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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니치처럼

Bollnow 2024. 4. 20. 05:21

그리니치처럼

Mario Benedetti

 

"아저씬 마요르카 사람이 아니죠?" 옆 테이블의 소녀가 말을 건넨다.

"? 뭐라고요?" 끼뇨네스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독한 셰리주가 목에 걸릴 뻔했다.

"왜 놀라셨어요?" 소녀는 놀리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재밌어 했다.

", 좀 놀랐어요. 여기 빨마 시에는 나를 아는 사람이 없어요. 나그네인 거지."

"그러니까 마요르카 사람이 아닌 거죠. 스페인 사람도 아니고."

"탐색전은 집어치우고, 난 아르헨티나 사람이요."

"그런 거 같았어요."

"어떻게요?" 끼뇨네스는 짙은 색 바지에 흰 블라우스를 걸친 꼬맹이 아가씨를 찬찬히 바라본다. 몸이 아직은 덜 자랐지만 장래성은 있어 보인다.

"글쎄요. 바지 주름을 봐도 그렇고, 담뱃불 붙이는 것도 그렇고, 여자 보는 눈길도 그렇고."

"굉장한 발전이군. 전에는 우리가 중남미식 사투리를 써야 알아보았는데."

"마흔셋 맞죠?"

"마흔하나."

"나이도 빼요?" 소녀는 뻔뻔하긴 하지만 상당히 독창성이 있었다. 끼뇨네스는 마음에 들었다.

"전 우루과이 사람에요. 열넷이고요."

"."

"관심이 안 가세요?"

"누가 아니랬나? 하지만 요즘 몇 년 사이엔 유럽에서 남미 사람 보는 게 드문 일도 아니에요."

"전 이름이 수사나에요. 아저씬요?"

"끼뇨네스."

수사나는 레모네이드를 시켜 두었지만 아직 입도 안 대고 있었다.

"그 레모네이드가 뜨뜻해지겠어요. 지금이 팔월이라는 걸 잊지 말아요."

"찬 음료는 제게 잘 안 맞아요."

소녀는 온도를 재는 듯이 한 손으로 컵을 감싸지만 여전히 들어 올리지는 않는다.

"아저씬 여기 보르네 거리를 지나가는 이 스웨덴 여자들, 화란 여자들, 독일 여자들에게 쏙 빠지신 것 같은데, 다 맘에 드시나 보죠?"

", 경우에 따라 다르지. 화란 여자라고 다 화란 여자일까."

"어떤 여자들이 더 좋으세요? 세장(細長)형 유방 쪽인가요, 아님 피하지방층이 발달한 쪽인가요?"

끼뇨네스는 요것 봐라 싶다.

"어디서 그런 말은 배웠니?"

", 말을 놓으시네. 더 좋지."

"그럼, 당연하지."

"좋아요, 난 까막눈이 아니니까."

"내가 보기엔 열네 살치곤 너무 까졌는데."

수사나는 잠자코 마치 땀구멍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듯 자기의 가는 두 팔을 바라본다.

"햇볕을 많이 쬐면 언제나 주근깨가 생겨나요."

"나도 그래." 맞장구를 치려고 끼뇨네스가 그렇게 말한다.

"주근깨 듀엣이네요. 노래할 줄 아세요?"

"돼지 목 딴 소리지. ?"

"바이올린처럼 깽깽대요."

"일반화시키면 곤란해. 바이올린 나름이지."

"모두 소리가 안 맞아요. 정말이라고요. 우리 삼촌이 바이올리니스트였거든요, 그런데 하루 온종일 괭이 소리내더라고요. 아니면 우리 듀엣 그만 두죠, ."

"왜 바이올리니스트'였다'고 하니? 이젠 아냐?"

"지금은 목수에요. 톱으로 끽끽대죠. 망명자가 그렇죠, ."

", 너도 망명자구나."

"물론이죠."

"그렇게 당연한 건 아니지. 망명자가 아닌 우루과이 인이나 아르헨티나 인도 있잖니."

"적어도 절반은 그래요."

"그러나 나머지 절반은..."

"망명자의 자식들이죠. 전 사실 그 두 번째 절반에 속해요. 아저씬요?"

"첫 번째."

"부에노스아이레스 떠난 지 얼마나 됐어요?"

"뚜꾸만이야. 아르헨티나에 부에노스아이레스만 있는 게 아니라고."

"알았어요."

"4년 됐어."

"그런데 여기 마요르카섬에서 뭐 하세요?"

"지금은 휴가 중이야. 하지만 보통은 팔러 다니지. 광고를 팔아. 스페인 전체로."

"재밌겠네. 난 독일에 살아요."

"그래 어떠니?"

". 독일사람들이죠."

끼뇨네스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짬에 셰리주를 한 모금 마셨다.

"좀 얘기 해 볼래, 왜 나한테 말을 걸었니?"

"모르겠어요. 어쩜 아저씰 모르니까."

"괜히 말 걸고 싶었어?"

"꼭 그런 건 아니고요. 사실은 누군가에게 말해야 했어요. 내가 자살할 거라고. 혼자 알고 있기에는 너무 큰 뉴스잖아요."

갑자기 소녀는 심각한 얼굴을 지었다. 끼뇨네스는 다시 술잔을 입에 가져갔지만 침만 꼴딱 넘어갔다.

"혼자서 여기에 왔니?"

"아뇨. 아빠랑."

"다행이구나."

"그리고 아빠 애인하고요. 조금 있으면 날 찾으러 올 거에요."

"엄마는?"

"독일에 있어요. 같이 안 산지 오래 됐어요. 엄마도 남자 친군지, 동지인지 있어요."

"그래서 자살하고 싶다는 거구나?"

", 그 말을 믿었네요."

"그럼 농담이었어?"

"천만에요. 그렇지만 아무도 내 말을 믿어줄 거라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것 때문은 아니에요."

그는 관광객들의 행렬을 다시 쳐다보았다. 보통은 카페 마이애미의 야외 테이블 이쯤에 앉아서 마드리드로부터 오는 신문 수송차를 기다리곤 했다. 그러다가 가판대로 가로질러 가서 신문 두어 부에 잡지 하나쯤을 사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곤 했다.

"좀 자세히 얘기해볼래?"

"그럴까. 아저씬 괜찮은 사람 같으니까. 이름은 징그러워도."

"왜 맘에 안 들어?"

"솔직히, 올라올 것 같아요. 물론 중요한 건 이름이 아니죠. 아저씬 좋은 사람, 아닌 사람?"

"그렇다고 생각해."

"그러면 맞아요. 만약 아니라면, 틀림없다고 말했을 거예요."

"나름대로의 방법론이 있구나."

"그럼요. 머리를 돌려야죠."

웨이터가 빈 쟁반을 들고 지나간다. 끼뇨네스는 얼른 셰리주를 한 잔 더 청한다.

"저 친군 나를 미성년자를 타락시키는 사람으로 생각할 거야."

"아니면 나를 어른 타락시키는 애로 생각하겠죠."

"그런 애들도 있지."

"그럼요. 감옥에 갔었더랬죠?"

다시 흠칫 놀랐다. 그렇지만 태연한 척하느라 안경을 벗어 깨끗하지도 않은 손수건으로 닦기 시작했다.

"삼 년."

"스페인에 혼자 살아요?"

"."

"부인도 애들도 없어요?"

"아내만 있어. 그런데 자살하고 싶은 건 너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그러네요. 하지만 제 말을 진짜로 여기는 것 같진 않네요."

"아니, 진짜야. 그렇지만 진짜가 아니었으면 더 좋겠어. 맘 편하게 말야. 그런데 진짜지."

"이렇게 젊은 나이에 죽으려 한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그렇게 남 얘기하듯 얘기하지 않으면 고맙겠다. 아니, 이상하진 않아."

"아무도 몰라요."

"왜 아무도니? 내가 알잖아."

"그러나 아저씬 날 배신하지 않겠죠. 정말 그러지 않을 거야."

"왜 아빠랑 얘기해보지 않니?"

"쥐뿔도 모르는데 뭐."

"난 알고?"

"확실하진 않죠. 그냥 시험해보는 거예요. 아저씬 날 이해하기에 너무 늙었지만 눈은 젊었어요. 그래서 혹시나 하는 거죠."

"그런 여지를 주니까 고맙다."

"제 눈은 어때요?"

"착잡해."

"아저씨도 나름대로 방법론이 있군요."

"그럼. 머리를 돌려야지."

소녀는 두 손으로 바지를 한 번 쓰는 동작을 취한다. 무의식적 동작이지만 무언가 뜻이 있는 것 같다.

"마약 해봤니?" 끼뇨네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어조로 말을 던져본다.

", 하지만 소용없어요. 나한텐 별로에요. 성격이 안 맞는다고나 할까."

"그건 잘 됐네."

"아니면 더 안 된 일인지도 모르죠. 어쨌든 잘 먹혀들지 않았어요."

끼뇨네스는 신문 차가 와서 마드리드 신문을 부리는 것을 보지만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는다. 나중에 시간이 있겠지. 당장은 여기, 소녀 곁에 있는 거다.

"네 아빠도 감옥 갔었니?"

"흐음."

"고생 많이 하셨니?"

"흐음. 게다가, 내 이름은 수사나가 아니에요."

"뭐라고?"

"엘레나."

"뭐가 어떻게 된 거니?"

"믿을 수 있는지 몰랐어요."

"지금은?"

"지금은 그렇다고 봐요."

"그런데 미안하구나, 난 여전히 끼뇨네스라고 한단다."

"안 됐네요. 그것도 가짜였음 했는데."

"쏘리."

"미리 조심 안 하세요?"

"가끔은 하지. 그러나 네가 CIA 요원 같진 않구나."

끼뇨네스는 두 번째 셰리주를 마시기로 작정한다.

"어때요? 괜찮아요?"

"."

"셰리주 한 번도 안 해봤어요."

"한 잔 시켜줄까?"

"아뇨. 술 마시면 두드러기 나요. 술하고 탱고 말에요."

"말해 볼래, 자살 충동의 동기를 내가 물어봐야 하니?"

"충동이 아니고 결심이에요."

"결심하려면 이유가 있을 거 아니니?"

"어떻게 할까요. 아저씨가 물어 볼래요?"

"좋아, 왜 그런 결심을 했니?"

"이유는 복합적. 아빠, 엄마, 아빠의 여자 친구, 엄마의 남자 친구, 저기에 대해 얘기하는 거, 나하고 사람들이 여기에서 발견하는 거."

"여기란?"

"독일, 유럽, 이 관광지 등등. 독서 좋아하세요?"

", 하지만 광은 아니지."

"음악은?"

"이하 동문. ?"

"이하 동문. 하지만 무슨 상관에요."

"어디부터 시작할 거야?"

"첨부터요, 고전작품처럼. 우리가 유럽에 왔을 때, 갈가리 찢겨져 있었어요. 난 여덟 살이었고요. 남동생은 두 살뿐이 안 됐어요."

"그러니까 동생이 있단 얘긴데, 놀랍구나."

"왜 놀라워요?"

"꼭 네가 무남독녀 같았거든."

"사실, 무남독녀 같이 보이죠. 그렇지만 남동생이 있죠. 걔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해요. 너무 어렸으니까요. 하지만 전 기억해요. 이층 짜리 아담한 집, 정원이 있고, 뿐따 까레따스에 있었죠. 아저씨, 몬테비데오 가봤지요?"

"두 번뿐이 못 가봤어, 오래 전에. 그래도 뿐따 까레따스가 어딨는진 알지. 등대하며, 이런 저런 거."

"아저씨에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우리 집에서 등대는 안 보였어요. 대신 감옥이 보였죠."

"훠이 훠이."

"독일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부모님은 같이 사셨죠. 같이 살았지만 굉장히 예민했어요. 모든 게 트집거리였어요. 다행인 건 밤이면 두 분이 사랑을 했죠."

"확실해? 그렇게 상상을 하는 거니, 아니면 엿보았다는 거니?"

"침대 용수철 소리가 증거였어요. 제겐 그 신호가 중요했어요. 조숙한 성적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이해해 보세요, 두 분이 서로 필요로 한다는 증거로 말이죠. 전 정상적인 애라고요. 어쨌든 아마도 그래서 그 관계가 깨지는 걸 원치 않았어요."

"그러나 깨졌구나."

"무지하게 다투었죠, 특히 정치 문제로요. 두 분 다 좌파에요, 그런데 웃기는 건 같은 단체에서 뛰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실패의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했죠. 난 거의 이해하지 못했어요. 불쾌했어요. 때때로 두 귀를 막았지만 여전히 들리더라고요. 반대로 남동생은 악을 쓰며 울어댔고 그래서 결국은 걔가 조용해지게 두 분이 입을 닫아야 했어요."

"네 동생도 마요르카에 와 있니?"

"아뇨. 엄마랑 있어요. 우리는 나누어졌어요. 하나는 이쪽, 하나는 저쪽."

"그래서?"

"그렇게 세월이 가다가, 어느 날 밤 갑자기 침대 소리가 나지 않았어요. 난 그게 끝장이라는 걸 알았죠. 다시 말해, 어느 날 저녁에 두 분이 용기를 내서, 나에게 얘야, 네가 이해해주면 좋겠는데, 인생이란 그런 거란다, 아빠하고 엄마는 헤어지려고 한다, 어쩌고저쩌고하는데 놀라지 않았다는 거죠. 어쨌든 더 나빴던 건 어쩌고저쩌고였어요."

엘레나 -전에 수사나였던-는 마침내 레모네이드를 반쯤 마시고, 그 틈에 끼뇨네스는 하품을 참지 못해 입을 크게 벌린다.

"지겨우신가 보죠?"

"아니다, 얘야, 더위 때문이야."

"보세요, 지겨우면 그만 둬요. 내가 왜 아저씨한테 조국 얘기를 다 하는지 아세요? 왜냐하면 우리는 절대로 다시 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요."

"확실해?"

"셈을 해 보세요. 낼모레면 우리는 떠날 거고 난 며칠 내로 끝장을 낼 거에요. 여기서 안 하는 건 여러모로 뒤처리가 아빠한테 더 복잡할 것 같아서예요. 그리고 아빠 휴가를 망쳐놓고 싶지도 않고요. 그러니까 이 대화가 세상에 하직을 고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처음으로 내가 세상이 된 느낌이네."

"나중에 아빠는 친구인지, 동지인지 알 수 없지만 좌우지간에 한 동포인 그 여자랑 짝짜꿍이 맞았어요. 엄마는 친구인지, 동지인지 알 수 없지만 역시 한 동포인 그 남자랑 짝짜꿍이 맞고요, 내 참. 모두가 집에 남아요. 조국도 무덤도. 어른들은 조국이고 나는 그다음에 오는 거죠."

"거기 동포들이 많아?"

"꽤 돼요. 서로 찾아다니며 언제나 저쪽 얘기를 하죠. 저쪽엔 궁핍과 실업이 있고, 저쪽엔 신문을 정간시키고, 저쪽엔 노래들을 금지시키고, 저쪽엔 서적을 압수하고, 저쪽엔 박해가 있고, 저쪽엔 고문을 하고, 저쪽엔 죽인다고 하죠."

"정말 그래."

"나도 알아요. 그렇지만 이건 다람쥐 쳇바퀴 같아요. 특히 우리처럼 그것을 살아보지 못하고 듣기만 하는 사람들에겐 더 그래요. 그래서 결국은 저쪽이란 걸 미워하게 돼요. 우리라는 건 어려서 온 우리들을 말해요. 생각해 보세요, 독일에서 우리 아빤 아무 탈 없이 일하죠, 엄마도 그렇죠, 그리고 죽이고 고문하지도 않고, 우리 같은 애들은 공부하고 친구도 사귀잖아요."

"그렇게 아름다운 환경이 네 계획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기다려봐요, 끼뇨네스 씨."

"들을게."

"어느 날 내 동생이, 지금은 여덟 살인데, 그러니까 우리가 올 때 내 나이랑 같은 거죠, 아빠 앞에 척 서더니, 우루과이엔 절대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래요 하는 거에요. 놀랍죠? 아빤 거의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어요. 왜 그러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동생은 그 나란 개똥이라고 했고, 아빤 정말 엉덩방아를 찧었죠. 지루해하실까 봐 결론을 말씀드리면, 그렇게 동생이 확신을 갖게 된 건 순전히 아빠, 엄마 그리고 그 나머지 동포들 때문이라는 거에요. 왠지 아세요? 말하고 떠들고 싸우고 고함치죠, 마치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에요, 마치 우리는 스폰지가 아니고 돌인 것처럼 말에요. 그렇지만 우리는 스폰지에요. 빨아들인다고요."

"너도 스폰지니?"

"그래요, 조금 다르긴 하지만. 동생보다 더 커서 왔기 때문에 뿐따 까레따스의 예쁜 정원을 기억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난 동생을 이해하고 걔 얘기가 설득력이 있다고 봐요."

소녀는 신이 난 듯 빠른 어조로 얘기를 하고, 끼뇨네스는 그 초록색 눈이 깜빡거리며 반짝이는 것이 마음에 든다. 뭔가 암시적인 얘기를 해줘야 될 것 같은 의무감을 느낀다.

"내가 한 가지 말해 줄까? 혹시 우연히 네가 자살하지 않고 다섯 살이 더 먹으면 넌 남자애들 사이에 퀸카가 될 거야."

소녀는 재밌다는 듯 코웃음을 친다.

"독일연방공화국의 남자애들 사이에 말에요?"

"꼭 독일이 아니래도."

"알겠어요. 내 비위를 맞추려고 그러시는 거죠. 설마 아저씨가 나를 사랑하는 건 아니겠죠, ?"

"아냐, 아냐, 안심하거라. 얘기나 계속해."

"정원을 기억하긴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해요. 동생처럼 단호하지도 못해요. 그렇다고 내가 정말 저쪽에 속한 것도 아녜요. 뿐따 까레따스라면 몰라도, 온 나라가 그런 것도 아니고 도시 전체도 아니에요."

"그러면 넌 독일사람이라고 느끼겠네."

"천만에요. 내가 카르토펠른살랏(감자샐러드)에 동화된 사람으로 보여요?"

"미안하구나, 난 그거 좋아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은 다르다니까."

"뚜꾸만이야."

"하여튼 달라."

"그런데 왜 넌 독일사람이라고 느끼지 못하니? 좋은 친구들을 사귀지 못했니?"

"야볼(물론이죠). 좋은 남자 친구들, 좋은 여자 친구들, 좋은 강아지들, 좋은 고양이들, 하지만 고양이들조차도 내가 결코 독일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니까."

"억양이 다르니?"

"빌리 브란트 수상보다 독일어는 더 잘해요. 그러나 내겐 다른 억양이 빠져 있어요."

"어떤 거? 정신적인 거?"

"맙소사, 제발 속물 티 좀 그만 내세요. 올라올 것 같애."

"미안, 미안. 그렇지만 그 다른 억양이란 게 뭐냐?"

"다르다, 그 뿐에요. 꼭 이름을 붙여야 할 필요가 있어요? 보세요, 그건 말이죠, 아저씨가 눈은 젊어 보여도, 정말 마흔 몇 살이라는 표시에요. 뭐든지 이름을 갖다 붙이는 세대 사람이라고요."

"맞아. 사전 세대지. 그런데?"

"얘기는 그리 간단하지 않아요."

"그런 거 같구나."

"이따금 난 엄마하고 그 남자 친구랑 살아요. 그 사람이 싫진 않아요. 가부장적이긴 하지만 솔직하죠. 다른 때는 아빠하고 그 로살바하고 살아요. 그 여자는 그렇게 맘에 들진 않는다고 말해두죠. 뭐 선입견이라는 거, 그 이상은 아니라는 거 인정해요."

"그 이하도 아니고."

"그런데 그 반쪽 가정과 반쪽 가정 사이에, 마치 나는 홈리스 같이 느껴지는 거예요."

"결국 그게 문제로구나."

"기다리세요, 끼뇨네스 씨. 두 사람이 떠나면, 난 다른 두 사람네 집에 남는 그런 식이죠. 그런데 한 번은 네 사람, 아니 동생까지 데려갔으니까 다섯이 몽땅 떠났어요. 둘은 동쪽으로, 셋은 서쪽으로. 난 한 가운데, 그리니치 천문대처럼 남았죠. 도시 전체가 내게 달렸어요.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그때 일이 일어났어요."

끼뇨네스는 이십 세기의 다이애나처럼 당당하던 소녀의 자세가 어딘가 허물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무슨 일이었는데?"

"별거 아네요." 흐릿한 목소리로 소녀가 대답한다. "강간당했어요."

"뭐라고?"

"강간당했다고요, 끼뇨네스 씨. 혼자 밤에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체구가 큰 사람이 어둠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데요. 영화랑 똑같아요. 전형적인 거죠. 날 확 나꿔채 건설 공사장으로 끌고 갔어요. 큰 손바닥으로 내 입을 막고요. 그럴 필요도 없었는데, 왜냐면 완전히 공포에 질려 벙어리가 되었거든요. 도움을 청할 엄두도 못냈지요. 그자는 일을 마쳤는데, 보아하니 경험자 같았어요. 나로선 몹쓸 초연이었고요. 그런데 참 기가 막힌 게 뭔지 아세요. 그 짓거리가 치러지는 동안 나한테 유일하게 기억나던 것은 부모님의 침대 용수철 소리였어요. 웃기죠, 안 그래요? 게다가 말에요, 그자는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대. 독일어가 아니었어요."

"뭐였는데?"

"알 수가 없어요. 무슨 새소리 같이 말했어요. 그러나 걸걸한 새소리요.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상당히 끔찍했어요."

"아주 잘 설명하고 있어. 그래서 그다음 어떻게 됐니?"

"그자는 욕망을 채우고 나자, 나를 되게 세게 한 방 먹이곤 뛰어 도망가데요. 간신히 일어나 보니 온몸이 멍 투성이에 피범벅이었어요. 그렇지만 뭐 중상은 아니었으니까 내 반쪽 집, 그러니까 두 블록 떨어진 엄마네 집으로 겨우 왔죠. 물론 아무도 없었고요. 그래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어요. 아직 아무도 몰라요. 그래요, 아저씨가 처음이죠."

"그래도 어떻게 엄마한테도 말씀을 안 드렸니?"

"뭐 하러요?"

"의사한테라도 가보게 말이다."

"어쩌면 그랬어야 했는지도 모르지만, 난 그런 검사가 싫어요. 한동안 혹시 임신이 되었으면 어떡하나 걱정했어요. 그러다가 그때 결심을 했어요. 죽기로 말이죠."

"하지만 임신이 안 됐잖니."

"물론 안 됐죠. 그래서 결심했다고요. 임신 됐더라면, 살아야 하잖아요. 아이와 그 모든 것 때문에 말이죠. 이해돼요? 그 경우엔 우리 가족 문제라던가, 사회 문제가 상관이 없었을 거예요. , 그런데 임신이 안 됐으니까 나를 없애버려야죠."

"무슨 얘긴지 하나도 이해가 안 된다."

"그럴 거예요. 그래서 아무에게도 얘기 안 했어요. 아저씬 눈빛이 젊어서 혹시 했는데, 역시 잘못 봤어요."

"하지만, 수사나, 아니 엘레나, 글쎄다. 내 말 좀 들어봐라."

"아저씨가 감 잡았는지 모르겠는데 말이죠, 내가 울지 않는 것은 순전히 아저씨 잡아가지 않도록 그러는 거예요. 여자아이를 괴롭힌다고 말이죠."

"고맙다. 네 배려에 뭐라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그러나 들어봐."

"뭐 복잡한 거 없어요. 저쪽에 나는 안 속해요. 이쪽에도 안 속하고. 거기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누가 날 공격해서 겁탈하고요. 어쩌면 화성인이었을까요. 게다가 아들 하나 안 생기고, 그러면 적어도 걔는 이쪽이 되었을 건데. 아님 저쪽에라도. 붙일 이름이 마땅찮으면 싼오브비치 출신이래도 좋고. 목이 메어요, 눈치채셨겠지만."

"매지 말고 풀어보자."

"소용없어요. 어쩌면 이 지경에 이르러선 그러고 싶지도 않아요."

"적어도 노력은 해봐야지."

"아직도 이해가 안 되세요? 그날 밤 이래, 난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당했어요. 쫓겨났다고요. 우리 앞을 지나가는 이 모든 스웨덴 사람들, 화란 사람들, 독일사람들 보세요. 따분한 표정에 벌겋게 탔죠? 나랑 쥐뿔도 상관없어요."

"나하고도 아무 상관없어. 날 겁탈한 것도 아니고."

"그래요, 엉성한 논리라는 거 인정해요. 그렇지만 울 엄마, 엄마의 남자 친구, 아빠, 아빠의 여자 친구, 심지어 내 동생, 우루과이 친구들, 독일 친구들도 나랑 아무 상관없어요. 왜냐면 내가 소외당해 있거든요. 나를 소외시켰어요. 물건 버리듯이. 중고 물건, 교환부품도 없이 고장 난 물건에요."

"울지 않겠다고 말한 거 잊지 마라."

"아저씨 안 잡혀가게 말이죠. 내 희생에 감사하셔야 해요, 왜냐하면 내가 정말 펑펑 울고 싶다고요."

"그렇지만 말이다, 깨달아야 할 게 하나 있어. 네가 울상을 짓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엄청 울어 버리고 싶다는 그 사실이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네가 소외당해 있는 게 아니란 거야. 정말 소외당한 사람은, 눈물이 없단다. 아주 메마른 거지."

"아저씬 어떻게 그걸 아세요?"

끼뇨네스는 담배를 한 개피 꺼내 불을 붙이려 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까닭 없이 성냥이 자꾸 떨리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아냐고? 왜냐하면 내가 지금껏 메말라 있었으니까, 아주 바짝."

소녀는 다시 울상을 짓는다. 그런데 열네 살짜리처럼 아니라 다섯 살배기 같다. 그렇지만 마음을 다시 가다듬고 마침내 레모네이드를 다 마신다. 소녀가 뭔가 말하려 하는데, 끼뇨네스는 소녀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는 걸 눈치챈다. 가면을 뒤집어쓰는 것처럼.

"보세요, 저기들 와요."

모든 게 하향세로 돌아선다. 왜냐하면 소녀의 아빠와 한 여자가 오고 있는데, 그녀는 틀림없이 로살바 같다. 그들은 약속 시간보다 늦게 도착하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공연히 성큼성큼 걸어왔다.

", 네가 여기 있으니 참 다행이야." 로살바가 숨을 몰아쉬며 말한다. "네가 우릴 기다리다 지쳤으면 어떡하나 걱정했어."

"우리가 많이 늦었지." 아빠가 해명을 한다. "시원한 거 한 잔 마실 시간조차 없었단다. 왜 그 칠레사람들 있잖냐, 기억나지? 바르셀로나에서 밤에 만난 사람들 말이지. 그 엘게따 부부와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거든."

"아빠, 로살바 아줌마." 소녀가 자기 물건을 챙기면서 말한다. "끼뇨네스 씨를 소개할게요. 뚜꾸만에서 오신 아르헨티나 분이에요."

"반갑습니다." 이구동성으로 세 사람이 인사를 한다.

"이 아저씨가 정말 잘해주셨어요." 소녀가 덧붙여 말한다. "덕분에 오래 기다리는 시간이 즐거웠을 뿐 아니라, 자살하지 않게끔 설득도 해주셨어요."

로살바는 약간 어리둥절해서 미소를 짓고, 아빠는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선생님 성함이 뭐라..."

"끼뇨네스입니다."

"끼뇨네스 선생님, 제 딸을 용서해주십시오. 젊은애들이 하는 말이 워낙 그렇잖습니까."

"제가 보기엔 영리하고 호감이 가는군요."

"감사합니다." 아빠가 덧붙인다."자 이제 저희가 데려가니 편히 쉬십쇼."

"고마워요, 끼뇨네스 아저씨."

아빠와 로살바가 택시를 잡으려고 하는 동안에 소녀는 두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었다가 끼뇨네스에게 키스를 살짝 날려 보낸다.

"얘야, 제발, 이제 가야지." 아빠가 이번엔 정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재촉을 한다.

"그래." 로살바가 거든다. "아빠 말씀이 맞아. , 가자, 이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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