서 훌쩍훌쩍 울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나는 사회라는 기계의 원활한 가동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 나는 기사의 아들이 아닌 것이다. 도토리 한 알과 밤 한 알이 나란히 떨어졌을 때, 하나가 다른 것의 길을 열어 주기 위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하나가 우연히 다른 것을 뒤덮어서 그것을 죽게 할 때까지 둘 다 최선을 다해서 싹트고 자라나며 번창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식물은 그 본성에 따라 살 수 없으면 죽어버린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감옥에서 보낸 그 밤은 매우 신기하고 흥미 있었다. 내가 들어갔을 때, 샤쓰바람의 죄수들은 문가에서 농담과 저녁 바람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간수가 [여보게들, 문을 잠글 시간일세]라고 말하자, 그들은 흩어졌고, 나는 그들이 텅 빈 방으로 돌아가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간수는 같은 감방을 쓰게 된 죄수에게 나를 [제일급의 현명한 놈이야]라고 소개했다. 문이 잠기자 그는 모자는 어디에 걸고 또 그는 어떻게 처신해 왔는가를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감방은 한 달에 한 번씩 흰 칠을 하며, 내가 들어간 감방은 이 도시에서 가장 희고 가장 소박하게 차려지고 아마도 가장 깨끗한 방일 것 같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내가 어디서 무슨 혐의로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나는 그에게 이야기를 해 준 다음, 이번에는 그에게 어떻게 해서 들어오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물론 그는 정직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세상 나름으로는 나는 그가 정직한 사람이었음을 믿게 되었다. [글쎄, 저자들은 내가 창고에 불을 질렀다고 하지만 나는 절대로 그런 짓은 하지 않았어]라고 그는 말했다. 내가 알아낸 정도로는, 그는 술이 취해 창고로 잠자러 갔다가 담뱃불 대문에 창고를 불타게 한 것 같았다. 그는 영리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듣고 있었고 3개월 동안 재판을 기다려 왔으나 앞으로도 그만큼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숙식을 무료로 제공받고 있고 또한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곳 생활에 꽤 익숙해졌고 또한 만족하고 있었다.

그가 한 쪽 창문을 차지했고 내가 다른 쪽 창문을 차지했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오래 들어와 있으면 할 일이라고는 창밖을 내다보는 일 뿐일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곧 이 방에 남아 있는 모든 팸플릿을 읽었고, 이전의 죄수들이 탈옥한 자리나 창살을 톱질로 잘라낸 자리를 살펴보았고, 이 방을 차지했던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감옥 밖으로는 결코 퍼지지 않는 여기 나름의 이야기와 소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이곳은 이 도시에서 시를 지어 회람으로 돌리기는 하지만 출판되는 일은 없는 유일한 곳이리라. 나는 탈옥을 하려다가 들켜서 시를 지어 노래로 부름으로써 보복을 했다는 어떤 젊은이가 지은 상당히 많은 시를 보았다.

나는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동료 죄수로부터 가능한 많은 이야기를 짜냈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어느 것이 내 침대인가를 가르쳐 주고 나에게 불을 끄라고 했다.

감방에 하룻밤 누워 있다는 것은 가보게 되리라고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던 먼 나라를 여행하는 것과 같았다. 마을에서 들리는 시계 치는 소리나 저녁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는 전에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는 쇠창살 안에 있는 창문을 열어 놓고 잤기 때문에 그런 소리들이 들여왔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중세(中世)로 옮겨진 내 고향 마을을 보는 것 같았고, 콩코드 강이 라인 강으로 바뀌고 내 눈 앞으로 가시(騎士)와 성()의 환영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거리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옛날의 도시인들의 목소리 같았다. 나는 뜻밖에도 바로 옆에 있는 여관의 부엌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소리를 듣게 되었다.이것은 나에게는 전혀 새롭고 희귀한 경험이었다. 그것은 내 고향을 좀더 가까이에서 본 모습이었다. 나는 바로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다. 나는 전에는 내 고향의 제도를 본 적이 없었다. 이것은 내 고장의 특수한 제도 중의 하나였다. 내 고장은 작은 도시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곳의 주민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침에는 문에 난 구멍으로 작은 장방형의 쇠 접시에 담긴 조반이 들어왔는데 초콜릿과 갈색 빵과 쇠숟가락이 들어 있었다. 그들이 다시 그릇을 가지러 왔을 때, 나는 남은 빵을 돌려주려고 할 만큼 풋내기였다. 그러나 나의 동료 죄수는 남은 빵을 집어 들고 점심이나 저녁을 위해서 남겨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잠시 후, 그는 근처의 들로 건초작업(乾草作業)을 하러 나갔다. 그는 매일 그곳으로 가며 정오까지는 돌아올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나를 다시 만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내가 감옥에서 나왔을 때다른 사람이 끼어들어서 세금을 냈던 것이다.내가 사는 마을에는 청년 시대에 떠났다가 비틀거리는 백발노인이 되어 돌아온 사람이 보게 되는 것과 같은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렇지만 내 시야마을과 주와 나라를 보는 시야에는 시간이 일으킬 수 있는 어떠한 변화보다도 더 큰 변화가 일어나 있었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더욱 더 분명하게 보게 되었다. 나는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을 어느 정도로 선량한 이웃과 친구로서 믿을 수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우정은 오직 좋을 때에만 믿을 수 있는 것이고, 그들은 올바른 일을 하려고 크게 애쓰지도 않으며, 그들은 그들의 편견과 미신 때문에 마치 중국인이나 말레이 사람처럼 다른 종족이고, 그들은 인류를 위한 희생에 있어서 결코 모험을 하지 않으며 심지어 재산조차도 희생하지 않으며, 결국 그들은 모두 고상하지도 않아서 도둑이 그들을 대하듯이 그들도 도둑을 취급하고 단지 외견상의 준수(遵守)와 약간의 기도, 그리고 가끔 쓸모없는 좋은 일을 하면서 영혼의 구제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어쩌면 나의 이웃을 가혹하게 판단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이웃들은 대부분 그들의 마을에 감옥과 같은 제도가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다고 나는 확신하기 때문이다.

전에는 가난한 채무자가 감옥에서 나오면 그를 아는 사람들이 감옥의 쇠창살 모양으로 손가락을 펴고 그 사이로 내다보면서 [안녕하시오?]라고 인사하는 것이 우리 마을의 관습이었다. 그러나 나의 이웃들은 나에게 이렇게 인사하지 않고 마치 내가 오랜 여행에서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처음에는 나를 쳐다보고 다음에는 서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나는 수선해 놓은 구두를 찾으려고 구둣방에 가는 길에 수감되었다. 이튿날 아침, 감옥에서 풀려나자 나는 용무를 마치러 가서 수선한 구두를 찾아 신고 내가 선도(先導)해 주기를 열망하는 월귤나무 열매를 따러가는 패들과 어울렸다. 그리고 반시간 후에는말이 곧 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에나는 2마일이나 떨어진 우리 고장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있는 월귤나무 밭의 한가운데에 도달했으며, 거기서는 어디서도 정부 같은 것은 볼 수 없었다.

이것이 나의 <옥중기>의 전부다.

 

나는 나쁜 국민인 것과 마찬가지로 좋은 이웃이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도로세(道路稅)의 납세를 거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학교를 후원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나는 지금 우리 마을 사람들을 교육하는 것으로 나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나는 세금 중의 어떤 특수 항목의 납세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단지 정부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효과적으로 물러나서 초연하려고 할 뿐이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내가 낸 돈이 총을 쏘는 사람이나 총을 사는 데 사용되지 않는 한돈은 아무 죄도 없는 것이다.내 돈의 행방을 추적하려고 하지는 않겠지만, 나의 충성심의 결과를 추적하는 일에는 관심을 갖고 있다. 사실상 나는 조용히 내 나름으로 나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있다. 비록 이러한 경우에는 흔히 그렇게 하듯이 나도 가능한 한 앞으로도 정부를 이용하고 그 이점을 이용하기는 하겠지만.

만일 다른 사람들이 정부에 동조하는 뜻에서 나에게 부과된 세금을 낸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부과된 세금을 낸 행동을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또는 오히려 그들이 정부가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불의를 선동하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세금을 부과 받은 나에 대해서 잘못된 관심을 갖고 나의 재산을 구하거나 또는 내가 감옥에 갇히는 것을 막기 위하여 세금을 대신 낸다면, 그것은 그들의 개인적 감정이 공익을 얼마나 저해하게 될 것인가를 현명하게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재의 나의 입장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경우에 자신의 행동이 완고함이나 다른 사람의 견해에 대한 부당한 존중 때문에 편중되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으로 경계해야 한다. 그때그때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기로 하자.

나는 때때로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 이 사람들은 짓궂기는 하지만 그들은 단지 무지할 뿐이다. 만일 그 방법만 안다면 그들은 좀 더 잘 할 것이다. 왜 네 이웃들에게 너를 본의 아니게 다루게 하는 괴로움을 주는가?] 또한 이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이것은 그들이 나에게 하듯이 나도 그들에게 해야 한다든가, 또는 그들로 하여금 다른 종류의 더 큰 고통을 받게 해야 한다든가 하는 이유는 되지 못한다.] 또한 나는 때때로 나 자신에게 말한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열의도, 악의도, 어떠한 개인적 감동도 없이, 또한 그들의 체질로 보아 현재의 요구를 취소하거나 변경할 가능성도 없이, 또한 네 쪽에서 다른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호소할 가능성도 없이, 너에게 단지 몇 실링을 요구할 때, 왜 너는 이 압도적인 야만적 힘에 대항하는가? 너는 추위나 배고픔, 바람과 파도에는 이렇게 완고하게 저항하지 않는다. 너는 비슷한 수많은 필연에는 묵묵히 따른다. 너는 불길 속에 머리를 디밀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전적으로 야만적인 힘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인간적인 힘이라고 보게 됨에 따라서, 그리고 나와 수백만의 무리들과의 관계를 단순히 야만적이고 생명 없는 사물과의 관계가 아니라 수백만의 인간과의 관계라고 생각함에 따라서, 우선 당장은 그들로부터 그들을 창조한 신에게 호소하고, 다음에는 그들로부터 그들 자신에게 호소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내 머리를 일부러 불 속에 집어넣는다면, 불이나 불을 창조한 자에게 호소할 수는 없고, 나는 단지 나 자신을 나무랄 수 있을 뿐이다. 만일 사람들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만족하고 여기에 맞춰서 그들을 대하며, 그들과 내가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데 대한 나의 요구나 기대에 따라 그들을 대하지 않아도 되는 권리가 나에게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면, 나는 마치 선량한 회교도나 숙명론자처럼 사물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만족하려고 노력할 것이고, 그것이 신의 뜻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사물에 저항하는 것과 순전히 야만적인 또는 자연적인 힘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곧 나는 노력을 기울여서 이러한 사물에 저항할 수는 있지만, Orpheus처럼 바위나 나무나 짐승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나는 어떤 사람이나 나라와 다툴 생각은 없다. 나는 사소한 일을 꼬치꼬치 따지거나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거나 이웃 사람보다 나를 돋보이게 하고 싶지도 않다. 오히려 나는 이 나라의 법률에 따를 구실을 찾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나라의 법에 순응할 준비가 지나치게 되어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사실상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 자신을 의심할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다. 해마다 세금 징수원이 찾아오면, 나는 순응할 구실을 찾기 위해 정부의 조치와 입장, 그리고 국민들의 정신을 재검토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조국을 어버이처럼 사랑해야 하며

우리의 사랑이나 노력이 조국에 명예가 되지 않는

그러한 경우가 간혹 있더라도

우리는 결과를 존중하고 우리의 영혼에게

지배와 이익의 욕망이 아니라

양심과 종교의 문제를 가르쳐야 한다.

 

나는 정부가 곧 이러한 일을 모두 나에게서 빼앗아 가리라고 믿으며, 그때에는 나는 애국자로서 내 이웃보다 하나도 나은 점이 없을 것이다. 보다 낮은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헌법은 온갖 결점이 있더라도 매우 좋은 것이고, 법률과 법정은 존경할 만하며, 주나 미국의 정부조차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여러 면에서 매우 찬양할 만큼 희귀한 것이고 감사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약간 더 높은 관점에서 본다면, 주나 미국 정부는 내가 지금까지 설명해 온 바와 같다. 좀 더 높은 관점, 그리고 가장 높은 관점에서 본다면, 주나 미국의 정부가 무엇이며 또한 일고의 가치라도 있는 것이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인가?

그러나 정부는 나에게 별로 관심이 없으며, 나는 가능한 한 정부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 세계에 있어서조차도 내가 정부 밑에서 살고 있는 순간은 많지 않은 것이다. 만일 <존재하지 않는 것>이 오랫동안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은 결코 없는 한도 내에서 우리가 자유롭게 사교하고 자유롭게 꿈을 꾸고 자유롭게 상상한다면, 현명하지 않은 통치자나 개혁가의 방해는 우리들에게 치명적일 수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또는 이와 비슷한 문제의 전문적 연구에 일생을 바친 사람들에게 나는 조금도 만족할 수 없다. 정치가들과 입법가들은 너무나 완벽하게 제도 안에 자리 잡고 있어서 이러한 문제를 분명하고 적나라하게 보지 못한다. 그들은 사회는 변천한다고 말하지만 그 사회가 없으면 그들은 쉴 곳이 없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는 경험과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독창적이고 유용하기도 한 제도를 만들어냈다는 사실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며,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는 진실로 그들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그들의 슬기나 솜씨는 별로 광범하지 못한 일정한 한계에 국한되어 있다. 그들은 세계를 다스리는 것은 정책이나 편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기 쉽다. Webster는 정부의 배후를 알지 못하며 따라서 정부에 대해 권위 있는 말을 할 자격이 없다. 그가 하는 말은 현존하는 정부의 본질적 개혁을 생각하지 않는 입법자들에게는 지혜롭다. 그러나 사상가들이나 백년대계를 생각하며 입법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는 이 문제를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침착하고 현명한 사색을 하지만 곧 정신적 한계와 관용의 한계를 드러내게 될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개혁가의 값싼 말이나 일반적으로 정치가의 더욱 값싼 지혜와 달변에 비교하면, 웹스터의 말은 아마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유일한 말일 것이고, 우리는 이 사람이 있는 데 대해 하늘에 감사한다. 비교해 본다면, 이 사람은 언제나 강력하고 독창적이며 무엇보다도 실제적이다. 게다가 그의 자질은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신중한 것이다. 법률가의 진리는 참된 진리가 아니라 일관성 또는 일관된 편법이다. 진리는 언제나 그 진리 자체와 조화를 이루며, 불의와 양립할 수 있는 정의를 드러내는 데 주요한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미 그렇게 불려온 바와 같이 <헌법 수호자>라고 불릴 만하다. 그는 사실상 공격은 하지 않고 방어만 하는 것이다. 그는 지도자가 아니라 추종자이다. 그의 지도자는 1787년의 사람들이다. [나는 여러 주를 합중국으로 결합한 최초의 타협을 와해시키려고 노력한 적도 없으며 그러한 노력을 제안한 적도 없고 그러한 노력에 찬성한 적도 없고 찬성하려고 생각한 적도 없다]고 그는 말한다. 헌법이 노예제도를 인정한 점에 대해서는 그는 [최초의 계약의 일부이므로 그대로 놓아두자]고 말한다. 그의 각별한 예리함과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실을 단순한 정치적 관계로부터 분리시켜서 절대적으로 지성에 의해 처리되어야 할 것예를 들면 오늘날 여기 미국에서 노예제도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마땅한가 하는 것으로 보지 못하고, 오히려 개인으로서 절대적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궁색한 대답을 하려고 하며, 또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몰려 있다. 이러한 대답에서 사회적 의무에 대한 새로운 규범이 단 하나라도 나올 것인가?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노예제도가 존재하는 주 정부들이 노예제도를 규제하는 방식은 각 주 나름으로 그 주의 주민, 그리고 재산과 인간성과 정의에 대한 일반적인 법률, 그리고 신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결정되어야 한다. 인간적인 감정이나 그 밖의 다른 목적을 갖고 다른 곳에서 조직된 단체들은 노예제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나는 그러한 단체를 고무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결코 격려하지 않을 것이다.]

진리의 보다 순수한 원천을 모르는 사람들, 진리의 흐름을 더 높이 추적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성경과 헌법 옆에 서서, 그것도 현명하게 서서 존경심을 갖고 겸허하게 진리의 샘물을 마셔야 한다. 그러나 진리의 원천이 어디서부터 흘러 내려와서 이 호수 또는 저 연못으로 흘러 들어가는가를 아는 사람들은 다시 한 번 태세를 가다듬고 샘의 근원을 향한 순례를 계속해야 한다.

입법에 관한 천재는 미국에 나타난 일이 없다. 이러한 천재는 세계 역사에서도 드물다. 웅변가와 정치가와 달변인 사람은 무수하지만 오늘날의 가장 난처한 문제의 해결법을 말해 줄 수 있는 어떤 진리나 웅변에 의해 고무될 수 있는 어떤 영웅심 때문에 좋아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입법자들은 자유 무역, 자유 단결 및 정직성이 국가에 대해 갖는 비교적인 가치를 아직도 배우지 못했다. 그들은 과세와 재정, 상업, 생산, 농업 등 비교적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조차도 재능을 갖지 못했다. 만일 우리가 적절한 경험과 인민의 효과적인 불평에 의해 시정을 하지 않고 의회에서의 입법자들의 말장난에 불과한 재치에 전적으로 따른다면, 미국은 여러 나라들 사이에서 그 지위를 오래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나는 이런 말을 할 권리가 없을지 모르지만, <신약성서>가 쓰여진 지 1800년이나 지난 지금, 입법의 학문을 밝혀주는 이 책의 빛을 충분히 이용할 만한 지혜와 실제적인 재능을 가진 입법자는 어디에 있는가?

나 같은 사람도 즐거이 복종하려고 하는 정부의 권위조차도 - 왜냐하면 나는 나보다 더 잘 알고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즐거이 복종하려고 하며, 대체로 나보다 더 잘 알지도 못하고 더 잘 하지도 못하는 사람에게도 복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 아직은 불순한 것이다. 엄격하게 공정하려면, 정부는 피치자의 허락과 동의를 받아야 한다. 절대군주제(絶對君主制)로부터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 그리고 입헌군주제로부터 민주주의로 발전하는 것은 개인을 진정으로 존중하게 되는 발전이다. 중국의 철학자인 공자조차도 개인을 제국(帝國)의 기본으로 볼 만큼은 현명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은 민주주의는 정부의 개선에 있어서 최종적인 것인가? 인간의 권리를 인정하고 조직화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가는 것은 불가능한가? 국가가 개인을 보다 높고 독립된 힘으로 보고 국가의 권력과 권위는 이러한 개인의 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인정하고 개인을 이에 알맞게 대우하게 될 때까지는 참으로 자유롭고 계몽(啓蒙)된 국가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마침내 만인에게 공정할 수 있게 되었고 개인을 이웃으로서의 존경심을 갖고 대하며 몇몇 사람이 국가로부터 초연하게 살며 정부에 간섭하지도 않고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살더라도 그들이 이웃과 동포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한 국가의 안정을 해친다고 생각하지 않는 국가를 상상해 보는 것을 즐긴다. 이러한 열매를 맺고 이열매가 익는대로 떨어지더라도 내버려두는 국가는 보다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국가가 탄생하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나는 이러한 국가도 상상해 보지만 아직 어디서도 실현된 것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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