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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 때문에

Bollnow 2024. 4. 21. 06:37

양심 때문에

Thomas Hardy

 

1

세상에는 저지른 죄나 과오에 대해 항상 속죄의 기회를 노리다가도 누군가로부터 그 필요성을 권고 받게 되면 이런저런 핑계를 내세워 기회를 늦추어 버리거나 아예 갖지 못하는 그런 미묘한 감정을 지닌 사람이 몇 명인가는 있게 마련이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공리설을 따르는 직감설을 취하는 그 결론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밀보온 씨와 프랭클린 부인의 경우가 그 좋은 예이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밀보온 씨는 오래 전부터 살아온 런던의 한 조용한 거리를 매일같이 규칙적으로 왔다 갔다 했다. 그 때문에 이 거리의 청소부들에게 그 사람만큼 잘 알려진 사람도 그리 흔하지 않은 편일 게다. 그는 자기 집은 아니었지만 이 거리의 11번지에 살고 있었다. 나이는 적어도 50 가까이 되어 보였으며 그의 습관을 보면 오늘 하루를 어떻게 무엇을 하며 보낼 것인가 하고 생각하는 것 이외엔 별로 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규칙적이었다. 그는 날마다 자기가 살고 있는 거리의 맨끝까지 걸어가서 으레 바른쪽으로 돌아 본드 가로 들어섰고, 이어 그가 소속한 클럽으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리고 6시만 되면 그곳에서 나와 아까와 똑같은 길을 되밟아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게 마련이었는데 혹시 다른 곳으로 저녁식사라도 하러 갔을 경우는 좀 늦게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얼핏 보아서는 별로 부자다운 데가 없었으나 약간의 재산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토우니 부인의 집에서 가장 좋은 방을 빌려서 혼자 살았는데, 방안의 가구는 초라한 편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지불한 방세로 가구를 샀다면 아마 열 배나 훌륭한 것을 마련했을 터인데도 그는 그 집의 가구를 빌려서 쓰는 것이 마음에 편한 모양이었다.

그와 친분이 있는 사람 중에서도 그를 깊이 알고자 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 역시 언행이 항상 담담하여 남의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친밀감을 주거나 하지 않았다. 그는 마음속에 무엇을 지니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으며 또 특별히 숨겨 둔 일도, 남에게 내놓고 알릴만한 일도 없는 것 같았다.

그가 어쩌다가 입 밖에 낸 말을 통합해 보면 그는 웨섹스의 어느 시골에서 태어났으며 젊어서 런던에 나와 은행원이 되어 상당한 지위에까지 올라갔으나, 그 무렵에 어떤 사업에 투자하여 성공한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 재산을 물려받고 아직 그럴만한 나이가 아닌데도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것이었다.

그가 며칠 동안 계속해서 몸이 약간 불편하여 누워 있었던 어느 날 밤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친 직후에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는 빈든 의사가 찾아왔다. 두 사람은 페치카 앞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의 병은 그다지 걱정할 만한 것이 아니어서 두 사람은 평범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빈든, 사실 난 참 외로운 사람이야. 무척 외로운......"

밀보온은 우울한 얼굴로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이야기 끝의 틈을 타서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나의 이런 외로움을 도저히 짐작하지 못할 거야. 나이를 한 살씩 더 먹어 갈수록 내 자신이 불만스럽게 느껴지네그려. 오늘은 유독 내가 지금까지 겪어 온 여러 가지 사건 중에서 실로 그 불만의 실마리가 되는 일이 생각나서 아주 괴로워했다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 전에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일이라네. 사실 나는 평소에 어느 누구와의 약속도 잘 지켜온 셈이지. 이러한 내 성미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한 번은 내가 누구하고 굳게 맹세하고서도 그것을 지키지 않은 일이 있는데 그것이 오늘 따라 실제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물론 내 편견일 테지만- 중요한 일로 떠오르지 뭔가. 자네도 그런 경험이 있을 테지만, 잠결에 문이나 창을 잠그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거나 낮에 꼭 써야 할 편지 답장을 쓰지 않은 것을 깨닫고 일어나는 꺼림칙함이란 사실 여간 성가신 게 아니잖나. 이처럼 그 약속이 자주 나를 괴롭혀 왔는데 오늘은 특히 그것이 더욱 심해졌다 말일세."

그들은 잠시 말을 멈추고 담배를 피웠다. 밀보온은 페치카 속의 불등걸을 보고 있었으나 사실은 잉글랜드 서부의 어느 고을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말이야."

그는 한참 만에 말을 이었다.

"난 그걸 깨끗이 잊어 본 적이 없다네. 그야 바쁠 때는 일에 밀려서 그 일을 생각할 틈이 없었지만 말이야. 그런데 조금 전에 얘기했지만, 오늘 같은 날 그 비슷한 사건의 재판 기사를 읽고 그 일이 너무나 역력히 떠오르지 않겠나. 그런데 그게 어떤 일이었나 하면, 얘기하면 아주 간단한 일이지. 물론 자네같이 세상물정에 밝은 사람이 이야기를 들으면 혹시 신경과민이 아니냐고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나는 스물한 살 때 웨섹스의 토온버러를 떠나 이곳 런던에 왔지. 그런데 나는 그 이전에 그곳에서 나와 동갑인 젊은 여성과 사랑하는 사이였다네. 물론 나는 결혼할 것을 굳게 약속한 터였지. 그런데 아시다시피 지금 나는 독신일세."

"뭐 흔히 있는 일이지."

의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그곳을 떠났네. 그리고 그때는 그런 관계에서 그렇게 쉽사리 빠져나온 것이 아주 잘 한 것같이 생각했지. 그런데 이 나이가 되고 보니 그 약속이 되살아나서 견딜 수가 없단 말이야. 솔직히 말해서 뭐 반드시 양심의 가책이라는 그런 뜻에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가죽을 쓴 고깃덩어리의 표본 같은 나 자신에 대한 불만이네. 이를테면 내가 내년 여름에 갚기로 하고 자네한테서 오십 파운드를 빌려 쓰고 갚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세. 그렇게 되면 나는 나 자신을 비열한 놈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 돈이 자네에게 몹시 필요했다면 더욱 말할 것도 없겠지.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그 처녀와 분명히 약속을 했다네. 그러면서 아무 거리낌 없이 그 약속을 저버렸거든. 그렇게 하는 것이 비열한 행위이기는커녕 오히려 약은 행동이기나 한 것처럼 말이야. 그 덕분에 여자는 가련한 희생자가 되었지. 그녀는 어린애까지 낳았으니 꽤 가혹한 벌을 받은 셈이지. 약간의 금전적 보조는 받았지만 나대신 아주 톡톡히 벌을 받은 셈이 아닌가. 이것이 내가 늘 생각하고 있는 마음의 고통일세. 자네는 믿지 못하겠지만 그 뒤 몇 년이 지나 모든 것이 지나가 버린 옛날이 되고 나처럼 그녀도 지금쯤은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되었을 텐데, 그 일이 아직도 때때로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한단 말이야. 아마 자넨 납득이 안 갈 테지만 말이야."

"아니, 그건 나로서도 이해가 가네. 그렇지만 그런 것은 개인적인 주관에 따라 문제의 심각성이 달라지리라고 보네. 웬만한 사람 같으면 이미 다 잊어버렸을 일이지. 이를테면 자네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가졌다면 그런 생각이 들겠나?"

"아마 안 했을 거야. 아니 안 했어. 그녀는 토온버러를 떠나 이름을 갈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그숀베리에 나타났어. 난 그 지방에 별로 가지는 않았으나 언젠가 이그숀베리를 지나간 적이 있는데, 그때 그녀가 이곳에서 음악교사라나 하여간 그런 직장을 얻어 자리를 잡고 산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어. 한 삼사 년 전인데 우연히 들은 것은 그것뿐이었어. 그 옛날 헤어진 이래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으니 지금 그녀를 만난다면 서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걸세."

"그래, 아이는 어떻게 되었나?"

의사가 물었다.

"글쎄, 요 몇 년 전만 해도 제 어머니와 함께 있다는 얘길 들었지. 그러나 지금도 꼭 살아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지. 귀엽게 생긴 계집애였지. 나이로 따지면 지금쯤은 그 애도 결혼을 했을지 모르겠군."

"그 애 어머니는 어땠나? 물론 얌전하고 훌륭한 여자였을 테지?"

", 상냥하고 의젓한 여자였지. 무엇보다도 이해심이 풍부했지. 보통 사람이 본다면 특별히 매력이 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말이야. 우리가 교제하고 있을 무렵의 그녀의 신분은 나하고는 좀 차이가 있었거든. 언젠가 말한 바도 있었지만 우리 아버진 변호사였네. 그때 그녀는 어느 악기점 집 딸이었지. 모두들 내가 그녀와 결혼하게 되면 내 신분이 떨어진다고들 했지. 아마 그래서 이런 결과가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내가 자네한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십 년이나 지난 오늘에 와서 그런 일을 보상하기엔 때가 너무 늦었다 하는 점일세. 그런 생각일랑 머리에서 떨쳐 버리게. 제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 재난으로 생각하고 말이야. 그야 지금도 그 모녀가 다 살아 있거나 어느 한쪽만이라도 살아 있다면 어떤 생활기반 같은 것은 마련해 줄 수도 있겠지. 물론 이것은 자네 마음이 내키고 또 그만한 여유가 있어야 할 테지만 말이야."

"글쎄, 내가 현재 그렇게 여유가 많은 처지는 아니지. 더군다나 어렵게 사는 친척도 있고. 어쩌면 그네들보다 내 처지가 더 어려울지도 모르지. 그리고 설령 내가 부자라 하더라고 돈으로 과거를 해결할 수는 없지 않겠나? 내가 전에 그녀에게 잘 살게 해준다는 약속을 한 것은 아니니까 말이야. 오히려 나는 우리가 앞으로 혹시 굉장한 가난뱅이가 될지도 모른다고 했었지. 내가 약속한 것은 그녀를 아내로 삼겠다고 한 것뿐이야."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그녀를 찾아내서 약속을 실행하지 그래."

의사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반 농담으로 말했다.

"아니 빈든, 물론 그건 농담이겠지만, 결혼하려는 마음은 내게 전혀 없단 말이야. 나는 단지 지금의 이 상태가 좋다고 생각하네. 타고난 성품이나 본능, 습관, 기타 모든 점으로 보아 나는 독신으로 살아갈 사나이로 태어난 것 같애. 나는 지금도 그녀를 훌륭하다고 여기고는 있지만- 그녀는 조금도 비난할 데가 없으니까- 애정 같은 것은 느끼고 있지 않아. 좋게는 여기고 있지만 흥미가 나지 않는 여자가 있는 법인데, 내 마음 속에 있는 그녀가 그런 존재란 말이야. 내가 그녀를 찾아내어 곧 결혼을 청하겠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결국 과거의 잘못을 뉘우쳐 보고 싶다는 생각일 따름이지."

"자네 정말 진심에서 하는 말은 아니겠지?"

의사는 약간 놀란 듯이 다그쳤다.

"실제로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 볼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해. 그것도 다만 지금도 말했듯이 명예를 존중하는 인간이라는 자각을 회복하기 위해서 말일세."

"일이 잘 되도록 빌겠네."

의사는 이렇게 말을 받으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오래잖아 그 의자에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걸세. 곧 현실 문제가 될지도 모르니 그땐 자네가 자신의 감정을 한 번 시험해 볼 수도 있을 테지. 하지만 자그마치 이십 년이나 가만히 있던 뒤니까, 그만두는 게 좋을 걸세."

 

2

이 의사의 충고도 밀보온의 마음속에서는 결정적인 영향을 갖지 못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진지한 심정과 도덕적인 관념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심정과 관념은 이제까지 몇 달 몇 년을 두고 그의 가슴 속에 서서히 쌓여 가서 때로는 매우 숭고한 종교적 감정에까지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은 밀보온의 행동에 직접 어떤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였다.

예의 그 가벼운 병이 오래잖아 완쾌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일시적인 충동 때문에 자기의 양심과 관계가 있는 일을 아무에게나 함부로 얘기해 버린 것이 상당히 후회가 되었다.

하지만 그때 그를 충동질한 힘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그의 마음속에 깊이 남아 있어서 마침내는 더욱더 강해져 갔다. 그 결과 예의 병세 고백을 한 날로부터 약 4개월이 지난 어느 따뜻한 봄날 아침, 밀보온은 패딩턴 역에서 서부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오랫동안 고독한 자기 자신과 맞대고 있자니, 그 저버린 약속이 자꾸만 마음에 떠올라서 드디어는 이와 같은 길을 더듬게 되었던 것이다.

좀 더 결정적인 동기를 말하자면 그 떠나기 이틀 전에 우편국 인명부를 뒤적거리다가 20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한 그녀가 아직도 이그숀베리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데 그 이름은 그녀가 고향에서 자취를 감추고 1, 2년 지나, 외국에서 돌아온 젊은 미망인과 아이라고 하며 이그숀베리에 정착한 때와 똑같은 이름이었다. 그녀의 처지는 별로 변한 것 같지 않았고, 아직도 딸과 함께 있는 모양이었다. 인명부에 의하면,

'레오노라 프랭클랜드 부인, 프랜시스 양, 음악 및 무용 교사'

밀보온 씨는 그날 오후에 이그숀베리에 도착했다. 그는 역에서 수하물을 찾기 전에 우선 그 교사들의 집을 찾아 나섰다. 그녀들의 집은 시의 중심 지대에 있었으며, 잘 닦아 놓은 놋쇠 문패에 두 이름이 분명히 적혀 있었다.

그는 그녀들의 동향을 좀 더 알아보기 전에는 대뜸 그 집으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그 맞은편의 완구점 2층의 방을 얻었다. 그 방은 프랭클랜드 가의 무용 강습이 행해지는 객실인지 거실인지와 마주 보이는 데 있었다. 여기에 방을 정한 그는 의심을 받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맞은편 집 부인에 대한 일을 묻기도 하고 또 스스로 관찰도 했다.

그가 알아낸 바에 의하면 프랭클랜드 부인은 외딸 프랜시스와 같이 살고 있으며, 인기도 있고 평판도 좋았으며 열심히 가르치는 덕분에 상당히 많은 학생들이 배우러 오며 딸이 그 어머니의 일을 거들어 주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이 도시에서 꽤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무용을 가르친다는 것이 약간 속된 것같이 여겨질지 모르지만 정말은 착실한 마음씨의 부인이며 생활을 하기 위해 알고 있는 것을 가르치는 데 불과했다. 그 대신 그녀는 자선 바자에 앞장서기도 하고, 교회 음악의 연주회를 돕기도 했으며, 기독교가 무엇인지 모를 뿐더러 그런 것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행복하기만 한 미개인들을 깨우쳐 주기 위한 구제 사업이나 자금 모집 음악회에 참가하는 등 상당한 교제와 활동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딸은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때에 교회를 장식해야 될 경우 처녀들의 선두에 서기도 하고, 어느 교회의 오르간을 켜는 일도 맡고 있었다. 그리고 워어커 목사가 6개월 간 대사원의 부창주의 역할을 충실히 그리고 열심히 해주었을 때 그 사례로 은으로 만든 그릇을 공로상으로 수여할 때 기부금을 낸 적도 있었다. 대체로 어머니나 그 딸은 이그숀베리의 상류 사회에서는 모범적인 착실한 사람들로 알려져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직업을 남에게 알리는 자연스럽고도 간단한 방법은 음악실 창문을 좀 열어두는 것이었다. 따라서 해가 떠서 질 때까지는 언제나 거기서 배우는 아이들- 12세에서 14세쯤-이 고전 음악의 소곡을 연주하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리하여 이러한 즐거움은 이 거리의 어디서든지 항상 자연스레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의 소문에 의하면 부인은 세를 받고 피아노를 빌려주거나, 악기 제작상의 대리인으로 피아노를 판매하기도 해 수입의 대부분을 얻고 있다고도 했다.

밀보온은 이상과 같은 사실을 알아내고 무척 흐뭇하게 여겼다. 참으로 상상하고 있었던 이상의 소문이었다. 그는 이와 같이 나무랄 데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두 여자가 보고 싶어졌다.

그는 얼마 되지 않아서 레오노라를 잠깐 볼 수가 있었다. 그것은 그가 이 도시에 도착한 이튿날 아침의 일인데, 그녀가 입구의 돌층계에 서서 양산을 펼치려던 참이었다. 그녀는 아주 마른 편은 아니었으나 비교적 몸집이 약해 보였다. 그리고 일찍이 젊었을 때 그가 매력을 느꼈던 그 얼굴은 지금도 여전히 선량해 보였으며, 나이가 과히 많아 보이지 않는 가운데 기품이 있고 사려 깊은 듯이 보였다. 게다가 검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은 미망인이라는 티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분명했다. 잠시 뒤에 딸이 또 나타났는데 그녀는 몸집이 좀 통통하달 뿐 어머니의 모습과 너무도 비슷했다. 그리고 그 태도에는 레오노라와 마찬가지로 엄격한 점이 있었으며 그녀의 사뿐한 걸음걸이조차도 어머니를 닮아 있었다.

밀보온은 마침내 두 사람을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튿날 레오노라에게 쪽지를 보내어 방문할 의사를 전했는데 직업관계상 낮에는 분주한 것 같으니 방문시간을 저녁때쯤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녀가 답장을 쓰기도 거북할 것을 생각하고 굳이 답장을 쓰지 않아도 되게끔 문구를 잘 꾸몄다.

그녀에게서는 아무 회답도 없었다. 물론 이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약간 기세가 꺾인 것만은 분명했다. 물론 그녀가 이쪽에서 요구하지도 않은 회답을 자청해서 일부러 보내올 이유란 사실 조금도 없는 것이란 점을 감안하면서도 말이다.

이윽고 그는 자기가 결정한 밤 8시에 길을 건너가 무표정한 하인의 안내를 받으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밀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작은 응접실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가칭 프랭클랜드라고 부르는 당사자인 부인은 2층에 있는 넓은 무용 음악실에서 그를 맞았다. 이러한 장소는 20년이란 긴 세월 동안 헤어져 있다가 만나는 장소로서는 서글플 정도로 사무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음은 새삼 두말할 여지가 없겠다.

일찍이 그가 버렸던 여자는, 도시에 살고 있는 그의 눈에도 훌륭한 몸차림으로써 눈앞에 나타났다. 그에게 다가올 때의 그녀의 태도는 엄격한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확실히 그를 만나도 그다지 기쁜 것 같지 않았다. 20년이나 버려두었다가 이제 와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안녕하세요, 밀보온 씨?"

그녀는 우연히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듯이 명랑하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아래층에는 마침 딸의 친구들이 와 있어서 여기서 뵐 수밖에 없어 안 됐습니다만."

하고 덧붙였다.

"당신의 딸 말이죠? 내 딸이기도 한......"

"? , 그야 그렇기도 하군요."

그녀는 마치 잊어버리고 있었던 사실이 금방 생각난 듯이 얼른 대꾸했다.

"그렇지만 함부로 말씀하시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어디까지나 미망인이니까요."

"알았소, 레오노라."

그는 다음 말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녀의 태도는 차갑고 쌀쌀했던 것이다. 눈물어린 원망의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에 이미 녹아 없어지고 만 듯했다. 그는 예상했던 서론은 다 집어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완전히 자유의 몸이겠죠, 레오노라. 내 말은 결론에 관한 것인데, 약속한 사람이나 또는......"

"그럼요, 완전한 자유의 몸이죠, 밀보온 씨."

그녀는 약간 놀라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가 찾아온 이유를 밝혀야겠소. 나는 지금부터 이십 년 전에 당신을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소. 지금 그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요. 내가 결론을 여태까지 지체한 데 대해서는 뭐라고 할 말이 없소만."

그녀는 이 말에 매우 놀랐다. 그러나 흥분하는 몸짓은 보이지 않았다. 어떤 편이냐 하면 약간 침울해지면서 언짢아하는 것 같았다.

"이 나이에 그런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녀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이제 와서 그런 짓을 하면 몹시 귀찮게 될 거에요. 지금 나는 수입도 상당한 편에 속해 있는 만큼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아요. 결혼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시게 되었는지, 좀 당돌하지 않아요?"

"그야 그러실 테죠."

밀보온 씨는 우물쭈물 말했다.

"그런데 분명히 말해 두지만, 이번의 경우 일시적인 충동- 연애 감정 면에서-과는 아무 관계가 없소. 레오노라, 나는 당신하고 결혼하고 싶소. 이건 간절한 내 소원이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양심에 관한 문제요. 즉 약속 이행이란 말이오. 나는 당신한테 분명히 약속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아나 버렸다는 것은 정말 미안했단 말이오. 나는 죽기 전에 이 불명예를 씻고 싶소. 그리고 우리는 옛날처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리라고 믿고 있소."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밀보온 씨의 의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어요. 그러나 제 입장도 생각해 주셔야겠어요. 나 자신이 결혼할 의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현재의 생활을 바꿔야 할 이유란 없지 않겠어요. 그렇게 되면 물론 당신의 양심에는 위로가 되실지 모르지만요, 저도 여기서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존경을 받는 지위에 있어요. 저는 이렇게 되기까지 혼자서 무척 애를 써왔어요. 그러니까 분명히 말해서 지금의 제 생활을 결혼과 맞바꿀 수는 없다 이거예요. 딸애도 오래잖아 훌륭한 남편이 될 수 있는 청년과 약혼할 단계에 있어요. 어느 모로 보나 그 애에게는 좋은 자리예요. 지금 그 사람이 아래층에 와 있어요."

"그 애는 내게 관해서 알고 있소?"

"아니, 천만에요! 아버지는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밖에는 아는 것이 없어요. 그러니 보세요, 모든 일이 잘 되어 가고 있잖아요. 저는 그것을 무너뜨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요."

그는 머리를 끄덕거렸다.

"잘 알겠소."

그는 그렇게 말하며 일어나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문간까지 갔다가 그는 되돌아왔다. 그가 말했다.

"그러나 레오노라, 나는 일부러 먼 곳에서 당신을 찾아왔소. 큰 지장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구료. 단지 옛 친구와 결혼하는 것뿐이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 않겠소? 그 애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우리가 결혼하는 것이 당연한 것 같소."

그러나 그녀는 머리를 가로저으면서 급기야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렇다면 이만 실례하겠소."

그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당분간 이그숀베리에 머물러 있을 작정이오. 다시 만나러 와도 괜찮겠소?"

", 마음대로 하세요."

그녀는 분명히 내키지 않는 태도로 말했다.

그는 뜻밖의 장애에 부딪쳐 약간 당황했지만 처음부터 이미 식어 버린 그녀의 정열을 다시 소생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그녀의 냉담한 태도를 극복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자주 찾아왔는데, 딸과의 첫 대면은 좀 괴로웠다. 하긴 그 자신도 처음에 생각하고 있었던 만큼은 딸에게 마음이 끌리지는 않았다. 그녀에 대하여 우선 따뜻한 친밀감이 우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프랜시스에게 자기 옛 친구와의 내막을 털어 놓았으나 그녀는 이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이와 같은 연유로 해서 밀보온은 오랫동안 프랭클랜드 부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베푸는 친절은 오히려 그녀를 괴롭히는 결과로밖에 나타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완고함에 놀랐으나 두 사람이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도덕상의 이유를 그가 비쳤을 때만은 그녀의 마음도 어느 정도 움직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는 성실한 인간으로서 결혼을 해야만 당연한 줄로 압니다. 그것이 곧 진실이 아니겠소?"

"나도 그쯤은 생각한 적이 있어요."

그녀는 의외로 대뜸 말을 받았다.

"처음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이론을 따진들 무얼 하겠어요. 이처럼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당신의 명예를 위해서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무언가 좀 이상하지 않으세요? 아시겠지만 우린 적당한 시기에 결혼했어야 옳았어요. 이제 와서 과오를 바로잡아 보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두 사람은 마침 창가에 서 있었다. 턱수염이 약간 난 목사복을 입은 사나이가 뜰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그들의 눈에 띄었다. 레오노라는 상기된 표정이 되었다.

밀보온이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요?"

"프랜시스의 애인이에요. 저를 어쩌나, 오늘 그 애는 집에 없는데. , 누가 그 애가 간 곳을 가르쳐 준 모양이군요. 저쪽으로 가는 걸 보니...... 아무튼 이 혼담이 잘 이루어져야 할 텐데."

"잘 안 될 까닭은 없지 않소?"

"하지만, 사실 저 분은 아직 결혼할 단계가 아니거든요. 더욱이 지금 저 분은 이곳에 있지 않아서 프랜시스는 여간해서는 그를 만나기가 힘들어요. 전에는 이곳에서 근무했지만 지금은 기차로 오십 마일 떨어진 아이벨의 존 교회에서 부목사 일을 보고 있어요. 둘 사이에는 모든 것이 이해가 되어 있나 봐요. 하지만 그분 친구 중에는 우리의 직업 때문에 결혼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나 봐요. 물론 그분 자신은 그런 반대를 문제로 삼고 있지 않지만요."

"만일 당신이 나와 결혼하게 되면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 혼인에 방해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도움이 될 거요."

"정말 그럴까요?"

"물론이지요. 우선 이 직업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는 여기서 뜻밖에도 그녀를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더욱 그 길로 돌진했다. 이 의견은 곧 딸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고 그 결과 그녀의 반대가 한풀 꺾인 것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밀보온은 이그숀베리의 하숙집을 떠나 런던에서 규칙적으로 왕래했는데, 드디어 그녀를 이겨냈다. 그녀는 별반 내키지 않는 가운데서도 결혼을 승낙하고 말았던 것이다. 두 사람은 가까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밀보온 일가는 런던에서 살기로 결정되었다. 따라서 이그숀베리의 음악 및 무용 강습소는 오랫동안 그 자리를 물려받으려고 애써 온 어느 후계자에게 팔아 버렸다.

 

3

밀보온은 전에 살던 거리는 아니지만 그곳에서 가까운 곳의 세대주가 되었고, 부인과 딸도 이사를 했다. 프랜시스의 애인도 이 새로운 환경에 만족스러움을 나타낸 것으로 전해졌다.

그로서는 아이벨에서 1백 마일이나 떨어져 있을망정 달리 볼일도 많이 있는 런던으로 와서 그녀를 만나는 것이 그녀가 기다리고 있다는 그것만으로 반대 방향으로 50마일씩이나 가는 것보다는 훨씬 편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밀보온 일가는, 작기는 하나 사람이 많이 왕래하는 거리의 어느 집을 지붕 밑까지 샅샅이 손질하여 살게 되었다. 최근까지 굴뚝 소제부의 얼굴빛과 흡사했던 그 집 정면은 그을음을 말끔히 떨고, 50년 가까이 그을음에 파묻혀 있었던 벽돌의 노랑색과 붉은색이 제 빛을 찾게 되어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가 놀라운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두 여자의 사회적 지위는 이 결혼으로 상당히 높아졌다. 그러나 런던에 처음으로 산다는 기쁨, 세계의 중심지에 서 있다는 흥분이 일단 지나가 버리자 그녀들의 생활은 조용하던 이그숀베리에서 주민의 4분의 3과 서로 인사를 나누던 때에 비교해서 너무나 무미건조함을 느꼈다. 밀보온 씨는 그의 아내에 대하여 나무라는 일이 없었다. 아니, 할 수도 없었다. 그가 이전에 저지른 짓과 오랜 세월이 지난 탓으로 그녀의 마음이 차갑고 완고하게 되어 버렸을망정 그는 자기의 뜻을 이루었다는 생각과 자기만족을 되찾았다는 생각이 언제나 아내 편에 유리하게 작용하여 모든 갈등을 곧 양보해 버리는 입장을 취했다.

런던에서 살게 된 지 약 한 달쯤 지났을 무렵에, 밀보온 일가는 와이트 섬의 해수욕장에서 1주일 지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곳에 있을 동안 퍼어시벌 코우프 씨- 프랜시스의 애인-가 그들을 방문했다. 젊은 두 사람의 정식 약혼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으나 결국엔 결혼을 하게 될 것이 기정사실화된 터였고,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절망하게 되리라는 것쯤은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그런데 프랜시스는 결코 감상가가 아니었다. 실상은 오히려 제멋대로 하는 점이 있는 성격이었다. 분명히 말한다면 이 젊은 처녀는 아버지의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킬 정도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아버지 편에서도 그녀에게 그럴 듯한 대우를 해주지 못한 과오가 있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할 계제는 못되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어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딸의 행복을 기원했으며 또 애를 쓰기도 했다.

코우프는 새로운 가장에게 정식으로 소개되고, 2, 3일 동안 섬에서 함께 생활했다. 그 마지막 날, 일행은 2시간쯤 요트를 빌어 타기로 했다. 요트가 그다지 멀리 나가지도 않았는데, 부목사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맞바람을 받으면서부터 갑자기 기분이 좋지를 않았다. 그러나 코우프가 이것을 좋아하는 눈치여서 세 사람은 얼굴을 찌푸리거나 불평하는 일 없이 꾹 참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청년도 결국은 세 사람의 눈치를 알아차리고 곧 방향을 돌리도록 일렀다. 그리고는 항구로 돌아오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여는 일 없이 서로 마주보기만 했다.

이 미묘한 경우는 피로, 불안, 공포의 대상과 마주쳤을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얼굴에 많은 영향을 주는 것으로서, 그 사람의 종족 공통의 표준에서 벗어나고 있는 점을 더욱 뚜렷하게 하며 표면적인 것에 불과한 특징을 강조하여 근본적인 특성까지 강화시키고 마는 일이 흔히 있는 법이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때에는 뜻하지 않았던 인상이 낯익은 얼굴에서 분명히 나타나는데, 특히 표정에는 파묻혀 잊혀졌던 조상들의 환영까지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 때는 눈에 익은 표정과 언동으로 말미암아 가려 있던 가족 특유의 용모가 갑자기 분명하게 나타나게 마련이다.

프랜시스는 아버지 밀보온 씨의 옆자리인 코우프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지루한 귀로에 처음에는 자연히 동정어린 상냥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이윽고 중년의 부친과 딸은 차차 얼굴이 창백해져서 프랜시스의 귀엽고 불그레한 얼굴이 푸르죽죽해지고 탐스럽던 얼굴 생김이 여느 때의 차분한 아름다움을 잃고 본래의 윤곽으로 되돌아감에 따라 차차 코우프는 이 두 사람이 편히 쉬고 있을 때에는 무엇 하나 공통된 점이 없었는데 불쾌해지면 서로 닮아지는 것을 깨달았다. 즉 기분이 좋지 않을 때의 밀보온 씨와 프랜시스는 놀랄 만큼 서로 닮아 있었던 것이다.

이 설명하기 어려운 사실에 코우프의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무거워져, 프랜시스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도 손을 잡아 주는 일도 잊어버렸다. 항구에 도착했을 때도 그는 실신한 사람처럼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윽고 일행이 집으로 돌아갈 때 그네들의 얼굴빛과 외모를 차츰 회복하게 되자 방금 닮았던 흔적은 하나씩 둘씩 사라져 버리고 밀보온 씨와 프랜시스는 다시 성()과 연령이라는 구분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치 요트놀이를 할 동안만 신비의 베일이 벗겨지고 과거의 기묘한 무언극이 언뜻 스쳐간 듯한 느낌이었다.

그날 밤, 그는 그녀에게 무심코 물었다.

"저어, 프랜시스 양. 당신의 의붓아버지는 어머니의 사촌뻘이라도 되는가요?"

"아뇨."

그녀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전혀 관계가 없어요. 단지 어머니의 옛 친구일 뿐이에요. 별안간 그건 왜 물어 보시죠?"

그는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 이튿날 아침에 아이벨로 떠났다.

코우프는 성실한 청년이었고, 게다가 퍽 예민했다. 그는 아이벨의 성 피터 가의 조용한 자기 방에 들어앉아 요트놀이를 할 때의 발견을 생각하고 오랫동안 불쾌한 기분에 잠겨 있었다. 거기 나타난 사실이 어느 정도 분명해지자, 그는 입장이 매우 거북함을 느꼈다.

그가 처음 프랭클랜드 일가를 만난 것은 이그숀베리의 교구민으로서였는데, 그뒤 프랜시스가 마음에 들어 마침내는 약혼의 단계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정식 약혼이 아직 지지부진 상태에 있는 것은 그가 아직 결혼할 계제가 못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프랭클랜드 일가의 과거에는 아무래도 무슨 비밀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러한 비밀이 있는 집안에 장가를 든다는 것이 상서롭지 못한 것이 아닌가고 코우프는 생각했다. 그는 앉아서 한숨을 쉬었다. 한편으로는 프랜시스를 잃고 싶지 않은 욕망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 내력이 결코 떳떳하다고 볼 수 없는 집안사람들과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마음이 내키지 않음과의 사이에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사실 정열적인 연인 사이라면 이러한 의혹을 두고 그처럼 마음 아파하고 괴로워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코우프는 교회의 일을 보는 한 인간으로서 애정 면에서는 누구 못지않게 보수적이고 고지식한 편이었다. 그의 생각에는 프랜시스에게는 세기말적인 퇴폐의 불순한 요소가 뒤섞여 적당히 조절되어 있는 것같이 보였다.

그는 이러한 의혹에 사로잡혀 고민하고 있는 동안에는 역시 그녀에 대한 정열이 솟아나지 않았다. 따라서 한동안 프랜시스에게 보내는 편지도 자연히 늦어지는 것이었다.

한편, 밀보온 일가는 런던으로 돌아왔다. 프랜시스는 자신도 모르게 불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코우프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끝에 그가 어머니와 의붓아버지가 어느 모로나 사촌간이라는 혈연관계를 갖고 있지 않느냐고 이상한 질문을 하더라고 말했다. 밀보온 부인은 놀라며 딸에게 다시 한 번 말해 보라고 일렀다. 프랜시스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이 말이 어머니에게 어떤 반응을 주는지 알아보려는 듯한 눈초리로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이가 그런 걸 물어 보았다고 해서 엄마가 놀랄 일은 아니잖아요. 그것과 그이가 저한테 편지를 하지 않는 것과는 무슨 관계라도 있나요?"

프랜시스의 질문에 밀보온 부인은 가슴이 섬뜩했다. 그러나 그녀는 당황하기만 할 뿐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프랜시스도 이상한 의혹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날 밤, 프랜시스는 우연히 양친이 거처하는 방 밖을 지나다가 안에서 격렬히 다투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불화의 씨가 마침내 밀보온 일가의 머리 위에 떨어진 것이다.

방안의 광경을 말해 보면, 밀보온 부인은 화장대 앞에 서서 그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편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으며, 남편은 거기 앉은 채 땅바닥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당신은 무엇 때문에 내 생활을 두 번씩이나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는 거예요?"

그녀는 날카롭게 쏘아 붙였다.

"양심이 어쩌니 하고 귀찮게 달라붙어서...... 귀찮아 견딜 수 없으니까 결국 응낙 했잖아요! 프랜시스와 나는 남부럽잖게 잘 꾸려 왔어요. 내 평생 단 하나의 소원은 프랜시스가 그 훌륭한 청년 코우프 씨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단 말예요. 그런데 이젠 다 틀려 버렸잖아요. 당신의 그 심술궂음 때문이란 말예요. 당신은 왜 내 세계에 불쑥 나타나 간신히 쌓아 올린 내 체면을 엉망진창으로 뭉개 버리는 거죠? 남들은 상상도 못할 기나긴 세월에 걸쳐 애써 얻은 건데......"

그녀는 테이블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렸고 밀보온은 끝내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프랜시스는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식사 때 그녀는 어머니한테 코우프 씨의 편지가 오지 않아 궁금해서 견딜 수 없다는 말 끝에 코우프 씨가 병이 났는지도 모르니 아이벨에 다녀 올 것을 간청했다.

밀보온 부인은 아이벨에 갔다가 그 날 중으로 돌아왔다. 프랜시스는 걱정이 되어 수척한 얼굴로 역까지 마중을 나갔다.

만사 잘 되었을까? 그러나 밀보온 부인은 일이 잘 되었다고 딸에게 기쁜 얼굴로 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녀가 이번 행차에서 더욱 분명히 깨달은 것은 떨어져 나가려는 사나이를 뒤쫓는 것처럼 큰 잘못도 없다는 점이었다.

프랜시스는 어머니와 함께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그녀의 애인이 떨어져 나간 이유를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밀보온 부인은 그 날 아이벨에서 코우프와 나눈 이야기의 모두를 프랜시스에게 알려 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밀보온 씨가 자기를 찾아내어 결국 결혼하게 된 것이 딸과 애인 사이가 멀어지게 된 근본 원인이라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왜 엄마를 다시 찾게 되었고, 또 엄만 왜 그 사람과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슬픔에 잠긴 딸이 어머니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윽고 그녀의 예민한 머리속에서 여러 가지 사실이 하나하나 연결되어 그녀는 차차 얼굴을 붉히며 자기가 짐작한 바가 사실인가 어떤가를 되풀이해서 물었다. 어머니는 결국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프랜시스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확 붉어지더니 다음 순간 약이 올라 죽을 지경인 것 같았다. 죄의 자식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알려진 이상 코우프 씨와 같이 까다롭고 근엄한 목사가 어찌 자기와 같은 여자를 순순히 아내로 맞이할 것인가. 그녀는 숨을 쉬는 것조차 거북하여 두 손으로 얼굴을 꼭 감싸며 허리를 굽혔다.

처음에는 둘 다 밀보온 씨 앞에서 용케 괴로움을 참고 견뎠다. 그러나 차차 감정이 끓어오르는데다가 저녁 식사 후에 그가 의자에서 졸고 있을 때 드디어 신경질은 폭발하고 말았다. 프랜시스도 약이 오른 나머지 어머니와 한패가 되어 그녀의 결혼약속을 무참히 깨어버린 결과를 몰고 온 폭풍의 사나이를 공박하기 시작했다.

"어머닌 어째서 그렇게도 약했어요. 이런 적을 집안에 들여놓을 생각을 했다니 너무 어이가 없어요. 어머니에게 귀찮은 존재임은 뻔한 사실이 아니에요. 더구나 그렇게 오랜 연후에 남편으로 삼다니! 내게 사실을 알려 주었더라면 좀 더 좋은 생각을 알려드릴 수도 있었잖아요. 물론 나로선 이분을 이처럼 나쁘게 말할 권리는 없겠지만, 그러나 참을 수가 없잖아요. 이 사람은 내 일생을 엉망진창으로 망쳐 놓은 거예요."

"프랜시스, 나 역시 무던히 버틴 것만은 사실이야. 나한테 그처럼 지긋지긋하게 했던 사내와 마주 얘기를 주고받는 것조차도 잘못이라는 걸 내가 왜 몰랐겠니. 하지만 이 사람이 내 말을 통 들어먹질 않았단다. 자기와 내 양심을 앞세우면서 하도 고집을 부리기에 나도 종내엔 그만 머리가 돌아 버려 응낙을 했지 뭐니. 정말이지 얼마나 허튼 수작이냐 말야. 아 그땐 얼마나 좋았니. 거긴 그래도 우리 나름의 사교계가 있었잖았니. 그것도 우리와 동등한 사람들뿐이니까 이쪽에서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았고 또 그들도 우리에게 무리한 것은 요구하지도 않았어. 그런데 여기는 어떠냐 말이야. 많은 것이 있으면서도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느냐. 이 사람은 말했지, 런던에서의 사교는 화려하고 멋지고 별세계 같다고 말야.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 그러나 우리들처럼 단 둘인 고독한 여자들에게는 어떠냐. 그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갈 뿐이지 뭐냐. 그러니 우리들이야 그들이 야단스레 떠드는 모습을 옆에서 구경이야 할 뿐이지 뭐냐. , 바보였어. 내가 바보였어!"

밀보온 씨는 완전히 잠들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두 여자의 저주와도 같은 비난이나 그와 비슷비슷한 갖가지 말을 다 듣고 있었다. 그는 이제 집에서도 마음이 편치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레오노라와 결혼한 이래 별로 얼굴을 나타내지 않던 클럽에 다시금 매일같이 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클럽에 나간다고 하여 가정에서의 어두운 그림자가 그의 머리속에서 사라질 리는 없었다. 그는 전과 같이 자기가 있는 곳에 자기 세계의 중심이 따라다닌다는 독신자의 감정에 편히 잠겨 안락의자에 파묻혀 석간을 손에 들고 있을 수 있는 여유도 없었다. 이제 그의 세계란 두 개의 중심을 가진 타원형이 되어 버렸으며, 자기의 중심은 그 두 개 가운데에서도 작은 쪽에 불과했다.

아이벨의 젊은 목사는 여전히 멀찌감치 서서 프랜시스를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분명히 그는 일이 되어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밀보온은 아내와 딸의 비난에 거의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견뎌냈다. 그는 무슨 새로운 생각에 깊이 잠겨 있는 것같이 보였다. 그는 그들 모녀가 자기 때문에 생활을 망쳐 버렸다는 말에 충격을 받고 어느 날 그들에게 조용히 다시 시골로 돌아가자고 제의했다. 반드시 이그숀베리가 아니더라도 그들만 찬성한다면 코우프 씨가 있는 아이벨에서 1마일쯤 떨어진 조그마한 옛 저택을 빌려주겠다는 사람이 있으니 그리로 가도 좋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적이 놀랐다. 그리고 그를 언제나 재앙을 일으키는 장본인으로 간주하기는 했지만, 그 제의에 동의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밀보온 부인이 말했다.

"언젠가는 코우프 씨가 당신의 과거를 분명히 물어 볼 것이고, 당신은 그에게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될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내가 프랜시스에게 걸고 있던 모든 희망은 사라질 게 아니겠어요? 그 앤 확실히 당신을 많이 닮았어요. 특히 기분이 언짢았을 때의 경우를 보면 두 사람의 얼굴이 그렇게 닮아 보일 수가 없어요. 이 일을 장차 어떻게 하죠?"

"둘이 함께 있는 것을 보지는 못할 거요."

그는 이렇게 말했고, 아내가 그렇지도 않을 거라고 우겼을 때, 그는 이미 아내를 상대도 하지 않았다.

결국 이사를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일꾼과 하인들이 짐마차로 가재도구를 운반해 갔다. 그동안 밀보온 부인과 그의 딸은 호텔에 머물렀고 그는 새 집을 수리하는 일을 감독하기 위해 아이벨을 두세 번 갔다 왔다 했다. 일이 다 끝났을 때 그는 런던의 두 사람에게로 왔다.

집의 수리가 끝났으니, 이젠 거기 가기만 하면 된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는 두 사람의 짐을 가지고 역까지 나갔다. 이번에 함께 가지 않느냐고 밀보온 부인이 말했을 때, 그는 변호사와의 일이 있어서 잠시 런던에 남아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대답했다.

"우리 단 둘만이 거기 산다면 얼마나 좋겠니."

기차 속에서 밀보온 부인이 말했다.

"비밀을 매달고 다니는 저 쓸데없는 작자가 두 번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더욱 좋겠다."

새로 이사 온 집은 느릅나무 숲속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아담하고 조그마했다. 이 집은 두 여자의 마음에 꼭 들었다. 새로 이사 온 그들을 맨 처음 찾아온 사람은 코우프였다. 그는 두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살게 된 것이 기쁘다고 말하고, 다시(입에 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만이 이렇게 훌륭한 생활을 하려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했으나, 전과 같이 애인다운 태도는 억제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네 아버지가 모든 걸 다 망쳐 버린 거야."

밀보온 부인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로부터 2, 3일 뒤, 그녀는 남편이 보내온 편지를 받고 적이 놀랐다. 그 편지는 블로뉴에서 부친 것이었다.

편지는 두 사람이 출발한 이래 그가 진행했던 재산 상속에 관한 내용부터 설명되고 있었다. 그 주요 골자는 밀보온 부인이 상당한 액수의 동산을 소유하게 되고 프랜시스는 더 많은 액수의 이자를 한평생 받되, 그 원금은 그녀의 자식들에게 분배되도록 되어 있었다. 편지의 나머지 부분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어떤 의무를 태만으로 인하여 일단 시기를 놓친 다음에 그것을 이행하더라도 완전 보상이 되지 못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잘못은 단지 과거 속에만 묻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이식 능력이 있는 식물처럼 퍼지고 뿌리를 내려 가지를 치거나 줄기를 잘라낸다고 하여도 그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을 다시 찾아낸 것은 나의 잘못임을 분명히 인정합니다. 이를 시정할 수 있는 방법은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이 결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의 방법은 또다시 우리가 만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당신 역시 새삼스레 나를 찾을 생각은 마십시오. 또 결코 찾아내지도 못할 것입니다. 당신이 불편하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정성을 다 해두었습니다. 다시 만난다는 것은 서로를 위해 아무 이익도 없음을 거듭 강조하면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 F. M

 

결국 그날 이후 밀보온은 런던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잘 찾아보았다면 밀보온 모녀가 아이벨로 이사한 지 얼마 안 될 무렵에 한 영국인이 브뤼셀에 정착한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는 밀보온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밀보온 부인이 보았다면 그가 누구였는가를 당장에 알았으리라.

이듬해 여름 어느 날 오후에 이 신사는 영국 신문을 뒤적거리다가 프랭클랜드 양과 코우프 목사의 결혼 광고를 우연히 발견했다.

"오오, 잘 되었군."

신사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의 일시적인 만족은 행복과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 전에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괴로워했지만 이번에는 안티고네와 똑같은 고민을 짊어지게 된 것이었다. 즉 명예를 중히 여겨 형식에 의한 의무를 수행한 덕택에 도리어 주책없다는 불명예스러운 보답만을 받고 만 것이었다.

때때로 그는 자기의 단골 클럽에 나가 약간 지나칠 만큼 술을 마셨다. 그리고는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하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숙소로 돌아오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선량한 사람이었으며 술을 마시고 있을 경우에라도 좀체 지껄이는 일이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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