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제2부 주유열국(周遊列國) 제2장 노자(老子)와 공자(孔子)

Bollnow 2024. 4. 24. 07:14

2부 주유열국(周遊列國) 2장 노자(老子)와 공자(孔子)

 

노나라에서는 대대로 이 청동솥에 새긴 정고보의 명문을 공직자들이 지켜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하여 사표로 삼고 있었다. 3대에 걸쳐 주군을 섬길 만큼 뛰어난 정치가였으면서도 특히 여기에 범벅이라도 좋고, 죽을 쑤어도 좋다. 내 입에는 풀칠만 하면 그뿐이다( 于是 于是 以余口).’라고 기록한 정고보의 명문은 공직자가 지켜야 할 겸손과 청렴결백을 극명하게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대대로 노나라에서는 새로운 벼슬아치들이 등용될 때에는 이 청동솥 앞에서 마음가짐을 다짐하는 불문율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공자가 바로 이 정고보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공자는 비록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회에서 벼슬할 수 있는 계급 중 가장 낮은 계층인 사()에 속하는 계급에서 태어났지만 이토록 가문만은 명문이었다.

공자는 노나라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조상은 은나라 최후의 임금 주왕(紂王)의 서형(庶兄)이며, 그 시대의 어진 신하로 알려진 미자계(微子啓)에 이르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공자의 계보는 이처럼 은나라의 왕들을 지나 탕() 임금에 이르고, ()나라의 왕실로 다시 이어져 줄곧 왕실의 적자로 내려오고 있는데, 불보하(弗父何)에 이르러서부터 왕계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는 불보하가 임금의 자리를 다투지 아니하고 스스로 물러나 은둔 생활을 했기 때문이었다. 왕계로부터 갈라진 불보하의 후손은 솥에 명문을 새긴 정고보를 거쳐 그의 아들인 공보가(孔父嘉)에 이르게 되는데, 이때 집안에 큰 변화를 일으키는 대사건이 일어난다. 공보가는 그 무렵 송나라의 장군격인 사마의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아름다운 부인이 있었다. 어느 날 권신 화보독(華父督)이 길거리에서 공보가의 부인을 보고는 반해 버려 음모를 꾸민 뒤에 군대를 동원하여 공보가를 죽이고 부인을 빼앗아 버렸던 것이다. 이로 인해 화보독이 보복을 두려워하여 계속 박해를 하자 할 수 없이 그의 아들 자목금보(子木金父)는 송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도망쳐 살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자기 아버지의 자()인 공보(孔父)에서 공()자만을 따서 정식으로 성을 삼았던 것이었다.

그 뒤를 이어 하숙(夏叔), 그리고 공자의 아버지인 숙량흘(叔梁紇)을 거쳐 공자에 이르게 되었는데, 어쨌든 공자의 조상을 은나라에까지 계보를 끌어올리고 족보를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마치 마태복음에서 예수의 족보를 첫 장에 상세히 기록하고,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를 마침내 하느님에게 이른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무릇 인류가 낳은 성인을 신성시하려는 후세 사람들의 존경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사마천도 사기에서 공자를 그의 선조는 송나라 사람으로서 공방숙(孔防叔)이라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비록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의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공자의 조상은 명문이었던 것만은 분명하게 보여지고 있다.

그 족보가 후세에 그럴듯하게 꾸며진 것이든 사실이든 간에 공자는 송나라의 명재상이었던 정고보의 후손으로 그 무렵 노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국어(國語)를 편찬한 민마보(閔馬父)란 사람이 쓴 기록에 의하면 옛날에 정고보란 사람이 상나라의 노래 12편을 주나라의 태사혜에게 가서 교정을 하였는데, () 편을 첫머리에 놓았다.’라고 하였다.

상나라의 노래인 상송(商頌)은 상나라 조정에서 쓰여지던 악가로 시경(詩經)에 전하고 있는데, 훗날 공자가 시경을 편찬, 정리하여 만인의 교과서로 삼으려 했던 것을 보면 정고보가 공자의 조상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 族譜(족보)

族譜(겨레 족, 계보 보). 자는 군대를 상징하는 깃발과 兵器(병기)의 일종인 화살이 합쳐진 글자로 동일 혈통의 군사들의 집합체를 말하며, 혈통이 다른 군사들의 집합체는 ()라고 하였다. 자의 뜻은 점차 혈연 관계가 있는 모든 사람들, 겨레의 뜻으로 자리 잡았다.

자는 말씀 언()(널리 보)를 합쳐 말을 적어 놓다.’라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진 形聲(형성)자이다.

族譜(족보)는 한 가문의 源流(원류)를 밝히고 系統(계통)을 존중하며 家統(가통)繼承(계승)名譽(명예)로 삼는 한 집안의 역사책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최초의 족보 제작에 관한 기록은 명확하지 않다.다만 고려 문종 때에 관가에 성씨·혈족의 계통을 기록한 簿冊(부책)을 비치하여 科擧(과거) 응시자의 신분 관계를 밝혔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려시대 이미 족보가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儒敎(유교)國是(국시)로 한 조선 시대의 족보는 곧 兩班(양반)象徵(상징)이었다. 血統(혈통)이 양반이라 하더라도 족보가 없으면 常民(상민)으로 轉落(전락)하여 軍役(군역)의 부담과 사회적인 차별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良民(양민)이 양반이 되려고 관직을 사고, 호적이나 족보를 위조하며, 뇌물을 써 족보에 끼려고 하는 등의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족보의 유형에는 시조부터 현세대에 이르기까지의 일족을 망라한 대동보(大同譜), 여러 종파의 연합 보책 가운데 특정 단위 집단만의 단독 수록 방법인 世譜(세보),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어느 한 파 속만의 이름과 벼슬·업적을 수록한 派譜(파보), 직계 조상을 중심으로 간단한 가계를 기록한 형태의 家乘譜(가승보), 한 가문의 혈통 관계를 이름자만의 간략한 도표로 나타내는 系譜(계보) 등이 있다.

그런데 족보의 이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槪念(개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始祖(시조)1()로 하여 차례로 내려가는 경우를 라 하며 자기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것을 ()라 한다. 부자의 사이가 로는 이세이지만 로는 일대가 된다.

行列(줄 항,줄 렬)은 문중에서 상하 관계를 분명히 하기 위해 만든 序列(서열)인데, 門中(문중)에서 족보를 편찬할 때 일정한 代數(대수)끼리의 항렬자와 그 용법을 미리 정해 후손들이 따르도록 하는 게 慣例(관례).

本貫(본관)이란 始祖(시조) 혹은 中始祖(중시조)의 출신지와 씨족의 世居地(세거지)를 근거로 정하는 것으로서, 시조나 씨족의 고향을 일컫는 말로 貫鄕(관향)이라고도 한다.

전통사회에서는 존명사상(尊名思想)이 투철하여 부모가 지어준 이름은 임금, 부모, 스승과 尊丈(존장) 앞에서만 사용할 뿐, 다른 사람들은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年齡(연령)20세에 이르면 冠禮(관례)를 행하는데 主禮者(주례자)가 성년이 되었음을 격려하는 뜻에서 ()라는 새로운 이름을 내린다. 동년배나 친구들은 를 부르고, 어린 사람이나 격이 낮은 사람, 또는 허물없는 사람에게는 ()를 지어 불렀다. 帝王(제왕)이나 官員(관원), 혹은 賢者(현자)死後(사후)에 생시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왕이 내리는 호를 諡號(시호)라고 하였다.

 

이는 사기에 나와 있는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노나라의 대부 맹희자(孟僖子)가 병으로 임종하면서 자신의 대를 이을 아들. 의자(懿子)에게 엄숙히 타일러 말하였다.

공구는 성인의 후손이다. 송나라가 망하자 노나라로 온 것뿐이다. 그의 조상 불보하는 처음에 송나라의 군주로 즉위할 신분이었으나 아우 여공( )에게 양보한 분이다. 정고보 대에 와서는 송의 대공, 무공, 선공을 보좌해 상경이 되었다.‘”

맹희자는 청동 솥에 새긴 명문의 내용을 설명하고는 다시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고 사기는 전하고 있다.

정고보는 공손하기가 이와 같았다. 내가 들은 바로는 성인의 후손은 벼슬에 오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반드시 사리에 통달한 현인이 나타난다라고 하였다. 지금 공구는 비록 나이는 젊지만 예를 좋아하니 필시 그는 사리에 통달한 현인일 것이다. 그러니, 내가 죽더라도 너는 반드시 그를 스승으로 섬기거라.”

이 말을 하고 맹희자가 죽자 아들 의자는 아우인 남궁경숙과 더불어 공자에게 가서 예를 배웠던 것이다.

맹희자가 공구는 지금 나이는 젊지만 예를 좋아하니하고 말하였던 것처럼 그 무렵 공자의 나이는 불과 17세로 아직 가르침을 펼 때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예를 배운 남궁경숙은 오히려 공자보다 나이가 많은 권신이었을 것이며, 공자가 정식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펼 때에는 이 무리 속에 끼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이름이 제자열전에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이 무렵 남궁경숙의 지위는 상당해서 젊은 백면서생에게 예를 배울지언정 제자 노릇은 차마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남궁경숙은 공자에게 든든한 후원자로 정신적·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공자가 47세 되던 해 주나라로 두 번째 출국을 단행하려 하였을 때 선뜻 따라나서서 동행하였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군주인 정공에게 부탁하여 교통의 편의까지 받게 되는 것을 보면 남궁경숙이 이미 상당한 세력가일 뿐 아니라 공자의 후원자 역할을 자임하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기록이 사기에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노의 남궁경숙이 노나라의 군주(정공)에게 부탁하였다.

청하오니 공자와 함께 주나라로 가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군주는 이를 허락하면서 승용거 한 대, 말 두 필, 종자 한 사람을 딸려주었다.”

이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공자의 첫 번째 출국은 군주의 허락을 받지 않은 망명이었지만 공자의 두 번째 출국은 군주로부터 정식으로 허락을 받았을 뿐 아니라 수레와 말까지 하사받은 호화 여행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공자는 남궁경숙과 군주가 내린 말이 이끄는 수레를 나란히 타고 종자를 앞세워 노나라를 출발하여 주나라로 떠난다. 이 무렵 주나라의 왕조는 훗날 낙양으로 알려진 낙읍. 노나라에서 주나라에 이르는 그 길은 오늘날에도 쉽게 여행할 수 없는 수천수만 리의 긴 여정이었다.

도중에는 진나라와 조나라, 정나라와 같은 여러 제후국들을 지나야 했으므로 자칫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여정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는 도대체 무엇을 하기 위해서 47세의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이와 같이 험난하고 머나먼 여정을 떠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공자가 떠난 이 여행은 인류사상 가장 극적이고 가장 신비스러운 여행이라고 일컬어 신과 신이 만나기 위해 벌인 신들의 여행이라고까지 불리고 있다.

신과 신이 서로 만나기 위해서 벌인 신들의 만남’, 인류가 낳은 3대 성인인 예수와 석가모니 그리고 공자는 시간적, 공간적인 격차로 서로 만난 적은 없다. 또한 인류가 낳은 최고의 철인들인 소크라테스와 마호메트도 서로 만난 적은 없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예외가 있으니 그것은 공자와 노자가 서로 인간의 모습을 지닌 채 기원전 506년에 극적으로 해후를 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하고 신비스러운 대사건 중의 하나이다.

이는 마치 로마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로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 나오는 명화 중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 그림에는 천상의 하느님이 인류 최초의 사람인 아담을 창조하면서 서로 손끝이 마주 닿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이는 천상과 지상이 만남으로써 하늘과 땅이 비로소 하나로 결합되고, 생명이 최초로 탄생하는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고 있는데, 공자와 노자의 만남도 이에 못지않아 마치 낮을 지배하는 해와 밤을 지배하는 달이 서로 만나는 행성들의 대격돌인 것이다.

노자(老子).

공자와 더불어 중국이 낳은 최고의 사상가. 공자보다 오히려 광범위하게 중국의 민간신앙을 움직여 사상적 기초를 닦은 수수께끼의 인물. 그리하여 오늘날 중국의 정신을 지배하는 도교를 창시한 신비의 용().

일찍이 톨스토이는 번역된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을 읽고 그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사상은 공자와 맹자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노자로부터 받은 영향은 어마어마하게 크고 지대한 것이었다.”

그뿐인가.

칸트의 철학을 계승한 관념론의 대가인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도가사상을 강의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에게 지금 노자의 중요한 저서(도덕경)가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빈에서 출판된 것으로, 나 자신도 그것을 읽은 일이 있다. 도덕경에는 특히 자주 인용되는 말로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무명(無名)의 도는 하늘과 땅의 시작이며 유명(有名)의 도는 우주(만물)의 시작이다.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만물의 근원이 되는 가장 고귀한 것은 곧 무()이며, ()이며, 전혀 불확정하고, 추상적이며 보편적인 것으로서, 그것은 또한 도()라고 불려졌었다.”

중국철학, 그중에서도 특히 노자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던 헤겔은 또한 노자의 도가사상을 서양철학을 낳은 그리스의 헬레니즘과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리스인들은 절대적인 것이 유일하다고 말하고 그것은 지상(至上)의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데 반하여, 노자는 유일한 긍정적인 형식으로서 부정할 수 있는 오직 추상적인 무()만을 얘기하여 왔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헤겔의 관념철학은 노자의 무사상에서 사유방법이나 사상체계를 받아들여 완성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유방법은 야스퍼스로 이어져 야스퍼스는 공자와 노자라는 저서를 통해 주관과 객관의 한계를 초월하고 절대적 원리로서 도를 추구하는 노자의 사상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있으며, 특히 노자의 사상은 키에르케고르, 니체로 이어지는 실존철학의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던 것이다.

근세 분석심리학의 거장 융(C. G. Jung)도 현대인의 심리분석방법으로 노자의 무 또는 무의식 사상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유럽인들은 노자의 이름을 문자 그대로 늙은 자식으로 표기하여 라틴어로 라오시우스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인류 사상 최고의 롱 셀러는 성경이지만 두 번째의 베스트셀러이자 롱셀러는 바로 라오시우스, 즉 노자가 지은 도덕경인 것이다.

공자가 찾아가고 있는 사람은 이렇듯 바로 라오시오스 즉 노자인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어머니의 뱃속에서 80년간이나 들어있었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백발로 그래서 이름도 늙은 자식이라 불렸다는 노자. 이 노자를 공자는 마음속으로 존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 대충 헤아려보면 공자가 노자를 만나러 갈 무렵에는 노자가 공자보다 나이가 2030세가 많았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 무렵 노자의 나이는 80세에 가까운 노인이었을 것이다.

노자는 공자와는 달리 유가를 형성하여 제자를 키우거나 학문을 가르치지 않고 은둔 생활을 하였으므로 공자가 노자에게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 주나라로 구도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마음속으로 노자를 존경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사마천은 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공자가 존경하였던 인물로는 주의 노자, ()의 거백옥, 제의 안평중, ()의 노래자(老萊子) 등이다.”

공자가 위대한 정치가인 안평중, 즉 안영을 존경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기록한 바가 있다.

그러나 공자가 존경하였던 인물 중 첫 번째로 노자가 등장하고 있음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인 것이다. 사기에 의하면 노자가 평생 동안 공식적인 벼슬을 했던 것은 주나라의 수장실(守藏室)의 기록관인 사()가 고작이었다. 수장실이라 하면 왕실 서고를 말하는 것으로 오늘날로 말하면 중앙도서관을 지키는 사서였던 것이다. 아마도 노자의 그 웅대하고 심오한 사상은 수장실을 지키면서 수많은 책을 읽고 사색함으로써 완성되었겠지만 이미 그때 전국시대 최고의 대학자이자 사상가였던 공자가 수천수만 리의 먼 길을 무시하고 오직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은자(隱者)를 찾아가는 것만 보더라도 공자의 열정적인 학구열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배움에 있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공자의 태도로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공자는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그들에게서 좋은 점을 가려서 따르고 좋지 못한 점은 거울삼아 고치기 때문이다(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라고 말함으로써 주위의 모든 사람들과 모든 일이 그가 배울 스승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어진 이를 보면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자를 보면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반성한다(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라고 말함으로써 배움에 있어서 몰두하는 태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논어의 첫 장도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기쁘지 아니하겠는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는 유명한 말로 시작하고 있는 공자였으므로 공자가 공야장편에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은 공자가 얼마나 배움에 철두철미하였던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열 집이 있는 고을이라면 반드시 충성과 신의에 있어서는 나와 같은 사람이 있겠지만,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

공자는 죽을 때까지 배우고 배우고 또 배웠다. 이는 조금 안다고 해서 자신의 학문이 완성되었다고 착각하는 오늘날의 변설가들이 심각하게 반성하고 부끄러워해야 할 덕목이다.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는 노자의 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알지도 못하면서 잘 아는 것처럼 말을 하는 것은 사람을 속이는 죄악이며 무서운 범죄행위인 것이다.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 노자를 만나러 간 공자는 노자에게 특히 예에 대해 묻고 싶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사마천은 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으므로.

남궁 경숙과 함께 주나라로 간 공자는 노자를 만나 예에 대해서 물었다.”

공자가 이처럼 예에 대해 묻기 위해 평소에 존경하고 있는 노자를 만나러 여행을 떠났던 것은 공자의 출신 성분과도 관계가 깊다.

().

모든 인간행동의 기본이 되는 예는 특히 공자 가르침의 핵심이 되고 있는데, 공자는 자신의 아들인 리()에게 다음과 같이 예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다.

예를 배우지 않으면 설 근거가 없게 되며, 예를 알지 못하면 사람으로서 설 근거가 없게 된다(不學禮 無以立 不知禮 無以立也).”

공자가 강조한 예는 개인 뿐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기능으로써도 중요한 수단이었는데, 따라서 공자는 논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임금은 신하를 부리기를 예로써 하고, 신하는 임금을 섬기기를 충으로써 한다(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

공자가 이처럼 예의 효용을 극단적으로 강조하고 있음은 공자의 출생과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데, 그것은 공자가 사에 속하는 유()라는 특수한 신분의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공자의 태생은 다른 성인들과는 달리 비극적인 운명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공자의 탄생을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

숙량흘은 안씨(顔氏)의 딸과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은 본시 노나라의 시씨 집안에 장가들어 아홉 명의 딸만을 낳았을 뿐 아들이 없어 다시 첩을 얻었으나 맹피(孟皮)라는 이름의 다리 불구인 아들을 낳았다. 그 뒤 60세의 나이로 안씨 집안의 셋째 딸인 안징재(顔徵在)와 정을 통하여 낳은 것이 바로 공자였던 것이다.

숙량흘이 안씨 집안에 청혼을 하자 아버지는 숙량흘은 비록 나이가 들어 늙었지만 집안이 좋고 건장하고 힘이 세다.’고 하면서 딸들에게 출가할 의사가 있는가 물었다. 첫째, 둘째 딸들은 늙은 숙량흘에게 출가하는 것을 거부하였으나 셋째 딸 안징재만이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숙량흘에게 시집가는 것에 동의하였다고 공자가어는 전하고 있다.

공자의 어머니 안징재는 임신을 하자 이구산(尼丘山)에서 기도를 올렸다고 하는데, 공자의 이름이 구()이고,자가 중니(仲尼)라는 것도 이 산과 관계가 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마천이 숙량흘과 안징재가 야합해서 공자를 낳았다.’라고 기록한 내용 중에 야합이란 말의 뜻은 정확하게 해석되지 않는다.

야합(野合).

이는 문자 그대로 집이 아닌 들판에서 통정을 한다.’라는 뜻인데, 흔히 정식으로 결혼해 절차를 밟지 않은 두 남녀가 부적절하게 정을 통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호사가들은 숙량흘이 안징재를 유혹하여 들판에서 정을 나눴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극단적인 해석이고, 어쨌든 64세가 된 노인과 20세도 되지 않은 처녀와의 비정상적인 관계로 태어났음은 분명한 것이다. 또한 야합이란 글 뜻으로 보면 두 사람이 불륜의 결합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어쨌든 이처럼 공자는 사생아로 기원전 551(양공 22) 노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 지금의 산둥성 곡부 남쪽 22지점에 있는 추현(鄒縣)에서 태어났다.

공자가 태어난 생년월일은 각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지만 1952년 중화민국 교육부에서 전국의 저명한 학자들을 총동원하여 검토한 결과 공자의 탄생일을 다음과 같이 공식적으로 결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기원전 551년 음력 827(양력 928)’

이처럼 비정상적인 남녀관계의 불륜에 의해서 사생아로 태어난 공자는 외롭고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낸다. 공자의 자가 중니인데, ‘은 형을 뜻하는 백()과 아우를 뜻하는 숙()의 중간을 뜻하는 용어이므로 공자에게는 틀림없이 형이 있었을 것이다. 논어에 보면 남용(南容)이란 사람의 행실이 훌륭한 것을 보고 공자가 그에게 형의 딸을 시집보냈다.’라는 기록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공자의 형은 숙량흘의 첩이 낳은 불구의 맹피였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실제로 사고무친(四顧無親)의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소년시절을 보냈음에 틀림이 없다.

특히 아버지였던 숙량흘은 공자가 세 살 되던 해 죽어버렸으므로 공자는 외로웠을 뿐 아니라 가난까지 겹친 불우한 소년시절을 보낸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공자의 어머니는 숙량흘이 죽자 곡부의 동쪽에 있는 방() 땅에 장사를 지내놓고도 공자에게 아버지의 무덤을 감춰두고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어린 공자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일깨워 주지 않으려는 배려 때문이었지만 공자가 장성한 뒤에도 계속 가르쳐 주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가난해서 제대로 장사를 지내지 못한 데다 굳이 부적절한 관계로 인해서 태어난 수치스러운 사실을 아들에게 숨기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자가 청년 시절 때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는데, 이때의 기록이 사기에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공자는 어머니가 돌아가자 오부의 성 밑에 있는 구()라는 거리에 빈소를 꾸몄다. 아직 부친의 묘소를 몰랐기 때문에 훗날 합장을 기대한 근신하는 행동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먼 훗날 뜻하지 않은 곳에서 아버지의 묘소가 발견되어 공자는 비로소 부모를 합장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떳떳하지 못한 불륜으로 태어난 사생아였음을 자각하게 된다. 바로 장례 수레를 끄는 상여꾼의 어머니가 용케도 오래전에 장사지냈던 숙량흘이 묻혀 있던 장소를 공자에게 가르쳐 줘 비로소 공자는 방 땅에 부모를 합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류사상 가장 뛰어난 성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공자가 다른 성인들과는 달리 불륜의 사생아로 태어났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인 것이다.

어떻든 공자가 태어났을 적에는 공자의 집안은 보잘것없어 사회에서 벼슬할 수 있는 계급 중 가장 낮은 신분인 사()에 속하는 계급이었다. 이 계급은 위로는 귀족 대부들이 있고, 아래로는 서민과 상공계급이 있는 중간계층이었다. 스스로 노력하고 운이 좋으면 좀 더 위 계층으로 올라갈 수도 있었지만 잘못하면 서민계층으로 전락해 버릴 수 있는 아슬아슬한 입장이었다. 사는 자기의 관직을 유지하고 잘 살아나가자면 반드시 정치를 맡고 있는 공경귀족들에게 빌붙어 자기 땅을 경작하거나 생산업에 종사하는 것보다 벼슬살이를 하는 것이 보다 잘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던 것이다.

사기에는 이 무렵의 공자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공자는 가난하고 천했다(孔子貧且賤).”

실제로 공자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청년 시절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을 정도였다.

나는 젊어서 미천했기 때문에 비천한 일을 많이 할 수 있게 되었다(吾少也賤 故多能鄙事).”

또한 공자의 용모에 대해서 사마천은 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공자는 자란 뒤 키가 96(210)이어서 사람들은 모두 공자를 키다리라 부르며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사마천은 공자를 태어나면서부터 머리가 움푹 들어갔기 때문에 구()라 하였다.’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공자는 보통사람과는 다른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공자는 사마천의 묘사처럼 특이한 용모를 갖고 있었던 모양으로 훗날 공자가 제자들을 잃고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 이를 본 정나라 사람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동문 밖에 한 사람이 서 있는데 그의 키는 96촌이고, 눈두덩이 평평하고, 눈꼬리가 긴 눈과 광대뼈가 튀어나왔고, 그 이마는 요임금과 같고, 그 목은 고요(皐陶:요 임금의 현신), 그 어깨는 자산(子産:정나라 재상) 같으나 허리 아래로는 우임금보다 3촌가량 짧은 듯하다.”

공자의 이처럼 당당하고 건장한 체격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처럼 보인다.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은 안씨 집안에 청혼을 하자 숙량흘은 비록 나이가 들어 늙었지만 집안이 좋고 건장하고 힘이 세다.’라는 호평을 받을 만큼 건장한 체격을 갖고 있었는데, 실제로 숙량흘은 제나라가 노나라를 쳐들어 왔을 때 300여 명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치열한 전투 끝에 포위망을 뚫고 고을을 수비하는 전공을 올렸던 뛰어난 무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대에 이르러서는 더욱더 가문이 몰락하여 공자는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제사를 돌봐주는 유의 신분으로 입에 풀칠할 수밖에 없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어쩔 수 없이 예에 밝을 수밖에 없었던 공자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자는 어렸을 때부터 놀 때에는 항상 예기(禮器)를 진열하고 놀아 그 예에 바른 태도는 선천적인 듯 보였다.”

사마천의 표현처럼 예에 바른 태도는 선천적인 듯 보였던 공자. 그러므로 공자가 노자에게 예에 관해 묻기 위해 먼 길을 떠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보여진다.

그러나 공자가 평소에 존경하던 노자를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났던 것은 다만 예에 관해 가르침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또한 그 무렵 공자가 처한 난처한 입장 때문이기도 하였다.

제나라에 망명해 있던 소공이 7년 만에 객사하고, 그 뒤를 이어 정공이 왕위에 올랐으나 노나라는 그 전보다 더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공자의 명성은 더욱 커져서 먼 곳에서까지 제자들이 몰려들어 유가는 번창일로에 있었지만 나라는 극도의 혼란에 빠져 난세 중의 난세였다. 노나라의 정치는 계손씨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었으나 뜻밖에 계손씨는 신세력으로 대두된 양호(陽虎)에 의해서 견제되고 있었다.

원래 양호는 계씨의 가신이었지만 우두머리였던 계편자가 죽고 그 뒤를 이어 계환자가 권력을 잡자 평소에 양호를 미워하던 계환자는 양호를 체포하려 하였다. 다급해진 양호는 오히려 반란을 일으켜 계환자를 잡아 가두었다. 뒤에 양호는 계환자의 맹약을 받고 풀어주었으나 천하의 권세는 이미 가신에 불과하였던 양호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양호는 계씨 등 삼환씨를 더욱 업신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 공자는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었으므로 양호는 공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왜냐하면 공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천하의 민심을 자기편으로 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양호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오래된 숙원(宿怨)이었다.

공자의 나이 17세 때의 일이었다. 30여년 전 공자는 양호로부터 씻을 수 없는 모욕을 받았던 것이었다. 물론 양호는 이러한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으나 공자는 영원히 이 수치를 잊을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양호는 평생 누구를 원망하지 않던 공자가 적대시하였던 단 하나의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공자가 양호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공자의 나이 17세 때의 일로 그 무렵 공자는 어머니가 죽자 아버지의 묘소에 합장한 직후였다. 사마천은 두 사람의 악연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자가 상복을 입고 갈대를 띠고 있을 때 노나라의 대부인 계씨가 선비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그때 공자도 초대되어 참석했는데, 계씨의 가신인 양호가 그런 차림의 공자를 보고 잔치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물리치며 말하였다.

주인님은 선비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계신다. 그런데 고집스럽게도 그런 차림으로 예를 지키려는 그대는 초청될 수 없다.’

공자는 문전박대를 당한 뒤 돌아 나오고 말았다.”

이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평소에 상례를 중시하였던 공자는 어머니를 장사지낸 후 상복을 입고 잔치에 참석한 듯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옷차림을 양호는 심히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잔치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쫓아내어 문전박대를 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30여 년 전. 그러나 역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양호는 이를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 큰 명성을 얻고 있는 공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이다.

논어 양화(陽貨) 편의 첫머리에는 그런 얘기가 실려 있다.

양호가 공자를 만나고자 하였으나 공자께서는 만나 주지 않으셨다. 그러자 양호가 공자께 돼지를 선물로 보내왔다. 공자는 양호가 집에 없을 만한 때를 기다려 사례를 하러 가다가 도중에서 그를 만났다. 양호가 공자에게 말을 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난 선생과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양호는 평소 그토록 만나려고 했으나 쉽게 만나 주지 않던 공자를 보자 반색을 하며 말을 꺼냈다.

나라를 잘 다스릴 보배를 지니고 있으면서 나라를 혼란한 채로 내버려 둔다면 그것을 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는 대답하였다.

할 수 없습니다.’

양호가 다시 물었다.

일을 하고자 하면서도 번번이 때를 놓치는 것을 지혜롭다 하시겠습니까(好從事而失時 可謂知乎).’

공자는 다시 말하였다.

할 수 없습니다.’

양호는 웃으며 말하였다.

세월은 흐르고 있고, 시기는 나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日月逝矣歲不我與).’

예부터 중국에서는 선물을 받으면 반드시 답례를 하는 것이 예의였다. 만나고자 하여도 만나 주지 않는 공자를 억지로라도 만나기 위해서 양호는 먼저 공자에게 돼지를 선물로 보낸 것이었다. 선물을 받고서도 답례를 하지 않는 것은 평소 예를 숭상하고 있는 공자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양호가 집에 없는 틈을 기다려 답례를 하고자 하였으나 도중에 양호와 마주쳐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던 것이다. 이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양호는 어떻게든 공자를 정치에 끌어들이려 하고 있으며, 공자는 이를 사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계씨를 비롯한 삼환씨의 대부들이 벌이는 전횡조차 부도덕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공자였으므로 하물며 가신에 불가한 양호가 방자하게 권력을 휘두르는 꼬락서니는 도저히 마음속으로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공자는 집요한 양호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함으로써 말꼬리를 잡히지 않고 교묘하게 피했다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좋습니다. 장차 나도 벼슬을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장차 나도 벼슬을 하겠습니다.’라고 양호의 예공을 슬쩍 피해버린 공자는 그 순간 아마도 노자를 만나기 위해서 주나라로 여행을 떠날 것을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극도로 혼란한 노나라에 머물러 있다가는 자칫하면 정치에 말려들어 근묵자흑(近墨者黑),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라는 말처럼 나쁜 권력에 자신도 모르게 물들거나 이용당할 것을 염려하여 벼슬을 하긴 하겠지만 미래에 그러하겠습니다.’라는 애매한 답변으로 얼버무린 뒤 그는 결심을 굳혔을 것이다.

실제로 양호뿐 아니라 그의 정적인 계환자도 천종의 곡식을 공자에게 선물로 보내왔다고 공자가어가 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무렵 노나라에서는 공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노자를 만나기 위해서 떠난 공자의 여행은 다목적 여행인 셈이었다.

오늘날 산둥성 가상현(嘉祥縣)에는 화상석(畵像石)으로 유명한 무씨(武氏)사당이 있다. 화상석은 분묘나 사당의 평평한 내벽이나 석주, 석관의 표면에 새겨진 장식 화상으로 표현방식은 음각에 의한 선묘(線描)를 기본으로 부조적(浮彫的)인 것도 있는데, 그려진 것은 인물, 신화, 풍속 등 다채로우며 미술적으로 뛰어날 뿐 아니라 당시의 문화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재료로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것이다.

이 화상석들은 대부분 돌로 만든 분묘나 석조물들이 급격하게 발달한 후한시대(後漢時代)에 새겨진 것으로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의 작품들인 것이다.

청나라 건융(乾隆) 연간에 프랑스 고고학자에 의해서 발굴된 무량석실은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화상석들을 끌어모아 수천 점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특히 후석실의 3석에 4층으로 된 그림은 단군신화의 내용과 유사점을 갖고 있다 하여서 우리나라 학자들 간에도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유적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이 사당에는 전국시대 때의 고사들이 간단한 명문과 함께 생생하게 새겨져 있는데, 노자와 공자가 극적으로 만나는 장면을 새긴 화상석이 수십 점이나 전시되고 있다. 그만큼 2000년 전에 벌써 노자와 공자와의 만남을 역사적으로 가장 신비한 사건으로 보고 있는 중국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이 화상석에는 노자를 만나고 있는 공자가 한결같이 품속에서 새를 꺼내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이 새는 비둘기()로 공자가 노자를 예방할 때 비둘기를 선물로 준비하였던 것은 그 무렵 현명한 노인이나 스승을 만날 때면 으레 비둘기를 예물로 바치는 습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부터 구장(鳩杖)이라 하면 비둘기 형상을 머리에 새긴 노인의 지팡이로, 나라에서 공로 있는 늙은 신하에게 하사하던 상서로운 물건이었으며, 또한 머리에 비둘기 형상을 새긴 노인들이 쓰는 젓가락을 가리키는 것으로 비둘기는 모이를 먹을 때 목이 메지 않는 데서 노인도 목이 메지 않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 비둘기는 마음속으로 존경하는 노인에게 바치는 최고의 선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노나라를 떠날 때부터 한 쌍의 비둘기를 예물로 준비하고 남궁경숙과 더불어 임금이 내린 수레를 타고 노자를 만나기 위해서 수만 리의 먼 길을 여행하였던 것은 이렇듯 노자에 대해 최고의 경의를 표하고 있음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노나라를 출발한 공자는 송나라를 지나 위나라의 국경을 거쳐 조나라를 통과하였다. 주로 제수(齊水)를 따라서 주나라로 가는 지름길을 택한 여정은 다시 정나라를 지나 진나라를 거친 후 마침내 최종 목적지인 주나라의 낙읍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수만 리의 여정을 공자가 얼마 만에 도착하였는가는 알려진 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제후국들의 국경을 통과하는 동안 공자는 질병과 여독에 시달리는 한편 강대국들의 위협에,때로는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험난한 여정이 그로부터 10년 뒤 공자의 나이 55세 때 단행한 주유열국의 전초인 셈이었으니, 공자에게는 일종의 사전답사 여행이기도 한 것이었다. 낯선 제후국들의 풍습과 풍물을 미리 견학할 수 있었으며, 여러 제후국들의 정보도 사전에 수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였던 노자는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노자에 대한 기록 중 가장 정통한 것은 사마천의 사기이다. 사마천은 열전 중에 노자를 포함시켜 사초를 기록하면서 그 이유를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노자는 인위적인 조작을 하지 않고도 사람들을 자연적으로 감화시켜 태연하면서도 올바른 행동을 하게 하였다. 그래서 노자열전을 저술한다.”

중국 역사상 가장 수수께끼의 인물인 노자에 대한 사마천의 기록 역시 짤막하다. 사마천은 노자의 신분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을 뿐이다.

노자의 성은 이()씨이고, 이름은 이(). 초나라 고현(苦縣)의 여향 곡인리(鄕 曲仁里) 사람으로 자는 백양(伯陽), 시호는 담()이라 하였다. 그는 주나라 수장실(守藏室)의 사()였다.

노자의 성이 이씨이고,이름 역시 이였으므로 원래 이름은 이이였을 것이다. 따라서 노자라는 공식적인 이름은 후세에 생겨났음에 틀림이 없다. 노자의 사상이 무위(無爲), 무아(無我), 무명(無名)을 숭상했음을 생각할 때 노자라는 이름은 그의 사상에서 비롯된 가명(假名)이었을 것이다. 노자를 연구하였던 유명한 미국의 블랙니(R B Blakney)는 노자의 이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상식적이기는 하지만 옳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노자란 본시 가명이었을 것이다. ‘란 성이 아니고 다만 형용사로서 늙은의 뜻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저술의 습관에 의하면 도덕경의 저자는 반드시 고인(古人)일 것이라고 추정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 책을 쓸 적에는 반드시 노인이었으리라 생각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고증학적인 근거는 없지만 역사적 상식으로 볼 때는 가장 그럴듯하다. ‘노자란 요즘 사람들이 사용하는 노선생이란 말과 같으며, ()대 사람들이 소동파(蘇東坡)노파(老坡)’라고 부른 예와 같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노자에 대해서 설명한 또 다른 기록은 진()대에 갈홍(葛洪)이 지은 신선전(神仙傳)’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노자는 이름이 중이(重耳)이고, 자는 백양이며, 초나라 고현 곡인리 사람이다. 그의 어머니는 대류성(大流星)의 느낌을 받고 임신을 했다고 한다. 비록 천연(天然)의 기운을 받아 임신을 했지만 이씨 집안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대로 이씨 성을 따랐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노자는 하늘과 땅보다도 앞서 출생했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하늘의 정백(精魄)으로서 신령(神靈)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노자의 어머니가 임신한 지 72년 만에 출생을 했는데, 탄생할 적에 어머니 왼편 겨드랑이를 째고 나왔고, 나면서부터 머리가 희었기 때문에 그를 노자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갈홍의 노자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또 어떤 이는 그의 어머니는 남편이 없었기 때문에 노자는 어머니 집안의 성을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노자의 어머니가 마침 오얏나무 밑을 지나다가 노자를 낳았는데, 나면서부터 말을 할 줄 알았고, 그 오얏나무를 가리키며 이 나무로 나의 성을 삼겠노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 또한 노자는 상삼황(上三皇) 시대에는 현중법사(玄中法師)였고, 하삼황(下三皇) 시대에는 금궐제군(金闕帝君)이었고,.”

갈홍은 또한 노자의 생김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노자는 신장이 9척이었고, 누런 얼굴에 새까만 입, 높은 코와 긴 눈썹을 갖고 있었다. 눈썹 길이는 다섯 치였고, 귀의 길이는 일곱 치였다. 이마에는 세 가지의 무늬가 있었는데, 위아래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발에는 팔괘(八卦)가 새겨져 있었고, 신귀(神龜)를 걸상으로 삼았다. 금과 옥으로 된 집에 백은으로 섬돌을 만들고 살았으며, 오색의 구름으로 옷을 삼고, 중첩(重疊)의 관을 쓰고, 봉연()의 칼을 찼었다. 황동(黃童) 120명을 거느리고, 왼편에는 열두 마리의 청룡, 오른쪽에는 스물여섯 마리의 백호, 앞에는 스물네 마리의 주작, 뒤에는 일흔두 마리의 현무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앞에서는 열두 궁기(窮奇)가 길을 인도하였고, 뒤에는 서른여섯 피사가 시종하였다. 위에서는 우레와 번개가 번쩍번쩍하였다.”

노자의 탄생과 모습을 사마천의 사기와 달리 이처럼 신비롭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전국시대 때부터 유행된 신선사상(神仙思想)과 무관하지 않다. (), ()대에는 스스로 불로장생술을 익혔다고 내세우는 방사(方士)들이 수없이 나오는데, 이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사상적 근거를 노자에 두었으므로 후세로 갈수록 노자의 생애에는 신비로운 여러 가지 전설들이 가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후한의 장릉(張陵)이란 사람에 의해서 도교가 창시되고, 노자를 도교의 종주로, ‘도덕경을 그들의 기본 경전으로 삼아 신도들에게 이를 외우도록 한 이래 더욱 심화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노자를 만난 공자는 제자들이 노자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사기는 대답하고 있다.

다만 이렇다. 내가 만나 뵌 노자는 마치 용과 같은 분이셨다.”

().

머리에 뿔이 있고, 몸통은 뱀과 같으며, 비늘이 있고, 날카로운 발톱이 있는 네다리를 가진 동물로 춘분에는 하늘로 올라가고 추분에는 연못에 잠긴다고 여겨지는 중국인들이 상상해서 만든 영수(靈獸).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으면서 흔히 천자와 제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신령한 상징으로 현존되어 왔었던 전설상의 동물. 공자는 노자를 용이라는 이미지로 표현함으로써 노자를 용이 되어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리면 나로서도 그의 행적을 알 길이 없다.’라고 고백한다.

노자의 사상을 계승한 장자는 공자의 말을 들은 제자 자공(子貢)이 노자를 찾아뵙고, 가르침을 청했다고 하는데, 이 역시 진위를 알 수 없는 허구인지도 모른다.

사마천도 사기에서 노자의 존재 자체를 진위조차 알 수 없는 신비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을 정도이다.

노자는 오직 숨어 살았던 군자이기 때문에 그 진위는 추측하는 자의 입장에 따라 달라지고 있다.”

한술 더 떠서 냉정한 사가였던 사마천도 노자에 대해서만큼은 이렇게 신비감을 더하고 있다.

노자는 160, 혹은 200세를 살았다는 설이 있다. 노자는 무위의 도를 몸에 지녔기 때문에 장수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 窮奇(궁기)

窮奇’(곤궁할 궁, 기이할 기). 중국 고대 () 임금 시대에 사방에는 渾敦(혼돈), 窮奇(궁기), 도올, 도철이라는 사악한 괴물이 살고 있었다. 그 가운데 窮奇凶暴(흉할 흉, 사나울 포)한 호랑이의 모습에 앞다리 겨드랑이에는 날개가 달려있어 하늘을 날아다녔다. 성격도 괴팍하여 사람들이 싸움을 하면 올바른 쪽을 잡아먹는가 하면 악인에게는 산 짐승을 잡아 보내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자는 (구멍 혈)(몸 궁)을 합하여 다하다.’라는 뜻이 되었으나 점차 궁구하다.’‘궁색하다.’‘난처하게 만들다.’와 같은 뜻이 파생되었다. 窮餘之策(궁여지책), 窮地(궁지), 追窮(추궁)이나 窮鼠齧猫’(궁할 궁, 쥐 서, 물어뜯을 설, 고양이 묘)라는 成語(성어)에서 쓰인다. 중국 () 武帝(무제)財政(재정) 危機(위기) 극복과 기득권층 制壓(제압)을 위해 소금·철의 생산을 직접 국가가 管掌(관장)하였다. 기득권 세력의 불만이 擴散(확산)되자 昭帝(소제)는 대토론회를 개최하였다.

고급 관료들은 專賣制度(전매제도)와 엄정한 法治(법치)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반면 지식인들은 쥐는 고양이만 보면 오금을 펴지 못하지만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서는 고양이를 물 수도 있다.’라는 말로 反駁(반박)하였다.

이와 같은 연고를 담고 있는 窮鼠齧猫는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는 뜻으로, ‘아무리 약자라도 궁지에 몰리면 강자에게 必死的(필사적)으로 抵抗(저항)을 이르게 되었다.

다음으로 ()자에 관해서 살펴보자. 의 본래 뜻은 절뚝거리다.’라고 한다. 두 발을 뻗고 서 있는 모습인 ()할 수 있다.’라는 뜻인 ()자가 조합된 데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이것이 이상하다.’‘뛰어나다.’라는 뜻으로 쓰이자 본 의미를 보존하기 위해서 만든 글자가 (절름발이 기)자이다. 奇妙(기묘), 奇想天外(기상천외), 奇貨可居(기화가거)등에서 쓰인다. 奇貨可居는 진기한 물건은 잘 간직하여 나중에 이익을 남겨 판다는 뜻으로,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함을 이른다. ‘史記(사기)’呂不韋列傳(여불위열전)’에 나오는 고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국시대 말엽 ()나라에는 큰 무역을 하는 呂不韋(여불위)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사업상 ()나라의 도읍인 邯鄲(한단)에 잠시 머문 적이 있었다. 이곳에 진나라 昭襄王(소양왕)의 손자인 子楚(자초)人質(인질)로 잡혀 초라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안 여불위는 이 사람을 잘 이용하면 커다란 이익을 챙길 수 있겠다.’라고 생각하였다. 자초를 찾아간 여불위는 본국의 상황을 소상히 설명하였다. 머지않아 父君(부군)安國君(안국군)은 소양왕의 왕위를 계승할 것이고, 안국군은 본부인 소생의 아들이 없기 때문에 庶出(서출)이 후사를 이어야 한다고 보고, 자초가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後援(후원)을 약속하였다.

본국으로 돌아온 여불위는 화양부인을 비롯한 고관들을 매수하여 자초의 태자 책봉에 성공했다. 자초가 왕위에 오르자, 여불위는 재상의 자리에 앉아 無所不爲(무소불위)의 권력을 장악하고, 이미 자신의 자식을 懷妊(회임)趙姬(조희)까지 왕에게 넘겼다. 그리고 조희가 낳은 아들 ()始皇帝(시황제)가 되었다.

 

이렇듯 노자와 공자는 중국의 사상을 양분하는 양대 산맥이었으면서도 그 성격은 전혀 다르다. 공자를 중심으로 하는 유가사상이 현실적이라면, 노자의 도가사상은 초현실적이다. 공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사회를 인(), (), (), ()와 같은 훌륭한 덕과 올바른 예의제도로써 다스려 보려고 애를 쓰는 데 비하여 노자는 어차피 사람은 그 어떤 제도로 교화되거나 변화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현실 차원을 넘어선 도()라는 절대적인 원리를 추구하면서 현실 사회가 어지러운 것은 사람들이 불완전한 자기의 이성을 바탕으로 하여 그릇된 자기중심의 이기주의적인 판단 아래 행동하기 때문이라 생각하였다. 곧 노자의 사상은 사람의 이성적 한계에 대한 각성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올바르다, 훌륭하다고 믿는 것은 모두 절대적으로 올바르거나 훌륭한 것이 못 된다. 올바른 것은 그릇된 것이 전제가 되어야만 하고, 훌륭한 것은 나쁜 것이 전제가 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사람들의 모든 가치, 즉 높다, 낮다, 길다, 짧다, 아름답다, 추하다, 행복하다, 불행하다는 모든 판단이 그러한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러한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불행에 빠지게 되고, 사회적으로는 혼란과 분쟁이 일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자는 절대적인 원리로서의 도의 추구, 인간 이성의 한계성에 따른 각성에서부터 이른바 무()의 사상과 자연의 사상을 발전시킨다. ‘란 도의 본원적 상태이며, 그것을 다시 인간에의 성품에 있어 무위(無爲), 무지(無知), 무욕(無慾), 무아(無我) 등의 개념으로 발전시킨다. 결국 노자는 사람들의 인위적이고 의식적인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인위적이고, 의식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상태가 곧 자연인 것이다. ‘자연이란 스스로 그러한 것이며, ‘저절로 그러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람들을 불행케 하는 모든 가치판단이나 사회적인 구속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상태를 뜻한다. 그것은 자연의 한 구성 요소로서 인간 본연의 회복이며, 인간이 타고난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곧 절대적인 자유의 추구인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유가사상은 필연적으로 사회 참여를 통하여 지상에서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군자를 목표로 하고 있지만 초현실적인 도가사상은 필연적으로 자연 상태 속의 은둔생활을 통하여 신선이 되기를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가사상은 도가사상을 현실도피라고 비난하고 있으며, 도가사상은 유가사상을 지나친 세속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공자는 시대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서 주나라 초기의 봉건제도를 부활시키려고 애썼으나 노자는 그 시대의 혼란은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제정한 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단정하고 주나라 초기의 봉건제도는 물론 모든 인위적인 제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사마천도 사기에서 유가와 도가사상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상에서는 노자의 학문을 하는 자는 유학을 배척한다. 유학자들 역시 노자를 이런 식으로 배척한다. ‘길이 같지 않으면 서로 일을 꾀할 수 없다.’”

사마천의 기록처럼 공자의 유가와 노자의 도가는 두 갈래의 같지 않은 길인 것이다.

노자의 학문을 하는 자는 유학을 배척한다.’라는 사마천의 기록 역시 논어에 자주 등장하는 중요한 화두 중의 하나이다.

훗날 공자가 초나라의 작은 속국 중의 하나였던 섭()을 방문했을 때 길가에서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이란 수수께끼의 인물을 만나는데, 논어에 기록된 이 장면을 통해 당시 공자가 노자의 도가사상을 따르던 사람들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를 미뤄 짐작케 하고 있다.

 

# 無爲(무위)

無爲’(없을 무/할 위). 甲骨文(갑골문) 자의 字形(자형)은 사람이 대나무 가지와 같은 물건을 손에 잡고 춤추는 모습을 본뜬 글자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자는 본래 춤추다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발음이 같은 ’(없을 무)의 뜻으로 널리 쓰이고, ‘춤추다라는 뜻은 춤추는 두 발 모양의 상형 ’(어그러질 천)을 넣은 ’(춤출 무)자로 나타내었다.

자가 쓰인 成語(성어) 가운데 無何有之鄕’(무하유지향)莊子(장자)에 나온다. 어떤 사람이 장자에게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을 묻자, 그는 逆情(역정)을 내면서 나는 지금 조물주와 벗삼고 유유자적하다가 싫증이 나면 붕새를 타고 세상을 벗어나 아무것도 없는 곳(無何有之鄕)에서 노닐며 넓은 들판에서 살려 한다.’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유래한 無何有之鄕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가장 높은 安息處(안식처)를 뜻하는데, 그곳에 이르기 위해선 無爲自然(무위자연)의 도를 행해야 한다. 여기에는 生死(생사) 是非(시비)도 없으며, 지식도 마음도 하는 것도 없는 행복한 곳이다.

자는 손()으로 코끼리 코를 잡고 부리는 모습으로 길들여 일을 시키다.’가 본래의 의미였다 .甲骨文을 보면, (손톱 조)를 뺀 나머지는 코끼리의 형상을 간략하게 나타냄을 알 수 있다. ‘코끼리의 상형에는 잘 알려진 자도 있다. 후대에 의 뜻은 행하다’ ‘되다’ ‘위하여로 확대되었다. ‘說文解字(설문해자)’에서 어미 원숭이로 풀이함은 갑골문을 통해 명백한 오류로 밝혀졌다.

가 쓰인 성어 가운데에는 爲虎傅翼’(할 위/범호/시중들 부/날개 익)이 있다. 韓非子(한비자) 難世편에 실려 있는 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權勢(권세)는 쓰는 사람에 따라 천하를 다스리는 骨幹(골간)이 되는가 하면, 혼란으로 몰아넣는 도구이기도 하다. 周書(주서)에서는 범에게 날개를 달아주지 마라. 날개를 달아주면 사람들을 골라 잡아먹을 것이다(毋爲虎傅翼 飛人邑擇人而食之)’라고 하였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威勢(위세)를 줌은 범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다. 여기서 유래한 爲虎傅翼威勢(위세) 있는 악인에게 힘을 보태주어 더욱 猛威(맹위)를 떨치게 함을 비유한 말로 爲虎添翼(위호첨익) 또는 與虎添翼(여호첨익)이라고도 한다.

老子(노자)春秋時代(춘추시대)의 어지러운 世態(세태)가 끊임없는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여 無爲自然(무위자연)主唱(주창)하며 현실을 외면한 隱遁(숨을 은/달아날 둔)逃避(도피)의 철학을 강조했다.

無爲有爲(유위),또는 인위(人爲)의 상대 개념으로, 인간의 知的(지적) 誤謬(오류)에 의한 制度(제도)나 행위를 否定(부정)하여 혼란해진 자기 자신을 정화함으로써 본래의 자연스러움을 회복하려는 개념일 뿐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음은 아니다. 또한 그가 말하는 자연이란 물리 세계의 자연이나 서양철학의 自然主義(자연주의)도 아니다.

자연은 바로 스스로 그러하고,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정신의 獨立(독립)이며, 사물의 실상과 합일로써 얻어지는 정신적 圓滿性(원만성)이다. 無理(무리)해서 무엇을 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한 대로 사는 삶이 무위자연이다.

 

논어의 미자(微子)편에 나오는 유명한 일화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장저와 걸닉이란 두 사람이 나란히 밭을 갈고 있었다. 공자는 그들 곁을 지나다가 자로(子路)를 시켜 그들에게 나루터가 있는 곳을 물어보게 하였다. 자로가 가까이 가니, 장저가 먼저 물었다.

저 수레에 고삐를 잡고 있는 사람이 누구요?’

자로가 대답하였다.

공구라는 분입니다.’

노나라의 공구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는 나루터가 있는 곳을 알고 있소.’

이번에 걸닉에게 물으니 걸닉이 말하였다.

당신은 누구시오.’

중유(仲由)라는 사람입니다.’

그럼 당신은 노나라 공구의 제자로군요.’

그렇습니다.’

자로가 대답하자 걸닉이 웃으며 말하였다.

지금 세상은 온통 물이 도도히 흐르는 것과 같은데 그 누가 강물의 방향을 바꿀 수가 있겠소. 또한 당신도 사람을 피해 다니는 사람(공자)을 따르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을 피해 사는 선비를 따르는 게 어떻겠소.’

그러면서도 그들은 밭갈이를 멈추지 않았다.”

이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공자는 자신의 정치 이상을 현실정치에 접목시키기 위해 많은 제후국들을 주유하였으나 결국 벽에 부딪혀 사람들을 피해 도망쳐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장저와 걸닉은 아예 세상을 피해 밭갈이의 은둔 생활을 하는 노자의 제자로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 같은 세상의 물줄기를 바꾸려는 공자를 비웃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눈으로 보면 나루터도 모르는 공자가 어떻게 강물의 방향을 바꾸려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전해 들은 공자는 언짢은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논어는 기록하고 있다.

자로가 돌아와서 이 사실을 고하자 공자께서는 언짢은 듯이 말하였다.

새나 짐승과 같이 어울려 살 수는 없는 일이다. 내 천하의 사람들과 어울려 살지 않고, 그 누구와 더불어 살겠는가. 천하에 도가 있다면 나는 그것을 개혁하려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鳥獸不可與同群 吾非斯人之徒與 而誰與 天下有道 丘不與易也).’”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공자가 언짢은 표정(憮然)으로 새나 짐승과 어울려 사는 은둔 생활보다 사람과 더불어 살며, 사회의 제도를 개혁하려고 애쓰는 자신의 사상에 대해 처연한 변명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인간미 넘치는 공자의 참모습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자에 대한 불만이 또다시 계속되는데 그것에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자로가 숨어 사는 노인을 만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자로가 공자를 수행하다 뒤처져 있을 때 막대기에 대바구니를 매달아 걸머지고 걸어가는 노인을 만났다. 자로가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께서 저희 선생님을 못 보셨습니까.’

노인이 말하였다.

사지를 움직이지 않고 오곡도 분별하지 못하는데 누가 선생이란 말이오.’

그리고 노인은 지팡이를 땅에 꽂아 놓고 밭의 풀을 뽑았다. 자로는 손을 모아 잡고 공손히 서 있었다. 노인은 자로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머물게 하고는 닭을 잡고 기장밥을 지어 대접하고, 또 자기의 두 아들을 만나게 해주었다.

다음 날 자로가 공자를 만나서 모든 사연을 이르자 공자는 숨어 사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시고는 자로로 하여금 되돌아가 노인을 찾아보도록 하였다. 그러나 자로가 가보니 노인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여기에서도 숨어 사는 사람으로 표현된 노인은 도가사상을 따르는 은자(隱者)임이 분명하다. 그의 눈으로 보면 밭갈이와 같은 노동도 하지 않고, 오곡도 분별하지 못하는 공자가 무슨 스승이 될 수 있겠느냐고 신랄하게 비웃고 있는 것이다.

은둔자로서 어떻게든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보려고 애쓰는 공자를 이처럼 냉소적으로 비웃는 최고의 장면은 초나라의 미치광이 접여가 보인 행동이다. 이 역시 논어의 미자 편에 나오는데,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초나라의 미치광이 접여가 이런 노래를 부르면서 공자의 곁을 지나갔다.

봉새야, 봉새야.

어찌하여 덕이 쇠하였던가.

지난 일을 탓해도 소용없지만

앞일은 바로잡을 수 있는 것

아서라, 아서라.

지금 정치를 한다는 것은 위태로운 짓이니라(鳳兮鳳兮 何德之衰 往者不可諫 來者猶可追 已而已而 今之從政者殆而).’”

공자가 수레에서 내려 그와 얘기를 나누려고 하였으나 접여는 피해 달아나 버려서 같이 얘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이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미치광이 접여는 실제로 미친 사람이 아니라 미친 척하며 세상을 피해 사는 거짓광인인 것이다. 그의 눈으로 보면 세상을 바로잡으려고 정치에 뛰어든 공자의 행동은 위태로우며 미친 짓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의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세상을 피해 사는 은둔자, 즉 노자의 도가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공자의 태도는 어리석은 미친 짓으로 사마천의 기록처럼 같지 않은 두 가지의 길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공자를 비웃은 네 사람, 즉 장저와 걸닉, 노인과 미치광이 접여 등 모든 사람이 바로 초나라 사람이란 점이다. 초나라는 바로 노자가 태어난 곳이었던 것이다.

서울대학교의 교수였던 김학주(金學主)의 탁월한 지적처럼 노자의 도가사상이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초나라의 지리적 위치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도가사상은 유가사상과 함께 중국사상의 표리를 이루고 있으며, 유가사상이 중국 북방(황하 유역)의 기질을 대표한 사상이라면 도가사상은 중국의 남방(장강 유역)의 기질을 대표한 사상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그것은 공자가 중국의 북방인 노나라 출신이고, 노자는 남방의 초나라, 즉 지금의 하남성 출신이라는 이유에서뿐 아니라 이들은 각각 중국 북방과 남방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중국에 있어서 북방과 남방의 차이는 기후와 자연에 있어서뿐 아니라 사람의 기질이나 학술, 문화 전반에 걸쳐 두드러진 성격상의 대조를 이루고 있다. 북방은 날씨가 차갑고, 자연조건이 거칠고 메말라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자기 주위의 조건들과 투쟁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남방은 날씨가 온화하고, 생물이 잘 자라고, 농산물이 풍부하여 사람들은 별걱정 없이 풍족한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북방 사람들은 투쟁적이며, 현실적인데 반하여 남방 사람들은 부드럽고 평화로우며 낭만적이다. 이러한 대조적인 지리적 특색은 그처럼 대조적인 문화와 사상을 낳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공자도 남방의 너그러움과 부드러움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

공자의 제자 중 가장 성격이 급하고, 공격적이었던 자로가 공자에게 강함이란 어떤 것입니까.’하고 질문하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중용은 기록하고 있다.

네가 묻는 강함은 남방의 강함인가, 아니면 북방의 강함인가. 그렇지 않으면 네가 가진 너의 강함인가. 너그러움과 부드러움으로서 가르치고 무도함에 대해서도 보복하지 않는 것은 남방의 강함인데, 군자들은 그렇게 처신하는 법이다. 또한 북방의 강함이란 무기와 갑옷을 깔고 죽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후회하지 않는 것인데 강자들이 그렇게 처신하는 법이다.”

공자의 이 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남방과 북방의 기질은 또렷이 구별된다. 남방은 부드럽고, 너그러움을 장점으로 강조하고 있으며, 북방은 지리적인 여건으로 전쟁을 하고, 비록 무기와 갑옷을 깔고 죽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이 진정한 용기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의 대답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북방과 남방의 기질상의 차이는 이처럼 공자가 생존해 있는 당시에도 또렷이 구별되어지던 독특한 형질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공자를 비웃는 노자의 제자들인 은둔자들이 공자의 언행록인 논어에 세 번이나 등장하고 있는 것에 반하여 노자의 사상을 이어받은 장자(莊子)에는 노골적인 공자에 대한 비난이 수십 차례나 등장하고 있다.

물론 노자의 유일한 경서인 도덕경에는 공자에 대한 비난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노자의 사상을 계승한 장자에는 공자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내용이 전편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무릇 성인들의 종교나 철학을 전파하는 데에는 탁월한 제자가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만약 플라톤이 없었더라면 소크라테스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고, 아난이 없었더라면 부처의 경전은 이루어지지 못하였을 것이며,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바오로가 없었더라면 기독교는 세계적인 종교로 확산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맹자(孟子)가 없었더라면 공자의 사상은 맥이 끊겼을지도 모르며, 장자가 없었더라면 노자는 다만 수수께끼의 인물로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유가사상을 공자와 맹자의 이름을 합해서 공맹사상(孔孟思想)’이라 부르고 있으며, 도가사상은 노자와 장자의 이름을 붙여 노장사상(老莊思想)’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노자의 학문을 하는 자는 유학을 배척한다.’라는 사마천의 사기의 기록처럼, 장자는 특히 공자와 공자의 제자들을 배척하는 데 앞장선 사람이었다.

사마천도 장자를 노자열전편에 함께 묶어 설명하고 있는데, 수수께끼의 인물이었던 장자에 대한 기록 역시 짤막하며 그 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자는 몽()사람이며, 이름은 주(). 일찍이 칠원성(漆園城)의 관리가 되었다. 양의 혜왕(惠王)이나 제의 선왕(宣王) 시대 사람이다.

좌충우돌하는 그의 학문은 나름대로 무척 박학다식하나 결국 그 요점은 노자의 학술로 귀착된다. 그래서 10만여 자의 그의 노작은 노자의 가르침에다 자신의 설명을 덧입힌 우화(寓話)로 일관하고 있다.

외루허(畏累虛)’라는 산() 이름, ‘항상자(亢桑子)’라는 인명 등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가공적인 것이나 문장을 잘 엮어 세상 인정을 교묘히 이용해 유가나 묵가(墨家)를 절묘하게 공격했으므로 당대의 어떤 대학자라 하더라도 그의 비판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의 언사는 너무나 방대했고, 자유분방했으며, 아무한테도 구애받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왕공이나 대인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초의 위왕(威王:BC 339325 재위)이 장주가 현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사자에게 후한 선물을 들려 장주에게 보냈다.

주군께서 선생님을 재상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저희와 함께 가시지요.’

이 말을 들은 장주가 웃으며 말했다.

천금이라면 막대한 금액인 데다가 재상 또한 존귀한 지위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러니 마다하시지는 않겠지요.’

그러자 장주가 말했다.

자네, 교제(郊祭:교외에서 지내는 천제)에서 희생되는 소를 본 적이 있는가?’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소를 어떻게 기르던가.’

몇 년 동안 잘 먹이고, 수 놓은 옷을 입혀서 호화롭게 사육하지요.’

아무리 그렇지만 끝내는 태묘(太廟)로 끌려 들어가 죽게 되지.’

사자는 말문이 막혔다.

그때를 당해 죽기 싫다며 갑자기 돼지 새끼가 되겠노라 아우성을 친다 해서 소가 돼지로 변하던가. 어서 그냥 돌아가게. 나를 더 욕되게 하지 말고.’

하지만.’

사자가 말을 덧붙이려 하자 장자가 말을 맺었다.

차라리 나는 더러운 시궁창에서 유유하게 놀고 싶다네. 왕에게 얽매인 존재는 되기 싫으이. 못 알아듣겠나. 죽을 때까지 벼슬 같은 것은 하지 않고 마음대로 즐기며 살고 싶단 말일세.’”

자신의 말처럼 왕과 같은 권력자에게 얽매이지 않고 더러운 시궁창에서 돼지처럼 유유히 놀다가 죽은 장주. 그러한 장주의 눈으로 보면 현실에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어리석은 무리였던 것이다.

장주가 도가사상의 본질을 깨달은 것은 어느 날 낮잠을 자면서 꿈을 꾼 데서 비롯된다. 장자의 내용 중 가장 유명한 그 꿈에 대한 일화는 다음과 같다.

예전에 나는 나비가 된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기꺼이 날아다니는 한 마리의 나비였었다. 아주 즐거울 뿐 마음에 안 맞는 것은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자기가 장주라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갑자기 잠에서 깨어난 순간 나는 분명히 장주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장주가 나비 꿈을 꾸었던 것일까, 아니면 나비가 장주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장주와 나비는 확실히 별개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구별이 애매함은 무엇 때문인가. 이것이 사물의 변화인 까닭이다.”

장주가 나비 꿈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다 하여서 이를 호접몽(胡蝶夢)이라 하는데, 이는 자신과 나비가 확실히 별개이긴 하지만 둘이 아닌 하나의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심경임을 체득했기 때문인 것이다. 장주의 눈으로 보면 자신과 나비는 결국 하나이며, 또한 생과 죽음도 둘이 아닌 하나인 것이다. 즉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둘이 없는 집(無二堂)’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주의의 바탕에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생각한 공자는 다른 성인들과는 달리 일체 죽음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다만 현실적인 문제만을 거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공자의 태도는 장주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은 집착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공자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우화들이 수십 편이나 장자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장주의 태도를 사마천도 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장주는 어부(漁父), 도척(), 거협() 등의 글을 지어 공자의 무리들을 비판하면서 노자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다.”

실제로 장주는 내편(內篇)’,‘외편(外篇)’,‘잡편(雜篇)’ 등 세 부로 나눈 광대한 저서를 모두 서른 세 편의 항목으로 세분화시키고 있는데, 그곳에는 공자를 조롱하는 우화들이 곳곳에 나오고 있지만 그중 공자를 조롱하는 클라이맥스는 사마천의 기록처럼 도척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도척은 중국 역사상 가장 잔인하였던 대도(大盜)였다. 장주는 공자가 이 도둑에게 망신당하고 오히려 가르침을 받고 도망쳐 나오는 장면을 풍자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공자에 대한 공개적인 망신이어서 특히 유명하다. 도척의 이야기 중 가장 긴 일화지만 장자가 공자를 어떻게 풍자하고 있는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서 이를 전재하면 다음과 같다.

공자는 유하계(柳下季)와 친구사이였다. 그런데 유하계의 아우는 이름을 도척이라고 하는 유명한 도둑놈이었다. 이 도척은 졸도 9000명을 이끌고 천하를 횡행해서 제후들까지도 괴롭혔다. 남의 집에 구멍을 뚫고 문을 열어 우마를 끌어가고, 부녀를 납치해 가기 일쑤였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친척도 염두에 없고, 부모와 형제도 돌보지 않았으며, 조상의 제사도 지내는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한번 지나는 곳에서는 대국이면 성을 지켰고, 소국이면 보() 속에 들어갔고, 백성들은 그 등쌀에 울상이 되었다. 보다 못한 공자가 도척의 형인 유하계에게 말했다.

무릇 아버지 되는 사람은 반드시 그 아들을 타이를 수 있고, 형이 되는 사람은 그 아우를 가르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만약 아버지가 아들을 타이르지 못하고, 형이 아우를 가르치지 못하면 부자 형제의 혈연이 귀할 것이 없을 터입니다. 지금 선생은 일세의 재사로 칭송을 받고 계시면서도 아우는 큰 도둑으로 유명한 척이어서 천하에 해독을 끼치고 있는데도 형으로서 이를 바른길로 이끌어주지 못하시니, 나는 몰래 선생을 위해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나는 선생을 위해 도척을 찾아가 설득해 보고자 합니다.’”

유하계(柳下季)는 당시 노국의 현인으로 성은 전()씨고, 이름은 획(). 평소에 공자가 존경하였다고 논어는 기록하고 있다. 버드나무 밑에서 살았기 때문에 유하(柳下)라고 불렸다. 그런 현인에게 역사상 가장 유명한 도둑인 동생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로니컬한 일일 것이다. 어쨌든 장자에 나오는 일화는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자 유하계가 말했다.

지금 선생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된 사람은 그 아들을 타일러야 하고 형이 된 사람은 그 아우를 가르쳐야 한다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아들이 아버지의 훈계를 듣지 않고, 아우가 형의 가르침을 받지 않을 적에는 아무리 선생의 웅변을 임한다 해도 이를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다가 척의 사람됨으로 말하자면 마음은 솟아나는 샘처럼 분방하고, 그의 성격은 불어치는 표풍(飄風)같이 사납습니다. 어떤 적이라도 막을 만한 강한 힘과 어떤 잘못이라도 호도(糊塗) 할 만한 언변을 지녔으며, 그 뜻에 순종하면 기뻐하고 뜻에 거슬리면 성을 내서 남 욕하기를 밥 먹듯이 하는 터입니다. 그러니 선생께서는 부디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공자는 그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안회로 마차를 몰게 하고, 자공을 왼자리에 앉힌 다음 도척을 찾아 나섰다.

한편 도척은 이때 부하들을 태산 남쪽에서 휴식시켜 놓고 자기는 사람 간을 회로 하여 간식을 먹고 있었다. 그런 판에 찾아온 공자는 마차에서 내리자 앞으로 나아가 접수하는 사람을 보고 말하였다.

노국의 공구라는 사람이 장군의 높은 의를 사모한 나머지 달려와 삼가 어른께 인사 여쭙니다.”

신하가 들어가 그 뜻을 전했더니, 이를 들은 도척은 크게 노해서 눈빛은 명성(明星)과 같고, 머리칼은 치솟아 관을 치밀어 올리는 듯하였다.

그놈은 노국의 사기꾼 공구임에 틀림없으렸다. 내 말을 이렇게 전하라. 너는 인의가 어떠니 예악이 어떠니 하고 말을 조작하고, 문왕의 도가 이렇고 무왕의 도가 저렇다고 망령된 소리만 지껄이고 다닌다. 머리에는 나뭇가지를 벗겨서 만든 어쭙잖은 관을 쓰고, 허리에는 죽은 소의 옆구리 가죽으로 만든 띠를 띤 꼬락서니라니. 그리고 되지도 않는 소리만 지껄이면서 농사일도 안 하고 밥을 먹고, 길쌈을 안 하면서 옷을 입고 살아가지 않느냐. 그리하여 입술을 놀리고 혓바닥을 움직여서 제멋대로 시비를 가려 천하의 군왕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다. 그뿐인가. 천하의 선비들로 하여금 도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대신 효제(孝悌) 따위를 도덕인 양 착각해서 요행히 제후가 되고 부귀를 노렸으면 하는 생각을 품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너의 죄는 크고 허물은 무겁다. 우물대지 말고 속히 꺼져라! 그렇지 않으면 네 간을 도려내어 점심상 위에 반찬으로 보태도록 하리라. 이와 같은 내 말을 공구에게 전하거라.’

신하가 도척의 말을 전하자 공구는 다시 한번 면회를 청했다.

나는 장군의 친형이신 유하계선생과 친근한 사이입니다. 원컨대 진중에서 장군의 신이라도 바라보게 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신하가 다시 그 뜻을 전하자, ‘그러면 데리고 오라.’고 도척이 만날 뜻을 보였다. 공자는 추창()하여 나아가 자리를 피하여 물러난 다음 도척에게 두 번 절하여 경의를 표했다. 그런데 도척은 크게 노해서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칼자루에 손을 대고 눈을 부릅떴는데, 그 목소리는 새끼를 자주 낳은 호랑이 같았다.

구야, 앞으로 나오라. 네 말이 내 뜻에 맞으면 살려주겠거니와 내 마음에 거슬리면 너는 죽는 줄 알렷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듣건대 무릇 천하에는 세 가지 덕이 있다고 합니다. 타고 나기를 몸이 장대하고 아름답기가 비길 데 없어서 노약(老若) 귀천 보는 사람마다 좋아하는 것이 상덕(上德)이요, 지혜는 천지를 포용하고 능력은 만물을 뒤덮는 것이 중덕(中德)이요, 용맹과감해서 여러 사람들을 모으고 병졸을 지휘하는 것이 하덕(下德)입니다. 사람으로서 이 중의 어느 한 덕만 가진대도 군자가 되기 족할 터인데, 장군께서는 이 세 가지를 겸비하고 계십니다. 장군의 키는 92, 얼굴에는 광택이 있고, 입술은 붉은 칠이라도 한 듯하며, 이는 조개라도 늘어놓은 듯 아름답고 목소리는 황종(黃鐘)의 가락에 맞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장군을 도둑놈이라고 부르고 있으니, 저는 장군을 위해 부끄러워하고 취하지 않는 바입니다. 장군께서 제 말을 들어주신다면 저는 남으로는 오() (), 북으로는 제() (), 동으로는 송() (), 서로는 진() ()에 사신이 되어 찾아가 장군을 위해 수백 리의 큰 성을 쌓고, 수십만 호의 대도시를 건설한 다음 장군을 높여 제후를 삼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천하를 일신하여 전쟁을 그만두고 병졸을 쉬게 하며, 또 형제를 거두어 함께 사시면서 같이 조상을 제사하여 효를 다하신다면 이야말로 성인과 현인에 어울리는 행실이요, 천하가 다 원하는 바일 것입니다.’

구야, 더 앞으로 썩 나오너라. 대저 이익을 보여 타이르고 감언이설로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란 다 어리석은 무리로 정해져 있다. 그런데 너는 나를 장대하고 얼굴이 잘생겨서 남들이 보고 좋아한다고 하였거니와, 이것은 내 부모의 유덕(遺德)일 뿐 내 탓은 아니다. 네가 치켜세운다고 내가 그것쯤을 모르겠느냐. 그리고 즐겨 남의 면전에서 칭찬하는 사람은 또 곧잘 등을 돌리면 욕을 한다.’라는 말이 있다. 또 너는 큰 성과 많은 백성을 주어 나를 제후로 삼아주겠다고 했거니와, 이는 이익으로 나를 꾀고 세상의 바보처럼 취급하려는 태도다. 제후가 되었다 해서 그것이 어찌 언제까지나 가겠느냐. 성이 크다 해도 천하보다 큰 성은 없을 것이다. 그 천하를 요순은 자기 것으로 만들었으나, 그 자손들은 지금 송곳 꽂을 땅도 갖지 못하고 있다. 또 탕왕 무왕도 천자가 되었으나, 그 자손은 지금 끊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이 차지한 이익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 아닌가.’

도척은 다시 말을 계속했다.

또 나는 이런 말을 들었다. 태고에는 새나 짐승이 많고 사람은 적었으므로 사람들은 다 나무에 올라가 보금자리를 치고 살았으며, 낮에는 도토리 밤을 줍고 밤이 되면 나무 위에서 잤다. 그래서 이때의 사람들을 유소씨(有巢氏)의 백성이라고 한다. 또 옛날에는 의복 입는 것을 몰라서 여름이면 나무를 해서 많이 쌓아 두었다가 겨울이 오면 그것으로 불을 때서 몸을 녹였다. 그래서 이 시기의 사람들을 지생지민(知生之民)’,생활을 본능적으로 해 간 백성이라고 부른다. 그후 신농씨(神農氏)가 다스릴 때만 해도 잘 때에는 마음을 푹 놓고 자고 일어나 있을 때에는 무심해서 사람들은 그 어머니를 알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며, 사슴 따위 짐승과 같이 살았다. 스스로 농사지어 배를 불리고, 스스로 길쌈해서 옷을 지어 입었으며, 남을 해칠 생각은 꿈에도 지니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때까지를 이상적인 덕에 의해 살아가던 황금시기라고 할 수 있다.’”

너는 감언이설로 자로(子路)를 설득해서 굴복시켜 그의 높은 무인(武人)의 관을 벗게 하고 긴 칼을 몸에서 떼게 하여 자기 제자로 삼았다. 그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다 공구는 능히 폭력을 그치게 하고 비행을 금지했다.’라고 찬양했다. 그러나 종내에는 어찌 되었던가. 자로는 위국(衛國)의 군주를 죽이려다가 실패해 그 나라 동문(東門)에서 사형이 집행되고, 그 시체는 젓 담기고 말았다. 이는 네 가르침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너는 스스로 현인 성인으로 자처하는지 모르나 두 번이나 노국에서 추방되고, ()에서는 발자취까지도 지워지는 박해를 받았고, ()에서는 죽을 고생을 하고, () ()의 국경에서는 포위까지 되었으니, 천하에 일신을 용납할 곳도 없는 형편 아니냐. 그리고 제자를 교육한답시고 자로를 이런 화에 걸리게 했으니 위로는 자기 몸조차 보존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남을 지도하지도 못함이 명백하니, 너의 도라는 것이 무에 대단하단 말이냐.’

도척의 말은 다시 계속되었다.

세상에서 높이 치는 인물로는 황제(黃帝)만 한 이가 없다. 그러나 그 황제조차도 무위자연의 덕을 완전히 유지하지 못해서 탁록의 들판에서 싸운 결과로 피가 백 리나 흐르도록 사람을 많이 죽게 했다. 또 요()는 자식에게 인자하지 못했고, ()은 어버이에게 불효한 사람이었다. ()는 자기를 혹사하여 반신불수가 되었으며, ()은 그 임금을 추방하고, 무왕(武王)은 주()를 죽였고, 문왕(文王)은 유리( )에 감금되었다. 이 여섯 사람은 성인이라 하여 세상에서 모두들 존경하는 터이나, 자세히 따지고 보면 다 이익 때문에 자기의 진실을 어지럽게 하고, 자기의 본성에 어긋나는 짓을 한 사람들이어서 그들의 행위는 매우 창피스러운 것들이었다. 같은 이야기를 현인들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는 소위 현인으로서 제일 먼저 백이 숙제를 꼽거니와, 그들은 고죽국(孤竹國)의 왕위를 사양한 끝에 수양산에서 굶어 죽고 말아, 그 시체는 묻히지도 않고 버려졌다. 또 포초(飽焦)는 의사(義士) 흉내를 내고 세상을 비난하다가 나무를 껴안고 죽었다. 신도적(申徒狄)은 임금을 간해도 채택이 안 되자, 돌을 지고 황하에 뛰어 들어가 고기와 자라의 밥이 되었다. 개자추(介子推)는 더 없는 충신이어서 자기 다리 살을 베어 문공(文公)을 먹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문공이 환국 후 배신하자, 그는 성을 내고 도망했다가 마침내는 나무를 껴안은 채 타 죽고 말았다. 또 미생(尾生)은 애인과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했었는데, 여자는 안 오고 물은 늘어났으나 떠나지 않고 버티다가 다리 기둥을 안고 죽었다. 이 여섯 사람은 목을 매단 개나 물에 빠진 돼지, 혹은 족발을 들고 대문 앞에 선 거지나 다를 바가 없다. 다 명성에 얽매여 죽음을 가벼이 알고, 다 타고 난 생명의 존귀함을 생각하여 수명을 유지할 줄 모른 사람들이다.’”

도척은 다시 말을 이었다.

충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세상에서는 충신하면 으레 왕자비간(王子比干)이나 오자서(伍子胥)를 들먹이거니와 오자서는 피살된 시체가 양자강에 던져졌고, 왕자비간은 가슴을 도려내는 참혹한 꼴을 당했다. 이 둘을 세상에서는 충신이라고 이르지만 결국은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것밖에 무엇이 있는가. 그런데 이와 같이 위로는 황제에서부터 시작하여 아래로는 왕자비간 오자서까지의 일을 생각할 때, 세상이 칭찬하는 이런 사람들이란 다 신통찮은 친구들이다. 네가 나에게 말하는 것이 만약 귀신에 관한 일이라면 모르거니와, 그것이 사람에 관한 일이라면 이상에서 내가 말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런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도척은 그 말을 이렇게 맺었다.

나는 인간의 성정(性情)이라는 것이 어떤가에 대해 너에게 말해 주겠다. 눈은 아름다운 빛을 보려 하고, 귀는 아리따운 소리를 듣기 좋아한다. 또 입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 들고, 의지는 욕망의 충족을 추구한다. 이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런데 인간의 일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있단 말인가. 사람이 아주 오래 산대야 기껏 백세며, 웬만큼 오래 살아서는 팔십세, 겨우 장수했다고 할 수 있을까 말까 한 것은 육십세 정도다. 그리고 이것은 장수한 축에 속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 중에서 병과 조상하는 시간과 근심에 잠기는 기간을 제외한다면, 입을 열어 웃을 수 있는 것은 한 달에 겨우 너댓 새뿐이다. 천지는 무궁한 데 대해 사람은 죽을 시기가 정해져 있는 유한한 존재, 이 유한한 몸을 이끌고 무궁한 천지 사이에 의지해 있는 인간의 운명은, 비유하자면 문틈 사이를 천리마가 달려 지나가는 것하고나 같다고 할까. 이 잠깐의 인생에서 그 뜻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그 목숨을 완전히 유지해가지 못하는 자는 누구건 도에 통하지 못했음이 명백하다. 네가 하는 말은 다 내 뜻에는 맞지 않는 터이니 빨리 꺼지고 다시 지껄이지 않는 것이 현명하리라. 너의 말이란 것은 미친놈의 잠꼬대요, 사기꾼이 중얼대는 소리거니, 그런 것으로 인간의 진실이 보존될 리가 없다. 어찌 논하고 말고 할 것이나 있겠느냐.’

도척에게 혼이 난 공자는 두 번 절하고 달려서 물러나, 문을 나서자 대기시켜 놓았던 마차에 오르려 했으나, 세 번이나 고삐를 놓칠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었다. 눈은 흐리멍덩해서 보이지 않고 안색은 불 꺼진 재와도 같이 창백하였다. 그는 마차의 가로나무()에 몸을 기댄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겨우 노국 수도의 동문 밖까지 왔을 때, 우연히 유하계와 맞부딪쳤다. 유하계가 말을 걸었다.

요 며칠 동안 전혀 뵙지 못했습니다. 마차를 보니 어디를 다녀오시는 모양인데, 혹시 도척을 만나러 가셨던 것은 아닙니까.’

공자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놈이 전에 말씀드린 대로 혹시 선생의 뜻을 거슬리지나 않았는지요.’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실이 그대로였습니다. 나는 속담에 있는 대로 병도 없는데 뜸을 뜨는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달려가 호랑이 머리를 쓰다듬고, 호랑이의 수염을 따러 들었다가 하마터면 호랑이에게 물려 죽을 뻔했습니다.’”

물론 장자에 나오는 이 유명한 장면은 사실이 아니다. 공자를 조롱하는 내용 중 클라이맥스인 이 구절은 장주가 얼마나 공자를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고 있는가를 도둑인 도척의 입을 빌려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잔인한 도둑인 도척의 입을 빌려 도둑이라면 너만한 도둑이 다시없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너를 도구(盜丘)라고 부르지 아니하고 나만 도척이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라고 공자를 조롱함으로써 장주는 공자를 큰 옷에 넓은 띠를 띠고, 터무니없는 말과 위선적 행위로 천하 군주들을 속여서 부귀를 얻고자 하는 지식의 도둑이라 비웃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공자가 노자를 만났을 때도 노자로부터 그런 취급을 받는다. 장주가 공자를 노골적으로 비웃는 것과 달리 노자는 공자를 만났을 때 비교적 온건한 태도로 말하였지만 결과적으로 노자로부터 제발 예를 빙자한 그 교만과 그리고 뭣도 없으면서도 잘난 체하는 병과 헛된 집념을 버리라.’라는 충고를 듣게 되는 것이다.

물론 사마천의 공자세가에는 그런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이는 사마천이 평소에 공자를 마음속으로 존경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마천은 공자세가를 집필하면서 공자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사기에 서술하고 있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시경(詩經)’에 보면 고산(高山)을 우러러보면서 대도(大道)로 나아간다.’라고 되어 있다. 도달할 수는 없더라도 마음은 저절로 그쪽으로 향한다는 뜻이다.

나는 공자의 저서들을 읽으며 그의 인품을 생각해 보았다. 노나라로 직접 가서는 그의 묘당에 있는 거복(車服)과 예기도 보고 여러 유생들이 공자의 옛집에서 예를 익히고 있는 것도 구경했다. 나는 주위를 거닐면서 차마 그곳에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사실을 감지했다. 천하의 어떤 군주나 현인들도 살아서는 영화를 누렸겠지만 죽어서는 그 영화도 끝났다. 그렇지만 공자는 포의(布衣)의 신분이었으면서도 덕은 10여 대에 걸쳐 전하고 학자들도 공자를 종주(宗主)로 우러러보고 있는 것이다. 천자나 왕후들을 비롯해 중국 전역에서 예를 논할 때에는 반드시 공자를 표준으로 취사선택하니 과연 공자를 지성(至聖)이라 부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인류가 낳은 최고의 역사가 사마천은 공자를 지덕을 갖추어 더없이 뛰어난 성인지성으로까지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천은 공자세가편에 감히 공자에 대한 노자의 힐난을 기록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다만 이렇게 간단하게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남궁경숙과 주나라로 간 공자는 노자를 만나 예에 대해서 물었다. 그리고 떠나려고 하자 노자는 공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귀한 사람은 손님을 보낼 때에 재물로써 전송하고, 어진 사람은 손님을 보낼 때에 좋은 말로 전별한다고 하오. 나는 부귀하지 못한 사람이라 어진 사람의 이름을 빌려 그대에게 말로써 전별할까 하오. 총명하여 사리를 깊게 살필 줄 알면서도 죽을 고비를 겪는 사람은 원래 남을 비방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며, 능변이면서 넓고 크게 아는 것이 많은데도 자신을 위태롭게 하는 사람은 원래 남의 악행을 폭로하기 좋아하는 사람이오. 그리고 사람의 자식된 자는 모름지기 자신을 버리고 어버이를 섬겨야 하고 사람의 신하된 자는 역시 자신을 버려 임금을 섬겨야 하는 법이오.’

공자가 주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돌아오자 제자들이 점차로 많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공자에게 부드럽게 말하였던 노자의 태도는 노자열전의 기록을 보면 180도로 달라지고 있다.

 

# 布衣(포의)

布衣(베 포/옷 의). 布衣베로 지은 옷’,‘벼슬 없는 선비를 이른다. 포의는 庶民(서민)의 옷으로, 서민들은 노인이 되기 전 비단옷을 입을 수 없다는 데서 온 말이라고 한다.

는 본래 ’(/)’(수건 건)를 합하여 를 뜻하는 글자이며, 경우에 따라 널리 알리다.’‘베풀다.’의 뜻으로도 쓰인다. ‘布告’(포고:고시하여 널리 일반에게 알림), ‘布施’(보시:남에게 물건을 베품), ‘布衣寒士’(포의한사: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가난한 선비)에 쓰인다.

는 웃옷, 저고리를 본뜬 글자이다. 허신은 설문해자에서 옷을 라고 함은 사람이 옷에 의지하기 때문이며, 웃옷은 ()라 하고, 아래옷은 (치마 상)이라고 한다.’라고 설명했다. 자가 들어간 말에는 衣服’(의복), ‘衣食住’(의식주), ‘衣裳之治’(의상지치:법을 정할 필요 없이 인덕으로 나라를 다스려 백성을 교화함) 등이 있다.

史記(사기) ‘項羽本紀(항우본기)’에는 이런 故事(고사)가 전한다. ()나라의 도읍 咸陽(함양)에 입성한 項羽(항우)3세 황제 誅殺(주살)阿房宮(아방궁) 全燒(전소), 始皇帝(시황제)의 무덤 해체, 막대한 金銀寶貨(금은보화) 掠取(약취), 부녀자 유린 등 반인륜적 행위를 일삼았다. 側近(측근)范增(범증)을 비롯한 신하들이 부당성을 極諫(극간)하였으나 항우는 고향 하늘을 바라보며 부귀한 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누가 알아주랴.’라고 하면서 默殺(묵살)하였다.

항우는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향 彭城(팽성)으로 遷都(천도)하여 고향 사람들에게 자신의 功德(공덕)을 알리는 데에는 성공한다. 그러나 關中(관중)지역을 차지한 劉邦(유방)에게 대패하여 천하를 잃고 말았다. 여기서 유래한 錦衣夜行(비단 금/옷 의/밤 야/다닐 행)아무 보람 없는 행동을 자랑스레 함을 뜻하게 되었다.

역사 속에서 布衣를 자처한 사람 가운데 중국 춘추시대의 介之推(개지추)가 있다. 그는 권력투쟁의 와중에 19년간 망명 생활을 한 公子(공자) 重耳(중이:文公)를 줄곧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망명 생활에 終止符(종지부)를 찍는 朗報(낭보)가 왔다. 主君(주군) 중이가 진나라의 왕위를 계승하게 된 것이다. 이 소식과 함께 주군을 따르던 무리들은 꿈에 부풀어 황금빛 미래를 그릴 뿐, 과거의 쓰라린 기억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 배에 오르는 순간 그들은 누더기와 쪽박을 모두 강물 속으로 던졌다. 깜짝 놀란 개지추는 그들을 挽留(만류)하며, “우리의 同苦同樂(동고동락)이 이날을 위해서였단 말이오? 어려웠던 과거를 쉽게 잊는 사람은 행복을 논할 자격이 없소.”라고 개탄했다. 개지추는 그 길로 벼슬의 미련을 접고 고향길을 찾았다.

개지추의 예견대로 論功行賞(논공행상)에 눈먼 측근들은 나라와 백성의 安危(안위)보다 일신의 영달에 혈안이었다. 민심은 離反(이반)되고 국가 財政(재정)枯渴(고갈)되어 갔다. 뒤늦게 자신의 과오를 깨달은 진문공은 이 難局(난국)을 타개할 인물은 개지추 뿐이라는 判斷(판단)에서 개지추를 찾았지만 그는 끝까지 綿山(면산)에서 布衣之士(포의지사)로 생을 마감했다.

이는 역사가로서 냉정하게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는 직필(直筆)의 사마천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사마천은 차마 공자세가에서는 묘사하지 못했던 장면을 노자열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 수천수만리의 여정을 거쳐 주나라의 낙읍으로 간 공자는 마침내 노자를 만나게 되자 마차에서 내려 노나라로부터 갖고 온 기러기 두 마리를 선물로 받쳐 올리고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사마천은 기록하고 있다.

예에 대해서 가르침을 주십시오.” 공자를 만나기 위해서 소를 타고 온 노자는 공자를 맞아 며칠 동안 머물렀는데, 인류사상 가장 극적인 이 장면을 사마천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공자의 질문을 받은 노자는 머리를 흔들며 대답하였다.

예에 대해서라면 더구나 나는 할 말이 없네.’

그렇지만 선생님 같은 분이 할 말이 없으시다니요.’

그러자 노자는 말을 이었다.

잠깐만 기다려 보게나.딱 한 가지 얘기해 줄 말이 있기는 있네만.’

어서 가르쳐 주십시오.’

그대가 우러러보는 옛 성인들은 이미 살도 썩어지고 뼈마저 삭아 없어졌겠지.’

그렇지만 말씀은 남아 있지 않습니까.’

공자가 말하자 노자는 머리를 흔들며 다시 말을 이었다.

글쎄, 그것이 공언(空言)이란 말씀이오. 들어보게. 군자라는 작자도 때를 잘 만나면 호화로운 마차를 타고 그 위에서 건들거리는 몸이 되지만 때를 잘못 만나면 어지러운 바람에 흩날리는 산쑥 대강이 같은 떠돌이 신세가 되지 않겠는가.’

그렇겠지요.’

내가 아는 바로는 예를 아는 군자는 때를 잘 만나고 못 만나고의 문제가 아니란 말일세.’

그렇다면 예란 무엇인지요.’

내가 알기론 이런 것일세.’

노자는 비로소 자신의 핵심 사상을 꺼내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를테면 훌륭한 장사꾼은 물건을 깊숙이 감추고 있어 얼핏 보면 점포가 빈 것처럼 보이듯 군자란 많은 덕을 지니고 있으나 외모는 마치 바보처럼 보이는 것일세. 그러니 그대도 제발 예를 빙자한 그 교만과 그리고 뭣도 없으면서도 잘난 체하는 말과 헛된 집념을 버리라는 말일세.’

한 방 맞은 공자는 그러나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예에 대해 묻는 것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예입니까.’

그러자 노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맺음을 하고 공자의 곁을 떠난다.

그런 건 나도 몰라.다만 예를 묻는 그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이것뿐일세. , 이제 그만 가보게나.’”

노자와 공자의 이 문답은 마치 인류가 낳은 성인이자 대사상가인 두 사람이 벌이는 이중창(二重唱)을 연상시킨다. 전혀 화음이 맞지 않는 이 듀엣은 그러나 기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 장면을 보고 혹자는 노자의 승리고, 공자의 패배라고 분석하고 있지만 이는 피상적이고, 대립적인 관점에서 본 유치한 발상이다. 공자는 오히려 자기와 차원이 다른 노자의 사상을 솔직히 인정하고 존경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사고방식과 생각의 각도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백안시하고, 멸시하는 태도는 소위 지식인일수록 몸에 밴 습성인데, 공자는 이를 초월하여 노자의 의견을 경청하면서도 자신이 추구하는 예에 대해서 끝까지 집요하게 묻고 또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류가 낳은 대성인이었던 노자와 공자가 벌인 이 듀엣은 어느 한쪽이 더 우월하고, 어느 한쪽이 테너이며, 어느 한쪽이 바리톤인가 하는 이분법을 벗어난 최고의 병창(竝唱)인 것이다. 결국 노자도 이기고, 공자도 이긴 환상의 2부 합창인 것이다.

그러나 이 2부합창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노자는 물건을 깊숙이 감추고 있어 얼핏 보면 빈 것처럼 보이는 장사꾼이 훌륭하고 또 많은 덕을 갖추고 있으나 외모는 마치 바보처럼 보이는 군자야말로 참군자라고 역설함으로써 무위(無爲)의 도()를 강조하고 있고, 반면에 공자는 계속해서 대여섯 번이나 예란 무엇입니까.’하고 묻고 또 물음으로써 유위(有爲)의 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무위의 도

노자의 사상은 한마디로 무위의 도로 압축된다. 노자가 쓴 유일한 경서인 도덕경의 첫 구절이 도라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로 시작하고, 스스로 생겨나고 발전하며 무엇인가 하려는 의지를 갖지 않고서도 모든 것을 이루어내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므로 무엇이든 알려는 지적 호기심에 의해서 만물의 영장이 된 인간은 오히려 그 지적 욕망 때문에 자기 해체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물처럼 부쟁(不爭)의 덕을 갖춰야 하며,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노자의 사상은 한마디로 물로 상징된다. 물은 만물을 도와서 생육시켜주지만 자기 주장을 하지 않고 누구나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 물은 무언가 한다는 자의식 없이 자연을 돕고 만물을 소생시킨다. 따라서 무엇인가 작위하려는 자기 욕망을 끊고 물처럼 무위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이 도이며, 이것이 바로 도는 항상 무위하지만 하지 않는 일이 없다(道常無爲而無不爲)’는 최상의 도인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이러한 노자의 무위의 도보다는 유위의 도를 추구하는 현실주의자였다. 공자에게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인, , , 지와 같은 유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무위의 도를 추구하는 노자를 유위의 도를 추구하는 공자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던가는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이에 대해 사마천은 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자는 돌아갔다. 그리고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제자들에게 공자는 한숨을 쉬며 말하였다.

얘들아, 새는 잘 날고, 물고기는 헤엄을 잘 치며, 짐승이라는 놈은 잘 달린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글쎄 말이다. 달리는 놈이라면 그물을 쳐서 잡을 수가 있고, 헤엄치는 놈이라면 낚싯줄로 낚을 수 있으며, 나는 놈이라면 화살이나 주살로 쉽게 쏘아 잡을 수가 있지 않은가 말일세.’

그야 당연하지요.’

제자들의 하나가 대답하였다.

그렇지만 용이 되어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리면 나로서도 그 용의 행적은 알 길이 없지 않겠나.’

공자의 말을 들은 제자 중의 하나가 다시 물었다.

어째서 그런 말씀을 새삼스럽게 하시나요.’

그러자 공자는 대답하였다

너희들이 예를 물었기에 하는 말이다. 나도 예의 진수를 몰라 노자에게 가서 물었는데, 다만 이렇다. 내가 만나 뵌 노자는 마치 용과 같은 분이셨다.’

제자들이 침묵하자 공자는 말을 덧붙였다.

내가 알기로는 노자는 모름지기 무위의 도를 닦는 분인 것 같다.’”

노자를 용으로 비유한 공자의 표현은 정곡을 찌른다. 공자는 평생 동안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때로는 그물을 치고, 낚시질을 하고, 화살을 쏘았다. 그러나 노자는 그물로도 화살로도 그 무엇으로도 잡을 수 없는 용인 것이다.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린 정체불명의 용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노자가 펼친 무위의 도가 아무리 옳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새를 잡고 물고기를 낚는 인간사를 포기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공자가 펼친 무언의 항변인 것이다.

공자의 이 말은 스피노자의 그 유명한 금언을 떠올리게 한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것이다.”

이러한 노자와 공자의 만남을 독설가인 장주가 놓칠 리는 없을 것이다. 장자에는 노자와 공자가 만나는 장면이 너댓 개나 중복해서 나타나고 있는데, 한결같이 노자에게 공자가 질타당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물론 이는 실제적인 상황이 아니라 평소 유가사상에 대해서 못마땅해하고 있던 장주가 자신의 사상을 노자의 입을 빌려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음인데, 그중에서 가장 합리적인 장면 하나만을 고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자 천운(天運)’편에 나오는 그 내용은 공자는 쉰한 살이 되었으나 아직 진정한 도에 대해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쪽으로 여행하여 주나라의 패()로 가서 노자를 만났다.’라는 서두로 시작되고 있다.

여기서 장주가 말한 주나라의 패는 오늘날 강소성(江蘇省) 서주(徐州) 부근의 지명으로 노자가 태어난 고향과 가까운 곳이다. 그보다 더 유명한 것은 그곳이 한나라를 건국한 고조(高祖)의 고향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공자가 노자를 만났을 때 먼저 노자가 말했다.

어서 오시오. 나는 당신이 북방의 현인이라는 소문을 진작부터 듣고 있었소. 당신은 진정한 도를 체득하였는가.’ 공자가 대답했다.

아닙니다.아직 체득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무엇에서 도를 구했는가.’ ‘저는 도를 수리(數理)에서 구하고자 애썼습니다만, 5년이 지나도 체득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 밖에 또 무엇에서 도를 구하려 했는가.’

저는 또 음양의 이치 속에서 그것을 구했습니다만, 2년이나 지나도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럴 테지. 도를 무슨 물건처럼 가져다 바칠 수 있다면 사람치고 그것을 자기 임금에게 가져다 바치지 않는 자는 없을 것이다. 도를 가져다드릴 수 있다면 사람치고 누가 그 부모에게 가져다드리지 않겠는가. 또 누가 남에게 말해서 이해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사람치고 자기 형제에게 일러 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며, 도가 물건처럼 누구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사람치고 제 자손에게 물려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못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도라는 것은 자기 속에 주체성이 확립되어 있지 않으면 멈춰 있지 않고 밖으로 그것에 어울리는 바른 행위가 없고 보면 그 사람에게 와 주지 않는다. 마음속에서 끌어내어 이것을 보여주고 싶어도 밖에서 받을 태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성인은 그 도를 나타내 보이지 않으며, 또 밖에서 가르쳐 주려 해도 받는 측에 주체성이 확립되어 있지 않으면 성인은 그런 사람을 상대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언어는 천하의 공기(公器), 너무 이것에만 얽매여서는 안 되며, 인의(仁義)는 옛날 성왕(聖王)들이 묵던 주막이니 하룻밤쯤 자는 것은 몰라도 언제까지나 거기에 묵으려 들어서는 안 된다. 만약 길게 묵노라면 여러 사람 눈에 띄어서 비난이 돌아올 것이다. 옛날의 지인(至人)들은 인()을 일시적 방편으로 빌리고 하룻밤을 의()에서 자고 간 것뿐이다. 그들은 얽매임 없는 경지에 노닐며, 자기 일신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정도의 식량을 밭에서 얻고 남을 도와줄 여유도 없는 조그만 토지로 만족했다. 얽매임 없는 경지에 노니는지라 인위가 없고 간소한 생활에 만족한지라 살기가 쉬웠으며, 남을 도와주는 일이 없는지라 자기 것을 끌어내는 번거로움도 없었다. 옛날에는 이것을 진실에 입각한 놀이라고 했다.’”

 

# 公器(공기)

公器(공변될 공/그릇 기),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사회에 널리 이용되는 공중의 기구관직을 뜻한다.

字源(자원)에 대해서는 물건을 나눌 때 공평하게 나눈다는 뜻의 指事(지사) 글자, 본래 항아리를 그린 象形(상형) 글자, ‘갈라지다라는 의미의 ()과 입의 형상인 ()가 합쳐져 입가의 주름살을 나타내었다는 설이 분분하다. 에는 공변되다’‘한가지’‘공공의’‘드러내다’ ‘제후’ ‘어른등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자는 ()과 네 개의 입 구()로 이루어졌는데 에는 제사에 쓰이던 귀한 그릇’,혹은 진귀한 보물을 담아두는 상자라는 뜻이 있다. 여기에 (개 견)자가 들어간 것은 누가 훔쳐가지 않도록 지키기 위함이었다는 설도 있다. 이처럼 자는 진귀한 그릇을 뜻하는 글자에서 도구’‘인재의 뜻이 派生(파생)되었다.

조선 중종 때 사람 梁淵(양연)은 사헌부 지평(持平) 벼슬을 시작으로 判中樞府事(판중추부사)에까지 이르렀지만 젊은 시절 말타기, 활쏘기 같은 무예에만 관심이 있을 뿐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나이가 사십에 이르자 배움의 열망이 싹텄다. 왼쪽 주먹을 꽉 쥐면서, ‘학문을 이루는 날까지 이 주먹을 펴지 않을 것이다.’라는 각오로 공부에 전념했고 몇 해 만에 文理(문리)를 터득, 과거에 당당히 급제했다. 과거에 급제한 날 주먹을 폈을 때는 손톱이 손바닥을 뚫고 들어가 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양연과 같은 인물을 평할 때 어울리는 말이 바로 大器晩成(큰 대/그릇 기/늦을 만/이룰 성)이다. 노자는 ()를 설명하면서 아주 큰 사각형은 모서리가 없고(大方無隅),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며(大器晩成), 아주 큰 소리는 들을 수 없고(大音希聲), 아주 큰 형상은 모양이 없다(大象無形).’라고 하였다. 이처럼 만성(晩成)이란 본래 거의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이 강하였으나, ‘늦게 이룬다.’라는 뜻으로 쓰이게 된 것은 다음 일화에서 비롯됐다.

三國志(삼국지) ‘魏志(위지)’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나라에는 풍채가 우람한 최염(崔琰)이라는 장군이 있었다. 반면 그의 사촌 동생 崔林(최림)體軀(체구)矮小(왜소)하여 남들의 조롱거리가 되곤 하였다. 남들이 뭐라 해도 최염만은 동생의 인물 됨됨이를 알고 있었기에, ‘큰 종이나 솥을 만드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너는 반드시 뒤늦게라도 큰 인물이 될 것이다.’라는 말로 勇氣(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최염의 말대로 최림은 훗날 三公(삼공)의 반열에 올랐다.

또한 後漢書(후한서)’에는 馬援(마원)이라는 사람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는 末職(말직)에서 시작하여 大軍(대군)을 호령하는 지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가 처음 관직에 나아갈 무렵 그의 형은 너는 훗날 크게 될 인물(大器晩成)이다. 목수가 갓 베어낸 원목을 다듬어 쓸 만한 목재로 가공해 내듯이 꾸준히 노력하며 自重(자중)하라.’라고 충고하였다. 형의 이 말을 평생의 교훈으로 간직하고 노력한 마원은 결국 伏波將軍(복파장군)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 일화에서 보듯 大器晩成크게 될 사람은 늦게 이루어진다.’거나 晩年(만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성공함을 이를 때 쓰인다.

노자는 공자를 향해 말을 이었다.

()를 긍정하는 자는 재물을 남에게 양보해 주지 못한다. 명예를 긍정하는 자는 명성을 남에게 양보해 주지 못한다. 권세를 좋아하는 자는 권세를 남에게 양보해 주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일단 그런 것들이 손에 들어오면 오직 잃을까 그것만을 근심하고, 잃으면 슬픔에 잠기기 마련이다. 무엇 하나 진실에 눈을 돌리는 일이 없고 쉴 틈도 없이 이익만을 엿보는 자, 이것을 천벌을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 원한과 은혜를 갚는 것, 뺏는 것과 주는 것, 간하는 것과 가르침,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 이 여덟 가지는 천하를 바르게 통치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만물의 변화에 순응해서 한 군데에 얽매이지 않는 자만이 이것을 쓸 수가 있다. 그러기에 고인들도 정치란 우선 자기를 바로 하고 남을 바로 하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마음으로부터 이 이치를 수긍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도()로 들어가는 문도 열리지 않을 것이다.’

노자의 말을 경청한 공자는 이번에는 인의(仁義)에 관한 자기 의견을 말했다. 그러자 노자가 말했다.

겨를 뿌려 사람의 눈에 들어가게 하면 천지 사방의 방향감각이 없어지며, 모기나 등에가 살을 쏘면 하룻밤 내내 잠을 못 이루는 법이다. 그대의 인의에는 더한 독이 깃들어 있어서 사람의 마음을 혹하게 만드니, 세상을 이 이상 어지럽히는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대가 만약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그 순박함을 잃지 않게 하려고 한다면 그대 자신이 바람처럼 자연스레 움직여서 무위의 덕을 지켜가는 것이 좋다. 구태여 북을 두들기면서 잃은 자식을 찾는 것처럼 떠들어댈 필요가 없다. 백조는 매일 목욕하는 것도 아니건만 언제나 희고 까마귀는 매일 검은 칠을 하는 것도 아니건만 언제나 검다. 자연으로 정해진 흑백, 선악은 아무리 논해 본대도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인의를 가지고 만들어 낸 명예 같은 것은 어차피 대단한 것일 수는 없지 않은가. 샘물이 마르자 고기들이 육지에 모여 서로 습한 숨을 불어 물거품으로 적셔 주고 있는 광경은 기특하다면 기특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잔재주를 부리는 것이 어찌 망망한 강이나 호수에서 서로 상대의 존재를 잊은 채 유유히 노니는 것만이야 하겠는가.’

공자는 노자를 만나고 돌아와서는 사흘이나 말이 없었다. 제자들이 스승의 침묵을 이상히 여겨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노자를 만나셨습니다만 그에게 무엇을 가르치려 하신 것입니까.’

제자들의 질문에 공자는 긴 한숨을 쉬고 대답하였다.

나는 이제야 처음으로 진짜 용을 보았다. 용은 기운을 한 곳으로 집중하면 훌륭한 체구를 이루고, 기운을 분산시키면 천변만화하는 무늬를 이룬다. 그리고 구름을 타고 무심히 날며 만물의 근원인 음양을 따라 자기를 기르는 것, 그것이 용이다. 나는 용과도 같은 노자를 만나보자 놀란 나머지 입이 벌어진 채 닫히지 않았다. 그런 내 주제에 어떻게 노자를 가르친단 말이냐.’

제자인 자공(子貢)이 말했다.

그렇다면 사람 중에는 본래 몸은 시체같이 고요히 지니고 있으면서도 정신은 용처럼 무한히 변화하고, 깊은 못처럼 침묵하고 있으면서도 그 소리는 우레처럼 울려 퍼지며, 일단 움직이면 천지 같은 위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바로 노자라는 것이로군요.’”

어쨌든 이로써 노자와 공자의 만남은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주지 못하고 상대방에 대한 이견만을 확인한 후 짧게 끝이 나고 만다.공자는 노자에게서 용과 같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고 다시 자신의 고향인 노나라로 돌아왔을 뿐이었다.

오히려 두 성인은 짧은 만남을 통해 극단적인 두 갈래 길로 나뉘게 되는데, 공자는 세상 밖으로 더욱 나가게 되었으며, 노자는 더욱더 세상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양극의 길에 대해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표현으로 기록하고 있다.

공자는 노자와 헤어진 후 주를 떠나 노나라로 돌아왔는데 제자들이 점차로 많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공자의 태도와는 달리 노자는 공자를 만난 후 무위의 도를 한층 더 닦게 되어 세상 속으로 숨을 것을 결심하게 되는 것이다. 사마천은 이러한 노자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노자는 자신을 숨김으로써 이름이 나지 않도록 애를 썼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산속 어딘가에 매화나무가 활짝 피어 있으면 아무리 자신을 숨긴다 해도 산 전체에서 매화의 향기가 나는 법. 노자는 숨어도 숨어도 자신의 이름이 세상에 퍼져 나가는 것을 깨닫자 마침내 영원히 은둔 생활에 들어가 차라리 신선이 될 것을 결심한다. 이리하여 마침내 세상을 등져 사라지려 하는데, 이러한 노자의 모습을 사마천은 이렇게 표기하고 있다.

노자는 오랫동안 주나라에 있었으나 나라가 쇠약해지는 것을 보고 드디어 그곳을 떠나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다.”

함곡관(函谷關).

이는 산관(散關), 혹은 옥문관(玉門關)으로 불리던 교통의 요충지로 중국 허난성(河南省) 북서부에 있어 동쪽 중원에서 서쪽의 관중으로 통하는 관문을 가리킨다. 중국 화북지구 남부 황허 연안에 있는 교통과 군사상의 요지이다.

황허강 남안의 링바오(靈寶) 남쪽 5지점에 있는 이곳은 동서 8에 걸친 황토층의 깊은 골짜기로 되어 있어 양안(兩岸)이 깎은 듯 높이 솟아 있고, 벼랑 위의 수목이 햇빛을 차단했기 때문에 한낮에도 어두워 그 모양이 함처럼 깊이 깎아져 있어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예로부터 관동과 관서를 구분할 때의 경계를 가리키는 꼭짓점인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노자는 소를 타고 이 계곡을 지나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선계로 들어가려 했다는데, 노자가 한 사람만 막아서도 만 사람이 지나갈 수 없다.’라는 함곡관을 지나려고 했을 때 노자를 막아선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을 지키는 윤희(尹喜)란 관리였는데, 만약 윤희가 노자를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노자는 실제로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린 용처럼 인류사에 있어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수수께끼의 인물로만 전해오고 있었을 것이다.

이 극적인 장면을 사마천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를 알아챈 관령(關令) 윤희가 노자를 붙들고 간곡히 아뢰었다. ‘선생님, 어디로 가십니까?’

소를 탄 노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다만 손을 들어 계곡 건너편의 피안(彼岸)을 가리킬 뿐이었다. 그러자 윤희가 말하였다.

진정 은둔하려 하십니까?’

그럴까 한다.’

언제 만나 뵙게 될지 모르는데 힘드시더라도 저를 위해 무슨 말씀인들 주시고 떠나가십시오.’

어허, 이런 변고가 있나. 나로서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는데.’노자는 소 등에 올라탄 채 난처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사마천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윤희는 만만하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무위의 도는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노자가 웃으며 말하였다.

그놈 말 잘하네. 옜다, 이거나 가져라. 그나마 태워버릴 작정이었지만.’”

사마천의 기록을 보면 노자는 이미 자신이 써 두었던 도덕경을 윤희에게 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윤희의 부탁을 받자 함곡관의 관사에 머물면서 며칠 만에 도덕경을 완성하여 윤희에게 전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윤희는 노자가 남긴 단 하나의 제자인 셈이었으며, 윤희가 없었더라면 인류가 낳은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성경과 또 하나의 롱셀러인 도덕경이 존재하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동양뿐 아니라 서양철학에도 깊은 영향을 주어 라틴어로 라오시우스’, 늙은 자식으로 불렸던 노자. 그가 어쨌든 한마디도 남기지 않은 채 신선이 되지 않고 5000여 자로 짧은 도덕경을 남긴 것은 인류를 위해서도 다행한 일일 것이다. 이 극적인 장면을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노자가 윤희에게 준 그것이 바로 도덕의 깊은 뜻을 5000여 자로 새긴 상하 두 편의 도덕경이다.”

도덕경.

사마천의 기록처럼 5000여 자로 새긴 상하 두 편의 짧은 책. 상편은 주로 도에 대해서 다루고, 하권은 주로 덕에 대해서 다루고 있어 둘을 합쳐 도덕경으로 불리고 있는 노자의 경서. 5000여 자의 짧은 경서를 통해 무위자연을 꿈꾸는 평화주의의 동양사상은 싹트게 되었다.

노자의 사상은 공자의 표현처럼 용과 같아 정확하게 지적할 수는 없지만 한마디로 무위(無爲)의 사상이다.

여기서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이를테면 죽음이나 극단적인 게으름을 연상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런 것을 하겠다는 인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됨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위는 자연이란 말과 같은 개념이다.

이 우주의 광대무변함, 생명들의 신비로운 생성과 죽음, 요컨대 일체의 존재들은 의식 없는 작용이며, 작용 없는 작용이며, 작용하는 주체가 없는 작용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 생성력이 허술한가 하면 정반대로 의식이 없는 작용이므로 최고의 진선미를 갖춘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노자의 무위는 무위무불위(無爲無不爲)’, 즉 아무것도 하지 않으나 사실에 있어서는 못하는 일 없이 다하고 있음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자가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는 높은 자도, 낮은 자도, 가진 자도, 못 가진 자도 없는 균분주의(均分主義)인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천도(天道)는 활을 당기는 것과 같다. 높은 자는 누르고, 낮은 자는 들며, 남는 것은 덜며, 모자란 것은 이를 보충한다. 천도는 남는 것을 덜고, 모자란 것을 보충하지만 인도(人道)는 그렇지 않아서 오히려 모자란 데서 덜어내 남는 자를 보태주고 있다.”

노자의 이런 균등사상은 플라톤이 말하였던 이상국가와 아주 가깝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에서 자신이 꿈꾸던 이상주의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고대사회에서 그들은 고립상태에 있으므로 서로 우정이 두텁고 의식주가 모자라지 않았으므로 심한 빈곤에 빠지지 않으며, 궁핍 때문에 서로 쟁탈하는 일이 없다. 금이니 은이니 하는 것이 없으므로 부라는 것도 없으며, 빈부가 없는 사회이기에 횡포나 부정, 질투 따위가 발생할 여지 또한 없다. 그러기에 그들은 순박하고 선량하다. 그들은 무엇에나 숙련해지는 일이 없어서 요즘과 같은 기술이나 예술도 필요치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입법자(立法者:정치가)를 가질 필요가 없었고, 모든 것을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습관대로 살았다.”

그런 의미에서 노자와 장자로 이어지는 노장사상은 훗날 들어온 불교를 이해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중국민족은 불교를 이해하는 데 그 실마리를 도가에서 찾았으며 이는 도가사상이 초월적인 면이 있는 데다 도를 무()라고 규정한 점이 불교의 공() 사상과 유사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국민족은 도가를 통해 불교를 이해했기 때문에 격의불교(格義佛敎)’라는 독특한 사상을 낳았으며, 마침내 중국민족에 가장 체질적으로 맞는 화려한 선종(禪宗)을 꽃피우게 하였던 것이다.

노자는 언어니 문자니 하는 것을 존중하지 않았다. 심지어 노자는 신의 있는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에는 신의가 없다. 착한 사람은 말에 능하지 않고, 말에 능한 사람은 착하지 않다. 아는 사람은 박식하지 않고, 박식한 사람은 알지 못한다(信者不美美者不信善者不辯辯者不善知者不博博者不知).’고 말함으로써 언어와 지식을 존중하지 않았는데, 이는 중국의 선종이 추구한 불립문자(不立文字)’,즉 불교의 깨달음은 말이나 문자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와 상통하고 있음인 것이다.

노자는 이렇듯 윤희에게 도덕경을 남기고 다시 소 등에 올라탄 후 함곡관을 지나 영원히 사라져버린다. 그 후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는데, 사마천은 노자열전에서 그의 모습을 다만 이렇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공자는 같은 시대 사람인 초나라의 노래자(老萊者)15편의 책으로 도가(道家)의 운용(運用)을 논한 것을 보면 그가 노자의 제자일 법도 하다. 노자는 160세 혹은 200세를 살았다는 설이 있다.그는 무위의 도를 몸에 지녔기 때문에 장수했을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공자가 죽은 지 129(혹은 119) 되는 해에 주의 태사(太史:史官) ()이 진나라의 헌공(獻公:BC 384~362 재위)에게 한 말이 있다.

처음에는 진() 나라가 주나라와 합류한 지 500년 만에 분리하며, 분리된 지 70년 만에 패왕(覇王)이 나타날 것입니다.’

물론 역사 속의 기록이다. 그렇게 말한 답이 노자라고도 하고 혹은 아니라고도 한다. 노자는 오직 숨어 살았던 군자이기 때문에 그 진위는 추측하는 자의 입장일 뿐이다. 다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노자의 아들은 종()인데 위()의 장군이 되어 단간(段干:山西省 安邑縣 近郊) 땅을 봉토(封土)로 받았다. 종의 아들은 주()이고 주의 아들은 궁(), 궁의 현손이 가()인데 가가 한()의 효문제(孝文帝)를 섬겼다. 가의 아들 해()는 교서왕(膠西王)인 앙()의 태부(太傅)가 되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제()에서 살게 된 것이다.

세상에서는 노자의 학문을 하는 자는 유학(儒學)을 배척한다. 유학자들 역시 노자를 이런 식으로 배척한다.

길이 같지 않으면 일을 서로 꾀할 수가 없다.’

노자는 인위적으로 작위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교환케 하고, 조용하게 있으면서도 사람들이 저절로 올바르게 되도록 가르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사마천은 이러한 수수께끼의 인물 노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음을 하고 있다.

노자가 떠난 후 아무도 그의 최후를 알지 못했다.”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