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독수리의 실종(The passing of black eagles)
검은 독수리의 실종(The passing of black eagles)
O Henry
어느 해, 몇 달 동안 걸쳐 사나운 도적이 리오 그랑데 강 연안의 텍사스 국경지대를 마구 휩쓸고 다녔다.
이 악명 높은 약탈자의 얼굴은 쳐다만 보아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었다. 그 특징으로 그는 <국경의 공포, 검은 독수리>라고 불리우고 있었다. 그와 그의 부하들의 소행에 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이 많이 떠돌았다.
그런데 어느 날 <검은 독수리>는 홀연히 이 지상에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그 뒤로 다시는 그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일당들조차 그가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지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주 경계지대의 목장이나 부락에서는 그가 또 언제 말을 타고 나타날는지 몰라 불안에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마 다시는 나타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검은 독수리>의 운명을 밝히고자 나는 이 이야기를 쓰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발단이 된 것은 센트 루이스에 있는 바텐더의 다리였다. 치킨 랏글즈가 공짜로 점심을 얻어먹고 있을 때 바텐더가 재빨리 그것을 꿰뚫은 것이다.
코가 새 주둥이처럼 길고, 게다가 새 요리를 좋아하기 때문에 같은 친구들은 그에게 치킨이라는 별명을 붙이고, 이따금 새 요리를 사주고 있었다.
식사 때 술을 마시는 것이 건강적인 습관이 아니라는 것은 의학상의 일반적인 설이다. 그런데 술집의 위생은 그와는 정반대이다.
치킨은 그 설에 따라 식사에 반드시 따르게 마련인 술을 사지 않았다. 바텐더는 카운터 모서리로 돌아와서 이 분별없는 손님의 귀를 잡아 문 쪽으로 끌고 가서 한길에다 내동댕이쳐 버렸다.
길거리에 나서자 치킨은 겨울이 온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밤공기는 차가 왔고, 하늘에는 별들이 싸늘하게 반짝였으며, 사람들은 두 줄기의 흐름을 이루어 서로 밀쳐가며 귀가를 서두르고 있었다. 모두들 외투를 입고 있어. 그 단추가 잠겨진 조끼 주머니로부터 잔돈을 끌어내기가 몇 배나 힘들어져 있었다. 이제는 예전처럼 남부로 건너갈 시기가 온 것이다.
대여섯 살쯤 되는 사내아이가 과자가게 윈도우를 탐스러운 눈으로 들여다보고 서 있었다. 한쪽 손에 2온스짜리 빈 병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가장자리가 깔쭉깔쭉하고 반짝이는 둥근 은화를 꼭 쥐고 있었다.
이 광경은 치킨의 재능과 용기에 알맞은 작전 계획을 생각해 내게 만들었다. 그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고, 부근에 순찰 중인 경관이 없음을 확인하자 그럴듯하게 먹이에게 말을 걸었다.
낯선 인간이 친절한 듯이 말을 걸어오면, 조심해야 한다고 부모에게 미리 가르침 받고 있는 소년은 쌀쌀하게 받아들였다.
이렇게 되면 행운을 잡기 위해서 때로는 사생결단의 대모험을 해야 한다고 치킨은 생각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밑천이라고는 통틀어 5센트뿐이었는데. 사내아이의 살찐 손에 굳게 쥐어져 있는 것을 빼앗기 위해, 그 5센트를 걸지 않으면 안 된다. 까딱하면 밑천을 날리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완력으로 어린아이에게서 약탈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공포심을 갖고 있었으므로 상대방을 속여 목적을 이루는 방법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년 전 어떤 고원에서 배가 고파 견딜 수 없게 된 그는 혼자 유모차 안에서 놀고 있는 어린애의 우유병을 빼앗은 일이 있었다. 먹을 것을 빼앗긴 어린아이는 즉시 하늘이 꺼질 듯이 큰 소리로 울어 댔으므로 사람들이 달려와, 치킨은 이내 체포되어 삼십 일간이나 유치장 신세를 져야만 했었다. 그 뒤로 그 자신의 말을 빌리건대 ‘어린애는 도무지 질색’인 것이다.
그는 어떤 과자를 좋아하느냐는 질문부터 시작해서 필요한 정보를 조금씩 이끌어냈다. 소년은 들고 있는 병에 진정제를 십 센트어치만 사 오라는 심부름을 나온 것으로, 방금 약국으로 가는 길이었다.
심부름을 시키면서, 그 어머니는 ‘일 달러 은화는 꼭 쥐고 있어야 한다. 중간에 멈춰서서 아무하고나 얘기를 해선 안 된다. 잔돈은 약국 사람한테 종이에 싸서 달라고 해서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어야 한다’라고 타일렀던 모양이다.
정말로 사내아이의 바지에는 주머니가 두 개나 달려있었다. 그리고 소년이 좋아하는 과자는 초콜릿 크림이었던 것이다. 치킨은 과자가게에 들어가 무모한 투기꾼으로 변모했다. 다음의 보다 큰 모험의 준비공작으로 캔디 주(株)에 전 자본을 투입한 것이다.
그는 과자를 사내아이에게 주고, 그 아이가 자신을 경계하는 마음이 없어진 것을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손쉽게 모험 여행의 주도권을 잡아 그를 그가 잘 아는 깨끗한 약국으로 데리고 갔다.
약국에 들어가자 그는 아버지 같은 태도로 일 달러 은화를 소년의 손에서 약사에게 넘겨주고 약을 부탁했다. 소년은 심부름의 책임에서 해방되어 기쁜 듯이 초콜릿을 먹고 있었다.
드디어 투자에 성공한 이 악한은 주머니를 뒤져 어딘가에서 주은 외투 단추를 꺼내어 종이에 잘 싼 다음 거스름돈인 것처럼,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 사내아이의 주머니 속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 사내아이를 집 방향으로 돌려 놓고는, 다정하게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치킨의 마음은 이름 그대로 깃털 달린 동물의 그것 만큼이나 부드러웠다. 이리하여 이 투기꾼은 투자금이 열일곱 배라는 순이익을 올렸던 것이다.
그로부터 두 시간 뒤에 광산철도의 화물열차가 빈 화차를 뒤에 매달고 텍사스를 향해 정거장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 빈 화차 하나에 치킨은 톱밥에 가슴까지 잠겨 편하게 누워 있었다.
그의 옆에는 싸구려 위스키 한 병과 치즈가 들은 봉지가 놓여 있었다. 치킨 랏글즈씨는 이렇게 전용차를 타고 겨울을 나기 위해 남부행을 떠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화차는 수없이 새로 연결되거나 정차하거나 하면서 일주일간 남하를 계속했다. 치킨은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를 때와 같이 꼭 필요한 때를 제외하고는, 줄곧 화물차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는 그 화차가 남부의 목장 지대로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중심지인 산 안토니오가 그의 목적지였다.
그곳은 공기가 상쾌하고 온화한 고장이었다. 주민은 너그럽고 참을성이 있었다. 술집의 바텐더들도 그를 걷어차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식사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같은 식당엘 자주 가더라도 그들은 별로 화를 내지 않고, 입에 밴 욕설이나 퍼부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욕을 할 때도 남부인 특유의 느린 말투로 욕을 하며, 또한 그들은 어휘가 부족하여 말을 멈추는 동안에 실컷 음식을 먹을 수가 있었다.
그곳의 날씨는 언제나 봄과 같았고, 광장은 밤이면 음악이나 축제소동이 있어 항상 즐거웠다. 설령 잠자리가 없더라도 밖에서 기분 좋게 잡을 잘 수가 있었다.
텍서커너에서 그가 탄 화차는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고는 계속 남하하여 오스틴의 콜로라도 다리를 지나 산 안토니오를 향해 화살처럼 달렸다.
화물열차가 그곳에 닿았을 때 치킨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십 분 뒤 열차는 다시금 떠나 종착역 라레드로 향했다. 이 텅 빈 화차는 근처의 목장에서 짐을 싣기 위해 곳곳에 배치되고 있었던 것이다. 치킨이 눈을 떴을 때 화차는 정거 중이었다. 판자 틈으로 달이 밝은 밤이 보였다. 밖으로 기어나가 보니 자기가 탄 화차가 다른 세 칸의 화차와 함께 쓸쓸한 곳에 방치되고 있음을 알았다. 어두운 들판 한가운데에 남겨진 치킨은 보트와 함께 무인도로 올라선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
선로 근처에는 하얀 말뚝이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위쪽에 ‘샌 안 구십(S, A, 90)’이라고 적혀 있었다. 라레드는 아직도 먼 곳에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 일백 마일 사방에 동리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코요테 떼들이 짖기 시작했다. 치킨은 심한 고독감에 엄습되었다. 보스턴에서는 일자무식한 상태에서, 시카고에서는 배짱도 없이, 필라델피아에서는 잠잘 곳도 없이 뉴욕에서는 의지할 만한 연줄 하나 없이, 그리고 피츠버그에서는 술 한잔 마시지 못하고 살아온 그였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외로움을 느껴 본 적은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갑자기 밤의 깊은 적막을 깨뜨리고 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선로의 동쪽에서 들려왔기에 치킨은 그쪽으로 살금살금 탐험을 나섰다. 어렸을 때 책에서 읽은, 이런 초원에 출몰하는 모든 것 –뱀, 들쥐, 산적, 독거미, 카우보이 등- 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괴기하고도 위협적인 모습으로 둥그런 머리를 높이 쳐들고 있는 선인장 덤불을 빙 돌아선 그는 겁에 질린 말 한 마리가 흥흥 콧소리를 내며 요란스럽게 오십 야드쯤 뛰더니 다시 풀을 뜯어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나 그것은 이 무인도 같은 황야에서 치킨이 공포를 느끼지 않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는 농장에서 자랐기 때문에 말을 다루는 일에는 능숙했고. 또한 탈 줄도 알았던 것이다. 그는 말을 어르면서 다가갔다. 말은 처음 놀란 다음부터는 한결 얌전해 보였으며, 치킨은 풀밭에 질질 끌고 다니는 이십 피트가량의 올가미 밧줄을 잡을 수 있었다. 멕시코 목동처럼 그 고삐로 굴레(소나 말을 다루기 위하여 목에서 고삐에 걸쳐 얽어매는 줄)를 만드는데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다음 순간에는 그는 말 등에 올라타 말이 가고 싶은 방향으로 달리게 내버려 두었다.
‘어디건 데려다 줄테지.’
라고 치킨은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달밤의 대초원을 달리기란 평소 몸을 움직이기 싫어하는 치킨에게도 필시 유쾌한 일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런 기분에 잠길 심경은 못되었다. 머리가 아프고, 목이 말라왔다. 게다가 이 운수 좋게 찾아낸 말이 데려다 주는 곳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몹시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 말이 뚜렷한 목표를 향해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초원이 평탄한 곳에서는 말은 동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갔다. 이따금 언덕이 물이 마른 깊은 골짜기나 숲 따위에 방해되어 비록 우회하더라도 이내 다시금 정확한 본능적 방향감각으로 인도되어 다시 제 길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마침내 완만한 언덕 비탈길에 이르자 말은 속도를 늦추어 천천히 걸었다. 문득 보니 돌을 던지면 닿을 정도의 거리에 숲이 있고 멕시코식 움막, 통나무로 지어 진흙으로 벽을 바르고 풀로 지붕을 깐 작은 오두막이 서 있었다.
달빛 속에 오두막 근처의 주변 땅이 양의 발굽으로 밟혀 져 있는 것이 보였다. 갖가지 도구로 마구, 로프, 안장, 양가죽, 사료통, 캠핑용 짚 침대 따위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물통이 오두막 입구에 있었다.
치킨은 말에서 내려 말을 나무에 매달았다. 그리고는 몇 번이나 불러 보았으나. 집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그는 열린 문을 통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성냥을 켜서 테이블 위 램프를 켰다.
잠자리로 필요한 것만을 갖춘 독신용의 집이었다. 치킨은 구석구석을 살펴보다가 마침내 뜻밖의 것을 찾아냈다. 작은 녹색의 항아리로서, 거기에는 그가 마시고 싶어하던 술이 아직 일 쿼터가량 남아있었다.
그로부터 30분 뒤에 치킨은 비틀거리며 그곳에서 나왔다. 그는 자기의 누더기옷 대신 양치기의 옷을 입고 있었다.
긴 구두를 신고 있었고. 걸을 때마다 박차(拍車 말을 탈 때 구두의 뒤축에 다는, 톱니바퀴 모양의 쇠로 만든 물건)가 짤랑거렸다. 허리에는 탄알이 가득 꽂힌 권총띠를 두르고, 좌우 권총집에는 커다란 육 연발 권총이 한 자루씩 들어 있었다.
그는 근처를 돌아다니며 담요나 안장, 고삐를 찾아 그것을 말에 장비했다. 그리고는 다시금 말을 타고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무법자이며 말이나 소같은 가축을 훔치는 도적단인 바드 킹 일당은 후리오 강가에서 야영을 하고 있었다.
리로 그란데 연안에 있어서의 그들의 약탈은 여느 약탈에 비해 그리 대담무쌍한 것은 못되었는데도 차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어, 마침내 큐우 대위(大尉)가 이끄는 삼림경비대가 일당의 토벌에 파견되었다.
그래서 제법 군사(軍師 사령관이나 지휘관 밑에서 군사적 계략이나 작전을 맡은 사람)의 소질이 있는 바드 킹은 법률의 집행자들에게 자취를 남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고, 부하들을 데리고 후리오 협곡으로 들어가서 일시 틀어박혔던 것이다.
이 도피는 참으로 분별이 있는 행동으로서, 이름난 바드 킹의 용명과 조금도 어긋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부하들 사이에서는 불만의 소리가 적지않게 나오고 있었다. 실상 산속에서 이런 잠복 생활을 하고 있는 사이에 그들은 몰래 바드 킹이 과연 지도자로 적당한가를 논하게 된 것이다.
바드의 통솔력이 논의된 것은 이제껏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영광은 이제 새로운 별빛 밑에서 쇠약해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부하들의 감정은 <검은 독수리>라면 좀 더 화려한, 유익한, 탁월한 지도력을 지니고 있다는 의견으로 기울고 있었다.
<국경의 공포>라는 별명을 가진 <검은 독수리>가 일당에 들어온 것은 3개월쯤 전의 일이었다.
일당이 산 미젤 호(湖)에서 야영을 하고 있을 때. 어느 날 밤 말 탄 사나이가 단신으로 찾아왔다. 이 신참자는 보기에 흉측하고 거치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먹이에 덤벼들 듯 비뚤어진 새 주둥이 같은 코가 검은 수염 위에 튀어나와 있고, 눈을 동굴처럼 움푹 패어 있으며, 잔인한 빛을 띄우고 있었다. 박차가 달린 긴 구두에 녹색의 차양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고,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라고는 없었다.
단신으로 바드 킹의 야영지로 찾아 들어올 만한 자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사나이는 마치 맹렬한 새처럼 이들 일당에게 겁 없이 내려와 앉아 먹이를 요구했던 것이다.
대초원 지방에서는 누구에게나 거침없이 식사를 대접하는 풍습이 있다. 설령 적일지라도 그를 쏘기 전에 먼저 식사를 제공해야 한다. 따라서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모르는 이 내방자도 먼저 맛있는 식사를 제공받았다.
사람을 놀라게 하는 괴이한 이야기나 자랑거리를 풍부하게 갖고 있는, 말솜씨께나 있어 보이는 새로서, 가끔 뜻이 통하지 않는 말도 튀어나왔는데. 그것이 오히려 효과적이어서 같은 동료 외의 인간과 접촉한 일이 없는 바드 킹의 부하들 사이에 새로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이 괴이한 내방자의 눈으로 볼 때. 무법자 집단 따위는 어리석은 시골뜨기들의 집단에 불과했다. 이를테면 밥 따위를 얻어먹기 위해 농가 뒤뜰에서 농군들에게 허풍이나 떨고 있는 것 같은 것이었다.
사실 남서부의 악당들은 태도도, 옷차림도 제법 악당다워졌으므로 그가 이 도적의 일당을 피크닉이나 호도따기에 모인 선량한 시골뜨기의 모임으로 잘못 생각했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은 없는 것이다.
상냥한 행동하며, 얌전한 걸음걸이하며, 부드러운 말투에 볼품없는 옷차림 따위, 겉으로 보아 그들이 저질러 온 무서운 범죄행각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는 무엇 하나 없었다.
이 멋지고 낯선 사나이는 이틀 동안 융숭한 대접을 받고 나서 전원일치의 의견으로 도적단의 일당이 되도록 권유를 받았다. 그는 <몬트레서 대위>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등록시켜 준다면 승낙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이름은 즉시 일당에 의해 부결되고, 그 왕성한 식욕에 경의를 나타내어 피고(돼지)라는 애칭이 주어졌다.
이리하여 텍사스 국경은 악당 가운데에서도 가장 지독한 악당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3개월간 여전히 바드 킹이 통솔하고, 경비대와의 충돌을 피하면서 적당한 수확을 올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이들 일당은 목장에서 꽤 많은 말과 훌륭한 소 몇 마리를 훔쳐서, 리오그란데 장을 무사히 건너 팔아 재미를 톡톡히 보았다.
또한 이따금 작은 촌락이나 멕시코인 개척부락을 습격하여 주민을 위협해서 필요한 탄약이나 식량을 빼앗았다. 이런 피를 흘리지 않는 약탈이 되풀이되는 사이에 돼지의 사나운 얼굴과 무서운 목소리는 얌전한 생김의 다른 도적들이 평생 얻지 못할 화려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별명을 붙이는 일에 능숙한 멕시코 인은 처음으로 그를 <검은 독수리>라고 불렀으며. 그들은 갓난아이들을 달랠 때마다 이 무서운 도적이 큰 부리로 아기를 물고 간다는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울음을 그치게 하곤 했던 것이다.
이윽고 이 이름이 퍼져감에 따라 과장된 신문기사나 목장의 소문 따위로 <국경의 공포, 검은 독수리>라고 불리게 되었다.
뉴서스 강에서 리오 그란데 강에 이르는 지역은 기름진 들판으로서, 양이나 소, 말이 목장 지대가 되어 있었다. 태반은 방목으로 주민의 수는 적으며 법의 손이 닿지 않았으므로 피그가 화려하게 날뛰며 그들 도적단을 유명하게 만들 때까지도 그들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뒤 킨네이 대위가 이끄는 경비대가 이 지역에 파견됨에 따라 바드 킹은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보고, 적을 습격하든가 아니면 일시적으로 후퇴하든가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굳이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부하를 데리고 후리오 강가로 후퇴했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부하들 사이에 불만이 생겨 바드 킹에 대한 탄핵 절차와 함께 <검은 독수리>를 그 후계자로 삼아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나게끔 된 것이다.
바드 킹이 이런 눈치를 못 챌 리가 없었다. 그는 그가 가장 믿고 있는 부하 카크터스 테일러를 곁으로 불러 상의했다.
“만일 녀석들이 나로서 만족할 수 없다면, 난 기꺼이 물러앉겠다. 녀석들은 내 방법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난 그 녀석들을 생각해서 킨네이 대위가 경비대를 이끌고 있는 동안만 숨어 있기로 정한 거라구, 사살당하거나 감옥에 처박히는 것에서 구해줬는데 그런 나를 못마땅하다는 거야.”
“사태가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지요.”
카크터스는 설명했다.
“단지 녀석들은 돼지 녀석한테 홀딱 반해 있는 것 뿐이라구요. 그 수염과 독수리 코가 바람을 가르며 앞장서서 달리는 걸 보고 싶어한 것 뿐이란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돼지 녀석, 생각보단 그리 대단한 것 같지 않던데.”
바드 킹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이 말했다.
“난, 아직 녀석이 두드러진 공을 세우는 걸 한 번도 본적이 없어. 딴은 녀석 소리치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을 떨게 할 수가 있고, 모두들 타지 못하는 거치른 말을 탈 수도 있어. 그렇지만 녀석은 아직 한 번도 총을 쏜 일이 없다구, 이봐, 카크터스, 녀석이 일당이 된 뒤로 우리는 한 번도 총질을 하며 싸운 적이 없잖아? 안 그래?
멕시코인 애들을 놀래주거나, 가게 따위를 습격하는 건 물론 잘하지. 강도나 절도를 시키면 천하일품이지만, 막상 총을 쏘는 일에 얼마만큼 공을 세울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평소 큰소리치는 녀석이 막상 총소리를 들으면 얼이 빠지게 마련이지.”
“놈은 결투를 한 적도 있다는 것이고.”
카크터스는 다시금 덧붙였다.
“그자는 안 가 본데가 없다고 허풍 떨고 있습죠.”
“그건 나도 알고 있지.”
바드 킹은 카우보이 특유의 회의적인 투로 말했다.
“그런데도 그 녀석의 말은 석연치 않은 데가 있단 말이야.”
이 밀담은 다른 8명의 동료가 모닥불을 둘러싸고 누워있거나, 저녁을 먹고 있는 동안에 행해졌다. 돼지는 그 만족할 줄 모르는 왕성한 식욕을 억제하면서 묵직한 목소리로 동료들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바드 킹과 카크터스는 이야기를 중단하고 귀를 기울였다.
돼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소나 말 따위를 몇천 마일씩 쫓아다녀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단 말야. 숲이나 가시나무 사이를 뛰어다녀 보라지! 맥주를 통째 마셔도 시원치 않을 만큼 갈증만 나고, 게다가 밥 한술도 못 먹게 될 땐 정말 기막히다구. 만일 내가 우두머리라면, 무얼 할 건지 가르쳐 줄까? 나 같으면 열차를 해치우겠어. 급행열차를 덮쳐 너희들이 한동안 푹 쉴 수 있을 만한 현금을 털겠어. 째째한 일엔 이제 질렸다구, 소도둑 같은 째째한 일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단 말야.”
그 뒤 대표가 바드 킹에게로 왔다. 그리고는 한쪽 다리에 무게를 걸고 바드 킹의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은근히 퇴진을 요구했다.
바드 킹은 그들의 의사에 따라 스스로 물러나기로 했다. 보다 큰 위험과 보다 큰 수확이 그들의 소망인 것이다. 열차 강도라는 돼지의 제안은 그들이 공상을 불태워, 선동자의 용기와 대함에 대한 존경을 더한층 깊게 했다. 그들은 단순 소박한 인습적(因襲的 예전의 풍습, 습관, 예절 따위를 그대로 따르는 것)인 산적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가축을 훔치거나, 어쩌다가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거나, 그런 습관적인 행동의 범위를 넘는 모험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바드 킹은 공평한 입장을 취해 <검은 독수리>가 두목으로서의 시련을 빠져나갈 때까지 부하와 동등한 지위에 만족하기로 동의했다.
열차시간표를 조사하고 그 지방의 지리를 검토하는 등, 수없이 협의를 거친 끝에 새로운 계획을 결행하는 시간과 장소가 결정되었다.
당시 멕시코에서는 식량 기근이 일어나고, 미국 일부에서는 축산물이 극도로 결핍되고 있었던 만큼, 양국 간의 국제 무역은 활발히 행해져. 많은 액수의 현금이 공화국을 잇는 철도에 의해 수송되고 있었다.
습격하기에 안성맞춤인 장소로 의견이 일치한 것은 라레드 북방 약 40마일쯤에 있는 작은 역 에스피나였다. 열차는 그곳에 1분간 정차하기로 되어 있었다. 주위는 들판이고, 역에는 역장이 사는 집 한 채밖에 없었다.
<검은 독수리>가 이끄는 일당은 밤에 말을 타고 떠났다. 에스피나 근처에 이르자 그들은 2, 3마일 떨어진 숲속에서 종일 말을 쉬게 했다.
열차는 오후 10시 30분에 에스피나에 닿을 예정이었다. 따라서 열차를 습격한 뒤 그 약탈품을 가지고 이튿날 새벽녘에는 멕시코 국경을 넘을 수 있을 터였다. 공정하게 말해서 <검은 독수리>는 자기에게 주어진 명예와 책임을 피하거나 벗어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신중하게 부하에게 각자의 임무를 부여하고, 그 역할을 주의 깊게 지도했다. 각기 4명씩 서로 양쪽 숲속에 매복해 있기로 되어 있었다. 귀가 밝은 로저스가 역장을 구금한다. 말타기의 명수 차리는 말 곁에 남아 언제나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해 놓았다.
열차가 정차할 때의 기관차의 위치를 예측하여 그 지점의 선로 한쪽에는 바드 킹이 매복하고, 반대쪽에는 <검은 독수리>가 매복한다. 두 사람은 기관사와 화부(火夫)에게 권총을 들이대고 기관차에서 끌어내어 열차 뒤쪽으로 가게 만든다.
그리고는 열차 내의 현금을 빼앗아 도주한다. 단 <검은 독수리>가 권총을 발사하여 신호를 할 때까지는 모두들 움직이지 않는다. 계획은 그야말로 물샌 틈 없이 완벽했다.
열차 도착 시간 10분 전에 전원은 자기 자리에 배치되었고. 선로 가에까지 무성한 숲속에 몸을 숨겼다. 멕시코 만에서 흘러오는 비구름에 덮여 밤은 어두웠다. <검은 독수리>는 선로에서 5야드 떨어진 풀숲 그늘에 엎드려 있었다. 허리의 벨트에 6연발짜리 두 권총을 찔러넣고 이따금 포켓에서 술병을 꺼내 입에 갖다 댔다.
선로 저쪽에 한 점의 별이 나타났는가 싶더니, 그것은 이내 커져, 다가오는 기관차의 헤드라이트로 변했다. 그것과 함께 열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차츰 높아져 왔다.
이윽고 기관차는 마치 도적을 법의 손에 넘기려고 온 괴물처럼 그들을 노려보며 귀청이 찢어질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검은 독수리>는 땅에 엎드렸다. 기관차는 예상과는 달리, <검은 독수리>와 바드 킹이 매복하고 있는 지점을 50야드나 더 지나서 멈추었다.
도적단의 수령은 일어나서 재빨리 주위를 돌아보았다. 부하들은 모두 엎드린 채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바로 눈앞의 것이 그이 주의를 이끌었다.
그 열차는 통상의 여객열차가 아니라. 객차와 화차의 혼합열차였다. 그의 앞에 멈추어진 유개화차(有蓋貨車 지붕이 있는 화차)의 도어가 어찌 된 일인지 약간 열려 있었다.
<검은 독수리>는 다가가서 도어를 열었다. 어떤 냄새가 그의 코를 자극했다. 그것은 축축한, 곰팡내가 나는, 황홀해지는 것 같은 그리운 냄새–옛날의 행복한 나날이며 여행의 추억을 심하게 북돋아 주는 냄새-였다.
<검은 독수리>는 마치 고향으로 돌아온 방랑자가 소년 시절을 보낸 옛집 울타리의 해묵은 장미 냄새를 그리워하듯 그 매혹적인 냄새를 맡았다.
향수가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는 손을 뻗쳐 화차 안을 더듬었다. 톱밥이 –마른, 부드러운, 곱슬머리 같은, 포근한, 충동질하는 것 같은 톱밥- 깔려 있었다. 밖에서는 안개비가 차가운 얼음 비로 변하고 있었다.
발차를 알리는 벨 소리가 높이 울렸다. 도적단의 수령은 벨트를 풀러 권총째 땅바닥에다 집어 던졌다. 박차도, 그리고 차양이 넓은 모자도 재빨리 집어 던졌다. <검은 독수리>는 털갈이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기차는 한 바탕 흔들렸다가 발차했다. <국경의 공포>는 화차로 기어올라 도어를 닫았다. 사나운 얼굴에 약간 바보스러운,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띄우며 치킨 랏클즈는 이제 고향으로의 여행길에 오른 것이다.
열차는 습격의 신호를 초조하게 기다리며 몸을 숨기고 있는 도적들을 뒤로 아무 일 없이 에스피타 역을 떠났다.
열차가 속도를 늘림에 따라 서로 양쪽에 있는 숲의 검은 그림자의 시야를 벋어났다.
차장은 파이프에 불을 당기고 창으로 밖을 바라보면서 감정을 담아 중얼거렸다.
“이 근처는 열차 강도에 안성맞춤인 곳이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