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멜레온과 하이에나 3
3부
7. 박정희 정권하의 언론 Ⅰ(1961~1967)
8. 박정희 정권하의 언론 II
9. 박정희 정권하의 언론 III (1972~1979)
7. 박정희 정권하의 언론 1 (1961~1967)
제일 먼저 KBS부터 점령한 박정희
1961년 5월 16일 한강을 넘어 서울로 들어온 일단의 군인들은 중앙청과 KBS를 점령했다. 새벽 4시 15분경 공수부대원이 기관단총을 들고 KBS에 나타나자 당시 숙직을 보던 PD 박종민과 아나운서 박종세는 보도실 책상 밑에 숨었다가 다시 구석방 텔레타이프실로 들어가 숨었다. 원료 방송인 유병은은 박종민의 증언을 인용하면서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런데 잠시 후 별안간 '박 아나운서 나오시오.'하고 하는 정중한 목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책상 밑에 숨어있던 박종세 아나운서는 '이제 별수 없구나'하고 생각하면서 공수부대원을 따라 응접실로 들어가 보니 별을 단 장군과 몇 명의 영관급 장교들이 서 있었다고 한다. 철모에 별 두 개를 단 박정희와 김동하 장군과 사복을 입은 김종필 중령 등이었다고 하는 박종민의 증언이다. '박종세 아나운서요? 나 박정희입니다.'하고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고 한다. 박 장군은 궐기하게 된 취지를 또박또박 자세히 설명한 후 방송을 부탁했다고 한다. ... 5, 16혁명은 제일 먼저 방송국에서 막이 오른 것이며, 박정희 장군 및 김종필 중령 등이 박종세 아나운서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방송국 내부에 혁명군에게 협조한 인사가 있었으리라는 추측이 무성했다 박종세 아나운서 한 사람만 5, 16혁명 유공자로 서훈된 바 있었다."
그렇게 해서 KBS는 새벽 5시 첫 방송을 통해 ‘혁명’이 시작되었다고 선언하고 6개 항의 '혁명 공약'을 발표했다. 정권을 잡은 쿠데타 세력은 전국에 내린 비상 계엄령 포고 1호를 통해 언론 출판 보도를 사전 검열하였으며, 5월 23일엔 '사이비 언론 및 언론 기관 정화'라는 명분하에 많은 언론사를 폐쇄시켜 전국 916개 언론사 가운데 일간지 39개, 일간 통신 11개, 주간지 31개만이 남게 되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64개 중앙일간지 가운데 15개가 살아남았고, 지방에서는 51개 일간지 가운데 24개가 살아남았다. 통신사 11개는 316개 가운데 살아남은 것이 있는데, 지방통신사 64개는 전부 폐쇄되었다. 355개의 중앙주간지 가운데선 31개가 남고 130개 지방주간지 가운데선 한 개가 살아남았다.
‘민족일보’ 폐간과 조용수 사형
군사정권은 사이비 언론 단속에만 그치지 않고 정략적 살인까지 저질렀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혁신계 세력을 대변하는 ‘민족일보’를 폐간시키고 그 발행인인 조용수를 용공으로 몰아 사형시킨 것이었다.
5월 19일 계엄사령부는 '민족일보의 폐간 통고와 함께 '민족일보가 조총련계로부터 들어온 약 1억 환의 불법 도입 자금으로 발간되어 괴뢰집단이 지향하는 목적 수행에 적극 활약해 왔다고 발표하면서 조용수를 포함한 8명을 구속했다. 혁명재판소는 조용수를 포함한 3명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나머지 5명에게 5년에서 15년에 이르는 중형을 선고하였다. 재판 결과가 발표되자 국내의 문단과 언론계 인사 104명, 일본펜클럽, 국제펜본부, 국제신문인 협회 등은 관대한 처분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박정희 앞으로 냈다. 그러나 미국을 방문하고 있던 박정희는 11월 16일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가진 연설에서 세 언론인의 사형 선고는 타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두 명은 사형에서 무기로 형이 감형되었지만 조용수는 1961년 12월 22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러나 계엄사령부가 주장한 혐의는 근거가 매우 박약한 것이었다. 당시 '민족일보는 민족 통일을 열렬히 염원하고 통일 논의를 성원하였으나 북한 주장을 비판하는 논조도 보였던 신문이다. 게다가 조용수는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주동자인 박정희의 혁신적 성격을 낙관해 다음과 같은 우호적인 사설을 쓰기도 했다.
"끝으로 우방 제국에게 일언을 부치노니, 이 군사 혁명이 발생된 원인을 깊이 이해하고 진정한 우호를 베풀어 주기를 진심으로 희구해 마지않는다. ... 우리들은 거듭 내치외교에 획기적인 일신이 있고 민주적인 조명이 있기를 강조함으로써 이 획기적인 군사위원회의 혁명 과업 수행에 더 많은 영광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조용수와 대구 대륜고 동기동창인 전 국회의장 이만섭은 "그의 죽음은 박 장군이 본인의 사상적 문제를 의식적으로 입증하기 위한 희생양이었다"고 말한다. 언론인 김삼웅도 박정희의 사상적 콤플렉스가 주요 원인이라고 말한다.
"해방 후 남로당 등 좌익에 관계한 바 있는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하는 과정에서 미국 측으로부터 사상적 성향에 의혹을 받게 되면서 혁신계 인사들을 자신의 면죄부의 제물로 삼았다는 것이 ‘민족일보’ 사건의 정치적 배경이다. ‘민족일보’ 조용수는 박정희의 사상적 콤플렉스가 불러온 희생양이었던 셈이다.
이는 조용수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던 송지영은 네 차례 감형을 받아 출감하여 ‘조선일보’ 논설위원, 문예진흥원장, 통일원 고문, 민정당 전국구 의원, 한국 방송공사 이사장, 광복회 부회장 등 요직을 거쳤으며 중형을 받았던 다른 인물들도 송지영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는 것으로 보더라도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이다.
생각하면 박정희는 참으로 잔인무도하고 야비한 인간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자신의 사상적 콤플렉스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 조용수를 제물로 삼았으면 그 유족에게라도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는 했어야 했던 것 아닐까? 그러나 박정희 일당은 민족일보의 자산은 물론 조용수 가족들의 전 재산을 몰수했으며, 이후 가족들의 거듭된 탄원도 받아 주지 않았다. 독립군을 추적하던 일본 관동군 중위 '오카모토'(박정희)다운 처세라고나 할까.
박정희의 언론에 대한 혐오감
다른 신문들의 경우 변신은 매우 빨랐다. 예컨데, ‘조선일보’는 1961년 5월 19일 <혁명의 공약과 국내외의 기대>라는 제하는 사설에서 "군사 혁명은 이런 불행한 여건하에서 보다 나은 입장을 마련하기 위하여 감행된 것으로서 이것이 거국적인 단결과 함께 국내외적인 찬사와 지지를 받게 된 소이가 실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고 했으며, ‘동아일보’는 5월 26일 <혁명 완수로 총진군하자>는 제하의 사설에서 "5, 16 군사 혁명이 민주적이냐 또는 합헌적이냐 혹은 지휘권을 누가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에의 논의는 이미 기정사실화한 이 혁명을 반공, 민주 건설을 향해서 이끌고 나가야 할 이 단계에 있어서 백해무익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타임'지는 1961년 8월 4일 자에서 한국 언론을 가리켜 '벙어리 신문'이라고 평하였지만 그건 정확한 평가는 아니었다. 당시 신문들은 아첨을 하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박정희까지 7월 19일 기자 회견에서 "언론인은 기개가 부족하다"고 비웃었겠는가.
그러나 신문들의 그런 아첨에도 불구하고 군부의 언론에 대한 인식은 지극히 부정적이었다. 특히 박정희는 군에 있을 때에 언론의 부패상을 직접 목격한 적이 많았기 때문에 사실 언론에 대해 칼을 갈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언론에 대한 혐오감이 비판이라고 하는 언론 본연의 기능까지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박정희는 5, 16 직후인 1961년 8월 '최고회의보'창간호에 기고한 글에서 "국론을 통일하기 위해 무책임한 언론의 자숙이 요청된다."고 했으며, 11월 22일 미국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행한 연설에서도 "과거의 많은 신문들이 금전에 좌우되고 부패했으며, 공산주의 색채를 띄었다"고 단정하기도 했다. 그는 또 1962년 4월 29일 기자 회견 석상에서는 "자율적 정화가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부패 언론인의 명단을 공개하겠다"는 말도 했다. 부패 척결 의지야 백 번 환영할 만한 일이었지만, 이후 박정희는 오히려 부패는 봐주거나 부추기면서 비판만 봉쇄하는 언론 탄압에 임하게 된다.
군사정권은 국민의 환심을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미 치밀한 연구를 끝냈던 것일까? 1962년 1월에는 제1차 경제계획을 발표했고, 3월엔 정치활동정화법을 발표하여 4천3백69명의 정치 활동을 금지했다. 3월 22일엔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하자 박정희 자신이 대통령 권한대행의 자리를 차지했으며, 6월엔 그 악명높은 중앙정보부를 발족시켰다.
5, 16 이후 1962년 6월 22일까지 기자의 신분으로 체포되거나 재판에까지 회부된 인원은 960명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신문, 통신의 제작 과정에서 문제를 일으킨 위반자, 즉 포고령, 반공법, 기타 법을 어겼다고 해서 구속된 인원은 141명에 달했다.
군사정권의 새로운 언론 정책
1962년 6월 28일 군사정권은 새로운 '언론 정책'을 내놓았는데, 이는 언론 자유와 책임, 언론인의 품위와 자질, 언론 기업의 건전성, 신문 체제의 혁신, 언론 정화 등 5개 항의 기본방침과 20개 항의 세부 지침으로 구성돼 있었다. 군부는 입법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권장'이라는 이름으로 이 같은 정책을 강요했다.
이 정책으로 인해 신문발행 요건이 까다로워져 사실상 신규 언론사의 출현이 불가능하게 됐으며 하루에 두 번을 내던 조, 석간제가 조간 또는 석간 가운데 하나를 택해 하루에 한 번 신문을 내는 단간제로 바뀌었다. 8월 4일 당국의 조정아래 6대 중앙지는 조간이냐 석간이냐를 정했는데 8월 20일부터 동아 서울 경향 대한 등 4개사가 석간을, 조선 한국 등 2개사가 조간을 택했다.
단간제는 신문의 정보량을 대폭 축소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뉴스의 속보성과 정론성도 크게 후퇴했다. 결국 단간제는 신문의 비판적 기능을 현저히 약화시킨 반면 지면의 잡지화, 상업화 현상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이 언론 정책이 모두 다 나쁜 결과만 가져온 건 아니었다. 그 긍정적 측면에 대해 언론인 송건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까지 없었던 '일요 신문'을 발간케 하고 하루 8면 이상으로 증면케 하였다. 서울의 중앙지의 경우는 일 12면 이상으로 늘리게 했다. 기자 보수의 기준을 정한 점도 평가할 만했다. 서울 시내에 본사를 둔 일간신문과 통신사의 중견 기자의 봉급을 월 1만 원 이상으로 한다고 한 점이다. 물론 당장 지켜지지는 않았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소위 '무보수 기자'들이 적지 않았던 만큼 기자들의 보수 기준을 설정한 것은 크게 잘한 일이었다."
2년 반의 군정 기간에 일어난 가장 큰 필화 사건은 ‘동아일보’ 주필 고재욱과 논설위원 황산덕의 구속과 ‘한국일보’ 사장 장기영의 구속이었다. ‘동아일보’는 1962년 7월 28일 <국민투표는 만능이 아니다>라는 사설을 게재해, 1963년 여름으로 예정된 민정에 앞서 군사정부가 새 헌법을 기초하여 이를 국민투표에 붙이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을 펼쳤는데 군사 정권은 이를 문제 삼은 것이었다. 반공법 등 위반혐의로 구속된 고재욱은 8월 14일 기소유예로 석방되었고 황산덕은 12월 7일 공소 취하로 석방되었다.
'한국일보'는 1962년 11월 28일 1면 톱으로 혁명 주체 세력이 영국 노동당과 비슷한 정당 창당을 추진 중에 있다고 보도하였는데, 이 기사로 다음 날 장기영 사장 겸 편집국장을 비롯한 간부 4명은 혁명위 포고 등의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 정부의 자진 정간 권고를 받은 '한국일보'는 29일 1면 톱에 문제의 기사가 사실무근이었다는 사과문을 게재하고 12월 2일부터 사흘간 자진 휴간하였으며, 장 사장은 12월 6일 사장직에서 인책 사퇴하겠다고 밝힘으로써 그날 밤 두 간부와 함께 석방되었다. 장기영은 1963년 1월에 사장직에 복귀하였다.
KBS-TY의 개국
그런 언론통제가 시사하듯이, 군사정권에 있어서 언론은 '혁명'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TV의 도구적 효용에 눈을 돌린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1년 8월 TV 방송국 설립을 계획하였고 그 결과 탄생된 방송국이 바로 오늘날의 KBS-TV이다. 1961년 12월 24일 KBS-TV는 채널 9를 통해 5시간의 실험방송을 하였으며 12월 31일부터 1일 4시간의 정규 방송을 개시하였다. 세계적으론 이미 70여 개 나라가 TV방송을 실시하고 있던 때였다.
KBS-TV의 개국은 그야말로 군사 작전을 방불케 했다. 남산에 방송국사를 짓는 공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루어졌으며 날씨가 추워지자 콘크리트가 얼까 봐 소금을 섞어 가며 강행군을 했다. 원로 방송인 노정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말로 번갯불에 콩 구어 먹는 속도보다도 더 발랐다. 창설 계획을 세운 것이 그 해 8월 14일, 건축 공사를 시작한 것이 10월 10일이니 2개월 남짓 걸린 셈이다. 기재는 미국 RCA 기계를 발주하여 12월 10일에 비행기로 실어 날랐고, 그때부터 설치공사가 강행군되었다. 아마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일이요, 세계적인 기록일 것이다. 남들 같으면 아무리 빨리해도 2~3년은 걸려야 했을 일을 우리는 불과 3개월도 안 걸려 해치운 것이다. 자랑해야 할지 졸속이라고 비난해야 할지 모르겠다."
미국과 일본에서 2만 대의 수상기를 도입하기 전 국내에는 어느 정도의 수상기가 있었을까? 원로 방송인 유병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시 TV 수상기의 정확한 숫자는 아무도 알 길이 없었다. 왜냐하면 부산에서 일본 TV가 선명하게 보이자 상인이 서울에 올라와 TV 수상기를 부산으로 수집해 가는 현상이 나타났으며, 여행자의 반입 및 동두천 등 미군 PX를 통한 음성적인 유통으로 인한 TV 수상기의 상당량 증가로 KBS-TV가 개국할 무렵에는 약 1만 대의 수상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1만 대론 모자라 군사정권은 1962년 2월부터 총 2만 대의 TV를 미국과 일본에서 긴급 도입해 월부로 배포하였다. 당시 이렇게 수입된 TV 수상기를 갖기 위한 경쟁은 매우 치열하였는데, 원로 방송인 유병은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TV 수상기 신청서 1장에 1백 원씩 팔았는데, 신청서를 사러 온 시민의 운집으로 세종로와 정동 방송국 부근은 인산인해를 이루는 대혼잡으로 교통순경까지 출동하였다. 신청서를 판매한 대금이 무려 6백 50만 원에 달했다고 하니 대단한 경쟁이었다."
원래 KBS-TV는 당시 공보실장 오재경의 아이디어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오재경의 생각은 진정 나라를 생각하는 선의였을 것이다. 다만 그의 선의도 '혁명'의 성공을 목표로 하는 것이기에 TV가 '혁명을 위한 도구'로 탄생되었다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오재경은 후일 그의 '수상 22년'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여론을 만드는 서울 시민의 병든 마음을 성하게 고치기 위해서 나는 TV국 세우기를 원했다. 또한 새로워지는 나라와 겨레의 모습을 구체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이것을 눈으로 보고 그들의 생활로 삼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혁명정부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삼고 싶었던 것이다. 50일 낮밤 동안에 만들어낸 TV국은 확실히 나의 혁명이었다."
군사정권은 부산, 대구, 관주, 대전, 전주 등 전국 주요 지방 도시에 방송국을 증설하여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하겠다는 5개년 계획을 발표하였다. 1963년 1월부터 공식으로 등록된 3만 4천 대의 수상기에 대해 시청료를 징수하였고 광고 방송을 실시하였다. 군사정권은 1963년 12월 10일 방송법을 통과시켜 26일 공포하였으며 1964년 2월 10일에 시행령을 공포하였다.
'주여! 상업방송을 금지시켜 주시옵소서'
KBS-TV의 광고 방송과 관련하여 당시 광고에 대한 사회 인식 수준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일화가 많다. 당시 방송 PD로 활동했던 서울대 교수 강현두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국영 텔레비전인 KBS가 광고 방송을 시작한 것은 1963년 1월 1일 저녁 7시 반으로 기억된다. 근엄한 KBS가, 국민을 계도하는 방송인 국영방송이 이제 광고를 시작하는 것이다. 아나운서들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점잖고, 예쁘게 그리고 인격적으로 그러나 이제부터 상업 광고문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상 첫 광고 프로그램이 퀴즈 프로그램이었고, 그 첫 CM이 무슨 부럼빈인가 하는 드링크제 광고였다. 당시 생방송 시대였기도 하려니와 갑작스럽게 변경된 방송제도 속에서, 불과 이틀 전에 결정된, 전혀 경험 없이 하는 상업 프로 제작이 잘 준비되었을 리도 만무하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텔레비전 광고 문화는 어처구니없는 실패담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그 실패의 경험담은 대략 이러하다. 정각 시보를 알리면서 시작된 퀴즈 프로그램 <우등생 퀴즈>의 슬라이드를 넘기고 광고 슬라이드와 함께 아나운서 부스의 불이 켜지면서, 큐를 받은 두 여자 아나운서는 부롬빈 드링크제의 광고문을 읽는다. 그러나 한 줄 읽기도 전에 아나운서 A는 웃음을 터뜨렸다. 연출자는 허둥지둥 부수의 마이크를 껐으나 낭패 1. 용기를 내서 다시 한번 큐. 이번에는 아나운서 B가 웃음을 터뜨린다. 그래서 낭패 2. 결국 어떻게 사상 첫 CM이 끝맺혀졌는지 아무도 기억할 수 없지만 연출자는 아마도 슬라이드와 음악만 내보냈으리라. 그것도 새해의 정월 초하룻밤 저녁 7시 30분 골든아워에.”
한국방송공사가 펴낸 「한국 방송사」(1977)에 기록돼 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당시 방송인들이 광고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걸 잘 말해 주고 있다.
“스폰서가 붙어 있는 프로그램에는 CM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어떤 프로그램에든 스폰서가 붙으면 곧 CM을 제작해야만 한다. 그런데 1962년 당시에만 하더라도 주로 아나운서가 CM을 만들었는데 당시의 아나운서들은 하나같이 CM 제작에는 기피증세를 나타내고 있었다. 프로듀서가 CM을 녹음하기 위해 아나운서를 찾으면 어디론가 도망치고 없다. 애써 찾아서 CM 제작을 끝내 놓고 나면 아나운서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혹은 쑥스러워서 금방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그것도 그럴 것이 당시의 아나운서들은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반면에 CM을 장터의 약장수가 약 선전을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CM 기피는 오히려 당연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니 당시 기독교방송에선 광고를 어떻게 대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주여! 상업 방송을 금지시켜 주시옵소서”라는 기도까지 나왔다고 한다. 「한국 방송사」에 실린 일화를 살펴보자.
“기독교방송국이 개국한 이래 광고 방송을 하는 것을 전제하면서도 실제로는 제공 멘트 이외의 CM방송을 일체 금지시켜 왔다. 그러나 문화방송이 개국되고 거기에서 제공 멘트 이외의 CM 방송을 개시하자 기독교방송국에서도 어쩔 수 없이 방송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한 번은 드링크 선전에 ‘음주 전후’ 운운하는 짧은 CM이 방송되었다. 그러자 목사들의 빗발 같은 항의가 당장 전화통에 불을 질렀다. 그 후 며칠 안 되어서 십여 명의 목사들이 몰려와서는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는 방송국에서 ‘음주 전후’라는 용어를 함부로 방송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처사라고 비난하면서 항의 소동을 벌였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1962년 당시 종교 과장직을 맡고 있었던 정인희 목사는 직원들의 아침 예배시간을 통해 다음과 같은 기도를 했다. ‘주여, 여기는 당신의 복음을 전하는 곳입니다. 여기에 천박한 상업방송의 CM이 방송되는 것은 당신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여, 여기에서 전파를 타고 나가는 모든 상업 방송을 금지시켜 주옵소서.”
군사정권의 문화방송 강탈
KBS-TV가 탄생되기 얼마 전 서울엔 새로운 민간 라디오 방송국이 문을 열었다. 1961년 12월 2일 서울에서 부산문화방송과 네트워크를 형성한 한국문화방송주식회사(HLKV)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사주인 김지태는 1962년 5월 한국문화방송은 물론 부산문화방송과 부산일보의 경영권을 재단법인 5, 16 장학회에 넘기고 물러났다. 「문화방송 30년사」는 그걸 단 한 줄로 가볍게 기록하고 넘어갔지만, 그건 김지태가 5, 16쿠데타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군사정권이 강탈한 혐의가 짙다. 당시 김지태는 부정축재자로 몰렸는데, 후일 김지태는 자신의 결백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이건 아직까지도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라 길게 인용하도록 하겠다.
“혁명 후 10개월만인 1962년 3월 27일 국내 각 신문들은 큼직큼직한 활자로 ‘부정축재 처리법 위반, 국내 재산 해외 도피 등의 혐의로 김지태씨 입건’이라는 제목 아래 소상한 기사를 썼다. ... 내가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고 맞서는 경우를 생각해 보니 나 개인보다는 우선 산하 기업체 간부들이 희생을 당하는 데다가 기업 경영이 엉망이 되어 수천 종업원이 실직하게 될 것이 안타까웠다. 신문사나 방송국은 공영 사업이므로 누가 경영하든 이 나라 매스컴 발전에 이바지할 수만 있으면 된다는 심정으로 협상에 응할 심산이 섰다. 그러나 구속된 조건 아래 그런 서류를 작성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니 석방된 연후에 약속을 이행하겠다고 버티었으나, 막무가내로 어느날 작성해 온 양도서에 강제로 날인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되자 며칠 안 되어 경남 고등군재(고등군사재판소)는 ‘피고인들은 자기의 죄과를 뉘우치고 국가 재건에 이바지할 뜻이 농후하다’는 이유를 들어 나를 비롯한 전원에 대하여 공소 취하를 선고했다. 이렇게 하여 1948년 4월 이래 14년간 애지중지 가꾸어 놓은 「부산일보」와 만 4년 동안 막대한 사재를 들여 궤도에 올려놓은 문화방송과 부산문화방송은 1962년 5월 25일, 5, 16 재단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이 기본 재산을 토대로 하여 ‘5, 16 장학회’는 그해 7월 14일에 발족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부일장학회’의 기본 재산인 부산 시내 토지 10만 평을 헌납했다.
그렇다면 5, 16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61년 4월 말로 접어들면서 박정희는 거사 자금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었다는 걸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월간조선」 편집장 조갑제는 1998년 현재 「조선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5월 3일 박정희는 부산으로 내려가서 대구사범 동기 황용주 부산일보 주필을 송도 덕성관에서 만났다. 군수기지사령부의 참모장 김용순 준장을 데리고 온 박정희는 황용주를 옆방으로 불러내더니 거사 계획을 설명하고는 이렇게 부탁하는 것이었다. ‘급히 김지태 사장에게 부탁하여 5백만 환만 융통해 줄 수 없겠나.’ 황 주필은 난감했다. 부산일보 김지태 사장에게 자신이 그런 부탁을 할 처지가 아닐 뿐만 아니라 김 사장이 과연 성공이 불확실한 쿠데타 계획에 돈을 댈 것인지 자신을 가질 수도 없었다. 박정희는 대답을 망설이는 황용주에게 이런 말을 덧붙였다. ‘김 사장에게는 서울의 모 장성이 요청한다고 말하든지 그래도 반응이 없을 때는 쿠데타 계획을 약간만 비쳐 주어도 괜찮다.’‘가능성이 희박하지만 어떤 계기를 만들어서 이야기해 보지.’...황용주 주필이 김 사장에게 그 뜻을 전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쿠데타가 발생했다. 김지태가 그런 부탁을 전달받았다면 어떤 태도를 취했을지는 알 수 없다. 김지태 사장은 5, 16 직후 밀수 혐의로 구속되고 부산일보와 문화방송의 운영권을 빼앗긴다. 협조해 주지 않은 데 대한 혁명 주체들의 보복이란 주장이 있다. 협조 요청을 받은 적이 없는 김지태 측으로선 할 말이 많을 것이다.”
라디오 방송의 치열한 경쟁
CBS는 1962년 1월 1일부로 공포된 ‘전파관리법’에 따라 외국인은 재단법인의 장이 될 수 없게 되어 사장을 길진경으로 바꾸었으며, 외국의 자금 지원이 줄어들자 9월 12일 상업방송의 허가신청서를 체신부에 제출하였고 10월 19일에 인가되었다. 이후부터 CBS는 선교 이외의 일반 교양프로그램을 추가하고 전체 방송 시간의 30%에 한해 상업방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 CBS는 이미 1959년 3월 26일 대구국, 1959년 12월 23일 부산국, 1961년 8월 1일 광주국, 1961년 11월 1일 이리국을 개국하여 다소 부족하나마 전국 방송망을 갖게 되었다.
1963년 4월 25일에 개국한 민영 동아방송(DBS)은 모기업인 동아일보를 등에 업고 보도방송에 많은 힘을 쏟아 라디오 저널리즘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1964년 5월 9일엔 ‘라디오 서울’이 개국하였는데, 9월 15일 사장에 홍진기가 취임함으로써 라디오 서울은 삼성의 완전한 계열사로 편입됐다. 라디오서울은 이름을 여러 번 바꿨다. 1965년 8월 15일부터는 중앙라디오라고 했다가 11월 15일부터는 중앙방송이라고 했는데, 이 이름은 KBS 중앙방송국과 혼동돼 편지까지 잘못 배달되는 일이 벌어지자 1966년 8월 15일부터 동양방송(TBC)으로 바뀌게 되었다.
삼성은 라디오 방송에 만족하지 않고 1964년 12월 7일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상업 TV 방송인 동양 TV 방송(TBC)을 개국하였으며 12월 12일엔 부산국을 개국하였다. 동양 TV의 전신은 D-TV였다. D-TV는 1962년 12월 31일 체신부로부터 TV 방송국 가허가를 받아 회사를 설립해 놓고 2년여의 준비 끝에 개국하게 된 것이었다. D-TV는 1966년 1월 25일 라디오와 함께 중앙방송에 합병됐으며, 1966년 8월 15일부터는 사명을 동양방송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당시는 아직 TV의 시대는 아니었으며 라디오가 훨씬 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1960년대 중반에 라디오 저널리즘도 KBS, CBS, MBC, DBS, TBC 등 5개사에 의해 제법 치열한 경쟁 체제에 접어들었다. 라디오 방송사들은 보도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오락 프로그램 경쟁도 치열하게 전개했는데, 특히 상업 방송사들 간 코미디물 경쟁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한국연감」 1965년 판은 당시의 경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DBS에서 구봉서, 김희갑, 송해 등 코미디언을 업고 청취자들에게 인기를 모으자 MBC 측은 이에 도전을 하여 끝내 DBS로부터 구봉서를 탈취하고 다음에 송해도 끌어들여 배삼룡 등과 함께 강팀을 형성했다. 동양방송은 이에 경쟁하러 나서서 서영춘을 기르며 팬들의 인기를 제법 모았다.”
FM 방송이 처음 시도된 것은 1963년이었다. 이규일 등 3명은 1963년 7월 20일 서울 FM 방송주식회사를 설립했으나 재정 사정이 어려워 개국 준비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 때문에 뒤늦게 허가를 받은 AFKN이 1964년 1월 1일을 기해 서울 FM을 앞질러 FM 방송을 개시했다. 서울 FM은 1964년 6월 26일부터 정규방송에 들어갔지만 수신기가 널리 보급되지 못한 데 따른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1966년 4월 4일 동양방송에 흡수되고 말았다. 동양방송은 한동안 서울 FM의 명칭을 사용하다가 같은 해 8월 15일부터 동양 FM의 이름으로 방송을 내보냈다. 동양 FM은 대구 한국 FM과 제휴했으며, 동양 라디오도 광주의 전일 방송, 군산의 서해방송과 제휴하여 방송망을 이루었다.
10, 15대선과 박정희의 사상문제
1962년 12월에 실시된 국민투표에 의해 헌법은 다시 대통령중심제로 돌아갔는데, 이 헌법에 따라 1963년 10월 15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이 선거가 있기까지엔 우여곡절이 많았다.
5, 16쿠데타 이후 계속 실시되어 온 계엄령은 1962년 12월 6일에 해제되면서 언론에 대한 당국의 사전 검열이 사라졌고, 1963년 1월 1일을 기해 민간 정치인에 대한 정치 활동 규제법인 ‘정치정화법’이 해제되면서 사회 분위기는 활기를 되찾았다. 2월 26일엔 쿠데타 세력뿐만 아니라 윤치영, 이효상, 박준규, 민관식, 백남억 등 구여권 인사와 학계 인사들까지 다수 참여한 가운데 공화당이 창당됐다. 그다음 날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정치를 민간인에게 넘기고 대통령 출마를 않겠다는 이른바 2, 27 선서라는 것을 하여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러나 그 감동도 잠시뿐이었고, 박정희는 3월 16일 돌연 군정을 다시 4년간 연장한다는 성명과 함께 이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한다는 이른바 3, 16 군정 연장 성명을 발표했다.
박정희는 군정 연장론을 펴면서 또 하나의 언론통제법인 ‘헌법 부칙 개정안과 비상사태 수습을 위한 임시조치법’을 발표하였다. 이에 언론은 격렬하게 반대하였지만, 이미 언론 자유는 상실한 지 오래라 조선, 동아, 경향과 대구의 매일신문의 경우 사설 없는 신문이 나가기 시작했다. 재야 정치인들과 대학생들의 반대도 거센 데다 미국 정부까지 반대해 결국 군정 연장 기도와 언론 규제 관계법은 철회되고 10, 15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 것이다.
공화당 후보 박정희와 민정당 후보 윤보선의 대결로 치뤄진 이 선거에서 박정희는 유효 투표의 46.6%인 4백 72만 2천여 표를 얻었고 윤보선은 45.1%인 4백 54만 6천여 표를 얻었다. 대통령 선거 사상 가장 근소한 15만여 표의 차이로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이로써 쿠데타 세력에 의한 2년 7개월에 걸친 군정이 일단 형식적으론 끝난 셈이지만, 그건 그야말로 형식이었을 뿐 옷만 바꿔입은 군인들이 각계 요직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정치, 행정 간부 가운데 군 출신이 차지한 비율은 1950년대에 8.8%이던 것이 1960년대에는 44%로 급증했다.
박정희가 관권 선거와 금권 선거의 덕을 보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실질적으론 윤보선의 승리나 다름없는 선거였다. 그러나 당시 선거에선 윤보선이 박정희에 대해 매카시즘 수법을 썼으니 이는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윤보선은 선거 기간 중 박정희의 사상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하였고 박정희는 “저들이 나를 빨갱이로 몰려 한다”고 분노했다. 그러나 민정당의 매카시즘 수법은 정도를 넘어섰다. 1963년 10월 10일 대선을 닷새 앞둔 시점에서 민정당 유세반의 김사만이 경북 영주에서 “부산 대구에는 빨갱이가 많다”는 발언을 함으로써 전 영남을 발칵 뒤집어 놓아 오히려 박정희를 돕는 역효과를 내고 말았다.
그러나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박정희는 정말 사상적으로 의심을 받을 만한 과거를 가진 인물이었다. 과거도 과거지만 5, 16 쿠데타 직후 북한이 박정희 주도의 쿠데타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5월 16일 오후 7시 평양방송은 조선중앙통신의 보도문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보도했던 것이다.
“16일 새벽 3시를 기해 군사 정변을 단행한 남조선 군인들은 행정, 입법, 사법 등 정부 기관들과 방송국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청년, 학생들과 인민들이 장면 정권을 타도한 군사정권을 지지, 환영하는 군중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북한은 박정희의 과거를 알고서 그를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박정희는 자신이 사상적으로 의심받기에 충분한 과거를 가졌다는 것을 상쇄하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이후 무자비한 매카니즘 수법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한일회담과 6.3 사태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는 쿠데타라고 하는 원죄를 의식했는지 정권의 정통성 확보 차원에서 경제 개발에 매달리게 되었지만, 그건 정경유착을 근거로 한 것이라 후일 한국에 정경유착이라는 망국병을 안겨 주게 된다. 박 정권의 출범 자체도 정경유착의 구린 냄새를 풍기면서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이는 1964년 1월 15일 야당 원내교섭단체였던 신민회 소속의 국회의원 유창열이 이른바 3분 폭리 사건을 폭로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밀가루, 설탕, 시멘트 등 이른바 3분 산업과 관련된 기업들이 가격 조작과 세금 포탈을 통해 엄청난 폭리를 취하는 것을 묵인해 주는 대가로 공화당이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받은 사건인데, 이 사건에 삼성그룹의 제일제당이 연루돼 있었다.
어찌 됐건 박정희는 경제 개발에 매달리게 되었고 그 자금을 얻기 위해 1964년 봄 한일회담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일회담 추진은 순조롭지 않았다. 학생들은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투쟁을 격렬하게 벌였으며 언론은 그 투쟁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박정희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1964년 4월 22일 박정희는 언론의 자유는 최대한으로 보장하고 있는데 언론의 책임에 대한 애기는 전혀 없다고 비난하였고, 5월 2일엔 일제 때부터 반항만을 되풀이하는 정치인 및 언론인들의 근본적 사고 방식과 자세는 제거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고, 5월 23일엔 정국 불안의 책임이 일부 언론의 무책임한 선동에도 있다고 주장했으며, 5월 25일엔 예기치 않은 사태가 일어날지 모르는데, 그것은 일부 언론인의 선동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경고하였다.
박정희의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장준하가 발행하는 사상계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한겨레신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시 학생 시위의 모든 구호는 「사상계」에서 나왔으며 논문 하나하나가 모두 반대 투쟁의 전략과 전술이 되는 등 「사상계」는 어느덧 한일협정 반대 투쟁의 이론적 지도부가 되어있었다. 「사상계」의 엄청난 영향력에 놀란 박 정권의 조직적 탄압이 시작됐다."
언론계 전반에 대한 박 정권의 조직적 탄압은 1964년6월3일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는 걸로 귀결되었는데, 이로 인해 언론에 대한 사전 검열제가 실시되었다. 박정희는 6, 3 계엄령을 선포한 뒤 국회에서 행한 교서에서 언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론이 없는 시간부터 암흑천지가 되는 것도 사실이요, 언론의 창달 여부는 문화의 척도가 된다는 것도 진실이지만, 세상에는 신문이 나라를 망쳤다는 소리도 있고 이 사회의 혼란은 신문도 상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소리도 있다. ... 우리나라 신문은 지난 18년간 선의건 악의건 너무나 많이 자극적, 선동적인 언사를 써 왔다. 이렇게 해서 경영상 수지는 맞추어 왔을는지는 몰라도 국가 사회에 유익한 일만 해 왔다고 단언할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6월 4일 「경향신문」은 <하루는 책보, 이틀은 깡통> <칡뿌리 먹는 가족> 기사를 내보냈는데, 이와 관련 이준구 사장과 손충무 사진부 기자가 구속되었으며, 6월 4일과 5일 동아방송은 <앵무새> 프로그램에서 부정사건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6명의 간부가 반공법 등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 이 ‘앵무새 사건’에 대해 당시 담당 프로듀서였던 김영효는 후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칭 ‘앵무새 사건’은 편의상 보도용으로 명명된 것이고 사실을 뉴스를 비롯한 동아방송의 전반적인 논조가 표적이었다. 다시 말해 「동아일보」 까지를 포함한 동아의 언론 활동에 물리적 제재를 가하자는 게 진짜 숨은 의도였다. 내가 수사받던 중 ‘다른 신문이나 방송도 한일회담을 비판하고 있는데 왜 하필이면 동아냐’고 물었을 때 수사관은 ‘다른 신문사나 방송국이 뭐라고 해도 상관없지만 동아방송과 동아일보만은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 상부의 생각인 것 같다’고 귀뜀했었다."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
박 정권은 그런 식으로 일일이 대응하는 것에 한계를 느꼈던 것인지 보다 근본적인 언론통제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6월 중순 이후 언론규제법안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더니 집권 여당인 공화당은 7월 30일에 언론 윤리 위원회법안을 국회에 상정한 뒤, 일요일인 8월 2일 밤 이 법의 제정에 반대해 오던 야당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일방적으로 통과시켰다.
전문 20조로 된 언론윤리위원회법은 신문 방송 등 언론의 자율적 규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언론윤리위원회와 언론윤리심의위원회를 두고 언론 윤리보강을 제정하여 보도 내용이 이 요강에 위배되는지 여부를 심의케 한다는 내용이었다. 심의의 기준이 되는 언론 윤리 요강은 국가의 안전 및 공안의 보장에 관한 사항, 국가 원수의 명예 존중에 관한 사항, 언론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사항, 보도 논평의 공정성 보장에 관한 사항 등을 포함하도록 규정해 놓았다.
언론계는 언론 자유를 크게 위축시킬 것이 분명한 이 법안에 대해 결사 반대하였다. 국회, 중앙청 기자단은 24시간 취재를 거부했으며 경제 부처 출입 기자단은 ‘일방적인 대정부 협조’ 거부에 나섰다. 8월 5일엔 언론 단체 대표들이 모여 ‘언론윤리위원회법 철폐 투쟁위원회’를 구성했다. 박정권이 언론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8월 10일 공포 즉시 이 법의 시행에 들어가자 언론계는 이 날 ‘악법 철폐 전국 언론인대회’를 개최했다.
박 정권은 8월 31일 임시 국무회의에서 언론윤리위원회법 시행을 가로막는 기관이나 개인에 대해 특혜나 협조를 일제 배제키로 결정했다. 그 결과인지 그날 동아일보, 경향신문, 조선일보, 대구매일신문 등 이법의 시행에 반대한 4대 신문에 대해 정오부터 1시간 동안 정부 부처와 산하 금융기관, 각급 행정 관서들이 신문 구독을 중지토록 하는 기이한 행정 압력을 가하였다.
그러나 언론계의 대대적인 투재 덕분에 언론윤리위원회법을 둘러싼 박정권과 언론계의 갈등은 결국 1964년 9월 8일 박대통령과 언론계 대표들이 만난 ‘유성회담’으로 38일 만에 일단락되었다. 그 타협의 내용은 법은 그대로 두되 시행은 유보한다는 것이었다. 유성회담의 한 대표로 참석했던 편집인협회 부회장 최석채는 회담 전후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4일 저녁 청와대를 방문한 김성곤씨 (당시 공화당 중진이며 동양통신 경영주)가 박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언론계에서 정부의 위신과 체면을 유지할 수 있는 성의만 보여준다면 언론윤리위법 시행을 유보할 수 도 있다는 힌트를 얻었다. 6일 김씨의 주선으로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홍종철 공보장관, 유봉영 철폐특위 위원장, 고재욱 철폐특위 부위원장 등이 회동, 언론계가 자율적 규제를 강화함으로써 언론윤리위법 시행을 유보하게끔 요청하는 구체적 내용의 각서를 정부에 제출해 달라는 정부 측 요구사항을 토의했다. 7일 오전 철폐특위 상임위가 가서 제출 문제를 토의했으나 부결됐다. 오전 회의 결과를 안 정부 측이 재회담을 요청, 다시 토의한 결과 각서가 아니더라도 달리 적당한 방법으로 할 수 있다는 시사를 얻었다. 오후 철폐특위 상임위에서 격론 끝에 각서가 아닌 제2의 건의서를 내기로 하고 때마침 유성에 내려가 있는 박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대표를 파견키로 결정했다. 7일 밤 대표 6명(유봉영, 고재욱, 홍종인, 최석채, 김규환, 이환의)이 기차로 유성에 내려갔으며 달리는 차 안에서 건의문을 만들었다. 8일 오전 9시 15분 유성의 한 호텔에서 박 대통령과 만나 언론 윤리 위법 파동 수습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 회담에서 확실한 언질은 받지 못했으나 유성까지 내려온 것이 헛되지 않으리라는 자신을 얻었다."
언론 윤리위원법 파동의 와중인 19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는 이른바 ‘인혁당 사건’ 이란 것을 발표했다. 중앙정보부부장 김형욱은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적인 지하조직으로 국가를 변란하려던 인민혁명당 사건을 적발, 일당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16명을 전국에 수배중에 있다“고 발표한 것이다. 그러나 이사건은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한 건을 올리기 위해 철저하게 조작한 사건이었다. 오죽하면 검사 3명이 기소할 수 없다며 사표까지 제출했겠는가. 박 정권은 이 사건을 어거지로 조작해 힘으로 밀어붙여 12명의 피고에 대해 대법원에서 최고 3년에서 1년까지 형을 선고받게 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이는 처음 발표와는 큰 거리가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다. 박정권은 그게 아쉬웠던지 10년 뒤인 혁당재건위 사건이라는 또 다른 조작을 획책하게 된다.
「세대」 필화 사건
언론윤리위법 실시에서 일단 후퇴한 박 정권은 다른 방법으로 언론을 통제하려고 했는데, 그건 정부에 비판적인 특정한 언론사 및 기자들에 대한 물리적 제재와 더불어 정보 기관원이 언론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계엄 해제 뒤에도 1964년 11월 21일 자 「조선일보」의 <남북한 가입 제안 준비> 제하의 기사로 선우휘 편집국장과 필자인 이영희 기자가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되는 등 필화는 계속됐다.
이른바 ‘세대 필화 사건’은 국회에서 야당이 문제삼아 일어난 필화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특이했다. 1964년 11월 10일 야당 국회의원 한건수는 국회 국방위원회의 정책질의 석상에서 「세대」 11월호에 문화방송 사장 황용주가 기고한 <강력한 통일 정부에의 의지>라는 글이 ‘국시에 위반’되는지 여부를 따졌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여당인 공화당 대변인 신범식은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이 남북통일 문제에 언급한 ‘광주 발언’은 우리들의 통일 원칙을 재확인한 것이며, 「세대」지에서 문제화된 기사 내용은 각자가 자기의 소견을 밝히는 언론 자유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당으로서는 관여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야당은 국시 위반을 내세워 국무위원급을 위시해서 ‘보다 더 고위층에 상당하는 관계자의 정치적 책임’까지 추궁하겠다는 정치 공세를 폈다. 야당의 그런 공세 때문인지 서울지검 공안부는 11일 밤에 황용주를 구속했는데, 구속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남북 두 개의 한국을 내세워 대한민국 정부의 합헌성을 부인하였고, 8, 15 후 미국의 진주를 점령으로 보고 6, 25의 참전을 군사 개입으로 단정하여 반미 사상을 고취했으며, 유엔 동시 가입과 제3국을 통한 대화의 방안도 수립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북한 괴뢰의 이른바 통일론을 찬양 고무 동조한 혐의가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황용주는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기동창으로서 당시 박정희와 친분이 가장 두터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는 점이다. 아마 그래서 야당도 적극적인 정치 공세를 폈을 것이다. 게다가 박정희는 그 이전인 10월 18일 춘천에서 강원도지사와 공화당 강원도 당위원장과 환담하는 자리에서 국내외적인 여건으로 보아 남북통일이 멀지 않아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한 바 있었다. 당시 국제사회는 중공의 핵 실험 성공과 영국 노동당의 13년 만의 집권, 그리고 후르시초프의 실각 등과 같은 변화가 일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민정당 대표최고위원 윤보선은 박정희가 춘천에서 한 발언의 진의와 내용이 무엇인지 밝히라고 추궁을 해댔던 것이다. 박정희는 그런 공세에 밀려 11월 3일 광주에서 열린 학생의 날 기념 식전에서 치사를 통해 유엔 감시하에서 남북한 자유 총선거라는 통일방안 외에는 어떠한 방안도 있을 수 없으며, "통일이 급하다 하여 그 방법마저 바꿀 수는 없다"고 여론이나 감상적 공론만으로는 통일이 될 수 없다고 밝혔다.
황용주는 이듬해 4월 30일에 열린 1심 공판에서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으며, 5년이 걸린 대법원판결에서도 원심판결을 확정받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1963년 대통령 선거와 더불어 이 사건은 야당이 매카시즘 공세를 펼쳤다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박정희는 다시금 통일과 관련된 정치적 교훈을 얻었던 건 아닐까? 매카시즘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정치적 무기라고 하는 교훈을 말이다.
경제 개발과 철권통치
또 박 정권은 1964년 9월 월남에 제1 이동 외과 병원을 파견하였고 1965년 10월부터는 전투부대를 파견하기 시작했다. 월남은 파병은 언론의 또 다른 치부를 드러내 주는 사건이었다. 언론인 송건호는 이렇게 말한다.
"월남 파병 문제는 이미 1964년 말부터 정계나 언론계에서 그 득실을 놓고 활발히 거론되고 있었다. 이러한 의논 과정에서 언론계의 대부분은 파병이 후일 한국에 오래오래 문제를 남길 것이라는 비판적 입장이 압도적으로 우세했고, 따라서 사적으로는 이 점에 있어 거의 일치했다. 그러나 이러한 파병 반대 여론이 신문에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었다. 공개적으로 월남 파병이 앞날의 국가 이익으로 보아 이롭지 않으며 파병에 반대한다는 주장을 사설을 통해 명백히 밝힌 신문이 하나도 없었다. 단지 파병에는 이러저러한 문제점이 있다는 애매모호한 주장만이 있을 뿐이었다. 언론이 이미 양심과 독립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첫 번째 예였다."
1965년부터는 언론인에 대한 테러도 급증했다. 1965년 9월 7일 밤 「동아일보」 편집국장 대리 변영권의 집 대문이 괴한들에 의해 폭파됐으며, 바로 다음 날엔 동아방송 제작과장 조동화가 서울시경에서 나왔다는 괴한들에 의해 폭행을 당한 뒤 유기되었다. 1966년 4월 25일 「동아일보」 최영철 기자는 박정희를 비판한 <소신은 만능인가> 라는 기사로 테러를 당했으며 7월 20일 밤 '동아일보' 권오기 정치부 차장 역시 괴한으로부터 테러를 당했다. 12월에도 '강원일보' 기자의 군복 괴한에 의한 납치 사건, 1967년 1월의 '호남매일신문' 기자의 군 장교에 의한 폭행 사건 및 '강원일보' 사회부장 집 괴한 칩입 사건 등이 발생했다.
박 정권은 한편으론 언론과 인권 탄압이라는 채찍을 휘두르면서 경제 개발이라고 하는 당근을 끊임없이 내밀고 그걸 홍보하는 데에 열을 올렸다. 1966년엔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계획이 발표되었고, 경제성장률은 이 기간 중 연평균 9.7%를 기록했다. 1967년 5월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대통령 자리에 오른 박정희는 개발실적을 내세우며 더욱 강력한 철권통치로 치달았다.
1967년 대선을 앞두고 일반 대중에게 선을 뵌 영화 <팔도강산>은 공보부가 나서서 기획하고 제작한 홍보물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팔도강산> 시리즈로 모두 5편의 영화 제작과 흥행이 끝난 뒤에는 <꽃 피는 팔도강산>이라는 제목의 TV 연속극(KBS)까지 만들어져 정권 홍보에 크게 기여하였다.
원래 영화 <팔도강산>에서는 주연 배우인 황정순이 교통사고로 주게 돼 있었는데 당시 공보부 장관 윤주영의 요청으로 사는 걸로 처리됐다. 물론 그 바람에 영화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윤주영이 나중에 또 다른 주연 배우인 김희갑에게 밝힌 바에 따르면, 그 영화를 TV 연속극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8. 박정희 정권하의 언론 II
‘신문은 편집인 손에서 떠났다’
3선 개헌을 획책하고 있던 박 정권은 1967년 총선에서 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부정선거로 개헌 가능선인 3분의 2 이상 의석을 확보하였는데, 이 부정선거가 말해 주듯이 박 정권의 오만방자함은 극에 이르렀고 이는 다시 언론 탄압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1968년 말에 발생한 신동아 사건이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신동아는 일제 치하에서 정간된 지 28년 만에 1964년 9월호부터 복간되었다.)
동아일보사가 발행하는 월간 「신동아」는 1968년 12월호에 <차관>이라는 심층 보도 기사를 실었는데, 그 주된 내용은 '차관이 정경유착의 표본이며 정치자금의 원천이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중앙정보부는 김진배 기자 등 기자 5명을 불러 반공법 위반혐의로 수사를 하였으며 트집을 잡기 위해 10월호에 실렸던 <북괴와 중, 소 분열>이라는 기사도 문제 삼았다. 이 기사의 필자는 당시 미국 미주리대 조순승 교수였는데, 문제가 된 건 '남만주 빨치산 운동의 지도자 김일성'이라는 표현이었다. 이건 이미 문제가 되어 11월호에 '공비의 두목'이라는 말의 오역이었다고 정정기사를 게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박정권은 발행인 김상만 부사장에게 소유 주식을 포기하고 「신동아」를 자진 폐간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동아일보는 그런 압력에 굴복하여 12월 7일 오역을 다시 한번 사과하는 굴욕적인 사고를 게재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천관우 주필, 「신동아」 주관, 「신동아」 부장의 사표를 수리하였다. 이 사건을 지켜본 최석채 신문편집인협회 회장은 1968년 12월 7일자 「기자협보회」와의 인터뷰에서 "신문은 편집인 손에서 떠났다"고 토로하였다.
더욱 씁쓸한 것은 '신동아 사건'은 「동아일보」를 제외하곤 모든 언론 매체들이 단 한 줄도 보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 사회학자 김해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심지어는 이 사건이 정치 문제화되어 국회에서 논란이 되었는데도 그 국회 활동상마저도 제대로 보도하지를 못했다. 권력을 상대로 기자들의 연행, 구속 사실을 항의하는 일은 생각도 할 수 없는 풍토가 되고 말았다. 적어도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어떤 필화 사건이 일어났을 경우 언론계는 그 사실만큼은 신속하게 보도했었다. 신동아 사건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언론인의 연행 구속이 있을 때는 그때마다 당하는 사나 언론 단체가 항의하곤 했다. 심지어는 대통령을 상대로 항의문을 전달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사상계와 장준하의 시련
'신동아 사건'이 말해 주듯이, 당시 대표적인 월간지는 「신동아」였으며 이승만 정권 치하에서 맹활약을 했던 「사상계」는 군사정권의 탄압과 이후 장준하의 정계 진출로 인해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5, 16쿠데타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한 바 있는 「사상계」는 한일회담에 대해서도 비판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는데, 이때 군사정권은 '사상계 죽이기' 공작을 개시했던 것이다. 서점에 나간 「사상계」는 관권의 압력으로 대부분 반품이 되어 돌아왔고 그런 음성적인 탄압이 몇 개월간 계속되면서 「사상계」는 경영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50년사」의 저자 임영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상계」를 겨냥한 박정희의 공격은 집요하고 교묘하게 진행되었다. 그것은 반품을 통해 「사상계」의 경영 상태를 곤란하게 만드는 일과 세무사찰이었다. 중앙정보부는 「사상계」가 출간되면 대량으로 주문하여 가수요를 창출한 다음 3개월 뒤 구입한 서점을 통해 고스란히 반품으로 되돌려보냈다. 그리고 돌아온 반품은 폐지가 되어 재생지 공장으로 실려갔다. 이렇게 계속되는 안기부의 반품 공작으로 「사상계」의 경영 상태가 악화되어 장준하는 이런 어려움을 정기 구독자 모집으로 극복하려고 기도하였다. 정기 구독자 모집은 매우 성과가 있었지만 그것도 시일이 지나면서 한계에 이르렀다."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 장준하는 잡지의 영역을 벗어나 시국 강연 연사로 맹활약하면서 결국엔 정당에 가입하게 되었고, 1966년 10월 26일엔 구속되기도 했다. 그가 구속된 이유는 민중당이 주최한 '특정 재벌 밀수 진상 폭로 및 규탄 국민 대회‘에서 “박정희란 사람은 우리나라 밀수 왕초다" "존슨 대통령이 방한하는 것은 박정희씨가 잘났다고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한국 청년의 피가 더 필요해서 오는 것이다"라고 한 발언때문이었다.
장준하는 구속된 상태로 1967년 6, 8 국회의원 선거에 유진오(민중당), 윤보선(신한당), 이범석, 백낙준의 4자 회담 결과 새로 발족된 신민당 후보로 서울 동대문을구에 출마해 4만 표 이상을 얻는 압도적 표차로 당선되었다. 그가 국회의원이 된 후 「사상계」는 교수, 공무원, 언론인, 정치인 등 다양한 경력을 갖고 있는 부완혁에게로 판권이 넘어갔다. 그 이후 「사상계」는 「신동아」, 「월간중앙」을 뒤쫓아가는 신세가 되었다.
장준하와 박정희의 반목과 갈등은 매우 뿌리 깊은 것이었다. 장준하는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만주에서 독립군을 추적한 바 있는 관동군 중위 '오카모토'(박정희)를 경멸했고, 박정희는 장준하에 대해 열등의식에서 비롯된 증오심 비슷한 걸 갖고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8, 15 해방 후인 1945년 9월 초순 중국에서였다. 일제의 항복으로 패잔병이 된 박정희는 시안에서 독립군 장교인 장준하를 만나게 된다. 언론인 김상웅은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장준하는 이때 일본 장교라는 과거를 별로 참회하지 않고 행동하는 박정희에게,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자진해서 일군을 탈출하지 않은 점, 일본이 패전하지 않았다면 일군 장교로서 여전히 한국 독립투사를 학살했을 것이라는 점, 유난스럽게 기회주의적인 자세 등을 들어 크게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측근 이철우 증언)."
당시 「사상계」가 주장했던 '언론의 게릴라전'은 오늘날에 더욱 유효한 개념이 아닌가 생각된다. 함석헌은 「사상계」 1967년 1월호에서 다음과 같이 '언론의 게릴라전'을 주장하였다.
"이번 선거가 성공하든 또는 실패하면 그럴수록 제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언론의 게릴라전이다. 국민의 양심을 대표하는 사상계가 경영난에 빠져 있다. 계획적인 압박이 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대규모의 정규군의 전쟁시대가 지나가고 게릴라전이 승부를 결정하는 바와 같이 언론에서도 대신문 대잡지가 여론을 지배하는 시대가 지나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정규군이 패퇴하면 그 패전부대를 무수한 게릴라 부대로 재편성하여 큰 부대로는 어찌할 수도 없는 전국 구석구석에까지 파견하여 오히려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것처럼, 우리들의 사상전에 있어서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 정권을 이대로 방치해 둔다면 새로운 희망이 솟아 나오지 않는다.
1, 21사태와 통일혁명단 사건
「신동아」에 대한 박 정권의 몰지각한 탄압은 1968년 초에 벌어졌던 이른바 '1, 21사태'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았다.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의 무장 공비 31명이 "박정희 모가지를 따러 왔다"며 청와대 근처에까지 쳐들어와 당시 살벌한 공안정국이 형성돼 있었던 것이다. 또 1, 21사태가 일어난 지 이틀 후인 1월 23일에는 미국의 첩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억류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같은 해 10월 30일에는 울진, 삼척에 130여 명의 무장 공비가 침투하는 사건이 일어나 남북한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1, 21사태가 일어나자 박정권은 즉각 향토예비군 제도를 창설했고 울진, 삼척 무장 공비 사건이 일어난 지 20여 일 후인 11월 21일에는 도, 시민증을 폐지하고 주민등록증 제도를 도입했다.
박 정권은 국내 언론은 무자비한 탄압으로 통제하는 한편 외국 언론에 대해선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애를 썼다. 1968년 미국 「워싱턴 포스트」의 동북아시아 책임자로서 한국을 처음으로 담당하기 시작했던 셀리그 해리슨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그 시정 박정희 정권은 도쿄에 있는 외국 특파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애썼는데, 우리는 서울 방문 때마다 호사스런 기생파티를 제공받았고 고위층과도 쉽게 접촉할 수 있었다. 내 경우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통령과의 단독 회견을 가졌다. 그러나 기생파티는 내가 박 정권의 3선 개헌안에 대한 대중적 반대 투쟁을 광범위하게 보도하기 시작한 1969년 7월 끝났다."
해리슨도 지적했다시피, 3선 개헌안에 대한 대중적 반대 투쟁은 치열하게 전개되었지만 박 정권의 정치 공작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던 중 1968년 8월 24일 이른바 '통일혁명당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으로 모두 158명이 검거되고 50명이 구속되었는데, 중앙정보부의 발표에 따르면 주동자는 김종태를 필두로 한 김질락(월간 「청맥」 주간) 등 서울대 문리대를 비롯 각 대학 출신의 혁신적 엘리트들로 구성돼 있었다. 이 사건으로 모두 5명이 처형되고 신영복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중형을 받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청맥」이라고 하는 잡지이다. 이 잡지는 1964년 8월에 창간되어 1967년 6월호로 통권 35호, 총 4만 5천 부(수사 기관 발표)를 발간, 배포했다. 대표 김진환은 북으로 가고, 주간 김질락은 처형되었다. 청맥에 대해 언론인 김삼웅은 이렇게 말한다.
"중앙정보부의 발표대로라면 월간 「청맥」은 통일혁명단 산하에 있는 9개 서클 중의 하나였다. 군사 독재의 질곡과 전통적인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1960년대 중반의 젊은 인텔리들에게 「청맥」은 당시의 교양지 「사상계」와는 또 다른 방향에서 지적인 호기심과 매력의 대상이었다. 이런 잡지가 북한의 자금으로 운영되고, 발행인과 주간이 북측과 연결되었다는 정부의 발표는 남한 지식인들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 「청맥」이 북한의 자금으로, 친북 인사들에 의해 발행된 잡지라고는 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친북적인 성향을 띠지 않는 합법적인 교양지였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평가는 달라져야 한다. 「청맥」 사건은 분단 체제의 산물로서, 이에 대한 분석과 평가가 자유롭게 진행되어야 한다. 예가 적절할지는 모르지만, 범죄자가 처형되더라도 그 자식은 보호받아야 하듯이, 비록 김질락 등이 처형되었다 치더라도 당시 한국적 정신 풍토에서 발행되고, 수많은 이 땅의 지식인들이 참여하여 만든 잡지는 그 나름대로 의미와 가치가 평가되어야 한다. 따라서 합법적인 공간에서 발행된 「청맥」은 마땅히 우리 언론사에 편입되고 연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재벌 언론' 「중앙일보」의 창간
1960년대 중반은 가중되는 언론 탄압과 더불어 언론계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상업주의가 심화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1965년 5월 6일엔 당당하게 상업주의를 표방한 「신아일보」가 창간되었으며, 10월 22일엔 삼성재벌에 의해 「중앙일보」가 창간되었다.
또 1966년 1월 25일엔 은행 부채 4천6백만 원을 갚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향신문」이 경매 처분되었는데 「경향신문」은 기아산업 대표이던 김철호에게 넘어갔다. 「경향신문」의 경매 처분은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 시 「경향신문」이 강력하게 저항한 것에 대한 박 정권의 보복 조치였다.
재벌의 지원을 받은 「중앙일보」의 창간은 다른 신문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앙일보는 삼성의 막대한 자본에 힘입어 무가지를 총 발행 부수의 27%까지 늘리는 공격적인 판매 전략을 구사했으며 1967년 당시 국내 초고속 윤전기 8대 중 5대를 보유하는 등의 자본력 과시로 다른 신문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미디어오늘」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른 언론사들은 방어적인 출혈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1963년과 1967년 사이 신문 판매 부수는 약 2배 정도 늘어나는 데 불과했으나 중앙 종합일간지의 평균 자본 규모는 약 7.7배 가까이 증가했다. 판매 수입의 증대와는 무관하게 중앙일보의 공격적인 시설 투자 등에 영향을 받아 다른 언론사들에서도 급격한 시설 투자 등이 이뤄졌음을 말해 주는 사례이다."
다른 신문들이 중앙일보의 그런 공격적인 경영을 반겼을 리 만무였다. 1966년 삼성그룹이 관련된 이른바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자 다른 신문들은 융단폭격을 퍼부었고 이는 중앙일보에게도 다소의 타격을 주었다.
이 사건은 원래 5월 24일 발생한 것으로 사건의 내용은 삼성의 계열사인 한국비료가 사카린 원료 58톤을 한국비료 공장 건설 자재로 가장하여 일본으로부터 밀수입하여 시판하려다 부산세관에 적발된 뒤 2천만 원의 벌과금을 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9월 15일 언론 보도가 도화선이 되어 정치, 사회 문제로 비화되었고 9월 22일 국회에서 국회의원 김두한이 부총리 장기영에게 파고다 공원에서 퍼온 오물을 퍼부음으로써 그 절정에 달했다. 삼성이 한국비료 건설을 위해 일본의 미츠이로부터 5천만 달러에 가까운 차관을 들여올 때 지불 보증을 한 사람이 바로 장기영이었기 때문에, 사카린 밀수가 정치자금 염출과 관련이 있지 않느냐는 국회의 질책이 장기영에게 집중적으로 퍼부어졌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세계일보' 논설위원 주태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병철 삼성 회장이 한비 주식 51%를 국가에 헌납하는 것으로 매듭됐으나 이 사건은 외자 도입이 국민 전체에게 의혹을 사게 되는 계기가 됐다. 어떤 신문사는, 사설에서는 차관망국론을 언급하면서도 뒤로는 일본의 차관 도입으로 호텔을 지으면서 '빨리 인가를 내 달라'고 기획원에 압력을 넣어 관리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그렇게 뻔뻔스러운 짓을 저지른 신문은 다름 아닌 '조선일보'였다. 이 당시 일부 신문사들은 언론 권력을 이용하여 사익을 채우는 데에 혈안이 돼 있었다. 사카린 밀수 사건에 대한 동양방송과 「중앙일보」의 대응도 다를 바 없었다.
삼성 비호에 동원된 중앙매스컴
한국비료와 동일 계열사인 동양방송은 한국비료를 비호하는 프로그램들을 제작해 재벌이 언론 기업 소유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예컨대, 1966년 9월 18일 아침 9시 30분에 방영된 <일요응접실>이라는 교양프로그램에서는 「중앙일보」 논설위원 신상초, 서울대 교수 김기두를 출연시켜 비호 방송을 하였으며, 그날 저녁 7시 <석양의 데이트>라는 프로그램에선 이대 출판부장 정충량, 황성모,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승한, 경희대 교수 박경화 등의 지식인을 출연시켜 한국비료 밀수 행위를 비호하게 했던 것이다.
삼성의 적반하장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다. 그런 여론에 밀려서인지 박정희까지 나서서 재벌의 언론 기업 소유를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건 시늉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걸 법으로 금지시키면 되는 건데 말이다. 실제로 이 사건은 중앙매스컴에 대한 어떤 실질적 규제나 법률의 제정도 이루지 못한 채 사과 방송과 출연자의 1개월간 방송 출연 금지 정도로 그치고 말았다.
다른 신문들은 삼성의 적반하장에 대해 폭격을 퍼부었다. 물론 신문들의 비판 자체는 타당한 것이었겠지만, 평소 신문들이 재벌들의 비리에 관대했다는 걸 감안한다면 보복적인 성격이 없었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삼성그룹 회장 이병철은 그 사건이 마무리된 지 3년 후인 1969년 2월 14일 삼성그룹 전 임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치적으로 누군가가 작용을 많이 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누가 했는지 그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아마 우리 「중앙일보「가 미워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때 보니까 주로 신문이 동원되었으니 신문을 동원시킨 장본인이 있겠지요. 「중앙일보」를 보면 다른 신문이 10년이 걸려서 20만 부를 발행하게 되어도 큰 성공이라고 말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1년 만에 30만 부 이상을 발행하고 있었습니다. 「중앙일보」가 너무나 빨리 발전되는 바람에 다른 신문은 모두 그것을 시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차제에 이걸 없애 버리자' 그렇게 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때 「중앙일보」가 넘어지지 않은 것이 당시의 형세를 회상해 볼 때 이상한 일입니다. 1주일만 두들겨도 없어질 것이 명약관화한데 1년을 계속 맞아도 「중앙일보」가 건재한 것이 이상하다는 말도 들어 왔습니다."
삼성그룹의 비리에 대해 전혀 반성의 기미가 없는 점이 뻔뻔하고 역겹기는 하지만, 이 사건은 이후로도 우리 신문들이 밥먹듯이 저지르는 공적 보도를 빙자한 사적 보복의 한 사례일 수 있다고 하는 점에서 이병철의 발언은 시사하는 바 크다 하겠다.
그러나 이병철이 그 말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병철의 동양방송과 중앙일보도 언론 권력으로서의 횡포를 유감없이 부린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게 바로 1969년 4월에 일어난 '미원, 미풍 조미료 광고 방송 사건'이다. 당시 미원과 미풍은 조미료 밀수 협의로 수사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었는데, 동양방송은 그 사건을 보도하면서 미원 관련 보도만 내보냈으며, 미원과 함께 조사를 받는 삼성그룹 계열의 미풍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미원의 광고마저 빼 버렸다. 미원 측은 이에 항의하여 4월 5일 「동아일보」 2면에 동양방송의 불공정한 보도와 「중앙일보」의 해명 광고 게재 거부를 항의하는 호소문(의견광고)을 냈다. 언론사를 갖지 않은 기업은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신민당 소명서' 사건
1967년 4월에 일어난 이른바 '신민당 소명서' 사건은 한 편의 '블랙 코미디'였다. 신민당은 제6대 대통령 선거일(1967년 5월 3일)을 앞둔 4월 7일(신문의 날) 성명을 발표하여 "정부 기관원이 언론 기관에 상주하여 압력을 가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IPI와 UNCURK(국제연합 한국통일부흥위원단)에 '한국 정부의 언론 탄압에 대한 소명서'를 제출키로 하는 한편, 신문발행인협회, 신문편집인협회, 기자협회 등에 격려문을 보내기로 방침을 세웠다. 신문들이 신민당을 공격하는 해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조선일보'는 4월 7일자 조간에서 <신민당에 충고한다:언론의 권위를 선거에 이용 말라>라는 제하에 언론 단체에 대한 모욕적 표현을 취소하라고 요구했고, '한국일보'는 같은 날 사설에서 <신민당은 언론 불신을 조장 말라>라는 제하에 IPI나 UNCURK에 소명서를 제출하려는 것은 지나친 사대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꾸짖었다. 또 같은 날 석간인 '중앙일보'는 "한국 언론의 자주성을 얕보고 언론을 병신 취급하지 말라"고 공격했고, '경향신문'은 "언론 기관을 모독하는 망상을 버리라"고 호통쳤고, '대한일보'는 "한국 언론에 대한 중대 모욕으로 단호히 지탄한다"고 비난했다. 정부 기관원이 언론 기관에 상주하여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신민당의 주장에 대해서도 '조선일보'는 '터무니없는 악선전'이라고 주장했고, '대한일보'와 '경향신문'은 전혀 근거 없는 맹랑한 말이라고 주장했고, '중앙일보'와 '한국일보'는 언급을 피했다.
다만 '신아일보'는 8일 <언론에 압력 있다>는 제하의 사설에서 신민당의 주장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소명서 제출에 대해선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에 신중한 유의가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또 11일 뒤늦게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한 '동아일보'는 "(기관원의) 상주란 생각할 수 없으나 빈번히 출입하는 것은 사실이요, 간섭 용훼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으나 자료 제공 또는 청탁의 형식으로 그 의견이 빈번히 표명되었던 것도 사실이요. ... 심리적인 불안과 압박을 주었다는 것도 사실"이라 시인하였으나, "국제기구에 언론문제를 언론과 상의 없이 먼저 제기한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한국일보 장기영의 활약
1968년을 전후해 각 일간지들은 자매지로 주간지를 발행하였는데, 1968년의 경우 이미 발행되고 있던 '주간한국' 이외에 '주간중앙'(8월 24일), '선데이서울'(9월 22일), '주간조선'(10월 20일), '주간경향'(11월 17일) 등이 창간됐다. 이 주간지들의 창간은 '주간한국'의 성공에 자극을 받아 이루어진 것인데, '주간한국'의 발행 부수는 1968년에 이르러 한국일보의 발행 부수를 능가하는 40만 부를 오르내렸다.
일간지의 매체 다각화를 선도한 신문은 한국일보였다. 장기영은 1960년 7월 17일 '소년한국일보' 창간을 시초로 하여 1960년 8월 1일에 '서울경제신문', 1964년 9월 27일에 '주간한국', 1969년 1월 1일에 '주간여성', 1969년 9월 26일에 '일간스포츠'를 창간하였다. 장기영은 심지어 1968년에 한국일보 사옥이 불탄 뒤 새 건물을 지을 때 건물 꼭대기에 높은 TV 안테나 탑을 세워 1950년대 말 실패로 끝난 TV 방송국의 재개국을 기약하는 열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장기영의 매체 다각화와 관련, 한국외국어대 교수 정진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문 기업은 하루 몇 시간 동안의 피크타임을 기준으로 인력과 시설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같은 시설을 활용하여 여러 개의 신문을 발행한다면 인력과 시설 면에서의 로스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풀로 가동할 수 있다는 것이 장기영의 생각이었다. 그는 경제기획원 장관을 물러나 한국일보로 되돌아온 후, 당시 우리나라 신문이 하루는 8면, 하루는 4면으로 발행되는 제도는 경영상의 로스가 너무 많다고 말한 적이 있다. 4면을 내는 날도 8면 낼 때의 인원과 시설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한국일보는 다른 신문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인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원래 조간은 석간보다 많은 인원이 필요하지만, 그보다는 한국일보는 1950년대 중반 이후 매년 한두 차례씩 공개 채용한 견습 기자가 수용 한계를 넘치고 있었다. 잉여 인원을 활용할 수 있는 지면이 더 필요했다고 할 수도 있다. 장기영의 개성과 스케일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 배경 때문인지 한국일보는 다른 신문들의 인력 양성소 노릇을 톡톡히 했다. 한국일보를 거쳐 다른 신문들로 옮긴 기자들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장기영은 '왕초'니 '대기자'니 하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장기영은 신문 제작에 있어서도 많은 아이디어를 낸 인물로 유명하다. 한국외국어대 교수 정진석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하고 많은 일화와 신문에 관련된 경구, 명언들을 남기기도 했지만 한국일보에 우리나라 최초로 과학부와 기사 심사부를 설치했고, <모임>란과 공항에 드나드는 사람을 취재하는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등 참신한 아이디어를 수없이 개발했다. 그는 '한국일보'가 신문의 최정상을 정복한다는 뜻으로 '정상이 보인다'고 말하기도 하다가 1964년 5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잠시 언론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의 아이디어 가운데 그가 죽은 후 6년이 지난 뒤에야 전 국민과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이 KBS가 1983년에 벌인 이산가족 찾기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장기영은 1961년 1월 1일부터 '10만 어린이 부모 찾아주기 운동'을 시작했고, 1974년 1월에는 '70만 이산가족 친지 찾기'를 벌여 그 사무국을 한국일보 안에 두었던 일이 있었다. ... 이 사업을 KBS에서 벌인 이원홍 사장은 바로 '한국일보' 견습 기자 4기(1956년 4월 1일)로 입사하여 1971년 6월 편집국장을 지내기도 했던 사람이다."
코리아나호텔과 맞바꾼 '조선일보'의 3선 개헌 캠페인
이 주간지들 가운데 압권은 단연코 '선데이서울'이었다. "대중의 구미에 맞는 '넘치는 멋'과 '풍부한 화제' 그리고 '감미로운' 내용을 담은 "대중잡지라는 기치를 내걸고 창간된 '선데이서울'은 세미누드 화보와 함께 <눈초리에 몸이 아파요>(스트립쇼걸 인터뷰), <퇴근 뒤의 애정 관리> 등 당시로선 파격적으로 '낯뜨거운' 내용들을 과감히 다뤄 창간호 6만 부를 발매 2시간 만에 팔아치우는 대성공을 거두었다('선데이서울'은 1975년에 이르러 월 1억 원의 순수익을 올려 서울신문의 어려운 재정 형편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1978년엔 발행 부수가 23만 부를 돌파하기도 했다. '주간경향'도 창간 3주만에 10만 부를 넘어섰다.).
이런 주간지들의 번성과 관련하여 한국외국어대 교수 정진석은 "60년대 이후 대도시를 중심으로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도시로 몰린 공장 노동자들이 주요 독자층을 형성하게됐다."고 말하고 "당시 정부로부터 증면을 억제받고 있던 신문사들이 오락, 흥미 위주의 주간지 발행을 통해 이들 독자들을 흡수하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서울 인구는 1960년 2백 50만 명에서 1970년 5백만 명으로 늘어났다.)
언론의 그러한 상업성 추구는 박 정권이 바라던 바였다. 박 정권은 언론에게 각종 특혜를 베풀어 언론이 오직 상업적 성장에 몰두하게 유도하였다. 1967년 당시 일반 자금의 대출 금리가 25%였을 때 신문들은 18%의 낮은 금리로 대출 특혜를 받았으며, 신문 용지에 대한 수입 관세에서도 신문들은 일반 수입관세 30% 대신 4.5%의 관세율을 적용받았으며, 저리의 차관 도입이라는 특혜까지 누리게 된다.
특히 조선일보는 1968년 박 정권이 베푼 특혜에 힘입어 신문사 건물과 코리아나호텔을 짓기 위해 일본에서 4천만 불의 상업 차관을 아주 좋은 조건으로 들여왔다. 차관 도입 당시 '조선일보' 경제부에 근무했던 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코리아나호텔 건립을 위한 자금은 1967년경 대일 청구권 자금 중 상업차관으로 들어온 것이며 언론사에 대한 상업차관으로는 이것이 첫 번째인 것으로 알고 있으며, 당시 국내 금리가 연 26%나 됐던 것과 비교하면 연 7~8%에 불과한 상업 차관을 허용한 것 자체가 엄청난 특혜임에 틀림없다. ... 당시 상업 차관을 주선한 사람은 방일영씨와 막역한 사이이며 공화당의 돈줄로 통하는 김성곤씨로 알고 있으며, 방씨와 김씨가 각별한 사이라는 것은 현재 조선일보에 김씨의 아호를 딴 성곡도서실이 있다는 사실로 잘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경제계 소식에 밝은 한 언론계 인사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당시 차관 도입 자체가 엄청난 특혜였기 때문에 차관을 도입한 측은 정부 측에30~40% 정도를 정치자금으로 내놓는 등 차관 도입에 따른 비리가 많았다. ... 경제 개발 계획 초기인 당시에 기간산업도 아닌 관광호텔 건립을 위해 귀중한 외자를 배정하는 것에 대해 경제기획원의 실무 담당 과장이 끝까지 외자 도입 허가에 동의하지 않아 코리아나호텔 상업차관은 외자 도입 허가 서류에 실무 담당자의 서명 없이 외자 도입이 허가된 유일한 사례가 됐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에 있겠는가. '조선일보'가 박 정권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기회는 곧 찾아왔다. 그건 바로 3선 개헌을 위한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었다. 박 정권은 1969년 10월 17일 2선 개헌안을 투표에 부쳐, 행정적 조작으로 77.1%의 투표율에 투표수의 3분의 2를 약간 넘는 찬성을 받았다고 발표했는데, 당시 '조선일보'의 아첨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조선일보'는 투표 전날인 10월 16일 자에 <'영광의 후퇴'보다 '전진의 십자가'를... '나는 나를 버리고 국가를 위해 한 번 더'>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공화당 기관지라도 감히 할 수 없는 낯뜨거운 아첨을 해 댄 것이다. 또 11명의 '각계 인사'를 선정하여 개헌을 지지하고 찬양하는 아첨의 소리를 잔뜩 늘어놓았다.
조선일보가 가장 심한 경우였다는 것일 뿐 1960년대 후반은 모든 신문들의 사세 확장이 눈에 띄게 이루어졌으며 이는 무엇보다도 가시적으로 사옥의 신, 증축과 대규모화 추진으로 나타났다. 조선일보의 1968년 신축 및 코리아나호텔 건축 이외에도 동아일보의 1962년, 1968년 두 차례 중축, 중앙일보의 1965년 신축, 서울신문의 1965년 별관 신축, 1969년 신축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신문의 타락과 무보수 기자
대부분 섹스를 상품화한 주간지들의 번성은 당시 언론이 어떤 참상에 처해 있었는지 그걸 역설적으로 웅변해 주는 것이었다. 당시의 언론 상황에 대해 언론인 송건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언론 자유에... 가혹한 권력 당국이 청소년들의 타락을 자극하면서 눈 뜨고 차마 읽을 수 없는 저속한 주간지들에 대해서는 거의 무제한이라 할 만큼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었다. ...젊은 세대의 본능을 좀먹어 들어가 그들의 정치적 사상적 의식화를 저지하는 데 어느 정도의 효과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명색이 사회의 공공, 공익사업이라 할 언론 기관에서 젊은 세대를 타락시키는 문화사업에 앞장서고 있다는 것, 더욱이 이러한 타기할 저속한 출판이 정부의 기관지라 할 서울신문이나 경향신문 같은 신문사일수록 더욱 심했다는 것은 개탄을 금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서울대 문리대 기독학생회는 1969년 6월 10일 교내 4, 19 기념탑 앞에서 섹스물 중심의 일부 주간지를 소각하는 항의 시위를 하면서 "윤리의 방종과 노예화에서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이제 이 조국과 인류를 좀먹는 탈선 매스컴을 불태운다"고 선언하였다.
9월 3일에는 연세대 총학생회가 언론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해 "외부의 압력이나 제재로 인한 언론의 타락은 바로 민주주의의 죽음이므로 언론인들은 다시 한번 냉정한 언론인의 양심과 지성과 용기를 찾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1969년 11월 편집인협회 주관으로 열린 매스컴 세미나에서 (동아일보)의 박권상 편집국장 대리는 "한국의 언론 기업에는 언론 기관을 공익기관으로서보다 자기의 정치적 또는 경제적 사유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보인다"고 말하고 "우리나라의 3대 통신 모두, 그리고 중앙의 8대 일간지 가운데 적어도 3개 신문이 유력한 재벌 소유"라고 지적했다.
박권상의 지적이 시사하듯, 1960년대는 신문의 정치적 도구이자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으로서 탈바꿈하기 시작한 기간이었다. 1960년대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8~10%인 반면, 신문 기업의 성장률은 20%에 이르렀다. 1961년 한국의 신문 총 부수는 74만 부로 인구 1백 명당 2.9부꼴이었으나 1965년에 100만 부 돌파로 3.9부. 1967년에 150만 부 돌파로 5.1부꼴로 늘어났다. 그러나 당시의 경제 개발 전략이 그러했듯이, 신문은 대도시에 집중되었는데 1961년 전체 발행 부수의 72%가 서울을 비롯한 10대 도시에 집중되었으며 1960년대 말 서울과 부산의 신문 구독자 수는 전체의 42.6%에 이르렀다.
신문사들의 다각적 경영도 이미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는데 당시 신문계의 정상을 차지하고 있던 동아일보의 경우, 다가적 경영에 의한 수입은 1961년 전체 매출액의 4%에 불과했으나 1970년에는 29%에 이르렀다. 광고 수입 의존도도 1950년에는 50%에 육박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자들은 아직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었다. 1965년의 경우, 10년 이상 경력을 가진 기자가 경제기획원이 정한 최저 생계비를 받았으며 1969년엔 중앙지 3~5년의 경력자가 최저 생계비 수준의 임금을 받았다.
그래도 저임금은 나은 편이었다. 아예 보수를 받지 않고 일하는 기자들이 많았다. 오죽하면 기자협회가 1964년 창립과 함께 '무보수 기자 일소 운동'에 나서겠는가. 1965년 11월 30일 문공부가 발표한 전국 무보수 기자 현황을 보면 전체 7천9명의 기자 가운데 1,567명이 무보수 기자인 것으로 집계됐다. 또 1968년도 문공부 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언론인 중에서 면세점 이하의 급료를 받거나 보수를 아예 받지 않는 언론인의 비율이 전체의 22.35%에 이르렀다. 1969년도 기자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중앙 종합일간지 본사 기자의 12.1%(313명), 지방 주재 기자의 51%(743명)가 면세점 이하의 급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보수, 저임금 기자들은 생계 유지 차원에서 비리를 저질렀기 때문에 이는 심각한 사회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저임금에도 불구하고 양심적으로 버틴 기자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걸 드라마틱하게 보여준 사례가 1969년 11월 2일에 벌어진 (동아일보) 마산 주재 기자인 박성원 일가족 자살 사건이다. 월급 1만 7천 원(당시 최저생계비 2만 5,790원)으로 부인과 4남 1녀를 부양하던 박성원은 계속되는 생활고로 가정불화가 잦자 이를 비관해 부인 아들과 함께 음독 자살했다.
영화의 몰락을 예고한 TV의 성장
1960년대 후반 방송계엔 큰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 바람은 누구나 감지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건 엉뚱하게도 전자산업 분야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1966년 정부는 전자산업을 수출육성 산업으로 지정하여 재정적인 지원과 함께 면세 혜택을 주었다. 1969년엔 아예 전자산업육성법을 공포하여 전자산업 지원에 박차를 가하였다. 1968년부터 텔레비전 수상기의 국내 조립 생산이 가능해졌는데, 주목할 것은 당시 전자산업의 적극적인 육성은 TV 수상기의 급격한 증가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사실이다.
1969년 8월 8일 MBC-TV가 개국하였다는 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후 MBC는 계속 지방국을 개국함으로써 1971년 4월에 이르러 전국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6월엔 7대 재벌이 주요 주주로 참여하여 적극적인 상업방송으로서 TBC-TV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한국 영화가 1969년을 정점으로 하여 이후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TV가 영화관객을 안방에 주저앉힌 것이다. 영화 관객은 1969년 1억 9천4백만 명으로 최고 기록을 수립한 이후 매년 평균 13%씩 감소하게 된다. 1971년에 1억 5천만 명, 1973년에 1억 1천만 명, 1975년에 7천8백만 명, 1977년에 6천5백만 명, 1990년엔 5천3백만 명 수준으로 떨어진다. 1969년에 우리 국민은 1인당 1년에 극장을 6번이나 갔지만 이 수치는 1978년에 2번, 1984년 이후 1번으로 줄게 된다.
MBC는 1968년부터 라디오 방송망을 확장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곧 TV 방송망 확장으로 이어졌는데, 이에 대해 원로 방송인 정순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68년에서 71년에 이르는 MBC 방송망의 확장은 (대통령 선거와 총선거가 1971년에 있었으므로) 정치적인 의미는 컸겠지만, 구매력이 그리 크지 못해서 광고주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쉬운 시장성 없는 도시에도 그 타당성 한 번 제대로 따져보지 않고 방송국을 세웠기 때문에 개국 초부터 경영상에는 문제가 많았던 것이다. 터가 좋지 않아 방송국이 영세해지면 해질수록, 돈을 벌기에 열을 올리게 되고 열을 올리면 올릴수록 방송은 나빠지게 마련이다. 이런 이치를 뻔히 알면서 여기저기 방송국을 마구 세운 데다가 요새 말로 '방송'의 '방'도 모르는 유지들을 모셔다 일부 지방 방송사를 맡겼으니, 방송이 어디로 갔겠는가?... '방송 출연자들에게 출연료는 왜 주느냐? 반대로 그를 선전해 준 사례를 방송국이 받아야지...' 하고 호통을 친 사장님, 사모님의 꽂꽂이 선생을 출연시키거나, 주치의를 건강상담에 출연시키고 좋아하는 국장님..."
1968년 코카콜라, 1969년 펩시콜라의 상륙은 TV 광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동아일보와 OB그룹의 공동투자로 1969년 1월에 설립된 광고대행사 만보사도 코카콜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광고 전문가 신인섭은 코카콜라가 한국 광고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코카콜라 광고는 한국 광고계에 일대 혁신을 일으켰다. 그 근본이 된 것은 서구에서는 지극히 당연하나 한국에서는 예외적이라 할 수 있던 광고대행사의 이용이었다. 거의 모든 광고주 회사가 자사에 광고 부서를 두고 광고를 직접 하던 이 무렵에 코카콜라는 만보사를 광고대행사로 씀으로써 근대적인 광고 제도를 이 나라에 토착화시키는 사례를 남겼다. 또한, 미리 연구, 조사해서 정한 컨셉트에 따라 1년 중 동일 테마를 가지고 계절에 따라 표현을 바꾸어 가며 캠페인을 전개했다. 전 매체를 동원해서 통일된 표현을 썼으며, 따라서, 상황이 허락하는 한 인쇄, 전파 및 기타 매체의 광고 제작이 동시에 이루어졌으며, 또한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했다. 이러한 제작 방법은 그 당시 한국에서는 드물게 보는 것이었는데, 사실상 길게 보아 오히려 제작비를 절감하는 것이기도 했다. 제작을 위해서는 국내 톱클라스의 크리에이터를 동원했는데, 스틸 사진에는 김한용, 작, 편곡에 최창권, 노래에 조영남을 썼다. 'It is the real thing.' 이란 코카콜라 캠페인은 '산뜻한 그 맛, 오직 그것뿐'으로 옮겼으며, 1970년대에 한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졌고, 가장 장수한 광고였다."
아폴로 11호, (아씨), (여로)
그렇게 방송사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전자산업이 TV 수상기를 생산해내는 가운데 수상기의 보급은 1966년에 4만 3천여 대에 이르던 것이 1967년에 7만 3천여 대, 1968년에 1만 8천여 대, 1969년에 22만 3천여 대, 1970년에 37만9천여 대에 이르게 되었다. 1970년 서울의 TV 보급률은 30% 선을 넘었다는 기록도 있다.
TV의 위성 중계는 사람들로 하여금 TV에 더욱 매료되게 만들었을 것이 틀림없다. 1960년대 후반 가장 큰 TV 이벤트는 인간의 달 착륙이었다. 1969년 7월 16일 미국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아폴로 11호를 발사하여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는데, 당시 우리 TV의 중계 경로는 매우 복잡했다. 화면은 미국의 케이프 케네디 발사 현장에서 미국 ABC-TV가 인공위성 인털새트 2호에 쏘아 올렸고, 이것을 일본의 NHK가 지구국에서 받아 전국에 중계하는 한편 한국을 위해 대마도에서 마이크로웨이브로 보내 주었다. 이것을 부산 금련산에서 받아 서울에 보내 다시 전국 텔레비전망을 통해 방송하는 방식을 채택했던 것이다. 금산 지구국이 준공된 건 1970년 6월 2일이었다.
그런가 하면 TV 드라마도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특히 1970년 3월 2일부터 방송된 TBC-TV의 (아씨)는 대성공을 거두어 방송사들 간에 치열한 일일연속극 경쟁을 낳게 만들었다. 원로 방송인 정순일은 당시의 경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1971년도의 TV 기본 편성표를 보면, KBS가 오후 8시 20분과 9시 30분, TBC가 오후 7시와 8시 30분과 10시 정각, MBC가 오후 7시 50분과 9시 10분과 9시 40분에 각각 20분 일일극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편성해 놓고 팽팽히 맞서 나갔으니, 참 대단한 싸움이었다. 반면 사회 교양프로그램은 점점 줄어들고, 오락 프로그램 전성시대가 온 것이다."
1972년 KBS-TV가 방송한 (여로)의 인기도 대단했다. 정순일은 (여로)의 인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떨어진 바보 남편, 장욱제와 태현실 내외의 연기는 전국의 시청자를 매일 밤 7시 30분만 되면 웃고 또 울리고 했는데 수상기가 1백만 대 가까이 보급되었어도 그리 흔치는 않던 시절이라 극장에서도 이 시간이 되면 관객들이 영화를 보다 말고 휴게실로 몰려가서 텔레비전을 보고 돌아오는 바람에 아예 20분간은 영화 상영을 중단했다는 얘기도 있었고, 저녁 시장은 텅텅 비고 상인들과 손님들이 모두 근처 다방으로 모였다느니, 이 시간에 도둑맞는 집과 밥 태우는 집이 많았었다느니 하는, 에피소드도 많았다. 특히 고생 끝에 부산까지 내려오는 데 성공한 태현실이 장욱제를 만날 날이 점점 가까워 오자, '오늘 만난다', '아니 내일이다'하는 논쟁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고, 국무회의가 열리기 전에 장관들이 한담을 나누는 자리에서도 자주 화제가 되었다는 소문이 들릴 정도였다. 작가가 시청자의 애간장을 태울 만큼 태우다 드디어 두 사람을 만나게 해 준 날 저녁, 필자는 고려대학 경영대학원 강의실에 있었는데 7시가 좀 지나면서 수강생이 한둘씩 휴게실로 빠져나가더니 방송 시간이 다 되어서는 그만 강의실이 거의 텅 비어 버리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한다."
전태일의 분신자살과 김지하의 (오적)
1970년 4월 8일 서울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기슭에서 일어난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는 박정희식 개발독재의 어두운 면을 여지없이 노출시켰다. 33명의 생명을 앗아간 이 사고는 부정부패로 얼룩진 날림 공사의 표본이었다. 그러나 그런 날림 공사가 판을 치는 가운데에도 경제 개발의 가시적인 성과는 하나둘 쌓여 갔다. 1970년 7월 7일에 개통된 경부고속도로가 가장 드라마틱한 사례일 것이다.
박정희식 개발독재의 어두운 면은 극심한 빈부 격차와 노동자 착취로도 나타났다. 영세한 봉제 공장이 8백여 개나 밀집되어있는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23살 먹은 전태일을 1970년 11월 13일 근로 조건 개선을 요구하여 온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자살했다. 그는 불길에 휩싸인 채 이렇게 부르짖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전태일 분신 사건은 당시의 언론 상황을 말해 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신문들은 사건 다음 날인 11월 14일 대부분 이 사건을 사회면에서 다뤘고 16일에는 사설을 내보냈지만(일요일이었던 15일 대부분의 일간지는 휴간), 그 이후 신문에서 이 사건에 대한 기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조선일보‘는 아예 이 사건을 보도하지도 않았다. ‘조선일보‘는 일요일에 유일하게 신문을 발간했으면서도 이 사건에 굳게 침묵을 지켰으며 이는 16일에도 마찬가지였다. 세상눈이 두려웠던지 17일에야 (한 청년 직공의 참화가 말해 주는 것)이라는 제하의 사설을 실었을 뿐이다. 물론 그 사설 내용조차도 악덕 기업주보다는 노동운동에 책임을 전가하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을 분노케 했다.
언론의 그런 외면에도 불구하고 전태일의 분신자살 사건은 다른 노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본격적인 노동운동이 벌어지게 만든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71년에 일어난 노동 분규 사건은 1,656건을 헤아렸는데, 이는 전년도의 165건의 열 배가 넘는 것이었다. 노동운동과 동시에 도시 빈민들의 생존권 투쟁도 활성화되었는데, 이는 1971년 8월의 경기도 광주단지 주민 폭동으로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 유명한 김지하의 담시 <오적>이 나온 게 이즈음이었다는 건 결코 우연은 아니었을 게다. '오적‘은 재벌, 국회의원, 장성, 장 차관, 고급 공무원 등 다섯 도둑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담은 풍자 담시였다. 원래 이시가 「사상계」 1970년 5월호에 실렸을 때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시를 읽은 박정희는 크게 분노하였지만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은 건드리면 커지니 소리 없이 묻어두는 게 낫다는 쪽으로 박정희를 달랬다. 후일 김계원은 <오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문제의 시라는 걸 읽는 순간 경악했고 김지하는 참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도 그 인상은 지워지지 않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어려운 한자까지 갖다 붙여 가며 썼는지...”
그러나 이 시가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에 전재되면서 정치 문제로 비화돼 결국 부완혁과 김지하를 포함한 네 명이 구속되었다. 「민주전선」엔 군 장성 부분이 삭제된 채로 실렸는데, 당시 신민당은 기관지를 무려 10만 부씩이나 찍어 가두 판매함으로써 재미를 보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사상계」의 발행이 중단되자 「조선일보」는 판권을 인수하여 계속 간행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편집실까지 두었으나 판권 인수 교섭이 여의치 않아 포기해 버렸다. 문공부는 9월 26일부로「사상계」의 등록을 말소시켜 버렸는데, 부완혁의 소송 제기로 사상계 등록 취소 처분을 취소하라는 원심판결을 확정한 대법원판결이 1972년 4월 26일에 나왔지만 여러 여건이 여의치 않아 「사상계」는 복간되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말았다.
사상계를 통해 큰 활약을 했던 함석헌이 1970년 4월에 개인잡지인 「씨알의 소리」를 창간했다는 것도 지적해 둘 필요가 있겠다. 4월 19일에 창간호 3천 부를 발간한 이 잡지는 편집위원으로 계훈제, 김동길, 이태영, 장준하, 천관우 등을 두었으며 나중에 김성식, 안병무, 법정 등이 참여하였다.
‘언론화형선언문’과 ‘언론 자유 수호 선언’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박 정권의 언론통제는 더욱 극심해졌으며 언론은 그런 통제에 순응하는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항의하여 1971년 3월 24일 서울대 법대생들은 학생총회를 열고 일간신문과 잡지 등을 불태우는 ‘언론화형식’을 가졌다. 3월 25일 서울대 문리대생들도 학생총회를 열고 ‘언론인에게 보내는 경고장’을 채택하였지만 신문엔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3월 26일 서울대 문리대 법대 상대 학생회장단 30여 명은 <민중의 소리 외면한 죄 무엇으로 갚을 텐가>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동아일보사 앞까지 찾아가 <언론인에게 보내는 경고장><언론화형선언문><언론인에게 고한다> 등의 유인물을 행인들에게 나눠주고 마이크로 낭독하였으며 언론 화형식을 가졌다.
학생들은 <언론화형선언문>을 통해 “이제 권력의 주구, 금력의 시녀가 되어 버린 너 언론을 슬퍼하며 조국에 반역하고 민족의 부름에 거역한 너 언론을 민족에 대한 반역자, 조국에 대한 반역자로 규정하여 민중의 이름으로 화형에 처하려 한다”고 선언하였다. 학생들은 또 <언론인에게 보내는 경고장>에서는 언론인들이“선배 투사의 한 서린 해골 뒤에 눌러앉아 대중을 우민화하고 오도하여 얻은 그 허울좋은 대가로 안일과 축제를 일삼는 자들”이라고 규탄하였다. 이 ‘경고장’은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정치 문제는 폭력이 무서워 못 쓰고, 사회 문제는 돈 먹었으니 눈감아 주고, 문화 기사는 판매 부수 때문에 저질로 치닫는다면 더이상 무엇을 쓰겠다는 것인가... 신문이 신문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요 대중을 위해 있는 것일진대, 폭력이 무서웠다고, 돈맛이 좋았다고 그렇게 나자빠져 버리면 그만인가! 도둑 지키라는 파수꾼이 망보기꾼으로 둔갑한 꼴이 아니고 무엇인가! 듣건대 일선 기자의 고생스런 취재는 겁먹고 배부른 부, 차장선에서 잘리기 일쑤고, 힘들게 부, 차장 손을 벗어나면 편집국장 옆에서 중앙정보부원이 지면을 난도질하고 있다니 이것이 무슨 해괴한 굿거리인가. 통탄할 언론의 무기력과 타락은 이미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이 주장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언론인 송건호는 당시 어느 언론사 한 논설위원의 개탄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상공부 문제는 이런 사정으로, 서울시 관계 문제는 저런 사정으로, 건설부 문제는 또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경제기획원 관계 기사는 또 다른 사정으로 모두 사설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회사측의 지시니 차라리 사설란을 없애버리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왜 학생들은 하필이면 동아일보사 앞에서 그런 시위를 벌였을까? <언론인에게 보내는 경고장> 가운데 다음과 같은 대목은 당시 「동아일보」의 위상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동아야 너도 보는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올라만 가는 조선의 저 추잡한 껍데기를. 너마저 저처럼 전락하려는가. 동아야 너도 알맹이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았는가. 우리는 신문 경영자가 이미 정상배로 전락했음을 단정하고 또한 신문을 출세의 발판으로 이용하려는 가짜들이 적지 않음을 알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닥 양심을 지니고 고민하고 있는 언론인이 어딘가에 있으리라 믿으며 그들께 호소한다...”
또 4월 2일 연세대생 5백여 명은 교련 거부 성토대회를 갖는 자리에서 ‘전국 언론에게 보내는 메세지’를 채택하였다.
대학생들이 선언한 한국 언론의 사망은 박 정권에겐 큰 축복이었다. 실제로 박정희는 그렇게 죽은 언론을 매우 흡족하게 생각하여 그해 4월 7일 제10회 신문의 날 치사에서 “우리 언론은... 조국 발전을 위한 공헌의 전통을 확립하였습니다”라고 언론을 추켜세웠다. 그간 박정희는 언론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엔 그 어떤 상황에서건 비판적인 직설을 마다하지 않았던 걸로 미루어 그건 의례적인 치사가 아니라 박정희의 진심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박정희는 언론에 대해 흡족하게 생각한 반면 학생들의 반독재 자유 언론 시위는 연일 계속되었으며, 이는 양심적인 기자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동아일보」 일부 기자들은 4월 15일 ‘언론 자유 수호 선언’을 했는데, 편집국에서 선언대회 개최가 좌절되자 별관 2층 회의실로 자리를 옮겨 강행하였다. 30여 명이 참석한 이 선언대회에 참석한 간부들 가운데엔 송건호 논설위원과 김중배 사회부장이 있었다. 이날 편집국장 박권상은 중앙정보부에 전화를 걸어 중정 요원의 철수를 요구하였는데, 그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5일 아침 일찍 중앙정보부 보안 담당 차장보에게서 기자들의 선언 경과를 묻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때 동아일보를 출입하던 중정 요원이 문화부 쪽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차장보에게 ‘젊은 기자들이 당신들의 출입 금지를 결의했다. 나로서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으니 당장 철수시켜 달라’고 말했다. 그는 ‘고려해 보겠다’고 답했고 나는 다시‘고려만으로는 안 된다. 지금 철수시키지 않으면 우리가 쫓아내겠다’고 경고했다. 그는 ‘15분만 기다려 달라. 부장(이후락)의 허락을 받아 철수시키겠다’고 말했고 곧 그 요원은 사라졌다. 이날부터 8개월 후인 12월의 국가 비상사태 선포까지 기관원의 출입은 중단됐다.”
동아일보의 언론 자유 수호 선언에 힘입어 한국일보 기자들도 4월 16일 자유 언론 수호 선언을 하였으며 4월 17일엔 조선일보, 대한일보, 중앙일보 기자들도 참여하였다.
4, 27 대선과 지역 분열주의
그러나 그런 일련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4, 27대선은 언론이 자유롭지 못한 가운데 치러졌으며 박 정권은 부정선거를 자행하여 정권을 재장악하였다.(박정희 6백34만 표, 김대중 5백 40만 표). 1971년 국가 예산은 5천2백42억 원이었는데, 박정희는 이 선거에서 예산의 1할이 넘는 6백억~7백억 원을 썼다(6백억 원은 김종필, 7백억 원은 강창성의 증언). 선거가 끝나고 박정희는 94만여 표밖에 차이가 나지 않은 것에 대해 “하마터면 정권 도둑맞을 뻔했다”고 말했다지만. 정작 정권을 도둑맞은 건 김대중이었다. 국가 예산의 1할 이상을 선거에 쓴 정권이 박 정권 말고 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4, 27대선에서 박정희는 지역감정을 이용함으로써 지역 갈등의 골을 깊게 하는 역사적 범죄를 저질렀다. 우선 지역별 투표 결과부터 살펴보자. 박정희는 김대중보다 경북에서 92만 표(박 133만, 김 14만 표), 경남에서 58만 표(박 89만, 김 31만 표)를 이겼는데, 이 영남 지역 승리는 전체 승리 득표 94만 표보다 56만 표나 많은 것이었다. 반면 김대중은 박정희를 전북에서 23만 표(박 30만, 김 53만 표), 전남에서 40만 표(박 47만, 김 87만 표), 그리고 서울에서 39만 표(박 80만, 김 119만 표)를 이겼다. 박정희는 이미 1967년 대선에서 윤보선에 비해 영남 표만 136만 표를 앞섰는데, 그것은 전국적으로 박이 이긴 116만 표보다 20만 표나 웃도는 것이었다.
그러한 영남 몰표는 박정희가 지역감정을 적극적으로 부추긴 결과였다. 1971년 대선에선 특히 국회의장 이효상의 활약이 눈부셨다. 그는 1963년 대선에서도 9월 10일 대구 수성 천변에서 열린 공화당 유세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는 ‘지역 분열주의 광신도’였다.
“이 고장은 신라 천 년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고장이지만 이 긍지를 잇는 이 고장의 임금은 여태껏 한 사람도 없었다. 박 후보는 신라 임금의 자랑스러운 후손이다. 이제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 이 고장 사람을 천 년만의 임금으로 모시자.”
이효상은 1963년 대선에서 재미를 본 수법을 또 써먹은 것이다. 그는 선거 유세 때마다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 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다”고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숱한 망언을 양산해냈다.
또 중앙정보부는 당시 ‘선거 전략의 귀재’로 불렸던 김대중의 선거 참모 엄창록을 김대중과 분리시키는 공작을 저질렀는데, 이에 대해 김대중의 측근 권노갑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구에서 선거 막바지인데 ‘호남인이여 단결하라’ ‘백제권 대동단결’같은 유인물이 호남향우회 명의로 나돌아다녔다. 심지어 럭키 치약을 사지 말자고 하는 등 고약한 지방색 자극 유인물이 토박이 유권자 집에 무제한으로 살포되는 것이었다. 부산에서도 ‘호남 후보에게 몰표를 주자’‘호남인이여 단결하라’는 구호가 전봇대에 나붙는다는 보고가 왔다. 현지 여론이 하루아침에 들끓기 시작하는데 시간이 없어 손쓸 겨를도 없었다. 아, 이게 자취를 감춘 엄창록의 수작이라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리」 사건과 서승, 서준식 형제 사건
김대중을 용공으로 몰려는 정치 공작도 아주 저급한 수준에서 치열하게 이루어졌다. 4, 27선거를 두 달 앞둔 1971년 2월 12일 문학평론가 임중빈과 그의 글<사회 참여를 통한 학생운동>이라는 글은 실은 「다리」지 편집인 윤형두와 발행인 윤재식을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한 것도 바로 그런 공작의 일환이었다. 그 글은 「다리」 1970년 11월호에 실렸던 것인데 석 달이 지나 뒤늦게 구속을 한 건 김대중의 측근 김상현이 「다리」의 고문 직함을 가진 실제 소유주라고 하는 걸 겨냥한 것이었다. 반공법 위반으로 문제가 된 임중빈의 글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침묵이 미덕이며 안정만이 특효약이라는 기만적 발상, 희망의 좌절, 욕망의 좌절, 지성의 좌절 속에 좌절은 기교를 낳고 그 기교 때문에 다시 좌절하는 이 나라 사이비 지식인 작태나 언론인의 곡필, 한낱 오락상업에 동원되고 있는 문화예술인의 추태... 아메리카의 문화혁명은 단순한 광기의 발산...”
박 정권은 이후락의 중앙정보부가 밀어붙인 이 「다리」지 사건에선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정작 ‘한 건’을 올린 건 당시 육군 보안사령관 김재규였다. 4, 27선거가 열흘도 남지 않은 시점인 1971년 4월 18일 ‘선거를 틈타 민중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암약’해온 재일교포 대학생 서승(27세, 서울대 대학원 2학년), 서준식(24세, 서울대 법대 3학년) 형제 등 ‘간첩’ 10명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된 것이다. 서승은 10개월가량 김대중의 측근 김상현의 집에 기거한 적이 있었는데, 후일 서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안사 신문 과정에선 없는 사실을 자백하라고 고문했다. 김상현씨 집에 기거했다는 꼬투리를 잡아 김대중씨와의 관련 여부를 집중추궁했다. 죄 없는 학우들이 나에게 포섭됐다는 이유로 옆방에 끌려와 고문을 당하고 비명을 질렀다. 더 이상 고문을 당하면 내 뜻과는 달리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생겼다. 밤샘 조사 뒤 수사관이 식사하러 가고 경비병도 방을 비운 사이 경유 난로 기름을 끼얹고 분신을 기도했다.”
물론 그 사건은 조작된 것이었다. 서승 서준식 형제가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재일교포로서 모국에 대한 그리움에서 방문을 했던 것이지 그들은 간첩 행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무서운 음모극이었다. 김대중의 측근 김상현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박정희 후보가 질 경우 서승 사건과 연계시켜 선거 자체를 뒤엎어 버리려는 전략이었다고 한다. 조봉암이 그런 식으로 죽어갔던 것 아닌가.”
박정희는 4, 27 대선에서 유권자들에게 “이번이 마지막 출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마지막’에 약한 우리 국민의 물러빠진 심성을 파고들어 제법 재미를 보았다. 김대중이 17일 전주 유세부터 “박 정권이 종신 총통제를 획책하고 있다”고 폭로했기 때문에 박정희로서는 그에 대항할 필요도 있었으리라. 그런데 그 아이디어가 조선일보에서 나왔다는 게 흥미롭다. 조선일보 회장 방우영이 자신의 자서전 「조선일보와 45년」에서 밝힌 말이다.
“박 대통령의 부산 유세를 앞두고 이후락 실장이 본사를 찾아와 환담 중에 ‘결정적 묘안이 없느냐’고 물었다. 이때 최석채 주필이 ‘3선만 하고는 더 이상은 안 하겠다고 국민 앞에 공약을 하라’고 말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박 대통령은 부산 유세에서 처음으로 국민 앞에서 '이번만 하고는 다시는 여러분께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박정희가 단지 말만 한 건 아니었다. 한 편의 신파극을 연출했다. 그는 24일 부산 유세에 이어 25일 서울 유세에서는 눈물까지 흘리며 "더 이상 여러분들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고 호소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말은 사실이었다. 김대중의 폭로 그대로 박정희는 이후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유신으로 국민의 투표권을 아예 박탈해버렸으니 말이다.
말을 듣지 않으면 사람을 개 패듯이 패고 혹독한 고문을 저지르는 박정권의 만행 앞에선 공화당 의원이라고 해서 면책이 되는 것 아니었다. 1971년의 이른바 '10, 2 항명'은 박 정권의 포악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그걸 잘 말해 주는 사례다.
당시 공화당 의원 김성곤, 길재호 등 4인 체제는 박정희의 지시를 받아 그들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은 내무부 장관 오치성과 갈등을 빗고 있었다. 4인 체제는 야당에까지 영향을 미쳐 오치성의 해임 결의안을 제출케 했는데, 10월 2일 개표 결과 총 투표 수 203 가운데 가 107, 부 90, 무효 6표로 오치성의 해임 결의안을 통과되고 말았다. 박정희는 일부 공화당 의원의 항명에 격노해 중앙정보ㅂ장 이후락을 불러 항명 주동자를 색출해 '엄중히' 조사할 것을 명령했다.
그 결과 다음 날 23명의 의원이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극심한 구타와 고문이 자행됐다. 김한수의 당시 국회 발언 속기록엔 이렇게 묘사돼 있다.
"9명의 국회의원이 보자기에 쒸워져 발길에 채이고 몽둥이에 맞는 고문을 당했다. 얼마나 치고 때렸는지 생으로 무엇을 쌌다는 얘기다. 나는 개를 잡아 몽둥이질을 할 때 생으로 싸는 것을 본 적이 있다. ..."
프레스 카드제와 언론 통폐합
1971년 2학기가 개학되면서 대학가에서는 교련 반대에서 출발하여 독재 권력의 부정부패와 선거 부정을 규탄하는 시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박 정권은 10월15일 서울시 전역에 위수령을 발동하였으며 서울 8개 대학에 무기 휴업령을 내렸고 그래도 사회 각계의 저항이 끊이지 않자 박 정원은 급기야 12월 6일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당시 박정희는 '혹세무민의 일부 지식인들은 언론 자유를 빙자하여 무책임한 안보론을 분별없이 들고 나와 민심을 더욱 혼란케 하고 있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국가 비상사태 이후 언론은 완전히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신문 발행인들로 구성된 한국신문협회는 '정부의 비상사태 선언을 강력히 뒷받침할 국민의 총단결을 호소한다.' '국가 안전보장 논의에 있어 언론이 지켜야할 절도를 자인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12월 17일엔 문공부의 종용에 따라 이른바 '언론 자율에 관한 결정 사항'을 채택하고 언론사 기자가 정부가 발급하는 프레스카드를 소지해야만 활동할 수 있는 이른바 '프레스 카드제'를 수용하였다.
그 결과 1972년 2월부터는 프레스카드가 없이는 취재를 못 하게 됐으며 프레스카드를 받지 못한 기자들은 언론계를 떠났다. 문공부가 1971년 12월 밝힌 전국의 기자 수는 7,090명이었는데, 프레스카드를 발급받은 3,975명(KBS는 제외)과 카드를 발급하지 않기로 한 주간 및 월간 등 잡지 기자 828명을 제외하면 모두 2,287명이 프레스카드를 발급받지 못해 기자직을 그만두게 되었다. 이는 불과 3개월 만에 32.3%의 기자가 도태되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프레스 카드제는 국가의 언론통제 수단인 동시에 신문산업의 경영합리화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1972년에 '자진 폐간 형식'을 빌어 추진된 언론 통폐합도 바로 그런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박 정권은 ‘대구일보‘와 ‘대구경제일보‘를 문 닫게 하였고, ‘전북일보‘, ‘전북매일‘, ‘호남일보‘를 통폐합하여 ‘전북신문‘을 창간케 했으며, ‘대전일보‘와 ‘중도일보‘도 통폐합하여 ‘충남일보‘를 창간케 했으며, ‘연합신문‘, ‘경기일보‘, ‘경기매일신문‘을 통폐합하여 ‘경기신문‘을 창간케 했다. 목포의 ‘호남매일신문‘도 자진 폐간케 했다. 이러한 1도 1사 원칙에 따라 모두 11개 지방신문이 없어지고 대신 3개 지방신문이 새로 창간되었다.
또 박 정권은 1972년 3월7일 정부 각 부처의 기자실을 줄이고 출입기자를 제한하는 내용의 이른바 '정부 출입 기자 대책'을 발표해 행정부처의 기자실을 한 부에 한 개씩만 두도록 통폐합하고 출입 기자도 한 부처에 1사 1인에 제한했다.
박 정권은 72년 4월 7일 신문의 날에 '언론인기금'을 설치하겠다고 밝혔으며 다음 날 문공부는 '신문 통신 방송의 편집국 계통 종사자들의 퇴직 후 생계비를 비롯한 각종 경제적인 혜택을 준다'는 내용의 구체안과 함께 기금 목표액을 5억 원으로 설정하겠다고 밝혔다. 이로써 박 정권의 언론통제는 언론 기업의 이윤을 보장해 주면서 언론인에게 특혜를 베풀어 포섭하는 이른바 '권언유착'의 방식을 전환하게 되었다.
9. 박정희 정권하의 언론 III (1972~1979)
새마을운동과 '7, 4 남북 공동성명'
박 정권은 언론을 장악한 것만으론 모자랐던지 대중 조직의 정치화까지 획책하였다. 1972년 4월부터 대대적으로 전개된 새마을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박 정권은 5월에 이 운동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서울시 통반장 1만 8천 명을 해임하고 친여적 인물로 그 자리를 채움으로써 영구 집권을 위한 기초를 닦기 시작했다.
방송은 새마을운동을 위한 전위대로 이용되었다. 1972년 4월부터 각 방송국은 새마을 방송을 위한 전담 기구를 설치하여 새마을 정신, 새마을운동 주요 시책, 새마을 사업, 새마을 지도자 소개 및 관련 미담 등을 집중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했으며, 행정 기관에서 주최하는 새마을 방송 협의회도 매월 정기적으로 개최되어 새마을 방송의 편성과 제작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새마을 방송 프로그램 콘테스트와 새마을 방송 종합평가회 등이 열렸던가 하면 새마을 방송 유공자를 선발하여 시상하기도 했다.
물론 새마을운동이 보여 준 순기능이 전혀 없었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순기능은 새마을운동의 정치화를 무리 없이 추진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했던 요건이었으니 그것에 너무 감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언론을 완전히 장악하고 관제 대중 조직까지 결성한 박 정권은 1972년 7월 '7, 4 남북 공동성명'을 발표해 전 국민을 통일 열기에 들뜨게 만들었다. 그럴 만도 했다. 7월 4일 오전 10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내외신 기자 회견에서 발표한 다음과 같은 사실에 국민이 놀라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서울의 이후락 정보부장은 1972년 5월2일부터 5일간 평양을 방문했다. 이 부장은 평양에서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과 회담했으며 김일성과는 두 차례 회담했다. 평양의 김영주 부장을 대신해 박성철 부수상이 5월29일부터 6월1일까지 서울에 왔다. 박성철은 이 부장과 두 차례, 박정희 대통령과 한 차례 회담했다."
그 결과 합의했다는 남북 공동성명은, 첫째로 민족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주적으로 해결돼야 한다고 했다. 둘째는 통일은 무력행사에 의하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실현해야 하고, 셋째는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무엇보다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해야 한다고 했다. 즉, 통일의 대원칙으로서 자주, 평화, 대단결을 내걸었던 것이다.
'10월 유신'이라는 사기극
그러나 돌이켜보건대 그건 일종의 사기극이었다. 박 정권은 그로부터 3개월 후인 10월 17일 통일을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고 이른바 '10월 유신'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국회를 강제해산하고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으며 헌법 기능을 정지시키고 그 권한을 비상 국무회의가 맡아 박정희가 곡 법이요 진리인 그런 철권통치 체제를 구축하였던 것이다. 물론 언론은 사전 검열을 받았으며 대학은 아예 문을 닫아 버렸다.
그 사기극은 남한의 지배 세력과 북한의 지배 세력은 상호 공생관계라는 의심을 갖게 만들었다. 북한도 1972년 10월 17일 사회주의 헌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1인 지배 체제를 강화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선 지금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김일성이 유신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건 거의 분명한데, 박정희의 그런 계획에 협조한 이유에 대해선 북한에서의 1인 독재체제 구축을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경제난으로 남북 관계 안정을 통한 군비 축소를 원했기 때문이었는지 그건 정확히 알 길이 없는 것이다.
비상계엄 선포 이후 한 차례의 피비린내 나는 폭력극이 연출되었다. 신민당 의원 최형우도 그 폭력극의 희생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80여 일 전 국회 본회의에서 국무총리 김종필에게 묻는 형식으로 유신 음모를 폭로했는데, 비상계엄이 선포되자마자 영등포 군부대에 끌려가 문제의 발언 제보자를 대라는 혹독한 고문에 시달렸다. ‘동아일보‘ 기자 김충식은 이렇게 말한다.
"고문은 광기에 가까웠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벗겻다. 두 손을 모아 무릎을 끌어안고 깎지 끼게 한 뒤 포승으로 묶었다. 각 목을 최의 팔과 다리 사이에 끼워 양편 책상 사이로 통닭 바비큐처럼 매달았다. 얼굴에 수건을 덮고 그 위에 물을 부었다. 숨이 막혀 어쩔 수 없이 물을 들이켜야 했다. 살려 달라고 애원하자 시멘트 바닥에 팽개쳤다. 잠을 재우지 않고 구타하며 전기고문도 가했다. 제보자를 대라, 김영삼의 조직을 불라고 요구했다. 핀셋으로 국부를 잡아당기고 툭툭 치며 굴욕감을 주었다. '아, 아, 내가 인간의 세상에 살고 있는가.' 최형우는 그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김일성을 닮아 간 박정희
박 정권은 10월 27일 사실상의 대통령 종신제를 기초로 하는 헌법 개정안을 발표하였는데, 이 헌법 개정안을 11월 21일 공포 분위기 속에서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91.9%의 투표율과 91.5%의 찬성률로 통과돼 그 악명 놓은 유신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를 두고 박정희는 '통일을 향한 국민 의지의 발현'이라고 주장했지만, 그건 국민에게 무력감과 공포감을 조장한 폭력 정치의 승리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군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한 민주화 인사(양관수)의 증언이다.
"나는 10월 유신 때 전방 근무 사병이었다. 국민투표 때 반대표를 찍으려 했더니 중대장이 붓뚜껑을 빼앗았다. '네가 아무리 반대표를 찍어도 사단에 가면 모두 찬성표로 바뀐다'면서 중대장이 찬성표를 찍었다."
투표를 얼마 앞두고서 벌어진 홍보 공작도 목불인견의 수준이었다. 시골 벽지 초등학교에까지 홍보용 동요가 시달되었는데, "10월의 유신은 김유신과 같아서 조국 통일되듯이 남북통일 이뤄요. 우리 몸에 알맞는 민주 나라 만들어..." 운운하는 내용이었다.
그런가 하면 청와대 대변인 김성진은 언론사에 박정희의 '말씀'을 보도할 때 존대어미를 쓰도록 '희망'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로동신문‘이나 평양방송에서 '...말씀하였다'고 보도하는데 우리는 '...밝혔다'는 식이니 그래서야 되겠느냐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어떤 방송국은 한동안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라는 뉴스를 내보낸 일도 있었다. 그렇게 박정희는 점점 김일성을 닮아 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유신은 엄청난 규모의 여론 조작을 통해 정당화되고 예찬되었다. 신문에겐 재갈이 물려졌다. 유신 헌법에 대한 반대 의견을 표현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의견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조차 범죄 행위로 다뤄졌다. 유신 초기 사회부 기자였던 ‘동아일보‘ 편집위원 정구종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유신 발표 당시 본인은 동대문경찰서 출입 기자였다. 유신과 함께 기자실이 문을 닫자 동대문경찰서 출입 기자들은 아침에는 창경원에 모였고 낮엔 경찰서 외곽을 돌면서 사건.사고를 쫓아다녀야 했다. 몇 달 후 경찰서 기자실은 묵시적으로 다시 이용하게 되었으나 취재에는 여러 가지 계약이 따랐다. 하루는 '기독교회관에서 목사들의 집회가 있다. 취재해 보라'는 지시를 회사로부터 받고 본인 등 각 언론사 기자들이 기독교회관으로 달려갔다. 이해학 목사 등 10여 명의 젊은 성직자들이 '유신 반대 성명'을 발표하는 현장이었다. 일단 모두들 회사에 전화 보고는 했으나 어느 신문, 방송도 유신 반대 성명을 싣지는 못했다. 그날 오후 동대문경찰서의 정보과장이 기자실에 와서 모두들 모여 달라는 통보를 했다. 영문도 모르고 기자실에 모이자 정보과장은 '오늘 기독교회관의 취재 관계로 중앙정보부에서 기자들을 만나자고 한다. 내 차에 타고 가 보자'로 했다. 반강제 연행식으로 모두들 남산 중앙정보부 6국 수사과로 실려갔다. 그리고는 밤새 피의자 조사를 받았다. 옆방에는 목사들이 이미 연행돼 와 밤새 구타당하며 취조받는 소리가 생생히 들렸다. 기자들에게 씌워진 혐의는 간단했다. 목사들의 유신 반대 성명 내용을 회사에 전화로 알림으로써 '유신 헌법 반대 의견은 타인에게 고지, 전달했다'는 것이며 이는 법에 저촉된다는 것이었다. 옆방에는 그날 현장에 취재 나왔던 정치부의 강성재 기자도 연행돼 와 조사를 받고 있었다. 밤을 샌 조사와 조서 작성, 범죄인 도표 작성 등으로 겁을 준 뒤 중앙정보부 측은 새벽에 취재 기자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다시는 유신 반대 관련 취재를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받은 뒤였다. 말하자면 유신 체제를 왈가왈부하는 어떤 움직임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협박과 공갈을 하기 위한 일막극이었다. 물론 그같은 전말은 신문, 방송에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으며 각 언론사 젊은 기자들의 허탈함과 불만은 안팎으로 쌓여 갔다."
언론의 유신 홍보와 조선일보의 코리아나 호텔 완공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시실 언론은 유신 헌법의 홍보에 적극 협조하였다. 사회학자 김해식은 이렇게 말한다. "10월 27일 개헌안이 공고된 뒤 11월 21일 국민투표가 실시되기까지 신문의 많은 지면과 방송의 많은 시간은 당국에서 배급한 새 헌법에 관한 해설 기사와 할당된 연사들의 출연으로 메워졌다. 또한 10월 27일부터 12월 말까지는 모든 신문의 1면과 7면에 '통일 위한 구국 영단 너도나도 지지하자'. '새 시대에 새 헌법. 새 역사를 창조하자'. '뭉쳐서 헌정 유신. 힘 모아 평화 통일'이라는 등의 문공부 제정 표어가 날마다 6단 크기로 실렸다." 그런 상황에서 벌어진 조선일보의 대정부 로비는 너무 어이가 없다. 조선일보가 차관 특혜를 받아 시작한 코리아나호텔은 1972년에 완공됐는데 당시에는 외국인 관광객이 적어 객실이 텅텅 빌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선일보가 취한 조치에 대해 사회학자 김해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선일보는 여기서 또 정부에 압력을 넣어 자구책을 구했다. 즉 당시 본점 신축을 추진중이던 주택은행에 대해 관계 당국에 압력을 넣어 신축 계획을 취소시키고 코리아나호텔에 입주시킨 것이다. 한 언론계 인사는 '조선일보는 코리아나호텔의 지하 2층과 지상 1층에서 7층까지를 주택은행측에 매각했는데 대지 지분이 전혀 없이 건물 일부만을 매각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일부 신문에겐 재갈이 물리고 또 일부 신문은 정부로부터 각종 특혜를 얻어내느라 언론이기를 포기한 상황에서 방송은 유신의 홍보 도구로 총동원되었다. 문공부 방송관리국 모니터에 나타난 구체적인 통계에 따르면 10월 17일부터 11월 21일까지 방송은 단독 해설 218회, 좌담 398회, 유신과 관련된 비전 제시 특별 프로그램 58회, 유신을 내용으로 한 스팟 드라마가 1,268회에 이르렀다.
조선일보의 광신적 유신찬양
조선일보가 코리아나 호텔의 일부를 주택은행에 매각한 게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지만, 조선일보의 유신찬양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이었겠는가. 역사의 기록을 위해 조선일보의 유신찬양이 과연 어느 정도였는지 그 광신성을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조선일보는 유신 선포 다음 날인 1972년 10월 18일 <평화 통일을 위한 신체제 >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앞으로의 보다 보람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얻기 위하여 진정 알맞은 조치임을 기쁘게 생각" 한다고 했으며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알맞은 조치"라고 했다. 또 "헌법 기능의 일부 정지와 아울러 이에 따르는 몇 가지 조치가 선포된 것은 새로운 헌정 질서의 존립을 위하여 만부득한 조치"라는 말도 했으며 "비상사태는 민주 제도의 향상과 발전을 위하여 하나의 탈각이요 시련이요 진보의 표현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10월 28일 사설 <유신 개혁의 기초 - 민주주의의 안정과 번영을 위한 헌법>에서는 "발의측의 문제의식이 이렇듯 왕성하다고 과감한 개혁이 담긴 개헌안을 우리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대통령을 직접 선거함으로써 빚어졌던 여러 가지 폐해와 부작용을 일소할 수 있게 된다"고도 했다.
「조선일보」는 11월 23일 <새 역사의 출범> 이라는 사설에서는 완전히 발광의 경지에 돌입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압도적인 지지와 찬성을 나타냈다. ...조국 통일과 민족중흥의 제단 위에 모든 것을 바친 그의 뜨거운 애국심과 뛰어난 영도력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성원의 발현"이라고 했으니 무슨 해설이 더 필요하랴.
「조선일보」는 12월 23일 사설 <국민회의와 대통령 선거 -영광스런 순간에 공감을 함께 한다>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박정희를 단독 후보로 추천한 사실과 관련하여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이에 합당한 후보 인물을 추천하는 절차를 다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12월 24일 사설 <줄기찬 통일에의 의지 - 8대 대통령 선출을 경하하면서>에서는 " 이 역사적 전환기에 국민의 최고 영도자로서의 새로운 중책을 맡은 박 대통령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민족의 앞날에 힘찬 발전이 있기를 기원해 마지 않는다"고 했다.
너무 역겨워 더이상 인용하는 것도 고통스럽다. 「조선일보」 12월 28일 사설 <새 역사의 전개 - 제8대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을 경하한다>를 길게 인용하는 것으로 「조선일보」의 유신찬양에 대한 기록을 끝맺기로 하자.
"부와 근대화의 씨앗을 뿌려 가꿈으로써 이 나라 국민의 뼈에 젖은 패배의식과 열등감을 용기와 자신으로써 대체해 주고 지난 4반세기에 걸쳐 지속되어 온 냉전 속에서의 동족상잔과 남북결원의 민족사에 10, 17 구국의 영단으로 종지부를 찍고 평화 통일의 새 역사를 위하여 정초한 박정희 대통령을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 취임토록 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미덥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무엇 때문에 지난 10년 동안 5, 6, 7 대나 대통령을 역임한 그를 또다시 환영하는 것인가. 한 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그의 영도력 때문이다. 그의 높은 사명감과 뛰어난 능력과 역사의식의 정당성 때문이다. ... 그의 높은 사명감과 뛰어난 능력과 역사의식의 정당성 때문이다. ...온갖 난경에서 오늘의 굳건한 역사 발전의 기틀을 구축한 그의 훌륭한 정치 역량을 우리는 더욱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더욱 전망적인 민족 통일의 사명감과 구국 중흥의 신념에 불타는 영도자를 가졌다."
한국방송공사의 탄생과 MBC의 분양
1972년 12월 30일 비상국무회의는 한국방송공사법을 확정 공포했으며, 이를 근거로 1973년 3월 3일 KBS는 한국방송공사로 개편되었다. 이 날을 기념해서, KBS 사장 승용차의 번호판은 특별히 7333으로 해달라고 부탁해서 달고 다녔다고 한다.
형식적으로는 KBS가 국영 매체에서 공영 매체로 달라진 것이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KBS를 통한 권력 홍보의 권위를 높여 주기 위한 것이 었을 뿐이고 권력 홍보에 관한 한 KBS는 국영도 공영도 아닌 박정희 개인의 사영 방송이었다 과언이 아니었다.
한국 방송공사의 개편과 함께 1973년 3월에 개정된 방송법은 그간 임의 단체였던 방송윤리위원회를 법정 기관으로 하여 제재 규정을 강화하였으며, 방송국에 심의실을 두어 사전 심의할 것을 의무화하였으며, 방송 편성 기준에서 교양 방송을 종래의 20%에서 30% 이상으로 높였고, 방송 순서를 중단하는 중간 광고를 금지하였다.
이 당시의 방송은 방송 저널리즘의 기능은 아예 포기한 채 권력의 홍보 매체이자 국민의 '정치로부터의 도피'를 부추기는 도구로 기능하였다. 1972년 10월 제9회 방송의 날을 맞아 문공부 장관은 방송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즈음 우리 방송 일면에는 민족 고유의 미풍양속과 전통문화를 손상하고 비생산적인 낭비와 퇴폐적인 흥미 위주의 풍토를 조장하는 듯한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사회의 윤리와 건전성을 해치고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이러한 경향을 마땅히 우리들 방송인 스스로 반성하고 시정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언론의 자유를 부르짖는 언론인들에게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한 박 정권이 방송인들을 향해 그렇게 호소를 하다니 어째 좀 이상하지 않은가? 그건 어디까지나 국민의 시선을 의식한 공식적인 말씀일 뿐이고 실제적으로는 방송의 방종과 타락을 방조하고 부추긴 것이 박 정권의 방송 정책이었다.
물론 박정희 개인은 TV를 시청하다가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해 자주 불평을 했다. 방송인 정순일은 1971년에 일어난 한 가지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우선 장발을 누구보다도 싫어했고 그의 생일을 축하하러 온 조카를 호되게 매질을 하며 꾸짖었다는 일화를 가진 박정희 대통령은 이 해 1월 22일 히피족을 절대 방송에 출연시키지 말라는 준엄한 지시를 내렸다. 이것이 시작이긴 하다. 그러나 1971년 6월 16일의 문공부 장관 담화만큼 방송이 집중적인 비난을 받은 적은 방송 사상 일찍이 없었다. 6월 3일에 출범한 김종필 내각의 문공 행정을 맡은 윤주영 장관은 16일에 가진 취임 후 기자 회견에서 방송이 자숙해 주기를 강력히 요망하면서, '방송이 저속한 외래 풍조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내용의 저속화는 물론 퇴폐 풍조를 확산하고 있다고 호되게 꾸짖고. ..."
대통령이나 문공 장관의 꾸지람은 때로 TV에 찬바람을 몰고 오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과성의 개인적인 ' 취향의 문제' 였을 뿐 박 정권 치하의 TV는 철저하게 오락 중심이었고 그것이 국민의 '정치로 부터의 도피'와 무관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 가끔 TV에 대해 찬바람을 일으키는 것이 TV의 그런 기능을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64년, 가요 곡이 너무 퇴폐적이라는 여론이 일자 공보부 장관 홍종철이 KBS로 달려가 가요 레코드를 짓밟아 버린 사건이 있었는데, 이는 '여론 관리'차원에서도 정부가 TV를 향해 늘 잔소리를 할 필요가 일다는 걸 시사하는 게 아닐까?
1971년 MBC는 3억 원이던 수권 자본금을 10억 원으로 증자하면서 본사 주식의 70%를 7개 재벌에게 분양하고 지방사 역시 민간에 분양하였다. 이일은 6월 30일부로 MBC 사장 겸 5, 16장학회 이사로 취임한 이환의가 박정희의 특명을 받아 해치운 일이었다. 박정희는 당시 전라북도 도지사에서 물러난 이환의를 청와대로 불러들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내가 임자에게 맡기고 싶은 일이 생겼어. 이번 대통령 선거 때, 야당 측이 나와 내 사람(부인)을 공격하는 말 가운데 MBC 재산의 60%가 내 개인 재산이라 주장하면서 신문에 광고로까지 낸 것을 봤지? 나아 안사람은 (MBC 주를) 단 한 주도 갖고 있지 않아. 아마 나와 대구사범 동창인 조증출씨가 사장을 맡고 있고, 나의 동서 조태호군이 5, 16 장학회를 맡고 있다 보니 그런 말이 나온 것 같아... MBC 사장과 5, 16 장학회 이사를 맡길 테니 MBC와 장학회 재산을 정리해서 국민 앞에 공개해 줘야겠어."
그렇게 해서 증자한 MBC의 본사 주식 7억 원어치는 7명의 새 주주들, 박병규(해태), 정주영(현대), 구자경(금성), 최준문(동아건설), 신용호(교육보험) 등에 1억 원씩, 김성곤(쌍용)에게 1억 5천만 원, 임채홍(미원)에게 5천만 원에 각각 양도됐다. 지방사 주식도 임대홍(전주), 김성곤(대구), 최준문(대전), 최승효(광주), 한병기(강릉), 백태훈(제주), 박종규(마산), 이후락(울산, 포항), 이도영(청주), 김진만(춘천, 삼척), 구자경(부산, 진주) 등에게 85%씩을 팔고 나머지 15%는 서울 MBC가 소유하는 방식으로 처리했다.
이환의는 또 한 번 박정희의 특명을 받아 1972년 7월 24일 적자에 허덕이던 경향신문을 병합하였는데, 이렇게 해서 '주식회사 문화방송, 경향신문이 탄생하게 되었다.
언론인의 정. 관계 진출
국민을 폭력으로 완전히 제어하자 박 정권은 1972년 12월 13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해제하고 열흘 뒤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어용 기관은 장충체육관에서 박정희를 제8대 대통령으로 뽑았다. 통대의원 2,359명 가운데 2,357명이 지지한 99.99%의 지지율이었다. 이로써 박정희는 조선 시대 왕보다 더 큰 권력을 누리게 되었다. 유신 헌법 제 53조에 따라 대통령에게는 이른바 긴급조치권이 부여됐는데, 박정희는 이 긴급조치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철권통치에 골몰하였던 것이다.
그 후 박정희가 휘두른 긴급조치는 어처구니없게도 박정희 자신이 선포한 유신 헌법에조차 저촉되는 것이었으니, 이는 이후에도 한국의 법치가 궤멸된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 그걸 잘 말해 준다 하겠다. 예컨대, 긴급조치 제1호(1974년 1월)에서는 헌법개정에 대하여 논의하는 것조차 금지했고, 제4호(1974년 4월)에서는 문교부 장관에게 학생들이 반체제 운동을 계속하면 대학을 폐교시킬 수 있는 권한마저 부여했으며, 제9호(1975년 5월)에서는 헌법을 비방하거나 반대하는 것을 금지하였던 것이다.
철권통치의 제도화를 위해 박 정권은 1973년부터 언론인을 정, 관계에 적극 진출시키기 시작했다. 1973년 4월 23일 박 정권은 11개 정부 부처에 대변인직(이사관 또는 부이사관급)을 신설하여 거의 전원을 언론계에서 기용하였다. 예컨대, 「중앙일보」 서기원 논설위원은 기획원 대변인으로, 이광표 편집국장 대리가 상공부 대변인으로 가는 등 직책에 어울리지 않는 전직을 해 언론계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또 제9대 국회에서는 유정회 의원 8명을 포함, 19명의 전직 언론인이 여당의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으로 당선됐고 6명의 언론인이 비서실장으로 변신했으며, 그에 앞서 11명의 언론인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되기도 했다. 유정회 1기로 원내에 진출한 언론인들은 문태갑(동양통신), 이종식(조선일보), 이진희(서울신문), 임삼(한국일보), 정재호(경향신문), 최영철(동아일보), 주영관(합동통신) 등이었는데, 이들에 대해 사회학자 김해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들은 유신 이전에 청와대를 오랫동안 출입했고 정치부장으로 재직중에 들어간 것이 공통된 특징이었다. 당시 3개 방송을 제외하면 각언론 매체별로 한 사람씩 선발된 셈이었다. 이런한 각 사별 배분 방식은 뒤에 민정당에서 전국구와 지역구 의원을 언론계에서 기용하는 데에도 원용되었다. 유신국회에서 언론인을 각 사별로 안배하여 진출시킨 것은 유신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키는 데 언론의 역할이 컸기 때문에 이에 대한 논공행상의 하나로 취해진 조치가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어찌 그런 이유뿐이었겠는가. 원내에 진출한 이후 각자 자기 출신 언론사를 맡아 보도를 통제하는 동시에 정권 홍보에 적극 앞장서 달라는 뜻이었을 게고. 그런 '출세'의 본보기를 보여줌으로써 언론인들을 '정치화'시켜 스스로 알아서 기게 만들기 위한 고단수 수법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박 정권에게 그런 의도가 있었건 없었건, 이는 그 이후의 역사가 입증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정부 대변인인 문화공보부 장관도 1970년대 내내 언론인 출신이 도맡았다. 신범식(69년 4월~71년 6월), 윤주영(71년 6월~74년 9월), 이원경(74년 9월~75년 12월), 김성진(75년 12월~79년 12월), 이규현(79년 12월~80년 5월)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렇게 정권 홍보의 전위대로 차출된 언론인들 가운데엔 나중에 다시 언론사로 복직한 경우도 많았으니, 이는 언론이 정권 홍보의 도구로 전락한 당시 상황을 잘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박 정권 기간 내내 정, 관계에 진출했다가 언론사로 복직한 언론인의 수는 국회 충원 언론인 14과 행정부 충원 언론인 41명을 합해 모두 55명이며, 이는 정, 관계로 진출한 전체 언론인의 36.4%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별들의 고향>과 ‘호스테스 문학’
10월 유신으로 한국 언론은 사망한 거나 다름없었다. 한국 언론이 본분을 망각하고 스스로 권력화되어 국민위에 군림하는 비극이 바로 이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언론 자유를 권력에 상납한 신문들은 연재소설 등과 같은 대중문화적 기능에 큰 신경을 썼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조선일보”가 연재한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이었다. 1973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별들의 고향”은 75년까지 40여만 부가 팔리는 대기록을 세웠다. “별들의 고향”은 1974년의 베스트셀러인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 1976년 조해일의 “겨울 여자” 등과 더불어 이른바 ‘호스테스 문학’의 전성시대를 만들어냈다. “별들의 고향”에 대해 문학평론가 이재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72년 ‘조선일보’에 연재된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은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습니다. ‘별들의 고향’을 보기 위해 ‘조선일보’를 산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고 영화화된 ‘별들의 고향’은 당시의 기록으로서는 전무후무한 40여만 명이 몰려들었습니다. ‘별들의 고향’은 창녀 ‘경아’의 사랑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작가 최인호는 남들이 경원시하는 술집 여자의 사랑과 아픔에 연민의 눈길을 던지기는 하였지만 이들의 처지가 산업화 과정의 부산물이었다는 것에까지는 충분한 주의를 돌리지 못하였습니다. 소설도 이들의 고통 자체에만 주목할 뿐 그것의 사회적 배경이나 해결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개인적인 사랑이나 윤리로 대체되어 버린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970년대 산업화의 영향으로 고향에서 도시로 내쫓긴 농민의 딸들, 수많은 ‘경아’들이 이 소설들의 애독자가 되었고 그들은 앞다투어 자신의 가명을 경아로 바꾸었습니다.”
김대중 납치 사건과 긴급조치 1, 2호
박 정권은 야당과 지식인에 대한 탄압을 멈추지 않았다. 때로 그건 광기 그 자체였다. 1973년 8월 8일 일본의 도쿄 구당에 있는 그랜드팔레스호텔에서 벌어진 김대중 납치 사건이 그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결국 김대중은 미국의 개입으로 8월 13일 살아서 서울 동교동 자택에 나타났지만, 이후 김대중에 대한 박 정권의 탄압은 광기를 더해갔다.
모든 사람들이 박 정권의 무자비한 철권통치에 주눅이 들어 침묵하고 있을 때에 용감하게 나선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다름 아닌 대학생들이었다.
10월 유신 1주년이 기까워 오던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생들은 유신 헌법 철폐를 주장하며 유신 이후 최초의 시위를 벌였다. 물론 이 시위는 검열관으로부터 보도 불가 판정을 받았고 “동아일보”는 시위기사 부분을 백지로 발간하였다. 5일 후인 10월 7일 “동아일보” 기자 50여 명은 ‘보도 가치가 있는 기사를 지면에서 다룰 것’을 요구하며 편집국에서 철야농성을 벌였는데, 이 농성 덕분에 그 기사는 10월 8일에서야 아주 작게나마 보도될 수 있었다.
1973년 10월 19일 “경향신문” 견습기자들은 외부 압력 배제, 사실 보도 충실, 인사 쇄신, 급료인상 등을 요구하였다. 11월 5일 경북대생의 시위 사건과 서울 YMCA 앞에서 있었던 함석헌, 김재준, 지학순, 법정, 천관우 등의 시국선언 낭독 사건이 보도되지 않자, “동아일보” 기자들은 또 철야농성에 돌입하였으며, 그 결과 그 사건은 다음 날 1단 기사로 보도되었다. 11월 20일 “동아일보” 기자들은 ‘언론 자유 수호 제2 선언문’을 채택하였으며 이는 한국일보, 기독교방송, 조선일보, 문화방송, 중앙일보, 신아일보 등 다른 언론사로 확산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박 정권은 11월 중순부터 신문 발행인과 편집국장을 대상으로 서명 공작을 시작하였는데, 그건 ‘국내외의 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을 인식하고 유신 체제나 안보에 위해되는 기사는 싣지 않는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자율 지침’이었다. 상당수의 발행인이 서명한 것으로 알려지자, “동아일보” 기자들은 1973년 12월 3일 김상만 발행인에게 서명하지 말 것을 촉구하는 ‘언론자유수호 제3선언문’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노력은 박 정권이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 2호를 발동함에 따라 무력화될 수밖에 없었다. 유신 헌법에 반대하면 군사재판에 넘겨 15년간 징역형을 살린다니, 국민을 그저 배만 부르면 그만인 개돼지로 만들겠다는 게 아니고 무엇이랴.
긴급조치 3호는 박 정권의 정치 공작이 제법 정교한 시나리오에 따라 움직인다는 걸 보여주었다. 3호는 국민 생활 안정을 꾀한다는 명목으로 월 5만 원 이하 소득자에 대한 소득세 면제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아니 그게 굳이 긴급조치로 내세울 정책이었을까. 이는 ‘긴급조치’라는 단어에 대한 교활한 이미지 조작이었다. 3호가 나온 다음 날인 1974년 1월 15일 박 정권은 유신 헌법에 반대한 장준하, 백기완 등 11명을 1, 2호 위반자로 잡아넣었다.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
그러나 봄이 되고 3월 신학기가 되자 민주화 운동은 다시 대학에서부터 불붙기 시작했으며, 4월 3일엔 대학가에서 시위가 벌어진 가운데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의 명의로 여러 선언문들이 발표되었다. 그들의 ‘결의문’에는 다음과 같은 6개 항의 요구 사항이 제시돼 있었다.
“첫째, 부패 특권 족벌의 치부를 위한 경제 정책을 시정하고 부정부패 특권의 원흉을 즉각 처단하라. 둘째, 서민의 세금을 대폭 감면하고 국민경제의 밑받침인 근로 대중의 최저 생활을 보장하라. 셋째, 제 노동 악법을 철폐함으로써 노동운동의 자유를 보장하라. 넷째, 국가 비상사태, 1, 8조치 등으로 구속된 모든 애국지사들을 즉각 석방하고, 유신 체제를 폐기하여 진정한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라. 다섯째, 모든 정보, 폭압 정치의 원천인 중앙정보부를 즉각 해체하라. 여섯째, 반민족적 대외의존 경제를 청산하고 자립 경제 체제를 확립하라.”
이 ‘결의문’이 발표된 4월 3일 밤 10시 박 정권은 긴급조치 제4호를 발표했고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공산주의자의 배후 조종을 받은 민청학련을 적발하였다.”고 주장했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이른바 ‘민청학련사건’이다. 박 정권은 민청학련에 대해 용공 조작이라는 그 낯익은 수법으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한 것이다. 물론 민청학련과 인혁그룹(이것도 중앙정보부가 붙인 이름이었을 뿐이다.)을 하나로 묶기 위해 검거한 사람들에겐 모진 고문이 가해졌다. 예컨대, 당시 서울대 문리대생 유인태의 말을 들어보자.
“밤낮으로 신발을 벗겨 얼굴과 머리를 때리거나 몽둥이 찜질, 볼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기, 몽둥이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뭉개는 고문을 했다. 몇 날 몇 일이고 잠을 못 자게 하고 흰 벽을 쳐다보게 하는 고문도 있었다. 물고문도 했다. 발가벗긴 몸을 나무 사이에 묶어 대롱대롱 매달리게 한 뒤 수건을 얼굴에 씌우고 주전자로 물을 붓는 것이었다. 숨이 막혀 발광하면 ‘너, 군대에 있을 때 이북 갔다 왔지?’하는 것이었다. 견디다 못해 고개를 끄덕이면 물 붓기를 중단하고 진술서를 쓰라고 했다. 거부하면 또 물 고문... 지하실에서 사정없이 로프로 등을 후려갈기기도 했다. 터진 살갗에 뭔가 조금만 닿아도 맞을 때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며칠 지나 안티프라민을 발라 주고...”
그런가 하면 경북대생 이강철은 “나는 인혁당의 ‘인’자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그걸 잘 아는 것을 시인하지 않는다고 검사 입회하에 전기고문을 수 차례나 받았습니다”라고 증언한 바 있다. 우리 독립투사들을 상대로 일제가 저질렀던 모든 잔학한 고문이 박 정권하에서 총동원되었는데 그 주범은 물론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1974년 4월 5일 군포 야산에서 식목일을 기념해 오동나무를 심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민청학련 대학생 놈들은, 보고를 들어 보니 순 빨갱이들이야. 잡히기만 하면 모두 총살이야.”
‘박정희 사진을 이가 아프도록 꼭꼭 씹었다’
대통령이라는 자의 인권의식이 그 모양이니 말단 수사관들은 대통령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라도 모두 고문 전문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 지경이었으니 변호사가 법정에서 변론 도중 끌려나가는 것도 크게 놀랄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1974년 7월, 법을 유린하는 민청학련 재판의 어이없는 작태에 대해 변호사 강신옥은 변론 도중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오늘 과연 법은 정치나 권력의 시녀가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 검찰관들은 나랏일을 걱정하는 애국 학생들을 내란죄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등을 걸어 빨갱이로 몰고 사형이니 무기니 하는 형을 구형하고 있다. 이것은 법을 악용하는 ‘사법살인’ 행위가 될 수 있다.”
강신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재판장이 제지했고 법정 안에 있던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강신옥을 끌고 나갔다. 그는 그날로 풀려났지만 박정희의 지시에 의해 며칠 후 구속되었다. 다른 변호사들에게 본때를 보여야 한다는 게 구속 사유였다고 한다. 그러나 강신옥 구속은 신문에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긴급조치 위반 사실을 허가 없이 보도하는 것 자체가 긴급조치 위반이었기 때문이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발생한 박정희 암살 기도 사건과 그로 인한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 사망은 그러한 탄압을 일시적으로 다소 완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한림대 일본학 연구소장 지명관은 이렇게 말한다.
“육영수의 유해안치소에서와 장례 때 흐느껴 우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여기에 마음을 놓은 박정희 정권은 위기를 극복했다고 생각했는지 8월 23일 긴급조치 제1호, 제4호를 해제하고 투옥된 사람들도 많이 석방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동안 충격요법적인 효과를 나타낸 데 불과했다. 그 뒤에 찾아온 반동이란 더 무서운 것이었다.”
중앙정보부의 발표에 의하면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로서 관계 기관의 조사를 받은 사람만도 1,204명에 달했으며, 약 3개월 후 군법회의는 180명의 피고인 중에서 14명 사형, 13명에는 무기징역, 그리고 28명에는 15년에서 20년을 구형했다. 당시 선고는 구형한 그대로 떨어졌기 때문에 이를 가리켜 변호사 한승헌은 ‘정찰제 판결’이라고 했다. 민청학련 및 인혁당 사건에 관련됐다고 해서 중형을 선고받은 사람들 중에서 1975년 4월 8일 8명이 사형 확정 선고를 받았고, 그다음 날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러나 한 편에서는 중형 선고를 받은 학생들은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곤 했으니, 이는 당시의 법이라는 건 박정희와 그 하수인들의 기분 내키는 대로였다는 것이다. 언론인 김삼웅은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긴급조치 4호를 통해 반체제적인 학생들과 이들의 배후라고 판단한 교수, 종교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것이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의 조작이었다. 특히 ‘인혁당 재건위’라는 공안 사건을 통해 학생들에게 겁을 주고, 학생 시위가 북한 측의 조종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국민에게 선전하여 이를 탄압하고자 했던 것이다. ... 인혁당 연루자들은 심한 고문으로 죽은 후에도 시신이 온전하게 가족에게 인수되지 못했다. 당국이 고문 사실이 폭로될까 두려워 유족의 동의 없이 화장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고문 사실을 은폐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 이들에 대한 고문과 전격 처형, 사체 화장 등의 거듭되는 잔혹성과 의혹에 종교계에서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진상은 규명되지 못했다. 무고한 국민의 피를 너무도 많이 흘리게 한 박정희에게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던 걸까? 그는 후일 정부 요인들 앞에서 “크나큰 실책이라면 인혁당 8명을 처형한 것이 역사의 오점을 남겼다.”고 고백했다. 먼 훗날인 1995년 4월 25일 문화방송이 사법 제도 1백 주년을 기념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판사 315명에게 보낸 설문 조사에서도 인혁당 사건 재판이 “우리나라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이었다는 답이 나왔다. 1987년 인혁당 사건 희생자 가운데 한 명인 우홍선의 아내가 작성한 호소문엔 이런 말이 있다.
“우리들의 남편들은 가족들 얼굴 한 번 못 보고 아침 이슬처럼 쓰러져 갔습니다. 저는 남편이 사형당한 이후 신문에 나온 박정희 사진을 그가 죽을 때까지 이가 아프도록 꼭꼭 씹어서 뱉곤 했습니다. 남편 산소에 매주 꽃을 들고 찾아가서 하늘을 향해 ‘살인마 박정희 천벌을 받아라’하고 외쳤습니다. 한 번 외치면 효과가 없을 것 같아 꼭 세 번씩 외쳤습니다. ... 택시를 타면 운전수에게 인혁당이 조작임을 폭로하면서 울부짖으며 거리를 누볐습니다.”
‘온 세상이 히스테리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박정희가 오점을 남긴 게 하나둘이랴. 박 정권은 ‘국가 안보’라는 단어를 너무 함부로 팔아먹었다. 심지어는 이런 일도 있었다. 1974년 9월 초, 특권 상류층 여성들 다수가 보석밀수에 관련된 사건이 있었는데, 박 정권은 ‘국가 안보’를 내세워 이 사건을 가시화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집권 세력과 특권 부유층의 부정부패와 타락까지도 ‘국가 안보’라는 미명하에 은폐되고 보호되었던 것이다.
그 정권에 그 언론이었다. 1974년 9월에 한국기자협회 회장 선출이 있었는데, 서울의 각 신문사 발행인들은 서울 소재 신문사 기자들은 회장 출마를 하지 못하도록 결의를 했다. 도대체 그게 결의를 할 수 있는 사항이란 말인가. 신문 발행인들이 정권과 유착돼 있는 상황에서 탄압의 대상은 늘 기자들이었다. 1964년 11월 10일부터 1974년 말까지의 약 10년간 기자들에 대한 폭행 사건은 모두 97건이었는데, 그 이유를 살펴보면 취재 방해가 64건(66%), 기사 불만에 대한 보복이 29건(30%)으로 나타났다.
방송도 그랬다. 1974년 2월 7일 MBC는 방송 프로그램과 연예인의 이름에서 외래어를 추방한다고 발표하고, 그날부터 <MBC 페스티벌>은 <MBC 대향연>, <가요 스테이지>는 <가요 선물>, <MBC 그랜드 쇼>는 <토요일 토요일 밤에>, 그리고 <일요 모닝쇼>는 <이 주일의 화제>로 바뀌었다. 연예인 특히 보컬 그룹의 이름도 국산화되었다. '어니언즈'는 '양파들', '블루벨주'는 '청종', '바니걸즈'는 '토끼소녀'가 되었다. 눈치만 보던 TBC와 KBS는 MBC에 대한 여론의 지지가 높아지자 슬그머니 MBC 뒤를 따랐으나 TBC는 독자적인 국산 이름을 붙여 방송국마다 연예인의 이름이 달라지는 소동이 있었다. 8월 말에 가선 방송윤리위원회가 가수의 외국어 예명을 우리말로 쓰기로 결정하면서, '패티 김'은 본인이 싫다고 막무가내로 버텼으나 결국 '김혜자'라는 이름으로 불려질 수밖에 없었다. 원로 방송인 정순일은 이때를 회상하면서 "온 세상이 히스테리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히스테리'는 1976년에 다시 일어났다. 4월 16일 박정희는 국무회의에서 방송에 자주 나오는 외래어를 우리말로 고쳐 써 보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결과 나타난 것 가운데 하나가 스포츠 용어를 우리말로 고쳐 부르는 것이었다. 방송윤리위원회가 2년여의 심의 끝에 1978년 10월 1일에 최종 확정해 방송사에 사용을 권장한 '우리말 운동 용어'는 모두 541개였다. 야구의 경우 '번트'는 '살짝 대기', '볼 카운트'는 '던진 셈', '세이프'는 '살았음', '스퀴즈'는 '짜내기', '슬라이딩'은 '미끄럼'이었고, 축구의 경우 '헤딩 슛'은 '머리 쏘기', '포스트 플레이'는 '말뚝 작전'이었다.
물론 그런 '우리말 쓰기'는 분명 칭찬받을 점이 있다. 문제는 그것이 충동적으로 전시 효과 차원에서 이루어졌고 전반적인 문화 정책과 전혀 아귀가 맞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즉, 서구적 대중문화를 이용해 국민의 '정치로부터의 도피'를 부추기는 문화 정책과 그런 강압적인 '우리말 쓰기'는 앞뒤가 전혀 맞지 않았던 것이다.
10, 24 자유 언론 실천 선언
기자들은 자유 언론 운동을 추진해 갈 수 있는 기구로 노동조합을 선택하고 이때부터 노조의 설립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1974년 3월 6일 동아 노조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사측은 3월 8일 '집단 소요 행동'이라는 이유로 노조 임원 11명 전원을 포함한 13명을 해고하였다. 노사 갈등의 우여곡절 끝에 타협책이 만들어졌는데, 이에 따라 노조 활동은 금지된 대신 4월 12일 사장 김상만은 특별담화문을 발표해 해고된 전원을 사면하였다.
그러나 노조 활동이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었다. 공식적으론 노조는 금지되었지만 수면하의 활동은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성과는 6개월 후에 나타났다. 1974년 10월 24일 오전 9시 15분 동아일보 편집국 출판국 방송국 기자 180여 명은 3층 편집국에 모여 '자유 언론실천선언'을 박수로 채택하였으며, 이는 24일 밤 곧 바로 조선일보와 한국일보로 번졌으며, 이틀 사이에 서울과 지방을 망라한 31개 신문, 방송, 통신사가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동아일보의 10, 24 선언문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 민주 사회를 유지하고 자유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사회 기능인 자유 언론은 어떠한 구실로도 억압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것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교회와 대학 등 언론계 밖에서 언론의 자유 회복이 주장되고 언론인의 각성이 촉구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뼈아픈 부끄러움을 느낀다. 본질적으로 자유 언론은 바로 우리 언론 종사자들 자신의 실천 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받거나 국민 대중이 찾아다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 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 민주 사회의 존립의 기본 요건인 자유 언론 실천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선언하여 우리의 뜨거운 심장을 모아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신문, 방송, 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한다. 1. 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거부한다. 1. 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일체 거부한다. 만약 어떠한 명목으로라도 불법 연행이 자행되는 경우 그가 귀사할 때까지 퇴근하지 않기로 한다."
동아일보 광고 탄압 사건
박 정권은 늘 자유 언론 실천 운동에 앞장을 서는 동아일보에 대해 집중적인 타격을 가함으로써 그 운동을 무력화시키고자 하는 음모를 꾸몄는데, 그게 바로 1974년 12월 16일부터 시작된 「동아일보」 광고 탄압 사건이었다. 이는 박정희로부터 "동아일보를 혼내 주라"는 지시를 받은 중앙정보부에 의해 획책되었다.
박 정권은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넣어 「동아일보」에게 광고를 주지 못하도록 했으며, 그 결과 1975년 1월 23일까지 동아일보 상품 광고의 98%가 떨어져 나갔다. 당시 동아일보 광고국장 김인호는 주거래 광고 기업체 간부들과의 면담에서 광고 탄압이 중앙정보국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 온 대광고주로는 대기업 및 일반 기업, 극장, 출판사 등이 있었다. 이들 회사의 사장과 광고 담당 간부들은 중앙정보부에 불려가서 '왜 동아일보에만 광고를 내느냐' '앞으로 동아일보에 계속 광고를 내면 곤란하다'는 등의 협박을 받았다. 몇몇 회사들이 조금 버티기는 했으나 1974년 연말께 가서는 대광고주들과의 거래는 완전히 중단됐다."
중앙정보부의 뒤에 박정희가 있었다. 당시 대미 로비스트 김한조는 미국의 반응이 나쁘므로 광고 탄압을 중단해야 한다고 박정희에게 건의했지만 박정희는 듣지 않았다. 박정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동아일보는 못돼먹었어. 「워싱턴 포스트」가 일전에 날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고 썼는데 동아만 그걸 전재했어. 그래 내가 김일성이라는 말이오?"
그 대신 국민들의 격려 광고가 쇄도하여 「동아일보」 광고면은 한동안 국민들의 격려문으로 채워졌다. 1975년 1월 2일 두 달 동안에 실린 격려 광고 중에서 몇몇 격려 문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았다.
"해마다 1년간 모은 돼지저금통을 깨서 불우한 이에게 전해 왔으나 이번에는 광고 해약으로 어려움을 겪는 동아일보를 돕는 데 쓰기로 했습니다."-이우인(6살), 지인(5살). 1월 10일
"긴급조치로 구속된 동료 학생에게 사식비로 전하려 하였으나 이 길마저 당국이 차단해서 광고 없는 동아일보에 성금으로 바칩니다." -이대 사회학과 일동. 1월 10일
"동아일보를 보는 재미로 세상을 산다." -익명 서점. 1월 11일.
"배운 대로 실행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이렇게 광고하나이다." -서울법대 23회 동기 15인 일동. 1월 11일.
"빛은 어두울수록 더욱 빛난다.(금반지 반 돈쭝을 놓고 가면서...)" - 동아일보를 아끼는 한 소녀. 1월 13일
"나사 빠진 배움 무엇에 쓰랴." -대일고 2학년 2명. 1월 15일.
"동아일보 배달원임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신동지국 배달원 15명 일동. 1월 15일.
"시장길서 만난 우리들 빈 바구니로 돌아서며 조그마한 뜻 '거목 동아'에 보냅니다." -주부 일동. 1월 16일.
"동아! 너마저 무릎 꿇는다면 진짜로 이민 갈꺼야." -이대 S생. 1월 18일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여백을 삽니다." -밥집 아줌마. 1월 18일
"약혼했습니다. 우리의 2세가 태어날 때 아들이면 '동아'로, 딸이면 '성아'(여성동아)로 이름을 짓기로 했습니다." -이묵. 오희. 1월 20일
"오늘도 동아일보를 읽으시는 하느님." - 서울제일교회 학생회. 1월 20일
"저희 부친은 돌아가실 때까지 앞날의 동아와 저희 형제들을 몹시 걱정 하셨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부산 자녀. 1월 25일.
"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 -어느 경북대 교수. 1월 27일
"국민 여러분 우리 손자에게 아빠를 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박경리. 2월 17일(사위 김지하씨 석방 후)
"직필은 사람이 죽이고 곡필은 하늘이 죽인다." -부산 어느 기자. 2월 19일
"작은 광고들이 모두 민주 탄환임을 알라." -oo출판사 편집부. 2월 22일
'자유 언론선언'을 상술로 이용한 조선일보
그러나 그런 격려 광고가 동아일보가 당면하게 된 경제적 위기를 해결해 줄 수는 없었다. 동아일보 사주는 결국 박 정권의 광고 탄압에 굴복하여 1975년 3월 8일 경영 악화를 이유로 기구 축소를 단행한다면서 심의실, 기획부, 과학부, 출판부를 없애고 사원 18명을 해고하였다. 이의 부당성을 지적한 기협 분회장(장윤환) 외 1명(박지동)을 또 해고했다. 이렇게 시작된 동아일보 기자들의 해고는 신임 분회장(권영자) 등 17명의 해고로 이어졌다.
한편 「조선일보」 기자들은 창간 55주년 기념일 다음 날인 3월 6일 한국기자협회 조선일보 분회 집행부(분회장 정태기)의 주도로 "진실에 투철해야 하는 기자로서의 열과 성을 다해 언론 자유에 도전하는 외부 권력과의 투쟁은 물론 언론 내부의 안이한 패배주의와도 감연히 싸우려 한다."는 요지의 선언문을 채택하고 정론지 제작을 요구하며 이의 관철을 위해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 또 기자들은 정론지 제작을 요구하다 오히려 '편집권 침해'를 이유로 1974년 12월 18일 전격 해고당한 두 기자(백기범, 신홍범)의 복직 약속도 지키라고 요구했다.
백기범과 신홍범의 해직은 「조선일보」 1974년 12월 16일 자에 실린 유정회 소속 국회의원 전재구의 <허점을 보이지 말자>는 글의 게재에 대해 두 기자가 편집국장 김용원에게 항의한 데서 비롯됐다. 두 기자는 그 글이 유신 체제를 일방적으로 홍보하는 내용으로 보나 논설위원실의 가필을 거쳐 실리게 된 경위로 보나 「조선일보」가 지녀야 할 공정성과 균형에 어긋난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사측은 두 기자의 행동을 위계질서를 무시한 하극상 행위로 몰아 해고했던 것이다.
농성 6일째인 1975년 3월 11일 방우영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들이 편집국에 들어가 농성 기자들을 완력으로 모두 끌어냈고, 이 일로 33명의 기자를 해고했다(최준명은 1978년 5월 1일 '배신행위'라는 동료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제입사). 해고된 기자들은 '조선 자유 언론수호투쟁위원회'(조선투위)를 구성하여 기나긴 투쟁에 들어갔다.
조선투위는 1975년 4월 11일, 조선일보의 상술과 관련하여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폭로했다. 그건 조선일보가 기자들의 순수한 자유 언론 실천 의지를 상업주의적 목적을 위해 이용했다는 것이다. 그 '진상 보고서'의 일부를 길게 인용하기로 한다.
"회사측은 1971년 5월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 언론 수호 선언'을 한 이래 각 사 기자들 사이에 자유 언론선언 운동이 번질 때마다 조선일보 기자들에게 '적어도 2등은 해야 한다'고 은근히 뒤에서 고무 격려해 왔습니다. 「동아일보」와 더불어 이른바 전통 있는 민족지를 자부해 온 「조선일보」로서는 동아일보 기자들이 언론 자유를 외칠 때 조선일보 기자들이 침묵할 경우 소위 '사쿠라 신문'이란 오해를 받을까 봐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 언론선언을 하고난 뒤 조선일보 기자들 사이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을 때에는 간부들을 은연중 초조한 기색을 보였고,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조선일보 기자들은 자유 언론선언을 하는 것이 언론인으로서 대의명분에 합당할 뿐만 아니라 회사의 이익에도 합치하는 것으로 판단, 솔직히 말해서 회사의 암묵적인 승인 아래 '어용 행사' 비슷한 일을 해오기도 했습니다. ... 그 중 대표적인 것은 1973년 10월에 가졌던 자유 언론 수호 궐기대회였습니다. ... 74년 10월 24일 역사적인 기자들의 '자유 언론실천선언' 직후 회사측 태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언대회 직후 회사 간부들의 일반적인 태도는 '잘들 했어. 2등은 해야지. 동아일보를 바짝 뒤따라 가야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일보 기자들이 회사 측이 생각하는 어용성의 한계 안에 머물 것을 거부하고 종전과는 달리 자유 언론을 성실하고 꾸준한 자세로 실천해 가려 하자, 회사 측은 두 달이 못 가서 기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첫 희생자가 신홍범, 백기범 두 기자였습니다. ... 2등은 해야 된다고 강조해 오던 회사 측은 금년 1월에 들어서서는 2등도 못 하겠다면서 '자주 노선'이란 그럴듯한 말을 만들어냈습니다. 기자들은 이 말에 속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조선일보의 위선을 감추기 위한 술수라는 것을 쉽게 간파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주 노선' 이후 실제로 제작된 신문의 지면이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거리로 내쫓긴 145명의 기자
동아일보 기자들은 조선일보 기자들이 강제로 해산된 다음 날일 1975년 3월 12일 자유 언론 실천을 위한 최후의 방법으로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 기자들은 제작 거부 농성과 함께 23명이 공무국을 점거하여 단식 투쟁을 병행했지만 마치 군사 작전을 방불케 하는 회사 측의 공격을 받았다. 경남대 교수 정대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회사 측은 농성 엿새째인 17일 새벽 술 취한 보급소 직원 등 폭력배 200여 명을 동원, 농성 중이던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엔지니어등 160여 명을 폭력으로 축출했다. 이 장면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처절한 참상의 현장이었다. 산소 용접기, 해머, 각목, 소방 호스 등을 동원하여 새벽 3시부터 6시경까지 진행된 이 강제 축출 작전에서 닷새째 단식 중이던 기자들이 마구 폭행당해 사회부 정연주 기자 등 여러 명이 부상했다. 방송국 강제 축출에서는 김학천 프로듀서가 무수히 구타당해 탈장과 뇌진탕 증세로 입원하기도 했다. 17일 새벽 동아일보사 주변 세종로 일대에는 정, 사복 경찰 수백 명이 미리 포위하고 있어 동아일보 사원 축출 작전이 사전에 잘 짜여진 계획에 따라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3월 17일 오전 10시 기협 동아 분회와 동아방송 자유 언론실행위원회는 기협 사무실에서 내외신 기자 회견을 갖고, "이제 동아는 어제의 동아가 아니다. 폭력을 서슴지 않는 언론이 어찌 민족의 소리를 대변할 것인가"라고 묻고 "인간의 영원한 기본권인 자유 언론은 산소 용접기와 각목으로 말살될 수는 없다"고 밝혔다. 쫓겨난 기자들은 '동아 자유 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구성해 기나긴 투쟁에 들어갔는데, 이들은 강제 축출당한 뒤 유신 체제가 끝날 때까지 모두 17명이 구속되었고, 7명이 구류처분을 받았으며, 80여 명이 중앙정보부 등 수사 기관에 연행되어 1일 내지 18일 동안의 조사를 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
결국 동아일보는 3월 8일부터 5월 1일까지 7차례에 걸쳐 모두 113명을 해고하였으며 조선일보에서는 32명이 해고됐다. 이로써 박 정권과 언론사 사주들은 자유 언론 실천 운동을 원천봉쇄하는 효과를 거두게 되었으며 하루아침에 거리로 쫓겨난 기자들은 다른 직장에 취직하는 것마저도 금지된 채 오랜 기간 동안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재야 언론 운동에 투신해 대안 언론으로서 출판 활동에 적극 임하였다. 이들의 삶에 대해 조선일보 해직 기자 신홍범은 후일 전두환 정권 치하의 법정에서 '보도 지침'과 관련돼 구속된 상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받아들이는 곳이 없어 번역 등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조선투위 한 분은 쫓겨난 후, 밤에는 야간 시간 강사를 했고 새벽에는 용산 시장에 가 고추 장사를 했다. 동아투위의 어떤 분은 옷 장사, 남대문 시장에서... (이 부분에서 신홍범씨는 감정이 격해진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방청석 또한 숙연해졌다.) 양복점의 외판원, 한약방에서 약을 썬 사람도 있었다. 나는 지금 이렇게 조선투위의 일원이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그들은 현직 언론인보다 잘 살지는 못하지만 양심을 지켰기에 자랑스럽고 자유스러우며 어디서나 당당하다. 나는 해직 언론인들을 참으로 존경한다."
언론사 '기수 인맥'의 명암
해직 언론인에 대한 박 정권의 그런 무자비한 탄압은 오늘날 한국 언론인들의 전문성을 저해하는 한 가지 이상한 문화를 고착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문화일보' 경제부 박태견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전문성 부재는 기자 개개인의 산물이기도 하나, 보다 근원적인 원인은 동종 업종 간 이직을 막아 온 언론사의 폐쇄성에서 유래한다. 지난 1970년대 유신 시절 이후 언론사주들은 일종의 묵시적 협약을 통해 기자들이 타사로 이동하는 것을 원천 봉쇄해 왔다. 동아투위 사태라는 거센 기자들의 저항을 경험했던 정치 권력이 반골 언론인들의 언론계 내 재취업을 원천 봉쇄하기위해 사주들에게 이를 강요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후 언론계에는 각사별로 이른바 '기수 인맥'이라는 것이 자리 잡게 되면서 업종 간 이동을 막는 칸막이로 작용해 왔고, 그 결과 언론사 간 경쟁만 존재할 뿐 언론인 간 경쟁이 원천봉쇄되면서 '언론 수준의 하향 평균화'와 ...'언론 정신의 쇠락'을 초래했다."
그러나 이미 동아투위 사태 이전에도 존재했던 '기수 인맥'이 그러한 투쟁을 가능케 한 힘이 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한국외국어대 교수 정진석은 이렇게 말한다.
"신문사 간의 비교적 자유로왔던 인사 교류가 1970년대로 넘어올 무렵부터 줄어든 것은 각사별로 수습기자 중심의 인사 서열이 확립되면서부터였다. 견습기자들은 사내에서 입사 기별로도 결속이 강화되었다. 1970년대 초반의 언론 자유 수호 운동도 이들 견습기자 출신 기별 움직임이 가져온 결속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할 수 있다."
긴급조치 9호와 김영삼의 변질
'동아일보'에 쏟아진 격려 광고는 광고 탄압 넉 달째를 맞은 1975년 3월 25일까지 9,223건에 이르렀으며, 이에 따른 동아일보의 광고 수입액은 1억 6백여만 원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동아일보가 정권의 탄압에 굴복해 기자들을 대량 해직시킨 이후엔 격려광고도 크게 줄어들어 5월 7일이후 광고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박 정권은 이 격려 광고가 의미하는 국민들의 저항에 놀란 것인지 때마침 일어난 크메르 루즈군의 크메르 장악(4월 17일)과 월남의 패망(4월 30일)을 이용하여 국가 안보를 강조하면서 5월 13일 "일체의 유언비어 날조 및 헌법 비방 행위의 금지, 학생 집회 및 시위의 금지" 등을 골자로 한 긴급조치 9호를 공포하여 공포 정치를 더욱 강화했다.
그 와중에서 일어난 박정희-김영삼 회담은 박정희의 기를 더욱 살려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당시 신민당 총재인 김영삼은 5월 21일 박정희와의 회담 이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방향을 급선회하여 박 정권에 대해 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다. 야당 인사 고흥문은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갑자기 김 총재는 박 정권에 대한 전면 반대에서 체제 내의 비판으로 선회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저 상황이 급변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당보 '민주 전선' 편집 방침에까지 세심한 신경을 썼다."
그런가 하면 당시 신민당 대변인을 했던 이택돈은 후일 그때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1975년 5월, 박정희-김영삼 회담 때의 일입니다. 제가 신민당 대변인으로 김 총재를 모시고 청와대에 갔었습니다. 회담이 끝난 뒤 무슨 얘기를 나눴느냐고 제가 물어보았죠. 그때 김 총재는 특유의 어법으로 이렇게 말하더군요. '요점은 이거야. 여당은 지가 하고, 야당은 나보고 맡으라는 거야.' 그래서 제가 '김대중씨는 어떻게 하고요?'라고 반문했죠. 김 총재는 '김대중이는 끝났어!'라고 잘라 말하더군요. 박-김 회담 이후로 김 총재의 태도가 많이 달라졌지요. 제가 유신 정권을 공격하는 발언을 할 때마다 김 총재가 제지를 하는 겁니다. 왜 자꾸 호랑이 코를 쿡쿡 쑤시냐고 말입니다. 호랑이 코를 쑤시라고 주문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러냐고 했죠. 그래서 대변인은 그만두었죠.
1975년 10월 8일 신민당 의원 김옥선은 의정 발언을 통해 "인도차이나 사태 이후 우리나라 전역에서 일어났던 안보궐기대회는 관제 데모 아닌가"라고 물었다. 여당 의원들은 그의 발언을 제지했으며 제명을 요구했다. 신민당도 김옥선이 제명당하면 소속 의원 전원이 운명을 같이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때에도 김영삼은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였다. 김옥선은 총재 계보 의원인데도 불구하고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더니 결국 김옥선이 스스로 의원직 사퇴서를 내게 만들었다. 김영삼은 후일 다시 대여 투쟁을 불태우긴 하지만 이때엔 확실히 변절의 길을 걷고 있었고 박정희는 야당의 적극적인 반대도 없이 독재 권력을 한껏 만끽하였다.
은폐된 '명동 사건'과 무하마드 알리
긴급조치 9호 발표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고 투옥되었지만, 대대적인 국민 저항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때부터 1979년 이른바 '10, 26사태'가 일어날 때까지는 단 한 번의 언론투쟁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국 언론의 고질병이라 할 '획일성'이 바로 이때에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된다. 오죽하면 정부 간행물에 준하는 출판물이라 할 '신문연감' 1977년 판은 당시의 언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을까.
"한국 신문은 금년(1976년) 들어 편집 체계의 획일성과 기사 취급의 안이성으로 말미암아 일부 독자로부터 간간이 비난을 받아 오고 있다. A 신문에 난 기사 내용이 B 신문에도 형용사 한 자 틀리지 않고 같은 내용이 나오는 경우가 때때로 있을 뿐 아니라, A 신문에 4단 표제로 나온 제목이 B 신문에도 4단 표제의 같은 제목으로 다음 날 조간까지 변형 없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획일적인 편집 현상은 특히 정치적인 사건을 다룰 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가령 명동 사건). 서울 시내에서 발간되는 7개 일간지는 명동 사건 공판 기사를 한결같이 2단 표제로 다루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 하더라도 생각해 볼 문제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긴급조치 9호 발표로부터 9개월여 후인 1976년 3월 1일에 이르러서야 민주화 진영의 큰 움직임이 가시화되었다. '3, 1 민주구국선언 사건' 또는 '명동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선언은 서울 명동성당에서의 3, 1절 기념 미사를 통해 발표되었다. 윤보선, 김대중과 같은 정치가, 함석헌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 그리고 대표적인 지식인 등 17명이 서명을 한 이 선언문은 긴급조치의 철폐, 투옥 인사와 학생의 석방, 의회 정치 회복, 사법권의 독립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언론은 이 사건을 단 한 줄도 보도할 수 없었고, 박 정권의 탄압이 가해진 3월 10일에서야 일방적으로 검찰 측 발표만을 보도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살벌한 상황에서도 TV는 질식할 것만 같은 국민들의 '숨통'을 터 주기 위해서라도 국민을 하는 기능을 수행해야 했다. 그런 기능이 과잉이 돼 사회적 물의를 빚은 적도 있었는데, 1976년 6월에 일어난 이른바 '무하마드 알리' 사건이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당시 세계 권투 헤비급 챔피언인 알리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듯 높아 그의 MBC 방문은 즉흥적인 쇼로 꾸며졌다. 그 쇼엔 당시 인기가 높던 세 명의 여가수가 출연했는데, 원로 방송인 정일순은 이렇게 말한다.
"프로그램이 시작되면서 이변이 생겼다. 가수들이 알리의 팔에 서로 먼저 매달리느라고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다. 시청자로부터는 이 눈 뜨고 못 볼 꼴불견을 항의하는 전화가 빗발쳤다."
방송윤리위원회는 이 쇼의 출연 연예인들의 경박한 행동이 윤리 규정을 위배했다고 '경고' 처분을 내렸고 MBC는 그걸로도 안심이 안 돼 스스로 저녁 뉴스에 사과 방송을 냈다.
보도 지침과 '오일쇼크'
양심적인 기자들의 대량 해직과 긴급조치 9호 공포 이후 한국 언론은 언론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만큼 생명력을 잃고 무자비한 군사정권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박 정권은 그 정도로도 만족할 수 없었던지 그간 각 언론사에 일일이 하달해 온 '보도 지침'을 계속 유지시켰다. 그간 '보도 지침'은 5공 치하에만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미디어오늘'은 지난 1996년 유신 시대에도 보도 지침이 존재했었다는 걸 최초로 보도하였다. '미디어 오늘'이 입수한 자료는 1975년 5월 16일부터 79년 10, 26 직후인 11월 20일까지 4년 6개월여라는 긴 기간에 걸쳐 중앙정보부 등에서 각 언론사에 하달한 보도 지침으로, 이는 박 정권의 언론통제가 얼마나 극악스러웠는지 웅변해 주고 있다.
그런 극심한 통제 상황에서 신문들의 주된 관심은 오로지 경제적 번영이었으며, 이는 오늘날 한국 언론의 성격을 규정짓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1970년대에 걸쳐 언론 자유의 향유와 언론사의 경제적 성장은 상호 반비례하는 관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3년 10월에 발생한 이른바 '오일쇼크'는 신문들에게 부정적으로만 작용한 건 아니었다. 오일쇼크로 수출에 큰 타격을 입게 된 기업들이 내수 시장에 눈을 돌리면서 치열한 광고 경쟁이 전개되었고 이는 신문들의 수입을 늘려 주는 효과를 가져 왔다. 1969년의 10대 광고주가 대부분 제약 회사였음에 비해 1974년에는 소비재 산업 부분의 기업으로 변화된 것도 그런 사정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광고비도 크게 늘었다. GNP 대비 광고비 비율로 따져 볼 때 1970년에서 1973년까지는 0.4% 선에 머물렀으나 1974년에 0.63%로 크게 뛰었다(75년 0.71%, 76년 0.77%, 77년 0.77%, 78년 0.81%).
오일쇼크는 방송에도 적잖은 변화를 일으켰다. 1973년 11월 26일부터 TV 방송 시간이 단축 실시되었으며 12월 3일에는 일요일을 제외한 모든 요일의 아침 방송이 전면 중지되었다. 또 새마을 정신을 강조하는 이른바 '새마을 방송'이 대폭 강화되었다. 1976년 4월 문공부는 '가족 시간대 프로그램 편성, 제작 지침'을 통해 '민족사관 정립 극'이란 것을 제작하도록 지시했으며, 1978년의 '프로그램 지침'을 통해선 사극 중심의 '민족사관 정립 드라마'를 새마을운동과 반공을 소재로 한 현대극으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1백만 부 돌파를 선언한 '중앙일보'
신문사들은 1976년에 경쟁적으로 고속 윤전기를 도입하였고 증면과 더불어 광고 지면을 크게 확대하였으며 무가지를 살포하는 등 신문사들 간 판매 경쟁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그러한 경쟁이 너무 치열하자 한국신문협회가 1975년 5월, 1977년 7월, 1979년 9월 등 세 차례에 걸쳐 확장지 및 무가지 규제, 월정 구독료 엄수, 첨가물 사용 금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신문 판매에 대한 정상화 결의를 하기까지 했다.
신문들 간의 치열한 판매 경쟁에 불을 붙인 장본인은 다름 아닌 '중앙일보'였다. 중앙일보는 이미 1972년 9월 신문협회의 결의를 무시하고 서울과 부산 간 신문 수송을 단독으로 강행하여, 신문협회 산하 판매협의회에서 제명당한 바 있으며, 1974년 8월에도 부산 지방에 대한 단독 수송을 실시하여 또 한 번 제명을 당한 바 있었다. 특히 1975년 신문의 날 신문 휴간 위반 사건은 다른 신문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그러나 중앙일보의 그런 공격적인 경영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중앙일보의 주장이긴 하나, 1974년 3월 하루 평균 발행 부수는 50만 8천 부였으나 1975년 9월 22일에는 70만 부를 돌파하였으며 1978년 12월 12일에는 1백만 부를 넘어섰다.
당시 4대 일간지라 할 '동아일보', '조선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가운데 '조선일보'와 '한국일보'는 조간이었고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는 석간이었기 때문에 중앙일보의 공격적인 경영에 대해 가장 불편하게 생각한 신문은 단연 동아일보였다. 1970년대 후반에 일어난 '동아일보'의 삼성그룹 비리 폭로 시리즈도 그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사이에 가장 눈에 띄게 감정 대립으로 나타난 사건은 1976년 5월의 용인자연농원에 대한 집중 보도와 1978년 4월의 삼성 조선의 시추선 설계도면 절취 관련 사건 폭로, 그리고 1980년 3월의 용인자연농원의 돼지 분뇨 방류 사건 등이었다.
'동아일보'는 1976년 5월 10일 자에서 '입장료 비싼 용인 패밀리랜드, 빈약한 시설에 과대선전만'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사회면 톱으로 보도한 이후 4일 동안 연달아 사회면의 많은 부분을 자연농원 기사로 다루었다. 5월 17일부터는 사회면 기사와 함께 '용인자연농원의 내막'이라는 시리즈 기사를 연재했으며, 5주 만인 6월 28일부터는 삼성그룹의 땅 투기를 공격하는 <땅의 애사>라는 시리즈를 연재했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의 전쟁
동아일보는 2년 뒤인 1978년 4월 12일 자에 <삼성 조선 관련 혐의, 설계도 절취 사건>을 보도했는데, 이때엔 중앙일보가 반격에 나서 이 사건의 보도가 동아일보의 왜곡 조작이며 특정 회사를 헐뜯기 위한 감정에 치우친 것이라고 주장했다. 동아일보가 계속 사건을 파헤치자 삼성은 중앙일보 광고를 통해 대응했다. 삼성은 중앙일보 4월 15일자에 낸 세 번째 광고에선 동아일보를 다음과 같이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이제 악의와 중상과 허구의 보도로써 진실을 고의로 외면하고 국민의 이목을 현혹해 온 동아일보의 반사회적 누습이 또다시 천하에 드러났습니다. 동아일보는 최근 10년간만도 폐사 관계 제사에 대한 근거 없는 비방 기사를 무려 518건이나 다루었으며, 의도적인 과장 보도와 논평까지 합치면 실로 700여 건에 이르고 있습니다. 동아일보는 계속 실추되고 있는 사세를 만회해 보겠다는 저의에서 앞으로도 더욱 더 반사회적, 반의도적인 비열한 수법으로 우리를 헐뜯는 데 발 벗고 나설 것이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 광고의 내용이 말해 주듯이, 삼성은 동아일보와의 전면전도 불사하겠다는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삼성의 적은 동아일보만이 아니었다. 삼성의 주장대로 동아일보가 삼성에 대해 부당한 공격을 했었다면 삼성의 중앙일보 역시 그런 부당한 공격을 다른 재벌그룹을 향해 한 적은 없었을까? 1980년 3월에 일어난 삼성그룹과 현대그룹의 한판 싸움은 그런 질문을 던져봄 직한 사건이었다. 이건 시간적으로 다음 장에서 해야 할 이야기이나 말 나온 김에 여기서 미리 하도록 하자.
현대는 1980년 3월 15일 자 조간부터 중앙일보를 제외한 중앙일간지에 전 5단의 '해명서'를 일제히 게재하여 중앙매스컴(삼성이 소유한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이 대대적인 집중 보도로 여론을 오도하여 현대건설과 현대중공업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을 뿐만 아니라 해외 공사의 수주에도 큰 타격을 입혔다고 주장했다. 현대는 '해명서'에서 재벌 소유의 언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중앙매스컴이 참으로 사회의 공기로 남기를 바란다면 무엇보다 먼저 삼성 재벌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한국 언론의 내일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한국 중공업의 내일을 위해서도 기업의 '칼이 되고 방패'가 되는 재벌 비호의 언론은 진정한 언론인의 언론으로 되돌려놓지 않으면 안 된다고 우리는 믿는다.
양 재벌의 싸움은 현대의 정주영 회장과 이명박 현대건설 사장, 삼성의 홍진기 중앙매스컴 사장과 김덕보 동양방송 대표이사가 만나 중앙매스컴이 앞으로 공정한 보도를 하겠다는 걸 전제로 하여 휴전이 이루어졌지만, 현대는 언론을 갖고 있지 못한 서러움을 절감하면서 먼 훗날 결국엔 일간지를 창간하게 된다. 정주영은 이미 1977년에 서울신문 8월 11일 자에 기고한 칼럼에서 '신문 없는 서러움'을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었다.
-오늘에 와서는 나의 마음은 신문에 대하여 가끔 실망과 서글픈 마음을 가지게 된다. 요사이 일부 신문이 기업의 영리를 추구하는 무기로 교묘하게 이용되려는 시련에 부딪히고 있는 느낌을 금할 수 없다. 우리들의 신문은 모든 자기 본위의 욕망에서 해탈한 숭고한 인격자의 지도하에서 발행되어 영원한 민족의 동반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우연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삼성과 현대가 휴전 협정을 맺은 다음 날인 1980년 3월 18일 동아일보는 용인자연농원의 양돈장에서 흘러나온 3만여 마리분의 분뇨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주민들의 식수원에 버려진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보도했다. 이 보도는 국민의 이익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상호 갈등 관계에 있어야만 비리를 적극적으로 폭로하는 우리 언론의 고질병은 씁쓸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 고질병이 비단 동아일보에만 한정한 것은 아니기에 사회 개혁은 물론 언론의 개혁을 위해선 언론사들 간 싸움을 붙이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동아투위와 조선투위의 성명
그 음울한 상황 속에서도 동아투위와 조선투위는 유인물을 통해 자유 언론에 대한 자신들의 신념을 토론하곤 했다. 1977년 12월 30일, 2년 6개월을 복역하고 출감한 이부영과 그에 앞서 출감한 성유보를 위한 합동 환영회 겸 송년회에서 발표된 양 투위 공동명의의 민주 민족언론선언 가운데 일부를 인용해 보자.
-권력의 시녀로 타락한 현 언론의 추악한 모습을 보라. 없는 정치를 있는 것처럼 없는 경제를 있는 것처럼 없는 문화를 있는 것처럼 없는 비젼을 있는 것처럼 터무니없이 왜곡하고 있다. 참된 정치, 참된 경제, 참된 문화, 참된 민족의 비전을 이 사회 제자리에 돌려놓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이 사이비 언론을 제거해야 한다. 지난 30여 년의 인고 속에서 과거의 언론인이 아닌 미래의 언론인으로 성장한 우리는 오늘의 사이비 언론을 타도하고 민주민족언론을 세우는 책무를 통감한다. 지금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배층의 농락에 의해 빼앗기고 소외되어 온 것을 본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양심의 소리를 외치다가 감옥에 끌려가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배움터를 박탈당한 것을 목격하며 또한 소위 경제 성장의 응달에서 병들고 찌들린 무수한 사람들의 신음과 절규를 듣는다. 민주언론은 이러한 민중의 아픔을 같이하는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민중의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한 줌도 안 되는 지배자의 언론이기를 거부한다. 체제나 정권은 유한하다. 그러나 민중과 민족은 영원하다. 이 영원한 민중과 민족을 위한 언론, 즉 민주 민족언론을 우리는 지상 과제로 삼는다. 자유 언론은 어느 한 시대를 투쟁을 선언하며 영원한 승리를 확신한다.
또 동아투위와 조선투위는 1978년 4월 7일 제22회 신문의 날을 맞아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날이 갈수록 민중과는 멀어지고 권력과는 유착되어 가는 오늘의 신문, 해가 바뀔수록 민중을 기만하고 권력을 옹호하려 드는 오늘의 신문인. 우리는 이러한 처절한 상황 속에서 이미 민주 민족을 위한 언론을 선언했으며 제도언론의 타도를 주창했다. 오늘의 언론은 관민 합작에 의한 악덕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 신문과 방송의 제작에 참여했던 우리는 그동안 생산자 아닌 소비자 입장에서 언론이라는 새로운 공해가 민중에게 끼치는 체제 중독 현상에 몸서리칠 따름이다. 이제 한국의 언론 언론인은 한 줌의 양심마저 도용하는 조선일보. 보도기관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다 하여 해고 근로자들의 항의를 받고 방송이 일시 중단되어도 해명조차 못 하는 기독교방송. 더구나 지난달 26일 여의도에서 있었던 부활절 예배 때 발생한 기독교방송의 중계방송 중단 사건 등등. 최근 국내 보도기관들의 이러한 자세는 단순히 힘 있는 자들의 오만이라고만 탓할 수 없고, 무지에서 오는 야만적 행위라고 지탄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말하는 사이비 언론은 곧 제도언론이요, 나아가서는 힘 있는 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언론이다. 이들이 제작하는 매체들은 한결같이 민중들에게는 자유로운 선택권이 없다. 가정에서, 길거리에서, 그리고 밤낮으로 보거나 들어 줄 것을 강요하고 있다. 이 사이비 언론은 최근 120여 명의 근로자가 하루아침에 해고된 동일방직 사건을 비롯하여 성직자, 교수, 언론인, 학생들의 의로운 민주 투쟁과 농민들의 아우성을 일체 외면하고 있다. 우리는 민주 민족언론 선언의 주지에 따라 오늘의 모든 신문 방송을 거부하는 범국민 연합전선을 펼 것을 주창한다. 오늘의 사이비 신문 방송이 이 땅에서 사라질 때까지 민주 국민은 모든 힘을 합쳐 투쟁하자.
1978년 10월 24일에 일어난 이른바 ‘민권일지 사건’도 70년대 말의 참담한 언론 상황을 잘 웅변 해주고 있다. 해직 언론인들은 10월 24일 명동 한일관에서 10, 24 자유 언론실천선언 4주년을 맞아 보도되지 않은 민주 인권 일지(1977년 10월 ~ 78년 10월)를 발표했는데, 이는 당시 1년간 언론에서 전혀 보도하지 않았거나 보도했더라도 박 정권을 홍보하거나 비호하는 등 왜곡 보도한 사건들, 특히 전국 각 대학의 학생운동, 종교계, 노동자 그리고 여러 민권 단체의 인권 운동 등 모두 250여 건을 기사화한 것이었다. 이게 긴급조치 9호에 위반된다 하여 동아투위 위원들이 구속되자 동아투위 위원들은 10월 25일부터 종로구 청진동 사무실 앞길에서 도열하여 연행 구속 사태에 항의하고 그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침묵시위를 벌였다. 이 침묵시위에는 조선투위의 동료 기자들과 많은 민주 시민들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박 정권은 침묵 도열 시위 16일만인 11월 8일에 기동대 병력을 동원하여 시위자들을 모두 강제 해산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동아투위 위원들은 모두 10명이었다.
10.26 사건과 유신의 종언
1979년 5월 30일 마포 새 당사에서 열린 신민당 전당대회에선 김영삼이 김대중의 도움을 받아 이철승을 누르고 2년 6개월 만에 총재로 복귀하였다. 김영삼은 1975년 5월 21일 박정희와의 회담 이후 변질돼 76년 9월 당권을 이철승에게 넘겨주어야 했으나 김대중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한 것이었다. 1978년 12월 12일에 치러진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은 61석을 획득하여 1973년 총선 때의 52석에 비하여 9석이나 더 확보하였으며 득표율에서도 1.1% 앞서 사실상 야당의 승리를 이뤄냈다. 이러한 국민적 염원에 김영삼도 뒤늦게 반성을 하고 선명 야당의 기치를 들고 나섰던 것이다.
김영삼은 1979년 6월 11일 외신기자클럽 초청 연설에서 남북의 긴장 완화를 위해 김일성과 면담할 용의가 있다는 발언을 했는데, 이 발언이 나가자 상이군인과 반공청년을 자처하는 무리들이 마포 당사에 난입하여 당원들을 폭행하고 잡기를 부수는 난동을 벌였으며 공화당도 발언을 취소하라고 물고 늘어졌다.
절대권력이라는 마약에 취한 박 정권은 점점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1979년 8월 12일 YH무역의 여공 180여 명이 사기성 폐업에 항의하여 야당인 신민당사에서 항의 농성하는 것을 경찰은 무자비하게 탄압하였으며 그 와중에서 YH 노동자 김경숙이 사망하였다. 이 사건이 채 마무리되기도 전에 박 정권은 신민당 원외 지구당위원장 3명을 사주하여 김영삼을 비롯한 총재단 전원에 대한 직무 정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하도록 했으며 9월 8일 서울민사지법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전당대회 의장 정운갑을 총재 직무대행으로 선임했다. 김영삼은 9월 10일 기자 회견을 통해 범국민적 항쟁을 선언했으며 9월 15일 미국 뉴욕 타임즈지와의 회견에서 카터 미 행정부는 소수 독재자인 박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공화당과 유정회는 김영삼의 발언을 사대주의 반국가적 언동으로 규정하여 김영삼의 의원직을 박탈하는 징계안을 내더니 10월 4일 경호권을 발동한 가운데 김영삼 제명 결의안을 10여 분만에 변칙으로 통과시켰다.
김영삼 제명 사건이 일어나자 10월 16일부터 부산과 마산에서 수천여 학생들과 시민들이 유신 철폐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인 이른바 10, 16항쟁 또는 부마 민주항쟁이 일어났다. 박 정권의 종말이 임박했던 것이다. 열흘 후인 10월 26일 박정희는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었는데, 김재규의 살해 동기가 그 무엇이든 부마 민주항쟁이 김재규에게 큰 영향을 미친 건 분명했다.
박정희는 육영수가 죽은 후 엽색 행각에 빠져들었는데 26일 밤도 바로 그런 자리였다.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은 박정희를 위한 채홍사 역할을 맡았는데,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런 음탕한 술자리를 한 달에 10여 차례나 열렸으며 궁정동 안가를 다녀간 연예인만 해도 1백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경호실장 차지철도 채홍사 역할을 맡았는데 그가 TV를 보다가 지명한 경우가 30%쯤 되었다고 한다.
또 박정희도 영화나 TV를 보다가 맘에 든 배우나 가수의 이름을 대며 한번 보고 싶다고 그러면 즉시 불려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수십 명의 일류 연예인들, 누구나 한 번 듣기만 하면 입을 딱 벌릴만한 TV 드라마와 은막의 스타들이 궁정동 안가의 밤 연회에 왔었다는 것이다. 물론 술자리 근처엔 침대가 준비돼 있었다. 청와대의 TV와 궁정동 안가는 그런 용도였단 말인가!
박정희는 그렇게 조선 시대 왕보다 더 큰 권력을 원 없이 누리다가 죽었으니 개인적으론 억울할 게 전혀 없는 죽음이었다. 그러나 후일 조선일보는 박정희를 미화하고 예찬하면서 박정희가 청교도식의 청렴하고 도덕적인 생활을 하였다는 식으로 사기를 쳐 대게 되니 진정한 박정희 재평가를 위해서도 궁정동 안가에서 벌어진 일은 클린턴 섹스 스캔들 이상으로 낱낱이 파헤쳐 공개할 필요를 절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