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왕도(王道) 제4장 문정공(文正公)
제1부 왕도(王道) 제4장 문정공(文正公)
서울 외곽의 신흥도시인 분당을 향해 직통하는 도시고속도로를 달려가는 동안 내 머릿속에 줄곧 떠오르는 단어 하나는 상전벽해(桑田碧海)였다.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하였다.’라는 단순한 뜻이지만 그 표현으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풍경이 차창 밖으로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한적한 교외의 들판이었던 이곳은 완전히 빌딩의 숲으로 변해 있었다. 거대한 아파트 빌딩으로부터 이들을 유혹하는 상가들, 서울에서부터 이전해 온 관공서와 대기업의 사무실들….하늘을 찌를 듯한 마천루의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차를 몰고 100㎞에 가까운 속도로 달려가는 내 머릿속으로 문득 릴케가 ‘말테의 수기’에서 노래하였던 시 한 구절이 떠오르고 있었다.
“도시는 고향도 어머니도 없다.
아이들은 어머니가 야회(夜會)에 나가는 동안 그 옷깃 속에서 떨어진 장미꽃 냄새를 맡아가며 고독 속에서 잠이 든다. 마치 등불을 들고 홀로 잠든 노예처럼.”
뽕나무밭이 변해서 푸른 바다를 이룬 거대한 신도시는 릴케의 시처럼 고독을 키우고 고향을 잃어버리게 한다. 어머니를 잃어버린 우리들의 아이들을 노예처럼 홀로 잠들게 한다.
상전벽해.
원래 상전벽해는 신선전(神仙傳)에 나오는 ‘마고 선녀 이야기’가 출전으로 어느 날 선녀 마고가 왕방평(王方平)에게 ‘제가 선생님을 모신 지가 어느새 뽕나무밭이 세 번이나 푸른 바다로 변하였습니다. 이번에 봉래(蓬萊)에 갔더니 바다가 다시 얕아져 이전의 반 정도로 줄어 있었습니다. 또 육지가 되려는 것일까요.’하고 말하였던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상전벽해가 널리 쓰이게 된 것은 당나라의 시인 유정지(劉廷芝)가 ‘흰 머리를 슬퍼하는 노인을 대신해서 지은 시’라는 의미의 ‘대비백두옹(代悲白頭翁)’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 데에서 비롯된다.
“낙양성 동쪽 복숭아꽃, 오얏꽃 날아오며 날아가며 누구의 집에 지는고.
낙양의 어린 소녀는 제 얼굴이 아까운지 가다가 어린소녀가 길게 한숨짓는 모습을 보니 올해에 꽃이 지면 얼굴은 더욱 늙으리라.
내년에 피는 꽃은 또 누가 보려는가.뽕나무 밭도 푸른 바다가 된다는 것은 정말 옳은 말이다.”
유정지가 노래한 것처럼 강남의 신도시는 복숭아꽃, 오얏꽃들이 만발한 5월의 신록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시인 코페가 ‘신은 촌락을 만들었지만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라고 말하였듯 끊임없는 인간의 욕망으로 신이 만든 촌락은 파괴되고 결국 인간이 만든 신기루의 도시로 인해 ‘뽕나무밭도 푸른 바다가 된다는 것은 정말 옳은 말인 것이다(實聞桑田變成海)’.
낯선 도시의 풍경은 사람을 고독하게 한다. 평생을 도시에서 살아온 나였지만 공중에 떠 있는 누각 같은 신도시를 달려가다 보면 어디가 어딘지 방향감각을 잃어버린다. 한 치의 머뭇거림도 용납지 않는 드넓은 신작로는 오직 성난 말처럼 질주하는 속도만을 허락할 뿐.
따라서 방향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쏜살같이 스쳐가는 도로의 표지판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불안과 고독이 낯선 신도시를 달려가는 내 입에서 혼잣말이 흘러나오게 한다.
“사막이군.”
나는 도시고속도로를 달려가면서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대도시는 대 사막이로군.”
# 庶弟(서제)
庶는 ‘많다, 여럿, 서자’등의 뜻으로 쓰인다. 庶처럼 (집 엄)이 들어간 한자는 대체로 (부엌 포), 府(곳집 부), 廳(관청 청)처럼 뜻은 과 관련되며, 음은 나머지 부분이 된다. 첩(妾첩)의 자식을 서자라 하는데, 단군신화(檀君神話)에서처럼 고대(古代)에는 제후(諸侯)의 세자(世子)를 적자(適子), 기타의 아들을 서자라 하였다.
옛날에 환인(桓因:하느님)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인간 세상에 뜻을 두었는데, 환인이 천부인(天符印:신의 권한을 상징하는 부적과 도장)을 주고 인간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에 환웅이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白山:지금의 묘향산) 꼭대기의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왔으니 이곳을 신시(神市)라 했다. 그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과 인간의 삼백예순 가지나 되는 일을 주관하여 인간 세계를 다스려 교화시켰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늘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이에 환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이것을 먹으며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사람이 될 것이라 했다. 곰은 이를 잘 지켜 21일 만에 여자가 되었으나,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뛰쳐나와 사람이 되지 못했다. 여자가 된 곰은 늘 신단수 아래에서 임신하기를 기원했다. 이에 환웅이 사람으로 변하여 그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으니 단군왕검이다. 단군은 기원전 2333년에 아사달(阿斯達:평양)에 수도를 정해 단군조선(檀國朝鮮)을 건국, 약 20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兄(맏 형)의 반대말인 弟는 ‘끈으로 어떤 물건을 묶어놓은 모양’을 본뜬 것인데, 끈을 차례차례 고르게 감았다고 해서 ‘차례’를 의미하였고 여기서 ‘아우’의 뜻도 생겨났다고 한다.
庶弟는 서모(庶母:아버지의 첩)가 낳은 아우, 즉 이복(異腹:배다른)동생을 말한다. 분명한 것은 父나 母가 달라도 동기간(同氣間:형제)이다. 형제를 동근(同根)·천륜(天倫)·안항(雁行)으로 표현하는데, 안항(雁기러기 안, 行갈 행 또는 항렬 항)은 기러기가 ∨자 대형으로 줄지어 날아가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흔히 형과 동생은 비슷한 경우가 많아 형, 아우를 구분하기 어렵다. 여기에 비유되어 두 사물이나 일의 낫고 못함을 분간하기 어려운 경우를 난형난제(難兄難弟)라 한다. 형제간에 중요한 것은 역시 우애(友愛)일 것이다. 형제간 우애에 대해서는 전래(傳來)설화나 실화가 많은데 다음은 그 하나이다.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것으로 고려 공민왕 때 일이었다. 형제가 길을 가다가 우연히 황금 두 덩어리를 얻어서 양천강(陽川江:경기도 김포시 공암진 근처)에 이르러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아우가 갑자기 금덩어리를 강물에 버렸다. 평소 형을 사랑했으나 금덩어리를 나누고 보니 형이 미워 보여, 이 물건은 상서롭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형도 동생의 마음을 이해하고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졌는데, 이후 이 강을 투금뢰(投金瀨)라 부르게 되었다. 재산 문제로 형제간 다툼 내지 살인이 일어나는 사회에 귀감(龜鑑)이 아닐 수 없다.
―대도시는 대사막이다.
영국의 속담처럼 엄청나게 뻗어나간 신도시는 거대한 사막이었다. 물도 없고, 그늘도 없고, 오직 있는 것은 생명을 거부하는 모래뿐. 그래서 T S 엘리엇은 도시를 ‘황무지(荒蕪地)’라 표현하지 않았던가.
“여기는 물이 없고 다만 바위뿐.
바위만 있고 물은 없다.
그리고 모랫길/길은 산 사이에 구불구불 돌아 오르는데 그 산들도 물이 없는 바위만의 산/물이 있다면 우리는 멈춰 마실 것을/바위 사이에선 사람들이 멈추어 생각할 수도 없다.
땅은 마르고 발은 모래 속에 빠져 바위 사이에 물만 있다면 침도 못 뱉는 이빨이 썩은 산의 아가리/여기서는 서지도 눕지도 앉지도 못한다/산속엔 정숙조차 없다/오직 메마른 불모의 뇌성뿐.
산속엔 고독조차 없다.
오직 갈라진 토벽집 문에서 빨간 성난 얼굴들이 냉소하며 으르렁거릴 뿐.”
T S 엘리엇의 시처럼 이곳은 물이 없고 바위만 있는 사막이며, 황폐한 황무지일지도 모른다. 저 거대한 빌딩들은 사막에서 솟아난 물이 없는 바위산. 서지도 눕지도 앉지도 못하는 정숙도 고독조차 없고 오직 있는 것은 빨간 성난 얼굴들이 으르렁거리는 냉소만이 존재하는 비정한 사막, 비정한 도시.그 사막 사이에 난 모랫길을 나는 지금 철로 만든 낙타를 타고 유목민이 되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낯선 신도시가 주는 감상에만 젖을 수가 없었다.
어제 나는 용인시에 전화를 걸어 내가 찾아가는 목적지에 이르는 길을 확인해 두었던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사전에 미리 정보를 수집해 두었지만 그것만으로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지난겨울 전라남도 화순의 능주에 있는 적려유허비를 찾아갈 때도 길을 잘못 들지 않았던가. 막연히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물으면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가 한결같이 모른다는 대답을 듣고 낭패를 보지 않았던가.
비교적 조광조의 유적들이 잘 보존되어있는 한적한 지방에서도 그렇게 무심하였는데, 한참 난개발 중인 신도시의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조광조의 유적들을 찾는 것은 그에 비하면 마치 모래밭에 떨어진 바늘을 찾는 것만큼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고심 끝에 생각해낸 것이 용인시에 직접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다행히 인터넷에는 조광조의 유적을 관리하는 문화재과의 전화번호가 기재되어 있었다. 막연히 공무원들은 불친절할 것이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전화를 받은 사람은 의외로 친절하였다. 그는 심곡서원(深谷書院)과 조광조의 무덤이 있는 장소를 문화재과에 근무하는 직원답게 잘 알고 있었으며, 그곳의 위치를 묻는 내게 이렇게 말하였다.
“전화를 잘 걸어 오셨습니다.전화를 걸지 않고 그냥 찾으려 하셨다면 아주 힘드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신개발지라 온통 아파트촌으로 둘러싸여 전문가들도 잘 찾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내가 출발하는 위치를 묻고 그곳에서 찾아오는 길을 하나하나 상세히 가르쳐 주었다. 인터넷에 나와 있는 현장의 약도들도 물어 찾아가는 것보다 그가 안내해준 대로 이정표를 따라서 단순하게 찾아가는 방법이 훨씬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을 차를 몰아가면서 나는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자칫하면 안내판을 놓칠지도 몰랐으므로 차를 몰아가면서도 나는 줄곧 긴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심곡서원(深谷書院).
심곡서원은 조광조와 그의 시신을 이곳까지 운구하였던 양팽손을 제향하고 있는 서원으로 조광조의 무덤이 있는 이곳에 선조 38년(1605년) 서원을 세우고 조광조의 위패를 모신 데에서 비롯된다.
선조는 특히 조광조를 존경하여 조광조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는데, ‘문정공(文正公)’이라 하였다. 이는 ‘도덕이 있고 학식이 넓으며 올바른 도리를 행한다.’는 뜻으로 선조의 이러한 배려에도 재력이 부족하여 서원이 세워지지 못하다가 시호를 받은 지 30년이 지난 후에야 서원을 세울 수 있었는데, 서원의 이름을 ‘심곡(深谷)’이라 하였던 것은 원래 이곳이 조광조의 선영이 있었던 ‘심곡리’란 곳으로 조광조가 19세 되던 해 아버지 조원강이 별세하자 3년간 시묘를 하면서 이곳에 초당과 연못을 만들어 놓고 학문에 정진하던 유서가 깊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간신히 서원이 세워졌어도 임금으로부터 사액(賜額)을 받지는 못하였다. 임금으로부터 서원에 이름을 지어 그것이 새겨진 편액(扁額)을 받지 못하면 서원으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는데, 그 후 인조 9년(1631년), 유문서(柳文瑞) 등이 상소하여 사액해 줄 것을 청하였지만 거절당하였고, ‘심곡’이란 사액을 받은 것은 효종 원년인 1650년이었다. 서원이 세워진 지 반세기가 지나서야 임금으로부터 사액을 받은 것을 보면 조광조에 대한 평가는 사후 130년이 흘러가도 부정적인 평가를 완전히 씻을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200년이 지난 고종 2년(1865년), 흥선대원군에 의해서 서원철폐령이 내려 전국의 서원 417개 중 27개소만 살아남을 때 조광조를 배향하고 있는 심곡서원이 존치(存置)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이 서원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난 겨울 능주에 있는 ‘적려유허비’를 답사함으로써 시작된 조광조의 추적은 조광조의 시신이 묻혀 있는 묘소와 심곡서원을 찾아감으로써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조광조가 죽은 지 500년.
지금까지의 추적은 조광조의 생애와 살아있을 때의 그의 정치적 행적이었다면 심곡서원과 그의 무덤을 찾아감으로써 사후 500년이 흘러가는 동안 조광조가 역사에서 어떠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가에 대한 마무리 작업을 하기 위함인 것이다.
특히 숙종(肅宗)은 조광조를 매우 깊이 존경하여 ‘정암집’을 읽고 나서 ‘독정암집유감(讀靜菴集有感)’이란 어제(御製)를 내린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늘 돌아가시기 전에 한 말씀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솟아났었는데, 지금 선생의 글을 읽어 보니 더욱 더 도덕이 밝았음을 알겠도다.
조정의 벼슬아치들은 공을 이루기를 간절히 바랐고, 시골의 노파들도 존경하였다네.
부수적으로 예(藝)에 노닐며 굳센 필세(筆勢) 또한 아름답도다.
(每思臨死言 涕淚自交 今讀先生書 益知道德晟 朝紳咸仰成 野亦尊敬 餘事游於藝 佳哉筆勢勁)”
조광조에 대한 숙종대왕의 어제는 지금도 심곡서원 강당에 현판으로 내걸려 있다 한다.
차는 어느덧 신도시에서도 외곽지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외국에서나 볼 수 있는 명품들을 싼값에 살 수 있는 아웃렛들이 갑자기 나타났다. 지금까지 비교적 한적하였던 도로는 먼 곳에서 싼값에 고급 상품들을 사려는 사람들이 몰고 온 차량들의 행렬로 시장거리처럼 붐비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사람의 행렬이 드문 한적한 풍경이었다. 대부분 서울로 출퇴근을 하고 도시는 베드타운의 역할로만 충실한 듯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의외로 드물어 유령의 도시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웃렛이 있는 외곽지대는 모여든 사람들로 무슨 잔칫날처럼 붐비고 있었다. 싼값에 고급 명품을 살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대혼잡을 이루고 있는 모양이었다.
# 筆勢(필세)
筆은 聿(마침내 율)에서 나왔는데 聿은 손으로 붓을 잡고 있는 모양을 본뜬 것이나‘이에’라는 뜻으로도 쓰이자 본뜻을 유지하기 위해 聿자에 竹자를 붙인 것이다. 筆에서 대나무를 본뜬 竹자는 붓의 재질(材質)을 나타낸 것이다. 竹자가 들어간 한자는 第(차례 제), 筵(대자리 연), 箸(젓가락 저), 篇(책 편)처럼 뜻은 竹과 관련됐으며 음은 나머지 부분이 된다.
글 쓰는 데 필수적인 문방사우(文房四友)에는 紙(종이 지), 墨(먹 묵), 硯(벼루 연)에 筆(붓 필)이 들어있는데 붓은 쓰는 도구이므로 ‘쓰다.’라는 뜻도 있다. 후산담총(後山談叢)에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紙筆을 가리지 않는다. 묘한 솜씨는 손에 있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저수량(遂良)이라는 사람이 좋은 붓과 먹이 없으면 글을 안 쓰려 했는데 어느 날 우세남에게 자신의 글씨를 보여 주며 구양순(歐陽詢)의 글씨와 비교해 어느 쪽이 더 잘 썼는지 물었다. 이에 우세남이 ‘구양순은 일체 불평 없이 어떤 붓이나 종이로도 썼는데, 자네는 아직도 종이와 붓에 관심이 큰 것을 보면 구양순을 당할 수 없을 것이네.’라고 한 말과 관련된 말이다.
勢는 ‘권세, 형세, 위세, 세력’ 등을 뜻한다. 대나무를 세로로 쪼개는 듯한 기세, 즉 세력이 강하여 막을 수 없는 모양을 파죽지세(破竹之勢)라 하는데 이는 다음 일화에서 나왔다.
진(晋)나라의 두여(杜予)는 왕준(王濬)의 군사와 함께 오(吳)나라의 무창(武昌)을 빼앗은 후 여러 장수와 함께 작전을 의논하였다. 한 장수가 봄도 반이 지나 강물도 불어나고 있어, 이곳에 오래 주둔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겨울에 다시 쳐들어오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이에 두여가 ‘지금 우리 군사의 세력은 대나무를 쪼갤 때와 같다. 두세 마디를 쪼개 나가다 보면 칼날이 지나감에 따라 저절로 쪼개지는 것과 같으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그 후 3월에 오나라의 서울 남경(南京)을 함락시켰다.
형세와 관련한 예로 ‘호랑이의 위세를 빌린 여우,즉 호가호위(狐 여우호, 假 빌릴 가, 虎 범 호, 威 위엄 위)’도 들 수 있다. 초(楚)나라 선왕(宣王)이 신하들에게 여러 나라가 우리 재상 소해휼(昭奚恤)을 두려워한다는 게 사실인지 물었다. 이때 위나라 출신 강을(江乙)은 소해휼을 질시하고 있었기에 일화를 통해 그렇지 않음을 설명했다.
호랑이가 여우를 잡았는데 여우가 호랑이에게 나는 천제(天帝)가 명한 사자(使者)이니 나를 잡아먹으면 나를 백수(百獸:모든 짐승)의 王으로 한 천제의 명을 어기는 것으로 너는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실제로 호랑이가 여우의 뒤를 따라가 보니 모든 짐승들이 달아나는 것이었다. 여우 뒤의 호랑이 때문이었는데 호랑이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으로, 많은 나라들이 소해휼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의 뒤에 있는 선왕(宣王)의 강한 군사력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상과 같이 볼 때 筆勢는 필력(筆力)과 함께 글씨에 드러난 힘, 문장의 힘을 뜻한다. 言心聲也(언심성야:말은 마음의 소리)요, 書心畵也(서심화야:글씨는 마음의 그림)라 했다. 전산화 시대라 해도 글씨는 매우 중요함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나는 네거리에 붙여진 도로 표지판을 보았다.
‘죽전사거리.’
나는 차 옆 좌석에서 메모지를 들여다 보았다.어제 내게 길을 가르쳐준 문화재과에 근무하는 관리의 말이 정확하다면 첫 번째 갈림길에 접어든 셈이었다.
“죽전사거리에서 우회전하십시오. 고가도로 위로 직진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그가 가르쳐준 대로 방향지시등을 켠 후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자 한눈에 구도로가 나타났다. 새로 개발된 신도시가 아니라 예전부터 있었던 낡은 구역인 듯 도로는 좁고 퇴락한 건물들이 도로 양옆에 촘촘히 서 있었다. 정치적 목적에 의해서 한꺼번에 개발된 분당의 신도시는 일단 여기에서 끝이 난다. 그러나 인간의 끝 간 데를 모르는 욕망으로 인해 개발은 또 다른 개발을 낳고 도시는 또 다른 도시를 낳는다. ‘수지’라는 새로운 이름의 신개발지가 암세포처럼 번져 나가 전이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이름은 용구현(龍駒縣)이라 불리던 용인시.고구려에서는 이곳을 구성현(駒城縣)이라 하였다. 고려 때는 처인현(處仁縣)이라 불렸으므로 두 마을의 이름에서 한자씩 따와 용인이라는 명칭으로 고쳐 부르게 된 것이다. 조선초기의 문신이었던 김수녕(金壽寧)은 용인을 다음과 같이 기문(紀文)하고 있다.
“용인은 작은 고을이다. 그러나 왕도가 인접한 까닭으로 밤낮으로 모여드는 대소빈객이 여기를 경유하지 않는 적이 없는데, 이는 대개 남북으로 통하는 길목인 때문이다.”
그러나 용인이 서울에서 가까운 작은 고을이었지만 풍광만은 절경이어서 갑자사화 때 관이 쪼개어져 참시를 당한 후 사흘 동안이나 장사를 지내지 못하여 점쟁이가 말하였던 대로 ‘바위 밑에서 사흘 밤을 잠들기를 기다렸던’ 매계 조위(曺偉)는 이곳 객관에서 하룻밤을 머물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는 환패(環佩)소리 같고 고요하게 맑은 것은 동경(銅鏡)을 새로 간듯하네/물고기도 꽃다운 먹이에 몰려들어서 펄떡펄떡 뛰어 오른다.
너울거리는 녹음이 청정한데 늙은 나무는 가지가 엉기었다/급한 비가 질펀한 물을 깨트리며 은은하게 우레를 몰고오고 공중에 빗긴 것은 만줄기 은대(銀竹)인데/수면 위에는 야단스레 소용돌이가 생긴다.
맑은 청풍이 뜰을 씻어가고 어둠은 저물녘 까마귀를 따라온다/술잔이 오래되어 밤기운이 차곱고야/나는 이 한적함을 사랑하여 삼성(參星)이 기울 때까지 앉아 있노라.
시를 적어서 아름다움을 기록하려해도 차마 묘한 시구 음·하(陰·何)에게 부끄럽구나.”
조위가 노래했던 대로 용인의 절경을 노래하려 해도 음·하,즉 육조시대의 유명한 시였던 음갱(陰)과 하손(何遜)이 부끄러워서 차마 기록할 수 없다는 조위의 탄식처럼 용인은 예로부터 풍광이 아름다운 적현(赤縣).
그러나 그 풍광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조위의 시처럼 청정한 녹음은 어디로 사라지고 뜨락을 스쳐가는 맑은 바람과 까마귀를 따라 내려오던 저물녘의 어둠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광기 어린 인간의 욕망으로 끊임없이 파헤쳐지고, 부서지고, 까뭉개진 자리에 콘크리트로 만든 건물들만이 들어서고 있음이니.
일찍이 프랑스의 철학자 루소는 말하였다.
“도시는 인류의 쓰레기 하치장이다.”
어느덧 넓은 도로가 나타났다. 왕복 6차선의 준 고속도로였다. 관리가 말하였던 대로 수원으로 가는 43번 국도였는데, 43번 국도가 나타난 것은 가르쳐준 대로 정확한 방향을 따라가고 있음을 증명해준 것이었다.
연이어 새로운 도시가 나타났다. 지금까지 내가 달려온 것보다 더 새로운 신개발지였다.
그러나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어제 내게 특별히 강조했던 관리의 말이 새삼스럽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43번 국도를 따라 곧장 달려오시면 안 됩니다. 그러면 곧장 북수원으로 직행하시게 될 것입니다. 한 5분가량 달려오시다 보면 오른쪽으로 ‘수지초등학교’로 들어가는 표지판이 나올 것입니다. 그 표지판이 나오면 샛길로 들어오셔야 합니다. 절대로 입구를 놓치시면 안 됩니다.”
나는 메모지를 들어 다시 한번 확인하여 보았다.메모지에는 ‘수지초등학교’라고 분명히 적혀 있었다. 나는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입으로 중얼거려 외워보았다.
“수지초등학교, 수지초등학교”
나는 출구를 알 수 없는 미로(迷路)에 빠진 느낌이었다.수 없는 반복훈련으로 출구를 발견하는 실험용 쥐처럼 내 앞에 펼쳐진 거대한 도시의 미로는 나를 실험용 미아로 만들고 있었다.
마침내 도로 한 옆에 세워진 철제기둥에서 내가 찾던 ‘수지초등학교’의 표지판을 찾을 수 있었다.하마터면 지나칠 뻔 하였으므로 황급히 핸들을 꺾어 출입구처럼 빠져 나왔다.갑자기 2차선으로 접어든 옛길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찾아가고 있는 목적지가 거의 다 와가고 있음을 느꼈다.
첫 번째 네거리에 이르자 왼쪽으로 관리가 말하였던 것처럼 대기업의 기술원 건물이 보였고, 키가 낮은 야산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이 시작되었다. 아직 무시무시한 난개발의 발톱이 이곳까지는 미치지 못한 듯 오월의 신록들이 야산을 새파랗게 뒤덮고 있었다.
나는 차창을 열었다. 그러자 싱그러운 숲 냄새가 훈풍을 타고 스며들었다. 이곳의 옛 지명은 ‘서원골’,지금은 용인시의 상현동이지만 옛사람들은 이곳에 ‘심곡서원’이 있다 하여서 ‘서원골’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심곡서원은 광교산(光敎山)의 끝자락과 이진산(離陣山)을 잇는 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하였는데, 그렇다면 저 신록으로 뒤덮인 산의 이름이 광교산일 것인가.
어쨌든 서원에서 전해 내려오는 연보에 의하면 이곳에서 조광조는 젊은 시절 10년 가까이 머물렀던 것처럼 보인다. 연산군 6년(1500년) 조광조 나이 19세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간 묘막을 짓고 시묘하였으며, 끝난 후에는 선영묘 근처에 초당을 짓고 그곳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때의 기록을 연보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선생은 이미 상을 벗었으나 애통함을 다하지 아니하여 마침내 묘 밑에다가 초당 몇 칸을 짓고 영원이 사모하는 곳으로 하고 또한 못을 파고 축대를 만들어 연꽃과 잣(은행, 느티)나무 두 종류를 심어놓고 쉬는 것을 의뢰하였다. 어머니를 봉양함에는 맛있는 음식을 드리고, 겨울에는 따스하게 하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해드림을 삼갔다. 힘써 글 읽는 것을 그치지 아니하여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 사서(四書)로서 위주로 삼고, 그다음의 모든 경서와 성리학에 대한 글들과 통감강목(通鑑綱目) 등을 읽었다. 매일 닭이 울면 세수하고, 머리 빗고, 엄숙히 단정히 앉아 심기를 편안히 하고, 구부리고 읽으면 우러러 생각하며 생각하여 터득하지 못하면 비록 날이 다하고 밤을 새우더라도 터득할 것을 기약하고 스스로 한정적인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참을성을 쌓고, 힘쓰기를 오래하며, 덕의 그릇이 성취되었으나 오히려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것으로 힘씀을 삼았다. 이때 사화(戊午士禍)가 성하여 사람들은 선생이 하는 짓을 보고 어떤 사람은 미치광이라 칭하고, 어떤 사람은 재앙의 근원이라 칭하여 친구들이 간간이 끊어지기도 했으나 선생님은 이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조광조가 소학(小學)을 열심히 읽었던 것은 그의 스승 김굉필로부터 받았던 영향 때문이었다.
소학은 남송시대 주자(朱子)의 감수 아래 그의 제자인 유청지(劉淸之)가 편찬한 책으로 대학(大學)에 대응된 말이며, 초보교육을 위해 아동에게 일상적 예의범절과 어른을 섬기고 벗과 사귀는 도리를 가르치는 목적으로 어릴 때부터 유교적 윤리관을 가르치기 위한 아동의 수신서(修身書)로 장려되었던 모든 교육기관에서 필수교과서로 읽힌 책이었으며,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었던 책이었다.
특히 조광조의 스승 김굉필은 소학동자(小學童子)라고 불릴 만큼 소학을 읽는 데만 열중하였다. 김굉필은 소학을 읽은 후 독소학(讀小學)이란 시를 지었는데,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학문을 배우고도 천기를 알지 못하더니 소학의 글 속에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네(業文猶未識天機 小學書中悟昨非).”
김굉필이 소학에 깊이 빠진 것 역시 그의 스승 김종직의 영향이었는데, 김종직 역시 그의 부친이었던 김숙자(金叔滋)로부터 소학의 중요성을 전수받게 되었으므로 이로부터 소학을 중시하는 ‘소학파’란 학통(學統)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학통은 특히 고려 신하로 굳게 지조를 지켰던 길재(吉再)와 세조의 쿠데타에 항의하여 관직을 버린 김숙자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핵심적 교재로 사용되고 있었다.
조광조는 스승의 영향을 받아 소학을 중심으로 하는 경전들과 중국의 역사서인 ‘통감강목’에 의지하여 연보에서 기록된 것처럼 주위 사람들로부터 미치광이란 말을 들을 만큼 이곳 일대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던 것이다.
경사진 오르막길을 오르자 곧 다시 내리막길이 나타났다. 거의 다 왔는데 안내판이 나타나지 않아 잠시 차를 멈추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으려 하는데 멀리 표지판이 보였다. 한눈에 유적지를 나타내는 갈색 이정표였다. 일단 갈색 표지판이 나타난다는 것은 가까운 곳에 유적이 있다는 반가운 신호였으므로 나는 그대로 차를 몰고 다가가 보았다.
“심곡서원”
마침내 어렵사리 미로를 헤치며 찾아온 뒤끝에 목적지인 심곡서원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서원으로 들어가려면 왼쪽으로 급커브를 틀어 낮은 분지로 들어가야 했으므로 나는 조심스럽게 오가는 차량이 있는가를 살피며 샛길로 접어들었다.
인근에 사는 주민들이 텃밭을 만들어 채소를 가꾸고 있기 때문일까, 작은 공터들이 보이고 둘러싸인 야산에는 온통 아파트의 건물들이 병풍을 두르고 있었다. 그 공터에 초라한 몇 개의 건물이 보이고 마침내 홍살문(紅箭門)이 나타났다.
보통 홍살문은 능이나 묘, 궁, 관가들의 입구에 세운 것으로 두 개의 둥근 기둥을 올리고 지붕이 없이 붉은 살을 쭉 박고 가운데 태극 문양을 새긴 문이었다. 붉은 칠을 한 것은 잡귀신을 쫓고, 홍살문 안에는 위대한 사람의 신위가 있으므로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은 반드시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라는 주술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도로변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우뚝 서 있었다. ‘누구든지 그 앞을 지날 때에는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가진 석비로 품귀에 따라서 1품 이하는 10보, 3품 이하는 20보, 7품 이하는 30보 앞에서 내려 걸어가게 되어 있는 ‘대소인원개하마비(大小人員皆下馬碑)’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 홍살문 안으로 작은 주차장이 보였으므로 그대로 차를 몰고 들어가 그곳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리자 오월의 햇살이 한꺼번에 플래시를 터뜨리듯 작열하고 있어 눈이 부실 정도였다. 낮은 울타리를 따라 피처럼 붉은 영산홍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서원 뒤편의 숲속에 아카시아 꽃들이라도 만발한 듯 달콤한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그러나 서원 주위는 문자 그대로 천지개벽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까뭉개고 그곳에 새 아파트를 짓고 싶지만 명색이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어있는 유적지라 어쩔 수 없이 보존하고 있는 듯 서원의 건물들은 흥부네 집 아이들의 헤진 옷을 기운 누더기처럼 간신히 그곳에 남아 있었다. 원래는 야산을 등 뒤로 하고 양지바른 명당자리에 세워진 서원이었지만 이제는 볼썽사나운 고층아파트들로 둘러싸여 서원은 데리고 온 의붓자식처럼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었다.
서원의 입구는 세 칸의 솟을대문으로 이루어진 외삼문(外三門)으로 돌계단 위에 우뚝 서 있었다. 홍살문처럼 역시 붉은 칠을 한 대문에는 각각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었고,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쓰여진 ‘심곡서원’이란 현판이 내걸려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강렬하게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서원 바깥에 있는 작은 못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조광조는 이곳에 스스로 못을 파고 그곳에 연꽃을 심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못자리가 조광조가 만들었다는 그 연지(淵池)가 아닐까. 그러나 철책으로 둘러싸인 못자리는 물조차 없는 메마른 구덩이에 지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개발, 개발에만 온 정신을 팔고 있는 사람들. 그러나 그들은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데는 이와 같이 무신경하다. 아파트 한 채에 들어가는 주방기구의 값만으로도 조광조가 만들었던 연못은 복원될 수 있을 것이다. 아파트 거실에 매달린 고급 샹들리에의 조명 값만으로도 그 못에 연꽃을 심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
미친 것은 우리들이다. 기록에 의하면 사람들은 ‘선생이 하는 것을 보며 어떤 사람은 미치광이라 칭하였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미치광이는 조광조가 아니라 후세를 사는 우리들인 것이다. 무엇이 소중한지 무엇이 귀한지 모르고 오로지 경제적 논리에 의해서 이익을 좇고 프리미엄에 미쳐 있는 미치광이들.
그 메마른 구덩이가 조광조가 직접 만든 연못임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바로 못자리 위쪽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조광조는 ‘이곳에 연못을 만들고 잣나무 두 종류를 심어놓고 쉬는 것을 위탁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조광조가 심었던 잣나무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그 나무들이 연못 위쪽에 아직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나무들은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세 그루. 나는 연못가에 있는 느티나무로 올라가 보았다. 나무 밑둥 옆에는 이 느티나무가 경기도에 의해서 보호수로 지정되었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었고, 수령 5백년이 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5백년이 된 느티나무임에도 불구하고 나무의 높이는 17m, 밑 둘레가 4m에 이를 만큼 거목으로 자라 있었다. 조광조가 죽고 왕이 바뀌고 왕조가 멸망하고 전쟁이 일어나는 5백 년 동안 그가 심은 나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움직이지 않고 역사의 진리를 말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가 노래하였던가.
“나무는 신성한 것이다. 나무와 이야기하듯 나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아는 사람은 진리를 안다. 나무는 교의(敎義)도 처방도 듣지 않는다. 나무는 개개의 일에 집착하지 않고 삶의 근본 법칙을 말해준다.”
조광조가 심은 느티나무. 조광조가 죽은 이래 5백 년 동안이나 삶의 근본 법칙을 말해주는 느티나무. 조광조의 혼백은 저 느티나무처럼 아직도 살아남아 역사의 진리를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삶의 교의를 가르쳐주고 있지 아니한가.
나는 돌계단을 올라 외삼문으로 다가갔다.솟을대문 옆에는 심곡서원을 설명하는 안내문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심곡서원 이곳은 중종 때의 문신 정암 조광조를 기리기 위해서 효종 원년(1650년)에 건립된 서원으로 그해에 비로소 사액을 받았다. 현종14년(1673년) 강당이 중건되었다. 고종 대원군의 철폐 때에도 훼철되지 않았던 전국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조광조는 연산군 때의 폭정을 개혁하기 위해서 중종에 의해서 등용된 인물로 향약 보급운동, 반정공신위훈(反正功臣僞勳) 삭제, 현량과 실시 등 각종 개혁정치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개혁의 내용이 지나치게 급진적이어서 훈구대신들이었던 남곤, 심정 등의 정치적 반격이라 할 수 있는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이 사화로 조광조는 전라도 능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선조 때 영의정으로 높임을 받고, 문정공(文正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심곡서원은 사당과 강당만으로 이루어진 조선 후기의 소규모 서원이지만 건물은 상당히 짜임새 있다.”
외삼문 천장 밑에는 ‘심곡서원’이란 현판이 내걸려 있었다. 나는 그 현판이 안내문에 나와 있는 대로 효종이 내린 편액인가 하고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임금이 내린 편액이라면 그곳에는 분명히 사액(賜額)이란 글귀가 명기되어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런 글귀가 적혀 있지 않았다.
외삼문은 굳게 잠겨져 있었다.일년에 두 번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대제를 올릴 때만 열어 놓으며, 사람들은 다만 서쪽에 있는 협문을 통해야만 서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음이었다.
나는 서협문을 통해 서원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이곳 건물 중 가장 큰 건물인 강당이 나타났다. 강당 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의 현판이 걸려 있었다.
“日照堂”
한눈에 조광조의 절명시 중 ‘밝은 해가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니 거짓 없는 이 내 충정 환하게 비추리라(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에서 한 자씩 빌려와 지은 당호임을 알 수 있었다.
건물의 형태는 덤벙주초라 불리는 주춧돌 위에 원통주를 세운 초익공집으로 합각지붕에 겹처마로 되어 있었다. 각 칸마다 판자로 된 문비(門扉)가 달려 있었는데, 건물 안에서부터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반쯤 열린 창호문을 통해 안을 살펴보니 어두운 실내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책을 펴놓고 무엇인가를 소리 내어 읽고 있었다. 그 소리의 정체는 곧 밝혀졌다. 주차장에 차를 세울 때도 두 대의 승용차가 이미 주차되어 있었고 건물 뒤쪽으로 돌아가 보니 강당문 앞에 신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을 보아 강당 안에서 무슨 모임이 있는 모양이었다.
서원의 옛 건물을 단순히 유적으로만 보존하지 않고 인근에 사는 사람들끼리 이곳에 모여서 함께 글공부를 하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흡족하여졌다. 건물 뒤쪽에는 사우(祠宇)로 들어가는 내삼문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경내에서 조광조를 배향하는 제사의 중심공간인 지존한 사당을 지키는 마지막 문으로 가운데 문은 제향시 제수만이 통과할 수 있는 신문(神門)이었다. 천장 밑에는 다음과 같은 현판이 걸려 있었다.
“深谷書院 庚寅年 七月二十七日 賜額”
사액이란 글씨가 분명히 양각되어있는 것을 보아 이 현판이 임금 효종으로부터 사액된 편액임이 분명하였다. 경인년이라면 효종원년(1650년), 마침내 효종은 친필로 사액하여 내림으로써 정식으로 조광조의 복원을 만천하에 공표하게 되는 것이다. 실로 조광조 사후 130년 만의 일인 것이다.
나는 효종이 직접 쓴 ‘심곡서원’의 현판을 우러러 보았다.검은 색 바탕의 흰 글씨로 양각된 효종의 어필은 능숙한 솜씨의 달필은 아니었으나 한 자 한 자 정자체로 공들여 쓴 필치였다.
일찍이 청나라의 볼모로 잡혀갔다가 즉위한 뒤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고 북벌계획을 세웠던 강골답게 글자 하나하나에는 혼이 깃들어 있었다. 31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친청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고, 송시열과 같은 반청파를 등용한다. 또한 오랫동안 역적으로 몰려 있던 조광조에 대한 사액을 내린 것을 보면 얼마나 효종이 자주정신에 투철하였던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효종은 ‘심곡서원’이란 사액을 직접 내렸을 뿐 아니라 예조좌랑 채지연(蔡之沇)을 직접 이곳까지 보내어 조광조의 영령 앞에 제사를 지내도록 명령한다. 이 제문을 지은 사람은 이시해(李時楷).
이시해는 선왕이었던 인조의 실록을 편찬한 당대 제일의 문장가로서 효종이 형 소현 세자와 더불어 청나라의 심양에 볼모로 갈 때 호종하였던 인연으로 효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고 있던 문신이었다.
효종은 이시해로 하여금 치제문(致祭文)을 지어 올리도록 하는 한편 채지연을 보내어 조광조의 신위 앞에서 이를 낭독하도록 하였다.
이 기록이 치제문 서두에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국왕은 예조좌랑 채지연을 보내어 선정신(先正臣)인 문정공 조광조의 영령(英靈)에 제를 드리노라(國王遣臣禮曹佐郞蔡之沇 諭祭于先正臣文正公趙光祖之靈).”
치제문의 내용은 당대 제일의 문장가였던 이시해의 작품답게 명문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시작됐다.
“경의 기상(氣象)은/산악(山嶽)의 정신(精神)인 듯 북두(北斗)의 결정(結晶)인 듯/영봉(靈鳳) 같은 상서(祥瑞)며 금옥같이 윤택(潤澤)하다.
어려서 학문에 뜻을 두고/개연(慨然)히 분발하여 대도(大道)를 탐구(探究)했네.역법(曆法)은 하정(夏正) 쓰고 면류관(冕旒冠)은 주(周)의 제도/일찍부터 지닌 포부 왕좌지재(王佐之才) 그 아닌가?
이 나라 동녘 땅에 문화가 싹튼 것은/기자(箕子)가 우리 땅에 오면서 시작됐네.
그 덕화(德化) 그 교훈이 그 뒤로 침체되어/신라(新羅) 고려(高麗) 지나면서 큰 발전 없었도다.
두절된 그 학문을 문경공이 창시하고/경 또한 분발하여 정통(正統)을 받았도다.
방향을 제시하고 앞길을 알려주니/문왕(文王)이 아니어도 그침 없이 분기(奮起)한다.
흉중(胸中)에 쌓인 지식 자연히 대도(大道)와 부합되며/언어와 동작은 법도에 어김없다.
조용히 생각하고 밤낮으로 신칙(申飭)하여/엄연(儼然)하고 숙연(肅然)한 그 위의 어긋남이 없었도다.
굳건하고 엄밀하게 다듬고 갈고하여/영화가 밖으로 발하여/선명한 그 광채가 옥(玉) 같고 물과 같네.
법도(法度) 있는 품위는 일거일동(一擧一動)에 나타나고 고고한 학의 맑은 울음 구천(九天)까지 들려주어 임금께 신임(信任)받아 천재일우(千載一遇) 되었도다.”
나는 내삼문의 협문을 거쳐 사우 앞으로 들어가 보았다. 사당은 장대석으로 만든 기단 위에 방주(方柱)를 두르고 맞배지붕을 한 건물이었는데, 문은 닫혀 있었다. 어쨌든 서원 경내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였으므로 망설여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따로 관리인을 불러 안내를 받을 처지가 못 되었으므로 나는 그냥 문을 열고 사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정면으로 붉은 커튼이 가려진 조광조의 영정이 보였다.나는 그 커튼을 젖혀 보았다.
검은 관모에 양손을 소매 속으로 찔러 넣고,흰색 관복을 입은 조광조의 영정은 이미 지난 가을 능주의 적중거가에서 본 그대로의 동일한 전신상이었다.
# 千載一遇(천재일우)
千자가 들어간 한자어는 千字文처럼 반드시 一千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千劫(천겁:오랜 세월), 千古(오랜 옛적), 千秋(천번의 가을, 즉 오랜 세월), 千篇一律(천편일률:많은 시문의 글귀가 거의 비슷비슷함)처럼 반드시 一千을 의미하지 않고 ‘매우 많음’을 뜻하는 경우가 있다.
千里眼(천리안)의 千里도 ‘아주 멀리’라는 뜻이다. 중국 南北朝시대 北魏(북위)의 양일(楊逸)이라는 사람이 廣州(광저우:허난성 황천현)의 군수로 부임하여 백성들을 위하여 성실히 일했다. 한번은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사람들이 발생하자 실무자들의 반대와 조정의 승낙 없이 “나라의 근본인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창고를 여는 것이 죄라면 내가 받겠다.”며 양곡을 방출하여 이들을 구제했다. 또한 민폐를 없애기 위해 감시원을 곳곳에 배치하여 군대나 공무원이 지방에 갈 때는 반드시 자기가 먹을 식량을 지참하게 하였다. 이에 지방 사람들이 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려 하면 그들은 “楊使君(양사군:양일)께서 千里眼을 가지고 계신데 어찌 속일 수 있겠소.”라며 거절하였다. 이에 千里眼은 본래 千里(먼 곳)를 내다본다는 뜻이나, 후에는 미래의 일이나 남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했다.
載(재)는 수레에 짐을 싣는다는 뜻으로, 수레를 본뜬 車(수레 차, 성씨 차, 수레 거)와 ‘재’라는 음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車자가 들어간 한자는 대부분 輩(무리 배), 輪(바퀴 륜), 轉(구를 전), 較(비교할 교)처럼 뜻은 수레와 관련되어 있으며, 음은 나머지 부분이 된다.
遇(우)는 (쉬엄쉬엄 갈 착)과 (긴꼬리원숭이 원)로 이루어졌다. 착이 들어간 한자도 대부분 近(가까울 근), 遠(멀 원), 迷(미혹할 미)처럼 뜻은 착과 관련되어 있으며, 음은 나머지 부분이 된다. 원이 들어간 한자도 거의가 偶(짝 우), 寓(붙일 우), 愚(어리석을 우), 隅(모퉁이 우)처럼 ‘우’라 읽는다.
이상으로 볼 때 千載一遇는 천년에 한 번 만남 또는 만나기가 매우 어려운 기회를 뜻하는데, 이는 동진(東晉) 때 원굉(袁宏)이 위(魏)나라의 순문약(荀文若)에 대해 “천 년에 한 번 만남(千載一遇)은 賢君(현군)과 名臣(명신)의 아름다운 만남이로다.”라며 찬양한 것에서 연유된 말이다. 같은 말로 千歲一會(천세일회), 千歲一時, 盲龜隅木(맹구우목:눈먼 거북이가 망망한 大海에서 떠다니는 나무토막을 만나는 것 같이 만나기 어려운 기회) 등이 있다.
기회란 이렇듯 만나기 어려운 경우가 있는가 하면 자주 오는 경우도 있다. 중요한 것은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를 위해 다음 故事(고사)와 같이 평소에 열심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진(晉)나라의 차륜(車胤)은 어렸을 때, 공손하면서도 부지런히 책을 읽었다. 그는 불 밝힐 기름이 없어 여름에는 명주 주머니에 수십 개의 螢(반딧불 형)을 담아 그것으로 비추며 밤새워 책을 읽어, 훗날 벼슬이 상서랑(尙書郞)에 이르렀다. 손강(孫康)은 젊었을 때 마음이 맑고 꿋꿋하여 잡스럽게 사귀지 않았는데, 가난으로 기름을 구하지 못해 밤에는 雪(눈 설)에 책을 비추어 보더니, 훗날 벼슬이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이르렀다. 책상을 설안(雪案)이라 하는 것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래서 어려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히 공부하는 것을 螢雪之功(형설지공) 또는 螢雪이나 螢窓雪案이라 한다.
두루마기 바깥으로 흰색 버선을 신은 조광조의 두발이 삐죽이 나와 있었다. 그 발을 보자 나는 문득 갖바치가 직접 만들어 보냈던 한 짝은 검고, 한 짝은 흰 태사혜의 신발이 떠올랐다. 전해 내려오는 야사에 의하면 조광조는 죽기 직전 양팽손에게 자신이 죽으면 그 신발을 신겨 달라고 유언하였으며, 양팽손은 이를 지켜 그대로 시행하였다고 한다.
저 흰색 버선발 위에 신겨졌던 한 짝은 검고, 한 짝은 흰 짝짝이의 비단신.
“천층 물결 속에 몸이 뒤집혀 나오고 천년의 세월도 검은 신을 희게 하지는 못하는구나.”
조광조가 죽어 이미 500년이 흘렀음에도 갖바치가 마지막으로 쓴 참위의 수수께끼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영정 앞에는 붉은색 제단이 놓여 있었고, 제단 위에는 나무로 만든 물건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 물건을 감싸고 있는 뚜껑을 밀어 올려 내용을 확인하여 보았다. 그 나무 조각 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贈領議政文正公靜菴趙先生神位”
이것인가.
나는 그 초라한 신위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생각했다.
이것이 조광조의 신위인가. 신위라면 죽은 조광조의 영혼이 의지하여 머물러 있는 자리. 이 한갓 초라한 나무막대기 위에 조광조의 영령이 머물러 있단 말인가.
사당 안 동쪽으로 또 하나의 제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곳에는 영정도 보이지 않고 다만 붉은색으로 칠하여진 또 하나의 신위가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나는 다시 그 나무상자의 겉면을 벗겨 보았다.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진 또 하나의 신위가 놓여 있었다.“學圃梁先生神位”
학포 양팽손은 조광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인연을 맺고 있었다. 조광조의 시신을 고향 앞 골짜기에 가매장하여 들짐승의 밥이 되지 않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이듬해 봄 조광조의 시신을 이곳까지 운구하였던 은인이었다. 두 사람이 최초로 인연을 맺은 것은 1506년 중종 원년 양팽손의 나이 19세가 되던 해였다.
그 무렵 조광조는 이곳에서 학문에 정진하고 있었는데, 도가 지나쳐 ‘사람들은 선생이 하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미치광이라 칭하고 어떤 사람은 재앙의 근원이라 칭하여 친구들이 간간이 끊어지기도 했으나 선생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였다. 친구들마저 찾아오지 않을 정도로 미친 사람처럼 학문에 열중하던 조광조에게 그러나 여섯 살이나 어린 양팽손은 소문을 듣고 조광조를 찾아간다. 이때의 기록이 양팽손의 연보에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선생이 개연(慨然)히 도를 구할 뜻이 있어 의리를 연구하고 경제(經濟)에 마음을 두었으나 지식을 개척해 나가지 못함을 허물로 여겨 드디어 정암 선생을 찾아가 더불어 경지(經旨)를 강구하고, 사물을 토론하니, 정암도 그 깊이 있는 학식과 재능을 인정하여 세상에 필요한 큰 그릇이라 하였다.”
이처럼 양팽손은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있던 조광조를 불원천리하고 능성에서 용인으로 찾아간 붕우였으며, 마침내 조광조가 진사시험에 방수(榜首)되고, 양팽손이 생원시험에 1등으로 합격한 후에도 두 사람은 서로 강론하고 질의하여 빠진 날이 없었던 것이다.
이때의 기록이 연보에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정암이 일찍이 ‘내가 양팽손과 더불어 이야기함에 마치 지초(芝草)나 난초의 향기가 사람에게서 풍기는 것 같다.’하였고, 또 그 기상을 일컬어 ‘비갠 뒤의 가을하늘이요, 구름이 막 걷힌 직후의 밝은 달이다. 인욕이 깨끗이 다 없어졌다.’ 하였다.”
조광조가 양팽손을 ‘마치 지초나 난초의 향기가 사람에게서 풍기는 것 같다.’고 평한 내용은 지란지교(芝蘭之交)에서 나온 말이다.
지란지교는 ‘지초와 난초 같은 향기로운 사귐’이란 뜻으로,‘벗 사이의 맑고도 높은 우정’을 이르는 말인 것이다.
이 말은 공자가 교우편(交友篇)에서 친구와의 우정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 것에서 비롯된다.
“선한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향기로운 지초와 난초가 방 안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오래되면 그 냄새를 맡지못하나 이는 곧 향기와 더불어 동화된 것이다(與善人居 如入芝蘭之室 久而不聞其香 卽與之化矣).”
공자는 선한사람과의 우정뿐만 아니라 선하지 못한 사람과의 교우도 경계하고 있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하지 못한 사람과 같이 있으면 절인 생선가게에 들어간 것과 같아서 오래되면 그 나쁜 냄새는 알지 못하나 그 냄새와 더불어 동화된 것이다. 이는 붉은 주사(朱砂)를 지니고 있으면 붉어지고 검은 옻(漆)을 지니고 있으면 검어지게 되는 것이니, 군자는 반드시 그와 함께 있는 것을 삼가야 한다.”
조광조와 지란지교를 맺었던 양팽손.그의 연보는 조광조와의 향기로운 우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정암이 능성으로 귀양 오자 선생은 정암과 더불어 언제나 곤궁한 처지에서라도 도리어 형통함을 잊지는 말자고 서로 권면하였다. 정암이 말하기를 ‘우리 두 사람이 여기에서 공유하게 된 것이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이니 서로 간절히 하고 자세히 권면하여 본뜻을 이룩하고 큰 허물이나 짓지 않도록 합시다.’ 이에 선생도 말하기를 ‘이제 인정이 망가졌는데 우리가 귀양을 와서 이렇게 못다 한 학문을 마치게 되었으니 이 또한 하늘의 뜻인가 보다’하였다. 그리고 경의(經義)를 연마하지 않은 날이 없었고, 어쩌다가 며칠만 서로 보지 못하면 곧바로 편지가 왕복하였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양팽손이 지초와 난초처럼 향기로운 사람이었던 것은 조광조의 사후에 그가 보인 행동이었다.
역적죄로 사사된 죄인의 시신은 함부로 수습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양팽손은 조광조의 시신을 홀로 염하고 매장하였던 것이다.
이때의 기록도 연보에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정암에게 사사의 명이 이르자 선생이 손을 잡고 결별을 했는데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다만 하는 말이 ‘각자 우리 왕에게 해야 할 도리를 할 뿐이다.’고 하였다. 이날은 바람도 매섭고 눈이 많이 내려 사람들이 그 추위를 견딜 수 없었는데, 선생은 홀로 적려의 밖에서 종일토록 통곡하여 울고, 몸소 염을 하며, 빈소를 마련하고 전(奠)을 올리며 슬픔을 극진히 하였다.”
그뿐인가.
이듬해 봄, 날이 따뜻해지자 조광조의 체백(體魄)을 용인에 보내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던 것이다. 체백이란 죽은 지 오래된 송장을 가리킨 말로 주로 객사하여 임시로 땅속에 가매장한 시신을 말함인데, 양팽손이 없었더라면 조광조의 시신은 들짐승의 밥이 되어 이와 같은 서원도 조광조의 무덤도 남아 있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때 양팽손은 우분(憂憤)으로 병이 나서 장례에 참석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는데, 그 대신 양팽손은 그의 고향에 조광조의 사당까지 건립하는 것이다. 이때의 기록도 연보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선생이 매양 정암을 이야기하려면 곧 눈물을 흘리더니 이때 이르러 쌍봉의 중조산(中條山) 아래에 사당을 짓고 문인과 자제를 시켜 춘추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오늘날 조광조를 위대한 사상가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실패한 정치가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조광조가 양팽손이란 사람과 죽음을 뛰어넘는 향기로운 지란지교의 우정을 맺음으로써 ‘나를 낳아준 사람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이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叔牙)’라고 탄식한 관중처럼 자신을 진정으로 알아주는 친구를 가졌던 조광조를 인생의 성공자로서 평가하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 憂憤(우분)
憂는 마음 속에 근심이 있음을 뜻하는 글자다. 심장을 본뜬 心(마음 심)이 들어간 한자는 거의가 忌(꺼릴 기:己 몸기+心), 忍(참을 인), 忘(잊을 망), 忙(바쁠 망), 忿(분할 분), 怒(성낼 노), 悟(깨달을 오), 悲(슬플 비), 悼(슬퍼할 도), 情(뜻 정), 惻(슬퍼할 측), 感(느낄 감), 懺(뉘우칠 참)처럼 그 뜻은 마음(心, )과 관련되어 있으며, 음은 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된다. 憂자가 들어간 한자는 優(넉넉할 우, 광대 우), (탁식할 우), (곰방메 우)처럼 ‘우’라고 읽는다.
무성하게 돋아난 풀을 본뜬 卉(풀 훼)자와 조개를 본뜬 貝(조개 패)자로 구성된 憤자는 언짢은 일로 마음이 부풀어 오름(賁 클 분)을 뜻하는데, 분함도 마음의 한 작용이므로 이 들어간다.賁자가 들어간 한자 역시 墳墓(분묘)라고 할 때의 墳(무덤 분), 噴水(분수)라고 할 때의 噴(뿜을 분)처럼 ‘분’이라 읽는다.
우리는 살면서 이런저런 근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근심 속에는 다음 일화와 같이 알고 보면 근심할 것이 아닌 쓸데없는 근심을 하는 경우가 있다.
열자(列子)에 보면 중국 杞(기)나라에 근심이 매우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만약 하늘이 무너지면 어디로 피해야 하나.”하며 잠도 못 자고 食飮(식음:먹고 마심)도 끊었다. 그러자 이 일을 안 한 사람이 그에게 “하늘은 공기만 차 있을 뿐 아무것도 없는 것이니 무너질 일이 없소.”라며 안심시켰다. 그러자 걱정 많은 사람은 “그렇다면 해나 달 또는 별이 떨어지지는 않겠소? 그것들이 떨어지면 이 세상은 어찌 되겠소.”라며 계속 근심했다. 이에 “해와 달과 별은 공기 속에서 빛나고 있을 뿐이니, 그것들이 떨어져도 우리가 부딪쳐 죽지 않을 것이니 근심 마시오.”라며 이해시켰다.
그러자 이번에는 “땅이 무너지면 어떡하오.”라며 계속 걱정하는 것이었다. 이에 “땅은 흙이 쌓인 것인데 흙이 四方에 가득 차 있어서 우리가 뛰고 밟아도 꼼짝하지 않으니 걱정 마시오.”라며 근심을 풀어주었다. 여기서 나온 말이 ‘杞나라 사람의 근심’이라 해서 杞憂 또는 杞人之憂(기인지우)인데,이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다.’라는 뜻이다. 우리 주위에서도 어설프게 알아서 그것 때문에 마음의 병을 얻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가 하면 다음 일화에서 나온 識字憂患(식자우환:학식이 있는 것이 도리어 근심을 사게 됨)인 경우도 있다. 유비(劉備)가 諸葛亮(제갈량)을 영입하기 전에는 徐庶(서서)가 유비의 참모로 曹操(조조)를 여러모로 어렵게 만들었다. 이에 조조는 서서의 어머니가 자신의 영역인 魏(위)나라에 있다는 점과, 서서가 孝子(효자)라는 점을 이용하여 서서를 자기편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의 일환으로 조조의 참모 程昱(정욱)의 꾀에 따라 서서의 어머니 筆體(필체)를 흉내내어 서서에게 급히 집에 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받은 서서가 歸家(귀가)하자 평소 학식이 높고 의리를 중시하며 늘 한 君主만 잘 섬기라고 아들을 격려해온 그의 어머니가 놀라 自初至終(자초지종:처음부터 끝까지)을 알아보니, 그것은 자신의 필체를 흉내 낸 가짜 편지 때문이었음을 알았다. 이에 서서의 어머니는 ‘女子가 글자(字)를 안다(識)는 것(者)은 근심(憂患)을 부르는 원인이 되는구나.’라고 탄식했다.
이상으로 볼 때 憂憤은 근심과 분함 또는 근심하며 분하게 여김 등으로 해석된다. 佛經(불경) 중 華嚴經(화엄경)에 一體唯心造(일체유심), 즉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있다. 사람의 온갖 감정인 喜怒哀樂(희로애락:기쁨과 노염과 슬픔과 즐거움)은 어느 상황에서라도 자신이 조정할 수 있어야 하는 바, 이를 위한 수양이 중요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조광조의 신위를 모신 심곡서원에 양팽손이 함께 배향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로 1958년에 이르러서야 시행되었으니,참으로 아이로니컬한 일일 것이다.
나는 묵묵히 조광조의 영정을 바라보았다. 조광조의 영정을 모시고 1년에 두 번 제례를 지내고 있지만 사당 안은 울긋불긋하게 그린 변두리 극장의 싸구려 간판처럼 조잡한 느낌이었다. 나는 문득 효종 원년에 왕이 직접 예조좌랑 채지연을 보내어 제를 올렸을 때 낭독하였던 치제문의 마지막 부분을 떠올렸다. 당대의 문장가였던 이시해가 어명으로 지어 올린 제문답게 명문이었던 치제문의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다.
“…굳히고 다진 맹세 나쁜 풍속 모두 고쳐/더없이 순후(純厚)한 태평성세 만들고자, 이런 계획 이루어져 성과가 나타나서,/우리 임금 요순같이 거의 되게 되었는데, 소인배(小人輩)가 틈을 타고 가진 흉계 다 부려서/청천백일(靑天白日) 흑운(黑雲)되어 변괴(變怪)가 발생했네.
군신 간에 가진 의논 좋은 정치 하자고 했는데/소인들은 음모하여 오만간계 다 꾸몄다/그 당시 북문의 화(禍)는 천고의 슬픔이네.
공자(孔子) 같은 성인(聖人)도 천하를 순환(循環)했고/주자(朱子) 같은 현인(賢人)도 위학(僞學)으로 몰렸었네.
성공을 못 본 것은 이 아니 천명(天命)인가!/국가의 운명(運命)이지 경과는 관계없다.
하늘은 어이하여 현철(賢哲)을 내어놓고/상란(喪亂)을 입히다니 이것이 웬말인가?
사문(斯文)이 화를 입자 사기마저 꺾였으며/우리 도가 불행하여 불귀객(不歸客)이 되시다니,/성조께서 보살피어 증시(贈諡)하고 증직(贈職)하여/국맥을 다시 이어 사림이 힘입었다.
주공(周公) 공자 경륜도덕(經綸道德) 공언(空言)으로 되었는데/경의 창시(倡始) 아니더면 존숭(尊崇)할 줄 누가 아랴!
천리(天理)와 인심(人心)은 경에 의해 밝아지고/도학(道學)을 전승(傳承)한 공(功) 정자(程子) 주자(朱子) 못지않네.
위대하다 경의 공로 오랠수록 빛이 나서/영원히 백세(百世)토록 종주(宗主)로 떠받드니/부색(否塞)함은 잠깐이고 신장(伸長)됨은 오래도다.
구성(駒城) 땅 저 한편에 완연(宛然)한 송추(松楸)있어/사당(祠堂)짓고 신주(神主)앉혀 춘추(春秋)로 제향(祭享)한다.
현판을 높이 달아 심곡(深谷)이라 이름하고/예관(禮官)을 보내어서 술잔을 드리오니/밝으신 영령(英靈)은 나의 이곡(裏曲) 받아주오.”
과연 그러한가.
나는 팔짱을 끼고 조광조의 영정을 바라보며 생각하였다. 과연 치제문의 내용처럼 조광조의 공로는 위대해서 오랠수록 빛이 나고 있는가. 영원히 백세토록 조광조의 업적은 신장되고 있음일 것인가.
그때였다. 건물 밖에서부터 떠들썩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강당 안에 모였던 사람들이 회합을 끝내고 뿔뿔이 흩어지는 모양이었다. 나는 사당을 나와 강당 쪽으로 걸어갔다. 주로 나이 들어 은퇴한 사람들이 헤어지며 인사를 나누고 있다 나를 보았다. 그 중의 한 명이 내게 명함을 주며 악수를 청하였다.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서 논어도 배우고, 경전도 공부하고 있습니다.”
대학의 교수로 있는 분이 자원 봉사하여 모임을 이끌고 있는 모양이었다. 심곡서원이 다만 문화재로만 남아 있지 않고 산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겐 우선 반가웠다.
“다른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서예공부도 하고 있습니다.”
강당 옆에는 ‘장서각(藏書閣)’이란 현판이 정면에 내어 걸린 건물이 있었다.
“저 안에는 아직도 많은 책이 보관되어 있습니까.”
내가 묻자 교수가 대답하였다.
“글쎄요. 원래는 67종 486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었고, 정암집 목판본이 보관되어 있었지만 두 차례에 걸쳐 도난되어 지금은 대부분 사라져버리고 서고 역할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씁쓸한 느낌이었다.원래 심곡서원에는 치사재(治事齋)란 건물이 있어 원생들이 기거하며 공부를 하였다.
서원은 원래 지방 사림세력의 구심점이며, 나아가 중앙 정치세력의 기반으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던 중요한 거점이었다. 따라서 서원은 학문 연구와 선현제향을 위해서 사림에 의해 건립된 사설 교육기관임인 동시에 향촌의 자치 운영기구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원은 성리학 보급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조선조 최고의 학당이었으며, 오늘날의 대학에 해당하는 고등교육기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생들은 사라지고 장서각에 보존되었던 귀중한 교재들은 도난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사람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려 나는 강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원생들이 모여서 화합과 학문에 정진하던 강당 안에는 문화재급에 해당하는 중요한 유물이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특히 송시열이 쓴 ‘심곡서원강당기(深谷書院講堂記)’와 숙종대왕이 조광조의 문집이 간행됨을 축하하며 쓴 ‘어제(御製)’의 두 현판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송시열은 평생 조광조를 흠모한 성리학자로 직접 능주에 있는 ‘적려유허비문’을 썼을 뿐 아니라 1637년 10월에는 심곡서원을 방문하고 그 기문을 목판에 새겨 강당 천장에 내걸었다.
과연 송시열의 강당기는 빼곡히 채운 문장으로 천장에 걸려 있었다. 그보다 내 눈을 강렬하게 사로잡은 것은 숙종대왕이 직접 지은 어제였다.
민진원(閔鎭遠)은 왕비였던 인현왕후의 동생으로 문장과 글씨에 뛰어난 문신이었는데 숙종이 죽은 후 ‘임금은 돌아가셨으나 신하인 자신은 아직도 살아 있다. ’하여서 미사신(未死臣)이란 겸사(謙辭)로써 자신을 칭하고 몸소 숙종의 뜻을 받들어 어제를 기록하였던 것이다.
민진원은 우선 정암집을 읽고 난 후 감탄한 숙종이 직접 쓴 시의 서두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늘 돌아가시기 전에 한 말씀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솟아났었는데,
지금 선생의 글을 읽어 보니 더욱더 도덕이 밝았음을 알겠도다.
조정의 벼슬아치들은 공을 이루기를 간절히 바랐고, 시골의 노파들도 존경하였다네.
부수적으로 예(藝)에 노닐며 굳센 필세(筆勢) 또한 아름답도다.”
숙종의 어제에 나오는 ‘시골의 노파들도 역시 존경하였다네(野亦尊敬)’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연보에 의하면 조광조에게 사명이 내리자 아우 숭조(崇祖)가 분망히 길을 가는데 어떤 할머니가 산 가운데로부터 슬피 울며 나오면서 묻기를 “무슨 일로 곡을 합니까.”하였다. 숭조가 대답하기를 “저는 형이 죽었기 때문에 곡을 합니다만 할머니는 어째서 곡을 합니까?”하니, 할머니는 대답하였다. “나라에서 조광조를 죽였다고 하니, 어진 사람이 죽으면 백성들은 도대체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합니까?”하였다고 전하고 있고, 강령현(康翎縣), 지금의 인천시 옹진군에서는 한 농부가 마침 닥친 가뭄의 원인을 두고 조광조를 죽인 탓이라 했다가 처벌을 받았다는 기록까지 전하고 있다. 민진원은 숙종의 어제를 간행한 뒤 다음과 같은 소감을 밝히고 있다.
“숙종 어제가 간행된 뒤에는 제생들이 비로소 이를 볼 수 있었다. 감모의 정성을 감당치 못하여 장차 서원의 벽에 걸어서 영구히 교훈을 남기고자 하여 나에게 부탁하여 베껴 쓰게 하였다. 내 삼가 완미하고 엄숙히 읽어 보니 우리 성고(聖考:숙종)께서 유학을 높이고 도를 귀중히 여기셨으며, 세상에 드문 상감(相感)의 지극한 뜻을 엿볼 수 있었다. 한번 읊조리고 세 번 탄식하며 감동하여 눈물이 절로 솟아나왔다. 삼가 엎드려 절하여 눈물을 씻고 이를 쓴다.”
나는 ‘서원의 벽에 걸어서 영구히 교훈을 남기고자 썼다.’는 민진원의 현판을 강당 천장에서 찾아내 이를 천천히 읽어 보았다.
강당 천장 벽에는 송시열의 ‘강당기’를 비롯하여 ‘학규(學規)’,‘중건기(重建記)’ 등 많은 현판들이 걸려 있었으나 대부분 일정한 규격 속에 많은 내용을 빼곡히 담고 있어 판독하기가 불가능하였지만 유독 숙종대왕의 어제만은 굵은 필체로 양각되어 있었고, 마모상태도 양호하여 한 자 한 자 정확히 읽어 내릴 수 있었다. 민진원이 추신하여 쓴 문장 제일 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崇禎後再庚戌首春 未死臣 閔鎭遠 敬識”
재경술이라면 1730년.수춘은 1월이니,민진원이 숙종대왕의 뜻을 받들어 어제를 삼가 적은 것은 조광조의 사후 200년 후의 일인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나는 팔짱을 낀 채 다시 생각하였다. 조광조의 사후 200년이 흐른 뒤에 숙종은 ‘늘 돌아가시기 전에 한 말씀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솟아 나온다’라고 노래하였다. 숙종이 돌아갔음에도 신하인 자신은 황공하게도 살아 있다 하여서 죽지 못한 신하, 즉 미사신(未死臣)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민진원 역시 ‘한번 읊어보고 세 번 탄식하여 감동하여 눈물이 절로 솟아 나왔다’라고 칭송하고 있다.
또한 효종의 어명으로 이시해는 치제문을 통해 조광조를 ‘위대하다. 공의 경로는 오랠수록 빛이 나서 영원히 백세토록 종주(宗主)로 떠받드니’하고 축원하고 있다.
그 뿐인가. 송시열은 ‘강당기’에서 조광조를 다음과 같이 영탄(詠歎)하고 있다.
“선생은 뛰어난 자질로 문장의 기운을 지니시어 스승의 전수를 받지 않고 홀로 도의 묘리를 터득하시었다. 이는 순수한 성현의 도요, 순전한 제왕의 법이었다. 비록 일시에 행하지는 못하였으나 후세에 전하는 것은 더욱 오랠수록 없어지지 않으리라. 아, 이것이 어찌 인력이 관여할 일인 것인가. 하늘이 실로 그렇게 한 것이다.”
송시열로부터 ‘성현의 도’와 ‘제왕의 법’을 갖추었던 하늘이 내린 인물로 찬양받았던 조광조.
그러나 조광조는 이처럼 후세의 사람들로부터 칭송만 받았던 인물은 아니었던 것이다. 조광조의 사후 그에 대한 복권운동이 시작되자 홍문관 직제학이었던 허흡(許洽) 등은 조광조를 ‘나라를 어지럽히는 괴수’라고 단정하고 맹렬하게 비난하였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심지어 조광조와 같은 신진사림파로 함께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기묘사화 때는 조광조 일파로 몰려 삭직당하고 유배를 떠났던 김정국(金正國)은 ‘사재척언’에서 조광조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대사헌 조광조는 항상 총애를 받아 매양 소대(召對)할 때에는 반드시 의리를 끌어와 비유하였다. 종으로 횡으로 경서의 말을 인용하여 말을 정지하는 때가 없으니 다른 사람은 그동안에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비록 한겨울과 한창 더위라도 한낮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았고, 소대를 마치고 나면 윤허되지 않은 일이 없었다. 같이 있던 자는 매우 괴롭게 여겼고, 모두 싫어하는 기색이 있었다. 일찍이 대사헌으로서 아문에 출사하다가 길에서 고형산을 만났으나 경례하지 않고 지나갔는데, 대사헌을 미워하는 자는 모두 이를 갈았다. ‘한서’를 상고하여 보니 소망지(蕭望之)가 어사가 된 후에는 정승을 가볍게 여겨 만나고도 예를 표하는 일이 없는 것과도 같았다. 또한 장탕(張湯)도 어사가 되어 매양 밤이 늦어야 일을 파하였다. 두 사람이 어질고 어질지 않음은 비록 같지 않으나 거만하고 제 마음대로 하다가 죄를 당한 것은 같다. 예나 지금이나 군자의 몸가짐에는 공경하고 겸손한 것이 복을 누리는 터전이 된다. 어찌 경계하지 않으리오.”
같은 신진사림파였던 김정국으로부터도 ‘예나 지금이나 군자의 몸가짐에는 공경하고 겸손한 것이 복을 누리는 터전이 된다. 어찌 경계하지 않으리오(古今一轍君子處身持敬謙遜享福之基何不戒哉也).’라는 경책을 받았던 조광조. 비록 도덕적으로는 훌륭한 군자였지만 정치가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하나는 말을 즐겨하는 다변(多辯)과 자기의 뜻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독선적인 교만이었던 것이다. 실록에도 조광조가 경연에서 말을 독차지하여 ‘한번 말을 꺼내면 하루종일 계속되어 차츰 조광조의 집요함에 싫증을 느껴 중종은 낯빛을 찡그리고 싫어하는 기색이 완연하였다.’라고 전할 정도로 조광조는 말을 독점하고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다변은 정치가에게는 예나 지금이나 치명적인 독이 되는 법.정치가들은 무엇보다 말을 아끼고,말에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일찍이 송나라의 태종은 이방(李防)에게 칙명을 내려 ‘태평총류’를 편찬하게 하였다.
훗날 태종이 하루에 세 권씩 읽어 1년 만에 완독하였다고 해서 ‘태평어람(太平御覽)’이란 제목으로 바꾼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명언이 나오고 있다.
“정신은 감정에 의해서 발현되며, 마음은 입을 통해서 발표된다. 복이 생기는 것은 그 징조가 있으며, 화가 생기는 데도 그 단서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함부로 감정을 표출하거나 지나치게 수다를 떨어서는 안 된다. 작은 일은 큰일의 시작이 되고, 큰 강도 작은 개미구멍으로 터지며, 큰 산도 작은 함몰(陷沒)로 기울어진다. 이처럼 작은 일이라도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 병은 입으로 들어가고 화는 입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군자란 항상 입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입은 화의 근원’이라는 이 말에서부터 ‘구시화문(口是禍門)’이라는 성어가 나온 것. 그러므로 특히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는 항상 말을 아끼고 말을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평소에 공자의 설법을 유치한 행위라고 무시하였던 노자(老子)는 도덕경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진리를 말하고 있다.
“참으로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참으로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
참으로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오직 행동으로 나타내 보일 뿐이다. 참으로 아는 사람은 말의 수단을 통해서 남을 설득하려 하지 않고 오직 실행으로 남을 감화시키는 것이다.
결국 조광조의 참화도 지식인으로서의 다변에서 비롯되었으니, 그렇다면 조광조는 노자의 눈으로 보면 아는 자가 아니라 알지 못하는 부지자(不知者)가 아닐 것인가.
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이와 같은 상반된 평가는 조광조가 죽은 지 500년이 흐른 지금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음이 아닐 것인가.
나는 천천히 강당을 나왔다.
오후에 접어든 5월의 햇살은 더욱더 눈부셔서 밖으로 나오자 갓 빨아 놓은 옥양목(玉洋木)처럼 온천지에 널려 있었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필요가 없었으므로 나는 외삼문을 통해 서원 밖으로 나섰다.
이제 가야 할 데는 한 곳뿐.조광조의 무덤이었다.
주차장에 세워둔 승용차를 타고 무덤까지 갈까 하다가 나는 문득 서원의 기록을 떠올렸다. 서원의 기록에 의하면 ‘본원의 터는 용인현 서쪽으로 십 리쯤 되는 심곡의 선묘 아래 있는 묘좌유향이며, 선생의 묘소는 이곳에서 수백 보쯤 떨어져 있다. 혹자는 선생의 옛 집터’라 하였다.
기록대로라면 조광조의 묘소는 이곳에서 수백 보가 떨어진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차를 타고 가지 않고 걸어가는 편이 빠를 것이다. 나는 즉시 홍삼문을 벗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 多辯(다변)
‘많다’는 뜻의 多는 제사 지낼 때 고기(月: 肉고기 육)를 몇 겹 포개놓은 것에서, 또는 저녁(夕)이 매일 오듯 시간이 무궁하게 온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는 두 說(말씀 설)이 있다. 후자와 관련하여 夙(일찍 숙), 夜(밤 야), 夢(꿈 몽)같은 한자가 만들어졌는데, 夕자가 들어간 한자는 시간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辯은 두 죄인(辛辛:죄인 서로 송사할 변)을 말(言)로 다스린다는 뜻인데 辯論(변론), 辯護(변호)처럼 眞僞(진위:진실과 거짓)를 판단, 설명한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辨別(변별)이라 할 때의 辨(판단 또는 분별하다 변)자와 혼동할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 言자가 들어간 한자는 訂(바로잡을 정), 記(기록할 기), 詠(읊을 영), 誤(잘못 오), 讓(겸손할 양)처럼 대부분 뜻은 言에 있고 음은 言자를 제외한 부분이 된다.
이상으로 볼 때 多辯은 多言과 같이 ‘말이 많다.’는 뜻으로 쓰인다.
간혹 말을 많이 하거나 靑山流水(청산유수:푸른 산에서 거침없이 흐르는 물이라는 뜻인데, 말을 거침없이 잘하는 것의 비유)처럼 말하는 것을 마치 말 잘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老子가 ‘말을 교묘히 잘하는 것은 졸렬한 것과 같고,말을 매우 잘하는 자는 말을 더듬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말한 것과, 莊子(장자)가 ‘개는 매우 잘 짓는 개, 즉 대상과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짓는 개를 좋은 개라고 여기지 않으며, 사람은 말 잘하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한 것처럼 能辯(능변:말 잘함)보다는 오히려 不言(불언)의 가치를 인정한 것이라 하겠다.
明나라 때 呂新五(여신오)는 인물 됨됨이의 순서를 첫 번째는 침착하고 묵직하며 깊이 있는 인물, 두 번째는 적극적이고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는 인물, 세 번째는 聰明(총명)하고 辯才(변재:말을 잘함)한 사람이라 해서, 말 잘함을 우선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多辯은 다음 일화에서처럼 실속이 없는 경우도 많다.
禦岷楯(어민순)에 보면 옛날 한 곳에 쥐들이 모였다. 그때 쥐 한 마리가 ‘庫間(곳간, 庫곳집 고)을 뚫고 들어가 살면 생활이 윤택해질 텐데, 다만 두려운 것은 고양이 뿐이야.’라고 했다. 그러자 다른 쥐가 ‘그 고양이 목에 방울만 달면 고양이가 움직일 때마다 방울 소리가 나게 되어, 방울 소리만 들으면 모두 달아나 죽음을 피할 수 있지.’라며 고양이 목에 방울을 매달 것을 제안했다. 많은 쥐들이 좋아 펄펄 뛰며 그 말이 옳다고 환호하자 큰 쥐가 ‘대체 누가 그 방울을 고양이 목에 달아주나?’라고 反問(반문:반대로 물어봄)했다.이 말에 모든 쥐들은 啞然失色(아연실색)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기서 나온 말이 방법은 좋아도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뜻의 猫項懸鈴(猫고양이 묘, 項목 항, 懸매달 현, 鈴방울 령)이다.
명심보감에 ‘一言不中(일언부중)이면 千語無用(천어무용)이라’ 즉, 한마디 말이라도 (이치에)맞지 아니하면 천 마디 말이 쓸데없다고 했으니 말 많은 多辯보다는 한마디 말을 하더라도 이치에 맞도록 하는 신중함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채마밭을 지나자 다시 옛길이 나타났다. 간신히 차 두세 대가 엇갈려 갈 수 있을 정도로 비좁은 도로였다. 도로 옆에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한옥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허름한 상점들이 쉴 새 없이 오가는 작업 차에서 풍기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나는 상점에 들러서 말린 건어물과 소주 한 병을 사들었다. 지난 겨울 능주로 갔을 때 향을 피운 분향만을 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점 주인에게 조광조의 무덤이 있는 위치를 묻자 그는 턱으로 가리키며 말하였다.
“언덕길을 내려가시면 큰 도로 입구 변에 있을 것입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비닐봉지에 물건을 싸들고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거리 곳곳에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 도로뿐만 아니라 야산의 나뭇가지 위에도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이곳의 땅이 수원으로 편입되는 것을 반대한다는, 페인트로 조잡하게 쓰여진 글씨였다. 한결같이 붉은 페인트였으므로 얼핏 보면 붉은 피로 쓰여진 혈서처럼 보이고 있었다.
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가벼운 마음이었으나 마음과는 달리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것은 조광조에 대한 이러한 상반된 평가 때문이었다. 나는 지난 6개월 이상 조광조에 대한 추적을 계속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조광조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광조.
과연 그는 누구인가.
영웅인가, 역적인가. 아는 자인가, 모르는 자인가. ‘하늘의 도’와 ‘제왕의 법’을 알았던 성현인가, 나라를 어지럽힌 괴수인가. 지식인인가, 지성인인가. 도덕주의자인가, 위선자인가. 개혁적인 정치가인가, 과격한 극단주의자인가. 현실적인 인물이었던가, 이상적인 몽상가였던가. 오늘을 사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인물인가, 아니면 본받지 말아야 할 인물인가.
그 순간 나는 한 짝은 검고 한 짝은 흰 태사혜의 신발을 마지막으로 선물하였던 갖바치의 참위를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
조광조는 여전히 한 짝은 검고, 한 짝은 흰 가죽신을 신고 있는 것이다. 500년이 흐른 세월 뒤에도 그는 여전히 짝짝이의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광조는 검은 사람인가, 아니면 흰 사람인가.
오늘날 우리들 중 자신이 검은 신을 신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조광조 역시 검은 신을 신었다고 할 것이다.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조광조 역시 진보주의자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며,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조광조를 과격한 극단주의자로 폄하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이념이나 이기주의에 의해서 조광조는 아직도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전히 한밤의 숙청극은 계속되고 있다. 아직도 권력의 신무문에서는 쿠데타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끊임없이 정적에게 사약이 내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백성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이루어지고 있지만 실은 권력을 장악하려는 추악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어디에도 백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 순간 내 머릿속으로 몽골제국의 초기 공신이었던 야율초재(耶律楚材)가 떠올랐다. 역사상 가장 강력하였던 몽골제국의 세조 쿠빌라이의 뛰어난 정치고문이었던 야율초재는 때문에 인류사상 최고의 정치가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요나라의 왕족 출신으로 대대로 금나라를 섬겼으나, 몽고군이 요나라를 점령하자 칭기즈칸에게 항복한 인물로, 군정과 민정을 분리하여 군관이 민중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세제를 정비하여 제국의 경제적 기초를 확립하였던 대정치가였던 것이다.
야율초재는 연경이 몽고군의 손에 들어갔을 때 포로가 되었으나 그의 명성을 들어왔던 칭기즈칸이 간곡히 불러 등용했던 사람이었다. 천성이 현명하고 충직하여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권세와 이익에 굴하지 않았다.
칭기즈칸과 오고다이칸 2대에 걸쳐 재상으로 봉직하였는데, 오고다이칸은 아버지 칭기즈칸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르자 야율초재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 말하였다.
“나는 아버지가 이룩한 대제국을 개혁하려 한다. 좋은 방법이 있으면 말해보라.”
이에 야율초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한 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한 가지의 해로운 일을 제거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한 가지 일을 만들어내는 것은 한 가지 일을 줄이지 못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야율초재는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개혁이라면 새로운 사업이나 제도를 시작하여 백성을 번거롭게 만드는 것보다는 원래 있던 일 가운데서 해로운 일, 필요 없는 일을 제거하는 것이 훨씬 백성들을 위하는 일이라는 결론을 피력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한 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함은 한 가지의 해로운 일을 제거함만 못하다(興一利不若除一害)’는 정치철학이 탄생된 것이었다. 이는 한 마디로 야율초재의 정치관을 나타내는 말로 조광조가 시행하였던 정치개혁과 반대되는 이론이었던 것이다.
조광조는 썩어빠진 정치를 개혁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제도를 창출해 내었고, 이를 강력하게 추진해 나갔던 것이다. 대정치가 야율초재의 개혁방법은 무엇을 하기 위한 개혁이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는 무위(無爲)의 개혁이었으며, 이와는 반대로 조광조의 개혁은 끊임없이 일을 만들고 새로운 방법을 창안해 내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조광조는 정치를 유교의 학문과 일체시하였던 아마추어 정치가였는지 모른다. 이러한 아마추어리즘이 조광조를 실패한 정치가로 전락시킨 중요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조광조의 무덤 위치를 가르쳐준 상점 주인의 말은 정확하였다. 언덕길을 내려가자 곧바로 왕복 6차선의 간선도로가 나타났다. 심곡서원으로 가기 위해 잠시 접어들었던 샛길은 여기에서 끝이 나고 다시 수원으로 가는 준 고속도로의 43번 국도가 합류되는 모양이었다. 그 합류되는 지점에 다음과 같은 이정표가 서 있었다.
“문정공 조광조 선생 묘 및 신도비”
아슬아슬한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차를 타고 왔으면 자칫 그대로 지나칠 수밖에 없을 만큼 짧은 경계구역이었다. 원래는 개천이 흘러내리던 곳이었는지 임시로 작은 다리가 놓여 있었고, 그 다리를 건너자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철제 간판문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은 조선 중기 사림의 중심인물로 정치개혁을 주도한 조광조의 묘이다. 조광조는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영수로 인정받고 있다. 조광조는 중종 5년, 생원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중종반정 이후 훈구파의 권력독점으로 사회갈등이 심화되고 있어 정치적 개혁이 요구되고 있던 상황에서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은 조광조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면서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의 개혁정치는 고려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조선시대 때의 풍습과 사상을 유교적으로 바꾸어 놓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훈구파의 강력한 반발로 새로운 정치 질서를 이루려던 계획은 실패하고 탄핵을 받은 뒤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그 뒤 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제향되었다.선조 38년에는 그의 묘소 아래에 있는 심곡서원에 봉안되었다. 이율곡은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등과 함께 조광조를 동방사현(東方四賢)이라 불렀다. 조광조의 묘역은 선조 때 만들어져 현재까지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있다.…”
조광조를 동방사현이라고 불렀던 이율곡은 평생 조광조를 존경하여 자신이 세운 은병정사 내의 주자사(朱子祠)에 조광조의 석상을 세워놓았을 정도였다. 그는 또한 조광조의 묘지명을 직접 썼으며 그 묘지명에서 이율곡은 ‘저 울창한 용인땅 산 서리고, 물굽이 긴대, 빛나는 그 덕업 영원토록 잊지 못하리’라는 감탄사로 조광조를 기리고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선조 원년에는 당시 백인걸을 비롯하여 태학생 홍인헌 등은 조광조를 문묘에 배향할 것을, 부제학이던 박대립은 관작을 증수하고 시호를 내릴 것을 주장하자, 선조는 경연에서 퇴계 이황에게 조광조의 학문과 행적에 관해 물었다. 이에 이황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는 성품이 빼어났으며 일찍 학문에 뜻을 두어 집에서는 효도와 우애를 조정에서는 충직을 다하였으며, 동시 여러 사람과 협력하고 옳은 정치를 다하였습니다만 그를 둘러싼 젊은 사람들이 너무 과격하여 남곤·심정 등을 모함하고 구신들을 물리치려함으로써 화를 입게 된 것입니다.”
조광조에 대한 수많은 평가 중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인 사상가인 이퇴계가 내린 조광조에 대한 평가야말로 단연 최고봉일 것이다. 이퇴계는 자신이 직접 조광조의 행장기(行狀記)를 썼으며, 이 행장기에서도 이퇴계는 조광조의 실수를 다음과 같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러나 공의 뜻이 너무 속히 하고자 하는 데에 잘못됨을 면치 못하여 무릇 건의하고 시행하는데 조급하게 굴어서 장황하고 과격하며 또는 나아가 젊고 이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유행에 뜻이 맞아 함부로 날뛰는 자가 그 사이에 많이 끼어 있었고, 늙은 신하들이 새 시의(時議)에 배척당하여 이에 따라 공박(攻駁)을 당한 자의 원망이 골수에 사무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퇴계는 자신이 조광조의 행장기를 짓는 이유를 ‘황(滉)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비록 선생의 문하에 공경히 배우지는 못하였으나 선생으로부터 받은 것이 적지 않게 많은데, 이미 비명(碑銘)을 사양한 데다가 또 행장마저 짓지 않으면 더 어찌 정(情)이 지극하니 일(事)이 따른다고 하겠는가.’라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이 조광조에게 학문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천천히 조광조의 무덤 쪽으로 걸어갔다. 원래는 깊은 심산유곡이었는데 산기슭까지 아파트 단지들이 건설되고 중턱으로는 도시고속도로가 건설되어 묘역은 야산으로 변해있었다.
묘역으로 들어간 산자락에는 소나무와 잡목으로 이루어진 숲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고, 그 나뭇가지에도 용인 땅의 수원편입을 결사반대한다는 붉은 페인트로 칠해진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 언덕으로 오르는 가장자리에는 거대한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漢陽趙公靜菴趙光祖先生墓域”
그 표석을 보자 나는 마침내 조광조의 무덤을 찾아왔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는 ‘악의 꽃’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던가.
“이승은 짧다. 무덤은 기다린다. 무덤은 배고프다.”
배고픈 무덤. 보들레르의 절창처럼 누군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배고픈 조광조의 무덤. 옛말에 무덤을 ‘백골청태(白骨靑苔)’라 하였다. 죽은 후 500년이 흘렀으므로 이미 흰 뼈와 푸른 이끼로만 남아서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어지러운 난세를 살고 있는 우리를 기다리는 조광조의 무덤을 마침내 오늘 내가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무덤으로 오르는 오솔길 옆에 거대한 신도비가 우뚝 서 있었다. 신도비는 지난날 종 2품 이상 벼슬아치의 무덤가에 세워진 석비였다.
이 신도비가 세워진 것은 선조 18년(1585년)으로 조광조 사후 66년이 흐른 뒤였다.
어명을 받고 비문을 지은 사람은 노수신(盧守愼)이고, 비문을 쓴 사람은 이산해(李山海)였다. 노수신은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로 영의정에 이르렀던 대학자였는데, 어명으로 자신이 신도비명을 짓게 된 이유를 비문 서두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융경(隆慶) 무진년(戊辰年)은 지금 임금(선조)의 원년이다.정암 선생에게 영의정을 추증하시고 다음 해에 시호를 도덕이 있고, 견문이 넓으며, 정도로써 사람들을 복종시킨다는 뜻으로 문정(文正)이라고 내리셨다. 이윽고 어명으로 그의 행동을 기록하게 하시고, 서원과 사우 세우는 것을 허락하셨다. 이는 천심을 나타내고 사람의 도리를 붙잡아 혁혁하게 사람의 이목에 비춰진 것이었으니 이 때문에 한 나라의 선비된 자들이 안심하게 되었다. 그뒤 11년 만에 진신포의(縉紳布衣)들이 모두 그 묘도(墓道)에 비각이 없다 하여서 모두들 나에게 와서 비명을 부탁하였다….”
서문에 나오는 ‘진신포의’ 중에서 진신은 옛날 벼슬하는 자가 홀(笏)을 꽂고 신(紳)을 드리웠기 때문에 관복을 입는 말이며, 포의는 베로 지은 옷으로 미천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벼슬한 사람, 안 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신도비를 세울 것을 원하였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음인 것이다.
신도비에 새겨진 비문은 석비의 앞뒤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조광조의 생애를 비롯하여 그의 업적과 행장을 남김없이 기록하고 있는 비명은 다음과 같은 찬사로 끝맺음하고 있다.
“정성스럽고 한결같이 큰 자리에서 옛것을 참고하여 새것을 도모하였도다.
왕도를 행하시고 백성을 안정시키니 바람처럼 움직여서 교화가 퍼져 갔도다.
진실로 총명하여 사리를 통달하면 물욕(物慾)의 가리움도 저절로 없어지니 나의 병이 아니로다.
그러나 소인들은 속으로 원을 품어 무리들이 이를 가니 꺼진 재가 다시 타도다.
얼굴 표정 바라보고 눈치를 엿보아서 어찌하면 이간하고 어찌하면 허물할까 자나 깨나 모의하네. 하지만 선생은 순리대로 살아가고 죽음도 편케 여겨 나라 위한 그 단충은 밝고 맑은 한수(漢水)이고 배어나는 샘이로다.
오는 이와 가는 이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망하지도 아니하고 어기지도 아니하며, 뒤에도 계시옵고 앞에서도 계시도다.
역대의 임금들이 은혜를 베푸시어 사방의 모든 선비 보호하고 호위하니 아직까지도 전한 것이 있도다.
공(功)은 비록 두어 해를 깊이깊이 닦았으나 은택(恩澤)은 백성에게 흘러서 내려가도다.
온전함을 더욱 밝게 볼 수 있어 잘 모르는 그들에겐 내 이렇게 고하노니, 두려워하지 말며 의심도 하지 말고,어진 이와 현명한 이를 반드시 믿어 주오.
아아! 슬프도다! 성공하며 패하는 건 하느님께 맡겨두리.”
신도비.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事跡)을 기리는 비석. 대개 무덤의 남쪽을 향해서 세우는데, 여기서 신도란 말은 죽은 사람의 묘로(墓路), 곧 신령의 길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이 오솔길은 조광조의 신령과 만나러 가는 유일한 신도(神道)일 것인가.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신도비명을 더듬어 확인하던 나는 한 구절에서 손이 멈췄다.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였다.
“오는 이와 가는 이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망하지도 아니하고 어기지도 아니하며, 뒤에도 계시옵고 앞에도 계시도다(有來有歸不亡不違在後在前).”
과연 그러한가.
조광조의 영령을 찾아가는 신도에는 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오는 이와 가는 이가 끊임이 없이 이어지고 있는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진사림파와 훈구파의 정치적 공방이 계속되고 있지 아니한가. 어차피 권력의 다툼은 힘을 가진 구세력과 그것을 빼앗으려는 신세력의 신구갈등에서부터 비롯되는 것. 구세력은 자신을 보수라 하고 신세력은 자신을 진보라 일컫는다. 그러나 어차피 진보를 표방하는 신세력도 언젠가는 스스로 청산해야 할 낡은 구세력으로 전락해가는 것이니, 조광조가 살았던 16세기보다도 더 심각한 국론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오늘날에도 조광조는 여전히 뒤에도 계시옵고 앞에도 계시옵는가.
그러나 아니었다.
조광조의 무덤으로 올라가는 길은 깎아지른 낭떠러지였다. 조광조의 비극적인 운명을 암시하듯 조광조는 살아서도 절벽의 생애였고, 죽어서도 단애(斷崖)의 운명이었다. 따라서 조광조의 무덤은 끊겨서 더 이상 올 수도 없고 갈 수도 없는 차안(此岸)의 언덕인 것이다.
연보에 의하면 1520년 봄, 조광조의 시신을 심곡리의 언덕에 반장(返葬)하였을 때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전해 오고 있다.
“소달구지로써 용인으로 관을 옮겨와서 장례를 마치고 나니 흰 무지개가 해를 둘렀는데, 동쪽 서쪽으로는 세 번 두르고, 남쪽과 북쪽으로는 각각 한 번씩 둘러섰고, 남북쪽에 둘레 밖으로 두 줄기의 무지개가 띠를 둘러놓은 듯이 하늘에 닿을 것 같았다….”
그러나 쌍무지개가 떴던 무덤주위로는 홍예(虹)대신 고층아파트들이 하늘에 닿을 것같이 띠를 두르고 서 있었고, 깎아내린 산기슭에는 도시와 도시를 잇는 간선도로가 개통되어 수많은 차량들이 굉음을 내며 달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분명히 심곡리의 언덕이라고 표기된 기록과는 달리 조광조의 무덤은 급격한 경사를 이룬 비탈길 위에 마치 낭떠러지 위에 세운 제비집처럼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
길 양옆에 무덤들이 보였다. 이곳 어딘가에 조광조의 선친이었던 조원강의 무덤도 있을 것이고, 조광조의 차남이었던 용(容)의 무덤도 있을 것이다. 조광조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정(定)은 일찍 죽었고, 둘째 아들 용은 판관으로 있어 훗날 이퇴계에게 사람을 보내어 비명을 써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는 것이 행장기에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이곳 일대가 조광조의 선영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조광조의 부인이었던 한산 이씨는 비교적 오래 살아 조광조가 죽은 지 38년 후에 이곳에 묻혀 장사를 치른 후 다시 조광조와 합장되었다. 그러나 수백 년의 세월이 흘러 묘비도 사라져버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황폐한 무덤들만 곳곳에 산재해 있을 뿐이었다.
나는 가파른 비탈길을 빠르게 올랐다. 짧은 거리였지만 급경사였으므로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무덤 바로 앞에는 묘표(墓表)가 서있었다. 죽은 사람의 이름과 생몰연월일 등을 새겨 무덤 앞에 세운 푯돌은 당대문장가였던 이산해(李山海)의 솜씨였다. 이산해는 작은아버지 이지함에게 글을 배웠으며, 지함은 평생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내 토정(土亭)이라 불렸던 조선시대의 기인으로 ‘토정비결’의 저자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 斷崖(단애)
繼(이을 계)의 반대 의미를 지닌 斷은 돌도끼를 본뜬 斤(도끼 근)과 나머지 부분(왼쪽)으로 구성되었다. 왼쪽 부분은 베틀의 한 부속품인 ‘북’ 또는 두 개의 실타래 모양을 본뜬 것이라는 두 설(說)이 있다. 斤이 들어간 한자는 음이 劤(힘 근), 芹(미나리 근), 近(가까울 근)처럼 ‘근’인 경우가 있는가 하면, 斥(물리칠 척), 新(새로울 신)처럼 뜻만 도끼와 관련된 경우도 있다.
베틀과 관련된 다음 일화는 학업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으로 잘 알려져 있다. 맹자가 어렸을 때 유학을 갔다가 학업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맹자 어머니가 베를 짜고 있다가 “학문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느냐?”라고 물었다. 맹자가 “전과 같습니다.”라고 말하자 어머니는 짜고 있던 베를 칼로 끊어 버렸다. 맹자가 그 이유를 묻자 “네가 중도에 학문을 그만두는 것은 내가 이렇게 베를 짜다가 끊어 버리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이에 맹자가 밤낮으로 부지런히 공부하며 子思를 스승으로 섬겨 마침내 天下의 名儒(명유:유명한 유학자)가 되었다. 여기서 유래된 말이 孟母斷機(맹모단기), 또는 斷機之戒(단기지계)이다.
교육과 관련한 맹자 어머니의 유명한 또 다른 일화가 孟母三遷之敎(맹모삼천지교)이다. 맹자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기에 어려서부터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런데 공동묘지 근처에 살다 보니 장사 지내는 장면을 흉내 내며 놀았다. 이에 맹자의 어머니는 환경을 바꾸기 위해 시장 근처로 이사했다. 이번에는 맹자가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들의 흉내를 내며 노는 것이었다. 이에 孟母(맹모)는 다시 서당 근처로 이사하니 맹자가 글 읽는 것이나 제사 지낼 때의 禮法(예법)을 흉내 내며 놀기에 그곳에 머물러 살았다고 한다.
사람은 신경을 많이 쓰거나 심리적으로 괴로우면 腸(창자 장)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창자가 끊어질 듯한 슬픔이나 괴로움 또는 자식이나 남편을 잃은 부녀자의 애끊는 심정을 斷腸(단장)이라 표현하는데 이는 다음 일화에서 유래되었다.
東晉(동진)때의 장군 환온(桓溫)이 蜀(촉)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長江(장강)의 三峽(삼협)을 지날 때 군졸 한 명이 원숭이 새끼를 잡아 배에 올랐다. 이를 본 어미 원숭이가 미친 듯 울부짖으며 강변으로 100여 리나 쫓아와 배가 峽谷(협곡)에 들어서는 순간 배에 뛰어들더니 헐떡이다가 죽고 말았다. 군졸들이 죽은 원숭이의 배를 갈라보니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져 있었다고 한다.
厓(언덕·낭떠러지 애)는 산기슭과 흙이 겹겹이 쌓인 모양(圭)이 합해져 이루어졌다. 厓가 들어간 한자는 涯(물가 애), (막을 애), (대그릇 애)처럼 음은 ‘애’이고, 厓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뜻이 된다.
언덕은 양쪽을 나누는 기준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生死(생사:삶과 죽음)를 바다에 비유하여 번뇌의 이승을 此岸(차안)이라 하고,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涅槃(열반)의 淨土(정토)나 그 세계에 도달하는 경지를 到彼岸(도피안), 즉 彼岸(피안)이라 한다.
훗날 이율곡으로부터 ‘진귀한 새, 괴이한 돌, 이상한 풀’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기인. 이지함처럼 이산해도 괴팍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평생 조광조를 사숙하여 신도비도 함께 쓴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다.
이산해는 묘표에서 다음과 같이 조광조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오호라, 묘비로도 진실로 선생의 경중을 나타내기에 부족한데 하물며 다시 여기에 무엇을 기대할 것이 있겠는가.”
조광조의 무덤은 두 개의 석인과 한 쌍의 망주석(望柱石)이 보호하고 있었다. 봉분은 잘 보존되어 있었고, 무덤 위에 자란 풀들도 가지런히 깎여 있다.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풀 사이에 피어 있었고, 한 떼의 나비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들고 온 비닐봉지 속에서 소주병과 건어물을 꺼내어 상석 위에 내려놓았다. 마개를 따고 종이컵에 술을 한 잔 부은 다음 무릎을 꿇고 조광조의 무덤을 향해 삼배를 올렸다. 상석 위에는 누군가 꺾어 묶은 한 다발의 들꽃이 놓여 있었다. 배를 올리고 나서 나는 종이컵에 든 술을 봉분 주위를 돌아가며 무덤 위에 뿌리기 시작하였다.
생전에 조광조는 주색에 엄격하여 절제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20세도 되지 않았던 젊은 시절, 한 여인이 추파를 보내어 머리 비녀를 보내오자 이를 여인숙의 벽에 걸어 놓고 온 것은 유명한 일화였지만, 실제로도 조광조는 평생 첩을 두지 않고 일부일처로만 지냈다. 이는 당시로서는 드문 예에 속하고 있다. 관직을 가지지 않고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은 사람이라도 양반이면 첩 하나쯤 두는 것이 예사였고, 사회적으로도 허용되던 때였음에도 조광조는 정실부인 하나만을 고집하였다.
이율곡도 첩이 둘이나 있었고, 심지어 최고의 성리학자인 이퇴계도 축첩하고 있었는데, 조광조의 이러한 처사는 시대를 초월한 도덕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엿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조건 여자를 멀리하던 율법주의자는 아니었다. 기록에 의하면 중종 13년 5월, 왕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남녀가 적합하게 서로 만나서 정도를 잃지 않는다면 이는 도심(道心)이지, 사사로운 욕정이 아니며, 또한 도에 지나치게 거절한다면 이 또한 사람의 정이 아닌 것입니다.”
이는 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술을 못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술로 인한 동료들의 실수를 자주 보고는 철저하게 절주를 실천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광조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도학의 정신을 철저히 지켜나간 이상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조광조도.
나는 술을 무덤의 주위에 뿌리면서 생각하였다.
막상 의금부에 의해서 한밤중에 체포되자 엉망으로 만취하였던 것이다. 자신을 심문하던 이장곤에게 ‘이 못난 놈아,이 용가(龍哥)야.’하고 술주정하였으며,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신이 답변한 공초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아마도 그날이 조광조가 일생일대에 만취한 처음이자 마지막 날이었으니.
나는 한잔 가득 따른 술을 무덤에 남김없이 뿌리며 중얼거렸다.
“조광조여, 무덤 속에 들어있는 조광조의 영령이여, 술을 권하노니 사양하지 말고 내 노래 한 곡에 귀 기울여 보시오. 금도 옥도 비단도 귀한 것이 못된다.다만 길게 취하여 깨어나지 않는 것이 원이로다.”
나는 술을 뿌리며 이백이 지은 장진주(將進酒)의 한 구절을 권주가로 중얼거려 말하였다.
“옛적에 성현도 다 흔적이 없고 오직 마시는 자만이 이름이 남더라. 주인이 어찌 술이 적다고 하느냐. 즉시 많은 술을 사올 것이다. 오화마(五花馬)와 천금구(千金)를 꺼내어 좋은 술로 바꾸어 그대와 더불어 만고의 시름을 덜고 싶다.”
나는 빈 잔에 술을 따라 혼자서 벌컥벌컥 들이켜기 시작하였다.
혼자서 마시는 낮술이 금세 취기를 불러일으켰다.
나는 이백의 시구처럼 조광조와 더불어 술을 마셔서 만고의 시름을 덜고 싶었다. 남은 술을 종이컵에 다시 따르자 술병이 바닥났다. 술잔을 들고 나는 무덤 앞에 앉아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산이 높고 계곡이 깊어 심곡이라 불렸던 산골은 그러나 이제는 화류항(花柳巷)으로 변해 있었다. 5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광조가 낳은 아들과 그 아들이 낳은 아들과 또 그 아들의 아들들이 죽고 또 태어난 천년의 세월을 통해 이곳까지 파도가 밀려 들어와 조광조의 무덤을 무인도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인적은 끊기고 조광조는 완전히 잊혀진 인물로 낭떠러지 위에 세워진 제비집처럼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조광조는 없다.
노수신은 신도비에서 조광조를 ‘오는 이와 가는 이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망하지도 아니하고, 어기지도 아니하고, 뒤에도 계시옵고 앞에서도 계시도다.’라고 노래하였지만 이제 조광조는 앞에도 없고 뒤에도 없다. 찾아오는 이도 없고 가는 이도 없다. 조광조는 이제 과거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는 것이다.
한 잔의 낮술이 내 마음을 감상적으로 만들었을까. 나는 거대한 아파트들과 도로 위를 쏜살같이 달려가는 차량들의 행렬을 우울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문득 서원 강당 위 천장에서 보았던 이재(李縡)의 시 한 수가 떠올랐다. 이재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사화 때 관직을 사퇴하고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던 대학자였는데, 문외출송(門外黜送)할 때 심곡서원을 방문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짓는다.
“선생의 위대한 모습을 뵙지는 못했으나 하늘과 땅 같은 천리(天理)의 마음은 알 수가 있겠도다.
가련하도다. 심어 두신 수택의 나무들이 윗가지는 솟았지만 아래는 그늘이 없네.”
이재는 서원을 방문했을 때 조광조가 직접 심은 나무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노래하였던 것이다. 조광조가 심은 나무들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남아 무성히 자라고 있다.
그러나 조광조가 심은 손때 묻은 나무가 아직도 무성히 자라고 있다 하더라도 그 아래는 이재의 노래처럼 그늘이 없지 아니한가.
그늘이 없는 나무, 조광조야말로 그늘이 없는 나무(無影木)인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분명히 살아 있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조광조의 그림자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뿐인가. 역시 조선 후기의 문신이었던 성영우(成永愚)도 서원을 방문하고 다음과 같이 한탄하고 있지 아니한가.
“찾아온 손님들은 저문 날을 근심하고 문밖의 정가(政街)에는 갈림길이 많구나(客來愁日暮門外政多岐).”
술 취한 내 가슴 속으로 성영우의 시구가 비수가 되어 내리꽂혔다.
그렇다.
날은 저물어가고 있다. 계절의 여왕인 5월의 찬란한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지만 저물어 가는 저 문밖의 정가에는 갈림길이 많기도 하지 않은가. 도대체 이렇게 많은 갈림길이 일찍이 정가에 존재하였던가.
일찍이 공자는 중용(中庸)에서 말하였다.
“군자의 길은 예컨대 먼 데로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고 높은 데로 올라가려면 반드시 낮은 곳에서 시작하는 바와 같으니라.”
그러나 먼 곳을 가는 길도, 가까운 곳으로 가는 길도, 높은 데로 올라가는 길도, 낮은 곳으로 가는 길도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곳은 천 갈래로 만 갈래로 찢어진 갈림길뿐, 갈림길이 많이 있다는 것은 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그만큼 찾기 힘들다는 뜻이 아닐 것인가.
다기망양(多岐亡羊).
‘여러 갈래 길에 이르러 양을 잃었다.’는 뜻으로 달아난 양을 찾으려는 데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는 바람에 정작 양은 놓치고 말았다는 얘기다. 이는 열자(列子)의 설부(說符)편에 나오는 고사로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전국시대의 사상가로 양주(楊朱)가 있었다. 당시에는 천하의 혼란을 다스리기 위해 ‘모두가 서로 사랑하라(兼相愛).’를 부르짖는 묵자(墨子)의 사상이 대유행을 보이고 있었다. 묵자는 ‘남을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 하라.’하면서 ‘겸상애’야말로 ‘돌아가면서 서로를 이롭게 하는 교상리(交相利)’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는데, 이와는 달리 양주는 극단적인 개인주의, 혹은 이기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다.
양주의 개인주의는 ‘내 몸의 터럭 한 개를 가지고 세상을 구할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터럭 하나도 뽑을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묵적, 혹은 묵자의 겸애설(兼愛說)과 대비를 보여 ‘양주묵적’이라고 통칭되던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어느 날 양주의 이웃집 양 한 마리가 달아났다. 그래서 그 집 사람은 물론 양주의 집사람까지 동원되어 양을 찾으러 나서느라고 안팎이 매우 분주하였다. 이 모습을 본 양주가 물었다.
“양 한 마리를 찾는다면서 왜 그리 많은 사람이 나서느냐.”
그러자 하인이 대답하였다.
“예, 양이 달아난 쪽에는 갈림길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모두들 지쳐서 돌아왔는데, 양은 찾지 못했다고 했다. 갈림길마다 사람들이 찾아 나섰지만 갈림길에 또 다른 갈림길이 있어서 양이 어디로 달아났는지 통 알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양주는 갑자기 우울해져서 하루 종일 말도 하지 않았다. 제자들이 그 까닭을 물어도 대답조차 없었다. 그래서 맹손양(孟孫陽)이란 제자가 선배인 심도자(心都子)를 찾아가 앞서 있던 일을 말하고 스승인 양주가 입을 다문 이유를 물었다. 이에 심도자는 이렇게 대답하여 주었다.
“그것은 선생님이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라네. 곧 ‘큰길에 갈림길이 많기 때문에 양을 잃어버리듯이 학문하는 사람들은 다방면으로 배우기 때문에 본성을 잃는다. 학문이란 원래 근본이 하나인데, 그 말단에 와서 이와 같이 달라지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근본으로 돌아간다면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다.’고 생각하시고는 현실이 그렇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면서 입을 다무신 것이라네.”
여기서부터 ‘다기망양’은 학문의 길이 너무 여러 갈래로 나뉘어서 다방면에 걸쳐 지나치거나 지엽적인 것에 얽매이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비유로 쓰이게 되었는데, 오늘날에도 선택할 대상이 너무 여러 가지가 있어, 어느 것을 택할지 곤혹스러운 경우에도 이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찔끔찔끔 술을 마시면서 생각하였다.
양주가 걱정하였던 대로 갈림길이 많기 때문에 양을 잃어버린 것처럼 오늘날 문밖에는 갈림길이 많이 있어 정치가 실종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
기독교에서 예수가 자신을 따르는 사람을 양이라 표현한 것처럼 양은 백성을 의미하는 비유일 것이다. 정치란 양을 편안히 하고 정치가는 양을 풀밭으로 이끄는 목자(牧者)일 것이다.
양을 풀밭으로 이끄는 길이 정치의 근원이므로 이 길은 복잡하지 않고 오히려 단순할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이데올로기와 정쟁과 편가르기에 의해서 정치의 길은 수많은 갈림길로 갈라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히려 이 수많은 갈림길 때문에 막상 우리가 찾아야 할 잃어버린 양은 찾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성영우의 탄식대로 오늘날 문밖 정가에는 갈림길이 많기도 하여 백성들은 저문 날을 근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천천히 술을 아껴 마시며 성영우의 시를 다시 한 번 읊어보았다.
“찾아온 손님들은 저문 날을 근심하고 문밖의 정가에는 갈림길도 많구나.”
조광조의 무덤을 찾아온 손님인 나, 역시 이곳에 앉아 저문 날을 근심하고 있다. 아아,한 발짝만 나가도 문밖의 정가(政街)에는 찢어지고 갈라진 수많은 갈림길만 무성할 뿐이다.
일모도궁(日暮途窮).
문자 그대로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막혀 있구나.
일찍이 초나라의 평왕 때 오사(伍奢)는 태자 건(建)의 태부(太傅)였다. 이때 간신 비무기(費無忌)는 태부의 다음 벼슬인 소부로 있었는데, 태자비로 간택된 진에서 데려온 미녀를 태자대신 평왕에게 권하고 아첨하여 왕의 신임을 얻는다. 아들의 부인이 될 여자를 가로챈 평왕은 여자에게 빠져 버렸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비무기는 태자의 보복이 두려워지자 참소하여 태자를 국경으로 쫓아버린다.
또 평왕이 태자가 반기를 든다는 비무기의 말을 듣고 오사를 꾸짖자 오사는 도리어 왕의 그릇됨을 간하였다. 이 때문에 오사는 유폐되고, 태자는 송나라로 도망친다. 이번에는 오사의 두 아들의 보복이 두려워진 비무기가 태자의 음모를 두 아들의 조종 때문이라고 참언하였다. 그래서 오사와 맏아들은 잡혀 죽고 둘째 아들 오자서(伍子胥)는 오나라로 도망치는 것이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복수의 화신이었던 오자서. 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되어 버린 오자서는 그 후 초나라를 정복하고 평왕의 묘를 파헤친 후 시체에 300번의 매질을 가함으로써 아버지와 형의 원한을 푼다.
이 처사가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사람들이 비난하자 오자서는 말하였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막혀 있다.” 이 말은 ‘나이가 들었어도 할 일은 많이 있다.’는 뜻으로 비록 늙고 쇠약하여 살 날이 많지 않다 하더라도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는 뜻인 것이다.
오자서의 탄식처럼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막혀 있어 가야 할 길은 먼 것이다. 도대체 유사 이래 나라가 이처럼 어지러웠던 적이 있었던가. 왕조는 멸망하였고 하루아침에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능욕당한 이래 간신히 독립을 하였지만 우리와는 상관없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나라는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일찍이 고구려, 백제, 신라시대 때에도 볼 수 없는 동족 간의 상잔으로 600만 명의 양들이 학살당하였다. 그 전쟁은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동생이 형을 찌르고, 누이를 겁탈하는 ‘더러운 전쟁(Dirty War)’이었다. 그 전쟁은 우리 민족과 전혀 상관없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 체제의 하수인이 되어 대리전을 벌여 오늘날, 전 세계에 남은 단 하나의 분단국이 되었다.
그뿐인가. 시민혁명도 일어나고, 쿠데타도 일어나고, 젊은 장교들도 일어나 정권을 자기 밥그릇처럼 독차지하였다. 정권을 사사로운 욕심으로 채우려는 더러운 야망으로 군인들도 양들을 학살하고 송두리째 껍질을 벗겨내었다. 그리하여 수천 개의 갈림길이 생겨났다.
전라도에 경상도, 충청도로 갈라진 지역의 갈림길이 생겨나는가 하면,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와의 계층별 갈림길도 생겨났다. 젊은이와 나이든 사람들의 세대별 갈림길이 생겨나는가 하면, 기업과 노동자 간의 갈림길도 생겨났다. 진보와 보수의 편 가르기 갈림길도 생겨났으며,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의 학력별 갈림길도 생겨났다.
증오와 전쟁과 복수와 대립과 갈등의 감정적 갈림길이 생겨났는가 하면, 물질과 소유와 섹스의 쾌락적 갈림길도 생겨났다.
이 모든 것은 양들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의 사리사욕 때문에 비롯되었으니, 이 어리석은 지도자들을 우리는 정상배(政商輩)라고 부른다.
일찍이 공자는 군자에 대비되는 말로 소인을 이르러 다음과 같은 사람이라고 평하고 있다.
“소인은 편당을 짓고 두루 어울리지 않으며, 이해관계를 따지는데 밝으며, 교만하며 태연하지 못하며, 언제나 걱정근심으로 지내며, 모든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다.”
결국 정치가 이처럼 갈림길이 많아 어지러운 것은 소인배(小人輩)들의 무리 때문이 아닐 것인가.
나는 다시 찔끔찔끔 술을 마셨다. 애초에는 조광조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고 남은 술을 음복하기 위해 마시기 시작한 술이었으나 점심도 거른 공복에 마신 술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만취한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지금은 태평성대인가. 아니면 난세인가. 당나라의 선승 조주(趙洲)는 난세야말로 호시절(好時節)이라 하였는데, 그렇다면 지금은 호시절인가, 아니면 비상시국인가.
아니다.
나는 머리를 흔들며 생각하였다.
지금이야말로 난세이며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인 것이다.비록 하나의 국호를 가지고 있으나 실은 수많은 갈림길로 나누어진 전국시대인 것이다.
원래는 천자가 천하의 종주로서 다스리던 나라였으나 이제는 천자가 제후들을 다스리는 능력을 잃게 되어 약육강식의 전쟁이 끊이지 않는 전국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천자는 천자로서의 권능을 잃고 수많은 갈림길은 제후들과 대부들에 의해서 지배된다. 작은 나라들은 큰 나라에 먹히거나 예속되고 있으며, 쉴 새 없는 공전(攻戰)으로 땅 빼앗기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곳곳에서 왕들이 생겨나고 스스로를 제후라고 칭하는 신 귀족들이 일어나고 있다. 세력을 넓히려는 패권주의에 의해서 서로 힘을 합쳐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며, 어제의 변절자가 오늘의 애국자가 되어 버린다. 제후는 왕을 꿈꾸며 왕은 천자를 꿈꾸고 있다. 모두들 천하통일을 꿈꾸며 진시왕이 되고 싶어 하고 있다.
일찍이 공자가 태어난 것은 기원전 551년.
그 무렵 천하는 진(秦), 초(楚), 제(齊), 진(晉), 오(吳), 월(越), 노(魯), 송(宋), 정(鄭), 위(魏)… 등의 전국시대로 갈라져 있을 때였으니, 2500년 전의 그때와 지금의 전국시대와는 무엇이 다를 것인가.
공자는 말년에 난세를 두려워하며 역사책인 ‘춘추(春秋)’를 지었다. 맹자는 공자가 춘추를 지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상에 도가 쇠미해지고, 사설(邪說)과 폭행이 생겨나며, 신하로서 자기 임금을 죽이는 자가 생기고 자식으로서 그 아비를 죽이는 자가 생겨나니, 공자는 두려워서 춘추를 지었다.”
2500년 전의 전국시대와 지금의 시대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세상에 도가 쇠미해지고 사설과 폭행이 생겨나고 부하가 상사를 죽이고 아들이 아비를 죽이는 일이 생겨나니, 공자의 전국시대와 전혀 다름이 없지 않은가.
사마천은 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이르지 않았던가.
“공자가 춘추를 지음에 있어서는 쓸 것은 쓰고 깎아낼 것은 깎아내었는데, 자하(子夏)같은 제자들도 한마디도 더 보탤 여지가 없었다. 제자들에게 춘추를 전해주면서 공자는 ‘후세가 나를 알아주는 것도 춘추를 통해서일 것이고, 나를 죄주게 되는 것도 춘추를 통해서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쓸 것은 쓰고 깎아낼 것은 깎아내어 단 한자도 가감할 수 없을 만큼 심혈을 기울였던 춘추.여기에서 ‘공정한 태도로 준엄하게 역사를 비판하는 필법’인 공자의 춘추직필(春秋直筆)이란 말이 생겨났으니, 공자가 다시 태어난다면 이 전국시대를 어떠한 필법으로 기록할 것인가.
아니다.
나는 머리를 흔들면서 생각하였다. 공자는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 공자는 부활하여 이 시대에 다시 살아나 그 유명한 춘추필법으로 역사를 비판하고 이 전국시대를 주유하면서 왕도를 설파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조광조의 시대에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조광조도 자신이 살았던 당대를 극심한 가치관의 혼란으로 난세 중의 난세로 보았을 것이며, 따라서 공자가 다시 살아나 재림(再臨)하는 것이 시대의 요청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어쩌면 조광조는 자신을 공자의 현신(顯身)이라고 생각하였을지도 모른다.
순간 내 머릿속으로 조광조의 무덤 입구에 서 있는 안내문의 내용이 떠올랐다. 비교적 조광조의 업적을 정확하게 압축해 놓은 안내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은 조광조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면서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의 개혁중심에는 고려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낡은 조선시대 풍습과 사상을 유교적으로 바꾸어 놓으려는 것이었다.”
여기서 ‘왕도정치’란 공자가 그토록 열국을 주유하면서 구현하기를 염원하였던 정치사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왕도정치란 ‘인과 덕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다스리는 정치사상’을 말함인데, 맹자는 ‘왕도’에 대비되는 정치사상으로 ‘패도(覇道)’를 엄격히 구별하고 있다.
서양철학에 있어 소크라테스가 공자라면 플라톤과 같은 존재는 맹자로서, 맹자는 공자의 유가사상을 한층 더 발전시킨 것으로 유명한데, 맹자는 ‘왕도’와 ‘패도’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무력으로 인을 대신하는 것이 패도이고, 덕으로 인을 행하는 것은 왕도이다. 무력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것은 마음으로 복종케 하는 것이 아니며, 힘이 모자라 그렇게 되는 것이며, 덕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것은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진심으로 복종케 하는 것이다.”
왕도를 유가정치의 이상으로 삼았던 공자와는 달리 힘으로 백성을 지배하는 패도 역시 중요한 정치수단으로 보았던 맹자는 그러므로 이상주의적인 공자와는 달리 현실적 정치관을 가졌던 사상가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는 안내문에서 엿볼 수 있듯이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던 공자의 화신(化神)이었다.
조광조는 자신을 공자와 동일시함으로써 1515년 중종이 직접 출제한 알성시의 문제에서 ‘공자께서 만약 내가 등용이 된다면 적어도 3년 이내에 정치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다.’라고 말하고, ‘오늘날과 같은 어지러운 시대를 당하여 이 난세를 극복하고 옛 성인의 이상적 정치를 오늘에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할 것인가, 이에 대한 대책을 논하라.’는 시험 문제를 통해 공자의 왕도사상이야말로 난세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설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광조의 왕도정치는 안내문에 나와 있는 대로 ‘고려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조선시대의 낡은 풍습과 사상을 유교식으로 바꾸어 놓으려는 것’이었다.
공자의 사상은 시황제의 ‘분서갱유(焚書坑儒)’ 정책으로 자취를 감추었다가 한나라의 무제(기원전 140~87년 재위) 때에 오경박사가 갖추어지면서 유학으로 정립되어 2000년의 중국 역사를 통해서 중국 정치의 기본원리와 사회윤리의 발판을 이루는 학문으로 발전되어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 후 수나라와 당나라를 거칠 때에는 불교의 융성으로 유학은 자연 쇠퇴하고 있었는데, 이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삼국시대와 신라통일시대, 그리고 고려시대 때까지 우리나라에서도 계속되었던 것이었다.
유교가 다시 부흥하기 시작한 것은 주자(朱子·1130~1200)에 의해서인데, 그런 의미에서 주자는 유교의 중시조라고 불릴 만할 것이다. 후대의 평가와는 달리 당대에는 위학(僞學)이라 하여서 크게 박해를 받았던 주자의 성리학은 송나라 멸망 후 원대에 이르러 관학으로 채택되고 과거의 교재로 사용되면서 크게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주자는 공자가 말한 ‘옛날의 학자는 자기를 위해서 공부했지만 요즘의 학자는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기 위해서 공부한다(古文學者爲己今之學者爲人).’라는 구절에서 자기 자신의 도덕적 함양을 위한 위기지학(爲己之學)과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기 위한 위인지학(爲人之學)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었으며, 이것을 타파하는 길이야말로 진정한 학문의 길임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주자의 핵심 철학인데, 이는 위대한 철인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그리스 시대에 대유행을 보이던 소피스트, 즉 궤변주의에 대해 ‘너 자신을 알아라.’라고 질타하였던 소크라테스의 육성을 연상시키는 사자후인 것이다.
소피스트들의 궤변적 변론술은 ‘비논리적인 것을 논리적인 진실처럼 보이게 하는 일종의 기만술’인데, 주자가 살았을 당시에도 지식인들은 진정한 깨우침을 위한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 궤변술을 통해 명성만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를 주자는 다음과 같이 꾸짖고 있다.
“오늘도 경전을 토론하는 사람들에게는 네 가지의 병폐가 있다. 그 하나는 본디 저속한 것을 끌어올려서 숭고하게 만들고, 본디 비천한 것을 끝까지 캐물어서 심오하게 만들고, 본디 비근한 것을 이끌어서 고원하게 만들고, 본디 명확한 것을 굳이 희미하게 만든다.”
유학이 주자에 의해서 중흥된 것은 원나라라는 이민족의 침입 앞에 민족적 저항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국가적 위기를 맞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민족의 북방 지배는 한족에 대한 정치적 위협인 동시에 문화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치명적이었던 것이었다. 또한 정부는 부패하고 부도덕하며, 당파싸움은 치열하며 많은 지식인들은 관직에 나가지 않았으며, 한족의 문화적 전통이었던 유학은 이미 1000년 이상 불교에 그 자리를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이민족의 교의에 무릎을 꿇게 되면 한족의 정신적 뿌리인 유학은 어떻게 되겠는가.”
주자는 이러한 위기상황 속에서 유학의 도를 부흥시키기 위해 전 생애를 바친 위대한 사상가였다.이는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려 후기의 시대상황 역시 무신집권에 의한 정치적 불안,불교의 부패와 무속의 성행,몽고의 침탈 등으로 국내외적으로 위기가 가중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 고려 후기의 학자 안향(安珦)이 1289년 원나라를 왕래하여 주자서를 베껴 오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그려 가지고 온 후 주자학은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수입되게 된 것이다. 그후 성리학은 성균관의 유학자들에게 수용되어 새로운 학풍을 이루게 되었는데, 특히 정도전, 권근(權近) 같은 성리학자는 이성계를 도와 법전을 제정하고, 국시(國是)를 유교로 삼는 정치이념을 성립함으로써 활짝 꽃피게 되었던 것이었다.
특히 조광조가 살았던 당대는 중종이 알성시의 문제에서 말하였듯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지도 못하고, 나라의 법도도 정해지지 않은 난세 중의 난세였던 것이다.
세조는 어린 단종을 죽이고 정권을 찬탈하였으며, 중종 역시 신하들의 반정에 의해서 물러난 연산군 대신 옹립되어 왕위에 오른 허수아비 왕이었던 것이다. 왕조의 건립 이래 두 번이나 신하가 임금을 쫓아내고 죽이는 불충의 난이 일어난 무법천지였던 것이다.
따라서 조광조는 안내문에 나와 있던 대로 ‘고려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조선시대의 낡은 풍습과 사상을 유교식으로 바꾸어 놓으려는 개혁정치’를 펼치다가 ‘훈구파의 강력한 반발로 새로운 정치 질서를 이루려던 개혁은 실패하고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죽임을 당해 이곳에 묻혀 있는 것이다.
나는 아껴 마시던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봉분 옆 풀밭 속에 웃자라 있는 들꽃 위로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접고 쉬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손을 뻗어 나비의 날개를 붙잡아 보았다.
노랑나비였다.
이른 봄에 노랑나비를 보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데, 노랑나비를 한 마리 잡기까지 했으니, 이것은 길조인가. 나는 소리를 내어 춘향전의 판소리 한 구절을 흥얼거려 보았다.
“그러면 너 죽어 될 것이 있다/너는 죽어 명사십리 해당화 되고/나는 죽어 나비 되어/나는 네 꽃송이 물고/너는 내 수염 물고/춘풍 선듯 불거든/너울너울 춤을 추며 놀아보자.”
나는 손가락을 펼쳤다. 그러자 잠시 멈칫거리던 나비는 너울너울 날갯짓하며 춤을 추며 사라졌다.
그래 조광조는 이곳에 묻혀 있다.
공자의 유교사상으로 정치개혁을 꿈꾸다가 실패하고 죽임을 당해 이곳에 묻혀 있는 것이다.
순간 내 머릿속으로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양팽손에게 했던 조광조의 유언이 떠올랐다.
조광조는 양팽손의 손을 잡고 ‘양공, 안녕히 계십시오. 신이 먼저 갑니다.’라고 위로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야사는 전하고 있지 아니한가.
“부탁이 있소이다. 양공,나 죽은 후에 반드시 걸망 속에 들어있는 태사혜를 신겨 주시오. 내 두 발에 신발을 신긴 채 매장시켜 주시오.”
조광조가 남긴 수수께끼의 유언은 그대로 지켜졌을 것이다. 양팽손은 손수레에 조광조의 시신을 실어 자신의 고향인 쌍봉계곡에 가매장하였으며, 이때 가죽으로 만든 태사혜를 조광조의 두 발에 신겨주었을 것이다. 이듬해 봄 조광조의 시신이 이곳으로 반장될 때에도 조광조의 시신은 아직 썩지 아니하고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고, 또한 그 짝짝이 가죽신도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500년이 흐르는 동안 무덤 속 조광조의 백골도 진토되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니, 하물며 그 가죽신이야 일러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조광조의 육신이 썩어 진토가 되었을지언정 갖바치가 남기고 간 참위만큼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으니.
“천년 세월도 검은 신을 희게 하지는 못하는구나.”
수수께끼의 갖바치가 직접 만든 가죽신과 더불어 바쳐 올린 조광조의 운명을 암시하는 수수께끼의 참언.이 참언의 비밀은 50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5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한 짝은 검고, 한 짝은 흰 짝짝이 가죽신을 족쇄처럼 신고 있는 조광조.
그때였다.
문득 내 머릿속으로 등소평의 목소리가 천둥소리가 되어 들려왔다. 죽의 장막 중국이 개방정책을 실시하려 하였을 때 위대한 개혁가 등소평은 이렇게 말하였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어느 고양이든 상관없다. 쥐를 잘 잡는 고양이야말로 좋은 고양이인 것이다.”
중국이 정부 주도 체제에서 시장경제체제로 바뀔 무렵 등소평은 ‘부유할 수 있는 사람부터 먼저 부유해져라.’라는 선부론(先富論)을 주창한 후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간에 돈을 잘 벌 수 있는 체제가 좋은 체제인 것이다.’라는 뜻으로 그 유명한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것이다.
등소평의 개혁정신에 의해서 중국의 개방은 급속도로 진전된다. 그 어떤 이념이나 그 어떤 이데올로기에 구애되는 것은 마치 고양이의 색깔을 구분 짓는 무의미한 일이다. 오직 필요한 것은 고양이의 빛깔이 아니라 쥐를 잘 잡느냐 못 잡느냐의 실용주의인 것이다.
그렇다면 조광조는 어떠한가.
개혁가 조광조는 여전히 죽은 지 50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한 짝은 검은 신을, 한 짝은 흰 신을 신고 있지 아니한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자신의 이념에 의해 조광조가 검은 신을 신은 검은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가 하면 조광조가 흰 신을 신은 흰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지 않은가.
분명히 말해서 흰 빛깔과 검은 빛깔은 쥐를 잘 잡는 고양이와는 전혀 상관이 없고, 흰 가죽신과 검은 가죽신은 조광조와 전혀 상관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조광조의 짝짝이 신발, 그 빛깔만을 문제 삼고 있지 않은가.
1999년말 뉴스위크는 20세기가 낳은 유명한 어록을 소개하고 있다. 1925년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대중은 작은 거짓말보다 더 큰 거짓말에 더 쉽게 속아 넘어간다.”라고 한 말에서부터 1987년 레이건 미 대통령이 고르바초프에게 “미스터 고르바초프, 이 벽(베를린장벽)을 허물어 버립시다.”라고 한 말까지 소개한 이 어록 중에서 백미는 단연 1978년 덩샤오핑이 선언한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이다.”는 내용의 ‘흑묘백묘론’이었다. 원래 이것은 덩샤오핑의 독창적인 이론은 아니었다. 원래 사천지방의 속담인 ‘흑묘황묘(黑猫黃猫)’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데올로기와 선입관에 구속되지 않고 오직 경제발전의 결과만을 놓고 어떤 정책이나 제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말자는 덩샤오핑의 실용주의 경제이론은 마오쩌둥의 ‘잡초론(雜草論)’의 경제이론을 송두리째 뒤집어엎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던 것이다.
마오쩌둥은 “사회주의의 잡초를 심을지언정 자본주의의 싹을 키워서는 안 된다(寧要社會主義的草不要資本主義的苗)”라는 ‘잡초론’으로 문화혁명을 일으켜 중국의 역사를 후퇴시켰으며, “덩샤오핑은 죽어도 회개할 줄 모르는 주자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비난하며 숙청하였던 것이다. 결국 덩샤오핑의 ‘고양이론’이 마오쩌둥의 ‘잡초론’을 뒤집어엎은 이후 중국 도처에는 자본주의의 숲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음이니.
나는 천천히 무덤가에서 일어서면서 생각하였다.
결국 조광조의 검은 신과 흰 신도 마찬가지가 아닐 것인가. 갖바치의 참언은 ‘검은 신이든 흰 신이든 상관없다. 몸에 잘 맞아 편안한 신발이면 좋은 신발인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음이 아닐 것인가.
조광조가 신진사림파이든 대역죄인이든 과격주의자든 실패한 정치가든 그것은 모두 신발의 빛깔에 불과한 것이다. 조광조는 안내문에 나와 있던 대로 유교의 정신으로 왕도정치를 실현하려 하였던 개혁자였던 것이다.
이러한 조광조의 유교적 개혁정신은 ‘계심잠(戒心箴)’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어느 날 중종은 어전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항상 마음을 경계하고 싶으니 홍문관에서는 이에 합당한 글을 지어 올리도록 하라.”
왕의 어명이 떨어졌으므로 소속관원들이 모두 모여 머리를 짜내어 글을 올렸는데, 그 결과 채택된 것은 뜻밖에도 조광조의 글이었다.
‘마음을 경계하는 글’인 ‘계심잠’에는 조광조의 도덕주의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 잘 표현되어 있는데, 조광조는 이로 인해 중종으로부터 털로 만든 이불까지 하사받는 것이다.
이 계심잠의 서문은 다음과 같다.
“…사람의 마음에는 욕심이 있으므로 그 마음의 본체의 영묘한 것이 잠겨져서 사사로운 정에 구속되었음은 능히 유통하지 못하여서 천리가 어두워지고 기운도 또한 막히어서 인륜이 폐해지고 천지만물이 생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임금은 음란한 소리와 아름다운 맛의 유혹이 날로 앞에 모여들고 또한 권세의 높은 것으로 교만해지기가 쉽습니다. 성상께서 이를 염려하시고 두려워하여 신에게 명하여 마음을 경계하는 글을 지으라 하시니 아아, 지극하십니다. 신이 감히 뜨거운 정성을 헤쳐 내어 만분의 일이나마 도움이 될 것을 바라나이다.”
그러고 나서 조광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굳세게 자기의 마음을 지켜 신명의 엄숙함을 본받도록 한다. 이렇게 하기를 바꾸지 말고 끊임없이 마음을 닦아라. 그리하면 마음의 밝음이 진실로 깨끗하고 그 흐름은 호호(浩浩)할 것이니라.천하 모든 일에 발휘하면 탁연한 밝은 날이라. 마음속에 있는 의(義)는 모든 일에 나타나고 인(仁)은 모든 물건에 밝게 비칠 것이다. 아아, 이 마음을 항상 지니면 선과 악이 분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조광조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옛 성인이 가르쳐주고 또 그것을 그대로 행하는 것이 성인의 심법(心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조광조는 어디까지나 옛 성인, 즉 공자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공자가 가르친 대로 행하고, 공자의 심법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마음을 지켜나가는 법’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조광조의 개혁정신은 자명해지는 것이다. 조광조는 공자의 마음으로 정치를 개혁하려 하였던 것이다.
조광조는 자신을 공자의 현신으로 동일시함으로써 공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공자의 입으로 말을 하고, 공자의 귀로 소리를 듣고, 공자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꾸려 하였던 것이다. 조광조는 자신뿐 아니라 중종도 공자가 되어주기를 소망하였던 것이다.
공자의 인과 공자의 덕은 바로 왕도이며 공자의 도덕과 윤리야말로 모든 사람이 마음을 경계하여 본받고 반드시 지켜나가야 할 계율이었던 것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조광조의 무덤을 돌아보면서 생각하였다.
조광조의 발에 신겨진 검은 신과 흰 신. 천년의 세월도 검은 신을 희게 바꾸지는 못하는 가죽신은 바로 공자인 것이다.
그렇다.
나는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수수께끼의 참언은 이제야 그 비밀이 밝혀지는 것이다. 이제야 알겠으니 조광조는 우리나라가 낳은 가장 위대한 정치가인 것이다. 조광조는 비록 실패했지만 공자의 사상으로 낡은 정치를 개혁하려 하였던 선각자였던 것이다. 다른 성리학자들이 공자의 사상을 다만 학문적으로만 연구하고 발전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조광조는 공자의 사상을 현실정치에 접목시키려고 애를 썼던 구도자였다. 격랑의 역사를 온몸으로 부딪쳐 유가의 도를 실현하려다 산화한 유교적 이차돈인 것이다. 따라서 조광조의 실패는 정치적 실패가 아니라 구도의 궁극(窮極)이었으니, 조광조야말로 순교자인 것이다.
나는 천천히 가파른 언덕길을 걸어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다시는 조광조의 무덤을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지난 6개월 동안 추적해왔던 조광조의 생애와는 이제 작별을 고할 때가 된 것이다. 이제 내 앞에는 새로운 길이 펼쳐져 있다. 그것은 조광조의 발자취를 좇아 500년 전의 과거에서 2500년 전의 역사 속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공자의 행적을 좇아가는 길일 것이다.
조광조가 신었던 짝짝이의 신발을 물려 신고 마치 조광조로부터 바통을 전해받은 장거리주자처럼 계주(繼走)를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
언덕을 내려와서 나는 마지막으로 다시 조광조의 무덤을 우러러보았다. 문득 조광조가 살아생전 지었던 한 수의 시조가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길 건너 일편석이 강태공의 조대(釣臺)로다.
문왕은 어디가고 빈 배만 남았는고.
석양에 물차는 제비만 오락가락하더라.”
조광조의 시처럼 언덕 위의 무덤은 빈 무덤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석양의 물차는 제비만 오락가락하더라는 시구처럼 풀밭 위로는 어지러운 나비 떼들만 춤을 추며 오락가락하고 있을 뿐이었다.
조광조여, 안녕.
개천 위로 난 다리를 건너면서 나는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나는 조광조가 내게 준 한 짝은 검고, 한 짝은 흰 짝짝이의 신발을 물려 신고 서둘러 차가 주차되어있는 심곡서원을 향해 빠르게 걷기 시작하였다. 어느덧 술은 완전히 깨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