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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에서

Bollnow 2024. 4. 20. 04:40

해변에서

Katherine Mansfield

 

1

이른 아침,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고 '초승달' 해변은 온통 하얀 바다안개로 덮여 있다. 풀이 무성한 후미진 만의 커다란 언덕도 잔뜩 안개에 싸여 있다. 언덕이 어디서 끝나고 단지와 방갈로가 어디서 시작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자갈길도 그 저쪽의 단지와 방갈로도 사라지고, 거기에서 더 저쪽에 있는 불그스름한 풀이 덮힌 하얀 모래언덕은 전혀 보이지를 않았다. 물가가 어디쯤이고 바다가 어디에 있는지 눈짐작이 될 만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잔뜩 이슬이 내려 풀은 새파랗다. 물방울이 풀잎에 매달려 떨어지지도 않고 은빛 깃털을 단 줄기가 긴 토이토이풀이 축 늘어져서 시들고, 방갈로의 정원에는 마리골드와 석죽이 흠뻑 물기를 머금은 채 땅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싸늘한 푸크샤가 흠뻑 젖고, 납작한 금련화 잎사귀에 진주알 같은 이슬이 맺혀 있다. 어둠 속에서 바다가 철썩철썩 밀려들어, 하나의 커다란 파도가 덮어 씌우고 난 다음 같다. 쏴아쏴아 하고- 어디까지나? 한밤중에 눈뜬 사람에겐 크나큰 물고기가 창문으로 뛰어들었다가 나가는 것이 보였을지도 모른다......

- , 하고 졸린 듯이 바다가 하품을 했다. 풀숲에서 시냇물소리가 들려왔다. 미끄러운 돌멩이 사이를 졸졸 누비면서 빠르게, 고사리풀이 난 웅덩이에 괴었다가 다시금 흘러내려 간다. 커다란 나뭇잎에 팔짝 물방울이 튄다. 그런데 뭣인가 그 외에도- 뭣일까- 미세한 것이 흔들리고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잠해진다. 누가 엿듣고 있는 것 같다.

'초승달' 해변의 끝을 돌아간 곳, 깨진 바위들이 덧쌓인 틈서리로 한 무리의 양떼가 나타났다. 작지만 움직이는 푹신한 양떼였다. 냉랭하고 조용한 분위기에 겁을 집어먹었는지 막대 같은 가느다란 다리로 재빨리 달려간다. 그 뒤를 늙은 목양견이 물에 젖은 다리에 모래를 묻히고, 코로 땅 냄새를 맡으면서 뭔가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기나 한 듯이 무뚝뚝한 얼굴로 달려왔다. 바위 틈에 난 그 길에 목자가 나타났다. 여위고 허리가 꼿꼿한 노인인데, 작은 물방울이 줄무늬에 튄 프라이즈 외투를 입고 무릎 밑을 끈으로 묶은 빌로드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접은 청색 손수건을 챙에 감은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한 손은 혁대에 찌르고, 다른 한 손은 반들반들 길이 든 그럴 듯한 황색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으면서 나직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표표하게 멀리서 들려오는 그 소리는 슬프고 다정하게 들려왔다. 늙은 개는 예전 버릇으로 한두 번 껑충 뛰었는데, 그 경솔함을 뉘우치기나 한 것처럼 별안간 멎어서서 주인 곁을 두세 번 점잔을 빼며 걸었다. 양이 토닥토닥 잰 발로 달리며 울음소릴 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바다 밑에서 환상의 양떼가 그 소리에 응답했다. '음매 음매.' 잠시 모두 같은 곳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전방에는 얕은 물웅덩이가 있는 자갈길이 펼쳐졌다. 똑같은 젖은 풀숲이 양쪽으로 보이고, 똑같은 그림자 비슷한 울타리가 있었다. 그러자 뭔가 무서운 커다란 물체의 모습이 나타났다. 두 팔을 벌리고 머리칼이 산산이 흩어진 거인이다. 그것은 스태브즈 부인의 가게 밖에 서 있는 커다란 고무나무였다. 양떼가 그곳을 지나갈 때 유칼리의 강한 냄새가 풍겨왔다. 목자는 불던 휘파람을 그쳤다. 붉은 코와 젖은 수염을 소매로 문지르고, 눈을 가늘게 뜨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막 해가 떠오르려는 참이었다. 놀랄 만한 속도로 안개가 걷혔다. 산산이 흩어져서 평탄한 들판부터 개기 시작하여 풀숲 위로 말려서 올라가자, 갑자기 도망이라도 치듯이 꺼지고 말았다. 은빛 광선의 폭이 확대됨에 따라서 크게 뒤엉키어 소용돌이치는 줄무늬가 밀고 밀리며 흘러갔다. 저 멀리 활짝 갠 푸른 하늘이 물웅덩이에 비쳐서 전신주를 타고 흐르는 물방울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반짝이면서 물결치는 바다는 이미 그쪽을 보면 눈이 부실 만큼 환했다. 목자는 윗주머니에서 대통이 달린 파이프를 꺼내더니 얼룩무늬가 든 담배 덩어리를 찾아내어, 그것을 얇게 두세 장 벗겨 들고는 파이프에 담았다. 풍채가 중후한 잘 생긴 노인이다. 그가 담배에 불을 댕겨 푸른 연기가 머리 위에서 맴돌자, 개는 가만히 지켜보면서 주인이 늘 짓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음매 음매."

양들은 부채꼴로 퍼졌다. 그리하여 겨우 피서객들의 집을 떠났을 무렵, 맨처음 잠든 사람이 몸을 뒤척이면서 졸린 듯이 머리를 들어 올렸다. 양 울음소리가 작은 아이의 꿈속에서까지 울리자...... 아이는 팔을 들어 올려서 잠이 든 채 폭신폭신한 귀여운 작은 양을 끌어 당겨 껴안았다. 그리고 나서 최초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바넬 가의 고양이 플로리였다. 문기둥에 앉아서, 여느 때처럼 아직 이르지만 우유 배달하는 여자애를 기다리고 있었다. 늙은 목양견을 보자 재빨리 뛰어올라가서 등을 둥글게 오므리고 얼룩진 머리를 빼며 좀 결벽스럽게 진저리를 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 징그러워. 왜 이렇게 덜렁대는 느낌이 드는 못된 사람일까?"

하고 플로리는 말했다. 그러나 목양견은 쳐다보지도 않고 다리를 옆으로 흔들면서 느릿느릿 지나갔다. 하나 고양이를 바보 같은 계집애라고 생각한 증거로 한쪽 귀를 씰룩거렸다.

아침 산들바람이 풀숲에서 일어나 나뭇잎과 축축한 흙냄새가 바다의 예리한 냄새에 뒤섞였다. 무수한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검은 방울새 한 마리가 목자의 머리 위를 날다가 작은 가지 끝에 앉더니 해가 있는 쪽을 향해서 가슴의 깃털을 곤두세웠다. 그때 양떼는 어부의 오두막집을 지나서 우유 배달하는 소녀 리라가 늙은 할머니와 함께 사는 작은, 불에 그을린 것처럼 보이는 '' 앞을 지나갔다.

양들이 누런 습지에 잘못 들어가서 목양견 왓구가 질퍽거리며 뒤쫓아 무리를 휘몰아 앞장서서는 '초승달' 해변으로부터 '날씨' 포구 쪽으로 통하는 좀 더 가파롭고 좁은 암도(岩道)로 나아갔다.

"음매 음매."

마른 길을 양떼가 비틀거리며 지나가는 동안에 갸날픈 울음소리가 났다. 목자는 파이프를 작은 대통만 밖에 내밀고 윗주머니에 꽂았다. 곧 이어서 표표한 휘파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왓구는 냄새 나는 것을 찾아 바위 위로 달려가더니 시무룩해서 돌아왔다.

양떼는 깡총깡총 뛰거나 서로 받고 재촉하면서 해변 모퉁이를 돌아갔다. 목자도 그 뒤를 따라 보이지 않게 되었다.

 

2

잠시 후, 한 방갈로의 뒷문이 열리더니 거친 무늬가 든 해수욕복을 입은 사나이가 단지를 가로질러서 달려왔다. 그는 울타리를 뛰어넘고 수북한 억새풀을 헤치고 달려 움푹 파인 데서 모래언덕 쪽으로 기어 올라가더니, 열심히 뛰어서 구멍투성이인 커다란 돌을 넘고 차디차게 젖은 작은 돌을 넘어 기름처럼 빛나는 굳은 모래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팔짝팔짝 스탠리 바넬이 열심히 물가에서 달려 나오자 발목에서 물이 거품을 일으켰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내가 첫째다. 이번에도 다른 사람들을 이겼다. 그는 몸을 급히 굽혀서 머리와 목을 물에 적셨다.

"겨레여, 잘 왔노라. 그대 씩씩한 자여."

유창한 베이스의 목소리가 바다 저쪽에서 울려왔다.

이거 안 되겠는걸, . 얼굴을 쳐드니 스탠리의 눈에 멀리 수면에 떠오른 검은 머리통과 들어 올려진 팔이 보였다. 죠나단 트라우트다- 저 녀석 한 발 앞서서 바다에 먼저 들어갔군.

"찬란한 아침이야."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 좋은 아침이야."

스탠리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왜 저 녀석은 자기 가까운 바다에 가만히 있지 않고 이곳이 어디라고 여기까지 침입하는 것일까. 스탠리는 물을 차고 내닫자 손으로 끌어당기며 헤엄치기 시작했다. 죠나단도 지지 않고 그에게로 접근해 왔다. 검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찰싹 달라붙어서 빛났다. 짧은 머리가 빛나고 있었다.

"간밤에 어처구니없는 꿈을 꿨거든."

하고 그는 소리쳤다.

이 사내는 대체 어찌된 셈일까. 그 집요한 입담에 tm탠리는 신경이 곤두섰다. 더구나 노상 같은 이야기다- 언제나 자기가 꾼 시답잖은 꿈 이야기거나 엉뚱한 발상, 책에서 읽은 실없는 소리 따위를 늘어놓는다. 스탠리는 벌렁 누워서 두 발로 물을 찼다. 인간 소용돌이 꼴이다. 하나 그래도......

굉장히 높은 벼랑에 매달려 밑에서 누가 소리치는 꿈을 꿨다구."

그럴 테지, 하고 스탠리는 생각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수영을 멈추고 "어이 트라우트" 하고 불렀다.

"오늘 아침에는 바쁘단 말이야."

"오늘 아침엔 뭐라구?"

죠나단은 정말 놀랐다- 어쩌면 놀라는 척해 보였는지도 모른다-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모습을 나타내더니 숨을 토해 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말야."

하고 스탠리는 말했다.

"시간이 없어- 꾸물댈 여유가 없단 말이야. 이젠 서서히 끝내지 않으면 안돼. 급하다구. 오늘 아침에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어- 알겠나?"

스탠리가 미처 말하기도 전에 죠나단은 몸을 뺐다.

"잘 있거라, 벗이여."

하고 온건한 베이스의 목소리가 말했다. 그리고 그는 잔물결도 일으키지 않고 물속으로 헤엄쳐서 떠나갔다...... 괘씸한 녀석이군. 덕분에 스탠리의 물놀이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어쩌면 저 놈은 손댈 수도 없는 바보일까. 스탠리는 바다 한가운데로 향해 갔다가 급히 헤엄쳐서 되돌아오자 물가로 달려 나왔다. 속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죠나단은 아직도 물속에 있었다. 두 손을 지느러미처럼 부드럽게 움직여서 키 크고 깡마른 몸이 파도에 흔들리는 대로 뜨고 있었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온갖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탠리 바넬이 좋았다. 분명히 가끔 스탠리를 놀려서 우롱해 주고픈 악마 같은 소망을 품는 일이 있었지만 속으로는 미안하게 여기고 있었다. 만사를 성실하게 하려는 스탠리의 결의에는 뭔가 슬픔을 유발하는 데가 있었다. 언젠가는 '아웃'이 될 것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하나 그렇게 되면 그는 무슨 큰 실패를 저지를 것이다. 그 순간 커다란 파도가 죠나단을 들어 올려서 치더니 즐거운 소리를 지르며 물가에 부딪쳤다. 깨끗하다. 또 하나의 파도가 밀려온다. 이것이 인생을 사는 방법이다- 분별없이 무턱대고 힘이 다할 때까지. 물 밑에 발을 대자 그는 자국이 난 굳은 모래에 발가락을 누르면서 기슭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거나 유연하게 버티며 인생의 물결의 간만에 역행하지 말고 되는 대로 몸을 내맡기는 일- 이것이 긴요한 안목이다. 살아가는 일- 살아가는 일. 쏟아지는 빛을 쐬고 자신의 아름다움에 미소 짓는 듯한 이 신선하고 깨끗한, 더 말할 수 없는 아침이 속삭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정말' 하고.

그러나 물에서 나오자 죠나단은 추워서 파래졌다. 온몸이 아렸다. 누군가에게 피를 빨아 먹히고 있는 느낌이었다. 몸부림치며 근육을 완전히 굳힌 채 터덜터덜 물가로 올라오면서 그도 또한 오늘 아침의 물놀이가 좋지 않았다고 느꼈다. 바다에 너무 오래 있었던 것이다.

 

3

감색 사지 양복 저고리를 입고 빳빳한 칼라에 물방울무늬 넥타이를 맨 스탠리가 모습을 나타냈을 때, 거실에는 베릴 혼자만이 있었다. 그는 기분 나쁠 만큼 옷에 손질을 하고 있었다. 그날 하루거리에 나가는 참이었다. 의자에 앉자 그는 시계를 꺼내어 자기 접시 옆에 놓았다.

"겨우 이십오 분뿐이 시간이 없어."

하고 그는 말했다.

"죽 준비가 되어 있는지 어쩐지 보아 주지 않을래, 베릴."

"어머니가 보러 가셨어요."

하고 베릴은 말했다. 테이블에 앉아 그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고마워."

스탠리는 한 모금 마시더니 ", " 하고 어이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탕을 잊어버렸군."

"어머, 죄송해요."

하지만 그래도 베릴은 설탕을 넣으려 하지 않았다. 설탕 항아리를 밀어냈다. 어찌된 셈일까. 자신이 설탕을 넣으면서 스탠리는 푸른 눈을 크게 떴다. 그 눈이 떨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재빨리 누이동생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어떻게 된 거 아니야."

하고 칼라를 만지작거리면서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베릴은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든 접시를 뒤집어엎었다.

"" 가볍게 대답하고, 스탠리를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어찌할 수 없잖아요."

"하기야 없지,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뭔가 너......"

마침 그때 문이 열리며 어린 소녀 셋이 모습을 나타냈다. 똑같은 푸른 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갈색 다리는 맨발이고 각기 머리를 땋아서 흔히 말하는 '말꼬리' 모양으로 해서 핀으로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 뒤에서 쟁반을 손에 든 페아필드 부인이 따라왔다.

"조심해, 모두."

하고 부인은 주의시켰다. 과연 세 소녀는 모두 대단히 조심을 했다. 물건을 나르게 한 것이 기뻤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아침 인사를 했나요?"

", 아줌마."

일동은 스탠리와 베릴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잘 잤니, 스탠리?"

() 페아필드 부인이 그에게 접시를 건네주었다.

"일찍 일어나셨습니다. 우리 아드님은 뭘 하고 있죠?"

"어른이 다 됐어. 어젯밤에는 한 번밖에 깨질 않았지. 기분 좋은 아침이야."

노부인은 그 자리에 서서 한 손을 빵에 얹고 열린 창문으로 정원을 내다보았다. 바다가 울렸다. 열어 제친 창문으로 니스 칠을 한 노란색 벽과 카펫을 깔지 않은 마룻바닥에 햇살이 비쳤다. 테이블 위의 것이 모두 반짝반짝 빛났다. 그 한가운데에 노랑과 빨강의 금련화를 꽂은 지 오래된 샐러드용 접시가 놓여 있었다. 부인은 미소 지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기색이 그 눈에 빛나고 있었다.

"그 빵조각을 하나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고 스탠리가 말했다.

"합승이 오기까지는 십이 분밖에 남지 않았어요. 누가 내 구두를 하녀에게 내 주었지요?"

"벌써 닦아 놓았어."

페아필드 부인은 침착하게 말했다.

"케자이아, 어째서 그런 몹쓸 짓을 하는 거지?"

하고 베릴이 난처해하며 외쳤다.

"나요?"

케자이아는 숙모를 바라보았다. 무슨 짓을 했다는 것일까? 다만 죽() 한가운데에 도랑을 파고 물을 흘려보내서 양 기슭을 먹고 있을 뿐인데. 더구나 그것은 매일 아침 하고 있는 일이라서 이제까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일인데.

"왜 이자벨이나 로티처럼 제대로 음식을 못 먹는 거니?"

어른들은 무리한 말만 하거든.

"하지만 로티는 언제나 부도(浮島)만 만드는 걸요. 그렇지, 로티?"

"난 만들지 않아요."

하고 이자벨은 딱 잘라서 말했다.

"나는 설탕을 치고 우유를 넣어서 곧 먹어요. 먹는 것을 장난감으로 하는 것은 갓난애뿐이에요."

스탠리는 의자를 뒤로 밀어놓고 일어났다.

"구두를 내 주시지 않겠습니까, 어머니. 그리고 베릴, 식사를 마쳤으면 급히 문간으로 가서 합승을 세워 주시지 않겠소? 이자벨, 어머니 계신 데로 달려가서 아버지 모자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 물어다오. 아 잠깐- 너희들 아버지의 스틱을 갖고 놀지 않았니?"

"아뇨."

"한데 여기 놔뒀단 말이야."

스탠리는 소리쳤다.

"이 구석에 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누가 가지고 있지? 얼른 내놔라. 시간이 없어. 스틱이 없으면 안 돼."

하녀 앨리스도 스틱을 찾는 데 동원되었다.

"어쩌면 부엌에서 불을 때는 데 사용하고 있지 않았을까?"

스탠리는 린다가 자고 있는 침실로 황급히 뛰어들었다.

"돼먹지 않았어. 내 물건은 하나도 옆에 제대로 붙어 있지를 않아. 이번에는 스틱을 가져가 버린 녀석이 있거든."

"스틱? 무슨 스틱이요?"

이런 말을 할 때의 린다의 애매한 태도는 본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스탠리는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도 내게 동정하지 않는군,

"합승이에요, 스탠리."

문간에서 베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탠리는 린다에게 팔을 내저었다.

"다녀옵니다. 할 틈도 없다" 했는데, 이것도 그녀에 대한 일종의 시위였다.

그는 실크햇을 움켜쥐고 문을 뛰쳐나가서는 정원의 오솔길을 걸었다. 과연 합승이 기다리고 있었다. 베릴은 열린 문에 기대서 풀린 기분 좋은 표정으로 누구에게나 웃는 얼굴을 보이고 있었다. 여자들의 박정함, 그들은 스틱이 없어지지 않도록 조심해 주지도 않은 주제에, 내가 자기들을 위해서 억척스럽게 일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거든. 켈리가 회초리로 말 등을 후려쳤다.

"다녀오세요, 스탠리."

기분 좋고 명랑하게 베릴이 외쳤다.

'다녀오세요'라고만 한다면 아무 내용도 없는 이야기다. 멍하니 서서 한 손으로 눈을 가려 햇살을 막고 있지 않은가. 더욱이 입장이 곤란한 것은 체제상 그도 똑같이 '다녀옵니다' 하고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자 베릴이 돌아서서 깡총 뛰더니 집으로 달려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저 여자는 나를 쫓아내서 기뻐하고 있는 거다.

그렇다, 베릴은 고마워하고 있었다. 거실에 달려들어서, "떠났어요"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베릴, 스탠리는 떠났니?"

작은 플란넬 저고리를 입은 아기를 안고 노() 페어필드 부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떠났어?"

"떠났어요."

아아, 가슴이 놓인다. 남자가 집에 없으면 전혀 다르다. 서로 부르는 목소리까지 변한다. 비밀을 서로 나눠 주고 받기나 하듯이 따뜻하고 부드럽게 울린다. 베릴은 테이블 있는 데로 갔다.

"차 한 잔 더 하시면 어때요, 어머니. 아직 뜨거워요."

어쨌든 이것으로써 이제는 자기들 좋을 대로 해도 좋다는 사실을 축복하고 싶었던 것이다. 방해하는 남자는 없어졌다. 하루 진종일 완전히 자기들 마음대로다.

"아냐, 괜찮다."

노 페어필드 부인은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부인이 갓난애를 흔들어 올리면서 "바바바- 바아"라고 하는 모습에서 그녀도 똑같은 기분임을 알았다. 새장에서 나온 어린 새처럼 소녀들은 단지로 달려갔다.

하녀 앨리스조차 부엌에서 접시를 닦으며 그 기분에 물들어 물통의 귀중한 물을 함부로 써서 없앴다.

"사내가 뭐람."

하고 그녀는 말했다. 차 끓이는 주전자를 개숫물통에 넣고 거품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물속에서 누르고 있었다. 그 주전자가 남자이고 익사하기에는 너무나 아깝다고 말하는 듯이.

 

4

"기다려, 이자벨. 케자이아, 기다리라니까."

불쌍하게도 아직 로티가 뒤에 남았다. 울타리의 층계를 혼자서 넘는 것이 무섭고 힘들기 때문이다. 첫 단을 올라서자 벌써 무릎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기둥을 잡았다. 그리고 한쪽 발을 내디뎌 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한데 어느 발부터? 도저히 결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마침내 될 대로 되라는 듯이 쾅 하고 한 다리를 내딛자- 저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몸이 아직 반은 단지 안에 있는데 반은 억새풀더미에 내딛고 있는 것이다. 로티는 기둥에 매달려서 크게 소리쳤다.

"기다려."

"기다리면 안 돼, 케자이아."

하고 이자벨이 말했다.

"저 아이는 바보라구, 언제나 떠들어대기만 하니까. , 가자."

케자이아의 셔츠를 잡아당겼다.

"함께 오면 내 바께쓰를 쓰도록 해 주겠어."

다정하게 말했다.

"네 것보다 커요."

하나 케자이아는 로티를 혼자 놔두고 갈 수가 없었다. 뛰어서 돌아왔다. 로티는 얼굴이 벌개져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 또 한 발을 드는 거야."

하고 케자이아는 말했다.

"어디로?"

로티는 산꼭대기에서처럼 케자이아를 내려다보았다.

", 내 손 있는 대로야."

케자이아는 그 장소를 두드렸다.

"어머, 거기라구."

로티는 깊이 한숨을 내쉬고 또 한쪽의 발을 들었다.

"그리고- 한 바퀴 돌아서 앉으며 미끄러지는 거야."

하고 케자이아는 말했다.

"하지만 앉을 자리가 없잖아. 케자이아."

그러나 마침내 어떻게 되었다. 그렇게 하고 나자 로티는 몸서리치고는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난 울타리를 넘는 것이 점점 숙달되는 모양이지, 케자이아."

로티는 희망에 찬 성질이었다.

연분홍과 푸른색 챙 넓은 모자가 이자벨의 밝은 붉은색 모자 뒤에서 그 미끄러운 언덕을 올라왔다. 정상에서 일동은 어디로 갈 것인가를 정하고, 누가 선착을 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멈춰 섰다. 뒤에서 보니, 지평선을 지고 서서 힘겨운 듯 삽을 휘두르고 있는 일동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소인원의 탐험대 같았다.

새뮤얼 죠세프스 집안의 아이들이 모두 벌써 그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 거드는 여자와 함께였다. 접었다 펴는 의자에 앉아서 목에 매단 호각과 행동을 지휘하는 작은 막대로 혼란을 막고 있다. 이 아이들은 결코 제멋대로 놀지 않고 자기들만으로 게임을 하지도 못했다. 자칫하면 틀림없이 사내아이가 계집아이 목에 물을 끼얹거나, 계집아이가 사내아이의 포켓에 작고 검은 게를 넣으려고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에스 제이 부인과 불쌍한 여자 조수는 아이들을 '즐겁게 놀고 장난을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매일 아침 '일정'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전부가 경쟁이나 뜀박질, 차례돌리기 내기였다, 만사가 귀청을 울리는 여자 조수의 호각소리로 시작되고 그 소리로 끝났다. 상품까지 붙어 있다- 여자 조수가 떫은 미소를 지으면서 불룩한 삼노끈 광주리에서 끄집어낸 커다란, 지저분한 종이꾸러미였다. 아이들은 상품에 욕기가 나서 맹렬하게 싸우고 서로 속이고 팔을 꼬집었다- 꼬집는 일에는 모두 숙달되어 있다. 바넬 가의 아이들이 꼭 한 번 함께 놀았을 때 케자이아가 상품을 탄 일이 있다. 종이를 석 장쯤 풀자 작은 녹이 슨 옷걸이가 나왔다. 모두 왜 그렇게 법석을 떠는지 알 수 없었다.

하나 이제 케자이아들은 새뮤얼 죠세프스 집안의 아이들과는 놀지 않았고, 그 모임에도 가지 않았다. 죠세프스 집안은 언제나 이 해변에서 아이들의 모임을 열었는데 언제나 똑같은 음식이 나왔다. 커다란 세숫대야에 담은 프루츠 샐러드와 넷으로 자른 케이크 빵, 그리고 물그릇에 담은, 깨끗한 여자의 말을 빌자면 '리무나데야'. 저녁에 돌아올 때는 반드시 프록의 가장자리 장식이 반쯤 찢어지고, 실로 짠 앞치마에 뭔가가 철떡 묻어 있다. 그리고 뒤에 남은 그 집의 아이들은 잔디에서 야만인같이 뛰어다니고 있다. 엉망진창인 것이다.

해안 반대쪽 물가에서 작은 사내아이 둘이 반바지를 걷어 올리고 거미처럼 뛰어다니고 있다. 하나는 모래를 파고, 다른 하나가 작은 바께쓰에 물을 퍼서는 수면에서 파닥파닥 들락거린다. 트라우트 집안의 형제인 피프와 래그즈다. 그런데 피프는 모래를 파고, 래그즈는 거드는 데 열중해 있었으므로, 사촌 자매들이 바로 옆에 왔는데도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봐요."

하고 피프가 말했다.

"이런 것이 발견됐어요."

그리고 모두에게 우그러져 못쓰게 된 헌 구두를 보였다. 세 소녀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런 걸 어디에 쓸 셈이지?"

하고 케자이아가 물었다.

"간수해 두는 거야."

피프는 경멸하는 얼굴로 "찾아낸 물건이 아닌가- 안 보여?"

확실히 케자이아에게는 그것이 보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물건이 모래에 묻혀 있어"

하고 피프는 설명했다.

"난파선에서 버리거든. 보물이지. 여러 가지가 발견돼...... 그야-"

"한데 왜 래그즈가 그렇게 물을 끼얹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하고 로티가 물었다.

"적시는 거야."

하고 피프가 말했다.

"조금 다루기가 쉬워지지. 더욱더 끼얹으라구. 래그즈."

마음이 착한 래그즈는 뛰어다니면서 물을 끼얹었다. 물은 코코아 같은 다갈색이 되었다.

"이봐, 어제 발견한 것을 보여 줄까?"

수수께끼 같은 말투로 말하자, 피프는 모래에 삽을 꽂았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거야."

모두 약속했다.

"하나님 맹세하겠습니다, 라고 말해."

소녀들은 그렇게 말했다.

피프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자 셔츠의 가슴에 오랫동안 그것을 문지르고, 다시 한 번 입김을 불어서 또 문질렀다.

", 한 바퀴 도는 거야."

일동은 한 바퀴를 돌았다.

"모두 같은 쪽을 보라구. 가만히, 자아."

그는 손바닥을 펴서 뭔가 빛나는 것을 햇빛에 들어 보였다. 정말 예쁜 초록색 돌이다.

"에머랄드다."

피프는 엄숙하게 말했다.

"정말이야, 피프?"

이자벨조차 감동했다.

그 예쁜 초록색 돌은 피프의 손가락 끝에서 춤추는 것처럼 보였다. 베릴 아줌마 반지에는 에머랄드가 붙어 있다. 한데 대단히 작다. 이것은 별만큼 크고 훨씬 더 아름답다.

 

5

아침나절이 지나자 사람들이 모두 모래언덕을 넘어서 나타나 멱을 감으러 물가로 내려왔다. 열한 시에는 피서객인 여자와 아이들이 바다를 차지하기로 양해가 되어 있었다. 맨 먼저 여자들이 옷을 벗고 해수욕복을 입은 후 스폰지로 만든 야릇한 모자로 머리를 가렸다. 그리고는 아이들의 단추를 따주었다. 물가에 옷가지와 신이 작은 산더미처럼 쌓였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돌을 지질러 놓은 커다란 여름모자가 거대한 조개껍질처럼 보인다. 이상한 것은 뛰고 웃는 사람들이 모두 물속으로 달려 들어가고 나면 바닷소리조차 변하고 만다. 라일락 빛 무명옷을 입고 모자를 턱 밑에서 잡아맨 페어필드 노부인은 어린 손자들을 모아놓고 준비를 시켰다. 트라우트 집안의 소년들은 별안간 머리 위로 셔츠를 걷어 올렸다. 그리고 다섯이서 일제히 달려 나갔다. 할머니는 앉아서 한 손을 편물가방에 넣어, 손자들이 무사히 바다로 뛰어들고 나면 털실뭉치를 꺼내려고 했다.

몸이 단단한 소녀들이 실은 약하게 보이는 어린 소년의 반도 용감하질 않았다. 피프와 래그즈는 몸을 떨면서도 구부리더니 피샥피샥 수면을 치면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하나 열두 번 물을 긁을 만큼 헤엄칠 수 있는 이자벨도 여덟 번쯤 헤엄치는 케자이아도 물을 끼얹지 않는다는 확실한 양해가 없으면 뒤따르질 않았다. 로티는 여러 아이들의 뒤를 쫓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었는데, 다만 물가에 앉아서 다리를 뻗고 무릎을 가지런히 붙이고, 그래도 바다에 떠오를 셈인 것처럼 애매하게 팔을 휘젓기만 했다. 그러나 보통 이상으로 큰 수염투성이 어른 파도가 와락 달려들면 겁에 질린 얼굴로 황급히 일어서서 다시 물가를 달려 올라왔다.

"엄마, 이것 좀 갖고 계세요."

반지 둘과 가느다란 금사슬이 페어필드 부인의 무릎에 떨어졌다.

", 그러렴. 한데 너 여기서 멱 안 감을 거냐?"

"네에."

베릴은 우울하게 대답했다. 애매한 대답이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옷을 벗겠어요. 켄바 씨네 아줌마와 함께 수영을 할래요."

"그래."

페어필드 부인은 입술을 꼬옥 다물었다. 하리 켄바 부인은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베릴은 그것을 알고 있다.

불쌍하게도 어머니는, 하고 미소 지으면서 그녀는 돌멩이 위를 달려갔다. 불쌍하게도 어머니는 늙으셨어. 늙은이야, 아아, 젊다는 것은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가......

"기분이 좋은 모양인데."

하고 하리 켄바 부인이 말했다. 돌멩이 위에 등을 구부리고 앉아서, 두 팔로 무릎을 안은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기분 좋은 날이군요."

하자 베릴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그렇군."

하리 켄바 부인의 목소리는 글쎄, 하는 것처럼 울렸다. 한데 부인의 목소리는 어떤 사람의 생각에도 글쎄, 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는 것이다. 키가 크고 풍채가 기묘한 부인으로 가늘고 긴 손발을 가진 여자였다. 얼굴도 또한 갸름하게 길며, 지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굽슬거리는 금발은 불에 타서 시든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혼자였다. 노상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궐련을 물고 이야기를 해서 재가 당장에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위태로울 만큼 길게 되면 그제서야 입술에서 뗀다. 브리지 게임을 하지 않을 때는- 그녀는 매일 싫증도 안 내고 브리지를 한다- 반짝이는 햇살을 온몸에 쐬면서 드러누워 있는다. 아무리 쐬어도 끄떡없다. 십 분 정도가 아니다. 그런데도 몸이 따뜻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바짝 말라서 시들어 차디차며, 물에 떠내려 온 유목처럼 부인은 돌멩이 위에 길게 누워 있다. 해변의 여자들은 부인의 처신이 대단히 방탕하다고 믿고 있었다. 겉치레하지 않는 천한 말씨를 쓴다. 자기가 남자나 되듯 남자들과 상대하여 어울린다. 집에 대해서는 조금도 근심하지 않으며, 하녀인 글라디스를 '건달'이라고 부른다. 그것들은 모두가 꼴불견인 이야기였다. 베란다 층계에 서서 켄바 부인은 태연한 지친 어조로 곧잘 이런 말을 했다.

'건달아, 손수건을 한 장 던져다오.'

그러면 모자도 안 쓰고 빨간 나비 리본으로 머리를 묶고 흰 구두를 신은 '건달'이 얌전치 못한 웃음을 웃으면서 달려온다. 저러니 세상 사람들이 가만있지 못하지. 그야 아이가 없는 것은 확실하지만 남편이...... 거기까지 말하고 나면 사람들은 언제나 목소리가 커지고 열을 띤다. 어째서 켄바 씨는 저런 여자와 결혼을 했을까.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 물론 돈이 목적이었을 테죠.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건.

켄바 부인의 남편은 그녀보다 적어도 십 년은 젊었다. 대단한 미남자로서 살아 있는 남자라기보다 마치 인형이나 미국 소설의 가장 완전한 삽화 같았다. 검은 머리, 짙은 푸른색의 눈, 붉은 입술에 여유스런 졸린 듯한 미소, 테니스의 명수이자 나무랄 데 없는 댄스 파트너요, 게다가 신비스러웠다. 하리 켄바는 몽유병자 그대로였다. 남자들은 그가 참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을 걸든 한마디도 속마음을 실토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부인이 그를 무시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편 역시 아내를 무시하고 있었다. 어떤 생활을 하고 있을까? 물론 까닭은 있다. 하나 그 까닭이라니 말로 할 것이 못 된다. 함께 있는 것을 누군가가 본 일이 있는 여자나 발견한 장소...... 그 무엇 한 가지 확실하지 않고 분명하지 않았다. 해변의 여인들 중에는 그가 언젠가는 살인을 할 것이라고 몰래 생각하고 있는 자도 있었다. 그렇지, 여자들이 켄바 부인에게 말을 걸고 그녀가 입은 무섭게 야한 옷차림을 보고 있을 때에도 그들의 눈에는 부인이 물가에서 길게 누워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냉정하고 처절하게 입가에 담배를 문 채였다.
켄바 부인은 일어나서 하품을 하자 벨트를 끌르고 브라우스 끈을 잡아당겼다. 베릴은 스커트를 내려서 발을 뽑고, 속옷을 벗어 짧고 흰 페티코트와 맨 리본을 어깨에 걸친 캐미솔만 입은 모습이 되었다.

"어머."

하리 켄바 부인이 말했다.

"귀여운 여인이야, 당신은."

"싫어요."

하고 베릴은 온건하게 말했다. 하지만 한 짝씩 양말을 벗고 나니 귀여운 미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좋잖아."

하리 켄바 부인은 자기 페티코트를 밟으면서 말했다. 정말 그 속옷이라니. 푸른 무명의 아랫도리와 뭔가 베갯잇을 연상시키는 린넬의 보디스......

"당신 코르셋을 하지 않았군."

부인은 베릴의 허리에 손을 댔다. 베릴은 짐짓 일부러 비명을 지르면서 펄쩍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하지 않았어요" 하고 똑떨어진 어조로 말했다.

"행복한 사람이야."

켄바 부인은 한숨을 쉬며 제 코르셋을 풀었다.

베릴은 뒤돌아섰다. 그리고 옷을 벗는 것과 동시에 해수욕복을 입으려는 사람이 곧잘 하는 예의 정교한 동작을 시작했다.

"내겐 신경쓰지 않아도 돼요."

하고 하리 켄바 부인은 말했다.

"왜 부끄러워하죠? 당신을 잡아먹진 않아. 저런 멍텅구리처럼 놀라진 않을 거니까."

그리고 말이 우는 듯한 기묘한 웃음소리를 내고는 다른 여자들에 대해서는 상을 찡그려 보았다.

하나 베릴은 부끄러웠다. 남 앞에서 옷 벗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일까. 하리 켄바 부인은 어리석기 짝이 없으면 뭔가 창피한 일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만든다. 왜 부끄러워해야 한단 말인가. 시미즈를 벗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우뚝 서서 새 담배에 불을 붙인 부인 쪽을 재빨리 바라보았다. 그러자 재빠르고도 엉뚱한 언짢은 감정이 일어났다. 자포자기한 웃음을 웃으면서, 말라서 축 늘어진, 모래가 손에 만져지는 해수욕복을 입자 비틀린 단추를 잠갔다.

"그러는 편이 좋아."

하리 켄바 부인이 말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물가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정말 당신이 옷을 입고 있는 건 죄악이야. 언젠가는 누가 그렇게 말해 줄 사람이 생겨야 하는데."

바닷물은 정말 따뜻했다. 저 불가사의한 투명한 청색이고, 군데군데 은빛이 내비친다. 물 밑의 모래는 금색으로 빛났다. 발가락으로 차니 뭉클뭉클 사금이 솟아올랐다. 파도가 가슴까지 치밀었다. 베릴은 두 팔을 뻗고 일어나서 바다를 바라보며,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조금씩 뛰어올랐다. 파도가 조용히 제 몸을 들어 올리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예쁜 아가씨는 즐겨야지."

하고 하리 켄바 부인은 말했다.

"즐기지 않으면 거짓말이야. 놓치면 안 돼요. 마음껏 즐기세요."

그리고 갑자기 재주 한 바퀴를 넘더니 모습을 감추고 헤엄쳐 갔다. 얼마나 빠른지 쥐와 같았다. 그리고는 홱 방향을 바꾸자 헤엄쳐 돌아오기 시작했다. 뭔가 좀 더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베릴은 이 차디찬 여자의 독기에 닿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싶었다. 얼마나 묘하고 소름 끼치는 말일까. 하리 켄바 부인이 가까이 왔을 때 검은 방수 해수욕 모자를 쓰고 턱 있는 데까지 졸린 듯한 얼굴을 내민 그 모습은 그녀 남편의 처참한 캐리커처처럼 보였다.

 

6

앞마당 풀숲 한가운데 서 있는 마누카나무 밑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린다 바넬은 꿈꾸는 기분으로 아침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컴컴하게 우거진 마누카의 잎과 그 사이 사이의 파란 틈들을 쳐다보았다. 가끔 작은 황색의 꽃이 그녀의 몸에 떨어졌다. 예쁜- 그렇다, 그 꽃을 하나 손바닥에 올려 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멋지고 작은 구경거리다. 하나하나 담황색 꽃잎이 애정 깊은 손으로 정성들여 만들어진 것처럼 빛난다. 중심에 조금만 혀가 있어서 그 때문에 종모양으로 보인다. 바깥쪽은 짙은 청동색이다. 하나 꽃이 피면 금새 떨어져서 흩어진다. 누구든 이야기하며 프록에서 털어낸다. 기분 나쁜 그 작은 꽃이 머리칼에 달라붙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피는 것일까. 이런 것을 만들어내는 수고를- 아니, 기쁨일지도 모르지만- 누가 맡아 하는 것일까. 모두 한순간에 허사가 되고 마는데...... 묘한 이야기다.

옆의 풀 위에서, 두 베개 사이에 사내아이가 잠들어 있다. 머리를 어머니로부터 돌려대고 곤히 잠자고 있다. 그 가늘고 검은 머리칼은 진짜 머리칼이라기보다 그림자처럼 보였다. 하나 귀는 밝고 짙은 산호 빛이다. 린다는 두 손을 머리 위에서 마주잡고 발을 포갰다. 방갈로가 모두 텅 비고, 모두가 물가로 내려가 있어서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는 것은 기분이 좋다. 자기가 정원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다. 외톨이다.

눈부실 만큼 하얗게 피코티가 빛난다. 금의 눈을 가진 마리골드가 번뜩인다. 금련화가 베란다 기둥에 녹금의 불길처럼 엉켜붙어 있다. 이들 꽃을 충분히 오래 바라볼 시간이, 진기한 느낌이 없어질 정도의 시간이, 그것들을 잘 알게 될 시간이 내게 있다면, 한데 그 자리에 멈춰서서 꽃잎을 헤치고 잎 뒤쪽을 발견하자마자 '인생'이란 것이 닥쳐와서 그것에 밀려 흘러가 버리고 만다. 등 의자에 누워 자면서 린다는 제 몸이 가붓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뭇잎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바람처럼 '인생'이 와서 그녀는 붙잡히고 흔들려진다.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아아, 언제까지나 그럴 것인가. 도망칠 길은 없는 것일까. ..... 그녀는 타스마니아의 집 베란다에 앉아서 아버지의 무릎에 기대고 있다. 아버지가 약속하신다.

'리니, 너나 나나 늙으면 급히 어디론가 가자. 도망치자. 젊은이끼리 가듯 함께 가자. 중국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구나.'

린다에게는 그 강이 보인다. 폭이 대단히 넓고 작은 뗏목이나 배가 잔뜩 있다. 사공의 노란 모자가 보인다. 그들이 외치는 높고 가느다란 소리가 들린다......

', 아빠.'

그런데 그때, 머리칼이 밝은 적색인 어깨가 딱 벌어진 한 청년이 천천히 집 앞을 지나간다. 천천히, 아니 진정인 체하며 모자를 벗는다. 린다의 아버지가 곧잘 하는 버릇으로, 비웃는 표정으로 그녀의 귀를 잡아당긴다.

'리니의 애인이군.'

하고 속삭인다.

'싫어요, 아빠. 스탠리 바넬과 꼭 결혼해야 할 건 없잖아요.'

하지만 린다는 그와 결혼했다. 더구나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누구의 눈에도 띄는 스탠리가 아니고, 일상의 그는 아니었다. 겁 많고 민감하고 순진한, 매일 밤 무릎 꿇고 기도하는. 남에게 친절해 하고 싶어하는 스탠리였다. 스탠리는 단순했다. 남을 신용하면- 가령 그는 린다를 신용하고 있지만- 그것은 진실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불신한 처사를 하지 못한다. 거짓말을 못한다. 누구든- 린다가- 자기에게 정직하지 않으면, 진실을 보여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는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모른다. '이런 속임수는 난 몰라' 하고 그는 내뱉듯이 말하는데, 그 개방적인 몸부림과 당혹한 표정은 함정에 빠진 야수와도 같았다.

그런데 곤란한 일은- 여기서 린다는 웃음이 나오려 했던 것이다. 결코 우스운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가 린다 자신의 스탠리가 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평온할 때가 가끔가다 숨쉴 시간 정도는 있었다. 하나 그 외에는 언제나 불붙는 버릇이 있는 집이든가, 매일 난파하는 배 위에서 지내고 있는 것과 같았다. 언제나 위험 한가운데로 떨어지는 것은 스탠리였다. 린다의 시간은 그를 구출해내고 원상으로 회복시켜서, 기분을 진정케 하고 그 이야기를 듣는 일로 다 소비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아이가 태어나지 않을까 하는 근심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린다는 얼굴을 찡그렸다. 급히 의자에 고쳐 앉아서 발목을 잡았다. 그렇다. 그것이 인생에 대한 참다운 불만이다. 까닭모를 일이다. 몇 번이나 묻고 귀를 기울였으나 대답이 없던 의문인 것이다. 아이를 낳는 것은 여자의 공통된 숙명이란 말은 멋대로 하는 말들이다. 그것은 정말이 아니다. 그런 것은 틀렸다. 뭣하면 내가 증명해 보이겠다. 자기는 아이를 낳고 건강을 해쳐 쇠약해서 용기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더구나 그것을 이중으로 참을 수 없는 이유는, 자기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적당히 행동하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만약 그런 힘이 있더라도 자신은 작은 딸애를 안아 주거나 함께 놀아 주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 저 무서운 여행을 나설 때마다 차디찬 입김을 쐬어 온 몸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딸들에게 나눠 줄 온기란 남아 있지도 않다. 아들은- 고맙게도 어머니가 맡아 주셨다. 그 아이는 어머니의, 아니 베릴의, 아니 누구든지 그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사람의 것이다. 전혀 이 팔에 안아 본 적이 없다. 그 아이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지금 바로 여기에 누워 있어도...... 린다는 그쪽을 굽어보았다.

갓난애는 몸을 뒤챘다. 눈을 감은 채 그녀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이젠 잠이 깼다. 짙은 푸른색의 아기다운 눈을 반짝 떴다. 엄마의 모습을 엿보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별안간 그 얼굴에 보조개가 파였다. 그것이 점점 퍼지더니 이 없는 입이 웃었다. 말할 수 없이 기분 좋은 웃는 얼굴이었다.

'여기 있어요' 하고 그 행복한 미소는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엄마는 왜 날 안 좋아하죠?'

그 미소에는 뭔가 기묘한, 전혀 예기치 않았던 여운이 있었다. 린다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자신을 억제하고 아이를 향해 싸늘하게 말했다.

"나는 아기 같은 건 좋아하지 않아."

'아기를 좋아하지 않다니?'

아이는 엄마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나를 안 좋아해?'

어리석게도 엄마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린다는 의자 곁을 떠나 풀 위에 앉았다.

"왜 그처럼 웃는 거지?"

엄격한 말투로 "내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안다면 웃을 일이 아닐 텐데."

그러나 아기는 그저 눈을 가늘게 뜨고 베개 위에서 머리를 굴렸다. 그녀가 하는 말을 한마디도 믿지 않았다.

"그런 건 다 알고 있어."

하고 미소 지었다.

린다는 이 어린것의 자신에 어이에 없어서...... 아니, 속이면 안돼. 그런 기분이 아냐. 좀더 다르고 정말 새로운, 정말...... 눈물이 그녀의 눈에서 춤을 추었다. 린다는 나직한 소리로 갓난애에게 속삭였다.

"어머, 이상한 도련님이시군."

그러나 벌써 아기는 모친을 잊어버렸다. 진지했다. 복숭아 빛의, 말랑해 보이는 것이 뭔가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있다. 그는 그것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순간 그것은 사라지고 없었다. 하나 다시 한 번 그가 반듯이 드러눕자 또 하나 아까와 같은 환영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그것을 잡으려고 결심했다. 무섭게 안간힘써서 벌렁 뒤집었다.

 

7

조수가 빠져서 물가에는 사람이라곤 없었다. 따뜻한 파도가 뒤치락거리며 부딪고 있었다. 햇살이 곧장 내리비쳤다. 뜨겁게 타오르며 보드라운 모래에 직사하여 회색이나 파랑, 검정, 하얀 줄무늬가 있는 돌멩이를 달구었다. 굽은 조개껍질 속에 괸 물을 빨아올리고, 모래언덕 여기저기 조그만 모래벼룩 외에는 무엇 하나 움직이는 것이라곤 없었다. 팔딱, 팔딱, 팔딱. 모래벼룩은 잠시도 가만히 있을 때가 없다.

저쪽에서는 썰물 때 물 마시러 물가로 내려오는 털이 잔뜩 난 짐승처럼 보이는 해초가 엉겨 붙은 바위 위에서 작은 물웅덩이에 하나씩 빠진 은화같이 햇빛이 반짝이며 뒹굴고 있었다. 웅덩이는 춤추고 떨고, 잔물결이 구멍이 뻥뻥 뚫린 기슭을 씻었다. 몸을 굽혀서 본즉, 물웅덩이는 모두 기슭에 푸르거나 연분홍색 집들이 늘어선 호수 같았다. 그리고 그 집들 뒤에는 광대한 산지- 계곡, 고갯길, 위험한 개울이나 물가로 통하는 가파른 오솔길. 밑에는 바다의 숲이 흔들리고 있다- 복사빛 실 같은 나무, 미끌대는 말미잘, 오렌지색 알맹이들이 달라붙은 해초. 문득 바닥의 돌이 하나 움직이는가 싶더니 뾰족한 검은 촉각이 보인다. 실 같은 생물이 흔들거리다가 사라진다. 복사 빛으로 흔들리던 나무가 어떻게 된 모양이다. 순식간에 싸늘한 달빛 같은 푸른색으로 변한다. 그러자 잘 들리지 않을 정도의 '' 하는 소리가 난다. 그 소리를 낸 것은 누구지? 바닥 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렇더라도 뜨거운 햇볕을 쐬면 해초는 얼마나 강하고 습기 찬 냄새를 발하는 것일까......

피서객의 방갈로에는 초록색 차일이 드리워 있다. 베란다 위에 축 늘어진 모습으로 보이는 해수욕복과 겁에 질린 줄무늬 타올리 단지 쪽을 향해 쏠리듯 울타리에 걸려 있었다. 창문 뒤에는 어디에나 문지방에 즈크구두가 놓여 있고, 돌덩이나 바께쓰나 주워 모은 전복 껍질들이 있었다. 열기를 받아서 풀숲이 흔들렸다. 자갈길에는 오직 그 한가운데에 길게 누운 트라우트 가의 개 스우카가 있을 뿐이었다. 푸른 눈을 위로 향하고 다리를 쭉 뻗친 채 가끔 자포자기해서 숨을 토했다. 이제 이런 일은 그만둘 결심을 하고 친절한 짐마차든가 뭐가 올 것을 기다리고 있는 듯이.

"뭘 보고 계셔요, 할머니. 왜 가만히 그렇게 벽을 노려보고 있죠?"

케자이아와 할머니가 함께 낮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소녀는 짧은 즈로오즈와 짧은 내의만을 입고 팔과 다리를 드러낸 채 할머니 침대의 바람 넣은 베개를 베고 자고 있었다. 하얀 레이스가 달린 화장옷차림의 노부인은 창가의 흔들의자에 앉아서 무릎에 기다란 복사 빛 편물을 놓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이 방은 방갈로의 다른 방과 마찬가지로 빛이 엷은 니스칠을 한 목조인데,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 있지 않았다. 가구는 몹시 낡고 간단했다. 예컨대 화장대는 나뭇가지 무늬의 모슬린 치마를 입힌 짐 궤짝이고, 그 위의 거울 또한 이상야릇한 물건이다. 두 갈래진 작은 번개가 속에 갇힌 듯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패랭이꽃을 꽂은 병이 놓여 있는데, 입추의 여지없이 꽂은 그 꽃은 빌로드의 핑크 쿠션처럼 보였다. 그리고 케자이아가 할머니에게 드린 핀을 넣는 특별한 조개껍질과 시계가 동그마니 옆에 있기에 대단히 좋은 장소가 되리라고 케자이아는 생각했다. 하기야 좀 더 특별한 조개껍질이 또 하나 있었다.

"으응, 할머니."

노부인은 한숨을 내쉬고 검지손가락에 두 번 털실을 감고 뼈바늘을 움직였다. 짜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윌리엄 아저씨의 일을 생각하고 있던 참이란다."

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오스트리아의 윌리엄 아저씨?"

하고 케자이아는 물었다. 또 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 물론이지."

"내가 만난 일이 없는 사람 말예요?"

"그렇단다."

"어머, 그래요. 그 아저씨가 어찌 됐나요?"

케자이아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광산엘 갔지. 거기서 일사병에 걸려 죽었단다."

케자이아는 눈을 깜박이고 그 광경을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작은 남자가 양철로 만든 병정처럼 크고 캄캄한 구멍 옆에 쓰러져 있다.

"아저씨를 생각하면 할머니는 슬퍼지나요?"

케자이아는 할머니가 슬픈 표정을 짓는 것이 싫었다.

그럼 이번에는 노부인이 생각할 차례가 된다. 슬퍼질까, 회상하면? 자기가 그렇게 하고 있으면, 케자이아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지나간 세월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슬퍼질까? 여자답게, 그 세월이 보이지 않게 된 훨씬 뒤까지 그것을 찾아서 구하면 슬퍼지는 것일까? 아냐, 인생이란 어차피 그런 거야.

"아아니, 케자이아."

"하지만 왜?"

하고 케자이아는 물었다. 맨살을 드러낸 한 팔을 쳐들어 허공에 그림을 그리면서 "왜 윌리엄 아저씨는 죽지 않으면 안 되었던 거죠? 노인은 아니었을 테죠?"

페어필드 부인은 그물코를 셋씩 세기 시작했다.

"그저 그렇게 되었을 뿐이란다."

하고 희미한 소리로 말했다.

"누구든 죽지 않으면 안 되나요?"

케자이아가 물었다.

", 누구든지."

"나는요?"

케자이아의 목소리는 무섭게 의심스러운 듯이 울렸다.

"언젠가는."

"하지만 할머니."

케자이아는 왼다리를 흔들면서 발가락을 꿈틀거렸다. 모래로 깔끄러웠다.

"내가 죽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노부인은 한숨을 내쉬고 실 뭉치에서 긴 실을 뽑아냈다.

"그런 사정은 들어주지 않아요."

하고 슬프게 말했다.

"빠르든 늦든 언젠가는 모두 그렇게 되는 거란다."

케자이아는 모로 누운 채 이 문제를 잘 생각해 보았다. 죽고 싶지 않았다. 죽으면 여기서 나가야 하고 어디서든 나가야 하며, 영원히 나가야 한다- 할머니를 뒤에 남겨두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갑자기 돌아누웠다.

"할머니."

하고 겁에 질린 목소리로 불렀다.

"뭐냐?"

"할머니는 죽지 않죠?"

케자이아는 분명히 그렇게 믿고 있었다.

"어머, 케자이아."

- 할머니는 눈을 들어 미소 짓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 이야기는 그만두자꾸나."

"하지만, 죽지 않으시죠. 나를 뒤에 남겨두고 가진 않으실 테죠? 할머니가 안 계시다니 그럴 수는 없어요."

그렇게 되면 무섭다.

"그런 일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할머니."

하고 케자이아는 졸라댔다.

노부인은 계속 뜨기만 했다.

"약속해 줘요. 그렇겐 안 하겠다구."

그러나 할머니는 침묵만을 지켰다.

케자이아는 침대에서 굴러 나왔다. 더 참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 무릎에 냉큼 올라앉더니 노부인의 목에 두 팔을 감고 키스하기 시작했다. 턱 밑을, 귀 뒤를, 그리고 목에 숨결을 내뿜으면서,

"안 하겠다고 말해 줘요...... 안 하겠다고...... 안 하겠다구요-"

키스하는 간간이 할딱거리면서 그리고 가만히, 가볍게 할머니를 간지르기 시작했다.

"케자이아."

노부인은 편물을 손에서 떨어뜨리고 흔들의자에 벌렁 나둥그러졌다. 그녀는 케자이아를 간지르기 시작했다.

"안 하겠다고 말해요, 안 하겠다고 말해요, 안 하겠다고 말해요."

하고 서로 껴안고 웃으면서 두 사람이 나둥그러지자 케자이아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자아, 그만, 그만해, 이 장난꾸러기야."

하고 노() 페어필드 부인은 말하고, 곧바로 모자를 고쳐 썼다.

"편물을 주워다오."

두 사람 모두 "안 한다"는 것이 뭣이었는지 잊어버리고 말았다.

 

8

바넬 가의 뒷문이 쾅 닫히면서 대단히 화려한 모습이 오솔길을 따라 문까지 걸어나왔을 때 해는 아직 반짝반짝 정원에 쏟아지고 있었다. 오후의 외출을 위해서 의상을 갖춘 하녀 앨리스였다. 크고 붉은 물방울 무늬가 잔뜩 붙어 있어서 보기만 해도 오싹하는 하얀 무명옷을 입고, 백구두를 신고, 걷어 올라간 챙 밑에 양귀비꽃을 단 타스칸 모자를 쓰고 있었다. 물론 장갑을 끼었다. 하얀 장갑인데, 단추가 달린 곳이 녹이 슬어 있었다. 한쪽 손에는 자기(페리샬)라고 평상시 그녀가 부르고 있는 몹시 상처가 난 양상을 들었다.

베릴은 창가에 앉아 금세 감은 머리를 말리면서, 저런 꼴불견은 본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서기 전에 불태운 코르크로 얼굴에 검정 칠만 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만화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장소에서 저런 계집애가 어디로 가는 걸까. 하트형 피치 부채가 그 풍성하게 늘어진 깨끗한 밝은 머리칼을 업신여기듯이 두드렸다. 앨리스는 아마 누군가 몹시 형편없는 젊은 녀석과 친해져서 틀림없이 함께 풀숲 속으로 숨어 버릴 테지, 하고 그녀는 상상했다. 한데 저렇게 남의 눈에 띄는 모양을 부렸으니 별수 없지. 저런 옷차림의 앨리스를 데리고 숨는 것도 큰일일걸.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베릴의 생각은 좀 심했다. 앨리스는 스태브즈 부인이 있는 곳에 차손님으로 불려 가는 것이다. 심부름 온 꼬마가 정식으로 '초대장'을 보내 왔던 것이다. 모기약을 사러 처음 그 가게에 간 이래 앨리스는 쭉 스태브즈 부인의 단골이었던 것이다.

"어머, ."

스태브즈 부인은 제 옆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렇게 잡아먹힌 사람은 처음 봤어요. 식인종에게 습격당한 것 같지 않겠어요."

그렇더라도 길에 다소 사람이 지나갔으면 좋겠는데, 하고 앨리스는 생각했다. 뒤에 아무도 사람이 없다는 건 이상한 느낌이다. 등골에서 힘이 빠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긴 하나 뒤돌아보는 것은 어리석다. 이쪽의 속셈을 꿰뚫어 볼 위험이 있다. 그녀는 장갑을 잡아 끌어올리고 혼자 노래를 읊조리며 멀리 있는 고무나무에게 말했다.

"곧 가겠어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을 상대하는 것만 못하다.

스태브즈 부인의 가게는 길을 조금 벗어난 언덕 위에 있었다. 그 커다란 두 개의 창문은 눈이고, 넓은 베란다는 모자이며, '스태브즈 상점'이라고 갈겨서 쓴 지붕의 간판은 모자의 돌출부에 보기 좋게 꽂힌 작은 명함 같았다.

베란다에는 바다에 들어가는 걸 기다리고 있다기보다는, 그 속에서 구출된 경우처럼 축 늘어진 해수욕복들이 길게 늘어져서 걸려 있다. 그리고 그 옆에, 마치 범벅처럼 뒤섞인 즈크화가 한 무더기 걸려 있었다. 한 켤레를 사려면 적어도 오십 켤레는 휘저어서 억지로 골라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고도 짝을 찾을 수만 있다면 대성공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고르다 못해 한 짝은 발에 맞고 다른 한 짝은 발보다 약간 큰 것을 사서는 돌아간다...... 스태브즈 부인은 여러 가지 물건을 조금씩 구색 맞춰 놓은 것이 자랑이다. 두 개의 창 옆에 위태로운 피라밋형으로 수북이 물건이 쌓여 있는데, 그것이 와르르 무너지지 않고 끄덕없는 재주는 마술사밖에 모른다, 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쪽 창문 왼편 구석에 네 개의 마름모꼴 아교로 이런 광고가 유리에 붙어 있었다- 유사 이래 붙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분실, 극히 아름다운 금브로우치 순금임

바닷가나 그 부근에서 사례금 드림'

 

앨리스는 문을 밀었다. 벨이 울리고, 빨간 사지의 커튼이 열리면서 스태브즈 부인이 나타났다. 환하게 웃으면서 한 손에 길다란 베이콘 나이프를 든 부인은 우의적인 산적(山賊)이요, 하고 말하는 듯한 꼴이었다. 앨리스는 대환영을 받았다. '예의범절'에 맞게 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하기야 그 '예의범절'이란 요컨대 노상 잔기침을 하거나, 장갑을 잡아당기거나, 스커트를 손끝으로 잡고 눈앞에 늘어 놓여진 것을 잘 모른다, 혹은 상대편의 말을 잘 모른다는 척을 해 보이는 일이었다.

응접실 테이블에 음식 준비가 돼 있었다- , 사아진, 버터가 통째로 한 파운드, 그리고 누군가의 이스트 광고처럼 커다란 과자 빵. 그건 그렇고, 프리머드 스토브가 웅웅 울어서 그 이상 큰 소리로 말하려는 것은 헛수고였다. 앨리스가 등의자 끝에 앉자 스태브즈 부인은 더욱 스토브의 석유를 길어 올렸다. 갑자기 스태브즈 부인이 의자에서 쿠션을 밀어젖히더니 커다란 포장지로 싼 물건을 보였다.

"이번에 또 사진을 찍었는데 말예요."

하고 명랑하게 앨리스를 부르면서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려주세요."

얌전하게 새초롬하면서 앨리스는 손가락에 침칠을 하고, 맨 위의 사진부터 엷은 종이를 벗겼다. 어머, 어쩜 이렇게 많을까. 서른 장 이상이나 있네. 그녀는 그것들을 손에 들고 불에 비쳐 보았다.

스태브즈 부인이 팔걸이의자에 앉아서 잔뜩 한쪽으로 몸을 기울인 참인데, 그 커다란 얼굴은 좀 어이없다는 표정을 띠고 있었다. 그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팔걸이의자는 카펫에 얹어져 있는데 그 왼쪽에, 기적적으로 카펫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힘차게 폭포가 떨어지고 있다. 오른쪽에는 그리스식 기둥이 서고 양쪽에는 거대한 삼나무가 서 있었다. 그리고 희끄무레한 눈이 쌓인 울퉁불퉁한 산이 솟아 있는 배경이었다.

"경치 좋죠."

하고 스태브즈 부인은 외쳤다. 그리고 앨리스가 흔연한 목소리로 "매우" 하고 대답했을 때, 프리머드 스토브의 소리가 작아지더니 쉬이- 하고 멎었다. 기분 나쁜 조용한 속에서 "아름답군요" 하고 앨리스는 말했다.

"의자를 바짝 대세요"라고 말한 후 스태브즈 부인은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 하고 차를 건네주면서 한참 생각한 말투로 "하지만 그 형이 내게는 마음에 안 들어요. 확대를 부탁하고 있는 거예요. 크리스마스 카드로 한다면 그야 괜찮지만 작은 사진은 마음에 미흡하거든요. 재미없어요. 실은 그것을 보고 실망했어요, 저는."

앨리스는 부인이 하는 말을 잘 알았다.

"대형이다"라고 스태브즈 부인은 말했다.

"나는 대형이다, 하는 것은 죽은 영감의 말버릇이었죠. 아무튼 작은 것은 좋아를 안 했으니까요. 작은 것은 소름이 쭉 끼친다나요. 하기야 묘한 이야기 같지만."

- 여기서 스태브즈 부인은 의자를 삐걱거리고 추억에 잠긴 나머지 몸을 부풀렸다-

"결국 그이가 이 세상을 하직한 것은 수종이었죠. 병원에서 몇 번이나 듬뿍 뽑아냈지만...... 천벌이란 거예요."

그에게서 뽑아낸 것이 무엇이었는지 앨리스는 알고 싶어서 좀이 쑤셨다. 그래서 물었다. "그거, 물 아니에요?"

스태브즈 부인은 앨리스의 눈을 한참 바라보더니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액체였어요."

'액체'라니. 앨리스는 고양이같이 그 말에서 물러섰다가 다시 돌아오자, 조심스레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그것이 영감이었어요."

스태브즈 부인은 우람한 남자의 등신대의 머리통과 어깨를 연극적인 몸짓으로 보여 주었다. 웃저고리 단추 구멍에는 소용돌이 모양의 싸늘한 양고기 지방을 연상시키는 묵직한 백장미가 꽂혀 있다. 사진 밑에는 빨간 종이에 은색 글씨로 이렇게 씌어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다.'

"훌륭한 얼굴이군요."

하고 앨리스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스태브즈 부인의 곱슬거리는 금발 위에 맸던 담청색 나비형 리본이 흔들거렸다. 부인은 살찐 목덜미를 활 모양으로 폈다. 굉장한 목덜미다. 밑둥은 밝은 복사 빛이고 다음에는 불그스름한 귤빛, 그리고 자색 같은 난황색으로 바뀌다가 짙은 크림색으로 옮겨간다.

"하나 뭐니 뭐니 해도."

부인은 깜짝 놀라게 하는 어조로 말했다.

"제멋대로 할 수 있는 것을 능가하는 건 없죠."

그 나직하고 둔한 웃음은 고양이가 목을 울리는 소리와 흡사했다.

"제멋대로 할 수 있는 것을 능가하는 건 없어요."

하고 스태브즈 부인은 거듭 말했다.

'제멋대로?' 앨리스는 키들키들 바보처럼 웃었다. 불안한 기분이었다. '부엌'으로 달려 돌아왔다. 왠지 이상하다. 앨리스는 부엌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9

간식을 먹고 나자 바넬 가의 빨래터에는 이상한 패거리들이 모였다. 테이블 주위에는 암소와 수탉과, 자기가 당나귀임을 노상 잊고 있는 당나귀와 양과 벌이 앉아 있었다. 빨래터는 그 같은 모임에는 안성맞춤인 장소다. 모두 떠들 만큼 떠들어도 아무도 방해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방갈로에서 떨어진 곳에 세운 작은 양철지붕 집이었다. 깊숙한 물통이 벽에 붙여서 놓여 있고, 구석에는 세탁용 집개가 든 광주리가 얹힌 솥이 있었다. 거미줄이 걸린 작은 창문에는 먼지가 자욱한 문지방에는 양초동가리와 쥐덫이 있었다. 머리 위로는 말린 그물이 교차하고, 굉장히 큰, 그렇다, 어처구니없이 큰 녹슨 편자가 벽 못에 걸려 있다. 한가운데 테이블을 놓고 그 양쪽으로 의자가 놓여 있었다.

"벌은 될 수가 없단다, 케자이아. 벌은 동물이 아니니까. 그건 곤충이지."

"하지만 난 벌이 되고 싶은 걸."

케자이아는 소리 내어 울었다...... 작은 벌, 노란 털이 잔뜩 나고 무늬가 든 다리를 갖고 있다. 그녀는 허리 밑으로 다리를 잡아당기고 테이블에 기댔다. 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곤충도 동물일 거야, 틀림없이."

하고 완강히 버텼다.

"제대로 소리를 내잖아. 물고기 따위와는 달라."

"나는 소다, ."

하고 피프가 외쳤다.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울음소릴 질렀다- 어떻게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걸까- 로티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나는 양이야."

래그즈가 말했다.

"오늘 아침에 양이 상당히 많이 지나갔다구."

"어떻게 그것을 알지?"

"아빠가 울음소리를 들었대, 음매."

무리 뒤에서 잰걸음으로 따라와 안아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새끼 양과 같은 울음소리였다.

"꼬꼬댁 꼬꼬-"

이자벨이 닭울음소리를 질렀다. 붉은 뺨과 희번덕거리는 눈을 한 그녀는 수탉과 방불했다.

"나는 뭐가 되면 좋지?"

하고 로티가 여러 사람에게 묻고, 앉아서 웃으며 모두가 결정해 주기를 기다렸다.

"순한 것이 아니면 안 돼."

"당나귀가 좋을 거야, 로티."

하고 케자이아가 권했다.

"히힝. 잊지 않을 거야."

"히힝."

로티는 정색을 하고 소리쳤다.

"언제 그렇게 말하면 되는 거지?"

"내가 설명해 줄께."

암소가 말했다. 카드를 쥐고 있는 것은 그다. 머리 위에서 카드를 휘둘렀다.

"모두 조용히 해. 모두들 들으라구."

일동이 조용해지길 기다려서 "이것을 봐, 로티" 하고 카드를 한 장 뒤집고는 "점이 두 개가 있지- 알겠나? 만일 네가 그 카드를 한가운데 댔을 때, 누군가 또 두 점짜리를 대는 자가 있으면 '히힝' 하는 거야. 그러면 그 카드는 네 것이다."

"내 것?"

로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져도 돼?"

"아아니, 바보로구나. 그렇게 해서 노는 거야. 하고 있는 동안만이야."

하면서 암소는 그녀에게 화를 냈다.

"어머, 로티는 정말 바보로구나."

거만한 수탉이 말했다.

로티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떨렸다.

"난 그만두겠어."

하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일동은 공모자처럼 서로 얼굴을 마주봤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 알고 있다. 로티는 나가서 앞치마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한구석에서 벽에 기대어, 아니, 어쩌면 의자 뒤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그만두지 않아도 돼, 로티. 아주 쉬우니까."

하고 케자이아가 말했다.

후회한 이자벨은 어른스럽게 말했다.

"내가 하는 것을 주의해 보면 곧 알게 될 거다, 로티."

"훌쩍거리지 마, 로티."

하고 피프가 말했다.

"자아, 제대로 해보자. 그럼 시작한다. 내 거야, 정말은. 하지만 너에게 준다. ."

그리고 로티 앞에 카드 한 장을 놓았다.

그러자 로티는 힘이 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또 다른 곤란한 일이 일어났다.

"손수건이 없어."

하고 그녀는 말했다,

"지금 당장 필요해, ."

"그럼 내 것을 써라."

래그즈가 자기 세라셔츠에 손을 넣어 구깃구깃한 손수건을 꺼냈다. 매듭이 지어져 있었다.

"조심해."

하고 주의하면서 "그 한 귀퉁이만을 사용하는 거야. 풀면 안돼. 그 속에 불가사리가 들어 있으니까. 길을 들일 셈이야."

"자아, 여러분."

하고 암소가 말했다.

"알겠죠- 자기 카드를 보면 안돼요. 내가 '시작'할 때까지 손을 테이블 밑에 두는 거예요."

짝 짝 하고 카드가 차례대로 테이블에 놓였다. 모두 전력을 다해서 보려고 하지만 피프가 얼마나 빠른지 틈을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빨래터에 앉아서 가슴을 두근거리며 피프가 패를 나눌 때까지, 일동은 겨우 동물원의 소() 코러스를 폭발시키지 않고 견딜 수가 있었다.

"자아, 로티부터 시작한다."

로티는 조심조심 한 손을 뻗어 자기 손에 든 제일 위의 패를 잡아서 유심히 보더니- 틀림없이 점수를 헤아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밑으로 내려놓았다.

"아냐 로티, 그렇게 하면 안돼. 자기가 맨 먼저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그리고 반대쪽으로 향하게 해야지."

"하지만, 그렇게 하면 모두 나와 같은 때에 보게 되잖아."

하고 로티가 말했다.

게임은 진전되었다. 음머, 암소는 대단했다. 테이블에 돌진해서 카드를 다 먹어치울 기세였다.

붕 붕, 벌이 울었다.

꼬꼬댁 꼬꼬. 이자벨은 흥분하여 일어서서 날개처럼 팔을 움직였다.

음매. 꼬마 래그즈는 다이아몬드의 킹을 내고 로티는 모두가 말하는 '스페인의 킹'을 냈다. 이제는 거의 카드도 가진 것이 없었다.

"왜 안 울지, 로티?"

"내가 뭔지 잊어버렸어."

하고 당나귀는 슬픈 듯이 말했다.

"그럼 바꿔. 개가 좋아. 멍멍."

", 좋았어. 그쪽이 훨씬 쉬우니까."

로티는 싱글벙글거렸다. 한데 그녀와 케자이아가 양쪽 다 '1'을 냈을 때, 케자이아는 일부러 기다려 주었다. 다른 사람이 로티에게 신호해서 가리켰다. 로티는 새빨개졌다. 난처한 얼굴을 하자 마침내 입을 열었다.

"히힝, 케자이아."

", 잠깐."

게임 도중에 암소가 한 손을 들어서 일동을 제지했다.

"저게 뭐지? 무슨 소리지?"

"소리라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수탉이 물었다.

", 떠들지 마, 저거."

모두 조용해졌다.

"지금 뭔가- 문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하고 암소가 말했다.

"무슨 소리지?"

양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벌이 몸서리쳤다.

"도대체 왜 문 같은 걸 닫으라고 말했을까?"

하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아 아, , 왜 문을 닫았을까.

아이들이 게임을 하고 있는 동안에 날이 저물었다. 호화스런 놀이 비치더니 지금은 그것도 사라지고, 바다 위에, 모래언덕 위에 어둠이 잰걸음으로 스며들어서는 단지 위로 올라왔다. 빨래터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면 소름이 끼친다. 그러나 열심히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어딘가 아주 먼 곳에서 할머니가 등불을 켜고 있다. 덧문이 닫히고, 부엌의 불이 맨틀피스의 주석 그릇에 비쳐서 간들거린다.

"이렇게 되면 이제는."

하고 암소가 말했다.

"거미가 천정에서 테이블에 떨어지기만 해도 무서울 거야."

"천정에서 거미가 떨어지진 않을 거라구."

"떨어질걸. 우리 집 민이 말하는데, 크기가 작은 접시만 하고 구즈베리처럼 길다란 털이 난 거미를 본 적이 있대."

작은 머리통들이 모두 갑자기 위를 쳐다보았다.

작은 몸뚱이들이 서로서로 모여서 꽉 하나로 달라붙었다.

"왜 아무도 부르러 안 오지?"

하고 수탉이 외쳤다.

아아, 어른들은 지금 기분 좋게 웃으면서 등불을 켜고 앉아 천천히 차를 마시고 있겠지. 우리들에 관해서는 잊어버리고 만 거다. 아니, 정말 잊어버린 게 아냐. 저 빈정대는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곳에 내던져 두기로 결정을 한 거다.

별안간 로티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아이들은 모두 의자에서 펄쩍 뛰며 덩달아 비명을 질렀다.

"얼굴- 얼굴이 들여다보고 있다."

하고 로티가 겁에 질린 소리로 말했다.

정말이다, 그대로다. 창에 찰싹 붙은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검은 눈과 검은 수염.

"할머니, 엄마, 누가 없어요."

아이들이 서로 밀치락달치락하며 문을 향해 달려가기 전에 문이 열리더니 죠나단 아저씨가 모습을 나타냈다. 이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온 것이다.

 

10

죠나단은 좀 더 일찍 올 생각이었는데 앞마당에서 린다를 만났다. 그녀는 풀 위를 여기저기 걷다가는 서서 말라 죽은 석죽을 뽑거나, 머리가 무거운 카네이션에게 나무를 받쳐 주거나, 무슨 꽃의 냄새를 깊이 들이마시면서 여느 때처럼 초연한 모습을 보이며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하얀 프록 위에 중국인 가게에서 산 복사 빛 단이 달린 노란색 숄을 걸치고 있다.

"안녕하세요, 죠나단."

하고 린다가 말을 걸었다. 그러나 죠나단은 얼른 그 초라한 파나마모를 벗어서 가슴에 대고, 한쪽 무릎을 구부려 린다의 손에 키스를 했다.

", 아름다운 그대. 하늘나라의 복사꽃이여."

부드럽게 베이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다른 여자 분들은 어디 계십니까?"

"베릴은 브리지놀이를 하러 갔고 어머니는 아이를 목욕시키고 계셔요...... 뭘 빌리러 오셨나요?"

트라우트 가에서는 늘 물건을 떨어뜨리고, 곤경에 처하면 바넬 가로 가지러 보내곤 한다.

하나 죠나단은 오직 이렇게 대답했다.

"약간의 사랑과 약간의 우의를."

그리고 린다와 나란히 걸었다.

린다는 마누카나무에 걸린 베릴의 해먹으로 미끌어 들어가고, 죠나단은 옆의 풀 위에 누워서 긴 풀줄기를 뽑아서는 씹기 시작했다. 둘은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옆 마당에서 아이들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어부의 가벼운 짐차가 자갈길을 덜거덕대며 지나가고,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를 부대에 쑤셔 박고 지르는 듯한 코 먹은 소리였다. 귀를 기울이니 돌멩이에 밀려드는 만조의 나직한 물소리가 들린다. 해는 가라앉으려 하고 있다.

"그럼 월요일에는 사무실로 돌아가겠군, 죠나단."

하고 린다가 물었다.

"월요일에는 감방 문이 열리고 찰깍 잠기면 또다시 십일 개월과 일주일 동안 이 희생을 가둬 두겠죠."

하고 죠나단은 대답했다.

린다는 천천히 해먹을 흔들며 "지겨워" 하고 말했다.

"나보고 웃으라고, 아름다운 그대. 나보고 울라고?"

린다는 죠나단의 말투에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조금도 그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틀림없이" 하고 희미하게 말했다.

"길이 들겠죠. 뭐든지 길들게 마련이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

''은 땅 밑에서 울렸는가 생각될 만큼 낮았다. '어떻게 하면 길이 들지' 생각하고 나서 '난 아무래도 안 돼.'

벌렁 누운 죠나단의 모습을 보면서 린다는 또 그가 얼마나 인상이 좋은 남자인가를 생각했다. 그가 평사원에 불과하고, 스탠리가 그보다 배나 돈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죠나단은 도대체 어찌된 것일까? 야심이 없는 거다. 그것이 안 되는 거다, 라고 린다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재능이 있고 비범하다는 느낌이 든다. 음악에 정열을 기울이고 있다. 남은 돈을 모조리 책을 사는 데 쓴다. 언제나 새로운 아이디어, 계획, ()에 넘쳐 있다. 한데 그것이 하나도 열매를 맺지 않는다. 새로운 불이 죠나단의 가슴 속에 타오르고 있다. 그가 새로운 문제를 설명하고 묘사하고 부연할 때, 그 불이 나직하게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을 정도다. 그러나 잠시 후 불길은 무너져서 타고 남은 찌꺼기밖에 안 남고, 죠나단은 그 검은 눈에 굶주린 표정을 띠고 방황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이상한 과장법으로 말했다. 그가 교회에서 노래 부르면- 합창대의 리더이다- 엄청난 연극적인 톤으로 힘주어 부르기 때문에, 아무리 하찮은 찬송가라도 일종의 세속적인 광휘에 휩싸인다.

"월요일에는 다시 사무실에 나가야 하다니 정말 어리석고 화가 치민단 말이야."

하고 죠나단은 말했다.

"지금까지도 늘 그랬고, 앞으로도 늘 그럴 테지. 아홉 시에서 다섯 시까지 의자에 꼬박 앉아 타인의 원장에 시시한 글이나 쓰고 인생의 가장 좋은 세월을 낭비하다니. 그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 인생의 사용법으로선 분하지 않은가. 아니면 나는 바보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그는 풀 위에서 돌아누우며 린다를 쳐다보았다.

"이봐요, 나의 생활과 일반적인 죄수의 생활과는 뭐가 다르다고 생각하지? 내가 아는 유일한 차이는, 내가 스스로 감옥에 들어갔는데 아무도 설명해 줄 사람이 없다는 거야. 내 입장은 죄수의 입장보다도 더 참을 수가 없어. 만일 내가- 강제로- 발버둥치고 있는데- 처넣어졌다고 하면, 그럴 경우에는 한번 문에 자물쇠가 잠기고 나면, 아냐, 어쨌든 오륙 년 지난 후에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파리가 날아가는 것이나 간수가 통로를 지나갈 때 그 발소리가 어디서 어떻게 바뀌는지 특별히 주의해서 그것을 세는 일 따위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겠지. 그런데 실제로 나는 자진해서 방으로 뛰어든 곤충과 같거든. 벽에 부딪고 창에 부딪히며 천정에서 파닥거리고, 그렇지, 이 세상에서 가능한 일체의 짓을 하는 거야. 다만 다시 한 번 날아갈 수만은 없어. 그래서 그동안 그 나방이처럼, 아니 나비처럼, 아니 뭐든지 좋아, '인생의 짧음, 인생의 짧음'을 하고 생각하고 있지. 하나 실은 그것은 오직 하룻밤이나 하루이며, 이 광대한 위험한 정원이, 아직 발견되지 않고 탐험되지 않은 나라가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

"만일 정말 그런 기분이 든다면 왜-"

하고 린다는 빠른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아아" 하고 죠나단은 외쳤다. '아아'는 어딘가 환희에 넘쳐 있다고 해도 좋았다.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군. ? 정말 왜 그럴까? 그것은 미칠 것 같은 풀 수 없는 의문이다. 왜 나는 다시 한 번 뛰쳐나가지 않는가? 창문이든 어디든 좋아, 들어올 입구가 있는 것이다. 희망이 없을 만큼 꽉 닫혀 있지는 않다- 그렇지. 왜 그곳을 찾아서 나가려 하지 않는가? 대답하라, 나의 누이여."

하나 그녀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았다.

"나는 점점 그 곤충을 닮아간다. 어찌된 일인가?"

하고 한마디 할 때마다 말을 끊고- "잠시도 파닥대거나 붕붕거리며 유리창을 기어오르는 걸 멈추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금지되어 있다. 곤충의 법칙에 위배된다. 왜 나는 직장을 그만두지 않는가? 예컨대 당장 그만둘 경우, 방해가 되는 것이 뭘까를 왜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가? 어처구니없이 묶여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아이를 둘 양육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그들은 사내아이다. 지금이라도 바다로 나가도 되고 오지에서 일을 찾아도 된다. 그럼-"

갑자기 그는 린다에게 미소 짓더니 비밀을 털어놓듯 말투를 바꾸고

"마음이 약해...... 약한 거야. 끈기가 없어. 무게가 없지. 지도 원리가 없다고나 말해 둘까."

하나 곧 음울하지만 거침없는 목소리가 울렸다.

"세상에 알려진 그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느뇨...... 그대는."

그리고 두 사람은 침묵해 버렸다.

해는 넘어갔다. 서녘하늘에 짓눌린 장밋빛 구름의 커다란 덩어리가 걸려 있다. 구름 사이에서도 그 저편에서도 하늘 가득히 퍼질 만큼 햇살이 넓은 줄무늬가 되어 빛나고 있다. 머리 위에서는 푸른 하늘이 엷은 금빛으로 바뀌고, 그것을 배경으로 뚜렷이 떠오른 숲이 금속처럼 검게 윤택한 빛을 던졌다. 그와 같은 광선이 공중에 나타나면 가끔 인간은 두려움에 무릎을 꿇는다. 하늘 위에 전능하시고 투기하시는 신 여호와가 계시어, 그 눈은 우리 인간에게 주어지고 항상 지켜보며 결코 싫증내지 않는다는 것이 생각난다. 그 내림에 즈음하여 대지는 모두 진동하고 하나의 썩은 무덤이 된다. 싸늘하게 빛나는 천사가 사람들을 여기저기로 휘몰아친다.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사실을 설명해 줄 시간이 없다...... 그러나 오늘 밤은 그 은빛 광선에 더없이 기쁘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이 있는 듯 린다에겐 생각되었다. 바다로부터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저 기쁘고 온화한 아름다움을 가슴에 들이마시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바다는 부드럽게 숨 쉬고 있었다.

"틀려먹었어, 틀려먹었다구."

죠나단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정경은, 그런 무대 장치는 아무래도...... 의자가 세 개, 책상이 세 개, 잉크병이 세 개에 쇠그물로 눈을 가리려 하거든."

그가 앞으로도 변하지 않으리라는 걸 린다는 알고 있기에 말했다.

"이젠 너무 늦지 않았겠어요?"

"나는 늙은이야- 늙은이."

죠나단은 가락을 붙여가며 말했다.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머리에 손을 갖다 댔다.

"보세요."

그의 검은 머리에는 완전히 은빛이 뒤섞여 있었다. 빛깔이 검은 닭의 가슴의 깃털 같았다.

린다는 놀랐다. 그가 희끗희끗 센 머리를 가졌다고는 생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옆에 서서 한숨을 내쉬던 죠나단이, 그때 처음으로 결의가 모자라고 은근하지도, 무관심하지도 않으며, 이미 늙은 기색을 띤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어둠이 깔린 풀 위에선 그는 대단히 키가 커 보였다. 그러자 이런 생각이 그녀의 머리에 스쳤다.

'잡초와 같은 사람이야.'

죠나단은 몸을 굽혀 그녀의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여인이여, 아름다운 그대의 마음에 신의 축복이 있기를."

하고 그는 속삭였다.

"나의 명성과 재산을 이어받을 그 아들을 찾아가리로다. 이 몸은......"

그는 가버리고 말았다.

 

11

방갈로 창문에 불이 켜졌다. 네모난 금빛 광선이 두 개의 석죽과 마리골드 위에 떨어졌다. 고양이 플로리가 베란다에 나와서 제일 윗단에 앉았다. 하얀 발을 단정히 모으고 꼬리를 말아 올렸다. 만족스런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이 순간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고마워, 날이 새네' 하고 플로리는 말했다. '고마워, 기나긴 하루가 끝났어.' 살구 같은 눈을 떴다.

이윽고 합승의 덜걱덜걱대는 소리가 나자 케리의 채찍이 울렸다. 점점 가까워 오더니, 거리에서 돌아온 사내들이 큰소리로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합승은 바넬 가의 문 옆에서 섰다.

린다의 모습이 보이기까지 스탠리는 집으로 들어가는 길을 반쯤 걸어갔다.

"여어, 당신이군."

", 스탠리."

그는 꽃밭을 뛰어넘어서 두 팔로 그녀를 잡았다. 린다는 그의 힘차고도 친밀한 포옹에 휩싸였다.

"용서해 줘, 용서."

스탠리는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녀의 턱 밑으로 한 손을 돌려 얼굴을 밀어올리더니, 자기 쪽으로 향하게 했다.

"용서라뇨?"

린다는 미소 지었다.

"대체 뭘 말이죠?"

"농담이겠지, 잊을 턱이 없을 텐데."

하고 스탠리 바넬은 외쳤다.

"나는 하루 진종일 다른 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어. 정말 힘든 하루였어. 뛰쳐나와서 전보를 칠까 생각했지만, 내가 돌아가기 전에 배달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만두었지. 지옥 같은 괴로움이었다구, 린다."

"하지만 ."

라고 린다는 말했다.

"뭔가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라도 있나요?"

"린다."

- 스탠리는 기분이 언짢았다-

"몰라?- 아니, 알고 있을 텐데- 오늘 아침에 나는 '다녀오겠소'란 말도 하지 않고 뛰쳐나가지 않았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자신도 알 수 없지만, 물론 예의 그 울화통 탓이야. 하지만- , 좋아."

- 그리고 한숨을 쉬자 그는 또 그녀를 껴안았다-

"오늘은 덕분에 혼이 났으니까."

"손에 들고 있는 그건 뭐죠?"

하고 린다는 물었다.

"새 장갑? 보여 주세요."

"아냐, 세무 가죽으로 된 싸구려야."

스탠리는 소극적인 어조로 말했다.

"오늘 아침 마차에서 벨이 끼고 있는 것을 보고, 가게 앞을 지나가다가 잠시 들어가서 내 것을 샀던 거야. 뭘 웃고 있어. 그런 일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 테지."

"안 된다고 하는 게 아니에요!"

하고 린다는 말했다.

"정말 잘 생각하셨어요."

그녀는 그 커다란 장갑을 한 짝만 제 손에 끼고는 손을 이리저리 돌리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스탠리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것을 사고 있는 동안에도 당신 생각만 했다오.'

그것은 정말이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그것을 말로는 할 수 없었다.

"안으로 들어갑시다."

하고 그는 말했다.

 

12

밤이 되면 왜 이렇게 느낌이 달라지는 것일까. 여느 것이 다 잠들어 있을 때 눈을 뜨면 왜 이렇게 가슴이 두근댈까. 새벽녘- 새벽녘이다. 하나 일각, 일각 차츰 눈이 떠지는 느낌이 든다. 천천히, 숨을 쉴 때마다 새롭고 놀랄 만한, 한낮의 빛 속에서 본 것보다도 더욱 오싹오싹 두근두근거리는 세계로 빠져들어 가는 것 같다. 음모에라도 가담한 듯한 이 기묘한 느낌은 도대체 무엇일까. 몰래 사뿐히 방안을 거닐어 본다. 화장대에서 뭔가 집어 들었다가는 소리 나지 않게 살며시 다시 놓는다. 그러면 온갖 것이, 침대의 기둥조차도 그 의미를 알아차리고 반응하며, 비밀에 참여한다......

낮엔 자기 방이라도 그리 좋아할 수가 없다. 방에 관한 일은 생각나지도 않는다. 나가거나 들어오거나,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가, 찻장이 삐걱거리거나 한다. 침대 모서리에 앉는다. 신을 바꿔 신고 달려간다. 휙 허리를 구부려 거울을 들여다보고 머리에 핀 두 개를 꽂고 코끝에 분을 바르고 나간다. 한데 지금은- 갑자기 이 방이 그리워졌던 것이다. 조그맣고 우스꽝스런 방, 자기 것이다. 아아, 뭐든 제 것으로 만든다는 건 즐겁다. 나의- .

"영원히 나의 것."

"그래요."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진다.

아니, 물론 그러한 것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 모두 시시한 잠꼬대다. 하나 무의식중에 베릴은 분명히 제 방 한가운데에 두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을 눈에 그렸다. 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그는 그녀를 껴안는다. 그리고 속삭인다.

"나의 귀여운 미인."

그녀는 침대에서 펄쩍 뒤로 물러서 창으로 달려가 창턱에 팔꿈치를 얹고, 창가에 놓인 의자에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이 밤은 정원과 나무 숲의 나뭇잎 한 장까지, 하얀 울타리와 별조차 그 음모의 가담자였다. 달은 휘영청 빛나고, 꽃이 대낮과 같이 빛나고 있다. 멋진 백합 모양의 잎사귀와 활짝 핀 꽃을 단 금련화의 그림자가 은빛 베란다에 떨어지고 있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휘어진 마누카나무는 한 다리로 서서 날개를 편 새와 같았다.

그러나 베릴이 풀숲에 눈길을 주자 풀숲은 슬퍼 보였다.

'우리는 말없는 나무입니다. 밤하늘에 가지를 뻗어, 우리 자신도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탄원하고 있습니다.'

슬픔에 잠긴 풀숲은 그렇게 말했다.

확실히 외톨이가 되어 인생을 생각하면 언제나 인생은 슬프다. 저 흥분이 갑자기 사라지고, 정적 속에서 누군가가 이름을 부르고 있다. 제 이름을 처음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베릴."

", 여기 있어요. 나 베릴이에요. 날 부르는 이가 누구죠?"

"베릴."

"곧 가요."

혼자서 사는 것은 쓸쓸하다. 물론 친척이나 친구는 많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는 건 아니다. 아무도 모르는 베릴을 발견해 줄 사람, 언제든지 그 베릴대로 있으라고 말해 줄 사람이 아쉽다. 그녀는 연인이 갖고 싶은 거다.

'이 다른 사람들 틈에서 저를 데려가 주세요. 먼 곳으로 가십시다. 우리들의 인생을, 전혀 새롭고 다른 사람이 끼어들지 않는 인생을 처음부터 새로 시작합시다. 둘이서 불을 사릅시다. 함께 앉아 먹도록 합시다. 밤이면 긴 이야기를 주고받읍시다.'

그 생각은 거의 '날 구해 주세요, 어서 구해 줘요' 하는 말과 같았다.

......'어머, 어리석기는. 얌전빼는 짓은 그만둬요. 젊을 때 즐기는 거야. 난 그렇게 충고해요.'

그러자 하리 켄바 부인의 커다란 무관심한, 말울음 같은 웃음소리에 높고 어리석은 웃음소리가 껄껄대며 뒤섞였다.

그러나 아무도 상대가 없으면 그것은 무섭고 힘들다. 여러 가지 사정에 좌우되기가 쉽다. 무뚝뚝할 수도 없다. 그래서 해변의 다른 멍텅구리들처럼 세상모르고 점잔을 뺄 근심을 언제까지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게다가- 사람을 움직일 힘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아는 건 멋지다. 그렇다, 정말 멋지다......

아아, , ''가 얼른 오지 않는 것일까.

여기서 이대로 산다면, 하고 베릴은 생각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하나, 누가 온다는 것을 어떻게 알지?'

하고 마음속의 작은 소리가 비웃었다.

그러나 베릴은 그것을 지워버렸다. 남겨둬서는 안 된다. 타인은 어떨지 모르지만 자기는 안 된다. 그 예쁘고 멋진 베릴 페어필드가 결혼하지 않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베릴 페어필드를 기억하세요?

'기억하다뇨, 그럼 잊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사람을 만난 것은 어느 여름, 해변에서였습니다. 물가에 서 있었는데 파아란'- 아니 핑크색의- '모슬린 프록을 입고 커다란 크림색의'- 아니, 검은-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벌써 몇 년 전의 일인걸요.'

'지금도 전혀 변함이 없어요. 아니, 이전보다 더 예쁠 정도예요.'

베릴은 미소짓고 입술을 깨물며 정원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누군지 모르는 사나이가 한길을 벗어나서 바넬 가의 울타리를 따라 단지를 걷더니, 곧장 접근해 오는 것이 그녀의 눈에 띄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누굴까? 대체 누구일까? 도둑일 리는 없었다. 분명히 도둑은 아니다. 담배를 피우며 경쾌한 걸음걸이이니까. 베릴의 심장이 껑충 뛰었다. 한바퀴 뒤집어져서 그대로 멎었는가 생각될 정도였다. 누구인지를 알았다.

"안녕하세요, 베릴 아가씨."

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잠깐 산책하러 나오시지 않겠습니까?"

하고 점잖게 나왔다.

산책을 나오라구- 이 한밤중에?

"갈 수 없어요. 벌써 모두 잠자리에 든 걸요. 다 자고 있어요."

"그런가요."

경쾌한 목소리가 말했다. 향긋한 담배연기가 풍겨왔다.

"모두들 어떻게 됐다구요? 오세요, 정말 좋은 밤이로군. 사람 하나 없어요."

베릴은 머리를 흔들었다. 하나 벌써 몸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며 고개를 들고 있었다.

목소리가 말했다. "무섭습니까" 하고 비웃는 투로.

"처녀니까."

"천만에."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는 동안에 몸속의 그 나약한 생물은 도사리던 것을 풀고 갑자기 이상할 만큼 우람해졌다. 베릴은 나가고 싶었다.

그러자 어느 새 상대방이 알아차렸는지 목소리가 말했다. 다정하고 온화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오세요."

베릴은 낮은 창틀을 넘어 베란다를 가로질러서 잔디 깔린 정원을 지나 문까지 달려나갔다. 그가 먼저 와서 말했다.

"결국 나오셨군요."

하고 놀리는 어조로

"무섭지 않죠, . 무섭지 않죠?"

하지만 무서웠다. 여기까지 나오긴 했지만 베릴은 겁에 질려 있었다. 모든 것이 일변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달빛은 그녀를 지켜보며 반짝이고, 주위의 그림자는 쇠로 만든 빗장 같았다. 손을 잡혔다.

"조금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말했다.

"무서워해야 할 까닭이 없잖아요."

천천히 베릴은 손을 잡아끌렸다. 상대가 힘을 주면 그녀는 꽁무니를 뺐다.

"아니, 더 이상 멀리 가진 않겠어요."

"이상한 말을 하시는군."

하리 켄바는 신용하지 않았다.

", 저 푸크샤 숲까지 가 봅시다, 자아."

푸크샤 숲은 키가 컸다. 울타리 위에 쓰러지듯 기대어 뒤엉켜 있었다. 그래서 그 밑이 어둑한 작은 움푹 파인 곳처럼 되어 있다.

"아니, 정말 더는 안 가겠어요."

하고 베릴은 말했다.

순간, 하리 켄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곧 옆으로 다가와서 그녀를 향해 미소짓자 빠른 말로 지껄였다.

"바보 같은 짓 하는 게 아니에요, 바보 같은 짓."

그 미소는 그녀가 이제까지 본 일이 없을 만큼 이상한 것이었다. 술 취해 있는 걸까? 그 밝고도 맹목적인 무서운 미소가 그녀를 소름끼치게 했다. 넌 뭘하고 있는 거냐, 왜 이런 데로 나왔느냐, 하고 문이 열리자, 고양이처럼 재빨리 하리 켄바가 문을 지나서 그녀를 끌어당겼을 때, 엄숙한 표정이 정원에게 물었다.

"이 싸늘한 악마놈이, 싸늘한 악마놈이."

하고 그 화가 치민 목소리는 말했다.

그러나 베릴은 꺾이지 않았다. 팔을 뽑고 몸을 굽혀서 밀어냈다.

"어머, 징그러워."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럼 대체 왜 나왔어."

하리 켄바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도 대답하는 자라곤 없었다.

작은 한가스런 구름이 한 조각, 달의 얼굴을 스쳤다. 그러자 그 어둠의 순간에 바다도 나직한 근심하는 소리를 질렀다. 구름이 지나가자 바닷소리는 희미하게 중얼거림으로 바뀌었다. 음울한 꿈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주위는 온통 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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