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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하(1962~ ) ㄱ ~ ㄷ

Bollnow 2024. 5. 2. 18:28

가까운 거리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가끔은 비 오는 간이역에서 은사시나무가 되고 싶었다

가늠할 수 없는 거리

가로등

가을

가을이 저무는 창가에서

간격

감옥

거짓 웃음

겨울나무

겨울, 저무는 황혼의 아름다움

고독하다는 것은

고슴도치 사랑

궁금하다는 것

귀로(歸路)

그는 떠났습니다

그대가 가고 없어도 내 마음엔 이별이 없네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그대가 지독히도 그리운 날

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그대 굳이 아는 체하지 않아도 좋다

그대 긴 그림자

그대는 아는가

그대를 위해서라면

그대를 절대 잊지 못하겠습니다

그대 안에 내가 있습니다

그대와 마주 앉아 따뜻한 차 한잔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그런 날이 또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를 만났습니다.

그를 위해서라면

그리우면 가리라

그리움이 길이 되어

그리움이란

그립다는 것은

그 저녁 바다

그해 겨울, 죽은 친구를 생각하며

금지된 길

기다리는 이유

기다린다는 것

기다림의 나무

기다림, 혹은 절망 수첩

기대어 울 수 있는 한 가슴

기원

길 위에서

길을 가다가

길의 노래

꽃잎

꽃잎의 사랑

끝끝내

나는 작은 틈새가 두려웠다.

나로 인해 절대 아파하지 마십시오

나보다 먼저

나의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나 혼자서만

난 너에게

날마다 내 마음 바람 부네

낮고 깊게 묵묵히 사랑하라

낮은 곳으로

내가 길이 되어 당신께로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내가 빠져 죽고 싶은 강, 사랑, 그대

내 가슴 한쪽에

내가 웃잖아요

내가 할 수 없는 한 가지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내 마음의 빈터

내 모든 것 그대에게 주었으므로

내 몫의 아픔

내 삶에 가장 소중한 의미로

내 속에서 빛나는 그대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너를 보내고

너무 오래이다

너 없는 세상

너에게 가는 것만으로도

너의 모습

네가 좋아하는 영화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누군가를 원하고 있기에

눈물

눈물겨운 너에게

눈 오는 날

눈이 멀었다

늘 곁에 있는 것들의 소중함

늘 이만큼의 거리를 두고

다시 별

다시 섬진강변에서

다시 안개

단풍잎 사랑

단 하나의 행복

당신을 향한 그리움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돌아가고 싶은 날들의 풍경

돌아가는 길

동행

되풀이할 수 없는 사랑

뒤늦게서야

뒤늦은 사랑

드러낼 수 없는 사랑

따뜻한 사람

떠나가는 그의 등 뒤에서

떠나는 이유

떠날 준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그대

 

 

 

가까운 거리

이정하

 

그녀의 머리냄새를 맡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고 싶었습니다.

가능하다면 영원히라도 함께 있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댄 이런 나를 타이릅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함께 있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여전히 난 이해를 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대와 함께 있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데

왜 우린 멀리 떨어져서 서로를 그리워해야 하는지.

왜 서로보다 하고 있는 일이 먼저인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나중을 위해 지금은 참자는 말,

그 말을 이해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도 나 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할 뿐입니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이정하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가는 만큼

그대가 멀어질 것 같아서

가까이 다가가면

내가 다가가면

그대는 영영

떠나갈 것 같아서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대가 떠나간 뒤,

그 상처와 그리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한순간 가까웁다

영영 그대를 떠나게 하는 것보다

거리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오래도록 그대를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더 앞섰기에.

 

 

 

가끔은 비 오는 간이역에서 은사시나무가 되고 싶었다

이정하

 

햇볕은 싫습니다.

그대가 오는 길목을 오래 바라볼 수 없으므로,

비에 젖으며 난 가끔은

비 오는 간이역에서 은사시나무가 되고 싶었습니다.

비에 젖을수록 오히려 생기 넘치는 은사시나무,

그 은사시나무의 푸르름으로 그대의 가슴에

한 점 나뭇잎으로 찍혀 있고 싶었습니다.

어서 오세요, 그대.

비 오는 날이라도 상관없어요.

아무런 연락 없이 갑자기 오실 땐

햇볕 좋은 날보다 비 오는 날이 제격이지요.

그대의 젖은 어깨, 그대의 지친 마음을

기대게 해주는 은사시나무. 비 오는 간이역,

그리고 젖은 기적소리.

스쳐 지나가는 급행열차는 싫습니다.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지나가버려

차창 너머 그대와 닮은 사람 하나 찾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비에 젖으며 난 가끔은 비 오는 간이역에서

그대처럼 더디게 오는 완행열차,

그 열차를 기다리는 은사시나무가 되고 싶었습니다

 

 

 

가늠할 수 없는 거리

이정하

 

가까운 것 같아도

사실, 별과 별 사이는

얼마나 먼 것이겠습니까.

 

그대와 나 사이,

붙잡을 수 없는 그 거리는

또 얼마나 아득한 것이겠습니까.

 

가늠할 수 없는 그 거리,

 

그대는 내게 가장 큰 희망이지만

오늘은 아픔이기도 합니다.

 

나는 왜 그리운 것,

갖고픈 것을 멀리 두어야만 하는지

 

 

 

가로등

이정하

 

언제부턴가 내 가슴속에 가로등이 하나 켜져 있었지요. 대낮에도 꺼지지 않았고, 내 삶의 중심에서 골목길까지 훤히 비추는. 어떤 때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내 심장의 피로 불 밝히는 때도 있었지요.

 

 

 

가을

이정하

 

가을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것들을 물들이며 옵니다.

그래서 가을이 오면

모두가 닮아 갑니다.

 

내 삶을 물들이던 당신,

당신은 지금 어디쯤 오고 있나요?

벌써부터

, 당신에게 이렇게 물들어 있는데,

당신과 이렇게 닮아 있는데.

 

 

 

가을이 저무는 창가에서

이정하

 

그렇게 슬픈 목소리로 울지 마

내 시월의 창들아

그 슬픈 눈으로

곱게 물든 은행잎을 바라보지 마

너의 흔들리는 그 눈빛으로

세상의 모든 빛을 끌 수 있다면

네 투명한 마음속에

세상의 모든 풍경을 담을 수 있다면

나는 너에게 악수를 건네리

 

슬퍼하지마

내 시월의 창들아

이렇게 넓은 세상 속에서

또 낙엽은 지고

연인들은 쓸쓸히 헤어지고

저만치서

이별과 절망의 발자국을 뚜벅뚜벅 울리며

겨울은 걸어오고 있는데...

이제 우리, 두꺼운 외투를 하나씩 준비하자

그대와 나의 오랜 이별을 위하여

 

 

 

간격

이정하

 

1

그대와 나 사이에

간격이 있습니다.

 

엄청난 것도 아니면서

늘 그것은 일정하게 뻗어 있어

나를 절망케 합니다.

 

그러나 나는 믿습니다.

서로 다른 샘에서 솟아나온 물도

끝내는 한 바다에서 만남을

 

그대와 나

지금은 잠시 떨어져 있지만

나중에는 한 몸입니다.

우리 영혼은 하나입니다.

 

 

2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서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데

동의하는 일입니다.

 

내가 가져야 할 것과

내가 가져선 안 되는 것 사이의 간격을

서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안타까운 것.

가져선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자꾸만 마음이 기웃거려지는,

꼭 그 간격만큼 슬픈...

 

 

3

별과 별 사이는

얼마나 먼 것이랴.

그대와 나 사이,

붙잡을 수 없는 그 거리는

또 얼마나 아득한 것이랴.

 

바라볼 수는 있지만

가까이할 수는 없다.

그 간격 속에

빠져 죽고 싶다.

 

 

 

감옥

이정하

 

몸은 마음을 가두는 감옥이었네.

그대에게 가고 싶은 마음을 끝내 가두고야 마는

내 살아서는 결코 풀려날 수 없는

지긋지긋한 철창이었네.

 

그대, 내 삶의 하염없는 형량이여.

 

 

2

그대여, 아주 가끔은

당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당신이 쳐둔 철망, 그 좁은 곳을 나와

마음껏 걸어가보고 싶은 때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젠 알겠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탈옥할 수 없다는 것을.

당신의 감시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당신 밖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음을.

그것이 평생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하는 길임을.

 

나 스스로 종신형을 선고받아

당신의 무기수로 살아가는 나는.

 

 

 

갑자기 눈물이 나는 때가 있다

이정하

 

길을 가다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때가 있다.

따지고 보면 별일도 아닌 것에 울컥 목이 메어오는 때가 있는 것이다.

늘 내 눈물의 진원지였던 그대.

 

그대 내게 없음이 이리도 서러운가.

덜려고 애를 써도 한 줌도 덜어낼 수 없는 내 슬픔의 근원이여,

대체 언제까지 당신에게 매여 있어야 하는 것인지.

이젠 잊었겠지 했는데도 시시각각 더운 눈물로 다가오는 걸 보니

내가 당신을 사랑하긴 했었나 보다.

뜨겁게 사랑하긴 했었나 보다.

 

 

 

개화

이정하

 

그가 아무 말을 하고 있지 않아도

그의 입만 쳐다본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라.

 

그가 다른 곳을 보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얼굴 화장을 고치고 있다면

또한,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시선이 따라간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라.

 

꽃이 피는 순간을 기다려 보았는가.

굳게 오므린 꽃잎들이 서서히 부풀어오르는 순간,

그 순간은 결코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느니

눈 깜짝할 새 꽃망울은 터지고 마느니

 

사랑이란 그렇게 은밀히 온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비밀스럽게 온다.

어떤 한 사람 때문에,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의

존재 따위는 신경 써지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미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라.

죽을 때까지 뿌리 뽑을 수 없는

마음속 꽃나무 한 그루.

 

 

 

거짓 웃음

이정하

 

당신은 아는가?

당신의 아픔을 함께 나누지 못함이

내게는 더 큰 고통인것을.

당신은 나에게 위안을 주려

거짓 웃음을 짓지만

그걸 바라보고 있는 나는

더욱 안타깝다는 것을.

 

그대여, 언제나 그대 곁에는

아픔보다 더 큰 섬으로 내가 저물고 있다.

 

 

 

겨울나무

이정하

 

그대가 어느 모습

어느 이름으로 내 곁을 스쳐 지나갔어도

그대의 여운은 아직도 내 가슴에

여울 되어 어지럽다.

따라나서지 않은 것이

꼭 내 얼어붙은 발 때문만은 아니었으리.

붙잡기로 하면 붙잡지 못할 것도 아니였으나

안으로 그리움 삭일 때도 있어야 하는 것을.

그대 향한 마음이 식어서도 아니다.

잎잎이 그리움 떨구고 속살 보이는 게

무슨 부끄러움이 되랴.

무슨 죄가 되겠느냐.

지금 내 안에는

그대보다 더 큰 사랑

그대보다 더 소중한 또 하나의 그대가

푸르디푸르게 새움을 틔우고 있는데.

 

 

 

겨울 성별식 - 성스러운 이별, 그 하나

이정하

 

돌아오지 못하는 것들은 언제나 정직하다.

이름 붙여지지 않아 쉽사리 잊혀질지라도

그네들이 남겨둔 발자욱,

발자욱의 두께는 누구든지 가늠할 수 있다.

 

나는 이제 바람과 한 몸이 된다.

바람은 쉬지 않고 잠자지 않고 게으름피지 않는다.

미성년의 길목을 지나

추위보다 먼저 성년의 언덕에 다다르면,

내 삶의 아랫도리를 흥건히 적셔놓고

한쪽으로만 생각을 쏠리게 하는 공복의 겨울을 만난다.

 

눈이 내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기다린다.

 

또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꿈꾸는 자세가 서툴다.

미래는 무슨 색일까, 막연히 감회에 젖어 있기엔

지나온 흔적들이 너무 슬프고 맨살 맨몸이 너무 아리다.

내게 남은 행복이 있었더냐, 그것 또한 거두리라.

신이 귓속말로 조용히 속살일 때,

아아 난 이미 알았어야 했다.

살아 있기에도 용기가 필요한 것임을.

 

 

 

겨울, 저무는 황혼의 아름다움

이정하

 

보여주겠다.

분지의 벌판 끝에 서 있는

눈사람 같은 자세를 보여주겠다.

귀 기울여 줄 것.

누가 와서

이 쓸쓸함을 지적해다오.

저무는 황혼으로 내 사랑을

죄다 보여주겠다.

 

 

 

고난과 기다림 끝에

이정하

 

겉으로 보기에 불행해 보이는 사랑이

오히려 축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

사랑의 본모습은 원래 속살 깊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조개만 보고

그 속에 감추어진 진주는 보지 못하는 우매한 짓이 아닐까.

우리 삶이 그렇듯 사랑 또한 지금 이 순간이 전부는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이 괴롭고 힘들다고 해서 사랑을 포기하는 사람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포기하는 것과 같으며

또한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선물을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던져 버리는 바보나 마찬가지다.

사랑은 쉴새없이 노력하는 자의 것이다.

고난과 기다림 끝에 은빛 영롱한 진주가 탄생된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당장의 시련으로 인해 낙담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그 시련으로 인해

당신의 사랑은 더욱 알차게 영글 것임을 명심하라.

 

 

 

고독하다는 것은

이정하

 

날고 싶을 때 날 수 있는 새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피고 싶을 때 필 수 있는 꽃들은 또 얼마나 행복한가.

 

고독하다는 것은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내 마음을 고스란히 비워 당신을 맞이할 준비가

다 되어 있다는, 그래서 당신이 사무치게 그립고,

어서 오기만을 기다린다는 그런 뜻입니다.

 

 

 

고슴도치 사랑

이정하

 

서로 가슴을 주어라.

그러나 소유하려고는 하지 말라.

소유하고자 하는 그 마음 때문에

고통이 생기나니.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 두 마리가 서로 사랑했네.

추위에 떠는 상대를 보다못해

자신의 온기만이라도 전해주려던 그들은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상처만 생긴다는 것을 알았네.

안고 싶어도 안지 못했던 그들은

멀지도 않고 자신들의 몸에 난 가시에 다치지도 않을

적당한 거리에 함께 서 있었네.

비록 자신의 온기를 다 줄 수 없었어도

그들은 서로 행복했네.

행복할 수 있었네.

 

 

 

공간

이정하

 

눈이 내리네.

 

우리는 어느 한 점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눈은

지상의 모든 것을

덮어주고 가려주지만

한 사람의 공간만큼은

어찌할 수가 없네.

 

 

 

관심

이정하

 

사랑을 깨닫는 일은 아주 쉬운 일 같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마치 우리가 늘 접하고 있으면서도 있는지 없는지 무감각한 공기처럼.

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한 순간도 우리 곁을 벗어난 적이 없지만

깨닫지 않는 자에겐 존재하지 않는 묘한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처음 사랑을 접했을 때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그 이상의 희열을 느낀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보여 주는

관심과 애정에 대해 더없이 행복해하고 고마워한다. 하지만 왜

갈수록 덤덤해지는 것인지. 처음엔 아주 작은 것에도 감동하지만

나중엔 그것보다 더 큰 것에도 왜 시큰둥한 것인지. 그것이 바로

사랑을 멀어지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지금 바로

한 장의 엽서라도 쓸 일이다. 그래서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과 다름없는 마음을 비춰 주어야 한다.

새로운 사랑을 찾아 방황하지 않으려면.

 

 

 

궁금하다는 것

이정하

 

서로 다른 공간에서

각자 제 식대로 살다가

생전 처음 너를 맞했는데

 

그때부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지나온 너의 공간이

지나온 너의 시간이

지금, 어디를 가는 것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

 

그리고 제일 궁금한 것은,

너도 내가 궁금한가?

 

 

 

귀로(歸路)

이정하

 

돌아오는 길은 늘 혼자였다.

가는 겨울해가 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내 마음도 무너져왔고. 소주 한 병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시외버스를 타는 동안에

차창밖엔 소리 없이 눈이 내렸다.

그대를 향한 마음을 잠시 접어 둔다는 것.

그것은 정말 소주병을 주머니에 넣듯

어딘가에 쉽게 넣어둘 일은 못 되었지만

나는 멍하니 차창에 어지러이 부딪혀오는

눈발들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내 사랑이 언제쯤에나 순조로울는지.

오랫동안 우리가 기다려온 것은 무엇인지.

어디쯤 가야 우리 함께 길을 갈 수 있을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는

저 차창에 부서지는 한 송이 여린 눈발이었다.

무언가를 주고 싶었으나 결국 아무것도

주지 못한 채 돌아섰지만 그대여.

나 지금은 슬퍼하지 않겠다. 폭설이 내려

길을 뒤덮는다 해도 기어이 다시 찾아올 이 길을.

문득 고개 들어 보니 차창 너머

손을 흔들고 서 있는 그대.

그대 모습이 이토록 눈물겨운 것은

세상에 사랑보다 더한 기쁨이 없는 까닭이다.

버스는 출발했으나 내 마음은 출발하지 않았다.

비록 몸은 가고 있으나 나는 언제까지나

그대 곁에 머물러 있다.

 

 

 

그 겨울

이정하

 

가슴을 맞대며 살아야 한다.

그렇게 서로

온기를 나누며 살아야 하느니.

 

겨울이 추운 것은

서로 손 잡고 살라는 뜻이다.

손 잡아 마음까지

나누며 살라는 뜻이다.

 

그 겨울,

우린 서로 등을 돌렸네.

함께 가지 못하고

서로 딴 길을 걸어갔네.

그리하여 그 겨울은

내 삶에

가장 추운 날들이었네.

 

 

 

그는 떠났습니다

이정하

 

그는 떠났습니다.

떠남이 있어야 돌아옴도 있는 거라며 그는

마지막 가는 길까지 내게 웃음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왜 모르겠습니까,

그 웃음 뒤에 머금은 눈물을.

그의 무거운 발자국 소리를 가슴에 담으며

나는 다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이라도 뛰어가서

그대의 앞길을 막아서고 싶었지만

도저히 난 그럴 수 없습니다.

먼 훗날을 위해 떠난다는 그를

어떻게 잡을 수 있겠습니까.

입술만 깨물 수밖에.

내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동안

그의 모습은 점점 사라지고

그제서야 내 몸은 슬픔의 무게로

천 길 만 길 가라앉습니다.

그는 떠났고 나는 남아있습니다만

실상 남아있는 건 내 몸뚱어리뿐입니다.

내 영혼은 이미 그를 따라나서고 있었습니다.

 

 

 

그대가 가고 없어도 내 마음엔 이별이 없네

이정하

 

그대가 가고 없어도 내마음엔 이별이 없네.

내가 그대를 보내지 않는한 언제까지는 그대는 나의 사람.

곁에 없다고 해서 그대 향한 나의 마음은 식은 것은 아니기에

그대가 가고 없어도 내마음엔 이별이 없네

이 땅에 함께 숨 쉬고 있는 한 언제까지나 그대는 나의 사람.

훨훨 날아가 보렴.

이 세상 어디에 가거나 내가 먼저 닿아 있을 테니.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이정하

 

 

햇살이 맑아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비가 내려 또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전철을 타고 사람들 속에 섞여 보았습니다만

어김없이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았습니다만

그런 때일수록 그대가 더 생각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숱한 날들이 지났습니다만

그대를 잊을 수 있다 생각한 날은 하루도 없었습니다.

더 많은 날들이 지나간대도

그대를 잊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날 또한 없을 겁니다.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지만

숱하고 숱한 날 속에서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어김없이 떠오르던 그대였기에

감히 내 평생

그대를 잊지 못하리라 추측해 봅니다.

당신이 내게 남겨 준 모든 것들,

그대가 내쉬던 작은 숨소리 하나까지도

내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는 것은

아마도 이런 뜻이 아닐는지요.

언젠가 언뜻 지나는 길에라도 당신을 만날 수 있다면,

스치는 바람 편에라도 그대를 마주할 수 있다면

당신께,

내 그리움들을 모조리 쏟아 부어 놓고, 펑펑 울음이라도...

그리하여 담담히 뒤돌아서기 위해서입니다.

아시나요, 지금 내 앞에 없는 당신이여.

당신이 내게 주신 모든 것들을 하나 남김없이

돌려주어야 나는 비로소 홀가분하게 돌아설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아침엔 장미꽃이 유난히 붉었습니다.

그래서 그대가 또 생각났습니다.

 

 

 

그대가 지독히도 그리운 날

이정하

 

비가 내립니다.

그 동안 무던히도 기다렸던 비가

소리도 없이

내 마음의 뜨락에 피어 있는

목련꽃들을 적시고 있습니다.

 

이런 날엔

지독히도 그리운 사람이 있지요.

목련꽃처럼

밝게 웃던 그사람.

 

가까운 곳에 있더라도

늘 아주 먼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

 

그 사람도 지금쯤

내리는 저 비를 보고 있을는지.

내가 그리워하는 것처럼

그 또한 나를 그리워하고 있을는지.

 

설마

그럴 것 같지는 않아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듭니다.

내리는 비는

내 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파고듭니다.

 

 

 

 

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이정하

 

그대 굳이 아는 척 하지 않아도 좋다.

찬비에 젖어도 새잎은 돋고

구름에 가려도 별은 뜨나니

그대 굳이 손 내밀지 않아도 좋다.

말 한번 건네지도 못하면서

마른 낙엽처럼 잘도 타오른 나는

혼자 뜨겁게 사랑하다

나 스스로 사랑이 되면 그뿐

그대 굳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그대 굳이 아는 체하지 않아도 좋다 - - 정호승 님의 시 부치지 않은 편지를 읽고

이정하

그대 굳이 아는 체하지 않아도 좋다.

찬비에 젖어도 새잎은 돋고

구름에 가려도 별은 뜨나니

그대 굳이 손 내밀지 않아도 좋다.

말 한 번 건네지도 못하면서

마른 낙엽처럼 잘도 타오른 나는

혼자 뜨겁게 사랑하다

나 스스로 사랑이 되면 그뿐

그대 굳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그대 긴 그림자

이정하

 

잊을게요

그대가 말했지만

그게 아닌 눈빛을

내 어찌 모르겠습니까

애써 기다려

우리 가슴이 식을 수 있다면

애초에 그댈

만나지도 않았었겠지요

 

사랑했어요

그대가 말했지만

아무 대답 못 하고

난 떠나야 했습니다

우리 사랑은 왜

먼 산처럼

서로 다가 갈 수가 없는 것인지

깊어질수록

왜 가혹한 형벌이어야 하는지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팠습니다

 

애닯다

내 가는 길

묵묵히 돌아서는 내 뒷모습은

그대에게 어떤 상처로 남을까

그대를 떠나오면서

난 보았습니다

내가 떠난 빈자리

바로 그 자리에서 쓸쓸히

무너지는 그대 긴 그림자를!

 

 

 

그대 나를 떠났다 해도

이정하

 

그대여, 마지막이란 말은 결코 입 밖에 내지 마십시오.

세상의 그 많은 말들 중에 하필이면 마지막이란 말로

내 가슴에 상처를 내지 마십시오.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많이 남아있는

우리의 삶. 우리가 서로 다른 길을 걷는다 하더라도

살아가노라면 어쩌다 우연히 마주치는 경우가 있고,

또한 환경과 형편이 바뀌어 우리가 함께 길을

걸어갈 수도 있는 것이니 마지막이란 말로

우리가 다시 만날 그 가능성마저 박탈하지는 마십시오.

나는 마지막이란 말보다 더 절망스런 말은

아직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대, 나를 떠났다 해도 여전히 내 가슴에

뜨겁게 남아있는 사람이여.

 

 

 

그대는 담배 연기처럼

이정하

 

인이 박혔다는 말들을 하지요. 그래서 끊을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생각나는 것이 담배라고.

그랬습니다. 그대 또한 내 가슴 깊숙이 인이 박힌 것이어서

잊을려고 하면 외려 더욱 생각나곤 했습니다.

 

하기사 담배를 끊은 적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어쩌다 한 나절을 끊었다 치더라도

온 신경이 부르르 떨리고야 마는 금단현상 때문에

결국엔 두 손 들고 말았었지요.

그랬습니다. 내 목을 댕강 쳐버리기 전에는

결코 끊을 수 없는 담배처럼

그대 또한 내가 죽기 전까지는

결코 끊을 수 없는 인연인가 봅니다.

참으로 내 가슴 깊숙이 인이 박힌 것이어서

새벽녘, 잠 깨었을 때 그대부터 찾게 되는가 봅니다.

 

 

 

그대는 아는가

이정하

 

그대는 아는가, 만났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사랑했다는 것을

사랑했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그리워했다는 것을

 

그대와의 만남은 잠시였지만

그로 인한 아픔은 내 인생 전체를 덮었다.

바람은 잠깐 잎새를 스치고 지나가지만

그 때문에 잎새는 내내 흔들린다는 것을

 

아는가 그대. 이별을 두려워했더라면

애초에 사랑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이별을 예감했기에 더욱 그에게

열중할 수 있었다는 것을

 

상처 입지 않으면 아물 수 없듯

아파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네

만났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사랑했고

사랑했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여 진정 아는가.

 

 

 

그대를 내 안에 잡아두는 일

이정하

 

쓸데없는 생각인 줄 알면서도 자꾸만 그대와 헤어질 것 같은

망상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런 내 망상들이 씨앗이 되어

실제로 그런 일이 생기게 되면 어떡하나,

은근히 불안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대를 내 안에 잡아두는 일은

왜 이리 힘이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랑이 이런 거라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을.

그대가 언젠가 가버리고 말 사람이라면

끝끝내 내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말았을 것을.

이제 와 생각하니 모든 게 다 부질없습니다.

그러나 그대여, 그런 후회가 일 때마다 나는 생각합니다.

낙엽이 되어 떨어질 걸 뻔히 알면서도

여름날, 그 뜨거운 햇볕을 온몸으로 받아

열매 맺게 하는 나뭇잎, 그 섬세한 잎맥을 떠올립니다.

 

온갖 수고로움으로 열매 맺게 한 뒤

마침내 땅으로 떨어져 나무를 기름지게 하는 잎새.

그 잎새가 자양분이 되어, 발목을 덮어주는 담요가 되어

매서운 겨울을 견딜 수 있게 한다 생각하니,

만나고 헤어지는 일에만 매달리고 집착한 내가 부끄러웠습니다.

사랑을 저울질한 내 이기심의 잣대가 부끄러웠습니다.

 

 

 

그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이정하

 

그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은 늘 우울했습니다.

그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대가 나를 바라보는 그 슬픈 눈빛은

나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지상에서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수많은 것 중에 하나인 사랑.

아마도 그 사랑은 우리 두 사람만의 의지로 흘러가는 것은

정녕 아닌 듯합니다.

거미줄처럼 얽힌 세상의 많고 많은 일과,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이란 벽이

언제나 우리가 가는 길을 가로 막고 있으니,

그대가 힘겨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 그대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는 나였기에,

그런 그대에게 조그만 힘도 되어주지 못하는 나였기에

그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은 늘 우울했습니다.

쓸쓸한 바람만 내 마음 가득 불어왔습니다.

 

 

 

그대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은

이정하

 

그대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은

참 많이도 막막했습니다.

서로에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기 위해서라지만,

말이야 얼마나 그럴듯한가만은 내 마음은 그렇지 못해

한 길 물 건너듯 나를 훌쩍 건너가

저 멀리 냇물로 흘러간 그대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은

참 많이도 울적했습니다.

가을날, 제 할 일 다 하고 잎사귀는 떨어진다지만

우리 사랑은 꽃피우지도 못하고 떨어지는 잎새 같아

그대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은

참 많이도 슬펐습니다.

쉽사리 잊을 수 있기에 그대는 헤어지자 했겠지만,

그대야 그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난 차마 그럴 수 없어서

그대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은

참 많이도 난감했습니다.

이 세상 그만 살고도 싶었습니다.

 

 

 

그대를 위해서라면

이정하

 

내 그대를 위해 하루에 담배 한 개비씩

덜 피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내 그대를 위해 거창한 것은 해 주지 못하나

아름답고 든든한 배경은 되어 주지 못하나

아주 작은 티끌 하나로도

그대의 근심은 되지 않겠습니다.

 

그대가 피아노를 연주할 때

악보가 되어 주진 못하나

건반이 되어 소리를 내겠습니다.

건반마저 되지 못한다면

그대가 앉아 있는 의자라도 되겠습니다.

 

그대가 시집을 읽을 때

시는 되어 주지 못하나

안경이 되어 활자를 밝히겠습니다.

그마저 되지 못한다면

책 사이에 끼어 있는 책갈피라도 되겠습니다.

 

내 그대를 위해 작정한 모든 것이

그대 눈가의 잔주름 하나 지울 수 있다면

세상의 그 무엇이 된들 상관있겠습니까.

있는 듯 없는 듯 그대 곁에서

가까이만 있겠습니다.

내 그대를 위해 거창한 것은 해 주지 못하나

아름답고 든든한 배경은 되어 주지 못하나

 

 

 

그대를 절대 잊지 못하겠습니다.

이정하

 

그대여, 당신을 잊으리라는 나의 다짐이 비 내리는 오는 또 흔들리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는 나의 결심에 오늘도 여지없이 내 마음은 한 자리에 못 있습니다.

잊어야 하는 줄 알면서도 잊지 못하는 게 나의 병이라서, 이렇듯 쓸쓸히 비 내리면 나는 하염없이 그대 생각에 젖어 듭니다.

살아오는 동안 수없이 해본 이별이었지만 유독 그대와의 헤어짐은 가슴 아팠고, 괜찮을 수 있을 거라 막연히 예상했던 나의 판단이 이렇게 비 내리는 날이면 더욱 허물어집니다. 비 내리는 날이면 신경통이 도지듯 더욱 젖어드는 그대 생각에 내 온몸은 사랑의 신열로 떨리고, 그리면 그럴수록 그때 그대와 헤어질 수 있다 생각한 나의 오만이 원망스럽습니다. 산다는 것은 늘 이처럼 후회와 아쉬움의 연속이라 그대여, 비가 오는 이런 날이면 그대를 절대 잊지 못하겠습니다. 그대를 잊겠다곤 한 말, 물릴 수 있으면 물려 주십시오.

 

 

 

그대 속마음

이정하

 

다 알았다고 생각했다가도

끝내는 하나도 알지 못할 것 같은

그대 속마음.

 

그렇지만..., 다 보여요.

굳이 내색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아요.

몸은 거기 있지만

마음은 여기 와 있다는 것을.

 

 

 

그대 안에 내가 있습니다

이정하

 

내 안에 그대가 있습니다

부르면 눈물이 날 것 같은 그대의 이름이 있습니다

 

별이 구름에 가렸다고 해서 반짝이지 않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대가 내 곁에 없다고 해서

그대를 향한 내 마음이 식은 것은 아닙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사랑엔

늘 맑은 날만 있는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찌 보면 구름이 끼여 있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난 좌절하거나 주저앉지 않습니다

만약 구름이 없다면 어디서 축복의 비가 내리겠습니까

 

어디서 내 마음과 그대의 마음을 이어주는 무지개가 뜨겠습니까

 

 

 

그대에게 가는 수밖에

이정하

 

어찌합니까, 그대에게 가는 수밖에.

그대가 외면하더라도 일단은 그대에게 가는 수밖에.

내 가슴에 붙은 불은 그 무엇으로도 끌 수가 없으니,

오로지 그대 눈동자 속 그 깊은 사랑밖에 없으니

가서 사정해서라도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부터 잡을 수밖에.

내 가슴 모조리 타 잿더미만 남기 전에

그대 사랑 속에 풍덩 빠질 수밖에.

가서 빠져 죽어도 좋으리.

빠져 죽은 내 넋이 무주 공천을 떠돈다고 해도 좋으리.

그대 사랑 안에서라면.

 

 

 

그대에게 가자

이정하

 

가자, 밤열차라도 타고.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수 년 간 떠돌던 바람,

여지껏 내 삶을 흔들던 바람보다도 더 빨리.

어둠보다도 더 은밀하고 자연스럽게.

 

가자, 밤열차라도 타고.

차창가에 어리는 외로움이나 쓸쓸함,

다 스치고 난 후에야

그것들도 내 삶의 한 부분이었구나,

솔직히 인정하며.

 

가자, 밤열차라도 타고.

올 때가 지났는데도 오지 않으면

내가 먼저 찾아 나서자.

더 이상 기다리고만 있지 말고

두 팔 걷어부치고 대문을 나서자.

 

막차가 떠났으면 걸어서라도 가자.

늘 내 가슴 속 깊은 곳

연분홍 불빛으로 피어나는 그대에게.

가서, 기다림은 이제 더 이상

내 사랑의 방법이 아님을 자신 있게 말하자.

내 방황의 끝, 그대에게 가자.

 

 

 

그대와 마주 앉아 따뜻한 차 한잔

이정하

 

조용히 내려와 곱게 흩어지는 햇살들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아침입니다.

 

이러한 날이면 내 마음은 한 자리에 못 있지요.

하지만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욕구만큼이나

내게 부여된 책임이 있어 나는 어쩔 수 없이

내가 있는 자리에 주저앉고 맙니다.

 

지금쯤 그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 아침 커피를 한 잔 하면서

저 찬란하게 부서지는

아침 햇살을 감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나는 오늘 아침 햇살을 바라보며

그 조용한 반짝임이

꼭 그대의 편지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보잘 것 없는 나의 글이 힘이 된다니

그 말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지요.

 

사실은 그대의 편지가 도리어

저 고운 햇살처럼 나를 눈부시게 하는데,

오늘 같은 날이면 다른 것 모두 접어두고서

 

그대와 마주앉아

따뜻한 차 한 잔 마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이정하

 

눈을 뜨면 문득 한숨이 나오는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나

불도 켜지 않는 구석진 방에는

혼자 상심을 삭이는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정작 그런 날 함께 있고 싶은 그대였지만

그대를 지우다 지우다 끝내 고개 떨구는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그대를 알고부터 지금까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사랑한다

사랑한다며 내 한 몸 산산이 부서지는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할 일은 산같이 쌓여 있는데도

하루종일 그대 생각에 잠겨

단 한 발짝도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그런 날이 또 있었습니다

이정하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헤어지자 헤어지자 했는데

외려 더 선명히 떠오르는.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 마음 틈새로 자꾸만 보고 싶은.

그래서 가슴이 아픈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눈물이 나는

그런 날이 또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정하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치고 싶었던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잎보다 먼저 꽃이 만발하는 목련처럼

사랑보다 먼저 아픔을 알게 했던

현실이 갈라놓은 선 이쪽 저쪽에서

들킬세라 서둘러 자리를 비켜야 했던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까이서 보고 싶었고

가까이서 느끼고 싶었지만

애당초 가까이 가지도 못했기에 잡을 수도 없었던

외려 한 걸음 더 떨어져서 지켜보아야 했던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음악을 듣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무슨 일을 하든간에 맨 먼저 생각나는 사람

눈을 감을수록 더욱 선명한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기어이 접어두고

가슴 저리게 환히 웃던, 잊을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눈빛은 그게 아니었던

너무도 긴 그림자에 쓸쓸히 무너지던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살아가면서 덮어두고 지워야 할 일이 많겠지만

내가 지칠 때까지 끊임없이 추억하다

숨을 거두기 전까지는 마지막이란 말을

절대로 입에 담고 싶지 않았던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부르다 부르다 끝내 눈물 떨구고야 말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를 만났습니다.

이정하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반갑게 차 한 잔 할 수 있는

그를 만났습니다.

 

방금 만나고 돌아오더라도

며칠을 못 본 것 같이 허전한

그를 만났습니다.

 

내가 아프고 괴로울 때면

가만히 다가와 내 어깨를 토닥여주는

그를 만났습니다.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는 날이면

문득 전화를 걸고 싶어지는

그를 만났습니다.

 

어디 먼 곳에 가더라도

한 통의 엽서를 보내고 싶어지는

그를 만났습니다.

 

이 땅 위에 함께 숨 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마냥 행복한

그를 만났습니다.

 

 

 

그를 위해 내가 무엇을

이정하

 

참된 사랑이란 이기적이지 않네.

그 사랑은,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

자유롭게 만들어 주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때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있을 때

앞에 놓인 어려움들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네.

참된 사랑이란, 서로를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가슴을 결속시켜주는 것이기에.

성장할 수 있도록, 변화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서로를 위해서라면 헤어짐이라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용기를 주기에.

 

사랑한다고 말만 하지 말고

사랑받고 있다고 자만하지 말고

그를 위해 내가 무엇을 했고

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기를.

 

 

 

그를 위해서라면

이정하

 

내 그대를 위해 하루에 담배 한 개비씩

덜 피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내 그대를 위해 거창한 것은 해 주지 못하나

아름답고 든든한 배경은 되어 주지 못하나

아주 작은 티끌 하나로도

그대의 근심은 되지 않겠습니다.

 

그대가 피아노를 연주할 때

악보가 되어 주진 못하나

건반이 되어 소리를 내겠습니다.

건반마저 되지 못한다면

그대가 앉아 있는 의자라도 되겠습니다.

 

그대가 시집을 읽을 때

시는 되어 주지 못하나

안경이 되어 활자를 밝히겠습니다.

그마저 되지 못한다면

책 사이에 끼어 있는 책갈피라도 되겠습니다.

 

내 그대를 위해 작정한 모든 것이

그대 눈가의 잔주름 하나 지울 수 있다면

세상의 그 무엇이 된들 상관있겠습니까.

있는 듯 없는 듯 그대 곁에서

가까이만 있겠습니다.

내 그대를 위해 거창한 것은 해 주지 못하나

아름답고 든든한 배경은 되어 주지 못하나

행여 티끌 하나라도 근심은 되지 않겠습니다.

 

 

 

그리우면 가리라

이정하

 

그리우면 울었다. 지나는 바람을 잡고 나는 눈물을 쏟았다. 그 흔한 약속 하나 챙기지 못한 나는 날마다 두리번거렸다. 그대와 닮은 뒷모습 하나만 눈에 띄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들개처럼 밤새 헤매어도 그대 주변엔 얼씬도 못했다. 냄새만 킁킁거리다가 우두커니 그림자만 쫓다가 새벽녘 신열로 앓았다. 고맙구나 그리움이여, 너마저 없었다면 그대에게 가는 길은 영영 끊기고 말았겠지. 그리우면 가리라, 그리우면 가리라,고 내내 되뇌다 마는 이 지긋지긋한 독백, 이 진절머리 나는 상념이여

 

 

 

그리움이 길이 되어

이정하

 

비가 내립니다.

언제나 그렇듯 헤어질 시간은

빨리 다가오기 마련이지요.

그대도 아쉬운 듯 쓸쓸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애써 그 표정을 우산 속에 감추고 있었지만

우리 언제 다시 만날 것인가는

나는 일부러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대가 약속할 수 없다는 것,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다만 이 비가 언제 멈출 것인가

하늘만 올려다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약속할 수 없는 그대의 마음은 더욱 아프겠지요.

다시 만날 기약없이 헤어지는 당신인들

어디 마음이 편하겠어요.

하지만 난 믿고 있습니다.

약속은 없어도 우리 곧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내가 그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그대로 길이 되어

그대에게 이르게 해줄 것이라고.

이 비가 언제 그칠까는 장담 못하지만

언젠가는 그치게 마련이듯

우리 마음이 있는 한

당신과 나는 만나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비가 내립니다.

당신이 가고 난 지금,

비는 더 세차게 뿌립니다.

 

 

 

그리움이란

이정하

 

그리움이란

참 무거운 것이다.

 

어느 한순간 가슴이 꽉 막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게 할 만큼.

어떤날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짐스럽다 여기게 할 만큼.

 

따지고 보면 , 그리움이란

멀리 있는 너를 찾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남아 있는 너를 찾는 일이다.

너를, 너와의 추억을 샅샅이 끄집어내

내 가슴을 찢는 일이다.

 

그리움이란

참 섬뜩한 것이다.

 

 

 

그립다는 것은

이정하

 

 

1

그립다는 것은

아직도 네가

내 안에 남아있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지금은 너를 볼 수 없다는 뜻이다.

볼 수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 내 안 어느 곳에

네가 남아있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래서

내 안에 있는 너를

샅샅이 찾아내겠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래서

가슴을 후벼파는 일이다.

가슴을 도려내는 일이다

 

 

2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한데

왜 보고 싶은지 모르겠습니다.

오래 만나지 않아도 그 무엇 하나

느끼지 못하는 것이 없는데

왜 만나고 싶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립다는 것은

그저 가슴 한 쪽이 비어온다는 것,

당신이 내게 차면 찰수록

가슴 한쪽은 점점 더 비어온다는 것.

 

 

 

그저 그렇게

이정하

 

살아 있는 동안

또 만나게 되겠지요.

못 만나는 동안

더러 그립기도 하겠지요.

그러다가 또

무덤덤해지기도 하겠지요.

 

살아가는 동안

어찌, 갖고 싶은 것만 갖고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나요.

그저 그렇게

그저 그렇게 사는 거지요.

 

마차가 지나간 자국에 빗물이 고이듯

내 삶이 지나온 자국마다

슬픔이 가득 고였네.

 

 

 

그 저녁 바다

이정하

 

아는지요?

석양이 훌쩍 뒷모습을 보이고

그대가 슬며시 손을 잡혀 왔을 때

조그만 범선이라도 타고 끝없이 가고 싶었던

내 마음을,

당신이 있었기에 평범한 모든 것도

빛나 보였던 그 저녁 바다,

저물기 때문에 안타까운 것이

석양만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지요?

발길을 돌려야 하는 우리 사랑이

우리가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와야 하는 그것이

내 가장 참담한 절망이었다는 것을

저무는 해는 다시 떠오르면 그만이지만

우리가 다시 그곳을 찾게 될 날이 있을까

서로의 아픔을 딛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대로 영원히 영원히

당신의 가슴에 저무는 한 점 섬이고 싶었던

내 마음, 그 저녁 바다를

 

 

 

그해 겨울, 죽은 친구를 생각하며

이정하

 

바람이 불지 않았다.

왜 불지 않느냐 이유도 없이

그저 불지 않았다.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넘어가는 길목

언제가 우리 가슴을 적시는 것은

추위가 아닌 바람이었다.

눈이 내리지 않았다.

왜 내리지 않느냐 이유도 없이

그저 내리지 않았다.

 

썩지는 않겠구나.

한겨울 모진 추위에 꽁꽁 얼어붙어

썩어 문드러지지는 않겠구나

어느 하나 대수롭지 않은 것이 없었던

그해 겨울, 죽어 비로소 내 가슴에

정직하게 살아오는 사람이여.

 

나는 아직 숨 쉬고 있다.

악착같이 숨 쉬고 있다.

 

 

 

금지된 길

이정하

 

1

그 밤, 어둠에 가려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걸어오던 길이 길이 아니었음을.

 

지나고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세상이 그어둔 금을 넘어

우리가 걷고 있었다는 것을.

 

돌이켜 걷기엔 너무 멀리 왔습니다.

가도 가도 어둠뿐인 이 길을.

 

 

2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일이

결코 죄가 되지 말게 하소서

나로 하여 그대 가슴에

더러운 발자국 찍히게 하지 마소서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는 나에게

단 한 사람도 동행치 말게 하소서

설혹 멋모르고 따라온 사람이 있더라도

반드시 뒤돌아서게 하소서

뒤돌아서게 하소서

 

 

 

기다리는 이유

이정하

 

1

만남을 전제로 했을 때

기다림은 기다림이다.

만남을 전제로 하지 않았을 때

기다림은 더 이상 기다림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엔, 오지 못할 사람을 기다리는,

그리하여 밤마다 심장의 피로 불을 켜

어둔 길을 밝혀두는 사람이 있다.

 

사랑으로 인해

가슴 아파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오지 못할 걸 뻔히 알면서도

왜 바깥에 나가 서 있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왜 안 되는가를.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더라도

기다리는 그 순간만으로 그는

아아 살아 있구나 절감한다는 것을.

쓰라림뿐일지라도 오직 그 순간만이

가장 삶다운 삶일 수 있다는 것을.

 

 

2

기다리는 이유를 묻지 말라.

너는 왜 사는가.

 

지키지 못한 약속이라도 나는 무척 설레였던 것을.

산다는 것은 이렇게 슬픔을 녹여 가는 것이구나.

 

 

 

기다린다는 것

이정하

 

1

기약 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쓸쓸하고 허탈한 마음을 아는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막연히 기다리는 일밖에 없을 때

그 누군가가 더 보고 싶어지는 것을 아는가.

 

한 자리에 있지 못하고 서성거리다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라도 들릴라치면

그 자리에 멈추고 귀를 곤두세우는

그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을 아는가.

 

끝내 그가 오지 않았을 때

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미리 알았으면서도

왜 가슴은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인지,

온다는 기별이 없었는데도

다음에는

꼭 올 거라고 믿고 싶은 마음을 아는가.

 

그를 기다린다는 것은

내 마음에 그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

그를 위해 마음 한구석을 비워두는 일.

비워둔 자리만큼 고여 드는 슬픔을

아는가 모르는가, 그대여.

 

 

2

귀향하는 열차를 기다립니다.

그래, 산다는 것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기다린다는 것.

기다린다는 것은 또한

곁에 있건 없건 그 대상에게서

눈을 떼지 않겠다는 뜻.

일의 결과를 기다리고,

해가 뜨고 지길 기다리고,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다

끝내는 죽음마저 기다리는,

그리하여 기다리는 그 순간이 모여

우리 삶이 되질 않았던가.

그중에서도 내 가장 소중한 기다림, 그대여.

내 인생의 역에 기차가 거짓말처럼 들어와 서고,

그대가 손을 흔들며 플랫폼으로 내려설

그 눈부신 시간을 기다리네.

기다리고 또 기다리네.

그대여, 어서 오기를.

그래서 먼 여행 끝의 피곤함을

모두 내게 누여라.

 

 

 

기다린다는 것은

이정하

 

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대를 기다린다는 것은, 그것이 정말 바보스런 짓임을 모르진 않으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단지 그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대를 기다리는 일만이 오로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어서 그마저도 할 수 없으면 내가 살아가는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대와의 만남은 내가 살아온 날들에 비해

짧디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가 함께 나눈 기쁨과 슬픔은

내 생애 전부를 합친 것보다 더 깊었으므로

그대를 기다리는 일은 기다리는 일만으로 나는 행복합니다.

오랜 기다림 속에서도 지치지 않을 수 있는 까닭은

바로 당신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떠난 지 오래지만 아직 나의 가슴에 그대의 온기가 남아 있듯

언제까지나 그대는 부인할 수 없는 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의 나무

이정하

 

내가 한 그루 나무였을 때

나를 흔들고 지나가는 그대는 바람이었네.

 

세월은 덧없이 흘러

그대 얼굴이 잊히어 갈 때쯤

그대 떠나간 자리에 나

한 그루 나무가 되어 그대를 기다리리.

 

눈이 내리면 늘 빈약한 가슴으로 다가오는 그대.

잊혀진 추억들이 눈발 속에 흩날려도

아직은 황량한 그곳에 홀로 서서

잠 못 들던 숱한 밤의 노래를 부르리라.

 

기다리지 않아도 찾아오는 어둠 속에서

서글펐던 지난날의 노래를 부르리라.

 

내가 한 그루 나무였을 때

나를 흔들고 지나갔던 그대는 바람이었네.

 

 

 

기다림, 혹은 절망 수첩

이정하

 

그대 어디서 오고 있는가.

어디서 오기에 이토록 오래 걸리는가.

 

어리석고 어리석은 게 사랑이다.

오는 길만 제대로 알려줬더라면

이렇게 서로

안타까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그대 어디서 오고 있는가.

오는 길을 모르기에 마중을 나갈 수 없다.

 

 

 

기대어 울 수 있는 한 가슴

이정하

 

비를 맞으며 걷는 사람에겐 우산보다

함께 걸어줄 누군가가 필요한 것임을

울고 있는 사람에겐 손수건 한 장보다

기대어 울 수 있는 한 가슴이

더욱 필요한 것임을.

 

그대를 만나고서부터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대여, 지금 어디 있는가.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말도 못 할 만큼

그대가 그립습니다.

 

 

 

기원

이정하

 

1

이 한세상 살아가면서

슬픔은 모두 내가 가질 테니

당신은 기쁨만 가지십시오.

고통과 힘겨움은 내가 가질 테니

당신은 즐거움만 가지십시오.

 

줄 것만 있으면 나는 행복하겠습니다.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2

쉽게 사랑할 수 없었다면

잊는 것만이라도 쉬웁기를.

 

너를 만나고, 단 한 순간도

마음 편히 있은 적 없었으니.

늘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너를 바라보아야 했으니.

 

어쩌다 함께 있어도

시간은 또 왜 그처럼 빨리 흘러가는지.

서로 우연히 마주친 것이라면

그저 지나쳤으면 그뿐이었을 것을.

놓는다곤 했지만 결코 놓을 수 없는

우리 인연의 끝자락이여.

 

쉽게 사랑할 수 없었다면

잊는 것만이라도 쉬웁기를.

서로 비켜가야 하는 길이라면

돌아서는 일만이라도 쉬웁기를.

 

 

 

이정하

 

1

길에서 벗어나야

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듯

그대에게서 벗어나

그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았네.

 

끝이 보이지 않았지만

다시 가지 않을 수 없었네.

가도 가도 막막한 그 길에서

내 영혼은 다 부르텄다.

 

 

2

함께 가고 싶지만

당신은 언제나 저만치 가고 없습니다.

 

가만히 손을 흔들다

나는 까닭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길 위에서

이정하

 

길 위에 서면 나는 서러웠다.

갈 수도, 안 갈 수도 없는 길이었으므로,

돌아가자니 너무 많이 걸어왔고,

계속 가자니 끝이 보이지 않아

너무 막막했다.

 

허무와 슬픔이라는 장애물,

나는 그것들과 싸우며 길을 간다.

그대라는 이정표,

나는 더듬거리며 길을 간다.

그대여, 너는 왜 저만치 멀리 서 있는가.

왜 손 한번 따스하게 잡아주지 않는가.

길을 간다는 것은, 확신도 없이 혼자서 길을 간다는 것은

늘 쓸쓸하고도 눈물겨운 일이었다.

 

 

 

길을 가다가

이정하

 

때로 삶이 힘겹고 지칠 때

잠시 멈춰 서서 내가 서 있는 자리,

내가 걸어온 길을 한번 둘러보라.

편히 쉬고만 있었다면

과연 이만큼 올 수 있었겠는지.

 

힘겹고 지친 삶은

그 힘겹고 지친 것 때문에

더 풍요로울 수 있다.

가파른 길에서 한숨 쉬는 사람들이여,

눈앞의 언덕만 보지 말고

그 뒤에 펼쳐질 평원을 생각해보라

외려 기뻐하고 감사할 일이 아닌지.

 

 

 

길의 노래

이정하

 

1

너에게 달려가는 것보다

때로 멀찍이 서서 바라보는 것도

너를 향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겠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것보다

묵묵히 너의 뒷모습이 되어 주는 것도

너를 향한 더 큰 사랑인줄을 알겠다.

 

너로 인해 너를 알게 됨으로

내 가슴에 슬픔이 고이지 않는 날이 없었지만

네가 있어 오늘 하루도 넉넉하였음을..

 

네 생각마저 접으면

어김없이 서쪽 하늘을 붉게 수놓은 저녁해.

자신은 지면서도 세상의 아름다운 배경이 되어주는

 

그 숭고한 헌신을 보며,

내 사랑 또한 고운 빛깔로 마알갛게 번지는

저녁 해가 되고 싶었다.

 

마지막 가는 너의 뒷모습까지

감싸줄 수 있는 서쪽 하늘,

그 배경이 되고 싶었다.

 

 

2

길이 없어 갈 수 없다면

내 스스로 길이 되어 당신께 닿으리라.

심산유곡 험한 길 발 부르터 갈 수 없다면

그 사이 흐르는 물이라도 되어

당신께 가 닿으리라.

 

황량한 들판, 메마른 사막에선

바람이 되어 길을 가리라.

길동무 해줄 사람 아무도 없는

쓸쓸한 그곳에서 석양을 맞는다면

나는 또 그대로 노을이 되리라.

 

날마다 나는 길을 떠났네.

영영 닿을 수 없는 곳에 당신이 있고

그 사실을 내가 모르지 않아도

나는 길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네.

그냥 있을 수는 도저히 없었네.

부르면 슬픔으로 다가올 이름

내 안에 뜨거운 노래로 남아 있는 이여.

 

이 세상 어디에서 보고 있는가,

그리움으로 타올라

마지막 숨을 거두는 저 노을을.

 

 

 

꽃잎

이정하

 

그대를 영원히 간직하면 좋겠다는 나의 바람은

어쩌면 그대를 향한 사랑이 아니라

쓸데없는 집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대를 사랑한다는 그 마음마저 버려야

비로소 그대를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음을..

 

사랑은 그대를 내게 묶어 두는 것이 아니라

훌훌 털어 버리는 것임을..

 

오늘 아침 맑게 피어나는 채송화 꽃잎을 보고

나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꽃잎이 참으로 아름다운 것은

햇살을 받치고 떠 있는 자줏빛 모양새가 아니라

자신을 통해 씨앞을 잉태하는,

 

그리하여 씨앗이 영글면 훌훌 자신을 털어 버리는

그 헌신 때문이 아닐까요?

 

 

 

꽃잎의 사랑

이정하

 

내가 왜 몰랐던가

당신이 다가와 터뜨려 주기 전까지는

꽃잎 하나도 열지 못한다는 것을.

 

당신이 가져가기 전까지는

내게 있던 건 사랑이 아니니

내 안에 있어서는

사랑도 사랑이 아니니

 

아아 왜 몰랐던가

당신이 와서야 비로소 만개할 수 있는 것.

주지 못해 고통스러운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끝끝내

이정하

 

헤어지는 날까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헤어지는 날까지

차마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그대 처음과 같이 아름다울 줄을

그대 처음과 같이 영원할 줄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순결하게 무덤 가에 무더기로 핀

흰 싸리 꽃만 꺾어 바쳤습니다

 

사랑도 지나치면 사랑이 아닌 것을

눈물도 지나치면 눈물이 아닌 것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끝없이 높은, 쓸쓸한

이정하

 

이제 가을인가 봅니다.

창문 너머로 올려다보이는 하늘이

며칠 전과는 다르게 끝없이 높게만 보이니까요.

끝없이 높게만 보이는 그것,

어쩐지 쓸쓸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나는 작은 틈새가 두려웠다.

이정하

 

나는 작은 틈새가 두려웠다.

 

나는 불안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

어떤 날은

꿈 속에서도 불안했다.

 

며칠 못 보아도 불안했고

자주 만나도 불안했고

함께 있어도

마음이 안 놓였던 것은

그대를 못 믿어서가 아니다.

 

가면 갈수록 벌어지는

'현실'이란 틈새.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하는

그 작은 틈새가 나는 두렵다.

 

 

 

나로 인해 아파하지 마라

이정하

 

내가 그대에게 다가가는 것이

그대에게 아픔만 줄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차마 그대에게 다가설 수는 없지만

내 안에서 그대를 추억하고 내 안에서

그대를 그리워하는 일이야 어쩔라구요.

그리하여 아픔 또한 순전히 내 차지입니다.

 

그러니 그대가 마음 쓸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 혼자 그리워하다가 나 혼자 괴로우면 그만.

그대는 그저 아무 일 없다는 듯 무덤덤하십시오.

그대가 나로 인해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그대가 나로 인해 행여라도 고민스러웁다면

그 자체가 내겐 더 괴로울 뿐이니

그저 내 삶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한 사람 있었구나.

그렇게만 여겨 주십시오.

나로 인해 절대 아파하지 마십시오.

 

 

 

나만 괴로운 것이 아니다

이정하

 

사랑으로 인해 괴로운 사람이여,

나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를.

내색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그는 나보다 더한 고통을 참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기만 괴롭다고, 왜 자기에게만 이런 고통을 내리느냐고

하늘을 원망하지 말 것.

 

원래 사람에게 배당된 고통의 양은

눈곱만치도 차이가 나는 게 아니다.

다만 받아들이는 쪽의 자세에 따라 차이가 날 뿐.

괴로움이란 일정한 무게가 있는 것이 아니라서,

받아들이는 쪽의 자세에 따라 가벼울 수도 무거울 수도 있다.

괴로워하는 모습을 가능하면 그에게 보이지 말자.

그것으로 인해 그는 더 괴로울 수도 있으니.

 

 

 

나무

이정하

 

1

사랑은 장미꽃과 같은 것이어서

사랑스러운 눈길을 받는 동안은 활짝 피어나나

그 눈길을 거두어 버렸을 때는

힘없이 시들어 버린다는 것을.

 

마음 속에 사랑의 나무를

한 그루 키워본 사람은

그 어렵고 힘겨움에 쉽게 '나무 심기'

매달리지 않을 것이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사랑에 눈 뜬 사람' 이 심는 나무는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것임을.

 

 

2

나무는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닙니다.

안에서 또 다른 그대를

잉태하고 있을 뿐.

 

나무는

떨어져 있는 것 같아도 그게 아닙니다.

뿌리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를 향해 뻗어나가

서로 부둥켜안고 있지 않습니까.

 

제자리를 지키며

사랑을 나누는 나무들에게

()은 한 가지 보상을 주었습니다.

더 가까이 다가갈 순 없지만

더 멀어지지도 않게끔.

 

 

 

나무는

이정하

 

외롭지 않네.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지만

더 멀어지지도 않았으므로.

 

겉으로야 무심한 척 시침 떼지만

그를 향해 뻗어 있는 잔뿌리를 보라.

남들 모르는 땅속 깊이

서로 부둥켜안고 있지 않은가.

 

 

 

나무와 비

이정하

 

오랜 가뭄 속에서도 메말라 죽지 않은 것은

바로 너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수많은 나뭇가지와 잎새를 떨궈내면서도

근근히 목숨줄을 이어가는 것은

언젠가 네가 반드시 올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대여, 지금 어디쯤 오고 있는가.

껍데기가 벗겨지고 목줄기가 타는 불볕 속에서도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도 가시지 않은 나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이 자리에 서 있다.

 

 

 

나뭇잎 하나

이정하

 

사람의 가슴 속에는 누구든지 사랑이란 나뭇잎 하나를 키우고 있지요.

그리하여 그들은 늘 자신의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 주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메마른 가슴 속에선 그 나뭇잎이 푸르게 자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먼저

이정하

 

참 이상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을 한없이 챙겨주고 싶어지거든요.

말하자면,그 사람에게

한없이 마음을 써주고 싶은 것이지요.

이건 그 사람이 잘 먹던 음식인데,

이건 그 사람에게 어울릴 만한 옷인데... .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내 자신보다 먼저

그 사람 생각이 떠오르게 됩니다.

 

그 사람도 나를 그렇게 생각할까,

가끔씩 자문해보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지요.

내 그대를 향한 마음,

그 마음 흐르는 대로 따르면 그뿐.

 

그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기쁠 때나 즐거울 때보다

힘겨워하고 슬퍼할 때

그의 곁에 있어 주어라.

 

그에게 더 이상 줄 것이 없노라고 말하지 말고

그를 위해 마지막 남은 눈물마저 흘려주어라.

그러면 그는 세상 모든 것을 잃는대도

결코 낙망하지 않을 것이다.

실의에 빠진 사람을 일어설 수 있게 하는 힘,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나의 관심은

이정하

 

그대를 알고부터 나는 많은 것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관심은 오로지 '그대' 밖에 없었으므로.

 

그대가 즐겨 듣는 음악, 그대가 자주 가는 카페,

그대가 좋아하는 영화... 그렇듯 그대에게 매달리다 보니

자연히 나의 것은 등한시될 수밖에 없었고,

점차 내 주변의 것들은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나는 사랑이라 생각했습니다.

나의 것보다 그대를 위한 것들에 더 마음이 쓰이는 것.

 

사랑이 그런 거라면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해도 그대의 사랑만 얻을 수 있다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찌합니까.

이런 내 마음을 그대는 도통 몰라주고 있으니.

 

 

 

나의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이정하

 

가을이 오면, 그리하여 내 마음에 쓸쓸한 낙엽이 쌓이면,

나는 나의 이름으로 그대를 호명합니다.

부르다 부르다 끝내 눈물 떨구고야 말 그대 이름.

내 눈물 속에 더욱 빛나는 '그대'라는 이름 하나.

 

 

 

나 혼자서만

이정하

 

그대는 가만히 있는데

나만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그대는 무어라 한 마디도 하지 않는데

나만 공연히 그대 사랑을

가늠해보곤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그대를 ㄷ고

나 혼자서만 부지런히 사랑과 이별 사이를

들락날락 했던 것입니다

부족하면 채우려고 애를 쓰지만

넘치면 그저 묵묵히 있을 수 있다는 걸

그대 그윽한 눈빛은 내게 가르쳐 주었지요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 사실은

더욱 큰 사랑임을

어쩔 수 없이 난 인정해야 했지요

 

 

 

난 너에게

이정하

 

난 압니다.

네 가슴속에 차지하고 있는 나의 흔적이

아직은 보잘것없음을.

그러나 난 또 믿고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흐르면

내 모든 노력들이 헛되지 않아

너의 몸속을 가득 채울 맑은 피로

내가 떠돌게 될 것을.

 

난 압니다.

네가 좋아하는 연분홍빛 노을,

난 너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연분홍빛 노을로 네 가슴에 남게 될 것을.

 

 

 

날마다 내 마음 바람 부네

이정하

 

내 사는 곳에서 바람 불어 오거든

그대가 그리워 흔들리는 내 마음인 줄 알라

내 사는 곳에서 유난히 별빛 반짝이거든

이 밤도 그대가 보고 싶어

애태우는 내 마음인 줄 알라.

 

내 사는 곳에서 행여 안개가 밀려 오거든

그대여, 그대를 잊고자 몸부림치는

내 마음인 줄 알라.

내 아픈 마음인 줄 알라.

 

 

 

남지를 생각하며

이정하

 

그 아득한 저녁나라,

볼 수 없는 바람이 분다.

 

분다는 것은

누구의 일생이 저문다는 것일까.

 

아름답게 살기 위하여

아름답게 살기 위하여

아름답게 살아남기 위하여

 

그리하여

훗날 죽음마저 부끄러워지기를

 

신의 문 밖에서

빌고 또 빌었지.

 

 

 

낮고 깊게 묵묵히 사랑하라

이정하

 

깊고 참된 사랑은 조용하고

말이 없는 가운데 나오나니

진실로 그 사람을 사랑하거든

아무도 모르게

먼저 입을 닫는 법부터 배우라.

 

말없이 한 발자국씩!

그가 혹시 오해를 품고 있더라도

굳이 변명하지 마라.

그가 당신을 멀리할수록

차라리 묵묵히 받아들이라.

 

마음 밑바닥에 스며드는 괴로움은

진실로 그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니

그가 당신을 멀리할 때는

차라리 조금 비켜 서 있으라.

 

그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를 위해

외려 두 손 모아 조용히 기도하다 보면

사랑은, 어디 먼 곳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마음속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낮은 곳으로

이정하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고여들 네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나가지 않게 할 수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내가 그대를 보내지 않는 한

이정하

 

내 살아오는 동안 그대와의 만남은

짧디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내가 그대를 통해 느껴야 했던 기쁨과 슬픔은

내 생애 전부를 합친 것보다 더 크고 깊었습니다.

이런 글을 남기기 위해 우리의 사랑은 그토록 아팠던 것인지,

그대가 없는 내 가슴의 빈 공간은

아직도 그대의 온기가 남아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설사 그대가 다른 사람의 사람이 된다고 해도

언제까지나 그대는 부인할 수 없는 나의 사랑입니다.

내가 그대를 보내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그대는 나의 사랑입니다.

 

 

 

내가 길이 되어 당신께로

이정하

 

가지려고

소유하려고 했던 사랑이 아니었는데

그 사랑은 지금 내게서 멀어져만 가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이해가 아닌 배려라고 믿고 있었는데

사랑하면서 오해도 있었고

그래서 아파해야만 했습니다.

 

사랑이란 늘 엉키는 실타래처럼

오해하고, 그것이 아니었음을 알고 난 후에도

사랑이 집착도 될 수 있음에의 확인으로 멀어져가야만 하는 것인지.

 

집착이 아니었는데

그냥 바라보고 싶은 것이었는데

한 가지만을 바라지 않고 여러 가지를 바랬고

궁금해지는 것들이 하나둘씩 늘어갈수록

그에게로 가는 문은 닫히더이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이정하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당신이 가지지 않은 것 때문에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기쁨보다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슬픔 때문에

나는 당신을 더 사랑합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당신이 안고 있는 상처 때문에

나는 당신을 더 사랑합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흠이라고 여기고 있는 그것을

나는, 바로 그것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이렇듯 당신을 감싸주기 위해섭니다.

그러니 당신은 내게

가지고 있지 않은 것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설사 남보다 훨씬 못한 걸 가졌더라도

그것 때문에 슬퍼하지 마십시오.

무엇보다 당신은,

누구도 가질 수 없는 나의 사랑을

가지지 않았습니까.

그런 당신을,

그런 당신의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

 

 

 

내가 빠져 죽고 싶은 강, 사랑, 그대

이정하

 

저녁 강가에 나가 강물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습니다.

때마침, 강의 수면에 노을과 함께

산이 어려 있어서

그 아름다운 곳에 빠져 죽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것은

가끔 사람을 어지럽게 하는 모양이지요.

내게 있어 그대도 그러합니다.

"내가 빠져 죽고 싶은 이 세상의 단 한 사람인 그대"

그대 생각을 하며 나는 늦도록

강가에 나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 순간에도 강물은 쉬임없이 흐르고 있었고,

흘러가는 것은 강물뿐만이 아닌 세월도,

청춘도, 사랑도,

심지어는 나의 존재까지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지나온 길마저도 덧없이 흘러서

나는 이제 돌아갈 길 아득히 멀고

 

 

 

내 가슴 한쪽에

이정하

 

세상의 울타리 안쪽에는

그대와 함께 할 수 있는

자리가 없었습니다.

스쳐갈 만큼 짧았던 만남이기도 했지만

세상이 그어둔 선 위에서

건너갈 수도 건너올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에

쓸쓸하고 어둡던 내 가슴 한쪽에

소망이라는 초 한 자루를 준비합니다.

그 촛불로

힘겨운 사랑이 가져다준 어두움을

조금이라도 밀어내주길 원했지만

바람막이 없는 그것이 오래 갈 리 만무합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따뜻한 자리를 마련해둔다는 것.

아아 함께 있는 사람들은 모를겁니다.

 

오지 않을 사람을 위해

의자를 비워둘 때의 그 쓸쓸함을.

그 눈물겨움을.

 

세상이라 이름 붙여진 그 어는 곳에도

그대와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대가 있었기에 늘 나는

내 가슴속에 초 한 자루를 준비합니다.

건너편 의자도 비워둡니다.

 

 

 

내가 웃잖아요

이정하

 

그대가 지금 뒷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언젠가는 돌아오리라는 것을 믿기에

나는 괜찮을 수 있지요.

 

그대가 마시다가 남겨 둔 차 한 잔

따스한 온기로 남아 있듯이

그대 또한 떠나 봤자

마음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을 수 있지요.

 

가세요 그대, 내가 웃잖아요.

너무 늦지 않게 오세요.

 

 

 

내가 할 수 없는 한 가지

이정하

 

세상엔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 한 가지만을 꼽으라면

그건 바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대는 나보고 사랑하지 말라 하시지만

그럴수록

나는 그대에게 더 목매단다는 것을

 

물은 물고기가 없어도 아무렇지 않게

흘러갈 수 있지만

물고기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음을

 

당신 대수롭지 않겠지만

나는 그럴 수 없는 그 차이가

내 슬픔의 시작인 것을

 

그러니 그대는 그저 모른 척해 주십시오

이 세상에 발붙이고 있는 한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대를 사랑하는 일이 내겐 곧

숨 쉬며 살아가는 일이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뿐

이정하

 

이제 그대를 그냥 두어 보리라 작정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서 지금까지의 일이 까맣게 잊혀진다 해도,

언젠가는 내가 그대를 진정 사랑했다는 마음을

그대가 알아주리라 믿어 보겠습니다. 그때까지

그대가 건강하기만을 빌고 있겠습니다.

 

건강히 살아 있다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는 날 있겠지요.

내가 몸져눕지 않고 그대가 찾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서 있다면 그런 날은 기어이 찾아오리라 믿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대가 돌아왔을 때

낯선 기분이 들지 않도록 모든 것을 제 자리에 놓아두는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뿐, 그때까지

그대여 내내 행복하십시오.

 

 

 

내게 있어 첫 계절인 이 가을날

이정하

 

보았는지요, 오늘 아침 자욱한 안개 속에 숨어 있던

아직은 설익은 가을을.

 

바쁜 거라고, 몹시 바쁜 거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혹 무슨 일이 생긴 거나 아닌지 쓸데없는 걱정을 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지금까지 보내온 글 중에서

가장 짧은 그 글이 내게는 가장 반가운 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많이 바쁘다니 난 많이 기쁩니다.

내 짧은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어떤 일에 아주 많이 바쁠 때

그것은 곧 아주 많은 행복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았거든요.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할 일이 많다는 건 행복한 일이지만

건강보다 더 큰 행복이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사람들은 누구나 사계절을 이야기할 때

. 여름. 가을. 겨울 순으로 말하지만

나는 가을. 겨울. . 여름 순이 더 좋습니다.

내게 있어 첫 계절인 가을,

요즘의 이 계절이 난 몹시도 사랑스럽습니다.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이정하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사뭇 설레는 밤, 나는

그대에게 언제나 나를 못 잊도록

내가 당신의 마음을 가져왔습니다.

 

좋거나 나쁘거나 그대의 마음은

늘 나와 함께 있으니 오로지 나의 것.

설레고 타오르는 내 사랑에서

그 어느 천사도

당신을 구해 내진 못할 겁니다.

 

 

 

내 마음의 빈터

이정하

 

가득 찬 것보다는

어딘가 좀 엉성한 구석이 있으면

왠지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낍니다

 

심지어는 아주 완벽하게

잘생긴 사람보다는

외려 못생긴 사람에게

자꾸만 마음이 가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난 나의 많은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어지지요

 

조금 덜 채우더라도

우리 가슴 어딘가에

그런 빈터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밑지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가 조금 어리 숙할 수는 없을까요

 

그러면 그런 빈터가

우리에게 편안한 휴식과

생활의 여유로운 공간이 될 터인데

 

언제까지나

나의 빈터가 되어주는 그대

그대가 정말 고맙습니다

 

 

 

내 마음의 악마

이정하

 

내 불행의 시작은

너를 알고부터 비롯된 게 아니고

너를 소유하고자 하는 데서부터

비롯되었네.

 

아아 어찌 용서받을까.

내 탐욕의 마음이여, 몸뚱어리여.

진실로 진실로 너를 가질 수 있음은

진정 너로부터 떠나는 데

있는 것인데.

 

 

 

내 모든 것 그대에게 주었으므로

이정하

 

슬픈 사랑아

내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네

내 가진 것은 빈손뿐

더 이상 그대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네

세상 모든 것이 나의 소유가 된다 하더라도

결코 그대 하나 가진 것만 못한데

슬픈 사랑아

내 모든 것 그대에게 주었으므로

더 이상 그대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네

주면 줄수록 더욱 넉넉해지는

이 그리움밖에는

 

 

 

내 몫의 아픔

이정하

 

내가 그대에게 다가가는 것이

그대에게 아픔만 줄 뿐이라는 것을 아네.

그래서 차마 다가설 수는 없지만

그대를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일이야 어쩔라고

그리하여 아픔 또한 순전히 내 차지.

그대 몫이 아니네.

그러니 그대가 마음 쓸 일은 하나도 없네

나 혼자 그리워하다가 나 혼자 괴로우면 그뿐,

그대는 그저 아무 일 없다는 듯 무덤덤하라.

그저 스치고 지나가는 한 사람 있었구나, 여길 뿐

나로 인해 아파하지 마라.

나로 인해 절대 눈물 흘리지 마라.

 

 

 

내 사랑의 방식은

이정하

 

그대여, 당신을 떠나보내고

나는 잠시나마 당신을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없이 불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틀린 생각이었습니다.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했다면

잃을 것이 결코 없기에.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데

동의하는 일일 것입니다.

나와 당신과의 간격,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당신과 당신 자신의 차이든

혹은, 당신을 사랑하는 나와 나 자신과의 차이든

당신을 사랑함에 있어 그 거리를 수긍하고

유지하는 데 동의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대를 붙잡는다 한들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가까울수록 아픔만 커지는 것이 우리 사랑이라면

때론 저만큼 물러서 있는 것도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이라는 것을.

 

그저 당신을 만나 행복했었다고,

다 채우지 못한 절반의 사랑이었을지라도

전혀 사랑하지 않은 것보다 나은 것이었으니

그대여, 이것이 설혹 잘못된 방식이었다 할지라도

당신을 사랑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내 삶은 더없이 빛날 수 있었다고.

 

 

 

내 삶에 가장 소중한 의미로

이정하

 

서해 바다를 찾았습니다.

그대와 함께라면 얼마나 좋을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하는 내 머리 위로

몇 마리의 갈매기가 날았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듯 갈매기들은

수평선 저 너머로 몇 개의 점이 되어 사라져 갔습니다.

저렇게 나도 이 세상 너머로 사라질 수 있다면,

완벽하게 사라져

사람들의 기억에서조차도

남아있지 않을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이

또 내 마음에 쓸쓸하게 고여왔습니다.

울적할 때마다 찾게 되는 서해바다.

싸늘한 바람이 나의 온몸을 휘감고 돌지만

나는 아무런 느낌 없이

오로지 그대 생각에만 젖어 있습니다.

내 발밑에서 밀려갔다 밀려오는 거센 파도처럼,

내 삶의 한가운데를 밀려왔다 밀려가 버린 그대.

하지만 이제 난 괜찮을 수 있습니다.

해변의 모래밭을 쓸쓸히 걸으며 괜찮을 수 있다고

내심 다짐해 봅니다.

짜디짠 소금기를 모래밭에 남겨두고 파도가 밀려가듯이,

그대 또한 내 가슴에 남겨 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이 비록 쓰라림뿐일지라 해도

내 가장 소중한 추억으로,

내 가장 소중한 의미로

그대는 나의 삶에 아름답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여명으로

이정하

 

길을 가다보면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다.

담벼락 귀퉁이에라도 털썩 주저앉아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내 삶의 모퉁이에서 그대를 만났다.

내 어깨를 두드려주며, 어서 일어나 봐요 하던 그대.

참고 기다리면 밤이 지나고 새날이 밝아오듯

내 인생의 여명을 환히 비춰 주던 그대.

 

그대는 지금 어디 있는가.

다시 한번 내 삶을 밝혀줄 순 없는가.

 

 

 

내 삶의 주소는 정확한가

이정하

 

당신은 일 년에 몇 통의 편지를 남에게 보내는지?

그리고 자신이 받아보는 편지는 몇 통쯤 되는지?

그립고 보고 싶던 사람으로부터 어느 날 날아온

한 장의 편지로 인해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 듯이

어쩔 줄 몰라 하던 날은 없었는지?

'이 세상 누구보다도 소중한 그대' 라고 씌어진 편지 말입니다.

 

편지는 주소를 정확하게 써야만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에게 주소를 가르쳐 줄 때 틀리지 않도록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가르쳐 주게 마련입니다.

그렇듯 우리는 누구나 자기가 살고 있는 집주소는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삶의 주소는 어찌 보면

잊어버리고 지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집주소만 외우고 있을 게 아니라 한번쯤 지금 서 있는

내 삶의 주소는 정확한가 살펴봐야겠습니다.

어쩌면 내가 엉뚱한 곳에 서 있으므로 해서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들을 영영 못 받아 볼 수도 있으니까.

 

 

 

내 속에서 빛나는 그대

이정하

 

어둠음 내가 되겠습니다

그대는 내 속에서

빛나는 별이 되십시오

 

잎줄긴 내가 되겠습니다

그대는 나를 딛고

영롱한 꽃으로 피십시오

 

멀리서 지켜보겠습니다

내 아픈 모습 그대가 볼 수 없도록

그러나 그댄 영원히 내 속에 있습니다

 

 

 

내 안에 그대가 있습니다

이정하

 

내 안에 그대가 있습니다.

부르면 눈물이 날 것 같은 그대의 이름이 있습니다.

별이 구름에 가렸다고 해서 반짝이지 않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대가 내 곁에 없다고 해서

그대를 향한 내 마음이 식은 것은 아닙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사랑엔 늘 맑은 날만 있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찌 보면 구름이 끼여 있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난 좌절하거나 주저앉지 않습니다.

만약 구름이 없다면 어디서 축복의 비가 내리겠습니까.

어디서 내 마음과 그대의 마음을 이어주는 무지개가 뜨겠습니까.

 

 

 

내 작고 초라한 사랑 이야기

이정하

 

()

한때는 나에게도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지요.

사랑한다 사랑한다 결코 이야기할 수 없는.

누군들 사랑하는 여자가 없었겠냐만은 한때 나에게는

온몸을 다 바쳐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지요.

사랑한다 사랑한다 한 번도 말한 적 없는.

 

 

1

그대는 늘 내게 사랑보다 먼저 아픔으로 다가왔지요.

꽃이 채 피기도 전에 꽃잎이 떨어지는 그런 식이었습니다.

내 사랑을 받아 줄 수 없는 그대의 현실을 미리 알고 있었으므로

그대를 사랑하면서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던 나는,

그대와 사랑을 나누지도 못했기에 헤어질 수도 없었던 나는

그냥 멀리서 그대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이리도 가슴 아픈 일인가,

그대를 알고서부터 나는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2

꼭 말을 해야 상대방의 마음이 짐작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대가 내 사랑을 느끼지 못하진 않았을 테지요.

날마다 내 마음을 떼어내 상처투성이인 이 가슴을

모른다하진 않겠지요. 사랑하지 않는 것이 피차에게 이롭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내 마음이 닿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솟아나는 그대 생각을 난들 어찌합니까.

 

내가 그대를 원하면 원할수록 더욱 슬픔이 커질 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맺지 못할 사랑이라면

보내고 잊어야 하는 것이 옳다는 것도 모르진 않습니다.

잊혀지지 않는다 치더라도 잊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것도

지극히 상식에 속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왜 난 그 단순한 진리를 망각하고

아직껏 그대를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인지 참으로 모를 일입니다.

사랑이란 이렇게 모르는 것투성이입니다.

 

 

3

그대는, 그대 자신 때문이 아니라 그대가 안고 있는 현실 때문에

내 사랑을 받아줄 수 없다 했습니다.

나를 위해서라도 그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나는 느꼈습니다. 그렇게 말할 때의 그 슬픈 표정을.

 

그대여,

그런 당신이기에 나는 더욱 당신을 놓칠 수 없습니다.

내 사랑을 원하면서도 당신이 처한 현실 때문에,

당신이 책임져야 할 그 어떤 부분 때문에

나의 사랑을 받아 줄 수 없다면

내가 그대를 어찌 보낼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책임져야 할 사람들을 위해 자신은 희생하겠다는

그대의 그 고운 마음씨를 알고서야

어찌 당신을 멀리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신은 어찌돼도 그만, 상대방을 위해 떠나려는 당신을

나는 이제 전보다 더 사랑하겠습니다.

당신의 아픔을 밟고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지금,

내 비록 큰 힘은 없을지라도 그대가 힘겨울 때

그대가 잠시 앉아 쉴 수 있는 나무의자가 되어주는 것이

지금 나의 가장 큰 소망입니다.

 

 

4

사랑이란,

꼭 가까이 다가서서 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함께 영화를 보고, 마주앉아 차를 마셔야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는 말 못할 겁니다.

숲속 길을 둘이 걸으며 도란도란 정겹게 대화를 나누는 것만이

사랑의 전부는 아니라고 믿습니다.

 

세상에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더욱 도타운 사랑이 있습니다.

서로 만나기는 어려워도 매일 만난 것처럼

그대를 가슴에 안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으나 그 떨어져 있는 거리가

아무 문제가 아닌 사람이 있습니다.

만나지 못해도,

가까이 있지 못해도 내가 그대를 더욱 사랑할 수 있는 까닭은

그대의 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마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늘 그대의 마음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5

세상에는, 사랑이 있어서 더없이 행복한 사람도 있겠지만

때로는 슬픔만 안고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사랑하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그대여, 나는 그대를 알고부터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대여,

난들 왜 그대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루에도 수백 번씩 그대 가까이에 다가가고 싶지만

먼 산에 지는 노을처럼 물끄러미 바라만 볼 수 밖에 없는 것은,

내가 그대에게 가까이 다가감으로 해서

그대에게 또 하나의 짐이 되기 싫은 까닭입니다.

지금 그대가 지고 있는 짐만도 벅찰 것인데 나마저 짐이 된다면

그대로 폭싹 주저앉을까 두려운 까닭입니다.

그리하여 그대여, 나는 날마다 그대에게 부는 바람입니다.

가까이 다가가도 하나도 무겁지 않은,

날마다 내 마음 거기에 머무는 바람입니다.

 

 

6

봄이 왔다고 했습니다. 나는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 새 담벼락마다 개나리가 새움을 틔웠다고 들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진달래, 철쭉, 목련 등도

화사하게 꽃망울을 터뜨리겠지요.

유난히 눈이 많았던 올겨울도 그렇게 지나갔군요.

그대 얼굴 한번 못 보고 올겨울도 그냥 그렇게 지나갔군요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이정하

 

그대여

손을 흔들지 마라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떠나는 사람은 아무 때나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겠지만

남아 있는 사람은 무언가.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는가.

 

기약도 없이 떠나려면

손을 흔들지 마라

 

 

 

너를 보내고

이정하

 

너를 보내고,

나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찻잔은 아직도 따스했으나

슬픔과 절망의 입자만 내 가슴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어리석었던 내 삶의 편린들이여,

 

언제나 나는 뒤늦게 사랑을 느꼈고

언제나 나는 보내고 나서 후회했다.

 

그대가 걸어갔던 길에서 나는

눈을 떼지 못했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는데 툭 내 눈앞을 가로막는 것은

눈물이었다.

 

한줄기 눈물이었다.

 

가슴은 차가운데 눈물은 왜이리 뜨거운가.

 

찻잔은 식은 지 이미 오래였지만

내 사랑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내 슬픔,

내 그리움은 이제부터 데워지리라.

 

그대는 가고,

나는 갈 수 없는 그 길을

나 얼마나 오랫동안 바라보아야 할까

안개가 피어올랐다.

 

기어이 그대를 따라가고야 말

내 슬픈 영혼의 입자들이.

 

 

 

너를 보내지 않기 위해

이정하

 

그대가 근심하는 것은 무엇인가?

삶은 나에게 가르쳤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당신의 아픔을 딛고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고.

자신은 어찌돼도 그만 나를 위해 떠나려는 당신을

내 어찌 보낼 수 있으리.

 

내 너에게 아무 할 말이 없다.

그저 붙잡은 손 놓으면 안된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이제 나는 알겠다.

내가 싸워야 할 상대는 그대가 아니라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임을.

내 사랑을 받아줄 수 없는 그대의 현실,

그것과 한판 거창하게 싸움을 벌여야 할 것이라고.

너를 보내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부터 먼저 제압해야 하겠노라고.

 

 

 

너무 깊이 박혔다

이정하

 

마음 속에 너무 깊이,

너무 오래 숨겨두면

자신도 그걸 꺼내기가 힘이 든다.

내 안에 너무 깊숙이 박혀 있어

이젠 내 자신조차도

끄집어낼 수 없는 이여,

 

강물이 바다를 향해 가듯

내 당신을 향한 마음을 아는가.

세상엔 수많은 길들이 나 있었지만

오로지 내겐 당신을 향한

한 길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가.

세상에 존재하는 그 수많은 것들이

내 오직 당신을 통해서만

보이고, 느껴지고, 숨 쉬어진다는 것을

그대 정녕 아는가, 모르는가.

 

 

 

너무 오래이다

이정하

 

떠나기만 하면 그대는

너무 오래입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합니다.

그대여, 어서 오세요.

기다림으로 난 목이 마릅니다.

 

 

 

너 없는 세상

이정하

 

이상한 일이지요, 당신을 생각하면

왜 쓸쓸함이 먼저 앞서오는 것인지.

따스한 기억도 많고 많았는데

그 따스함마저 왜 쓸쓸하게 다가오는 것인지.

 

혼자 걷다 보면 어느덧

눈에 익숙한 거리로 들어설 때가 있지요.

모든 건 다 제자리에 있는데

단지 당신만이 없는 이곳,

 

바람이 불었습니다.

낙엽이 떨어졌습니다.

당신이 없는 나의 세상은 그저

이렇게 텅 비어만 가는가 봅니다.

오랫동안 나의 마음 당신을 향해 있었고

그보다 더 오래 당신을 잃고

나는 슬펐습니다.

 

 

 

너에게 가는 것만으로도

이정하

 

처음에 어린 새가 날갯짓을 할 때는

그 여린 파닥임이 무척 안쓰러웠다.

하지만 점점 날갯짓을 할수록

더 높은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삶도 꾸준히 나아가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풍성해질 수 있다는 것일 게다.

 

맨처음 너를 알았을 때

나는 알지 못할 희열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곧

막막한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내가 사랑하고 간직하고 싶었던 것들은

항상 멀리 떠나갔으므로.

 

하지만 나는 너에게 간다.

이렇게 가다보면 너에게 당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내 마음이 환희로 가득 차오르는 건

너에게 가고 있다는 그 사실 때문이었다.

너에게 닿아서가 아니라

너를 생각하며 걸어가는 그 자체가 내겐

더없이 행복한 것이었으므로.

 

 

 

너의 모습

이정하

 

산이 가까워질수록

산을 모르겠다.

네가 가까워질수록

너를 모르겠다.

 

멀리 있어야 산의 모습이 또렷하고

떠나고 나서야 네 모습이 또렷하니

어쩌란 말이야, 이미 지나쳐 온 길인데.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 먼 길인데.

 

벗은 줄 알았더니

지금까지 끌고 온 줄이야.

산그늘이 깊듯

네가 남긴 그늘도 깊네.

 

 

 

네가 좋아하는 영화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이정하

 

아는가, 네가 있었기에

평범한 모든 것도 빛나 보였다.

 

네가 좋아하는 영화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네가 웃을 때 난 너의 미소가 되고 싶었으며

네가 슬플 때 난 너의 눈물이 되고 싶었다.

 

네가 즐겨 읽는 책의 밑줄이 되고 싶었으며

네가 자주 가는 공원의 나무의자가 되고 싶었다.

 

네가 보는 모든 시선 속에 난 서 있고 싶었으며

네가 간혹 들르는 카페의 찻잔이 되고 싶었다.

때로 네 가슴 적시는 피아노 소리도 되고 싶었다.

 

아는가, 떠난 지 오래지만

너의 여운이 아직 내 가슴에 남아 있는 것처럼

나도 너의 가슴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싶었다.

 

사랑하리라 사랑하리라며

네 가슴에 저무는

한 줄기 황혼이고 싶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정하

 

새를 사랑한다는 말은

새장을 마련해

그 새를 붙들어놓겠다는 뜻이 아니다.

 

하늘 높이 훨훨 날려 보내겠다는 뜻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이정하

 

누군가를 사랑할 때

자신은 비어 있어야 합니다.

그때 사랑은 비로소 두 사람 사이를 흐릅니다.

 

 

 

누군가를 원하고 있기에

이정하

 

어디에나 바람은 분다.

사람의 가슴속에서 부는 바람은

누구를 향한 갈망이 아닐까.

누군가를 원하고 있기에

내 안에서 이는 흔들림.

기어이 등을 떠밀려

한 자리에 못 앉아 있게 하는

 

바람이 불었다.

언젠가 스쳐 지나간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안에 난

내 모든 것을 풀어놓았다

 

 

 

이정하

 

아무도 없는 뒤를

자꾸만 쳐다보는 것은

혹시나 네가 거기 서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이다.

그러나 너는 아무 데도 없었다.

 

낙엽이 질 때쯤

나는 너를 잊고 있었다.

색바랜 사진처럼 까맣게 너를 잊고 있었다.

 

하지만 첫눈이 내리는 지금,

소복소복 내리는 눈처럼

너의 생각이 싸아하니 떠오르는 것은 어쩐 일일까.

그토록 못잊어 하다가 거짓말처럼

너를 잊고 있었는데.

 

첫눈이 내린 지금...

자꾸만 휑하니 비어 오는 내 마음에

함박눈이 쌓이듯 네가 쌓이고 있었다.

 

 

 

눈 내리는 겨울밤, 꿈의 형상학

이정하

 

1

어느 누가 아름다운 꿈 꾸지 않으리

내 이런 불면의 밤에도

속절없이 눈은 내린다.

씨팔씨팔 잠도 없이 흩날리며

내린다는 것은

늘 목숨처럼 가엾고도 아름다운 일이었지.

 

누가 죽었길래 이토록 폭설이 내리는 것일까.

그리하여 그대 태어난 기슭으로 돌아갈 것이지만

이 시대의 한 끄트머리는 늘 메마르다.

누구는 바람부는 날의 풀잎처럼 흔들리며 사랑하며

쉽게 살아가라고 말하지만 눈발이여

지금은

슬픔을 슬퍼하고 아픔을 아파할 때가 아니다.

말해주마 눈발이여

내게도 한때는 행복한 시절이 있었노라고.

행복에 겨워

운명조차 잊고 있었던 때가 많았노라고.

수정되고 수정되어 불투명한 우리들의 꿈

끝으로 갈수록 왜 이렇게 우울해야 하는 것인지

동전 소리만 짤랑짤랑 꿈 속을 가득 채우는 것인지

생각하는 불면의 밤이 깊어질수록

돌아가고 싶었다. 유년의 그 향기롭던

크레용 냄새 속으로

한 조각 크레용이 되어 문드러지고 싶었다.

 

 

2

또다시 생애의 불꽃들이 하염없이 젖고

언 땅 속에 박혀 있는 흰 뿌리들만이

부활을 꿈꿀 수 있을 때

살 속에 뼈를 묻고 낮게 엎드려 있는 땅

그 싸늘한 입김 속에서 새 한 마리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새가 찾는 그리운 땅은 어디에 있을까

그 안식의 땅도 눈발에 젖고 있는지

지상의 어디에도 새의 발자국은 찍혀지지 않고

울음소리만 어둠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3

내린다에 대해 눈은 얼마나 평등할까

내리는 흰 눈 사이 그 작은 거리가 만드는 어둠

지워버릴 듯 지워버릴 듯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실상 허위적거리는 것은 우리들뿐이었다.

이렇게 폭설이 내리다보면 이 땅은

하나의 커다란 무덤이 될지도 모르는데

숨구멍을 틔워줄 사람은 늘 결석한다.

 

- 눈은

죽은 사람의 상처를 감싸주지만

지나온 핏자욱만은 남겨두고 싶었다.

 

 

4

살아 숨쉬는 자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싶다.

어둡고 깊은 잠에 취해 있는 온갖 것들을 깨워

쉬임없이 흘러가게 할 채찍소리가 듣고 싶다.

죽은 자들이여, 녹슨 시간의 수레바퀴들이여

눈 내리는 불면의 밤

그대 지워진 이름들을 부르면 나는 왜

늘 목이 마르는가.

 

 

 

눈물

이정하

 

날마다

나는 말라가고 있다.

눈물이 흐른다.

물기만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

내 영혼의 가벼워짐.

그런데

몸은 왜 이리 무거운가.

왜 자꾸만 가라앉는가.

 

 

 

눈물겨운 너에게

이정하

 

나는 이제 조금만 사랑하고

조금씩만 그리워하기로 했습니다

한꺼번에 사랑하다 그 사랑이 다해 버리기보다

한꺼번에 그리워하다

그 그리움이 다해 버리기보다

조금만 사랑하고 조금씩만 그리워해

오래도록 그대를 내 안에 두고 싶습니다

아껴가며 읽는 책, 아껴가며 듣는 음악처럼

조금씩만 그대를 끄집어내기로 했습니다

내 유일한 희망이자 기쁨인 그대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이 없어지고 지워지지만

그대 이름만을 내 가슴속에

오래오래 영원히 남아있길

간절히 원하기에

 

 

 

눈 오는 날

이정하

 

눈 오는 날엔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는 게 아니라

마음과 마음끼리 만난다.

그래서 눈 오는 날엔

사람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딴 데 가 있는 경우가 많다.

 

눈 오는 날엔 그래서

마음이 아픈 사람이 많다.

 

 

 

눈이 멀었다

이정하

 

어느 순간,

햇빛이 강렬히 눈에 들어오는 때가 있다.

그럴때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잠시 눈이 멀게 되는 것이다.

 

내 사랑도 그렇게 왔다.

그대가 처음 내 눈에 들어온 순간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나는 세상이 갑자기 환해지는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로인해

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될줄

까맣게 몰랐다.

 

 

 

늘 곁에 있는 것들의 소중함

이정하

 

행복이라는 나무가 뿌리를 내리는 곳은

결코 비옥한 땅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떻게 보면

절망과 좌절이라는 돌멩이로 뒤덮인

황무지일 수도 있습니다

 

한 번쯤 절망에 빠져보지 않고서,

한 번쯤 좌절을 겪어보지 않고서,

 

우리가 어찌

행복의 진정한 값을 알수 있겠습니까.

 

절망과 좌절이라는 것은,

우리가 참된 행복을 이루기 위한

준비 과정일 뿐입니다.

 

따라서 지금 절망스럽다고

실의에 잠겨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지금 잠깐 좌절을 겪었다고 해서

내내 한숨만 쉬고 있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일입니다.

 

더 큰 행복을 위해,

참된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아닙니까.

 

돌멩이를 부지런히 들어내야

옥토를 만들 수 있듯이

말입니다.

 

절망과 좌절이라는 것이

설사 우리의 삶에

바윗덩어리와 같은 무게로

짓눌러 온다 하더라도

 

그것을

무사히 들어내기만 한다면,

 

그 밑에는 틀림없이

눈부시고 찬란한 행복이라는 싹이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늘 이만큼의 거리를 두고

이정하

 

늘 이만큼의 거리를 두고

당신 곁에서 있습니다

늘 이만큼의 거리를 두고

당신의 행복을 빌어줍니다

 

당신 생각하는 내마음 깊어져

집착으로 얼룩지지 않도록

내 간절한 그리움도

그만큼의 거리를 남겨 둡니다

 

그러나 다음 세상 당신을 만난다면

그 누구에게도 어떤 누구에게도

당신을 보내지 않을 겁니다

 

그 어떤 거리도 당신과 나 사이에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간절히 원하여

가질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원하고 갈망하여도

가질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버리는 것 보다 힘겹다는 것을

이젠 알 것 같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어가나 봅니다

세월 속에 묻혀가나 봅니다

 

그래도 변치 않는 사랑 하나,

변치 않는 꿈 하나 간직하고

살아가는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정하

 

그대를 만났습니다만

기다리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그대를 기다렸습니다만

그리워하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그대를 그리워했습니다만

슬퍼하는 날이 더 많아졌습니다.

 

훗날, 지나오고 나서 보니

그것이 사랑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한번 내디디면 점점 발이 빠져

다시는 헤어 나오지 못할.

 

 

 

다섯 페이지의 행복

이정하

 

고교 시절, 아주 아끼던 책이 한 권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유달리 그 책을 아꼈던 것은

책에 담긴 글 때문이 아니라 먼 곳에서 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예쁘게 포장해 보내준 그때 그 사람의 손길 때문인 것도 같습니다.

어쨌거나 난 그 책을 늘 몸에 간직하고 다니면서도

다 읽지는 못했습니다. 책을 선물 받던 그 날,

이미 반 이상이나 읽어버린 나는

다음날부터 아껴가며 몇 장씩만 읽어갔기에.

읽어 넘긴 책장이 두꺼워질수록 그 책을 읽는,

아니 그 사람의 손길을 느끼는 행복이 줄어드는 것만 같아

내 안타까움도 더해갔고요.

 

그러던 어느 날, 다섯 쪽만 남겨놓은 그 책은

내가 그 책을 선물한 사람과 통화를 하는 동안 공중전화기 뒤로

넘어가 버렸습니다. 워낙 사람들이 붐비는 역 앞이었는지라

손가락도 잘 닿지 않는 책을 꺼내기 위해

전화부스를 차지하고 있을 수는 없었고,

전화부스 뒤쪽에서 전화기와 부스 유리 사이에 갇힌

그 책만 멍하니 바라보다 나는 힘없이 돌아서야 했습니다.

 

다음 날 새벽, 길다란 집게를 들고 그곳까지 달려갔지만

이미 그 책이 사라진 뒤였습니다.

그때의 허탈감이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다섯 페이지만큼의 행복이

항상 내 뒤에 남아있는 것 같아

오히려 푸근해지기도 했으니 참 우스운 일이지요?

 

 

 

다시 별

이정하

 

사랑이여,

아득히 멀기만 한 사랑이여

내가 여기서 서성이고만 있는 것은

그대 곁에 갈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대를 가까이 하지 못함은

그러한 까닭이 있기 때문이니

그 이유 또한 묻지 마라

그 이유가 바로

내 괴로움의 근본이니

 

 

 

다시 섬진강변에서

이정하

 

어딜 가더라도 우리끼리 모여 살자.

함께 있으면 서러움은 조금 덜할 테지.

살다 보면 이같이 하늘이 푸를 때

섬진강변 그 고운 그늘이 그리운 날도 있을 테지.

그럴 때면 개망초야

몰래 부둥켜안고 실컷 울음 울자꾸나.

우리 눈물로 고향의 풀씨를 키우고

꽃을 피워 여기 한 숲을 이루자꾸나.

 

내 먼저 죽으면 살점은 태우고

남아있는 뼈 곱게 갈아 강물에 뿌려다오.

물고기라도 살찌워, 그 살찐 물고기 따라

고향 땅에 갈 수 있겠지.

그때까지 만이라도 개망초야

우리 함께 살자, 우리 함께 살자.

 

 

 

다시 안개

이정하

 

막상 달려가 보면 너는 어디에도 없었다.

언제나 나는 한발 늦었다.

 

움직이지 마.

내 생애를 걸고 너를 지명 수배한다.

 

 

 

다짐

이정하

 

나는 이제

한쪽 눈만 뜨고

한쪽 귀만 열고

한쪽 심장으로만

숨 쉴 것이네.

 

내 안에 있는

당신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아

 

다른 한쪽은 모두

당신 것이야.

 

 

 

단풍잎 사랑

이정하

 

언젠가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안에 난 내 모든 것을 풀어놓았습니다

가을날 단풍잎에게 가서 물어 보십시요

낙엽이 되어 떨어질 걸 뻔히 알면서도

왜 그 순간까지 자기 몸을 남김없이 태우는지

 

 

 

단 하나의 사랑

이정하

 

이 땅 위

당신과 같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내가 나눌 사랑도

단 하나.

 

당신이 아니고선

그 어떤 것도

사랑일 수 없으니.

 

 

 

단 하나의 행복

이정하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당신으로서는

별 의미 없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알아주십시오.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마술,

오직 하나의 힘,

오직 하나의 행복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주는 일은 받는 일보다 행복하고,

사랑하는 일은 사랑받는 일보다 아름다워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을.

 

 

 

당부

이정하

 

차라리 나를 모른 척해 주십시오.

가능하다면 싸늘하게 외면해 진저리쳐지도록 만들어 주십시오.

외려 그 편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한결 덜 괴롭겠습니다.

 

 

 

당신만이

이정하

 

잘 지내시리라 믿습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이곳에 없는 건 바로 당신뿐입니다.

밖이 훤히 보이는 창문에서 내려다보면

모든 것이 다 그대로인데...

온갖 것이 다 그대로 제자리에 있는데

다만 당신만이 내 곁에 없습니다.

 

 

 

당신을 보내고 난 후에야

이정하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는지

당신을 보내고 난 후에야 나는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떠나고 난 자리에 바람 불고, 비 내리고,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꽃은 피지 않았습니다.

낙엽 지고, 어둠이 내려 앉았지만

해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가까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며칠 못 보아도 괜찮을 줄 알았습니다.

영영 간다길래 견뎌낼 줄 믿었습니다.

하지만, 나를 떠나간 당신을

나는 끝내 떠날 수가 없었음을.

당신은 나를 버릴 수 있었지만

나는 끝내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을.

내 안에 너무 깊숙이 박혀 있어

이제는 나조차도 꺼내기 힘든 당신,

 

아아 하필이면 나는

당신을 보내고 나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는지,

단 하루도 당신 없이 살아낼 수 없다는 것을.

 

 

 

당신을 향한 그리움이

이정하

 

당신을 향한 그리움이

커피 향처럼 피어오르는 날에는

 

세상을 향한

나의 창문을 닫아 버리고

오직 당신을 향해

내 마음의 문을 엽니다.

 

당신을 향한 그리움이

빨간 꽃봉우리처럼

내 마음의 잎새마다

가득히 맺혀 있는 날에는

 

세상을 향한

나의 창문을 모두 닫아 버리고

오직 당신을 향해

내 영혼의 촛불을 높이 밝혀 듭니다.

 

당신이 아니면

그 누구도 치유할 수 없는

나의 병은 사랑입니다.

 

당신이 아니면

그 누구도 치유할 수 없는

나의 병은 그리움입니다.

 

당신을 향한 그리움이

쏟아지는 햇살처럼 눈부신 날에는

나는 음악을 듣고 를 씁니다.

 

당신을 향한 내 영혼의 노래를...

 

 

 

당신의 생각을 안고

이정하

 

퇴근길, 육교 한 모퉁이의 작은 꽃집 앞을 지나치다가

다알리아 한 단을 샀습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나

, 꽃집 앞에 서서 봉우리가 작지만 노란빛이 유난스런 국화나,

향내가 짙은 후리지아나, 꽃잎이 많지 않지만 하얀색에

자줏빛이 감도는 다알리아 등을 감상하는 일을 즐겨합니다.

주인 아가씨의 눈치를 보며 그냥 돌아서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어쩌다 나는 오늘처럼 그것들을 한 다발씩 사오기도 합니다.

 

그것들을 안고, 그러면 늘 떠오르는 그대의 생각을 안고

천천히 집으로 걸어오는 동안 어느 새 꽃송이들은

아련한 추억이 되어 내 가슴에 파고들었고,

나는 그 따스하면서도 쓸쓸한 추억들을 창가의 작은 꽃병에

꽂아두었습니다. 향긋한 내음이 방 안 가득 번지는 걸

가만히 바라보다 문득 나는 볼 수 있었습니다.

책상 위에 곱게 놓여진 하얀 봉투. 눈처럼 흰 봉투.

거기에 씌어진 그대의 글씨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다알리아 꽃향기보다 더 짙은 기쁨을.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정하

 

창가사이로 촉촉한 얼굴을 내비치는 햇살같이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려주며 이마에 입맞춤하는

이른 아침같은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드러운 모카 향기 가득한 커피 잔에

살포시 녹아 가는 설탕같이 부드러운 미소로 하루시작을

풍요롭게 해주는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분분히 흩어지는 벗꽃들 사이로

내 귓가를 간지럽히며 스쳐가는 봄바람같이

마음 가득 설레이는 자취로 나를 안아주는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메마른 포도밭에 떨어지는 봄비 같은 간절함으로

내 기도 속에 떨구어지는 눈물 속에 숨겨진 사랑이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내 삶 속에서 영원히 사랑으로 남을..

어제와 오늘.. 아니 내가 알 수 없는 내일까지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돌아가고 싶은 날들의 풍경

이정하

 

1 - 시간

시간이 유수처럼 흘러간다는 말이

실감나는 요즘 입니다.

세상은 급변하고 나 또한 하루하루를 워낙 바쁘게 지내다 보니

도대체 지금 내가 무얼 하며 살고 있는지조차도 모를 지경입니다.

꽃이 피었는가 싶더니 그 꽃이 진 지도 이미 오래,

날이 바뀌고 계절이 바뀌는 것도 무감각할 정도로

시간은 쉬임없이 흘러갑니다.

어떤 때는 더럭 겁이 나기도 합니다.

나는 여기 가만히 있는데

시간만 저 멀리 혼자 가버리는 것 같아서......

 

 

2 인생이라는 길

우리는 흔히 인생을 길에다 비유하곤 합니다

한번 들어서면 가지 않을 수 없는 길 같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가다 보면 예기치 않았던 장애물을

만날 수도 있고 순풍에 돛을 단 듯 순조로운 길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이 인생이라는

길에는 동반자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이므로 이정표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자기 혼자서 그리고

자신의 힘만으로 걸어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길인 것입니다

하지만 행여 두렵다고 떨지는 마십시오

내딛는 발걸음만 힘차다면

그 길엔 새소리와 온갖 아름다운 꽃들이 반겨 줄테니까말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인생이라는 길은 순풍에 돛단 듯이 순조로운 길만은 아닙니다

중간에 방향을 잃어 헤매기도 하는데 그 속에서

좌절과 실패를 경험하면서 한숨과 실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길은 어찌 됐든

우리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중도에 포기하는

일은 있을 수도 없고 또한 그런 일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험준한 고개가 있으면

힘들이지 않고 내려갈 수 있는 내리막길도 있는 법입니다

힘들다고 해서

주저앉아 있으면 길은 점점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숨을 쉬고 있는 동안에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것을 감내하며 묵묵히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그런 어려움들도 다

인생의 한 부분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겁니다

 

 

3

거울은 벽에만

걸려 있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도 있습니다.

바로 양심이라는

거울 말입니다.

벽에 걸린 거울을

자주 보는 것처럼

자기 마음의 거울,

즉 양심을 자주 들여다보면

그 사람은 더더욱

아름다워질 텐데요.

 

 

4

가고 싶었습니다.

 

내 삶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몰라도

가는 동안,

나는 주변의 모든 것들을

음미하고 싶었습니다.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달라지는 세상,

그 세상의 숨소리 하나라도

빠뜨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5 - 사랑이라고 불리는 그것

사랑이 다른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은 그것이 커지기 시작하면

자신조차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송두리째

던져주고 싶은 충동......

사랑에 빠진 사람은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해야 합니다.

사랑이라고 불리는 그것, 두 사람의 것이라고 보이는 그것은

사실 홀로 따로따로 있어야만 비로소 충분히 전개되어

마침내는 완성될 수 있는 것이기에.

사랑이 오직 자기 감정 속에 들어 있는 사람은 사랑이 자신을

연마하는 일이 됩니다. 서로에게 부담스런 짐이 되지 않으며

그 공간과 거리에서 끊임없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

사랑에 빠질수록 혼자가 되십시오. 두 사람이 겪으려 하지 말고

오로지 혼자 겪으십시오.

 

 

6

좀 늦게 가는 것이

창피한 일은 아닙니다.

사막의 낙타는 천천히 가기에

무사히 목적지에 닿을 수 있지 않습니까.

무엇이든 과정이 있는 법이고

그 과정을 묵묵히 견뎌낸 사람만이

결국에는 값진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7

사랑이 있는 눈을 보았습니다.

눈동자가 떨리며 누군가를 향해

끊임없이 흔들리는 그 마음을 보았습니다.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눈은 아름답습니다.

열 마디의 말보다 서로의 눈을 맞추며 느낄 수 있는 마음,

그 눈으로 인해 알 수 있고

또 감출 수 없는 마음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습니다.

 

 

 

돌아가는 길

이정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대에게 가는 길이 아니라

그대를 돌아서 가는 길이었습니다.

갈수록 그대와 멀어지는 길.

차마 발걸음 떨어지지 않는 그 길을

나는 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왜

그대에게 가는 길을 모르겠습니까.

마음으로는 수천 번도 더 갔던 길이라

눈을 감고도 훤히 알 수 있었지만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저만치 멀리 서 있는 당신

당신은 아시는지요?

그대에게 가지 못해 슬픈 게 아니라

그대에게 갈 수 없어 슬펐다는 것을.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빈 몸뚱어리로

그저 발만 내딛고 있었습니다.

 

 

 

동행

이정하

 

돌이켜보면 나는 늘 혼자였다

사람들은 많았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언제나 혼자였다

기대도 싶은 때 그의 어깨는 비어 있지 않았다

잡아줄 손이 절실히 필요할 땐

그는 저만치서 다른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 산다는 것은 결국

내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 을 확인하는 일이다

비틀거리고 더듬거리더라도 혼자서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들어선 길 이상 멈출 수도 가지 않을 수도 없다

같이 걸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것처럼 내 삶에 절실한 것은 없다

 

 

 

되풀이할 수 없는 사랑

이정하

 

가까이 있을 때는 몰랐습니다.

외려 그대가 가고 난 뒤에야

그것이 사랑인 줄 알았습니다.

같은 꿈을 되풀이해서 꿀 수 없는 것처럼

내 사랑도 되풀이해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아아 그대가 멀리 떠나간 뒤였습니다.

나는 왜 항상 너무 늦게 느끼는지,

 

언제나 지난 뒤에 후회해 보지만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모두가 다

내가 희망하는 반대편에 있었습니다.

 

그대가 곁에 있을 때는 덤덤하더니

막상 그대가 가고 없으니

왜 이리 그리운지요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내 주변에 많으나

막상 내가 원하는 것은

항상 멀리 떨어져 있는

이 이율배반적인 삶,

허망하고 허망하여라.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 어쩌면 삶은,

사랑은 깨어진 꿈처럼

허망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언뜻 가져 보았더랬습니다.

 

 

 

뒤늦게서야

이정하

 

가까이 있을 때는 몰랐습니다.

떠나고 난 뒤에야 난 그것이

사랑인 줄 알았습니다.

 

같은 꿈을 되풀이해서 꿀 수 없는 것처럼

사라도 되풀이해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그대가 멀리 떠난 뒤였습니다.

 

나는 왜 항상 늦게 느끼는지요.

언제가 지난 뒤에 후회해 보지만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대가 먼저 길을 떠났고,

뒤늦게 내가 부지런히 따라가 보았지만

이미 그대의 모습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뒤늦은 사랑

이정하

 

​​나뭇잎이 떨어지면서

아주 잠깐 햇빛을 받아 빛났다.

기억한다,

내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던 것을.

스쳐가는 반짝임으로

그대가 내게 머물던 그 황홀한 순간을.

언제나 늦었다.

빛은 잠깐이었고

어둠은 너무 길었다.

사랑이라 깨달았을 땐 이미 넌 저만치 가 있었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았다

 

 

 

드러낼 수 없는 사랑

이정하

 

비록 그 사랑이

아픈 사랑일지라도

남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말도 할 수 없는 사랑,

그래서 혼자의 가슴속에만

묻어 두어야 하는

사랑을 가진 사람에 비해서.

 

밝힐 수 없는 사랑,

결코 세상에 드러낼 수 없는 사랑,

 

그러나 그 사람에겐

오래 간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자신의 가슴이 잿더미가 되는 줄 모르고...

 

 

 

등잔 밑

이정하

 

어디에서 나를 찾는가, 나 당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을.

어디쯤에서 나를 기다리는가, 나 당신의 마음 안에 있는데.

진작부터 나 당신의 내부에서,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당신이 알아주기만을 바라고 있는데...

 

 

 

 

따뜻한 사람

이정하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내리는 흰 눈 사이,

그 작은 거리가 만드는 어둠 속에서 우리는

어느 한 점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내가 이 지상의 한 뼘 땅이 되어,

그대는 싸륵싸륵 내리는

눈이 되어 그렇게 그대를 맞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눈은 지상의 모든 것을 덮어주고, 지워주고,

가려주었지만 한 사람이 남긴 공간만큼은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날, 따뜻한 사람이 그립습니다.

 

 

 

떠나가는 그의 등 뒤에서

이정하

 

뒤늦게 내가 저사람을 사랑하고 있구나, 느껴본들 무슨 소용 있으랴.

이미 저만치 떠나가고 있는 그의 등 뒤에서.

 

그래도 힘껏 소리칠 일이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목터지게 외칠 일이다.

떠나가는 그 사람이나마 사랑을 안고 떠나가게.

 

 

 

떠나는 이유

이정하

 

떠나는 사람에겐 떠나는 이유가 있다

 

왜 떠나는가 묻지 말라

 

그대와 나 사이에 간격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묻지 말라

 

괴로움의 몫이다

 

 

 

떠나려는 사람은 강물에 띄워 보내자

이정하

 

떠나려는 사람은

강물에 띄워 보내자.

 

이 순간이사 한없이 멀어지지만

굳이 슬퍼하지 말자.

 

언젠가는 강물이 비구름 되어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내게 다시 돌아오리니.

 

 

 

떠난 사람의 자리가 선명히 드러나거든

이정하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 밤이 많거든, 사랑이란 것은

우리 인간의 한낱 부질없는 약속임을 알고 애써 잠을 청하라.

그대로 잠이 오지 않거든 자리에서 일어나 마당이라도

한 바퀴 휙 둘러볼 일이다. 끄지 않은 네 방의 불빛처럼

아직도 떠난 사람의 빈 자리가 선명히 드러나거든,

그를 만난 그 순간이 영원하리라 믿었던 네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것부터 깨달아라. 순간의 행복으로 인해

네가 고통받아야 할 날이 얼마나 여러 날인지,

만남이 있으면 당연히 이별이 있다는 그 단순한 진리를

이제는 수긍하라.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두 사람이 만난 것이

대단하다고 여기기 쉬우나, 남녀가 만나 사랑하고 이별하는 것이

그저 물이 낮은 데로 흐르듯 아주 자연스럽고 별 대수롭지 않은

일임을 깨달아라. 사랑한다 해서 꼭 함께해야 한다는 법도 없음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일도 그 속에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도

봄날 꾸는 꿈처럼 허망한 일이라는 것을 모르진 않았을 텐데...

 

 

 

떠날 준비

이정하

 

그냥 떠나십시오

떠나려고 굳이 준비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당신은 끝까지 가혹합니다.

떠남 자체가 괴로운 것이 아니고

떠나려고 준비하는 그대를 보는 것이

괴로운 것을.

 

올 때도 그냥 왔듯이

갈 때도 그냥 떠나가십시오.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그대

이정하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나는 소망 했다.

 

살아가면서 모든 것이 잊혀진다 하더라도

그대 이름만은 내 가슴에 남아 있기를....

 

살아가면서 덮어두고 지워야 할 일이 많겠지만

 

그대와의 사랑, 그 소중했던 추억만은 잊혀지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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