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llnow 2024. 4. 21. 06:48

미덕

W. S. Maugham

 

세상에 아바나 잎담배보다 더 좋은 담배는 흔치 않다. 내가 가난하던 젊은 시절에는 누가 한 대 주어야 겨우 얻어 피울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돈만 있으면 날마다 점심과 저녁 식사 후에는 이 잎담배를 피우리라고 마음 먹었던 것이다. 그처럼 젊은 시절에 내가 결심을 하여, 지금까지 계속하여 실천해 오는 것은 이것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환멸을 느끼지 않고 모를 정도로 작다든가, 혹은 피우기에 지루할 만큼 긴 담배는 비위에 맞지 않는다. 나는 쉽게 빨 수 있게끔 잘 말려 있고, 잎이 단단해서 입술에 묻어나지 않으며, 다 피운 후에도 향기가 남아 있는 담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 마지막 한 모금을 빨고 나서 꽁초를 버리고, 담배 연기가 푸른 빛으로 변하며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볼 때, 민감한 사람이라면, 그 반 시간 동안에 즐거움을 얻기 위해 소비한 모든 노고와 성의와 고초와 거기에 따른 번거로움과 걱정 그리고 복잡한 기구로 말미암은 상념으로 하여 마음이 우울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이것을 위해 오랜 세월을 두고 열대지방의 태양을 쬐면서 땀을 흘려 왔으며, 배들은 7대양을 찾아 돌아다녔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맛 좋은 백포도주 한 병에 굴을 실컷 먹을 때 더욱 절실해지며, 나아가서 양고기의 요리 같은 것을 먹을 때에는 거의 찾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른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담배와는 달리 동물이며, 지구상에 몇백 년 동안 생물이 살아온 후로, 이러한 동물들이 결국은 얼음에 채운 접시 위나 은석쇠 위에서 그들의 생애가 종말을 고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두려움마저 느끼기 때문이다.

 

상상력이 둔한 사람들은 굴을 먹는 것이 그렇게 두려울 정도로 엄숙한 사실임을 미처 깨닫지 못할지 모른다. 또한 진화는 우리에게 굴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서 슬기롭게 자기 자신을 보증해 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굴에는 거만한 인간 정신에 거슬리는 일종의 냉담성이 있으며, 인간의 허영심을 외면하는 자기만족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눈물을 흘릴 수 없을 정도로 침통한 생각에 잠기지 않고서 어떻게 양고기 요리를 바라볼 수 있겠는가. 여기 당신의 접시 위에 인간이 관여하고 한 종족의 역사가 깃들어 있는 부드러운 고기 한 점이 놓여 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의 운명도 매우 기묘하다. 날마다 목격하는 단순하고 평범한 여러 사람들이 은행원, 청소부, 합창단 둘째 줄에 앉아 있는 중년 부인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등 뒤에 뻗어 있는 오랜 역사와 그들을 태초에 진흙덩어리에서 지금 현재의 이곳까지 데려온 가나긴 모험의 연속들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은 실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현재 이곳까지 데려오는데 이토록 많은 파란곡절이 필요하였다면, 그들에게는 그만한 의의가 부여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만든 것이 창조자이든 아니든 간에, 그들이 당하고 있는 운명이 창조자에게는 보잘것없는 일일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에게 뜻하지 않는 사고가 일어나면, 운명의 줄기는 끊어지고, 이 세상과 더불어 시작된 모든 이야기들은 갑자기 끝나며, 그것이 바로 바보가 들려준 이야기처럼 보잘것없는 듯이 생각된다. 그처럼 극적인 중요성을 지닌 이 사건이, 그렇게 조그마한 원인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손쉽게 방지할 수 있는 대단치 않은 사건이, 매우 중대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보잘것없는 사소한 행동이 우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의 전 생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어느 날 내가 거리를 지나가지 않았던들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인생이란 극히 환상적인 것이다. 우리는 인생의 흥미 있는 일을 보기 위해 유머에 대한 특별한 센스를 가져야 한다.

나는 어느 봄날 아침에 본드가()를 걸어가고 있었다. 점심시간까지 별로 할 일도 없었으므로, 나는 혹시 신기한 물건이라도 경매에 붙이지 않나 해서 소더비 경매장에 들려볼 작정이었다. 거기까지 가려면 길을 하나 건너야 하였다. 내가 차들 사이로 빠져 길을 건너 맞은편 길에 이르렀을 때, 마침 모자점에서 나오는 브루네오에서 알게 된 사람과 마주쳤다.

"아니, 몰튼, 오래간만이오. 언제 귀국하였소?"하고 나는 그에게 말하였다.

"한 주일 전에 돌아왔습니다."

그는 지방 관리였다.

주지사는 그에게 나에 대한 소개장을 써 주었으며, 나는 그가 살고 있는 고장에서 한 주일을 보낼 계획인데 관영 호텔에 묵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었다. 내가 도착하였을 때 그는 부두까지 마중을 나와 주었으며, 나더러 자기와 함께 머물자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의 청을 거절하였다. 내 숙박비를 그에게 부담시키고 싶지 않은데다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함게 한 주일이나 보내기가 싫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혼자 있는 편이 더 자유로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말하였다.

"저에게는 방 여유가 있습니다. 게다가 호텔은 불결해요. 저는 반년 동안이나 백인과는 별로 이야기도 나눠보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인젠 혼자 있는 것이 지긋지긋할 지경입니다."

나는 그의 초대를 받아 조그마한 그의 증기선을 타고 둘이서 방갈로에 도착하였다. 그는 나에게 술을 권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하여도 그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도무지 모르고 있었다. 그는 별안간 수줍어져서 조리 있는 그의 유창한 말씨도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게 들려왔다. 나는 그의 불편을 덜어 주려고 노력하였다(이곳이 그의 집이고 보면 내가 할 일이 못 되었지만). 나는 그에게 새로 나온 레코드를 갖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축음기를 틀었다. 재즈 음악이 울려 퍼지자 그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의 방갈로는 강가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커다란 베란다가 거실로 사용되고 있었다. 개성을 찾아볼 수 없는 실내장식은 직위에 따라서 언제든지 전근하는 관리 생활의 양식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다. 벽에는 장식품으로서는 원주민의 모자가 걸려 있으며, 그밖에 동물의 뿔과 피리와 팡이 있었다. 책꽂이에는 탐정소설과 오래된 잡지가 몇 권 꽂혀 있고, 건반이 노랗게 된 조그마한 피아노도 놓여 있었다. 방안이 말끔히 정돈되어 있지는 못하였지만 별로 불편하지는 않았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그의 생김새를 잘 기억할 수 없다. 그는 젊은 청년으로(나중에 안 일이지만 나이는 스물여덟이었다.)언제나 얼굴에 선원티가 나는 매력적인 미소를 뜨고 있었다. 나는 그와 함께 한 주일을 보냈다. 배를 타고 강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산에 가기도 하였다. 언젠가는 20마일쯤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농부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나누기로 하였다. 우리는 저녁마다 으레 클럽에 나갔다. 회원은 공장 지배인들과 그 조수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피차에 말도 별로 건네지 않는 처지였다. 우리가 함께 브리지 놀이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몰튼이 그들에게 미리 손님 앞에서 자기를 난처하게 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분위기는 언제나 딱딱하였다.

우리는 클럽에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나서 레코드를 들은 연후에 잠자리에 들었다. 몰튼은 할 일이 별로 없어 시간을 보내기가 주체로운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정력가로 원기 왕성하였다. 이곳이 그의 첫 번째 부임지였으며 그는 한 사회인으로 자립하게 된 것이 무척 기뻤던 것이다. 그에게 단 한 가지 걱정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가 맡고 있는 도로공사를 끝마치기 전에 다른 데로 근근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 공사는 그에게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그는 공사를 스스로 계획하여 자기에게 이를 맡기고 국고를 지출해 달라고 당국을 설득시켰던 것이다. 그는 직접 그곳을 답사하고 골목까지 낱낱이 조사하였으며, 여러 가지 기술 문제를 자기 손으로 해결해 나갔다. 그는 아침에 사무실에 나가기 전에, 덜컥거리는 낡아빠진 포드 자동차를 몰고 일하는 현장에 나가 얼마나 진척되었는지 알아보곤 하였다. 그는 그 일 이외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꿈도 공사에 대한 것을 꾸는 것이었다.

그는 1년 후에는 공사를 끝낼 계획이었으므로 그 해까지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아마도 작품을 창조하는 화가나 조각가라 하더라도 그보다 더 큰 정열을 바치지 못하였을 것이다.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된 것도 이 열성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그의 솔직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으며 그의 고독한 생활이며 승진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고향에 돌아갈 생각조차 물리치고, 일을 마치려는 그의 정열에 감동되었던 것이다. 그 도로의 길이가 얼마나 되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15마일이나 20마일쯤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도로가 무엇에 긴요한지도 잊어 버렸다. 그도 그런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정열은 예술가의 그것이었고, 그의 슬기는 자연을 정복한 자의 그것이었다. 그는 일이 진척됨에 따라서 이것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그는 밀림을 파헤쳐야만 하였다. 폭풍우가 휘몰아치면 몇 주일 동안의 작업이 수포에 돌아갔으며, 지형의 갑작스러운 변동으로 적지 않은 두통거리였다. 그는 이러한 일들을 잘 수습하여 원상대로 복구시켜야만 하였다.

그에게는 자금도 넉넉하지 못하였다. 오직 그의 정열만이 그를 견디고 이겨나가게끔 해 주었다. 이 사업이 그에게는 일종의 장엄한 성격을 띤 것으로 보였으며, 일의 성패는 많은 일화를 낳으면서 전개되는 무용담이기도 하였다.

그가 갖고 있는 유일한 불만은 낮이 너무 짧은 것이었다. 그에게는 할 일이 많았다. 그의 관할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재판관 노릇도 해야 하고, 때로는 세금도 거두어들여야 했다. 그리고 나이는 비록 스물여덟밖에 되지 않지만, 그들의 보호자 노릇까지도 해야 하였다. 그는 가끔 밖으로 여행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그가 현장에 없으면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살기 위해 마지못해 일하는 인부들을 독려하며 하루 종일이라도 거기 눌러있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도착하기 며칠 전에, 그를 몹시 기쁘게 한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그는 도로의 일부를 완성하기 위하여 어떤 중국인과 계약을 맺으려고 하였는데, 그 중국인은 터무니없는 돈을 요구하였다. 그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교섭을 하였지만 합의를 보지 못하였다. 몰튼은 울화가 치밀었으며, 일이 일시 중단된 것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갖은 수단을 다 써보았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그가 사무실에 나갔더니, 전날 밤에 중국인 도박장에서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인부 한 사람이 크게 중상을 입고 가해자는 구속되었다. 그 가해자가 바로 물튼과 계약을 하려던 사람이었다. 그는 재판을 받게 되었다. 몰튼은 모든 증거가 명백히 드러났으므로 그에게 18개월 동안의 중노동을 선고하였다.

"이제 그자는 무보수로 길을 닦게 되었어요."하고 몰튼은 두 눈을 반짝이며 말하였다.

어느 날 아침에 우리는 그 중국인이 죄수의 옷을 걸치고 덤덤한 표정으로 일을 하는 것을 복격하였다. 그는 자기의 액운을 순순히 받아들였던 것이다.

"나는 그자에게 길 닦는 일이 끝나면 나머지 형기(刑期)는 면제해 주겠다고 약속했지요. 그랬더니 무척 기뻐하더군요. 그렇게 하는 건 별로 큰 문제가 아니지요."

나는 몰튼과 헤어지면서 그가 영국에 오게 되면 나에게 알려 줄 것을 당부하였더니, 그는 상륙하는 즉시로 편지를 띄우겠다고 나에게 약속하였다. 나는 그때 기분으로 이렇게 초대를 하였지만, 그것은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말을 그대로 곧이듣는 사람이 있으면 좀 당황하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고국에 있을 때에는 해외에 갔을 때와 판이하다. 고국에서는 온유하고 다정하며 자연스럽다.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많으며, 남에게 친절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기가 받은 대접에 대하여 답례할 때가 오기를 기다리지만 막상 그렇게 되면 마음의 짐이 된다.

자기의 고국에서는 명랑하던 사람도 으레 낯설은 주변에 오게 되면 무뚝뚝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럽고 주저하는 태도를 취하므로, 혹시 친구에게 소개라도 하면 그를 무척 딱딱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마련이다. 친구들은 저마다 예의를 지키려고 하다가도, 이 낯선 자가 가 버리고 다시 화제가 종전대로 자유롭게 이루어지면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된다.

먼 나라에 떨어져 사는 사람들은 적적하고 굴욕적인 경험을 통하여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정글 지대 밖에서는 때때로 극진하게 초청이 와서 이를 반가이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그 기회를 좀처럼 이용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몰튼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그는 젊고 또 독신이었다. 그런데 흔히 말썽이 되는 것은 부인들이었다. 여자들이 초청객의 충충하고 모양이 없는 못차림을 보고는 곧 촌티를 느끼고 본체만체 하며 푸대접을 하기가 일쑤이다. 그러나 남자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카드놀이도 하고, 정구나 댄스를 즐길 수도 있다. 몰튼은 매력이 있었다. 그러므로 하루 이틀 지나면 남들과 잘 어울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왜 이리로 와서 곧 내게 알리지 않았소?"

하고 나는 그에게 물었다.

"폐가 될까 봐 그랬지요."

그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원 별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는 본드가의 한 모퉁이에서 이렇게 잠시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도 그는 낯선 사람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그가 카키색 셔츠나 정구복을 입은 외에는, 클럽에서 밤늦게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하려고 파자마 쟈켓에 사롱(말레이 섬의 토인들이 허리에 감는 천)을 걸친 모습 밖에는 본 적이 없었다. 아마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편한 저녁 옷차림일 것이다. 지금 입고 있는 곤색 세루 양복은 어딘가 그에게 좀 덜 어울렸으며, 흰 칼라 위에 솟은 그의 얼굴은 구릿빛을 띄고 있었다.

"도로공사는 어떻게 되었소?"하고 나는 그에게 물었다.

"다 마쳤어요. 출발이 늦어질까 봐 상당히 걱정했지요. 나중 판에 가서 장애가 한두 가지 있었지만 그냥 밀고 나갔어요. 그곳을 떠나기 전날에는 포드차로 도로 끝까지 한 바퀴 돌아왔지요."

나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가 좋아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런던에 와서는 무슨 일을 하면서 지냈어요?"

"옷을 몇 벌 샀지요."

"그래 재미가 어때요?"

"굉장했지요. 좀 쓸쓸하기는 했지만 그런 건 무관해요. 아무튼 밤마다 쑈오에 나갔어요. 아마 당신도 파머 집안사람들을 사라와크에서 만난 적이 있으니까 아실 거예요.- 이곳에 곧 도착할 예정이었어요. 우리는 함께 연극을 구경하기로 하였는데, 그녀의 어머니가 병환으로 드러눕게 되어 그들의 집안은 스코틀랜드로 가게 되었어요."

그는 매우 명랑하게 이야기를 하였지만, 그의 말은 내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그도 똑같은 경험을 하였을 것이다.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전에 출발에 앞서 여러 달을 두고 계획을 해 왔으며, 배에서 내렸을 때에는 너무 흥분하여 어쩔 줄을 몰랐던 것이다. 상점과 클럽과 극장과 식당들로 가득 찬 런던, 그는 이제 참으로 인생을 즐기는 것이었다. 런던은 그를 아주 삼켜 버렸다. 런던, 이상하게도 소란스럽고, 악의는 없으나 냉담한 도시, 그 속에서 그는 어리둥절하였다.

그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새로 사귀는 사람들에게는 서로 상통되는 짐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정글에 있을 때보다 더욱 고독하였다. 다만 그가 우연히 동양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그 장에서 마주쳐 하룻저녁을 함께 보내며 즐겁게 웃고 떠들던 때가 그에게 어느 정도의 위안을 주었을 뿐이었다. 그는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하면서 친구들의 이야기를 주고받다가도, 나중에 휴가가 끝나 다시 일자리로 돌아가도 서운할 것이 없다고 실토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가족을 찾아갔다. 물론 반가웠지만 전 같지는 않았다. 어딘가 모르게 서먹서먹하였다. 영국 사람들의 생활은 이렇듯 지겨운 것이다. 고향에 돌아온 것은 기뻤으나 이제 더 눌러살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강가에 있는 방갈로와 그 일대를 산책한 일이며, 또 산다카니나, 쿠틴, 싱가폴 등에 가끔 들리곤 하던 즐거운 한때를 회상하는 것이었다.

나는 몰튼이 도로공사를 끝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휴가를 얻었을 때,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아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런던, 어떤 클럽이나 식당에서 혼자 저녁을 먹고, 함께 연극을 즐기거나 한 잔 나눌 수 있는 친구 한 사람도 없이 극장에 가는 것을 생각할 때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나는 설사 그가 런던에 와 있다는 것을 진작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지난 주일 줄창 틈이 없었다. 바로 이날 저녁에도 나는 친구들과 함께 극장에 가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튿날은 외국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오늘은 어떻게 지내렵니까?"

하고 나는 그에게 물었다.

"파빌리온에 가볼까 하지요. 그곳은 사람들이 많아 매우 혼잡하지만 그곳에 있는 친구가 표를 한 장 얻어 주었어요. 당신도 가끔 좌석표 하나쯤은 얻을 수 있을 거예요. 두 장은 어렵더라도 말예요."

"저한테 와서 함께 저녁이나 나누지 않겠어요? 나는 헤이마킷으로 친구 몇 사람을 초대하기로 했어요. 식사를 마치면 즉시 극장에 갈 예정으로 있어요."

"그럼 가지요."

우리는 열한 시에 만나기로 하고, 나는 다른 약속이 있어 그와 헤어졌다.

나는 그와 만나게 될 친구들이 그의 마음에 별로 들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되었다. 내 친구들은 이미 중년 신사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외국으로 떠나기 직전에 초대할 만한 젊은 친구는 한 사람도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또 내가 사귀는 아가씨들은 아무도, 보르네오에서 온 수줍은 그 청년과 함께 춤을 추기 위해 저녁 식사에 초대를 받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비숍 씨 내외가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해 주리라고 믿고 있었다.

아무튼 그로서는 집에 혼자 돌아와 열한 시부터 잠을 자기보다는 악대가 있고, 예쁘장한 부인들이 춤추는 것을 구경할 수 있는 클럽에서 저녁을 먹는 것이 더욱 즐거울 것이다. 그는 별로 갈 데가 없었으니 말이다.

나는 의과대학 학생 시절에 처음으로 찰리·비숍을 알게 되었다. 그는 키가 작달막하고 메마른 친구로, 엷은 다갈색 머리를 하고 용모는 투박한 편이었다. 반짝거리는 검은 눈이 총명해 보였지만, 안경을 쓰고 있었으므로, 얼굴은 둥글고 명랑하고 홍조를 띠고 있었다. 그는 여자를 남달리 좋아하였다. 돈도 없고 외모도 볼품없는 그에게 젊은 여자들이 언제나 따르며, 변덕스러운 그의 욕망을 채워 주는 것을 보면 그에겐 분명히 어떤 뛰어난 수완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영리하고 교만하였으며, 따지길 좋아하고 성미가 급하였다. 또 빈정대기를 잘하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는 좀 불쾌한 친구였던 것 같다. 그러나 상대방에게 지루한 느낌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이제 50 고개를 거의 넘어서게 되자 몸이 차츰 뚱뚱해지고 머리가 많이 벗겨졌지만, 두 눈은 금테 안경 뒤에서 유난히 버쩍이며,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강했으며, 남과 시비를 잘하고 과격한 편이었다. 그러나 선심을 잘 쓰고 재미있는 친구였다.

오래 사귀는 처지고 보면 상대방의 특징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게 마련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신체적인 결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것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의 본래 직업은 병리학자로, 때때로 새로 나온 얄팍한 책자들을 나에게 보내 주곤 하였다. 그것은 무미건조한 전문 서적으로 박테리아의 그림이 많이 실려 있었다. 나는 그 책을 별로 읽지는 않았다. 찰리가 자기 전공 분야에 대하여 피력한 견해는 사리에 잘 맞지 않는다는 풍문이 들려왔다. 그는 같은 부문의 다른 학자들 사이에서 별로 평판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동료들을 무능한 바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하는 일에서는 1년에 6백 내지 8백 파운드의 수입이 있었으며, 남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건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는 그와 30년 동안이나 알고 지내는 처지이므로 그를 좋아하였지만, 그의 아내인 마져리를 좋아하게 된 것은 이유가 좀 다르다. 그녀는 아주 멋있는 여자였던 것이다. 그가 나한테 결혼 하겠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그 무렵에 그는 40이 가까웠으며, 여자에 대한 애정이 쉽사리 변하는 사람이었지만 결코 열렬한 편은 아니었으며, 그 목적도 막연하기 짝이 없었다. 요새처럼 관념적인 시대에는 그의 여성관은 좀 노골적이라고 생각되기가 쉬울 것이다.

그는 여자에 대하여 자기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다가도, 만일 사랑이나 돈이 부족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면,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곧 단념해 버리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그는 자기의 이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여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생리적인 만족을 채우기 위해 여자를 원하였던 것이다. 키도 작달막하고 잘 생기지도 못한 사나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이러한 욕구에 응해 주는 여자가 꽤 많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정신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단세포의 조직을 관찰하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그는 언제나 요점만 간단히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나한테 마져리·홉슨이라는 젊은 여자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다짜고짜로 말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이유를 물었다. 그는 싱긋 웃으며 대답하였다.

"세 가지 이유가 있네. 첫째로 결혼하지 않고서는 그 여자가 나와 같이 자려고 하지 않네. 둘째는 그 여자가 아프리카의 하이에나처럼 나를 곧장 웃겨 주네. 그리고 셋째는 그 여자는 이 세상에서 친척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외톨이라 누군가를 돌봐줘야 한다는 거야."

"자네 그 첫째 이유는 과장이고, 둘째 이유는 거짓말이고, 셋째 이유가 정말일 걸세. 그런데 그건 바로 그 여자가 자네를 자기 손아귀에 넣고 있다는 말과 같네그려."

그의 눈은 커다란 안경 뒤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잘 알아맞추나."

"그녀가 자네를 손아귀에 넣고 있을뿐더러 자네는 그것을 무척 달갑게 여기는 모양이군 그래."

"내일 점심을 먹으러 와서 그 여자를 한번 보게. 첫인상은 괜찮을 걸세."

그는 어떤 남녀 혼합클럽의 회원으로, 나도 그 무렵에 자주 그 클럽에 드나들었으므로, 우리는 거기서 점심을 먹기로 약속하였다

나는 첫눈에 마져리가 매우 매력 있는 여자임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그 무렵에 30이 못되었으며 기풍이 있는 어엿한 숙녀였다. 나는 이것을 만족스럽게 여겼지만, 찰리는 대체로 품행이 좋지 못한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저으기 놀라기도 하였다.

그녀는 미인이라고는 할 수가 없었지만 용모가 단정하였다. 아름다운 검은 머리 하며, 예쁘장한 눈매, 그리고 혈색이 좋고 건강한 피부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끄는 솔직한 데가 있었으며, 정직하고 단순하여 믿음직스러운 여자로 보였다. 나는 곧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좋은 말 살대였으며, 별로 재치 있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남의 말귀를 잘 알아들었다. 남의 농담을 잘 알아주고 부끄럼성도 별로 찾아볼 수 없었다. 남에게 유능한 살림꾼 같은 인상을 주었으며, 온순하고 감수성이 뛰어남을 보여주는 차분한 침착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사이가 무척 좋은 편이었다. 나는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마져리가 왜 벌써 머리가 벗겨져 결코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이 성질이 괴팍한 작은 친구와 결혼하려고 할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리하여 그것은 그녀가 찰리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서로 장난을 치고 놀려주고 하면서 실컷 웃어대었다. 그들의 눈은 때때로 의미심장하게 마주치면서 그들만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 같았다. 그것은 마음을 무척 감동시키는 광경이었다.

그들은 한 주일 후에 관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것은 매우 훌륭한 결혼식이었다.-그 후 16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당신의 일을 되돌아보니, 그들이 서로 주고받던 농담이 생각나서 절로 웃음이 터진다. 나는 여태까지 그들처럼 헌신적인 부부는 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한 번도 큰 재산을 모은 적이 없었다. 그런 것은 수째 바라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듯 그들에게서는 무슨 야망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유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중에서는 제일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판톤가에 있는 이 아파트의 셋집은 작은 침실 하나와 거실 하나, 그리고 부엌을 겸한 욕실이 달려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가정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식사 같은 것도 아침만 아파트에서 먹고 점심과 저녁은 식당에서 먹었다. 그러니까 가정이란 그들에게는 단지 잠자는 곳을 의미할 뿐이었다. 혹시 밖에서 위스키나 소다를 마시러 한 사람만 더 와도 방이 꽉 들어차는 것 같았지만, 집안에는 언제나 아늑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마져리는 잡역부의 도움을 받아 찰리가 마구 어질러놓은 집안을 언제나 깨끗이 치워 놓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집안에는 개성을 나타내는 물건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차가 한 대 있었다. 그리하여 잘리가 쉬는 날이면 각자 필요한 짐을 한 트렁크씩 꾸려서 싣고 차를 몰아 운하를 지나서 가고 싶은 곳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차가 간혹 고장이 나도 그들에게는 조금도 두통거리가 되지 않았으며, 날씨가 좋지 않은 것도 한 재미로 생각하였고, 타이어가 터지는 것 정도는 커다란 즐거움으로 간주하였다. 혹시 길을 잃어 들에서 밤을 새워야 할 때에도 그들은 매우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찰리는 여전히 핏대를 잘 올리고 곧잘 다투었으나 한 번도 마져리의 사랑스러운 평온한 마음을 거슬리는 일이 없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말 한마디로 곧잘 그를 달래고 또 웃길 수 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미지의 박테리아에 대한 연구>에 관한 논문을 타이프로 치기도 하고, 과학잡지에 실을 남편의 원고를 정리하기도 하였다

나는 어느 날 그들에게 다툰 일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우리에게는 다툴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찰리는 천사처럼 마음이 고우니까요."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이 친구는 교만하고, 남과 시비를 잘하며, 성미가 고약하기로 이름났는데요. 안 그래요?"

하고 나는 반문하였다.

그녀는 남편을 보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싱거운 사람으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내버려 둬요. 그 친구는 무식한 바보라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곧잘 지껄이니까."하고 이번에는 찰리가 입을 열었다.

그들 내외는 의가 무척 좋았다. 함께 있을 때에는 서로 행복감을 느꼈으므로, 되도록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였다. 찰리는 결혼하고 오래된 후에도, 날마다 점심시간이면 식당에 차를 몰고 가서 아내를 만나곤 하였다. 주위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마구 놀려대었으나, 한편 가슴에 뭉클한 무엇을 느끼며 그들 두 내외를 대하는 것이었다. 혹시 누가 그들에게 시골에 와서 주말을 보내도록 초청하면, 마져리는 그 집주인에게 더블베드가 없으면 가지 않겠노라고 통지를 하는 것이었다. 그들 내외는 너무나 오랫동안 둘이서 같이 자는 버릇을 붙여 왔으므로 혼자서는 잠이 오지 않았다. 그 때문에 때때로 곤란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대체로 어느 부부를 막론하고 서로 떨어진 방을 쓰기를 원하는 법이다. 그리고 같은 목욕실을 사용하도록 요청을 받으면 으레 수줍어하는 것이다. 현대의 주택들이 부부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지 않지만, 비숍 내외를 초청할 경우에는 반드시 더블베드가 있는 방을 그들에게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친구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점잖지 못한 일이라고 핀잔을 하기도 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이것은 부인 측으로서는 상당히 거추장스러운 일이기도 하였지만, 이들 내외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저으기 즐거운 일이었으므로 그런 괴벽쯤은 눈감아 줄 만도 하였다. 찰리는 언제나 명랑하였으며, 그의 익살은 주위의 사람들을 무척 즐겁게 하였고, 마져리는 언제나 조용하면서도 행동이 자연스러웠다.

이들 두 내외를 접대하는 것은 그리 힘 드는 일이 아니었다. 다만 시골길을 저물도록 둘이서 같이 걷도록 내버려 두면 그들은 매우 좋아하였던 것이다. 남자가 결혼을 하게 되면, 아내는 조만간 남편을 그 다정한 친구들에게서 떼어놓기가 일쑤이다. 그러나 마져리는 이와는 반대로 찰리와 그의 친구 사이를 더욱 두텁게 해 주었다. 그녀는 남편으로 하여금 좀 더 아량을 베풀게 하여 더욱 훌륭한 친구가 되게 하였던 것이다. 그들 내외는 결혼한 부부라기보다는 좀 우스운 말이지만, 두 사람의 독신자가 의좋게 함께 살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마져리는 혼자서, 수다스럽고, 입씨름을 좋아하며, 쾌활한 대여섯 명의 남자들 축에 끼어 있을 때에도, 언제나 그들의 친교에 방해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적지 않는 도움을 주었다. 나는 영국에 있을 때마다 그들과 어울렸다. 그들은 으레 앞서 내가 이야기한 클럽에서 식사를 하였으므로 나는 혼자 떨어져 있을 때에는 그들에게 가서 한 몫 끼곤 하였다.

그날 녁에 우리가 연극 구경을 가기 전에 가볍게 식사를 하려고 자리를 같이하였을 때, 나는 그들에게 몰튼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그 사람은 분위기를 좀 딱딱하게 할지 모르겠네."하고 나는 덧붙였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얌전한 청년으로 내가 보르네오에 머물러 있을 때 매우 친절히 대해 주었네."

"왜 좀 더 일찍 알려 주시지 않았어요?"

하고 마져리가 말하였다.

"그랬더라면 처녀를 한사람 데리고 왔을 텐데요."

"처녀가 무슨 필요가 있어?"

찰리가 말하였다.

"당신이 있지 않소."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나같이 나이 많은 여자와 춤을 추어 기분이 나겠어요?"

"쓸데없는 소리 말아요. 기분하고 당신 나이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오?"

찰리는 이렇게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자네 우리 집사람보다 더 능숙한 사람하고 춤을 추어 본 적이 있나?"

나는 매우 능숙한 여자와 춤을 춘 적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그녀도 분명히 춤에 익숙하였다. 발걸음이 가볍고 리듬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 있었다.

"한 번도 없네."하고 나는 선선히 대답하였다.

우리가 시로에 도착하니, 몰튼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야회복을 입은 그의 얼굴은 햇빛에 매우 그을린 것처럼 보였다. 그가 입은 옷이 어색하게 보이는 것은 아마도 그 옷이 좀약과 함께 4년 동안이나 고리짝 속에 들어 있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카키색 셔츠를 입는 편이 훨씬 더 어울렸다.

찰리 비숍은 말재주가 뛰어난 사람으로, 자기가 하는 말을 되새겨도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몰튼은 얌전을 빼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칵테일을 한 잔 권하고 나서, 샴페인도 몇 병 가져오게 하였다. 그가 춤을 추고 싶어 하는 눈치를 알아차렸지만, 나는 그가 마져리에게 춤을 청할 의향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우리 모두가 그와는 다른 세대에 속해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비숍부인은 춤을 석 잘 추어요."

하고 나는 귀띔을 하였다.

", 그러세요."

그는 약간 얼굴을 붉히며 말하였다.

"저와 추실까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녀는 마루 위로 빙빙 돌았다. 그녀는 그날 저녁에 깜찍스럽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우난히 멋져 보였다. 그녀가 몸에 걸친 수수한 검은 드레스는 6기니 이상은 될 것 같지 않은 값싼 것임에 틀림이 없었으나 숙녀답게 보였다. 그녀에게는 미끈한 다리가 유난히 아름다웠는데, 그때에는 스커트를 상당히 짧게 입고 있었다. 화장을 약간 한 듯하였지만 다른 여자들에 비하면 매우 자연스럽게 보였다. 그리고 싱글 스타일의 머리매무새도 잘 어울렸다. 흰 머리칼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고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얼굴이 예쁜 편은 아니지만, 상냥하고 점잖은 태도와 건강미는 그녀를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하였다. 그녀가 테이블에 돌아왔을 때, 두 눈은 빛나고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이분의 춤 솜씨가 어때요?"하고 찰리가 아내에게 물었다.

"아주 기가 막혀요."

"부인하고는 춤추기가 전혀 힘이 들지 않습니다."하고 몰튼이 말하였다.

찰리는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그는 말을 비꼬기를 잘하였지만, 워낙 이야기하는데 흥미를 갖고 있었으므로, 그의 말은 무척 재미있었다. 그러나 그는 몰튼이 전혀 모르는 화제를 꺼냈었다. 나는 몰튼이 대접 상 흥미 있게 귀를 기울이는 체하지만, 좌중의 황홀한 광경과 음악과 그리고 샴페인에 취하여, 이야기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음악 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자, 그의 눈은 마져리를 찾고 있었다. 찰리도 눈치를 채고 빙그레 웃어 보였다.

"마져리! 이분하고 춤을 추지 그래. 난 당신이 하는 운동을 바라보는 것이 좋으니까."

그리하여 두 남녀는 다시 어울려 춤을 추었다. 찰리는 한동안 다정스럽게 아내를 쳐다보았다. "마져리가 꽤 기분을 내고 있군그래. 저 사람은 춤을 좋아하는데, 나는 춤을 추면 숨이 차서 탈이야. 저 젊은 친구도 꽤 추는 것 같군."

내가 베푼 조그마한 파티는 성공리에 끝마쳤다. 나와 몰튼이 비숍 내외와 헤어져 피카딜리 광장을 향해 걸으면서 그는 나에게 진심으로 감사하였다. 그는 그날 밤이 참으로 즐거웠던 모양이다. 나는 그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이튿날 아침에 나는 해외로 떠났다.

나는 몰톤을 더 즐겁게 해 줄 수 없는 것이 몹시 안타까웠다. 내가 해외에서 다시 돌아올 때면, 그는 보르네오로 가는 도중에 있을 것이다. 내 머리에는 그의 모습이 가끔 언뜻 떠오르기는 하였지만, 가을에 내가 고국으로 돌아갈 무렵에는, 나는 이미 그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런던에서 한 주일쯤 지난 어느 날 밤, 나는 찰리 비숍이 잘 출입하는 클럽에 우연히 들렀다. 찰리는 나도 얼굴을 아는 몇 명의 남자와 함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귀국한 후로 나는 그들 중에서 어느 한 사람과도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중의 한 사람은 빌 마아쉬로 나와는 절친한 사이였다. 그의 아내는 쟈넷트라고 불렀다. 그는 나에게 술을 한 잔 권하였다.

"자네는 어디서 오는 길인가? 요즈음 통 볼 수가 없어."하고 찰리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가 취한 것을 곧 알고 저으기 놀랐다. 그는 술을 좋아하였지만, 언제나 조심하여 마시고 한 번도 과음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에 우리가 한참 젊었을 때에는 그도 가끔 취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아마 무엇보다도 굉장한 친구라는 것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젊은 시절은 아마 무엇보다도 굉장한 친구라는 것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젊은 시절에 과음한 것을 들추어내어 그를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나는 그가 술에 취하면 버릇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더욱 남과 시비하기를 좋아하여 큰 소리로 마구 떠들어 대므로 누구나 그와 언쟁을 벌이기가 일쑤였다. 그는 상당히 독선적이라, 멋대로 굴었으며 자기의 경솔한 언사에 곁에서 남들이 아무리 이의를 제기해도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가 취한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의 고약한 성미에 화가 치밀기도 하였지만 너그럽게 생각하고 꾹 참는 것이었다. 그는 결코 유쾌한 상대는 못되었다. 나이도 먹을 만치 먹었으며, 머리가 벗어지고, 안경을 받쳐 쓴 이 뚱뚱한 사나이가 일단 술에 취하면 마구 추태를 부리는 것이었다. 그는 여느 때에는 옷매무새가 단정한 편이었지만, 지금은 엉망이고 온통 담뱃재가 묻어 있었다. 찰리는 웨이터에게 위스키 한 병을 더 가져오라고 일렀다. 그 웨이터는 이 클럽에서 일을 보아온 지 2, 3년 되었다.

"선생님 아직도 앞에 한 잔 남아 있는뎁쇼."

"아 잔말 말고 곧 위스키 두 잔을 더 가져와. 안 가져오면 건방지다고 주인에게 이를 테야."하고 찰리가 말하였다.

"네 알았습니다. 가져옵죠."

찰리는 단숨에 잔을 비웠다. 손이 약간 떨렸으므로 옷에 위스키를 몇 방울 떨어뜨렸다.

"여보게 찰리, 우리 인제 그만 일어설까?"

하고 빌 마아쉬가 말하고 나서 나를 향하여 입을 열었다.

"찰리는 아마 좀 더 눌러있어야 할 거야."

나는 저으기 놀랐다. 필경 무슨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긴 것을 알아차리고 잠자코 있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만 집으로 가자구?"

찰리가 말하였다.

"가지 전에 한 잔만 더 할래. 그래야만 오늘 밤을 곱게 보낼 테니까."

나는 파티가 쉽사리 끝날 것 같지 않았으므로,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가보겠다고 말하였다. 내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빌이 말하였다.

"내일 저녁에 우리 집에서 저녁이나 같이 들도록 하세. 나하고 쟈넷트와 찰리, 이렇게 넷이서 말이야."

"암 가고 말고, 그렇게 하세."

하고 나는 말하였다. 분명히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마아쉬 내외는 레전트 공원 동쪽에 살고 있었다. 하녀가 나에게 문을 열어 주고, 서재로 안내하였다. 빌은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기 전에 잠깐 할 이야기가 있네."

그는 나와 악수를 나누면서 말하였다.

"자네 마져리가 찰리에게서 떠난 것을 알고 있나?"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는 이만저만 상심하고 있는 게 아닐세. 쟈넷트는 그가 그 조그마한 아파트에서 혼자 외롭게 지내는 것이 너무나 안 되어, 얼마동안 여기 와서 함께 지내자고 했네. 그는 물고기처럼 마냥 마시기만 하네. 두 주일 동안 뜬 눈으로 보냈다는 거야."

"설마 아주 간 거야 아닐 테지."

나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아주 가 버렸다네. 몰튼에게 미쳐버린 거야."

", 몰튼? 아니 그자가 누군데?"

나는 그가 보르네오에서 온 내 친구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자네가 그자를 소개해서 결국 일을 이렇게 만들어 놓았는데 누군지 모른단 말이야? 이제 그만 2층으로 올라가세. 나는 자네가 이 사실을 미리 아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말하는 거라네."

우리는 서재에서 나왔다. 나는 얼떨떨하기만 하였다.

"그런데 이 사람아."하고 내가 말을 꺼내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쟈넷트에게 물어보게. 그녀는 자세히 다알고 있네. 이런 일은 정말 보다가 처음이야. 나는 마져리 처사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네. 그리고 몰튼이라는 그자는 필경 바람둥이일 거야."

그는 앞을 서서 응접실로 들어갔다. 내가 들어서자 쟈넷트 마아쉬는 나한테 다가와 인사를 하고 찰리는 들창가에 앉아서 석간신문을 보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더니, 그는 신문을 옆에 놓고 손을 내밀었다. 그는 술에서 깨어 있었으며, 약간 거만하게 구는 품이 전에나 다름이 없었지만, 기분은 몹시 언짢은 것 같았다.

우리는 쉐리주()를 한 잔씩 마시고 저녁 식사를 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쟈넷트는 매우 명랑한 여자였다. 그녀는 키가 후리후리하고 얼굴이 희며 예쁘짱하였다. 그리고 남들과의 대화도 언제나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포도주를 마냥 마시도록 두었지만, 거기에는 10분을 넘겨서는 안 된다는 훈시가 따랐다.

빌은 평소에 말이 없는 편이었으나, 지금은 꽤 떠들어대었다. 나는 게임에 한몫 끼어들었다. 나는 영문을 잘 몰라 답답하였으나, 마아쉬 내외는 찰리가 너무 상심하지 않도록 하려고 애썼으므로 나도 그를 즐겁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언제나 토론하는 것을 좋아했다. 지금도 한바탕 토론을 전개할 용의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병리학자의 입장에서 당시에 세상 사람들이 주목을 끌고 있는 살해사건에 대하여 자기의 의견을 말하였다. 그러나 어쩐지 그의 말에는 기운이 없었다. 그는 마치 텅 빈 껍데기처럼 보였다. 주인의 체면을 생각하여 억지로 입을 놀렸지만 생각은 딴 데 가 있었다.

드디어 쟈넷트가 기다리다 못해 위층 마루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때에는 여자가 있어야 일이 순조롭게 된다. 우리는 2층에 올라가서 함께 브리지 놀이를 하였다. 이윽고 돌아갈 시간이 되자, 찰리는 마릴본 거리까지 나와 함께 걷겠다고 하였다.

"어머나, 찰리, 시간이 꽤 늦었어요. 이제 그만 돌아가서 주무시는 게 좋을 텐데."하고 쟈넷트가 말하였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산책을 좀 하면 잠이 잘 오니까요."하고 그는 대답하였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중년의 병리학 교수가 잠시 걷고 싶다는데 어떻게 마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남편을 슬쩍 쳐다보았다.

", 함께 산책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이 말은 나한테 좀 주책이 없는 것 같이 들렸다. 여자들은 남의 일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경우가 때때로 있다. 찰리는 그녀에게 못마땅한 얼굴을 하였다.

"뭐 빌을 끌어낼 필요는 없어요."

그는 약간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하였다.

"나도 생각이 없어요."하고 빌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고단해서 그만 자야겠어."

우리가 떠난 후에 필경 마아쉬 내외 사이에 언쟁이 약간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철길을 따라 걷고 있을 때, 찰리가 입을 열었다.

"그들은 나한테 지나칠 정도로 친절을 베푸네. 나는 그들이 없었더라면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도 모르네. 몇 주일 동안 한 번도 눈을 붙여 보지 못했으니까."

나는 딱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을 뿐, 그 까닭을 묻지 않았다. 우리는 한동안 잠자코 발길을 옮겨 놓았다. 그는 필경 그동안에 일어난 일에 대하여 나에게 이야기하려고, 이처럼 같이 걷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생각할 여유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나는 그에게 동정을 표시하고 싶었지만 실례가 될까 봐 염려하였다. 나는 그의 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인상을 그에게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가 말머리를 꺼내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물론 그는 나의 이러한 공작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는 나의 조롱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말을 가다듬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우리는 길모퉁이에 이르렀다.

"자네는 교회 앞에 가면 택시를 잡을 수 있을 걸세."하고 그는 말하였다.

"나는 좀 더 걷고 싶네. 그럼 잘 가게."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갔다. 나는 그만 당황하였다. 나로서는 택시를 잡을 때까지 걷는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목욕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목욕을 하다 말고 뛰어나와 젖은 몸에 수건을 두르고 수화기를 들었다. 쟈넷트가 건 전화였다.

"저 그분에 대해 여쭈어보겠는데요."하고 그녀는 말하였다.

"어젯밤에 선생님께서도 늦도록 찰리를 붙들어 주셨지요? 새벽 세 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그분은 마릴본 거리에서 저와 헤어졌는데요. 그는 저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더군요."

"그러세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쩐지 나와 오랫동안 통화하고 싶어 하는 기미가 엿보였다. 그녀는 아마도 침대 옆에서 전화를 걸고 있을 것이다.

"여보세요."

나는 재빨리 말을 건네었다.

"전 지금 목욕하고 있는 중인데요."

"어머나! 그럼 선생님 댁엔 목욕실에도 전화가 있으세요?"

그녀는 약간 부러운 듯한 어조로 물었다.

"아뇨. 전 지금 양탄자 위에 온통 물방을을 떨어뜨리고 있는 중이올시다."

나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어머 저걸 어째!"

그녀의 목소리에는 실망과 짜증이 뒤섞여 있었다.

"그럼 언제쯤 뵐 수 있을까요? 열두 시에 저희 집에 오실 수 있어요?"

열두 시는 나한테 적당한 시간이 못되었지만, 나는 그녀와 더 여러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요. 안녕히 계세요."

나는 그녀가 무어라고 더 말하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아마 하늘나라에서는 복 많은 사람들끼리 전화를 할 때에는 필요한 말 이외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쟈넷트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친구들의 불행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돕는데 열성이 대단했으며, 기꺼이 친구들의 어려운 처지에 뛰어들어 힘이 되고 싶어 하였다. 그녀야말로 역경에 처했을 때의 친구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밖의 사람들의 일은 그녀에게는 대수롭지 않았다. 친구 중에서 어느 한 사람에게 애정 문제가 일어나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 비밀을 털어놓게 하였으며, 또 이혼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도 반드시 참견하려 들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친절한 여자였다. 나는 열두 시에 쟈넷트의 응접실에 안내되었을 때, 그녀는 안달이 나는 것을 억제하면서 나를 맞아주는 것을 보고 속으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비숍 부부 사이에 일어난 비극에 대하여 몹시 마음이 아팠으나, 그것은 꽤 흥미 있는 일이었으므로, 그녀는 그 내막을 들려줄 만한 상대가 하나 나타난 것을 무척 기뻐하였다. 그녀는 마치 어머니들이 시집간 딸이 첫아기를 해산하는 데 대하여 의사와 의논할 때와 같은 그런 실제적인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일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일을 경솔하게 생각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가치 있는 것이라면 모조리 얻어들을 심산이었다.

"마져리가 끝내 찰리 곁을 떠나야겠다고 저한테 말하였을 때, 저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그녀는 이와 같은 말을 열 번도 더 되풀이하면서 이야기하였다.

"그들은 제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부부들 중에서 제일 정다운 사이였어요. 정말 원만한 결혼이었어요. 둘이는 불타오르는 것처럼 열렬히 사랑했어요. 빌과 저도 원만한 편이긴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지독하게 싸움을 하거든요. 어떤 때에는 그이를 죽이기라도 할 것 같아요."

"저는 부인과 빌의 관계에 대하여는 알고 싶지 않습니다. 비숍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시오. 저는 그 때문에 왔어요."

"저는 선생님을 만나 뵈어야 할 것 같았어요. 그 일에 대하여 자세히 얘기해 줄 수 있는 분은 선생님뿐이니까요."

", 그건 당치도 않는 말씀입니다. 저는 어젯밤에 빌이 얘기해 주었기 때문에 처음 알았어요, 그전까지는 감감소식이었어요."

"하긴 저도 그렇게 생각해 보기도 했어요. 선생님께서 그 일에 대하여 모르고 계실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퍼뜩 들더군요. 선생님은 그 일에 이상스럽게 관련된 것 같아요."

"저는 일이 부인에게서 발단된 것 같아요."

"아네요, 오히려 그건 선생님이에요. 어쨌든 말썽은 선생님께서 일으키셨거든요. 그 청년을 소개한 것은 선생님이 아네요? 제가 선생님을 만나려고 그렇게 몸이 달아 한 것도 그 때문이었지요. 선생님은 그 사람에 대하여 모든 걸 알고 계시죠? 전 그 사람을 본 일도 없어요. 조는 마져리가 그에게 대하여 얘기해 준 것 밖에는 몰라요."

"언제 점심 식사를 하시겠어요?"

나는 물었다.

"한 시 반요."

"저도 그때 먹겠습니다. 그럼 얘기해 보시죠."

쟈넷트는 내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이 떠올랐던 것 같다.

"제가 점심을 굶으면 선생님도 따라서 굶으시겠어요? 간단한 식사라면 여기서 마련할 수도 있어요. 냉장고 속에 고기도 얼마간 들어 있으니까, 별로 서둘 필요는 없어요. 전 세 시까진 미징원에 갈 필요가 없어요."

"아닙니다. 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늦어도 한 시 20분에는 여기를 떠나야 해요."

"그럼 빨리 여쭈어봐야겠네요. 제리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리라니요. 누구 말입니까?"

"제리 몰튼 말이에요. 그 사람의 이름은 제랄드예요."

"제가 그걸 알 턱이 있습니까?"

"선생님은 그 사람과 같이 계시지 않았어요. 주고받은 편지 같은 건 없었나요?"

"그런 걸 읽을 기회가 없었나 봅니다."

나는 좀 언짢은 듯이 대답하였다.

"어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편지 봉투도 못 읽어 보셨다는 말씀인가요. 대체 그 사람은 어떻게 생겼어요?"

"글쎄요. 이를테면 키플린과 같은 타입이에요. 자기 일에 대하여는 열성이 대단하고 다정한 면도 있어요. 건축기사와 같은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랍니다."

"그런 건 알고 싶지 않아요."

쟈넷트는 짜증을 내면서 말하였다.

"그이가 어떻게 생겼느냐 말예요."

"뭐 보통 사람과 비슷하지요. 그를 다시 만나면 알아볼 수는 있지만 지금 분명히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그는 좀 깔끔해 보이지요."

"어머, 선생님은 소설가가 아니신가 봐요. 그 사람의 눈은 무슨 색깔이에요?"

쟈넷트가 말하였다.

"모르겠는데요."

"한 주일 동안이나 같이 지내시고도 상대방의 눈이 파란색인지 갈색인지 분간 못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 사람의 얼굴빛이 희어요? 검어요?"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습니다."

"키는요? 커요, 작아요?"

"보통이지요."

"저를 약을 올리실 작정이세요?"

"천만에요. 그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남의 주의를 끌 만한 데가 없어요. 못생기지도 않고 잘생기지도 않았어요. 매우 점잖아 보이고 신사적이지요."

"마져리가 그러는데 그의 미소가 매혹적이고 얼굴이 잘생겼다고 하던데요."

"아마 그럴 테지요."

"그 사람은 마져리에게 홀딱 빠져서 제정신이 아니에요."

"뭘 보고 그렇게 생각하세요?"

나는 냉담한 태도로 물었다.

"전 그들의 편지를 읽어 보는 걸요."

"마져리가 부인에게 편지를 보여주었나요?"

"그럼요."

남자로서는, 여자들이 사적인 일에 대하여 남에게 털어놓는 것을 듣고 있기란 무척 힘든 노릇이다. 그녀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사사로운 일을 거침없이 지껄인다. 정숙은 여자의 미덕이다. 남자들은 이것을 이론상으로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여자들이 가볍게 입을 놀리는 것을 볼 때마다, 그들은 다만 어안이 벙벙해지는 것이다. 만일 몰튼이 자기 편지를 쟈넷트 마쉬가 읽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랑의 내막에 대하여 그녀가 나마다 보고를 받아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쟈넷트의 말에 의하면 몰트은 첫눈에 마져리에게 홀딱 반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시로에서 일린 조촐한 파티에서 처음 만난 이튿날 아침에 그는 마져리에게 춤출 수 있는 어떤 장소에 나와서 자기와 같이 차라도 마시자고 전화로 청했다고 한다. 쟈넷트는 이번 일에 대하여 나에게 마져리의 견해를 들려주고 있었으므로, 나는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쟈넷트가 마져리에게 동정을 금치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져리가 자기의 남편 곁을 떠나 버리자, 쟈넷트는 찰리가 쓸쓸하게 아파트의 빈방을 지키고 있으니 몇 주일 동안 자기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좋겠다는 마음에서, 찰리에게 상당히 친절을 베풀어온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거의 날마다 찰리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것은 그가 날마다 마져리와 함게 점심을 먹는 습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쟈넷트는 찰리와 함께 래전트 공원을 때때로 산책도 하였으며, 주일이면 빌과 함께 골프를 치도록 하였다.

그녀는 찰리가 자기 불행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면 참을성 있게 잘 들어 주고, 마음껏 그를 위로해 주었다. 그녀는 그를 진심으로 동정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히 마져리의 편이었다. 혹시 내가 마져리에 대하여 비난을 하면 맹렬히 반대하고 나섰다. 이번 일은 쟈넷트를 상당히 흥분시켰다. 그녀는 처음에 마져리가 자기를 찾아와서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러나 다소 의아스러운 태도로 자기에게 잚은 애인이 생겼다고 말하던 당초부터, 드디어 마져리가 인제 부부 사이에 진저리가 난데다가 마음이 산란하여, 더는 참을 수 없어 보따리를 싸가지고 아파트를 나왔다고 말할 때까지의 모든 일을 이야기하였다.

"저는 하긴 처음에는 제 귀를 의심했어요."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선생님도 찰리와 마져리의 사이가 어떻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아요. 그들은 피차에 상대방의 속에 꼭 매어서 사아왔어요. 그들은 너무나 다정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웃지 않을 수 없었어요. 제 눈에도 찰리는 한 번도 멋있게 보인 적이 없어요. 그의 생김새가 조금도 매력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 아니겠어요? 그렇지만 그가 아내에게 하도 잘하기 때문에 우리는 저마다 그를 좋게 생각하였어요. 그리고 때로는 마져리가 부럽기까지 하였어요. 그들에게는 돈이 없어 그럭저럭 살림을 꾸려왔지만 무척 행복했거든요. 저는 그들 사이에 무슨 변화가 일어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어요. 그런데 마져리는 이번 일을 재미있게 생각하더군요. 그녀는 저한테 말했어요. <난 이 일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건 당연한 일이지 뭐요. 내 나이에 젊은 애인이 있다는 건 당연한 일 아녜요. 난 몇 해 동안 남한테서 꽃을 한 송이 받아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난 그이에게 인제 꽃을 그만 보내라고 말할 지경이에요. 찰리는 그런 걸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이는 춤을 퍽 좋아해요. 그이가 그러는데 내가 홀딱 반할 만큼 춤을 잘 춘다지 뭐요. 그이가 언제나 혼자서 극장엘 간다니, 꼴이 됐어요? 그래 우리는 낮에 두세 번 극장에 간 적이 있어요. 내가 그이를 따라나서면 어떻게 고마워하는지 민망할 지경이에요. 하지 않겠어요. 그래 제가 <얘기를 들으니 그분은 양처럼 온순한 사람인가 보군요?>하고 말했더니 그녀가 하는 말이 <그래요. 저를 이해하여 주시겠지요? 저를 과히 탓하지 않으시겠지요?> 하길래 <그럼요. 제가 그렇게 소견이 비좁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아실 텐데요. 저도 당신과 같은 처지에 있다면 역시 행복했을 거예요.>하고 저는 말했어요."

마져리는 몰튼과의 사이를 남편에게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찰리는 사람 좋게 아내에게 애인이 생긴 것을 알고, 곧잘 아내를 놀려 주곤 하였다. 그는 몰튼이 얌전하고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하는 청년이기 때문에, 자기가 바쁠 동안, 아내에게 같이 놀 수 있는 남자가 생긴 것을 오히려 기쁘게 생각하고, 한 번도 질투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셋이서 여러 번 저녁을 같이 먹고, 쇼를 구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 제리 몰튼은 마져리에게 자기와 단둘이서 하루 저녁을 보내자고 요청해 왔다. 그녀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열심히 설득하는 바람에 그녀는 망설였다. 그러던 중에 하루는 드디어 그녀가 쟈넷트에게 전화를 걸어, 찰리를 단독으로 저녁 식사와 브리지 놀이에 초대해 달라고 부탁하였던 것이다. 찰리는 동부인을 하지 않고서는 아무래도 얼굴을 내밀려고 하지 않았으나, 마아쉬 내외와는 오랜 친구지간이므로 쟈넷트는 이점을 내세웠다. 그녀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꾸며내어 찰리가 초대에 응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이튿날 그녀는 마져리와 만났다. 마져리는 어제저녁에 한때를 매우 재미있게 보냈다고 말하였다. 그녀는 몰튼과 함께 메이든 헤드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그곳에서 한바탕 춤을 추고 나서, 여름 밤을 드라이브하다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이는 내가 좋아서 미칠 지경인가 봐요." 마져리가 말하였다.

"그이가 키스해 줬어요?" 하고 쟈넷트가 묻자,

"물론이죠."하고 마져리는 킥킥거렸다.

"자넷트, 그것도 말이라고 해요? 그분은 매우 상냥하고 또 천품이 무척 고와요. 하기는 나는 그분이 하는 말을 절반도 믿지 않지만 말예요."

"설마 그분을 사랑하게 되지는 않을 테지요?"

"벌써 사랑하고 있는걸요."

"일이 난처해지면 어떻게 해요?"

"뭐 잠깐 동안일 텐데 어때요. 그인 가을에 보르네오로 가게 돼요."

"당신은 요즘에 몇 년은 더 젊어 보이는군요."

"나도 그걸 느껴요. 몇 살은 더 젊어진 것 같아요."

그 후 두 남녀는 날마다 서로 만났다. 그들은 오전 중에 만나서 함께 공원을 산책하거나 화랑(畵廊)에 들리곤 하였다. 그러다가 머져리가 남편과 함께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면, 그들은 일단 헤어졌다가, 점심 식사를 마친 다음에 다시 만나 차를 잡아타고 교외로 달리거나 강가로 드라이브하는 것이었다. 마져리는 처음에 이 사실을 남편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가 이해해 주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래 부인은 몰튼을 한 번도 못 만나셨어요?"하고 나는 쟈넷트에게 물었다.

"마져리는 그러기를 원치 않는걸요. 그녀와 저는 세대가 같지 않아요. 저는 그 심정을 잘 알 수 있어요."

"그렇겠군요."

"저는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어요. 그녀가 물튼과 함께 외출할 때면 언제나 저하고 함께 가는 것 같이 되어 있었거든요."

나는 무슨 일이든지 분명히 하는 성미이므로 이렇게 물었다.

"그들은 육체관계까지 맺었나요?"

"어마, 마져리는 그런 여자가 아니예오."

"그걸 어떻게 보증해요?"

"그런 일이 있었더라면 그녀가 저한테 말했을 거야요."

"하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저는 마져리에게 그걸 물어보기도 했어요. 그녀는 펄쩍 뛰지 않겠어요. 아마도 사실일 거야요. 그들 사이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저한테는 좀 이상하게 들리는군요."

"선생님께서도 마져리가 얼마나 훌륭한 여자인지 잘 아시지 않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녀는 찰리에게 매우 충실했어요.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남편을 속이려고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녀가 남편에게 어떤 비밀을 갖고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괴로운 일이었으니까요. 그녀는 자기가 몰튼을 사랑하게 된 것을 알게 되자 바로 남편에게 이야기하려고 하는 걸 제가 못하게 말렸어요. 이야기했대야 남편의 기분만 상하게 할 뿐이라고 말해 주었지요. 두어 달 지나면 그 청년은 떠나게 될 터인데, 오래 계속되지도 않을 일로 큰 소동을 피우는 것은 현명한 일이 못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얼마 후에 물튼과 헤어지게 된 데서 일은 발단되었다. 비솝 내외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떠날 예정이었다. 즉 그들은 자동차로 벨기에, 네델란드, 그리고 도이치 북부 지방을 여행할 계획으로 있었던 것이다. 찰리는 지도와 안내서를 살피기에 바쁘고, 친구들에게서 호텔과 길에 대한 지식을 열심히 수집하였다. 그는 마치 초등학교 아이들처럼 들뜬 기분으로 휴일을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져리는 침울한 마음으로 남편이 여행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들은 4주일 동안 해외로 나가 있을 예정이고, 몰튼은 9월에 배를 타고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녀는 모처럼 가진 자기들의 달콤한 한때를 그처럼 오랫동안 허비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자동차 여행은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였다. 그녀는 떠날 기일이 점점 다가오자 더욱 신경과민이 되어, 드디어 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녀로서는 이 길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여보, 저는 이번 여행을 가고 싶지 않군요."

어느 날 남편이 방금 듣고 온 한 음식점에 대한 이야기를 그녀에게 하고 있을 때, 그녀는 별안간 남편의 말을 가로막고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남편은 멍하니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자기가 한 말에 스스로 놀라 약간 입술이 떨렸던 것이다.

"아니 왜요?"

"아무것도 아니예요. 다만 마음이 별로 내키지 않는군요. 저는 잠시 혼자 있고 싶어요."

"어디 몸이라도 불편하오?"

그의 눈에는 근심스러운 빛이 떠돌고 있었다. 그녀는 이것을 보자 참을 수가 없었다.

"아네요. 요즘처럼 건강이 좋은 적은 일찍이 없었어요…… 전 사랑을 하고 있어요."

"아니 당신이? 누구하고"

"몰튼하고요."

그는 깜짝 놀라 아내를 쳐다보았다. 자기의 귀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그녀는 남편의 표정을 잘못 해석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를 탓하여도 소용없어요. 전 인제 어떻게도 할 수 없어요. 그이는 2, 3주일 후면 이곳을 떠나 버려요. 저는 이 짧은 동안을 허송세월하기는 싫어요."

남편은 너털웃음을 쳤다.

"여보, 마져리! 어쩌면 당신은 그렇게도 어리석단 말이오? 당신은 그의 어머니가 되어도 충분한 나이란 말이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말하였다.

"저 못지않게 그이도 저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어요."

"그자가 당신 보고 그렇게 말했소?"

"그럼요. 수없이 말했어요."

"그자는 새빨간 거짓말쟁이군."

그는 킥킥거리며 크게 웃었다. 그러자 살찐 배가 유쾌한 듯이 들먹거렸다. 그는 아내의 말을 기막힌 농담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찰리는 아내를 옳게 다루지 못했던 것 같다.

쟈넷트는 그가 아내에게 다정스럽고 동정적인 태도를 취했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는 좀 더 이해성이 있어야 했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눈에 비친 모습과 굳어진 입술하며 조용히 흐르는 슬픔, 그리고 드디어 포기하는 태도 등을 엿볼 수 있었다.

여자란 남들의 아름다운 희생에는 언제나 민감한 법이다. 이 경우에는 찰리가 노발대발하며, 가구를 한두 가지 부수거나(그가 다시 사 놓아야 하는) 마져리의 아래턱을 한두 번 후려 갈기만 했어도 쟈넷트는 그를 존경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아내의 행동을 웃어넘겼다. 이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뚱뚱하고 키가 별로 크지 않은 55세의 병리학 교수가 별안간 야만인같이 난폭한 행동을 취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여 말하지 않았다. 아무튼 화란으로 떠나는 여행은 중단되었다. 그리하여 비숍 내외는 8월 한 달을 런던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들은 별로 행복하지 못하였다. 여러 해 동안 습관해 온 식사는 같이하였지만, 마져리는 나머지 시간을 몰튼과 함께 보내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보내는 즐거운 시간에는 그녀가 참고 견딜 것을 보상할 수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에게는 참아야 할 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아내가 어리석게 굴기 때문에 화가 치밀었지만, 그녀가 자기한테 불성실하였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하여 쟈넷트에게 물어보았더니,

"그분은 조금도 아내를 의심치 않았어요. 아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몇 주일이 지나 드디어 몰튼은 배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틸베리에서 출항하였다. 마져리는 그를 전송하고 돌아와서 이틀 동안 꼬박 눈물오 보내었다. 그러자 찰리는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신경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이봐요, 마져리!"하고 그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는 그동안 참으리만큼 참아 왔소. 이제는 마음을 좀 진정시켜야 하지 않겠소? 당신이 말한 것은 농담치고는 너무 지나치단 말이오."

"좀 이대로 내버려 두시면 어때요? 나는 내 일생을 아름답게 장식해 주던 모든 것을 이제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그 바보 같은 소릴랑 작작해요."

그가 또 무슨 말을 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자기가 몰튼에 대한 생각을 그녀에게 말한 것은 분명히 현명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무튼 그는 매우 점잖지 못하게 굴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그들 사이에 처음으로 큰 싸움이 일어났다.

마져리는 한 시간 후나 혹은 그다음 날에 몰튼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때에는 찰리가 아무리 조롱을 하여도 견딜 수 있었지만, 이제 그가 영원히 떠나가 버렸다고 생각하자, 남편의 조롱을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몇 주일 동안 자제하려고 하였으나, 이제는 더 견딜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녀는 자기가 정신없이 남편에게 정말 무엇이라고 떠 버렸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항상 화를 내더니 마침내 마침내 아내에게 손찌검까지 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아내를 때렸을 때, 그들 내외는 둘다 깜짝 놀랐다. 그는 모자를 집어쓰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들은 그 불행한 기간 중에도 언제나 한 침대를 사용해 왔었다. 그런데 그가 밤중에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는 거실에 놓여 있는 소파에서 잠들어 있었다.

"여보, 어디서 자고 있는 거요. 못난 짓 작작하고 침대로 가요."

"싫어요. 그냥 내버려 두세요."

그들은 밤새도록 옥신각신하였다. 마져리는 끝내 지려고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밤마다 소파위에서 잤다. 그러나 비좁은 아파트에서는 서로 떨어져 살 수 없었다. 서로 보지 않고 듣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너무 여러 해 동안 가까이 지내왔기 때문에, 같이 있는 것이 거의 본능이 되다시피 하였다.

남편은 아내에게 이치를 따져서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는 아내를 아주 어리게 보았다. 그리하여 그녀의 생각이 얼마나 옳지 못한가를 납득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니 자연 두 사람 사이에는 언제나 말다툼이 그치지 않았다. 그는 아내를 조용히 혼자 두지 않았다. 잠도 못 들게 하면서 밤새도록 지루하게 얘기를 늘어놓았다. 아내를 설득하여 애인에 대한 사랑을 잊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들은 2, 3일씩 서로 말을 하지 않는 때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몹시 울고 있었다. 그는 아내의 눈물을 보자 마음이 산란해졌다. 그는 그녀에 대한 자기 사랑이 얼마나 깊은가를 누누이 말하고, 둘이서 함께 보낸 즐거웠던 시절을 회상케 함으로써, 아내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하였다. 지나간 일은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리하여 다시는 몰튼의 이야기를 입 밖에 내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들은 과연 이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었던가?

그러나 마져리는 화해가 암시하는 모든 일을 미리 생각하고 몸서리치는 것이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머리가 아프다고 말하면서 수면제를 달라고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남편이 출근할 때에도 그녀는 잠자는 체하였다. 그러나 남편이 나가자마자 그녀는 보따리를 싸가지고 아파트를 나와 버렸다. 그녀에게는 물려받은 장신구가 몇 가지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판 돈으로 싼 하숙집을 얻어 들고 남편에게는 주소도 알리지 않았다.

남편은 아내가 자기를 완전히 버렸다는 사실을 알자 넋을 잃고 말았다. 그는 아내가 집을 나간 데 대한 충격으로 하여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쟈넷트에게 쓸쓸해서 못 견디겠다고 말하고, 마져리에게 다시 돌아와 달라는 편지를 써서 그녀에게 주면서 중간에서 조정의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는 아내만 돌아와 준다면 무슨 일이든지 기꺼이 약속할 용의가 있었다. 말하자면 완전히 기가 꺾여 버린 것이다. 그러나 마져리는 응하지 않았다.

"그 여자가 앞으로 돌아올 것 같아요?"하고 나는 쟈넷트에게 물었다.

"돌아오지 않겠다는 거예요?"

시간이 거의 한 시 반이 가까웠으므로 나는 떠나야만 했다. 그리하여 나는 그 집을 나와 거리를 걸었다.

2, 3일이 지나자, 마져리에게서 만나자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는 자기가 내 아파트로 오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차를 권하고 친절히 대하려고 하였다. 그녀의 문제는 나와 전혀 관계가 없었으나, 나는 속으로 매우 어리석은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아마도 그녀를 대하는 내 태도가 좀 쌀쌀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일찍이 한 번도 예쁘게 보인 적은 없었지만 지난 몇 해 동안에 별로 늙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녀의 검은 눈은 여전히 매력적이었으며, 얼굴에서는 놀랍게도 주름살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자연스러운 태도하며, 상냥한 말씨는 매우 호감을 주었다.

"선생님께서 저를 위해 힘이 되어 주셨으면 해요."

그녀는 대뜸 말을 꺼내었다.

"무슨 일인데요?"

"찰리는 오늘 마아쉬씨 댁에서 아파트로 되돌아갈 거예요. 그런데 처음 며칠 동안이 감당해 나가기 힘들지 않을까 염려가 되는군요. 그래 선생님께서 그이를 저녁 식사나 혹은 다른 일에 청해 주셨으면 하는데요."

"저는 책을 좀 봐야겠는걸요."

"그리는 술을 굉장히 마신다는군요. 참 안됐어요. 선생님께서 그리를 바로잡아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요새 그 사람한테 무슨 가정적인 고민이 있는 모양이더군요."

나는 좀 냉정하게 말하였다.

마져리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괴로운 듯이 나를 쳐다보다가 마치 내가 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몸을 움칠했다.

"선생님은 물론 저보다 그이를 훨씬 전부터 알고 계셨으므로 그의 편을 드실 거예요."

"실은 저는 이 몇 해 동안은 주로 부인을 통하여 그 친구를 알게 되었어요. 저는 한 번도 그 사람을 좋게 생각한 적은 없지만, 부인만은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해 왔어요."

그녀는 나를 바라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 미소는 무척 매혹적이었다. 그녀는 내 말을 긍정하였다.

"제가 그분에게 좋은 아내였다고 생각하세요?"

"암요, 매우 원만했지요."

"그분은 언제나 남을 노엽게 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싫어한 것은 그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저는 한 번도 그분이 까다롭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 사람은 부인을 무척 좋아하였어요."

"저도 알고 있어요. 저희는 재미있게 지내 왔어요. 16년 동안 저희는 정말 매우 행복했어요."

그녀는 말을 멈추고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그러나 저는 그분의 곁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대로는 도저히 살 수 없었던 거예요. 저희들의 생활은 마치 개와 고양이 사이 같아서 정말 무서울 정도였어요."

"피차에 원치 않는다면 같이 살아야 한다는 이유가 없어질 테지요."

"저희에게는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었어요. 그동안에 저희는 사이가 너무 긴밀하였기 때문에 떨어질 수 없었거든요. 그런데 나중에는 그분을 거들떠보기도 싫어졌어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분께서 다 사정이 그렇게 만만치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몰튼과 사랑에 빠진 것은 당연해요. 그 사람은 제가 찰리에게서 느끼던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랑이었어요. 찰리에 대한 사랑에는 이를테면, 언제나 모성애와 같은 것이 있었고, 저는 항상 그를 보호하는 입장에 서게 마련이었어요. 그만큼 저는 찰리보다는 지각이 있었던 거예요. 그분은 다루기가 무척 힘든 사람이었지만, 저는 언제나 기준을 조정할 수 있었거든요. 그러나 몰튼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어요."

그녀는 한결 목소리가 부드러워지고 얼굴은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그이는 저에게 젊음을 되찾게 해 주었어요. 저는 그이 앞에서는 어린 소녀나 마찬가지였어요. 저는 그분의 힘에 기대일 수 있었고, 그분의 보호를 받아 안전감을 느낄 수도 있었어요."

"그 사람은 제가 보기에도 퍽 훌륭한 청년 같더군요."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마도 일이 잘될 겁니다. 내가 처음 만났을 때, 그 청년은 퍽 젊어 보였어요. 아마 지금 겨우 스물아홉 살쯤 되었을걸요."

그녀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녀는 내 말귀를 알아들었던 것이다.

"저는 그분에게 제 나이를 속이지 않았어요. 그분은 나이 같은 건 문제가 되지 않는 거예요."

나는 이 말을 시인하였다. 그녀는 자기 나이 같은 것을 속일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 사람에게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진실을 말함으로써, 어떤 잔인한 희열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부인은 올해 몇이시던가요?"

"마흔넷이어요."

"앞으로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저는 편지로 찰리에게서 떠났다는 것을 몰튼에게 알렸어요. 이제 기별이 오는 대로 그분한테로 떠나려고 해요."

나는 놀랐다.

"부인께서는 이미 잘 알고 계실 테지만,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은 원시적인 조그마한 식민지입니다. 저는 부인께서 난처한 처지에 놓이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그분은 저한테 자기가 떠나고 나서 제가 지내기 어려우면 곧 자기에게 오라고 했어요."

"젊은 사람이 사랑에 빠졌을 때 한 말을 그렇게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까요?"

그녀의 얼굴에는 다시 기쁨이 넘쳐흘렀다.

"암요. 그 젊은이가 바로 몰튼이라면 믿고 싶어요."

나는 가슴이 뜨끔하였다. 나는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제리 몰튼이 닦아놓은 도로 공사에 대한 이야기를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나는 극적인 표현을 빌려 그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것은 어느 정도 효과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저한테 왜 그런 이야기를 하세요?"

내가 말을 마치자,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

"좋은 이야기니까요."

그녀는 머리를 옆으로 저으며 가볍게 웃어 보였다.

"아네요. 선생님께서는 필경 저한테 그분이 젊고 정열적이며, 자기 임무에 지나치게 열성이라, 그 밖의 다른 일에 허비할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하신 거지요? 저는 그분의 일을 방해할 생각은 없어요. 선생님은 그분을 저만큼 알지 못해요. 그분은 무척 낭만적이에요. 자기 자신을 개척자로 자처하고 있는 거예요. 거는 그분에게서 새로운 지방을 개척하는 데서 어떤 흥분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어요. 사실 그건 훌륭한 일이 아니겠어요? 그런 일에 종사하던 사람에게는 이 고장의 생활이 상당히 지루하고 단조롭게 보일 거예요. 그곳에 있으면 물론 고독할 테지요. 그러므로 중년 여자가 한사람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위안이 되겠지요."

"부인께서는 그 사람과 결혼하실 작정입니까?"하고 나는 물었다.

"저는 그분의 손에 제 자신을 맡겨 버렸어요. 그분이 원치 않는 일이라면 전혀 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담담한 신정으로 이야기를 하였으며, 그녀의 대토에는 비장한 데가 있었으므로, 나는 그녀가 떠난 후에 벌써 그녀에게 아무런 분노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나는 물론 그녀가 매우 어리석다고는 생각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어리석은 행동에 언제나 분노를 느낀다면, 우리는 일생을 만성적인 분노 속에서 보내야 할 것이다.

나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녀는 몰튼이 무척 낭만적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고약한 세상에서는 낭만주의자들도 자기네의 어리석은 짓을 집어치우게 된다. 그들이 날카로운 현실감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바보란 겉으로만 큰소리를 치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영국 사람들은 낭만적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그들을 위선자로 생각하는 것도 그 때문이지만, 실은 그들은 위선자가 아니다. 그들은 진지한 태도로 신의 왕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여정이 너무나 힘에 벅차 도중에서 가장 안전하게 보이는 곳에 투자를 하게 되는 것이다. 대영제국의 정신이란, 웰링턴의 군대와 마찬가지로, 땅에다 배를 대고 전진하는 정신이다.

나는 몰튼이 마져리의 편지를 받고 나면 15분쯤은 쓸쓸한 기분을 금치 못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의 일에 대하여 별로 동정이 가지 않았다. 마져리는 실망하게 될 터이지만, 결코 큰 타격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남편에게 돌아가면 된다. 한바탕 시련을 겪은 이 부부는 분명히 평화롭고 행복하게 조용히 여생을 보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예상과는 달랐다. 나는 찰리 비숍을 한동안 만나보지 못했으므로, 다음 주일, 어느날 저녁에 함께 식사라도 나누자고 편지를 띄웠다. 그리고 한편 그의 일이 염려되었지만 그장에도 같이 가자고 제의하였다. 나는 그가 물고기처럼 술을 들이키고 마냥 취하면 고잘 떠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극장에서는 성가시게 굴지 않았으면 하였다. 우리는 평소에 자주 출입하는 클럽에서 7시에 만나 저녁을 먹기로 하였다. 연극이 815분에 시작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에 가서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오지 않았다. 그의 아파트에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아무도 받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가 이리로 오는 중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연극의 첫머리를 보지 못하는 것이 싫어, 그가 오면 곧장 2층으로 올라가려고 홀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신간을 절약하기 위해 식사도 미리 주문해 두었다. 시계는 7시 반을 가리켰다가, 잠시 후에는 815분 전을 가리켰다. 나는 그를 더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식당에 올라가 혼자서 저녁을 먹었다.

나는 식당에서 마아쉬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빌이 나타났다.

"찰리가 어떻게 된 거야?"

하고 나는 말하였다.

"우리는 함께 식사를 하고 연극을 구경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영 나타나지 않네그려."

"아 그 친구 말인가? 오늘 오후에 죽었다네."

"?"

내가 하도 놀라 큰소리로 외쳤으므로, 옆에 앉은 몇몇 손님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식당은 만원이라 보이들이 이리저리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전화는 계산대 위에 놓여 있었으며, 술을 나르는 보이가 쟁반 위에 독일 백포도주 한 병과, 굽이 높은 유리잔 두 개를 받쳐 들고 가까이 와서 계산서를 출납계원에게 내주었다. 뚱뚱한 보이가 손님 두 사람을 테이블에 안내하면서 나를 몰아내었다.

"자네는 어디서 전화를 하는가?"하고 빌이 물었다.

아마도 내 주위에서 떠들썩하는 소리가 그쪽에 들렸던 모양이다. 내가 있는 곳을 말하였더니 그는 식사가 끝나는 대로 바로 와 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쟈넷트가 나한테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곧 가지."하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쟈넷트와 빌은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빌은 신문을 읽고 있었으며, 쟈넷트는 페이션트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하녀가 나를 안내해 들이자, 그녀는 바로 나한테 다가왔다. 그녀는 마치 배불리 먹고 나서 살그머니 다가서는 표범처럼 몸을 약간 움츠리고 발길을 조용히 떼어 놓으면서 사뿐히 걸어왔다. 나는 그녀가 매우 흥분해 있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그녀는 아와 악수를 하고 나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추려고 외면해 버렸다. 그녀는 나지막하게 슬픈 목소리로 말하였다.

"저는 마져리를 여기 데려다가 침대에 눕혀 놓았어요. 의사가 진정제를 먹였어요. 그녀는 몹시 피로해 있어요. 얼마나 가엾은지 모르겠어요."

마져리는 헐떡이는 것 같기도 하고 흐느끼는 것 같기도 한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이런 일은 왜 언제나 저한테서 일어나는지 모르겠군요."

비숍 부부는 식모를 두지 않았다. 날마다 아침이면 잡역부(雜役婦) 한 사람이 와서 아파트를 청소하고, 아침 설거지를 해 주었다. 그 잡역부도 열쇠를 하나 갖고 있었다. 그녀는 그날 아침에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파트에 들어와 설거지를 하였다. 아내가 집을 난간 후로 찰리의 생활은 질서가 없었으므로, 그녀는 찰리가 늦잠을 자는 것을 보고도 태연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시간이 지나자 그가 일하러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침실문을 노크하였다. 아무 대답도 없었다. 오직 그의 신음소리만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그는 침대에 반드시 드러누워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큰소리로 그를 불러 보았다. 그녀는 어딘가 이상스러워 아파트의 같은 층에 사는 신문기자의 집으로 달려가 벨을 눌렀다. 신문기자는 아직도 잠자리에 누워있었으므로 잠옷차람으로 나와서 문을 열어 주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하고 그녀는 말하였다.

"우리 집 어른 잠깐 오셔서 좀 봐주세요. 아무래도 이상해요."

신문기자는 복도를 건너 찰리 방에 들어갔다. 그의 침대 옆에는 빈 수면제 병이 하나 놓여 있었다.

"경찰에 알리는 것이 좋겠어요." 그는 말하였다.

경찰관이 와서 앰블런스를 보내라고 서에 전화를 하였다. 그들은 찰리를 체링 크로스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그는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옆에서 마져리가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쟈넷트가 이렇게 말하였다.

"물론 시체를 검사해 볼 테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해요. 그분은 지난 3, 4주일 동안 통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그래 언제나 수면제를 먹어온 것 같아요. 그런데 실수해서 약을 과용한 거예요."

"마져리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나는 이렇게 물었다.

"마져리는 너무 충격을 받아 지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요. 그렇지만 저는 그녀에게 찰리가 분명히 자살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어요. 그이는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고요. 그렇지요, 여보?"

"그래 당신 말이 맞았어." 빌이 대답하였다.

"그는 아무 편지도 남기지 않았나요?"

"네 남기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마져리는 오늘 아침에 그가 보내온 편지를 한 통 받았어요. 하긴 편지라고 할 것도 없지요. 꼭 한 줄밖에 적혀 있지 않았으니까요. <여보, 당신이 없어서 나는 무척 외롭소.> 이것뿐이었어요. 이것은 물론 별로 뜻이 없는 말이에요. 마져리는 시체를 검사할 때 그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고 저한테 말했어요. 남들에게 이상한 생각은 줄 필요가 뭣이냐는 거예요. 그런데 수면제를 가지고서는 아무도 트집을 잡지 않을 게 아녜요. 그러나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약은 쓰지 않겠어요. 이번 일은 분명히 사고로 일어난 거예요. 그렇지요, 여보?"

"그래 당신 말이 맞았어." 빌이 또 대답하였다.

쟈넷트는 찰리가 자살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믿고 싶은 것은 과연 어느 정도 진심으로 믿고 있는지 나는 여성 심리학을 잘 모르므로 분명히 알 수 없었다. 하기는 그녀의 생각이 옳을지도 모른다.

중년의 과학자가 자기를 버리고 떠난 중년의 아내 때문에 자살을 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치 않은 생각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그는 아마도 수면 부족으로 피로하여 정신이 흐리멍텅한 상태에서, 자기 생각보다 수면제를 과용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것이 이 사건에 관한 검시관의 견해였다. 그는 찰리 비숍이 근자에 무절제한 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아내가 그를 버리고 떠난 줄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찰리가 결코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으려고 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검시관은 미망인에게 동정을 표시하고 수면제의 위험성에 대하여 누누이 역설하였다.

나는 워낙 장례식을 싫어하는 사람인데, 쟈넷트는 나더러 찰리의 장례식에 꼭 참석해 달라고 하였다. 병원에 근무하는 찰리의 동료 몇 사람이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지만, 마져리의 희망에 따라 그들은 오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장례식에는 쟈넷트와 빌, 마져리와 나 이렇게 넷만 참석하였다.

우리는 임시 시체보관소에서 영구차를 타고 갈 예정이었다. 그들은 도중에 나를 부르겠다고 하였다. 나는 기다리고 있다가 저쪽에서 차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빌이 차에서 내려 나를 데리고 갔다.

"잠깐만."하고 그는 말하였다.

"자네에게 할 말이 있네. 쟈넷트는 일이 끝나면 자네와 함께 차라도 마시기를 바라고 있네. 마져리가 너무 상심치 말아야 할테니까 말이야. 차를 들고 나서 함께 브리지 놀이라도 하세. 와 주겠지?"

"이대로 가도 괜찮겠나?"하고 나는 물었다.

"무방하네. 오히려 마져리의 마음이 한결 홀가분할 걸세."

"그럼 가지."

상복을 입은 쟈넷트는 그 아름다운 머리와 함께 한결 맵시 있어 보였다. 그녀는 동정하는 친구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해 내었다. 그녀는 검은 빛 마스카라가 지워지지 않도록 눈물을 교묘히 닦으면서 울기도 하였으며, 마져리가 흐느낄 때에는 그 팡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기도 하였다. 그녀는 공경에 빠졌을 때에는 곧잘 도움이 되는 친구였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마져리에게는 전보가 한 통 와 있었다. 그녀는 전보를 갖고 2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찰리의 어느 친구가 그의 부고를 받고 보낸 위로 전보일 거라고 생각하였다.

빌이 옷을 갈아입으러 나갔으므로, 나는 응접실에서 쟈넷트와 브리지 놀이판을 꺼내 놓았다. 그녀는 모자를 벗어서 피아노 위에 올려놓았다.

"위선자 노릇을 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에요."하고 그녀는 말하였다.

"마져리는 물론 커다란 충격을 받았어요. 그렇지만 인제는 마음을 진정시켜야지요. 아마 그녀는 브리지 놀이라도 한판 하면 평소의 기분으로 돌아갈 거예요. 하긴 가엾은 찰리의 일을 생각하면 정말 안 됐어요. 그에게는 마져리가 떠난 것이 무척 가슴 아픈 일이었어요. 마져리로서는 오히려 이롭게 되었지만 말에요. 그녀는 오늘 아침에 몰튼에게 전보를 쳤어요."

"뭐라고 쳤을까?"

"가엾은 찰리의 일을 알려 준 거지요."

그때 식모가 들어왔다.

"아주머니, 마져리 부인에게 가보세요. 그분이 만나고 싶어 해요."

"그래, 가 봐야지."

그녀는 밖으로 나가고 나는 혼자 방에 남아 있었다. 조금 있자, 빌이 들어왔다. 우리는 함께 술을 마셨다. 이윽고 쟈넷트가 돌아왔다. 그녀는 나한테 전보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제 편지를 기다리시오. 제리>

"무슨 뜻인지 아세요?"하고 그녀는 나에게 물었다.

"문자 그대로지요."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하긴 저도 물론 마져리에게는 아무 뜻도 없는 말이라고 했어요. 그래도 그녀는 좀 걱정이 되는 모양이더군요. 이 전보는 찰리가 죽었다는 것을 알리는 그녀의 전보와 엇갈린 것이 분명해요. 어쨌든 그녀는 브리지 놀이가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에요. 남편의 장례가 있던 날에 그런 놀이를 한다는 것이 뭣하긴 해요."

"암요."하고 나는 말하였다.

"제리는 물론 그녀가 친 전보에 대하여 회전을 보내오겠지요. 틀림없어요. 우리는 인제 가만히 앉아서 그의 소식을 기다릴 수밖에 없군요."

나는 그녀와 더 이야기할 필요가 없으므로 자리를 뜨기로 하였다. 이틀이 지나 쟈넷트는 전화로 나에게 마져리가 몰튼에게서 조의 전문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읽어주었다.

<슬픈 소식에 가슴이 아프오. 당신의 애절한 비애를 동정하여 마지 않소. 당신의 사랑. 제리>

"이 전보를 어떻게 생각하세요?"하고 그녀가 물었다.

"깎듯이 예절을 지킨 글이군요."

"하기야 기쁘다고 쓸 수야 없을 테지요."

"암요. 아무리 묘한 표현을 하더라도 그럴 수야 없지요."

"그렇지만 그분은 <당신의 사랑>이라고 했거든요."

나는 이 두 여자가 전보를 얼마나 여러 각도로 궁리해 보았으며, 또 글자 하나하나까지 세밀히 검토하여 거기 숨은 뜻을 캐내려고 얼마나 애썼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녀들이 오랫동안 주고받은 이야기가 귀에 쟁쟁거리듯 하였다.

"지금 몰튼이 마져리를 낙심케 한다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요."하고 쟈넷는 말하였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모직 그가 신사냐 아니냐에 달려있는 거예요."

"괜한 걱정은 그만 두세요."

나는 그난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 후 나는 마아쉬 내외와 두어 차례 식사를 나눈 적이 있다. 마져리는 피로해 보였다. 그녀는 초조한 마음으로 몰튼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슬픔과 불안에 싸여서, 그림자처럼 수척하여 퍽 쇠약해 보였으며, 전혀 찾아볼 수 없던 고상한 기품마저 풍기고 있었다.

그녀는 무척 상냥해졌으며, 자기에게 베푸는 남의 친절에는 큰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으나, 불안스럽고 약간 수줍은 듯한 그녀의 미소에는 깊은 슬픔이 서려 있었다. 그녀의 연약한 태도는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물튼은 멀리 몇천 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쟈넷트가 전화를 걸어왔다.

"편지가 왔어요. 마져리가 그러는데 그 편지를 선생님한테 보여 드려도 무방하다는 거예요. 이리로 오실 수 있겠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긴장돼 있었으며, 그것이 모든 것을 대변해 주었다.

나는 가서 그 편지를 읽어 보았다. 매우 조심스럽게 쓴 편지였다. 아마도 몰튼은 여러 번 고쳐 썼을 것이다. 내용은 매우 친절하였다. 그는 마져리의 마음을 상하지 않으려고 말을 조심스럽게 골라서 쓴 것 같았다. 그러나 편지의 전면에는 그의 공포감이 나타나 있었다. 그는 꽤 떨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사태를 원만히 수습하는 방도는 가벼운 익살을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던지 식민지에서 살고 있는 백인들에 대하여 꽤 우스운 말을 썼다.

마져리가 갑자기 그곳에 나타나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할까? 그는 당장 직장에서 해고될 것이다. 개방적이고 자유스럽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못하며, 그곳은 클라팝보다도 구석진 곳이다. 그는 마져리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 고장의 수다스러운 여자들이 그녀를 멸시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어디 가서 일하나 열흘 동안은 본부에 가 있어야만 하였다. 마져리가 그의 방갈로에서 살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호텔 같은 건 없었다. 뿐더러 그가 하고 있는 일은 그를 며칠씩 정글 속에 매어 두기가 일쑤였다. 요컨대 그곳은 여자가 살 곳이 못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마져리가 자기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라고 말하고, 그렇지만 자기 걱정은 조금도 말고, 다시 남편에게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자기가 그녀와 찰리 사이를 떼어 놓은 데 대하여 가책을 느낀다고 하였다.

이것은 분명히 무척 쓰기가 힘든 편지였을 것이다.

"그는 찰리가 죽은 줄은 모르고 있어요. 저는 마져리 보고, 그가 그 소식을 들으면 모든 것이 달라질 거라고 말했어요."

"마져리가 그 말을 시인해요?"

"그녀는 지금 사리를 가릴 수 없나 보더군요. 그런데 선생님은 그 편지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셔요?"

"글쎄요. 그가 마져리를 원치 않는 것은 분명한 것 같군요."

"몇 달 전만 하여도 그는 그녀를 무척 원했었는데……."

"환경이 바뀌고 분위기가 달라지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몰라요. 아마 그는 런던을 떠난 지가 벌써 1년이 넘은 것처럼 생각될 거예요. 그는 옛 친구와 옛일에 돌아간 거지요. 부인, 마져리가 혼자서 고민해 보았대야 부질없는 짓입니다. 그곳의 생활이 그의 마음을 그렇게 돌려놓은 거랍니다. 그에게는 이제 그녀가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저는 편지 사연이야 어쨌든 그에게 직접 가보라고 충고하였어요."

"그녀가 지각을 차려 깨끗이 거절을 당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텐데……"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그녀의 골은 뭐가 되지요? 그건 너무 무정해요. 마져리는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여자예요. 무척 착한 여자예요."

"부인이 그렇게 생각하시다니 흥미 있군요. 이렇게 말썽을 일으키게 된 건, 결국 그녀가 착한 탓이었어요. 왜 그녀는 몰튼과 육체관계 맺지 않았나요? 그랬대야 찰리는 알 리 없을 테고, 일은 조금도 악화되지 않았을 텐데요. 그렇게 되면 두 남녀는 멋있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을 것이고, 몰튼이 떠날 때에도 하나의 즐거웠던 일화(逸話)가 아름답게 끝을 맺는다고 생각을 하면서 헤어졌을 거요. 따라서 그에게는 그 일이 즐거운 추억이 되었을 것이며, 그 여자는 만족스럽고 아늑한 마음으로 남편에게 돌아가 전과 같이 착실한 아내 노릇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쟈넷트는 입술을 오므리고 멸시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미덕(美德)을 간직할 줄 알아야죠."

"그 미덕이 탈입니다. 우리에게 폐단과 불행만을 가져오는 미덕은 해서 뭣에 쓰자는 겁니까? 부인께서는 그걸 <미덕>이라고 하여도 저는 <비겁>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그녀가 찰리와 함께 살고 있는 한, 남편에게 불성실하다는 것은 그녀에게 몸서리치는 일이었던 거예요. 이런 여자들은 왜 얼마든지 있지 않아요?"

"내 원 참! 아 그녀는 육체적으로는 불성실하더라도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남편에게 성실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게 여자들이 곧잘 꾸며대는 핑계지요."

"꽤 비꼬시네요."

"현실에 직면하여 상식을 적용하는 것이 비꼬는 것이라면, 저는 분명히 지독하게 빈정대는 것이 되겠지요. 그렇지만 사리를 따져 봅시다. 마져리는 중년 부인이고, 찰리는 쉰다섯이나 되며, 그들 내외는 15년 동안이나 결혼생활을 해 왔어요. 그녀가 자기에게 몸이 단 젊은이에게 홀딱 빠진 것은 당연해요. 그런데 그건 사랑이 아니라 생리 문제였어요. 그녀가 그의 말을 액면대로 믿다니 이만저만한 잘못이 아니지요. 그가 요구한 것은 굶주린 성()의 충족이었어요. 그는 4년 동안이나 백인 여자를 주려 왔으니까요. 그가 당시에 한 들뜬 약속에 매어서 그녀의 일생을 망치려고 들다니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어요. 그가 마져리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것은 우연한 동기에서였어요. 그는 마져리의 육체를 원하였지만 그녀를 정복할 수 없었으므로, 더욱 원하게 된 거지요. 그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였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저는 그것이 단지 성욕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들이 동침하였던들 찰리는 죽지 않았을 겁니다. 이렇게 말썽이 생긴 것은 그녀의 하잘것없는 미덕 때문이었어요."

"그건 당치 않은 말씀이에요. 그녀는 어쩔 수 없었던 거예요. 선생님은 그걸 모르세요? 그녀는 행실이 고약한 여자가 못 되었던 거예요."

"저는 이기적인 여자보다 행실이 고약한 여자들, 바보보다는 바람둥이를 택하겠어요."

", 그만두세요. 그런 난폭한 말씀을 하시라고 부른 건 아녜요."

"그럼 뭣 하러 불렀어요?"

"몰튼은 선생님의 친구예요. 선생님이 그 사람을 마져리에게 소개해 주셨고, 그녀는 그 사람 때문에 곤경에 빠진 거예요.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은 선생님으로부터 발단된 거예요. 그러니까 몰튼에게 편지를 띄워, 그녀를 버리지 않도록 충고해 주세요. 이건 선생님의 의무에요. 그렇지 않아요?"

"저는 그 짓은 못하겠어요."하고 나는 말하였다.

"그럼 알겠어요. 이제 그만 가셔도 좋아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아뭏든 찰리가 생명보험에 든 건 잘했어요."하고 쟈넷트가 말하였다.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부인은 그런 소리를 하면서도 나더러 비꼰다는 거요?"

나는 물을 쾅 닫고 나오면서, 쟈넷트에게 던진 그런 무례한 말은 다시 입 밖에 내지 않으리라고 다짐하였다. 그런데 쟈넷트는 꽤 호감을 느낄 수 있는 여자임에 틀림없다. 나는 그녀와 결혼하면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가끔 생각해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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