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과학 혁명의 구조 3

Bollnow 2024. 4. 22. 08:11

XI. 혁명의 비가시성

XII. 혁명의 해결

XIII. 혁명을 통한 진보

후기

 

 

XI. 혁명의 비가시성(The Invisibility of Revolutions)

 

우리는 아직도 과학혁명이 어떻게 끝맺음을 하는가를 묻고 대답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전에 혁명의 존재와 성격에 관한 확신을 강화하는 마지막 시도가 필요할 것 같다. 나는 이제까지 예증에 의해 혁명을 드러내 보이려고 노력해 왔으며, 그 실례들은 지루할 정도(ad nauseam)까지 늘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그것들의 대부분은 친숙하다는 이유 때문에 의도적으로 선정된 것으로서, 통상적으로 혁명으로서가 아니라 과학적 지식에의 부가물로서 간주되어 왔다. 어떤 예증들을 추가하든지 간에 그런 똑같은 생각에 이르게 될 것이므로, 예증들을 추가해 보았자 달라질 것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어째서 혁명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으로 밝혀지는가에 대해서 훌륭한 이유들이 있다고 본다. 과학자나 일반인이나 양쪽 다, 창조적인 과학 활동의 이미지를 대부분 과학혁명의 존재와 의미를 체계적으로 위장시키는 ―더러는 중요한 기능적인 이유로 인해― 권위적 원천(authoritative source)으로부터 얻게 된다. 그 권위의 성격이 인식되고 분석될 때에 한해서 역사적 사례들이 충분히 효과적인 것이 되리라 기대할 수 있다. 나아가서 이 점은 나의 주장에 대한 결론을 맺는 마지막 절에 가서야 충분히 전개될 수 있겠지만, 여기서 요구되는 분석은 아마도 신학(theology)을 제외한 모든 다른 창의적인 지적 추구로부터 과학 활동을 가장 분명하게 구분시켜 주는 성격 가운데 하나를 제시하게 시작할 것이다.

권위의 원천으로서, 나는 교과서를 모델로 한 대중 서적들과 철학적 저작들의 두 가지와 아울러 주로 과학 교과서를 생각하게 된다. 이들 세 가지 범주들 모두가 ―최근까지만 해도 연구 수행을 통해서가 아니고는 과학에 대한 정보의 유의미한 원천은 달리 없었다―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이미 명료화된 일단의 문제들, 데이터, 이론, 그리고 가장 빈번한 경우로는 그것들이 쓰여진 시기의 과학자 사회에 공약되어 있는 일련의 특정 패러다임에 관해 논의하게 된다. 교과서들 자체는 당대의 과학적 언어의 어휘와 구문을 전달하는 것을 겨냥한다. 대중화 서적들은 일상 생활의 것에 보다 가까운 언어들 써서 이들 동일한 응용들을 서술하기 위해 시도한다. 그리고 과학철학(philosophy of science)은, 특히 영어 사용권의 경우, 바로 그 과학 지식의 완결체의 논리 구조(logical structure)를 분석한다. 보다 완전한 고찰을 한다면 이들 세 장르의 실제적 차이점들이 반드시 다루어지겠지만, 여기서 우리의 가장 큰 관심을 끄는 것은 그들의 유사성이다. 이들 세 종류는 모두 과거의 과학혁명들의 안정된 결과 (outcome)를 기록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대의 정상과학 전통의 기반을 드러낸다. 그것들의 기능을 수행하려면, 그 저술들은, 그런 기반이 전문 분야에 의해 우선 어떻게 인식되고 다음 단계로 받아들여지는가에 대하여 신뢰할 만한 정보를 제공해야 할 필요는 없다. 적어도 교과서의 경우에는, 이러한 문제들에 있어서 체계적으로 오류를 빚게 될 충분한 이유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II절에서 교과서나 이에 해당되는 저작들이 크게 의존하는 것은 과학의 어느 분야에서나 첫 패러다임의 출현에 예외 없이 부수되는 상황임을 보았다. 이 에세이의 마지막 절에서는 그런 교과서들에 의한 성숙한 과학(mature science)의 지배가 그 발달 양식을 다른 분야의 경우와는 현저히 차이가 나게 만든다는 점에 관해 논의하게 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다른 분야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일반인과 전문가들의 과학 지식은 둘 다 교과서 및 교과서로부터 유도된 몇몇 다른 종류의 문헌에 근거하게 된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일단 받아들이기로 하자.

그러나 교과서는 정상과학의 영속을 위한 교육적 수단으로서 언어, 문제 구조 (problem-structure), 또는 정상과학의 기준 등이 바뀔 때마다 그에 따랄 전체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다시 쓰여져야 한다. 요컨대 교과서들은 매 과학혁명을 거칠 때마다 바뀌는 것이며, 이렇게 새롭게 쓰여진 교과서들은 필연적으로 그것들을 생산했던 혁명의 역할뿐만 아니라 혁명의 존재 자체까지도 가려 버리고 만다. 그 자신의 생애에서 직접 과학 혁명을 겪었던 당사자가 아닌 이상, 연구를 수행하는 과학자나 교과서 문헌을 읽는 일반인 어느 쪽이든 간에 그 역사적 감각은 그 분야의 가장 최근에 있었던 혁명의 결과까지로만 한정된다.

따라서 교과서들은 자신의 분야의 역사에 대한 과학자의 감각을 절단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다음 단계로 그것들이 제거해 버렸던 것들에 대한 대치물을 제공하기 위해 전진한다. 특징적으로 과학 교과서들은 서론의 장에서나 또는 더 흔하게 이전 시대의 거장들에 대한 산발적 인용에서, 역사에 대해서는 편린만을 다룰 뿐이다. 그러한 인용들로부터 학생들과 전문가들은 양쪽 다 오랜 세월의 역사적 전통에 대한 참여자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그들의 역할을 느끼게 되는 교과서-유도적 전통(textbook-derived tradition)은 사실상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다. 과학 교과서들 (그리고 너무나 많은 구식들)은, 명백하며 동시에 고도로 기능적이라는 이유로 해서, 교과서의 패러다임 문제들의 서술과 해결에 기여했다고 쉽사리 평가될 수 있는 과거 과학자들의 연구 중 그런 부분만을 인용한다.

더러는 선택에 의해, 더러는 왜곡에 의해 이전시대의 과학자들은, 과학 이론과 방법의 가장 최근의 혁명에 의해 과학적인 것으로 보이게 되었던 바로 그 일련의 고정된 규범들에 부합되도록, 고정된 문제들의 한 벌에 대해 연구를 수행해 왔던 것으로 암묵적으로 표현된다. 교과서와 그것이 함축하는 역사적 전통은 매 과학 혁명이후에 다시 쓰여져야 했다는 사실은 놀라울 것이 없다. 그리고 그것들이 다시 쓰여짐에 따라, 과학이 다시금 대체로 매우 축적적인 것처럼 보이게 된다는 것도 이상할 바가 없다.

물론 그 분야의 과거가 현재의 유리한 지위를 행해 선형적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보는 경향이 과학자 그룹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과거 지향적으로 쓰려는 유혹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또한 항상 그러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역사를 다시 쓰려는 유혹을 보다 강렬하게 느끼는데, 그까닭은 더러는 과학 연구의 결과가 탐구의 역사적 맥락에의 의존을 뚜렷이 보여 주지 않기때문이며, 더러는 위기와 혁명기를 제외하고는 과학자의 지위가 매우 안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과학의 현재에 대해서든 과거에 대해서든 간에, 보다 역사적인 세부 사항 또는 제시된 역사적 세목에 대한 보다 강한 얽매임은 인간의 특성, 과오, 혼돈에 작위적인 지위만을 부여할 것이다. 과학의 가장 훌륭하고 가장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 폐기하게 된 것을 어째서 존중하는 것일까? 역사적 사실을 경시하는 태도는, 다른 종류의 사실적 항목들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전문분야, 즉 과학 전문 분야의 이데올로기에 깊숙이 그리고 기능적으로 침투되어 있는 것 같다. 화이트헤드(Whitehead)가 '그 분야의 창시자들을 잊기를 주저하는 과학은 패배한 것이다'라고 적었을 때, 그는 과학자 사회의 비역사적 기질을 간파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옳은 것은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과학은 다른 전문적 활동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영웅을 필요로 하며 영웅들의 이름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그 영웅들을 잊는 대신에, 과학자들은 그들의 연구를 잊거나 또는 수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는 과학사(history of science)를 직선적 또는 축적적으로 보도록 만든 끈질긴 경향인데, 그것은 심지어 과학자들로 하여금 그 자신들의 연구에 대해 뒤돌아보게 만든다. 예를 들면 돌턴의 화학적 원자론의 전개에서 양립할 수 없는 세 가지의 설명은 모두 훗날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결합비(combining proportions)와 같은 화학적 문제들에 그가 일찍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사실상 그러한 문제들은 그것들의 해결과 더불어 비로소 그에게 떠올랐던 것 같고, 그것도 그의 창의적 연구가 거의 다 완성될 무렵이었다.1) 돌턴의 설명 전체가 빠뜨렸던 것은 이전에는 물리학과 기상학에 국한되었던 일련의 질문과 이루었던 일이며, 그 결과는 그 분야에로의 방향의 재배치였고, 그것은 화학자들에게 옛 데이터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제기하고 옛 데이터로부터 새로운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을 가르쳤던 재배치이다.

또는 다시, 뉴턴은 갈릴레오가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중력이라는 힘이 시간의 제곱에 비례하는 운동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적었다. 사실상 갈릴레오의 운동학 법칙(kinematic theorem)은 뉴턴 자신의 역학적 개념(dynamical concepts)의 기반 요소에 포함시켜 볼 때 그런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그런 종류의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낙하 물체에 대한 그의 논의는 물체를 떨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는 균일한 중력(gravitational force)에 대해서는 커녕 힘 자체에 관해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2) 갈릴레오의 패러다임 하에서는 제기될 수도 없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갈릴레오의 공로로 돌림으로써, 뉴턴의 설명은 과학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느꼈던 해답에서 뿐 아니라 운동에 대해 제기되었던 질문에서의 작지만 가위 혁명적인 재공식화(reformulation)의 영향을 보이지 않게 가려 버리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경험적 발견 이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갈릴레오로, 그리고 갈릴레오로부터 뉴턴 역학으로의 전이에 관해 훨씬 더 잘 설명해 주는 것은 바로 질문과 해답의 공식화에서 일어나는 이런 종류의 변화이다. 그러한 변화들을 감추어 버림으로써 과학의 발전을 선형적인 것으로 만드는 교과서의 경향은 과학적 발전의 가장 의미 깊은 일화들의 핵심에서 일어나는 과정을 보이지 않게 숨겨 버린다.

앞의 예들은, 각각 단일한 혁명의 맥락에서, 혁명 이후의 과학 교과서에 의해 정규적으로 완결되는 역사의 재정립의 시작을 드러내 보인다. 그러나 그 완성에는 위에서 예증된 왜곡 역사적 왜곡 해석의 반복 이상의 것이 수반된다. 그들 잘못된 해석들은 혁명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가려 버린다. 과학 교재에 실린 아직 눈에 보이는 자료의 배열은 혁명의 기능을 부정하게 될 과정 ―만일 그런 과정이 있다면―을 묵시적으로 시사한다. 왜냐하면 교과서란 학생들로 하여금 당대의 과학자 사회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빨리 익히는 것을 겨냥하므로, 교과서는 현행 정상과학의 다양한 실험, 개념, 법칙, 이론들을 개별적으로 그리고 가능한 한 지속적으로 다루게 된다. 교수법으로서의 이런 제시 기법은 나무랄 데가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비역사적인 과학적 저작의 성향, 그리고 위에 거론되었던 수시로 발생하는 계통적 왜곡 해석과 연관지어 볼 때, 다음과 같은 강렬한 인상이 압도적으로 따르게 마련이다. 과학은 한데 통합되어 현대의 기술적 지식의 총체를 구성하게 된 일련의 개별적 발견과 발명에 의해 현재 과학의 상태에 이르렀다. 교과서가 시사하는 바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과학 활동의 시초로부터 출발하여 오늘날의 패러다임들 속에 구현된 특정 목표들을 향해 진력해 왔던 것이 된다. 흔히 건축에서 벽돌을 쌓아올리는 것에 비유되듯이, 과학자들은 당대의 과학 교과서 속에 제공된 정보 더미에 또 다른 사실, 개념, 법칙 또는 이론들을 하나씩 하나씩 추가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이 발전되어 온 방식이 아니다. 현대의 정상과학에서의 수수께끼들은 대부분 가장 최근의 과학혁명이 완결되기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그 중 극히 소수만이 그것들이 현재 일어나는 속에서 과학의 역사적 시초까지 거슬러 오를 수 있다. 보다 앞서 간 세대들은 그들 나름의 기기와 해결의 규범을 갖고 그들 고유의 문제들을 연구하였다. 변화를 거쳤던 것은 단순히 문제들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교과서 패러다임이 자연에 일치시키는 사실과 이론의 전체 조직망 구조가 변동을 겪은 것이다. 예컨대 화학적 조성이 일정하다는 사실은 화학자가 활동했던 어느 세계 속에서 실험에 의해 발견해 낼 수 있었던 단순한 경험적 사실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돌턴이 도중에 그 경험을 변화시키면서 전반적으로 이전의 화학적 경험에 일치시켰던 관련 사실과 이론의 새로운 체계 속에서의 한 요소―그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불가결의 요소―인 것인가? 또는, 마찬가지 논리로서, 일정한 힘에 의해 생겨나는 새로운 체계 속에서의 요소―그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불가결의 요소―인 것인가? 또는 마찬가지 논리로서, 일정한 힘에 의해 생겨나는 일정한 가속은 역학을 다루는 연구자들이 항상 추구해 왔던 단순한 사실에 불과한 것인가, 또는 그것은 뉴턴 이론의 맥락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제기되었던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서, 그 이론만이 그 질문이 제기되기 이전에 주어졌던 전체 정보로부터 대답될 수 있었던 것인가?

여기서 이 질문들은 교과서에 실린 단편적 발견 사실들로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제기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이 질문들은 교과서가 이론으로서 제시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암묵적 의미를 갖는다. 물론 그 이론들은 '사실들에 일치(fit the facts)'되지만, 이전부터 접할 수 있었던 정보를 이전의 패러다임 하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사실들로 변형시킴으로써만 그렇게 된다. 그리고 이는 이론들 역시 항상 존재해 왔던 사실에 부합되도록 단편적으로 진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이론들은 이전의 과학 전통의 혁명적 재공식화로부터 일치화된 사실들과 더불어 출현하게 되는데, 이전의 전통 속에서는 지식을 매개로 하는 과학자와 자연 사이의 관계가 새 것과 동일하지 않았다.

마지막 한 가지 예를 들면, 교과서의 서술이 과학적 발전에 대한 우리의 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이러한 설명이 분명히 밝혀질 것이다. 초보적인 화학 교과서는 어느 것이나 화학 원소의 개념을 다루어야 한다. 이런 개념이 도입될 때면 거의 언제나 그 기원은 17세기 화학자 보일(Robert Boyle)에게로 돌려지고 있는데, 주의 깊은 독자라면 그의 저서 "회의적 화학자(sceptical Chemist)"에서 요즈음 사용되는 것과 매우 유사한 '원소(element)'의 정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보일의 공헌에 대한 언급은 초보자로 하여금 화학은 예컨대 설파제(sulfa drug)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한다. 덧붙여 그것은 과학자의 전통적 임무 가운데 하나가 이런 종류의 개념들을 창안해 내는 것임을 일러준다. 과학자를 양성하는 교육적 병기고의 일부로서 보일의 공헌을 인용한 것은 굉장한 성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과학적 활동의 성격에 대해 학생과 일반인 모두를 오해로 이끄는 역사적 과오의 양상을 다시 한번 보여 주게 된다.

보일에 따르면 ―그는 확실히 옳았다― 그의 원소에 대한 '정의(definition)'는 전통적인 화학적 개념의 부연 설명에 불과했다. 보일은 다만 화학 원소 따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이 '정의'를 내놓은 것이었다. 역사적으로는 보일의 공헌에 대한 교과서의 해석은 상당히 잘못된 것이다.3) 물론 데이터에 대한 다른 여러 해석 착오보다 더 사소할 것도 없지만, 그런 잘못은 사소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코 사소하지 않은 것은 이런 종류의 오류가 복합되어 다음 단계로 교과서의 기술적 구조(technical structure) 속에 자리잡게 될 때 끼치게 되는 과학에 대한 인상의 문제는 사소하지가 않다. '시간', '에너지', '힘' 또는 '입자'와 마찬가지로, 원소의 개념은 전혀 창안되거나 발견되지도 않는 그런 종류의 교과서 구성 요소이다. 특히 보일의 정의는 적어도 그 이전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며, 그 이후로는 라부아지에를 거쳐 현대의 교과서에까지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태고적부터 현대적 원소 개념이 존재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보일의 경우와 같은 언어상의 정의에는 그 자체로서 고려될 때 과학적 내용이 별로 들어 있지 않다. 그런 정의는 의미가 완벽하게 논리적으로 특수화된 것(만일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이 못 되며, 그보다는 교육상의 보조물에 가깝다. 그것들이 지시하는 과학적 개념은 교과서나 다른 체계적 저술 내에서 여타의 과학적 개념들, 처리과정, 그리고 패러다임 응용례 등과 연관될 때에만 완전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원소의 개념과 같은 개념은 그 배경 맥락과 분리해서는 거의 창안될 수 없다. 더욱이 일단 맥락이 주어지면, 그 개념들은 이미 손  안에 들어온 것이므로 별로 창안을 요할 것도 없어진다. 보일과 라부아지에는 둘 다 중요한 방식으로 '원소(element)'의 화학적 의미를 변화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개념을 새로 창안한 것이 아니었고, 그 정의로서 사용되는 언어의 공식을 바꾼 것도 아니었다. 아인슈타인 역시,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그의 연구 주제의 맥락 내에서 그것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공간'과 '시간'을 창안해내거나 명료하게 재정의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 유명한 '정의(definition)'를 포함한 보일의 연구에 있어서 그의 역사적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그는 '원소'와 화학적 조작 및 화학적 이론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킴으로써 그 개념을 이전과는 매우 다른 수단으로 변형시켰고, 그 과정에서 화학과 화학자의 세계를 아울러 혁명을 비롯한 여타의 과학혁명들은 반드시 그 개념에 현대적인 형태와 기능을 부여하도록 요구되었다. 그러나 보일은 이들 각 단계에 수반되는 과정 그리고 기존 지식이 교과서에서 구체화될 때 그 과정에 나타나는 변화의 두 가지에 대한 전형적인 실례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한 교육 형태는 과학의 다른 어느 측면보다도 강하게, 과학의 성격 그리고 과학 진보에서의 발견과 역할에 대한 우리의 인상을 결정지어 왔다.

 

 

 

XII. 혁명의 해결(The Resolution of Revolutions)

 

우리가 방금 논의했던 교과서들은 과학혁명이 일어난 후에서야 만들어진 것들이다. 교과서들은 정상과학의 새로운 전통에 대한 기반이다. 교과서의 구조에 관한 질문을 제기함에 있어서, 우리는 분명히 한 단계 빠뜨렸다. 새로운 패러다임 후보가 그 이전의 것을 대체하게 되는 과정은 무엇인가? 발견으로든 이론으로든 간에, 자연에 관한 새로운 해석은 우선 어느 개인 또는 소수 개인의 정신에서 나타난다. 과학 그리고 세계를 다르게 보는 방식을 처음 익히는 것은 바로 그들이며, 천이를 일으키게 하는 그들의 능력은 그들 전문 분야의 대다수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공유되지 않은 두 가지 상황에 의해 성숙된다. 언제나 그들의 관심은 위기를 조성하는 문제들에 강력하게 집중되어 왔다. 더욱이 통상적으로 그들은 위기가 닥친 분야에 극히 생소한 젊은 학자들인 까닭에 대다수 당대 학자들에 비해 옛 패러다임에 결정된 세계관과 법칙들에 대해 다소 약하게 얽매여 왔다. 그 전문분야의 전체 또는 관련된 소그룹을 자신들의 과학과 세계를 보는 방식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그들은 어떻게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만 하는 것인가? 무엇이 그 그룹으로 하여금 정상 연구에서의 전통을 버리고 다른 전통을 버리고 다른 전통을 택하도록 만드는 것인가? 이런 질문 등의 긴급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것들이, 정립된 과학 이론들의 시험 (testing), 확증(verification) 또는 오류입증(falsification) 등에 대한 철학자의 탐구에 과학사학자가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재해석 방법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정상과학에 종사하고 있는 한, 연구자는 수수께끼의 해결자일 뿐 패러다임의 검증가는 아니다. 어느 특정 문제의 풀이를 찾는 동안 과학자는 원하는 결과를 내놓지 못하는 접근법을 피해 수많은 대안적 접근을 시도하게 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가 패러다임을 검증하는 것은 아니다. 그 과학자는 오히려 마치 논술된 문제와 실제상의 또는 상상의 장기판을 자기 앞에 놓고 해결책을 찾아 이리저리 움직여 보는 체스를 두는 사람과 흡사하다. 이러한 연습의 시도는, 체스를 두는 사람에 의해서건 과학자에 의해서건, 그 자체로서의 시험일 뿐이지 게임과 규칙 등에 대한 시험은 아니다. 그것들은 패러다임 자체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패러다임 검증(paradigm-testing)은 주목할 만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끊임없이 거듭된 실패가 위기를 초래한 뒤에라야 비로소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때조차도 위기 의식이 패러다임의 대안적 후보를 출현시킨 뒤에라야 일어나게 된다. 과학에 있어서는 시험 상황이, 수수께끼에서 그러하듯이, 단순히 단일 패러다임과 자연과의 대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검증은 과학자 사회에 충실하려는 두개의 경쟁적 패러다임 사이에서의 경합의 일부로서 일어난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 공식화는 사실입증(verification)에 대한 가장 흔한 현대의 두 가지 철학적 이론에 대해 뜻밖의 그리고 아마도 유의미한 유사 관계를 드러낸다. 과학이론의 사실입증에 관한 절대적 기준을 추구하는 과학 철학자는 아직 까지 매우 드물다. 어떤 이론도 관련되는 시험에 모두 접해 볼 수는 없다는 사실에 유의하면서, 그들은 이론이 입증되었는가의 여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제로 존재하는 증거에 비추어 그 이론의 개연성(probability)에 대해서 묻게 된다. 그리고 그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유력한 학파는 바로 손안에 있는 증거를 설명해 내는 상이한 이론간의 능력을 비교하도록 된다.

이렇게 이론 사이의 비교를 고집하는 것은 새로운 이론이 수용되어지는 역사적 상황을 특징짓는 것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것은 틀림없이 사실 입증에 대한 미래의 논의가 지향하게 될 하나의 방향을 가리킬 것이다.

그러나 가장 통상적인 형태로서, 개연론적 사실입증 이론(probabilistic verification theory)들은 모두가 Ⅹ절에서 논의된 순수한 또는 중립적 관찰-용어들에 의지한다. 한 가지 개연성 이론은 주어진 과학 이론을 같은 관찰 자료 더미에 일치한다고 생각될 수 있는 다른 모든 이론과 비교할 것을 요구한다. 또 다른 이론은 주어진 과학 이론이 통과해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시험을 상상 속에서 구성해 볼 것을 요구한다.4) 분명히 그러한 구성의 몇 가지는, 절대적이든 상대적이든 간에, 특이한 확률성의 계산에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나, 이러한 구성의 몇 가지는, 절대적이든 상대적이든 간에, 알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미 강조했듯이, 언어상 또는 개념상의 과학적 또는 경험적으로 중립의 체계가 있을 수 없다면, 교대하여 일어나는 시험과 이론의 제안된 골격은 이런저런 패러다임-근거의 전통으로부터 나와야만 한다. 이렇게 제한됨으로써 그 구조는 가능한 경험들 또는 가능한 이론들에 모두 접근할 수는 없다. 결과적으로, 개연성 이론들은 그것들이 그것을 확실히 밝히는 것에 못지 않게 시실 입증상황을 감추어 버린다. 그것들이 강조하듯이, 그런 상황은 이론들 사이 그리고 널리 알려진 증거들 사이의 대비에 의존함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되는 이론과 관찰은 언제나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사실입증은 마치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과도 같다. 그것은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의 실제적 대안들 중에서 가장 적합한 것을 뽑아 낸다. 여전히 여타의 대안들이 남아 있는 경우와 데이터가 다른 종류의 것인 경우, 그 선택이 과연 이루어질 수 있었던 최선의 것인가의 여부는 유용한 질문이 못된다. 그것에 대한 대답 등을 찾는 데 쓰일 도구 등이 없기 때문이다.

문제들의 이런 전반적 구조망에 대한 전혀 다른 접근이, 사실입증 과정의 존재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칼 포퍼(Karl R. Popper)에 의해 전개되었다.5) 그는 그 대신 오류입증(falsification), 즉 테스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오류입증이 그 결과가 부정적인 까닭에, 정립된 이론의 폐기를 불가피하도록 몰아 간다. 분명한 것은 오류입증에 매겨진 역할은 이 에세이가 이상경험(anomalous experience), 즉 위기 유발에 의해 새로운 이론을 위한 길을 마련하는 경험에 부여한 역할과 매우 흡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 현상의 경험이 오류입증의 경험과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나는 후자의 오류입증 경험이 존재하는지도 의심스럽다. 앞서 되풀이하여 강조되었듯이, 어느 주어진 시기에 당면하게 되는 수수께끼를 모두 풀 수 있는 이론은 없다. 이미 얻어진 풀이들 또한 완전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반면에 어느 시기에든 정상과학을 특징짓는 수수께끼들의 대부분을 정의하는 것은 기존 데이터-이론일치(data-theory fit)의 미결정성과 불완전성이다. 만일 그런 일치의 어느 실패가 언제나 이론 거부의 근거가 된다면, 모든 이론들은 어느 때에나 거부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단 한 번의 심각한 실패가 이론 폐기를 정당화한다면, 포퍼 학파는 '비개연성(improbability)'이나 '오류입증 정도(degree of falsification)'에 대한 어떤 규준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한 가지 이론을 전재시킴에 있어 그들은 다양한 개연론적 사실 입증이론의 지지자들을 괴롭혔던 그런 난관들의 조직망에 당면하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러한 난관들은 과학적 탐구의 기초 논리에 대한 만연되고 상반된 견해들의 양진영이 둘 다 크게 대별되는 두 과정을 하나로 묶으려고 시도했음을 인식함으로써 많이 피할 수 있다. 포퍼의 이상 현상 경험은 그것이 기존 패러다임에 대한 경쟁 후보들의 출현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과학에 중요하다. 그러나 오류입증은 분명히 일어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상현상 또는 오류입증 사례의 출현과 더불어 또는 단순히 그것 때문에 일어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사실입증이라 불리는 편이 옳을 지도 모르는 결과적이며 개별적인 과정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옛 패러다임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승리 속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개연론자(probabilist)의 이론 비교가 핵심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사실입증과 오류입증의 결합된 과정에서이다. 나는 그러한 두 단계 공식화는 훌륭한 사실 같음(verisimilitude)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은 사실입증과정에서의 사실과 이론 사이의 일치(또는 불일치)의 역할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을 터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과학사학자들에게는 사실증명이 사실과 이론의 일치를 확립시킨다고 주장하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이론들은 모두 사실과 일치되었지만, 그러나 대체로 그러했을 따름이다. 어느 개별적 이론이 사실과 부합되는가 또는 얼마나 잘 부합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더 이상의 정확한 대답은 없다. 그러나 이와 유사한 질문들은 이론이 총괄적으로 또는 쌍으로 다루어질 때 제기될 수 있다. 두 가지의 실제적이며 경쟁적인 이론 가운데 어느 것이 사실과 더 잘 부합되는가를 묻는 것은 매우 타당성이 있다. 예컨대 프리스틀리의 이론이나 라부아지에의 이론 어느 것도 기존의 관찰 사실들과 엄밀히 일치하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라부아지에의 이론이 보다 합당하다는 결론을 맺는 데 10년 이상을 망설였던 당대의 학자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화는 패러다임 사이에서 선택하는 일을 그 실제이상으로 쉽고, 친숙해 보인다. 만일 단 한 계열의 과학적 문제들이 존재한다면, 즉 그 내부에서 그들 문제에 작용하는 하나의 세계 그리고 그들의 해결을 위한 한 계열의 기준만이 존재한다면, 패러다임의 경쟁은 각 패러다임에 의해 해결되는 문제들의 수를 헤아리는 것과 같은 어떤 과정을 밟아 어느 정도의 관례적으로 해결이 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상 이런 조건들은 결코 완전히 충족되지 못한다. 경쟁적인 패러다임의 주창자들은 언제나 적어도 조금씩은 서로 엇갈리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어느 쪽도 다른 한 쪽이 그 입장을 확고히 하는 데 필요한 모든 비경험적 가정을 시인하려 하지 낳을 것이다. 화합물의 조성(composition)에 대해 논쟁을 벌였던 프루스트와 베르톨레처럼, 그들은 부분적으로 각자의 패러다임을 통해서 논의하게 마련이다. 과학과 그 문제들을 보는 데 있어서, 서로 상대방을 자기 방식으로 끌어들이기를 원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쪽도 자신의 입장이 증명되기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패러다임 사이의 경쟁은 증명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 종류의 싸움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경쟁적 패러다임의 제안자들이 어째서 상대방의 관점에 완전히 접촉할 수 없는가의 몇 가지 이유를 살펴보았다. 그 이유들은 총괄적으로 혁명 이전과 이유의 정상과학 전통에서의 동일 표준상 비교 불능성(incommensurability)이라고 표현되었으며, 우리는 여기서 그것들을 간단히 요약하기만 하면 된다. 일차적으로 경쟁적인 패러다임의 제안자들은 흔히 패러다임의 어느 후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의 항목에 대해 의견이 상치될 것이다.

과학에 대한 그들의 기준이나 정의도 동일하지 않다. 운동 이론은 물질 입자간에 작용하는 인력의 원인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가, 아니면 운동 이론은 단순히 그러한 힘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으로 충분한가? 뉴턴의 역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의 이론과는 달리, 그 질문에 대한 후자의 대답을 암시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널리 거부되었다. 그리고 뉴턴의 이론이 받아들여졌을 때, 그에 따라 하나의 질문이 과학으로부터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그 질문은 일반 상대성 이론이 해결되었다고 자부해도 좋을 만한 질문이다. 또는 19세기에 널리 퍼진 상태에서, 라부아지에의 화학 이론은 화학자들로 하여금 금속은 어째서 그렇게 서로 비슷한가의 질문, 즉 플로지스톤 화학이 의문을 제기하고 대답까지 해 놓았던, 하나의 질문을 제기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라부아지에의 패러다임에로의 전이는, 뉴턴 패러다임으로의 전이와 마찬가지로, 허용되는 질문뿐만 아니라 완성된 풀이까지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소멸은 영구적인 것은 아니었다. 20세기에 들어와 화학 물질의 성질에 대한 질문들은 그것에 관한 몇 가지 해답과 더불어 다시 과학에 등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동일 표준상의 비교 불능성 이상의 것이 개재되어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들이 옛 것들로부터 탄생된 것이므로, 그것들은 보통 전통적 패러다임이 이전에 사용해 왔던 개념적이며 조작적인 용어와 장치의 많은 부분을 포함한다. 그러나 새로운 패러다임은 차용한 이 요소들을 전통적 방식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패러다임 내에서 옛 용어, 개념, 실험은 서로서로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그 필연적인 결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두 경쟁적 학파들 간의 오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공간이 '휘어 있을(curved)' 리가 없기 때문에 ―공간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비웃어 넘겼던 보통 사람을 보고 단순히 틀렸다거나 잘못 생각했다고 할 수는 없다. 아인슈타인 이론을 유클리드 식으로 전개하려 들었던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들도 틀렸던 것은 아니었다.6) 이전에 공간이 의미했던 것은 반드시 평평하고 동질적이고 균등성이며, 물질의 존재에 의한 영향을 받지 않았다.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뉴턴 물리학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우주로의 이행을 위해서는, 그 요소를 공간, 시간, 물질, 힘 등으로 하는 전반적 개념상의 조직체계가 변형되어야 했고, 다시 전체로서 자연에 놓여져만 했다. 그러한 변형을 거쳤거나 또는 거치는 데 실패했던 사람들만이 자기들이 무엇에 대해 동의했고 동의하지 않았는가를 정확히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혁명이라는 분수령을 가로지를 수 있는 의사 소통이란 부분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예로서, 코페르니쿠스가 지구가 회전한다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그를 돌았다고 한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그들이 단순히 틀렸거나 또는 대단히 틀렸던 것도 아니다. 그들이 '지구'에 의해 의미했던 것에는 이미 고정된 위치라는 개념도 포함되어 있었다. 적어도 그들의 지구는 움직여질 수가 없었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가 일으킨 혁신은 단순히 지구를 움직이게 한 것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물리학과 천문학의 문제들에 접근하는 전혀 새로운 방식이었고, 필연적으로 '지구'와 '운동'의 의미를 둘 다 바꾸어 버렸다.7) 그런 변화가 없이 회전하는 지구라는 개념은 미친 소리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러한 변화들이 이루어지고 이해되기에 이르자, 데카르트와 호이겐스는 둘 다 지구의 운동이 과학으로서 핵심이 없는 질문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8)

이들 실례들은 경쟁적 패러다임들을 동일 표준상 비교 불능한 성격의 제3의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측면을 지적하고 있다. 내가 더 이상 잘 설명할 수가 없는 점은, 경쟁적 패러다임의 제안자들이 서로 다른 세계에서 그들의 연구를 수행한다는 점이다. 하나는 서서히 낙하하는 속박된 물체들을 다루고, 다른 하나는 계속해서 운동을 되풀이하는 진자를 다룬다. 한 쪽에서는 용액이 화합물이고 다른 한 쪽에서는 혼합물이다. 한 쪽은 평평한 형태에 다른 한쪽은 곡면 형태의 공간에 포함된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작업하기 때문에, 두 그룹의 과학자들은 같은 관점에서 보면서도 서로 다른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기분 내키는 대로 어느 것을 본다는 뜻은 아니다. 양쪽이 모두 세계를 바라보고 있으며, 그들이 바라보는 대상은 변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영역에서는 그들은 서로 다른 것들을 보며, 또 서로 다른 관계에서 그것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한 그룹의 과학자들에게는 증명될 수도 없는 법칙이 다른 그룹에게는 직관적으로 명백해 보이는 경우가 생기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마찬가지로, 그들 사이에서 충분히 의사 소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려면, 한 그룹 또는 다른 그룹이 우리가 패러다임 변동(shift)이라 불러온 개종(conversion)을 거쳐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동일 표준상 비교 불능의 것들 사이의 천이 (transition)이기 때문에, 경쟁적인 패러다임 사이의 천이는 논리에 의해 또는 가치 중립적 경험에 의해 강제되어 한 번에 한 걸음씩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게슈탈트 전환(gestalt switch)에서와 같이, 그것은 일시(반드시 한 순간은 아니라고 하더라도)에 일어나거나 또는 전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과학자들은 어떻게 이러한 전위(transposition)를 일으키게 되는 것일까? 그 대답의 일부는 그들은 그런 전위를 일으키지 않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 이론은 그가 죽은 지 거의 1세기가 지나도록 소수의 전향자밖에 얻지 못했다. 뉴턴의 연구는 "프린키피아(Principia)"의 출간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특히 대륙에서는 일반적으로 수용되지 못했다.9) 프리스틀리는 산소 이론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고, 켈빈 경 역시 전자기 이론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 밖에도 그런 예는 계속된다. 개종의 어려움은 과학자들 자신에 의해서도 자주 주목을 받아 왔다. 다윈의 그의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의 마지막 부분의, 유난히 깊은 통찰력이 드러나는 구절에서 이렇게 적었다. "나는 이 책에서 제시된 견해들이 진리임을 확신하지만 ... 오랜 세월 동안 나의 견해와 정반대의 관점에서 보아 왔던 다수의 사실들로 머리 속이 꽉 채워진 노련한 자연사학자들이 이것을 믿어 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 그러나 나는 확신을 갖고 미래를 바라본. 편견 없이 이 문제의 양면을 모두 볼 수 있을 젊은 신진 자연사 학자들에게 기대를 건다."10) 그리고 플랑크는 그의 "과학자 자서전(Scientific Autobiography)"에서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서글프게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그 반대자들을 납득시키고 그들을 이해시킴으로써 승리를 거두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자들이 결국에 가서 죽고 그것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기 때문에 승리하는 것이다."11)

이런 사실과 그 비슷한 여러 사실들은 너무 흔하게 알려져 있어서 더 이상 강조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재평가를 필요로 한다. 과거에는 그런 사실들이, 과학자들은 단지 인간에 불과할 따름인지라 엄정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흔히 간주되었다. 나는 이 문제들에 있어서는 증명 또는 착오의 어느 것도 논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패러다임으로부터 패러다임으로의 이행은 강제될 수 없는 개종 경험(conversion experience)이다. 특히 정상과학의 옛 전통을 신봉하는 이들이 일생에 걸려 벌리는 저항은 과학적 기준의 위반이 아니라 과학적 연구의 성격 자체에 대한 지표가 된다. 저항의 근원은 결국 옛 패러다임이 모든 문제를 풀어 줄리라는 확신, 즉 자연이 패러다임에 의해 제공되는 틀 속으로 맞춰진 다는 확신에 있다. 사실상 때때로 그렇게 되듯이. 혁명기에는 그런 확신은 고집스럽고 완고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확신은 또한 무언가 그 이상의 것이다. 바로 그 확신은 정상과학 또는 수수께끼 풀이의 과학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의 전문 사회가 보다 낡은 패러다임의 잠재적 전망과 정확성을 개발하는 데 성공을 거두고, 다음 단계로 새로운 패러다임이 출현하게 되는 연구를 통해 난관을 분리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는 길이란 정상과학을 통해서일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저항이 불가피하고 정당한 것이라고 말하고, 패러다임 변화가 증명에 의해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논증도 무관하다거나 또는 과학자들이 그들의 정신을 바꾸도록 설득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변화를 일으키는 테 한 세대가 걸리기도 하지만, 과학자 사회는 다시 또 다시 새로운 패러다임들로 계속 전향해 왔다. 더욱이 이들 개종들은 과학자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는 것이다. 어떤 과학자들, 특히 나이가 많고 보다 노련한 과학자들은 무작정 거부할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견해를 움직이는 쪽으로 접근될 수 있다. 최후의 저항이 사라지고 난 뒤, 전문가 사회 전체가 다시금 단일한 그러나 이전과는 다른 패러다임 아래 연구를 수행하기까지는 개종이 한 번에 몇 가지씩 발생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개종이 어떻게 유발되며 어떻게 저항 받는가를 물어야 한다.

이 물음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종류의 대답을 기대할 수 있는가? 그 것은 설득의 기술에 대한 물음이거나 또는 증거가 있을 수 없는 상황에서의 논증과 반대 논거에 대한 물음인 까닭에, 우리의 질문은 이전에는 이루어진 적이 없었던 유형의 연구를 요하는 새로운 것이다. 우리는 대단히 부분적이고 인상적인 성격의 개괄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이미 언급했던 내용은, 증명보다 오히려 설득력에 관해 묻게 되는 때에는 과학적 논증의 성격에 관한 질문에 단일하고 획일적인 대답이 없다고 주장하는, 그런 고찰 결과들과 부합된다. 과학자들은 각각 온갖 종류의 이유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하게 되는데. 보통 한번에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수용하게 된다. 이들 이유 가운데 몇 가지 ―예를 들면 케플러를 코페르니쿠스주의자로 전향시킨 태양숭배사상―는 전적으로 확실한 과학 영역의 왜곡에 속하는 것이다.12) 그 밖의 다른 이유들은 과학자의 생애와 성격의 특성에 따라 결정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심지어 개혁자와 그 스승들의 국적이나 이미 쌓은 명성이 상당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13) 그러므로 우리는 결국 이 질문들을 달리 물을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제로 이 사람 저 사람을 개종시키는 논거에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제나 단일 그룹으로서 조만 간에 재형성될 과학자 사회의 성격에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마지막 절로 미루어 두고, 여기서는 패러다임 변화를 둘러싼 싸움에서 특히 효과적이라 입증된 논증의 몇몇 유형을 살펴보기로 한다. 아마도 새로운 패러다임의 지지자들이 내세우는 가장 유력했던 유일한 주장은 그들이 옛 패러다임을 위기로 이끌고 간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것이 합리화될 수 있는 경우에는, 흔히 이 주장은 있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것이 된다. 그러한 주장이 진전된 영역에서 그 패러다임은 난관에 처한 것으로 알려지게 된다. 그 난관은 거듭 탐사되어 왔으며, 그것을 제거하려는 시도들은 되풀이되어 허사로 드러났다. '결정적 실험들(crucial experiments)'―두 가지 패러다임을 특히 날카롭게 구분시켜 줄 수 있는 실험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이 미처 창안되기도 전에 인식되어 왔고 시험되어 왔다. 그렇게 하여 코페르니쿠스는 오랜 세월 동안 말썽거리였던, 1년의 길이라는 문제를 해결했노라고 주장했고, 뉴턴은 지상계의 역학과 천상계의 역학을 조화시켰노라고 주장했으며, 라부아지에는 기체의 정체(gas-identity)와 중량 관계의 문제들을 해결했노라고 주장했고, 아인슈타인이 수정된 운동의 이론과 부합되는 전기역학(electrodynamics)을 탄생시켰노라고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종류의 주장들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옛 경쟁 상대보다 훨씬 우월한 양적인 정확성을 나타내는 경우에 특히 성공할 확률이 크다. 프톨레아이오스 이론으로부터 얻어진 모든 계산에 대한 케플러의 루돌핀(Rudolphine)도표의 수리적 우월성은 천문학자들의 코페르니쿠스 이론으로의 개종에서 주된 요인이었다. 수리천문학적 관측의 정량적 예측에서 보인 뉴턴의 성공은, 그 분야의 보다 합리적인 정성적인 경쟁 이론들을 물리치고 그의 이론이 승리를 거두게 되었던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이유였을 것이다. 20세기에 들어 플랑크(Planck)의 복사 법칙과 보어(Bohr)의 원자모형에서 이루어진 획기적인 정량화의 성공은, 물리과학의 전반적 관점에서 볼 때 그것들이 해결한 것 이상으로 많은 문제들을 야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물리학자들로 하여금 그 이론들을 받아들이도록 단기간에 납득시켰다.14)

그러나 위기를 야기시키는 문제들을 해결했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서는 그다지 충분한 것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떳떳하게 주장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상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에 비해 더 정확할 것도 없었고, 직접적으로 달력의 개량에 기여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다시, 처음 발표된 후 여러 해 동안, 빛의 파동 이론은 광학의 위기에서 주된 원인이었던 편광효과(polarization effects)를 해결함에 있어 그 적수였던 빛의 입자설만큼 성공적이지도 못했다. 때로는 비상 연구를 특징짓는 보다 느슨한 연구의 수행은 위기를 야기한 문제에 초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패러다임 후보를 생산할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에는, 흔히 그렇듯이 그 분야의 다른 부분으로부터 증거가 유도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 다른 영역에서는, 만일 새로운 패러다임이 옛 것이 통용되었던 동안에는 전혀 의문시되지 않았던 현상들의 예측을 허용하게 되는 경우, 특히 설득력이 강한 논증이 전재될 수 있다.

예컨대 코페르니쿠스 이론은 행성들이 지구와 유사하며, 금성이 위상(phases)을 나타내며, 우주는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광활함에 틀림없으리라는 것을 시사하였다. 그 결과, 그의 죽음 이후 60년이 지나, 돌연 망원경을 통해 달의 산들과 금성의 위상 현상, 그리고 전에는 예측하지도 못했던 무수한 별들이 나타났으며, 그러한 관측 사실들은 새 이론에로 많은 전향자들―특히 비천문학자들―을 끌어들이게 만들었다.15) 파동 이론의 경우에는 전문가 사회의 개종을 일으킨 주된 근원이 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프레넬(Fresnel)이 회전 원반의 그늘 중심에 흰 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 냈을 때, 프랑스 학자들의 저항은 졸지에 그리고 거의 완전히 붕괴되어 버렸다. 이것은 프레넬로서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결과였으나, 당초 그의 반대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푸아송(Poisson)은 엉뚱하지만 필연적인 프레넬 이론의 결과임을 증명해 보였다.16) 그것들의 충격적 영향 때문에 그리고 처음부터 새 이론에 "끼워 맞춰진(built into)" 것이 아님이 매우 명백했기 때문에, 이것들과 같은 논증은 특히 설득력을 지니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아인슈타인은 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이 수성의 근일점(mercury`s perihelion)의 운동에서 잘 알려진 이상(anomaly)을 정확하게 설명해 주리라고 기대했던 것 같지는 않으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그는 대단한 승리감을 느꼈던 것이다.17)

이제까지 논의된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모든 논증들은 문제를 해결하는 경쟁 패러다임의 상대적 능력에 바탕한 것이었다. 과학자들에게는 그러한 논거들은 일반적으로 가장 의미 있고 설득력 있는 것이다. 앞의 실례들은 그 강력한 호소력의 원천에 관해서는 아무런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곧 되돌아가 살피게 될 이유들로 해서, 그것들은 개별적으로나 총괄적으로나 강제성을 띠지는 못한다. 다행히도 또 다른 종류의 사고 방식이 존재한다. 이것들은 완전히 명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지만, 적절한 것이나 심미적인 것에 대한 개인의 감각에 호소하는 논증들이다. 새로운 이론은 옛것에 비해 '보다 간결하고(neater)', '보다 적합하고(more suitable)', '보다 단순하다(simpler)'고 얘기된다. 아마도 이런 논거들은 수학에서 보다 과학에서는 덜 효과적일 것이다. 대부분의 새 패러다임의 초기 형태는 미숙한 것이다. 그 심미적인 호소력이 완전히 갖추어질 수 있을 때에는, 과학자 사회의 대다수가 다른 방식을 통해 설득된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미적 고찰의 중요성이 때때로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수가 있다. 그러한 심미적 요소를 통해 새로운 이론으로 이끌리는 과학자의 수는 소수이기는 하지만, 패러다임의 궁극적 승리는 바로 그 소수에 의존할 수가 있다. 만일 그들이 그 패러다임 후보를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해서 채택하지 않았더라면, 새로운 패러다임 후보는 과학자 사회 전체를 이끌 만큼 충분히 전개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보다 주관적이고 심미적인 고찰의 중요성에 대한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패러다임 논쟁이 무엇에 관한 것인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 후보가 최초로 제안될 때, 이는 그것이 당면한 문제들 가운데 소수만을 풀어 낼 수 있을 뿐이며, 대부분의 그런 풀이들도 아직은 매우 미흡한 상태이다. 케플러의 출현이 있기까지, 코페르니쿠스 이론은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작성된 행성 위치에 대한 예측을 거의 개량시키지 못하였다. 라부아지에가 산소를 '공기자체(the air itself entire)'로 보았을 때 그의 새 이론은 새로운 기체들의 종류가 늘어남에 따라 제기된 문제들, 즉 프리스틀리가 매우 성공적으로 반격을 가했던 요점에 대해 전혀 대처하지 못했다. 프레넬의 흰 점과 같은 경우들은 극히 드물다. 통상적으로 명백히 결정적인 논거들이 전개되는 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전개되고 수용되고 탐사된 이후 훨씬 지나서의 일이다. 지구의 자전을 입증하는 푸코(Foucault) 진자나 빛이 물 속에서 보다 공기 중에서 더 빠르게 운동한다는 것을 보여 준 피조(Fizeau)의 실험이 모두 그러했다. 그것들을 생산하는 일은 정상과학의 일부이며, 그것들의 역할은 패러다임 논쟁에서가 아니라 혁명 이후의 교과서에서 나타난다.

그러한 교과서가 집필되기 이전 논쟁이 계속되는 동안의 상황은 크게 다르다. 보통 새로운 패러다임의 반대자들은 위기에 처한 영역에서조차도 그것이 그 전통적 적수인 패러다임보다 거의 우월한 점이 없다고 당당히 주장할 수 있다. 물론 새로운 패러다임은 어떤 문제들을 더 잘 다루기도 하고 몇몇 새로운 법칙들을 밝혀 놓기도 한다. 그러나 옛 패러다임도 이전에 다른 도전들에 대응했듯이, 그 패러다임들은 그러한 도전에 만족되도록 명료화될 수 있으리라 믿어진다. 티코 브라헤(Tycho Brahe)의 부분 수정된 지구 중심의 천문학 체계, 그리고 플로지스톤 이론의 후기 수정안은 둘 다 상당히 성공적인 것이었다.18) 더욱이 전통적 이론과 과정의 옹호자들은 거의 어김없이 그 새로운 적수 패러다임으로는 풀지 못하나 그들의 관점으로는 전혀 무리가 없는 문제들을 선정해 낼 수 있다. 물의 조성이 밝혀지기까지, 수소의 연소반응은 플로지스톤 이론에 유리하고 라부아지에의 이론에 위배되는 강력한 논거가 되었다. 그리고 산소 이론이 승리를 거둔 뒤에도 탄소로부터의 가연성 기체의 제조를 설명할 수 없었는데, 이것은 플로지스톤 학파가 그들의 견해를 강력히 뒷받침하는 것으로 지적했던 현상이었다.19) 위기에 처한 영역에서조차도, 논증과 반대 논증(counterargument)의 균형은 때로는 참으로 그 우열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그 영역 밖에서는 흔히 균형은 결정적으로 전통 쪽에 기울게 될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고대로부터의 지상계에서의 운동에 대한 전통 이론을 대체함이 없이 그것을 파괴시켜 버렸다. 뉴턴도 중력에 대한 옛 전통적 설명에 대해 마찬가지 파괴를 일으켰으며, 라부아지에는 금속의 공통성에 대해 그러한 결과를 빚는 등 그밖에도 많은 사례를 들 수 있다. 요컨대 새로운 패러다임 후보가 처음부터 상대적 문제 해결 능력만을 검토했던 완고한 사람들에 의해 심판을 받아야 한다면, 과학은 극소수의 주요 혁명만을 경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앞서 패러다임의 동일 표준상 비교 불능성이라 칭한 것에 의해 형성된 반대 논증들까지 덧붙인다면, 과학은 혁명이라고는 결코 경험하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패러다임 논쟁에 대체로 그러한 견지에서 다루어진다는 것이 상당히 타당하기는 하지만, 그 논쟁들은 참으로 상대적 문제 해결 능력에 관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 논의의 핵심은 어떤 경쟁 패러다임도 완전히 풀었다고 주장하지는 주장하지 못하는 다수의 문제들에 대해 과연 어느 패러다임이 장차 연구의 지침이 될 것인가에 필요하고, 그런 상황에서의 결정은 과거의 업적보다는 미래의 가능성에 근거되어야 한다. 초기 단계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문제 해결에 의해 제공되는 증거가 없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가 흔히 생긴다. 즉, 그는 옛 패러다임이 소수의 문제를 다루는 데 실패했다는 것만을 아는 상태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은 그것이 당면한 다수의 주요 문제들에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 종류의 결정은 신념을 바탕으로 할 때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선행되는 위기가 왜 그토록 중요한가를 보여 주는 이유중의 하나이다. 위기를 경험한 적이 없는 과학자들은, 곧 도깨비불이라고 밝혀지고 또 그렇게 널리 알려지게 될 것을 따르기 위해, 문제 해결의 확고한 증거를 부인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위기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선택된 특정 패러다임 후보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 그 근거가 합리적이거나 궁극적으로 정당한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어떤 근거가 아울러 존재해야 한다. 무언가가 적어도 몇 명의 과학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제안이 올바른 궤도에 올라 있음을 느끼게 해 주어야 하며,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개인적이고 불분명한 심미적인 고찰뿐일 때가 종종 있다. 사람들은 때때로 대부분의 명확한 기술적 논증(technical arguments)이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을 때에 그런 고찰들에 의해 믿음을 바꾸어 왔다.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이론도 또는 드 브로이(De Broglie)의 물질 이론도 처음 제안되었을 때에는 의미 있는 설득력의 근거를 많이 갖추지 못했었다. 오늘날까지도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은 주로 심리적 근거에서 사람들을 끌고 있으며, 이런 호소력은 수학 분야의 이방인으로서는 느끼기 힘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궁극적으로 어떤 신비적인 심미주의(aesthetic)를 통해 성공을 거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이유만으로 과학 전통을 폐기하는 과학자는 매우 드물다. 그런 태도의 사람들은 잘못 판단했던 것으로 판명되는 일이 잦다. 그러나 하나의 패러다임이 승리를 거두려면 초기에 우선 몇몇 지지자들이 나타나야 하는데, 이들은 확고한 논증이 이루어지고 증식될 수 있을 정도까지 그 패러다임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논증들조차도 그것들이 나타날 무렵에는 각각으로서 결정적인 것은 못 된다. 과학자들은 이성적인 사람들인 까닭에, 여러 가지의 논거를 거쳐가면서 결국 많은 과학자를 설득시키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 모두를 설득할 수 있거나 설득시켜야 하는 단일한 논증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 일어나는 일은 단일 그룹의 개종이라기보다는 전문 분야의 신념의 분포에서 점차로 전이가 증대되는 것이다.

패러다임의 새로운 후보는 당초에는 지지자도 거의 없고 지지자의 동기도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지자들이 유능한 경우에는 패러다임을 개량하고, 그 가능성을 탐구하고, 그것에 의해 인도되는 과학자 사회가 어떤 것이 되는가를 보여 주게 된다. 그리고 그런 일이 진행됨에 따라, 만일 패러다임이 투쟁에서 승리를 거둘 운명이면, 설득력 있는 논증들의 수효와 강도가 증강될 것이다. 그에 따라 보다 많은 과학자들이 개종하게 될 것이고, 새 패러다임의 탐사 작업이 계속될 것이다. 그 패러다임에 기초한 실험, 기기, 논문 그리고 서적 등의 수효가 점차 불어날 것이다. 계속해서 새로운 관점이 효과적임에 납득된 더 많은 사람들이 정상과학을 수행하는 새로운 방식을 채택하게 되면서, 결국 소수의 나이 많은 저항자들만이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조차도 틀리다고 말할 수 없다. 과학사학자는 역사에서 항상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틴 비합리적이었던 사람들―이를테면 프리스틀리―을 만날 수 있지만, 어느 정도까지의 저항을 가리켜 비논리적 또는 비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기껏해야 과학사학자는 전문 분야가 온통 개종된 후에도 계속 버티는 사람은 사실상 과학자이기를 거부한 것이라 말하고 싶을 것이다.

 

 

 

XIII. 혁명을 통한 진보(Progress through Revolutions)

 

앞 절까지의 내용은 이 에세이에서 다룰 수 있는 한계 내에서 과학적 발전에 대해 저자 나름대로 도식적으로 기술한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그것이 제대로 결론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만일 이러한 설명이 과학의 지속적 발전의 본질적 구조를 담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와 동시에 특이한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어째서 앞에서 묘사한 과학 활동은 예컨대 예술, 정치 이론, 또는 철학이 변천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꾸준히 전진해 나가는가? 어째서 진보는 우리가 과학이라 부르는 활동들만을 위해 거의 독점적으로 확보된 특별 조건이란 말인가? 이 물음에 대한 가장 통상적인 대답은 이 에세이의 내용에서 부인되어 왔다. 우리는 대안들이 발견될 수 있는가의 여부를 물음으로써 그 결론을 내려야 한다.

이 물음의 일부는 전적으로 어의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의 모든 경우 '과학'이라는 용어는 확실한 방식으로 발전이 일어나는 분야에만 쓰인다. 이 성격이 가장 명확히 드러나는 것은 이런 저런 현대의 사회과학들이 참으로 과학인가에 관한 되풀이되는 논쟁에서이다. 이들 논쟁은 오늘날 서슴없이 과학이라 분류되는 분야들의 패러다임 이전 시대에서 그 유사성을 갖는다. 전체를 통틀어 그것들의 표면적 주체는 그 난감한 용어의 정의이다. 사람들은 예컨대 심리학은 이러저러한 특성들을 가지고 있는 까닭에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특성들은 한 분야를 하나의 과학으로 성립시키는 데 불필요하거나 충분치 않다고 반박한다. 이런 싸움에는 흔히 막중한 노력이 투입되고 뜨거운 열정이 솟아나기도 해서, 바깥에서 보는 사람은 이유를 알지 못해 어리둥절해진다. '과학'의 정의 (definition)가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 그 정의가 어느 사람에게 그가 과학자인가 아닌가를 말해 줄 수 있는가?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자연과학자나 예술가들은 그 용어의 정의에 신경을 쓰지 않는가? 이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실제로 제기되고 있을 것이다. 어째서 나의 분야는 예컨대 물리학과 같은 방식으로 진전되지 못하는가? 기술이나 방법, 또는 이념에서의 어떠한 변화가 그것을 그렇게 진보되도록 만드는 것인가? 그러나 이것들을 정의에 일치되도록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이 아니다. 더욱이 자연과학으로부터의 전례가 적용된다면, 그것들은 정의가 발견될 때가 아니라 현재 그들 자신의 위치를 의심하는 그룹들이 그들의 과거와 현재의 업적에 대하여 합의를 이룰 때, 더 이상 고려의 원천이 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경제학자들이 그들 분야가 과학이냐 아니냐에 관해 사회과학의 다른 여러 분야의 학자들보다 논쟁을 덜 하는 것은 의미가 깊다. 그것은 경제학자들이 과학이 무엇인가를 알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들이 합의를 이룬 것이 경제학이기 때문인가?

더 이상, 단순히 의미론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 관점은 과학 그리고 진보의 관념 사이의 뒤얽힌 관계를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되는 전환 명제이다, 고대에서나 근대 초기의 유럽에서나 수세기 동안 회화(painting)는 확실히 누적적 발전을 하는 분야로 간주되었다. 그 기간 동안 화가의 목표는 묘사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플리니(Pliny)와 바자리(Vasari)같은 비평가이자 역사학자들은, 보다 완벽한 자연의 묘사들을 가능케 했던 명암법을 거쳐서 원근법으로부터 나온 일련의 창안에 경의를 표하며 기록하였다. 20) 그러나 과학과 예술 사이의 작은 틈이 느껴지게 된 것 역시 그 시기로서, 특히 르네상스 시대의 몇 해 도안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훗날에 이르러서야 범주상 명확히 구별지어진 분야들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갔던 여러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21) 더욱이 그런 꾸준한 교류가 중단된 이후까지도, '예술'이라는 용어는 역시 발전적이라고 여겨졌던 기술과 공예에 대해서도 회화와 조각에나 마찬가지로 계속 적용되었다. 회화와 조각이 그 목표로서의 묘사를 명백히 부인하고 원시적인 모델로부터 다시 배우기 시작했을 때. 우리가 지금 당연시하는 간극이 현재의 깊이만큼 깊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다시 한번 분야를 바꾸어서 과학과 기술 사이의 심오한 상이성을 보는 데 있어서의 우리의 어려움은 진보가 두 분야 모두의 뚜렷한 속성이라는 사실과 일부 관련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발전하고 있는 어떤 분야든지 과학이라고 간주하려는 경향을 인지하는 것은 우리의 현재의 문제점을 부각시킬 뿐이지 해결하지는 못한다. 이제 문제로 남는 것은, 어째서 발전이 이 에세이가 서술한 기술(techniques)과 목표를 갖고 수행되는 과학 활동에서 그처럼 현저한 특징이 되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하나 속에 여러 가지가 내포되어 있으며, 여기서 그 각각을 개별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것을 제외한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것들의 해결은 과학 활동과 그것을 수행하는 과학자 사회 사이의 관계를 보는 우리의 표준적인 견해의 반전에 일부 의존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결과라고 여겨져 왔던 것을 원인으로서 인식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과학적 진보(scientific progress)', 그리고 심지어 '과학적 객관성(scientific objectivity)'이라는 어구는 부분적으로 중복되는 것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사실상 그런 중복성의 한 측면이 방금 제시된 바 있다. 그것이 과학이기 때문에 어느 분야가 발전을 이룩하는 것인가, 아니면 발전을 이룩하기 때문에 그것이 과학인 것인가?

이제 정상과학과 같은 활동이 어째서 발전할 것인가를 묻고, 정상과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몇 가지를 상기함으로써 논의를 시작해 보자. 보통 성숙한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은 단일 패러다임으로부터 또는 밀접하게 연관된 패러다임의 한 벌로부터 연구를 수행한다. 서로 다른 과학자 사회가 똑같은 문제들을 고찰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한 예외적인 경우에는 그 그룹들은 몇 개의 주요 패러다임을 공유하게 된다. 그러나 과학자들이건 비과학자들이건 간에 어느 단일 과학자 사회의 입장에서 볼 때, 성공적인 창의적 작업의 결과는 바로 발전이라야 한다. 어떻게 그것이 진보를 기록한다는 것을 보았다. 그 밖의 창의적 분야들도 이와 동일한 종류의 진보를 보여 준다. 교의를 설파하는 신학자나 칸트의 무상명령(Kantian imperatives)에 관해 논하는 철학자는 그의 전제들을 공유하는 그룹에 대해서 만이라도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

창의적인 어느 학파도 한편으로는 창의적 성공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그룹의 총체적인 업적에의 부가가 아닌 활동의 범주를 인식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우리가 비과학 분야가 발전한다는 것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각 학파들이 존재하는 까닭에, 각각 서로 다른 학파의 발전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Aristotelianism)가 발전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발전에 관한 이러한 의구심들은 과학에서도 역시 일어난다. 다수의 경쟁 학파가 존재하는 패러다임 이전 시대를 통틀어, 학파 내에서를 제외하면 발전의 증거는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다. 이것은 II절에서 설명한 개인이 과학을 수행하는 시기에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그들의 연구 활동의 결과가 과학에 부가되지 않는다. 또한 한 분야의 기초적 교의가 다시 한번 논쟁거리가 되는 혁명의 시기에는, 반대되는 패러다임의 이런저런 것이 채택되는 경우 지속적 발전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의심이 거듭해서 표출된다.

뉴턴주의(Newtonianism)를 거부했던 이들은 그 이론이 물질에 내재하는 본유적 힘(innate forces)에 의존함으로써 과학을 중세의 암흑 시대로 되돌려 놓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라부아지에의 화학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실험실의 원소를 택하기 위해 화학적 '원소'의 개념을 배격하는 것은 유명론에 도피하려는 사람들에 의한 화학적 설명의 거부라고 보았다. 보다 완곡하게 표현되기는 하였으나, 이와 비슷한 감정은 또한 양자 역학의 유력한 확률적 해석에 대한 아인슈타인, 봄(Bohm)과 그 밖의 여러 학자들의 반대에 깔려 있었던 근거로 보인다. 요컨대 발전이 분명하고 동시에 확실해 보이는 것은 종상과학 기간에 한정된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에는 과학자 사회는 그 연구의 결실을 다른 방식으로는 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정상과학에의 맥락에서, 발전의 문제에 대한 대답의 일부는 단순히 관찰자의 시각에 달려 있다. 과학적 발전은 여러 타 분야에서의 발전과 다른 종류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시기에서 각각의 목표와 기준을 묻는 경쟁적인 학파의 부재는 정상과학 사회의 진보를 더 쉽게 볼 수 있도록 만든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대답의 일부일 뿐이지 가장 중요한 부분은 결코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앞에서 일단 공통된 패러다임의 수용으로 과학자 사회가 그 최초의 원칙들을 끊임없이 재검토해야 할 필요성으로부터 해방되면,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 사회의 관심을 끄는 현상의 가장 미묘하고 가장 비전의 것에 전적으로 집중할 수 있음을 보았다. 필연적으로 그것은 그 그룹이 전반적으로 새로운 문제들을 해결하는 효율성과 능률을 증대시킨다. 또한 과학에서의 전문 활동의 여러 성격들은 매우 특수한 이런 효율성을 더욱 증진시킨다.

이들 성격 중 일부는 성숙한 과학자 사회가 일반인과 일상 생활의 요구로부터 유례 없이 고립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한 유리(insulation)가 완전했던 적은 없다. 우리는 지금 유리의 정도에 관해 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창의적인 활동이 그렇듯이 배타적으로 그 전문 분야의 구성원들에게만 공표되고 또 그들에 의해서만 평가되는 전문 사회는 다시 더 없다. 가장 난해한 시인 또는 가장 추상적인 신학자라 할지라도 박수에는 신경을 덜 쓸는지 모르나, 자신의 창조적 작업에 대한 대중의 인정에 대해서는 과학자들보다 훨씬 더 관심이 클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필연적인 것으로 밝혀진다. 과학자는 그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을 공유하는 청중인 동료들만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까닭에, 과학자는 단일한 한 벌의 기준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는 다른 그룹이나 학파가 무엇이라고 생각할 것인가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고, 따라서 하나의 문제를 처리한 후에는 보다 이질적인 그룹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에 비해 더 빨리 다음 문제로 넘어갈 수가 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반 사회로부터의 과학자 사회의 유리는, 과학자 개인에 의해 풀릴 수 있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충분한 문제들에 그의 주의를 집중하도록 허용한다는 것이다. 공학자와 다수의 의사들과 대부분의 신학자들과는 달리, 과학자는 그 해결이 시급히 요청되고 그것들을 푸는 데 소용되는 수단들을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로 해서 문제들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연과학자들과 다수의 사회과학자들 사이의 차이 역시 시사하는 바가 큰 것으로 드러난다. 자연과학자들이 거의 그렇지 않은 데 비해, 사회과학자들은 흔히 연구 문제의 선택에 있어 주로 해결책의 강구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견지에서 옹호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인종 차별의 결과라든가 경기 순환(business cycle)의 원인 등의 문제에서 그러하다. 그러면 어느 쪽 그룹이 더 빠른 속도로 문제들을 해결하리라 예상하리라 예상할 수 있을까?

보다 큰 사회로부터의 유리의 결과는 전문 과학자 사회의 또 다른 특성, 즉 비결을 전수하는 교육의 성격에 의해 대폭 강화된다. 음악, 회화, 문학 등에서는 다른 예술가들, 특히 앞서 간 예술가들의 작품을 접함으로써 배움을 얻게 된다. 독창적인 창작에 대한 요약(compendia) 또는 편람(handbooks)을 제외하고는, 교과서는 단지 부차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역사, 철학, 그리고 사회과학에서는 교재 문헌이 보다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분야들에서도 대학의 기초 과정에서는 원전 자료를 병행하여 강독하게 되는데, 일부는 그 분야의 '고전(classics)'들이고 나머지는 학자들이 서로를 향해 집필한 당대의 연구 보고들이다. 그 결과 이들 분야의 학생은 그의 미래 그룹의 구성원들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해결을 시도하게 될 지극히 다양한 문제들을 지속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는 이 문제들에 대한 경쟁적이고 동일 표준상 비교 불능의 풀이들, 즉 궁극적으로 그 스스로 평가를 내려야만 하는 풀이들에 직면하게 된다.

이 상황을 적어도 현대 자연과학에서의 상황과 대조해 보라. 이들 자연계 분야의 학생은 대학원 과정 3, 4년에서 독자적 연구를 시작하게 되기까지는 주로 교과서에 의존한다. 다수의 과학 교과과정은 대학원 학생들에게까지도 학생용으로 쓰여지지 않은 저작들을 읽으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연구 논문과 전공 논문을 보충 독서자료로 부과하는 경우에서도 그러한 과제는 최상급반에 국한되며, 사용하는 교과서에 없는 부분을 다소 보완하는 자료에 제한된다. 과학자 교육의 최종 단계에 이르게 되면서, 교과서는 교과서를 가능케 했던 독창적인 과학 문헌으로 체계적으로 대치된다. 이러한 교육 기법을 가능하게 하는 그들의 패러다임에 확신이 얻어진 상황에서, 그것을 바꾸고 싶어하는 과학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도대체 그런 연구들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 모두 보다 간결하고 정확하고 체계적인 형태로 최근의 교과서에 요약되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뉴턴, 패러데이(Faraday), 아인슈타인, 슈뢰딩거(Schrodinger)의 연구 보고서를 읽어야 하겠는가?

이런 형태의 교육이 매우 오랫동안 수행되어 온 것을 변명하는 대신, 우리는 이 방법이 전반적으로 엄청나게 효과적이었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것은 폭이 좁고 경직된 교육으로서, 아마도 정통 신학을 제외한 다른 어느 분야에서보다도 더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정상과학적 연구에 대해서, 과학자들은 거의 완벽하게 대비를 갖추고 있다. 더욱이 이것은 또 다른 임무―정상과학을 통한 유의미한 위기의 형성―에 대해서도 잘 대비되어 있다. 위기가 발생하는 경우, 과학자는 물론 그렇게 잘 대비된 상태가 못 된다. 만연된 위기가 덜 경직된 교육의 실제에 반영될지라도, 과학적 훈련은 쉽사리 새로운 접근법을 발견해 낼 인물을 양성하도록 잘 짜여져 있지 못하다. 그러나 누군가―보통 젊은 학자거나 그 분야에 신진인 인물―가 패러다임의 새로운 후보를 들고 나오는 한, 경직성으로 인한 손실은 오직 개인에게만 일어날 뿐이다. 그 변화가 영향을 미치는 세대에 이르게 되면, 개인적인 경직은 상황이 요구하는 대로 패러다임으로부터 옮겨갈 수 있는 집단과 양립하게 된다. 특히, 바로 이러한 경직성이 과학자 사회에게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리는 민감한 신호를 보내 줄 때 양립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정상 상태에서 과학자 사회는 그 패러다임이 규정하는 문제나 수수께끼를 푸는 데 있어 굉장히 효율적인 도구가 된다. 더욱이 그 문제들을 해결한 결과는 필연적으로 발전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만큼 이해하는 것은 과학의 진보라는 문제에서 제 2의 주요부를 부각시킬 뿐이다. 그러므로 이제 방향을 돌려 비상과학(extraordinary science)을 통한 발전에 대해 묻기로 하자. 어째서 진보는 과학혁명에서도 역시 확실하게 보편적인 부수물이 되어야 하는가? 여기서 다시금 과학혁명의 결과가 다른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를 물음으로써 이것은 명확해질 것이다. 혁명은 대립되는 두 진영의 어는 한쪽이 전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종식된다. 그룹이 그 승리의 결과를 진보 이하의 무엇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이 틀렸고 상대편이 옳았다고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적어도 그들에게 있어서 혁명의 결과는 발전이어야 하며, 그들은 자기들 사회의 미래의 구성원들이 과거 역사를 똑같은 방식으로 보게 될 것임을 확신시키는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XI절에서는 그것을 성취시키는 기술에 관해 상세히 설명하였고, 우리는 이제 막 전문 과학 활동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성격으로 되돌아 왔다. 과학자 사회가 과거의 패러다임을 부인하는 경우에는, 전문적 연구에 적합한 주제로서의 그 패러다임이 구체화되어 있는 대부분의 책과 논문들도 동시에 거부하는 것이다. 과학 교육에서는 예술 박물관이나 고전 도서실에 상응하는 어떤 것도 이용하지 않으며, 그 결과는 그의 분야의 과거에 대한 과학자의 인식에서 극적인 왜곡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다른 창조적 분야의 종사자들 이상으로, 과학자는 그 결과가 그의 분야를 현재의 유리한 지위로 곧장 이끌어 주는 것이라 보게되며, 또한 그는 그 결과를 발전이라고 본다. 과학자가 그 분야에 머물러 있는 한, 그에게는 다른 대안이란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언급은 필연적으로, 성숙한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은 오웰의 "1984년"의 전형적 인물처럼, 그 사회에 존재하는 힘에 의해서 다시 쓰여진 역사의 희생물이 된다는 것을 제시할 것이다. 더욱이 이런 시사는 전적으로 부당한 것은 아니다. 과학혁명에서는 소득 못지 않게 손실도 따르며, 과학자들은 손실에 대해서는 유독 맹목적인 경향을 띤다.22)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혁명을 통한 진보에 관한 어떤 설명도 이 대목에서 멈추지는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패러다임 사이의 선택을 결정하는 과정과 권위의 성격을 억제하지 않는다면 전혀 틀린 것은 아닐 공식화, 즉 과학에서 힘은 정의(in the sciences might makes right)라는 명제를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권위가 그리고 특히 비전문적 권위가 패러다임 논쟁의 조정역을 한다면 그들 논쟁의 결과는 혁명이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과학적 혁명은 아닐 것이다. 과학의 존재 의미는 어느 특별한 유형의 사회 구성원들에게 패러다임 사이에서의 선택의 능력을 부여하는 것에 달려 있다. 과학이 존속되고 성장하기 위해 그 사회가 얼마나 특별해야 하는가는, 과학 활동에 대해 인류가 보인 이해력의 부족에 의해 알 수 있다. 기록이 남아 있는 모든 문명은 기술, 예술, 종교, 정치체제, 법률 등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옛 문명의 이러한 영역들은 우리들의 문명에서만큼이나 발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로부터 전승되었던 문명만이 가장 원초적인 과학 이상의 것을 지니고 있었다. 과학지식의 대부분은 지난 4세기 동안 유럽이 낳은 산물이었다. 그 밖의 다른 지역, 다른 시대는 과학적 생산활동이 나타나는 그런 특별한 과학자 사회를 뒷받침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 과학자 사회의 본질적 특성들은 무엇인가? 분명히 이런 특성은 엄청나게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한다. 이 영역에서는 지극히 시험적인 일반화만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 과학 그룹의 구성원이 되기 위한 다수의 필수 요건은 이미 놀랄 만큼 확실히 드러나 있다. 예컨대 과학자는 자연계의 거동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심을 쏟아야 한다. 덧붙여, 그들의 자연에 대한 관심이 그 범위상 전반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루는 문제들은 세부적인 문제들이 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를 만족시키는 해답은 단순히 사적인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풀이로서 수용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공유하는 그룹은, 전반적으로 사회로부터 무작위로 끌어내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 정의된 과학자의 전문 동아리 사회가 된다. 아직도 쓰여지지 않았다면, 과학적 생애에서의 가장 강력한 규칙들 중 하나는 과학적인 주제들에 대해 국가 원수 또는 일반 대중을 향한 호소의 금지를 들 수 있다. 특출하게 유능한 전문가 그룹의 존재의 인정과 전문적 업적에 대한 전폭적 조정자로서의 그 역할의 수용은 시사하는 바가 더욱 심오하다. 그룹의 구성원들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모두가 공유하는 훈련과 경험에 의해, 게임의 규칙을 가진 또는 명료한 판단을 위한 상응하는 기초를 갖춘 유일한 소유자로 보일 것이다. 그들이 평가에 필요한 어떤 기본 바탕을 공유하고 있음을 의심하는 것은 과학적 성취의 양립 불가능한 기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 인정은 필연적으로 과학에서의 진리가 하나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과학자 사회에 공통적인 특질의 이러한 일부 성격은 전적으로 정상과학의 실제로부터 끌어냈던 것이며, 또 그랬어야만 한다., 그것은 보통 과학자를 훈련시키는 목표가 되는 활동이다. 그러나 그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그런 성격들은 그러한 사회를 다른 모든 전문가 그룹으로부터 구별시키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그 원천이 정상과학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성격들은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특히 패러다임 논쟁 기간 동안 그 그룹이 보이는 반응의 여러 가지 특이한 성질들을 설명해 준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유형의 그룹이 패러다임의 변화를 발전이라고 간주해야 한다는 것을 보았다. 이제 우리는 그런 인식이 중요한 측면에서 자기 충족적인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과학자 사회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통해 해결되는 문제의 수효와 정확도를 극대화하는 고도의 효율적인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적 성취의 단위는 해결된 문제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리고 과학자 그룹은 어느 문제들이 이미 해결되었는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전에 이미 풀렸던 많은 문제들에 대해 다시 의문을 제기하는 그러한 관점을 채택하려는 과학자는 거의 없다. 자연은 그 자체가 우선 이전의 업적들이 문제성을 띤 것으로 보이게 만듦으로써 전문 분야의 안정 상태를 깨뜨려야 한다. 더욱이 그런 상황이 일어나서 패러다임의 새로운 대안이 부상했을 때라고 할지라도, 과학자들은 두 종류의 매우 중요한 조건들이 합치되지 않는 한 그것을 수용하기를 꺼릴 것이다. 첫째, 새로운 패러다임 대안을 여타의 방식으로는 대처될 수 없는 두드러지고 일반적으로 인정된 문제를 해결하는 듯이 보여야 한다. 둘째, 새로운 패러다임은 그 선행 패러다임을 통해 과학에 조성되었던 구체적인 문제해결 능력의 상당히 큰 부분을 보전하리라 기약되어야 한다. 그 자체를 위한 새로운 혁신이란 다수의 다른 창조적 분야에서처럼 과학 분야들에서 절실한 요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패러다임들은 거의 또는 전혀 그 선행 패러다임들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보통 과거 업적의 가장 구체적인 부분들을 많이 보전하며, 항상 부가적인 구체적 문제풀이들이 출현을 허용한다.

여기까지의 논의가 문제 해결 능력이 패러다임 선택에서의 독특하거나 또는 명료한 근거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어째서 그런 종류의 기준이 있을 수 없는가의 이유들을 여럿 보아 왔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의 전문가 사회가 정확하고 상세하게 다룰 수 있는 수집 자료를 지속적으로 늘릴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하리라는 것을 시사한다. 그 과정에서 과학자 사회는 손실을 감수하게 될 것이다. 흔히 몇몇 구식 문제들은 제거되어야 한다. 더욱이 혁명은 자주 과학자 사회의 전문적 관심의 영역을 좁히고, 그 전문성의 정도를 높이며, 일반인과 과학자 그룹을 포함한 다른 그룹과의 의사 소통을 저해한다. 가학의 깊이는 확실히 깊어지게 되지만, 그 폭은 그렇게 넓어지지 못할 것이다. 폭이 확장된다면, 그 폭은 어느 독자적 단일 전문 분야의 범위에서가 아니라 주로 과학의 전문 분야들의 다변화에서 현저하게 넓어지게 된다. 그러나 개별적인 과학자 사회가 받는 영향 또는 기타 손실들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과학자 사회의 성격은 과학에 의해 해결되는 문제들의 목록과 각각의 문제 해결의 정확도가 둘 다 계속해서 증가하리라는 실질적인 보장을 제공한다. 적어도 그것이 주어질 수 있는 어떤 길만 있다면, 그 전문가 사회의 성격은 그러한 보장을 제공해 준다. 과학자 집단의 결정보다 더 상위인 기준이 다른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 바로 앞의 문단들에서는 과학에서의 진보라는 문제에 대한 보다 세련된 해결의 모색에서 추구돼야 할 방향들을 제시했다. 아마 이 방향은, 과학적 진보라는 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해 온 것과는 다르다는 점을 시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한 유형의 발전이, 그러한 활동이 존속하는 한 필연적으로 과학 활동을 특징짓게 될 것임도 동시에 보여준다. 과학에는 다른 유형의 발전이 있을 필요가 없다. 보다 정확히 표현한다면, 우리는 패러다임의 변화들이 과학자와 과학도들을 점점 더 진리에 가깝게 인도하고 있다는 관념―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간에―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이제 마지막 몇 페이지를 남겨 놓을 때까지 이 에세이에서의 '진리(Truth)'라는 용어가 베이컨으로부터 인용된 의미로서만 언급되었음을 주목할 차례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사용되었던 경우조차도, 그것은 단지 과학 활동에서의 양립될 수 없는 규칙들이 혁명기를 제외하고는 공존할 수 없다는 과학자의 확신의 원천으로서만 쓰여졌는데, 혁명기의 경우 전문 분야의 주된 임무는 오직 한 가지만을 남겨두고 모든 규칙 계통을 제거하는 일이 되다. 이 에세이에서 묘사된 발전의 과정은 원초적인 초기 단계로부터의 진화의 과정―뒤이어 계속되는 단계들이 자연에 대해 점점 더 상세히 세련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특징 지워지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논의했던 것이나 앞으로 더 얘기할 내용의 어느 것도 과학의 발전이 무엇인가를 향한 진화의 과정임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불가피하게 이 공백이 많은 독자들을 혼돈 시킬 것이다. 우리는 모두 과학을 자연에 의해 미리 설정된 어떤 목표를 향해 부단히 다가가는 하나의 활동으로 간주하는 것에 매우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과학에 그런 목표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인가? 과학자 사회에서 어느 주어진 시점의 지식 수준으로부터, 진화의 견지에서, 과학의 존재와 그 성공 양쪽에 관해 모두 설명할 수는 없는가? 그것은 과학에는 자연을 완벽하게 객관적으로 진리에 부합되게 하는 하나의 설명이 있으며, 과학적 성취에 대한 합당한 측정이란 우리를 그 궁극적 목표에 얼마나 근접시켰는지를 나타내는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게 도와주는가? 만약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것을 향한 진화(evolution-toward-what- we- wish- to-know)대신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의 진화(evolution -from- what- we -do - know)로 대치할 수 있게 되면, 다수의 혼동스런 문제들이 사라져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귀납의 문제(problem of induction)가 이 미로의 어딘가에 놓여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과학적 진보에 대한 이런 대안적 견해가 야기시킬 결과에 대해 아직 세부적으로 상술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서 제안된 개념상의 전환이 바로 1세기 전 서구에서 발생했던 현상과 아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 도움을 준다. 두 경우에서 천이에 대한 주요 저해 요인이 동일하게 때문에 특히 도움이 된다. 다윈이 1850년에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에 의한 그의 진화 이론(theory of evolution)을 처음 출판했을 때, 많은 전문가들을 가장 괴롭혔던 것은 (species)변화의 개념도 아니었고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되었으리라는 가능성도 아니었다. 인간의 진화를 비롯한 진화를 가리키는 증거는 수십 년 동안 축적되어 왔으며, 진화의 개념은 이전에도 제안되었고 널리 퍼져 있었다. 진화의 개념 자체는 특히 종교 집단들로부터의 저항에 부닥쳤지만, 그것은 다윈주의자들(Darwinians)이 직면했던 가장 큰 난관은 결코 아니었다. 그 어려움은 다윈 자신의 발상과 매우 가까운 견해로부터 비롯하는 것이었다. 다윈 이전 시대의 유명한 진화 이론들―라마르크(Larmarck), 챔버스(Chambers), 스펜서(Spencer), 그리고 독일의 자연철학자들(Naturphilosophers)의 이론들―은 모두 진화를 목표-지향적 과정(goal-directed process)으로 간주하였다. 인간에 대한 그리고 당시의 식물군, 동물군에 대한 '개념(idea)'은 최초 생명의 창생으로부터 어쩌면 신의 정신 속에 존재했을 것이라고 믿어졌다. 그러한 개념이나 계획은 전체적 진화 과정에 방향을 설정했고 길잡이가 되었다. 진화적 발전에서의 각각의 새로운 단계는 출발에서부터 존재했던 계획의 보다 완전한 실제화였던 것이다.23)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그런 목적론적 성격의 진화론(teleological kind of evolution)의 붕괴는 다윈의 제안에서 가장 의미 깊고 가장 수용하기 곤란한 문제였다.24) "종의 기원"은 신이나 자연 그 어느 것에 의해 설정된 목표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대신 주어진 환경에서 그리고 자료가 주어진 실제 유기체들에서 작용하는 자연선택이라는 메커니즘이 보다 정교하고 복잡하며 훨씬 더 분화된 유기체들(organisms)의 점진적이지만 꾸준한 출현의 원인으로 설정되었다. 사람의 눈이나 손과 같이 놀랄 만큼 잘 적응된 기관들도 원시적인 태초로부터 출발한 그러나 목표 없이 꾸준히 진행되었던 과정의 산물이었다. 그 기관들은 이전에는 지고의 조물주와 예정된 계획의 존재에 대한 강력한 논거가 되었던 것이었다. 생존을 위한 유기체들 간의 단순한 경쟁의 결과인 자연선택이 고등 동식물과 더불어 인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는 믿음은 다윈 이론에서 가장 난해하고 혼돈스러운 측면이었다. 특정한 목표가 없는 터에 '진화(evolution)', '발전(development)', '진보(progress)'가 무엇을 의미할 수 있겠는가?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용어들은 갑자기 자기 모순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유기체의 진화를 과학적 개념의 진화에 관련시키는 유비(analogy)는 너무 지나치게 비약하기 쉽다. 그러나 이 마지막 절의 주제들에 관한 한, 그것은 거의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절에서 혁명의 해결이라고 묘사되었던 과정은 과학자 사회 내에서 미래의 과학을 수행하는 가장 적합한 길을 찾으려는 갈등에서 빚어지는 선택의 과정이다. 정상 연구의 시기에 의해 분리된 그러한 일련의 혁명적 선택들의 알짜 결과가 우리가 현대 과학 지식이라 부르는 놀랄 만큼 잘 적응된 장치들이다. 그 발전과정에서 연속되는 단계들은 명료성과 전문성의 증대라는 특징을 띠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현재 생물학적 진화가 그러했으리라 상상하는 바와 같이, 과학 발전의 전 과정은 설정된 목표, 영구적으로 고착화한 과학적 진리의 혜택이 없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데, 그 설정된 목표에 대해서는 과학지식의 발전에서의 각 단계는 보다 훌륭한 모범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의 논의를 따라온 독자는 누구나, 왜 진화과정이 들어맞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도대체 과학이 가능하려면 인간을 포함한 자연은 어떤 것이라야 하는가? 왜 과학자 사회는 다른 분야가 다다르지 못하는 확고한 일치를 이룰 수 있어야 하는가? 어째서 패러다임의 변화를 계속적으로 거쳐가면서 줄곧 여론의 일치를 이루어야 하는가? 어째서 패러다임 변화는 항상 이전에 알려졌던 것들보다 어떤 의미에서든 더 완벽한 도구를 만들어 내야 하는가? 하나의 관점에서 보면 이 질문들에 대해서는, 첫 번째 것을 제외하고는, 이미 답변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에세이를 시작했을 때나 마찬가지로 미해결 상태이다. 특별해야 하는 것은 비단 과학자 사회만이 아니다. 과학자 사회가 그 일부를 이루는 전체 세계 역시 상당히 특별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 특질들이 무엇이라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우리는 처음보다 더 알게 된 바가 없다. 그러나 그 문제―인간이 알 수 있으려면 세계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는 이 에세이에서 새삼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과학 그 자체만큼이나 오래되었으며, 아직 대답하지 못하고 남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여기서 대답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증거에 의한 과학의 성장과 양립할 수 있는 자연에 관한 그 어떤 개념도 여기서 전개되었던 과학의 진화적 관점과 양립될 수 있다. 이 견해는 또한 과학 활동에 대한 철저한 관찰과도 양립 가능한 것인 만큼 아직도 미결인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로서 그것을 적용할 만한 강력한 논거가 존재한다.

 

 

 

후기 ― 1969

 

이 책이 처음 출간된 지도 어느덧 칠 년이 지났다.25) 그 동안 나는 비판의 소리와 스스로의 더 깊은 연구로, 이 책이 제기하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이해를 넓히게 되었다. 근본적인 것에 대해서는 나의 견해가 달라진 게 거의 없으나, 이제는 쓸데없는 어려움과 잘못된 해석을 낳은 이 책의 초기의 정식화가 지닌 성격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한 오해들은 일부 내 자신의 것이었으므로, 그것들을 제거함으로써 나는 궁극적으로 이 책의 개정을 위한 기초를 제공해 주는 근거를 얻게 되었다.26) 그리고 동시에 나는 요구되는 수정의 개요를 잡고, 몇 가지 되풀이되는 비판에 대해 언급하고, 내 자신의 견해들이 현재 어느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지에 관한 개진할 수 있는 기회를 기꺼이 환영한다.27)

나는 당초 원문의 주요 난제 가운데 몇 가지는 패러다임의 개념에 관한 것으로 집중되고 있으므로, 후기에서의 논의는 그것들로부터 시작한다.28) 곧 이어 나오는 소절에서는, 나는 그 개념을 과학자 사회의 관념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쪽이 바람직함을 제안하고, 어떻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지적하며, 그에 따르는 분석적 분리와 유의미한 결과들에 관해 논의하고자 한다. 그 다음으로는 이전에 이미 결정된 과학자 사회 구성원들의 행동을 고찰함으로써 패러다임이 추구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고려해 본다. 이런 과정은 곧 이 책의 많은 부분에서 '패러다임'이란 용어가 두 가지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음을 드러내게 된다. 한편으로, 패러다임은 어느 주어진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해 공유되는 신념, 가치, 기술 등을 망라한 총체적 집합을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패러다임은 그런 집합에서 한 유형의 구성 요소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모형이나 또는 예제로서 사용되어, 정상과학의 나머지 수수께끼에 대한 풀이의 기초로서 명시적 규칙들을 대치할 수 있는 구체적 수수께끼-풀이를 나타낸다. 사회학적이라 부를 수 있는 패러다임이란 용어의 첫 번째 의미는 아래 소절 2의 주제가 된다. 소절 3에서는 실례가 될 만한 과거의 성취로서의 패러다임에 치중한다.

적어도 철학적으로는 '패러다임'의 두 번째 의미는 둘 중에서 보다 심오한 것이고, 내가 그 이름으로 논의했던 주장은 이 책이 불러일으킨 논쟁과 오해의 주요 원천이 되었는데, 특히 내가 과학을 주관적이고 비합리적인 활동으로 만들었다는 비난에 대해서 그러하다. 이 문제들은 소절 4와 5에서 고려된다. 소절 4에서는 '주관적(subjective)'이니 '직관적(intuitive)'이니 하는 어휘가, 내가 공유된 실례에 암묵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묘사했던 지식의 구성 요소들에 적절하게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을 논한다. 그런 지식은, 본질적 변화 없이는 규칙과 기준을 써서 알기 쉽게 바꾸어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체계적이고 시간의 검증을 겪은 것이며 어떤 의미로는 교정할 수 있는 성격을 띤다. 소절 5에서는 그런 논증을 두 가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이론들 사이에서의 선택이라는 문제에 적용시키는데, 간단히 결론짓자면 엄청나게 다른 견해를 지닌 사람들이 상이한 언어 사회의 구성원으로 간주되고 그들의 의사 소통 문제가 해석의 문제로서 분석되도록 요구한다. 나머지 세 가지 문제는 결언을 맺는 소절 6과 7에서 논의된다. 소절 6에서는 이 책에서 전개된 과학관(view of science)이 철두철미하게 상대주의적(through-and-through-relativistic)이라는 비난을 살펴본다. 소절 6은 나의 논증이, 비평자들의 언급처럼, 서술적 양식과 규범적 양식사이의 혼동으로 참으로 헤맨 것인지의 여부를 검토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소절 7은 별도로 하나의 에세이가 될만한 토픽들에 관해 간명하게 논평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즉 이 책의 주요명제들이 과학 이외의 분야들에도 얼마만큼 합당하게 적용될 수 있는가의 정도를 다룬다.

 

 

1. 패러다임과 과학자 사회의 구조(Paradigms and Community Structure)

 

'패러다임'이란 용어는 이 책의 앞부분에서 일찍이 등장하고 있으며, 그 도입의 방식은 본질적으로 순환성을 띠고 있다. 하나의 패러다임은 어느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그 무엇이며, 또한 바꾸어 말하면, 하나의 과학자 사회는 어느 패러다임을 공유하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순환성(circularities)은 모두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나는 이 후기의 뒷부분에서 비슷한 얼개의 논변을 옹호할 것이다), 여기서의 순환성은 참으로 어려움의 원천이다. 과학자 사회는 패러다임들에 우선적으로 의존하지 않고도 형성될 수 있으며 또한 당연히 그래야 한다. 패러다임들은 그 다음, 주어진 사회 구성원들의 행동을 세밀히 검토함으로서 발견될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이 책을 다시 쓰는 것이었더라면, 그것은 과학자 사회의 구조에 관한 논의로부터 얘기를 시작했을 것인데, 이 주제는 최근 들어 사회학적 연구의 중요한 주제로 등장했고, 과학사 학자들 역시 중요하게 다루기 시작하고 있다. 예비적인 결과는, 그 중 대부분이 아직 출간되지는 않았으나, 그 탐색에 요구되는 경험적 기법이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으며, 일부 결과는 이미 얻어졌고 나머지도 반드시 진척되리라고 믿어진다.29) 과학 활동에 종사하는 학자들은 대부분, 당대의 다양한 전문분야에 대한 신뢰가 적어도 대충 결정된 구성원 그룹 가운데 분포되어 있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그들의 사회적 제휴에 관한 물음에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그들의 소속 확인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수단이 발견되리라고 가정할 것이다. 예비적인 연구 결과를 소개하는 대신에, 나는 이 책의 앞 부분의 장들에 다분히 깔려 있는 과학자 사회의 직관적 개념에 관해 간단히 밝혀보려고 한다. 그것이 요즈음 과학자, 사회학자, 그리고 많은 과학사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공유되는 개념이다.

이 관점에 의하면, 과학자 사회는 과학 전공분야의 종사자들로 구성된다. 대부분의 다른 영역의 경우와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유사한 교육과 전문적인 전수를 거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동일한 기술적 문헌의 내용을 흡수했으며, 그것으로부터 다수의 동일한 교훈을 얻어냈다. 그런 표준적인 문헌의 범위는 대개 과학적인 주제 내용의 한계를 긋게 되며, 각 집단마다 통상적으로 그 고유의 주제를 갖는다. 거기에는 과학에서의 학파, 다시 말해서 양립되지 않는 관점에서 동일주제에 접근하는 집단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다른 영역에 비하면 과학에서는 이런 일이 훨씬 드물다. 그들은 항상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들의 경쟁은 대체적으로 곧 끝난다. 따라서 어느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들의 후계자 양성을 비롯한 공유하는 일련의 목표를 추구해야 하는 고유적 책임을 짊어진 사람들이라고 스스로도 자처하고, 남들도 그렇게 간주한다. 그런 그룹 안에서 의사 소통은 비교적 완전하며 전문적 판단에서도 비교적 의견이 잘 일치된다. 그런가 하면, 상이한 과학자 사회의 주의는 상이한 주제에 집중되는 까닭에 그룹 노선 사이의 전문적 의견 교환은 때때로 곤란해지는 경우도 생기고 흔히 오해를 낳기도 하며, 진행되는 과정에 미처 예기치 못했던 상당한 의견 차이를 빚어내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의 과학자 사회는 물론 다양한 수준으로 존재한다. 최고의 세계적인 규모는 모든 자연 과학자들의 사회이다. 이보다 단지 약간 낮은 준위에서 주요 과학 전문 그룹들이 존재한다. 바로 물리학자, 화학자, 천문학자, 동물학자 등등의 과학자 사회가 그것이다. 이렇듯이 몇 갈래로 묶으면,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의 소속은 주변을 제외하고는 쉽게 확립된다. 가장 높은 수준의 주제, 전문 학회의 회원, 그리고 구독되는 잡지는 일반적으로 매우 충분하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의 그룹은 몇몇 주요 더 작은 집단(major subgroups)으로 나뉠 것이다. 유기화학 그 외 고체 물리학자, 고에너지 물리학자, 전파 천문학자 등으로 나뉠 것이다. 경험적인 문제들이 출현하는 것은 그 다음의 보다 낮은 수준에 국한된다. 요즈음의 실례를 든다면, 그 그룹에 대한 공적인 인정에 앞서 어떻게 파지 그룹(phage group)이 분리되었을까? 이런 목적을 위해서는 학자는 전문 분야 학회에 참석하고, 출간에 앞서 초고라든가 교정쇄를 배포하는 일에 의존하게 마련이며, 또한 무엇보다도 서신 왕래와 인용문헌 중의 연결에서 발견되는 것들로 비롯한 공식적, 비공식적 의견 교환 매체에 크게 의존하게 된다.30) 내 견해로는, 적어도 현재의 상황과 역사의 보다 최근의 기록에 관해서, 그 작업은 이루어질 수 있고 또 이루어질 것이라 여겨진다. 전형적으로 그것은 아마도 백 명, 경우에 따라서는 그보다 훨씬 밑도는 숫자의 집단을 파생시킬 수 도 있다. 개별적으로 과학자들, 특히 가장 유능한 학자들은 동시이거나 또는 잇달아서 보통 그런 그룹의 여러 곳에 속하게 될 것이다.

이런 유형의 과학자 사회는 이 책이 과학지식의 생산과 확인의 주역으로서 소개한 기본 단위들이다. 패러다임이란 그런 그룹들의 구성원이 공유하는 그 무엇을 말한다. 이렇듯이 공유하는 기본 요소의 성격과 관련짓지 않고서는 이 책의 앞에서 설명한 과학의 여러 가지 성격은 도저히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원래 원고에서 그런 성격들이 따로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과학의 다른 성격들은 쉽사리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곧장 패러다임으로 화제를 돌리기에 앞서, 과학자 사회의 구조에만 관련지을 필요가 일련의 주제를 살펴볼 가치가 있다.

이들 성격 가운데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과학 분야의 발달에서 패러다임 이전 시대로부터 패러다임 이후 시대로의 이행이라고 내가 앞에서 지칭했듯이 그러한 II이행은 절에서 간략히 설명했던 바로 그런 변환이다. 천이가 일어나기 전에, 여러 갈래의 학파들은 주어진 분야의 지배를 놓고 겨루게 된다. 이후 몇몇 주목할 만한 과학적인 성취의 자취를 따라서 다수의 학파는 대폭 줄어들어 보통 하나로 수렴되며, 보다 효율적인 양식의 과학활동이 시작된다. 효과적 방식의 과학활동이란 일반적으로 비전의 성격을 띠며 수수께끼-풀이(puzzle-solving)를 지향하는데 이는 그 구성원들이 그 분야의 기초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때에만 가능하게 되는 한 그룹의 연구를 뜻한다. 성숙으로의 그런 천이의 성격에 대해서는, 특히 현대의 사회과학의 발달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로부터, 이 책에서 다룬 것보다 훨씬 더 충분한 논의를 거치는 것이 마땅하다. 그 목적을 위해서는 그런 이행이 패러다임의 우선적 획득과 반드시 관련되지 않아도 된다는(나는 지금 관련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것을 지적하면 도움이 될 듯 하다. '패러다임-이전(pre-paradigm)' 시대의 학파들을 비롯한 모든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은 내가 총괄적으로 '하나의 패러다임' 이라 지칭했던 유형의 기본요소들을 공유한다. 성숙으로의 이행과 더불어 변화를 거치는 것은 패러다임의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 성격이다. 그 변화를 거친 뒤라야 정상의 수수께끼-룰이 연구가 가능해진다. 앞에서 하나의 패러다임 획득과 연관지었던 진보된 과학의 여러 가지 속성을 이제 나는 그런 종류의 패러다임 획득 결과를 논할 것인데, 그런 유형의 패러다임은 도전해 오는 수수께끼가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그 풀이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며, 참으로 총명한 전문가들이 성공할 것을 보장해 준다. 그들 자신의 분야(또는 학파)가 패러다임들을 갖고 있음을 확인함으로써 용기를 얻은 사람들만이 중요한 그 무엇이 변화에 의해 희생된다는 것을 감지 할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문제는, 적어도 과학사학자들에게는 보다 중요한 것으로서, 과학의 주제 내용과 과학자 사회 간의 이 책에서의 암묵적인 일 대 일의 확인 관계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지금까지 되풀이해서, 예컨대 '물리광학', '전기', '열' 등이 연구의 주제 내용을 명명해야만 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나의 논지가 허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유일한 대안은 이들 모든 주제가 물리학 집단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학자인 나의 동료가 여러 번 지적했듯이, 그런 유형의 확인(identification)은 통상적으로 검증(examination)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19세기 중엽 이전에는 물리학 집단이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것은 이전에 분리되어 존재하던 두 부분의 집단, 즉 수학과 자연철학(physique experimental)사이의 합병에 의해 형성되었다. 오늘날에는 단일하고 광범위한 과하자 사회의 주제 내용인 것이 과거에는 다원적 집단들 사이에 다양하게 나뉘어져 있었다. 예컨대 열과 물질의 이론 같은 보다 좁은 범위의 주제는 오랜 세월 도안 어느 단일 과학자 사회의 특수 영역이 되지 않은 채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상과학과 혁명은 둘 다 과학자 사회에 기초한 활동이 변화하는 사회 구조를 우선 벗겨 보아야 한다. 첫 번째 경우인 정상과학에서는 패러다임이 과학의 주제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한 그룹의 종사자들을 다스린다. 패러다임-지향형 또는 패러다임-파괴형 연구에 관한 어떠한 고찰도 우선 책임이 있는 집단 또는 집단들을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과학 발전에 대한 분석이 그런 방식으로 접근되는 경우, 결정적인 주의를 요하는 초점들이었던 몇 가지 난관이 제거될 가능성이 있다. 예컨대 여러 비평자들은 물질의 이론(theory of matter) 을 지적하여, 내가 하나의 패러다임에 대한 과학자들의 충성이 모두 한결같다고 지나치게 과장한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비교적 최근에 이르기까지 물질 이론들은 지속적인 불일치와 논쟁을 낳은 주제였음을 지적한다. 나는 그러한 표현에는 동감하지만, 그러나 이것이 반대 - 예제(counter -example)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질의 이론들은 적어도 1920년경까지는 어느 과학자 사회를 위한 특수 영역 또는 주제 (subject matter)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들은 다수의 전문가 그룹을 위한 수단이었다. 상이한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은 때로는 서로 다른 수단을 택하였고, 다른 집단의 선택에 대해 비판하였다. 보다 중요한 것은, 물질의 이론은 어느 단일 집단조차도 그 구성원들이 반드시 동의해야 하는 유형의 토픽은 아니라는 점이다. 동의에 대한 필요성은 과학자 사회가 수행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 19세기 전반의 화학은 그런 점에 대한 하나의 사례를 제공한다. 과학자 사회의 몇몇 기본적 수단들―일정비례, 배수비례, 기체 반응의 법칙들―은 돌턴의 원자론의 결과로서 보편적 성질로 받아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 이후 화학자들은 그들의 연구를 이들 수단에 근거해서 수행하면서, 때로는 격렬하게 원자의 존재에 대하여 의견의 불일치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밖의 다른 난점과 오해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풀릴 것이라고 믿는다. 더러는 내가 선택한 사례들 때문에, 그리고 더러는 연관되는 일부 독자들은 필자가 코페르니쿠스, 뉴턴, 다윈, 또는 아인슈타인과 관련된 주요 혁명에 우선적 내지는 전적으로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러나 과학자 사회 구조에 관한 보다 명확한 묘사는 내가 부각하려고 노력했던 상당히 다른 인상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혁명이란 그룹 공약에서의 모종의 재정립을 포함하는 특이한 유형의 변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대규모의 변화라야 하는 것은 아니며, 가령 25 명 이하로 구성된 어느 단일 집단 외부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혁명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 까닭은 과학철학(philosophy of science)의 문헌에서 거의 인식되지 않거나 논의되지 못한 이런 형태의 변화는 이렇듯 소규모로 규칙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므로, 축적적 성격에 반하는 혁명적인 변화가 반드시 이해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수정은 앞의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으로 그 이해를 촉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여러 비평자들은 위기, 즉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공통적 각성이, 초판이 의미했던 것처럼 그렇게 한결같이 혁명에 선행되고 있는지의 여부에 회의를 표시했다. 그러나 나의 주장에 중요한 그 어느 것도 위기가 혁명에 절대적인 필수 요건임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위기는 단지 통상적인 서막으로서, 다시 말해서, 정상과학의 경직성이 영원히 도전을 받지 않은 채로 계속되지 않음을 보증하는 자체 보정 메커니즘을 제공한다. 혁명은 다른 방식으로 유도되기도 하지만, 나의 견해로는 그런 일은 드문 것 같다. 덧붙여 나는 과학자 사회의 구조에 관한 적절한 논의의 부재가 위에서 모호하게 감추었던 점을 여기서 지적할 것이다. 위기란 그것을 겪고 그리고 때로는 그 결과로서 혁명을 거치게 되는 그 과학자 사회의 연구에 의해 발생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전자 현미경 같은 새로운 기기 또는 맥스웰의 법칙이 하나의 전문 분야에서 생겨나서 그것들의 동화가 다른 분야에서 위기를 발생시키기도 한다.

 

 

2. 집단 공약의 집합으로서의 패러다임(Paradigms as the Constellation of Group Commitments)

 

이제 패러다임으로 이야기를 돌려서 그것들이 과연 무엇이 될 수 있는가를 논의해 보자. 나의 원래 텍스트는 더 이상 모호하거나 중요한 질문을 남겨 놓지 않는다. '패러다임'이 이 책의 핵심이 되는 철학적 요소들을 명명한다는 나의 확신에 공감하는 한 동조적인 독자는 부분적 분석 색인 을 마련하였으며, 패러다임이란 용어가 적어도 스물 두 가지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31) 지금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런 차이들이 대부분은 형식상의 일관성의 결여 때문인 것으로 보이며(즉 뉴턴의 법칙들은 때로는 패러다임이고, 때로는 패러다임의 부분들이며, 때로는 패러다임적으로 쓰인다), 그것들은 비교적 수월하게 제거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런 편집 성격의 작업이 이루어지면, 용어의 사용상 전혀 다른 두 가지 용도가 남게 되는 데, 그 둘은 분리를 요한다. 보다 광범위한 의미가 이 소절의 주제가 된다. 또 하나의 의미는 다음 소절에서 고려하기로 한다.

위에서 방금 논의했던 기법에 의해, 특정 전문가 사회를 구분한 다음에는, 이런 유용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 구성원들은 그들의 전문가 사회의 충족과 그들의 전문적 평가의 상대적 합의를 설명할 수 있는 무엇을 공유하는가? 이 물음에 대해 이 책의 초판은, 그 답변인 하나의 패러다임 또는 한 벌의 패러다임을 들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논의될 용법과는 달리, 이런 쓰임에 대해서는 그 용어가 적합하지 않다. 과학자들은 스스로 하나의 이론 또는 한 벌의 이론들을 공유한다고 말할 것이며, 그 용어가 이런 용도를 위해서 궁극적으로 다시 쓰일 수 있다면 내게는 기쁨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과학철학에서 요즈음 쓰이고 있듯이, '이론(theory)'은 여기에서 요구되는 것보다 성격과 범위에 있어서 훨씬 더 제한된 구조를 내포한다. 그 술어가 현재의 함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때까지, 다른 것을 채택한다면 혼동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목적으로 나는 '전문분야 행렬(disciplinary matrix)'를 쓸 것을 제안한다 : '전문분야'라고 붙인 것은 특정 전문분야 종사자들의 공통적인 소유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행렬'이라고 붙인 것은 각기 고도의 명세를 필요로 하는 다양한 유형의 규칙적인 요소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초판이 패러다임들, 패러다임의 부분들, 또는 패러다임적인 것으로 만든 '그룹 공약의 대상들(object)가운데 대부분 또는 모두가 전문분야 행렬의 성분을 이루며, 그런 것들로서 그 요소들은 온전한 하나를 형성하여 총체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제 더 이상 한 조각의 모두 (all of a piece)인 것처럼 논의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철저한 리스트를 만들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나, 전문분야 행렬 성분들의 주된 유형에 주목하는 일은 지금 내가 하는 접근의 성격을 밝힘과 아울러 나의 다음 요점에 대한 기틀을 마련해 줄 것이다.

나는 중요한 유형의 성분 하나에 대해 '기호적 일반화(symbolic generalization)'라 명명할 것인데 그 배경은 그룹 구성원들에 질문 또는 이견이 없이 전개된, (x) (y) (z) 파이 (x, y, z)와 같은 논리적 형태로 표시될 수 있는 표현을 의중에 둔 것이었다. 그것들은 전문분야 행렬에서의 형식적인 또는 쉽게 형식화할 수 있는 성분들이다. 때로는 그것들은 이미 기호 형태로 발견되는 것들이다. f=ma 또는 I=V/R가 그런 예이다. 또 어떤 것들은 보통 단어로 표현된다. '원소들은 일정한 무게비로 결합한다' 또는 '작용은 반작용과 같다' 등의 경우이다. 이와 같은 표현들이 일반적으로 수용되지 않았더라면, 그룹 구성원들이 그들의 수수께끼-풀이 활동에서 논리적 및 수학적 조작의 막강한 테크닉을 소속시킬 수 있는 요체가 없었을 것이다. 분류학(taxonomy)의 실례는 정상과학이 몇 가지 안 되는 그런 표현을 갖고 진행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위력은 그 종사자들이 그들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기호적 일반화(symbolic generalization)의 수효에 따라 상당히 일반적으로 증강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 일반화는 자연의 법칙처럼 보이지만, 그룹 구성원들에 대한 그 것들의 기능은 그뿐만이 아닌 경우가 흔하다. 때로는 그러하다. 예컨대 줄-렌즈(Joule-Lenz) 법칙은 ^6 1235 24 126^이다. 이 법칙이 발견되었을 때,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은 H, R, 그리고 I가 각각 무엇을 나타내는가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으며, 이들 일반화는 단지 그들이 미처 모르고 있었던 열, 전류 그리고 저항의 작용에 대한 어떤 것을 그들에게 일러준 것이었다. 그러나 이 책의 앞부분에서의 논의가 시사하듯이 기호적 일반화는 그와 동시에 제2의 기능을 나타내는 일이 상례인데. 그런 기능은 과학철학자에 의한 분석에서 예리하게 분리되는 것이 보통이다. f=ma 나 I=V/R 처럼, 기호적 일반화는 일부는 법칙들로서 작용하나, 또 일부는 그것들이 전개하는 몇몇 기호들의 정의로서 기능을 나타내기도 한다. 더욱이 그것들의 분리 불가능한 입법적 및 정의적 위력 사이의 균형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천된다. 다른 맥락에서 이런 점들은 다시 상세하게 분석될 것인데, 그 까닭은 어느 법칙에 대한 공약의 성격은 어느 정의에 대한 언질의 것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법칙들은 점진적으로 교정할 수 있는 경우가 흔하지만 그러나 동어반복으로서 정의는 그렇지가 않다. 예컨대 옴(Ohm)의 법칙의 수용이 요구했던 것 중의 일부는 '전류(current)'와 '저항(resistance)'을 둘 다 재정의 하는 일이었다. 만약 이 용어들이 이전에 의미했던 것을 그대로 의미했었더라면, 옴의 법칙은 옳은 것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어째서 옴의 법칙이, 예컨대 줄-렌즈 법칙은 그렇지 않았는데, 그리도 격렬하게 반대를 겪었는가의 이유가 된다.32) 아마도 이런 상황은 전형적인 것 같다. 나는 요즈음 모든 혁명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전에는 어느 부분에서 동어반복의 위력이었던 일반화의 포기를 포함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인슈타인은 동시성(simultaneity)이 상대적임을 증명했던 것인가 아니면 동시성의 개념 그 자체를 바꾸었던 것인가? '동시성의 상대성(relativity simultaneity)'이란 어구에서 역설(paradox)을 느끼는 사람들은 무조건 틀린 것이었는가?

다음은 전문분야 행렬의 제2형태의 성분에 관해 고려할 차례인데, 이는 초판에서 '형이상학적 패러다임(metaphysical paradigms)' 또는 '패러다임의 형이상학적 부분(metaphysical parts of paradigms)'이란 제목으로 많이 얘기했던 바 있다. 나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신념들에 대한 공유된 공약을 떠올린다. 열은 물체의 구성 요소들의 운동 에너지이다. 지금 책을 다시 쓴다면, 나는 그러한 공약을 특정 모형에서의 믿음이라고 서술할 것이다. 그리고 상당히 발견적인(heuristic) 다양성도 포함하도록 범주 모형을 확장할 것이다. 전기회로(electric circuit)는 정류-상태 유체 역학계(steady-state hydrodynamic system)로 간주될 수도 있다. 기체 분자는 미소한 탄성의 당구알이 무작위 운동을 하는 것처럼 운동한다. 그룹 공약의 강도는 사소하지 않는 결과와 아울러 발견적인 것으로부터 존재론적인 모형까지는 폭을 따라 다양하게 변화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모형은 유사한 기능을 갖는다. 그 중 무엇보다도 그것들은 그룹에게 바람직한 또는 허용될 만한 유추와 비유를 제공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들은 무엇이 설명으로서 채택될 것인가 바꾸어 말하면, 그것들은 미해결의 수수께끼 명부의 결정에 있어서 그리고 각각의 중요성 평가에 있어서 도움이 된다. 그러나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은 발견적 모델조차도 공유하지 않아도 된다는―보통 공유하기는 하지만―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미 19세기 전반 동안에 화학자 사회의 일원이 되는 데 원자에 대해서 꼭 믿어야 할 필요는 없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전문분야 행렬에서 제3종 요소를 가리켜 나는 여기서 가치관(values)이라고 설명할 것이다. 보통 그것들은 상이한 과학자 사회에서 기호적 일반화나 모형의 어느 경우보다도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며, 그런 가치관들은 자연과학자들에게 한 동아리로서 집단의 의미를 제공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그것들은 어느 때이고 항상 적용하고 있지만, 특히 그 중요성이 두드러지는 시기는 특정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이 위기를 확인해야 할 때, 또는 후에 그들의 분야를 수행함에 있어 양립되지 않는 방식들 사이에서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 때가 된다. 아마도 가장 깊숙이 간직된 가치는 예측에 관한 것이 아닌가 한다. 예측들은 정확해야 한다. 정량적인 추론이 정성적인 것보다 바람직하다. 허용할 수 있는 오차의 한계가 어떻든 간에, 예측은 주어진 분야에서 한결같이 만족되어야 한다. 기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한 전체 이론들을 평가하는 데 사용되는 가치들도 존재한다.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수수께끼-공식화와 풀이를 가능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능한 한 그것들은 간단하고, 이치가 정연하며, 수긍이 가고, 당시 전개되는 있는 다른 이론들과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지금 나는 위기의 원천과 이론선택의 요인을 고려하는 데 내부적, 외부적 일관성과 같은 가치들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점이 초판의 약점이었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가치도 존재한다. ―이를테면, 과학은 사회적으로 유용해야 한다(또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따위)― 하지만 앞서의 설명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시사하리라 믿는다.

그러나 공유된 가치의 한 가지 성격은 각별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전문분야 행렬에서의 다른 어느 종류의 성분보다 엄청난 정도로, 가치관은 그것들의 적용에서 차이가 나는 사람들에 의해 공유될 수 있다. 정확도의 판정은 비교적, 물론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시대가 달라지더라도 쉽사리 변치 않으며 어느 특정 그룹에서의 구성원 각자에 따라 다르지도 않다. 그러나 단순성, 일관성, 개연성 따위의 판정은 흔히 개인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난다.

아인슈타인에게는 옛 양자론에서 정상과학의 추구를 불가능하게 만들었으며 견딜 수 없는 모순이었던 내용이 보어(Bohr)와 그 밖의 다른 학자들에게는 정상적인 방법에 의해 저절로 풀리라 예측될 수 있었던 난점이었을 따름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치가 적용되어야만 하는 경우들에서, 오로지 서로 다른 가치들이 흔히 서로 다른 선택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하나의 이론은 다른 것에 비해 더 정확할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일관성이 떨어지거나 수긍이 덜 가는 것일 수 있다. 여기서도 다시 옛 양자론이 실례가 된다. 간단히 말해서, 가치관은 과학자들에게 폭넓게 공유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공약은 심오하고 또한 과학을 이루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가치관의 적용은 그룹의 구성원들을 구별짓는 개성과 경륜의 특성에 따라 상당한 영향을 받는 경우가 있다.

이 책의 앞부분을 읽은 여러 독자들에게, 공유된 가치관의 작용에서의 이런 특성은 내 입장의 주요 취약점으로 보였던 것이다. 나는, 과학자들에 공유되는 그 무엇이 서로 겨루는 이론들 사이의 선택 또는 통상적인 이상(anomaly) 현상과 위기를 야기하는 이상 현상 사이의 구별 등의 주제에 관해 획일적인 동의를 얻게 하는 데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주관성과 불합리성까지도 찬양하고 있는 것으로 자주 비난받고 있다.33) 그러나 그런 반응은 가치 판단에 의해서 어느 분야에서나 나타나는 두 가지 특성을 무시한 것이다. 첫째로, 어느 그룹의 구성원들은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가치를 적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유된 가치관은 그룹 행동의 중대한 결정적 요소가 될 수 있다〔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가치론(value theory)이라든가 미학(aesthetics)에 관한 특이한 철학적 문제란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사실 표현이 일차적인 가치였던 시기에는 모두 비슷하게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나, 조형 예술(plastic arts)의 발달양식은 그런 가치가 폐기되었을 때 극심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34) 일관성이 일차적인 가치가 되지 않게 될 경우, 과학에서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상상해 보라, 둘째로, 공유된 가치관의 적용에서의 개별적인 가변성은 과학에 필수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다. 가치들이 적용되어야 하는 사항들은 또한 예외 없이 위험을 무릅써야만 하는 요체들이 기도 하다. 이상 현상들은 대부분 정상적인 방법에 의해 해결된다. 새로운 이론들에 대한 제안은 대부분 잘못된 것으로 밝혀진다. 만일 어느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매번 이상 현상에 대해 위기의 원천으로서 반응을 나타낸다거나 또는 어느 동료가 진전시킨 새로운 이론마다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면 과학은 중단되고야 말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어느 누구도 이상 현상들이나 위험부담이 큰 새로운 이론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혁명이란 거의 일어나지 않거나 또는 전혀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주제에서 과학자 사회는 개별적인 선택을 좌우하는 공유된 규칙에 보다는 오히려 공유된 가치에 의존하는 편이 위험을 분산시키고 연구 활동에 대한 장기적 안목의 성공을 확고히 하는 길이 될 것이다.

이제는 전문분야 행렬의 제4종의 요소로 방향을 돌리고자 하는데, 이는 여타의 유형으로서 유일한 것이 아니라 여기서 논의하게 될 마지막 유형일 따름이다. 이 요소에 대해서는 '패러다임'이란 술어가 언어학상으로나 자전적으로나 꼭 들어맞을 것이다. 이것은 당초 내가 그 단어를 택하도록 이끌었던, 한 그룹의 공유된 공약의 성분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그 자체의 수명을 다한 것 같으므로, 여기서 나는 '표준예'라는 말로 대치할 것이다. 이 용어의 사용에서 내가 의미하는 내용은, 실험실에서든 시험 문제에서든 또는 과학 교재의 장 말미에서든 간에, 과학교육의 시작에서부터 학생들이 직면하게 되는 구체적인 문제풀이들이다. 그러나 이들 공유된 실례에는 최소한도 정기 간행물에서 볼 수 있는 기술적 문제풀이의 일부가 추가돼야 하는데. 그것들은 과학자들이 교육 과정을 밟은 뒤의 연구 생활에서 당면하는 것들이며, 또한 과학자들에게 그들의 연구가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가를 실례로서 보여 주는 것들이다. 전문분야 행렬의 다른 어떠한 성분보다도, 여러 벌의 표준예 사이의 차이는 그 과학자 사회에 과학의 미세구조(finestructure)를 제공해 준다. 예컨대 물리학자는 모두 동일한 예증들을 배우는 것에서 출발한다. 빗면, 원추형의 추, 그리고 케플러의 궤도 같은 문제들이 그것이다. 부척(vernier), 열량계(calorimeter), 그리고 휘트스톤 브리지(Wheatstone bridge) 같은 기기도 포함된다. 그러나 과학자의 수련이 진전됨에 때라서 그들이 공유하는 기호에 의한 일반화는 점차로 서로 다른 표준예들에 의해 설명된다. 고체 상태와 장(場) 이론의 물리학자들은 양쪽 다 슈뢰딩거(Schrodinger) 방정식을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보다 기초적인 적용만이 양쪽 그룹에 공통될 뿐이다.

 

 

3. 공유된 예제로서의 패러다임(Paradigms as Shared Examples)

 

공유된 예제로서의 패러다임은 이제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새롭고 가장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라 여기는 핵심 요소이다. 따라서 표준예는 전문분야 행렬의 어느 유형의 성분보다도 지대한 관심을 요구한다. 과학철학들은 실험실이나 과학 교재에서 학생이 맞닥뜨리는 문제들을 논의하지 않는 것이 상례였으며, 그 까닭은 그런 것들은 학생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의 응용에서 실습만을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학생이 우선 이론과 그것을 응용에서 실습만을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학생이 우선 이론과 그것을 응용하는 몇몇 규칙을 익히지 않는 한, 학생은 문제를 전혀 풀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과학지식은 이론과 규칙 속에 내장되어 있다. 문제들은 그것들의 적용에서 숙련되도록 제공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과학의 인식적 함의를 그렇게 편재화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논지를 펴 왔다. 학생들이 문제를 많이 풀고 난 뒤에는, 더 많이 풀어내는 것에 의해 능란한 솜씨만을 키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처음 시작에서 그리고 그 뒤 얼마 동안, 문제를 푸는 것은 자연에 관한 일관성 있는 사항들을 배우는 것이다. 그런 표준예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학생들이 이미 배운 법칙과 이론은 경험적인 내용을 거의 지니지 못할 것이다.

내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지적하기 위해서 이제 기호 사용의 일반화로 잠깐 되돌아가기로 한다. 널리 공유된 하나의 범례로서, 일반적으로 f=ma 로 나타내는 뉴턴 운동의 제2법칙을 보자. 이에 상당하는 표현을 주어진 전문가 집단의 구성원들이 아무런 의문도 없이 말하고 받아들인 것을 알게 된 사회학자나 언어학자는, 추가적인 고찰이 없다면, 그 표현 또는 그 식의 각 항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그 사회의 과학자들이 그 식을 어떻게 자연에 관련시키는가에 대해서 크게 깨우치지는 못할 것이다. 실제로 그들이 의문 없이 그것을 인정하고 논리적, 수학적 조작을 도입하기 위한 열쇠로 사용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서 그들이 의미와 적용 같은 문제에 관해 완전히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들은 상당한 정도까지 동의하게 되며, 그렇지 않은 경우, 그 사실은 그들의 이후의 대화로부터 곧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나올지 모른다. 어느 시점에서 그리고 무슨 방법으로 그들은 그렇게 하기에 이르렀는가? 주어진 실험적 상황에 직면하여, 그들은 어떻게 해서 관련되는 힘, 질량, 그리고 가속도를 골라낼 줄을 알게 되었는가?

실상 그런 상황의 이런 측면에 관해서는 아주 드물게 주목되거나 또는 전혀 주목된 일이 없지만, 학생들이 배워야만 하는 그 무엇은 이것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다. 그것은 논리적, 수학적 조작이 f=ma 에 직접 적용되는 경우와 다르다. 그 관계식은 검토해 보면 하나의 법칙-개요(law-sketch), 또는 법칙-도식(law-schema)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학생이나 연구중인 과학자가 한 문제 상황으로부터 다음의 것으로 넘어감에 따라, 이 조작들이 적용되는 기호적인 일반식이 달라지게 된다. 자유낙하(free fall)의 경우, f=ma 는 mg=md2s/dt2 으로 된다. 단진자(simple pendulum)에 대해서는 이 관계식은 mgsinΦ=-mld2Φ/dt2 으로 변형된다. 상호작용하는 조화 진동자(harmonic oscillators) 한 쌍에 대해서는 그것은 두 개의 방정식으로 쓰여지는데, 첫 번째 식은 m1d2s1/dt2+k1s1=k2(s2-s1+d)가 된다. 그리고 자이로스코프(gyroscope)처럼 복잡한 경우에서는 또다시 다른 형태가 되어서, f=ma 라는 식에 닮았는지조차 알아내기가 힘들어진다. 그렇긴 하지만, 학생이 이전에 당면하지 않았던 다양한 물리적 상황에서 힘, 질량, 가속도를 확인하는 것을 익히노라면 그 학생은 그 관계식들을 상호 관련짓는 f=ma 의 적절한 수정식을 고안하는 것도 깨우치게 되는데, 보통 이런 변형식은 글자 그대로의 동등한 것을 이전에 경험해 본 적이 없었던 형태가 된다. 학생은 어떻게 그렇게 하는 것을 알아냈을까?

과학도와 과학사학도 양쪽에 모두 친숙한 현상이 여기에 실마리를 제공한다. 과학도는 으레 그들 교재의 한 장을 독파했고 완전히 이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의 끝에 실린 문제들을 푸는 데 있어서는 여러 군데에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한다. 통산적으로 그런 난점들은 동일한 방식으로 해결된다. 학생은, 자기 교수의 도움을 받든 받지 않든 간에, 그의 문제를 그가 이미 부닥쳤던 문제처럼 다루는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유사성을 파악하고 구별되는 두 가지 이사의 문제들 사이의 유비 관계를 파악하게 되므로, 학생은 기호를 서로 관계짓고 그것들을 이전에 효과적이라고 증명된 방식으로 자연에 적용케 할 수 있다. 법칙-묘사, 예컨대 f=ma 는 하나의 도구로 작용함으로써 학생에게 어떤 유사성을 탐색해야 하는가를 지시하며, 그 상황이 느껴지게 되는 경험의 통일적 형태를 신뢰해 준다. 내 생각으로는, f=ma 또는 그 밖의 기호 일반화에 관한 주제처럼, 다양한 상황들을 서로 닮은 것으로 보는 능력은 학생이 연필과 종이를 쓰든 설비가 잘된 실험실에서든 간에, 예제를 풂으로써 얻게 되는 주요 성과라고 본다. 그 문항수에서는 개인차가 크게 벌어질 것이지만, 어느 정도의 문제풀이를 완결하고 나면, 학생은 한 사람의 과학자로서 서에게 닥치는 상황을 그 전문가 그룹의 다른 구성원들과 같은 경험 형태로 다루게 된다. 그 학생에게는 그런 상황들이 그의 수련이 시작되었을 때 당면했던 것과는 더 이상 동일하지가 않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사물을 보는 데 시간의 흐름과 그룹이 승인한 방식에 동화된 것이다.

이렇게 얻어진 유사성 관계(similarity relations)의 역할은 또한 과학자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과학자들은 문제를 풀 때 그것을 이전의 문제풀이에 본을 따서 해결하며, 기호 일반화에의 의존은 극히 미미한 것이 상례이다. 갈릴레오는 빗면에서 굴러내리는 공은 어느 기울기의 제1경사면에서 그와 똑같은 수직 높이까지 공을 되돌림만큼의 속도를 얻는다는 것을 알아냈으며, 그 실험적 상황을 점-질량(point-mass)을 갖는 진자로서 다룰 줄 알게 되었다. 그 다음 호이겐스(Huyghens)는 물리적진자의 진동에서의 중심(center of oscillation)에 대한 문제를 풀었는데, 그것은 진자의 벌어진 모양이 갈릴레오의 점-진자들(point-pendula)로 구성되고, 흔들리는 어느 점에서나 점-진자 사이의 결합이 순간적으로 끊긴다고 상상함으로써 가능했던 일이다. 결합이 끊긴 뒤에는 각각의 점-진자는 자유롭게 흔들릴 것이지만, 각각 그 최고점에 이르렀을 때 그것들의 총괄적인  무게중심(collective center of gravity)은, 갈릴레오 진자의 경우처럼 벌어진 진자의 무게중심이 낙하하기 시작했던 높이까지만 올라갈 것이다. 드디어 베르누이(Daniel Bernoulli)는 구멍으로부터의 물의 흐름을 호이겐스의 진자에 유사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게 되었다. 미분소의 시간 간격 동안 탱크와 분출구에서의 물의 무게 중심의 하강을 결정해 보라. 다음에는 뒤이어 물의 각 입자가 그 시간 간격 동안 얻은 속도로 가능한 최고 높이까지 따로따로 상승한다고 가정하라. 그러면 각 입자의 중심의 상승은 탱크와 분출구에서의 물의 중심의 하강과 같아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한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드디어 오랫동안 탐구되었던 유출속도(speed of efflux)가 즉각 도출되었던 것이다.35)

동일한 과학 법칙이나 법칙-개요의 응용에 대한 주제에서처럼, 이 실례는 문제들로부터 서로 동류의 것으로 상황을 이해하는 것을 터득한다는 표현에 의해 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분명히 밝히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런 실례는 유사성 관계를 터득하는 동안에 얻어지고, 그 이후 규칙이나 법칙에서보다는 오히려 물리적 상황을 보는 관점의 방식에서 구현되는, 자연에 대한 일관적인 지식을 내가 언급하는 이유를 밝혀 주어야 할 것이다. 보기로 들었던 세 가지 문제는, 모두 18세기 역학자에 대한 표준예로서, 자연의 한 가지 법칙만을 전개시킨다. '활력의 원리(principle of vis viva)'라고 알려진 이 법칙은 보통 이렇게 기술된다. '실제의 하강은 잠재적 상승과 동일하다.' 이 법칙을 베르누이가 응용했던 것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논리적인 귀결이었는가를 시사할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본 그 법칙의 문자 그대로의 서술은 사실상 별 위력이 없다. 그 단어들을 알고 그런 문제들을 모두 풀 수는 있으나 현재 다른 방법을 채택하고 있는 물리학 전공의 요즈음 학생에게 그 법칙을 주어 보라, 그 다음, 모두 잘 알려진 단어들이긴 하지만, 문제들조차 알지 못했던 사람에게 그런 단어들이 무엇을 말해 줄 수 있는가를 상상해 보라, 그 사람에게 이 일반화는 그가 '실제의 하강(actual descents)'과 '잠재적 상승(potential ascents)'을 자연의 요소로서 인식하는 것을 깨우쳤을 때에 한해서 작용을 나타내기 시작할 것이며, 그것은 법칙에 선행되어 자연이 나타내거나 나타내지 않는 상황들에 관해 무엇인가를 깨우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유형의 깨우침은 전적으로 문자상의 수단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단어들이 실제로 어떻게 기능하는가에 관한 구체적인 실례들과 더불어 과학도에게 단어들이 주어질 때 다가오는 것이다. 자연과 용어들은 함께 더불어 터득된다. 다시 한 번 폴라니(Michael Ploanyi)의 유효적절한 표현을 빌면, 그런 과정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묵시적 지식(tacit knowledge)'으로서, 그것은 과학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규칙을 얻는 것보다는 오히려 과학을 수행하는 것에 의해서 터득되는 지식이다.

 

 

4. 묵시적 지식과 직관(Tacit Knowledge and Intuition)

 

묵시적인 지식과 공존하는 규칙의 거부에 대한 이런 언급은 또 다른 문제를 드러내는데. 그런 문제는 나에 대한 비평자들(critics)에게는 잘 납득되지 않고 주체성과 불합리성이라는 비난의 근거를 제공했던 것 같다. 어떤 독자들은 내가 과학을 논리와 법칙보다는 오히려 분석할 수 없는 개별적 직관에 머물게 하려고 시도했던 것으로 느낀 모양이다. 그러나 그 해석은 두 가지 본질적인 측면에서 방향을 잘못 잡은 거이다. 첫째로, 만일 내가 도대체 직관에 관해 말하고 있다면, 그 직관들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무엇인가 하면, 그것들은 성공을 거둔 그룹의 구성원들이 지닌, 시험을 거치고 또한 공유된 소유물로서, 초보자는 그룹-회원이 되기 위한 준비의 한 부분으로서 그런 직관들을 수련을 통해 얻게 된다. 둘째로, 그런 직관은 원칙적으로 분석할 수 없는 성격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나는 초보적인 수준에서 직관의 성질들을 조사하도록 고안된 컴퓨터 프로그램을 써서 현재 실험 중에 있다.

그 프로그램에 관해서 지금 여기서 논의할 만한 것은 없으나,36) 그것을 언급하는 것만도 나의 가장 핵심적인 요점을 보여 줄 것이다. 내가 공유된 표준에 속에 깔려 있는 지식에 관해서 말할 때, 그것은 규칙, 법칙 또는 확인 기준에 내장되어 있는 지식보다 덜 체계적이라거나 덜 분석적인 배움의 양식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만약 처음에 표준예로부터 추상화되고, 그 뒤에 그 표준예 대신 기능을 나타내는 규칙들을 써서 재구성되는 경우 그 의미가 잘못 해석되게 마련인 배움의 방식을 염두에 두고 있다. 혹은 같은 요지를 달리 표현한다면, 주어진 상황을 이전에 보았던 어떤 것 비슷하게 그리고 또 어떤 것과는 다르게 인식하는 능력을 표준예로부터 터득한다고 말함으로써 내가 신경-대뇌 매커니즘의 용어에 의해 잠재적으로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과정을 제안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 해명이 그 본질상 '무엇에 관련지어 비슷한가?' 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 물음은 하나의 규칙에 대한 요건이며, 이 경우에서는 특정 상황들을 유사성의 무리로 묶는 기준에 대한 자격을 말한다. 그리고 나는 제한 조건(또는 적어도 완전한 한 벌의 조건)을 찾아내려는 유혹은 이 경우에는 억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반대하는 것은 체계가 아니라 특정 유형의 체계이다.

이런 점을 구체적으로 밝히기 위해서, 여기서 잠깐 본론을 벗어나기로 한다. 무엇으로 이어지는가가 지금 내게는 확실해 보이지만, 초판에서 '세계는 변화한다'와 같은 문구에 꾸준히 의존했던 것은 그것이 항상 변화하지는 않았음을 시사하고 있다. 만일 두 사람이 같은 장소에 서서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면, 유아론의 고통 속에서 우리는 그들이 거의 비슷한 자극을 받는다고 결론지어야 한다(만일 응시한다고 가정하면, 자극은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극을 보지는 않는다. 자극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지극히 이론적이며 추상적이다. 오히려 자극은 감각을 가지며, 결코 앞의 두 사람의 감각이 똑같다고 생각해야 할 구속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회의론자들(sceptics)은 아마도 1794년에 돌턴이 그것을 서술하기 전까지는 색맹이 어디에서도 주목되지 않았던 일을 기억했을 것이다〕. 반대로 대부분의 신경적인 과정은 자극(stimulus)의 접수와 감각(sensation)의 인식 사이에서 일어난다. 이것에 관해 확실하게 알려진 몇 가지 사항 가운데 이런 것들이 있다. 똑같은 자극이 전혀 다른 감각을 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극으로부터 감각까지의 경로는 일부 길들이기에 따라 부분적으로 조절된다. 서로 다른 과학자 사회에서 자라난 개인들은 어떤 경우에는 마치 서로 다른 사물을 본 것처럼 행동한다. 만일 우리가 자극을 감각과 일 대 일로 확인하려 들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들이 현실적으로도 그렇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제 여기서 주목할 것은 두 집단, 즉 그 속의 구성원들이 동일한 자극을 수용하면서도 체계적으로 상이한 감각을 갖는 두 집단은 어떤 의미에서는(in some sense)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각(perceptions)을 설명하기 위해서 자극의 존재를 가정하며, 개인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유아론(solipsism)을 둘 다 피하기 위해서 지각의 불변성을 가정한다. 이러한 두 가지 어느 가정에 대해서도 나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다. 그러나 우리의 세계는 첫째, 우선 자극으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 우리 감각의 대상으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 우리 감각의 대상으로 채워지며, 그리고 이런 것들은 각 개인 마다 또는 각 그룹마다 똑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개인들이 동일 그룹에 소속되고, 그에 따라 교육, 언어, 경험,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만큼, 그들의 감각이 같아도 생각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성립된다. 달리 어떻게 해서 그들의 의견 교환의 완전함과 그들의 환경에 대한 행동상의 반응의 공통성을 우리가 이해한단 말인가? 그들은 거의 같은 방식으로 사물을 보고 자극을 처리함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룹의 구분화(differentiation)와 전문화(specialization)가 시작되는 곳에서 우리는 감각의 불변성을 입증할 만한 유사한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 내가 보기에는 단순한 편협함이, 우리로 하여금 자극으로부터 감각까지의 경로가 모든 그룹의 구성원들에게 동일하다고 여기도록 만드는 것 같다.

이제 표준예와 규칙으로 되돌아가서, 그 양태가 얼마나 예비적이든 간에, 내가 제안하고자 노력해 온 것은 바로 이것이다. 전체적 문화권이거나 그 속의 한 전문 분야의 세분화된 집단이거나 간에, 어느 그룹의 구성원들이 똑같은 자극에 직면했을 때 똑같은 것을 보는 것을 배우는 기본적 기술 가운데 하나는 상황의 실례들에 접함으로써이고, 실례들은 그 그룹에서 앞서 간 사람들이 서로 동류의 것으로서 그리고 다른 상황과는 틀리는 것으로서 보는 것을 이미 배워왔던 그런 실례들이다. 이 비슷한 상황들은 바로 그 개체의 연속적인 감각적 표상일 것이다. 이를테면 그것이 어머니라면, 그녀는 결국 눈으로 보아서

어머니로서 그리고 아버지나 누나와는 다른 사람으로서 받아들여질 것이다. 이런 비슷한 상황은 자연 가족(natural families)에서의 구성 요소들의 직각도 될 수 있어서, 예컨대 한편으로 백조 다른 한편으로 거위를 구별하는 것과 같다. 또는 그런 상황은 보다 전문화된 그룹의 구성원들에게는 뉴턴 경우의 실례들이 될 수도 있어서, 말하자면 기호식 f=ma 의 변형으로 다룰 수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고, 이는 과학의 법칙-묘사가 적용되는 상황들과는 달라지는 상황이 된다.

우선 현 시점에서는 이런 형태의 무엇인가가 일어난다고 인정하고 보자. 우리는 표준예로부터 터득된 것이 규칙 그리고 그것을 적용하는 능력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표현은 매력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어느 상황을 이전에 부닥쳤던 경우들처럼 보는 것이 물리적, 화학적 법칙으로 완전히 다스려지는 신경 과정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단 그렇게 하는 것에 우리가 익숙해지면, 유사성의 인식은 우리 심장이 뛰는 것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체계적이라야 한다. 그러나 바로 그런 비교는, 인식 과정이 우리가 조절할 능력이 없는 과정으로서 수의적이 아닐 수도 있음을 또한 시사하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그때는 그것을 규칙과 기준을 적용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생길 것이다. 이런 말로써 그것을 논하는 것은 우리가 대안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 이를테면 어느 규칙을 벗어났거나, 기준을 잘못 적용했거나, 또는 사물을 이해하는 어떤 다른 방식을 시험해 왔거나 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뜻한다.37) 내 견해로는 그런 것들은 도대체 우리가 할 수 없는 유형의 일들이다.

아니면 보다 정확히 표현해서, 그런 것들은 우리가 어떤 감각을 지니게 되고 무엇인가를 감지하기 이전까지는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 다음 흔히 우리는 기준을 추구하고 그것을 활용하게 된다. 그 다음에는 해석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감지 그 자체에서는 하지 않은 여러 가지 대한 가운데서 선택하게 되는 신중한 과정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보아 왔던 것이 무엇인가 이상할는지도 모른다(앞에 서술된 이상한 카드놀이를 기억해 보라).

모퉁이를 돌면서, 집에 계시리라 생각했던 시간에 어머니가 시내 가게로 들어가는 것을 본다고 하자. 자기가 본 것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우리는 갑자기 외친다. "그건 어머니가 아니었어. 어머니는 붉은 머리니까 말야!" 그 가게로 들어서면서 우리는 그 여인을 다시 한번 보고, 어째서 그녀를 어머니로 여길 수 있었는지 알 수가 없어진다. 다시, 가령 얕은 시냇물 바닥에서 무엇을 잡아먹고 있는 물새의 꼬리 깃털을 본다고 하자. 저게 백조인가 아니면 거위인가? 우리는 눈으로 모았던 것을 가만히 생각하면서, 머리 속에서 예전에 보았던 백조와 거위의 깃털과 그 꼬리털을 비교하는 것이다. 또는 어쩌면 으뜸가는 과학자가 되어서, 우리는 이미 쉽게 감식할 수 있는 자연계의 과의 구성 요소에 대한 어떤 일반적 특징(이를테면 백조의 흰 빛깔)을 알아내려고 한다. 다시 우리는 이전에 이미 감지했던 것을 잘 생각해 보면서, 주어진 과의 구성 요소들이 공통으로 갖는 성질을 찾게 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숙고하는 처리 과정이며, 그 속에서 우리는 기준과 규칙을 찾아내고 전개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임 갖고 있는 감각을 해석하고, 주어진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분석하려고 노력한다. 어떤 방식으로 그렇게 하든 간에, 가기 관련된 과정들은 결국 신경적인 것이며, 따라서 한편으로 감지를 조정하며 다른 한편으로 우리 심장의 고동을 조종하는 바로 그러한 물리적, 화학적 법칙에 따라 조절된다. 그러나 그 계가 세 가지 경우 모두 에서 동일 법칙을 만족시킨다는 사실은 우리의 신경 장치가, 감지에서처럼 또는 우리 심장의 고동에서처럼, 해석에 있어 똑같은 방식으로 조작되도록 짜여진다고 믿을 만한 이유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내가 이 책에서 반론을 펴고 있는 것은 데카르트 이래의, 그러나 그 이전은 아닌, 전통적인 시도에 대해서인데. 즉 지각 작용을 하나의 해석적 과정으로서 지각 이후 행동의 무의식적 해석으로 분석하려는 시도에 대한 반론이다.

지각의 온전성을 강조할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은 물론 과거 경험의 대부분이 자극을 감각으로 변형시키는 신경 계통에서 구체화된다는 점이다. 적절하게 짜여진 지각의 메커니즘은 존립 가치를 지닌다. 서로 다른 그룹들의 구성원은 동일한 자극에 부닥쳤을 때 서로 다른 지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말은, 그들이 어떤 지각이든지 아무것이나 가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저런 환경에서 늑대와 개를 구별할 수 없는 그룹은 존속될 수가 없었다. 오늘날의 원자 핵물리학자 그룹도 알파 입자와 전자의 궤적을 구별할 능력이 없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과학자로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룹이 사용하는 검증을 견디어 낸 것들만이 대를 물릴만한 가치가 있는 까닭은 그룹 안에서 보고 깨닫는 방식이 극히 소수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극으로부터 감각으로의 경로에 내포된 자연에 관한 경험과 지식에 대해 말해야 하는 것은 그것들이 역사에 걸쳐 그 성공 때문에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식(knowledge)'이란 잘못 사용한 단어일는지도 모르나, 그것을 사용한 데는 이유가 있다. 자극을 감각으로 변형시키는 신경과정 속에 짜여져 있는 그 무엇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그것은 교육을 통해서 전수되어 왔다. 그것은 시험(trail)에 의해서 어느 그룹의 당시 환경에서 그 역사상의 경쟁 상대들보다 훨씬 효율적임이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은 앞으로의 교육을 거치면서, 또한 환경에 잘 맞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서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그런 것들은 지식의 특징이며, 그것들은 내가 어째서 그 낱말을 사용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해 준다. 그러나 이것은 야릇한 용법인데, 그

이유는 또 다른 특징 하나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아는 것이 무엇인가에 직접 접근하는 방법이 없으며, 그런 지식을 표현하는 데 쓰이는 규칙이나 일반화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 그런 접근 수단을 제공할 수 있는 규칙은 감각이 아니라 자극에 관련될 것이며, 그리고 자극은 정교한 이론을 통해서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없이는 자극에서 감각에 이르는 경로에 내포되어 있는 지식은 암묵적인 채로 남게 된다.

이것은 분명히 서론에 불과하며 모든 세부 사항에서 옳아야 할 필요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감각에 대하여 방금 논의한 것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갖는다. 기껏해야 그것은, 아마도 직접 검증은 아니겠지만, 실험적 조사를 거쳐야 하는 시각에 대한 하나의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관찰과 지각에 관해 이렇게 논의하는 것은, 역시 책의 대부분에서 이루어졌듯이, 은유적인 기능을 맡고 있다. 우리는 전자(electron)들을 보는(see) 것이 아니라 그 자취를 보거나 또는 안개상자(cloud chamber)에서 증기의 기포를 보는 것이다. 우리는 전류는 전혀 보지 못하고 대신 전류계나 검류계의 바늘을 본다. 그러나 앞에서, 특히 X절에서, 나는 마치 우리가 전류, 전자, 장과 같은 이론적인 실체를 지각했던 것처럼 일관해 왔다. 마치 표준예들의 검토로부터 그렇게 하는 것을 터득한 것처럼 얘기했고, 그런 경우들에서도 마치 관찰의 이야기를 기준과 해석의 이야기로 대치하는 것이 잘못인 것처럼 표현해 왔다. '보는 것(seeing)'을 그것들과 같은 맥락으로 옮기는 비유는 그런 주장에 대한 충분한 그거가 되기 어렵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그것은 보다 정학한 양식의 논술을 기하기 위해 장차 삭제되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컴퓨터 프로그램은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할애될 수 있는 지면으로 보나 현재로서 내가 이해하는 정도로 보나, 둘 다 미흡한 까닭에 여기서는 비유를 삭제할 수가 없다.38) 그 대신 나는 간결하게 그것을 지지하는 시도를 할 것이다. 물방울을 보거나 또는 눈금을 가리키는 바늘을 보는 것은 안개상자 실험과 전류계에 생소한 사람에게는 초보적인 지각 경험이다. 그러므로 전자나 전류에 관해 결론에 도달할 수 있기 전에, 세밀하게 관찰하고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이 요구된다(또는 그밖에 외부적 권위의 개입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기기들에 대해 배웠고 그것들을 쓰는 예증적 경험을 쌓은 사람은 그 입장이 전혀 달라지며, 그가 그것들로부터 받은 자극을 처리하는 방식에서는 그 만큼에 해당하는 차이가 나타나게 된다. 추운 겨울날 자기가 내뿜은 숨의 증기에 대해서는 그의 감각도 일반인의 것과 똑같을지 모르지만, 안개상자 실험을 관찰할 때에는 그는 물방울을 보는(여기서는 글자 그대로) 것이 아니라 전자, 알파 입자 등의 궤적을 보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의 그렇게 한다면, 그런 궤적들은 그것에 상응하는 입자들의 존재에 대한 지표로서 해석에서의 기준이 되지만, 그러나 그 경로는 물방울을 설명하는 사람에 의해서 선택된 것과는 다르며 더 짧아질 것이다.

또는 과학자가 바늘이 가리키는 눈금을 읽기 위해 전류계를 들여다본다고 생각해 보라. 아마 그의 감각은 보통 사람의 것과 같을 것인데, 특히 그가 이전에 다른 형태의 계량기 눈금을 읽은 적이 있다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는 전체 회로의 맥락에서 계량기를 본(여기서도 흔히 글자 그대로) 것이며, 그 계기의 내부 구조에 관해서도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그에게는 바늘의 위치가 하나의 기준이지만, 과학자는 계량기가 어느 값을 가리키는가만 결정하면 된다. 반면에 보통 사람으로서는 바늘의 위치는 그 자체를 제외하고는 다른 어느 것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는 내부 및 외부 배선의 전체 설계를 검토하고, 전지와 자석으로 실험하는 등의 여러 가지의 일들을 해야 한다. '보는 것(seeing)'의 문자상 사용에서보다 못지 않게 비유적인 표현으로서, 해석은 지각 작용이 끝나는 데서 시작된다. 이 두 과정은 동일하지 않으며, 지각 작용이 해석에서 완결 짓도록 남겨 두는 것은 그 이전의 경험 그리고 훈련의 본질과 양에 따라 극적으로 달라진다.

 

 

5. 예증, 동일 표준상 비교 불능성, 그리고 혁명(Exemplars, Incommensurability and Revolutions)

 

방금 논의한 내용은 이 책의 요지를 한 가지 더 밝혀 주는 기초를 제공한다. 서로 같은 기준에서 비교할 수 없는 동일 표준상 비교 불능성에 대한, 그리고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이론들 사이에서의 선택에 관해 논쟁하는 과학자들에게 미치는 그 영향의 중요성에 대한 나의 견해가 그것이다.39) X절과 XII 절에서 나는 그런 논쟁에 참석한 분파들이 양쪽이 모두 의존하는 실험적 또는 관찰적 상황들의 어떤 측면을 달리 보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상황을 논의할 때 쓰는 어휘들은 다른 방식으로 자연에 관련시키고 있음에 틀림없고, 그들의 의사 소통은 부분적인 것에 그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어느 이론의 다른 것에 대한 우월성은 그 논쟁에서 증명될 수가 없는 그 무엇이다. 그 대신 내가 주장한 것은 각 분파는 설득에 의해서 다른 편을 전향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철학자들만은 나의 논의에서의 이들 부분의 의도를 심각하게 잘못 해석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다수는 내가 다음의 믿음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40) 동일 표준상 비교불능한 이론들의 옹호자들은 도대체 서로 의견 교환을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론-선택(theory-choice)에 관한 논쟁에서 충분히 만족할 만한 이유들에 의해 선택되어져야 한다. 신비스러운 모종의 통각 작용이 현실적으로 도달된 결론에 이르게 한 결정적 요인이 된다. 이 책의 어느 다른 부분보다도 이런 왜곡된 해석을 낳은 문장들 때문에 비합리적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우선 나의 견해를 되새겨서 고려해 보라, 내가 분명히 하고자 하는 요점은 간단한 것이며 과학철학에서 오랫동안 친숙했던 것이다. 이론-채택을 둘러싼 논쟁은 논리적 또는 수학적 증명과 완전히 유사한 형식으로 틀이 잡힐 수가 없다. 논리적 또는 수학적 증명에서는 추론의 전제와 규칙은 출발점으로부터 명기된다. 결론에 관해 의견의 불일치가 있는 경우, 계속되는 논쟁에서의 분파들은 그들의 밟아 온 자취를 하나 하나 되돌아보면서 각 단계를 그 이전의 규정에 비추어 점검한다. 그런 과정의 종말에서 그 중 누구인가는 자기가 잘못을 저질렀고, 이전에 수용된 규칙을 위반했다는 것을 자인해야 한다. 그렇게 인정하고 나면, 그는 의존할 것이 없어지고, 이 다음으로는 적수의 증명법이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는 대신 만약 그 양쪽이 규정된 규칙의 의미 또는 적용에 관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는 경우, 또 이전의 그들의 의견일치가 증명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지 못함을 깨닫는 경우라면, 그 논쟁은 그것이 과학혁명에서 불가피하게 택하게 되는 형태로 지속된다. 그러한 논쟁은 전제에 관한 것이며, 그것은 증명의 가능성에 이르는 서막으로서 설득에 의지하게 된다.

비교적 친숙한 이 명제에 관한 그 어느 것도, 설득된 것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또는 그런 이유들이 궁극적으로 그룹에 대해 결정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또한 선택의 이유들이 과학철학자들이 보통 열거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정확도(accuracy), 단순성(simplicity), 성과(fruitfulness) 등등이 그런 이유이다. 그러나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그런 이유들이 가치관으로서 작용하며, 따라서 그것들은 그것을 같이 존중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개별적으로 또는 총체적으로, 달리 적용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두 사람이 그 이론들의 상대적인 성과에 관해 의견을 달리한다면, 또는 그들이 이르는 범위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어느 쪽에 대해서도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어느 쪽이 비과학적인 것도 아니다. 이론-선택에 대해서는 중간적인 산술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적절히 적용되어 그룹의 각 개인을 동일한 결론으로 유도해야 하는 체계적 결정과정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효한 결론을 성립시키는 것은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 개인들이라기보다는 전문가 사회이다. 어째서 과학이 지금과 같이 진보되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굉장히 매력 있는 토픽이기는 하지만, 각 개인을 어느 특정 선택까지 이르기 위해 걸어온 길과 개성을 낱낱이 벗겨 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그룹의 구성원 대다수가 궁극적으로 그 밖의 결정적 논거보다 어느 한 벌의 논변을 찾을 것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공유된 가치관의 어느 특정 전문가 집단이 공유한 특정 경험과 어떻게 서로 작용하는가의 방식에 관해서 이해해야 한다.

그런 과정은 설득의 길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다 심오한 문제를 제기한다. 같은 상황을 달리 지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논의에서 같은 어휘를 쓰는 두 사람은 단어를 달리 사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내가 동일 표준상 비교 불능의 견해라고 이름 붙인 관점을 갖고 논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들이 함께 나누기를 바라고, 더구나 감히 설득되리라고 희망할 수 있겠는가? 이 물음에 대한 예비적인 대답조차도 그 난점의 본질에 관해 더욱 명시화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나는 적어도 일부는 그것은 다음의 형태를 취하리라고 본다. 정상과학의 실제는, 표준예들로부터 얻어지는 대상과 상황을 유사성 무리로 분류하는 능력에 의존하게 되는데, 여기서 유사성의 무리는 그런 분류가 "과연 무엇으로 보아 비슷한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의미에서 원시적이다. 그러면 어떤 혁명에서든지 하나의 핵심적 성격은 유사성 관계의 어느 부분이 변화한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동일 부류로 묶었던 대상들이 혁명 후 서로 다른 조로 분류되며, 그 반대 현상도 일어난다. 코페르니쿠스 이전과 이후의 태양, 달, 화성, 지구에 관해 생각해 보라. 갈릴레오 이전과 이후의 자유낙하, 진자 운동, 행성 운동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변경된 분류에서도 대부분의 대상은 계속해서 함께 묶이게 되므로, 조의 명칭들은 대체로 그대로 유지된다. 그러나 하부 단위에서의 이동은 그것들 사이의 상호 관련성의 조직망에서 심각한 변화의 일부가 되는 경우가 흔하다. 금속을 화합물의 무리로부터 원소의 무리로 옮긴 것은 연소에서, 산성에서, 그리고 물리적, 화학적 결합에서 새로운 이론이 출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순식간에 그런 변화들은 화학 전반에 걸쳐 퍼져 나갔다. 그러므로 놀랄 것도 없이 그런 재배치가 진행되는 때, 그들의 대화가 이전에는 완전히 이해되는 듯이 진행되었던 두 사람은 돌연 똑같은 자극에 대해 서로 모순되는 진술과 일반화로서 반응하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 어려움은 그들의 과학적인 대화의 모든 영역에서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런 문제들은 일어나게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이론의 선택이 가장 핵심적으로 의존하는 현상을 둘러싸고 가장 조밀하게 몰릴 것이다.

그런 문제들은 처음에는 의견 교환에서 확연하게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언어적인 것은 아니며, 그런 난점들은 문제를 일으키는 술어의 정의를 규정함으로써 간단히 해결될 수가 없다. 난점들이 그것에 대해 몰려 얽힌 단어들은 더러는 예증에의 직접적인 적용으로부터 알려지게 되었던 까닭에, 대화의 단절에 처한 당사자는 "나는 다음 기준에 따라 결정된 방식으로 '원소'(또는 '혼합물',또는 '행성' 또는 '속박되지 않는 운동')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둘 다 같은 방식으로 사용하며, 그들 이론 양쪽 또는 그 이론들의 경험적 결과 양쪽에 적합한 중립적 언어에 의존할 수는 없다는 얘기이다. 그 차이의 일부는 그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영되고 있는 언어들의 적용보다 우선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대화 단절을 겪은 사람들은 무언가 의지할 것이 있어야 한다. 그들에게 닥치는 자극은 동일한 것이다. 그들의 일반적인 신경 장치도 같기는 하지만, 서로 다르게 짜여져 있다. 게다가 경험의 가장 중요하지만 미소한 영역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신경 프로그래밍조차도 거의 똑같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직전이 과거를 빼고는 그들이 하나의 역사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서, 그들의 일상적 세계와 대부분의 과학적 세계 그리고 언어는 모두 공유의 것이다. 공통되는 것이 주어진 만큼 그들은 자기들이 어떻게 서로 다른가에 관해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에 필요한 기법은 그리 간단하거나 편안하지도 않으며 과학자의 정규적 병기창의 일부도 아니다. 과학자들은 그런 기술이 무엇인가에 관해 참으로 깨닫는 경우가 드물며, 또 과학자들은 개종을 유도하거나 스스로 개종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확인하는 데 필요한 시간보다 그런 기교를 더 오래 사용하는 일도 매우 드물다.

간단히 표현해서, 대화 단절에서의 당사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서로를 다른 언어 사회의 구성원이라 여기고, 그 다음에 번역가가 되는 일이다.41) 그룹 자체 안의 그리고 그룹 상호간의 대화 사이의 차이 자체를 하나의 연구 주제로 잡는다면 그들은 첫째로, 각 집단 안에서는 별 문제 없이 사용됐으나, 그룹 사이의 논의에서 말썽의 초점이 되는 술어와 어법을 찾아내려는 시도를 할 수 있다(그런 난점을 제기하지 않는 어법은 그 소리대로 번역하면 된다). 과학적인 의사 소통에서 난제가 되는 영역을 골라내게 되면, 그들의 문제거리를 더욱 밝히려는 시도로서 자신들이 공유하는 일상적 어휘들에 의지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각자가 다른 사람이 그 자신의 언어로 나타낸 반응에 다른 어떤 자극이 주어졌을 때, 무엇을 보고 말할 것인가를 찾아내려고 노력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비정상(anomalous)의 거동을 단순한 오차 내지 착란의 결과로서 설명하는 것을 충분히 억제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얼마 안 있어 서로 서로의 행동을 꿰뚫어 예측하게 된다. 각자 남의 이론을, 그리고 그 논리적 결과들을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을 터득할 것이며, 동시에 그 이론이 적용되는 세계를 자기의 언어로 서술하는 것을 익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과학사학자가 시대에 뒤진 과학 이론을 다룰 때 규칙적으로 수행하는(또는 수행해야 하는) 작업이 된다.

만일 이루어진다면, 번역은 대화 단절의 당사자들로 하여금 각자의 견해가 안고 있는 강점과 결함이 무엇인가를 대리해서 경험하도록 한다. 그런 까닭에 번역은 설득을 휘하거나 개종을 위해 양쪽으로 막강한 수단이 된다. 그러나 설득조차 성공할 필요는 없으며, 만약 성공한다고 해서 그것은 개종을 수반하거나 또는 개종이 뒤따라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 두 경험은 같은 것이 아닌데, 이 점은 내가 최근에 와서야 완전히 깨닫게 된 중요한 차이점이다.

내가 보는 바로는, 누군가를 설득하는 것은 그에게 나 자신의 견해가 우월하다는 것, 따라서 그 자신의 것을 대치해야 한다는 것을 믿게 하는 일이다. 그 정도쯤은 번역과 같은 어떤 것에 의지하지 않고도 흔히 이루어진다. 번역이 없이는 어느 과학 그룹의 구성원들에 의해 얻어진 설명과 문제-진술 가운데 다수가 다른 이들에게는 모호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각 언어 집단은 출발로부터 보통 몇 가지 구체적인 연구 결과를 산출할 수 있는데, 이런 연구 결과는 양쪽 그룹에 의해 같은 방식으로 이해되는 글귀로 서술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고유의 술어를 써서 다른 집단에 의해 설명될 수는 없다. 만일 새로운 관점이 당분간 견디어 내고 계속 성공을 거두게 되면, 이런 방식으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연구 결과는 그 수가 불어나게 마련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런 결과만으로 결정적이 될 것이다. 그들은 말할 수 있다. 나는 새로운 견해의 옹호자들이 어떻게 성공하는지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그러나 나는 배워야 한다. 그들이 무엇을 하든 간에 그것은 분명히 옳다. 그런 반응은 특히 그 전공 분야에 방금 입문한 사람들에게서 쉽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어느 한쪽 그룹의 특수한 어휘와 공약을 아직 습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그룹이 같은 방식으로 사용하는 어휘로 서술된 논증은 보통 결정적이 되지 못하는데, 적어도 상반되는 출현에서 거의 최후 단계까지는 결정적이 못 된다. 전문분야에 이미 수용된 견해들 가운데서, 번역에 의해 허용된 보다 확장된 비교에 얼마간 의지함이 없이 설득되는 것은 거의 없다. 치러야 할 대가는 흔히 대단히 길고 복잡한 문장들임에도 불구하고('원소'라는 용어를 빌지 않은 채 진행되었던 프루스트와 베르톨레의 논쟁에 관해 생각해 보라), 추가적인 많은 연구 결과는 한 과학자 사회의 언어로부터 다른 것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다. 더욱이 번역이 진행됨에 따라 각 집단의 일부 구성원들은 대리적으로, 이전에 모호했던 진술이 어떻게 해서 반대 그룹의 구성원들에게 설명으로 보일 수 있는가에 관해서도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기술의 이용 가능한 설득을 보장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번역이란 두려움을 주는 과정이며, 그리고 그것은 정상과학에서는 완전히 생소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쟁 위에 논쟁이 덮침에 따라서, 그리고 도전 뒤에 도전이 성공적으로 응전됨에 따라서, 맹목적인 완강함만이 결국에 가서는 연속되는 저항에 관한 이유가 된다.

그렇게 되면, 역사학자와 언어학자 양쪽 모두에게 오랫동안 친숙한 번역의 제2의 국면은 결정적으로 중요해진다. 어느 이론 또는 세계관을 자기의 고유 언어로 번역한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되지는 않는다.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는 낯설었던 언어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전환은, 그렇게 하기를 바랄 만한 이유가 꽤 그럴듯하더라도, 어느 개인이 일부러 선택에 의해 한다든가 하지 않아도 되는 변화가 아니다. 오히려 번역을 배우는 과정의 어디에선가 그는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고, 어떤 결론이 맺어지지 않은 채로 새로운 언어로 빠져 들어갔다는 것을 깨닫는다. 또는 그렇지 않으면, 예컨대 그들의 중년기에 상대론이나 양자역학에 처음 직면했던 많은 사람들처럼, 그는 새로운 견해에 완전히 설득 당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내재화하지 못한 채 그 견해가 구축하는 세계에서 편안할 수가 없음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그 사람은 지적으로 자기 선택을 완료한 것이지만, 그것이 유효하게 되어 요구되는 개종은 그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이론을 이용할 수는 있으나, 생소한 환경에서 이방인으로서 그렇게 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오직 거기에 원주민들이 존재한다는 이유 때문에 그에게 주어진 대안이 된다. 그의 직업은 원주민들의 것에 기생하는 셈인데, 왜냐하면 그는 그 사회의 장래 구성원들이 교육을 통해 습득할 지적 요소들의 좌표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경험의 통일적 전체의 게슈탈트 전환에 비겼던 개종경험(conversion experience)은 혁명의 과정에서 심장부를 이룬다. 선택을 위한 훌륭한 이유들은 전환의 동기를 제공하며, 전환이 일어나기 쉬운 풍토를 조성한다. 덧붙여, 번역은 신경적 재프로그래밍에 관한 입력의 요점을 제공하는데, 지금으로서는 불가해일지라도 그것이 전환의 바닥에 흐르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훌륭한 이유라든가 번역의 그 어느 것도 이런 집단적 개종을 구성하지는 않으며, 과학적 변화의 본질적 유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설명해야 할 과정이 바로 그것이다.

 

 

6. 혁명과 상대주의 (Revolutions and Relativism)

 

방금 약술한 입장에서 파생된 하나의 결과가 특히 나를 비판한 사람들 중 다수에게 문제거리가 되었다.42) 그들은 나의 견해를, 특히 이 책의 마지막 절에서 전개된 바로서, 상대주의적 입장이라고 보고 있다. 상이한 이론들의 옹호자들은 서로 다른 언어-문화권(language-culture) 집단의 구성원과 마찬가지이다. 유사성을 인식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두 그룹이 다 옳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한다. 문화와 그 발달에 적용될 때 그런 입장은 상대성을 띠게 된다. 그러나 과학에 적용되는 경우 그것은 그렇게 않을 수도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그것에 대한 비판 세력이 보는 데 실패했던 관점에서 보면 단순한 상대주의(mere relative)로부터는 거리가 멀다. 나는 하나의 그룹으로서 또는 그룹들 속에서  볼 때, 발전된 과학의 종사자들은 근본적으로 수수께끼-푸는 사람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론-채택의 시기에서 그들이 전개하는 가치관은 그들 연구의 다른 국면으로부터 유도되기는 하지만, 자연에 의해 주어지는 수수께끼를 설정하고 풀이하는 증명된 능력은 가치 상충의 경우에서, 과학자 그룹의 대다수 구성원에게 가장 뚜렷한 기준이 된다. 다른 어느 가치와도 마찬가지로 수수께끼-풀이 능력은 적용에서 모호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것을 공유하는 두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 활용으로부터 이끌어내는 판단에서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을 탁월하게 만드는 어느 과학자 사회의 행위는 그렇게 않은 사회의 것과는 전혀 딴판이 될 것이다. 나는 과학에서 수수께끼-푸는 능력에 부여되는 높은 가치는 다음과 같은 필연적 결과를 낳는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원초적인 자연철학과 수공업에서의 그들의 공통된 원점으로부터 출발해서 현대 과학 전문분야로의 발전을 나타내는 진화의 계통수를 상상해 보라. 기둥으로부터 어느 가지의 끝까지 결코 접히지 않는 그 계도를 따라 그려진 선은 후예에 의해 연결되는 이론의 계통을 추적하게 될 것이다. 그 이론들의 원점 근처에 너무 가깝지는 않은 점들을 골라 어느 두 가지 이론을 고려해 보면, 별 상관없는 관찰자라도 보다 최신 이론으로부터 그 이전의 것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의 항목을 고안하기가 쉬워질 것이다. 가장 유용한 것들 가운데 몇을 들어보자. 예측, 특히 정량적 추론의 정확성, 비전과 일상적인 주제 사이의 균형, 그리고 해결된 다수의 상이한 문제의 수이다. 이것들은 과학 활동에서 역시 중요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목적에 덜 활용되는 것으로는 단순성, 전망 그리고 다른 전공과의 조화 등의 가치들이 존재할 것이다. 그런 항목들은 아직은 필수적인 것들은 아니지만, 나는 그것들이 완결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만일 완결된다면 그 다음 과학의 발전은, 생물학적 진보와 마찬가지로, 그 방향이 하나이며 비가역적인 과정이 된다. 그 이후의 과학 이론들은 그것들의 적용되는 흔히 상당한 차이가 나는 환경에서 수수께끼를 푸는 데 이전의 것들보다 더 좋은 이론이 된다. 이는 상대주의자의 입장이 아니며, 그것은 내가 과학의 진보를 확신하는 신봉자라는 의미를 드러낸다.

그러나 과학철학자와 일반인 양쪽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진보의 개념과 비교해 보면, 이 입장은 핵심 요소를 결여하고 있다. 하나의 과학 이론이 보통 그 먼저 것들보다 우수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수수께끼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보다 나은 도구라는 것뿐만 아니라, 어느 방식으로든 자연이 참으로 어떤 것인가를 더 잘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의미에서이다. 자주 듣는 말로서, 연속되어 이어지는 이론들은 갈수록 진리에 더욱 근접하거나 또는 진리에 점점 더 가깝게 근사적으로 된다고 한다. 명백히 이와 같은 일반화는 수수께끼-풀이와 이론으로부터 유도된 구체적 예측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존재론(ontology)에 관한 것이고, 그 이론이 어떠한 실재 (entity)로 자연을 채우는가, 그리고 '참으로 거기에 (really there)' 무엇이 존재하는가 사이에서의 조화에 관한 것이다.

아마도 전체 이론에 적용되는 '진리'의 개념을 구하는데 그 밖의 다른 방식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방식은 그런 구실을 못할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참으로 거기에'와 같은 어구를 재구성하는 방법으로서 이론과 무관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어느 이론의 존재론과 자연에서의 그 '실제(real)' 대응물 사이의 부합이라는 개념은, 이제 나에게는 원칙적으로 착각하기 쉬운 성격으로 여겨진다. 더욱이 과학사학자로서 나는 그 견해의 비개연성에 감명을 받고 있다. 이를테면 나는 뉴턴의 역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보완하고,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수수께끼-풀이의 도구로서 뉴턴의 이론을 향상시킨 젓에 대해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의 승계에서 존재론적 진전의 시종일관된 방향성을 볼 수가 없다. 그 반대로, 그렇다고 전체가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몇 가지 중요한 관점에서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에 더 가까운데, 이는 아인슈타인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뉴턴이론에 근접한 것보다는 더 가깝다. 이런 입장을 상대주의로서 묘사하려는 유혹은 이해할 만한 것이긴 하지만, 나에게는 그 표현은 틀린 것으로 보인다. 바꿔 말해서, 만일 그 입장이 상대주의(relativism)이라면, 나는 상대론자(relativist)가 과학의 본질과 발전에 관해 설명하는 데 요구되는 그 어떤 것을 잃는다고 볼 수가 없다.

 

 

7. 과학의 성격(The Nature of Science)

 

이제 나의 초판의 원문에 대해 빈발하는 두 가지 반응을 간단히 논의하는 것으로 끝을 맺으려고 한다. 첫 번째 것은 비판적이고 두 번째 것은 호의적 반응인데, 나의 생각으로는 둘 중 어느 것도 완전히 맞지는 않는 것 같다. 이 두 가지는 지금까지 계속 얘기해 왔던 것에 관계되지도 않고 또한 상호간에 연관되지도 않지만, 두 가지 반응이 다 상당히 널리 퍼져 있으므로 적어도 얼마만큼은 나의 반응을 요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초판을 읽은 몇몇의 독자들은, 내가 서술적(descriptive) 그리고 규범적(normative) 양식의 사이에서 되풀이해서 왔다갔다하는 것에 주목했을 것이다. 그런 이행은 특히 '그러나 그것은 과학자가 하는 일이 아니다'로 시작되어 '과학자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끝나는, 자주 쓰여진 문장에서 두드러졌다. 어떤 비평에서는 내가 서술(description)을 처방(prescription)과 혼동하고 있어, 다음의 유서 깊은 철학적 명제를 위배했다고 비판한다. '이다'는 -이어야 한다'를 의미할 수는 없다.('Is' cannot imply 'ought').43)

실제로 그 명제는 상투어처럼 되어 버려서, 이제는 어디에서도 더 이상 존중되는 원칙이 되지 못한다. 당대의 많은 철학자가 규범적인 것과 서술적인 것이 구별되지 못하도록 혼합된 중요한 문맥들을 찾아내었다.44) '이다'와 '-이어야 한다' 는, 그 동안 여겨졌던 것처럼, 항상 별개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내 입장이 이런 국면에 대해 혼동된 듯 싶었던 것을 밝히는 데 현대 언어 철학의 미묘함에 의지할 필요는 없다. 이 책의 앞부분에서는 과학의 성격에 대한 관점 또는 이론을 제시했는데, 과학의 다른 철학사상과 마찬가지로, 이론은 과학자의 활동이 성공적일 경우 과학자들이 마땅히 행동해야 하는 방식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그것은 반드시 어느 다른 이론보다 좀더 옳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반드시 어느 다른 이론보다 좀더 옳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반복되는 '-이어야 한다'와 '-임이 당연하다'에 대한 합법적인 근거를 제공한다. 바꿔 말해서 그 이론을 신중하게 다루려는 일련의 이유는 그들의 방법을 개발해 왔고 그들의 성공을 위해 선택해 왔던 과학자들이 실제는 이 이론이 그들에게 해야 할 것을 시키는 대로 행동한다는 점이다. 나의 서술적 일반화는 그 이론에 대한 증거인데, 그 이유는 이 일반화도 역시 이론으로부터 유도될 수 있기 때문이며, 한편으로 과학의 본질에 대한 다른 견해에 대해 이 일반화는 비정상적 거동을 조성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논증의 순환성은 결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논의의 대상이 되는 이 관점의 논리적 결과들은 당초 그 견해가 거기에 쏠렸던 관찰들에 의해 종결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되기 이전에도, 나는 그것이 제시하는 이론의 일부가 과학적 행동과 과학 발전의 탐구에 유용한 도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후기와 초판의 비교는 그것이 그런 역할을 지속해 왔다는 것을 시사 할 것이다. 단순히 순환성의 견해가 그런 지침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이 책에 대한 마지막 한 가지 반응에 대하여, 나의 대답은 좀 다른 유형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이 책에서 반가움과 만족스러움을 느낀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던 까닭은 이 책이 과학에 대해 밝히는 것보다는 과학 이외의 많은 여타 분야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서 이 책의 주요 명제들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며, 그 입장을 확장시키려는 그들의 시도를 위축시키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의아하게 하는 면이 있다. 이 책이 과학의 발전을 비축적인 단절들에 의해서 매듭지어지는 전통에 묶인 시대의 연속으로서 묘사하고 있는 한에서는, 그 명제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광범위하게 적용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당연히 그래야 하는 이유는 그 주제들이 다른 분야들로부터 빌어 온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 음악, 미술, 정치 발전, 그리고 다른 여러 인간 활동을 연구하는 사가들은 오랫동안에 걸쳐 그들의 주제를 같은 방식으로 서술해 왔다. 형식, 취향, 그리고 제도적 장치에서의 혁명적인 단절로 나뉘어진 시대 구분은 그들의 표준적 수단 가운데 군림해 왔다. 만일 내가 이러한 개념들에 관하여 처음으로 발상한 것이라면, 이는 주로 그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발달한다는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져 왔던 과학에 적용함으로서 이루어졌다고 본다. 그리고 구체적 성취, 표준예로서의 패러다임의 개념은 이차적인 공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예컨대 미술에서의 양식 개념을 둘러싼 말썽 많은 난점들은, 만일 회화가 어떤 추상적인 양식 규범에 따라 제작된다기보다는 서로서로 본을 따서 완성된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면 사라질 것이라 생각된다.45)

그러나 이 책은 또한 다른 유형의 요점을 밝히고자 하는데, 그것은 이 책의 많은 독자들에게 잘 드러나 보이지 않았던 측면이다. 과학의 발전은 흔히 그렇게 여겨 왔던 것보다 더 가깝게 다른 분야에서의 발전을 닮을 수 있으면서도, 또한 전혀 다르기도 하다. 이를테면 과학이 적어도 그 발전에서 어느 시점 이후의 다른 분야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방식으로 발전했다고 말하는 것은, 발전 그 자체가 무엇이든 간에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책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그 차이들을 검토하고 그 차이들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발전된 과학에서 서로 경쟁하는 학파들이 없다거나 또는 상당히 드물다.(이제 나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 같다)는 것에 대해 위에서 반복하여 강조한 것을 생각해 보라. 또는 어느 주어진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이 유일한 청중이고 그 사회의 연구에 대한 유일한 심판자가 되는 정도에 대해 다룬 나의 표현을 상기해 보라. 또는 과학 교육의 특이한 성격에 관해서, 목적으로서의 수수께끼-풀이에 관해서, 그리고 과학자 그룹이 위기와 결단이 시기에서 전개하는 가치체계에 관해서 다시 생각해 보라. 이 책은 이와 똑같은 유형의 다른 특징들을 드러내 보이는데, 그 중 어느 것도 과학에만 독특한 것일 필요는 없으나, 과학 활동을 구별짓는데 연관되고 있다.

과학의 이 모든 특징에 관해 아직도 알아내야 할 부분이 대단히 많다. 이 후기의 서두를 과학자 사회의 구조를 연구할 필요성에 대해 강조하는 것에 의해 시작했으므로, 이제 다른 분야에서의 상응하는 집단에 의한 그와 비슷한 연구,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교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을 맺으려고 한다. 과학적이건, 아니건 간에 어느 특정한 사회에서 어떻게 회원을 뽑으며, 어떻게 회원으로 뽑히게 되는가? 그 과정은 어떤 것이며, 그 그룹의 사회화 단계들은 무엇인가? 그 그룹은 그 목적으로서 총체적으로 무엇을 보는가? 그것은 개별적이건 총체적이건 간에, 어떤 탈선까지를 허용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탈선을 어떻게 조정하는가? 과학의 보다 철저한 이해는 이뿐만 아니라 이렇듯 심각하게 필요로 하는 영역은 다시없다. 언어와 마찬가지로, 과학지식은 본래적으로 한 그룹의 공통되는 성질이거나 반면에 아무것도 아닐 수 없다. 이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과학지식을 창출하고 또 사용하는 과학자 그룹들의 고유한 특성을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1) L. K. Nash, "The Origins of Dalton`s Chemical Atomic Theory", Isis XLVII(1956), 101~16.

2) 뉴턴의 견해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 Florian Cajori (ed.), Sir Isaac Newton`s Mathematical Principles of Natural Philosophy and His System of the World (Berkeley, Calif., 1946), p.21. 이 문구는 다음 참고 문헌에 실린 갈릴레오 자신의 논의와 비교되어야 한다. Dialogues concerining Two New Sciences, trans. H. Crew and A. de Salvio (Evanston, (III., 1946), pp. 154~76.

3) T. S. Kuhn, "Robert Boyle and Structural Chemistry in the Seventeenth Century", Isis, XLIII(1952), 26~29.

4) 개연성의 확인 증명 이론에 이르는 주요 경로에 관해 간명하게 추린 것이 다음에 실려 있다. :Ernest Nagel, Principles of the Theory of Probability, Vol. I, No. 6, of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Unified Science, pp. 60~75.

5) K. R. Popper,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New York, 1959), 특히 i-iv장.

6) 휘어진 공간의 개념에 대한 비전문적인 반응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 Philip Frank, Einstein, His Life and Times, trans. and ed. G. Rosen and S. Kusaka(New York, 1947),pp.142~46. 유클리드 공간 내에서의 일반 상대성의 증가를 보존하려는 시도 가운데 몇 가지는 다음에 실려 있다. C. Nordmann, Einstein and the Universe, trans. J. McCabe(New York, 1922), chap. ix.

7) T. S. Kuhn, The Copernican Revolution (Cambridge, Mass., 1957), chaps. iii, iv, and vii. 태양 중심설이 철저히 천문학적 주제 이상이었던 내용이 이 책의 전반적인 테마이다.

8) Max Jammer, Concepts of Space (Cambridge, Mass., 1954), pp. 118~24.

9) I. B. Cohen, Franklin and Newton : An Inquiry into Speculative Newtonian Experimental Science and Franklin`s Work in Electricity as an Example Thereof (Philadelphia, 1956), pp.93~94.

10) Charles Darwin, On the Origin of Species... (authorized edition from 6th English ed. ;New York, 1889), II, 295~96.

11) Max Planck, Scientific Autobiography and Other Papers, trans. F. Gaynor (New York, 1949). pp. 33~34.

12) 케플러의 사고에서 태양숭배사상이 어떤 구실을 했는가는 다음 책에 실려 있다. E. A. Burtt, The Metaphysical Foundations of Modern Physical Science(rev. ed. ;New York, 1932), pp.44~49.

13) 명서의 역할에 대해서는 다음을 고려해 보라: 레일레이 경(Lord Rayleigh)은 그의 명성이 확고해진 시기에 전기역학의 몇몇 패러독스에 관한 논문을 British Association 에 제출하였다. 논문이 처음 제출되었을 때, 자칫 실수로 그의 이름이 빠져 버렸고, 그 논문은 처음에는 어떤 "역설가(paradoxer)" 의 연구라 하여 거부되었다. 그 후 얼마 안 가서, 저자의 이름이 삽입되자, 그 논문은 톡톡히 사과를 받으면서 기꺼이 수락되었다.〔R. J. Strutt, 4th Baron Rayleigh, John William Strutt, Third Baron Rayleigh (New York, 1924), p. 228〕.

14) 양자론에 의해 발생된 문제들에 관해서는 F. Reiche, The Quantum Theory (London, 1922), chaps. ii, vi-ix을 보라. 이 문단에서의 다른 사례들에 대해서는 XII절 앞 부분의 주 참조.

15) Kuhn, op. cit., pp. 219~25.

16) E. T. Whittaker, A History of the Theories of Aether and Electricity, I(2nd ed.;London, 1951), p.108.

17) 일반 상대성 이론의 전개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 :ibid., II(1953), 151~80. 그 이론이 수성의 근일점의 운동에 대한 관찰과 꼭 들어맞았을 때 아인슈타인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는 다음 참고문헌에서 인용한 편지에 실려 있다:P. A. Schilpp(ed), Albert Einstein, Philosopher-Scientist (Evanston, III., 1949), p. 101.

18) 기하학적으로 코페르니쿠스의 것과 완전히 동일했던 브라헤의 체계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J. L. E. Dreyer, A History of Astronomy from Thales to Kepler(2nd ed. : New York, 1953), pp. 359~71. 플로지스톤 이론의 최종안과 그 성공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J. R. Partington and D. Micke, "Historical Studies of the Phlogiston Theory", Annals of Science, IV(1937), 113~49.

19) 수소에 의해 제기된 문제에 대해서는 J. R. Partington, A Short History of Chemistry(2d ed.; London 1951), p. 134를 참조. 일산화탄소에 대해서는 H. Kopp, Geschichte der Chemie, III(Braunschweig, 1845), 294~96을 보라.

20) E. H. Combrich, Art and Illusion: A Study in th Psychology of Pictorial Representation (New York, 1960), pp .11~12.

21) bid., p.97; and Giorgido de Santillana, "The Role of Art in the Scientific Renaissance," in Critical Problems in the History of Science, ed. M. Clagett(Madison, Wis.,1959), pp. 33~65.

22) 과학사학자들은 유난히 충격적인 형태로 이런 맹목성에 직면하는 수가 많다. 과학 분야로부터 과학사로 넘어오는 학생 집단은 언제나 그들에게 있어 가장 가르칠 만한 대상이다. 그러나 또한 통상적으로 처음에는 가장 난처한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과학도들은 '정답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옛날 과학을 그 당시의 맥락에서 분석하게 하는 일이 각별히 어렵기 때문이다.

23) Loren Eiselley, Darwin`s Century : Evolution and the Men Who Discovered It (New York, 1958), chaps. ii, iv-v.

24) 다윈 학파가 이 문제와 투쟁한 유명한 얘기를 특히 예리하게 파헤친 것이 A. Hunter Dupree, Asa Gray,1810~1888(Cambridge, Mass., 1959), pp. 295~306, 355~83에 실려 있다.

25) 이 후기를 처음 준비하게 되 것은 한때 내 학생이자 오랜 친구인 동경 대학의 나카야마 시게루 박사가 이 책의 일본어 번역판에 후기를 넣자고 한 제안 덕분이었다. 나는 그의 아이디어와 아울러 그것의 결실을 기다려 준 인내에 감사하며, 또한 이 후기를 감사하며, 또한 이 후기를 영어판에 싣게 해 준 것에 감사한다.

26) 이 수정판에서 나는 체계적인 재집필을 시도하지는 않았고, 몇 개의 오자를 고친 것 이외에 골라 낼 수 있는 잘못을 범한 두 문구만을 수정하는데 그쳤다. 그것들 중 하나는 pp.50~58에 나온 18세기 역학의 발달에서 뉴턴의 '프린키피아(Principia)'의 역할을 설명한 부분이다. 또 하나는 pp.129~130에서 위기에 대한 반응에 관한 고찰이다.

27) 내가 최근에 쓴 에세이 두 가지에는 또 다른 증거가 나타날 것이다: "Reflection on My Critics", in Imre Lakatos and Alan Musgrave(ed.), Criticism and the Growth of Knowledge(Cambridge, 1970) "Second Thoughts on Paradigms", in Frederick Suppe(ed.), The Structure of Scientific Theories(Urbana, Ill., 1970 or 1971), 다음부터는 위의 에세이 중 첫 번째 것은 "Reflections"라 약칭하고, 그것이 실린 책은 "Growth of Knowledge" 라 표시하기로 한다. 두 번째 에세이는 "Second Thoughts"라 부르기로 한다.

28) 내가 패러다임을 최초로 제안한 것에 대해 특히 수긍이 가도록 비판한 내용에 대하여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Margaret Masterman, "The Nature of a Paradigm", in Growth of Knowledge :Dudley Shaper,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Philosophical Review, LXXIII(1964), 383~94.

29) W. O. Hagstrom, The Scientific Community (New York, 1965), chaps. iv and v; D. J. Price and D. de B. Beaver, "Collaboration in an Invisible College." American Psychologist, XXI (1996), 101~118; Diana Crane, "Social Structure in a Group of Scientists: A Test of the 'Invisible College' Hypothesis", American Sociological Review.XXXIV(1969), 335-52; N.N. Mullins, Social Networks among Biological Scientists, (Ph, D, diss., Harvard University, 1966), and "The Micro-Structure of an Invisible College: The Phage Group" (1968년 보스턴에서 열린 American Sociological Association 연례 회의에서 발표된 논문).

30) Eugene Garfield, The Use of Citation Data in Writing the History of Science (Philadephia: Institute of Scientific Information, 1964); M. M. Kessler, "Comparison of the Results of Bibliographic Coupling and Analytic Subject Indexing", American Documentation, XVI (1965), 510~15.

31) Masterman, op. cit.

32) 이 에피소드의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T. M. Brown, "The Electric Current in Early Nineteenth-Century French Physics", Historical Studies in the Physical Sciences, I 1969), 61~103, and Morton Schagrin, "Resistance to Ohm`s Law", American Journal of Physics, XXI(1963), 536~47.

33) 특히 다음을 참조하라. Dudley Shapere, "Meaning and Scientific Change", in Mind and Cosmos : Essays in Contemporary Science and Philosophy, The University of Pittsburgh Series in the Philosophy of Science, III(Pittsburgh, 1966), 41-85; Israel Scheffler, Scinece and Subjectivity(New York, 1967); the essays of Sir Karl Popper and Imre Lakatos in Growth of Knowledge.

34) XII 절 첫머리의 논의 참조.

35) 이 보기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Rene Dugas, A History of Mechanics, trans. J. R. Maddox(Neuchatel, 1955), pp. 135- 36, 186-93, and Daniel Bernoulli, Hydrodynamica, sive de viribus et motibus fluidorum, commerntariiopus academicum(Strasbourg, 1738), Sec. iii. 18세기 전반에 걸쳐 문제풀이를 다른 것에 본뜸으로써 역학이 발달된 정도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Clifford Truesdell, "Reactions of Late Baroque Mechanis to Success, Conjecture, Error, and Failure in Newton`s Principia", Texas Quarterly, X (1967), 238~58.

36) 이 주제에 대한 자료는 "Second Thoughts"에 실려 있다.

37) 만일 모든 법칙이 뉴턴의 법칙과 같고 모든 규칙이 십계명 같았더라면, 이런 점은 밝혀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경우라면 '법칙을 깨뜨린다'는 말은 난센스일 것이며, 규칙의 거부는 법칙에 의해 다스려지지 않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교통 법규와 그 비슷한 여러 법칙은 깨어질 수 있어서 이 문제는 쉽게 혼동을 일으킨다.

38) "Second Thoughts"의 독자를 위해, 다음의 숨은 얘기가 도움이 될 것이다. 자연계의 과의 구성요소들을 곧바로 알아 맞추는 가능성은 신경처리 과정 뒤에, 구별하려 하는 과들 사이에 비어 있는 지각력의 공간이 있느냐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 거위로부터 백조에 이르는 범위의 물새에 대하여 감지되는 연속성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구별하기 위해 특수한 기준을 도입해야만 할 것이다. 관찰할 수 없는 실체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요지가 성립된다면, 그 다음에는 경우에 따라 상당히 달라질, 몇 가지 안 되는 기준으로 하는 한 벌의 규칙이 없더라도 그러하다. 그런 요점은 더 중요할지도 모르는 개연성의 필연적 결과를 제시한다. 이론적 실체는 치환에 의해서 어느 이론의 존재론으로부터 제거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규칙들이 없게 되면, 이런 실체들은 제거할 수 없다. 다음 단계로 그 이론은 그런 실체들의 존재를 요구한다.

39) 이에 수반되는 주안점은 "Reflections"의 v절과 vi절 참조.

40) '주 9)'와 "Growth of Knowledge"에 Stephen Toulmin 이 쓴 에세이.

41) 번역에 관련된 국면은 대부분 이미 고전이 된 자료인 W. V. O. Quine, Word and Object(Cambridge, Mass., and New York, 1960), i장과 ii장에 수록. 그러나 콰인은 같은 자극을 받는 두 사람은 같은 감각을 가져야 한다고 가정하는 것 같다. 따라서 그는 번역자가 번역하려는 언어가 적용되는 세계를 서술할 수 있어야 하는 범위에 관해 거의 말할 것이 없다. E. A. Nida, "Linguistics and Ethnology in Translation Problems", in Del Hymes(ed.), Language and Culture in Society (New York, 1964), pp.790~97 참조.

42) Shaper,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and Popper in Growth of Knowledge.

43) 여러 가지 보기 가운데 하나는 "Growth of Knowledge"에 실린 P. K. Feyerabend의 논문이다.

44) Stanley Cavell, Must We Mean What We Say? (N. Y., 1969), chap. i.

45) 과학에 대하여 무엇이 그렇게 특별한가를 보다 확장시켜 논의한 것뿐만 아니라 이점에 관하여는 다음을 참조하라. T. S. Kuhn, "Comment(0n the Relation of Science and Arts)", Comparative Studies in Philosophy and History, XI(1969), 403~12.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