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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부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제4장 유림(儒林)

Bollnow 2024. 4. 24. 07:42

6부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4장 유림(儒林)

 

잔뜩 회색 잿빛 구름으로 뒤덮여있던 하늘은 오후가 되자 마침내 푸득푸득 털갈이하는 짐승에서 털이 뜯겨져 나가듯 싸락눈이 흩날리기 시작하였다.

어제부터 공묘(孔廟)와 공부(孔府)를 순회하여 마지막 코스인 공림(孔林)에 이르렀으므로 나는 적잖이 지쳐있었다.

공묘는 곡부성 안에 있는 공자의 묘당(廟堂). 공자가 작고한 1년 뒤 노나라의 애공이 공자가 살던 집 3칸을 개축하여 사당으로 만들고 세시봉사(歲時奉祀)케 한 것이 공묘의 시작인데, 청나라 때인 1730년에 개축된 공묘는 대성전(大成殿)으로 불릴 만큼 공자 사당의 총본산이었다.

흰 돌로 된 이중계단 위에 노란 유리기와를 이은 이중 팔작지붕은 중국에서도 북경의 태화전(太和殿)과 태안(泰安)의 천황전(天殿)을 비롯한 3대 건물로 손꼽힐 만큼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대성전의 중앙에는 지성선사(至聖先師)’라는 편액과 함께 그 안에 공자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 양편에는 사배(四配)라 하여 안회, 증삼, 자사, 맹자의 조상과 십이철이라 불리는 민손, 염옹, 단목사를 비롯하여 송나라의 주희에 이르기까지의 조상이 배열되어 있어 역대 유가에서 전해오는 선현들이 모셔져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공부(孔府)는 공자 후대의 장자와 장손들이 살고 있던 공씨 가문의 사저. 공자가 죽은 후 2000년 이상 이곳에서 살고 있던 공씨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습봉택(襲封宅)이었다.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살았던 공씨의 후예는 77대손인 공덕성(孔德成). 타이완으로 망명하기까지 이곳에서 살던 공자의 마지막 종손이었다. 그러나 인구 61만 명의 곡부는 대부분 공씨의 성을 가진 공자의 후예로, 오늘날 이들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술인 공부가주(孔府家酒)를 만들어 막대한 이윤을 남기고 있다.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공묘와 공부, 그리고 공림은 오직 공자의 고향이라는 이유만으로 중국의 전역과 세계 각지에서 모여드는 관광객의 수입으로도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고, 그뿐인가, 대성전 중앙에 걸려 있는 문자 그대로 세계의 3대 성인이었던 지성선사(至聖先師), 공자의 학문보다는 공자의 이름을 딴 술을 만들어 중국 최고의 명주를 만들어 파는 공자 후예들의 상술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곡부 제일의 문화유산은 내가 지금 찾아가고 있는 공림(孔林).

공림이 곡부에 남아있는 공묘, 공부, 안묘(顔廟), 주공묘(周公廟), 소호릉(少昊陵) 등의 많은 문화재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그곳에 공자의 무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공묘를 비롯하여 공부와 공자의 고택들은 모두 둘레 5.5의 고성 안에 산재하고 있었지만 공림은 도성 북문에서 북쪽으로 약 1.5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는 공림은 공자와 77대 후손에 이를 때까지의 후손들이 묻혀있는 가족묘지로 도성 외곽지대에 자리 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지친 발길을 터덜거리며 북부에서 뻗어 내린 공로(公路)를 따라 걸었다. 이 공로는 원래 곡부성 안으로 통하는 주작대로였고, 옛날부터 신도(神道)라고 불렸듯 신성한 통로였다. 길 양편에는 수백년이 되었을 법한 고백(古柏)들이 열병식을 올리듯 늘어서 있었다.

신도 중간에는 여섯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석비방(石碑坊)이 세워져 있었다. 기둥 아래로는 용과 봉황, 기린, 사자들이 정교하게 여러 가지 형태로 조각되어있는 오문비방(五門碑坊)이었는데, 그 중간에는 만고장춘(萬古長春)’이란 네 글자의 액자가 걸려 있었다. 그 액자의 문자를 따 장춘방(長春坊)’이라고도 부르는 그 석비를 본 순간 나는 지친 걸음을 멈추고 잠시 새삼스러운 감회에 젖어 들었다.

만고장춘(萬古長春).

편액에 걸린 내용대로 세상에 유례가 없을 만큼 긴 꿈’. 만고에 영원히 이어갈 만한 길고 긴 꿈.

2500여년 전, 바로 이곳에서 태어난 공자가 이루어낸 동양철학의 골수 유교는 어쩌면 한바탕의 길고 긴 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자가 이뤄낸 한바탕의 꿈, 유교는 여전히 사라지지 아니하고 동양 정신의 위대한 유산이 되었으며, 마침내 우리나라에 이르러 조광조를 비롯한 경세가들에게는 왕도정치의 근본이 되었고, 이퇴계를 비롯한 사상가들에게는 서양철학과 맞설 수 있는 유일무이의 동양적 가치관으로 정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편액을 본 순간 나는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무게로 짓눌러 오는 피로감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었다.

그렇다.

공자의 무덤인 공림으로 가기 위해서 터덜거리며 걷고 있던 내가 지친 것은 어제부터 공묘와 공부를 들러 최종 목적지인 공림으로 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짧은 공간이동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3년간 나는 공자에 의해서 창시된 유교가 어떻게 맹자와 주자를 거쳐 형이상학적으로 발전되었는가, 2000년의 궤적을 추적하였으며, 마침내 그 유가 사상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조광조를 비롯한 정치가들에게는 통치이념으로, 또한 해동공자 이퇴계에 이르러서는 메타피직(metaphysics)화 되어 어떻게 논리적으로 완성될 수 있었는가 하는 그 과정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던 것이다.

이제 3년여에 걸친 그 추적은 마침내 공자의 무덤인 공림을 참배하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공림은 내게 있어 공간이동의 종착점일 뿐 아니라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역주행하였던 2500년에 걸친 시간 이동의 꼭짓점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의 무덤이 있는 공림에 들러 공자를 참배하는 것은 내게 있어 한없는 세월(萬古)의 오랜 과거로부터 시작되어 온 유가의 긴 꿈(長春)에서 벗어나 현실로의 눈을 뜨는 공양미 300석과 같은 순례행위인 것이다.

마침내 공림 앞 광장이 드러났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초2월의 쌀쌀한 늦은 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장 앞은 관광객으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고, 그들을 상대로 한 장사꾼들의 아우성 소리가 시끌벅적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다가오는 나를 보자 장사꾼들은 용케도 나를 외국에서 온 이방인으로 알아보았고, 그러자 벌떼처럼 일어나 나를 에워쌌다.

“1000, 1000. 싸다,

장사꾼들은 서로 손에 물건을 들고 나를 물어뜯을 것처럼 공격하였다. 그중에서 내 눈에 띈 것은 수레를 끌고 다니는 노점상이었는데, 그들은 수레 위에 붉은색이 나는 과일을 들고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물론 생수병을 들고 있었으나 갈증이 났으므로 나는 그 노점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것은 과일이 아니라 무였다.

이곳 지방의 특산물로 껍질을 벗기면 그 속이 수박처럼 새빨간 홍무였다. 나는 홍무를 하나 사서 껍질을 벗겨주기를 기다려 천천히 그것을 씹었다.

무라고 하기에는 달콤하고, 과일이라고 하기에는 무미한 홍무를 나는 디즈니만화에 나오는 토끼처럼 씹어 삼켰다.

원래 사기에는 공자가 노나라 도성 북쪽 사수(泗水)가에 매장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의 장면을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자는 노나라의 북쪽 사수가에 매장되었다. 제자들은 모두 3년간 상을 입었다. 3년간의 심상(心喪)을 끝내고 서로 이별하려 할 때에는 소리 내어 울었다.”

따라서 공자의 무덤이 사기에 기록된 대로 도성의 북쪽인 이곳에 묻혀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증명이 되는 명확한 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무덤이 도성 북쪽에 있다는 기록은 오늘날에도 입증되는 사실이나 무덤 곁에 사기에 기록된 대로 사수라는 강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불분명하다.

다만 오늘날 공림 안에는 수수(洙水)라고 불리는 개울이 흐르고 있는데, 이는 강이라기보다는 작은 도랑에 불과하므로 아마도 사기에 기록된 사수는 물길이 끊겨 지도상에서 사라져 버린 듯 보인다.

또한 사마천은 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노나라에서는 대대로 매년 공자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다. 많은 유자들이 공자의 무덤 앞에서 예를 익혔고, 향음(響音:향악의 우등생을 군주에게 추천하는 예식), 대사(大射:향인의 궁술시험) 등의 예를 행했다. 공자의 무덤은 1(一頃)이었다. 제자들이 기거했던 당은 후세의 묘로 남아 공자의 옷과 관, (), (), ()를 보관했다. () 대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200년이나 존속되었다. 한나라의 고조가 노나라에 들렀을 때에는 태뢰(太牢:, , 돼지)를 갖추어 제사를 지냈다. 경상(卿相) 등이 이 땅에 오면 언제나 공자의 무덤에 먼저 참배한 뒤에야 정사를 보았다.”

이렇듯 공자의 묘는 한() 대에 이미 존재하였으며, 한나라의 고조가 제사를 지냈던 그 당시 이미 사방 1(1경은 100)에 해당되는 거대한 묘역으로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마천의 기록이 정확하다면 유방(劉邦)이 한나라를 건국한 것은 BC 206. 그러므로 기원전 479년에 공자가 죽었고, 또한 시황제에 의해서 유교가 핍박을 받아 초토화되었다 하더라도 공자의 사후 200여 년에 이미 공자의 무덤은 거대하게 조성되어 있었고, 한고조 유방은 이 무덤 앞에서 천자가 사직을 제사 지낼 때 갖추는 가장 융성한 제물들을 바치는 제사를 올렸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자신이 농민 출신이었으므로 평소에 지식을 갖춘 학자들을 경멸하여 학자들의 관에 오줌을 누며 혐오감을 표시하기도 했으나 마상(馬上)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마상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라는 신하의 간언을 접하고 유교의 예를 받아들여 유교를 국교로 정하였던 유방.

그뿐인가.

사마천 역시 공자세가후기에서 노나라로 직접 가서 그의 묘당에 있는 거복(車服)과 예기(禮器)도 보고 여러 유생들이 공자의 옛집에서 공자의 예를 익히는 것도 구경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사마천의 생존 때 벌써 공묘와 공부, 그리고 공자의 무덤이 성지로 보존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각지에서 모여드는 유생들의 순례지로 각광 받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공림으로 들어가는 입장권을 사기 위해 매표소 앞에 섰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관람객들은 단체권을 사기 위해 이미 길게 줄이 서 있었다. 줄을 선 나를 보고 복무원이란 팻말을 단 젊은 여성들이 다가와 안내를 자청하였다.

그들은 공림을 안내하는 일종의 관광가이드였다. 중국정부에서는 현지인들의 수입을 보장해 주기 위해서 모든 명소들의 안내를 이처럼 현지인들에게 할당해 두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현지인들에게 작은 수익이라도 보장해 주려는 안간힘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들의 안내를 받기보다는 홀로 공자의 무덤을 참배하고 싶었으므로 그들의 집요한 접근을 무표정한 얼굴로 차단시켰다. 표를 사들고 공림의 전문(前門)이라고 할 수 있는 대림문(大林門) 안으로 들어서려 하자 이번에는 인력거꾼들이 나를 막아 세웠다.

공림의 크기는 자그마치 20ha나 되는 거대한 숲.

공림은 이림(裏林)과 외림(外林)의 두 구역으로 나눠지는데, 공자의 무덤은 이림 한가운데 있다. 공림의 대문인 대림문에서 이림의 입구까지는 건강한 사람이라도 15분 이상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야 하는 먼 길이었다. 지친 나는 순간 인력거를 타고 싶은 강렬한 유혹을 느꼈으나 이를 물리치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중간에 있는 지성림(至聖林)이라는 금빛 글씨가 새겨져 있는 대문을 들어서자 붉은 담으로 이어지는 협도가 나타났다. 이 협도를 따라서 늘어선 수많은 노점상들이 한꺼번에 소리를 지르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한결같이 조악한 물건들이었다.

모택동의 사진, 싸구려 도장, 해바라기 씨, 펄쩍펄쩍 뛰는 대나무로 만든 인형, 공자의 초상, 울긋불긋 색칠한 돌멩이 등 도무지 용도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상품들을 들고 공자의 후예들은 한 푼이라도 더 팔기 위해서 소리 높여 외치고 있어 마치 시장판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협도는 지성림문(至聖林門)에서 끝이 났다. 이 문은 원래 옛 노나라 도성의 북문에 해당되는 자리였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공자가 13년 동안의 주유열국을 끝내고 BC48468세의 나이로 고향인 곡부로 돌아올 때 사용했던 문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제자들이 어째서 북문을 이용하여 도성 안으로 들어가는가를 의아해하였지만 13년 동안의 천하 유세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공덕도 이루지 못하고 초라하게 상갓집의 개처럼 돌아오는 공자로서는 남의 눈에 띄지도 않고 스스로의 자괴감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이처럼 북문으로 입성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한 것은 공자의 위대한 지성(至聖)은 오히려 68년간의 전생보다는 초라하게 돌아와 7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기까지의 5년 동안의 짧은 후생에 완성된 것이었으니, 이는 마치 예수가 30살의 나이에야 공생활을 시작하여 3년 만에 그리스도로 부활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5년의 짧은 기간이야말로 성인으로서 공자가 완성되는 중요한 공생활 기간이었던 것이다. 5년 동안의 짧은 공생활 동안 공자가 한 일은 현실정치에 대한 집념을 완전히 단절하고 제자들의 교육에만 전념하는 한편 만인의 교과서가 될 경서들의 편전에만 몰두하였던 것이다.

13년 동안의 방황을 통해 공자는 실제로 현실정치를 통해서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각성하였던 것이다.

공자가 처음 노나라로 돌아왔을 때 애공은 정치에 대해서 묻는다.

그러자 공자는 정치란 신하를 잘 선택하는 일입니다.’라고 간단하게 대답하였을 뿐이었다.

또한 실권자였던 계강자가 도적들의 횡행을 근심하자 공자는 그에게 이렇게 쏘아붙인다.

적어도 그대만이라도 탐욕을 버리지 않는다면 도적에게 상을 준다하더라도 그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공자에게 한 가닥 미련을 갖고 있던 노나라 왕실과의 완전한 결별이었다. 이에 대해 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노나라에서도 공자를 끝내 등용해 쓰지 않았다. 공자 또한 벼슬 구하는 일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이런 기록은 사마천의 주관적인 해석처럼 보인다.

공자가 지성림문이라 불리는 저 북문을 통하여 68세의 나이로 고향으로 돌아올 때에는 이미 현실정치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있었으므로 사기에 기록된 대로 그것은 포기가 아니라 마치 십자가에 못 박히는 듯한 결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공자에 있어서 새로운 부활이었다.

이에 대해 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자의 시대에는 이미 주실(周室)은 쇠미해져 있었고, ·악은 황폐해졌으며, 시서(詩書)는 흩어져 없어졌다. 그래서 공자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하··주의 3대의 예를 주석하고 고서, 전기들을 정리했으며, 위로는 요순의 시대로부터 시작해 아래로는 진()의 목공에 이르기까지 순서에 따라 정리 편찬하였다.”

지성림문 안으로는 동서쪽으로 뻗으면서 공림을 한 바퀴 도는 환림로(環林路)가 있었다. 이 환림로의 길이는 5. 공림의 외림은 여기에서 끝나고 또다시 공자의 무덤이 있는 이림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림과 외림의 분기점은 지성림문에서 100m 거리에 흐르고 있는 수수(洙水). 말이 강이지 실제로는 개울처럼 보이는 이 도랑 위에는 수수교(洙水橋)라고 불리는 작은 다리가 놓여 있었다.

대문에서 인력거를 타고 온 사람은 일단 이곳에서 하차하는데, 인력거꾼들은 손님을 내려주고 다시 공자의 무덤에서 나오는 환림로 출구 쪽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의 손님을 태우고 돌아가는 모양으로, 다리 입구에는 인력거에서 내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털갈이하듯 푸득푸득 내리던 싸락눈은 어느새 알이 굵어져 있었다. 날씨가 풀렸는지 굵어진 눈발에는 촉촉한 물기마저 스며들어 있었다.

나는 눈이 내리는 수수교를 천천히 지나 이림 안으로 들어서면서 생각하였다.

사마천은 고향에 돌아온 공자가 ··3대의 예를 주석하고 고서, 전기들을 정리하였으며, 위로는 요순의 시대로부터 아래로는 진의 목공에 이르기까지 순서에 따라서 정리 편찬하였다.’라고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5년의 짧은 기간 동안에 시(), (), (), (), (), 춘추(春秋) 등 육경(六卿)이라고 불리는 유교의 경전을 스스로 편찬하였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불가사의한 일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공자와 더불어 세계의 3대 성인 중에 하나인 부처는 8만의 설법을 하였으면서도 그 자신은 단 한 편의 경전을 완성하였던 적은 없다. 이는 예수도 마찬가지로 불경이나 성경들은 모두 부처와 예수가 죽고 난 뒤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집대성되고 제자들에 의해서 기록되어 편찬되었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스스로 창시한 유교의 경전을 제자들의 몫으로 넘기지 아니하고 스스로 살아 생전에 제자들과 더불어 편찬하였던 것이다.

그중 공자가 직접 지은 책은 역사책이라 할 수 있는 춘추(春秋)’이다.

공자는 위로는 요순의 시대로부터 아래로는 진의 목공에 이르기까지 순서에 따라 역사를 저술함으로써 후세의 정치가들에게 역사를 거울로 삼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포폄(褒貶)의 뜻을 담아 춘추를 썼던 것이었다. 13년 동안의 주유천하에서도 현실정치를 바로잡지 못하였던 공자는 중국 최초의 역사서인 춘추를 저술함으로써 역사 속에 깃들인 미언대의(微言大義)를 통해 현실정치의 모순을 지적하려 함이었던 것이다.

공자가 춘추를 저술할 때 얼마나 공을 들였는가는 사기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공자는 관직에 있을 때 소송이 들어오면 고소문 한 장 쓰는 데도 혼자서 하는 일 없이 반드시 동료들과 의논했었다. 그런데 적어도 춘추를 저술할 때는 가필과 삭제를 오로지 혼자 했다. 자하(子夏)처럼 문장력이 뛰어난 제자라도 스승의 저작에 글자 한 자 가감할 수가 없었다.”

공자가 얼마나 비장한 각오 아래 춘추의 저작에 몰두하였는가는 춘추가 완성되자 그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만의 힘으로 저술한 춘추를 제자들에게 보여준 후 공자가 하였던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후세에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춘추에 의해서일 것이다. 후세에 나를 죄 주는 것도 오직 춘추를 통해서일 것이다(知我者 其惟春秋乎 罪我者 其惟春秋乎).”

맹자 역시 등문공 하편에서 공자가 후세에서라도 자신의 정치적 이상의 실현을 기대하고자 자신의 뜻을 담은 춘추를 지었음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도가 쇠미해지고 사설(邪說)과 폭행이 생겨나며, 신하로서 자기 임금을 죽이는 자가 생기고, 자식으로서 그 애비를 죽이는 일이 생겨나니, 공자는 두려워서 춘추를 지으셨다. 춘추는 천자로서의 할 일이다.”

이처럼 춘추가 공자가 직접 지은 유일한 경서라면, 나머지 경전들은 사마천의 이미 주실은 쇠미해져 있었고, ·악은 황폐해졌으며 시·서는 흩어져 없어졌다. 그래서 공자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하··주의 3대의 예를 주석하고, 고서·전기들을 정리하였다.’라는 기록처럼 공자가 이를 안타깝게 여겨 그 무렵 전해 내려오던 시()들과 노래(), ()와 서(), 그리고 역() 등을 총정리하여 집대성 해놓은 경전들이었던 것이다.

그 중 시경(詩經)’은 중국 최초의 시가집으로 중국문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유가의 경전 중 하나인데 논어에 보면 이에 대해 공자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위나라로부터 노나라로 돌아온 뒤에야 음악이 올바르게 되고 아(), ()이 제각각 올바른 자리를 찾게 되었다.”

사기에 의하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던 3000여 편의 시 중에서 공자는 중복되는 것을 빼어내고 예의에 합당하는 305편의 작품만을 취하여 시경을 편찬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공자는 평소에도 시의 중요성에 대해 논어 속에서 이렇게 술회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대들은 왜 시경을 공부하지 않는가. 시는 사람의 감흥을 일으켜주고, 사물을 올바로 보게 하여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게 하며, 은근히 불평을 할 수 있게 한다. 가깝게는 어버이를 제대로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올바로 섬길 줄 알게 하며, 새나 짐승, , 나무들의 이름도 많이 알게 한다.”

공자가 이처럼 시를 사랑하여 시경을 편찬하였던 사실은 훗날 시경이 유가의 가장 중요한 경전 중의 하나로 자리를 차지하는 결과를 낳게 한다. 이로 인해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시가 크게 성행하여 중국 전통문학의 중심을 이루며 발전되는 문화 혁명의 교과서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공자야말로 이처럼 위대한 사상가였을 뿐 아니라 정치가, 교육자, 역사가, 음악가, 그리고 문학가라고 불릴 만큼 전인적(全人的)인 세계인, 즉 코스모폴리탄이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공자가 고향으로 돌아온 만년의 5년간은 비교적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안정적인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불행이 연속적으로 겹치던 화불단행(禍不單行)의 고난기였다. 이 고난기 속에서도 늙은 공자가 그처럼 놀라운 열정을 가지고 육경을 편찬하였다는 것은 한마디로 기적적인 일인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다음해인 기원전 483, 공자의 나이 69세 되던 해. 그의 외아들 공리(孔鯉)50세의 나이로 먼저 죽는다.

공자는 부인과 헤어져 혼자 살고 있었으므로 만년에 유일하게 의지하던 외아들마저 잃게 되었으니 한순간에 사고무친(四顧無親)의 독거노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그다음 해에는 공자가 가장 사랑하였던 제자 안연(顔淵)이 죽은 것이다. 안연은 아버지와 함께 공자에게 배웠던, 공자보다 30세 아래인 수제자. 논어를 통해 보면 여러 제자들 중에서도 안연만은 여러 번 드러내 놓고 칭찬하고 있으며, 자기가 평생 이루지 못한 이상을 대를 이어 이뤄줄 제자로 기대하고 있었던 단 하나의 후계자였던 것이다.

너무나 가난하여 29세인 젊은 나이 때 온 머리가 하얗게 세었던 안연에 대해 공자는 극찬하고 있었다. 안연이 죽은 바로 직후 제자들 중에서 누가 학문을 좋아합니까.’하고 애공이 묻자 공자는 대답한다.

안연이라는 사람이 학문을 좋아해서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고, 과실을 거듭 범하지 않았었는데, 불행히도 단명하여 죽어버렸습니다. 지금은 죽어 없으니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연 역시 스승 공자를 하늘처럼 존경하고 우러르고 있었다. 사기에는 안연이 스승 공자를 향해 공경하였던 내용이 고스란히 전재되어 있다.

선생님의 도는 우러러볼수록 더욱 더 높다. 구멍을 뚫고 들어갈라치면 그 벽은 더욱 굳으며, 앞에 있는가 하면 홀연히 뒤에 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사람을 순서대로 유도하여 이끄신다. ()으로 나의 소견을 넓혀주시고 예()로써 나의 행위를 규제하여 주셨다. 나는 그만두려 해도 그만둘 수 없이 선생님을 따라 나의 재능을 다하도록 만드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선생님이 저 높은 곳에 우뚝 서 계시다는 것을 알았으나 선생님을 따라 그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 높고 먼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수제자 안연이 죽자 공자는 자신의 이상이 단절되는 비통함을 느낀 듯 소리 내어 울면서 이렇게 탄식하였다고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은 기록하고 있다.

내가 안연을 제자로 가지게 된 뒤부터 다른 제자들이 더욱 더 나와 다정하게 지낼 수 있었는데

그러고 나서 공자는 통곡하면서 다음과 같이 통탄한다.

아아,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噫 天喪予 天喪予)”

논어의 선진(先進)편에는 안연이 죽었을 때 공자가 취했던 장면을 보다 극적으로 전하고 있다.

안연이 죽자 공자께서 통곡을 지나치게 하셨다. 모시고 있던 사람들이 말하였다.

선생님, 통곡이 지나치십니다.’

그러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통곡이 지나치다고, 그런 사람을 위해 통곡이 지나치지 않으면 또 누구를 위하여 통곡하겠느냐.’”

그뿐이 아니었다.

안연이 죽은 2년 뒤 이번에는 또 다른 제자인 자로마저 죽는다. 안연이 공자의 사상을 계승할 수제자라면 자로는 제자 중에 성격이 가장 곧고 용감하여 13년 동안의 주유천하 중에서도 줄곧 공자를 호위하였던 애제자였다. 일찍이 공자 자신이 도가 행하여지지 않아 뗏목을 타고 바닷속을 들어간다 해도 나를 따를 자는 자로뿐일 것이다.’라고 신임하였던 애제자였던 것이다.

공자가 초라하게 노나라로 돌아왔을 때도 자로는 끝까지 스승을 호위하였는데, 임무를 완수하자마자 곧 위나라로 가서 공회()의 읍재가 되었다. 그러나 위나라에 내란이 일어나 위기에 처하게 되자 이 소문을 듣자마자 공자는 자로가 곧 죽겠구나.’하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는 논어에 나오는 공자가 중유(仲由:자로)같은 사람은 제 명에 죽지 못할 것이다.’라고 예언했던 말이 그대로 들어맞은 셈이었는데, 실제로 자로는 공회를 구하려고 홀로 적진에 뛰어들어 싸우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이었다. 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공자는 아아, 하늘이 나를 끊어버리는구나(噫 天祝予)’라고 통곡하였다.

이는 안연이 죽었을 때의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天喪予)’의 표현보다 더욱 절망적인 탄식이었다.

이러한 아들의 죽음과 사랑하는 두 제자의 연이은 죽음은 공자의 운명관을 바꾼 것처럼 보인다. 평소에는 하늘()이나 하느님(上帝)과 같은 천도(天道)에 대해서는 가르침을 펴지 않아 제자 자공(子貢)선생님의 학문과 의표(儀表)에 대해서는 들어서 배울 수가 있었지만 선생님의 본성(本性)과 천도에 관한 말은 듣고 배울 수가 없었다.’라고 증언하고 있는데, 실제로 공자는 자로가 죽음에 관하여 물었을 때 삶도 아직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未知生 焉能死)’라고 일축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공자가 안연과 자로가 죽었을 때 두 번이나 하늘이 나를 망친다.’하고 탄식하고, ‘하늘이 나를 끊어버린다.’하고 한탄하는 것을 보면 말년에 공자는 하늘에 의해서 결정되는 인간의 명운을 인정하는 운명론자가 되어 버린 듯 보인다.

이는 공자 자신이 쓴 역사책 춘추의 마지막 부분이 서수획린(西狩獲麟)’이라는 사건으로 끝을 맺는 사실을 통해서도 그러한 공자의 운명관을 미뤄 짐작케 하고 있는 것이다.

서수획린.

문자 그대로 서쪽으로 사냥을 나가 기린을 잡았다.’는 고사성어로 노나라의 애공 14년 봄(기원전 481, 공자 71) 사람들이 노나라 서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기린을 잡은 일이 있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사람들은 처음 보는 짐승이라 몰라보았으나 공자는 그것이 곧 기린임을 알았다. 이에 대해 공양전(公羊傳)’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기린이란 어진 짐승이니, 올바른 왕이 있으면 나타나고, 없으면 나타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잡은 짐승을 고라니 같으면서도 뿔이 났다.’하고 말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누구를 위해 나왔느냐, 누구를 위해 나왔느냐.’

그러고는 소맷자락을 들어 얼굴을 닦았는데, 눈물이 옷자락을 적시었다.”

사기에는 이 장면을 약간 다르게 묘사하고 있다.

서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기린을 본 공자는 말씀하시기를 나의 도는 궁지에 왔다.’고 하면서 또 탄식 섞인 말씀을 하셨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구나.’

자공이 여쭈었다.

어째서 선생님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십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원망하지 말고 사람을 탓하지 말아야 한다. 아래 것을 배워 위의 것까지 통달했으니, 나를 알아주는 것은 오직 하늘뿐일 것이다.’”

기린이 잡힌 사건을 두고 흘린 공자의 눈물이나 나의 도는 궁지에 왔다.’라고 말한 공자의 탄식은 모두 어지러운 난세에 잘못 나와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잡히고만 상서러운 짐승 기린을 보고 바로 자기의 운명을 직감한 결과 때문일 것이다.

즉 공자는 자신을 기린과 동일시하였던 것이다. 기린이란 어진 짐승으로, 올바른 왕이 있으면 나타나고, 없으면 숨어버리는 짐승인데, 어쩌다 잘못하여 어지러운 난세에 태어났으므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찮은 고라니로 취급받듯이 자신도 어지러운 난세에 잘못 태어나 평생 동안 나를 알아주지 않는구나.’하고 탄식하며 궁지에 몰려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던 내용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절대로 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다. 마치 난세에 잘못 나와 괴물로 오해받는 기린처럼 자신은 영원히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뜻이며, 실질적인 생애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때 공자는 나를 알아주는 것은 오직 하늘뿐일 것이다.’라고 못박음으로써 마침내 운명론자로서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음인 것이다.

이러한 운명관의 변화 때문일까. 말년에 공자는 역경(易經)’에 심취하였다. ‘역경은 주나라 초기에 완성되었으므로 주역(周易)’이라고도 불리는 책인데, 동양의 철학 정신을 역리(易理)로 논한 글로 자연의 섭리, 만물의 기원, 인생론과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본시는 인간의 길흉을 점치는 복서(卜筮)인 것이다.

공자가 말년에 역을 좋아하여 역을 읽는 사이 책을 엮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사기의 기록은 이러한 공자의 바뀐 하늘에 대한 운명관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한 공자는 하늘에 대해 또다시 한탄하였다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하늘이 나에게 수명을 몇 년만 더 주었더라도 나는 역리를 충분히 연구하여 그토록 큰 잘못이 없도록 할 수 있을 터인데.”

이처럼 제자 자공의 기록처럼 천도에 대해서는 평생 동안 가르침을 펴지 않았던 공자가 말년에 이르러서 하늘타령을 계속 부르짖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인 모순인 것이다.

둥근 반원 형태로 만들어진 수수교(洙水橋) 밑으로는 그러나 흐르는 물이 거의 없었다. 원래 물 이름 수() 자가 나온 것은 공자의 고향을 흐르는 수수(洙水)라는 강 이름에서 비롯된 것으로, 공자가 생전에 수수와 사수(泗水) 강가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데서 수사학(洙泗學)이란 학통이 생겨났었는데, 그러나 강물이 끊겼기 때문일까,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은 거의 없었고 대신 그 위로 알이 굵어진 싸라기눈만이 부스러진 쌀알처럼 어지러이 흩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용도(甬道)를 따라 걸었다.

공림을 참배하는 많은 사람들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 인해전술의 해방군처럼 쏟아지는 눈발을 맞으며 행진하고 있었다. 이윽고 당묘문( 墓門)이 나타났다. 당묘문은 옛날부터 제사를 지낼 때 제주들이 옷을 갈아입기도 하고 제물을 마련하기도 하던 곳. 실질적으로 공자의 묘역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당묘문을 나서자 용도 양편에 네 개의 석조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첫 번째 것은 화표(華表)라고 불리는 거대한 석주였다. 망주(望柱)라고도 불리는 이 돌기둥은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천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람들은 모두 시끌벅적하게 낙천적으로 웃으며 극락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화표를 뛰어넘고 있었다.

그다음의 석조물은 문표(文豹). 표범 모양으로 생긴 이 석조물은 용맹과 충성을 상징하는 석상이며, 세 번째 석조물은 괴수모양의 녹단( ). 상제의 마차를 끌던 동물로 하루에 18000여 리를 달리고, 온갖 말을 다 알고, 모든 일을 다 안다는 전지전능의 정명(精明)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며, 마지막 네 번째 석조물은 옹중(翁仲). 유일하게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석상으로 일찍이 진()나라의 장수로, 이민족과의 싸움에서 맹위를 떨쳤다는 완옹중(阮翁仲)을 가리키는 석상이었던 것이다.

만리장성을 구축하였다고는 하지만 흉노의 침입을 막지 못하였던 진시황은 키가 20척이나 되고, 힘은 수백 명을 당할 정도의 남해의 거인 완옹중을 발탁하여 오랑캐를 물리쳤던 데서 비롯된 이 석상은 돌하르방으로 변형이 되어 우리나라의 제주도에서도 수호신으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용도가 끝나자 향전(享殿)이 나타났다. 이곳은 조상들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던 향당(享堂).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동한(東漢)시대 때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 계속 중수를 거친 것이었다. 그러므로 용도에 세워진 네 개의 석상들도 모두 송나라와 명나라 때 만들어진 석조물인 것이다.

향전을 돌아가자 해정(楷亭)이 나타났다.

정자 안 비석에는 오래된 해수(楷樹)가 조각되어 있고, 정자 곁에는 말라죽은 늙은 나무가 한 그루 남아있었다.

원래 자공(子貢)이 이곳에 움막을 짓고 시묘를 할 때 심은 해나무로 이로 인해 공목(孔木)이라고도 불리던 나무였다.

이를 기념하듯 정자 앞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子貢手植楷

그러나 청나라의 강희(康熙) 연간에 이 나무는 벼락을 맞고 타죽어 버렸으므로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비석과 정자를 세운 것이었다.

자공(子貢).

공자의 제자 중에서도 특히 외교활동이 뛰어나 살아생전에 스승보다 더 유능하고 뛰어난 인물이라고 평가를 받았던 자공.

스승 공자로부터도 자공은 천명대로만 살지 않고 재산을 불렸고, 그의 예측은 거의 적중하였다.’라는 평가를 받았던 뛰어난 정치가이자 재산가였던 자공은 그러나 이러한 외교활동으로 스승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였다.

스승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였다는 자책감으로 자공은 6년 동안이나 공자의 무덤 곁에서 여막을 치고 묘를 지켰던 것이다. 이에 대해 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자는 노나라의 도성 북쪽 사수가에 매장되었다. 제자들은 모두 3년간 상을 입었다. 3년간의 심상을 끝내고서도 서로 이별하려 할 때에는 소리 내어 울었다. 어떤 제자들은 그대로 머물기도 하였다. 자공은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6년이 지난 후에야 물러났다. 제자들이나 노나라 사람으로서 집을 공자의 무덤 곁으로 옮긴 것이 100여 가가 되어 이곳을 공리(孔里)라고 불렀다.”

고향으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5년 동안 공자는 육경을 제자들과 함께 스스로 편찬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쉬지 않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것이다. 공자를 만세사표(萬世師表)라고 부르는 것은 이처럼 옛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그것을 갈고 닦아 알게 된 사람(好古敏以求之者)’으로서 옛것을 잘 습득하여 새로운 것을 알아낸 진리(溫故而知新)’를 책으로 펴냈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펼쳐 마침내 전 인류의 스승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공자는 지금도 남아있는 행단(杏壇) 근처에서 끊임없이 제자들을 가르쳤다.

공자는 제자들을 시(), (), (), ()을 가지고 가르쳤다.’라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는데, 제자들의 숫자는 3000명으로 추정되며, 육예(六藝)에 능통했던 제자들만 해도 72명이나 되었다고 사마천은 증언하고 있다. 물론 공자는 평생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공자가 집중해서 제자들을 가르친 것은 68세의 나이로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부터였던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공자의 가르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자는 네 가지 방법으로 제자들을 교화하였다. 즉 문(:학문을 배워 인륜도덕의 이치를 밝힘), (:자신의 행실을 닦음), (:자기의 마음을 다함), (:언어가 신실하여 행동과 일치함)이다.

공자는 인격적으로 분석해볼 때 다음의 네 가지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즉 사의(私意)가 없었고, 기필코 무엇을 이루겠다는 의욕도 없었으며, 고집을 부리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자아를 버려 손쉽게 남을 따르려 하는 점도 없었다.

공자가 특히 삼간 점이 있었는데, (:제사를 드리기 앞에 근신하는 일), 전쟁, 질병이 그것이다.

공자는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이()를 말하기도 했으며, 그러나 이를 말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천명(天命)과 인()을 더불어서 말했다.

사마천은 공자의 가르치는 방법에 대해서도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공자는 사람을 가르칠 때에도 상대가 스스로 분발해서 배우려 하지 않으면 굳이 계발(啓發)해주지 않았고, 사우(四隅:동서남북의 네 방향) 중에서 일우(一隅)를 들어 깨우쳐 주었을 때 나머지 삼우를 깨닫고 반문해 오지 않았을 때에도 더 이상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공자의 가르침에 대한 열정도 수제자 안연과 애제자 자로가 죽자 곧 꺼져버린 듯 보인다. 그리고 거듭되는 불행과 절망으로 마침내 병이 난 듯 보인다. 논어에는 공자의 병을 암시하는 내용이 나오고 있다.

공자께서 병이 심하게 나시자 자로가 문인으로 하여금 공자의 가신(家臣)노릇을 하게 하였다. 병이 약간 차도를 보이자 이를 알고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오랫동안 자로가 나를 속여 왔구나. 가신이 없는데도 가신이 있는 것처럼 꾸몄지만 내가 누구를 속이겠는가. 하늘을 속이겠는가. 또한 나는 가신들 손에 장사 지내지기보다는 차라리 자네들 손에서 장사 지내지고 싶다. 또 내가 비록 성대히 장사지내지 못한다고 해도 설마 길거리에서 죽게 되기야 하겠는가.”

그 무렵 공자는 곳곳에서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다.

심히 내가 노쇠하였구나. 오랫동안 나는 주공을 다시는 꿈속에서 보지 못하고 있다.’라고 탄식하기도 하고, ‘봉황새도 날아오지 않고 하도(河圖)도 나타나지 않으니, 나는 끝장이로구나.’라고도 말하였던 것이다.

주공은 공자가 이상으로 삼았던 주나라 초기의 예의 제도를 제정했던 어진 인물. 실질적으로 공자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것이다.

또한 봉황새는 태평성대에 나타난다는 전설적인 새이며, 하도는 황하에서 용마가 지고 나타났다는 중국의 고대문물을 상징하는 전설적인 도문(圖文)인 것이다. 그러므로 봉황새도 날아오지 않고 하도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공자의 탄식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옛 문물제도도 부흥시켜 놓지도 못하고, 자신의 생애가 끝장에 이르렀음을 절망적으로 나타낸 탄식이었던 것이다.

안연과 자로가 죽은 후 공자가 사랑했던 제자는 바로 자공.

나는 스승의 묘를 6년간이나 지키면서 심었다는 벼락 맞은 나무 곁에 세워진 비석을 천천히 손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비석은 원래의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새카맣게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 있었는데 그것은 아직도 스승의 죽음을 슬퍼하는 자공의 눈물로, 비석이 항상 촉촉하게 젖어있다는 전설 때문이었다.

그런 전설 때문일까.‘자공수식해(子貢手植楷)’라는 글자가 새겨진 비석은 물기에 젖어 있었다.

자공은 비록 스승의 임종은 지키지 못하였으나 스승의 최후를 지켜본 유일한 제자.

공자가 죽기 일주일 전 자공은 깊은 병에 들어있는 스승을 찾아 병문안을 한다.

이 장면을 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자가 병이 들었다. 자공이 병문안을 갔더니 때마침 공자는 지팡이를 짚고서 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자공을 보자 말하였다.

(:자공), 어째서 이토록 늦게야 왔느냐.’”

지팡이를 짚고 마당을 거닐고 있다가 자공을 보자 어째서 이토록 늦게 왔느냐.’고 하소연하는 공자의 모습은 참으로 인간적이다. 사랑하는 아들과 두 제자를 먼저 떠나보내고 깊은 병에 들어있는 독거노인으로서의 공자의 고독을 처연하게 드러내고 있는 장면인 것이다.

이때 공자는 눈물을 흘리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렀다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태산이 무너지는도다.

철주는 부러지는도다.

철인이 시들려는도다.

(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

많은 학자들은 공자의 마지막 임종게가 공자가 스스로를 철인(哲人)이라고 표현할 리가 없으므로 후대의 가필이라고 추정하고 있지만 공자가 노래를 끝마치고 나서 자공에게 말하였던 내용을 보면 공자가 설혹 자신을 태산과 철주, 그리고 철인으로 비유하였다 하더라도 교만하다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사기에는 공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유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천하에는 오랫동안 도()가 없고 그렇다고 해서 나를 종주(宗主)로 떠받들지도 않는다. 그런데 하()에서는 유해를 입관하면 동쪽 계단 위에 두고, ()에서는 서쪽 계단 위에 두고, ()에서는 당상(堂上)의 동서 두 기둥 사이에 두는데, 어젯밤 꿈에 보니 내가 동서 두 기둥 사이에 놓여 있고, 공물(供物)이 그 앞에 갖추어져 있었다. 나의 조상은 은나라 사람이다.”

자신의 조상이 은나라 사람이므로 은나라의 장례법대로 동서 두 기둥 사이에 유해가 안치될 것이라는 공자의 유언은 자신이 곧 죽을 것이며, 마침내 동서 두 기둥 사이에 묻힐 것임을 예언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사기는 간략하게 공자의 죽음을 전하고 있다.

“···그로부터 이레 뒤에 공자는 죽었다. 나이는 72세로 노의 애공 164월 기축일(己丑日)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짤막한 사기의 기록과는 달리 예기 단궁(檀弓)’ 상편에는 죽음을 맞은 공자의 모습을 보다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공자의 마지막 노래를 들은 후 자공은 슬픔에 젖어 종종걸음으로 공자의 방으로 들어가며 말한다.

태산이 무너지면 우리들은 앞으로 무엇을 우러를 것이며, 철주가 부러지고, 철인이 시들어버린다면 우리는 한편으로 무엇을 의지해야하는 것입니까. 선생님께서는 아마도 병이 깊어 마음이 약해지신 모양입니다.”

이 말을 들은 공자는 말하였다.

사야, 오는 것이 어찌 그리 더디냐. 옛날 하나라 사람들은 동쪽 섬돌 위에 빈소를 차렸는데, 이는 마치 죽은 이가 손님을 대하는 주인 노릇을 하려는 것이었다. 은나라 사람들은 양편 기둥에 빈소를 마련했으니 손님과 주인 사이에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주나라 사람들은 서쪽 섬돌 위에 빈소를 만들었으니, 이는 마치 죽은 이가 손님으로 있듯이 하려는 것이었다.”

공자는 다시 말을 잇는다.

그런데 나는 은나라 사람인데, 지난밤에는 두 기둥 사이에 앉아서 상()을 받는 꿈을 꾸었다.”

이처럼 자신의 장례절차를 유언하고 나서 공자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최후를 암시한다.

명철한 임금이 나오지 않으니, 천하에서 그 누가 나를 존중해주겠는가. 나는 아무래도 죽으려나 보다.”

공자가 돌아간 것은 사기에 기록된 대로 기원전 497(노나라 애공16, 공자의 나이 73세 때) 4월 기축일(己丑日).

이때 노나라의 애공은 사자를 통해 조사를 보내어 말하였다.

상천(上天)은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구나. 한 노인(공자)을 이 세상에 남겨 나 한사람을 도와 위()에 오르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이제 나는 외롭고 애통한 마음 금할 수 없다. 아아, 슬프다. 이보(尼父:공자)가 가고 없으니 내가 법도로 삼고 따를 분이 없구나.”

공자가 죽자 노나라의 애공이 공자를 추모하여 지은 글은 뇌문().

공자의 제자인 자공은 스승이 살아있던 생전에는 등용하지도, 공경하지도 않다가 죽은 후에야 그처럼 스승을 칭송하는 것은 예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명분 없는 행동이라고 못마땅한 비평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유대인 속담에 죽은 사람을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더 이상의 경쟁자가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무릇 역사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은 당대에는 칭찬받지 못하고 항상 경원시되는 법.

그것은 그 뛰어난 사람들이 진리의 빛으로 가면 속에 숨겨진 영혼을 비추며 진리의 칼로 찌르고 있기 때문에 항상 자신들을 불편하게 하는 걸림돌이며 가까이하기에는 고통스럽고 더불어 함께 살기에는 거북한 존재이기 때문인 것이다.

자공은 그러한 위선자 애공을 향해 직격탄을 날린다.

우리 군주(애공)께서는 노나라에서 생을 마치시지 못할 것이다. 스승님께서 예를 이루면 혼란해지고, 명분을 잃으면 죄과가 된다. 심지(心志)를 잃는 것을 혼란이라 하고, 정당한 지위를 잃는 것을 좌과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군주께서 재세(在世) 중에는 선생님을 등용하지 않고 죽은 후에야 그런 조사를 내리신 것은 예가 아니다. 게다가 나 한 사람(一人)’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이것은 천자의 자칭이며 제후가 쓸 수 있는 자칭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명분도 서지 않는 무례한 일이다.”

그러나 이처럼 공자를 백안시하였던 애공은 공자가 죽은 지 1년 후 공자가 살던 3칸의 집을 개축하여 묘당(廟堂)을 만들고 세시봉사케 하였다.

이것이 오늘날에도 남아있는 거대한 공자 사당의 시작이었으니, 애공은 자공의 비평대로 선생님을 생전에는 등용하지 않고 죽은 후에야 그런 조사를 내린 비례를 저질렀지만 공자의 사후에 묘당을 만듦으로써 공자의 유교 사상이 만세를 뛰어넘어 오늘날 묘당에 내걸린 지성선사(至聖先師)’란 편액처럼 영원히 기릴 수 있는 만세사표로서의 그 주춧돌을 놓은 셈인 것이다.

해정을 지나자 주필정(駐亭)이 나타났다. 주필정은 공자무덤 동남쪽에 있는 건물로서 송나라의 진종(眞宗)과 청나라의 강희(康熙), 건륭(乾隆)황제가 친히 왕림하여 공자에게 제사를 지낼 때 머물렀던 삼좌()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건물.

마침 알이 굵어진 눈발들이 그대로 내려쌓여 삽시간에 공자의 무덤 앞은 눈부신 설경으로 변하여 있었다.

사람들은 더욱더 몰려들어 공자의 무덤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맨 처음 눈에 띈 것은 공자의 손자인 공급(孔伋)의 무덤. 무덤 앞에는 기국술성공(沂國述聖公)’이라는 석비가 세워져 있었고, 공자무덤의 바로 앞 남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공자의 무덤 동쪽에는 공자의 아들인 공리(孔鯉)의 무덤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서 공자와 더불어 아들인 이, 그리고 손자인 급 3대의 무덤이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형태 때문에 3대의 무덤을 휴자포손(携子抱孫), 아들을 거느리고 손자를 품었다.’라고 표현되고 있었다.

공자의 아들 공리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고 다만 공자의 아내 올관 씨가 공리를 임신했을 때, 노나라의 임금이 내려준 잉어를 먹고 태어났다고 해서 잉어(鯉魚)’라는 의미의 ()’자를 넣어 명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공자의 자가 백어(伯魚)인데, 이는 우두머리 물고기란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름에도 불구하고 공자의 아들 공리는 탁월한 사람은 아닌 듯 보여진다. 공자 자신도 수많은 제자를 키웠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자신의 아들인 공리에게는 별다른 가르침을 펴지 않은 것을 보면 공리는 평범하고 범상한 아들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사실은 논어의 계씨(季氏)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참고하면 잘 알 수 있다.

어느 날 공문의 제자 진항(陳亢)이 공리에게 물었다. 진항은 공리가 스승의 아들이니, 혹시 자신들이 듣지 못하였던 특별한 가르침을 사사로이 펼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진항은 공리에게 그대는 아버지로부터 남다른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는가.’하고 묻는다. 이때 공리는 대답하였다.

아무것도 없다. 하루는 뜨락에 홀로 서 계실 때에 내가 종종걸음으로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지나치고 있었더니, 아버지께서 갑자기 너는 시()를 배웠느냐하고 물으셨다. 그래서 내가 아직 못 배웠습니다.’하고 아뢰었더니 시를 배우지 못했으면 남과 더불어 사물을 형용하여 말할 수 없느니라(不學詩,無以言)’라고 말씀하셨으므로 물러 나와 시를 공부하였다. 그 후 어느 날 또 뜨락에 홀로 서 계실 때에 내가 종종걸음으로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지나가자 다시 아버지께서 물으셨다.

너는 예()를 배웠느냐.’

이에 나는 아직 못 배웠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예를 배우지 못했으면 남과 더불어 똑바로 설 수 없느니라(不學禮無以立).”

그러고 나서 공리는 대답하였다.

아버지께 그 말을 들은 후 나는 물러나와 예를 배웠다. 아버지로부터 들은 것은 이처럼 시와 예, 두가지뿐이다.”

이 말을 들은 진항은 기뻐하며 물러나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를 물어서 셋을 알았다. ()와 예()를 알았고, 또 군자는 자기 아들이라 해서 특별히 가까이하지 않음을 알았다.”

진항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공자가 수많은 가르침을 펼쳤으나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본()은 오직 시()와 예()로 압축될 수 있다는 진리였으며, 또한 공자가 자기 아들이라 해서 특별하게 사사로운 가르침을 펼치지 않았다는 사실인 것이다.

이는 공리가 안연을 비롯한 다른 제자와는 달리 뛰어난 학문적 재능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지만 어쨌든 공자는 아들 공리가 죽자 직접 자신이 지금도 남아있는 묏자리에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바로 그 옆자리에 자신이 묻힐 묘터를 마련해둘 만큼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안연이 죽자 안연의 아버지 안로(顔路)가 공자에게 공자의 수레를 팔아 덧관(최고급관)을 마련해 줄 것을 요청하였을 때 공자가 대답하였던 내용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잘났건 못났건 누구나 자기 자식을 위해서 말하기 마련이다(才不才亦各言其子也).”

물론 공자는 공리가 죽었을 때 평범한 관을 사용하였을 뿐 덧관을 마련하지 못하였으므로 비록 수제자인 안연이 죽었다 하더라도 수레를 팔아서까지 덧관을 마련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거절하고 있는 장면이 논어의 선진(先進) 편에 나오고 있지만 공자가 말한 잘났건 못났건 누구나 자기 자식을 위한다.’는 내용은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공자의 아들 공리 역시 비록 못난 자식이라 하더라도 아버지인 자신은 아들을 위할 수밖에 없다는 공자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있는 장면인 것이다. 그러나 진항의 표현대로 자기 아들이라 해서 특별히 가까이하지 않았던평범한 아들 공리와는 달리 손자 공급은 할아버지를 뛰어넘을 만큼 빼어난 학자였다.

따라서 공리는 죽기 직전 나는 아버지(공자)보다는 못하지만 내 아들은 아버지(공리)보다 훨씬 낫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지만 이는 후세의 가필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공리는 공자의 나이 69세 때 50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공급은 바로 공리가 죽던 해에 태어난 유복자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죽기 전에도 태어나지 않은 아들을 두고 자기보다 뛰어난 현인이라고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공자도 아내를 쫓아내고 홀아비 생활을 하였는데, 그의 아들 공리도 이유 없이 아내를 쫓아 보냈으며, 손자인 공급조차도 아내를 쫓아 보냈다.

공자가 아내를 쫓아 보낸 이유는 제사상에 번육()을 올리지 않았다는 이유였는데, 이러한 괴팍한 기질 역시 유전적인 요소였을까. 3대가 모두 아내와 불화를 겪은 광부(曠夫)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리의 예언은 그대로 적중된다. 자신은 아버지 공자보다는 못하지만 자신의 아들 공급은 아버지를 뛰어넘어 공자에 필적하는 대사상가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형질은 열성이든 우성이든 한 대를 걸러 나타나는 격세유전(隔世遺傳) 때문일까.

공급은 할아버지 공자가 창시한 유교를 후세에 전하는 가장 중요한 징검다리였던 것이다.

공급의 생애는 잘 알려진 바가 없다.

장년 시절에는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후에 노나라로 돌아왔으며, 목공으로부터 빈사(賓師)의 예를 받았다고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사마천도 사기에서 이에 대한 기록을 짤막하게 전하고 있을 뿐이다.

공자는 이를 낳았다. 자는 백어인데,50세에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백어는 급을 낳았다. 자는 자사(子思)이며 62세 때 죽었다. 자사는 일찍이 송나라에서 재난을 당했었다. 그는 중용(中庸)을 저술하였다. 자사는 백()을 낳았다. 자는 자상(子上)인데 47세에 죽었다.

그러므로 공급, 즉 자사의 뛰어난 업적은 사마천이 기록한 대로 유가의 중요한 경전인 중용을 저술했다는 사실.

자사는 할아버지의 중용사상을 계승 발전시켜 양단(兩端)을 잡아 중()을 사용하는 집양용중(執兩用中)’의 방법론을 제시한 유가의 대학자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란 천하의 큰 근본이고, ()란 천하의 공통된 도()’라는 핵심사상은 중과 화를 지극히 성실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케 하고, 만물이 잘 생육될 것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중과 화야말로 우주의 근본법칙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물론 자사는 태어난 지 4살 때에 할아버지를 잃었으므로 공자로부터 직접 유교를 배운 적은 없었을 것이다. 자사는 공자의 학문을 이어받은 증자(曾子)로부터 학문을 배웠던 것이다.

증자는 공자보다 46세나 어린제자로 그 많은 제자들 중에서도 공자의 도통을 이어받은 유일한 제자로 손꼽혀 왔었다.

나는 매일 자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반성한다. 남과 일을 꾀함에 있어 불충실하지 않았던가. 친구들과 사귐에 있어 신뢰를 잃지 않았던가. 스승에게서 배운 것을 익히지 않은 바 없었던가(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이처럼 공자의 가르침을 이행하는데 철두철미하였던 증자는 특히 주자로부터 증자가 대학(大學)을 저술했다고 단정한 이후부터 종성(宗聖)이라고 존경받았던 사람.

공자의 손자인 공급은 바로 증자로부터 할아버지의 사상을 전수받음으로써 공자와 증자, 그리고 자사로 이어지는 법통의 중심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최대의 업적은 자사의 학통이 맹자로 이어졌다는 역사적 사실.

맹자가 직접 자사에게서 배웠다는 학설도 있지만 자사가 BC483년에 태어나 BC402년에 죽었고, 맹자의 출생연도는 불분명하지만 대충 BC373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어 두 사람의 세대 차이는 30여 년. 그러므로 맹자가 자사에게서 직접 유교를 배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맹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로부터 직접 유학을 배우지 않고 자사의 문인으로부터 유학을 배웠던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사기에서 맹자가 자사의 문인으로 나아가 배웠다.’라는 기록을 통해 정확하게 밝혀지지만 그러나 맹자는 자사의 재전(再傳) 제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포부는 자사를 사숙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공자를 계승하고자 노력하였던 것이다.

공자에 대한 맹자의 추앙은 극진한 것이어서 원하는 바는 오직 공자를 배우는 것이다.’라고 계속해서 공언함으로써 스스로를 공자 사상의 계승자임을 자임하였을 뿐 아니라 실제로 유가의 중시조(中始祖)로 자리매김하였던 것이다.

유교 사상을 공자와 맹자의 첫 이름을 따서 공맹 사상으로 부르는 것은 맹자가 공자 사상의 발양자(發揚者)였기 때문인 것이다.

서양철학사에 있어 소크라테스가 시조라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개화시킨 중흥지주(中興之主)였으며, 동양사상에 있어 공자가 유교를 창시한 시조라면 맹자는 플라톤처럼 유학을 개화시킨 중흥조(中興祖)였던 것이다.

만약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없었더라면 맹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맹자가 없었더라면 유학은 대가 끊겨 멸절되었을 것이므로 뭐니뭐니해도 공급 최대의 업적은 공자와 증자, 그리고 자신을 거쳐 맹자에게 유가의 학통을 바통 터치함으로써 2500년에 걸친 유가의 계주가 맥을 끊기지 아니하고 오늘날까지도 계속 달릴 수 있도록 그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공급의 무덤 앞에는 석조로 만든 옹중 한 쌍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것은 북송(北宋) 선화(宣和) 연간에 세운 석인들이었다.

공급의 묘를 돌아가 마침내 공리와 공자의 무덤이 나타났다.

먼저 나타난 것은 공급의 아버지, 공리의 무덤. 3기의 무덤 중 규모가 가장 작은 편이었는데, 무덤 앞에는 사수후묘(泗水侯墓)’라는 글자가 새겨진 석비가 세워져 있었다.

그 안쪽에 공림의 주인공인 공자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중국인들이 모여들어 공자의 무덤을 배경으로 사진들을 찍고 있었고, 공자의 무덤 위에 솟아난 잡목들에도 흰눈이 하얗게 뒤덮여있었다.

원래 공자의 묘는 분묘의 형태가 말의 등처럼 생겼다 해서 마렵봉(馬封)이라고 부르고 있다.

실제로 흰눈이 덮인 공자의 무덤은 백마의 등처럼 보였다.

특이한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조상의 무덤을 잘 관리하기 위해서 수시로 떼를 입히고 벌초를 해서 가지런히 정돈하는 것이 보통이나 중국에서는 무덤 위에 잡초나 나무가 잘 자라야 자손이 번창한다는 속설이 있었으므로 공자의 무덤 위에는 측백나무가 웃자라고 있었고 많은 잡초들이 무덤 위를 거칠게 뒤덮고 있었다.

공자의 무덤 바로 곁에는 작은 움막 하나가 있었다.3칸의 와방(瓦房) 앞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새겨진 석비가 세워져 있었다.

子貢廬墓處

그 글자는 자공이 여막을 짓고 머무르던 곳이라는 뜻. 여막은 상제가 무덤 가까이 살면서 묘지를 지키던 초막을 가리키는 것으로 실제로 사마천은 사기에서 자공은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6년이 지난 후에야 물러났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여묘처와 연결된 돌로 만든 석책 바로 뒤에 공자의 무덤이 있었다.

무덤 앞에는 거대한 묘비가 새겨져 있었다.

대성지성문성왕묘(大成至聖文宣王墓).´ 원래 공자의 무덤 앞에는 다른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송대에 전각된 것으로 그곳에는 선성묘(宣聖墓)’란 글자가 전각되어 있었다. 공자의 무덤 앞에는 두 개의 묘비가 쌍둥이처럼 세워져 있는데 앞에 세워진 묘비는 명나라 정통(正統) 8, 서기 1443년에 세운 것이었다.

나는 눈을 맞으며 물끄러미 그 묘비에 전각된 문장의 뜻을 새겨보았다.

위대한 지덕을 아울러 갖추어 더없이 뛰어난 지성, 문성왕의 무덤.”

그러나 그 묘비에 새겨진 문장의 뜻을 새겨보던 나는 뜻밖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자가 무덤의 상석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무덤 밖에서 보면 자가 아니라 ()’자로 보이고 있었다. ‘자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무덤에 바짝 다가가서 석비의 아랫부분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는데, 놀라운 것은 ()’자 부분의 가운데 획이 기형으로 길게 변형되어 전각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순간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무릇 왕()이란 지상에서의 왕국을 지배하는 권력자, 즉 임금을 가리키는 용어이므로 군주만의 대명사인 것이다. 사마천이 사기에 표현하였듯 공자가 뛰어난 지성(至聖)이었지만 한갓 포의(布衣)에 불과한 미천한 신분이었으므로 공자의 무덤 앞에 함부로 임금 자를 사용할 수 없어 그러한 편법을 썼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쏟아지는 눈발을 맞으며 생각하였다.

그러한 편법을 쓴다 하더라도 공자가 실제로 진리의 문성왕(文宣王)임을 가릴 수야 있겠는가.

공자가 이 지상의 왕국, 권세의 왕이 아니라 왕 중의 왕임을 가릴 수 있을 것인가.

왕 중의 왕(King of the King).

세계의 3대 인이었던 예수와 부처, 그리고 공자는 살아생전에는 이 지상의 화려한 왕들은 아니었다.

실제로 성경 속에서 예수는 죽기 전날 총독 빌라도로부터 그대는 유대의 왕인가.’ 하는 준엄한 질문을 받는다. 이에 대해 침묵을 지키던 예수는 마침내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다인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할 것이다. 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예수의 대답에 빌라도는 다시 묻는다.“아무튼 네가 왕이냐.”

빌라도는 예수의 내 왕국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라는 난해한 대답에 일체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빌라도는 로마제국의 황제를 모시는 유대의 총독. 그러므로 빌라도는 이 소용돌이의 주인공인 예수가 왕이냐, 아니냐 라는 현세적인 관심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예수는 대답한다.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러 왔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듣는다.”

예수의 이 말은 자신이 이 지상의 왕이 아니며, 진리와 하늘나라의 왕임을 명백히 하고 있음이다. 실제로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보잘것없이 구유에 눕혀졌던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으로써 목수 예수는 구세주, 즉 그리스도로 부활한다.

그뿐인가.

석가모니의 경우는 이 지상의 왕이 아님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다. 석가모니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나 하찮은 포의의 신분인 공자와는 달리 히말라야 남쪽 기슭의 카필라라는 왕국에서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난다. 태자 시절에 아버지 슛도다나왕은 이름난 점성가를 불러 석가모니의 미래를 점쳐보았다. 이때 점성가는 태자는 뛰어난 위인의 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왕위에 오르면 무력을 쓰지 않고 온 세상을 다스리는 제왕이 될 것이고, 출가하여 수행하면 반드시 부처님이 되어 모든 중생을 구제해줄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왕자 싯다르타는 온 세상을 다스리는 제왕의 길을 포기하고 왕궁을 떠나 출가함으로써 제왕의 길에서 전륜성왕(轉輪聖王)의 길로 나아가 부처가 되었던 것이다.

만약 예수가 악마의 유혹대로 높은 산으로 올라가서 발아래 절을 하였다면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권세와 영광을 물려받는 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처가 진리의 길을 포기하였더라면 점성가가 예언하였던 대로 온 세상을 다스리는 위대한 정복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는 악마의 유혹을 거부하고 진리의 편에 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바오로의 표현대로 어리석은 행동을 함으로써 왕 중의 왕으로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이며, 석가모니 역시 화려한 왕궁을 포기하고 출가함으로써 왕 중의 왕인 전륜성왕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공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공자가 만약 13년 동안의 주유천하 중에서 눈 밝은 군주의 눈에 들어 본격적으로 왕도정치를 펼쳤더라면 아마도 공자가 다스리는 국가는 유토피아의 이상 국가를 이뤄 마침내 전국시대를 통일하는 강력한 제국을 이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자에게는 그런 기회는 결코 찾아오지 않았다. 초라하게 상갓집의 개처럼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온 공자에게 있어 그 절망은 오히려 예수의 경우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거나 부처의 경우처럼 왕궁을 떠나는 출가 행위였던 것이다.

죽기 전까지도 눈 밝은 군주의 출현을 고대하였던 공자의 모습은 마치 소설 큰 바위 얼굴을 연상시킨다. 평생 동안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성인을 고대하고 있었던 주인공 자신이 마침내 큰 바위 얼굴이었다는 너대니얼 호손의 명작소설의 내용처럼 평생 동안 이상적인 왕을 고대하며 천하를 주유하였던 공자는 죽은 후에야 이 세상이 그토록 고대하였던 큰 바위 얼굴이 바로 공자 자신이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왕 중의 왕.

인류가 낳은 예수와 부처, 그리고 공자의 3대 성인은 이처럼 세속의 왕권과 그 화려한 권세와 영광을 포기함으로써 진리의 왕 중의 왕으로 환생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물끄러미 공자의 무덤 앞에 새겨져 있는 묘비의 내용을 다시 한번 자세히 보았다.

대성지성문선왕묘(大成至聖文宣王墓).”

그 묘비의 내용은 위대한 지덕을 갖추어 더없이 뛰어난 지성, 문선왕의 무덤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지만 보다 자세히 분석하면 공자를 세 가지의 지덕을 갖춘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는 것이다.

대성(大成)’이란 말은 위대한 학문을 완성하였다라는 뜻이고, ‘지성(至聖)’이란 말은 최고의 성인이라는 뜻이며, ‘문선왕(文宣王)’이란 말은 문화를 전파하는 왕이라는 세 가지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 내 가슴 속으로 뜨거운 감동의 물결이 용솟음쳐 끓어올랐다.

그렇다.

나는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공자는 진리의 왕 중의 왕이지만 또한 아직까지도 인간으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예수가 부활하여 그리스도가 되어 하늘 왕국을 선포함으로써 이 지상의 나그네인 우리들에게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기를 요망하고 있지만 공자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여전히 저 무덤에 묻힌 하나의 인간으로 남아 우리들에게 이 지상의 시민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부처 역시 해탈하여 초월적인 신앙의 대상이 되었지만 공자는 여전히 인간으로만 남아있는 것이다.

스스로를 사람의 아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예수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외아들.’ 그러나 공자는 2500년 전에 태어났지만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남아서 우리들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충고를 아직까지도 계속해서 참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위대한 학문의 완성자, 최고의 성인, 문화를 전파하는 왕이라는 저 묘비의 내용처럼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 곁에 살아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인간 공자.

나는 이제는 함박눈으로 변해 쏟아지는 눈발 속에서 묵묵히 공자의 무덤을 바라보면서 생각하였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변함없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 공자. 예수와 부처처럼 신앙의 대상으로 우상(偶像)화되지 않고 여전히 살아있는 인간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공자.

가자.

나는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다시 이제 가자.

오마니, 아버지, 누이야. 우리 이제 오마니 등에 업고 앵두 따다 실에 꿰어 목에다 걸고 검둥개 앞세워 달마중 가자. 공자가 제시하였던 그 효()와 충(), 그 예()와 경()으로 가득 찼던 숲으로 가자. 유림의 숲으로 가자.

나는 뒷걸음질쳐서 공자의 무덤 앞을 물러나왔다.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으므로 나는 빠르게 걸어 무덤 옆길로 빠져나왔다.

그곳에는 숲이 우거져 있었다.

공림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듯이 이곳은 공자를 비롯한 공씨의 후예들이 묻혀 있는 공동묘지.

실제로 쏟아지는 흰 눈으로 뒤덮인 공림 곳곳에는 봉분의 모습이 보였다. 이곳에는 100여 종에 달하는 많은 고목들이 자라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는 각 지방의 공자 제자들이 자기 지방에서 자라나는 나무들을 옮겨 심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공림에는 공자의 후손 50여기의 무덤이 산재해 있는데, 대부분 남자들의 무덤들뿐이다. 한 가지 예외는 72대 연성공 공헌배(孔憲培)의 부인이며, 건륭황제의 딸인 우씨(于氏)의 묘. 이는 황제의 딸이라는 사실을 감안해서 특별 예우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눈은 더욱 더 강하게 내려 프로스트의 시처럼 들려오는 소리 나는 바람과 날리는 눈뿐. 온 숲 속은 어둡고 깊고 그리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나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어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 있다.”

프로스트의 시처럼 나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었으므로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을 향해 걷기 시작하였다.

순간 내 머릿속으로 한가지의 상념이 떠올랐다. 이 공림에 묻힌 사람들의 무덤이 어찌 공씨가문의 무덤들뿐이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이 공림에 묻힌 사람들이 모두 공자의 후손들의 무덤이라면 나를 낳은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묻힌 이 동방의 대지야말로 유림(儒林)의 숲이 아닐 것인가. 내가 만난 퇴계와 율곡, 그리고 조광조도 이 유림 속에 묻힌 선인들. 그렇게 보면 공자는 우리의 정신을 낳은 아버지인 것이다.

공림을 빠져나오는 내 귓가에 동양 최고의 사가인 사마천의 사자후가 폭풍이 되어 들려왔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시경(詩經)에 보면 고산을 우러러보면서 대도(大道)로 나아간다.’라고 되어 있다. 도달할 수는 없더라도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향한다는 뜻이다. 나는 공자의 저서들을 읽으며 그 인품을 생각해 보았다.중략나는 주위를 거닐면서 차마 그곳에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사실을 감지했다. 천하의 어떤 군주나 현인들도 살아서는 영화를 누렸겠지만 죽어서는 그것으로 끝났었다.

그러나 공자는 포의의 신분이었으면서도 덕은 10여대를 걸쳐 전하고 학자들도 공자를 종주(宗主)로 우러러 보고 있는 것이다. 천자와 왕후들을 비롯해 중국 전역에서 육예를 논할 때에는 모두 공자를 표준으로 취사선택하니, 과연 공자를 지성(至聖)이라 부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사마천의 표현처럼 고산을 우러러보면서 대도로 나아가기 위해서공림을 빠르게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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