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지성에 관하여 1
1. 교육의 기능
2. 자유의 문제
3. 자유와 사랑
4. 귀를 기울인다는 것
5. 창조적 불만
6. 삶의 전체성
7. 야심
8. 정돈된 사고
1 교육의 기능
여러분은 혹시 교육이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자문해 본 적이 있는지 궁금하군요. 우리는 왜 학교에 가며, 왜 여러 가지 과목을 배우고, 왜 시험을 치르고, 왜 저마다 나은 점수를 얻으려고 경쟁할까요? 이른바 교육이라고 하는 이 말은 무슨 뜻이며, 무엇을 교육한다는 것일까요? 이것은 정말 중요한 물음입니다. 학생들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학부모, 선생님들, 그리고 이 땅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물음입니다. 우리는 왜 교육받기 위해 경쟁에 뛰어들까요? 그저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젊은 시절에 인생의 전 과정에 대한 이해를 마련하는 데에 교육의 기능이 있는 것일까요? 일자리를 얻고, 생활비를 번다는 건 필요한 일입니다. 인생은 참으로 넓고도 깊은 것입니다. 인생이란 엄청난 수수께끼, 인생이란, 우리가 인간으로 기능하는 엄청나게 넓은 땅입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한 준비나 하다 보면 우리는 인생의 전체적인 의미를 놓치게 되고 맙니다. 인생을 이해한다는 것은, 시험을 준비한다거나, 수학, 물리학 등 여러분이 뛰어들고자 하는 분야에서 대가가 되는 일보다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이든 학생이든, 우리가 왜 교육하며, 왜 교육받고 있는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다? 자, 한 번 물어봅시다. 삶이란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삶이라는 것은 사실 굉장히 놀라운 것이 아닐까요? 새, 꽃, 푸르른 나무, 하늘, 별, 강, 강에 사는 물고기 이 모든 것이 삶입니다. 삶이란 구차스러운 것이면서도 풍요로운 것입니다. 삶이란 무리, 종족, 국가 간의 끊임없는 싸움입니다. 삶이란 명상입니다. 삶이란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것이며, 우리 마음속에 은밀히 숨어있는 미묘한 것들, 선망, 야망, 열정, 공포, 성취와 근심 같은 것들입니다. 삶은 이 모든 것이며,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겨우 이 모든 것의 조그만 귀퉁이 하나만을 이해할 준비나 하는 게 고작입니다. 우리는 이러저러한 시험에 합격하고 일자리를 얻어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그리고는 나날이 기계를 닮아갑니다. 우리는 그러면서도 삶을 두려워하고 근심하고, 삶에 대해 놀랍니다. 자, 그렇다면 교육의 기능은 우리를 도와 인생의 전 과정을 이해하게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직업, 우리 능력이 허락하는 최상의 일자리를 얻기 위한 준비나 시키는 데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자라 성인이 되면 우리 모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어른이 되면 무엇을 할 것이냐고 자문해 본 적이 있는지요? 보나마나 결혼이나 하고,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채 깨닫기도 전에 어머니 아버지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일에, 혹은 부엌에 싫증을 내게 되고, 점차 일터나 부엌에서 시름시름 시들어 갈 것입니다. 여러분이 겨냥하던 삶이 겨우 그겁니까? 이런 물음을 자신에게 던져본 적이 있습니까? 마땅히 던져 봐야 할 물음이 아닐까요? 여러분이 부잣집 아들딸들이라면 진작에 보장된 훌륭한 일자리도 있을 테고, 여러분 아버지가 쓸만한 일자리를 만들어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부잣집에 시집 장가갈 수 있을 테지요, 하지만 그런데 휩쓸리면 부패하고 맙니다. 여러분 인격이 뒤틀리고 맙니다. 아시겠지요?
분명하게 말해 둡니다. 삶이 참으로 미묘하고 엄청나게 아름답고, 슬프고, 기쁜 것이라는, 말하자면 삶의 넓이를 이해시키는데 여러분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교육은 무의미합니다. 여러분은 학위를 얻을지도 모릅니다. 이름 뒤로 수두룩하게 직함을 거느릴 수도 있고, 아주 좋은 일자리에 안착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는 뭡니까? 그러고 나서 여러분 마음이 흐리멍덩해지고 마음 쓰임새에 진력이 나고, 하는 짓이 어리석게 여겨진다면, 그래서 뭘합니까? 그러니까 젊을 때 인생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애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육의 참기능이란, 이 모든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낼 수 있도록 여러분 안에 있는 지성의 잠을 깨우는 것이 아닐는지요? 지성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네, 지성이란 두려워하지 않고 어떤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생각하는 능력입니다. 지성을 통해 자유로이 생각하면 여러분도 무엇이 의미있는 것인지, 무엇이 참된 것인지 스스로 찾아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고 있으면 절대로 지성인이 될 수 없습니다. 정신적인 것이든 세속적인 것이든, 야심이라는 것은 그 겨누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근심과 두려움의 씨앗이 됩니다. 따라서 야심은 우리들의 마음을 맑고, 단순하고, 곧고, 따라서 지성적이게 해 주는 데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아시겠지만 젊은 시절에 두려움을 모르는 환경에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나이를 먹어 가면서 겁이 많아집니다. 우리는 사는 것은 겁내고, 일자리를 잃을까 겁내고, 우리들 관습을 겁내고, 이웃이 어떤 사람들일까 하고 겁내고, 남편이나 아내가 무슨 소리를 할까 해서 겁내고, 죽는 것을 겁냅니다. 우리들 대부분의 내부에는 어떤 형태로든 공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모두가 젊은 시절을, 두려워할 것이 없는, 말하자면 분위기가 자유로운-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 과정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로운-환경에서 지내는 것이야 가능하겠지요.
인생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인생이란, 그 인생을 경영하면서 우리가 만들어 낸 추한 것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모든 것에 대해-조직화한 종교에 대해, 관습에 대해, 지금의 부패한 사회에 대해-모반을 시도한다면 인생의 넉넉함, 그 깊이, 그 참으로 예사롭지 않은 아름다움의 정수를 맛볼 수가 있고, 인간으로서 스스로 무엇이 참된 것인가를 알아낼 수도 있습니다.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교육이란 이런 것이 아닐는지요.
사회가 요구하는 것,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안전하고도 손쉬운 생존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삶일 수는 없습니다. 무슨 까닭에서일까요. 여기에는 공포와 부패와 죽음이 있기 때문이지요. 산다는 것은 스스로 무엇이 참된 것인가를 모색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모색은 자유가 있는 곳에서만, 여러분의 내부에 끊임없는 내적 모반이 있는 곳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이러한 삶을 고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물음을 던지라고 하는 사람, 신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아보라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분이 모반을 시도하면, 엉터리인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위험한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부모님이나 사회는 여러분이 안전하게 살 것을 바랍니다. 여러분도 안전하게 살고 싶어 하고요. 안전하게 산다는 것은 모방하는 삶을 말합니다. 따라서 공포안에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육의 기능이란, 우리들 개개인을 자유롭게, 두려워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아닐까요? 두려움이 없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는 교육자인 선생님 몫은 물론이고 여러분 자신의 몫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이 필요합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두려움이 없는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게 굉장한 일인지 아시겠지요. 우리는 이런 분위기를 조성해야 합니다. 왜냐? 우리가 보기에, 이 세상은 끝없는 전쟁의 와중에 휘말려 있습니다. 전쟁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늘 권력을 장악하려는 정치가들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법률가, 경찰, 군인, 그리고 저 나름의 지위에 오르고 싶어 하고, 그 지위에 오르기 위해 싸움질을 일삼는 야심 만만한 사람들 세상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른바 성자들도 있고, 수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린 구루(스승)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역시 이승에서건 내세에서건 권력과 지위를 탐합니다.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혼란스러운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공산주의자는 자본주의자와 드잡이하고, 사회주의자는 이 양자를 업어치기하고, 사람들은 저마다 안전한 자리, 권력 혹은 안정된 생활이 있는 지위를 얻으려고 누군가를 상대로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서로 반목하는 신앙으로, 카스트(인도의 세습적 제도)와 귀천의 구별짓기로, 분리주의적인 국수주의자들로, 갖가지 우매한 짓거리와 잔혹한 형태로 누더기가 되어버린 세상입니다. 적응해야 한다고, 여러분이 늘 이 한심한 사회의 틀에 적응해야 한다고 배우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부모들이 바라고, 여러분 역시 여기에 적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 그렇다면 이 다 썩어 문드러진 사회 질서의 무늬에 여러분을 길들게 하는 것이 교육의 할 일일까요, 아니면 여러분에게 자유-자라서 장차 전혀 다른 사회, 새로운 세상을 지어낼 수 있게 하는 온전한 자유-를 주는 것이 교육의 할 일일까요? 우리는 이 자유를 얻고 싶어 합니다. 미래에 얻게 될 것을 바라는 게 아니고 지금 얻고 싶어 합니다. 얻지 못하면 우리 모두 파멸하고 맙니다. 참된 세상을 살고 참된 것을 스스로 찾아내려면, 지성적인 인간이 되려면, 세상을 그저 익히는 것이 아니라 맞서고 이해하려면, 지금 바로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항상 내적으로 깊이 있는 심리적 모반을 도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항상 심리적 모반을 도모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참된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사람은, 이성의 가르침에 순응하는 사람은 전통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항상 모반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진리를 찾아내고 신이나 사람을 만나는 일은, 항상 묻고 항상 관찰하고 항상 배울 때만 가능합니다. 두려워하면 물을 수 없고, 관찰할 수 없으며, 배울 수 없으며, 깨어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육의 기능은 마땅히 외적으로는 물론 내적으로도 인간의 생각, 인간의 관계와 인간의 사상을 파괴하는 이 두려움을 뿌리 뽑는 것이어야 합니다.
-- 모든 사람들이 모반을 꾀한다면, 이 세상에 혼란이 올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지요?
크리스나무르티 : 먼저 질문 자체를 음미해 봅시다. 무슨 까닭에서요? 질문 자체에 대한 이해가 아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저 대답을 기다리지는 말아주세요. 질문이 이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반을 꾀한다면, 세상에 혼란이 오지 않겠느냐고요. 그러니까 지금의 사회는 완벽한 질서를 구가하고 있는데 만일에 모든 사람들이 이 질서에 모반을 꾀한다면 혼란이 오지 않겠느냐는 거지요? '지금은' 혼란이 와 있지 않은가요? 부패한 것이 없어서 모든 것이 아름답기만 한가요?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여유있게, 넉넉하게 살고 있습니까? 사람과 사람이 반목하고 있지 않습니까? 야망도 없고, 아귀다툼 같은 경쟁도 없습니까? 아닙니다. 이 세상은 이미 혼란 상태에 있습니다. 먼저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 사회가 질서 정연한 사회라고 인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언어로 최면하지 마십시오. 이곳 유럽이든, 미국이든, 러시아든, 세상은 이미 부패과정에 있습니다. 이 부패 과정이 여러분에게 보인다면 여러분은 이미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이 급박한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도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도전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중요하겠지요? 만일에 여러분이 한두교도나, 불교도, 기독교도나 공산주의자로서 대응한다면 그 대응책에는 처음부터 한계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대응책이 못 되는 것이죠.
여러분에게 두려움이 없어야, 여기에 충분히 그리고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습니다. 힌두교도로서, 공산주의자로서, 혹은 자본주의자로서 생각하지 말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완전한 인간으로서 생각해야 여기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대해, 사회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탐욕스러운 소유욕에 끊임없이 저항할 수 없으면 이 문제를 풀어낼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욕심이 없어야, 여러분이 탐욕스럽지 않아야, 자신의 영달에 매달리지 않아야, 비로소 이 도전에 대응하여 새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 저항하고, 배우고, 사랑하는 것은, 각기 독립된 과정입니까? 동시에 진행되어야 하는 과정입니까?
크리슈나무르티 : 물론, 각기 독립된 과정이 아닙니다. 단일한 과정인 것이지요. 아시겠지만, 질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질문은 이론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지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언어적이고 지적일 뿐입니다. 따라서 알맹이가 없습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 실제로 끊임없이 저항하고, 배우는 일과 사랑하는 일의 의미를 알아내려고 애쓰는 사람-이런 사람은 단일한 과정이 어떻고, 세 가지 과정이 어떻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의 씀씀이에 아주 영리합니다. 그래서 설명을 요구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합니다.
배운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정말 배우고 있다면 이는 온 삶을 통해서 배우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때 여러분에게 가르침을 베푸는 스승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이때면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가르침을 베풉니다. 여러분은 모든 것에서 배웁니다. 따라서 지도자도 없고, 철학자도 없고, 구루도 따로 없습니다. 삶 자체가 스승입니다. 이때 여러분은 끊임없는 배우는 경지에 들게 됩니다.
-- 사회가 소유욕과 야심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는 말씀이 사실인지요. 야심이 없으면 우리는 부패하지 않게 되는지요?
크리슈나무르티 : 정말 중요한 질문이군요, 따라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주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디 한 번 따져 봅시다. 교실에서 여러분이 창 밖을 내다보거나 다른 급우의 머리 꽁지를 당기고 있다고 합시다. 선생님은 여러분에게, 주의가 산만하니까 주의를 기울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여러분은 하고 있는 공부에 흥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주의를 기울일 것을 강요합니다. 이것은 주의가 아닙니다. 주의라는 것은, 어떤 일에 전적으로 흥미를 기울이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때만이 여러분은 주의를 기울이는 대상을 기꺼이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니까요. 이럴 때, 여러분의 온 마음, 여러분의 전 존재가 거기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에게 이 질문-야심이 없으면 부패하지 않게 되느냐는-이 아주 중요한 질문으로 보이면, 여러분은 여기에 흥미를 가지고, 이 문제의 진실을 찾아내려고 할 것입니다.
자,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야심 만만한 사람은 저 자신을 파괴하고 있지 않는지요? 야심이 옳은지 그른지 따져보기에 앞서 이것부터 먼저 검토해 보기로 합시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세요. 그리고 야심가들을 한 번 찬찬히 뜯어보세요. 여러분이 야심 만만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 자신을 생각하고 있을 테지요? 여러분은 잔인합니다. 여러분은 야심을 성취시키고 싶어서, 위대한 인물이 되고 싶어서 다른 사람들을 옆으로 밀어붙입니다. 여러분은 이로써 사회에다 성공하는 자와 뒤쳐지는 자 간의 갈등을 일으킵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좇으려는 사람들 사이에 늘 싸움이 일어납니다. 과연 이 싸움이, 창조적인 삶에 보탬이 되는 생산적인 행위일까요? 이해가 갑니까? 내 설명이 너무 어려운가요?
일 자체가 좋아 기꺼이 그 일을 할 때 여러분에게 야심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전 존재를 기울여 어떤 일을 하고 있다고 합시다. 어떤 위치에 도달하기 위해서거나, 이득을 얻기 위해서거나, 보다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좋아서 하고 있다고 합시다. 이럴 때에 야심 같은 건 없겠지요? 이럴 때엔 경쟁 같은 것도 없습니다. 일등 자리를 두고 누구와 다투는 일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육이란 마땅히 여러분을 도와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내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여러분은 처음부터 인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참으로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일, 의미가 있다고 여겨지는 일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여러분의 여생은 참 고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면 여러분의 마음은 오직 권태와 부패와 죽음뿐인 일상적인 일에 갇히고 맙니다. 여러분이 젊은 시절에,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일이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야말로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러하듯이 인도에서도 교육은 정부가 관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실험이 실시될 가능성이 있는지요?
크리슈나무르티 : 정부의 도움이 없다면, 이러한 종류의 학교가 있을 수 있을까요? 이분이 하신 질문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이분은, 온 세계의 모든 일에 대한 정부, 정치가,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나 정신을 특정한 틀 안에 가두려 하고, 우리를 특정한 방향으로 생각하게 만들려 하는 권위주의자들의 통제가 강화되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러시아나 다른 나라나, 정부가 교육을 관장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분은, 내가 말하고 있는 학교가 정부의 지원 없이도 가능할 것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자, '선생님'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아시다시피, 선생님은 어떤 일이 중요하다, 가치 있다고 생각하면, 정부나 사회의 법률을 무시하고 전력을 기울일 테지요. 그리고 이로써 성공을 거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어떤 일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질문이 나온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여러분이나 나나, 우리 모두가 내적, 심리적, 정신적으로 완벽하게 저항할 경우 새로운 세계의 탄생이 가능할 것이라고 확신한다면, 우리는 두려움 같은 부정적인 개념이 새어들어올 수 없는 학교를 만드는 데 우리의 마음과 정신과 몸을 바칠 것입니다. 선생님, 진정한 의미에서의 혁명적인 것은, 무엇이 참된 것인가를 알고 기꺼이 그 진리에 따라 살 수 있는 소수에 의해 창조됩니다. 그러나 무엇이 참된 것인가를 알아내는 데는 관습으로부터의 진정한 자유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는 것이지요.
2 자유의 문제
이번에는 자유의 문제를 여러분과 함께 의논해보기로 합시다. 자유의 문제는 아주 깊은 연구와 이해를 필요로 하는 지극히 복잡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자유에 대한 이야기, 종교적 자유와 저 하고 싶은 대로하는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학자들은 이 모든 이야기를 묶어 여러 권의 책으로 펴낸 바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 문제에 아주 단순하게, 똑바로 접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 방법에 우리에게 참 해결책을 제시해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길을 가다가,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 즈음 풋달이 수줍은 듯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걸 보고 발길을 멈춘 적이 있는지요? 이 시각이 되면 대개의 경우 강물은 아주 잔잔하고, 그래서 모든 것이 수면에 되비칩니다. 다리가 되비치고, 다리 위를 지나는 기차가 되비치고, 달이 되비치고,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별들이 그 수면에 되비칩니다. 정말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관찰하고, 바라보고, 온 주의를 거기에다 기울이자면 여러분의 마음은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면 우리 마음이 어떤 문제, 어떤 근심에 사로잡혀 있어서도 안 되고, 명상에 잠겨 있어서도 안 됩니다. 여러분이 제대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아 있을 때뿐입니다. 이럴 때야만 비로소 우리 마음이 지극히 아름다운 것에 민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여기에 자유의 문제를 해결하는 단서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 자유라는 게, 마음에 내키는 데로하고, 가고 싶은데 가고, 좋을 대로 생각하는 게 자유일까요? 여러분은 실제로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자유롭다는 게 그저 자주적인 상태를 뜻할까요? 이 세계의 사람들 중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자주적입니다.
그러나 이들 중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자유라는 말은 지성이라는 말을 싸안고 있지 않은지요? 자유롭다는 것은 지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지성은,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성에 대한 개안은 여러분이 처한 모든 상황, 말하자면 끊임없이 여러분을 가두려 하고 있는 사회적, 종교적, 전통적 영향력 및 부모님들의 영향력을 이해하기 시작할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그러나 갖가지 영향력-부모님, 정부, 사회, 여러분이 속한 문화, 여러분의 신앙, 신들 및 미신, 알게 모르게 여러분이 적응하고 있는 전통의 영향력-을 이해하고, 이 이해를 통해 이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깊은 통찰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좋은 지위를 누리지 못할까 봐 두려워합니다. 전통을 따르지 못할까 봐 두려워합니다. 옳은 일을 그르칠까 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자유란, 두려움이나 강제나, 무사 안일에 빠지고 싶다는 충동이 없는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안전하기를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참 훌륭한 사람이다. 외모가 정말 그럴싸하다, 또는 참으로 놀라운 지성이다, 이런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이런 욕심이 없다면 우리 이름 뒤로 그럴싸한 직함을 거느리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이런 직함 같은 것들은 우리에게 자신감과 중요 인사나 된 듯한 기분을 안겨 줍니다. 우리는 모두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무엇인가가 되고 싶어 할 때 우리는 이미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 점에 유념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유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정치가와 권력과 지위와 권위의 세계에서든, 고결한 사람 고상한 사람 신성한 사람을 지향하는 이른바 영적인 세계에서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한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남자든 여자든 이 모든 것의 허구를 꿰뚫어 보고, 그 마음이 순수한 상태로 머물고, 따라서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사람-이런 사람은 자유롭습니다. 이 단순 명쾌한 원리만 이해하면 여러분 역시 이 원리의 놀라운 아름다움과 그 깊이를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갖가지 시험을 치르는 목적은 여기에 있습니다. 즉 보다 나은 지위를 얻기 위함이며, 우리들 자신을 보다 나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직위, 지위, 그리고 지식은 우리가 보다 나은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을 갖게 해 줍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이 여러분에게, 어떠어떠한 지위 정도는 얻어야 한다, 삼촌이나 할아버지처럼 성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더러 들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여러분 자신이 어떤 영웅의 전례를 흉내 내거나, 도사나 성인같이 되려고 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니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도사의 전례를 좇든, 성인이나 스승이나 친척의 전례를 좇든, 특정 전통에 몸을 붙이려 하든, 여러분에게 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욕심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러한 사실을 온전하게 이해할 때 비로소 자유를 향한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육이 할 일은 어릴 적부터 누구를 모방하려고 하게 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기 자신일 것을 가르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잘났든 못났든, 남을 부러워하든 시기하든, 이러한 여러분 자신을 이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런 상태로 머물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말하자면, 여러분 자신이고자 하기는 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는 이래서 안 되겠다, 조금만 나아지면 보다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겠다, 근사한 일이 아니겠느냐, 여러분 스스로가 이렇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는 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여러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해하면, 이 이해 가운데서 여러분 자신이 달라집니다. 따라서 뭔가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한다고 해서 자유로워지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해서 자유로워지는 것도 아니며, 전통이나 부모님이나 섬기는 '구루(스승)'의 권위를 따른다고 해서 자유로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실체를 시시각각으로 이해하는 데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아실 테지만, 여러분은 이런 교육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받은 교육은, 여러분이 보다 나은 존재, 혹은 다른 존재가 되도록 채근해 왔습니다. 이래 가지고서야 여러분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이란 아주 복잡한 존재입니다. 학교에 가고, 싸우고, 놀이하고, 두려워하는 것만이 여러분의 실체는 아닙니다. 드러나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것도 여러분의 실체입니다. 이 실체는 여러분이 하는 생각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책, 신문, 여러분의 지도자에 의해 여러분 마음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들로도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이해는, 여러분이 보다 나은 사람이 되려 하지 않을 때, 흉내내지 않을 때에, 남의 전례를 따르지 않을 때만 가능합니다. 다시 말하면, 보다 나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전통에 온전하게 저항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저 엄청난 자유의 길로 통하는 진정한 혁명의 길은 이 길뿐입니다. 이 자유의 길을 닦아주는 일이야말로, 정말 교육이 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의 부모님, 선생님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의 욕망은 여러분을 보다 나은 존재, 혹은 다른 존재와 동일시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야 행복하다는 느낌과 안락하다는 느낌이 가능할 테니까요. 하지만 여러분이 지적인 인간이고자 한다면 마땅히 여러분을 예속시키고 압박하는 모든 영향력을 분쇄해야 하지 않을까요?
새 세계의 희망은, 거짓이 무엇인가를 꿰뚫어 보고,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여기에 저항하는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유 안에서 자라나야 마침내 전통에 뿌리를 단 세계, 몇몇 철학자나 이상주의자의 중뿔난 주장에 따라 틀잡힌 세계가 아닌, 참 새세계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저 보다 나은 사람이나 되고자 하거나, 훌륭한 사람의 전형을 흉내내고자 한다면, 자유는 여러분에게 발을 붙일 수 없습니다.
-- 지성이란 무엇입니까?
크리슈나무르티 : 이 문제를 천천히, 끈기 있게 검토해 보고 나서 지성이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알아본다는 것은 결론을 내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 차이를 알 지 모를지 궁금하군요. 지성이 무엇이냐는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리는 순간이야말로 여러분이 지성적이기를 포기하는 순간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늘 이래 왔습니다. 말하자면 걸핏하면 결론부터 내리려고 했던 것이지요. 따라서 그 사람들은 지성적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자, 여러분은 이제 한 가지를 터득했습니다. 지성이란 항상 배우는 것이지 결론을 내는 것이 아님을 터득한 셈입니다.
지성이란 무엇이냐? 대개의 사람들은 지성이란 무엇이다, 하는 정의에 만족했습니다. 아니면, '정말 근사한 설명이다.'하고 감탄하거나, 스스로 설명해보는 데서 그칩니다. 그러나 설명에 만족한다는 것은 피상적입니다. 따라서 지성적일 수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지적인 마음의 자세란, 설명과 결론에 만족하지 않는 마음의 자세라는 걸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지적인 마음의 자세란 믿는 마음의 자세도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것 역시 결론의 또 다른 모습이니까요. 지적인 마음의 자세는 묻는 마음의 자세, 주시하고 배우고 연구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이게 대체 무슨 뜻입니까? 지성이란, 두려움이 없을 때, 기꺼이 저항할 수 있을 때, 신이 무엇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어떤 사물의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사회의 전구조와 맞설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이 말은 대체 무슨 뜻일까요?
지성은 지식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책을 모두 읽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책이 여러분에게 지성을 베푸는 법은 없습니다. 지성이란 아주 미묘한 것입니다. 지성이란, 어디에 닻을 내리고 있는 고정된 개념이 아닙니다. 지성이란 여러분이 마음의 전과정을 이해할 때만 그 얼굴을 드러냅니다. 마음이라고 해서 철학자나 여러분 선생님들이 말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여러분이 지니는 인간성의 산물입니다. 여러분이 이 마음을 이해하면, 한 권의 책도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은 과거의 온갖 지식을 싸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성은 여러분 자신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사람들, 사물들, 그리고 관념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여러분 자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성은 배움처럼, 여러분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성은 위대한 저항 정신과 함께, 말하자면 두려워할 줄 모를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사랑의 감정이 있을 때 솟아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두려움이 없는 데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설명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면, 내가 여러분의 질문에 아직 대답하지 않고 있다고 여러분은 생각할 것입니다. 사실은 나도 이게 조금 걱정스럽습니다. 지성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삶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삶은 공부, 놀이, 섹스, 일, 싸움, 선망, 야망, 사랑, 아름다움, 진실입니다. 삶이란 이 모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이 물음을 성실하고 줄기차게 밀고 나갈 끈기가 없습니다.
-- 세련되지 못한 마음도 예민해질 수 있습니까?
크리슈나무르티 : 이 질문에, 이 말의 배후에 도사린 의미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세련되지 못한 마음도 예민해지려고 애쓴다면, 그런 내 노력 자체는 조잡한 것입니다. 이 점에 유념하세요.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바라만 보세요. 반면에, 나는 조잡하되 변화를 바라지도 않고 예민해지려고 애쓰지 않음을 인식한다면, 조잡한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시작하고, 나날이 내 생활 속에서 이런 조잡한 모습들-먹을 때의 게걸스러움, 사람을 다룰 때의 그 거친 태도, 자만심, 오만, 내 습관과 생각의 야비함-을 관찰한다면, 이 관찰하는 태도 자체가 나의 현재 상태를 변화시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령 내가 우둔한 사람인데도 똑똑해져야겠다고 한다면, 똑똑해지려는 노력 자체가 그렇게 멍청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멍청하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지, 똑똑하게 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똑똑하게 굴려고 해도, 나 자신이 멍청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배움을 통해 나 자신을 피상적으로 다듬을 수도 있고, 책 속의 구절을 인용할 수도 있고, 위대한 저자의 명문을 읊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기본적으로 나는 여전히 멍청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 일상생활에서 드러나는-나는 하인을 어떻게 대하는가, 내 이웃을, 가난한 사람을, 부자를, 관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내 어리석음을 이해하고 깨달으면, 이 깨달음 자체가 어리석음을 물리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도 한 번 해보세요, 여러분 자신이 하인에게 하는 말투, 관리에게 기를 쓰지 못하는 여러분의 태도, 여러분에게 줄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에 대한 여러분의 무시하는 태도 같은 걸 좀 잘 살펴보세요, 그러면 여러분 눈에도 여러분 자신이 얼마나 멍청하고 어리석은지 보일 것입니다. 이러한 어리석음을 이해하는 데 지성이 있고, 예지가 있는 것입니다. '일부러' 예민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상태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추합니다. 둔합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조잡스러운 사람, 세련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도움이 없이 어떻게 어린이가 저 자신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크리슈나무르티 : 내가, 알 수 있다고 합디까, 아니면 내가 하는 말이 그렇게 들리더라는 것입니까? 환경이 도움을 준다면 어린이도 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은, 진정으로 젊은이가 자신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야 한다는 데 관심이 있다면,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절로 저 자신을 알 수 있게끔 환경을 조성해 주면 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이 질문을 한 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이게 정말 중요한 문젠가요? 정말, 어린이에게 저 자신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는 일이 중요하게 여겨지고, 만일에 권위주의의 지배 아래 놓이면 어린이가 이 일을 해 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면, 어떻습니까, 적절히 환경이 조성되도록 도와주면 어떨까요?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가르쳐 달라, 그러면 하겠다는 건 역시 케케묵은 태도입니다. "함께, 어떻게 해봅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어린이들이 저 자신에 대한 지식을 기르도록 환경을 조성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모든 사람, 말하자면 부모님, 선생님, 그리고 어린이들 자신이 관심을 쏟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지식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 대한 이해가, 강요받는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이 문제가 여러분이나 나에게,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중요한 문제라면, 우리모두 힘을 합해 제대로 이런 학교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 애들이 저에게 이따금씩 마을에서 이상한 현상을 목격했다고 말합니다. 즉, 망상에 사로잡힌 것과 비슷한 상태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들은 귀신, 정령 같은 것들을 두려워합니다. 또 죽음에 대해서 묻기도 합니다. 이런 물음에 대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크리슈나무르티: 죽음이 무엇이냐는 문제는 나중에 다루게 될 겁니다. 그러나 잘 아시겠지만 두려움이란 것은 정말 엄청난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부모들로부터, 어른들로부터 귀신 이야기를 듣습니다. 듣지 않았다면 귀신을 보았다고 할 리 없습니다. 망상에 대해서도 누군가가 얘기해 주었을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어려서 이런 것을 잘 모릅니다. 이런 것은 어린이 여러분의 경험이 아니고, 어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투사된 데 지나지 않습니다. 때로는 어른들도 이런 것에 대해 전혀 모르는 수가 많습니다. 그들은 그저 이런 것을 책에서 읽고는 모두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전혀 달라지고 맙니다. 과거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경험이 있던가요? 만일, 이 경험이 과거에 의해 오염되었다면 그것은 과거의 연속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따라서 혼자서 처음으로 하는 경험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어린이를 대하는 여러분은 그들에게 여러분 자신의 오류, 귀신에 대한 여러분의 관념, 여러분 자신의 독특한 사상이나 경험을 주입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피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나이든 사람들은, 우리 삶에 있어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이런 시시한 이야기를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차츰 어린이들에게 자기네들의 걱정과 두려움과 미신을 전하게 되고, 어린이들도 결국은 자연스럽게 나이든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되풀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 나이든 사람들이 어린이들에게, 사실은 자기네들도 뭐가 뭔지 모르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대신,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두려움을 모르고 자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자유와 사랑
모르긴 하지만 여러분들 중에는, 자유에 대해서 내가 지금까지 한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새로운 관념, 여러분이 익숙해지기 까다로운 관념 앞으로 나서 보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삶의 추한 면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상(일과 사물)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뭐가 뭔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것과도 부딪쳐 보아야 합니다. 좀 어려울 것 같은 것도 거듭 생각해 보면 볼수록, 거듭 따져 보면 따져 볼수록, 삶을 넉넉하게 사는 능력은 그만큼 폭넓어질 것입니다.
혹시 이른 아침, 수면에 비치는 햇빛을 본 적이 있는지요. 본 적이 있다면, 그 빛이 얼마나 기가 막히게 부드러운지, 하늘에 하나뿐인 샛별이 나뭇가지에 걸린 그 시각에 검은 물결이 어떻게 춤추는지, 잘 알 것입니다. 본 적이 있으신지요? 아니면 너무 바빠서, 일상 잡사에 쫓기느라고 이 땅-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야 하는 이 땅-의 푸근한 아름다움을 미처 보지 못했거나 잊고 있었던 건가요? 우리가 공산주의자든 자본주의자든, 힌두교도든 불교도든, 회교도든 기독교도든, 장님이든 절름발이든, 건강하든 행복하든, 이 땅은 우리의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이 땅은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부자만의 땅, 권력을 가진 통치자, 한 나라의 귀족들에게만 속하는 땅이 아니라 우리의 땅, 여러분의 땅이자 나의 땅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름 없는 사람들입니다만 우리 역시 이 땅에 살고 있고 또 우리 모두 함께 어울려 이 땅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땅은 부자들의 세계이자 가난한 자들의 세계이며, 유식한 자들의 세계이자 무식한 자들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땅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땅을 느끼고 사랑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고요한 아침 같은 때 이따금씩 사랑하고 느끼는 게 아니라, 늘 그렇게 사랑하고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유가 무엇인지 알아야 비로소 이 땅을 우리의 것으로 느끼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자유만 한 게 없습니다. 그런 데도 우리는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유로워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모두가-선생님, 부모님, 법률가, 경찰관, 군인, 정치가, 사업가-저마다 구석구석에서 자유의 길을 막을 만한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하고 싶은 짓을 한다거나, 여러분을 구속하고 있는 외적 환경에서 뛰쳐나온다는 게 아닙니다.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의존의 문제를 전적으로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의존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은 부모님에게 의존하고 있겠지요? 여러분은 선생님들에게, 요리사에게, 우편물 집배원에게, 날마다 우유를 배달해 주는 사람 같은 이들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의존이라면 누구나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로워지려면 반드시 이해해야 하는 아주 내면적인 의존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자기의 행복을 위해 남에게 기대는 것이 바로 이런 의존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남에게 의존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이것은 구속되는 정도가 심한, 타인에 대한 물리적 의존이 아니라, 이른바 행복을 구한답시고 남에게 내면적으로, 심리적으로 기대는 의존을 말합니다. 내면적으로 심리적으로 타인에게 의존할 때 여러분은 노예가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나이를 먹으면서도 부모나 아내나 남편이나 구루나 어떤 이념에 감정적으로 의존한다면, 이는 여러분이 구속당하기 시작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는 이걸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데도 우리들 대부분은, 특히 젊은 시절에는, 이런 것도 모르고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자유로워지려면 모든 종류의 내면적인 의존에 저항해야 합니다. 의존하는 까닭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저항할 수 없습니다.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그런 것을 이해할 때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유는 단순한 반발이 아닙니다. 자, 반발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만일에 내가 여러분의 기분을 상하게 할 말을 하거나 욕을 한다면, 여러분은 나에게 화를 낼 것입니다. 이게 반발입니다. 이 반발은 의존하는 데서 온 것입니다. 자주성이란, 이보다 정도가 심한 반발입니다. 그러나 자유는 반발이 아닙니다. 우리가 반발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이를 뛰어넘지 않는 한 우리는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여러분은 나무를 사랑하고 새를 사랑하고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게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게 아무것도 베풀어 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나무를 가꾸고, 새를 먹이고, 애완동물을 아껴 줍니다. 나무는 그늘을 베풀지 않고, 새는 여러분을 따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사랑은 늘 근심과 질투와 두려움과 뒤섞여 있기 때문이지요. 즉 우리는 남에게 내적으로 의존하고 있어서 사랑한 만큼 받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저 사랑하고 사랑을 거기에 남겨 놓으려 하지 않고 반대급부를 요구하고 거둬들입니다. 바로 이렇게 요구하기 때문에 우리는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와 사랑은 늘 짝지어 다닙니다. 사랑은 반발이 아닙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네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거야 장사지, 시장에서나 사고파는 것이지 어디 사랑입니까? 이런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반대급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주고 있다는 느낌조차 없어야 참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유를 아는 것은 이런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여러분은 이런 사랑을 배운 바 없습니다. 여러분의 배움은 여기에서 끝납니다. 부모님들은 오직 여러분이 좋은 직업을 구해서 성공적인 삶을 살아 주는 것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입니다. 부모님들에게 돈이 많다면, 여러분을 해외로 유학 보낼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어느 나라건, 부모의 목적은 여러분이 잘살고, 존경받을 만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여러분 때문에 그만큼 더 피곤해지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오르려면 여러분 자신이 수많은 사람들과 경쟁하고, 그만큼 무자비하게 이겨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부모님들은 아이들을 야심이 있는 곳, 경쟁이 있는 곳, 따라서 사랑은 있을 수 없는 곳으로 보냅니다. 우리가 사는 이런 사회가 끊임없이 부패해 가고 사람들이 늘 치고받고 있는 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정치가, 법률가, 이른바 귀족들이 입만 열면 평화 어쩌고 하지만, 이건 말짱 헛소리들입니다.
자, 여러분이나 나나 이 자유의 문제라는 걸 좀 철저하게 이해해야겠습니다. 사랑한다는 게 무엇인지, 우리들끼리 한 번 검토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왜요? 사랑하지 않으면 생각도, 주의도 기울여 볼 수 없을 것이요, 도무지 어떤 문제를 사려깊게 따져 볼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려 깊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사람들이 맨발로 자주 다니는 길에 뾰족한 돌 하나가 솟아 있다고 합시다. 여러분은 이 돌을 뽑아냅니다. 누가 뽑으라고 해서 뽑는 게 아니고 남을 생각해서 뽑는 것이지요. 남이라는 게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나무를 심고, 가꾸고, 강을 바라보고, 이 땅의 풍요로움을 즐기고 하늘을 나는 새들을 관찰하면서 그 날갯짓의 아름다움을 구경하고, 삶이라고 불리는 이 엄청난 구경거리 앞에서 눈을 씻고 마음을 여는 경지-여기에 자유가 없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자유는 아무 가치가 없는 관념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따라서 내적인 의존을 이해하고 이를 분쇄하는 사람, 이로써 사랑이 무엇인지 깨친 사람에게만 자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만이 새 문화, 다른 세상을 가질 수 있습니다.
-- 욕망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입니까? 어떻게 하면 욕망을 없앨 수 있습니까?
크리슈나무르티 : 질문하시는 분이 젊은 분이군요. 왜 이분은 욕망을 없애야 할까요? 여러분은 이해하시겠습니까? 젊은 분입니다. 삶에의 충동과 생명력에 넘치는 젊은 분입니다. 이런 분이 왜 욕망을 없애야 합니까? 이분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최상의 미덕이다.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통해 신, 혹은 이름 붙일 수 있는 궁극적인 실재를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욕망이란 어디서 유래한 것이냐, 어떻게 하면 이를 없앨 수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러나, 욕망을 없애려는 충동 자체가 역시 욕망이 아닐는지요. 이러한 충동을 부추기고 있는 것은 바로 두려움입니다.
욕망의 근원, 본원은 무엇일까요? 욕망은 어디에서, 무엇에서 시작된 것일까요? 마음이 끌리는 걸 보면 가지고 싶어 합니다. 자동차, 혹은 보트를 보면 가지고 싶어 합니다. 혹은 부자가 이룬 것을 성취하고, '산야시(고행자)'가 되어 보고 싶기도 합니다. 욕망은 여기에서 유래합니다. 보고, 만지는 것, 여기에서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고, 이 마음이 동요되는 데서 욕망이 생깁니다. 자, 욕망이 갈등을 일으킨다는 걸 알고 여러분은," 어떻게 하면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정말로 바라는 것은 욕망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고, 욕망이 일으키는 근심, 걱정, 고통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것은 욕망 자체로부터의 자유가 아니고 욕망의 나무에 열린 쓰디쓴 과실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여러분은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욕망과 한 덩어리로 어우러진 고통, 고민, 투쟁, 모든 두려움과 근심을 벗겨내고 이로써 즐거움만 남길 수 있는데도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라겠습니까?
욕망의 정도야 어떻든 얻고, 성취하고, 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는 한 근심, 슬픔, 공포도 여기에 함께 하기 마련입니다. 부자가 되고 싶고, 이러저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야심을 버리는 것은, 우리가 욕망 자체가 썩어빠진 것임을 꿰뚫어 볼 수 있을 때, 욕망 자체의 부패하는 속성을 알 때만 가능합니다. 형태야 어떻든, 권력-국무총리, 판사, 사제, 구루의 권력-에의 욕망이라는 게 나쁘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우리는 권력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야심이 필경 부패하고 마는 것이며, 권력에의 욕망이 나쁘다는 걸 꿰뚫어 보지 못합니다. 꿰뚫어 보기는커녕, 권력을 좋은 일에 쓰면 되지 않느냐고 합니다. 이게 웃기는 소립니다. 의롭지 못한 수단은 결코 의로운 목적에 쓰이지 못하는 법입니다. 수단이 나쁘면 결과 또한 나쁜 법입니다. 좋다는 것은 나쁘다는 것의 반대 개념이 아닙니다. 좋은 것은 나쁜 것이 자취도 없이 사라져서야 나타납니다. 따라서 욕망과, 욕망의 결과와, 욕망의 부산물의 의미를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욕망 자체만 없애려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일입니다.
--이 사회에 살면서, 어떻게 하면 의지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있는지요?
크리슈나무르티: 여러분 사회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회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입니다. 그렇지요?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책에서 구구절절이 끌어다 대지도 말고요.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세요. 그러면 사회란 여러분과 나, 그리고 다른 이들과의 관계라는 걸 알 수 있을 겝니다. 인간관계가 사회를 만듭니다. 그런데 지금의 사회는 소유욕의 관계를 토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들 대부분은 돈, 권력, 재물, 권위를 가지고 싶어 합니다. 정도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우리는 모두 지위와 명성을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유욕의 사회를 구축한 것입니다. 우리가 소유욕에 발목을 잡히고 있는 한, 우리가 지위와 명성 같은 것을 바라고 있는 한, 우리는 이 사회에 속해 있는 것이고, 따라서 이 사회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령 어떤 사람이 이런 것을 바라지 않고, 그저 겸손하게 자신의 현재 상태에 머무르고 있을 경우 이 사람은 이 사회 밖에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런 사회에 저항하고, 따라서 이 사회와 단절되어 있습니다.
불행히도 지금의 교육이 겨냥하는 것은 여러분을 이 소유지향적인 사회에 길들이고, 적응시키고, 이 사회에 알맞도록 여러분을 조정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부모님, 선생님, 그리고 책이 관심을 쏟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제대로 길이 드는 한, 여러분이 야심적이고 소유 지향적이고 적당한 부패 상태를 용인하고, 남들을 제쳐가며 지위와 권력을 획득하는 한, 여러분은 훌륭한 시민으로 대접받습니다. 여러분은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배워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육이 아닙니다. 이것은 일정한 틀에 여러분을 깎아 맞추는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육의 참 할 일은 여러분을 관리, 혹은 판사, 혹은 국무총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을 도와 이 썩어빠진 사회의 구조를 온전하게 이해하고, 참 자유안에서 자라게 해 주는 일입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이 썩어빠진 사회를 털어 버리고 전혀 다른 사회, 새 세상을 꾸며낼 수 있지 않겠어요?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구세대에 저항하는 이들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새 세상-소유욕, 권력의 명성을 그 바탕으로 깔고 있지 않는 세상-을 꾸밀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람들뿐이기 때문입니다.
나이 든 사람들은 이러시겠지요. "될 법이나 한 이야기야? 인간의 속성이란 어차피 그런 거야. 그러니 헛소리 말어." 하지만 우리는 어른들의 마음을 무장 해제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아이들을 틀에 맞게 짜맞추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 확실히 교육에는 치료 기능도 있고 예방 기능도 있습니다. 여러분같이 조금 철이 든 분들은 이미 틀이 잡혀 있습니다. 이미 짜맞추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야심만만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버지처럼, 장관처럼, 혹은 어느 누구처럼 성공하고 싶어 합니다. 따라서 교육의 참 기능은 길들어진 여러분 마음의 매듭을 푸는 일을 도울 뿐만 아니라, 하루하루 삶의 전 과정까지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자유 안에서 성장하여 새 세상-현재의 세상과는 전혀 달라야 하는-을 만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여러분의 부모님이나 선생님이나 일반 대중들은 이 일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교육이 학생은 물론이고 교육자까지 교육시키는 과정이 되어야 하는 소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을 왜 싸웁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사내아이들은 왜 싸웁니까? 여러분은 이따금씩 동생과도 싸우고, 여기 있는 친구들과도 싸우지요? 왜요? 여러분은 장난감을 놓고 싸웁니다. 다른 아이가 공을 빼앗아 갔다고 해서, 혹은 책을 가지고 갔다고 해서 여러분은 싸움질합니다. 어른들도 똑같은 이유로 싸웁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아이들의 장난감이 어른의 경우는 지위, 부, 권력이 되는 것뿐입니다. 여러분은 권력을 원한다, 나 역시 원한다, 그러면 우리는 싸웁니다. 국가간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전쟁이란 이렇게 단순한 것인데도 철학자, 정치가, 종교인들은 괜히 복잡하게 말합니다. 이것 보세요.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갖추고도-삶의 넉넉함, 실존의 아름다움, 투쟁, 정신적 고통, 웃음, 눈물을 이해하고도-마음을 단순하게 쓴다는 것은 대단한 기술이 없으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법을 알 때 비로소 여러분은 마음을 단순하게 쓸 수 있습니다.
--질투란 무엇입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질투란, 여러분의 현재 상태에 불만이 있어 다른 것을 부러워하는 것 아닙니까? 현재 상태에 대한 불만에서 선망이 비롯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보다 박식한 사람, 보다 잘난 사람, 혹은 보다 큰 집에 사는 사람, 보다 큰 권력, 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은 보다 신심이 깊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보다 나은 명상법을 알고 싶어 합니다. 신에게 도달하고 싶어 합니다. 현재 상태와 전혀 다른 존재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 즉 여러분의 현재 상태를 이해하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이해하자면, 현재 상태를 다른 것으로 변화시키고 싶어 하는 욕망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변하고 싶다는 욕망이 선망과 질투를 낳습니다. 반면에, 여러분이, 현재 상태를 이해하고 있으면, 그 이해 안에서 여러분의 현재 상태는 이미 탈바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세요, 여러분이 받는 교육은 여러분에게, 현재 상태로부터 달라지라고 충동질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질투할 때마다 교육은 여러분에게 속삭입니다.
"질투하지 말아라. 그건 몹쓸 일이야."하고.
그래서 여러분은 질투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이 애쓴다는 것 자체가 바로 질투의 일부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달라지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예쁜 장미가 예쁘다는 거야 여러분도 아시겠지요. 그러나 우리 인간은 생각하는 능력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즉 생각하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은 상당한 수준의 예지와 이해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를 알아내는 일은 비교적 쉽습니다. 현재의 우리 교육은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을 뿐,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어떻게 통찰하고 탐구해야 할 것인가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학생은 물론 선생님들까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알게 될 때 학교가 비로소 그 이름값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왜 무슨 일에건 만족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크리슈나무르티: 어린 소녀가 이런 걸 묻는 데, 누가 시킨 짓은 아닌 듯합니다. 어린 나이에, 이 소녀는 왜 매사에 만족하지 못하는지 그 까닭을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른들은 뭐라고 하시겠어요? 여러분이 소녀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여러분은, 이 어린 소녀가 매사에 만족하지 못하는 까닭을 묻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여러분들은 보아하니 교육자들 같으신데요, 그런데도 여러분들은 이 비극의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명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둔합니다. 지쳐 있습니다. 내적으로는 죽어 있습니다.
왜 인간은 만족을 모를까요? 행복을 구하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는 변화를 통해서만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인간은, 끊임없는 변화의 추구를 통해 행복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이 직업에서 저 직업으로, 이 관계에서 저 관계로, 이 종교에서 저 종교로, 이 이념에서 저 이념으로 옮겨 다닙니다. 혹은 더러는 삶을 스스로 침체시키고 거기에 은둔해 버립니다. 만족이란, 달라지겠다는 욕망이 없는 상태에서, 비관하지도 않고 비교하지도 않는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자신을 볼 때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여러분 눈에 보이는 대로 그저 받아들이고 가서 잠이나 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이 더 이상 비교하고, 판단하고, 평가하지 않고, 따라서 달라지겠다는 욕심 없이 순간순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 때, 바로 이러한 자각 안에 영원히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읽어야 합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왜 읽어야 하지요? 조용히 잘 들으세요. 당신은, 왜 놀아야 하느냐, 왜 강을 바라보아야 하느냐, 왜 잔인하게 굴어야 하느냐고는 묻지 않는군요, 그렇지요? 당신은 싫은데 왜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해야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하지만 읽기, 놀기, 웃기, 잔인하게 굴기, 착하게 굴기, 강 구경하기, 구름 바라보기-이 모든 것이 삶의 한 부분입니다. 따라서 만일 당신이 읽을 줄도 모르고, 걸을 줄도 모르고, 나뭇잎의 아름다움조차 느낄 줄 모른다면, 당신은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삶의 조그만 귀퉁이가 아니라 온전한 삶 자체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래서 당신을 읽어야 하고, 또 하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노래를 불러야 하고, 춤을 추어야 하고, 시를 써야 하고, 고통스러워해야 하고, 이해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게 곧 삶이니까요.
--부끄러움이란 무엇입니까?
크리슈나무르티: 낯선 사람을 만날 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습니까? 이 질문을 할 때 당신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이처럼 이 강단에 나와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면 어때요, 부끄럽지 않을 것 같습니까? 문득 아름다운 나무나, 예쁜 꽃이나 둥우리에 앉아 있는 새를 만나면 조금 부끄럽고 난처하다는 느낌 때문에 가만히 서 있고 싶어지지 않을까요? 보세요, 부끄러워한다는 건 좋은 겁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에게 있어서 부끄러움이란 자의식과 관계가 깊습니다. 위대한 사람이 있다면 말입니다만, 그런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자신을 의식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사람은 참 대단한 사람이고, 유명한 사람이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이때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이때의 부끄러움은 자의식입니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부끄러움도 있습니다. 부드러운 수줍음 같은 부끄러움이 그것입니다. 여기에는 자의식이 없습니다.
4 귀를 기울인다는 것
여기에 있는 여러분은 왜 나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혹시 왜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요? 누구에게 귀를 기울인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여기에 있는 여러분은 모두 말하는 사람 앞에 앉아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들의 생각과 딱 맞아떨어지는 말을 들으려고 앉아 있습니까, 아니면 무엇인가를 들으려고 앉아 있습니까? 전자와 후자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무엇인가를 알아내려고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저 자기의 생각과 맞아 떨어지는지 보려고 귀를 기울이는 것과는 전혀 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생각을 확인하려고, 그래서 그 생각을 고무하려고 한다면, 여러분의 경청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아무데도 걸리는 데 없이 자유롭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극히 예민하고, 날카롭고, 움직이고, 묻고 있으며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럴 때 여러분은 무엇인가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니 귀를 기울이는 이유, 귀를 기울이는 대상을 따져 보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만히, 아무데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아무 데도 정신을 집중시키려 하지 않는 채로, 그러나 마음을 조용히, 차분하게 안정시키고 그저 앉아 있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래 본 적이 있는 분에게 묻겠습니다만, 별의별 소리가 다 들리지요? 가까운 데서 나는 소리, 코앞에서 나는 소리는 물론이고 아주 먼 데서 나는 소리도 다 들을 수 있었을 겁니다. 말하자면 소리라는 소리는 다 듣고 있었던 셈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비좁은 도랑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식으로, 말하자면 아주 편안하게, 긴장을 풀고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자신의 내부에서 굉장한 변화-여러분이 의도하지 않았는데, 바라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생기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이 변화는 대단한 아름다움과 심오한 통찰을 거느립니다.
이따금씩 해 보세요. 지금 이 자리에서 해 보세요. 내 말에 귀를 기울이되, 나에게만 집중하지 말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물에게 귀를 기울여 보세요. 모든 종소리, 송아지 목에 걸린 종소리, 사원의 종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먼 곳을 지나가는 기차의 기적 소리, 길 가는 마차 바퀴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그리고는 여러분의 주의를 가까운 데로 옮겨 내 말에도 귀를 기울여 보세요. 그러면 듣는다는 게 심오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시키는 대로 하되 마음을 아주 고요한 상태로 다스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정말 귀를 기울인다면 마음은 저절로 고요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됩니다. 모든 사물에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은 고요합니다. 이런 식으로 편안하게, 흐뭇하게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여러분은 마음과 정신에 놀라운 변화-여러분이 생각도 못 해본 변화, 혹은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일으킬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지요? 생각이라는 게 무엇인지 아시는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고, 혹은 생각은 마음이 짜맞추는 사상입니다. 사람들은 늘 이 생각과 씨름합니다. 그러나 모든 소리-강둑에 밀려와 부딪치는 물소리, 새의 노랫소리, 아기 우는 소리, 어머니의 꾸지람 소리, 친구가 놀려대는 소리, 아내 혹은 남편의 잔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으며, 여러분은 언어의 세계 저편, 우리의 존재를 쥐어뜯는 언어적 표현 저편에 있는 세계에 도달해 있다는 걸 실감할 것입니다. 언어적 표현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 이유를 따지기 전에 먼저 물어보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젊든 나이를 먹었든, 경험이 없든 경험이 풍부하든 상관없이 모두 행복을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학생이라면 놀이를 즐기고, 공부하고, 하고 싶어 하던 자질구레한 일들을 통해 행복을 누리고자 합니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은 재산이나 돈에서, 좋은 집을 갖는 일에서, 마음 맞는 아내나 남편, 좋은 일자리를 얻는 일에서 행복을 구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더 이상 만족을 주지 못하면 우리는 다른 데로 옮겨갑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집착을 버려야겠다.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출가를 실천합니다. 가족을 떠나고, 재산을 포기하고는 세상을 등집니다. 아니면 동류끼리 모여 교우를 논하고, 한 지도자, 구루, 도사를 따르고, 한 가지 이상을 따르고, 필경은 자기 기만, 환상, 미신이 터부인 교리를 믿으면 행복하리라 생각하고 종교 집단에 몸을 붙일 것입니다.
내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아시겠어요?
머리를 빗고, 깨끗한 옷을 입고, 자신의 외모를 보기좋게 가꾸는 것은 행복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시험에 통과하고, 이름 뒤로 몇 자 직함을 거느리고, 일자리를 구하고, 집과 재물을 사들이고, 결혼하고, 아들 딸 낳고, 지도자들이 보이지 않는 도사들로부터 한 소식 옳게 받았다고 주장하는 종교 집단에 몸 붙이고-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행복을 찾아보겠다는 이 엄청난 욕심, 이 강박 관념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행복이란 이렇게 한다고 쉽사리 오는 게 아닙니다. 왜? 행복이란 이런 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이로써 기쁨을 느낄지 모르고, 이로써 새로운 만족을 얻을 지 모릅니다만 조만간 이것도 시들해지고 맙니다. 우리가 아는 사상(일이나 현상, 사물) 안에는 영원한 행복은 깃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키스 뒤에는 눈물이 있기 마련이요, 웃음 뒤에는 고통과 고독이 도사리고 있는 법입니다. 모든 것을 시들고, 부패합니다. 그러니까 젊을 때 행복이라고 하는 이 요상한 것의 정체를 좇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은 교육의 필수 조건입니다.
행복이란, 쫓아다닌다고 오는 게 아닙니다. 말은 쉽게 하지만 이건 굉장한 비밀입니다. 내가 몇 마디 말로 이걸 쫓아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내 말에 귀나 기울여 들은 걸 읊조린다고 해서 여러분이 행복해지는 건 아닙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행복의 순간은 여러분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옵니다. 행복을 누려 보겠다고 애쓰고 있지 않을 때, 참으로 뜻밖에, 그리고 신비스럽게 순수와 존재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행복이 거기에 성큼 다가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경지에 이르려면 굉장히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조직에도 가담하지 말고, 보다 나은 존재가 되려고 애쓰지도 말아야 합니다. 진리라는 것은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여러분의 마음과 정신이 모든 노력을 포기할 때, 보다 나은 인간이 되겠다고 더 이상 애쓰지 않을 때 우리 앞으로 나섭니다. 진리는, 마음이 조용히 시간을 초월한 상태에서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귀를 기울일 때 거기에 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것입니다만, 행복을 맞기 위해서는 두려움으로부터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 혹은 어떤 사물을 두려워하는 한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부모님을, 선생님을 두려워하는 한, 시험에 실패할까 봐 두려워하고, 진급하지 못할까 봐, 교조에게 가까이 가지 못할까 봐, 진리와 가까워지지 못할까 봐, 남들로부터 호감을 얻지 못할까 봐, 친구로 대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한 행복 같은 것은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여러분은 갑자기 이상한 일이 생기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혹은 혼자 걸을 때일 수도 있습니다. 청하지도 않았고, 요구하지도 않았고, 찾지도 않았던, 사랑, 진리, 행복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 문득 거기에 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젊은 시절에 제대로 교육받는 일이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교육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교육이 아닙니다. 왜냐구요?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이게 무슨 교육입니까? 여러분의 선생님은, 시험을 잘 치를 준비만 시킬 줄 알았지, 가장 중요한 삶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냐, 이걸 아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대부분은 그저 그럭저럭 삽니다. 그저 끌려다닐 뿐입니다. 이러니 산다는 게 지긋지긋할 밖에요. 진지하게 살려면, 참으로 크고 깊은 사랑을 실천하고 침묵을 민감하게 느낄 줄 알며, 경험이 풍부하되 예사롭지 않고 단순 소박해야 합니다. 또한, 투명하게 생각할 수 있고 편견이나 미신, 희망이나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진 마음이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삶입니다. 이렇게 삶을 사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여러분이 받은 교육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깔끔하고 예의바르게 처신하는 법을 배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온 사회가 비틀거리는데 이런 피상적인 것들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집이 불타는 데 손톱 소제를 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아무도 이런 것에 대해 얘기해 준 바 없고, 아무도 여러분과 함께 이를 실천하려 한 바 없습니다. 매일매일 특정 과목-수학, 역사, 지리 같은-을 공부하면서 반드시 보다 깊은 이러한 문제를 토의하는 데도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이로써 우리 삶이 풍부해질 수 있을 테니까요.
--신을 섬기는 것이야말로 참 종교가 아닐지요?
크리슈나무르티: 먼저, 무엇이 종교가 아닌지 따져 보기로 합시다. 이게 제대로 접근하는 방법이 아닐는지요. 무엇이 종교가 아닌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면 다른 걸 좀 생각해 볼 수 있을 테지요. 이건, 더러워진 유리창을 닦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더러워진 유리창을 닦고 나면 이 유리창 저쪽이 환하게 보일 테니까요. 그러니까 먼저 종교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 이것을 이해하고, 이것을 우리 마음에서 쓸어버릴 수 있을지 검토해 보기로 합시다.
"생각해 보겠소." 이런 소리는 하지 맙시다. 공연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어쩌면 여러분은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대개의 나이든 사람들은 이미 발목을 잡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종교가 아닌 것에 편안하게 안주하고 있어서 공연한 일로 구설수에 말려들지 않으려 할 겁니다.
자, 그러면, 종교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혹시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종교가 대충 어떤 것인지-신에 대한 믿음 어쩌구 저쩌구하는-골백번도 더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종교가 아닌지 말해 보라는 사람은 못 보았을 겁니다. 여러분과 내가 한 번 검토해 보기로 합시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건, 다른 사람 말을 듣건, 언표된 것만 받아들이지 말고,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는 데 귀를 기울이세요. 일단 여러분 스스로 무엇이 종교가 아닌지 알게 되면, 평생 어떤 종교의 사제나 책도 여러분을 못 속입니다. 뿐만 아니고 두렵다는 감정이, 여러분이 믿고 따를지도 모르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무엇이 종교가 아닌지 검토하기 위해 먼저 일상 생활 차원에서 시작해서 정도를 높여 가 보기로 하지요. 멀리 가려면 가까운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가까운 곳에서의 한 걸음이 가장 중요한 한 걸음입니다. 자, 무엇이 종교가 아닐까요? 종교 의식이 종교일까요? 푸자를 거듭한다-이게 종교일까요?
참 교육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이지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면, 여러분에게 그럴 능력이 있다면 여러분은 자유로운-교조주의, 미신, 종교의식으로부터-인간입니다. 따라서 무엇이 종교인지 알아낼 수 있습니다.
종교 의식은 분명히 종교가 아닙니다. 의식을 행한다는 것은 선대에서 여러분 앞으로 넘어온 형식을 되풀이하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식을 행하면서도 기쁨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면서 즐기는 사람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이게 종교일까요? 의식을 행하면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도 아무것도 모르는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할아버지가 했으니까 여러분도 하는 것입니다. 안 하면 아버지 할아버지로부터 꾸중을 들을 테니까요. 이것은 종교가 아니겠지요?
그러면 신이 있다는 신전 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인간이 상상으로 빚어낸 신상이 있습니다. 그 신상은 상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징일 뿐이지 실체는 아닙니다. 상징은, 언어는, 상징이나 언어가 표상하고자 하는 실체가 아닙니다. '문'이라는 단어가 문인 것은 아니겠지요? 언어는 실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신전으로 예배하러 갑니다. 무엇을 예배합니까? 상징일 수 있는 신상이겠지요. 그러나 상징은 실체가 아니지요. 그러면 왜 신전에 갈까요? 사실이 이렇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종교를 비방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이 이러한데, 상종해도 좋을 사람이든 상종하면 안 될 사람이든, 바라문(인도의 네 계급 중 가장 높은 승려 계급)이든 바라문이 아니든, 신전에 가는 사람들을 두고 내가 시비할 이유는 없습니다. 갈 테면 가라지요. 아시다시피 나이 지긋한 분들은 상징을 종교로 만들어 놓고 이 종교를 위해서라면 다투고, 싸우고, 죽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은 거기 없어요, 신은 절대 상징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상징이나, 신상을 예배하는 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그러면 믿음은 종교일까요? 이건 좀 까다롭습니다. 우리는 가까운 데서 시작했습니다만, 이제 조금씩 멀리 나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종교냐... 기독교도는 이렇게 믿고, 힌두 교도는 저렇게 믿고, 회교도는 이런 식, 불교도는 저런 식으로 믿으면서도 이 모두가 스스로를 일컬어 종교인이라고 합니다. 이들 모두에게 나름의 신전, 신들, 상징, 믿음이 있습니다. 이게 종교일까요? 신을, 라마를, 시타를, 이시와라(힌두교 신들)를, 그리고 그 밖의 신들을 믿으면 그게 종교일까요? 이런 믿음을 어디서 얻었던가요?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믿었으니까 믿는 게 아닌가요. 아니면 샹카다(일원론을 신봉하던 힌두 신학자)나 부처 같은 이의 말씀이라는 걸 읽고는 믿음을 얻어서 이걸 진짜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요. 여러분 중 대부분은 '기타'(바가바드 기타)를 믿습니다. 그래서 다른 책을 읽을 때와는 달리 그 내용을 단순 명쾌하게 찾아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의식은 종교가 아니고, 신전에 간다는 것도 종교가 아니며, 믿음 역시 종교가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믿음은 사람들을 갈라놓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서 갈려 나왔고, 저희들끼리도 서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힌두교도에게는 적이 많습니다. 저희들끼리 바라문이니 비바라문이니, 이것이니 저것이니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이래서 적대 의식과 분열과 파괴를 조장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종교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종교일까요? 여러분이 정말 창을 말끔히 닦았다면-이것은 여러분이 의식의 참례를 그만 두었다는 뜻이며, 어떤 지도자나 구루를 따르는 일도 그만두었다는 뜻입니다.-여러분의 마음도 창처럼 말끔히 닦였을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밖을 내다볼 수 있습니다. 밖이 카랑카랑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서 신상, 의식, 믿음, 상징, 모든 말씀, 만트람(신가)과 성구, 그리고 모든 형태의 두려움이 말끔하게 닦여 나갔다면,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것은 참인 것, 시간을 초월한 것, 영원한 것뿐입니다. 신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자면 엄청난 통찰과 이해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경지는, 종교가 무엇이냐는 문제를 제기하고, 매일매일 이 문제를 그 바닥까지 고구하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합니다. 오직 이런 사람만이 참 종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 나머지는 모두 입에 발린 말이나 지껄이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들의 예배 용품, 그들이 몸에 걸치는 법의, 그들의 푸자, 그들이 울리는 종소리, 이 모든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미신에 다름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른바 종교라는 모든 것에 저항할 때 우리는 비로소 종교의 실체를 만날 수 있습니다.
5 창조적 불만
꼼짝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어 본 적이 있는지요? 한번 해보세요.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가만히 앉아 여러분의 마음이 무슨 짓을 하는지 한번 관찰해보세요. 마음을 통제하려고 하지 마세요.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이 문제에 대한 관심에서 저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건너 뛴다고 탓하지 마세요. 그저, 마음이 어떻게 건너뛰는지 그것에 유념하세요. 마음이 하는 일에 간섭하면 안 됩니다. 강둑에서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듯이 그렇게 바라보기만 하세요. 흐르는 강물에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강물은 늘 살아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마음은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입니다. 나비처럼 늘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닙니다.
노래를 들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듣습니까? 여러분은 노래하는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노래하는 사람이 아주 잘 생긴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노래를 들으면서 노랫말의 의미를 새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노래를 듣는다는 행위 이면을 들여다봅시다. 여러분은 노래의 곡조 및 곡조와 곡조 사이의 침묵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게 아닐는지요. 이런 식으로 아주 조용히 앉아 있어 보세요. 불안해하지 말고, 손가락이나 발가락 하나 까딱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도록 하세요. 아주 재미있습니다. 재미 삼아, 놀이 삼아 하다 보면, 마음을 잡으려고 애쓰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가라앉아 간다는 걸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의 마음속에는 검열관도, 판관도, 감정관도 없습니다. 마음이 아주 조용히 가라앉아 가고 이 상태가 지속되면 여러분은 참 유쾌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유쾌하다는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유쾌하다는 것은 웃고 싶은 상태, 이러저러한 일에 재미를 느끼는 상태, 사는 재미, 웃는 재미, 두려워하지 않고 남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재미를 느끼는 상태입니다.
혹시 남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본 적이 있는지요? 여러분은 선생님, 부모님, 지위가 높은 관리, 하인, 가엾은 쿨리(하급 노동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본 적이 있습니까? 있다면, 상대의 반응은 어떻던가요? 우리들 대부분은 남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걸 두려워합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 역시, 그렇게 주시당하고 보면 슬며시 겁이 나기 때문이지요. 자기 자신을 노출시키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고통과 고민과 갈망과 희망을 겹겹이 앞세워 놓고 그 뒤에 숨어 경계의 눈초리를 번득이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웃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웃는다는 것, 행복을 느낀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아시다시피, 가슴에 노래가 없다면 삶은 아주 멋대가리 없을 테니까요. 사람은 이 신전에서 저 신전으로, 이 남편이 아내에게서 저 남편 저 아내에게로 옮겨갈 수도 있고, 새로운 스승, 혹은 구루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내적인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삶은 별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적인 재미를 찾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피상적인 불만만 있기 때문이지요.
불만을 갖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불만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 까닭은 우리들 대부분이 이 불만이라는 것을 어떠한 방향으로 끌고 가서는 해소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관심사는 물질적 이득과 사회적 체모가 안정하게 보장된 지위에 그대로 눌러 앉아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귀찮은 일과 사귀지 않아도 되니까요.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들은 귀찮은 일에 부딪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생님들은 판에 박힌 구습을 즐겨 따르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불만을 느끼고,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 순간부터 귀찮은 일과 부딪치게 되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진정한 불만을 통해서만 인간은 주도적일 수 있습니다.
주도적이라는 말뜻을 아십니까? 여러분이 누구의 사주도 받지 않고 어떤 일을 주도하거나 시작할 때 여러분이 갖는 힘이 주도권입니다. 주도한다고 해서, 뭐 굉장한 일이나 아주 어려운 일을 주도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작은 일을 주도하다 보면 나중에 큰 일을 주도하게 되는 수야 있겠지요. 그러나 자발적으로 나무 한 그루를 심을 때, 남을 늘 인정스럽게 대할 때,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사람에게 미소를 보낼 때, 길에 솟아나온 돌을 뽑을 때, 길을 가다가 만나는 동물을 쓰다듬어 줄 때, 이럴 때 여러분은 작은 일을 주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여러분이 창조성이라고 불리는 놀라운 것에 접근하기 위해 여러분이 발휘하는 굉장한 주도권 행사의 첫 걸음입니다. 창조성이라는 것은, 주도성에다 그 뿌리를 대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도성이란, 불만이 있는 곳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불만을 두려워하지 말고, 여기에서 불꽃이 번득일 때까지 계속해서 불만의 자양을 공급하세요. 그리고는 모든 일, 말하자면 여러분의 일, 여러분의 가정, 돈이나 지위나 권력을 추구하는 여러분의 전통적인 가치관에 대해 끊임없이 불만을 가지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제대로 생각하고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여러분은 끊임없이 이렇게 불만을 갖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보살펴야 할 자식이 생기고, 생계를 꾸리는 데 필요한 직업에 대한 고려도 해야 합니다. 여기에 이웃 사람들의 의견이 끼어들고, 여러분의 목을 죄는 사회가 끼어들면 이 불만의 불꽃은 여러분 안에서 사그라들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래서 불만이 생길 때마다 라디오를 켜거나, 구루를 찾아가거나, 푸자를 하거나 클럽에 가입하고, 술을 마시고, 여자 꽁무니를 쫓거나 할 겁니다. 이 모든 것은 불만의 불꽃을 끄기 위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명심하세요. 이 불만의 불꽃이 없이는 아무 일도 주도할 수 없습니다. 주도성이 없는 곳에서는 창조하는 행위가 있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 참된 것인가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마땅히 기존의 질서에 저항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은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직업에 안정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만큼 저항을 기피합니다.
창조성은 그림을 그린다거나 시를 쓰는 데만 있는 게 아닙니다. 물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만, 그 자체로서는 별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전적으로 불만을 갖는 일입니다. 이 전적인 불만이야말로 주도성이 뿌리를 내릴 곳이며, 이 주도성이 성숙하면 곧 창조성이 됩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신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방법은 이것뿐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적인 상태가 바로 신이니까요.
따라서 사람은 마땅히 이러한 전적인 불만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사람은 마땅히 만사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어야 하지만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기쁜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불만을 품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독한 골칫덩어리입니다. 이들은 늘, 이것이나 저것이 잘못 되었다고 불평합니다. 이들은 늘 더 좋은 지위를 바라고, 전혀 다른 환경을 원합니다. 이들의 불만은 피상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혀 불만을 품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만일에 여러분이, 젊은 시절에는 저항하고, 나이를 먹으면서는 불만을 품되 거기에 기쁨과 애정의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다면 그 불만의 불꽃은 굉장한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불만이 새로운 것을 지어내고, 창조하고, 또한 태동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교육을 제대로 받아야 합니다. 제대로 된 교육이란, 좋은 직업에 눌러앉을 준비, 성공의 사다리를 오를 준비나 시키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도록 도와주고, 여러분을 넉넉하게 만들어 주는 교육입니다. 넉넉하게 만들어 준다고 해서 넓은 침실이나 천정이 높은 방을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믿음, 어떤 두려움에도 구속당하지 않고 자랄 수 있도록 넉넉한 마음을 갖게 해 준다는 뜻입니다.
--불만이 있으면 제대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장애를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크리슈나무르티: 당신은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던 것 같군요. 모르긴 하지만 아마 당신은 나에게 던질 질문에만 골몰하고 있었을 겁니다. 이걸 어떤 식으로 물어볼까, 하고 궁리하고 있었겠지요. 사실, 방법이 다르다뿐이지, 여러분 모두가 이런 식이었을 겁니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선입견이라는게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내가 하는 말이 듣고 싶었던 말이 아니면 슬그머니 귓전으로 흘려 버립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자신들 나름의 문제로 꽉 차 있으니까요. 조금 전에 질문한 분이 내 말을 잘 들었다면, 그래서 불만, 기쁨, 창조성의 속성을 제대로 파악하게 되었다면 아마 이런 질문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쨌건 불만이 생각을 제대로 할 수 없게 합니까? 제대로 생각한다는 건 어떤 겁니까? 생각을 통해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것이 제대로 하는 생각입니까? 당신의 마음이 결과에 관심을 갖는다면, 제대로 생각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어떤 결과, 결말을 찾으려 하지 않을 때, 무엇인가를 얻으려 하지 않을 때, 당신을 제대로 생각할 수 있습니까?
당신에게 편견이나 특정의 믿음이 있으며, 말하자면 힌두 교도로서, 공산주의자로서, 기독교도로서의 입장에 있으면 제대로 생각할 수 있습니까?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원숭이가 말뚝에 묶이듯이 마음이 어떤 믿음에 묶이지 않을 때에야 당신은 제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을 때만 제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편견이 없을 때만 제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게 다 무슨 말이냐 하면, 당신의 마음이 어떤 형태의 무사 안일도 추구하지 않을 때, 따라서 마음이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졌을때만 제대로, 단순하고 곧게 생각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불만이 생각을 제대로 할 수 없게 합니다. 불만을 통해 어떤 결과를 추구할 때, 이 불만을 해소시켜 버리려 할 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고 싶어질 때, 제대로 생각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매사에-자신의 편견에, 자신의 믿음에, 자신이 느끼는 두려움에-불만을 느끼면서도 어떤 결과를 좇지 않는다면, 이 불만이 생각의 초점을 특정 대상이나 특정 방향이 아닌 곳으로 맞춰 줍니다. 그러면 당신의 사고 과정은 아주 곧고 단순 명료해집니다.
노소를 막론하고, 우리들 대부분은 무엇인가를 바라기 때문에 더 많은 지식, 더 나은 일자리를 얻고 싶어 하고, 더 좋은 자동차를 사고 싶어 하고 더 많은 봉급을 받고 싶어 하기 때문에 불만이 생깁니다. 우리의 불만은 더 많은 것에 대한 욕망에 그 뿌리를 대고 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불만을 품는 것은, 단지 더 많은 것은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불만은 이런 종류의 불만이 아닙니다. 생각을 제대로 할 수 없게 하는 것은 더 많은 것에 관한 불만입니다. 반면에, 만일 우리가 더 많은 것은 원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채 불만을 갖는다면, 그리고 우리가 우리 직업, 돈을 번다는 사실 자체, 지위나 권력을 추구하는 태도 자체, 우리의 전통, 우리가 기왕에 가지게 된 것, 장차 가지게 될 것에 대해 불만을 품는다면, 또한 우리가 특정 대상이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해 불만을 품는 다면, 이 불만이야말로 오히려 생각을 제대로 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받아들이거나 따르는 대신, 묻고 조사하고 꿰뚫어 보려 하는 데에서 통찰하는 능력이 생깁니다.
--자기 인식이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자기를 인식할 수 있습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여러분에게 이 질문 뒤에 도사리고 있는 정신 상태가 보입니까? 질문한 분에게 창피를 주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만, "어떻게 하면 그걸 얻을 수 있겠습니까? 얼마면 살 수 있겠습니까? 그걸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며, 어떤 수련을 쌓고 어떤 식으로 명상해야 합니까?" 이렇게 묻는 정신 상태를 잠깐 엿보기로 합시다.
"저것을 얻기 위해서는 이것 정도는 하겠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의 마음은 기계적입니다. 말하자면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습니다. 소위 종교인이라는 사람들도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 인식이란 이런 식으로 믿어지는 게 아닙니다. 노력한다고 해서, 수련한다고 해서 자기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학교 친구들, 선생님들, 그리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의 여러분 위치를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자기 인식이 생깁니다. 자기 인식은, 여러분이 다른 사람의 태도, 그들의 몸짓, 옷 입는 버릇, 말투, 남을 경멸하거나 남에게 아첨할 때 하는 짓, 거기에 대한 여러분의 반응을 관찰하다 보면 저절로 생깁니다. 자기 인식은 여러분 안에 있는 것, 여러분 주위에 있는 것을 관찰하고, 거울에 비친 여러분 자신의 얼굴을 보듯이 그렇게 자신을 보면 생기기 마련입니다. 거울 앞에 서면 여러분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지요? 머리 모양이 달라졌으면 좋겠다, 머리숱이 많았으면 좋겠다, 얼굴 생김생김이 덜 징그러워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야 하겠지요. 하지만 실체가 거기에 있는데, 거울에 그대로 비치고 있는데, "참 잘생겼단 말이야" 어쩌고 하면서 그 실체를 옆으로 치워 버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런 식으로, 여느 거울을 보듯이, 관계의 거울을 정확하게 볼 수 있다면, 자기 인식에의 길은 끝없이 열리기 마련입니다. 이 길로 들어서는 것은, 해변도 없고 바다도 없는 심연으로 들어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바닥에 이르고 싶어 합니다.
"드디어 나는 자기 인식에 도달했다. 아, 행복하구나"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렇게는 안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여러분 모습을 보되, 본 것을 후회하지 않고, 남과 비교하지 않고, 더 잘났더라면, 더 고상했더라면 하고 아쉬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아서 그 실체와 함께 할 수 있을 때 여러분은 끝없이 먼 데까지 뻗어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여로에는 끝이 없습니다. 이것이 이 여행의 신비이자 아름다움입니다.
--영혼이란 무엇입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우리의 문화, 우리의 문명이 영혼이라는 말을 발명했습니다. 문명이란, 집단의 욕망이며 많은 사람들의 의지입니다. 인도의 문명을 보십시오. 인도의 문명은 많은 사람들의 욕망과 의지의 산물이 아닙니까? 모름지기 문명이란, 집단 의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산물입니다. 이 경우, 인간의 집단 의지는, 죽고 부패하고 마는 물리적인 육체 이상의 무엇, 보다 위대하고 보다 나은 의미를 지닌 무엇, 부서지지 않고 죽지 않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의 집단 의지는 영혼이라는 관념을 상정했습니다. 이따금씩, 스스로 죽음이 없는 상태 즉 영원 불멸이라고 불릴 수 있는 엄청난 것에 대해 무엇인가를 발견했다는 사람이 한둘씩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평범한 사람들은, "그래 사실일 것이다. 그 사람 말이 옳을 것이다." 했습니다. 결국 영원 불멸하고 싶어하던 그들은 이 영혼이라는 말에 매달렸습니다.
여러분 역시 이 물질적인 존재 이상의 무엇인가가 정말 있는지 알고 싶을 테지요? 매일 일터에 나가고, 싸우고, 남을 부러워하고, 아이를 키우고, 이웃 사람 흉이나 보고, 쓸데없는 말이나 지껄이는 이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듯 한 일상에 시달리는 여러분 역시, 이런 것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는지 알고 싶을 것입니다. 영혼이라는 말 자체가 불멸하고, 시간을 초월해 있는 상태라는 관념을 나타냅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여러분은, 그런 상태가 있는지 없는지 스스로 찾아보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지를 않습니다.
"그리스도나 상카라나, 또 누구누구라고 하는 사람이 뭐라고 했건 관심이 없다. 전통의 이른바 문명이라는 것의 소명에도 관심이 없다. 시간의 틀 저 너머 존재하는 상태가 정말 있는지 없는지 내가 찾아보아야겠다."
여러분은 문명이나 집단 의지가 상정해 놓은 공식에 저항하지 않습니다. 저항은커녕 이를 받아들이면서, "그래 영혼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공식을 이거라 하고, 다른 사람들은 저거라 합니다. 그러다 결국 여러분은 편을 갈라서고, 믿음이 다른 사람을 적대합니다.
시간의 틀 너머 존재하는 상태가 있는지 없는지 진심으로 알아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문명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집단 의지에서 뛰쳐 나와 뒤에 홀로 서야 합니다. 교육의 필수적인 기능은 곧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어야 합니다. 홀로 설 수 있게 하며, 다수의 의지나 자신의 의지에 갇히지 않고, 무엇이 참된 것인지 스스로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는 일, 이것이 교육이 해야 할 일입니다.
남에게 의존하지 마세요.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라도 시간은 초월한 상태가 있다고 한들 그게 여러분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배가 고프다면, 밥을 먹고 싶겠지요. 말로 배를 불리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은, 스스로 찾아내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주의에 있는 모든 것들이 썩어가고, 부서지고 있는 것을 압니다. 이 소위 문명이라는 것도 이제는 집단 의지에 따르지 않습니다. 문명은 지금 이 시각에도 조각나고 있습니다. 삶은 시시각각으로 여러분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도전에 대해 습관이라는 타성으로만 맞선다면, 다시 말해서 받아들이는 방법으로만 대응한다면, 대응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나는 받아들이지 않겠다. 나 혼자서 찾아보고 조사해 보겠다."고 말한다는 것은, 홀로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시간을 초월한 상태, 더 많은 것, 더 적은 것을 지향하지 않는 상태가 있는지 없는지 스스로 찾을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이 홀로 설 수 있을 때뿐입니다.
6 삶의 전체성
우리들 대부분은 삶의 하찮은 한 부분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 부분을 통해 전체를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방에서 나가지 않고도 강의 길이와 너비를 두루 살피고, 강둑 푸른 풀밭의 그 넉넉함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비좁은 방에 살면서도, 조그만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면서도, 우리 삶을 움켜잡았고, 죽음의 의미를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대로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자면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밖으로 나간다는 것, 창이 조그만 그 방을 떠나, 비판이나 비난도 하지 않고, "이것은 좋고 저것은 싫다"고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들 대부분이 한 부분을 통해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바큇살을 통해 바퀴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의 바큇살이 바퀴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바퀴라고 불리는 물건이 되려면 바퀴 통과 바퀴 테가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여러 개의 바큇살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퀴라는 것을 이해하자면 바퀴 전체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삶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삶의 전 과정을 이해해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이 원리를 따르고 있기를 바랍니다. 이유는 뜻밖에도 간단합니다. 교육은 마땅히 삶의 전체를 이해하도록 여러분을 도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육이 여러분에게 그저 일자리를 잡을 준비를 시키거나, 결혼, 자식 양육, 보험, 푸자, 하찮은 신들과의 문제 같은 일들에 상식적으로 대처하게 할 준비나 시켜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제대로 된 교육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지성과 통찰이 필요합니다. 교육자 자신이, 삶의 전 과정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교육을 받는 일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교육자가 여러분을 가르칠 때, 새로운 것이든 공식에 따라서 안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삶이란 엄청난 수수께끼입니다. 그러나 책에서 읽을 수 있는 수수께끼,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주고받는 수수께끼가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가 해답을 찾아야 하는 수수께끼입니다. 우리가 작은 것, 좁은 것, 시시한 것을 이해하고, 이러한 것들을 뛰어넘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젊을 때 삶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내적으로 메마른 인간이 된 채 나이를 먹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겉으로는 돈을 잘 쓰고, 고급 승용차를 타고, 더러는 뽐내기도 하겠지만 우둔하고 텅빈 인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비좁은 방을 나가 넓은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 그토록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육체적 사랑이나 신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그저 사랑입니다. 새, 나무, 꽃, 여러분의 선생님, 부모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뛰어넘은 인류애를 말합니다.
사랑한다는 게 무엇인지 스스로 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엄청난 비극이 아닐는지요. 사랑이라는 걸 지금 알지 못한다면 앞으로는 영영 알기 어렵습니다. 왜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사랑이라고 불리는 게 점점 추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이를 먹으면, 사랑은 사고파는 장사 형식의 점유물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만일에 여러분이 가슴으로 사랑을 안아들이기 시작한다면, 심은 나무를 사랑하고 길 잃은 짐승을 다독거려 준다면, 나이를 먹으면서도 창이 좁은 조그만 방에 갇혀 있지 않고 그 방을 떠나 삶 전체를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실제적입니다. 울고불고할 만한, 감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감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는 감상적인 요소가 전혀 없습니다. 젊을 때 사랑을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하고도 중대한 일입니다. 여러분의 부모님과 선생님은 사랑을 몰랐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만든 사회가 이 꼴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늘 저희들끼리, 혹은 다른 사회와의 전쟁 상태가 계속되는 사회를 만들어 놓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종교, 그들의 철학, 그들의 이념은 모두 가짜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으니까요. 그들은 한 부분밖에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좁은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창 밖의 풍경이 그들에게는 즐거울 수도 있습니다. 그들 눈에는 넓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넓이 전부는 아닙니다. 이 뜨거운 사랑의 감정 없이는 절대로 전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사랑의 감정이 없는 여러분은 늘 비참할 것입니다. 삶이 끝나는 날 여러분에게 남는 것은 잿더미, 그리고 무성한 빈말들 뿐일 것입니다.
--우리가 유명해지고 싶어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여러분은 왜 유명해지고 싶어 합니까? 내가 그 까닭을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설명한다고 해서, 그 욕심을 버리겠어요? 여러분이 유명해지고 싶어 하는 것은 이 사회에 사는, 여러분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유명해지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부모님, 선생님, 구루, 요기(요가 수행자) 모두가 유명해지고 싶어 합니다. 이름을 날리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유명해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함께 생각해 봅시다. 왜 사람들은 유명해지고 싶어 하지요? 첫째, 유명해지면 득이 되기 때문입니다. 유명해진다는 건, 굉장히 기분 좋은 일일 테지요?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면 아주 주요 인사가 된 듯한 느낌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생불사할 듯한 기분까지 맛보게 해줍니다. 여러분은 유명해지고 싶어 합니다. 이름이 널리 알려져,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여러분 이야기를 하게 되었으면 합니다. 왜요? 까놓고 보면 여러분이란 존재가 별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속은 차 있지 않습니다. 속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외적으로나마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속이 꽉 차 있으면 까짓, 유명하건 말건 그런 것은 아무 문제도 안 됩니다.
속이 꽉 차기는, 겉이 차 보여서 유명해지는 것보다 훨씬 힘이 듭니다. 속이 꽉 차려면 조심해야 할 일도 많고, 가까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일도 많습니다. 여러분에게 왠만큼의 재능만 있고, 이 재능을 계발할 줄만 알면 유명해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속이 찬 상태는 이런 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속이 차려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게 어떤 것인지 식별하고 이를 내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유명해지고 싶다는 욕심이 바로 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중의 하나입니다. 속이 찬다는 것은 홀로 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명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은 홀로서기를 두려워합니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아첨과 호평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 젊은 시절에 쓰신 책에는, '이것은 내 말이 아니다. 내 스승의 말씀이다.'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왜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시는지요? 그리고 선생님의 스승은 누구셨습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삶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는, 한가지 생각에 매이지 않는 일입니다. 매인 상태를 일컬어 일관성이 있다고 합니다. 만일 비폭력을 이상으로 삼는다면, 여러분은 이 이상으로 일관하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이분은 실제로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스스로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당신이 젊은 시절에 우리에게 말한 것과는 다릅니다. 왜 당신은 일관성이 없습니까?"
일관성이 있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젭니다. 일관성이 있다는 것은, 사고의 특정 양식을 한결같이 따른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은 이것, 내일은 저것, 하는 식으로, 서로 모순되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일관성이 있는 마음이 무엇인지 따져 보고 있습니다. "나는 어떠어떠한 주장에 동조하기로 맹세했다. 따라서 나는 평생을 이러한 태도로 살겠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일관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야말로 그렇게 멍청할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왜요? 이 사람은 결론을 내리고. 이 결론에 따라 살고 있으니까요. 이런 사람은, 자기 주위에 벽을 쌓아 올리고, 세월이 흘러가기를 기다리는 사람에 다름아닙니다.
이건 아주 까다로운 문젭니다. 어쩌면 내가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내 생각은 그게 아닙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일관성만 고집하면 기계화하여, 그 생명력, 불꽃, 자유로운 운동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마음은 특정 양식 안에서만 기능합니다. 질문의 일부에 대해서는 이로써 대답이 된 셈입니다.
나머지 부분은, 스승이 누구였느냐는 겁니다. 이 질문에 담긴 뜻을 여러분은 잘 모릅니다. 알든 모르든 상관없습니다. 들으셨지요. 내가 소년 시절에 책을 한 권 썼다는군요. 저 신사분 말씀으로는, 내가 그 책에서, 스승의 도움을 얻어 그것을 썼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저 신지학자들처럼, 머나먼 히말라야 산중에는 세상일을 간섭하고 돕는 도사들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신사분은 그 도사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잘 들으세요. 지금부터 하는 말은 저 신사분뿐만 아니라, 여러분에게도 적용되니까요.
도사, 혹은 구루가 누구냐 하는 게 그렇게 문제가 됩니까? 중요한 것은 삶이지 구루나, 도사나, 여러분을 대신해서 인생을 해석해주는 지도자나 선생님이 아닙니다. 삶을 이해해야 하는 사람은 여러분입니다. 고통을 받는 사람, 슬픔을 겪는 사람은 여러분들입니다. 아무도 여러분에게 가르쳐 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그들의 설명은 엉터리이거나 얼토당토않기 십상입니다.
따라서 회의한다는 건 좋은 일입니다. 회의는 여러분이 구루를 필요로 하는지 하지 않는지 스스로 생각해 볼 기회를 베풉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자신을 위한 등불이 되는 일, 스스로 자신의 도사와 제자가 되는 일, 스스로 자신의 선생과 학생이 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배우고 있는 한 선생님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삶의 전과정을 탐구하고, 발견하고, 이해하지 않을 때 비로소 선생님이 나타납니다. 그런 선생님은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이럴 경우 여러분은 이미 죽은 인간이며 따라서 선생님 역시 죽은 인간입니다.
--사람은 왜 뽐내는지요?
크리슈나무르티: 글씨를 잘 썼을 때, 경기에서 이겼거나 합격했을 때 여러분은 자랑스러워하지 않습니까?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본 적이 있겠지요? 그것을 친구에게 보여 본 적이 있겠지요? 만일에 친구가 아름다운 시다, 멋진 그림이다, 라고 말한다면 아주 기분이 좋을 테지요? 다른 사람이 훌륭하다고 칭찬해 줄 만한 일을 했을 때 여러분은 기분이 좋아집니다. 조금도 이상할 것 없습니다. 아주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그다음에 여러분이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쓰거나 방을 청소할 때를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누군가가 와서.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해 줄 것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와서 칭찬해 주지 않으면, 여러분은 더 이상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쓰거나 청소하거나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이 공모해서 제공하는 즐거움에 의존하게 되어 버리고 만 셈입니다. 이렇게 간단합니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될까요? 나이를 먹어가면서 여러분은, 자신이 한 일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를 바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이 일을 계속해야지, 내 구루를 위해, 내 조국을 위해, 인간을 위해, 신을 위해."
하지만 여러분은 인정받기 위해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에서 자만심이 자랍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하는 일은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시겠어요?
자만심 같은 걸 이해하려먼 제대로 꿰뚫어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만심이 어떻게 해서 생기는지, 자만심이 부르는 재앙이 어떤 것인지, 처음부터 끝까지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온 마음과 정신을 여기에 집중시켜 끝까지 뒤쫓되 중도에서 그만두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놀이에 정신을 쏟을 경우 여러분은 이 놀이를 끝까지 합니다. 중도에서 그만두고 집으로 가 버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은 이런 경우에 길들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을 도와 몇 과목의 공부에만 매달리게 할 것이 아니라 삶의 전 과정을 캐묻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교육이 해야 할 일의 일부입니다.
--어릴 때 저희들은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며 추한 것이 무엇인가를 배웠습니다. 그 결과 저희들은 이날 이때까지, '이것은 아름답고 저것은 추하다.'는 식의 생각에 매달려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무엇이 정말 아름답고 추한 것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자, 여러분은 저 아치가 아름답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은 추하다고 하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이 경우에 어떤 일이 더 중요합니까? 아름다우냐 추하냐, 이 시비를 가리기 위해 여러분의 반대 의견과 싸우는 일일까요, 아니면 미추를 공히 감상할 수 있는 감각을 터득하는 일일까요? 삶을 살아가다 보면 더러운 것, 야비한 것, 타락한 것, 슬픈 일, 눈물겨운 일도 있는 법이고, 기쁜 일, 우스운 일, 햇빛을 받는 꽃같이 아름다운 일도 있는 법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모든 것에 대해 두루 감각을 여는 일입니다. 이것은 아름답다, 저것은 추하다고 정하고, 이 의견에 머무르는 일이 아닙니다. 가령 내가, "나는 아름다운 것은 가꾸고 더러운 것은 배격한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름다운 것을 가꾸는 일이 오히려 나의 심미안을 둔화시키게 됩니다. 이는 오른쪽 팔만 단련시키느라고 왼쪽 팔을 시들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는 물론, 추한 것에 대해서도 깨어 있어야 합니다.
춤추는 나뭇잎,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 석양의 아름다움도 볼 줄 알아야 하고 거리의 거지들에 대해서도 의식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무거운 짐과 씨름하는 가엾은 여자를 볼 줄 알아야 하고 그런 여자를 거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면 기꺼이 손을 내밀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 필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감각이 이 모든 것을 향해 열려 있을 때 비로소 여러분은 여러분 몫의 일을 시작하고 남을 도울 수 있으며, 남을 거부하거나 비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아직 선생님의 스승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 그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책 같은 건 불 질러 버리세요. 내던져 버리세요. 스승이 누구였느냐 하는 따위의 시시한 것을 중요하게 여길 때, 당신은 존재의 문제 전체를 아주 시답잖은 일로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우리는 늘 누가 도사인가, 누가 박식한 사람인가, 저 그림을 그린 화가가 누구냐고 묻고 있습니다. 알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화가가 누구건 상관하지 않고 스스로 그림 자체의 내용을 알아보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시인이 누구인지 알아야 비로소 그 시가 아름답다고 합니다. 이것은 속물주의 근성이요, 어떤 의견의 판박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근성은 사상의 궁극적 실재에 대한 여러분의 내적 지각을 약화시킵니다. 여러분이 그림을 보고 그 그림을 아름답다고 여기고, 그래서 감명을 받았는데도, 그 그림을 그린 화가가 누구냐는 문제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여러분의 관심이 그림의 내용을, 그림의 진실을 파악하는 데 있다면 그림 자체가 그 의미를 고스란히 전해 줄 것입니다.
7. 야심
지금까지 우리는 사랑하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에 대해 토론해 왔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사랑이란 얻을 수도 살 수도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랑이 없으면 착취와 통제에서 해방된 완벽한 사회질서에 대한 우리의 계획에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나는, 우리 모두가 젊을 때 마땅히 이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이 세상 어디를 가든 우리가 만나는 사회는 끝없는 갈등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어디를 가건 한편에는 권력자, 부자, 잘사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편에는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두가 서로 질투하면서 경쟁하고 있습니다. 저마다 높은 지위, 더 많은 봉급, 보다 나은 권력과 명성을 얻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이 처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늘 내적, 외적인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과 내가 이러한 사회 질서를 완전하게 뒤엎을 완벽한 혁명을 구상한다고 합시다. 그러자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이 권력 추구의 본능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형태는 다르더라도 하나같이 권력을 얻고 싶어합니다. 재물이 있고 권력이 있으면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고, 중요한 사람들을 사귈 수 있고 유명해질 수 있습니다. 재물과 권력이 있는데도 우리는 완벽한 사회의 태동을 꿈꿉니다. 우리는 권력으로 이러한 것을 성취시키는 것이 좋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권력의 추구 자체-우리들 자신의 권력, 국가의 권력, 특정 이념의 권력-는 옳지 못한 것, 파괴적인 것입니다. 권력 추구 자체가 필경은 적대 세력을 만들어서 늘 분쟁을 일으키고 말기 때문입니다.
옳지 못하다, 그렇다면 교육이 마땅히 자라는 여러분에게, 내적 외적 갈등이 없는 세상, 권력과 지위에 대한 욕망이 뿌리 뽑혀 여러분과 여러분 이웃이 서로 갈등하는 일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인식시켰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내적 외적 갈등이 없는 사회가 과연 만들어질 수 있기는 있는 것일까요? 사회란 여러분과 나의 관계입니다. 만일 우리의 관계가 야심에 그 뿌리를 대고 있다면, 우리는 모두 나름대로 남 못지않은 권력을 누리고 싶어 할 것입니다. 이 경우 우리는 늘 갈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갈등의 원인을 해소시킬 수 있을까요? 우리 자신을 교육시켜 경쟁하지 않는 인간, 나와 남을 비교하지 않는 인간, 이러저러한 지위를 바라지 않는 인간, 요컨대 전혀 야심이 없는 인간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일까요?
부모님과 함께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 갈 때, 신문을 읽을 때,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 이럴 때마다 여러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 한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들은 이념 문제로, 재산 문제로, 인종 문제로, 계급 문제로, 종교 문제로, 늘 이러저러한 사람들과 갈등하고 있지요? 여러분의 부모님들, 이웃들, 목사님들, 관리들, 이 모두 야심 덩어리들이 아니던가요? 더 나은 지위를 누리겠다고 몸부림치면서 늘 다른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지 않던가요? 네, 이 경쟁 심리의 뿌리가 뽑혀야 우리 모두 행복하고 창조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평화로운 시대가 옵니다.
자, 어떻게 하면 야심과 경쟁 심리의 뿌리를 뽑을 수 있을까요? 규칙으로, 법률로, 아니면 야심을 갖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훈련시키면 야심을 물리칠 수 있을까요? 겉으로는 야심을 갖지 않겠다고 마음을 훈련시킬 수도 있고 사회적으로는 남과의 경쟁을 그만둘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속으로, 여러분은 여전히 야심을 버리지 못한 상태가 아닐는지요? 인간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이 야심을 완전히 쓸어버릴 수는 있는 것일까요? 아마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여러분에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자, 그럼 그 어느 누구에 해당하는 내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만일에 야심을 버리고 새 세상을 만들 수 있다면, 여러분은 파괴적인 야심의 광기도, 경쟁도 없는 이 세상에서 여유 있게, 넉넉하게, 행복하게, 창조적인 삶을 누릴 길을 찾고 싶겠지요? 여러분의 삶이 남의 삶을 파괴하고, 여러분의 야심이 남의 인생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일이 없는 그런 삶을 누리고 싶겠지요?
우리는 이런 세상을, 실제로는 전혀 불가능한 유토피아의 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유토피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나는 그런 잠꼬대를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단순한 보통 사람들인 여러분과 내가, 권력과 지위에 대한 갖가지 욕망으로 나타나는 이 야심에 쫓기지 않고도 이 세상에서 창조적인 삶을 누릴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할 수 있을 때, 여러분은 이 물음에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직업이 기술자라고 합시다. 만일 생계를 꾸리기 위해 기술자가 되었다면, 혹은 여러분의 아버지나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기술자가 되었다면 여러분은 일종의 강요에 시달리고 있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종류야 어떻든 강요당하는 삶은 모순과 갈등에 시달리기 마련입니다. 반면에, 여러분이 정말 좋아서 기술자나 과학자가 되었다면,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좋아서 나무를 심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쓴다면 다른 사람과 경쟁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거야말로 보다 나은 세상의 문을 여는 진짜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젊은 시절에는, 무엇을 좋아하는가를 알아내기가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지요. 기술자가 되고 싶기도 하고, 기관차의 기관사, 푸른 하늘을 누비는 항공기 조종사가 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유명한 웅변가나 정치가가 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화가, 화학자, 시인 혹은 목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머리 쓰는 직업을 고르고 싶을 때도 있고, 손을 놀리는 직업을 바랄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에 대한 여러분의 관심은, 좋아하기 때문에 생긴 것인지 아니면 반발이나 사회적 압력 때문에 생긴 것인지요? 어떻게 하면 이런 것을 따져 볼 수 있을까요? 교육의 참 목적은 이런 것을 따져 볼 수 있도록 여러분을 돕는 것이 아닐는지요. 그래야 여러분이 자라면서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에 온 마음과 온 정신과 온 몸을 던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정말 하고 싶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는 데도 상당한 지성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여러분이 생계를 꾸리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 이 썩어 버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한다면 여러분은 이런 일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부모님들, 선생님들, 그리고 사회의 피상적 요구에 의한 전통의 수렁으로 빠져들기를 거부한다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찾아내는 데 있어서도, 살아가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살아가지 못할까 봐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말을 곧잘 합니다.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게 아닐까."
그러나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누가 시키는 대로 한다면, 그 일에 대한 사랑이 있을 리 없습니다. 모순뿐인 것이지요. 이 내적 모순이 바로 파괴적 야심을 불러일으키는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따라서 교육의 기본적인 기능은, 여러분을 도와 정말 사랑하는 일을 찾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 일에 온 마음, 온 정신을 다 쏟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의 존엄성이 그 빛을 발하고, 그래야 인간의 범용함, 소아병적인 소시민의 정신 상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선생님, 좋은 환경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좋은 선생님과 좋은 환경을 통해서야 비로소 여러분은 사랑 가운데서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은 여러분이 하는 일을 통해 나타날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없다면, 여러분이 치르는 시험, 여러분의 지식, 능력, 지위나 재산은 재무더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이런 사랑이 없으면 여러분의 행동은 오로지 현재 상태 이상의 전쟁, 증오, 해악, 그리고 파괴를 향해 치닫게 될 뿐입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아직은 여러분에게 생소하게 들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아직 어린 것 같으니까요. 그러나 여러분의 선생님들에게는 중요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역시 마음 한구석으로나마 이 이야기를 수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선생님께선 왜 수줍어하시는지요?
크리슈나무르티: 우리 인생에서 말이지요,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건 대단한 일입니다. 유명한 사람도, 위대한 사람도, 유식한 사람, 개혁주의자나 혁명가도 되지 않고 그저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산다는 건 참 엄청난 일입니다. 이런 경지에 들었다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호기심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면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어집니다. 그것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일상의 삶 가운데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지요?
크리슈나무르티: 당신은 진리는 이것이고 일상의 삶은 저것이라고 생각하는군요. 그런데 이 일상의 삶을 누리면서 소위 진리란 것을 깨닫고 싶어하는군요. 하지만 진리는 일상의 삶과 별개의 것일까요? 당신은 어른이 되면 생활비를 벌어야 하겠지요? 결국 이것 때문에 시험을 치르는 것 아닙니까? 생활비를 벌 준비를 하기 위해서요.
하지만 돈만 벌 수 있으면 어떤 분야의 일을 하건 상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직업일 수만 있다면, 군인이 되건, 경찰이 되건, 법관이 되건, 수상한 사업가가 되건 상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느냐, 즉 생계 수단의 진실 여부를 따져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진리는 여러분의 삶 속에 있는 것이지, 삶에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말투, 말의 내용, 웃는 모습, 다른 사람들을 속이거나 아첨하는 태도-이 모든 것이 여러분 일상 삶의 진실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군인이 되든, 경찰관이 되든, 법관, 혹은 머리 잘 쓰는 사업가가 되든, 먼저 이런 직업들의 진실을 알고 시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가 하는 일의 진실을 알지 못하고, 그 진실이 명하는 바를 좇지 않으면 여러분의 삶은 참으로 끔찍해지고 맙니다.
자, 다른 직업은 조금 복잡하다는 이유에서 제쳐두기로 하고, 우선 군인이 되어야겠다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 문제를 함께 검토해 봅시다. 군대의 선전이나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은 듣지 말고 한번 따져 봅시다. 군인이라는 직업에 관한 한 무엇이 진실입니까? 군인이 된다는 것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생각하지 말고 오직 복종만 하도록 마음을 수련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죽일 준비, 죽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잘났든 못났든 특정인이 한 말은 무조건 옳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자신을 희생시키기 위해, 남을 죽이기 위해 군인이 됩니다. 이게 정당한 직업입니까? 남에게 물어보지 말고 여러분 스스로 이 문제의 진실을 꿰뚫어 보세요. 군인이 되면 여러분의 미래의 어마어마한 유토피아를 위해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명령하는 사람은 미래의 일이면 뭐든지 다 아는 사람 같습니다! 국가를 위한 것이든, 조직화한 종교를 위한 것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죽이는 직업이 정당한 직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죽이는 게 정당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따라서, 곧 여러분 자신의 삶인, 삶의 작용에 얽힌 진실을 밝혀 보려면 이러한 것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야 합니다. 온 마음 온 정성을 여기에 기울여 보아야 합니다. 편견을 물리치고 독자적으로 분명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무슨 까닭에선가요? 진리란 삶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 일상의 삶이라는 그 작용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상과 도사, 그리고 성자들이 우리의 명상을 도울 수 있지 않을는지요?
크리슈나무르티: 올바른 명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질문의 답을, 진실을 혼자서 찾아보고 싶지 않습니까? 올바른 명상이란 이런 것이다, 하는 권위있는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면, 진실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일까요? 이건 정말 굉장한 문제입니다. 명상법을 제대로 알려면 생각이라고 하는 이 엄청난 것의 전과정을 속속들이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명상하라는 권위 있는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면, 여러분은 추종자, 특정 체계 혹은 관념의 눈먼 추종자로 전락하고 맙니다. 권위의 수용은, 결과에 대한 희망에 그 뿌리를 대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명상이 아닙니다.
--학생의 의무는 무엇입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의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무엇에 대한 의무지요? 정치가들이 말하는 국가에 대한 의무? 어머니 아버지가 바라는 바에 따르는 의무? 부모님은, 자기네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여러분의 의무라고 할겁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여러분에게 하는 이야기는 그들의 배경과 관습 같은 것에 얽매여 있습니다. 그리고 학생이라는 건 무엇입니까? 학교에 가고, 시험 때문에 몇 권씩 책을 읽는 소년 소녀가 학생입니까? 늘 배우고 그 배움에 끝이 없는 사람만이 학생입니까? 해당 분야의 책이나 읽고, 시험에 합격하고, 시험에 합격하고 나면 책을 내던져 버리는, 그런 사람이 학생이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진짜 학생이란, 스무 살, 혹은 스물다섯 살까지가 아니라 평생 공부하고, 배우고, 묻고, 탐구하는 사람만을 말합니다.
학생은 마땅히 늘 배워야 합니다. 끊임없이 배우고 있는 한 선생님은 따로 없는 것이죠. 진짜 학생이 되는 순간 여러분을 가르칠 선생님은 없습니다. 바로 그때는 세상만사가 여러분의 선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강둑에서 출렁거리는 물, 하늘 높이 나는 새, 무거운 짐을 지고 지나가는 가난한 사람, 인생에 관한 한 뭐든지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 -여러분은 이 모든 것으로부터 배웁니다. 따라서 선생님은 없으며 또한 이 때 여러분은 어떤 특정 선생님의 제자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생의 의미는 오직 배우는 것입니다. 옛날 스페인에 고야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화가가 있었습니다. 고야는 위대한 거장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만년에 그린 어느 그림 밑에다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아직도 배우고 있다'
물론 책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긴 합니다. 그러나 책을 통한 배움으로는 멀리 못 갑니다. 책은 여러분에게, 저자가 하는 말만 들려줍니다. 그러나 자기 인식을 통해 배우는 사람은 어떻게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인가, 어떻게 관찰해야 할 것인가를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모든 것에서 배웁니다. 음악에서, 사람들의 말, 그 말하는 태도에서, 분노, 탐욕, 야심에서 무엇인가를 배웁니다.
이 땅은 우리의 것입니다. 공산주의자의 것도 아니고 사회주의자의 것도 아니며 자본주의자의 것도 아닙니다. 이 땅은 싸우지 말고 행복하게, 넉넉하게 살아야 할 여러분과 나의 것입니다. 그러나 삶이 풍요롭고 행복하다는 느낌, '이 땅은 우리의 것'이라는 느낌은 누가 강요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법이 정한다고 해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느낌은 이 땅과 모든 것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이러한 상태가 곧 배움입니다.
--존경과 사랑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사전에서 존경과 사랑을 찾아보면 답이 나올텐데요? 당신이 알고 싶은 게 그거 아닌가요? 이 말의 정상적인 의미를 알고 싶은 건가요, 아니면 말의 배후에 있는 의미를 알고 싶다는 건가요?
목사나 장관같이 훌륭한 사람이 나타날 때 사람들이 그에게 존경하는 걸 주의 깊게 본 적이 있는지요? 그런 걸 존경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존경은 가짭니다. 왜? 그 배후에 두려움과 탐욕이 있으니까요. 당신은 그 딱한 작자에게 뭔가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목에다 꽃바퀴를 걸어 주는 거지요. 그건 존경이 아니에요. 시장에서 사고파는 데 소용되는 동전일 뿐이지요. 하인이나 마을 사람은 존경하지 않지요? 그래요, 당신은 뭔가를 줄 수 있는 사람만 존경합니다. 그런 종류의 존경은 두려움에 다름아닙니다. 그건 존경이 아니에요. 그런 존경에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러나 당신의 가슴에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고관이나 선생님이나, 여러분의 하인이나 마을 사람이나 다 마찬가지예요. 그러면 당신은 그들 모두를 존경할 수 있습니다. 연민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반대 급부를 요구하지 않으니까요.
8. 정돈된 사고
세상을 살다 보면 별일이 다 있습니다만, 혹시 우리들 대부분이 왜들 이렇게 단정하지 못할까,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지요? 왜 옷차림, 태도, 생각, 일하는 방법 같은 게 이렇게 단정치 못할까요? 왜 우리는 걸핏하면 시간을 어기고, 자주 남의 입장을 무시해 버리곤 하는 것이지요? 매사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들의 옷차림, 우리들의 사고, 우리들의 말, 우리들의 걸음걸이, 우리보다 운이 덜 좋은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강요한 바도 없고 계획한 바도, 의도한 바도 없는데 무엇이 이 질서라는, 기묘한 것을 부여했을까요? 혹시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질서라고 하는 말,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내가 말하는 질서, 혹은 정돈된 상태란, 담담하게 앉아 있는 상태, 서둘지 않고 찬찬히 먹는 상태, 느긋하면서도 정확한 상태, 생각이 맑되 그 미치는 범위가 넓은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 삶에 이러한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나는, 만일 우리가 교육을 통해 만사에 질서를 부여하는 요인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것 참 굉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질서란 덕성에서만 생겨납니다. 여러분이 작은 일에는 물론 매사에 덕성스럽지 못하면 여러분 인생은 엉망이 되고 말 것입니다. 혼돈의 와중에 떨어지고 만다 그 말입니다. 덕성스럽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덕성스러우면 생각이 정확하고, 온 삶, 온 존재에 질서가 잡힙니다. 이것이 덕성의 기능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부러 덕성스러워 '보겠다'라고 애쓰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스스로를 친절하고, 능률적이고, 신중하고, 사려 깊은 사람으로 훈련시킨다면, 남을 해코지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애쓰고, 선량한 인간이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데 우리 정력을 소모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러한 노력이 존경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신은 나날이 지속되어 갑니다. 따라서 이런 우리는 덕성스러운 사람일 수 없습니다.
꽃을 자세히 관찰해 본 적이 있는지요? 꽃잎 한 장 한 장이 그렇게 정확할 수가 없지요? 그런데도 꽃은 무척 부드럽고 냄새는 아주 향기롭습니다. 그리고 아름답습니다. 자, 어떤 사람이 질서 정연한 상태에 이르려고 노력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생활이 정확해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부드러울 수는 없습니다. 꽃의 예에서 보았듯이 부드러움이라는 것은, 부드러워지려고 애쓰지 않을 때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참으로 어려운 일은, 자의적인 노력 없이 정확하고, 분명하고, 폭넓어지는 일입니다.
보셨지요? 질서 정연한 상태, 깔끔한 상태에 이르려는 노력은 별 힘을 쓰지 못합니다. 내가 일부러 내 방을 정돈하려고 한다면, 모든 것을 제자리에 두는 데 신경을 쓴다면, 발로 딛는 곳, 손을 대는 곳 등등 늘 나 자신의 행동을 관찰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르긴 하지만 나라는 사람은, 자신은 물론이고 남들에게도 견딜 수 없이 지겨운 인간이 되고 말 것입니다. 늘 무엇인가 더 나은 존재를 획득하려는 사람, 생각을 늘 주의 깊게 가다듬는 사람, 이것과 저것을 주도면밀하게 재어서 생각하는 사람, 정말 피곤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아주 깔끔하고 분명한 사람일 수는 있습니다. 말을 정확하게 골라 쓰는 사람, 늘 주의깊고 사려깊은 사람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삶의 창조적인 즐거움을 상실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뭡니까? 어떻게 하면 삶의 창조적인 즐거움을 누리면서도, 느낌이 미치는 바가 폭넓고, 생각하는 바가 트여 있고, 그러면서도 그 삶이 정확하고 분명하고 질서 정연한 사람이 될 수 있느냐, 문제는 이거 아닙니까? 내가 생각하기로 우리들 대부분은 이런 사람이 못 됩니다. 우리는 사물을 그렇게 강렬하게는 느끼지 못하고, 온 마음 온 정신을 완전하게 어떤 사물에 쏟아 넣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문득, 꼬리가 탐스럽고, 털빛이 아름다운 빨간 다람쥐 두 마리를 보았던 생각이 나는군요. 이 두 마리의 다람쥐는 근 10분간 잠시도 쉬지 않고 서로 쫓고 쫓기면서 나무를 오르내리고 있었어요. 삶의 즐거움에 겨워서 그러는 거지요. 하지만 사물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 한, 우리 삶에 정열을 기울이지 않으면 여러분이나 나는 그런 즐거움을 알지 못합니다. 정열이라고 해서, 대단한 선행을 하겠다거나 무엇을 개혁하겠다는 정열이 아닙니다. 그저 사물을 강렬하게 느끼고자 하는 정열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고, 우리 전 존재에 전반적인 혁명이 일어나야 비로소 이런 활기찬 정열의 소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물에 대한 느낌이 깊지 못한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아는지요? 선생님이나 부모님에게 저항해 본 적이 있는지요? 단순히 싫어서 하는 저항이 아닙니다. 어떠어떠한 일이 싫다는 깊으면서도 강렬한 느낌 때문에 하는 저항이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일에 대해 깊고 강렬한 느낌을 경험했다면, 바로 이 느낌이 이상한 방법을 통해 여러분의 삶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질서 정연함, 깔끔함, 생각의 분명함 같은 것은 그 자체로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예민한 사람, 깊이 느끼는 사람, 완벽한 내적 혁명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몫을 합니다. 만일에 여러분이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이나 부자가 타고 가는 자동차의 먼지로 얼굴을 더럽힌 거지에 대해 강렬한 느낌을 경험한다면, 여러분이 매사에 감수성이 예민하고 포용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감수성과 포용력이 여러분의 삶에 질서를, 덕성을 부여합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교육자와 학생이 두루 이해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도 마찬가지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나라에 사는 우리 역시 주의깊지도 못하고 어떤 사물을 깊이 느끼려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지적입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며, 어떻게 생각해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말도 많이 들었고 이론도 많이 배워서, 말하자면 아주 영리하다는 의미에서 피상적이라는 지적이라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우리는 상당한 차원에 이르기까지 계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인 본질이나 그 의미는 별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행동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내적인 본질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관념의 작용에 의한 행동이 아닙니다.
강렬하게 느껴야 하는 까닭-정열 및 분노의 느낌-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느낌을 주시하고, 함께 하고, 이 안에서 진실을 찾아내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것들을 억압만 하려고 들면서, "화를 내지 말아야지. 격한 감정에 휩쓸리지 말아야지, 그건 나쁘니까." 이 따위 소리나 한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점차 어떤 관념에 갇혀 천박해져 갈 것입니다. 여러분은 굉장히 영리해질 수도 있고, 백과 사전적인 지식의 소유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깊고 강렬한 느낌이라는 생명력이 없으면 삶에 대한 여러분의 이해는 향기 없는 풀과 다를 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을 젊은 시절에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을 알아야 나이 들어서 진짜 혁명아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혁명아라고 해서 어떤 이념이나 이론이나 서적을 선호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글자 그대로의 혁명아, 완전한 인간의 길로 통하는 혁명아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과거에 오염될 소지가 전혀 없습니다.
이럴 경우 여러분의 마음은 참신하고 순수합니다. 따라서 엄청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의미를 놓칠 경우 여러분의 삶은 맥없이 시들어 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사회, 가족, 아내와 남편, 이론, 종교 혹은 정치 조직이 여러분은 압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시급하게 제대로 교육을 받아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분의 선생님들이 여러분을 도와, 이른바 문명이라는 것의 올가미를 풀어헤치게 하고, 여러분을 같은 짓을 되풀이하는 기계가 아니라, 가슴에 노래를 간직한 인간, 따라서 행복하고 창조적인 인간으로 키워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노란 무엇입니까? 왜 사람은 화를 내는 것입니까?
크리슈나무르티: 내가 당신의 발등을 밟거나, 꼬집거나, 당신이 가진 걸 아무거나 빼앗는다면, 당신은 화를 안 내겠어요? 내겠지요. 그런데 왜 화를 내어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왜 화내는 건 나쁘다고 생각합니까? 나쁘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왜 사람은 화를 내는지 알아보고, 분노의 진실을 한 번 따져 볼 필요가 있겠군요. 그리고 화내는 게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이 기회에 말해 두고자 합니다.
자, 당신은 왜 화를 냅니까? 다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치고 싶지 않다는 것은 생존을 위한 인간의 정상적인 욕심입니다. 당신은 어떤 개인이나 정부나 사회로부터 이용당하거나, 피해를 입거나, 파괴당하거나, 착취당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당신의 따귀를 때린다면 당신은 아주 기분이 나쁩니다. 모욕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런 느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이런 짓을 한 사람이 당신보다 덩치가 더 크고 힘이 더 세다면 당신은 맞받아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상대에게 분풀이하는 대신 다른 사람에게 분풀이합니다. 동생에게, 누이에게, 혹 하인이 있다면 그에게 분풀이하려 듭니다. 이래서 화의 연쇄는 계속됩니다.
먼저 밝혀 두고 싶은 것은, 화를 낸다는 게 다치지 않기 위한 자연적인 반응이라는 사실입니다. 왜 남에게 당하고 삽니까? 그래서 당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보호합니다. 방어선, 말하자면 장벽을 구축하기 시작합니다. 내적으로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열지 않고, 또 받아들이지도 않음으로써 당신 주위에다 장벽을 쌓습니다. 따라서 당신은 세상을 탐색할 수 없습니다. 폭넓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화를 낸다는 건 아주 나쁜 일이라고 말하면서 분노라는 것을 비난합니다. 갖가지 다른 감정을 비난하듯이 말이지요. 그러다 보면 당신은 차차 메마른 인간, 텅 빈 인간이 되어 갑니다. 그러다 급기야는 강렬한 감정이 전혀 없는 인간이 되고 맙니다. 내 말뜻을 아시겠어요?
--우리는 왜 어머니를 이토록 사랑하는 거죠?
크리슈나무르티: 당신은 아버지를 싫어하고 어머니는 사랑합니까? 잘 들으세요. 누군가를 아주 깊이 사랑할 때, 다른 사람은 이 사랑에서 제외시켜 버립니까? 어머니를 사랑한다면, 동시에 아버지, 이모, 이웃 사람들, 그리고 하인까지 사랑하게 되는 게 아닌가요? 먼저 사랑하는 감정이 일고 난 뒤에 어떤 사람을 특별히 사랑하는 게 아닌가요? "나는 어머니를 무척 사랑한다." 할 때, 어머니를 극진히 섬긴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어머니에게 쓰잘 데 없는 걱정도 끼쳐드릴 수 있겠군요? 만일 어머니를 극진히 섬긴다면, 동생, 누이, 그리고 이웃 사람들 역시 그렇게 대하게 되는 게 아닌가요?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어머니를 진짜로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말뿐이죠. 말이 좋아서 사랑이다, 이겁니다.
--저의 가슴은 미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랑할 수 있는지, 제발 좀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크리슈나무르티: 사랑하는 방법은 아무도 가르쳐 줄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있다면 이 세상의 문제는 아주 단순해졌을 것 아닙니까? 수학을 배우듯이 책을 통해 사랑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면, 정말 멋진 세상이 되지 않겠어요? 미움도 없고 서로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것도 없고, 전쟁도 없고, 부자와 가난뱅이의 구분도 없고, 따라서 우리 모두 친구처럼 살 수 있을 테지요. 하지만 사랑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오가는 게 아닙니다. 미워하기는 쉽습니다. 그리고 미움은 사람들을 동아리끼리 모이게 합니다. 이러한 모임은 온갖 환상을 만들어 냅니다. 전시처럼 온갖 종류의 협력체제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사랑은 이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방법을 배울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은 미움을 잘 보아 두었다가 부드럽게 한쪽으로 치워버리는 일 정도입니다. 미움과 싸우지 마세요. 사람을 미워하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라는 소리도 하지 마세요. 오로지 미움이 무엇인지, 있는 그대로 보고, 털어 버리세요. 옆으로 쓸어버리세요. 그거 별 것 아니예요. 중요한 것은 미움이 여러분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는 사태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여러분 마음은 기름진 흙과 같습니다. 시간만 충분하면 미움의 문제는 잡초처럼 여러분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맙니다. 일단 뿌리를 내리면 뽑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미움의 문제에 뿌리내릴 시간을 주지 않으면 자랄 데가 없어 곧 시들어 버립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미움을 부추키고, 뿌리내릴 시간을 주면 엄청난 문제로 자라 버립니다. 그러나 미움이 일 때마다 그냥 지나가게 하다 보면, 여러분 마음이 감상과는 거리가 멀면서도 아주 예민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되면 사랑을 아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마음은 감각과 욕망은 추구할 줄 알지만 사랑은 추구할 줄 모릅니다. 사랑이 마음을 찾아와야 합니다. 일단 사랑이 찾아들면, 육감적인 것 신성한 것의 구별이 무의미해집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굉장한 것입니다. 온 실존을 전적으로 이해하게 하는 품성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삶에 있어서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즐거운 일을 하고 싶을 때, 여러분은 그 일만 하게 되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아주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 할 수도 있고 아름다운 처녀와 결혼하고 싶어 할 수도 있습니다. 칭찬을 듣고 싶기도 하고 시험에 합격하고 싶어 합니다. 이때 여러분은, 그토록 바라던 이 일만 성취시키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행복이 그런 걸까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꽃처럼 이런 행복은 곧 사위어 버리지 않던가요?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삶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피상적인 것, 말하자면 좋은 차를 갖는 일, 안정된 지위를 얻는 일, 강풍에 신나게 연을 날리다가 몇 분 후에는 연을 찢어버리고 마는 아이처럼 덧없는 일에 대한 하찮은 감정에 만족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는 만족합니다.
우리는, "행복이란 무엇인가? 이것을 찾는 데 내 온 마음, 내 온 정력, 내 전 존재를 바치겠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별로 진지하지도 않습니다. 또,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 강렬한 느낌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찮은 일에 만족합니다.
하지만 행복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찾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행복이란, 결과, 혹은 부산물입니다. 여러분이 행복 자체를 추구한다는 것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행복은 불청객입니다. 행복하다는 걸 의식하는 순간 벌써 당신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순간을 경험해보았는지요. 별것도 아닌 일로 갑자기 즐거워졌을 때 잠깐 우리는 저절로 미소가 떠오르며 행복하다는 느낌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의식하는 순간 이내 여러분은 이것을 잃어버리게 되지 않던가요? 행복을 의식하고 추구하는 것은 바로 행복의 끝입니다.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요구가 뒷전에 머물러 있을 때 바로 행복은 거기서 머뭅니다.
수학에 대해서라면 많이 배웠겠지요? 역사, 지리, 과학, 물리학, 생물학 같은 과목을 배우는 데 많은 나날을 보냈겠지요? 하지만 이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를 생각하는 데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선생님이 쓴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체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어 본 적이 있나요? 침묵의 아름다움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지요? 마음을 풀어놓아 본 적이 있나요? 쓰잘 데 없는 일을 밀어 놓고, 보다 넓고 깊은 곳으로 마음을 풀어서, 뒤지고, 찾아 본 적이 있나요?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십니까?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우리들 각자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투사된 것입니다. 우리의 지금 상태가 곧 세상의 지금 상태인 것입니다. 우리는 소유욕의 화신입니다. 우리는 남을 질투하고 비난합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도 이와 똑같습니다. 보다 극적으로, 무자비하게 진행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선생님은 이런 것을 생각하는 데 조금도 시간을 쓰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조금씩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데 시간을 써 나갈 때, 비로소 사회 전반에 혁명이 태동하고, 새 세상을 이룩할 가능성이 열립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새로운 세상, 형태만 다른, 이 썩은 세상의 연속이 아닌 새로운 세상은 마땅히 와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이 깨어 있지 않으면, 감시하지 않으면, 폭넓게 열려 있지 않으면 새 세상은 오지 않습니다. 젊은 시절에, 더할 나위 없이 심각한 이 문제를 이따금씩 생각하되, 일자리와 죽음으로 통하는 것에 다름 아닌 교과 과목 공부에만 시간을 보내지 말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문제들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세요. 그러다 보면 예사롭지 않은 기쁨과 행복의 느낌이 여기에서 샘솟을 것입니다.
--진짜 삶이란 무엇이죠?
크리슈나무르티: 참 삶이란 무엇이냐, 조그만 소년이 내게 이 질문을 했습니다. 놀고, 맛있는 걸 먹고, 달리고, 뛰고, 밀고-이것이 소년에게는 진짜 삶일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우리는 삶을 진짜와 가짜로 나누고 있습니다. 전존재를 던져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진짜 삶이라고 일컬을 수 있겠지요. 따라서 내적 갈등도 없고, 하고 싶어하는 일과 해야하는 일 사이의 다툼도 없는 삶입니다. 이때 삶은 완벽한 통합과정에 듭니다. 이 과정의 삶은 무척 즐겁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도 심리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때, 완전한 내적 초월 상태에 들었을 때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하는 일을 사랑할 수 있을 가능성은 이럴 때만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총체적인 자기 혁명 상태에 든다면, 정원을 손질하든, 국무총리가 되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때 여러분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든 다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독창성이라는 아주 엄청난 감정은 바로 이 사랑에서 우러나오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