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슴과 빈 북
머슴과 빈 북
Lev Nikolayevich, Graf Tolstoy
에밀리안은 주인집에서 살고 있는 머슴이었다. 그는 어느 날 일터로 가는 길에 목장을 지나게 되었다. 발검음을 옮기다가 느닷없이 개구리 한 마리가 눈앞에 튀어나와 하마터면 밟을 뻔했다. 그는 가까스로 개구리를 피해서 지나갔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에밀리안 씨!"
그가 뒤돌아보니 거기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에밀리안 씨, 왜 결혼을 안 하세요?"
"나 같은 가난뱅이한테 누가 시집이나 오겠어요?"
그러자 처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세요? 그럼 저를 아내로 맞으시면 어때요."
에밀리안은 몹시 기뻤다.
"거 고마운 말씀이지만 살아갈 일이 큰 걱정이랍니다."
"별 걱정을 다 하시네요. 사람이 잠을 적게 자고 부지런히 일을 하면, 먹고 입는 걱정은 안해도 될 거예요."
"하긴 그렇지요! 그럼 좋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살까요?"
"도시로 가십시다."
그리하여 그들 남녀는 도시로 나왔다. 그녀는 변두리에 조그마한 집을 마련하고 그와 신혼 살림을 차렸다.
하루는 임금님이 거리를 자나가게 되었다. 그들의 집은 길가에 있었으므로 그녀는 임금님을 보려고 밖으로 나갔다.
임금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저 여자는 어디 출신일까?"
그녀의 미모에 반한 임금은 마차를 세우고 에밀리안의 아내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농부 에밀리안의 아내입니다." 그녀가 대답했다.
"너같은 미인이 어떻게 농부의 아내가 되었느냐? 너는 왕비가 되고 싶지 않느냐?"하고 임금이 물었다.
"네, 말씀은 감사합니다마는 저는 농부의 아내로서 만족합니다."하고 그녀는 대답했다.
임금은 얼마 동안 그녀와 이야기를 나눈 후에 궁전으로 마차를 몰았다. 임금은 궁전에 돌아와서도 에밀리안의 아내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밤을 새워가면서 어떻게 하면 에밀리안의 아내를 빼앗아 올 수 있을까 하는 궁리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끝내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다 못해 임금은 신하들을 불러 좋은 방법을 모색하도록 분부했다.
이윽고 신하들이 입을 열었다.
"먼저 에밀리안을 머슴으로 궁전에 불러들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옵니다. 그런 연후에 저희들이 놈을 학대해 죽게 만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과부가 되어 마음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임금은 이 진언을 받아들여 에밀리안에게 사람을 보내어 아내와 함께 궁전에 와서 봉사하라고 분부하였다. 신하가 에밀리안에게 찾아와서 임금의 명령을 전했다. 그러자 그의 아내는 입을 열었다.
"제 염려는 말고 가보세요. 낮에만 그곳에서 일하시고 밤에는 집에 돌아오시면 되잖아요?"
에밀리안은 신하의 뒤를 따랐다. 궁전에 이르자 임금이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아내를 데리고 오지 않고 혼자만 왔느냐?"
"집을 지키고 있는 아내를 무엇하러 데리고 옵니까?"
궁전에서는 에밀리안에게 두 사람의 몫의 일을 시켰다. 그는 말없이 일을 시작했고 저녁 때에는 일을 모두 끝마쳤다. 그러자 시종은 다음 날에는 네 사람 몫의 일을 맡겼다.
일을 마친 에밀리안은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깨끗이 정돈이 되어 있고, 아내는 저녁 준비를 해 놓고 식탁 옆에 앉아 바느질을 하며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난롯불을 활활 지펴 놓고 에밀리안을 맞아들였다. 그녀는 일에 지친 남편에게 음식을 권하면서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물었다.
"일이 이만저만 힘들지 않아요!"하고 그는 말을 계속했다.
"이렇게 과중한 일을 하다가는 필경 쓰러지고 말 거요."
"그래요? 그렇다고 너무 염려하지는 마세요. 그리고 어떻게 해야 일을 제대로 끝낼 수 있을까 신경 쓸 것도 없어요. 부지런히 일을 하노라면 끝마치게 될 거예요."
아내의 위로를 듣고 에밀리안은 잠들었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그는 또 다시 궁전으로 들어가 곁눈질 한 번 팔지 않고 묵묵히 일을 했다. 그리하여 하루의 일을 무난히 끝마치고 어둡기 전에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에밀리안의 일거리는 많아졌다. 그러나 그는 시간 안에 일을 끝마치고 밤이면 집에 돌아와 쉴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이 하여 1주일이 지났다. 궁중에서는 어떤 일을 시켜도 에밀리안을 골탕 먹일 수 없게 되자, 이번에는 힘든 일을 시켰다. 그러나 그것도 별로 소득이 없었다. 에밀리안은 목수일, 석공일 또는 지붕 고치는 일까지도 무난히 해치우고 밤이면 아내에게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어느덧 2주일이 지났다. 임금은 신하들을 불러 책망했다.
"나는 너희들을 그냥 둘 수 없다. 벌써 2주일이 지났는데 무엇들을 하고 있느냐? 에밀리안을 혹사하여 죽여 버리겠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놈은 날마다 밤이면 콧노래를 부르며 돌아가니 대체 나를 놀리는 거냐?"
신하들은 부지런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저희들은 그놈을 호되게 부려서 못 견디게 하려고 했사오나 무슨 일이나 척척 해냅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고 순식간에 해치웁니다. 놈은 어떤 인간인지 지칠 줄을 모릅니다. 그런 까닭에 생각다 못해 이번에는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을 시켰습니다. 하오나 그것마저 무난히 해치웠습니다. 무슨 일을 맡기든지 거침없이 해치우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어떤 마술을 쓰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옵니다. 그런 까닭에 이번에는 아무래도 해낼 수 없는 일을 맡겨 보려고 생각합니다. 다름 아니오라 하루에 큰 교회당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에밀리안에게 하루 동안에 궁전 앞에 큰 교회당을 지으라고 분부하십시오. 그리하여 놈이 그것을 해내지 못 할 때에는 명령을 어긴 죄로 목을 자르면 될 것입니다."
임금은 사람을 시켜 에밀리안을 불러들였다.
"여봐라, 명심해서 듣거라!" 임금은 말을 계속했다.
"너는 이 궁전 앞에 커다란 교회당을 지어야 해. 내일 밤까지 일을 마치면 많은 상을 줄 테지만 마치지 못할 경우에는 처형을 당할 것이다."
에밀리안은 임금의 명령을 받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이젠 죽었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오자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우리는 아무래도 이곳에서 도망쳐야겠소. 그렇지 않으면 죄도 없이 목숨을 빼앗기게 생겼소."
"뭐라구요? 왜 그렇게 겁을 먹고 계셔요?"
아내는 말을 이었다.
"도망갈 필요는 없어요."
"글세 겁을 먹지 않게 생겼나 생각해봐요. 나더러 내일 하루동안에 큰 교회당을 지으라는 거요. 그리고 그것을 끝내지 못하면 목을 자르겠다나? 그러니 별수 있소? 도망치는 수밖에...."
그러나 아내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임금에게는 많은 병정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어디를 가든 잡히지 않을 수 없지요. 도망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우리는 힘이 닿는 데까지 임금의 명령에 따라야 해요."
"그렇지만 생각해 보구려.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어서 식사나 마치고 한잠 푹 주무세요. 그리고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세요. 그러면 일은 잘되어 갈 거예요."
그는 아내의 말을 듣고 잠자리에 누웠다.
이튿날 아침 아내는 그를 일찍 깨웠다.
"어서 궁궐로 나가세요. 그리고 부지런히 일을 하세요. 못과 망치가 있어요. 나가 보시면 당신이 할 일은 거의 다 되어 있을 거예요."
에밀리안이 궁전 앞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커다란 교회당이 거의 세워져 있었다. 에밀리안은 여기저기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저녁 때에는 일을 무난히 마치게 되었다.
임금이 잠을 깨어 궁전에서 광장을 바라보니, 거기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교회당이 서 있고 에밀리안은 여기저기 못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임금은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임금에게는 교회당은 필요치 않았고, 에밀리안을 처형하고 그의 아내를 빼앗으려던 구실이 없어진 것이다. 그렇게 되자 임금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임금은 다시 신하들을 불렀다.
"에밀리안은 또 일을 거뜬히 해치웠다. 그러니 놈의 목을 벨 구실을 어디서 찾는단 말이냐? 그런즉 너희들은 다른 묘안을 궁리해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너희들의 목을 먼저 베어 버릴 테다."
신하들은 궁리 끝에 궁전 주위에 배가 지나다닐 수 있는 강을 파도록 에밀리안에게 분부하도록 진언했다.
임금은 에밀리안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
"너 하루에 망루를 세울 수 있겠지? 이런 일쯤 아무것도 아닐 테니, 내일 중으로 일을 마쳐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네 놈의 목을 벨 테다."
에밀리안은 더욱 놀라서 기가 죽었다.
"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계셔요?"하고 아내가 물었다.
"임금이 새로 어려운 분부라도 내렸나요?"
에밀리안은 자초지종을 아내에게 이야기했다.
"이번엔 도리가 없소. 도망치도록 합시다."
아내가 말했다.
"임금의 병정들이 얼마나 많은데 도망을 쳐요? 어딜 가나 곧 붙잡히고 말 거예요. 그러니 분부대로 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고 무슨 힘으로 분부대로 이행한단 말이요?"
"그리 겁낼 건 없어요. 저녁이나 드시고 푹 주무세요. 내일 아침에는 일이 무사히 되게끔 할 테니까요."
에밀리안은 아내의 말대로 한잠 푹 잤다. 날이 밝자 아내가 흔들어 깨웠다.
"궁궐로 가세요. 준비가 다 되었어요. 다만 궁궐 앞에 있는 강가 근처에 쌓인 흙을 삽으로 평평하게 다지기만 하면 돼요."
에밀리안은 거리로 나섰다. 어느새 궁궐 주변에는 강이 파져 있고, 큰 배도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궁궐 앞 한켠에 흙더미가 쌓여있고 강 옆이 좀 허술했다. 그러므로 그는 그곳을 삽으로 파서 정리하기 시작했다.
임금이 잠에서 깨어보니 어제까지 없던 강이 생기고 배도 왕래하고 있었다. 그리고 곁에서 에밀리안이 삽으로 땅을 고르게 하고 있었다. 임금은 매우 놀랐다. 강에서 배가 오가는 모습을 보고도 임금은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불만스러웠다. '놈은 못 하는 일이 없나 보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을꼬?' 임금은 이렇게 생각하고 신하들을 불러 말했다.
"여봐라! 에밀리안을 기어코 골탕 먹여야겠는데 무슨 좋은 방도가 없겠느냐? 우리가 아무리 지혜를 짜내어 골려주려고 해도 놈은 척척 감당해 내니. 그년을 뺏아 오기는 다 틀렸다!" 신하들은 머리를 짜낸 끝에 임금에게 한 가지 계략을 진언했다.
"에밀리안더러 어딘가에 가서 어떤 알 수 없는 물건을 가져오라고 분부를 내리십시오. 그렇게 되면 놈은 꼼짝 못 하고 걸려들 것입니다. 놈이 어디에 가든 잘못 갔다고 트집을 잡으시고, 어떤 물건을 가져오든지 임금님께서 원한 것이 아니라고 우기시면 됩니다. 그렇게 해서 놈의 목을 자르고 그 아내를 빼앗아 오십시오."
임금은 매우 기뻐하였다.
"음, 거 참 좋은 생각이로구나."
임금은 에밀리안을 불러 분부를 내렸다.
"어디 가서 어떤 알 수 없는 물건을 가져오도록 해라. 만약 내 분부를 어기면 네 목을 자를 테다."
에밀리안은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임금의 분부에 대해 말했다. 아내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것은 필경...."하고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당신을 기어코 해치려고 신하들이 흉계를 꾸며 임금에게 말했나 보군요. 이번에는 조심하셔야 해요."
그녀는 한동안 골똘히 생각한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거리가 좀 멀어서 수고스러울 테지만 어떤 병정의 어머니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세요. 그리고 그 노파가 뭘 줄 테니 갖고 궁궐로 가세요. 저도 그리로 가겠어요. 이렇게 된 이상 저도 이제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군요. 꼼짝 못 하고 붙들려 가게 생겼어요. 그렇지만 오래 붙잡혀 있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도 그 노파가 시키는 대로만 해 주신다면 저를 곧 구해낼 수 있을 거예요."
아내는 남편에게 떠날 준비를 시키고 자루 하나와 방추를 내주었다.
"이걸 노파에게 주세요. 그러면 노파는 당신이 제 남편인 줄 알게 될 거예요."
그녀는 남편에게 길을 가르쳐 주었다.
에밀리안은 길을 떠났다. 거리를 지나 한참 갔더니 병정들이 훈련은 하고 있었다. 이윽고 병정들이 훈련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자, 에밀리안은 가까이 다가가서 말을 건넸다.
"여보시오. 어딘가에 가서 알 수 없는 물건을 가져오려면 어떻게 하면 좋지요?"하고 묻자, 병정들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누구한테 그런 부탁을 받았소?"하고 그중 한 병정이 대답했다.
"실은...."
병정은 말을 계속했다.
"우리도 어딘지 모르는 곳을 향해 진군하고 있소. 그러니 좀처럼 목적지에 닿을 수 없소. 그리고 우리도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물건을 찾고 있는데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소. 그러니 당신에게 뭐라고 일러줄 수 있겠소?"
에밀리안은 병정들과 함께 한동안 휴식을 취하고 나서 다시 길을 떠났다. 그는 얼마 후, 어느 숲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움막이 있고, 그 안에 병정의 어머니가 꿇어앉아 눈물을 흘리면서 베를 짜고 있었다. 노파는 베를 짜면서 눈물로 손끝을 적셨다. 그녀는 에밀리안을 보고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어떻게 여기까지 왔소?"
에밀리안은 노파에게 방추를 꺼내 보이고 아내가 자기를 그곳으로 보낸 사연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노파는 싱글벙글하면서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에밀리안은 지금까지 겪은 일을 상세히 말했다. 즉 아내와 결혼하게 된 동기며, 도시로 이사한 일, 임금에게 불려가서 여러 가지 어려운 분부를 받아 왔다는 사실, 망루를 세우고 배가 다니는 강을 판 일이며, 임금이 어딘가에 가서 알 수 없는 물건을 찾아오라는 명령을 한 경위를 이야기했다. 노파는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나서 울음을 그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드디어 때가 된 모양이군."
이어 노파는 에밀리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과히 염려할 것 없어요. 이리로 와요. 뭐 좀 먹어야지." 에밀리안이 식사를 마치자 노파는 그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일러주었다.
"여기 이 실뭉치를 굴려서 그 뒤를 따라가야 해요. 한참 따라가면 바닷가에 이르게 될 거요. 바닷가 근처에는 큰 거리가 있는데, 그 맨 끝에 있는 집에 가서 하룻밤 묵어가겠다고 부탁해요. 그때 당신에게 요긴한 것이 눈에 띌 거요."
"그렇지만 할머니,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이 자기 부모의 말보다도 그 물건의 말을 더 잘 들으면, 그것이 바로 당신이 찾는 것인 줄 알아야 해요. 그걸 임금에게 갖고 가란 말이오. 임금은 그런 걸 누가 갖고 오라더냐고 시치미를 뗄 거요. 그때 당신은 그렇다면 두들겨 부숴 버리겠다고 말을 하고서, 그것을 강기슭에 갖고 가 부숴서 물속에 처넣으시오. 그렇게 하면 당신의 아내도 도로 찾아올 수 있고, 또 내 눈물로 말릴 수 있을 거요."
에밀리안은 노파와 헤어졌다. 그는 밖으로 나와 실뭉치를 굴렸다. 그것은 줄곧 굴러 드디어 바닷가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과연 큰 도시가 있고, 그 맨 끝에 높다란 집이 한 채 있었다. 에밀리안은 그 집에서 하룻밤 묵게 해 달라고 간청을 했다. 주인은 쾌히 승낙하여 그는 곧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주인이 벌써 일어나 아들을 깨우고 장작을 가져오라고 이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아직 일러요."하고 아들이 말했다.
"서두를 것 없잖아요."
그러자 어머니가 난롯가에서 말했다.
"어서 갖다 와라. 아버지는 뼈가 쑤셔서 그러시는 거야. 아버지께서 장작을 나르시는 걸 봐야 하겠니. 조금도 이르지 않다."
그러나 아들은 몇 마디 중얼거리더니 다시금 자리에 누워버렸다. 그러자 별안간 길가에서 사나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들은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섰다. 그는 급히 옷을 주워 입고 거리를 향해 뛰쳐나갔다. 에밀리안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 뒤를 좇았다. 그것은 무슨 소리였을까. 아들에게 부모의 말보다도 더 위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그는 그것을 알아보고 싶었다.
에밀리안의 눈에는 배에 무엇인가 움켜 안고 쾅쾅 두드리면서 거리를 걷고 있는 웬 남자가 보였다. 사나운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남자였다. 그리고 그 소리가 아들을 순종케 했던 것이다. 에밀리안은 그곳으로 급히 뛰어가서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작은 대야처럼 둥글고 양쪽에 가죽을 씌운 물건이었다. 그는 물었다.
"이게 뭡니까?"
"북이요." 하고 남자가 대답했다.
"그럼 속은 비었겠군요."
"그럼요." 사내가 대답했다.
에밀리안은 매우 놀랐다. 그는 그 북을 자기에게 팔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내는 좀체로 승낙하지 않았다. 에밀리안은 단념하고 북을 치며 가는 사내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그는 하루 종일 따라다녔다. 이윽고 그는 남자가 누워서 잠자는 틈에 몰래 그 북을 훔쳐 가지고 도망쳤다.
그는 쏜살같이 달음질쳐 자기가 살던 마을에 이르렀다. 아내는 집에 없었다. 그가 집을 비운 다음 날 임금이 궁궐로 데려간 것이다.
에밀리안은 곧 궁궐로 달려가 관리들에게 외쳤다.
"나는 어딘가에 가서 알 수 없는 물건을 가지고 돌아왔소."
관리들은 임금에게 이 말을 전했다.
임금은 에밀리안에게 내일 다시 오라고 일렀다.
"저가 오늘 온 것은...."하고 그는 말했다.
"임금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서 임금님께 이것을 전해 주십시오. 임금님께서 속히 이곳까지 나오시도록 말씀드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직접 들어가 뵙겠습니다."
이윽고 임금이 나타났다.
"너는 그사이 어디 갔었느냐?"
임금이 물었다.
에밀리안은 바른 대로 대답을 하였다.
"당치도 않은 곳에 갔구나."하고 임금은 말을 계속했다.
"그래 무엇을 갖고 왔느냐?"
에밀리안은 임금에게 북을 보이려고 했으나 임금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래요?"하고 에밀리안은 말했다.
"그럼 두들겨 부숴 버려야지. 쳇, 악마에게나 넘겨줘야겠다."
에밀리안은 북을 어깨에 메고 둥둥 치며 궁궐을 떠났다. 그때였다. 임금의 군인들이 에밀리안의 뒤를 따라나서면서 에밀리안에게 경례를 부치며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임금은 창문을 통해 이 광경을 바라보고 병정들에게 에밀리안의 뒤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들은 임금의 만류는 귀 밖으로 흘려버리고 저마다 에밀리안을 따라나섰다. 임금은 마침내 에밀리안에게 아내를 돌려줄 터이니 그 대신 북을 자기 손에 넘겨달라고 말했다.
"그건 안 됩니다."
에밀리안은 딱 잘라 말했다.
"저는 이 북을 두드려 강물에 던지라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에밀리안은 계속 북을 치면서 강가에 이르렀다. 병정들도 뒤좇아 왔다. 에밀리안은 강가 언덕으로 올라가 북을 부숴 버린 후 그 부스러기들을 모조리 강물에 던져 버렸다. 그러자 병정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 버렸다. 에밀리안은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 임금도 그를 괴롭히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내외는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