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1784)
I. Kant
이 글은 <베를린 월간>이라는 잡지의 1784년 12월호에 게재되었다. 칸트가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같은 잡지의 1783년 9월호에 실린 베를린 목사 쵤너(Johann Friedrich Zöllner)의 한 논문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이 논문에서 쵤너는 교회를 거치지 않는 시민 결혼을 비판하면서, 시민 결혼이라는 관념을 낳은 계몽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아무도 대답한 적이 없다고 비판했다. 이런 비판에 대해 모제스 멘델스존이 1784년 9월호에서 먼저 대답하고, 그다음으로 칸트가 대답하게 된 것이다. 칸트는 이 잡지의 편집인 비스터(Biester)와 20년 동안 서신 왕래를 지속하는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계몽에 대한 칸트의 정의는 이러하다:
[계몽이란 인간이 자신의 과오로 인한 미성숙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숙상태란 자신의 지성을 타인의 지도 없이 사용하는 능력이 없는 것을 말한다. 이 미성숙상태가 인간 자신의 과오로 인한 것인 이유는, 이런 상태의 원인이 지성의 결핍이 아니라, 지성을 타인의 지도 없이 사용하려는 결단과 용기가 부족한 데 있기 때문이다. Sapere aude! 네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지녀라!는 것이 계몽의 구호다.]
너무도 유명하게 된 이 문장에 대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는 이 문장을 자세하고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위의 문장에 따르면 계몽이란, 인간이 타인의 도움 없이 자신의 지성을 스스로 사용하는 능력을 습득하고 실행하는 데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타인의 도움이 없다 함은 바로 사고의 자율성에 대한 요구이다. 기존의 선입견이나 지배적인 관념, 상부로부터 주어지는 해석과 설명 등에 의존하지 않고, 이런 일체의 생각들, 나아가 세상만사에 대해 스스로의 지성으로 검토해보고 자신의 판단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나 교회, 학교, 언론 등에서 가르치고 유포시키는 일체의 견해들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비판적 검토와 숙고만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못할 때, 인간은 부모의 말을 그냥 믿고 따르는 어린 자식과 같은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고, 이런 상태가 바로 미성숙상태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그토록 오래 이런 미성숙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칸트의 대답은 명확하다. 인간의 [게으름과 비겁함]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게으르다는 것은, 자신의 지성으로 스스로 사고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며, 그 대신 남이 만들어놓은 생각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훨씬 편하기 때문에 미성숙상태에 머무르고자 하는 태도를 말한다. 더구나 사고의 지배자들은 이런 상태를 고착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한다. 자립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개인에게도 위험한 일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혼란과 대립을 낳을 것이라고 선전해대는 것이다. 그러나 첫걸음마란 항상 서툴고 힘든 것이지만, 연습을 할수록 머지않아 직립보행이란 것이 전혀 어렵지 않은 상태가 오는 것처럼, 자립적으로 사고하는 것도 일정한 훈련기간을 거치면 안정된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또한 그는 자립적 사고가 사회의 혼란의 원인이 전혀 될 수 없다는 생각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뒤에서 말하기로 하자.
그런데 게으름과 비겁함으로만 미성숙상태를 설명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닐까? 삶을 유지하기 위한 노동이 자신의 거의 전 에너지를 소비시킬 때, 자율적으로 사고하는 일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미적 서한>에서 쉴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곤궁과 싸움하느라고 너무 지치고 기력을 잃어 오류와의 새롭고 힘겨운 싸움에 나설 힘이 없다. 사유의 쓰라린 수고를 면제받는 데 만족하여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개념에 대해 후견인으로 나서는 것을 허용하며, 설령 그에게 보다 높은 욕구가 일어나더라도 국가와 성직자들이 이런 경우를 위해 마련해놓은 공식들을 갈증난 믿음으로 움켜쥐는 것이다. 이런 불행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연민을 느껴야 한다.”
독자적인 사유를 철저하게 해낼 수 있기 위해서는 노동 생활 바깥에서도 일정한 기력이 남아있어야 한다. 오늘날에도 직장에서 기진맥진하여 돌아온 사람에게는 어려운 책을 읽을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냥 텔레비젼 앞에서 멍청히 앉아있다가 가뭇 잠이 들고 마는 것이다. 칸트는 계몽을 위한 물질적 조건을 소홀히 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계몽이 성립하게 된 것도 시민계급의 물질적 부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계몽이 성립하고 난 후에도 소수에게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 역시 독자적 사유를 위한 물질적 조건이 여전히 소수에게만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칸트의 계몽 정의에서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점은, 계몽이 [지식의 전파] 같은 것이 전혀 아니라는 점이다. 지식의 전파를 계몽으로 간주하는 것은 칸트의 계몽 정의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계몽의 주체는 소수 지식인이 아니라 만인이다. 칸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지니고 있으며, 계몽이란 이런 능력을 활성화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누구도 교육의 수용자로 대상화되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대상화하는 태도야말로 반계몽적이다. 이미 만들어진 지식을 대중에게 전파하겠다는 태도는 대중의 머리를 기존의 지식 대신 다른 지식으로 채우겠다는 것 이상이 아니며, 이 때 대중의 독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은 여전히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계몽이란 타인의 생각을 더 이상 독자적 검토 없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계몽의 광장에서는 지식인의 견해도 검토의 대상일 뿐이다. 누구의 견해도 권위나 특권에 근거하여 관철되어서는 안된다. 바로 이런 면에서 칸트의 정언적 명령과 마찬가지로 그의 계몽구상 역시 형식적 규정이다. 어떤 특정한 주장이나 주의가 관철되는가 하는 것은 계몽 자체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 주장과 주의들이 어떤 식으로, 어떤 기준에 의해 관철되는가 하는 것만이 계몽의 존재여부를 결정한다. 특정 주장이나 주의의 관철을 계몽으로 보게 될 때, 이는 오히려 반계몽으로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이 주장, 주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독자적인 사유권리는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공론의 영역에서의 자유로운 토론을 거쳐 이루어진 시민들의 동의에 기초하는 개혁만이 계몽에 일치하는 개혁이다.
이렇게 독자적으로 사유하기 위해 사회적 차원에서 관철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상과 언론의 자유다. [그러나 이 계몽을 위해서 가장 요구되는 것은 자유이다] 이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 한, 인간은 몽매상태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어렵다. 자유롭게 생각들이 교환되고 부딪치는 가운데에서만 인간은 사고를 위한 자극을 받고 사고의 지평을 확장시키며 사고하는 법을 습득할 수 있다.
칸트는 당대의 국가가 이런 자유를 허용하지 않고 있는 것을 비판한다. 위에서 주어지는 임무를 수행하기만을 요구하면서, 독자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칸트에 따르면, 그러한 임무의 수행과 독자적 사고는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 독자적 사고에 대한 요구, 사상과 언론의 자유에 대한 요구가 직무의 수행에서까지 개인적 생각대로 행동할 것을 허용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성의 공적 사용과 사적 사용의 차이를 이런 주장의 근거로서 제시한다.
얼핏 떠오르는 것과는 달리 이성의 사적 사용이란 직업의 수행을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고, 공적 사용이란 개인으로서, 그러나 인류 혹은 [세계시민]의 일원으로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양자는 사용되는 이성의 적용 범위가 제한적인가 아니면 보편적인가 하는 것을 기준으로 구별된다. 직업 수행에 있어서 개인의 판단을 배제하는 것은 칸트의 보수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혹은 적어도 국가에 대한 타협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으나, 실은 그렇지 않다. 이 구별에는 매우 깊은 고려가 반영되어 있다. 칸트의 생각을 좇아가보자:
장교는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장교가 명령이 자신의 생각에 맞지않는다고 복종하지 않으면 군대는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성직자는 자신이 속한 교회의 입장에서 설교해야 한다. 그가 교회의 입장과 다른 견해를 설교하게 되면 그에게 성직을 부여한 교회와의 계약을 위배하는 것이다. 시민은 자신에게 부과되는 시민적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시민적 의무의 수행을 거부할 때, 사회는 혼돈에 빠질 수 있다. 사람이 자신의 직업적 업무를 수행할 때에는 이렇게 자신이 속한 조직의 규정에 따라야 한다. 이 규정에 따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업무수행 시에도 규정에 어긋나게 행동하려 한다면, 그는 조직을 대표하면서 조직을 거부한다는 모순을 범하게 된다. 조직의 일원으로서 그는 조직이 위임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자일 뿐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은, 조직의 입장을 자신의 입장과 맞는 방식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조직이 일체의 면죄부를 받게 되는 것은 아니다. 직업이 부여하는 의무가 완전히 반이성적이라면, 그런 의무를 부과하는 조직은 거부되어야 한다. 이런 경우에 인간은 조직을 떠나야 한다. 반이성적 조직을 대변하는 일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직이 부과하는 직무의 수행 시에 인간은 이성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여기서 사용되는 이성이 조직의 의무를 수행하는 데 제한된 것이고, 이런 이성은 요즘 용어로 말하자면 목적합리성 혹은 도구적 이성이며, 조직이 규정하는 목적의 유효성은 그 조직에 속한 자에 한하기 때문이다. 즉 전체 인류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러한 일체의 조직은 모두 사적인 조직이다. 이성이 이렇게 사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공적으로 사용되는 것처럼 기만하려고 할 때, 바로 이것이 후일 맑스가 말하는 [이데올로기]가 될 것이다.
반면,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한다 함은, 그런 조직의 일원의 자격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자율적인 개인으로서, 전 세계에 대해 타당한 이성적 사유를 하는 경우를 말한다. 칸트는 이 때 개인은 [학자]로서 사고한다고 한다. 학자란, 특정한 제한적 이익을 떠나 보편인간적인 차원에서 사고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이성의 공적 사용에는 무제한의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 공론장의 토론에 개인으로서 참가하는 경우에는 장교도 개인 자격으로 군대의 문제점과 오류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설교단 바깥에서는 성직자도 교회의 잘못을 비판하는 글을 쓸 수 있으며, 시민도 국가가 부과하는 의무의 부당성을 공격할 수 있다.
이런 자유는 진보를 지향하는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권리이며, 따라서 어떤 구실로도 제한되거나 금지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군대나 교회, 국가가 이런 자유를 금지한다면, 이런 규정은 그 자체로 이미 무효이며, 인정될 필요가 없다. 계몽은 어떤 누구도 건드려서는 안 되는 [인류의 신성한 권리]다. 그러므로 입법자는 계몽을 금지하거나 억압하는 법률을 정하고 강제할 권한이 당초부터 없다. 입법자는 일반의지를 대변해야 하며, 시민적 질서 안에서만 행동해야 한다. 시민적 질서에 본질적으로 속하는 것이 바로 사상과 언론의 자유다. 사상과 언론의 영역에서 국가권력은 이 영역을 보호하고 향상시키는 것 외에는 아무런 권한을 지니지 못한다. 이런 계몽의 권리는 개인이 포기하기를 원하더라도 포기될 수 없는 것이다. 개인은 자신에 한해서도 계몽의 권리를 처분할 권한이 없다. 그러므로 설령 역사의 특정 시기에 국가와 국민이 이런 자유를 영구히 제한하는 계약에 합의했다고 하더라도, 후세는 이 계약을 즉시 무시할 권리를 지닌다. 물론 이때에도 이런 계약에 대한 저항은 시민적 의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자유를 행사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즉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다시 말해 공론의 장에서 이런 계약의 부당성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함으로써 반대여론을 형성하고, 이런 여론의 확산을 거쳐 개혁을 유도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교회사에서 잘 드러난다. 신교가 구교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이 이러했다.
칸트의 이런 서술에서는 그의 혁명에 대한 회의적인 입장이 드러난다. 그는 계몽이 완만하지만 지속적인 과정을 거쳐서만 수행될 수 있다고 본다. [혁명을 통해서 전제적인 개인이나 이익과 지배에 탐닉하는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가능할 수 있겠지만, 사고방식의 진정한 개혁은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이 말은 혁명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국가가 일반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신 지배자의 일반이익에 반하는 특수이익만을 강요하는 경우, 이런 상황의 제거를 위한 혁명까지 거부되고 있지는 않다. 다만 이런 상황이 제거된다고 해서 계몽이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혁명 후에 또다른 선입견과 편견이 지배하게 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혁명에 대한 칸트의 입장은 실은 좀 더 복잡하다. <’이론에서는 맞을 지 모르지만 실제에는 전혀 맞지 않다’라는 상투어에 대해>(1793)에서 칸트는 전제정치에 대해 다시 한번 언급하면서, 전제정치에 대한 반대는 일반적이고 공적인 판단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며, 직접 국가권력에 저항하는 식으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의 바탕에는 이런 고려가 깔려있다. 만일 이러한 직접적인 불복종과 저항의 권리가 인정된다면, 국가의 질서 자체가 무너지게 된다. 저항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국가의 질서를 인정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판단할 권한을 개인에게 부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국가와 국민, 혹은 국민 가운데 다른 생각들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대립할 때 시민적 질서의 유지를 위한 최저선까지 무너지게 된다.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관철시키기 위해 폭력을 사용할 권한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는 사회 자체의 붕괴다. 이렇게 사회자체가 붕괴되는 것보다는 폭정하에서라도 사회가 유지되는 것이 낫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칸트가 이성의 공적 사용의 자유를 위한 싸움은 전적으로 인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는 점이다. 국가의 틀을 유지하는 가운데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해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입장이 핵심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앞서 말한 사고의 자유가 사회의 혼란을 낳지 않는다는 칸트의 주장의 근거가 있다.
칸트는 글의 끝에서 당대는 계몽되었는가? 라고 질문한다. 그의 대답은, 이미 계몽이 완수된 시대는 아니지만, 계몽이 진행되고 있는 시대라는 것이다. 여전히 많은 영역에서 이성적 사유가 제한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차츰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프리드리히 대제가 허용하기 시작한 종교적 자유, 양심의 자유, 국가의 입법에 대한 비판의 자유 등을 높이 평가한다. 칸트는 이런 자유가 확산되고 행사될수록 국가의 원칙도 더 나아질 것이라는, 일종의 [선순환적인 발전]을 낙관적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런 상황평가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국가가 [전체 국민의지]를 대변해야 한다는 주장과, 언론과 사상의 자유의 허용이 군주 개인의 의사에 달려있는 상황은 서로 호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평가에는 칸트의 정치적, 전술적 고려가 담겨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학부 간의 논쟁>(1798)에서 칸트는 여전히 혁명에 대해 반대하고 진화적인 발전을 옹호하지만, 결국 나아가야 할 정치 제제는 공화국체제임을 주장하게 된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칸트가 관용(Toleranz)을 [거만한 이름]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타인에게 당연하게 인정되어야 할 권리를 인정하면서 이를 관용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권리를 선심에 따라 선물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것이 아마도 칸트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칸트처럼 우리도 물어보자: 우리 시대는 계몽되었는가? 그렇다고 자신할 수 없을 것 같다. 여전히 정당성이 의심스러운 편견들과 입장들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고, 이성의 사적 사용을 공적 사용으로 가장한 이데올로기들이 곳곳에서 기만의 덫을 깔아놓고 있으며, 공론의 장에 참가하기를 거부하면서도 힘을 잃지 않는 세력들이 있다. 그러나 계몽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온갖 부정적인 양상들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도 장기적으로 계몽에 기여할 것이다. 그러나 매체가 자동적으로 계몽을 낳지는 않는다. 진정으로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는 용기, 사고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끈기, 복합적인 문제에 복합적인 지식과 사유로 대응하려는 노력, 공론의 장에서의 일체의 억압에 대해 맞서 싸울 수 있는 투지, 자신의 생각을 두려움 없이 말하는 과감성, 이런 덕성들을 갖추고 행사하려는 노력만이 우리를 계몽된 시대로 이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