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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하(1962~ ) ㅇ ~ ㅎ

Bollnow 2024. 5. 2. 18:35

아득한 거리

아름다운 추락

아무도 알지 못하지

아직도 기다림이 있다면 행복하다

아침에

아침 일찍부터

아파도 아파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랑

아파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

아픔은 나의 몫

안개

안부

알게 될 때쯤

알 수가 없습니다

애수

약속

어둠은 내가, 그대는 내 속에서 빛나는 별이

어둠이 있기에 더욱 반짝이는 별

어디까지가 그리움인지

어디부터 사랑이고 어디까지 이별인지

어디에도 없는 그대

어디쯤인지

어떤 날

어머니

언젠가는 돌아오리라는 것을 믿기에

없을까

엑스트라

영원

영원히 그대 눈부심 속으로

예감

오락가락

오래도록

오랜 시간 동안

온기가 담긴 말

외로운 사랑

욕심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다면

우리들 슬픈 사랑의 종착역

우리 사는 동안에

우리 마음에 어찌 이별이 있겠습니까

우울한 하루

의문

이름을 불러주는 일

이 밤도 그대를 보고 싶어 애태우는

이별 노래

이별을 예감했기에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가슴앓이

이 아침

이유

이쯤에서

이쯤에서 다시 만나게 하소서

인사 없이

입구와 출구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잎새가 떨어지기까지

자국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남을 사랑할 수 있다

작은 기도

작은 새

장애물

장작

저녁 강가에 나가

저녁 길을 걸으며

저녁별

저만치 와 있는 이별

저만치 홀로 서 있는 섬

저무는 황혼의 아름다움

저물녘

저물지 않는 섬

전용(專用)

절반의 사랑

절정

조금씩만 그리워하기로 했습니다

조용히 손을 내밀었을 때

좁은 문

주는 사랑

주면 줄수록 더 넉넉히 고여오는

주저하지 말 것

지금

지금은 잠시 떨어져 있지만

진실로

진실로 그를 사랑한다면

진작부터 비는 내리고 있었습니다

진정한 사랑, 진정한 행복

찔레에게

참꽃 소곡

참된 사랑

참사랑의 모습

참새를 사랑한다는 것은

참회

창가에서

창문과 달빛

창작

첫눈

첫눈 내린 날

첫눈 내린 날 내 가슴은

촛불

추억, 오래도록 아픔

추억에 못을 박는다

춘래불사춘(春來不思春)

카페에서

칼국수

태양

톱밥 난로

판화

풍장(風葬)

하루살이 사랑

하나

하루

한밤에서 새벽까지

한 뼘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했네

함께 가자, 우리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

행복이라는 나무가 뿌리를 내리는 곳은

행여 영영 올 수 없더라도

허수아비

허수아비, 그 이후

험난함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험로

헤어진 연인에게 신의 큰 축복이 있나니

헤어짐을 준비하며

형벌

호두

호명

혼자

혼자 사랑한다는 것은

혼자서 떠났습니다

홀씨

화석

환희

황혼의 나라

흔들리며 사랑하며

흔적

흘러가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아득한 거리

이정하

 

내가 한 그루 나무라면

그대는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 같은 것이었습니다.

잊을 만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다가와

나를 흔들어놓고 지나가버리는 바람.

그 아득한 거리 앞에 늘 몸져눕는 나는

내 죽어 한 줌 씨앗으로나마 그대의 품에 안겨 있고 싶었지만...

 

그대는 내가 바라만 보아야 하는 먼 산 같은 것이었습니다.

백 년을 기다려봤자 한 발자욱도 내게 다가오지 않는.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늘 고개 빼들고

그대를 향해 서 있는 한 그루 나무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시사철 잎잎이 그리움으로 물들어 있는 나는.

 

내가 빠져 죽고 싶은 강, 사랑, 그대...

 

 

 

아름다운 추락

이정하

 

저 나뭇잎 떨어지고야 말리라.

기어이 떨어지고야 말리라.

 

뒤에 올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자리를 비켜주는 저 나뭇잎은

슬프지 않네. 남아 있는 이를 위해

미련 없이 자신의 한 몸 떨구는,

떨어지는 순간에도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

저 나뭇잎의 아름다운 추락을 보면

만나고 헤어지는 일에만 매달려온

내가 부끄러웠다.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려온 나의 집착

억지만 부려 그대 마음 아프게 한

내가 부끄러웠다.

 

 

 

아무도 알지 못하지

이정하

 

내 가슴 깊숙이 자리한 나뭇잎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지.

기다림으로 제 한 몸 붉게 물들이고

끝내는 싸늘한 땅으로 떨어지고야 마는

한 잎 나뭇잎, 그 나뭇잎을 알지 못하지.

 

내 마음을 흔들고 지나간 한 줄기 바람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지.

다시 온다는 한마디 말만 남기고

훌쩍 떠나가버린 그대, 내 뼈 속 깊이

아픔으로 박혀 있는 그대를 아무도 알지 못하지.

한 줄기 바람으로 스쳐 지나간 그대를

아무도 알지 못하지.

 

 

 

아직도 기다림이 있다면 행복하다

이정하

 

사랑이 가슴에 넘칠 때

진실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사랑의 감정을 가슴 가득히 담고

살아갈 때 누구라도

행복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늘 되풀이되는 일과 속에서

정신없이 맴돌다가도 가끔 푸른 하늘을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 난

이런 소망을 가만히 외어 봅니다

언제나 사랑하며 살게 하옵소서 라고..

 

나의 이 바람은 큰 사랑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주변에 있는 것들부터

우선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자는

아주 작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사실 입으로는 사랑을 외치면서도

정작 마음의 문은 꼭꼭

닫아 두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은 결코 큰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고

 

내 주변에 있는 것들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시작되어 가지를

뻗치는 게 사랑이라고

감히 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랑이란 것은

관심을 갖지 않으면 결코

솟아나지 않는 정입니다

 

가만히 있는데

저절로 솟아나는 정이 아닌 것이지요

 

퍼낼수록 다시금 맑고도 그득하게

고여 오는 샘물

 

당신도 당신의 가슴 속에 있는

사랑이라는 샘물을 자주

그리고 되도록

많이 퍼내지 않으시렵니까.

 

 

 

아침에

이정하

 

창으로 밝아 오는 아침 햇살 속에서

그대의 모습도 함께 보았습니다.

 

커튼을 걷어 내며 따스한 빛살 곳곳에

그대의 고운 눈길이 빛나는 걸 느낍니다.

 

밤새 그 빛이 그리워 헤매던 꿈길인 것을

잠이 깨고서 이제사 알게 됩니다.

 

오늘 아침은 세상이 나를 다르게 깨웁니다.

 

 

 

아침 일찍부터

이정하

 

아침 일찍도 오시더군요.

그대인가 했더니, 아침 일찍도 오시는 비.

내 우울함의 시작.

 

그립다는 것은 그대가 내 곁에 없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런 그대가 내 곁에 있어 줬으면 하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내 가슴 한쪽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립다는 것은 다시는 못 할 짓이다.

 

 

 

아파도 아파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랑

이정하

 

사랑은 어쩌면 봄날에 꾸는 꿈 같은 것이 아닐까요?

허망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깨고 난 뒤에야

진실을 느낄 수 있으므로.

현실의 벽이 아무리 높더라도,

그것을 알고 있더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진실한 사랑임을...

 

아직껏 사랑을 해보지 않아 아파보지 않은 사람,

그리고 아파도 아파도 사랑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사람,

그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을 택해야 한다면

과연 당신은 어느 쪽을 택하겠습니까?

 

 

 

아파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

이정하

 

그대를 기쁘게 해줄 수 없다는 것,

그대 가슴에 기쁨이 아닌 슬픔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었던 나는

그것이 늘 짐이 되었습니다.

그대 쓸쓸한 가슴에 작은 미소라도 띄우게 하고 싶었던 나는

이제 나 혼자만 아파하기로 했습니다.

나 혼자만 아파하고 나 혼자만 그리워하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설령 헤어짐을 뜻한다 해도

그대가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랬습니다. 우리의 꽃 피우지 못한 사랑보다도

더욱 내 마음에 걸린 것은, 그대의 밝은 웃음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었으니

이젠 한 발자욱 그대에게서 물러서리라 다짐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여, 그대는 이제 그만 마음 아파하십시오.

이제 그만 마음 아파하고 밝은 웃음을 되찾으십시오.

아파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입니다.

 

 

 

아픔은 나의 몫

이정하

 

그대에게 다가설 수 없었지만

내 안에서 그대를 추억하고

내 안에서 그대를 그리워하는 일이야

어쩔라고.

그리하여 아픔 또한 순전히 내 차지네.

그대 몫이 아니네.

 

길을 가고 있었는데

내 곁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 사람이 있었구나,

그대여 다만 그렇게만 생각해다오.

나로 인해 절대 아파하지 말고.

 

 

 

안개

이정하

 

1

나는 새벽마다 수없이 그대를 떠나보내는 연습을 합니다.

내 속에 있는 그대를 지우는, 그러다가 그러다가...

끝내는 나까지 지워지고 마는.

 

 

2

내 생애 어디 한 군데 마른 곳이 있었더냐.

내딛는 발걸음마다 헛발질투성이였고,

허둥대다 보면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질 뿐이었다.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나를 더 옭아매는 안개,

내 안에 너무 깊숙이 들어 있어

나조차도 꺼내기 힘든 사람아,

당신에 휩싸이면 나는 서러웠다.

갈 수도 가지 않을 수도 없는 길 한복판에서

나는 무엇을 잡으려고 이리도 허우적거리는가.

 

 

 

안부

이정하

 

1

보고 싶은 당신.

아침부터 눈이 내려요.

그곳은 어떤가요?

 

눈 내리는 이곳과

눈 내리지 않는 그곳.

꼭 그 간격만큼

나는 당신이 그리웠지요.

 

눈은,

세상의 모든 것을

가려주고 덮어주지만

당신의 흔적만은

어쩌지 못하네요.

 

눈이 내릴수록

내 가슴에 쌓여오는 당신.

그간 어떻게 지냈나요?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는데요.

당신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데요.

 

사랑해요.

끊임없이....

 

 

2

잘 지낸다고 합니다.

사는 게 다 그런 거라고,

특별한 일 없다고.

 

그대는 또 내게

잘 지내라고 했지요.

그러겠노라고 덤덤히 대답은 했지만

나는 곧 쓴웃음 짓지요.

 

당신이야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어찌 당신 없이

잘 지내겠느냐고.

 

 

3

가을이 채 가기도 전에 설악산 대청봉에는

벌써 눈이 내렸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올 가을에는 단풍잎 한 번 못 보고

그냥 그렇게 지나갈 것 같군요.

그대 얼굴도 한 번 못 보고

그냥 그렇게 지나갈 것 같군요.

사랑하는 당신,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하기를...

 

 

 

알게 될 때쯤

이정하

 

사랑은 추상형이어서

내 가지고 있는 물감으로는

그릴 수가 없었네.

 

수년이 지나

사랑에 대해 희미하게 눈뜰 때

그때서야 알 수 있었네.

사랑은, 물감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으로 그리는 것.

 

언제나 늦었네.

인생이란 이렇구나 깨닫게 되었을 때

남은 생은 얼마 되지 않고,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곁에 없었네.

사랑이라 깨달았을 때 이미 그는

저만치 가고 없네.

 

 

 

알 수가 없습니다

이정하

 

틈만 나면 그대는 내 곁을 벗어날려고 하지요.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그대에게 나는 왜 자꾸만

마음을 주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떠날 걸 뻔히 알면서도 그대만 만나면 들뜨게 되는 내 마음을,

언제나 나보다 그대를 위한 일에

더 신경을 쓰는 나를 알 수가 없습니다.

틈만 나면 내 곁을 떠날려고 하는 그대에 비해 나는 왜

그대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조금치도 생기지가 않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애수

이정하

 

나 이렇게 서 있네.

슬픔이 물방울처럼 뚝뚝 떨어지는

비 오는 간이역 은사시나무.

나 이렇게 서 있네.

그대를 이제 보내기 위해

그대에게 결코 다가서지 않기 위해

나 이렇게

뿌리 박고 서 있네.

 

하지만 어쩌할 것인가.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여기 없는 것을.

내 영혼은 벌써 그를 따라나서고 있는 것을.

 

 

 

약속

이정하

 

 

언제라도 찾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서 있겠습니다.

 

낯선 기분이 들지 않도록

모든 것은 제자리에 놓아두겠습니다.

 

기별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대는 그저

돌아오기만 하십시오.

 

 

 

어둠은 내가, 그대는 내 속에서 빛나는 별이

이정하

 

어둠은 내가 되겠습니다.

그대는 내 속에서 빛나는 별이 되십시오.

잎줄기는 내가 되겠습니다.

그대는 내 속에서 영롱한 꽃으로 피어나십시오.

 

또한 난, 그대가 밟고 지나가는 보드라운 흙이 되겠습니다.

어쩌다 발을 헛디뎌 넘어지더라도 손끝하나 다치지 않게 하는,

그리하여 먼지만 툭툭 털면 일어설 수 있게 하는

그런 보드라운 흙이 되겠습니다. 그러니 그대여,

그댄 내 안에서 마음껏 걸어가십시오.

당신을 편히 가게 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지요.

 

 

 

어둠이 있기에 더욱 반짝이는 별

이정하

 

살아가다가 잿빛처럼 컴컴해지는 날이 있습니다.

소리치며 내뱉을 수 없는 아픈 숨결들이 내 가슴 속에서 엉켜

시커멓게 숯으로 타는 그런 날이 있습니다.

절망이란 절망은 한꺼번에 모아둔 것 같은 그런 날이 있습니다.

 

바로 그대에게서 우리 사랑의 종말을 전해듣던 날이었습니다.

그날 하늘은 유독 어두웠지요.

눈물을 감추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 보았을 때

그때 내 눈에는 유성 하나가

길게 꼬리를 감추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어둠이 있기에 더욱 반짝이는 별.

그것처럼 우리 사랑도 그렇게 반짝일 수는 없는지요.

 

 

 

어디까지가 그리움인지

이정하

 

걷는다는 것이 우리의 사랑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마는

그대가 그리우면 난 집 밖을 나섭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난 그대 생각을 안고 새벽길을 걷습니다.

 

어디까지가 사랑이고

어디부터가 이별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지금은 따뜻함이

절실할 때입니다.

 

새벽길을 걷다 보면 사랑한다는 말조차

아무런 쓸모 없습니다.

 

더도 말고 적게도 말고 그저 걷는 만큼

그대가 그립습니다.

 

함께 걸어주는 이가 그립습니다

 

 

 

어디부터 사랑이고 어디까지 이별인지

이정하

 

불면의 밤이 지나 어느덧 여명이 터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잠자기는 다 틀린 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새벽길을 나섰습니다.

걷는다는 것이 우리의 사랑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만

난 그대가 그리우면 언제나 그렇듯 집 밖을 나섭니다.

 

걷다 보면 어디부터가 사랑인지, 또 어디까지가 이별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쨌거나 지금은 따뜻함이 절실할 때입니다.

함께 걸어줄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할 때입니다.

그렇게 새벽길을 걷다 보면, 사랑한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생각조차도

아무런 쓸모없습니다. 더도 말고 적게도 말고 그저 걷는 만큼

그대가 그리울 뿐입니다.

함께 걸어줄 누군가가 그리울 뿐입니다.

 

 

 

어디에도 없는 그대

이정하

 

그대라는 두 글자엔

눈물이 묻어 있습니다

 

그대라고 부르기만 해도

금새 내 눈이 젖어 오는 건

아마도 우리 사랑이

기쁨이 아닌 슬픔인 탓이겠지요

 

지금 내 곁에 없어

이 세상 누구보다도 그리운 그대여

 

이렇게 깊은 밤이면

더욱더 보고 싶어지는 그대여

 

그대는 아십니까

당신을 만난 이후부터

나는 내내 당신에게

흘러가고 있는 강이 되었다는 것을

쉬임 없이 당신을 향해서 흐르고 있는

사랑의 강이 되었다는 것을

 

그 강의 끝 간 데에 아마 노을은 지리라

새가 날고 바람은 불리라

 

오늘밤쯤

그대의 강가에 닿을 수 있을는지

막상 달려가 보면 망망대해인 그대

어디에도 없는 그대

 

 

 

어디쯤인지

이정하

 

나에겐 나의 길이 있었습니다.

그대에겐 그대의 길이 있었습니다.

그 길이 어디쯤서 마주칠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나는 늘 두리번거립니다.

 

 

 

어떤 날

이정하

 

길을 걷다 무심히 쳐다본 하늘에

노을이 걸려 있었습니다.

나는 까닭 모르게 한숨이 났습니다.

 

 

 

어머니

이정하

 

어머니에 대한 시 하나 애절하게 쓰고 싶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간절하고도 슬픈 시 하나를.

그러나 불러보기만 해도 목메이는 어머니 이름

어머니, 하고 써놓고는 더 이상 쓸 수 없는......

 

 

 

언젠가는 돌아오리라는 것을 믿기에

이정하

 

그대가 지금 뒷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언젠가는 돌아오리라는 것을 믿기에

나는 괜찮을 수 있습니다.

그대가 마시다가 남겨둔 차 한 잔 내 앞에 남아 있듯이

그대 또한 떠나봤자 마음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소 지을 수 있습니다.

미소 지으며 그대를 보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떠나려는 사람은 기꺼이 떠나보냅시다.

떠난 빈자리가 못내 서러웁거든 바깥으로 나가

저 흘러가는 강물을 보십시다.

이 순간이사 한없이 멀어지지만 굳이 슬퍼하지 맙시다.

언젠가는 강물이 비구름 되어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우리들 가슴을 적실게 아닙니까.

 

 

 

없을까

이정하

 

어디 아늑한 추억들이 안개 깔리듯 조용히 깔리고

말을 하지 않아도 가슴으로 사는 곳은 없을까.

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해서 사는, 그리하여

괴로운 깨어남이 없는 영원한 숙취의 세계는 없을까.

녹슬고 곪고 상처받은 가슴들을 서로 따스하게

다독거려주는 그런 사랑의 세계는 없을까.

겨울 저편, 빛나는 햇살 한 올 오래도록 바라보면서

비로소 사랑의 칼날에 아름답게 살해되는

그런 안녕의 세계는 없을까 없을까 없을까.

 

 

 

엑스트라 - 만적의 난

이정하

 

나무깽이와 죽창을 틀어쥔 채

흡반 같은 카메라 앞에서

만적의 난을 재현하는 새벽

 

자정부터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태풍에 밭뙈기를 잃은 만적

불황에 일자리를 잃은 만적

경마에 처자식을 잃은 만적이가

씨벌헐 씨벌헐 무릎을 찧어가며

31시간 혁명을 일삼는 중이다

 

왜 없는 놈들은 역사를 통털어

엑스트라인가

쉴 새 없이 죽창을 휘두르며 나는

노비혁명을 주도한 만적이가

최충헌의 가비(家妃)였다는 사실을 곱씹는다

 

차별이 차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혁명이 혁명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서 오지만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

 

봉수대처럼 집채는 불타오르고

보조 출연자들은 똥돼지처럼 소리치는

반장의 악바리에 똥줄이 빠지는데

그래도 살아야겠다고 우리들 만적들은

 

서로의 상처를 어깨동무로 싸맨 채

봉기의 창끝으로 동천(冬天)을 가른다

 

 

 

영원

이정하

 

사랑의 깊은 속을 들여다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진실로 진실로 영원한 것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이라는 것을.

그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해서 영원을 갈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끊임없이 그대를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숨쉬고 있는 한 끝나지 않을 이 지긋지긋한 그리움,

땅속에 묻히기 전까지는 결코 떨구지 못할 내 삶의 그림자 같은 것이여.

 

 

 

영원히 그대 눈부심 속으로

이정하

 

햇빛이 눈 부셔 눈 감고 걸어가는 길,

가슴 벅차게 걸어가는 사랑이라는 길.

그 길을 언제나 난 그대와 함께 걷고 싶었지.

그렇게 영원히 영원히

그대의 눈부심 속으로 스며들고 싶었지.

내 눈이 멀고, 내 귀가 멀고,

내 육신이 타서 재가 된다 할지라도...

 

 

 

예감

이정하

 

나는 예감했습니다.

언젠가 나뭇잎 떨어지듯 그렇게 그대 또한 내 곁을 떠나갈 것을.

새순은 언젠가 다시 돋아나겠지만 한번 떠난 그대는

영영 내 곁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또 예감했습니다.

지금의 내 예감이 하나도 틀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늘 기대는 빗나가고 우려만 적중되던 내 안타까운 사랑을.

그대를.

 

 

 

오락가락

이정하

 

쓸데없는 생각인 줄 알면서도 자꾸만

그대와 헤어질 것 같은 망상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런 내 망상들이 씨앗이 되어

실제로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은근히 불안해지기도 했습니다.

기대는 빗나가고

늘 우려만 적중되던 나의 사랑.

그대여, 그대를 내 안에 두는 일은

왜 이리 힘이 드는가요.

사랑이 이런 거라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을.

언젠가 가버리고 말 거라면

내 마음의 문 열지 않았을 것을.

그러다 나는 또 무척 부끄러워졌습니다.

사랑을 내 이기심의 잣대로 저울질한 것 같아서.

이렇듯 그대여, 나는 늘 왔다갔다합니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늘 안절부절못합니다.

 

 

 

오래도록

이정하

 

오래도록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네

다가가는 만큼 그대가 멀어질 것 같아서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네

내가 가까이 다가가면

어쩌면 그대가 영 떠나갈 것 같아서

그대가 떠난 뒤, 그 상처와 그리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다가가고 싶었지만

더 이상 가까이 갈 수 없었네

한순간 가까웠다가 그대를 떠나게 하는 것보다

조금 떨어져 있어도

오래도록 그대를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더 앞섰기에...

 

 

 

오랜 시간 동안

이정하

 

오랜 시간 동안 나는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당신의 옆에 서 있었습니다.

참으로 오랜 시간 동안

나는 당신을 위해 두 손을 모았습니다.

 

아는지 모르는지

당신은 내게 눈길 한번 안 주더군요.

그래서 더욱 쓸쓸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나는 더 철저하게 외로워지나 봅니다.

 

 

 

온기가 담긴 말

이정하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진실이 담겨 있지 않으면

상대방은 오히려 그 사람에 대해 실망감과 함께 혐오감을 가질 뿐입니다.

 

말은 하기에 따라 상대방의 가슴을 적시는 위안이 될 수도 있고

상대방의 가슴을 찌르는 비수도 될 수가 있는데

요즘 우리들은 말을 너무 막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한 번의 입을 열기 위해서 적어도 두세 번은 생각해보는 사람이

과연 우리들 중에서 몇 명이나 될까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부러 꾸며서 듣기 좋게 하는 말보다는 조금 어눌하더라도

모과처럼 향기를 낼 수 있는 말, 진심으로 상대방을 위해주는

따스한 온기가 담긴 그런 말들이 우리 주변에 더 많이 넘쳤으면 좋겠습니다.

 

 

 

외로운 사랑

이정하

 

오랜 시간 동안 나는 당신의 옆에 서 있었습니다.

아는지 모르는지 당신은 내게 눈길 한 번 안 주더군요.

그래서 쓸쓸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면 할수록

더 철저하게 외로워지는가 봅니다.

 

 

 

욕심

이정하

 

삶은 나에게 일러주었네.

나에게 없는 것을 욕심내기보다는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소중히 하고

감사히 여기라는 것을.

 

삶은 내게 또 일러주었네.

갖고 있는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기를.

그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다보면

외려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가.

내가 가질 수 있고,

가질 수 없는 것은 또 무엇인가.

나는 여지껏

욕심만 무겁게 짊어지고 있었네.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이정하

 

그렇습니다. 우리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구석지고 어두운 장롱 밑을 기어다니는

한 쌍의 바퀴벌레면 어떻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한 쌍의 바퀴벌레로 세상의 온갖 더러운 찌꺼기를

갉아먹는다 해도 그게 무슨 대수냐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그러나 그대는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자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바퀴벌레로 변해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들을 갉아먹는

나의 모습을 어찌 보느냐고.

 

그렇게 말하는 그대를, 그런 마음가짐의 그대를

내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 슬픈 사랑의 종착역

이정하

 

1

무작정 역으로 나갔습니다

오늘쯤 그대가 올 것이라는 막연한 예감만 믿고.

하루 종일 눈 내린 오늘,

내 슬픈 사랑은 어디쯤 오고 있는지

우리들 사랑의 종착역은 어디인지

나는 역 대합실 출구 앞에서

소리 죽여 그대 이름을 불러 봅니다.

그러면 그대도 덩달아 내 이름을 부르며

나타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대는

기어이 오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출구를 빠져 나왔지만

그대와 닮은 사람 하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눈은 하염없이 내리고

내 마음은 한자리에 못 있습니다.

 

 

2

그대여, 아직까지 기차를 못 탔다면

지금이라도 타십시오. 눈발이 한없이 쌓여

길을 막는 일이 있다 해도 난 기다리겠습니다.

우리들 사랑의 힘으로 끝내 기차는 도착할 것이고

그리하여 그대와 나 서로의 손을 잡으며

하나 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대여, 빨리 오십시오.

그리움으로 난 목이 마릅니다.

 

 

 

우리 마음에 어찌 이별이 있겠습니까

이정하

 

그리움 때문에 눈물 흘리지는 마십시오.

지금 그 사람이 곁에 없다고 해서 웅크리고 있지만 마십시오.

그 사람은 비록 당신의 곁에 없지만

우리 마음에 어찌 이별이 있겠습니까.

 

떨어지면 남이라는 발상은 육체적 관계만을 따졌을 때

나올 수 있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마음에 어찌 이별이 있겠습니까.

비록 그대가 곁에 없어도 마음만은 항상 그대와 함께인 것을.

마음과 마음이 통한다면 진실로 그대와 떨어져 있는

물리적인 거리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깟 보고 싶음이야 무슨 대수겠습니까.

 

 

 

우리 사는 동안에

이정하

 

그대가 떠나야 한다길래 난 미리 아파했습니다.

막상 그대가 떠나고 나면 한꺼번에 아픔이 닥칠 것 같아

난 미리부터 아픔에 대비했습니다.

미리 아파 했으므로 정작 그 순간은 덜할 줄 알았습니다.

또한 그대가 잊으시라시면 난 그냥 허허 웃으며 돌아서려 했습니다.

그대가 떠나고 난 뒤의 가슴 허전함도 얼중에도 그대를 생각했습니다.

내 가슴이 이런데 당신의 가슴이야 오죽 하겠습니까.

슬픔을 슬픔이라 이야기하지 않으며

아픔을 아픔이라 이야기하지 않으며

그저 행복했다고 다시 만날 날이 있으리라고

이 세상 무엇보다도 맑은 눈물 한점 보이고 떠나간 그대

아아- 그대는 그대로 노을이었습니다.

내세에서나 만날 수 있는 노을이었습니다.

 

 

 

우울한 하루

이정하

 

낙엽이 떨어졌었죠.

내 마음 깊은 곳으로

그대를 만난 지 하루만 지나도

내 마음은 우울병을 앓는답니다.

어떤 독한 약을 먹어도 고쳐지지 않는

 

기다리지 않기로 해놓고

혼자 있을 땐 혼자의 생활에 충실하기로 해놓고

난 또 멍청히 전화기만 내려다봅니다

지금쯤 연락이 올 때도 됐는데 연락이 오지 않으면

내 마음 그렇게 우울할 수가 없어요

슬픈 나뭇잎만 가득 쌓인답니다

 

 

 

의문

이정하

 

1

내가 살아가는 동안 담담하게 그대를 떠올릴 수 있는 날이 있을는지.

과연 그런 날이 오기는 올는지. 그대,라고 읊조리면

왜 늘 가슴이 답답해지며 쓸쓸해져 오는 것인지.

대체 얼마만큼 아픔에 더 익숙해야 아무렇지도 않게

그대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인지.

 

 

2

그땐 아무 말 없이 보내 놓고

지금 와서 왜 애타게 그리워하는지

 

그 이유를 묻지 말라.

 

그걸 나도 모르겠으니,

그래서 더 괴롭고 괴롭나니.

 

 

 

이름을 불러주는 일

이정하

 

사람은 물론이지만 이 세상의 온갖 만물들은

모두가 다 스스로에게 걸맞은 이름이 있습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에서부터

산과 들에 지천으로 피어 있는 아주 작은 들꽃 하나에도.

그래서 세상을 많이 안다는 것은 사물의 이름을

많이 안다는 것과도 같은 뜻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사물에 이름을 붙여주기 위해서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보이지 않는 공기나 바람에게까지 우리는

온갖 이름을 붙여주고 있으니까. 그런데 난,

그 많은 이름들을 그냥 알고만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만 알고 있는 이름이 있으면

그것을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쳐 줘야 할 것 같고,

또 그 이름의 주인공들을 자주 불러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길을 가는데 누군가 등 뒤에서 자기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의

그 반가움. 그런 반가움을 남에게 주는 일이

바로 사랑을 실천하는 일 같아서 말입니다.

 

 

 

이 밤도 그대를 보고 싶어 애태우는

이정하

 

내 사는 곳에서 바람 불어오거든 그대여,

그대가 그리워 흔들리는 내 마음인 줄 아십시오.

내 사는 곳에서 유난히 별빛 반짝이거든 그대여,

이 밤도 그대를 보고 싶어 애태우는 내 마음인 줄 아십시오.

 

그대여, 내 사는 곳에서 행여 안개가 밀려오거든

그대를 잊고자 몸부림치는 내 마음인 줄 아십시오.

내 아픈 마음인 줄 아십시오.

 

 

 

이별 노래

이정하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이별을 예감했기에

이정하

 

이별을 두려워했다면 난 아마도 그대를 사랑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별을 예감했기에 그동안 그대에게 더 열중할 수 있었을 겁니다.

마지막 그 순간, 자신은 지면서도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온몸을 불태우는 단풍잎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가슴앓이

이정하

 

주위의 축복 속에 기쁘게 결합되는 사랑은

참으로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렇게 행복한 사랑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슬픔만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더 많은 듯해 보였습니다.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자신의 가슴 속에만 간직해두어야 하는 사랑은

다분히 아픔을 동반합니다.

나는 그를 사랑하는데 그가 나를 외면하고 있을 때의 그 고통이야

과연 어디다 비할 수 있을까요.

또한, 서로가 사랑하면

서로 끝내는 헤어질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사랑도 있습니다.

개개인이 처해 있는 상황과 현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물러서야 하는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사실, 이 땅 위에는 서로 사랑하면서도 헤어져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두가 기쁘게 결합하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이별해야 할 때의 그 핏빛 서러움, 그건 겪어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가슴앓이를.

 

 

 

이 아침

이정하

 

커피 물을 끓이는 시간만이라도

당신에게 놓여 있고 싶었습니다만

어김없이 난 또 수화기를 들고 말았습니다.

사랑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 요 며칠,

그대가 왜 그렇게 떠나갔는지

왜 아무 말도 없이 떠나갔는지

그 이유가 몹시 궁금했습니다.

어쩌면 내가 당신을 너무 사랑한 것이 아닐까요.

잠시라도 가만히 못 있고 수화기를 드는,

커피 물을 끓이는 순간에도 당신을 생각하는

내 그런 열중이 당신을 너무 버겁게 한 건 아닐까요.

너무 물을 많이 줘서 외려 말라 죽게 한

저 베란다의 화초처럼.

여전히 수화기 저편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고,

늘 그런 것처럼 용건만 남기라는 낯모를 음성에

나는 아무 할 말도 못 하고 머뭇거립니다.

그런 순간에 커피 물은 다 끓어 넘치고

어느덧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주전자를 보며,

어쩌면 내 그런 집착이 내 마음을 태우고

또 당신마저 다 타버리게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은 새로 끓이면 되지만

내 가슴을 끓게 만들 사람은

당신 말고는 다시 없을 거란 생각에

당신이 또 보고 싶어졌습니다.

내 입에 쓰게 고여오는 당신,

나랑 커피 한 잔 안 하실래요?

 

 

 

이유

이정하

 

이별한 순간부터

눈물이 많아지는 사람은

못다 한 사랑의 안타까움 때문이요

말이 많아지는 사람은

그만큼의 남은 미련 때문이요

많은 친구를 만나려 하는 사람은

정 줄 곳이 필요하기 때문이요

혼자만 있으려 하고

가슴이 아픈지조차 모르는 사람은

아직도 이별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 밤이면 슬퍼지는 이유는

그대 밤이면 날 그리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고

나 술 마시면 미어지는 이유는

그대 술 마시다 흘리고 있을 눈물이 아파 보여서이고

나 음악을 들으면 눈물 나는 이유는

그대 음악 속의 주인공으로 날 만들어 듣기 때문이고

나 이런 모든 생각 떨쳐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떨쳐버리고 나면 무너질

나를 위해서입니다.

 

 

 

이쯤에서

이정하

 

내가 가까이하고픈 것들,

내가 간직하고픈 것들은 언제나

내 손길이 닿기 전에 저만큼 사라져 버리고

잡히는 것은 늘 쓸쓸한 그리움뿐이었지요.

나는 이제 그만 그리움과 작별하고 싶습니다.

내 평생 그것과는 이웃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룻밤도 돌아눕지 않는 그리움,

그 지긋지긋한 상념들...

 

금방이라도 내게 다가와 따뜻한 손 내밀 것 같은 그대여,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 있기에 이토록 더디 옵니까.

 

 

 

이쯤에서 다시 만나게 하소서

이정하

 

그대에게 가는 길이 멀고 멀어

늘 내 발은 부르터 있기 일쑤였네.

한시라도 내 눈과 귀가

그대 향해 열려 있지 않은 적 없었으니

이쯤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하소서.

 

볼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는 사람.

생각지 않으려 애쓰면 더욱 생각나는 사람.

그 흔한 약속 하나 없이 우린 헤어졌지만

여전히 내 가슴에 남아 슬픔으로 저무는 사람.

내가 그대를 보내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그대는 나의 사랑이니

이쯤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하소서.

 

찬 이슬에 젖은 잎새가 더욱 붉듯

우리 사랑도 그처럼 오랜 고난 후에

마알갛게 우러나오는 고운 빛깔이려니,

함께 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그로 인한 슬픔과 그리움은

내 인생 전체를 삼키고도 남으니

이쯤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하소서.

 

 

 

인사 없이

이정하

 

그대 진정 나를 사랑했거든

떠난다는 말 없이 떠나라

 

잠깐 볼일이 있어 자리를 비웠거니,

그래도 오지 않으면

조금 늦는가보다, 생각하고 있을테니.

 

그대 진정 나를 사랑했거든

떠난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떠나라

 

 

 

입구와 출구

이정하

 

그대에게 이를 수 있는 입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난 언제나 그대 밖에서 서성일 수밖에.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갇혀 지낸다 해도 그대여,

그대에게 닿을 수 있는 문을 열어 주십시오.

바람 불고, 비 내리고, 눈보라치는

그대 밖 이 황량한 곳에서

언제까지나 나는

그대가 문을 열어 주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대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출구도 없었습니다.

머물러 있어 봤자 그대 눈길 한 번 받을 수

없었으면서, 그리하여 내 가슴이 온통 잿더미가

되어 가면서도 어찌합니까, 그대 밖으로

빠져 나갈 수 있는 출구를 찾을 수 없는 것을.

무심한 그대여,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하며 그대 주위에서

서성대는 내가 보이지 않습니까. 지나는 길에

손이라도 한 번 잡아주세요, 다만

그대를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기쁨으로 삼고 있는 나에게.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정하

 

나는 내가 지칠 때까지

끊임없이 그대를 기억하고

그리워할 것이네

그대를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안에 간직하기 위해서

 

난 또한 더이상 아파해야 할 것이 없어질 때까지

그대와 더불은 추억을 샅샅이 끄집어내어

상처받을 것이네

그대를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무감각해지기 위해서

 

 

 

잎새가 떨어지기까지

이정하

 

언제부턴가 난 열매보다 나뭇잎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이지 가을날 탐스러운 열매가 맺히기까지는

그야말로 수많은 나뭇잎의 헌신적인 봉사가 있었지 않습니까.

여름철, 그 따가운 햇볕을 온몸으로 받아 내고

때로는 시들고 말라 죽기까지 한 잎새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가을날, 살진 열매가 탐스럽게 달릴 수가 있었던 겁니다.

그런 나뭇잎의 수고로움이 없었다면

어찌 조그마한 열매라도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자기 할 일을 다 한 잎새가 가을이 다하면

결국 빈 손만 가지고 흙으로 돌아갑니다.

결코 열매를 시샘하거나 남아 있겠다고 고집부리지 않고

미련 없이 제 한 몸을 떨구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잎새에게서 난 실로 삶의 경건한 의미를 느낍니다.

평생을 한눈팔지 않고 오로지 자기 길에서 땀 흘리고 수고한 잎새.

그렇다고 해서 결코 자기 공을 내색하지 않으며

자기 한 몸을 다 태우다가 떠날 때는 오히려 빈손으로 떠나는 잎새.

그런 삶의 자세로 우리가 살아간다면 세상은 얼마나 평화로우며

또 우리의 삶의 과정은 얼마나 아름다울는지요.

 

 

 

자국

이정하

 

망치는, 못을 박는 데도 쓰이지만

못을 빼는 데도 필요합니다.

 

사랑이라는 것,

추억이라는 것,

못을 빼고 난 다음에도 남아 있는

메울 수 없는 구멍 같은 것이여.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남을 사랑할 수 있다

이정하

 

누군가를 사랑하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부터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다.

먼저 자신의 내부에 사랑을 그득히 채워 놓고 나서야

비로소 남을 사랑할 수 있다. 그래야 그 사랑이 올바를 수 있다.

신은 사랑에 관한 한 가지 법칙을 인간에게 내렸는데

그것은 자신을 사랑하고 수용할 수 있는 만큼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래서 '비키 킹' 이란 사람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 것이 아닌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져 보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 일들을 먼저 자신과 함께 해 보라.

근사한 음악을 골라 줄 사람이 필요하면 스스로 안내책을 읽고 음악을 골라 보라.

혼자 영화를 보고 자신과 함께 즐겨라. 자신에게 도취되라.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질 수 없다면,

다른 누구와 함께 있어도 즐거움을 느낄 수 없고, 깊은 사랑에 빠질 수 없다.

 

 

 

작은 기도

이정하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게 하소서

그리움으로 가슴 아프다면

그 아픔마저 행복하다 생각하게 하소서

그리워할 누가 없는 사람은

아플 가슴마저도 없나니

 

아파도 나만 아파하게 하소서

둘이 느끼는 것보다 몇 배 도하더라도

부디 나 한 사람만 아파하게 하소서

간구하노니

이별하고 아파하는 이 모든 것

그냥 한번 해보는 연습이게 하소서

다시 만나 더욱 사랑할 수 있게 하는

다시는 헤어져 있지 않게 하기 위한

그런 연습이게 하소서

 

 

 

작은 새

이정하

 

사랑했던 날보다도

더 많이 그리워한

그대 내게 있었기에

다 타버린 내 영혼.

함께 했던 시간보다

더 많이 사랑했던

그대 나를 떠났기에

내게 남은 건

오직 어둠.

 

그 많고 많은 날들 중에서

그대 그립지 않은 날 없어.

내 죽기 전까지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세상에 단 한 사람, 내 슬픈 작은 새여.

내 둥지를 떠나 지금 어디에.

나 없인 날 수 없었던

내 슬픈 작은 새여.

 

 

 

장애물

이정하

 

사랑하기란 참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참사랑을 하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에서 마음으로 가는 길에는

수많은 장애물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 험한 길을 가다보면

그대로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고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오고 싶을 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주의 깊게 다시 한 번 살펴보십시오.

혹시 그 장애물들이 자기 스스로 만든 것이지 않은지?

실제로 사랑이라는 노정에는

타인이 만들어놓은 장애물은 극히 드뭅니다.

그 대부분 자신이 상처받기 두려운 나머지

스스로 금을 그어놓은 자기변명이기 십상입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가는 길,

진정으로 마음을 열어야 갈 수 있는 길.

 

 

 

장작

이정하

 

사랑했으므로 내 모든 것이 재만 남았더라도

사랑하지 않아 나무토막 그대로 있는 것보다는 낫느니.

 

 

 

저녁 강가에 나가

이정하

 

저녁 강가에 나가

강물을 바라보면 앉아 있었습니다.

때마침 강의 수면에

노을과 함께 산이 어려 있어

그 아름다운 곳에 빠져 죽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아름답다는 것은

가끔 사람을 어지럽게 하는 모양이지요

내가 있어 그대도 그러합니다.

내가 빠져 죽고 싶은

이 세상의 단 한 사람인 그대.

 

그대 생각을 하며 나는

늦도록 강가에 나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 순간에도 강물은 쉼 없이 흐르고 있었고,

흘러가는 것은 강물뿐만이 아닌 세월도,

청춘도, 사랑도, 심지어는 나의 존재까지도

알지 못할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지나온 길마저도 덧없이 흘러서

나는 이제 돌아갈 길 아득히 멀고......

 

 

 

저녁 길을 걸으며

이정하

 

해 질 무렵, 오늘도 나는

현관문을 나섰습니다. 그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대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해

내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았습니다.

아니, 또 어찌 보면 아무것도 없기도 합니다.

아픈 우리 사랑도 길가의 코스모스처럼

한 송이의 꽃을 피워 올릴 수만 있다면

내 온 힘을 다 바쳐 곱게 가꿔 나가겠지만

그것이 또 내 가장 절실한 소망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이렇듯 무작정 거리에 나서

그대에게 이르는 수천수만 갈래의 길을

더듬어 보는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난여름, 무던히 내리쬐던 햇볕도 마다 않고

온몸으로 받아 내던 잎새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 한 송이의 꽃이 피어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내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저 꽃잎들도 언젠가 떨어지겠지만, 언젠가

떨어지고 말리라는 것을 제 자신이 먼저 알고 있겠지만,

그때까지 아낌없이 제 한 몸을

불태우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생각한 내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떨어진 꽃잎 거름이 되어 내년에 더더욱 활짝

필 것까지 생각하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생각했던 내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내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저녁별

이정하

 

너를 처음 보았을 때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너를 바라보는 기쁨만으로도

나는 혼자 설레였다.

 

다음에 또 너를 보았을 때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를 깨닫곤

한숨지었다. 너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어느새 내 마음엔

자꾸만 욕심이 생겨나고 있었던 거다.

 

그런다고 뭐 달라질 게 있으랴.

내가 그대를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다

당장 숨을 거둔다 해도

너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냉랭하게 나를 내려다볼밖에.

 

내 어둔 마음에 뜬 별 하나.

너는 내게 가장 큰 희망이지만

가장 큰 아픔이기도 했다.

 

 

 

저만치 와 있는 이별

이정하

 

()

모든 것의 끝은 있나니.

끝이 없을 것 같은 강물도 바다도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의 끝은 있나니.

또 마땅히 끝은 있나니.

청춘도 그리움도 세월도

그리하여 우리의 삶마저도···.

 

내 사랑도 끝이 있다는 것을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네.

돌아보면 저만치 와 있는 이별,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아 나는 애써 외면하고자 했네.

내 사랑도 끝이 있다는 것은

결코 알고 싶지 않았네.

결코 알고 싶지 않았네.

 

 

1

하루에 한 시간씩 덜

생각하자 합니다.

하루에 한 시간씩 덜

떠올리자 합니다.

 

당신은 모르십니다.

그 한 번으로 인해

내 목줄이 얼마나 조여지는지를,

그 한 시간으로 인해

내 목숨이 얼마나 단축되는가를.

 

하루에 한 시간씩 덜

생각하자 합니다.

당신이 내게 하루에 한 시간씩

덜 살으라 합니다.

 

사랑이 올 때는 소리가 없습니다.

발자국 소리는 물론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우리의 가슴에 들어와 앉게 됩니다.

그러나 갈 때는 다릅니다. 조용히 간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로 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올 때와는 달리 너무나 큰 흔적을 남기고 갑니다.

사랑의 발자국, 혹은 어두운 그림자.

어쩌면 우리 삶이 다하는 날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깊고 깊은 생채기를.

 

 

2

면목이 없습니다.

당신이 내내 나를 밀어내는

그 이유를 모르지 않기에

더 면목이 없습니다.

 

사랑한다 말하고 싶지만

차마 할 수 없는 그 마음을 알기에

나는 더욱더 면목이 없습니다.

더 바랄 것 없이 행복했었다고 하지만

자신은 괜찮으니 어서 떠나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모를 리 없던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내게 한없이 기대게 해놓고 이제 와서

염치없게, 당신을 두고

 

내 초라한 뒷모습

차마 마저 보지 못하고 고개 떨구던 당신이여,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곁에 두지 않는 법이라며

눈물보다 더 슬픈 미소를 짓던

나의 작은 새여,

 

내 그대의 상처를 품어주지도 못하고

세상의 거친 바람을 막아주지도 못하고

나만 훌쩍 자리를 피해야 하니

참으로 면목이 없었습니다.

가슴이 아플 염치조차 없었습니다.

돌아오는 그 길에 하늘은 있었지만 하늘이 없었고,

별이 떠 있었지만 그 별 또한 없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보냈지만 나는 없었습니다.

이 지상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3

세상 살아가는 일이 다 슬픔을 수도하는 일이 아닐까.

잠은 자도 잔 것 같지 않고, 꿈을 꿔도 꾼 것 같지 않고,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아무런 감흥이 없는 요즈음,

슬픔이라는 화두만 붙잡고 살았네.

 

내 살아가는 동안 슬픔은

아무리 단련되어도 능숙해지지 않네.

 

 

4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다

문득 비가 내린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요 며칠, 해가 떴는지

바람이 부는지

도통 몰랐습니다.

 

어둠만 있었습니다.

그 어둠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5

저만치 구름이 몰려와 있었습니다만

나는 우산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곧 비가 내리겠지만

드센 소낙비로 내릴지도 모를 일이지만

나는 그대로 길을 나섰습니다.

그대, 아시는지요.

비가 내린다면 그냥 흠뻑 젖고 말 뿐

결코 우산을 준비하고 싶지 않은 나의 마음을.

먹구름이 아까보다 더 가까이 와 있었지만

끝내 비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오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은 나의 마음을.

 

 

 

저만치 홀로 서 있는 섬

이정하

 

나는 언제나 그대가 가까이 있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내가 있는 곳에서 그대가 있는 곳까지는 얼마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버스 토큰 하나면 10분이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그곳,

이 생각 저 생각하며 걷는다 해도 1시간이면 넉넉하게 닿을 수 있는 그곳이

오늘은 왜 이리 멀게 느껴지는가요.

 

바라볼 때는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나 막상 가자면 엄청나게 먼 섬.

그 섬처럼 오늘은 그대가 내 마음 속에 가라앉습니다.

나는 언제나 그대에게 닿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고,

그대는 모르는 일처럼 시치미 뚝 떼며 저만치 홀로 서 있고.

 

 

 

저무는 황혼의 아름다움

이정하

 

그대만 생각하면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서

냇물이 되고

서해로 흘러가는 강이 되고

그 강을 적시는 황혼이 되네.

 

어둠이 오면

어김없이 별은 뜨지만

그 별은 누구를 위해 뜨는 것일까.

고단한 우리네 삶,

우리네 사랑은

쉬어갈 줄 모르네.

 

 

 

저물녘

이정하

 

잊으라, 그대가 말했지만

눈빛은 그게 아님을

 

고개를 끄덕여야 했지만

내 마음은 그게 아님을

 

돌아서는 그대 등 뒤로

황혼이 진다.

그 황혼의 나라로 함께 갈 수는 없을까.

 

아무도 사랑을 할 줄 모르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

 

 

 

저물지 않는 섬

이정하

 

온 가슴이 잿더미가 되어 으스러질지라도

그대 맘속 깊이 흐르는 푸른 물소리를

그리며 더러는 그리워하며 살 일이다.

그리하여 서로의 아픈 모습을 보여 주자.

언제나, 아픈 그대 곁에 내가 있음을

아픔보다 더 큰 섬으로 내가 저물고 있음을

우리여,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생이 다하는 그 날까지 아니 그 이후에라도

서로 잊지 말기로 하자.

 

 

 

전용(專用)

이정하

 

그대, 지금 가더라도

언제든 다시 오십시오.

혹여 상처 입거든

언제든 와서 쉬십시오.

 

그대의 자리는

늘 따뜻이 데워놓겠습니다.

그대가 돌아왔을 때 어색하지 않도록

모든 건 제자리에 두겠습니다.

가끔 쉬었다 가세요.

 

 

 

절반의 사랑

이정하

 

이세상의 태양 아래 움직이는

모든 이들에게

식어 가는 태양의 반쯤 따사로운 것이

억어 죽는 것보단 나으니

 

비록,

다 채우지 못한 절반의 사랑일지라도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보단 나은 것이니

 

누구를 사랑하든

어떤 방식으로 사랑하든

사랑한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기뻐하라.

 

 

 

절정

이정하

 

가끔 나는 생각해 본다.

어쩌면 나는, 너를 떠나보낼 때

너를 가장 사랑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이별은 내게 있어 사랑의 절정이었다

 

가장 사랑하던 그 순간, 나는 너를 놓았다

내 사랑이 가장 부풀어 오르던 그 순간이,

나는 외려 풍선처럼 터져 버렸다

 

잘가라. 나는 이제 그만 살게.

손을 흔들어 주진 못했지만

그 순간 너를 향한 마음이 절정이었음을

절정이 지난 다음엔 모든 게 다 내리막이었다

내 삶도, 나의 인생도

 

 

 

조금씩만 그리워하기로 했습니다

이정하

 

조금씩만 사랑하고

조금씩만 그리워하기로 했습니다.

 

한꺼번에 사랑하고

한꺼번에 그리워하면 너무 허무할 것 같아서.

 

아껴가며 먹는 사탕처럼,

아껴가며 듣는 음악처럼

 

조금씩만 사랑하고

조금씩만 그리워하기로 했습니다.

 

한꺼번에 사랑하다

그 사랑이 다 해 버리면 너무 허무할까 봐.

 

한꺼번에 그리워하다

그 그리움마저 다 떨어져 버리면

남는 것은 한숨밖에 없기에.

 

다시는 주워 담을 수 없는

우리의 사랑,

조금씩만 사랑하고

조금씩만 그리워하기로 했습니다.

 

 

 

조용히 손을 내밀었을 때

이정하

 

1

내 마음속에 가장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사람은

내가 가장 외로울 때 내 손을 잡아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손을 잡는다는 것은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일인 동시에

서로의 가슴 속 온기를 나눠가지는 일이기도 한 것이지요.

사람이란 개개인이 따로 떨어진 섬과 같은 존재지만

손을 내밀어 상대방의 손을 잡아주는 순간부터

두 사람은 하나가 되기 시작합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조용히 손을 내밀었을 때,

그때 이미 우리는 가슴을 터놓은 사이가 된 것입니다.

 

 

2

내가 외로울 때

누가 나에게 손을 내민 것처럼

나 또한 나의 손을 내밀어

누군가의 손을 잡고 샆다.

 

그 작은 일에서부터

우리의 가슴이 데워진다는 것을

새삼 느껴보고 싶다.

 

그대여 이제 그만 아파하렴.

 

 

 

좁은 문

이정하

 

고통과 절망이 당신의 축복이라면

당신을 따라 영원히 살게 됨이 두렵습니다

먼저 당신의 나라로 간 친구에게

친구여, 나는 살아 있노라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노라

말하기 왜 이리 눈물 겨운지요

누가 나와 밤새워 기도할 자 없겠느냐

그 옛날 겟세마네 언덕에서 당신이기도 할 때처럼

가장 아플 때 외면당하고

모든 이들에게 버림받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끼셨던 당신이여

언제까지나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실 건지요

 

 

 

주는 사랑

이정하

 

누군가를 사랑할 때

자신은 비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무조건 주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한 방울의 물이 시냇물에 자신을 내어 주듯이

사랑이라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그대에게 주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단 한 순간이라도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

당신 자신은 비어 있어야 합니다.

 

그때 사랑은 비로소 두 사람 사이를 흐릅니다.

그 비밀스런 문을 엽니다.

 

 

 

주면 줄수록 더 넉넉히 고여오는

이정하

 

그에게 더 이상 줄 것이 없노라고 말하지 말자.

사랑은 주면 줄수록 더욱 넉넉히 고여오는 샘물 같은 것이다.

당신은 어느 때 그가 가장 사랑스러운가?

모든 게 순조로워 서로간에 화평한 웃음이 감돌 때?

아니다. 그런 때는 결코 아닐 것이다.

하던 일이 실패해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절망감으로 깊은 한숨을 내쉴 때,

모든 사람으로부터 외면당해 어느 한 구석에 혼자 외로이 웅크리고 있을 때,

그런 때야말로 사랑이 필요하다.

그런 때야말로 사랑의 힘이 진정으로 발휘되어야 할 때다.

그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기쁠 때나 즐거울 때보다 힘겹고 슬플 때

그의 곁에 있어 줘라. 그에게 더 이상 줄 것이 없노라고 말하지 말고

그를 위해 마지막 남은 눈물까지 흘려 줘라.

그러면 그는 세상 모든 걸 잃는다 해도 결코 주저앉지 않을 것이다.

실의에 빠진 사람을 다시금 일어설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주저하지 말 것

이정하

 

애써 외면하지 말 것. 그가 내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음을.

그 사실을 인정한다면 마음의 문을 열 것.

내 사랑이 그에게 막힘없이, 또 자유롭게 흘러 넘치도록.

그 사랑이 마치 서녘 하늘에 펼쳐 놓은 노을과도 같아

그걸 바라보는 그의 가슴까지 적셔 줄 것.

이젠 더 이상 뒤에 물러서 있지 말 것.

사랑을 보여 주기를 주저하지 말 것.

설혹 그 사랑이 괴롭더라도 과감히 부딪칠 것.

소심하게 앉아만 있지 말 것.

 

 

 

지금

이정하

 

그대가 죽어 가고 있을 때

그동안 이렇게 살아왔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 것이다.

지금 그 소원대로 살아가기를.

 

그대가 이별할 때

그동안 이렇게 사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가질 것이다.

지금 그 마음대로 사랑하기를.

 

 

 

지금은 잠시 떨어져 있지만

이정하

 

그대와 나 사이에 '간격'이 있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다가가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그만큼 멀어지는 것은 그대와 나 사이에

'간격'이 있었던 까닭입니다.

그대와 나 사이, 언뜻 보면 별 대수롭지 않은 것 같은

그 간격이 오늘도 나를 절망케 합니다.

붙잡을 수 없는 그 거리는 얼마나 아득한 것인지.

 

그러나 나는 믿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샘에서 솟아나온 물도

끝내는 한 바다에서 만나는 것임을.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끝내는 한 바다에서 만나고야 마는 것임을.

그대와 나, 지금은 잠시 떨어져 있지만

나중에는 한 몸입니다.

우리 영혼은 하나입니다.

 

 

 

진실로

이정하

 

그에게서 사랑할 만한 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줄수록 샘솟는 것입니다.

하지만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것.

 

누군가를 가장 사랑해야 할 때가

언제라고 생각합니까?

모든 게 순조롭고 편하게 느껴질 때?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도

사랑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못 믿을 사람이라고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때,

그 사람이 하던 일에 실패해

실의에 빠져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그런 때야말로 사랑이 진정 필요한 것입니다.

진실로 그를 사랑한다면

그가 이 자리에 있기까지 겪었던 슬픔과 고통,

그 모든 것을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그를 사랑한다면

이정하

 

그에게 더 이상 줄 것이 없노라고 말하지 말라

사랑은, 주면 줄수록 더욱 넉넉히 고이는 샘물 같은 것

진실로 그를 사랑한다면

그에게 더 이상 줄 것이 없노라고 말하지 말고

마지막 남은 눈물마저 흘릴 일이다

 

기어이 가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붙잡지 말라

사랑은, 보내 놓고 가슴 아파하는 우직한 사람이 하는 일

진실로 그를 사랑한다면

떠나는 그의 앞길을 막아서지 말고

그를 위해 조용히 고개 끄덕여 줄 일이다.

 

사랑이란 그런 거다

그를 위해 나는 한 발짝 물러서는 일이다

어떤 아픔도 나 혼자 감수하겠다는 뜻이다

진실로 사랑한다면, 그를

내 안에만 가둬두지 않을 일이다.

 

 

 

진작부터 비는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정하

 

어디까지 걸어야 내 그리움의 끝에 닿을 것인지

걸어서 당신에게 닿을 수 있다면 밤새도록이라도 걷겠지만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다 버리고 나는 마냥 걷기만 했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도 그냥 건성으로 지나치고

마치 먼 나라에 간 이방인처럼 고개 떨구고

정처 없이 밤길을 걷기만 했습니다.

 

헤어짐이 있으면 만남도 있다지만

짧은 이별일지라도 나는 못내 서럽습니다.

내 주머니 속에 만지작거리고 있는 토큰 하나,

이미 버스는 끊기고 돌아갈 길 멉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걸어서 그대에게 닿을 수 있다면

그대의 마음으로 갈 수 있는 토큰 하나를 구할 수 있다면

나는 내 부르튼 발은 상관도 않을 겁니다.

 

문득 눈물처럼 떨어지는 빗방울,

그때서야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아아 난 모르고 있었습니다.

내 온몸이 폭싹 젖은 걸로 보아

진작부터 비는 내리고 있었습니다.

 

 

 

진정한 사랑, 진정한 행복

이정하

 

울퉁불퉁 찌그러지고 모난 모과일수록

향기는 더 짙게 나는 법입니다.

매끈하게 잘생긴 모과는 모양만 그럴 듯할 뿐

향기는 별로라고 합니다.

 

우리 사랑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닐는지요?

훤히 뚫린 신작로처럼 매끄럽기만 하다면 그만큼 끝도

더 빨리 찾아오는 게 아닐까요.

울퉁불퉁 온갖 좌절과 고난을 겪고 난 다음에

찾아오는 사랑이야말로

그만큼 값지고 행복한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나는,

지금 우리 사랑이 어렵다고 해서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대가 잠시 떠나 있다고 해서 우울해 하지 않습니다.

내 안에 그대가 남아 있는 한 진정한 행복은 끝내 찾아오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비바람을 겪고 난 나무가 더욱 의연하듯,

고난을 이겨낼 수만 있다면 우리 사랑이 더욱 향기롭게

열매 맺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이정하

 

오직 사랑만을 사랑하게 하소서

사랑으로 치장된 다른 것에 한눈 팔지 말게 하소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일이 외려 그대에게

힘겨운 짐이 되지 말게 하소서

 

 

 

찔레에게

이정하

 

아무 기별하지 말자.

그리움만으로 한 세상 살아가면서도

저렇게 표독스런 꽃 피울 수 있는 것을.

비 내린다 찔레여, 비가 내린다.

난 무엇으로 네 삶 속에 스밀 수 있을까.

 

할 말이 없다.

내 너를 만나도 할 말이 없다.

 

 

 

참꽃 소곡 - 죽어 참꽃으로 피어났을, 내 어린 날의 눈먼 누이에게

이정하

 

누이야 참꽃이 피었다.

기다리면 기다리는 만큼 참꽃은 아름답다.

내가 쓰는 이 아름답다는 말 한마디

 

아름답다는 것이 무언지 누이는 알까.

빨강 크레용을 입에 넣어 깨물어보던 눈먼 누이야,

오랜 기다림 끝에 참꽃이 피었다.

지난겨울은 네 폐병 말기의 기침 소리처럼

쓰라렸고, 크레용 속에 가두어 두었던

내 유년이 추위에 떨고 있을 때면 언제나 나는

그림을 그렸다. 새하얀 도화지 위에 그려진

내 유년은 싸늘한 어둠 속을 날아가는 파랑새

한 마리. 누이가 뱉어놓은 피 한 방울.

누이야, 네 손끝에 묻어나던 크레용 냄새를

기억하느냐. 늘 네 손끝엔 산이 있었고,

강이 흐르고, 바람 소리가 들렸었지.

 

누이야 네 밝은 가슴으론 무엇을 보았니.

어둠의 끝, 세상의 끝을 보았니. 한 닢

반짝이는 나뭇잎을 보았니. 네 못 보던

눈에 송글송글 눈물이 맺히게 하던 언덕배기,

아이들 튼튼한 함성으로 이 언덕배기에 누이야

참꽃이 피었다.

 

이 세상 무엇이 되어야

가장 아름다운 꿈이 될 수 있을까.

될 수 있을까, 무엇이 되어 한 닢 반짝이는

눈물로도 남을 수 있을까. 부르면 다가올 것 같은

누이야, 잊혀진 모든 것들 다시 돌아오는

봄날 하오, 어김없이 참꽃은 피고 지는데

누이야 너는 어떤 꽃으로 피어났을까.

이 세상 어떤 아름다운 꿈으로 피어났을까.

 

 

 

참된 사랑

이정하

 

참된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네.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를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것.

참된 사랑은 서로를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가슴을 결속시키는 일이네.

성장할 수 있도록

변화할 수 있도록

그를 위해서라면 헤어질 수 있는 용기마저

가질 수 있도록 격려해 주는 것.

 

새가 어디로 날아가든

결코 새장 문을 닫아 두지 않는 것.

 

 

 

참사랑의 모습

이정하

 

내가 어렸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시골의 어느 공원묘지에 묻혔다.

이듬해 나는 방학을 이용해서 그 근처의 친척집엘 갔다.

우리가 탄 차가 할머니가 잠들어 계시는 묘지입구를 지나갈 때였다.

할아버지와 나는 뒷좌석에 함께 앉아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우리가 아무도 안 보는 줄 아셨던지 창문에 얼굴을 대시고

우리들 눈에 띄지 않게 가만히 손을 흔드셨다.

그때 나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처음 깨달았다.

 

 

 

참새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정하

 

진정한 사랑은 잃게 되는 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상대의 보답을 바라지 않았으므로

잃어버릴래야 잃어버릴 것이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흥정을 바라는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이만큼 주었으므로 이만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까닭에,

기대한 만큼의 보답을 못 받게 되면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한탄하기 일쑤인 것이지요.

 

사랑을 잃었다고 하는 것은 기실 사랑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집착이 무너진 것이 아닐는지요? 참새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참새가 하늘을 향해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이지

자신의 새장 안에 가둬놓는다는 말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참회

이정하

 

때로는

서럽게 울어보고 싶은때가 있네

아무도 보지 않는 데서 넋두리도 없이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하여 정갈하게 울고 싶네

그리하여 눈물에 흠씬 젖은 눈과

겸허한 가슴을 갖고 싶네

 

그럴 때의 내 눈물은

나를 열어가는 정직한 자백과 뉘우침이 될 것이다.

가난하지만 새롭게 출발할 것을 다짐하는

내 기도의 첫 구절이 될 것이다.

 

 

 

창가에서

이정하

 

1

햇살이 참 맑았다.

네가 웃는 모습도 그러했다.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바라만보고 있겠다는 뜻은 아니다.

온몸으로 너를 받아들이고 싶다는 뜻이다.

 

햇살이 참 맑았다.

네가 웃는 모습도 그러했지만

어쩐지 나는 쓸쓸했다.

자꾸만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너에게 다가설 순 없더라도 이젠

너를 보고 있는 내 눈길은

들키고 싶었다.

 

햇살이 참 맑았고

눈이 부셨다.

 

 

2

비 갠 오후,

햇살이 참 맑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습니다.

세상이 왜 그처럼 낯설게만 보이는지

 

그대는 어째서

그토록 순식간에 왔다 갑니까.

 

 

 

창문과 달빛

이정하

 

그대는

높은 담장 안

창문입니다.

 

거대한 벽 앞에

발 부르트던

나는

 

부르지 않아도

그대 곁에 다가가는

달빛입니다.

 

 

 

창작

이정하

 

사랑했으므로 내 모든 것이 재만 남았더라도

사랑하지 않아 나무토막 그대로 있는 것보다는 낫느니.

 

 

 

첫눈

이정하

 

아무도 없는 뒤를 자꾸만 쳐다보는 것은

혹시나 네가 거기 서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이다

그러나 너는 아무 데도 없었다

 

낙엽이 질 때쯤 나는 너를 잊고 있었다

색 바랜 사진처럼 까맣게 너를 잊고 있었다

하지만 첫눈이 내리는 지금, 소복소복 내리는 눈처럼

너의 생각이 싸아하니 떠오르는 것은 어쩐 일일까

그토록 못 잊어 하다가

거짓말처럼 너를 잊고 있었는데

첫눈이 내린 지금,

 

자꾸만 휑하니 비어 오는 내 마음에

함박눈이 쌓이듯 네가 쌓이고 있다

 

 

 

첫눈 내린 날

이정하

 

첫눈 내린 날, 내 가슴은

한없이 너른 들판입니다.

설혹, 당신이 스쳐 지나가더라도

선명한 발자국으로 당신을 껴안는

그런 들판입니다.

 

당신은 나를 밟고 지나갔음에도

나는 언제까지나 당신을 안고 있음이여.

당신은 나를 버렸음에도

나는 당신을 버릴 수 없음이여.

 

 

 

첫눈 내린 날 내 가슴은

이정하

 

첫눈이 내렸습니다.

첫눈이라는 말만 입에 담더라도 내 가슴은 한없이 너른 들판이 되고 말지요.

설혹 당신이 스쳐지나간다 할지라도 선명한 발자국만은 남는,

그런 너른 가슴으로 당신을 껴안는 들판이 되고 말지요.

 

첫눈이 내렸습니다.

첫눈이라는 말만 입에 담더라도 나는 조용히 눈을 감게 되지요.

그러면, 쓸쓸한 내 마음의 간격 사이로도 눈이 내리고,

저 너머 빈 들판에서 홀로 서 있는 나무가 떠오릅니다.

당신은 나를 버렸음에도 나는 결코 당신을 버릴 수 없는

첫눈 내린 날의 내 가슴.

 

첫눈이 내렸습니다. 이제 그만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촛불

이정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한 자루의 촛불을 켜고 마주 앉아 보라.

고요하게 일렁이는 불빛 너머로

사랑하는 이의 얼굴은 더욱더 아름다워 보일 것이고

또한, 사랑은 멀고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깝고 낮은 곳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웁거든

한 자루의 촛불을 켜두고 조용히 눈을 감아보라.

제 한 몸 불태워 온 어둠 밝히는 촛불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두 손 모으다 보면

당신이 사랑하는 그 사람은 어느새, 다른 곳이 아닌

바로 당신의 마음속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추억에 못을 박는다

이정하

 

잘 가라, 내 사랑

너를 만날 때부터 나는

네가 떠나는 꿈을 꾸었다

저문 해가 다시 뜨기까지의

그 침울했던 시간

그 동안에 나는 못질을 한다

다시는 생각나지 않도록 서둘러

내 가슴에

큰 못 하나를 박았다

 

잘 가라, 내 사랑

나는 너를 보내고 햄버거를 먹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뒤돌아서서

햄버거를 먹다가

목이 막혀 콜라를 마셨다

 

잘 가라, 내 사랑

네가 나를 버린 게 아니라

내가 너를 버린 게지

네가 가고 없을 때 나는 나를 버렸다

너와 함께 가고 있을 나를 버렸다

 

 

 

추억, 오래도록 아픔

이정하

 

사랑이라는 이름보다도 늘 아픔이란 이름으로 다가오던 그대.

살다 보면 가끔 잊을 날이 있겠지요.

그렇게 아픔에 익숙해지다 보면 아픔도 아픔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겠지요.

사랑도 사랑 아닌 것처럼 담담히 맞을 때도 있겠지요.

사랑이란 이름보다는 아픔이란 이름으로 그대를 추억하다가.

 

무덤덤하게 그대 이름을 불러 볼 수 있는 날이 언제인지,

그런 날이 과연 오기는 올는지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언제쯤 그대 이름을 젖지 않은 목소리로 불러 볼 수 있을지,

사랑은 왜 그토록 순식간이며 추억은 또 왜 이토록 오래도록 아픔인 것인지...

 

 

 

춘래불사춘(春來不思春)

이정하

 

봄이 한창이라고 합니다.

온 산과 들에 지천으로

봄꽃들이 피었다고 합니다.

 

그대가 오지 않고선

나는 언제나 겨울입니다.

 

이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와도

그대가 오지 않는 한

나는 언제까지나 겨울입니다.

 

 

 

카페에서

이정하

 

1

눈이 내립니다.

내리는 눈은 같이 보고 있지만

당신의 생각은 어디쯤 가 있는지

모릅니다.

 

다만 함께 있음으로

가슴 떨리는 오후

 

눈이 내립니다.

조금만 더 천천히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2

약속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그대는 오지 않았습니다.

벌써 세 잔째 커피를 마시면서도 나는

돌아갈 생각 않고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대가 이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고,

지금 오고 있다고 최면도 걸어 보았지만

끝내 그대는 오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마칠 시간, 카페의 불이 모두 꺼졌어도

나는 일어서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가면

잠자기는 다 틀린 일, 한 자락 어둠으로라도

이 카페에 남아 있고 싶었습니다.

 

아아 그대가 오지 않아도 좋으니

그대에게 무슨 일이나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칼국수

이정하

 

오늘 아침엔 눈 대신 비가 내립니다.

이런 날이면 어느 창가에 앉아 칼국수나 먹었으면 좋겠다,

라고 한 그대의 말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태양

이정하

 

그대의 눈부심 속으로

타들어가고 싶었다.

 

내 살과 뼈가

한 줌 재로도 남을 수 없어도

 

그렇게 그대 안에

녹아들고 싶었다.

 

 

 

톱밥 난로

이정하

 

온기로 환희 달아오르는

그대 얼굴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때로는,

그대 가슴을 데워주기 위해

내가 톱밥난로로

뜨거워질 때도 있어야 하리.

 

 

 

판화

이정하

 

너를 새긴다.

더 팔 것도 없는 가슴이지만

시퍼렇게 날이 선 조각칼로

너를 새긴다.

 

너를 새기며,

날마다 나는 피 흘린다.

 

 

 

풍장(風葬)

이정하

 

더는 갈 수 없었네.

인생은 기나긴 강 흐르고 흘러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게 흘러

아무 미련 없이 떠나려 했는데

그런 생각조차 없이 훌쩍 가려 했는데

한 발짝 가다 멈춰서고

다시 한 발짝 가다 뒤돌아보는

이 마음의 요동.

 

떠나시게 떠나시게

북망산천 험한 길 잊고 가시게

남은 자의 축원소리 생생히 듣고 있지만

아아 어찌하는가 어찌해야 하는가

내 살 같은 사람 두고

더는 갈 수 없는데.

 

 

 

하나

이정하

 

사랑은

서로 다른 시냇물이 만나

하나의 강물이 되는 일입니다.

강물과 강물이 만나

하나의 바다가 되는 일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

더 넓고 큰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하루

이정하

 

그대 만나고픈 마음 간절했던

오늘 하루가 또 지났습니다.

내일도 여전하겠지만

난 정말이지 소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하루가 지나면

당신과 만날 날이 그만큼 가까워지는 것이기를.

이 하루만큼 당신께 다가가는 것이기를.

 

그대 만나고픈 마음 간절했던

오늘 하루가 또 지났습니다.

 

 

 

하루살이 사랑

이정하

 

하루살이 사랑은 되지 말자. 애초에 그러려면 만나질 말자.

사랑이란 이름 아래 모든 게 감싸진다고 생각하지 말자.

너는 너, 나는 나대로의 길을 열심히 가면서 서로를 사랑하자.

때로 그리워하면서 살기도 하자.

 

하루에 이루어진 도자기는 값이 싸지만,

오래 기다려 이루어진 보석은 값이 비싼 법.

가슴이 찢겨져 온통 누더기가 되더라도

차분히 기다려 보석처럼 영롱한 사랑을 만들자.

하루살이 사랑은 되지 말자. 애초에 그러려면 만나질 말자.

 

 

 

한밤에서 새벽까지

이정하

 

누가 제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별은 스스로가 빛난다.

수없이 많은 별들 중에서도

그 어느 하나 빛을 내지 않는 별은 없다.

 

우리들 잠든 영혼을 깨워주는 종소리

잠에 취해 혼미한 새벽,

잠결에도 우리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저 맑은 종소리는 도대체 누가 울리는 것인가

 

 

 

한 뼘

이정하

 

달빛도 아까워 오늘 밤,

담쟁이 넝쿨 한 뼘 자랐다

 

허공을 더듬어 길을 낸다는 것,

손닿는 어느 기둥이라도 붙잡고 휘감아

악착같이 매달려 있는 건

그 자체가 부여안고 가야 할

자신의 삶이기 때문이다

 

멈추어 있는 것은 삶을 멈추는 일

달빛도 숨쉬는 것도 아까웠던

한 생애가 손을 뻗는다

두고 봐라, 손톱만한게 한 뼘되고

한뼘이 길이 되어 끝내 당도할 그 어디,

 

거기 고마운 당신이 있을까

삶이여, 넝쿨 같은 삶의 눈물겨움이여.

 

 

 

한 사람

이정하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묻혀지고 잊혀진다 하더라도

그대 이름만은 내 가슴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것은

언젠가 내가 바람편에라도

그대를 만나보고 싶은 까닭입니다

살아가면서 덮어두고 지워야 할 일이 많겠지만

그대와의 사랑,그 추억만은 고스란히 남겨두는 것은

그것이 바로 내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는 까닭입니다.

 

두고두고 떠올리며 소식 알고픈

단 하나의 사람.

내 삶에 흔들리는 잎사귀 하나 남겨준 사람

슬픔에서 벗어나야 슬픔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듯

그대에게서 벗어나 나 이제

그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아네.

처음부터 많이도 달랐지만 많이도 같았던

차마 잊지 못할 내 소중한 인연이여...

 

 

 

한 사람을 사랑했네

이정하

 

사랑을 얻고 나는 오래도록 슬펐다.

사랑을 얻는다는 건

너를 가질 수 있다는 게 아니었으므로.

너를 체념하고 보내는 것이었으므로.

 

너를 얻어도, 혹은 너를 잃어도

사라지지 않는 슬픔 같은 것.

아아 나는 당신이 떠나는 길을 막지 못했네.

미치도록 한 사람을 사랑했고,

그 슬픔에 빠져 나는 세상 다 살았네.

세상살이 이제 그만 접고 싶었네.

 

 

1

삶의 길을 걸어가면서

나는, 내 길보다

자꾸만 다른 길을 기웃거리고 있었네.

 

함께 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한 슬픔과 그리움은

내 인생 전체를 삼키고도 남게 했던 사람.

만났던 날보다 더 사랑했고

사랑했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그리워했던 사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함께 죽어도 좋다 생각한 사람.

세상의 환희와 종말을 동시에 예감케 했던

한 사람을 사랑했네.

 

부르면 슬픔으로 다가올 이름.

내게 가장 큰 희망이었다가

가장 큰 아픔으로 저무는 사람.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기에 붙잡지도 못했고

붙잡지 못했기에 보낼 수도 없던 사람.

이미 끝났다 생각하면서도

길을 가다 우연히라도 마주치고 싶은 사람.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는 날이면

문득 전화를 걸고 싶어지는

한 사람을 사랑했네.

 

떠난 이후에도 차마 지울 수 없는 이름.

다 지웠다 하면서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눈빛.

내 죽기 전에는 결코 잊지 못할

한 사람을 사랑했네.

그 흔한 약속도 없이 헤어졌지만

아직도 내 안에 남아

뜨거운 노래로 불려지고 있는 사람.

이 땅 위에 함께 숨 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마냥 행복한 사람이여,

나는 당신을 사랑했네.

세상에 태어나 단 한 사람

당신을 사랑했네.

 

 

2

한번 떠난 것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네.

 

강물이 흐르고 있지만

내 발목을 적시던

그때의 물이 아니듯,

 

바람이

줄곧 불고 있지만

내 옷깃을 스치던

그때의 바람이 아니듯

한번 떠난 것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네.

 

네가 내 앞에 서 있지만

그때의 너는 이미 아니다.

 

내 가슴을 적시던

너는 없다.

네가 보는 나도

그때의 내가 아니다.

 

그떄의 너와 난

이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한번 떠난 것은 절대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아아,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그 부질없음이여.

 

 

3

오늘 또

그의 집 앞을 서성거리고 말았다.

나는 그를 잊었는데

 

내 발걸음은···,

그를 잊지 않았나 보다.

 

 

4

차라리 잊어야 하리라, 할 때

당신은 또 내게 오십니다.

 

한동안 힘들고 외로워도

더 이상 찾지 않으리라, 할 때

당신은 또

이미 저만치 오십니다.

 

어쩌란 말입니까 그대여,

잊고자 할 때

그대는 내게

더 가득 쌓이는 것을.

 

너무 깊숙이

내 안에 있어

이제는

꺼낼 수도 없는 그대를.

 

 

 

함께 가자, 우리

이정하

 

함께 가고 싶었다. 어떤 길이건 간에 너와 함께 가고 싶었다.

너는 남아 있고 나만 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불행인 것을.

나는 아직도 얼마나 많이 내 뒷모습을 네게 보여야 하는가.

힘없이 늘어져 있을 내 어깨를 네게만은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나는

차마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고 다만 가슴이 아프다고만 했다.

내 뒷모습을 지켜보다 끝내 고개 떨구는 너도

다만 가슴이 아프다고만 했다. 함께 가자, 우리.

맨손 맨몸이면 어떠랴. 가슴 가득 사랑만 품고 있으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부럽지 않은데.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

이정하

 

그대를 만나던 날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착한 눈빛, 해맑은 웃음

한 마디, 한마디의 말에도

따뜻한 배려가 있어

잠시 동안 함께 있었는데

오래 사귄 친구처럼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내가 하는 말들을 웃는 얼굴로 잘 들어주고

어떤 격식이나 체면 차림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솔직하고 담백함이

참으로 좋았습니다

 

그대가 내 마음을 읽어주는 것만 같아

둥지를 잃은 새가

새 둥지를 찾은 것만 같았습니다

짧은 만남이지만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오랜만에 마음을 함께

맞추고 싶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장미꽃 한 다발을 받은 것보다

더 행복했습니다

 

그대는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더 좋은 사람입니다

 

 

 

행복이라는 나무가 뿌리를 내리는 곳은

이정하

 

행복이라는 나무가 뿌리를 내리는 곳은

결코 비옥한 땅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떻게 보면

절망과 좌절이라는 돌멩이로 뒤덮인

홯무지일 수도 있습니다.

 

한 번쯤 절망에 빠져보지 않고서,

한 번쯤 좌절을 겪어보지 않고서

우리가 어찌 행복의 진정한 값을 알 수 있겠습니까?

 

절망과 좌절이라는 것은

우리가 참된 행복을 이루기 위한 준비 과정일 뿐입니다.

따라서 지금 절망스럽다고 실의에 잠겨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지금 잠깐 좌절을 겪었다고 해서

내내 한숨만 쉬고 있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일입니다.

 

더 큰 행복을 위해, 참된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아닙니까?

그리고 반드시 이겨 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돌멩이를 부지런히 들어내야

옥토를 만들 수 있듯이 말입니다.

 

절망과 좌절이라는 것이

설사 우리의 삶에 바윗덩어리와 같은

무게로 짓눌러 온다 하더라도

그것을 무사히 들어내기만 한다면,

그 밑에는 틀림없이 눈부시고 찬란한

행복이라는 싹이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행여 영영 올 수 없더라도

이정하

 

오늘 오지 못한다면

내일 오십시오.

내일도 오지 못한다면

그 다음날 오십시오.

항상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지루한 줄 모르는 것은

바로 당신을 기다리기 때문이지요.

행여 영영 올 수 없더라도

그런 말은 입 밖에 내지 마십시오.

다만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게

행복인 나에게.

 

 

 

허수아비

이정하

 

1

혼자 서 있는 허수아비에게

외로우냐고 묻지 마라.

어떤 풍경도 사랑이 되지 못하는 빈 들판

낡고 해진 추억만으로 한세월 견뎌왔느니.

혼자 서 있는 허수아비에게

누구를 기다리느냐고도 묻지 마라.

일체의 위로도 건네지 마라.

세상에 태어나

한 사람을 마음속에 섬기는 일은

어차피 고독한 수행이거니.

 

허수아비는

혼자라서 외로운 게 아니고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외롭다.

사랑하는 그만큼 외롭다.

 

 

2

살아가다 보면 사랑한다는 말만으로

부족한 것이 또한 사랑이었다.

그에게 한 걸음도 다가갈 수 없었던 허수아비는,

매번 오라 하기도 미안했던 허수아비는

차마 그를 붙잡아둘 수 없었다.

그래서 허수아비는 한 곳만 본다.

밤이 깊어도 눈을 감지 못한다.

 

 

 

허수아비, 그 이후

이정하

 

밤만 되면 허수아비는 운다.

늙고 초라한 몸보다도

자신의 존재가 서러워

한없이 운다.

 

한낮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서 있지만

밤만 되면 허수아비는 목이 메인다.

 

속절없이 무너져

한없이 운다.

 

 

 

험난함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이정하

 

기쁨이라는 것은 언제나 잠시뿐, 돌아서고 나면

험난한 구비가 다시 펼쳐져 있는 것이 인생의 길.

 

삶이 막막함으로 다가와 주체할 수 없이 울적할 때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구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자신의 존재가 한낱 가랑잎처럼 힘없이 팔랑거릴 때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나는 더욱 소망한다.

그것들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화사한 꽃밭을 일구어낼 수 있기를.

나중에 알찬 열매만 맺을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꽃이 아니라고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험로(險路)

이정하

 

높낮이가 있어야 산이고, 굴곡이 있어야 강이다.

너에게 가자면 수천의 산을 넘고 수만의 강을 건너야 하느니,

그것쯤이야 대수로운 게 아니지만 막상 가보면 네가 문을 닫고 있는 데야.

 

네 마음의 부재. 천신만고 끝에 당도했는데 너는 이미 외출하고 없다.

지금 와서 어쩌란 말인가. 되돌아갈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는 너의 문 앞에서.

 

 

 

헤어진 연인에게 신의 큰 축복이 있나니

이정하

 

헤어진 연인에게 가장 많은 신의 축복이 따른다고 말하면

얼굴 찌푸릴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조용히 한번 생각해 보자.

헤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그의 못난 점만 보였겠지만

헤어진 지금은 어떠한가.

그의 괜찮은 모습만 온통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지 아니한가.

 

 

 

헤어짐을 준비하며

이정하

 

1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마음 속으로

조용히 보내줄 준비를 한다는 뜻이다.

 

사랑은 결코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므로.

외려 너를 점점 멀리 두는 데

익숙해지는 일이므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조용히 너를 보내겠다는 뜻이다.

보내고 나서 나는, 하염없이

슬픔에 빠져 있겠다는 뜻이다.

 

 

2

나 그대에게 다 준다 하였으나

실상은, 주지 않고 남긴 게 있었네.

 

막상 그대 간다 하니 그동안 못해준 것들,

미처 챙겨주지 못한 그것들이 새삼 떠올랐다.

그대여, 갈 땐 마저 다 가져가기를.

그대가 내게 준 건 물론이고,

내게 남은 게 있으면 다 가져가기를.

그대 가고 나면 어차피 아무 소용없는 것,

그 모든 것 다 그댈 위한 것이었으니.

 

그리하여 나는,

빈껍데기로 한세상 살아가리니.

 

 

3

내 너를 사랑한 게 아니라

너의 가면만을 사랑한 것이기를.

 

내 너를 사랑한 게 아니라

너를 사랑한 나를 사랑한 것이기를.

 

상처를 사랑할 줄 알게 하여

아물게 할 줄도 알게 하기를.

 

떠나간 너로 하여 치를 떨게 하지 말고

너를 사랑한 나로 인해 치를 떨게 하기를.

그리하여 다시는 사랑하게 하지 말기를.

사랑 같은 건 얼씬도 하게 하지 말기를.

 

 

4

울지 마라, 그대여

네 눈물 몇 방울에도 나는 익사한다.

울지 마라, 그대여

겨우 보낼 수 있다 생각한 나였는데

 

울지 마라, 그대여

내 너에게 할 말이 없다.

차마 너를 쳐다볼 수가 없다.

 

 

5

너를 보내고..., 나는 어떻게 사나.

자신이... 없었다.

 

, 고개가 떨구어졌다.

 

 

 

형벌

이정하

 

사랑은 깊어질수록 가혹한 형벌이네.

어찌하여 우리에겐 슬픈 일만 생기는 것인지

잠 못 이루며 생각해봐도 아무런 소용 없네.

우릴 만나게 한 것이 신()의 뜻이라면

그로 인한 고통은 인간의 몫이던가.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로운

아아 이승의 사랑, 우리의 사랑은 왜

계단이 되지 못하고 먼 산이 되어야 하는가.

왜 먼 산이 되어 눈물만 글썽이게 하는가.

 

 

 

호두

이정하

 

외로움이 깊으면 겉은 야무진 법이다.

그러나 속은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된다.

 

슬픔 위에 슬픔이 겹쳤네.

내 삶의 옹이진 부분,

잘못하기만 한 내 사랑이여..

내가 만든 벽 때문에

나도 옴싹달싹 못할 줄이야.

 

 

 

호명

이정하

 

누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아

뒤를 돌아보면 지나가는 바람이었다.

바람이 지나치다

그냥 마른 잎 하나를 떨군 게지.

 

그대가 거기 서서

나를 불러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늘

그대가 나를 부르는 것 같은 착각에

뒤를 돌아본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은

못내 쓸쓸하다.

내 이름을 불러줄 사람,

그 사람은 어디 있는가.

 

 

 

혼자

이정하

 

혼자 서서 먼 발치를 내다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가만히 놓아 둘 일이다. 무엇을 보고 있느냐,

누구를 기다리느냐 굳이 묻지 마라.

혼자 서 있는 그 사람이 혹시 눈물 흘리고 있다면

왜 우느냐고도 묻지 말 일이다.

굳이 다가서서 손수건을 건넬 필요도 없다.

한 세상 살아가는 일,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어차피 혼자서 겪어나가야 할 고독한 수행이거니.

 

 

 

혼자 사랑한다는 것은

이정하

 

갑자기 눈물이 나는 때가 있다

길을 가다가도

혹은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지는 때가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별일도 아닌 것이었는데

왜 울컥 목이 메어오는 것인지

늘 내 눈물의 진원지였던 그대

그대 내게 없음이 이리도 서러운 건 줄

나는 미처 몰랐다

덜어내려고 애를 써도 덜어낼 수 없는 내 슬픔은

도대체 언제까지 부여안고 가야 하는 것인지

이젠 되었겠지 했는 데도

시시각각 더운 눈물로 다가오는 걸 보니

내가 당신을 사랑하긴 했었나 보다

뜨겁게 사랑하긴 했었나 보다

조용히 손을 내밀었을 때

내가 외로울 때 누가 나에게 손을 내민 것처럼

나 또한 나의 손을 내밀어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다

그 작은 일에서부터

우리의 가슴이 데워진다는 것을

새삼 느껴보고 싶다

그립다는 것은

아직도 네가 내 안에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지금은 너를 볼 수 없다는 뜻이다

볼 수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 내 안 어느 곳에

네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래서

내 안에 있는 너를 샅샅이 찾아내겠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래서

가슴을 후벼 파는 일이다

가슴을 도려내는 일이다

혼자

혼자 서서 먼발치를 내다보는 사람이 있다면

가만히 놓아 둘일이다

무엇을 보고 있느냐

누구를 기다리냐 굳이 묻지 마라

혼자 서있는 그 사람이

혹시 눈물 흘리고 있다면

왜 우냐고 묻지 말일이다

굳이 다가서서 손수건을 건 낼 필요도 없다

한세상 살아가는 일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어차피 혼자서 겪어 나가야 할

고독한 수행이거니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혼자서 겪어 나가야 할

고독한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혼자서 떠났습니다

이정하

 

언제나 혼자였습니다.

그 혼자라는 사실 때문에

난 눈을 뜨기 싫었습니다.

 

이렇게 어디로 휩쓸려 가는가.

세상 사람들 모두 남아있고

나 혼자만 떠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따로따로 걸어가는 것보다

서로 어깨를 맞대며 함께 걸어가는 것이

훨씬 더 아름답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나는 늘 혼자서 떠났습니다.

 

늘 혼자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늦은 밤,

완행열차 차창 밖으로 아득히 별빛이 흐를 때,

나는 까닭 없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혼자서 가야 하고

혼자서 닿아야 하는 것이

우리 종착지라면

어쩐지 삶이 쓸쓸하지 않습니까.

 

낯선 객지의 허름한 여인숙 문을 기웃거리며

난 늘 혼자라는 사실에 절망했습니다.

 

그렇게 절망하다가,

어느 바람 부는 거리 한구석에서

나는 그리움이란 이름으로

당신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홀씨

이정하

 

갈 수 없네.

그 아득한 거리 앞에

몸져눕는 나는

홀씨로 떨어져 죽어서야

그대 앞에 닿을까.

 

갈 수 없네.

살아서는 그대 곁에

닿을 수 없는 나는

언제나 그대 쪽으로

바람이 불기만을 기다리는

한 포기 가녀린

들꽃이었네.

 

 

 

화석

이정하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나 너에게 갇혀 사네.

더 많은 세월이 흐르면

나는 죽고 없어지겠지만

 

내 사랑, 영원히 변치 않을

화석으로 남으리.

 

 

 

환희

이정하

 

처음에 어린 새가 날갯짓을 할 때는 그 여린 파닥임이 무척이나 안쓰러웠다.

하지만 날갯짓을 할수록 더 높은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삶이 꾸준히 나아가기만 하면 얼마든지 기쁜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거다.

그렇다. 맨 처음 너를 알았을 때 나는 알지 못할 희열에 떨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곧 막막한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내가 사랑하고 간직하고 싶었던 것들은 항상 내 곁을 떠났으므로.

그래도 나는 너에게 간다. 이렇게 나아가다 보면

너에게 당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그렇다. 내가 환희를 느끼는 것은 너게게 가고 있다는 그 자체다.

마침내 너에게 닿아서가 아니라 너를 생각하며 걸어가는 그 자체가

나에겐 더없는 기쁨인 것이다.

 

 

 

황혼의 나라

이정하

 

내 사랑은

탄식의 아름다움으로 수놓인

황혼의 나라였지.

 

내 사랑은

항상 그대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가도 가도 닿을 수 없는 서녘 하늘,

그곳에 당신 마음이 있었지.

 

내 영혼의 새를 띄워 보내네.

당신의 마음

한 자락이라도 물어 오라고.

 

 

 

 

흔들리며 사랑하며

이정하

 

이젠 목마른 젊음을

안타까워하지 않기로 하자.

찾고 헤매고 또 헤매이고

언제나 빈손인 이 젊음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하자.

 

누구나 보균하고 있는

사랑이란 병은 밤에 더욱 심하다.

마땅한 치유법이 없는 그 병의 증세는

지독한 그리움이다.

 

기쁨보다는 슬픔

환희보다는 고통, 만족보다는

후회가 더 심한 사랑, 그러나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어찌 그대가 없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으랴

 

길이 있었다. 늘 혼자서

가야 하는 길이었기에 쓸쓸했다.

길이 있었다. 늘 흔들리며

가야 하는 길이었기에 눈물겨웠다.

 

 

 

흔적

이정하

 

칼국수를 먹다가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유난히 칼국수를 좋아했던 그대였기에.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을 듣다가도 그대가 떠올라 눈물 글썽입니다. 유난히 그대가 즐겨 듣던 곡이었기에. 나는 이제 그대가 좋아하는 음식, 그대가 좋아하는 음악, 그대가 좋아하는 색깔과 모양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납니다. 이제는 어느덧 그대가 좋아하는 것만이 아닌 내게도 가장 좋아하는 것들이 되어 있는 온갖 것들. 그것들이 그대가 떠난 빈자리를 채워 주다가 그대를 더욱 생각나게 하는 추억이 되어 내게 눈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흘러가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이정하

 

저녁 강가에 나가보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강물은 하류 쪽으로 힘차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아니, 흘러가고 있는 것은 강물 뿐만이 아니라 둑 너머 길도,

사람도, 우리 인생도, 사랑도 저만치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랬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세상에서 정지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한쪽에서 서둘러 생겨나면 다른 한쪽에선

바쁘게 사라지고 있었으니까요. 전에 존재했던 모든 것들은

정말이지 얼마나 빨리 내 곁을 스쳐 지나갔던가,

생각해보면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내가 가까이 하고픈 것들, 내가 간직하고픈 것들은 언제나

내 손길이 닿기 전에 저만큼 사라져버리고

잡히는 것은 언제나 쓸쓸한 그리움뿐이었지요.

 

추억이 아름다운 것은 다시는 그것이 재현될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 날, 흘러가는 강물에 언뜻 비쳤다가 사라지는 밤풍경처럼

그렇게 내 삶도 흘러가는가 봅니다.

그렇게 내 사랑도 흘러가는가 봅니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이정하

 

1

수제비를 먹다가 하릴없이 눈물이 나는 걸 보니

내가 당신을 사랑하긴 사랑했었나 봅니다.

수제비처럼 뜨겁게

사랑하긴 사랑했었나 봅니다.

 

 

2

수제비를 먹다가 눈물이 글썽여지는 건

수제비의 뜨거운 김 때문이 아니라

유난히 수제비를 좋아했던 그대 때문이라는 것을

그대는 모르진 않겠지요.

길을 가다가 근처 꽃집의 후리지아를 보면

또 문득 눈물이 글썽여지는 것은

그 꽃을 유독 좋아했던 그대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진 않겠지요.

이렇듯 나는 그대가 좋아했던 것들을 접하면

먼저 눈물부터 앞서게 됩니다.

그것들이 그대가 없는 빈 자리를 메꿔주다가

그대를 더욱 생각나게 하는 추억이 되어

내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일기장에선 벌써 지워버렸지만

내 가슴에선 끝내 지우지 못한 그대와의 추억들,

어쩌면 나는 평생 그것들을 안고 살아갈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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