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살아있는 느낌을 위해 1

Bollnow 2024. 5. 5. 20:31

낙타를 나누는 방법 : 이드리스 샤

고독, 그 자체를 위한 고독 : 윌리엄 헤슬릿

대화의 기술 : 미셸 드 몽테뉴

전통과 개인적인 재능 : T.S. 엘리엇

살아있는 것은 다 성스럽다 : 에드먼드 윌슨

모자를 쫓아서 : G. K. 체스터턴

마술적 암시성에 대한 예술가의 열망 : 조셉 콘래드

고전이란 무엇인가? : 상뜨 뵈브

 

 

낙타를 다루는 방법(이드리스 샤)

페르시아의 사사니언 황제와 예언자 무하마드의 혈통을 이어받아 출생. 16권의 저서를 남겼고 그 책들은 5개 국어로 번역되었으며 전세계적으로 45판 인쇄를 기록. 여행, 문학, 유머, 철학, 역사 등에 관한 것들이 그의 주제이며, 여기에 실린 글들은 그의 사상의 일단을 보여주는 교훈적인 글들임.

 

하이다르의 한 제자

하이다르의 한 제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저는 이러이러한 책을 사지 않았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지식의 근원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통과 필요 없는 경비를 절약할 수 있었습니다."

일 년 후에 하이다르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그에게 책을 건네주었다.

"자네는 나를 12개월이나 섬겨 왔지. 자네의 그 봉사는 백 냥에 해당하네. 그 돈 대신 이 책을 주는 것일세."

"책 한 권에 백 냥을 지불하지는 않으시겠죠. 그렇게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네는 이 책을 받아야만 하네. 그러니 자 받게. 여기 있네. 여기 있네. 자네가 만약 낙타가 필요 없다면 동전 한 닢의 가치밖에 없을 걸세. 단 한마디의 말도 그것이 자네에게 긴요하다면 천 냥의 가치가 있는 걸세.“

 

퇴학

어떤 사람이 바하딘 나스반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떤 학생을 내쫓느라고 분명히 고통스러웠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가능하다면 학생을 시험하고 도와주는 방법 중에서 최고의 방법은 그를 내쫓는 것입니다. 만약 그 학생이 당신에게 대들면 그는 자기를 내쫓게 한 그 경박함과 결함을 발견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 학생이 당신을 용서한다면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이 위선적인 일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기회를 가질 것입니다. 만약 그가 침착을 다시 찾는다면 그는 자기가 공부한 것에서 이득을 얻고, 특히 자기 자신을 유리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보크하라 이스레일의 말들

가르치는 것은 공기와 같다.

사람들은 공기 속에서 살고 있으나 그 공기가 없으면 자기들은 죽게 된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공기가 오염되었을 때, 예를 들면 연기가 올 때에만 공기를 볼 수 있다.

그는 오염된 공기를 마시며 본다. 그리고 그것이 순수한 물질이라고 상상한다. 공기가 없으면 사람은 죽는다. 그러나 그가 숨이 막히면 자기가 필요한 것은 공기의 회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평범한 물질들이 이렇게 너무나 부주의하게 취급당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의 존재를 인식 못 하는 경우가 있는데 공기는 이러한 경우의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현자의 돌

루미라는 사람이 보통의 돌 하나에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그것을 루비하고 생각하게 할 정도의 특징들을 부여했다.

그 돌은 보석상에서 은 100,000냥에 팔렸다.

그 돌의 변화에 대해서 루미 자신은 이렇게 말했다.

"현자의 돌을 사용해서 구리를 금으로 만드는 것은 정말로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은 순간의 부주의로 현자의 돌이 구리로 변한다는 사실이다."

 

라비아 엘 아다위아

어느 날 하산이 라비아한테 왔다. 이때 라미아는 많은 명상가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하산은 입을 열었다.

"나는 물 위에서 걸을 수 있네. 자 우리 둘이서 저쪽의 물 위로 가세. 거기에 앉아 영적인 토론을 하세."

라비아는 말했다.

"자네가 이 엄숙한 친구들한테서 나가고 싶으면 나와 함께 공중을 날으세. 그리고 거기서 이야기하면 어떤가?"

하산은 말했다.

"나는 그것을 할 수 없네. 왜냐하면 자네가 말하는 그 능력을 나는 갖고 있지 않네."

라비아는 말했다.

"자네가 물에 조용히 앉을 수 있는 힘은 고기가 갖고 있는 힘이지. 내가 공중을 날 수 있는 힘은 새가 갖고 있지. 이런 능력들은 참된 진리의 일부분이 아니네. 그들은 자존심과 경쟁심의 기초는 될 수 있어도 영적인 것의 기초는 될 수 없네.“

 

늙어진다는 것

그들은 옴드루만에게 이렇게 물었다.

"늙어지는 것이 좋습니까, 젊어지는 것이 좋습니까?"

그는 말했다.

"늙어진다는 것은 앞에서 보면 시간이 없고 뒤에서 보면 실수만 많이 생기는 것이다. 어느 것이 좋은지는 여러분들의 판단에 맡기겠다."

 

던져 버려지는 것에 대하여

낙타를 타고 있는 어떤 사람이 현자인 자라두를 지나가다가 많은 제자들이 위대한 스승이라고 믿었던 그 비천한 살마(자라두)의 모습을 보고 소릴 질렀다.

"만약 가르침의 목적이 사람들을 향상시키는 것이라면 버림받은(던져 버려진)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습니까?"

자라두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만약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면 그는 던져 버려지지 않고 완전히 죽어 버렸을 것이다.“

 

진리를 깨닫는 세 단계

산에서 멀지 않은 어떤 곳에서 한 사람이 조용히 살고 있었다. 그는 행실이 좋았고 세련되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그에게서 놀라운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매력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는 친절하고 이해심이 많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를 찾아 그의 충고를 들으려 했다.

그는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누구를 막론하고 충고를 해주었다.

어떤 사람은 가게를 여는 데에 대한 자문을 구했으며 어떤 사람은 서까래를 세우는 데 대해서 또 어떤 사람은 식물을 재배하고 정원을 가꾸는 일에 대해서 자문을 요청해 왔다.

어느 날 진리를 찾으려고 길을 떠난 많은 사람들이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서로 이야기했다.

첫 번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리들이 그 위험스런 급류를 무사히 건너게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나에게 서까래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이 산도둑들한테 붙들렸을 때 나는 그들에게 정원을 가꾸는 법을 가르쳐 주어서 우리들을 석방시켰다.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사람이 나에게 꽃과 정원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은 여행 도중 야생동물의 공포에서 벗어났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나에게 가르쳐 준 교훈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내가 인생에 있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물어본 일이 있었는데 그는 나에게 야생동물을 이기는 법을 배우라고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 해서 여행자들은 모두 자기 나름의 이야기를 말했다. 여행자 각각은 인생에 있어서 진보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을 한 가지씩 다 배웠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배운 것이 자기들의 생존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거의 인식하지 못했다.

여행 도중 그들과 같이 있었던 안내자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이 만약 그 사람은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여러분들 중의 아무도 이곳에 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 충고를 받으러 갔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웃거나 그의 교훈을 잊어버렸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가 한 말 속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행자들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안내자가 산기슭에 살면서 자기들에게 충고를 해주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찾고 있던 진리가 다름 아닌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당황했다. 그리고 그들의 대변자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우리가 지금 보는 바와 같이 진리라면 왜 처음부터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는가? 말해주었더라면 이렇게 고생하면 이 먼 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았다. 즉 그들은 세 단계(충고를 받아들이는 단계, 여행을 통해서 그것을 응용하는 단계, 그리고 진리 그 자체를 인식하는 단계)를 거치지 않았더라면 결코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마음속에 있는 그 어떤 것이 산기슭에 있는 그 사람의 평범한 충고 속에서 진리의 어떤 울림, 다시 말하면 어떤 현실을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절대적인 진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수피(회교의 일파) 현인인 압둘라림은 가르치기를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가끔 인생행로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충고를 해주곤 했다.

배움에 대한 능력도 없고, 신비스런 의식에 참석함으로써 비정상적이 된 어떤 사람이 그를 찾아 왔다.

그는 물었다.

"현인들의 가르침에서 어떻게 하면 가장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을까요?"

수피는 말했다.

"자네의 능력에 해당하는 틀림없는 방법이 있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네의 귀를 틀어막고 무(먹는)에 대해서 생각하게."

"강의와 운동 전에 합니까, 도중에 합니까, 후에 합니까?"

"아무것도 참석하지 않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네."

 

현인의 길

파타우가 라스구에게 말했다.

"수피 교수들은 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연구를 합니까?"

라스구는 대답했다.

"만약 어떤 학생이 단순히 암기하거나 현인과 교제를 함으로써 어떤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전혀 학생의 자격이 없다. 만약 어떤 선생이 학생들에게 자습만을 하라고 하고 규율이나 의식만을 주장함으로써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학생만큼 어리석은 사람이다."

현인의 길을 배울 때에는 많은 방법으로 보통 세상의 보통 일을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차원이 낮은 어떤 것을 가르치는 데 사용하는 얼마 안 되는 수단들 갖고 차원이 높은 것을 배우려고 하는 것은 아직도 학생이 되지 않은 사람의 표식이다.

 

비교하는 법

온갖 종류의 비교를 좋아하는 어떤 사람이 회교탁발승에게 편지를 내어 비교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말했다.

그 탁발승은 기름과 물이 든 병 한 개와 무명실로 된 심지를 그에게 보냈다. 이 소포 속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가 들어있었다.

"친애하는 친구여, 만약 그대가 심지를 기름 속에 넣고 거기다 불을 붙이면 빛이 생길 것이다. 만약 그대가 물 속에 기름을 쏟아 넣고 그 위에다 심지를 넣으면 빛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기름과 물을 한데 섞어서 그것을 흔들고 그 속에 심지를 넣으면 지글지글 소리가 날 것이다. 이렇게 간단히 비교할 수 있는데 나한테 찾아와서 실험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할라비

그들은 할라비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당신이 만났던 사람들의 특질들을 결정하는 데 어떤 행동을 취했습니까?"

그는 말했다.

"나는 일반적으로 유순하고 겸손한 태도를 취했다. 나의 겸손한 태도에 대해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 사람들을 나는 되도록 피했고, 나의 겸손 때문에 나를 존경한 사람들도 나는 피했다.“

 

세 가지 해석

진리를 찾을 결심을 한 세 명의 탁발승이 위대한 스승의 집에 도착했다.

그들은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그는 그들을 그의 정원으로 데리고 갔다. 그는 죽은 나무 조각을 하나 들고 이 꽃에서 저 꽃으로 걸어 다니며 가장 큰 꽃들을 다 쳐 없앴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현자는 제자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물었다.

"내가 행한 행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 질문에 올바르게 대답하는 사람들은 나에게서 배울 수 있다."

첫째 제자는 말했다.

"선생님의 교훈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르치는 데 있어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두 번째 제자는 말했다.

"선생님의 교훈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외모가 아름다운 것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 제자는 말했다.

"저는 선생님의 말씀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죽은 것들은 살아있는 것까지 해를 줄 수 있습니다."

스승은 말했다.

"여러분들은 다 나의 제자가 될 수 있네. 그러나 여러분들은 부분적으로 알고 있으나 완전하지는 않네. 그러나 각자의 말은 옳네."

 

돈의 가치

아와드 아피피는 책을 한 권 갖고 있었는데 그는 이 책에다 자신이 20년 동안 여행하고 공부하면서 현인들과 철학자들과 이야기한 것을 기록해 두었다.

어느 날 한 학자가 찾아와서 그 책을 복사해 갈 수 없느냐고 물었다.

아와드는 말했다.

", 물론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복사해 주는 대가로 금 천 냥을 받아야겠습니다."

그 학자는 말했다.

"그건 굉장히 많은 돈인데요. 베끼는데 그만한 돈을 지불할 수 없어요. 게다가 지식에다 돈을 청구하는 것은 온당한 일이 못 됩니다."

아와드는 말했다.

"나는 지식 자체에 대해서 돈을 청구하지 않았습니다. 그 금 천 냥은 여행을 할 수 없는 제자들의 여행비로 쓸 작정입니다. 그리고 금액이 많다고 하십니다만 나는 나의 여행에 금 5만 냥을 썼고 20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어요. 제 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외양과 평가

어떤 남자가 이만 자이누라비딘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당신을 저의 지도자와 선생님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으로부터 배울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만은 물었다.

"왜 나를 지도자이자 선생님으로 생각하시오?"

손님은 대답했다.

"저는 친절하고 따스하고 외양이 좋은 그런 사람을 일생 동안 찾아왔으나 아직도 그런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만은 울며 말했다.

"친구여, 인간처럼 가냘프고 많은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 또 어디 있겠소? 내가 가지고 있다는 바로 그 명성과 행동은 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사람들 중의 몇몇 사람들이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모든 사람이 외양만 보고 사람을 평가한다면 모든 악마도 성자로 생각될 것입니다."

 

포도 한 송이

옛날에 남자 세 명이 여행을 함께 떠났다.

그런데 그들은 길가에서 우연히 자그마한 동전 하나를 발견했다. 그들은 수중에 다른 돈이 없었기 때문에 그 돈을 가지고 무엇을 살 것인가에 관해 서로 논쟁을 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사람이 입을 열었다.

"나는 맛있는 것을 원합니다."

두 번째 사람은 말했다.

"아닙니다. 나는 단것을 몇 개 원합니다."

세 번째 사람은 말했다.

"나는 갈증을 풀고 싶소."

지나가던 어떤 현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은 그에게 중재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소. 나는 여러분들을 다 만족시킬 수 있소."

그는 가까운 곳에 있는 가게에 가서 그 돈을 가지고 포도 한 송이를 사서 그것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첫 번째 사람은 말했다.

"이것은 맛있는 것이군요."

두 번째 사람은 말했다.

"이것은 단것 몇 개군요."

세 번째 사람은 말했다.

"이것은 나의 갈증을 풀 수 있는 것이군요."

 

낙타를 나누는 방법

옛날에 수피 선생이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자기가 죽은 후에 자기의 제자들이 올바른 선생을 찾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법이 정한 의무적인 유산인 낙타 17마리를 제자들에게 남기면서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자네 셋은 다음과 같은 비율로 낙타들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은 반을, 중간 나이의 사람은 삼분의 일을, 그리고 가장 어린 사람은 구분의 일을 가져라."

그가 죽자마자 유서가 낭독되었을 때 제자들은 스승의 그 비능률적인 분배 방침에 놀랐다. 어떤 제자는 말했다.

"낙타들을 공동으로 소유하자."

그러나 다른 제자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누어 갖자."

다른 한 제자는 말했다.

"낙타를 팔아서 돈으로 나누어 갖자."

그러다가 그들은 선생의 유산에는 어떤 숨은 뜻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 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풀 수 있는가에 대해서 탐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부탁한 사람은 누구나 다 실패를 했다. 그러다가 그들은 선생님의 사위 되는 하즈라트 알리에게 왔다. 그는 말했다.

"저는 이렇게 해결하고자 합니다. 현재 있는 낙타에다가 한 마리를 더하십시오. 그러면 18마리가 되겠는데 이 18마리 중에서 반(9마리)을 가장 나이가 많은 제자에게 주시오. 둘째로 나이가 많은 제자는 전체의 수의 삼분의 일(6마리)을 가지시오. 나머지 제자는 구분의 일(2마리)을 가지시오. 그러면 17이 될 것입니다. 한 마리 남은 것은 나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해서 스승의 뜻을 알았다.

 

개개인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원칙

옛날에 영적인 업적과 세상사에 있어서의 업적 때문에 명성을 얻게 된 어느 탁발승이 있었는데 그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그런데 어느날 그는 결혼하기로 작정했다.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수 마일 내의 지역에서 가장 성질이 고약한 여자와 결혼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알고 아주 놀랐다.

그가 결혼할 후에 어떤 아라비아인이 이 성자가 그 어리석은 여자한테서 비판받고 있는 것을 알고 자신의 호기심을 누를 길이 없었다.

그는 그 탁발승에게 왜 그 여자하고 사는가를 물어 보았다.

그 탁발승은 말했다.

"나의 부인의 잔소리는 나로 하여금 너무 건방지지 않게 해줍니다. 그녀가 아니라면 성자로서의 나의 위치는 흔들릴 것입니다. 게다가 그녀는 나의 행동을 자기 자신의 행동과 대조함으로써 자신의 그 무례함을 수정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현인을 모방하는 일은 정말로 해볼 만한 일이겠다.' 하고 그는 혼자서 이야기했다. 그는 스승의 설명에 너무나 감동이 되어 집에 도착하자마자 자기가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성질이 고약한 여자와 결혼했다.

그녀는 자기의 친구들, 친척들, 그리고 제자들 앞에서 자기 남편의 흉을 봤다. 그러나 그가 온순한 태도를 취하면 취할수록 그녀의 조롱과 야유는 증가했다.

몇 달도 못 가서 그녀는 미쳐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데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어느날 그녀는 자기보다 더 성질이 고약한 여자와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성질이 더 고약한 여자는 그녀를 죽이고 말았다.

홀아비가 된 그 아라비아인은 다시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드디어 옛날의 탁발승의 집에 오게 되었다. 그는 탁발승에게 자신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탁발승은 말했다.

"당신이 잘 이해하지 못했던 그 원칙을 서둘러 실천에 옮기기 전에 나에게 자문을 구했더라면 나는 그 원칙은 일반적인 원칙이 아니었다는 것과 그 원칙을 개개인에 따라 다르게 적용하는 법을 가르쳐 드렸을 것입니다."

 

허풍선이의 제자들

터키스탄의 세 남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페르시아어를 조금할 줄 아는 어느 허풍선이의 추종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이 허풍선이의 제자들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들에게 세 개의 말을 가르쳐 주었다. 그들은 각자가 세 마디 말, '우리들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를 외웠다.

이 지식을 습득하자마자 그들은 모든 지식이 담겨져 있는 성소로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그들이 코라산에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사람이 하나 땅에 죽어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이 이상한 광경을 보고 말에서 내렸다. 그들이 말에서 내리자 몇 명의 코라 상인들이 다가와서 말했다.

"누가 이 사람을 죽였소?"

"우리들."

이라고 첫째 제자가 전에 배운 단어를 사용해서 대답했다.

그들은 체포되어 법정으로 연행되었다.

재판관은 말했다.

"너희들은 이 시체 주위에 서 있었느냐?"

둘째 제자가 말했다.

"않았습니다."

"그건 거짓말이야."

재판관은 말했다.

그리고나서 재판관은 물었다.

"너희들이 그 사람을 죽일 때 기분이 어떠하더냐?"

"행복하지."

라고 세 번째 제자가 말했다.

"이놈들은 틀림없는 괴물들이야."라고 코라상인들이 소리쳤다.

재판관은 다시 물었다.

"그 범죄를 왜 저질렀느냐?"

그 세 제자들은 그들의 모든 페르시아 말을 사용해서

"우리들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소리쳤다.

"저들은 틀림없는 불치의 살인자들이야!"

라고 그 재판관은 교수형을 선고하면서 말했다.

 

고독, 그 자체를 위한 고독 - 윌리엄 헤슬릿

이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것 중의 하나는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나는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사교생활은 방안에서 하지만 집 밖에 나가면 자연이 나의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혼자 있을 때에도 결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들판은 그의 서재이고 자연은 그의 책이다."

나는 걸으면서 동시에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시골에 있을 때에는 식물 같은 생활을 하고 싶어 한다. 나는 산울타리와 검은 소들을 비판하는 것을 싫어한다. 나는 도시와 도시에 있는 모든 것을 잊기 위해서 도시를 빠져 나온다. 나는 고독을 좋아하며, 또 고독 그 자체를 위해서 고독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외딴 곳에서 고독의 향기로움을 속삭일 수 있는 친구'를 원하지도 않는다.

여행의 정신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사할 수 있는 자유, 그것도 완전한 자유인 것이다. 우리들이 여행을 하는 것은 주로 모든 방해물과 불편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우리 자신들을 뒤에 남겨두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빠져나오려고 하는 데 있다. 내가 여행을 하려는 것은 중요치 않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내가 도시에서 잠시 없어져 혼자 남아 있을 때에도 당황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이다. 역마차나 이륜마차를 타고 친구와 함께 그 진부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대신 나는 머리 위에 맑고 푸른 하늘과 발밑에는 푸른 잔디와, 나의 앞에는 구불구불한 길, 그리고 세 시간 동안 걸어서 저녁 식사를 하고 그다음에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그런 것을 좋아한다. 나는 웃고, 달리고, 도약하고, 기뻐서 노래를 부른다. 태양빛에 그을린 인디언들이 자신들을 고향의 해안으로 실어다 줄 파도 속으로 거꾸로 뛰어드는 것과 같이 나는 나의 과거 속으로 뛰어들어 그곳에서 혼자 좋아한다. 오랫동안 잊혀졌던 것들, 예를 들어 '침몰된 난파선과 액수를 알 수 없는 보물들'과 같은 것들이 나의 열렬한 시야 속으로 갑자기 떠오른다. 그리고는 느끼고, 생각하고, 다시 나 자신이 되기 시작한다. 나의 침묵은 위트(기지)를 보여주려고 시도하다가 깨어진 그런 거북한 침묵이 아니라 혼자서도 완전한 웅변이 되는 그 혼란 되지 않은 침묵이다. 나처럼 말재주, 두운법, 댓구, 논쟁, 분석 등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제발 혼자 쉬게 내버려 두십시오."

현재 나는 다른 할 일이 있는데 이 일은 독자들에게는 한가한 일로 보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양심의 바로 그 소재'이다. 이 야생 장미가 이렇게 아름다운데 한 마디 논평이 없을 수 있을까? 이 들국화는 에메랄드 색깔의 옷을 입고 나의 마음속으로 뛰어들지 않는가? 그러나 만약 내가 나에게 매우 귀중한 이러한 상황들을 여러분에게 설명한다면 여러분들은 그저 웃고 말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기분이 내키면 혼자서 걷거나 말을 타거나 자기 자신의 꿈을 즐긴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좋은 예법인 것 같지는 않으며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등한시하는 결과를 가져오며 자기 일행에 끼어야겠다는 생각을 항상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전적으로 나 혼자 있든가, 아니면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든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한다.

나는 많은 생각들을 일단 덮어두었다가 나중에 그것을 검토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나의 희미한 생각들이 미풍에 흔들리는 엉겅퀴의 솜털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나의 생각들이 논쟁의 가시덤불 속에 엉켜 있는 것을 싫어한다. 나는 단 한 번만이라도 내 마음대로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혼자 있어야만 가능하다. 나는 20마일 되는 도로를 걸으면서 어떤 사람과 함께 어떤 점에 대해서 논쟁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 하지는 않는다. 만약 내가 나의 동료에게 도로를 횡단하다가 콩밭의 향기에 대해서 말한다 해도 그는 아마도 그 냄새를 맡지 못할 것이다. 만약 내가 먼 곳을 가리켜도 그는 근시안이기 때문에 안경을 꺼내야 볼 수 있을 것이다.

대기 속에는 느낌이 있고 그름의 색채 속에는 색조가 있다. 그런데 이들은 우리들의 공상을 자주 하지만 그들의 그 효과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이런 경우에는 공감이 생기지 않고, 그들을 추구하려는 불안스러운 갈망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도중에 불만이 생겨, 끝내는 짜증만 내게 마련이다.

여행만큼 근시안적인 상상이나 변덕을 보여주는 것은 거의 없다. 사람들은 여행의 장소를 바꿀 때 생각도 달리 먹는다. 아니, 의견이나 감정까지도 변화시킨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잊혀진 옛날 장면들을 보고 애써서 그 옛날의 모습을 상기해 보려고 하지만 그 장면을 보지 않으면 그 장면들에 대해서는 다시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한 번에 한 장소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환상의 캔버스는 크기가 일정하기 때문에 그 위에다 한 벌의 물건들을 그리면 그들은 즉각적으로 모든 다른 것들을 말살시켜 버리게 된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개념들을 확대시킬 수 없고 단지 견해를 바꿀 뿐이다. 거치른 불모의 시골을 여행할 때 나는 나무가 많고 경작된 시골을 생각할 수 없다. 어 거치른 불모의 시골을 보면 세상은 다 불모인 것처럼 보인다.

시골에서 우리들은 도시에 관해서 잊어버리고 도시에서는 또 시골을 경멸한다. 포플링 플러터 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이드 파크(공원)를 넘어서면 모든 것이 다 사막과 같다. 우리들이 보지 않는 그 모든 것은 공백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그 영역은 하나의 전망이 다른 전망으로 확대될 그런 것이 아니며 한 군이 다른 군과 연결되었거나 바다가 육지와 연결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눈이 일견에 받아들이는 그 공간의 개념 이상의 것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 외의 나머지 것은 지도책에 쓰여져 있거나 산수의 계산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들 혼자서 온 누리를 측정하며 자신들의 존재 바탕을 조금씩밖에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해서 수많은 물건들과 장소들을 기억한다. 마음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곡들을 연주하는 기계로 된 악기와 같은 것이지만 이 곡들은 연속적으로 연주해야 한다. 하나의 개념은 또 하나의 다른 개념을 상기시켜 주지만 그것은 동시에 모든 다른 개념들을 배척한다."

 

대화의 기술 - 미셸 드 몽테뉴

어떤 사람들을 경고로서 비난하는 것이 우리의 정의의 관습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이 잘못했다고 해서 비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는 똑같은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경고를 받는 것이다. 나의 과오는 가끔 자연스럽고 교정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정직한 사람들은 하나의 본보기를 보여줌으로써 일반 사람들에게 이득을 주지만 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의 본보기를 피하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이익을 준다.

만약 내가 나의 결함들을 노출시켜 사람들에게 알린다면 어떤 사람은 그것을(나의 결함)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성들은 나 스스로를 칭찬하는 데서 오는 명예보다는 나 스스로를 비난하는 데서 오는 명예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나는 나의 결함을 자주 의존하고 그것들을 자세히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자기 비난은 믿어도 자기 칭찬은 믿지 않는다.

나와 같이 다른 사람들의 본보기를 모방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결점들을 피함으로써 더 많은 것들 배우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카토가 바보들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운다고 말한 것은 위와 같은 이야기를 염두에 둔 것이다.

잔혹에 대한 공포는 여하한 관대함보다도 나로 하여금 더 관대함을 느끼게 한다. 승마를 잘하는 사람이 나의 승마 기술을 낫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변호사나 베니스 사람이 나의 승마 기술을 낫게 해준다. 좋은 연설 스타일은 나쁜 연설 스타일만큼 나의 연설을 향상시키지 못한다.

매일 다른 사람의 어리석은 행동은 나의 경고하고 충고해 준다. 짜증나게 하는 것은 기쁘게 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들에게 영향을 주고 우리들을 각성시킨다. 우리들을 낫게 해주는 것은 동의보다는 의견의 불일치, 유사성보다는 차이점에 의해서이다. 나는 나에게 매일의 교훈을 주는 나쁜 것을 이용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불유쾌한 것을 보고 나 자신이 유쾌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내 의견으로는 우리들의 마음에 있어서 가장 유익하고 가장 자연스러운 일은 대화이다. 나에게 있어서 대화라는 것은 생활에 있어서 그 어느 것보다도 유쾌한 일이다. 그래서 만약 나에게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나의 시력을 잃는 한이 있어도 듣는 것이나 말하는 것은 잃지 않겠다. 아테네인들과 로마인들은 그들의 아카데미에서 대화를 크게 존중했다. 오늘날까지도 이태리인들은 이러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책을 공부하는 것은 우리들을 흥분시키지 못하는 나른하고 활력이 없는 행동이지만 대화는 우리들을 가르치고 운동을 시키는 데가 있다. 내가 만약 강력한 마음의 소유자와 말씨름을 하게 되면 그의 생각은 나의 생각에 자극을 준다. 그의 경쟁심, 허영심, 그리고 투쟁심은 나를 자극하고 나를 끌어올린다. 그래서 동의한다는 것은 대화에서는 아주 필요한 요소이다.

나는 토론을 하고 논쟁을 하기를 좋아하지만 조그만 규모의 친구들과 개인적으로 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면서 자신의 기지를 자랑삼아 보이는 것은 신사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리석음은 불행의 특징이다. 그러나 그것(어리석음)을 참지 못하거나, 그것을 화내거나 걱정을 하는 것은(내가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또 하나의 취약점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이러한 점을 비난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와 대화를 할 때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깊은 장애물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더 자유롭고 쉽게 대화를 하고 토론을 할 수 있다. 상대방의 주장이나 믿음이 아무리 나의 것과 반대되는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나는 결코 놀라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어떠한 생각도 나에게는 인간의 기지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며, 그렇게 경박하거나 지나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나에게 반대되는 의견들은 나를 불쾌하게 만들거나 나를 소외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나를 각성시키고 내 마음을 운동시킬 뿐이다.

우리들은 교정 받는 것을 싫어한다. 우리들은 그 교정이 학교 수업의 형태가 아니라 대화의 형태로 제시된다면 우리들은 그 교정에 타협을 하고 그것을 환영해야 한다. 우리들은 반박의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 반박이 정당한 것인지 아닌지 생각하지 않고, 좋은 수단이든 나쁜 수단이든 가리지 않고 그 반박을 물리치려고 할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손을 뻗는 대신에 발톱을 내보이는 것이다.

나는 나의 친구가 "자네는 바보야, 자네는 꿈을 꾸고 있네."라고 심한 말을 하는 것을 참을 수 있다. 나는 신사들의 대담한 의견 제시를 좋아한다. 우리들은 그 섬세하고 의식적인 말의 소리에 대하여 우리들의 귀를 강화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야 한다. 나는 강력하고 남성다운 친교와 친숙함, 다시 말하면 거칠고 정력적인 교제의 우정을 좋아한다.

어떤 사람이 나를 반대하는 말을 할 때 그는 분노가 아니라 주의력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나를 반박하고 나의 잘못을 고쳐줄 때에 나는 그와 타협한다. 진리에 대한 원인은 우리들 둘 다에게 공통되는 원인이어야 한다.

만약 우리들의 논쟁이 내기하는 방식에 의하여 결정되고 우리들이 우리들의 손실을 기억할 수 있도록 실제로 점수를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좋은 일일 것이다.

"당신은 20번의 경우에 있어서 무식과 고집 때문에 100크라운 손해를 봤어요."

나는 누구에 의해서 진리가 발견되든 간에 진리를 환영한다. 나는 진리가 멀리서 나에게 접근해 올 때 기꺼이 항복하고 나의 정복된 칼을 진리에게 넘겨준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의 저작품에 대하여 지나치게 건방지고 학교 선생 같은 태도로 비평하지 않는 한 나의 저작품에 대한 비평을 권장한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주장에 가해진 모든 반박을 미소로 환영했다는 사실은 그의 힘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그는 상황이 자기에게 유리해지면 그것을 새로운 승리의 계기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우리들의 적의 우월성에 대해서 우리들이 갖고 있는 감정과 우리들에 대한 경멸만큼 우리들로 하여금 반박에 대하여 그렇게 민감하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관찰할 수 있다.

사실상 나는 나를 매도하는 사람들과 사귀려고 한다.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에게 양보하는 사람들과 사귀는 것은 단조롭고 해로운 만족을 준다. 안티스테네스는 자기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을 칭찬하는 사람을 감사와 호의로 보지 말라."

나는 나의 적의 약점을 이용해서 얻은 승리에 만족했을 때보다 그의 주장의 힘에 내 자신을 양보할 때 내 자신을 극복함으로써 얻은 승리를 더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게임의 규칙에 의해서 나에게 가해진 타격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부정하게 가해진 타격들은 참을 수 없다. 나는 누가 이기는가에 대해서 상당히 무관심하다. 나는 논쟁이 규칙에 따라서 수행된다면 하루종일 평화스럽게 논쟁할 수 있다.

우리들의 말다툼은 다른 말의 범죄처럼 금지되어야 하고 처벌받아야 한다. 말다툼이 분노에 의해 지배당할 때 얼마나 많은 악이 발생하는가! 우리들은 처음에는 이성과 싸우다가 그다음에는 사람들과 싸운다. 우리들은 오직 반박하기 위해서 토론하는 것을 배운다. 그래서 토론의 모든 대상자들이 논박을 하고 논박을 당할 때 결과적으로 진리는 묵살을 당하고 무효화된다.

토론의 목적은 무엇인가? 토론자들의 한 사람은 동쪽으로 가고 한 사람은 서쪽으로 간다. 그러다 보면 그들은 요점을 잃게 되고 많은 부수적인 질문들 속에서 요점을 보지 못하게 된다. 한 시간 동안 토론하다 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잊어버리게 된다. 토론자는 자기 자신의 이유만을 추구하고 상대방의 이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입장이 약해졌음을 발견하고 두려운 마음이 생겨 모든 논쟁을 거부한다. 그는 처음에는 문제들을 혼동시킨다. 아니면 논쟁이 열기를 띠고 있을 때 그는 갑자기 말을 중지하고 불끈 화를 내며 자신의 무지에도 불구하고 오만한 경멸을 드러내 보인다.

토론자가 자기의 적이 자기에게 필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적에게 가르치는 것만큼 더 큰 승리는 어디서 기대할 수 있겠는가? 토론자가 논쟁의 내용에 의해서 유사한 점을 얻는다면 승리하는 것은 진리이다. 그리고 토론자가 토론을 진행하는 방법에 의해서 유리한 점을 얻는다고 하면 그는 토론에 있어서 승리하는 것이다.

 

전통의 개인적인 재능 - T. S. 엘리엇

우리들은 영어를 쓰는 데 있어서 전통의 부재를 한탄하면서 가끔 전통이라는 말을 쓰고 있으나 전통에 대해서는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 우리들은 '그 전통' 아니면 '하나의 전통'을 말할 수 없다. 우리들은 기껏해야 이러저러한 시가 '전통적'이라거나 '너무 전통적'이라고 말하면서 전통이라는 말의 형용사를 사용한다. 아마 전통이라는 단어는 비난하는 말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좀처럼 사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이란 단어는 어떤 유쾌한 고고학적인 재현을 인정할 때 막연하게 사용된다. 이와 같이 확실한 고고학에 관한 유쾌한 관련이 없이 전통이라는 말을 영국인들의 귀에 기분 좋게 들리게 할 수는 없다.

우리들이 살아 있거나 죽은 작가들을 감상할 때 확실히 전통이라는 단어는 나타날 가능성이 없다. 모든 민족과 인종들은 자기 나름의 창조적인 정신뿐만 아니라 비판적인 정신이 있다. 그들은 또한 자기들의 창조적인 천재들의 결함과 한계보다는 자기 자신의 비판적인 습관의 결함과 한계를 더 잘 망각한다. 우리들은 불란서 언어에 나타난 막대한 분량의 비평문에서 불란서 국민들의 비판적인 방법과 습관을 알고 있거나 아니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불란서 국민들이 우리들(영국인)보다 더 비판적이며, 또 불란서인들은 영국인들보다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들은 비평에 숨쉬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피한 것이며 책을 읽고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 느낄 때 우리들의 마음속에 스쳐 가는 것을 분명히 말한다고 해서 더 나빠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들 자신에게 상기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 있어서 해명되는 사실들 중의 하나는 우리들은 어느 시인을 칭찬할 때 그의 작품이 다른 사람들을 닮지 않은 점을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의 작품에서 개인적인 것, 다시 말하며 그에게서 독특한 것을 찾는 체하고 있다. 우리들은 그 시인이 그의 선임자들과 다르다는 것을 만족스럽게 부여한다. 우리들은 따로 떨어져 즐길 수 있는 어떤 것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만약 전통의 유일한 형태가 우리의 바로 앞 세대의 성공을 맹목적으로, 그리고 소심한 마음을 갖고 따르는 데 있다면 그 '전통'은 확실히 권장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들은 그러한 경향이 곧 사라져버리는 것을 많이 보았다. 새로운 것은 반복보다 낫다. 전통이라는 것은 이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전통은 상속될 수 없다. 만약 사람들이 전통을 원한다면 그들은 노력을 많이 해서 그것을 얻어야 한다. 우선 전통은 역사적인 감각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 역사적인 감각은 25세 이상 된 시인이 계속해서 시인이 되듯 그 어느 누구에게든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인 감각은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이해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역사적인 감각은 사람들로 하여금 호머로부터 시작된 유럽의 전체 문학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감각을 갖고 글을 쓰게 한다. 역사적인 감각은 영구성과 세속성을 갖고 있는데 이것이 작가를 전통적으로 만든다.

어느 시인이나 어느 예술가도 자기의 완전한 의미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의 의미와 그의 감상은 죽은 시인들과 예술가에 대한 관계를 감상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를 따로 떼어서 평가할 수 없다. 우리들은 그를 죽은 사람들과 대조해 보고 비교해 보아야 한다. 나는 이것이 단순히 역사적인 비평만이 아니라 심미적인 비평이라고 생각한다. 그가(시인이나 예술가) 다른 사람들과 순응해야 한다는 것은 일방적인 말은 아니다. 새로운 예술 작품이 창조되었을 때 발생되는 일은 그 작품에 선행된 모든 예술 작품에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다. 현존하는 불후의 작품들은 자기들 사이에서 하나의 이상적인 질서를 형성하는데, 이 이상적인 질서는 현존하는 불후의 작품들 사이에 새로운 예술 작품이 도입됨으로써 수정된다. 새로운 작품이 도입되기 전에 기존 질서는 그 자체로 완전하다. 그러나 새로운 질서가 들어온 후에 기존 질서가 살아 남기 위해서는 자신은 전부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각 예술 작품의 관계, 균형, 그리고 가치는 다시 조정된다. 이것이 새 것과 낡은 것과의 조화이다. 이러한 질서와 개념을 인정한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과거는 현재에 의해서 수정되고 현재는 과거에 의해서 수정된다는 것이 엉터리 같은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시인이나 예술가는 자기 자신은 과거의 기준에 의해서 불가피하게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과거의 기준에 의해서 평가받는 것이지 불구가 되도록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며 또 죽은 비평가의 기준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두 개의 물건이 서로 평가되고 비교되는 것이다.

시인의 과거에 대한 관계를 좀 더 지성적으로 논해 보자. 그는 과거를 통해 받아들일 수 없고, 전적으로 한두 개의 개인적인 찬사에 의거하여 자기 자신을 형성할 수 없으며, 또 자기가 좋아하는 시기에 의거하여 자기 자신을 형성할 수 없다. 시인은 주류를 매우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 주류는 가장 두드러진 명성을 통해서만 항상 흐르는 것은 아니다. 그는 또한 예술은 결코 향상되지 않으며 예술의 소재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 유럽의 정신, 그리고 자기 나라의 정신은 자기 자신의 정신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이 정신도 변화하고 있으며 이 변화는 그 변화과정에서 아무것도 버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 변화하는 과정에서 셰익스피어나 호머 같은 작가들이 낡은 것으로 일축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발전, 세련, 복잡화는 향상은 아니다. 아마 심리학자가 본다 해도 그것은 향상이 아니다. 그러나 현재와 과거와의 차이는, 의식하는 현재는 어느 정도 과거를 알고 있으나 과거는 자기가 자신을 알고 있는 것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죽은 작가들은 우리들로부터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그들의 업적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자신의 필요한 감수성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많은 것들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우리들은 주장하고 있으나 그 지식이 시험이나 응접실과 같은 것을 위한 유용한 형태로 쓸 수 있는 것에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어떤 시인은 지식을 빨리 흡수할 것이고 또 어떤 시인은 땀을 흘려서 지식을 흡수할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대영제국의 박물관에서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플루타크로부터 얻었다. 내가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시인은 과거의 의식을 얻어서 그것을 발전시켜야 하며 그의 생애 동안 그 의식을 계속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시인은 현재의 자기를 가치 있는 어떤 것에다 계속 양보해야 한다. 시인의 발전은 계속적인 자기 희생이며 자기 개성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이제 비개인화의 과정과 그것의 전통 감각에 대한 관계를 정의하는 문제가 남아있다. 이러한 비개인화 과정에서 예술이 과학의 조건에 접근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직한 비평과 예민한 감상은 시인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시를 겨냥한 것이다. 만약 우리들이 신문 비평가들의 혼란된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들은 시인들의 이름을 많이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즐길 수 있는 시인이나 시를 찾는다면 그런 것은 좀처럼 찾을 수 없다. 나는 하나의 시가 다른 작가들의 시에 대해 가지는 관계의 중요성을 지적하려고 애를 썼고 지금까지 쓰여졌던 모든 시의 살아있는 전체로서의 개념을 시사한 바 있다. 그리고 성숙한 시인의 정신이 미숙한 시인의 정신과 다른 점은 '개성'의 평가나 아니면 '할 말이 더 많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특수하거나 매우 다양한 감정이 새로운 것으로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는 더 완전한 매개체가 되는 데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들이 가장 위대한 시의 대표적인 구절 몇 개를 서로 비교한다면 새것과 옛것이 얼마나 다양하게 결합되어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들은 '숭고함'의 준 윤리적인 기준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감정'의 위대함이나 강렬함이 아니라, 말하자면 결합이 발생하는 예술적인 과정의 강도이기 때문이다. 파울로와 프란체스카(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지옥의 제2편에서 단테가 만나는 연인들이다)의 일화는 분명한 감정을 사용하고 있으나 이 시의 강도는 측정되는 경험상의 강도가 주는 그런 인상과는 아주 다르다. 더구나 이 일화는 직접적으로 감정에 의존하지 않는 율리시스의 항해보다 강력하지 않다. 감정의 변화의 과정에 있어서는 다양성이 많이 있을 수 있다. 아가멤논의 살해(그의 부인 클라티메스트러에 의해 살해당했음 : 에스킬러스의 연극인 아가멤논의 중심 장면)아니면 오셀로의 고민은 단테의 신곡의 장면보다 더 명확히 예술적인 효과를 주고 있다. 아가멤논에 있어서 예술적인 감정은 실제 관객의 감정과 비슷하며 오셀로에 있어서 예술적인 감정은 주역 자신의 감정과 비슷하다. 예술과 사건 사이의 차이는 항상 절대적이다. 아가멤논의 살해에서의 사건과 감정의 결합은 율리시스의 항해에서의 사건과 감정의 결합과 마찬가지로 복잡할 것이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이나 다 여러 요소들이 결합된 것이다. 키츠(영국의 시인)의 송시는 특별히 나이팅게일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나이팅게일이 자신의 매력적인 이름과 명성 때문에 생기게 된 여러 감정들을 포함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 공격하려고 노력하는 관점은 정신의 실질적인 통일체에 관한 형이상학적인 이론과 관계가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인은 발표할 개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상과 경험이 어떤 독특하고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결합되어 있는 특별한 매개체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중요한 인상과 경험은 시에서는 설 자리가 없을 것이며 시에서 중요한 인상과 경험은 개성에 있어서는 아주 대수롭지 않은 역할을 할 것이다.

 

살아있는 것은 다 성스럽다 - 에드먼드 윌슨

존 스타인벡(미국의 소설가. 노벨상 수상자)은 캘리포니아 태생이며 다른 어느 작가에 못지않게 캘리포니아주의 일에 관여하였다. 샐리나스 밸리라는 지역에 관해서 그는 소설을 통하여 최근의 어느 소설 못지 않게 끈기 있고 줄기차게 묘사하였다.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포그너(미국의 소설가. 노벨상 수상자)가 미시시티 주를 철저히 묘사했다는 것뿐이다.

그러면 스타인벡은 그가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고장에서 무엇을 발견했던가? 나는 그의 순수한 기술적인 면의 기교가 그의 주제를 흐려 놓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여덟 권의 책을 내놓았는데 이 책들은 많은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토틸라 플랫(Tortilla Flat)"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거의 단순화시킨 익살맞은 전원곡 같은 소설이다. "생쥐와 인간"은 치밀하게 짜여진 작은 드라마인데 이 소설은 너무나 재치 있게 고안되었고 비정치적인 관점에서 인간성을 비판한 하나의 우화이다. "긴 계곡"은 동물들을 다루는 일련의 단편소설들인데 여기서는 시적인 상징들이 현실적인 배경 속에 나타나 있으며 또 그것들은 구체적인 세부 사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분노의 포도"는 설교와 사회적은 막간으로 가득 차 있다. 이리하여 스타인벡의 소설들을 읽어보면 항상 내용의 방향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스타인벡의 소설에는 항상 변하지 않고 어떤 중요성을 띠고 있는 토대가 있다. 스타인벡의 소설에 항상 나타나 있는 그 토대는 그가 생물학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라는 단편소설에서 생물학 연구소는 그가 직접 알고 있으며 그가 강력하고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이다. ""에 묘사된 실험실, 과학자가 흰쥐에서부터 시작하여 방울뱀에게 먹이를 주고 불가사리의 난자를 수정하는 물 위의 밀폐된 작은 건물은 그의 소설의 중요한 이미지의 하나이다. 그것은 스타인벡이 인간 생활을 동물의 용어로 표현하려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스타인벡은 그의 소설에서 하등 동물이나 아니면 인간들을 너무나 기본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거의 동물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 동물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데이비드 가넷과 D.H. 로렌스의 동물애호소설과 가깝다. "천국의 목장"이라는 소설에서 작은 개구리와 이리라고 불리우는 그 바보는 새들과 동물들의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동물과 유사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토틸라 플랫"에서는 해적이 하나 있는데 그는 개집에서 개들과 함께 살고 있으며 인간과의 교우를 잊어버렸다. "의심스러운 싸움"이라는 글에서도 한 작중 인물이 있는데 그의 성격과 개의 성격이 혼동되어 있다. "분노의 포도"에서 조드 가의 여행은 처음에는 거북이의 걸음으로 비유되었고 여행하는 도중 내내 동물, 곤충, 그리고 새들이 동반되었다. 오클라호마에서 소유권을 빼앗긴 소작인들이 농장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우리들은 그 집으로 박쥐, 족제비, 부엉이, 생쥐 그리고 들판으로 돌아갔던 애완용 고양이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생쥐와 인간"에 나오는 레니는 애완용 동물들을 갖고 다니기를 좋아하는데 그는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도 살인적인 동물적 본능을 갖고 있다. "롱 밸리"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거의가 다 동물과 식물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스타인벡은 로렌스나 키프링처럼 동물을 낭만적인 인간의 수준까지 끌어올리지 않고 인간을 동물과 동화시키는 효과를 내고 있다. "국화꽃", "흰 메추라기" 그리고 ""에서는 자신들을 각각 국화, 흰 메추라기, 그리고 뱀과 동일시하고 있는 여자들을 다루고 있다. "도주"라는 작품에서 어린 멕시코 소년은 남자를 한 명 죽이고 산 속으로 도망간다. 그는 동물들의 모습과 너무나 비슷하게 닳았기 때문에 산속의 사자도 그를 네발 달린 짐승으로 착각하고 있다. "처녀 성캐티"에서는 사악한 돼지가 참회를 하고 성자가 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성프란시스의 작은 꽃들"에서처럼 돼지를 고귀하게 만들지는 못하고 있다.

스타인벡은 D.H. 로렌스처럼 자신의 동물을 사랑하지 않는다. 상술한 관점은 "알려지지 않은 신"에 나오는 토마스 웨인과 관련해서 잘 그려져 있다. 그는 동물에게 친절하지 않았으며 동물들이 서로 친절하게 대하는 것 이상의 친절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동물들이 이해할 수 있는 시종일관성을 갖고 행동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모든 동물들은 그를 신임했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동물들을 좋아했고 이해했다. 그리고 동물들이 서로 죽일 때 그런 감정을 갖고 그는 동물들을 죽였다. 그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동물적이기 때문에 동물에 대해서 감상적인 태도를 가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스타인벡은 로렌스처럼 그의 여러 가지 동물들의 완전함에 대해서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스타인벡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동물의 습관이나 행동이지 인상이 아니다.

이리하여 스타인벡의 중요한 주제는 가장 신중하고, 상상적이고, 건설적인 인간성의 단면이 아니고, 인간에게 가장 매력적인 동물의 양상이 아니라 생활 자체의 과정이다. 자연의 일반 과정에 있어서 살아있는 유기체는 계속해서 파괴되고 있다. 이 살아있는 유기체를 파괴시키고 있는 중요한 것들 중에는 생존과 번식을 위해 필요한 약탈적인 식욕과 경쟁적인 본능이 있다. 살해자의 이 충동은 "생쥐와 인간"의 레니와 같은 바보 속에 잘 보존되어 있는데 그 충동은 거의 천진난만한 형태로 되어 있다. 그러나 레니는 그러한 충동에 굴복하는 것은 '나쁜'일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의 고도로 개화된 친구한테서 배운다. 그는 그의 본능에 항거하는 투쟁에서 지고 만다. 레니는 좋은 사람인가, 아니면 나쁜 사람인가? 작가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그는 우리 인간의 모든 외도가 그러하듯이 우리의 동물적인 천성의 불확실성에 의해 배반당하고 만다. 그러고 스타인벡은 일반적으로 이 원시적인 수준에서 도덕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분노의 포도"에서 설교사는 인간의 도덕성에 환멸을 느낀다. 생전에 매우 호색적이고 비천했던 조드 할아버지의 무덤에서 행했던 그의 다음과 같은 설교는 스타인벡의 견해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한 늙은이가 살다가 그저 가 버렸다. 나는 그가 훌륭했는지 아닌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가 살아 있었다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지금은 가버렸으니 중요한 문제는 없어진 것이다. 나는 어느 시인이 한때 '살아있는 것은 어느 것이나 다 성스럽다.'라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인간 사회를 다루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는 "분노의 포도"의 주제는 "붉은 조랑말"의 주제와 같다. "붉은 조랑말"은 말들을 다루는 것으로 생각되어 있는데 이 두 작품들의 주제는 다 생명에 대한 충실이다. 붉은 조랑말을 죽게 한 데 대한 책임을 느낀 사람들은 새 조랑말이 살아서 태어나도록 암말을 희생시킴으로서 조랑말에 대한 보상을 한다. 그래서 로즈 오브 쉐런조드는 영양실조로 사산된 아기를 안고 자신의 젖을 아사 직전에 있는 그 비참한 희생자에게 제공한다. 설교사는 이렇게 계속 말한다.

"나는 죽은 사람에게 기도를 하고 싶지 않다. 그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는 직업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끝났다. 우리들이 할 일은 한 가지밖에 없다. 그러나 그 방법은 천 가지가 있어서 우리들은 어느 것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만약 내가 기도를 한다면 그것은 어느 길을 택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겠다."

"분노의 포도"에서 스타인벡의 최초의 소설 중의 하나인 "알려지지 않은 신에게"로 관심을 돌려보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 책에서 스타인벡은 자연의 기본적인 원칙으로서의 파괴적이고 재생산적인 힘을 솔직하게 다루고 있다. 작품의 한 대목에서 주인공은 다른 작중 인물에 의해서 결코 '사람을 알지 못한' 사람으로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당신은 사람들을 결코 알지 못하고 있소, 조셉 씨."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원시적인 자연 숭배를 하고 있는데 그는 이 원시적인 자연 숭배를 위해서 가뭄이 생겼을 때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한 피의 헌납을 위해 우선 자기 자신은 희생시키고 그 다음에는 자기 부인을 희생시킨다. 이 이야기는 불합리한 이야기이지만 약간 흥미 있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것은 막 30고개에 들어선 스타인벡이 세상에 대한 견해와 세상을 움직이는 힘에 대한 개념을 표현하려는 성실한 시도임을 분명히 나타낸다.

 

모자를 쫓아서 - G. K. 체스터턴

내가 시골에 가고 없을 때 런던에 홍수가 났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거의 야만적인 질투를 느낀다. 내가 사는 바터시라는 곳은 내가 알기로는 물들이 서로 만나는 장소이다. 바터시는 내가 거의 말할 필요도 없이 인간이 사는 곳치고는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바터시는 베니스의 모습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고깃간에서 고기를 운반한 배는 마치 곤돌라처럼 잔잔한 은빛 물결을 헤치고 그 좁은 수로를 따라 쏜살같이 움직여 나갔다. 래치모오 도로의 골목까지 채소를 운반한 식료품 상인은 곤돌라 선장의 그 우아한 솜씨로 노를 저었음에 틀림없다. 섬처럼 시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어느 한 지역이 홍수가 나면 그것은 하나의 군도가 된다.

어떤 사람들은 홍수나 화재를 낭만적으로 보는 것은 약간 현실성이 부족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불편한 일을 낭만적으로 보는 것은 다른 견해만큼 아주 실제적이다. 홍수와 같은 것에서 쾌락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할 수 있는 사람은 그러한 것을 불평하는 '보통 납세자'만큼 아주 논리적이고 또 훨씬 더 지각이 있다. 치통과 같은 진짜 고통은 거의 즐길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남자들로 하여금 욕설을 퍼붓게 하고 여자들로 하여금 울부짖게 하는 대부분의 불편한 일들은 정말로 감상적이거나 아니면 상상적인 불편들, 다시 말하면 전적으로 마음속에서만 생각하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우리들은 어른들이 기차 정거장에서 기다려야 한다고 불평하는 것을 듣는다. 그런데 독자는 어린 소년이 정거장에서 기차를 기다려야 한다고 불평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런 적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가 기차 정거장 안에 있는 것은 경이의 동굴과 시적인 쾌락의 궁전에 와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에게는 빨간 신호등과 파란 신호등은 마치 새로운 태양과 새로운 달과 같은 것이다. 나무로 된 신호기가 떨어지면 그것은 그에게는 마치 어느 위대한 왕이 자신의 막대기를 던져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 나는 어린애와 같다. 예를 들어 기차는 215분까지 사람들을 서서 기다리게 한다. 기다리는 동안에 사람들은 풍성하고 유익한 명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전성기의 대부분을 지금은 아마 물속에 잠겼을지도 모르는 클라팜 정션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나는 어떤 고정된 신비로운 생각에 사로잡혀 나도 모르게 물이 내 허리까지 올라오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내가 말한 바와 같이 이러한 불편도 감정적인 견해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을지 모른다. 독자들도 일상생활의 전형적인 불편한 점들이라고 현재 언급되는 있는 거의 모든 것들에 대해 나와 같이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모자를 주우려고 바삐 쫓아다니는 것은 불유쾌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마음을 혼란 되지 않고 경건하게 가지려는 것이 왜 불유쾌하단 말인가? 모자를 주우려고 쫓아다니는 그 사람이 게임이나 스포츠에는 훨씬 더 빨리 뛰어다닌다. 이 동일한 사람들은 그 좋은 비단 모자보다는 그 재미없는 작은 가죽공을 집으려고 더 열심히 뛰고 있다. 모자를 하나 주우려고 애쓰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확실히 코믹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매우 코믹한 동물이며 그가 하는 대부분의 일이 코믹한 것이다. 따라서 모자를 쓰기 위하여 수선을 떤다는 것은 부인을 얻으려고 쫓아다니는 남자만큼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은 이 모자 문제에 대해서 올바르게 느낀다면 가장 남자다운 정열과 가장 성스러운 기쁨을 갖고 모자를 추구할 수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유쾌한 사냥꾼이 야생동물을 추격하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상 나는 바람이 부는 날 모자를 찾는 것은 앞으로는 상류 사회의 스포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 아침 귀부인들과 신사들이 어떤 고지를 지나가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직업적인 몸종들이 이러저러한 숲에서 바람에 불려 날린 모자를 찾기 시작했다는 말을 귀부인들과 신사들은 들을 것이다. 모자를 찾는 일은 스포츠와 인도주의를 겸하는 일임을 주목하라. 모자를 사냥하는 사람들은 고통을 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모자 사냥을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쾌락을 가져다 준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모든 다른 집안의 걱정에도 적용될 수 있다. 우유에 파리 한 마리를 끄집어내려고 노력하거나 포도주잔에서 코르크를 한 개 끄집어내려고 노력하는 신사는 가끔 자신을 짜증스럽게 생각한다. 그에게 어두운 물웅덩이에 앉아 있는 낚시꾼들의 인내심을 잠시나마 생각하게 하라. 나의 어떤 친구는 서랍 하나가 말을 안 들어 늘 짜증을 내곤 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마치 어떤 강력한 적과 상대해서 싸우고 있다고 상상해보게. 아니면 알프스 계곡에서 동료를 로프로 끄집어내고 있다고 상상해보게."

나는 이런 말을 하고 곧 그를 떠나 버렸다. 틀림없이 나의 말은 그에게 최고의 열매를 맺게 해주었을 것이다. 틀림없이 그는 상기된 얼굴로 임전태세를 갖추고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서랍의 손잡이를 잡아당길 것이다.

나는 런던의 홍수가 시적으로 용납되거나 향유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전적으로 공상적이거나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런던의 홍수는 불편을 준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야기시키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모험이라는 것도 하나의 불편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불편이라는 것은 잘못 생각된 하나의 모험이다.

 

마술적 암시성에 대한 예술가의 열망 - 조셉 콘래드

예술의 상태에 도달하려는 작업은 모든 면에 있어서 자신의 정당성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예술 그 자체는 진리를 밝힘으로써 가시적인 우주를 가장 공평하게 처리하려는 성실한 시도라고 정의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술은 자신의 형태와 색채, 빛깔, 그림자, 문제의 양상, 생활의 사실에서 기본적이고 지속적인 것, 다시 말하면 이들의 존재의 기본적인 것을 찾으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래서 예술가는 사상가나 과학자처럼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에 호소한다. 사상가가 만약 세상의 양상에 인상을 받으면 그는 개념 속으로 뛰어들며 과학자가 우리들의 상식, 우리들의 지성, 우리들의 평화에 대한 갈망에 대해 권위 있게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들의 편견, 그리고 가끔 우리들의 두려움이나 이기주의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고 항상 우리들의 그 경신성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그들의 말은 경건하게 경청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관심사는 중요한 문제들, 예를 들어 우리들의 정신을 함양하고, 우리들의 몸을 적당히 돌보고, 우리들의 야망을 달성하고 우리들의 수단을 완성시키고, 우리들의 귀중한 목적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들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가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예술가는 그 동일한 장관에 부닥치면 그는 혼자서 그것을 생각하고 중압과 투쟁의 그 고독한 영역에서 자신이 무엇을 호소할 것인가를 발견한다. 그는 우리들이 덜 명백한 능력에 호소한다. 다시 말해서 더욱 더 저항적이고 어려운 특질 안에서 필연적으로 사라지게 되는 그러한 천성에 호소한다. 그의 호소는 그렇게 시끄럽지 않고 덜 분명하지만, 깊이가 있으며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 발생하는 효과는 영원히 지속된다. 연속되는 세대들의 변화하는 지혜로 인하여 개념은 파기되고 사실은 의심을 받고 이론들은 파괴된다. 그러나 예술가는 지혜에 의존하지 않는 우리들의 존재의 그 부분에 호소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습득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날 때부터 갖고 있는 그 부분에 대해 호소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더 영원히 지속된다. 그는 기쁨과 놀라움, 우리의 눈을 둘러싸고 있는 신비로움, 연민과 아름다움, 고통, 그리고 모든 창조물과 교우하는 그 잠재적인 감정에 호소한다. 그는 또한 수많은 마음의 고독을 하나로 묶어 주는 그 오묘하지만 물리칠 수 없는 결속의 확신에 대해 호소하고, 사람들을 서로 결합시켜 주고__죽은 사람을 산 사람과 산 사람을 죽은 사람과 연결시켜 준다. , 기쁨, 슬픔, 열망, 망상, 희망, 두려움 속에 있는 그 유대감에 호소한다. 소설은 만약 그것이 예술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기질에 호소한다. 그리고 사실상 소설은 미술이나 음악이나, 아니면 모든 예술처럼 하나의 기질을 모든 다른 기질에다 호소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모든 다른 기질의 오묘하고 저항력이 없는 힘은 발생하는 사건들에 참다운 의미를 부여하고, 장소와 시간의 도덕적이고 감정적인 분위기를 창조한다. 이러한 호소가 효과를 발휘하려면 그 호소는 감각을 통해서 전달되는 인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실상 이러한 호소는 만들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기질이라는 것은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건 집단적인 것이건 간에 설득을 당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예술은 일차적으로 감각에 호소한다. 그리고 문자로 자신을 표현할 때의 예술적인 목적은 감각을 통해서 호소하는 것이어야 한다. 예술은 조각의 조형성, 미술의 색채, 음악의 마술적인 암시성을 꾸준히 열망하고 있어야 한다. 조형성, 색채, 마술적인 암시에 대한 접근의 시도가 가능한 것은 형태와 소재의 완전한 혼합에 완전히, 그리고 변함없이 헌신할 때이다.

그 창조적인 일을 성취하고, 자기의 힘이 닿는 데까지 멀리 나가고, 실수나 지루함이나 질책에 방해를 받지 않고 앞으로 나가려는 성실한 노력은 산문작가를 정당화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이다. 만약 그의 양심이 깨끗하다면 즉각적인 이익을 찾고, 구체적으로 교화되고 위로를 받고, 즐겁게 되기를 요구하며, 즉시 향상되고 격려를 받고, 아니면 충격을 받거나 매혹을 당하기를 요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내가 성취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나의 과업은 쓰여진 단어의 힘에 의하여 여러분들을 듣고, 느끼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으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이며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약 내가 나의 과업에 성공한다면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요구하고 있는 격려와, 위로와 매력 등 그 모든 것과, 또 아마도 여러분들이 요청할 것을 잊어버린 그 진리의 일면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후회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생의 일시적인 국면을 포착하는 것은 소설가의 과업의 시작에 불과하다. 부드럽고 성실하게 접근하는 그 과업은 선택도 후회도 없이 포착된 그 단편을 성실한 분위기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보도록 붙잡고 있는 것이다. 그 과업은 포착된 단편의 진동, 색깔, 그리고 형태를 보여주고 그것의 운동과 형태와 색채를 통해서 진리의 본질을 보여주며 고무적인 비밀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위와 같이 표현된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소설가의 기술의 그 일시적인 공식들을 성실히 지킬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 공식들 중의 영속적인 부분인 진리는 소설가의 재산 중에서 가장 귀중한 것으로 소설가와 함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주의, 낭만주의, 자연주의, 그리고 감상주의 등, 이 모든 것들은 소설가와 잠시 동안 교우하다가 성전의 문턱, 다시 말하면 양심의 머뭇거리는 소리와 소설가 자신의 작품의 애로에 대한 솔직한 의식에 자리를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불안스러운 고독 속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의 지고의 울부짖음 속에서는 자신의 명백한 부도덕성이 상실된다.

가끔 우리들은 길가의 나무 그늘 속에서 편안히 다리를 쭉 뻗고 먼 들판에서 일꾼이 움직이는 것을 보며 잠시 후에는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을까에 대하여 나른한 마음으로 궁금히 생각하기 시작한다. 우리들은 그의 몸의 움직임과 그의 팔의 움직임을 본다. 우리들은 또한 그가 허리를 굽혔다가 일어나서 머뭇거리다가 다시 움직이는 것을 본다. 그의 노력의 목적을 알게 되면 한가한 시간에 매력을 가져다줄지도 모른다. 만약 그가 돌을 집어 들거나 도랑을 파거나, 나무 그루터기를 뽑아 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들은 더 참된 관심을 갖고 그의 노력을 지켜볼 것이다. 우리들은 조용한 분위기에서 움직이고 있는 그를 잘 봐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또한 그의 실수도 용서해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의 목적을 이해한다. 그리고 결국 그는 노력은 했으나 힘이 없었다. 아마 그는 지식이 없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그를 용서하고 우리의 갈 길을 간다. 그리고 잊어버린다.

그리고 이것은 예술을 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그리고 성공은 먼 곳에 있다. 이리하여 성공할 수 있는 힘이 있는지 없는지 의심을 하면서 우리들은 인생 자체와 같이 고무적이면서도 어렵고 안개처럼 흐려진 예술의 목적에 대해서 조금밖에 이야기하지 않는다.

f

고전이란 무엇인가? - 상뜨 뵈브

고전 작가란 일상적인 정의에 의하면 찬미에 의해 신성화된 오래된 작가이며 그의 특별한 문체로 타인들에게서 인정을 받는 권위자이다. 고전이란 말을 이러한 의미로 처음 사용한 사람들은 로마인이었다.

처음에 현대인을 위한 참된 유일한 고전은 고전 작가들의 작품이었다. 그리스인은 그들의 독특한 행운과 자연스러운 마음의 개발에 의하여 자기들 외에는 다른 고전 작가들을 갖고 있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인 작가들을 자신의 유일한 고전 작가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그리스인을 모방하려고 애를 썼다. 시세로와 버질이 나타난 이후 로마 문학의 위대한 기간이 지나간 후에 로마인들은 자기들 나름의 고전 작가를 갖게 되었으며 이 고전 작가들은 그 후 몇 세기 동안 고전 작가로서의 독점적인 지위를 갖게 되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그렇게 라틴어에 무식하지는 않았으나 균형과 취미가 결여되었을 중세기에 있어서는 순위와 질서를 혼동했었다. 중세에 있어서 오비드는 호머보다 더 중요시되었고 뵈티우스는 플라톤과 필적하는 고전 작가처럼 보였다. 15세기나 16세기에 있어서 학문의 부활은 이 장구한 혼돈을 바로잡는 데 도움을 주었고 고전 작가들을 제대로 찬미할 수 있게 만들었다. 따라서 그리스와 라틴의 진정한 고전 작가들이 햇빛을 보게 되었고 조화 있게 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근대문학은 마치 이태리인처럼 태어났고 단테가 나타나자마자 후손들은 그를 고전 작가로 맞이하였다. 근대 이태리는 자신의 고전 작가들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스페인인들은 불란서가 자신의 고전 작가를 찾고 있을 때 이미 자신의 고전 작가들을 갖고 있었다고 믿었다. 독창력과 예외적인 활력을 가진 몇몇의 재능 있는 작가들은 고립된 채 단절되었기 때문에 한 국민에게 견실하고 당당한 문학적인 부의 기초를 제공하지 못했다. 고전이라는 개념은 계속과 시종일관성을 의미하며 단일성과 전통과 유행을 창출하며 스스로를 전달시키면서 오래 가는 그런 것이다. 루이 14세의 그 영광스러운 시기가 지나간 후에야 비로소 불란서 국민들은 자기들이 그렇게도 훌륭한 행운을 가졌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느꼈다. 누구나 루이 14세에게 아첨과 과장으로 강조를 하면서 그 찬란한 시기를 알려주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진실의 감정이 있었다. 그러자 이상하고 두드러진 모순이 발생했다. 위대한 루이와의 시대의 경이에 가장 많이 매혹되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불치의 반대자들과 적대자들로 생각했었던 그 사람들을 신성화하고 고양하려고 했다. 근대 작가들을 위해서 고대 작가들을 희생시키기까지 했던 사람들(이 사람들 중의 중심인물은 페롤트였다)이 페롤트에게 반기를 들고 고전 작가들을 옹호했다.

실례가 가장 좋은 정의가 될 것이다. 불란서는 루이 14세 이래로 고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숙고해 왔다. 불란서에서는 18세기에 네 명의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서 고전에 대한 개념을 강화시켜 왔다. 볼테르의 "루이 14세의 시대", 몽테스큐의 "로마인들의 위대성과 몰락", 부퐁의 "자연의 신기원", 그리고 루소의 "사보야르드의 목사"를 읽어라. 그리고 18세기의 불란서인들이 이 기억할 만한 작품들을 통해서 전통을 발전과 독립의 자유와 조화시키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했는가를 이해하라. 그러나 금세기 초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새롭고 다소 모험적인 문학에 대한 최초의 시도 속에서 고전에 대한 개념은 이상하게 그 범위가 좁혀졌고 축소되었다. 최초의 아카데미 사전(1694)은 고전 작가의 정의를 '많이 인정받은 고전 작가로서 자기가 취급하는 주제에 있어서는 권위자'라고 쓰고 있다. 1853년의 아카데미 사정은 이 정의를 더욱 더 축소시켜 정확성과 한계를 갖고 있다. 이 사전은 고전적인 작가를 '어떠한 언어에 있어서 모델이 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고전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존경받는 학술회원들이 그 당시에 소위 낭만주의자들을 상대로 하여 내린 것이었다. 나는 지금이야말로 이러한 소심하고 제한적인 정의를 부인하고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 때라고 생각한다.

내가 정의 내리고 싶은 진정한 고전 작가란 인간의 마음을 동요하게 만들었고 인간의 보물을 증가시켜 주었고 인간의 마음을 발전시키게 했으며 애매모호한 진리가 아니라 어떤 도덕을 발견했고 마음속에 영원한 정열을 보여주었고, 위대하고 세련되고 건전하고 아름다운 형태로 자신의 사상과 관찰과 창안을 표현하고, 자기 자신의 독특한 문체, 다시 말하면 전세계의 문체가 될 수 있는 그런 문체로 모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그런 작가이다.

원한다면 나는 상술한 정의에다 작가 이름을 적용할 수도 있겠다. 우선 나는 몰리에르를 들겠다. 그는 불란서가 가진 가장 완전한 천재, 시적인 천재이다. 비평가들의 왕과 같은 존재인 괴테는 그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몰리에르는 너무나 위대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를 읽을 때마다 놀라곤 한다. 그의 각본은 비극에 가깝다. 아무도 그는 모방하려고 시도한 용기를 가진 사람들은 없었다. 악덕이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는 그의 작품 "수전노"는 가장 숭고한 작품 중의 하나이며 최고의 극작품이다. 드라마에 있어서의 모든 행동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위선자"는 모범적인 작품이다. 첫 장면은 대단히 설명이 잘 되어있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훨씬 더 중요한 것을 예고한다. 렛싱의 각본의 설명은 매우 훌륭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위선자"를 더 인정하고 있다. 이 작품은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좋은 작품 중의 하나이다. 나는 매년 몰리에르를 읽을 때마다 이태리의 위대한 대가를 모방한 조작품을 깊이 생각하게 된다."

불란서에서는 루이 14세 이전에 위대한 고전은 없었다. 그래서 단테나 셰익스피어 같은 사람들이 없었다. 마투렝 레기니어나 라베라이처럼 이상이나 깊은 감정, 혹은 심각성이 결여되어 있는 시인만이 있었을 뿐이다. 몽테뉴는 호러스를 본딴 조숙한 고전 작가였다. 그러나 그는 적당한 환경의 부족으로 인하여 문체와 익살에 있어서 무절제한 환상적 요소를 남기었다.

고전을 만드는 처방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은 명확히 인식되어야 한다. 어느 작가가 순수성, 정확성, 우아함, 그리고 문체와 영감의 특질을 모방함으로써 고전 작가가 된다고 믿는 것은 마치 아버지 라신느가 죽은 후에는 아들 라신느가 아버지 라신느의 자리를 차지한다고 믿는 것과 같은 것이다. 더구나 동시대인들이 보는 앞에서 너무 빨리, 그리고 아무런 반대 없이 고전 작가의 자리를 확보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런 경우에 고전 작가가 된 사람은 후세에 있어서 그 자리를 유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퐁텡은 생전에 그의 친구들에 의해서 순수한 고전 작가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조숙한 고전 작가들이 잠깐 동안만 그 자리를 유지하고 오래 가지 못했던 일이 얼마나 많은가! 세비그네 부인은 이러한 고전 작가들은 항상 변하는 색채를 띠고 있다고 재치 있게 말한 적이 있었다. 고전에 관한 한 가장 기대되지 않았던 작가가 가장 훌륭하고 가장 위대한 작가로 판명된다. 루이 14세 시대에 나타난 네 명의 위대한 시인들 중에서 가장 고전적이 아닌 시인은 몰리에르였다. 사람들은 그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그를 좋아했던 것이다. 몰리에르 이후에는 라 퐁텡이 가장 고전적인 아닌 것처럼 보였다. 200년이 지난 지금 결과를 보아라. 이 두 작가들은 버로우 이상으로, 심지어는 라신느 이상으로 모든 것을 내포하는 도덕의 특징들을 갖고 있는 작가라고 생각되고 있지 않는가?

 

행복한 사람 - 버트랜드 러셀

 

사랑

사람들이 흥미가 부족하게 되는 중요한 원인들 중의 하나는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와 반대로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끼게 되면 무슨 일에든지 흥미를 느끼게 된다.

사람은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감정을 갖게 된다. 그는 자기가 불쾌한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는 어렸을 때 다른 아이들보다 사랑을 덜 받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또는 사실상 그는 아무에게서도 사랑을 받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어렸을 때의 불행 때문에 생긴 자신감의 부족이 원인이 될 것이다.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여러 가지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는 아마 예외적인 친절을 베풂으로써 사랑을 얻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경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일에 있어서 아마 성공을 거둘 가능성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친절의 동기는 그 친절을 받는 사람들에 의해서 쉽사리 파악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비로운 행위에 의해서 사랑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인간의 배은망덕을 경험하고 환멸을 느끼게 된다.

그는 그가 얻으려는 사랑이 그 사랑의 대가로서 제시하는 물질적인 이득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는 생각은 결코 떠오르지 않는다. 솔직히 이러한 생각이 그의 행동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그는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주목하고 세상에 대해서 복수를 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제외한 세상에 대항하게 하는 데 충분한 성격의 힘을 요하는, 불행에 대한 하나의 과감한 행위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를 하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대부분의 남녀들은 그들이 비록 사랑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소심한 절망 속에 잠기게 될 뿐이며 이따금씩 질투와 악의로 그 절망을 경감시킬 뿐이다. 일반적으로 그러한 사람들의 생활은 지극히 이기적이 되며 사랑의 부재는 그들에게 불안감을 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생활을 완전히 지배하는 버릇을 가짐으로써 불안감을 본능적으로 피하려고 한다. 항상 똑같은 일상생활의 노예가 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차가운 외부 세계에 대한 공포에 자극을 받아 행위를 하게 된다.

여하튼 간에 안정감을 갖고 생활을 해나가는 사람들은 불안정감을 갖고 생활하는 사람보다 행복하다. , 이 안정감이 그들을 불행으로 이끌지 아니한다면 말이다. 다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안정감은 사람들로 하여금 위험을 피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좁다란 널판지 위를 건너갈 떼에는 두려운 마음을 갖지 않을 때보다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있을 때 더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똑같은 일이 인생의 행위에 적용된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갑작스런 재난을 당하는 경우에 많은 어려운 상황을 해를 입지 않고 무사히 지나갈 수 있으나 소심한 사람은 슬픔을 당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유용한 자신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어떤 사람은 산이나 바다에서 자신을 갖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공중에서 자신을 갖고 있다. 그러나 생활에 대한 일반적인 자신은 무엇보다도 자기가 필요한 올바른 애정을 받는 데서 오는 것이다.

내가 이 장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흥미의 근원으로서 생각되는 마음의 습관이다. 애정이라는 것은 대부분은 상호교환적이지만 위에서 말한 안정감을 주는 것은 받는 사랑이 아니라 주는 사랑이다. 엄격히 말해서 이러한 효과를 갖고 있는 것은 사랑뿐만 아니라 감탄도 해당된다. 배우, 설교사, 연사들과 같이 일반인들의 찬미를 얻는 것이 직업인 사람들은 갈채에 더욱 더 의존하게 된다. 그들이 일반인들로부터 정당한 인정을 받으면 그들의 생활은 흥미로 가득 차게 된다. 그렇지 못하면 불만을 갖게 되고 이기주의적인 마음을 갖게 된다.

부모에게서 사랑을 받는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자연의 법칙으로 받아들인다. 부모의 사랑이 어린애의 행복에 있어서는 중요한 것이지만 어린애는 그것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에게 발생하는 모험과 성인이 될 때에 일어날 더 놀라운 모험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러한 외적인 관심사의 배후에는 그가 재난이 발생했을 때에 부모들이 자기들을 보호해줄 것이라는 생각이 존재한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이는 소심하고 모험심이 없으며 공포와 자기 연민에 꽉 차 있고 즐거운 마음으로 세상일을 탐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아이는 놀라울 정도로 어린 나이에 삶과 죽음과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숙고하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그는 처음에는 내성적이며 우울한 성격의 소유자가 되지만 어떤 계통의 철학이나 신학의 비현실적인 위안을 찾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유쾌한 일들과 불유쾌한 일이 뒤범벅이 되어 있다. 그래서 이것들로부터 이해할 만한 체계나 패턴을 만들려는 욕망은 사실은 두려움의 결과, 다시 말하면 탁 트인 공간을 무서워하는 데에서 생긴 것이다. 소심한 학생은 그의 서재의 네 개의 벽 안에서 자유를 느낀다. 만약 그가 세상이 똑같이 잘 정돈되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는 거리로 나가서도 거의 똑같이 안심을 느낀다. 이러한 사람은 만약 더 많은 사랑을 받는다면 진짜의 세계에 대해서 덜 두려워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애정이 항상 모험심을 갖게 하는 것은 아니다. 주어진 사랑은 소심한 것이 되지 말고 강건한 것이 되어야 하며, 안전에 대해서는 결코 무관심한 것은 아니지만 안전보다는 탁월성을 갈망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발생할지도 모르는 재난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항상 경고하며, 모든 개들은 다 물며 모든 암소들은 황소와 같다고 생각하는 어머니와 유모들은 아이들이 그들의 바로 옆에 있지 않으면 결코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생각하게 할 것이다. 지나치게 소유욕이 강한 어머니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어린애를 기분 좋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기의 아이가 세상을 이겨내는 능력보다는 그 여자에게 의존하기를 더 갈망하고 있을지 모른다.

어린 시절에 형성된 마음의 습관은 일생 동안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 사랑을 하게 되는 많은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작은 안식처를 찾는다. 그런데 이 안식처에서 그들은 자신이 칭찬을 받지 못할 만한 사람이면서 칭찬을 받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가정은 진리로부터의 피난처이다. 그들은 그들이 전에 현명하지 않은 어머니로부터 얻은 것을 부인에게서 찾는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부인이 자기들을 나이만 먹은 어린애로 간주한다면 놀라워할 것이다.

가장 좋은 사랑이란 어떤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사랑에는 어떤 보호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을 우리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상처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불행을 염려하는 것은 실제로 일어난 불행에 대한 동정과는 반대로 사랑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포는 우리들에 대한 공포보다 더 큰 것이 아니다. 더구나 그러한 공포는 소유욕에 대한 하나의 위장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공포심을 불러일으켜서 다른 사람들을 완전히 소유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물론 이것은 왜 남자들이 소심한 여자들을 좋아하는가에 대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자들은 여자들을 보호함으로써 여자들을 소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튼튼하고 모험심이 강한 사람은 해를 입지 않고 많이 버틸 수 있으나 소심한 사람에게서는 거의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

타인으로부터 받은 사랑은 두 가지 기능을 하고 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안정과 관련해서 이것을 언급해 왔다. 그러나 성인의 생활에 있어서 이것은 더욱 더 긴요한 생물학적인 목적을, 다시 말하면 어버이가 되는 것이다. 성에 대한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없는 것은 여하한 남녀에 있어서 중대한 불행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기쁨을 그들로부터 빼앗기 때문이다. 이러한 박탈은 조만간 사람들로부터 흥미를 파괴해 버리고 내성적인 성격을 만들어낼 것임이 거의 확실하다.

어렸을 때 있었던 불행은 말년에 사랑을 얻지 못하게 하는 성격의 결함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여자들보다는 남자들에게 아마 더 해당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자들은 남자를 사랑할 때에는 성격을 더 중요시하는 반면에 남자들은 여자들의 외양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 남자들이 여자들에게서 발견하는 유쾌한 특질보다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사랑의 대상이 되는 사람에 관해 말해 왔으나 이제는 주는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여기에는 또한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그런데 이 중의 하나는 아마 인생의 흥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공포에 대한 표현이다. 전자는 완전히 칭찬할 만한 것으로 보이지만 후자는 기껏해야 위로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날씨 좋은 날 아름다운 해안을 따라 배를 타고 항해한다면 해안을 찬미하고 해안에서 쾌락을 느끼게 된다. 이 쾌락은 전적으로 바깥쪽을 내다보는 데서 오는 것이며 우리들 자신의 절실한 필요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반면에 배가 만약 난파되어 해변가로 헤엄을 쳐서 오게 되면 해변에서 새로운 사랑을 얻게 된다. 해변은 파도로부터의 안전지대이며 해변의 아름다움이나 추함은 중요치 않은 문제가 된다. 더 좋은 애정은 안전한 배를 타고 있는 사람의 심정과 비슷하며 덜 좋은 애정은 난파된 배로부터 헤엄쳐 가는 사람의 심정과 같다. 전자의 사랑은 사람이 안전을 느끼거나 자기에게 부닥친 위험에 무관심한 태도를 갖고 있는 한 가능할 뿐이다. 이와는 반대로 후자는 불안감에 의해서 야기된다. 불안정에 의해서 야기되는 느낌은 그렇지 않은 느낌보다 훨씬 더 주관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종류의 사랑은 인생에 있어서 본질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상 모든 참된 사랑은 두 가지를 다 갖고 있으며 사랑이 불안정감을 정말로 치유하는 한 위험과 두려움이 있을 때 흐려지게 되는 그러한 관심사를 다시 자유롭게 느끼게 한다.

가장 좋은 사랑은 서로서로 생명을 주고 받는 그런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각자는 기쁘게 사랑을 주고 쾌히 사랑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각자는 이러한 상호교환적인 사랑의 결과로서 세상은 더욱 더 흥미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종류의 사랑이 있는데 그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명력을 빨아들이고 다른 사람이 주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 대가로 아무것도 주지 않는 그런 사랑이다. 어떤 활기에 찬 사람들은 이 흡혈귀 같은 사람들에 속한다. 그들은 이 사람 저 사람으로부터 활력을 빨아낸다. 그들은 번성하고 흥미를 가지게 되지만 이들에게 활력을 주고 있는 사람들은 창백해지고 희미해지고 둔해진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자기들의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그들을 결코 목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자기가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결코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오직 자신의 활동에 대한 자극만을 생각한다. 분명히 이것은 그들의 성격의 어떤 결함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단하거나 치료하기에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빈번히 커다란 야심과 관련되어 있으며 무엇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에 대한 부당한 일방적인 견해에 뿌리를 박고 있다.

두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서로간의 선에 대한 수단뿐만 아니라 공동선을 갖는 하나의 결합체로서의 사랑은 진정한 행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자신의 자아가 강철벽 속에 둘러싸여 그 자아를 확대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은 자기 직업에 있어서 아무리 성공한다 하더라도 인생이 주는 최고의 것을 얻지 못하게 된다. 사랑은 제거하는 야심은 일반적으로 인류에 대한 어떤 분노와 증오의 결과인데 이것은 젊었을 때의 불행이나 인생 후기에 있어서의 불공평에 대해서나 아니면 피해망상증을 가져오는 원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너무나 강력한 자아는 세상을 충분히 즐기기 위해서는 피해 버려야 하는 하나의 감옥이다. 참다운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은 감옥 자체에서 탈출해 나온 그 사람의 표식 중의 하나이다.

사랑은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받은 사랑은 다시 내보내야 한다. 이 두 개가 똑같이 존재하는 곳에서 사랑은 최고의 가능성을 성취하는 것이다. 상호교환적인 사랑을 꽃피우게 하는 데에 대한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장애물들은 중대한 악이며 세상은 이것 때문에 고생을 했고 아직도 고생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남을 잘 찬미하지 않는 것은 혹시 그 찬미를 제대로 못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잘 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에 의해서, 아니면 탈 잡기를 좋아하는 세상에 의해서 고생을 당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다.

도덕과 세상의 지혜라는 이름으로 주의가 요구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사랑에 관한 한 관용과 모험심은 풀이 죽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에 대해 소심과 분노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을 일생동안 얻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점에 있어서 부도덕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우수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적인 관계에 있어서 참된 사랑이라는 것은 거의 없다. 남녀는 각각 자기 자신은 상대방에게 주어 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각자는 근본적인 고독을 지키고 있으며 손을 대지 않은 채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경험 속에서는 근본적인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가족

과거로부터 우리들에게 전해진 모든 제도 중에서 가족만큼 그렇게 분열되어 있고 본 궤도에서 이탈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식들에 대한 부모들의 사랑과 부모들에 대한 자식들의 사랑은 행복의 가장 큰 근원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으나 사실상 현재로서 자식과 부모와의 관계는 십중팔구 양 당사자들(부모와 자식들)에게 불행의 근원이 되며, 적어도 백이면 아흔아홉은 두 당사자들 중의 하나에 불행의 근원이 된다.

원칙적으로 가족이 줄 수 있으나 주지 못하고 있는 근본적인 만족은 우리의 시대에 널리 존재하고 있는 불만의 가장 뿌리 깊은 원인 중의 하나이다. 자식들과 행복한 관계를 갖고 싶어 하거나 자식들에게 행복한 생활을 마련해 주고 싶어하는 어른들은 부모가 되는 것에 대해 깊이 숙고해야 한다. 그리고 숙고한 다음에는 현명하게 행동해야 한다. 가족의 문제는 너무나 방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특수한 문제, 다시 말하면 행복의 정복에 관련된 것을 제외하고는 이 책에서 다룰 수 없다. 그리고 그 문제와 관련시킨다 해도 우리들은 사회구조의 변화 없이 각 개인의 힘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가족관계의 향상 문제를 다룰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중대한 제안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에 있어서 가족의 불행의 원인은 심리적, 사회적, 교육적, 그리고 정치적인 것으로 아주 다양한 원인들로 되어있다. 부유층에 관한한 두 가지 이유가 다 결합되어 여자들이 부모가 되는 것을 전보다도 더 부담스럽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원인은 독신 여자들에게 직업의 길을 열어 주는 것이고, 집안일에 대한 중압감으로부터의 탈피이다.

옛날에 여자들은 노처녀라는 그 참을 수 없는 상태로 인하여 마음에 내키지 않은 결혼을 했다. 노처녀들은 집에서 처음에는 아버지에게, 그다음에는 마음 내켜 하지 않는 오빠에 의존해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녀는 하루를 채울 직업이 없었고 집 밖에서 시간은 재미있게 보낼 수 있는 자유가 없었다. 그녀는 성적인 모험을 할 수 있는 기회나 성향이 없었다. 또 그녀는 이 성적인 결혼 외의 이성적인 모험은 저주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모든 안전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계획적인 유혹자의 간계에 의해서 처녀성을 상실했다면 그녀의 처지는 정말로 동정을 받을 만한 것이다. 이것은 '웨이크 필드의 목사'에 다음과 같이 아주 정확히 그려져 있다.

그녀의 죄를 은폐하고

그녀의 수치를 만인의 눈으로부터 감추고

그녀의 연인을 참회하게 하고

그의 마음을 괴롭히는 길은

죽는 것뿐이다

현대의 노처녀는 이런 상황에서는 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만약 교육을 잘 받았으면 그녀는 편안한 생활을 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며 부모의 승낙을 받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부모들을 딸들에 대해서 경제적인 힘을 상실했기 때문에 딸들에게는 도덕적인 불찬성을 표시하는 데 조심성을 기울인다. 꾸지람을 받지 않으려는 사람을 꾸지람했댔자 소용없는 일이다. 젊은 미혼 여성은 지성과 매력이 평균 이하가 아니고 자식을 갖고 싶어 하는 욕망이 없다면 요사이에는 완전히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식을 갖고 싶은 욕망이 압도적인 것이 된다면 부득이 결혼하지 않을 수 없고 직업을 잃게 되는 것이 확실하다. 그녀는 전에 누리던 즐거움보다 훨씬 더 낮은 수준의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왜냐하면 남편의 수입은 자기가 전에 벌던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으며 게다가 가족까지 돌봐야 하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독립된 생활을 하다가 필요한 비용의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여자들은 어머니가 되는 것을 주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는 여자는 이전 세대의 여자들에 비해서 새롭고 놀라운 문제, 다시 말하면 형편없을 정도로 집안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현대의 여자들은 집안 일에 얽매여 자신의 능력과 교육에 아주 걸맞지 않은 많은 자질구레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자기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집안일을 등한시하는 하녀들을 꾸짖음으로써 자신의 성격을 망쳐 버린다. 실제로 아이들을 맡기는 문제에 관해서도 자기가 애를 써서 이 문제에 대해서 잘 알게 되면 자기가 어떤 기관에서 광범위한 훈련을 받은 보모를 채용할 능력이 없는 한 청결이나 위생에 관해서는 보모에게 맡기거나, 아니면 기본적인 예방책에 관하여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는 것은 불가능하며 또 맡긴다면 중대한 불행이 있을지도 모르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많은 시시한 일들에 눌려서도 자신의 모든 매력과 자기 지성의 4분의 3만 잃지 않는다면 그녀는 운이 좋은 여자이다.

저녁이 되어 남편이 직장에서 돌아왔을 때 낮동안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여자는 지루한 여자이며 이야기를 하지 않는 여자는 무관심한 여자이다. 여자가 아이를 갖기 위해서 치른 희생을 그녀는 항상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기대 이상으로 더 많은 보상을 거의 틀림없이 요구하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그녀는 자질구레한 일들에 끊임없이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에 말참견이 많아지고 편협한 마음의 소유자가 된다. 이것이 기혼녀가 당해야 할 모든 부당한 일들 중에서 가장 해로운 일이다. 다시 말해서 가정주부는 자신의 집안일 의무를 다함으로써 집안일들을 등한시하여, 유쾌하고 매력 있는 태도를 보여주었더라면 집안 식구들은 아마 그녀를 사랑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본질적으로 경제적인 것이지만 이것과 거의 똑같이 중대한 다른 문제도 있다. 대도시의 인구 집중으로 생긴 주택난 말이다. 중세기에 있어서 도시들은 오늘날의 시골과 같았다. 아이들은 다음과 같이 자장가를 불렀다.

바오로 사원의 첨탑엔 나무가 하나 있네

그 나무엔 사과도 많이 열렸네

런던시의 어린 소년들은

막대기로 그것을 따려고 뛰어가네

그들은 이 울타리 저 울타리로 뛰어서 런던교(다리)로 돌아오네

폴의 첨탑을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성 바오로 사원과 런던교 사이에 있는 이 울타리들이 언제 사라졌는지 모른다. 런던의 어린 소년들이 이 자장가가 시사하는 기쁨을 향유한 지도 몇 세기가 흘렀으나 인구의 많은 수가 시골에 살았던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도시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도시 밖으로 나오는 것은 쉬운 일이며 그들의 집에 정원이 딸려 있는 것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현재 영국에서는 농촌 인구보다 도시 인구가 굉장히 많다. 미국에서는 도시는 농촌보다 약간 인구가 더 많을 뿐이지만 도시의 인구는 신속하게 증가하고 있다. 런던과 뉴욕 같은 도시들은 너무나 크기 때문에 도시 밖으로 빠져나오는 데에는 오래 걸린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한 줌의 흙도 없고 적당한 수입을 가진 사람들이 최소한의 공간에 기거해야 하는 아파트에 대개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어린아이들이 있다면 아파트의 생활은 어려워진다. 아파트에서는 아이들이 놀 공간이 없고 부모들은 아이들의 그 시끄러운 소리들을 피해 갈 곳이 없다. 따라서 지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교외에 사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아이들의 관점에서 볼 때에도 틀림없이 바람직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경제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여기서 관계하는 문제, 다시 말하면 사람이 현재 행복을 찾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현재 자식과 부모와의 관계에 있어서 심리적인 어려움을 취급할 때 이 문제에 더욱 더 가까워지게 된다. 이것은 민주주의에 의해서 제기된 문제들의 일부이다. 옛날에는 주인과 노예가 있었다. 주인들은 일에 있어서 결정을 내렸고 그들은 대체로 노예들이 좋아했다. 왜냐하면 노예들은 주인들의 행복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노예들은 아마 주인들을 싫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민주주의의 이론에 의해서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거의 보편적으로 발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노예가 주인을 증오한다 해도 주인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주인은 여하튼간에 행복을 느낄 것이다. 민주주의 이론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자 이 모든 것은 변했다. 다시 말해서 전에는 말없이 복종하던 노예들은 더 이상 복종을 안 하게 되었다. 전에는 자신들의 권리에 대해서 의심을 품지 않았던 주인들은 주저하고 불안감을 갖게 되었다. 양쪽에서는 마찰이 생겼고 불행이 야기되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의 변화는 민주주의의 일반적인 전파의 특별한 예이다. 부모들은 자식들에 대한 자신의 권리에 대하여 더 이상 자신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식들은 부모들을 공경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지 않다. 전에는 아무런 의심없이 요구되었던 복종의 미덕은 유행이 되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도 일리가 있는 이야기이다.

정신분석은 얼떨결에 아이들에게 입힐지도 모르는 피해로 교육받은 부모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만약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입을 맞추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생길지도 모르며 만약 입을 안 맞추면 질투와 분노가 생길지도 모른다. 만약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어떤 일들을 하라고 명령한다면 그들은 죄의식을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어른들이 바람직스럽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런 습관을 갖게 된다. 부모들이 자기네 애기가 엄지손가락을 빠는 것을 보면 그들은 온갖 추측을 다 하게 되지만 그들은 이 애기의 행위를 어떻게 금지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하고 있다. 과거에는 의기양양하게 힘의 행사를 했던 부모들의 입장은 소심하고 걱정을 하는 그런 입장이 되었고 양심적인 의문에 가득 차게 되었다.

그 옛날의 단순한 기쁨은 사라졌다. 그리고 독신녀의 새로운 자유 때문에 어머니가 되고자 결심한 여자들은 전보다도 더 많은 것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어머니들은 자식들에게 너무나 조금밖에 요구하고 있지 않으며 비양심적인 어머니들은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 양심적인 어머니들은 자신 본래의 사랑을 억제하고 조심하게 된다. 비양심적인 어머니들은 자기들이 얻지 못한 기쁨을 아이들한테서 보상받으려고 한다. 전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자식의 사랑은 굶주려 있게 되고 후자에 있어서는 지나친 자극을 받게 된다. 어느 경우에나 가족은 그 간단하고 자연스런 행복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든 문제에 비추어 볼 때 출산율이 감소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이는가? 인구에 있어서 출산율의 감소 인구가 곧 감소되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시점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부유한 계층에 있어서 이 시점을 오래전에 지나갔다. 부유 계층에 있어서의 출산율에 대한 통계는 많지 않다. 그러나 진 앨린의 책에서 인용된 두 개의 사실은 상술한 것을 언급하고 있다. 스톡홀롬에서 1919년부터 1922까지 직업여성들의 임신율은 인구 전체의 3분의 1밖에 안 되었으며 미국의 웰레슬리 대학의 4,000명 졸업생 가운데에서 1896년부터 1913년 사이에 여자 졸업생들이 낳은 아이들의 총수는 약 3,000명이었다. 그런데 자손들이 실제로 줄어드는 것을 막으려면 어렸을 때 죽지 않고 8,000명을 낳아야 한다. 백인종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문명은 그들이 이 문명을 받아들이는 비율에 따라서 출산율도 적어진다는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가장 문명화된 인종이 가장 출산율이 낮다. 가장 개화되지 않은 인종이 출산율이 높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는 연속적인 등급이 매겨져 있다.

부모의 행복의 기쁨의 근원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자기 자신이 죽은 다음에도 자기의 몸이 연장되게 하여 자신의 몸을 구제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힘과 애정이 친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새로 난 아기는 무력하기 때문에 부모는 아기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싶은 충동이 있다. 그런데 이 충동은 아이에 대한 부모의 사랑뿐만 아니라 힘을 위한 부모의 욕구를 만족시켜 준다. 무력함을 느끼는 한 어린애에게 주어지는 사랑은 비이기적이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부모가 아이들을 좌지우지하려는 소망과 아이들을 위하려는 소망 사이에는 갈등이 생긴다. 왜냐하면 아이들을 지배하려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아이가 될 수 있는 대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독립심을 배우는 것은 바람직스럽다. 그러나 이것은 부모의 지배욕의 측면에서 볼 때에는 불쾌한 일이다. 어떤 부모들은 이러한 갈등을 결코 의식하지 못하며 아이들이 반항할 때까지 자식들에게 난폭하게 군다. 이러한 갈등에 있어서 부모의 행복은 상실된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로 다 돌봐 주었는데도 결과적으로 아이가 부모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을 보고 마음이 괴로워진다. 부모들은 자식이 군인이 되길 바랐으나 평화주의자가 된다든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들이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자식들이 나이를 먹은 후에 나오는 것만은 아니다. 혼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어린아이에게 밥을 먹여주면 어린아이는 수고를 덜어 주는 친절을 베푸는 것처럼 보일지는 모르나 부모는 아이의 복지를 위하기보다는 어린아이 앞에서 군림하는 것과 같다. 만약 부모가 어린애에게 위험을 너무나 생생하게 보여준다면 그것은 아이들을 부모들에게 너무 의존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만약 아이에게서 반응을 기대하는 그런 애정을 실제로 보여준다면 그것은 아이의 감정에 의하여 아이를 부모 편에 붙들어 두려는 것과 같다.

크고 작은 부모들의 소유하려는 욕망은 부모들이 매우 조심성이 있거나 마음이 깨끗하지 않는 한 아이들을 잘못 인도하게 된다. 이러한 위험을 알고 있는 현대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다루는 데 자신을 잃고 우연히 실수를 할 때보다도 아이들에게 더 쓸모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성인들의 확신과 자신의 부족만큼 아이들의 마음속에 걱정을 만드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조심성을 가지는 것보다는 마음이 순수한 것이 더 낫다.

아이들이 잘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부모들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가를 말하기 위해서는 정신분석에 관한 교과서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에 의해 올바른 인도를 받는다. 이런 경우에 자식과 부모와의 관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화를 가져오며 아이들에게 반항심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부모에게는 좌절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처음부터 부모가 아이들의 인격을 존중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아이들에게만 바람직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결혼과 우정에 있어서도 매우 필요하다.

이제 이 책에 관계하는 문제에 대해서 말해 보자. 현대 세계에 있어서 부모의 완전한 기쁨은 내가 언급했듯이 아이에 대한 존경을 깊이 느끼는 사람들만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부모들은 자식들을 지배하려고 짜증이 날 전도로 억제할 필요도 없고, 자식들이 자유를 얻을 때 억압적인 부모들이 경험하는 쓰디쓴 환멸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태도를 가진 부모들은 억압적인 부모들보다 더 많은 기쁨을 얻는다.

 

일하는 것

일하는 것이 행복의 원인이 될 수 있는가 아니면 불행의 원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아마 의심스러운 문제로 간주될 수 있다. 지극히 짜증나는 일이 확실히 많이 있으며 일이 지나치게 많으면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일이 지나치게 많지 않으면 아무리 재미가 없는 일이라도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빈둥빈둥 지내는 것보다는 덜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에는 일의 성격과 일하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지루함을 그저 없애는 일로부터 시작하여 가장 심원한 기쁨에 이르는 일 등 종류가 여러 가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은 그 자체는 흥미가 없으나 그러한 일도 어떤 큰 장점을 갖고 있다. 우선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할 필요가 없이 하루의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 기호대로 하고 싶은 시간이 있다면 할 만한 가치 있는 유쾌한 일을 어떻게 생각해 낼까 쩔쩔맨다. 그들은 무엇을 결정하든 간에 다른 일이 더 유쾌할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마음이 괴로워진다. 남아도는 시간을 현명하게 보낸다는 것은 문명의 마지막 산불이며 현재로서는 이 수준에 도달한 사람은 극소수이다. 더구나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일은 그 자체가 싫증을 느끼게 한다. 단 예외가 있다면 비상한 진취성이 있는 사람에게는 무엇을 하라는 명령이 지나치게 불유쾌하지 않다면 일을 하라는 말을 듣는 것은 확실히 유쾌하다. 대부분의 부유한 사람들은 고된 일에서 벗어난 대가로 말할 수 없는 지루함에 시달린다. 그들은 때때로 아프리카로 사냥을 가거나 비행기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함으로써 위안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나 이러한 감동적인 일은 제한되어 있으며 젊은 시절이 지나간 후에는 특히 그렇다. 따라서 영리한 부자는 마치 자기가 가난한 사람인 양 열심히 일한다.

그런고로 일을 한다는 것은 우선 지루함을 방지하는 것으로서 바람직스럽다. 왜냐하면 흥미 없는 일이지만 그런 일이라도 하면서 느끼는 지루함은 일을 하지 않을 때에 느끼는 그런 지루함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일은 또 하나의 장점이 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휴일을 더 달콤한 것으로 만든다. 정력을 다 쏟아 부을 정도로 열심히 일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게으른 사람보다는 한가한 시간에 더 많은 흥미를 발견할 것이다.

보수를 받는 일이든 보수를 받지 않는 일이든 일의 또 다른 장점은 성공과 야심의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일에 있어서 성공은 수입으로 측정된다. 수입을 늘리고 싶은 욕망은 성공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높은 수입이 가져다주는 안락한 생활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일이란 아무리 지루하더라도 만약 그것이 명성을 쌓는 수단이 된다면 참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목적의 지속성은 행복의 가장 긴요한 요인들 중의 하나이며 대부분의 사람의 경우에 이것은 자신의 일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집안일에 종사하면서 살아나가는 여자들은 남자들, 그리고 밖에서 일하는 여자들보다 행복하지 못하다. 집안일을 하면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보수를 받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향상시킬 수 있는 수단도 없고 남편과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남편이 부인을 알아주는 것은 집안일을 해서가 아니라 부인의 다른 특질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아름다운 집들과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어 이웃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될 정도로 부유한 여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여자들은 비교적 적으며 대부분의 가정주부들은 다른 종류의 일이 남자와 직업여성들에게 가져다주는 그런 만족을 얻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일에 있어서 그것이 아무리 변변치 못한 일이라도 시간을 때우면서 어떤 출구를 찾는 만족을 가져다주며 지루한 일이라도 하고 사는 사람은 전혀 할 일이 없는 사람보다 평균적으로 볼 때 행복하다. 그러나 일이 흥미가 있을 때에는 그것은 지루함에서 벗어나는 안도감보다는 훨씬 높은 차원의 만족을 줄 수 있다. 흥미가 있는 일은 약간 흥미가 있는 일에서 시작하여 위대한 인간의 전체 정력을 흡수할 가치가 있는 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일을 흥미 있게 만드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첫째는 기술을 행사하는 것이고 둘째는 건설이다.

어떤 예외적인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 기술의 행사가 당연한 것이 되거나, 아니면 더 이상 기술을 향상시킬 수 없을 때까지 기술을 사용한다. 이러한 현상은 유아기에 시작한다. 예를 들어 머리를 땅에 대고 설 수 있는 아이는 발을 땅에 딛고 서기를 싫어한다. 많은 일은 기술을 씀으로써 기쁨을 가져다준다. 또 변호사의 일 같은 것은 카드놀이를 하는 데서 얻는 그런 즐거움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기술을 행사해야 할 뿐만 아니라 기술을 가진 적대자를 기지로 이겨내야 한다. 비행기를 타고 묘기를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일이 너무나 좋기 때문에 그는 그 일에 기꺼이 목숨을 걸려고 한다. 나는 유능한 외과의사가 자기가 하는 일이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자신의 절묘한 수술에서 만족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이보다는 그 강도가 크지는 않지만 더 비천한 일에서 똑같은 만족을 얻을 수 있다. 기술을 요하는 모든 일은 그 기술이 다양하거나, 아니면 무한하게 향상될 수 있다면 유쾌한 것이 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조건이 빠진다면 최대의 기술을 습득했다 해도 그 일은 더 이상 흥미를 주지 못한다. 3마일 경주를 뛸 수 있는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 그 기록을 깨뜨릴 수 없을 때에는 그 경주에 흥미를 잃게 된다. 다행히도 중년기에 이를 때까지 새로운 상황이 새로운 기술을 요하고 계속 향상을 기할 수 있는 일이 상당히 많이 있다.

행복의 근원으로서 기술이 행사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또 하나의 요소가 있다. 이것은 건설적인 요소이다. 대부분의 일에 있어서는 아니지만 어떤 일에 있어서는 그 일이 완성될 때에는 그 일은 하나의 기념비처럼 남게 된다. 우리들은 다음의 기준에 의하여 건설과 파괴를 구별할 수 있겠다. 건설에 있어서는 일의 최초의 상태는 비교적 짜임새가 없지만 마지막 단계에 가서는 목적의 구체화가 이루어진다. 파괴에 있어서는 이와는 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일의 최초의 상태는 목적을 구체화하지만 마지막 단계는 아무런 체계가 없이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서 파괴자가 의도하는 것은 어느 것을 막론하고 어떤 목적을 구체화하지 않는 일의 상태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기준은 건물을 건설하고 파괴하는데 적용된다.

건물을 세우는 데 있어서는 사전에 세운 계획이 실천에 옮겨진다. 그러나 파괴에 있어서는 파괴가 이루어진 다름에 그 자재들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아무도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물론 파괴는 다음 건설을 위한 준비 단계로서 매우 필요하다. 이러한 경우에 그것은 건설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후에 올지도 모르는 건설에 개의하지 않고 파괴적인 목적을 가진 행동에 참여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러나 그는 새로 건설하기 위해서 파괴해 버린다고 생각하면서 상술한 사상을 은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에게 다음에는 어떤 것을 건설하겠냐고 물으면 금방 그의 가면을 밝혀 낼 수 있다. 이에 대해서 그는 모호하고 열의가 없이 대답할 것이다.

큰 건설 공사의 성공에서 얻는 만족은 그것이 비록 예외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만이 느끼는 것이긴 하지만 인생이 제공할 수 있는 가장 큰 만족의 하나이다. 그의 일이 결과적으로 나쁘게 되지 않았다는 것이 판명된다면 중요한 일을 성취했을 때의 그 행복을 남에게서 뺏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만족에는 많은 형태가 있다. 관개 사업에 의하여 황무지에 꽃을 피우게 한 사람은 가장 구체적인 형태로 자신의 일을 즐길 수 있다. 또한 가장 명백한 예들은 예술가와 과학자들이다.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숨을 쉴 수 있는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한 이것은 오래 지속된다." 이러한 생각이 셰익스피어의 불행을 위로해 주었다는 데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는 14행 시에서 그의 친구에 대한 생각이 자신에게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가 그의 친구에게 쓴 그 14행 시는 친구 자신보다는 이 목적을 위해 더욱 더 효과적이다. 위대한 예술가나 과학자들은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을 한다. 그들은 그 일을 할 때에는 받을 만한 가치 있는 존경을 받는데 이 존경은 그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힘을, 다시 말하면 인간의 사고와 감정을 지배하는 힘을 주고 있다. 그들은 또한 자기 자신을 좋게 생각할 만한 다른 이유를 갖고 있다. 이러한 운이 좋은 상황의 결합은 어떠한 사람도 행복하게 해주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미켈란젤로는 대단히 불행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가난한 친척들의 빚을 갚아야 하지 않았었던들 그렇게 고심해서 예술 작품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위대한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는 힘은 기질적인 불행과 관계되어 있으며 그 불행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예술가는 그의 일에서 얻는 기쁨이 없다면 아마 미쳐 버릴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들은 가장 위대한 일도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할 수 없다. 우리들은 그것이 인간을 덜 불행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예술가들보다 기질적으로 덜 불행하다. 그리고 과학에 있어서 큰 일을 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들인데 이들의 행복은 일차적으로 일에서 온다.

오늘날 지성인들에 있어서 불행의 이유 중의 하나는 문학적인 재능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재능을 독립적으로 행사할 기회가 없이 부유한 회사에 고용되는데, 이 회사들은 상술한 문학적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해롭고 무의미한 것을 만들어 낼 것을 주장하는 데 있다.

인간은 자신의 생활을 전체적으로 보는 데 있어서 그 견해가 매우 다양하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에 긴요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생이란 지침이나 통일성이 없는 일련의 분리된 사건으로 보인다. 나는 전자가 후자보다 더 행복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만족과 자존심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상황들을 점진적으로 쌓아 올릴 수 있으나 후자는 어떤 피난처에도 도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바람부는 대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하나의 전체로 보는 습관은 지혜와 도덕의 중요한 부분이며 이것은 교육에 의하여 권장해야 할 것 중의 하나이다. 시종일관된 목적만 가지고는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데 충분하지 않으나 그것은 행복한 생활의 거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그리고 시종일관된 목적은 주로 일하는 데에서 자신을 구체화시킨다.

 

행복은 성취하는 것이다.

중용이라는 것은 흥미가 없는 이론이다. 그리고 나는 어렸을 때 중용이라는 것을 경멸과 체념을 갖고 거부한 일이 생각난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나는 영웅적인 것을 찬미했었기 때문이다. 진리라는 것 또한 항상 흥미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용이 이에 대한 적절한 예가 될 수 있다. 즉 중용이라는 것은 흥미가 없는 이론일지는 모르나 매우 큰 많은 문제에 있어서 그것은 진실한 것이다.

중용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는 하나의 경우는 노력과 체념 사이의 균형에 관해서이다. 이 두 가지 이론은 극단적인 옹호자들을 갖고 있다. 체념의 이론은 성자와 신비주의자에 의해서 설파되었고 노력의 이론은 능률 전문가와 힘센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설파되었다. 이 두 학파는 다 진리의 일부분만 갖고 있지 전체는 갖고 있지 않다. 나는 이 장에서는 이 두 가지 이론 사이에 균형을 취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노력을 지지하는 경우부터 시작하겠다.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 행복이라는 것은 운이 좋은 상황이 단순히 작용하여 익은 열매와 같이 입에 떨어지는 어떤 것은 아니다. 피할 수 있는 불행, 피할 수 없는 불행, 병과 심리적인 갈등, 분쟁과 악의로 가득 찬 세상에 있어서는 행복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각 개인이 당하고 있는 불행의 많은 원인들과 싸우는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드물기는 하지만 행복을 얻는 데 그렇게 큰 노력이 들지 않는 경우도 있다. 충분한 재산을 상속받고 건강도 좇은 데다가 간단한 취미를 가진 무사태평한 호인은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으며 사람들이 왜 그렇게 소란을 떨고 있는가에 대하여 궁금히 여길지도 모른다. 어느 잘생기고 게으른 여자가 만약 부유한 남자와 우연히 결혼을 하게 되어 남편에게서 큰 노력을 요구받지 않고, 결혼 후에도 뚱뚱해지는 것은 걱정 안해도 된다면 그녀는 자식들만 걱정을 끼치지 않는다면 상술할 남자와 똑같이 한가한 생활을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예외적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며 많은 사람들은 천성이 그렇게 호인이 못 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조용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참을 수 없이 지루한 것으로 만드는 불안한 정열을 갖고 있다. 건강은 아무도 보존한다고 장담 못 하는 축복이다. 이러한 모든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행복은 신의 선물이라기보다는 성취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성취에 있어서 내적인 노력과 외적인 노력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내적인 노력에는 필요한 체념의 노력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현재로서는 외적인 노력만 고려해 보자.

남녀를 불문하고 생계를 위해서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 노력의 필요성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강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인도 탁발승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신도들의 적선으로 생활을 해나갈 수 있으나 서구사회에서는 이런 생활방식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더구나 덥고 건조한 나라에 있어서보다 서구사회에서의 기후는 위와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을 덜 유쾌한 것으로 만든다. 다시 말해서 겨울에는 따스한 방에서 일하기보다는 밖에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낼 정도로 게으른 사람은 없다. 따라서 서구 사회에서는 체념만 가지고는 행복에 가는 길을 찾을 수 없다.

서구 국가들의 많은 사람들은 성공하는 데에서 만족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단지 생계를 이어가는 것만으로는 행복을 얻지 못한다. 예를 들어 과학적인 조사 연구와 같은 직업에 있어서 많은 수입을 벌지 못하는 사람이 이러한 감정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직업에 있어서 수입은 성공의 척도가 된다. 여기에서는 체념이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바람직스러운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겠다. 왜냐하면 경쟁적인 세상에 있어서는 두드러진 성공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혼은 상황에 따라서 노력이 필요하기도 하고, 필요하지 않기도 한 그런 문제이다. 영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처럼 남성이나 여성 중 어느 한 성이 소수에 속한다면 그 성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결혼을 하는 데 일반적으로 노력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다수에 속하는 성은 위와는 반대이다. 여성들이 다수인 곳에서 소모되는 노력과 사고의 양은 여성 잡지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명백해진다. 남성이 많은 곳에서는 연발 권총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신속한 방법을 사용한다. 이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왜냐하면 다수의 남자들은 가장 빈번하게 문명의 개척 지대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성공적으로 키우는 데 관련된 노력은 너무나 명백한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그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체념을 믿고 그릇된 '영적'인 인생관을 믿는 나라들은 유아 사망률이 높은 나라들이다. 의학, 위생, 방부법, 적당한 식사 등은 실제적인 집념이 없이는 성취할 수 없다. 그들은 물질적인 환경을 위한 정력과 지성을 필요로 하고 있다. 물질을 하나의 망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흙먼지도 그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결국 자식들을 죽게 만드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본래의 욕망이 위축되지 않은 사람인 경우에 있어서는 어떤 힘이 그의 정상적이고 이치에 맞는 목적을 형성한다. 사람이 욕망 하는 힘은 그의 지배적인 정력에 달려 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지배하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사상을 지배하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지배하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물질적 환경을 지배하기를 바라며 어떤 사람은 지적인 탁월성의 힘을 원한다. 온갖 종류의 공적인 일은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으는 것이 목적이 아닌 한 어떤 권력에 대한 욕망을 내포한다.

그러나 체념도 행복을 얻는 데 있어서 하나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그 역할은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 못지 않게 긴요하다. 현명한 사람은 예방할 수 있는 불행을 당했을 때에는 그냥 앉아 있지 않겠지만 피할 수 없는 것에는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잘못되어 가고 있는 모든 사소한 일에 대해서 짜증을 내고 화를 내며 이렇게 해서 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많은 정력을 낭비한다. 심지어는 정말로 중요한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도 감정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에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생겨나 그것이 마음의 평화를 위협하도록 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하는 것을 가르쳤으며 이러한 말은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에게도 해당된다. 실제적인 일에 있어서의 능률은 그 일에 투입되는 감정과 정비례하지 않는다. 사실 감정은 때때로 능률에 장애물이 된다. 일을 할 때에는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운에 맡기는 것이 필요한 태도이다.

체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절망에 뿌리를 박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달성할 수 없는 희망에 뿌리를 박고 있다. 첫 번째 것보다는 두 번째 것이 좋다. 무엇인가를 달성하려다가 근본적으로 좌절한 사람은 절망의 체념을 배우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신의 절망을 종교적인 말로 위장하거나, 아니면 명상이라는 것은 인간의 진정한 목적이라는 이론으로서 위장을 한다. 그러나 내면적인 패배를 감추기 위해 무슨 위장을 하든지 간에 그는 본질적으로 쓸모가 없고 근본적으로 불행하다. 달성할 수 없는 희망에 기초를 둔 체념을 가진 사람은 아주 다르게 행동한다. 달성할 수 없는 희망은 큰 것이며 개인적인 것으로는 달성하기에 어려운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무슨 활동을 하든지 간에 죽음이나 어떤 질병에 의해 패배를 당한다. 나는 나의 적에 의해서 압도를 당할지도 모른다. 또 나는 성공을 가져오지 못하는 어리석은 길을 택했다는 것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이렇듯 수많은 장애물로 인한 개인적인 희망의 좌절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욕망이 인류를 위한 더 큰 희망의 일부분일 때에는 실패가 온다 해도 그것은 위와 같은 완전한 패배는 아니다. 자신이 위대한 발견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지도 모르며, 또는 정신적인 좌절을 맛보고 자신의 희망을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과학의 진보를 깊이 원하고 그 목적에 대한 자신의 공헌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는 순전히 이기적인 동기에서 연구를 한 사람이 느끼는 그런 절망을 느끼지 않는다. 필요한 개혁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전쟁 때문에 자신의 노력이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것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며 자신이 애를 쓴 것이 자신의 생전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부득이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의 참여와는 관계없이 인류의 미래에 관심이 있다면 완전히 절망에 빠질 필요는 없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하는 경우들은 체념하기가 가장 어려운 것들이다. 체념이 훨씬 쉬운 경우들도 많이 있다. 인생의 중요한 목적이 계속해서 성공의 전망을 보여주지만 이차적인 목적이 좌절되는 그런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중요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은 결혼의 불행 때문에 마음이 산란해진다면 바람직한 체념을 하지 못한다. 만약 그가 일에 정말로 몰두한다면 결혼 생활이 행복할 때와 마찬가지로 불행할 때에도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그 작은 고통들도 인내심을 갖고 참지 못한다. 그들은 기차를 놓치면 화를 내고 저녁 식사가 제대로 요리되지 않으면 노발대발하며 굴뚝의 연기가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절망한다. 그러한 사람들이 그 사소한 문젯거리에 낭비하는 에너지는 만약 그것이 제대로 사용된다면 많은 나라들을 세울 수 있을 정도로 큰 것이다. 현명한 사람은 하녀가 털지 않은 먼지, 요리인이 요리하지 않은 감자, 굴뚝 청소부가 쓸어버리지 않은 그을음 등을 눈여겨 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이러한 문제들을 개선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만약 그가 그렇게 할 시간이 있다면 그는 아무런 감정도 갖지 않고 그 문제들을 처리한다는 것이다. 걱정과 초조와 짜증은 아무 데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걱정과 초조와 짜증은 아무 데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이런 것들(걱정, 초조, 짜증)을 강력하게 느끼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극복할 수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우리가 앞에서 마란 근본적인 좌절이 아닌 그 어떤 것에 의해서 압도를 당하는지 아닌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일의 실패나 불행한 결혼의 고통을 참게 해주는 더 큰 희망에의 정신 집중은 그가 기차를 놓쳤거나 진흙 속에다 우산을 떨어뜨렸을 때 참게 하는 일을 가능케 한다.

걱정에서 벗어난 사람은 계속 짜증이 날 때에도 인생이 전보다 훨씬 더 유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에는 비명의 소리라고 지르고 싶게 만들었던 그 개인적인 특성들은 이제는 단순히 재미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A라는 사람이 그에게 티에라 델 휴의고의 일화를 340번이나 이야기해도 그는 그 횟수를 세어 가면서 즐거워할 것이며 자기 자신의 일화를 말함으로써 헛되게 다른 방향으로 화제를 돌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날 아침 일찍 기차를 타려고 서두를 때 구두끈이 끊어졌다고 해도 그는 이일은 역사에 있어서 커다란 중요성을 갖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구혼을 하려고 하는데 지루한 이웃 사람이 찾아와서 방해를 한다면 그는 아담을 제외하고 모든 인류가 이런 불행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상한 유추에 의해서 사소한 불행에 대하여 위안을 줄 수 있는 것은 무한정으로 많다. 개화된 모든 남녀들은 자기 자신의 그림을 마음속으로 간직하고 있으며 이 그림을 망치게 하는 어떤 일이 발생하면 괴로워한다. 가장 좋은 치유 방법은 그 그림을 하나만 갖고 있을 것이 아니라 화랑 전체를 갖고 문제가 되는 사건에 적당한 것을 골라내는 것이다. 만약 그 초상화 중 하나가 웃어 넘길 정도로 사소한 것이라면 더욱 더 좋은 일이다. 자기 자신을 마치 비극의 영웅처럼 하루종일 보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그렇다고 자기 자신을 항상 희극에 나오는 광대처럼 생각하라는 것은 나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사람은 더욱 더 짜증을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황에 적당한 역할을 선택하는 데에는 약간의 재치가 있어야 한다. 물론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감탄할 만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최소한의 체념과 유머가 일을 하게 하는 정력과 성공을 달성하게 하는 결실을 파괴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일의 중요성이나 일의 용이성이나 난해도에 대하여 자신을 속이지 않는 사람은 가치 있는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기만에 의해서 고양되었을 때에만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일을 계속하기 전에 진리를 감내 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공상적인 일에 의해서 도움을 받으려는 소망은 이익보다는 해를 준다. 사실을 알기 위해 쓰여진 약간의 시간은 낭비된 시간이 아니며 그 후에 행해진 일은 자신의 정력에 대한 자극제로서 자신의 이기주의를 계속 확대할 필요가 있는 사람에 의해서 행해지는 그런 일보다도 덜 해로울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실을 기꺼이 직면하려는 데에는 어떤 체념이 있다. 이런 체념은 처음 순간에는 고통을 줄지는 모르나 궁극적으로는 자기 기만자들이 당하기 쉬운 실망과 자기기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것이다. 매일 믿을 수 없게 되어 가고 있는 것들을 믿으려는 노력보다 더 피로하고 짜증이 나는 일은 없다.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