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llnow 2024. 5. 5. 20:15

    제1장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What Is Seen and What Is Not Seen)

 

    1.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1)

 

  경제활동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은 그것이 하나의 행동이든, 제도이든 법이든 간에 한 가지 효과에만 그치지 않고 일련의 연속된 효과들을 만들어낸다. 여러 가지 효과 중에서 당장 나타나는 효과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들은 눈에 잘 띈다. 반면 시간을 두고 서서히 나타나는 효과들도 많은데, 그런 효과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우리가 그런 간접적인 효과들을 미리 내다볼 수 있다면 무척 다행이다.

  사이비 경제학자와 진정한 경제학자들 사이의 차이는 오직 한 가지이다. 사이비 경제학자들은 오직 눈에 쉽게 띄는 효과들에만 집착한다. 반면 진정한 경제학자들은 보이는 효과뿐만 아니라 시간을 두고 나타나는 간접적인 효과까지도 내다볼 수 있다.

  하잘것없어 보이는 차이지만, 그로 인한 결과의 차이는 엄청나다. 눈에 당장 보이는 효과가 좋아 보일 경우 그로 인한 장기적이고 간접적인 효과들은 십중팔구 비참한 결과를 가져다주기 십상이다. 그래서 사이비 경제학자들은 당장 눈에 띄는 하잘것없는 이득에 집착한 나머지, 두고두고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 반면 진정한 경제학자들은 당장은 고통스럽지만 오랜 기간에 걸쳐 나타나는 더 큰 이득을 추구한다.

  인간의 건강이나 도덕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당장 달콤하게 느껴지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습관들은 나중에 쓰디쓴 결과를 안겨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방탕과 게으름, 낭비벽 같은 것들이 모두 그렇다. 당장 눈에 띄는 효과에만 사로잡혀, 두고두고 나타나는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대개 고약한 습관에 탐닉하게 된다. 본능에 이기지 못해 그러는 사람도 있고, 또 의도적으로 그러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인간의 고통스런 진화과정과도 관련이 있다. 태어나서 강보에 싸여 있을 때 인간은 무지의 장막에 가려져 있다. 아기는 자기의 행동으로 생겨나는 즉각적인 효과, 즉 자신의 눈에 띄는 것만을 염두에 두고 행동한다. 시간이 흘러서 한참 자란 후에야 비로소 아이는 자기 행동의 보이지 않는 효과도 고려할 수 있게 된다.2) 이것이 가능하려면 경험과 예측이라는 두 가지를 습득해야 한다. 경험은 유용하지만, 고통스럽다. 경험은 우리가 취한 행동의 결과를 직접 느끼게 함으로써 우리의 행동에 의해 초래되는 모든 결과들을 알게 해준다. 불에 데어본 사람은 불에 가까이 가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이같이 경험이라는 잔인한 선생 대신 예측이라는 좀 더 점잖은 선생을 소개하고 싶다. 지금부터 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즉 오직 예측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을 비교해 보이기로 한다.

 

  1. 깨어진 창

 

  굿펠로우씨(Mr.Goodfellow)는 화가 잔뜩 나 있다. 그의 아들이 유리창을 깬 것이다. 모여 있던 구경꾼들이 입을 모아 위로의 말을 하고 있다.

  "그냥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세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경제가 살아날 수도 있다고요. 다른 사람들도 먹고 살아야지요. 아무도 유리를 깨지 않는다면 유리 만드는 사람은 무얼 먹고 살라고요?"

  우리가 겪고 있는 대다수 경제제도들이 이같은 아이디어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이 단순한 위로의 말을 분석해보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차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유리를 갈아 끼우는 데 6프랑이 든다고 해보자. 그 6프랑이 유리제조업의 성장을 촉진할 것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유리업자는 그 돈으로 자기 자신의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부주의한 아이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보이는 효과이다. 일련의 결과들 중 보이는 일부분의 결과일 뿐이다.

  한번 뒤집어 생각해 보라. 사람들은 유리 깨는 일을 좋은 일로 간주하고 있다. 누군가가 유리를 깼기 때문에 돈이 들고, 산업이 번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말인가. 그런 궤변이 어디 있는가. 당신의 그같은 주장은 보이는 결과에만 사로잡힌 소치이다.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어야 한다.

  6프랑의 유리를 사는 데에 지출한 결과 다른 물건에 대한 지출이 그만큼 줄었다는 것을 당신은 보지 못하고 있다. 만약 그 돈을 유리 사는 데에 쓰지 않았다면 새 구두를 사거나 책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엔가 돈을 지출한다는 것은 다른 것에 지출할 돈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경제 전반에 대한 효과를 살펴보도록 하자. 유리가 깨진 결과 유리산업이 6프랑만큼의 자극을 받는다. 그것이 유리가 깨짐에 따른 보이는 결과이다.

  만약 유리가 깨지지 않았다면 신발산업(또는 다른 어떤 산업)이 그 돈만큼의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이것은 눈에 띄지 않는 결과이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효과까지를 고려할 경우, 유리가 깨지든, 안 깨지든 간에 산업 전체, 또는 국가 전체의 고용량에는 달라질 것이 없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이제 굿펠로우씨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유리가 깨졌다고 할 때, 굿펠로우씨가 최종적으로 누리는 것은 유리 한 장이다. 반면 유리가 깨지지 않았다고 가정한다면, 그 6프랑으로 신발을 샀을 테고, 굿펠로우씨는 최종적으로 유리와 신발을 가질 수 있다.

  결국 굿펠로우씨도 사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 사회는 유리가 깨짐으로 인해 그 유리의 가치만큼을 잃게 되었다는 결론을 얻는다.

  이같은 논의는 다음과 같이 일반화될 수 있다.

  "무엇인가가 불필요하게 파괴되었다면 사회는 그것의 가치만큼 손실을 입는다."

  보호주의자들에게는 끔찍한 말이겠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부수고, 파괴하고, 낭비한다고 해서 고용이 늘어나지는 않는다. 파괴를 통해서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같은 말에 대해서 "산업신보"3)는 무엇이라고 말할까? 어처구니없게도 파리가 불에 타버릴 경우, 그것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창출될 부의 크기를 정확히 계산해냈던 존경하는 생샤망(M. de Saint-Chamans)4)씨와 그의 추종자들은 무엇이라고 할까?

  입법에까지 반영된 그의 정교한 논리를 망쳐놓은 것에 대해 생샤망씨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지 말고 제발 보이지 않는 결과까지도 계산에 넣어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독자들도 주의하시라. 내가 처음에 꺼낸 이야기에는 두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하시라. 한 사람이 더 있다. 소비자인 굿펠로우씨는 유리가 깨진 결과 그렇지 않았다면 누릴 수 있었던 새 신발의 혜택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두 번째의 등장인물은 유리업자이다. 그는 이 사고로 인해서 득을 보게 되었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이 두 사람 말고도 그늘에 가려진 제3의 인물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신발제조업자(또는 다른 어떤 기업)이다. 그는 유리가 깨어진 사건으로 인해서 손해를 보았다. 이 사람은 보이지 않는 효과를 대표한다. 만약 우리가 이 제3의 인물을 놓친다면 문제의 핵심을 간과하는 것이 된다. 이 그늘에 가려진 제3의 인물을 잘 인식한다면 유리가 깨어졌기 때문에 산업이 발전할 수 있다는 식의 어리석은 말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우리가 이 제3의 인물을 잘 인식한다면 국내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 수입을 억제해야 한다는 식의 어리석은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수입을 제한하는 것은 유리를 깨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외국 물건의 수입에 대한 억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끝까지 파고 들어가 보면 그 밑바닥에는 바로 다음의 논리가 놓여져 있다.

  "만약 유리가 깨지지 않는다면 유리제조업자는 무얼 먹고살라는 말인가."

 

  2. 동원 해제

 

  나라라고 해서 개인과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한다면, 그것을 위해서 치러야 하는 대가가 과연 치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국가에게 있어 국가안보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만약 국가안보를 위해서 10만의 병력과 1억 프랑의 자금이 필요하다면, 나는 그것에 대해서 아무 할말이 없다. 무엇인가를 얻으려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부터 말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어느 국회의원이 10만 명의 군인들을 제대시키자는 제안을 내놓았다고 해보자. 그 결과 납세자들은 1억 프랑의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이런 반대를 한다.

  "이 10만의 병력과 1억 프랑의 세금은 우리의 국가안보를 유지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된다. 물론 그것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같은 고통이 없다면 프랑스는 내전이나 외적의 침입을 막아낼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이 말에 대해서 어떤 이견도 없다. 물론 구체적인 숫자가 맞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최소한 논리적으로는 경제학의 원리에 충실하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희생이 필요하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희생이 희생이 아니라(누군가에게 득을 가져다준다는 이유로) 이득으로 간주되기 시작할 때, 그같은 논리는 경제학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다.

  군대를 줄이자는 제안자들이 연단에서 내려오기도 전에 누군가가 나와서 목청을 높일 것이다.

  "병사 10만 명을 내보내겠다고? 도대체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알아서 먹고살라고 하겠지. 하지만 당신도 실업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 않소. 어디나 일자리를 찾는 사람으로 넘쳐나고 있소. 당신은 그 군인들을 살벌한 경쟁으로 넣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임금까지 낮추게 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오. 겨우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세상에, 국가가 10만 명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오. 게다가 그 군대가 와인과 의복과 무기를 소비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시오. 그것 때문에 공장들이 돌아가고, 주둔지의 경제가 돌아가지 않소. 10만 명의 군대는 수많은 기업들에게 하나님이 내린 선물이잖소. 그런데 당신은 끔찍하게도 그같이 좋은 경제활동에 종지부를 찍자고 주장하고 있군요."

  이 사람은 군대가 제공하는 본래의 서비스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를 내세워서 군대의 축소를 반대하고 있다. 내가 문제시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주장이다.

  10만 명의 군인들이 있음으로 해서 납세자들은 1억 프랑을 부담해야 하지만 그 덕에 그 군인들이 먹고살게 되고, 그들에게 물품을 제공하는 공급자들에게 사업의 기회가 생긴다. 그것이 군인이 있음으로 인한 보이는 결과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1억 프랑의 세금을 납부한 결과 납세자들은 그만큼 소비를 줄여야 하며, 세금이 없었다면 구매했었을 상품의 공급자들이 상대적으로 타격을 받게 된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효과이다. 전체의 대중들에게 도대체 어떤 이득을 가져다주는지 계산한 것이 있다면 내게 알려달라.

  문제를 단순화하기 위해서 10만 명과 1억 프랑이 아니라 한 사람과 1천 프랑을 가지고 설명하기로 한다.

  우리는 갑이라는 마을에 살고 있다. 신병모집자들이 돌아다니다가 한 명의 신병을 확보했다. 세무서 직원도 같이 돌아다니면서 마을주민들로부터 1천 프랑을 거두었다. 이제 그렇게 뽑힌 사람과 1천 프랑을 메츠라는 도시로 보내기로 했다. 메츠는 그런 식으로 뽑힌 사람들이 그렇게 거두어진 돈으로 무위도식하는 도시이다. 메츠만을 놓고 생각하면 당신의 말이 맞다. 마을마다 한 사람을 뽑아서 놀고 먹이는 것이 유익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갑이라는 마을 전체로 눈을 돌려본다면 다른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그 마을은 한 명의 청년이 기여했을 노동력을 잃었고, 그에게 주어졌을 임금, 그리고 그 돈이 소비됨으로 인해서 늘어날 산업활동을 잃게 된다.

  어설프게 생각하면, 이 마을이 겪는 손실이 메츠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의해서 상계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극복하기 힘든 차이가 있다. 그 청년이 마을에 남아 있었다면 노동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메츠시에서는 노동 대신 좌로 나란히, 우로 나란히 정도나 하는 군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국가안보의 필요성이 줄어, 10만 명의 군인이 남아돌게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우리의 청년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 청년이 어디에 있건, 돈이 돌아가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마을에 있었다면 365일 생산적인 노동을 했을 테지만, 메츠시에서는 비생산적인 노동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이들을 제대시키기로 했다. 당신은 그로 인해서 노동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임금은 내려갈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것은 보이는 결과뿐이다.

  당신이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 10만 명의 군인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1억 프랑을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납세자들에게 돌려주는 것임을 보지 못하고 있다. 당신은 10만 명의 노동력이 경쟁에 돌입한다는 것은 보고 있으면서도 그와 동시에 그들에게 지급될 1억 프랑의 돈도 소비자들에게 되돌려진다는 사실은 보지 못하고 있다. 노동의 공급이 느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와 동시에 노동에 대한 수요도 늘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군인들을 제대시킬 경우 임금이 낮아질 것이라는 주장은 옳지 못하다. 당신은 10만 명의 군사와 1억 프랑의 세금은 같이 붙어 다닌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을 할 일도 없이 군대에 붙잡아둔다면 1억 프랑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10만 명의 군인들에게 지급되지만, 그들을 제대시킨다면 같은 돈이 노동의 대가로 그들에게 지급된다. 그들도 노동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또 있다. 납세자들이 그 돈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군인들에게 주어버리든지, 아니면 일한 대가로 노동자들에게 지급 하든지와는 무관하게 궁극적인 차이는 납세자들이 돈을 낸 대가로 무엇을 받느냐의 차이이다. 그 돈을 군인들에게 지급한다면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하는 셈이다. 반면 군인들을 제대시킨다면 납세자들은 돈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된다. 결론적으로 할 일이 없어진 군인들을 제대시키지 않고 세금으로 먹여살리는 것은 국가적으로 순손실이다.   그들의 주장을 확장시켜 보면 그들의 주장이 궤변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만약 군대의 규모를 확대하는 것이 나라 전체에 이익이 된다면, 왜 이 나라의 모든 남성들을 군인으로 소집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가.

 

  3. 조세

 

  이런 말을 들어본 일이 있는가.

  "조세는 최선의 투자이다. 그것은 마치 생명수와 같다. 조세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계를 이어나가는지 생각해보라. 게다가 그것이 산업에 미치는 간접적인 효과까지 생각해 보라. 조세의 좋은 점은 끝이 없다. 마치 생명 그 자체와도 같다."

  이같은 주장과 맞서기 위해서 나는 앞에서 동원했던 논리들을 반복해야겠다.

  조세수입으로부터 나오는 월급으로 공무원들이 살아간다는 것은 조세의 보이는 효과이다. 공무원들을 상대로 물건을 공급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이득도 보이는 효과이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코앞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눈에 잘 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납세자들이 겪어야 하는 불이익은 보지 못한다. 게다가 그 납세자들에게 물건을 공급하는 자들이 겪는 불이익은 더욱 더 보지 못한다. 조금만 생각을 돌리면 너무나 명백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정부의 공무원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1백 원을 쓰면, 납세자들의 지출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공무원들의 지출은 실제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눈에 잘 띄는 반면, 납세자들이 치러야 하는 비용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당신은 국가를 메마른 땅으로, 그리고 세금은 마른 대지를 적셔주는 단비로 비유한다. 하지만 당신은 그 비가 어디에서 오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조세는 그 대지의 습기를 앗아가고 결국 땅을 메마르게 하지 않을까? 비가 오려면

대지로부터 증발된 습기보다 비의 양이 더 적지는 않은지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굿펠로우씨는 1백 원을 세금으로 바치지만 그에 대한 직접적인 대가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에게 대가가 돌아오는 것은 나중에 공무원들이 그 돈을 지출하면서부터인데, 그때도 직접 되돌려 주는 것이 아니라 식량이나 노동력 같은 형태로 돌려준다. 그 과정에서 굿펠로우씨는 예를 들어 5프랑의 손실을 입게 된다.

  물론 굿펠로우씨가 낸 세금 액수만큼의 서비스를 정부가 굿펠로우씨에게 돌려주는 경우도 종종 있기는 하다. 이 경우는 누구도 손해가 아니다. 단순히 교환이 일어났을 뿐이다. 그처럼 정부가 유용한 기능을 하는 것에 대해서 내가 반대를 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에게 이 말을 하고 싶다. 만약 당신이 정부 기관을 만들고 싶다면 그것이 쓸모있는 기관이라는 사실을 보여달라. 납세자인 굿펠로우씨에게 세금의 대가로 그에 상응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사실을 보여주라. 그것이 바로 정부의 정당한 필요성이다. 그것이 아니라 공무원과 그 가족, 또 그들에게 물품을 공급하는 업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세금을 거두어야 한다면, 또는 고용을 창출하기 위해서 세금을 거두어야 한다면 아예 말도 꺼내지 마시라.

  굿펠로우씨가 정부로부터 진정 유용한 서비스를 공급받기 위해서 세금을 낸다면 그것은 구두수리를 해달라고 그 돈을 구두수선공에게 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은 주고받는 관계일 뿐 어느 쪽에도 손해가 아니다. 하지만 굿펠로우씨가 세금을 내고 정부로부터 아무런 대가를 받지 못했다면, 아니 오히려 불편함만을 정부로부터 받게 되었다면, 그것은 마치 그 돈을 도둑에게 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세금으로 납부된 그 1백 원이 국민경제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말은 꺼내지도 마라. 길을 가다가(불법적이건 합법적이건 간에) 기생충 같은 강도를 만나 돈을 뺏기지 않았더라면 그 돈은 굿펠로우씨가 썼을 테고, 국민경제는 왕성해졌을 것이다.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지 말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것도 살펴보자.

  작년의 일이다. 헌법의회가 반대자들을 적극적으로 배척하지 않았던 덕에 나도 재정위원회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거기에서 헌법초안자들은 아주 현명하게 처신했다.

  티에르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평생을 정통주의자파(legitimist party)와 성직자파(clerical a party)와 투쟁하는 데 보냈다. 그러다가 얼마전 공통의 위험에 처한 나머지 그들과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들도 옛날에 생각했듯이 그런 괴물만은 아니었다."

  그 말이 맞다. 상대방과 교류를 하지 않으면 대립은 더욱 격화되고 증오는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다수파가 소수파의 위원회 진입을 허용하게 되면, 십중팔구 서로의 견해차가 과거에 생각했듯이 그렇게 크지 않으면, 상대방의 생각이 그렇게 잘못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어쨌든 나는 작년에 재정위원회의 일을 했다. 우리의 동료가 공화국 대통령과 장관들과 대사들의 보수를 동결시키자고 했을 때, 늘 터져나오는 반대의 목소리가 있었다.

  "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정부기관의 사무실을 위엄 있게 보이도록 치장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수한 인재들이 공무원이 되려고 합니다. 곤경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이 공화국 대통령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했을 때 매번 그것을 거절하는 고통을 겪도록 해서야 되겠습니까. 입헌정부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서 관공서와 외교관에게 어느 정도의 겉치레를 허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의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고, 내가 그 문제에 대해서 답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틀렸든 맞았든 간에 그들의 주장이 공공의 이익이라는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편협한 절약주의나 질투에 눈이 먼 케이토주의자들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의견에 더 호의적인 편이다.

  그러나 그들이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늘 그래왔듯이 예의 그 진부한 주장을 되풀이할 때는(그 주장은 늘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내 경제학자적 양심이 그것을 허용할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나라 프랑스의 지적 수준에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고위직 공무원의 사치품 소비는 예술과 산업과 고용을 촉진할 것입니다. 대통령과 장관들이 베푸는 크고 작은 연회들은 그와 관련된 산업들의 성장을 촉진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월급을 줄일 경우 파리의 산업은 위축될 것이고 그것의 파급효과는 곧 전국으로 미칠 것입니다."

  세상에 맙소사! 선생, 제발 산수 공부 좀 제대로 하시오. 큰 것에다 작은 것을 더하는 것과 작은 것에다 큰 것을 더하는 것이 다르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말을 프랑스 의회에서 버젓이 할 수 있다는 말이오? 창피하니 그만두시오. 누구도 당신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오.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자. 내가 어떤 일꾼에게 1백 원을 주고 배수로를 파게 하려고 한다. 그런데 느닷없이 세무서 직원이 그 1백 원을 빼앗아다가 내무부 장관에게 건네주었다. 배수로를 파려던 내 계획은 무산되었고, 내무부 장관의 식탁에는 요리 하나가 더 늘게 되었다. 당신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런 식의 정부지출이 산업을 발전시킨다고 주장하는가. 그것은 단순한 소비의 이전, 또는 노동력의 이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당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가. 그 장관의 식탁이 좀더 호화스러워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농부인 내 밭의 배수가 잘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파리의 출장 요리업자가 1백 원어치의 추가 주문을 받은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시골의 일꾼이 5프랑을 잃게 되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장관의 식탁에 요리가 추가된 것과 요리업자의 이익이 더해졌다는 것, 그것은 보이는 효과에 불과하다. 보이지 않는 효과를 생각하라. 물이 질척거리는 전답과 일거리를 못 얻은 시골의 일꾼이 그것이다.

  좋으신 하나님, 2 더하기 2가 4라는 것을 경제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참으로 힘듭니다. 설령 그것에 성공한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사람들은 이렇게 소리쳐댄다.

  "그것은 너무나 진부해."

  그들은 결국 당신이 증명해놓은 것과는 무관하게 투표를 하고 말 것이다.

 

  4. 극장과 예술

 

  국가가 예술을 지원해야 할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찬반의견이 분분하다.

  지원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예술이 우리 민족의 영혼을 넓히고, 높이며, 또 시화시킨다고 주장할 것이다. 예술에 대한 지원은 인간이 물질적인 욕구에만 사로잡히는 것을 막아주고, 그 대신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알게 할 것이기 때문에 인간들의 태도나 관습, 도덕에 좋은 영향을 줄 것이며, 심지어는 산업에도 도움을 줄 것이라고 한다. 이타리엥 극장이나 음악원(Conservatory)이 없었다면 지금의 프랑스 음악이 어떻게 가능했을 것이며, 프랑세스 극장이 없었다면 지금의 프랑스 연극이 어떻게 가능했을 것이며,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그림과 조각들이 어떻게 가능했겠느냐고 말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중앙집권과 그에 따른 미술에 대한 지원이 없었더라면, 프랑스 노동자들의 고상한 취향도 없었을 것이고, 지금처럼 아름다운 상품들을 전세계에 수출하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런 결과들을 놓고 볼 때, 모든 유럽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들을 성취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세금 좀 부과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은 너무 무책임하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들의 논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반대 논리를 들어본다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첫째, 그들의 주장은 분배의 정의라는 것과도 어긋난다. 노동자들의 주머니에서 돈을 뺏어다가 예술가들의 이익을 높여주는 입법자들을 과연 정의롭다고 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라마르탱(Lamartine)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극장지원금을 뺏아가려고 하는데, 당신이 하는 일이 그 정도에서 그치겠는가. 그렇게 하다 보면 결국은 당신이 일하는 대학과 박물관과 연구소와 도서관에 대한 지원금도 없애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모든 선한 것과 모든 유용한 것들에 대해 지원해야 한다면,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어느 정도가 될는지 알기나 하는가. 농업, 제조업, 상업, 복지와 교육 등 대부분의 활동들이 당신의 지원목록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가. 게다가 예술에 대한 지원이 예술을 발전시킨다고 가정하는 것 같은데, 그것은 과연 맞는 말인가. 그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은 더 깊이 따져 보아야겠지만, 지금까지 관찰한 바에 따르자면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는 극장들이 가장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제 좀 더 고상한 차원으로 넘어가 보자. 인간의 필요와 욕구는 서로서로 상승작용을 하여 소득이 높아질수록 점점더 세련된 상태로 발전해간다5)고 할 수 있다. 정부가 그 과정에 개입해서는 안된다. 정부가 사치재를 생산하는 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세금을 거두어갈 경우, 사치재가 아니라 필수재를 만드는 산업이 피해를 입게 되고, 결국은 문명의 정상적인 발전경로에 역행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정부가 사람들의 욕구나 취향, 노동과 인구의 배치 등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게 되면, 사회는 그 확고한 기반을 잃고 불확실하고 위험한 상태로 빠져들게 된다. 시민들은 자신들의 판단에 의해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이것이 국가개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논리이다.

  나는 선택과 충동은 위로부터, 즉 입법자로부터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즉 시민들 스스로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형성되어야만 한다고 믿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 반대의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결국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말살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리 경제학자들을 비난한다. 우리가 예술 활동에 대해서 지원하지 말자는 것이었지 예술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 활동들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그에 대한 보상도 예술가들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치 우리가 예술 그 자체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으로 매도해버린다. 이것은 마치 국가가 시민들에게 국교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우리가 시민들이 종교 자체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매도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가 교육에 대해서 국가가 지원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면 그들은 우리를 교육 그 자체에 대한 반대자로 몰아버린다. 우리가 특정한 산업이나 토지가격에 대한 지원을 반대하면, 그들은 우리가 재산권이나 노동에 반대하는 것으로 매도해버린다. 예술에 대한 국가지원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그들은 우리를 예술의 가치도 모르는 야만인으로 몰아세운다. 그들의 비난은 틀렸을 뿐 아니라 정당하지도 못하다.

  나는 내 모든 힘을 다해 그들의 주장에 저항한다. 우리는 종교나 교육, 재산이나 노동이나 예술을 없애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같은 활동들이 남의 것에 기생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자유롭게 발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같이 중요한 활동들이 자유로운 환경에서 조화롭게 발전해야 하며, 그리하여 이같은 활동 중 어느 것도 분쟁과 남용과 폭정과 무질서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를 반대하는 자들은 지원이나 규제의 대상이 아닌 것들은 모두 없어지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그 반대이다. 그들은 인간 그 자체가 아니라 입법자에게 희망을 건다. 우리는 입법가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에 희망을 건다.

  라마르탱씨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우리가 경제학자들의 주장을 따르게 된다면 결국 이 나라에 부와 명예를 안겨주는 전람회를 폐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라마르탱씨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지원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없애버리는 일로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소. 국가가 살리기로 작정한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당신에게는 당연한 결론일 것이오. 결국 당신은 국가가 조세수입으로 먹여살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느 것도 존속할 수 없음을 주장하는 것이오. 나는 당신이 내세우고 있는 그 전람회를 가지고 당신의 주장이 틀렸음을 보이려고 하오.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고상하고 가장 자유로운, 그리고 인간적이라고 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박람회가 지금 런던6)에서 조성되고 있는 중이오. 그리고 그 박람회에 대해서 영국정부는 어떤

개입이나 지원도 하고 있지 않소.

  아까도 말했듯이 미술계에 국가지원이 필요한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내가 이 자리에서 그 논쟁에 대한 결론을 내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독자들의 이해를 바란다.

  하지만 라마르탱씨가 제기한 주장 가운데에서 내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경제학 논리에 비추어볼 때, 다음의 주장은 말이 안 되는 소리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술과 관련된 경제문제는 고용이란 한마디로 요약된다. 그 노동의 성격이 무엇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노동이든 생산적이고 유용하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극장산업은 도장공, 석공, 장식업자, 의상업자, 건축업자 등 8천 명에게 임금을 주어 먹여 살리고 있다. 그들은 파리라는 이 도시의 곳곳에 박혀 살아가고 있다. 당신은 그들의 요구를 동정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동정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보조금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라.

  그의 연설은 계속된다.

 

  파리사람들의 즐거움은 지방의 관공서들에게 일자리와 생필품들을 제공한다. 그리고 부자들의 호사는 공화국내의 모든 극장산업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그리고 이같이 고상한 활동이 있음으로 인해 생필품을 제공받고 있는 20만의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에게 임금과 빵을 제공해준다. 당신들이 이 6만 프랑의 보조금을 승인함으로써 그들에게 그 돈을 나누어줄 수 있게 된다(옳소! 옳소! 박수갈채).

 

  옳다고? 틀렸소! 정말 틀렸소! 최소한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경제학적인 논리에 비추어본다면 그의 말이 틀렸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 6만 프랑 중 일부가 극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간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중의 일부는 분배되는 과정에서 어디로든 사라질 것이다. 문제를 좀 더 깊이 생각해본다면, 파이의 대부분이 다른 곳으로 사라져버린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돌아갈 빵이 몇 조각이라도 남아있다면 무척 다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6만 프랑이 도장공과 장식업자, 의상업자, 미용업자들에게 모두 돌아간다고 해보자. 그렇더라고 그것은 보이는 효과에 불과하다.

  그 돈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것이 동전의 뒷면이다. 그 뒷면은 앞면만큼이나 중요하다. 그 돈이 누구에게서 나오는가. 만약 의회가 그 돈을 리볼리가로 가게 하지 않고 원래대로 그레넬가7)로 향하게 했다면 그 돈이 누구에게 갔겠는가. 그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효과이다.

  누구라도 그 돈이 투표함에서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누구라도 투표함이 우리 국부를 증가시킬 수 없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투표한다고 해서 없던 돈이 새로 생겨날 수 없음을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수결에 의해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어딘가에 있던 것을 뺏어다가 다른 누군가에게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누군가가 그 돈을 받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가 그 돈을 뺏겨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1프랑을 세금으로 낸 사람은 더 이상 그 1프랑을 자신을 위해서 쓸 수가 없다. 그 1프랑에 해당하는 만큼의 만족을 잃게 된다는 것도 분명하다. 1프랑어치의 만족을 위해서 일했던 노동자는 세금 때문에 그만큼의 만족을 빼앗겨버리는 셈이다.

  5월 16일 날 국회에서 벌어진 표결 결과, 국가의 복지와 고용이 늘어났다는 식의 어린아이와 같은 생각은 더 이상하지 말자. 보조금은 재산과 임금을 재분배하는 것일 뿐이다.

  보조금 때문에 만들어지는 직업들과 그 직업들의 유용함이 그 보조금 때문에 없어지는 직업과 그것의 유용함에 비해 더 급하고 더 도덕적이며 더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 6만 프랑을 세금으로 낸 결과 농부와 도랑 파는 사람과 목수와 대장장이들의 임금을 줄이는 대신, 같은 액수만큼 가수와 미용사와 장식업자와 의상업자의 임금을 올려놓았다. 후자의 직업이 전자의 직업보다 더 중요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라마르탱씨도 최소한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후자의 직업이 전자의 직업들만큼 생산적이고 유익하다고 했다. 그 말조차도 의문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극장산업이 다른 산업의 지원을 요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산업의 중요성이 덜하다는 증거 아닐까?

  하지만 내가 이 책에서 어떤 직업이 본질적으로 더 중요한지를 논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라마르탱씨와 그의 동조자들을 배우들에게 물건을 공급해주는 사람들의 임금만이 아니라 납세자들에게 물건을 공급하는 사람들이 입게 되는 손해도 고려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한 그들은 재분배와 부의 창출 사이의 차이도 모른다는 놀림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만약 그들이 진정으로 논리적이었다면 무한대의 보조금을 요구했어야 했다. 6만 프랑에 의해서 새로운 부가 창출되는데, 10억 프랑의 보조금을 지급한다면 더욱 많은 부가 창출되지 않겠는가.

  조세를 거두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려면 좀 그럴듯한 근거를 제시하라. 제발 "공공지출이 있기에 노동자들이 먹고 산다"는 식의 한심한 말은 이제 그만두라. 그런 말은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을 은폐해버린다. 즉 공공지출은 항상 민간지출을 줄여서만 가능하며, 그 결과 노동의 종류가 달라질 뿐 경제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당신의 주장이 인기를 끄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잘못된 추론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5. 공공사업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대규모의 사업이 필요하다면, 국가는 당연히 시민들로부터 돈을 거두어서 사업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을 때는 난감해진다.

  "그 밖에도 공공사업은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찾아주는 방법이기도 하다.“

  정부는 도로를 만들고 유지 관리하며, 궁전을 짓기도 하고 운하는 파기도 한다. 이런 일들이 일부의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보이는 효과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다른 직업을 가진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게 된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효과이다.

  도로 놓는 일을 한번 생각해 보자. 매일 아침 1천 명의 노동자가 일터로 나왔다가 임금을 받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이 점은 분명하다. 만약 정부가 도로를 놓지 않았다면 이 선량한 노동자들이 그같은 일자리를 얻지 못했을 테고 임금을 받아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시야를 좀 더 넓히면 다른 무엇이 있지 않을까? 듀팽(Dupin)8)씨가 도로사업을 위한 예산이 통과되었음을 선포하는 순간 돈이 달빛을 타고 하늘에서 포울드(Fould)9)씨와 비노(Bineau)10)씨의 금고로 떨어지는 것일까? 일이 제대로 되려면 정부는 지출을 결정하면서 동시에 그 돈을 어떻게 거둘 것인지에 대해서도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세무공무원들을 내려보내서 세금을 거두어들여야만 하지 않겠는가.

  이같이 문제의 양면을 같이 보아야 한다. 1백만 프랑의 돈을 지출했을 때 어떤 좋은 일들이 벌어지겠는가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만약 그 돈을 세금으로 내지 않았을 경우 납세자들이 할 수 있었던 일도 같이 생각하라. 당신은 공공사업이라는 것이 양면을 가지고 있는 동전 같은 존재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앞면에는 부지런히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그것은 보이는 효과이다. 반면 그 뒷면에는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효과이다.

  내가 지금 비판하고 있는 이 엉터리 논리는 공공사업에 가면 더욱 심각하다. 가장 어리석고 낭비적인 사업들이 공공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진다. 철도나 교량이 필요해서 지어야겠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런데 그같은 이유가 없을 때는 이상한 논리를 갖다대면서 공공사업을 벌이려 한다.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공공사업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다.

  샹데마르11)의 사열대를 지었다가 부수었다가 하는 식이다. 위대한 나폴레옹은 노동자들에게 도랑을 팠다가 묻었다가 하는 일을 반복하도록 시켰는데,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매우 자비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결국 결과는 같은 것 아닌가. 우리가 궁극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부가 노동자들에게 분배되도록 하는 것 아닌가."

  문제의 근본으로 내려가 보자. 화폐는 우리에게 환상을 가져다 준다. 공통의 사업을 위해서 돈을 갹출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그 돈에 상당하는 노동력을 갹출하는 것이나 다르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들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이 협동작업을 해야 할 경우 그것을 문제시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들의 노동에 대한 보상은 일의 결과물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구실로 사람들을 불러모아다가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도로나 아무도 살지 않는 궁전을 지으라고 강요한다면 매우 어리석은 일임이 분명하다.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느니 차라리 나 자신을 위해서만 일을 하겠다고 시민들이 대들더라고 할 말이 없다.

  협조의 수단이 직접적인 노동이 아니라 납세인 경우에도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차이가 있기는 하다. 공공사업을 위해서 직접적인 노동을 제공할 경우 잘못된 사업으로 인한 손해는 모든 시민들에게 돌아간다. 반면 조세라는 수단을 택하게 되면 그 공공사업 때문에 일자리를 갖게 되는 사람들은 손해를 면하게 된다. 물론 그만큼 다른 납세자들의 부담은 더욱 늘어나게 된다.

  헌법에 다음과 같은 조항이 나온다.

  "사회는 국가나 정부부처, 지방자치 단체들로 하여금 실업자 구제를 위한 공공사업을 수행하게 함으로써 노동자들의 발전을 장려하고 돕는다."

  위기상황이나 혹한기처럼 예외적인 상황에서 잠정적으로 국가가 공공사업을 시행하는 것은 납세자들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 국가가 보험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일자리의 숫자를 늘린다거나 임금을 높일 수는 없다. 평상시에 약간씩 일자리와 임금을 저축해두었다가 어려울 때에 다시 돌려주는 정도의 의미를 가질 뿐이다.

  하지만 일단 그것이 영구적이고 일반적인 정책으로 변해버리면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속임수가 되어버린다. 공공사업을 통해서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고 임금을 올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주장은 모순일 뿐이다. 공공사업으로 인해 어느 정도 일자리가 생겨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보이는 효과에 불과하다. 보이지는 않지만 숨은 효과가 그보다 더 크다. 공공사업을 위해서 세금을 거두어야 하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일자리보다 훨씬 더 많은 일자리들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효과이다.

 

  6. 중간상

 

  사회란 인간이 서로 서로를 위하여 수행하는 서비스의 총합이다. 그같은 서비스는 자발적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고 강제적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다. 우리는 강제적인 서비스를 공공서비스라고 하고, 자발적인 서비스를 민간서비스라고 부른다.

  법에 의해서 강요되고 규제되는 공공서비스는 변화가 필요할 때조차도 잘 변하지 않기 때문에 필요가 없어진 후에도, 심지어는 서비스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성가신 존재가 된 이후에도 살아남는다.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사적인 서비스는 개별적 책임의 영역에 놓여 있다. 거래 쌍방 간의 협상에 의해 각자는 자신의 능력 범위 내에서 원하는 것을 제공받는다. 그러기에 사적 서비스야말로 진정한 가치를 자지며, 그것의 가치는 다른 재화에 대한 상대적인 가치에 의해서 측정된다. 전자의 공공서비스는 정체를 면하지 못하는 반면 사적인 서비스는 계속 발전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공공서비스의 지나친 비대화는 쓸데없는 노력의 낭비를 가져오고 그 결과 사회는 기생주의에 물들어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오늘날의 학자들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사적인 서비스를 오히려 기생주의의 산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다양한 직업들이 하는 역할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들 학자들이 맹렬히 비난해 마지않는 것은 중간상이다. 그들은 자본가와 은행가와 투기꾼과 기업가와 상인들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학자들은 이들 중간상들이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불필요하게 끼여들어서 폭리를 취하려 한다고 비난한다. 만약에 그들이 해오던 일 그 자체를 없앨 수 없다면, 국가가 그 일을 대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문제에 관한 사회주의자들의 궤변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은 국가에게 바쳐야 하는 대가는 숨기고, 중간상들에게 지불해야 하는 대가만을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 대해서도 눈에 쉽게 띄는 것과 잘 생각해봐야만 알 수 있는 것 간의 갈등이 있다.

  특히 대기근12)이 들었던 1847년에 이같이 지극히 해로운 사회주의자들의 견해가 지지를 받았다. 곤경에 처할수록 터무니없는 처방에도 잘 넘어가는 인간의 속성(Malesuada fames)13)을 사회주의자들은 잘 간파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미국이나 크리미아에서 식량을 도입하는 일을 왜 중간상들에게 맡겨야 하는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 식량을 보급하고 저장하는 일을 맡기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들은 순수한 원가만을 받고 팔 것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즉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그리고 무정부적인 거래를 위하여 갖다 바쳐야 할 중간상들의 몫이 인민들에게, 그 중에서도 특히 가난한 인민들에게 되돌려질 것이다."

  사람들이 중간상들에게 갖다 바치는 대가는 눈에 잘 띈다. 그것은 보이는 효과이다. 하지만 그들이 국가나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공무원들에게 갖다 바쳐야 할 대가는 잘 눈에 띄지 않는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효과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중간상들에게 갖다 바친다고 생각하는 대가라는 것은 무엇인가. 두 사람이 서로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그리고 경쟁의 압력하에서 서로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해보자. 가격은 서로간의 협상에 의해서 결정된다. 사람들이 착취당한다고 생각하는 대가는 바로 그것이다.

  파리의 시민들이 굶주림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식량이 있더라고 그것이 파리가 아니라 오데사(Odessa)에 있는 한 파리 시민의 배고픔은 해결되지 않는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배고픈 사람들이 직접 식량이 있는 곳으로 가서 밀을 구해 온다. 둘째, 그같은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에게 그 일을 맡긴다. 마지막으로 공무원들에게 그 일을 맡기고, 세금을 거두어주는 방법이다.

  이 세 가지 방법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가.

  자유로운 사람일수록, 깨인 사람일수록,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자발적으로 두 번째 방법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사실이었다. 그 방법이 가장 좋다는 것에 대한 증거로 더 이상의 무엇이 필요한가. 그같이 생활과 직결된 문제에 있어 인류가 스스로를 기만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자.

  밀을 구하기 위해서 3천6백만 파리시민 전체가 오데사를 향해 떠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첫 번째 대안은 무용지물이다. 소비자들이 자신들을 위해서 직접 그 일을 할 수는 없다. 공무원이든 장사꾼이든 중간에 매개자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원리상으로는 첫 번째 방법이 가장 원초적인 수단임을 명심하라. 자기가 필요로 하는 밀을 구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기의 책임이다. 그것은 누구나 자기에게 부과된 임무이다. 누가 되었든 간에 다른 누군가가 그 일을 대신해 준다면 그는 그 일에 대해 보상받을 권리가 있다. 중간상들도 자신들의 일해 대해서 보상받을 권리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사회주의자들은 중간상들을 기생충이라고 부른다. 기생충이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공무원과 중간상 중 어느 쪽이 더 기생충인가.

  기업들(물론 그 기업들이 자유롭다는 가정하에서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기후의 변화를 연구해야 하고, 매일매일 곡물의 생장상태를 확인해야 하며, 세계 곳곳에서 들어오는 보고서를 확인해야 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등 자신의 행위를 결정하는 데 최대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기업들의 최대 관심사는 가장 싼값에 사서 모든 비용을 축소하고, 가장 작은 노력으로 가장 큰 결과를 얻어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늘 배를 대기시켜 놓고 있으며, 세계 방방곡곡과 연락을 취하고 있다. 프랑스의 장사꾼들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장사꾼들까지고 프랑스에 식량을 공급하기 위하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들의 이기적인 동기에 의해 사업에 필요한 비용을 최소화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간의 경쟁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절약의 이익을 소비자들에게 돌려주도록 한다. 일단 밀이 도착하면 기업인들은 위험을 줄이고 이익을 남기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그것을 팔아치우려고 한다. 그리고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런 과정은 다시 시작된다.

  기업들이 이 지역에 식량을 분배하는 기준은 가격이다. 식량 가격이 가장 높은 곳, 즉 가장 식량이 귀한 곳부터 그 배급이 시작된다. 따라서 이 두 번째 방법보다 배고픈 자의 욕구를 잘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사회주의자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이같은 체제의 진정한 묘미는 그것이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소비자들은 기업인들에게 운임과 이적비와 보관비와 수수료 등을 지불해야 한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라. 어떤 체제를 택하든 소비자들이 식량을 운반하고 보관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을 부담하지 않을 방법이 있는가. 서로 치열한 경쟁관계에 있는 중간상들에 의해서 그 일들이 수행될 때, 소비자들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은 최소화된다. 그리고 마르세이유의 상인들이 파리의 상인들을 위해서 일하는데, 파리의 상인들이 마르세이유의 상인들을 위해서 일하지 않을 리 없다.

  만약 사회주의자들이 의도하는 대로 국가가 중간상들의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대중들에게 돌아갈 절약의 이점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겠는가. 소매가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4만 개 자치단체의 대표자들이 어느 날 밀을 구하기 위해 오데사에 도착했다고 해보자. 그때 밀의 가격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에게 운송비 절감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공무원들이 중간상들보다 더 적은 수의 배와 선원과 창고를 사용하면서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또 그들이 더 짧은 항로를 택하겠는가. 그들이 지출한 비용을 부담하지 않을 방법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하는가. 중간상들이 비용을 절약한다고 할 때, 그 절약분이 모두 중간상들의 이윤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공무원들과 당신의 대표자들이 거룩한 동포에게 사로잡혀 오데사까지 공짜로 갈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들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사용한 시간에 대해서도 보상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대가는 중간상들이 취하게 될 2~3퍼센트의 이윤보다 1천 배나 더 많을지 모른다.

  게다가 그런 방식으로 식량을 배분하기 위해서는 세금을 거두어야 할 텐데 그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도 한번 생각해보라.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의롭지 못한 것들과 낭비를 생각해 보라. 정부가 져야만 할 책임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보라.

  이처럼 엉터리 같은 생각을 만들어내고 곤경에 처한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해서 그것을 퍼뜨린 사회주의자들은 가소롭게도 자신들을 '미래를 내다보는 자'라 부른다. 미래를 내다보는 자라, 이 말은 이 신사분들이 보통 사람들보다 더 먼 앞날을 내다볼 수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자신들의 잘못이 있다면 미래를 너무 멀리 내다본 것이라고, 그래서 중간상들이라는 기생충이 살아남아 있는 것은 아직도 사회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들의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오히려 그 반대가 옳다. 지금의 사회주의자들만큼 어리석은 생각을 가진 자들이 판치는 야만적인 세상을 어느 시대에 다시 찾아볼 수 있겠는가.

  오늘날의 사회주의자 도당들은 사람들 간의 자유로운 결합에 대해 끊임없이 반대한다. 자신들이 끊임없이 날조해내는 어떤 형태의 사회보다도 자유로운 사회가 인간들간의 진정한 결합을 가능하게 해 준다는 사실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옷이 만들어지려면 수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땅의 구획을 짓고 비료를 주고 배수를 하고 씨를 뿌려야 한다. 거기서 수확한 것들로 양을 기르고 털을 깎아야 한다. 깎은 털을 실로 잣고 옷감을 만들고 염색해야 한다. 그것을 다시 자르고 바느질을 해서 겨우 옷 한 벌이 만들어진다. 그것만이 아니다. 이같은 활동이 가능하려면 직접 관련되는 일 외에도 농기구와 양의 우리와 공장과 석탄과 기계와 마차 등 수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만약 사회라고 하는 것이 인간들 간의 진정한 결합이 아니라면, 곡괭이질에서부터 마무리 바느질에 이르기까지 옷을 만들기 위한 전 과정을 자기 스스로 해내야만 한다.

  그러나 다른 인간들과 관계를 가지고 싶어하는 본능적 성향 덕에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그 작업이 분담된다. 한 가지의 특화된 작업만으로도 하나의 산업이 유지될 수 있게 될 때까지의 분업의 정도는 심화되어 간다. 그리고 각각의 과정을 통해서 부가된 가치에 비례해서 전체의 이익이 배분된다. 만약 이것을 인간들 간의 진정한 결합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무엇이 결합인지 내게 알려달라.

  어느 누구도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기 때문에, 모든 노동자들은 서로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공급해주어야 하며, 공통의 목적을 위해서 서로 도와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을 고려해보았을 때, 각각의 작업을 담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서로서로에 대해서 중간상(또는 매개자)들이다. 예를 들어 운송업자와 방적업자와 방직업자가 있다고 해보자. 만약 중간상을 기생충이라고 부른다면, 운송업자는 그 나머지 업자들에게 기생충 같은 존재가 된다. 하지만 운송이 필요 없는 일인가. 누군가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운송업자는 자신의 시간을 들였고, 고통을 참아내지 않았는가. 실을 잣고 천을 짠 사람들이 운송업자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을 하였다고 생각하는가. 일의 본질에서 차이가 나는가. 이 세 업자 모두 이익의 분배에 참여할 권리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이 세 사람 모두가 협상에 의하여 결정되는 가격을 받는 것에 잘못이 있는가.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형성된 분업이라고 해서 공통의 이익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는가. 사회주의자들이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인간들 간의 자유로운 결합관계를 깨고 분업을 파괴하며, 인류문명의 발전을 유보시켜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모든 사람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고 해서, 자기의 위치를 자기 자신의 책임하에 스스로 결정하고 거래한다고 해서, 그 모든 행위들을 이기적인 동기로 한다고 해서, 내가 지금까지 설명한 인간들 간의 자발적인 결합의 가치가 덜해지는가. 소위 개혁가라는 사람들이 자신의 방식을 우리들에게 강요하고 모든 사람을 자신의 의지에 따르게 해야만 인간들 간의 결합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자칭 미래를 예견한다고 자인하는 학자들의 주장을 생각하면 할수록 자기들은 오류를 범하지 않으며, 또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의지를 사람들에게 강요해도 괜찮다는 식의 무지한 생각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나의 논의가 너무 지엽적인 문제로 빠졌더라도 독자들께서는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생시몽주의자들(Saint-Simonians)이나 푸리에(Fourier)가 주창한 공동체주의 옹호자들, 카베(Cabet)가 주창한 이상향 이카리아(Icaria)를 흠모하는 자들의 책에 고무되어서, 중간상들을 비난하는 장광설이 언론과 의회를 가득 채우고 있는, 그리고 노동과 교환의 자유가 위협받고 있는 작금의 상황을 생각해볼 때, 다소 지엽적이긴 했지만 반드시 쓸모없는 일만은 아니었다고 자위해본다.

 

  7. 무역에 대한 규제

 

  한 보호주의자 선생(내가 아니라 샤를 듀팽(Charles Dupin)이 붙인 이름이다)께서 자기의 철광석 광산과 제철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연조건이 더 나은 벨기에가 우리의 보호주의자 선생보다 더 낮은 가격으로 프랑스에 철을 팔기 시작했다. 프랑스 사람들은 착한 플란더스(Flanders) 사람들 덕에 과거보다 싼 가격으로 철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이기적인 프랑스 사람들, 특히 못 제조업자, 철물제작자, 달구지목수, 기계공, 대장장이, 농부 같은 사람들은 철을 사기 위해서 중간상을 벨기에에 보내거나 자신이 직접 거기까지 가기도 했다. 하지만 보호주의자 선생은 이런 모든 것들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직접 그들을 혼내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손해를 보는 것은 자기뿐이었기 때문에 최소한 그것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해야만 했다. 그는 이렇게 다짐했다. 장총을 메고 권총을 허리에 차고, 탄창을 가지고서 내가 직접 전장에 나아가리라. 거기에서 나는 철물제작업자들과 못을 만드는 놈들과 대장장이와 기계공들과 열쇠장이들처럼 나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기는 놈들을 모두 죽여버리리라. 그렇게 본때를 보여준다면 그들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겠지.

  그런데 막상 떠나려고 하니 몇 가지 걱정이 앞을 막아섰다. 그는 이렇게 자문해보았다. 가만 있자, 그러다가 나의 동포인 프랑스인들과 나의 적인 벨기에놈들이 맞공격을 해오면 어떻게 하지. 내가 그들을 죽이기 전에 오히려 내가 죽을지도 모르겠는걸. 게다가 내 하인들을 모두 전쟁터에 내보낸다고 하더라도 전선 전체를 다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안고. 결국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겠구먼.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자유시장의 힘에 맡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돌아서려는 순간, 보호주의자 선생의 머리에 기막힌 생각이 번뜩였다.

  파리에 법을 만드는 공장이 있다는 생각이 퍼뜩 떠오른 것이다. 법이라는 것이 뭐야? 하고 그는 스스로 자문해보았다. 법이란 일단 공포되고 나면, 그것이 좋든 나쁘든 간에 모든 사람들이 지켜야만 하는 것이잖아. 사람들로 하여금 법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경찰이 조직되고, 또 그 경찰을 유지하기 위한 인력과 돈은 국민들로부터 강제로 징수되지.

  그러니 내가 그 멋진 법공장으로부터 "벨기에산 철의 수입을 금지한다"고 규정한 법을 얻어낼 수만 있다면, 나는 아주 횡재를 하는 셈이지. 내 하인들을 직접 전선에 내보내지 않더라도 정부가 대신 그 일을 해줄 테니 말이야. 정부는 철을 사용하는 금속노동자들이나 열쇠공, 못제조업자, 대장장이, 기능공, 기계공, 농부 같은 사람들의 아들들을 2만 명이나 채용해서 세관에 앉혀 놓을 것이고, 그들이 철의 수입을 막아주겠지. 그들에게 월급을 주려면 2천5백만 프랑 정도는 필요할 텐데, 그 돈은 다시 금속노동자들이나, 열쇠공, 못제조업자, 대장장이, 기능공, 기계공 같이 내가 만든 철을 사용할 사람들에게서 거두어들이면 될 거야. 돈 한푼 안 들여도 나의 사업은 내가 직전 전선에서 싸울 때보다 훨씬 잘 보호받게 되지. 브로커들의 농간에 놀아날 필요도 없을 거야. 내가 원하는 가격으로 철을 팔 수 있을 테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나는 그저 나의 속임수에 넘어간 사람들을 보면서 즐기면 그만이지. 그들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들이 유럽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겠지. 정말 멋진 작전이야. 약간 귀찮긴 하겠지만, 분명히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음이 분명해.

  그래서 우리의 보호주의자 선생은 법공장으로 향했다(다음에 언젠가는 보호주의자 선생이 법을 만들어내기 위해 저지르는 어둡고 비밀스런 거래들에 대해서 얘기할 기회를 갖겠다. 하지만 오늘은 공개적인 활동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겠다). 그는 그곳에서 의원들을 비롯한 높으신 분들께 이렇게 말한다.

  "벨기에산 철이 프랑스에서 10프랑에 팔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도 같은 값으로 팔 수밖에 없지요. 내가 받고 싶은 가격은 15프랑인데 그 괘씸한 벨기에산 철 때문에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벨기에산 철의 수입을 금지한다'라는 법을 하나 만들어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당장 가격을 5프랑으로 올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음과 같은 좋은 일들이 생기지요."

  "1백 킬로그램당 5프랑씩 더 받게 될 테니 나는 더 부자가 되겠지요. 그러면 내 광산의 채굴량도 늘어날 것이고 더 많은 사람들을 고용할 것입니다. 나와 내 고용인들이 더 많은 돈을 소비할 테니 우리들에게 물품을 공급하는 사람들도 이득을 보겠지요. 그 공급업자들은 다른 공장들에게 더 많은 주문을 낼 테니 온 나라의 경제가 번영하지 않겠습니까. 마치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 하나가 모든 방향에 걸쳐 수많은 동심원을 만들어내듯이 당신이 내 지갑 속에 넣어주는 돈도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이 말에 매혹된 나머지, 그리고 법 하나를 만들어서 사람들의 부를 그처럼 쉽게 늘릴 수 있다는 말에 현혹되어서, 입법자들은 수입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부를 만드는 것이 이처럼 쉬운 것이라면 도대체 힘들게 노동을 하고 저축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람. 법 하나만 잘 만들면 그만인 것을."

  그리고 실제로 우리의 보호주의자 선생이 예측했던 일들은 모두 현실로 나타났다. 하지만 결과들도 같이 발생했다. 즉 그의 추론은 틀렸다고 할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불완전한 추론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가 특혜를 요구하면서 내세운 것들은 보이는 효과뿐이었다. 그늘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효과들은 무시해버린 것이다. 실제로는 세 사람이 있는데 그가 언급한 것은 두 사람뿐이었다. 일부러 그렇게 했든지 아니면 잘 모르고 했든지 간에 우리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그같은 잘못을 바로잡는 일이다.

  보호주의자 선생의 금고 속으로 들어간 5프랑이 그 자신과 그로 인해 일자리를 잡게 되는 사람들에게 이득이 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만약 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 5프랑이 저 달로부터 공짜로 떨어진 것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돈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금속노동자, 못제조업자, 목수, 대장장이, 농부, 건축업자같이 선량한 시민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보호주의자 선생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일반시민들에게는 손해가 되는 것이다. 보호주의자 선생은 자신에게 주어진 5프랑이 국내산업을 보호하는 데에 쓰인다고 하지만, 그 정도라면 선량한 시민들에게 그 돈이 있을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원래는 다른 데에 던져졌을 돌이 법이 그것을 금했기 때문에 다른 곳에 던져졌을 뿐이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효과가 보이는 효과를 상쇄한다. 그리고 이 전체의 과정은 정의롭지 못하다. 더욱 통탄스러운 것은 그같은 부정의가 법에 의해서 자행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미 말했듯이 그들에 가려진 제3의 인물이 있다. 나는 그를 전면에 내세우고 싶다. 그래서 문제의 그 5프랑이 또다른 손해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보이려고 한다. 그래야만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될 테니까 말이다.

  우리의 굿펠로우씨에게 노동의 대가로 벌어들인 15프랑이 있다(아직 벨기에산 철의 수입규제가 이루어지기 전의 상태를 가정한다). 그가 그 15프랑으로 무엇을 할지 한번 생각해보라. 그 가운데 10프랑을 가지고 모자 하나를 산다. 그 모자를 산다는 것은 벨기에산 철 1백 킬로그램의 값을 치른 것과 같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남은 5프랑을 강물에 던져버리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만족에 필요한 무엇인가, 예를 들어서 부세(Bossuet)15)가 지은 "세계사 강론" 같은 책을 구매하는 데에 그 돈을 지출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굿펠로우씨는 국내산업을 진흥시키는 데에 다음과 같은 지출을 한 셈이다.

 

  파리의 모자제조업자에게 10프랑

  출판업자에게 5프랑

 

  굿펠로우씨 자신을 생각한다면 15프랑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만족을 얻은 셈이다.

 

  첫째, 1백 킬로그램의 철

  둘째, 책

 

  이제 벨기에산 철의 수입을 금지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우리의 굿펠로우씨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철의 가격이 15프랑으로 높아졌기 때문에 굿펠로우씨는 가진 돈을 모두 보호주의자 선생에게 갖다 바쳐야 한다. 1백 킬로그램의 철 이외에 책으로부터 얻는 즐거움은 사라져버린 것이다. 굿펠로우씨가 5프랑을 손해 보았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그렇다는 사실을 부인할 자가 있는가. 결국 수입제한 때문에 가격이 높아져서 소비자들이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사람들은 그만큼 국내산업이 이득을 볼 것 아니냐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 수입금지법으로 인해서 바뀌는 것은 돈의 행방일 뿐이다. 그 법이 없었더라면 모자제조업자와 출판업자에게 나누어졌을 돈이 제철업자에게로 몰려가는 것일 뿐이다.

  보호주의자 선생이 전선에서 직접 행사하려고 했다가 법을 이용해서 행사하고 있는 그 폭력은 도덕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매우 다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세상에는 법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한 약탈도 부도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건대 그보다 통탄스러운 상황은 없다. 어쨌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불법적인 약탈이든 합법적인 약탈이든 간에 그 경제적 효과는 같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든 그것은 당신의 자유이다. 하지만 문제의 차분히 생각해 본다면 합법이든 불법이든 간에 약탈로부터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수입규제가 보호주의자나 그의 산업(또는 당신이 그렇게 부르기를 원한다면 국내산업)에 5프랑의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두 가지 종류의 손해도 같이 발생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10프랑이면 될 것을 15프랑을 주고 사야만 하는 소비자인 굿펠로우씨와, 그 5프랑의 차이 때문에 수요를 잃게 된 다른 국내산업들이다. 이같은 손해들이 과연 받아들인 만한 손해인가 스스로 판단해보라.

 

  도덕: 강제력을 사용하는 것은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는 것이다. 하나님! 강제력을 사용해서 무엇인가를 생산해낼 수 있었다면 프랑스는 지금보다 훨씬 더 부유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8. 기계

 

  "기계에서 저주 있으라. 기계의 힘이 커진 결과 매년 수백만의 노동자로부터 일자리와 임금과 빵을 뺏어가고, 그들을 가난으로 몰아넣고 있구나. 기계에게 저주 있으라."

  무지와 편견으로부터 나오는 이런 아우성이 신문지면을 덮고 있다. 하지만 기계를 저주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 그 자체를 저주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같이 말도 안되는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16)

  만약 그들의 주장이 옳다고 해보자. 그것은 결국 어리석고 정신적으로 정체되어있는 나라,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생각하고, 연구하고, 발명하는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선사 받지 못한 나라에게만 복지와 부와 행복이 주어진다는 말이 된다. 만약 그들이 옳다면 철, 불, 풍력, 전기, 화학과 물리법칙 등 자연의 힘을 이용하는 나라는 누더기와 비참한 오두막과 가난과 정체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그야말로 루소가 말했듯이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타락한 동물이다"라는 말이 맞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틀렸다. 인간이란 한순간이라도 더 작은 노력으로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고 하지 않는 적이 없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들은 생각하고 노력하고 발명을 한다. 따라서 만약 그들의 주장이 옳다면 인간은 쇠퇴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인간들의 지적인 열망이라는 것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고통만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의 주장이 옳다면, 기계가 풍부한 랭카스터(Lancaster) 지방의 주민들은 일자리를 찾아서 기계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아일랜드(Ireland)로 갔어야 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야만의 그늘이 문명을 가리고, 또 무지하고 미개한 시대에 문명이 만개했어야 했다.

  이같은 모순이 발생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주장하는 것 뒤에는 무엇인가 숨겨진 것이 있음이 분명하다. 여기서는 그처럼 가려진 것을 찾아내려고 한다.

  수수께끼의 열쇠는 바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있다. 지금부터 보이려는 것은 내가 여태껏 해왔던 것들의 반복일 뿐이다. 문제의 성격이 같기 때문이다.

  인간은 거래를 하려는 자연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 상대방이 외국의 제조업자든, 아니면 국내의 기계제조업자든 간에 강제적으로 막지만 않는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노력을 아끼기 위해서 거래에 나서려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한 반대의 논리는 양쪽 모두 다 같다. 그같은 거래를 허용하면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의 진정한 효과는 일자리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일을 할 수 있도록 인간의 노동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동일한 장애물 즉 같은 성격의 강제력이 등장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외국인들이 국내에서 경쟁하는 것을 금지하고, 기계가 노동과 경쟁하는 것을 금지한다. 인간으로부터 자유를 뺏아가는 것만큼 인간의 자연스런 성향을 질식시키는 것이 또 있을까?

  다른 많은 나라들에서는 입법자들이 한 종류의 경쟁만을 금지하고 다른 경쟁들에 대해서는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저 쳐다보고만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그 나라의 입법자들이 일관적이기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잘못된 길을 가다 보면 반드시 모순이 나오게 마련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인류는 이미 파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잘못된 원칙이 완벽하게 실천된 것을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내가 다른 곳에서 말했던 것처럼 부조리는 모순의 한계이다. 거기다가 한마디 더 보태고 싶다. 부조리는 모순의 증명이다.

  이제 우리의 논증을 시작해보자.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굿펠로우(James Goodfellow)씨가 2프랑으로 두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작업량을 반으로 줄여줄 수 있는 도구를 발명하게 되었다. 굿펠로우씨는 한 명의 노동자를 해고하고 1프랑을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노동자 한 명을 해고했다는 것, 그것은 보이는 효과이다. 사람들은 이것만을 보고 투덜거리기 시작한다.

  "문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가. 자유는 평등과 양립할 수 없어. 인간의 마음이 자연을 정복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결과 한 노동자는 영원히 빈곤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되지. 어쩌면 굿펠로우씨는 두 명의 노동자를 계속 고용할 수도 있었을 거야. 그러나 두 명의 임금을 합쳐서 1프랑만 주었겠지. 노동자들끼리 서로 경쟁할 것이기 때문이지. 그렇게 해서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지는 거야. 사회를 개조해야 해."

  당초의 전제를 인정한다면 그럴듯한 결론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전제와 결론이 모두 틀렸다. 보이지 않는 다른 반쪽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생산방식으로 인해서 굿펠로우씨가 돈을 절약하게 되었다는 것과 절약된 돈의 효과가 고려되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발명품으로 인해 1프랑만 가지고도 같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1프랑은 여전히 그의 손에 남아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노동을 제공할 사람이 한 사람 더 생겼고, 또 남은 1프랑을 가지고 그를 고용할 자본가가 더 생긴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만나서 결합하게 된다.

  노동의 공급과 수요, 그리고 임금에 대한 수요와 공급 사이의 이같은 관계가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과거에 두 사람의 노동자에 의해서 수행되던 작업이 이제 새로운 발명품이 등장함으로 인해 한 사람의 노동자만으로, 그리고 1프랑만으로도 수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나머지의 노동자는 그 절약된 1프랑을 가지고 다른 일을 하게 된다.

  변한 것이 무엇인가. 새로운 발명으로 인해 국가 전체로 보면 만족 수준이 높아진 것 아닌가. 다시 말해서 발명이란 싼값으로 자연을 정복하는 수단이며, 그리고 싼값으로 이윤을 만들어주는 수단이다.

  이 말을 듣고 당신은 다음과 같이 말꼬리를 물고늘어질지 모르겠다.

  "기계를 발명해서 나오는 모든 이윤은 자본가의 몫이다. 노동자계급이 단기적으로 보는 손해야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그들이 새로운 기계로부터 얻는 것이 무엇인가. 당신이 말한 바가 옳다면 새로 도입된 기계가 하는 일이란 자원을 재배치하는 것 이외에 무엇인가. 그로 인해서 자원이 줄어들지 않는다고 당신은 말하지만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사실 아닌가."

  내가 말한 것에 대한 모든 반박 논리마다 일일이 다 대꾸할 수는 없다. 내가 여기서 하고자 하는 것은 기계에 대한 편견과 무지 중에서도 가장 위험하고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대꾸하는 것이다. 새로 도입되는 기계로 인해 과거에 그 분야에 묶여 있던 노동력이 다른 일을 할 수 있게 되고, 또 기계로 인한 노임의 절약분은 다른 분야에서의 추가적인 고용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보이고 싶을 뿐이다. 이 추가적인 노동력과 돈이 결합되면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것들이 생산될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기계의 도입으로 인해 나타나는 최종적인 결과는 과거와 같은 노동력으로 더 많은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추가적인 만족은 누구의 차지가 될까?

  그렇다 당신들의 말대로 처음에는 그 기계를 최초로 사용하게 될 자본가, 또는 발명자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창의적이고 모험적인 행동에 대한 대가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다음 단계이다. 새로운 기계로 인해서 얼마만큼의 노동력이 풀려나든지 간에 그 결과 절약되는 돈은 새로운 노동력들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하게 된다.

  자본가들은 어떨까? 자본가들끼리의 경쟁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처음에 얼마의 돈을 절약할 수 있든 간에 자본가들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제품의 가격은 그가 절약한 돈의 크기만큼 낮아지게 된다.

  이런 단계에 들어서게 되면, 새로 발명된 기계의 덕을 보는 것은 더 이상 발명자나 자본가가 아니다. 최종적인 수혜자는 소비자이며 노동자까지를 포함한 대중이며 결국 인류 전체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있다. 즉 가격의 하락으로 인해서 소비자들에게 돌아가는 절약분은 임금으로 지불될 금액을 늘려놓게 된다는 사실이다. 기계가 임금을 빼앗아간 것 같지만 결국은 그 돈을 다 돌려주는 것이다.

  다시 앞의 예로 돌아가 보자. 우리의 굿펠로우씨는 임금으로 2프랑을 주어야만 했다. 이제 새로운 기계가 발명됨으로 인해 1프랑만 주면 되는 상황이 되었다.

  만약 최종 생산품의 가격이 변하지 않는다면, 같은 물건을 생산하는 데에 필요한 노동자의 숫자는 하나가 줄어든다. 그것이 보이는 효과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굿펠로우씨가 절약한 나머지의 1프랑은 다른 사람을 고용하는 데에 사용되는 것이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효과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다 보면 가격인하 경쟁이 이루어지게 되고 그 결과 굿펠로우씨가 절약해온 그 1프랑은 없어지게 된다. 그는 더 이상 그 1프랑을 사회의 고용 1인을 늘릴 수 있도록 방출하지 않는다. 그 1프랑은 다른 누군가의 차지가 된다. 누구든 그 상품을 사는 사람은 1프랑 낮은 가격을 지불할 것이기 때문에 1프랑 절약분은 임금으로 지급될 돈을 늘려놓는다. 이 역시 보이지 않는 결과이다.

  이 문제에 대한 다른 설명방식이 제안되기도 한다.

  "기계는 생산비를 낮추고 제품의 가격을 낮춘다. 그 결과 그 제품에 대한 소비가 늘어날 것이고, 그것이 다시 생산을 촉진하여 결과적으로 기계가 발명되기 전보다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이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서 남의 글을 인용하고 억지로 짜맞추는 등 여러 가지 재주를 부린다. 매우 그럴듯하지만 과학적이지는 못한 주장이다.

  그들의 주장이 맞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만약 가격이 하락함에도 불구하고 소비가 늘지 않을 경우, 기계는 고용을 줄인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은 틀린 말이다.

  모든 사람들이 모자를 쓰고 다니는 나라가 있다고 해보자. 기계가 도입되어 모자의 가격이 절반으로 떨어졌다고 해서 모자 소비가 두배로 늘어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럴 경우 그 나라 노동력의 일부가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잘못된 추론방식을 택한다면 그렇겠지만, 나의 추론방식으로는 그렇지 않다. 모자에 대한 수요가 전혀 늘지 않더라도 임금으로 지불될 돈은 고스란히 남아있을 것이다. 기계가 사용되지 않았더라면 모자산업으로 갔어야 할 돈들이 소비자의 손에 남아 있게 되고 그 돈은 결국 기계로 인해 풀려난 노동력에게 임금으로 지불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모든 산업들의 발전이 촉진될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들이 바로 사실이다. 과거의 신문값은 80프랑이었다. 이제 그 값은 48프랑이 되었다. 구독자는 32프랑을 절약하게 되었다. 그 32프랑이 신문산업의 다른 제품을 구입하는 데에 쓰여질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어딘가에는 그 돈이 쓰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중의 1프랑은 더 많은 신문을 사는 데에, 다른 1프랑은 음식을 사는 데에, 다른 1프랑은 더 좋은 옷을 사는 데에, 그리고 더 좋은 가구를 사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

  이렇게 모든 산업들이 상호 연결되어 있다. 각 산업들을 연결하는 통로는 눈에 잘 띄지 않지만, 광대한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한 부분에서의 절약은 다른 모든 부문의 이득이 된다. 이것은 반드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무엇인가를 절약한다고 해서 일자리가 줄어든다든가 임금이 떨어지는 법은 없다.17)

 

  9. 신용

 

  늘 그래 온 것이긴 하지만 지난 수년간 특히 더 심해진 것이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부를 나누어주기 위해서 모든 이들에게 융자를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난 2월 혁명18) 이후 사회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이같은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기사들이 파리의 신문들에만 1만 건이 넘는다고 하더라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환상만으로는 어느 것도 해결할 수가 없다. 이같은 의미에서 볼 때, 융자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이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생산물과 경화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으며, 경화와 단순한 불환지폐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그같은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은 혼돈 때문이었다.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화, 주화, 은행권 등 교환을 매개하는 수단들을 머릿속에서 지워야 한다. 융자의 실제 알맹이는 생산물 그 자체이다.

  어느 농부가 쟁기를 구입하기 위해서 50프랑을 융자받을 한다면, 실질적으로 그가 빌리려 하는 것은 50프랑이라는 돈 그 자체가 아니라 쟁기인 셈이다.

  그리고 어느 상인이 집을 사기 위해서 2만 프랑을 융자받으려 할 경우, 그가 빌리려고 하는 것은 2만프랑이라는 돈이 아니라 집인 셈이다.

  돈이 필요한 것은 여러 거래상대방간의 거래를 원활하게 해주기 위함일 뿐이다.

  피터(Peter)는 쟁기를 가지고 있고 제임스(James)는 돈을 가지고 있다. 윌리암스(William)는 쟁기를 빌리고 싶다. 그런데 피터는 쟁기를 빌려주지 않으려고 하는 반면 제임스는 돈을 빌려주려고 한다. 윌리암스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그는 제임스에게 돈을 빌려서 그 돈으로 피터에게서 쟁기를 구입한다.

  누구도 돈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해서 돈을 빌리지는 않는다. 돈을 빌리는 것은 생산물을 얻기 위함이다.

  어느 나라든 간에 존재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생산물들을 거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통되고 있는 돈의 액수가 얼마가 되었든 간에, 그리고 원하는 물건이 무엇이었든 간에(그것이 쟁기이든, 집이든, 도구이든, 식량이든, 원료이든 간에) 빌리는 사람들이 빌릴 수 있는 것의 총량은 그것의 소유자들의 빌려주는 것의 총량보다 클 수 없다.

  누군가 무엇을 빌린다는 것은 빌려줄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그리고 융자란 바로 그 빌리는 행위임도 잊지 마라.

  사정이 이럴진대, 융자기관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빌리려는 자와 빌려주려는 자들이 서로 서로를 쉽게 찾을 수 있게 해주고, 또 서로 상대방이 원하는 조건을 쉽게 알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뿐이다. 그들이 개입해서 빌려주려는 것과 빌리는 것의 총량을 늘릴 수는 없다.

  하지만 요즈음의 사회개혁자들이 원하는 대로 하자면 금융기관들은 그같이 불가능한 일을 해내야만 할지 모른다. 소위 사회개혁가라는 이름의 신사분들이 원하는 것은 쟁기와 집과 도구와 식량과 원료를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처럼 불가능한 일을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바로 국가의 지급보증이라는 수단을 통해서이다.

  이 문제를 생각할 때는 매우 조심스러워야 한다.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쉽사리 눈에 뜨이지 않는 것들도 많기 때문이다. 이제 이들 두 가지를 다 바라보자.

  쟁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들인데, 실제로 프랑스내에 존재하는 쟁기는 하나뿐이라고 생각해보자. 그 하나뿐인 쟁기의 주인을 피터라고 해보자. 존(John)과 제임스 두 사람이 그 쟁기를 빌리고 싶어한다. 존은 평소에 정직했고, 재산도 있으려니와 명망도 있기에 사람들은 그를 신뢰한다. 즉 존에게는 신용이 있는 것이다. 반면 제임스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피터는 자신의 쟁기를 존에게 빌려주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이 과정에 국가를 개입시키고 싶어한다. 국가는 피터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가진 쟁기를 제임스에게 빌려주어라. 제임스가 상환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 국가가 나서서 해주겠다. 우리의 지급보증은 존이 스스로의 신용으로 하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물론 우리 국가라는 것이 그 스스로 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납세자들로부터 거두어들이면 될 테니 얼마나 안전한가. 만약 필요하다면 우리 국가가 세금을 거두어서 이자와 원금을 모두 갚아주겠다."

  그래서 피터는 제임스에게 그 쟁기를 빌려주었다. 그것은 보이는 결과이다.

  "우리의 계획이 이루어낸 성공을 보라. 국가가 개입한 덕에 가난한 제임스가 쟁기를 쓸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제임스는 더 이상 손으로 삽질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이제 그는 스스로 재산을 만들어갈 것이다. 이는 그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에도 큰 이득임이 분명하다."

  신사분들, 제발 그러지 마시오. 그것이 나라 전체에 이득이 된다고요? 보이지는 않는 결과까지를 생각한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거요.

  그들이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하나뿐인 쟁기가 제임스한테 간 결과 존이 그 쟁기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제임스가 손으로 삽질을 하는 대신 쟁기를 쓰게 된 결과 존은 쟁기 대신 손으로 삽질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들은 이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결국 사람들이 추가적인 융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은 융자의 재배분일 뿐이다.

  그들이 또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같이 융자를 재분배하는 과정에서 정의롭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첫째는 존에 관한 일이다. 정부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정직과 능력만으로 융자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부당하게도 자신의 권리를 뺏긴 셈이다. 둘째는 납세자들의 문제이다. 자신과 별관계도 없는 일을 위해서 부당하게 세금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존에게도 똑같이 해주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빌려줄 수 있는 쟁기의 숫자는 하나뿐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하나뿐인 쟁기가 둘이 될 수는 없다. 그들의 주장은 빌려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빌릴 수 있다는 결론으로 귀착되고 만다.

  내가 논리를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복잡한 금융제도라고 할지라도 정부개입을 통해서 융자를 늘린다고 해서 융자 총액이 늘 수는 없다. 다만 재분배 효과만이 있을 뿐이다. 한 시점을 놓고 볼 때, 한 국가내에 존재하는 자본의 총량은 일정하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어떤 용도로든 쓰이고 있다. 신용이 없는 자들의 융자금 상환을 국가가 보증해줌으로 인해 빌리려는 자들의 숫자가 커지고 그 결과(납세자들의 부담을 통해서) 이자율은 높아진다. 하지만 빌려주려는 사람들의 숫자나 융자액의 총가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신용거래를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결단코 그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법을 통해서 인위적으로 차입을 장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차입을 방해하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의 제도속에 신용이 형성되고 전파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있다면 법으로 하여금 그것을 제거하게 하라. 그것만큼 바람직한 것은 없다. 그 이상의 것을 하려는 사회개혁가가 있다면 그는 사회개혁가라는 이름값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19)

 

  10. 알제리아 문제

 

  네 명의 발언자들이 서로 청중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목청을 높이고 있다. 처음에는 한목소리를 내다가 나중에는 제각각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들은 프랑스의 힘과 영광에 대해서 말한다. 광대한 프랑스 식민지의 미래와 잉여인구의 재배분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씨를 뿌려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들의 달변이 도달하는 궁극적인 귀착점은 바로 다음과 같은 말이다.

  "5천만 프랑의 예산을 통과시켜 주시오. 그 돈으로 우리는 알제리와(Algeria)에 항구와 도로를 만들어 우리의 주민들을 실어나를 것이고, 그들을 위해 집을 짓고 터를 닦을 것이오. 그렇게 되면 당신들은 프랑스 노동자들의 실업이라는 문제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이며, 아프리카의 고용을 늘릴 것이며, 마르세이유(Marseilles)의 교역량을 늘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이에게 이익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5천만 프랑이 쓰여지는 곳만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맞는 말이다. 그 돈은 이미 정부의 재정에 들어온 이후의 사태만을 주목한다면 분명히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 돈의 출처를 생각해본다며 답이 그렇게 분명한 것은 아니다. 그 돈이 쓰여지면서 좋은 일들을 하지만 그 돈을 거두면서 자행된 나쁜 일들 또한 생각해 보라. 그들의 주장처럼 한정된 시야에서 본다면 모든 것이 이득이다. 바베리(Barbary)에 지어지는 집은 눈에 보이는 결과이다. 바베리에서 만들어지는 이윤과 일자리, 프랑스에서의 실업의 감소, 마르세이유(Marseilles)에 주어지는 교역량의 증가 등은 모두 보이는 결과이다.

  하지만 눈에 잘 띄지 않는 것도 있다. 국가가 지출하는 그 5천만 프랑은 납세자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다. 국가가 아니었더라면 납세자들이 그 돈을 지출했을 것이다. 공공지출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좋은 것들 뒤에는 납세자들의

사적 지출이 줄어듦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해로운 것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굿펠로우씨가 공들여 번 5프랑을 가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가정을 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하지만 그 돈을 어딘가에 쓰려고 하지 않았다면 왜 그 돈을 벌려고 노력했겠는가. 그 돈으로 정원에 담을 치려고 했었다면 그 일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결과이다. 농지에 배수시설을 설치하려 한 사람이라면 그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농지에 배수시설을 설치하려 한 사람이라면 그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결과이다. 도구를 더 장만하려고 한 사람은 그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결과이다. 세금을 내지 않았더라면 더 좋은 옷을 입을 수도, 더 잘 먹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들의 교육을 더 잘 시킬 수 있었을 것이고 딸의 지참금을 더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선단체에 가입했을지도 모른다. 세금을 거둠으로 인해서 이 모든 것들을 할 수가 없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결과이다. 직접적으로는 그 돈을 이용해서 얻게 될 직접적인 만족들이 없어진다는 것이고, 간접적으로는 도랑파는 사람, 목수, 대장장이, 양복장이, 동네 서당 훈장들의 일자리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들 두 가지가 다 보이지 않는 결과이다.

  우리 프랑스의 시민들은 알제리아(Algeria)의 미래에 대해서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그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시민들은 알제리아의 미래가 좋아지는 사이에 프랑스 자신의 형편이 나빠지는 것도 걱정해야 한다. 사람들은 내게 마르세이유의 번영을 말하지만, 그것을 위해서 세금이 거두어졌고 그 결과 다른 지역에서 산업이 쇠퇴해가고, 일자리가 파괴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도 지적하고 싶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바베리에 옮겨간 주민들 덕에 남아 있는 인구들이 짐을 덜게 된다."

  그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들을 알제리아까지 수송하기 위해 그들이 국내에서 소비했을 자본의 두세 배나 많은 자본이 빠져나갔다 해도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20)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이다. 공공지출이 가져오는 좋은 것들의 뒤에는 더 많은 사악한 것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은 알아채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능력을 다해 독자들에게 두 가지 면을 다 고려하라고 권하는 바이다.

  공공지출의 문제를 검토할 때는 그 지출 자체의 효용이 어느 정도인가만을 따져야 한다. 그것으로 인해서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식의 논리는 무시해버린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환상일 뿐이다. 공공지출로 인해서 일자리가 늘어나는 것이라면 민간지출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 공공지출과 고용은 서로 관계가 없는 문제들이다.

  알제리아에 투자될 공공지출 그 자체의 필요성을 이 글에서 논할 수는 없다.

  그래도 이 말만은 꼭 해야 할 것 같다. 경제적 이득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세금을 거두어서 공공지출을 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고? 여기에 그 이유가 있다.

  첫째, 어떤 형태의 조세든 간에 일단 시행이 되면 어느 정도는 정의의 원칙이 침해당한다. 제임스 굿펠로우씨가 1백 수sou를 벌려고 애썼던 것은 그 돈으로 무엇인가 만족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돈을 거두어서 다른 누군가에게 준다는 것은 그를 불쾌하게 할 것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돈을 거두는 사람은 왜 그 돈을 세금으로 거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이유를 설명할 의무가 있다. 국가가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 하는 다음과 같은 말은 정말 메스껍다.

  "당신에게 거둔 1백 수를 가지고 다른 누군가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줄 것이다."

  제임스 굿펠로우씨는 (깨닫자마자) 다음과 같이 답할 것이다.

  "세상에, 그럴 거라면 내가 직접 그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겠소."

  납세자의 이같은 주장을 무시하고 나면 정부의 다른 주장들이 벌거벗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예산당국과 제임스씨간의 논쟁은 아주 단순화되어 버린다. 정부가 제임스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생각해 보자.

  "당신이 스스로의 안전을 보호하는 대신 우리가 경찰관을 고용하려고 하오. 또 당신이 매일 건너다니는 도로를 만들고, 당신의 재산과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법관을 고용할 것이고, 국경선을 지키기 위해서 군인들을 고용하려고 하오. 그러니 당신이 1백 수를 세금으로 납부하시오."

  사정이 그렇다면 제임스 굿펠로우씨는 두말없이 그 돈을 낼 것이고, 내가 지금까지 공공정책을 비난한 말들은 무의미해져 버린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부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당신에게서 1백 수를 받아가려고 하오. 그중의 1수를 떼어내서 만약 당신이 농사를 망쳤을 때 당신에게 보상금으로 쓰려고 하오. 또는 당신이 당신 자녀를 가르치고 싶어 하지 않을 때 우리가 대신 그를 가르치는 데에 쓸 수도 있을 테고, 1백 가지 음식이 차려진 장관들의 101번째의 음식을 차려놓는 데에 쓸 수도 있을 것이오. 그 나머지의 돈으로는 알제리아에 주택을 짓고, 알제리아 정착민들을 지원하고, 알제리아 주둔군들과 그들을 감독하는 지휘관들을 지원하려 하오."

  우리의 불쌍한 제임스는 다음과 같이 외칠 것임이 분명하다.

  "법이 이런 것이라면 도대체 정글의 법칙과 다를 것이 무엇이오."

  물론 정부도 제임스가 이처럼 반응하리라는 것을 미리 예견한 터라 나름대로의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정부는 그 1백 수가 고용에 미치는 영향을 미리 역설한다. 장관의 저녁상을 차리는 요리사와 상인들을 부각시킨다. 정부는 또 5프랑으로 일자리를 얻게 되는 식민지 정착민들과 군인들과 장군들을 부각시킨다.

  다시 말해서 정부는 보이는 효과만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제임스가 보이지 않는 결과들에 대한 추론을 할 줄 모른다면 이쯤에서 속아넘어가 버리고 말 것이다. 내가 똑같은 말을 반복해가면서까지 제임스를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정부의 지출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일자리를 재배분할 뿐이다. 이 사실로부터 중대한 두 번째의 반론이 제기된다. 일자리의 재배분은 지구상의 인구분포와 관련된 자연법칙을 교란시키는 것이다. 5천만 프랑이 납세자들의 손에 남아있었다면, 그 납세자들이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4만 자치단체들에서 고용이 창출되었을 것이다. 그 5천만 프랑은 모든 이들과 국토를 이어주는 끈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 돈은 최대한 많은 숫자의 노동자들과 산업들로 분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시민들로부터 그 돈을 빼앗아 다른 장소에다 쏟아넣으려 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본토로부터 노동력이 이동할 것이다. 또 그에 비례하여 국적을 버리는 노동자들과 유랑인구들이 생겨난다.

  감히 말하건대 그렇게 자리를 옮긴 노동자들은 세금으로 지원되는 돈이 바닥날 경우 위험한 지경에 처할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런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프게도 이같은 일들은 쉽게 눈에 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같이 쉽고 멋지게 얻어지는 것들에 갈채를 보낸다. 그리고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그같은 정책을 반복해달라고, 그리고 확장해달라고 요구한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만약 그 돈이 납세자들의 수중에 남아 있었다면 같은 숫자의, 그리고 더 유용한 일자리들이 프랑스 국내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조세를 거두어서 그 돈을 알제리아에 투자할 경우, 종래의 일자리들은 없어지고 만다. 그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결과이다.

 

  11. 절약과 사치

 

  보이는 결과가 보이지 않는 결과들을 가져서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은 정부의 공공지출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관한 이같은 정치경제학적 현상은 도덕적 기준을 망쳐놓기도 한다. 그것은 국민들로 하여금 도덕적 이해관계와 물질적 이해관계가 서로 대립되는 것인 양 생각하도록 한다. 그것만큼 맥빠지고 비극적인 일이 어디 있겠는가.

  잘 생각해 보라. 자식에게 절약과 절제를 가르치고 싶어 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아버지뿐만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다 겉치레와 사치를 죄악시한다. 이것은 지극히 좋고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이상한 풍조가 만연되고 있다.

  "재물을 쓰지 않고 쌓아두면 사람들의 피가 말라간다."

  "위대한 자들의 사치는 범인들에게 위문품이 된다."

  "낭비벽이 있는 사람은 자신을 망칠지는 모르지만 국가는 살찌게 한다."

  "가난한 자들의 빵은 부자들의 잉여물로부터 나온다."

  이 괴상망측한 말들은 도덕적 사고와 경제적 사고간의 극단적 대립을 보여준다. 생각이 제대로 박힌 사람치고 이 말을 듣고서 마음이 편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는 결코 이같은 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서로 상충되는 두 개의 사고가 인간의 마음속에 공존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어느 쪽을 택하든 간에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 인간은 품위를 잃게 된다. 절약만을 강조하다 보면 필요한 것조차 쓰지 못하게 되고, 낭비를 강조하다 보면 도덕적 파탄을 면하기 어렵다.

  다행히도 이같은 대중적 견해들은 절약과 사치간의 관계를 잘못 해석한 결과이다. 오직 보이는 결과만을 고려했을 뿐 보이지 않는 결과는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이같은 잘못을 고치려고 한다.

  몬도(Mondor)와 아리스테(Ariste)는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은 덕에 각자가 매년 5만 프랑씩의 소득을 벌 수 있게 되었다. 몬도는 요즘 유행하는 식의 인류애를 실천하기로 했다. 낭비를 하는 것이다. 매년 서너 차례씩 가구를 바꾸었고, 매달 마차도 새 것으로 바꾸었다. 사람들은 그가 재산을 탕진하는 뛰어난 방식을 칭찬했다. 그가 돈을 쓰는 방식은 발자크(Balzac)나 알레산더 듀마(Alexander Dumas)도 무색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소리 높여 그를 칭찬했다.

  "몬도(Mondor) 얘기를 해주세요. 몬도여, 만수무강하시라. 그는 노동자들의 은인입니다. 그는 인민들에게 천사 같은 존재입니다. 그가 사치 속에 탐닉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의 마차가 행인들에게 진흙을 끼얹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 그의 사치로 인해 그의 인간적인 존엄과 인류 전체의 존엄이 상처를 입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대수라는 말입니까? 그가 스스로 노동을 하지는 않지만, 가진 재산이라도 탕진하는 통에 세상에 쓸모 있는 존재가 된 것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그는 화폐의 소통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정원은 늘 만족스러워하는 상인들로 가득하지요. 사람들이 돈은 돌고 도는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까?"

  아리스테는 전혀 판이한 인생경로를 택했다. 그를 이기주의라고 부를 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개인주의자임은 분명했다. 그는 돈을 지출할 때 합리적이려고 노력했으며 쾌락을 추구할 때도 적당한 정도의 수준에서 절제를 했다. 또 그는 그의 자녀들의 미래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는 돈을 저축하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아리스테를 두고 이렇게 말할 것이었다.

  "이 야비한 구두쇠 부자놈은 아무 쓸모도 없어. 물론 그가 살아가는 단순한 인생에는 인상적인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 그는 인간적이기도 하고 호의를 베풀기도 하고 관대하기도 하지. 하지만 너무 타산적이야. 그는 자기가 벌어들인 것을 다 쓰지를 않아. 그의 집은 호화스럽게 번쩍이지도 않고 사람들로 넘쳐나지도 않지. 그러니 목수나 마차 만드는 사람이나 말장사나 제빵업자들이 그에게 고마워 할 이유가 없잖아."

  인간의 도덕에 매우 해로운 이같은 판단은 눈에 쉽게 띄는 한 가지 사실, 즉 낭비벽이 심한 사람의 행동에만 기초를 두고 있다. 근검절약하는 다른 형제가 하는 지출은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신께서 만들어놓은 질서는 정말 위대하다. 다른 모든 것들이 그렇듯이 신이 만들어놓은 질서하에서는 근검절약과 도덕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다. 아리스테의 지혜는 몬도의 행동에 비해 그저 단순히 가치가 있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이윤을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더 많은 이윤의 귀속처는 아리스테나 막연한 사회 전체만이 아니다. 현재의 노동자들에게, 그리고 현재의 산업 전체에 이득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증명하고 싶다면 인간의 육안으로는 식별할 수 없는 숨은 결과들을 살펴보면 된다.

  몬도의 흥청망청하는 지출이 가져오는 효과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다. 사륜마차, 이륜마차, 쌍두마차 등 그가 구입한 갖가지의 마차들과 그의 천장화, 화려한 카펫, 위용을 자랑하는 저택 등은 모든 이의 눈에 띈다. 누구든지 그가 경마에 자신의 서러브레드(thoroughbred)를 출전시킨 것도 볼 수 있다. 그가 파리의 집에서 주최한 만찬은 거리의 군중들을 들뜨게 한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정말로 멋진 사람이야. 자기 재산에 구멍이 뚫릴 텐데도 저렇게 사람들을 대접하다니 말이야."

  이것은 보이는 효과이다.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아리스테의 소득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알기는 쉽지가 않다. 그러나 그 돈이 쓰이는 경로를 끝까지 추적하다 보면 아리스테의 소득도 몬도의 것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일원까지 고용을 늘리는 데에 쓰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결정적인 차이가 있기는 하다. 어리석은 몬도의 지출은 점점 줄어들어서 결국은 파경에 다다를 것이지만, 아리스테의 지출은 매년 늘어갈 것이라는 점이다.

  이치가 이렇다면 공공의 이익은 도덕적 원칙과 대립되지 않는다.

  아리스테는 매년 그 자신과 그의 집을 위해서 2만 프랑을 지출한다. 만약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아리스테를 현명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가난한 자들이 겪는 고통에 마음이 아파서,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의무가 있다는 생각에서 1만 프랑을 기부했다. 사업을 하거나 공장을 하거나 농사를 짓는 그의 친구들 중에서도 경제적으로 곤란의 지경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리스테는 그들을 도와줄 요량으로 1만 프랑을 다시 떼어놓았다. 마지막으로 딸 시집 보낼 때에 줄 지참금과 아들의 장래를 위한 자금 등을 위해서 또 다른 1만 프랑을 매년 저축해나갔다.

  아리스테의 지출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개인적인 경비 2만 프랑

  자선 1만 프랑

  친구 도와준 돈 1만 프랑

  저축 1만 프랑

 

  각각의 항목들을 살펴본다면 한 나라의 산업발전을 촉진하지 않는 돈은 한 푼도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 경비: 이렇게 지출된 돈은 노동자들과 상인들에게 배분된다. 몬도의 경우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의하지 않겠다.

 

  자선: 여기에 투입된 돈도 위와 같은 이유에서 산업을 촉진한다. 아리스테가 직접 소비하는 것은 아니지만 돈을 받은 사람들이 그 돈을 쓸 것이기 때문에 제빵업자와 정육업자, 양복장이, 가구상인 등이 혜택을 보게 된다. 이같이 단순한 소비자의 대체는 산업 전체의 구조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1백 수를 가지고 아리스테 자신이 그 돈을 지출하는 것이나 가난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 돈을 지출하게 하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다.

 

  친구 도와준 돈: 아리스테의 도움을 받은 친구가 그 돈을 받아서 내다 버릴 리는 없다. 다른 물건을 구입하거나 빚을 갚는 데에 그 돈을 사용할 것이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산업의 발전이 촉진된다. 몬도가 서러브레드를 구입하기 위해서 지출한 1만 프랑이 아리스테나 그의 친구가 옷감을 사기 위해서 지출한 1만 프랑보다 산업발전에 더 큰 도움이 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거든 나와보라. 만약에 그 돈을 가지고 빚을 갚았다면, 그 돈을 받은 제3의 인물이 그 돈을 지출하게 될 것이다. 사업을 위해서든 공장을 위해서든, 광물자원을 채취하기 위해서든 간에 그는 그 돈을 가지고 뭔가를 할 것이다. 결국 누가 그 돈을 쓰든 간에 그는 아리스테와 노동자들간의 매개자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지출자의 이름은 바뀌지만 지출은 그대로이다. 따라서 산업의 발전을 촉진하는 효과도 다름이 없다.

 

  저축: 이제 저축한 돈 1만 프랑이 남았다. 예술이나 산업, 노동자들의 고용을 촉진한다는 차원에서 본다면 몬도가 아리스테보다 나은 것처럼 보이는 돈이다. 물론 도덕적으로는 아리스테가 몬도보다 약간 나은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위대한 자연의 법칙과 경제의 법칙이 그처럼 충돌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에게는 정신적 고통 이상의 것이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이익과 도덕적으로 옳은 것 중에서 양자택일식의 선택을 해야만 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암울하다. 다행히도 실제는 그렇지 않다21). 아리스테가 도덕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우월하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역설적으로 들리는 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저축한다는 것은 지출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테가 그 1만 프랑을 저축한 목적이 무엇일까? 마당에다가 파묻어두기 위함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자본과 소득을 늘리기 위함이다. 따라서 당장의 만족을 위해서 쓰여지지 않은 이 1만 프랑은 땅이나 주택이나 정부의 채권이나 기업체의 지분이라는 형태로 투자될 것이다. 십중팔구는 브로커나 은행의 도움을 받을 것이지만. 그 돈이 지출되는 경로를 따라가다 보면 중간매개자가 판매자일 수도 있고 은행가들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그 돈으로 가구나 보석, 말 같은 것들을 구입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결국은 산업생산을

촉진하는 용도에 쓰이게 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아리스테가 저축한 1만 프랑으로 땅이나 국채를 구입한다는 것은 결국 그가 그 돈을 소비에 충당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은 그것을 이유로 해서 아리스테의 행위에 반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잘 따져보면 그 땅이나 채권을 판 사람은 그 돈을 가지고 어딘가에 사용할 것이다.

  결국 그 돈의 지출자가 누구인가와는 상관없이 누군가는 그 돈을 지출하게 된다.

  고용이나 산업생산을 촉진한다는 차원에서 볼 경우 아리스테와 몬도 간에는 단 한 가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몬도가 하는 소비는 직접 그 자신에 의해서, 그리고 그의 주변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그것은 눈에 잘 띈다. 반면 아리스테의 돈은 중간에 여러 명의 매개자가 있고, 또 먼 거리에서 소비되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도 눈에 잘 띄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논의의 핵심은 돈이 돌고 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낭비하는 형제의 금고 속에 돈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약하는 형제의 금고 속에도 돈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절약은 산업의 발전에 해롭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산업생산을 촉진한다는 면에서 본다면 절약이나 사치나 다를 것이 없다.

  당장의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긴 시간을 놓고 볼 경우는 어떨까?

  그 후로 10년이 흘렀다고 해보자. 몬도의 재산과 인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몬도는 파산했을 것이다. 매년 5만 프랑의 돈을 경제에다가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짐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상인들에게도, 예술가들에게도, 산업가들에게도 노동자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의 후손들에게조차 걱정거리일 뿐이다.

  같은 10년이 흐른 후의 아리스테의 모습은 다르다. 그는 자신의 소득을 계속해서 경제에다가 공급하고 있을 것이며, 그 액수는 더욱 더 커져갈 것이다. 그는 국가의 자본총액을 늘리는 데에도 기여할 것이며 그로 인해서 노동자들에게 지급될 임금의 총액을 늘리는 데에도 기여할 것이다. 그리고 노동에 대한 수요는 노동에 지급될 총액의 규모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계급에게 돌아갈 임금수준이 높아지는 데도 기여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의 자손들이 그를 대신하여 진보와 문명의 발전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절약하는 것이 사치하는 것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점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즉각적인 결과가 아니라 궁극적인 결과에 눈을 돌려볼 경우 절약은 경제적으로도 우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2. 노동의 권리와 이윤에 대한 권리

 

  "형제들이여, 당신의 돈으로 세금을 내서 나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줄 것이다."

  노동에 대한 권리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것은 가장 본질적인 사회주의이다.

  "형제들이여, 내가 직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세금을 낼지어다."

  이것이 이윤에 대한 권리이다. 앞의 것보다는 좀더 세련된, 제2급의 사회주의이다.

  이 두 가지의 주장은 모두 보이는 효과에 기대어 살아간다. 보이지 않는 효과까지를 고려하기 시작하면 어느 것도 살아남을 수 없다.

  세금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일자리와 이윤은 보이는 효과이다. 만약 세금으로 낸 돈이 납세자들의 손에 남아 있었더라면, 그 돈을 다른 용도에 지출하였을 것이고 그로 인해서 일어났을 일들은 보이지 않는 효과이다.

  1848년에 등장한 노동권은 두 가지의 모습으로 그 자신을 드러냈다. 그런 구체적인 모습 덕분에 노동권에 대한 요구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국영작업장이었고 또다른 하나는 45상팀(Centimes)22)이라는 제도였다.

  매일매일 수백만 프랑이 리볼리가에서 국영작업장으로 옮겨졌다. 그것만 본다면 아주 흡족한 일이다.

  그러나 동전의 다른 면도 있었다. 매일매일 국고로부터 수백만 프랑이 빠져나오려면, 어디로부턴가는 국고가 채워져야 한다. 노동권 옹호자들이 납세자들에 호소하려 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러 곳에서 불평이 터져나왔다. 농부들은 이렇게 불평했다.

  "그 때문에 나는 45상팀을 세금으로 내게 되었다. 그 때문에 나는 옷도 못 사게 되었고, 밭에 뿌릴 비료도 못 사는 신세가 되었다. 집을 고칠 돈도 없어졌다."

  그 농부가 고용한 인부는 또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인나리가 옷을 사는 데에 쓸 돈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양복장이들의 일이 줄어들게 되었다. 밭을 갈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인부들도 일이 줄어들었다. 집을 고치지 않을 터이니 목수들과 벽돌공들의 일도 줄어들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의 거래로부터 두 번의 이윤이 나올 수 없다는 것과 정부가 만들어 내는 일자리를 결국 납세자들이 만들어낼 일자리를 대체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결국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노동권이라는 것이 정의롭지 못한 것임은 물론이려니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고, 노동권 소동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노동권의 과장된 형태에 불과한) 이윤권이라는 것은 아직도 건재해서 그 위세를 드러내고 있다.

  보호주의자가 사회에게 요구하는 역할 중에 창피한 것은 없는 것일까? 보호주의자는 사회에게 이런 요구를 한다.

  "너는 나에게 일자리, 그것도 이문이 많이 남는 일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내가 좀 멍청한 나머지 10퍼센트의 손해가 나는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회, 네가 나만 제외하고 다른 시민들에게 20프랑씩을 세금으로 부과한다면, 내 사업은 다시 흑자로 돌아설 수 있겠지. 이윤은 나의 권리라는 것을 명심해야 돼. 너는 내게 이윤을 보장해주어야 해."

  이 궤변에 귀 기울이고 있는 우리의 사회, 그 궤변가를 위하여 스스로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우리의 사회, 한 산업의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산업의 이윤을 줄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불쌍한 우리의 사회, 그러니 너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도 싸다.

  지금까지 내가 여러 가지 문제들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눈치챘겠지만, 누구든 정치경제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현상에 따르는 즉각적인 결과에 현혹되기 십상이다. 경제학을 배우면 즉각적인 결과뿐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나타나는 궁극적인 결과까지 고려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23)

  하려고만 한다면 다른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이 글을 끝내려고 한다. 문제가 무엇이든 결국은 설명하는 말이 되고 말아 독자들이 너무 지루해 할 것 같아서이다. 샤토브리앙24)이 역사에 관해서 한 말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치겠다. 그의 말은 정치경제학에 대해서도 옳다.

 

  역사에는 두 종류의 결과가 있다. 하나는 즉시 인식될 수 있는 즉각적인 결과이고 다른 하나는 당장은 잘 안 보이지만 오랜 기간을 두고 나타나는 장기적 결과이다. 이 두 가지의 결과는 서로 상충될 경우가 많다. 전자는 인간의 단기적 지혜로부터 나오고 후자는 장기적인 지혜로부터 나온다. 신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가 끝난 후에 나타난다. 하나님은 인간이 사라진 뒤에 나타난다. 신의 지혜를 거부하고 싶다면 거부하라. 신의 역사와 그의 말씀을 믿고 싶지 않다면 마음대로 하라. 보통사람들이 섭리라고 부르는 것을 당신들이 환경의 작용이니 이성의 작용이니 하고 부르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그러나 일이 끝난 후에 돌이켜본다면, 도덕이니 정의니 하는 이름으로 처음부터 계획되고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신의 섭리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알게 될 것이다.

  - 샤토브리앙, "무덤에서의 회상"


1) 'Bstiat'의 마지막 저술로서 1850년 7월에 출간되었다. 1년 전부터 출간을 약속했던 논문이었으나 'Choiseul'가에서 'd`Algen'가로 이사하는 도중 원고를 분실한 관계로 출간이 지연되었다. 오랫동안 새 원고를 쓰는 작업을 했으나 일이 잘 안 풀려서, 국회에서 행한 연설을 기초로 해서 다시 원고를 썼다. 하지만 너무 어렵게 씌어졌다고 생각한 나머지 두 번째의 원고조차도 불에 던져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원고를 쓰게 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논문은 세 번째 씌어진 작품이다.

2) Economic Harmonies의 제10장 참조.

3) Moniteur Industriel. 당시 프랑스 국내사업보호위원회의 기관지.

4) Auguste, Vicomte de Saint-Chamans(1777~1861). 하원의원이자 국가재건위원회 위원. 보호주의자이자 무역수지 균형의 적극적인 주창자였다.

5) Economic Harmonies 제3장.

6) 1851년, 런던의 하이드 파크에서 개최된 대형 박람회를 지칭함. 예술과 산업의 발전을 목적으로 런던예술협회에 의해서 개최됨. 전시물들을 전시하기 위한 수정궁(crystal palace)으로 유명했음.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인 앨버트경이 박람회의 의장을 맡았음.

7) 리볼리가는 시청이 있는 거리이고, 그레넬가는 극장용품 공급업자들이 있는 거리이다.

8) Charles Dupin(1784~1873). 프랑스의 엔지니어이자 경제학자. 예술 및 기예원의 교수, 하원 및 상원의원 등을 거쳤음. 경제통계 분야를 통해서 경제학에 기여했음.

9) Archille Fould(1800~1867). 정치가이자 금융업자.

10) Jean Martial Bineau(1805~1855). 엔지니어이자 정치가. 1852년에 재무상을 지냈음.

11) 당초 센 강 왼편 둑에 있었던 행진광장이었음. 오늘날에는 에펠 탑과 사관학교 사이에 위치한 공원으로 변했음.

12) 1846년 당시 북부와 서부 유럽에서의 곡물 및 감자 농사가 실패함에 따라 다음 해인 1847년 식량 가격의 폭등이 있었다. 그해는 식량문제뿐 아니라 제조업, 금융업이 모두 침체를 면치 못했다.

13) 배고픔은 사악한 조언자이다. 'Virgil'의 'Aeneid Ⅳ', 276.

14) 'Bastiat'는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은 진리라는 식의 예단을 하는 경향이 있다. Economic Harmonies 제6장의 부록 "Morality of Wealth"를 참조할 것.

15) Jacques Benigne Bousset(1627~1704). 'Condom'과 'Meaux'의 주교였으며 뛰어난 설교자. 왕족들을 위한 그의 장례식 추도연설은 프랑스 고전풍의 최고로 간주되었음. 루이 14세의 아들의 개인교사였을 당시 저술하였던 세계사(Historie universelle)는 훗날 오랫동안 교과서로 사용되었음. 개신교에 대해서는 철저히 반대했으며, 갈리아주의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프랑스 가톨릭의 독립성을 높여놓았음.

16) Economic Sophism 제7장 참조.

17) Economic Harmonies 제3장 및 제8장.

18) 1848년 2월 22일, 기조Guizot 수상에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고, 그 결과 루이 필립Louis Philippe 왕이 그를 해임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계속되었고 급기야 시위대에게 발포하는 일이 발생했음. 시위는 무장봉기로 이어졌고, 결국 왕이 퇴위하고 제2공화국이 탄생함.

19) 프랑스어판 제5권 "무이자 대부에 관한 열두번째의 편지"를 보라.

20) 전쟁부 장관의 발표에 따르면 알제리아에 파견된 병사 1인당 8천 프랑의 비용이 지출된다고 한다. 그런데 1인당 4천 프랑이면 프랑스의 저소득계층이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한 명을 떠나게 하려고 두 명분을 지출해야 한다면 어떻게 프랑스를 잘살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21) Economic Sophism 참조.

22) 2월 혁명 이후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치된 국영작업장과 더불어 실시되었던 제도. 45상팀을 간접세로 징수하였다. 국영작업장은 실패임이 판명되었다. 국영작업장을 폐쇄하고 실업자들을 군대나 공공사업, 기타 민간기업체를 통해서 흡수하려고 하자, 파리의 노동자들은 정부가 직업에 대한 권리를 배신했다고 들고 일어났다. 1849년 7월의 일이었다. 결국 진압되기는 했지만 처절한 봉기였다.

23) 만약 어떤 행동의 결과가 행위자 자신에게 모두 돌아간다면 자기 행위가 일으킨 결과의 전모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자주 있다. 보이는 효과는 행위자에게 돌아가고 보이지 않는 나쁜 효과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어떤 행동으로 인해 나타나는 결과의 전모를 파악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한다. 나쁜 결과를 감수해야 하는 그 타인으로부터 반응이 올 때에 비로소 그것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과정은 긴 시간을 요하기 때문에 잘못된 정책이라도 오랜 기간 존속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는 10만큼의 이익이 있지만 30명의 다른 사람들에게 15만큼의 손해가 가는 행동을 했다고 해보자. 타인들이 입는 손해의 총량은 15지만 사람 수는 30이기 때문에 각자에게 돌아가는 손해는 0.5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로서는 손해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무언가 손해보는 자들로부터 반응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익은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는 반면, 손해는 널리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손해보는 자들이 무슨 행동을 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Bstiat'의 미발표 논문 중에서).

24) Vicomte Francois de Chateaubriand(1768~1848).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였으며 부르봉 왕가의 지지자. 나폴레옹이 실각하고 부르봉 왕가가 재집권했을 때, 영국과 독일 대사, 그리고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저명한 저작물로는 "기독교의 진수", "무덤으로부터의 회상"이 있다.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