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충돌 3
8. 서구와 비서구 : 문명 간의 문제
서구보편주의
새로운 세계에서는 상이한 문명에 속하는 국가들과 집단들의 관계는 우호적이지 않고 대체로 적대적이 경향을 띨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날 것으로 예상되는 관계는 문명 간의 관계다. 미시적 차원에서 보면 폭력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단층선은 이슬람과 이웃한 정교, 힌두, 아프리카, 서구 크리스트교 문명 사이에 놓여 있다. 거시적 차원에서 보면 지배적 대립은 서구 대 비서구의 양상으로 나타나겠지만, 가장 격렬한 대립은 이슬람 사회아 아시아 사회, 이슬람 사회와 서구 사회에서 나타날 것이다. 미래의 가장 위험한 충돌은 서구의 오만함, 이슬람의 편협함, 중화의 자존심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 것이다.
문명 중 유일하게 서구는 다른 모든 문명에게 대대적인, 때로는 파괴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따라서 서구 이슬람 힘과 문화, 다른 문명들의 힘과 문화의 상대적 힘이 증가하면서 서구문화의 매력은 반감되며 비서구인들은 점점 자신들의 고유문화에 애착과 자신감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서구와 비서구의 관계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문제는 서구문화의 보편성을 관철하려는 서구-특히 미국-의 노력과 서구의 현실적 능력 사이에서 생겨나는 부조화라고 말할 수 있다.
공산주의의 몰락으로 자유 민주주의의 이념이 지구적 차원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므로 서구의 이념이 보편타당하다는 견해가 확산되면서 부조화는 한층 심화되었다. 서구, 그중에서도 특히 예로부터 민주주의의 선교사 역할을 자임해 온 미국은 비서구인들이 민주주의, 시장경제, 제한된 정부, 인권, 개인주의, 법치주의 같은 서구의 가치에 동조해야 하며, 이러한 가치들을 자신들의 제도에 구현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다른 문명들 내의 소수 집단은 이러한 가치를 수용하고 적극적으로 선전하지만 비서구 사회의 지배적인 태도는 대체로 회의주의 아니면 격렬한 반발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서구의 보편주의가 비서구에게는 제국주의로 다가온다.
서구는 자신의 주도적 위치를 고수하고자 지금도 노력하고 있고 앞으로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세계 공동체'의 이익으로 규정함으로써 그러한 이익을 수호하려고 한다. 이러한 구호는 미국과 여타 서방 국가들의 이익이 반영된 행동에 범지구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완곡한 집합명사('자유 세계를 대체하는')가 되어 버렸다. 가령 서구는 비서구 사회의 경제를 자신이 지배하는 세계 경제 체제로 끌어들이려고 애쓴다. 서구는 IMF 같은 국제 경제 기구를 통해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챙기고 다른 국가들에게 자신이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경제정책을 강요한다. 비서구인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할 경우 IMF는 경제각료를 비롯한 소수집단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거의 모든 응답자가 IMF에 대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 것이다. 1MF에 대한 부정적 인상은 IMF 관리들을 다른 사람의 돈을 몰수하고 비민주적으로 생경한 정치, 경제간행의 규칙을 강요하면서 경제적 자유의 숨통을 틀어막기를 일삼는 네오볼셰비키로 그린 아르바토프(GEORGI Arbatov)의 묘사에 집약되어 있다.
또한 비서구인들은 서구의 원칙과 서구의 행동 사이에서 나타나는 간극을 서슴지 않고 지적한다. 위선, 이중잣대, 단서 조항은 보편주의가 한낱 제스처에 지나지 않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민주주의가 중요하지만 그것이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집권을 돕는다면 재고의 대상이 되고, 이란과 이라크에게는 군축을 요구하지만 이스라엘은 방치하고, 자유 무역은 경제 성장을 낳는 만병통치약이지만 농업은 예외이고, 중국의 인권은 문제 삼아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인권은 문제 삼지 않고, 석유 자원을 가진 쿠웨이트에 대한 침공은 기를 쓰고 막아도 석유 자원이 없는 보스니아가 공격을 받으면 나 몰라라 한다. 이중잣대는 어설픈 보편주의가 불가피하게 치러야 할 대가이다.
정치적 독립을 달성한 비서구 국가들은 서구의 경제적, 군사적, 문화적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경제적으로 서구에 필적할 만한 수준에 육박하고 있다. 아시아와 이슬람 국가들은 단시일 안에 서구와 군사적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지름길을 모색하고 있다. 서구 문명의 보편주의에 대한 집착과 서구의 상대적 세력 감소. 다른 문명들의 점운하는 문화적 자긍심은 서구와 비서구의 관계를 껄끄럽게 만들 소지가 높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의 성격과 적대감의 정도는 다양하며 크게 세 범주로 구분된다. 서구는 도전 의식이 강한 이슬람 문명, 중국 문명에 대해서는 늘 긴장감을 느끼며 이들의 관계는 대체로 적대적이다. 세력이 약하며 서구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라틴 아메리카나 아프리카와의 관계에서는 갈등의 소지가 높지 않고 특히 라틴 아메리카와 서구의 관계는 원만할 것이다. 러시아 일본 인도와 서구의 관계는 이 두 범주의 중간적 성격을 띠면서 협력과 갈등의 요인을 모두 안고 있다. 이 세 나라는 사안에 따라서 때로는 이슬람, 중국의 편에 서고 때로는 서구의 편을 들 것이다. 이들은 서구 문명과 이슬람, 중국 문명 사이에서 '그네' 역할을 하는 문명이다.
이슬람과 중국은 판이한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둘 다 서구에 대한 크나큰 우월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 두 문명의 실력과 자긍심은 서구와의 관계에서 나날이 늘어나고 있으며 가치관과 이익을 둘러싼 서구와의 충돌 역시 다각화되고 심화되고 있다. 이슬람에는 핵심국이 없으므로 이슬람과 서구의 관계는 나라별로 크게 다르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로 서구에 대한 반감이 지배적 추세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추세는 원리주의의 부상, 이슬람 각국에서 나타나는 친서방 정권에서 반서방 정권으로의 권력 교체 현상, 일부 이슬람 집단과 서구의 준전시 상태 돌입, 일부 이슬람 국가와 미국 사이에 존재했던 냉전적 안보 결속의 약화에 반영되고 있다. 특정한 사안들을 놓고 벌어지는 대립의 근저에 깔린 것은 향후 세계에서 이들 문명이 서구에 견주어 어떤 역할을 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21세기의 세계 기구, 권력의 분포, 각국의 정치와 경제는 서구의 가치와 이익을 대변할 것인가, 아니면 이슬람과 중국의 가치와 이익에 의하여 주로 규정될 것인가?
현실주의자들은 비서구 문명의 핵심국들이 연합하여 서구의 지배에 맞서는 견제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부 사안에서는 이것이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가까운 시일 안에 대대적인 반서구 연합이 출현할 것 같지는 않다. 이슬람 문명과 중국 문명은 종교, 문화, 사회 구조, 전통, 정치, 생활방식의 뿌리에 놓인 근본적 가정이 판이하게 다르다. 두 문명의 공통점은 두 문명이 각각 서구와 갖는 공통점보다도 미약하다. 그러나 정치의 세계에서는 공동의 적이 공동의 이해를 낳는다. 서구를 주된 적수로 간주하는 이슬람과 중국은 히틀러에 맞서 연합국과 스탈린이 협력했던 것처럼 서구에 맞서 협력을 모색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이러한 협력은 인권. 경제 등의 다양한 사안에서 일어나지만, 무엇보다도 군사력. 특히 대량 살상무기와 그것을 실어 나를 수 있는 미사일을 개발하여 서구의 군사적 우위에 도전하는 양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1990년대 초반 이미 '유교-이슬람 결합'이 구축되어 한편에서는 중국, 북한과 다른 한편에서는 파키스탄, 이란,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알제리가 다양한 수준으로 공조를 필치면서 군사 부문에서 서구에 대적할 수 있는 길을 도모하고 있다.
서구와 이들 국가의 대립을 낳는 사안들이 국제무대에서 점차 무게를 얻고 있다. 이러한 사안들은 서구의 다음과 같은 의중과 맞물려 있다 (1) 서구는 핵무기, 생물 무기, 화학 무기와 이 무기를 실어 나를 수 있는 수단의 확산 방지와 축소 정책을 통해 군사적 우위를 고수하려고 한다. (2) 서구는 다른 국가들에게 서구적 개념의 인권을 존중하고 서구식 민주주의를 도입하도록 압박을 가함으로써 서구의 정치적 가치관과 제도를 확산시키려고 한다. (3) 서구는 비서구인 이민자나 망명자의 수를 제한함으로써 서구 사회의 문화적, 사회적, 인종적 틀을 보호하려고 한다. 이 세 부문에서 서구는 비서구 사회의 이익에 맞서 자신의 이익을 수호하는 데 과거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어려움을 겪을 공산이 크다.
무기 확산
군비 확산은 사회적, 경제적 발전의 파생물이다. 일본 중국, 아시아 각국은 경제력이 커지면서 강한 군사력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슬람 국가들도 같은 길을 걸을 것이다. 경제 개혁이 성공할 경우 러시아의 군사력 강화도 예상된다. 20세기의 지난 몇십 년 동안 비서구 국가들은 서방국, 러시아, 이스라엘, 중국으로부터 첨단 무기를 확보하였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도의 첨단 무기를 자국에서 생산할 수 있는 방위 산업을 육성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21세기 초반에 들어가서는 더욱 가속화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에 들어가서도 상당 기간 동안 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서 군사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문명은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 아래 주도하는 서구 문명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에 공습을 감행할 수 있는 공군력을 가진 유일한 나라는 여전히 미국일 것이다. 바로 이것이 미국을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남아 있게 하고 서구를 세계의 주도적 문명으로 남아 있게 하는 결정적 요소이다. 서구와 비서구의 군사적 균형에서 서구의 압도적 우위는 당분간 유지될 것이다.
첨단 재래식 무기를 개발하는 데 필요한 엄청난 시간과 노력, 비용 때문에 비서구 국가들은 서구의 재래식 군사력에 맞설 수 있는 별도의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유혹을 강하게 받는다. 가장 손쉬운 길은 대량 살상 무기와 그것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하는 것이다. 문명의 핵심국들과 지역 패권을 누리고 있거나 패권을 지향하는 국가들은 특히 그런 무기 확보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러한 무기는 먼저, 그것을 보유한 국가들이 자기네 문명이나 지역에서 다른 나라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게 해 주며, 나아가 미국을 비롯한 외세가 자기네 문명이나 지역에 쉽게 개입하지 못하게 만드는 억지력을 제공한다. 이라크가 핵무기를 손에 넣을 때까지 후세인이 쿠웨이트 침공을 2, 3년만 늦추었더라면 그는 지금쯤 쿠웨이트를 차지하는 것은 물론 사우디아라비아의 유전도 독차지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비서구 국가들은 걸프전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북한의 군사 관계자들이 얻은 교훈은 다음과 같다. "미국이 군사력을 배치할 여유를 주지 말라. 공군력을 증강할 틈을 주지 말라. 미국이 기선을 잡지 못하게 하라. 미군의 인명 피해를 최대화하라." 인도의 한 고위 군 장성의 지적은 더 노골적이다. "핵무기가 없거든 미국과 싸우지 말라 ?" 그러한 교훈은 비서구 세계의 정치 지도자와 군 관계자들의 뇌리에 깊이 박히면서 다음과 같은 개연성 높은 전망을 낳았다. '미국은 핵무기를 가진 나라와는 싸우지 않는다.
핵무기는 예전처럼 패권 정치를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패권국들이 맡은 역할이 축소되고 국제 체제의 분열 추세를 공고히 한다.'라고 프리드먼(Lawrence Freedman)은 지적하였다. 탈냉전 세계에서 핵무기가 서구에게 지니는 의미는 냉전 시대의 그것과는 정반대이다. 냉전 당시 미국의 애스핀 국방장관이 지적한 것처럼 서구는 핵무기를 통하여 소련에 대한 재래식 무기의 열세를 만회하였다. 핵무기는 '균형추' 였다. 그러나 탈냉전 세계에서 미국은 재래식 군사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확보하였으며, 이제는 미국의 잠재적 적수들이 핵무기를 보유하려고 한다. 과거의 소련처럼 미국은 군사적 우위를 잃게 될지 모른다.
따라서 러시아가 자국의 방위 계획에서 핵무기의 역할을 새삼 강조하면서 1995년에는 우크라이나로부터 추가로 대륙 간 미사일과 탄두를 구입하기로 합의한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는 1950년대에 우리가 러시아 측에게 했던 말을 지금 그대로 되듣고 있다."라고 미국의 한 무기 전문가는 지적한다. 이제는 러시아 측이 이떻게 말한다. 우리가 핵무기를 도입하는 것은 재래식 무기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다." 비슷한 역전 현상으로, 냉전 시대의 미국은 전쟁 억지력을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선제 핵 공격 포기 의지를 공식적으로 천명하기를 거부하였다. 탈냉전 세계에서 핵무기가 갖는 전쟁 억지력을 새롭게 주목하면서 러시아는 1993년 과거 소련이 견지하였던 선제 핵 공격 포기 의지를 사실상 철회하였다. 마찬가지로 중국도 탈냉전 시대의 제한적 억지력에 입각한 자신의 핵전략을 발전시키면서 1964년에 표명한 바 있는 선제 핵 공격 포기 의지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며 그 의지를 약화시켰다. 다른 핵심국들과 지역 강국들도 핵무기나 기타 대량 살상 무기를 확보하면 비슷한 입장을 취하면서 서구의 재래식 무기에 자신의 무기가 갖는 억지력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핵무기는 서구를 더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도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핵탄두를 장착한 탄도 미사일을 유럽과 북미에 보낼 수 있다. 북한, 파키스탄, 인도는 미사일의 사정 거리를 계속 넓히고 있으며 언젠가는 서구를 직접 표적으로 삼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가능성이 높다. 뿐만 아니라 핵무기는 다른 수단으로 전용될 수도 있다. 군사 분석가들은 테러, 산발적 게릴라전 등의 저강도전에서 제한전, 재래식 무기가 대대적으로 동원되는 전면전, 나아가 핵전쟁까지 충돌의 다양한 수위를 상정한다. 역사적으로 테러는 약자의 무기, 곧 재래식 군사력을 갖지 못한 세력의 무기였다. 2차 대전 이후 핵무기는 약자가 재래식 군사력의 열세를 만회할 수 있는 무기가 되었다. 과거의 경우 테러리스트들은 제한적 폭력밖에 행사할 수 없었다. 기껏해야 여기서 몇 명 죽이고 저기서 건물을 파괴하는 정도였다. 대규모 폭력을 가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군사력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가면 소수의 테러리스트가 대규모 살상, 대규모 파괴를 감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테러와 핵무기는 약자인 비서구 세계의 무기이다. 이 둘이 결합할 때 약자인 비서구 세계의 힘은 강해질 것이다.
탈냉전 세계에서 대량 살상 무기와 그것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수단을 개발하려는 노력은 이슬람권과 유교권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어쩌면 파키스탄과 북한은 소수의 핵무기를 가졌거나 아니면 적어도 단기간 안에 핵무기를 조립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할 것이며, 핵무기를 실어 나를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거나 입수하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라크는 상당 수준의 화학전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생물 무기와 핵무기를 입수하고자 막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란은 핵무기 개발을 위한 포괄적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시정 거리를 확대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1988년 라프산자니 이란 대통령은 '이란은 화학 무기, 박테리아 무기, 방사능 무기를 공격적으로도 방어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무결하게 갖추고 있어야 한다.'라고 선언하였다. 다시 3년 뒤 이란의 부통령은 이슬람 회담에서 '이스라엘의 핵무기 보유가 지속되는 한 우리 이슬람교도는 핵확산을 저지하려는 유엔의 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합심하여 원자 폭탄을 개발해야 한다.'라고 강조하였다. 1992년과 1993년에 미국의 고위 정보 관계자는 이란이 핵무기를 입수하고자 심혈을 쏟고 있다고 지적하였으며 1995년 크리스토퍼 미 국무장관은 '현재 이란은 핵무기 개발에 총력을 쏟고 있다.'라고 못 박았다. 핵무기 개발에 관심을 가진 여타 이슬람 국가들로는 리비아, 알제리,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거론된다. 마즈루이의 화려한 표현대로 버섯구름 위에 걸린 초승달(이슬람을 상징 : 옮긴 이)은 서구 외의 다른 지역에도 위협을 가할 수 있다. 이슬람은 결국 남아시아의 힌두교 세력과 중동의 시온주의, 유대주의 세력을 대상으로 핵무기를 통한 러시안룰렛 게임을 벌일지도 모른다.
군사 부문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유교-이슬람 결속에서 중국은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많은 이슬람 국가들에게 재래식 무기와 비재래식 무기를 제공하고 있다. 연구용임을 표방하지만 상당수의 서방 전문가들이 플루토늄 생산 능력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하는 알제리 사막의 삼엄한 감시와 통제를 받는 원자로 건설, 리비아에 대한 화학 무기 원료 판매,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CSS-2 중거리 미사일 제공, 이란, 리비아, 시리아, 북한에 대한 핵 기술 및 핵 물질 공여, 이라크에 대한 막대한 규모의 재래식 무기 판매의 주역은 모두 중국이다. 1990년대 초반 중국에 뒤이어 북한이 이란을 거쳐 시리아에 스커드 미사일을 제공하였으며 다시 그것을 발사할 수 있는 이동 포대를 제공하였다.
유교-이슬람 군사적 유대의 핵심 고리는 한 축에 중국과 북한이 있고 다른 한 축에 파키스탄과 이란이 있다. 1980년부터 1991년까지 중국의 무기를 주로 도입한 나라는 이란과 파키스탄이었고 그 뒤를 이라크가 따랐다. 1970년대 초반부터 중국과 파키스탄은 대단히 긴밀한 군사적 관계를 발전시키고 있다. 1989년 양국은 향후 10년간 무기 구입, 공동 연구와 개발, 공동 생산, 기술 이전은 물론 상호 합의에 의한 제3국 수출 분야에서 군사적 협력을 도모한다는 양해 각서에 서명하였다. 파키스탄의 무기 구입에 중국이 보증을 하는 내용이 추가로 들어간 협정이 1993년 체결되었다. 그 결과 중국은 사실상 거의 모든 군사 관련 수출품을 파키스탄군의 모든 부분에 양도함으로써 파키스탄에게 가장 신뢰할 만하고 가장 광범위하게 군사 하드웨어를 제공하는 나라가 되었다. 중국은 또한 파키스탄의 제트기, 탱크, 대포, 미사일 생산 시설의 건설을 도왔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중국이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을 결정적으로 지원하였다는 사실이다. 중국은 파키스탄에 농축 우라늄을 제공하고 탄두 설계에 조언을 제공하였으며, 중국의 핵실험 지역을 이용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다시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고 300킬로미터의 시정 거리를 갖는 M11 탄도 미사일을 파키스탄에 공급하는 과정에서 미국과의 약속을 파기하였다. 그 대가로 중국은 파키스탄으로부터 공중 급유 기술과 스팅어 미사일을 확보하였다.
1990년까지 중국과 이란의 무기 교역 또한 강화되었다. 1980년대의 이란-이라크 전쟁 기간 중 중국은 이란 무기의 22퍼센트를 제공하였으며 1989년에는 단일 국가로서는 이란에 가장 많은 무기를 수출하는 나라가 되었다. 중국은 또한 핵무기를 확보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이란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최초의 중국-이란 공동 조약을 체결한 데 이어 두 나라는 1990년 1월 과학 기술 협력과 군사 기술 이전 분야에서 10년 기한의 양해 각서에 서명하였다. 1992년 9월 라프산자니 대통령은 이란의 핵 전문가들을 대동하고 파키스탄을 방문한 뒤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핵 협력 조약을 체결하였다. 1993년 2월 중국은 이란에 300메가와트급의 원자로를 건설하는 데 동의하였다. 이들 조약에 따라 중국은 핵 관련 기술과 정보를 이란에 이전하고 이란 과학자와 기술자를 훈련시켰으며 이란 측에 우라늄 농축 장비를 제공하였다. 1995년 미국의 계속되는 압력 때문에 중국은 2기의 300메가와트급 원자로 판매를 미국의 표현에 따르면 '취소' 하였고 중국의 설명에 따르면 '유예'하였다. 중국은 미사일과 미사일 관련 기술을 이란에 제공한 주요국이었다. 그중에는 1980년대 말 북한을 거쳐 제공한 실크윔 미사일과 1994~95년에 제공한 수십 개 혹은 수백 개에 이 르는 미사일 유도 시스템과 컴퓨터 기기가 포함된다. 중국은 또 중국 지대지 미사일의 이란 현지 생산을 허용하였다. 이러한 지원에 동참하여 북한도 스커드 미사일을 이란에 선적하였으며 이란의 미사일 생산 시설 건설을 도왔고 1995년에는 사정거리가 600마일인 노동 1호 미사일을 이란에 제공하기로 합의하였다.
삼각 공조의 세 번째 축으로서 이란과 파키스탄도 핵 부문에서 광범위한 협조를 전개하였다. 파키스탄은 이란의 과학자들을 훈련시켰으며, 1992년 11월 파키스탄, 이란, 중국은 핵 개발을 공동 추진하는 데 합의하였다. 파키스탄과 이란의 대량 살상 무기 개발 계획에 대한 중국의 광범위한 지원은 이들 국가 간에 대단히 긴밀한 공조와 협력이 펼쳐지고 있음을 입증한다.
이러한 사태 전개는 서구의 이익에 잠재적 위협이 되었다. 그 결과로 나타난 대량 살상 무기의 확산은 서구 안보 레이더의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가령 1990년 미국인의 59퍼센트가 핵무기 확산 저지를 가장 중요한 외교적 목표로 지적하였다. 1994년 미국 일반 국민의 82퍼센트, 외교 전문가의 90퍼센트가 가장 시급한 해결을 요하는 과제로 이 문제를 꼽았다. 클린턴 대통령은 1993년 9월 핵확산 저지에 중점을 두겠다고 선언하였으며, 1994년 가을에는 핵무기, 생물 무기, 화학 무기의 확산과 그러한 무기를 실어 나르는 수단의 확산으로 야기되는 미국의 국가 안보, 외교 정책, 경제에 미치는 유례 없는 엄청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하여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1991년 CIA는 100명의 상근 직원을 거느린 비확산 센터를 창설하였으며, 1995년 12월에는 애스핀 국방장관이 새로운 확산 저지 방위안을 발표하고 핵 안보 및 확산 저지 담당 차관직을 신설하였다.
냉전 시대의 미국과 소련은 첨단 핵무기와 그것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수단을 거듭 개발하면서 고전적인 무기 경쟁을 벌였다. 그것은 증강 대 증강의 겨룸이었다. 탈냉전 시대의 지배적인 군사력 경쟁은 이와는 성격이 다르다. 서구를 적대시하는 세력은 대량 살상 무기를 손에 넣으려 하고 서구는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저지하려고 한다. 그것은 증강 대 증강이 아니라 증강 대 억제의 싸움이다. 서구의 핵 군사력은 규모나 파괴력 면에서, 허세를 부린다면 모를까 경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증강 대 증강의 구도로 펼쳐지는 무기 개발 경쟁은 결국 양측의 자원, 의지, 기술력에 따라 좌우된다. 그것은 예측 불가능하다. 반면 증강 대 억제의 구도가 어떻게 귀결될 것인지는 예측 가능하다. 서구의 억제 노력이 다른 국가들의 무기 증강 속도를 늦출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을 중지시키지는 못한다. 비서구 국가들의 경제 발전, 무기, 기술, 정보를 팔아 돈을 벌 수 있다는 경제적 유흑, 자신의 지역 헤게모니를 수호하려는 핵심국과 지역 강대국의 정치적 욕구 등은 서구의 억제 노력을 좌절시키기에 충분하다.
서구는 대량 살상 무기의 확산을 저지하는 것이 국제 질서와 안정에 기여하고 모든 국가의 이익을 낳는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다른 국가들은 이것을 서구의 헤게모니 고수 전략으로 파악한다. 그것은 대량 살상 무기의 확산을 놓고 미국과 지역 강국이 보이는 불안의 차이에도 반영된다. 이런 현상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지역이 한반도이다. 1993년과 1994년에 미국은 북한의 핵무기 보유 가능성에 위기의식을 가졌다. 1993년 11월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의 핵폭탄 개발을 좌시하지 않겠다. 우리는 그 점에 대하여 확고한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라고 못 박았다. 상원, 하원, 부시 행정부에서 활약한 관리들은 북한의 핵 시설물에 대한 선제공격의 필요성을 검토하였다. 미국의 북한에 대한 우려는 상당 부분 세계적인 핵확산 추세에 대한 불안 심리에 그 뿌리가 있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가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활동을 제약하고 복잡하게 만드는 측면도 있고 만일 북한이 핵 기술이나 핵무기를 수출할 경우 남아시아와 중동에서 미국의 입지는 크게 약화될 가능성이 높았다.
반면 한국은 핵무기를 지역적 이해의 구도에서 파악하였다. 다수의 한국인들은 북한의 핵무기를 한민족의 핵무기로 이해하였다. 핵폭탄을 같은 동포의 머리 위에 떨어뜨릴 리는 만무하므로 일본과 그 밖의 잠재 위협 세력으로부터 한민족의 주권을 수호할 수 있는 좋은 수단으로 북한의 핵무기를 받아들였다. 한국의 관리들과 군 관계자들은 통일 한국의 핵무기 보유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공공연하게 피력하였다. 한국의 이해는 잘 반영되었다. 핵무기 개발에 뒤따르는 희생과 국제적 오명은 북한이 짊어져야 하는 반면 한국은 궁극적으로 그것을 승계받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무기와 한국의 발달한 산업이 결합하면 통일 한반도는 동아시아 무대에서 실력 국가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다질 수 있을 것이다. 1994년에는 한반도에서 커다란 위기를 감지하는 워싱턴과 이렇다 할 위기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서울 사이의 현격한 인식 차이는 양국 수도의 공포 격차를 낳았다. 1994년 5월 위기가 고조되었을 때 한 저널리스트가 지적한 것처럼 몇 년 전부터 시작된 북한의 핵 개발을 둘러싼 대치 상태에서 한 가지 기이한 현상은 한반도에서 멀어질수록 위기감이 높아진다는 점이었다. 비슷한 인식의 격차는 남아시아에서 미국의 안보 이해와 그 지역 강대국들의 안보 이해 사이에서도 발생하였다. 이 지역에서 미국은 핵확산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데 비해 정작 이 지역 사람들은 그리 과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두 나라의 핵무기를 동결, 축소하거나 아예 폐기하도록 하자는 미국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상대국이 가하는 핵 위협을 무난히 수용하는 편이다.
대량 살상력을 가진 '균형추' 무기의 확산을 저지하려는 미국과 서방의 노력은 제한된 성공밖에 거두지 못하였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클린턴 대통령의 공언이 있은 지 한 달 뒤 미 정보부는 북한이 한두 개의 핵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그 후 미국의 정책은 북한이 핵무기를 증강하지 못하도록 북한에 당근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수정되었다. 미국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을 철회시키거나 중단시키는 데 실패하였으며 이란의 핵 개발에도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1995년 4월에 열린 핵확산 금지 조약 회의에서 핵심적으로 부각된 사안은 이 조약을 25년 동안 한시적으로 연장할 것이냐 아니면 무기한 연장할 것이냐였다. 미국은 무기한 연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대다수 국가들은 5대 핵 강대국들이 핵무기를 대폭 감축하는 조치가 수반되지 않는 한 무기한 연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맞섰다. 거기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이 조약에 서명하고 핵 안전 사찰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무기한 연장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결국 미국은 압력, 회유, 협박을 유효 적절하게 구사학는 전략으로 무기한 연장안을 압도적 다수의 지지로 통과 시켰다. 이집트와 멕시코만 하더라도 무기한 연장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경제적으로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런 입장을 무직정 고수 할 수만은 없었다. 조약은 무기한 연장되었지만 최종 토의에서 7개 이슬람 국가(시리아, 요르단, 이란, 이라크, 리비아, 이집트, 말레이시아)와 아프리카 1개국(나이지리아)은 반대 견해를 공표하였다.
1993년 미국의 정책이 강하게 반영된 서구의 일차적 목표는 핵확산 금지에서 핵확산 대응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는 핵의 부분적 확산은 불가피하다는 현실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앞으로 미국의 정책은 핵확산 대응에서 핵확산 조절로, 그리고 만약 미국 정부가 냉전 시대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핵확산을 통하여 미국과 서구의 이익을 도모하는 길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다. 1995년 현재 미국과 서구는 억제 정책을 고수하고 있지만 그것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핵 을 비롯한 대량 살상 무기의 확산은 다문명 세계에서는 느리지만 필연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권력 분산의 중심적 현상이다.
인권과 민주주의
1970. 80년대에 독재 체제에서 민주주의 체제로 이행한 나라는 30개국이 넘는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정치적 변화의 배후에 깔려 있는 주된 요인은 의심할 나위 없이 경제 발전이다. 그러나 스페인, 포르투갈, 라틴 아메리카 각국, 필리핀, 한국, 동유럽의 민주화에는 미국, 서유럽 국가들, 국제기구의 정책과 노선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민주화는 크리스트교와 서구의 영향력이 강한 나라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은 남유럽과 중부 유럽에서 새롭게 출현한 민주주의 정부가 가장 큰 안정을 보이고 있으며 정도는 덜하지만 라틴 아메리카의 민주주의도 조기에 안정을 찾을 가능성이 높다. 동아시아에서는 가톨릭 신자가 많고 미국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는 필리핀이 1980년대에 민주주의로 복귀하였고 한국과 대만의 민주화에는 크리스트교 지도자들이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앞에서도 지적하였지만, 옛 소련의 발트 공화국들도 안정된 민주체제를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교권 국가들의 민주화 수준과 안정도는 나라마다 상이하며 미래의 전망도 불투명하다. 이슬람 공화국들의 민주화 전망은 희박 하다. 1990년대까지 쿠바를 제외하고 서구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였거나 크리스트교의 영향력이 강한 나라들이 대부분 민주화로 돌아섰다.
이러한 민주화 추세와 소련의 붕괴는 서구, 특히 미국에게 전 세계에서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나고 있으며 머지않아 서구적 인권 개념과 서구적 민주주의 정치 형태가 세계를 장악하게 되리라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민주주의의 전파를 고무시키는 것이 자연히 서구인의 으뜸가는 정책 목표로 자리 잡았다. '억압 너머에는 민주주의가 있다.' 탈냉전 세계를 맞아 부시 대통령은 우리의 새로운 임무를 민주주의의 고취와 공고화로 규정하였다.'라고 말한 1990년 4월 베이커 미 국무 장관의 발언에 부시 행정부의 입장이 요약되어 있다. 1992년 선거 유세 기간 중에 클린턴은 민주주의의 고취가 클린턴 행정부의 최우선 정책 목표임을 거듭 천명하였다. 민주화는 그의 선거 유세 연설에서 나온 거의 유일한 외교 정책이었다. 대통령에 당선되자 클린턴은 국가적으로 민주주의를 고취시키는 부처의 예산을 3분의 2나 증액하였다. 클린턴 대통령의 국가 안보 보좌관은 클린턴 외교 정책의 핵심 과제를 '민주주의의 확대'로 규정하였다. 국방장관도 민주주의의 지원을 4대 주요 목표의 하나로 설정하면서 국방성 내에 그런 정책을 전담하는 고위직을 신설하려고 시도하였다. 미국보다 강도는 약하고 덜 직접적이긴 하지만 인권과 민주주의의 후원은 유럽 각국의 대외 정책에서 우선적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서구 주도의 국제 경제 기구는 개발 도상국에게 주는 차관과 원조에서 이러한 기준을 내세웠다.
1995년 현재 유럽과 미국의 그러한 노력은 제한적인 성공만을 거두었다. 거의 모든 비서구 문명들은 서구의 이러한 압력에 반감을 드러냈다. 여기에는 힌두교, 정교, 아프리카, 심지어는 일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도 포함된다. 서구의 민주화 정책에 대한 가장 큰 저항은 이슬람권과 아시아에서 나왔다. 이 저항은 이슬람 부활과 아시아의 자기주장으로 구체화된 폭넓은 문화적 자각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미국이 아시아에서 실패한 것은 일차적으로 아시아 지역의 점증하는 경제력과 자긍심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아시아의 지도자들은 서구에 대한 의존과 종속의 시대는 지나갔으며, 1940년대까지 세계 경제 생산의 절반을 차지하고 유엔을 지배하며 만국 인권 선언을 기초한 서구는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싱가포르의 한 관리는 "아시아에서 인권을 신장하려는 노력은 탈냉전 세계의 변화된 세력 구도도 감안해야 한다....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대한 서구의 영향력은 크게 축소되었다.'라고 지적하였다.
그의 지적은 옳다. 미국과 북한 사이의 핵 문제를 둘러싼 합의는 '타협적 굴복'이라는 표현이 어울리고,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강국들에게 인권을 들이밀었던 미국의 정책은 무조건적인 항복으로 귀착되었다. 인권 개선의 조짐이 보이지 않을 경우 중국에 무역 최혜국 대우를 철회하겠다는 위협을 가한 후 클린턴 행정부는 자국 국무장관이 베이징에서 난생처음 수모를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손상된 체면을 되살리는 의례적 몸짓조차 하지 못하고 종전까지의 정책을 되집어 무역 최혜국 대우와 인권 문제를 분리시킴으로써 중국의 강수에 기민하게 대응하였다. 그러자 중국은 미국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면서 클린턴 행정부가 반대하는 행동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 미국은 한 미국 시민에게 체벌을 가하는 문제에서 싱가포르와 벌인 대립에서도 비슷하게 물러서야 했고 동티모르 지역의 폭력 진압에 대해서도 인도네시아 정부에 강하게 항의하지 못했다.
서구의 인권 압력에 저항하는 아시아 각국의 능력은 여러 가지 요인에 힘입어 강화되었다. 미국과 유럽의 기업들은 이 급속하게 신장하는 지역에서 투자와 교역을 어떻게 해서든 늘려야 할 입장이므로 자국 정부에게 기업의 경제 활동을 저해하는 정책을 펴지 말도록 강한 압력을 넣었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 국가들은 서구의 인권 압력을 주권 침해로 간주하고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공조를 취하였다. 중국에 투자한 대만, 일본, 홍콩의 기업인들은 중국이 미국으로부터 무역 최혜국 대우를 계속 부여받을 수 있는가에 막대한 경제적 이해가 걸려 있다. 천안문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안 되어 미야자와 일본 총리는 우리는 '추상적 인권 개념'이 중국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강조하였다. ASEAN 국가들은 미얀마에 압력을 넣는데 동의하지 않았으며 1994년에는 미얀마 군사 정권이 ASEAN 회담에 참석하는 것을 환영하였다. 반면 유럽 연합은 그 대변인의 표현대로 유럽 연합의 정책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였고, 미얀마에 대한 ASEAN의 입장에 동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밖에도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는 점증하는 경제력을 등에 업고 자신들을 비난하거나 자신들이 거부감을 갖는 행동에 관여하는 국가나 기업에 대하여 역제재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아시아 국가들은 성장하는 경제력 덕분에 인권과 민주주의와 관련한 서구의 압력에 점차 면역력을 갖게 되었다. 1994년 닉슨은 '오늘날 중국의 경제력 앞에서 인권에 대한 미국의 강의는 경솔해 보인다. 10년 뒤 중국은 그런 강의에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20년 뒤에는 코웃음을 칠 것이다.'라고 꼬집었다. 그 시점에 가면 아마 중국의 경제 발전은 서구의 강의를 불필요하게 만들 것이다. 경제적 발전이 서방 정부들과의 관계에서 아시아 정부들의 입지를 강화시키고 있다. 그것은 장기적으로 아시아 정부들과의 관계에서 아시아 시민사회들의 입지를 강화시킬 것이다. 만약 아시아에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점점 강력해지는 아시아의 부르주아와 중산층이 민주주의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핵확산 금지 조약의 무기한 연장안을 관철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인권과 민주주의를 유엔 안건으로 상정하려는 서구의 노력은 번번이 좌절을 겪었다. 이라크 제재와 같은 몇 가지 예외적 사안을 제외하면 인권 결의안은 유엔 표결에서 거의 예외 없이 부결되었다. 일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만 동참하였을 뿐 나머지 국가들은 인권 제국주의의 색채가 농후한 결의안을 지지하는 대열에 동참하기를 거부하였다. 일례로 1990년 스웨덴이 20개 서방 국가들을 대표하여 미얀마의 군사 정권에 대한 제재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하였지만 아시아를 비롯한 다른 지역 국가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인권 유린을 이유로 내건 이란 제재 결의안 역시 부결되었다. 중국은 1990년대 초반 내리 5년간 아시아 각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중국의 인권 유린에 대한 우려가 표명된 서방 주도의 결의안을 좌초시키는데 성공하였다. 1994년 파키스탄이 유엔 인권 위원회에서 캐슈미르 지방에서 발생한 인도의 인권 유린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상정하였다. 인도에 우호적인 나라들이 이 결의안에 반대하였음은 물론이지만 과거 비슷한 결의안의 표적이 되었던 중국과 이란도 난색을 표하면서 우방국 파키스탄으로 하여금 결의안 상정을 철회하도록 설득하였다. (이코노미스트) 지는 인도가 캐슈미르에서 자행한 잔학한 행위를 비난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유엔 인권위원회는 직무 태만으로 그 행위를 재가한 꼴이 되어 버렸다. 다른 국가들도 살인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 터키, 인도네시아, 콜롬비아, 알제리 모두 지탄을 받지 않았다. 유엔 인권 위원회는 창설한 사람들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살육과 고문을 일삼는 정부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다.'라고 비판하였다.
서구와 다른 문명들 사이의 인권을 보는 견해 차이와 자신의 목표를 관철시키지 못하는 서구의 한계는 1993년 6월 빈에서 열린 유엔 세계 인권 회의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한쪽 진영에는 유럽과 북미 국가들이, 반대편 진영에는 50개국에 이르는 비서구 국가들이 있었다. 후자에서도 가장 적극적이었던 15개 나라의 면면을 보면 라틴 아메리카 1개국(쿠바), 1개 불교국(미얀마), 정치 이념, 경제 제도, 발전 수준에서 다양한 편차를 가진 4개 유교국(싱가포르, 베트남, 북한, 중국) 9개 이슬람 국가들(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이란, 이라크, 시리아, 예멘, 수단, 리비아)이었다. 이 아시아-이슬람 그룹을 주도한 나라는 중국, 이란, 시리아였다. 이 두 그룹 사이에 주로 서구를 지지하는 편이었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 사안에 따라 서구의 입장을 지지하기도 하지만 반기를 들 때가 더 많은 아프리카, 정교 국가들이 포진하였다.
문명의 선을 따라 국가들을 대팁으로 이끈 사안 중에는. 인권과 관련한 보편주의 대 문화 상대주의, 정치적. 시민적 권리와 개발권을 포함한 경제적. 사회적 권리 중에서 어느 것을 상대적으로 우선시할 것인가, 경제적 지원과 정치적 압력의 연계, 유엔 인권 감독관의 신설, 같은 기간에 빈에서 회의를 갖고 있던 비정부 인권 단체들을 정부간 회의에 어느 수준으로 참석시킬 것인가 외에도, 달라이 라마가 유엔 본회의에서 연설하도록 허용할 것인가, 보스니아 내의 인권 유린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비난을 가할 것인가 하는 좀 더 구체적인 문제들도 망라되어 있었다.
이러한 쟁점들에 대한 중요한 견해 차이는 서구 국가들과 아시아-이슬람 블록 사이에서 불거졌다. 빈 인권 회의가 열리기 두 달 전 아시아 국가 들은 방콕에서 만나 인권은 국가적, 지역적 특수성과 다양한 역사적, 종교적, 문화적 배경의 맥락 안에서 고찰되어야 하며 인권에 대한 감시는 국가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고 인권 상황의 개선이라는 전제 조건 아래 경제 지원을 하는 것은 개발권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입장 차이가 너무도 컸기 때문에 5월 초 제네바에서 빈 회의를 앞두고 열린 마지막 예비회담에서 작성된 문건의 거의 대부분은 한두 개국 이상의 반대로 괄호로 묶여 있었다.
서구 국가들은 빈 회의에 대한 준비가 덜 되었고 수적으로도 열세를 면치 못하였으므로 본회의에서 상대측보다 많은 양보를 하였다. 그 결과 여성의 인권 신장에 대한 강력한 촉구를 제외하면 합의된 내용은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한 인권 운동가의 지적대로 그 문건은 '결함과 모순'을 안고 있었으며 아시아-이슬람 연합의 승리와 서구의 패배를 의미하였다. 빈 선언은 언론, 출판, 집회, 종교의 자유에 대한 명백한 요구를 담고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많은 점에서 1948년 유엔이 채택한 만국 인권 선언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서구 세력의 약화를 반영한다. "1945년의 국제 인권 체제는 사라졌다. 미국의 헤게모니는 약화되었다. 1992년의 통합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일개 반도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는 이제 서구만의 것이 아니라 아랍, 아시아, 아프리카의 것이기도 하다. 만국 인권 선언과 국제 규약은 이제 2차 대전 직후와는 달리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유명무실한 것이 되어 버렸다.'라고 미국의 한 인권 운동가는 지적하였다. 아시아의 한 서구 비판가도 비슷한 견해를 피력하였다. '1948년 만국 인권 선언이 채택된 이후 처음으로 유대교-크리스트교와 자연법 전통에 완전히 치우치지 않은 나라들이 우위를 차지하였다. 이 유제 없는 상황은 인권의 새로운 국제 판도를 규정할 것이다. 또한 분쟁의 빈도를 증폭시킬 것이다.
또 다른 관측통에 따르면 "빈의 최대 승리자는, 설득을 통해 걸림돌을 제거하는 것을 성공이라고 볼 수 있다면, 누가 보아도 중국이었다. 베이징은 자신의 덩치를 슬쩍 과시하는 것만으로도 회담 내내 우위"를 유지하였다. 빈에서는 전략에서도 지고 표결에서도 졌지만, 서구는 몇 달 뒤 중국을 상대로 적지 않은 숭리를 거두었다. 중국 정부는 2000년 하계 올림픽 베이징 유치를 위해 막대한 투자를 하였다. 중국 국민도 올림픽 유치 열기에 휩싸여 여론의 기대 수준도 올라갈 대로 올라가 있었다. 중국 정부는 다른 나라 정부를 상대로 자국 올림픽 위원회에 압력을 넣어 달라고 활발한 득표 작전을 펼쳤다. 대만과 홍콩도 이 운동에 동참하였다. 반면 미국 의회, 유럽 의회, 인권 단체들은 베이징의 올림픽 유치에 맹렬히 반대하였다. 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표결은 비밀 투표를 따르지만 투표는 명백히 문명의 선을 따라 이루어졌다. 1차 투표에서 베이징은 알려진 바로는 아프리카의 폭넓은 지지를 등에 업고 시드니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하였다. 이스탄불이 탈락한 뒤 2차 투표에서 유교-이슬람 연합이 중국에 몰표를 던졌다. 그러나 베를린과 맨체스터가 탈락한 뒤 이들의 표가 시드니로 쏠리는 바람에 시드니는 4차 투표에서 아슬아슬하게 중국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안겨 주었다. 중국은 미국의 음모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하였다. '미국과 영 국은 중국을 평가 절하하는 데 성공하였다... 표면적인 이유는 '인권' 이었지만, 진정한 이유는 서구의 정치적 영향력을 과시하는 정치적인 것이었다.'라고 리 콴유는 주장하였다. 의심할 나위 없이 전 세계인의 대다수는 인권보다는 스포츠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지만, 서구가 빈을 비롯한 각종 국제회의에서 인권 문제와 관련하여 번번이 패배하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올림픽에서 드러난 서구의 제한된 영향력은 서구의 힘이 그만큼 축소되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서구의 힘이 줄어들었다는 요인 외에도,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역설 또한 탈냉전 세계에서 민주주의를 신장시키려는 서구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냉전 시대의 서구와 미국은 '우호적 독재자'라는 골치 아픈 문제에 직면하였다. 이것은 철저한 반공 노선을 고수하였기 때문에 냉전의 유익한 동반자가 될수 있는 군사 정부, 독재자와 협력하는 데서 오는 딜레마였다. 이들 독재 정부가 인권을 무자비하게 유린하였을 경우 그러한 협조는 불안과 때로는 당혹을 낳았다. 그러나 그들과의 협력은 정도가 덜한 악으로서 합리화할 수 있었다. 이들 정부는 대체로 공산주의 체제처럼 철저한 탄압으로 일관하지는 않았으며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입김에 덜 반발하고 더 높은 호응도를 보이리라는 기대를 걸 수 있었다. 더 잔인하고 적대적인 독재자에 압박을 가하기 위해서는 덜 잔인하고 우호적인 상대와 손을 맞잡아야 한다는 발상이었다. 탈냉전 세계에서는 우호적 독재 국가와 적대적 민주 국가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훨씬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다. 민주주의의 절차를 통해 집권한 정부는 친서방적이고 서방의 노선에 협조적이리라는 서구의 안이한 가정이 비서구 지역에서 반드시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선거를 통해 외세를 배격하는 민족주의 세력과 원리주의 세력이 집권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원리주의 세력이 명백한 승리를 거둔 1992년의 알제리 선거에서 군부가 개입하여 선거를 무효화하였을 때 서구는 안심하였다. 터키의 복지당과 인도의 힌두교 정당이 1995년과 1996년의 선거에서 다수 의석을 쟁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집권에는 실패하였을 때 서구는 다시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혁명이라는 분위기를 감안해야 하지만, 이란은 어떤 면에서는 이슬람 세계에서 상대적으로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다.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를 포함한 대다수 아랍 국가에서 민주적 선거가 치뤄질 경우 비민주적이었던 과거 정부에 비해 서구의 이익에 덜 동조하는 정권이 들어서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중국에서 투표를 거쳐 집권하는 정부는 대단히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띨 것이다. 비 서구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민주적 절차가 서구에 적대적인 정권을 탄생시 키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서구의 지도자들이 깨달으면서, 선거에 영향을 끼치려 노력하면서도 민주주의를 신장시키는 데 대한 열의를 점차 잃어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민
인구 통계학이 숙명처럼 작용한다면, 인구 이동은 역사의 원동력이 된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상이한 인구 증가율, 경제적 조건, 정부 정책이 그리스인, 유대인, 독일인, 노르웨이인, 터키인, 중국인 등의 대규모 이동을 낳았다. 이러한 이동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극심한 폭력을 수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세기의 유럽인들은 인구 침략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1821년에서 1924년 사이에 5500만 명의 유럽인이 해외로 이주하였는데 그중 5400만 명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서구인들은 다른 민족들을 정복하고 때에 따라서는 말살시켰으며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을 개척하고 거기에 정착하였다.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서구의 부상을 단적으로 입증하는 요소를 단 하나 꼽는다면 그것은 인구의 수출이다.
20세기 말에 와서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이민이 더욱 늘어났다. 1990년에 합법적인 국제 이민의 수는 1억 명에 달하였으며, 망명자가 1900만 명, 불법 이민자가 최소한 100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새로운 이민의 물결은 탈식민화, 새로운 국가의 성립, 사람들의 이주를 장려하거나 강제적으로 추진하는 국가 시책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근대화와 기술 발전의 산물이기도 하다. 교통수단의 발전은 이민을 더욱 쉽고 빠르게 그리고 저렴한 비용으로 할 수 있게 하였으며, 통신 기술의 향상은 경제적 기회를 추구하려는 욕망을 자극하고 이민자와 본국에 있는 가족 간의 결속을 강화시켰다. 19세기에 서구의 경제적 발전이 이민을 자극한 것처럼 20세기에 들어와 비서구 사회의 경제 발전도 이민을 자극하고 있다. 인구 이동은 자기 운동적 과정이다. '인구 이동의 유일한 법칙이 있다면, 일단 인구 이동이 시작되면 그것은 자체적으로 새로운 이동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이민자는 이민을 떠나는 방법에 관한 정보, 이주를 용이하게 하는 재정적 도움, 일자리와 집을 구하는데 필요한 조언을 제공함으로써 고국에 있는 친구와 친척의 이민을 돕는다'라고 와이너(Myron Weiner)는 주장한다. 그 결과 그의 표현에 따르면 세계적 이민 위기가 나타난다.
서구인은 일관성 있게 또 압도적으로 핵확산에 반대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원해 왔다. 반면에 이민에 대한 그들의 견해는 애매모호하였고 지난 20년 동안 일어난 중요한 세력 변화와 함께 그 견해가 바뀌었다. 1970년대까지 유럽 국가들은 대체로 이민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였으며 특히 독일과 스위스는 노동력 부족 현상을 타개하고자 이민을 장려하였다. 19S5년 미국은 1920년대에 수립된 유럽 지향의 이민 수용 정책을 획기적으로 수정하고 관련 법규를 조정하여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비유럽 지역에서 대대적인 이민을 받아들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높은 실업률, 이민자 수의 폭증, 비유럽계의 대대적 증가 등으로 유럽인의 태도와 정책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몇 년 뒤 비슷한 우려 때문에 미국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이민 정책의 변화가 나타났다.
20세기 후반의 이민과 망명은 주로 비서구 지역 내부에서의 이동이라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서구 사회로 유입되는 이민자의 수는 절대량에서 19세기 말 해외로 나간 서구인의 수에 육박한다. 1990년 현재 미국에는 이민 1세대가 2000만 명에 이르며 유럽에는 1550만 명, 호주와 캐나다에는 800만 명의 이민 1세대가 거주하고 있다. 유럽 주요 국가들에서 이민자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7퍼센트에서 8퍼센트에 이른다. 1994년 현재 전체 미국 인구의 8.7퍼센트가 이민자인데 이 수치는 1970년의 2배이며, 캘리포니아 인구의 25퍼센트, 뉴욕 인구의 16퍼센트가 이민자다. 1980년대에 미국은 모두 830만 명의 이민을 받아들였으며 1990년대의 전반기 4년 동안 450만 명의 이민자가 미국에 정착하였다.
새로운 이민은 압도적 다수가 비서구 사회에서 왔다. 1990년 현재 독일에 거주하는 터키인의 수는 167만 5천 명에 이르며 그 뒤를 이어 유고슬라비아인, 이탈리아인, 그리스인이 대규모 외국인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이탈리아는 이민자의 주요 출신국이 모로코, 미국(대부분 고향으로 돌아온 이탈리아계 미국인으로 추정됨), 튀니지, 필리핀 순서로 분포되어 있다. 1990년대 중반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는 이슬람교도의 수는 400만 명에 이르며 서유럽 전체에는 1300만 명의 이슬람교도가 살고 있다. 1950년대만 하더라도 미국으로 유입되는 이민자의 3분의 2가 유럽과 캐나다 출신이었다. 1980년대에 와서는 수적으로 훨씬 늘어난 이민자의 35퍼센트가 아시아 출신, 45퍼센트가 라틴 아메리카 출신, 15퍼센트가 유럽과 캐나다 출신이었다. 미국의 자연 인구 증가율은 낮은 수준이며 유럽의 경우는 제로에 가깝다. 이민자들의 출산율이 매우 높기 때문에 서유럽 지역의 인구 증가율은 아주 높아질 전망이다. 따라서 이제는 군대나 탱크가 아니라,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신을 경배하고 다른 문화에 속해 있으며, 자신들의 일자리를 앗아가고 자신들의 땅을 차지하고 복지 제도를 잠식하고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위협하는 두려운 이민자들이 자신들을 침략하고 있다는 불안이 서구인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다. 인구 증가의 상대적 열세에서 기인하는 이러한 공포는 호프먼(Stanley Hoffman)의 지적대로 본격적인 문화적 충돌과 국가적 정체성에 대한 불안이 접맥되어 있다.
1990년대 초반 유럽 이민자의 3분의 2가 이슬람교도였다. 이민에 대한 유럽인의 우려는 무엇보다도 이슬람 이민자들을 겨냥하고 있다. 위기는 인구 서유럽 신생아의 10퍼센트를 이민자들이 차지하며 브뤼셀의 경우는 신생아의 50퍼센트가 아랍계다.- 와 문화의 양면에서 나타난다. 독일에 거주하는 터키인이건 프랑스에 거주하는 알제리인이건 이슬람 공동체는 현지 문화에 동화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럴 조짐을 보여 주지 않아 유럽인들을 불안에 빠뜨리고 있다. 이슬람 공동체가 유럽의 국경선을 잠식하면서 말하자면 유럽 공동체에서 열세번째 나라로 부상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전 유럽에 팽배해 있다.'라고 1919년 도므나슈(Jean Marie Dome-nach)는 지적하였다. 이민자에 대하여 미국의 한 언론인은 이렇게 평가하였다.
유럽인의 적대감은 묘하게도 선별적으로 나타난다. 동유럽의 침공을 우려하는 프랑스인은 거의 없다. 폴란드인은 어차피 유럽인이며 가톨릭 신자이다. 또한 비아랍계 아프리카 이민자들도 두려움이나 경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적대감은 대개 이슬람교도에게 쏠린다. '이미그레(Immigre)'라는 단어는 현재 프랑스에서 제2 종교가 된 이슬람과 사실상 동의어로 쓰이는데, 이것은 프랑스 역사에 깊이 뿌리 박힌 문화적 인종적 편견을 드러낸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프랑스인은 인종주의자라기보다는 문화주의자이다. 그들은 완벽한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아프리카 흑인을 헌법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슬람교도 여학생이 두건을 두르고 등교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1990년 현재 프랑스에 아랍인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프랑스 국민은 76퍼센트, 흑인이 많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46퍼센트, 아시아인이 많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40퍼센트, 유대인이 많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22퍼센트였다. 1994년 독일 국민의 47퍼센트가 아랍인 이웃과 함께 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응답하였고, 39퍼센트는 폴란드인과, 36퍼센트는 터키인과, 22퍼센트는 유대인과 이웃이 되고 싶지 않다고 답하였다. 서유럽에서는 유대인을 겨냥한 반유대주의가 아랍인을 겨냥한 반유대주의로 바뀌었다.
이민에 대한 여론의 반대와 이민자에 대한 적대감은 이민자 사회나 개인에 대한 폭력 행위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났으며, 특히 1990년대 초반 독일에서 크게 사회 문제가 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극우주의, 민족주의, 반이민정책을 표방하는 정당들에 대한 지지도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지지도는 아직은 미미하다. 독일의 공화당은 1989년의 유럽 선거에서 7퍼센트를 상회하는 표를 얻었으나 1990년의 국내 선거에서는 고작 2.1퍼센트의 지지율만 얻었을 뿐이다. 프랑스의 경우, 1981년에는 거의 무시해도 좋을 정도였던 극우 국민전선에 대한 지지표가 1988년에는 9.6퍼센트로 뛰어올랐고. 그 후 지방 선거와 의회 선거에서 12퍼센트와 15퍼센트 사이에서 지지율이 오르내리고 있다. 1995년 대통령 후보로 나선 민족주의 성향의 두 후보가 얻은 지지율은 도합 19.9퍼센트였으며, 국민전선은 툴롱과 니스를 포함한 여러 도시에서 시장을 당선시켰다. 이탈리아에서는 MSL 국민동맹에 대한 지지율이 1980년대의 5퍼센트에서, 1990년대 초반에는 10퍼센트에서 15퍼센트 사이로 껑충 뛰어올랐다. 벨기에에서는 플랑드르의원연합/국민전선이 1994년의 총선에서 9퍼센트의 지지도를 얻었으며 특히 앤트워프에서는 28퍼센트의 지지를 얻었다. 오스트리아의 경우 1986년 총선에서 10퍼센트 미만에 머물렀던 자유당의 지지율이 1990년 총선에서 15퍼센트로, 다시 1994년에는 23퍼센트로 뛰어올랐다.
이슬람교도 이민에 반대하는 유럽 정당들은 대체로 이슬람 국가의 이슬람 정당들과 유사한 행동 양식을 보인다. 이들은 모두 부패한 기존 체제와 기존 정당들을 비난하고 특히 실업 같은 경제적 불만에 편승하며 인종적 종교적 구호를 내걸고 자국에 대한 외세의 영향력을 거세게 비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이 두 진영의 극단론자들은 테러와 폭력에 개입하기도 한다. 이슬람 원리주의 정당과 유럽의 극우 정당은 모두 총선보다는 지방 선거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이슬람 국가와 유럽 각국의 기존 정부는 이러한 사태 전개에 유사한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슬람 국가 정부는 과거보다 이슬람 색채가 짙게 깔린 노선, 상징, 정책을 추진하였다. 유럽의 주류 정당들도 극우 반이민 정당의 구호와 대책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였다. 민주주의가 효과적으로 가동되고 이슬람 정당이나 민족주의 정당과 겨루는 둘 이상의 정당이 존재하는 경우, 이 들 우익 정당의 지지율은 20퍼센트를 넘지 못하였다. 알제리, 오스트리아, 그리고 어느 정도는 이탈리아에서도 확인되었듯이, 다른 효과적인 대안 정당이 존재하지 않을 때만 이들은 20퍼센트의 벽을 돌파할 수 있었다.
1990년대 초반 유럽의 정치 지도자들은 경쟁적으로 반이민 정서에 대응하였다. 프랑스에서 시라크(Jacques Chirac)는 1990년 이민을 완전히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파스쿠아(Charles Pasqua) 내무 장관은 1993년 제로 이민을 내걸었다. 미테랑(Francois Mitterrand), 크레송(Edith Cresson), 데스탱(Valery Giscard d'Estaing) 같은 주요 정치인들도 반이민 정책에 동조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민은 1995년 의회 선거의 증요한 쟁점이었으며 보수당의 승리에 분명히 기여하였다. 1990년대 초반 프랑스 정부의 정책은 외국인 자녀의 시민권 획득, 외국인 가족의 이민, 외국인의 망명 신청 요건, 알제리인의 프랑스 입국 비자 취득을 한층 까다롭게 만드는 쪽으로 바뀌었다. 불법 이민자는 강제로 추방되었으며, 이민을 전담하는 경찰력과 정부 기관도 증강되었다.
독일에서도 콜 총리를 비롯한 여러 정치 지도자들이 이민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였다. 가장 중요한 조치로서, 독일 정부는 '정치적 이유로 탄압을 받는 사람들' 의 망명 자격을 보증하는 독일 헌법 16조를 수정하고 망명 신청자들에 대한 보조금을 대폭 삭감하였다. 1992년 43만 8천 명이 독일 망명을 신청하였지만 1994년에는 불과 12만 7천 명이 망명을 신청하였다. 1980년 영국은 망명자 수를 매년 약 5만 명으로 대폭 축소하는 정책을 취하였으므로 이 지역에서는 이민에 대한 반감과 적대감이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1992년과 1994년 사이 영국은 망명 허용자 수를 2만 명에서 1만 명으로 줄였다. 유럽 연합 내에서 이동의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영국 정부는 비유럽계 이민이 유럽 대륙으로부터 몰려들 가능성을 무엇보다도 우려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1990년대 중반의 시점에서 서유럽 국가들은 비유럽계의 이민을 완전히 금지하지는 않더라도 그 수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정책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민 문제가 뒤늦게 부각되었으며 유럽처럼 강한 정서적 반감은 유발하지 않았다. 미국은 스스로를 이민자들의 국가로 이해하는 뿌리 깊은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이민자들을 성공적으로 동화시킨 역사적 경험이 있다 게다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미국의 실업률은 유럽에 비하여 현저하게 낮았다. 이민에 대한 미국인의 입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요인은 실직에 대한 공포가 아니었다. 미국으로 유입되는 이민자들의 출신국 분포가 유럽보다 다양하므로, 단일 외국인 집단에 의하여 압도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지역에 따라서는 현실성 있는 불안임에도 불구하고 폭넓은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두 최대 이민자 집단과 평균 미국인의 문화적 거리 또한 유럽보다 가깝다. 멕시코인은 가톨릭 신자로서 스페인어를 구사하며, 필리핀인 역시 가톨릭 신자로서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이러한 요인들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와 라틴계 이민의 수를 크게 증가시킨 기폭제의 역할을 한 법안이 1965년에 통과된 지 4반세기가 흐른 후 미국의 일반 여론이 크게 바뀌었다. 1965년에는 국민의 33퍼센트가 이민 축소를 원하였다. 그러던 것이 1977년에는 42퍼센트, 1986년에는 49퍼센트, 1990년과 1993년에는 61퍼센트가 이민 제한을 원하였다. 1990년대에 이루어진 일련의 여론 조사들에서 국민의 60퍼센트 이상이 이민 규제를 원하는 일관된 흐름이 확인되었다. 경제 불안과 악화되는 경제 상황이 이민의 여론 추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경제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 꾸준히 반대 여론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문화, 범죄, 생활방식 등이 더 중요한 원인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한 분석가가 1994년에 지적한 것처럼 상당수의, 아니 대다수의 미국인은 아직도 자기 나라를, 영국의 법 전통을 계승하였고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영어를 써야 하고 서구의 고전적 전범에 따라 각종 기관과 건물을 지었고 유대교-크리스트교를 신봉하고 프로테스탄트의 노동 윤리에서 발전의 원동력을 찾은 유럽인이 개척한 나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을 반영하듯 한 여론 조사에서 미국 국민의 55퍼센트가 이민이 미국 문화에 위협을 가한다는 응답을 하였다. 유럽인이 이슬람 국가나 아랍인에서 이민 위기를 본다면 미국인은 아시아인과 라틴 아메리카인, 특히 멕시코인에게서 이민 위기를 감지한다. 미국이 지나치게 많은 이민을 받아들이고 있는 나라를 묻는 1990년의 여론 조사에서 압도적 다수가 멕시코를 꼽았고 그다음이 쿠바, 동양(광의의), 남미와 라틴 아메리카(광의의) 일본, 베트남, 중국, 한국이었다.
1990년대 초반의 점증하는 이민 반대 여론은 유럽과 비슷한 정치계의 대응을 낳았다. 미국의 정치 제도를 감안할 때 반이민 노선을 표방하는 극 우 정당이 대세를 잡기는 어렵지만 반이민 정책을 요구하는 선동주의 정치가와 이익 집단의 수가 늘었고 이들의 활동 범위도 확대되었으며 목소리도 높아졌다. 미국인의 원성은 주로 350만 명에서 400만 명에 이르는 불법 이민자들에게 집중되었으며 정치권도 즉각적으로 여기에 호응하였다. 유럽처럼 미국에서도 가장 강력한 대응은 이민자들에 대한 부담을 고스란히 떠맡는 주 단위, 지방 단위에서 나왔다. 1994년 플로리다주는 다른 여섯개 주의 동참을 이끌어내면서 불법 이민자들 때문에 추가로 발생하는 교육, 복지, 치안, 기타 경비를 매년 8억 8천 4백만 달러씩 연방 정부가 부담해야 한다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절대 숫자로 보거나 상대적 비율로 보거나 이민자가 가장 많은 캘리포니아주의 윌슨 주지사는 불법 이민자의 자녀에 대한 교육 기회를 박탈하고, 불법 이민자의 미국에서 태어난 자녀에게는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으며, 불법 이민자를 위한 주 정부의 응급 치료 예산을 폐지하는 법안을 제출하여 여론의 지지를 얻었다. 1994년 11월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윌슨 주지사의 제안 187호를 압도적으로 승인하여 불법 외국인들과 그들의 자녀에 대한 보건, 교육, 복지 혜택을 없앴다.
또한 1994년 클린턴 행정부는 당초의 입장과는 달리 이민을 엄격히 규제하고 정치 망명자의 자격 요건을 강화하고 이민 귀화국을 확대하고 국경 순찰대를 강화하고 멕시코와의 국경선에 물리적 장벽을 세우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선회했다. 1990년 의회가 출범시킨 이민 개혁 위원회는 1995년 합법적 이민자의 수를 매년 80만 명에서 55만 명으로 줄이고 자녀와 배우자에게 우선권을 주되 현 시민권자나 영주권자의 다른 친척에게는 우선권을 주지 않는 안을 권고함으로써 아시아계와 히스패닉계의 분노를 샀다. 이 위원회의 수많은 권고안을 구체화한 다수의 법안과 이민 축소를 겨냥한 각종 시책들을 1995~96년도 의회에서 면밀하게 검토하였다.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이민은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쟁점의 하나가 되었다. 대통령 후보로 나선 부캐넌(Patrick Buchnan)은 이민 규제를 자신의 가장 중요한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다. 미국은 비서구인의 자국 유입을 대폭 줄인다는 점에서 유럽의 선례를 따르고 있다.
유럽이나 미국이 이민의 유입을 근절시킬 수 있을까? 1970년대에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킨 라스파유(Jean Caude Chesnals)의 소설로부터 1990년대에 나 온 셰스네(Jean -Claude Chesnals)의 학문적 분석에 이르기까지 프랑스는 인구 분포와 관련한 비관적 시나리오를 일관되게 경험해 왔다. 그것을 1991년에 를루슈(Pierre Lellouch) 는 이렇게 요약한 바 있다. '역사, 근접성, 빈곤으로 프랑스와 유럽은 필시 남쪽의 실패한 국가들로부터 온 사람들에게 압도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다. 과거의 유럽은 백인과 유대교-크리스트교 신자가 주류를 이루었다. 미래의 유럽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미래는 변경 불가능한 방식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미래도 영속적이지 않다. 문제는 유럽이 이슬람화할 것이냐 아니냐 또는 미국이 히스패닉화 할 것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미국과 유럽이 상이한 문명들에서 유래한 두 개의 서로 뚜렷이 구분되는 대규모 공동체를 포함하는 단절국이 될 것이냐의 여부이다. 이것은 다시 이민자의 규모와 그들이 유럽과 미국을 지배하는 서구문화에 어느 정도까지 동화되느냐에 달려 있다.
유럽 사회는 대체로 이민자들이 자기네 문화에 흡수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며 실제로 그렇게 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슬람교도 이민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동화될 것인지도 지금으로서는 불투명하다. 따라서 적지 않은 수의 이민이 지속적으로 유입될 경우 유럽 국가들은 크리스트교 공동체와 이슬람 공동체로 분열될 가능성이 있다. 유럽의 정부들과 유럽인들이 이민 축소에 따르는 비용을 기꺼이 감당할 자세가 되어 있을 경우 이런 사태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비용에는 이민 저지를 위한 시책에 직접적으로 들어가는 재정 비용, 기존의 이민자 공동체를 더욱 소외시키는 데 따르는 사회적 희생, 노동력 부족과 인구 증가율 저하가 낳는 장기적 경제 희생 가능성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슬람교도의 인구 잠식 문제는, 이미 일부 국가가 그런 단계에 도달하였지만 북아프리카와 중동 국가들의 인구 증가율이 절정에 달한 뒤 감소 추세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 심각성이 차츰 약화될 것이다. 인구 압력이 이민을 억제한다면, 이슬람교도 이민자 수는 2025년까지는 크게 떨어질지도 모른다.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는 사정이 다르다. 만약 서부 아프리카와 중부 아프리카에서 경제 발전이 이루어져 사회적 이동성을 촉진한다면, 유럽이 느끼는 '이슬람화' 의 위협은 '아프리카화' 의 위협으로 바뀔 것이다. 이러한 위협이 얼마나 현실화할 것인가는 AIDS와 그 밖의 질병으로 아프리카 인구가 얼마나 줄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아프리카 다른 지역으로부터의 이민을 얼마나 흡수할 수 있을 것인지에 좌우될 것이다. 이슬람교도가 유럽에 직접적인 문제를 야기한다면 미국의 고민은 멕시코인이다. 현재의 추세와 정책이 계속될 경우, (표 8.2)에서 볼 수 있듯이 21세기 전반기에 가서는 미국의 인구 분포가 극적으로 변화하여 백인이 50퍼센트 가까이를 차지하고 히스패닉계가 25퍼센트를 차지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유럽처럼 이민 정책이 바뀌고 효과적인 이민 억제책이 마련될 경우 이러한 예측은 빗나갈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히스패닉 인구가 과거의 이민 집단들이 그랬던 것처럼 미국 사회에 얼마나 잘 동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2세대, 3세대 히스패닉 집단은 그런 동화에서 많은 이득을 볼 수 있고 또 동화를 향한 강한 압력을 받는다. 그렇지만 멕시코 이민은 다른 이민 집단들과 중요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첫째, 유럽이나 아시아의 이민자들은 바다를 건너왔다. 반면 멕시코 이민자들은 걸어서 국경선을 넘거나 강을 건너서 왔다. 게다가 교통수단과 통신 수단 덕분에 본국과 잦은 접촉을 가질 수 있고 따라서 본국의 동포들과 긴밀한 유대감을 공유할 수 있다. 둘째, 멕시코 이민은 미국의 남서부에 집중되어, 유카탄에서 콜로라도강까지 연결되는 광범위한 멕시코인 사회를 형성한다(지도 8.1). 셋째, 동화에 대한 저항감이 다른 이민 집단들보다도 멕시코 이민 집단이 유독 강하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부분적 증거들이 있으며 1994년 캘리포니아에서 나온 제안 187호에 대한 반대 시위에서 입증되었듯이 멕시코 이민자들은 자신들을 미국인이 아니라 멕시코인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넷째, 멕시코 이민자들이 정착하는 지역은 19세기 중반 미국이 멕시코와의 전쟁을 통해 합병한 곳이다. 멕시코의 경제적 발전은 틀림없이 멕시코 국민들 사이에서 실지 탈환 의식을 확산시킬 것이다. 21세기에 미국이 군사적 팽창을 통해 얻은 결과가 21세기 초에 들어가 멕시코 인구의 팽창으로 위협받거나 역전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문명 간의 세력 판도 변화 때문에 서구는 핵무기 확산, 인권, 이민 등의 문제에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서구는 다른 국가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경제적 자산을 당근과 채찍으로 유효 적절히 사용하고, 다른 국가들이 서구 국가들을 이간질시키지 못하도록 결속을 다지고 정책 공조를 공고히하며 비서구 국가들 간의 차이점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키고 활용해야 한다. 이러한 전략을 서구가 얼마나 추구할 수 있는가는, 한편으로는 서구와 서구에 도전하는 문명들 사이의 갈등의 성격이나 강도에 좌우되고, 또 한편으로는 서구가 중간적 문명들과 얼마나 유대감을 가지고 그들과 얼마나 공동의 이해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인가에 좌우될 것이다.
9. 문명 중심의 세계 정치 구도
핵심국과 단층선 분쟁
문명은 궁극적 인간 종족이며, 문명의 충돌은 지구적 규모에서 펄쳐지는 부족간의 분쟁이다. 미래에는 상이한 문명에 속하는 국가와 집단이 제3의 문명에 속하는 대상과 겨루어 자신들의 이익을 증진시키거나 그 밖의 공동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제한적이고 임기응변적이며 전략적인 연대와 결속을 맺을 것이다. 과거 냉전 시대의 군사 동맹처럼 상이한 문명에 속하는 국가간의 연합은 약화되거나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와 미국의 지도자들이 한때 공언한 바 있는 문명 사이의 긴밀한 '동반자 관계'는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문명간의 관계는 소원함에서 폭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색채를 띨 것이며 대부분의 관계는 그 양극단의 중간 지점 어딘가에 자리 잡을 것이다. 많은 경우 그 관계들은 옐친 대통령이 러시아와 서구의 관계를 놓고 경고한 '냉화'에 근접하는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라 게라 프리아(la guerra fria)' 곧 냉화는 13세기에 스페인인이 지중해에서 이슬람교도와의 '불편한 공존을 묘사하고자 창안한 표현이지만, 1990년대에 들어와 이슬람과 서구 사이에서 문명의 냉전'이 다시금 전개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견해로 표현되고 있다. 문명들의 관계를 묘사하는 표현은 이밖에도 얼마든지 있다. 냉전, 무역전, 불안한 평화, 긴장 관계, 강한 라이벌 의식, 경쟁적 공존, 군비 경쟁 등은 모두 상이한 문명에 속한 실체들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는 훌륭한 표현들이다. 신뢰와 우의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문명의 갈등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국지적이고 미시적인 차원에서, '단층선 분쟁'은 상이한 문명에 속한 인접국들 사이에, 한 국가 안의 상이한 문명에 속한 집단들 간에, 옛 소련과 유고슬라비아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낡은 질서의 파편 위에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고 시도하는 집단들 간에 발생한다. 단층선 분쟁은 특히 이슬람교도와 비이슬람교도 사이에서 빈번히 일어난다. 분쟁의 원인과 성격, 전개 양상은 10장과 11장에서 자세히 분석하겠다. 세계적이고 거시적인 차원에서 '핵심국 분쟁'은 상이한 문명에 속한 주요국들 사이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분쟁을 낳는 쟁점들은 국제 정치의 고전적 주제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유엔, IMF, 세계은행처럼 지구적 규모를 갖는 국제기구의 운영과 발전에 미치는 상대적 영향력
2. 핵확산 금지, 무기 규제, 군비 경쟁을 둘러싼 논쟁에 반영되는 상대적 군사력
3. 무역, 투자 등의 문제를 둘러싼 대립에서 나타나는 경제력과 복지 수준
4. 한 문명에 속한 나라가 다른 문명에 거주하는 동족을 보호하고, 다른 문명에 속한 사람들을 차별하고, 자국 영토에서 다른 문명 사람들을 배제하려는 노력과 관련 있는 인적 요소
5. 한 나라가 자신의 가치관을 다른 문명 사람들에게 강요하거나 촉구하려고 시도할 때 발생하는 가치관과 문화의 갈등
6. 단층선 분쟁이면서도 핵심국들을 곧잘 전선으로 끌어내는 영토 분쟁
이러한 문제들은 인류의 역사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갈등의 근원이다. 그러나 상이한 문명에 속한 국가들이 부딪칠 때 문화적 차이는 갈등을 증폭시킨다. 상호 경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핵심국들은 자기 문명의 응집력을 강화하고 제3의 문명에 속하는 국가들의 지지를 끌어내고 적대 관계에 있는 문명의 내부 분열과 결함을 조장하며 이러한 목표들을 달성하고자 외교적. 정치적. 경제적 방책, 은밀한 공작, 유인, 선전, 강압을 적절히 섞어서 구사한다. 그러나 핵심국들은 중동이나 인도 대륙처럼 단층선을 따라 서로 인접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직접적 군사 충돌은 상호 자제한다. 핵심국 간의 전쟁은 다음 두 가지 상황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첫째, 핵심국을 포함한 동질적 집단들이 분쟁 당사자들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단층선 분쟁이 문명 간의 전면전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대립 관계에 있는 핵심국들이 자제하거나 단층선 분쟁을 해결하도록 유도하는 측면도 있다.
둘째, 문명들의 세력 균형에 변화가 올 때, 핵심국들의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 투키디데스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 문명 내부에서 아테네의 힘이 강성해졌을 때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서구 문명의 역사는 부상하는 강대국과 쇠락하는 강대국 사이에 벌어진 '헤게모니 전쟁'의 역사다. 상이한 문명에 속해 있으면서 부상하는 핵심국과 쇠락하는 핵심국 사이의 분쟁 촉발 정도는 이들 문명에 속한 국가들이 새로운 강대국의 부상 앞에서 견제를 추구하느냐 편승을 추구하느냐에 달려 있다. 아시아 문명에서는 편승 현상이 더 지배적으로 나타나지만, 중국의 부상은 미국, 인도, 러시아 같은 다른 문명권의 국가들로 하여금 세력 균형을 도모하도록 자극할 수 있다. 서구의 역사를 볼 때 영국과 미국 사이에서는 헤게모니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 팍스 브리타니카에서 팍스 아메리카나로의 이행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주된 요인은 두 사회의 문화적 유대감이 강하였기 때문이다. 서구와 중국 사이에는 그러한 종류의 유대감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서구에서 중국으로 패권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군사 충돌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런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은 상당히 많다. 이슬람의 역동성은 비교적 소규모로 벌어지는 단층선 분쟁의 지속되는 원천이 되고 있으며, 중국의 부상은 핵심국 사이에 벌어지는 대규모 문명 전쟁의 잠재적 원천이 되고 있다.
이슬람과 서구
클린턴 대통령을 비롯하여 일부 서구인들은 서구는 이슬람과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폭력을 휘두르는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이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1400년 동안의 역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입증한다. 정교를 포함한 크리스트교와 이슬람교의 관계는 폭력으로 얼룩져 있다. 그들은 서로가 강한 적대감을 가졌다. 20세기에 표출된 자유 민주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갈등은 이슬람과 크리스트교 사이의 지속적이고 뿌리 깊은 갈등 관계에 비하면 일시적이고 표피적인 역사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때로는 평화적 공존의 시기도 있었지만, 이들의 관계는 대체로 극심한 경쟁감과 다양한 강도의 열전 관계였다. 에스포지토(John Esposito)가 지적하듯이 역사적 역학 관계로 보아 두 공동체는 흔히 경쟁 관계에 있었고 때로는 패권, 영토, 정신을 놓고 처절한 싸움을 벌였다. 오랜 세월 동안 두 종교는 대대적 공세, 소강상태, 역공 같은 일련의 단계를 거치면서 영욕을 주고받았다. 7세기 초반에서 8세기 중반까지 이슬람-아랍 세력이 크게 부상하면서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중동, 페르시아, 북인도가 이슬람교도의 지배권 아래 들어갔다. 그 후 약 2세기 동안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를 가르는 경계선은 안정 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11세기 후반부터 크리스트교 세력은 지중해 서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의 회복을 주장하고 나서 시칠리아를 정복하고 톨레도(스페인 증부의 도시)를 탈환하였다. 1095년 크리스트교권은 십자군 원정을 감행하여 이후 150년 동안 크리스트교 군주들은 근동의 성지와 인접 지역들에서 크리스트교의 지배권을 확립하려고 노력하다가 점점 패퇴하여 결국 1291년 그들의 마지막 보루었던 아크레(이스라엘에 있는 지증해 연안 도시로 십자군 전쟁의 격전지다 : 옮긴 이)를 잃고 말았다. 그동안 오스만 제국은 다시 역사의 전면에 나섰다. 오스만 제국은 먼저 콘스탄티노플을 약화시킨 다음 북아프리카는 물론 발칸 지역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1529년에는 빈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루이스(Bernard 1ew1s)의 지적에 따르면 1천 년 가까이 무어인이 스페인에 첫발을 내디딘 시기부터 터키가 빈을 2차 포위한 시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은 끊임없이 이슬람의 위협에 시달렸다. 이슬람은 지금까지 최소한 두 번에 걸쳐 서구의 생존을 위협한 경력이 있는 유일한 문명이다.
그러나 15세기에 들어와 사태는 다시 반전하였다. 크리스트교 세력은 점차 이베리아를 탈환하고 1492년 그라나다 정복을 매듭지었다. 그동안 유럽에서 발달한 대양 항해술에 힘입어 포르투갈을 선두로 유럽 국가들은 이슬람교도의 심장부를 우회하여 인도양 너머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아울러 러시아는 두 세기 동안의 타타르 지배로부터 벗어났다. 오스만 제국은 마지막 압박을 가하여 1683년 빈을 다시금 포위하였다. 그러나 빈 정복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오스만 제국은 이후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발칸 지역의 정교 세력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투쟁을 벌였고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가 확대되었으며 러시아는 혹해와 코카서스 지역에서 약진하였다. 그 후 1세기 동안 '크리스트교 세계의 천적'은 '유럽의 병자'로 바뀌었다. 1차 대전이 끝난 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최후의 일격을 가하여 터키 공화국을 제외한 오스만 제국의 전 영토를 직접 또는 간접 통치하는 기틀을 구축하였다. 1920년에 이르면 겨우 4개 이슬람 국가-터키,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아프가니스탄-만이 비이슬람교도의 통치를 받지 않으면서 독립국으로서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와 1930년대부터 서서히 시작된 서구식민주의의 퇴조는 2차 대전의 종전과 함께 가속도가 붙었다. 소련이 붕괴하자 독립 이슬람 국가의 수도 늘어났다. 한 통계에 따르면 1757년부터 1919년까지 비이슬람 정부가 이슬람교도의 영토를 병합한 사례는 약 92건에 이른다. 1995년에 이르면 이 중에서 69개 지역이 다시 이슬람의 통치 아래 들어갔고 이슬람교도 인구가 압도적 다수를 점하는 독립국의 수가 45개로 늘어났다. 이러한 관계 변화에 수반된 폭력성은 1920년부터 1929년까지 발생한 상이한 종교를 가진 국가 사이에 벌어진 전쟁 가운데 절반이 이슬람교도와 크리스트교도 사이에서 발생하였다는 사실에 반영되어 있다.
이처럼 갈등이 지속되는 원인을 12세기 크리스트교도들의 종교적 열정이나 20세기의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 같은 일시적 현상에서 찾기는 어렵다. 갈등은 두 종교의 본질과 이들 종교에 바탕을 둔 문명의 성격에서 나온다. 한편으로 이 갈등은 종교와 정치를 통합하고 초월하는 삶의 방식으로서 이슬람을 고수하는 이슬람교의 가치관과 세속의 영역과 종교의 영역을 분리하는 서구 크리스트교의 가치관이 빚는 대립의 산물이다. 그러나 갈등은 유사성에서도 기인한다.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는 모두 일신교인데, 일신교는 다신교와는 달리 자기 외부의 신성을 좀처럼 수용하려 들지 않으며 세계를 우리와 그들이라는 이원적 구도로 파악한다. 둘 다 하나의 유일한 신앙을 모든 인간이 추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보편주의를 내건다. 이교도를 참다운 유일 신앙으로 개종시켜야 할 의무가 신앙인에게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이 둘은 모두 포교에 커다란 비중을 두는 종교이다. 처음부터 이슬람은 정복을 통하여 교세를 넓혔으며, 크리스트교도 그런 기회를 마다하지 않았다. '지하드'와 '십자군'이라는 평행선상에 놓인 개념은 서로 유사할 뿐 아니라 세계의 다른 주요 종교들과 이 두 종교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다른 문명들이 역사를 순환적이거나 정적인 상태로 보는 것과는 달리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는 유대교와 함께 역사를 목적론적으로 이해한다.
과거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의 충돌 수준은 인구 증가나 감소, 경제 발전, 기술 변화, 종교적 열정의 강도 같은 요인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7세기에 이슬람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아랍인이 전례 없는 '규모와 속도'로 비잔틴 제국과 사산 제국의 영토로 대거 이주하였다. 몇 세기 뒤 십자군이 발홍한 것도 경제 성장, 인구 팽창, 11세기 유럽에서 이루어진 클뤼니파의 개혁 운동과 맥을 같이한다. 덕분에 성지 수복의 기치 아래 수많은 기사와 농부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 1차 십자군 원정대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을 때 "아드리아해와 헤라클레스의 기둥(유럽과 아프리카를 잇는 지브롤터 해협 동안의 두 곶 : 옮긴 이) 너머에 거주하는 모든 야만인 부족을 포함하여 서구 전체가 모든 권속을 거느리고 대대적인 이주를 시작하척 단단한 덩어리처럼 아시아로 치고 들어오는" 듯하였다고 한 비잔틴 거주자는 당시의 상황을 전한다. 19세기에 들어와 폭발적인 인구 증가는 다시 한번 유럽을 들썩여 사상 최대 규모의 유럽인이 이슬람 지역을 비롯하여 세계 각지로 쏟아져 나갔다.
그에 상응하는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20세기 후반 이슬람과 서구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첫째, 이슬람교도 인구의 증가는 대규모의 실업자를 낳았고 여기에 불만을 품은 청년들은 이슬람의 대의를 실현하는 운동에 뛰어들거나 서구로 이주하여 인접 국가들을 긴장으로 몰아넣었다. 둘째, 이슬람의 부상으로 이슬람교도들은 서구에 견주어 자기네 문명의 독특한 가치와 개성에 새로운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셋째, 자신의 가치와 제도를 보편화하고 경제적, 군사적 우위를 고수하며 이슬람 세계에서 발생하는 분쟁에 개입하려는 서구의 시도는 이슬람교도들의 강한 반발을 낳았다. 넷째, 공산주의의 붕괴로 서구인과 이슬람교도의 공적이 사라지자 둘은 서로를 가장 큰 위협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다섯째, 이슬람교도와 서구인의 접촉이 늘어나고 교섭이 잦아지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이 상대방과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각성 또한 새롭게 확산되었다. 상호 교섭과 어울림은 또한 상대 문명에 속한 사람들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자기 문명 사람들의 권리를 놓고 벌어지는 대립을 심화시킨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이슬람 사회와 서구 사회에서 상대방에 대한 관용은 모두 크게 줄어들었다.
이슬람과 서구가 다시금 충돌하는 원인은 권력과 문화의 근본적 물음으로 귀결된다. 누가 지배하고, 누가 지배당해야 하는가? 레닌이 정의한 정치학의 핵심 문제가 바로 이슬람과 서구의 대립 구도 밑바탕에 놓여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레닌이라면 무의미한 것으로 간과했을 부수적 갈등이 존재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두 가지 판이한 해석 따라서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놓고 벌어지는 대립이 바로 그것이다. 이슬람이 이슬람으로 남아 있는 한(그렇게 될 것이다.), 서구가 서구로 남아 있는 한(상대적으로 불투명하다), 두 거대 문명이 생활방식을 놓고 벌이는 근본적 갈등은 지난 1400년 동안 그랬듯이 앞으로도 이들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규정할 것이다.
이슬람과 서구의 관계는 상당수의 중요한 문제들을 놓고 이들의 입장 차이나 대립 때문에 더욱 복잡하게 꼬인다. 역사적으로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영토에 대한 지배권이었지만 오늘날 이 문제는 상대적으로 그 비중이 줄어들었다. 1990년대 중반에 이슬람교도와 비이슬람교도 사이에서 발생한 28건의 단층선 분쟁 가운데 19건이 이슬람교도와 크리스트교도 사이에서 빚어졌다. 이 중 11건은 이슬람과 정교의 충돌이고 8건은 이슬람과 아프리카 및 동남아시아의 서구 크리스트교 신자들과의 충돌이었다. 폭력을 낳았거나 폭력으로 비화할 잠재력이 있는 분쟁 중에서 오직 1건, 곧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충돌만이 서구와 이슬람의 단층선에서 직접 발생하였다. 서구의 영토 제국주의가 실질적으로 막을 내리고 아직까지는 이슬람의 영토 팽창 야심이 구체화되고 있지 않은 이 시점에서, 두 문명의 지리적 분리는 어느 정도 뿌리를 내려 발칸 반도 몇 지역에서만 서구 공동체와 이슬람 공동체는 서로 등을 맞대고 있다. 따라서 서구와 이슬람의 갈등은 영토보다는 무기 확산, 인권과 민주주의, 원유 지배권, 이민, 이슬람 테러주의, 서구의 간섭 같은 문명 사이의 포괄적 쟁점에서 표출된다. 냉전이 끝난 뒤 서구와 이슬람의 역사적 반목이 다시금 불거지고 있다는 인식이 양 진영에서 모두 확산되고 있다. 가령 1991년 부전(Barry Buzan)은 서구를 전선으로 끌어낼 가능성이 있는, 서구와 이슬람 사이의 사회적 냉전이 출현하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사태 전개는 부분적으로는 세속적 가치와 종교적 가치, 부분적으로는 크리스트교와 이슬람교의 역사적 경쟁의식, 부분적으로는 서구의 패권에 대한 시기심, 부분적으로는 중동의 탈식민 정치 질서를 서구가 지배하는 데 대한 반감, 부분적으로는 지난 2세기 동안 이슬람 문명과 서구 문명이 각각 이룩한 성과를 부당하게 비교하는 데 대한 불만과 굴욕감에 관계가 있다.
나아가 그는 이슬람과의 사회적 냉전이, 유럽 연합으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점에 유럽의 정체성을 강화시킬 것으로 예상한다. 따라서 서구 내부에는 이슬람과의 사회적 냉전을 지지할 뿐 아니라 그것을 고무하는 정책을 채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적지 않은 수의 인구가 존재할 수 있다고 한다. 1990년 서구의 주도적인 이슬람학자 루이스는 이슬람 원한의 뿌리를 분석하면서 이렇게 결론지었다.
우리가 사안과 정책의 차원 그리고 이것들을 추구하는 정부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의 기류와 대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문명의 충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대교-크리스트교 유산을 아득한 옛날부터 적대시해 온, 비이성적이지만 명백한 역사적 반응이다. 우리 펀에서도 경쟁자에게 서로 똑같이 역사적이고 똑같이 비이성적인 반응을 보이고 싶은 유흑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비슷한 견해를 이슬람 진영에서도 피력한다. "서구의 유대교-크리스트교 윤리와 서쪽으로는 대서양에서 동쪽으로는 중국까지 뻗어 있는 이슬람의 부상하는 세력과 갈등이 번지고 있다는 부인 못 할 조짐이 있다."라고 이집트의 언론인 시드 아메드(Mohammad S1d_Ahmed)는 주장한다. 한 저명한 인도의 이슬람교도는 1992년 "서구의 다음 번 대결 상대는 분명히 이슬람 세계에서 나올 것이며 새로운 세계 질서를 위한 투쟁은 마그레브에서 파키스탄에 이르는 이슬람 국가들의 주도로 이루어질 공산이 크다. 고 했다. 튀니지의 한 유력한 변호사는 그 투쟁은 이미 벌어지고 있다고 보았다. "식민주의는 이슬람의 모든 문화적 전통을 불구화하려고 애썼다. 나는 이슬람 신도가 아니다. 나는 종교와 종교 사이에는 갈등이 없다고 생각한다. 분쟁은 문명과 문명 사이에 존재한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이슬람 세계의 지배적 조류는 반서구주의이다. 이것은 이슬람의 부활과 '가르브자데기' 곧 서구적 독소의 이슬람 사회의 침투라는 감지된 현상에 대한 반발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결과다. '구체적으로 어떤 종파로 나타나건 이슬람의 새로운 자기주장은 이 지역의 사회, 정치, 윤리에 미치는 유럽과 미국의 영향력을 거부한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지난날 간혹 '우리는 서구화해야 한다.'라고 주장한 이슬람 지도자들이 있었다. 지난 4반세기 동안 어떤 이슬람 지도자가 그런 발언을 하였다면 그는 고립되고 말았을 것이다. 오늘날 정치인이건 관리이건 학자이건 기업인이건 언론인이건 이슬람교도가 서구의 가치와 제도를 찬양하는 발언을 듣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대신에 그들은 자기 문명과 서구 문명의 차이점, 자기 문화의 우월성, 서구의 침입에 맞서 자기 문화의 순수성을 고수할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슬람교도들은 서구의 힘 그 힘이 자기들 사회와 가치 체계에 가하는 위협을 두려워하고 증오한다. 그들은 물질 만능의 서구문화는 타락하고 부패하였으며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의 생활방식에 미치는 서구의 영향력에 더더욱 맞서야 할 절박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이슬람교도들은 서구가 불완전하고 오류에 찬 종교를 신봉한다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그래도 '성서'에 바탕을 둔 종교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 어떤 종교도 믿지 않기 때문에 공격한다. 이슬람교도의 시각에서 보면 서구의 세속주의, 몰종교성, 따라서 비윤리성은 이것들을 낳은 서구 크리스트교보다 더 몹쓸 악이다. 냉전 시대의 서구는 자신의 적수를 '무신론적 공산주의자'라고 불렀다.
탈냉전 이 낳은 문명 충돌의 시대에 이슬람교도는 자신의 적수를 무신론적 서구라고 부른다. 오만하고 물질 지상주의적이며 억압적이고 잔인하고 타락한 서구상은 원리주의 골수분자들뿐만 아니라, 서구가 동지이자 옹호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공유하고 있다. 1990년대에 서구에서 출간된 이슬람교도의 저술 중에서 메르니시(Fatima Mernissi)의 "이슬람과 민주주의(Islam and Democracy)처럼 찬사를 받은 책도 드물 것이다. 많은 서구인들은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현대 이슬람 여성 교도의 용기있는 발언이라고 이 책을 극찬하였다. 그러나 그 책에 묘사된 서구의 모습은 매우 비판적이다. 서구는 '호전적'이고 '제국주의적'이며, '식민주의의 공포'를 통하여 다른 민족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흔'을 남겼다. 서구문화의 상징인 개인주의는 모든 말썽의 원천이다(p.8). 서구의 힘은 가공할 만하다. 서구만이 아랍인의 교육을 위하여 위성을 써도 좋을 것인지 또는 아랍인의 머리 위에 폭탄을 떨어뜨릴 것인지를 결정한다....... 서구에서 유입된 상품과 공중파를 휩쓰는 서구산 TV 영화는 우리의 잠재력을 깔아뭉개고 우리의 생활을 침해한다... 그것은 우리를 짓누르고 우리의 시장을 포위하고 우리의 미약한 자원, 주도권, 잠재력을 지배하는 힘이다. 그와 같은 우리의 상황 인식은 걸프전을 거치면서 확신으로 바뀌었다.'(pp. 146~147) 서구는 군사 연구를 통하여 힘을 창출하고 수동적 소비자인 저개발 국가들에게 그 연구의 산물을 팔아먹는다. 이 굴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이슬람은 독자적으로 기술자와 과학자를 키워 스스로 무기를 만들어(핵무기인지 재래식 무기인지 그녀는 명시하지 않았다.) 서구에 대한 군사적 의존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pp. 43~44). 부언하지만, 이것은 구레나룻을 기르고 두건을 쓴 이슬람 원리주의자의 견해가 아니다.
정치적, 종교적 견해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교도들은 자기네 문화와 서구 문화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에 대체로 동의한다. "핵심은 우리 사회가 서구와는 다른 가치관에 기초해 있다."라는 점이라고 가노우시(Shelk Ghanoushi)는 지적한다. 한 이집트 정부 관리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인은 여기 와서 우리가 자기들처럼 행동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우리의 가치관이나 문화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 한 이집트 언론인도 같은 견해를 피력한다.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다른 배경,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다른 미래를 추구할 권리가 있다." 발행 부수가 많고 진지한 주제를 다루는 이슬람 세계의 언론들이 이슬람의 제도와 문화를 굴복시키고 침해하고 종속시키려는 서구의 음모와 책략을 묘사하는 기사를 거듭 싣고 있다.
서구에 대한 반발은 이슬람 부활의 지적 구심점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 국가들이 서방 국가에게 보이는 태도 변화에서도 감지된다. 탈식민지 시대가 막 시작되었을 때 이슬람 정권들은, 민족주의 혁명으로 독립을 달성한 알제리와 인도네시아 같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정치적, 경제적 이념과 정책 면에서 서구 지향적이었고 대외 정책 면에서도 친서방적이었다. 그러나 친서방 정권들이 이라크, 리비아, 예멘, 시리아, 이란, 수단, 레바논,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서구에 덜 우호적이거나 명백한 반서방주의를 표방하는 정권들로 차츰 바뀌었다. 튀니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같은 나라들에서도 정책 지향점과 대외 관계에서 덜 극적이지만 유사한 방향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냉전 시대에 미국의 가장 든든한 이슬람 우방국이었던 터키와 파키스탄은 내부적으로 이슬람주의자들의 강한 압력을 받고 있어, 이들 국가와 서구의 유대 관계는 차츰 불안정해질 가능성이 있다.
1995년 현재 10년 전보다 친서방적 색채가 뚜렷하게 짙어진 유일한 나라는 쿠웨이트다. 이제 이슬람 세계에서 서구의 우방은 군사적으로 서구에 종속된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 토후국들 아니면 경제적 의존도가 높은 이집트, 알제리 정도이다. 1980년대 후반 소련이 더 이상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제공할 의지와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동유럽의 공산 체제들은 무너졌다. 서구가 이슬람 위성국들을 더 이상 수호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이 분명해질 때 이 나라들 역시 비슷한 운명을 겪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슬람의 반서방 의식 확산과 함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야기하는 이슬람 위협에 대한 서구의 불안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유럽은 이슬람을 핵확산, 테러리즘의 본거지로, 골치 아픈 이민 문제의 본산으로 받아들인다. 일반 국민과 지도층 모두 이러한 우려를 품고 있다. 중동의 '이슬람의 소생' 이 미국에 위협을 가하는지를 물은 1994년 11월의 한 여론 조사에서 외교 정책에 관심을 가진 3만 5천 명의 미국인 중에서 61퍼센트가 그렇다고, 28퍼센트가 아니라고 응답하였다. 그보다 1년 앞서 어떤 나라가 미국에게 가장 큰 위협을 가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무작위로 추출된 미국인들은 이란, 중국, 이라크를 3대 위협국으로 꼽았다. 마찬가지로 미국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물은 1994년의 조사에서 일반 국민의 72퍼센트와 외교 전문가의 61퍼센트가 핵확산을, 일반 국민의 69퍼센트와 외교 전문가의 33퍼센트가 국제 테러리즘을 지적하였다. 모두 이슬람과 폭넓은 관련이 있는 사안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의 33퍼센트와 외교 전문가의 39퍼센트가 이슬람 원리주의의 확산에 우려를 나타냈다. 유럽인들도 비슷한 입장을 보인다. 가령 1991년 봄 프랑스 국민의 51퍼센트가 프랑스의 가장 큰 위협은 남쪽에서 온다고 응답한 반면 동쪽에서 온다고 응답한 비율은 겨우 8퍼센트였다. 프랑스 국민이 가장 우려하는 네 나라는 모두 이슬람 국가로, 52퍼센트가 이라크를, 35퍼센트가 이란을, 26퍼센트가 리비아를, 22퍼센트가 알제리를 꼽았다. 독일과 프랑스의 총리를 포함한 서구 정치 지도자들도 비슷한 우려를 표명한 바 있으며, 1995년 NATO 사무총장은 이슬람 원리주의는 서구에게 최소한 과거의 공산주의만큼이나 위협적이라고 공언하였다. 클린턴 행정부의 최고위 인사도 서구의 범지구적 경쟁 세력으로 이슬람을 지목하였다.
동쪽에서 오는 군사적 위협이 사라지면서 NATO의 전략은 차츰 남쪽에서 오는 위협으로 그 방향타를 돌리고 있다. 1992년 미국 육군의 한 분석가는 남부층이 중부 전선을 대체하면서 빠른 속도로 NATO의 새로운 전선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언급하였다. 이 남쪽의 위협에 대처하고자 NATO의 남유럽 회원국들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은 합동군사훈련을 개시하는 한편 이슬람 과격분자들에 대처하는 방안을 놓고 마그레브 지역 국가들과 공조를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유럽 내의 대규모 미군 주둔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작용하기도 한다. "유럽 내의 미군은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 야기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이 지역의 군사적 구도에 강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1990~91년의 걸프 전 때 미국, 프랑스, 영국이 유럽 지역에서 중동 지역으로 기민하게 군사력을 투입하던 일을 기억하는가? 이 지역 사람들은 기억한다."고 전직 미 고위 관리는 지적하였다. 그러나 두려움과 분노와 증오의 감정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그 관리는 덧붙였어야 하리라.
이슬람교도와 서구인이 서로를 바라보는 지배적 시각과 이슬람 과격주의의 부상을 감안한다면, 이란 혁명이 성공한 뒤 이슬람과 서구 사이에 준전쟁이 전개되고 있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그것은 5가지 이유에서 준전쟁의 성격을 갖는다. 첫째, 이슬람 국가 전체가 서방 국가 전체를 상대로 싸우지는 않기 때문이다. 2개 원리주의 국가(이란, 수단), 3개 비원리주의 국가(이라크, 리비아, 시리아), 광범위한 이슬람 기구들이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다른 이슬람 국가들의 자금 지원을 얻어 이스라엘과 유대인 일반뿐 아니라 미국과 때로는 영국, 프랑스 같은 기타 서방국들과 싸움을 벌이고 있다. 둘째, 이것이 준전쟁인 이유는 1990~91년의 걸프전을 제외하면, 한편에서는 테러리즘, 한편에서는 공습, 첩보 작전, 경제 제재 같은 제한된 수단의 범위 내에서 벌어지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셋째, 폭력이 지배적 경향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지속적으로 나타나지는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쪽이 간헐적으로 도발을 감행할 때마다 다른 쪽에서 대응을 보이는 양상이다. 그러나 준전쟁도 엄연한 전쟁이다. 1991년 1월에서 2월 사이에 서방의 폭격으로 사망한 수만 명의 이라크 군인과 민간인을 차치하고라도 1979년 이후 수천 명의 희생자와 사망자가 거의 매년 발생하였다. 걸프전이라는 '진짜' 전쟁 때 목숨을 잃은 서구인보다 이 준전쟁에서 사망한 서구인의 수가 더 많다.
더욱이 양측은 이 분쟁을 전쟁으로 인식한다. 일찍이 호메이니는 아주 분명하게 '이란은 아메리카와 실질적인 교전 상태에 있다'라고 선언하였다. 카다피 또한 서구를 상대로 성전을 벌이고 있다고 기회 있는 대로 공언한다. 다른 이슬람 집단이나 국가의 과격 지도자들도 비슷한 표현을 쓰고 있다. 서방 진영을 대표하여 미국이 지목한 7개 '테러국' 중에서 5개국이 이슬람 국가이고(이란, 이라코, 시리아, 리비아, 수단), 나머지가 쿠바와 북한이었다. 미국은 사실상 이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로 미국과 미국의 우방을 공격하기 때문에 이들과 전시 상태에 있음을 미국은 인정하는 셈이다. 미국 관리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이들을 '무뢰배', '망나니', 악당으로 불러 문명화된 국제 질서의 외부에 두면서 다국적 또는 일국적 응징의 좋은 표적으로 만들고 있다. 미국 정부는 세계 무역 센터의 폭파범들이 미국을 상대로 도시 테러전을 감행하려 의도하였다고 규탄하면서 맨해튼에서 후속 폭파 계획을 모의한 혐의자들을 미국을 상대로 벌이는 '전쟁에 뛰어든 병사들'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슬람교도는 서구가 이슬람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고 주장하고 서구인은 이슬람 집단이 서구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 고 주장하는 마당에, 전쟁에 가까운 모종의 사태가 진행 중이라고 결론짓는 것보다 더 합당한 추정이 있을 수 있을까.
이 준전쟁에서 양측은 자신의 강점을 이용하고 상대의 약점을 파고든다. 군사적으로 그것은 주로 테러와 공습의 대결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슬람의 대의 구현에 온몸을 바친 전사들은 서구의 개방된 사회 구조를 이용하여 특정한 장소를 골라 폭탄을 설치한다. 서구의 군사 전문가들은 이슬람의 허술한 영공을 이용하여 특정한 장소에 스마트탄을 떨어뜨린다. 이슬람 과격 집단들은 서구 유력 인사들의 암살을 모의하며. 미국은 과격 이슬람 정권의 전복을 모의한다. 미 국방성에 따르면 1980년부터 1995년까지 15년 동안 미국은 중동에서 모두 17회의 군사 작전을 벌였는데. 그것들은 하나같이 이슬람교도를 겨냥한 작전이었다. 미국의 군사 작전이 그처럼 집요하고 일관되게 다른 문명 사람들에게 적용된 예는 달리 찾아보기 어렵다.
이제까지 양측은 걸프전을 제외하면 폭력의 강도를 상당히 낮은 수준으로 유지해 왔고 폭력 행위를 전면적 대응이 요구되는 도발 행위로 규정하기를 꺼려 왔다. '리비아가 실제로 미국 항공기를 격추시키도록 자국 잠수함에게 지시를 내렸다면 미국은 잠수함 사령관의 인도를 요구하는 대신 이를 리비아 정부의 전쟁 도발 행위로 간주해야 마땅하였을 것이다. 리비아 정보기관이 항공기를 격추시켰다 하더라도 원리적으로는 전혀 다를 것이 없다.'라고 (이코노미스트} 지는 지적한다. 그러나 이 전쟁의 당사자들은 냉전 시대에 미국과 소련이 서로에게 가하였던 것보다 훨씬 폭력적인 전략을 구사한다.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미국과 소련은 상대방의 민간인이나 심지어는 군속을 고의적으로 살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준전쟁 에서는 이런 일이 거듭 반복되고 있다.
미국 지도자들은 준전쟁에 뛰어든 이슬람교도들이 소수 집단에 지나지 않으며 그들의 폭력 행위도 압도적 다수의 온건 이슬람교도로부터 거부당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입증하는 증거는 희박하다. 서구에 대한 폭력 행사를 반대하는 목소리는 이슬람국들에서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서구에 추파를 보내고 서구에 의존하는 이슬람 정부들까지 서구에 대한 테러 행위를 규탄하는 자리에서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반면, 유럽 각국의 정부와 국민들은 냉전 시대에 미국이 소련과 공산주의자에게 취한 행동에 곧잘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으면서도 미국이 이슬람교도 적수에게 취한 행동은 대부분 지지하고 거의 비난을 가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의 분쟁과는 달리 문명의 분쟁에서는 누구나 친족을 편들고 나선다.
서구가 직면한 근본 문제는 이슬람 원리주의가 아니라 이슬람이다. 자기네 문화의 우월성을 철석같이 믿고 자기네 힘의 열세를 고민하는 사람들을 거느린 상이한 문명이다. 이슬람의 문제를 우려하는 쪽은 CIA나 미 국방성이 아니라 서구다. 자기 문화의 보편성을 철석같이 믿고 비록 쇠퇴 하고는 있지만 자기들은 아직도 우월하기 때문에 그 문화를 전 세계에 전파할 사명감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거느린 상이한 문명이다. 이것이야말로 이슬람과 서구의 갈등을 불 지르는 핵심 성분이다.
아시아, 중국, 아메리카
문명의 가마솥
아시아, 특히 동아시아 경제의 변화는 20세기 후반의 세계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발전 가운데 하나다. 1990년대까지 이 지역의 경제 발전은 동아시아와 환태평양 전체가 결속하여 더욱 광범위한 교역망을 이루면서 국가들 간의 평화와 화합을 다지는데 기여하리라고 내다본 관측자들에게 경제적 도취감을 심어 주었다. 이러한 낙관론은 교역이 평화의 변함 없는 원동력이라는 대단히 의심이 가는 기정에 의지한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경제 성장은 국가 내부는 물론 국가들 사이에서 정치 불안을 낳아 국가 간, 지역 간 세력 균형에 변화를 가져온다. 경제 교류는 인적 접촉을 가져올 뿐이지 화합을 낳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경제 교류는 민족 간의 차이점에 대한 깊은 각성과 상대에 대한 두려움을 낳았다. 국가 간의 무역은 이익만이 아니라 갈등을 낳는다. 과거의 역사적 경험이 타당하다면, 아시아의 경제적 서광은 아시아의 정치적 그늘, 곧 아시아의 불안정과 갈등을 낳을 가능성이 높다.
아시아의 경제 발전과 아시아 국가들의 점증하는 자신감은 적어도 세 가지 방식으로 국제 정치를 교란시킨다. 첫째, 경제 발전은 아시아 국가들로 하여금 군사력 강화를 가능케하여 미래 아시아 국가간의 관계에서 불확실성을 높이고 냉전 시대에 억눌려 있던 쟁점과 대결 의식을 전면으로 부각시키며 그 결과 이 지역의 분쟁 가능성과 불안정성을 높인다. 둘째, 경제 발전은 아시아 국가들과 서구 특히 미국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이 싸움에서 아시아 국가들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능력을 강화시킨다. 셋째 아시아 최대의 강국인 중국의 경제 성장은 이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높이고 중국이 동아시아에 대하여 전통적 헤게모니를 재주장하고 나설 가능성을 높인다. 이 과정에서 다른 나라들은 중국에 '편승'하여 이러한 발전에 합류하거나 '견제'를 추구하여 중국의 영향력을 억제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길 증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인다.
서구가 힘을 행사하던 지난 몇 세기 동안 중요한 국제 관계는 서구의 주요 강대국들이 자기들끼리 펼치는 게임이었고, 18세기에 들어와 부분적으로 러시아가, 다시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일본이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 유럽은 거대한 분쟁과 협력의 중심 무대였고, 냉전 시대에도 초강대국의 대결은 주로 유럽의 심장부에서 이루어졌다. 탈냉전 세계의 중요한 국제 관계의 경연장이 있다면 그것은 아시아, 그중에서도 특히 동아시아이다. 아시아는 문명의 가마솥이다. 동아시아 지역에만 6대 문명 일본, 증화, 정교, 불교, 이슬람교, 서구에 속한 국가들이 있으며, 남아시아에는 추가로 힌두 문명이 있다. 네 문명의 핵심국인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고, 남아시아에는 인도가 있으며 인도네시아는 이슬람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는 한국, 대만, 말레이시아 등 점점 경제적 영향력이 커지는 중진국들이 존재한다. 그 결과 여러 가지 측면에서 18세기와 19세기의 유럽 정세에 비교할 수 있는 국제 관계의 대단히 복잡한 양상이 나타났고, 이 다극적 상황에서 불확실성과 가변성 또한 커졌다.
동아시아는 복수의 문명, 복수의 축을 가졌다는 점에서 서유럽과 대조되며 경제적, 정치적 차이는 이 대조를 한층 부각시킨다. 서유럽의 모든 국가들은 안정된 민주 제도를 운영하고 시장 경제를 가지고 있으며 경제 발전의 수준이 매우 높다. 1990년대 중반 동아시아에는 하나의 안정된 민주주의 국가, 불안정한 몇몇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들, 아직도 공산주의 독재 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4~5개 국가, 군부 정권 개인 독재, 1당 지배 체제 국가들이 혼재하고 있다. 일본과 싱가포르에서 베트남과 북한에 이르기까지 경제 발전의 수준도 천차만별이다. 시장 경제와 경제 개방이 대세 이긴 하지만, 경제 체제의 성격은 북한의 명령 경제에서 시작해서 국가 규제와 민간 기업의 다양한 혼합을 거쳐 홍콩 같은 자유 방임 체제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다.
중국이 때때로 힘을 휘둘러 이 지역에 질서를 세우기는 하지만 서유럽과 같은 의미의 국제 사회는 동아시아에는 예로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20세기 후반의 유럽은 유럽 연합, NATO, 서유럽 연합, 유럽 의회, 유럽 안보 협력 기구 같은 국제기구를 통하여 대단히 긴밀한 복합체로 단단히 결속되어 있다. 동아시아에는 ASEAN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국제기구가 없다. 그나마 ASEAN은 강대국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주로 안보 문제를 협의하는 기구로서 가장 원시적 형태의 경제 통합을 향하여 이제 막 출발하는 단계에 있다. 1990년대에 들어와 환태평양 국가들이 대거 참여하는 훨씬 광범위한 기구로서 APEC이 창설되었지만, 이것은 ASEAN보다 취약한 회의 기구다. 그나마 아시아의 주요 강대국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국제기구로서는 APEC이 유일하다.
서유럽과 달리 동아시아는 국가 간 분쟁이 싹틀 만한 소지가 많다. 가장 널리 인정되는 분쟁 위험 지역은 한반도와 중국이다. 그러나 이곳은 냉전의 유산이다. 이념 대립은 뚜렷한 감소 추세에 있다. 1995년까지 중국과 대만의 관계가 대폭 개선되었으며 한국과 북한의 관계도 호전될 기미가 보이고 있다. 한국과 북한이 같은 민족끼리 전쟁을 벌일 확률은 낮으며,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가능성은 전자보다는 높지만 대만이 중국의 우월적 지위를 거부하고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포하지 않는 한 역시 일정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중국의 한 군사 문건은 '집안 식구끼리 싸우는 데는 한도가 있어야 한다.'라는 장성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한반도와 중국에서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은 남아 있지만 문화적 동질성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가능성은 희박해질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냉전이 남긴 갈등은 오랜 반목과 새로운 경제 관계가 반영된 다른 성격의 갈등으로 바뀌거나 보완되고 있다. 1990년대 초반 동아시아의 안보를 분석한 보고서에서는 동아시아를 '위험한 지역', '무르익은 대결 의식', '복수의 냉진 이 펼쳐지는 지역, 전쟁과 불안정이 지배하는 '미래로 회귀하는 지역으로 묘사하는 표현들이 자주 눈에 띈다. 서유럽과는 달리 1990년대의 동아시아에는 해결되지 않은 영토 분쟁이 남아 있는데, 그중 가장 굵직한 것이 일본과 러시아의 북방 도서 반환 문제, 남중국해를 둘러싼 중국, 베트남, 필리핀을 비롯한 여러 동남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대립이다. 중국과 러시아 중국과 인도의 국경 문제를 둘러싼 대립은 1990년대 중반에 들어와 한결 누그러지기는 하였지만 중국이 몽골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고 나설 경우 언제든지 표면으로 부각될 수 있다. 민다나오, 동티모르, 티베트, 태국 남부, 미얀마 동부에는 대부분 외국의 지원을 받는 반란 세력 또는 분리 운동 추구 세력이 존재한다. 1990년대 중반 현재 동아시아 지역에는 국가 간의 평화적인 관계가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지만, 지난 50년 동안에 가장 커다란 두 번의 전쟁이 한반도와 베트남에서 일어났다. 아시아의 중심국인 중국이 미국은 믈론, 한국, 베트남, 중국, 국민당, 인도, 티베트, 러시아 등 거의 모든 이웃 국가들과 싸움을 벌였다. 1993년 중국의 한 군사 분석 보고서는 중국의 군사 안보를 위협하는 아시아의 8개 긴장 지역을 지목하였으며, 중국 증앙 군사 위원회는 동아시아의 안보 전망은 대체로 매우 암울하다고 결론지었다. 수 세기 동안의 전란을 치른 서유럽은 이제 평화를 구가하고 있으며 이 지역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동아시아의 경우는 다르며, 프리드버그(Aaron Friedberg)가 지적하듯 유럽의 과거가 아시아의 미래에 재연될 가능성은 다분히 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경제의 역동성, 영토 분쟁, 되살아난 대결 의식, 정치 불안정 같은 요인 때문에 동아시아 지역의 군사비 지출과 군사력은 대폭 증강되었다. 동아시아 정부들은 새로운 경제력과 평균 교육 수준이 높은 인구를 활용하여 부실하게 무장된 대규모의 농민군을 첨단 무기로 무장한 소수 정예의 군대로 개편하려는 노력을 가속화하고 있다. 미국이 동아시아에 어느 정도 깊숙이 개입할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늘어나면서 동아시아 각국은 군시적 자생력을 갖추기 위하여 부심한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유럽, 미국, 옛 소련으로부터 막대한 무기를 여전히 사들이고 있지만, 외국의 기술을 도입하여 자국 내에서 첨단 전투기, 미사일, 전자 장비를 생산하는 데 더욱 비중을 둔다. 일본과 증화권 국가들 중국, 대만, 싱가포르, 한국의 방위 산업은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해안선을 맞대고 있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지형적 특수성으로 각국 정부는 미사일, 공군력 해군력 보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 결과 이제까지 전쟁 수행 능력이 없었던 국가들도 차츰 전투 능력을 확보해 가는 추세에 있다. 이러한 군사력의 증강은 투명성이 결여된 상태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의혹과 불신도 커지게 마련이다. 세력 관계가 빠르게 변하는 상황에서 모든 동아시아 국가들은 필연적으로 '앞으로 10년 뒤에는 누가 적이고 누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에 직면한다.
아시아와 미국의 냉전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사이에 미국과 아시아 국가들의 관계가 베트남을 제외하고 점차 적대적으로 흘러갔으며 미국은 이러한 대립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능력을 차츰 잃어갔다. 이러한 추세는 동아시아 강대국들과의 관계에서 확연히 드러나는데, 미국과 중국, 일본의 관계가 바로 그렇다. 한쪽으로는 미국에서, 또 한쪽으로는 중국과 일본에서, 양국 사이에 냉전이 펼쳐지고 있다는 발언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동시적 조류는 부시 행정부에서 시작되더니 클린턴 행정부에 들어와 한층 가속이 붙었다. 1990년대 중반에 이르면 미국과 두 아시아 강대국의 관계는 아무리 좋게 보아도 '긴장'으로밖에 묘사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러한 상태가 호전되리라는 전망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1990년대 초의 미일 관계는 걸프전에서 일본의 역할, 주일 미군 문제, 중국과 기타 국가들을 겨냥한 미국의 인권 정책을 받아들이는 일본의 태도, 일본의 유엔 평화 유지군 참여,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경제 관계, 특히 무역 같은 포괄적 사안을 둘러싼 논쟁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무역 전쟁이라는 표현이 거의 일반화되었다. 미국 관리들 특히 클린턴 행정부의 관리들은 일본에게 거듭 양보를 촉구하였으며, 일본 관리들은 이 요구에 점점 거세게 저항하였다. 미일 무역 논쟁은 갈수록 격화되었고 해결 가능성은 갈수록 낮아졌다. 일례로 1994년 5월 클린턴 대통령은 일본에 엄격한 무역 제재를 가하는 권한을 자신에게 부여하는 안에 서명하였으며. 이것은 일본뿐 아니라 세계의 주요 무역 기구인 GATT 사무총장의 반발을 샀다. 그러자 일본은 미국의 정책을 꼬집어 공격하였으며 얼마 뒤 미국도 정부 조달 계약에서 미국 기업들이 차별 대우를 받는다며 공식적으로 일본을 비난하였다. 1995년 봄 클린턴 행정부는 일본의 고급 승용차에 100퍼센트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하였지만, 이러한 조치가 이루어지기 직전에 타결이 이루어져 간신히 정면충돌을 모면할 수 있었다. 두 나라 사이에는 무역 전쟁과 아주 흡사한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1990년대 중반에 이르면 일본의 유력 정치인들이 미군의 일본 주둔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할 정도로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
같은 기간 동안 양국 국민들의 호감도도 꾸준히 줄어들었다. 1985년 미국 국민의 87퍼센트가 일본에 대체로 우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1990년에는 이 비율이 67퍼센트로 줄었고, 다시 1993년에는 일본에 우호적인 생각을 가진 미국인이 50퍼센트밖에 되지 않았으며 미국 국민의 3분의 2정도가 가급적 일본 제품을 구입하지 않으려고 애쓴다고 응답하였다. 1985년 73퍼센트의 일본 국민이 일미 관계가 우호적이라고 응답하였지만, 1993년에는 64퍼센트가 비우호적이라고 응답하였다. 1991년은 일반 국민의 여론이 냉전의 틀로부터 이탈한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될 만한 해이다. 그해 양국 국민은 소련을 우선순위에서 모두 밀어냈다. 사상 처음으로 미국인은 일본이 소련보다 미국의 안보에 위협을 가한다고 응답하였고. 사상 처음으로 일본인은 미국이 소련보다 일본의 안보에 위협을 가한다고 응답하였다.
일반 여론의 변화에 상응하여 엘리트 집단의 의식에도 변화가 왔다. 미국에는 두 나라의 문화와 사회 구조 차이를 강조하고 미국이 경제 문제에 있어서 일본을 더 강경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수정 노선을 걷는 중요한 학자, 지식인, 정치인 집단이 등장하였다. 언론, 논픽션, 대중 소설에 등장하는 일본인의 모습이 차츰 비하되어 갔다. 그에 뒤질세라 일본에서도 2차 대전 후 미국의 통치와 시혜를 경험하지 않았고 일본의 경제적 번영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선배들은 상상도 하지 못한 방식으로 미국의 요구를 서슴없이 거부할 줄 아는 새로운 정치 지도자 세대가 나타났다. 미국의 '수정주의자들'에 해당하는 집단이 일본의 '저항자들'이었다. 양국의 정치인들은 미일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 대해서는 강경 노선을 주장하는 것이 득표 전략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사이에 미국과 중국의 관계 또한 점차 적대적으로 흘렀다. 두 나라의 갈등은 1991년 9월 덩 샤오핑이 언급한 대로 '새로운 냉전'을 낳았으며, 그 후 이 표현은 중국 언론에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1995년 8월 중국의 관영 언론사는 1979년 '양국이 외교 관계를 수립한 이후 중미 관계가 최저 수준에 와 있다.'라고 선언하였다. 중국 관리들은 중국에 대한 내정 간섭을 거듭 비난한다. 1992년 중국 정부의 한 내부 문건은 '우리는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이 된 이후로 새로운 헤게모니와 패권을 휘두르기에 혈안이 되어 있음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미국의 힘은 상대적으로 하향세에 있으며 미국의 실력 행사에는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1995년 8월 장쩌민(강택민) 국가 주석은 '서구 적대 세력은 우리 조국을 서구화하고 분열시키려는 책동을 단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고 있다.'라고 비판하였다. 1995년 중국 지도부와 학자들 사이에는 미국이 중국을 영토적으로 분열시키고 정치적으로 체제 전복을 꾀하며 전략적으로 억제하고 경제적으로 좌절시키려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에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런 견해를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있다. 미국은 리 덩후이 대만 총통의 미국 입국을 허용하였고 150대의 F16 전투기를 대만에 팔았으며 티베트를 '점령당한 자주적 영토'로 규정하였고 중국의 인권 침해를 비난하였다. 또 베이징의 2000년 올림픽 유치를 반대하고 베트남과의 관계를 정상화하였으며 중국의 대 이란 화학 무기 부품 수출을 비난하고 파키스탄에 미사일 장비를 판매하였다는 이유로 중국에 무역 제재를 가하는 한편 경제 문제를 내걸어 추가 제재를 가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나아가 중국의 세계 무역 기구 가입도 방해하였다. 양국은 상대방의 흑심을 서로 비난하였다. 미국에 따르면 중국은 미사일, 지적 재산권, 형무소 노동에 대한 합의를 파기하였고, 중국에 따르면 미국은 대만 총통의 입국 허용, 첨단 전투기의 대만 판매 등으로 역시 양국 합의를 위배하였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미국을 가장 적대적인 시각으로 보는 중요한 집단은 군부이다. 군부는 미국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도록 기회 있을 때마다 중국 정부에 압력을 넣는 것으로 보인다. 1993년 6윌 중국의 군 장성 100명이 중국 정부가 미국에 대하여 '수동적'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중국을 협박하는 미국의 기도에 저항하지 못하였다는 불만을 담은 서한을 덩 샤오핑 앞으로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해 가을 중국 정부의 한 기밀문서는 미국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군사적 이유를 열거하였다. 중국과 미국은 상이한 이념 사회 체제, 외교 정책을 둘러싸고 오랜 갈등을 빚어 왔으므로 근본적인 중미의 관계 개선은 불가능할 것이다.' 미국은 동아시아가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강력한 적수를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1990년대 중반의 중국 관리들과 언론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미국을 적대국으로 묘사하고 있다.
중국과 미국의 적대감이 점점 늘어나는 것은 양국의 국내 정세에도 부분적인 원인이 있다. 일본과 맞섰을 때도 그랬지만 미국 엘리트의 여론은 두 갈래로 갈려 있다. 대다수의 의원들은 중국과의 건설적 연대를 강조하면서 양국의 경제 관계를 확대하고 중국을 이른바 국가들의 공동체로 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반대 진영에서는 미국의 국익에 미칠 중국의 잠재적 위협을 강조하면서 중국에 대한 유화책은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므로 단호한 억제 정책을 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3년 미국 국민은 중국을 이란 다음으로 미국에 가장 큰 위험을 주는 나라로 꼽았다. 미국 정부는 대만 총통의 코넬 대학 방문 허용, 클린턴 대통령의 달라이 라마 접견 같은 상징적 신호를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중국의 무역 최혜국 대우의 연장 조치에 나타나듯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인권을 희생시키는 길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적수가 나타나야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전략이 먹혀들고 정권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다. 후계자를 둘러싼 권력 투쟁 기간이 장기화함에 따라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화되는 시점에서 덩 샤오핑의 승계를 노리는 장쩌민을 비롯한 중국 최고위 지도자들은 국가의 이익 수호를 조금이라도 늦출 만한 여유가 없다.
10년 동안 미일, 미중 관계는 이처럼 악화 일로를 걸어왔다. 아시아와 미국과의 관계에서 벌어지게 된 문제는 너무도 광범위하고 다양한 영역을 포괄하고 있다. 그래서 자동차 부품, 카메라 판매, 군사 기지, 또 한편으로는 반체제 인사의 투옥, 무기 이전, 지적 재산권 같은 개별 사안을 둘러싼 갈등에서만 그 원인을 찾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두 강대국과 이처럼 한꺼번에 갈등을 악화시켜 나가는 것은 미국의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외교와 정치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원칙에 따르더라도, 미국은 두 나라의 지나친 접근을 막아야 하고 한 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될 경우 다른 나라와는 관계 개선을 도모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조짐은 보이지 않고 있다. 아시아와 미국의 갈등 관계를 부채질하는 요인들이 너무나 광범위해서 그런 관계에서 야기되는 개별 쟁점들을 해결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일반적 현상에는 일반적 원인이 있다.
첫째, 통신, 무역, 투자, 상호 지식의 확대라는 형태로 아시아 국가들과 미국의 교섭이 늘어나면서 이해가 상충 될 수 있고 또 현실적으로도 상층 되는 사안과 주제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러자 관계가 소원하였을 때는 무해한 이국적 성분으로 보아 넘겼을 상대국의 사회적 관습과 의식이 자국에 위협을 가하는 요소로 부각되었다. 둘째, 1950년대에 미국과 일본은 소련의 위협에 맞서 미일 공동 안보 조약을 체결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와 소련의 힘이 더욱 커지자 미국은 중국과 1979년 외교 관계를 수립하여 소련의 위협을 무력화시킨다는 공동의 이익을 증진시키고자 상호 협력이라는 응급 처방을 마련하였다. 냉전이 끝나자 미국과 아시아 강대국들 간에 존재하였던 최우선적 공동 이해는 사라졌고 거기서 생긴 공백은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따라서 양측의 이해가 상충 되는 다른 문제들이 전면으로 부각되었다. 셋째,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 발전은 이들 국가와 미국의 전체적 세력 균형에 변화를 가져왔다. 앞에서 보았듯이 아시아인은 자신이 가진 가치관과 제도를 점차 긍정하고 있으며 서구 문화와 비교 하였을 때 자기 문화의 우수성을 강하게 의식해 가는 추세에 있다. 한편 미국은 특히 냉전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로 자신의 가치관과 제도가 보편타당하다고 믿고 있으며 아시아 국가들의 국내 정책과 외교 정책에 입김을 불어 넣을 수 있는 힘이 여전히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국제 환경의 변화는 아시아 문명과 미국 문명의 근본적인 문화적 차이를 전면으로 부각시켰다. 가장 광범위한 수준에서 보면, 상당수의 아시아 국가들에 깊숙이 배어 있는 유교 정서는 권위, 위계질서, 개인적 권리와 이익의 종속적 지위, 합의의 중요성, 대립의 회피, 체면 둥에 가치를 두며, 일반적으로 사회보다는 국가를, 개인보다는 사회를 우위에 둔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인은 자기들 사회의 발전을 몇백 년 또는 몇천 년이라는 기나긴 전통 속에서 이해하며 그 장구한 역사성의 장점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태도는 자유, 평등, 민주주의, 개인주의에 대한 미국인의 신념, 그리고 정부를 불신하고 권위에 저항하며 견제와 균형을 추구하고 경쟁을 부추기며 인권을 신성시하고 과거를 잊고 미래를 무시하며 당장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하는 미국인의 성향과는 상치된다. 갈등의 뿌리는 사회와 문화의 근본 차이에 있다.
이러한 차이는 미국과 아시아 강대국들의 관계에서 특수한 결과를 낳았다. 경제 문제를 둘러싼 미국과 일본의 분쟁, 특히 일본의 무역 흑자와 미국의 상품과 투자에 대한 일본의 규제 문제를 해결하고자 양국 외교관들은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미일 무역 협상은 냉전 시대의 미소 군축 협상과 여러모로 흡사한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1995년 현재 미일 무역 혐상 에서 나온 가시적 결과는 오히려 미소 군축 협상의 수준에도 못 미치고 있다. 갈등이 두 나라 경제의 근본 차이점, 특히 주요 선진 공업국 중에서도 일본 경제가 갖는 독특한 성격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일본의 공산품 수입액은 GNP의 3.1퍼센트로, 다른 주요 선진 공업국들의 평균치인 7.4퍼센트를 크게 밑돈다. 일본의 해외 직접 투자액은 GDP의 겨우 0.7퍼센트로 미국의 28.6퍼센트, 유럽의 38.5퍼센트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주요 선진 공업국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일본은 1990년대 초반 내내 예산 흑자를 기록하였다.
일본 경제는 전체적으로 보아 서구 경제학의 보편적 법칙이 예측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 달러를 평가 절하할 경우 일본의 무역 흑자가 줄어들 것이라는 1980년대 초반 서구 경제학자들의 안아한 가정은 오류로 판명되었다. 1985년의 플라자 합의는 미국의 대 유럽 무역 적자를 큰 폭으로 줄였지만 대일 적자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엔화가 달러당 100엔 미만 수준으로 뛰어올라도 일본의 무역 흑자는 여전히 높았고 심지어는 상승세를 보였다. 결국 일본인은 강력한 통화와 무역 흑자를 동시에 유지할 수 있었다. 서구의 경제 이론가들은 실업과 인플레이션은 반비례 관계에 있으므로 실업률이 5퍼센트 미만으로 떨어지면 인플레이션 상승 압력이 나타난다는 데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일본은 여러 해째 5퍼센트 미만의 실업률과 평균 1.5퍼센트의 인플레이션을 유지하여 왔다. 1990년대로 접어들자 미국과 일본의 경제학자들은 두 나라의 경제 체제에 근본적 차이가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개념화하려는 시도에 나섰다. 한 신중한 연구는 일본의 유난히 낮은 공산품 수입 수준은 통상적 경제 요인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또 다른 분석가는 서구 전문가들이 어떤 예측을 내놓건 일본 경제는 서구의 논리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서구의 자유 시장 경제가 아니라는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일본인은 ....서구 관측통들의 예측력을 혼미에 빠뜨리는 방식으로 움직이는 유형의 경제구조를 고안하였다.'라고 주장한다.
일본 경제의 남다른 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주요 선진 공업국들 중에서 일본 경제가 튀는 이유는 일본 사회만이 비서구 사회이기 때문이다. 일본이라는 사회의 문화는 서구 특히 미국이라는 사회의 문화와는 다르다. 일본과 미국을 비교 분석한 무게 있는 연구는 하나같이 이 차이점을 강조한다. 일본과 미국의 경제 갈등이 해결되기 위해서는 한쪽 경제의 기본 성격이 바뀌든지 쌍방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한 나라 또는 두 나라의 사회와 문화가 토대부터 달라져야 한다. 그런 변화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사회와 문화는 바뀐다. 하지만 엄청나게 충격적인 사건만이 그런 변화를 낳는다. 2차 대전에서의 참패는 세계에서 가장 호전적이었던 두 나라를 가장 평화적인 국가로 만들었다. 그러나 미국이나 일본이 히로시마 원폭에 버금 가게 경제적으로 서로를 압도할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경제 발전은 또한 한 나라의 사회 구조와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1950년대 초부터 1970년대 말까지 스페인에서 일어난 극적인 변화가 좋은 본보기이다. 따라서 경제적 부가 축적되면서 일본도 미국형 소비자 주도 사회로 바뀔 가능성은 있다. 구조 개선 노력을 위한 미일의 제한적 합의는 이러한 수렴 현상을 촉진시킨다는 취지로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 노력들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경제적 차이가 두 나라의 사회 문화적 차이에 얼마나 깊이 뿌리 박혀 있는지를 여실히 입증하였다.
미국과 아시아 국가 사이의 갈등은 문화적 차이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그 갈등의 결과는 미국과 아시아의 변화하는 세력 관계를 반영한다. 미국이 그 분쟁에서 일부 승리를 거두기는 하였지만 대세는 아시아 쪽으로 기울었으며 세력 변화는 갈등을 한층 악화시켰다. 미국은 아시아 정부들이 미국을 '국제 사회'의 지도자로 받아들이고 서구의 원칙과 가치를 그들 사회에 적용하는 데 순응하기를 바란다. 반면에 로드 미 국무 차관보가 말하듯 아시아인들은 자신들의 성취를 의식하게 되면서 자부심을 느끼며 동등한 대우를 바라고 미국을 국제 깡패까지는 아니어도 사감 정도로 간주한다. 그러나 미국 문화의 뿌리 깊은 내적 요구로 미국이 국제 문제에서 깡패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사감 역할은 포기하지 않고 있어, 자연히 미국의 기대가 아시아 국가들의 기대와 상충 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대단히 광범위한 사안들에서 일본과 여타 아시아 국가 지도자들은 미국의 요구를 거부할 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때로 상대방의 발언을 일축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시아와 미국의 관계에서 상징적 전환점이 된 사건은 한 전직 일본 고위 관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1994년 2월에 발생한 최초의 대형 탈선이었다. 당시 호소카와 일본 총리는 미국산 자동차 부품 수입의 수치 목표를 명기하라는 클린턴 대통령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일 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라고 일본의 또 다른 관리는 토로하였다. 1년 뒤 일본의 외상은 국가 간 지역 간 경제 전쟁이 벌어지는 시대에 서방의 일원이라는 '허울 좋은 정체성'보다는 일본의 국익이 더 중요하다고 발언함으로써 변화하는 기류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세력 균형의 변화에 미국이 차츰 적응하고 있다는 것은 1990년대에 들어와 변화된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서도 읽을 수 있다. 첫째, 아시아 국가들에게 압력을 가할 의사도 능력도 없음을 사실상 시인하듯 미국 스스로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문제와 갈등을 빚는 사안을 구분하였다. 과거 클린턴은 미국의 중국 외교 정책에서 인권을 최우선 순위에 두겠다고 선언하였지만 1994년 미국 기업체, 대만, 기타 영향력 있는 집단의 압력을 받고 인권과 경제 문제의 연계 고리를 끊었으며, 반체제 인사에 대한 중국 정부의 방침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단으로서 무역 최혜국 대우 연장 카드를 이용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클린턴 행정부는 일본과의 관계에서 미국이 얼마든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안보 정책과 일본과 가장 큰 갈등을 빚고 있던 무역 등의 경제 문제를 분리시켰다. 결국 미국은 중국의 인권을 증진시키고 일본의 경제적 양보를 얻어내는 데 활용할 수 있었던 무기를 내려놓은 셈이었다.
둘째, 미국은 아시아 국가들과의 상호주의를 기대하고 거기에 입각한 정책을 여러 차례 추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일련의 양보를 하면 아시아 국가들로부터도 거기에 상응하는 양보를 얻어낼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다. 이러한 노선은 아시아 국가들과 '건설적 연대' 또는 '대화'를 유지할 필요성이 있다는 언급으로 정당화되었다. 그러나 아시아 국가는 그러한 양보를 미국이 쇠락하는 징후로 해석하면서 미국의 요구를 더더욱 거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이러한 양상은 특히 중국과의 관계에서 단적으로 나타났다. 미국이 무역 최혜국 대우를 연장해 주자 중국 내의 인권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새로운 인권 유린 사례가 속속 터져 나왔다. '좋은 관계를 '우호적' 관계와 동일시하는 미국인의 습벽 때문에 미국은 자신에게 승리를 안겨 주는 관계를 '좋은' 관계로 이해하는 아시아 국가들과의 경쟁에서 상당히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다. 아시아인에게 미국의 양보는 보답의 대상이 아니라 이용의 대상이다.
셋째, 무역 마찰을 둘러싼 미일 간의 거듭되는 분쟁에서 일정한 도식이 형성되었다. 미국은 일본에게 요구를 하고 그 요구를 충족시키지 않을 경우 제재를 가하겠다고 위협한다. 지리한 협상이 이어지다가 제재 발효 시한이 임박해서야 합의가 이루어진다. 그 합의문은 애매모호한 문장으로 되어 있어, 미국은 원칙적으로 승리를 주장할 수 있고 일본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그 합의를 얼마든지 이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마찬가지로 중국도 인권, 지적 재산권, 무기 확산 등과 관련하여 포괄적 원칙을 담은 합의문을 마지못해 수용하지만 미국과는 전혀 다르게 그 문구를 해석하면서 이제까지의 정책을 고수해 나간다. 아시아와 미국의 이런 문화적 차이, 세력 균형의 변화를 등에 업고 이제 아시아 국가들은 미국과의 마찰이 생길 경우 서로를 지원하는 양상을 보인다. 가령 1994년 일본의 공산품 수입에 수치 목표를 설정하라는 미국의 요구에 맞서 호주에서 말레이시아, 한국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모든 아시아 국가들이 일본의 편을 들었다. 비슷한 양상은 중국에 대한 무역 최혜국 대우 부여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을 때도 되풀이되었다. 당시 호소카와 일본 총리는 서구의 인권 개념을 아시아에 맹목적으로 적용할 수 는 없다고 분명히 못 박았으며, 싱가포르의 리 콴유는 중국을 압박할 경우 미국은 태평양 지역에서 외톨이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은 세계 보건 기구의 사무총장 경선에서 서구 후보 대신 일본 출신 현 사무총장의 재선을 밀었으며, 일본은 살리나스 전 멕시코 대통령의 퇴진으로 생긴 세계 무역 기구 사무총장 자리를 놓고 미국 후보 대신 한국 후보를 밀었다. 이 일련의 기록들은 1990년대 현재 범태평양 지역의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에서 동아시아 각국이 미국보다는 다른 동아시아 국가와 훨씬 큰 유대감을 갖고 있음을 명약관화하게 보여 준다.
냉전의 종식, 아시아와 미국의 늘어나는 접촉, 미국의 상대적인 국력 감퇴로 일본을 비롯한 여타 아시아 국가들과 미국의 문화적 충돌이 표면으로 부각되었고 아시아 국가들이 미국의 압력에 맞설 수 있는 능력도 커졌다. 중국의 부상은 미국에게 더욱 근본적 난제로 다가온다. 인권, 무역, 티베트, 대만, 남중국해, 무기 확산 등 미국과 중국의 마찰은 미국과 일본의 마찰보다 훨씬 광범위하다. 미국과 중국이 증요한 정책 목표에서 입장을 공유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양국의 차이점은 전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마찰은 두 나라의 상이한 문화에서 주로 기인한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근본적 패권의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다. 중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 또는 미국의 헤게모니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미국은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 질서 또는 중국의 헤게모니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미국은 200년이 넘도록 유럽에서 막강한 패권 국가가 못 나오도록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중국에 문호를 개방한 이후 100년 가까이 미국은 아시아에서도 똑같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미국은 두 번의 세계 대전을 치렀으며, 독일 제국주의, 나치 독일, 일본 제국주의, 소련과 중국의 공산주의와 싸웠다. 미국의 이런 의지에는 변함이 없으며 레이건 부시는 그 점을 재확인하였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새로운 패권 국가로 부상하는 것은 미국의 중요한 정책 목표와 상충 된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 밑바닥에는 향후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를 둘러싼 근본적 대립이 자리 잡고 있다
중국의 헤게모니: 견제와 편승
6개의 문명, 18개의 나라,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 국가 간의 증요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차이를 가진 동아시아는 21세기 초반에 들어가 다양한 국제 관계의 틀 가운데 어느 하나로 발전할 것이다. 그것은 대다수의 지역 강대국과 실력국이 관여하는 아주 복잡한 협력과 갈등의 조합이 될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 어쩌면 인도가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는 강대국 중심의 다극 체제가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 흑은 동아시아의 정치가 중국과 일본 또는 중국과 일본의 양극 구도로 재편되고 나머지 나라들은 어느 한쪽을 편들거나 증립을 지키는 양상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 아니면 동아시아 정치가 베이징을 중심으로 권력의 위계가 형성되는 전통적 단일 질서로 복귀할 가능성도 있다. 만일 중국이 21세기에 들어가서도 높은 수준의 경제 성장을 유지하고 덩 샤오핑 사후에도 정치적 통합성을 유지하며 후계자 문제를 원만히 해결한다면, 중국은 맨 마지막 시나리오를 실현시키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것이 성공하느냐 못하느냐는 동아시아의 정치 구도에서 다른 국가들이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중국의 역사, 문화, 전통, 영토, 경제적 역동성, 자기 인식은 모두 동아시아의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목표 설정은 눈부신 경제 발전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미국, 소련 다른 강대국들도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 성장을 이루던 시기에 혹은 그 직후에 대외 팽창, 자기주장, 제국주의의 길로 나섰기 때문이다. 경제력과 군사력의 증대가 중국에 그와 같은 효과를 미치지 않으리라고 단정할 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 중국은 2천 년 동안 동아시아를 지배한 나라이다. 이제 중국인은 그 역사적 역할을 되찾아 1842년 영국의 강압으로 맺은 난징 조약을 시발점으로 1세기 이상 지속되어 온 서구와 일본에 대한 굴욕과 종속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으려 한다.
1980년대 후반부터 중국은 축적되는 경제 자원을 군사력 증강과 정치적 영향력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경제 발전이 지속되면 대대적인 군사력 증강 계획도 차질 없이 추진될 것이다. 한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의 군사 예산은 하향 곡선을 그렸다. 그러나 1988년에서 1993년 사이에 중국의 군사 예산이 명목상으로는 2배로 늘었고 실질적으로는 50퍼센트 늘었다. 1993년도 중국 군사비 지출액은 공식 환율로 대략 220억 달러에서 570억 달러 안팎으로 추정된다. 이것을 구매력 기준으로 환산할 경우 중국의 국방비는 최고 900억 달러까지 치솟는다. 1980년대 말 중국은 군사 전략의 기본틀을 새로 짜, 소련과의 전면전이 발발할 경우 침공에 맞서는 방어전 개념에서 세력 확대에 주안점을 둔 지역 안보 전략으로 바꾸었다. 이 전략 변화에 발 맞추어 중국은 해군력 확층, 최신 장거리 전투기 확보, 공중 재급유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항공 모함 도입을 결정하였다. 중국은 또한 러시아와 상호 이익이 되는 무기 구매 관계를 발전시키고 있다.
중국은 동아시아의 지배국이 되려고 한다. 동아시아 지역의 경제 발전은 점점 중국 의존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중국 본토와 대만, 홍콩, 싱가포르의 급속한 성장에다가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의 경제 발전에 화교들이 차지하는 비중도 급격히 늘고 있다. 더욱 위협적인 것은 중국이 남중국해에 대한 영유권을 점점 강하게 내세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은 패러셀 제도에 기지를 건설하고, 1988년에는 베트남과 일부 도서 지역에서 교전을 벌였으며, 필리핀 근해의 미스치프 산호초에 함정을 파견하고 인도네시아의 나투나섬 인근 유전에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중국은 또한 미군의 동아시아 주둔을 암묵적으로 두둔하던 종래의 입장에서 벗어나 미군 철수를 적극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중국은 냉전 시대와는 일본의 방위력 증강을 은근히 촉구하는 자세를 보였지만 탈냉전 시대에 들어와서는 일본의 군사력 증강에 대한 우려를 점차 강하게 표명하고 있다. 지역 헤게모니를 노리는 국가의 전형적 행동에 맞추어 중국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군사적 우위를 확립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요소들을 최소화하려고 노력 중이다.
남중국해 같은 극히 드문 사안을 제외하면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패권주의는 직접적 무력 사용에 의한 지배 영토의 확대로 나타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중국은 일률적으로 적용시키지는 않겠지만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다음과 같은 태도를 전부 또는 일부 받아들이라고 요구할 것이다.
* 중국의 영토적 자주성, 중국의 티베트. 신장 지배, 홍콩. 대만의 중국 귀속을 지지한다.
* 남중국해, 나아가서는 몽골에 대한 중국의 통치권을 묵인한다.
* 경제, 인권, 무기 확산, 기타 사안에 대한 서방과의 마찰에서 대체로 중국을 지지한다.
* 이 지역에서 중국의 군사적 우위를 받아들이고 그 우위에 도전할 수 있는 핵무기나 재래식 무기의 확보를 자제한다.
* 중국의 이익에 부합되고 중국의 경제 발전을 유도하는 무역 투자 정책을 채택한다.
* 지역 문제 해결에서 중국의 지도력을 존중한다.
* 중국인 이민을 대체로 폭넓게 받아들인다.
* 자국 내의 반중국, 반화교 운동을 금지하거나 억압한다.
* 중국 본토의 친척이나 고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권리 등 자국 내에 거주하는 화교의 권리를 존중한다.
* 다른 강대국들과의 군사 동맹 또는 반중국 연합 결성을 하지 않는다.
* 동아시아의 팜범위 소통어로서, 영어의 보완어, 궁극적으로는 대체어로서 중국어 사용을 장려한다.
분석가들은 중국의 등장을 19세기 후반 유럽의 패권국으로 부상한 빌헬름 치하의 독일에 비유한다. 새로운 패권국의 출현은 늘 고도의 불안을 야기하지만, 중국이 패권국으로 떠오를 경우 그것은 1500년 이후 세계 역사에 등장한 모든 패권국들을 초라하게 만들 것이다. "중국이 세계를 뒤흔들면 세계는 새로운 균형을 되찾기까지 30년에서 40년이 걸릴 것이다. 중국은 그저 또 하나의 열강일 뿐이라고 깎아내려도 소용없다. 중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주역이다." 1994년 리 콴유는 이렇게 평가하였다. 중국의 경제 발전이 10년만 더 계속되고(그럴 가능성이 있다)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겪으면서도 정치적 통합성이 유지된다면(그럴 가능성이 높다), 동아시아 국가들과 전 세계는 이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주역의 점증하는 자기주장에 어떤 식으로든 대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크게 보아서 국가들은 새로운 강국의 출현에 두 가지 방식 가운데 하나 또는 둘의 조합으로 대응할 수 있다. 혼자 또는 다른 나라들과 동맹을 맺어서 신흥 강국을 견제하고 억제하며, 필요하다면 전쟁까지도 불사하면서 자신의 안보를 지키려고 시도할 것이다. 아니면, 신흥 강국에 편승하여 적응하면서, 자신의 중요한 이익을 보호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아래 신홍 강국과의 관계에서 이차적 지위 또는 종속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또는 편승과 견제를 혼합하는 전략도 있지만, 이것은 신흥 강국을 적으로 만들면서 아무런 보호도 받을 수 없는 처지에 봉착할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전략이다. 서구식 국제 관계 이론에 따르면 편승보다는 견제가 대체로 바람직한 선택이고 또 실제로 더 많이 애용되어 온 전략이다. 월트(Stephen Walt)는 이렇게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의도를 계산할 때 국가들은 균형을 택함이 온당하다. 합류는 위험 부담이 크다. 신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국가들은 패권국이 변함없는 온정을 베플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패권국을 돕는다. 패권국이 공격적으로 나올 가능성을 감안한다면 견제가 더 안전하다. 더욱이 약한 쪽에 붙으면 거기서 태동하는 동맹에서 자국의 영향력이 커진다. 약한 쪽에서 더 큰 도움을 필요로 하기 패문이다.
서남아시아 지역의 동맹 구도에 대한 월트의 분석은 외부의 위협에 대처하고자 할 때 국가들이 거의 예외 없이 견제를 채택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유럽의 근대사에서도 견제 행위가 일반적 관행이었다. 여러 열강들은 펠리페 2세, 루이 14세, 프리드리히 대제, 나폴레옹, 빌헬름 황제, 히틀러가 야기한 위협을 견제하고 억제하려고 동맹 관계를 변화시키곤 하였다. 그러나 국가들은 어떤 조건하에서는 편승을 선택하기도 한다는 점을 월트도 인정한다. 슈웰러(Randall Schweller)의 주장에 따르면 부상하는 강국에 편승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나라들은 수정주의로 기우는 국가들이다. 그들은 현재 구도에 불만을 느끼며 그 구도를 변화시키는 데서 이익을 챙기려 든다. 편승은 패권 국가가 사악한 의도를 가지지 않았다는 데 대한 어느 정도의 믿음을 전제로 한다.
견제를 추구하는 국가들은 일차적 또는 이차적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첫째, A 국가는 자신이 잠재적 적수로 간주하는 B 국가를 견제하고자 C 국가나 D 국가와 동맹을 맺거나 자국의 군사력과 기타 역량을 강화하거나(이것은 군비 경쟁의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수단들을 결합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A 국가와 B 국가는 서로에게 일차적 견제국이다. 둘째, A 국가는 당장은 이렇다 할 잠재적 위협 국가를 발견하지 못하지만 지나치게 강력해질 경우 자국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B 국가나 C 국가의 상호 견제를 부추기는 데 관심을 기울일 수도 있다. 이 상황에서 A 국가는 B 국가와 C 국가에게 이차적 견제국의 역할을 하며, B 국가와 C 국가는 서로에게 일차적 견제국의 역할을 한다.
중국이 동아시아 지역의 패권국으로 등장하기 시작할 때 다른 나라들은 중국에 어떻게 반응할까? 물론 반응의 양태는 아주 다양할 것이다. 중국이 미국을 자신의 주적으로 규정하고 있으므로 미국의 지배적 여론은 일차적 견제국의 지위를 가진 미국이 중국의 패권을 저지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런 역할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일 강대국이 유럽이나 아시아를 지배하는 상황을 원치 않는 미국의 전통적 이해에도 부합한다. 그 목표는 유럽에서는 유명무실해졌지만 아시아에서는 그렇지 않다.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미국과 서유럽의 느슨한 연합체는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지 않는다. 자기주장이 강하며 통합성을 유지하는 강력한 중국의 등장은 그렇지 않다. 필요하다면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패권을 저지하고자 전쟁을 불사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중국의 경제 발전이 계속된다면 중국은 21세기 초반에 가서 미국의 정책 입안가들이 직면할 가장 심각한 안보 위협국이 될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헤게모니를 저지하고자 한다면 미국은 그런 목적을 위하여 일본과의 동맹 노선에 수정을 가하고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의 군사적 유대를 강화하며 아시아 지역에 미군을 증강 배치하고 이 지역에 대한 군사적 투입 역량을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중국의 헤게모니를 저지하기 위한 싸움에 뛰어들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미국은 보편주의를 철회하고 중국의 헤게모니를 받아들이고 태평양 맞은편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미칠 수 있는 자국의 영향력이 대폭 축소되는 현실을 흔쾌히 수용해야 한다. 어떤 노선을 택하건 만만치 않은 희생과 위험이 뒤따른다. 가장 큰 위험은 미국이 명확한 선택을 하지 않아 전쟁이 자신의 국익에 보탬이 되는지를 심도 있게 검토하지 않고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중국과의 전쟁에 휘말리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미국은 다른 강대국이 중국의 일차적 견제국 역할을 할 때 이차적 견제국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중국의 일차적 견제국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는 일본인데, 일본이 그떻게 되려면 그들의 정책이 크게 바뀌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일본의 재무장이 강화되고 핵무기를 확보해야 하며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지지를 둘러싸고 중국과 치열한 경합을 벌여야 한다. 일본은 미국이 주도하는 중국 견제 연합에 동참할 가능성은 있지만 실은 그 가능성도 불투명하다-일본이 중국의 일차적 견제국이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이차적 견제국 역할을 하는데 이렇다 할 관심이나 능력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나폴레옹 시대에 미국은 새로운 강국으로서 이차적 견제국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가 결국 영국,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다. 20세기 전반기에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상호 견제를 촉발하기 위한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다가 손상된 균형을 회복하고자 뒤늦게 세계 대전에 뛰어들어야 했다. 냉전 시대의 미국은 소련의 일차적 견제국 역할을 맡는 것 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었다. 미국이 강대국으로서 이차적 견제국 역할을 제대로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차적 견제국이 되려면 섬세하고 유연하고 애매모호하고 때로는 음흉한 역할을 맡아야 한다. 미국의 가치 기준으로는 도덕적으로 옳아 보이는 국가를 지원하지 않거나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국가를 지원하는 등 상황에 따라 지지 대상을 기민하게 바꿔야 하는 사태가 생길 수도 있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중국의 일차적 견제국으로 떠오른다 하더라도 미국이 과연 그런 균형 관계를 효과적으로 지원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미국은 두 잠재적 위협국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기보다는 기존의 한 위협국에 직접적 압력을 가하는 데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아시아 국가들은 전통적으로 편승을 선호하는 성향이 강하며 이러한 성향은 이차적 견제를 시도하려는 미국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을 것이다.
편승이 신뢰에 바탕을 둔다면 여기서 세 가지 명제가 도출된다. 첫째, 편승은 문화적 동질성이 결여된 나라들보다는 같은 문명에 속하거나 문화적 동질성을 공유하는 나라들 사이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둘째, 신뢰도는 상황에 따라 가변적일 수 있다. 어린 소년은 다른 소년들과 겨룰 때는 자기 형을 편들겠지만,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형을 상대적으로 덜 신뢰할 것이다. 따라서 상이한 문명에 속한 나라들 사이의 교류가 잦아질수록 문명 내부의 편승 성향은 강화되게 마련이다. 셋째, 편승이나 견제의 성향은 문명마다 다르다. 소속국 사이의 신뢰도가 문명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가령 중동 지역에서 견제가 지배적 구도로 나타나는 것은 아랍과 기타 중동 문화에서 내부적 신뢰도가 아주낮은 수준에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요인들 외에도 편승이나 견제의 성향은 힘의 분포에 대한 기대나 선호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유럽 국가들은 절대주의의 단계를 거쳤지만 아시아의 역사를 관통하는 견고한 관료주의 제국이나 '동양적 전제주의'는 겪지 않았다. 봉건제는 권력의 분산이 자연스럽고 바람직하다는 신념과 다원주의의 토대를 제공하였다. 그러므로 국제 차원에서도 세력 균형은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정치가의 책임은 세력 균형을 수호하고 견지하는 데 있었다. 균형이 깨뜨려질 위기에 처하였을 때는 균형을 회복하기 위한 견제 행동이 요청되었다. 요컨대, 유럽식 국제 사회 모형은 유럽식 국내 사회 모형의 확대판이었다.
반면에 아시아의 관묘주의 제국은 사회적, 정치적 다원주의나 권력의 분산을 위한 틈새를 거의 허용하지 않았다. 유럽과는 달리 중국에서 편승은 견제에 비하여 압도적 우위를 점한 것으로 보인다. 파이(Lucian Pye)는 '1920년대에 군벌들은 강자에 붙었을 때 어떤 잇속을 챙길 수 있는지를 먼저 점검한 다음에야 약자와 연대하였을 경우의 이득을 계산하였다.... 세력 균형을 도모해 온 유럽의 전통과는 달리 중국의 군벌들에게 자립성은 궁극의 목표가 아니었다. 그들은 패권과의 결탁 가능성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라고 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골드스타인(Avery Goldstein)은 권위 체계가 비교적 명확하게 설정되어 있던 1949년부터 1966년까지 편승은 중국 공산주의 정치 구조의 특징적인 현상이었다고 주장한다. 문화 혁명을 계기로 권위가 무정부 상태에 빠지고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한편 정치적 주역들의 생존 가능성이 위태로워지자 견제를 추구하는 행동이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1978년 이후 명확하게 규정된 권위 체계가 회복되자 편승이 다시 정치 행위의 지배적인 양태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중국인은 국내 문제와 국외 문제의 구분선을 명확하게 긋지 않았다. 그들이 생각한 세계 질서는 중국 내부 질서의 필연적 귀결, 따라서 중국이라는 문명적 정체성의 화장된 투사에 다름 아니었으며 중국의 문명적 정체성은 같은 중심점으로부터 더 넓게 확장될 수 있는 올바른 우주 질서로서의 원 안에서 재생산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맥파커(Roderick MacFarquhar)는 '중국인의 전통적 세계관은 세세하게 분절된 위계 사회에 대한 유교적 이상을 반영한다. 외국의 군주나 정부는 중국에 예속된 존재로 이해된다. '하늘의 해가 둘이 아니듯 이 세상의 황제도 둘일 수 없다'라고 그 점을 표현하였다. 자연히 중국인은 다극적 또는 다변적 안보 개념에 이질감을 갖는다. 아시아인은 대체로 국제 관계에서 위계를 수용하는 데 거부감이 없으며 유럽식의 헤게모니 전쟁은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유럽 역사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원활하게 기능하는 세력 균형 체제가 아시아에게는 낯설기만 하다. 19세기에 서구 열강이 몰려들기 전까지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는 중국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다른 나라들은 다양한 수준으로 베이징에 종속되거나 베이징과 협력하거나 베이징으로부터 자율성을 누렸다. 물론 세계 질서의 유교적 이상은 현실 속에서 완전히 구현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 정치의 아시아적 위계 모형은 유럽적 균형 모형과 아주 대조적이다.
이러한 세계관 때문에 국내 정치에서 편승을 지향하는 중국인의 성향은 국제 관계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이것이 개별 국가의 외교 정책을 규정하는 정도는 그 나라가 유교 문화를 공유하는 정도, 중국과의 역사적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한국은 문화적으로 중국과 공통점이 많으며 역사적으로도 중국에 기울어져 왔다. 싱가포르는 냉전 시대에 중국 공산당과 적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와 노선을 수정하기 시작한 싱가포르의 지도자들은 미국 등이 중국의 현실적 패권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였다. 화교 인구가 많고 지도층의 반서구 의식이 강한 말레이시아는 역시 중국 쪽으로 강하게 기울었다. 태국은 19세기와 20세기에 유럽과 일본의 제국주의와 타협함으로써 독립을 유지하였으며 중국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취할 가능성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베트남이 야기하는 잠재적 안보 위협도 태국을 중국에 접근시키는 요인의 하나이다.
동남아시아에서 중국을 견제하고 억제할 만한 성향이 있는 두 나라는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이다. 인도네시아는 인구가 많고 이슬람 국가이며 중국과 지리적으로도 떨어져 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의 지원이 없으면 남중국해에 대한 중국의 세력 확대를 저지할 능력이 없다. 1995년 가을 인도네시아와 호주는 자국 안보가 적대적 도발에 직면할 경우 공동의 대처 방안을 모색하자는 내용의 안보 협약을 체결하였다. 두 나라는 이것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협정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였지만 적대적 도발을 감행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나라로 중국을 지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베트남은 유교 문화의 뿌리가 깊지만 역사적으로 중국과 적대적 관계를 맺어 왔고 1979년에는 잠시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베트남과 중국이 서로 스프래틀리 제도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며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양국 해군이 간헐적으로 교전을 벌인 적도 있다. 1990년대 초반에 들어와 베트남의 군사력은 중국의 군사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따라서 그 어떤 동아시아 국가보다도 베트남은 중국 견제를 위하여 공조를 취할 수 있는 동반국들을 찾아 나서려는 욕구가 강하다. 1995년에 이루어진 베트남의 ASEAN 가입과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는 이러한 방향을 지향하는 두 가지 조치였다. 그러나 ASEAN이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있을 뿐 아니라 ASEAN이 중국에 맞서는 데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ASEAN이 반중국 연합으로 발전하거나 베트남이 중국과 맞설 때 베트남을 지원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미국은 ASEAN보다는 중국을 견제하려는 의지가 강한 나라지만 1990년대 중반 현재로서는 미국이 남중국해에 대한 중국의 영유권 주장에 어디까지 저항할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결국 베트남으로서는 중국에 순응하고 핀란드화(강대국과 우호적 관계를 맺으면서 중립을 지키는 노선 : 옮긴 이)를 수용하는 것이 '가장 피해가 적은 방안' 일 수 있다. 이것은 베트남인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겠지만 생존은 보장될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와 중국과 북한을 제외한 동아시아 모든 나라들이 계속 적인 미군 주둔을 지지하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베트남을 제외하면 동아시아 국가들 대부분은 대체로 중국에 순응하는 경향을 보인다. 필리핀은 자국에 있는 미군의 주요 해군 기지와 공군 기지를 폐쇄하였고 오키나와에서는 미군의 대규모 주둔을 반대하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 1994년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는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에 군사적 개입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이들 국가 해역에 6척의 보급선을 정박, 해상 기지로 사용하게 해 달라는 미국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러한 중국 눈치 보기는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최초로 열린 아세안 지역 포럼은 스프래틀리 제도 문제를 의제로 다루지 말자는 중국의 요구에 침묵으로 일관하였으며, 1995년 중국이 필리핀 해역의 미스치프 산호초를 점령하였을 때 어떤 ASEAN 국가도 여기에 항의하지 않았다. 1995 ~96년 중국이 성명과 군사 시위로 대만을 위협하였을 때 아시아 각국 정부는 하나같이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이들의 편승 성향은 옥슨버그(Michael Oksenherg)가 적절히 요약하였다. '아시아의 지도자들은 세력 균형이 중국 우위로 변화할 가능성을 우려하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지금은 베이징에 대적하려고 하지 않으며 미국의 반중국 십자군에 동참하지도 않을 것이다.
중국의 부상은 일본에 심각한 도전으로 다가오며 일본이 어떤 전략을 추구해야 하는가를 놓고 일본 내부에서 열띤 논란이 벌어질 것이다. 중국의 군사적, 정치적 우위를 인정하는 대신 일본의 경제적 우위를 인정받는 일종의 주고받기 형태로서 일본이 중국에 순응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인가?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는 연합체의 중추로서 미일 동맹에 새로운 의미와 비중을 부여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인가? 중국의 침입에 맞서 자국의 이익을 수호할 수 있도록 군사력 증강을 도모해야 할 것인가? 일본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가급적 명확한 답변을 내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노력의 핵심은 미일 군사 동맹일 수밖에 없다. 아마 일본은 동맹의 방향을 이런 식으로 재조정하는 데 마지못해 서서히 동조할 것이다. 일본이 적극성을 가지려면 다음 문제들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1)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세계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미국의 총체적 능력, (2) 아시아에 계속 주둔하고 중국의 영향력 확대에 적극적으로 맞서겠다는 미국의 의지. (3) 막대한 경제적 피해를 보거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을 우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중국을 봉쇄할 수 있는 일본과 미국의 능력.
미국이 확고부동한 의지를 보여 주지 않는 한 일본은 중국에 순응할 가능성이 높은데 미국이 그런 의지를 보일 확률은 낮은 편이다. 동아시아를 일방적으로 유린하면서 처참한 결과를 초래한 1930년대와 1940년대를 제외하고, 일본은 역사적으로 자신이 패전국으로 간주한 나라에 결탁함으로써 안보를 지켜 왔다. 1930년대에 일본이 독일, 이탈리아 추축국에 가세한 것도 이것을 그 당시 세계 정치에서 가장 역동적인 군사적, 이념적 세력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그보다 앞선 20세기 초반에 일본은 의식적으로 영일 동맹에 합류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세계 문제를 주도하는 나라가 영국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의 일본은 비슷한 맥락에서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국력을 가졌고 일본의 안보를 보장할 수 있었던 미국과 동맹을 맺었다. 중국인처럼 일본인도 국제 정치를 위계 구조로 파악한다. 국내 정치의 역학이 그렇기 때문이다. 한 유력한 일본인 학자는 이렇게 지적한다.
일본인이 국제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자국을 고찰할 때 국내 모형은 좋은 발판이 된다. 일본인은 국제 질서를 일본 사회 안에서 내부적으로 표현되는 문화적 양태에 외부적 표현을 주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그 문화적 양태의 특징은 수직적으로 위계화된 구조와의 유관성이다. 그러한 국제 질서관이 형성되기까지는 근대화 이전까지 중일 관계를 통하여 장기간 누적된 일본의 경험이 크게 작용하였다.
결국 일본의 동맹 성향은 '근본적으로 견제가 아닌 편승' 이었고 '패권국과의 결탁' 이었다. 일본에 오래 거주한 한 서구인은 일본인은 "'대세' 앞에 머리를 숙이고 윤리적 강자로 파악된 존재와 협력하는 데 누구보다도 빠르고...... 윤리적으로 쇠락하고 기울어가는 패권국으로부터 받은 수모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빠르게 분개를 나타낸다."라고 지적하였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역할이 축소되고 중국의 역할이 급신장하면 일본의 정책도 자연스럽게 변할 것이다. 그런 변화의 조짐은 벌써 감지되고 있다. 중일 관계에서 핵심적인 질문은 '누가 최고인가?'라고 마부바니는 말한다. 그 답은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명시적인 언급이나 공감대의 표명은 없었지만 베이징이 국제적으로 비교적 고립되어 있던 1992년 일본 왕이 중국을 방문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거 않다.
이상론으로 보았을 때 일본의 지도자와 국민은 지난 몇십 년 동안 유지되어 온 기본 틀에 매력을 느껴, 압도적인 힘을 가진 미국의 보호 아래 있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아시아 개입이 점차 줄어들면 일본 내에서 '재아시아화'를 주장하는 세력의 발언권이 강해질 것이고,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다시 패권국으로 등장하는 것을 불가피한 현실로 받아들일 것이다. 가령 1994년의 한 여론 조사에서 21세기 아시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질 나라가 어디냐는 질문에 대하여 일본 국민의 44퍼센트가 중국을, 30퍼센트가 미국을 꼽았으며 16퍼센트만이 일본을 거론하였다. 1995년 일본의 한 고위 관리는 일본이 중국의 부상에 적응할 만한 '자제력'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는 이어 미국에게도 그것이 있는지를 물었다. 일본의 자제력에 대한 그의 발언은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반면 그가 제기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불분명하다.
중국의 헤게모니 장악은 동아시아의 불안정과 갈등을 감소시킬 것이다. 또한 이 지역에서 미국과 서구의 영향력도 줄어들 것이다. 미국은 역사적으로 세계의 주요 지역을 다른 강대국이 지배하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해 왔지만, 그러한 지배를 현실로 수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헤게모니가 다른 아시아 국가나 미국의 이익을 위협하는 수준은 중국의 내부 사정에 좌우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경제 성장은 군사력과 정치적 영향력의 확대를 낳지만 그와 동시에 정치 발전과 좀더 개방적이고 다원적이며 나아가서는 민주적 정치 형태를 향한 움직임을 자극할 수도 있다. 한국과 대만에서 좋은 본보기를 찾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두 나라에서 모두 민주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밀어붙인 정치 지도자들은 크리스트교 신자였다.
권위, 질서, 위계, 개인보다 집단을 우위에 두는 사고방식 등 중국의 유교적 전통은 민주화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그러나 경제 성장은 남부 중국에 상당한 수준으로 축적된 부, 역동적 부르주아, 정부의 통제 영역을 벗어난 경제력의 누적, 급격히 확대되는 중산층을 만들어 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 본토인은 무역, 투자, 교육 등의 방면에서 외부 세계와 깊숙이 연루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은 정치적 다원주의를 향한 움직임의 기본적 발판을 제공한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개방이 이루어지려면 권위주의 체제의 내부에서 개혁 세력이 실권을 장악해야 한다. 중국에서 그것이 가능할까? 덩 샤오핑 사후의 첫 권력 계승 집단에서는 그것을 기대하기 어렵지만 그다음 집단에서는 어느 정도 기대할 수 있다. 21세기에 가면 남부 중국에서 명목상이 아니더라도 실질적으로는 정치적 정당의 요소를 정강으로 내걸고 대만, 홍콩, 싱가포르의 중국인과 밀접한 유대를 맺고 이들의 지원을 받는 집단이 출현할지 모른다. 남부 중국에서 그러한 운동이 싹 트고 베이징에서 개혁파가 실권을 잡는다면 체제의 성격에 어떤 형태로든 변화가 올 가능성이 있다. 민주화는 정치인들을 민족주의적 구호로 무장시켜 전쟁 발발의 가능성을 높이기도 하지만, 장기적으로 중국에 안정된 다원주의 체제가 들어선다면 다른 강대국들과의 관계도 호전될 것으로 전망된다.
프리드버그의 지적처럼 유럽의 과거는 어쩌면 아시아의 미래일지 모른다. 그러나 아시아의 미래는 아시아의 과거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아시아는 갈등을 감수하면서 견제를 추구할 것인지 패권을 수용하면서 평화를 추구할 것인지 둘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서구 국가들 같으면 갈등과 견제를 추구할 것이다. 역사, 문화, 현실적 세력 판도는 아시아가 평화와 패권의 길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음을 암시한다. 1840년대와 1850년대에 서구의 중국 침탈과 함께 시작되었던 시대는 이제 막을 내리고 있다. 중국이 지역 패권국으로서의 위치를 되찾으면서 동아시아는 자주성을 모색하고 있다.
문명과 핵심국 : 새로운 역학 관계
탈냉전 시대의 다극 다문명 세계에는 과거 냉전 시대를 지배했던 중추적 대립 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슬람의 급격한 인구 증가와 아시아의 고속 경제 성장이 지금의 속도를 유지한다면 서구와 서구에 도전하는 문명 사이의 갈등은 세계 정치에서 그 어떤 대립보다 중심적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이슬람 국가 정부들은 서구에 점점 덜 우호적인 정책을 취할 것이고, 이슬람 집단과 서구 사회 사이에서 간헐적인 소규모의 폭력, 때로는 심각한 폭력 사태가 빚어질 것이다. 미국과 중국, 일본, 그 밖의 아시아 국가들은 점점 갈등 관계에 빠져들 것이고, 만일 중국이 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부상하는 것을 미국이 저지하려들 경우 대규모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교-이슬람의 결속은 지속될 것이고 그 관계의 심도와 범위도 깊어지고 넓어질 것이다. 이 결속에서 핵심적인 비중은 무기 확산, 인권, 기타 사안에서 이루어진 이슬람권과 중화권의 공조이다. 파키스탄, 이란, 중국의 긴밀한 협력이 그 밑바탕을 형성한다. 1990년대 초에 들어와 중국의 양샹쿤 주석이 이란과 파키스탄을 방문하였고 라프 산자니 이란 대통령이 파키스탄과 중국을 방문하였다. 이러한 상호 방문은 파키스탄, 이란, 중국의 기초적 동맹 관계 구축을 겨냥한 것이었다. 중국을 방문하기 전 라프산자니 대통령은 파키스탄의 이슬라마바드에서 이란과 파키스탄은 '전략적 동맹'을 맺고 파키스탄에 대한 공격은 이란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여기에 화답하듯 파키스탄의 부토(Bsenazir Bhutto)는 1993년 10월 총리에 취임한 직후 이란과 중국을 방문하였다. 이들 세 나라의 협력 관계에는 정치인, 군인, 관료 차원의 정기적 교류, 방위 산업을 비롯한 민간 분야와 군수 분야의 다양한 공조, 다른 국가들에 대한 중국의 무기 이전 등이 망라되어 있다. 파키스탄에서는 외교 정책의 '자주성'과 '이슬람적' 사고를 강조하면서 '테헤란-이슬라마바드-베이징 축'을 열망하는 집단이 그러한 관계 강화를 지지하였다. 이란에서도 현 세계는 이란, 중국 파키스탄, 카자흐스탄의 '긴밀하고 일관된 협력'을 요구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1990년대 중반에 이르면 이 세 나라 사이에는 서구에 대한 견제, 인도에 대한 안보 우려, 중앙 아시아에 대한 터키와 러시아의 영향력 발휘 억제 같은 사안에서 사실상 동맹 관계가 구축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이 세 나라는 다른 이슬람 국가와 아시아 국가를 포함하는 좀더 광범위한 집단의 중추로 발전할 것인가? 풀러(Graham Fuller)의 지적에 따르면 비공식적인 '유교-이슬람교 동맹' 이 실현 가능한 것은 마호메트와 공자가 반서구적이어서가 아니라 유교와 이슬람 두 문화가 서구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 전횡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국가들에게 서구가 부분적으로 책임져야 할 과오에 분노를 표명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런 협력을 가장 강력하게 요구한 사람이 카다피(Mu'ammar al- Qadhafi)다. 그는 1994년 3월 이렇게 선언하였다.
‘새로운 세계 질서는 유대 교도와 크리스트교도에 의한 이슬람교도 지배를 의미한다. 이것이 완수될 경우 그들은 곧이어 인도, 중국, 일본 등지의 다른 종교들을 지배할 것이다.....’
지금 크리스트교도와 유대 교도는 이렇게 말한다. 과거 서구의 사명은 공산주의 분쇄에 있었으며 앞으로는 이슬람교와 유교 분쇄에 있다고.
바야흐로 우리는 중국이 이끄는 유교 진영과 미국이 이끄는 십자군 진영과의 충돌을 목전에 두고 있다. 십자군을 백안시하는 것만이 우리의 정당한 태도다. 우리는 유교의 편에 선다. 유교와 제휴하고 국제 전선에서 유교와 함께 싸움으로써 우리는 공동의 적을 제거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이슬람교도는 공동의 적수에 맞서는 투쟁에서 중국을 지원할 것이다.
우리는 중국의 승리를 기원한다.
유교 국가들과 이슬람 국가들의 긴밀한 반서구 동맹에 대한 열망은 중국이 어떤 나라와도 동맹을 맺지 않을 것이라는 장쩌민 주석의 1995년 발언이 나오면서 기세가 한풀 꺾였다. 장쩌민 주석의 입장은 중국은 세계의 중심국으로서 형식적인 동맹국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다른 나라들은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중국과의 협력을 모색해야 한다는 중국인의 전통적 사고방식을 반영한다. 그러나 중국은 서구와의 갈등 때문에 반서방 국가들과의 제휴를 모색할 것이다. 반서방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것이 이슬람 국가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원유의 안정적 확보를 위하여 이란,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는 물론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과의 관계를 확대하려 들 것이다. 1994년 한 에너지 전문가의 지적에 따르면 이 무기-원유 축은 더 이상 런던이나 파리, 워싱턴의 지시를 받지 않을 것이다."
다른 문명들과 그 핵심국들이 서구와 맺는 관계는 이것과는 성격이 판이하다. 남반구의 문명 곧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는 핵심국이 없고 서구에 대한 의존도가 높으며 경제력과 군사력도 비교적 약하다. (라틴 아메리카의 발전 속도는 매우 빠르지만) 서구와의 관계에서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는 상반된 태도를 취할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는 문화적으로 서구와 가깝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 경제 체제는 서구 체제와 점점 유사해져 갔다. 한때 핵무기 개발에 나섰던 라틴 아메리카의 두 나라(브라질 아르헨티나)는 그런 시도를 포기하였다. 모든 문명을 통틀어서 경쟁적인 군사력 증강 열기가 가장 낮은 수준에 있는 라틴 아메리카는 미국의 군사적 지배에 불만을 가질지는 몰라도 거기에 반기를 들 의사는 없을 것이다. 많은 라틴 아메리카 국가에서 개신교가 급속히 교세를 넓히면서 이 지역을 서구처럼 가톨릭과 개신교가 혼합된 사회로 변모시키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와 서구의 종교적 결속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한편 멕시코, 중앙아메리카, 카리브 지역 사람들이 미국으로 유입되면서 히스패닉 문화가 미국 사회에 끼치는 영향도 문화적 수렴 현상을 촉진한다. 라틴 아메리카와 서구-사실상 미국-사이에서 중요한 갈등을 낳는 문제들은 이민, 마약, 마약 관련 테러, 경제 통합(NAFA에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을 받아들이는 문제라든가 메르코수르나 안데스 협약 같은 라틴 아메리카 지역 공동 시장을 확대하는 문제)이다. 멕시코의 NAFA 합류와 함께 불거진 문제에서 드러나듯이 라틴 아메리카 문명과 서구 문명의 결합은 순탄하지는 않을 것이며, 21세기에 들어가서도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결합이 이루어지든가 아니면 아예 불발로 끝날 가능성마저 있다. 그러나 서구와 여타 문명들과의 차이에 비하면 라틴 아메리카와 서구의 차이는 여전히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서구와 아프리카의 관계는 갈등의 소지가 이보다 약간 더 많을 뿐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아프리카가 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대한 현안은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브라질, 아르헨티나처럼 핵무기 개발 계획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한 핵무기를 폐기하였다. 이 핵무기는 아파르트헤이트를 비난하는 외부 세력의 공격을 저지하고자 백인 정부가 만든 것이었다. 백인 정부는 다른 목적에 사용할지도 모르는 흑인 정부의 손에 핵무기를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핵무기를 만들 능력을 말살시킬 수 없으며, 아파르트헤이트를 청산하고 들어선 정부는 아프리카의 핵심국으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아프리카에 대한 서구의 개입을 저지하고자 다시금 핵무장에 나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인권, 이민, 경제, 테러 등이 아프리카와 서구 사이에 가로놓인 현안이다. 예전의 식민지들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유지하려는 프랑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 아프리카에서는 탈서구화 과정이 진행될 것이며 서구 열강의 이권과 영향력은 줄어들고 토착 문화가 목소리를 되찾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남아프리카 문화에서도 백인-영어적 요소가 아프리카적 요소에 밀려나는 추세가 가시화할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가 더욱 서구에 밀착되는 반면 아프리카는 서구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그러나 이 두 문명은 상이한 방식으로 여전히 서구에 의존하고 있으며 유엔에서의 투표권 행사를 제외하고는 서구와 서구에 도전하는 세력 사이의 균형 관계에 결정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러나 세 그네(swing) 문명(일본, 러시아, 인도)의 경우는 사정이 분명히 다르다. 이들 문명의 핵심국들은 세계 문제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맡고 있으며 서구 및 반서구 세력과 복잡하고 모호한 관계를 맺으면서 둘 사이에서 동요할 가능성이 높다. 이 문명들은 자기네끼리도 복잡한 관계 아래 놓여 있다. 앞서 보았듯이 일본은 오랜 시간이 흐르면 커다란 번민과 자기 모색의 과정을 거쳐 미국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중국에 접근할 가능성이 있다. 냉전 시대에 형성되었던 다른 문명 간의 동맹 관계와 마찬가지로 일본과 미국의 안보 협력은 공식적으로 폐기되지는 않더라도 약화될 전망이다.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는 러시아가 1945년에 점령한 쿠릴 열도를 양보하지 않는 한 순조롭지 못할 것이다. 냉전 종식 직후가 이 문제를 타결 지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러시아 민족주의가 빠르게 부상하면서 일본은 아까운 기회를 놓쳤다. 앞으로는 이 문제에서 미국이 예전처럼 일본의 입장을 지지하리라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냉전 시대 후반기에 중국은 소련과 미국을 상대로 '중국 카드'를 유효 적절히 활용하였다. 탈냉전 세계에서 러시아에게는 러시아 카드가 있다. 러시아와 중국이 접근하면 유라시아의 판세는 결정적으로 서구에 불리한 쪽으로 기울 것이며, 1950년대 중소 밀월 관계에 대한 우려가 또다시 재현될 가능성도 높다. 러시아와 서구의 긴밀한 공조는 유교-이슬람교의 결속을 견제하는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중국은 냉전 시대처럼 북으로부터의 침공을 다시금 우려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인접한 문명들과 그 나름의 문제를 안고 있다. 서구와의 관계에서 그 문제들은 대체로 단기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를테면 그것은 냉전의 종식이 낳은 결과라든가 러시아와 서구의 세력 균형을 새롭게 정의하는 문제, 양측의 대등한 지위를 인정하고 각자의 영향권을 존중하는 문제 등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다음과 같다.
1. 중부 유럽과 동유럽의 서구 크리스트교 국가들을 포함시켜 유럽 연합과 NATO를 확대하는 방안을 러시아가 받아들이는 한편 서구는 우크라이나가 두 나라로 쪼개지지 않는 한 NATO를 그 이상 확대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야 한다.
2. 러시아와 NATO는 불가침 선언, 안보 문제에 대한 정기적 협의, 무기 경쟁을 피하기 위한 협조 노력, 탈냉전 세계의 안보 요구에 걸맞은 무기 감축 협상 등 다양한 층위에서 동반자 관계를 모색해야 한다.
3. 정교 국가들 사이에서, 또 정교 인구가 다수를 점하는 지역에서 안보를 유지하는 데 러시아가 으뜸가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을 서구가 인정해야 한다.
4. 러시아가 남쪽의 이슬람 민족들로부터 느끼는 현실적 또는 잠재적 안보 위협이 있음을 서구가 인정하고, 러시아가 그러한 위협에 대처하는 데 필요한 조치들을 측면에서 지원하고 유럽 통상 전력 협정(CFE)도 기꺼이 수정하겠다는 의사를 비쳐야 한다.
5. 러시아와 서구는 양측의 이해가 모두 걸려 있는 보스니아 문제 등을 처리할 때 동등한 지위에서 협력하기로 합의해야 한다.
이러한 방향에서 합의가 도출되면 러시아와 서구가 서로에 대해 장기적 안보 위협을 가할 위험성은 높지 않다. 유럽과 러시아는 출생률이 낮고 고령 인구가 느는 등 인구 분포 면에서 완숙기에 접어든 사회다. 이런 사회는 팽창주의를 추구한다든지 공세적으로 나가는 데 필요한 젊은 혈기가 없다.
탈냉전 시대로 접어들 무렵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가 과거에 비해 한결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국경 분쟁이 해소되면서 국경선에 주둔하던 양측 군사력이 대폭 축소되었다. 교역이 늘어났고 서로를 겨누던 핵미사일도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켰으며 양국 외무 장관은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과의 싸움에서 공조를 모색하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러시아가 탱크, 전투기, 장거리 폭격기, 지대공 미사일을 포함한 자국 무기와 군사 기술의 중요한 고객으로서 중국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러시아의 입장에서 이러한 관계 호전은 일본과의 냉각 관계를 감안할 때 중국을 아시아의 동반자로 삼겠다는 의식적 결정의 일환이었고 NATO 확대, 경제 개혁, 군축, 경제 지원, 서방 국제기구 가입 등의 문제에서 불거진 서구와의 갈등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중국은 중국대로 세계 무대에서 외톨이가 아님을 서구에 과시할 수 있고, 지역 안보에 자신의 영향력을 공고히 하는 데 필요한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러시아-중국 결속은 유교-이슬람 결속처럼 양국 모두에게 서구의 패권과 보편주의에 맞서는 수단 된다.
이 결속이 장기적으로도 유지될 것인가는 첫째, 러시아와 서구의 관계가 어느 정도까지 상호 만족을 느끼는 수준에서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가. 둘째, 동아시아에서 이루어지는 중국의 헤게모니 장악이 경제, 인구, 군사 분야에서 러시아의 이익을 얼마나 위협하는가에 달려 있다. 중국의 경제적 역동성은 시베리아까지 이미 번졌고 중국 기업인은 한국, 일본 기업인과 함께 시베리아 지역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 시베리아의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미래가 유럽 쪽보다는 동아시아에 더 연결되고 있음을 점차 실감하고 있다. 러시아가 더욱 위협을 느끼는 것은 시베리아로 유입되는 중국인 이민이다. 이 지역의 불법 중국인 이민자는 1995년 현재 300만 명에서 5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부 시베리아 지역에 거주하는 러시아인의 수가 약 700만 명임을 감안할 때 이것은 엄청난 규모의 이민이다 "중국인은 러시아의 극동 지역을 평화적으로 점령하고 있다."라고 그라초프 러시아 국방장관은 경고하였다. 러시아의 한 고위 이민 관리도 "우리는 중국의 팽창주의를 저지해야 한다."라고 맞장구를 쳤다. 나아가 중국이 중앙아시아의 옛 소련 공화국들과 경제적 교류를 확대하면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악화될 지 모른다. 또 1차 대전 이후 러시아가 중국으로부터 분리시켰으며 그 후 몇십 년 동안 소련의 위성국 역할을 해 온 몽골을 중국이 다시 접수하기로 결심할 경우 중국의 팽창주의는 군사적 경향을 띨 수도 있다. 몽고 제국의 침공 이후 러시아를 짓눌러 온 '황인종' 지배에 대한 공포는 다시금 현실로 나타날 수 있다.
러시아와 이슬람의 관계는 수 세기에 걸쳐 터키, 북부 코카서스 민족, 중앙아시아 토후국들과 벌여 온 침략 전쟁의 역사적 유산에 따라 규정된다. 현재 러시아는 발칸 지역에서 터키가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정교 동맹국인 세르비아, 그리스와 공조를 벌이는 한편 코카서스 지역에 대한 터키의 잠식을 막기 위하여 역시 같은 정교국인 아르메니아와 결속을 강화하고 있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 이들을 독립국가연합에 가입시켰으며 이 지역에 자국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다. 러시아가 각별하게 신경을 쓰는 것은 카스피해의 유전과 천연가스 자원, 이 자원을 서구와 동아시아에 보급할 수 있는 수송로의 확보이다. 러시아는 또한 북부 코카서스에서 체첸 이슬람교도와 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 포함된 반정부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타지키스탄에서도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안보 위협은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의 위협'을 억제하고자 중국과 협력을 모색해야 하는 또 다른 동기가 된다. 러시아의 이란 접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러시아는 이란에 잠수함, 최신 전투기, 전폭기, 지대공 미사일, 각종 정찰 장비와 전자 장비를 판매하였다. 러시아는 또 이란에 경수로를 건설하고 우라늄 농축 시설을 제공 하기로 합의하였다. 그 반대급부로 러시아는 이란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원리주의의 확산을 억눌러 주기를 노골적으로 기대하며 암묵적으로는 이 지역과 코카서스 지역에서도 터키의 영향력 확대를 저지하는 데 러시아와 협력해 주기를 기대한다. 앞으로 러시아와 이란의 관계는 러시아의 남부 지역에서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 이슬람 인구의 위협을 러시아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결정적으로 좌우될 것이다.
또 하나의 '그네' 핵심국 인도는 냉전 시대에 소련의 우방이 되어 중국과 한 차례, 파키스탄과 여러 차례 전쟁을 벌인 바 있다. 탈냉전 시대에 들어와서도 인도와 파키스탄의 관계는 캐슈미르, 핵무기, 이 지역의 전체적 군사 균형 문제를 놓고 여전히 갈등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다. 파키스탄이 다른 이슬람 국가들의 지원을 어떻게 끌어내느냐에 따라 인도와 이슬람의 관계는 달라질 것이다. 따라서 인도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파키스탄과 거리를 두도록 개별 이슬람 국가들을 설득하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냉전이 종식되면서 이웃 국가들과 우호 관계를 확립하려는 중국의 노력은 인도까지 확대되었고 긴장도 한결 누그러졌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장기적으로 지속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 중국은 남아시아의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왔고 앞으로도 이 기조는 유지될 것이다. 예컨대 중국은 파키스탄과 관계를 긴밀히 유지하면서 핵무기 및 재래식 무기 증강을 지원하고 있으며, 경제 원조, 투자, 군사 지원을 앞세워 미얀마에 해군 기지 건설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 중국의 힘은 현재 욱일승천 중이며 인도의 힘은 21세기 초반에 가서 엄청나게 커질 것이다. 분쟁의 소지가 상당히 크다. 한 분석가는 이렇게 지적한다. '아시아의 두 거인 사이에 깔려 있는 뿌리 깊은 경쟁의식, 자신을 문명과 문화의 강대국, 중심국으로 이해하는 전통 의식 등으로 양국은 다른 국가들이나 운동 집단들의 지지를 얻고자 각축을 벌일 것이다. 인도는 다극적 세계에서 단순히 독립된 지역의 패권 중심부로서가 아니라 중국의 힘과 영향력을 견제하는 지위로 올라서고자 노력할 것이다."
유교-이슬람교의 광범위한 결속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중국-파키스탄의 결속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인도에게 유리하므로 인도는 앞으로도 러시아의 무기를 대규모로 구입할 것이다. 990년대 중반 인도는 항공 모함. 극저온 로켓 기술을 포함하여 중요한 무기를 거의 모두 러시아로부터 도입하였고 이것은 미국의 제재를 낳았다. 무기 증강 말고도 인도와 미국 사이에는 인권, 캐슈미르, 경제 자유화 같은 현안들이 걸려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미국과 파키스탄의 관계는 냉각되고 중국을 견제한다는 공동의 목표 아래 인도와 미국이 접근할 가능성이 높다. 남아시아에서 인도가 세력을 확대하는 것은 미국의 국익을 저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미국에게는 유리하다.
문명과 그 핵심국 사이의 관계는 복잡하고 양면적이며 자주 변화한다. 한 문명 안에 들어가는 대부분의 국가들은 다른 문명에 속한 나라들과 관계를 정립할 때 대체로 핵심국의 노선을 따른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같은 문명에 속해 있다고 해서 그 나라들이 다른 문명에 속한 모든 나라들과 동일한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제3의 문명에 속한 공동의 적을 겨냥하는 공동의 이해관계가 상이한 문명에 속한 나라들 사이의 협력을 낳을 수 있다. 한 문명 안에서도 분쟁은 일어날 수 있는데 특히 이슬람이 그렇다. 또 단층선에 위치한 집단 사이의 관계와 문명의 핵심국 사이의 관계는 성격이 판이하다. 하지만 전반적 추세는 명백하며 문명들과 핵심국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합 집산과 대립의 양상은 어느 정도 일반화시켜 말할 수 있다 이 양상을 요약한 것이 (그림 9.1)이다. 냉전 시대의 비교적 평이한 양극성은 사라지고 다극 다문명 세계의 훨씬 복잡한 관계가 출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