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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놀룰루

Bollnow 2024. 4. 21. 06:57

호놀룰루

W. S. Maugham

 

현명한 여행가는 언제나 상상 속에서 돌아다니는 법이다. 언젠가 프랑스의 한 노인(정확히 말하면 아 사람은 사보이인이었다)<방안에서 하는 여행>이라는 책을 쓴 적이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지 못했으므로,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나, 그 표제만으로도 나의 공상을 자극하였다. 나는 이런 공상적인 여행으로 세계 일주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벽난로 위에 걸려 있는 한 폭의 성화(聖畵), 나를 자작나무 숲이 무성하고, 둥근 지붕을 한 교회들이 서 있는 러시아로 데려가 준다. 볼가강이 유유히 흘러내리고, 군데군데 집들이 들어 들어앉은 마을 어귀에 있는 주막에서는 사나이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거친 양피(羊皮) 저고리를 걸치고,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나는 나폴레옹이 처음으로 모스크바를 바라본 조그마한 언덕 위에 올라서서 거대한 이 도시를 내려다본다. 언덕을 내려오면 내가 일반 친구들보다 친숙한 알료쟈, 보른슨키 등 많은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내가 도자기를 바라볼 때, 중국의 강렬한 향기를 맡게 된다. 나는 좁다란 논두렁 길이 아니면 나무가 우거진 산모퉁이를 돌아서 가마에 실려 간다. 맑게 개인 아침나절에 터벅터벅 걸어가는 가마꾼들은 즐거운 듯이 지껄여댄다. 나는 때때로 멀리서 신비롭게 들려오는 깊숙한 절간의 종소리를 듣는다. 북경(北京)의 거리는 군중들로 가득 차 있고 몽고의 사막지대에서 오피와 진귀한 약재(藥材)를 싣고 줄을 지어 질서정연하게 걸어 들어오고 있는 낙타 떼에게 길을 비켜 주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진다.

영국 런던의 오후는 때때로 무거운 구름이 낫게 감돌고 주위가 쓸쓸하여 우리를 우울하게 하기가 일쑤이다. 이때 창밖을 바라보면 산호섬(珊瑚島)의 백사장 위에 군데군데 야자수가 무성한 것을 볼 수 있다. 바닷가는 은빛으로 반짝이며, 햇볕 아래서는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만큼 눈부시다. 머리 위에서는 구관조(九官鳥)가 우짖고 파도는 끊임없이 암초에 밀려 닥치고 있다.

이처럼 노변(爐邊)에 앉아서 즐길 수 있는 여행이 최고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여행에서는 우리의 환상이 절대로 일그러지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커피에 소금을 타서 먹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들은 소금을 타서 먹으면 톡 쏘는 맛이 있어, 그것이 특별하고 희한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치로 낭만의 후광(後光)에 에워싸인 고장을 찾아갈 때 느끼게 되는 환멸이 특수한 정취를 자아내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어떤 풍경에 뛰어난 아름다움을 기대했을 때, 거기서 받는 인상은 실제로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보다 한결 복잡한 내용일 수가 있다. 이것은 마치 한 위대한 인물이 지닌 성격상의 약점이, 그에게 대한 존경심을 덜게 되더라도, 그것이 그 인물을 더욱 흥미 있게 해주는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나는 호놀룰루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유럽과는 너무나 먼 거리에 떨어져 있고, 샌프란시스코에서도 꽤 긴 여행을 하여야 갈 수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너무나 이방적이고 매혹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나는 처음에 이곳에 도착하였을 때,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물론 내가 예상한 이 도시의 모습을 머릿속에 정확히 그리고 있지는 못하였으나, 눈앞에 나타난 광경에 대하여 놀람을 금치 못하였다.

호놀룰루는 마치 전형적인 유럽의 도시였다. 석조로 된 저택에 오두막집이 마주 붙어 있고, 낡아빠진 목조 건물들이 고급 유리를 끼운 산뜻한 상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거리를 전차가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포드 뷰익, 팩하드 등과 같은 자동차들이 길을 메우고 있었다. 상점에는 미국 문명의 여러 가지 필수품들이 가득 차 있었으며, 두 집 건너 은행이고, 네 집 건너 선박대리점이었다.

거리에서는 별별 종족들이 한데 몰려 붐비고 있었다. 미국 사람들은 이곳의 기후에는 아랑곳도 없이 빳빳한 칼라에 검정 웃저고리의 차림새에, 머리에는 밀짚모자나 소프트햇 중절모 등을 쓰고 다닌다. 곱슬머리에 살갗이 연한 갈색인 카나카족들은 다만 셔츠에 바짓바람으로 돌아다니지만, 혼혈아들은 번쩍거리는 넥타이에 검은 반장화를 신고 말쑥한 차림새를 하고 있다. 교활한 웃음을 띠고 있는 일본 사람들은 매우 친절하며 깨끗한 돛폭 천으로 만든 양복을 입고, 그 한두 발짝 뒤에는 그네들의 고유의 옷차림을 한 아내들이 등에 아기를 업고 따라간다. 화려한 색깔의 아동복을 입고 면도로 머리를 빡빡 밀어 버린 일본 어린이들은 귀여운 인형처럼 보인다. 다음은 중국인들의 차례다. 뚱뚱하고 돈 많은 중국 남자들은 미국식 옷차림을 하고 있으나, 검은 머리를 잘 빗어 올린 중국 여자들은 무척 매력이 있다. 그녀들의 머리는 너무나 단정하여 좀처럼 흩어지지 않을 것 같이 보였으며, 흰색이나 곤색 또는 검정색 웃저고리에 바지를 입은 모습이 무척 날씬해 보인다. 이 밖에도 필리핀 사람들이 있다. 필리핀 남자들은 큼직한 밀짚모자를 쓰고 다니며, 여자들은 잔뜩 부풀어 오른 소매를 단 노란색 무명옷을 걸치고 있다.

이곳 호놀룰루는 동양과 서양의 교차지대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것이 아주 낡은 것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설사 우리가 이곳에서 기대하던 낭만을 찾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여러모로 매혹적인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말과 사고방식이 다른 이방인들끼리 서로 이웃이 되어 살고 있어, 각자가 서로 다른 신을 섬기며, 다른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과 시장끼에 대한 두 가지의 욕구일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들로부터 커다란 활기를 느낄 수 있다. 날씨는 무척 온화하고 하늘은 짙푸르며, 군중 틈에 끼어 걸어가노라면, 맥박이 뛰는 뜨거운 정열을 느끼게 된다. 한길 모퉁이의 단()위에서 흰 방망이를 들고 교통정리를 하고 있는 본토박이 순경의 모습은 주위의 분위기에 어떤 위신을 던져 주지만, 그것은 단지 표면상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표면의 아래에는 암흑과 신비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밤중에 산림 속에서 나지막하게 두드리는 북소리에 별안간 정적이 깨어지기 시작한 때의 짜릿한 흥분을 이곳에서 느낄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곳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기대하게 된다.

내가 이처럼 호놀룰루의 부조리(不條理)에 대하여 말하게 되는 것은 앞으로 들려줄 이야기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내가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원시적인 미신에 대한 것이다. 이곳의 정교한 문명 속에 이러한 미신이 뚜렷이 눈에 뜨이지는 않지만, 아직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전화나 전차, 일간 신문들이 존재하는 곳에 그와 같은 불가사의한 일들이 있을 수 있으며, 적어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 나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나는 호놀룰루를 안내해 준 친구의 태도에서도 부조리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 부조리를 첫눈에 호놀룰루의 가장 인상적인 특질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는 원터라는 미국 사람으로, 나는 뉴욕의 어떤 친지가 써 준 소개장을 갖고 그를 찾아갔던 것이다. 나이는 4, 50세가량 되어 보이고, 관자놀이 근처에 성긴 머리칼이 허옇게 탈색하고 있는, 날카롭고 메마른 얼굴을 한 사나이였다. 그는 눈을 끔뻑거리는 버릇이 있었으며, 두툼한 안경에서 풍기는 근엄한 인상이 꽤 재미있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키는 후리후리하고, 체형은 홀쭉이였다. 그는 호놀룰루 태생으로, 부친은 큰 상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 상점에서는 메리야쓰 류와 기타, 테니스 라켓에서 방수복에 이르기까지 멋쟁이들에게 필요한 상품을 팔고 있었는데, 꽤 벌이가 좋았으므로, 아들이 장사를 하는 것을 거부하고 배우가 되겠다고 말했을 때, 그의 부친이 얼마나 화를 냈겠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원터는 20년 동안 무대 생활을 해 왔었다. 때로는 이역에서 공연한 적도 있었지만, 소질이 별로 없어 주로 가설극장에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어리석지 않아, 오하이오주의 클리블랜드에서 너절한 배역을 맡고 있느니, 차라리 호놀룰루에서 양말대님 장사라도 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무대를 버리고 사업에 종사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생활난에 허덕여 왔으므로, 자신이 원했더라면 돈을 벌어 대형 자가용을 굴리며 골프장 근처에 있는 호화로운 저택에서 사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마음껏 즐겼을 것이며,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 사업도 빈틈없이 운영해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술에 대한 집념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연기 생활을 다시 계속할 수 없는 처지이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기의 아트리에로 나를 데리고 가서, 자기가 그린 그림들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그림은 과히 손색이 없어 보였으나 내가 그에게서 개다한 작품은 못되었다. 그의 그림은 극히 작은 정물화로 모두가 가로세로 각각 8인치에서 고작해야 12인치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며, 꼼꼼하게 잘 다듬은 것들이었다. 그는 세부의 묘사를 특히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의 아트리에에 걸려 있는 과일 그림들은 길란다요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것들이었다. 그의 그림을 보는 사람은 누구나 그 끈기에 놀라며, 그의 재주에 탄복할 것이다. 그가 배우로서 성공을 거두지 못한 까닭은 연기를 사전에 너무 치밀하게 연구하여 대담성과 폭을 잃은 데 있는 것으로 난 생각한다. 그가 나한테 호놀룰루의 거리를 안내하면서 보여 준 위세 있고 아이러닉한 태도가 나는 저으기 재미있었다. 그는 호놀룰루만 한 도시는 미국에도 없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였지만, 그것은 좀 과장된 줄을 자기도 인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자동차로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건물들을 보여 주고 나서, 내가 그 건축물에 꽤 탄복하면, 매우 흐뭇해하는 것이었다. 그는 돈 많은 사람들의 저택도 보여 주었다.

"저것은 스텁스 가문의 저택이랍니다."하고 그는 말하였다.

"건물을 짓는 데만도 10만 불이 들었어요. 스텁스씨 댁이라면 이 고장에서는 꽤 명문에 속합니다. 스텁스씨가 이곳에 선교사로 온 것은 70년도 더 되는 옛날 일입니다."

그는 여기서 잠깐 말을 멈추고, 커다란 둥근 안경 너머로 두 눈을 껌벅이며 나를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이곳에 있는 명문들은 모두가 선교사의 가문이랍니다. 호놀룰루에서 큰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전에 선교사업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요?"

"성경을 읽으셨지요?"

", 좀 보았어요."하고 나는 대답하였다.

"거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지 않아요. <조상이 신 포도를 먹으면, 그 자손의 이가 시니라>. 그렇지만 호놀룰루에선 그와 반대인 것 같습니다. 카나카족에게 기독교를 가르쳐준 조상의 자손들에게는 땅이 굴러 들어왔으니까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법이지요."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암요.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곳 원주민들은 가난뱅이가 되었어요. 토후(土候)들은 선교사들에게 존경의 표시로 토지를 기증하고, 선교사들은 천국에 보답을 쌓는 대신에 당을 사들였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선교사업은 분명히 좋은 장사였어요. 그들 중에는 사업을 버리고(사업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테지) 수째 토지 매매업자가 된 된 선교사도 있지만, 이것은 예외에 속한 일이었어요. 대체로 사업 방면에 손을 댄 것은 그들의 자손들이었어요. 믿음을 전하기 위해 50년 전에 이곳에 건너온 아버지를 가진 사람들은 실로 행운아라고 할 수 있어요."

그는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팔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제기랄, 시계가 멎어 버렸군요. 지금쯤 칵테일을 한잔할 시간이 되었을 겁니다."

우리는 포장이 잘되고 그 가장자리에 무궁화나무가 죽 늘어선 한길을 달려서 다시 시내로 들어왔다.

"유니온 주점에 가본 적이 있습니까?"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럼 한번 가볼까요?"

나는 유니온 주점이라고 하면 이곳 호놀룰루에서 가장 유명한 곳임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꽤 호기심을 갖고 그곳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 주점에 가려면 킹가에서 좁은 골목길로 빠져들어 가야만 하였다. 그리고 이 골목에는 여러 회사의 사무실들이 많이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출출하여 한잔 마시러 가는 술꾼을 보아도, 그들이 유니온 주점으로 가는지 혹은 주위의 사무실에 가는지 알 수 없다.

이 주점은 안이 넓은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출입구가 세 군데나 되고, 실내를 가로지른 카운터의 맞은편 두 귀퉁이는 열 개의 조그만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 조그마한 방들은 칼라카우아 왕이 백성들 몰래 술을 마시기 위해 만든 것이라는데, 그 어느 방에서는 검둥이 군주(君主)가 술을 한잔 앞에 놓고 로버트 루이 스티븐슨과 마주 앉아 있었을 광경을 상상해 보니, 통쾌하기 짝이 없었다. 짙은 금빛 틀 속에 유화로 된 그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빅토리아 여왕의 석판화도 두어 장 걸려 있었다. 그리고 벽에는 18세기의 낡은 동판화들도 걸려 있었으며, 그중의 하나는 드 와일드의 과장된 화풍(畵風)을 닮고 있었다. 이런 그림이 어떻게 여기 붙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20년 전의 그래픽 지()와 런던 뉴스 화보(畵報)의 크리스마스 증보판(增補版)에서 오래된 유화식(油畵式) 판화들이 걸려 있었다. 그 밖에도 위스키며 진, 샴페인, 맥주 등이 광고와 야구팀 지방 교향악단의 사진들도 붙어 있었다.

이곳은 방금 지나온 밝은 네거리의 현대적인 소란한 세계에는 속해 잇지 않고, 지금은 사라져가는 어느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마치 그 옛날의 냄새 같은 것을 맡는 기분이었다. 어둠컴컴한 불빛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이루어, 암거래(暗去來)의 장소로 적당하게 생각되었다. 이런 분위기는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는 악한들의 무용(武勇)이 단조로운 인생을 잠식하던 살벌한 전시대(前時代)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였다.

내가 들어서니 실내는 거의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몇 사람의 상인이 커운터에 둘러서서 지껄이고 있었으며, 한쪽 구석에는 카나카족 두 사람이 술을 마시고, 점원으로 보이는 두 사나이가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 나머지 손님들은 매무새로 보아 뱃사공임이 틀림이 없었다. 즉 부정기 화물선의 선장, 1등 항해사, 기관사 등으로 보였다. 카운터 뒤에서는 흰 제복을 입고 면도를 깨끗이 한, 눈이 부리부리하고 술이 많은 곱슬머리의 뚱뚱한 요리사 두 사람이 이 주점의 명물인 호놀룰루 칵테일을 부지런히 만들고 있었다.

원터는 이 손님들을 거의 다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카운터를 향해 걸어갔더니, 내 곁에 선 작달막하고 뚱뚱한 안경잡이 사나이가 그에게 술을 한 잔 사겠다고 제의하였다.

"아닙니다. 내가 사지요."

원터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나에게 말하였다.

"인사하시죠. 버틀러 선장입니다."

그 키가 작달막한 사나이는 나에게 악수를 청하였다. 우리는 이야기를 주고받았으나 나는 소란스러운 분위 때문에 주의가 산만하여 그를 자세히 살펴볼 경황이 없었다. 우리는 칵테일을 한 잔씩 마시고 나서 헤어졌다.

원터와 나는 다시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차기 움직이기 시작하지 원터가 말하였다.

"버틀러를 만나서 다행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선생님을 그 사람에게 소개해 드리려던 참이었어요. 그 사람 인상이 어떻습니까?"

"나는 그에게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어요."하고 나는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신비(神秘)를 믿습니까?"

"글쎄요, 그런 걸 어떻게 믿어요?"나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몇 해 전에 그 사람에게 매우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그 얘기는 직접 그에게서 들어 보십시오."

"무슨 일인데요."

원터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는 그걸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런 일에 흥미를 갖고 계세요?"

"그런 일이라니요?"

"이를테면 마력(魔力)이나 요술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런 일에는 누구나 흥미를 갖고 있을 겁니다."

원터는 잠시 말을 멈췄다.

"제가 직접 말씀드리기보다는 그 사람에게서 직접 듣고 판단해 보십시오. 오늘 저녁 바쁘십니까?"

"뭐 별로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럼 저녁으로 그에게 연락하여 우리가 그의 배에 찾아가도 무방한지 알아보지요."

원터는 나에게 버틀러 선장에 대하여 약간 성명해 주었다. 그는 전 생애를 태평양에서 보냈다고 한다. 옛날에는 신수가 지금보다 월씬 좋았으며, 처음에는 캘리포니아 해안을 내왕하는 여객선 1등 항해사로 근무하다가 나중에 선장이 되었는데, 배가 난파하여 승객들이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그의 술 때문이었을 겁니다."하고 원터는 덧붙여 말하였다.

이 사고의 원인이 규명된 결과 그는 자격증을 빼앗겼을뿐더러, 신세를 망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몇 해 동안 남태평양을 전전하던 끝에, 기금은 호놀룰루와 그 군도(群島) 사이를 내왕하는 법선(帆船)의 선장으로 있었다. 이 배의 주인은 중국인으로, 면허가 없는 선장이면 급료가 사기 때문에 그 마음에 들었으며, 더구나 백인을 선장으로 둔다는 것은 매우 유리한 일이었다. 나는 버틀러 선장에 대한 이런 설명을 듣고, 그에 대한 이미지를 좀 더 정확하게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나는 그의 둥근 안경과 그 뒤의 둥글고 푸른 눈을 회상하면서 그의 됨됨을 머릿속에서 다시 검토해 보았다. 그는 조그마한 키에 통통한 몸집을 하고 있었으며, 보름달처럼 둥근 얼굴과 조그마하고 동그스럼한 코를 갖고 있었다. 얼굴은 붉은 편이며, 금발머리는 짧게 깎고 수염은 깨끗이 면도하고 있었다. 포동포동한 손등에는 관절 마디마다 우문이 파여 있었으며, 다리는 통통하고 짤막하였다.

그는 매우 명랑하여 아무리 비극이 닥쳐와도 그를 해치지 못할 것 같았다. 나이는 서른너댓 살쯤 되었을 터이지만 훨씬 젊어 보였다. 그런데 나는, 아까는 그를 피상적으로 대하였으므로 그의 인생을 파멸로 인도한 그 비극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난 이상, 다음에 그를 만나면 더욱 조심스럽게 관찰해보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마련인 정서적인 반응을 살펴본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무서운 전쟁이나 죽음의 위협, 또는 말할 수 없는 공포를 겪고 나서도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 있는가 하며, 고요한 바다에서 넘실거리는 달이나 숲속에서 새 우는 소리에도 성격이 변할 만큼 큰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의지의 강약(强弱), 상상력의 빈곤, 또는 성격의 나약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자들의 비명과 공포에 싸여 배가 침몰하는 현장이며, 이어서 사고 원인을 규명하는 데 따르는 시련, 사망자들을 위해 울부짖는 가족들의 애통, 자기 눈으로 본 선장에 대한 신문의 공격, 그가 느낀 치욕과 망신 등등을 머릿속에서 그려볼 때, 얼마 전에 마치 초등학교 아이들처럼 솔질한 말씨로 하와이 여자며, <율레이> 홍등가, 자기의 난봉 등을 거침없이 이야기하던 버틀러 선장의 태도가 너무나 놀라와 나는 좀 어리둥절하였다.

그는 시원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런데 전에는 아무도 그가 다시 웃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을 것이다. 나는 그의 반짝이는 흰 이빨을 생각해 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이빨은 가장 매력이 있는 부분이었다. 나는 그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와, 그의 태도에서 찾아볼 수 있는 통쾌한 무관심에 대하여 생각하느라고, 나는 오늘 밤에 그를 찾아가서 들을 예정으로 있는 그의 비극적인 이야기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는 차라리 될 수 있으면 그의 성격에 대하여 더 상세히 알고 싶었던 것이다.

원터가 버틀러와 만날 약속을 미리 해 두었으므로, 우리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부두로 향하여 대기하고 있는 보트를 타고 노를 저어갔다. 돛배는 방파제에서 얼마 되지 않는 곳에 닻을 내리고 있었다. 보트를 본선의 뱃전에 대자, 우크레레의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사닥다리를 타고 배에 올라갔다.

"그는 선실에 있을 겁니다."

원터가 앞장을 서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조그마한 선실은 더럽고 누추하였다. 한쪽에 테이블이 놓여 있고, 사면에 넓은 벤치가 놓여 있었다. 이러한 벤치는 선객들이 누워서 잠자는 곳인 듯하였다. 방안을 남포등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토인 처녀가 우크레레를 켜고 있었으며, 버틀러는 머리를 그녀의 어깨에 기대고 한팔로 그녀의 허리를 껴안은 채 자리에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선장, 방해가 되지 않아요?" 원터가 농을 걸었다.

"어서 오슈!" 버틀러는 몸을 일으켜 우리와 악수를 하고 말하였다.

"술은 뭘로 할까요?"

밤공기는 훈훈하고 열린 창문을 통하여 하늘에서 아직도 푸른 빛으로 반짝이는 많은 별들을 볼 수 있었다. 선장은 살찐 흰 팔굽이 드러나 보이는 소매 없는 속셔츠와 더러운 바지를 입고 있었다. 곱슬머리에는 낡고 초라한 중절모를 얹어 놓고, 맨발로 있었다.

"이 아가씨를 소개하겠어요. 예쁘죠?"

우리는 그 아름다운 아가씨와 악수를 하였다. 그녀는 선장보다 훨씬 카가 크고, <마더 허버드> ()도 그녀의 육체미를 감출 수 없었다. 이 옷은 지금부터 2, 30년 전에 풍기를 단속하기 위해 선교사들이 토인 처녀들에게 억지로 입힌, 옷자락이 길고 느슨한 덧옷이었다.

그녀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좀 뚱뚱해질 몸집이었으나, 지금은 우아하고 날씬하였다. 갈색 피부는 투명할 정도였고, 두 눈이 무척 아름다웠으며, 숱이 많고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채는 굵게 따내려 휘감겨 있었다. 그리고 애교 있게 웃고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면서 내보인 그녀의 이빨은 고르고 희었다. 그녀는 참으로 매력이 있었다. 선장이 그녀에게 미칠 정도로 홀딱 빠지고 있다는 것은 곧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것 같았으며, 언제나 그녀의 몸을 애무해 주고 싶은 듯이 보였다. 이것은 곧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더욱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여자 편에서도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눈에 빛나는 광채가 이것을 말해 주고 있었으며, 두 입술은 욕정에 타는 듯 약간 벌리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자주적인 광경이었다. 아니 어쩌면 감동적이기도 하였다. 나는 어색한 생각이 들었다. 사라에 불타는 두 남녀의 앞에서 어찌 타인의 존재가 안중에 있겠는가. 나는 원터가 이곳에 나를 데려온 것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누추한 선실의 분위기는 사랑의 극치를 나타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장소로 갑자기 갑자기 돌변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배들이 몰려 있는 이곳 호놀룰루의 항구에서, 별이 반짝이는 하늘 아래 외부 세계와 동떨어진 이 돛배를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이러한 애인들이 태평양의 밤물결을 타고 푸른 언덕이 누워있는 이 섬 저 섬을 돌아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랴 싶었다. 내 뺨을 부드러운 낭만의 미풍이 스쳐갔다.

그러나 버틀러는 아무래도 낭만과 관련시켜 생각해 보기에는 힘든 인간이었다. 대체 그의 어떤 면이 여자의 사랑을 불러일으키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의 옷은 더욱 땅딸보와 같은 인상을 주었으며, 둥근 안경은 그의 동그란 얼굴을 마치 새침한 아기천사의 얼굴을 연상케 하였다. 그의 모습은 타락한 목사처럼 보였다.

그의 입에서는 괴상한 미국식 어투가 곧잘 튀어나왔다. 나는 그의 어투를 그대로 흉내 내고 싶지 않으므로, 그가 들려준 이야기를 앞으로 옮겨쓸 때, 실감이 나지 않더라도 내 나름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더구나 그는 욕설을 섞지 않고는 말하지 못하는 성미라, 성령 귀에는 별로 거슬리지 않는 욕설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활자화하면 천하게 보일 것이다. 그는 환락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여자들은 이 점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여자란 대체로 경박한 동물이므로 찌푸리지만 자기를 웃겨 주는 익살꾼에게는 맥을 못쓰는 법이다.

여자란 유머의 감각이 둔하다고 할 수 있다. 이 피서지에 나오는 다이아나는, 걸핏하면 모자를 깔고 앉는 익살꾼 앞에서는 자기의 신중한 태도를 기꺼이 내던지는 것이었다. 나는 버틀러 선장이 꽤 매력 있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만일 내가 배의 침몰에 대한 그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들 그를 평생 근심 한번 해 보지 못한 사람으로 간주하였을 것이다.

우리가 선실을 들어서자, 선장이 곧 벨을 눌러 두었으므로, 중국인 요리사가 유리잔과 소다수 몇 병을 들고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는 위스키병과 선장이 이미 마신 빈 잔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나는 방금 잔을 날라온 이 중국인 요리사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일찍이 이처럼 흉한 꼴을 한 남자를 본 일이 없었다. 아주 작은 키에, 단단한 몸집을 한 그는 발을 절룩거리고 있었다. 그는 조끼에 땟국이 흐르는 명색만이 흰 바지를 걸치고 있었으며, 헙수룩하게 헝클어진 희색 머리칼 위에 사냥할 때 쓰는 모자를 얹어 놓고 있었다. 일반 중국인들이 이런 모자를 쓰고 있으면 단지 우습게 보일 터이지만, 이 사나이의 경우는 우스울 정도가 아니라 불쾌하게 보였다. 사각형으로 된 넓은 얼굴은 마치 억센 주먹으로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편편하고 고무 자국이 숭숭 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몰골에서 가장 흉한 것은 한번도 수술을 받지 않은 심한 언청이 입술이었다. 찢어진 윗입술은 한쪽이 고를 향하고 있었으며, 그 틈새로 누렇고 큰 이빨이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실로 소름이 끼치는 모습이었다. 그는 입에 담배를 비스듬히 물고 있었는데, 그것이 더욱 흉악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위스키를 따르고 소다수가 들어 있는 병을 열었다.

", 소다수를 너무 많이 타지 말어." 선장이 말하였다.

중국인은 말없이 우리에게 위스키를 한 잔씩 따라 주고 밖으로 나갔다.

"저 되놈을 보셨지요?"

버틀러가 그 살진 얼굴에 웃음을 띠우고 말하였다.

"밤중에 저런 사람을 만나면 꽤 무섭겠는데요."

내가 대답하였다.

"지독하게 못생겼지요?"

선장이 말하였다. 그는 이 말을 하면서 어쩐지 유달리 만족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한 가지 점에 대해서는 매우 고마운 친구지요. 아무튼 저녀석의 얼굴을 보면 틀림없이 술 한 잔씩은 마시게 되지요."

잠시 후에 테이블 위쪽 벽에 조롱박 하나가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러지 않아도 나는 묵은 조롱박을 구하고 있던 참인데 이렇게 오래된 것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었다.

"어느 섬에 갔더니 추장이 주더군요."

선장이 나를 유심히 보면서 말하였다.

"내가 그에게 한번 호의를 베풀었더니, 답례로 선사했어요."

"좋은 선물이군요." 나는 대답하였다.

나는 선장에게 넌지시 이 조롱박을 팔도록 제의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는 이 물건이 별로 소중한 것 같지 않았다. 그러자 선장은 내 생각을 알아차린 듯이 말하였다.

"저 조롱박은 누가 만 달러를 준대도 팔 수 없어요."

"그럴 테지요." 원터가 말하였다.

"저걸 말아서야 되나요."

"왜요?" 내가 물었다.

"저 조롱박은 그 사건과 관련되어 있어요." 원터가 내 말에 대꾸하였다.

"그렇지요? 선장님!"

"그럼요."

", 그럼 어디 그 이야기를 좀 들어 볼까요?"

"아직 초저녁인데요, ." 선장이 말하였다.

선장이 내 궁금증을 풀어 주기 전에 어느덧 밤은 깊어갔다. 그가 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일하던 시절의 경험담과 남태평양에서 보낸 생활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동안에 우리는 위스키 잔을 수 없이 비웠다. 이윽고 아가씨가 곯아떨어졌다. 그녀는 갈색 팔뚝으로 얼굴을 고인 채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숨을 쉴 적마다 가슴이 부드럽게 오르내렸다. 그녀의 잠이 든 거무스름한 얼굴은 무표정하면서도 아름답게 보였다.

선장은 그녀를 낡은 법선으로 짐을 실어내기 위해 돌아다니다 호놀룰루의 어느 섬에서 발견하였던 것이다. 카나카족은 워낙 일하기 싫어하기 때문에 경제권은 부지런한 중국 사람들과 재빠른 일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조그마한 농토를 갖고 감자와 바나나를 재배하는 한편 배를 한 척 갖고 고기잡이를 다녔다. 그는 버틀러가 선장으로 있는 범선의 운전사와 먼 인척 관계가 되었으므로 어느 날 저녁에 버틀러를 자기의 초라한 통나무집으로 초대하였다. 그들은 위스키 한 병과 우크레레를 들고 갔다. 선장은 소심한 사람이 아니므로 잘생긴 여자를 보면 곧 달려들어 프로포즈를 하는 성미였다. 그는 토인의 말을 잘하였으므로, 그 수줍어하는 처녀의 마음을 얼마 안 가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는 초저녁을 노래와 춤으로 보내고, 밤이 깊어갈 무렵에는 그의 곁에 기대어 앉은 처녀의 허리에 팔을 감고 있었다.

그들은 부득이 이 섬에서 며칠 묵어야 할 형편이었다. 선장은 언제나 성미가 느슨하여, 이 섬에서 체류하는 날짜를 구태여 줄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아름다운 이 섬에서 얼마든지 즐거울 수 있었다. 인생은 긴 것이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배의 주위를 헤엄치며 돌아다녔다. 선창가에는 선원들을 상대로 위스키를 팔고 있는 선구상(船具商)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이 혼혈아인 상점 주인과 트럼프를 하여 보내었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선장과 운전사는 그 예쁜 아가씨가 살고 있는 집에 가서 함께 보래도 부르고 지난날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선장더러 딸을 데려가라고 말하였다. 그들이 이문제에 대하여 정답게 의논하고 있는 동안에, 선장에게 기대어 앉은 아가씨는 그의 손을 꼭 쥐어 주며 부드러운 눈길로 승낙하도록 독촉하였다. 선장은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가정적인 분위기를 좋아하므로, 때때로 따분하게 느끼는 해상생활이 아름다운 처녀의 존재로 하여 한결 즐거워진 것 같았다.

또 무엇보다도 실리적으로, 양말을 기워 주거나, 빨래를 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매우 편리한 일이었다. 그는 빨래를 한답시고 옷을 곧잘 찢어 놓는 되놈에게는 진저리가 났던 것이다. 토인 여자들의 빨래 솜씨는 매우 훌륭하였다.

그는 배가 항구에 닿으면, 날씬한 돛폭 천으로 지운 옷을 갈아입고 호놀룰루 시내를 돌아다니길 좋아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처녀의 몸값이었다. 그녀의 부친은 150달러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평소에 절약할 줄 모르는 선장의 수중에 이런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는 돈에 인색한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자기를 좋아하는 아가씨의 부드러운 얼굴을 바라보자, 값을 깎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50불을 현금으로 지불하고, 나머지 100불은 석 달 후에 주겠다고 하였다.

이 문제를 두고 오랫동안 옥신각신하였으나, 결말을 보지 못하였다. 그는 울화가 치밀어 그날 밤은 잠을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새웠다. 그는 줄곧 그 귀여운 아가씨의 꿈을 꾸었으며, 잠에서 깨어날 적마다 아가씨의 부드럽고 요염한 입술을 느끼곤 하였다. 그는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자기 자신을 탓하였다. 지난번에 호놀룰루에서 있었던 포커 노름에서 돈을 잃지 않았던들 이런 궁색은 면하였을 것이다.

"여보게, 버너너즈!"하고 그는 운전사를 불렀다.

"아무래도 그 처녀를 데려와야겠네. 영감한테 가서, 돈을 다 줄 테니 딸에게 떠날 준비를 시키라고 일러 주게. 새벽에 떠난다고 전하게."

나는 운전사가 왜 그렇게 괴상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본명은 피일러로, 영국식 성을 갖고 있지만, 백인의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커다란 키에 살이 찌고 균형이 잡힌 체격을 하고 있었으며, 하와이에서는 보기 드물 만큼 살색이 검었다. 아마 장년기를 넘어 숱이 많은 곱슬머리는 희끗희끗하게 보였다. 웃니는 앞을 금으로 싸고 있었으며, 그에게는 이것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그는 심한 사팔뜨기로 하여 침울한 인상을 주었다. 익살스러운 선장은 걸핏하면 그의 눈을 놀려대었다. 더구나 자기 눈에 대하여 신경을 몹시 쓰고 있었으므로, 그는 거침없이 이러한 신체적인 결함을 더욱 꼬집어 주는 것이었다.

일반 토인들과는 달라서 버너너즈는 말이 적은 편이었다. 만일 버틀러 선장과 같은 호인이 아니라면 이 운전수의 꼴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항해하는 동안에 말동무와 함께 지내기를 좋아하여 잘 지껄여대는 사교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생전 가야 입 한번 놀리지 않는 친구와 날마다 함께 배에서 지내야 한다면, 선교사라도 술에 도움을 청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선장은 이 운전사에게 자극을 주기 위해 호되게 골려주는 등 갖은 노력을 다하였으나 별로 반응이 없었다. 누구나 혼자서 웃는다는 것은 멋적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선장은 드디어 그가 술자리에서나 평상시나 백인의 상대가 될 수 없다고 단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항해사로서는 훌륭하였다. 버틀러 선장은 영리한 사람이다. 자기가 믿을 수 있는 항해사를 구하기가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배가 떠날 때면, 흔히 육지에서 술에 만취되어 돌아와서는 침대에 쓰러져 술이 깰 때까지 잠을 잤는데, 이것은 물론 버너너즈를 그만큼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도무지 붙임성이 없어, 이야기 상대가 되기 힘들었다. 그런데 그 처녀는 훌륭한 말동무가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배에서 자기를 기다리는 여자가 있으면 육지에 내려서도 과음하는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성구 상을 하는 친구에게 가서 술을 받아 놓고 돈을 꾸어 달라고 하였다. 선장쯤 되면 성구 상에게 호의를 베풀 기회가 때때로 있으므로, 15분가량 나지막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은 끝에(큰소리로 남에게 알릴 필요가 없으므로) 그는 뒤 호주머니에 지폐를 구겨 넣고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날 밤에 배로 돌아갈 때, 그는 처녀를 데리고 가게 되었다.

버틀러 선장이 자기 행위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가정해 본 것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술을 아주 끊지는 못했지만 과음을 하지 않게 되었다. 2, 3주일 동안 바다에서 보내다가 육지에 돌아와, 친구들과 함께 한 잔 어울리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지만, 어린 그 처녀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것도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선실 문을 열고 들어가 쌔근쌔근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몸위에 허를 굽힐 때, 눈을 부시시 뜨며 자기를 향해 손을 내미는 처녀가 그리웠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노름판에서 따 쥔 광땡 못지않게 그를 즐겁게 하였다. 돈도 자연히 절약되었다. 그러나 돈을 아낄 줄 모르는 그는 그녀에게 알맞는 선물을 사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녀의 긴 머리칼을 위해서는 은으로 된 머리빗을 샀으며, 금목걸이와 모조 루비 반지 등을 선사하였다. ! 인생은 얼마나 즐거운가!

1년이 지났다. 그러나 선장은 그녀에게 권태를 느끼지 않았다. 그는 감정을 분석해 보는 성미가 아니지만,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분명히 어떤 무서운 힘을 갖고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자기가 그녀에게 점점 끌리는 것을 느꼈으며, 때로는 그녀와 결혼해도 무방하겠다는 생각까지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운전사가 식사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개의치 않았으나 두 번째 나타나지 않았을 때, 선장은 중국인 요리사에게 물었다.

"운전사는 어디 있어? 식사를 안 하는 거야?"

"먹지 않겠답니다."

하고 중국인 요리사가 대답하였다.

"어디 아픈 건 아냐?"

"글세요. 잘 모르겠어요."

이튿날 버너너즈가 나타났다. 그런 여느 때보다 시무룩해 있었으므로, 식사를 마치고 그는 처녀에게 웬일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웃으며 예쁜 어깨를 으쓱 치켜올렸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버너너즈가 자기에게 사랑을 고백하기에 나무랬더니 화가 났다는 것이다. 쾌활한 선장은 질투를 느끼는 성미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버너너즈가 사랑에 빠진 것이 매우 재미있게 생각되었다. 그런 사팔뜨기가 여자의 호감을 산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가 티타임에 나타났을 때 선장은 그를 통쾌하게 놀려 주었다. 그는 조금도 눈치를 채지 못한 채하고 허튼수작을 부리면서 버너너즈를 호되게 비꼬아 주었다. 처녀는 그 태도가 결코 유쾌하다고만 볼 수 없어 버너너즈가 돌아가고 나서, 앞으로는 말을 조심하라고 부탁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녀의 심각한 태도에 놀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가 아직 토인족의 기질을 잘 모른다고 핀잔을 주었다. 그들은 감정이 격하면 물불을 헤아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좀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이러한 그녀의 태도가 그에게는 무척 우스워 보였다. 그리하여 그는 껄껄 웃어 주었다.

"또다시 귀찮게 굴면 나한테 알리겠다고 위협하란 말이야. 그러면 다시는 그따위 수작을 못 할 거야."

"차라리 그를 해고해 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그것은 안 돼. 난 사람을 볼 줄 알어. 그 녀석이 당신에게 귀찮게 굴면 한번 멋지게 본때를 보여줘야겠어."

그녀는 보통 여자에게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총기를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굳은 결심을 하고 있는 남자와 부질없이 다투는 것은 그의 고집을 부채질해 줄 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던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름다운 섬 사이를 지나 고요한 바다를 헤쳐나가는 이 초라한 법선 위에서는, 몸집이 작달막한 선장이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처참하고 긴장된 연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처녀의 완강한 저항에 후끈 달아오른 버너너즈는 이미 인간이 아니고, 바로 욕정덩어리였다. 그리하여 그는 점잖게 혹은 웃는 얼굴로 프로포즈해 오는 것이 아니라, 고슴도치처럼 야만스럽게 난폭한 태도로 덤벼드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그녀의 경멸은 증오로 변하고, 그의 간청에 대하여 분노에 찬 욕설로 대꾸해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싸움은 어디까지나 몰래 계속되어, 며칠 후에 선장이 버너너즈의 일에 대하여 물었을 때 그녀는 건성으로 대답해 주었다.

그러나 어느 날 밤 선장이 호놀룰루에서 외출하였다가 겨우 배가 떠날 시간에 대어 왔을 때, 드디어 이 싸움을 목격하게 되었다. 배는 그날 새벽에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낮에 거리에 나갔던 버너너즈는 독한 소주를 마시고 만취되어 돌아왔다. 배를 향해 보트의 노를 저어오던 선장은 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는 사닥다리를 타고 급히 기어 올라갔다. 버너너즈가 자기의 바로 곁에서 선실 문의 손잡이를 뒤틀며 처녀를 향해 고래고래 외치고 있었다. 자기 말을 들어 주지 않으면 그녀를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하는 것이었다.

"무엇 하고 있는 거야?" 선장이 외쳤다.

운전사는 그 손잡이를 놓고 매서운 눈으로 선장을 노려보더니 잠자코 외면하였다.

"집어쳐! 문을 가지고 왜 그러는 거야?"

운전사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화가 잔뜩 올라 선장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허튼 수작을 하면 어림도 없어. 이 썩어빠진 사팔뜨기 깜둥이 놈아!"

선장은 운전사보다 키가 1피트나 작아 도저히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으나, 토인 승무원들은 많이 다루어 본 솜씨가 있을뿐더러 호주머니 속에는 손가락에 끼는 쇠붙이를 갖고 있었다. 이 쇠붙이는 산사가 사용할 것이 못 되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자기는 신사가 아니며, 또 신사답게 대할 상대도 못되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오른팔이 운전사에게 날아가고 강철 반지를 낀 그의 주먹이 상대편의 턱을 정면으로 후려갈겼다. 운전사는 도끼에 얻어맞은 황소처럼 쓰러졌다.

"인제 정신을 좀 차리겠지."

선장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버너너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선실 문을 열고 처녀가 나타났다.

"죽었어요?"

"아니야."

그는 사람을 불러 운전사를 자기 침대에 옮겨 가라고 이르고 후련한 듯이 손을 부볐다. 그의 둥글고 푸른 눈이 안경 뒤에 번쩍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처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눈에 뜨이지 않는 위험에서 그를 지키려는 듯이 두 팔을 벌리고 껴안았다.

버너너즈가 다시 일어난 것은 2, 3일이 지난 후였다. 자기 방에서 나오는 그의 얼굴은 찢어지고 부어 있었으며, 검은 피부는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선장은 그가 갑판 위를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것을 보고 불러들였다. 운전사는 말없이 그에게 다가왔다.

"여보게 버너너즈!"

그는 날씨가 더워 땀으로 매끈거리는 콧등 위로 미끄러지는 안경을 끌어 올리며 말하였다.

"이런 일 때문에 자네를 해고할 생각은 없네. 그러나 내가 한번 화가 나면 어떻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테지. 다시는 그따위 짓 말어!"

그는 운전사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면서 그의 가장 큰 매력인 통쾌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운전사는 그의 손을 붙잡고 입술을 실룩거리면서 웃는 시늉을 하였다. 선장의 머릿속에는 이 사건은 이미 끝나 버렸다. 그리하여 세 사람이 다시 식탁에 마주 앉았을 때, 그는 버너너즈를 다시 놀려 주었다. 운전사는 가뜩이나 부어오른 얼굴이 아픔으로 더욱 일그러져 밥도 씹기가 힘든 모양이라 쳐다보기가 민망스러웠다.

그날 저녁에 파이프를 물고 상갑판에 앉아 있던 선장은 몸이 으시시 추워 왔다.

<오늘 같은 밤에 몸이 떨리다니 웬일이야!>

그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몸살이 난 모양이군, 하루 종일 어쩐지 기분이 좀 이상하더라니.>

그는 잠자리에 들어 키니네를 몇 알 먹었다. 이튿날 좀 덜한 듯하였으나, 마치 오입을 하고 난 뒤처럼 몸이 어딘가 허전하였다.

"간장이 나빠진 모양이군."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환약 한 알을 꺼내어 입에 물었다.

그날은 식욕이 별로 없고, 저녁이 되자 기분이 매우 언짢았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더운 위스키 몇 잔으로 치료해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별로 효과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에 거울을 들여다보니 골이 몹시 초췌해 있었다.

"호놀룰루에 닿을 때까지 낫지 않으면 덴비씨 병원에 찾아가 보아야지. 의사의 치료를 받으면 곧 나을 테지."

그는 입맛이 전혀 없고 팔다리가 노곤하였다. 잠은 푹 잤으나 기분이 상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하게 피로를 느끼는 것이었다. 그의 몸집은 작았으나 정력적이라 병석에 눕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으므로, 침대를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며칠 후에는 이 피로를 감당할 도리가 없어, 침대에 그냥 누워있어야 했다.

<일은 버너너즈가 대신해 줄 테지>

그는 혼자서 중얼대었다.

<전에도 그렇게 했으니까.>

그는 전에 자기가 흔히 친구들과 어울려 녹초가 되어, 배에 돌아와 정신없이 쓰러져 자던 일을 생각하고 빙그레 웃었다. 그것은 처녀를 데려오기 전의 일이었다. 그는 웃는 얼굴로 그녀의 손을 꼭 쥐어 주었다. 그녀는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기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는 줄 알자 그는 안심시키려고, 자기는 평생 앓아 본 적이 없으므로, 늦어도 한 주일 안으로 거뜬해질 거라고 말하였다.

"버너너즈를 내보낼 걸 그랬어요."하고 그녀는 말하였다.

"아무래도 그 사람 때문인 것 같아요."

"내 보내지 않기를 썩 잘했어. 만일 그랬더라면 배는 누가 맡게. 나는 역시 사람을 볼 줄 알거든."

그는 눈의 흰자위가 누렇게 변하고, 창백해진 푸른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말을 이었다.

"이봐. 설마 당신은 그자가 날 독살하려고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테지?"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중국인 요리사와 뭐라고 몇 마디 말하고 나서, 정성껏 그의 식사를 보살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으며, 그녀가 그에게 하루에 두세 차례 수프를 한 컵 들게 하는 것도 무척 힘들었다.

그가 병에 단단히 걸린 것은 분명하였다. 체중은 급격히 줄어들고 통통하던 얼굴이 창백하고 훌쭉하였다. 그는 아렇다 할 아픈 데도 없이 날마다 쇠약해지고 기운이 빠져갔으며 꼴이 점점 못되었다.

이번 항해는 약 4주일쯤 계속되었다. 그들이 호놀룰루로 돌아왔을 때에는 선장 자신도 자기 건강을 걱정하게 되었다. 그는 벌써 반달 이상이나 병석에 누워있는 셈이고, 이제는 기운이 전혀 없어 제발로 걸어서 의사에게 갈 수도 없었다. 그는 사람을 시켜 의사를 배로 불러왔다. 그를 진찰해 본 의사는 병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체온은 정상이었다.

"선장님!"하고 의사는 말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무슨 병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진찰해서는 알 도리가 없으니, 병원에 입원해 보시오. 속에는 분명히 이상이 없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몇 주일만 입원해 있으면 회복될 것 같습니다."

"나는 배에서 떠날 수가 없는데요."

그의 말에 의하면, 중국인들은 괴상한 족속으로 만일 자기가 입원하여 배를 떠나면, 선주(船主)에게 해고를 당하여 일자리를 잃게 되지만, 이대로 누워있으면, 선주와의 계약에 의해 말썽이 없으며, 배는 운전사에게 맡겨 두면 그만이라는 것이었다. 또 한 자기는 처녀의 곁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보다 더 나은 간호사가 없으니, 인간의 힘으로 낫게 할 수 있는 병이라면, 그녀도 자기를 낫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누구나 한번은 죽어야 하므로 자기를 편히 두어 달라고 하였다. 그는 의사의 충고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의사도 단념하고 말았다.

"정 그렇다면 처방을 서 드릴 테니 한번 써 보시오. 그리고 당분간은 그냥 누워 계셔야 합니다." 의사는 자신 없게 말하였다.

"선생님, 그 점은 염려 마십시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래야 일어날 기운이 없는걸요."

의사는 자기 처방에 자신을 갖지 못하였으며, 선장도 그 처방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의사가 돌아간 뒤, 그 처방지에 불을 댕겨 담배에 불여 물고 쾌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담배 맛은 벌써 잃었기 때문에, 그는 다른 데서 쾌감을 구하였다. 그가 담배를 피우는 것은 오직 자기가 담배를 피울 만큼 건강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날 저녁에 그가 앓아 드러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부정기 화물선 선장으로 있는 친구 두 사람이 찾아왔다. 그들은 위스키를 한 병 앞에 놓고 필리핀 시가를 피워 가면서 그의 병세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한 친구는, 자기 배의 항해사 한 사람이 이번 버틀러 선장처럼 까닭 모를 병에 걸려 미국 의사들도 고치지 못하던 것을, 신문에 난 특효약 광고를 보고 행여나 해서 써 보았더니, 두 병을 먹고 나자 신통하게 나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병에 걸린 후로 버틀러 선장은 정신이 전보다 다 맑아져, 친구들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에 그는 그들의 마음을 환히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은 자기를 죽을 사람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는 친구들이 돌아가자 무서워졌다. 처녀는 그가 그토록 쇠약해진 것을 알고, 이제는 자기가 손을 쓸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녀는 전부터 토인 의사를 부르자고 졸라대었으나 번번이 거절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애원하다시피 하였다. 선장은 귀찮은 얼굴을 하고 듣고 있었으나 속으로 망설였다. 미국인 의사가 자기 병을 모른다니 이사한 노릇이었다. 그는 자기가 겁을 먹고 있다는 인상을 그녀에게 주기는 싫었다. 흑인 의사는 꼴불견이었지만 한번 데려오게 하면, 그녀에게 적이 위안이 될 것 같아 좋을 대로 하라고 말하였다.

밤에 토인 의사가 왔다. 선장은 램프가 의미하게 비치고 있는 선실에서 혼자 자는 둥 마는 둥 하며 누워있었다. 그때 살며시 문이 열리면서 처녀가 발끝을 세우고 걸어 들어오고, 그 뒤를 어떤 사람이 소리 없이 들어섰다. 그는 이 광경을 보고 웃지 않을 수 없었으나 이제는 워낙 기운이 빠져, 그 웃음은 눈에 반짝거린 광채에 불과하였다.

토인 의사는 메마른 늙은이로, 대머리에 주름살투성이인 얼굴이 원숭이처럼 보였다. 허리는 구부정하고, 온몸에 고목처럼 응이가 배겨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볼 수 없는 몰골을 하고 있었으나, 두 눈만은 매우 생기가 있어, 어두운 불빛 아래 블그레 타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때 묻고 낡아빠진 무명 바지를 걸치고 윗도리는 벌거벗고 있었다.

그는 궁둥이를 마룻바닥에 대고 앉더니 15분쯤 선장을 주시하다가 손바닥과 발바닥을 만져 보았다. 처녀는 불안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윽고 의사는 선장의 목에 걸치고 있던 물건을 하나 내놓으라고 하였다. 처녀가 선장이 늘 쓰고 다니던 중절모를 내어주었다. 그러자 의사는 그 모자를 두 손에 움켜쥐고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나지막하게 주문(呪文)을 외우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에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모자를 놓고 바지 호주머니에서 담뱃대를 꺼내어 피워 물었다. 처녀가 의사에게 다가앉자, 그는 뭐라고 속삭였다. 처녀는 깜짝 놀랐다. 그들은 급히 뭐라고 얘기를 주고받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돈을 치르고 문을 열어 주었다. 의사는 방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말없이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녀는 선장에게 가까이 와서 몸을 굽혀 나지막하게 말하였다.

"()이 한 사람 당신을 국이려고 한대요."

"허튼소리 말어."

그는 버럭 화를 내었다.

"정말이에요. 그래서 미국 의사도 못 고쳤던 거예요. 이 고장 사람은 기도로 적을 죽일 수도 있어요. 전 실제로 그런 일을 눈으로 본걸요. 그렇지만 당신은 백인이라 아무도 해치지 못할 줄 알았어요."

"나한테 무슨 적이 있어?"

"버너너즈가 적이어요."

"그가 뭣 때문에 나더러 죽으라고 기도를 한단 말이냐?"

"일찌감치 그자를 내보낼 걸 그랬어요."

"만일 내 병이 단지 그자가 저주하기 때문이라면, 며칠 새로 거뜬히 일어나서 식사를 할 수 있어."

그녀는 잠자코 그를 쳐다보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당신은 죽어요."

전에 문병 왔던 두 선장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참아 입 밖에 내지 못했을 뿐이 아니었던가? 창백한 선장의 얼굴에는 소름이 끼쳤다.

"의사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던데. 얼마간 누워있으면 낫는다는 거야."

그녀는 마치 공기도 자기 말을 엿듣지 못하게 하려는 듯이 자기의 입술을 그의 귀에 갖다 대고 말하였다.

"당신은……당신은 죽어요. 그믐달이 지면 죽어 버릴 거예요."

"거 재미있는 얘기로군."

"버너너즈가 먼저 죽지 않는 한, 당신은 그믐달과 함께 죽을 거에요."

그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 아니므로, 이런 그녀의 말이, 아니 그보다도 그녀의 격렬하면서도 조용한 태도가 그에게 준 충격에서 곧 벗어났다. 그의 눈에는 다시금 미소가 스쳐 갔다.

"좀 두고 봐요."

"초승달이 뜨기까지는 열이틀이 남았어요."

그는 별안간 그녀의 음성에 이상한 예감을 느꼈다.

"이봐, 그건 또 엉터리 수작이란 말이야. 한마디도 믿을 수 없어. 아예 버너너즈에게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못써. 그는 못 생겼지만 일류 운전사란 말이야."

그는 말을 더 하고 싶었으나 극도로 피로하였다. 맥이 탁 풀리면서 머리가 얼떨떨하였다. 날마다 이때쯤 되면 그의 병세가 더 나빠지는 것이었다. 그는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러자 처녀는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선실을 빠져 밖으로 나갔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보름을 넘긴지 얼마 되지 않는 달이 검은 물결 위에 은빛을 던지고 있었다. 저 달이 사그러질 때 사랑하는 남자가 죽는다고 생각하자 그녀는 두려움에 찬 가슴으로 달을 쳐다보았다.

그의 목숨은 그녀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녀만이 그를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적은 교활하였다. 따라서 그녀도 교활해야 한다. 그때 그녀는 누가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별안간 닥친 두려움으로 하여 뒤돌아보지 않고서도, 운전사의 불타는 눈길이 자기를 어둠 속에서 노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가 자기 생각을 알아차린다면 모두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그녀는 모든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려고 애섰다. 그의 죽음만이 사랑하는 사람을 구해낼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그를 죽이는 방법이 있었다. 그녀는 물이 담겨 있는 조롱박 속의 자기 그림자를 그가 들여다보는 동안에 물을 흔들어 그 그림자를 지워 버리면 그는 마치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죽어 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속에 비친 그림자는 바로 그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이런 위험을 잘 알고 있으므로, 그가 물이 담긴 조롱박을 들여다보면서 조금도 의심을 사지 못하도록 하는 교활한 술책이 필요하였다. 그를 죽이려고 벼르는 적이 있다는 것을 그가 알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시일이 너무나 급하였다. 그녀는 이윽고 운전사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자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틀이 지나 그들은 다시 출법하였다. 앞으로 초승달이 돋기까지는 열흘이 남아 있었다. 선장의 몰골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가죽과 뼈만 남아서 부축하지 않으면 움직일 수도 없었다. 입을 놀려 말하는 것도 힘들어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도 그 일에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운전사는 무척 약은 사람이라 침착하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호놀룰루 군도의 한 조그마한 섬에 이르러 짐을 부려 놓았다. 이제는 겨우 한 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녀는 드디어 일에 착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선실에서 전에 선장과 함께 사용하던 물건을 몇 가지 꺼내어 짐을 꾸렸다. 그리고 이 짐짝을 자기와 운전사가 식사를 함께 하는 선실에 갖다 두었다.

이윽고 식사 시간이 되어 그녀가 들어서자 운전사는 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가 그 짐짝을 유심히 보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는 분명히 그녀가 배에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단정하였다. 그는 이 웃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치 자기의 행동을 선장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는 듯이 자기의 모든 소지품을 하나하나 갑판 선실로 옮겨가 짐을 꾸렸다. 선장의 옷도 몇 가지 집어넣었다. 드디어 운전사는 더 이상 침묵을 지킬 수 없다는 듯이 돛폭 천으로 만든 양복 한 벌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뭣 하러 싸는 거요?"

그녀는 두 어깨를 움칫 치켜올렸다.

"고향에 돌아가려구요."

그는 험상궂은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다. 선장이 다 죽어감으로 닥치는 대로 빼돌려 가지고 도망치려는 수작이냐는 표정이었다.

"내가 가져가지 못하게 하면 어쩔 테요? 그건 선장의 물건이 아니오."

"그렇지만 그분에게는 소용없는 물건들인걸요."하고 그녀는 대답하였다.

벽에는 조롱박이 걸려 있었다. 그것은 내가 선실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게 선장과 이야기한 바로 그 조롱박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끄집어 내렸다. 온통 먼지투성이었으므로, 그녀는 물병의 물을 따라 손가락으로 먼지를 닦아내었다.

"그건 뭣 하러 그러는 거요?"

"팔면 50달러는 받을 게 아녜요?"하고 그녀는 대답하였다.

"그걸 가져가려면 나한테 사례를 해야 해요."

"뭘 사례할까요?"

"몰라서 물어요?"

그녀는 입가에 살짝 웃음을 지어 보이고 그를 힐금 쳐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몸이 달아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녀는 어깨를 약간 움칫해 보였다. 그러자 그는 사나운 기세로 달려들어 두 팔로 그녀를 껴안았다. 그녀는 깔깔대며 웃었다. 이어서 그 탄력 있는 포동포동한 팔을 그의 목에 감고 요염하게 몸을 맡겼다.

이튿날 아침에 그녀는 깊이 잠든 그를 가볍게 흔들어 깨웠다. 아침 햇살이 선실에 비쳐왔다. 그는 그녀를 품에 껴안았다. 그리고 앞으로 선장의 목숨이 하루 이틀밖에 남지 않았으며, 선주(船主)는 선원들을 통솔해 나갈 백인 선장을 새로 구하기가 그리 쉽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그는 다른 사람보다 선주에게 보수만 적게 요구하면 선장 자리는 자기에게 차례가 올 터이니, 배에서 자기와 같이 살자고 하였다.

그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몸을 그에게 바싹 기대고, 선장이 가르쳐준 미국식으로 그의 입술에 키스를 하며 배에 그냥 남겠다고 약속하였다. 버너너즈는 행복에 도취되어 있었다.

절호의 챤스였다.

그녀는 일어나 머리를 매만지려는 듯이 테이블 쪽으로 갔다. 거울이 없었으므로 조롱박에 담긴 물에 얼굴을 비쳐 보며 윤기가 흐르는 머릿결을 손질하고 손짓을 하여 버너너즈를 불러 조롱박을 가리켰다.

"밑바닥에 뭐가 깔려 있어요."

버너너즈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본능적으로 물속을 정면으로 들여가 보았다. 그의 얼굴이 그 물속에 비쳤다. 그러자 그녀는 재빨리 힘껏 조롱박을 두들겼다. 그녀의 손이 조롱박의 밑바닥을 두들기는 바람에 물이 튀어 올랐다. 그러자 그의 그림자는 산산조각이 났다.

버너너즈는 깜짝 놀라 목쉰 소리를 지르며 뒤로 움칫 물러나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얼굴에 승리감으로 충만한 증오의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그의 눈에 갑자기 공포감이 감돌았다. 이어서 그의 침울한 얼굴이 괴로움으로 하여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무슨 강한 독약이라도 마신 것처럼 마룻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온몸에 심한 전율이 한번 스치더니 그는 조용해졌다. 그녀는 냉담하게 허리를 굽혀 한 손으로 그의 가슴을 만져보고 나서, 아래 눈꺼풀을 벗겨 보았다. 그는 죽어 버린 것이다. 그녀는 선장이 누워있는 선실로 들어갔다. 그의 볼에서는 희미한 생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그는 놀라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곡절이냐구요? 이야기 내용이나 사실 여부보다는 어찌하여 이러한 일이 그런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느냐 하는데 더 흥미가 있지요. 그처럼 보잘것없는 평범한 사나이의 마음 어느 구석에 아름다운 처녀들의 정열을 불태울 수 있는 힘이 숨어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어요."

나는 그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동안에, 옆에서 잠들어 있는 그녀를 바라보고, 사랑은 지적도 낳을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혔다.

"이건 그 여자가 아닙니다."

"아니, 뭐요?"

"요리사의 얼굴을 자세히 보셨지요?"

"지금까지 내가 본 사람 중에서 가장 흉하게 생겼더군요."

"버틀러는 일부러 그런 요리사를 데려다 둔 거요. 아까 이야기한 그 처녀는 실은 작년에 중국인 요리사와 눈이 맞아 줄행랑을 쳤거든요. 방금 배에서 본건 새로 데려온 여자지요. 데려온 지 두어 달밖에 안 돼요."

"원 세상에 그럴 수가 있나."

"그는, 이번 요리사는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반드시 그렇다고만 볼 수는 없지요. 되놈이 일단 여자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찝쩍대기 시작하면 배겨낼 여자가 없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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