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중 대화
취중 대화
Shirly Jackson
그는 그 집안과 친분이 있었고 혼자 부엌을 찾을 수 있을 만큼 집에도 익숙했다. 하지만 얼음을 가지러 가는 척하며 부엌으로 간 건 술을 깨고 싶어서였다. 거실 소파에서 퍼질러 잘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스타더스트1)>를 불러댔고 여주인은 얇고 투명한 안경을 쓴 무뚝뚝한 젊은이에게 진지한 태도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는 주저 없이 파티장을 벗어나 식당을 조심스레 지나쳤다. 네다섯 명이 딱딱한 식당 의자에 앉아 뭔가를 토론하고 있었다. 부엌문을 밀자 벌컥 열렸다. 하얀 에나멜 칠이 된 식탁 옆에 앉아 차갑고 깨끗한 식탁의 표면에 손을 얹었다. 초록색 무늬가 멋들어지게 새겨진 곳에 술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자 여자아이가 식탁 너머에서 그를 가늠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 이 댁 따님이지?” 그는 인사를 건넸다.
“아일린이에요.” 그녀가 대꾸했다.
그가 보기에 여자애는 너무 헐렁하고 모양 없는 옷을 입고 있었다. 요즘 여자애들은 저렇게 입는가 보다 하고 막연히 짐작했다. 머리를 양쪽 귀 옆으로 땋아 늘어뜨린 여자아이는 어리고 풋풋했으며 치장은 하지 않았다. 스웨터는 자주색이었고 머리는 검은색이었다. “술을 입에도 안 댄 모양이네.” 말하는 도중에야 여자애에게 할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마시고 있었죠. 한 잔 드릴까요?”
무례한 주정뱅이라면 뻔할 뻔자니 문제없이 다룰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하는 태도에 그는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고맙구나. 커피를 마시면 딱 좋겠어.” 그는 눈의 초점을 맞추려 애쓰고 있었다. 커피는 뜨거웠다. 그녀가 앞에 잔을 놓으며 말했다. “블랙으로 드시겠죠.” 그는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 김을 얼굴과 눈에 쐬며 정신이 맑아지기를 빌었다.
“멋진 파티 같네요.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나 봐요.” 그녀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멋진 파티란다.” 커피는 데일 듯 뜨거웠다.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어지럼증이 싹 가셨던 것이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한결 낫군. 고마워.”
“다른 방은 지금 무척 더울 거예요.” 그녀가 위로하듯 말했다.
그가 껄껄 웃음을 터뜨리자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계속 말을 잇는 것으로 보아 무례를 용서한 듯했다. “2층이 어찌나 푹푹 찌는지 잠시 내려와 앉아 있어야겠다 싶었죠.”
“자고 있었니? 우리 소리에 깬 거니?”
“숙제를 하고 있었어요.”
그는 여자애를 다시 보았다. 주의를 기울여 글씨를 쓴 습자 공책과 작문 숙제, 낡은 교과서가 펼쳐져 있는 책상에서 아이들과 함께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그려졌다. “고등학생이니?”
“졸업반이죠.” 뭔가 반응을 기다리는 듯하더니 그녀가 말했다. “폐렴 때문에 일 년을 쉬어야 했어요.”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남자친구에 대해 물어? 아니면 농구에 대해?) 그래서 집 앞쪽에서 아스라이 들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척했다. 그는 모호하게 말했다. “근사한 파티야.”
“파티를 좋아하시나 보군요.”
그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빈 커피 잔만 응시했다. 스스로를 파티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여자애는 약간 놀란 듯한 어조였다. 마치 검투사와 야수가 맞서 싸우는 잔인한 시합을 찬성한다거나 혼자 정원에서 미친 사람처럼 왈츠를 춘다는 말이라도 들은 듯한 태도였다. 그는 생각했다. 나는 저 애보다 거의 두배나 나이가 많아.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숙제를 해야 했지. “농구를 하니?”
“아뇨.” 그녀가 대답했다.
그녀가 먼저 부엌에 와 있던데다 이 집의 거주인이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대화를 이어야 한다는 사실이 짜증스러웠다. “무슨 숙제를 하고 있었니?”
“세상의 미래에 대해 쓰고 있었어요.” 그녀가 빙그레 웃고는 말을 이었다. “바보 같죠? 정말 바보 같은 숙제예요.”
“파티에서 사람들이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단다. 그래서 여기로 피신 왔지.” 그녀는 그가 부엌으로 온 이유가 그 때문만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래, 세상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 것 같니?”
“미래가 그다지 밝을 것 같지는 않아요.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면 말예요.”
“현대가 얼마나 흥미진진한 시대인데.” 그는 여전히 파티장에 있는 양 말했다.
“글쎄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 그렇지 않을 수도 있죠.”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자애는 신고 있는 새들 슈즈2)의 신발 코를 멍하니 응시하며 한쪽 발을 앞뒤로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신발을 따라 움직였다. “열여섯 살짜리 여자애가 그렇게 생각하다니 정말 끔찍한 시대로구나.” 그는 조롱하듯 말을 이을까 생각했다. 내가 네 나이 무렵이었을 때 여자애들은 그저 칵테일이나 남자친구와 나누는 애무에 대해서만 생각했지.
“열일곱 살이에요. 큰 차이가 있죠.” 그녀가 고개를 들더니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네 나이 무렵이었을 때…….” 그는 지나치게 강조하며 말했다. “……여자애들은 칵테일이나 남자친구와의 애무에 대해서만 생각했지.”
“그것도 문제예요. 아저씨가 어렸을 적에 사람들이 진정으로 무언가를 두려워했다면 현재가 이렇게 형편없지는 않을 거예요.” 그녀가 진지하게 대꾸했다.
그는 의도한 것보다 더 날카로운 어조로 대답했다.(‘내가 어렸을 때라니!’) 게다가 정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관대함 때문에 아이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어른의 방식으로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고 말했다. “우리도 두려워했단다. 열여섯 살이나 열일곱 살 때의 아이들은 누구나 두려움에 떨지. 그 나이에 꼭 지나쳐 가야 하는 관문중 하나야. 남자애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이 어떻게 멸망할지 계속 상상하고 있어요.” 그녀는 그의 뒤에 있는 벽을 바라보며 사뭇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보다도 교회가 먼저 무너질 거예요. 강가의 높다란 아파트들이 안에 사람이 있는 채로 서서히 물에 잠기겠죠. 그때 학교에서는 라틴어 수업을 하느라 카이사르의 책을 읽고 있을 거예요. 끝까지 읽지도 못하겠죠. 어쩌면 우리가 라틴어 수업에서 카이사르의 책을 읽은 마지막 사람들이 될지도 몰라요.” 그녀는 묘하게 신나 보이는 기색으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카이사르 책의 새 장을 시작할 때마다, 이 장이 우리가 끝내지 못할 그 장이 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하곤 해요.”
“그건 좋은 소식이로구나. 카이사르라면 질색이었거든.” 그는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젊은이라면 누구나 카이사르를 싫어할 거예요.”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는 잠시 기다린 후 입을 열었다. “그런 음울한 상상으로 머릿속을 채우는 건 다소 어리석은 것 같구나. 영화 잡지를 하나 사서 보지 그러니.”
“영화 잡지는 뭐든 공짜로 읽을 수 있을 거예요. 지하철이 서로 충돌하겠죠. 그러면 작은 잡지 가판대가 찌그러져버리고, 누구나 균일상점에서 사탕이나 잡지나 립스틱이나 가짜 꽃을 원하는 대로 집어갈 수 있을 거예요. 거리의 대형 상점에 걸려 있는 옷도 마음껏 입을 수 있을 테고요. 모피 코트도요.” 그녀가 단호히 대꾸했다.
“주류 판매점 문이 활짝 열려 있긴 빈다. 그러면 태연히 걸어 들어가 브랜디를 상자째 들고나올 거야. 더 이상 걱정거리라고는 없겠지.” 그는 슬슬 성가신 기분이 들었다.
“사무실 건물은 산산이 무너져 돌더미가 될 거예요.” 그녀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여전히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정확히 언제 멸망할지 알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래, 어떨지 짐작이 가는구나.”
“그 후에는 세상이 완전히 달라질 거예요. 지금의 세상을 이루던 모든 것이 사라질 테니까요. 새로운 규칙과 생활 방식이 생겨날 거예요.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서 숨을 수 없도록 집안에서 살면 안 된다는 법이 생길지도 모르죠.”
“모든 열일곱 살짜리 여자애들은 학교에서 분별력을 키워야만 한다는 법이 생길지도 모르고.” 그가 일어서며 말했다.
“학교는 완전히 사라질 거예요. 더 이상 아무도 배우지 않을 거예요. 지금과 같은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죠.” 그녀는 단호히 반박했다.
“그렇구나.” 그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인걸. 내가 그런 세상을 볼 만큼 살지 못할 것 같아 안타깝구나.” 그는 걸음을 멈추고는 어깨로 식당으로 통하는 문을 밀었다. 어른다우면서도 가차 없는 비판을 늘어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가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었으며, 그가 어렸을 적에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히게 될까 봐 꺼려졌다. 결국 그는 이렇게 말했다. “라틴어 공부하다 모르는 게 있으면 말하렴. 기꺼이 도와주마.”
그녀가 피식 웃는 바람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밤마다 숙제를 하고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거실로 돌아가니 사람들이 활기차게 돌아다니고 피아노 주위의 사람들은 이제 <언덕 위의 집>이라는 민요를 부르고 있었다. 여주인은 푸른색 양복 차림의 키가 큰 품위 있는 남자와 진지한 대화에 빠져 있었다. 여자애의 아버지와 마주치자 그는 말했다. “방금 따님과 무척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집주인이 재빨리 거실로 훑어보며 말했다. “아일린요? 어디에 있죠?”
“부엌에요. 라틴어 공부를 하고 있더군요.”
“갈리아 에스트 옴니아 디비사 인 파르테스 트레스3). 그래요.” 집주인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대단히 남다른 학생 같습니다.”
집주인이 유감스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요즘 애들이란.”
1) 스타더스트 미국에서 1920년대에 작곡되어 크게 유행한 대중음악.
2) 새들 슈즈 구두끈 있는 부분만 다른 빛깔로 된 옥스포드 구두.
3) 갈리아 에스트 옴니아 디비사 인 파르테스 트레스 ‘갈리아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뜻으로, 카이사르가 쓴 ‘갈리아 전쟁기’의 첫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