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지성에 관하여 2
9. 열린 마음
10. 내면적인 아름다움
11. 순응과 저항
12. 순수한 자신감
13. 평등과 자유
14. 자기 수련
15. 협력과 부담
16. 마음을 새롭게 하기
9. 열린 마음
배움이 무엇인지 한 번 따져보면 아주 재미있을 것 같군요. 우리는 책을 통해, 혹은 선생님으로부터 수학, 지리, 역사 같은 걸 배웁니다. 우리는 런던이 어디에 있는지, 모스크바, 혹은 뉴욕이 어디에 있는지 배웁니다. 우리는 기계를 어떻게 작동하느냐, 새가 어떻게 집을 짓고 새끼를 돌보느냐 등등에 대해 배웁니다. 관찰과 연구를 통해서 배웁니다. 이것은 배움의 한 갈래입니다.
그러나 갈래가 다른 배움, 즉 경험을 통한 배움도 있지 않습니까? 조용한 수면에 돛 그림자를 드리우고 강 위를 미끄러지는 배를 보았을 때, 이 경험은 또 얼마나 굉장한 것입니까? 이런 경험을 하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우리들의 마음은 지식을 저장하듯이 그런 종류의 경험을 저장합니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때쯤 같은 종류의 경험-기쁨의 경험, 우리 삶에는 참으로 드문 평화의 인식-을 기대하면서 배를 보러 강가로 나갑니다. 이처럼 마음은 부지런히 경험을 저장합니다. 우리를 생각하게 하는 것은, 기억으로 저장된 경험이 아닐는지요.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은 기억의 반응입니다. 강 위를 미끄러지는 배를 보고 기쁨을 느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경험을 기억으로 저장했다가 이를 반복시켜보려 하는 것입니다. 생각의 과정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내 말 맞습니까?
놀랐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제대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얼마 안 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저 책에서 읽은 것, 누구한테서 들었던 것만 되풀이해서 생각합니다. 혹은, 생각을 하되 극히 제한된 경험의 산물만 생각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두루 여행하여 엄청나게 많은 경험을 쌓고, 우리와는 다른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의 관습, 종교, 몸짓을 관찰하고는 이 모든 것을 기억에다 저장합니다.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판단하고 선택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삶에 대한 합리적인 자세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생각은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아주 좁은 영역에만 국한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강 위의 배, '화장터'로 실려가는 시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마을 아낙네를 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이 모든 인상은 우리의 경험에 묻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 무신경하기 때문에 이러한 인상은 우리 내부로 침잠하여 익지 못합니다. 우리가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할 때, 비로소 전혀 다른 종류의 생각이 시작됩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만든 틀 속에 갇히지 않습니다.
이러저러한 믿음에 발목을 잡히고 있을 경우 여러분은 독특한 편견 혹은 전통을 통해 사물을 보게 됩니다. 이로써는 실체와 접촉할 수 없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읍내로 가는 시골 아낙네를 본 적이 있습니까? 본 적이 있다면,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어떻게 느꼈습니까? 혹은 이런 여자를 너무 자주 봐 와서 별 느낌이 없었거나,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은 아닌 지요? 자 어떤 일, 어떤 사물을 처음 본다고 합시다.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은 본 것을 자동적으로 자신의 편견에 따라 해석합니다. 내 말 맞지요? 여러분은,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자본주의자, 혹은 그 밖의 무슨 주의자로서 여러분 틀에 따라 이 일을 경험합니다. 반면에, 여러분이 어떤 주의자도 아니고, 어떤 이념이나 믿음의 색안경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이 사물과 접촉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이 관찰하고 있는 사물 사이의 놀라운 관계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편견이나 선입견이 없고 마음이 열려 있다면, 주위의 일들이 참으로 놀랍고 싱싱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젊을 때 이 모든 일들을 잘 보아 두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강물에 뜬 배를 잘 보세요. 지나가는 기차를 관찰하세요. 무거운 짐을 진 농부를 보세요. 부자의 오만, 목사와 거물들을 비롯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뽐내는 모습을 잘 보아 두세요. 그저 바라보되, 평가하면 안 됩니다. 평가하는 순간, 여러분과 그 사상과의 관계는 끝나고 맙니다. 여러분 자신과 그 사상 사이에가 장벽을 세우는 셈입니다. 그러나 그저 관찰만 하면 여러분은 이 사람들, 이러한 사상들과 직접적이 관계를 갖게 됩니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예리하게 관찰하되 판단도 하지 않고, 결론도 내리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생각은 놀라우리만큼 예리해집니다. 이 때 여러분은 끊임없이 배우는 경지에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위에는 어디서나 태어남과 죽음, 돈과 지위와 권력을 둘러싼 투쟁,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끝없는 작용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이 모든 게 다 대체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가져 볼 법하지 않습니까? 우리들 대부분은 답을 얻어내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현상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듣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정치서적 혹은 종교 서적을 들추거나 누구에게 설명을 구합니다. 그러나 이를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삶이라는 것은 책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 대한 추종, 혹은 어떤 형태의 기도를 통해서 납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나 나나 스스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것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싱싱하게 살아 있을 때, 깨어 있을 때, 지켜볼 때, 관찰할 때,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일 때만 가능합니다. 이럴 때라야만 비로소 우리는 참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행합니다. 가슴에 사랑이 없기 때문이지요. 사랑은, 여러분과 다른 사람 사이에 장벽이 없을 때, 다른 사람들은 만나고 관찰하되 평가하지 않을 때, 강물에 뜬 배를 그저 바라보면서 그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을 때만 여러분 가슴에 싹틉니다. 편견이, 있는 그대로 사물을 관찰하는 여러분 시야를 흐리지 못하게 하세요. 그저 관찰하세요. 그러면 이 단순한 관찰이, 나무, 새, 걸어가고, 일하고, 웃는 사람에 대한 자각이 여러분의 내부에서 무엇인가를 변하게 할 것입니다. 이 엄청난 변화가 여러분의 가슴속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여러분의 가슴에서 사랑이 샘솟지 않으면 여러분의 인생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육자들은 먼저 여러분을 가르쳐 이러한 것들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도록 해야 합니다.
--왜 우리는 사치스럽게 살고 싶어하는지요?
크리슈나무르티: 사치라니, 무슨 뜻으로 한 말이지요? 깨끗한 옷을 입고, 늘 목욕해서 몸을 깨끗이 하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이걸 사치라고 하는 것입니까? 굶기를 밥먹듯이 하는 사람, 누더기를 걸치고 다니는 사람, 매일 목욕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이런 게 사치일 수 있겠지요. 따라서 사치의 정의는 당사자의 욕망에 따라 달라집니다. 요컨대 정도 문제인 셈이지요.
자, 여러분이 사치를 좋아할 경우, 편안한 것을 좋아해서 늘 소파나 푹신푹신한 걸상에만 앉으려 할 경우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잠들어 버립니다. 육체적으로는 어느 정도까지는 편안한 게 좋습니다. 그러나 편안한 것을 강조하다 보면, 마음은 잠들어 버립니다. 뚱뚱한 사람들을 관찰해본 적이 있는지요? 이들 대부분은 늘 행복합니다. 두꺼운 지방층을 뚫고 들어가 그들을 괴롭힐 수 있을 만한 것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이건 육체적인 조건입니다만 마음에도 이러한 지방층이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은 질문받는 걸 싫어합니다. 방해받는 걸 싫어합니다. 이러한 마음은 곧 잠에 빠져듭니다. 지금 우리가 교육이라고 부르는 것도 학생들을 잠재웁니다. 학생이 날카로운 질문,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는 질문을 던지면 선생님은 곧 당황하면서, "하던 공부나 계속하자."하고 얼버무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형태의 안락함에 집착할 때, 특정 습관, 믿음, 혹은 우리가 내 집이라고 부르는 특정 장소에 집착할 때 우리 마음은 잠들기 시작합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사치스럽게 사는지 여부를 묻는 것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활동하는 마음, 깨어 있는 마음, 지켜보는 마음은 안락한 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의 소유자에게 사치라는 것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옷이 없어 헐벗는다고 해서 마음이 깨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겉으로 보면 참으로 단순하게 사는 산야시는 내적으로는 덕성을 함양하고 진리와 신에게 접근하는 등 매우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적으로 단순하고 엄격해지는 일입니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려면, 믿음과 두려움과 갖가지 욕망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마음의 소유자만이 제대로 생각할 수 있고 제대로 탐색하고 제대로 진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환경과 싸우고 있는데도 우리 삶에 평화가 있을 수 있는 것인지요?
크리슈나무르티: 환경이란 원래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던가요? 환경이란 허물어뜨려야 할 대상이 아니던가요? 부모님의 믿음, 여러분의 사회적 배경, 여러분의 관습, 여러분의 먹는 음식의 종류, 종교, 사제, 부자와 가난한 사람 등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과 사물들-이 모든 것이 여러분의 환경입니다. 그렇다면 의문을 제기하고 저항함으로써 마땅히 이 환경을 허물어뜨려야 하지 않겠어요? 환경에 저항하지 않고 그저 받아들이고만 있으면 평화롭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의 평화입니다. 반면에 이 환경의 틀을 부수려고 몸부림치고, 무엇이 참인지 스스로 찾아내려고 애를 써 보십시요. 여러분은 괴어 있는 평화가 아닌, 말하자면 죽음의 평화와는 전혀 다른 평화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환경과의 싸움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싸워야 합니다. 따라서 평화라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환경을 이해하고 환경과 싸우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평화가 옵니다. 그러나 환경을 수용하면서 평화를 찾는다면 여러분의 의식은 잠들고 맙니다. 그것은 죽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젊은 시절부터 저항에 길들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저항하지 않으면 썩을 뿐입니다.
--선생님은 행복하신가요? 아니면 행복하지 못하신가요?
크리슈나무르티: 모르겠어요.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날아가버리지 않던가요? 신나게 놀 때, 재미있어서 마구 소리를 지를 때, 그 재미있다는 걸 의식하니까 어떻게 되던가요? 재미가 없어집니다. 그런 경험 해 본 적 있습니까? 행복이라는 것은 의식의 범주 안에 드는 것이 아닙니다.
착해지려고 하니까 착해집디까? 착하게 군다는 게 어디 뜻대로 되는 것입디까? 착하다는 상태는 보고, 관찰하고, 이해할 때 자연스럽게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이라는 것도 의식하는 순간에 창밖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행복을 찾는다는 건 어리석은 짓입니다. 왜? 행복하지 않을 때만 거기에 있기 때문이지요.
겸손이란 말이 무슨 뜻이지 아시지요? 여러분은 겸손이라는 미덕을 자신의 안에서 자라게 할 수 있습니까? 매일 아침, 겸손해야지, 이렇게 말하는 게 겸손입니까? 아니면 겸손이란, 여러분의 자만심이나 허영심을 버릴 때 생기지 않던가요? 이처럼 행복을 가로막는 요소가 사라졌을 때, 자신의 근심과 절망, 자신의 안락에 대한 추구를 포기했을 때 행복은 거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애써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 여러분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습니까? 왜 나와 토론하려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알 텐데요. 아무리 서툴더라도 자기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건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에게 의미가 있는 일이니까요. 내가 그 이유를 가르쳐 드리지요. 지금 서툴더라도 생각과 느낌을 나타내기에 버릇들여야 어른이 되어서도 환경이나 부모, 사회, 전통에 짓눌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여러분의 선생님들은 여러분의 묻는 태도를 장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생각은 묻지 않습니다.
--우리는 왜 웁니까? 슬픔이란 무엇입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조그만 소년이, 우리는 왜 울며, 슬픔이라는 게 무엇인지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떨 때 웁니까? 장난감을 빼앗겼을 때, 다쳤을 때, 게임에서 이기지 못했을 때, 선생님이나 부모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들었을 때, 매를 맞았을 때 울겠지요. 나이를 먹으면 울 기회가 줄어듭니다. 말하자면 덜 울게 됩니다. 삶에 대해 그만큼 단단해져 가기 때문이지요. 나이 들어서 우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어릴 때의 그 감수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죠. 그러나, 슬픔이라는 것은 반드시 무엇을 잃었기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빼앗긴 데서, 절망한 데서 오는 것만도 아닙니다. 슬픔이라는 것은 이보다 훨씬 깊은 감정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해하지 못할 때 그런 감정이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해하지 못할 때 몹시 슬퍼지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마음의 장벽을 투과하지 못할 때 우리는 비참해집니다.
--어떻게 하면 갈등을 겪지 않고도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습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왜 갈등을 두려워합니까? 여러분은 모두 갈등이라는 것을 무시무시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군요. 지금 여러분과 나는 서로 갈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나는 여러분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지만, 여러분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기에 갈등이 있고 알력이 있습니다. 알력, 갈등, 장해 이게 무엇이 나쁩니까? 여러분은 마땅히 장해에 부딪쳐야 하는 게 아니던가요? 갈등을 피하려고 하면 완전한 인간이 되는 데 필요한 통합 작용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갈등을 이겨내는 데, 갈등을 이해하는 데만 통합이 있을 수 있습니다.
통합이라는 것은 참으로 이루기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전존재가 여러분의 행위, 말, 생각 안에서 완전한 통일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관계-사회와의 관계, 가난한 사람, 마을 사람, 거지 백만장자와 정부 고관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 없이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관계를 이해하자면 이 관계와 싸워야 합니다. 의문을 제기해야 합니다. 그저 전통, 여러분의 부모님, 사제, 종교, 사회의 경제 체계가 확립해 놓은 가치관을 받아들이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저항하지 않고는 절대로 통합을 이룰 수 없습니다.
10. 내면적인 아름다움
푸른 벌판, 지는 태양, 잔잔한 강물, 혹은 눈 덮인 산봉우리 같은 것에서 형용하기 어려운 고요와 아름다움을 느껴 본 경험이 한두번 쯤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입니까? 아름다움이란 단순히 느낌일 뿐일까요? 아니면 아름다움이란 우리의 지각 너머에 존재하는 것일까요? 옷에 대해 야하지 않은 취미를 갖는 일, 조화가 잘 되는 색깔을 쓰는 일, 위엄있게 처신하는 일, 조용조용히 말하면서 자신의 심적 평화를 깨뜨리지 않는 일, 이 모든 일이 다 아름답지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시인이 시를 쓰듯이, 내면 상태의 외적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강물에 비치는 푸른 벌판을 보고도 아무런 아름다움도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냥 보아 넘길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어부처럼 매일 물 위를 낮게 나는 제비를 본다면 이 정경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꼈을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어떤 변화가 일어나길래,, "아, 참 아름답다."고 말하게 됩니까? 무엇이 아름다움에 대한 내적 자각을 구성합니까? 외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취미에 맞는 옷, 좋은 그림, 맵시 있는 가구, 혹은 가구가 하나도 놓이지 않았는데도 공간의 배분이 아름다운 벽, 모양이 완벽한 창, 이런 것들도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나는 이런 아름다움을 얘기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무엇이 이런 내적 아름다움을 구성하는지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적 아름다움에 눈뜨기 위해서는 완벽한 자기방기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어디에 사로잡히지 않고, 제한을 받지도 말아야 하며, 방어하는 일, 저항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소박하지 못한 자기 방기는 혼돈일 뿐입니다. 소박하다는 것, 작은 것에 만족하되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 아시겠지요? 깊고 내면적인 소박함과 자기 방기가 있어야 합니다. 소박하다는 것은 단순하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더 묻지 않고 더 얻으려 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박한 자기 방기, 여기에서 단순한 것에 대한 기초가 생깁니다. 창조적인 아름다움은 바로 이 단순성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단순할 수도 소박할 수도 없습니다. 입으로는 단순성과 소박성을 말할 테지만, 사랑이 없으면 늘 강요당한다는 느낌에 시달립니다. 따라서 이런 데 자기 방기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자신을 방기할 때, 완전히 잊어버릴 때만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 안에서 창조적 아름다움이라는 상태가 시작됩니다.
아름다움에는 형태의 아름다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면적 아름다움이 없으면 형태의 아름다움이라는 감각적인 느낌은 타락과 분열을 지향할 뿐입니다. 이 내면적 아름다움은, 사람들, 그리고 이 땅의 모든 것들에게 사랑을 느낄 때만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그리고 이 사랑에서, 남을 생각하고, 남을 주시하고 인내하는 풍부한 감정이 생겨납니다. 여러분은 가수로서 혹은 시인으로서 완벽한 기예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거나 언어를 잘 다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면에 이 창조적 아름다움이 없으면 여러분 재능은 별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불행히도 우리들 대부분은 나날이 기술자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험을 치르고, 생활 수단으로 이 기술 저 기술을 습득합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상태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기술만 습득하거나 능력만 계발한다면 이 세상은 나날이 추악해져가고 어지러워질 것입니다. 우리가 내면의 창조적 아름다움을 일깨우고 이를 밖으로 표현해야 질서가 생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술을 습득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이러자면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아무 제한도 받지 않으며, 저항하거나 방어하지 말고, 우리들 자신을 완전히 방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을 방기할 수 있는 것은 소박한 때, 즉 내적으로 단순한 때뿐입니다. 외적으로는 단순해지기 쉽습니다. 몇 점 안 되는 옷으로 만족하고 하루 한 끼 식사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소박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만으로 광대 무변하게 경험할 수 있을 때, 경험하는 데도 여전히 단순할 때만 우리는 소박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는, 우리의 마음이 더 이상 더 많은 것에 연연해하지 않을 때, 시간이 흐르면 더 가질 수 있고,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릴 때만 가능합니다.
내 말이 이해하기가 좀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건 아주 중요합니다. 아시겠지만 기술자는 창조자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기술자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아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창조자들이 아닙니다. 미국에는, 사람이 풀려면 하루 10시간씩 수백년 걸리는 수학 문제를 단 몇 분만에 풀어내는 계산기가 있습니다. 이런 엄청난 기계들이 속속 개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계가 창조자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하루가 다르게 기계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저항해도 기계의 한계 안에서만 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저항이 아닙니다.
창조적일 수 있다는 게 이처럼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자기 방기를 통해서만 창조적일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어떤 것도 강요당하지 않을 때, 무엇이 되지 못해도, 무엇을 얻지 못해도, 어디에 이르지 못해도 두려워하지 않을 때만 창조적일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소박함과 단순성이 함께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 모든 것이 아름다움이며 창조적인 상태입니다.
--몸이 죽은 뒤에도 영혼은 살아 있습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정말 알고 싶습니까? 어떻게 알아 낼 생각입니까? 영혼에 대한 샹카라나 부처나 예수의 말씀을 읽어서요? 여러분이 섬기는 지도자나 성자의 말씀을 들어서요? 그 사람들 모두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잖아요? 이런 걸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말하자면 당신의 마음은 의문을 제기할 입장에 놓여 있습니까?
먼저, 육체의 사후에도 살아 있을, 그 영혼이라는 게 있는지 없는지 한 번 따져 보아야겠군요, 영혼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영혼이라는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니면, 단지 영혼이라는 게 있다는 말을 들은 데 지나지 않습니까? 부모님, 여러분이 섬기는 종교의 사제, 특정 서적, 문화 환경으로부터 영혼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를 받아들였습니까?
영혼이라는 말은 단지 물질적 실존 너머 존재하는 것이란 뜻이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육체, 성격, 성향, 덕성 같은 것은 아시다시피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초월해서 영혼이라는 게 있다이거죠. 그런 상태가 정말 존재한다면 이것은 정말 영적인 것,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영적이 것이 죽음을 초월해서 존재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게 질문의 한 부분입니다.
이 질문의 다른 부분은, 죽음이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사후에도 존재하는 게 있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짜 중요한 질문은, 살아 있으면서 죽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느냐는 거지요. 누가, 사후의 삶이 있다거니 없다거니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당신은 여전히 모릅니다. 하지만 죽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죽어 본 다음에 아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건장하고 힘차게 살면서, 생각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역시 교육이 해야 할 일의 일부분입니다.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수학, 역사, 지리에 능통해지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이 죽음이라는 엄청난 것을 이해할 능력도 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이해하되, 육체적으로 죽은 다음에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에, 웃고, 나무에 오르고, 배를 젓고, 헤엄치고 할 수 있는 동안에 이해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죽음이란 미지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동안에 이 미지의 것들을 아는 일입니다.
--우리가 병들어 자리에 누우면 왜 우리 부모는 우리들 걱정을 그렇게 합니까?
크리슈나무르티: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자식을 보살피고 걱정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이 걱정할 때 그 걱정은 아이들에게보다는 그들 자신에게 쏠리고 있습니다. 부모들은 아들이나 딸이 죽으면 우리는 어찌 살꼬, 하는 생각에서 여러분이 죽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부모님들이 자식을 사랑하면 어떻게 되었어야 하는지 아십니까? 부모님들이 여러분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여러분에게 두려워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야만 했습니다. 여러분이 건강하고 행복한 인간으로 사는 걸 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전쟁도 없는 사회, 빈곤도 없는 세상, 여러분은 물론이고 여러분 주위의 마을 사람들, 읍내 사람들, 심지어는 동물도 죽이지 않는 사회를 이루어 놓았어야 했습니다. 전쟁이 있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부모님들이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식들에게 자기네 전 존재를 던져 넣었습니다. 그들은 자식을 통해 그들의 삶이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몸져 누우면 부모님들이 걱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관심을 쏟는 것은 그들 자신의 슬픔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들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재산, 땅, 이름, 재물, 그리고 가족은 한 개인이 삶을 지속하는 수단입니다. 지속하는 수단은 때로 영원한 것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식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부모님들은 놀라고 슬픔에 빠집니다. 그들이 주로 관심 갖는 바가 그들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부모님들이 진심으로 자식에게 관심을 가졌더라면 사회는 하룻밤에 변할 수 있습니다. 그랬더라면 우리는 전혀 다른 교육을 받았을 터이고, 전혀 다른 가정, 전쟁이 없는 세상에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신전은 마땅히 참배자들에게 개방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신전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예배하는 곳이자, 인간의 마음이 생각해 내었고 인간의 손이 돌로 새긴 이미지인 신의 상징이 있는 곳입니다. 그 돌, 그 상은 신이 아니지요? 그렇지요? 그건 상징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상징이란 햇빛아래 선 우리들의 그림자 같은 것이고요. 그림자는 우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신전안에 있는 이 상, 이 상징은 신이 아닙니다. 진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신전에 들어가든 안 들어가든 그게 뭐 대수로운 일입니까? 뭣 때문에 그런 일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합니까? 진리는 마른 나뭇잎 아래 있을 수 있습니다. 길옆의 돌에도 깃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석양을 되비추는 수면에, 구름에, 짐을 지고 가는 여인의 미소에도 깃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도처에 실체가 있는데 무엇 하러 신전에 들어갑니까? 대체로 보아 신전에는 신이나 진리가 없습니다. 신전은 인간이 두려움에 못 이겨서 만든 것일 따름입니다. 신전은, 안전을 도모하자는 욕심, 종파와 계급 간의 분열을 그 바탕으로 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사는 인류입니다. 신을 찾기 위해서라면 신전은 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전은 인류를 분열시키니까요. 기독교의 교회, 최고의 모스크, 힌두교의 사원, 이 모든 신전이 인류를 분열시킵니다. 따라서 신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이런 곳에서 볼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든 신전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은 정치적인 문제에 해당합니다. 현실성이 없는 것이지요.
--규율은 우리 삶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습니까?
크리슈나무르티: 굉장한 역할을 맡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삶에 상당히 큰 부분이 이것은 하되 저것은 하지 말라는 규율과 관계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일어나야 할 것인가, 무엇은 먹고 무엇은 먹지 말아야 할 것인가, 무엇은 알아야 하고 무엇은 알면 안 되는 것인가에 대해 늘 지시를 받습니다. 여러분은 늘 읽어야 한다, 학교에 가야 한다, 시험을 보아야 한다는 등의 강요에 시달립니다. 여러분의 부모님, 선생님, 사회, 관습, 성전, 이 모두가 여러분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정해 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은 이러한 규율에 매여 있습니다. 내 말 틀렸습니까? 여러분은 하라와 하지 말라의 포로입니다. 이러한 규율은 여러분이 갇힌 우리의 철창입니다.
자, 규율에 갇힌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요? 여러분이 무엇을 두려워할 때, 여러분이 어떤 일에 저항할 때는 규율이 있어야 합니다. 이럴 때 여러분은 스스로를 자제하고 단속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발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렇게 합니다. 하지 않으면 사회-부모님, 선생님, 관습, 성전으로서의 사회-가 대신해 줍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의문을 제기하고 탐구하는데도, 두려움을 모르는 채 배우고 이해하는데도 규율이라는 게 필요합니까? 배우고 이해하면, 여기에서 참 질서가 생겨납니다. 이 질서는 강요나 강제에 의한 질서가 아닙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두려움 때문에 규율에 묶이고 사회의 강요에 굴복하면서,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말에 꼼짝 못 하면서 자유나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자주성은 이것으로 끝장입니다. 문화의 뿌리가 깊을수록, 여러분을 규율의 틈 안으로 밀어넣고,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규정하는 전통의 무게는 그만큼 더한 법입니다. 무게에 눌리면, 여러분은 증기 압착기에 깔린 사람처럼 심리적으로 납작해지고 맙니다. 실제로 인도에서 자주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전통의 무게가 어쩌나 엄청난지 여러분의 자주성은 깡그리 파괴당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개인일 수 없습니다. 네, 여러분은 사회라고 하는 기계의 일부가 되었고, 이로써 만족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여러분은 저항하지 않습니다. 터지지도 않고 인습의 틀을 깨뜨리지도 않습니다. 부모님은 여러분이 저항하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선생님 역시 여러분이 이 인습의 틀을 깨뜨리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육은 여러분을 기존의 틀 안에 맞게 길들이는 것만 겨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길들면 여러분은 완전한 인간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이 여러분의 용기를 갉아먹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있는 한 기쁨도 창의성도 없습니다.
--조금 전에 신전 이야기를 하시면서 신의 상징이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그림자를 던지는 분이 없어서 그 그림자조차 구경하지 못했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 그림자로 만족할 수 있어요? 배가 고플 때 먹을 것만 보고 있으면 허기가 가십니까? 아니라면 왜 신전의 그림자에 만족하겠다는 겁니까? 정말 실체를 이해하고 싶다면 그림자를 걷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림자에, 상징에, 석상에 최면당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어떤 꼴이 되었는지 잘 보세요. 저마다 모스크에서, 사원에서, 교회에서 저 나름의 그림자를 섬기느라고 사람들이 이 편 저 편으로 갈라졌습니다. 그림자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실체는 하나뿐입니다. 이 실체는 나뉠 수 없습니다. 이 실체로 통하는 길은 없습니다. 기독교, 회교, 힌두교, 이런 종교가 길일 수는 없습니다.
--시험이라는 게, 장래가 보장된 부자집 아들딸들에게는 필요없는 것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생계비 벌 준비를 해야 하는 가난한 학생들에게는 필요한 것이 아닐는지요. 우리가 사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 필요성이 더 절박해지는 것인지요?
크리슈나무르티: 당신은 사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왜냐구요? 당신은 빈민 계층에 속하지도 않을 뿐더러 아주 유복한 집안의 자식입니다. 그런데 왜 저항하지 않습니까? 공산주의자로서, 사회주의자로서 저항하라는 게 아닙니다. 사회의 전체제에 저항하라는 말입니다. 당신은 할 수 있는데도 왜, 참된 것을 찾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일에 지성을 던져 놓지 않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은 저항하지 않을 모양입니다. 저항할 힘도 없고, 생각할 시간도 없는 것 같으니까요. 가난한 사람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먹을 것과 일자리입니다. 그러나 여유가 있고 지성을 여기에 쓸 시간도 있는 당신이 왜 저항을 도모하지 않습니까? 왜, 무엇이 올바른 사회인가, 무엇이 참된 사회인가를 따져 보고 새 문명을 일으키지 않는 겁니까? 당신 선에서 시작되지 못한다면 가난한 자들 선에서 시작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가진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크리슈나무르티: 우리가 하고 있는 이야기는, 부자는 마땅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가지고 있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자가 아무리 가진 것을 포기해 봐야 가난한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건 문제가 안 됩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여러분, 따라서 지성을 갈고 닦을 기회가 넉넉한 여러분이 저항을 통해 새 사회를 건설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건 여러분 어깨에 걸린 문제이지 다른 사람의 어깨에 걸린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우리들 모두의 문제이지 가난한 사람, 돈 많은 사람, 혹은 공산주의자들의 문제가 아닙니다. 잘 아시겠지만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이러한 저항 정신, 깨뜨리고 찾아내겠다는 충동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정신입니다.
11. 순응과 저항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여러분의 생각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주의를 기울여 본 적이 있는지요.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주의를 기울여 본 적이 있는지요. 아니, 마음이 마음의 작용에 주의를 기울에게 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 편이 옳겠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느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나무, 꽃, 새, 사람들을 어떻게 보는지, 암시에 어떻게 반응하며 새로운 관념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주의를 기울여 본 적이 있는지요. 생각해 보세요. 이런 경험이 있습니까? 없다면 여러분은 큰 손해를 보고 있는 셈입니다.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알게 하는 것은 교육의 기본적인 목적에 속합니다. 만일,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모른다면, 마음이 마음 자체의 작용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사회가 무엇인지 알 리 없습니다. 여러분이 사회학이나 사회 과학 서적을 읽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모른다면 사회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마음이 사회의 일부분이자 곧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반응, 여러분의 믿음, 여러분의 신전 참례, 여러분이 입는 옷, 여러분이 즐겨 하는 일, 하지 않는 일, 여러분이 하는 생각, 사회는 이런 것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회는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복사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마음은 사회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여러분의 문화, 종교, 다양한 계층, 다수의 야심, 갈등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회이며 여러분은 이 사회의 한 모퉁이입니다. 사회와 무관한 여러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회는 늘 젊은이들의 생각을 통제하려 하고, 모양을 잡으려 하고 틀로 판박이를 찍어내려 합니다. 여러분이 태어나서 이 세상으로부터 어떤 인상을 받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여러분의 부모님은 늘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 섬겨야 할 것과 섬기면 안 되는 것을 가르쳐 왔습니다. 부모님들은 여러분에게, 신이 있다거나, 신이 없으되 국가는 있으니 독재자가 곧 예언자라는 말을 해 왔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여러분은 이러한 가르침의 세례를 받아 왔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마음이-아주 여리고, 섬세하고, 늘 궁금해하고, 늘 알고 싶어 하고, 늘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싶어 하는-차차 형식에 갇히고, 길들여지고, 틀잡혀 왔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특정 사회의 양식에 순응하여 혁명적일 수 없게 길들여져 왔다는 뜻입니다. 틀에 박힌 사고의 습관에 길들여져 왔기 때문에 저항한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의 저항은 이 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것은 급식의 개선과 편이 시설의 확충을 요구하는 죄수들의 저항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보세요, 죄수들은 저항하되 감옥 안에서 저항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신을 찾건, 올바른 정부가 어떤 정부인지 따지건, 늘 이것은 진짜 저것은 가짜,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 이 사람은 올바른 지도자요, 이분은 성자라고 주장하는 사회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야심적인 사람 혹은 아주 영리한 사람이 일으킨 이른바 혁명처럼 여러분의 저항 역시 늘 과거에 의해 제한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저항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혁명이 아닙니다. 이것은 보다 높은 차원의 활약, 틀 안에서의 보다 격렬한 투쟁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짜 저항, 진정한 혁명은 이 틀을 깨뜨리고 틀 밖에서 요구하는 일입니다.
아시다시피 모든 개혁가들은-누구든 상관이 없습니다.-오로지 감옥 안에서의 상황을 호전시키는 데만 관심을 두어 왔습니다. 이들은 여러분에게 순응하지 말라는 말도 하지 않으며 "전통과 권위의 벽을 허물어라, 마음을 가두는 틀을 뿌리쳐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교육이란, 주입식 교육을 통하여 시험에 합격할 것을 요구하거나, 암기한 것을 쓰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교육이란, 마음이 갇힌 이 감옥의 벽을 볼 수 있도록 여러분은 돕는 일입니다. 사회는 우리 모두에게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사회는 끊임없이 우리의 사고를 틀잡으려고 합니다. 이 외부로부터 온 사회적 압력은 세월이 감에 따라 점차 내부적인 압력으로 바뀌어 갑니다. 그러나 이 압력이 미치는 범위가 넓고 깊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외부로부터의 압력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 틀을 깨뜨리지 않는다면 내부로부터의 압력만큼 견디기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힌두교도로서 생각하든, 회교도로서 생각하든, 기독교도로서 생각하든 마찬가지입니다. 즉 여러분이 속한 종교의 입장에서 생각하되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섬기고, 무엇을 섬기지 않든 그 대상을 의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사회의 틀입니다. 이 틀을 의식하고, 이 틀을 깨뜨리고 나오지 않으면, 아무리 자유롭다고 생각해도 여러분은 여전히 감옥에 갇힌 죄수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감옥 안에서의 저항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우리는 보다 나은 급식, 보다 많은 빛, 하늘을 조금이라도 더 볼 수 있도록, 보다 넒은 창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천민도 신전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느니 안 된다느니 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계급 제도를 타파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계급 제도의 타파를 통해 또 하나의 보다 튼튼한 계급제도를 만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죄수입니다. 그리고 감옥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자유는 감옥의 벽 밖에만 있습니다. 사회의 틀 밖에만 있습니다. 그러나 이 틀에서 자유로워지려면 틀의 내용물을 이해해야 합니다. 내용물을 이해하는 일은 곧 우리 마음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지금의 문명, 이 관습에 묶인 문화 혹은 사회를 만든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공산주의자로서 사회주의자로서 이것으로서 저것으로서 저항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를 인식하는 것, 자신의 활동, 생각과 느낌을 자각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육입니다. 자신을 충분히 인식할 때 마음은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노력해 보세요. 먼 장래에 노력해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 아니면 오늘 오후에 당장 시작해 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방에 사람들이 너무 많으면, 집안이 너무 붐비면 혼자 나가세요. 나가서 나무 밑이나 강둑에 조용히 앉아 조용히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찰해보세요. 고쳐도 안 되고,"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고 해서도 안 됩니다. 그저 영화를 구경하듯이 구경만 하세요. 극장에 갔을 때 여러분은 영화에 끼여들지 않지요? 영화를 만드는 것은 배우들이고 여러분은 그저 구경만 합니다. 이처럼 구경꾼으로서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지켜만 보세요. 재미있을 것입니다. 영화보다 훨씬 재미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마음은 또 하나의 세상이어서 이 안에 온 인류의 경험이 다 축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여러분의 마음이 곧 인간입니다. 이 인간을 알면 여러분은 인간에게 깊은 연민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이해에서 사랑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 사랑스러운 것을 바라보고 있을 동안에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이 모든 것은 어떻게 배우셨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도 알 수 있겠습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정말 좋은 질문이군요. 물었으니까 내 얘기를 조금 하지요. 나는 이런 것에 관한 책을 읽은 바가 없습니다. '우파니샤드'도 '바가바드 기타'도, 심리학 서적도 읽은 바가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진작에 말했듯이 마음을 잘 관찰하면 거기에 다 있습니다. 따라서 일단 자기 인식의 여행길에 나서면 책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는 낯선 나라로 들어가 새로운 것들, 놀라운 것들을 보거나 발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에게 중요성을 부여하면 안 됩니다. 본 것, 발견한 것들이 다 허물어져 버리고 맙니다.
"찾았다, 이제 알았다. 나는 참 대단해. 이런 것들을 다 찾아내고 말았으니까."
이렇게 말하는 순간 여러분은 빈 손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먼 여행을 떠날 때는 행장을 간단하게 꾸리세요. 아주 높은 산에 오르려 할 때는 가벼운 몸으로 떠나세요.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안다는 상태, 이해한다는 상태는 자기 인식과, 마음의 움직임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웃 사람들에게 하는 말과 말투, 걸음걸이, 하늘이나 새를 보는 태도,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 나뭇가지를 꺽는 손짓-이 모든 것이 하나같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여러분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거울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의식이 깨어 있으면 이 모든 것을 순간 순간 새롭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한 의견을 틀 잡아야 합니까, 아니면 그러지 말아야 합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어떤 사람에 대한 의견에 대해 꼭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합니까? 어떤 사람에 대한 의견을 꼭 틀 잡거나 꼭 그 사람을 평가해야 합니까? 가령 선생님에 대해 의견을 틀 잡아서 여러분에게 득 될 게 무엇입니까? 중요한 것은 선생님이 아니라 선생님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입니다. 살다 보면 우리는 중요하지 않은 일에도 마음을 쓰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특정인에 대한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은 좋다.","그 사람은 허영심이 지나쳐." ,"그 사람 미신 너무 좋아해." 혹은 "그 사람은 이러저러한 일을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남 사이에다 관념의 발을 쳐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짜 그 사람과는 만날 수 없습니다. 누가 무슨 일을 하는 걸 보았다면, 우리는,"그가 이 일을 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그 일이 일어난 날짜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어요? 누가, 여러분이 좋아하거나 싫어할 만한 일을 하면, 여러분은 그 사람에 대해 고정 관념이 될 경향이 있는 의견을 갖습니다. 그리고는 열흘 뒤나 1년 뒤에 만나도 그 의견대로 그 사람을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동안 그는 변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이러저러하다."고 할 게 아니라, "2월에는 이러저러했다."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그는 완전히 달라졌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는 저 사람을 안다."고 하는 말은 틀렸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시점까지의 그 사람, 특정 날짜에 있었던 사건을 통한 그 사람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에 대해 그 이상은 전혀 모르고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늘 새로운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되 편견은 물론 고정된 관념도 갖지 말고, 여러분 자신의 의견도 갖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느낌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해서 느낍니까?
크리슈나무르티: 혹 심리학을 배웠다면 인간의 신경 계통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들었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꼬집으면 여러분은 아픔을 느낍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여러분의 신경은 이 자극을 뇌로 전달하고, 뇌는 그것을 아픔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꼬집지 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육체적인 느낌입니다.
육체적 느낌이 있으니 심리적 느낌이라는 것도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을 아주 근사하게 생겼다고 생각하는데 누군가가 "당신은 못 생겼어."라고 말했다고 칩시다. 여러분은 자존심이 몹시 상하겠지요. 그건 또 왜 그럴까요? 여러분은 뇌가 불쾌한 혹은 모욕이라고 해석할 말을 들으면 속이 상합니다. 혹은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아첨한다면 여러분은 "정말 기분 좋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느낌-생각은 반응입니다. 귀찮은 일, 모욕, 아첨 같은 것들에 대한 반응입니다. 이 반응의 과정이 느낌-생각입니다. 그러나 실제 느낌-생각은 이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따라서 얼마든지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느낄 때마다 꼭 여기에 이름을 붙입니다. 내 말 맞지요? 즐겁다거나 고통스럽다거나 하는 것 따위입니다. 화가 나면 이런 상태의 느낌에 분노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느낌에 이름을 붙이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요. 한번 해보세요. 화가 나도 이름을 붙이지 말아 보세요. 분노라고 부르지 말아 보세요. 이름을 붙이지 말고 그저 느껴지는 대로 느끼면서 그 반응을 한 번 살펴보세요.
--인도 문화와 미국 문화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우리가 미국 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일반적으로 미국에 이식된 유럽 문화, 개척자들과의 만남에서 물리적, 정신적으로 수정되고 확충된 문화를 뜻합니다.
그럼 인도 문화란 어떻습니까? 여기에서 여러분이 누리는 문화가 어떤 문화입니까? 문화라는 말의 뜻을 어떤 뜻으로 썼습니까? 정원 일을 더러 해 보았다면, 땅을 갈고 흙을 고를 줄 알 것입니다. 먼저 땅을 파고, 돌멩이를 골라내고 필요하다면, 퇴비, 즉 나뭇잎, 건초, 거름, 기타 유기물을 섞어 우선 흙을 기름지게 한 연후에 나무를 심습니다. 기름진 흙은 나무에 영양을 공급합니다. 그러면 나무는 잘 자라 마침내 장미꽃이라고 하는 놀라우리만큼 아름다운 것을 지어냅니다.
인도 문화가 이와 같습니다. 수백만 국민들이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통스러워하고, 두려워하고, 피하고, 즐기면서 투쟁을 통해, 의지의 시험을 통해, 이것은 취하고, 저것에는 저항함으로써 이 문화를 일으켰습니다. 날씨, 음식, 옷도 여기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마음이라고 하는 훌륭한 토양을 일구었습니다. 이 토양이 틀 잡히기 전에는 온 아시아로 펴져 나간, 수는 얼마 안 되지만 생명력에 넘치고 창조적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들처럼,
"사회의 규칙은 규칙이니까 마땅히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 아버지가 뭐라고 하실까."
이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발견해 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미지근한 사람들이 아니라 뜨거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인도 문화입니다. 여러분이 하는 생각, 먹는 음식, 입는 옷, 여러분의 몸짓, 전통, 언어 습관, 그림과 조각, 신들, 사제들, 성전들-이 모든 것이 다 인도 문화입니다.
따라서 인도 문화는 어딘가 유럽 문화와는 다릅니다. 그러나 그 저류를 흐르는 동향은 똑같습니다. 그 동향이 미국에서는 달리 표현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요가 다를 것이기 때문이지요. 인도에 비해 전통 문화는 기름지지 못해도 미국에는 냉장고나 자동차 같은 건 많습니다. 그러나 저류의 동향은 매한가지입니다. 즉 행복을 추구하고, 신이 무엇이며 진리가 무엇인가를 찾는 동향은 같다는 것입니다. 이 움직임이 정지하면 문화는 내리막길을 구릅니다. 바로 이 나라에서 그렇게 되고 있듯이 말이지요. 이 움직임이 권위나 전통이나 두려움에게 차단당하면 부패와 퇴보 현상이 시작됩니다.
진리가 무엇이며 신이 무엇인지 알아내고자 하는 충동, 진정 충동은 이것뿐입니다. 다른 충동은 다 부수적인 것입니다. 잔잔한 강물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번집니다. 번지는 파문은 부수적인 움직임, 사회의 반응입니다. 진짜 움직임은 한가운데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행복, 신, 진리를 찾아보려는 움직임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거나 위험을 느끼고 있으면 그런 것을 찾아 낼 수 없습니다. 위협이 가중되고 두려움을 느끼게 될 때 문화는 내리막길을 구릅니다. 젊을 때 틀잡히거나 길들여지지 않고, 부모님이나 사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는 게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길들여지지 않고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보려는, 시간을 초월한 노력이 여러분 내부에서 시작됩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신이 무엇인지 찾아 헤매는 자만이 새 문명 새 문화를 지을 수 있습니다. 순응하는 사람, 낡은 틀이라는 감옥 안에서만 저항하는 사람은 어림없습니다. 여러분은 고행자인 척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이 사회 저 사회에 적응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종교에서 저 종교로 옮겨다니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자유로워지겠다고 갖가지 몸부림을 다 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가슴속에, 참된 것, 진리, 사랑을 찾는 움직임이 없다면 이 모든 노력도 무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아주 유식할지도 모르겠고, 사회가 바람직하게 여기는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전통이라는 감옥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따라서 혁명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아무 가치도 없는 사람입니다.
--인도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참 순진한 질문이군요. 의견 없이 사물을 보는 것과, 사물에 대해 의견을 갖는다는 것은 전적으로 다릅니다. 모든 사람들이 미신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과, 비난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의견이라는 건 별 것 아닙니다. 나는 이 의견, 여러분은 저 의견, 그리고 제3자는 우리와는 또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견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고 형태입니다. 중요한 것은 의견 없이, 평가나 비교도 하지 말고 사실을 그대로 보는 일입니다.
의견 없이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만이 아름다움에 대한 진짜 자각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인도인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면 고정된 의견도 갖지 말고 평가도 하지 말고 그대로 보세요. 그러면 여러분이 본 것은 진짜입니다.
인도인에게는 인도인 특유의 몸짓과 인도인 특유의 전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다른 나라 국민과 마찬가집니다. 인도인 역시,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싫증을 잘 내고, 잔인할 수 있고, 겁이 많고, 사회라는 감옥 안에서 저항합니다. 미국인들처럼, 인도인들도 편한 걸 선호합니다. 지금 상황으로는 미국인만큼 편할 수야 없겠지만요. 인도인에게는 타락하는 세계를 꾸짖고 성자 되기를 지향하는 삼엄한 전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뿌리 깊은 야심, 위선, 탐욕, 질시도 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그렇듯 인도인들도 계급제도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인도의 경우 정도가 심할 뿐입니다. 인도에서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가까이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받고 싶어합니다만 사랑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불행합니다. 참된 것에 목말라 있습니다. 우리는 책 쪽으로 눈을 돌립니다. 우파니샤드로 눈을 돌리고, 바가바드 기타로 눈을 돌리고, 성경으로 눈을 돌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과 명상 안에서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곳 인도에서든, 러시아에서든, 미국에서든, 인간의 마음은 어디 가나 그게 그겁니다. 단지 다른 하늘 아래서, 다른 정부 아래서 다른 방법으로 스스로를 진술할 따름입니다.
12. 순수한 자신감
우리는 지금까지 감옥 안에서 저항하는 문제에 관해 의견을 나누어 왔습니다. 개혁가들, 이상주의자들, 그리고 구체적인 결과를 겨누고 부지런히 뛰는 다른 여러 사람들이 길들어 온 틀 안에서, 그들 자신의 사회 구조라는 벽안에서, 다수의 집단 의지가 표현된 문명의 문화적 틀 안에서, 어떻게 저항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자신감이 무엇인지 자신감이라는 건 어떨 때 생기는 것인지 살펴볼 차례가 된 듯합니다.
자신감은 주도적인 행위에서 생겨납니다. 그러나 어떤 틀 안에서의 주도적인 행위는 자기 과신만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자기 과신은, 자기가 개재하지 않는 자신감과는 달라도 크게 다릅니다. 자신감을 갖는다는 게 어떤 상태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손수 어떤 일을 한다면, 가령 손수 나무를 심어서, 그 자라는 것을 보고,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쓰고, 혹은 나이가 들어 마을에 다리를 놓아준다거나 공직에서 행정적인 수완을 발휘했을 때 여러분은 그런 일이면 얼마든지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보시다시피 지금 우리가 아는 자신감은 모두, 감옥, 사회-공산주의 사회든, 힌두교, 혹은 기독교 사회든-가 우리 주위에다 친 울타리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 안에서의 주도권도 자신감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습니다. 일을 잘 할 수 있게 하니까요. 여러분은 이 감옥 안에서의 자신감으로도 자동차를 설계할 수 있고 좋은 회사, 훌륭한 과학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 구조 안에서 사회 구조를 계승하고, 개혁하고, 빛이 되고, 감옥의 내부 장식이나 하는 이런 종류의 자신감은, 자신감이 아니라 자기 과신입니다.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알면, 그 일을 하는 자기 자신을 중요한 사람으로 느낍니다. 반면에 연구와 이해를 통해 여러분이 속한 사회 구조에서 이탈하려 할 때, 여기에서는 진짜 자신감이 생겨납니다. 여기에 자기 과신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양자의 차이-자기 과신과, 자기가 빠진 자신감의 차이를 알게 될 때 우리는 삶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배드민턴이나 크리켓이나 축구 같은 운동을 잘할 수 있을 때, 여러분은 이런 운동에 자신감을 갖지요? 이때의 자신감은, 이런 운동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둘 것임을 예감하게 됩니다. 수학 문제를 빨리 풀 수 있다면 이 능력 역시 여러분에게 자기 확신을 줍니다. 사회 구조 안에서의 행동에 자신을 느낄 때, 여기에는 늘 기묘한 교만 같은 게 끼어들지요?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사람, 멋진 결과를 달성해 낼 수 있는 사람의 자신감에는 늘 자기 자신에 대한 이러한 교만과, 하는 사람은 나라는 느낌이 묻어 다닙니다. 따라서 어떤 결과를 가능케 하는 그 행위 자체, 감옥 안에서의 사회를 개혁하는 그 행위 자체에는 늘 행위자 자신의 교만, 즉 내가 그 일을 해내었고, 내 이상은 그렇게 소중한 것이 아니며, 내가 속한 무리가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는 느낌이 묻어 다닙니다. 사회라는 감옥에서 표현되는 자신감에는 늘 나라는 의식이 뒤따릅니다.
교만한 이상주의자들이 뻐기는 걸 본 적이 있는지요? 어떤 결과를 달성했다거나, 대단한 개혁에 성공한 정치 지도가들이, 세상에는 저희들만 있는 듯이 저희 이상과 업적에 대해 허풍 떠는 걸 본 적이 있는지요? 나름의 평가에 따르면 그 사람들 아주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연설문 몇 장만 읽어보면, 자칭 개혁가라는 자들을 몇 명만 관찰해보면 이들이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저희들의 자아를 갈고 일구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아무리 범위가 넓어도 그들의 개혁은 역시 감옥 안에서의 개혁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파괴적입니다. 사람들을 비참하게, 갈등하게 만들 뿐입니다.
자, 이 사회 구조 전반, 즉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집단 의지의 문화적 틀을 꿰뚫어 보아서,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여기에서 뛰쳐나올 수 있다면, 힌두 사회든, 공산주의 사회든, 기독교 사회든, 여러분이 속한 특정 사회라는 감옥의 벽을 부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교만에 때묻지 않은 자신감이 생겨난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순수한 자신감입니다. 새로운 문명을 지어내는 것은 순수한 자신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사회의 틀 안에 안주하는 한 이 순수한 자신감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주의 깊게 들어주세요. 이 말을 하는 나는 별로 중요한 사람이 못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나의 진실을 이해시키는 일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교육이라는 게 어차피 이런 게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을 사회의 틀에다 맞추게 하는 것은 교육의 할 일이 아닙니다. 물론 당치도 않지요. 여러분이 사회의 틀을 완전히, 깊이, 폭넓게 이해하는 것을 돕고 이것을 깨뜨리고 나오게 하는 게 교육의 참 기능입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자신에 대해 교만하지 않은 인간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순수하기 때문에 자신만만한 인간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들 거의 전부가, 어떻게 하면 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을까, 이 사회를 개혁할 수 있을까, 이런 데만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엄청난 비극입니다. 여러분이 던진 질문의 대다수가 여러분의 이러한 자세를 반영하고 있다는 걸 아시는지요? 실제로 여러분은, "어떻게 하면 사회에 적응할 수 있을까요? 내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면 부모님은 뭐라고 할까요,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여러분의 자신감과 주도성을 깡그리 때려 부수고 맙니다. 여러분은 이런 것이 없어도, 자동 인형처럼 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아주 유능한 사람이 되어 교문을 나설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여러분에게 창조적 불꽃이 있을 리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 우리가 사는 환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이해의 과정을 통해 사회와 환경에서 뛰쳐나와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이건 전 세계적인 문젭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대응책, 삶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든 러시아에서든, 어디서든 낡은 방법은 썩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이라는 것은 끊임없는 도전에 맞서는 일입니다. 보다 나은 경제 질서를 확립한다는 것은, 이런 도전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이 못 됩니다. 도전이라는 것은 늘 새롭습니다. 문화, 국민, 문명이 이 늘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지 못하면 부서질 수밖에 없습니다.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이 예사롭지 않은, 순수한 자신감을 획득하지 못하면, 여러분은 집단에 흡수당하거나 범용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름 뒤로 몇 자의 직명을 거느릴 수는 있을 겁니다. 결혼하고 자식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걸로 끝입니다.
보세요, 우리들 대부분이 겁을 먹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이 될까 봐 여러분의 부모님, 선생님, 뿐만 아니라 정치와 종교까지 겁을 먹고 있습니다. 왜요? 이들은 모두 여러분이 환경적, 문화적 영향력이 두루 미치는 감옥 안에 안주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회의 틀에 대한 이해를 통해 바로 그 사회의 틀을 부수는 사람, 따라서 그 틀 안에 몰아넣을지라도 스스로의 마음이 갇히지 않는 사람-이런 사람만이 새 문명을 지을 수 있습니다. 아무 의식 없이 순응하는 사람, 저 틀에 틀잡혔다고 해서 이 틀에 저항하는 사람-이런 사람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신이나 진리에 대한 탐구는 감옥에 안주하는 대신 감옥을 이해하고 그 벽을 부수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바로 이 자유를 향한 행동이 새 문화,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들어 냅니다.
--선생님, 우리는 왜 친구를 사귀고 싶어 하죠?
크리슈나무르티: 소녀가, 왜 친구를 사귀고 싶어 할까, 하고 묻습니다. 왜 사람은 친구를 사귀고 싶어 할까요? 남편이나 아내도 없이, 자식도 없이, 친구도 없이 혼자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나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어요. 그래서 친구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요. 혼자 살려면 굉장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신, 진리 같은 걸 찾으려면 혼자여야 합니다. 친구를 갖는다는 건, 남편이나 아내, 혹은 자식과 함께 산다는 건 신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잘 보세요. 우리는 여기에 빠지고 맙니다 우리는 가족에 빠지고, 일에 빠지고, 재미가 하나도 없는, 썩어가는 삶의 단조로운 일상에 빠집니다. 우리는 이런 일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혼자가 되는 걸 끔찍하게 여깁니다. 겁을 냅니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다 다 담듯이 우리들 대다수는 우리들의 믿음을 한 곳에 쏟아붓습니다. 그래서 친구가 없는 삶, 가족이나 일에서 떨어진 삶은 풍요롭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삶 자체로만 풍요로울 수 있다면-누구나 얻을 수 있는 돈이나 지식의 넉넉함을 따지는 게 아니라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실존으로서의 넉넉함을 말합니다- 우정이라는 것은 부수적인 것으로 떨어집니다.
하지만 보세요. 여러분은 혼자서 사는 교육은 받은 적이 없습니다. 혼자 산보 나가 본 적이 있습니까? 혼자 나무 아래 앉아-책을 가지고 나가도 안 되고, 친구랑 함께 가도 안 되고, 오직 혼자-나뭇잎 떨어지는 걸 보고,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나 어부들 노랫소리도 듣고, 새가 나는 것, 마음 안에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는 것을 느긋하게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혼자가 될 수 있고, 이런 것을 보고 들을 수 있다면, 여러분은, 정부가 세금을 매길 수도 없고, 어떤 인간의 힘으로도 방해할 수 없고, 따라서 아무도 부술 수 없는 굉장한 풍요로움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강연하는 게 선생님 취미인가요? 말씀하시는 게 지겹지도 않으십니까? 왜 이런 일을 하시는 거죠?
크리슈나무르티: 아주 반가운 질문을 해 주셨군요. 생각해 보세요. 어떤 일을 사랑하면 지겨움 같은 건 느낄 수 없어요. 사랑한다는 것은, 결과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거기에서 무엇을 얻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사랑한다는 건, 사랑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절망도 없고 끝도 없지요. 나는 왜 이 짓을 하고 있는 걸까요? 장미꽃은 왜 피고, 자스민에서는 왜 향기가 나고, 새는 왜 나느냐고 묻지 그래요?
나도 강연 같은 건 안 하려고 해보았어요. 말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이걸 알아보고 싶었던 거죠. 안 하는 것도 괜찮은 일입니다. 내 말뜻 아시겠지요? 무엇인가를 얻으려고-돈, 상, 뭐나 된 듯한 기분 같은 걸-강연한다면 금방 지겨워집니다. 이럴 때의 강연은 파괴적입니다. 별 의미가 없어요. 다만 자기 성취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가슴에 꾸며 낸 것들이 아니라 사랑으로 꽉 차 있을 때, 내 말은 분수와 같습니다. 늘 시원한 물을 뿜는 분수와 같습니다.
--나는 그 애를 사랑하는데 그 애는 화를 냅니다. 그 애가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죠?
크리슈나무르티: 먼저 묻겠어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어요? 사랑한다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나요? 사랑한다는 건, 여러분은 마음, 정성, 존재의 모든 것을 주되, 그 값을 요구하지 않는 일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어요? 이래도 사랑하는 사람이 화를 낼까요? 그러면 소위 사랑이라는 말로 남을 사랑하는데도 왜 화를 낼까요? 그건 말이죠, 상대에게서 기대했던 것을 얻어 내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나는 아내를, 남편을, 아들을, 딸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들이 옳지 못하면 화를 낸다, 왜 화를 낼까요?
아버지는 왜 아들이나 딸에게 화를 낼까요? 그것은 아버지는 자식이 무엇무엇이 되고, 어떤 틀에 맞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자식이 여기에 반발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님들은 자기 계산과 자식들을 통해서 뭔가를 이루려 하고, 스스로를 영원한 존재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자식이 하는 짓이 마땅치 않으면 실망하고 불같이 화를 내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에게는 자식을 어떤 인간으로 키우겠다는 이상이 있습니다. 부모님들은 이 이상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성취하려고 합니다. 그런데도 부모가 성취감을 느낄만한 틀 속으로 자식이 들어와 주지 않으면 화를 내는 겁니다.
친구에게도 더러 화를 내죠? 어떻게 해서 화를 내는지 한 번 따져 본 적이 있나요? 부모님들이 화를 내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친구에게서 뭔가를 기대합니다. 이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여러분은 실망합니다. 실망한다는 것은, 내면적으로, 심리적으로 그 삶에게 기대고 있다는 뜻입니다. 심리적으로 기대고 있는 한, 여기에서 좌절감을 맛볼 때가 있는 법입니다. 이 좌절감이 분노, 비참한 느낌, 질투, 그리고 갖가지 갈등을 낳습니다. 사랑하되, 특히 젊은 시절에 전존재를 던져, 나무를, 동물을, 부모님을, 선생님을 사랑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전존재를 던져 사랑해야 갈등이나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세요. 교육자는 대개 자기 자신의 일에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가족, 돈, 지위에 대한 개인적인 걱정에만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이에 바로 교육을 이 지경으로 만든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여러분의 가슴속에는 사랑이 있을 것입니다. 어릴 때는, 사랑이라는 게 자연스러운 감정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서 이 사랑하는 마음은 부모님, 교육자, 사회 환경의 손에 무참하게 부서집니다. 이 순수함, 인생의 향기인 사랑을 간직하는 건 대단히 힘듭니다. 굉장한 지성과 통찰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이 장애물을 넘어서게 할 수 있을까요?
크리슈나무르티: 장애물을 넘어서게 하려면, 먼저 마음과, 장애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지요? 먼저 마음의 한계, 경계, 그리고 그 변경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안다고 말합니다만 이건 다 해보는 소립니다. 우리는, "내 마음 안에 장벽이, 굴레가 있구나, 이게 무엇인지 알아야겠다. 그러니 우선 이게 무엇인지, 이게 어떻게 생겨나는지, 그 속성이 무엇인지 알아야겠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무슨 병에 걸렸는가를 알면 치료의 가능성은 그만큼 커집니다. 그러나 병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마음의 특정 한계, 굴레, 장애물이 무엇인지 알고, 이를 이해하려면, 이를 비난하거나 옳으니 그르니 해서도 안 됩니다. 아무 의견이나 편견이 없이 관찰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비난하는 버릇이 들어 놔서, 이건 굉장히 어렵습니다.
어린이를 이해하려면 어린이를 나무라지 말아야 합니다. 나무라는 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어린이가 놀 때, 울 때, 먹을 때 관찰해야 합니다. 어린이의 기분을 세심하게 관찰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린이를 보고 잘생겼다느니 못생겼다느니, 똑똑하다느니 멍청하다느니, 이것이니 저것이니 하면 어린이를 관찰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장애물을 제대로 볼 수 있으면, 피상적인 장애물뿐만 아니라 무의식 깊이 내재한 장애물까지 제대로 불 수 있으면, 마음이 이를 넘어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이때 넘어선다는 행위 자체가 곧 진리에 다가감에 다름아닙니다.
--신은 이 세상에 왜 이렇게 많은 남자와 여자를 만들어 놓았죠?
크리슈나무르티: 왜 당신은 신이 우리를 창조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기는 거지요? 간단하게 설명하는 방법이 있어요. 생물학적인 본능이란 말이 있지요. 본능, 욕망, 정열, 정욕 같은 것은 모두 우리 삶을 구성하는 부분들입니다. 만일 당신이 삶이 곧 신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 질문의 전제와는 별개의 문제가 됩니다. 그렇다면 신은, 정열, 정욕, 질투, 공포를 싸안은 모든 것입니다. 이 모든 요소들이 이 세상에다 엄청나게 많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해 내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대한 천벌 중의 하나라는 인구 과잉 문제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이건 간단하게 해결 될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대를 이으려고 하는 갖가지 충동이 있고 대를 이어야 한다는 강요도 받고 있습니다. 이 복잡한 과정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출생률만 조절하는 일에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 개개인이 그렇게 해 놓았습니다. 그것은 산다는 게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삶이라는 것은 우리가 쉬운 말로 실존이라고 부르는 것같이, 야하고 범용스럽고, 통제될 수 있는 것의 성질이 아닙니다. 삶이라는 건 이런 것과는 어림없이 다른 것이며 엄청나게 풍요롭고 끊임없이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영원한 운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우리 삶은 무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13. 평등과 자유
마른 땅에 쏟아지는 비, 정말 근사하겠지요? 이 비는 나뭇잎을 깨끗하게 씻어 주고 땅을 적셔 줍니다. 나는, 우리 역시, 비가 나무를 씻듯, 우리들 마음을 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에는 여러 세기에 걸쳐 먼지가 겹겹이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 먼지를 우리는 지식, 경험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이나 나나 매일 이 마음을 씻어 어제의 기억을 닦아낸다면, 우리 마음은 나날이 싱싱할 것입니다. 갖가지 실존의 문제들을 훌륭하게 처리할 줄 아는 마음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는 소위 평등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평등이라는 게 도무지 있을 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지닌 능력이 각기 다르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평등은, 모든 사람은 똑같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평등입니다. 가령 학교를 예로 들자면, 교장, 교감, 기숙사 사감 같은 직위는 일의 성격과 그 기능을 나타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보세요. 특정 직무 혹은 기능에, 이른바 지위에 따른 권위라는 게 따라 붙습니다. 그리고 이 지위에 따른 권위는 존경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이 지위에 따른 권위에는 곧 권력, 위신 같은 게 포함되고, 이 권위를 누린다는 것은 곧 사람들을 꾸짖고, 이래라저래라 명령하고, 친구나 가족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능이 지위의 권위로 행세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지위, 권력, 직위, 위신, 남을 이롭게 할 수 있는 특권 같은 것을 떨쳐 버릴 수 있다면 기능이라는 개념은 아주 달라져 버릴 것입니다. 기능이라는 게 단순한 의미로 통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장관이건, 국무총리건, 요리사건, 가난한 교사건 똑같은 수준에서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 모두가 서로 다르긴 하지만 각기 사회에 꼭 필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기능에서 권력, 지위, 위신 같은 것, "나는 우두머리다, 그러니까 중요하다."는 생각을 벗겨낼 수 있다면 이 사회, 특히 학교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우리는 모두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위가 높고 낮다는 의미에서, 거물이고 조무래기라는 의미에서의 권위는 발붙일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모두가 자유로울 것입니다. 우리가 학교에다 이런 분위기, 우리 모두가 자신감을 느낄 수 있는 자유롭고 사랑이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안락하다고 느낄 때, 편안하다고 느낄 때 자신감이 생긴다는 것은 여러분도 아실테지요.
집에서 아버지, 어머니나 할머니가 끊임없이 이래라저래라 한다면 편안할 수 있을까요? 나는 스스로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잃고 말 것입니다. 자라는 여러분은, 참된 것이라고 믿고 의지하는 데가 있다면 여기에 대해 토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없다면 찾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옳다고 믿는다면 그 옳다고 믿는 바에 의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고통스럽더라도, 경제적 손실이 있더라도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그리고 이로써 젊은 시절에는, 편안하고 안락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은 안락하다는 느낌을 맛보지 못합니다. 겁을 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나이든 사람들, 선생님들, 부모님들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늘 마음이 안락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안락한 느낌을 '경험'하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집안 사람의 눈에 띄지 않은 채, 이래라저래라는 말도 듣지 않고 가만히 있어 보면 굉장한 안도감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때 여러분은 꽃피기 시작합니다.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됩니다. 드러낼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학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건 학교가 아닙니다.
어떤 곳에서, 안락하다는 의미에는 안도감을 느낄 때, 여러분은 얌전해집니다. 기가 꺾이지 않은 상태, 강요당하지 않은 상태여야 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안도감이 들고 행복을 느낄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행복을 느끼고 있을 때는 남을 해치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학생들을 그렇게 편안하게 만들어 주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학생들은, 교장 선생님, 교사, 기숙사 사감이 이래라 저래라 하고 몰아붙일 것이라는 생각에서 잔뜩 겁을 집어먹고 학교로 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대부분은 학교와 집에서 지위의 권위를 존중해야 하는 것으로 배워 왔습니다. 여러분의 어머니, 아버지에게는 지위의 권위가 있습니다. 교장 선생님에게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그런 분들을 두려워하면서, 그 지위의 권위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왔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학교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지위에 따른 권위가 기능에서 사라지고, 평등이라는 느낌이 학교를 지배할 때만 가능합니다. 올바른 교육의 관심은 여러분을 도와 활기찬 인간, 감수성이 예민한 인간, 지위라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 때문에 사람을 거짓 존경하지 않는 인간으로 만드는 데 있어야 합니다.
-- 우리는 왜 놀이에는 재미를 느끼면서도 공부에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이유는 간단합니다. 여러분의 선생님들이 어떻게 여러분을 가르쳐야 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이것뿐입니다. 복잡할 건 없습니다. 가령 선생님이 수학이나 역사, 혹은 그가 담당하는 과목을 좋아한다면 여러분도 그런 과목을 좋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좋아한다는 감정은 저절로 통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지요? 만일에 음악가가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고, 노래에다 전 존재를 던져 넣는다면, 이 느낌은 듣는 사람에게도 전해질게 아닙니까? 제대로 전해지면 여러분도 노래를 배우고 싶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자기가 담당하는 과목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과목을 가르치는 것이 지겹지만, 선생님들은 생활비를 벌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걸 진심을 좋아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여러분 모두 놀라운 인간이 되어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놀이나 공부뿐만 아니라, 꽃, 강물, 새, 이 땅까지 사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이 여러분의 가슴속에서 감동으로 출렁거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훨씬 빠른 속도로 배워 나갈 것이고 여러분의 마음은 넓게 트여, 범용에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교육자를 교육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교육자에 대한 교육은 아주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교육자들은 이미 자기네 버릇에 익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린 여러분은 아직 그다지 버릇에 익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어떤 일, 가령 놀이나 수학, 역사, 그림이나 노래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여러분의 지성이 잠에서 깨어나 활기차게 움직인다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부가 술술 잘 되는 건 물론입니다. 결국, 마음이라는 것은 호기심이 많기 때문에 늘 묻고, 알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 호기심을 잘못된 교육 방법이 부숴 놓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교육받아야 하는 것은 학생뿐만이 아닙니다. 선생님들도 교육받아야 합니다. 삶이라는 것은 교육의 과정, 배움의 과정입니다. 시험에는 끝이 있지만 배움에는 끝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호기심의 눈을 뜨고 늘 깨어 있을 때 여러분은 이 세상의 무엇으로부터든 배울 수 있습니다.
--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일이 그릇되었다는 걸 알면 그 그릇된 일이 바로 잡힌다고 했습니다. 저는 매일 담배 피우는 게 좋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도 이게 바로 잡히지 않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 담배 피우는 어른을 본 적이 있겠지요? 부모님, 선생님, 이웃, 그 밖의 사람이라도 좋습니다. 담배 피우는게 습관이 되어 있지요? 그것을 매일, 몇 년간이나 줄기차게 피워 왔습니다. 이제 그들은 습관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종으로 예속된다는 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습관과 싸우고 맞서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수련하고, 저항하고, 이 습관을 없애는 데 필요한 갖가지 방법을 동원합니다. 그러나 습관이라는 건 죽은 겁니다. 자동화된 행동입니다. 그래서 맞서 싸운다는 것은, 여기에 힘을 부여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만일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자기 습관, 즉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담배를 꺼내고, 톡톡 두들이고, 입술로 물고,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아들이는 행위를 의식한다면, 그리고 이 버릇이 나올 때마다 별로 싫어하지도 않고, 담배 피우는 게 나쁜 짓이라면서 안타까와하지도 않는다면, 이 사람은 이 습관에다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하지 않는 셈입니다. 그러나 습관이 되어 버린 것을 정말 끊어 버리겠다면 이 습관을 좀 더 꼼꼼히 따져 보아야만 합니다. 즉 우리들의 마음이 어쩌다 이런 습관이 익었느야, 다시 말해서 우리 마음이 왜 이렇게 부주의하냐는 문제를 파고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매일 창밖을 내다보면서 이를 닦는다면, 이 이닦는 행위는 습관이 됩니다. 그러나 아주 조심스럽게 이를 닦으면서 온 주의를 다 쏟는다면 이것은 습관이나, 아무 생각없이 반복하는 일상적인 버릇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 실험해 보세요. 마음이 어떤 식으로 습관을 통해 안주하려는지, 안주한 상태에서 방해를 받지 않으려고 하는지 관찰해보세요.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은 늘 습관이라는 은신처 안에서 기능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현상은 더 심해집니다. 여러분은 이미 몇 가지 버릇에 익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부모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결혼하지 않는다든지 하면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이나 아닐까 해서 두려워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마음은 이미 습관이라는 은신처 안에서 기능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이 습관이라는 은신처 안에서 기능하고 있는 한, 나이가 열 살이든 열 다섯 살이든 여러분은 이미 늙은 것입니다. 안으로는 썩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몸이 튼튼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별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몸이 아직은 젊고 꼿꼿해도 마음은 이미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왜 우리 마음이 습관에 안주하려 하는지, 왜 습관이라는 은신처에 숨으려 하는지, 왜 전차처럼 특정 레일 위로만 움직이려 하는지, 왜 의문을 제기하는 걸 그렇게 두려워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우리 아버지는 '시크교도'다, 따라서 나는 '시크교도'다, 그러니까 머리를 기르고 터번을 써야겠다." 이렇게 말한다면,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따져 보지도 않고, 아버지의 틀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도 없이 이런 말을 했다면 여러분은 기계나 다름없습니다. 담배 피우는 버릇 역시 여러분을 기계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습관의 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모든 것을 이해해야 여러분은 마음이 맑아지고 젊어지고 활기를 찾습니다. 마음이 이런 상태가 되어야 매일매일이 새로울 수 있으며, 강물에 비친 아침 햇살이 가슴이 뛰는 풍경일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왜 어른들이 심각해지면 겁을 먹는지요? 왜 어른들은 그렇게 심각해하는지요?
크리슈나무르티: 심각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늘 쾌활해하고 늘 명랑하게 웃으며 지냅니까, 아니면 더러는 조용히, 심각하게 생각에 잠길 때도 있습니까? 어떤 일에 '대해' 심각한 게 아니라, 그저 심각한 상태, 더러 이럴 때도 있습니까? 어른들이 심각한데 왜 겁을 먹어야 하는 겁니까? 두려워할 게 뭐가 있습니까? 여러분이 드러내기 싫어하는 걸 어른들이 꿰뚫어 볼까 두려운 겁니까? 아시겠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이런 문제를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심각한 표정,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어른들이 겁난다면 "나는 왜 두려워할까."라는 의문을 제기해 보아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러질 않습니다.
자, 심각하다는 게 무엇입니까? 한번 따져 봅시다. 여러분은 극히 피상적인 일에 심각해할 수도 있습니다. 가령 사리(인도인의 평상복-역주)를 살 때, 온 주의를 여기에다 기울이고, 어떤 것을 살까 마음을 쓰고, 여남은 가게를 두루 다니며 한나절 내내 견본을 구경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도 심각하게 생각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피상적으로만 심각합니다. 매일 신전에 나가고, 꽃고리를 바치고, 사제에게 헌금하는 일을 아주 심각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 역시 쓸데없는 일 아닙니까? 신이나 진리는 신전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국수주의를 심각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역시 쓸데없는 진리지만요.
국수주의라는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의 조국 인도, 잘났건 못났건 나의 조국." 이런 사고방식, 인도는 영적인 지식의 보고니까 세계의 어떤 나라보다 위대한 나라라는 생각이 바로 국수주의적 사고 방식입니다. 우리들 자신을 특정 국가와 동일시하고 뽐낼 때 국수주의적 사고방식이 시작됩니다. 국수주의라는 것은 우상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조국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부수고, 죽이고, 죽습니다. 이런 식으로 국가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정치가들이 만들고, 즐겨 쓰는 사고방식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쓸데없는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심각한 상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보세요. 그러면 쓸데없는 행동이나 특정의 틀이 야기시키지 않은 심각한 상태도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이러한 상태야말로 어떤 결과나 목적을 좇지 않을 때 나타나는, 정말 심각하게 여겨도 좋을 상태입니다.
-- 운명이란 무엇입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정말 이 문제를 한 번 따져 보고 싶습니까? 묻는다는 건 참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질문은, 여러분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어서 그 대답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만 의미가 있습니다. 혹시, 사람들이 질문만 해 놓고는 그 문제에 대해 흥미를 잃어 버리는 걸 본 적이 있는지요? 나는 며칠 전에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질문을 해 놓고는, 하품도 하고 머리도 긁고 옆사람과 잡담도 하더군요. 질문하는 순간에 흥미를 잃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거니와, 정말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거든 아예 질문하지 마세요.
운명이 무엇이냐는 문제는 정말 어렵고 까다롭습니다. 보세요.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이 원인이 어떤 결과를 빚어내지요? 러시아에서든 미국에서든 인도에서든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준비하면 그들의 운명은 전쟁에 묶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바란다, 우리는 저들의 공격에 대비할 뿐이다, 이렇게 주장한대도 별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전쟁의 동인을 가동시킨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여러 세기에 걸쳐 특정 문명이나 문화의 발달에 참여해 왔을 때 이내 그들은, 좋건 싫건 개인을 그 흐름에 실어 떠내려보내는 운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 특정 문화나 문명의 흐름에 휩쓸리거나 떠내려가는 과정, 이것을 운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여러분이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합시다. 이 변호사는 자식을 꼭 변호사로 만들려 한다고 칩시다. 다른 일을 하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이 아버지의 소원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변호사가 될 운명에 묶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한사코 변호사가 되는 걸 거부하거나, 정말 마음이 기우는 일 - 쓰고 싶어 하고, 그리고 싶어 하고, 빈털터리로 빌어먹는 일이 있어도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할 수도 있습니다 - 을 하겠다고 우긴다면, 여러분은 이 흐름에서 헤어 나오는 셈입니다. 여러분은 이럴 때 아버지가 의도한 운명의 사슬에서 풀려나오는 것입니다. 문화나 문명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제대로 교육받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네, 여러분은 전통에 짓눌리지 않아야 하고, 특정의 종족적, 문화적, 혹은 가족적 집단의 운명에 빠져들지 않아야 하며, 예정된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기계적인 존재가 되지 않도록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이해하고, 여기에서 뛰쳐나와 홀로 설 수 있는 사람만이 자신의 동인을 만들어 냅니다. 이 사람의 목표가 허위를 깨뜨리고 진실에 매진하는 것이며 이 동인 자체도 진실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운명에서 자유롭습니다.
14. 자기 수련
혹시, 우리가 왜 훈련을 받고 스스로를 수련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 세계의 정당이라는 정당은 모두 당원을 훈련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러분의 부모님, 선생님, 그리고 여러분이 속한 사회는 하나같이 여러분은 훈련을 받아야 하고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왜요? 정말 훈련이라는 걸 받을 필요가 있는 건가요? 내가 알기로, 우리는 훈련이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훈련은, 사회에 의한 훈련, 종교 지도자에 의한 훈련, 도덕률에 의한 훈련, 여러분 자신의 경험에 의한 훈련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큰일을 성취시키고 싶어 하고, 큰 돈을 벌고 싶어 하고, 위대한 정치가가 되고 싶어 하는 야심가에게 있어서는 야심 자체가 자기 수련의 수단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훈련이란 꼭 필요한 거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더러 몇 시에는 꼭 자고, 몇 시에는 꼭 일어나고, 공부는 반드시 하고, 시험에는 반드시 합격하고, 어머니 아버지 말씀에는 반드시 복종하라는 등등의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왜 여러분은 훈련을 받아야 합니까? 훈련이란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훈련이라는 말은, 사람을 어떤 일에 맞춘다는 뜻이 아닙니까? 여러분의 생각을 어떤 사람의 말에 맞추고, 이런 욕망에는 저항하고 저런 욕망에는 순응하고, 이런 건 하고 저런 건 하지 말고, 겉으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속까지 순응하고, 억누르고, 따르는 것 - 이 모든 것이 곧 훈련입니다. 오랜 세월을 우리는 선생님, 구루, 사제들, 정치가들, 임금들, 법률가들, 우리가 사는 사회로부터 마땅히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자,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훈련이란 필요한 것이냐, 이 문제에 대한 다른 접근 방법은 없는 것일까... 나는 여기에 다른 접근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학교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한 번 따져 보아야 할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은 대체로, 능률적이기 위해서는 훈련 - 도덕률에 의한 훈련이건, 정치 강령에 의한 훈련이건, 공장에서 기계같이 일하는 훈련이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훈련 과정은 순응을 통해 우리 마음을 무디게 하고 맙니다.
자, 훈련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합니까? 아니면, 공산주의의 이상향, 도덕적, 혹은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최고 가치 같은 이념적 틀 안에 여러분을 맞추어 넣습니까? 모든 형태의 훈련이 그렇듯이 여러분을 구속하고 가두었는데도, 이 훈련이 여러분을 풀어 줄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요? 아니면 다른 접근 방식이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하나만 바랄 수도 있는 것일까요? 서로 갈등하는 두 가지 이상의 욕망 대신 하나의 욕망, 다시 말해서 한 가지만 바랄 수도 있는 것일까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여러분에게 두 가지, 세 가지, 열 가지 욕망이 생기는 순간 훈련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 아닐까요? 여러분은 부자가 되고 싶고, 자동차와 집을 가지고 싶어 하는 동시에, 적게 소유하거나 전혀 소유하지 않는 게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종교적이라는 이유에서 이러한 것들을 타개하고 싶어 할 수도 있습니다. 제대로 교육을 받으면, 상호 모순이 없고, 따라서 훈련이 필요 없는 상태로 전 존재를 완성시킬 수 있을까요? 완성이라는 개념은 자유라는 개념을 싸안고 있습니다. 따라서 완성된 인간에게는 훈련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완성되었다는 것은, 동시에 모든 수준에 두루 통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아시겠어요, 어릴 적부터 제대로 교육받을 수 있다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전혀 모순이 없는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훈련도 필요 없고 강요도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상태에서는 완전히 자유롭게 자신의 전 존재를 하고 있는 일에 던져 넣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훈련이란 모순이 있는 곳에서만 필요합니다. 정치가들, 정부, 그리고 조직화한 종교는 여러분에게 한 방향의 사고만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완전한 공산주의자, 완전한 가톨릭 신자, 혹은 그들이 의도하는 완전한 존재가 되어야 문제를 잃으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기계처럼 생각하며 기계처럼 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맹목적으로 그들을 따르기 때문에 모순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맹목적인 복종은 파괴적입니다. 왜냐하면, 맹목적인 복종이란 기계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적인 여유가 전혀 없는, 상황에의 순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릴 적부터 완전한 안정감, 안도감, 말하자면 '이것'이 되어야지 '저것'이 되면 안 된다는 강박 관념과의 투쟁이 없는 상태에 이를 수 있기는 한 건가요? 내적인 몸부림이 있으면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 갈등을 해소시키려면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반면에, 제대로 교육을 받아왔고, 여러분이 하는 일 모두가 완성을 지향하는 행위라면 여기에는 모순도 없고, 따라서 강요된 행위를 하는 일도 없습니다. 완성을 지향하는 행위가 있을 때는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훈련이라는 것은 파괴적입니다. 왜냐하면, 훈련이란 자유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완성은, 어떤 형태의 것이든 훈련 같은 것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말하자면 내가 선한 일을 한다거나, 본질적인 진실에 매달리고, 참으로 아름다운 일에 내 전존재를 던져 넣는다면, 내 내부에는 모순이 있을 리 없습니다. 이럴 때 나는 어떤 일에도 순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 자체로서 선하고 올바른 일 - 힌두교 전통, 혹은 공산주의 이론으로 보아 올바르다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상황을 초월해서 올바른 일 - 을 하고 있다면 나는 완성된 인간이며 따라서 훈련을 받거나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학교가 할 일이란, 여러분에게 이 완성된 인간으로서의 자신감을 갖게 하고, 여러분이 단순히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옳고, 선하고, 영원한 진실일 수 있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닐는지요?
그리고, 만일에 여러분이 어떤 일을 사랑한다면 구태여 훈련을 하거나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창조적인 이해가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저항도 없고 갈등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정도로 완벽한 사랑은, 여러분이 스스로의 처지를 편하다고 느낄 때나 완전한 안도감을 느낄 때만 가능합니다. 젊을 때는 특히 그렇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교육자와 학생이 신뢰를 통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가 만드는 사회는 지금처럼 추악하고 파괴적인 사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순이 없고, 따라서 훈련이 필요하지 않는 완벽한 통합 행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면, 전적으로 다른 문화, 새 문명을 지을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항하고 누르려고만 한다면, 이 저항에 부딪히고 눌린 것들이 필연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작용하여 사회를 해치는 행위, 파괴적인 사건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 훈련이라는 문제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내가 보기로는, 훈련이란 추악한 것입니다. 창조적인 것이 못 됩니다. 파괴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내 말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말을 이해하지 마세요. 천만의 말씀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은, 저 좋을 대로 하지 '않습니다'. 올바른 행위를 지향하게 하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이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사랑하는 일이며 사랑이 하고 싶어 하는 대로 하게 되는 일입니다.
-- 왜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싫어합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정말 가난한 사람들을 싫어합니까? 당신을 나무라자는 게 아닙니다. 정말 가난한 사람들을 싫어하는지 묻고 있는 것뿐입니다. 싫어한다면, 왜 그렇습니끼? 왜, 왜 싫어합니까? 당신도 언젠가는 가난뱅이가 될 테고 그 때의 자기 몰골을 상상하면 두려우니까 싫다는 겁니까? 아니면 가난한 사람들의 저저분하고, 단정하지 못한 꼴이 마음에 안 드는 겁니까? 단정치 못하고 더러운 것이 싫어서, "가난뱅이와는 상대도 하기 싫다."고 하는 겁니까? 그 때문입니까? 하지만 가난, 불결함, 혼란, 이런 걸 누가 만들었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부모님, 여러분의 정부 -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만들었습니다. 왜? 우리 가슴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식도, 이웃도, 심지어는 살아 있는 자도 죽은 자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에도 사랑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정치가들은 이 세상의 비참하고 추악한 것들을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관심하는 바는 오직 여기저기에다 미봉책을 마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만 있으면, 이 추한 것들은 내일에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사랑하는 것이 있습니까? 사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전 존재를 던져 무엇인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때, 이 때의 사랑은 감상적인 것도 아니요, 의무도 아닙니다. 육체적인 것, 거룩한 것으로 나눌 수 있는 사랑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부모님도 좋고, 친구도 좋고, 개도 좋고, 나무도 좋습니다. 전존재를 던져 사랑해 본적이 있습니까? 아마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추악함, 증오, 질시가 자리할 넓은 공간이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이런 빈 데가 없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이 문제를 두루 토의하고, 우리들 마음에 달라붙어 사랑을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할 방법을 찾는데 노력해야 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유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사랑할 때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생기 발랄한 사람, 행복을 느끼는 사람만이 새로운 세상을 가꾸어 낼 수 있습니다. 이런 세상은, 정치가, 개혁주의자, 관념적인 성자들이 가꾸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 선생님은 진리, 선, 통합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진리, 선, 통합의 이면에는 허위, 악, 분열이 있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하면 훈련을 통하지 않고 진리와 선에 이르고, 통합을 이룰 수 있습니까?
크리슈나무르티: 다른 말로 해볼까요? 우리는 남을 질투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훈련을 통하지 않고 질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느냐, 이 말이지요? 우선 질문 자체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왜냐하면, 답이 질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답이 질문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질투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은 잘생긴 사람들입니다. 좋은 옷을 입고 있습니다. 멋진 터번을 두르거나 아름다운 사리를 입고 있습니다. 나도 그런 옷을 입고 싶습니다. 그러나 입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질투하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이 가진 걸 바라거나 지금과는 다른 상태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은 여러분을 질투하는 것입니다.
내가 질투하는 것은 여러분처럼 아름다워지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멋진 옷, 으리으리한 집, 높은 지위가 탐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같은 상태를 부러워하는 것은 내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불만 및 그 불만의 원인을 이해하면 여러분과 같아지기를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을 탐내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면 나와 남을 비교하거나, 남을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질투라는 감정은, 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을 때, 다른 사람처럼 되고 싶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과연 무엇인지, '이걸' 알고 싶다."고 할 때 질투의 감정은 사라집니다. 이 경지에 이르면 훈련 같은 것은 필요 없습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데서 자기통합이 시작됩니다.
우리의 교육, 우리의 환경, 우리의 문화는 우리에게 더 나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철학, 종교, 그리고 경전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더 나은 존재가 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남을 질투합니다. 남을 질투한다는 것은 현재의 나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무엇인지, 왜 늘 남과 비교하려 하는지, 왜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인지 알면 자신을 훈련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이 이해하는 과정 속에서 통합과정이 시작됩니다. 우리 내부의 모순은,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와 함께 사라집니다. 이로써 우리는 통합된 인간,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 힘이란 무엇입니까?
크리슈나무르티: 힘에는 내연기관, 증기기관 혹은 전기 기관에 의한 기계적인 힘이 있습니다. 나무 안에도 힘이 있습니다. 이 힘이 수액을 흐르게 하고 잎을 돋아나게 합니다. 명징하게 생각하는 힘, 사랑하는 힘, 미워하는 힘도 있고 독재자의 힘도 있으며 신의 이름으로, 도사들의 이름으로, 국가의 이름으로 인간을 이용하는 힘도 있습니다.
전기, 빛, 원자력으로서의 힘... 이런 힘은, 그 자체로서는 좋은 것이지요? 그러나 침략과 독재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힘처럼, 무엇인가를 얻는 데 사용되는 마음의 힘은 어떤 상황에서건 나쁘게 작용합니다. 사회의 우두머리,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행사하는 교회나 종교 조직의 우두머리들은 나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사람들을 조종하고, 틀잡고, 안내하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조직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이란, 맑게 사고할 수 있게 되는 순간, 혼돈에서 벗어나는 순간 지도자이기를 포기합니다. 힘을 포기하는 거지요.
이제 중요한 것은, 왜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행사할 힘을 가지고 싶어 하는지 그 까닭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부모님들은 자식에게 힘을 행사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힘을 행사합니다. 한 가정에서 시작된 이 악덕은 독재 정부, 독재적인 정치 지도자, 독선적인 종교 학자에 이르기까지 확산됩니다. 인간은, 힘에 대한 이런 갈증을 느끼지 않고는, 남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남을 이용하지 않고는, 자기 자신, 혹은 집단, 국가, 종교지도자, 성자를 강화시키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일까요? 이런 종류의 힘은 하나같이 파괴적입니다. 인간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반면에, 남에게 대한 친절, 배려, 사랑... 이런 것들은 이상하게도 시간을 초월해서 그 힘을 발휘합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영원합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사악한 힘이 자리하지 못합니다.
-- 우리는 왜 명성을 좇습니까?
크리슈나무르티: 나름대로 생각해 본 적은 있습니까? 우리는 작가로, 시인으로, 화가로, 정치가로, 가수로, 혹은 각기 추구하는 방면에서 유명해지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고 있는 일을 별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노래하고 그림 그리고 시 쓰는 일을 진심으로 살아야 한다면, 유명해지건 말건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유명해지고 싶다는 건 속되고, 하찮고, 멍청한 욕심입니다. 무의미합니다. 우리는,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명성으로써 이 일을 치장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교육은 감히 썩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게 아니라 성공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과를 행위 자체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잘 들으세요. 여러분의 빛나는 지성이 말 아래 두는 일, 숨어 사는 일,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하되 뽐내지 않는 일, 멋지지 않습니까. 이름 내지 않고 선행을 베푸는 것도 근사한 일입니다. 이렇게 하면 유명해지지 않습니다. 신문에 사진이 나는 일도 없습니다. 정치가들이 여러분 문전을 서성거리는 일도 없겠지요. 이렇게 살 때 여러분은, 숨어 사는 창조적인 인간일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은 풍부하고 아름다운 법입니다.
15. 협력과 부담
우리는 지금까지 많은 이야기를 해 왔고 우리 삶의 여러 가지 문제를 다루어 왔습니다. 하지만 정말 무엇이 문제인지 알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문제라는 것은, 우리 마음에 뿌리를 내리게 내버려두면 해결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마음은 문제를 만들어 내고는 그 문제가 뿌리를 내릴 토양이 되어 버립니다. 이 문제가 일단 우리 마음에 뿌리를 박아 버리면 뽑기가 무척 어려워집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문제의 정체를 눈여겨보고, 이 문제가 자랄 토양을 제공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이 세계가 당면한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가 협력, 협동의 문제입니다. '협력'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지요? 협동한다는 말은 함께 일한다, 함께 짓는다, 함께 느낀다, 함께 자유로이 일할 수 있도록 나누어 갖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함께 일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함께 일하는 게 자연스럽고 쉽지가 않은 거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함께 일하라는 강요를 받습니다. 겁주기, 상벌 같은 장치를 통해서 말이지요. 이런 일은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독재 정부 아래서는 무자비하게 동원되어 함께 일해야 합니다. '협력, 협동'하지 않으면 숙청당하거나 집단 수용소행입니다. 이른바 문명 국가에서도 여러분은 '나의 조국'이라는 관념, 교묘하게 조작되고 여러분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널리 선전된 이데올로기를 통해 함께 일하자는 권유를 받습니다. 누군가가 교묘하게 그려낸 유토피아의 청사진을 실현시키는 데 동참하라는 권유를 받기도 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을 함께 일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이러한 계획이요, 관념이요, 권위입니다. 이렇게 함께 일하는 것을 '협력, 협동'이라고 하는데, 이 협력, 협동을 권유하는 이면에는 상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협력, 협동'의 배후에는 겁주기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무엇인가를 '위하여' 일하고 있습니다. 조국을 위해, 임금님을 위해, 당을 위해, 신이나 위대한 도시를 위해, 평화를 위해, 아니면 이러저러한 개혁을 위해 일합니다. 협력이라는 것은 특정 결과를 위해 함께 일하는 것인 셈입니다. 여러분에게는, 협력을 통해 성취시키고자 하는 이상 - 완전한 학교를 만들자는 이상 같은 - 이 있습니다. 그래서 협력이라는 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권위가 끼어 들어와 있지요? 일을 하다 보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인가를 아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성취시키기 위해서 서로 협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걸 협력, 협동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네, 협력, 협동이 아니라 일종의 탐욕, 일종의 공포, 일종의 강제입니다. 이런 협력, 협동의 배후에는, '협력, 협동'하지 않으면 정부가 너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5개년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다, 너는 집단 수용소행이다, 네 조국은 전쟁에 진다, 너는 천당에 못간다.... 이런 유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어떤 형태건 권유하고 유도하는 힘이 늘 작용합니다. 권유받고 유도당하는 한 진정한 협력, 협동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함께 일하기로 합의하고 함께 일한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협력, 협동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런 합의에서 중요한 것은 특정한 일을 해 낸다는 것이지 함께 일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과 내가 다리를 만들거나, 길을 닦거나 나무를 심기로 합의했다고 합시다. 그러나 이 합의의 이면에는 합의가 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내가 내 몫의 일을 하지 못하면 어쩌나, 여러분에게 일을 다 맡겨 버리게 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형식으로든 권유받고 함께 일하는 것은 협력, 협동이 아닙니다. 합의하고 함께 일하는 것도 협력, 협동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노력의 이면에는 무엇을 얻는다거나, 어떤 것을 피한다는 의도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진짜 협력, 협동은 이런 것과 전혀 다릅니다. 함께 존재하고 함께 일하는 재미를 누려야 진짜 협력, 협동입니다. 특정한 일을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습니까? 아이들은 대체로 함께 존재하고 함께 일하는 재미를 압니다. 아이들을 한 번 관찰해 보세요. 아이들은 무슨 일에서건 협력, 협동합니다. 여기에는 화합이나 불화, 상이나 벌 같은 건 없습니다. 그저 돕는 걸 좋아할 뿐입니다. 아이들은 함께 존재하고 함께 하는 재미를 알고 본능적으로 협력, 협동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이 일을 하면 저걸 주겠다.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영화구경을 시켜 주지 않을 테다." 이런 말로 아이들을 부패시킴으로써 그들의 자연스럽고도 자발적인 협력, 협동 정신을 깨뜨려 버립니다.
따라서 진짜 협력, 협동이라는 것은 어떤 일을 함께 하자는 합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재미, 다만 함께 한다는 느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 느낌에는 개인의 관념 작용이나 개인 의견의 개입이 없습니다.
이런 협력, 협동을 경험해 보았다면 어떤 경우에 협력, 협동하지 '말아야' 하는지도 알 것입니다. 이것 역시 굉장히 중요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우리는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협력, 협동을 일깨울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한 정신을 일깨울 때 우리의 협력, 협동이 어떻게 되는지 잘 보세요. 우리는 어떤 계획을 위해, 혹은 합의된 바를 위해 협력, 협동하지 않습니다. 함께 한다는 참으로 굉장한 느낌, 상벌이 개입하지 않는, 함께 존재하고 함께 일하는 재미만을 위해 협력, 협동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협력, 협동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가령 우리가 똑똑하지 못하면 엉뚱한 일에 협력하게 됩니다. 히틀러나 역사상의 여러 독재자같이, 엄청난 계획, 환상적인 이상에 사로잡힌 야심적인 지도자들에게 봉사하는 셈이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협력, 협동하지 '않아야' 할 때를 알아야 합니다. 진짜 협력, 협동의 재미를 알 때만, 우리는 어떤 경우에 협력, 협동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 어떻게 하면 걱정거리를 없애 버릴 수 있습니까, 그 걱정거리를 피해 갈 수도 없는데요?
크리슈나무르티: 그러면 마땅히 부딪혀야지요. 여러분은 흔히 걱정거리가 생기면 문제를 피해 가려고 합니다. 절에 가거나, 영화 구경을 하거나, 잡지를 뒤적이거나, 라디오를 틀거나, 다른 데로 주의를 돌립니다. 그러나 피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되돌아오면 여전히 문제는 거기에 있을 것이니까요. 그런데 왜 처음부터 그 문제와 부딪치려 하지 않습니까?
걱정이라는 게 도대체 뭡니까? 여러분은 시험을 앞두고 걱정합니다. 떨어지면 어쩌나 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진땀을 흘리고 잠을 설칩니다. 떨어지면 부모님들이 실망할 겁니다. "해냈어요. 시험에 합격했어요."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시험 결과가 나올 때까지 걱정합니다. 이 상황을 비켜 갈 수 있습니까, 이 상황에서 도망칠 수 있습니까! 없지요? 그렇다면 맞붙어야 합니다. 왜 걱정합니까? 여러분은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어쨌거나 붙거나 떨어지거나 할 것입니다. 걱정하면 할수록, 두려워하면 할수록, 신경을 쓰면 쓸수록 그 만큼 여러분은 사고 기능의 장애를 받습니다. 그래서 막상 그날이 오면 글 한 자 쓸 수 없게 됩니다. 그저 시계만 쳐다보겠지요. 나도 다 겪어 본 일입니다.
마음이 자꾸만 어떤 문제 쪽으로 쏠릴 때, 끊임없이 그 문제에 대해 관심을 보일 때, 우리는 이런 상태를 걱정이라고 합니다. 자,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런 상태, 걱정하는 상태를 없앨 수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에, 문제가 뿌리를 내릴 토양을 마련하지 못하게 하는 일입니다.
마음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겠지요? 위대한 철학자들은 이 마음의 속성을 알아내기 위해 오랜 세월을 썼습니다. 마음에 대해서 씌어진 책도 이루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은 간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온 관심을 이 마음이라는 것에만 쏟을 수 있다면 말이지요. 자, 마음이라는 걸 자세히 관찰해본 적이 있습니까? 지금까지 여러분이 배워 온 것, 경험에 대한 기억, 부모님, 선생님으로부터 들어 온 말, 책에서 읽은 내용, 주위에서 본 것, 이 모든 것이 마음의 내용물입니다. 관찰하고, 구별하고, 배우고, 이른바 덕성을 쌓고, 생각을 나누고, 바라고, 두려워하는 것 이것이 마음입니다. 마음이란 표면에 나타나는 것만이 아닙니다. 인종적 야심, 행동의 동기, 충동, 갈등이 내재해 있는 무의식의 심층 역시 마음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의식이라고도 불리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늘 어디에다 관심을 쏟고 싶어 합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염려하고, 주부가 부엌일을 염려하고, 정치가가 인기나 국회에서의 지위를 염려하듯이 말이지요, 그러나 어디에다 관심을 쏟고 있는 마음, 다시 말해서 어떤 생각으로 가득 찬 마음은 문제를 해결해 낼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은 빈 마음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한 번 들여다보세요. 늘 전전긍긍하고 있지요? 늘 무슨 생각으로 가득 차 있지요? 어제 들은 말, 조금 전에 알게 된 것, 내일 할 일 같은 것으로 꽉 차 있지요? 비어 있을 때가 없습니다. 이것은 축 늘어져 있다거나, 일종의 정신적 진공 상태에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 - 이 생각이 고상한 것이든 유치한 것이든 - 으로 꽉 차 있으면 마음은 작고 비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작은 마음은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문제를 담을 수 있을 뿐입니다. 문제가 아무리 크고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이 문제에 집착하면 마음은 아주 비좁아집니다. 빈 마음, 따라서 산뜻한 마음만이 문제와 맞닥뜨릴 수 있고 문제를 풀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강가에, 혹은 방안에 앉아 있을 때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한 번 들여다보세요. 그러면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공간,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그 공간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잡다한 생각으로 채워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이 이렇게 채워져 있는 한,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한 - 가정주부의 마음이나 위대한 과학자의 마음이나 마찬가집니다 - 마음은 작고 비좁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마음은 어떤 문제와 맞닥뜨려도 그 문제를 풀어낼 수 없습니다. 반면에 이 마음이 비어 있으면 문제를 맞닥뜨릴 수도 있고 풀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마음은 늘 산뜻하기 때문입니다. 오래전부터 길들어진 생각이나 기억, 관습에 매이지 않고 문제를 새롭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어떻게 하면 우리들 자신을 알 수 있습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여러분은 자기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지요?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자주 보았을 테니까요. 여러분을 샅샅이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있습니다. 얼굴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는 생각, 느낌, 의도, 욕심, 충동과 공포까지 비추는 거울이 있습니다. 이 거울이 바로 관계의 거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부모님들, 여러분과 선생님들, 여러분과 강, 땅, 여러분과 여러분 생각의 관계, 이 관계를 비추어 주는 거울입니다. 관계는 거울입니다. 이 거울을 통해 여러분은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는 모습이 아니라, 여러분 그대로의 모습을 비추어 주는 거울입니다. 보통 거울을 들여다볼 때는, 근사한 모습이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불가능한 얘기지요. 거울은 우리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비춥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일 수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남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관계의 거울을 통해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어떤 식으로 대하는지, 이 관계의 거울에는 그대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는 사람에게는 공손하게 말하고 있을 것입니다. 줄 수 없는 사람에게는 되는대로, 혹은 얕잡아보는 듯한 말투를 쓰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사람이 들어오면 일어서지만, 하인이 들어오면 본 체도 안 할 것입니다. 이 관계의 거울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사람을 존경한다는 게 얼마나 위선적인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거울 속에서 우리들 자신과 나무, 새, 관념, 그리고 책과의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의 학위라는 학위는 다 땄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를 알지 못하면 여러분은 그렇게 멍청한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알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교육의 목적입니다. 자기에 대한 인식 없이, 그저 시험에 대비해서 배우고 쓰는 것은 참 웃기는 인생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바가바드 기타, 우파니샤드, 코란 혹은 성경을 줄줄 인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자신을 모르고 있다면 흉내나 내는 앵무새와 다를 게 없습니다. 반면,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자기 자신을 알기 시작할 때 여러분은 엄청난 독창성을 구사할 수 있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 - 탐욕스럽고, 호전적이고, 선병질적이고, 질투가 많고, 우둔하더라도 이런 자신을 볼 수 있게 된다면 이건 대단한 발견일 수 있습니다. 바꾸려 하지 않고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본다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본다면 여러분은 여기에서 엄청난 계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의 사고는 끝없이 깊어갑니다. 왜? 자기 인식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지요.
이 자기 인식을 통하여 여러분은 신이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시간을 초월한 상태가 무엇인지도 알아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선생님들은, '자기'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지식을 여러분에게 전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지식으로 시험에 합격하고, 학위를 따는 등등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울을 보고 자기 얼굴을 알 듯이,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알지 못하면 여러분의 지식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합니다. 아무리 유식해도 자신을 모르는 사람은 무식장이입니다. 이런 이들은 사고가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교육자들이 교육받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교육자들도 배움을 통해 마음과 생각의 작용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관계의 거울에 비친 자신을 정확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기 인식은 지혜의 시발점입니다. 자기 인식 안에 우주가 있습니다. 자기 인식은 인간의 모든 갈등을 두루 싸안습니다.
-- 가르쳐 주는 분이 없는데도 우리는 자기 인식에 이를 수 있습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자기 인식에 충동하고 자극하고 몰아붙여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까? 여러분, 이 질문을 잘 음미해 보세요. 이 안에 답이 있습니다. 이 문제를 잘 음미하면 반쯤은 해결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마음이, 해답을 찾으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으면 이 문제를 음미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자기 인식에 이르려면, 가르쳐 줄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여러분에게 구루가 있어야 한다면, 여러분의 영감을 촉발할 사람, 여러분을 격려할 사람, 칭찬할 사람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여러분이 그런 사람에게 의지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설사 자기 인식에 도달하고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이 떠나면 원래 상태로 돌아가고 맙니다. 여러분이 누구에게, 혹은 어떤 관념을 촉발시킬 영감에 의지하는 순간, 두려움이라는 구속이 생깁니다. 따라서 영감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그건 참 영감이 아닙니다. 실려가는 시체, 싸우는 사람을 그저 바라본다고 합시다. 이 광경이 여러분 마음에 어떤 생각을 일으키지 않을는지요? 야심만만한 사람을 보았거나, 지위 높은 관리가 들어오자 그 발치에 무릎을 꿇는 사람을 보았다면, 이런 일이 여러분 마음속에 생각을 일으키지 않을까요? 네, 영감이라는 것은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떨어지는 나뭇잎, 사람의 손에 죽은 새의 시체에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것을 바라본다는 것은 배우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스승으로 생각하면 여러분은 이 배움의 길에서 벗어나고 맙니다. 그 사람은 여러분의 악몽이 되고 맙니다. 누구를 따르지 말아야 하고, 스승을 모시지 말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따르지도 말고 모시지도 말고, 강, 꽃, 나무, 짐을 지고 가는 아낙네, 여러분 가족, 여러분의 생각으로부터 배우세요. 어떤 사람으로부터도 배울 수 없습니다. 오직 여러분 자신으로부터만 배울 수 있습니다. 이래서 이러한 배움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끊임없이 관찰하고 줄기차게 의문을 제기하는 마음입니다. 관찰을 통해, 몸부림을 통해, 행복한 순간, 눈물겨운 순간의 체험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 자기모순을 안고서야 어떻게 동시에 존재하고 함께 할 수가 있습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자기모순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나는 이런 일을 하고 싶어 하면서 동시에 저런 일을 하라는 부모님을 기쁘게 해주고 싶다, 이럴 때 나는 갈등을 느낍니다. 이것이 자기 모순 상태지요. 자,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요? 이 모순을 해소시키지 못하면 존재고 행위고 제대로 할 수 있을 턱이 없습니다. 이때 먼저 해야 할 일은 자기모순에서 자유로워지는 일입니다.
자, 여러분은, 그림 그릴 때만 삶의 기쁨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림을 공부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아버지는 여러분에게, 법률가나 사업가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학비를 줄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는다고 칩시다. 여러분은 모순을 느끼게 되겠지요? 어떻게 하면 이 내적 모순을 떨쳐 버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이 갈등, 이 고통에서 헤어날 수 있을까요? 자기모순에 사로잡혀 있으면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어떻게든 손을 써서 이 모순에서 헤어나와야 합니다. 어떻게요? 아버지에게 굴복해요? 굴복한다는 것은 즐거움을 버리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이게 모순을 해소시키는 방법일 수 있을까요? 반면에 아버지에게 맞서서, "죄송합니다, 아버지. 거지가 되어도 좋고 굶어 죽어도 좋습니다. 그림을 그리겠습니다."하고 말한다면 모순은 사라집니다. 이렇게 하면 동시에 존재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온 정성을 이 일에 쏟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면서 법률가나 사업가가 되었다고 합시다. 여러분은 한평생을 재미없고 피곤한 인간으로 살게 됩니다. 고통스러워하면서 좌절하면서, 비참하게 살아야 합니다. 남을 부수고 저 자신을 부수면서 살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을 여러분 스스로 생각하는 일입니다. 왜냐고요? 여러분이 커감에 따라 여러분에 대한 부모님의 바람은 자꾸만 늘어납니다. 만일에 여러분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하고 분명하게 생각하고 분명하게 결정해 두지 않으면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부모님 손에 끌려다녀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좋아하는 일, 일생을 바칠 만한 일을 미리 찾아 나서면 모순 같은 건 생길 까닭이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여러분의 존재가 곧 행위입니다.
--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부모님에 대한 의무까지 저버려야 한다는 것입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의무'라는 근사한 말을 썼는데, 무슨 뜻으로 썼나요? 누구에 대한 의무인가요? 부모님에 대한 의무? 정부에 대한 의무? 사회에 대한 의무? 만일 부모님이, 법률가가 되어 자신들을 제대로 부양하는게 자식의 의무라고 하시는데도 여러분은 산야시가 되고 싶다, 그럼 어떻게 하겠어요? 인도에서는 산야시가 되면 존경을 받으니까 여러분 아버지도 승낙할 겁니다. 여러분도 고행자의 법복을 입으면 뭐나 된 것 같은 기분일 테고, 여러분 아버지도 자식을 산야시로 보낸 덕을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여러분이 목수나 도자기공처럼 손을 써서 하는 일을 좋아한다면, 여러분의 의무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걸 누가 여러분에게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 보고 그 뜻을 깨우쳐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생각하는 이 일이야말로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평생을 몸바쳐 할 수 있는 일이다, 부모님이야 승낙하건 말건."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님이나 사회가 바라는 일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진정한 의무가 무엇인지 그것도 생각하세요. 그리고는 무엇이 진실인가, 굶어도 좋고 비참해져도 괜찮고 죽어도 상관없으니 평생을 바칠 만한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대단한 지성과 감각, 통찰력,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잘 들으세요. 의무라는 생각에서 부모님을 부양한다면 이 부양이라는 것은 저자거리에서 사 올 수 있는 물건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여기에는 사랑이 없으니까 의미도 없습니다.
-- 나는 기술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를 반대하고 학비를 대지 않으려 한다면 내가 어떻게 이 방면의 공부를 할 수 있겠습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아버지가 당신을 쫓아내는 한이 있어도 기술자가 되겠다고 우길 경우, 당신에게는 살아갈 방법도, 기술자가 되기 위해 공부를 계속할 학비도 없다, 이런 말이지요? 그럼 얻어먹든지 친구에게 손을 벌리든지 하겠지요. 이것 보세요. 인생이라는 건 참 이상한 겁니다. 하고 싶은 일이 분명해지는 순간 무슨 일인가가 벌어집니다. 삶이 당신을 돕습니다. 친구, 친척, 선생님, 할머니 같은 분이 당신을 돕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쫓아내는 게 무서워서 포기한다면 당신은 구제불능입니다. 두려워서 남의 요구에 굴복하는 사람, 삶은 이런 사람의 편이 되어 주지 않아요. 그러나, '이거야말로 정말 내가 하고 싶어 하던 일이다. 밀고 나가야겠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정말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당신은 배를 곯으며 역경을 헤쳐 나가려고 몸부림칠 겁니다. 그러나 이때의 당신은 옛날 당신의 복사판이 아닙니다. 당신은 전혀 다른 인간이 되어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아실 테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홀로서기를 두려워합니다. 젊을 때는 사실 홀로 선다는 게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미국이나 유럽과는 달라서 경제적인 자유가 없는 나라니까요. 이 나라에는 인구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쉬 기가 꺾입니다. 여러분은 늘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자신에게 물을 테지요. 그러나 버티어 보세요. 그러면 어떤 일이, 혹은 누군가가 당신을 도울 겁니다. 세속적인 요구와 맞설 수 있을 때 당신은 당당한 인격으로 설 수 있습니다. 이때 삶은 당신 편이 됩니다.
생물학에는 돌연변이라고 불리는 현상이 있습니다. 어떤 종에서 갑자기 엉뚱한 종이 불쑥 튀어나오는 현상을 말합니다. 정원을 자주 손질해 보았다면, 어떤 종류의 꽃을 가꾸어 보았다면 알 것입니다. 어느 날 아침에 문득 전혀 새로운 꽃이 거기에 피어 있는 걸 보았을 겁니다. 이 새로운 꽃이 바로 변종입니다. 새롭기 때문에 돋보입니다. 그래서 꽃 가꾸는 사람은 이 꽃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입니다. 삶도 이와 같습니다. 모험에 자신을 거는 순간 여러분 안에, 그리고 주위에 무슨 일인가가 일어납니다. 삶은 갖가지 방법으로 여러분의 편이 되어 줍니다. 새로 선택한 삶의 형태가 여러분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을 비참하게 만들 수도 있고, 몸부림치게 할 수도 있고, 굶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삶까지도 싸안을 수 있을 때 그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잘 아시겠지만, 우리는 삶을 싸안으려고 하지 않고 다만 안전한 놀이로서 즐기려고만 합니다. 그리고 안전한 놀이를 즐기는 사람은 안전하게 죽습니다. 내말이 틀립니까?
16. 마음을 새롭게 하기
어느 날 아침 나는 화장터로 실려 가는 주검을 보았습니다. 아주 빨간 천에 싸여 있었는데, 시신은 운구하는 산 사람 넷이 몸을 움직이는 데 따라 출렁거리더군요. 사람들은 주검을 보는 순간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왜 인간은 피폐하는지, 혹시 궁금하게 여겨 본 적이 있는지요? 새 차를 사서 몇 년 쓰다 보면 헌 차가 됩니다. 육체도 낡습니다. 그렇다면 내친 김에 왜 마음도 피폐하는지 물어봅시다. 조만간에 육체에는 죽음이 옵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의 마음은 이미 죽어 있습니다. 몸은, 우리가 끊임없이 쓰니까, 기관이 낡아져서 피폐합니다. 질병, 사고, 나이, 나쁜 음식, 나쁜 유전 형질 - 이 모든 것이 육체를 피폐하게 하고 죽이는 요인들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왜 피폐합니까? 늙고, 무거워지고 둔해지는 것입니까?
시신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까? 우리 육체가 죽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마음은 왜 피폐합니까? 이런 의문을 제기해 본 적이 없습니까? 마음도 '피폐'합니다. 나이 많은 사람은 물론 젊은이들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젊은이들을 통해 마음이 어떻게 둔해지고 무거워지는가를 압니다. 만일에 마음이 이렇게 피폐해지는 까닭을 알면, 미리 방지할 수 있을 텐데요.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끝나지 않는 삶, 시간에 매이지 않는 삶, 부패하지 않는 삶, 강가 층층다리로 실려 가 불에 그을리고, 남은 것은 강으로 버려지는 육체같이 썩지는 않는 삶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 왜 마음이 피폐할까요? 여기에 대해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젊을 때의 우리 마음은 산뜻하고, 열의가 있고,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부모 때문에, 사회 때문에, 환경 때문에 이미 둔해지지 않았다면 말이지요. 여러분은 왜 별이 빛나는지, 왜 새가 죽는지, 왜 나뭇잎이 떨어지는지, 제트기가 어떻게 나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은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묻거나, 알고 싶어하는 이 활기찬 충동은 곧 짓눌리고 맙니다. 공포에 짓눌리고, 전통의 무게에 짓눌리고, 인생이라고 하는 이 엄청난 것과 맞설 수 없는 우리의 무능에 짓눌립니다. 여러분도 익히 보았을 테지요? 여러분의 열의가 얼마나 쉽게, 나무라는 한마디 말, 하지 말라는 몸짓, 시험의 공포, 부모의 위협 앞에서 무참하게 부서지는가를. 이것은 우리의 감성이 이미 옆으로 밀렸고, 우리 마음이 이미 둔해졌음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닐는지요. 우리 마음을 둔화시키는 또 하나의 요인은 모방입니다. 여러분은 전통에 의해 모방하게끔 되어있습니다. 과거의 무게가 여러분을 어떤 양식에 길들이고 순응하게 합니다. 이 순응을 통해 마음은 안도감을 느낍니다. 이 순응하는 습관은 윤활유를 듬뿍 칠한 구멍과 같습니다. 걸림이 없이, 한 점 의혹이 없이 우리를 드나들게 해주니까요. 주위에 있는 어른들을 관찰해보세요. 그들은 평화를 원합니다. 죽음의 평화라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참 평화는 그들이 바라는 평화와는 달라도 많이 다릅니다.
자, 마음이 그 구멍 안에, 틀 안에 안주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욕구가 이 구멍을 더욱 강화시킵니다. 구멍 안에 들어앉은 사람이 이상을 따르고 전례를 따르고 구루를 따르는 것도 다 이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방해받지 않고 안전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모방합니다. 역사책에서 위대한 지도자, 성자, 장군에 대한 글을 읽으면, 어떻습니까, 그들의 삶을 본뜨고 싶지 않습니까? 이 세상의 위대한 사람들의 삶을 본뜨고 싶지 않습니까? 우리의 본능은 위대한 사람들을 본뜨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그들과 같은 인간이 되고자 노력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을 피폐시키는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바로 그러면서 마음은 스스로를 틀 안으로 가두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사회는 깨어 있는 사람, 예리한 사람, 혁명적인 사람을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기존 사회의 틀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틀을 부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여러분의 마음을 틀 안에 가두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른바 교육이 모방하라고, 따르라고, 순응하라고 여러분을 꼬드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은 모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말하자면, 습관 만드는 것을 그만둘 수 있을까요? 늘 습관에 갇혀 있는 마음이 이 습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마음은 습관의 결과가 아닐까요? 마음은 전통의 결과, 시간, 즉 과거의 반복과 연속이라는 의미에서 시간의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은,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 -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 투사되어있는 미래의 일까지 - 에 대한 생각을 없애 버릴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마음은 습관에서, 그리고 습관을 만드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이 문제를 깊이 파고 들어가면 이런 일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새로운 틀, 새로운 습관을 만들어 내지 않고, 다시 모방의 구덩이에 빠지지 않고 자신을 새롭게 한다면, 늘 싱싱하고 젊고 순수할 수 있으며 따라서 영원히 배우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모아들이는 과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습관을 만드는 것, 모방하는 것은 모아들이는 과정입니다. 마음이 무엇인가를 긁어모으고 있을 때, 여기에 피폐가 따르고 죽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긁어들이지 않는 마음, 모아들이지 않는 마음은 매일, 매순간마다 죽습니다. 이런 마음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끝없이 빈 상태가 바로 이런 마음의 상태입니다. 따라서 마음은 그 긁어 들인 모든 것에 대해서, 모든 습관, 모방한 가치관, 평화를 위해 의지하고 있던 모든 것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이렇게 죽은 마음은 저 스스로의 생각이라는 그물에 갇히지 않습니다. 순간순간 과거에 대해 죽음으로써 마음은 산뜻해집니다. 따라서 이런 마음은 피폐하지도 않고, 죽음의 파도에 휩쓸리는 일도 없습니다.
-- 어떻게 하면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실천할 수 있는지요?
크리슈나무르티: 당신은 옳다고 생각되는 말을 들으면 일상생활 속에서 이를 실천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생각과 행동 사이에는 틈이 있습니다. 그렇지요? 당신은, 생각은 이렇게 하고 행동은 저렇게 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생각한 바를 실천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행동과 생각에 이러한 틈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하면 이 틈을 메울 수 있느냐, 어떻게 하면 생각을 행동에다 잇댈 수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정말 하고 싶을 때 당신은 그 일을 합니다. 밖에 나가서 크리켓을 하고 싶다, 재미를 느낄 만한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면 당신은 그 일을 할 방법과 수단을 찾아냅니다. 어떻게 하면 실행할 수 있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 일에 대해 열이 올라 있어서, 당신의 전 존재, 온 마음, 온 생각이 온통 거기 쏠려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태와는 조금 다른 이 문제의 경우 당신은 아주 교활해져 있습니다. 당신은 이 일을 생각하면서 저 일을 실행하고 싶어합니다. 당신은, 그것 참 근사한 일이다, 일단은 찬성이다, 그러나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다, 그러니 이를 실천 할 방법을 가르쳐 달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신에게 이를 실천할 의사가 없다는 뜻입니다. 당신이 정말 바라고 있는 것은 실천을 미루는 일이며, 그 까닭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조금만 질투하기를 원하는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 다 질투하는데, 나는 왜 질투하면 안 되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전과 다름없는 상태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당신이 남을 질투하지 않으려면, 질투의 진실을 알면, 코브라의 진실을 보듯이 질투라는 것의 진실을 알면 당신은 더 이상 남을, 어떤 상태를 질투하지 않아도 됩니다. 즉 질투하는 상태가 끝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질투하는 상태에서 해방될 수 있느냐고 묻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물이나 상태의 진실을 아는 일입니다. 그런 상태를 실천하는 방법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실천하는 방법을 묻는다는 것은 그 상태의 진실을 모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길을 가다가 코브라를 만나면, '이 일을 어떻게 한다?'하고 자신에게 묻습니까? 당신은 코브라가 얼마나 위험한 동물인지 잘 아니까 몸을 피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 질투하는 상태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따져 보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대해 당신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도 없고, 함께 따져본 사람도 없습니다. 질투하면 안 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질투의 본질을 따져 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사회나 조직화 된 종교가 다 이 질투, 무엇인가 다른 것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질투라는 것의 본질을, 그 진실을 꿰뚫어 볼 때 질투심은 사라집니다.
'어떻게 하면 실천할 수 있느냐.'는 것은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의 물음입니다. 어떤 일을 실천할 방법을 모른다, 그런데 그 일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그 일을 곰곰이 따져 보세요. 그러면 눈에 보이기 마련입니다. 이러지를 않고 삐딱하게 앉아, "탐욕에서 벗어날 방법을 가르쳐 주시오." 하고 백날 물어봐야 탐욕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깨어 있는 마음으로, 편견을 물리치고 이 탐욕의 본질을 묻고 따진다면, 여러분의 전 존재를 이 물음에 던져 넣는다면, 스스로 질투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진실 자체이지, 자유로워질 방법을 알아내려는 태도가 아닙니다.
-- 왜 욕망이라는 것은 욕망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우리가 바라는 바를 성취시키는 데는 왜 늘 장애가 있습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어떤 일에 대한 여러분의 욕망이 완전할 때, 만일 결과에도 성취에도 집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여러분의 전존재가 여기에 투입된다면 - 여러분에게 두려움이 없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 장애 같은 것은 있을 턱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욕망이 완전하지 못할 때, 욕망 자체에 갈등이 있을 때, 여기에 장애가 있고 모순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하면서도 그 일을 두려워하는 상태, 이 일을 하고 싶어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정말 어떤 상태가 되는 것인지 분명히 자각하고 있습니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내가 설명할 테니 잘 들으세요.
인간과 인간의 집단적인 관계인 사회는 여러분이 완전한 욕망을 갖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욕망을 가질 때 여러분은 사회의 골칫거리, 위험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야심이나 질투 같은 것 정도는 사회도 허용합니다. 있어 봐야 별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회라는 것은 질투하는 사람, 야심 만만한 사람, 무엇을 믿고 무엇을 모방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는 질투, 야심, 믿음, 모방 따위를 용인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공포에 다름이 아니라도 사회는 그대로 용인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욕망이 기존 사회의 틀에 맞으면 여러분은 훌륭한 시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욕망이 완전해지는 순간 이 완전한 욕망은 사회가 요구하는 틀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회로 보아서는 여러분은 위험한 존재로 변합니다. 그래서 사회는 여러분이 완전한 욕망을 갖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막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욕망은 여러분 전존재의 표현에 다름 아니고, 따라서 혁명적인 행동을 유발할 수 있는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존재한다는 행위는 무엇무엇이 된다는 행위와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존재하는 행위는 혁명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는 이를 거부합니다. 대신 사회가 좋아하는 것은 어떤 상태가 되려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사회의 틀에 적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심의 한 형태로서, 어떤 상태가 되려는 행위로 나타나는 욕망은 성취되지 않습니다. 조만간 꺾이고, 막히고, 좌절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고 우리는 나쁜 짓을 해서라도 여기에 저항합니다.
이것은 함께 따져 보아야 할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나이를 먹으면 여러분 역시, 욕망이라는 것은 절대로 성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욕망의 성취에는 늘 좌절의 그림자가 따릅니다. 좌절하는 여러분의 가슴에 깃드는 것은 노래가 아니라 절규입니다. 어떤 상태가 되려는 욕망 - 위대한 사람, 위대한 성자, 위대한 이것 아니면 저것이 되려는 욕망 -에는 끝이 없습니다. 따라서 성취될 리 없습니다. 이러한 욕망은 늘 고통과 비애와 전쟁의 씨앗이 될 뿐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태가 되려는 욕망에서 자유로워질 때, 행동이 전혀 달라지는, 말하자면 존재하는 경지에 이릅니다. 내가 빈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런 상태는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합니다. 이런 상태에 이른 사람은 성취와 전혀 상관없이 사고합니다. 이런 상태 자체가 곧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 저는 제가 미련한 사람이라는 걸 압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저더러 똑똑하다고 합니다. 어떤 걸 믿어야 합니까? 내 판단을 믿어야 합니까? 다른 사람의 말을 믿어야 합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자, 이 질문을 조용히 주의 깊게 따져 봅시다. 성급하게 답을 내려고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나를 똑똑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나는 내가 미련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압니다. 이 경우 여러분의 말에 따라야 할까요? 내가 똑똑하기를 바란다면 그렇게 하겠지요. 여러분의 아첨이 내 귀에 솔깃하게 들릴 겁니다. 나는 그 말에 영향을 받겠지요. 하지만 내가 만일, 미련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미련한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멍청하다면, 아무리 똑똑해지려고 해도 계속 멍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상태에 이르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멍청한 행동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멍청한 사람 역시 똑똑한 사람이나 하는 짓을 할 수도 있습니다. 시험에 합격할 수도 있고 일자리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로써 멍청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잘 들으세요, 비꼬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이 멍청하다, 미련하다는 걸 자각하는 순간, 다시 말하면 똑똑해지려고 노력하는 순간, 멍청한 상태를 따지고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 바로 이 순간이 지성에 눈을 뜨는 순간입니다.
탐욕이라는 걸 예로 들어봅시다. 탐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필요 이상으로 많이 먹는 것, 놀이에서 남을 큰 차로 앞지르고 싶어하는 것, 더 많은 재물을 바라는 것, 남보다 더 큰 자동차를 사려는 것, 이런 것들이 곧 탐욕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탐욕스러우면 '못쓴다'고 생각하고, 탐욕을 버리는 생활을 실천하려고 한다고 칩시다. - 이건 어리석은 짓입니다. 왜냐하면, 탐욕이라는 것은 버리려고 애쓴다고 해서 버려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탐욕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마음과 생각을 던져 이 탐욕의 진실을 뚫어보려고 할 때 여러분은 탐욕의 반대 개념은 물론, 탐욕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때의 여러분에게야말로 똑똑한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현상'과 씨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되어야 할' 상태를 본뜨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조금은 미련하더라도, 똑똑해지겠다고, 영리해지겠다고 애쓰지 마세요. 그저 무엇이 여러분을 미련하게 만드는지, 이걸 따져 보세요. 모방, 공포, 남을 본뜨자는 욕심, 어떤 선례나 이상을 따르자는 생각, - 이 모든 것들이 여러분의 마음을 미련하게 만듭니다. 남을 따르려 하지 않을 때, 공포를 물리칠 때, 스스로 맑고 분명하게 생각 할 수 있을 때 - 여러분은 가장 똑똑한 인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데도, 똑똑해지겠다고 애쓸 때 여러분은 진짜 미련한 사람 축에 들고 맙니다.
--우리는 왜 장난을 좋아합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장난치고 싶을 때,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세요. 아주 뜻있는 질문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화가 났을 때, 왜 화를 내고 있느냐고 자신에게 묻지는 않지요? 왜 화를 냈느냐고 묻는 것은, 화가 가라앉았을 때뿐이죠? 그렇지요. 화가 가라앉은 다음에야 여러분은, '바보같이, 화를 내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화가 나 있을 때 왜 화를 내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화가 난 상태를 혐오하지 말고 한 번 따져 보세요. 마음이 분노로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릴 때 그 흔들이는 '현장'에 있어 보세요. 화가 놀라울 정도로 빨리 가라앉는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아이들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장난이 심합니다. 그리고 이건 당연합니다. 아이들은 기운차기 때문이지요. 온 몸과 온 마음이 생명력과 기운으로 넘칩니다. 이런 것들은 어떤 형태로든 발산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왜 장난이 심하냐는 질문은 꽤 까다로운 질문입니다. 음식, 수면 부족, 정서 불안 같은 것도 장난이 심한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원인들이 제대로 해소되지 않는 경우, 아이들의 장난은 사회에 대한 반발로 표변합니다. 사회가 이런 원인을 해소해 주지 못할 경우에는 말이지요.
'비행' 청소년들이 어떤 애들인지 알겠지요? 온갖 못된 짓을 하는 아이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사회라는 감옥 안에서 저항합니다. 어른들이 이들을 도와 실존의 모든 문제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생기발랄합니다. 일부는 아주 똑똑합니다. 이들의 저항은, "이 강제, 이 엄청난 순응의 강요를 이해하고, 여기에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 달라."는 절규에 다름 아닙니다. 교육자들에게 이 문제가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이들 이상으로 교육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바로 교육자들입니다.
--저는 차를 즐겨 마십니다. 어떤 선생님은 이걸 나쁜 버릇이라고 하고, 어떤 선생님은 괜찮은 버릇이라고 합니다.
크리슈나무르티: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들 말은 잠깐 치워놓으세요. 편견일 수도 있으니까요. 질문을 한 번 더 들어봅시다. 소년이 어떤 일을 '즐겨하는' 걸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차를 즐겨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음식을 더 먹으려고 싸우거나 하는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나이가 일흔이나 여든, 즉 한쪽 발을 무덤에다 대고 있는 사람에게라면 어떤 일이 인이 박혀도 나무랄 일이 못 되겠지요. 하지만 여러분 나이는 이제 한창 꽃피는 나이입니다. 이럴 때 이미 어떤 일에 인이 박혀 있다면 곤란하지 않겠어요? 중요한 것은 차를 마셔도 좋으냐 나쁘냐가 아니라 바로 이겁니다.
어떤 일에 버릇이 들었다는 것은 여러분 마음이 이미 무덤을 향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힌두 교도로서, 공산주의자로서, 가톨릭 신자로서, 혹은 개신교 신자로서 생각할 때 여러분 마음은 이미 타락하고 있습니다. 시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이 깨어 있어서, 왜 어떤 습관이 매달리느냐, 왜 특정 방향으로만 생각하느냐고 묻고 따질 때, 차를 마신다거나 담배를 피운다는 부수적인 문제는 저절로 해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