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 : 실천 철학
스피노자 : 실천 철학
Gilles Deleuze
<목차>
1장 : 스피노자의 생애
2장 : <에티카>와 도덕성의 차이에 관하여
3장 : 악에 관한 편지 (블리옌베르크와의 서신교환)
4장 : <에티카>의 주요개념 색인
5장 : 스피노자의 진화 (<지성개선론>의 비완성에 관하여)
제1장 : 스피노자의 생애
니체는 자신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어떤 것이 철학자의 삶의 신비를 구성하는 것인지를 이해했다. 그 철학자는 금욕주의적인 미덕 ― 겸손, 청빈, 정숙 ― 을 전유하고 이것들을 완전히 자기 자신만의 목적에, 사실은 전혀 금욕주의적이지 않은 비범한 목적에 귀속시킨다. 그는 이것들을 자신의 독특함의 표현으로 만든다. 이것들은 그의 경우에 있어서 도덕적 목적도, 또 다른 삶을 이루기 위한 종교적인 수단도 아니며 오히려 철학 자체의 '효과'이다. 이 철학자에게는 절대적으로 다른 삶이란 없기 때문이다. 겸손, 청빈, 정숙은 특히나 부유하고 매우 윤택한 삶의 효과가 되며, 사유를 정복할 정도로 충분히 강력한 삶의 효과, 그리고 모든 다른 본능을 스스로에 종속시킬 만큼 충분히 강력한 삶의 효과가 된다. 스피노자가 자연이라고 불렀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삶은 더 이상 수단과 목적을 통해 필요에 기초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에 의해 생산, 생산성, 역량(potency)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겸손, 청빈, 정숙은 그의 위대한 삶의 방식이며, 그 자신의 신체의 사원(寺院)을 만든다. 왜냐하면 원인은 너무도 자랑스럽고, 너무 부유하며, 너무 감각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철학자에 주목함으로써 겸허하고 가난하며, 자애로운 외양을 공격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이 외양은 사람들의 무능력의 범위를 증가시킨다. 그리고 이 철학자는 어떤 빌미도 주지 않지만 온갖 공격을 받는다.
여기에서 이 철학자의 고독의 충분한 의미가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가를 결코 따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 환경들 중의 그 어떤 것에도 적합하지 않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가 가장 나은 생활조건, 혹은 생존 조건을 발견하는 곳은 바로 민주적이고 자유주의적 환경 속에서이다. 그러나 그에게 이러한 환경들은 사악한 의지가 삶에 독을 풀어놓거나 황폐화시킬 수 없게 하는 유일한 보증인이자, 또 이 환경들은 국가의 목적, 사회의 목적을, 환경일반을 약간이라도 넘어서게 하는 사유의 역량으로부터 삶을 분리시킬 수 없게 하는 유일한 보증인이다. 스피노자는 모든 사회에서 그것은 복종의 문제이며, 그 밖의 어떤 것도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바로 이 때문에 과오, 장단점, 선악이라는 통념은 복종 및 불복종과 관련을 맺고 있는 매우 사회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나은 사회는 사유의 역량을 예속의 책무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사회이며, 그 자신의 이해관계에 있어서, 사유를 국가의 규칙에 종속시키지 않게 돌보는 사회이며, 이는 행동에만 적용된다. 사유가 자유롭고 따라서 생동적인 것인 한, 어떤 것도 타협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기를 멈출 때, 모든 다른 억압 또한 가능해지고 이미 현실화되었기에 모든 행동은 비난받게 되며, 모든 삶은 위협에 처하게 된다. 확실히 그 철학자는 가장 좋아할 만한 조건을 바로 민주적 국가와 자유주의적 서클에서 찾는다. 그러나 그는 결단코 자기의 목적을 국가의 목적이나 환경의 목표와 혼동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복종은 물론 비난도 피해 나가는 사유 속의 힘들을 애타게 간청하며, 선악을 넘어선 삶, 장점이나 책잡힐 것이 없는 엄격한 순진무구함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이 철학자는 다양한 국가에서 거주할 수 있으며, 자주 다양한 환경 속에서 거주할 수 있으되 그러나 그는 은둔자, 그림자, 여행자 혹은 떠돌이 하숙생의 태도로 그렇게 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스피노자가 보다 개방적일 것이라고 추정되는 환경에 들어가기 위해 보다 폐쇄적일 것이라고 추정되는 유대인 환경과 단절했다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자유기독교, 데카르트주의, 데 비트(de Witt) 일파들에 찬성한 부르주아지 등등... 왜냐하면 그는 어디로 가든지 간에 성공의 기회가 많든 적든 간에, 그 자신과 그의 보기 드문 목표가 관용될 수 있는지를 묻고 요구하며, 이 관용으로부터 그는 한 사회가 가질 수 있는 민주주의의 수위, 진리의 수위를 판단하거나 혹은 이와 정반대로 모든 인간들을 위협하는 위험과 관련되는 것을 판단한다.
바루흐 스피노자(Baruch는 히브리어로 이를 라틴어로 표현하면 베네딕트(Benedict)라는 말이 되는데, 히브리어에서 이 말은 '축복받은'이란 뜻 : 역주)는 1692년,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지구에 있는 부유한 상인가정에서 태어났다. 유대인 학교에서 그는 신학과 상업을 공부한다, 13세부터 그는 아버지의 회사에서 일하지만 여전히 공부를 좋아했다(1654년에 아버지가 죽고 나서 1656년까지 그는 형과 함께 회사를 경영한다). 그를 유대인 공동체 및 사업과 단절하게 만들고 1656년의 파문으로 이끌었던 철학적 개종은 얼마나 느리게 일어났던가? 우리는 이 시기 동안 암스테르담 공동체가 동질적이었다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이 공동체는 매우 다질적이었으며, 기독교 환경처럼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들도 매우 다양했다. 대부분 그것은 이전의 '마라노'들로, 즉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외향적으로는 가톨릭주의를 실천했으며 16세기 말에 이주당해야만 했던 유대인들로 구성되었다. 심지어 성실하게 유대인 신앙을 고수한 사람들도 전통적인 랍비적 유대교와 결코 화해할 수 없었던 철학적, 과학적, 의학적 문화에 깊이 물들어 있었다. 스피노자의 아버지는 분명히 회의주의자였으나 그럼에도 시냐고그(유대인들의 종교적 집회나 교회당 : 역주)와 유대인 공동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암스테르담에서는 랍비와 전통의 역할은 물론이고 성서 자체의 의미를 문제삼는 것에까지 이르게 된다. 우리엘 다 코스타(Uriel da Costa)는 1647년에 영혼과 계율의 불멸성을 부인하고 자연법을 인정했다는 이유로 비난받는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후안 데 프라도(Juan de Prado)는 영혼은 신체와 더불어 사멸하며 신만이 철학적 말씀으로 존재하며 신앙은 헛된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1656년에 회개해야 했으며, 이후 파문당하고 비난받게 된다. 최근 간행된 문서들을 스피노자가 프라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우리는 위의 두 경우가 함께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보다 냉엄하게 심판을 받고 1656년보다 더 일찍 파문을 당했다면 이것은 그가 회개를 거부하고 스스로 단절을 추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많은 경우에서처럼 랍비는 순응을 바랬을 것이다. 그러나 회개하는 대신에 그는 "시냐고그를 떠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를 쓰거나 미래의 <신학정치학논고>의 초고를 썼다. 틀림없이 스피노자가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공동체의 아이였다는 사실은 그의 사례를 더욱 나쁘게 만들었다.
암스테르담에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다. 광신자에 의한 암살 기도가 뒤따랐기에 그는 철학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서 레이든으로 갔고 린스뷔르흐의 교외에 정착했다. 흔히 스피노자는 사유가 항상 인간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님을 보여주는 징표로 칼로 찢겨져 구멍이 뚫린 코트를 착용했었다고 말해지곤 한다. 때로 철학자가 소송을 끝내는 경우도 있었으나 파문과 더불어서 그의 삶을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유주의적 기독교의 영향력이 스피노자의 단절을 설명하는데 요청되어야 한다고 믿을 때, 또 마치 이 단절이 외적인 원인에 기인하는 것인 양 믿을 때 이것은 유대인 공동체의 다질성과 철학자의 운명을 고려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미 암스테르담에서 확실히, 그의 아버지가 생존해 있었을 때에도 그는 판 덴 엔데(Van den Ende)의 학교에서 교육과정을 이수했는데, 이곳에서는 라틴어와 더불어 데카르트 철학, 수학, 물리학의 기초를 배웠던 수많은 청년 유대인들이 참석했었다. 이전에는 제수이스트였던 프란시스 판 덴 엔데는 데카르트주의자라는 평판을 일찍이 얻었으며 또한 자유사상가이자 무신론자이며 심지어 정치 선동가라는 평판도 얻었다(그는 1674년에 프랑스에서 하층귀족인 드 로앙의 반역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했다.) 분명히 스피노자는 또한 자유주의적이고 반-성직자적인 기독교도들, 어떤 범신론과 평화적 코뮤니즘(pacifist communism)에 고무된 콜레지안트파(Collegiants)(평등주의적이고 평화주의적인 원시기독교로의 복귀를 실천하고자 하는 파 : 역주)와 메노니파(Mennonites)(16세기에 창시된 기독교 신교의 한 파 : 역주)와도 교제했다. 그는 이들의 주요 거점 중의 하나인 린스부르그에서 이들을 다시 만났다. 그는 야리크 엘레스(Jarig Jelles), 피에터 발링(Pieter Balling), 시몬 데 브리스(Simon de Vries), '진보적' 서적 판매상이자 출판가인 얀 리에우베르트(Jan Rieuwerts)와 친구가 되었다. (1655년에 스피노자가 올덴버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평온주의pacifism를 주창하며, 1671년에 엘레스(Jelles)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공동체주의적 테마가 나타난다). 어쨌든 판 덴 엔데는 가톨릭주의의 한 형태를 여전히 고수했던 것 같다. 네덜란드에서 이 종교의 난점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콜레지안트파와 메노니파의 철학에 관해서 볼 때, 이것은 종교 비판을 물론이고 윤리적 개념과 정치적 관심에 있어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완전히 압도한다. 메노니파나 심지어 데카르트주의에 의한 영향을 생각하는 대신에 우리는 스피노자가 가장 관용적인 서클에, 그가 태어났고 혼자서 그 단절을 책임져야만 했고 유대교만큼이나 기독교 또한 거부했던 파문당한 유대인을 환영하기에 가장 적합한 서클에 자연스레 가담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유대인 파문이 의미하는 것 중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오히려 빈번히 적용되었고 종종 돌이킬 수 없는 수단이었다. 국가권력을 갖지 못한 공동체의 수장들은 재정적 기여나 심지어 정치적 정통성을 거부한 사람들을 처벌한 어떤 제재 수단도 갖고 있지 못했다. 칼뱅주의 당파의 저명인사들처럼,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엄청날 정도로 증오하고 있던 유대인 수장들은 정치적으로는 오렌지 왕가와 결탁했으며 인도 회사들에 대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스피노자의 스승 중 하나인 랍비 메나사헤 반 이스라엘(Menasseh ben Israel)은 동인도 회사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1640년에 파문당했다. 그리고 스피노자를 심판한 평의회 의원들은 왕당파, 친-칼뱅주의자이자 반-스페인적이었고 대부분이 동인도 회사의 주주들이었다.) 스피노자의 자유주의자와의 결탁, 거대 독점체들의 와해를 요구한 요한 데 비트의 공화당에 대한 동조 ― 이 모든 것이 스피노자를 반역자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스피노자는 종교적 환경은 물론이고 동시에 경제적 환경과도 단절한다. 가족의 사업을 포기하면서 그는 렌즈를 가는 일을 배웠으며 수공 소매업을 구비하고 광학법칙을 파악해 작업할 수도 있는 장인, 즉 철학자 장인이 되었다. 그는 또한 다음의 것을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초창기 전기작가 코렐루스(Colerus)는 마사니에로(Masaniello)의 나폴리 혁명가의 태도와 의복을 하고 있었다는 것에서 그가 끌어낸 것과 연결시킨다.
린스부르그에서 스피노자는 그의 친구들에게 후일 <소론>이라 불리우게 되는 라틴어로 된 글을 설명한다. 그들은 각주를 달았고, 옐레스는 독일어로 이를 번역했으며, 아마 스피노자는 그가 이전에 썼던 어떤 텍스트를 구술했을 것이다. 1661년경에 그는 일종의 정신적 여정에 따라서 넓어져 간 <지성개선론>을 구상했는데, 이것은 메노니파적인 태도로 부를 비난하는 데 집중했다. 이 논고, 즉 스피노자의 방법에 관한 장엄한 설명은 미완성된 채로 남겨지게 된다. 1663년경, 그와 함께 살았고 그에게 많은 희망을 주면서도 동시에 그를 괴롭혔던 청년에게 스피노자는 <데카르트 철학의 윤리적 원리>를 선물했다. 이 책은 스콜라적 통념들(형이상학적 사유들)의 비판적 검토로 보충된다. 리에우베르츠(Rieuwertz)가 이 책을 출판했고 엘레스(Jelles)는 출판을 위한 재정을 감당했으며, 발링(Balling)은 이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물리학자이자 시인이면서 암스테르담의 새 극장의 조직자인 레비스 마이어(Lewis Meyer)가 서문을 썼다. <원리들>과 더불어 스피노자의 '교수적(professorial)' 저작은 끝나게 된다. 매우 극소수의 사상가들만이 자기의 발견물의 교수가 되려는 강력한 열정을 피할 수 있으며, 사적인 정신 교육의 세미나 열정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1661년 초에 스피노자가 세운 계획과 집필 시작은 그를 또 다른 차원으로, 상이한 요소로 나아가게 했는데, 우리가 앞으로 보게되듯이 이것은 더 이상 '설명'의 요소도 방법론적인 차원도 아니게 된다. 아마도 이런 연유 때문에 스피노자는 <지성개선론>을 미완성된 채로 남겨두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후기 의도는 그것을 기꺼이 다시 쓰려고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는 준-교수적 시기 동안에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주의자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소론>은 모든 스콜라주의, 유대인 사상, 르네상스 철학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로부터 단지 스피노자에게만 귀속되는 심오하게 새로운 어떤 것을 추출해내기 위하여 정화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데카르트주의를 사용하고 있는 사유의 방식을 이미 보여준다. <원리들>의 설명과 <형이상학적 사유>의 설명 간의 복합한 관계는 이중 게임의 증거를 제시하는데, 이 게임에서 데카르트주의는 마치 하나의 여과기처럼 다루어지지만, 바로 이러한 방식에서 더 이상 낡은 철학과도, 또 데카르트주의와도 관계를 맺지 않는 새롭고 심오한 스콜라주의가 출현한다. 데카르트주의는 결코 스피노자의 사유가 아니다. 이것은 그의 수사학이나 진배 없다. 그는 데카르트주의를 그가 필요로 했던 수사학처럼 사용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지 <에티카>에서만 그 명확한 형태가 부여된다.
1663년에 스피노자는 헤이그의 교외인 포르뷔르그(Vorrsburg)로 이주한다. 그는 나중에 헤이그에 정착한다. 스피노자를 여행가로 정의하는 것은 그가 걸어간 거리가 아니라 하숙집에 머무르려고 하는 경향, 부계 상속에 대한 비난 이후의 그의 집착, 소유, 부의 결여이다. 그는 <에티카>에 대한 작업을 계속한다. 1661년 초에 스피노자와 그의 친구들 사이의 편지는 그의 친구들이 스피노자 책의 테마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1663년에 시몬 데 브리에스(Simon de Vries)는 스피노자가 보낸 텍스트를 읽고 토론한 연구 그룹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일군의 친구들에게 1675년에 라이프니쯔와 관련해서도 그 자신이 그렇게 할 것이듯이 낯선 사람을 경계하라고 털어놓으며 그의 관념을 비밀에 부쳐줄 것을 요구한다. 그가 헤이그 근방에 살았던 이유는 아마도 정치적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수도 가까이에 사는 것은 행동적인 자유사상가적(libertins)(성서적 신과 철학적 신의 모순을 강조하는 자연신교적 이신론자들을 지칭 : 역주) 서클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콜레지안트파 그룹의 정치적 무관심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두 주요 정당인 칼뱅주의 당과 공화당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전자는 독립을 위한 투쟁이라는 주제, 전쟁의 정치학, 오렌지 왕가의 야심, 중앙집중적 국가 형성에 여전히 헌신적이었다. 후자는 평화의 정치학, 지방분권적 조직화, 자유경제의 발전에 헌신적이었다. 군주제의 열정적이고 호전적인 행위에 대해 요한 데 비트는 자연적이고 기하학적인 방법에 의해 인도되는 공화국의 합리적 행위를 대립시켰다. 이제 다음의 것은 신비가 된다. 사람들은 칼뱅주의와 오렌지 왕가에, 불관용과 전쟁 도발 행위에 여전히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1653년 이래로 데 비트는 네덜란드의 총리였다. 그러나 여전히 공화국은 선호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놀랍고도 우연적으로 왕이 없는 공화국으로 남아있었으며, 이것은 인민들에게는 불충분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스피노자가 혁명의 해로움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혁명이 크롬웰 혁명이 고무한 실망에 의거해서, 혹은 오렌지 왕가의 가능한 쿠데타에 의해 야기된 불안들에 의거해서 생각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이 시기 동안 '혁명적' 이데올로기는 신학은 물론이고 칼뱅주의 정당에도 스며들었고, 종종 반동의 정치학에 봉사했다.
그러므로 1665년에 스피노자가 <에티카> 작업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신학정치학논고>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은 놀랄만한 것이 아니며, 이것은 다음의 질문과도 연결된다. 왜 인민들은 그렇게도 비합리적인 것일까? 왜 그들은 그들 자신의 노예화(enslavement)를 자랑스러워할까? 왜 그들은 그들의 속박이 마치 그들의 자유라도 되는 양 속박을 '위해서' 싸우는 것일까? 어째서 자유를 획득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유를 간직(유지)하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것일까? 왜 사랑과 기쁨을 요청하는 종교는 전쟁, 불관용, 증오, 적의, 양심의 가책을 자극하는 것일까? 1670년에 <신학정치학논고>는 익명으로 가공의 독일 출판사에서 출간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저자는 곧 밝혀진다. 그렇게도 많은 면박, 저주, 모욕, 중상모략을 일으킬 책은 아마도 극히 드물 것이다. 유대인, 가톨릭인, 칼뱅주의자, 루터파 ― 데카르트주의자를 포함한 모든 우익적 사고를 한 서클들 ― 는 서로 경쟁적으로 그를 비난할 정도였다. 이후 '스피노자주의'와 '스피노자주의자'라는 단어는 모욕이자 위협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모진 의심을 받았던 스피노자의 비평가들도 심지어 매우 비난받았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들 비평가들 중에는 몇몇 매료된 자유주의자와 데카르트주의자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이 공격에 가담함으로써 그들의 정통성을 증명했다. 폭탄같은 책은 항상 폭탄적인 비난을 받는다. 우리는 <논고>에서 탈 신비화의 급진적 모험으로서의, 혹은 '효과'의 과학으로서의 철학의 기능을 발견하지 않고서는 이 책을 읽을 수 없다. 최근의 주석가들은 <논고>의 진정한 독창성은 그것이 종교를 효과로서 여기고 있다는 점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인과적 의미에서는 물론이고 광학적 의미에서도 필연적인 합리적 원인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듯이 생산과정을 이 원인과 연결시킴으로써 추구될 수 있는 생산과정의 효과가 있다(예를 들어, 이 방식으로 자연적 법칙은 강력한 상상력을 가졌으나 약한 지성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필연적으로 '기호'로 지각된다). 심지어 종교를 다룰 때에도 스피노자는 생산된 효과와 그 생산의 법칙을 드러내는 유리들을 반짝반짝하게 닦는다.
공화당과의 유대, 그리고 아마도 데 비트의 보호가 스피노자를 더욱 특정한 종류의 근심으로부터 구출했다(1669년 초에 스피노자적 가르침 때문에 비난받은 철학 사전의 저자인 Koerbagh가 체포되어 감옥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그의 삶이 곤란에 처해졌던 교외를 떠나야만 했고, 헤이그에 거주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은 침묵을 대가로 했다. 네덜란드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데 비트 일파들이 1672년에 암살당하고 왕당파가 권력에 복귀하자 이제 더 이상 스피노자가 <에티카>를 출간한 것은 문제시되지 않았다. 1675년에 암스테르담에서의 간단한 노력은 그로 하여금 그 관념을 포기할 수 없도록 확신을 주었다. "어떤 신학자들은 왕과 행정장관들 앞에서 나를 불평할 근거를 찾는다. 게다가 나를 좋아하는 어리석은 데카르트주의자들은 도처에서 나의 의견과 글을 남용함으로써 비난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여전히 이런 과정을 추구한다." 스피노자에게는 그 나라를 떠나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더욱 더 혼자였으며 병이 들었다. 그가 평화롭게 살 수 있었던 유일한 환경도 그의 기대를 져버렸다. 그러나 그는 <에티카>를 알고자 하는 계화된 사람들의 방문은 받아들였다. 비록 이것이 이후의 그 비판가들과의 동조를 의미하거나 심지어 그에게 요청된 방문이 부인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1676년의 라이프니쯔의 경우). 팔라틴(Palatine) 선거의 당선자가 1673년에 그에게 제공한 하이델베르크의 철학 교수직도 그를 유혹하지 못했다. 스피노자는 가치들을 전복하고 망치로 때리듯이 철학을 구성한 '사적 사상가(private thinkers)'의 계열에 속한다. 그는 '공식 교수'의 일원이 아니다(라이프니츠의 격찬하는 말에 따르면, 이들 공식 교수들은 기성의 감성, 도덕성의 질서, 폴리스를 결코 어지럽히지 않는다). "공공[영역]에서 가르치는 것은 결코 소망이 아니기 때문에, 저는 이렇게 훌륭한 기회를 받아들이도록 제 자신을 꼬드길 수 없습니다. 비록 제가 그것에 대해 오랫동안 심사숙고하긴 했지만." 스피노자의 사유는 이제 가장 최근의 문제를 제기한다. 상업적 귀족제를 위한 기회는 무엇인가? 왜 자유주의적 공화국이 설립되었던가? 대중(multitude)을 노예들의 무리 대신에 자유로운 인간의 집단성으로 바꾸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이러한 모든 질문들이 미완성된 채 남겨진 <정치학논고>의, 상징적으로 볼때 민주주의에 관한 장의 초반부에서 멈추어버린 <정치학논고>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1677년 2월에 스피노자는 아마도 폐병으로 사망했으며, 이 때에 수고를 가지고 있던 친구 마이어(Meyer)가 배석했다. 그해 말에 <사후 저작>이 익명의 기증자의 희생을 치루면서 출판되었다.
병으로 서서히 침식당한, 이렇게 검소하고 청빈한 삶, 이렇게 가늘고 연약한 신체,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의, 이러한 갈색의 타원형의 얼굴 ― 우리는 어떻게 삶 그 자체로 가득 찬, 삶과 동일한 역능을 가진 인상을 설명할 수 있을까? 살고 사유하는 전체적인 방식에서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외관상 만족하는 것과는 대립된 입장에 서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의 이미지를 투사한다. 사람들은 외관상 만족하기에 삶을 증오하고 부끄러워한다. 인간성은 죽음의 숭배를 복수화하며 전제자와 노예, 성직자, 판사, 군인의 단결을 야기하며 항상 바쁘게도 삶을 그 근거로 달려가게 하고 삶을 진동시키고 분노로 혹은 단계적으로 삶을 죽이고 법률, 특성들, 임무들, 제국들로 삶을 압도하거나 삶을 질식시키는 자기파괴에 복종한다. 이것은 스피노자가 세계에 내렸던 진단, 즉 우주와 인류의 파괴이다. 전기작가 코렐루스는 스피노자가 거미 싸움을 좋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몇 마리의 거미들을 지켜보았고, 그들끼리 싸우게 만들거나 혹은 몇 마리의 파리를 거미집에 던져 넣었으며 그 싸움을 매우 즐겁게 지켜보았으며 때로는 너털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동물들은 적어도 우리에게 죽음이 가진 환원불가능할 정도의 외재적 성격을 가르쳐준다. 동물들은 각기 죽음을 필연적으로 초래하지만 그들은 내부로부터 죽음을 실행하지는 못한다: 자연적 실존들의 질서에 있어서 불가피한 나쁜 조우자. 그러나 동물들은 아직 내재적 죽음을, 전제자-노예의 보편적 사드마조히즘을 발명하지 못했다. 헤겔이 스피노자는 부정적인 것과 그 역량을 무시했다고 비난하는 바로 그 지점에 스피노자의 영광과 순수함이, 스피노자의 발견물이 놓여 있다. 부정적인 것에 의해 소비되는 세계에서 스피노자는 죽음에 도전할 수 있는 삶을, 삶의 역량을, 인간의 살인 욕동들(appetites)을, 선과 악의 규칙들(rules)을,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의 규칙들을 충분히 신뢰했다: 부정적인 것의 모든 환상(phantoms)을 폐기하는 삶을 충분히 신뢰하기. 파문, 전쟁, 전제, 반동, 마치 그것이 자신들의 자유라도 되는 양 자신들의 노예화를 위해 싸우는 인간들 ― 이것이 스피노자가 살았던 세계를 형성한다. 드 비트 일파들은 그에게 모범적인 사례이다. 궁극적 야만(Ultimi barbarorum). 그가 보기에 굴욕적이고 파탄적인 삶의 모든 방식, 부정적인 것의 모든 형태들은 두 가지 원천을 갖는다. 원한과 나쁜 양심, 증오와 죄에 대해서 하나는 외부를 향하고 다른 하나는 내부를 향한다. "인류의 두 가지 최대의 적들(archenemies), 즉 증오와 연민." 그는 이러한 원천들이 인간의 의식과 연결된 것이라고 거듭 비난하며, 새로운 의식, 새로운 견해, 삶을 위한 새로운 욕동이 있기 전까지는 결코 소진될 수 없다고 비난한다. 스피노자는 그가 영원하다는 것을 느끼며 경험한다.
스피노자의 사유에서 삶은 관념의 문제도 이론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방식이자 모든 속성들에 있어서 하나의 동일하고 영원한 양태이다. 그리고 기하학적 방법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에티카>에서 이 방법은 스피노자가 현자라고 불렀던 것과 대립된다. 그리고 현자는 인간의 무역능성(powerlessness), 근심에서 즐거움을 취하는 모든 것이며, 중상모략(accusation), 악의(malice), 헐뜯기, 비천한 해석을 먹고 자라는 모든 것이자, 인간의 영혼을 파탄시키는 모든 것이다(전제자는 파탄난 영혼들을 필요로 한다. 마치 파탄난 영혼들이 전제자를 필요로 하듯이). 기하학적 방법은 더 이상 지적인 설명의 방법이 아니다. 기하학적 방법은 더 이상 교훈적인 표현 수단이 아니며 오히려 발명(invention)의 방법이다. 그것은 생동적이고 광학적인 교정(rectification) 방법이 된다. 인간이 다소 일그러져 있다면 이러한 긴장 효과는 인간을 보다 기하학적인 그 원인들과 연결시킴으로써 교정될 것이다. 이러한 광학적 기하학이 <에티카> 전체를 관통한다. 사람들은 <에티카>가 사유를 통해서 읽힐 수 있는 것인지, 역능을 통해서 읽힐 수 있는지를 묻는다(예를 들어, 속성들은 역능들인가 개념들인가?). 현실적으로 거기에는 단지 하나의 용어만이, 즉 삶(Life)만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사유를 에워싸지만 그러나 역으로 이 용어는 단지 사유에 의해서만 에워싸여진다. 삶은 사유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그 사상가만이 죄와 증오로부터 자유로운 잠재적(potent) 삶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단지 삶만이 그 사상가를 설명한다. 기하학적 방법, 렌즈를 가는 직업, 그리고 스피노자의 삶, 이것들은 전체를 구성하는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살아있는 선구자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그가 증명들은 "정신의 눈"이라고 말할 때 바로 이 점을 표현한 것이다. 그는 세 번째의 눈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이 눈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허위적 외양들, 정념들, 죽음들을 넘어서 삶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덕 ― 겸손, 청빈, 정숙, 검약(frugality) ― 은 더 이상 삶을 변전시키는 덕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관통하고 그것과 하나가 되는 역능으로서 이러한 종류의 비젼에 요구된다. 스피노자는 희망이나 심지어 용기를 믿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즐거움과 비젼을 믿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살도록 내버려 두었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살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는 단지 고무하고 깨우고 드러내기를 원했을 뿐이다. 세 번째의 눈으로 기능하고 있는 증명의 목적은 명령하거나 심지어 확신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렇게 고무된 자유로운 견해를 위해서 안경 알을 만들거나 렌즈를 가는 것이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제게 그것은 예술가들, 과학자들, 철학자들이 렌즈를 갈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무언가를 위한 거대한 준비입니다. 어느 날 렌즈는 완벽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또한 명확하게, 비틀거리고 놀랍고 아름다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Henry Miller)
제2장 : <에티카>와 도덕성의 차이에 관하여
그 어떤 철학자도 [스피노자보다] 더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지 않았으며, 또한 그보다 더한 저주와 미움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스피노자주의의 위대한 이론적 테제들 ― 하나의 단일한 실체는 속성들의 무한성을 지닌다, 신은 자연이다(Deus sive Natura), 모든 '피조물들'은 이러한 실체의 속성들의 양태 혹은 실체의 변용에 다름아니다 ― 을 회상하는 것만으론 불충분하다. 도덕적이고 초월적이고 창조주인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러한 테제들이 어떻게 범신론 및 무신론과 결합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스피노자주의를 스캔달의 대상이 되게 하였던 실천적 테제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 테제들은 삼중의 탄핵을 함축하고 있다. "의식"에 대한, "가치"에 대한, "슬픈 정념"에 대한 탄핵. 이러한 탄핵은 니체와 공유하는 세가지 주요한 유사점들이다. 하기에 스피노자의 생전에도 이미 그가 유물론, 비도덕론, 무신론으로 고발당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1. (사유를 옹호하며) 의식에 대한 가치절하 : 유물론자인 스피노자
스피노자는 철학자들에게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다. 즉 신체. 그는 신체를 하나의 모델로서 정립할 것을 제안한다. "우리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모른다..." 이렇게 무지를 선언하는 것은 하나의 도발이다. 우리는 의식과 의식의 명령들에 관해서, 의지와 의지의 효과에 관해, 신체를 움직이게 하는 수 많은 방식들에 관해, 신체를 지배하는 것과 정념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 그러나 우리는 심지어 일개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조차도 모른다. 이러한 지식을 결여하고 있기에 우리는 탁상공론만 벌이고 있을 뿐이다. 차후 니체가 말하듯이, 우리는 의식 앞에서 경탄하지만, "오히려 진정으로 놀라운 것은 신체이다..."
스피노자의 가장 유명한 이론적 테제들 중의 하나는 평행론(parallelism)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평행론은 신체와 정신 사이의 실질적 인과성을 부정할 뿐더러, 하나의 다른 하나에 대한 어떠한 선차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만일 스피노자가 신체에 대한 정신의 우위성을 거부했다면, 이는 정신에 대한 신체의 우위성을 정립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것은 그 반대와 마찬가지로 지성적으로 알 수 있는(intelligible) 것이 아니다. 평행론의 실천적인 의의는 의식에 의한 정념의 지배의 기획인 도덕의 토대가 되는 전통적인 원칙의 전도이다. 과거에는 신체가 작용할 때 정신은 작용을 받으며, 역으로 정신이 작용할 때는 신체가 작용을 받는다고 말해져 왔다. (逆관계의 규칙에 관해서는 데카르트의 <정념론>의 1장과 2장을 참고) 그러나 <에티카>에 의하면, 거꾸로 정신에 있어서 능동인 것은 필연적으로 신체에 있어서도 능동이며, 신체에 있어서 수동인 것은 필연적으로 정신에 있어서도 수동이다. 하나의 계열은 다른 계열에 대한 어떠한 선차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에게 신체를 하나의 모델로써 바라볼 것을 요구했을 때 스피노자가 의도했던 바는 무엇일까? 이는 신체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을 능가하며, 마찬가지로 사고 또한 우리가 우리가 그것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식을 능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제이다. 신체에는 우리의 지식을 넘어서는 많은 것들(things)이 있는 것 못지않게 정신에도 우리의 의식을 넘어서는 많은 것들이 있다. 그러므로,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바로 하나의 동일한 운동에 의해 우리 지식의 주어진 조건들을 넘어선 신체의 힘을 포착하려 애쓸 것이며 우리 지식의 주어진 제약들을 넘어선 정신의 힘을 포착하려 애쓸 것이다. 평행적 방식으로 의식을 교묘히 피해가는 정신의 힘들을 발견하기 위해, 그리하여 [신체와 정신의] 힘들을 비교할 수 있기 위해, 사람들은 신체의 능력에 관한 지식을 추구한다. 정리하자면, 스피노자에 의하면, 신체의 모델은 연장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사고의 평가절하를 함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중요한 것은, 신체의 모델이 사고와의 관계에 있어서 의식의 평가절하를 함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 신체의 미지의 것(the unknown)만큼 심원한 사유의 무의식과 무의식적인 것의 발견.
사실은 의식은 본성상 착각(illusion)의 소재지라는 것이다. 의식의 본성은 효과들을 기록한다는 것이지만 그러나 원인들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원인들의 질서는 다음에 의해 정의된다 : 연장된 각각의 신체, 사고된 각각의 관념과 정신은 그 신체의 부분들과 그 관념의 부분들을 포섭하는 특징적인 관계들에 의해 구성된다. 하나의 신체가 다른 신체와 '조우할(encounter)' 때, 어떤 관념이 다른 관념과 만났을 때, 둘의 관계는 때로는 더욱 강력한 전체를 형성하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가 상대방의 부분들의 응집력을 파괴시켜 분열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신체에 있어서, 마찬가지로 정신에 있어서 가장 심오한 것은 이것들이 동일하게 복합적 법칙들에 따라 서로서로와 합성하게 되고 또 서로서로 분열을 하는 살아있는 부분들의 집합을 이룬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원인들의 질서는 본성의 모든 것들을 무한하게 촉발시키는 관계들의 합성과 분열의 질서이다. 그러나 의식적인 존재자로서의 우리는 이러한 합성과 분열의 효과들만을 파악할 뿐이다. 즉 우리는 하나의 신체가 우리의 신체와 조우하고 그것과 합성할 때 기쁨을 경험하며, 반대로 하나의 신체나 관념이 우리 자신의 응집력을 위협할 때 슬픔을 느낀다. 우리는 그러한 조건 속에서 단지 우리의 신체에 "일어나는 것"만을, 우리의 정신에 "우연히 일어나는 것"만을, 다시 말해 우리의 신체에 대한 어떤 신체의 효과, 우리의 관념에 대한 어떤 관념의 효과만을 취할 뿐이다. 그러나 이는 단지 자신의 고유한 관계에 있어서 우리의 신체일 뿐이며, 자신의 고유한 관계에 있어서 우리의 정신일 뿐이며, 그들 각각의 관계들에 있어서 다른 신체들이며 다른 정신들 혹은 다른 관념들일 뿐이고, 그것에 따라 이 모든 관계들이 서로 서로 합성하거나 분열하는 규칙일 뿐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지식과 의식의 주어진 질서에 있어서는 이 모든 것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간단히 말해, 우리가 사물들을 알고 우리 자신을 의식할 때 놓여져 있는 조건들은 우리로 하여금 부적합한 관념들, 혼란스럽고 절단된 관념들, 실질적인 원인들로부터 분리된 효과들만을 가지게 한다. 이것이 바로 어린아이들이 행복하다거나, 최초의 인간이 완전했다고 생각하기 힘든 이유이다. 원인들과 본성들에 대한 무지하고 사건들에 대한 의식에 탐닉하고 효과들을 견디도록 운명지워졌기 때문에, 그들은 모든 것에 노예였으며, 그들의 불완전성에 비례하여 불안하고 불행하다. (그 누구도 완전하고 행복한 아담이라는 신학적 전통에 스피노자만큼 강력하게 반발하지 못하였다.)
어떻게 의식이 자신의 격정을 평온하게 만들었을까? 어떻게 아담은 그 자신을 완전하고 행복하다고 상상했을까? 삼중의 착각의 작동을 통해서. 의식은 단지 효과들만을 취하기 때문에, 의식은 사물들의 질서를 역전시킴으로써, 효과를 원인으로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무지에 만족하게 된다.(목적인final causes의 착각) : 의식은 우리 신체에 가해진 어떤 신체의 효과를 신체의 고유한 작용의 목적인으로 추론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의식은 자신을 첫번째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신체에 대한 그 자신의 힘에 호소한다(자유 법령의 착각). 그리고 의식이 더 이상 그 자신을 첫 번째 원인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때, 목적들의 조직자라고 상상할 수 없을 때, 지성과 의지를 갖춘, 인간으로 하여금 신의 영광과 신의 처벌에 알맞는 세계를 준비시키기 위해 목적인과 자유 법령을 수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신에 호소한다(신학적 착각). 그러나 의식이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의식은 의식을 구성하는 삼중의 착각, 즉 목적성의 착각, 자유의 착각, 신학적 착각과 분리될 수 없다. 의식은 눈뜬 채 꿈을 꾸고 있을 뿐이다. "어린아이는 그가 우유를 자유롭게 원한다고 믿고 있다. 화가 난 어린아이는 자신이 자유롭게 복수를 원한다고 믿고 있다. 겁많은 자는 자유롭게 도망치길 원한다고 믿고 있다. 그리하여 술에 취한 사람은 그가 나중에, 취기가 가셨을 때 공연히 말했다고 후회할지라도 술에 취했을 때는 그는 자유로운 결정에 의해서 지껄인다고 믿는다."
여전히 의식 자체가 하나의 원인을 갖는다는 것은 필연적이다. 스피노자는 때로는 욕망(desire)을 "욕동을 의식하고 있는 욕동(appetite together with consciousness of the appetite)"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그는 이 정의가 욕망에 대한 유명론적 정의라는 것을 분명히 하며, 의식은 욕동에 아무것도 보태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한다. ("우리는 어떤 것이 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추구하며 의지하며 욕구하며 욕망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가 그것을 추구하며, 의지하며, 욕구하며, 욕망하기 때문에 선하다고 판단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욕망에 관한 실질적 정의에 도달해야 하는데, 이 정의는 동시에 소위 욕동적인 과정에서 의식을 텅 비게 만드는 "원인"을 보여준다. 이제 욕동이란 그것에 의해 각 사물이 자신의 존재 안에서, 각 신체가 연장안에서, 각 정신 혹은 각 관념이 사고 안에서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에 다름 아니다(코나투스 conatus).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우리로 하여금 조우된 대상에 따라 상이하게 작용하도록 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계기에 있어서 이러한 노력이 대상들에서 유래한 변용들(affections)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규정적인 정서들은 필연적으로 코나투스에 관한 의식의 원인이다. 그리고, 정서들은 정서들이 우리로 하여금 좀더 완전하거나 좀 덜 완전한 것으로(기쁨과 슬픔) 향하게 하는 운동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조우된 사물이 우리와 합쳐지는가 또는 반대로 우리를 분열시키는가에 따라 의식은 보다 더 완전한 것에서 보다 덜 완전한 것으로의, 혹은 보다 덜 완전한 것에서 보다 더 완전한 것으로의 흐름에 관한 계속적인 자각으로서, 다른 신체들과 다른 관념들과의 관계속에서 기능하는 코나투스의 변형(variation)들과 결정(determination)들로써 나타난다. 나의 본성과 일치하는 대상은 내가 우리와 대상 그리고 나 자신도 포함하는 상위의 총체성을 형성하도록 규정한다. 나와 일치하지 않는 대상은 나의 응집력을 위험에 빠뜨리며, 나를 작은 부분들로 분해시키려 하며, 극단적인 경우에 있어서는 나의 구성적인 관계와 양립불가능한 관계들로 빠지게 한다.(죽음) 의식은 흐름(passage)이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의식은 보다 덜 강력한 총체성들로부터 더 강력한 총체들로의 흐름, 또는 그와는 반대되는 흐름에 대한 자각이다. 의식은 순전히 일시적이다. 그러나 의식은 전체(the Whole) 혹은 어떤 특정한 전체(whole)의 속성이 아니다. 의식은 단지 정보제공적인 가치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며, 더우기 그 정보는 필연적으로 혼란되고 왜곡된 것이다. 다음과 같이 썼을 때 니체는 엄격한 의미에서 스피노자적이다. "가장 위대한 행위는 무의식적이다. 의식은 하나의 전체가 보다 상위의 전체에 스스로 종속되기를 원할때만 나타난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자아에 대한 외적 실재와 이러한 상위의 전체에 대한 의식이다. 그것에 대해 우리가 한낱 기능에 불과한 어떤 존재자와의 관련하에서만 의식은 태어난다. 의식은 우리가 그것을 통해 그 존재자에 합치하게 되는 수단이다."
2. ("좋은"과 "나쁜"을 옹호하기 위해서) 모든 가치들, 특히 선과 악에 대한 가치절하 : 비도덕론자로서의 스피노자
"너는 그 과일을 먹어서는 안 될 것이야..." 불안에 시달리고, 무지한 아담은 이 말을 금지의 표현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이 말들이 언급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만약에 아담이 먹는다면 이것은 그 자체로 아담에게 독이 될 과일을 언급한다. 이는 특유의 관계들이 서로 양립불가능한 두 신체들 사이의 조우의 사례이다. 즉, 과일은 하나의 독으로서 작용한다. 즉 그것은 아담의 신체의 부분들을 더이상 그의 본질과 조화되지 않는 새로운 관계들로 들어가도록 규정할 것이다. (이와 병행하여, 과일의 관념은 그의 정신의 부분들을 규정할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원인들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그는 신이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도덕적으로 금지시킨 반면 신은 단지 과일을 섭취하는 것의 자연적 결과들만을 드러내 줄 뿐이라고 생각한다. 스피노자는 이 점에 있어서 범주적(정언적categorical)이다. 우리가 악, 병,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분류하는 모든 현상들은 다음과 같은 유형 -- 나쁜 조우, 독의 작용(poisoning), 약물중독, 관계적인 분열(relational decomposition) -- 이다.
어쨌든, 항상 자연의 영원한 법칙에 따라 특수한 질서(순서)로 합성에 참여하게 되는 관계들이 있다. 선(Good)과 악(Evil)은 없으며, 좋음(good)과 나쁨(bad)이 있을 뿐이다. "선악을 넘는다는 것은, 적어도 이 말은 좋음과 나쁨을 넘어서를 의미하지 않는다." 좋다는 것은 어떤 신체가 직접적으로 그 관계를 우리의 신체와, 그리고, 우리 신체의 모든 것 혹은 그 힘의 일부분과 합성시킬 때, 우리의 신체를 증대시킬 때이다. 예를 들어, 음식이 그렇다. 우리에게 있어서 나쁘다는 것은 어떤 신체가 우리 신체의 관계를 분열시킬 때를 말하며, 독이 우리 피를 파괴시키는 것처럼 그 신체가 우리의 부분들과 결합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본질에 상응하지 않는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을 때를 말한다. 그러므로 좋음과 나쁨은 일차적이고 객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그러나 이것은 상대적이고 부분적이다 : 우리의 본성과 일치하는 것 혹은 일치하지 않는 것. 결과적으로, 좋음과 나쁨은 인간의 존재에 관한 두 가지 유형들 혹은 양태들을 특징지워주는 주관적이고 양상적인 이차적인 의미를 가진다. 개인이 그와 만나는 것을 조직할 수 있고, 또 자신의 본성에 일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끌어들일 수 있으며(join with) 자신의 질서와 양립할 수 있는 관계들을 자신의 관계들과 결합시킬 수 있는 한 그렇게 하고자 하는 개인은 좋다(good)(혹은 자유롭다, 합리적이다, 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좋음이란 역동주의, 힘 그리고 힘들의 합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무렇게나 살며, 조우의 효과들을 경험하는데 만족하나, 항상 경험된 효과가 그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한탄하고 비난하며 그 자신의 무능력만을 드러내는 개인은 나쁘다, 비굴하다, 나약하다, 어리석다라고 불릴 것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환경에서 무엇을 만나든지간에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을 내버려 두면서, 많은 폭력이나 죄를 믿음으로써 항상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선보다는 악과 대면하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어떻게 죄를 지음으로써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고, 또 원한감정(resentment)을 가짐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도처에서 우리 자신의 무능(powerlessness)과 노예화, 우리 자신의 병듦, 소화불량, 독(poison)이 만연하는 것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과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존재의 내재적 양태들의 유형론인 윤리학은 존재를 초월적 가치들에 위탁시키는 도덕성을 대체한다. 도덕은 신의 판단이며, 판단의 체계이다. 그러나 윤리학은 판단의 체계를 내던져 버린다. (선-악이라는) 가치들의 대립은 존재의 양태들의 질적인 차이(좋은-나쁜)로 대체된다. 가치들의 착각은 의식의 착각과 구별되지 않는다. 의식이 효과들을 기다리는데 만족하고 효과들을 취하는 것에만 만족하기 때문에 의식은 자연의 모든 것을 잘못 파악한다. 사람이 도덕적으로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은 이제 이해하는데 있어서 실패하는 것 뿐이다. 법칙은 항상 "당신은 해야 한다"는 도덕적 형식으로만 우리에게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가 결국 법칙을 오해할 뿐이라는 점은 매우 명백하다. 우리가 세 가지에 관한 규칙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마치 임무인 양 그것을 응용할 것이며, 또 그것에 천착할 것이다. 아담은 그의 신체와 과일의 관계에 관한 규칙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신의 말씀을 금지로써 해석하였다. 더 나아가, 도덕법칙의 혼돈된 형식은 매우 타협적인 자연법칙을 가지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자연법칙들이 아니라 오로지 영원한 진리들만을 이야기해야 했다. "'법칙'이라는 용어를 자연적 사물들에 적용하는 것은 메타포적인 것으로 보이며, 법칙의 일상적인 의미는 단순히 명령이다..." 니체가 독과 해독제에 관한 학인 화학에 관련하여 말했듯이, 우리는 도덕적인 여운을 가지고 있는 법칙이라는 단어에 신중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효과들만을 고려한다면, 두 영역 - 자연의 영원한 진리들의 영역과 제도들의 도덕적 법칙들의 영역 - 을 매우 쉽게 분리시킬 수 있다. 의식을 글자 그대로 취해 보자. 도덕법칙은 명법이다. 도덕법칙은 무엇보다도 복종이라는 목적과 효과를 지닌다. 이 복종은 절대적으로 필연적일 수 있고, 명령은 정당화될 수 있지만, 이것이 문제는 아니다. 도덕적이건 사회적이건, 법칙은 우리에게 어떠한 지식도 제공하지 않는다 ; 그것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더욱 안 좋은 것은, 그것은 지식의 형성을 방해한다는 점이다(전제자의 법칙). 기껏해야, 그것은 지식을 준비하며, 지식을 가능하게 할 뿐이다(그리스도의 혹은 아브라함의 법칙). 이러한 양 극단 사이에서, 그것은 자신들의 존재양태 때문에 지식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 안에 지식의 장소를 마련한다(모세의 법칙). 그러나 어쨌든, 본성의 차이는 지식과 도덕 간에, 명령과 복종의 관계 사이에, 아는 자와 지식의 관계 사이에 항상 드러난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신학의 비극과 해악은 단순히 사변적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본성에 있어서 차이나는 이러한 두 질서들 사이에서 신학이 우리에게 주입하는 실천적 혼란에서 기인한다. 여하튼, 신학은 성서가 지식의 기초를 제공한다는 것 -- 비록 이 지식이 합리적인 방식으로 발전되어야 하며, 이성에 의해 전치되고 번역되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 을 고려한다. 반면에 도덕의 가설은 창조하며 초월적인 신이다. 차후 살펴보겠지만, 이 점에 있어서 기나긴 오류(long error) -- 이 오류에 의해 명령은 무엇인가를 이해된 것으로, 복종을 지식 자체로, 존재를 허가(Fiat)로 오해한다 -- 의 역사인 존재론 전체와 타협하는 혼란이 있다. 법칙은 항상 가치들의 대립(선-악)을 규정하는 초월적인 심급이다. 그러나 지식은 항상 존재의 양태들의 질적인 차이(좋은-나쁜)를 규정하는 내재적인 힘이다.
3. (기쁨을 옹호하며) 모든 "슬픈 정념"에 대한 가치절하 : 무신론자로서의 스피노자
만약 윤리학과 도덕성이 동일한 지침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면, 이것들을 구별하는 것은 단지 이론적인 것에 불과하게 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자신의 저작을 통하여 스피노자는 끊임없이 세 종류의 배역(personage)을 탄핵한다. 슬픈 정념에 사로잡힌 인간, 슬픈 정념을 착취하며 자신의 힘을 증대시키기 위해 슬픈 정념을 필요로 하는 인간, 인간의 정념 일반과 제약 일반에 의해 슬픔을 당하는 인간.(스피노자는 그들을 경멸한 만큼 조롱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롱은 나쁜 웃음이다.) 노예, 전제자, 목사..., 즉 도덕적 삼위일체.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 이래 폭군과 노예간의 뿌리깊은 은밀한 결합을 이 처럼 명확히 보여준 적은 없었다. "전제적 정치술에 있어서 최고의 그리고 본질적인 신비적 진리(mystery)는 신민들을 속이는 것이며, 종교라는 허울좋은 꾸밈새를 통하여 신민들을 억압하는 공포를 은폐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안전을 위해 싸우는 것처럼 노예제를 위해서도 용맹스럽게 싸울 수 있었고, 전제자의 허영을 위해 자신들의 피와 삶을 바치는 것을 부끄러워 하기는 커녕 최고의 영예로 간주하였다." 이것은 슬픈 정념이 욕망의 경계없음을 정신의 혼란에, 욕정(cupidity)을 미신에 갖다 붙이는 복합물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가장 열정적으로 온갖 종류의 미신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가장 노골적으로 외적인 이익을 욕망하는 자들일 수 밖에 없다." 폭군은 계속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슬픈 영혼을 필요로 하고, 마찬가지로 슬픈 영혼은 만족되고 증식하기 위해 전제자를 필요로 한다. 어쨌든, 그들을 한데 묶는 것은 삶에 대한 증오이며, 삶에 대한 분노이다. <에티카>는 분노한 인간(resentful man)에 관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원한에 사로잡힌 인간에게 모든 행복은 공격이며, 그는 비참함이나 무능력을 자기만의 정념으로 간주한다. "어떻게 하면 인간의 정신을 강하게 하지 않고 파열시키는가를 아는 자들은 그들 자신에게 있어서나 타인에게 있어서나 부담스럽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지나친 조급함과 그릇된 종교열로 인해서 인간 속에서 살기보다는 오히려 짐승들 속에서 살기를 바란다. 이것은 마치 부모의 꾸중을 침착하게 들을 수 없는 소년이나 청년이 군대에 들어가서 가정의 안락과 아버지의 훈계 대신 전쟁의 불안과 전제자의 명령을 택하고 오로지 부모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모든 부담을 자기가 떠맡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스피노자에게는 "삶"의 철학이 있다. 그것은 우리를 삶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모든 것, 삶을 적대시하는 모든 초월적 가치들, 의식의 제약과 착각에 얽매어 있는 가치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과 악, 비난과 은총, 죄와 속죄라는 범주들은 삶을 황폐화시킨다. 삶을 황폐화시키는 것은 증오인데, 여기에서는 죄라는 형태로 자기자신으로부터 이탈하여 자기자신을 적대시하는 증오도 포함된다. 스피노자는 슬픈 정념들의 가공할만한 연쇄를 차례차례로 추적한다. 우선, 슬픔 그 자체, 다음으로 증오, 혐오, 비웃음, 공포, 절망, 양심의 가책(morsus conscientiae), 연민, 분개, 시기, 굴욕, 회개, 자기비하 수치, 후회, 화, 복수, 잔인함... 그는 분석을 계속해 나가면서 심지어 증오와 안위에 있어서도 이것들을 노예들의 느낌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슬픔의 찌꺼기(grain)를 발견할 수 있다. 진정한 도시는 시민들에게 보상의 희망 혹은 심지어 소유물들에 대한 안전 대신에 자유에 대한 사랑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덕의 대가로 보상을 받는 자들은 자유인이 아닌 노예들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어떤 슬픈 정념은 덕을 위해 유용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니체보다 앞서서, 그는 삶을 허위화시키는 모든 것, 그것의 이름으로 우리가 삶을 깔보는 모든 가치들을 탄핵하였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삶의 환영에 이끌리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죽지 않을 것인가만을 생각하며, 우리의 모든 삶은 죽음의 경배이다.
슬픈 정념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변용(affection)이론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우선 개별자는 독특한 본질인데,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힘의 일정한 등급이다. 어떤 고유한 관계가 이 본질에 상응하며, 촉발될 수 있는 일정한 능력이 이러한 힘의 등급에 상응한다. 더 나아가, 이 관계는 부분들을 포섭한다. 촉발될 수 있는 이 능력은 필연적으로 정서들로 채워져 있다. 그러므로, 동물들은 유와 종이라는 추상적인 통념보다는 촉발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그들이 "행할 수 있는" 정서들에 의해, 그들의 능력의 한계 안에서 그들이 반작용하는 흥분에 의해 정의된다. 유와 종에 대한 고려는 여전히 "도덕"을 함축한다. 이에 반해, <에티카>는 인간과 동물에 관해 단지 촉발될 수 있는 그들의 능력만을 고려하는 비교행동학(ethology)이다. 인간의 비교행동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우선 두 종류의 정서만을 구별하면 된다: 촉발된 개별자들의 본성에 의해서 설명되고 개별자의 본질로부터 도출되는 작용, 다른 것에 의해 설명되고 개별자 외부에서 기원하는 정념(passion). 그러므로 촉발될 수 있는 능력은 그것이 능동적인 정서들에 의해 채워진다고 가정되는 한 작용하는 힘(power of acting)으로 나타난다. 반면에 그것이 정념에 의해 채워지는 한 무언가에 작용될 수 있는 힘(power of being acted upon)으로 나타난다. 주어진 개별자, 즉 주어진 힘의 등급이 일정한 한계내에서 항상적이라고 가정될 때 촉발되어지는 능력 그 자체는 그러한 한계내에서 항상적이다. 그러나 작용력과 작용되어지는 능력은 매우 다르며, 서로에 대해 반비례한다.
작용과 정념을 구별하는 것뿐만 아니라 두 가지 정념의 종류를 구별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어쨌든, 정념의 본성은 우리의 촉발되어지는 능력을 채우는 것이며, 우리를 우리의 작용력과 분리시키며 분리된 채로 있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신체와 일치하지 않는 외적인 신체(즉, 그것의 관계가 우리의 신체와 합성되지 않는)와 조우했을 때, 그 신체의 힘은 마치 우리의 힘과 대립하는 신체의 힘처럼 수축(subtraction)이나 고정화(fixation)를 초래한다. 이러한 것이 발생하면, 우리의 작용하는 힘은 감퇴되었다 혹은 닫혀 있다고 말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정념은 바로 슬픔의 정념이다. 반대로 우리가 우리의 본성과 일치하는, 그것의 관계가 우리의 신체와 합성되는 신체를 만난다면, 우리는 그 신체의 힘이 우리의 신체에 더해졌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를 촉발하는 정념은 기쁨의 정념이며, 우리의 작용하는 힘은 증대되거나 고양되었다. 이러한 기쁨은 여전히 하나의 정념인데, 왜냐하면 그 기쁨은 외적인 원인을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작용력과 분리된 채로 있으며, 작용력을 단지 형식적인 의미에서만 소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작용력은 비례적으로 증대된다. 우리는 우리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우리로 하여금 작용하고 능동적인 기쁨을 누리게 할 가치가 있게 하는 이행의 지점, 전환점에 "접근한다."
슬픈 정념들의 상태를 정의하는 것은 이러한 전체로서의 정서이론이다. 그것들이 어떻게 정당화되든 간에, 그것들은 우리 힘의 최하위 등급에 분개하며, 우리가 우리의 작용력으로부터 분리되어지는 순간에 분개하며, 우리가 소외되었을 때 분개하며, 우리가 미신의 환영과 전제자의 신비화에 투항하였을 때 분개한다. <에티카>는 필연적으로 기쁨의 윤리학이다: 오직 기쁨만이 가치가 있으며, 기쁨은 우리를 작용으로, 작용의 환희로 이끈다. 슬픈 정념들은 항상 무능력으로 귀결된다. 하기에 <에티카>의 삼중의 실천적 문제는 다음의 것이 될 것이다. 어떻게 기쁜 정념의 최대치에 이를 수 있는가?, 이로부터 자유롭고 능동적인 느낌으로 진행할 수 있다(비록 자연안에서의 우리의 위치는 나쁜 조우와 슬픔을 운명지워 놓고 있지만). 어떻게 적합한 관념들을 형성할 수 있는가? 이 적합한 관념들은 바로 능동적 느낌들의 원천이다(비록 우리의 본성적 제약들이 우리에게 우리의 신체와 정신과 다른 신체에 대한 부적합한 관념들만을 가질 것을 운명지워 놓고 있지만). 어떻게 우리는 우리 자신과 신 그리고 사물들을 의식할 수 있는가? ― 우리 자신과 신과 사물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의식할 수 있다(sui et Dei et rerum aeterna quadam necessitae consius)(비록 우리의 의식은 착각들과 분리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에티카>의 위대한 이론들 ― 실체의 일자성(oneness), 속성들의 단성성(univocity), 보편적 필연성, 평행론 등등 ― 은 의식, 가치들, 슬픈 정념들에 관해서 세가지 이론적 테제들로부터 분리되어 다루어질 수 없다. <에티카>는 동시에 두 번 쓰여진 책이다 : 한번은 정신의 모든 엄격함을 가진채 위대한 사변적 테마를 발전시키고 있는 정의, 명제, 증명, 보충들의 연속적 흐름 속에서. 다시 한번은 가슴의 모든 격정들을 표현하고 탄핵과 해방의 실천적 테제들을 정립하고 있는 주석들의 단절된 사슬 속에서, 불연속적인 격렬한 선으로, 첫번째 판 아래에 놓여 있는 두 번째 판으로. <에티카> 전체는 내재성으로의 여행이다. 그러나 내재성은 무의식 그 자체이며, 무의식적인 것의 정복이다. 윤리적 기쁨은 사변적인 긍정과 상호연관되어 있다.
제3장 : 악에 관한 편지 (블리옌베르크와의 서신교환)
블리옌베르크와의 서신교환은 지금까지 남아있는 8개의 편지들(18에서 27까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네쌍의 편지는 1664년과 1665년 사이에 쓰여졌다. 이것들은 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매우 흥미롭다. 블리옌베르크는 악의 문제에 관한 질문을 스피노자에게 써 보냈던 곡물 브로커이다. 스피노자는 처음에는 그의 편지가 진리탐구라는 동기를 가졌다고 믿었으나 곧 블리옌베르크가 논쟁을 좋아하는 취향을 가지고 있으며, 올바르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고 또 판단하기를 좋아하는 마니아라는 것, 즉 철학자가 아니라 아마추어적인 칼뱅주의적 신학자라는 것을 깨닫는다. 스피노자는 두번째 편지까지는 블리옌베르크의 건방진 태도에 완곡하게 대답한다. 그리고 마치 그 자신이 그 주제에 매혹당했다는 듯이 서신교환을 계속한다. 스피노자는 블리옌베르크의 방문이 있기 전까지는, 그리고 블리옌베르크가 악의 문제를 넘어 가는 모든 종류의 질문을 제기할 때까지도 서신교환을 중단하지 않는다. 이제 이러한 일련의 편지들의 심오한 이해관계가 남아 있는 것은 이런 것이다. 편지들은 그의 여타 저술과 결코 동등하지 않는 분석과 진술의 위험을 무릎쓰면서 스피노자가 악의 문제 자체를 사고하는 유일하게 긴 텍스트이다.
블리옌베르크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거나 그가 종종 말했던 것에 대해 혼란을 겪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다(그의 과오는 다른 곳에 있다). 비록 그는 <에티카>를 알지 못했지만, 그리고 스피노자의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설명에 관한 언급으로 첫 번째 편지를 시작하고 있지만, 그는 다른 질문을 한 다음에 가장 기본적인 질문, 즉 스피노자주의의 심장부를 향해 나아가는 질문을 던진다. 그는 스피노자로 하여금 예에 관한 예를 제공하도록, 역설들을 발전시키도록, 악에 관한 매우 기이한 개념화를 떼어내도록 한다. 그것은 마치 진리의 사랑이 스피노자로 하여금 그의 특징적인 고요함(caution)을 내뿜게 하고, 심지어 그가 적대적이거나 증오한다고 느끼는 개인들에 대면해서, 그리고 미묘한 주제에 관련해서 그의 가면을 벗어버리게 하는 것과 같다. 거대한 합리주의 이론에 따라 악은 없다라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17세기의 공통장소이지만, 그러나 스피노자가 급격하게 변형시킬 그러한 방식 속에서 그것은 블리옌베르크와의 서신교환의 본질적 관심사가 된다. 스피노자의 견해에서, 만일 악이 없는 것이라면 이것은 오로지 선만이 존재하며 존재를 생산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선만이 단지 악을 행할 수 있고, 존재만이 선과 악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블리옌베르크는 그가 데카르트주의자에게 이야기한 일반적 문제로부터 시작한다. 어떻게 신은 금기된 사과를 먹는 아담의 의지와 같은 '악한 의지'의 원인일 수 있는가? 이제, 스피노자는 그 자신을 위해서 즉각적으로 답변한다(데카르트와 자신 사이의 어떤 차이들을 지적하면서 그는 나중에 편지 21에서 데카르트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악은 없다라고 하는 일반적 의미를 설명하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는다. 블리옌베르크가 제시한 예를 통해 그는 대답한다. "아담에 대한 금기는 단지 이것으로 구성된다. 신은 그 나무 열매를 먹는 것이 죽음을 야기한다고 아담에게 계시했다. 그는 또한 독이 우리들을 죽인다는 자연적 지성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하는 것처럼"(편지 19). 다시 말해서 신은 모든 것을 금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에게 그 과일은, 그 구성(composition)에 의해서, 아담의 신체를 분해(decomposition)할 것이라고 알려준다. 그 과일은 비소(arsenic)처럼 작용할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으로 우리는 스피노자의 기본적 테제를 발견한다. 나쁜 것은 약물중독, 독극물중독, 소화불량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 혹은 심지어 요소들을 불관용으로 혹은 알레르기로 개별화시켜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블리옌베르크는 이 점을 매우 잘 이해했다. "당신은 제가 악덕(vice)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빼야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당신의 특이한 본성(singular nature)에 반대되기 때문이지, 그것들이 그 자체로 악덕을 담고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당신은 우리의 본성이 구역질 나게 하는 음식의 섭취를 하지 않게 되듯이 그것들을 빼뜨립니다." ― 그러나 본성의 어떤 것이 이러한 불관용을 갖지 않고 게다가 범죄를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편지 12 )? 어떻게 개인적 혐오가 덕을 구성할 수 있을까? 블리옌베르크는 또 다른 매우 흥미로운 질문을 덧붙이며, 이에 대해 스피노자는 직접적으로 답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만 한 사물이 독성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악은 단지 실험적 문제, 후험적(a posteriori) 문제일 뿐일까? 또 이런 경우에, '계시' 혹은 '지식'의 의미는 무엇인가(편지 20)?
문제들이 즉각적으로 실행되는 바로 이러한 수준에서, 우리는 스피노자를 따라서 독극물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각각의 신체는 부분들, '매우 많은 수의 부분들'을 가진다. 그러나 이 부분들은 그것을 특징짓는 어떤 관계(운동과 정지의 관계)에 의거할 때에만 단지 그것에 속한다. 상황은 매우 복잡하다. 왜냐하면 구성적 신체들은 매우 상이한 질서들의 부분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그 자체로 다양한 관계들로 들어간다. 이러한 다양한 관계들은 이런 수준에서 혹은 저런 수준에서 소여된 개별자의 특징적 혹은 지배적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각각의 신체에 대한 관계들의 포개짐이 있으며, 하나의 신체에서부터 또 다른 신체에까지의 관계의 포개짐이 있고 또 이것이 '형태'를 구성한다. 예를 들어, 스피노자가 올덴버그에게 보낸 편지(32)에서 보여주듯이, 유미(乳靡 : chyle)와 수액(lymph)은 각각이 그 자신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되는 두 개의 신체들이며, 이것들은 세번째의 결정적인 관계에 따라 혈액을 구성한다. 거꾸로 혈액은 또 다른 특징적이거나 지배적인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 동물 혹은 인간 신체의 부분이다. 그리고 두 가지 신체들 사이의 관계는 동일하지 않다 ― 예를 들어 개별자들은 정확하게 같은 혈액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독극물의 경우에는 무엇이 일어나는가? 혹은 (각각의 관계의 개별적 요소들이 설명된 이후에) 알레르기의 경우에는 무엇이 일어나는가? 이러한 경우에 신체의 구성적 관계의 하나가 파괴되었으며, 분해된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리고 죽음은 신체의 특징적 혹은 지배적 관계가 파괴되기로 결정되었을 때에 일어난다. "나는 신체의 부분들이 그렇게 배치되어서 운동과 정지의 상이한 관계를 획득했을 때 신체를 죽은 것으로 이해한다." 스피노자는 따라서 한 관계에 의해 의미된 것은 파괴된 것이거나 분해된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한다. 이것은 그 자체로 영원한 진리인 그 관계가 더 이상 현실적 부분들에 의해 실현될 수 없을 때 일어난다. 제거된 것은 영원히 진실한 그 관계가 아니라, 정립된 것과 이제 다른 관계를 가정하는 것 사이의 부분들이다. 예를 들어, 독극물은 혈액을 분해한다. 즉 독극물은 혈액의 부분들이 다른 신체들을 특징짓는 상이한 관계들 하에 들어가도록 결정한다(그것은 더 이상 혈액이 아니다...). 여기서 또다시 블리옌베르크는 매우 잘 이해하며, 마지막 편지(24)에서 동일한 결론이 영혼에게도 유효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존재자체는 매우 많은 수의 부분들로 합성되며, 그것은 다른, 비인간적인 영혼으로 넘어가는 그 부분들을 가지고 동일한 분열(disintegration)을 겪어야 한다.
그러므로 스피노자는 악은 없다는 고전적 테제를 유지하는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그 어떤 경우에서도, 서로에 대해 일치하는 관계들이 항상 있다. (에를 들어, 독극물과 혈액의 부분에 들어가는 새로운 관계들 사이의 일치). 그러나 자연적 질서에 일치하여, 일치하는 관계들은 필연적으로 아마도 용해될 수 있는, 즉 실현되기를 그치는 특별한 관계의 보존과 상응하지는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악(그 자체)도 없지만, 그러나 (나에게) 나쁜 것은 있다 : "인간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서로에 대해 갖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의 보존을 초래하는 사물들은 좋은 것이다 ; 다른 한편 인간의 신체의 부분들에 서로 서로에 대해 상이한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갖도록 초래하는 것은 나쁘다." 나의 것과 일치하는 관계를 가진 각각의 대상은 좋다고 불릴 것이다; 나의 것을 분해하는 모든 대상은, 비록 그것이 다른 관계들과 일치하더라도 나쁘다(disconvenientia)고 불릴 것이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가 더 세세하게 살피게 될 때 상황은 더욱 더 복잡해진다. 우선 우리는 많은 연속적 관계들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의 동일한 대상은 한 가지 관점에서는 우리와 일치하지만 다른 관점에서는 우리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두번째로, 우리의 관계들 자체의 각각은 어떤 허용정도(latitude)를 즐기는데, 그것은 어린아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나아가, 병(illness) 혹은 다른 상황들은, 삶을 영위하는 것이 똑같은 개인이라는 것에 의아해하는 그러한 한도와의 관련을 변경시킬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 신체의 시체(corpse: 주검)로의 변형을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양태화는 우리 자신의 양태화된 부분들이 다른 부분들을 분리시키고 스스로에 반하게 하는 독처럼 작용할 수 있는 것이 될 수도 있다(어떤 병과 극단적인 경우에는 자살).
독작용(poisoning) 모델은 이러한 모든 경우의 복잡성 속에서 타당하다. 그것은 우리가 겪는 해로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해로움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독에 중독될 뿐만 아니라 또한 독살자들이기도 하다. 우리는 치료제이자 독으로서 작용한다. 블리옌베르크 자신은 세가지 예를 끌어온다. 살인행위와 더불어 나는 다른 인간 신체의 특징적 관계를 파괴한다. 절도(stealing) 행위와 더불어 나는 한 인간과 그의 청빈(property)을 결합시키는 관계를 파괴한다. 그리고 성교행위와 더불어 파괴된 것은 결혼상대자와의 관계이며 부부의 특징적 관계이다. 비록 이것이 제도화되고 계약적인 사회관계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어떤 유형의 개별성을 구성한다.
이 모델을 바라보면서 블리옌베르크는 첫 번째 계열의 반대를 제기한다. 1) 우리는 덕에서 악을, 정당한 행위에서 범죄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2) 우리는 어떻게 신이 책임을 지지 않으며 신이 원인이 아닌 순수 비존재에 악을 관련시킬 수 있는가? 만일 구성관계로 들어서는 관계들이 항상 존재하고 다른 것들은 분해된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동일한 것이라는 것을, '전체 세계는 영원하고 영구지속하는 혼동에 들어서고, 우리 인간은 짐승처럼 되어 갈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다른 한편 우리는 악이 선과 똑같은 수위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부인과 행한 성행위와 자기 부인과 행한 성행위에는 어떤 긍정성도 없기 때문이다.
구별하기의 가능성과 필연성에 관해 스피노자는 작용의 논리의 모든 권리를 지지한다. 그러나 이 권리는 매우 특수한 것이어서 그의 반응은 극히 모호한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네로의 모친살해는 이것이 긍정적인 어떤 것을 파악하는 한에서 나쁜 짓(knavery)이 아니다. 또한 오레스테스도 그의 어머니에 대한 살인의도를 가지고 똑같은 살인행위를 수행했다. 그럼에도 그는 비난받지 않으며, 혹은 적어도 네로만큼 혹독하게 비난받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네로의 나쁜 짓이란 말인가? 이것 외에는 없다 : 그는 그러한 행위를 통해서 그가 어떤 연민도 없이 배은망덕하고 불복종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 신은 이것의 원인이 아니고 네로의 행위와 의도의 원인이다"(편지 23). 이러한 예에서 어려운 텍스트는 <에티카>에서 설명될 것이다. 물어뜯는 행위에 있어서 긍정적인 것 혹은 좋은 것은 무엇인가?라고 스피노자는 묻는다. 좋은 것이란 (나의 팔을 들어올리고 주먹을 쥐고 급격하고 강력하게 움직이는) 이런 행위가 나의 신체의 역능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나의 신체가 어떤 특정한 관계에 행할 수 있는 것을 표현한다. 이러한 행위에서 나쁜 것은 무엇인가? 나쁜 것은 행위가 사물의 이마주와 결합될 때 나타나며 이 사물의 본질은 바로 그 행위에 의해 분해된다(나는 어떤 사람을 때림으로써 그를 죽인다). 똑같은 행위가 사물의 이마주와 결합된다면 좋다고 할 수 있으며, 이 사물의 본질은 그것과 일치하게 된다(예를 들어 철을 연마하는 해머). 이것은 한 행위가 관계를 직접적으로 분해할 때 나쁘다는 것을 의미하며, 반면 그 행위가 다른 관계들과 그 관계를 합성하게 직접적으로 합성할 때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경우이든 간에 합성과 분해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 어떤 관계들의 분해와 다른 관계들의 합성이 모두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를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로 되는 것은 한 사물이 그것과 합성하는 한에 있어서, 혹은 그와 반대로 그것에 의해 분해되는 한에 있어서 그 행위가 한 사물의 이마주와 결합되는지의 여부를 아는 것이다. 이제 두 가지 모친살해의 경우로 되돌아가 보자. 오레스테스는 클리템네스트라(Clytemnestra)를 죽였지만, 그녀는 오레스테스의 아버지인 아가멤논(Agamemnon)을 죽였다. 따라서 오레스테스의 행위는 아가멤논의 이마주와 정확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결합되며, 그 행위가 일치하는 영원한 진리로서 아가멤논의 특징적 관계와 결합된다. 그러나 네로가 아그리피나(Agrippina)를 죽였을 때 그의 행위는 단지 그의 어머니와의 이마주와만 결합되며, 따라서 그의 행위는 그의 어머니의 이마주를 직접적으로 분해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는 자신이 '연민을 전혀 갖지 않는 배은망덕하며 불복종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내가 '화나 분노를 동반하여' 한 방 날렸을 때, 나는 나의 행동을 나의 행동과 일치하지 않는 어떤 것의 이마주와 결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반대로 그 행동에 의해 분해되는 어떤 것의 이마주와 결합시킨다. 간단히 말해서 악덕과 덕, 좋은 행위와 나쁜 행위 사이에는 확실히 어떤 구별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구별은 행위 자체 혹은 그 이마주를 낳지 않는다('그 자체만으로 고려되지 않는 어떤 행동도 선하거나 나쁘지 않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어떤 의도도 낳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결정과만 관련된다. 즉 행위의 이마주와 결합되어 있는 사물의 이마주와만 관련된다. 혹은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두 관계들의 관계함, 즉 그 자신의 관계에서는 행위의 이마주와 그 관계에서는 사물의 이마주와 관련된다.
만일 이것이 정말로 구별의 요점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악은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 왜냐하면 자연 혹은 신의 관점에서 볼 때, 항상 구성하는 관계만이 존재하며, 영원한 법칙에 따라서 구성하는 관계들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관념이 적합할 때마다 그것은 최소한 두개의 신체들, 즉 나의 신체와 또 다른 신체를 포획한다. 신체들이 그것들의 관계들을 합성하는 한에서는('공통통념'). 다른 한편으로 불일치하는 신체들의 적합한 관념은 존재하지 않으며, 나의 신체와 일치하지 않는 신체의 적절한 관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불일치하는 한에 있어서는. 이런 의미에서 악, 아니 오히려 나쁨은 단지 부적합한 관념들을 통해서만 존재하게 되며, 이로부터 뒤따라 나오는 슬픔의 변용들(증오, 분노 등등)을 통해서만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또 다시, 모든 것은 의문에 부쳐진다. 그러므로 자연의 법칙에 따라 합성하는 관계들의 관점에서 볼 때 악은 무라고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관계들에서 표현된 본질들과 관련해서도 똑같이 말해질 수 있을까? 스피노자는 행위 혹은 행동이 동등하게 완전한 반면 행위자는 동등하게 완전하지 않으며 본질들은 동등하게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편지 23). 그리고 이러한 특이한 본질들 자체는 개별적 관계들이 합성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쁨과 분명 결합되지 않는 특이한 본질들이란 존재하지 않는가 -- 절대적 악의 위치를 재도입하는 것으로 족한 것일까? 독에 속해 있는 것에는 특이한 본질들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그러므로 블리옌베르크는 두번째 계열의 반대를 제기한다 : 범죄를 저지르게 하고 다른 사람을 죽이게 하고 또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죽이게 하는 것에는 어떤 본질도 속해 있지 않는 것일까(편지 22)? 범죄에서는 본질들이 존재하지 않으며 독이 아니라 맛있는 음식만이 존재하는 것일까? 그리고 반대는 악의(malice)라는 악에서부터 불행(misfortune)이라는 악에 이르기까지 수행된다. 왜냐하면 불행이 나에게 닥쳐올 때마다, 즉 나의 관계들 중 하나가 분해될 때마다, 이 사건은 비록 다른 관계들이 그 본성을 이룬다고 하더라도 나의 본질에 속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범죄자가 될 수 있는 나의 본질에 속한다 ...(편지 20과 22). 스피노자 자신은 '본질의 변용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스피노자가 개별적 관계들의 질서에서 악을 추방하려고 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특이한 본질들의 질서로부터 악을 추방하려고 했는지, 즉 그러한 관계들보다 더욱 심오한 특이성들의 질서에서 악을 추방하려고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스피노자의 응답은 간결하다. 만일 범죄가 나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순수하고 단순한 덕일 것이다(편지 23). 그러나 전체적인 질문은 정확히 이것이다: 나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본질에 속하는 것은 항상 하나의 상태, 즉 하나의 실재,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역량 혹은 능력을 표현하는 완전함이다. 이제, 한 사람은 그가 가지고 있는 변용에 따라서 악의가 없거나 불행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가 행하는 변용에 따라서 그는 악의가 없거나 불행하지 않는 것이다. 맹인은 빛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없으며, 악의있는 인간은 지성적 빛에 의해서 영향을 받을 수 없다. 만일 그가 악의가 있다거나 불행하다고 말해질 수 있다면 이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상태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 혹은 그가 더 이상 갖지 않고 있는 상태 때문이다. 이제 하나의 본질은 그 자신의 상태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그것은 다른 어떤 본질도 소유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시각이 돌에 속한다는 것이 모순적인 것만큼이나 시각이 그에게 속한다는 것도 모순적이다. ... 마찬가지로 우리가 감각적 쾌락을 위한 욕동에만 이끌리는 사람의 본성에 대해 주목하게 될 때, 그리고 그에게 있는 현재의 이 욕동을 훌륭한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욕동과 비교하거나 혹은 다른 순간에 이 동일한 사람에게서 발견되었던 욕동과 비교할 때, ... 보다 훌륭한 이 욕동은, 고려되는 있는 이 순간에는, 그것이 악마나 돌맹이의 본성에 속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사람의 본성에 더 이상 속하지 않는다."(21). 그러므로 관계들의 질서에서 악이 존재하지 않듯이 본질들의 질서에서도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악이 관계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단지 관계들 사이의 관계들에만 존재하는 것이듯, 악은 결코 상태나 본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태들이 비교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태들의 비교는 본질들의 비교만큼이나 타당성이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블리옌베르크는 가장 최고로 저항한다. 만일 내가 두 개의 본질들 중 하나를 다른 것의 역량을 갖지 않는 것으로 비난하기 위해서 두 본질들을 비교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한다면(돌은 보지 않는다는 것을 참조하라), 또한 내가 똑같은 본질을 가진 두개의 상태들을 비교한다고 한다면, 어디에서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실질적인 이행이, 즉 내가 이전에 가졌던 역량의 감소나 소멸이 존재하는가? "만일 내가 이전보다 더 불완전해졌다고 한다면, 나는 내가 덜 완전해지는 만큼 더 나쁘게 될 것이다"(20). 스피노자는 모든 생성들과 모든 지속들을 파악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본질의 동시성(instantaneousness)을 가정하지 않는가? "당신의 견해에서는 본질이 지각될 때의 바로 그 순간에서 본질이 가지고 있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본질에 속하지 않습니다"(22).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서신왕래에서 지쳐버린 스피노자가 이 점에 관련하여 블리옌베르크에게 답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에티카>에서 그 자신은 더 작은 완전함 -- "슬픔" -- 으로의 이행의 실재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슬픔에 있어서는 더 큰 완전함의 결핍에까지는 이르지 못하며 또한 완전함의 두 상태들의 비교에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 슬픔에 있어서 축소될 수 없는 어떤 것이 존재하며, 부정적이지도 외재적이지도 않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 그 이행은 경험되며 실재적인 것이다. 지속. '나쁜'의 궁극적 축소 불가능성을 검토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 이것이 작용역량의 감소 혹은 영향받을 수 있는 능력의 감소로서의 슬픔이며, 이 슬픔은 악의를 가진 증오속에서 그리고 불행의 절망에서 표현된다(심지어 악의의 기쁨들은 이것이 적들에게 가해진 슬픔에 밀접하게 의존한다는 점에서 반작용적이다). 지속의 실존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스피노자는 실존의 연속적인 변이를 지속이라고 정의하며 사실 그것을 나쁜 것의 가장 최후의 피난처인 양 사고한다.
본질에 속하는 것은 하나의 상태 혹은 하나의 변용뿐이다. 본질에 속하는 것은 이것이 실재성 혹은 완전함의 절대적 양을 표현하는 한에 있어서 상태일 뿐이다. 그리고 상태나 변용은 실재의 절대적 양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작용역량의 변이, 증대나 감소, 기쁨이나 슬픔을 표현한다. 그러나 이 변이는 그 자체로 본질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변이는 단지 실존 혹은 지속에 속할 뿐이며, 실존하는 상태의 발생에만 관련할 뿐이다. 본질의 상태들이 실존에 있어서 증대에 의해 생산되는가 아니면 감소에 의해 생산되는가라는 것에 매우 상이하게 의존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 있다. 외적인 상태가 우리의 작용역량의 증대를 포함할 때, 그것은 바로 이 역량에 의존하는 또 다른 상태에 의해 결합된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와 일치하는 어떤 것의 관념은, 우리가 합성관계에 들어서는 어떤 것의 관념은 우리 자신과 신에 대한 적합한 관념을 형성할 수 있게 만든다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마치 외적인 상태가 우연에 의해 합성되듯이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만 의존한다. 이와 반대로 외적 상태가 감소를 포함할 때, 그것은 다른 부적합하고 의존적인 상태에만 연결될 수 있다. -- 우리의 역량이 이미 그 지점에까지 도달하지 않는 한, 아무 것도 그것과 비교될 수 없다. 간단히 말해 본질의 상태들은 이것들이 있을 수 있는 만큼 완전하다. 그러나 이것들은 실존에 있어서 그 생산법칙에 따라 다르다. 이것들은 본질에 있어서 실재의 절대적 양을 표현한다. 그러나 이것들이 실존에 있어서 포함하는 것은 변이에 상응한다.
이런 의미에서 실존은 하나의 실험이다. 그러나 그것은 심판(Judgement)에 대립되는 물리적 혹은 화학적 시험(test), 실험이다. 이런 이유로 블리옌베르크와의 서선교환 전체는 신의 판단이라는 주제로 향한다. 신은 선악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 지성, 의지, 정념을 가지고 있는가? 실재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상태에 따르는 것을 제외하고서는 결코 판단될 수 없다. 상태에 관한 물리적-화학적 시험은 윤리학을 도덕적 판단과 대립한 것으로서 구성한다. 본질, 우리의 특이한 본질은 동시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원하다. 그러나 본질의 영원성은 우리 자신의 강렬한 부분들이며, 스스로를 영원한 진리로서 합리적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실존은 일군의 이 지속적 관계 하에서 우리에게 속하는 연장적 부분들이다. 만일 우리가 존재하는 동안에 우리의 작용역량을 증가시키기 위해 이 부분들을 합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동시에 우리 자신에게만 의존하는, 즉 우리 자신의 강렬한 부분들에만 의존하는 많은 수의 변용들을 경험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가 항상 우리 자신의 부분들과 다른 것의 부분들을 파괴하거나 분해하는데 몰두한다면, 우리의 강렬한 부분 혹은 영원한 부분, 우리의 본질적 부분은 스스로에게서 유래하는 매우 적은 수의 변용만을 경험할 것이며, 이것에 의존해서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좋은 인간과 나쁜 인간 간의 궁극적인 차이인 것이다. 좋거나 강한 인간은 완전히 존재하거나 완전히 강렬해서 생애 내내 영원성을 획득하며 실존하는 사람이자, 항상 연장적이고 외적인 그 죽음은 그에게서 아무런 중요성도 갖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윤리적 시험은 연장된(deferred) 판단과 반대된다. 도덕적 질서를 회복하는 대신 그것은 도처에서 본질들과 그 상태들의 내재적 질서에 순응한다. 보상과 처벌을 분배하는 종합을 대신하여 윤리적 시험은 (금이나 흙의 시험처럼) 우리의 화학적 합성을 분석하는 것에 만족한다.
우리는 세 가지 구성성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1) 우리의 특이한 영원한 본질, 2) (운동과 정지라는) 우리의 특징적 관계들 혹은 또한 영원한 진리들인 촉발될 수 있는 우리의 능력, 3) 연장적 부분들, 이것은 지속에 있어서 우리의 실존을 정의하며 이것들이 우리의 이러저러한 관계들을 실현함에 있어서 우리의 본질에 속한다(외적 변용들이 촉발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충족시키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본성의 가장 마지막 층의 수준 위에서만 '나쁨'은 존재한다. 나쁜 것은 관계에 있어서 우리에게 속하는 연장적 부분들이 다른 관계들에 들어서는 외적 요소들에 의해 야기될 때 발생한다. 혹은 우리가 촉발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변용과 대면할 때 발생한다. 이런 사건 속에서 우리는 우리 관계가 분해된다고, 혹은 촉발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파괴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관계는 단지 연장적 부분들에 의해 실현되기를 그칠 뿐이다. 혹은 우리의 능력은 그 영원한 진리를 잃지 않고서 외적 변용에 의해 실현되기를 그칠 뿐이다. 우리가 나쁘다고 부르는 모든 것은 엄격하게 말해서 필연적이되, 그러나 이것들은 외부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우연적 사건의 필연성. 우선 실존의 평균적(average) 지속이 있다. 관계를 생각해 보면 평균적 지속에 있어서 관계는 실현될 수 있다. 그러나 나아가 우연과 외적 변용들은 모둔 순간에 그 실현을 방해할 수 있다. 우리로 하여금 죽음이 우리 자신에 내재한다고 믿게 만드는 것은 죽음의 필연성이다. 그러나 시실 파괴와 분해는 우리의 관계들 자체나 우리의 본질에 관련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처음에는 우리에게 속하는 연장적 부분들에게만 관계하며, 그리고 나서 우리 자신의 관계보다는 다른 관계들에 들어서도록 결정된다. 이런 이유로 <에티카>는 4부에서 자기-파괴라는 분명한(apparent) 현상에 많은 중요성을 부여한다. 실제로 포함된 것은 항상 다른 관계들에 들어서도록 결정되며 결과적으로 우리 내부의 신체들에 낯선 것처럼 작용하는 일군의 부분들이다. 이것이 '자동면역적 질병'과 더불어 일어나는 것이다. 그 관계가 외적 행위자(작용자), 전형적으로 바이러스에 의해 방해받는 일군의 세포들은 우리의 특징적 (면역적) 체계에 의해 파괴될 것이다. 혹은 역으로 자실과 더불어 일어난다. 이번에 방해받는 무리는 보다 상위의 조처를 취하며, 상이한 관계에 있어서, 우리의 특징적 체계를 파괴하기 위해서 다른 부분들을 끌어들인다('알려지지 않은 외적인 원인들이 신체를 촉발하기 때문에 우리는 전과는 대립된 또 다른 본성을 갖게 된다. ...'). 그러므로 독작용이라는 보편적인 모델이여, 스피노자에게 경애를.
우리의 연장적 부분들과 우리의 외적인 변용들은 이것들이 우리의 관계 중 하나를 실현하는 한에서 우리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이 관계 혹은 그 본질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본질에 속함에는 두가지 방식이 존재한다. 즉 '본질의 변용'은 우선 순전히 객관적인 방식으로 이해된다. 즉 변용은 우리의 본질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작용하는 외적인 원인들에 의존한다. 이제 이러한 변용들은 때로 우리의 관계들의 실현에 깃들거나 이것을 위험에 빠뜨리며(작용역량의 감소로서의 슬픔), 때로는 그것을 강화하거나 증대시킨다(작용역량의 증대로서의 기쁨). 그리고 후자의 경우에서만 외적인 혹은 '수동적인' 변용은 적극적 변용에 의해 합성되는데, 이 적극적 변용은 우리의 작용역량에만 엄격하게 의존하며 우리의 본질에 내재하며 우리의 본질을 구성한다: 적극적 기쁨, 본질의 자기변용, 이러한 소유격(genitive)은 이제 자동적이게 되며, 인과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로 축소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와 반대로 이 내적이고 면역적인 변용들은 형태들이 되며, 이 형태들을 통해 우리는 내부에서, 그리고 영원히, 본질적으로 우리 자신, 다른 사물들, 신을 의식한다(지식의 세번째 종류, 즉 직관). 이제 우리가 우리의 실존 동안에 이러한 자기-변용에 도달할수록 우리는 실존을 잃음에 있어서, 죽게 됨에 있어서, 심지어 고통을 받음에 있어서 더 적게 잃게 되며, 우리는 사실상 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혹은 나쁨이란 없다고, 아니 본질에 속하는 것은 없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제4장 : <에티카>의 주요개념 색인 (1)
ABSOLUTE(절대적)
1. 실체란 그 종류에 있어서 무한한 모든 속성들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라고 일컫어진다. 물론 한 종류에 있어 무한한 것은 다른 종류들의 결핍도, 심지어 그것들과 관련해서 대립도 포함하지 않으며, 단지 이러한 모든 무한한 형태들이 동일한 것을, 존재론적으로 단자적인(unary) 존재를 지시하게끔 하는 실재적 구별만을 내포한다(E.,Ⅰ, 정의 6과 설명). 절대적인 것이란 바로 이러한 존재의 성격이며, 반면 무한한 것은 단지 각 '종류'의 특성(property) 혹은 속성들 각각의 특성들일 뿐이다. 스피노자주의는 그 전체에 있어서 특성으로서는 무한하게 완전한 것을 넘어서며, 자연(Nature)으로서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으로 향하는 하나의 운동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것의 존재론적 증명의 '대체'는 이런 운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2. 신의 역량들, 존재하고 작용하는 절대적인 힘, 사유하고 파악하는 절대적인 역량을 특질화한다(Ⅰ, 11, 주석: infinitam absolute potentiam existendi ; Ⅰ, 31, 증명: absolutam cogitationem). 그러므로 절대적인 것의 두 쌍, 혹은 절대적인 것의 두 역량들, 이것들은 동등하며 우리가 알고 있는 두가지 속성들과 혼동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 두가지 역량들의 동등성(equality)에 관해서는, <에티카>, Ⅱ, 7, 보충을 보라.
ABSTRACTIONS(추상화)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스피노자가 추상개념들과 공통통념들(common notions)간에 본성상의 차이를 내세웠다는 것이다(Ⅱ, 40, 주석 1). 공통통념들은 서로서로 동의하는, 즉 법칙에 따라서 그들 독자적 관계들을 구성하면서 이러한 내재적인 일치(agreement)나 구성(composition)을 유지하는데 있어 또 다른 것을 촉발하는 어떤 것의 관념이자,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신체들 사이에 있는 공통된 어떤 것의 관념이다. 그러므로 공통개념은 촉발될 수 있는 우리의 능력(our capacity for being affected)을 표현하며, 우리의 파악 역량(power of comprehending)에 의해 설명된다. 반대로, 추상적인 관념은 촉발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넘어설 때 그리고 우리가 파악하는 대신 상상하는데 만족할 때 발생한다. 우리는 더 이상 구성으로 들어서는 관계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외재적인 기호, 우리의 상상을 놀라게 하는 변화가능한 인지적 특성만을 보유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것들(직립하는 동물로서의 인간, 혹은 웃고 말하는 동물로서의 인간, 합리적 동물, 깃털이 없는 동물 등등)을 무시하는 반면 본질적인 특성을 내세운다. 우리는 지각가능한 유사성들과 차이들의 조잡한 분배를 구성의 통일로, 즉 가지적인 관계의 구성으로, 내적인 구조들(fabrica)로 대체하며, 우리는 자연 속에서 연속성들, 불연속성들, 자의적인 유비들을 정립한다.
어떤 의미에서 추상화는 기능을 전제한다. 왜냐하면 기능은 이마주들에 의해서 사물들을 설명하기 때문이다(그리고 신체들의 내적 본성을 우리 자신에 관한 그 신체들의 효과로 대체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기능은 추상화를 전제로 하는데 왜냐하면 기능은 연합의 질서 혹은 심지어 외재적 변형의 질서에 따라서 서로서로로 변형되는 추상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지성개선론>, 62-64 : "우리가 인간이 짐승으로 변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매우 일반적이다. ..."). 우리는 어떻게 부적합한 관념이 추상적인 것과 허구적인(fictious) 것을 결합하는지를 알게 된다. 허구적인 추상은 상이한 유형들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종적(specific)이냐 유적(generic)이냐로 결정된 가변적이고 지각 가능한 특징을 통해 정의된 강(classes), 유(species), 종(kinds)이 존재한다(개는 짖는 동물이다 등등). 이제 종적 차이와 유적 차이를 통해 정의되는 이러한 방식을 거부하면서 스피노자는 공통통념들과 연결되어 있는 완전히 상이한 방식을 제시한다. : 존재들은 촉발될 수 있는 존재들의 능력에 의해서, 존재가 할 수 있는 변용(affection)에 의해서 정의되며, 또한 그것들이 반작용하는 자극에 의해서, 그리고 그것들이 촉발할 수 없는 그러한 것들을 통해, 존재들의 능력을 뛰어넘는 것을 통해, 그리고 그것들을 아프게 하거나 죽게 만드는 것을 통해 정의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존재자들을 그 역량에 의해서 분류할 수 있게 된다. 즉 우리는 존재들이 다른 것들과 일치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되며, 그럼에도 서로서로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또한 어떤 것에게 영양분을 제공할 수 있는 것과 일치하며, 이것은 또한 어떤 것과 친화적이 된다는 것, 그리고 어떤 관계에 따라서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 말, 그리고 개; 혹은 보다 적절하게 지적하면 철학자와 주정뱅이, 사냥개와 집 지키는 개, 경주마와 쟁기마 -- 이것들은 촉발될 수 있는 이것들의 능력에 의해 서로서로 구별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들이 자신들의 삶을 충족시키고 만족시키는 그러한 방식에 의해서 구별된다. vita illa qua unumquodque est contentum (E., Ⅲ, 57). 그러므로 더 일반적이거나 덜 일반적인 상이한 유형들이 존재하며, 종과 유라는 추상적 관념과 동일한 기준을 전혀 갖고 있지 않는 유형도 존재한다. 심지어 비록 각각의 것이 그 종에 있어서 무한한다고 불리더라도 속성들은 유로서의 실체를 규정하는 유적인 차이가 아니며, 또한 그것들은 그 자체로 종도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종'은, 속성의 양태들은 변용들 자체이기 때문에, 단지 실체로서 무한한 변용능력을 구성하는 필연적인 존재 형식을 지시할 뿐이다).
두 번째로 수(number)가 존재한다. 수는 추상적 관념의 상관자(correlate)이다. 왜냐하면 사물들은 강, 종, 유의 구성성분에 따라 나열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수는 '표상의 보조자'이다(메이어에게 보내는 편지 12). 수는 '추상적으로 고려된' 실존하는 양태들에 적용되는 한에 있어서는, 수는 실존하는 양태들이 실체로부터 뒤따라 나오고 서로서로 관련되어 있는 방식과는 별도로 그 자체로 추상적이다. 오히려 반대로 자연에 대한 구체적인 견해는 도처에서 무한한 것을 발견하며, 반면 그 부분들의 수 때문에 어떤 것도 무한하지 않다. -- 속성들의 무한성으로 이루어진 실체도 2, 3, 4 등등으로 나아가지 않고서도 즉각적으로 긍정되지 않으며(Schuller에게 보내는 편지 64 ), 실존하는 양태도 부분들의 무한성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수 때문에 부분들의 무한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Tschirnhaus에게 보내는 편지 71). 그러므로 수적 구별은 실체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며 -- 속성들간의 실재적 구별은 결코 수적이지 않다 -- 또한 양태들에 적합하게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수적인 구별은 양태의 본성을 표현하며, 단지 추상적으로만 양태적 구별의 본성을 표현하고, 단지 표상에게만 이 본성을 표현한다.
세 번째, 초월적인 것(transcendentals)이 존재한다. 여기에서 유적이거나 종적인 성격들의 문제를 통해 우리는 존재들 사이에 외적인 차이들을 정립하지 않으며, 오히려 존재라는 개념 혹은 존재와 공존하는 개념들에 대해 우리는 초월적인 가치를 부여하며, 우리는 이것에 무성(nothingness)를 대립시킨다. (존재/비존재, 통일/다원, 참/거짓, 선/악, 질서/무질서, 아름다움/흉칙함, 완전/불완전 등등...) 이것은 단지 내재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있을 뿐인 선험적(transcendent) 가치들을 제시하며, 이것은 단지 상대적인 대립만을 가지고 있을 뿐인 절대적인 대립에 의해 정의된다. 따라서 선과 악은 좋음과 나쁨의 추상이며, 이것들은 한정적인(definite) 실존양태와 관련된다고 말해지며, 또한 그 작용 역량의 변이의 방향에 따라서 좋음과 나쁨의 변용들이라 칭한다(E., Ⅳ, 머리말).
기하학적 존재들은 종적인 문제를 설정한다. 이것의 모습(figure)은 모든 의미에서 추상적인 것, 혹은 이성의 존재들에 속한다. 그것은 종적인 특성에 의해 정의된다. 그것은 척도의 대상이며, 수와 동일한 종류의 도움을 얻어 측정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은 비-존재(Jelles에게 보내는 편지 50)를 포함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하학적 존재들에 적합한 원인을 배분할 수 있는 반면 다른 이성의 존재들은 진정한 원인들에 대한 무지를 내포한다. 우리는 사실상 유적인 정의 (고정되어있는 한 점이 다른 점을 움직일 수 있는 선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기술된 모습으로서의 원, <지성개선론>, 95-96, 혹은 반원의 회전이라고 기술된 모습으로서의 구(球), idem, 72)에 의해 한 모습에 대한 종적인 정의(예를 들어, 중심이라고 불리우는 하나의 동일한 점에서 동일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점들의 집합으로서의 원)를 대체한다. 분명 이것은 추상적인 것과 허구적인 것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허구를 포함한다. 왜냐하면 어떤 원이나 구도 이러한 방식으로 자연에 의해 발생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떤 특이한 본질도 따라서 배분되지 않는다. 그리고 선이라는 개념 혹은 반원이라는 개념은 어떤 방식으로도 그것에 속해 있는 운동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표현: fingo ad libitum causam (idem, 72). 그러나 실재적 사물들을 표상하는 관념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 사물들이 생산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그 관념을 참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관념의 진리는 대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자율적 역량에 의존하기 때문이다(idem, 72). 그러므로 기하학적 존재의 허구적인 원인은 우리가 이것을 신의 역량에 도달하기 위핸 발판대로서 우리의 파악역량을 발견하기 위해 사용한다고 했을 때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신은 선이나 반원의 운동을 결정한다). 왜냐하면 신의 관념과 더불어 모든 허구들과 추상들은 멈추게 되며, 이로부터 뒤따라 나오는 관념들은 그 질서에 있어서 실재적인 특이한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생산되기 때문이다(idem, 73, 75, 76). 이러한 이유로 기하학적 통념은 이것들이 관련을 맺고 있는 추상적인 것을 배척할 수 있는 허구들이며, 또한 그들 자신을 쫓아 낼 수 있는 허구이다. 결과적으로 이 통념들은 추상적인 것 보다는 오히려 공통통념들에 가깝다. 즉 이것들은 <에티카>에서 공통통념이 하게 될 것을 미리 <지성개선론>에서 보여주고 있다. 사실 우리는 어떻게 공통통념이 표상과 복잡한 관계를 유지하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서든 기하학적 방법은 그 충분한 의미와 확장(extension)을 보존할 것이다.
ACT. 권력/역량을 참조
ACTION. Affections를 참조.
ADEQUATE-INADEQUATE. 관념을 참조.
AFFECTIONS, AFFECTS
1. 변용들(affectio)는 양태들 자체이다. 양태들은 실체 혹은 실체의 속성들의 변용들이다(<에티카>, Ⅰ 25, 보충; Ⅰ 30, 증명). 이러한 변용들은 타당한 원인으로서의 신의 본성에 의해 설명되며 신은 작용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적극적이다.
2. 두 번째 수준에서, 변용들은 양태에서 일어나는 것, 양태의 양태화(modification), 그 양태에 대한 타 양태들의 효과들을 지시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변용들은 이마주들 또는 무엇보다도 신체적인 흔적이다(<에티카>, Ⅱ 요청 5; Ⅱ 17, 보충; Ⅲ 요청 2). 그리고 변용들의 관념들은 촉발된 신체의 본성과 촉발하는 외적 신체의 본성 모두를 포함한다(Ⅱ 16). "그 관념들이 우리 내부에서 나타나듯 외적 신체에도 나타나는 인간 신체의 변용들을 우리는 사물의 이마주라 부를 것이다.... 그리고 정신이 이러한 방식으로 신체를 고찰할 때, 우리는 그것을 표상된 것이라고 부를 것이다."
3. 그러나 이러한 이마주적 변용들 또는 관념들은 이전의 상태보다 다소간의 완전성을 내포하는 촉발된 신체와 정신의 특정한 상태(constitutio)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하나의 이마주 또는 관념으로부터 다른 것으로의 이행과 경험을 경험하게 되며 지속을 통해 우리는 더 큰 혹은 더 적은 완전성에 이르게 된다. 나아가 이러한 상태들, 이러한 변용들, 이마주들 또는 관념들은 그것들을 이전 상태로부터 옮겨와서 다음 상태로 나아가게 하는 지속과 분리될 수 없다. 완전함의 연속적인 지속 또는 변이(variation)는 "정서들" 또는 감정(affectus=feeling)이라 불린다.
일반적 규칙에 따라 변용(affectio)은 직접적으로 신체에 관해 말해지며, 반면에 정서들(affectus)은 정신을 지시하는 것으로 언급되어왔다. 그러나 실재적인 차이는 이 점에 있지 않다. 차이는 외적 신체의 본성을 포함하는 신체의 변용들과, 관념들, 그리고 작용역량을 증가 혹은 감소시키는 것을 포함하는 정서 간에 있다. 신체와 정신은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affectio는 촉발된 신체의 상태를 가리키며 촉발시키는 신체의 현존을 함축하지만, affectus는 촉발시킨 신체들의 상관적인 변이를 고려하면서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감정 정서들이 특수한 유형의 관념들 혹은 변용들로서 제시된다고 하더라도 이마주 변용들 혹은 관념(ideas)들과, 감정 정서들(feeling affects) 간에는 본성상 차이가 있다. "나는 정서를 그것에 의해 신체의 작용역량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시키거나 저해하는 신체의 변용들로 이해한다...."(Ⅲ, 정의 3). "정신의 정념[수동상태 - 역자]이라고 불리는 정서는 혼동된 관념인데, 그것에 의하여 정신은 자신의 신체나 신체의 일부에 대해서 이전보다 더 크거나 작아지게 하는 실존하는 힘을 긍정한다...."(Ⅲ, 정서에 대한 일반적 정의). 정서가 이마주나 관념을 함축한다는 것은 확실하며, 그 원인으로부터 그러하듯 후자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확실하다(Ⅱ, 공리 3). 그러나 정서는 이마주나 관념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정서는 두 상태의 차이를 포함하는 생생한 지속 안에서 경험되기 때문에 순전히 일시적이며, 지시적이거나 표상적인 것과는 상이한 본성을 갖는다. 이것이 스피노자가 정서는 관념들의 비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이유이며, 그리하여 어떠한 지성주의적 해석도 거부하는 이유이다: "이전보다 크거나 작아진 실존하는 힘이라고 말할 때, 나는 정신이 신체의 현재적 구성을 과거의 구성과 비교한다고 이해하지 않는다. 정서의 형상[형식?]을 구성하는 관념은 전보다 커지거나 작아진 실재성을 실질적으로 포함하는 신체의 어떤 것을 긍정하는 것으로 이해한다"(Ⅲ, 정서에 관한 일반적 정의).
존재하는 양태는 촉발될 수 있는 몇몇 능력에 의해 정의된다(Ⅲ, 요청 1과 2). 그것이 다른 양태와 조우하게 되었을 때, 이 다른 양태가 그것과 구성하게 될 때 이 양태에 "좋을" 수가 있다. 반대로 그 양태를 분해할 때, 그 양태에 "나쁠" 수가 있다. 첫 번째 경우 존재하는 양태는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한다. 두 번째 경우는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한다. 이에 따라, 다른 양태의 역량이 그것에 추가되거나 또는 반대로 그것으로부터 역량을 박탈시켜 유동성을 빼앗고 억제하기 때문에, 작용역량이나 존재력이 증가되거나 감소된다고 말할 수 있다(Ⅳ 정리 18의 증명). 더 큰 완전성으로의 이행이나 작용역량의 증가는 기쁨의 정서, 혹은 감정이라 불린다. 더 작은 완전성으로의 이행이나 작용역량의 감소는 슬픔이라 불린다. 그러므로 작용역량은 촉발될 수 있는 능력과 동일하게 외부적 원인에 따라 변한다. 감정 정서(기쁨 또는 슬픔)는 그것이 전제하는 이마주 변용이나 관념(우리들의 것과 일치하는 혹은 일치하지 않는 신체의 관념)에서 도출된다. 그리고 정서가 그것을 나오게 한 관념으로 복귀할 때 기쁨은 사랑이 되고, 슬픔은 증오가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변용과 정서의 상이한 계열들은 연속적으로, 그러나 가변적인 조건하에서, 촉발될 수 있는 능력을 충만하게 된다(제3부 정리56).
우리들의 감정 또는 정서들이 존재의 다른 양태들과의 외적인 조우로부터 도출되는 한, 그것들은 촉발시키는 신체의 본성에 의해 그리고 우리 상태에 있어서 혼란된 이마주인 그 신체에 대한 필연적으로 부적합한 관념으로 설명된다. 그러한 정서들은 수동(passions)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한 정서들의 적합한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Ⅲ 정의 2). 심지어 작용역량의 증대라고 정의되는 기쁨에 기초하는 정서들도 수동들이다. 기쁨은 "어떤 인간의 작용능력이 그가 자신과 자신의 행동들을 충전되게 인식하는 지점까지 증가되지 않는 한에서"(Ⅳ 정리59 증명) 여전히 수동이다. 심지어 우리의 작용능력이 질료적으로는 증대되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형상적으로 통제하지 못할 때에는 수동적인 상태로, 우리의 역량과 분리된 채로 남아 있다. 이것이 정서들의 관점에서 슬픈 정념들과 기쁜 정념들이라는 두 종류의 정념들간의 기본적인 구별이 수동과 능동(passions and actions) 간의 매우 상이한 구별을 예비하는 이유이다. 변용(affectio)의 관념은 항상 정서들을 야기한다. 그러나 만약 그 관념이 혼란된 이마주가 아닌 적합한 것이라면, 그 관념이 간접적으로 우리 자신의 상태를 포함하는 대신에 촉발시키는 물체의 본질을 표현한다면, 그 관념이 내적인 변용(affectio)의 관념 또는 우리의 본질, 타자의 본질들 그리고 신의 본질의 내적인 일치를 명시하는(세 번째 종류의 지식) 자기변용이라면, 그것으로부터 도출되는 정서들은 그 자체 작용들이다(제3부 정리1). 이러한 정서들 혹은 느낌들은 기쁨들 혹은 사랑들이어야 할뿐만 아니라(제3부 정리58과 59), 매우 특별한 기쁨들이자 사랑들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그러한 정서들은 더 이상 우리의 작용역량이나 완전함의 증대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역량 혹은 완전함의 충만되고 형상적인 소유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이다. 은총받음이라는 단어는 이러한 능동적 기쁨들을 위해 보존되어야 한다. 능동적 기쁨들은 수동적 기쁨처럼 지속 안에서 자신들을 확장하고 지속을 정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능동적 기쁨들은 영원하며 더 이상 지속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다; 능동적 기쁨들은 더 이상 이행들과 경과들을 함축하지 않고, 스스로를 그리고 서로서로를 그것들이 나오는 적합한 관념들과 함께 영원한 양태 안에서 표현한다(제5부 정리31-33).
AFFIRMATION(긍정). 부정을 참조.
ANALOGY(유비). 탁월을 참조.
APPETITE. 권력/역량을 참조.
ATTRIBUTE(속성)
"지성이 실체에 관하여 그 본질을 구성하고 있다고 지각하는 것"(<에티카>, Ⅰ, 명제 4) 속성들은 지성이 보유하고 있는 것을 보는 방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적 지성은 단지 있는 것만을 지각하기 떄문이다; 그것은 발산(emanation)도 아니다. 왜냐하면 속성들에 대한 실체의 우월성과 탁월함은 존재하지 않으며, 또 다른 속성에 대한 하나의 속성의 우월성이나 탁월함도 없기 때문이다. 각 속성은 어떤 본질을 '표현한다'(Ⅰ, 10, 각주 1). 속성이 필연적으로 지성과 관련을 맺는다면, 이것은 속성이 지성 안에 거주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표현적이기 때문이며 이를 '지각하는' 지성을 필연적으로 포함하는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표현된 본질은 무제한적인, 무한한 성질(quality)이다. 표현적 속성은 본질을 실체와 관련시키며, 지성이 파악하는 것은 이러한 내재적 관계이다. 속성들 속에서 독특한 모든 본질들은 실체에 있어서 하나로서 있으며, 속성들에 의해서 그것들은 관계 맺는다.
각 속성은 "그 자체를 통해서 그리고 그 자체로 인식된다"(올덴버그에게 보내는 편지 2). 속성들은 실재에 있어서 판명하다. 즉 어떤 속성도 인식되기 위해서 다른 것, 혹은 다른 것에 보유된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절대적으로 단순한 실체적 성질들을 표현한다. 결과적으로 하나의 실체는 각 속성에 양적으로든 혹은 형식적으로든 (수적으로가 아니라) 상응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에티카>의 처음 8개 정리들에서 정의된 순전히 양적이고 형식적인 복수성은 하나의 실체와 각 속성을 동일화할 수 있게 만든다. 속성들 사이의 실재적 구별은 궁극적 실체적 '본질들(quiddities)' 사이의 형식적 구별이다.
우리는 단지 두 개의 속성들만을 알 뿐이며, 그것들의 무한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단지 두가지만을 알고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우리가 우리의 본질에 포함된 것 즉 우리가 정신과 신체인 한에서 사유와 연장이라는 무한한 그러한 성질들로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Ⅱ, 1과 2). 그러나 우리는 또한 속성들의 무한성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는데, 왜냐하면 신은 사유에 의해서도 연장에 의해서 고갈될 수 없는 존재하는 것의 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속성들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한에서, 그리고 속성들이 양태의 본질들에 포함되고 포함하는 한에 있어서 속성들은 엄밀히 말해서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 신체들이 연장을 포함하고 연장이 신의 신체의 속성이라는 것은 같은 형태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은 피조물들 자체 속에 가지고 있는 완전화와는 다른 형태에서 '피조물들'에 의해서 포함된 완전화를 소유하지 않는다 : 그러므로 스피노자는 탁월, 다성성(equivocity), 심지어 유비라는 통념들을 급진적으로 거부한다(이 통념들에 따르면 신은 다른 형태에서, 더 우월한 형태에서 완전화를 소유한다...). 스피노자적 내재성은 그러므로 발산(emanation)과 대립하는 것만큼이나 창조와도 대립한다. 그리고 내재성은 무엇보다도 속성들의 단성성을 의미한다 : 같은 속성들은 그것들이 구성하는 실체와 그것들이 포함하는 양태들을 긍정한다(단성성의 첫번째 모습, 즉 원인의 모습과 필연적인 것의 모습이라는 나머지 두 가지의 것).
AUTOMATON. 방법을 참조.
BEING OF REASON, IMAGINATION(이성의 존재, 상상력의 존재). 추상화를 참조.
BLESSEDNESS. Affections를 참조.
CAPACITY(능력). Power을 참조.
CAUSE(원인)
"나는 자기원인을 그것의 본질이 존재를 포함하는 것, 또는 그것의 본성이 존재하는 것으로만 인식되는 것으로 이해한다"(I. 정의 1). 스피노자가 에티카를 자기원인에 대한 정의에서 시작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전통적으로 자기원인이라는 통념은 작용인과성(독특한 효과의 원인)과의 유비에 의해서 많은 예방책(precaution)과 더불어서, 따라서 단순하게 파생적인(derivative) 의미에서 차용되었다. 그러므로 자기의 원인은 '하나의 원인에 의한 것처럼'을 의미한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전통을 전복하여 자기의 원인을 모든 인과성의 전형으로, 그 독창적이고 철저한 의미로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용인과성이 있다. 효과의 본질과 실존이 원인의 본질과 실존과 다르게 되든, 혹은 그 자신의 본질과는 다른 실존을 가진 효과는 그 실존의 원인으로서 다른 어떤 사물을 지시하든 간에 이 속에서 효과는 원인과 달라진다. 그러므로 신은 모든 사물들의 원인이다. 그리고 모든 존재하는 유한한 사물은 그것을 존재하게 하고 작용하게 하는 원인처럼 또 다른 유한한 사물을 지시한다. 본질에서, 그리고 실존에서 차이나는 원인과 효과는 어떤 공통된 것도 가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Ⅰ, 17 주석; 쉴러에게 보내는 편지 64). 그리고 또 다른 의미에서, 이것들은 공통된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 : 속성, 바로 이 속에서 효과는 생산되며, 이것에 의해서 원인은 작용한다(올덴버그에게 보내는 편지 4; 쉴러에게 보내는 편지 64). 그러나 원인으로서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속성이 효과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이 본질에 의해서 요청될 뿐이다(Ⅱ, 10).
신이 동일한 속성들을 통해서 자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을 생산한다는 것은 신이 그 자신의 원인이라는 것과 똑같은 의미에서 모든 사물들의 원인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신은 자신이 존재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생산한다. 그러므로 속성들의 단성성은 ― 똑같은 의미에서 이것들은 그것이 그 본질을 구성하는 실체라고 말해지며, 그것들을 그들의 본질에서 포함하는 산물이라고 말해진다 ― 원인의 단성성으로까지 확장하며, 이 속에서 '작용인'은 '자기 원인'과 동일한 의미라고 말해진다. 이러한 방식으로 스피노자는 전통을 이중적으로 전복한다. 왜냐하면 작용인은 더 이상 원인의 첫번째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며, 자기 원인도 더 이상 작용인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해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작용인은 자기 원인과 동일한 의미를 띤다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유한하게 실존하는 사물은 그 원인으로서의 또 다른 유한하게 실존하는 사물을 지시한다. 그러나 유한한 사물이 이중의, 수평적이고 수직적인 인과성에 종속된다고 말해질 수는 없다. 수평적인 것은 다른 사물들의 무한정한(indefinite) 계열들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며, 수직적인 것은 신에 의해서 구성된다. 왜냐하면 계열들의 각 용어에서 하나는 신과 관계되며, 원인으로 하여금 그 효과를 가지게끔 결정하는 신과 관계되기 때문이다(E., Ⅰ, 26). 그러므로 신은 결코 멀리 떨어진 원인이 아니라 후행(regression)이라는 첫번째 용어를 통해서 도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단지 신만이 원인이다. 인과성의 모든 형상들에는 단지 하나의 의미와 하나의 양태성만이 존재한다. 비록 이 형상들이 그 자체로 다양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자체의 원인, 무한한 사물들의 작용인, 서로서로와의 관계에 있어서 유한한 사물들의 작용인). 그 한 가지 의미로 또 그 하나의 양태성으로 이해된 원인은 본질적으로 내재적이다. 즉 그것은 (일시적인 원인에 반대하여) 생산하기 위해서 그 자체 내부에 남아 있으며, 마찬가지로 효과는 (발산적인 원인에 반대하여) 그 자체 내에 남아있다.
CITY(도시). 사회(society)를 참조.
COMMON NOTIONS(공통 통념들)
공통통념들(<에티카>, Ⅱ, 37-40)은 이것들이 모든 정신들에 공통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일차적으로는 이것들이 모든 신체들(연장, 운동과 정지)이든 혹은 어떤 신체들(적어도 두가지, 즉 나의 신체와 또 다른 신체)이든 간에 신체들에 공통된 어떤 것을 표상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통 통념들은 전혀 추상적인 관념들이 아니고 일반적인 관념들이다. (<신학-정치론 논고>, 7장).
각 존재하는 신체는 운동과 정지의 어떤 관계에 의해서 특징 지워진다. 두 가지 신체들에 상응하는 관계들이 스스로 또 다른 것들에 적응할 때, 두가지 신체들은 더욱 커다란 역량을 가진 구성적 신체를 형성하며, 그 부분들에 현존해 있는 전체를 형성한다(예를 들어, 피의 부분들로서의 유미(chyle)와 수액(lymph), 올덴버그에게 보낸 편지 32). 간단히 말해서 하나의 공통 통념은 두가지 혹은 그 이상의 신체들 사이의 구성의 표상이며, 이러한 구성의 통일성의 표상이다. 그 의미는 수학적이라기보다는 생물학적이다 ; 그것은 존재하는 신체들 사이의 일치 혹은 구성의 관계들을 표현한다. 공통 통념들이 정신들에 공통된다는 것은 단지 부차적이다 ― 그것들은 단지 구성과 문제의 구성의 통일성에 의해 촉발된 신체들을 가진 정신들에 공통되기 때문에 다소간은 그렇다.
비록 서로에 대해서 일치하지 않을지라도 (예를 들어 독과 독에 감염된 신체) 모든 신체들은 어떤 공통된 것 -- 연장, 운동과 정지 -- 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것들이 모두 매개적인 무한양태의 관점에서 볼 때 서로 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신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통해서는 결코 불일치하지 않는다(Ⅳ, 30). 어쨌든 가장 일반적인 공통통념들을 고려함으로써 우리는 일치가 끝나가고 불일치가 시작하는 것으로부터 보며, '차이들과 적대들'(Ⅱ, 29, 주석)이 형성되는 수준에서 본다.
공통 통념들은 필연적으로 적절한 관념들이다. 실제로 이것은 구성의 통일성을 표상하면서 부분에서나 전체에서나 존재하며, 단지 이럴 때에만 적합하게 인식될 수 있을 뿐이다(Ⅱ, 38과 39). 그러나 전반적인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공통통념들을 형성할 수 있는가를 아는 데에 있다. 이런 관점에서 공통통념들의 더 큰 일반성 혹은 극히 작은 일반성이 중요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여러 곳에서 스피노자는 마치 우리가 더 큰 일반성에서 극히 작은 일반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듯이 쓰고 있다(<신학정치론>, 7장, <에티카>, Ⅱ, 38과 39). 그러나 우리는 응용의 질서에 대해서 다루고 있으며, 우리는 극히 작은 일반적 수준에서 불일치의 외양내에서부터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일반적인 통념들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그러므로 공통통념들은 이미 주어진 것으로 상정된다. 공통통념의 형성 질서는 이미 상이한 문제(matter)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신체와 일치하는 하나의 신체와 조우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 공통되어 있다는 것을 아직 적절히 알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즐거움-정념이라는 정서나 감정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체와 일치하지 않는 하나의 신체를 조우하는 것에서 생겨나는 슬픔은 결코 공통통념을 형성하게 할 수 없다. 그러나 작용역량과 파악역량의 증대로서의 즐거움-정념은 이것을 산출할 수 있다. 그것은 공통통념의 간헐적인(occasional) 원인이다. 이런 이유로 이성(Reason)은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되며, 이것은 인간이 합리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합리적으로 되어가는가를 보여준다. 이성은 1. 선한 조우, 즉 우리의 양태들과 구성관계에 들어서며 우리에게 즐거운 정념을 고무시키는 양태들의 조우(감정은 이성과 일치한다)를 선택하고 조직하기 위한 노력(effort)이다. [이성은] 2. 공통통념들의 지각과 파악, 즉 이러한 구성관계로 들어서는 관계의 파악인데, 이로부터 우리는 다른 관계들을 연역하며, 또한 이것에 기초하여 우리는 새로운 느낌들을 경험하며, 이번에는 적극적인 느낌들을 경험한다(감정들은 이성으로부터 태어난 것이다).
스피노자는 5부의 머리말에서부터 공통통념의 형성 혹은 발생의 질서를 설명하는데, 이것은 이것의 논리적 응용의 질서에 한정되어 있는 2부와는 대조된다. 1) '우리가 우리의 본성과는 반대되는 정서들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한', 슬픔의 정서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한, 우리는 공통통념들을 형성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Ⅴ, 10을 참조하라. 여기에서는 분명히 선행한 정리들과 마찬가지로 공통통념들을 요청한다). 최초의 공통통념들을 그러므로 가장 나중의 공통통념들이며, 이것들은 나의 신체와 나에게 기쁨-정념을 야기하는 또 다른 것간의 공통된 어떤 것을 표상한다. 2) 이러한 최초의 공통통념들로부터 기쁨의 정서들이 차례로 뒤따라 나온다. 즉 이것들은 정념이 아니라 오히려 최초의 정념과 결합하여 그 자리를 차지하는 적극적 기쁨이다. 3) 이 최초의 공통통념들과 이것에 의존하는 적극적 정서들은 심지어 우리의 신체와, 우리의 신체와 일치하지 않으며 우리의 신체와 반대되며 우리의 신체에 정념을 야기시키는 신체들 사이에 공통된 것을 표현하면서 우리에게 보다 일반적인 공통통념들을 형성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한다. 4)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공통통념들로부터 슬픔을 뒤집어 엎고 슬픔으로부터 태어난 정념들을 대체하면서 적극적 기쁨이라는 새로운 정서들이 뒤따라 나온다.
공통통념 이론의 중요성은 몇 가지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1) 이 이론은 <에티카>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 이것은 스피노자적 이성 개념 전체를 변화시키고 두 번째 종류의 지식의 지위를 정의한다. 2) 이것은 근본적 물음에 답한다. -- 우리 지각의 자연적 조건이 우리로 하여금 단지 부적절한 관념만을 가지도록 하게 만든다면, 우리는 어떻게 적합한 관념을 형성시키려 애쓰며 어떤 질서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가? 3) 이것은 스피노자주의의 재정위(recasting) 전체를 발생시킨다. 기하학적 질서에서 적합하게 출발하는 것에 이를 뿐인 <지성개선론>이 여전히 허구(fiction)의 침투를 받고 있는 반면, 공통통념은 허구의 작동을 제한하는 기하학적 방법에서 허구와 추상화를 제거한 실재적인 것의 수학 혹은 구체적인 것의 수학을 형성한다. -- 공통통념이 실존양태들의 특이한 본질의 어떤 부분도 구성하지 않으면서도 이 실존양태와 관련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공통통념은 일반성이다(Ⅲ, 37). 그러나 공통통념은 실존양태들 혹은 개별자들 간의 실재적 관계의 구성을 표상한다. 기하학은 관계들을 추상적으로(in abstracto)만 포획하는 반면, 공통통념은 우리로 하여금 관계들을 있는 그대로, 즉 살아있는 존재들 속에서 필연적으로 구현되어 있는 것 그대로 파악하게 하며, 가변적인 용어와 구체적인 용어들 사이에서 공통통념들이 정립된다. 이런 의미에서 공통통념은 수학적이라기 보다는 생물학적이다. 즉 이것은 자연의 모든 사물의 구성의 통일성과 그 통일성의 변이의 양태들을 파악하게 만드는 자연적 기하학을 형성한다.
공통통념의 중심적 지위는 첫 번째 종류의 지식과 세 번째 종류의 지식 사이에 있는 '두 번째 종류의 지식'이라는 표현에 의해 명확하게 지적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지식들은 두 개의 매우 상이한, 비대칭적인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다. 두 번째 종류의 지식과 세 번째 종류의 지식의 관계는 다음의 형태로 나타난다. : 적합한 관념, 즉 신 안에 있는 것으로서의 우리 안에 있는 관념(Ⅱ, 38과 39). 공통통념은 신의 관념을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부여한다(Ⅱ, 45, 46, 47). 신의 관념은 가장 일반적인 통념에도 타당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실존양태들에 공통되어 있는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즉 그것들은 신 안에 있으며 신에 의해 생산된다(Ⅱ, 45, 주석, 특히 Ⅴ, 14-20. 이것은 <에티카> 전체가 세 번째 종류의 지식과 관계하는 5부의 정리를 표현하는 공통통념의 관점에서 쓰여졌다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공통통념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신의 관념은 그에 특이한 감정(feeling)과 종교의 대상이다(Ⅴ, 14-20). 그러나 신의 관념은 '그 자체로' 공통통념이 아니며, 스피노자는 이것을 공통통념과 명확히 구별한다(Ⅱ, 47). 이것은 그것이 신의 본질을 파악하기 때문이며 실존양태들의 구성과의 관계에서만 공통통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통통념이 필연적으로 신의 관념으로 이끌어갈 때에 공통통념은 우리를 모든 것이 변화하는 지점으로까지 끌고 가며, 신의 관념의 새로운 의미와 세 번째 종류의 지식을 구성하는 새로운 감정과 더불어 세 번째 종류의 지식이 우리에게 신의 본질과 실재적 존재들의 특이한 본질들 간의 상관관계를 드러내 주는 지점으로까지 끌고 간다(Ⅴ, 21-37). 따라서 두 번째 종류의 지식과 세 번째 종류의 지식간에는 어떠한 단절도 없으며 신의 관념의 한 측면에서 다른 측면으로의 이행만이 존재한다(Ⅴ, 28). 우리는 공통통념의 능력 혹은 실존과 관계하는 영원한 진리의 체계로서의 이성을 넘어서 본질적인 진리의 체계로서의 '직관적 지성'으로 들어선다. (이것은 때로 '의식'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단지 여기에서만 관념들은 이것들이 신 안에서 그러하듯이, 우리에게 영원한 존재의 경험을 부여하면서 우리에게 복수화redoubling되고 반영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종류의 지식에 대한 두번째 종류의 지식에 관한 한, 이것은 이들 간의 단절에도 불구하고 다음의 방식으로 표현된다. : 이것들이 실존하는 신체들과만 관련되는 한에서 공통통념은 상상될 수 있는 어떤 것과 관련을 맺는다(이런 이유로 신의 관념은 그 자체로 공통통념이 아니다. Ⅱ, 47, 주석). 공통통념들은 관계들의 구성을 표상한다. 이제 이 관계들은 이것들이 서로서로 결합하고 서로서로 촉발하는 한에서 있어서, 각각의 것이 다른 것들에, 표상에 상응하는 관념에 '이마주들'을 남겨두는 한에 있어서 신체들을 성격규정한다. 물론 공통통념들은 그 자체로 이마주들이나 표상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일치를 위해서 이성의 내재적인 파악을 달성하기 때문이다(Ⅱ, 29, 주석). 그러나 공통통념들은 표상과 이중적인 관계를 맺는다. 첫째, 외재적 관계이다. 왜냐하면 신체의 변용의 표상이나 관념은 적합한 관념이 아니고, 표상이나 관념이 우리의 신체와 일치하는 하나의 신체의 효과를 우리에게 표현할 때 적합한 일치를 파악하는 공통통념의 형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내재적 관계이다. 왜냐하면 표상은 공통통념이 내재적인 구성적 관계를 통해 설명하는 것들에 대한 신체들에 대한 외재적 효과들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표상의 특성들과 공통통념의 특성들 사이에는 필연적인 조화가 존재하며 후자는 전자의 특성에 의존한다(Ⅴ, 5-9).
COMPREHEND(파악하다). 설명하다(explain), 정신(mind), Power을 참조.
CONATUS(코나투스). Power를 참조.
CONSCIOUSNESS(의식)
스스로를 이중화하며, 무한성으로 이중화하는 관념의 특성, 즉 관념의 관념. 모든 관념은 속성 안에 존재하는 어떤 것(관념의 객관적 실재성)을 표상한다 ; 그러나 관념은 사유의 속성 안에 존재하는 어떤 것 자체이다(관념의 형식 혹은 형식적 실재성). 그러므로 그것을 표상하는 것은 또 다른 관념의 대상이다 등등(<에티카>, Ⅱ, 21). 그러므로 의식의 세 가지 특성들 : 1) 반성(reflection). 의식은 주체의 도덕적 특성이 아니라 관념의 물리적 특성이다. 즉 의식은 관념에 대한 정신의 반성이 아니라 정신 속에서 관념의 반성이다(<지성개선론>). 2) 파생(derivation). 의식은 그것이 의식하는 것의 관념과 관련해서 이차적이며, 첫 번째 관념이 가치있는 것만 가치있다. 이 때문에 스피노자는 우리가 알기 위해서 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없으며(idem, 35)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는 알 수 없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에티카>, Ⅱ, 21과 43). 3) 상관관계(correlation). 의식이 의식하는 것의 관념과 맺는 의식과의 관계는 관념이 지식의 대상과 맺는 관계와 동일하다(Ⅱ, 21). 그러나 스피노자는 관념과 관념의 관념 사이에는 단지 이성의 구별만이 있다(Ⅳ, 8 ; Ⅴ, 3)고 말한다. 이것이 설명하는 바는 두 가지가 모두 사유의 동일한 속성에 포함되지만 그러나 여전히 두 개의 상이한 역량을, 즉 존재하는 것의 역량과 사유하는 것의 역량을, 관념 및 관념의 대상과 똑같은 방식으로 언급한다는 것이다.
의식은 완전히 무의식에 빠지게 된다. 의식은 1) 우리가 관념들을 갖고 있는 조건 하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관념들에 대해서만 의식적이다. 신이 갖는 모든 관념은 그가 단지 우리의 정신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관념들의 무한성을 지니는 한, 본질적으로 우리들을 곤란하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구성하는 관념들에 대해 의식적이지 못하며, 심지어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지속에 대해서도 의식적이지 못하다. 우리는 단지 우리 고유의 외적 신체의 결과, 즉 변용의 관념을 표현하는 관념들에 대해서만 의식적이다(Ⅱ, 19와 이후). 2) 관념들은 사유의 양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코나투스와 그것의 다양한 결정들 또는 정서들 또한 사유의 양태처럼 정신에 속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변용의 관념이 코나투스를 분명하게 결정하는 한에서만 그것들에 대해 의식적이다. 그리고 결과적인 정서는 이제 그것을 결정하는 관념과 같은 방식으로, 그 자체에로 돌아가 반성의 특성을 즐기게 된다(Ⅳ, 8). 이것이 스피노자가 욕망을 의식적으로 된 코나투스, 즉 변용으로 된 이러한 의식의 원인으로 정의한 이유이다(Ⅲ, 욕망의 정의).
그러므로 자연적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부적합한 관념들, 즉 불완전하고 절단된 관념들의 의식이 되는 의식은 두 가지 기본적인 환상의 장이 된다. 1) 자유라는 심리학적인 환상. 원인을 본질적으로 무시하고 결과만을 고찰한다면, 의식은 그 자체로 자유롭다고 믿을 수 있을 것이며, 정신은 현동적으로 신체를 작동하게 하는 원인이라는 말을 통해 신체가 할 수 있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정신에게 신체에 대한 표상역량을 속성화할 것이다(Ⅲ, 2 주석; Ⅴ, 머리말). 2) 종말목적(finality)이라는 신학적 환상. 코나투스나 욕동을 변용의 관념에 의해 결정된 정서의 형식 속에서만 파악한다면, 의식은 이러한 변용의 관념들이, 그것들이 우리 고유의 외적 신체의 결과를 표현하는 한에서, 진정으로 최초의, 그리고 진정으로 최후의 원인임을 믿을 수 있으며, 우리가 자유롭지 못한 영역에서 선지자인 신이 수단-목적의 관계에 따라 모든 것을 정돈하였다고 믿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욕망은 선하다고 판단되는 것의 관념에 대한 관계에서 이차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분명 의식은 관념의 반성이며 최초의 관념이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만을 가치있다고 보기 때문에 의식적 현실화는 그 자체로 힘을 갖지 않는다. 그리고 오류성(falisity)은 그 자체로 어떤 형식도 갖지 않기 때문에 아직, 부적합한 관념은 그것 안에서 긍정적인 것을 선언하지 않고서는 그 자체로 돌아가서 반성하지 않게 된다. 즉 태양이 200피트 거리에 있다는 것은 틀린 것이지만, 내가 태양이 200피트 거리에 있는 것처럼 본다는 것은 옳다(Ⅱ, 주석). 무의식의 지식 즉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관련된 연구, 원인의 결정, 그리고 공통통념의 구축을 위한 조절적(regulative) 원리로서 작동할 수 있는 것은 의식 내의 부적합한 관념들의 이러한 긍정적인 핵심(kernel)이다. 그리하여 일단 우리가 적합한 관념을 확보하게 된다면, 우리는 결과를 그것들의 진정한 원인과 연결시키며 적합한 관념의 반성이 되는 의식은 그것의 환상을 극복하고 그것이 경험하는 변용과 정서의 명석판명한 관념을 구축할 수 있게 된다(Ⅴ, 4). 또는 오히려, 그것은 그것들의 원인에 의해, 따라서 이성의 구분에 의해 공통통념들로부터 나오며 수동적 정서와 구분되는 능동적 정서를 수동적 정서 위에 겹쳐 놓는다(Ⅴ, 3과 이후). 이것이 지식의 두번째 종류의 목적이다. 그리고 세번째 대상은 신의 관념, 자기 자신의 관념, 타자의 관념에 대해 의식적으로 되는 것이다. 즉 이러한 관념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신 안에서 그러한 것처럼 우리 안에서 반성한다(sui et Dei et rerum conscius, Ⅴ, 42, 주석).
DEATH(죽음). 지속(duration), 실존(existence), 좋음-나쁨, 부정, Power
DEFINITION(정의), DEMONSTRATION(증명)
정의는 그 자체로 고려되는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서 고려되지 않는) 사물의 판명한 표식에 관한 진술이다. 나아가 진술된 구별은 본질의 구별이어야 하며, 정의된 사물에 내재적이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는 명목적 정의/실재적 정의의 이분법을 재구성한다: <지성개선론> 95-97. 명목적 정의는 추상적인 것 (종적 차이와 유적 차이: 인간은 합리적 동물이다) 혹은 propria(신, 무한하게 완전한 존재) 또는 특질(원, 하나의 동일한 점에서 동일한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여전히 외적인 결정을 추상화한다. 이와 반대로 실재적 정의는 발생적이다. 이것은 사물의 원인이나 그 발생적 요소들에 관해 진술한다. 스피노자에 의해 개진된 특히 놀라운 예(E., Ⅲ) : 욕망(욕망을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서의 '욕동')의 명목상의 정의는 우리가 이것이 '이 의식의 원인'(즉 변용)을 덧붙인다면 이것은 실재적인 것이 된다. 실재적 정의의 이러한 인과적 혹은 발생적 성격들은 생산된 사물(원처럼, 즉 한 끝점이 고정되어 있는 선의 운동)에만이 아니라 신 자체(신, 속성들의 무한성에 의해 구성된 존재)에도 적용된다. 실제로 신은 그가 그 자체의 원인이라는 점에서, 즉 원인이라는 단어의 완전한 의미에서, 그의 속성이 참된 형상적 원인들이라는 점에서 발생적 정의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실재적 정의는 아프리오리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실재적 정의는 또한 아포스테리오리할 수도 있다. 이 정의는 실존하는 사물, 동물, 예를 들어 인간은 그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의해서 정의하는 것이다. (그 역량, 변용될 수 있는 그 능력). 비록 문제의 역량이 본질 그 자체이고 역량이 변용들을 경험하는 한에서만이라고 할지라도 이것은 경험으로부터만 알려질 수 있다. 게다가 실재적 정의는 어떤 이성의 존재들에게도 인식될 수 있다. 예로 기하학적 모습(figure)은 추상적이며, 또 단순한 명목적 정의에 따르는 것이지만 그러나 또한 그 원인을 통해서 그리고 실재적 정의에 따라서 파악될 수 있는 '공통통념'이라는 추상적 관념이기도 하다(그러므로 원에 대한 앞의 두 정의들은 명목적인 동시에 실재적이다).
증명은 정의의 필연적 결과이다. 증명은 적어도 정의된 사물의 특성을 연역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정의들이 명목적인 한 단지 하나의 특성만이 각 정의로부터 연역될 수 있다. 다른 것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대상들, 다른 관점들을 필연적으로 산출해야 하며, 정의된 사물을 외적인 사물들과의 관계속에 집어넣어야 한다(편지 82와 83). 이런 의미에서 증명은 사물에 외재적인 운동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정의가 실재적인 것일 때, 증명은 사물의 모든 특성들을 연연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것은 지각이 된다. 즉 증명은 사물에 내재적인 운동을 포획한다. 이런 방식으로 증명은 외재적 관점과 무관하게 정의와 연결된다. 사물이 지성 속에서 '스스로를 설명하는' 것이지 지성이 사물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DESIRE(욕망). 의식, Power를 참조.
DETERMINATION(결정). 부정을 참조
DURATION(지속)
시작부터 존재의 연속. 지속은 존재하는 양태라고 말해진다. 그것은 처음을 포함하는 것이지 끝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양태가 작용인의 작용(action)을 통해서 존재하게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단순히 속성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존재하는 것이며(E., Ⅱ, 8) 혹은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경향이 있다 ; 즉 그것은 존재하려고 힘쓰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것의 바로 그 본질은 따라서 힘쓰려는 경향으로서 규정된다(Ⅲ, 5). 이제, 사물의 본질도 그 존재를 설정하는 유효적 원인도 그 지속에 할당하며 끝난다(Ⅱ, 정의 5의 설명). 바로 이 때문에 지속은 저절로 '존재하는 것의 무한정한(indefinite) 연속'이다. 지속의 끝은, 다시 말해서 죽음은 존재하는 양태가 그 관계를 분해하는 또 다른 양태와 만난 것에서부터 유래한다(Ⅲ, 8 ; Ⅳ, 39). 그러므로 죽음과 탄생은 어떤 방식으로든 결코 대칭적이지 않다. 양태가 존재하는 한, 지속은 그 정서들, 더 나은 혹은 덜한 완전화로의 끊임없는 이행, 존재하는 양태의 작용 역량의 연속적 변이(variation)를 규정하는 살아있는 이행(transition)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속은 영원성과 대조되는데, 왜냐하면 영원성은 어떤 시초도 가지지 않으며, 완전하고 불변하는 작용 역량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영원성은 불확정한 지속도 지속 이후에 시작하는 어떤 것도 아니며, 그것은 지속과 공존한다. 마치 본성상 차이나는 우리들 자신의 두 부분들, 즉 신체의 실존을 포함하는 부분과 그 본질을 표현하는 부분들이 공존하듯이(Ⅴ, 20, 주석과 이후).
EMINENCE(탁월, 우월)
삼각형이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신이야말로 탁월하게 삼각형이라고 말할 것이다(복셀Boxel에게 보내는 편지 56). 스피노자가 탁월의 통념에서 발견하는 잘못된 점은 신을 인간학적이거나 신인동형동설적 용어로 정의하면서도 신의 특성성을 구출할 것을 이 통념이 주장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인간 의식으로부터 빌려온 특징들을 신의 것으로 귀속시킨다(이러한 특징들은 심지어 있는 바로서의 인간에게 적합한 것도 아니다) ; 그리고 신의 본질을 공급하기 위하여, 그들은 단지 이러한 특징들을 무한성으로까지 고양시키거나, 신은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무한하게 완전한 형태에서 그것들을 소유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에게 무한한 정의와 무한한 정숙을, 무한한 입법자적 지성(understanding)과 무한한 창조적인 의지를, 혹은 심지어 무한한 목소리와 무한한 손과 다리를 귀속시킨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는 다성성(equivocity)과 유비들이 동등한 힘을 가졌다고 비난하면서 이것들을 구별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신이 우리의 특질과는 상이하다는 혹은 우리의 것에 비례한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특질들을 소유하고 있는지를 결코 문제삼지 않는다. 왜냐하면 각각의 경우 속성들의 단성성은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단성성은 스피노자의 전체 철학의 시금석이다. 속성들이 신과 똑같은 형태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 실존이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양태에 있어서는 그들의 본질들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신의 본질과 양태의 본질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절대적으로 동일한 형태들이 존재하며 신과 양태들에 절대적으로 공통된 통념들도 존재한다. 속성들의 단성성은 실체의 본질과 실존을 양태들의 본질과 실존으로부터 근본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지만 또한 존재의 절대적인 통일성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다. 탁월, 그리고 이와 더불어 애매성과 유비는 이중적으로 잘못을 범하고 있는데, 우선은 공통된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신과 피조물 사이에 공통된 어떤 것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에 있어서 (본질들의 혼동) 그러하며, 이것들이 실존하는 곳에서 어떤 공통된 형태들을 부인한다는 점에서 (초월적 형태들의 착각) 그러하다. 즉 이것들은 존재를 파열나게 하며 동시에 본질들을 혼동시킨다. 탁월이라는 언어는 신인동형설적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양태적 본질을 실체의 본질과 혼동하기 때문이다. 탁월이라는 언어는 외재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식속에서 모델화되며, 본질들을 propria와 혼동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상상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성적인(equivocal) 기호들의 언어이지 단성적인(univocal) 표현의 언어는 아니기 때문이다.
ENCOUNTER (OCCURSUS). Affections, Good, Nature, Necessary, Power
ERROR(오류). 관념(Idea)을 참조
ESSENCE(본질)
"한 사물의 본질을 필연적으로 구성하는 것 ..., 그것이 없으면 사물이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업으며, 또 반대로 어떤 사물이 없으면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그러한 것"(E., Ⅱ, P 10, 주석). 그러므로 모든 본질은 상관성(reciprocity)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의 본질이다. 본질에 관한 전통적인 정의에 부가된 이러한 호혜성의 규칙은 세가지 결과를 낳는다.
1) 똑같은 속성의 여러 가지의 실체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실체들 중 하나로 동시에 인식된 속성은 다른 것들 없이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 ;
2) 실체와 양태들 간의 여러 가지의 실체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양태들은 실체 없이는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반면 역으로 실체는 양태들 없이도 매우 잘 존재할 수 있고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 따라서 동일한 형태로 실체를 긍정하고 양태들을 긍정하는 속성의 단성성은 본질에 대한 어떠한 혼동도 수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속성들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지만 단지 속성들만을 포함하고 있을 뿐인 양태들의 본질을 구성하진 않기 때문이다. : 실제로 스피노자에게 속성들의 단성성은 본질의 이러한 구분을 보증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3) 비실존하는 양태들은 신의 지성에서는 가능성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는 양태들의 관념은 신의 관념에서 파악되며 동일한 방식으로 이러한 양태들의 본질들은 신의 속성들에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Ⅱ, 8] : 이제 모든 본질은 어떤 것의 본질이며, 비실존하는 양태들은 그 자체로 실재적이고 현실적인 존재들이며, 이 존재들의 관념은 그러므로 무한한 지성에 필연적으로 주어진다).
만일 실체의 본질이 실존을 포함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존재의 그 특성을 그 자체의 원인에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처음에는 각각의 속성이 속성에 의해 성질이 부여되었기(qualified) 때문에 증명되며(Ⅰ, 7), 그리고 나서는 실체가 속성들의 무한성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Ⅰ, 11) 때문에 증명된다. 이때 속성의 무한성은 본질이 본질을 표현하는 속성과 관계되느냐 아니면 모든 속성들 속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실체와 관계되느냐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속성들은 본질이 필연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실존을 표현하지 않고서는 본질을 표현할 수 없다(Ⅰ, 20). 속성들은 실존하고 작용하는 많은 힘들인 반면 본질은 실존하고 작용하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량이다.
그러나 실존을 포함하지 않으며 속성들에 포함되어있는 양태적 본질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양태적 본질들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각각의 본질은 신의 역량의 일부이다. 신의 역량이 양태적 본질에 의해 설명되는 한(Ⅳ, 4, 증명), 스피노자는 <소론>에서부터 양태적 본질을 항상 특이한 것(singular)으로 인식해 왔다. 그러므로 본질들의 구별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는 <소론>의 텍스트(Ⅱ, 20장, n. 3; app, Ⅱ, 1)는 현실적으로는 지속에서의 실존과 연장적 부분들의 소유를 내포하는 본질들의 외재적 구별만을 부정했을 뿐이다. 양태적 본질들은 단순하고(simple) 영원하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럼에도 여전히 속성과 관련해 보았을 때, 그리고 서로서로 관련지어 보았을 때, 순전히 내재적인 또 다른 구별 유형을 가지고 있다. 본질들은 논리적 가능성들도 기하학적 구조들도 아니다. 본질들은 역량의 부분들, 죽 물리적 강렬도들의 수위들이다. 본질들은 어떤 부분들도 갖지 않으며, 마치 강렬한 양들이 더 작은 양들로 구성되어 있듯이 그 자체로 부분들, 역량의 부분들이다. 본질들은 어떤 한계도 없이 서로서로 양립가능하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각각의 생산에 포함되어 있되, 각각은 모든 다른 것들과는 상이한 역량의 특정한(specific) 수위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ETERNITY(영원성)
실존이 본질에 의해 포함되어있는 한에 있어서 실존의 성격(E., Ⅰ, D 8). 그러므로 본질 자체가 영원하고 단지 이성의 구별에 의해서만 본질과 구별되듯이, 실존은 "영원한 진리"이다. 그러므로 영원성은 양태의 실존에 성격을 부여하는(qualify) 지속과 -- 심지어 무한정한 지속 -- 과 대조된다. 이러한 지속이 본질에 의해 포함되어 있지 않는 한에서.
양태의 본질은 그럼에도 영원성의 특정한 형태, 즉 영원한 상(species aeternitatis)을 소유한다. 이것은 양태의 본질이 필연적 실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이때 필연적 실존은 양태의 본질에 특정(peculiar)하다. 비록 양태의 본질은 스스로를 통해서는 존재하지 않음에도 그 원인으로서의 신에 의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즉각적인 무한양태는 영원하며 마찬가지로 각각의 특이한 본질은 제한없이 모든 다른 것들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지속에서의 실존을 지배하는 매개적인 무한양태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구성과 분해의 규칙들이 영원한 진리들의 체계를 형성하는 한 그 자체로 영원하다. 그리고 이러한 규칙들에 상응하는 각각의 관계들은 영원한 진리이다. 이런 이유로 스피노자는 정신이 영원성의 상 아래에서 신체의 특이한 본질을 인식하는 한에서, 또한 정신이 공통통념들을 통해서 실존하는 사물들을 -- 즉 실존에서 사물들의 구성과 분해를 결정하는 영원한 관계들에 따라서 -- 인식하는 한에서 정신은 영원하다(Ⅴ, 29, 증명 : et praeter haec duo nihil aliud ad mentis essentiam pentinent).
영원한 실존과 실존간의 본성상의 차이는 (심지어 무한정하게) 계속적으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지속은 실존하는 양태들이 관계들 -- 이것에 따라서 양태들은 존재하게 되고 존재하길 멈추게 되고, 서로서로 구성 관계에 들어서고 분해 관계에 들어선다 -- 을 실현하는 한에서만 단지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관계들, 그리고 더더군다나(a fortiori) 양태적 본질들은 영원한 것이지 지속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특이한 본질의 영원성은 기억, 육감(presentiment), 혹은 계시의 대상이다. 그것은 엄격하게 말해서 현실적 경험의 대상이다(Ⅴ, 23, 주석). 그것은 정신의 일부분의 현실적 실존에 상응하며 특이한 본질을 구성하며 그 특징적인 관계를 구성하는 그 강렬한 부분에 상응한다. 반면 지속은 이러한 관계의 똑같은 성격 하에서 정신에 일시적으로 속해있는 강렬한 부분들에 있어서 정신을 촉발한다(부분들의 두 종류의 차별화, Ⅴ, 38, 39, 40을 참조).
영원한 상(species aeternitatis)이라는 표현에서 species는 항상 개념 혹은 지식을 지시한다. 그것은 항상 특수한 신체의 본질을 표현하는 관념이거나 혹은 영원한 상 아래에서(sub species aeternitatis) 사물들의 진리를 표현하는 관념이다. 그것은 본질들이나 진리들이 그 자체로 영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자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 원인을 통해서 영원한 존재이다. 그리고 본질들 혹은 진리들은 이것들이 필연적으로 인식해야만 하는 원인으로부터 파생되는 영원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species는 형태와 관념을, 형태와 개념화를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으로 기호화한다.
EXISTENCE(실존)
자기 자신의 원인에 의하여, 실체의 실존은 본질에 포함되기에 따라서 본질은 절대적으로 실존하는 것의 무한한 역량이다. 따라서 우리가 긍정된 사물과 그 긍정을 구별하는 한에서 있어서는 본질과 실존 사이에는 이성의 구별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양태적 본질은 본질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유한하게 실존하는 양태는 이것을 결정하는 또 다른 유한하게 실존하는 양태를 지시한다(E, Ⅰ, 24와 28). 이것은 본질이 실제로 실존과 구별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본질은 단지 양태적으로만 구별될 수 있다. 유한한 양태에 관한 한, 실존하는 것은 ① 그 자체로 실존하는 외적인 원인들을 갖는 것이며, ② 그러한 양태를 특징짓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하에 들어서기로 외적 원인들에 의해 결정되는 연장적 부분들(extensive parts)의 무한성을 현실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며, ③ 다른 외재적 원인들이 그것들을 다른 관계들에 의해 포함되기로 결정하지 않는 한 특징적 관계 하에 이러한 부분들을 견디어 내는 것, 보존하려고 하는 것, 다시 말해서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다(죽음, Ⅳ, 39). 그러므로 양태의 실존은 그것이 속성에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연장적 부분들의 무한성을 견디어 내고 점유한다는 의미에서 바로 그러한 본질이다. 양태의 실존은 외재적인 양태적 실재(extrinsic modal reality)이다(Ⅱ, 8, 보충과 주석). 신체만이 관념들로 구성되어 있는 그러한 강렬한 부분들(intensive parts)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정신 또한 그것을 갖고 있다(Ⅱ, 15).
그러나 양태적 본질은 또한 그것에 특이한(peculiar) 실존을 가지는데, 이것은 그 자체로 상응하는 양태의 실존에 독립적이다. 게다가, 비실존하는 양태는 단지 논리적 가능성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것은 물리적 실재에 부여된 강렬한 부분 혹은 수위를 가진다. 게다가 본질과 그 자신의 실존 간의 이러한 구별은 실재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양태적인 것이다. 이 구별은 본질이 필연적으로 실존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 원인(신)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실존하며 속성에 포함된 것으로서 실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내재적인 양태적 실재이다(Ⅰ, 24, 보충과 25, 증명; Ⅴ, 22, 증명).
EXPLAIN(설명하다)-IMPLY(포함하다) (EXPLICARE, IMPLICARE)
설명하다는 스피노자에게서 '강력한' 용어이다. 그것은 사물에 외재하는 지성의 작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에 외재하는 사물의 작동을 의미한다. 심지어 증명들은 사물속에 존재하는 운동을 지각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정신의 '눈'이라고 말해진다. 펼침(explication)은 항상 스스로 펼침이며, 발전이자 풀림(ubfolding)이며, 역동주의이다. 즉 사물은 스스로를 설명한다. 실체는 속성들 속에서 설명되며 속성들은 실체를 설명한다. 그리고 다시 속성들은 양태들 속에서 설명되며 양태들은 속성들을 설명한다. 그리고 접힘은 전혀 펼침의 대립점이 아니다. 그러므로 설명하는 것은 포함하는 것이며, 전개하는 것은 담는 것이다. 자연(Nature) 속의 모든 것은 이러한 두 가지 운동들의 공동실존의 산물이다. 즉 자연은 펼침과 접힘의 공통적 질서이다.
설명하다와 포함하다가 분리되는 것에는 단 한가지의 예만 있다. 그것은 부적절한 관념의 경우이다. 부적절한 관념은 우리의 파악 역량을 포함하지만, 그러나 이것에 의해서 설명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외재적 사물의 본성을 담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설명하지는 않는다(E, Ⅱ, 18 주석). 이것은 부적절한 관념이 항상 사물들의 혼합과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이며, 다른 신체에 대한 하나의 신체의 효과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적절한 관념은 원인들과 관련되어 있는 '파악'을 결여하고 있다.
사실상 파악함은 설명함과 포함함이라는 두 가지 운동들을 설명하는 내재적 이성이다. 실체는 모든 속성들로 이루어지며 속성들은 모든 양태들을 담고 있다. 파악은 펼침과 접힘의 동일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그러므로 '접힘complicatio'을 통해 신을 정의했던 중세 시대와 르네상스의 전체 전통을 재발견한다. 신은 모든 사물들을 complicate하는 반면에, 각각의 사물은 신을 설명하고 포함한다.
파악, 펼침, 접힘이 또한 지성의 작동을 지시한다고 말해지고 있다. 이것은 그것들의 객관적인 의미이다. 지성은 속성들과 양태들을 '파악한다'(Ⅰ, 30 ; Ⅱ, 4). 적절한 관념은 사물의 본성을 파악한다. 그러나 사실 객관적인 의미는 형식적인 의미로부터 따라나온다. "지성에 객관적으로 포함된 것은 필연적으로 본성 안에 있다."(Ⅰ, 30 ; Ⅱ, 7, C). 파악하기 위해서는 항상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무언가를 붙잡아야 한다. 파악함은 스피노자에 따르면, 어떤 것을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과 대립된다. 신은 가능성들을 인식하지 않는다. 신은 그가 존재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파악한다. 신은 그가 스스로를 파악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사물들을 생산한다. 그리고 신은 그가 스스로와 모든 사물들 (관념들)을 파악하는 형식 속에서 그 형식을 생산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사물들은 형식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신의 펼침과 접힘이다.
FALSE(허위). 관념(idea)을 참조.
FEELING. Affections, Affects를 참조.
FINALITY(궁극성). 의식을 참조
FREEDOM(자유)
<에티카>의 전반적인 노력은 자유와 의지 간의 전통적인 연결과 단절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 자유가 선택할 수 있고 심지어 창조할 수 있는 의지의 능력으로서 간주되든 (무관심의 자유), 아니면 우리 자신을 하나의 모델에 맞게 조정하고 그 모델에 효과를 실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간주되든 (계몽된 자유) 간에. 우리가 신의 자유를 이러한 방식으로 인식할 때, 즉 전제자나 입법자의 자유로서 인식할 때, 우리는 그것을 물리적인 우발성 혹은 논리적인 가능성에 결속시키고 있다. 우리는 따라서 비일관성을 신의 역량의 탓으로 돌린다. 왜냐하면 신은 대신에 어떤 것을 창조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 혹은 최악의 무역량(pwoerlessness)을 창조할 수도 있었는데, 왜냐하면 신의 역량은 가능성의 모델들에 의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는 외부로부터의(ex nihilo) 창조의 경우에는 무성(nothingness)처럼, 혹은 계몽된 자유의 경우에는 선함과 좋음(Better)처럼 실존에 추상화를 부여할 수도 있다(E., Ⅰ, 17, 주석; 33, 주석 2). 스피노자는 자유는 의지의 특성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의지는 자유로운 원인으로 불리울 수 없다." 의지는 유한한 것이든 무한한 것이든 간에, 항상 차이적 원인에 의해 결정되는 양태이다. 심지어 이러한 원인이 사유의 속성하에서 신의 본성일지라도(Ⅰ, 32). 한편으로 관념들은 양태들 자체이며, 신의 관념은 단지 가능성들을 인식할 수 없는 신이 그 자신의 본성과 이로부터 따라 나오는 모든 것에 일치하는 유한한 양태일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의지(volitions)는 관념 속에 포함된 양태들이며, 이것은 그 작용에 있어서 어떤 우발적인 것도 존재하지 않는 관념 그 자체로부터 따라나오는 긍정이나 부정과 동일한 것이다(Ⅱ, 49). 그러므로 지성도 의지도 본성이나 신의 본질도 포함하지 않으며 자유로운 원인들도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유일한 양태성이자 자유롭다고 불리울 수 있는 것의 유일한 원인인 필연성은 '그 본성만의 필연성을 통해서 존재할 수 있으며, 그 자체만에 의해서 작용하도록 결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속성들의 무한성에 의해 구성된 신은 그가 자기 원인이라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로 모든 사물의 원인이다. 신은 자유롭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가능성들이나 우발성들을 인식하지 않고서도 그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뒤따라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라고 정의된 것은 필연성에 의해 결정된 '내부'이며 '자체(self)'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통해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며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패턴을 통해서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을 통해서 자유로우며 우리의 본질로부터 뒤따라 나오는 것을 통해서 자유롭다.
이러한 의미에서 양태는 항상 여타의 것들을 지시하기 때문에 자유롭다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일까? 자유는 의식이 원인들에 대해 무지하고 가능성들과 우발성들을 상상하고 신체에 대한 정신의 의지적 작용을 믿는 한에 있어서 의식의 근본적인 착각이다(Ⅰ, 부록; Ⅱ, 35, 주속; Ⅴ, 머리말). 양태들의 경우에 실체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유를 의지에 연결시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결국 양태들을 하나의 본질, 즉 역량의 수위를 가진다. 양태가 적합한 관념들을 형성하려고 할 때, 이 관념들을 다른 실존하는 양태들과의 그것의 내재적인 일치를 표현하는 공통통념들(지식의 두 번째 종류)이거나 신의 본질과 모든 다른 본질들과 내재적으로 필연적으로 일치하는 그 자신의 본질의 관념(세 번째 종류의 지식)이다. 적극적 정서들 혹은 감정들은 이러한 적합한 관념들로부터 필연적으로 뒤따라 나온다.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이것들은 양태 자체의 역량에 의해 설명된다(Ⅲ, 정의 1과 2). 실존양태는 따라서 자유롭다고 말해진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지 않았으되 자유롭게 되거나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에티카>의 4부는 이러한 자유로운 인간 혹은 강한 인간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Ⅳ, 54, 등등). 인간, 즉 유한 양태들의 가장 강력한 것은 그가 자기의 작용역량을 소유하게 될 때, 즉 그의 코나투스가 그 자신의 본질에 의해 설명되는 적극적 정서들이 뒤따라 나오는 적합한 관념들에 의해 결정될 때, 자유롭다. 자유는 항상 본질과 연결되어 있으며 본질로부터 뒤따라 나오는 것과 연결되어 있지 의지와 의지를 지배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
GEOMETRIC BEINGS(기하학적 존재자들). 추상화, 공통통념들, 방법을 참조.
GOOD-BAD(좋음-나쁨)
좋음과 나쁨은 이중적으로 관련되어 있으며 서로에 관련해서 말해지며, 두 가지 모두는 존재하는 양태와 관련한다. 이것들은 작용(acting)의 역량의 변이(variation)의 두 가지 의미이다 : 이러한 역량의 감소(슬픔)는 나쁜 것이다 ; 그것의 증대(즐거움)는 좋은 것이다(<에티카>, Ⅵ, 41). 그러므로 객관적으로, 우리의 작용역량을 증대시키거나 고양시키는 모든 것은 좋은 것이고, 감소시키거나 제한하는 것은 나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의식하는 즐거움이나 슬픔의 감정을 통해서만 좋음과 나쁨을 안다(Ⅵ, 8). 작용의 역량은 사물들의 가장 커다란 수에 the capacity for being affected를 열어두는 것이기 때문에 '신체를 여러가지 방식으로 자극받을 수 있는(정서) 상태로 만드는' 한 사물은 좋다(good)(Ⅳ, 38). 혹은 신체를 성격짓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보존하는 것은 좋음이다(Ⅳ, 39). 이런 모든 의미에서 좋다는 것은 유용하다는 것이며 나쁘다는 것은 해롭다는 것이다(Ⅳ, D 1과 2). 그러나 유용한 것과 해로운 것에 관한 이런 스피노자적 개념화의 독창성을 기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좋음과 나쁨은 따라서 실존하는 양태들 간의 조우를 표현한다("자연의 공통적 질서", 외재적 결정 혹은 오류투성이의 우연한(fortuitous) 조우(fortuito occurs; Ⅱ, 29 보충과 주석). 의심할 여지없이 운동과 정지의 모든 관계들은 매개적인 무한 양태에서 서로서로 일치한다. 그러나 신체는 나의 신체의 부분들로 하여금 나의 성격상의(charateristic) 관계와 직접적으로 혹은 즉각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새로운 관계에 들어설 수 있게 한다. 이것이 바로 죽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Ⅱ, 39). 불가피하고 필연적이라고 하더라도 죽음은 항상 외재적인 우연한 조우의 결과이며, 나의 관계를 분해하는 신체와의 조우의 결과이다. 나무의 과일을 먹는 것에 대한 신의 금기는 아담에게는 단지 과일이 '나쁘다'는 계시에 지나지 않는다. 즉 그것은 아담과의 관계를 분해할 것이라는 것. 그는 또한 "독은 우리를 죽게 만든다는 자연적인 지성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한다."(블리옌베르크에게 보내는 편지 19; <신학정치학 논고>, 4장). 모든 악은 나쁨으로 격하되며 나쁜 모든 것은 독(poison), 소화불량(indigestion), 중독(열광, 흥분, intoxication)을 포함하는 범주에 속한다. 심지어 내가 행하는 악(나쁜=사악한)은 그 구성적 관계를 상정하지 않고서는 이 작용을 낳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내가 작용의 이마주를 대상의 이마주와 결합시킨다는 사실에 있다(Ⅳ, 59, 주석). 그러므로 모든 나쁜 것은 작용 역량의 감소(슬픔-증오)에 의해 측정된다. 모든 좋은 것은 이 동일한 역량의 증대(즐거움-사랑)에 의해 측정된다. 스피노자의 철저한 투쟁, 슬픔에 기반한 모든 정념들에 대한 그의 급진적인 비판, 이것은 에피쿠로스에서 니체로 나아가는 가장 위대한 계보 속에 스피노자를 위치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인간의 나쁜 외재적 조우자들 속에서 인간의 내재적 본질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혐오이다. 슬픔을 포함하는 모든 것은 전제와 억압에 봉사한다. 슬픔을 포함하는 모든 것은 나쁜 것이라고 비난받아야 하며 우리를 우리의 작용역량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어떤 것이라고 비난받아야 한다. 그것은 양심의 가책(remorse)과 죄의식(guilt), 죽음에 관한 명상(Ⅳ, 67)만이 아니라 심지어 희망, 안위(security)도 무역량을 의미한다(Ⅳ, 47).
모든 조우자들에 있어서 구성하는 관계들이 존재하며 매개적인 무한양태에서는 제한 없이 구성하는 모든 관계들이 존재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모든 것은 무난하며(well), 좋다고 말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좋은 것이란 작용 역량의 증대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작용역량 및 앎의 역량의 형상적 소유는 최고로 좋은 것(summum bonum)으로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 이성은 우연한 조우자에 좌우된 채로 남아있는 대신 우리 자신과 직접적으로 구성하는 관계들을 가진 사물들과 존재들에 우리를 참여시키게 하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이성은 최고의 좋음 혹은 '우리 자신의 이점', proprium utile을 추구하는데,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어 있다(Ⅳ, 24-28). 그러나 일단 우리가 우리의 작용 역량을 형식적으로 소유하게 된다면 좋음(bonum), 최고의 좋음(summum bonum)이라는 표현은 종말목적론적(finalist) 착각에 너무 사로잡히게 되며, 세 번째 종류의 지식에 있어서 순수한 잠재력(potency) 혹은 ("제일 기반"이지만 궁극적 목적은 아닌) 덕의 언어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사라지게 된다. 이런 이유로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사람들이 자유롭게 태어났다면, 그들이 자유로운 동안에는 아무런 좋음과 나쁨의 개념도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다."(Ⅳ, 68). 좋음은 실존하는 양태와의 관계 속에서 말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또 가변적이지만 아직은 충분히 소유되지 않은 작용 역량과의 관계 속에서 말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좋음은 결코 총체화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좋음과 나쁨을 선과 악으로 실체화한다면 우리는 이 선은 존재와 작용을 위한 이성으로 만들어 버리게 된다. 우리는 종말목적론적 착각에 빠진다. 우리는 충만한 신적인 역량 속에 분유된 우리의 방식과 신적 생산의 필연성을 모두 그릇되게 표상한다. 이런 이유로 스피노자는 근본적으로 그 시대의 테제와는 떨어져 있었다. 이 테제들에 따르면 악은 무이며, 선은 우리로 하여금 존재하고 작용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악처럼 선은 무의미하다. 이것들은 사회적 기호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보상과 처벌이라는 억압적 체계에 의존하는 이성 혹은 표상의 존재들이다.
IDEA(관념)
일차적으로 다른 사고작용의 양태들과 관련해서, 비록 그것들과는 다르지만, 사고작용의 양태이다(<에티카>, 공리 3). 사랑은 아무리 혼동된 것이라도 사랑받는 것의 관념을 전제한다. 바로 이 때문에 관념은 한 사물을 혹은 사물들의 상태를 표상한다. 비록 감정(정서, affectus)은 상태들의 변이에 상응하는 더 큰 완전화나 더 적은 완전화로의 이행을 포함하기는 하지만. 그러므로 감정에 대한 관념의 일차성이 있으며 동시에 두 가지[감정과 관념] 사이의 본성상의 차이도 있다.
관념은 표상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과 우리가 존재한다는 관념(신체의 관념으로서의 정신)을 구별해야만 한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관념은 신 안에 있다. 신은 이것을 적절하게 소유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이 우리를 구성하는 한에서가 아니라 신이 상이한 관념들의 무한성으로 촉발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다른 본질들의 관념들은 모두 우리의 것과 일치하며, 다른 실존들의 관념들은 제한없이 우리의 실존의 원인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관념을 즉각적으로 가질 수 없다. 우리 지각의 자연적 조건하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유일한 관념은 우리의 신체에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우리의 신체에 대한 또 다른 신체의 효과를, 즉 두 신체들을 혼합을 표상하는 관념이다. 이것들은 필연적으로 부적합하다(Ⅱ, 11, 12, 19, 24, 25, 26, 27 ...).
이러한 관념들은 이마주들이다. 혹은 오히려 이마주들은 신체적 변용(affectio) 자체이며, 우리의 신체에 대한 외재적 신체의 흔적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념들은 사물의 상태를 표상하는 이마주들의 혹은 변용들의 관념이다. 즉 우리의 신체가 이런 방식으로 촉발된 채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이것에 의해서 외재적 신체의 현존을 긍정한다(Ⅱ, 7) : 1. 이러한 관념들은 기호들이다; 관념들은 우리의 본질이나 역량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으로부터 흔적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의 현실적 상태와 우리의 무능력을 '지시한다'. : 이것들은 외재적 신체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신체의 현존과 이것이 우리에게 끼치는 효과를 '지시한다'(Ⅱ, 16). 그것이 관념들을 가지고 있는 한 정신은 '상상한다'고 말해진다(Ⅱ, 17). 2. 이러한 관념들은 무엇보다 기억 또는 습관의 질서에 따라 서로 연결된다 ; 만일 신체가 두 개의 물체에 의해 동시에 촉발된다면, 하나의 흔적은 정신으로 하여금 다른 것도 상기하게 할 것이다(Ⅱ, 18). 이러한 기억의 질서는 또한 외적인 우연한 물체들간의 조우의 질서이다(Ⅱ, 29). 그리고 조우가 항구성(constancy)을 덜 가지면 덜 가질수록, 기호는 더욱 모호해질 것이다(Ⅱ, 44). 이것이 우리의 변용이 별개의 다양한 물체들을 함께 뒤섞는 한에서, 상상(imagination)이 날개 달린 말과 같은 순수 허구를 형성하는 이유이다 ; 그리고 그것이 외견상 유사한 물체들 간의 차이점을 과대평가하는 한, 유(類)와 종(種)의 그것과 같은 추상을 형성하는 이유이다(Ⅱ, 40과 49).
적합한 관념들은 모두 상이하다. 그것들은 진정한 관념인데, 신 안에 있는 것처럼 우리 안에 있다. 그것들은 사물의 상태에 대해, 또는 우리에게 일어난 것에 대해 표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자체(what we are)와 사물 자체(what things are)에 대해 표상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세 개의 요체를 지닌 체계적인 세트를 형성한다 : 우리 자신의 관념, 신의 관념, 그리고 다른 사물들의 관념(세 번째 종류의 지식). 1. 이러한 적합한 관념은 앎(knowing)의 역량과 파악역량으로서의 우리의 본질과 역량에 의해 설명된다(형상인). 그것들은 원인으로서의 다른 관념들과, 이러한 원인을 결정하는 신의 관념을 표현한다(질료인) ; 2. 그러므로, 그것들은 사유의 속성에서 관념들의 자율적 연결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형상과 질료를 통합하는 이러한 연결, 또는 concatenatio는 정신을 정신적인 자동인형(spiritual automaton)으로 구축하는 지성의 질서이다.
우리는 관념은 표상적이지만, 그것의 표상성(대상적 존재)은 그것의 본성에 관해 아무 것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고 쓸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후자는 관념의 내적 특성으로부터 나온다(Ⅱ, 정의 4). 스피노자가 "적합한"이라고 말할 때, 그가 명석 판명한이라는 말을 계속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적 "명석 판명한"이라는 말과는 매우 다른 어떤 것을 마음에 품고 있다. 관념의 형식은 심리학적 의식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능가하는 논리적 역량에서 찾아진다 ; 관념의 질료는 표상적 내용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표현적 내용, 즉 관념이 다른 관념을 언급하고 신의 관념을 언급하는 인식론적 질료에서 찾아진다. 논리적 역량과 인식론적 내용, 설명과 표현, 형상인과 질료인은 사유의 속성의 자율성 그리고 사유하는 정신의 자동운동(automatism)에서 합쳐진다. 적합한 관념은 어떤 것을 진정하게 표상하며, 단지 그것이 사유의 속성에서 그것의 형상의 질서와 그것의 질료간의 자동적 연결을 발달시키기 때문에 사물의 질서와 연결을 표상한다. 그렇다면, 부적합한 관념과 상상이 결핍하고 있는 것을 보자. 부적합한 관념은 전제 없는 결과와 같은 것이다(Ⅱ, 28의 증명). 그것은 우리의 앎의 역량에 의해 형상적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그것의 고유한 원인을 질료적으로 표현하지 않기 때문에 두 개 -- 형상적인 그리고 질료적인 -- 의 전제로부터 분리되어 그것들을 박탈당하고 있으며, 관념의 연결(concatenation)을 이루는 대신 우연적 조우의 질서에 속한 채 남아있다. 오류가 어떤 형식도 지니지 않으며 어떤 능동적인 것으로도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Ⅱ, 33). 그리고 아직 부적합한 관념 안에 능동적인 어떤 것이 있다 : 내가 태양을 200피트 거리에 있는 것으로 볼 때, 이러한 지각, 이러한 변용은 그 변용이 그것을 설명하는 원인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한 태양의 효과를 표상한다(Ⅱ, 35; Ⅳ, 1). 부적합한 관념 안의 능동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 그것은 그것에 의해 설명됨이 없이 우리의 이해역량(power of understanding)의 가장 낮은 수준을 포함하며, 그것을 표현함이 없이 고유의 원인을 지적한다(Ⅱ, 17, 주석). "정신의 표상은 그 자체로 보면 아무런 오류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 또는 정신이 사물을 표상한다고 해서 오류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자신에게 현존하는 것으로 표상하는 사물에 대하여 그 존재를 배제하는 관념이 없다고 고찰될 때만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정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현존하는 것으로 표상할 때 그것과 동시에 그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알았다면, 정신은 확실히 표상 능력을 자기 본성의 결점으로 돌리지 않고 오히려 장점으로 여겼을 것이기 때문이다"(Ⅱ, 17, 주석).
그러므로 총체적인 문제는 이러하다 : 우리의 자연적 조건이 우리로 하여금 부적합한 관념만을 지니도록 결정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적합한 관념을 지니고, 형성하게 될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최소 관념도 지님이 없이 적합한 관념을 정의했다. 답변은 공통 통념의 산출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 ; 그리고 여기에서도 스피노자는 우리가 어떻게 그것들을 산출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제Ⅴ부) 전에 공통 통념이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제Ⅱ부). 우리는 위에서 그 문제를 고찰했다(공통 통념 항목 참조). 그러나 관념과 감각-정서(affectus)가 다른 본성을 지님에도 불구하고, 적합하든 부적합하든, 관념은 감각-정서가 그것들의 원인으로부터 나오듯, 항상 그것의 결과인 감각-정서에 뒤따라 나온다. 그러므로 부적합하고 적합한 것은 무엇보다 관념을 기술하지만, 또한 원인도 기술한다(Ⅲ, 정의 1). 적합한 관념이 우리의 이해역량(power of comprehend- ing)에 의해 설명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결과하며, 연속적으로(consequently) 작용적인 감각의 적합한 원인이 됨이 없이 적합한 관념을 가지지 않는다(Ⅲ, 정의 2). 반대로, 우리가 부적합한 관념을 지니는 한, 우리는 우리의 감각의 부적합한 원인인 바, 그것은 정념이다(Ⅲ, 1과 2).
IMAGES, IMAGINATIONS(이마주, 상상력). Affections, 공통 통념들, 관념을 참조.
IMMENANCE내재성. 속성, 원인, 탁월, 자연을 참조.
INDIVIDUAL(개별)
이 용어는 때때로 사유의 속성에 있어서 관념의 통일성과 결정적 속성에 있어서 그 대상들을 가리킨다. (<에티카>, Ⅱ, 21, 주석). 그러나 보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어떤 속성에 있어서 실존양태의 복잡한 조직을 가리킨다.
1. 양태는 역량의 수위 혹은 강렬한 부분, pars aetena인 (Ⅴ, 40) 특이한 본질을 가지고 있으며 각각의 본질은 아주 명쾌한 것이며 다른 모든 것에 일치한다. 2. 이 본질은 실존과 관련을 맺고 있는 영원한 진리 자체인 특징적 관계 속에서 표현된다(예를 들어, 연장 속의 운동과 정지의 어떤 관계). 3. 양태는 그것의 관계가 현동적으로 연장적 부분들의 무한성을 포섭할 때 실존하게 된다. 이러한 부분들은 외재적 결정론의 작동을 통해 특징적 관계 속으로 들어가도록, 혹은 그것을 실현하도록 결정된다. 양태는 그 부분들이 자신과 양립할 수 없는 상이한 관계속으로 들어가도록 외부로부터 결정될 때 실존하기를 그만둔다. 그러므로 지속은 관계들 자체가 아니라 현동적 부분들이 이러저러한 관계 하에서 포섭되는 그러한 방식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역량의 수위들은 이것들이 양태들의 본질을 구성하는 한에 있어서 서로서로 일치하며, 어떤 특정 관계 하에서 하나의 수위에 속하는 연장적 부분들이 새로운 관계 하에서 다른 것에 의해 정복될 수 있는 한에 있어서 실존에 있어 필연적으로 갈등하게 된다(Ⅳ, 공리와 Ⅴ, 37, 주석).
그러므로 개별은 연장적 부분들이 특별한 관계 하에서 양태의 특이한 본질에 속하는 한에 있어서 이 연장적 부분들의 무한성으로 구성되어 있다(Ⅱ의 13부터). 이러한 부분들(corpora simplicissima)은 그 자체로 개별들이지 않다. 각각의 어떠한 본질도 존재하지 않으며, 이것들은 자신들의 외부적 결정론에 의해서만 규정되며, 항상 무한성들로서 실존한다; 하지만 이것들은 이것들의 무한성이 양태의 이러저러한 본질을 특징짓는 이러저러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한에 있어서 실존적 개별을 구성한다; 이것들은 실존의 무한히 변화하는 양태적 질료를 구성한다. 이러한 무한한 것들은 메이어에게 보낸 편지가 더 크거나 작은 것으로서 규정하고 있는 그러한 것이며, 어떤 제한된 것과 관련되어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두 가지 실존양태들을 고려해 볼 때, 만일 우리가 타자에 비해 두 배의 역량의 수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러한 관계 하에서 타자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두 배 더 큰 부분들의 무한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타자를 그 부분들 중의 하나로 다룰 수 있을 것이다. 확실하게 말해서 두 가지 양태들이 실존에 있어서 서로서로 조우할 때, 하나는 다른 하나를 파괴하거나 혹은 그와 반대로 그것이 그 자신을 보존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두가지 양태들의 특징적 관계가 서로를 분해하는가 혹은 서로 직접적으로 구성하는가에 따라서 말이다. 하지만 모든 조우자들에 있어서는 영원한 진리들로서 실존하는 어떤 관계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질서에 따라서 그 전체성에 있어서 자연은 모든 관계들을 구성하고 그것들의 상이한 수위를 가지고 있는 강렬한 부분들의 모든 집합을 소유하는 개별로 간주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양태적 과정으로서의 개별화는 항상 양적이다. 하지만 두가지 매우 상이한 개별화가 존재한다: 본질의 개별화, 이것은 분리불가능하고 영원한 명백히 강렬한 부분으로서의 역량의 각 수위의 특이성에 의해 정의된다; 그리고 실존의 개별화, 이것은 양태적 본질이 표현되는 운동과 정지의 영원한 관계를 일시적으로 현실화하는 연장적 부분들의 일련의 분리가능함에 의해 정의된다. (정신에 있는 이러한 두가지 종류의 '부분들'에 관해서는 Ⅴ를 참조).
제5장 : 스피노자의 진화 (<지성개선론>의 비완성에 관하여)
아베나리우스는 세가지 국면들을 구별하면서 스피노자의 진화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소론>의 자연주의, <형이상학적 사유들>의 데카르트적 이신론, 그리고 <에티카>의 기하학적 범신론. 데카르트적 시기와 이신론적 시기가 존재했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맨 처음의 자연주의와 최후의 범신론 사이에는 주목할만한 강조점의 차이가 있다. 이 문제로 돌아가면서 마르샬 게루(Martial Gueroult)는 <소론>이 신=자연이라는 등식에 기반하고 있는 반면에 <에티카>는 신=실체라는 등식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론>의 일차적 테마는 모든 실체들이 하나의 똑같은 자연에 속한다는 것인데 반해, <에티카>의 일차적 테마는 모든 자연들이 하나의 똑같은 실체에 속한다는 것이다. <소론>에서, 사실 신=자연이라는 등식은 신이 그 자체로 실체인 것이 아니라 모든 실체들을 표현하고 통일시키는 "존재"라는 것을 함축한다. 대조적으로, <에티카>에서 신과 실체의 동일성은 속성들이나 성질이 부여된 실체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것, 그리고 항상 자기-원인화의 특성(property)을 즐긴다는 것을 수반한다. 자연주의는 의심할 여지 없이 강력하긴 하지만, 그러나 <소론>에서 그것은 속성들에 기반한 자연과 신간의 '상응(coincidence)'인 반면, <에티카>는 실체들의 일자성(oneness) (범신론)에 기반하여 실체적 동일성을 증명한다. <에티카>에서는 자연의 대치가 있다. 즉 자연과 신의 동일성은 능산적인 것(the naturata)의 내재성과 소산적인 것(the maturans)의 내재성을 더욱 잘 표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정교화되어야만 한다.
이처럼 범신론의 절정 단계에서 우리는 철학이 스스로 신 안에 즉각적으로 거주하고 있으며 신과 더불어 시작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해서, 이것은 합당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소론>의 진실이다 : <소론>은 신과 더불어, 신의 존재와 더불어 시작한다 ― 단지 그 결과, 즉 첫째 장과 두번째 장 사이의 진보에 있는 단절을 겪기 위해서. 그러나 <에티카>에서, 혹은 이미 <지성개선론>에서, 즉 스피노자가 자신의 배열에 따라 연속적인 발전의 방법을 취했을 때, 그는 신과 더불어 시작하는 것을 사려 깊게 피하고 있다. <에티카>에서 그는 모든 속성들에 의해서 구성된 실체로서의 신에 도달하기 위해서 주어진 실체적 속성들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그는 여전히 아홉가지 정리들을 요구하는 이런 지름길을 스스로 발명하면서 가능한 한 빨리 신에 도달한다. 그리고 <지성개선론>에서 그는 "가능한 한 빨리" 신의 관념에 도달하기 위해서 주어진 참된 관념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스피노자가 신과 더불어 시작했어야 했다고 믿곤 하기 때문에 최고의 주석가들도 <지성개선론>이라는 텍스트의 차이들과 스피노자의 사유에 있어서의 비정구성들을 추측한다. 사실, 가능한 한 재빠르게 신에 도달하는 것, 그러나 즉각적으로 신에 도달하지는 않는 것은 <지성개선론>과 <에티카> 모두에 있어서 스피노자의 정의적 방법의 부분이다.
우리는 <에티카>의 발전에 있어서 빠름, 느림, 머뭇거림의 이러한 물음들의 일반적인 중요성을 기억하고 있다. 커다란 상대적 빠름은 처음에는 실체로서의 신의 관념에 도달하기 위해서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 모든 것은, 항상 필수적인 계기들에서 새로운 가속이 생산될 때까지 확장되고 느려진다. <에티카>는 때로는 빠르게 흐르고 때로는 느리게 흐르는 하나의 강이다.
스피노자의 방법이 종합적이고 구성적이며 진보적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원인들에서 효과들로 나아간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마치 마술에 의한 것처럼 스스로를 원인에 정립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유한 질서'는 원인에서 효과들로 나아가지만 그러나 우리는 고유한 질서를 즉각 따라갈 수는 없다. 종합적으로는 물론이고 분석적으로도, 우리는 명백하게 효과 혹은 적어도 '주어진' 효과의 지식과 더불어 출발한다. 그러나 분석적 방법이 단순히 사물의 조건으로서의 원인을 추구한다면, 종합적 방법은 조건화(conditioning)가 아니라 오히려 발생을, 즉 우리에게 다른 사물을 알게끔 해주는 충족이성을 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원인의 지식은 완전하다고 말해질 수 있으며, 그것은 가능한 한 빠르게 원인에서 효과들로 나아간다. 처음에는 종합은 가속화된 분석적 과정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 분석적 과정은 종합적 질서의 원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만 사용된다. 플라톤이 말했듯이, 우리는 '가설'로부터 출발해서 결과들이나 조건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이로부터 모든 결과들과 조건들이 뒤따라 나오는 '비가설적(anhypothetical)' 원리를 향해 나아간다.
그러므로 <지성개선론>에서 우리는 이로부터 모든 관념들이 뒤따라 나오는 신의 관념에 도달하기 위해서 '주어진' 참된 관념, 즉 모든 참된 관념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에티카>에서 우리는 실체에 도달하기 위해서 모든 속성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로부터 모든 사물들이 뒤따라 나오는 실체적 속성으로부터 출발한다. 문제는 이러한 두가지 출발점들을 면밀히 주시하고 <에티카>와 <지성개선론>의 차이의 정확한 본성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제 <지성개선론>는 이러한 관점에서 꽤 분명해진다. 우리가 가정을 경유해서 이로부터 출발하게 되는 주어진 참된 관념은 기하학적 존재자의 관념인데, 정확하게 말해서 그러한 존재자들은 단지 우리의 사유에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 거기로부터 출발하면서 우리는 발생적 요소에 도달하는데, 이 발생적 요소로부터 출발하는 특성만이 아니라 모든 다른 특성들도 뒤따라 나온다 : 즉, 우리는 원의 종합적 정의에 도달한다("한 점은 고정되어 있고 나머지 부분들은 움직일 수 있는 것의 선이라고 기술된 모습"; 선과 운동의 결합속에 존재하는 종합은 우리 자신의 사유역량보다 더 우월한 사고역량으로서의 신을 지시한다). <에티카>가 어떻게 나아가는지를 보도록 하자. 우리가 가정을 경유해서 이로부터 출발하는 속성, 혹은 성질이 부여된(qualified) 주어진 실체는 공통 통념에서 파악되며, 거기로부터 우리는 충분한 종합적 설명, 즉 하나의(single) 실체 혹은 신의 관념이 모든 속성들을 파악하며 이로부터 모든 사물들이 뒤따라 나온다는 설명에 도달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러한 두가지 출발점들, 즉 기하학적 존재의 관념과 속성의 공통 통념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사실 공통 통념은 <에티카>의 특별한 기여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들은 이전 저작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러한 새로움이 단지 말만의 새로움인지, 혹은 결과를 수반하는 개념의 새로움인지를 아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모든 존재하는 사물은 본질을 가지지만, 그러나 그것은 또한 특징적 관계들도 가지고 있는 바, 이러한 관계들을 통해서 그것은 존재에 있어서 다른 사물들과의 구성에 들어가거나 다른 사물들 속에서 분해된다. 공통 통념은 정확하게 여러가지 사물들 사이의 관계들의 구성의 관념이다. '연장'의 속성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그 자체의 본질을 가졌지만, 그러나 그것이 공통 통념의 대상이라는 의미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연장 속의 신체들은 또한 그 자신들이 본질들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공통 통념의 대상이라는 의미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연장의 속성은 또한 이것이 그 본질을 구성하는 실체에 공통된 형태이며, 또한 이것이 그 본질들을 포함하는 모든 가능한 신체들이다. 공통 통념으로서의 연장의 속성은 어떤 본질과도 혼동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신체들의 구성의 통일을 고안한다; 모든 신체들은 연장 속에 있다. ... 똑같은 추론이 보다 제한된 조건들을 유지한다: 어떤 주어진 신체는 어떤 다른 신체와의 구성으로 들어가며, 구성적 관계 혹은 두 신체들의 구성의 통일은 부분들의 본질로도 전체의 본질로도 환원될 수 없는 공통 통념을 정의한다 ; 예를 들어, 나의 신체와 특별한 음식 사이에는 무언가 공통이 있다. 그래서 공통 통념은 두가지 문턱들, 즉 모든 신체들에 공통되는 최대치의 문턱 그리고 적어도 두가지 신체들, 즉 나의 신체와 또 다른 신체에 공통된 최소치의 문턱 사이에서 진동한다. 바로 이 때문에 스피노자는 가장 보편적인 공통 통념과 가장 덜 보편적인 공통 통념을 구별한다. 그리고 <에티카>에서 자연이 획득하고 있는 특권적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 관계들의 이러한 구성 혹은 구성의 이러한 통일은 모든 신체들 사이에, 어떤 특정한 수의 혹은 어떤 특정한 유형의 신체들 사이에, 특별한 신체와 어떤 다른 신체 사이에 공통된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줄 것이다. ... 공통 통념은 항상 그것의 관념인데, 이 속에서 신체들은 다른 신체들에 동의한다; 신체들은 이런 혹은 저런 관계들 하에서 동의하는데, 이러 저러한 관계들은 신체들의 변양하는 수들 사이에서 정립된다. 이런 의미에서 정말로 자연의 질서가 있는 것인데, 이는 단지 모든 관계들이 다른 관계와의 구성에 들어가기 때문만은 아니다 : 즉 가장 보편적인 통념들에서 가장 덜 보편적인 통념들로 나아가며 또 그 역도 성립하는 관계들의 구성의 질서가 있다.
<에티카>의 공통 통념의 이러한 이런은 적어도 네가지 관점에서 볼 때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그 대상이 존재하는 신체들 간의 관계의 구성인 공통 통념은 기하학적 개념들을 여전히 방해하는 모호성들을 제거한다. 사실, 공통 통념은 기하학적인 이데아라기 보다는 물리-화학적 혹은 생물학적인 이데아이다 : 공통 통념은 그 다양한 측면들에서 자연의 구성의 통일을 표현한다. 만일 공통 통념이 기하학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실재적, 물리적, 존재하는 존재들 사이의 실재적 관계이다. 이와는 달리 기하학적인 존재에 관계하는 이전의 저작들에서는 많은 모호성이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후자는 추상적, 혹은 허구적인 것으로 남았다.... 그러나 일단 스피노자가 공통 통념의 지위를 정의하자마자 이러한 모호성들이 설명된다. 기하학적 개념은 추상적 관념이거나 이성의 존재자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한 공통 통념의 추상적 관념이기에, 따라서 이러한 공통 통념을 묘사함으로써 우리는 또한 그것[기하학적 개념]을 추상화를 통해 작동하도록 만듦으로써 기하학적 개념에 영향을 주는 제한으로부터 기하학적 방법을 자유롭게 한다. 공통 통념 덕분에 기하학적 방법은 무한한 것에 적합하게 되며, 실재적이거나 물리적인 존재자들에 적합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성개선론>과 <에티카>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자는 남아 있는 모호성들과 더불어서 기학학적 개념들에 의존하는 반면, 후자는 새롭게 고립된 공통 통념에 의존한다.
또한 지식의 종류들의 분류화와 관련되는 커다란 차이가 결과한다. <에티카>에서 공통 통념은 이차적 종류의 지식을 정의하는 적합한 관념이다. 대조적으로 <소론>에서 혹은 여전히 <지성개선론>에서도 지식에 있어서의 이러한 두 번째 종류의 것에 상응하는 것은 올바른 믿음으로서 혹은 명료하지만 적합한 지식은 아닌 것으로서 정의되며, 그것은 추상화를 경유해서 나아가는 추론이나 연역으로 이루어진다. 결과적으로, 최고의 혹은 세 번째 종류의 지식의 갑작스런 출현은 <소론>과 심지어 <지성개선론>에서도 신비에 가리워져 있다. 이와 반대로 <에티카>에서 공통 통념의 엄격한 적구성은 두 번째 종류의 정구성만이 아니라 세 번째로의 이동의 필연성을 보증한다. 두 번째 종류의 지식의 이러한 새로운 지위는 <에티카> 전체를 통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것은 이전의 저작과 비교해 볼 때 가장 실체적인 변양화이다. <에티카>에서 말해진 두 번째 종류는 매우 다양하고 심지어 예측 불가능한 절차들을 합병하는 것(incorporate)을 멈추지 않는다. 관계들의 구성의 영역에서, 이성은 단순히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화학적이고 생물학적인 실험(experiments)의 프로그래밍의 모든 자원이다. (예를 들어, 동물들 사이에서 동물들의 구성의 통일에 관계하는 탐구) 이제 이것이 일어났을 때, 즉 <에티카>가 공통 통념이론을 해명할 때, 공통통념 이론은 절차들의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는 두번째 종류의 지식의 정구성과 적구성을 보증한다. 왜냐햐면 어떤 경우에서도 우리는 "실재적 존재자에서 또 다른 실재적 존재자"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 번째 종류에서 세 번째 종류로 나아가는 방식을 고려해 보자. <에티카>에서 이 점과 관해서는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두번째 종류의 지식과 세번째 종류의 지식은 적합한 관념의 체계이지만 그러나 이것들은 서로와 매우 다르다. 세번째 종류의 관념은 본질의 관념, 속성들에 의해서 구성된 실체의 내적 본질의 관념이며, 속성들에 개입된 양태들의 특이한(singular) 본질이다; 그리고 세번째 종류의 관념은 본질에서 본질로 나아간다. 그러나 두번째 종류의 관념이 관계들의 관념, 즉 존재하는 속성과 그 무한한 양태에 의해 형성된 가장 보편적인 관계이자 속성에서 존재하는 이러저러한 양태에 의해서 형성된 가장 덜 보편적인 관계들이다. 그러므로, 속성이 공통통념으로서 봉사할 때, 공통 통념으로서 이해된 것은 그 본질에 있어서는 물론이고 그것이 적용된 양태의 본질들에 있어서도 이해되지 않으며, 단지 그것이 그 본질을 구성하는 존재하는 실체들에 공통된 형태로서만, 그리고 그것이 그 본질들을 포함하는 존재하는 양태들에 공통된 형태로서 이해된다. 그러므로 본질들의 어떤 것도 알지 못함에도 공통 통념으로부터 출발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공통 통념으로서의 속성으로부터 출발하며, 우리는 필연적으로 본질들의 지식으로 나아간다. 그 방식은 다음과 같다. 적합한 존재자(비록 이것은 그 자체로 어떤 본질도 구성하지 않지만), 공통 통념은 필연적으로 우리를 신의 관념으로 끌고 간다. 이제 신의 관념은 공통 통념 자체가 아니다. 비록 그것이 필연적으로 공통 통념에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관계들의 구성이 아니라 구성으로 들어간 모든 관계들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신의 관념은 우리로 하여금 두번째 종류에서 세번째 종류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일면적으로 대면한 공통 통념과 일면적으로 대면한 본질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통 통념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즉각적인 경험이 우리에게 이런 신체나 저런 신체의 효과를 부여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신체들을 구성하는 관계들을 부여하기 때문에, 어떻게 우리는 공통 통념 그 자체를 형성할 수 있는가? 설명은 <에티카>에서 늦어진다. 우리가 경험 속에서 우리의 것에 동의하지 않는 신체와 마주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슬픔(우리의 행위의 역량의 감소)을 촉발시키는 효과를 가진다. 이 경우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공통 통념을 형성하도록 하지는 못하는데, 이것은 두 신체들이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지 그것들이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우리가 우리의 신체에 동의하는 신체와 마주친다면, 그리고 우리에게 즐거움을 촉발시키는 효과를 가진 신체와 마주친다면, 이러한 즐거움(우리의 행위 역량의 증대)는 이러한 두가지 신체들의 공통 통념을 형성하게끔, 즉 그것들의 관계들을 이루며 그것들의 구성의 통일을 인식하라고 설득할 것이다. 이제 우리가 충분한 즐거움을 가지고 선택했다고 생각해 보자. 공통 통념의 우리의 기술(art)은 그러한 것, 즉 심지어 불일치의 경우에도, 우리는 신체들 사이에 공통된 것이 무엇인가를, 구성의 충분히 넓은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예를 들어 모든 가능한 신체들의 공통 통념으로서의 연장의 속성). 이런 방식으로, 공통 통념의 실천적 형성체의 질서는 가장 덜 보편적인 것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반면에, 그것들의 이론적 설명의 질서는 오히려 가장 보편적인 것에서 가장 덜 보편적인 것으로 나아간다. 이제, 왜 <에티카>에서는 이러한 설명이 그렇게 늦게 나타났는가를 우리가 묻는다면, 그 이유는 제 2부의 설명(exposition)이 여전히 공통 통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데 있어서 이론적인 것이기 떄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실천적 상황에서, 그리고 그 기능에 있어서 공통 통념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가에 관해서 우리는 제 4부의 후반부에까지도, 그리고 그 축약된 형태에 도달하기까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공통 통념이 우리의 역량과 관련한 실천적 이데아라는 것은 분명해진다. 단지 관념과만 관계하는 그것의 설명(exposition)의 질서와는 달리 그것들의 형성의 질서는 어떻게 정신이 '그 정서들을 질서화할 수 있고 그것들을 함께 연결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정서와 관계한다. 공통 통념은 예술(Art)이며, <에티카> 자체의 예술이다. 선과의 만남을 조직하고, 현실적 관계들을 구성하며, 역량을 형성하고 실험한다.
그러므로 공통 통념은 철학의 시작과 관련해서, 기하학적 방법의 범위에 관련해서, <에티카>의 실천적 기능 등등과 관련해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그리고 공통 통념은 <에티카> 이전에는 결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스피노자의 최종적 진화를 기록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며, 동시에 왜 <지성개선론>이 미완성된 채로 남아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게 멀리까지 요청된 이유는 자의적인 것 (시간의 부족?)인가 아니면 모순적인 것(그 실행이나 적용으로부터 분리된 방법의 유용성? 그러나 <지성개선론> 자체는 그렇게 추상적인 어떤 것도 시도하지 않았다)인가? 현실적으로,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지성개선론>의 비완성에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공통 통념을 발견하고 발명했을 때 스피노자는 <지성개선론>의 입장이 여러가지 측면에서 부적절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전체 저작이 수정되거나 개작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지성개선론>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 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다른, 미래의 논고를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가설을 그럴듯하게 만드는 것은, <지성개선론> 자체에서, 스피노자가 존재하는 텍스트의 말미를 향해가면서 공통 통념의 명확한 암시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스피노자가 본질들과 혼동되는 것이 아니라 법칙들을 포함하고 있는 "고정되고 영원한 사물들의 계열들"에 대해서 말하는 유명하고도 난해한 구절은 존재하는 존재자들에게 적용되며, 후자의 지식을 구성한다. 이제 공통 통념만이 영원한 존재의, 그리고 '계열들'을 형성하는 이러한 이중적 성격을 가지는데, 왜냐하면 여기에는 관계들의 구성의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므로 공통 통념의 발견이 <지성개선론>의 편집판의 말미에 출현하며, <에티카>의 시작 부분에서 나타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약 1661~1662년경에. 그러나 왜 이러한 발견이 스피노자로 하여금 <지성개선론>의 이미 존재하는 견해를 포기하도록 만들었던 것일까? 이에 대한 설명은 공통 통념이 그 기능들을 충족시킬 수 없거나 그 결과들을 발전시킬 수 없을 때에 출현한다는 것이다. 공통 통념은 <지성개선론>의 텍스트에는 상대적으로 너무 늦게 발견된다. 공통 통념은 철학을 위한 새로운 출발점을 정립한다. 그러나 출발점은 이미 기하학적 관념에 장착되었다. 공통 통념은 존재하는 것의 지식의 적합한 양식을 결정하며, 어떻게 우리가 이러한 지식의 양태에서 궁극적인 양태, 즉 본질들의 지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지식의 양식들은 이미 <지성개선론>에서 규정되었기에 공통 통념이나 고정되고 영원한 사물들의 계열들이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며, 따라서 이러한 것들은 본질들의 지식과 더불어 지식의 궁극적 양식으로 넘겨지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공통 관념들에게 그들의 자리와 기능을 부여하기 위해서, 스피노자는 <지성개선론> 전체를 필연적으로 다시 써야만 했다. 그것은 단지 완성된 부분을 무효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변양시키는 것이었다. 스피노자는 공통 통념의 관점에서 <에티카>를 다시 쓰고 싶어했다. 비록 그것이 <에티카>에서는 상응하는 실험과 더불어 기원, 형성체, 이런 공통 통념의 계열들에 관계하여 윤곽만 묘사된 실천적 문제들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논고를 연기하는 것을 의미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