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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왕도(王道) 제3장 지치주의(至治主義)

Bollnow 2024. 4. 24. 07:07

1부 왕도(王道) 3장 지치주의(至治主義)

 

15191117.

마침내 죄인 조광조의 유배행렬은 황급히 한양을 출발하였다.

조광조를 능주까지 압송하는 나장들은 의금부 소속의 사령들이었는데, 그 숫자가 여섯 명에 이르는 삼엄한 행렬이었다. 이들의 임무는 조광조를 유배지 능주까지 압송한 후 고을수령에게 인도하는 일이었다. 특히 의금부 소속의 나장들은 납패(鑞牌)를 차고 있었는데, 이들은 다른 나졸들과는 달리 군기가 세고 권위를 갖고 있었다.

조광조는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한 방책에 둘러싸여서 이송되고 있었는데, 조광조를 알아본 수많은 백성들이 다투어 다가와 통곡하였으며, 이때마다 나장들은 손에 든 주장으로 이들을 쫓아 버리곤 하였다.

백성들은 한결같이 조광조에 대한 신의를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조광조가 실시하였던 향약(鄕約)에 대한 소문들을 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향약은 문자 그대로 동네 주민들 사이의 생활규범이라고 할 수 있는데, 향약은 주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증손여씨향약(增損呂氏鄕約)’에서 비롯되었다. 중국 북송말기 남전(藍田)에 살고 있던 여대방(呂大防) 형제가 가문의 약속으로 만든 여씨향약(呂氏鄕約)’이 그 모체였다. 이 향약의 약조는 대충 네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덕업상권(德業相勸)으로 효도와 미덕 등 덕 있는 일을 서로 권하는 것과 그 둘째는 과실상규(過失相規)로 잘못하는 일을 서로 바로잡는 것이며, 셋째는 예속상교(禮俗相交)로 예절을 다하여 서로 사귀기를 가르치는 것이며, 그 넷째는 환난상휼(患難相恤)로 화재나 천재지변이 일어났을 때 서로 돕는 것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는 백성들의 풍속을 순화시키고 상호부조하게 하는 일종의 지방자치단체의 협약이었던 것이었다. 조광조가 향약을 실시한 것은 이와 같이 작은 규모의 풀뿌리 자치행정에서부터 그가 생각하는 혁신정치를 실현시킴으로써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새로운 기풍을 불러오기 위함이었다.

이미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건국하면서 이 향약을 중시하여 태조 주원장 때부터 전국을 200300호의 가구로 분할하여 향약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었다.

조광조는 미신타파와 아울러 백성들의 근본적인 개혁을 위해서는 향약의 점진적 확대를 주장하였으며, 그리하여 지난 10월에는 향약을 전국적으로 확대실시할 것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조광조가 실시하였던 향약은 백성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백성들은 향약을 통해 자신들이 국가의 주체이며,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자부심을 자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훗날 김육(金堉)은 그가 쓴 기묘록(己卯錄)’에서 조광조의 행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칭송하고 있다.

조정암이 정치를 맡았던 1년 동안에 향약을 통해 시중소민들은 그 부모를 잘 섬기고, 자식을 정성껏 기르며, 장사(葬事)에는 깊이 애통하여 3년 복을 입고, 군졸이나 천한 사람들까지 시묘(侍墓)하고 제사에 위패를 모시고 묘에 비를 세우게 되었다. 만약 조정암의 행적이 수년간 계속되었더라면 풍속이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자신이 대동법을 만들어 충청도에서 이를 시행하여 지방자치에 큰 성공을 거두었던 김육의 표현대로 시중소민(市中小民), 즉 백성들은 조광조가 펼친 향약에 대해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따라서 조광조에게 깊은 신뢰를 갖고 있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조광조가 하루아침에 죄수가 되어 유배를 떠난다는 소문이 떠돌자 너나 할 것 없이 수많은 백성들이 조광조의 행렬을 찾아 울며 애통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조광조를 호송하는 나장들은 격리시키기 위해서 주장을 들고 위협하거나 때리기도 하였지만 구름처럼 모여드는 백성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조광조의 유배를 슬퍼한 사람들은 백성들뿐만이 아니었다.

성균관도 들고 일어선 것이었다. 조광조 등이 옥에 갇혔음이 세상에 알려지자 제일 먼저 시위에 나섰던 사람들이 바로 성균관의 유생들이었던 것이다.

젊은 유생들은 자신의 직접적인 스승격인 조광조와 김식 등이 투옥되자 정의감이 폭발되었다. 수백 명의 유생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거리로 나서 대궐로 향하였다. 광화문 밖에 이르렀을 때 신명인(申命仁)이란 학생이 앞으로 나서서 말하였다.

상두꾼들도 상소를 올려 신원하려 하거늘, 하물며 여러분 유생들이 아직도 상소를 준비하지 못함은 어찌된 일이오.”

신명인의 말은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었다. 천한 상여꾼들도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씻기 위해서 신원하는데, 어찌 스승인 조광조가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썼는데 이를 보고만 있겠느냐는 고함소리에 유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덤벼들었다.

신명인이 붓을 들어 상소문을 초하니, 나머지 유생들도 거들어 순식간에 연명으로 된 상소가 완성되었다.

이 유생들의 대표는 이약수(李若水)였다.이들 150여 명은 궐기대회를 가진 후 곧 대궐을 향해 시위행렬을 계속해 나갔다. 문을 지키는 군졸들이 필사적으로 막았으나 허사였다. 학생들은 저지선을 맹렬한 기세로 뚫고 들어가 합문(閤門) 앞에까지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여러 유생들이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이들은 합문 앞에 이르러 상소를 올린 후 모두 무릎을 꿇고 땅을 치며 통곡하기 시작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유생들의 곡성이 대궐을 진동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곡성이 온 대궐을 뒤흔들었으므로 자연 중종이 이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

중종은 크게 놀랐고, 곧이어 승지로부터 이들이 보낸 상소문을 전해 받아 읽어보았지만 상소문을 읽은 중종은 더욱더 화를 내며 말하였다.

유생들의 처사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노라. 대궐 안에 함부로 난입해 들어와도 죄가 되거늘, 하물며 문을 밀치고 들어와 곡성을 냄은 천고에 없는 일이 아닌가.”

중종은 주동자를 색출하여 엄단하도록 명령내리는 한편 금군을 풀어 유학생들을 궐내에서 쫓아내게 하였다. 어명을 받은 군사들이 이들을 모두 쫓아내려 하였지만 유생들은 필사적이었다. 옷과 갓이 찢어지고, 상처 입은 몸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상소를 올린 주동자 다섯 명,즉 이약수, 윤언직(尹彦直), 박세호(朴世豪), 김수성(金遂性), 황계옥(黃季沃) 등은 곧 체포되었는데, 모든 유생들이 모두 함께 잡혀가길 원하니, 감옥이 부족하여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조광조가 중종의 교지가 내려지자마자 즉시 능주로 유배를 떠나게 된 것은 이처럼 흉흉한 민심 때문이었던 것이다.

더 이상 조광조를 도성에 머물도록 하였다간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서둘러 조광조를 귀양길로 쫓아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의 유배 길은 이와 같은 옷깃을 여미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전송하는 백성들에 의해서 외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조광조를 압송하는 나장들도 비록 조광조가 죄인이 되었다고는 하나 그를 함부로 다룰 수는 없음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한 최고의 권세를 가졌던 인물이었으므로 나장들도 조광조를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지방의 많은 관원들도 나와서 조광조를 위문하였고, 선산이 있는 용인을 지날 때에는 이자()의 전송을 받을 수 있었다.

이자는 우참찬으로 조광조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영의정 정광필에 의해서 장차 국가에 크게 이바지할 인물이오니 아무쪼록 의금부로 하여금 죄가 있고 없음을 분명히 가리어 처결토록 하소서란 탄원을 받고 특별히 사면되었던 것이다. 이자는 감옥에서 석방되자마자 자신의 초당이 있는 용인으로 내려왔다가 마침내 유배지로 떠나는 조광조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대감.”

비참한 모습의 조광조를 보자 이자는 흐르는 눈물을 옷소매로 닦으며 말하였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 오니까.”

원래 이자는 교제가 넓어 조광조를 숙청하는데 앞장선 남곤과도 원만하게 지내어 평소 사림파와 훈구파의 갈등을 해소하는데 앞장섰던 중도파였다. 그러나 파직이 되어 자신의 초당으로 내려왔다가 막상 죄수가 되어 유배를 떠나는 조광조를 보자 기가 막혀 눈물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대감.”

이자는 울면서 말하였다.

지나는 길에 잠시 선영에 들러 예를 표하고 떠나시지요.”

용인은 조광조의 부친이었던 조원강(趙元綱)의 묘소가 있어 조광조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고장이었다. 조광조의 부친뿐 아니라 그의 조부, 조광조의 사후에는 그의 묘소가 이장된 곳이며, 부인 이씨뿐 아니라 조광조의 아들이었던 정()과 용() 등 모든 가족들이 묻혀있는 선산이었던 것이다. 특히 그의 부친이었던 조원강이 19세 때 죽자 부친의 묘소 앞에서 3년 동안 시묘를 하는 한편 학문에 정진하였던 조광조에게는 유서 깊은 고장이었던 것이다. 주자가례에 따라 부친의 묘 아래 여막(廬幕)을 마련해두고 잠을 잘 때에도 참최(斬衰)를 벗지 않고 아침저녁 드리는 제상의 제기들도 종을 시키지 않고 손수 씻어 제사를 올렸던 곳이었다. 3년의 시묘가 끝났어도 조광조는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여막이 있던 자리에 초당을 마련하여 집 앞에는 작은 연못을 만들고 연꽃과 잔 나무도 심어놓고 학문에 정진하였던 곳으로 조광조의 정치사상이 완성된 곳이었던 것이다. 벼슬길에 올랐을 때도 조광조는 가끔 이곳에 들러 성묘를 하면서 지친 심신을 회복하는 특별한 장소였던 것이다. 용인의 심곡리,지금의 용인시 수지읍 상현리인 이곳은 그런 의미에서 마음의 고향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광조가 마음만 먹으면 잠시 유배길을 멈추고 선영에 들러 이자의 권유대로 예를 표하고 떠날 수 있음이었다.

그러나 조광조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럴 수는 없소이다.국법을 어긴 강상(綱常)죄인이 되어,내 어찌 선영에 참배할 수 있겠소이까. 그 대신.”

조광조는 이자를 쳐다보며 말하였다.

문충공의 묘소에는 잠시 들려서 예를 표하고 떠나겠소.”

문충공(文忠公)은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鄭夢周)를 가리키는 말로 조광조는 평소에 정몽주와 그의 스승이었던 김굉필(金宏弼), 두 사람을 사표로 삼고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이자는 나장에게 소리쳐 말하였다.

잠시 수레를 돌려 문충공의 묘소로 향하도록 하라.”

정몽주의 묘소는 모현면 능원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용인현에서 동쪽으로 15리 지점에 있는 외진 곳이었다.

압송을 맡은 나장들은 어쩔 수 없이 수레의 방향을 정몽주의 묘소로 바꾸었다. 묘소에 이르자 조광조는 잠시 수레에서 내려 이자와 함께 제단 위에 술을 따르고 배를 올려 예를 갖추었다.

정몽주.

고려 말의 충신. 이성계가 날로 위망(威望)이 높아져서 고려를 정복하려는 야망을 보이자 이성계를 먼저 제거하려다 이를 눈치챈 이방원(李芳遠))에 의해서 선죽교(善竹橋) 위에서 이방원의 부하인 조영규(趙英珪)에게 격살되었던 천품이 높고 충효를 겸하였던 충신 정몽주.

생전에 조광조는 정몽주를 사숙하여 항상 이렇게 말하곤 하였던 것이다.

내겐 두 사람의 스승이 있다.죽은 사람으로서는 문충공이고, 살아있는 사람으로서는 한훤당(寒喧堂)이었다.”

한훤당은 김굉필을 가리키는 것으로 조광조가 17세 때 직접 찾아가 사제로서의 인연을 맺었던 사람이었다.

 

# 綱常(강상)

(벼리 강)은 사(실 사)(산등성이 강)이 합해 이루어졌다. 사가 들어간 한자는 (법 기), (붉을 홍), (무늬 문), (순수할 순), (어지러울 분)과 같이 그 뜻은 거의가 실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 나머지 부분이 음이 된다. 따라서 자의 음은 ()’인데, 자가 들어간 한자는 (굳셀 강), (강철 강)처럼 거의 이라 발음된다.

그리고 (항상 상)(숭상할 상)(수건 건)이 합해진 자인데, 자가 들어간 한자는 (일찍 상), (상줄 상) 등과 같이 으로 발음된다. 의 본뜻은 치마였으나, 차츰 항상이란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아지자 자에 (옷 의)자를 붙여 별도로 (치마 상)자를 만들어 쓰게 되었다.

綱常은 유교 문화에서 사람이 늘 지키고 행하여야 할 덕목인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이다. 삼강(三綱)이란 (1) 임금은 신하의 벼리가 되고(군위신강, 君爲臣綱), (2) 남편은 아내의 벼리가 되며(부위부강, 夫爲婦綱), (3) 아버지는 아들(자식)의 벼리가 된다(부위자강, 父爲子綱)는 세 가지 기본 강령이다. 오상(五常)은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 즉 인() · () · () · () · (), 또는 오륜(五倫)을 말한다.

五倫이란 (1)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가 있어야 하며(군신유의, 君臣有義), (2) 아버지와 아들(자식) 사이에는 친함이 있어야 하며(부자유친, 父子有親), (3)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분별이 있어야 하며(부부유별, 夫婦有別), (4)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가 있어야 하며(장유유서, 長幼有序), (5) 친구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붕우유신, 朋友有信)는 다섯 가지 기본 실천윤리이다. 과거 유교(儒敎)를 숭상하던 사회에서는 삼강오행이 사회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였으므로 삼강오상(三綱五常)에 어긋난 행위를 한 사람을 綱常罪人이라 하였다.

그러나 다음 일화 속의 인물에 대한 해석이 사람에 따라 다르듯이, 삼강오행에 대한 견해가 시대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나라에 살았던 미생(尾生)이라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한번 약속한 것은 철저히 지켰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사랑하는 여자와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는 그 시간에 다리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나타나지 않고 갑자기 장대비만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물이 불어 가슴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미생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다리 기둥을 부둥켜안고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리다가 물에 떠내려가 죽고 말았다.

이 일화는 장자(莊子)의 도척편(盜篇)에 나오는데, 전국시대의 유명한 유세가(遊說家) 소진은 연()나라 왕에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할 때 이 일화 속의 미생을 신의(信義)의 본보기로 삼았다. 그러나 장자(莊子)는 미생(尾生)을 쓸데없는 명목(名目)에 목숨을 걸고 소중한 생명을 천하게 버리는 사나이라 말하면서 유가(儒家)에 대해서도 진실로 삶의 길을 모르는 무리들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래서 미생지신(尾生之信)’이라는 말은 신의(信義)를 굳게 지키는 것’,또는 어리석고 지나치게 정직함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중요한 것은 공자(孔子)지나침은 못 미치는 것과 같다(과유불급, 過猶不及)’라고 말했듯이 중용(中庸)을 지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조광조는 17세 되던 해 그의 부친 조원강이 어천도(魚川道)의 역참(驛站) 찰방의 관리로 임명받아 평안도로 부임하자 부친을 따라 그곳으로 갔다가 마침 그곳 희천에 정치적 이유로 유배와 있던 김굉필을 찾아가 스승으로 섬기고 사제의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나란히 배를 올리고 나서 이자는 제단 위에 올렸던 술을 조광조에게 권하며 말하였다.

오늘의 풍색이 이처럼 나쁘니 세월이 하 수상하나이까.”

조광조는 이자가 따라주는 술을 음복하며 웃으며 말하였다.

하오면 내가 잔을 들고 한바탕 춤이라도 추오리까.”

두 사람은 서로 술을 나누어 마시면서 크게 한바탕 웃었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나장들은 호방하게 웃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어리둥절하였다. 먼저 단숨에 술을 들이켠 이자가 이렇게 노래하였다.

오늘의 풍색이 매우 나쁘다 해도/잔 들고 춤을 추니 그 또한 기쁘리라/무장한 사나이가 말을 지쳐 지나간다/족쳐서 묻지마라/제 어찌하건 오백 년의 나라 강상(綱常)/내 한 몸에 맡겼구나.”

먼저 이자가 노래하자 조광조도 단숨에 잔을 비우고 질세라 노래하였다.

백골이 진토된들 임향한 마음 변할쏘냐/상공의 한번 죽음 분수에 당연하나/저 녹사(錄事)는 누구 집 자제던가/살아서 상공 따랐고 죽어서도 상공 따랐네/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성조(이성계)가 개국하여 책봉한 공신들이 고려조에 녹을 먹던 사람들이로세.”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여 읊은 노래는 정몽주의 문집인 포은집(圃隱集)’에 나오는 노래로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그때 성조(이성계)의 공업(公業)이 날이 갈수록 성해감에 모든 관리들이 마음을 돌려 따라 붙었다. 태종(이방원)이 태조께 고하기를 정몽주가 어찌 우리 집을 배반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태조가 말하였다. ‘내가 애매한 참소를 만나면 정몽주가 죽기로써 나를 변명해 주었지만 만일 나라를 일으키려 한다면 그 마음을 알 수 없다.’

차츰 문충공의 심사가 알려지매 태종이 잔치를 차려 청하고서 술을 권하며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성황당 뒷담이야 무너진들 어떠하리/우리도 이렇게 해서 죽지 않은들 또 어떠하리.’

이 노래를 들은 문충공이 술을 보내며 노래를 지어 불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백골이 진토되어 넋이야 있든 없든/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리오.’

문충공의 노래를 들은 태종이 그 마음이 변치 않을 것을 알고 드디어 없애기로 결심했다. 문충공이 문병차 태조의 집에 가서 겸하여 기색을 살펴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옛 술친구의 집을 지나더니 주인은 출타하고 뜰에는 꽃만 만발했다. 이내 옆길로 들어가서 술을 부르고 꽃 속에서 춤을 추며 노래하였다.

오늘 풍색이 나쁘구나. 매우 나쁘구나.’

연거푸 술을 들이켜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활을 멘 무사(조영규)가 앞질러 지나갔다. 낯빛을 변하면서 따라 오는 녹사를 돌아보고 문충공이 이르기를 너는 뒤에 처지거라하였다. 그러나 녹사가 대답하기를 쇤네가 대감을 모시고 왔는데 어찌 딴 곳으로 갈 수 있사옵니까라고 하였다. 두 번 세 번 꾸짖어도 듣지 않다가 마침내 문충공이 죽임을 당함에 함께 부둥켜안고 죽었다. 그때의 일이 너무 갑작스러워 아무도 그 이름을 기억한 이가 없어서 뒷세상에 전하지 못하였다.”

포은집에 실린 이 기록은 훗날 심광세(沈光世)에 의해서 정리되었으나 정몽주의 단심가와 정몽주를 위해 죽음을 바친 이름 없는 녹사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널리 회자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조광조와 이자 둘이서 읊은 이 노래는 이처럼 임향한 일편단심은 백골이 진토되어도 변할 수 없다라는 정몽주의 충정을 통해 자신들의 단심을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조광조와 정몽주는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된다.

중종 12, 87.

권진(權嗔)이라는 성균관의 유생이 비교적 긴 분량의 상소문을 중종에게 올렸는데,그 내용은 정몽주와 김굉필을 성균관의 문묘에 종사(從祀)하자는 것이었다.

학문과 덕이 있는 인물들의 신주를 문묘에 모시자는 것인데, 정몽주는 성리학에 밝을 뿐 아니라 충효와 예절에 뛰어났으며, 교육을 일으켜 후세에 끼친 공로가 크고, 김굉필은 바른 행실과 교육으로 선비들의 귀감이 되었으니, 문묘종사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 권진의 주장이었던 것이다.

물론 조광조는 이에 전적으로 찬성하였다. 평소 조광조의 신념대로 정몽주는 정신적 스승이고, 김굉필은 실제적 스승이었으니 마땅히 억울하게 죽은 김굉필에게 작록과 시호를 내리고 정몽주와 함께 문묘에 종사케 하는 것이 올바른 도리라고 이를 중종에게 청하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조광조의 청은 받아들여지지 아니하였다. 정몽주를 종사토록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김굉필은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으므로 그의 연고지에 사당을 세우고 자손을 우대하는 정도로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중종의 견해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김굉필이 조광조의 스승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만약 김굉필을 문묘종사케 한다면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림들의 세력을 한층 강화시켜 주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는 것을 염려한 훈구파의 반대에 부딪혔던 것이었다.

조광조는 그 막강한 권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를 관철시키지 못하였고 이것이 마음 속에서 한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정몽주의 무덤 앞에서 백골이 진토된 들 임 향한 마음이야 변할 수 있겠는가라는 노래를 읊는 것으로 임금에 대한 변함없는 단심을 노래한 조광조는 마침내 이자와 헤어지며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충의는 본래 없어질 수 없는 것/평소부터 닦아온 사람 그 또한 없었던가/모진 바람에 견디는 풀 더욱 보기 어렵더니/이제야 고려의 한 충신을 내 알겠구나.”

조광조가 읊은 이 노래는 훗날 왕위에 오른 태종이 자신이 죽인 정몽주를 기려 문충이란 시호를 내리며 지은 노래였다.

태종은 정몽주를 기리며 또 하나의 시조를 짓는데,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가 쇠망함에 이조(李朝) 문득 일어나니/현명한 인사들이 떼 지어 붙었구나/조용히 죽음을 택한 오천(烏川)의 선비/조선 땅에 절의(節義)의 길 열어주었네.”

조광조는 이자와 마지막으로 헤어지면서 태종이 노래하였던 시를 통해 모진 바람에 견디는 풀 같은 자신의 처지를 은유하여 나타내 보였던 것이다. 이자와 작별을 고한 조광조는 다시 머나먼 유배 길을 떠나게 되는데 용인을 지난 수레 행렬이 남강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이미 구름처럼 모였던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날이 저무는 강물 위로는 붉은 노을이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는데, 바로 그 때 어디선가 기골이 장대한 사람 하나가 홀연히 나타나 조광조의 행렬을 따르고 있었다.

물럿거라.”

압송하던 나장 하나가 따르는 사람을 향해 쫓아내려 하였으나 그 사내는 오히려 크게 소리 지르며 바짝 다가서고 있었다.

나으리, 대사헌 나으리.”

마침내 나졸이 손에 든 주장을 휘둘러 사내의 몸을 세차게 후려치며 말하였다.

썩 물러서지 못하겠느냐.”

분명히 쓰러질 만큼의 충격을 받았으나 사내는 꿈쩍도 하지 않고 무서운 눈빛으로 나졸을 노려본 후 낮은 소리로 말하였다.

네 이놈, 내가 개상에 얹은 곡식단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어디서 함부로 태질이란 말이냐.”

사내가 꼼짝도 하지 않고 노려보며 말하자 나졸들이 모두 사내를 쳐다보았다. 비록 기골이 장대하긴 하였지만 봉두난발한 천민에 불과한 모습이었다. 그런 쌍놈이 함부로 네 이놈하고 불호령을 내렸으므로 군세가 강하기로 소문난 의금부 나졸들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린 셈이었다.

이놈 봐라.”

나졸들의 수장격인 나장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하였다.

저놈을 당장 혼찌검을 내어 이리 끌고 오도록 하여라.”

화가 난 나졸들이 한꺼번에 주장을 들고 덤벼들었다.그러나 네댓 명의 나졸들이 동시에 덤벼들었으나 놀랍게도 사내의 몸에는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한결같이 무술에 능한 군사들임에도 불구하고 사내의 몸은 바람처럼 솟구쳐서 자유자재로 신출귀몰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수레 위에 앉은 조광조가 바깥이 소란스럽자 물어 말하였다.그러자 나장이 답하였다.

웬 사내가 나으리를 부르며 쫓아오고 있어 이를 쫓고 있는 중입니다.”

잠깐 수레를 멈추시게나.”

나장이 수레를 멈추자 조광조가 말하였다.

그 자를 이리 데려오시게.”

나장이 나서서 싸움을 뜯어말리고 그 사내를 조광조의 곁으로 데려왔다. 한바탕의 격전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숨소리 하나 거칠어지지 않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조광조가 묻자 사내는 선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나으리, 대사헌 나으리. 쇤네를 모르겠나이까.”

조광조는 물끄러미 사내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쑥대머리로 잔뜩 헝클어진 머리에 얼굴을 덮은 검은 구레나룻. 남루한 모습만 보면 갈 데 없는 쌍놈이었다. 그러나 천천히 사내의 행색을 살피던 조광조의 입에서 어느 순간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아니 자네가 웬일인가.”

나으리께오서

무릎을 꿇은 사내가 고개를 숙여 말하였다.

유배 길에 오르셨다고 하여서 한양에부터 쫓아오는 길이나이다.”

내가 자네를 얼마나 찾았는지 알고 있는가.”

조광조가 반가운 표정으로 말하였다.

사람들과 접촉을 금지하기 위해서 방책을 두르지 않았다면 두 손을 마주 잡을 정도의 반색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다 이제야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나으리께오서는 쇤네가 불가촉(不可觸)의 천민임을 모르시나이까.”

불가촉천민. 사내의 말은 사실이었다.

한 나라의 고위 대신인 대사헌 조광조와 지금까지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조광조 일생일대 최고의 수수께끼 인물인 피색장(皮色匠). 짐승의 가죽을 다루어 물건을 만드는 갖바치와는 서로 어울릴 수 없는 불가촉의 신분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조광조는 일개 갖바치에 불과한 사내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 1년 이상이나 수소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내의 행방은 묘연하였다. 수표교 근처에서 피전을 벌여 놓고 장사를 하던 갖바치는 하루아침에 홀연히 사라져 버렸으며 산중에 들어가 수도를 한다고도 하고 사물놀이패가 되어서 전국을 떠돈다고도 하는 헛소문만 무성하였던 것이다. 이 수수께끼의 인물에 대한 기록은 조광조의 문집 부록편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도성 안에 남다른 인격을 지닌 피장이 한 사람 있었다. 조광조는 진작부터 그 인물을 알아보고 학문에 관해서 묻거나 같이 자면서 시국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기도 하면서 가까이 지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피장의 능력이 뛰어난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된 조광조는 어떻게든 그를 관직에 추천하려 하였으나 그는 조광조의 제의를 사양한 후 자취를 감추었다. 이름 석자도 알리지 않은 채.”

 

# 皮色匠(피색장)

짐승의 가죽으로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드는 사람

()는 피골상접(皮骨相接:살가죽과 뼈가 서로 붙을 정도로 몹시 마름), 피리양추(皮裏陽秋:사람마다 피부 속, 즉 마음에는 속셈과 분별력이 있음)처럼 가죽 또는 겉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수치심을 모르는 뻔뻔한 얼굴을 철면피(鐵面皮)라 하는데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옛날 왕광원(王光遠)이라는 사람이 학문과 재능에 뛰어나 진사(進士)까지 되었다. 출세욕이 강한 그는 관리나 권세가의 시()를 보면 그 사람 앞에서 저로서는 도저히 이런 시를 쓸 수 없거니와 이태백(李太白)도 못 쓸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등 아첨을 다하였다. 한번은 술 취한 관리가 광원이 어쩌나 보려고 채찍으로 광원의 등을 때렸는데 광원은 빙긋이 웃으며 각하(閣下)의 매는 시원합니다.’라며 아부의 말만 계속하였다. 옆에 있던 친구가 나무라자 광원은 여보게, 그 사람에게 잘 보여둬야 할 것 아닌가.’라며 태연하였다. 그때 사람들은 광원을 가리켜 얼굴 두께가 열겹 철갑(鐵甲) 같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철면피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상대방이 좋아하도록 말을 교묘하게 잘하며 비위를 맞추고 얼굴색(·빛깔 색)을 좋게 하는 것을 교언영색(巧言令色)이라 한다. 공자(孔子)는 이들을 미워하여 교언영색(巧言令色) 하는 자 중에는 어진 사람(仁者)이 거의 없다.’라고 했다.

또한 아무런 이유 없이 얼굴빛을 좋게 하며 아부하는 것을 무고호아(無故好阿)라 한다. 옛날에 갈가마귀 한 마리가 고깃덩이를 물고 나뭇가지에 앉아 있었다. 그 아래를 지나던 여우가 목소리가 매우 고와 노래를 아주 잘 한다던데, 노래 한 곡 불러 준다면 나에게는 큰 영광일 텐데,한 번 불러 줄래?’라고 하였다. 여우의 말을 사실로 착각한 갈가마귀가 노래를 부르려고 입을 열자 입에 있던 고깃덩이는 땅에 떨어졌다. 이에 여우는 이 어리석은 갈가마귀야, 네 목소리가 뭐 아름답냐. 앞으로는 이유 없이 너에게 아부하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거든 조심해.’라고 하며 고깃덩이를 물고 사라졌다.

공자의 말이나 이 일화에서 보듯 교언영색하는 사람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은 직업에 귀천(貴賤)이 없지만 옛날에는 피색장(皮色匠)과 같이 물건 만드는 장인(匠人) 또는 장색(匠色)은 천한 신분이었다. 중요한 것은 장자(莊子)의 일화처럼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닐까.

옛날 위()나라에 포정(푸줏간 포, 백정 정)이라는 명요리사가 혜왕(惠王) 앞에서 소를 잡는데, 순식간에 완벽하게 뼈와 고기를 분리하였다. 그 모습에 혜왕이 감탄하자, 포정은 자기가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는 소를 보면 소의 외형만 보였으며, 3년쯤 지나자 뼈와 근육이 보였으나, 19년이 된 지금은 소를 정신()으로 대하여 눈 감고도 소의 몸에 생긴 틈바구니를 자연의 섭리에 따라 칼질하기에 칼날이 뼈와 부딪히지 않고도 가죽 및 고기를 모두 도려낼 수 있었기에 19년 동안 칼을 한 번도 갈지 않았다고 했다.

포정의 말이 끝나자 혜왕은 나는 포정의 말을 듣고 양생(養生:참되게 사는 것)의 도()를 터득했다.’고 감탄했다. 포정의 예술적인 칼솜씨는 인생을 무리 없이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이래서 신묘(神妙)한 기술이나, 달인(達人)의 경지를 말할 때 포정해우(庖丁解牛)에 비유하기도 한다.

일개 갖바치에 불과한 피장에게 학문에 관해 묻거나 같이 자면서 시국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는 기록은 이긍익(李肯翊)이 편찬한 사서 연려신기술(燃藜室記述)’에도 나오고 있는데, 어쨌든 뛰어난 인물이면 상민이건 천민이건 첩의 자식인 서얼이건 가리지 않고 과감하게 발탁하여 등용하자는 조광조의 신분철폐 사상으로 인해 그런 파격적인 일화가 싹틀 수 있었던 것이다.

조광조가 그 수수께끼의 피장에 관한 소문을 들은 것은 1년 전인 중종 13년 봄이었다. 이 무렵 조광조는 부제학이었는데, 과거제도를 시험으로 뽑지 않고 추천으로 하는 천거과(薦擧科)로 뽑자고 공식적으로 발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광조는 이 혁신적인 제도를 발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땅이 작아 본래 인물이 적은 데다 여기에 또 서얼과 사천(私賤)을 분별하여 그들을 쓰지 않습니다. 중국에서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오직 고루 쓰지 못함을 걱정하고 있는데,어찌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시행조차 못 하고 있나이까.”

결국 조광조는 현실의 벽이 너무 두꺼웠으므로 어쩔 수 없이 천거의 대상을 양반계층에만 국한시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광조와 일개 갖바치와의 이러한 파격적인 우정은 조광조가 얼마나 신분보다는 인물 위주로 사람을 평가하는가를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도성 안 수표교 근처에 남다른 인격을 지닌 피장 하나가 있다는 말을 들은 조광조는 하인을 데리지 않고 홑몸으로 그 피전을 방문하였다. 작은 점방 안에는 기골이 장대한 사람이 가죽으로 물건을 만들고 있었다. 그 갖바치가 문리까지 틔어 사물의 조리를 깨달아 모르는 것이 없다는 소문이어서 조광조는 일부러 변복을 하고 점방을 찾았던 것이었다.

어인 일로 오셨나이까.”

짐승의 가죽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있던 갖바치가 조광조를 보고 물어 말하였다.이에 조광조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대가 가죽을 잘 다룬다고 하니 가죽 다루는 솜씨를 보러왔네.”

난데없는 조광조의 대답에 힐끗 조광조를 일별하고 나서 갖바치는 한참을 말없이 가죽을 다뤄 물건을 만들 뿐이었다. 한참동안 묵묵히 일만 하던 갖바치가 오랜 후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하오면 가죽의 겉을 다루는 솜씨를 보러 오셨습니까, 아니면 가죽의 속을 다루는 솜씨를 보러 오셨습니까.”

갖바치의 질문에 조광조는 뜨끔하였다. 속마음을 들킨 때문이었다. 피전 안에는 갖바치가 용도에 따라 쓰는 가죽들이 매달려 있었다. 쇠가죽과 돼지가죽, 거북이 가죽과 뱀 가죽. 그뿐인가. 염소 가죽과 두꺼비 가죽도 걸려 있었다. 갖바치의 말은 단순한 것 같지만 깊은 뜻을 담고 있었다. 이를테면 쇠가죽은 겉으로만 보면 소의 가죽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쇠가죽의 속을 보면 그것은 소의 가죽이 아니라 소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뱀 가죽은 겉으로 보면 뱀의 가죽에 지나지 않지만 뱀 가죽의 속을 보면 그것은 뱀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죽의 겉을 다루는 솜씨를 보러 오셨는가, 아니면 가죽의 속을 다루는 솜씨를 보러 오셨는가.’라는 갖바치의 질문은 조광조가 이곳에 다만 자신을 미천한 갖바치로서 가죽을 다루는 솜씨를 보러온 것이냐, 아니면 겉은 갖바치이지만 속마음, 즉 자신의 진면(眞面)을 보러온 것이냐고 묻는 일종의 준엄한 선문이었던 것이었다. 이에 조광조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그대를 찾아온 것은 피리를 보기 위함이오.”

피리(皮裏).이는 가죽의 내부, 즉 심중을 가리키는 말로 내가 찾아온 것은 가죽 다루는 솜씨가 아니라 그대의 마음이라는 선답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갖바치는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오면 나으리께오서는 양추(陽秋)를 보러 오셨소이다 그려.”

갖바치의 말에 두사람은 단숨에 의기투합되었다.만난 후 불과 서너마디의 문답으로 두 사람은 이심전심이 되었던 것이다.

어떻게 오셨냐는 갖바치의 질문에 대해 피리’,가죽의 마음을 보러 왔다는 조광조의 대답과, 껄껄 웃으며 양춘을 보러 오셨군요.’라고 대답한 두 사람의 선문답을 합치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되는 것이다.

피리양추(皮裏陽秋).

원래는 피리춘추(皮裏春秋)’지만 진()의 간문후(簡文后)의 휘가 ()’이었으므로 이를 피해 ()’자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 문장의 뜻을 직역하면 가죽의 속에는 춘추, 즉 역사가 있다는 뜻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의 의미는 모든 사람은 비록 말은 하지 않더라도 저마다의 마음속에는 속셈과 분별력이 있다라는 뜻인 것이다.

이 선문답을 통해 조광조는 갖바치가 소문대로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꿰뚫게 되었으며 갖바치 또한 변복을 하고 찾아온 조광조가 불세출의 정치가임을 꿰뚫어 본 것이다.

이때부터 조광조는 이 갖바치를 찾아와 시국에 관한 대화도 나누고 어지러운 정국을 바로 잡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 묻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기를 수차례, 어떤 때는 기록에 나와 있는 대로 갖바치의 전방에서 함께 자면서 밤을 새우며 토론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특히 조광조의 주된 관심은 난세를 타파하는 개혁에 대한 방안이었다. 이에 갖바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나으리,이 전방에는 모든 가죽이란 가죽은 다 걸려 있습니다. 쇠가죽은 물론 돼지, , 거북이 할 것 없이 다 걸려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의 가죽만은 걸려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인 줄 아시나이까.”

잠시 숙고하던 조광조가 대답하였다.

인피(人皮),즉 사람의 가죽이 아닐 것인가.”

조광조가 대답하자 갖바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나으리.이곳에는 사람의 가죽만은 걸려 있지 않습니다.하오나 나으리, 옛말에 이르기를 모든 가죽의 심중에는 이를 분별하는 올바른 속셈이 들어 있다하였습니다. 동물의 심중에도 이러한 분별력이 들어 있으매 하물며 사람의 심중에는 천성이 깃들어 있지 않겠습니까. 나으리, 나으리께오서는 난세(亂世)를 걱정하셨습니다마는 당의 선승 조주(趙洲)는 한 사람이 와서 난세에는 어떻게 처신해야 합니까하고 묻자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난세야말로 호시절이다.’ 그러므로 나으리, 난세를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람의 가죽, 즉 인피 속에 깃들어 있는 백성들의 분별력을 키우고 정치를 바로잡을 수 있는 호시절임에 틀림없을 것이나이다. 그러므로 나으리, 난세를 바로잡을 수 있는 최대의 방법은 첫째도 사람이고, 둘째도 사람이며, 셋째도 사람인 것입니다.”

갖바치는 가죽을 깎는 칼을 들어 가죽위에 사람 인()자를 새기며 힘주어 말하였다.

쇤네는 쇠가죽의 겉을 다루어 신발을 만들고 있습니다마는 나으리께오서는 사람의 가죽을 다루어 정치를 바로잡는 갖바치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갖바치는 형형한 눈빛으로 조광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람을 바꿔야 하실 것입니다. 고인 물은 반드시 썩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썩은 정치를 바꾸는 일은 결국 사람을 바꾸어 새 물로 갈아 채우는 일입니다.”

갖바치의 인적청산론은 조광조의 정국(靖國) 공신의 개정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연산군을 몰아세우는 데 공을 세웠다 하여서 훈작(勳爵)을 받은 정국공신들을 훈구파라 하였는데, 이 무렵 이 정국공신들의 숫자는 무려 103명에 이르고 있었다. 한번 공신에 오르면 자손대대로 영화를 누릴 수 있고 토지와 노비를 받아 경제적으로 혜택을 누릴 수 있어 일부에서는 뇌물이나 로비로 공신에 책봉되었던 것이다.

훗날 조광조가 정치개혁을 위해서 정국공신들의 숫자를 103명에서 무려 78명의 공훈을 삭제하는 결단을 내리게 된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이렇듯 수수께끼의 인물인 갖바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조광조는 훈구파의 거센 저항으로 이처럼 유배 길에 올라 결국 사약을 받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런 의미에서 갖바치는 조광조에게 정치적 결단을 내리게 하는 한편 정치적 비극을 불러일으킨 그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조광조가 정몽주와 김굉필을 스승으로 사숙하고 있었다면 갖바치는 정도전(鄭道傳)을 정치적 사표로 삼고 있었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개국공신이었으나 훗날 왕위 쟁탈전에 휘말려 이방원에 의해서 살해된 뛰어난 정치가였다. 유학의 대가로 개국 후 군사, 외교, 행정, 역사, 성리학 등 여러 면에서 활약하였고, 척불숭유(斥佛崇儒)를 조선왕조의 근본 이데올로기로 확립한 사상가였다.

고려조의 멸망을 인간 상호 간의 증오심과 윤리의 타락으로 본 정도전은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려면 무엇보다 도덕 재무장, 즉 윤리의 재건이 필요하며, 윤리를 실행하는 수단이 곧 정치며, 그 전제조건이 경제안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상하, 존비, 귀천의 명분이 바로 서고 인간마다 자기의 본분을 지키면 자연 사회질서가 확립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상하질서의 확립을 위한 윤리 도덕이 삼강오륜이었다. 이를 위한 철학으로 성리학만이 유일한 정학(正學)이며, 통치체제로 중앙정부에 의한 전국적 지배를 강화하는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했으며, 그 중심은 군주였다. 군주는 최고의 통치권을 갖고 전국의 토지와 백성을 지배하나 실질적인 통치권은 재상(宰相)이 갖는, 오늘로 말하면 일종의 내각책임제같은 성격을 띤 재상중심체제를 지향하였던 것이다. 통치자의 부정과 독재를 막기 위해서는 감찰권과 언권(言權)의 강화를 제시했으며, 통치윤리는 인정(仁政)과 덕치(德治)가 근본이 되어야 하고 형벌은 보조적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체제의 확립은 경제생활의 안정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며, 물질적 기초로 국가 재정이 확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정도전은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농업생산이 진흥되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중국의 공전제(公田制)에 바탕을 둔 토지 개혁을 실행한 불세출의 정치가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정도전이 갖바치뿐 아니라 조광조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그가 대대로 명문 귀족 집안의 출신이 아니라 시골 향리 출신의 하찮은 신분이었고, 특히 그의 어머니는 노비의 피가 섞인 우연(禹延)의 딸이었다는 것이다. 노비의 피가 섞인 정도전이 조선경국전이라는 저서를 통해 나라의 기본통치제도를 확립하였다는 사실이 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삼봉은 말씀하셨나이다. 조선경국전에서 이르기를 백성은 국가의 근본이요, 군주의 하늘이다.’라고 말입니다.”

삼봉(三峰)은 정도전의 호로 갖바치는 조광조와 더불어 밤을 새우며 시국을 토론할 때마다 이를 되풀이하여 상기시키곤 하였다.

따라서 나으리께오서는 하늘에서 비를 내려 집이 새어 내리면 반드시 일산(日傘)을 받쳐서 두루 천만리에 평안을 얻게 하고 온 천하가 새지 않게 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시려면 반드시 언로(言路)가 통하여야 할 것입니다.”

비가 새면 우산을 받쳐서 온전하게 새지 않게 하였다.’라는 말은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필원잡기(筆苑雜記)에 나오는 유명한 일화이다. 조선 초기에 가장 뛰어난 문인이었던 서거정이 지은 필원잡기는 갖바치와 조광조가 담소할 때 즐겨 인용한 책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서거정이 지은 필원잡기에는 유관(柳寬)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문정공(文貞公) 유관은 공정하여 청렴하며, 신하로서는 최상의 지위에 있었으나 초가집 한 칸과 베옷과 짚신으로 평생 소박하였다. 언젠가 한 달이 넘도록 장마가 져서 비가 삼줄기처럼 새어 내렸다. 공은 방안에서 우산을 들고 비를 피하며 부인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우산이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디겠소.’

이 말을 들은 부인이 말하였다.

우산이 없는 집은 반드시 미리 방비가 있을 것입니다.’”

유관이 들고선 우산은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주는 일산으로 모든 집이 다 일산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유공이 걱정하였던 것이다. 유관의 집이 있던 곳은 동대문과 신설동 사이, 따라서 이 동네는 우산각골이라고 불리었던 것이다.

갖바치가 조광조에게 군주는 하늘이니 비가 내려 집이 새면 우산을 받쳐서 온 천하가 새지 않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던 말은 유관의 일화를 통해 조광조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었다.

특히 오늘날의 언론(言論)에 해당하는 언로가 통해야만 온전한 우산 노릇이라 할 수 있다는 갖바치의 충고는 언로의 중요성을 강조한 정도전의 정치사상에서 비롯된 것인데, 조광조도 이미 언로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종이 즉위 10년째 되던 해에 왕비로 맞아들인 장경(章敬)왕후가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왕비 신()씨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왕비 신씨는 연산군을 폐위시킬 때 제일 먼저 피살당한 신수근(愼守勤)의 딸로 혁명을 일으킨 훈구파에서는 후환을 없앤다는 이유로 강제로 신씨를 쫓아내어 인왕산 밑에서 살게 하였던 것이다. 매일 왕을 그리워했던 신씨는 마침내 인왕산에 올라가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전하는 방법을 발견해 냈는데, 그것은 인왕산의 큰 바위 위에 자신의 치마를 벗어 놓는 일이었다. 중종 역시 신씨를 잊지 못하여 신씨가 있는 인왕산 쪽을 자주 바라보았는데, 어느 순간 그 치마가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처음에 그 이유를 잘 모르다가 비로소 내막을 알게 된 중종은 매일같이 치마바위를 통해 애틋한 사랑의 언어를 주고받으며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장경왕후가 죽자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순창 군수 김정(金淨)이 공동명의로 옛 왕비 신씨의 복위를 청하는 청복고비신씨소(請復故妃愼氏疏)’의 상소문을 올렸던 것이다. 이에 훈구파 공신들은 격렬하게 반대하고 나섰는데, 무엇보다 언론과 정치와의 상관관계를 잘 알고 있었던 조광조는 왕 앞에 나아가 언로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극간하고 있다.

전하, 언로가 통하고 막히는 것은 가장 나라에 관련이 깊은 것이어서 통하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편안하나 막히면 분란이 일어나고 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임금 되는 이는 언로를 넓히기에 힘써서 위로는 공경(公卿)과 여러 관료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시정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언로를 열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책임지는 언로가 없으면 스스로 뜻을 다할 수 없는 고로 간관(諫官)을 설치하여 이를 주로 하도록 맡기는 것이니, 그 말하는 바가 좀 지나치더라도 모두 마음을 비워놓고 우대하여 용납하는 것은 언로가 혹 막힐까 우려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근래에 박상과 김정 등이 구언(求言)하심을 당해 진언을 드렸는데, 그 말이 만약 지나친 바가 있으면 쓰지 않으면 될 일이지, 어찌 다시 죄를 줄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언로를 중요시하였던 갖바치와, 언로가 통하고 막히는 것이야말로 나라의 흥망이 달려 있다고 극간한 조광조는 서로 일맥상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광조는 이 갖바치를 어떻게 해서든 관직에 추천하여 등용시키려 하였다. 이렇게 뛰어난 인물을 미천한 갖바치로 머물게 하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라고 본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가의 크고 작은 관직은 모두 양반들이 독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일개 피장의 신분으로는 이 벽을 뛰어넘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조광조의 속마음을 눈치 챈 갖바치는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하였다.

나으리, 옛말에 야서지혼(野鼠之婚)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들쥐에게는 들쥐가 가장 어울리는 배필이라는 뜻으로 쇤네는 들쥐이나이다. 하오니 들쥐를 집쥐로 만들려 하지 마옵소서. 만약에 나으리께오서 쇤네를 집쥐로 만들려 하신다면 쇤네는 당장에라도 들판으로 도망쳐 나갈 것이나이다.”

그러나 조광조는 어떻게 해서든 관직에 등용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그 무렵 조광조는 홍문관의 부제학이었는데, 마침 홍문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도적(圖籍)들을 관리하는 전적(典籍)에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게 된 것이었다. 비록 정6품의 초급관리였으나 갖바치를 전적에 임명할 수 있다면 그를 수하에 두고 있으면서 그가 가진 재능을 활용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뛸 듯이 기뻐한 조광조가 수표교로 찾아갔을 때는 그러나 피전은 굳게 문이 닫혀 있었다.

한참을 문을 두드리다가 그냥 발길을 돌리려던 조광조는 옆에 자리 잡고 있던 싸전을 찾아가 주인에게 물어 말하였다.

옆집의 갖바치가 어디 몸이라도 아파서 문을 닫았소이까.”

싸전 주인은 흘깃 조광조를 쳐다보았다. 그는 평소에 조광조가 피전에 자주 들르던 손님인줄은 알고 있었으나 조광조가 어떤 인물인 줄은 몰랐으므로 퉁명스럽게 대답하였다.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아예 문을 닫았소이다.”

문을 닫다니요.”

피장 일을 그만두고 가게 문을 닫았다는 것이외다.”

하오면.”

조광조가 물었다.

어디로 간다하더이까.”

그것을 내가 어찌 알겠소이까. 하루아침에 간다 온다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으니. 벌써 가게 문을 닫은 지 달포가 넘었소이다.”

조광조는 심히 난처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들쥐는 때가 되면 들판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하였으므로 갖바치는 자신의 말대로 벌판으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하는 수 없이 조광조가 그냥 발길을 돌리려는데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 싸전 주인이 조광조의 등 뒤에서 소리쳐 말하였다.

나으리께오서는 혹시 조대감이 아니시나이까.”

그렇네.”

조광조가 대답하자 비로소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면서 싸전 주인이 말하였다.

달포 전 가게 문을 닫기 전날 밤 갖바치가 쇤네에게 종이 한 장을 주면서 이렇게 말하였나이다. 행여 조 대감이란 분이 가게에 들러 자신을 찾거들랑 전해 달라고 하면서 문서 한 장을 맡기고 떠났나이다. 하오니 잠깐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조광조는 청계천이 흐르는 수표교 위에 서 있었다. 맑은 물이 흐르는 다리 아래로는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고 있었고, 시전이 열리고 있었으므로 마침 시장거리에는 물건을 사러 온 성민들이 한가득 하였다. 원래 마전들이 많아서 마전교라 불리던 수표교는 청계천으로 흐르는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서 수표를 세운 데서 비롯된 이름이었는데, 정월 대보름날이면 백성들이 밤을 새워 즐겨하였던 답교놀이와 연날리기로 도성 안에서 가장 인파로 붐비던 번화한 곳이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싸전 주인이 종이 한 장을 들고 나타났다. 남이 함부로 볼 수 없도록 밀봉되어있는 문서였다. 봉지를 뜯고 보니 안에서 한 장의 종이가 나왔다. 종이 위에는 분명히 낯익은 갖바치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

조광조는 천천히 그 내용을 읽어 보았다.

나으리, 나으리의 재능은 족히 한 시대를 경제(經濟)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오나 그것은 반드시 주상의 마음을 얻은 후에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갖바치의 마지막 편지는 조광조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나으리께오서는 반드시 주상의 마음을 얻어 하늘에서부터 새는 비를 우산으로 막아야만 태평천하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오나 주상께오서는 지금 명성 때문에 나으리를 쓰시지만 실제로는 나으리를 잘 모르고 계실 것입니다. 만일 나으리와 주상 사이에 소인이 끼어든다면 나으리께오서는 화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갖바치의 문장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조광조 역시 중종의 유약한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갖바치의 말대로 지금 주상은 필요성 때문에 자신을 쓰지만 언젠가는 변심하여 내칠지도 모른다.

소인(小人). 이는 유교에서 군자(君子)와 대비되는 사람으로 학문이 깊고,덕이 높고, 행실이 바른 사람을 군자라고 일컫고 있으며, 이에 비하면 소인은 학문이 얕고 이익을 좇아 함부로 날뛰는 소인배를 뜻하는 것이다. 논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공자의 가르침은 군자의 학문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사람들이 훌륭한 군자가 될 것을 열심히 설교하고 있으며, 공자는 군자와 소인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군자는 의로움에 밝고 소인은 이로움에 밝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군자는 편안함에서 교만하지 않고, 소인은 교만하면서 편안하지 못하다(君子泰而不驕 小人驕而不泰).”

조광조 역시 갖바치의 충고대로 평소 소인의 음모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는 평소 중종에게 왕으로서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는 안목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일임을 강조하면서 이 세상에 음과 양, 낮과 밤이 있는 것처럼 조정에서는 군자와 소인이 섞여 있을 수밖에 없어 이들을 구별하는 것은 오직 군주 자신의 판단력밖에 없다고 역설하였던 것이다.

군자와 소인은 구별하기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대감이 논하고 재상이 개진하는 바에 따라 그 사람이 현명한지, 안 한지에 대해서는 알 수 있지만 그래도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옛날에는 임금이 신하들 접하기를 마치 아비와 형이 자식과 동생을 대하는 것처럼 하여 생각하는 바를 모두 토로하게 하였기 때문에 임금은 그들이 행하는 것을 보고 그 말 하는 것을 들으며 그 사람의 깊이 숨어 있는 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중략)비록 현명하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왕을 가까이 모실 때에는 착한 말 하는 척하며, 언사를 꾸며서 아뢰므로 그 사람의 참모습을 알아내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후세에 와서는 사람을 알아보기가 어렵게 되었으므로 임금 된 사람은 한층 더 깊이 유념해야 합니다.”

그때 조광조는 갖바치가 남기고간 문서의 내용을 다 읽어보고 그것을 수표교 위에서 찢어버렸다. 찢어진 종잇조각은 모래톱 위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아낙네를 지나 청계천의 맑은 개울물을 따라 흘러가 버렸던 것이다.

그것이 벌써 1년여 전.

1년 동안 조광조는 얼마나 갖바치에 대해 수소문하였던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산속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이 있었는가 하면 사물놀이패 각설이를 따라서 전국을 떠돈다는 뜬소문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광조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갖바치의 모습을 쳐다보며 생각하였다.

바로 그 갖바치가 1년 만에 제 발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조광조가 죄인이 되어 유배 길에 올랐다는 소문을 듣고 한양에서부터 줄달음질 쳐서 좇아온 것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대의 말이 정확하였네, 그려.”

조광조는 탄식하여 웃으며 말하였다.

나와 주상 사이에 소인이 끼어든다면 화를 면할 수 없다던 그대의 참위가 오늘날 그대로 들어맞았네, 그려.”

하오나.”

갖바치도 웃으며 말하였다.

논어에 이르기를 오직 여인과 소인은 다루기 어려우니 가까이하면 교만하고 멀리하면 원망하게 된다(唯女子與小人爲難養也 近之則不孫 遠之則怨) 하였습니다. 나으리께오서는 여인 하나도 이미 못 다뤄 정표로 빼어준 머리 비녀도 벽에 걸어두고 도망쳐 원망을 받으셨는데 어찌 소인으로부터도 원망을 받지 않으시겠나이까.”

갖바치의 말에 조광조는 크게 웃었다. 갖바치의 말은 두 사람이 함께 밤을 새우며 나눴던 정담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조광조는 평생동안 한 사람의 부인만을 둔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거의 모든 고위 대신들뿐 아니라 서경덕 같은 빼어난 성리학자들도 대부분 축첩(蓄妾)을 하고 있었으며, 이를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음에도 조광조는 시대를 초월하는 윤리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듯 정부인 하나만을 고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인의 유혹에 대해 조광조가 어떻게 처신하였던가를 말해주는 일화 하나가 지금도 남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조광조가 20살도 안 되었던 젊은 시절, 외방을 나갔다가 하룻밤 묵어가려고 숙박할 집을 정하여 들었는데, 마침 그때 그 여인숙에 먼저 온 손님으로 젊은 여인이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용모도 무척 예뻤던 여인이라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여인이 준수한 외모의 조광조를 보자 마음이 동하여 은근히 추파를 보내 유혹해 오기 시작하였다. 여인의 태도에 부담을 느낀 조광조는 가노(家奴)를 재촉하여 짐을 싣고 다른 집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날 밤 가노는 조광조에게 물건 하나를 내놓으며 말하였다.

나으리, 어떤 사람이 나으리에게 이것을 전해드리라 하였나이다.”

그게 무엇이냐.”

조광조가 받아들고 보니 그것은 비녀였다. 비녀란 쪽진 머리가 풀어지지 않도록 꽂는 장신구로서 여인이 자신의 비녀를 보낸다는 것은 풀어헤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암시였던 것이다. 특히 쪽진머리는 시집간 여자가 뒤통수를 땋아 틀어 올려서 비녀를 꽂은 모습을 말하는데, 이는 그 여인이 남편이 있는 아낙네임을 증명하는 것이었고, 머리가 풀어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몸을 허락하겠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비녀는 꽃과 달의 모습이 새겨진 화월잠(花月簪)이었는데, 이를 받아든 조광조는 심히 난처하여 말하였다.

이를 돌려주고 오너라.”

조광조의 명령에 가노가 손을 저으며 말하였다.

비녀는 외간 남자가 돌려줄 수는 없습니다. 오직 나으리만이 이를 돌려줄 수 있을 것이나이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낙네가 비녀를 뽑아주었다면 이는 정표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이를 되돌려줄 수는 없는 것이다. 여인의 유혹을 거절한다 하더라도 이를 돌려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조광조뿐이었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조광조는 여인에게 직접 비녀를 돌려주지 아니하고 여인숙의 벽에 이를 걸어놓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고 전하고 있다.

나으리께오서는 죄를 지으셨습니다.”

조광조가 그렇게 고백하였을 때 갖바치는 놀리면서 말하였다.

옛말에 이르기를 잔은 채워야 맛이고, 계집은 품어야 맛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나으리께서는 화보시(花普施)란 말씀도 모르십니까. 정에 굶주린 여인의 풀어헤친 머리를 쓰다듬어 비녀를 다시 꽂아주는 행위도 훌륭한 보시이며, 자비 행위인 것입니다.”

갖바치는 용케 두 사람이 밤을 새우며 나누었던 정담을 기억해 두었다가 이를 인용하며 농지거리를 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나으리께서는 소인들의 비녀들도 꽂아주셨어야 하셨나이다. 그래야만 원망을 듣지 않고 유배길에도 오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대의 말이 심히 옳네.”

박장대소하면서 조광조가 대답하였다.

날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붉은 저녁노을에 핏빛으로 물든 강물도 땅거미에 젖어 들고 있었다.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었다.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할 시간이 다가왔으므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지켜보던 나장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하였다.

나으리, 이제 배에 오르실 시간이나이다.”

나룻배를 젓는 뱃사공은 미리 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잘 있게나.”

조광조가 작별인사를 고하자 갖바치가 서둘러 말하였다.

나으리께 드릴 물건이 있어 갖고 왔나이다.”

그것이 무엇이냐.”

조광조가 묻자 갖바치는 등에 걸머지었던 걸망을 꺼내어 방책의 틈 사이로 밀어 넣었다.

무엇이냐.”

나장이 망태기처럼 얽어 만든 바랑을 보자 경계하여 소리쳤다. 유배 길에 오른 죄수에겐 함부로 물건을 건네주지 못하였으므로 이를 본 나장이 이를 제지하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무것도 아니오.”

두 손을 털면서 갖바치가 말하였다.

내가 쓰던 걸망을 나으리께 드리는 것뿐이오.”

내버려 두어라.”

조광조가 말하자 나장은 물러섰다. 멈췄던 수레 행렬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몇 발자국 따라오면서 갖바치가 소리쳐 말하였다.

나으리, 걸망 속에는 나으리께 드릴 물건이 들어있나이다. 하오나 청컨대 능주에 도착하시기 전에는 걸망에 들어있는 물건을 절대로 뒤져보지 마시옵소서. 필히 능주에 도착하신 후에야 이를 꺼내 보시옵소서. 이를 지키시겠나이까?”

내 반드시 그러하겠네.”

나으리.”

수레를 따라 걷던 갖바치가 비로소 발을 멈추었다.

다시 뵈올 때까지 부디 몸 건강하시옵소서.”

강가에 매어둔 나룻배를 향해가는 동안 갖바치는 선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해거름으로 그의 모습은 조금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조광조가 배 위에 올라탔을 때에는 사위는 어둠이 짙게 드리웠으므로 그 어디에도 갖바치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다시 볼 그날까지 몸 건강하시라.’라는 인사말은 영영 이루어지지 않은 영원한 이별의 말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조광조는 갖바치와의 약속은 철저히 지켰다. 갖바치가 던지고 간 걸망 속에 들어있는 물건을 능주에 도착하기 전에는 뒤져보지 않았던 것이었다. 걸망 속에 들어있는 갖바치의 정표는 조광조의 사후 5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를 암시하고 있음인데, 그렇다면 수수께끼의 인물, 갖바치는 벌써 그때 조광조의 비참한 최후를 예견하고 있었음일까.뿐 아니라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난세가 계속될 것을 꿰뚫어 보고 역사적 인물인 조광조를 통해 그 난세를 헤쳐나가는 교훈을 얻기를 예언한 선지자(先知者)였던 것일까.

어쨌든 조광조는 갖바치를 만남으로써 머나먼 유배 길 동안 줄곧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보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었다.

조광조가 스승 한훤당 김굉필을 만난 것은 스승의 나이 45세 때, 조광조가 17세 때였다. 그의 부친 조원강이 평안도의 찰방으로 부임했을 때 조광조도 함께 따라갔다가 그곳에 유배와 있던 김굉필을 찾아가 사제의 인연을 맺은 것이었다. 그때 김굉필은 무오사화에 연류되어 희천(熙川)으로 내려와 유배생활 중이었다. 조광조의 유가사상은 이처럼 당대 제일의 성리학자였던 스승 김굉필로부터 전수받은 것이었다.

이때 김굉필은 찾아간 17세의 조광조에게 선비로서의 행동에 대해 먼저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는 노나라의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유가선비로서의 행동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하고 물은 데에 대한 공자의 답변이었던 것이다.

너는 마땅히 공자가 선비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에 대해 가르친 내용을 평생 잊지 않고 명심하도록 하여라.”

조광조는 유배 길의 수레 위에서 20여 년 전 스승 한훤당이 일러준 내용을 묵묵히 처음부터 끝까지 되새겨 보았다.

선비는 보배(옛 성왕의 도)를 벌여 놓고서 초빙되기를 기다리고 부지런히 힘써 학문을 닦아 쓰여지기를 기다리며, 충성과 신의를 품고서 등용되기를 기다리고, 힘써 실천함으로써 벼슬자리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닦고 있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의관(衣冠)이 알맞아야 하며 동작이 신중해야 합니다. 그들이 큰 것을 사양할 적에는 태만(怠慢)한 듯하고, 작은 것을 사양할 적에는 거짓인 듯하며, 크게는 위협을 받고 있는 듯이 하고, 작게는 부끄러운 듯이 합니다. 그들이 나아가는 일은 어렵게 하며 물러서는 일은 쉽사리 하며, 유약(柔弱)하기 무능한 사람과 같습니다. 그들의 용모는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기거(起居)에 엄격하고 어려움을 두려워하며, 그들의 거동은 공경하고 말은 반드시 신의를 앞세우며 행동은 반드시 알맞고 올바릅니다. 길을 나서서는 편리한 길을 다투지 아니하고, 여름이나 겨울에는 따스하고 시원한 곳을 다투지 않습니다. 그의 목숨을 아끼는 것은 소망이 있기 때문이며, 그의 몸을 보양(保養)하는 것은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대비(對備)는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금과 옥을 보배로 여기지 아니하고 충성과 신의를 보배로 삼습니다.땅 차지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고 의로움을 세우는 것으로써 땅을 삼으며, 재물을 많이 축적하기를 바라지 않고 학문이 많은 것을 부로 여깁니다. 벼슬을 얻는 일은 어렵게 생각하되 녹()은 가벼이 생각하며, 녹은 가벼이 생각하되 벼슬자리에 머무는 것은 어렵게 생각합니다. 적절한 시기가 아니면 나타나지 않으니 벼슬 얻는 일이 어렵지 않겠습니까? 의로움이 아니라면 화합하지 않으니 벼슬자리에 머무는 것이 어렵지 않겠습니까?”

선비사상. 비록 공자가 설법함에서 비롯되었으나 전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선비사상을 남긴 우리나라. 지금은 퇴색되어 흔적도 보이지 않으나 마땅히 그 명맥을 이어 나가야 할 선비의 길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선비는 재물을 탐하는 태도를 버리고 즐기고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며, 이익을 위하여 의로움을 손상시키지 않고, 여럿이서 위협하고 무기로써 협박을 하여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의 지조를 바꾸지 않습니다. 사나운 새나 맹수(猛獸)가 덤벼들면 용기를 생각지 않고 그에 대처하며 무거운 솥()을 끌 일이 생기면 자기 힘을 헤아리지 않고 그 일에 착수합니다. 과거에 대하여 후회하지 아니하고 장래에 대하여 미리 점치지 아니하며, 그릇된 말을 두 번 거듭하지 않고 뜬소문을 두고 따지지 않습니다. 그의 위엄은 끊이는 일이 없으며, 그의 계책을 미리 익히는 법이 없습니다. 그들의 행위가 뛰어남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친근히 할 수는 있어도 위협을 할 수는 없고, 가까이하게 할 수는 있어도 협박할 수는 없으며,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사는데 있어 음락(淫樂)을 추구하지 않으며, 음식에 있어 맛을 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과실은 은밀히 가려줄 수는 있어도 면대(面對)하여 꾸짖을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꿋꿋하고 억셈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충성과 신의로써 갑옷과 투구를 삼고, 예의와 정의로써 방패를 삼으며, ()을 추대하여 행동하고 정의를 안고 처신합니다. 비록 폭정(暴政)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입장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처신함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좁은 집 허술한 방, 사립문에 거적문이 달린 집에 살며, 옷을 갈아입어야 나갈 수 있고 이틀에 한 끼밖에 먹지 못할 형편이라 하더라도, 임금이 응낙한 데 대하여는 감히 의심치 아니하며, 임금이 응낙지 않는다 하더라도 감히 아첨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벼슬하는 태도는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지금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옛 사람들에게 뜻을 두며, 지금 세상에서 행동하고 있지만 후세의 모범이 됩니다.마침 좋은 세상을 만나지 못하여, 임금이 끌어주지 아니하고 신하들은 밀어주지 아니하며, 아첨을 일삼는 백성들 중에 붕당(朋黨)을 이루어 가지고 그를 위협하는 자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몸을 위태롭게 할 수는 있으나 그의 뜻을 뺏을 수는 없습니다. 비록 위태롭다 하더라도 행동을 하는 데 있어서는 끝내 자기 뜻을 믿으며, 백성들의 고통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그들의 걱정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 淫樂(음락)

은 주로 음탕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자가 들어간 한자는 (땀 한), (머리감을 목), (물댈 주), (기름 유)와 같이 뜻은 물과 관련하여 형성되며, 음은 를 제외한 부분이 된다.

은 나무에 몇 개의 줄을 매어놓은 악기, 또는 악기대()에 걸어 놓은 크고 작은 북이라는 설()이 있는데, 그 뜻과 음은 세 가지로 활용된다.

첫째로 음악(音樂), 관악기(管樂器)에서처럼 풍류 악으로 쓰인다. 악기 중에는 줄을 이용한 현악기(絃樂器)도 있는데, 옛날에는 (거문고 금)(비파 슬)이 대표적이었다. 이 두 악기는 연주할 때 좋은 화음을 이루기에 부부(夫婦)에 비유돼 부부사이가 좋은 경우를 금슬이 좋다, 또는 금슬상화(琴瑟相和)’라 하며, 사이가 좋지 않은 경우를 금슬부조(琴瑟不調)라 한다.

둘째는 낙관적(樂觀的), 낙천적(樂天的), 동고동락(同苦同樂)처럼 즐거울 락으로 쓰인다. 장자(莊子)는 지락편(至樂篇)에서 지락무락(至樂無樂), 즉 최고의 즐거움은 즐거움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즐거움이라 했다.

장자는 아내가 죽었을 때도 물동이를 치며 노래까지 불렀는데, 친구인 혜자가 책망하자 아내는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갔으니 자연의 이치를 안다면 슬퍼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한 일화는 장자(莊子)고분이가(鼓盆而歌)’에 나온다.

장자가 여름날 산길을 가는데 소복 입은 젊은 여인이 무덤에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남편이 죽기 전 자기가 죽으면 무덤에 풀이나 마르거든 개가(改嫁)하라고 유언했는데, 그렇게 되려면 올여름도 그냥 보내야 하기에 풀을 빨리 말리기 위한 것이라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장자의 아내는 분개하며 자신은 절대 개가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에 장자가 처의 지조를 시험하려고 도술을 부려 죽은 척하였다. 아내는 장자가 정말 죽은 줄 알고 장자를 입관하여 대청에 안치했다.며칠 후 이웃 나라 왕자라는 사람이 조문왔는데, 장자의 처는 한눈에 그에게 반했다. 저녁이 되자 자고 가라는 장자 처의 요청에 왕자는 못 이기는 척 허락했다.

저녁에 부인이 술상을 들고 방에 들어서자 왕자가 청혼을 했다. 흥분한 장자의 처는 자기 방으로 돌아온 후 곧바로 상복을 벗고 다홍치마에 화장을 하고는 밤이 깊어지자 슬며시 왕자의 방에 들어갔다. 그런데 왕자가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며 자기는 난치병을 앓고 있는데, 죽은 지 백일 이내의 시체 골수를 먹어야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장자의 처는 장자 골통을 깨려고 도끼로 관 뚜껑을 뜯었다. 죽은 줄 알았던 장자가 벌떡 일어나며 당신은 내가 살아날 것을 어찌 알았소? 또 무슨 일로 다홍치마에 분을 발랐소?”라며 능청을 떨었다. 놀란 장자의 처가 미친 듯 건넌방으로 가보니 왕자는 없었다.

이에 장자 처는 부끄러워 물동이를 뒤집어쓰고 마당가 우물에 빠져 죽었다. 그래서 장자가 그 물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는데 여기서 상처(喪妻)를 뜻하는 고분지통(叩盆之痛), 또는 고분지탄(叩盆之嘆)이 나왔다.

셋째는 논어에 공자(孔子)가 말한 지자요수 인자요산(智者樂水 仁者樂山,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에서와 같이 좋아할 요로 쓰인다.

자가 이상과 같이 쓰이고 있음을 볼 때 淫樂음탕함과 즐거움 또는 음탕하게 즐김이고, 淫樂(음악)음탕한 음악으로 해석되는데, 한자어는 다소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17살 되던 해, 스승 한훤당으로부터 직접 전해 들었던 유가 선비가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儒行)’에 대한 설법을 되새기던 조광조의 가슴으로 공자의 말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선비는 충정과 신의로서 갑옷과 투구를 삼고, 예의와 정의로서 방패를 삼으며, ()을 추대하여 행동하고, 비록 폭정이라 하더라도 정의를 안고 처신해야 한다는 공자의 말은 사자후(獅子吼)가 되어 조광조의 뇌리를 흔들었다.

사자후.

사자가 울부짖으면 뭇짐승들이 엎드려 떨듯이 20여 년 전 스승으로부터 전해 들었던 선비의 사상은 하루아침에 반역죄인이 되어 유배를 떠나는 조광조의 가슴에 사자후가 되어 울부짖고 있었다.

나는 과연 스승 한훤당으로부터 평생 잊지 말고 명심하라.’고 내린 유훈(遺訓)을 잊지 않고 지켜나가고 있었던 것일까.

조광조는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수레 위에서 지난 세월 자신의 처신을 끊임없이 되새기고 반추하고 있었다. 한훤당의 유훈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선비는 좁은 집 허술한 방, 사립문에 거적문이 달린 집에 살며, 옷을 갈아입어야 나갈 수 있고 이틀에 한 끼밖에 먹지 못할 형편이라 하더라도, 임금이 응낙한 데 대하여는 감히 의심치 아니하며, 임금이 응낙지 않는다 하더라도 감히 아첨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벼슬하는 태도는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지금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옛 사람들에게 뜻을 두며,지금 세상에서 행동하고 있지만 후세의 모범이 됩니다. 마침 좋은 세상을 만나지 못하여, 임금이 끌어주지 아니하고 신하들은 밀어주지 아니하며, 아첨을 일삼는 백성들 중에 붕당(朋黨)을 이루어가지고 그를 위협하는 자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몸을 위태롭게 할 수는 있으나 그의 뜻을 뺏을 수는 없습니다. 비록 위태롭다 하더라도 행동을 하는 데 있어서는 끝내 자기 뜻을 믿으며, 백성들의 고통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그들의 걱정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선비는 널리 공부하되 그만두는 일이 없으며, 독실한 행동함에 지치지 아니하고, 홀로 거처하더라도 그릇된 짓을 하지 않습니다. 위로 출세를 한다 하더라도 덕이 부족하여 곤경에 빠지지 않도록 하며, 예로서 사람들을 대하되 조화를 귀중히 여기며, 충성과 신의를 찬양하고, 온화하고 유순한 것을 법도로 삼으며, 현명한 사람을 흠모하되 모든 사람들을 용납하며, 자기의 모난 것을 무너뜨림으로써 백성들과 화합하고자 합니다. 그들의 관대하고 너그러움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안에서 사람을 천거함에 친한 사람이라 하여 기피하지 않고, 밖에서 사람을 천거함에 원수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기피하지 않습니다. 그의 공로를 드러내고 한 일들을 종합하여 현명한 사람이면 누구나 추천하여 벼슬자리에 나아가게 하되 그 보답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임금이 그의 뜻을 이해하여 사람을 씀으로써 진실로 국가를 이롭게 하려고만 하지 부귀를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현명한 이들을 천거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을 추천함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훌륭한 것을 들으면 남에게도 알려주고, 훌륭한 것을 보면 남에게도 보여줍니다. 벼슬자리에는 서로 남을 앞세우고, 환난을 당하면 서로 죽음을 무릅쓰며, 오랜 동안라도 남이 먼저 승진(昇進)하기를 기다리고, 먼 곳의 사람이라도 능력만 있으면 서로 불러 벼슬하게 합니다. 그들이 벼슬하고 남을 내세움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자신을 깨끗이 건사하고 덕()으로 목욕을 하며, 임금에게 의견을 아뢰고는 엎드려 하회를 기다리고, 고요히 물러나서도 홀로 올바른 길을 지킵니다. 임금이 알아주지 않고 소원히 대하더라도 은근히 깨우쳐 드리되 서두르는 법이 없습니다. 낮은 사람들을 대함에 오만하지 아니하고, 자기만 못한 사람들 앞에 뽐내는 법이 없습니다.”

스승 한훤당이 조광조에게 유훈으로 내려준 선비가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에 대한 설법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선비는 세상이 잘 다스려진다고 해서 가벼이 행동하지 않으며, 세상이 어지럽다고 해서 자기 뜻을 잃지 않습니다. 자기와 같은 부류라 해서 무조건 친하지 않고, 자기와 다른 부류라 해서 무조건 배척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뛰어나게 홀로 바른 행실을 지킴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위로는 덮어놓고 천자의 신하가 되지 않고, 아래로는 덮어놓고 제후들을 섬기지 않습니다. 신중하고 냉정하며 관대함을 숭상하고, 강직하고 꿋꿋한 자세로 사람들과 어울립니다. 박학(博學)하면서도 옛 현인(賢人)을 따를 줄 알고, 문장을 가까이하고 익히며 행실을 닦아 염치(廉恥)를 압니다. 비록 나라의 땅을 쪼개어 준다 하더라도 그것을 가벼이 여기며, 외국 신하가 되지 않고 함부로 벼슬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법도를 따름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지키는 법도가 같은 사람과 뜻을 합치고, 닦는 법술(法術)이 같은 사람과 도를 함께 추구합니다. 친구와 같은 지위에 나란히 있게 됨을 즐기고, 서로 남의 아랫자리에 있는 것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오래 만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친구에 관한 뜬소문은 믿지 않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반드시 올바른 법도에 근본을 두고 있고 의로움에 입각(立脚)해 있으며, 그와 뜻이 같은 친구면 나아가 협력하고 그와 뜻이 같지 않은 친구로부터는 물러섭니다. 그들이 친구를 사귀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온화하고 선량한 것은 인()의 근본이며, 공경스럽고 신중한 것은 인의 기반이며, 관대하고 너그러운 것은 인의 작용이며, 겸손하게 사물을 대하는 것은 인의 효능이며, 예의와 절조는 인의 외모이며, 말과 이론은 인의 장식이며, 노래와 음악은 인의 조화(調和)이며, 재물을 나누어 주는 것은 인의 베풂입니다.

선비는 모두 이런 것을 아울러 지니고 있으면서도 아직 감히 스스로 인()하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공경하고 사양함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빈천하다고 해서 구차하게 굴지 아니하며, 부귀를 누린다고 해서 함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임금의 권세에 눌려 욕을 보지 않으며, 높은 자리의 사람들 위세에 눌려 끌려다니지 않고, 관권(官權)에 눌려 그릇된 짓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선비()라 부르는 것입니다.”

노나라의 애공이 공자에게 유가의 선비로서 행동은 어떠해야 하는 것입니까.’하고 물었을 때 답변한 공자의 설법은 예기(禮記) 유행(儒行)편에 기록되어 있다. 공자의 가르침이 다른 부분은 되도록 짧고 간결함에 비해 유독 이 부분에서만큼은 길고 상세한데, 이는 공자가 선비를 도의 구현자(具現者)로 본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 올바른 사회를 이끌어 나가야 할 사명감이야말로 선비가 반드시 가져야 할 엘리트정신임을 강조하기 위함 때문이었던 것이다.

조광조도 스승으로부터 전해 들었던 이 유훈을 평생 동안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하였음일까.

능주로 가는 멀고 먼 유배 길에서 묵묵히 지난 과거를 돌이켜 보는 동안 조광조는 자신에 대해 참담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과연 그러하였음일까.

공자의 말처럼 임금이 알아주지 않고 소원히 대하더라도 은근히 깨우쳐 드리되 서두르는 법이 없었음일까. 나는 과격하여 성급하게 지치(至治)를 이루려 하지 않았던가. 스승 한훤당의 가르침처럼 온화하고 선량한 것이 인()의 근본이고, 관대하고 너그러운 것이 인의 작용이었는데, 나는 과연 관대하고 너그러웠던 것이었을까.

나는 나 자신만이 옳다고 독선적(獨善的)인 행동을 하지 않았던가.

 

# 金科玉條(금과옥조)

(·돈 금, 성씨 김)은 쇠붙이를 만드는 거푸집두 쇳덩이(글자 속의 두 점)’를 그린 모양, 또는 (이제 금)이라는 음과 땅속의 두 금덩이를 본뜬 부분이 합해져 구성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자가 들어간 한자는 (비단 금) 등 일부 한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바늘 침), (무딜 둔), (구리 동), (새길 명)처럼 자에 뜻이 있고 나머지 부분은 음이 된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행위라는 의미의 천금매소(千金買笑)라는 말이 있다.

서주(西周)의 마지막 ()는 포()나라의 포사라는 여인을 매우 사랑하였으나, 그녀는 전혀 웃지를 않았다. 그래서 왕은 그녀를 웃기는 사람에게 천금(千金)을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위석부(魏石父)가 거짓으로 봉화(烽火)를 올리게 하니, 군사들이 허둥지둥하다가 거짓임을 알고는 분개하였다. 이 모습에 포사가 웃었고, 왕은 포사의 웃는 얼굴을 보고싶을 때마다 거짓 봉화를 올리게 하다 보니, 실제로 적이 쳐들어왔을 때는 군사들이 모이지 않아 결국 나라가 망했다고 한다.

(조목·과정 과)는 익은 (벼 화)와 곡식의 양을 헤아리는 (말 두)를 본뜬 글자로, ‘곡식의 분량을 말로 되다가 본뜻인데, 이후 조목별로 나누다, 등급 짓다등의 뜻도 갖게 됐다.

(구슬 옥)은 구멍 뚫린 여러 개의 옥을 실로 꿰어놓은 모양을 본뜬 것이다. 자가 들어간 한자는 대체로 (구슬 주), (둥근 물체 구), (옥빛 영)처럼 뜻은 옥과 관련돼 나오며, 음은 자를 제외한 부분이 된다. 흔히 을 말할 때 옥석(玉石) 또는 옥돌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이 정반대의 뜻으로 쓰임을 오인한 것이다. ()나라의 변화(卞和)라는 사람이 형산(荊山)에서 큰 박옥(璞玉)을 주워서 여왕(慮王)에게 바쳤더니, 왕이 미치광이라고 욕하며 변화의 왼쪽 발꿈치를 잘랐다.

얼마 후 무왕(武王)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그 박옥(璞玉)을 바쳤으나, 그 역시 욕하며 변화(卞和)의 오른쪽 발꿈치를 잘랐다. 그 후 문왕(文王)이 등극하자 변화(卞和)는 형산(荊山)에 올라가 삼일 밤낮을 통곡하였다. 문왕이 신하로 하여금 그 이유를 알아보니 발꿈치를 잘려서가 아니라 을 돌로 알고 충신(忠臣)을 미치광이로 여기는 게 슬펐다는 것이다. 이 전문가에게 의뢰해 보니 과연 좋은 옥이었다. 한비자(韓非子)의 한 일화로 玉石옥과 돌, 진짜와 가짜, 좋은 것과 나쁜 것, 인재와 보통사람 등을 말한다.

이것과 저것을 구분 못 하는 어리석고 못난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숙맥이 있다. 그러나 정확한 표현은숙맥불변(菽麥不辨)’이다. 춘추시대 진()나라의 도공(悼公)에게 형이 있었는데 우둔하여 아무 일도 맡길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형은 관직 없이 지냈는데, 사람들은 그를 (콩 숙)(보리 맥)도 구별 못 하는 숙맥불변(菽麥不辨)’이라 했다. 여기서 숙맥불변(菽麥不辨)이 나왔는데, 콩과 보리를 강조하다 보니 不辨은 생략하고 숙맥쑥맥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곁가지 조)는 바람에 유유하게(태연한 모양 유) 나부끼는 나뭇가지()를 뜻한다. 이상으로 볼 때 금과옥조(金科玉條)는 금 같은 조목()과 옥 같은 가지, 즉 매우 귀중한 법칙이나 규정을 말한다. 그래서 보통 문장이나 대화에서 을 금과옥조로 여긴다, 또는 은 금과옥조이다.’라고 표현한다.

 

공자는 말하였다.

선비는 자기와 같은 부류라 해서 무조건 친하지 않고, 자기와 다른 부류라 해서 무조건 배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와 다른 부류는 배척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나는 선비이면서도 선비의 길을 지키지 못한 위선자였다. 내 자신은 군자를 꿈꾸고 있으면서도, 실상 나는 소인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쉴새없이 흔들거리는 수레에 몸을 맡기면서 조광조는 심사숙고하였다.

내가 아는 스승 한훤당은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완전한 군자였다. 한훤당은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고치려고 노력하였던 선비였다.

일찍이 공자는 논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 사람이 같이 길을 가면 그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그들에게서 좋은 점은 가려서 따르고, 좋지 못한 점은 거울삼아 고치기 때문이다(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스승 한훤당은 비록 제자라 할지라도 좋지 못한 점을 지적하면 이를 고치려고 애를 썼던 참 선비였다. 실제로 한훤당은 17세의 제자 조광조에게 네가 나의 스승이로구나.’하고 말하였던 적이 있을 정도였다.

하루는 한훤당에게 꿩을 선물로 주고 간 손님이 있었다. 고달픈 유배생활에 몸보신하라고 준 선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효성이 지극한 한훤당은 꿩을 보자 문득 한양에 있는 늙은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유난히 꿩고기를 좋아하는 어머니에게 주고 싶어 한훤당은 직접 꿩의 털을 뽑고, 내장을 꺼내어 고기를 햇볕에 말리고 있었다.

그런데 솔개 한 마리가 햇볕에 말리는 꿩고기를 물고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얼마 후 이를 알게 된 한훤당은 화가 나서 집에 있는 계집종을 불러다가 꾸짖기 시작하였다.

네 이년, 내가 그토록 이르지 않았더냐. 혹시 개나 고양이가 먹을지 모르니 주의해서 지키라고 신신당부하였거늘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어 그것 하나 지키지 못하였단 말이냐.”

옆에는 조광조를 비롯하여 최수성 등 몇 명의 제자들이 있었으나 스승은 화를 참지 못하였으며, 계집종은 땅에 무릎을 꿇은 채 울기만 할 뿐이었다.

본인의 심정이야 어떻든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좀 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지엄하신 스승이었으므로 제자들은 이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정도 노여움이 가라앉은 후 조광조가 나서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선생님, 선생님께오서 노모를 봉양하시려는 정성이 간절하다는 것은 저희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그러나 일찍이 공자께오서는 어진 이를 보면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자를 보면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반성한다(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라고 하였습니다. 선생님께오서 효성이 지극하다 하더라도 군자가 하는 말은 언제나 가려서 해야 할 줄 압니다. 선생님께서 어질지 못한 말씀을 하신다면 저희들이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그 순간 한훤당은 일어서서 조광조의 손을 잡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내가 마침 스스로 후회하고 있었는데 너의 말이 이와 같으니 내가 심히 부끄럽구나. 이제야 알겠으니 이제야 네가 나의 스승이지 내가 너의 스승이 못 되는구나.”

기록에 의하면 이때부터 한훤당은 조광조를 더욱 아껴 애지중지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모습을 송시열은 심곡서원기(深谷書院記)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조광조 선생의 자질은 이처럼 탁월하고 한훤당 역시 받아들이는 도량이 넓어 사제 간에 서로 계발된 바가 있었다. 아직까지 희천에 살고 있는 늙은이들 간에 이 이야기는 전해오며 미담으로 삼고 있다.”

스승 한훤당은 이렇듯 자기보다 30년 가까이 어린 제자의 충고를 서슴없이 받아들이는 군자로서의 아량과 너그러움을 갖고 있던 선비였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나는 그러한가.

스승 한훤당은 공자가 설법하였던 유가의 선비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행동’,유행(儒行)’의 도리를 철저히 지켜나갔을 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 계율을 만들어 이를 지켜나갔던 군자였던 것이다.

한빙계(寒氷戒).

문자 그대로 가난하고 얼음처럼 찬 이성으로 지켜야 할 계율을 한훤당은 몸소 지어놓고 이를 철저히 지켜나갔던 것이다. 그가 한빙계란 계율을 세운 것은 2년 전이었다.

원래 한훤당은 27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여 늦게 벼슬길에 올랐었다. 마흔한 살 때 이르러서야 정6품 관직인 형조좌랑(刑曹佐郞)에 올랐으며, 품계로 보면 크게 빛을 보지 못한 셈이었다.

그러나 김종직(金宗直)으로부터 정통적인 성리학을 전수 받은 대유로서 재야에 있는 훌륭한 인물인 유일(遺逸)로 손꼽히고 있었는데, 특히 대사헌을 지낸 반우형(潘佑亨)은 관직이 높은데도 5살이나 많은 한훤당을 스승으로 모시기를 간청하였던 것이다.

한훤당이 여러 차례 이를 사양하였으나 반우형은 물러서지 않는다. 선비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한빙계를 써주었는데 스스로 세운 율법에 엄격하였던 한훤당이 쓴 유명한 한빙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동정유상(動靜有常):움직이거나 머물고 있을 때 항상 평상심을 갖도록 하라.

2. 정심솔성(正心率性):항상 마음을 바로 해서 착한 본성을 따르라.

3. 정관위좌(正冠危坐):갓을 바로 쓰고 의관을 정제하고 무릎 꿇고 앉아, 자세를 바르게 하라.

4. 심척선불(深斥仙佛):신선이 되고자 하는 도교와 부처가 되려는 불교를 깊이 배척하라.

5. 통절구습(痛絶舊習):낡은 습관을 철저하게 끊어버려라.

6. 질욕징분(窒欲懲忿):욕심을 막고 분한 마음을 참아라.

7. 지명돈인(知命敦仁):하늘의 뜻을 알고 어짐에 힘쓰도록 하라.

8. 안빈수분(安貧守分):가난함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분수를 지키도록 하라.

9. 거사종검(去奢從儉):사치와 허영을 버리고 근검절약하도록 하라.

10. 일신공부(日新工夫):날마다 새로워지는 공부를 하라.

11. 독서궁리(讀書窮理):책을 많이 읽고 깊이 생각하도록 하라.

12. 불망어(不妄語):망령된 말과 삿된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하라.

13. 주일불이(主一不二):마음을 하나로 집중하여 절대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라.

14. 극념극근(克念克勤):잘 생각하고 게으르지 말고 항상 부지런하라.

15. 지언(知言):말을 아끼고 말의 의미를 깊이 새기도록 하라.

16. 지기(知幾):일의 기미(幾微)를 알도록 하라.

17. 신종여시(愼終如始):시작할 때와 같이 끝도 신중하게 하라.

18. 지경존성(持敬存誠):공경하는 마음을 지니고 성실함이 있으라.

그 유명한 한훤당의 한빙계는 이후 조광조를 비롯하여 이퇴계, 이율곡 등 모든 성리학자들이 반드시 지켜나가야 할 18가지의 계심(戒心)이 되었던 것이다.

조광조가 아는 스승 한훤당은 공자가 설법한 선비로서의 유행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 세운 한빙계의 계율을 철저하게 지켜나간 참 선비였다.

그러나 스승 한훤당도 조광조를 제자로 삼은 지 2년 뒤 순천으로 유배되고, 그로부터 4년 뒤인 연산군 10년 갑자사화로 인해 사사된다. 그 후 조광조에 의해서 우의정으로 추증되었으나 문묘에는 종향(從享)치 못하였는데, 제자 조광조도 마침내 스승과 똑같이 이처럼 대역죄인이 되어 유배 길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스승과 제자, 사제 간에 되풀이되는 운명의 악순환이란 말인가. 스승 한훤당도 신진사림파로서 유자광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에 의해서 숙청을 당하였듯 조광조 자신도 신진사림파로서 심정과 남곤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에 의해서 이처럼 숙청을 당하고 있음이 아닌가.

그렇다면 정치란 항상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는 기득권의 훈구세력과 사회를 개혁하려는 신진세력 간의 신구갈등에서부터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쟁탈전이 시작되는 것일까.

조광조는 잘 알고 있었다.

선조인 연산군 때에 훈구파들은 스승 한훤당을 비롯한 신진사림파들을 야생귀족(野生貴族)으로 규정하고 그들이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힌다고 비난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광조 역시 붕당죄로 기소되지 않았던가. 중종이 직접 남곤에게 받아쓰도록 내린 전교에서 조광조에 관한 유죄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지 않았던가.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 등 4인 등은 서로 붕당을 맺어 자기들에게 붙은 자에게는 관직에 나가게 하고 다른 자는 배척하여 성세(聲勢)로 상호 의지하여 권세가 있는 요직의 자리를 독차지하였다(후략)

붕당죄.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인 죄. 이는 국가를 전복하려는 대죄로 붕당죄인을 보통 대역죄인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옛 중국에서는 모든 관료는 개개인이 천자에 예속되는 것이라 하여 횡적으로 결합하여 당파를 만들 때는 이를 붕당죄로 처벌하였는데, 이는 사사로운 이익을 같이 추구하는 사람들끼리 결합된 정치단체였기 때문이었다. 붕당은 국론을 분열시키고 조정의 조화를 해치는 배타적인 이익집단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조광조를 태운 수레는 어느덧 충청도의 공주를 지나고 있었다. 그동안 어느덧 나흘 낮, 나흘 밤이 흘러 가버린 것이었다. 11월에 접어들어 이미 초겨울의 쌀쌀한 한풍이 조광조의 품속을 파고들고 있었고, 불어오는 바람에 어지러이 흩날리는 낙엽들만 유배 길을 뒤덮고 있었다.

선생님.

언제 날이 밝았는지, 언제 하루가 지났는지 흐르는 세월을 깨닫지 못하고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조광조는 마침내 신음소리를 내면서 스승을 불러보았다.

한훤당 선생님, 선생님도 붕당죄인이 되어 순천에서 사사되셨는데, 마찬가지로 저도 붕당죄인인 대역죄인이 되어 이처럼 능주로 유배 길 떠납니다. 선생님이 순천에서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것처럼 저도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선생님. 선생님이 사화에 휘말려 억울하게 돌아가신 것을 제가 잘 알고 있으니,저 역시 아무런 죄 없이 사화에 휘말려 이처럼 억울한 유배 길에 오르고 있음을 스승님께오서도 잘 알고 계실 것이나이다.

우러러보는 하늘 저편으로 떼 지어 따뜻한 남쪽 나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들의 모습이 아득하게 보이고 있었다.

조광조가 스승 한훤당의 수하에서 학문을 배운 것은 1년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 한훤당이 희천으로 유배된 지 2년 만에 순천으로 이배되었기 때문이었다. 스승과 헤어질 무렵 조광조는 한훤당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선생님, 공자께오서는 왕도(王道)를 실행하고자 하여 동서남북으로 다니며 70명의 임금을 유세하였으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오면 공자께서 실행하고자 하였던 왕도정치는 무엇을 말함이겠습니까.”

조광조의 질문은 회남자(淮南子) 태족훈(泰族訓)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왕도정치를 펼치기 위해 70여 개국을 주유하였으나 실패로 끝난 공자의 행각을 사기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자는 왕도를 밝히려고 70여 나라의 임금을 유세하였다.”

나이 55세에 왕도정치를 실행하기 위해 노나라의 사구(司寇)라는 벼슬을 내던지고 국외로 여행길에 오른 공자는 그러나 68세에 노나라로 되돌아가기까지 13년 동안 70여 나라를 주유하였으나 실패를 하게 된다. 그러므로 조광조의 질문은 공자가 펼치려던 왕도정치의 핵심은 무엇이며, 그것이 왜 70여 나라로부터 배척당하였는가를 묻는 질문이었다. 제자의 질문을 받은 한훤당은 심사숙고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것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다만 옛말에 이르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한훤당은 대답 대신 붓을 들어 종이 위에 다음과 같이 써 내렸다. 한훤당이 쓴 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至治馨香 感于神明

그 말의 뜻은 잘 다스려진 인간세계의 향기는 하늘의 신명까지도 감명시킬 수 있다.’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이는 주서(周書) 군진편(軍陣篇)에 나오는 유명한 말로 그것이 바로 스승 한훤당이 조광조에게 마지막으로 남겨준 유훈이 되었다. 조광조는 스승이 써준 그 문장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부친의 묘소 앞에 초당과 연못을 만들어 놓고 학문에 정진할 무렵에는 이 문장이 조광조의 화두가 되었다. 마침내 유배지 순천에서 스승이 사사되었다는 부음을 들었을 무렵에는 한훤당의 유훈을 통해 독특한 조광조의 정치사상인 지치주의가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주공(周公) ()은 주나라 건국의 공신이요, 특히 주나라 문물제도의 창제자였다. 공자는 언제나 이 주공을 꿈꾸며, 주공이 제정한 문물제도를 어지러운 자신의 춘추시대에 실현하려 했던 것이다. 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주공에게 걸고 있었던 것이다. 공자가 주공을 얼마나 존경하고 있었던가를 술이(述而)편에서 다음과 같이 한탄하고 있음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심히 내가 노쇠하였구나. 오랫동안 나는 주공을 다시 꿈속에서 보지 못하고 있으니(甚矣 吾衰也! 久矣 吾不復 夢見周公).”

조광조는 공자가 펼치려던 왕도정치가 바로 주공이 말하였던 지치(至治)’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지극히 훌륭한 정치의 효과는 향기와 같아 하늘도 감명시킬 수 있다는 것으로, 백성을 잘 다스리려면 무엇보다 다스리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완성되어 향기를 뿜어내어야 한다는 뜻인 것이다.

지치주의(至治主義).

조광조에 의해서 전개된 독특한 정치사상인 지치주의는 이렇게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조광조의 정치사상인 지치주의는 중종이 직접 출제한 알성문과 시험에 차석으로 합격한 조광조의 답안 서두에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하늘과 사람은 그 근본됨이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사람에게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임금과 백성은 그 근본됨이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예전에 이상적인 임금들은 백성들에게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옛날에 성인들은 하늘과 땅의 근본과 수많은 백성들의 무리를 하나로 여겼기 때문에 그런 이치에 따라 도를 행하였습니다

조광조의 정치사상을 엿볼 수 있는, 알성시에서 하늘과 사람은 그 근본됨이 하나입니다.’라고 시작한 조광조의 답변은 바로 조광조의 지치주의 사상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과 사람이 하나로 연결되는 합일체, 천인무간(天人無間)’의 명제는 하늘의 뜻이 인간의 일과 분리되지 아니한다는 천리불리인사(天理不離人事)’로 발전되어 사람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세상은 반드시 하늘의 뜻이 실현되는 이상적인 사회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철학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의 구성원인 개개인이 각각 수양을 통해서 도덕을 실천함으로써 성인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때에는 먼저 정치적 대표자인 왕이 수양을 통해 성인이 됨으로써 백성들을 교화할 수 있는 것이다.

조광조는 당시 군주인 중종이 수양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고, 따라서 이상정치의 실현이 가능한 것으로 판단하여 경연에서 중종에게 공자의 도인 성리학을 열심히 가르쳤던 것이다.

조광조의 정치사상인 지치주의는 4가지의 방법을 필요로 한다.

그 하나는 현인군자를 적극 정치에 참여시켜야 한다는 용현정신(用賢精神)이며, 또 하나는 사림 보호를 위한 선비들의 사기진작, 세 번째는 방법적 폐단이 있을 때는 시의에 맞게 고쳐야 한다는 진보적 개혁정신, 마지막으로 언로는 반드시 열어 놓아야 한다는 언론 자유정책이었다.

지치주의를 구체화하려는 이 네 가지 방법은 결국 사회의 개혁을 의미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갖바치와 밤을 새우며 토론하였던 대로 무엇보다 사람을 바꾸는 대규모의 물갈이를 통해 새로운 피를 수혈해야 하는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정치무대에 나온 지 불과 4년 만에 하룻밤 사이에 대역죄인으로 전락한 조광조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바로 인물개혁이었던 것이다.

물론 도교의 일월성신을 제사 지내는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한 일과 향약을 실시하여 미풍양속을 권장한 괄목할 업적도 있었지만 조광조의 개혁은 주로 인적 자원의 개발과 인적 청산에 있었다.

조광조가 이를 위해 첫 번째로 시행한 제도가 바로 현량과(賢良科)의 설치였다. 과거제는 중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긴 역사를 갖고 있었다. 고려 광종 때에 쌍기의 제안으로 처음 시행된 이래 과거제는 고려의 전 역사는 물론이거니와 조선왕조 건국 이후에도 인재를 선발하는 가장 중요한 제도로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제도는 당시의 신분제적 질서와 결합됨으로써 귀족신분층이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조선왕조 건국 이후 이 과거제도는 학교제도와 더불어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져 이 제도의 중요성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 과거제도는 결국 권력의 세습이라는 고질적인 폐단으로 변질되어 갔으며, 숨어 있는 인재를 발탁하는 데는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조광조는 단 한 번의 시험제가 아닌 천거제를 통해 인재를 발굴하는 한나라의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를 본받아 현량과라는 새로운 과거제도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조광조는 과거제도의 혁신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아 원래 인물이 적습니다. 거기에다 서얼과 사천을 분별하여 등용하지 않습니다. 중국에서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등용시키지 못할까 걱정하고 있는데, 하물며 작은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인재 등용을 좁게 할 수 있겠습니까. 중국 한대의 현량방정과를 그대로 복원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이런 방식으로 하면 대현인이라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침내 조광조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서 천거과는 중종 13년에 시행된다. 육조 및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과 지방의 관찰사, 수령들이 마땅한 인물을 선발하여 예조에 추천하면 예조는 추천된 사람 개개인의 신분을 조사하여 왕의 임석하에 중전에서 시행하여 뽑는 것이었다.

최초로 실시된 현량과에서는 서울과 지방에서 추천된 120명 가운데서 28명이 뽑혔다.

그러나 28명의 급제자들도 대부분 서울과 그 주변에 살고 있던 사람들로 집안이 좋은 대표적인 문벌집안 출신이었다. 따라서 새로운 피를 수혈하려던 조광조의 의지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새로운 관료를 발탁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장 중요한 위치에 임명하여 부릴 수 있는 인재를 확보하려는 노력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현량과의 실시는 조광조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켰는데 28명의 급제자 중 안처겸(安處謙), 안처근(安處謹), 안처성(安處誠) 3형제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은 불공정한 인사라고 비난이 쏟아졌던 것이었다. 결국 현량과의 실시는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광조가 자신의 뜻과 같은 신진 사림들을 규합하여 붕당을 만들려 한다는 것이라고 기성 관리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이 신진 사림들은 곧 각 조정에 배치되었는데, 이들의 진출은 기성 관리들에게 크게 위협이 되었으며, 더구나 조광조가 이 젊은 관리들을 통해 실시하려는 혁신정치는 기성 관리들의 기반을 무너뜨릴지 모른다는 불안을 가중시켜 구세력을 결집시키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특히 정국공신들에게 있어 이 신진사림들의 급성장은 위기감을 부채질하였다.

곧 이들의 불만을 암시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중종 14, 126. 누군가 궁궐 안으로 화살을 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화살대에는 익명의 편지가 매달려 있었는데, 이 불길한 조짐은 한 번에 그치지 아니하였다. 211일에는 건춘문(建春門)에 똑같이 익명의 서한이 매달린 화살이 꽂히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특히 건춘문은 경복궁의 동쪽 문으로 조선 태조가 처음으로 세운 경복궁에 딸린 신성한 문이었으므로 건춘문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는 것은 중대한 반역행위였던 것이다. 화살에 매달린 편지는 승정원에서 곧 불에 태워버렸으므로 그 내용은 전하지 않으나 다음날 중종이 소인이 군자를 해칠 뜻이 있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조광조를 비방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음이 분명한 것이다. 구전에 의하면 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射人先射馬 擒賊先擒王

이 말의 뜻은 사람을 쏘아 맞히려면 먼저 그 사람이 타고 있는 말을 쏠 것이며, 도둑을 잡으려 하거든 먼저 도둑의 괴수를 잡아야 한다.’란 뜻으로 이는 두보(杜甫)의 시 전출색(前出塞)’에서 나오는 문장이었다.

두보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었다.

활을 당기려거든 힘껏 당겨야하고/화살을 쏘려거든 긴 것을 써야 한다.

사람을 쏘려거든 먼저 타고 있는 말을 쏘고/도둑을 잡으려거든 먼저 도둑의 괴수를 잡는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도 한계가 있고/나라를 세움에도 국경이 있는 것이니, 침략하여 능멸해오는 무리들을 제재함이/어찌 사람을 많이 죽임에 있으리오.”

이 말은 그러므로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면 그와 가장 관계 깊거나 그가 의지하고 있는 사람, 혹은 배경부터 먼저 공략하라는 뜻을 가진 것이었다.

여기에서 도둑의 왕인 금왕(擒王)은 바로 조광조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인 것이다. 즉 새로운 신진 사림들을 등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키우려는 조광조는 말이며, 도적의 괴수이므로, 이 도적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장본인인 조광조부터 화살을 쏘아죽여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뜻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조광조에게 위협을 가하는 구세력들의 선전포고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조광조는 이러한 위협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연이어 오래전부터 별러온 두 번째의 카드를 빼어 결정타를 날려버린 것이었다.

조광조가 빼어든 두 번째의 칼은 정국(靖國)공신의 개정이었다.

정국공신이란 연산군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웠다 해서 주어진 훈작(勳爵)이었다. 그런데 이를 받은 사람 중에 엉터리가 많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바였다. 그래서 혁명 후 얼마 안 돼서부터 공훈록을 바르게 고쳐야 한다는 논의는 항상 있어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조신들의 성의 부족과 그들에 의해서 왕위에 옹립된 중종의 우유부단한 거부로 차츰 그에 대한 논의가 시들해가는 추세에 갑자기 조광조가 공론으로 제시한 것이었다. , 중종반정 때 공신이 된 사람들의 훈적을 삭제하려 했던 것이었다.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왕이 된 중종은 자기를 왕위에 올려준 신하들의 공로에 따라 사등급하여 정국공신에 봉하였다. , 일등 공신에는 박원종·성희안·홍경주 등 8, 이등 공신에는 운수군 효성과 심순경 · 이계남 등 13, 삼등 공신에는 유계종 · 고수겸 · 심정 등 30, 사등 공신에는 변준 · 윤여필 등 52명을 각각 책록하여 도합 103명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납득하지 못할 공신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운수군(雲水君)은 반정에 공이 있어서가 아니라 중종과 종친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특혜를 입은 것이었고, 이희옹(李希雍)이란 사람은 연산군이 혁명에 쫓겨나는 날 승지로 있었는데, 혁명군이 궐내로 밀고 들어오자 소매를 붙잡고 놓지 않으려는 연산군을 뿌리치고 하수구로 도망쳤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해서 슬그머니 혁명 등 배열에 끼여 엉뚱하게도 정국공신에 올랐던 비열한 인물이었던 것이었다.

이에 대사헌 조광조는 정국공신의 전면적인 개정을 요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정국공신은 책봉된 지 비록 오래되었다고는 하지만 이 공신 중에는 폐주(연산군)의 총신들이 많은데 이들의 죄를 논하자면 결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폐주의 총신이라 할지라도 반정할 때에 공을 세웠다면 마땅히 공신으로 기록될 수 있겠지만 이들은 아무런 공도 없지 않습니까. 대개 공신을 중하게 여기면 공을 탐하고, 이로움을 탐해서 왕을 시해하고, 나라를 빼앗는 일이 자주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만약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한다면 이러한 일의 근원을 막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희안은 당시에도 그렇게 하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유자광은 자제와 인아를 귀하게 만들기 위해 그렇게 하였으니, 이는 전적으로 소인들이 모의에 참석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상하 모두가 잘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때에 이를 앞세워 정국공신을 개정치 않는다면 온전히 국가를 유지할 수 없을까 걱정이 됩니다.”

조광조는 위와 같은 상소를 올려 왕의 결단을 촉구하였다. 곧 조정의 대신들도 이를 지지하고 계속해서 사헌부와 사간원이 성희안, 박원종, 유자광 등의 잘못을 들어 탄핵하였으나 중종은 삭훈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다시 대간이 사직서를 내고 삭훈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일은 비단 한 가지 정사(政事)의 잘못만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모두 이익만을 알고 인의를 모르면 장차 나라의 일이 어떻게 될지 걱정입니다.”

공신들은 여러 가지 특권을 누려 국가로부터 소위 녹권(錄券)을 받아 그 자신은 물론 자손 대대로 귀족으로 행세하여 영화를 누릴 수 있었으며, 국가에서 토지와 노비를 받아 경제적인 보상까지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 번 공신에 책록되는 일은 자신과 후손들의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아울러 확보하는 일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조광조 등 신진세력들이 수구세력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권력층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당시 가장 위세가 당당한 기성층인 정국공신을 제거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가 이처럼 강력하게 정국공신의 개정을 요구하고 나선 것은 그들의 기반을 무너뜨려 권력을 장악하려는 이유보다는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조선은 건국 이래 두 번이나 쿠데타가 있었다. 그 하나는 수양대군이 임금 단종을 몰아내고 정권을 찬탈한 사건이었고, 또 하나는 여러 대신들이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을 왕위에 옹립한 반정이었다.

수양대군의 정권 찬탈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공신이 정난(靖難)공신이며, 중종반정 때 공을 세운 공신들이 정국공신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는 신하가 군주를 죽이는 부도덕한 일이었다. 따라서 조광조는 공신을 중하게 여기면 공을 탐하고 이로움을 탐해서 왕을 시해하고 나라를 빼앗는 일이 이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됩니다.’라고 주장함으로써 군신유의(君臣有義)의 정의를 바로잡으려 했던 것이다.

유교적 이상주의를 통해 왕조의 도덕성을 재확립하려는 조광조의 의지가 정국공신의 개정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나 중종은 이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왜냐하면 자신의 즉위를 도와준 공신들이 비록 부당하게 책록되었다 하더라도 삭훈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광조 등 신진세력들의 저항은 의외로 완강하였다. 대사성 김식은 중종 앞에 나아가 다음과 같이 극간하고 있었다.

이 일은 갑자기 발의된 것이 아닙니다. 정국공신은 그 외람됨이 심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실로 무궁한 폐단을 열었으니, 지금 이것이 발의된 것은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볼 수 있습니다. 이를 고치면 이익을 탐하는 근원이 제거되어 국맥이 영구할 것이니 마땅히 그 이해를 헤아려 결정할 때를 잃어서는 아니 됩니다.”

조광조에 의해서 정국공신의 개정문제가 발의된 이래 조정은 화약고처럼 불붙고 있었다. 조광조가 대사헌으로 있는 사헌부와 사간원, 홍문관, 성균관, 의정부 대신에 이르기까지 모두 중종에게 간청을 드리고 있었고, 이를 거절하는 왕 사이에는 미묘한 감정의 대립이 보름간이나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1025일에 시작된 조광조의 발의가 보름이 지난 119일 조광조의 승리로 끝나게 되는 것이다. 즉 정국공신 103명 중에 3분의 2에 해당하는 78명이 삭훈됨으로써 남은 공신은 25명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조광조의 승리였을까. 그로부터 6일 후인 15일 밤. 삭훈된 홍경주와 남곤, 심정과 같은 훈구세력의 반격으로 한밤중에 숙청극이 일어나 조광조는 붕당죄의 대역죄인이 되었으니 조광조의 승리는 6일 천하로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이 무렵 흥미로운 비화가 하나 전하고 있다. 마침내 중종으로부터 78명의 정국공신을 삭훈한다는 전언을 받은 날, 조광조는 승리감에 도취하여 김정과 김식, 김구 등 동료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때 불쑥 나타난 사람은 최수성. 최수성은 강릉 출신의 진사로 조광조가 희천에서 한훤당으로부터 글을 배우고 있을 때 동문수학한 옛 친구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최수성은 한성에 올라올 때마다 조광조의 집에서 묵고 가고 있었으므로 자연 김식을 비롯한 조광조의 신진사림파들과 안면을 트고 지내고 있는 사이였던 것이다. 조광조와 달리 최수성은 벼슬에 관심이 없는 초야의 야인이었으며, 특히 시문에 뛰어났다. 그래서 그 자신이 시에 능했던 김정이 최수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데, 불쑥 나타난 최수성은 조광조에게 말하였다.

이보게 정암, 듣자 하니 자네의 기세가 하늘을 찔러 무소불위(無所不爲)라 하니 그게 사실인가?”

조광조는 어릴 때부터의 친구가 하는 말이었으므로 이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며 말하였다.

어찌하여 또 시비를 거시는가.”

이에 최수성이 정색을 하고 대답하였다.

항간에서 듣기를 자네가 아침에 출근하는 중 가마가 앞을 가로막고 늑장을 부리자 가마꾼을 잡아다가 볼기를 쳤다는데 그것이 과연 사실인가?”

 

# 無所不爲(무소불위)

는 원래 기구를 가지고 춤추는 무녀(巫女)의 모습을 본 뜬 글자인데, ‘없다라는 뜻으로도 쓰이게 되었다. 이에 춤추다라는 본뜻을 살리기 위해 자에 춤추는 두 발을 본뜬 천()’을 넣은 (춤출 무)자가 만들어졌다. 자가 들어간 한자는 (어루만질 무), (밟을 무) 등과 같이 대부분 음은 이며 뜻은 나머지 부분이 된다. 하는 바, , 을 뜻하는데, 자 다음에는 대체로 소위(所謂), 소행(所行)처럼 동사가 놓인다.

는 나무나 풀의 뿌리를 본뜬 것 또는 아래로 늘어진 한 송이 꽃부리를 본뜬 것이라는 두 설()이 있다.흔히 마시는 주량(酒量)이 많은 경우를 주류불사(酒類不辭)라고 잘못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두주불사(斗酒不辭)라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는 다음 일화에서 유래된 관용어(慣用語)이기 때문이다.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은 공조 관계였는데, 항우는 유방이 자기보다 먼저 진()의 서울 함양을 함락시킨 것에 대해 화가 났다. 이에 유방이 항우의 진영을 찾아가 해명하는데, 그때 항우의 참모 범증(范增)이 유방을 죽이려 하였다.

위급한 상황을 안 유방의 심복 번쾌가 방패와 칼을 들고는 그 자리로 뛰어 들어갔다. 항우가 잠시 놀랐으나 유방의 참모임을 알고는 번쾌에게 술을 주도록 하니, 번쾌는 한 말의 술을 단숨에 마셨고, 안주로 돼지 생고기를 방패 위에다 놓고 썰어 먹었다. 이 모습에 감탄한 항우가 한잔 더 권하자 번쾌가 죽음도 사양하지 않는 제가 어찌 말술(斗酒)을 사양하겠습니까(不辭), 다만 유방이 먼저 입성하여 장군(항우)을 기다리려고 했던 것인데, 그런 유방을 해치려 함은 장군답지 않은 처사입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을 하다,이 되다,을 위하다,이라 여기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진시황제(秦始皇帝)의 신하인 환관(宦官) 조고(趙高)는 진시황이 죽을때 태자(太子)인 부소(扶蘇)를 황제로 계승시키도록 유언하였으나, 승상(丞相) 이사(李斯)와 함께 그 유언을 속여 자신들이 다루기 쉬운 진시황 둘째 아들인 어린 호해(胡亥)를 황제로 세웠다.

그 후 조고는 이사 등을 죽이고 모든 것을 좌지우지(左之右之)했는데, 어느 날 에게 사슴(鹿)을 바치며 이것은 말()입니다(指鹿爲馬 지록위마)”라고 했다.

그러자 이 웃으며 사슴(鹿)을 말()이라 합니까라며 좌우를 둘러보자, 신하들 중에 말입니다라고 말한 자가 있는가 하면 사슴입니다라고 말한 자가 있었다. 이때 조고는 사슴이라고 말한 자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훗날 죄를 씌워 모두 죽였다. 그래서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행사하는 것을 指鹿爲馬라 하는데, 훗날 그 뜻이 확대되어 모순된 것을 끝까지 우겨 남을 속인다는 뜻으로 쓰기도 한다.

이상으로 볼 때 무소불위(無所不爲)어떠한 일도 하지 못함이 없다.즉 못하는 일이 없다는 뜻으로 무소불능(無所不能)과 함께 흔히 절대적 권력을 쥔 사람과 연결시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최수성의 질문은 사실이었다.

며칠 전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다. 조광조는 아침에 일찍 급히 중종의 부르심을 받고 궁 안으로 입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앞으로 다른 가마 하나가 먼저 가고 있었다. 호조판서인 고형산(高荊山)의 가마였다. 직급으로는 조광조가 종2품인 대사헌으로 위였으나 나이로서는 고형산이 19세나 위인 연상이었으므로 차마 앞서가지 못하고 별배꾼을 시켜 큰소리로 벽제()케 하였다.

물렀거라..물렀거라.”

보통 행차 때 구종별배(驅從別陪)가 잡인의 통행을 막고 길을 열면 서민들은 물론, 지위가 높다고 하더라도 관직이 아래인 사람들은 길을 열어주는 것이 법도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고형산의 가마꾼들은 좀체로 길을 열어주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조광조의 가마가 빨리 나아가려 하면 그쪽 길을 막아 일부러 늑장을 부렸던 것이다. 물론 고형산의 가마에도 마보사(馬步使)라는 별배가 있었다. 길을 터주는 인도자가 마보사였으므로 마보사가 가마를 멈추어 조광조의 일행을 행차시켰으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화가 난 조광조는 입궐과 동시에 군졸을 보내어 고형산의 마보사를 잡아다가 볼기를 치게 하고 하루가 지난 뒤에 석방하였던 것이다. 이 소문은 항간에 널리 퍼져 있었고 그 소문을 들은 최수성이 그것이 사실이냐고 물었던 것이다. 이에 조광조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사실이네.”

그러자 최수성이 다시 물어 말하였다.

어찌하여 정숙(靜叔:고형산의 자)의 볼기를 치지 아니하고 졸개에 불과한 마보꾼의 볼기를 칠 수 있단 말이오.”

이에 조광조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물론 정숙이 행한 바는 사대부가 길을 양보하는 미풍을 크게 잃은 것이니 정말로 잘못된 일이오. 그러나 비록 사헌부가 풍속을 검속하고 다스리기는 하나 정숙이 중신이므로 내가 규찰해서 바르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므로 하급관원 한 사람을 대신 다스린 것뿐이네.”

조광조의 말은 사실이었다. 비록 사헌부가 풍속을 검속하고 다스리는 권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노대신인 고형산을 직접 검속할 수는 없으므로 대신 수행원 하나를 구속하여 벌을 주었던 것이다. 고형산은 조광조의 말처럼 함경도 병마절도사와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형조판서를 역임한 후 호조판서에 올랐던 노대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암.”

조광조의 말을 들은 최수성이 물러서지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에 정암 자네의 앞길을 가로막았던 대신이 호조판서가 아니라 이곳에 앉아 있는 노천(老泉)이었다면 그때도 마보꾼의 볼기를 때렸을 것인가. 또한 정숙이 자네의 반대파가 아니라 자네와 같은 신진사림파였다면 과연 길을 막았다 하더라도 화를 내었을 것인가.”

노천은 김식의 자로 조광조가 가장 신뢰하는 오른팔이었던 것이다. 이 무렵 김식은 대사성(大司成)이었고, 조광조에 의해서 실시된 현량과를 통해 벼슬에 오른 신진사림파의 수장이었던 것이다.

꼬치꼬치 캐묻는 최수성의 태도를 보다 못한 김식이 가로막고 나서서 말하였다.

이보슈. 만약 내가 가마를 타고 행차하고 있었다면 정암이 탄 가마를 가로막지 않았을 것이니, 애초부터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오.”

그 순간 최수성이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호통을 치며 말하였다.

어찌하여 자네의 앞길을 막아서는 안 된단 말인가?”

최수성은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높였다.

어째서 정암이 탄 수레 앞은 막아서서는 안 된단 말인가. 옛말에 이르기를 큰길에는 문이 없다(大道無門).’ 하였는데, 하면 정암이 가는 길은 그 누구도 문을 세울 수 없는 큰길이란 말인가. 이유야 여러 가지였겠지만 상감의 부르심이 화급하다 하여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결국 따지고 보면 정암이 가는 길은 누구도 막아서는 아니 된다는 오만 때문이 아니겠는가.”

최수성의 말은 준엄하였다. 정국공신을 개정하고 그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조광조와 김식, 김정, 김구 등 핵심 세력들끼리 모여 술잔을 나누던 연회장은 갑자기 싸늘해졌다.

내가 정암, 자네에게 무소불위라 하였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네. 이제 정암 그대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능히 다 할 수 있게 되었네 그려. 그뿐인가.”

최수성의 힐문은 그것으로 그치지 아니하였다. “그대는 왕조가 건국한 이래 가장 뛰어난 영주이셨던 세종대왕 마마를 ()’()’는 영특하나 학문에는 부족하다 하는데 이 또한 사실인가?”

최수성은 조광조의 아픈 급소를 예리하게 찌르고 있었다. 조광조는 국가의 종묘에 제사 드리는 방법에 대해서 논하면서 그 제사를 시작한 세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폐단된 일이 많으니 원묘에 제사 지낼 때 전() 드리는 것과 능침에 초하루, 보름에 제사를 드리는 것은 모두 정도가 아닙니다. 이는 모두 세종조 때부터 비롯되었으니, 이로 보면 세종께서 재와 기는 영특하고 과단스러우셨으나 학문에는 다하지 못한 데가 있었던 듯싶습니다. 이는 선왕을 공경하는 도가 아니요, 도리어 번거롭고 더럽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아랫사람부터 의논하여 실행될 일이 아니니, 모름지기 상감께서 주야로 생각하고 헤아리셔서 성상의 마음으로 결단하시면 신을 섬기는 도를 얻으실 것입니다.”

최수성의 날카로운 질문에 조광조는 묵묵부답할 뿐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 이에 다시 최수성이 말을 이었다.

자네의 권세가 하늘을 찔러 능히 대적할 사람이 없더니, 이제는 선왕이신 세종대왕 마마의 가마도 자네가 가는 길 앞을 가로막지는 못하겠군. 하면 정암 자네는 세종을 감히 비판할 만큼 재와 기뿐 아니라 학문에도 능하다고 자신을 평가하고 있단 말인가.”

이에 김정이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듣자 하니 자네의 말이 심히 지나치고 무례하네.”

같은 문인으로서 각별한 애정을 보이고 있던 김정의 만류에도 최수성은 물러서지 아니하였다.

지나친 것은 내가 아니라 여기에 모인 자네들이네.”

최수성은 손을 들어 승리감에 도취해 있었던 네 사람을 한 사람씩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옛말에 이르기를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하였네.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보다 못하다는 뜻이 아닌가. 이보게, 정암. 정암 자네와 나는 20년 전 함께 평안도의 희천에서 한 스승 밑에서 공부를 하였지. 그때 나는 자네가 스승에게 물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네. 자네가 한훤당에게 왜 유학을 배워야 합니까?’ 하고 묻자 스승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네. ‘위기지학(爲己之學) 때문이다.’ 이에 내가 다시 물었었네. ‘자기를 향상시키기 위한 학문, 즉 위기지학 때문에 저희들이 유자가 되어야 한다면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입니까.’ 이에 스승께서는 논어의 옹야(雍也) 편에 나오는 다음의 말을 통해 답변을 해주셨네. ‘너는 군자로서의 유자가 되어야 하고 소인으로서의 유자가 되어서는 안 되느니라.’”

조광조는 묵묵히 최수성의 말을 듣고 있었다. 20여년 전 함께 한훤당으로부터 들었던 옛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한훤당의 가르침은 일관된 것이었다. 즉 공자가 문학에 재능 있는 자하(子夏)에게 말하였던 것처럼 너는 군자로서의 유자가 되어야지, 소인으로서의 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女爲君子儒 無爲小人儒)’는 가르침은 즉,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향상시켜 군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으로 이는 스승 한훤당의 핵심철학이었던 것이다.

최수성은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도 스승의 말을 잊지 못하네. 내가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힌 것은 스승의 가르침대로 내 자신을 향상시키기 위함이었네. 그러나 정암 자네는 국가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벼슬길에 올랐네. 나는 어느 쪽이 옳은가는 말할 수 없네. 일찍이 채근담은 권세에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은 깨끗하다.’라고 말하였지만, 또 이렇게도 말하였네. ‘권세에 가까이 할지라도 물들지 않는 사람은 더욱 깨끗하다.’ 그뿐인가. 이렇게도 말하였네. ‘권모와 술수를 모르는 사람을 높다 하나 알아도 이를 쓰지 않는 사람을 더 높다 할 것이다.’”

최수성은 말을 끊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술잔을 들고 말하였다.

어찌하여 내겐 술을 따르지 않는 건가. 이보게, 노천. 술 한잔 가득 따르시오.”

김식이 최수성의 술잔에 술을 한가득 따라주었다. 넘치도록 따른 술을 최수성은 단숨에 들이켜고 말하였다.

그런데 정암, 자네는 이미 권세에 물들었네. 자네뿐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미 권모술수에 도통하여 있네. 그러므로 진실로 볼기를 때릴 사람은 마보꾼이 아니라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는 그대들일세. 숙청되어야 할 사람들은 정국공신들이 아니라 그대들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권세욕일세. 한 잔 더 주시게나.”

최수성은 다시 빈 술잔을 김식에게 내어주었다. 김식이 마지못해 다시 따라주자 이를 단숨에 비우고 말을 이었다.

헤어지기 전에 술을 마시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군. 이보게, 정암. 자네가 마지막으로 술잔을 채워주게.”

최수성은 빈 술잔을 조광조에게 내밀었다. 조광조가 술을 따라주자 최수성은 물끄러미 조광조의 얼굴을 바라보며 불쑥 수수께끼의 말을 던졌다.

나는 가라앉고 있는 배를 탔어. 이제 곧 얼마 안 있어 물에 가라앉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불안해서 가슴이 두근두근했는데, 술 석잔을 거푸 마시니 이제 마음이 좀 편안해지는구나.”

순식간에 석잔을 비운 최수성은 그 길로 방을 나가버렸다. 김식을 비롯한 세 사람이 어이없는 얼굴로 조광조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가라앉은 배에 탔다니요.”

기록에 의하면 이 질문에 조광조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가 가라앉는 배라고 말한 것은 바로 우리들을 비유해서 가리킨 말이 아니겠소이까.”

결과적이지만 최수성의 비유는 그대로 적중된다. 정국공신을 개정하여 승리감에 도취되어 자축연을 벌였던 네 사람은 그로부터 정확히 6일 후에 붕당죄의 반역죄인으로 숙청되는데, 그렇다면 이들을 가라앉는 배에 비유했던 최수성의 참위는 그대로 들어맞게 되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최수성의 충고는 정치가들은 반드시 명심해야 될 진리인 것이다. 권력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한 순간부터 권력의 비극은 시작되는 것이며, 미라잡이가 미라가 되듯 수구세력들을 몰아낸 개혁세력은 오래지 않아 스스로 수구세력으로 전락함으로써 가라앉게 된다. 최수성의 지적처럼 정치에 있어 최고의 선은 곧 자기 자신의 개혁이며, 그 어떤 권력에도 물들지 않을 수 있는 도덕의 완성이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가라앉는 배.

이 지상에서의 권력은 그 어떤 권력이라고 할지라도 진수(進水)를 시작할 때부터 이미 물이 새어 가라앉는 난파선에 불과한 것이다.

어느덧 조광조를 태운 수레는 능성에 가까워지고 있었다.‘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한양에서부터 능성까지의 거리는 758.

능성현의 원래 이름은 이릉부리(爾陵夫里). 백제의 옛 이름으로는 죽수부리(竹樹夫里), 혹은 인부리(仁夫里)라 하였다. 훗날 선조 때 조광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 죽수서원은 백제 때의 옛 지명을 따서 지은 이름으로 이곳은 예부터 궁벽한 땅으로 알려져 있었다.

가라앉는 배.

머나먼 유배 길에서 줄곧 자신의 지난 행적을 떠올려 보던 조광조에게 마지막으로 떠오른 목소리는 수수께끼의 말을 던지고 사라진 최수성의 할()이었다. 옛 선승들이 수행자의 망상이나 삿된 사견(邪見)을 꾸짖어 단숨에 정신을 차리도록 외치는 소리처럼 조광조를 향해 가라앉는 배라고 외친 최수성의 목소리는 줄곧 조광조의 뇌리를 뒤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가라앉는 배.

결과적으로 조광조는 최수성의 말대로 침몰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자신이 단행한 정국공신의 개정으로 삭훈된 훈구파들의 반격으로 조광조의 배는 가라앉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는 하늘을 우러러 붉은 해를 쳐다보면서 중얼거려 말하였다.

결과적으로 내 행동은 과격하긴 하였지만 다른 사사로운 마음은 전혀 없지 않았던가. 저 하늘의 밝은 해는 거짓 없는 내 충정을 낱낱이 비추고 있지 않은가.

수레는 연주산(連珠山) 밑을 지나고 있었다.

구슬이 연하여 있는 모양이라 하여서 연주산이라 불리는 산 밑에는 영벽정(映碧亭)이란 작은 정자가 하나 있었다. 일찍이 김굉필의 스승이었던 김종직(金宗直)은 이곳을 지나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연주산 위에 뜬 달은 소반 같은데 풀과 바람 나무 간 곳 없고 이슬 기운만 가득 차네.

천뭉치의 솜구름 모두 흩어지고 한 덩이 공문서(公文書) 보잘것없도다.

시절은 다시 깊은 가을이라 아름답긴 하지만 나그네의 회포를 오늘 밤 누가 달래줄 것인가.”

스승 한훤당의 스승이었던 김종직. 문장과 경술에 뛰어나 이른바 영남학파의 종조(宗祖)가 되었던 조선조의 뛰어난 성리학자. 학문적으로는 조광조의 할아버지뻘 되는 김종직이지만 정치적으로도 조광조가 이끄는 신진 사림파의 시조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죽은 후에 무오사화가 일어나 무덤이 파헤쳐져 참시를 당하는 비극의 주인공이고 보면 조광조의 유배는 신진 사림파들이 반드시 겪어야 되는 운명의 대물림인 것인가.

정몽주는 격살 당하였고, 그의 제자인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였고, 또 그의 제자인 한훤당은 유배 중에 사사 당하였고, 막내격인 조광조 자신은 가라앉는 배를 타고 이처럼 유배를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아, 김종직이 지은 시처럼 연주산은 깊은 가을이라 핏물을 뚝뚝 듣는 듯한 만산홍엽으로 물들어 아름답지만 나그네의 깊은 회포는 그 누가 달래줄 것인가.

마침내 유배지인 능성에 도착한 조광조는 그 즉시 그곳 현감에게 인계되었다. 현감은 비봉산(飛鳳山) 아래 작은 민가를 구해 놓고 시중을 들 관동을 미리 준비해 두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제자 장잠을 비롯하여 생활에 필요한 일을 도와줄 하인들이 조광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헤어질 무렵 자신을 이곳까지 무사히 호송하고 온 나장들과 일일이 손을 잡고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그때가 1126.

조광조가 한양에서 유배 길을 떠난 것이 1117일이었으니, 정확히 열흘 만에 최종 목적지인 능성에 도착한 것이다.

조광조를 무사히 능주까지 호송하고 떠나려던 나장 하나가 다시 무엇인가를 들고 나타나 말하였다.

나으리께 전해 드릴 물건이 있어 다시 찾아왔나이다.”

그것이 무엇이냐.”

걸망이나이다.”

나장은 손에 든 걸망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소용이 닿지 않는 물건이라면 쇤네가 이를 버리겠나이다.”

나장의 말처럼 그것은 소용이 닿지 않을 만큼 낡고 허름한 물건이었다.

남강을 건너기 전 갖바치가 방책 틈사이로 밀어 넣은 걸망이나이다.”

순간 조광조는 열흘 전 만났던 갖바치의 일이 떠올랐다. 헤어질 무렵 갖바치는 조광조에게 바랑을 밀어 넣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던가.

나으리,걸망 속에는 나으리께 드릴 물건이 들어 있나이다. 하오나 청컨대 능주에 도착하기 전에는 들어있는 물건을 절대로 뒤져 보지 마시옵소서. 필히 능주에 도착하신 후에야 이를 꺼내 보시옵소서.”

그뿐인가. 갖바치는 이를 다짐이나 하듯 이를 반드시 지키시겠나이까하고 묻지 않았던가. 이에 조광조가 내 반드시 그리하겠네.’하고 대답하자 비로소 안심하고 갖바치는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지 않았던가.

물론 조광조는 갖바치와의 약속은 지킨 셈이었다. 능주에 도착하기까지 열흘 동안 걸망 속의 물건을 꺼내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갖바치의 당부를 지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유배 길에서 자신의 지난 행적을 반추해 보고, 무엇을 잘못하고 어떤 과오를 저질렀던가를 반성하는데 심사숙고하느라 딴 것에 정신을 팔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갖바치는 조광조에게 다음과 같은 참위를 내리며 스스로 행방을 감추어 사라지지 않았던가.

공의 재능은 한 시대를 경제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임금님의 마음을 얻은 후에야만 그것이 능히 가능할 것입니다. 지금 주상께오서는 명성 때문에 공을 쓰시지만 실제로는 공을 잘 모릅니다. 만일 그사이에 소인이 끼어든다면 공은 화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을 어떻게 해서든 등용하려는 조광조에게서 사라져 행방불명되었던 갖바치가 남기고 간 예언대로 조광조는 결국 주상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그사이에 소인이 끼어들어 보다시피 참화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능주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절대 뒤져 보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갖바치의 걸망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단 말인가. 조광조의 운명을 예언하는 또 하나의 참언이 들어있단 말인가.

두고 가거라.”

조광조가 말하자 나장은 망태기처럼 얽어 만든 바랑을 조광조에게 두 손으로 바쳐 올리고 사라졌다.

그날 밤 조광조는 갖바치가 준 걸망을 뒤져보았다.이 자리에는 양팽손이 함께 있었다. 양팽손의 나이가 조광조보다 6살 연하였으나 이곳 능주가 고향인 선비로 사마시를 함께 응시하여 조광조는 진사에, 양팽손은 생원시에 각각 장원으로 급제하였던 인연을 갖고 있었다. 특히 양팽손이 성균관에 입학하였을 때 유생들은 양팽손을 촌놈이라 부르며 푸대접하였지만 조광조는 이를 전혀 개의치 않고 가까이 지내왔던 특별한 인연을 맺었던 것이었다. 조광조가 능주에 도착하였다는 말을 듣고 단걸음에 양팽손이 달려온 것은 이런 각별한 인연 때문이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양팽손은 조광조 앞에 놓인 걸망을 가리키며 물어 말하였다. 이에 조광조는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이 안에는 소중한 것이 들어있다네.”

소중한 물건이 들어있다는 조광조의 말에 양팽손은 반신반의하면서 물었다.

이처럼 남루한 걸망 속에 귀한 물건이 들어있다니요.”

그러자 조광조가 대답하였다.

이 속에는 월단(月旦)이 들어있다네.”

월단이라 하면 인물에 대한 비평을 일컫는 말로 원래는 월단평(月旦評)이라 한다.‘ 매달 첫날에 내리는 평이라는 뜻을 지닌 말로 후한서(後漢書)에 나오는 유명한 일화 중의 하나이다.

후한 말 여남(汝南)에 허소()와 그의 사촌형인 허정(許靖)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은 그 지방의 인물들을 자세히 관찰하여 매월 초하룻날이면 허소의 집에서 인물비평을 하였다. 이 비평이 매우 날카롭고 정확하다 하여 평판이 높았다. 그래서 당시 이 비평을 들으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조도 그중의 하나였다. 아직 두각을 나타내기 전에 조조는 그들을 찾아가 자신에 대한 평가를 해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허소는 성격이 난폭하여 소문이 좋지 않았던 조조였던지라 선뜻 응하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조조가 하도 재촉하자 허소는 마지못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그대는 태평시대에는 간적(奸賊)이요, 난세에는 간웅(奸雄)이 될 인물이오.”

이 말을 들은 조조는 뛸 듯이 기뻐하였다는 말이 전해 내려고 오고 있는데, 양팽손은 웃으며 말하였다.

하면 대감도 조조처럼 간웅이시나이까?”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일세.”

조광조는 걸망 속에서 물건을 꺼내었다. 양팽손은 그 물건을 확인해 보았다. 그것은 신발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는 태사혜(太史鞋)이었다. 태사혜는 비단이나 가죽으로 만들고, 코와 뒤축 부분에 흰줄무늬의 태사문을 넣은 고급 신으로 주로 양반들이 신는 마른 신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태사신이 아닙니까.”

양팽손이 다소 실망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렇네. 태사신일세.”

조광조는 한눈에 그 신발이 갖바치가 자신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준 물건임을 알 수 있었다. 갖바치는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었던 조광조를 위해 손수 가죽으로 태사혜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하면 이것이 월단평이란 말씀이십니까. 대감 나으리를 감히 신발에 비유하다니요.”

그러나 조광조는 대답 대신 그 신발을 신어 보았다. 미리 치수라도 재어 놓고 있듯이 발에 꼭 맞는 맞춤 신발이었다. 한번도 조광조의 발 치수에 대해서 묻거나 재본 적이 없는 갖바치였지만 눈대중만으로도 정확히 발의 크기를 꿰뚫고 있었던 듯 신발은 크지도 작지도 않게 정확하게 꼭 맞고 있었다. 조광조는 태사혜를 신고 방안을 이리저리 거닐어 보며 말하였다.

어떤가. 내게 어울리는 신발인가.” 그러나 그 순간 양팽손은 조광조가 신고 있는 신발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양팽손은 유심히 조광조가 신은 신발을 바라보았는데, 놀랍게도 한쪽은 검은색이었고, 다른 한쪽은 흰색이었다. 크기는 정확하게 딱 들어맞았지만 신발의 빛깔만은 짝짝이였던 것이다.

하오나 대감.”

양팽손이 입을 열어 말하였다.

신발의 색이 한쪽은 검은색이고, 다른 한쪽은 흰색이나이다.”

그러자 조광조가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색깔이 한쪽은 희고, 한쪽은 검다하여서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신발이란 발에 딱 맞아 편안하면 그뿐이 아니겠는가.”

이 말을 들은 양팽손 역시 웃으며 말하였다.

하기야 대감의 모습은 왼쪽에서만 보면 흰 신발만 보게 될 것이요, 오른쪽에서만 보면 검은 신발만 보고 흰 신발은 보지 못할 것이니, 모두 대감이 검은 신발을 신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오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양팽손이 한 말은 일찍이 정도전(鄭道傳)이 한 말이었다. 서거정이 쓴 필원잡기(筆苑雜記)에는 정도전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봉 정도전이 어느날 아침 일찍 관아에 출근할 때 한 짝은 희고,한 짝은 검은 짝짝이 신발을 신었다. 공좌(公座)에서 서리가 고하니, 공이 내려다보고 한번 크게 웃고는 끝내 바꾸어 신지 아니하였다. 일을 마치고 말을 타고 퇴청하게 되었을 때 정도전은 웃으며 하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는 내가 한 짝은 검고, 한 짝은 흰, 짝신을 신고 있다고 괴상히 여길 것이 없다. 왼쪽에서 보면 흰 신발만 보일 것이요, 검은 신은 보지 못할 것이며, 오른쪽에는 검은 것만 보일 것이고 흰 신발은 보지 못할 것이니,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정도전이 겉치레를 하지 않는 것은 이러하였다.”

조광조는 한쪽이 검고, 한쪽은 흰, 짝짝이 신발을 본 순간 갖바치가 두 사람이 밤을 새우며 토론하였던 대로 정도전의 고사를 빗대어서 조광조의 운명을 암시한 것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갖바치가 스스로 조광조에게 딱 맞는 신발을 만들어 보내줌으로써 정치가로서의 조광조의 입장을 검은 신과 흰 신으로 비유하여 나타내 보인 것이었다.

즉 조광조의 정치철학은 한쪽에서 보면 검게 보일 것이고, 또 다른 쪽에서 보면 희다고 할 것이다. 신진사림파 쪽에서 보면 개혁적이라 할 것이고, 훈구파 쪽에서 보면 과격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의 정치철학은 그 빛깔에 있지 않고 발에 꼭 맞는 신발, 즉 지치주의의 완성에 있음이었다. 조광조는 신진사림파를 위한 개혁, 수구세력인 훈구파의 거세를 단행한 개혁이 아니라 공자의 유가 사상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의 지치주의를 이상적으로 실현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조광조의 정치적 실패는 갖바치가 검은 신과 흰 신으로 암시하듯 색깔 논쟁으로만 국한되어 비참한 패배를 맞게 되는 것이다.

어떠하신가.”

검고 흰 짝짝이의 신발을 신고 방안을 이리저리 거닐던 조광조가 제자리에 걸음을 멈추고 서서 양팽손을 쳐다보며 물어 말하였다.

내가 지금 흰색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검은 색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인가. 양공의 생각으로는 어떠하신가.”

이에 양팽손이 웃으며 말하였다.

검은 신발을 신고 있는 사람들은 대감을 흰 신발을 신었다 할 것이요, 흰 신발을 신고 있는 사람들은 대감을 검은 신발을 신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때였다.

갖바치가 만들어준 태사혜를 신고 방안을 거닐던 조광조가 고개를 숙여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망을 다시 집어 들었다. 손을 깊숙이 찔러 넣어 걸망을 뒤지자 그 속에서 접힌 종이가 나왔다. 조광조가 천천히 그 종이를 펼쳐 보았다. 종이 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천층 물결 속에 몸이 뒤집혀 나오고 천년세월도 검은 신을 희게 하지는 못하는구나.”

그 글씨는 낯익은 갖바치의 친필이었다.그렇다면 갖바치는 자신이 직접 만든 한 짝은 검고 한 짝은 흰, 짝짝이의 태사혜와 그 신발을 주제로 한 참언(讖言)을 통해 조광조의 운명을 점지해준 것일까. 때문에 갖바치는 능주에 도착할 때까지는 절대로 걸망 속을 뒤져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던 것이 아닐까. 그러면 도대체 갖바치가 남긴 참언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

묵묵히 갖바치가 남긴 문장을 읽은 조광조는 이를 들어 양팽손에게 내어주며 말하였다.

양공, 이것이 내 운명이오. 천지신명이 점지해준 내 월단평이오.”

양팽손은 조광조가 내민 종이 위에 쓰여진 문장을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천층 물결 속에 몸이 뒤집혀 나오고 천년 세월도 검은 신을 희게 하지는 못하는구나.”

천천히 문장을 읽고 나서 양팽손은 조광조를 쳐다보며 말하였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양공이 모르면 내가 어찌 알겠소이까.”

빙그레 웃으며 조광조가 말하였다.

양팽손이 정색을 한 얼굴로 말하였다.

하오나 천층 물결 속에 몸이 뒤집혀 나온다라는 말은 매계(梅溪)에게 내렸던 그 유명한 점술의 내용이 아닙니까.”

그것은 나도 알고 있소이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이까.”

조광조의 말은 사실이었다. 갖바치가 점지한 참언의 두 문장 중 앞의 것은 일찍이 매계 조위(曹偉)에게 내렸던 참언 중의 한 문장이었다. 이 문장은 특히 사림파의 유림들 간에 널리 유행되었던 참언이었던 것이다. 그 참언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연산군은 선왕이었던 성종의 실록을 편찬하기 위해서 사국을 열었는데, 이때 당시 사관이었던 김일손(金日孫)이 사초(史草)에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은 데서 사화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세조3(1457) 10월 밀양에서 경산으로 가다가 답계(踏溪)에서 하루를 숙박했는데, 그날 밤 신인이 칠장복(七章服)을 입고 나타나 전한 말을 듣고 슬퍼하여 지은 글이었다.

김종직은 이 제문에서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의 회왕(懷王), 즉 의제(義帝)를 조상하는 글을 지었는데, 이는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을 의제에 비유하여 세조의 정권 찬탈을 은근히 비난한 글이었던 것이다.

운문체로 지어진 유명한 조의제문은 꿈에서 깨어난 김종직이 다음과 같이 한탄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꿈에서 놀라 깨어 생각해보니 회왕은 남방 초나라 사람이고, 나는 동이의 사람이다. 땅이 서로 만 리나 떨어져 있고, 시대가 또 천여 년이나 떨어져 있는데,내 꿈에 나타나는 것은 또 무슨 징조일까. 역사를 상고해 봐도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는 말은 없는데, 혹시 항우가 사람을 시켜 몰래 시해하여 시체를 물속에 던진 것인지 이 또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김종직은 제문을 짓고 다음과 같이 넋을 위로하였던 것이다.

이 천지가 다하도록 그 원한 다할까/넋은 지금도 구천을 맴도는데 내 마음 금석을 꿰뚫음이여/임금께서 갑자기 꿈속에 나타나셨네.

주자의 사필을 본받아/설레는 마음으로 겸손히 사례며 술잔을 들어 강신제를 드리나니/영혼이시여 흠향하시옵소서.”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넣어 성종실록을 편찬하였을 때 책임자는 이극돈으로 훈구파의 한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초 속에 자신의 비행이 기록되어 있어 이에 앙심을 품고 있던 이극돈이 김종직의 제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림파를 숙청할 목적으로 옥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연산군은 평소에도 사림파를 비롯한 선비들을 증오하고 있었다. 이극돈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세조의 찬탈을 비난하는 글이라며 사림파들을 불충한 무리로 몰아 일으킨 것이 무오사화였으며, 이때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록 맨 첫머리에 기록한 사람이 바로 매계 조위였던 것이다.

무오년에 옥사가 일어나자 유자광이 연산군에게 참소하기를 매계가 조의제문을 첫머리에 기록한 것은 선왕 세조를 비난하기 위한 다른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하니, 연산군은 크게 노하였다. 그때 매계는 하정사(賀正使)로서 중국의 사신으로 들어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연산군은 강을 건너오는 즉시 참살하도록 명하였다. 매계 일행이 요동에 도착하여 이 소식을 듣자 허둥지둥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때 매계의 서제(庶弟)로 신()이라는 자가 있어 일찍이 그 지방에 점을 잘 치는 자가 있다는 것을 듣고 가서 길흉을 물었다. 그 사람은 운수를 따지다가 다른 말은 없이 다만 시 한 수를 적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천층 물결 속에 몸이 뒤집혀 나오고 바위 밑에서 사흘 밤 잠들기를 기다린다.”

신이 매계에게 말하기를 처음 글귀는 화를 면하는 것 같기는 하나 아래 글귀는 해석하기 어렵다.’하고 서로 근심하여 소리 없이 울었다.

모두 압록강에 도착하여 강변을 바라보니 매계를 척살하기 위해서 관인들이 기다리는 형상이었다. 일행이 실색하여 금오랑(金吾郞)이 와서 형을 집행하기를 기다린다.’고 서로 부둥켜안고 목메어 울었고, 매계는 목숨이 경각에 달렸구나.’하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였다.

마침내 강을 건너오자 정승 이극균이 다만 잡아다가 추문(推問)한다는 것을 알았다. 일행이 기뻐하고 다행히 여겨서 이를 천층 물결 속에서 몸이 뒤집혀 나온다.’는 점쟁이의 시가 바로 맞은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바위 밑에서 사흘 밤 잠들기를 기다린다.’라는 아래 글귀는 해독되지 않았다. 서울로 잡혀 왔으나 죽지는 않고 곤장을 맞고 순천으로 귀양 갔다가 병들어 죽어 고향인 금산으로 이장되었는데, 그로부터 6년 뒤 갑자사화가 다시 일어나 연산군은 전일의 죄도 따로 기록하여 매계의 관을 쪼개어 시체를 참시하도록 명하였다.

시체를 바위 밑에 끌어내다 두고 사흘 동안 장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바위 밑에서 사흘 밤 잠들기를 기다린다.’라는 점괘가 맞음을 신통해하고 처음부터 끝까지의 매계의 운명을 점지하였다는 사실에 탄식해 마지 않았던 것이다.

매계의 그런 일화는 훗날 김정국(金正國)이 지은 척언집(言集)에 수록되어 있는데, 척언이란 문자 그대로 주워들은 이야기란 뜻으로 자신이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모은 잡록집이었다.

매계의 이 일화는 특히 유생들에게 널리 회자되고 있었다. 김종직이 사후에 관속에서 꺼내어져 참시되었던 것처럼 사림파의 운명은 천층 물결 속에서 몸이 뒤집혀 나와 간신히 죽음을 면한다 하여도 끝내는 바위 밑에서 사흘 밤 잠들기를 기다려야만 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다고 스스로 자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광조는 매계의 일화를 스승 한훤당을 통해 이미 전해들을 수 있었다. 스승 한훤당도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희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조광조와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매계가 천층 물결 속에서 몸이 뒤집혀 나온다 하면서 간신히 목숨을 건지더니 나도 천층 물결 속에서 헤쳐 나와 마침내 너를 만나게 되었구나.” “하면.”

조광조가 스승에게 물었다.

“‘바위 밑에서 사흘 밤 잠들기를 기다린다.’는 참언은 무슨 뜻입니까.” 이에 준엄한 스승은 평소의 태도와는 달리 부드럽게 말하였다.

그를 내가 어찌 알겠느냐. 어차피 점술이란 미신이 아니겠느냐.”

평소에 한빙계(寒氷戒)를 지어놓고 불망어(不妄語)’,망령된 말을 하지 말라.’는 계율을 철저히 지켜나가던 스승 한훤당은 그러나 그로부터 6년 뒤 순천의 시장터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약을 먹고 사사당한다.

바로 그 순간 매계의 시신도 고향 금산에서 관이 쪼개져 참시를 당해 사흘이나 장사를 지내지 못한 것처럼 스승 한훤당의 시신도 시장거리에서 사흘간이나 거적에 둘둘 말린 채 방치되었으니, 한갓 망령된 말이라고 무시하였던 한훤당의 운명도 결국 요동의 점쟁이가 내린 바위 밑에서 사흘 밤 잠들기를 기다린다.’는 점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아닐 것인가.

그것이 불과 15년 전.

그렇다면 조광조의 운명도 매계는 물론 스승 한훤당의 비극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인가.

이것을 쓴 사람은 누구입니까.”

양팽손이 조광조를 쳐다보며 물었다.

갖바치네.”

조광조가 대답하자 양팽손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갖바치라면 피장이 아닙니까.일개 피장이가 어찌 신명의 뜻을 알겠습니까.”

하지만 매계에게 점괘를 내린 사람은 그보다 훨씬 더 미천한 일개 복자가 아니었던가.”

너무 심려치는 마시옵소서.”

양팽손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였다.

매계도 천층 물결 속에서 몸이 뒤집혀 나와 일단 생명은 보존하였으며, 대감께오서도 일시 재앙의 화를 면치 못하시지만 천층 물결 속에서 헤엄쳐 나와 곧 주상의 부르심을 받고 환향하게 되실 것이나이다.”

하지만.”

여전히 갖바치가 만든 태사혜를 신은 채 조광조가 말하였다.

이 말의 뜻은 여전히 무슨 뜻인가 알 수 없지 않은가.”

조광조는 갖바치가 쓴 마지막 문장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천년의 세월도 검은 신을 희게 하지는 못하는구나. 매계는 바위 밑에서 사흘 밤 잠들기를 기다려야 했는데, 그렇다면 나는 바위 밑에서 천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 아닐 것인가.”

이 말을 들은 양팽손이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일찍이 채소권(蔡紹權)도 의복과 관대에 마음을 쓰지 않아 한쪽 발에는 검은 신을 신고, 한쪽 발에는 흰 가죽신을 신고 다녔다고 하더이다. 이를 본 김안로(金安老)꽃 빛이 짙고 옅은 것은 다만 먼저 되고 후에 된 것뿐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소이까.”

양팽손의 말 역시 김정국이 지은 사재척언(思齋言)’에 실린 이야기 중에 하나이다.

채소권은 권신 김안로의 처남이었으나 평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아 훗날 김안로가 흉적으로 참화를 입을 때 무사할 수 있었던 문신인데, 그는 천성이 부드럽고 탄솔(坦率)하였다고 한다. ‘사재척언에 의하면 채소권은 조금도 의복과 관대에 마음을 쓰지 않았는데 어느 날 아문에 출사하면서 한쪽 발에는 흰 가죽신을 신고 한쪽 발에는 검은 가죽신을 신고 가니, 아전들이 입을 가리고 서로 웃었다고 한다. 근무를 마치고 자신의 매형인 김안로를 만나자 이를 본 김안로가 크게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꽃 빛이 짙고 옅은 것은 다만 먼저 되고 후에 된 것뿐이다.”

김안로의 말은 꽃이 필 때 어떤 빛깔은 진하고 어떤 빛깔은 옅은 것은 다만 먼저 나고 뒤에 나오는 차이뿐 꽃은 꽃일 뿐이다.’라는 말로 처남 채소권의 소박한 심성을 꽃의 아름다움으로 칭송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오니 대감께오서 한쪽 발은 검은 가죽신을 신고, 한 쪽 발에 흰 가죽신은 신은 것은 김안로 대감의 표현대로 꽃 빛이 옅고 짙은 차이뿐 다른 뜻은 없을 것입니다.”

양팽손은 짐짓 조광조를 위로하기 위해 가볍게 말을 흘렸다.

과연 양팽손의 말은 사실이었을까. 갖바치가 준 한쪽은 검고, 한 쪽은 흰, 짝짝이의 태사혜는 김안로의 표현대로 꽃잎이 짙고, 옅은 차이에 불과하였던 것일까.

갖바치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문장. ‘천 층 물결 속에서 몸이 뒤집혀 나오고 천년세월도 검은 신은 희게 하지는 못하는구나라는 참언 역시 단순히 매계 조위의 옛 고사를 빌려온 인용문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요동의 점쟁이가 남긴 점술도 매계가 살아생전에는 그 마지막 문장인 바위 밑에서 사흘 밤 잠들기를 기다린다라는 글을 해독하지 못하였다.

죽은 후 관이 쪼개어져 부관참시를 당한 후 연산군의 명에 의해서 사흘 동안이나 장례를 치르지 못한 후에야 사람들은 그 점괘의 정확함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천년세월도 검은 신을 희게 하지는 못하는구나라는 마지막 문장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조광조가 중종의 명에 의해서 사약을 받은 것은 1216. 기록에 의하면 눈이 강산처럼 내리던 한겨울 날이었다고 한다. 조광조가 능주에 도착한 것이 1126일이었으니, 도착한 지 한 달도 못 되는 20여 일 만에 금부도사 유엄이 갖고 온 사약을 받고 비참하게 최후를 맞게 되는 것이다.

그때까지도 갖바치가 남기고 간 참언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아니하였는데, ‘정암집에는 조광조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담담히 기록하고 있다.

조광조는 어찌하여 사사의 명만 있고 사사의 글은 없느냐고 묻고 남곤이 그동안 정승이 되고, 금부당상에 심정이 되었다는 말을 들은 후 그러면 나의 죽음이 의심이 없다고 대답한 후 죽는 것이 오늘을 지나치지 아니하면 될 것이 아닌가. 편지를 써서 집으로 보내고 또 분부할 일이 있으니 이를 처리하고 죽는 것이 어떠한고하고 물었다.

유엄이 이를 허락하자 조광조는 곧 집으로 들어와서 아내에게 조용히 편지쓰기를 마치고 마침내 그 유명한 절명시를 쓰기 시작한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노라.

하늘이 이 땅을 굽어보시니

내 일편단심 충정을 밝게 밝게 비추리.(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절명시를 다 쓰고 나서 제자 장잠을 불러 다음과 같이 유언을 남겼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으니 꼭 이를 실행하여다오. 내가 죽거든 관은 얇은 것으로 해다오. 무겁고 두꺼운 것은 절대로 써서는 안 된다. 행여 무거운 것을 쓰면 먼길에 돌아가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반드시 얇은 것으로 장만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조광조는 문 밖에 있는 양팽손을 방 안으로 불러들였다고 한다.

이후부터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다만 야사로만 전하는데, 뒤늦게 들어온 양팽손을 향해 조광조는 사기에 나오는 공자의 마지막 노래를 읊었다고 한다.

양공, 어째서 이토록 늦게 오셨소이까.

태산이 무너지는가.

양주(梁柱)는 꺾이는가.

철인(哲人)은 시드는가.”

그러고 나서 조광조는 공자가 남긴 유언을 다음과 같이 읊조린다.

아아, 천하에는 도가 없구나.”

이 말을 들은 양팽손이 왈칵 눈물을 쏟기 시작하자 조광조는 양팽손의 손을 잡고 양공, 안녕히 계십시오. 신이 먼저 갑니다라고 위로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부탁이 있소이다. 양공, 나 죽은 후에 반드시 걸망 속에 들어있는 태사혜를 신겨주시오. 내 두 발에 신발을 신긴 채 매장시켜 주시오.”

조광조가 남긴 수수께끼의 유언은 양팽손에 의해서 그대로 지켜진다. 유언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 사약을 들이켰으나 쉽게 숨이 끊어지지 않았으므로 보다 못한 군졸이 밧줄을 들고 조광조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목 졸라 교살시키려 하자 조광조는 무엇을 하려 드느냐. 네놈은 내 몸에 손끝 하나 대지 못한다. 성상께서 나의 몸을 보존하고자 사사의 명을 내리셨는데 어찌하여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려하느냐.’하고 호통을 치고는 남은 사약을 단숨에 들이켠 후 마침내 숨을 거뒀다고 한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조광조의 얼굴에는 이승에서의 한을 차마 끊지 못하겠다는 듯 부릅뜬 눈이 활짝 열려져 있었는데,이 눈을 감겨준 사람이 바로 양팽손.

그러고 나서 양팽손은 우차에 조광조의 시신을 실어 자신의 고향인 쌍봉마을 골짜기에 가매장 하였는데, 조광조가 남긴 유언대로 갖바치가 준 태사혜를 시신의 발에 신겨주었으며, 초라한 시신이었지만 가죽으로 만든 태사혜만은 어울리지 않게 화려하고 호사스러웠다고 한다.

지금도 조광조의 시신이 한겨울 동안 가매장되었던 자리에는 靜庵趙先生書院遺址追慕碑란 작은 비석이 서 있다. 송시열이 쓴 명필인데, 조광조의 사후 그의 무덤 자리에 세워졌던 서원의 흔적도 사라져버리고 한겨울 그곳에서 가매장되었던 조광조의 시신은 이듬해 봄 오늘날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상현리의 심곡리로 이장되는 것이다.

확인된 바는 없지만 한겨울이었으므로 양팽손이 신긴 태사혜도 아직 썩지 아니하고 생생하게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지난 5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무덤 속 조광조의 시신은 모든 것이 썩어 백골만이 남아 있을 터인데, 하면 조광조가 신었던 한 짝은 검고, 한 짝은 흰, 의미를 알 수 없는 짝짝이의 가죽신 역시 썩어 진토가 되어버렸을까.

그러나 아직 500년의 세월에도 썩지 아니하고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것은 갖바치가 남기고 간 두 줄의 문장 중 마지막 문장인 것이다.

천년세월에도 검은 신을 희게 하지는 못하는구나.”

그 문장의 수수께끼는 조광조의 생전에도, 조광조의 사후에도 풀리지 아니하였다. 아니 5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갖바치가 남기고 간 참언의 내용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갖바치의 참언이 정확하다면 아직 500년의 세월이 더 필요한 것일까. 500년의 세월이 더 흘러 마침내 100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독특하고, 가장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하였던 조광조의 역사적 평가는 올바르게 내려질 수 있을 것인가.

어쨌든 조광조는 15191216, 34세의 젊은 나이로 정쟁에 휘말려 아까운 목숨을 잃는다. 알성시에 2등으로 합격하여 사헌부 감찰로 임명됨으로써 정식으로 관직에 진출한 이래 불과 4년 만에 일찍이 전제 왕조체제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강력한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던 한국의 마키아벨리, 조광조는 이렇게 비참하게 최후를 맞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조광조는 누구인가.

실패한 정치가인가. 권력투쟁에 패배함으로써 목숨을 잃은 권력의 희생양인가, 아니면 이율곡이 내린 아깝다, 공은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를 다스리는 재주를 가졌음에도 학문이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로 나아가 위로는 임금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을 막지 못하였다.’라는 평가처럼 현실 정치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단순히 이상 정치를 구현하려 하였던 아마추어 정치가였던가.

조광조가 실패한 정치가이든 아마추어 정치가이든 500년이 지난 오늘날의 현실에도 조광조는 여전히 부활하여 살아 있는 정치적 모델이니, 그렇다면 천년의 세월도 검은 신을 희게 하지는 못하는구나.’라는 갖바치의 예언은 도대체 조광조의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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