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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비둘기 소리

Bollnow 2024. 4. 21. 06:51

산비둘기 소리

W. S. Maugham

 

나는 오랫동안 피터 멜로즈가 내 마음에 드는 작가인지 아닌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는 세상에 장편소설을 한 권 내놓고, 언제나 시인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들 -감각이 좀 둔할 수도 있지만 훌륭한 사람들이다- 사이에서 상당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늙은 신사들-오찬에나 참석하는 것 외에는 별로 할 일이 없는-이 젊은 여성과 같은 열성을 갖고 그를 칭찬하였으므로, 남편들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아낙네들은, 그런 칭찬을 듣고, 분명히 전도가 유망한 작가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작품에 대한 몇 편의 시평을 읽은 적이 있는데, 편자들은 각자 가지 멋대로 상반되는 내용의 평을 쓰고 있었다. 어떤 비평가는, 그 작가가 이 처녀작으로 영국 문단의 기수(旗手)의 한사람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다른 비평가는 오히려 혹평을 가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소설을 읽지 못하였다. 내 경험에 의하면, 어떤 소설이 논란이 되었을 때에, 바로 읽어 볼 것이 아니라 1년쯤 지나서 읽는 편이 효과적이었다. 그렇게 하면, 세상에 읽을 만한 가치가 없는 책들이 얼마나 않은지 알게 될 것이다. 아무튼 그런 책들이 놀라울 정도로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런데 나는 어느 날 우연히 피터 멜로우즈를 만나게 되었다. 어떤 셀리(백포도주 이름) 파티에 참석해 달라는 초대를 받고 이에 선뜻 응한 것이, 생각해 보니 잘못이었다. 그 파티는 브름스베리의 개조된 아파트 4층에서 열렸다. 나는 계단을 따라 4층까지 다 올라갔을 때, 숨이 좀 차서 헐떡거렸다.

이 파티의 주인공은 두 여인으로, 몸집이 다 남달리 큰, 초기에 접어든 중년 부인이었다. 그들은 자동차의 내부 구조에 대하여 정통해 있는 것을 자랑하며, 종이봉투에 넣어서 파는 과자들을 즐겨 군것질하는 따위는, 궂은날에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부랑인을 연상케 하는 여인들이었지만, 한편 제법 여자다운 맛도 있었다.

그녀들은 아파트 4층의 그 응접실을 "우리의 작업장"이라고 부르고 있었으나, 두 여자가 다 먹고사는 데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 처지라, 돈벌이 같은 것은 한평생 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응접실은 넓기만 하였지 장식은 별로 없었다. 주인들의 육중한 체구를 지탱하기에는 벅찰 것으로 보이는 스텐레스로 된 강철의자며, 유리판을 입힌 테이블 몇 개와 얼룩말의 가죽을 씌운 무척 긴 소파 하나가 놓여 있었다. 벽에는 책상이 두세 개 놓이고, 세잔느와 브라크, 그리고 피카소 들의 그림과 그들보다 더 유명한 영국 화가가 그린 복사판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서가에는 18세기의 진본(眞本)이 상당히 많이 꽂혀 있고(음란한 내용이 실린 책은 시대적으로 낡아서 없어지지 않으니까), 그밖에 현존하는 작가의 책들이 꽂혀 있었는데, 거의가 호화판들이었다. 내가 그 파티에 초대를 받은 것도, 그 서가에 꽂힌 몇 권의 저서에 서명을 하기 위해서였다.

파티에 모인 손님은 몇 사람밖에 되지 않았다. 주인들 이외에는 여자라고는 한 사람뿐이었는데, 이 여자도 실은 주인들에게 동생뻘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 여자도 몸이 뚱뚱하였지만 주인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고, 키도 후리후리하지만 주인들보다는 작은 편이며, 개방적이고 명랑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것도 주인들보다는 훨씬 덜한 편이었으므로, 그녀들의 동생이려니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묻는 것을 잊어버렸는데, 누가 브우플이라는 주인들의 성()을 부르면, 그녀도 덩달아 가지를 부르는 줄 알고 대꾸하곤 하였다. 그리고 남자 손님이라야 나 이외에는 한 명밖에 없었는데, 그가 바로 피터 멜로우즈였다.

그는 생각보다 젊어, 스물두셋 정도로 보이는 청년으로, 키는 보통이었으나 균형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인지 뚱뚱하고 작달막해 보였다. 유대인은 아니나 그와 비슷한 세미틱한 큼직한 코를 비롯하여, 불그레한 얼굴 근육이 지나치게 얇아 뼈대들이 불쑥 튀어나와 보이고, 숱이 많은 눈썹 아래 민감한 푸른 눈이 번쩍이고 있었으며, 짧게 깎은 다갈색 머리에는 비듬이 꽤 많이 있었다. 옷차림은, 킹스로드 부근을 더벅머리로 돌아다니는 미술 학도들이 흔히 몸에 걸치는 것과 비슷한 노퍽자켓(벨트가 달린 싱글 윗도리)에 잿빛 프란넬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는 비사교적이고 세련되어 있지 않은 청년으로, 태도와 언동에도 별로 호감이 가지 않았다. 자기주장만을 내세우고 따지기를 좋아하며,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동료 작가들에 대해서는 여지없이 경멸하고, 또 그러한 자기 소견을 열심히 떠들어 댔다. 유명한 작가들에 대한 그의 끈질긴 공격은 나를 통쾌하게 하기도 했으나, 그 내용은 내가 보기에는 너무나 과장되어 있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듣고만 있었으나, 내가 자기 앞에서 떠나면 나도 여지없이 깔아뭉갤 터이므로, 나의 통쾌감도 그런 점을 계산에 넣어야 하였다.

그는 무척 잘 지껄여댔다. 그 내용은 매우 재미있고, 때로는 기지(機知)가 번뜩이기도 하였다. 그가 토해내는 경구는 세 분의 숙녀가 무척 좋아하여, 차라리 괴로워 보일 정도로 몸부림치며 껄껄 웃어대지 않았던들, 나도 순진하게 따라 웃으며 동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무엇이고 떠들어댈 적마다, 그것이 익살스러운 이야기이건 터무니없는 이야기건 간에 그 세 사람의 숙녀들은 무조건 웃어대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가 줄곧 혼자서 떠들어댔기 때문에 어리석기 짝이 없는 소리도 수없이 튀어나왔으나, 한편 제법 재치 있는 소리도 들었다.

어쨌든 그에게 하나의 관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아직 미숙하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듯이, 그렇게 독창적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진지한 면은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무엇보다도 인상 깊은 것은, 열띠고 무모할 만큼 왕성한 활기였다. 그는 주체로울 정도로 사납게 자기 자신을 불태우는 열화와 같은 것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열화는 그를 가까이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한 줄기의 불길을 내뿜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에게는 그와 같은 무언가가 있기는 하였다. 하긴 그런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대견스러울 게 없을지 모르지만, 그와 헤어지고 나서, 그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 하고 내가 가벼운 호기심을 갖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 나는 그에게 이 방면에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한두 편의 재치 있는 소설을 써 낸 젊은이는 얼마든지 있었다-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한데 나는 그가 보통 남자들과는 어딘가 분명히 다르다는 인상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ㄱ의 나이가 30쯤 되면 지금까지의 그 사나운 성미도 누그러지고, 그가 자부하고 있던 것처럼, 그렇게 자기가 현명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하여 깨닫게 되어, 그런대로 따뜻한 인간미가 있는, 그리고 붙임성도 있는 남자가 될 것도 같은, 그런 타입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를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나 그로부터 이삼 일 지나, 내가, 꽤 알랑거리는 듯싶은 헌사(獻詞)가 곁들인 그의 소설을 받게 되었을 때, 나는 저으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소설을 읽었다. 그것은 분명히 자서전적인 작품이었다. 무대는 서섹스의 조그마한 도시이고, 등장인물은 체면치레에만 급급하여 돈벌이는 별로 하지 못하는 중류층의 상위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작품이 갖는 유머는 천박하고 거칠은 편이므로 내 비위에 거슬렸다. 작품의 주류가, 등장인물들이 늙고 가난뱅이라는 이유로 말미암아 그들을 조롱하고 비웃는 시니컬한 데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인 피터 멜로주는, 그와 같은 불행을 참고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의 괴로움이 어떤 것이며, 그런 괴로움을 어떻게 해서라도 메꿔 나가려는 그들의 노력이 얼마나 동정할 여지가 있는 것인가를 이해하려 들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 대하여 조롱과 비난을 일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작품 가운데 군데군데 찾아볼 수 있는 환경 묘사나, 어떤 방안의 자질구레한 표현이나, 시골 풍경을 인상적으로 그린 대목은 썩 잘되어 있었다. 그러한 묘사를 자기의 섬세한 마음씨와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정신적인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능력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것은 대체로 꾸김이 없는 자연스럽게 씌어진 것으로, 어조에 대한 멋진 감각도 돋보였다.

한데 이 작품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된 근본적인 요소, -따라서 나도 이것이 독자들에게 했구나 하고 생각한 점은, 소설의 줄거리를 이루고 있는 사랑의 이야기 속에 뜨겁게 꿈틀거리는 정열이었다.

그 사랑은 현대적이라 다소 음란하고, 또 이 역시 현대식이어서 이렇다 할 결실도 맺지 못하고 어물어물 끝장이 나서, 나중에는 모든 것이 소설의 첫머리처럼 되어 버린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그렇지만 독자들은 분명히 그 속에서 젊고 벅찬 사랑, 이상주의적이고 성적으로도 적극성을 띤 사랑이라는 인상이 깊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실로 생기있고, 감명 깊고, 숨막힐 듯한 기분을 준다. 다시 말해서 생명의 맥박이 지면(紙面)을 뒤흔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모하고 노골적이고 아름답기도 하다. 그건 하나의 자연력(自然力)과 흡사하였다. 즉 정열 덩어리라고 부를 수 있었다. 다른 어디를 찾아보아도 인생에 이렇듯 감동적이고 엄청난 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없다.

나는 피터 멜로우즈에게 편지를 띄워 그의 소설에 대한 감상을 쓰고, 언제 점심이라도 나누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그가 이튿날 전화를 걸어와, 우리는 만날 날짜를 정했다.

우리가 어느 음식점의 식탁에 마주 앉게 되었을 때, 그는 뜻밖에도 수줍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를 위해 칵테일을 한 잔 주문했다. 그는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기 시작했으나, 나는 역시 마음속으로는 침착하지 못하고 들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가 제일 자신 있게 내세우는 것은, 실상 자신이 없어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자기 자신에게 대해서일 것이다-숨기기 위한 태도라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그의 언동은 투박하고 굳어져 있었다. 그는 가끔 무례한 말을 지껄이고는 그 실언을 얼버무리기 위해 신경질적으로 웃어 보이기도 했다. 겉으로는 자신만만한 듯이 하면서도, 항상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며, 자기의 주장에 동조해 달라는 듯이 보였다. 일부러 상대방을 초조하게 만들거나 비위에 거슬리는 말을 지껄여, 그가 자부하는 대로 멋진 사나이라는 인상을 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그는 걸핏하면 자기 또래의 문인들을 경멸하고, 또 그것이 그의 제일 큰 관심거리이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별로 호감을 느끼지 못했지만, 구태여 그런 것에 구애되지 않았다. 자기 몫을 감당하는 슬기로운 젊은이가 미욱하게 보이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기의 소질을 알고 있으나, 활용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다. 자기 장점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연히 반발하게 된다. 그들은 자기가 남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데,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그걸 받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응분의 명성을 얻지 못해 안타까워한다.나는 이런 철이 없고 거만한 젊은이를 나무라지 않는다. 내가 동정(同情)의 주머니 끈을 바짝 조이는 것은 오히려 호감을 느끼는 젊은이를 만났을 경우이다.

피터 멜로즈는 자기 작품에 대해서는 매우 겸손한 태도를 취하였다. 내가 작품에서 마음에 든 대목을 칭찬했더니, 그는 그렇잖아도 불그레한 얼굴을 더욱 붉혔으며, 내가 어떤 부분에 대해 혹평을 했더니, 그는 이쪽이 오히려 면구스러울 만큼 겸손한 태도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 책의 인세(印稅)는 몇 푼 되지 않았으며, 그는 다음 작품에 대한 인세를 출판사에서 달마다 얼마간씩 미리 받고 있었다. 그는 말하기를, 그 제2 작품은 이제 쓰기 시작한 단계이며, 집필에 몰두하려면 거처를 옮기는 것이 좋겠는데, 당신은 리비에라에 살고 있으니까 해수욕이나 하면서 글을 쓸 만한 조용하고 값싼 숙소가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나에게 부탁했다. 나는 그에게, 우리 집에 와서 조용한 곳을 손수 찾아보라고 대답하였다. 내가 마을 마치자, 그의 푸른 눈이 광채가 나고 얼굴도 붉혔다.

"방해가 되지 않을까요?"

"괜찮아요. 나는 내 일만 하면 되니까요. 나는 당신에게 하루 세끼의 식사와 잠잘 수 있는 방을 제공할 뿐이거든요. 그러므로 권태롭기는 하겠지만 당신 마음대로 자유롭게 지낼 수는 있을 테지요."

"아주 신나는 이야기군요. 제 마음이 결정되면 알려 드리지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 좋다마다요."

우리는 이렇게 약속하고 헤어졌으며, 한두 주일 지나 나는 리비에라로 돌아갔다. 이것은 5월에 있은 일이었다. 나는 6월 초순에 피터 멜로즈에게서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 그 사연인즉, 언젠가 자기를 식사에 초대했을 때, 댁에 머물게 해주겠다는 이야기가 농담이 아니라면, 며칠 후에 찾아가 뵈어도 좋으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는 본심에서 그런 말을 했지만, 한 달이나 지난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그처럼 거만하고 행실이 점잖지 못한 젊은이를, 그것도 불과 한두 번밖에 만난 일이 없는, 즉 나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사나이를 집에 데려다 놓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는, 손님으로 받아들이기엔 거북하고 따분한 청년이 아닐까? 한편 나는 조용한 생활을 즐기는 사람으로, 외부 인사들과 접촉하는 일이 별로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내 추측대로 무례한 젊은이라도, 이쪽은 주인이므로 참고 그쪽 형편을 돌보아야 할 입장이니 그게 얼마나 언짢은 일이겠는가. 나는 참다못해 벨을 눌러 하인을 불러서, 그 녀석의 옷가지를 챙겨 반 시간 이내에 내보내라고 하는 나 자신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집에 며칠 머문다는 것은, 그로서는 방 겂과 식사 대를 절약하는 것이 되며, 그가 편지에 적어 보낸 대로 어렵고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다면, 내가 그를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집필에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을 터이므로, 나는 그에게 전보를 쳤다. 그는 곧 찾아왔다.

나는 정거장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전에 입고 있던 회색 프란넬 바지에 밤색 트위이드의 웃저고리 차림을 하여 매우 더워 보였으며, 실제로 땀에 절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풀에서 몸을 헹구고 나오더니 흰 쇼트 팬츠와 코세 셔츠로 갈아입었다. 그러자 그는 무척 젊어 보였다. 그가 영국을 떠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꽤 흥분해 있었다.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나도 기분이 좋았다. 그는 낯설은 환경에 처음 부딪혀, 평소의 자의식(自意識)을 잃어버렸나 보다. 순진하고 앳되며, 겸허한 인간으로 변해 버렸다. 이것은 놀라운 일로, 나로서는 호감을 느꼈다.

그는 밤에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 청개구리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조용한 정원에 나와 앉아서, 이번에 쓴 장편소설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하였다.-그것은 어떤 젊은 작가와 오페라에 나가는 유명한 프리마돈나와의 로맨스를 다룬 것이었다. 주제는 위더(1839~1908, 영국의 여류작가)의 작풍(作風)을 연상케 하는, 이 하드 보일드(hard boiled-객관적으로 표현하여 도덕적으로 비판을 가하지 않음) 한 젊은이에게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이므로, 나는 가소로운 생각도 들었다. 유행이 한 바퀴 돌아서 몇 세대를 지나면 다시 본래의 테에마로 돌아오게 마련인지, 참 묘한 일이기도 한다.

피터 멜로즈가 그 소설의 주제를 매우 현대적인 수법으로 다루리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은 어쨌든, 스토리는, 1880년대에 세 권으로 된 소설이 독자들을 매혹시킨 감상적인 줄거리와 비슷한 정도로 낡은 것이었다. 그는 시대 배경을 에드워드 7세 왕조(1901~1910)의 초기로 잡았으면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젊은이들에게는 이미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린 지나간 시대인 것이다. 그는 무척 잘 지껄여댔다. 말주변은 듣기에 거북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도 자의식을 갖지 못한 채, 소설에 자기의 백일몽을-세상에 이름난 절세의 미인과 자기가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이 모든 세상 사람의 선망을 독점한다는, 별로 매력이 없고, 이름도 없는 젊은이가 꿈꿀 수 있는, 익살스럽기도 하고 가련하기도 한 그런 백일몽을 엮어 나가려는 것이다. 나는 전부터 위더의 작품을 애독해 왔으므로, 피터의 구상도 나한테 불만스럽지는 않았다. 솜씨 있는 그의 묘사력이나, 전물이나 여러 가지 가구, , 나무, 꽃 같은 구체적인 사물을 생생하게 포착하는 안목이나, 인생에 대한 열의나, 사랑의 정열을 글로 표현하는 실력 등으로 미루어보아, 나는 그가 격렬하고 부조리하며 시적인 이야기를 써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물었다.

"당신은 어떤 프리마돈나를 하나쯤 알고 있나요?"

"아아뇨, 그러나 저는 제가 구할 수 있는 자서전이나 회상기 같은 것은 다 찾아 읽었어요. 이런 일만은 철저히 해 놓았지요.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한 사실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놀랄 만한 어떤 표현이나 암시적인 에피소드 같은 것도 잘 파악하기 위해, 그 사회의 내막에 대해서는 세밀한 부분까지 낱낱이 훑어보았어요."

"그렇게 해서 당신의 의도하는 바를 파악했단 말이죠?"

",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는 여주인공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녀는 젊고 아름답고 방자한데다가, 화도 고잘 내는 성미이지만 실은 마음씨가 너그럽다. 그만큼 스케일이 큰 것이다. 그녀가 정열을 쏟는 대상이며, 목소리뿐만 아니라 몸짓과 연기 동작, 그리고 그녀의 마음속에도 깊숙이 음악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녀는 남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예술을 깊이 이해하므로, 어떤 다른 가수가 그녀를 중상하더라도, 그 가수가 맡은 역()을 멋있게 불었을 경우에는, 그 가수의 고약한 언동을 용서해 줄 수도 있다. 그녀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도량이 넓은 여자로, 누가 불행에 빠졌다는 말을 듣고 마음에 내키면,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무엇이든지 주어 버린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무릅쓸 만큼 정열적이고 자랑스러운 애인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영리하고 교양도 있다. 청량하고 욕심이 적으며, 치사스럽지 않다. 그러니까 그녀는 너무나 훌륭하여, 현실 세계에서는 살아갈 것 같지 못한 그런 여자이다.

"역시 한 번쯤 프리마돈나를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을까요?"

"라 파르데르느라는 여자 이름을 들은 적이 있나요?"

"물론이죠. 그 여자의 회상록도 읽었어요."

"그 여자도 이 바닷가에 살고 있지요. 내가 전화를 걸어 저녁 식사에 초대하도록 하지요."

", 그래요? 그러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 여자가, 당신이 미리 기대했던 바와는 어긋나더라도, 나중에 나에게 불평을 해서는 안 돼요."

"저야 뭐 진실만을 알아내면 족하지 않을까요."

라 파르테르느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멜바와 같은 가수도 그녀의 명성에는 따르지 못한다. 그녀는 지금 오페라 무대에 서지 않지만, 목소리가 매우 아름답고, 어느 나라의 뮤직홀도 대뜸 초만원을 이루게 할 만한 매력을 지금도 갖고 있다. 겨울이면 해마다 긴 연주 여행을 떠나며, 여름에는 바닷가 별장에서 휴양을 한다. 이 리비에라 해안에서는, 적어도 30마일 이내의 거리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녀와 이웃처럼 지내는 처지므로, 나도 이 몇 해 동안에 그녀와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다. 그녀는 다혈질이며, 가수로서 이름이 나 있을 뿐만 아니라, 애정 방면에도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특히 자기 정사(情事)에 대하여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성미였다. 내가 보기에 그녀의 가장 큰 특색이라고 할 만한 특이하고 대담한 유머를 섞어가며 그녀는 귀족이나 부호들의 프러포즈를 받고, 날리던 일들을 몇 시간씩 이야기했다. 나는 이런 이야기에 매혹되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던 때가 많았다. 그 숱한 이야기 가운데 다소의 진실로 깃들어 있었으므로, 나는 그것으로 족하게 여겼다. 그녀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너 번 결혼했는데-모두가 짧은 기간이었으나-나폴리의 공작도 그런 상대자의 한 사람이었다.

라 파르테르느라는 이름으로 알려지는 것이 다른 어떤 직함보다도 나은 일이기는 하지만, 그녀는 이 공작의 칭호를 자기 이름에 덧붙여서 사용하는 법이 없었다(그녀는 그 공작과 헤어진 후에 또 다른 남자와 결혼했으므로 이에 공작의 칭호를 사용할 권리를 잃어버렸지만-).

그러나 그녀의 식탁에 오르는 은그릇이나 식기류, 그 밖의 정찬용(正餐用)의 모든 식기는 공작의 문장(紋章)과 보관(寶冠)으로 찬란하게 장식되어 있었으며, 하인들도 자기를 반드시 마나님이라고 부르게 했다.

그녀 자신은 항가리 출신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그녀의 영어는 매우 유창했다. 그러나 영어로 이야기할 때에는(문득 그런 필요성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가벼운 외국어와 비슷한 악센트를 섞었는데, 그 어투는 캔자스시티 부근의 말씨를 연상케 한다고 누군가 지적한 일이 있었다. 그녀의 해명에 의하면, 그것은 그녀가 아직 어린이였을 때 그녀의 부친이 미국에 망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부친이 훌륭한 과학자로서, 진보적인 학설 때문에 화를 당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마쟈르의 귀족으로, 어느 태공(太公)의 부인과 정을 통했기 때문에 황제의 격분을 사서 피신해야 했는지, 그녀는 진상을 잘 몰랐던 것 같다. 어느 쪽을 택하여 행세하는가에 따라-그녀가 다만 위대한 예술가로서 처신하는지, 아니면 두드러진 귀부인으로서 처신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나와 어울리는 마당에서, 타고난 본래의 모습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었으나-하긴 그녀가 그렇게 하려고 하여도 되지 않는 일이겠지만-나한테는 다른 사람의 경우보다 한결 솔직하게 이야기하였다.

그녀는 예술에 대하여, 매우 자연스럽고 건전한 멸시를 하고 있었다. 예술을 하나의 커다란 허구(虛構)라고 보았으며, 이런 허구를 대중에게 강요하는 예술가들을, 일종의 익살스러운 동정 같은 눈으로 보고 있었다. 솔직한 이야기가, 나는 피터 멜로즈와 라 파르테르느와의 면담에 대하여, 어느 편인가 하면, 하나의 야유적인 흥미를 갖고 있었다.

그녀가 내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인 것은, 우리 집 음식이 맛 좋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이나 스타일에 남달리 관심을 가져야 하는 그녀로서는, 하루에 저녁 식사 한 끼만 취하는 버릇이 있었으므로, 그 한 끼만은 영양이 풍부해야만 했던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9시쯤에 와 달라고 미리 일러두었다. 그녀의 식욕이 제일 왕성할 때가 9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하인들에게, 9시 반에 음식을 내오도록 일러두었다.

그녀는 1015분 전에 도착하였다. 연두빛 공단 드레스는 가슴께까지 움푹 패어 있고, 등을 통째로 드러낸 디자인으로, 커다란 진주 목걸이와 여러 개의 값진 반지를 끼고 있었을 뿐더러, 왼팔에는 손목에서 팔꿈치에 닿을 만큼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의 팔지를 여럿 끼고 있었다. 그 가운데 두세 개는 분명히 진짜 보석이었다. 검은 머리에도 다이아로 장식한 가느다란 장식물 한 개를 붙이고 있었다.

이날 밤, 그녀의 모습은 호사를 하고 있었다. 왕년에 스테포오드 하우스에서 열린 무도회에 참석했을 때에도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몸단장이 굉장하군요."하고 마는 말하였다.

"파티는 아니라고 미리 말했을 텐데요."

그녀는 관록 있는 그 검은 눈초리로 피터를 힐끗 바라보았다.

"천만에요, 이만하면 파티나 다를 게 없어요. 동석하는 친구분이 훌륭한 소설가라고 하시지 않았어요. 나 같은 여자는 한갓 연극자에 불과하지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찬란한 팔찌 하나를 쓰다듬었다.

"이건 창조적인 예술을 하시는 분에 대한 존경의 표시에요."

나는 야비한 말이라도 한마디 불쑥 던질 뻔했는데, 그걸 꿀꺽 참고, 그녀가 좋아하는 칵테일의 이름을 대고 그것을 권하였다. 나는 그녀를 마리아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었으며, 그녀는 나를 항상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첫째로, 그렇게 해서 그녀는 나에게 응석꾸러기의 취급을 받고 있는 듯이 생각하려는 것이고, 둘째 이유는, 나이 차이래야 그녀가 나보다 두세 살 아래이지만, 그와 같은 칭호에 의해 피차에 마치 세대의 차이라도 있는 듯이 느끼기 위해서였다. 하긴 그녀가 나를 얄미운 돼지라 부르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그런데 이날 밤의 그녀는 서른다섯쯤 된다고 해도 곧이들릴 것 같았다. 이목구비가 커서 나이만큼 늙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무대 위에 서면 요염하고 아름다웠는데, 일상생활에서도 코와 입이 다 크고 얼굴도 통통한 편이다. 상당히 아름다워 보였다. 얼굴은 지분(脂粉)으로 화장하고, 볼엔 거무스름한 연지를 발랐으며, 입술은 연연한 주홍색이었다. 언뜻 보면 스페인계의 미인을 연상케 했는데,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한 것 비용을 들여 그녀를 초대한 이상, 피터가 그만한 값어치를 얻게 하려고, 되도록 그녀에게 많은 이야기를 시키려고 유도해 보았지만, 그의 화제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수다스럽게 잘 지껄이는 여자라, 그런 이야기를 처음 듣는 사람은 소문대로 재치 있는 여자라고 일단 탄복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하나의 연기에 불과하여, 듣는 사람도 곧 그런 줄 알게 마련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떠들어대는 이야기의 의미도 잘 모를 경우가 있었으며, 따라서 자기 이야기에 이렇다 할 관심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녀가 이 세상에 태어난 후로 책을 한 권이라도 읽었는지 의심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녀의 지식-주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 마치 화보나 가득 실린 신문의 사진 따위나 들여다보고서 이해할 정도로 빈약한 것이었다. 그녀의 음악적인 정열이라는 것도, 그때그때의 기분적인 것이었다.

언젠가 나는 그녀와 함께 음악회에 간 적이 있다. 그녀는 <5 교향악>이 연주되는 동안 시종 쿨쿨 자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휴식 시간에 사람들에게, 베토벤을 듣고 있으면 너무나 크게 감동되어, 음악회에 가는 것을 망설이게 될 지경이에요. 그 아름다운 테에마가 머릿속에서 줄곧 울려 퍼지기 때문에 그날 밤은 뜬눈으로 새거든요-하고 지껄이는 것이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정말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하룻밤을 뜬눈으로 밝히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이미 짐작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교향곡>이 연주되는 동안에 그만큼 쿨쿨 잠을 잤으므로, 그날 밤에는 잠이 오지 않을 것은 당연하니까.

그런데 그녀가 흥미를 잃지 않는 화제가 오직 하나 있다. 이 화제가 입에 오르기만 하면 그녀는 지칠 줄 모르고 정력을 갖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어떤 방해물도 그녀로 하여금 그 화제로 되돌아오게 하는 것을 가로막지 못한다. 아무리 이야기가 빗나가도, 그녀는 재치 있게 이야기의 꼬리를 잡아 그 화제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 경우에 그녀는 머리가 하도 명석하여, 저 바보 같은 여자가 어떻게 저런 재주를 부릴까 깊을 정도이다. 일단 그 화제에 미치기만 하면, 그녀는 재치가 넘치고 화술이 능수능란하여, 때로는 철학자처럼, 또 때로는 비극의 여주인공처럼 떠들어대는가 하면 샘솟듯 하는 창조력까지도 다 동원되는 것이었다. 언변이 청산유수이고 천변만화해서 그칠 줄 모르게 된다.

그 화제란 바로 그녀 자신이다. 처음에 슬쩍 이 화제의 실마리만 던져 주고 나서, 그 후로는 때때로 적당히 맞장구만 치면 되는 것이다. 그녀는 마치 순풍에 돛을 단 격이었다. 이날도 그녀는 상당히 좋은 컨디션을 보였다. 우리는 테라스에서 식사를 했었는데 때마침 보름달이 앞바다에 떠 있었다. 자연은 마치 이런 자리에 어떤 풍취를 첨가해야 아울리는지 알기나 하는 듯이 정당한 무대 장치를 해주었다.

조망은 두 그루의 정정한 검은 측백나무로 구분되어 있고, 우리가 앉은 테라스의 주위에는 꽃이 활짝 핀 귤나무 숲에서 강한 향기가 풍겨 왔다. 바람도 없어, 식탁 위에 세운 촛불은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이 불빛은 라 파르테르느를 위해서는 매울 어울리는 조명이었다. 그녀는 우리들의 중간에 앉아 많이 먹고, 샴페인도 즐기며 매우 만족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녀는 달을 쳐다보았다. 바닷가에는 한 줄기 은빛 조명이 넓은 길처럼 뻗어 있었다.

"자연은 어쩌면 이처럼 아름다울까요!"하고 그녀는 말하였다.

", 이런 경치를 보고 노래를 부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어째서 사람들은 자기가 노래를 부르는 줄로(자연이 부르게 하는 게 아니라) 알까요? 아닌 게 아니라 코벤트 가든의 세트 따위는 영국 오페라의 수치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나는 지난번에 쥴리에트를 불렀을 때만 하여도, 달 모양을 좀 멋있게 만들어 줄 수 없느냐고 말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노래 부를 기분이 나지 않는다고 담당자에게 주의를 줬지 뭐예요."

피터는 말없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그녀 이야기를 깊이 음미하고 되씹어 보는 모양이었다. 그녀에게는 내가 처음에 바란 것 이상의 가치가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샴페인뿐 아니라 다변(多辯)에 의해서도 도취된 기분이었다.

그녀 이야기를 들어 보면, 매우 내성적이고 측은하여, 세상 사람이 떼를 지어 그녀 하나를 들볶아대는 것 같다. 그녀의 생애는 이처럼 승산이 없는 적들에 대한 투쟁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극장 매니저들에게서는 가혹한 취급을 당하고, 지휘자에게서는 비열한 농간을 받고, 가수들은 한 패거리가 되어 그녀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려고 하며, 그녀의 적들에게 매수당한 비평가는 그녀에 대한 중상을 퍼붓는 기사를 쓰고, 그녀가 모든 희생을 개의치 않고 사랑한 애인들에게서는 배신의 쓰라림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의 천재와 재치를 동원하여 이들의 모든 음모를 용케 분쇄할 수 있었다. 그녀는 눈을 번뜩이며 자랑스러운 듯이 적들의 모략을 무찌른 일과,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은 악한들에게 가해진 천벌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와 같은 싱거운 이야기들을 그렇듯 신이 나서 지껄이다니, 참으로 철면피들이로구나 하고 나는 감탄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것은 조금도 의식하지 못하고, 실은 자기가 무척 고집스럽고 샘이 강하며, 감정이 못대가리처럼 억세고, 허영심이 남달리 많고, 잔인하여, 이기적이고, 음모를 곧잘 꾸미며, 돈에 대한 욕심이 대단한 여자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때때로 피터 쪽을 곁눈질해 보았다. 나는 피터가, 자기의 이상인 프리마돈나 상()과 이 무자비한 현실을 견주어 보고, 속으로 얼마나 당황해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평범 이하의 마음씨를 가진 여자였다.

얼마 후에 그녀가 돌아가고 나서, 나는 웃으며 피터에게 물었다.

"어떻소, 좋은 자료를 얻게 되었지요?"

", 모든 게 아주 멋있게 어울리는군요."

그는 신이 나서 대답했다.

"어울린다구요?"

나는 뜻밖의 대답이므로 큰 소리로 반문하였다.

"내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여인상(女人像) 그대로에요. 내가 그녀를 만나보기 전에 벌써 그녀의 성격상의 특징들을 대략 정해 놓고 있었던 줄은 그녀 자신도 미처 짐작하지 못했을 테지요."

나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예술에 대한 정열이나 욕심이 없는 활달한 성격 등으로 미루어보더라도 그녀는 내 마음의 눈에 비친 여인과 꼭 같은 고귀한 영혼의 임자지요. 소견이 비좁은 인간이나, 호기심에 가득 찬 인간, 또는 속된 자들이 그녀의 앞길을 줄곧 가로막아 왔지만, 그녀는 위대하고 순결한 목적을 내세워 모든 것을 제쳐놓고 앞으로 나아가는 거예요."

그는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듯이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연이 예술을 모방하다니, 놀라운 일이 아니겠어요! 저는 그 여자를 작품에 살려 보일 것을 선생님께 맹세하겠어요."

나는 하려던 이야기를 보류했다. 마음 한쪽으로는 김이 빠지기도 하였지만 감격도 하였다. 피터는 보고 싶어 하던 것을 그녀에서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의 환각 속에는 미()를 닮은 무엇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나름의 시인이었다.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그는 이삼 일 후에 적당한 하숙을 정해 우리 집에서 나가기로 하였다.

얼마간의 시일이 지나, 드디어 그가 쓴 소설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거의 모든 젊은 작가들의 두 번째 작품이 대체로 그런 것처럼, 그 소설은 흔히 볼 수 있는 피상적인 성공을 거두었을 뿐이다. 비평가들은 그의 처녀작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이번 작품에 대해서는 터무니없이 트집을 잡으려고 하였다. 자기 자신이나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소재로 해서 작품을 쓰는 것과 자기 창작이나 연구의 대상 인물을 소재로 해서 소설을 쓰는 것 사이에는 으레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피이터의 소설은 좀 긴 편이았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재주를 필요 이상으로 부렸으며, 유머도 어딘가 거칠었다. 그러나 그는 소설의 배경인 그 시대를 교묘하게 재현하였으며, 처녀작에서 내가 감동을 받은 것과 같은 정열적인 몸부림은 낭만적인 이번 작품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나는 우리 집에서 만찬을 함께 한 후로 반년 이상이나 라 파르테르느를 만나지 못하였다. 그녀는 남미 방면으로 오랜 연주 여행을 떠나 있었으므로, 여름이 다 가도록 리비에라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어느 날 밤 나를 만찬에 초대하였다. 그날 밤에는 우리 두 사람 이외에 그녀의 동거인 겸 비서인 미스 그레이저라는 부인이 혼자 참석하였다. 라 파르테르느는 그녀에게 손찌검도 하고 욕설도 퍼부으면서 들볶아댔지만, 그녀가 없이는 아무 노릇도 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미스 그레이저는 바싹 마른 쉰 살 난 부인으로, 머리가 희끗하며, 누런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 져 있었다. 그녀는 좀 괴짜였다. 그녀는 라 파르테르느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은 모조리 알고 있었다. 그녀는 라 파르테르느를 사랑하면서도 미워했다. 미스 그레이저는 그녀가 없는 자리에서는 공대처럼 행동했다. 매우 익살맞은 여자로 변모되는 것이었다. 그녀가 이 유명한 가수의 숭배자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몰래 배 보이는 흉내는 일품이어서, 내가 알기로는 누구보다도 희한한 재주꾼이었다. 그녀는 마치 어머니라도 되는 듯이 이 가수의 뒷바라지를 해 주는 것이었다. 라 프라테르느에게 때로는 눈물로 호소하고, 때로는 솔직히 충고하여, 그녀로 하여금 인간다운 행동을 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이 그레이저였다. 또한 이 가수에 대하여 매우 부정확한 회상록을 슨 사람도 역시 그레이저였다.

이날 밤에 라 파르테르느는 연한 청색 공단으로 된 파자마를 걸치고(그녀는 공단을 남달리 즐겨 입었다), 머리칼을 잠재우기 위해선지 초록빛 머릿수건을 쓰고 있었다. 장식한 보석류는 몇 개의 반지며 진주 목걸이, 한 상의 팔찌와 옆에 단 다이아 브로우치 정도였다. 그녀는 남미에서 성공을 거둔 일에 대하여 나한테 들려주려고 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갖고 있었다. 그녀는 끊임없이 지껄여댔다. 이번 연주에서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를 낸 적이 없고, 또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음악회의 입장권은 매번 매진되고, 그녀는 돈도 많이 벌었다.

"그레이저, 그랬지?"하고 마라아는 억센 남미 악센트로 외쳤다.

"대체로 그런 셈이지요."하고 미스 그레이저가 다답하였다.

라 파르테르느는 친한 친구를 항렬 이름자로 부르는 고약한 버릇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가련한 상대방 여인은 오래전부터 그런 실례에는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만난 그 남자가 누구였지?"

"어떤 남자 말예요?"

"그레이저, 무척 얼빠졌군. 잘 기억하고 있을 텐데……나와 결혼한 적이 있는 그 남자 말이야."

"페페 자파타에요."

그레이저는 웃지도 않고 대답하였다.

"맞았어. 글쎄 그 남자가 형편없이 되어 버렸지 뭐에요. 그러게 그런 실례가 또 어디 있겠어요. 자기가 옛날에 해 준 다이아 목걸이를 나더러 내놓으라는 거에요. 그건 자기 어머니 유산이라나요."

"목걸이쯤은 돌려줘도 무장하지 않아요?"하고 그레이저가 말하였다.

"당신은 그걸 한 번도 목에 걸어 본 적이 없으면서……"

"돌려줘?"하고 라 파르테르느는 외치고 나서, 너무나 놀라, 불쑥 순순한 영어로(남미 악센트가 아닌) 이렇게 말을 이었다.

"돌려주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 미쳤어?"

그녀는 미스 그레이저가 지금 급성 착란증 발작이라도 일으킨 것으로 생각한 듯이, 그녀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곧 테이블 곁에서 일어났다. 마침 식사는 다 끝나 있었다.

"밖으로 나가요!"하고 그녀는 말하였다.

"만일 내가 천사와 같은 인내심이 없었던들 저런 여자는 벌써 내쫓겼을 거예요."

라 파르테르느와 나는 정원으로 나가 베란다에 걸터앉았다. 미스 그레이저는 우리를 따라오지 않았다. 정원에는 근사한 삼()나무의 무성한 가지들이 별이 총총한 밤하늘에 그림자를 솟구치고 있었으며, 베란다 아래까지 닿은 바다는 매우 조용하였다.

라 파르테르느는가 갑자기 자리에서 후닥닥 일어났다.

"이봐요, 그레이저, 나 정신없이 앉아 있었어. 당신도 어지간히 얼빠졌군."하고 그녀는 외쳤다.

"왜 그 이야기를 안 해 줬어."

그리고 나서 이번에는 나를 향해 말하였다.

"난 당신도 못마땅해요."

"식사하는 중에 생각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군요."하고 나는 대꾸하였다.

", 당신의 친구 말예요. 그리고 그분의 책에 대해서도……"

나는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려고 하는 것인지 어른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어느 친구의 어떤 책 알이지요?"

"참 멍청도 하구료. 얼굴이 번들번들하고 붉은 땅달보 같은 그 남자 말예요. 그이가 내 이야기를 소설로 썼지 뭐에요."

", , 피터 멜로즈 말이군요. 그렇지만 그건 당신 이야기가 아닐걸요."

"아네요, 틀림없이 제 이야기에요. 내가 바본 줄 아세요? 그 남자가 주책없이 나한테 그 책을 보내왔더군요."

"그럼 당신도 그 증정에 대해 예의상 답장쯤은 보내셨지요?"

"내가 그따위 무명 작가가 보내온 소설책에 일일이 답장을 쓸 만큼 한가해야지요. 아마 그레이저가 답장을 보냈을 테지요. 당신은 내게 그런 사나이를 만나게 해 주려고 식사에 초대한 모양이지만, 당신에게 그럴 권리는 없어요. 저는 당신이 나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당신의 환심을 사려고 초대에 응했던 거에요. 설마 제가 그따위 소설의 자료가 될 줄은 미처 몰랐어요. 우리처럼 오래된 친구 사이에서도 서로 믿을 수 없게 된다면 안타까운 일이 아녜요? 앞으로 다시는 당신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을래요. 이건 절대에요."

나는 그녀가 또 그 히스테리를 내는 모양이구나 싶어서 손을 썼다.

"뭐 그렇게 신경 쓸 것까지는 없어요."하고 나는 말하였다.

"우선 그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여가수의 성격에 관해 설마 당신은 분개하고 있는 건 아닐 테지요……?"

"그렇다면 내가 뭐 거기 나오는 하여가 나를 닮기라도 했다고 흥분하겠어요?"

"아무튼 그 여가수의 성격은 당신을 만나기 전에 이미 그분의 머릿속에 정해져 있었던 거에요. 또 그 주인공은 당신과 비슷하지도 않아요."

"나하고 비슷하지도 않다니, 어떻게 하시는 말씀이세요? 내 친구들은 그 주인공이 바로 나라고들 생각하고 있어요. 그건 누가 보든지 분명히 내 초상화에요."

"메리," 하고 나는 그녀를 타이르려고 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내 이름은 마리아라는 걸 당신은 누구보다도 잘 아실 텐데요. 그렇게 부르실 수 없다면 라 파르테르느 마담이라고 하든지, 공작부인이라고 불러 주세요."

나는 이와 같은 항의를 묵살해 버렸다.

"당신은 그 책을 읽어 봤나요?"

"물론이죠. 친구들이 저마다 그 소설은 내 이야기를 엮은 거라고 하기에 읽어 보았지요."

"그러나 그 여주인공으로 나오는 프리마돈나는 스물다섯으로 되어 있잖아요."

"나 같은 여자에게는 나이라는 게 없어요."

"그 소설의 여주인공은, 발끝에서 손끝에 이르기까지 전신이 음악적이고 비둘기 같이 상냥하며, 욕심이 전혀 없어요. 그리고 솔직하고 성실하며 공정해요. 당신은 자신도 그렇다는 건가요?"

"그럼 선생님은 저를 어떻게 보시는 거에요?"

"감정이 못대가리처럼 무디고, 절대군주처럼 무자비하며, 천성이 음모가인데다가 누구보다도 자기중심적이지요."

그녀가 나에게 퍼부은 욕설은 숙녀로서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소리였다. 설사 남자가 어떤 실수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신사에게 함부로 적용시킬 수는 없는 그런 말들이었다. 그러나 활활 타오르는 듯한 그 눈동자와는 달리, 그녀가 나에게 조금도 화를 내고 있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시다면 그 에메랄드 반지 이야기는 어떻게 된 거예요? 내가 그날 그 남자한테 반지 이야기를 해 줬지 않았어요?"

에메랄드 반지 이야기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전에 라 파르테르느는 어떤 큰 나라 황태자와 뜨거운 사랑을 하였는데, 그가 그녀에게 값진 에메랄드를 선사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그들은 대판 싸움을 하여 옥신각신하던 끝에 이야기가 그 반지에까지 미처, 그녀는 손에 끼었던 반지를 뽑아 난로 속에 집어 던져 버렸다. 황태자는 검소한 성격의 사람이라 크게 당황하여 고함을 지르며 난로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석탄을 긁어낸 다음, 겨우 반지를 찾아냈다. 라 파르테르느는 마룻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사나이를 경멸의 눈초리로 내려다봤다. 그녀 자신이 배짱이 크지도 못하면서 남이 쩨쩨하게 구는 꼴을 보지도 못하는 서이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이 이야기를 꺼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는 그를 사랑할 수 없게 되었어요."

이 일화는 피터의 마음에 들었다. 깨끗하고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소설에 재치 있게 이 이야기를 삽입했던 것이다.

"그 이야기는 당신네들을 믿었기 때문에 들려줬던 거지, 딴 사람에게는 아직 한 번도 털어놓지 않았던 거에요. 그걸 소설에 집어넣다니, 그런 치사스러운 배신이 어디 있어요. 그 사나이나 당신도 이 문제에 변명할 여지가 없겠지요?"

", 그렇지만 그 얘기라면 나는 당신에게서 여러 번 들었어요. 또 플로렌스 몽고메리도 루돌프 황태자와 어떤 여자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 여자도 그 얘기를 늘 자랑삼아 지껄였던 거예요. 뿐만 아니라, 로라 모테스도 자기와 바봐리아 왕 사이에 있었던 일이라고 얘기하더군요. 아마도 넬 구우인도 자기와 찰스 2세 사이에 있었던 일이라고 얘기했을 거요. 그러니까 그건 세상에 흔히 있는 낡은 얘기의 하나에 지나지 않아요."

그녀는 기가 꺾이기는 했으나, 그것도 한때뿐이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같은 일이 자주 일어났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실 건 없잖아요. 여자가 정열적이고 남자란 말고기 푸줏간 주인 모양 구두쇠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일 아네요. 내 말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그 에메랄드를 당신에게 보여 드릴까요? 난로에서 찾아낸 걸 반지 틀에 다시 끼워 넣었거든요."

"로라 몬테스의 얘기에 의하면, 그건 진주였다고 하더군요."하고 나는 비꼬았다.

"불속에 들어갔다가 나왔으니 얼마나 상했겠어요."

"진주라구요?"

그녀는 그 화려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당신에게 내가 벤지이 리이젠바움 사이에 있었던 진주 이야길 들려줬던가요? 그건 단편소설의 재료가 될 만하지요."

벤지이 리이젠바움은 큰 부자로, 오랫동안 그가 라 파르테르느의 정부(情夫)였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는 일이었다. 지금 우리가 앉아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 호화로운 별장을 그녀에게 사준 사람도 바로 그 리이젠바움이었다.

"그 사람 뉴욕에서 예쁜 목걸이를 사줬어요. 내가 메트로폴리탄에서 공연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고요. 그 시즌을 마치고 나서 우리는 유럽으로 돌아왔어요. 그 남자를 만나보지 못했지요?"

"그래요."

"그래요, 나쁜 사람은 아니었는데, 질투가 많은 광적(狂的)인 사람이었어요. 어느 이탈리아인의 젊은 고급선원이 나를 칭찬했다고 해서 배 위에서 대판 싸움을 벌였지 뭐예요. 하긴 난 남달리 상냥한 여자지만, 어느 남자에게서도 잔소리는 듣기 싫어요.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거든요. 내가 썩 꺼져버리라고 쏘아붙였더니-절교를 선언하는 거에요. 아시겠어요? 그리고 그 사나이가 내 뺨을 후려치는 거에요. 이건 갑판에서 일어난 이야기로 엮어도 좋을 거예요. 당신이니까 바른대로 말하지만, 그땐 나도 발끈했어요. 그래, 목에 걸었던 진주를 풀어 바닷속에 동댕이쳐 버렸지 뭐에요. 그 남자는<5만 달러나 하는 건데> 하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군요. 난 몸을 꼿꼿이 세우고<난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목걸이를 소중히 간수했을 뿐에요> 하고 태연히 응수하고는 싹 돌아서 버렸죠."

"어리석은 짓을 했군요."하고 내가 튕겼다.

"그리고는 24시간 동안 그를 만나지 않았어요. 그러자 그 남자는 항복하더군요. 파리에 도착하기가 바쁘게 카르티에의 보석상에 가서 꼭 같은 목걸이를 또 사줬어요."

그녀는 참다못해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어리석은 짓을 했다구요? 나는 다음 시즌에도 뉴욕에 다시 가게 되리라는 걸 일고 있었으므로, 진짜 진주 목걸이는 미리 은행에 맡겨 두었던걸요. 내가 바닷물에 동댕이친 건 가짜였어요."

그녀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어린애처럼 즐겁고 흐뭇한 웃음소리였다. 그녀로서는 그런 장난이 통쾌하여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들떠서 허리를 잡고 자꾸 웃어댔다.

"사내들처럼 어리석은 자가 어디 있어요."

그녀는 웃고 또 웃었다. 간신히 웃음이 멎었을 때는 꽤 흥분해 있었다.

"노래를 부르고 싶군요. 그레이저, 반주해 줘요."

응접실 쪽에서 대꾸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렇게 많이 먹고서도 노래가 나와요!"

"닥쳐요, 암소 할멈! 무슨 곡이든지 좋으니까 반주나 해요."

미스 그레이저는 대답 대신 슈만 가곡의 첫 소절을 반주하기 시작했다. 이 고이라면, 목청을 크게 움직이지 않아도 부를 수 있으므로, 미스 그레이저가 이곳을 택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라 파르티르느는 나직이 부르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는 자기가 듣기에도 매우 청아하다고 생각했던지 다음에는 목청을 한결 돋우어 불렀다. 노래는 곧 끝나고 고요에 잠기게 되었다. 미스 그레이저는, 그녀의 목청이 지금 쾌조(快調)이며, 그녀가 계속해서 더 부르고 싶어 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위대한 프리마돈나는 방안의 밝은 조명을 등에 업고 창가에 서서 검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큰 삼나무가 밤하늘에 웅장하게 솟아 있었다. 조용하고 감미로운 밤이었다. 미스 그레이저가 다시 두 소절을 반주했다. 나는 가벼운 전율을 느꼈다. 라 파르티르느는 그 소절이 어느 곳인지 분간하고 가볍게 몸을 움직였다. 나는 그녀가 포즈를 취하는 것을 보았다.

부드럽고 조용하게 웃으세요,

두 눈을 살며시 뜨세요.

이것은 이졸데의 죽음의 노래이다. 그녀는 목청에 부담이 가는 것을 걱정하여, 바그너의 가극에는 출연해 본 적이 없었지만, 이 노래는 아마도 가끔 연주회에서 불렀던 모양이다. 지금은 오케스트라의 반주가 아니라 가냘픈 피아노 반주이므로, 그 점은 염려할 것이 없었다. 절묘한 곡조가 그녀의 목소리에 실려 조용히 불어오는 밤바람을 타고 바다 위로 퍼져나갔다. 더할 나위 없이 로맨틱한 풍경이었다. 그 노랫소리는, 별빛 찬란한 이 아름다운 밤을 배경으로 삼아, 사람들의 가슴을 몹시 설레이게 하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섬세하고 아름답고 풍요한 수정처럼 밝게 들렸다. 그녀는 그런 목청에 놀라운 감정을 담아서 노래하였다. 애절하고 아름다운 그 가락은, 때로는 짜릿짜릿하게, 또 때로는 부드럽게 내 가슴 밑바닥까지 스며드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노래를 마쳤을 때, 목구멍에 치솟는 뜨거운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이 번져 흐르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또 말하기가 싫었다. 그녀는 창문을 통해 태고적부터 늙을 줄 모르는 바다를 내다보면서, 정물(靜物)처럼 언제까지나 조용히 서 있다.

그녀는 이 얼마나 불가사의한 여자인가! 나는 그 자리에서, 그녀가 설사 여러 가지 어처구니없는 결점들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온갖 미덕을 아울러 지닌 전형적인 여자라서 그녀를 작품에 소화시켰다는 점에서, 피터 멜로즈로 하여금 선수(先手)를 쓰게 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비정상적인 인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으레 비난할 것이다. 그녀는 물론 얄미운 여자이다. 그러나 이런 것도 감히 그녀의 매력 앞에서는 대항할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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