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름의 끝장(endgame)
노름의 끝장(endgame)
Samuel Beckett
등장인물 : 햄, 크로브, 네그, 넬
가구가 없는 방안.
잿빛이 감도는 어두컴컴한 방안.
무대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오른쪽과 왼쪽 벽에 높다랗게 두 개의 창문이 나 있고 거기엔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오른쪽, 무대 앞 쪽으로 도어가 있고 그 도어 가까이에 뒤집어서 걸어 놓은 액자.
왼쪽, 무대 앞 쪽에 한 장의 낡은 시트로 뒤덮인, 서로 나란히 붙여놓은 쓰레기통인 드럼통 두개.
중앙에 한 장의 낡은 시트를 뒤집어쓰고 바퀴 달린 의장에 앉아 있는 햄. 의자 곁에 꼼짝도 하지 않고 크로브가 햄을 내려다보고 있다. 매우 붉은 얼굴이다. 크로브는 왼쪽 창 밑으로 간다. 뒤뚱거리며 쓰러질 듯한 걸음걸이다. 머리를 뒤로 젖혀서 왼쪽 창문을 쳐다본다. 목을 돌려서 오른쪽 창문을 바라본다. 오른쪽 창 밑으로 간다. 머리를 뒤로 젖혀서 오른쪽 창문을 쳐다본다. 밖으로 나가서 곧 발판을 가지고 되돌아오자 그것을 왼쪽 창문 밑에 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커튼을 열어젖힌다. 발판에서 내려 오른쪽 창문을 향해 여섯 걸음 걷고 발판을 가지러 되돌아오자 그것을 왼쪽 창문 밑에 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커튼을 열어젖힌다. 발판에서 내려와 왼쪽 창을 향해 세 걸음 걷고 발판을 가지러 되돌아가서 그것을 왼쪽 창 밑에 놓은 다음 위에 올라서서 바깥을 내다본다. 짧은 웃음. 발판에서 내려 오른쪽 창문을 향해 한 걸음 걷고 발판을 가지러 되돌아와서 오른쪽 창밑에 놓고 위에 올라서서 창밖을 내다본다. 짧은 웃음. 발판에서 내려 드럼통 쪽으로 가서 발판을 가지러 되돌아오고 그것을 들어 올리자 생각을 고쳐먹고 그것을 도로 내려놓은 다음 드럼통 쪽으로 가서 뒤덮인 시트를 벗겨 정성들여 개서 한 쪽 팔에 걸친다. 한 쪽 드럼통의 뚜껑을 들어 올려 몸을 굽혀서 속을 들여다본다. 짧은 웃음. 뚜껑을 닫는다. 또 하나의 드럼통에서 같은 짓을 되풀이한다. 다음에 햄 쪽으로 가서 뒤집어쓰고 있는 시트를 벗긴 다음 정성들여 개서 한 쪽 팔에 걸친다. 실내복을 입고 펠트의 둥근 모자를 썼으며 핏자국이 묻은 커다란 손수건으로 얼굴을 덮고 목에는 호루라기 첵 무늬의 여행용 담요를 무릎에 걸치고 두꺼운 양말을 신고 햄은 잠자고 있는 듯하다. 크로브는 햄을 바라다본다. 짧은 웃음. 도어 쪽으로 가서 멈추어서 되돌아보고 무대를 바라다 본 다음 객석을 돌아다본다.
크로브 : (어떤 한 점을 응시한 채, 단조로운 목소리로) 끝, 끝이다, 끝나려고 하고 있다. 아마 끝날 것이다. (사이) 차례차례로 한 알 한 알이 모여서 어느 날 갑자기 퇴적으로 작은 퇴적으로 아무런 가치도 없는 퇴적이 된다. (사이) 이제 나를 벌할 수는 없다. (사이) 세로 3미터, 가로 3미터, 높이 3미터인 부엌으로 가자. 그 녀석이 피리를 불 때까지 테이블에 기대어 벽을 보고 있자.
크로브는 잠시 동안 그대로 서 있다. 그리하여 나가려고 한다. 곧 되돌아와서 발판을 들고 나간다. (사이) 햄이 꿈틀거린다. 손수건 아래에서 하품을 한다. 얼굴에서 손수건을 치운다. 매우 붉은 얼굴. 검은 색안경.
햄 : 어어어-(하품)-내(사이) 차례다. (손수건을 자기 앞에 펼쳐든 채) 꽤 오래 쓴 물건이다. (안경을 벗고 눈과 얼굴을 닦은 다음 다시 그것을 쓰고 손수건을 정성들여 개서 얌전히 실내옷의 가슴계에 붙은 호주머니에 집어넣는다. 가슴팍 있는 데의 끈을 늦춘 다음 두 손을 한데 모아 손가락을 서로 맞춘다) 도대체 어어(하품)-나만큼... 나만큼 가련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있었는지도 몰라. 옛날에는. 그러나 지금엔? (사이) 우리 아버지? (사이) 어머니? (사이) 나의...개? (사이) 아냐, 그들에게도 그들 나름대로의 괴로움이 있는지도 몰라.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들의 괴로움과 같은 가치가 있다고 하겠는가? 있는지도 모르지. (사이) 아니, 모든 것은, 어어어-(하품)-절대적이다. (자랑스럽게) 위대한 만큼 충실해있다. (사이. 음울하게) 그만큼 공허다. (코를 푼다) 크로브! (사이) 아니 나는 외톨박이였지. (사이) 엄청난 환상이다-그것도 복수의! 그 밀림! (사이) 이제 지긋지긋하다. 끝나도 좋을 때다, 이 숨어사는 집에서도. (사이) 그런데도 나는 주저하고 있다... 끝나게 하는 것을 주저한다. 그렇군, 확실히 그렇군, 이제 끝나도 좋을 때인데도, 나는 아직 어어어-(하품)- 끝나게 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 (하품) 아아, 피로하구나, 차라리 잠이나 자는 게 좋겠다. (호루라기를 길게 한 번 분다. 크로브가 재빨리 나온다. 그리하여 의자 곁에 멈추어 선다) 네가 오니 공기가 탁해지는구나! (사이) 준비해주게, 나는 잘 테니.
크로브 : 조금 전에 깨웠잖아.
햄 : 그래서 어떻다는 거야?
크로브 : 깨웠다. 잠자게 했다, 5분마다 할 순 없단 말이야. 나도 일이 있단 말이야.
사이
햄 : 너, 내 눈을 본 일이 없지?
크로브 : 없어.
햄 : 내가 자고 있는 동안에 안경을 벗기고 한 번 봤으면 하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단 말이야?
크로브 : 눈까풀을 쳐들고 말이야? (사이) 아니.
햄 : 언젠가 보여주지. (사이) 아무래도 거짓말 같군. (사이) 지금 몇 시나 됐지?
크로브 : 언제나 같은 시간이야.
햄 : 봤단 말이지?
크로브 : 그럼.
햄 : 그래서?
크로브 : 제로(Zero).
햄 : 비가 오지 않으면 안 될 텐데.
크로브 : 오지 않을 거야.
사이
햄 : 다른 일은 어때?
크로브 : 그저 그래.
햄 : 기분은 늘 같은 상탠가?
크로브 : (초조하게) 그저 그렇다고 했잖아.
햄 : 응, 좀 이상한 기분이다. (사이) 크로브.
크로브 : 응.
햄:이젠 지긋지긋하다고 생각되지 않아?
크로브 : 생각 하고말고! (사이) 뭐가?
햄 : 이...이런...일이 말야.
크로브 : 벌써 옛날부터 그랬어. (사이) 당신을 그렇잖았어?
햄 : (음울하게) 그럼, 앞으로도 변치 않겠군.
크로브 : 끝날는지도 몰라. (사이) 한평생, 내내 같은 물음에 같은 대답이란 말이지.
햄 : 준비해 주게. (크로브 움직이지 않는다) 시트를 가져와. (크로브 꼼짝도 하지 않는다) 크로브.
크로브 : 응.
햄 : 이제 먹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주지 않겠어.
크로브 : 그렇게 되면 둘 다 죽잖아.
햄 : 죽지 않을 정도의 것은 주지. 그러나 넌 늘 주린 배가 될 거야.
크로브 : 그렇다면 둘 다 죽지 않는다. (사이) 시트를 갖다 주지.
크로브 도어 쪽으로 간다.
햄 : 그만 둬. (크로브 멈추어 선다) 하루에 비스킷 한 개씩만 주지. (사이) 한 개 반. (사이) 무엇 때문에 나와 함께 있지?
크로브 : 왜 가지 못하게 말려?
햄 :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크로브 : 어디 다른 데가 없기 때문이다. (사이)
햄 : 그러나 너는 내게서 떠나갈 것이다.
크로브 : 노력은 하고 있어.
햄 : 내가 좋은 게 아니로군.
크로브 : 응.
햄 : 옛날에는 좋아했지.
크로브 : 옛날 말인가!
햄 : 너무 고생을 많이 시켰어. (사이) 그렇지?
크로브 : 그렇잖아.
햄 :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생시키지 않았단 말인가?
크로브 : 시켰고말고.
햄 : (흐뭇한 표정으로) 암 그렇고말고! (사이. 냉정하게) 용서해 주게. (사이. 다시 강조해서 강하게) 용서해 달라고 말하잖아.
크로브 : 듣고 있단 말이야. (사이) 출혈은 좀 어때?
햄 : 아까보단 좀 덜해. (사이) 진정제를 먹을 시간이 되잖았어?
크로브 : 아니.
사이
햄 : 네 눈은 좀 어때?
크로브 : 나빠.
햄 : 다리는.
크로브 : 나빠.
햄 : 그러나 움직일 순 있잖아?
크로브 : 응.
햄 : (격렬하게) 그렇다면 움직이란 말야! (크로브는 안 쪽 벽까지 걸어가서 이마와 두 손으로 벽에 기댄다) 어디서 있어?
크로브 : 여기.
햄 : 되돌아오란 말이야! (크로브는 의자 곁의 아까 서 있던 곳으로 돌아온다) 어디 있어?
크로브 : 여기.
햄 : 왜 나를 죽이지 않지?
크로브 : 찬장의 자물쇠를 열 줄 모르기 때문이야.
사이
햄 : 자전거 바퀴를 두 개 갖다 줘.
크로브 : 자전거 바퀴 따위가 어딨어.
햄 : 너 자전거는 어떻게 했지?
크로브 : 저전거라곤 가져본 일조차 없어.
햄 : 그럴 리가 있나.
크로브 : 그래도 자전거라도 있을 무렵, 난 그것이 갖고 싶어서 당신 발아래 엎드려서 애원했잖아. 당신은 날 내쫓고 말았지. 오늘날엔 그 따위가 있을 턱이 있어.
햄 : 그럼. 넌 심부름 땐? 나의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러 갈 땐 언제나 걸어갔단 말이야?
크로브 : 때론 말을 타고 갈 때도 있지. (한 개의 드럼통 뚜껑이 열리고 네그의 두 손이 나타나서 가장자리에 매달린다. 이어서 머리가 불쑥 올라온다. 나이트캡을 쓰고 있다. 매우 창백한 얼굴. 네그, 하품을 하며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는다) 나는 가야 돼, 할 일이 있단 말이야.
햄 : 부엌에 말인가?
크로브 : 응.
햄 : 나가면 죽는 줄 알아. (사이) 좋아, 가보란 말야. (크로브, 나간다. 사이) 무얼 꾸미기만 해 봐라.
네그 : 내 죽!
햄 : 난, 누구라구! 재수 없는 종마군!
네그 : 내 죽!
햄 : 아아! 아뭏든, 늙은이는 없어진 모양이군! 그저 먹는 것밖엔 머리에 없으니 말이야! (호루라기를 분다. 크로브가 나와서 의자 곁에 선다) 아니, 넌 가 버린 줄 알았는데.
크로브 : 아니, 아직.
네그 : 내 죽!
햄 : 죽을 주도록 해.
크로브 : 죽은 이제 없어.
햄 : (네그에게) 죽은 이제 없어. 이제 죽을 먹을 수가 없단 말이야.
네그 : 죽이 먹고 싶어!
햄 : 비스킷이나 한 개 주도록 해. (크로브 나간다) 간음의 되를 범한 자여! 손발은 좀 어때?
네그 : 가만 둬달란 말이야.
크로브, 비스킷을 한 손에 들고 나온다.
크로브 : 비스킷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크로브, 비스킷을 네그의 손에 건네준다. 네그는 그것을 받아 쥐고 쓰다듬어 보다가 냄새를 맡는다.
네그 :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뭐야, 이건?
크로브 : 늘 먹는 비스킷.
네그 : (원망스러운 표정을 그대로 짓고) 딱딱하잖아! 난 이것을 먹을 수가 없단 말야!
햄 : 처넣어 버려!
크로브, 네그를 드럼통에 밀어 넣고 뚜껑을 닫는다.
크로브 : (의자 곁으로 돌아가면서) 만약에 젊은이에게 분별이 있고 늙은이에게 능력이 있다면!
햄 : 저 위에 앉아 있어.
크로브 : 난 앉아 있을 수 없어.
햄 : 아, 그렇군. 그리고 난 서 있을 수 없고.
크로브 : 그런 셈이지.
햄 : 인간은 제가끔 분업을 하기 마련이야. (사이) 전화 온데는 없었지? (사이) 웃지 않는군 그래?
크로브 : (생각한 뒤) 특히 필요를 느낄 수가 없어.
햄 : (생각한 뒤) 나도 느낄 수가 없어, (사이) 크로브.
크로브 : 응.
햄 : 자연은 우리들을 잊고 말았구나.
크로브 : 자연 따위, 이제 없어.
햄 : 자연이 없다고! 그건 너무 극단적이야.
크로브 : 우리들 주위엔 말이야.
햄 : 그러나 우리들은 호흡하고 있지 않아! 시시각각으로 변화 하고 있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이가 빠지지 않느냐 말이다! 모든 것을 잃고 있지 않는가! 우리들의 싱싱함도! 여러 가지 이상도 말이야!
크로브 : 그럼, 아직 잊지 않고 있군.
햄 : 그러나 넌, 이제 없다구 했단 말이야.
크로브 : (슬픈 듯이)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우리들처럼 비뚤어진 생각을 하지 않을 거야.
햄 : 무엇이든 분에 맞아야 하는 거야.
크로브 : 그것이 잘못이란 말이야.
사이
햄 : 너 자신 한 사람 몫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그렇지?
크로브 : 천분의 한 사람 몫이야!
사이
햄 : 봄날은 길기도 하구나. (사이) 진정제를 먹을 시간이 되지 않았어?
크로브 : 아니. (사이) 나는 가 보겠어, 할 일이 있단 말이야.
햄 : 부엌으로 말인가?
크로브 : 응.
햄 : 할 일이란 도대체 뭔가?
크로브 : 벽을 바라보는 일이야.
햄 : 벽! 그 벽에 도대체 뭐가 보인다는 거야? 멸망을 예언한 글자란 말인가? 아니면 나체를 그려놓았단 말인가?
크로브 : 나의 빛이 사라져가는 것이.
햄 : 너의 빛이!...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러나 말이야, 너의 빛이라면 여기서도 사라져갈 것이다. 잠시 날 보란 말야, 그리고 너의 빛이란 것에 대해서도.
사이
크로브 :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잘못일 텐데.
사이
햄 : (냉정하게) 용서해 주게. (사이. 다시 강한 어조로) 용서해 달라고 말하고 있잖아.
크로브 : 듣고 있단 말이야.
사이. 네그가 갇힌 드럼통의 뚜껑이 쳐들린다. 두 손이 나타나서 가장자리에 매어 달린다. 이윽고 머리가 불쑥 올라온다. 한 쪽 손에 비스킷을 들고 두 사람의 얘기를 엿듣는다.
햄 : 네가 뿌린 씨, 싹이 텄어?
뚜껑을 닫은 다음, 몸을 일으킨다.
크로브 : (의자 곁으로 되돌아오며) 이젠 맥이 없어.
햄 : 아니, 그 점은 저 게으름뱅이 계집의 잔꾀란 말일세. 그런데, 뭘 중얼거렸어?
크로브 : 도망가랬어, 황무지로 말야.
햄 : 내가 알 바가 아니군. 그것뿐이야?
크로브 : 아아니.
햄 : 그럼, 뭐야.
크로브 :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
햄 : 밀어 넣었군?
크로브 : 응.
햄 : 둘 다 밀어 넣었군?
크로브 : 응.
햄 : 뚜껑을 못 열도록 해 두자. (크로브, 도어 쪽으로 가려고 한다) 서둘것 없어. (크로브, 나가다 만다) 화났던 것이 가라앉으니 오줌이 마려워졌어.
크로브 : 기구(카페텔-도요관)를 가져오지.
햄 : 서둘 것 없어. (크로브 멈추어 선다) 진정제를 다오.
크로브 : 아직 일러. (사이) 조금전에 각성제를 먹었잖아. 그럼 효력이 없어.
햄 : 아침엔 자극되고 밤에는 마비되고 만다. 그렇잖으면 그 반대다. (사이) 물론 죽었겠지, 그 늙다리 의사는?
크로브 : 늙은이가 아니었어.
햄 : 그러나 역시 죽었겠지?
크로브 : 물론이고말고. (사이) 물어 볼 필요도 없지 않아?
사이
햄 : 한 바퀴 돌려다오. (크로브, 의자 뒤로 돌아와서 의자를 앞으로 민다) 너무 빨라! (크로브, 의자를 민다) 세계일주를 해 보도록 하자! (크로브, 의자를 민다) 벽을 스쳐가도록 해 다오. 그리곤 한가운데로 간다. (크로브, 의자를 민다) 아까까지 한가운데에 있었지. 확실히?
크로브 : 응.
햄 : 진짜 바퀴가 달린 의자가 갖고 싶구나, 자전거 바퀴가 달린 것 말이다. (사이) 스쳐가고 있어?
크로브 : 응.
햄 : (벽을 손으로 더듬어 찾으면서) 거짓말이다! 왜, 거짓말을 하는 거야?
크로브 : (다시금 벽 곁으로 밀어 붙여서) 자, 자.
햄 : 스톱! (크로브, 안 쪽 벽 바로 곁에 의자를 멈춘다. 햄, 한 쪽 손으로 벽을 만진다. (사이)-오래된 벽이군! (사이) 저쪽 편은... 또 하나의 지옥이다. (사이. 격심하게) 좀 더 가까이! 좀 더 가까이! 꼭 붙게 하란 말이야!
크로브 : 손을 치워. (햄, 손을 움츠려 내린다. 크로브, 의자를 벽에 바싹 붙인다) 자.
햄, 벽 쪽으로 몸을 기울여 귀를 벽에 갖다 댄다.
햄 : 들려? (햄, 손가락 한 개를 굽혀서 벽을 두들긴다. 사이) 들리느냐? 벽돌에 공동이 있어? (다시 두들긴다) 이것, 모두 속이 비었군! (사이. 몸을 바로 세우고 격심하게) 이제 그만!
크로브 ; 아직 한 바퀴 돌지 못했어.
햄 : 아냐, 아까 그것으로 데려다 줘. (크로브, 의자를 이전 장소까지 밀고 가서 멈춘다) 여기가 아까 그곳이란 말야?
크로브 : 응, 여기가 그곳이야.
햄 : 확실히 한복판이지?
크로브 : 재 보지.
햄 : 대충대충 말이야!
크로브 : 그래.
햄 : 대충 한복판이겠지?
크로브 : 그런 것 같애.
햄 : 그런 것 같다니! 한복판쯤 된다고 하면 어때!
크로브 : 줄자를 가져오지.
햄 : 눈대중으로, 눈대중으로 말이야! (크로브, 표 나지 않을 정도로 의자를 움직인다) 꼭 한복판에 말이야!
크로브 : 여기야.
사이
햄 : 조금 왼쪽으로 치우친 것 같애. (크로브, 표나지 않을 정도로 의자를 움직인다. 사이)
크로브 : 아니.
햄 : 싹이 나오나 안 나오나 흙을 조금 후에 보면 어때?
크로브 : 싹은 나오지 않았어.
햄 : 아직 이른지 모르잖아.
크로브 : 싹이 나오려면 벌써 나와야 해. 싹은 절대로 나오지 않을 거야.
사이
햄 : 오히려 조금 전이 더 유쾌했는데. (사이) 그러나 하루의 마지막엔 언제나 이렇단 말이야. 그렇지, 크로브?
크로브 : 항상...
햄 : 오늘도 언제나와 같이 하루의 마지막과 같다. 그렇지, 크로브?
크로브 : 아마 그럴 거야.
사이
햄 : (고뇌에 찬 표정으로) 도대체 무엇이 일어나고 있단 말인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단 말인가?
크로브 : 무엇인가가 궤도를 지나가고 있어.
사이
햄 : 좋아, 가보도록 해. (피일체어의 등받이에 머리를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꼼짝도 하지 않는다. 크로브도 움직이지 않는다. 깊은 한숨을 쉰다. 햄, 머리를 들어올린다) 가보도록 하라고 말한 것 같은데.
크로브 : 그렇게 하려던 참이야. (도어 쪽으로 가서 멈추어 선다) 태어날 때부터 말이야.
크로브가 나간다.
햄 : 공연한 생각, 하지 말란 말이야.
햄은 의자의 등받이에 머리를 젖히고 꼼짝도 하지 않는다. 네그, 옆의 드럼통의 뚜껑을 두들긴다. 사이. 다시 세게 두들긴다. 뚜껑이 열리고 넬의 두 손이 나타나서 가장자리에 매달리며 이윽고 머리가 불쑥 올라온다. 레이스로 만든 나이트.캡. 매우 창백한 얼굴이다.
넬 : 왜 그래요, 나의 뚱뚱보? (사이) 정사라도?
네그 : 자고 있었어?
넬 : 천만에!
네그 : 키스해 줘.
넬 : 할 수가 없어요.
네그 : 해 보자.
두 개의 머리가 괴로운 듯 가까와지나 붙지 않고 떨어지고 만다.
넬 : 왜, 이런 연극을 매일매일 하게 되나요 ?
사이
네그 : 이를 하나 잃어 버렸어.
넬 : 언제 말예요?
네그 : 어제까지는 있었는데.
넬 : (슬픈 노래의 가락으로) 아아! 어제!
두 사람은 괴로운 듯이 서로 상대방 쪽으로 향한다.
네그 : 내가 보여?
넬 : 어렴풋이. 당신은?
네그 : 뭣이?
넬 : 내가 보여요?
네그 : 희미하게.
넬 : 됐어 됐어.
네그 : 그런 소리 하지 말아. (사이) 우리들의 시력은 떨어졌어.
넬 : 그래요.
사이. 두 사람 다 정면을 본다.
네그 : 내 목소리가 들려?
넬 : 네. 당신은?
네그 : 아아. (사이) 우리들의 청력은 떨어지지 않았군.
넬 : 우리들의 뭐라구요?
네그 : 우리들의 청력.
넬 : 아아. (사이) 그것뿐이에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은?
네그 : 기억하고 있겠지...
넬 : 아뇨.
네그 : 2인승의 자전거가 넘어져서 둘 다 정강이가 벗겨졌던 일을.
두 사람은 웃는다.
넬 : 아르데느에서의 일이었지요.
두 사람의 웃음소리. 약해진다.
네그 : 스단에서 떠난 직후였지. (웃음소리, 다시금 약해진다) 춥지?
넬 : 네, 굉장히. 당신은?
네그 : 굳어졌다. (사이)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넬 : 네.
네그 : 그럼 들어가렴. (넬, 움직이지 않는다) 왜 들어가지 않아?
넬 : 왜 그래요.
사이
네그 : 톱밥은 갈아주던?
넬 : 톱밥이 아니에요. (사이. 피로에 지친듯이) 좀 더 정확히 말할 수 없어요, 네그?
네그 : 그럼 모래란 말인가, 어느 것이든 대수로운 일은 아니잖아.
넬 : 대수로운 일이에요.
사이
네그 : 전에는 톱밥이었어.
넬 : 그랬어요.
네그 : 그런데 지금 모래란 말인가. (사이) 바닷가의. (상. 먼저보다 강하게) 지금에 와서는 놈이 바닷가에서 사온 모래란 말이다.
넬 : 그렇군요.
네그 : 그 녀석이 모래를 바꾸었어.
넬 : 아니.
네그 : 내 것도 그대로다. (사이) 야단을 쳐 줘야지. (사이. 비스킷을 보여주며) 조금 들지?
넬 : 필요 없어요. (사이) 뭘?
네그 : 비스킷이란 말이야. 네게 주려고 반 남겨 놓았었지. (네그, 비스킷을 바라본다. 자랑스러운 표정) 4분의 3이다. 네 몫이야. 자. (네그, 넬에게 비스킷을 내민다) 필요 없어? (사이) 어디 편치가 않아?
햄 : (지긋지긋한 표정으로) 이봐, 잠자코 있지 못하겠어,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사이) 얘기하려면 작은 소리로 하란 말야. (사이) 난들 꿈속에서라면 사랑을 할는지 알아. 숲 속으로 가서, 눈에 비치는 것은...하늘, 대지. 나는 달리고. 쫓겨서 도망가는 것이다. (사이) 자연! 내 머리 속에는 물이 떨어지고 있다. (사이) 심장이, 심장과 같은 것이, 머릿속에
사이
네그 : (작은 목소리로) 들었지? 심장이 머릿속에 말이야! (조심스럽게 낄낄댄다.)
넬 : 웃을 일이 아니란 말예요. 네그. 어째서 언제나 그런 일에 웃는 거예요?
네그 : 큰소리를 내지 말아요!
넬 : (목소리를 줄이지 않고) 불행만큼 우스운 것도 없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네그 : (분개한 어투로) 그래도!
넬 : 아니에요, 그런 거예요.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것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웃는 거예요. 웃고 말고요. 단 처음 얼마동안은 말입니다. 이렇게 한결같이 변화가 없어서야, 그렇잖아요. 몇 번이나 거듭 들은 얘기꺼리와 같이 여전히 재미있다고는 생각해도 웃지는 않게 되는 거예요. (사이) 그뿐이에요, 당신이 하고픈 말은?
네그 : 응.
넬 : 잘 생각해 보셔요. (사이) 그럼, 먼저 실례하겠어요.
네그 : 비스킷은 필요없단 말이지? (사이) 너 주려고 남겨 두었는데.
넬 : 실례하겠어요.
네그 : 그 전에 좀 긁어 주지 않겠어?
넬 : 안됩니다. (사이) 어디를?
네그 : 등을.
넬 : 안됩니다. (사이) 그 가장자리를 문지르면 되지 않아요.
네그 : 훨씬 아랜 걸. 움푹 들어간 곳이란 말이야.
넬 : 움푹 들어가다니, 어디?
네그 : 움푹 들어간 데라고 하니. (사이) 안되겠어? (사이) 어젠 거기를 긁어줘 놓고.
넬 : (슬픈 노래 가락으로) 아아! 어제!
네그 : 안되겠어? (사이) 너를 긁어줄까? 어때, (사이) 또 울고 있어?
넬 : 울어보려고 하는 참이에요.
사이
햄 : (낮은 목소리로) 혹은, 가는 정맥인지도 몰라.
사이
네그 : 뭐라구 그랬지?
넬 : 가는 정맥인지도 몰라.
네그 : 도대체 무슨 뜻이야? (사이) 무슨 뜻이 있겠어. (사이) 양복 장수의 얘기를 해 주지.
네그 : 웃으면 얼굴의 주름살이 펴지지.
넬 : 그건 조금도 우습지 않아요.
네그 : 언제나 그 얘기를 듣고 웃었잖어. (사이) 맨 처음에 애기해줬을 때 넌 죽는 줄 알았지.
넬 : 그건 코모의 호수 위에서였죠. (사이) 4월의 어느 오후. (사이) 정말 거짓말 같군요.
네그 : 뭣이?
넬 : 코모의 호수 위에서 둘이서 놀던. (사이) 4월의 어느 오후.
네그 : 우리들은 바로 그 전날 밤에 약혼을 했었지.
넬 : 약혼!
네그 : 네가 너무 웃는 바람에 배가 뒤집히고 말았지. 자칫 빠져 죽을 뻔했었지.
넬 : 그런 내가 행복했기 때문이었어요.
네그 : 아니야. 틀려, 그건 내 얘기 솜씨가 좋았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지금에도 너는 웃지 않아, 내가 애기할 때마다.
넬 : 그처럼 깊은데도 바닥까지 환히 모였지, 그렇게 뚜렷이 말예요.
네그 : 한 번 더 들어 봐. (해설자의 목소리로) 어떤 영국 사람이-(영국 사람과 같은 표정을 지은 다음 자기 얼굴의 표정으로 돌아온다)- 새해 세배 때문에 줄무늬바지가 필요해서 지나치던 양복점에서 치수를 재게 했다. (양복점 주인 목소리로) "자, 다 쟀읍니다. 사흘 후에 들러주시면 완성돼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흘 후의 일입니다. (양복점 주인 목소리로) "죄송합니다. 여드레 후에 들러주십시오. 엉덩이둘레가 잘못됐읍니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엉덩이 둘레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여드레 후. (양복점 주인 목소리로) "쏘오리, 열흘 후에 다시 들러 주십시오. 밑을 잘못 만들었읍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밑이란 매우 미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열흘 후. (양복점 주인 목소리로) "정말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보름 후에 들러 주십시오. 앞단추 다는 데가 잘못돼서." 지당한 말이었다. 앞단추 있는 데를 바느질하려면 상당한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사이. 보통 목소리로) 어설픈 얘기솜씨군. (사이. 우울한 말투로) 같은 얘기가 점점 어설퍼지는군. (사이. 해설자의 목소리로) 결국 가봉 실도 뽑지 않은 채 꽃피는 부활절이 되었으나 역시 단추 구멍을 잘못내고 말았다. (손님의 얼굴표정을 짓고 다음에 그 목소리로) "갓댐. 써어, 아니, 그야말로 형편없군! 이봐 하나님은 엿새 동안에, 그렇고말고, 이봐요, 엿새 동안에 세계를 말이요. 세계를 말이요. 말이요. 그런데 당신은 석달이나 걸려도 바지하나 만들지 못한다 말이요!" (노한 양복점 주인 목소리로) "그러나 손님, 자 이것을 좀 보셔요-(혐오를 겉들인 경멸스런 몸짓으로)-이 세계를...(사이)...그건 그렇고, 어떻습니까-(자만을 곁들인 다정스런 몸짓으로) -제 바지는요"
사이. 네그는 아무 감동도 없이 넬을 초연한 눈짓으로 응시하고 강요된 날카로운 목소리로 웃기 시작하는데 중간에서 그치고 넬 쪽으로 얼굴을 내밀고 또 다시 웃기 시작한다.
햄 : 이제 그만!
네그는 깜짝 놀라서 웃음을 그친다.
넬 : 바닥까지 환히 보였어요.
햄 : (초조한 듯이) 그만 두지 못하겠어. 도대체, 언제 끝낼 셈이야! (갑자기 미친 듯이 노해서)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네그, 드럼통 속으로 몸을 숨기고 뚜껑을 닫는다. 넬은 움직이지 않는다.) 저것들에게 무슨 얘기가 통하겠어? 그래도 아직 얘기 따위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광신적으로) 쓰레기꾼을 데리고 오면 아늬 왕국을 주겠다! (호루라기를 분다. 크로브가 나타난다) 이 쓰레기통을 들어내! 바닥에 던져 넣어 버려!
크로브, 드럼통 쪽으로 가서 멈추어 선다.
넬 : 그렇게 흰.
햄 : 뭐? 뭐라고 말하고 있어?
크로브, 몸을 굽혀서 넬의 맥을 짚어본다.
넬 : (낮은 목소리로 크로브에게) 도망가셔요.
크로브, 넬의 손목을 놓고, 넬을 드럼통속에 밀어 넣고 이번엔 조금 오른쪽으로 치우친 것 같다. (같은 동작) 거기 있지 말아줘-(즉, 의자 뒤에)-네가 무서워지는군.
크로브, 의자 곁의 아까 서 있던 곳으로 되돌아온다.
크로브 : 만약 이 녀석을 죽일 수만 있다면 만족해서 죽겠는데.
사이
햄 : 날씨는 어떤가?
크로브 : 언제나와 같다.
햄 : 육지를 보란 말이야.
크로브 : 망원경을 가져오지.
햄 : 망원경 따위 필요 없어!
크로브, 망원경을 한 쪽 손에 들고 나온다.
크로브 : 망원경을 가지고 돌아왔읍니다. (오른쪽 창문 밑으로 가서 창문을 쳐다본다) 발판이 있어야겠군.
햄 : 왜? 네 키가 오므라들기도 했담 말이야? (크로브, 망원경을 든 채 밖으로 나간다) 나는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지, 좋아하지 않고말고.
크로브, 나온다. 발판은 들고 있으나 망원경은 가지고 있지 않다.
크로브 : 발판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오른쪽 창문 밑에 발판을 놓는다. 위에 올라선다. 그러나 망원경을 갖고 오지 않은 것을 알아차린다. 발판에서 내려선다) 망원경이 필요하군.
크로브, 도어 쪽에 간다.
햄 : (격렬하게) 있잖아, 망원경은!
크로브 :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격렬하게) 있을게 뭐야, 망원경 따위가!
크로브, 나간다.
햄 : 슬픈 일이다.
크로브, 망원경을 한 쪽 손에 들고 나온다. 발판 쪽으로 걸어간다.
크로브 : 또 즐거워지는데. (발판 위에 올라서서 망원경으로 바깥을 내다본다. 망원경이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진다. 사이) 일부러 떨어뜨렸어. (발판에서 내려와 망원경을 주워서 살펴보고 객석으로 돌려댄다.) 잘 보이는군...미치광이들의 무리가. (사이) 이건 확실히 긴 안목으로 본다는 거지. (망원경을 내리고 햄 쪽을 돌아다본다) 웃지 않아?
햄 :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은 다음) 난 별로.
크로브 :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은 다음) 보이는 것은, 음...(망원경을 움직여 바라다본다) 제로...(바라다 본다)...제로...(바라다 본다)... 그리고 제로. (망원경을 내리고 햄 쪽을 되돌아본다) 어때? 안심이 돼?
햄 :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아, 모든 것은...
크로브 : 제
햄 : (심한 어투로) 누가 너한테 지껄이라고 했어! (보통 목소리로) 모든 것은...모든 것은...모든 것은, 뭐야?(심한 어투로) 모든 것은 뭐란 말야?
크로브 : 모든 것은 뭣인가? 한 마디로 줄여서 말이지? 알고 싶은 것은 그것뿐이지? 잠깐 기다려. (망원경을 들어 바깥을 내다 몬 다음 망원경을 내려서 햄 쪽을 돌아본다) 죽어서 멸망하는 것. (사이) 어때? 만족해?
햄 : 바다를 바라 봐.
크로브 : 같은 일이야.
햄 : 대해를 보는 거야!
크로브, 발에서 내려와 왼쪽 창문을 향해 몇걸음 걷고 발판을 가지러 돌아가서 왼쪽 창 밑에 그것을 놓고 위에 올라 망원경을 밖으로 향하게 하여 오랫동안을 바라본다. 그는 깜짝 놀라서 망원경을 내리고 한참 살펴본 다음 다시 밖으로 돌린다.
크로브 : 이런 건, 한 번도 보지 못했어!
햄 : (불안스러운 표정으로) 뭐야? 배의 돛인가? 부대란 말인가? 연기가 보인단 말인가?
크로브 : (여전히 바라다보면서) 운하 가운데 등대가 있다.
햄 : (안심한 듯) 뭐라구! 전부터 있던 거야.
크로브 : (여전히 바라다보면서) 운하 가운데 등대가 있다.
햄 : (안심한 듯) 뭐라구! 전부터 있던 거야.
크로브 : (여전히 바라다보면서) 그 미련인가.
햄 : 제방이겠지.
크로브 : (여전히 바라다보면서) 아아.
햄 : 그래, 그밖엔?
크로브 : (여전히 바라다보면서) 이제 아무것도 없어.
햄 : 갈매기는 없느냐?
크로브 : (여전히 바라다보면서) 갈매기크로브
햄 : 수평선은? 수평선에도 아무것도 없어?
크로브 : (망원경을 내리고 햄 쪽을 되돌아 보며 초조한 듯이) 수평선에 뭣이 있음 좋겠단 말야?
사이
햄 : 파도는, 파도의 상태는 어때?
크로브 : 파도? (망원경을 돌려서) 납이다.
햄 : 태양은?
크로브 : (여전히 바라다보면서) 허무다.
햄 : 그러나 지금 가라앉고 있겠지. 잘 찾아 봐.
크로브 : (찾아 본 다음) 보일 리가 있어?
햄 : 그럼 벌써 밤이란 말이지?
크로브 : (여전히 바라다보면서) 아니.
햄 : 그럼 뭐란 말이야?
크로브 : (여전히 바라다보면서) 잿빛이란 말이다. (망원경을 내리고 햄 쪽을 돌아보면서 더 강한 어투로) 잿빛이다! (사이, 다시금 강한 어투로) 재-애-삐-치다!
크로브, 발판에서 내려와 햄의 뒤로 다가가서 귀엣말로 속삭인다.
햄 : (깜짝 놀라서) 잿빛! 잿빛이라구?
크로브 : 엷은 검정. 우주 전면에.
햄 : 농담하지 마. (사이) 거기에 있지 말아, 네가 무서워진다.
크로브, 의자 곁의 본디 자리로 돌아온다.
크로브 : 뭣 때문에 이런 연극을 하게 될까, 매일같이?
햄 : 습관이야,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지 않아.
(사이) 어젯밤, 내 자신의 가슴속이 보였어. 큰 부스럼이 나 있었어.
크로브 : 그건, 당신 심장일 거야.
햄 : 아니야, 그건 살아있었어. (사이. 고뇌에 찬 표정으로) 크로브.
크로브 : 응.
햄 :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어?
크로브 : 뭣인가가 궤도를 지나가고 있어.
사이
햄 : 크로브!
크로브 : (초조한 듯) 왜 그래?
햄 : 이렇게 하고 있어도 우리들에게도...그...어떤...의미가 있지 않을까?
크로브 : 의미가 있다고? 우리들에게 의미가? (짧은 웃음) 아아, 이건 재미있군!
햄 : 생각해 봤는데, (사이) 만약 어떤 존재가 땅 위로 돌아왔다면, 우리들을 관찰하고 있는 동안에 여러 가지 관념을 만들어내지는 않을까? (지적 존재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음, 좋아, 이것이 뭔지 알았다. 저 패거리들이 뭣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 (크로브, 깜짝 놀라서 망원경울 놓고 아랫배를 두 손으로 긁기 시작했다. 햄, 보통 목소리로) 거기에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우리들 자신... 감동한 듯한 표정으로)... 우리들 자신...때로는...(열렬하게) 그야말로 언젠가는 이러한 것이 모두 혹은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크로브 : (괴로움에 찬 표정으로 긁으면서) 벼룩이가 있다!
햄 : 벼룩! 벼룩 따위가 아직 있어?
크로브 : (긁으면서) 그러잖으면, 이다.
햄 : (매우 불안스런 표정으로) 그러나 그것이 바탕 되어 인류가 또 태어난다고는 할 수 없지! 잡는 거야, 천지신명에게 맹세해서!
크로브 : 벼룩 잡는 약을 찾아오자.
크로브, 나간다.
햄 : 벼룩이라니! 정말 놀랐다! 무슨 놈의 일수가 이래!
크로브, 마분지로 만든 분무기를 들고 나온다.
크로브 : 돌아왔습니다. 살충제를 가지고 말입니다.
햄 : 흠뻑 뿌려주도록 해, 배가 터지도록 먹게!
크로브, 허리춤에서 와이셔츠를 끄집어내어서 바지 위쪽의 단추를 끄르고 바지와 배 사이에 공간을 만든 다음 그 구멍에 가루를 뿌려 넣는다. 몸을 앞으로 구부려서 들여다 며 기다린다. 몸부림을 친 다음 또 다시 미친듯이 가루를 뿌려 넣는다. 몸을 구부리고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크로브 : 빌어먹을!
햄 : 해치웠어?
크로브 : 그런 것 같애 (마분지의 용기를 놓고 옷을 고쳐 입는다) 그렇잖으면 교미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햄 : 교미! 숨어서 알이나 슬겠지. 그렇잖으면 숨어 있든지.
크로브 ; 뭐! 알을 슨다고? 왜 교미한다고 하지 않지?
햄 : 이봐! 놈들이 교미한다면 이쪽은 마지막이야.
사이
크로브 : 그런데 오줌은?
햄 : 지금 보고 있어.
크로브 : 아아, 그것 참 다행이야.
사이
햄 : (약동적으로) 우리 둘이서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자, 남쪽을 향해서! 바다를 건너! 너는 뗏목을 만들어다오. 해류가 우리들을 날라서 멀리 다른 포유류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줄 거야!
크로브 : 불길한 소릴 하는 게 아냐.
햄 : 나 혼자라도 나는 혼자서 떠나겠다! 곧 뗏목을 준비해 다오. 내일은 벌써 저편이다.
크로브 : (도어 쪽으로 달려가며) 곧 착수해야지.
햄 : 잠깐 기다려! (크로브, 멈추어 선다) 상어가 있을까?
크로브 : 상어? 모르겠는데. 있다고 하면 있겠지.
크로브, 도어 쪽으로 간다.
햄 : 기다려, 기다리란 말이야! (크로브, 멈추어 선다) 진정제 먹을 시간을 아직 멀었어?
크로브 : (격심한 어투로) 아직 멀었어!
햄 : 가만있으라니까! (크로브, 멈추어 선다) 네 눈은 좀 어때?
크로브 : 나빠.
햄 : 그러나 보이긴 하겠지?
크로브 : 부자유스럽진 않아.
햄 : 다리는 어때?
크로브 : 나빠.
햄 : 그러나 걸을 순 있겠지.
크로브 : 왔다갔다 서성거릴 순 있어.
햄 : 집안에서라면 말이지. (사이. 예언적으로 또한 육감적으로) 어젠가 너는 장님이 될 것이다. 나와 같이. 공허속의 깨알만한 충실이 되어서 앉아있는 영원한 암흑 속에서 나처럼 말이야. (사이) 언젠가 너는 너 자신에게 말할 것이다. 아아, 나는 지쳤다, 이제 앉아야겠군, 하고 말이야. 그리하여 너는 앉는다. 그런 다음 또 말할 것이다. 배가 고프구나, 일어나서 먹을 것이라도 만들어 와야지, 라고. 그러나 너는 일어날 수가 없어. 그리고는 말할 것이다. 앉은 것이 잘못이군, 그러나 앉은 김에 좀 더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먹을 것을 만들어 가자고. 아뭏든 간에 너는 일어날 수가 없으며 먹을 것도 장만할 수가 없단 말이야. (사이) 잠깐 벽을 바라본 후 자신에게 말할 것이다. 눈을 감고 잠시 잠이라도 자자. 그리고 나면 좀 좋아지겠지, 라고, 그리하여, 너는 감을 것이다. 네가 눈을 떴을 때는 이제 벽은 없다. (사이) 너 주위엔 무한한 공허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 해도 그것을 채울 수는 없지. 너는 초원속의 작은 돌멩이처럼 될 것이다. (사이) 그렇다, 언젠가 너에게도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겠지. 나처럼 말이야, 단지 다른 것은 너에겐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네가 누구에게도 동정을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정을 베풀 상대마저 없기 때문이다.
사이
크로브 : 그렇게 결정적인 것은 아니지. (사이 ) 거리에다 당신이 잊고 있는 게 있어.
햄 : 그래!
크로브 : 난 앉을 수가 없는 거야.
햄 : (초조하게) 그렇다면 넌 옆으로 길게 눕는 거야. 그런 게 문제가 아니야. 그렇잖으면 서 있겠지, 그것뿐이야, 지금처럼 선채로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말할 것이다. 나는 지쳤어, 멈추어 서자 그 말이다. 자세완 아무 관계가 없는 거야.
사이
크로브 : 그럼, 당신네들은 모두 내가 나가 버리는 게 좋단 말이죠?
햄 : 물론이다.
크로브 : 그럼 가겠어.
햄 : 갈 순 없을 거야.
크로브 : 그럼 가지 않겠어.
사이
햄 : 우리들을 단숨에 죽여주면 좋을텐데. (사이) 나의 급소를 찔러 주겠다고 맹세해 준다면 찬장의 자물쇠 여는 법을 가르쳐주겠는데.
크로브 : 당신 급소를 찌르지 못해.
햄 : 그럼 찌르지 않겠단 말이지.
사이
크로브 : 난 가봐야겠어. 할 일이 있기 때문에.
햄 : 네가 여기 도착했을 때의 일을 기억하겠어?
크로브 : 아아니. 너무 어렸어, 그렇게 당신이 말했잖아.
햄 : 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어?
크로브 : (싫증이 난 듯이) 또 대사구먼, (사이) 같은 것을 골 백 번이나 묻는군.
햄 : 오래된 질문이 좋은 것. (약동적으로) 앙, 오래된 질문에, 오래된 대답, 그것 밖에 더 있어! 내가 네 애비 대신이다.
크로브 : 응, (빙그르르 돌며, 주위를 돌아다본다) 이것이었지.
햄 : (자랑스럽게) 내가 없이는 (자신을 가리키는 몸짓을 한다.) 애비는 없다. 햄이 없다면 가.
사이
크로브 : 난 가겠어.
햄 : 생각해 본 일이 한 번이라도 있느냐 말이다.
크로브 : 한 번도 없어.
햄 : 여기에서 우리들은 굴속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사이) 그러나 산 너머 저편에는? 응? 만약에 아직 푸르다면 말이야? 응? (사이) 꽃의 여신! 과수의 여신! (사이. 도취해서) 곡식의 여신! (사이) 넌 그다지 멀리 가지 않아도 될지 몰라.
크로브 : 난 멀리 갈 수 없어. (사이) 가봐야겠어.
햄 : 나의 개는 완성되었나?
크로브 : 다리가 하나 모자라.
햄 : 털은 매끄럽겠지?
크로브 : 북실북실해.
햄 : 데리고 와.
크로브 : 다리가 모자라. 하나
햄 : 데리고 와! (크로브 나간다) 달리 흉계를 꾸미지마.
햄, 손수건을 꺼내서 펼치지 않은 채 얼굴을 닦고 호주머니에 집어넣는다. 크로브가 보플이 검은 빌로오드로 만든 개의 세 다리 가운데 하나를 잡아 쥐고 들어온다.
크로브 : 당신의 개다.
크로브, 개를 햄에게 넘겨준다. 햄은, 자기 무릎 위에 그것을 앉혀놓고 손으로 더듬으면서 그것을 애무한다.
햄 : 이놈은 흰 개구나?
크로브 : 아마.
햄 : 뭣이 아마야? 흰 거야. 희지 않아?
크로브 : 희지 않아.
사이
햄 : 너, 섹스를 잊고 있구나.
크로브 : (기분이 언잖은 듯이) 아직 완성된 게 아니란 말이야. 섹스는 제일 나중에 달게 돼 있어.
사이
햄 : 리본도 없잖아.
크로브 : (화를 내며) 그렇기 때문에 아까부터 완성돼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지 않아! 먼저 개를 완성한 다음에 리본을 다는 거야!
사이
햄 : 설 수 있을까?
크로브 : 글쎄.
햄 : 해 봐. (햄, 크로브에게 개를 돌려준다. 크로브, 그것을 마룻바닥에 놓는다.)
크로브 : 조금 기다려.
크로브, 웅크리고 앉아서 개를 바로 세우려고 하나 뜻대로 잘 되지 않는다. 개는 자꾸 쓰러진다.
햄 : 어떻게 됐어?
크로브 : 서 있어.
햄 : (손으로 더듬어서) 어디? 어디 있지?
크로브, 개를 세우고 붙잡고 있다.
크로브 : 여기야.
크로브, 햄의 손을 잡아 끌어 개다리 쪽으로 이끈다.
햄 : (대가리에 손을 얹어놓은 채) 나를 보고 있어?
크로브 : 응.
햄 : (거만하게) 마치, 산책이라도 가라는 듯이?
크로브 : 글쎄.
햄 : (거만하게) 그렇잖으면 먹다남은 뼈다귀라도 얻으려는 듯이? (손을 움츠려 들인다) 그대로 가만 두게, 나에게 뭣을 졸라대는 그대로 말일세.
크로브, 일어선다. 개는 또다시 쓰러진다.
크로브 : 난 가봐야겠네.
햄 : 아직 환상이 보여?
크로브 : 전처럼 똑똑하지도 않아.
햄 : 펙 노파네 집에 불이 켜졌어?
크로브 : 불이라니! 어느 집이고 불 따위 있을 리가 있어.
햄 : 그럼, 껴졌군 그래.
크로브 : 물론 꺼지고말고, 그 할멈은! 당신, 오늘 어떻게 된 게 아냐.
햄 : 나는 언제나와 같은 궤도를 지나고 있어. (사이) 파묻었어?
크로브 : 파묻다니! 누가 해준단 말이야.
햄 : 네가 말이야.
크로브 : 내가! 남을 파묻어 줄만큼 한가해 보여?
햄 : 그러나 난 묻어주겠지.
크로브 : 아아니 묻는 게 다 뭐야.
사이
햄 : 그녀도 옛날에는 아름다왔지, 마치 꽃송이처럼 말이야. 거기에다 사내들에겐 약했지.
크로브 : 우리들이라 하더라도 아름다왔지 뭐야-옛날은 말이야. 대개의 인간은 아름다운 것이야-옛날에는.
사이.
햄 : 작살을 가져다 줘.
크로브, 도어 쪽으로 가다가 멈추어 선다.
크로브 : 이것 해라, 해도 나는 그저 예 예하고 시키는 대로 하고, 결코 거절하지 않는다. 그건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
햄 : 거절하지 못하기 때문이야.
크로브 : 그러는 동안에 하지 안하게 될 거야.
햄 : 할 수 없게 되는 거야. (크로브 나간다) 아아, 그야말로 인간이란 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뭣이고 간에 설명해 주지 않으면 모르니 한심한 일이야.
크로브, 작살을 한 쪽 손에 들고 들어온다.
크로브 : 자, 작살을 가지고 왔어, 목구멍으로 밀어 넣어 보기라도 할 셈이야?
크로브, 햄에게 작살을 넘겨준다. 햄을 그것을 의지해서 의자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려고 한다.
햄 : 움직이는지 모르겠네.
크로브 : 아아니.
햄, 작살을 집어던져 버린다.
햄 : 기름 치는 것을 가져다 줘.
크로브 : 가지고 오면 어떻게 한다는 거야?
햄 : 수레에 기름을 치는 거야.
크로브 : 어제 쳤는데.
햄 : 어제! 어떤 뜻이야. 어제란 것은!
크로브 : (격심한 어투로) 불행의 토막을 말하는 거야. 나는 오로지 당신이 가르쳐 준 말만을 쓰고 있는 거야. 만약에 그것이 아무 뜻이 없는 말이라면 다른 말을 배우고 싶은 심정일세. 그렇지 않으면 제발 지껄이지 말아 줘요.
사이
햄 : 세상의 종말이 왔다고 뼈 속까지 믿고 있던 미치광이와 가까이 지내던 시절이 있었지. 그 사내는 그림쟁이였는데 말이야. 나는 그 녀석을 좋아했지. 정신 병원에 자주 만나러 갔었지. 손을 잡아 창문가에 자주 인도해 줬지. 그러고는 자, 저걸 보란 말이야! 저기에 보리 이삭이 물결치고 있는 것을! 그리고 저기 고깃배의 돛이 저렇게! 어때, 저런 아름다움은 하고 말해 줬지. (사이) 그 녀석은 나의 손을 뿌리치고 구석 쪽으로 도망가곤 했지. 그야말로 완전히 돌았던 거야. 그녀석의 눈에 비친 것은 그저 온통 재뿐이었던 것이야. (사이) 그 녀석만이 구제되었던 셈이지. (사이) 잊혀졌기 때문이지. (사이) 아무튼 이러한 증상이 적지 않은 모양이군...
크로브 : 미치광이라고? 그건 언제 일인데?
햄 : 아니, 먼 옛날 얘기야. 아마 너 따윈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거야.
크로브 : 좋은 시대였군!
사이. 햄, 둥근 모자를 벗는다.
햄 : 난, 그 녀석이 좋았었지. (사이. 모자를 도로 쓴다. 사이) 그림을 그리던 녀석이었는데.
크로브 : 무서운 일이란 얼마든지 있지.
햄 : 아아니, 이제 그 정도는 지났어. (사이) 크로브!
크로브 : 아아.
햄 : 상당히 오래 계속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아?
크로브 : 생각하고말고! (사이) 뭣이?
햄 : 이...이런...일이 말야.
크로브 : 그야, 훨씬 전부터 생각했었지. (사이)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햄 : (우울하게) 그럼, 오늘도 여전한 하루란 말이겠는데.
크로브 : 이런 생활이 계속되는 한은 말이야. (사이) 한평생 변함없는 헛소리란 말일세.
사이
햄 : 나는 너로부터 떨어질 수가 없어.
크로브 : 알고 있어. 그러나 나를 따라올 수도 없지 않어.
햄 : 네가 가버린다면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크로브 : (유쾌하게) 그야, 당신이 호루라기를 분다해도 달려오지 않으니, 그 땐 나는 가버린 거지.
사이
햄 :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크로브 : 글쎄, 아마 그럴 거야.
사이
햄 : 그러나 그저 부엌에서 죽을지도 모르잖아.
크로브 : 그렇다 하더라도 결국 같은 게 아닐까.
햄 : 음. 그러나 그저 부엌에서 죽어 나자빠진 것을 어떻게 알까?
크로브 : 그야...어느 때고 썩는 냄새가 나겠지.
햄 : 지금도 너한테서는 냄새가 나잖아. 거기에다 온통 집안엔 송장 썩는 냄새 토성이니 말이야.
크로브 : 온 세상이 말이지.
햄 : (화를 내며) 세상이야 어떻든 상관할 바가 아니잖아! (사이) 무엇이고 간에 찾아다 줘.
크로브 : 뭣?
햄 : 어떤 방법을, 방법을 발견하는 거야. (사이. 화를 내서) 발견하는 거야, 좋은 방법을 크로브
크로브 : 음, 그렇군 좋아. (마룻바닥에 눈을 떨어뜨리고 뒷짐을 진 채, 서성거리다가 멈추어 선다) 이건 한심한 일이군, 발이 아프기 시작하는데. 이러다간 생각할 수도 없게 되겠는데.
햄 : 가 버릴 수도 없게 되겠는데. (크로브, 또다시 걷기 시작한다) 뭣을 하는 거야?
크로브 : 발견하는 거야. (걷는다) 그렇지!
크로브 멈추어 선다.
햄 : 형편없는 사상가군! (사이) 그래서?
크로브 : 잠깐. (정신을 집중시킨다. 그다지 확신이 없는 듯이) 음...(사이. 아까보다는 확신을 갖고) 음. (머리를 쳐든다) 그렇다. 괘종시계를 사용하는 거야.
사이
햄 : 오늘은 피의 순환이 나쁜지도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나에겐-
크로브 : 당신이 호루라기를 분다. 내가 나타나지 않는다. 괘종시계가 운다. 그 땐 나는 가버렸다. 괘종시계가 울지 않는다. 그땐 나는 죽어 버렸다.
햄 : 괘종시계는 가는 거야? (초조한 듯) 괘종시계가 가는가 말이야?
크로브 : 아아니, 거의 쓰지 않았잖아.
햄 : (화를 내며) 그럼 너무 부려 먹지 않았으니.
크로브 : 보고 와야지. (나간다. 손수건의 행위. 무대 옆에서 괘종시계의 짧은 소리. 크로브 한 손에 괘종시계를 들고 나타난다. 크로브, 햄의 귓가에 그것을 가까이 하여 종을 울리게 한다. 두 사람은 종소리가 다 할 때까지 그것을 듣는다. 사이) 최후의 심판과 같군! 들었어?
햄 : 멍청한 것 말이야.
크로브 : 마지막 부분이 훌륭하군.
햄 : 나는 중간쯤이 좋은데. (사이) 진정제 먹을 시간이 되지 않았어.
크로브 : 아아니. (도어 쪽으로 가다가 뒤돌아본다) 너는 나가는 거야.
햄 : 내가 애기할 시간이다. 얘기가 듣고 싶어?
크로브 : 아아니.
햄 : 늙은이에게 내 얘기가 듣고 싶지 않은지 물어봐 주게.
크로브, 드럼통에 다가가서 네그가 들어 있는 쪽의 뚜껑을 들어 올리고 속을 들여다보며 몸을 굽힌다. 사이. 몸을 일으킨다.
크로브 ; 자고 있어.
햄 : 깨우는 거야.
크로브 몸을 굽힌다. 괘종시계를 울려서 네그를 깨운다. 또렷하지 않는 말. 크로브, 몸을 일으킨다.
크로브 : 당신 얘기는 듣고 싶지 않다던데.
햄 : 엿을 주지.
크로브, 몸을 굽힌다. 또렷하지 않는 말. 몸을 일으킨다.
크로브 : 설탕 과자가 먹고 싶대.
햄 : 주고말고, 설탕 과자를.
크로브, 몸을 굽힌다. 또렷하지 않는 말. 몸을 일으킨다.
크로브 : 좋아하는군. (크로브, 도어 쪽으로 간다. 네그의 두 손이 나타나고, 가장자리에 매달린다. 이윽고 머리가 불쑥 올라온다. 크로브, 도어를 열다가 뒤돌아본다) 당신은 저 세상을 믿고 있어?
햄 : 나는 언젠 저 세상에서 살고 있는 거야. (크로브, 도어 소리를 내며, 나간다) 펑하고 한 발 쏘아 줬지.
네그 : 듣고 있는 거야.
햄 : 건달 같으니라구! 뭣 때문에 날 만들었어?
네그 : 거기까지 깨닫지 못했지.
햄 : 뭣? 뭣까지 몰랐다구?
네그 : 그게 넌 줄이야. (사이) 설탕 과자를 주겠어?
햄 : 얘기를 듣는다면.
네그 : 맹세하겠어?
햄 : 응.
네그 : 뭣에다 걸고?
햄 : 명예를 걸고서 말야.
사이. 두 사람 웃는다.
네그 : 두 개 줄 테야?
햄 : 한 개다.
네그 : 내게 한 개와, 또 하나-
햄 : 한 개다! 시끄럽다! (사이) 어디까지 얘기했던가. (사이. 우울하게) 파괴되고 말았다. 우리들은 파괴되고 말았다. (사이) 숫구멍 때부터 머릿속에 물이 가득 차 있다. (네그, 크게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고 있다) 그것이 언제나 같은 장소에서 찌그러지고 만다. (사이) 가는 정맥인지도 몰라(사이) 그렇잖으면 가는 동맥인지. (사이. 조금 기운을 차리고) 그럼, 시간이다.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사이. 해설자의 말투로) 사나이는 천천히 기어서 다가왔다. 그 창백한 안색과 앙상한 체구는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사나이는 당장에라도 - (사이. 보통 말투로) 아니 이건 얘기 했는 거야. (사이. 해설자의 말투로) 오랜 침묵이 들려왔다. (보통 말투로) 참 좋군, 이건. (해설자의 말투로) 나는 조용히 파이프에 담배를 담고 있었다-해포석으로 된 파이프에. 그리하여, 그렇군...성냥불이라 해 두자. 그 성냥불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 두서너 모금 빨았다. 푸웃! (사이) 그런데, 그 날은 지금도 기억할 수 있으나 몹시 추운 날이었다. 한난계는 영도. 그러나 그 날은 크리스마스 전야였기 때문에 조금도...놀랄 것은 없었다. 흔히 있음직한 계절에 맞는 날씨였다. (사이) 그래, 도대체 어떤 바람이 불었기에 이렇게 찾아온 거야? 사나이는 나를 향해 눈물과 때로 얼룩진 시꺼먼 얼굴을 돌렸다. (사이. 보통 말투로) 잘 돼 가겠는데. (해설자의 말투로) 제발 저를 보지 말아 주십시오! 보지 말아 주십시요! 사나이의 눈길을 떨어뜨리고 입속으로 중얼중얼 말했다. 아마 사과의 말을 했겠지. (사이) 나는 알다시피 크리스마스 준비 때문에 매우 바쁜 몸인데, 도대체 뭣 때문에 이렇게 찾아온 거요? (사이) 그 날은 지금도 기억하고 잇는데 매우 맑은 날씨였지. 태양은 50도, 그러나 그 태양은 이미 서산을 넘어가려고 하고 있었다...죽은 이의 나라로. (보통 말투로) 참 좋군, 이 대목은. (해설자의 말투로) 자, 얼른 부탁할 일이란 것을 말하시요. 나는 이밖에도 할 일이 수두룩한 몸이니. (보통 말투로) 이건, 그야말로 프랑스적이다! 그러자, (해설자의 말투로) 거기에서 사나이는 결심한 듯, 저의 어린 자식이라니, 이건 귀찮게 돼 가는데 사내자식이 말입니다라고, 마치 성별이 중요한 것처럼, 말했다. 그 사내가 어디서 왔느냐구? 사내는 자기가 사는 곳을 나에게 말했다. 말을 타고와도 온전히 한나절이나 걸린다라고. 설마, 거기에 아직 사람이 살고 있다고는 할 수 없겠지! 아닙니다. 저와 자식 놈뿐입니다. 그 사내애가 사실상 있다고 치고 말이야. 좋아, 코우의 상태는 조사했지, 해협 저편 쪽을 말이야. 고양이 새끼 한 마리 없는. 좋아, 그런데 당신은 어린 아들을 그곳에 혼자 있게 내버려두고 왔다고 말하는 거요, 그것도 살아 있는 채? 응, 정말이요! (사이) 그 날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데, 몹시 바람이 불었지, 풍속계는 백, 바람은 마른 소나무를 뿌리째 멀리까지...날려 보내고 있었다. (보통 말투로) 조금 약한데, 이건. (해설자의 말투로) 글쎄, 잘 알겠는데, 결국 나에게 어떻게 해달라는 거요, 나는 전나무에 불도 켜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요. (사이) 결국, 나는 그 사나이가 어린 자식을 위해서 방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빵이다! 매번 당하는 일이지만, 그는 거지에 지나지 않았다. 빵이라구? 그러나 우리 집엔 빵이 없는 걸, 소화가 잘 안돼서 말이야. 그럼, 보리를? (사이. 보통 말투로) 잘 돼 가는데. (해설자의 말투로) 확실히 보리라면 고방에 쌓여 있지. 그러나 좀 생각해보란 말이요. 내가 당신네들한테 보리를 1킬로 혹은 1킬로 반만을 준다고 하자. 당신은 그것을 어린 자식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지고 가서-아직 살아있다면 말이야-맛있고 영양이 있는 죽을(네그, 반응을 일으킨다) 한 그릇, 혹은 한 그릇 반을 만들어 준다. 좋아, 어린 것은 곧 안색이 좋아진다-그럴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것으로 어떻게 된다는 거야? (사이) 나는 분개하고 있었지. 잘 생각해 봐요. 당신은 땅 위에 있는 거란 말이야! 구제할 방도가 없는 거란 말이야! (사이) 그날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지만 매우 건조한 날이었지. 습도계는 제로, 나의 류머티스에는 꿈같은 날이었지. (사이. 흥분해서) 대략적으로 당신의 희망이란 것은 뭣이란 말이요? 지구가 봄으로 다시 바뀌어 만들어지는 것이야? 바다나 강에 물고기가 가득 차게 되는 거야? 하늘에서 또 감로의 비가 오는 거요, 당신과 같은 얼간이들을 적시려고? (사이) 조금씩 나의 기분은 가라앉아 갔다. 그리하여 그 사나이에게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쯤 걸리게 됐는가를 묻게 되었다. 꼬박 사흘. 두고 온 어린 것의 상태는 어땠는가. 깊은 자에 빠져있었다. (강조하는 말투로) 그런데, 어떤 잠인가? 도대체 어떤 잠이란 말인가? (사이) 그래서 결국 나는 그 사나이한테 내 밑에서 일할 것을 제안했다. 내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거기에다, 나는 앞이 그다지 길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웃는다. 사이) 어때? (사이) 어떻게 생각해? (사이) 여기라면 당신도 노력 여하에 따라서 깨끗하게 죽을 수가 있지, 발바닥이 젖지 않고 말이야. (사이) 어때? (사이) 이윽고 사나이는 어린 것이-아직 살아만 있다면-함께 둬 두겠느냐구 묻게 이르렀지. (사이) 내가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이 순간이었다. (사이) 내가 어린 것을 떠맡는 것에 동의 안하나. (사이) 지금도 그 사나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꿇어앉아서 두 손을 땅에 짚고 미친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나의 기분을 알려 줬는데도. (사이. 보통 말투로) 오늘은 이것으로 그만. (사이) 이 얘기는 이제 그다지 오래 가지 않아도 돼. (사이) 다른 인물을 등장시킨다면 또 문제는 달라지겠지만 말이야. (사이) 그러나 그것을 어디서 찾지? (사이) 어디서 발견하느냐 말이다? (사이. 호루라기를 분다. 크로브, 나타난다) 하느님께 기도하자.
네그 : 설탕과자는?
크로브 : 부엌에 쥐가 한 마리 있군.
햄 : 쥐! 쥐 따위가 아직 있어?
크로브 : 반쯤 죽여 놨지. 당신이 그걸 방해한 거야.
햄 : 도망가지 않을까?
크로브 : 급소를 찌르는 것은 나중을 미루고 하느님께 기도하자.
크로브 : 또 한단 말이야?
네그 : 설탕 과자!
햄 : 하느님이 먼저다! (사이) 괜찮겠어. 모두들?
크로브 : (체념하고) 좋아요.
햄 : (네그에게) 넌?
네그 :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채 재빠른 말투로) 하늘에 계신 우리...
햄 : 시끄러워! 잠자코 속으로 비는 거야! 조금은 예외란 것을 생각하란 말이야! 자, 시작하자, (기도하는 모습. 침묵 제일먼저 그만두고) 어때?
크로브 : (눈을 뜨면서) 어리석은 짓이야! 당신은?
햄 : 안되겠는데! (네그에게) 넌?
네그 : 기다려. (사이, 눈을 뜨면서) 안되겠는데!
햄 : 그야말로 변변찮단 말이야, 하느님이란 것은! 천하기 짝이 없어!
크로브 : 그리고 없잖아.
네그 : 설탕과자!
햄 : 이제 없어, 설탕과자 따윈.
사이
네그 : 무리도 아니야. 아뭏든 나는 너의 애비다. 그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상관 없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건 변명이 될 수 없어요. (사이) 이를테면, 터키 과자인 라하트.루쿰이다. 이제 그런 게 없다는 것을 모두가 다 알고 있다. 그래도 나는 그것이 세상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너의 비위를 맞춘 대가로서 내가 그것을 요구하면 너는 준다고 약속함에 틀림없이. 무엇이고 간에, 시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사이) 네가 아직 어릴 때, 밤에 무엇인가에 놀라서, 사람을 부르고 찾을 때, 누구를 찾은 줄 알아? 엄마? 천만에, 나였어. 너는 우는 대로 내버려 두었었지. 결국에 가서는 안면방해라고 하여, 다른 방으로 내쫓겼댔지. (사이) 나는 임금님처럼 잠자고 있었다. 그것을 깨워서 너는 얘기를 들려주고 싶어 했다. 그것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진실로 내가 듣는 것을 너는 바라지도 않았다. 첫째, 나는 귀담아 듣지 않았던 것이다. (사이) 언젠가, 진실로 네가, 내가 귀담아 들어주기를 바랄 때가 온다면 좋겠는데, 내 목소리를, 사람의 목소리라는 것을 듣고 싶다고 생각하는 날이 말이다. (사이) 그렇다. 나는 그날까지 살아 있고 싶다고 생각한다. 네가 아직 어려서, 밤에 뭣엔가에 놀라, 나만을 단 하나의 희망으로 여기고 있던 때와 같이 나를 부르는 것을 듣고 싶어서 말이다. (사이. 네그, 넬의 드럼통 뚜껑을 두들긴다) (사이) 넬!
사이. 넬, 자신의 드럼통 속으로 쑥 들어가며 뚜껑을 닫는다. 사이.
햄 : 속이 들어다 뵈는 연극도 끝이다. (손으로 개를 더듬어 찾는다) 개가
나가고 없군!
크로브 : 진짜 개가 아니니까 나갈 수가 없잖아.
햄 : (손으로 더듬으면서) 없잖아.
크로브 : 누워 있어서 그래.
햄 : 이리 다오. (크로브, 개를 주워서 햄에게 건네준다. 햄, 양팔로 그것을 껴안는다. 사이. 햄. 개를 팽개친다) 부정하다! (크로브, 마루바닥에 있는 물건을 줍기 시작한다) 뭣을 하고 있지?
크로브 : 정돈이다. (몸을 일으킨다. 열띤 말투로) 뭣이고 간에, 귀찮은 것은 버려야겠다!
크로브, 또다시 줍기 시작한다.
햄 : 정돈이라구!
크로브 : (몸을 일으키면서) 난 정돈하는 게 제일 좋아. 내 꿈은 말이지, 뭣이고 간에 정적 속에 묻혀서 움직이지 않고 제가끔 최후의 장소에서 최후의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과 같은 세계란 말이야.
크로브, 다시 줍기 시작한다.
햄 : (애가 쓰여) 뭣을 해치우려고 하는 거야?
크로브 : (몸을 일으키면서, 온화하게) 약간 정돈하려는 것 분일세.
햄 : 내버려 둬.
크로브, 주운 것을 집어 던진다.
크로브 : 그냥 깔아 놓아도 별 차이가 없군.
햄 : (초조한 말투로) 어떻게 된 거야, 너의 발은?
크로브 : 발?
햄 : 마치 용기병의 크로브 연대와 같군.
크로브 : 편상화를 신었기 때문이야.
햄 : 슬리퍼론 아파서?
사이
크로브 : 나가 보겠어.
햄 : 안 돼!
크로브 : 있어 봐야 무슨 소용이 있어?
햄 : 나의 대사 상대가 되는 거야. (사이) 얘기를 많이 진척시켰지. (사이) 상당히 앞으로 끌고 갔지. (사이) 어디까지 했더라. 듣겠어?
크로브 : 아아, 그러고 보니, 당신 얘기는?
햄 : (매우 놀라서) 얘기라니, 무슨 얘기야?
크로브 : 당신이 훨씬 전부터 자기 자신에게 얘기하고 있는 얘기 말이야.
햄 : 아아, 내 소설을 말이지?
크로브 : 그래그래.
사이
햄 : (화를 내며) 좀더 당돌하게 묻는 거야, 당돌하게 말이야!
크로브 : 꽤 얘기가 진척된 것으로 여기는데.
햄 : (근엄한 표정으로) 아아니, 대수로운 것은 아니야. (한숨) 이런 날도 흔히 있지, 능률이 오르지 않는 날이 말이야. (사이) 저절로 나오기를 기다리는 거야. (사이) 결코 무리를 해서는 안돼, 무리를 한다면 마지막이야. (사이) 그래도 얼마간 나아간 셈이지. (사이) 기술을 습득하고 있으면 말이야, 그렇지? (사이. 힘을 넣어서) 그래도 얼마간 나아갔다고 말하고 있잖아.
크로브 : (감탄해서) 하항, 그것도! 그래도 진척시켰구먼!
햄 : (근엄하게) 아아니, 대수로운 것은 아니야. 아뭏든, 온통 제로보단 낫지만.
크로브 : 제로보단 낫다고! 이건, 멋진데.
햄 : 너에게도 얘기해 주지. 사나이는 배를 깔고 엉금엉금 기어 왔다.
크로브 : 누가 말야?
햄 : 뭐라고?
크로브 : 누구야, 사나이란?
햄 : 이봐!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사나이란 말이야.
크로브 : 아아, 그 사내란 말이지! 아니, 어떻게 된 건가 하고.
햄 : 엉금엉금 기어와서, 어린 자식을 위해 빵을 구걸하러 왔다. 그 사람은 그 사나이에게 정원의 자리를 줬지. 사나이는 또, 그... (크로브, 웃는다) 어디가 우습다는 거냐?
크로브 : 정원사의 자리!
햄 : 그래서 웃었어?
크로브 :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햄 : 오히려 빵 때문이 아냐?
크로브 : 응, 그렇잖으면 어린 것이겠지.
사이
햄 : 확실히 이건, 모두가 실로 우습다. 어때, 함께 실컷 웃어 버릴까.
크로브 : (한참 생각해 본 다음) 오늘은 더 웃을 수도 없을 것 같애.
햄 : (생각에 잠겼다가) 나도 안되겠는데. (사이) 그럼, 계속하자. 사나이는 또, 그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기 전에 어린 것과 함께 있을 수 있겠는가고 물었다.
크로브 : 몇 살이야?
햄 : 응, 매우 어리지.
크로브 : 나무 따위를 딸 수 있는 나이가 되겠지.
햄 : 어지간한 장난도.
크로브 : 그런 다음, 크게 자라기도 했겠지.
햄 : 아마 그럴 거야.
사이
크로브 : 좀 더 찔러라 찔러!
햄 : 그것뿐이야. 거기에서 그친 것이야.
사이
크로브 : 그 다음에 계속되는 것은 알고 있어?
햄 : 대충은.
크로브 : 얼마 가지 않아서 끝나는 게 아닐까?
햄 : 그렇게 될 것 같아서 걱정이야.
크로브 : 괜찮아, 또 다른 걸 만들어 내면 되잖아.
햄 : 글쎄. (사이) 조금 허전한 느낌이야. (사이) 창조의 노력이 너무 길어져 버렸어. (사이) 만약에 바다까지 몸을 끌고 갈 수만 있다면 모래를 베개 삼아 만조가 되는 것을 기다리겠는데.
크로브 : 이제 조수 따윈 없어.
사이
햄 : 그 여자가 죽었는지 좀 봐 주게.
크로브, 넬의 드럼통에 다가가서 뚜껑을 쳐들고 몸을 굽힌다. (사이)
크로브 : 죽은 것 같다.
크로브, 뚜껑을 닫고 몸을 일으킨다. 햄, 모자를 벗어 쳐든다. 사이.
또다시 쓴다.
햄 : (손을 모자에 댄 채) 그럼, 네그는?
크로브, 네그의 드럼통 뚜껑을 열고, 몸을 굽힌다. 사이.
크로브 :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 같애.
크로브, 뚜껑을 닫고 몸을 일으킨다.
햄 : (모자에서 손을 떼고) 뭘 하고 있지?
크로브, 네그의 드럼통 뚜껑을 쳐올리고 몸을 굽힌다.
사이
크로브 : 울고 있다.
크로브, 뚜껑을 닫고 몸을 일으킨다.
햄 : 그럼, 아직 살아 있군. (사이)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행복한 순간이 있었어?
크로브 : 없지, 내가 알고 있는 한은 말이야.
사이
햄 : 창문 밑으로 데려다 줘. (크로브, 의자 쪽으로 걸어간다) 얼굴에 햇빛을 느끼고 싶어. (크로브, 의자를 민다) 기억하고 있어? 처음 무렵, 나를 산책시키는 것이 실로 서툴었다는 걸 말이야. 위쪽을 너무 쳐들었지. 발자국을 뗄 때마다 팽개쳐질 것 같았어! (떨리는 소리로) 그래도 참 재미있었어, 둘이서 말이야. 그야말로 재미있었어! (우울하게) 그러는 동안에 습관이 돼 버렸어 (크로브, 의자를 오른쪽 창문을 멈춘다) 벌써? (사이. 머리를 뒤로 젖힌다. 사이) 이제 밝아?
크로브 : 밤이 아니야.
햄 : (화를 내서) 밝으냐고 묻고 있잖아!
크로브 : 응.
사이
햄 : 커튼을 내리치지 않았군?
크로브 : 응.
사이
햄 : 어느 쪽 창문이야?
크로브 : 육지 쪽.
햄 : 알고 있었어! (화를 내서) 그런, 이쪽으론 햇빛이 들어오지 않잖아! 다른 쪽이란 말이야! (크로브, 의자를 왼쪽 창문 밑으로 밀고 간다) 육지라구! (크로브, 왼쪽 창문 밑에 의자를 세운다. 햄, 머리를 뒤로 젖힌다) 아아, 이것이 햇빛이다! (사이) 태양 빛 같구나. (사이) 틀려?
크로브 : 틀려.
햄 : 내가 얼굴에 느끼고 있는 것은, 햇빛이 아냐?
크로브 : 틀려?
사이
햄 : 내 안색은 창백하지? (사이. 격심한 말투로) 안색이 창백하냐고 묻고 있잖아!
크로브 : 다른 때와 변함이 없어.
(사이)
햄 : 창문을 열어다오.
크로브 : 뭘 하게?
햄 : 바닷소리가 듣고 싶다.
크로브 : 당신에게는 들리지 않아요.
햄 : 네가 창문을 열어 줘도 말인가?
크로브 : 응.
햄 : 그럼 열어도 소용이 없겠군? 크로브...응.
햄 : (격심한 말투로) 그럼 여는 거야! (크로브, 발판 위에 올라서서 창문을 연다. 사이) 열었어?
크로브 : 응
사이
햄 : 확실히 열었겠지?
크로브 : 응.
사이
햄 : 아아니...? (사이) 매우 조용한 것 같은데. (사이. 격심한 말투로) 매우 조용하냐구 묻고 있잖아!
크로브 : 응.
햄 : 이제, 선원들이 없기 때문이겠지. (사이) 갑자기 말이 적어진 것 같은데, 몸이라도 불편해?
크로브 : 춥다.
햄 : 지금 어느 달이야? (사이) 창문을 닫아다오, 돌아가겠다. (크로브, 창문을 닫고 발판에서 내려와 의자를 본래 있던 곳으로 밀고 가서 그대로 의자 뒤에 얼굴을 묻고 서 있다) 거기에 있지 말란 말이야, 네가 무서워진다. 크로브, 의자 곁의 아까 서 있던 곳으로 돌아온다) 아버지! (사이. 다시) 아버지! 들었는가 좀 가 봐다오.
크로브, 네그의 드럼통에 다가가서 뚜껑을 열고 위로 몸을 굽힌다. 또렷하지 않는 말. 몸을 일으키다.
크로브 : 들었대.
햄 : 두 번 다?
크로브, 몸을 굽힌다. 또렷하지 않는 말. 몸을 일으킨다.
크로브 : 한 번 밖에.
햄 : 처음에 거야, 나중 거야?
크로브, 몸을 굽힌다. 또렷하지 않는 말. 몸을 일으킨다.
크로브 : 모르겠다고 하는군.
햄 : 나중 것이겠지.
크로브 : 그건, 뭐라구 말할 순 없군.
크로브, 뚜껑을 닫는다.
햄 : 여전히 울고만 있어?
크로브 : 아아니.
햄 : 불쌍한 죽은 이들! (사이) 뭘 하고 있었어?
크로브 : 비스킷을 핥고 있었어.
햄 : 생명은 계속된다. (크로브, 의자 옆의 본디 자리로 돌아간다) 담요를 다오, 추워 죽겠다.
크로브 : 이제 담요 따윈 없어.
사이
햄 : 키스를 해다오. (사이) 키스하고 싶지 않으냐 말이다
크로브 : 응.
햄 : 이마에라도 좋다.
크로브 : 어디고 간에 키스 따윈 하고 싶잖아.
사이
햄 : (손을 내밀고) 그럼, 하다못해 악수라도 해 다오.
크로브 : 당신 살결에 닿고 싶지 않아.
사이
햄 : 개를 다오. (크로브 개를 찾는다.) 아냐, 좋아.
크로브 : 필요 없어, 개는?
햄 : 필요 없어.
크로브 : 그럼, 가보겠어.
햄 : (얼굴을 묻고, 건성으로) 그렇군.
크로브, 도어 쪽으로 가다가 되돌아본다.
크로브 : 내가 죽이지 않으면, 그놈의 쥐, 죽고 말겠다.
햄 : (얼굴을 파묻고, 건성으로) 그렇군. (크로브, 나간다. 사이) 내 차례다. (손수건을 꺼내 펼쳐서, 팔에 건다) 흉계를 꾸미지 마. (사이) 사람은 운다. 울어, 어떤 까닭이 있어서가 아니다. 웃지 않으려고 울겠지. 그리하여 조금씩...정말로 슬픔에 감싸이게 된다. (손수건을 접어서 호주머니에 넣고 약간 머리를 쳐든다) 모두 도울 수가 있었는데. (사이) 돕는다! (사이) 구제한다. (사이) 여기저기서 불쑥 나타나니. (사이. 격심한 말투로) 그러나 좀 생각해 보란 말이야, 잘 생각하는 거야. 당신네들은 땅 위에 있단 말이다! 구제 할 방도가 없지 않아! (사이) 가보시오, 그리하여 서로 사랑하든 서로 핥든 마음대로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사이. 아까보다는 조용히) 방이 아니면 파이를 원하겠지. (사이. 격심한 말투로) 가버리란 말이얏! 페팅의 파아티로 돌아가란 말이닷! (사이. 낮은 목소리로) 이것도 저것도 모두! (사이) 진짜 개 한 마리 없다! (아까보다 조용히) 마지막은 처음부터 있는 법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계속한다. (사이) 나의 얘기를 시작할 수 있게 될는지도 모른다. (사이) 마룻바닥에 몸을 내던지게 될는지도 모른다. (괴로운 듯이 몸을 들어올리니 곧 미끄러져 내린다) 손톱을 틈서리에 끼워서 손목의 힘으로 몸을 앞으로 끌어당길 수 있는지도 모른다. (사이) 그것으로 마지막이 된다. 그렇게 되면 생각하게 될 것이다. 뭣이 그 마지막을 가져왔을까, 그리고는 생각하게 될 것이다. 뭣이...(주저한다)...왜, 마지막은 이렇게 늑장을 부릴까고. (사이) 거기에서는 세상이나 사람을 피해 사는 오래된 집에서, 침묵과..(주저한다)...무기력을 혼자서 마주할 것이다. 만약 잠자코 있을 수가 있다면, 그리고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만 있다면, 소리와 운동에 대해서는 틀이 잡힐 것인데. (사이) 아비를 부르고, 그리고...(주저한다)...자식을 불러서. 두 번, 세 번이나 말이다. 첫 번째에, 혹은 두 번째에도 놈들에게 들리지 않을 경우에는 말이다. (사이) 그 녀석은 돌아올 것이라고 자신을 타이를 것이다. (사이) 그러나 그리고는? (사이) 그리고는? (사이. 매우 흥분해서) 모든 종류의 환상이다! 눈여겨 바라보고 있는 듯한! 한 마리의 쥐! 발자국소리! 눈! 숨을 멈춘다. 그리하여...(숨을 내뱉는다) 그리고는 지껄인다, 빠른 말로, 말을, 마치, 밤, 모두와 함께 있고 싶어서, 함께 지껄이고 싶어서 몇 사람 몫의, 두 사람, 세 사람의 배역을 연출하고 있는 외톨박이 어린애처럼. (사이) 시시각각, 한 마디 한 마디, 저...(적당한 말을 찾는다)...늙다리 그리스 인의 좁쌀처럼. 그리하여, 사람은 한 평생, 그것이 한 평생이 되는 것을 기다린다. (사이. 계속하려다가 단념한다. 사이) 아아, 틀이 잡히면, 틀이! (호루라기를 분다. 크로브, 한 쪽 손에 괘종시계를 들고, 나온다. 그는 의자 곁에 와서 멈추어 선다.) 흥! 멀리 가지도 않았고, 죽지고 않았구나?
크로브 : 정신적으로 벌써 그렇다.
햄 : 어느 쪽이야?
크로브 : 양 쪽 다.
햄 : 멀리 가서, 죽었다는 셈이군.
크로브 : 순서가 거꾸로 가도 좋아.
햄 : (거만스럽게) 나에게서 멀리 떠나가게 되면, 목숨이 없을 것이다. (사이) 그래서, 그 쥐는?
크로브 : 도망가 버렸다.
햄 : 아무튼 멀리 가지 않았을 거야. (사이. 불안스럽게) 그렇지?
크로브 : 그 놈은 멀리 갈 필요가 없을 거야.
사이
햄 : 진정제 먹을 시간이 되지 않았어?
크로브 : 그렇군.
햄 : 아아! 이제 겨우 먹게 됐군! 빨리 다오.
크로브 : 진정젠, 이제 없어.
사이
햄 : (기절초풍을 해서) 하느님... (사이) 진정제가 없다니!
크로브 : 이제 없어. 앞으로 결코 진정제를 먹을 순 없게 됐어.
사이
햄 : 그러나 작은 둥근 상자엔, 그것이 가득 들어 있었는데!
크로브 : 응. 그러나 지금은 텅 비어 있어.
사이. 크로브, 방안을 맴돌고 있다. 괘종시계를 둘 곳을 찾고 있다.
햄 : (낮은 목소리로) 앞으로 어떻게 할까? (사이. 고함을 치며) 앞으로 어떻게 한단 말인가? (크로브, 그림 액자에 눈을 돌려, 그것을 벗기고 여전히 뒤집어서 벽에 기대어 놓고, 그 대신 괘종시계를 건다) 뭣을 하고 있는 거야?
크로브 : 태엽을 감고 있어.
사이
햄 : 육지를 봐다오.
크로브 : 또 말이야?
햄 : 너를 부르고 있으니 말이야.
크로브 : 목구멍이 아프지 않아? (사이) 트로치는 어때? (사이) 필요 없어? (사이) 유감인데.
크로브, 콧노래를 부르며 오른쪽 창문 쪽으로 가서 멈추어 선 다음 머리를 뒤로 젖히고 그것을 바라본다.
햄 : 노래 따위, 제발 부르지 말아다오!
크로브 : (햄 쪽을 뒤돌아보며) 이젠 노래할 권리도 없단 말인가?
햄 : 없다.
크로브 : 그럼, 어떻게 끝내면 좋단 말인가?
햄 : 너, 끝내고 싶어?
크로브 : 나는 노래하고 싶단 말이야.
햄 : 노래하지 말란 법도 없겠지만.
사이. 크로브, 창문 쪽으로 돌아 선다.
크로브 : 그 발판을 어디 뒀드라? (눈으로 찾는다) 보지 못했어, 발판을? (발견한다) 아아, 그래도 말이야! (왼쪽 창문 쪽으로 간다,) 때로는, 머리 반쪽이 어디 가버리지 않았느냐고 생각될 때가 있어. 그러나 그것이 지나고 나면, 또 명석해진단 말이야. (발판 위에 올라서서 창문 밖을 바라본다) 야, 이건 너무하네! 온통 물 밑이다! (바라본다) 어떻게 된 셈이야? (목을 내밀고 한 쪽 손을 들여다 본다) 비도 오지 않았는데. (유리창을 닦고 또다시 바라본다. 사이. 이마를 탁 친다) 왜 이다지도 난 바보스러울까! 방향을 잘못 잡았어! (발판에서 내려선 다음 오른쪽 창을 향해서 몇 걸음 걸어간다) 물밑이라구! (발판을 가지러 돌아간다) 정말, 바보 같은 짓을! (오른쪽 창문까지 발판을 끌고 간다) 정말, 바보 같은 짓을! (오른쪽 창문까지 발판을 끌고 간다) 때론, 정신이 반쯤 어디 간 것처럼 생각된단 말이야. 그러나 그게 지나고 나면, 또 정리되거든. (발판을 오른쪽 창문 밑에 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창밖을 내다본다. 햄 쪽을 뒤돌아본다) 특히 흥미 있는 부분이 있는 거야? (사이) 그렇잖으면 그저 전체로서 좋은가?
햄 : (아주 약하게 ) 전체다.
크로브 : 전체적인 정세를 말이지? (사이. 창문 쪽으로 몸을 돌린다) 어디보자.
크로브, 바라다본다.
햄 : 크로브!
크로브 : (바깥에 정신이 팔려서) 음.
햄 : 알겠느냐 말이다?
크로브 : (바깥에 정신이 팔려서) 음.
햄 : 난, 한 번도 거기 가 본 일이 없단 말이다. (사이) 크로브!
크로브 : (햄 쪽으로 뒤돌아보며, 초조하게) 뭐야?
햄 : 난, 한 번도 거기 가본 일이 없단 말이다.
크로브 : 운이 좋았어, 당신은.
크로브, 창문 쪽으로 향한다.
햄 : 언제나 아무 것도 없었다. 무엇이고 간에, 나를 제외하고 일어났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라. (사이) 넌 어떤 일이 있어났는가 알고 있어? (사이) 크로브!
크로브 : (햄 쪽을 돌아보며, 초조하게) 당신은 나로 하여금 이 쓰레기통의 거동을 보이고 싶소, 그렇찮으면, 보일 필요가 없다는 거요, 어느 쪽이야?
햄 : 먼저 대답부터 하란 말이야.
크로브 : 무슨?
햄 : 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알고 있느냐 말이다?
크로브 : 어디서? 언제?
햄 : (격심한 말투로) 언제라구! 뭣이 일어났는가 말이다? 모르겠어! 뭣이 일어났는가?
크로브 : 뭣이 일어나든, 그것이 어떻다는 거야?
크로브, 창문 쪽으로 몸을 돌린다.
햄 : 나로선, 모르겠단 말이다.
사이. 크로브, 햄 쪽을 돌아본다.
크로브 : (냉혹하게) 펙 노파가 램프에 칠 기름을 좀 달라고 찾아왔을 때, 당신은 풀이라도 뜯어 먹으라고 내쫓지 않았어. 그 때는, 당신도 뭣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알고 있었어. 내 말이 틀려? (사이) 펙 노파가 뭣 때문에 죽었는지? 그것도 알고 있을 게 아냐? 어둠 때문에 죽은 거야.
햄 : (매우 약하게) 기름이 없었잖아.
크로브 : (냉혹하게) 아니야. 많이 가지고 있었어!
사이
햄 : 망원경을 갖고 있어?
크로브 : 아아니, 이 이상 크게 뵈지 않아도 돼.
햄 : 찾아서 갖다 주게.
사이. 크로브, 하늘을 쳐다보며 두 주먹을 위로 올린다. 중심을 잃고 발판에 매달린다. 한두 층계 내려와서 멈춘다.
크로브 : 내 스스로가 어처구니없을 때가 있다. (마룻바닥까지 내려와서 선다) 뭣 때문에 난 언제나, 당신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지 모르겠어. 설명해 줄 수 없을까?
햄 : 안 돼...반드시 동정심에서겠지. (사이) 위대한 동정의 일종인가. (사이) 아아, 넌 반듯이 앞으로 괴로워할 거야, 반드시 괴로워할 걸세.
사이. 크로브, 방안을 맴돌기 시작한다. 망원경을 찾는 것이다.
크로브 : 이런 얘긴, 이제 신물이 났어. 그야말로 싫증이 난다. (찾는다) 당신이 깔고 앉은 게 아냐?
크로브, 의자를 움직이며 들어가 있을 만한 곳을 살핀다. 그리하여 또 찾기 시작한다.
햄 : (고뇌에 차서) 나를 이런 곳에 두고 말이야. (크로브, 화난 듯이 의자를 제자리로 옮기고 또 찾기 시작한다. 햄, 매우 약한 소리로) 꼭 한가운데겠지?
크로브 : 현미경이라도 있어야지, 이건-(망원경이 눈에 띄었다) 아아, 그렇지 않으면! 크로브, 망원경을 집어 들고 발판 있는데 가서 그 위에 올라서서 망원경으로 바깥을 내다본다.
햄 : 개를 다오.
크로브 : (바라보면서) 귀찮아 죽겠구나!
햄 : (다시 강하게) 개를 다오!
크로브, 망원경을 놓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다. 사이. 서둘러 발판에서 내려와 개를 찾고, 그것을 찾자 햄 쪽으로 달려가서 햄의 머리를 개로 세게 때린다.
크로브 : 자, 당신의 개다!
개는 바닥으로 떨어진다. 사이
햄 : 저 놈이 날 때렸다.
크로브 : 당신이 화나게 하기 때문이다! 난 지금 화를 내고 있는 거야!
햄 : 날 때리려면, 도낄 내려치는 거야. (사이) 그렇잖으면 작살로 말이다. 자, 이 작살로 하란 말이다. 개로 치지말고, 작살이나, 그렇잖으면 도끼로 하는 거야.
크로브, 개를 주워서 햄에게 건네준다. 햄, 그것을 두 팔로 안는다.
크로브 : (애원하듯) 제발 그만 두자, 이런 승부는!
햄 : 절대로 그만 두지 않겠다! (사이) 관 속에 넣어 다오.
크로브 : 관 따위가 남아 있을 게 뭐야.
햄 : 그렇다면, 이제 끝장이 나면 좋겠다! (크로브, 발판 쪽으로 간다. 햄, 격심한 말투로) 몽땅 날아가 버렸으면 좋겠다! (크로브, 발판 위에 올라서서 망원경을 찾으러 또 내려오고, 망원경을 찾아서 다시 올라서서 망원경을 쳐든다.) 어둠 탓이라구! 그렇다면, 난, 나는 단 한 번이라도 남에게 용서받은 일이 있느냐 말이다?
크로브 : (망원경을 내리고, 햄 쪽을 돌아보며) 뭣? (사이) 남이라니 나를 가리키는 말야?
햄 : (화를 내며) 방백이란 말이다! 이 멍청아! 처음 듣는 거야, 방백을? (사이) 마지막 독백을 시작하는 참이다.
크로브 : 말해 두겠는데. 당신의 분부이기 때문에, 나는 이 쓰레기통을 이제부터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이다. (망원경을 집어 든다) 헌데, 이렇게 본 결과...(망원경을 돌린다). 아무 것도 없다. ...없어...좋아...진실로 흡족해...아무 것도 없다...진실로-(깜짝 놀라며 망원경을 내려 살펴 본 다음 또 다시 집어 든다. 사이) 아니, 아니, 아안!
햄 : 뭐야, 귀찮게! (크로브, 발판에서 내려온다) 제발 큰일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크로브, 창가에 발판을 가까이 당겨서 위로 올라가며 망원경을 잡아든다.
사이
크로브 : 아니, 아니, 아아니.
햄 : 나뭇잎이야? 꽃인가? 그렇잖으면, 토마아아아-(하품을 한다) 토냐?
크로브 : (바라보면서) 뭣이 토마토란 말이야! 사람이다! 사람이다!
햄 : 그렇다면 때려죽이고 와. (크로브, 발판에서 내려온다) 사람이라면! (목소리를 떨며) 직분을 완수해야지! (크로브, 도어 쪽으로 달려간다) 아냐 그럴 필요는 없어. (크로브, 멈추어서 선다,) 거리는?
크로브, 발판으로 돌아와서 그 위에 올라가 망원경을 들어 올린다.
크로브 : 70...4미터
햄 : 가까이 오는 거야, 멀어져 가는 거야?
크로브 : (여전히 바라보면서) 움직이지 않아.
햄 : 성별은?
크로브 : 어느 쪽이든 상관없잖아? (창문을 열고 몸을 바깥으로 내민다. 사이. 몸을 일으켜 세우고 망원경을 내린 다음 햄 쪽을 돌아본다. 두려운 듯이) 어린애 같은데.
햄 : 직업은?
크로브 : 뭣?
햄 : (격한 말투로) 뭣하고 있는 거야, 그놈은?
크로브 : (격한 말투로) 뭘 하고 있는지 알 게 뭐야! 어린애가 하는 일 따위. (망원경을 집어든다. 사이. 망원경을 내리고 햄 쪽으로 돌아다본다) 앉아 있는 것 같애, 뭣에 기대서.
햄 : 파낸 돌이야. (사이) 너의 시력이 좋아진 것 같은데. (사이) 아마 집을 보고 있겠지. 다 죽어가는 모세의 눈으로.
크로브 : 틀려.
햄 : 그럼 뭣을 보고 있는 거야, 그놈은?
크로브 : (격한 말투로) 뭣을 보고 있는지 모르겠어! (망원경을 잡아든다. 사이. 망원경을 내리고 햄 쪽을 돌아다 본다) 자기 배꼽이다. 아무튼 그 근방이야. (사이) 왜, 그런 신문을 하지?
햄 : 아마, 죽었겠지.
크로브 : 가보자. (발판에서 내려와 망원경을 버리고 도어 쪽으로 가다가 멈추어 선다)
크로브, 작살을 찾아서 줍고 도어 쪽으로 간다.
햄 : 필요 없다.
크로브, 멈추어 선다.
크로브 : 필요 없다고? 미래의 생식계라고 하는데도?
햄 : 정말로 거기에 있다면, 이리로 오든지, 거기에서 죽는다. 만약, 정말로 있지 않다면, 보러 갈 필요가 없어.
사이
크로브 : 나를 신용하지 않는군? 만들어서 하는 소린 줄로 아는 모양이지?
사이
햄 : 마지막이다, 크로브. 우리들은 이제 끝장이다. 이제 끝장이다. 이제 난, 네가 필요치 않아.
사이
크로브 : 그것, 참 잘 됐군.
크로브, 도어 쪽으로 간다.
햄 : 작살은 두고 가.
크로브, 작살을 건네주고 도어 쪽으로 가서 멈추어 선다. 괘종시계에 눈길을 주자, 그것을 벗겨서, 보다 나은 장소를 눈으로 찾다가 발판으로 걸어가서, 그 위에 올려놓고 의자 곁의 장소로 돌아온다.
사이
크로브 : 가겠어.
햄 : 가기 전에, 무슨 말이고 해다오.
크로브 : 아무 말도 할 게 없어.
햄 : 두서너 마디로 족하다...내가 되풀이 할 수 있는 ...마음속으로 말이야.
크로브 : 마음, 당신 마음이라고!
햄 : 그렇다 (사이. 힘을 넣어서) 그렇고말고! (사이) 다른 것과 함께...그림자라든가, 지껄임이라든가, 모든 괴로움이라든가, 이윽고는 함께 끝장을 보기 위해서. (사이) 크로브... (사이) 그녀석은 한 번도 나에게 말하지 않았는데도 말을 건네 왔다. 그 녀석은 말했다...
크로브 : (절망적으로) 아아...!
햄 : 뭣인가... 네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을.
크로브 : 내 마음이라구!
햄 : 뭣이고 간에 한 마디... 네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을.
크로브 : (노래한다)
아름다운 작은 새여, 초롱에서 나와,
님을 만나러 날아가거라,
사랑스런 그녀의 가슴에다가,
속삭여 전해다오, 찾아간다고.
(사이) 됐어 이젠?
햄 : (불쾌한 듯) 텟!
사이
크로브 : (한 점을 바라본 채, 단조한 목소리로) 누군가가 말하고 있었다. 그것이야, 그것이 사랑이다. 정말이야, 정말이고 말고. 당신도 알고 있겠지, 얼마나-
햄 : 똑똑하게 말이지!
크로브 : (여전히 한 점을 바라본 채, 단조한 목소리로)-그것이, 정다운 것인가. 누군가가 말했다. 그것이야, 그게 바로 우정이란 것이다. 여부가 있겠어. 정말이고 말고, 틀림없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먼 데 있는 것이 아니잖아. 누군가가 말했다. 거기에 있는 거다. 바로 거기 멈추어 서서, 머리를 쳐들어 이처럼 멋들어진 것을 한 번 보란 말이야. 이 질서! 누군가가 말했다. 자, 너도 동물이 아니고 사람이니, 그런 것을 생각해 보란 말이야. 그렇게 하면 뭣이고 간에 확실해지는 거야. 간단하다! 누군가가 말했다. 이렇게 다 죽어가는 상처 입은 사람도, 온 정성을 다하여, 돌보고 있지 않느냐고 말이야!
햄 : 이제, 그만!
크로브 : (여전히 한 점만을 바라본 채, 단조한 목소리로) 나는 생각 하였어-때때로 말이다. 크로브, 만약 사람이-언젠가-너를 벌하기에 지쳤을 때, 좀 더 너는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 돼. 나는 생각하였다. -때때로 말이다. 크로브, 만약 사람이-언젠가-네가 나가기를 원한다면, 좀 더 거기에 있지 않으면 안 돼. 그러나 난 새로운 습관을 몸에 익히기엔, 나이가 너무 많고, 너무 현재의 생활에 파고든 것을 느낄 수 있어 좋다, 이것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난 즉, 결코 나가지 않겠다. (사이) 그리하여, 어느 날엔가 갑자기 그것이 끝난다. 그것이 달라진다, 나에겐 전연 알 수 없다. 그 쪽에서 알 수 없다. 난 남아있는 말 가운데서, 그것을 묻는다. 잠, 깨어 남, 저녁, 아침. 그러나 말에는 아무 뜻도 없다. (사이) 나는 감방 문을 열고 나간다. 허리가 온통 굽어져서 눈을 들어도 발 밖에 보이지 않고, 두 발 사이에 거무칙칙한 얼마 되지 않은 먼지 밖에 보이지 않는다. 나는 지구가 불을 끈 것이라 생각한다. 더우기 불을 켠 것을 본 일마저 없지만. (사이) 혼자 그렇게 될 것이다. (사이) 넘어지면, 행복하게 울 수 있을 것이다. 사이. 크로브 도어 쪽으로 간다.
햄 : 크로브, (크로브, 뒤돌아보지 않은 채, 걸음을 멈춘다. 사이) 아니, 아무 것도 아냐. (크로브, 다시 걷기 시작한다) 크로브!
크로브, 뒤돌아보지 않고 멈추어 선다.
크로브 : 이걸, 만류하는 솜씨라구 하지.
햄 : 고마왔어, 크로브.
크로브 : (뒤돌아서서, 기운차게) 잠깐, 고마왔던 것은 이쪽이야.
햄 : 그럼, 피차 고마왔던 셈이다. (사이. 크로브, 도어 쪽으로 간다) 또 하나. (크로브, 그 자리에 선다) 마지막 친절로 (크로브 나간다) 날 시트로 덮어다오. (긴 사이) 안돼? 좋다. (사이) 내, (사이) 차례다. (사이. 진저리나는 듯이) 긴 승부의 낡아빠진 끝남, 지는 것도 끝. (사이. 조금 힘을 차려서) 거기에서. (사이) 아아, 그렇군! (작살에 몸을 지탱해서 의자를 움직이려고 한다. 그 사이에 크로브, 나온다. 파나마 모자, 아래 위가 같은 맞춤 양복, 한 쪽 팔에 레인코오트, 우산, 슈우트케이스. 도어 곁에서 햄에게 시선을 못박고 무표정하게 크로브는 마지막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다. 햄, 단념하다) 좋다. (사이. 버려야겠다. (작살을 버린다. 개도 버리려 하다가 생각을 고쳐 한다) 허리를 펴서는 안돼. (사이) 그리고는? (사이) 들어 올린다. (모자를 벗어 위로 쳐든다) 지켜주십사, 우리의...엉덩이를. (사이) 그리곤 또 머리에 쓴다. (모자를 머리에 올려놓는다) 이것으로 무승부. (사이. 안경을 벗는다) 닦는다. (손수건을 꺼내서 접힌 채 안경을 닦는다) 그리고는 쓴다. (손수건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안경을 쓴다) 드디어 마지막 장면이군. 얼마쯤, 이런 바보스런 흉내를 낸 다음, 부르겠어. (사이) 시를 조금. (사이) 너는 불렀다-(사이. 다시 고쳐 말한다.) 너는 <원했다>, 저녁의 어둠을 저녁의 어둠은 온다-(사이. 고쳐 말한다) 저녁의 어둠은<내려서>, 재빨리. (되풀이한다. 굉장하게 노래라도 하는 투로) 너는 원했다. 저녁의 어둠을. 저녁의 어둠을 내려서, 재빨리. (사이) 좋군, 이것은. (사이) 그리고? (사이) 무의미한 순간, 언제나 무의미, 그래도 셈에는 들어간다. 셈이 갖추어져서, 얘기는 끝났다. (사이, 해설자의 말투로) 어린 것과 함께 있을 수 없겠습니까... (사이) 내가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이 순간이었다. (사이) 당신은 어린 것을 버리고 싶지는 않아? 자신은 시들어가면서, 자식이 커가는 것이 좋단 말이지? (사이) 마지막 15분간을 어린 것을 위해 부드럽게 해달란 말인가, 십만 번이나? (사이) 어린 것은 알지 못해, 어린 것은 굶주림과 추위와 그 뒤에 있는 죽음 밖에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은 세상이란 것이 어떻다는 것을 벌써 알고 있을 것이다. (사이) 아니, 나는 그 사나이에게 자신의 책임을 생각나게 했을 뿐이었다! (사이. 보통 말투로) 그러면, 이것으로 됐다, 이젠 다 됐어. (호루라기를 들고, 주저하다가 놓아 버린다. 사이) 그래, 그야말로!(호루라기를 분다. 사이. 다시 세게 분다. 사이) 좋아좋아. (사이) 아버지! (사이. 다시 세게) 이봐요, 아버지! (사이) 좋아좋아. (사이) 드디어 마지막 장면이다. (사이) 그럼, 마지막에는? (사이) 버린다. (개를 버린다. 호루라기를 쥐어뜯는다) 자! (호루라기를 자기 앞에 버린다. 사이. 냄새를 맡는다. 낮은 목소리로) 크로브! (긴 사이) 틀렸나? 좋아좋아. (손수건을 끄집어낸다) 이것이 승부의 습관이니...(손수건을 펼친다)... 습관에 따라...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다. (두 팔 끝으로 자기 앞에 손수건을 펼친다) 오래 쓴 때 묻은 것이다! (사이) 너는 버리지 않겠다. (사이. 햄, 손수건을 자기 얼굴에 가져간다.)
- 막이 내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