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멜레온과 하이에나 1
카멜레온과 하이에나
강준만
1부
1. 개화기의 언론 I (1883~1898)
2. 개화기의 언론 Ⅱ(1898~1910)
3. 일제하의 언론(1910~1945)
1. 개화기의 언론 I (1883~1898)
‘늑대 떼에게 포위된 소년’
구한말 역사를 읽다 보면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진다. 동화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당시 우리나라의 처지가 사나운 늑대 떼에게 포위된 한 소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부모님의 말씀을 안 듣고 위험한 곳으로 간 소년의 잘못에 대해 인과응보라고 말하기엔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소년의 몸부림이 너무 눈물겹다. 그 소년은 나름대로 꾀를 내 보려고 하지만 다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한 늑대의 밥이 되고 만다.
한반도에 ‘늑대 떼’들이 출몰한 건 1870년대였다. 일본은 1875년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1876년 조선 정부와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을 체결했다. 조선은 이 조약에 따라 개항을 하게 되었고 근대적인 서양문물을 수입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것이 강요된 상황에서 아무런 준비 없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강화도조약으로 인해 이제 조선은 기존의 척양 정책을 계속 추진할 수는 없게 되었으며, 청도 일본의 진출을 막기 위해 조선 정부에게 서양의 여러 나라와 통상조약을 맺을 것을 권고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은 1882년 제물포에서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이어 영국(1882년 체결, 1883년 정식조인), 독일(1882년), 러시아(1884년), 이탈리아(1884년), 프랑스(1886년) 등의 나라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뒤이어 오스트리아, 벨기에, 덴마크 등과도 잇달아 조약을 맺었다.
강요된 개방이라곤 하지만, 당시 국내에 적극적인 개방론자가 없었던 건 아니다. 이른바 통상 개화론은 1860년대부터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당시 정계를 주도한 민씨 일파도 청을 통해 서양문물의 우수성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화사상은 제법 폭넓은 지지기반을 갖게 되었다. 물론 반대세력도 만만치 않았으나 그들 사이의 갈등이 외세침략을 막아내는 데에 큰 장애가 되었다.
1880년대의 개화파들이라고 모두 한목소리를 냈던건 아니다. 그들 가운데에도 온건파가 있었고 급진파가 있었다. 역사학자 이광린은 온건파와 급진파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온건파는 당시의 집권 세력이었고, 그 주장인즉 우리의 도덕이나 사상은 그대로 지키되 오늘날 우리가 부족한 서양의 기술만을 받아들이자는 것이었다. 이 주장을 동도서기 사상이라고 블렀는데 중국의 양무 사상과 같은 것이었다. 이에 대해 급진파는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당이 이에 속하였고 그 주장인즉 서양의 기술뿐만이 아니라 제도와 사상까지 받아들이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1880년대 한국 사회에는 양무 사상과 변법 사상이 공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임오군란과 고종의 언론관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은 조선의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임오군란은 조선에서의 일본세력을 약화시키고 청의 지위를 상대적으로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는데 김옥균(1851~94), 홍영식(1855~84), 서광범(1859~97), 박영효(1861~1939) 등 개화파 인사들은 청의 내정간섭과 청에 의존하는 정부의 사대 정책에 크게 반발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1882년 박영효가 임오군란의 뒷처리를 위해 수신사로 일본에 가게 된 뒤부터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 시대의 역사를 잘 모르는 독자들은 수구파와 개화파 사이의 갈등에서 국왕인 고종의 입장은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는 언론사학자 최준의 다음과 같은 견해를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면서 이제 본론인 신문 이야기로 들어가도록 하자.
“고종은 비교적 커뮤니케이션 공개성에 호의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를 둘러싸고 있던 궁정 수구파들의 완강한 반격으로 말미암아 모조리 붕괴되고 말았다. 이는 전제 군주에 충성을 바치는 궁정 수구파들의 본능적인 발작이라 하겠다. 말하자면 커뮤니케이션의 공개성의 페쇄는 그들 전제주의 아래 궁정 수구파들의 하나의 생리였다. 그러나 고종은 신문의 발간에는 항상 호의적이었다. 이것은 일찍이 프로이센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이 신문의 자유를 허용하여 계몽전제주의를 쓴 것과도 비슷하였다. 말하자면 국가적인 일반 사항, 특히 정치적인 문제를 제외하는 한 신민의 계몽을 촉구하는 데는 아무 이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는 확실히 고종은 공개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지지하는 군주였다 하겠다. 그러나 조정 내지 정체의 변혁이라든가 또는 조정의 일정한 행동에 관하여 현실적으로 반대 혹은 비난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여기에 고종은 비교적 공개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이해하고 지지한 군주였으나 폐쇄성을 완전히 탈각치 못한 점에서 이른바 이율배반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지적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율배반성은 ”독립신문“이 등장한 후에 더욱 뚜렷이 나타났다.
한성순보의 창간
우리나라 신문의 역사는 ‘조보’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조보는 조선 시대 승정원에서 주로 조정의 소식을 필사하여 양반 관료들에게 반포한 것으로 조선조 초기에서 1895년까지 발행된 일조의 관보이다. 그러나 조보는 오늘날의 신문과는 큰 거리가 있어 현대적 의미의 신문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으로 알려진 ‘한성순보’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한성순보‘는 1883년 10월 31일에 창간돼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으로 발생이 중단되기까지 총 41호가 발간된 신문이다. ’한성순보‘는 1882년 일본에 수신사로 갔던 박영효가 일본의 신문을 보고 돌아와 만든 것으로 신문발행에 필요한 모든 요건이 일본에 의해 공급되었다. 박영효는 일본에서 귀국하는 길에 편집 기술자 3명과 인쇄공 2명을 데려오기까지 했다.
‘한성순보’는 정부가 아닌 박문국에서 발행하는 관보였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전문직으로서 기자가 존재했던 게 아니라 박문국의 관리가 기사를 쓰고 신문을 만들었으며,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한 게 아니라 관청에서 의무적으로 구독한 신문이었다. 이 신문이 순 한문으로 씌어진 것도 관리와 귀족 계급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국. 한문을 섞어서 신문을 내고자 하였으나, 한글 활자를 갖추지 못한 데다 수구파들의 완강한 반대로 순 환문으로 발행하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한성순보’는 과거의 관보가 다루지 않았던 시사성 있는 보도와 새로운 서양 문화의 소개에 치중함으로써 과거의 관보와는 분명한 차별성을 갖고 있었다.
‘한성순보’는 개화파 진영의 관점에서 유용한 지식을 풍부하게 제공했는데, 일본보다는 중국에 관한 기사가 더 많았다. 이와 관련, 한국외국어대 교수 정진석은 “신문 발간의 계기가 된 자극을 준 것은 일본이었지만, 순보의 뉴스원이나 그 내용은 오히려 중국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국내 보도의 경우 ‘한성순보’는 정부의 보도자료에 의존하고 사회 실정에 대해 직접적인 비판을 회피하는 소극적 태도를 보였다. 부국강병의 사상을 역설하고 반침략적 입장과 사대주의를 반대하면서도, 국내 문제와 구체적으로 결부된 측면은 취약했다. 또 자본주의 제도의 선진성과 봉건제도의 낙후성을 집중적으로 선전하면서도 봉건제도를 구체적으로 반대하는 논조는 미약했다.
유길준(1856-1914)은 ‘한성순보’의 창간에 참여했고 창간사까지 썼는데, 이를 근거로 유길준을 우리나라 최초의 기자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정진석은 유길준이 구체적인 준비 작업은 했지만 신문이 창간되기 전에 박영효가 한성판윤의 자리를 물러나 광주유수로 좌천되자 따라서 신문 발간 준비에서 손을 뗐기 때문에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면서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 후 1895년 4월에 발간한 ‘서유견문’에서 처음으로 외국의 신문 현황을 상세히 소개하기로 했고, 이듬해인 1896년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하려 할 때에는 내부대신으로 있으면서 신문 창간에 필요한 경비를 정부에서 보조하고 신문사 건물을 빌려주도록 주선하는 등의 결정적인 역할을 해서, 유길준 자신이 직접 신문 제작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초창기 우리나라 신문과는 깊은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이 되었다.”
‘한성주보’의 창간
‘한성순보’의 운명은 곧 개화파의 운명이기도 했다. 세상은 개화파의 뜻대로 돌아가진 않았다. 개화파는 점점 더 강해지는 보수 세력의 압박으로 큰 정치적 위기에 처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정변이라는 비상수단을 강구하게 되었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낙성 기념 축하연에서 김옥균, 박영효 등이 주동한 갑신정변이 이른바 ‘3일 천하’로 끝나게 되자 수구파들은 박문국사를 습격하여 인쇄기와 활자 등 일부를 소각하였고 이로써 ‘한성순보’도 폐간의 운명을 맞고 말았던 것이다.
1885년은 신문이 없는 공백 기간이었으나 서울과 인천, 의주를 연결하는 전신 시설이 가설되는 통신의 발전이 있었다. 갑신정변으로 좌절된 우편 업무는 10여 년이 지난 1895년에 이르러서야 우체사를 두고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한성순보’에 뒤이어 나타난 신문이 ‘한성주보’다. ‘한성주보’는 1886년 1월 25일에 창간돼 1888년 7월 14일 박문국의 폐지와 함께 사라진 신문이다. ‘한성주보’는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피신했던 개화파 인사들이 1885년 한성조약 체결로 다시 조선에 돌아와 활동하게 됨으로써 발행이 가능하게 된 것이었다. 일본에서 새 기계와 활자를 구입해 오는 등 ‘한성주보’의 창간을 위해 노력한 박문국 총재 김윤식, 그리고 ‘한성순보’ 창간에 큰 기여를 했던 후쿠자와 유기치의 제자 이노우에의 열정이 큰 역할을 했다.
그와 함께 이미 ‘한성순보’를 통해 현대적 의미의 신문의 가치를 만끽한 사람들이 신문의 복간을 바랐던 것도 ‘한성주보’ 창간의 배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성주보’ 창간호에 나오는 창간 취지문은 김윤식이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글은 ‘한성순보’가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갑신정변으로 비롯된 정치적 혼란이 수습되자 신문의 발행을 바라는 여론을 수립하여 창간을 추진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한성주보’는 ‘한성순보’를 복간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불과 1년여 되는 동안 서양문물이 더욱 유입된 탓인지 양력을 인정하여 발행 단위를 열흘에서 일주일로 바꾸었다는 것과 그 밖에 몇 가지 진일보한 차이점을 갖고 있었다. 국, 한문 혼용이었으며 극소수나마 민간인 구독자도 존재했다는 것, 그리고 보다 근대적인 활자와 인쇄 시설을 사용했고 신문 제작진도 증가했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광고는 1886년 2월 22일에 발행된 ‘한성주보’ 제4호에 실렸다는 점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광고주는 독일 무역상사 세창양행이었다. 광고 제목은 ‘덕상 세창양행 고백’ 이었는데 ‘고백’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 흥미롭다. 세창양행이 우리나라에서 사려는 물품은 호랑이 가죽을 비롯하여 수달피, 검은담비, 흰 담비, 소, 말, 여우, 개 등의 가죽과 사람의 머리털, 소. 말. 돼지의 갈기털, 꼬리, 뿔, 발톱, 조개와 소라, 담배, 종이, 옛날 동전 등이었으며, 팔려는 물품은 자명종, 유리, 서양 단추, 서양직물, 의복의 염료 등이었다.
신문내용에서도 다소의 변화가 있었다. 관의 소식은 물론 물가 변동 등과 같은 사회 소식과 아울러 외국의 발달된 과학, 문화 등을 보도하였다. ‘한성주보’는 ‘한성순보’의 국민 계몽사상을 이어 받긴 했지만 근대 신문을 개화의 무기로 사용하려던 개화파의 세력 약화와 더불어 봉건 군주에 충성하는 것을 우선시한 수구파적 성격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한성주보’의 수명은 채 2년 6개월을 넘지 못했다. ‘한성주보’ 가 1888년에 사라지면서 조선은 이후 1896년 ‘독립신문’이 창간될 때 까지 약 8년간 근대적인 신문을 갖지 못한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한성순보’와 ‘한성주보’가 ‘독립신문’의 창간에 미친 영향을 과소평가해선 안 될 것이다. 이와 관련, 한국외국어대 교수 정진석은 이렇게 말한다
“독립신문은 순보와 달리 한글 전용으로 제작되었고 민간 신문이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한글 전용의 기사는 주보에서 먼저 시도되었던 일이 있었고, 독립신문도 서재필 개인의 힘으로 발간된 것이 아니라 정부가 신문 발간의 경비를 지원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정부가 신문 발간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무엇보다도 한성순보와 주보를 발간해 본 경험으로 미루어 신문이 개화와 국민교육에 미치는 역할이 크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서재필의 신문 발간을 적극 지원한 사람은 내부대신이 되어있었던 유길준이었다. 유길준은 순보 창간 실무 작업을 제일 먼저 시작했던 사람이었으니 신문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순보와 주보는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결국 독립신문도 순보와 주보의 경험을 믿거름으로 하고 그 발간 정신을 이어받아서 나온 것이라 해서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동학혁명- 청일전쟁- 갑오경장- 을미사변- 아관파천
조선 정부는 조선을 노리는 열강의 이권 다툼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내치마저 제대로 하지 못했다. 개항 이후 근대 문물의 수입과 대외 관계에 따른 비용마저 농민들의 조세 부담으로 전가되었다. 농촌 경재가 파탄상황에 처하면서 외세 저항과 양반 체제부정을 내세운 동학의 교세는 날로 커져 같으며, 이는 결국 1894년 동학혁명으로 발전되었다. 동학혁명은 청과 일본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은 청을 조선에서 몰아내기 위해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청과 전쟁을 하는 동안 군대를 출동시켜 경복궁을 포위한 가운데 민씨 세력을 몰아내고 대원군을 내세운 한편,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중립적 인사와 친일적 인사들로 신정부를 구성하여 개혁을 추진토록 하였다. 이것이 바로 1894년 갑오개혁 또는 갑오경장이다. 일본은 전쟁에 몰두하느라 당시 개혁은 신정부가 정치, 경제, 사회 전 분야에 걸쳐 독자적으로 수행하였다.
정치면에서는 청과의 종주 관계를 청산하고 개국 연호를 사용하였고, 경제면에서는 재정을 일원화는 조치를 취하였는데, 가장 괄목한 만한 것은 사회면의 개혁이었다. 양반 체제하의 신분제 철폐, 조혼 금지와 과부 재가 허용, 고문과 연좌법 폐지, 의복 제도 간소화 등이 바로 이때 이루어졌다.
갑오개혁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이로써 일본은 조선에서의 우위를 확실히 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의 결과 양국 사이에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엔 일본이 대만과 랴오뚱 반도를 할양받는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어,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이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일본은 결국 랴오뚱반도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국제상황을 틈타 조선정부는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고종도 동조하는 가운데 민비는 정부 내의 친일세력인 박영효를 몰아내고 이범진, 이완용 등을 기용하여 새로이 친러 정부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이에 일본은 1895년 을미사변, 즉 궁중을 침범하여 민비를 시해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러 다시 친일 내각을 세웠다.
그렇게 세워진 친일 내각, 즉 김홍집 내각은 그동안 중지되었던 개혁을 재개하였으니 이를 을미개혁이라 한다. 을미개혁의 결과 건양이라는 새 연호를 1896년 1월부터 쓰게 되었고, 태양력을 사용하였고, 단발령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이 단발령은 그렇잖아도 민비 시해로 들끓고 있던 민심을 크게 자극하여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 일본과 친일정부에 대해 무력으로 항쟁하는 결과를 낳게 만들었다.
그와 같은 상황을 틈타 러시아는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인천에 정박 중인 러시아 군함으로부터 수병 120여 명을 서울로 이동시켰으며,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친러파 이범진 등과 공모하여 친위대 병력이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에 파견돼 왕궁의 경비가 소홀한 틈을 타 고종을 러시아 공관으로 옮기게 하였다. 이게 바로 1896년 2월의 이른바 아관파천이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다시 신문 이야기로 돌아가자.
‘독립신문’의 창간
우리 신문이 없던 공백 기간 중 엉뚱하게도 일본인들이 한글 신문을 하나 창간하였으니 그게 바로 ‘한성신보’다. ‘한성신보’는 1895년 1월에 창간되었는데, 이 신문은 1895년 10월 8일 민비 시해 사건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신문은 ‘우리나라 최초’라는 한 가지 기록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신문에 연재소설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896년 ‘한성신보’부터였다. 서울대 교수 권영민은 “이 신문에 최초의 연재소설이 등장하였다는 점을 신문학자의 첫 장에 기록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부끄럽다”고 말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 신문이 ‘독립신문’의 창간에 적지 않은 자극을 주었다. ‘한성신보’에 대한 반감 때문에 우리의 신문에 대한 필요성이 더욱 높아진 상황에서 국내 개화파와 서재필의 합작으로 1896년 4월 7일 드디어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이 창간된 것이다. 역사학자 한철호는 ‘한성신보’가 독립신문의 창간에 미친 영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895년 7월 7일 박영효의 일본 망명을 전후한 시기에 내각의 요직을 차지했던 정동파는 당시 일본 외무성의 자금을 지원받아 발간되고 있었던 ‘한성신보’가 일본의 입장을 편파적으로 옹호하는 기사를 게재하는 데 대해 강한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일본인이 발행하는 ‘한성신보’에 대항하기 위해 순수한 한글 신문을 발행‘할 목적으로 조선 주재 각국 공사들의 협조를 요청한 적이 있었다. 비록 정록파의 신문발행 기도는 민비 시해 사건으로 말미암아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 계획은 갑오경장 말기에 유길준과 서재필이 추진했던 것보다 시기적으로 앞섰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와 같이 아관파천은 이전 신문에 대한 지식과 그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던 정동파는 ’한성신보‘가 1896년 2월 18일 자에 고종의 아관파천을 비난하는 기사를 게재한 사건을 계기로 신문 간행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독립신문’은 순 한글로 제작되었으며, 제호나마 가로쓰기를 하였고 최초로 기사 빈칸 띄어쓰기를 하는 등 편집에서도 진일보한 면을 보여 주었다. 서울대 교수 신용하의 지적 그대로, ‘독립신문’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이후 급속히 성장한 신흥 사회 세력의 대두와 관련하여 그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순 국문으로 띄어쓰기를 하고 국어를 쓰면서 민간 신문으로 창간되어, 민중 속으로 파고들면서 민중을 계몽하고 민중을 대변한 새로운 형태의 신문”이었던 것이다.
1주 3회(화, 목, 토요일) 발간된 ‘독립신문’은 타블로이드판에 순 한글 기사 3면과 이를 축약한 영문판 1면으로 구성되었다. 발행인인 서재필이 ‘민간인’임을 강조하여 ‘독립신문’을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서재필 자신의 회고
서재필(1864-1951)은 20세의 나이에 김옥균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킨 인물로 당시 3일 천하의 4흉(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일본을 거쳐 미국에 망명하였으며, 그로부터 10년 10개월 만에 귀국해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서재필은 1898년 5월 14일 부인 암스트롱과 맏딸을 데리고 용산에서 배를 타고 인천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갔고, 그 후 ‘독립신문’은 윤치호가 운영을 맡아 1898년 7월 1일부터 일간으로 내다가 1899년 1월부터 아펜젤러, 6월부터 영국인 선교사 엠벌리를 거치면서 방황하다가 창간된 지 3년만인 1899년 12월 4일에 폐간되고 말았다. 서재필 자신의 입을 통해 ‘독립신문’의 발간 경위와 활동에 대해 들어 보자.
"내가 십여 년 동안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 한국에는 여러 가지 변천이 있었다. 청일전쟁 후 마관조약으로 한국은 독립국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나에게 외무차관이 되어 달라고 했으나 나는 의학 공부를 중지하고 싶지 않아 귀국 취임하기를 거절하였다. 나의 옛 동지인 박영호, 서광범, 윤치호, 유길준씨 등은 내각의 각료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아니 가서 천만뜻밖에도 박영효가 두 번째의 망명으로 워싱턴에를 왔다. 그에게서 조선의 정치 정세는 갑신정변 때나 다름없이 절망적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또 나에게 자꾸 귀국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무엇이고 조국을 위하여 일을 해 볼 생각으로 미국에서 경영하던 병원문을 닫고 1896년 12월에 미국을 떠나 정초에 도착하였다. 돌아와 보니 민 중전(명성황후)께서는 이미 승하하셨으나 정부의 배후에서는 왜성대의 일본 공사가 절대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나는 그때 나라의 중신들이 암살을 두려워해서 미국 공사관에 피신하고 있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리고 또 조야를 막론하고 서로 모해하고 서로 죽이는 못된 버릇이 옛날이나 다름없는 '조선적' 광경을 목도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낙심 실망한 끝에 변복을 하고 다음 선편으로 다시 미국으로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유길준은 백방으로 나를 만류하고 이런저런 벼슬을 나에게 권하였다. 나는 내가 미국으로 다시 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벼슬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민중을 교육하는 의미로 신문을 발간해서 정부가 하는 일을 백성이 알게 하고 다른 나라들이 조선에 대해서 무엇을 하고 있나를 일깨워 주는 일이나 해 보겠노라고 하였다. 유씨는 나의 말에 쾌락을 하고 재정적으로 나를 후원하겠다고 단단히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얼마 아니 되어 궁중과 정부에서는 크나큰 변동이 일어났다. 고종께서는 갑자기 밤중에 노서아 공사관으로 옮기시어 그곳에서 모든 정무를 보시었다. 나는 노서아 공사관으로 가서 고종께 뵈옵고 즉시 대궐로 돌아가시와 일국의 원수로서 나라의 정치를 보살피실 것이고 남의 나라 공사관의 한 빈객으로 머무르지 마십사고 복주하였다. 그때 고종께서는 물론, 노서아 공사까지도 나를 미워하였다. 그러나 새로 조직된 내각도 내가 유길준과 약속한 신문을 발간하는 것만은 거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새로 발간된 신문(독립신문)은 일반 민중의 호평을 사서 사회 각 층에 널리 읽히어졌다.
공정을 기하여 나는 불편부당주의로 어느 편 어느 패에도 쏠리고 기울지를 아니하였다. 나는 친로, 친일할 것 없이 두 정객들을 모두 공격하였다. 그 까닭은 그 두 편이 다 같이 '외국 세력의 괴뢰 노릇'을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공석에서나 사석에서나 글로나 말로나 '조선이 국리민복만을 위하여 일하고 남의 굿에 놀지 않음이 위정자의 의무'라는 것을 역설하였다.
이 같은 설교가 점차 효과를 내기 시작하여 일반 민중도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해서 조금씩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요일마다 서문 밖 독립관에서 내가 연설을 할 때에는 청중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그같이 민중이 정치적으로 각성되어 가는 것이 황제와 그 완고한 중신들과 외국 사신들까지 놀라게 하였다. 따라서 표면상으로 무사히 지냈으나 마음속으로는 모두 나를 미워하였다. 그에 따라 너무 급격한 개혁 운동을 하다가는 일신상 불리한 일이 많은 것인즉 개혁 운동을 하더라도 서서히 하라고 권고하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기사는 신문에 내지 말라고 뇌물을 주려는 자도 있었으며, 자기네의 그늘진 정치적 음모를 폭로한다면 신변에 위험이 있으리라고 협박을 하는 자까지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모든 것에 귀를 막고 한 신문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에 노력하였다. 그와 같이 매수에도 응하지 않고 압박에도 굴하지 않자, 그네들은 온갖 방법으로 나의 사업을 방해하기 시작한 바, 나중에는 우편물을 차압함으로써 신문의 지방 배달을 못 하게 하였다. 어느 날 미국 공사는 나를 보고 '황제와 정부에 대해서 적대적 태도를 취함은 현명하지 못한 일인즉 위험이 신변에 미치기 전에 가족과 함께 다시 미국으로 가라'고 권고하였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으므로 나는 얼마 동안 더 신문을 내다가 '씨는 이미 뿌렸은즉 내가 떠난 뒤라도 거둘 이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품고 나는 하릴없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기를 결심하였다. 나는 신문을 나의 친우인 윤치호에게 맡기고 떠났다. 어느 의미로 보아 나의 2년 동안의 귀국 활동은 아주 무의미한 것은 아닌 듯싶었다.
서재필에게 가해진 탄압
서재필 자신도 밝히고 있지만, ‘독립신문’ 창간에 대한 국고금 지출 승인서가 작성된 것은 친일파 김홍집 내각 때였지만, 그것이 집행된 것은 친러파인 박정양 내각 때였다. 왜 박정양 내각은 ‘독립신문’의 창간에 협조적이었을까? 이에 대해 언론사학자 최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박정양 내각도 전 내각에 못지않게 신문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 좋은 예로는 국모 명성황후의 시해 사건과 같은 일대 참변을 당했어도 이를 즉각 온 국민에게 알릴 수가 없었고 또 하나의 여론을 일으킬 수 없었음을 몸소 체함한 데 기인된다. 둘째, 미국 시민권을 가진 서재필에게 일단 약속한 것을 저버릴 수 없다고 생각한 점이다. 그것은 보수파들도 미국과의 우호 친선 관계를 두텁게 하려는 데에는 별로 이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박정양 내각의 생각은 오판이었다는 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독립신문’이 정부의 정책에 아무 거리낌없이 비판을 해 댔기 때문이다. 정부는 ‘독립신문’의 판권을 취소하고 싶었지만 법규가 없어서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이런저런 탄압을 가하는 수밖에 없었다. 1897년부터 노골화되기 시작한 정부의 ‘독립신문’ 탄압은 조병식이 외부대신으로 취임한 1897년 11월부터 더욱 격화되었다. 미국에 압력을 가하고 부탁을 하는 등 서재필의 추방 공작까지 진행되었다. 서재필은 그런 상황에서 더이상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서재필 개인의 서구적인 행태도 수구파 인사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엔 "임금을 뵈올 때 안경을 끼고 궐련을 피며 뒷짐을 지고, 뿐만 아니라 외국인의 세력을 업고 임금을 모욕하고 조정의 세력자를 핍박했다"고 씌어 있다. 물론 이 말을 그대로 믿을 순 없을 것이나, 사상을 떠나 개인적인 행태에 좀 '튀는' 면이 있었다는 건 분명한 것 같다. 심지어 서재필이 부인 암스트롱과 더불어 당시 한성 사교계에서 크게 활약해 인기가 좋았다는 것도 수구파 인사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하니 이와 같은 '문화 충돌'이 미친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서재필은 또한 독립협회를 결성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는데, 독립협회는 자주독립, 자강혁신, 자유민권의 세 가지 방향으로 활동하였다. 독립협회는 독립문을 세웠으며, ‘독립신문’을 통해 자주독립 의식을 높이고자 하였으며, 외국에 대한 각종 이권의 할양을 반대하는 동시에 이미 침탈된 이권을 되찾을 것을 주장하였다. 또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가 있던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였다.
고종은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국민의 환궁 요구에 따라 아관파천 후 약 1년 만인 1897년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고종이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간 것은 러시아를 비롯하여 미국, 영국 등 경운궁을 에워싼 외국 공사관의 보호에 의지하려고 하였던 것이었으니 당시 나라 꼴이 어떠했던지는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조선 정부는 고종이 환궁하자 독립 국가로서의 면모를 내외에 과시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조선 정부는 1897년 10월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하고 갑오개혁에서 '대군주'라고 하였던 국왕의 칭호를 '황제'로 고쳤으며,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의 뒤를 이은 또 한 차례의 근대적 개혁(광무개혁)을 실시하였다.
독립협회의 활동 가운데 가장 돋보였던 게 1898년 10월 29일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의 개최였다. 이는 국정 개혁을 실현시키기 위한 민중 차원의 정치운동이었는데,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어 총리대신 박정양 이하 몇몇 대신들까지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선 '헌의 6조'라는 개혁 요구안을 채택해 고종에게 건의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때 ‘독립신문’은 이 사실을 1, 2, 3면에 걸쳐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이 기사는 관원과 백성이 합동으로 상론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며 이 모임에 참석한 민중은 1만 명이었다고 보도했다.
집권층이 독립협회를 반겼을 리 만무했다. 정부는 11월 5일 새벽 독립협회가 황제 대신 대통령을 옹립하여 공화정을 하려고 한다는 이유를 들어 독립협회에 해산 명령을 내리면서 이상재, 남궁억, 정교 등 17명의 중심인물을 체포하였다. 이에 독립협회 측에서는 연일 만민공동회를 열어 투옥 인사의 석방과 독립협회의 부활, 그리고 헌의 10조의 시행을 더욱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보부상을 중심으로 어용 단체인 황국협회를 조직하고, 이로 하여금 독립협회와 충돌하게 한 뒤 사회 혼란을 이유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독립신문’의 진보성과 영향력
독립신문은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발간된 신문이기 때문에 민족의 독립 정신과 인권 신장을 강조하였으며, 외국 열강의 부당한 침투에 대해 공격적인 논조를 펼쳤다. 그러나 청, 러시아를 배격하였을 뿐 미국, 일본과의 유대는 강조하였다.
신문의 논조는 초당파적이었으며 공정하고 올바르게 보도하는 것을 사시로 삼았다. ‘독립신문’은 상하 귀천을 배격하였고 정부 관리의 비리나 정부 시책의 잘못은 물론 계몽적인 관점에서 일반 대중의 그릇된 것도 비판하였다. 대중 교육의 중요성과 아울러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으며 정치, 경제, 의학, 상업 뉴스는 물론 외국 뉴스에도 민감해 1년 4개월간 로이터통신과의 특별 계약으로 외신을 공급하였다.
‘독립신문’의 계몽성은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꽤 앞서간 면이 있었다. 이는 아마도 서재필의 미국 생활 경험에서 연유되었을 것이다. 예컨데, ‘독립신문’ 1896년 4월 14일 자 논설은 다음과 같이 '자치단체장 주민직선제'를 주장하였다.
"정부에 계신 이들이 관찰사와 군수들을 자기들이 천거 말고 각 지방 인민으로 하여금 그 지방에서 뽑게 하면 국민간에 유익한 일이 있다는것을 불과 1~2년 동안이면 가히 알리라."
‘독립신문’의 창간 당시 발행 부수는 3백 부였으나 폐간 때엔 3천 부에 이르렀고 신문의 가두 판매를 실시하기도 했다. 당시엔 오늘날과 달리 신문을 여러 사람이 돌려보았거니와 시장에서 큰 소리로 낭독을 하기도 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 1부를 2백여 명 정도가 돌려봤다고 말한 바 있어 실제 구독자 수는 수십만 명에 이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구독 방식은 ‘독립신문’ 이후에 나온 신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신문 구독 행태에 비추어 발행 부수 기준으로 당시 신문들의 영향력을 평가해선 안 될 것이다.
려증동의 서재필 비판
서재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학계에서 뜨거운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데 비판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그런 비판적인 시각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려증동의 연구를 들 수 있다. 려증동은 ‘독립신문’이 의병을 비도로 불렀다는 걸 지적하면서 ‘고종 시대 독립신문’이란 책을 낸 바 있다. 려증동은 또한 ‘독립신문’이 일본의 침략을 반대하지 않았고 '독립'이란 단어도 참된 독립이 아니라 조선이 청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일본에게 붙자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서재필 자신이 한국인으로 행세하지 않고 '필립 제어슨'이라는 미국인으로 행세했다는 점 등을 들어 서재필과 ‘독립신문‘을 비판하였다.
이 주장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되는 건 독립신문이 의병을 비도로 불렀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에 대해 서울대 교수 신용하는 1995년 10월 31일 한국 근대 언론 1백 년을 기념하는 토론회에서 다음과 같은 반론을 폈다.
"우선 역사적 고찰에서는 시간의 선후를 굉장히 중요시해야 됩니다. 의병은 갑오년부터 을미년 초에 걸쳐서 일어났는데, 갑오경장이 붕괴된 것은 1896년 2월 11일입니다. 2월 11일 아관파천으로 갑오경장 내각이 붕괴되고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새로운 내각을 구성했습니다. 김홍집과 어윤중은 피살되고 내각은 완전히 붕괴됐죠. 그다음에 고종은, 신 내각을 구성함과 동시에 전국에 의병 해산령을 내립니다. 고종은 갑오경장 내각이 붕괴됐으니까 정부도 바뀌었고, 그리고 갑오경장 내각을 역적 내각으로 규정하면서 의병을 즉각 해산하도록 여러 차례 해산령을 내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각 도별로 의병을 해산시키기 위해 대신들도 파견했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독립신문’이 언제 발행됐습니까? 1896년 4월 7일 발행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독립신문’은 정부와 국민들 사이에 의사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 정부의 지원하에 만들어진 신문입니다. 이 신문은 창간되자마자 역시 의병을 해산하라고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내각도 바뀌었고 이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됐고 대군주 폐하께서 의병을 해산하라고 조칙을 내리고 사절들을 각 도에 파견했는데, 2달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해산하지 아니한 의병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왜 해산하지 않는가. 끝까지 해산하지 아니하면 비도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빨리 해산해서 본업으로 돌아가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게 무슨 친일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 해산을 명령한 고종이 친일이 되고 그 신정부가 친일정부가 되는 것이지, 어떻게 그것을 전달한 ‘독립신문’이 친일이 되겠어요?"
주진오의 서재필 비판
서재필과 관련하여 다음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이미 려증동도 지적한 바 있지만, 서재필을 과연 한국인이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상명여대 교수 주진오는 “서재필이 1885년 도미 후 1890년에 미국인으로 귀화, 1894년 미국 여인과 결혼해 완전한 미국인의 길을 걸은 사람으로 85년 동안의 생애 가운데 한국인 서재필로 살았던 것은 26세 때까지였고 나머지는 미국인 필립 제이슨으로 자처했다.“라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는 ‘독립신문’ 설립 과정에서 단 한푼의 자본을 댄 바가 없었음에도 신문사를 자기 명의로 등록했으며, 1898년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소유권을 일본에 양도하려 했고,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 운영만 윤치호에게 넘긴 채 자신은 하는 일 없이 편집인의 명목으로 많은 연봉을 받기로 계약을 맺었다. ... ‘독립신문’ 등을 통해 그는 동학혁명이나 의병 운동을 철처하게 비난하고 있으며 열강의 이권 침탈과 시장 개방 요구를 '문명화'로 합리화하거나 옹호했고 심지어 독립신문사에서 각종 서양 물품을 판매하기도 했다."
신용하는 이에 대해서도 반론을 펴고 있다. 그는 미국이 제국주의 국가의 형태로 되거나 제국주의 정책을 채택하기 시작한 것은 1898년 미-스페인 전쟁이 발발할 때부터였으며 그전에는 가장 민주주의적이었고 한국에 대해서도 가장 우호적이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독립신문’이 1896년 4월에 창간되었고 서재필은 1988년 5월에 미국으로 떠났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신용하의 말을 더 들어 보자.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공격이 날카롭고 심한데, 도대체 갑신정변에 실패를 해서 미국으로 망명하고 거기에서 연애를 하고 결혼한 사람이 귀화해서 미국 시민권을 갖는게 무슨 대단한 문제가 되겠습니까. 더욱이 당시에는 국적 개념이 정립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 시민권을 갖는것이 무슨 대단한 문제가 되겠어요. 지금도 대한민국이 떳떳하게 독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명천지하에서 미국 시민권을 얻으려고 야단들인데, 그런 걸 가지고 한 망명객에 대해 그렇게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다음 더 중요한 것이 있어요. 독립운동 과정에 대해서 매우 납득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공격들을 하는데, 필라델피아에서 문방구점을 운영해서 독립운동 자금을 대고, 코리언 콩글레서 회의를 열고, 신문을 발행했고, ‘프렌즈 오브 코리아’를 만들고 하는 활동은 서재필 박사가 만일 친일파였고 자기 조국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할 필요가 없는 것들입니다. 지금도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미국 부인을 얻고 그 지방에서 유지로 활동하는 분들은 국내에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나 몰라라 하는데, 그 당시에 이미 없어진 나라, 언제 독립이 될지도 모르는 나라를 위해서 크든 작든 간에 자기 재산을 팔고 독립운동에 뛰어들고 하는 것은, 하기 힘든 일을 했기 때문에 더 높이 평가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 국적과 가족이 한국인인 사람이 하는 것보다 그걸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한 행동이 더 귀중한 것이죠."
서재필이 조국에 빈손으로 와서 조선 정부의 돈으로 신문사를 운영하다가 미국으로 떠나면서 거액의 현금(24,400원)을 벌어 갔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신용하는 그의 저서 ‘독립협회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앞서 인용한 이야기와 중복되는 부분이 있지만 다시 한번 들어 보자.
"이 부채(24,400원)는 3, 1운동 직후에 서재필이 독립운동을 위하여 사재를 모두 팔아서 7만 6천 달러를 모두 독립운동에 투입함으로써 충분히 청산하였다. 이때 그는 미국에서 병원 외에도 60~70명의 종업원을 둔 문방구와 분점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부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들을 모두 독립운동에 바치고 파산하였다. 여기서 그의 헌신적 애국심과 그의 인품을 볼 수 있다. 이 사실을 고려하면 이때 그가 가져간 24,400원은 비난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신문사를 서재필의 명의로 등록한 것에 대해 신용하는 "신정부의 각료들은 ... 각종의 이권이 구미 열강에게 양여되고 침탈되는 것조차 막지 못하는 형편에 있었으므로 서재필이 독립신문사를 자기 사유 기업으로 등록하는 것쯤은 오히려 하찮은 일에 속한 것이었다"고 평하였으나, 역사학자 한철호의 견해는 다르다. 한철호는 신용하의 시각이 박정양. 이완용 등을 주축으로 성립된 정동파 내각의 신문에 대한 인식을 고려하지 않은 데서 생겨난 오류라고 지적한다. 한철호의 말을 들어 보자.
"정동파 내각은 1896년 1월경 김홍집 내각과 서재필이 합의했던 사항들을 그대로 재승인하여 신문 창간비로 4,400원을 보조해 주는 동시에 정동 소재 정부 건물을 신문사 사옥으로 사용하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이를 모두 서재필의 개인 소유로 등록할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그 이유는 ...박정양 등이 미국의 신문들은 정부의 허가를 받는 민간지였으며, 또한 일본 외무성의 지원을 받는 ‘한성신보’도 민간지 형태를 취하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즉, 정동파 내각은 ‘한성신보’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동시에 정부 시책을 널리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정부의 입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관보보다는 미국의 신문이나 ‘한성신보’와 같은 민간지의 형식을 취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서재필은 숭미 사대주의자였나?
한편 북한에서 서재필과 ‘독립신문’을 보는 시각은 어떨까? 북한 김일성대 교수 리용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로는 '불평부당' '엄정중립'을 표방하였지만 실지에 있어서는 절대군주 제도를 옹호하고 군주 정치를 받들어 나가도록 인민들을 설복하려 하였으며, 당시 동학란이라 불리운 농민전쟁과 의병이라 불리운 인민들의 무작정 진출에 대해서는 분명히 억제하는 립장에 서 있었다. 이것은 ‘독립신문’의 정치적 배경으로 되어 있는 부르죠아 민족 운동자들이 아직 독자적인 정치 세력으로 나서리만큼 그 력량이 준비되지 못하고 있었고 또 그들이 많은 경우 '위국 충군' 사상의 고루한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계급적 제한성과 관련되여 있었다. 신문의 제한성은 다음으로 나라의 근대화와 독립자주 정신에 대하여 많이 론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을 주체 있게 들고 나가지 못하고 숭미사대의 경향을 많이 나타낸 것이다. 당시 미제국주의자들은 조선 침략의 음흉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박애와 평등의 방패를 뒤집어쓴 선교사들을 우리나라에 들이미는 한편 저들의 앞잡이 노릇을 할 수 있는 친미 분자들을 우리나라에 들이미는 한편 저들의 앞잡이 노릇을 할 수 있는 친미 분자들을 육성하기에 급급하였다. 동시에 조선 침략의 발판을 닦기 위하여 숭미 사상과 기독교 선전에 열을 올리였다. ‘독립신문’에는 일부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관계한 반면에 바로 미제에 의하여 육성된 서재필, 윤치호와 같은 친미 배족 분자들이 관계하였다. 그리하여 신문은 개화 문명에 대하여 떠들 때면, 미국 시민사회의 본을 따르도록 권고하였으며 자주 '구미 문명'의 소개와 기독교 선전에 골몰하였다. 신문 제4면을 영문으로 편집한 것도 미제를 비롯한 구미 제국에 우리나라 실정을 하소연하여 독립을 유지해 보려는 외세 의존, 숭미 사대의 립장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렇게 숭미사대주의를 부식시킨 것은 이 신문의 본질적인 약점이며 심중한 부정면이다. 신문이 가진 이러한 부정면을 가리우면서 근대 일간신문의 체제를 갖추고 일정하게나마 자유민권 사상을 제창하였다고 하여 그 력사적 지위와 역할을 일면적으로 과장하거나 지어 우리나라 신문의 '전통창시자'로 분식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이런 비판과 아울러 서재필은 한때 "세계에서 제일 불쌍하고 더러운 백성은 조선 백성"이라 했고, 또 한국의 독립이 일본의 힘으로만 될 것이며, 따라서 한국인은 이와 같은 일본의 덕택을 인정하여 일본에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비판에 대해 미국의 휘튼 대학 동양사 담당 교수인 비판 찬드라(Vipan Cchandra)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필자는 서, 윤 양씨의 몇 가지 극단적인 친일적 진술과 한국을 경멸하는 발언이 그들의 사상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발언은 어떤 순간적인 좌절감이나 안타까움으로 인한 감정의 폭발이라고 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나라의 힘이 압도적으로 약할 때 사람들은 가끔 이런 태도를 나타내게 마련이다. 2년 전에 김영삼 대통령은 개인적 이익이나 집단적 이익을 부정한 방법으로 추구하는 것이 한국의 질병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한 삼풍백화점 사건 같은 대참사가 잇따라 발생하자, 한국의 민족성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개탄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19세기 말의 서재필과 같이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더 실력이 낫고 꼼꼼하다고 하면서 한국이 일본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김 대통령이나 위와 같은 일반인을 민족주의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런 판단을 내린다면 그것은 어처구니없는 말이라고 비판을 받을 것이다. 서, 윤 양씨의 친미 내지는 친양적 자세는 이러한 예와 달리 제도적인 문제이다. 그들은 유교 사상을 극력 반대하면서 적극적으로 서양 문화를 도입하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개신교 신자이기 때문에 그런 경향이 더욱 강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필자는 그들의 애국심, 즉 민족주의적인 정신은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윤치호, 정진석, 김민환의 평가
서재필의 미국행으로 인해 ‘독립신문’을 인수하게 된 윤치호가 당시 밝힌 다음과 같은 소감도 '서재필을 위한 변명'이 될 수 있을것이다. 물론 윤치호는 서재필의 친우이기에 그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말이다.
"내가 ‘독립신문’을 인수한 유일한 이유는 모든 가능한 방법을 다하여 오직 그 발행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확신 때문이다. ‘독립신문’의 국문판과 영문판을 통한, 특히 국문판을 통한 서재필 박사의 사업은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과하지 않다. 국문판을 통해서 그는 압박받는 한국인들에게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는 사실 그것이 앵글로색슨이나 라틴 민족의 이론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천부의 것이며 인류보편적인 이론이기 때문에 진리인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한국인들에게 그들이 국왕과 양반을 위하여 짐을 지는 가축과 같이 부림을 당하는 우마가 아니며, 불가양의 권리들과 번영은 우연히 길에서 줍는 것이 아니라 오랜 노력과 연구와 투쟁을 통하여 획득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가 하면 한국외국어대 교수 정진석은 ‘서재필과 닉슨’이라는 제하의 신문 칼럼에서 이 세상에는 완벽한 인간이란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바탕으로 역사적 인물에 접근하고 그들의 업적을 조명할 줄 알아야 한다며 서재필을 다음과 같이 옹호하고 있다.
"흔히 우리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라는 두 가지 유형의 인간만이 존재한다는 양단 논법으로 역사를 평가하는 습관에 길들여 있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은 아무런 결함이 없고, 완전무결해야 한다는 틀에 얽매여 있는 한 오히려 그에 관한 부정적 평가가 나올 때에는 이를 방어하기가 더 어려울 수 있을 것이다. 정치 사회적으로 격동의 소용돌이를 헤쳐온 현대사의 인물들에 대한 평가는 참으로 어렵다. 닉슨은 한 사람의 정치가로서 패배를 딛고 일어선 인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전 국민이 바로 그와 같이 추락했다가는 겨우 다시 일어서는 역사의 되풀이 속에서 살아왔다. 친일파에 관한 비판과 이와 관련된 대한민국의 정통성 문제 같은 것도 그와 같은 역사적 인식을 바탕으로 돌이켜보아야 할 것이다. 역사적 상황을 무시하고 한 사람의 특정한 행위만을 확대하여 그의 전 생애를 그의 전 생애를 미화하거나 또는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일을 삼가야 할 것이다. 한 인물의 생애를 역사적 맥락에서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눈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정진석이 서재필을 무작정 옹호하는 건 아니다. 그는 서재필의 '결함'과 '아쉬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특히 그가 위대한 선각자라는 전제조건을 가지고 볼 때에는 그의 행동에서 아쉬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1898년 5월에 미국으로 돌아가던 무렵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도미를 간곡히 만류했으나 냉정히 떠나고 마는 장면에서는 그가 위대한 서재필이 아니고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충분히 납득이 될 행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섭섭한 마음을 누를 길이 없게 된다."
하기야 서재필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는 곧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다만 서재필에 대한 비판은 그가 그동안 지나치게 미화돼 온 것에 대한 반작용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독립신문’의 논조와 내용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고려대 교수 김민환의 다음과 같은 평가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독립신문’에 대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평가는 서재필이나 ‘독립신문’뿐 아니라 민영 신문 전반에 대한 평가에 연장하더라도 별로 문제 되지 않을 것이다. 당시의 민영 신문은 사실상 ‘독립신문’이 제시한 사상의 틀을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립신문’에 비판적일 경우 민영 신문 전체의 역할에 부정적인 것이며, 반대로 ‘독립신문’에 긍정적일 경우 민영 신문의 역할에 대해서도 대체로 긍정적이게 마련일 것이다.
조선일보의 서재필 이용
그러나 그런 변명과 옹호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서재필이 미국에 푹 빠져 미국을 맹신한 건 물론이고 미국에 비추어 조선을 멸시한 그런 점이 있었다는 것만큼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다. 주진오가 지적하였듯이, 서재필은 미국과의 경인철도 부설권 계약에 대해서도 "속마음을 의심할 필요가 없는 나라와 맺은 것이며 지금까지 어느 열강과 맺은 조약보다 유리한 계약"이라고 옹호하였으며, "남의 집에 갈때 파, 마늘을 먹고 가는 것이 아니고 남 앞으로 지나갈 때에는 용서해 달라고 해야 한다"든가 "조선 사람들은 김치와 밥을 먹지 않고 소고기와 브래드를 먹게 되어야 한다."고 했다. 아무리 그런 말의 선의를 이해한다해도 서재필을 소위 '선각자'라고 부르기엔 좀 민망한 점이 있다.
서재필은 해방 후 조선 주둔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의 초빙으로 1947년 6월에 방한해 47년 9월 10일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미국으로 떠나기 수일 전 언론인 김을한에게 갑신정변의 실패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갑신정변 당시의 인물로는 무어니 무어니 해도 김옥균이 제일 뛰어났으며 그는 또 진정한 애국자였다. 그리고 갑신정변이 실패를 한 원인은 일본을 너무 믿은 것 등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큰 패인은 그 계획에 까닭도 모르고 반대하는 일반 민중의 무지 몰각이었다.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민중의 조직이 없고, 잘 훈련된 후원이 없이 다만 몇몇 사람의 선각자만으로 성취된 개혁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한 로마 사람에게 처형되었으나 로마 사람이 그를 미워한 것이 아니고 그를 미워하기는 유태 사람이었다. 즉 그의 동포가 그를 알지 못한 때문이다. ...우리 한국 사람은 단결할 줄을 모르고 당파 싸움만 하다가 일을 그르치는 수가 많은데 갑신정변 때나 지금이나 그 점만은 똑같으니 한심한 일이오."
물론 서재필의 시각에 일리가 있고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는 것도 부인하긴 어렵지만, 일반 민중의 무지 몰각을 지나치게 탓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혁명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그것도 미리 감안하지 못했단 말인가. 고려대 교수 강만길은 서재필의 그런 시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정변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을 민중의 무지 몰각으로 돌렸으나 그것은 일반 민중이 정치 개혁의 의지가 없었던 탓이었다기보다 개화파의 정변 자체가 민중 세계에 뿌리박지 못한 위로부터의 개혁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민중 세계는 문호개방 이전부터 민란을 거듭했고, 꼭 10년 후에 갑오농민전쟁을 일으킬 만큼 정치 개혁 의지가 높아지고 있었다. 갑신정변이 민중 세계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외세. 특히 일본의 원조를 받고 있었다는 점에 있다."
사실 서재필과 관련된 논쟁의 진짜 문제는 다른 데에 있다. 서재필의 공과를 공정하게 인정하자는 데엔 이론이 있을 수 없다. 문제는 일부 신문들, 특히 조선일보가 서재필을 지나치게 미화하면서 이기적인 목적으로 이용한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서재필에 대한 비판은 그런 이용에 맞선 대응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도 유념할 필요가 있겠다 ‘한겨레’ 기자 손석춘은 그의 저서 ‘신문 읽기의 혁명’에서 일부 신문들의 속셈을 다음과 같이 꼬집고 있다.
“독자들은 이처럼 언론에 의한 우리 현대사의 왜곡에 대해 감시의 눈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왜 느닷없이 서재필인가? 하고 의아했던 독자 가운데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신문의 날을 전후한 사설에서 ‘독립신문’의 정신을 이어받아 자신들이 일제 아래서 민족지였음을 강조한 대목을 접하면서 ‘이래서였구나!’ 했던 분들이 있을 것이다. ...독자들은 이제 왜 우리 신문들이 서재필을 그토록 찬양하는 편집을 했는지 이해했을 터이다. ‘독립신문’은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실제로는 사설을 통해 친일과 독재 야합으로 얼룩진 자신들의 신문 편집을 교묘하게 정당화하려는 속셈인 것이다. ‘독립신문’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사적 이윤 추구를 가려 줄 수 있는 훌륭한 ‘상표’가 되는 민족지를 다시 한번 독자들에게 ‘세뇌’시키고 있는 셈이다."
2. 개화기의 언론 ∥(1898~1910)
‘매일신문’, ‘제국신문’, ‘황성신문’
1898년에 여러 신문들이 창간되었다. 1898년 1월 1일 배재학당의 학생회인 협성회가 주간으로 발행한 ‘협성회회보’는 학생회의 기관지인 동시에 일반에 판매하는 신문이었는데, 제법 인기가 높아 3개월 후에는 발행 부수가 2천여 부를 넘어섰다. 이에 힘을 얻은 협성회는 이 신문을 일간으로 발전시키기로 결의하고, 4월 2일 제14호를 마지막으로, 4월 9일부터는 제호를 ‘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바꾸어 일간으로 발행하기 시작했다. ‘매일신문’은 ‘독립신문’의 일간 발행(1898년 7월 1일부터)을 촉진시켰다.
이 신문은 ‘독립신문’보다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을 나타냈다. 이승만은 주필격으로 이 신문을 제작하다가 협성회 회장이 되어 자동적으로 이 신문의 사장직을 맡기도 했으나 사내 분규로 7월 초에 물러나 8월 10일에 창간된 ‘제국신문’에 참여하였다. ‘매일신문’은 그러한 내분을 이겨 내지 못하고 1899년 4월 4일에 폐간되었다.
비교적 오랫동안 발행된 신문으론 동시에 1898년에 창간돼 1910년 3월 31일에 폐간된 ‘제국신문’과 ‘황성신문’을 들 수 있다. ‘제국신문’은 중류 이하의 대중과 부녀자를 대상으로 삼은 신문이어서 정치적 색채가 옅었으며 주로 사회적 계몽에 중점을 두었다. 이 신문은 순 한글 사용으로 일반 민중과 부녀자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이승만은 ‘제국신문’을 통해 일본인들이 만든 ‘한성신보’와 치열한 논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승만은 20대 초반에 ‘협성회회보’, ‘매일신문’, ‘제국신문’, ‘황성신문’ 주필을 두루 역임한 뛰어난 언론인이었다. 그는 언론 활동을 하다가 1898년 12월 25일 독립협회가 해산당한 뒤 1899년 1월 9일에 독립협회에서의 활동 때문에 검거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며, 옥중에 있는 동안에도 27개월 동안이나 ‘제국신문’의 논설을 비밀리에 집필하였다. 그러나 논설을 비밀리에 집필한 것이 아니라 이승만의 옥중생활이 매우 자유로웠다는 주장도 있는데, 주진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승만은 당시 죄수로서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감옥 관리들과의 친분을 통해 감옥 안에 도서관과 학교를 운영하는 일을 할 수 있었고 나아가 집필까지 할 수 있었다. ‘신학월보’라는 잡지와 ‘제국신문’에 논설을 기고하는 행운도 누리는 한편, 중국에서 활동하였던 미국인 선교사 알렌과 중국인 채이경이 쓴 ‘중동전기’를 순 한글로 중역하였으며, 영한사전을 준비하고 ‘독립정신’을 집필하였다. 심지어 아들 봉수를 감옥으로 데려와 함께 지내고 집으로 돌려보내는 등 요즘의 교도소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자유를 누렸다.
이승만은 24세부터 29세까지 5년 7개월간 감옥 생활을 한 뒤 1904년 8월 9일에 석방돼 잠시 ‘제국신문’의 주필을 맡았다가 그 해 11월 4일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투옥되기 전 이승만의 활동에 대해 정진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무렵 이승만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서도 더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독립협회의 과감한 정부 비판과 급진적인 개혁의 요구는 수구파와의 충돌을 불가피하게 했다. 수구파들의 어용 조직인 황국협회의 보부상패들은 폭력으로 독립협회에 공격을 가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황국협회의 모함으로 1898년 1월 4일 독립협회 간부 10여 명이 한때 검거당하고 남은 간부들은 피신하는 수난 속에서도, 독립협회는 굴하지 않고 민중 집회를 열어 개혁을 요구했다. 보부상패들은 홍종우, 길영수 등의 지휘하에 몽둥이로 무장, 민중 집회인 만민공동회를 습격하여 목숨까지 잃은 자도 있었고 많은 부상자를 내게 했다. 이승만은 보부상패와의 대결에서 만민공동회 측의 청년 선봉장격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언론 활동은 곧 자주, 개화 운동이었고, 이는 정치적인 당면 과제였으므로 정치 활동과 신문 제작은 한 가지 목표로 귀착되었던 것이다. 1898년 11월 28일 ‘독립신문’에는 이승만이 보부상패들과 격돌하는 모습이 소상히 보도되어 있다."
이승만의 출옥 2개월만인 1904년 10월 10일 주한 일본군 헌병 사령부는 ‘제국신문’에 무기 정간 명령을 내렸는데, 그 이유는 ‘제국신문’ 10월 7일자 논설이 일본의 군사상 및 치안상 방해가 됐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정진석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정간은 우리나라 신문사상 처음 당하는 강제 정간이었고 일본측이 민족지에 가한 최초의 직접적 탄압이기도 했다. 일본은 제국신문을 정간시킨 후 사원들의 집을 순시했고 일진회 회원들은 제국신문이 앞으로도 일진회를 비방하면 사원들의 생명에 관계가 있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제국신문은 정간 3주일이 지난 10월 31일 일군 헌병사로부터 정간 해제를 통보받았으나 재정난으로 정간 한 달만인 11월 9일에야 속간했는데 이승만은 그 중간인 11월 4일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향한 것이다."
‘황성신문’은 ‘제국신문’과는 달리 국, 한문 혼용 일간지로 중류 계급 이상의 독자를
대상으로 삼았다. 그런 이유로 ‘황성신문’은 ‘수 신문’ ‘제국신문’은 ‘암 신문’으로 불리기도 했다. ‘황성신문’은 장지연, 유근, 남궁억 등 한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 중심이 돼 만들어진 신문이었기 때문에 ‘독립신문’보다 보수적인 색채를 띠었다.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1900년대로 넘어가면서 한반도는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외국 열강들의 치열한 각축장이 되어 가고 있었는데 그 주도권은 이미 일본이 쥐고 있었다. 일본은 1902년 러시아에 대해 만주로부터 철병할 것과 한반도에 있어서의 일본의 지위를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영일동맹을 체결하였으며, 1904년 2월 8일 인천해상에 정박중인 러시아 군함 2척을 기습 공격해 격침시킴으로써 이른바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일제는 전쟁을 일으킨 지 2주 후 조선 정부에 대해 “전쟁 수행에 필요한 지점을 형편에 따라 마음대로 얻어쓸 수 있도록”하는 강제 협정을 맺어 군사 기지를 확보했고, 전황이 유리하게 돌아가자 8월 22일 조선 정부의 외교 관계의 처리는 미리 일본 정부와 혐의를 거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제1차 한일협약을 강제로 맺었다.
이 전쟁은 1905년 5월 일본의 승리로 귀결돼 미국 대통령 씨어도어 루스벨트의 주선으로 러시아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는 것을 골자로 한 포츠머스조약이 체결되었다. 루스벨트는 7월 29일 국무장관 태프트를 일본으로 보내 일본 수상 카츠라와 이른바 ‘카츠라 태프트 밀약’을 맺었는데, 이로써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해주고 대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1899년 스페인으로부터 빼앗은 식민지) 지배를 인정했다. 영국도 8월에 제2차 영일동맹을 맺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승인하고 대신 일본은 영국의 인도 버마 등의 지배를 두둔하였다.
이제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노골적인 야욕을 드러내 1905년 11월 17일 그 치욕적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기에 이르렀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군을 출동시킨 가운데 조약에 반대하는 참정대신 한규설을 끌어내고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외부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을사 5적’의 찬성하에 고종에게 ‘보호조약’의 숭인을 강요해 성사시켰다. 이 조약에 따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본 외무성이 갖고, 내정은 통감이 관할하게 되었으니 대한 제국은 사실상 국가적 주권을 상실한 것이었다. 1906년 1월 일본은 한성에 통감부를 설치했으며, 초대 통감엔 이토가 취임했다.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의 사장 장지연은 11월 20일 자에 그 유명한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써 을사보호조약이 한국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폭로하고 이의 시정을 요구하였다. 그 논설의 일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아 저 돈견만 같지 못한 소위 우리 정부 대신놈들이 영리를 탐내고 헛된 위협에 겁먹어 매국 역적됨을 달게 받아들여 4천 년 강토와 리조 개국 5백 년의 력사를 가진 우리나라를 타인에게 받치고 2천만 백성을 타인의 노예로 만들었으니 저 돈견만 같지 못한 박제순과 각 대신들은 더 말할 것도 못 되거니와 참정대신은 정부의 우두머리라 단지 아니다라는 글자만으로 책망을 막고 이름을 부지할 밑천을 꾀하였는가. ...아 원통하고 분하구나 2천 만의 노예된 동포들이여 살았느냐 죽었느냐, 건국 이래 4천 년 국민 정신이 하루밤 사이에 졸연히 멸망하고 만단 말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당시 “황성신문”은 보통 3천 부를 찍었는데 “시일야방성대곡”이 실린 11월 20일 자 신문은 1만 부나 찍어 일제 경무청의 사전 검열을 거치지 않고 발송 배포하였다. 그로 인해 장지연 사장은 구속되었으며 “황성신문”은 무기 정간을 당했다. 장지연은 3개월간 투옥되었다가 정부로부터 통정대부로 일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하고 은퇴하였으며, “황성신문”은 80일간 정간 이후 복간되었다. 장지연은 그 후 진주에서 발행되는 “경남일보”의 주필을 맡기도 했는데, 이 신문은 1909년 10월 15일에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신문이었다.
장지연의 꼿꼿하면서도 화끈한 성품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황성신문은 오늘날의 주식제를 채택하여 운영하였으나 항상 재정이 넉넉치 못하여 정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도 여의치 않아 1903년 황성신문의 극심한 경영난에 처하게 되자 그는 2월 일자 논설에 “크게 소리 지르며 붓을 던진다”라는 글을 써서 신문 발간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음을 선언하였다. 이 논설이 나가자 각처에서 성금이 답지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지 못하고 1904년 1월 다시 휴간에 들어가야 할 형편에 처하게 되자 장지연은 “기생 갈보집이나 골패 화투장에는 돈을 물 쓰듯 하면서 신문값을 독촉하면 내일모레로 늦추니 이러고야 어찌 야만인이라 하지 않겠는가”라고 개탄했다. 이때에도 다시 성금이 답지했고 그 결과 15일 만에 신문을 속간할 수 있었다.
대한매일신보의 창간
러일전쟁의 와중에서 중요한 신문이 하나 창간되었는데 그건 바로 ‘대한매일신보’였다. 1904년 7월 18일에 창간된 ‘대한매일신보’는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지의 임시 특파원으로 내한중이던 어네스트 베델을 사장으로 내세우고 양기탁이 총무를 맡아 일본의 탄압에 반대하는 왕실과 민간 유지들의 비밀 투자로 운영되었다. 주필에는 박은식, 논설에는 신채호 등 애국지사들이 참여하였다.
일본은 당시 영국과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베델이 경영하는 대한 매일신보는 검열을 피할 수 있었고 반일 논조도 펼 수 있었다. 신문사 정문에는 ‘일인불가입’이라는 방까지 내걸었다. 이 신문은 처음엔 국, 한문 혼용으로 간행되었으나 나중엔 일반 대중을 위한 한글판도 발간하였다. 이 신문은 종래의 신문 체제보다 큰 27cm*40cm의 크기로 발행되었으며 1905년 8월 11일부터 외국인을 위한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따로 발간했다.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될 무렵엔 신문 지면에서 광고가 차지하는 비율도 크게 늘어나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의 경우 광고가 45-50%의 지면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반면 1896-99년 기간에 ‘독립신문’과 ‘황성신문’에 게재된 광고는 총 지면의 10~14%에 지나지 않았다. 1909년 3월부터는 ‘대한매일신보’에 전면광고가 등장할 정도로 광고가 제법 활기를 띠었다.
일본은 ‘대한매일신보’에 대응하여 일인계 국문판 신문들을 발간하였다. 기존의 ‘한성신보’외에 ‘대한일보’, ‘대동신보’, ‘동양일보’, ‘중앙신보’등이 새로 발간되었으며 ‘대한매일신보’의 영문판 ‘데일리뉴스’에 대항해 전 ‘저팬 타임즈’의 편집장을 데려다가 ‘서울 타임즈’를 발간하였다.
을사보호조약 이후에도 새로운 신문들이 창간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신문으로 ‘만세보’와 ‘경항신문’과 ‘대한민보’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만세보’는 1906년 6월 손병희, 오세창 등이 발간한 천도교 계통의 일간지로 1907년 6월에 폐간되기까지 일진회의 반민족적인 행동을 규탄하는 데에 앞장섰다. 주필 이인직은 ‘혈의 누’라는 연재소설을 50회에 걸쳐 실었다. ‘경향신문’은 1906년 10월 천주교에서 발행한 순 한글 주간지로서 종교 신문이었으나 민족의 독립과 자주정신을 강조했다.
그 후 오세창은 일제의 국권 침탈 행위가 극심해지자 1909년 ‘대한민보’를 창간하였다. ‘대한민보’는 일제 침략에 저항하는 민족운동 단체인 대한협회의 기관지 역할을 하면서 민족의 단결과 국권 회복을 위한 국민의 자각을 일깨우려고 노력하였다.
당시의 신문들은 일본이 '폭도'라고 부르는 무장 투쟁을 '의병'이라고 부르는 등 국민의 정치의식을 계몽하고 앙양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초대 통감 이토도 "수백 마디 말보다도 한 줄의 신문기사가 한국인들에게 더 큰 위력을 갖는다"고 토로한 바 있다.
일종의 맞불 작전으로 친일파 신문들도 창간되었는데 ‘국민신보’와 ‘대한신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국민신보’는 일진회의 기관지로서 1906년 1월 송병기, 이용구 등이 창간하였으며, ‘대한신문’은 이완용 내각의 기관지로서 1907년 7월에 창간되었다. 일본은 1906년 이른바 통감 정치를 실시하면서부터 기존의 ‘한성신보’의 이름을 ‘경성일보’로 바꿔 통감부의 기관지로 만들었다.
통감정치가 강화되면서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일본의 압력도 점증되었다. 일제는 1907년 10월 12일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 헨리 코번에게 베델의 처벌을 요구하는 소장을 제출해 외교적 탄압을 본격화했다. 베델은 10월 14일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관에 설치된 영사 재판정에 출두해 6개월간의 근신에 처해졌다. 그러나 베델의 근신기간이 만료된 직후 ‘대한매일신보’의 배일 논조는 더욱 강해졌다.
베델의 활약
‘대한매일신보’가 그러한 탄압에도 굴복하지 않자 일제는 영국에 대해 더욱 공격적인 외교 공세를 퍼 베델을 다시 영국 총영사관 재판정에 세우는 데에 성공했다. 베델에 대한 2차 재판은 1908년 6월15일 부터 3일 동안 서울의 영국 총영사관에서 열렸는데 상하이 고등법원에서 파견된 판사는 이 재판에서 베델에게 3주일간의 금고 형과 6개월간의 근신을 선고했다.
그러나 베델은 상하이에서 형을 복역한 뒤 다시 한성으로 돌아와 ‘대한매일신보’의 배일 논조를 더욱 강화시키면서 당시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국채 보상 운동을 진두지휘하였다. 그야말로 끈질긴 사나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에 불안을 느낀 일제는 1908년 7월 12일 제작을 실질적으로 총괄하던 양기탁을 국채 보상 운동 수집금 일부를 횡령했다는 조작된 혐의 내용으로 구속했다. 영국과 일본 사이의 치열한 외교전 끝에 양기탁은 9월 29일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무죄 선고를 받았다.
베델은 1909년 5월 1일 서른여섯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죽고 말았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는데 재판과 금고형에 따른 긴장과 과로가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나는 죽더라도 신보는 영생케 해 한국 민족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베델의 한국 사랑과 반일 정신은 매우 투철해 한 때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지는 “‘대한매일신보’의 통감부에 대한 공격을 중지시킬 수 있는 방법이란 베델을 암살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라고 쓰기도 했다. 베델의 장례식은 동대문 밖 영도사에서 수천 명이 모인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으며 그의 시신은 양화진(사울 합정동) 외국인묘지에 묻혔고 그의 공적을 기리는 사람들의 성금에 의해 1910년 묘비가 세워졌다.
베델은 2차 재판을 받기 전인 1908년 5월 27일 ‘대한매일신보’의 발행 및 편집인의 명의를 ‘코리아 데일리 뉴스’의 편집 일을 보던 영국인 알프레드 만함으로 바꿨기 때문에 베델이 죽은 다음 ‘대한매일신보’는 베델의 비서였던 만함이 맡아서 운영했다. 그러나 만함은 한국어에 대한 이해가 없어 신문 제작 일체는 양기탁에게 의존했다. 이 같은 상황을 달갑지 않게 여긴 주한 영국 총영사 헨리 보나르는 "한국을 위해 순교자가 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신문을 처분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만함을 회유하여 ‘대한매일신보’를 일본에 팔아넘기게 했다. 통감부는 합방조약이 성사될 때까지 ‘대한매일신보’의 매수를 비밀에 붙여둔 채 1910년 6월 14일 발행인 및 편집인의 명의만 한국인 이장훈으로 바꿔 놓았는데 이때에 양기탁은 자신이 이 신문에서 손을 떼었다는 광고를 게재하고 ‘대한매일신보’를 떠나고 말았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북한의 시각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하여 이 시기에 나온 신문들에 대한 북한의 시각은 어떠한지 그것도 알아보자. 북한 김일성대 교수 리용필은 이렇게 말한다.
"‘황성신문’을 비롯하여 이 시기 신문들의 대부분은 국가 멸망의 근본 원인을 실력이 약하고 인민들이 우매한 탓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위로부터의 개혁과 시정의 방법으로, 산업과 교육을 발전시키는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면서 밑으로부터의 혁명적 변혁과 대중 투쟁에 대해서는 경원하는 립장에 서 있었다. 이 신문들은 이른바 위국충군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로부터 의병들의 ‘소요’를 없애려고 한 국왕의 조칙을 옹호하여 특별히 크게 취급하는 한편 의병 투쟁을 비류(비적무리)들의 무일한 폭거, 부질없는 행동이라고 모욕하기까지 하였다.
‘황성신문’은 ‘의요(의병들의 소요)는 마땅히 빨리 진압되어야 한다’(1906.5.20), ‘경고 의병 제군’(1907.9.25) 등의 론설들에서 의병들을 향하여 권고하기를 그러지 않아도 나라 안이 분주하고 위태로운데 괜히 소란을 피우지 말고 병기를 던지고 고향에 돌아가 농, 상, 공업에 부지런히 종사하면서 자제를 교육하고 지식을 닦아야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고 우리의 직분도 하게 될 것이라고 설유하였다. 물론 이 신문들도 일제 침략 군대가 동원되어 의병을 마구 진압하고 민가를 불태워버리는 데 대하여까지는 찬성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한매일신보만’은 점차 평민적 성격을 띠면서 확대 강화되고 있던 의병 투쟁에 대하여 소극적으로나마 지지하는 립장에 서 있었다. ‘대한매일신보’는 매일 신문의 2면 지방 소식란에 일제 침략군의 병사들과 봉건 정부의 관헌들을 타격하는 반일 의병 투쟁 소식을 비교적 공정하게 반영한 것으로 하여 이채를 띠였다. ...
‘대한매일신보’는 또한 도처에서 벌어진 애국적인 개인 테로로 적들을 격살한 소식들도 크게 보도하여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신문은 1908년 4월 봉건 정부 고문으로 와 있던 미제 침략자 스티븐이 격살되었을 때 그를 간적이라 락인한 반면에 거사를 단행한 전명운을 애국의사라고 칭송하였으며, 1909년 10월에는 일제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쏴 죽인 안중근 거사를 두고 련일 글을 냈고 이듬해 3월 안중근이 놈들에게 사형당하였을 때에는 신문 호외까지 발행하여 사회 여론을 일으켰다.
이 시기 다른 신문들이 흔히 일제 놈들의 침략 정책을 폭로하고 망국의 위기를 우려하여 봉건 정부 관료들의 각성을 촉구하거나 비분강개하는 글 몇 편씩 발표하는 데 그치고 있을 때 ‘대한매일신보’는 이렇듯 반일 론조를 펴는 데서나 대중의 혁명적 진출에 대하는 태도에서 한 걸음 전진하고 있었다."
광무신문지법과 최남선의 ‘소년’
1907년 6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밀사 파견 사건으로 고종이 퇴위하면서 순종이 양위를 받아 황제로 즉위하고 연호를 융희로 고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일본의 계략에 의한 것으로 민심을 크게 자극하였다. 시위 운동이 연이어 일어났고 일진회의 기관지인 국민신보의 사옥이 파괴되고 일본일이 도처에서 습격당하였다. 일본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뒤 한일신협약(1907년 7월)을 체결하여 통감이 한국의 내정에 일일이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을 정식으로 갖게 되었다. 일본은 8월에는 겨우 8천 8백명 정도 되는 한국의 군대마저 해산시켜 거의 완전하게 한국의 국권을 탈취하였다.
이완용을 중심으로 하여 탄생된 친일 내각은 7월에 신문지법(광무신문지법)과 출판법을 만들어 신문을 발행하려면 혀가를 받도록 규제했고 보증금을 예치시키도록 했으며 신문 2부를 사전 납부하도록 했다.
신문의 허가제는 이미 사실상 실시되고 있던 것을 법제화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벌칙에 있어서 발행정지권, 벌금형, 체형, 신문 시설의 몰수 등을 규정하여 이로써 사실상 언론 기능을 상실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신문지법은 언론 탄압의 법적인 근거를 명문화했다는 것 이외에도 한국에 있어서의 언론 발전에 통제에 대한 악용의 선례를 남기게 되었고 식민지 언론의 교두보가 되고 말았다.
일제 통감부는 1908년 4월 29일 이완용 내각으로 하여금 신문지법을 개정하여 한국에서 발행되는 외국인의 신문까지도 발매, 반포 금지 또는 압수할 수 있도록 했다. 신문지법의 개정은 ‘대한매일신보’를 탄압하는 것이 근본 목적이었으나 반일 논조의 해외 교포 신문들이 국내에 유입되는 것을 막자는 속셈도 포함된 것이었다. 이 법의 개정 이후 ‘대한매일신보’는 한일합방 직후 통감부에 매수되기까지 국, 한문판 24차례, 국문판 21차례의 압수를 당했으며 2차례 정간 처분을 받았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신문들은 국채 보상 운동을 열렬히 전개하였다. 그러나 앞서 양기탁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시사하듯이 이 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도중에 좌절되고 말았다. 일제의 탄압이 가중됨에 따라 비밀 단체 형태의 정치 사회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07년에 결성된 신민회였다. 신민회는 안창호, 양기탁, 전덕기, 이동휘, 이갑, 이승훈 등 언론인, 군인, 산업인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1908년 11월 1일 근대적 체제를 갖춘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가 창간되었으니, 그게 바로 최남선의 '소년'이다. '소년'보다 2년 앞서서 발행된 최초의 독립된 소년 잡지로는 '소년 한반도'라는 것이 있었으나 이는 1907년 4월까지 모두 6권을 발행하는 데에 그쳤으며 경영 면에서나 편집 면에서 체계가 잡힌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잡지로 '소년'을 드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1911년 5월까지 모두 23호가 발행된 '소년'은 그런 이유로 오늘날에도 이 잡지 창간일을 '잡지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최남선은 '소년' 창간호에 한 일본인 지리학자가 우리나라의 지도를 토끼 형상처럼 생겼다고 말한 것을 반박하는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지도를 호랑이로 고안하여 그렸다. 이에 '황성신문'은 대한 지도를 천지간 동물 가운데 가장 용맹한 호랑이 모습으로 비유한 것은 "국민의 지기를 배양하고 국가의 지위를 존중케 하는 자료가 될지로다." 라고 논평했다.
일제의 강점과 신문들의 폐간
을사보호조약을 성공리에 끝낸 이토는 1909년 후임자에게 통감 자리를 물려주고 추밀원 의장이 되어 그해 10월 만주와 조선반도에 관한 협의차 러시아의 재무장관 코코프체프를 만나러 하얼빈으로 갔다. 1909년 10월 26일 그가 열차에서 내려 몇 걸음 내딛는 순간 안중근의 총탄 3발에 맞아 현장에서 즉사했다. 그러나 안중근의 의거도 일제의 야욕을 막아 낼 수는 없었다.
한국을 완전히 집어삼키고자 하는 일본의 음모는 나날이 노골화되었는데, 일본은 1910년 5월 육군 대신 테라우치를 새 통감으로 임명하여 병합을 실행하도록 하였다. 테라우치는 부임 즉시 '황성신문','대한민보','대한매일신보' 등 신문을 정간시켜 한국의 언로를 폐쇄한 뒤 총리 이완용과 더불어 병합의 음모를 꾸몄는데, 이는 결국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의 결과로 나타나고 말았다.
이로써 극히 제한된 자유나마 그걸 이용하여 언론 기능을 하고자 했던 신문들도 모두 강제 폐간되는 운명을 맞게 되는데, 이에 관해서도 비분강개조의 글쓰기 방식을 택하고 있는 북한 김일성대학의 교수 리용필의 평가를 인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일제 놈들은 조선 강점을 실현한 다음 날인 1910년 8월 30일부로 '대한매일신보'를 '민보'로, '황성신문'을 '한성신문'으로 제호를 바꾸게 하여 신문 이름에서부터 독립 국가의 표식을 지워 버리기에 광분하였으며 연이어 '민보'는 그 이튿날인 8월 31일에 폐간시켰고 '한성신문'은 다음 달 9월 14일에 폐간시켰다. 횡포무도하고 무분별한 처사는 진보적 신문들에만이 아니라 친일 매국 주구놈들이 발행하던 신문들에도 미치었다. 놈들은 반동 내각을 없애 버리는 것과 함께 그 기관지였던 '대한신문'도 일거에 없애 버렸으며 친일 주구 단체 '일진회'가 발행하던 '국민신보'마저 이제 와서는 별치 않게 여겨 없애 버리고 말았다. ...... 놈들은 1906년부터 발행되여 온 통감부 기관지 '경성일보'를 계속 유지하여 조선에 침토하여 온 일본 놈들을 대상하는 일문 어용 신문으로 '정비'하였으며, 한편 1910년 8월 30일에는 새로 조선 사람들을 대상하는 총독부 기관지 조선문 어용 신문 '매일신보'를 만들어냈다. 놈들은 강점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영향력이 있던 '대한매일신보'를 폐쇄하고 그 신문사를 매수하여 '매일신보'를 만들어냄으로써 그것이 마치도 '대한매일신보'를 이은 조선 사람들을 위한 신문인 듯한 인상을 조성할려고 하였다. 어용 신문 '매일신보'는 '경성일보'와 더불어 일제가 멸망할 때까지 식민지 통치를 미화하여 조선 인민을 노예화하고 '황국신민'화하는데 열을 올린 극악한 반동 신문이었다. '경성일보'와 합동 경영한 '매일신보'는 지난시기의 '대한매일신보'와 같이 독자들의 환심을 사려고 하였으나 우리 인민들은 이 신문의 정체를 간파하고 구독을 거부하고 나섰다. 독자가 없는 데 위구를 느낀 놈들은 이 신문을 관공서들에 강제로 할당 배포하고 신문 대금은 '면비'에서 긁어내게 하였다."
3. 일제하의 언론(1910~1945)
일제의 '무단정치'와 3.1운동
한일 합방 이후 일제는 철저한 헌병 경찰 제도로 일체의 언로,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박탈하였고 무자비한 인권 탄압을 자행하였다. 일제는 1910년 안명근의 테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계기로 그 이듬해에 신민회의 윤치호, 양기탁, 이승훈 등 저명인사 6백여 명을 무조건 검거해 그 가운데 105명을 기소하였는데(105인 사건), 이때에 무자비한 고문이 가해졌다.
일제의 잔혹한 인권 탄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게 1912년 12월 30일에 제정 공포된 '태형 준칙'이다. "조선 사람과 명태는 두들겨패야 한다."는 일본인들의 말이 바로 이 '태형 준칙'에서 비롯된 것이다. 재야 역사학자인 감삼웅은 이 '태형 준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총독부는 '합법적'으로 한국의 독립운동가나 반일 사상가는 물론 일반 형사범까지도 가혹한 태형으로 다스렸다. 태형은 그나마 '합법'의 절차를 따르고 있었다. 일제의 헌병, 경찰, 군인, 관리 등 총독부 수족들은 온갖 고문과 악형으로 한국인의 육신을 찢어 댔다. 저들의 대표적인 구문에는 손, 발목에 수갑을 채우고 코에 물 붓기, 코와 입으로 고춧가룻물 붓기, 비녀 꽂기, 통닭구이, 무릎에 몽둥이를 끼우고 교대로 뛰어내리기, 발가벗기고 거꾸로 매달아서 비행기 태우기, 고무호스로 입에 물 넣기, 손톱 발톱 밑에 바늘 찌르기, 칠성판에 묶기, 관 속에 넣고 못질하기, 생매장하여 위협주기, 전기고문, 성고문, 끓는 물 속에 집어넣기...... 등 온각 악형을 다 저질렀다."
헌병 경찰 조직(헌병 2천여 명, 경찰 5천7백여 명)에 의해 한국인의 하찮은 언동도 단속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 결과 1912년에는 5만 명 이상, 1918년에는 14만 명 이상이 검거되었다. 언로는 완전히 폐쇄되었다. 흔히 '무단정치 시대'로 불리우는 1910년의 한일합방에서부터 1919년의 3.1운동까지의 10년간은 언론의 '암흑기'였다. 일반 종합잡지의 발행마저도 어려워 종교 잡지와 일본에서 유학생들이 발행한 잡지들이 언론의 명맥을 이어갔다. 이 기간 중 발행된 잡지는 50여 종 가까이 되는데, 이 가운데 종교 계통 잡지가 24종으로 절반을 차지했다. 그 기간 중엔 일본인 신문들만이 판을 쳤다. '경성일보','매일신보','서울 프레스' 등 총독부 3대 기관지와 20개의 일간지가 발간돼 일본 제국주의 선전에 열을 올렸다. 다만 지방에 민족지인 '경남일보'만이 외롭게 살아 남아 1914년 말까지 발행되었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바와 같이, 그런 가혹한 인권 탄압과 억압적인 정책의 결과 1919년 3.1운동이 발생하게 되었다. 3.1운동은 고종의 서거(1919년 1월)와 일본에서의 2.8 독립 선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3.1운동 이후 전국을 휩쓴 시위운동 상황을 살펴보면, 집회 횟수 1,542회, 참가인원 202만 3,089명,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만 5,961명, 검거자 5만 2,770명, 불탄 교회 47개소, 학교 2개소, 민가 715채나 되었다.
3.1운동 시엔 '지하신문'들이 발행되었다. 가장 먼저 생겨난 것이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천도교의 보성사에서 창간된 '조선독립신문' 이었다. 이 신문은 3.1운동의 열기를 지속시키는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지하신문들이 생겨나게 하는 데 자극을 주었으며, 해외의 독립 운동 단체도 큰 자극이 되어 3.1운동 이후 해외에서 35종의 신문이 발행되었다. 1919년 상하이엔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는데, 임시정부 기관지로 간행된 ‘독립신문‘은 독립운동의 상황을 내외에 널리 알리고 국민의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데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문화통치'로의 전환
일제는 3.1운동 이후 무자비한 탄압 정치가 갖는 한계를 인식하고 이른바 '문화통치'로 전환하였다. 1919년 8월 12일 하세가와 요시미치에 뒤이어 제3대 총독으로 임명된 사이토 마코토는 9월 2일 서울 남대문역에 도착하는 순간 강우규의 폭탄세례를 받았지만 용케 살아남았다.
사이토는 9월 10일 헌병 경찰제의 폐지, 조선인의 관리 임용 및 대우 개선, 언론 집회 출판의 고려, 지방자치 시행을 위한 조사 착수, 조선의 문화와 관습 존중 등을 시정 방침으로 밝혔다. 그 이후 나온 사이토의 다음과 같은 발언들은 '문화통치'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말해주고 있다.
"조선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고, 문화적 제도의 혁신으로써 조선인을 유도하여 그 행복과 이익 증진을 도모할 것이다. ...총칼로 지배하려는 것은 그 순간의 효과밖에 없다. 남을 지배하려면 철학과 종교와 교육, 그리고 문화를 앞장세워서 정신을 지배해야 한다. ...이 땅의 어린이들을 일본인으로 교육하겠다. 황은에 감읍하도록 조선 민중에게 온정을 베풀어야 한다. 그들을 세뇌시켜야 한다. 이것이 나의 문화 정책이다."
일제가 만든 <조선 민족운동에 대한 대책>이라는 비밀문서에 나와 있는 다음과 같은 부분은 '문화통치'의 구체적 전략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일본에 충성을 다하는 자로 관리를 삼고 친일 지식인을 장기적 안목에서 양성한다. 친일분자를 귀족, 양반, 부호, 실업가, 교육가, 종교가 등에 침투시켜 각종 친일 단체를 조직케 한다."
바로 그런 전략에 따라 일제는 한국인이 발행하는 민간 신문을 허용하게 되었다. 신문의 경우 그런 적극적인 목적이 아니더라도 3.1운동을 전후로 하여 해외에서 발행된 우리말 신문과 국내의 지하신문들이 보여준 언론 항쟁에 대응해야 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언론사 학자 최민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제 무단통치 아래서 전개된 지하신문들의 활동이 두통거리였던 데다가 미주, 간도, 중국 등지에서 발행된 국외의 우리말 신문들이 국제여론을 불러일으키는 등 언론 활동이 활발해지자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민간 신문의 발행 허가 기운이 성숙했던 것이다. 실제로 3.1운동을 기해 발행된 ‘조선독립신문‘만 하더라도 창간호 1만 장이 만세 군중에게 배부되었는데, 이것을 받은 군중들은 이것을 또 몰래 등사판으로 찍어내어 순식간에 전국에 퍼뜨렸다. 뿐만 아니라 비상한 경찰의 압수. 수색 속에서도 10여 개의 신문이 발간되었으며, 격문. 경고문도 곳곳에 붙여 총독의 통치권 거부, 일본군 철수,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대표 파견, 조선인 관리의 퇴직 등을 요구하는 격렬한 언론 항쟁을 벌였다."
그리하여 총독부에 제출된 신문 발행 신청서는 십여 건에 달했으나 총독부는 1920년 1월 6일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사신문‘ 등 3개 신문만을 허가했다. 이 3개 신문을 허가한 일본의 구체적인 구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일제 치하에서 ‘조선일보‘ 기자로 일했던 김을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이토의) 성명 가운데에는 민간 신문도 허용하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오랫동안 언론에 목이 말랐던 민간 유지들은 신문. 잡지의 발행 허가를 얻고자 경무국 도서과에 신청서를 제출하고 격렬한 경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1920년 1월 6일 총독부에서 뚜껑을 열고 보니 결국 일간신문으로는 민족 진영을 대표하여 이상협, 김성수 등의 ‘동아일보‘를 비롯하여, 친일 단체인 대정친목회 예종석에게 ‘조선일보‘, 그리고 신일본주의를 표방하고 참정권 운동을 하는 국민협회 민원식에게 ‘시사신문‘ 등 3개의 신문을 허가했을 뿐이었다. 이것은 각 방면의 세력을 공평하게 균형시킨다는 미명하에 결국 2대 1의 비율로 친일파의 신문으로 하여금 민족 진영의 신문을 견제하고 억압하려는 심모원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재등(사이토) 총독의 소위 문화정치라는 것은 허울 좋은 개살구로 무단정치보다는 약간 나을 뿐, 실상인즉 '무단정치'나 '문화정치'나 근본적으로는 변함이 없으며 일제의 식민 정책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재등 총독의 화유 정책은 또 동화주의를 채택해서 일본인과의 결혼을 적극 장려하고 동시에 일본관리들에게는 조선말을 배우도록 권고하여 그 수당으로 매월 5원에서 20원까지를 더 지급해서 한국인의 내막과 움직임을 또 소상하게 살피도록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재등 총독의 문화정치였던 것이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사신문‘의 창간
친일 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의 예종석이 중심이 된 ‘조선일보‘는 노골적으로 친일을 표방한 가운데 1920년 3월 6일에 창간되었다. ‘조선일보‘는 '신문명 진보의 주의'를 사시를 내걸었는데, 이는 뒤떨어진 새 문명을 발달시켜 향상시키겠다는 것으로 일제 문화정치의 구호와 상통하는 것이었다.
1920년 4월 1일에 창간된 ‘동아일보‘는 이상협 명의로 발행 허가를 받았으나 초대 사장은 박영효, 사실상의 경영자는 호남 지주 김성수였다. ‘동아일보‘는 ‘조선일보‘와는 달리 민족지를 자처하면서 "조선 민중의 표현 기관임을 자임하노라"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 등과 같은 3대 주지를 밝혔다. 또 전국 13도의 자산가 유지들을 발기인으로 삼는 등 제법 민족지로서의 형식도 갖추고자 하였다. ‘동아일보‘는 "그 주지와 전국적인 주식 모집으로 해서 다른 두 민간 신문을 제쳐놓고 처음부터 국민들에게 민족지로서 부각되었다." 당시 동아일보의 인적 구성에 대해 ‘한국 신문사화‘의 저자인 김을한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창간 당시의 동아일보의 진용을 보면, 다음고 같이 제제다사하여 그 시대의 인류 인물들은 모두 신문사로 집중되었다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사장에는 그 옛날 김옥균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당의 영수로 철종왕의 사위인 박영효를 앉히고, 주주 대표로 김성수, 편집 감독에는 구한말 언론계의 원로이던 유근.양기탁의 두 분을 추대하고, 주간에는 당년 26세의 장덕수, 편집국장에는 28세의 이상협, 논설위원에는 김명식. 장덕준. 박일병, 편집 간부에는 김동성. 진학문. 한기악. 민태원. 염상섭. 김정진. 남상일. 고희동. 서승효 등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신문 경험이 있고 또 신문을 가장 잘 아는 이로는 일찍이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에 관계했던 유근, 양기탁과 이상협, 진학문의 네 사람뿐이었다. 이상협은 당시 하나밖에 없던 ‘매일신보‘ 기자였고, 진학문은 ‘대판조일신문‘의 경성 주재 기자였는데, 모두 3.1운동 때 크나큰 충동을 받고 다함께 ‘동아일보’ 창간에 참획하게 된 것이었다. ...후일 ‘조선일보’가 혁신되기 전까지는 거의 ‘동아일보’의 독천장이었다."
사장 박영효는 59세였으나 김성수(29세)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제작진이 20대 청년으로 당시 '동아일보'는 '청년신문'이라 부를 만했다. 초대 사장 박영효는 2개월만 명의만 빌려주다 물러났고 그 뒤를 이어 김성수가 사장에 취임했는데, 주간 장덕수는 김성수의 와세다대학 후배였으며 김정수의 뒤를 이어 사장에 취임한 김성수의 죽마고우 송진우 역시 와세다대학에 다닌 적이 있어 '동아일보'는 와세다대학 출신 유학파들이 주축을 이뤘다.
'동아일보'와 같이 4월 1일에 창간된 '시사신문'의 발행인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가장 악독한 친일파 중의 하나로 지목한 바 있는 민원식이었다. 민원식은 1896년경 일본에 유학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만난 바 있고, 한일합방 후 군수를 지냈으며 3, 1운동 후에는 중추원 부찬의를 지낸 인물이었다. 그는 신일본주의를 제창하면서 일선 융화 운동의 선봉으로서 국민협회를 조직하였다. 그가 제창한 신일본주의는 "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생활의 안고가 보장되어 가고 있는 이 마당에서 우리들은 생활의 안고와 확충을 보장받겠다"는 내용이었다.
'시사신문'은 민원식이 일본에서 피살된 후인 1921년 2월에 종간했다. '시사신문'은 관권을 이용한 강매와 총독부의 지원금에 의존하여 발행되었으며 대부분 무료로 배포되는 '기증지'가 많아서 실제 구독료 수입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민중들이 모두 구독을 거부하고 문에 '시사신문 不見'이라고 써붙였던 바, '시사신문'은 '불견신문'이라고까지 불렸다고 한다.
동아일보를 허가한 일제의 속셈
일제가 1920년에 '동아일보'의 발행을 허가한 속셈은 무엇일까? '조선일보'는 친일 단체에 허가한 것이므로 굳이 그 속셈을 따질 필요가 없다 하더라도 '동아일보'의 경우엔 보다 깊은 뜻이 있었을 것이다. 그 깊은 뜻은 당시 일본 고등경찰 과장의 다음과 같은 술회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동아일보'를 한다는 청년들이 장래 조선의 치안을 소란케 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중심인물들임에도 틀림없습니다. 그럴수록 이런 인물들을 항상 한자리에 모이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적을 알아야 이쪽의 방비책도 쓸 수 있을 줄 압니다. 저의 정보망만으로 그들의 움직임을 완전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신문을 허가함으로써 그들의 동정을 낱낱이 알 수 있을 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모아 놓아야만 일조 유사시에 일망타진하는 경찰 행동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단 문제가 생겼을 때는 정간이든 발행 중지든 마음대로 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 신문을 허용하는 것은 백 가지 이득이 있을지언정 한 가지 해도 없을 줄 압니다."
비슷하긴 하지만 또 다른 의견도 있다. 총독부가 발행하던 영자지 ‘서울 프레스’의 사장을 맡았던 야마가다는 당시 일본이 유력지 ‘만조보’의 편집국장을 역임한 언론인이었는데, 당시 ‘조선일보’ 기자였던 김을한은 야마가다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고 한다.
"테라우치총독의 언록정책이란 참으로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 조선에서 언론의 자유란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조선은 태평무사로 민중은 총독 정치에 만족하고 있다는 따위의 기사밖에 신문에 나지를 않았지요. 그래서 영어의 소위 '풀리쉬 파라다이스' 즉 '우자의 낙원'이 되어서 관리 만능의 시대였습니다. 조선 사람들도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평온 무사하였으므로 조선에 와 있던 일본 관리와 군인들은 정말로 총독 정치가 성공한 것으로 알고, 날마다 '화월'이나 '국수'와 같은 일류 요리 집으로 가서 일본에서 데려온 기생(접대부)들과 밤을 새워 가면서 술을 마시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었는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별안간 '독립만세!'소리가 터지게 되니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관리와 군인들이 깜짝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이지요. 민중의 분노가 폭발된 1919년 3, 1운동이 즉 그것인데, 그때까지 언론 자유를 박탈하여 어두운 면이나 자기들에게 좋지 않은 일은 전혀 쓰지 못하게 하고 '스파이'들의 말만 곧이듣고 안심을 하고 있었으니, 독립 만세 소리를 청천의 벽력과 같이 알았던 것은 또한 당연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 후 사이토 총독이 새로 부임해와서 문화 정책을 표방하여 비로소 일부분이나마 언론 자유를 인정하고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민간 신문을 처음으로 허가한 것은 여론을 존중하여 다시는 그와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조선일보의 동아일보에 대한 콤플렉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당시 창간 배경에 있어서 누가 더 민족적인 성격이 강한 민족지였는지 그걸 따지는 싸움을 벌이곤 하는데, ‘조선일보’는 1985년 4월 19일 자를 통해 ‘동아일보’ 창간의 '반민족적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다.
"이 중에서도 일부 토착 귀족, 지주 세력은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을 계기로 형성된 식민통치의 가장 중추적인 동맹군이었습니다. 결국, 귀족, 지주, 기성 친일 언론인으로 혼성된 측에 허가된 것이 바로 ‘동아일보’였고, 상공인 집단에 주어진 것이 ‘조선일보’였습니다.
‘동아일보’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편집장이었던 이상협에게 발행 허가되었고 한일합방의 공로로 일본 작후의 작위를 받은 박영효가 초대 사장이었다는 구성을 보더라도 ‘동아일보’가 과연 어떤 성격이었던가는 자명한 일입니다. ‘동아일보’는 또 17일 자 신문의 글에서 ‘동아일보’ 창간호와 창간특집호에 등장한 국내외 인사의 면면을 들어 ‘동아일보’가 민족지인 양 호도했으나 바로 그 축사의 대열에 10여 명의 총독부 관리 및 친일 인사가 들어 있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나, 이는 ‘조선일보’의 ‘동아일보’에 대한 콤플렉스가 매우 뿌리 깊은 것임을 말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조선일보’로서 '민족지'라는 타이틀이 이만저만 부러운 게 아니었다. 그걸 강조해야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건 곧 일제의 탄압을 자초하는 길이기 때문에 적당히 민족지 냄새를 풍기면서 일제에 타협하는 길밖에 없었다. 조선일보의 그런 이중적인 생존술에 대해 ‘미디어오늘’의 신문자본연구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20년 9월 ‘조선일보’는 창간 직후 친일지로 지목돼 '민족지'를 표방하고 나선 ‘동아일보’의 위세에 눌리자 스스로 배일적인 신문임을 공언하는 내용의 사설들을 실어 오다 총독부로부터 제2차 무기 정간을 받았는데. 이때 필자도 아닌 최국현 등 3명의 기자를 해고했다. 한편으로 독자의 신망을 얻기 위해 배일적임을 자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총독부와 타협해 정간 해제의 조건으로 기자를 해고하는 양면적인 행위를 보였던 것이다."
1924년 조선일보의 변화
1924년부터는 이광수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주의 사상과 사회주의 민족주의 논조가 유행하였는데, ‘조선일보’는 1924년 9월 민족주의자인 이상재가 사장이 되면서 편집진 및 지면 구성을 대폭 쇄신하여 민족지로서 뚜렷한 색채를 띄게 되었으며 1925년부터는 사회주의 논조를 펴기 시작해서 사회주의 신문이라는 평을 받기까지 했다.
1925년의 그런 사조는 러시아에 볼세비키 공산 정권이 들어선 세계사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겠지만, 1924년부터 시작된 ‘조선일보’의 대변화는 이상협이 동아일보에서 수십 명을 데리고 나와 신석우, 안재홍, 백관수, 조설현, 최선익 등과 손을 잡고 송병준으로부터 ‘조선일보’의 판권을 매수한 이후 일어난 것이었다. 이에 대해 김을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상협은 신문의 발행권을 얻어서 인촌 김성수와 함께 ‘동아일보’를 창간한 사람인데, 인촌의 막역한 친구요 또 동지인 고하 송진우가 3, 1운동으로 감옥에 있다가 나와서 동아일보사에 들어온 뒤부터는 사사건건 의견이 맞지 않아서, 필경 자기 사람인 일족랑당을 이끌고 동아일보를 탈퇴하고 말았다. 그때 이야기로는 고하와 하몽(이상협)은 근본적으로 성격이 맞지 않아서 소매를 나누게 된 것이라고 하고, 또 일성에는 박춘금의 각파유지연맹 사건 때에 고하가 박의 권총 협박에 못 이겨서 일금 십만 원을 주겠다는 증서를 써 주고서도 동아일보 사원들에게는 그런 일은 절대로 없다고 시치미를 떼었는데, 그 후 ‘매일신보’에서 그 사실을 폭로하고 문제의 증서라는 것까지 사진판으로 찍어서 신문에 내었기 때문에 이것을 본 동아일보 사원들은 이런 사장 밑에서는 일을 함께 할 수 없다고 해서 하몽을 필두로 유력한 사원들이 총퇴진을 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 편집과 논설에도 당시로서는 일류 인물들을 모조리 망라하고 조선 민중의 신문을 자처하여 무엇으로나 ‘동아일보’를 제압코저 하였으니, 1924년 가을, 민간 신문으로는 최초로 조, 석간(조간 2면, 석간 4면)을 낸 것이라든지, 전에는 없던 무선전화의 방송 시설을 한 것과 같은 일은 무엇이든 신기원을 지으려는 열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미국이나 일본 신문에서 힌트를 얻어서 한국 최초의 연재만화를 게재한 것도 ‘조선일보’가 최초이니, 이상협이 고안하고(때로는 민세 안재홍이 담당), 심산 노수현 화백이 그린 연재만화 ‘멍텅구리’는 일반독자의 절찬을 받아 그 만화의 주인공인 '멍텅구리'와 '옥매'와 '윤바람'의 세 사람은 오랫동안 조선 민중의 '이이돌(우상)'이 되었다. ... 민족의 지도자 월남 이상재 선생이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한 것도 그때의 일이다."
‘시대일보’와 ‘중외일보’
최남선은 1924년 3월 31일 ‘시대일보’를 창간했다. 일제는 민영지를 3개 정도 허용할 방침이었으므로 종간된 ‘시사신문’ 대신 최남선에게 ‘시대일보’를 발행하도록 허가를 내준 것이다. ‘시대일보’는 다른 신문들과는 달리 1면을 정치면으로 꾸미지 않고 대담하게 사회면으로 만드는 등 신선한 감각을 보여주었으나, 자본이 달려 1926년 8월 폐간되고 말았다. 그 후신으로 이름을 고쳐 ‘중외일보’가 창간되었다. ‘중외일보’의 활약에 대해 한국외국어대 교수 정진석은 이렇게 말한다.
"세 진용과 함께 ‘중외일보’는 재정 형편으로 인한 지금까지의 소극적인 경영 정책을 탈피하고 적극적으로 발전성을 꾀한다 하여 그때까지 다른 민간지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던 한국 신문 사상 초유의 조, 석간 4면씩 1일 8면 발행을 단행하여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이에 자극을 받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도 8면으로 맞서서 치열한 지면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원래 재력이 빈약했던 ‘중외일보’로서는 스스로 시작한 이와 같은 경쟁을 견디어 내지 못하고 자신의 수명을 단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비록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중외일보’의 그런 파격적인 경영 전략을 구사한 인물은 바로 이상협이었다. 정진석은 이상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상협은 당시 신문계의 귀재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가장 값싸고 가장 좋은 신문'을 내세워 구독료도 동아, 조선이 하루 6면 발행에 1개월 1원이었는데 중외는 하루 4면이었지만 1개월 60전이란 파격적인 염가 정책으로 사세가 든든한 동아, 조선에 대항했다. 이상협은 ‘동아일보’ 발행 허가를 받을 때부터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초대 편집국장이었으나 1924년에는 동아를 뛰쳐나와 체제가 잘 갖추어지지 않았던 조선일보로 그의 직계 기자들을 데리고 가서 조선의 기반을 확고히 구축한 다음에 중외일보를 스스로 경영하게 된 것이므로, 그의 모든 경험과 포부를 다하여 여러 가지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우리나라가 농업국이라는 사실을 비추어 농촌 독자를 대상으로 한 농업란을 만들고 오늘날에는 모든 신문이 싣고 있는 박보, 기보 등을 실어 오락적인 취향이라는 일부 식자의 비판도 있었으나 새로운 독자들의 개발에 기발한 재능을 과시했다."
이상협의 활약
이상협이 조선일보를 나오게 된 건 1925년 ‘조선일보’ 9월 8일 자에 실린 ‘조선과 러시아의 정치적 관계’라는 사설이 발단이 됐다. 당시 북경에서 오랫동안 계속돼 오던 일소 교섭이 타결되어 일본과 소련 사이에 통상이 재개됨에 따라 서울에도 소련 영사관이 설치되어 영사 사무를 보게 되었는데, 문제의 사설은 바로 이걸 다룬 것이었다. 그런데 총독부는 이 사설을 문제 삼아 집필자인 신일용을 구속하고 ‘조선일보’를 무기 정간에 처하였으며 새로 구입한 윤전기까지 압수하였다. 총독부는 무기 정간 시킨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극단적으로 조선 통치에 대한 불평불만을 시사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제국의 국체와 사유재산 제도를 부인하고 그 목적을 달하는 실행 수단으로서 적로의 혁명 운동 방법을 본받아서 현상을 타파할 것을 강조한 기사를 게재했기로 동일로 즉시 발행정지를 명령함과 동시에 그 책임자를 사법 처분에 붙인 것이다."
조선일보는 무기 정간의 해제를 위해 총독부를 상대로 로비를 하였고 총독부는 정간을 해제하는 대신 사회주의적 색채를 띤 기자와 사원의 해고를 요구하였다. 그 이후 상황 전개에 대해 김을한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에 이상협, 신석우, 최선익, 김동성씨 등 간부들은 세궁역진하여 부득이 그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것을 승인하는 언질을 주었고, 그에 따라 총독부 당국은 1925년 10월 15일 비로소 발행정지 처분을 해제하였다. 그리하여 신문사의 실권자인 신석우는 정간 해제와 더불어 모여든 사원을 개별적으로 불러들여서 홍종식, 박헌영 등 공산 분자를 대량으로 파면하게 되자, 파면을 당한 쪽에서는 그때 총독부와 교섭하던 이상협이 좌익 기자의 해고를 저지하지 못한 것을 공박하고 '우리를 내보낼 테면, 이상협과 함께 들어온 우익 기자들도 파면하여야 한다'고 물고 늘어지게 되었다. 그것은 좌·우 양익의 기자16명을 동시에 해고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좌익 기자들을 무마하기 위함이었으며, 이와 함께 그때까지 있었던 고문 제도를 폐지하여 이상협, 장두현, 신구범 등도 모두 퇴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혁신 ‘조선일보’에는 때아닌 폭풍이 불게 되었으며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조선일보’를 혁신한 하몽 이상협은 또다시 조선일보에서 나와서 이번에는 이미 폐간된 ‘시대일보’의 판권을 되살려서 '중외일보'를 창간하게 된 것이다."
이상협은 당시 언론인들이 무지하였던 광고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깨인 생각을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 한국 신문에 게재되는 일본 광고는 1925년경부터 크게 증가하였는데, 당시 전송(전보통신사)은 일본의 대표적인 광고 대리 업체로 경성지국을 통해 일본 광고를 한국 신문에 내는 일을 전담하였다. 당시 광고료는 너무 저렴한 것이었다. 김을한은 '한국신문사화'에서 이상협의 활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보통 5호 1행에 30전은 받아야 할 것을 오랫동안 20전밖에 주지를 않았으니 광고 중개업자로서는 그 마진을 너무 많이 먹은 것이었다. 그러나 초창기의 한국 신문은 4면에 불과한 지면이었지만, 어느 때는 기사가 모자라서 쩔쩔매던 때였으므로, 크고 작고 간에 그저 광고의 지형만 주는 것이 고마워서 광고료야 많든 적든, 그것을 따질 겨를도 없이 기꺼이 일본 광고를 내어 왔던 것이다. ... 한국 신문에 나는 일본 광고의 요금이 너무나 싼 것을 발견한 그는 즉시 도쿄로 가서 직접 전통 사장을 만나서 담판하는 한편, 광고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교섭한 결과, 그들도 지금까지의 광고료가 너무나 저렴했던 것을 인정하고 조금씩 그 요금을 올려 주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8년경에는 5호 1행에 1원씩을 받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동아의 송진우 사장도 1년에 한 번씩은 도쿄로 가서 광고료를 올리는 데 전력을 경주하였던 것이다."
'중외일보'는 1931년 6월 19일자로 종간호를 내면서 폐간된 뒤, 그해 11월부터 그 이름을 '중앙일보'로 고쳐 명맥을 이어가다가 1933년 여운형 등의 수중에 들어가면서부터 '조선중앙일보'로 개제되어 발행되다 1936년 9월 초에 폐간되었다. '조선중앙일보'는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더불어 '민간3지' 또는 '민족지'라고 일컬어졌다. 상지대 교수 박용규는 언론사 연구의 관점에서 시대, 중외, 중앙, 조선중앙일보로 이어지는 이 일련의 신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조선공산당 창당을 포함하여 1920년대 중반의 사회주의 운동과 관련해서는 '시대일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고, 1927년에 창립된 신간회와 관련해서는 '중외일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사회주의 운동가 출신들이 1930년대에는 어떻게 활동했는가를 보기 위해서는 '조선중앙일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이 시기에는 여러 민간지들을 옮겨 다닌 기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도 제3의 민간지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최남선의 몰락
'시대일보'의 실패는 최남선의 몰락을 재촉해 그를 변절하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08년 여름 출판사 신문관을 창설한 최남선은 그걸 근거로 삼아 '소년'을 창간한 뒤에도 1920년대 중반까지 약 20년간 7종의 잡지와 신문을 스스로 발간하는 맹활약을 하였다. '붉은 져고리', '새별', '아이들보이', '청춘' 등의 월간잡지와 1922년에 창간한 시사 주간지 '동명' 등이 말해 주듯이, 최남선은 자칭 '신보,잡지광'이었다.
'소년'이 폐간된 뒤 1년 6개월만인 1913년 1월 1일에 창간된 '붉은 져고리'는 내용은 잡지였지만 체제는 타블로이드판보다는 약간 작은 신문 형태로 매월 2회 1일과 15일에 발간했다. 최남선은 이를 '신문'이라 불렀는데, 이게 바로 신문 경영을 원했던 그의 욕심을 예고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신문'이라는 최남선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붉은 져고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신문인 셈이다.
최남선은 '시대일보'가 폐간되기 전인 1924년 말경에 '시대일보'에서 완전히 손을 뗐는데, 그건 사회의 비난과 사내 분규 때문이었다. 최남선은 충분한 자금도 없이 신문을 창간해 놓고 돈이 달리자 창간 2개월 후인 6월 2일에 일종의 사교인 보천교에 발행권을 넘긴다는 조건 아래 자본을 끌어들이는 계약을 맺었는데, 이것이 사회적으로 비난이 빗발쳤으며 사원들도 크게 반발하였다. '개벽' 잡지 1924년 8월호는 '최남선(사장) 진학문(편집국장)으로 보면 팔려도 더럽게 구린내 나게 팔려 먹었다. 돈이란 거기에 눈이 뒤집혀 자기 몸까지 팔아먹었다 해도 가하다."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그 일로 언론인, 문인, 사학자, 그리고 독립운동가로서 쌓아 올린 그의 명성은 큰 타격을 받았다. 그는 그 후 송진우의 권유로 1925년 8월부터 1928년 10월까지 객원으로 '동아일보'의 사설을 집필하였으나 자신의 실패에 크게 낙담한 탓인지 그 무렵부터 타락과 친일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1929년 10월 조선총독부의 조선사 편수회의 촉탁으로 임명되었고 12월에는 조선사편수회 위원이 되었으며, 이후 일본에 가서 조선인 대학생의 학병을 권유했는가 하면 중추원 참의, 만주 건국대 교수, 만주 '만선일보' 고문 직책을 맡는 등 노골적인 친일 행각을 벌였다.
무명회와 철필구락부
일제 치하의 언론인들은 일제의 탄압에 대항하기 위해 언론 단체를 결성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언론 단체인 무명회는 1921년 11월 27일에 결성되었는데, 회원 자격을 '조선인 기자'라고 폭넓게 규정하여 발행인이나 편집인, 기자가 모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무명회의 목적은 문화 보급의 촉진, 언론 자유의 신장, 여론의 선도, 회원의 명예와 권리의 옹호, 그리고 회원 상호 간 친목 도모 등이었다.
그러나 무명회는 창립 다음 해인 1922년까지만 몇 차례 모임을 가졌을 뿐 1923년부터는 사실상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924년 친일 단체인 각파유지연맹 간부들이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와 취체역 김성수를 폭행한 사건, 그리고 그로 인해 일어난 '언론 집회 압박 탄핵대회'라는 민중대회의 성격을 띤 항일 언론 투쟁 시에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1924년 8월 17일 언론인 30여 명은 모임을 갖고 무명회를 부활시키고 회원의 가입 자격을 '민주의 정신과 배치되지 아니하는 신문기자'로 한정한다고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그 자리에 참석했던 '매일신보' 기자 2명을 그 자리에서 퇴장시켜 버렸다.
1924년 11월 19일엔 사회부 기자 20여 명이 모여 철필구락부라고 하는 새로운 언론 단체를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회원 가입의 자격을 사회부 기자로 제한했으며, 신문 강연회 등과 같은 사업을 벌였다. 철필구락부의 주장에 따르자면,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강연회는 철필구락부가 1925년 2월 5일 YMCA에서 입장료 10전을 받고 개최한 강연회이다. 또 철필구락부는 1925년 5월경 회원 총회를 열고 사회부 기자의 급료를 최저 80원으로 인상 지급하도록 요구할 것을 결의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언론사상 최초로 기자 단체에 의한 급료인상 투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무명회와 철필구락부가 공동으로 벌인 가장 큰 행사로는 1925년 4월 15일부터 3일간에 걸쳐 열린 우리나라 최초의 전조선 기자대회일 것이다. 이 대회에는 지방 주재 기자까지 참여하여 참가자가 6백여 명에 이르렀다. 이 대회는 "죽어가는 조선을 붓으로 그려보자! 거듭나는 조선을 붓으로 채찍질하자!"는 구호를 내걸었으며 그 '취지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언론은 권위가 그의 생명이다. 현하 우리의 언론은 과연 어떤 언론인가? 우리는 힘껏 그 권위를 북돋우고, 그 생명의 발약함을 보아야 하겠다. 우리는 한 번도 원만히 모여 보지 못했다. 원만히 모이면 반드시 그만한 효과가 있을 것이다. 본 대회의 권위가 여기에 있다. 만천하 언론계의 동직자들이여! 모이자! 그리하여 '언론의 권위를 신장'하고 동직자의 친목을 도하자."
전조선 기자대회와 신간회
그러나 당시 '조선일보' 기자였던 '한국 신문사화'의 저자 김을한은 전조선 기자대회가 그렇게 겉으로 알려진 것과는 크게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전조선 기자대회가 개최되기까지에는 일간신문 각 사의 사회부 기자를 중심으로 조직된 철필구락부와 조선일보 영업국장 홍증식 이하 화요회 계통의 이른바 적파 기자들이 주동이 되었던 만큼 일반의 방청을 금지하고 회원들끼리만 의사를 진행하였는데, 개회 벽두부터 벌써 좌, 우 양파 기자가 대립하여 파란과 분규가 그치지를 않았다. 그러나 당시 조선일보 사장이던 이상재 선생의 넓은 도량과 응훈한 기백으로 결렬까지에는 이르지 않고 가까스로 의장에 이상재, 부의장에 안재홍씨를 선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 이 대회는 화요회가 주동이 된 만큼 '기자대회'란 표면상 한낱 구실에 지나지 않고 실상인즉 각지에 흩어져 있는 사회주의자를 한자리에 모이게 하기 위한 말하자면 공산당 조직의 예비 회의와 같은 것이어서, 속담에 '재주는 곰이 피우고 재미는 되놈이 본다'는 말과 같이 '기자대회'도 화요회의 간부인 홍증식이 영업국장으로 있었던 만큼 돈은 조선일보사에서 쓰고 실속은 공산주의자들이 본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조선일보의 지국장과 지방기자들은 대부분이 적색분자였으니 이 때문에 조선일보는 커다란 영향과 손해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시각은 최준의 '한국 신문사'나 1975년에 나온 '동아일보사사'의 시각과 상통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 언론사학자 최민지는 반론을 제기한다.
"이 전조선 기자대회는 조선일보 사원이 전 출석자의 약 반수를 점하였고 그 의장, 부의 장이 조선일보의 사장과 이사인 이상재, 안재홍이 됨으로써, 조선일보사가 주축이 된 것처럼 보이기는 하였으나 그 발의 자체가 '동아일보' 정치부장인 최원순의 발의였으며 사장 송진우와 간부 기자들 중에서도 김동진, 한기악, 한위건, 설의식 등이 준비위원으로서 기자대회의 준비 과정을 맡기도 한 전 언론계의 성사로서, 당시 '동아일보'도 ‘전조선 기자대회’ 제목의 사설로 시의에 적합한 대회로서 기대와 그 의의가 큼을 강조하였다. ... 필자의 견해로는 기자대회의 준비 과정과 그 경과를 살펴볼 때 비록 사회주의 계열이 주도했다 할지라도 기자대회는 공산당 결성을 촉성하였다기보다는 오히려 기자대회의 의장 부의장이던 이상재와 안재홍, 그리고 반수 이상이던 조선일보 기자들에게 일제와의 타협적인 자치 운동으로 나아가던 '동아일보'의 오도된 영향력을 견제하여, 비타협적인 민족 협동 단일 전선인 신간회 조직을 촉진하였던것으로 봄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찌 됐건 무명회와 철필구락부는 신문의 정간 처분이나 경찰의 기자구속, 폭행등과 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 항의하여 일정 정도 성과는 얻었으나 그 정도의 활동이나마 1927년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한 언론 단체들과는 달리 일본인 기자들까지 포함된 기자단이 1922년부터 결성되었다는 것도 지적해 둘 필요가 있겠다. 경제부 기자들이 결성한 경제기자단(1922년 3월 31일), 체신국 출입 기자와 체신국 관리들이 공동으로 구성한 광화구락부(1923년 12월 18일), 이왕직 출입 기자들이 만든 이화구락부(1924년 5월 16일), 스포츠 기자들이 만든 운동기자구락부(1927년 8월 27일), 연예부 기자들이 만든 찬영회(1929년 12월 6일) 등이 바로 그것이다.
앞서 거론된 바와 같이, 1927년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공동전선을 펴서 민족 단일조직으로서의 신간회가 조직되었다. 조선일보의 사장 이상재를 비롯하여 부사장 신석우, 주필 안재홍 이하 사원의 거의 전부가 신간회의 주요 간부가 되어 '조선일보'는 신간회의 기관지처럼 되었다. 신간회는 일본 경찰의 심한 감시로 표면적인 활동이 늘 억제를 당하였으나, 전국에 많은 지회가 설립돼 회원은 3만에 이르렀다.
최초의 여기자, 이각경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는 1920년 '매일신보'에 입사한 이각경이라는 것도 지적해 둘 필요가 있겠다. 그간 최초의 여기자로는 1924년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입사한 최은희로 알려져 왔는데, 최은희는 최초의 민간 신문 여기자라 해야 옳을 것이다. 최은희는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최은희의 활약에 자극을 받은 동아일보는 여기자 허정숙을 채용했다. 허정숙은 최은희보다 두 달 늦게 출발했지만 오히려 그보다 더 이름을 떨쳤다. 소설가 이광수의 부인으로 의사였던 허영숙도 잠시 동아일보에 기자로 일한 바 있다.
반면 이각경은 활동 기간도 짧고 조심스럽게 일해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가 쓴 기자의 논조는 대단히 단호하고 적극적이었다. 기사제목만 보더라도 ‘자유와 개방적 생활 오늘날 남자만 의뢰 말고, 각자 자유롭게 활동을 해야’ ‘부인이여 안일을 취치 말라’ ‘자부를 둔 시부모여 며느리도 당신의 자식이거늘 왜 그리 노예시하는가’ 등과 같이 화끈한 맛이 있다.
경성방송국의 개국
이즈음 라디오 방송이 태동한 것도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1924년 2월 조선총독부 체신국은 방송에 대한 조사 및 기술적 연구를 시작하여 11월 초 체신국에 무선실험실을 설치하고 11월 29일 오후 3시 30분부터 송신 시험방송을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이 땅에 실험방송이나마 라디오 전파가 최초로 발사된 게 바로 이때였던 것이다.
일본인들에 의한 라디오 시험방송으로 방송 사업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자 총독부 체신국에 방송 사업 허가 신청서를 제출한 민간단체만도 11개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가장 적극적이었던 조선일보는 1924년 12월 17일부터 3일 동안 독자들을 위한 무선전화 방송공개시험을 실시했다. 조선일보 사장실에 홑이불로 방음 장치를 해 놓고 마이크를 설치하여 방송실을 꾸몄는데 사회는 조선일보 기자 최은희가 맡았고 인사말은 조선일보 사장 이상재가 하였다.
1926년 2월 15일 방송 사업 허가를 신청했던 11개 민간단체 대표들은 조선호텔에 모여 발기인총회를 열고 그해 4월 28일 경성방송국 창립준비위원회를 개최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 총독부는 한국인에 의한 방송국 설립을 허가치 않고 1926년 11월 30일 조선총독부 체신국 산하에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을 설립하였다.
경성방송국은 1927년 2월 16일 “여기는 경성방송국입니다. JODK”로 시작하는 첫 방송전파를 출력 1kw로 발사하였다. 라디오 본방송이 시작되기 전 극장에 모여 라디오를 듣는 시연회가 열리기도 했다. 당시 신문의 반응은 이랬다. "근세 과학의 일대 경이 몇백 몇천 리를 격한 곳에 흔적 없이 전파되는 방송의 신기막측한 비밀!"
‘JODK’라는 콜사인에 대해선 우여곡절도 많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말이 많다. 이에 대해선 원로 방송인 유병은이 그의 저서 ‘방송 야사’에서 밝히고 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그대로 소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JO’라는 콜사인은 일본 내에서만 사용하게 돼 있던 것인데 경성방송국이 개국할 무렵에 조선 총독부에서는 내선일체를 부르짖고 있었으며 조선총독부 도쿄출장소장이 일본 체신청과 방송 당국에 경성방송국의 콜사인을 개국 순서대로 JODK를 할당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강경한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쿄방송국이 JOAK,오사카가 BK,나고야가 CK였다. 그리고 네 번째로 개국하게 된 경성방송국의 콜사인이 ‘JODK’가 됐다는 것이다. JODK를 서울에 할당해 준 직후 일본 체신청이나 방송 당국에서는 잘못된 처사였음을 알게 됐으나 내선일체라는 슬로건에 눌려 그대로 방치했다는 뒷이야기였다(한덕봉의 증언). 사실은 조선 내의 콜사인은 ‘JB’를 사용토록 돼 있어 부산방송국이 JBAK를 시작으로 평양이 JBBK, 청진방송국이 JBCK로 개국하는 순서대로 콜사인이 배정돼, 청주방송국이 맨끝으로 JBQK였다. 이러한 우여곡절의 내막을 모르는 사람 중에는 경성방송국의 콜사인이 JODK이니, 이는 도쿄방송국의 지국으로 개국된 것이라는 저서를 펴낸 바도 있으며, 또 경성방송국이 개국할 당시에는 일본 방송을 서울에서 수신할 수 있는 아무런 시설이 계획돼 있지 않은 상태였는데도 서울방송국은 처음부터 일본 방송을 중계할 목적으로 설립됐다고 하는 책자도 볼 수 있었는데, 노창성의 고증을 들어보면, 일본 방송을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수신할 수 있는 수신 시설은 1935년 가을, 부산방송국이 개국될 때 비로소 동래수신소가 처음 생겨 일본 방송을 직접 수신해서 서울로 올려보냈다고 한다. 이 시절에는 일본 내에도 지국 제도는 없었다. 조선의 콜사인은 'JB'이며, 대만은 'JF'였고 만주는 'JQ'였다. 즉 'JO'는 일본 내에서만 사용하던 것이었다."
또 유병은은 경성방송국이 설립될 때 조선총독부에서는 단 한 푼도 재정적인 지원은 해 준 바 없으며, 사단법인 경성방송국 설립 자금 20만엔 전액은 조선식산은행에서 기채해 충당했고 민간으로부터 출자자를 모집하여 식산은행의 빚을 같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즉, 경성방송국이 일본 방송국의 지국이니 뭐니 하는 주장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개국 1주일 후인 2월 22일 당시 라디오 수신기 등록 대수는 1,440대였으나, 일본인이 전체의 80%가 넘는 1,165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1927년 말 전체 수신기 수는 5,260대로 증가하였다. 라디오 청취료는 매월 2엔이었는데, 당시 쌀 한 가마니 값이 5엔이었다는 걸 감안한다면 매우 비싼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수신기는 필히 방송국에 등록을 필한 후에 체신국의 청취 허가를 받아야 했고 대문 밖에 청취 허가장을 반드시 부착해야 했다. 허가를 받지 않고 방송을 도청할 경우 1천 엔 이하의 벌금 또는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엄한 규정이 있었다고 한다. 하기야 당시 서울의 인구가 약 30만 명, 전 조선의 인구는 1천8백만 명이었으니 여러 가지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개국 당시 프로그램은 일본어로 된 뉴스와 경제 시황 보도, 그리고 한국어의 물가 시세, 일기예보, 공지사항에다 음악 방송 정도가 고작이었다. 처음에는 1:3의 비율로 우리말과 일본어를 혼용하여 방송하였으나, 이에 대해 비판이 일자 1927년 7월 2:3의 비율로 바꾸어 교대 방송을 하는 등 여러 차례 변화를 보였지만, 한, 일 양국어 혼용 단일 방송(일명 '비빔밥 방송')은 처음부터 한국 청취자들의 불만의 대상이 되어 수신기 보급은 극히 부진하여 1929년 말에 1만 대를 돌파하였다. 따라서 경성방송국은 유일한 재원인 청취료 수입이 미미하여 심한 경영난에 빠지게 되었으며, 경성방송국은 수신자 보급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이중 방송 실시(한국어 방송과 일본어 방송)와 전국 방송망 확충을 계획하게 되었다.
1920년대엔 무성영화도 제작되었다. 우리나라에 활동사진이 처음 들어온 것은 1897년이라는 설과 1903년이라는 설이 있고, 연극에 활동사진의 기법을 수용한 연쇄극(극중의 장소를 재현하기 어려울 경우 영화로 찍어서 연극 사이사이에 보여 주는 방식)은 1919년 ‘의리적 구투’이어 1920년에 5편이 제작되었으며, 최초의 무성영화는 1923년에 발표된 ‘월하의 맹서’였다. 무성영화는 1923년 3편, 1924년 4편, 1925년에 8편, 1926년에 4편이 제작되었는데, 흥행에 대성공을 거둔 대표작으로는 1926년 9월에 발표된 나운규의 ‘아리랑’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발성영화인 ‘춘향전’이 제작된 건 1935년이었는데, 이 당시 영화 상영관은 39개소였으며 일본 영화 69%, 외국 영화 27%인 반면 우리 영화는 4%에 지나지 않았다.
6.10 만세운동과 광주학생운동
일제는 일어를 ‘국어’라 하여 한국어 말살 정책을 썼는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이에 대항하여 20년대 후반부터 문자 보급 운동을 벌였다. ‘동아일보’는 1928년 4월 1일을 기해 '글 장님 없애기 운동'을 벌일 것을 선언하였으며, ‘조선일보’는 1929년 7월 14일부터 '귀향 남녀 학생 문자 보급 운동'을 시작해 이를 연례 행사로 실시했다.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는 표어를 내건 이 운동의 첫 해에 참여한 학생은 409명에 이르렀다.
여기서 잠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자, 1926년 4월 조선 왕조 최후의 국왕인 순종이 서거하자 일본에 국권을 강탈당한 민족의 비애가 북받쳐 순종의 장례일인 6월 10일을 기해 항일 시위운동이 계획되었다. 비록 이 운동은 일본 경찰에 사전에 발각돼 크게 전개되진 못했지만 학생들의 계획은 탄로되지 않아 장례일인 6월 10일 곳곳에서 학생들은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 6, 10만세 운동의 결과 2백여 명의 학생이 검거되었다.
이처럼 당시는 민족운동에 대한 국민의 열의가 매우 높던 때였다. 특히 학생들의 경우 동맹휴학의 형태로 항일적 주장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쏟아져나왔다. 이러한 동맹휴학 운동의 절정은 광주학생운동으로 나타났다.
1929년 11월 3일 오후 전라남도 광주에서 나주로 향하던 열차 안에서 일본인 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은 3, 1운동 후 일어난 최대의 항일 민족 투쟁이었다. 광주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전국 각지의 거의 모든 학교들이 호응하여 대대적인 시위나 동맹휴학을 전개했다. 참가 학교 수는 194개교였고 참가 학생 수 5만 4천여 명이었는데, 그중 580여명이 퇴학과 함께 최고 5년의 체형을 받았으며 2,330명이 유기정학을 당했다.
조선. 동아의 한글 보급 운동
광주학생운동으로 이후 일제의 통제와 탄압이 가중되면서 신문의 논조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정치적, 사상적 논조에서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 노조로 이동한 것이다. 언론사학자 최민지는 1931년 만주사변의 발발에서 1937년 중일전쟁에 이르는 기간을 "논조나 기사에 있어서 정치적 사상적 기사보다 일상생활적, 순수 문화적, 오락적 그리고 역사적 분야에 몰두하여 신문사 주최의 사업 홍수를 이루는 한편 민간지는 치열한 증면 경쟁과 사옥 경쟁을 벌이는 민간 신문의 춘추전국 시대에 돌입하게 되는 시기"로 평가하고 있다.
사실 신문들은 그 기간 중엔 전과 같은 항일 논조를 보이지 않았으며 심지어 총독부 경무국은 신문 3사 대표 송진우(동아), 신석우(조선), 한기악(시대)을 불러 일종의 '보도 지침'을 내리고 그것을 지키겠다는 서약까지 받아 냈다. 그리하여 신문들의 창간 이래 기사 압수 처분 건수도 1929년부터 크게 줄어들었다. 기사 압수 처분 건수는 1920년 37건(동아 16, 조선 21), 1921년에 38건(동아 15 조선 23), 1922년에 27건(동아 15 조선 12), 1924년에 153건(동아 56 조선 48 시대 49), 1925년에 151건(동아 57 조선 56 시대 38)이었으나 1929년엔 75건(동아 28, 조선 21, 중외 26)이었다. 이와 관련 언론사학자 최민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1929년에 이르러 경제적 위기의 타개책을 대륙에의 무력 침략에서 구하려는 일본의 제국주위 침략 전쟁의 개시로 새 정세에 직면하게 됨과 동시에 일제의 가혹한 탄압하에서 국내의 대규모 민중운동이 1929년 광주 학생 사건을 고비로 다시 일어나지 못했고 민족 단일 전선인 신간회마저 1931년에 해산되었으며, 언론에 대해서는 일본을 내지, 내지인으로 일본 정부는 아정부, 제국정부로, 항일 무장단은 비적단으로... 표시하라는 등 그 논조와 용어에까지도 구체적으로 서약하게 만드는 단계에까지 이르러 기업으로서의 신문을 위한 대처로서 예필이 둔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신문들은 그 대신 주로 신문사 주최의 사업을 통해 민족의식이나 민족문화를 지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광주학생운동 이전부터 시작된 조선과 동아의 문자 보급 운동도 더욱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조선일보’는 1930년 12월에는 '한글 기념가'와 '문자 보급가'를 현상 모집하였고, 1931년 2월20일엔 춘계 문자 보급반을 결성하고 조선일보 전국지국과 분국을 총동원하여 3주간 걸쳐 문맹 퇴치를 위한 한글 원본을 전국에 무료 배포했다. ‘동아일보’도 1931년에서 1934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학생 하기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해 문맹 타파와 한글 보급 운동을 벌였다.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던지 총독부는 1935년 여름방학을 기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벌이는 문자 보급 운동에 대한 중지령을 내렸지만, ‘조선일보’는 다른 형태로 이 운동을 지속시켰다. 이 당시의 신문 연재 소설들도 주로 농촌 계몽을 겨냥한 것이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론 이광수의 ‘흙’(1932년 4월 - 1933년 7월)과 심훈의 ‘상록수’(1935년 9월 - 1936년 2월) 등을 들 수 있다.
한국외국어대 교수 정진석은 "이와 같이 일제 치하에서 언론이 전개한 국어운동은 민족의 독립역량 배양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두고 추진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두 신문의 문맹 퇴치 운동을 마냥 아름답게만 보지 않는 시각도 있다. 당시 2천만 인구 중 신문을 구독할 수 있는 사람이 4백만에 불과해 독자 확보 차원의 계산도 있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 운동의 경비는 거의 학생들이 스스로 부담했고, 그 밖에 동리 유지, 지방 단체, 교회, 그리고 신문사지, 분국 등이 부담하였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 비판은 그 당시에도 있었다. ‘신단계’라고 하는 잡지의 1933년 1월호에 실린 글은 신문사의 문자 보급 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일침을 가하고 있다.
"문자의 필요는 우리도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이 문자나 지식 그것만을 주는 한에 있어서는 우리는 그 필요를 그다지 크다고 생각지 않는다. 하물며 문자 그것을 통하야 전술한 바 동아지의 그 가공한 민족개량주의의 독성을 뿌림에 있어서랴! 그들은 그들의 주장을 보다 광범히 보다 힘있게 펴기 위하야 지금 귀중한 학생의 힘을 빌어 그 소리를 닦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겸하야 문자를 원여함으로써 그 기관지 ‘동아일보’를 널리 소화시키려는 그러한 의도도 물론 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싸움
그런 와중에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상호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급기야 공개적인 정면 격돌로 비화되기까지 했다. 싸움은 1933년 ‘조선일보’를 방응모가 인수하면서 부터 비롯되었다. 방응모는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금광에서 그야말로 노다지를 발견해 벼락부자가 된 인물로 한때 동아일보 정주지국장으로 일한 적도 있었다. 김성수에 비하면 그의 과거 경력은 정말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한국외국어대 정진석 교수는 방응모가 ‘동아일보’를 겨냥하여 공격적 경영에 나서게 된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김성수의 화려한 활동에 비하면 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를 인수할때까지는 사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사람이었다. ‘조선일보’를 인수할 때의 나이가 50세였으므로 김성수보다는 12살이나 위이지만 중앙무대의 활동은 10년 이상 뒤졌던 것이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지국 경영 때에 본사로부터 많은 설움을 당했다 한다. 본사로부터 정지 처분을 받은 일도 여러 차례였다. 넉넉지 못한 생활이었음은 그가 34살이 될때까지 여섯 번이나 이사를 다녔던 것으로도 능히 짐작이 된다. 그러면서도 일본 휴학까지 마친 김성수와는 극히 대조적으로 그때까지는 정주군 밖으로 집을 옮긴 일은 없었다. 그의 학력은 한문 공부뿐이었고, 한학을 가르치는 글방 훈장 노릇도 하였다 한다. 그러다가 수지 안 맞는 동아일보직국을 그만두고 광산에 손댄 것이 성공하여 백만장자가 된 것이다."
방응모는 신문 대금 미납으로 동아일보 본사로부터 정지 처분을 여러 번 받자 서울까지 찾아가서 사정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개하여 "어디 10년 후에 두고 보자"라는 원망 섞인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제 그 한풀이가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방응모는 ‘동아일보’를 추격하기 위해 편집진을 동아일보로부터 스카우트하여 동아일보의 신경을 건드렸고, 1935년 6월엔 ‘조선일보’가 김성수가 교장으로 있는 보성전문의 신입생 초과 문제, 그리고 역시 김성수가 교주인 중앙고보의 학생 11명이 경찰에 구속되어 재판에까지 이르게 된 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하였다. 그리하여 두 신문 사이의 싸움은 공개적인 이전투구의 양상으로 번졌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는 두 신문의 앙숙 관계는 이때의 싸움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한국외국어대 교수 정진석은 방응모의 경영 전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방응모는 조선을 인수한 후 편집진을 동아로부터 스카웃하고 판매 활동도 적극적으로 벌여 동아에 타격을 주었다. 동아에서 오랫동안 중추적 역할을 맡았던 이광수,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무더기로 끌어들였다. 방응모는 자신이 내세울 만한 학력을 갖지 못한 데 대한 보상심리였던지 학벌이 좋은 사람을 즐겨 채용했다. 그 중에도 사립 학교 출신보다는 관립대학 출신에 비중을 두어 조선일보 사원 가운데는 관립대학 출신자가 동아나 매일신보에 비해 많은 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 세평은 방응모의 이러한 인사 정책을 '간판주의' 정책의 한 표현이라고 꼬집을 정도였다. 어쨌든 방응모가 신문을 맡은 후 조선일보의 사세는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동아, 조선의 이러한 경쟁 상태는 마침내 1935년 6월에 공개적인 정면 격돌로 폭발하여 뜻있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 방응모 경영 이후 ‘조선일보’는 동아를 앞지르기 위해 신속한 호외를 자주 발행하여 경쟁은 더욱 가열되었다. 동아일보는 1931년 11월에 ‘신동아’, 1933년 1월에 ‘신가정’ 등의 월간잡지를 창간하여 발행해 오고 있었는데, 조선도 1935년 6월에 사옥을 준공한 후 ‘조광’을 창간(11월)한 데 이어, ‘여성’(1935년 4월), ‘소년’(1937년 4월), ‘유년’(1937년 9월) 등을 계속 창간하여 신문과 잡지 양면으로 경쟁이 확대되었다."
말이 나온 김에 ‘신동아’ 이야기를 빼놓을 순 없겠다. 1931년 11월에 나온 ‘신동아’ 창간호는 발매 부수가 2만 부를 돌파하였고 제3호부터는 1만 부에서 9천 부선으로 고정되었다. 당시 발행되던 잡지들의 발행 부수가 많아야 2~3천 부 수준이고 ‘동아일보’를 비롯한 일간지들의 발행 부수가 10만을 넘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건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비판의 소리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한국외국어대 교수 정진석은 이렇게 말한다.
"20년까지는 신문이 편집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나 30년대 무렵부터 영업 중심으로 바뀌어 수지타산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는데, 잡지 역시 그런 경향을 보이고 있었으며 ‘신동아’도 바로 그런 경향을 띠게 되었다는 비판이었다. 또한 ‘동아일보’의 지면을 이용한 ‘신동아’의 대량 선전과 지국의 활용으로 인해 독립된 잡지사가 발행하는 의견 잡지는 존립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다는 비판도 있었다."
방응모의 공격적인 경영은 동아일보를 바짝 긴장시켜 '기생관광'이라는 희한한 수법까지 동원하게 만들었다. 1934년 동아일보는 광고주인 일본의 제약, 제과, 화장품 회사의 간부 20여 명을 초청해 기생관광을 시켜 주었는데, 나중엔 조선일보까지 이 수법을 동원해 두 신문 간의 경쟁은 그야말로 '이전투구'를 방불케 했다. 이러한 광고 유치를 둘러싼 추태에 대해 문인 김동인은, 민간지들이 이윤 추구를 위해 '매족적 행위'을 일삼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즈음 신물들의 지면과 광고 비중은 크게 늘었다. ‘동아일보’의 경우 창간 초기에는 4면을 발행하였으나 1925년 8월에 6면으로, 1929년 9월에 8면으로, 1936년 1월에는 조, 석간 12면으로 증명했다. 동아일보의 전체 수입 가운데 광고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은 1920년에는 32%였으나 1930년에는 40%까지 올라갔으며 1940년에는 45%까지 올라갔다. 일제하에서 ‘동아일보’에 게재된 광고 내용을 생산지에 따라 구분하면, 조선 상품이 25.1%, 일본 상품이 67.8%, 미국 상품이 5.6%를 차지하였다.
일장기 말소 사건
1936년 8월 일장기 말소 사건은 신문들의 활동을 더욱 위축시켰다. ‘동아일보’는 8월 25일 자 지상에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사진을 게재하면서 가슴에 그려진 일장기를 말소하였는데, 이로 인해 ‘동아일보’는 무기 정간 처분을 당했으며 사장 송진우와 부사장 장덕수가 사직하였던 것이다.
일장기를 말소한 손기정의 사진을 먼저 게재한 신문은 여운형이 운영하던 ‘조선중앙일보’였다. 손기정의 우승 소식은 국내에 8월 10일에 전해졌는데 ‘조선중앙일보’도 8월 13일 자 지상에서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게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진을 선명치 않아 아무 일 없이 넘어갔다가 ‘동아일보’ 사건이 터지면서 알려져 ‘조선중앙일보’도 같이 무기 정간을 당하게 되었다.
‘동아일보’는 1937년 6월 1일, 무기 정간을 당한 지 279일 만에 복간되었으나 ‘조선중앙일보’는 재정 상태가 악화되어 정간은 해제되었지만 끝내 복간을 못 하고 1937년 11월 5일 허가의 효력 상실로 폐간되고 말았다. ‘신동아’도 ‘동아일보’와 같이 정간된 이후 복간되지 못했다.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는 체육부 기자 이길용에 의해 이뤄졌는데, 그는 후에 잡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 "단순히 충동적이고 우발적으로 일장기를 지웠다"고 고백했다. 사건이 터지자 사장 송진우는 이길용을 불러 놓고 "성냥개비로 고루거각을 태워 버렸다"고 큰 호통을 쳤으며, 이 소식을 들은 김성수도 "히노마루(일장기) 말소는 몰지각한 소행"이라면서 노여움과 개탄을 금치 못했다. 그 후 송진우는 무기 정간 해제를 위해 총독부 고관들에게 이 사건은 일개 기자의 독단에 의해 저질러진 몰지각한 행위에 불과하다고 하소연했으며 급기야 이길용 등 13명의 사원을 해고했다. 그러나 나중에 동아일보는 이 사건을 '민족지'의 증거로 두고두고 자랑하였다.
조선, 동아의 일제에 대한 충성
전쟁 준비에 광분하던 일제는 1937년부터 한국인을 일본 천황의 백성으로 하려는 이른바 황국신민화 운동을 벌였으며 뒤이어 우리말 사용 대신 일어 사용 그리고 창씨개명 등을 강요하였다.
그런 상황과 맞물려 ‘동아일보’는 일장기 말소 사건 후 일제의 압력에 굴복하여 친일어용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조선일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으며, 이 신문들은 1938년 이르러선 사설을 통해 ‘대일본제국 군대’에 지원할 것을 설득하였다. 예컨대, ‘조선일보’는 1938년 6월 15일 자 사설을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조선 통치 사상에 한 에포크 메이킹이요 미나미 총독의 일대 영단 정책하에 조선에 특별지원병 제도가 실시되게 된다는 데 대하여 이미 본란에 누차 우리의 찬사를 표한 바 있거니와... 요컨대 금번 지원병 제도의 실시는 위정 당국에서 상으로 일시동인의 성려를 봉체하고 하로 반도 민중의 애국 열성을 보아서 내선일체의 대정신으로 종래 조선 민중의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던 병역 의무의 제일단계를 실현케 하는 것이다. 황국신민된 사람으로 그 누가 감사치 아니하랴. 다만 오늘의 개소식을 당하야 특별히 이번에 엄선으로 선발된 지원 병사들은 이와 같은 중대하고 심원한 의의를 가진 제도를 특별히 실시하는 초기에 있어서 제1차 훈련생인 만치 그 책임이 중차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과잉 충성에도 불구하고 두 신문은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일본이 본격적인 전시 체제에 들어가면서 1940년 8월 10일에 폐간당하고 말았다. 당신 폐간당하는 마지막 장면을 김을한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양대 민족신문은 8월 11일자(1일 석간) 신문을 폐간호로 하여 각각 8면씩을 발행했는데 지령은 ‘조선일보’가 제6,923호, ‘동아일보’가 제6,819호였으며, 발행 부수는 조선 6만 3천, 동아 5만 5천이었다(1940년 2월 15일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 조사). 그때 기자들은 마지막 기사를 쓰며 울었으며, 사장 이하 많은 사람들이 폐간호를 인쇄하면서 돌아가는 윤전기를 붙들고 통곡하였다. 그런데 동아, 조선 두 신문을 강제로 폐간시킨 대가로 총독부 당국에서는 동아일보사에는 50만 원을, 조선일보사에는 80만 원을 각각 지불하였다. 그것은 두 신문사의 윤전기 기타 시설을 인수하고 사원들의 퇴직금 등을 보상하는 뜻에서 준 것인데, 조선이 동아보다도 30만 원이나 더 받은 것은 고속도 윤전기를 새로 구입하고 여러 가지 시설에서 돈이 많이 든 것을 평가한 때문이었다."
조선일보는 폐간 후 ‘조광’ 등 월간잡지와 단행본 출판 사업을 계속했는데, ‘조광’은 44년 말 발행을 중단하기까지 일제를 찬양하는 데에 앞장섰다. 방응모는 물론 김성수도 본격적인 친일 행각에 나서게 된다.
이중 방송 실시와 '단파 방송 밀청 사건'
라디오 방송은 1930년대에 하드웨어 측면에서는 큰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건 그만큼 라디오 방송이 일제의 선전 도구로 활용된 정도가 크다는 걸 의미할 뿐이었다.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이중 방송은 1933년 4월 26일부터 실시되었으며 방송 시간도 1일 16시간으로 크게 늘어났다. 한, 일 양국어 혼합 방송 시대인 1932년에 약 2만 명이던 청취자 수는 한국어 방송이 독립 분리된 이중 방송 후에는 3만 명으로 대폭 증가했다.
이중 방송이 실시되기 전까지 약 6년여 동안의 방송 시설은 '라디오의 아버지'라 할 마르코니가 공급해 준 것이라고 한다. 마르코니 부부는 1935년 11월 25일 특별열차 편으로 서울에 도착해 기자 회견을 가진적이 있는데, 당시 ‘조선일보’ 11월 25일 자는 마르코니가 "무선 시대 다음에는 TV 시대가 온다"고 이야기했다는 걸 전하고 있다.
경성방송국이 개국한 이래로 8년 7개월간 조선에는 경성방송국 하나뿐이었다. 1935년에 이르러서야 부산방송국(9월 21일)이 개국했고 뒤이어 1938년까지 평양(36년 11월 15일), 청진(37년 6월 5일), 이리(38년 10월 1일), 함흥(38년 10월 30일) 방송국 등을 차례로 개국했는데, 그 결과 라디오 수신기는 1936년 말에 7만 3천여 대, 1937년 말에는 11만 1천여 대에 이르렀다.
라디오 방송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자 조선총독부는 방송 통제를 더욱 강화하였으며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일제는 본격적으로 방송을 국민 동원과 전시 선전의 도구로 삼기 시작햇다. 조선총독부는 황국 신민화, 내선일체, 일본어 상용 등의 명분을 내걸어 우리말 뉴스 방송에서도 일본어 혼용을 강요하였고 ‘궁성요채의 시간’이니 ‘심전개발’이니 하는 프로그램을 방송토록 하였다.
1940년 동아, 조선일보의 폐간으로 인해 라디오 방송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고 청취자도 더욱 증가하였다. 청취자 등록은 1940년 10월 22일 자로 20만 명을 넘었는데, 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는 20만 명 돌파를 경축하는 대대적인 행사를 벌였다. 1940년 이후 방송망도 대대적으로 확충되었다.
1942년 3월까지 대구방송국(41년 10월 30일), 강릉방송국(41년 12월 1일), 마산방송국(42년 2월 20일), 개성방송소(42년 3월 1일), 서산방송소(42년 3월 1일), 장전방송소(42년 3월 1일), 광주방송국(42년 3월 20일), 목표방송국(42년 11월 1일), 원산방송국(43년 4월 10일), 대전방송국(43년 7월 15일), 해주방송국(43년 8월 1일), 신의주방송국(43년 8월 1일), 성진방송국(43년 11월 1일), 춘천방송국(44년 12월 20일), 청주방송국(45년 6월 16일) 등이 개설되었으며, 수신기 수는 1943년 7월에 28만 5천여 대에 이르렀다.
1942년 말에 발생한 이른바 '단파 방송 밀청 사건'은 당시 일제가 정보 통제에 얼마나 큰 신경을 썼는지 잘 보여준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총독부는 '외국 단파 방송 청취 금지령'을 공포하고 그 단속을 강화했지만, 그래도 방송국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신되는 ‘미국의 소리’ 방송을 듣곤 했다. 일제는 1942년 12월 말에는 이듬해 초까지 대대적인 검거를 해 150명 가까운 방송인들과 정객과 민간이 150명 해서 300여 명이나 되는 한국인을 체포해 이 가운데 75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의 의미에 대해 한국외국어대 교수 정진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사건은 일제하의 방송이 일본인들의 주도로 시작되었고 1930년대로 넘어오면서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대변하고 침략의 도구로도 활용되었으나 방송국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이 살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일제하의 방송도 한국 방송사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