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없는 사이
허물없는 사이
J. P. Sartre
1
류류가 벌거벗고 자는 것은, 시트에 살이 닿는 촉감이 좋을 뿐더러, 세탁비를 아끼기 위해서였다. 벌거벗고 침대 속에 들어가 자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래선 못써. 망측스럽다 해서 앙리는 처음에 반대하였지만, 나중에는 이러한 아내의 버릇에 따르기로 하였다. 그런데 앙리가 그렇게 한 것은 게으름 때문이었다. 남의 앞에서는 말뚝처럼 굳어지는 위인(爲人)이면서도(그는 스위스 사람, 특히 쥬네브 사람을 좋아하였다. 장작개비처럼 딱딱한 모습이, 그의 눈에는 의젓하게 보였던 것이다.) 자질구레한 일에는 무관심한 성미였다.
예컨대 몸도 깨끗하지 않았지만, 팬츠도 자주 갈아입지 않았다. 그리하여 류류는 팬츠를 빨래 자배기에 주워 담을 때에는 가랑이 사이가 누렇게 찌든 것을 으레 보게 마련이었다. 그렇다고 류류가 얼굴을 찡그리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럴수록 정분이 두터워 보이고, 그윽한 뉘앙스를 풍겨주는 것이었다. 류류는 영국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몸에서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고, 개성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편의 게으름은 안일에 흐리기 때문에 싫었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면 번번이 꿈속에 잠긴 듯한 얼굴을 하고 꼼짝도 하기 싫어하였다. 햇빛도, 시원한 물도, 칫솔도, 무슨 원수나 되는 것처럼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류류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왼발 엄지가락을 시트의 찢어진 구멍 속에 넣고 있었다. 아니, 찢어진 구멍이 아니라 시친 데가 터져서 생긴 구멍이었다. 이런 변이 있나. 내일 당장 꿰매야지, 류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터지는 것을 보려고, 실을 약간 잡아당겼다.
앙리는 아직 잠들지 않았다. 그러나 인제 귀찮게 굴지는 않는다. 자기는 눈만 감으면, 마치 가느다란 질긴 끈으로 칭칭 동여맨 거나 마찬가지 기분이라고, 그는 때때로 말해왔었다. 말하자면, 새끼손가락 하나라도 꼼짝 못 하겠다는 것이다. 류류는 거미줄에 휘감긴 파리 모양, 사로잡힌 이 육중한 몸뚱이를 가까이 느끼는 것이 좋았다. 만일 그가 중풍에라도 걸려, 지금과 같이 꼼짝 못 하게 되면, 내가 돌봐 줘야지. 어린애처럼 몸을 씻어 주고, 간혹 엎어 뉘고서 볼기짝을 툭툭 때려 주자. 그리고 때때로 남편의 어머니가 문병을 오면 무슨 핑계로 서든지 덮은 이불을 벗겨 보이자. 그러면 어머니는 아들의 벌거벗은 알몸뚱이를 보고 놀라 자빠질 것이다. 아들은 그런 몸뚱이를 15년 만에야 처음으로 보게 될 테니까 말이다.
류류는 남편의 허리에 살며시 손을 넣어 불알을 꽉 꼬집었다. 그는 낑낑거릴 뿐,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성적(性的) 불구자인 것이다. 류류는 방긋이 웃어 보였다. <불구자>라는 말을 들으면 언제나 우스워진다. 일찍이 앙리를 사랑하던 무렵, 그가 이와같이 마비된 듯이 옆에 누워 있으면, 그녀는 어렸을 때 걸리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보던 삽화가 생각났다. 그리고 남편이, 그 삽화에 나오는 난쟁이 같은 사람들에게 칭칭 결박을 당한 모습을 그려보고는 혼자서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앙리를 때때로 거리버라고 불렀다. 앙리는 이것은 영국 사람의 이름이고, 또 그렇게 부르는 류류가 한결 교양이 있어 보여서 무척 반가웠으나, 이왕이면 악센트까지 붙여서 불러 주었으면 하였다.
<아아, 모두들 얼마나 귀찮게 굴었던지 몰라. 앙리는 교양 있는 여자가 좋다면, 쟌느 브데르하고나 결혼할 일이지. 그 여자의 젖가슴은 비록 뿔피리처럼 기다랗게 축 늘어졌지만, 다섯 나라 말을 하니까. 다 지나가 버린 얘기지만, 일요일마다 쏘오에 가서 앙리의 식구와 하루를 함께 보내게 되면 어떻게 하품이 나던지,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들고 보면 으레 누가 옆에 와서, 내가 무슨 책을 읽나 들여다보았지. 그이의 여동생은 이렇게 물었다.
「류씨, 그 책 이해할 수 있어?」
정말이지, 앙리는 나를 별로 훌륭한 여자라고는 생각지 않았던가 봐. 그이는 스위스 사람을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건 자기 누이가 스위스 남자와 결혼하여 아이를 다섯이나 낳았다고 해서 그러는 모양이다. 둘이서 산(山)에 대한 애기를 지껄이면서 그이를 매혹시키거든.
난 아일 낳지 못해. 육신이 그렇게 되어 있는 걸. 그렇지만 함게 외출하면 그이는 공동변소만 자꾸 찾는데 그게 어디 꼴이 됐어? 나는 남편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거리의 쇼윈도우나 바라보고 있어야 하니 기가 찰 노릇이지. 아윽고 앙리는 바지를 추켜 올리고 늙은이처럼 가랑이를 어기적거리며 공동변소에서 나오거든.>
류류는 남편 곁에서 자기의 육체가 발랄한 것을 느끼면서 즐거웠던 것이다. 그러자 꼬르륵하고 소리가 났다. 배에서 나는 소리였다.
<아이, 기분 나빠라! 남편의 배에서 나는지, 내 배에서 나는지 알 수 있어야지.>
그녀는 눈을 지긋이 감았다. 부드러운 창자 속에서 액체가 흘러내리는 소리다.
<그런 창자는 누구에게나 다 있어. 리레트에게도 있고, 나한테도 있지.(그런 생각을 하면 뱃속이 뒤집히는 것 같아서 질색이야) 남편은 날 사랑하지만, 내 창자를 사랑하는 건 아니야.>
만일 내 맹장을 유리병 속에 넣어서 보여주면 어떨까? 아마도 알아보지 못할 테지. 남편은 언제나 내 몸을 만지작거리지만 만일 그 병을 손에 쥐어 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테지. <이건 내 아내의 창자야!>하고 생각할 수 없겠지. 어떤 사람을 사랑할진대, 그 사람의 것이라면 뭐든지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시고(食道)건, 간장이건, 창자건 말이야. 그러나 그런 걸 사랑하지 못하는 건 습관이 붙지 않은 탓이겠지. 만일 손이나 팔처럼 그런 걸 언제나 볼 수 있다면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지. 그러니 불가사리 따위는 우리네 인간들 보다 더 잘 사랑하고 있을 테지. 불가사리는 햇빛이 쪼이면 한가하게 바닷가에 누워서 자기 창자를 꺼내어 바람에 쏘이거든. 그건 누구나 볼 수 있어. 우리는 창자를 내놓을 수 없을까? 배꼽으로?>
류류는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자 마치 어제 장터에 가서 고무 화살로 쏜 원판처럼 파란 원판이 뱅글뱅글 돌기 시작하였다. 하나 쏠 적마다 글자가 하나씩 켜져서 그것이 도시 이름을 꾸며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앙리는 언제나 하는 버릇처럼 내 등에 몸을 갖다 대는 바람에, 디종(Dijon)이라는 도시의 이름이 다 나오려다가 그만 헤방을 받았지. 나는 누가 뒤에서 몸을 건드리는 게 질색이거든. 차라리 등이 없는 편이 낫지. 내가 볼 수 없는 사람이 뒤에서 장난을 치는 건 기분 나쁜 일이야. 상대방은 실컷 재미를 보고 있는데, 나는 그 손도 볼 수 없지 않아. 손이 오르내리는 건 느끼지만, 그 손이 어떻게 움직여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어야지. 상대편은 빤히 보고 있지만, 이쪽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으니 말이야. 앙리는 그런 짓을 잘하거든. 그이는 언제나 내 등 뒤에 누우려고만 든단 말이야. 그이는 내 궁둥이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내가 부끄러워하는 줄 알면서 일부러 궁덩이를 만지나 봐. 내가 부끄러워하면 더욱 신이 나는 모양이야. 그렇지만 앙리의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 (그런 생각을 하면 무서우니까.) 나는 레레트의 일이나 생각해 봐야겠어.>
류류는 밤마다 같은 시간에 리레트의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앙리가 잠꼬대를 하면서 끙끙거릴 때이다. 그러면 어떤 저항(抵抗)이 생겨, 다른 모습이 나타나려고 한다. 검은 곱슬머리까지 힐끗 보였다. 그러자 그녀는 뭐가 또 나타날지 몰라 온몸이 오싹하였다. 그래도 얼굴이라면 괜찮다. 그러나 꺼림칙한 기억이 머리에 떠올라, 밤을 뜬눈으로 새운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어떤 남자의 육체를 특히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앙리의 경우라면 문제가 다르다. 앙리의 몸이라면 머리에서 발끝까지 상상할 수가 있다. 배 언저리만 불그스름할 뿐, 전신이 검은 편이고, 흐늘흐늘하므로 가엾은 생각이 앞선다. 앙리의 말에 의하면, 체격이 좋은 사나이는 앉으면 배에 세 줄기 주름이 난다고 하지만, 그의 배에는 주름이 여섯 개나 생긴다. 그런데 그는 하나씩 건너뛰어 세고는, 자기한테도 주름이 세 개가 난다고 고집하면서 다른 주름은 보려고 들지 않는다.
류류는 리레트의 생각을 하자 짜증이 났다.
<류류, 너는 남자의 훌륭한 육체가 뭔지 몰라.>
<근육이 우툴두툴하고 돌처럼 딱딱한 육체라면 나도 알고 있어. 리레트는 아마도 그런 남자의 육체를 두고 하는 말 같은데, 그렇다면 우습기 짝이 없지, 난 그런 육체는 싫어. 빠떼르송이 바로 그런 육체를 갖고 있었거든. 그이한테 안기면, 내 몸은 마치 벌레처럼 뭉그러지는 것 같았어. 내가 앙리와 결혼을 한 건, 그 몸뚱이가 마치 신부(神父)의 그것처럼 부드러웠기 때문이지. 법의(法依)를 걸친 신부들을 보면, 여자처럼 얌전하게 보인단 말이야. 발에도 여자 양말을 신고 있는 것만 같아, 난 열다섯 살 때, 신부의 옷자락을 살며시 들고, 무릎과 팬츠를 들여다보고 싶었어. 그들의 가랑이 사이에도 그것이 달려 있으려니 하고 생각하니, 우습지 뭐야. 한 손으로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다른 손으로 다리를 더듬어 올라가서 그걸 만져 보았으면! 그렇지만 그런 옷 밑에 감춰진 남자의 그건 아마 흐늘흐늘하고 큼직한 꽃같이 생겼을 거야. 정말이지 그건 손에 쥐어볼 수가 있어야지. 좀 얌전히 있으면 오죽 좋을까. 그렇지만 짐승처럼 꿈틀거리면서 금세 딱딱해지거든. 그놈이 꿋꿋해져서 곤두서면 무서워. 정말 사나와 보인단 말이야.
사랑이란 얼마나 더러운지 몰라. 내가 앙리를 좋아하는 건, 그게 딱딱해지거나 고개를 치켜드는 일이 없기 때문이야. 그이의 그걸 보면 웃음이 나거던. 난 가끔 어루만져 주기도 했지. 아무튼 그이의 것은 아이들의 그것처럼 통 무섭지 않단 말이야. 밤에 내가 그걸 손가락 사이에 끼면, 앙리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숨을 크게 내쉬며 외면해 버리지. 그러나 그놈은 손가락에 잡힌 채, 꿈쩍도 않고 얌전히 있거든, 나는 구태여 꼭 눌러 주지 않고, 그냥 한참 있으면 그이는 드디어 잠들어 버린단 말이야. 그러면 나는 돌아누워서 신부니, 여자니, 하고 여러 가지 깨끗한 일들을 생각해 본단 말이야. 그리고 처음에는 내 배를 슬슬 어루만져 보거든. 판판하고 아름다운 배야. 이윽고 손을 아래로 내려 뻗어면, 기분이 참 좋아, 내 기분은 내가 아니고서는 북돋아 줄 수 없어. 고수머리, 흑인의 머리. 골처럼 목구멍에 뭉쳐 있는 불안!>
류류는 눈을 꼭 감았다. 그러자 리레트의 귀가 나타났다. 캔디로 만든 것같이 보이는 진홍빛과 금빛으로 된 귀여운 귀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 귀를 보아도 전과 같이 즐겁지 않았다. 리레트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녀가 싫어하는 날카롭고 야무진 목소리였다.
<넌 피에르와 함께 어디든지 가 버려야 해. 그렇게 하는 것만이 현명한 길이야.>
<나는 리레트를 무척 좋아하지만, 잘난 체하거나, 자기가 자신의 말에 도취되는 걸 보면, 은근히 배알이 꼴린단 말이야. 전에도 꾸우뿔 다방에서 만났을 때, 얼굴을 앞으로 내밀면서 사나운 눈초리로 티이르듯이 지껄여대었어.>
「넌 앙리와 함께 살아서는 안 돼. 그이를 사랑하는 건 벌써 옛날 일이야. 그러므로 여지껏 붙어사는 건 죄악이지 뭐니?」
<리레트는 나를 보기만 하면 앙리의 욕을 하지만, 그건 얌전치 못한 일이야. 앙리는 언제나 나한테 잘 해주는 거야. 하긴 나는 지금 앙리를 사랑하고 있지 않을지도 몰라. 그러나 그 일에 리레트가 뭣하러 참견한담! 그 애는 다만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 하는 식으로 단순하게 판단해 버리거든. 그러나 난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순 없어. 첫째 이 집에서 함께 사는 것이 노몸에 배어 있고, 또 그이를 아끼고 있으니까. 뭐니 뭐니 해도 내 남편인걸. 리레트년을 한 대 때려 주고 싶군. 그 뚱뚱한 꼬락서닐 보면 한바탕 혼내주고 싶단 말이야. <그건 죄가 돼.>하고 팔을 휘둘렀을 때, 겨드랑이가 보이지 뭐야. 하긴 그 애는 팔을 드러내고 다니는 편이 낫긴 해. 겨드랑이가 살짝 들여다보이는 게 마치 입을 벌린 것 같이 보이거든.>
류류는 곱슬곱슬한 머리칼 아래로 주름이 잡힌 듯한 거무스럼한 살결을 보았던 것이다.
「통통한 미네르바!」
피에르는 리레트는 이렇게 부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말이 질색이었다. 류류는 동생 로베르를 생각하고 방긋이 웃어 보였다.
「누나는 왜 겨드랑이 아래 털이 났어?」
어느 날 로베르는 류류가 콘비네이션 하나만 걸치고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병이야.」
하고 그녀는 대답해 주었다. 류류는 동생이 보는 데서 옷을 갈아입기를 좋아하였다. 언제나 재미있는 말을 걸어오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동생은 누나의 것은 다 만져 보고, 옷도 정성껏 개어 주었다.
<저 애는 손재주가 좋아 앞으로 훌륭한 재봉사라도 될지 몰라. 재봉사는 좋은 직업이야. 나는 동생을 위해 재단을 해 줘야지.
세상에 재봉사가 되려는 소년이 있다니 별 일도 다 보겠군. 내가 만일 남자라면 탐험가나 배우가 되려고 했을지 모르지만, 재봉사가 되려고는 하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로베로는 꿈이 많은 아이거든. 말도 별로 없고, 혼자서 생각에 잠기는 성미라, 그런지도 몰라. 나는 수녀가 되어 훌륭한 집에 시주를 받으러 다니고 싶었지. 눈까풀이 부드럽게 처지는 걸 보니 아마 인제 잠이 들려나 봐. 창백한 예쁜 얼굴에 고깔을 쓰면, 얼마나 참하게 보일까. 어둠침침한 응접실을 수없이 구경할 수 있을 테지. 그러나 식모가 와서 곧 전등을 켜면, 조상들의 초상화와 선반 위에 놓여 있는 청동의 조각들, 그리고 옷걸이도 눈에 뜨이겠지, 곧 주인아주머니가 작은 수첩과 50프랑짜리 지폐를 갖고 나올 거야.
「스님, 약소합니다.」
「고맙습니다. 복 많이 받으십시오. 또 뵙겠습니다.」
그러나 나같은 계집이 어떻게 수녀가 될 수 있을까. 버스를 타면 남자들에게 때때로 윙크라도할 테지. 남자는 처음에는 깜짝 놀라겠지만, 곧 나한테 얘기를 걸면서 쫓아올 테지. 그러면 나는 순경에게 일러서 그를 유치장에 처넣어을 거야. 시주는 내가 먹어 버리고 그런데 그 돈으로 뭣을 샀을까. 예방약? 별 어리석은 생각을 다 하는구나! 눈까풀이 스르르 녹아 온다. 아 기분이 좋다! 마치 눈물을 물에 탄 것 같군. 전신이 노곤하다. 멋진 초록빛 교황모(敎皇帽). 거기에는 에메랄드와 보석이 달렸을 테지.>
교황모는 빙빙 돌더니 이윽고 사나운 황소 대가리로 변하였다. 그러나 류류는 두렵지 않았다. <스쿠르쥬. 깡딸산 봉우리의 새. 주목!> 이런 말들이 입속에 맴돌았다. 벌판 중간을 붉은 길다란 강물이 흘러갔다. 류류는 고기를 다지는 기계와 고기 제품을 연상하였다.
<그건 죄악이야!>
류류는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뜨고 어둠 속에 일어나 앉았다.
<그 연놈들은 나를 괴롭히면서 그런줄도 모르나? 리레트는 물론 날 위해 그렇게 말할 거야.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그토록 경우가 바르면서, 왜 내가 오랫동안 생각해 봐야 한다는 건 몰라줄까?
「우리 집으로 와야 해요. 나는 당신을 갖고 싶어요.」
그 남자는 이글거리는 눈을 하고 나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최면술을 하는 사람처럼 날 노려보면, 그 눈이 무서워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그는 내 팔을 으스러지도록 잡는 거야. 그 눈을 바라보면 으레 가슴에 무성한 털이 생각나거든. - 와야 해요. 나는 당신을 갖고 싶어요. - 어쩌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담. 개자식 같으니!
나는 옆에 앉아서 웃어 보였지. 그 남자 때문에 얼굴에 다시 분을 바르고 그 남자가 좋아하길래 눈에도 화장을 했는데, 거들떠보지도 않는군. 그 남자는 언제나 내 젖가슴만 바라보거든. 내젖통이 숫제 가슴 위에서 말라붙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그 남자를 골려 줄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내 젖통은 보잘것없어. 아주 작은걸.
니스의 자기 별장으로 오라구? 그 별장은 바닷가에 면한 대리석 층층대가 있는 하얀 집이라나? 뭐 종일 알몸으로 함께 지내자구? 그 층층대를 알몸으로 오르내리면 얼마나 망측스러울까! 나는 이 남자가 내 몸뚱이를 보지 못하도록 먼저 올라가라고 해야지.
- 이 남자의 눈을 멀게 해 줍소서 - 하고 나는 기도를 올리면서 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을 테야. 그러나 여느 때와 별로 다를 게 없을 거야. 나는 그 남자 앞에서는 언제나 벌거벗고 있는 기분이니까.
「당신은 나한테 반했지?」
그는 내 팔을 잡고 협박하듯이 말하기에,
「그래요」하고 대답해 줬지.
「나는 당신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 둘이서 드라이브도 하고, 뱃놀이도 하고, 이탈리아로 여행도 가요.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지 해 줄께.」
그렇지만 그 남자의 별장에는 세간도 별로 없고, 방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잘 거야. 나더러 자기에게 안겨서 자라고 할 테지, 냄새가 꽤 날거야. 가슴팍은 싯누렇고 널찍해서 좋긴 하지만, 털이 너무 많지. 남자의 몸뚱아리에 털이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남자의 털은 검고 이끼 모양 부드럽지만, 나는 그걸 쓰다듬을 적마다 끔찍스러워. 나는 되도록 떨어져 있으려고 하지만, 언제나 힘껏 껴안거든. 그는 언제나 자기에게 안겨서 자라고 할 거야. 냄새가 얼마나 고약할까!
해가 지면 파도 소리가 들릴 테지. 그리고 무슨 생각이 나면 밤중에도 날 흔들어 깨울 거야. 한 달에 한차례 몸이 불편할 때를 제외하고는 편히 자지도 못하게 하겠지. 그러나 그때만은 건드리지 않을 거야. 그러나 여자가 몸이 불편해도 그 짓을 하는 남자가 있나 보더군. 일을 마치고 나면 배에 피가 묻을 테지, 자기 피가 아니라, 남의 피 말이야. 시트 위에도, 그 부근에도 피가 묻겠지. 아이 더러워! 왜 인간에게는 이 육신이라는 게 있을까?>
류류는 눈을 떴다. 거리에서 비쳐오는 햇빛으로 하여 커튼도 거울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이 빛깔이 좋았다. 창문가에는 안락의자가 하나 놓여 있는데, 앙리는 그 의자의 팔걸이에 바지를 걸쳐 놓았다. 바지 멜빵이 그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바지걸이를 사줘야지. 아니, 외출하는 건 질색이다. 그 남자는 종일 날 껴안고 있을 거야. 나는 그 남자의 소유물이 되고 노리개가 되어 버릴 테지. 그이는 날 바라보면서 이렇게 생각하겠지. - 이 여자는 내 노리개다. 나는 이 여자의 거기를 만져 보았어. 그리고 언제든지 생각이 나면 만질 수가 있어 -
뽀르 로와이알에서 있었던 일이다. 류류는 이불 속에서 발버둥을 쳤다. 그 일을 생각하면 피에르가 미워서 견딜 수 없었다.
그때 류류는 울타리 뒤에 있었다. 피에르가 자동차에 앉아서 지도를 살펴보고 있는 줄만 알았더니, 별안간 눈앞에 나타났다. 고양이처럼 뒤로 살살 기어 와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옆에서 자고 있는 남편을 발길로 걷어찼다. 혹시 깨어나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런데 알리는 <응, 응!> 소리만 낼 뿐, 눈을 뜨지 않았다.
<숫처녀처럼 순결한 젊은 미남자와 사귀어 봤으면! 몸을 서로 마주 대지도 않고, 손을 맞잡고 바닷가를 산책하고, 나란히 놓은 침대에서 따로 자면서 남매처럼 지내고, 이야기로 밤을 보냈으면!
차라리 리레트와 함께 사는 것도 좋을 거야. 여자끼리 살면 재미있을 테니까. 리레트의 어깨는 통통하게 살이 찌고 매끈매끈하거든. 리레트가 프레넬에게 반했을 때에는 정말 외로웠어. 그가 지금쯤 리레트를 어루만지고 있을 테지. 그가 리레트의 아깨와 옆구리를 살살 문질러 준면, 리레트는 한숨을 내쉴 거라고 생각해서, 기분이 나빴다. 그에게 리레트가 알몸으로 안겨서, 남자의 손이 자기 모믈 어루만지는 것을 느낄 때,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나는 리레트의 몸에 손을 대지 않을 테야. 그 애가 「얘 만져 줘.」 하고 원하더라도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거야.
나는 만일 내 모습이 남의 눈에 띄지 않는다면, 리레트가 그 남자에게 몸을 맡기고 있는 동안에, 곁에 지켜 서서 얼굴을 좀 구경하고 싶다. - 그때 그 애가 미네르바와 같은 행동을 취한다면 질색이야 - 그리고 벌린 장밋빛 두 무릎을 살짝 만지며 낑낑거리는 소리를 들어 봤으면!>
류류는 들뜬 목소리로 킥킥 웃어대었다.
인간이란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하는 법이다. 언젠가 피에르가 리레트를 강간하려고 하는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피에르의 편을 들어 두 팔로 리레트를 꼭 붙잡았지, 어제 리레트는 뺨이 새빨갛더군. 나하고 둘이서 소파에 앉아 있었지. 리레트는 무릎을 모으고 있었어. 그러나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앞으로도 그럴 거야.>
앙리가 코를 골기 시작하였다 류류는 휘파람을 불었다.
<자기는 옆에서 잠을 이루지 못해 속이 상하는데, 이렇게 코를 고는 데가 어디 있나! 병신 같으니! 만일 날 껴안고, 「류류! 당신은 내 생명이야. 나는 당신을 사랑해. 나를 버리지 말어」하고 애원하면, 희생을 하고 그냥 남아 있을 텐데――한평생 이렇게 살면서 위로해 줄 텐데.>
2
리레트는 카페 도옴의 테라스에 앉아서, 포도주를 주문하였다. 기분이 노곤하였다. 류류가 못마땅하였다.
<……그런데, 이 집 포도주에서는 코르크 냄새가 나는군. 류류는 언제나 커피를 마시니까 상관없지만, 그래도 아페리티프 시간에 커피를 마실 수야 없지. 이곳에 오는 손님들은 모두가 가난뱅이들뿐이라, 종일 커피가 아니면, 밀크커피를 마신단 말이야. 꽤 자극을 받을 테지. 나라면 못 견딜 것 같애. 가게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을 손님들의 콧등에 동댕이치고 싶을 거야. 여기 앉아 있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인걸. 류류는 왜 언제나 몽빠르나스에서 만나자는 건지 통 알 수가 없군. 카페 드 라 빼든가 빵빵에서 만나도 자기 집에서는 같은 거리이고, 나로서도 직장에서 더욱 가까운데. 언제나 이런 놈팽이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따분할밖에.
내가 조금이라도 틈만 있으면, 이리로 오라지 않아. 테라스라면 그나마 좀 나은 편이지만, 홀 안으로 들어가면 더러운 속옷 냄새가 나서 질색이야. 난 엉터리 예술가 따위는 싫어. 테라스에 앉아서 봐도 난 옷차림이 말쑥하여 잘 어울리지 않는단 말이야. 내가 면도도 하지 않은 남자들과 수상한 꼴을 한 여자들의 틈에 끼어있는 걸 보면, 길 가던 사람들도 깜짝 놀랄 거야. 저 여자는 저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할 테지.
여름철에는 돈 많은 미국 여자들도 가끔 들리곤 하지만, 현 정부가 그 모양이라 모두들 영국으로만 몰리거든. 사치품이 팔리지 않는 건 그 때문이야. 작년 이맘때에 비하면 난 반도 팔지 못한 거야. 딴 사람들은 얼마나 팔았을까? 가장 우수한 점원인 내가 이 모양이니 뻔해. 듀벡크부인이 그래도 난 칭찬했어. 요넬은 딱해 못 보겠어. 전혀 팔 줄을 모른단 말야. 이달에도 봉급 외의 수당이라고는 한 푼도 못 받았을 거야. 종일 서서 보내고 나면, 신나는 곳에서 좀 편히 쉬고 싶어지는 것도 당연하지 뭐야. 멋진 보이 프렌드와 좀 호화롭게 예술적으로 놀면서, 눈 딱 감고 기분대로 몸을 내맡기고도 싶단 말이야. 또 조용한 음악도 듣고 싶고. 때로는 앙바싸피에르 댄스홀에도 가보고 싶어. 돈도 그다지 많이 들지 않을 거야. 이 카페의 보이들은 건방져. 초라한 손님들만 상대하니까 그럴밖에.
그러나 나한테 서비스하는 저 땅달보 검정 대가리만은 그렇지 않거든. 꽤 공손히 대한단 말야. 류류는 이런 건달패와 상종하는 게 좋은가 봐. 멋진 곳에 가는 건 두려운 모양이지. 자신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야. 좀 고상한 남자를 만나면 기가 죽나 보지. 그래 루이 같은 사람을 싫어할 거야. 그렇지만 이런 곳에서는 마음이 편할 테지.
카라도 달지 않고, 궁상스럽게 파이프를 물고 앉은 녀석도 있잖아. 여자를 바라보는 저 눈초리를 좀 봐. 본색을 감추려는 기색은 전혀 없는 걸, 여자 하나 살 돈이 없을 거야. 이 근방에는 그런 여자들이 우굴우굴하지 뭐야. 구역질이 날 지경이야. 여기 오는 녀석들은 여자를 마치 잡아 삼킬 것 같군. 여자와 놀고 싶은 욕구를 점잖게 나타내어 일을 추진시킬 줄 모르는 녀석들이야.>
보이가 와서 물었다.
「물을 타지 말까요?」
「그래, 고마워요.」
보이는 다시 친절히 물었다.
「날씨가 참 좋습니다.」
「이런 좋은 날씨가 좀 더 일찍 왔어야 할 텐데…….」
「그럼요. 겨울이 한없이 계속되는 것만 같아요.」
보이는 물러갔다. 리레트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생각하였다.
<저 보이는 참 좋아. 자기 직분을 지킬 줄 알거든. 조금도 건방지게 굴지 않아. 그리고 나한테는 말 한마디라도 특히 조심한단 말야.>
허리가 구부정한 말라깽이 젊은이가 리레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그녀는 어깨를 치켜올리고, 그 남자에게 등을 돌렸다.
<여자에게 눈짓을 할 테면, 깨끗한 샤쓰라도 입고 올 일이지. 혹시 말이라도 걸어오면 이렇게 말해 줄 테다. 왜 류류는 앙리와 못 헤어질까? 그 사람을 괴롭히고 싶지 않기도 하지만, 그건 아무 말도 안 돼. 성적 불구자를 위해 일생을 망치다니!>
리레트는 성적 불구자는 본능적으로 질색이었다. <류류는 에어져야 할 거야> 하고 그녀는 생각하였다.
<일생의 행복이 좌우되는 일인데…… 자기의 행복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고 충고해 줘야지. 그러나 헛일일 거야. 지금까지 백번이나 말해 온걸.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행복을 안겨줄 수는 없지.>
리레트는 피로하여 머릿속이 텅 비어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물에 녹은 카라멜처럼 컵 속에서 끈적거리고 있는 포도주를 들여다보았다. 마음속에서는 <행복… 행복…>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뼈에 스미는 듯한 좋은 말이다.
<파리·쏘와르 신문의 현상문제에서 만일 내 의견을 물어오면, 이 보뇌에르(행복)라는 말이야말로 프랑스에서 제일 아름다운 말이라고 대답해 줘야지. 이런 생각을 해 본 사람이 또 있을까? 모두들 「기백」이니, 「용기」니 하고 대답할 테지, 그건 응답하는 사람들이 모두 남자이기 때문이야. 여자가 아니고서는 그런 대답을 하지 못할 거야. 여자나 그런 말을 존중하지.
상(賞)은 둘 있어야 해. 하나는 남자상으로, 가장 아름다운 말은 「오뇌에르(명예)」이고 여자상은 「보니에르」로, 내가 타게 될 거야. 「오뇌에르」와 「보뇌에르」, 서로 운이 맞는걸. 얼마나 재미가 있소!
류류에게는 이렇게 말해 줘야지,
「넌 자기의 행복을 망칠 권리는 없어. 류류, 너 자신의 행복 말이야.」
내가 보기에는 피에르는 손색이 없어. 사나이답고 똑똑하니까. 똑똑한 게 나쁠 게 뭐야. 그리고 돈도 있구. 류류를 잘 보살펴 줄 거야. 그 남자는 일상생활의 자질구레한 문제도 곧잘 처리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이야. 여자로서는 그만이지. 그리고 남을 위압할 수 있는 것도 취할 점이야. 뭐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그인 보이들도 잘 다루거든. 모두들 그이 말이라면 굽실거린단 말야. 그게 위엄이라는 거야. 앙리에게서는 그런 걸 볼 수 없어.
또 류류는 몸도 생각해 봐야지. 자기 아버지를 봐서도 조심해야 할걸. 몸집이 홀쭉하고 얼굴이 창백한 것도 멋일지 모르지만, 입맛도 없고 잠도 잘 자지 못하니 탈이야. 하루에 네 시간밖에 자지 못하면서 옷감 도안을 팔러 종일 파리를 돌아다니지 뭐야. 안될 말이야. 철없는 짓이구. 식사를 제대로 해야지. 한 번에 조금씩 먹는 것도 좋지만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여러 번 먹어야 해. 10년쯤 요양소에 가두어 놓으면 좋아질 거야.>
리레트는 그것을 생각하니 재미있었지만, 그 말라깽이가 줄창 바라보고 있으므로, 웃음을 삼켜 버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자와 눈이 마주쳤다.
라뷰의 얼굴은 온통 검은 여드름투성이였다. 류류는 장난삼아 손톱으로 여드름을 짜 주었다. <기분이 나쁘지만, 이건 그 사람 탓은 아니야. 류류는 미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나 봐, 나는 하이칼라 남자가 좋아. 와이샤쓰며 구두, 반짝이는 예쁜 넥타이 할 것 없이 그 매무새가 근사해. 거칠기도 하면서 상냥하고. 또 억세어 보이기도 하거든. 상냥한 힘! 영국 담배 향기며, 화장수 향기, 그리고 말끔히 면도를 한 그 살결 - 그건 여자의 살결과는 딴판이야. 마치 코르도바(스페인의 도시)의 가죽 같지 뭐야. 그 억센 팔로 휘감아 주는 거야. 그럼 남자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그 향긋한 체취(體臭)를 맡아볼 수도 있지 않아? 그때 남자는 달콤한 말로 속삭일 테지. 그 멋진 옷차림, 암소 가죽으로 된 근사한 구두. 그이는 이렇게 속삭일 거야.
「사랑하는 나의 사람! 귀여운 그대!」
그러면 정신이 아뜩해질 거야.
리레트는 작년에 자기를 버린 루이의 생각을 하고, 가슴이 메이는 것만 같았다.
<몸단장을 잘하는 사람! 커다란 반지하며, 금으로 된 담뱃갑, 여러 가지 귀중품들을 신이 나서 수집하는 사람 - 그런 사람이 가끔 짓궂게 굴다니! 여자보다도 심하지 뭐야. 가장 무난한 건 40대의 남자일지도 몰라. 관자놀이 근처가 희끗희끗한 머리를 빗어넘기고 아직도 몸단장을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 맺힌 데가 있고 어깨가 떡 벌어지고, 스포츠맨 타입이지만 고생도 겪어서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 좋을 거야.
류류는 말괄량이야. 나와 같은 친구가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 피에르까지도 드디어 화를 내기 시작했어. 하긴 그런 기회를 노리는 여자도 있을지 몰라. 그러나 나는 피에르더러 좀더 참아 보라고 언제나 타이르고 있어. 그이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호감을 갖는 눈치를 보이면, 난 슬쩍 류류의 얘기를 꺼내어 그 애를 칭찬하지. 그렇지만 류류는 내 도움을 받을 만한 자격도 없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깜깜이거든. 루이가 떠나 버린 후의 나처럼, 저도 혼자서 좀 살아 보라지. 종일 골이 빠지도록 일하고 나서, 저녁때 혼자 자기 방에 돌아오면, 그 방이 새삼 텅 비어 있음을 느끼고, 어느 누구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고 싶은 심정을 알게 될 테지, 이튿날 아침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또 직장엘 가서 아양을 떨며 억지로 명랑한 체하는 생활을 하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면서도 남보고는 기운을 내라고 일러주거든.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오는 걸까?>
큰 시계가 열 한 시 반을 가리켰다. 리레트는 행복을 생각하고 있었다. 행복의 파랑새, 사랑의 파랑새를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정신이 났다.
<류류는 반 시간이나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네. 이건 예사니까. 남편과는 결코 헤어지지 않을 거야. 그럴 배짱이 없거든. 그녀가 앙리와 함께 사는 건 단지 세상 체면 때문이야. 더러 군것질을 하지만, 그런 건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부인이라고만 불러 준다면, 그런들 어떠냐는 심보야. 남편을 죽일 놈처럼 욕하면서도, 이튿날 남들이 같은 말을 하면,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 야단이거든. 나로서는 할 도리를 다했어, 충고도 할 만큼 했지. 그러나 듣지 않으니 할 수 없지 뭐.>
택시 한 대가 도옴 앞에 와서 닿더니, 류류가 내렸다. 그녀는 커다란 트렁크를 손에 들고 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 앙리와 헤어졌어!」
그녀는 멀리서부터 큰 소리로 말하였다.
그녀는 트렁크가 무거워서 몸을 굽히면서 가까이 다가와서 빙그레 웃었다.
「뭐?」
리레트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정말?」
「그럼, 인제 끝장났어. 내 버리고 왔지 뭐야.」
리레트는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이도 알고 있니? 그이보고 그런 말을 했니?」
류류는 갑자기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면서 말하였다.
「물론이야.」
「그래?」
리레트는 아직도 긴가민가하였다. 그러나 아무튼 류류를 격려해 주고 싶었다.
「잘했지 뭐니. 용감했어.」
리레트는 <뭐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니>하고 한마디 더 해 주고 싶었으나 참았다.
류류는 의기양양하였다. 두 볼이 상기되고 눈이 반짝거렸다. 그녀는 트렁크를 옆에 놓았다. 잿빛 양털 외투에 가죽띠를 두르고, 안에는 깃이 접힌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모자는 쓰지 않았다. 리레트는 류류가 모자를 쓰지 않고 거리로 나가는 것이 싫었다. 그녀는 그것을 자기가 책망도 하고, 재미있게도 생각하였다. 그것은 야릇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류류를 만나면 으레 그런 기분을 느끼곤 하였다.
<류류는 활기가 있어. 난 그게 좋아.>
리레트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깨끗이 해결을 했어.」하고 류류가 말하였다.
「지금까지 가슴속에 숨겨둔 말을 다 털어놓았어. 그랬더니 어리둥절해 하더라.」
「어마! 깜짝 놀랐겠구나. 무슨 마음을 먹고 그랬니? 용감한데. 어제저녁에만 해도 헤어질 것 같지 않던데……」
「내 동생 때문이야. 나한테 큰소리치는 건 괜찮지만, 친정 사람에게 손찌검을 하는 걸 어떻게 참니?」
「아니, 왜 또 그렇게 되었어?」
「보이는 어디 있어?」
류류는 의자에 앉아 몸을 비틀면서 말하였다.
「이 도옴의 보이는 불러서 오는 법이 없어. 우리 테이블을 맡은 건 그 꼬마 검정대가리야.」
「그래, 너 아니? 내가 그 녀석을 휘어잡은걸.」
「그래? 그럼 화장실 당번 아줌마를 잘 살펴야겠군. 그 아줌마하고 붙어있으니까. 언제나 그 옆에 가서 알랑거리지 뭐야. 아마도 여자가 화장실에 드나드는 걸 구경하기 위한 핑계로 그럴 거야. 여자가 변소에서 나오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거든. 그러니 상대방은 얼굴을 붉힐밖에. 참, 잠깐만 기다려! 피레르에게 전화를 걸고 올께. 깜짝 놀랄 거야. 보이가 오면 밀크커피를 시켜. 곧 갔다 와서 자세한 얘기를 들려줄게.」
류류는 일어나 서너 발짝 내딛다가 다시 리레트 곁으로 돌아왔다.
2
「리레트, 나 정말 속이 후련해!」
「나도 그래.」리레트는 류류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류류는 리레트의 손을 풀고, 바벼운 걸음으로 테라스를 건너갔다. 리레트는 그녀의 뒤를 바라보았다.
<류류가 그러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걸. 어쩌면 저렇게 명랑해졌을까?>
리레트는 좀 어이가 없기도 하였다.
<용케 남편을 버렸군. 내 말을 진작 들을 일이지. 그랬더라면 벌써 끝짱이 났을 게 아냐. 어쨌든 내 덕이지. 결국 류류에겐 내 말이 큰 힘이 될 테니까.>
이윽고 류류가 돌아왔다.
「피에르가 깜짝 놀라지 뭐야. 자세한 내 말을 듣고 싶다는 거야. 그래 나중에 얘기해 주마고 했지. 같이 점심 먹기로 했으니까. 내일 밤엔 떠날 수 있을 거라고 하더라.」
「정말 기뻐. 류류, 어젯밤에 그렇게 결심한 거야?」
「내가 어떤 결판을 낸 건 아니야.」
류류가 겸손하게 말하였다.
「제바람에 결판이 난 거지.」
그녀는 초조한 얼굴로 식탁을 두들겼다.
「여봐! 보이, 밀크커피 가져와!」
리레트는 어이가 없었다.
<만일 내가 류류의 처지에서 이런 중대한 일을 당하였다면, 밀크커피가 먹고 싶어서 법석을 떨지는 않을 텐데. 류류는 귀엽기는 하지만 까부는 게 탈이야. 마치 새새끼처럼.>
류류는 픽 웃었다.
「그때 내가 앙리의 꼴을 구경했더라면!」
「너의 어머니께서는 뭐라고 하실까?」
리레트는 정색을 하고 물었다.
「우리 어머님? 그야 물론 대찬성일 거야.」
하고 류류는 자신 있게 대꾸하였다.
「그이는 어머니에게 버릇없이 굴었거든. 그래 어머니는 늘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이는 언제나 이러쿵저러쿵 트집을 잡으면서, 내 가정 교육이 나빴느니, 가겟방에서 자라, 배운 게 없어 그렇다느니, 하고 어머니에게 군소리를 늘어놓았으니까. 내가 이번에 결판을 낸 것은 어머니 때문이기도 해.」
「그런데 뭣이 어떻게 된 거야?」
「로베르를 때렸지 뭐야.」
「로베르가 네 집에 왔었니?」
「그래, 오늘 아침에 지나가다 들렀지 뭐야. 어머니가 그 애를 꽁뻬즈의 상점 점원으로 보낼 심산이었어. 이 얘기는 전에도 너한테 했지 않아? 우리가 아침을 먹고 있는데 그 애가 왔는데, 글쎄 앙리가 마구 쥐어박는구나.」
「아니, 왜?」
리레트는 초조한 듯이 물었다. 그녀는 언제나 두서없는 류류의 얘기가 못마땅하였다.
「둘이서 다퉜어!」
류류는 애매한 대답을 하였다.
「그런데 로베르가 지려고 해야지. 악착같이 대들다가는 <이 자식!>하고 욕설을 하는 거야. 하긴 앙리가 먼저 <쌍놈의 새끼!>라고 했기 때문이야. 그인 그런 소릴 곧잘 하거든. 난 처음에 허리를 쥐고 마구 웃었어. 그러자 앙리가 벌떡 일어나더니 로베르의 뺨을 후려갈기는 거야. 우리는 스터디오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화가 나는지 그만 죽여 버리고 싶더라.」
「그래서 집을 뛰쳐나온 거야?」
「뛰쳐나오다니……어딜 말이야?」
류류는 놀란 얼굴을 하고 물었다.
「네가 그이와 헤어진 게 그때가 아냐? 좀 차근차근 말해 봐. 네 얘길 통 알아들을 수가 없구나. 내 말 좀 들어 봐!」
리레트는 갑자기 의심이 들었다.
「대관절 정말로 헤어졌니?」
「그럼, 한 시간 동안이나 얘기를 해줘도 아직도 알아듣지 못해?」
「그래, 앙리가 로베르를 때렸어. 그래서?」
「그래서 난 앙리를 발코니로 쫓아내고 문을 잠가 버렸지. 난 배꼽을 뺐어! 그때까지도 잠옷 바람이었거든. 유리창을 두르리긴 했지만, 지독한 구두쇠라 깨뜨리진 못하는 거야. 나 같으면 손이 피투성이가 돼도 때려 부술 텐데. 그때 마침 텍시에씨 내외가 들어왔지 뭐야. 그러자 앙리는 유리창 너머로 날 바라보면서 빙글빙글 웃는 거야. 마치 장난을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수작이야.」
그때 보이가 지나가자 류류는 그의 팔을 꽉 붙잡고 말하였다.
「여봐! 밀크커피 한잔 갖다 줘!」
리레트는 보이에게 듣기에 거북한 말을 해서 미안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보이는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허리를 깊숙히 구부리고 있었다. 리레트는 그녀의 그러한 태도가 좀 못마땅하였다. 류류는 손아랫사람을 다룰 줄을 몰랐다. 너무 허물없이 대하기도 하고, 지나치게 쌀쌀하게 굴기도 하였다
류류는 깔깔 웃었다.
「앙리가 벌코니에 잠옷 바람으로 있던 골을 생각하면서, 우스워 죽을 지경이야. 글쎄 거기서 벌벌 떨고 있지 않겠니? 내가 발코니에 어떻게 내쫓았는지 알아? 그인 스터디오 안쪽에 있었어. 로베르는 엉엉 울어대는 거야. 그러자 앙리는 뭐라고 설교를 늘어놓기 시작하지 뭐야.
그래 난 창문을 열고, <앙리! 저걸 좀 봐요, 택시가 꽃 파는 아가씨를 들이받았구려.>하고 말했더니, 그인 내 옆으로 다가오겠지. 앙리는 그 꽃장수가 스위스 여자라 무척 좋아했거든. 자기에게 반한 줄 알고 있었던 거야. 그가 나더러
<어디야, 어디?> 하고 두리번거리는 동안에 나는 슬쩍 뒤로 빠져 방에 들어와 창문을 닫아 버렸단 말야. 나는 창너머로,
<내 동생에게 손찌검을 한 벌로 거기 있어야 해요.> 하고 야단을 쳤지.
한 시간도 더 발코니에 그냥 내 버려두었으니, 그는 화가 나서 눈을 부라리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쳐다보는 거야. 그래 난 혀를 쑥 내밀어 보이고 로베르에게 과자를 주고는 스터디오로 내 짐을 갖고 가서, 앙리가 싫어하건 말건, 일부러 로베르 앞에서 옷을 갈아입었지 뭐니. 그러자 로베르 마치 어른이나 된 것처럼 내 팔과 목덜미에 마구 키스를 하지 않겠어. 정말 귀여운 얘야. 우리는 앙리가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마구 놀았어. 그래 목욕하는 것까지도 잊어버렸어.」
「창문 뒤에는 그이가 여전히 서 있을 것 아냐? 기가 찰 노릇이군!」
리레트는 깔깔대며 웃었다.
류류는 웃음을 그치고 말을 계속하였다.
「그래 감기라도 들지 않았는지 모르겠어. 그렇지만 화가 나면 그런 것 알게뭐야.」
그녀는 명랑한 어조로 말을 계속하였다.
「앙리는 나한테 주먹을 내밀고 뭐라고 지껄여대는 거야. 나는 무슨 소린지 절반도 알아들을 수 없었어. 얼마 후에 로베르가 돌아가고 텍시에씨 내외가 초인종을 누르기에 안으로 모셔 들였더니, 그 이는 이 내외분을 보고 웃는 얼굴로 여신 굽신거리며 절을 하는 거야. 그래 난 말했어.
<우리 집 주인 좀 보세요. 어항 속에 든 금붕어 같지 뭐예요?>
그러자 텍시에씨는 유리창 너머로 그이에게 인사를 하겠지. 그들은 좀 어이가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워낙 점잖은 사람들이거든.」
「어머, 그 광경이 눈앞에 선히 보이는 것 같군 그래.」
리레트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네 남편은 발코니에 있고, 텍시에씨 내외는 스터다오에 있고!」
그녀는 이 말을 몇 번이고 되뇌이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때의 광경을 되도록 실감 있게 재치있는 말로 리레트에게 들려 주고 싶었던 거이다. 류류는 유머를 모른다는 생각에서 더욱 그렇게 하려고 하였으나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난 창문을 열어 줬어, 그러자 앙리는 안으로 들어와서, 텍시에씨 내외가 보는 데서 나한테 키스를 하고 나서 나더러 장난꾸러기라고 부르면서 딱 시치밀 떼는 거야.
<이 장난꾸러기가 날 골려 주려고 그랬지 뭡니까?>하고 말하지 않어.
난 그냥 웃기만 했지. 그러자 그들 내외도 빙그레 웃을밖에. 그래 우린 모두 웃어 버렸어. 그러나 이들이 돌아가자 앙리의 손은 번개같이 내 뺨을 갈기지 뭐야. 그래 나도 구둣솔을 집어서 던졌더니, 그이 입술이 그만 터져버렸어.」
「어머!」
리레트가 상냥스레 말하였다.
그러나 류류는 그녀의 동정을 물리치는 듯한 몸짓을 하더니, 사나운 표정으로 그 밤색 어미를 내흔들면서 몸을 꼿꼿이 세우고 눈을 뻔쩍거렸다.
그래 난 수건으로 그이의 입술을 닦아주고 나서,
<인제 나도 지쳤어요. 당신이 싫어 이 집에서 나가야겠어요.> 하고 본심을 털어놓고 얘기했어. 그러자 그인 엉엉 울면서 내가 가버리면 죽고 말겠다는 거야. 내가 그런 연극에 넘어갈 거야? 리레트, 너도 생각날 거야. 작년에 라인랜드 문제로 한창 떠들썩하던 때 말이야. 그이는 입버릇처럼 말하는 거야.
<류류, 곧 전쟁이 일어나. 난 싸움터에 나가 죽을지도 몰라. 그럼 당신은 날 고생시킨 일을 가엾게 생각하고 후회할 거야.>그러기에 나는,
<뭘요. 당신은 성적 불구자라 그날로 돌아올 테죠.>하고 대답해 줬지.
앙리는 무작정 날 스터디오 안에 감금하겠다고 떠 버리기에, 가엾어서 한 달 동안은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고 맹세했어. 그래 그인 사무실로 갔어. 빨갛게 충혈된 눈을 하고, 터진 입술에는 반창고를 붙이고 해서 꼴이 망측하기 짝이 없었지. 난 그가 나간 후에 집안을 치우고, 콩을 불에 삶아 놓고 나서 보따리를 쌌어. 그리고 부엌 식탁 위에 및 자 적어놓고 나와 버린 거야.
「뭐라고 썼어?」
「이렇게 써 놓았어.」
하고 그녀는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콩을 삶아 놓았으니 잡수시고, 가스를 꺼요. 냉장고 속에는 햄이 들어 있어요. 난 살기가 싫어서 급히 집을 나가요. 안녕」
그녀들은 함께 웃었다. 질을 가던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리레트는 자기네가 좋은 구경거리가 되었으리라고 생각되자, 뷔엘 커페나 카페 드 라 뻬의 테라스에 앉아 있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다. 그녀들은 한바탕 깔깔 웃고 나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리레트는 이제 할 얘기가 없을 것 같았다. 좀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인제 그만 가봐야겠어.」
류류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하였다.
「난 열두 시에 피에르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어. 이 트렁크 어떡할까?」
「나한테 둬. 곧 변소지기 할멈에게 만길 테니까. 그럼 언제 또 만날까?」
「두 시에 너한테로 갈게. 같이 할 일이 많아. 난 물건을 절반도 못 가져왔어. 피에르에게서 돈 좀 얻어야겠어.」
류류가 가 버리자, 리레트는 보이를 불렀다. 리레트는 두 사람 몫이라 마음이 아프고 무거웠다. 보이가 뛰어왔다. 그녀는 자기가 부를 적마다 이 보이는 반갑게 뛰어오는 것을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5프랑입니다.」하고 보이가 말하고 나서 좀 쌀쌀한 어투로 덧붙였다.
「두 분은 정말 재미있게 웃으시더군요. 웃음소리가 지하실까지 들려왔어요.」
리레트는 류류 때문에 그가 기분이 상했나보다 하고 원망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얼굴을 붉혔다. 「내 친구가 오늘 아침에 좀 흥분해서…….」
「물요. 퍽 좋으신 분입디다.」보이는 느낀 그대로 대답하였다.
「고맙습니다.」
보이는 6프랑을 호주머니 속에 넣고 물러갔다. 리레트는 좀 뜻밖이었으나, 시계가 열두 시를 치는 소리를 듣자 앙리가 집에 돌아와 류류의 편지를 읽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녀로서는 즐거운 한때였다.
2
「이걸 전부 내일 저녁때까지 방담가(街)의 떼아트르 호텔로 갖다 줘요.」
류류는 마치 귀부인이나 되는 듯이 카운트의 여자에게 이르고, 리레트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인제 됐어, 리레트, 어서 가자.」
「저어,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카운터의 여자가 물었다.
「류씨엔느 크리스 뺑!」
류류는 외투를 팔에 걸치고 총총히 사마리텐느 백화점의 높은 계단을 내려갔다. 리레트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발밑을 내려다볼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여러 번 넘어질 뻔하였다. 앞에서 춤추는 듯한 파랗고 노란 호리호리한 매무새에 정신이 펄려 있었기 때문이다.
<류류의 몸맵시는 왜 저렇게 음탕해 보일까…….> 리레트는 류류의 앞뒤를 바라볼 적마다 그 선정적(煽情的)인 모습에 놀랐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그녀로서는 알 수 없었다. 이를테면 막연한 인상이었다.
<몸매는 부드럽고 날씬하지만, 어딘가 망측한 인상을 주는군. 아무래도 그런 느낌이 드는걸. 옷이 몸에 꼭 끼어서 그런가 봐. 아마도 그럴거야. 입으로는 궁둥이 쪽이 흉해서 난 부끄럽다고 말하지만, 꼭 끼는 스커트만 입고 다니잖아? 궁둥이가 본래 작지만 - 내 궁둥이에 댈 것이 아니야 - 그래도 상당히 두드러져 보인단 말야. 가느다란 허리에 통통한 궁둥이! 치마통이 터질 듯이 꼭 끼어서 몸을 옷에 맞춰 끼운 것 같군. 게다가 빼쭉대며 걷는 꼴 하며>
류류는 뒤를 돌아보았다. 두 여인은 방긋이 웃었다. 리레트는 언짢은 생각이 들었으나 도취된 듯한 기분으로 친구의 음탕한 육체를 바라보았다. 위로 부풀어 오른 자그마한 젖가슴, 반들거리는 노란 살결 - 고무와 같다 - 길다란 허벅다리, 천하게 보이는 날씬한 몸매, 긴팔.
<이건 흑인 여자의 몸매야. 룸바를 추는 흑인 여자 같군.> 리레트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녀는 회전문 옆에 걸린 거울에 자기의 풍만한 육체를 비쳐 보았다.
<난 류류보다 몸이 좋아!>그녀는 류류의 팔을 잡으면서 생각하였다.
< 옷을 입고 있으면 류류가 멋지게 보이지만, 벗으면 내가 훨씬 나을 거야.>
두 여자는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이윽고 류류가 입을 열었다.
「피에르는 나한테 친절히 해 줬어. 리레트도 그렇고. 둘 다 난 참 고맙게 생각해.」
치하하는 말투가 좀 어색하였으나, 리레트는 흘려 버렸다. 사실 류류는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 하는 여자였다. 너무 수줍어하기 때문이었다.
「참, 낌박 잊었네.」
류류가 말하였다.
「부라쟈를 사야 할걸.」
「이 가게에서 사려던 참이야?」
둘이는 마침 샤쓰 가게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아냐, 이 가게에서 보니까 생각나는군. 핏쉐르 상점에 가서 살래.」
「그럼 몽빠르나스 거리로 가야겠구나. 얘, 조심해야 해.」
리례트는 걱정스러운 듯이 말하였다.
「몽빠르나스 거리는 자주 나다니지 말아야 해. 특히 이맘때는 말이야. 어쩌면 앙리를 만날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되면 어쩔라구 그래.」
「뭐, 앙리를?」류류는 어깨를 들먹거리면서 말하였다.
「뭐 그렇지 않을 거야.」
리레트는 슬그머니 화가 났다. 뺨과 관자놀이가 화끈거렸다.
「넌 언제나 그 모양이야. 뭣이고 하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턱대고 우기거든. 핏쉐르 상점에 가고 싶으니까, 앙리가 몽빠르나스 거리를 지나가지 않을 거라고 장담을 하는 거지 뭐야. 그인 날마다 오후 여섯 시가 되면 으레 그리로 지나가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니. 안 그래? 자기 입으로 말하고도 그래. 그인 렌느 거리를 지나, 라스파이유 큰 거리 모퉁이에서 AE선 버스를 기다린다면서?」
「그렇지만 아직 다섯 시밖에 안 됐어. 그리고 요새는 사무실에 나가지 않을 거야. 내가 두고 온 쪽지를 보고선 자리에 그냥 자빠져 있을 테니까.」
「류류!」
하고 리레트가 말을 이었다.
「오페라좌에서 얼마 멀지 않은 카트르 셉땅브르 거리에 핏쉐르 상점이 또 한 집 있잖아?」
「그래.」
류류는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그렇지만 거긴 일부러 가야 하지 않아.」
「뭐! 일부러라구? 그게 무슨 소리야. 엎어지면 코 닿을 텐데. 몸빠르나스 거리보다 더 가까워 얘.」
「거기 물건은 싫어」
리레트는 속으로 웃었다. 핏쉐르 상점에서 파는 물건은 다 같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류류는 고집을 부리는 것이었다. 누가 생각해 봐도 앙리는 그녀가 가장 만나기 싫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었다. 마치 일부러 앙리에게 걸려들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럼 좋아.」
리레트는 너그럽게 말하였다.
「몽빠르나스를 가도록 해. 만나더라도 앙리는 키가 크니까 우리 눈에 먼저 뜨일 거야.」
「흥, 뭐 어때? 만나게 되면 만나는 거지. 설마 잡아 먹을라구.」
류류는 몽빠르나스까지 걸어가자고 했다. 바람을 쐬고 싶다는 것이었다. 두 여인은 쎄느거리를 지나 오데옹 거리와 보지라아르 거리로 걸어갔다. 리레트는 피에르를 칭찬하면서, 이번에도그가 보여 준 태도는 매우 훌륭하였다고 일러 주었다.
「파리는 역시 좋아. 얼마나 그리운 곳이야 말이야.」
「그런 소린 작작 해. 모처럼 니스로 가게 되었는데, 왜 파리에 미련을 갖는 거야?」
류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뭔가 찾는 사람 모양 사방으로 눈을 두리번거렸다.
핏쉐르 상점에서 나올 때, 시계가 여섯 시를 치고 있었다. 리레트는 류류의 팔을 끼고 되도록 빨리 지나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류류는 보오망 꽃집 앞에 멈춰 섰다.
「리레트, 저 진달래 꽂 좀 봐. 근사한 응접실이라도 있다면 잔뜩 꽂아 놓고 싶어.」
「난 화분에 심은 꽃은 싫어.」
리레트는 불안하여 견딜 수 없었다. 렌느 거리를 돌아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보바 같은 앙리의 커다란 덩치가 나타났다. 모자도 쓰지 않고 밤색 스포츠 윗도리를 입고 있었다. 리레트는 밤색을 싫어하였다.
「저 봐! 류류, 그이가 오다니까 그래.」
리레트는 당황한 어조로 말하였다.
「어디, 어디야?」
류류도 리레트 못지않게 당황해하였다.
「바로 우리 뒤야. 건너편 길 말이야. 빨리 뛰어가! 돌아보지 말고!」
그러나 류류는 돌아보았다.
「응, 저기 있군 그래.」
리레트는 그녀를 앞으로 잡아끌려고 했으나, 그녀는 버티고 서서 앙리를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마 우릴 알아본 모양이야.」
류류는 겁이 났던지, 잠자코 리레트에게 끌려서 따라갔다.
「이젠 아예 뒤를 돌아보지 마.」
리레트는 다급히 말하였다.
「다음 길은 바른쪽으로 고부라져 가야 해. 드랑브르 거리말야.」
두 여인은 통행인에게 부딪치면서 바삐 걸어갔다. 류류는 리레트에게 끌리기도 하고 리레트를 끌기도 하였다.
그러나 리레트는 드랑브르 거리에 이르기도 전에 류류의 조금 뒤에 커다란 검은 그림자가 나타난 것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앙리임을 때뜸 알 수 있었다. 화가 치밀어 온몸이 바르르 떨렸다. 류류는 땅바닥만 내려다보면서 암상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경솔한 짓을 한 것을 후회하나 봐. 그러나 일은 당하고 말았으니 별수 없지.>
두 여인은 걸음을 더욱 재촉하였다. 앙리는 말없이 뒤쫓아왔다. 두 여인은 드랑브르 거리를 지나, 천문대 쪽으로 줄창 걸었다. 리레트의 귀에는 앙리의 구두 소리와 발을 떼어놓을 적마다 허덕이는 듯한 숨소리가 가볍게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그것은 분명히 앙리의 숨소리였다. (그는 본래 숨소리가 거칠었으나, 이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두 여자를 뒤쫓아오느라고 뛰어왔거나, 흥분하였기 때문이리라.)
<모르는 척해야지. 앙리인 줄알고 있었다는 내색을 해서는 안 돼.> 하고 리레트는 생각하였다. 그러나 곁눈질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앙리는 새파랗게 질려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마치 몽유병 환자 같군.> 이렇게 생각하니 무서웠다.
앙리는 입술이 떨려, 아랫입술에 붙은 분홍빛 반창고가 달랑거리고 있었으며, 들려 오는 숨결은 더욱 거칠었다. 이어서 그 숨결은 코머거리 소리처럼 되어서 사라졌다.
리레트는 불안하였다. 앙리가 새삼 무섭지는 않지만, 그의 병과 흥분이 두려웠다. 앙리는 손을 뻗쳐 류류의 팔을 잡았다. 류류는 금방 울음을 터뜨릴 듯이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부들부들 떨면서 앙리의 손을 마구 뿌리쳤다.
「후우!」
앙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리레트는 멈춰 서려고 하였다. 가슴이 결리고 귀가 윙윙거렸다. 그러나 류류는 뛰다시피 하면서 내빼는 것이었다. 그녀도 몽유병 환자처럼 보였다. 자기가 만일 류류의 팔을 놓고 멈춰 서면, 앙리와 류류는 서로 입을 다물고, 송장처럼 창백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나란히 걸어갈 것만 같았다.
드디어 앙리가 입을 열었다. 목쉰 듯한 이상한 목소리였다.
「나하고 집에 돌아가!」
류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알리는 여전히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당신은 엄연히 내 아내야. 집으로 같이 가재두 그래.」
「당신에게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데 왜 그러세요.」
리레트가 이를 악물고 대답하였다.
「혼자 가세요.」
그러나 앙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말하였다.
「난 어디까지나 당신의 남편이야. 나하고 같이 가야 해.」
「제발 그대로 두세요.」
리레트는 날카롭게 말하였다.
「아무리 성가시게 굴어도 소용없어요. 그런 말은 듣기도 싫어요.」
앙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리레트에게 말하였다.
「류류는 내 아내요. 그래 같이 집으로 돌아가자는 거요.」
그는 류류의 팔을 꽉 잡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류류가 뿌리치지 않았다.
「저리 가세요!」
리레트는 다시 대들었다.
「가긴 어딜 가? 난 어디까지라도 따라갈걸. 집으로 데려가고야 말 테니까.」
앙리는 힘을 주어 말하고 나서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고 이를 드러내 보이면서 악을 썼다.
「넌 내 아내란 말야!」
길을 가던 사람들이 웃으면서 돌아보았다. 앙리는 류류의 팔을 잡아 흔들면서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때 다행히 빈 택시가 지나갔다. 리레트는 차를 세웠다. 앙리는 따라왔다. 류류는 여전히 앞으로 걸어가려고 했으나, 둘이 양쪽에서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완력을 부려도 절대로 끌고 가진 못해요.」
리레트는 류류를 차도로 끌어내리면서 말하였다.
「내 아내야. 이리 내놔!」
앙리는 류류를 반대쪽으로 잡아끌었다. 그러자 류류는 기진맥진하였다.
「타실 거요, 안 타실 거요?」
운전수가 드디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리레트는 류류의 팔을 놓고 앙리의 손을 마구 때렸다. 그러나 앙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는 손을 놓고 리레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리레트도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속이 상해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두 남녀는 한동안 그렇게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양쪽 다 숨이 거칠어졌다. 이윽고 리레트는 정신을 가다듬어, 류류의 허리를 잡아 택시로 끌고 갔다.
「어디로 사세요?」운전수가 물었다.
앙리가 쫓아와서 차에 함께 타려고 대들었다. 그러나 리레트는 힘껏 앙리를 떼밀고 얼른 문을 닫아버렸다.
「어서 가요. 어서요! 가는 곳은 나중에 말할게요.」
택시가 떠나기 시작하였다. 리레트는 의자에 깊숙히 몸을 파묻었다.
<이게 무슨 꼴이람!> 그녀는 류류가 밉살스러웠다.
「류류, 어디로 갈 테야?」
리레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류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리레트는 그녀를 껴안고 달래듯이 말하였다.
「대답해 봐. 피에르한테 데려다줄까?」
류류는 몸을 꿈틀거렸다. 리레트는 그것을 승낙하는 뜻인 줄 알고, 몸을 앞으로 내밀며 말하였다.
「메신느가(街) 11번지요.」
리레트가 이렇게 말하고 뒤를 돌아보니, 류류는 이상한 표정을 하고 노려보고 있었다.
「뭐가 어쨌다는 거야?」
「난 너도 보기 싫어!」
류류는 악을 썼다.
「피에르도 보기 싫고, 앙리도 보기 싫어! 모두들 날 어떻게 하자는 거야? 왜 날 자꾸만 괴롭히는 거야?」
류류는 말을 멈추었다. 얼굴이 몹시 일그러져 있었다.
「실컷 울기나 해!」
리레트는 태연스레 말하였다.
「실컷 울면 기분이 좀 가라앉을 거야.」
류류는 허리를 굽히고 울기 시작하였다. 리레트는 그녀를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경멸하고 싶은 생각이 앞섰다. 차가 멈춰 섰다. 류류는 눈물을 씻고 얼굴에 분을 발랐다.
「리레트, 미안해. 나 흥분했었어. 앙리가 그렇게 나대는 걸 차마 볼 수 있어야지.」
「원숭이처럼 날뛰더군 그래.」
리레트는 기분을 진정시키고 말하였다. 류류는 방긋이 웃어 보였다.
「언제 또 만날 테야?」
하고 리레트가 물었다.
「내일이나 만나지. 이봐, 피에르는 어머니가 계시니까, 날 자기 집에서 재우는 게 거북하대. 그래 난 떼아트르 호텔에 가 있을래. 아침 아홉 시쯤 올래? 어머닐 만나러 가야 할 테니까.」
류류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리레트는 그녀의 얼굴빛이 너무 쉽게 변하는 것이 서글펐다.
「오늘 밤에 쓸데없는 걱정을랑 아예 말어!」
「나 몹시 피로해. 피에르가 빨리 놓아 줬으면 좋겠지만,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리레트는 차를 돌려 자기 집까지 타고 갔다. 아가는 영화관에라도 갈까 했으나, 이미 그런 기분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는 의자 위에 모자를 내던지고 창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침대 생각이 났다. 방구석에 놓인 부드러운 하얀 침대에 몸을 던지고, 불타는 뺨으로 베개를 애무해 보고 싶었다.
<난 강한 여자야. 류류는 끝까지 돌보아 준 것도 나야. 그런데 난 왜 이렇게 외로울까? 아무도 날 생각해 주는 사람도 없어.>
그녀는 자기 신세가 너무 가엾어서 흐느껴 울고 싶었다.
<둘이서 니스로 떠나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테지. 두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준 건 바로 난데……. 그들은 내 생각을 하지 않을 거야. 나만 뒤에 남아 부르마 상회에서 가찌 진주나 팔면서 하루에 여덟 시간 동안이나 일을 해야 하다니…….>
그녀는 두 뺨에 눈물이 몇 방울 흘러내리자, 침대 위에 조용히 쓰러졌다.
<니스로……> 그녀는 울면서 애처롭게 중얼거렸다. <니스로……태양이 눈부신 곳, 리비에라(지중해의 피한지)로……>
3
「아이, 싫어……」
캄캄한 밤, 누가 방안을 돌아다니고 있나 보다. 슬리퍼를 신은 사나이가 조심스럽게 한 발짝 두 발짝 내딛고 있다. 그래도 마루가 삐걱거린다. 사나이는 멈춰 섰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어느새 사나이는 방 저쪽에 가서 미친 사람모양 거닐고 있다.
류류는 오싹 추워졌다. 이불이 너무 얇은 것이다. 그녀는 다시 <아이, 싫어!>하고 소리를 쳤다. 자기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무서웠다.
<아이, 싫어! 그인 지금 밖으로 나가 하늘과 별을 바라보면서 담뱃불을 붙이고 있을 거야. 전에도 파리의 푸른 하늘이 좋다고 했지. 그인 어정어정 집으로 돌아갈 테지.
그 짓을 하면, 시적(詩的)인 기분에 잠겨 젖을 짜낸 암소처럼 몸이 가뜬하다고 그인 말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도 하지 않을 거야. - 그리고 나는 여지없이 더렵혀지고. 그인 지금 기분이 산뜻할 테지. 이 캄캄한 밤에 더러운 걸 쏟아놓았으니까. 손수건에도 잔뜩 묻어있고, 시트 한가운데가 축축하게 젖었어. 다리를 뻗을 수 없을 지경이야. 아이 더러워!
그런데 그인 말짱하거든. 밖으로 나가더니, 들창 밑에서 휘파람 부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거기 있나 봐. 고급 양복에 스프링을 걸치고 말짱한 기분으로 있을 테지. 그인 옷을 참 멋있게 입거든. 그런 남자와 함께 외출하는 여자가 자랑스러운 건 당연해. 그인 바로 내 방 창문 아래 있었는데, 난 어둠 속에서 발가벗고 누워 있었어. 기분이 사뭇 측측하여 배를 무질러 대면서 말이야. 「당신의 방이 어떤가 보려고 잠깐 둘러 보려고 올라왔어.」하고 말해놓고서도 두 시간 동안이나 있다가 갔지.
침대가 어찌나 삐걱거리는지 - 이놈의 육실할 침대가. 그인 어떻게 이런 호텔을 택했을까. 나도 옛날에 여기서 보름쯤 지낸 적이 있어. 그인 지내기 좋은 호텔이라고 하더군. 이상한 방이야. 나는 이렇게 작은 방을 본 적이 없어. 세간으로 가득 차 있고 안락의자 하며, 소파, 테이블 할 것 없이 사랑의 냄새가 물씬 코를 찌르는군. 그래. 그인 정말 이 호텔에서 보름 동안을 지냈는지 모르지만, 필경 혼자 지내진 않았을 거야. 나를 이런 호텔에 끌어 박아 두다니, 사람을 어떻게 보는 거야. 우리가 층계를 올라오는데, 보이가 히죽거리지 뭐야. 그 녀석은 알제리아 놈이야. 난 그따위 녀석은 보기도 싫어. 무서워. 녀석은 내 아랫다리를 한참 훑어보고 나서 사무실로 돌아갔지. 「둘이서 재미 보겠군!」 하고 망측한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았을 테지. 그놈의 나라에서는 여자에게 꽤 지독하게 구나 봐. 그런 놈팽이들에게 걸려서 한평생 절름발이가 되는 여자도 있다지. 나는 피에르가 극성을 떠는 동안에 줄곧 그 알제리아 녀석을 생각하고 있었지. 녀석은 내가 하고 있는 짓을 과장해서 상상하고 있을 테지.
<누가 방 안에 있나 보군!>
류류는 숨을 죽였다. 그러자 곧 삐걱거리는 소리가 멈춰 버렸다. 가랑이 사이가 아프다. 근질거리고 따갑다. 아, 울고 싶다. 앞으로 밤마다 이 모양일 테지. 내일 밤은 기차를 타니까 그렇지 않겠지만, 류류는 입술을 깨물고, 몸서리를 쳤다. 자기가 신음한 꼴을 생각해 본 것이다.
<아니야, 난 신음하진 않았어, 다만 숨을 크게 쉬고 있었을 뿐이야. 그의 몸이 어찌나 무거운지 내 위에 덮치면 숨이 막힐 지경이거든. 「꽤 끙끙대는군. 기분 좋지?」하고 그인 소근거렸지. 나는 그 짓을 할 때 말을 걸어오는 게 질색이야.
자기를 잊어버리고 도취되었으면 하는데, 그인 언제나 쉴 새 없이 지껄인단 말이야. 내가 왜 끙끙거려? 난 조금도 좋은 줄 모르는데, 그건 사실이야. 의사도 말했어. 제손으로 자기에게 쾌감을 주는 건 별문제지만, 그러나 그인 믿어주지 않거든. 남자에겐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나 봐.
「그건 처음 남자가 잘못했기 때문이야. 내가 재미를 가르쳐 주지.」 하고 저마다 떠들어대더군. 난 지껄이는 대로 내 버려두었지. 의학적으로 그러니까. 그래도 남자들은 납득이 잘 가지 않는가 봐.>
누가 층계를 올라왔다.
<손님인가 보지. 아아, 혹시 그이가 다시 온 것은 아닐까? 생각만 나면 또 올 사람이야. 아니야. 묵직한 걸음걸이로 보아, 그인 아니야. 혹시나……>
류류는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 알제리아 녀석이 아닐까. 내가 혼자 있는걸 알고 있으므로, 내 방문을 두드리러 오는지도 몰라. 죽을 지경이야.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해. 아니야, 저건 아래층이야.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사람인가 봐. 열쇠를 돌리고 있군. 취했으니까 시간이 걸릴 테지. 이 호텔에는 어떤 사람들이 묵고 있을까? 하찮은 사람들이겠지. 오늘 낮에도 층계에서 밤색 머리를 한 여자와 만났는데, 눈이 아편쟁이 같더군.
나는 신음하지 않았어. 하긴 연방 장난을 치는 바람에 좀 정신이 얼떨떨하더군. 그인 매우 능란했어. 난 그 방면에 능란한 사람은 싫어. 차라리 총각하고 동침하는 편이 나을 거야. 요소마다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조금씩 눈떠 보는 척하면서 여자를 장난감으로 생각할뿐더러 그 장난감을 잘 다룰 줄 안다고 신이 나 하는 건 꼴불견이야. 나는 멍청해지는 게 싫어. 목이 타고, 무서운 생각이 들거든. 입안에서도 어쩐지 이상한 맛이 감돌고. 남자들은 날 정복한 줄 알 테지. 난 모욕을 당한 것만 같애.
피에르가 다음에 다시 와서「어때, 내 기교가 대단하지?」 하고 으시대면 뺨따귀라도 갈겨 줄 테다.
아아 인간이란 이런 건가? 옷을 입거나, 몸을 씻거나, 화장을 하는 건 다 그 때문인가? 어떤 소설에도 그 얘기가 나오거든. 인간은 언제나 그런 걸 생각하나 봐. 그리하여 나중에는 남자와 함께 어떤 방에서 반쯤 짓눌렸다가 아랫배가 축축하게 젖게 마련이지.
잠을 자고 싶다. 잠시나마 잘 수 있다면!
내일은 종일 기차에 시달려 녹초가 될 테지. 그렇지만 니스의 거리를 모처럼 거닐 수 있을 거야. 좀 기운을 내야지. 상당히 아름다운 곳이라고 하던데. 이탈리아식 좁은 길이 많고, 알락달락한 옷들을 걸어 두고 있다지 뭐야.
난 화가(畵架)를 세워놓고 그림을 그려야겠어. 내 옆에 계집아이들이 몰려와서 무얼 그리나 하고 들여다볼 테지. 아이, 더러워! 몸을 펴고 누었더니, 젖은 시트에 허리께가 닿는군. 그래. 그이가 날 데리고 가는 건, 그 짓을 하기 위해서 뭐야. 아무도 날 사랑해 주지 않아.
앙리는 그때 나와 나란히 거닐고 있었지. 나는 정신을 가누지 못했지만, 속으로는 그의 입에서 무슨 정다운 말이 흘러나오기를 기다렸는데. 「나는 당신을 사랑해!」 하고 한마디만 던져 줘도 여북 좋았을까! 그렇다고 그이한테로 돌아가지는 않았을 테지만, 나도 상냥스럽게 뭐라고 말하고 나서 서로 의좋게 헤어졌을 텐데. 나는 줄창 기다리고 있었지. 그이가 내 팔을 잡을 때 난 잠자코 있었거든. 리레트는 팔팔 뛰면서, 그일 원숭이 같다고 했지만, 그건 말도 안 돼. 그러나 리레트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옆에서 앙큼한 눈으로 그이의 얼굴을 노려보더군. 그 애가 그렇게 표독한 줄은 미처 몰랐어. 아무튼 그이가 내 팔을 잡았을 때, 나는 저항을 하지 않았어. 그이가 바라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자기의 아내거든. 그인 나와 결혼한 남편이니까. 그인 언제나 날 무시했지. 자기는 나보다 머리가 좋다고 으스대었지만, 이번 일은 그이가 잘못했어. 자기가 교만하게 굴지만 않아도, 지금 한집에 있었을 텐데, 지금쯤은 아마 나한테 아무 미련도 없을 거야. 울지도 않고 코를 골고 있을 테지. 침대를 혼자서 차지하고 다리를 쭉 뻗고 살 수 있을 터이니까.
난 차라리 죽어 버릴까 봐. 그이가 날 고약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 지 겁이 나 못 견디겠어. 리레트가 중간에 끼어서 난 변명도 못했지. 리레트는 히스테리에 갈린 사람처럼 마구 떠벌이더군. 지금쯤은 자기 용기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을 거야. 양처럼 온순한 앙리에게 그런 짓을 하다니!
도로 가야지. 그들이 아무리 지랄을 하더라도, 그이를 강아지처럼 내 버리고 올 수야 없지. 류류는 침대에서 일어나 스위치를 틀었다. 양말과 콤비네이션만 있으면 되는 거야. 그녀는 급히 서두는 바람에 머리를 만질 틈도 없었다.
<회색 외투만 걸치면, 남이 보아도 알몸이라고 생각지 못할 거야. 발꿈치까지 길게 내려 덮이니까.
그 알제리아 녀석을 깨워――류류는 가슴이 선뜻하였다――현관문을 열어달라고 해야지.>
그녀는 살금살금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나 층계는 내려디딜 적마다 삐걱거렸다. 그녀는 사무실 문을 두들겼다.
「뭐요?」
하고 알제리아인이 물었다. 눈은 붉게 충혈되고 머리가 푸시시 하였다.
「문 좀 열어줘요.」
류류는 무뚝뚝하게 말하였다.
그녀는 15분 후에 앙리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요?」
앙리가 물었다.
「나예요.」
안에서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자기 집에 돌아왔는데도 들여보내 주지 않으려나 보다. 그렇지만 문을 열어줄 깨까지 두드려야지. 이웃 사람의 얼굴을 봐서도 깨너날 테지.>
잠시 후에 문이 방긋이 열리더니, 콧등에 종기가 난 앙리가 잠옷 바람으로 창백한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한잠도 자지 못했구나!>
류류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난 이대로 헤어지고 싶진 않았어요. 그래 한번 만나보려고 왔어요.」
앙리는 여전히 잠자코 있었다. 그녀는 앙리를 약간 떠밀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왜 이렇게 딱딱할까? 마치 무슨 어짢은 일이라도 하다가 들킨 사람 같군.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날 노려보고 있네, 팔을 축 늘어뜨리고 몸을 가누지 못하는군. 네, 그냥 잠자코 있어도 좋아요. 알겠어요. 흥분해서 말문이 막히셨죠.>
앙리는 간신히 침을 삼켜 보려고 하였다. 문은 역시 류류가 닫아야만 하였다.
「난 좋게 헤어지고 싶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입을 열었으나, 갑자기 발꿈치를 돌려 내빼고 말았다.
<어떻게 하려는 걸까?> 류류는 따라가기도 거북하였다.
<울고 있을까? 별안간 기침 소리가 들려 왔다. 변소에 있군.>
이윽고 앙리가 돌아왔다. 그녀는 그의 목에 매달려 키스하였다. 앙리의 입에서 음식을 토한 냄새가 났다. 그녀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추워.」
앙리가 말하였다.
「자요.」
그녀는 울면서 말하였다.
「내일 아침까지 있을래요.」
둘이는 잠자리에 들었다. 류류는 흐느껴 울었다. 자기 방에 다시금 돌아와서, 깨끗하고 아늑한 자기 침대와 창문에 비친 빨간 빛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앙리가 껴안아 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앙리는 몸을 쭉 펴고 반듯이 드러누워 있을 뿐이다. 마치 침대 속에 말뚝이라도 누여 놓은 것 같았다. 그는 스위스 사람과 얘기를 주고받을 때처럼 전신이 빳빳이 굳어 버린 듯싶었다. 그녀는 그의 머리를 움켜 안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당신은 정말 순진하구려.」
그는 울기 시작하였다.
「난 왜 이렇게 불행할까? 이래 본 적은 없어.」
「나는 안 그런가 뭐?」
류류가 그의 말을 받았다.
둘이는 한참 울었다. 이윽고 류류는 불을 끄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하고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두 사람의 고아처럼 순진하고 쓸쓸하게 - 그렇지만 안될 말이야.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인생은 거대한 파도와 같았다. 그 파도는 류류에게 밀려 닥쳐와 앙리의 팔굽에서 그녀를 앗아가는 것이었다.
<당신의 큰 손. 그것이 당신의 자랑이었지. 유서 깊은 집안의 자손들은 모두 손발이 큼직하다고 인제는 그 두 손으로 내 허리를 잡지 못하게 되었군. ――좀 간지럽기는 하여도 그 손이 닿으면 난 흐뭇했는데. 앙리가 성적 불구자라니, 그건 거짓말이야. 다만 순결한 거지. 그래 순결한 거야. 좀 게으른 건 사실이지만. 그녀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방긋이 웃었다. 그리고 앙리의 턱에 키스하였다.
<부모님에게 뭐라고 하면 좋을까? 어머니는 그런 말을 들으면 정신을 잃고 돌아가실지 몰라. 그러나 크리스뺑부인은 죽지는커녕 기뻐서 춤을 출 테지. 식사 땐 다섯 식구가 모여 내 이야기를 하면서 은근히 욕할 거야. 열여섯 난 계집애가 있는 터라 들려주기가 거북한 말도 있고 해서 터놓고 얘기할 수가 없을 테니까. 그러나 그 애는 모든 걸 다 알고 마음속으로 재미있어 하겠지. 그 애는 뭐든지 잘 알고 있거든. 그래 날 싫어하는 거야. 이런 더러운 집이 어디 있담! 아무튼 표면상 내가 불리한 건 사실이야.>
3
「식구들에게는 나중에 말하세요.」
하고 류류는 애원하였다.
「내가 건강이 나빠서 니스에 가 있는 걸루 얘기해요.」
「그렇게 말한들 누가 믿을 줄 알어?」
그녀는 앙리의 얼굴에 대고 마구 키쓰를 하였다.
「앙리, 당신은 나한테 잘못했지요?」
「그래, 잘못했어. 그렇지만 당신도 마찬가지야.」
앙리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긴 그래요. 아, 우린 왜 이다지도 불행할까요?」
류류는 숨이 턱에 닿을 듯이 흐느껴 울었다. 이윽고 날이 새면 떠나야하는 것이다. 인간은 결코 자기 뜻대로 일이 이루어지는 법이 없다. 다만 그 무엇에 끌려갈 뿐이다.
「그렇게 홀가분하게 떠나 버리다니, 그게 무슨 짓이야.」
류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난 당신을 끔찍이 사랑하고 있었어요.」
「그래, 지금은 사랑하지 않어?」
「전과는 달라요.」
「누구하고 같이 가는 거야?」
「당신은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을 어떻게 알게 됐어?」
앙리는 역정을 내었다.
「어디서 만난 거야?」
「그런 건 참견 마세요. 이제 와서 당신이 남편 행세하실 셈이에요?」
「그럼 어떤 남자하고 같이 가는군.」
앙리는 눈물을 찔끔거리면서 말하였다.
「앙리, 맹세하겠어요. 절대로 그렇진 않아요. 어머니의 목숨을 걸고 맹세해요. 인제는 남자라면 지굿지긋해요. 난 어떤 부부와 같이 가요. 리레트가 잘아는 늙은 분들이에요. 난 혼자서 살고 싶어요. 그분들이 나한테 일자릴 구해 준댔어요. 앙리, 내가 얼마나 혼자서 살고 싶어 하는지 아세요? 부부생활엔 진저리가 나요.」
「뭣에 진저리가 난다는 거야?」
「뭐든지요.」
류류는 다시 그에게 키쓰하였다.
「싫지 않은 건 당신뿐이에요.」
그녀는 앙리의 잠옷 속에 손을 넣어 한참 온몸을 쓰다듬었다. 앙리는 찬 손길에 오싹하였으나, 그녀가 하는대로 내 버려두고, 이렇게 말하였다.
「난 무척 괴로워!」
그의 가슴 속에 뭔가 산산이 부서지는 모양이었다.
일곱 시가 되자, 류류는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뜨고 침울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난 거기 가 봐야겠어요.」
「거기라니?」
「지금 방담 거리의 테아트르 호텔에 들어 있어요. 지저분한 호텔이에요.」
「여기 나하고 함께 있어 줘.」
「안돼요. 제발 빌어요. 성가시게 굴지 말아요. 그건 안 되는 일이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인간은 파도에 휩쓸려 간다. 그것이 인생이다. 판단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으며, 오직 몸을 맡길 뿐이다. 내일은 니스에 가 있을 테지.>
류류는 세면소에 가서 뜨뜻한 물에 눈을 씻고, 덜덜 떨면서 외투를 몸에 걸쳤다.
<하나의 숙명(宿命)이야. 오늘 밤 기차에서 잠이나 푹 잘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고서는 니스에 도착하자마자 녹초가 될 거야. 아마 1등 표를 사 줄 테지. 1등 차를 타고 여행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야. 나는 몇 해 번부터 1등 차를 타고 여행해 봤으면 하고 별러 왔지만, 막상 그렇게 하고 보니 별로 기쁠 것도 없고 시들하군 그래. 세상만사가 다 그런 거야.>
조금이라도 빨리 가 버리고 싶었다. 그녀는 이 마지막 순간이 어쩔지 견디기 어려웠다.
「그 가로와씨의 일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류류가 물었다.
가로와는 전에 앙리에게 포스터를 주문했었다. 앙리는 포스터를 다 그렸으나, 이제 와서는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글쎄, 어떡하면 좋을까?」
그는 이불 속에 파묻혀 있어, 머리털과 귀 끝만 보일 뿐이었다. 그는 힘없이 말하였다.
「한 주일쯤 잠이나 자고 싶군.」
「그럼, 안녕!」
「응, 잘 가!」
류는 이불을 조금 걷고 몸을 굽혀 남편에게 이마에 키스를 하였다. 그녀는 아파트의 문을 닫을 엄두가 나지 않아 오랫동안 낭하에 서 있었다. 그러다가 다른 곳을 바라보면서 문의 손잡이를 힘껏 끌어당겼다. 쾅!하고 문이 닫히고 나자, 그녀는 정신이 아찔하였다. 옛날 아버지의 관 위에 처음으로 흙을 한 삽 떠서 얹을 때에도 이런 심정이었다.
<앙리는 매정도 해라. 일어나 방문까지 바래다주면 어때? 그가 문을 닫으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처량하지는 않을 텐데.>
「그 애가 그런 짓을 했어요?」
리레트는 먼 데를 바라보면서 말하였다.
「정말에요?」
저녁 여섯 시쯤 해서 피에르는 리레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 그녀는 도옴으로 피에르를 만나러 온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오늘 아침 아홉 시 경에 류류와 만나기로 하지 않았어요?」
「만났어요.」
그녀가 대답하였다.
「태도가 수상하지 않았어요?」
「아무런 눈치도 뵈지 않았어요. 좀 피로해 보이기는 하더군요. 당신이 돌아간 후로 전혀 자지 못했어요. 니스를 구경할 생각으로 마음이 들떠 있기도 하고, 알제리아의 보이가 어쩐지 무섭기도 해서요……그리고 1등 차표를 샀을까 하고 궁금하게 여기더군요. 1등 차로 여행하는 게 평생의 소원이었대요. 아녜요.」
하고 리레트는 힘을 주어 말하였다.
「류류는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을 거예요. 적어도 나와 함께 있을 때 말에요. 난 두 시간이나 함께 있었어요. 그 애는 가면을 곧잘 쓴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난 그 애와 4년 동안이나 사귄 사이라. 어떤 경우에 무슨 태도를 취한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아무튼 그 애에 대해서는 난 모르는 게 없어요.」
「그렇다면 아마 텍시에가 충동한 게로군. 이상한데…….」
그는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을 계속했다.
「류류가 있는 곳을 누가 텍시에한테 가르쳐 줬을까? 그 호텔을 택한 건 나구요, 그 호텔에 대해 그 여자는 전에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을 텐데.」
그는 류류의 편지를 멍하니 매만지고 있었다. 리레트는 읽어 보고 싶었으나, 그가 내어주지 않아 마음이 졸였다.
「그 편지를 받으셨어요?」
그녀는 참다못해 물었다.
「편지?」
피에르는 선뜻 내주었다.
「읽어봐요. 한 시경에 문지기한테 전한 모양이던데.」
그것은 담배 가게에서 파는 얇다란 보랏빛 편지지에 쓰여 있었다.
그리운 당신에게!
텍시에씨 내외가 오셨어요.(누가 나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을까요?) 그래서 당신의 마음을 괴롭혀 드릴지 모르지만, 난 떠나지 않기로 작정했어요. 나는 전과 같이 앙리하고 살겠어요. 그이가 너무나 불쌍해요. 오늘 아침에 텍시에씨 내외분이 앙리를 만나 보러 갔더니, 그는 문도 열어주지 않으려고 했대요. 앙리의 꼴이 말이 아니더라고 텍씨에씨 부인이 말하지 뭐에요. 그들 내외분은 매우 친절하여 내 말을 잘 이해 하더군요. 부인의 말에 의하면, 모든 것이 앙리의 잘못이며, 그는 곰 같은 사람이지만 본시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거예요. 그리고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던가를 잘 알게 되었을 거라구요.
누가 나 있는 호텔을 얼려 줬는지 모르겠군요. 아마도 누가 오늘 아침에 내가 리레트와 함께 그 호텔에서 나오는 걸 우연히 보았는지도 모르겠어요. 텍시에 부인은, 이것이 나에게 커다란 희생을 요구하는 일인 줄 잘 알고 있지만, 서로 친하게 지내온 사이인지라, 내가 그런 희생을 거부할 여자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의 즐거운 니스 여행은 유감 천만이에요. 그러나 당신은 언제든지 나와 마음대로 사귈 수 있으므로 불행하지 않을 테지요. 전과 다름없이 자주 만나 주세요. 그러나 앙리는 내가 없으면 자살해 버릴 거예요. 그이에겐 내가 있어야 해요.
난 이런 책임을 지는 건 조금도 달갑지 않아요. 당신은 언짢은 표정을 짓지는 않을 테지요. 내가 두려워하는 그 표정 말에요, 또 내가 후회할 것을 원하지도 않겠지요.
지금 그이를 다시 만나려 가려고 하니, 좀 짜증도 나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조건을 내세울 테야요.
첫째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으므로 더 많은 자유가 있어야 할 것, 그리고 그이는 로베르의 일에 참견 말 것, 또 앞으로 우리 어머니의 욕을 하지 않을 것.
나는 정말 서글퍼요. 당신이 무척 그리워요. 당신에게 안겼을 때의 당신의 애무를 전신에 느끼고 있어요. 내일 다섯 시에 도옴으로 가려고 해요.
류류 올림
「아이, 딱해라!」
리레트는 피에르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나는 류류 자신을 위해 섭섭히 생각하는 거요. 그 여자에겐 맑은 공기와 햇빛이 필요하거든요. 그러나 본인이 그렇게 마음을 정했다는 데야 할 말이 없지요.…… 우리 어머니는 노발대발했어요. 별장은 어머니 소유거든요. 별장에 여자를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는 거요.」
「그래요?」
리레트가 씁쓸한 어조로 말하였다.
「정말에요? 그럼 잘 되었군요. 피차에 만족스러운 해결을 보았으니까요.」
그녀는 피에르의 손을 놓았다. 그녀는 어쩐지 쓰디쓴 회한(悔恨)이 복바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