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속의 붓다 2
제2장. 붓다와 예수, 그 하나의 가르침
1. 순결한 마음으로 가는 길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붓다와 예수는 매우 비슷한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주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바로 순결한 마음에 대한 가르침이다.
순결한 마음을 키워 나가는 것에 대하여 두 스승은 과연 어떤 가르침을 폈는가? 이 글에서는 먼저 그 점을 살펴보자.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기독교와 불교 문헌에 기록되어 우리에게 전해져 오는 두 스승의 가르침을 나란히 비교해 볼 것이다.
물론 독자들은 성경의 네 복음서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간단하게나마 그 네 복음서에 대하여 다시 한번 살펴보자.
초기 기독교에는 이런저런 복음서들이 많았다. 그래서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수많은 복음서 중에 어떤 것이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가를 놓고 논란이 많았다. 결국 현재까지 전해져 오는 네 가지의 기본적인 복음서만을 인정하고 나머지의 것들은 배척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네 복음서도 세부적인 사항에서는 일치하지 않는 내용이 많다. 네 복음서 가운데 마가복음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분량 면에서 다른 복음서보다 길며, 아무래도 마가복음서를 기초로 해서 씌여진 것 같다. 요한복음은 다른 세 복음서와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이 다르며, 세 복음서와 연결시켜서 기록 연대를 정하기도 어렵다.
복음서의 내용 속에 어떤 특정한 장소나 특정한 날짜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네 복음서 모두 기원후 1세기가 끝날 무렵에 문자로 정착된 것 같다.
우리의 토론 목적에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이 가장 잘 어울린다. 왜냐하면 이들 두 복음서만이 필자가 '순결한 마음'이라고 이름붙인 것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는 예수가 산 위에서 가르침을 폈다고 해서 산상수훈(山上垂訓), 또는 산상보훈(山上寶訓)이라고 불리우는 내용이 있다. 이 내용이야말로 우리가 이 글에서 토론하고자 하는 목적에 가장 적합하다.
누가복음 역시 그것과 유사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는데, 이것들은 산상수훈과 반대로 '평지(平地)의 가르침'이라고 불리운다. 그것은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누가복음 6:17)라는 기록에서 유래하였다.
하지만 누가복음의 후반부에도 우리의 토론 내용과 관련된 가르침들이 많이 있으며, 마태복음의 후반부에서도 몇 가지 찾아볼 수 있다.
이 글에서 필자가 인용하는 붓다의 가르침은 대부분이 역시 불교의 문헌인 법구경(法句經)에 기록된 것이다.
앞글에서 잠깐 말했듯이 기원전 6세기 경에는 많은 영적인 스승들과 교사들이 갠지스 강 유역을 따라 유랑하면서 가르침을 폈는데, 이들은 긴 토론과 논쟁을 통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지만 게송(gathas, 偈頌)이라고 불리우는 짧은 시로써 자신의 메시지를 표현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고오타마 붓다는 특히 그러한 짧은 시를 짓는데에 정통하였다. 한 가르침이 끝날 때마다 자신의 메시지를 그러한 게송 속에 압축해서 표현하였다. 짧은 게송들은 초기의 불교도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고오타마 붓다의 사후에 어떤 알려지지 않은 제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게송들을 모아 '진리의 가르침'이라는 제목 아래 묶었다. 이 제목은 산스크리트어로 다르마파다(Dharmapada)이며, 팔리어로는 담마파다(Dhammapada)이다. 이리하여 법구경은 당장에 모든 불교 문헌들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책이 되었을 뿐더러, 그 이후 지금까지 많은 불교도들 사이에서 염송되고 있다.
법구경 속의 게송들은 어떤 특별한 순서로 편집된 것이 아니라, 주제별로 막연히 묶여져 있을 뿐이다. 여러 세기에 걸쳐 불교가 아시아 전역으로 전파되면서 다양한 교파(敎派)와 종파(宗派)로 나누어졌지만, 그러한 와중에서도 법구경은 어느 교파, 어느 종파를 막론하고 널리 애송되었다.
성경의 산상수훈과 마찬가지로 법구경은 수세기 동안 문자 그대로 수천만의 사람들에게 지혜와 마음의 양식이 되어 왔다.
다음에 이어지는 토론은 법구경과 비슷한 주제를 다룬 성경 속의 말씀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토론 주제의 순서에는 별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 가르침 속에 담긴 전반적인 메시지이다.
왜냐하면 두 스승은 본질적으로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1) 분노를 극복함
법과 질서에 관한 논쟁은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되었을 것이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어떤 범죄든지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이 있는가 하면, 범죄에 대한 처벌이 '눈에는 눈' 그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온건한 입장도 있다. 그만큼 법과 질서의 논쟁은 다양하고 범위가 넓다.
온건한 입장을 취하는 이들도 대개는 공격자에 대한 자기방어를 인정하며, 반면에 공격 행위는 비난한다.
그런데 여기 전혀 다른 관점 하나가 있다. 이 관점은 공격자를 어떤 자세로 다루어야 하는가를 놓고 입장이 완전히 다르다. 이 관점은 비록 상대방에게서 공격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화를 내거나 똑같이 폭력으로 대항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비폭력의 가르침에 대한 기록은 최소한 기원전 6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무렵 중국에는 공자(孔子)라는 지혜의 스승이 각지를 여행하면서 가르침을 펴고 있었는데, 하루는 제자가 그에게 폭력을 친절로 갚아야 한다는 교리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공자는 그러한 가르침이 온당치 못한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폭력을 친절로 갚으면 친절은 무엇으로 갚느냐는 것이었다.
공자는 인자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학자이자 스승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폭력주의 속에 깃든 지혜를 발견하진 못하였다. 오히려 그는 정부가 국민을 공정하게 다룸으로써 평화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야만 국민이 정부를 신뢰한다는 것이었다.
같은 무렵 북인도 지방에서도 똑같은 주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중국이나 그 밖의 대다수 국가와 마찬가지로 인도에서도, 폭력적인 범죄에 대하여 강력하게 법을 행사하는 것이 정부(당시에는 왕에 의해서 통치되던)의 할 일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할 일을 똑바로 하라는 경고를 왕들에게 주기 위해선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한 왕이 죽어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거쳐야 하듯이 심판대 위에 섰다. 그러자 그의 통치 기간 중에 그 나라에서 저질러진 범죄들 중에서 마땅히 죗값을 치르지 않은 범죄들이 그의 악업(죄)으로 계산되었다. 그리하여 그만큼의 형벌이 그 왕에게 떨어졌다.
이것을 요즘 말로 표현하면, 신께서는 온갖 살인과 강도와 사기의 책임을 그 범죄가 일어날 당시에 재직하던 정치인과 경찰관과 판검사에게 돌린다는 말이 된다.
죄지은 사람은 마땅히 거기에 해당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 그것이 법이고 정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것을 아주 당연하고 마땅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의 흐름에 반대되는 주장이 나타났다.
당시 인도에서 번창일로에 있던 큰 도시들의 외곽 지역에 위치한 숲과 동산에서 가르침을 펴던 몇몇 떠돌이 스승들은 그것과는 아주 다른, 비폭력주의를 가르쳤다. 이러한 관점은 당시의 갠지스강 유역에 형성된 지적인 풍토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이었다.
필자는 그 지적인 풍토를 '갠지스 정신'이라고 부른다. 기원전 6세기경 또는 그 이전부터 갠지스강을 따라 새로운 정신 운동이 싹트는데, 그것은 모든 인간 존재의 최종적인 목적이 물질로부터 정신을 해방시키는 데에 있다고 믿는 견해였다. 그러한 해방의 상태가 산스크리트어로 니르바나(열반)이고 해탈이다. 이러한 해방의 상태는 오랜 정신적인 수행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것이었으며, 특히 그 수행 기간 동안 자신의 존재를 더럽히지 않는 것이 필요하였다.
모든 행위 중에서 가장 불순한 행위는 인간이든 동물이든 다른 생명체에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었다.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폭력적인 행위는 사악한 카르마(Karma, 嶪)를 낳으며, 그러한 카르마야말로 인간의 영혼을 가장 더럽힌다고 믿어졌다.
고오타마 붓다는 갠지스 정신의 대표적인 스승이었으며, 필자가 이제 방금 설명한 영적인 세계관을 수용하였다. 범죄자는 공정하게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는 제자들에게 어떤 이유로든지 동물이나 사람을 죽이거나 해쳐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어떤 미움도, 원한도 품지 않고, 심지어 어떤 상황이 닥쳐도 화를 내지 않는 경지에 오르도록 마음을 닦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한 가르침은 아래에서 보듯이 법구경의 여러 게송들에 나타난다.
"그는 나를 욕하고 때렸다.
나를 이기고 내것을 빼앗았다."
이러한 생각을 품고 있으면
미움이 가라앉지 않는다.
"그는 나를 욕하고 때렸다.
나를 이기고 내것을 빼앗았다."
이러한 생각을 품지 않으면
마침내 미움이 가라앉으리라
이 세상에서 미움은 미움에 의해서는
결코 풀어지지 않는다.
미움을 버릴 때에만 풀리나니
이것은 변치 않을 영원한 진리
법구경 3-5
약한 것이든 강한 것이든
살아 있는 것에
폭력을 쓰지 않고
죽이거나 죽게 하지 않는 사람
그를 나는 진정한 수행자라 부른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자
모욕과 학대를 참는 자
모든 존재에게 자비로운 자
그를 나는 진정한 수행자라 부른다.
무문자설경 33. 45-46
승리는 원한을 낳고
패자는 괴로움 속에 누워 있다
승패를 모두 버린 사람은
만족하여 즐겁게 산다
[법구경 201(간다라어 법구경 180)]
몇 세기 뒤에 예수도 비슷한 가르침을 폈다. 이 문제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붓다의 가르침과 나란히 비교될 수 있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너희가 만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돌려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당연히 돌려받고자 하여 빌리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누가복음 6:27-36]
온화한 마음으로 성냄을 이기라 착한 일로 악을 이기라 베푸는 일로써 인색함을 이기라 진실로써 거짓을 이기라
진실을 말하라 분노에 굴복하지말라 가진 것이 적더라도 누가 와서 빌거든 선뜻 내주어라 이 세 가지 덕으로 그대는 신들 곁으로 가까이 간다 [간다라어 법구경 280-281]
적의 있는 무리 속에 있으면서도 적의가 없고 폭력을 쓰는 무리 속에 있으면서도 마음 편하고 집착하는 무리 속에 있으면서도 집착하지 않는 사람 그를 나는 진정한 수행자라 부른다 [법구경 406]
붓다와 예수는 공격자를 이기는 길은 그를 보다 평화로운 마음 상태로 바꾸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이것은 무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온화한 마음으로 성냄을 이겨라"라는 것과 똑같은 의미이다.
예수가 말한 원수는 당시의 통치자들이었던 로마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고 필자는 믿는다. (유대의 독립운동가들인 열심당원(熱心黨員, Zealots)들은 로마인들을 원수로 삼았다) 예수가 의미한 것은 개인적인 인간관계였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공격적인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로 바꾸면 뜻이 더 명확해진다.
"너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행을 베풀라"는 말은 "착한 일로 악을 이기라"는 붓다의 가르침을 예수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비록 그것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체험하는 것과는 정반대되는 일일지라도 붓다는 "베푸는 일로써 인색함을 이기라"고 가르치고, 예수는 "달라는 자에게 무조건 다 주라"고 가르친다.
이를 위해 두 스승은 제자들에게 강인한 마음과 같은 침착성을 요구한다. 그래야만 외부로부터 아무리 적대적인 발언이나 행위가 가해져도 화를 내거나 원한을 품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붓다는 그 문제를 "분노에 굴복하지 말라"고 한마디로 요약한다. 그러한 마음 상태를 키워 나감으로써 예수의 제자들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될 수 있으며, 붓다의 제자들은 '신들 곁으로' 가까이 갈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의 유일신 사상과 인도의 다신교의 차이를 비교해 볼 수 있다. 불교에서는 "신들 곁으로 가까이 간다"고 말하고 있는 대신에, 기독교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많은 심리학자들은 차라리 마음껏 화를 내는 것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화를 내면 결국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다 줄 뿐이라고 두 스승은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 대하여 라가(히브리인의 욕설)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태복음 5:22 ]
성내지 말라 성냄을 억제하지 못하면 고통이 찾아온다. 성낼 당시에는 기분 좋게 생각되지만 나중에는 그 성냄 때문에 고통받는다 [간다라어 법구경 283]
예수와 붓다 모두 그들의 제자들에게 분노를 삼가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위에 인용한 문장은 어느 정도 당시의 서로 다른 문화적인 배경을 말해 주고 있다.
예수는 화를 내거나 마음을 절제하지 않는 사람은 유대의 법정이나 하나님에 의해 심판받게 된다고 청중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붓다의 말은 청중들이 인과응보의 업보(業報)의 작용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자신의 나쁜 행위는 나쁜 업보가 되어 결국 그 행위를 한 사람에게 되돌아간다는 세계관이다.
따라서 인도의 세계관에서는 굳이 하나님이 끼어들어 내세에 공정한 심판을 할 필요가 없다. 모든 행위는 저절로 업보에 따라 자신에게 되돌아가는 것이다.
예수의 말은 동족 이스라엘 사람을 공개적으로 모욕하는 것을 금지한 오래된 유대 전통과 관계가 있다. 유대 전통에서는 동족에 대하여 '형제'라든가 '이웃'과 같은 은유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기원전 6세기 무렵이나 또는 기원후 시대,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붓다와 예수같은 스승들이 가르친 비폭력 사상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은 그것이 현실적으로 별로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 중요한 예가 있다. 19세기가 지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은 인간의 달 착륙이나 세계대전 발발이 아니라 식민지 정책의 종말이다. (단순히 몇 세기 동안 지속된 영국 식민지 정책의 끝장이 아니라, 인류 역사 이래 계속해서 식민지 확대 정책을 지지해 온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뜻한다.) 영국이 인도 대륙(인도와 파키스탄, 실론을 포함한)의 독립을 인정하자 식민 치하에서 해방되는 나라가 급속도로 늘어났다.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요인도 있겠지만, 인도가 독립을 쟁취한 것은 전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을 통해서였다. 간디는 자신을 투옥한 영국 통치자들에게 화를 내지 않았으며, 감옥 생활을 참고 견디면서 단식 투쟁을 하였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다시 말해 그는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두 스승의 가르침을 세계정치 무대에 적용함으로써 목적을 이룬 것이다.
놀랍게도 간디가 선으로 악을 정복하는 이러한 비폭력 사상을 맨 처음 배운 것은 영국에서 대학에 다닐 때 읽은 성경의 산상수훈을 통해서였다.
나중에 그는 인도의 고전적인 문헌들과 여러 문화 속에서도 똑같은 사상을 발견하였다. 법률 학교를 졸업한 뒤에 그는 남아프리카로 법률 실습을 떠났다. 거기서 그는 하류계층인 유색인종 취급을 받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부터 그는 갖가지 정책적인 차별제도, 모욕과 멸시, 직업에 따른 인종 차별정책 등에 대하여 비폭력 사상을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남아프리카에서의 간디의 초기의 노력이 있은 지 여러 해 뒤에 한 젊은 흑인 목사가 간디의 비폭력 저항 사상에 대한 권위있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목사 역시 인종 차별 정책에 대항하여 평화로운 저항 운동을 전개하였다.
미국의 간디인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미국 흑인들의 완전한 시민권 획득을 위한 오랜 투쟁에 불을 붙였다. 마틴 루터 킹 목사 역시 산상수훈의 가르침에 영감을 받고 이 운동을 시작하였다.
비폭력 사상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별로 효과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비폭력 사상이 쉽고도 빠르게 효과를 거둘지 자신할 수 없다는 말이다.
붓다는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 초기에 심각한 공격을 받았으며, 예수의 비폭력 사상도 예루살렘의 정치 세력으로부터 그 자신을 구하진 못하였다. 간디 역시 자신이 그토록 희생적으로 해방을 위해 싸웠던 동포의 손에 의해 쓰러졌다. 또 마틴 루터 킹 목사도 모든 선지자들과 똑같은 운명을 겪은 끝에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도 비폭력 사상이 효과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이 자기 방어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미움과 편견을 이해와 사랑으로 탈바꿈시키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2) 육체의 욕망을 버려라
예수와 붓다는 분노와 미움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키워 나가는 것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성적인 욕망처럼 마음을 빼앗는 감정을 발달시키는 데에도 반대하였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신체 중에 하나를 잃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낳으리라 [마태복음 5:27-29]
방종하여 남의 아내를 유혹하는 자는 다음 네 가지 일과 만난다. 화를 불러들이고 편히 잠들 수 없으며 비난을 받고 지옥에 떨어진다 [법구경 309]
세속적인 선도 악도 다 버리고 음욕의 눈을 빼어 버린 자 밑뿌리에서 욕망을 끊은 자 그를 나는 진정한 수행자라 부른다 [무문자설경 33.68]
이러한 가르침은 단순히 간음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간음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마음까지도 단죄한다.
두 스승이 육체적인 욕망을 버리라고 한 것은 조만간 그러한 생각이 실제적인 간음으로 발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마음 상태 자체가 예수에 의하면 죄이고, 붓다에 의하면 악업(惡業)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러한 마음 상태를 탈바꿈시키지 않고 순결히 하지 않으면 결국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된다고 두 스승은 경고한다.
고오타마 붓다에게는 지옥이란 사람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여섯 군데의 장소 또는 상태를 의미하였다. 죽을 때는 순결치 못한 마음을 지니고 있고 또한 많은 악업을 쌓은 사람은 그 악행의 정도와 양에 따라 일정기간 동안 지옥에서 고통받아야만 한다. 마침내 그 악업과 악행이 다 보상되면 그 사람은 당장에 지옥을 떠나 동물계나 인간계에 다시 태어난다.
예수에게는 지옥이 어떤 의미였는지 명확치 않다. 천국과 지옥이 분리되어 있어서 하나는 위에 있고 하나는 아래에 있다는 사상은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듯 싶으며, 지중해 주변의 유대 국가를 포함하여 고대 세계에 널리 퍼져 있던 사상이다.
예수가 지옥에서의 형벌이 영원히 계속된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새 시대가 찾아올 때까지만 그 형벌이 계속된다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우리로서는 분간하기 어렵다.
지옥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심판의 과정을 어떤 식으로 생각했든 간에 두 스승은 제자들에게 분노와 미움과 육체적인 욕망을 극복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3) 심판하지 말라
피해야 할 부정적인 감정 상태 속에는 남을 심판하려는 마음도 포함된다. 두 스승은 이러한 마음 상태의 위험성을 강조하였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너 위선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태복음 7:1-5]
남의 허물을 보지 말라 남이 했건 말았건 상관하지 말라 다만 내 자신이 저지른 허물과 게으름만을 보라.
남의 허물은 보기 쉬워도 자기 허물은 보기 어렵다 남의 허물은 겨처럼 까불어 흩어 버리면서 자기 허물은 투전꾼이 나쁜 패를 감추듯 한다. [법구경50, 252]
"남의 허물을 겨처럼 까불어 흩어 버리려는" 부정적인 마음 상태는 분노와 미움이 그렇듯이 온당치 못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러한 마음 상태는 생각 깊은 곳에 악의 뿌리를 심어 놓는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악의 뿌리를 탐욕과 미움과 망상 등으로 표현한다. 이 세 가지 악의 뿌리가 순결치 못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자꾸만 남을 심판하고 판단하려는 생각을 낳는다.
뿐만 아니라 남을 심판하려는 마음은 더 큰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끊임없이 남을 심판하고 비난하는 사이에 자기 자신의 집안은 엉망이 되어 가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아마도 '비판(심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이라는 말을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시켜서 이해했을 것이다.
붓다의 말 속에 담긴 의미도 이와 비슷하다.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은 결국 그 악한 행위(카르마)로 인해 이생에서든지 다음 생에서든지 고통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똑똑한 제자라면 무엇보다도 남을 심판하기 전에 자기 눈 속의 들보를 빼내는 일, 자기의 겨를 먼저 까불어 키질하는 일을 우선적으로 삼았을 것이다.
자신의 겨를 까불지 않고 끊임없이 남을 심판하려고 할 때 많은 문제가 생긴다.
붓다와 예수는 그 실제적인 문제들을 간과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의 생활 속에서 겨를 까불어 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남을 지도하는 자가 될 수 없다고 그들은 경고하였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니 아니하겠느냐 [누가복음 6:39]
죄를 범한 자 거짓된 수단을 사용한 자 남에게 상처를 준 자 또는 그 밖의 비슷한 행위를 한 자 그가 이 길을 걸으면 벼랑에 떨어지리라. [무문자설경 9.7]
영적으로 장님인 지도자에 대한 누가복음의 이 설명은 앞에서 인용한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내용의 두 문장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어느 곳에선가 고오타마 붓다도 말은 다르지만 똑같은 관점을 표시하고 있다. 바보는 남을 타락으로 인도하기를 즐겨하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그 바보가 옳은 길로 인도하리라고 굳게 믿는다는 것이다.
4) 만족하라
순결한 마음과 관련된 두 스승의 가르침 중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 하나 있다. 그것은 자신에게 무엇이 주어지든지 만족하라는 가르침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고오타마 붓다는 제대로 식사를 공급받지 못하면서 오랜 기간을 홀로 지냈다. 그 결과 두 스승은 육체적으로 궁핍하고 불안정했던 그 시절이 영적인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체험을 바탕으로 두 스승은 제자들에게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기 마련인 음식과 옷과 집에 대한 불안을 초월하라고 가르쳤다. 그리하여 '만족'이라는 더 높은 상태를 추구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으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태복음 6:25-29]
재산을 모아두지 않고 검소하게 먹는 그런 사람의 해탈의 경지는 텅 비어 아무 흔적도 없기 때문에 허공을 나는 새의 자취처럼 따르기 어렵다
번뇌란 번뇌는 죄다 끊어 버리고 먹고 입음에 구애받지 않는 그런 사람의 해탈의 경지는 텅 비어 아무 흔적도 없기 때문에 허공을 나는 새의 자취처럼 알아 보기가 어렵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크게 즐기며 살자 우리는 광음천(光音天)의 신들처럼 즐거움을 먹으면서 살자 [법구경 92-93, 200]
만족하는 상태와 반대되는 것은 불안한 상태이다. 인도 사상에서는 음식과 집 같은 것에 불안해 하는 사람을 두고 '집착하는 자'라고 한다. 집착하는 자의 생각은 그가 집착하는 대상에 늘 매여 있다. 그것이 음식이든 담배든 돈이든, 혹은 그밖의 것이든 늘 그 대상에 집착하고 있다. 고오타마 붓다는 모든 물질적인 의존(依存)에서 벗어나라고 종종 제자들에게 말했다.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 주어지든지 만족하며
남에게 무엇이 주어지든지 신경쓰지 않는 자
늘 침착하여 자신을 되돌아 보는 자
그러한 자를 신은 즐거워 하노라 [무문자설경 32.Ⅰ]
착한 사람은 모든 것에 욕심을 버리고
쾌락을 찾아 헛수고를 하지 않는다
즐거움을 만나거나 괴로움을 만나거나
어진 사람은 동요의 내색을 하지 않는다 [법구경 83]
칭찬을 받든 비난을 받든 늘 평정한 마음 상태를 지녀야 한다는 이 마지막 문장은 초기 불교의 문헌과 힌두교 문헌에 수없이 반복되고 있다.
한 예로 바가바드 기타 제3장은 물 위에 돛단배처럼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가진 '평온한 마음의 소유자'를 찬양한다. 또 이 가르침은 자주 연꽃을 비유로 설명된다. 비난이나 칭찬의 말은 물이 연꽃 이파리 위를 굴러떨어지듯 그렇게 흔적없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연꽃 이파리는 윤기가 있어서 물이 묻지 않는 것이다.
아마도 기독교인이라면 연꽃 대신 다른 비유를 들었을 것이다. 즉 물이 '오리'의 등을 흘러내리듯 성자는 아첨과 비난의 말에 젖지 말아야 한다고 했을 것이다.
예수는 만족에 대한 것을 여덟 가지 복의 가르침 속에서 길게 다루고 있는데, 이것이 산상수훈의 시작이다. 그러나 팔복(八福)의 가르침 속에서 예수 자신이 말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은 첫 번째 말씀을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마태복음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적고 있다.
누가복음의 문장은 아무래도 당시 청중 속에 있던 가난하고 억압받는 민중("너희 가난한 자는")을 가리키고 있는 듯하다. 다가오는 시대에는 그들이 행복을 누릴 것이니 용기를 가지라는 뜻인 것 같다.
마태복음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겸허한 자는 결국 보상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팔복의 가르침의 첫 문장에 해당하는 불교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도 크게 즐기며 살자. 우리는 광음천(光音天)의 신들처럼(다시 말해, 천사들처럼) 즐거움을 먹으면서 살자." 이 의미는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의 말과 정확히 같지는 않다. 여기에는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감이 없다.
하지만 여기에는 스스로 선택한 가난한 삶이 최고의 삶이라는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다. 이러한 메시지는 예수의 다른 가르침 속에도 은유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하늘의 보물'이 바로 그것이다.
5) 하늘의 보물을 간직하라
소박하게 살기로 스스로 선택한 사람은 행복하다. 소박하게 살면서 자신에게 들어오는 재산을 유익하게 사용하는 사람은 더없이 행복하다.
전통적인 불교 사상은 물질적인 재산과 영적인 부(富) 사이에 언제나 구별을 두어 왔다. 후자를 공덕(功德)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선한 도덕적인 행위(카르마)에 의해서 생긴 영적인 힘을 의미한다.
고대 인도 신앙에 따르면, 사람은 이생에서 쌓은 공덕의 크기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된다. 바꾸어 말해, 악한 짓을 많이 하면 그 악업(惡業)으로 인해서 죽은 다음에 불행한 일들을 겪게 된다. 이 관점을 심어 주기 위하여 불교는 신체적인 용어와 관련된 한 가지 오래된 비유를 즐겨 사용한다.
인도 문헌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선한 사람은 내세에 아름다운 처녀의 영접을 받지만, 악한 사람은 늙은 마녀의 대접을 받는다. 아름다운 처녀는 선한 공덕을 의인화한 것이고, 늙은 마녀는 악업의 의인화이다.(우스갯소리지만, 그렇다면 선한 공덕을 쌓은 아름다운 여자는 내세에 누구를 만날 것인가?) 다음의 두 게송도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오랜 세월 타향으로 떠돌다가
무사히 고향에 돌아온 사람을
친척과 친구들은 기꺼이 맞아들인다.
이와 같이 착한 일 하고
이 세상에서 저세상으로 가는 사람은
착한 과보로 환영받는다
친척들이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온 것을 반기듯이 [법구경 219-220]
법구경의 또 다른 편집자는 앞에서 인용한 두 게송에 이어 다음의 게송을 배치하였다. "그러므로 저세상에 비추어 착한 일을 하라. 저세상에서 대접받는 일이야말로 착한 일이다."(무문자설경 5.23)
한번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길을 가다가 붓다는 바라문 계급에 속하는 두 명의 늙은 성직자를 만났다. 그들은 붓다가 지혜로운 사람인 것을 깨닫고서 내세에 대하여 질문하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그들은 죽음이 두렵다고 말했다. 아울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간절히 알고 싶어 했다.
붓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은 자신이 이생에서 쌓은 공덕에 대하여 확신을 갖는 길이라고 대답하였다. 공덕을 쌓은 사람은 늙어서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젊었을 때부터 공덕을 쌓아야 한다.
"젊었을 때 수행하지 않고 보물을 얻어 놓지 못한 사람은 고기 없는 물가의 늙은 백로처럼 쓸쓸히 죽어 갈 것이다. 젊었을 때 수행하지 않고 보물을 얻어 놓지 못한 사람은 부러진 활처럼 쓰러져 누워 부질없이 지난날을 탄식하리라."(법구경 155-156)
앞에 인용한 문장에서 '보물'이라는 단어로 표현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천국의 보물은 세속적인 보물처럼 불확실한 것이 아니다. 예수와 붓다는 다음과 같은 비유로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너희 소유를 팔아 남에게 베풀라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느니라 [누가복음 12:32-34]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녹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며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태복음 6:19-21]
믿음의 양식을 쌓아 두라
자신이 쌓은 공덕은
남에게 빼앗기지도 않으며
도적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이것을 손에 넣은 제자는
행복하여라
이러한 제자를 만난 스승도
행복하여라 [무문자설경10.11]
이 두 말씀은 똑같은 신학적인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내세라는 것이 존재하며, 그 내세의 삶은 인생에서 행한 도덕적인 행위에 따라 결정되며, 지혜로운 자는 세속적인 보물보다 '영원한' 보물을 더 많이 쌓는다는 것이다.
예수는 여러 가지 비유로써 '하늘의 보물'을 설명하였다. 예수는 가르침을 펼 때 비유를 많이 사용하였으며, 이것이 예수의 독특한 점이다.
붓다도 비유를 사용하긴 했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법구경에는 자신의 창고에 쌓인 많은 곡식을 자랑하는 부자의 비유에 걸맞는 세 가지 게송이 있다.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나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유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누가복음 12:16-21]
내 자식이다. 내 재산이다 하면서 어리석은 사람은 괴로워한다. 저세상에서는 제 몸도 자기 것이 아닌데 어찌 자식과 재산이 제 것일까
세상의 물건을 수백 수천 손에 넣어도 결국은 죽음의 신에게 굴복하는 법 이것이 인간의 운명임을 모르는가
아무리 재산을 비축해도 마지막에는 그것이 다하여 없어져 버린다. 높은 지위와 신분도 끝내는 떨어져 버린다. 만난 것은 끝내 작별해 버린다. 목숨은 끝내 죽음에 이르나니 [무문자설경 1.20-22]
다른 불교 경전에는 다음과 같은 붓다의 말씀이 적혀 있다. "아, 짧도다 인간의 생명이여, 백 살도 못 되어 죽어 버리는가. 아무리 오래 산다 해도 결국은 늙어서 죽는 것을, 사람들은 내 것이라고 집착한 물건 때문에 근심한다. 자기가 소유한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상 것은 모두 변하고 없어지는 것으로 알고, 집에 머물러 있지 말아라. 사람이 '이것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물건, 그것은 그 사람이 죽음으로 잃게 된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현명하게 이 이치를 깨닫고, 내 것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히지 말아라."(숫타니파아타 804-806)
예수는 또 다른 비유에서 남들이 가난에 허덕일 때 혼자서 재산을 축적하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생활하는 한 부자와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먹고 사는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누가복음 16:19-31)는 그 부자는 결국 죽어서 지옥에서 고통받는 반면에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서 축복을 받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가 길을 가고 있는데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질문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예수에게 묻는다.
예수는 그에게 계명대로 살인하지 말며, 간음하지 말고, 도적질하지 말라고 이른다. 그러자 그는 어려서부터 그러한 계명을 다 지켰다고 대답한다. 이에 예수는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의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말한다. 그러자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떠나간다. (마가복음 10:17-22)
이 일화는 하늘의 보화를 위해서도 자신의 재산을 포기하지 못하는 어떤 부자의 이야기를 말해 주고 있다.
덴마크의 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 일화가 담고 있는 의미에 대하여 사색하면서, 만일 그 부자가 기꺼이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했다면 예수가 그 돈을 그에게 되돌려 주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예수는 단지 그 사람이 재산에 집착하고 있는가를 시험해 보려고 했을 뿐이라고 키에르케고르는 이해했던 것 같다.
내 느낌으로는 예수의 다른 말씀들로 미루어 볼 때 이 일화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더 일리가 있는 듯하다. 예수는 실제로 그 부자에게 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과 그래야만 하늘의 보화(공덕)를 얻게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자비(慈悲)의 행위로 인해 하늘의 보상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가 불교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생에서 많은 자비를 베푼 신앙심 깊은 사람이 죽으면 아름다운 천상의 집이 그를 맞이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이야기를 들라면, 푸른 연꽃이 가득한 연못이 있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둘러싸인 집에 사는 여인의 이야기를 들 수 있다. 그처럼 축복받은 천상의 삶을 누리게 된 까닭을 묻자 그 여인은 설명하기를, 오래 전 자기가 지상세계에 살 때 푸른 연꽃 다발을 만들어 법당에서 위대한 승려 혹은 붓다에게 바쳤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그녀는 푸른 연꽃이 가득한 천상의 집에서 살게 된 것이다.
단순한 한 가지의 공덕으로 이토록 과장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누가나 공덕을 쌓으면 몇 십 배의 다양한 선물이 보상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들은 후기 불교에서 생겨난 것으로, 신자들의 영적인 발전뿐만이 아니라 승단의 살림을 유지하기 위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더 많은 보시를 하도록 부추기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필자의 확신으로는, 고오타마 붓다 자신은 이런 이야기를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며, 예수 역시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오타마 붓다라면 오히려 부자인 사람이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준(성스러운 사람에게 비친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환영했을 것이다. 또 예수가 말하고자 했던 바로 분명히 그것이었다. 예수가 여러 가르침 속에서 똑같은 주제를 되풀이 말하고 있는 것을 봐도 그 점을 알 수 있다.
붓다의 시대에는 진리와 영적인 완성을 찾아 방랑하는 탁발 승려들은 모두가 가난하였다. 나중에 불교 사원 제도가 정착되면서부터는 생활이 윤택해졌기 때문에 진짜로 가난한 자(마을의 거지)에게 보시하는 것과 승려에게 보시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게 되었다.
기독교와 불교 모두 절이나 교회에 대한 보시의 행위가 점차로 두 스승이 가르친 그 어떤 것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순결한 마음을 가지라는 본래의 메시지는 빛을 잃거나 아예 사라져 버렸다.
본래의 메시지는 이렇게 설명될 수 있다. 현명한 사람은 두 물건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좋은가를 구별할 줄 안다. 인간은 그 지혜를 '영적인 보물'에도 적용할 줄 알아야 한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하찮은 쾌락을 버림으로써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다면 지혜로운 이는 보다 큰 기쁨을 위해 하찮은 쾌락을 기꺼이 버리리라."(법구경 290)
예수도 비슷한 관점의 작은 예들을 몇 가지 들고 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수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태복음 13:44-46)
물론 최종적인 보물에 대한 붓다와 예수의 개념에는 차이가 있다. 예수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붓다에게는 그 최종적인 것이 앞에서 인용했던 대중적인 이야기 속에 묘사된 천상의 집을 얻는 것이 아니라 니르바나(열반)를 획득하는 데에 있다.
법구경의 한 게송은 지상이나 천상의 집에서의 즐거움보다는 마음속에서 미움과 분노와 탐욕과 음욕과 물욕 등의 나쁜 욕망들을 모두 몰아냈을 때 획득되는 열반의 상태를 강조하고 있다. "세속적인 행복이나 신들의 세계에서의 행복은 욕망을 버렸을 때 얻어지는 행복의 16분의 1에도 못 미친다."(무문자설경 30.33)
불교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과 열반의 축복 속으로 들어가는 것 사이에 이렇게 큰 구별을 두고 있지만, 기독교에는 그러한 구별이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화적인 배경 때문이다.
이제 두 스승의 가르침 속에 뚫고 도도하게 흐르는 공통된 핵심 주제로 들어가자. 그것은 바로 선한 마음에 대한 가르침이다.
6) 세상의 빛이 되어라
사람들은 으레껏 자신의 마음 상태를 가장하기 위하여 순결함과 경건함을 가장한다. 이러한 사람들이 정치나 종교의 지도자가 된다면 그것은 정말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붓다는 당시의 바라문 계급에 속한 승려들의 위선과 독선을 꼬집었다. 그들이라고 해서 항상 인도 사회가 주는 최고의 존경과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도 예루살렘의 유대교의 정신적인 위선을 비난하였다. 여기 두 스승의 불 같은 비난이 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태복음 7:15]
어리석은 자여 수도승의 머리 모습을 한들 무슨 소용인가 짐승 가죽옷을 입고 어쩔 셈인가 그대의 속은 더러운 밀림 거죽만 번지르르 치장했구나 [법구경 394]
붓다는 다른 법문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실제로는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면서
어떤 이득을 취하고자 겉모습으로
자신이 잘 절제된 것처럼 사람들을 속이는 자
그러한 자를 믿지 말라
동전에 금물을 입힌 것처럼
안이 썩었으면서
바깥으로는 선택받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자
많은 무리를 이끌고 세상을 돌아다니는 자 [무문자설경 29.11-2]
간다라어 법구경을 편찬한 이는 이 가르침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전래되는 순서를 마다하고 다음의 게송을 책의 맨 첫머리에 실었다.
수도승의 머리 모습이나 가문이나 신분에 의해서
성자가 된 것이 아니라
작든 크든 악한 행위를 모두 물리친 자
그는 악을 모두 물리쳤기 때문에 진정한 성자이다 [간다라어 법구경 1]
하지만 위선적인 지도자들 때문에 생기는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두 스승은 제자들에게 그러한 자칭 지도자들을 실제로 시험해 보도록 용기를 준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누가복음 6:43-44 (마태복음 7:16-20 참조)]
귀하고 가치 있고 올바른 가르침을 경멸하고 그 대신 그릇된 의견에 귀 기울이는 바보는 결국 가시나무처럼 자신을 파멸시키는 열매를 맺는다. [간다라어 법구경 258]
덕 있는 행동을 하든 악한 행동을 하든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똑같이 그에 따른 열매를 맺는다 [무문자설경 9.8]
붓다와 예수는 도덕적인 실천주의자였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느냐에 실제적인 차이를 두었다. 그들은 제자들에게 무지(無知)로써가 아니라 지혜로써 행동하고 말하는 사람과 관계를 맺으라고 가르쳤다.
거짓된 지도자들은 머지않아 정체가 드러난다고 그들은 믿었으며, 이러한 진리를 씨앗의 비유로 설명하였다. 씨앗들은 비슷해 보이지만 땅 속에 심어서 자라게 하면 머지않아 잡초인지 벼인지 금방 구별이 되는 것이다.
붓다와 예수는 그들의 말을 듣는 청중들이 스스로 그 말 속에 담긴 지혜를 식별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래서 붓다와 예수는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에 있어서 적극적인 방법이나 강력한 전략을 구사하지 않았다.
특히 붓다는 자신의 가르침 속에 담긴 지혜를 스스로 실천해 보라고 제자들에게 말하기도 하였다. 만일 똑같은 시험을 거짓된 지도자들의 가르침이나 도덕성에 해보면 그들의 결점이 금방 드러날 것이다.
행위가 열매를 맺는다는 비유가 사회적인 차원과 개인적인 차원 양쪽에 모두 적용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회적인 차원을 살펴보았다. 그릇된 인도와 분노와 남을 비방하는 잘못된 심판들로 '나쁜 씨앗을 뿌리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회적인 부도덕성을 붓다는 직접적으로, 또 예수는 비유를 통해 비난하고 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마태복음 7:6]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을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운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두려울 것이 없는데 두려워하고 진정 두려워해야 할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릇된 소견을 가진 자들은 악한 곳으로 떨어진다. [간다라어 법구경 273]
개에게 거룩한 것을 던지지 말라는 것은 위선적인 지도자들에게 영광과 찬양을 보내지 말라는 경고일 것이다.
마태는 이 문장을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문장 바로 뒤에 배치하였다. 위에서 인용하였듯이 그것은 자기 눈 속의 들보를 먼저 빼어낸 후에야 남의 눈 속에서 티를 빼라는, 제자들에게 남을 비난하고 심판하길 좋아하는 마음을 갖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하지만 지금 인용한 이 문장은, 예수의 제자들은 사악한 지도자들을 추종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위에 인용한 붓다의 말씀은 그 의미가 훨씬 더 분명하다. 수행자들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정의인지 분간할 수 있는 마음 상태를 키워 나가야 하며, 옳고 정의로운 것에 대해서는 충분한 지원을 보내야 한다.
좋은 씨앗을 뿌리는 것을 개인적인 차원과 관련시켜서 보면, 수행자들은 어떤 부도덕한 행위도 저질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는 결국 어떤 형태로든 열매를 맺어 그 자신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예수의 표현을 빌리면, 검으로 사는 사람은 검으로 망한다. 여기 법구경에 주석(註釋)을 붙인 초기 불교의 해설이 있다.
현자(賢者)의 가르침은 이렇다. 우리는 지혜로써 우리 자신을 보호해야만 한다. 바보는 지혜를 비웃고, 알면서도 사악하게 행동한다. 그리고 그러한 악한 행동으로 인해서 그들은 마침내 불행을 거두어들인다. 이는 마치 독초의 씨앗을 뿌린 사람이 독초를 거두는 것과 같다. 악한 사람은 그 자신의 인격 속에 죄의 씨앗을 뿌리며, 결국 그 자신이 뿌린 씨앗의 열매를 거두어들인다.
선한 사람은 그 자신의 인격 속에 좋은 열매(공덕)를 가꾼다. 결국 누구나 스스로 자신을 위한 열매를 가꾸고 있는 것이다.
좋은 씨앗을 뿌리는 마음 상태를 가진 수행자는 그 자신과 남을 위해서 유익한 일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떠돌이 스승의 삶 속에서 어떤 사회적인 가치를 발견하기란 늘 쉬운 일이 아니다.
한번은 마을에서 마을로 탁발을 돌다가 고오타마 붓다는 한 농부와 마주치게 되었다. 이 농부는 그에게 음식을 주기를 거부하면서, 도대체 남의 보시에 의존하면서 살 만큼 이 사회에 공헌한 것이 무엇이냐고 따졌다.
고오타마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농부가 쟁기질을 하고 곡식을 가꾸어 물질적인 양식을 거두어들이는 동안, 좋은 스승은 사회의 도덕적인 심성을 가꾸는 영적인 쟁기질을 한다. 따라서 진정한 지혜를 갖춘 떠돌이 스승을 보살피는 것은 모두에게 대단히 유익한 일이다.
"무엇 때문에,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집을 떠나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면서 사람들의 접대와 자선에 의존하여 살아가는가?" 예수도 이처럼 도전적인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지 필자는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예수가 제자들에게도 집을 떠난 불안정한 생활을 과감히 수용하라고 용기를 심어 준 것만은 사실이다.
7) 빛의 비유
수행을 거친 제자들이 사회에 좋은 일을 해야 한다는 내용의 주제는 빛을 비유로 해서 가장 잘 표현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발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추느니라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4-16]
한길가에 버려진 쓰레기 더미 속에서도 은은하게 향기를 뿜으며 연꽃이 피어 오르듯이
버려진 쓰레기처럼 눈먼 중생들 속에 있으면서도 바로 깨달은 사람의 제자는 지혜로써 찬란하게 빛나리라 [간다라어 법구경 303-304]
이처럼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의 빛이 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먼저 자기 자신의 길을 밝게 비추어야만 한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하겠느뇨 [마태복음 6:22-23]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누가복음 11:34-35]
두 눈이 있고 등불을 들고 있어서 온 사물을 다 보는 사람처럼 악과 덕의 법의 소리를 듣는 자 그는 완벽한 지혜를 갖추게 되리라
자신의 육체에 묶인 바보는 어둠에 싸여 있다 세상의 물건을 탐내는 저들은 모든 것을 같은 식으로 생각한다 [무문자설경 22.5, 27.5]
무지의 어둠에 둘러싸인 사람은 신체적으로 눈이 먼 사람보다 훨씬 불쌍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이야기들이 불교에는 많다.
불교에서는 무지한 사람을 눈에 눈가리개를 한 사람으로 묘사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행동의 결과를 볼 수 있지만, 정신적으로 장님인 사람은 악한 행동이 쓰디쓴 열매만 맺는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마음이 순수하지 못한 사람은 돼지에게 찬양을 보내면서, 동시에 진정으로 찬양을 받을 만한 사람을 무시한다. 이와 반대로 순수한 마음을 키운, 영적으로 진화된 제자들은 세상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기여한다.
예수는 말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태복음 5:13)
여기서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맺도록 좋은 씨앗을 뿌리라는 똑같은 내용의 가르침을 엿볼 수 있다. 완전히 악에 물든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쓸모없는 사람은 가시덤불이나 썩은 음식처럼 인정사정없이 잘리우고 내던져질 것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둘 다에서 예수는 두 집에 대한 비유로서 산상수훈을 끝마친다. 고오타마 붓다 역시 매우 비슷한 비유를 사용하였다.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듣고 행치 않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6:47-49]
잘 덮인 지붕에는 비가 새지 않듯이 수양이 잘 된 마음에는 탐욕이 스며들 틈이 없다. 허술하게 이은 지붕에 비가 새듯이 수양이 없는 마음에는 탐욕의 손길이 뻗히기 쉽다 [간다라어 법구경 219-220]
수양이 잘 된 마음, 순결한 마음을 키워나가는 일이 좋은 집을 짓는 것에 비유되고 있다. 그 작업은 조심스럽게 행해져야 한다. 성냄이나 폭력이나 욕망과 비방과 악행 등 그밖의 정신적인 어둠을 나타내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스며들 틈이 없도록 해야 한다. 정신의 집이 잘 지어진 제자는 세상의 빛이 될 수 있고, 지상의 소금이 될 수 있으며, 평화를 만드는 자, 좋은 열매를 맺는 자가 될 수 있다.
'순결한 마음'이라는 용어는 기독교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불교적이다. 붓다는 순결한 마음에 이르는 많은 길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하지만 예수 역시 똑같은 길을 가르쳤음을 우리는 지금까지 보아 왔다. 이 순결한 마음에 대한 개념을 바탕으로 우리는 예수의 도덕적인 가르침들을 새롭게 감상해 볼 수 있다.
2. 여러 가지 비유들
산상수훈과 같은 짧고 힘있는 말씀 외에도 두 스승은 자신들의 메시지를 보다 긴 이야기와 비유로써 설명하였다. 그렇게 하여 영적인 진리와 일상생활의 진리를 비교하도록 하였다. 이제 필자는 두 스승의 가르침 속에서 비유나 우화가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아울러 둘의 유사성도 함께 따져 볼 것이다.
1)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일상생활로부터 비슷한 예를 찾아 자신의 가르침을 설명하는 것이 예수의 독특한 스타일이었다. 그러한 예를 우리는 예수의 비유라고 부르는데,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면 개천에 빠진다는 식의 짤막한 비유들도 많지만 그 가운데는 방탕한 아들의 이야기처럼 길고 복잡한 비유도 있다.
붓다도 예수처럼 많은 비유와 은유와 우화들을 사용하였다. (잡아함경의 그 수많은 비유들을 생각해 보라.) 이제 불교와 기독교 양쪽에서 발견되는 비유들을 몇 가지 살펴보겠는데, 먼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부터 시작하자.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고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기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말씀이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와 사탄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마태복음 4:3-8,4:14-20]
그대여 생각해 보라. 한 농부가 세 종류의 밭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기름진 밭이고, 하나는 보통의 밭이며, 나머지 하나는 황폐한 밭이라고 하자. 자,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씨앗을 뿌릴 때가 되었을 때 그 농부는 과연 어느 밭에 맨 먼저 씨앗을 뿌리겠는가?
스승이시여, 씨앗을 뿌리고자 하는 그 농부는 맨 먼저 기름진 밭에 씨앗을 뿌릴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보통의 밭에 씨앗을 뿌리려고 할 것입니다. 두 밭에 모두 씨앗을 뿌린 다음에도 그 농부는 황폐한 밭에는 씨앗을 뿌리려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대여, 나에게 입문한 나의 정식 제자들이 그 기름진 밭과 같도다. 나는 이들에게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시초도 훌륭하고 중간에도 훌륭하고 맨 나중에도 훌륭한 진리를 가르친다. 왜냐하면 이들은 나를 섬으로 삼고, 나를 토굴로 삼고, 나를 요새로 삼고, 나를 피난처로 삼아 나와 함께 살기 때문이다.
또 그대여, 나의 평신도들이 바로 보통의 밭과 같다. 나는 그들에게 시초에 훌륭하고……훌륭한 진리를 가르친다.
또 그대여, 그 쓸모없고 황폐하고 소금기 많은 나쁜 밭이야말로 나와 다른 견해를 주장하는 떠돌이 은둔자들, 바라문들이다. 나는 그들에게도 시초에 훌륭하고…… 훌륭한 진리를 가르친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이 그 중에 단 한 문장만 이해해도 여러 날 동안 그들에게 이득이 되고 즐거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잡아함경 221-222]
두 이야기가 비유로 든 소재는 똑같다. 한 농부가 씨앗을 뿌리는데, 그 씨앗이 여러 종류의 밭에 떨어진다. 하지만 두 비유의 시각은 약간 다르다.
불교 측의 시각은 스승이 법문 석상에서 가지각색의 청중을 만난다는 것이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는 자신의 비유를 직접 제자들에게 해석해 준다.(어떤 학자들은 이 비유의 해석이 예수 자신이 행한 것이라기보다는 초기 기독교 사람들이 덧붙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일 그렇다면 이 비유가 좌절에도 불구하고 인내하면 좋은 보상을 받게 되리라는 것일지 모른다. 성경 속의 해석이 불교 측 문헌처럼 '밭'에 초점을 맞춘 반면에 이 해석은 '씨 뿌리는 자'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많은 종류의 제자들이 있다는 것이 그 비유의 시각이다. 어떤 제자는 많은 결실을 맺는 반면에 나머지 제자들은 사탄의 계략이나 또는 얕은 믿음 때문에 중도에서 떨어져 나간다. 이런 식으로 예수와 붓다는 가르침을 씨 뿌리는 일에 비유하고, 그 가르침을 듣는 청중의 능력을 다양한 밭에 비유하였다.
농사짓는 일에서 끌어낸 예수의 또 다른 비유가 있다. 이 비유 역시 붓다가 사용한 비유와 잘 비교된다.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마가복음 4:26-29]
비구들아, 여기에 한 농부가 있으니, 그는 밭을 잘 갈고, 씨앗을 잘 심어서, 물이 잘 드나들게 한다. 이세 가지 일이야말로 그 농부가 꼭 행해야 할 일이다. 비구들아, 그 농부가 대단한 마술을 지니고 있어서 "오늘 싹이 터서 내일이면 이삭이 패어라. 그리하여 모레면 추수할 수 있게 하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 일은 계절이 하는 일이다.
비구들아, 그대들 역시 "오늘이나 내일 또는 모레쯤엔 나의 마음이 아사바(불순한 것들)로부터 해방되리라."라고 말할 만큼 마술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라.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1.219]
붓다는 제자들을 농부에 비유하면서, 각자는 밭을 갈고 씨 뿌리고 가꾸는 세 가지 일을 해야만 하며, 그런 다음 그 '곡식'이 저절로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는 씨앗처럼 시작되어 이삭이 되고 잘 익은 곡식이 되어 추수 때가 이를 때까지 가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두 스승은 제자들에게 열심히 그리고 서둘러 일할 것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농부처럼 인내를 가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 하며, 붓다의 제자들은 영적인 완성을 이룰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려야만 한다. 다시 말해, 두 스승의 차이는 그들의 신학적인 차이에서 생겨난 것이다.
2) 탕자의 비유
방탕한 아들에 대한 불교 측의 비유는 초기 대승불교의 경전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법화경(法華經) 제 4장에 나온다. 이 법화경 속에서 붓다는 수제자 한 사람에게, 제자들도 미래의 언젠가는 붓다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제자들도 장차 열반의 축복뿐만 아니라 지고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이 새로운 약속에 고무되어 붓다의 또다른 수제자 세 명이 존경심을 품고 붓다에게 다가와 한 가지 비유를 말씀드리는데, 이 비유가 성경의 방탕한 아들에 대한 비유와 유사하다.
누가복음(15:11-32)에 나오는 이 방탕한 아들의 이야기는 독자들도 많이 들은 바가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에게 원망의 말을 하였다. 예수가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불평한 것이다.
그 불평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 중에 어느 한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또 예수는 잃어버린 동전을 찾은 여인의 기쁨을 비유로 든 다음에 이 유명한 탕자(蕩子)의 비유를 들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어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굶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서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그리하여 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찾아갔다. 아들이 골목 어귀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버지는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은 아버지께 이렇게 말하였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할 면목이 없나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하인들을 시켜 제일 좋은 옷을 꺼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겼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자방 잔치를 벌이면서 하는 말이,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하였다.
이때 맏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이 가까웠을 때에 음악소리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는 하인을 한 명 불러 무슨 일인가 물었다. 그리하여 동생이 돌아왔으며, 아버지가 기뻐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렸다는 말을 듣고 맏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 아버지가 나오자 맏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기생들과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까?" 그러자 아버지가 대답하였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앞에서 말했듯이, 제자들도 장차 깨달은 각자가 되리라는 붓다의 선언에 기쁨을 감추지 못한 제자들은 붓다에게 나아와 그 감격과 기쁨을 비유로서 표현한다.
법화경 신해품(信解品)에 기록된 이 비유에서 수제자 수부티[須부堤]는 붓다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서, 자신들이 붓다[覺者]의 '아들' 임을 알고 나서의 기쁨을 이렇게 묘사한다.
수부티는 "스승이시여, 저희가 비유를 들어 말하겠습니다"라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떤 젊은이가 어리석은 사람들의 꾐에 빠져 어렸을 때 집을 나가 쾌락을 찾아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 머지 않아 그는 돈이 떨어져 거지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의 아버지도 그리운 아들을 찾아서 집을 떠나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마침내 아버지는 한 도시에 정착하여 부유한 상인과 은행가가 되었으며, 군주처럼 넓은 토지를 갖고 살게 되었다.
거렁뱅이 아들은 품을 팔면서 이리저리 다니다가 어느 날 아버지가 사는 집에 오게 되었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를 몰라보고, 그토록 부유하게 사는 사람의 위엄에 놀라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보았으며, 하인을 보내 달아나는 거지를 데려오게 하였다. 자신들의 관계를 감춘 채 그 부자는 자기의 아들에게 토지에서 일을 하게하고 그 대신 음식을 제공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건강이 점차로 좋아지고 마음이 점점 트이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에게 합당한 일을 시켰다. 그리하여 몇 년 뒤 아버지가 죽을 무렵에 아들은 일꾼들의 총감독이 되어 있었다. 죽음이 임박한 어느 날 아버지는 아들을 시켜 친척과 국왕과 왕족과 모든 친구들을 모이게 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본래 내 아들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집을 나가 여러 곳으로 헤매 다녔습니다. 그동안 나는 아들을 찾기 위해 갖은 애를 썼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여기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을 이 아들에게 넘겨줍니다. 앞으로는 모든 일을 아들이 대신 맡아 할 것입니다."
아들은 뜻밖의 말을 듣고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예기치 않게 그에게 굴러들어온 이 행운과 과거의 불행을 비교하면서 말할 수 없이 감사하고 기뻤다.
이 이야기의 내용은 누가복음의 방탕한 아들에 대한 비유와 매우 비슷하다. 하지만 배경은 다르다.
누가복음의 편집에 따르면, 예수는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아들에게 가장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몇 가지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이 비유를 든다. 양치기가 잃었던 양을 되찾았을 때처럼, 여인이 동전을 되찾았을 때처럼, 또는 아버지가 집을 나간 아들을 되찾았을 때처럼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자식의 돌아옴을 기뻐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예수가 사용한 비유나 붓다의 제자들이 든 비유가 크게 다를바 없다.
하지만 붓다의 제자들은 깨달음의 약속이 자신들에게 준 기쁨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 비유를 사용하였다. 그 깨달음의 약속은 그들이 기대했던 바도 아니고, 또 그런 약속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스승이시여, 저희들은 오늘 뜻밖에 스승으로부터 전에는 들어 보지 못한 소리를 듣게 되어 놀랍고 기쁩니다. 이것은 저희들에게는 큰 수확입니다. 저희는 그토록 큰 보배가 저희에게 주어지리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고, 구하지도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었습니다."
이와 같이 불교 측 이야기는 받는 자의 관점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최고의 영적인 보물을 물려받는 상속자인 '아들'이 된 기쁨과 놀라움을 표현하는 데에 역점을 두고 있다.
누가복음의 방탕한 둘째 아들 이야기는 신약성경의 문맥에 잘 어울린다. 왜냐하면 맏아들의 불평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불평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 측 비유에는 둘째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없으며, 맏아들이 상징하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없다.(맏아들을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의 상징으로 취급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맏아들이 비록 질투심을 나타내긴 하지만 예수의 다른 비유들 속에 나타난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보다 훨씬 품위가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하나님의 율법에 충실한 유대인들을 맏아들이 상징하고 있으며, 아울러 맏아들의 불평은 율법에 충실하지 않는 자들을 받아들이는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불평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른다.)
간추려 말해서, 두 스승은 길든 짧든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에 비유를 잘 사용하였다. 어떤 형태든지 이들 두 스승이 사용한 비유적인 가르침들은 특히 그들이 만난 많은 사람들의 도덕적인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예수의 가르침의 형식적인 면에 있어서 비유들이 큰 역할을 했지만, 붓다 역시 이러한 형식의 설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붓다가 즐겨 사용했던 형식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인도에서 가타[게송]이라고 알려진 짧은 시(詩)의 형태였다. 붓다는 긴 산문적인 대답을 간단한 운문으로 줄여서 표현하는 데에 꽤나 능숙했던 것 같다.
비유를 사용한 것 말고도 두 스승의 또다른 주된 공통점은 기적(奇蹟)에 있다. 이제 그 기적에 대한 것을 살펴보자.
3. 여러 가지 기적들
예수와 관련된 기적들은 잘 알려져 있다. 복음서의 많은 부분이 기적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마가복음이 그렇다.
하지만 몇몇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지적한다. 즉, 특히 요한복음에도 그러한 것이 암시되어 있듯이 기적이란 것은 매우 특별하고 중요한 것이긴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특별한 징표가 없이는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신앙심 약한 자들을 위한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복음서 저자들을 포함하여 초기 기독교인들이 기적을 예수의 전도 사업중의 중요하고 본질적인 부분으로 생각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그리고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이며 기록된 최초의 신학자인 바울은 자신의 모든 신학이론을 한 가지 믿음에 기초를 두었는데, 그것은 바로 죽음에서 되살아난 예수의 기적적인 부활에 대한 믿음이었다.
현대에 와서 기독교가 기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신에 예수의 다른 가르침에 역점을 두고는 있지만, 지난 이십 세기 동안의 기독교 역사에서 기적은 수없이 되풀이 이야기되고, 덧칠되고, 극화(劇化)되었다.
기독교 사상과는 비교가 될 만큼 불교 측의 문헌들은 처음에 기적을 언급하는 것을 일부러 피했던 것 같다. 신자가 아닌 사람들을 위해 씌어진 고오타마 붓다에 대한 현대의 책자들도 붓다의 생애에서 일어난 기적적인 사건들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불교 사찰의 미술품이나 또한 선한 공덕의 보상에 대하여 전통적으로 전해져 오는 이야기들을 볼라치면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에서도 기적이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아가 붓다 사후에 기록된 긴 내용의 전통적인 붓다 전기들을 읽다 보면 책의 매 쪽마다 기적적인 사건들이 묘사되고 있다.
아주 초기에 씌어진 고오타마 붓다의 전기들 속에도 이곳저곳에서 기적에 대한 언급이 이루어지고 있다. 예수와 마찬가지로 고오타마도 수시로 기적을 행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제철이 아닌데 나무들이 꽃을 피운다든가 보석들이 땅에서 갖가지 솟아나는 등 특정한 기적적인 사건들이 때때로 고오타마 주변에 일어났다.
불교 문헌에 묘사된 기적들이 아주 초기의 기록에서 유래한 것인지 아닌지는 판가름하기 어렵다. 그것은 매우 까다로운 학문적인 문제이다. 정확히 말해 고오타마가 실제로 어떤 기적을 행했는지 아닌지는 결론내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인생에서 어떤 기적적인 사건들이 발생했을까? 이것은 예수의 기적에 대해서도 같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기적의 진실성 및 실제성에 대한 이야기는 제쳐 놓고, 우리는 여기서 불교와 기독교에서 두 스승과 그들의 제자들에 의해서 행해졌다고 주장하는 여러 가지 기적들을 비교해 보자.
두 스승의 기적을 비교하면서 필자는 먼저 '실제적인 기적'과 '남에게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한 기적'을 구별하고자 한다.(문헌들 자체에서는 이러한 구별을 찾아볼 수 없다.)
1) 실제적인 기적
먼저, 스승들이 매우 실제적인 목적을 위하여 행한 기적들이 있다. 기독교에서 여기에 가장 어울리고 보편적인 것은 병의 치료이다. 예수의 생애에서 일어난 다른 여러 가지 사건들을 설명하면서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가 특별한 때에 병자들을 치료하였음을 매우 진지하게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산상수훈의 도입부에서 누가복음은 예수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었으며, 아울러 그들에게서 '더러운 귀신'을 몰아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복음서가 육체적인 질병과 '영적인 병'(사악한 영들 때문에 생긴)을 구별하고 있다는 암시를 받을 수 있다.
예수는 그 두 종류의 병을 다 치료하였다. 예수 자신이 어떤 한 가지 방법만을 써서 병자들을 치료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예수는 때때로 자신의 입에서 침을 뱉아 병자의 몸에 문지름으로써 치료를 행하였다. 이 방법을 써서 예수는 벳새다의 소경 하나를 치료해 주었다.(마가복음 8:22-26)
붓다 역시 이것과 비슷한 치료를 적어도 한 번은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오타마가 태어난 지 이레 만에 어머니 마야가 죽자 대신 이모인 마하파자파티가 고오타마를 키우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이모가 왕자 고오타마의 새어머니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것은 당시 고오타마가 태어난 카필라 왕국의 풍습이었다. 그런데 고오타마가 출가하자마자 새어머니는 매일같이 슬픔의 눈물을 흘린 나머지 눈에 백내장이 생기고 말았다.(의학적으로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나중에 붓다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고오타마는 한 가지 큰 기적을 행하였다.(이것은 '쌍동이 기적'이라고 불리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겠다) 다시 말해, 고오타마의 몸의 상체에서 기적적으로 물이 솟아나온 것이다. 고오타마의 옛 아내(야소다라)가 그 물을 떠다가 눈먼 새어머니의 눈을 씻자 시력이 회복되었다.
불교도들은 이러한 기적이 붓다의 능력 때문에 일어났다고 말한다(불본행집경). 이 '능력'이라는 말은 그가 수많은 전생을 거치면서 쌓아 온 영적인 힘을 뜻한다. 만일 그 기적이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면 그들은 마땅히 그 기적이 하나님의 능력(또는 성령의 힘)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라고 적었을 것이다.
여기서 양측의 신학적인 배경의 차이가 또다시 두드러진다. 불교도들이 기적을 완전한 인간의 능력이나 선한 공덕의 힘으로 돌리는 반면에 성경은 그것을 인간이나 역사적인 사건들을 통하여 드러나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능력으로 돌리는 것이다. 결과는 비슷하지만, 결과에 대한 해석이 다른 것이다.
병자를 치료하는 기적이 붓다의 이야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스승의 사명에는 병자를 치료하는 일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이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에도 존재한다.
한 법구경에 붙여진 어떤 주석(註釋)을 보면 나병에 걸린 한 승려의 악취나는 상처를 붓다가 닦아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에 이어 다음의 설명이 이어진다. 그 옆에 인용된 성경의 문장은 예수가 처음으로 가르침을 펴기 전에 한 교회당에 들어가서 읽은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리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하게 하심이라 [누가복음 4:18-19]
여래(붓다)가 세상에 온 목적은 이들 가난하고 힘없고 보호자 없는 자들과 친구가 되기 위해서이다. 신체적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힘이 되기 위해서이다. 가난하고, 부모 잃고, 늙은 자들을 돕기 위해서이다. [법구경 주해 53쪽]
예수가 가르침을 펴고,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물리쳤다는 것을 복음서가 자주 기록하고 있듯이, 붓다의 전기 하나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 귀하신 이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실 때 말들이 울고, 코끼리들이 나팔을 불고, 공작새들이 춤추고, 뻐꾸기들이 울고, 악사가 없는데도 악기들이 저절로 연주되었으며, 보석들이 작은 상자속에서 소리를 내었다. 그 순간 장님들은 시력을 되찾고, 귀머거리는 듣게 되었으며, 미친 자들도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또한 독물에 중독된 사람은 독이 없어졌다. 그리하여 믿지 않던 자들이나 신심이 얕은 자들도 확신을 갖게 되었다. [불본행집경]
두 스승의 차이는 그들이 행한 기적의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기적을 행하는 방식에 있다. 예수는 적극적으로 치료 행위에 개입한 반면에, 붓다 주변에서는 붓다의 직접적인 개입 없이도 저절로 치료들이 행해졌다.
불교와 기독교 문헌에 기록된 또다른 종류의 실제적인 기적들이 있다. 순식간에 물질의 양을 증가시킨 예수의 기적이 바로 그러한 형태에 속한다. 마가복음은 예수가 한 번은 4천 명을 먹이기 위하여, 또 한 번은 5천 명을 먹이기 위하여 음식의 양을 기적적으로 증가시켰다고 전한다.
치료의 기적과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는 물질의 양을 불리는 기적이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않지만, 그러한 기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붓다의 전생 이야기들 중의 하나에 붙여진 주석자의 서문을 보면, 붓다가 한 구두쇠를 변화시키기 위한 실제적인 목적으로 일련의 증식(增殖)의 기적을 행해 보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이야기 자체가 흥미있을 뿐더러 후기 불교의 전형적인 이야기 형식을 취하고 있기에 여기에 그대로 그것을 옮겨 적는다.
매우 부유하면서도 또한 인색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남을 돕는 일에 쓰는 것을 참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그 재산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한 농부가 떡 한 조각을 맛있게 먹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 부자는 대개 형편없는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나머지 식량을 저장해 두는 편이지만, 그날따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충동이 일어 아내에게 꿀과 밀가루와 기름을 가져다가 떡을 조금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자식들과 하인들에게도 나누어 주지 않으려고 그와 아내는 몰래 집의 윗층으로 올라가 음식을 만들었다.
아주 먼 곳에서 이 구두쇠가 하는 짓을 지켜보고 있던 붓다는 그의 마음을 바꾸어 주기로 결심하였다. 이를 위하여 붓다는 한 제자에게 음식을 증가시키는 능력을 주어서 구두쇠의 집으로 보냈다.
그 제자는 하늘을 날아 그곳으로 갔다.(이것은 인도의 이야기에 나오는 성자가 공통적으로 행하는 기적이다.) 그리하여 구두쇠가 떡을 만들고 있는 비밀의 장소에 갑자기 모습을 나타내었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거지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구두쇠는 당장에 나가라고 호통을 쳤다. 그 승려가 나가지않겠다고 고집을 부리자 마침내 구두쇠는 그를 내보내기 위한 작전으로 아내에게 떡을 조금 떼어 그 승려에게 주라고 말했다. 아내가 떡을 조금 떼어 승려에게 내미는데, 갑자기 그 떡이 매우 커졌다.
이를 본 구두쇠는 그렇게 큰 떡을 줄 수 없다면서 자신이 직접 작은 양의 떡을 떼내었다. 그런데 그 떡 역시 다시 크게 부풀어 올랐으며, 이렇게 몇 차례나 반복되었다.
드디어 포기를 한 구두쇠는 비록 크긴 하지만 떡 한덩이를 승려에게 주어 버리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도저히 떡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마침내 몹시 지친 구두쇠는 마음이 달라져 승려의 자비 법문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승려는 그 구두쇠 부부를 데리고 순식간에 붓다와 5백 명의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그리고는 그 적은 양의 떡으로 그들을 모두 배불리 먹었으며, 그리고도 떡이 조금 남을 정도였다. 이에 깊은 감명을 받고 마음이 변화한 구두쇠 부부는 집으로 돌아와 자신들의 재산을 필요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기 시작하였다.[팔리어 본생경에 대한 주석 78]
이따금 자연계는 두 스승을 위하여 법칙을 바꾸었다. 이러한 기적은 특히 붓다의 이야기에 많이 등장한다.
붓다의 생애에는 나무들이 여러 가지 기적적인 방식으로 붓다와 관련을 맺는다. 붓다의 삶에서 일어난 네 가지 중요한 사건들이 모두 나무숲에서 일어났으며, 적어도 후기의 문헌에 따르면 이 나무들은 여러 가지 기적을 연출하였다.
붓다가 태어날 때 마야 부인이 출산시에 잡을 수 있도록 곁에 서 있던 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또 그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을 때에는 수많은 갖가지의 색의 꽃들이 그의 주변에 비처럼 뿌려졌다. 베나레스의 한 동산에서 최초로 법문을 시작할 때는 왕이 앉는 의자 하나가 기적적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가 죽을 무렵엔 나무들이 갑자기 꽃을 피웠다.
기적의 나무들이 또 있었다. 한 번은 붓다가 구덩이에 나무를 심자 즉시 그 나무에 열매가 열렸으며, 그 열매를 먹고 붓다는 병이 나았다.
순식간에 성장하여 열매를 맺는 이러한 과실수 이야기는 예수가 한 무화과나무에게 다가가 열매를 맺지 않았다고 저주를 퍼붓자 순식간에 시들어 버린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두 이야기가 그토록 다른 내용이긴 하지만, 둘 다 스승의 힘이 자연계에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말해 주고 있다.
두 스승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지 않았던 다른 기적들도 있다. 예를 들어 불교 경전들은 붓다 자신이든 그의 제자들이든, 성자가 하늘을 날아다닌 이야기를 자주 언급하고 있다.
붓다가 첫 번째 법문을 펴기 위하여 베나레스로 가던 도중에 갠지스 강을 건너야만 될 형편이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배삯을 지불할 아무런 것도 없었다. 뱃사공이 건네다 주기를 거부하자, 붓다는 물 위를 날아 강을 건넜다. 그것은 그의 위대한 공덕의 힘 때문에 가능했다.
반면에 예수는 죽은 사람을 무덤에서 살려내는 기적을 행하였다. 이러한 기적은 유대교에도 그 전례가 많았다. 이것은 치병(治病) 기적의 클라이막스라 할 수 있으며, 예수는 다른 병자들을 치료할 때와 똑같은 자비심과 애정을 바탕으로 이러한 기적을 행하였다.
2) 믿음의 기적
두 스승 모두 자신들이 단순한 마술사나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취급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특히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는 자신이 병을 치료해 준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남에게 알리지 말라고 누차 강조하였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일종의 '메시아의 비밀'을 감추기 위한, 다시 말해 비록 당분간만이라도 예수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숨기기 위한 전반적인 계획의 일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필자로서는 이렇게 생각하고 싶다. 예수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하여 떠돌이 신통력자의 이미지를 갖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그 이미지를 몰아내는 데에 그다지 성공하지 못하였다.
붓다는 신통력을 행사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그는 군중들에게 감명을 주기 위하여 신통력 따위를 부려서는 안 된다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붓다가 나란다성 바바리암라 동산에 머물러 있을 때였다. 하루는 케밧다[堅固]라는 남신도 한 사람이 붓다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 이토록 번화하고 잘 살고 있는 나란다 사람들이 부처님을 공경하며 믿고 있읍니다. 원컨대 부처님께서는 어떤 비구로 하여금 신통변화를 나타내 보이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이 성안에 사는 사람들이 더욱 부처님의 법을 믿고 공경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한 제자로 하여금 신통력을 부리게 해달라는 이러한 요청을 받자 붓다는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붓다는 그 사람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비구들에게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신통변화를 나타내 보이라고 가르친 일이 없다. 다만 한적한 곳에 앉아 도(道)를 생각하고, 공덕이 있거든 안으로 감추어 두고 허물이 있으면 몸소 드러내 놓으라고 가르칠 뿐이다."
그리고 나서 붓다는 자신이 알고 있는 세 가지 종류의 신통력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첫 번째 신통력은 신족통(神足通)이라는 것이다. 신족통이란, 한 몸으로 여러 몸을 나타내기도 숨기기도 한다. 또한 산과 장벽을 지나되 허공을 통과하는 것처럼 걸림이 없고, 땅속에 출몰하되 물 속에서처럼 자유로우며, 물 위로 다니되 땅 위와 같고, 허공에 앉되 날개 있는 새와 같다. 큰 신통력과 위력으로 해와 달을 손으로 만지고 육신을 가지고 범천(梵天)에 이르기도 한다.
그리고 두 번째 신통력인 타심통(他心通)이란, 남의 마음을 관찰하여 "너의 뜻은 이렇게 네 마음은 이렇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독심술과 같은 초능력을 말한다. 붓다는 이 두 가지 신통력을 영적인 완성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능히 해낼 수 있지만 남에게 믿음을 심어 주기 위하여 이러한 기적을 행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세 번째 신통력은 교계통(敎誡通)으로, 이것은 사람들에게 올바른 행동과 진리를 가르치고 훈계하는 일이다. 붓다의 말을 빌리면,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여 사문(沙門)이나 바라문(婆羅門)들에게 '그대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는 생각하지 말라. 이런 일은 하고 저런 일은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내버리고 저것을 취해라'와 같은 훈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모두 어둠을 떠나 밝음을 찾고 죄악을 버리고 공덕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예수가 비유를 즐겨 사용했듯이 붓다가 즐겨 사용했던 가르침의 한 방편을 엿볼 수 있다. 붓다는 한 단어나 문장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재해석하여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였다. 이 경우에도 그는 한 신도가 찾아와 제자들로 하여금 기적을 행사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자 그 신도에게 '기적(신통력)'의 의미를 재해석하여 가르침을 펴고 있다.
마찬가지로 예수 역시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기적('징표')을 보여 주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 대신 유대민족의 역사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이 어떻게 행동하기를 바라는지에 대한 많은 '징표'들을 제공해 준다고 지적하였다. 이렇게 의미를 재해석하여 의도된 결론을 얻어내는 방법은 붓다의 경우와 매우 비슷하다.
비록 예수와 붓다가 '남에게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한 기적'에 반대하긴 했어도,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문헌들에 따르면 그러한 기적들이 여러차례 행해졌다. 특히 후기의 불교 문헌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붓다와 그의 제자들은 물 위를 걷고, 공중을 날았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등의 기적을 행하였다.
깨달음을 얻은 다음 최초로 가르침을 펴기 시작할 무렵 붓다는 한 고행자인 카사파[마하가섭]와 그를 따르는 5백명의 제자들을 교화시키기 위하여 많은 기적을 행하였다.
예를 들어 나라 전체에 홍수가 났을 때 붓다는 대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저 물을 멈추게 하여 마른 땅을 걷는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불전) 그는 실제로 그렇게 하였다.
이에 카사파는 깊은 감명을 받고서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카사파와 그의 제자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붓다가 수많은 기적을 행했다는 것은 공인된 불교 경전 속에서 발견된다. 율장 건도부 대품 제1장 참조.)
가장 유명한 붓다의 기적은 소위 '쌍둥이 기적'이라는 것인데, 그는 이 기적을 깨달음을 얻은 뒤에 고향을 방문하였을 때를 비롯하여 여러 차례 행하였다. 그는 또한 육사외도(六師外道)라 불리는 당시의 여러 그릇된 종교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위대성을 나타내기 위해서도 그러한 기적을 행사하였다.
이것은 갈멜 산의 바알 신의 사제들 앞에서 선지자 엘리야가 보인 기적과 같은 것이다.
이 기적은 문헌에서 '쌍동이 기적'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붓다가 공중부양 상태에서 지상을 날면서 열과 차가운 물을 동시에 발산하였기 때문이다.
그때 그 귀하신 이께서는 야자나무 꼭대기보다 더 높은 공중에 서서 두 가지 모습의 여러 가지 기적을 행사하였다. 그는 신체의 아랫부분이 불꽃에 휩싸이면 상체에서 5백 줄기의 차가운 물이 뿜어져 나왔으며, 상체가 불꽃에 휩싸이면 하체에서 역시 5백 줄기의 차가운 물이 뿜어져 나왔다. [불본행집경]
(종교학자 알버트 에드먼즈는 붓다의 쌍둥이 기적을 요한복음 7장 37절에 기록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라는 예수의 말과 비교한다. 요한복음의 이 기록은 성서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그 생수가 예수 자신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그를 믿는 자에게서 흘러나온다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며, 게다가 예수가 언급한 성경이라는 것이 어떤 경전을 말하는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흥미 있는 것은 생수의 강이 '그 배에서' 흘러나온다고 되어 있는 점이다. 에드먼즈는 이것을 불교 경전의 '신체의 아랫부분'과 비교한다. 여기서의 문제는 누구나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성경에서 불꽃이나 불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는 그의 '배'에서 물을 뿜어내는 기적을 실제로 연출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성경의 문맥에서는 물의 기적은 성령의 도래와 관계가 있다. 또한 모세가 히브리의 광야에 머물 때 바위를 지팡이로 쳐서 물줄기가 뿜어나오게 한 것과 관계가 있다. 불교에서는 스승에게서 뿜어져 나온 그 물과 관련된 상징이 따로 있지 않다.)
남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고, 그것을 통해서 상대방을 변화시키기 위한 기적으로서 필자는 붓다가 살인강도인 앙굴리말라(손가락뼈 목걸이)의 마음을 변화시킬 때 사용한 방법을 예로 들고 싶다.(이 기적에 대해서는 예수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두 강도를 개종시킨 일과 비교해서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가 있다.)
붓다는 그 살인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한 가지 기적을 행사하였다. 즉, 지면에서 약간 떠오른 상태에서 계속해서 살인자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불교 경전뿐만 아니라 인도 문헌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또 다른 공중부양술은 물 위를 걷거나, 아니면 수면 위에 떠서 걸어가는 일이다. 붓다 자신도 이러한 신통술을 이따금 사용하였다.
하지만 다음에 소개하는 불교의 이야기는 제자라 해도 신념이 강하면 물 위를 걸을 수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또한 성경에도 여기에 필적하는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사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 때문에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마태복음 14:22-33]
그는 저녁 무렵에 아키라바티 강가에 도착하였다. 뱃사공이 배를 강가에서 거두어 들이고 법문을 들으러 갔기 때문에 그 제자는 나루에서 배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오로지 붓다에 대해서만 명상하면서 물 위를 걸어 강을 건넜다. 그의 발은 물에 젖지 않았다. 그는 마치 땅 위를 걷듯이 자연스럽게 물위를 걸었다. 하지만 강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그는 거센 물결을 보았다. 그러자 붓다에 대한 명상이 흔들리면서 그의 발이 물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다시금 붓다에 대한 명상을 강하게 하여 그는 물 위를 걸어 제타바나로 가서 스승에게 인사를 한 뒤 그 옆에 앉았다. [본생경 190]
두 경우 모두 제자는 스승에 대한 믿음 또는 명상을 통하여 물 위를 걸었다. 그러다가 두려움이 그 믿음과 명상을 흔들어 놓자 제자는 물속으로 빠지기 시작하였다. 베드로의 믿음은 바람 때문에 흔들렸고, 붓다의 제자는 물결에 의해서 명상의 방해를 받았다. 그러다가 두 경우 모두 스승에 대한 믿음과 명상이 회복되자 공중부양술도 다시 가능해졌다.
이렇게 두드러진 유사점말고도 이야기의 세부적인 사항들 역시 비슷한 점이 많다. 배가 등장한다든가 스승의 가르침이 이야기의 배경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성경에는 예수가 물 위를 걸은 것으로 보고되어 있는 반면에 붓다는 이 경우에 물 위를 걷는 신통력을 연출하지 않았다.
믿음에 의해서 기적이 행해진다는 사상은 두 종교의 공통된 사상이다. 예를 들어 신념이나 집중, 삼매경과 명상 상태에서는 산이라도 옮기고 부술 수 있다는 붓다의 말씀은 똑같은 믿음의 힘을 이야기한 예수의 말씀과 비교된다.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태복음 14:28-33]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를 갖춘 승려는 산 중의 산인 히말라야까지도 부술 수 있다. 그 여섯 가지란 무엇이냐? 비구들이여, 그것은 모두 깊은 명상 상태와 관련된 것이다. [증일아함경 222]
이 두 문장을 통해서도 유사한 점을 발견하는 반면에, 또다시 신학적인 관점과 업(業)의 관점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성경의 문장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철저한 사람은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해낼 것이라는 뜻으로 보여진다.
반면에 불경의 문장은 그러한 신학적인 의미가 전혀 없으며, 자신의 정신력을 한 가지에 집중시키고 완벽한 명상 상태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기적을 성취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두 스승은 마음의 특별하고도 불가사의한 힘을 강조하기 위하여 산을 옮긴다거나 부순다는 과장법을 사용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관점에서 그 과장법을 사용하고 있다.
스승들은 기적을 사용한다. 그것은 붓다와 예수의 생애에 대한 일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러나 그들이 행한 실제적인 기적의 세부적인 내용이나, 기적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행한 가르침도 분명치 않다.
예수는 그러한 기적들을 하나님에게 돌렸으며, 그의 제자들 역시 그러한 기적을 행사할 수 있게 될 것을 기대했던 것 같다.
반면에 붓다는 제자들도 영적인 완성을 이루면 충분히 기적을 행사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지만,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왜냐하면 그는 기적 자체가 아니라 그의 메시지에 초점이 맞추어지길 원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편상의 차이는 결국 두 종교의 차이를 낳았다. 기독교에서는 신자들이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라고 요구하는 반면에, 불교에서는 신통술을 부리거나 기적을 행사하는 것을 철저히 금지시킨 나머지 신통술을 부리는 자는 승단에서 추방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지난 수세기 동안 기독교는 그들의 기적을 유지하는 데에 애를 먹었으며, 반대로 불교는 신자들이 그들의 성자들에게 여러 가지 기적적인 일을 갖다 붙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 두 스승의 도덕적인 가르침이나, 그 가르침에 사용된 여러 가지 비유들, 기적들의 유사성은 붓다와 예수 두 스승이 결국 하나의 메시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잘 말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