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심부름꾼 소년(By Courier)
사랑의 심부름꾼 소년(By Courier)
O Henry
공원에 사람들로 붐빌 그런 계절도 그런 시간도 아니었다.
근데 지금 웬 낯선 여인네 한 분이 공원 내부 길을 따라 들어서더니 길가 한쪽 편에 난 기다란 의자 하나로 가 앉는다.
모든 게 가느다란 충동을 일으키는 한낮이었다.
그 충동에 못 이겨 다가오듯 그냥 스쳐 지나가려는 나른한 봄기운을 미리 온몸으로 체득해보고 싶은 여망에 잠시 이 여성은 시간을 내 공원 벤치로 가 앉은 듯 보였다.
아가씨는 그렇게 자리에 앉자마자 애수를 띤 멍한 얼굴로 생각에 잠기기 시작해 고요한 듯 아닌 듯하게 자신만의 명상에 잠겨 든 듯 보였다.
그때 새침한 과거의 기억 하나가 새삼 이 봄기운이 여미는 틈 사이로 그녀 곁에 들어왔던지 그녀의 안색이 불현듯 잠깐의 침울한 동요 한 줄기로 요동치는가 싶었다.
그렇지만 원체 젊은 라인의 바디 연장선상에 놓인 그녀인지라 두 뺨의 윤곽선의 견실함 마저 지울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침울함이 여성 특유의 두툼한 매력적 입술 라인의 섹시한 곡선 라인을 훼손할 정도도 못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토록 한 창 때였다.
그때 그녀가 앉은 공원 속 긴 의자의 통행 길 가까이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웬 낯선 젊은이의 걸음이 하나가 보인다.
그는 키가 제법 큼직한 젊은 사내로 자기 뒤로 심부름꾼 소년 하나를 대동하고 이리로 오고 있었는데, 그 심부름꾼 소년이 그 젊은이의 여행용 가방을 하나 끌고 오는 구조였다.
그때 맞은편 긴 의자에서 명상에 잠겨 있던 좀 전의 아가씨의 얼굴을 본 사내의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다 못해 금새 새파랗게 변해 창백해져 보이기까지 한다.
얼굴에 동요와 갈등이 가득한 데도 그 젊은이는 그녀의 안색부터 살폈고 좀 더 다가가 보고 싶은 듯 보였다.
그렇지만 이내 수치심이 들었던지 포기한 건지 그녀가 앉아 있던 긴 벤치와는 몇 미터 더 떨어진 다른 긴 의자로 가 앉기 위해 그 자리를 지나쳐 버리는 듯 보였다.
그녀가 그런 그이를 보았다는 증거도 아무 데도 없었다.
그이가 아니더라도 공원 내부의 그 주변 인기척 어느 누구도 그녀가 느꼈다는 증거 또한 아무것도 없다.
50야드쯤 더 걸어왔을 때, 젊은이가 불현듯 멈추더니 한쪽 편 공원 긴 벤치에 가 대뜸 앉고 본다.
심부름 소년도 그 긴 벤치 근방에 여행용 가방을 내려놓곤 ‘이 분이 지금 갑자기 왜 이러시나?’ 싶었던지 허무맹랑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젊은이는 손수건을 꺼내 좀 전 아가씨를 본 이후부터 연신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이마에서 닦아내느라 여념이 없는 와중이다.
좋은 손수건이었다.
그 손수건이 가 닿는 그 젊은이의 이마도 이 자가 보통 박식한 자가 아님을 한눈에 다 보여주고 있었다.
보통 웬만한 수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지금부터 대뜸 심부름하던 소년에게 농을 던지기 시작한다.
“너 저기 저 벤치에 앉아 계신 어느 젊은 아가씨 한 분에게 이 메시지 좀 전해줄래. 그녀에게 ‘여기 내가 지금 막 기차역으로 가려던 참이었다’고만 전해줘. ‘지금 막 샌프란시스코’로 떠나려던 참이었다고 말이다. 거기서 곧바로 ‘알래스카로 넘어가는 대로 알래스카에 사는 뿔이 큰 사슴 ‘말코손바닥사슴’의 일종인 ‘무스’를 사냥하러 떠날 예정인 어느 탐험대의 일원으로 합류할 예정이었다’고 전달해줘. 그러니 넌 그녀에게 이렇게만 전달해주면 된단다. ‘당신이 말을 걸지 말래서 평생토록 말을 걸지 않을 참이었으며, 당신이 편지도 보내지 말래서 평생토록 글 한 통도 안 써 보낼 참이었노라’고만. 단지 이렇게만 전해주면 돼. 그러니 이렇게 덧붙이는 것도 잊지 말고. ‘순순히 당신의 고뇌하는 판단을 받아들이며 답변만 학수고대 기다리고 있노라고’라고만. 그러니 ‘부디 그녀의 안전을 바래왔노라고만...’ 전해줄래. 그리고 이 마지막 말을 꼭 덧붙이는 걸 잊지 말고. ‘그 어떤 처분과 분부에도 당신으로부터 제가 하염없는 경멸과 비난을 받는 것에 대해 모든 걸 다 순순히 용인하고 인내하면서도, 다만 이 하나, 이 하나만큼만은 더 말씀드리고 싶었노라’고만 전해줘. 그리곤 ‘제가 왜 그런 처분을 학수고대하던 당신으로부터 받게 되었는지 난 다만 그 한 마디 설명 하나만 말씀 한 줄만 이유 한 개만 엿들을 수 있는 자그마한 용기마저 낼 수 없는 나약한 자여야만 하는 건지? 떠나오신 지금이라도 제게 다 들려줄 순 없으신 겐지?’ ‘그녀가 분에 겨워 내게 내리신 가당치도 않은 평생 그분께로의 접근금지 명령의 처분을 내가 방금 막 위배하였다손 치더라도 좋으니 부디 다만 한 번만 더 생각해주실 순 없으신 건지... 그 처분을 한 차례만 더 가다듬어주실 순 없으시겠는지...’ 그러니 넌 가서 이렇게만 전해주면 돼, 심부름꾼 소년아. ‘그 조치를 다시 생각해봐 주실 수 있으신 건지...’하고 말이다.”
그와 함께 그 똑똑해 보이는 젊은이는 이제부터 심부름을 하게 될 이 소년의 손에 넌지시 50센트짜리 동전 한 닢도 같이 쥐어 주는 것으로 자신의 심부름에 대한 독특한 대가를 지불하는 예의도 잊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이 생뚱맞은 길고 난해한 말투와 메시지 내용에 어안이 벙벙해져 기분이 잔뜩 상해진 소년이 대뜸 자신의 손에 쥐어 주는 이 젊은이의 50센트짜리 동전 한 닢에 그만 기분까지 다 환해져 ‘이게 뭔 횡재냐!’ 싶었지만 그래도 방금 젊은이의 넋두리가 하도 어이없어 ‘이게 대체 뭔 소린가?’ 싶어 잠시 영문도 몰라 뜸 들이다 대뜸, ‘이게 사랑의 심부름꾼 전달자에게 전해진 당사자의 메시지’란 걸 깨닫곤 그제야 쏜살같이 내달리기 시작한다.
웬 낯선 심부름꾼 소년 하나가 자신에게로 허겁지겁 뛰어와 멈추었는데도, 이 아가씬 안색에 한 치의 동요도 없다.
심부름꾼 소년이, 머리 뒤로 잠깐 슬쩍 걸치기만 한, 사각형 격자무늬 패턴이 있는 자전거 탈 때 전용으로 쓰는 낡은모자의 테두리만 손가락 끝으로 말뚱말뚱 매만지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심부름꾼 소년을 냉담히 바라보긴 했어도, 지금 이 아가씨의 두 눈엔 어떤 사념의 편견 따위는 아직 없는 듯 보였다.
“어머 아가씨,”라며 심부름꾼 소년이 생뚱맞은 지방 사투리(스페인 국적의 말투)가 꼬랑꼬랑 섞인 엉터리 영어 단어의 말투로 쓸데없는 망발까지 해가며 얘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문장 첫 부분마다 무조건 스페인 사람의 말투가 가득 섞인 말투로 시작했다가 문장 끝은 영어로 마무리 짓는 말투로 하는 대사들. 진짜 스페인 사투리가 아니라 이 단편소설의 저자인 오 헨리가 지어낸 가상의 스페인 사투리임) ‘조기’(거기) ‘조’(저) 벤치에 지금 막 앉아계신 웬 ‘샘뚱그레’(훤칠하게) 잘생긴 총각 한 분이 제게 동전 한 닢을 쥐어 주며 아리따운 당신께 ‘오메(어머) 아가씨!’란 노래 한 소절과 댄스 공연에 올릴 법한 한 토막의 율동 하나를 선물로 보내왔사옵니다. 만약 아가씨께서 저분을 생전 처음 보는 사내라 여기시면 그냥 ‘웬 허벌레한(시답지 않은) 놈’ 하나가 제게 미친 짓 하나 시킨 거라 여기시고 방금 제 말은 유념치 말아 주시고 지금 당장에라도 저를 다시 시켜 뉴욕 경찰관 나리 한 분이라도 지금 당장 여기로 불러오게 심부름을 보내주시옵소서. 그럼 내 3분 만에 경찰분 한 분을 당장에라도 대동하고 다시 나타나 드리리오다. 다만 얼굴을 조금 아는 약간 정도의 사이시라면, 저 연정에 취한 아저씨께서 지금 막 당신께 전달해드리라는 이 허풍 덩어리 열기구 한 ‘소타리’(묶음)를 제가 이제부터 좀 과장되게시리 풀어드려도 괜찮으시련지요.”
그 젊은 여인의 얼굴에 지금 막 살짝 가벼운 한 줄기의 흥미 내지는 관심 한 소절이 아주 살짝 얼굴에서부터 새어 나오다 금방 멈춘다.
“노래와 춤이라고!”라며 그녀는 낯선 아이에 대한 좀 전의 경계심을 한 꺼풀 풀어 해치고선 처음으로 말에 세심한 웃음기 하나마저 머금은 채로 말했다. “가령... 남프랑스와 북이탈리아에서 시를 노래로 읊으며 다녔다는 거리의 시인들 얘기를 말하는 거니. 그래 괜찮아... 너를 보냈다는 저 신사분께선 내가 한때나마 익히 잘 알던 분이시거든. 그러니 이 경우엔 바쁘신 경찰관님을 부를 필요까지 없는 거란다. 노래와 춤도 심부름하는 너만 좋다면 선사해줘도 돼. 다만 너무 크게 부르진 말거라. 이 공공장소에서 춤과 노래를 선보였다간 세상 사람 모두의 이목을 한눈에 끌어모으고 말 테니.”
“오,”라며 심부름꾼 소년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그 특유의 억양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어간다. “어련하시겠사옵니까, 아가씨, 단번에 알아들으시네요. (스페인 사투리로 말하는 대사) 네 맞아요, 제가 부여받은 임무는 공개적인 장소에서의 춤과 노래만 말하는 게 아니라, 당신께 말을 걸고 지금부터 할 이 메시지를 전해드리는 일이에요. 저분이 이렇게 덧붙였거든요. ‘그녀에게 가서 전해주련. 내 냉큼 옷 목 부분의 옷깃과 와이셔츠의 소맷부리를 다시 여미고 단번에 차를 한 대 얻어타선 지금 당장에라도 그 염병할 놈의 샌프란시스코(미국 서쪽 캘리포니아주의 도시 이름. 샌프란시스코를 경멸적으로 말하는 말이 원문의 ‘프리스코’라는 단어임)로 꺼져버리고 말 것을 약속드릴 수 있노라’고. 그럼 거기서, ‘저분은 황금광 찾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평생을, 이후 평생을..., 세계적 사금 생산지인 클론다이크로 넘어가 황금일랑은 일절 거들떠도 안 보고서 평생을 캐나다 겨울 시즌을 따라 이동하는 철새들 마냥 사냥만 하며 지낼 것을 지금 당장 맹세해드릴 수 있노라’고. 저분은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답니다. ‘당신이 연애편지도 더는 더 보내지 말라 하시니 보내지 않을 테요. 당신이 정원 담장도 더는 더 넘지 말라 하시니 그러지 않겠노라고’요. 다만 지금 이러는 이유도 ‘그저 아가씨가 다시 한번, 그러니까 딱 다시 한번만 더 생각해주셨음 하고 전하는 게 이유이지 의도된 딴 뜻은 없노라’고요. 저 아저씨 말로는 ‘아가씨께서 나를 과거 한때 스치고 지나간 외딴 사람쯤으로 여기시고 그때 그 잘못된 결정을 차버릴 기회조차도 두 번 다시 내게 건네주지 않더’래요. 또한 저분 말로는, ‘당신이 나란 사람을 완전히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 거만 같다. 대체 왜 그러시는지 한마디 말씀도 남기지 않고’서요.”
이 심부름꾼 소년의 말이 계속되는 동안 깨어난 이 젊은 아가씨의 관심은 그 눈동자에서도 좀체 사그라드는 법이 없었다.
아마도 이는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일 테다.
적어도 서신교환을 엄격히 금지 시킨 그녀의 이 일방적인 구애 차단 방식에 대해, 이런 식으로라도 교묘히 역이용한 지금 공원 저 긴 의자에 앉아 있는 캐나다 겨울 철새만 뒤쫓겠다는 예비 사냥꾼의 무궁무진한 ‘독창성’ 내지는 너무도 잘생긴 젊은 총각의 뻔뻔하다 못한 용맹하고 과감한 ‘호방성’ 내지는 뭐 그런 종류의 일종일 원인이었을 게다.
그녀가 곧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아무도 손질해주지 않아 떼가 타고 흐트러져 한적하니 공원 한가운데에 서 있는 울적하고 절망 가득한 조각상 하나에, 가만히 시선을 가져가더니 고정시킨다.
그러다 그녀가 이 사랑의 심부름꾼 소년에게 이렇게만 넌지시 말문을 전한다.
“가서 그 신사분께 전하려무나. ‘그분께 더는 내 이상적인 상황판단에 대해 또다시 그분께 되풀이해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그분이 더 잘 아실 테니까. ‘내가 지난날 그분과 꿈꾼 게 무엇이었고, 그게 그때까지 얼마나 유효했었는지 여부는 그분이 더 잘 아실 테니깐. 그러니 이 경우엔, 무엇보다 충직한 말과 진심어린 행동이 더 실한 최상의 척도였었겠지... 흔들리지 않을 척도 말이야.’ 그러니 넌 가서 이렇게만 전하려무나. ‘내 마음은 이미 다 정리되었노라’고. ‘내가 그때 그 마지막 결정을 내리던 내 여린 약점마저도 충분히 다 인지하고 내린 결정이었노라’고. ‘그게 바로 내가 그분의 계속된 탄원과 무수한 구실과 변명 어린 말씀에도 일절 귀 기울이지 않으려는 이유일 거라’고. 그게 무엇이든 ‘난 지금이나 그때나 내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이나 마음속의 풍문만으로 그분을 탓하려던 게 아니었음을. 이게 내가 책임이 덜한 이유일 거야.’ 그렇지만 매번 이렇게 ‘내 얘기를 들어달라!’ 말씀하시므로 그렇다면 넌 가서 이렇게만 전해주겠니. 너 가서 이렇게만 전해주련. 그날 저녁 무렵 나는 온실의 뒷문을 통해 ‘월드론 여사’가 주최한 온실 개관 기념 겸 리셉션이 열리던 그때 그 온실에 막 들어섰노라고, 그건 또한 나의 어머니께 드릴 장미꽃 한 송이를 따 가지고 나오기 위함이었노라고. 그렇담 여기서 내가 그날 밤 본 걸 누누이 다 말해야 되겠니. 그분과, 프랑스 여인이셨던 ‘미스 애시버턴 양’이 그분도 아시는 그 ‘핑크빛(분홍빛) 서양협죽도’ 아래서 하셨던 다정한 행동을... 다정히 계신 두 분 참 멋진 회화적 묘사 그림 같더구나. 한 폭의 명화 그림을 배경으로 그 앞에 분장하고서 멈추어선 인물들 마냥 한순간 마치 극적인 정경을 묘사하던 마냥 연출된 활인화 마냥 극적인 데가 있는 정경이었지. 그렇지만 두 분의 그 자세와, 병치... 그리고 그 두 가지 이상을 핑크빛 서양협죽도 아래에서 다정히 담긴 남녀의 ‘병치’... 그렇게 한순간을 그려 놓은 듯 동시에 포착된 모습이라니... 남녀 간의 다정함을 표현하는데 그만한 명명백백한 설득력 있는 증거가 또 어디 있겠니. 그건 지금도 변치 않는 거란다. 그걸 보자마자 난 조용히 장미를 내려놓고선 그 온실을 나왔지... 그와 함께 내 평생의 언약도 무뎌졌고 더는 어머니에게 따 드릴 장미도 필요 없게 된 거란다. 알겠니. 그러니 넌 네 신사분이 너를 시켜 전달해드리라고 한 그 율동과 노래를 그걸 기초한 그 감독님께 가서 조용히 다 돌려주면 되는 거란다.”
“아가씨, 아 근데 지가(제가) 시방(지금) 몹시 부끄럽지만 한 말씀만 더 여쭈어봐도 되나요. 병... 병... 그 병 무엇이라는 말이 대체 지) 무슨 말이랑께요 제가 그걸 어떻게 전달해드리면 되는 거예요, 친절한 아가씨? 병 무엇이라는 단어 말이에요.”
“‘병치’라고 하는 거란다... 왜 있잖니 지나치게 남녀가 가까이 있더라는 말로 이 경우엔 이해하면 되는 거란다... 방금 한 말이 어려우면 ‘대개 두 분이 친근하게 보이더라’는 다른 말로 불러도 돼... 그렇담 ‘다정’이 좋겠네. 아님, 어떤 상상을 지어내기에 너무도 그 상황이 알맞게 톡톡 튀게도 내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으로 와 닿더라고만 이해해줘도 돼. ‘오해’라고 표현해도 괜찮겠네.”
그제야 말뜻을 알아들은 이 심부름꾼 소년은 공원 바닥에 깔린 자그마한 자갈돌들이 사방팔방으로 다 튈 정도로 전속력으로 다리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뛰어 저리로 갔다.
금세 심부름꾼 소년은 아가씨와는 맞은편 저쪽 한쪽 구석의 공원 긴 의자 하나에 가서 서 있는다.
잘생긴 이 청년의 눈은 지금 숨에 겨워하는 심부름꾼 소년이 어떤 메시지를 전달받고 왔는지 심문하듯 눈빛으로 미리 캐보느라 여념이 없었더랬다.
안심하라.
심부름꾼 소년은 지금 개인화된 인격일랑은 온데간데없는 인간미 뚝뚝 떨어지는 비정하고 냉혹한 사랑의 메신저(전달자) 이 한마디 소행을 이행하는 데만 온통 관심이 쏠린 영락없는 소년이었던지라...
청년이 학수고대하는 모습을 본 심부름꾼 소년의 눈에 반짝 하고 불빛이 한 번 튀었다.
“아가씨가 말했어요. 남자들이 접근해와선 빠르고 약삭빠른 과장된 연설로 거들먹거리며 허무맹랑 수작을 걸어오면 거기에 안 넘어갈 웬만한 여자가 없노라고요. 아무리 싫어도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만 확인되면 마음이 물러져 약해지고 쉬이 넘어가기 마련이란 게 여자라고요. 그렇지만 아가씬 이 말씀도 분명히 했어요. 그때 그 온실 안에서, 당신이 웬 아리따운 여자 얼룩말과 붙들려져서는 죽을 둥 살 둥 부둥켜안고 있었던 걸 저 아가씨가 지금 두 눈 시퍼렇게도 똑똑히 다 목격하고 말았노라고요. 온실에서 장미꽃을 한 송이 꺾을 요량으로 잡아당기다 그만 몇 발자국 길옆으로 ‘비틀!’ 비켜서게 되었는데, 아 그만 당신이 그 체코 ‘오데르 강’ 출신이자 현재는 프랑스 국적인 웬 아가씨를 그 아가씨의 뼈가 다 어그러질 정도로 잡아당겨 꽉 끌어안다 못해 그냥 죽을 둥 살 둥 끌어안고 막 뒹굴려던 참이었던 걸 한눈에 다 목격하고 말았노라고요. 아가씨는 또 말했어요. 그때 두 분의 모습이 참 이뻐도 보이더랍니다. 그래서 따던 장미도 내려놓고 그 온실을 조용히 나왔답니다. 말도 없이. 다만 그 길로 즉시 아가씨는 큰병이 나 앓아눕다시피 하고 말았다네요. 따라서 저 예쁜 아가씨 말로는, ‘그러니 당신은 더 이상 이런 바보짓 하지 말고 지금 이 길로 샌프란시스코 기차역으로 가서 그 길로 당장 캐나다로 넘어가 내게서 줄행랑을 치는 게 좋을 듯합니다.’라고 말하네요. 그리고 거기서 죽을 때까지 캐나다 사슴이나 철새나 쫓아다니시며 잘 사시래요.”
아니 근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지금 이건 꺼지라는 말 아닌가...
근데도
지금 이도 저도 아닌 게, 초초하게나마 심부름꾼 소년의 허무맹랑한 말을 다 듣고 있던 이 젊은 남성이 소녀의 대사가 뒤로 갈수록, 웬일로 마음에 평정을 찾고 나직이 휘파람도 불어 보이며 번뜩이는 생각 하나가 도로 났던지라 이내 두 눈에 섬광마저 한 번 번쩍해 보이더니 다음과 같이 행동한다.
그가 곧 자신의 외투 안쪽의 호주머니로 손을 넌지시 가져가더니 이내 곧 두툼한 편지들을 손아귀 한 움큼씩 꺼내 든 것이다.
그 수많은 편지들 중 딱 하나만을 고른 젊은이는 그걸 다시 이 사랑의 심부름꾼 소년에게 드러나지 않게 가만히 건네주며, 그걸 다시 저 아가씨께 전달해주는 조건으로 이 기특한 노고의 심부름 값으로 시도 때도 없이 주던 50센트짜리 동전이 아니라 거금 그래 진짜 지폐인 푸른 1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자신의 조끼에 아주 작게 붙어 있던 호주머니 속에서 별도로 꺼내더니 또 이 심부름꾼 소년의 손에 살그머니 전달해준다.
“저분에게 이 편지를 전해드리려무나,”라며 젊은이가 말한다. “부디 ‘이 편지를 찬찬히 다 읽어보시라’고 말하더라는 말도 덧붙이는 걸 잊지 말고. 그날 상황이 적혀 있는 글이거든. 그러니 넌 이렇게만 전해주면 된단다. ‘그때 그 상황이 이제 막 시작하려던 당신의, 연인에 대한 막연한 기대 하나쯤에 작지만 소중한 진실 한 스푼만 첨가할 수 있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두통거리는 애초에 피할 수 있었겠노라’고. 그러니 넌 ‘아가씨가 그토록 충직하게 여기시던 청년의 충직은 그때나 지금이나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노라고, 오늘까지 오는 도중에 중도에 포기 상태로 된 적도 없었고’ 말이다. 그리고 이 말도 꼭 전해주렴. ‘아가씨의 답변을 간절히 바라고 있겠노라’고.”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는 소년, ‘메신저’는 이제 막 그 아가씨 앞에 서 있게 되었다.
“방금 저 신사분께선 이렇게 말했어요. 애초에 이유 없는 무덤은 없다. 저 신사분은 또 이렇게도 덧붙였어요. 저는 주색잡기에 얼을 올리는 그런 허랑방탕한 나부랭이 놈이 아니었고요. 그리고 아가씨 이 편지 좀 찬찬히 좀 읽어보세요. 내 장담하건대 굉장할 겁니다. 저 아저씨 내면이 좋은 사람입니다. 진짜 남자 같아요, 진짜요.”
그제야 이 아가씨도 지금 이 사랑의 심부름꾼 소년이 건네주는 편지를 꾸깃꾸깃 펼쳐 보기 시작한다.
짤막한 메모 형식의 그 편지엔 두 말 할 것도 없이 그때 그 상황이 소상히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친애하는 저의 아놀드 씨 의사님께,
기쁜 마음으로 이 글을 적게 되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제 자신도 기특합니다.
얼마전도 아닌 지난 금요일 저녁 날 제 딸아이를 두서없게도 애잔하게 도와주셨더군요.
딸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지병인 심장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날 조심하며 외출한다는 것이 그만 갑작스레 또 심장 발작을 일으켰지 뭡니까.
더구나 그날엔 ‘월드론 여사’가 주최한 온실 개관 기념 겸 환영 파티장 참석차 당신도 있던 바로 그 온실 파티에 참석하고 있었고 말입니다.
당신이 바로 그때 그 애 옆에 없었더라면 지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답니다.
만에 하나 당신이 옆에 안 계시어 그 애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을 때 당신이 그 애 옆에서 바로 받아주지 못하였더라면... 아 정말이지 저는 지금도 아찔하답니다.
그럼 만에 하나라도 의사분인 당신의 시기적절한 치료는 더 못 받았을 게 아닙니까.
그랬다가는 저희 부부는 그 불쌍한 아이를 지금 더는 더 이 세상에서 볼 수가 없게 되고 말았겠지요.
기특한 마음으로 다시 한번 제 감사 인사를 이런 간단한 메모 형식으로나마 먼저 전하는 바입니다.
저희 딸아이를 기꺼이 구원해주시고 돌봐주시고 도움이 필요한 시기적절한 때에 그 도움을 적절히 주신 데 못하여 대단히 부합된 의료 조치를 취하여주시어 저희 딸아이를 다시 살려 내신데 대하여 다시 한번 간곡히나마 저희 가족을 대표하여 이렇게나마 먼저 감사 인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당신의 진실된 종이 될,
‘로버트 애시버턴’이 올림.
추신(덧붙이는 말)
제가 급히 글을 먼저 남기는 바람에 이렇게 짧은 메모 형식으로나마 우선 전하게 된 점 간곡히 양해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적절한 시기에 찾아뵙기에 앞서 우선 사례의 말씀만이라도 이렇게 우선 편지로 남기는 것으로 의사 선생님인 당신께 감사 인사를 전하는 바입니다.
편지를 다 읽은 아가씨가 그 메모 형식의 짤막한 편지지를 도로 접어 심부름꾼 소년에게 도로 전달해준다.
“지금 저 신사분께선 지금 답장을 엄청 기다리고 계실 거구만요,”라며 사랑의 심부름꾼 소년이 재차 말한다. “제가 뭐라 전할까요?”
남녀 간의 애정행각으로 오해해 음향과 분노로 온통 뒤죽박죽이 된 자신의 오랜 오해의 터널을 갓 벗어나게 된 이 아가씨가 번뜩 눈을 뜨게 되는데 그 편지는 보통 영향을 미친 게 아님은 분명해 보였다.
왜냐면 아까 전과와도 사뭇 다르게 살며시 입가에 미소까지 머금고선 눈가엔 어느샌가 차곡히 쌓인 촉촉한 이슬을 맺히고서 환하게 그분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저 벤치에 앉아 계신 신사분께 이렇게만 전해줄래,”라며 아가씨가 그 나이대 특유의 겁많은 소심함마저 떨쳐내 버리고선 행복에 못내 겨운 떨리는 어조로 미소 가득 이렇게 말했다. “그분의 아가씨가 지금 여기서 ‘뵙기를 간절히 청하시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