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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나무숲

Bollnow 2024. 4. 18. 05:55

올리브 나무숲

Guy de Maupassant

 

1

마르세이유와 툴롱 사이에 있는 피스카만()에 자리 잡은 작은 어촌 사람들은 바다 낚시질에서 돌아온 빌브와 신부(神父)의 조그마한 배를 보고 저마다 바닷가로 나갔다. 배를 끌어 올리기 위해서였다.

배 안에는 신부 한 사람만 타고 있었다. 그는 올해 쉰여덟 살이지만, 노를 젓는 품이 뱃사람 못지않았다. 근육이 불거진 팔로 옷소매를 걷어 올리고, 신부 옷깃을 올려 무릎 사이에 끼고, 가슴에 단추를 좀 따 놓고, 모자는 벗어서 옆 걸상 위에 놓고, 그 대신 흰 천을 씌운 코르크 헬멧을 쓰고 있었다. 미사를 부르기보다는 모험을 즐기는 것이 어울린듯한 그의 모습은, 남부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장한 교직자의 풍모였다.

그는 때때로 배를 댈 곳을 잘 살피느라고 뒤를 돌아보고 나서 박자를 맞춰 규칙적으로 다시 노를 젓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남부지방의 서투른 뱃사람들에게 북부 사람들이 얼마나 배를 잘 젓는가를 새삼 보여 주려는 것 같았다.

힘차게 저어오던 배는 바닷가에 다다르자 앞머리를 처박고 해변 끝까지 기어오를 기세로 모래 위를 미끄러지더니 갑자기 뚝 멈추었다. 신부가 돌아온 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던 다섯 명의 사나이는 신부 앞으로 다가갔다. 저마다 상냥스럽고 호의에 찬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 많이 잡으셨는교, 신부님?"

하고 그들 중에서 한 사람이 남부지방의 심한 사투리로 물었다.

빌부와 신부는 노를 거두고 삼각모를 쓰기 위해 헬멧을 벗었다. 그는 걷어 올린 소매를 내리고 옷 단추를 채우고 나서, 사제(司祭)로서의 기품과 위엄을 갖추고 자랑스럽게 대답하였다.

", 많이 잡구 말구. 루우 세 마리에 뮤레엔 두 마리, 거기에 지렐도 몇 마리 잡았지."

다섯 명의 어부들이 배 가까이 가서 뱃전 너머로 허리를 굽히고 무슨 감정가나 되는 듯이 물고기들을 들여다보았다. 기름진 루우, 머리가 넓직하고 바다뱀이라고 할 수 있는 징그러운 뮤레엔, 그리고 오렌지 껍질과 같은 금빛 얼룩띠 무늬가 있는 남빛깔의 지렐.

그들 중에서 한 사람이 말하였다.

"신부님, 제가 댁에까지 들어다 드리지요."

"고맙소."

신부는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고 나서 걷기 시작하였다. 한 사람만 그의 뒤를 따르고, 남은 사람들은 배를 끌어 올리기로 하였다.

신부는 발걸음을 길게 떼어 놓으면서 힘차고 위엄있게 천천히 걸어갔다. 힘을 들여 배를 저은 뒤였으므로 아직도 몸이 후끈거려 올리브 숲의 가벼운 그늘 밑을 지나갈 때면, 가끔 모자를 벗고 그 반듯한 이마에 저녁 공기를 쏘였다. 아직도 훈훈하기는 하였으나 먼바다 위에서 불어오는 은은한 미풍으로 하여 저으기 선선해진 저녁 한때였다. 빳빳하고 짧게 깎은 흰 머리로 덮인 그 이마는, 신부의 이마라기보다는 장군에게 아울리는 이마였다. 바다를 향하여 밋밋하게 경사진 커다란 골짜기 한복판에 놓인 언덕 위에 마을이 보였다.

7월의 어느 저녁이었다. 멀리 톱날처럼 서 있는 산봉우리에 거의 닿을 듯한 눈부신 태양이 먼지투성이가 된 희끄므레한 길 위에 신부의 그림자를 비스듬히 길게 던져주고 있었다. 커다란 그의 삼각 모자는 한길 가 올리브 숲 위에 커다란 그늘을 던지며 지나갔다. 그것은 마치 장난이라도 하는 것처럼, 부딫히는 나무마다 재빨리 타고 올랐다가는 다시 땅으로 툭 떨어져 나무 사이를 기어가는 것이었다.

신부의 말 밑에서 먼지가 부옇게 피어올랐다. 여름이면 프로방스 지방의 모든 한길을 덮어 버리는 뿌연 흙가루가 주위에서 연기처럼 피어올라, 그의 옷자락을 차차 밝은 회색빛으로 덮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이제 시원해졌으므로,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찌르고, 산을 잘 타는 산악지방의 사람들 모양 느리고 힘찬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마을을 바라보았다. 20년 동안이나 그가 사제의 일을 맡아온 마을이었다. 자기가 원하여 다행히 차자하게 된 이 마을에 그는 앞으로 몸을 묻을 심산이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난 갈색 석탑이 남국의 아름다운 계곡에 고풍스러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그것은 성당의 종루라기보다 차라리 요새의 보루와 비슷하였다.

신부는 만족하였다. 루우를 세 마리, 뮤레엔을 두 마리, 그리고 지렐까지 몇 마라 잡았으니 말이다.

그는 교구의 신도들에게 보여 줄 자랑거리가 또 하나 는 셈이다. 나이는 많지만, 마을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건장한 몸집을 지녔다고 해서 존경을 받고 있는 그에게는, 그런 대수롭지 않은 천진스러운 자랑거리가 커다란 기쁨을 느끼게 하였다. 그는 권총을 쏘아서 꽃나무 가지를 꺾을 수 있으며, 가끔 전에 부대에서 검술 조교를 한 적이 있는 옆집 담뱃가게의 주인과 검술 연습도 하고, 바다에서는 누구보다도 헤엄을 잘 치는 것이었다.

그는 한때 멋쟁이로 명성을 떨친 빌브와 남작이었는데, 사랑에 실패하고 서른두 살에 신부가 되었다.

그는 피카르드라는 전통 있는 집안에 태어났다. 왕에게 충실하고 믿음이 깊은 집안으로, 그 아들은 대대로 군인이나 사법관, 또는 성직자가 되었다. 그도 처음에는 어머니의 권고대로 성직자가 되려고 하였으나, 아버지가 반대하는 바람에 목표를 변경하여 파리에 가서 법률을 배우고 법관이 되려고 결심하였다.

그가 공부를 마칠 무렵에 아버지는 늪에서 사냥을 하다가 폐렴에 걸려 죽고, 어머니도 이 뜻하지 않은 불상사에 충격을 받아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갑자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그는, 장차 직장을 가질 계획을 버리기로 하였다. 부유한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가면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신앙과 전통과 계율-이것은 그의 시골 귀족다운 근육과 더불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로 말미암아 그다지 자유로운 정신을 갖고 있지는 못하였으나, 그는 미남이고, 총명한 젊은이로 뭇사람들의 호감을 받았으며 귀족사회에서 인기가 대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젊고 절제 있고 부유하고 존경받는 청년으로 인생을 즐겼다.

그런데 그는 우연히 어떤 여배우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와는 어느 친구의 집에서 몇 번 만난 것이 인연이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직 나이 어린 콩세르바트와르 음악학교의 학생으로, 오데옹 극장에서 처녀출연(處女出演)을 하여 격찬을 받았다.

그는 절대적인 진리를 믿는 사람답게 모든 정열을 기울여 그 여자를 사랑하였다. 그녀가 처음 무대 위에 등장하여 커다란 성공을 거둔 그날에, 그는 눈부신 영광에 싸인 그 소녀에게 매혹되어 마침내 사랑에 빠져 버렸던 것이다.

그녀는 얼굴이 매우 아름다웠다. 그리고 성격은 변덕스러웠으나, 그 태도는 어린애처럼 천진하였다. 그는 이것을 천사와 같은 모습이라고 하였다. 그는 남자를 완전히 정복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를 몽유병자처럼 자기한테 미치게 만들었다. 그녀의 눈초리 하나 치맛자락 하나가 목숨을 저버릴 정도로 정열의 불길에 자기 몸을 태워 버리고야 마는 황홀경으로 인도하여, 그는 정신의 광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는 그 여자를 애인으로 삼고, 무대의 연출을 그만두게 한 다음에 4년 동안 정열을 기울여 그녀를 사랑하였다. 그는 자기의 명성이나 가문의 자랑스러운 전통도 져 버리고 그녀와 결혼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그녀가 오랫동안 자기를 속이고, 자기에게 소개를 해 준 그 친구와 부정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비극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그리하여 그녀가 해산만 하면 곧 결혼하려고 하던 참이라, 그것은 더욱 참혹한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증거품으로 서랍 속에서 발견한 몇 통의 편지를 손에 넣자 그녀를 공박하기 시작하였다.-그녀의 부정과 불의와 추행을 그의 본성인 반 야만적인 야수성을 드러내며 무섭게 꾸짖었다.

그러나 그녀는 파리 태생으로 염치나 명예 같은 것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사나이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딴 사나이에 대해서도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단순히 으스대기 위해 성() 위에까지 기어오르는 빈민굴의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무서움을 모르는 여자라, 그에게 마구 대어 들며 비웃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사내가 주먹을 들어 올리자, 그녀는 얼른 자기의 배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는 별안간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면서 기가 죽었다. 자기의 핏줄이 저 더럽고 비열한 몸뚱아리 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되자, 다시 그 계집에게 달려들어 둘 다 한꺼번에 밟아 죽임으로써 이중의 치욕을 대뜸 씻어 버리려고 하였다. 여자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이제 죽는 줄만 알았다. 남자의 억센 주먹 아래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땅바닥에 쓰러져 헐떡이는 그 부풀어 오른 배-벌써 생명의 씨가 움직이고 있는-를 남자의 발길이 당장 짓밟아 버리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그 발길을 막으려고 힘껏 두 손을 올리면서 고함을 질렀다.

"죽이지 말아요. 당신의 애가 아니니까요."

그는 주춤하고 한걸음 물러섰다. 하도 어이가 없고, 하도 놀라와, 그 분노도 발길도 한꺼번에 공중에서 멈춰 버린 듯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뭣이라고?"

여자는 사나이의 무서운 눈초리와 거동 속에서 뚜렷이 느낄 수 있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미칠 것만 같은 두려움으로 하여 연달아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당신의 애가 아니에요. 그이 애야요!"

그는 이를 악물고 꺼지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정말?"

"암요."

"거짓말이지?"

그는 다시금, 밟아 죽일 듯이 발길을 움직거리기 시작하였다. 무릎을 꿇고 있던 그녀는 일어나 뒷걸음을 치려고 하면서 여전히 중얼거렸다.

"그이 애예요. 당신 애라면 벌써 전에 있었을 거 아녜요."

이 말은 틀림없는 진실을 깨우쳐 주는 것처럼 그의 귀를 울려왔다. 그것은 실로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었다. 순간 그는 그 계집의 뱃속에 들어 있는 가련한 생명의 애비는 결코 자기가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모든 이지(理智)가 일시에 무한히 명백하고, 정확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고, 따라서 믿지 않을 수 없으며, 항의할 수도 없이 홀연히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별안간 자기 몸을 꽁꽁 묶고 있던 사슬이 불리는 듯하면서 분노마ㅈ 가라앉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 더러운 계집을 찢어 죽이려던 생각을 버렸다.

이윽고 그는 한결 침착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저리 썩 나가!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그녀는 명령대로 일어나 순순히 나가버렸다.

그 후 그는 그녀를 다시 보지 못하였다.

그는 길을 떠났다. 남쪽을 향해 태양을 바라보며 무작정 내려갔다. 그리하여 지중해안의 어느 계곡에 자리 잡은 마을에 이르러 발길을 멈추었다. 그는 그곳에서 18개월 동안 비탄과 절망과 깊은 고독 속에서 지내었다. 자기를 배반한 그 여자에 대한 괴로운 추억과 체취와 교태, 그 말할 수 없는 매력에 대한 아쉬움 속에서 그녀의 미모와 애무를 원망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그는 프로방스의 골짜기를 헤매었다. 추억으로 하여 병든 머리를 이끌고 올리브 나무의 거무틱틱한 잎사귀 사이로 스며 나오는 햇빛을 받으며 그는 끝없이 거닐었다.

그는 괴로운 고독과 싸우는 동안에, 어느새 옛날의 경건한 신앙심-소년 시절의 그 순수한 정열은 다소 식어 버렸지만-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일찍이 미지의 생애 대한 피난처로 생각되던 종교가 이제는 허위와 고뇌에 충만한 인생에 대한 피난처로서 그에게 나타났던 것이다. 기도하는 습관을 아직 버리지 않고 있던 그는 슬픔 속에서 더욱 기도에 힘썼다. 저녁이면 때때로 어둠컴컴한 교회 안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교회 안에는 제단을 지키는 성스러운 램프의 불꽃이 마치 하나님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처럼 외로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고민을 하나님에게 고백하고, 자기의 모든 괴로움을 호소하는 동시에, 충고를 구하고 동정과 구원과 보호와 위로를 애원하였다. 그는 날이 갈수록 더욱 열렬히 부르짖는 기도 속에서 번번이 커다란 감격을 느끼는 것이었다.

한 여인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받은 그의 가슴은 아물 줄 모르고 언제나 헐떡이며 끊임없이 애정을 갈구하였으나, 차츰 기도를 계속하며 믿음을 길러 성자와 같은 생활을 하고, 불쌍한 인간을 위로하면서 이끌어 주시는 구세주와 진심으로 경건하게 은밀한 교섭을 계속하는 동안에, 신비스러운 사랑이 마음속에 움터 지상의 사랑을 정복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어렸을 때의 뜻을 받들어 순결한 생활을 할 수 없던 그는 깨어진 생이나마 교회에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신부가 되었다. 그는 가문과 인척들의 힘으로, 우연히 찾아온 이 마을 주임 사제(司祭)로 임명되었다. 그는 재산의 대부분을 자선사업에 기부하고, 한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조금씩 도와줄 수 있는 정도의 재산만 가지고 경건한 예배를 통하여 인류에 대해 봉사할 수 있는 조용한 생활 속으로 은거해 버린 것이다.

그는 소견은 넓지는 못하였으나 선량한 신부요, 군인의 기질을 타고 난 이를테면 신앙의 안내자-즉 본능과 취미와 욕망으로 말마암아 길을 잃어버리곤 하는 인생의 산림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인간들을 강제로 옳은 길로 이끌어 주는 교회의 안내자였다. 그러나 옛날의 많은 기질이 마음속에 그대로 남아 있어, 과격한 운동과 귀족적인 스포츠와 검술을 좋아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여성을 싫어하였다. 그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험 앞에서 어린애들이 느끼는 막연한 공포심과 비슷한 것이었다.

 

2

신부의 뒤를 따라오던 어부는 남부지방 사람답게 이야기를 좋아하는 성미였으므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혀끝에서 감돌고 있었으나, 성도들에게 엄격한 위엄을 지키는 신부 앞이라 감히 입을 열지 못하다가 마침내 용기를 내어 말을 꺼내었다.

"신부님, 어떻습니까, 별장은 마음에 드십니까?"

그가 말하는 별장이란, 이 지방에서는 도시 사람이나 마을 사람이나, 여름이 되면 피서하기 위해 사용하는 아주 작은 집이었다. 신부는 교회 사택에서 5분이면 갈 수 있는 나무밭 속에 이런 집을 한 채 빌리고 있었다. 사택은 성당 옆인 데다 교구(敎區)의 한복판이라 답답하였다.

그는 여름에도 언제나 여기서 보내는 것은 아니었다. 가끔 가서 며칠씩 묵을 뿐이었다. 온통 초록색으로 뒤덮인 숲속에서 권총 사격 연습을 하기 위해서였다.

", 마음에 들구 말구."

하고 신부는 대답하였다.

나무 숲속에 납작한 별장이 보였다. 장밋빛으로 칠한 이 작은 집은 나무숲 한복판에 있었다. 그리하여 올리브 가지와 잎사귀의 검은 그림자를 받아 줄이 그어지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작게 잘린 듯하여 마치 이 프로방스 지방에 버섯이 솟아난 것 같았다.

키가 후리후리한 여인이 조그마한 저녘상을 차리면서 문 앞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한결같이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무엇인가 한 가지씩 들고 가선 상 위에 놓고 갔다. 처음에는 포크를, 다음에는 접시를, 다음에는 빵을, 그다음에는 찻잔을……이렇게 꼭 하나씩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르를 지방 지방의 여자들처럼 조그마한 보네(모자)를 쓰고 있었다. 검은 비단과 벨벳으로 된 끝이 뾰족한 모자로 꼭대기에는 하얀 버섯같이 생긴 장식이 꽃처럼 달려 있었다.

신부는 말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에 이르자 소리를 질렀다.

", 마르그리트!"

여인은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고는 자기 주인임을 알아차리고,

", 신부님이시군요!"

하고 대답하였다.

"이봐, 꽤 많이 잡아 왔어. 루우를 한 마리 얼른 좀 구어, 버터를 발라서 말이야. 딴 재료는 쓰지 말라고 버터만 발라서 굽는 거야. 알겠지?"

하녀는 앞으로 맞으러 나왔다. 그리고 어부가 들고 온 물고기를 살펴보았다.

"신부님, 이미 닭은 고아 놓았는데요."

"그렇지만 갓 잡아 온 생선을 하루 묵혀서 먹을 수야 있나. 좀 포식을 해야겠군. 이런 일은 나한테 그렇게 자주 있는 것도 아니겠고, 또 큰 죄가 될 리도 없을 테니까."

하녀는 루우 고기를 골라 가지고 가려다가 다시 돌아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참 신부님! 어떤 남자가 신부님을 뵙겠다고 세 번이나 찾아왔어요."

신부는 무관심한 태도로 물었다.

"남자가? 어떤 남잔데?"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아요."

"그래? 그럼 거지란 말이냐?"

"글쎄, 그런 것도 같아요. 그러나 그보다도 제가 보기에는 마우파탕 같더군요."

신부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마르그리트가 겁이 많은 줄은 잘 알고 있었다. 마우파탕이란 이 지방의 사투리로서 한길을 방황하는 악한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하녀는 이 숲속 별장에 와 있을 때면, 날마다 밤낮으로, 특히 밤이면 악한이 찾아와서 자기와 주인을 죽이지나 않을까, 하는 피해망상증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어부는 신부에게서 동전을 몇 푼 받아 가지고 돌아갔다. 그러자 옛날 사교계에 출입할 때에 몸치장을 하던 습관이 여전히 남아 있는 신부가,

"내 얼굴과 손을 좀 씻고 와야지."

하고 돌아서려는데, 마그리트가 부엌에서 식칼로 루우의 잔등을 긁어 피가 조금씩 묻은 은전 같은 나물을 뜯고 있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 ! 저 사람 말씀이에요!"

신부가 한길 쪽을 바라보니 정말 어떤 사나이가 눈에 띄었다. 멀리서 보아도 옷차림이 몹시 초라하였다. 사나이는 별장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신부는 그 사나이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여전히 그 하녀가 무서워하던 모습을 속으로 웃으면서 이렇게 생각하였다.

<정말이군. 하녀의 말대로 마우파당의 꼴을 하고 있는걸.>

낯선 사나이는 두 손을 포켓에 넣고 한순간도 눈을 신부에게서 떼지 않고 침착하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젊은 사람이었다. 볼에는 곱슬곱슬한 금빛 수염이 나고, 머리카락이 털모자 밑으로 삐져나와 흩어져 있었다. 모자는 때 묻고 구겨져 그 처음 빛깔과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밤색 깃 외투를 걸치고, 너덜너덜한 바지는 가랭이가 발뒤축에 톱날 모양, 늘어져 있었다. 발에는 스페인화를 신고 있어 소리가 나지 않아, 걸음걸이에 힘이 없고 불안해 보였다. 그것은 남의 눈에 뜨이지 않으려고 하는 부랑자의 걸음걸이였다.

사나이는 신부가 서 있는 몇 발자국 앞에 와서, 이마를 가리고 있던 그 걸레 조각 같은 모자를 연극배우 식으로 벗어들었다. 얼굴은 생기가 없고 방탕스러워 보였으나 그래도 어딘가 아름다운 데가 있었다. 정수리가 벗어진 것은 과로의 탓이 아니면, 조숙한 방탕의 표시였다. 나이는 분명히 스물다섯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신부는 그가 보통 부랑자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얼른 모자를 벗었다. 그는 적어도 실직을 당한 막벌이꾼이나, 감옥에서 감옥으로 전전하며 죄수들이 쓰는 괴상한 말 밖에는 할 줄 모르는 그런 전과자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였다.

"안녕하십니까, 신부님!"

사나이가 먼저 인사를 했다.

신부는 이 남루한 누더기를 걸친 정체 모를 사나이에게 경어를 사용할 수가 없어 다만,

"안녕하시오?"

하고 대답해 주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마주 쳐다보았다. 그러자 신부는 이 사나이의 시선 앞에서 이상하게 마음의 동요를 느꼈다. 초면의 적과 마주섰을 때처럼 가슴이 설레며, 살과 핏속에 소름이 오싹 끼치면서, 이상한 불안감이 전신을 휩쓰는 것이었다. 부랑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저를 아시겠습니까?"

신부는 놀라는 어조로 대답하였다.

"내가? 당신을? 전혀 모르겠는데……"

", 그러세요. 저를 전혀 몰라보세요? 그러시다면 저를 좀 더 똑똑히 바라보시지요."

"아무리 바라보아도 전혀 본 기억이 나지 않는걸."

그러자 상대방은 빈정거리는 어투로 말하였다.

"하긴 그러실 테지요. 그러시다면 신부님이 좀 더 아실만한 사람을 보여 드리지요."

그는 다시 모자를 쓰고 외투의 단추를 풀었다. 그러자 가슴팍의 살결이 온통 드러났다. 여윈 아랫배 위에는 붉은 혁대가 바지에 감겨 있었다. 그는 주머니 속에서 봉투를 한 장 꺼내었다. 그것은 가지각색으로 얼룩이 져 도저히 봉투라고 말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것은 흔히 부랑자들이 경관을 만났을 때 자기 신분을 보장하여 주는 서류가 들어 있는 봉투-따라서 정말인지, 가짜인지, 훔친 것인지, 자기 것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서류를 넣어서 옷 속에 넣어서 간직해 두는 그런 종류의 봉투였다. 그는 그 봉투 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었다. 옛날에 흔히 찾아볼 수 있던 엽서 모양의 사진이었다. 색깔이 누렇게 바래고 꼬깃꼬깃해진 사진으로 오랫동안 여기저기 끼고 다녀 품속에서 따뜻한 체온으로 색깔이 바래진 모양이었다.

그는 그 사진을 자기 옆에 내놓고 신부에게 물었다.

"그럼 이 사람은 아시겠습니까?"

신부는 좀 더 자세히 보려고 두어 발짝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면서 정신이 아찔하여, 그대로 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사진으로 옛날 사랑하던 여자에게 주려고 찍었던 것이다.

신부는 영문을 몰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사나이는 말을 계속하였다.

"그럼 인제는 아시겠습니까?"

신부는 더듬거리며 말하였다.

"알만하오."

"이게 누구시지요?"

"나요."

"분명히 신부님이시죠?"

"그렇소."

"그러시다면 이제 이 사진과 내 얼굴을 비교해 보십시오."

신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가엾은 그는 이 두 얼굴-그 사진의 얼굴과 그 옆에서 비웃고 있는 사나이의 얼굴이 서로 형제처럼 닮은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잘 알 수가 없어 더듬거리며 말하였다.

"그래 대체 용건은 뭐요?"

그 부랑자는 심술궂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용건요? 우선 제가 누구인지 알아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대체 당신은 누구요?"

"제가 누구냐구요? ! 한길을 가는 사람더러 붙들고 물어보시요. 저 하녀에게라도 물어보시오. 혹은 소원이시라면 이 사진을 보이고 촌장에게라도 물어보시오. 그러면 아마 큰 소리로 웃으실 겁니다. 하하, 제가 신부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치 않을 작정이세요, ?"

신부는 성경의 어느 한 장면처럼 두 손을 추겨 들고 절망에 찬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럴 리가 없소."

젊은 사나이는 바로 앞에 다가서서 얼굴을 맞대며 말하였다.

", 그럴 리가 없다구요? 신부는 이제 거짓말을 삼가야 합니다. 아시겠어요?"

그는 위협하는 얼굴을 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가 하도 자신 있게 말하므로 신부는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그는 지금 두 사람 중에 누가 과연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신부는 다시 한번 잘라서 말하였다.

"나는 아직까지 자식을 가진 일이 없소."

사나이는 반박하였다.

"정부를 가진 일도 없습니까?"

신부는 조금도 꺼리낌이 없이 한마디로 고백했다.

"있소."

"당신이 그 정부를 쫓아낼 때 임신하고 있었지요?"

그는 별안간 옛날의 분노가, 25년 전에 짓밟아 버렸던 분노가, 아니 그의 가슴속에 숨겨 둔 분노가 신앙의 천장을 뚫고야 말았다.-그 여자 위에 세워 놓은 신앙, 모든 것을 단념하고 몸과 마음을 온통 하나님께 바치려고 하던 신앙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잊고 이렇게 부르짖었다.

"내가 그 여자를 쫓아낸 것은, 그 여자가 나를 속였기 때문이야. 그 뱃속에 다른 남자의 자식을 배고 있었기 때문이야. 만일 그것이 내 자식이었던들 나는 죽여 버렸을 거야. 알겠어? 너도 그 여자도 한꺼번에 말이다."

이번에는 젊은이 쪽에서 신부의 진정한 격분에 저으기 놀라며 당황해하였다. 그러자 그는 잠시 후에 한결 부드러운 어조로 이렇게 말하였다.

"누가 그 애를 딴 남자의 자식이라고 말했어요?"

"물론 그 여자가 자기 입으로 말했어, 나한테 대들면서 분명히 말한 거야."

그러나 젊은이는 이 말에 굳이 반박하려고 하지 않고, 사건의 진상을 가리는 악한의 냉혹한 태도로 이렇게 잘라서 말하였다.

"그냥 어머니가 잘못 말한 거죠. 그것뿐이죠."

신부는 무서운 분노가 사라진 후에 냉정한 태도로 이렇게 물었다.

"누가 그러더냐, 네가 내 아들이라고?"

"어머니지요! 돌아가실 적에요. 신부님……그리고 또 이것 보세요."

그는 신부의 눈앞에 그의 작은 사진을 내밀었다.

신부는 그 사진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이 미지의 행인과 옛날의 자기 모습을 비교해 보았다. 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자기의 아들임이 분명하였다.

그의 머리를 어두운 절망이 휩쓸었다. 마치 옛날에 저지른 죄의 상처가 쑤시는 듯, 말할 수 없는 무서운 고통이 따르는 격정에 사로잡혔다. 자기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짐작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여자와 헤어질 때의 사나운 광경이 떠올랐다.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저 고약한 계집이 거짓말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거짓말은 훌륭히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그리하여 자기의 피를 나눈 자식이 세상에 태어나 성장한 뒤에는 길거리를 헤매는 저주스러운 부랑자가 되었다. 염소가 짐승의 냄새를 풍기듯이 죄의 냄새를 풍기는 부랑자가 되었다.

신부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하였다.

"나하고 같이 걸으면서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 볼까?"

젊은이는 비웃는 듯이 말하였다.

"그렇게 하세요……제가 여기까지 온 것도 그 때문이니까요."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올리브 숲을 향해 걸어갔다. 벌써 저녁때가 되었다. 이 남쪽 나라 황혼의 싸늘한 대기가 벌판 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장막을 펴 놓았다. 신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교직자다운 태도로 문득 눈을 치켜올렸다. 그의 주위에는 어디나 창공을 배경으로 하늘하늘 떠는 올리브의 조그마한 잿빛 잎사귀-이 세상의 가장 큰 고민, 그리스도의 절망과 같은 고민을 가려 준 일이 있는-들이 눈에 띄었다.

그의 가슴속에서 기도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절망적인 짤막한 기도 소리였다. 그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에게 구원을 청하는 소리이기도 하였다.

"주여! 저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그는 아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였다.

"그래, 어머님은 세상을 떠났다지?"

이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자, 새로운 슬픔이 마음속에서 소생하여 가슴을 찢는 것만 같았다. 도저히 아주 잊어버릴 수 없는 인간에 대한 기이한 슬픔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지난날에 그가 받은 고뇌의 처참한 액운이기도 하였다. 아니 그 여자가 이미 죽어 버린 이제 와서는 추억의 상처밖에 남지 않은 청년 시절의 그 짧고 황홀하던 행복의 전율이었다.

젊은이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얼마나 오래되었어?"

신부의 가슴속에 새로운 의혹이 일어났다.

"그럼 왜 진작 나한테 찾아오지 않았어!"

젊은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하였다.

"여러 가지 사고가 일어나서 그럴 수가 없었어요.……차차 말씀드리지요. 자세히 말씀해 드리겠어요. 그런데 저는 실은 어제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어요."

신부는 가엾은 생각이 치밀었다. 그리하여 갑자기 두 팔을 내밀며 말하였다.

", 그래! 딱하기도 하지!"

젊은이는 신부의 손을 잡았다. 커다란 두 손이 훨씬 가냘프고 열에 떨리는 손을 감싸 주었다. 이어서 그는 지금까지 입술에서 한 번도 떠나지 않던 그 비웃는 듯한 어조로 말하였다.

"우리는 어쩌면 서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신부는 걷기 시작하였다.

"저녁을 먹어야지."

신부는 불현듯 자기가 잡아 온 생선 생각이 났다. 이것을 삶은 닭고기와 함께 내놓으면 이 비참한 자식에겐 훌륭한 저녁 식사가 되리라고 생각하자, 그의 마음속에는 이상하게도 막연한 본능적인 기쁨이 떠올랐다.

이르르 출신의 하녀는 불안에 싸여 무어라고 중얼거리며 벌써부터 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신부는 큰 소리로 일었다.

"마그리트, 그 상은 방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자 어서 식사를 두 사람분 가져와. 빨리!"

하녀는 주인이 이런 불한당과 식사를 같이 하려는 것을 보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그냥 서 있었다.

그러자 빌브와 신부는 자기를 위해 차려 놓은 식기를 손수 치우며, 아래층에 하나밖에 없는 방으로 상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5분쯤 지나 신부는 부랑자와 마주 앉았다. 앞에 놓인 양배추국 그릇에서 더운 김이 작은 구름 송이처럼 두 사람의 얼굴 사이로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3

젊은이는 차츰 숟가락을 빨리 놀려 허기진 듯이 그릇에 가득 담긴 국을 퍼넣기 시작하였다. 한편 신부는 조금도 입맛이 동하지 않아 다만 달콤한 수프만 천천히 들이마실 뿐 빵은 그대로 접시에 남겨놓았다.

이윽고 신부는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

"이름이 무어지?"

젊은이는 빙그레 웃었다. 배가 불러서 무엇보다도 만족스러웠다.

"아버지를 모르고 큰 자식이니, 성은 어머니의 것을 쓸 수밖에 없었지요. 아마 그 성은 지금도 기억하고 계시지요? 그런데 이름은 둘이나 되지요.<필립·오규스트>라고 부릅니다. 저한테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지요."

"어떻게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어?"

신부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목메인 소리로 물었다.

부랑자는 어깨를 추켜올리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뻔한 노릇이 아니에요? 어머니는 당신과 헤어지고 나서 정부에게 내가 그의 자식이라고 속였지요. 그리하여 그 작자도 내가 열다섯 살쯤 될 때까지는 그대로 믿고 있었어요. 그런데 커감에 따라서 내가 너무나 당신을 닮아가기 시작하자 그도 내가 자기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필립·오규스트라고 하는 두 개의 이름을 갖게 되었었어요. 제가 운이 좋아서 아무도 닮지 않았든지, 혹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셋째 도둑의 자식이었던들 지금쯤은 <필립·오규스트··프라발롱> 자작이라고 그자의 성과 이름을 버젓이 가질 수 있었을 테지요. 그리하여 상원의원 프라발롱 백작의 아들로 행세했을 거구요. 저는 스스로 <불운아>라고 이름 지었지요."

"네가 어떻게 그런 자세한 내막을 다 알게 되었느냐?"

"제 앞에서 한바탕 말다툼이 벌어졌거든요. 아주 대판 싸움이었어요……그래서 다 알게 되었지요."

신부는 반 시간 전부터 뼈아프게 느끼고 참아오던 것보다 더 아프고 괴로운 감정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것은 점점 심해져서 나중에는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이러한 고통은 그가 들은 여러 가지 사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이야기하는 사나이의 태도와 힘주어 말할 때 부랑자의 자포자기한 표정에서 오는 것이었다. 신부는 이 젊은이와 자기 사이에, 자기와 자식 사이에 지금 도덕적으로 한없이 더러운 오물의 시궁창이 흐르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 종류의 정신을 지닌 인간에게는 목숨을 빼앗는 독소와 같은 것이었다. 이 사나이가 자기 자식이란 말인가? 신부는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모든 증거를 원하였다. 모든 것을 알고 싶고, 무든 것을 듣고 싶고, 그리고 모든 것에 귀를 기울이며, 그 고통을 견디고 싶었다. 그는 다시금 자기의 작은 별장을 에워싸고 있는 올리브나무들을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오 하나님이시여, 저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필립·오규스트는 국을 다 마시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신부님, 먹을 것이 더 없어요?"

이 집 부엌은 밖에 붙여 지은 건물 속에 있었기 때문에 신부의 목소리가 마그리트에게 잘 들리지 않아, 그는 알려야 할 일이 있으면 벽에 매달아 놓은 중국제 꽹과리를 두세 번 치는 것이었다.

그는 가죽으로 만든 방망이를 들어 그 쇠판을 몇 번 때렸다. 처음에는 약한 소리가 나더니, 점점 그 소리가 커지면서 땡땡 울렸다. 그리하여 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지더니 마침내 찢는 듯한 뚜드려맞는 구리의 무서운 비명으로 변하였다.

하녀가 나타났다.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굳어진 얼굴을 하고 들어오더니, 마치 주인에게 충성스러운 개가 주인의 신변에 닥치려는 참혹한 비극을 본능적으로 예감하듯이, 분노에 찬 눈초리로 부랑자를 쏘아보았다. 그녀의 손에는 불에 구운 생선을 들고 있었다. 녹은 버터의 구수한 냄새가 물씬물씬 풍겨왔다. 신부는 스푼을 들고 생선을 머리끝에서 꼬랑지까지 죽 가르더니 등 쪽 살을 젊은 아들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아까 내가 잡은 것이다."

이것은 번민 속에 남아 있는 조그마한 자부심 조각이었다. 마그리트는 물러가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신부는 그녀에게 다시 일렀다.

"마그리트, 포도주를 가져와, 아주 좋은 놈으로. 그 코르시카산 백포도주가 좋을 거야."

하녀는 이에 항의하려는 듯한 태도를 취했으므로, 신부는 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거듭 일렀다.

"어서 두 병만 가져와."

신부는 누구에게나 포도주를 권할 때는 실제로 먹을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지만 이처럼 자기 몫으로 한 병을 따로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필립·오규스트는 싱글벙글하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수지맞는데……이렇게 먹어 보기는 참 오래간만인데요."

하녀는 2분쯤 지나 다시 돌아왔다. 신부에게는 이 2분 동안이 영원처럼 지루하게 생각되었다. 신부는 내막을 좀 더 소상히 고 싶은 욕구가 피를 태우고 있었 때문이다. 이 욕구는 마치 지옥의 불길처럼 그의 피를 삼키고 있었다.

하녀는 병마개를 둘 다 뽑고서도, 그대로 머물러 서서 수상한 사나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부가 말하였다.

"이제 그만 가거라."

하녀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리하여 신부는 다시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였다.

"저리 가 있으라고 하지 않았어!"

하녀는 그제서야 비로소 돌아갔다.

필립·오규스트는 생선을 금방 먹어치웠다. 신부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와 그토록 닮은 얼굴에서 여러 가지 천하고 추한 골을 발견하고는 더욱 놀라며 절망에 사로잡혔다.

그는 조그맣게 잘라 입에 넣은 고깃점도 목이 메여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 중에서 가장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입에 넣은 음식을 오랫동안 씹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니는 무엇 때문에 세상을 떠났지?"

"폐를 앓다가요."

"오래 앓았나?"

"1년 반쯤 될까요?"

"어떻게 그런 병에 걸리게 되었어?"

"그야 모르죠."

두 사람은 한동안 잠잠하였다. 신부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알고 싶은 여러 가지 의문들이 물밀 듯이 닥쳐왔다. 그 여자와 헤어지던 날, 하마터면 그녀를 죽일뻔한 그날 이후로 그는 그녀에 대하여 아무 소식도 듣지 못하였다. 물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자와 행복스럽던 한때를 일시에 망각의 심연으로 던져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여자가 죽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제, 그의 마음속에는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은 강한 욕구가 북받쳐 올랐다. 그것은 질투가 따르는 욕구이며, 사랑에 빠진 남자의 욕구였다.

신부는 말을 계속하였다.

"설마 혼자서 살지는 않았을 테지?"

"그럼요, 언제나 그 사내와 같이 살았지요."

신부는 전신이 오싹하였다.

"그 사내라니, 프라발롱 망이냐?"

"그렇죠."

일찍이 여자로부터 배반당한 그는 자기를 속인 그 여자가 바로 자기 연적(戀敵)이라고 할 수 있는 남자와는 20년 이상이나 살았다는 사실을 머릿속에 헤아려 보았다. 그리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말이 불쑥 입에서 나왔다.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았느냐?"

젊은이는 비웃는 얼굴을 하고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럼요. 그야 불탈 때도 있고, 식을 때도 있기는 하지만……저만 없었던들 아주 행복하였을 텐데, 언제나 제가 그사이를 망쳐 놓곤 했지요."

"그건 또 왜?"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제가 열다섯 살쯤 될 때까지는, 그도 저를 친자식인 줄로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 사내도 바보는 아니었어요. 그는 제 기준으로 내가 누구를 닮았는지 분명히 판단하였지요. 그다음부터는 여러 차례 싸움판이 벌어지곤 했어요. 그러면 저는 방문 뒤에 숨어서 가만히 엿들었지요. 그놈은 자기를 속였다고 하면서 어머니를 막 야단치는 거야요. 그러자 어머니도 막 대들었어요. 그게 어디 자기 잘못이냐구요. 자기를 꾀어낼 때 딴 사람의 것인 줄 몰랐느냐는 거예요. 딴 사람이란 물론 신부님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으흥! 그럼 내 이야기도 더러 하더냐?"

", 그러나 제 앞에서는 절대로 신부님의 이름을 입 밖에 낸 적이 없어요. 그러다가 어머니가 이제 다 죽게 되자 입 밖에 내었어요. 하긴 그때도 여간 꺼리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너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부정한 생활을 눈치채었니?"

"물론이죠. 제가 그렇게 어리석은 줄 아세요? 이래 보여도 아직 어리석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어요. 그런 일은 철이 들기 시작하면 금방 알게 되는 법이지요."

필립·오규스트는 잔에 술을 철철 부어 쭉쭉 들이셨다. 두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하였다. 오래간만에 술을 마시니 빨리 취하는 모양이었다.

신부도 그런 줄 알아차리고 말리려고 하다가, 문득 그가 취하면 횡설수설하여 무슨 말이나 아주 털어놓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술병을 기울여 한잔 가득 따라 주었다.

마그리트가 삶은 닭을 가져다 상 위에 놓고 다시 부랑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화가 치미는 듯이 주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신부님, 저 꼴 좀 보세요. 술에 곤드레가 되었어요."

"참견 말고 가 있어……"

하녀는 문을 콱 닫고 나가 나가버렸다.

신부는 다시 이렇게 물었다.

"그래 네 어머니가 나더러 뭐라고 하든?"

"그야 버림받은 여자가 흔히 하는 그런 얘기죠. 같이 살기가 어려운 사람으로, 여자에게 까다롭게 굴었다는 둥, 자기 고집만 부려서 세상을 살아가기가 무척 힘들었을 것이라는 둥 하고 말이죠."

"그래 그런 말을 자주 하더냐?"

", 때로는 제가 알아듣지 못하게 은근한 말씨를 썼지만, 전 다 알아차렸지요."

"그래 그들은 너를 어떻게 대하더냐?"

"처음에는 매우 사랑해 주었지만 나중에 박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어머니는 저 때문에 집안이 성가시게 되자 저를 쫓아내었지 뭐에요."

"어디로?"

"뭐 간단한 일이죠. 제가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젊은 혈기로 좀 실수를 저질렀더니, 그 망한 것들이 글쎄 저를 감화원(感化院)으로 처넣었지 않겠어요. 저를 아주 떼어 버릴 심산이었지요."

그는 식탁 위에 팔을 세우고 두 손으로 볼을 괴었다. 그는 술에 만취가 되어 머리가 몽롱하였다. 그러나 자기 이야기를 지껄이고 싶은 간절한 충동을 느꼈다. 그것은 흔히 술 취한 사람이 횡설수설하고 싶어 하는 그런 충동이었다.

그는 입가에 여자처럼 애교 있는 웃음을 웃어 보였다. 신부는 이 간사한 눈웃음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알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자기를 정복하여 파멸로 인도한 그 가증스러운 세력을 그는 몸소 느껴본 적이 있었다. 아들은 어미를 많이 덞은 것이다. 얼굴 윤곽이 아니라, 그 매력 있는 그러나 못 미더운 눈초리하며, 몸에 배인 모든 죄악의 문을 여는 듯한 간사한 눈웃음의 유혹이 그러하였다. 그는 자기 이야기를 지껄이기 시작하였다.

"아무튼 그 감화원에 들어간 후부터는 아주 괴상한 생활을 해 왔지요. 아마 대 소설가라면 제 생활을 재료로 삼기 위해 많은 돈을 지불하고 사갈 거예요. 몽테·크리스트를 쓴 듀마 할아버지도 제가 당한 일 같은 것은 쓰지 못했거든요."

그는 일단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주정뱅이가 흔히 무슨 생각을 하려고 할 때의 심각하고 엄숙한 태도였다. 그러나 다시 천천히 말을 계속하였다.

"자식이 잘 되길 바란다면, 그 자식이 무슨 짓을 했던, 감화원 같은 데 보내서는 안 될 줄 알아요. 그 안에서 배우는 것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말이지요. 저는 처음에 어떤 재미나는 조그마한 장난을 저지른 데 불과하지만, 마주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어요. 어느 날 밤 아홉 시쯤 해서 친구 셋과 함께(셋이 다 좀 취해 있었어요) 포락 나루터 근처의 한길 가에서 어정거리고 있자니까, 마차 한 대가 나타났는데, 마부와 승객들은 모두 잠이 들어 있었어요. 마차에 탄 사람들은 마르티 동네 집안이었는데, 시내에 들어와서 저녁을 먹고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그래 저는 말고삐를 쥐고 나루터로 끌고 가서 말을 나룻배 위에 태운 다음에 배를 강 가운데로 떠밀었지요. 그래 소리가 나는 바람에 고삐를 잡고 있던 마부가 그만 잠이 깨었어요. 캄캄한 밤이라 앞이 보이지 않으므로 말에다 채찍질을 하는 거예요. 그러자 말은 깜짝 놀라 마차와 함께 그냥 물속에 뛰어들었어요. 그리하여 모두들 물속에 빠져 버렸어요. 그런데 나중에 친구 녀석들이 이 일을 일렀거든요. 처음에는 제가 하는 장난을 보고 재미있었어 하며 욱시까지 하던 녀석들이 말에요.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이렇게까지 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어요. 다만 장난삼아 그 사람들이 목욕하는 꼴이나 좀 보려고 했을 뿐이지요. 다음부터는 이 처음 일의 복수를 하려고 더욱 지독한 장난을 하였지요. 그러지만 감화원에서 저지른 것만큼 재미있지는 못했어요. 이런 이야기는 당신에게 이야기할 만한 것이 못 되지만, 맨 나중의 일 하나만 더 들려 드리지요. 이 이야기만은 당신의 마음에 드실 테니까요. 제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거든요."

신부는 아들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그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필립·오규스트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였다.

"좀 있다가 이야기하지그래."

신부는 뒤를 돌아보면서 꽹과리를 때려 쨍쨍 소리를 내었다. 곤 마그리트가 뛰어왔다. 그러자 신부는 그녀에게 일렀다. 그 목소리가 어떻게 거칠었던지 하녀는 무서워 온순하게 고개를 숙였다.

"램프를 가져와. 그리고 더 내올 수 있는 음식이 있으면 다 가져와. 그리고 내가 이 꽹과리를 다시 때리기 전에는 나타나지 말아. 알겠지?"

하녀는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초록색 갓을 씌운 하얀 사기 램프 등과 커다란 치즈 조각과 과일들을 식탁 위에 놓고는 나가 버렸다.

그러자 신부는 단호하게 말하였다.

"자 인제 이야기해 봐."

필립·오규스트는 조용히 자기 디저트 접시와 포도주잔을 비웠다. 그리하여 신부가 손도 대지 않은 둘째 병을 거의 다 비웠다.

젊은이는 입속에 음식과 술을 한꺼번에 쳐넣고 더듬거리며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그럼 들어보세요. 맨 마지막 이야기는 좀 끔찍해요. 저는 다시 집에 돌아와 둘이 싫어하건 말건 그냥 머물러 있었어요. 그들은 저를 퍽 무서워했단 말예요. 저를 건드리면 재미없으니까요. 만일 저를 귀찮게 굴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거든요. 그런데 그들은 함께 있을 때도 있고 떨어져 있을 때도 있어요. 사내는 거처를 둘 갖고 있었어요. 하나는 상원의원의 집이고, 하나는 정부의 집이었어요. 그러나 자기 집보다는 어머니의 집에 있을 때가 더 많았어요. 그는 이미 어머니 없이는 잠시도 지낼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사실 어머니는 영리한 여자지요. 보통이 아니에요.……남자를 꼭 붙잡고 놓지 않는 기술을 알고 있었거든요. 그 자식의 몸과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었어요. 하긴 남자들이란 어리석기 짝이 없지요. 저는 집에 돌아와서 그들을 한주먹으로 좌우했지요. 이래 뵈어도 저는 꽤 수단이 좋거든요. 필요하다면 꾀나 술책이나 주먹다짐에 있어서는 당할 놈이 없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병들자 그는 어머니를 멜랑 근처의 숲속같이 넓은 정원을 갖고 있는 별장으로 옮겼어요. 이것이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1년 반 전의 일이지요. 그때는 저도 어머니가 얼마 못살 것이라는 것을 느꼈어요. 그 녀석은 파리에서 매일 같이 찾아왔어요. 꽤 슬퍼하는 눈치였어요. 정말 진심으로 슬퍼하였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둘이서 한 시간 동안이나 무엇인가 수군거리고 있었어요. 대관절 뭘 저리 오래 수군거리나 생각하고 있자니까, 저를 방안으로 불러들이는 거예요. 어머니는 저더러 말했어요.-이제 나는 머지않아 죽을 것이다. 그러니 백작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제 너에게 알려 주어야겠다(어머니는 그놈을 가리켜 언제나 백작이라고 불렀지요). 다름이 아니라 살아 계신 네 아버지 말이다.-어머니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어요. 그때까지 저는 수없이 아버지에 대해 물어왔어요.…… 백 번도 더 되지요. 내 아버지 이름을 물어본 것 말에요.……그러나 어머니는 번번이 그걸 알려 주기를 거절했어요.……저는 언젠가는 꼭 알아내려고 결심하여, 심지어 어머니 뺨을 몇 대 후려갈긴 적도 있었어요. 그래도 어머니는 막무가내였어요. 그 후에도 여전히 제가 귀찮게 성화를 하니까 저의 입을 막아 버릴 심산으로, 아버지는 동전 한 잎 남기지 않고 죽어버렸다고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살아서도 보잘것없는 사내였으니, 자기가 젊은 혈기로 그런 사내와 실수를 했느니, 순진한 처녀의 탓이니 하고 둘러맞추더군요. 그래 저는 아버지가 죽은 줄만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난데없이

 

4

<살아게신 네 아버지 말이다.>

이렇게 말하지 않겠어요. 그러자 안락의자에 앉아 있던 백작은

<안돼, 안돼, 안돼, 로제트.>

이렇게 세 번이나<안돼>를 되풀이하더군요.

어머니는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키고 앉았어요. 저는 지금도 그 당시의 어머니가 눈앞에 선해요-불그레한 그 두 볼과 눈만이 유난히 빛나고 있었어요. 아무튼 어머니는 저를 사랑하고 있었어요. 어머니는 백작에게-<그럼 이 애를 위해 무엇을 해 주셔야지요. 필립>하고 말하였어요. 어머니는 백작더러 언제나 필립이라고 부르고, 저는 오규스트라고 불렀지요. 백작은 미친 사람처럼 소리쳤어요.

<천만에! 저 부랑자에게 저 악한, 저 전과자 녀석에게? . !>

그리고는 별의별 이름을 다 주워대었어요. 마치 한평생 그런 욕설만을 찾고 있던 놈처럼 말에요. 저는 화가 버럭 치밀어 모두 뒤집어엎으려고 했더니, 어머니가 말렸어요. 그리고 그 사내를 향해 말하였어요.

<그럼 이 애는 죽으란 말에요?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아요?>

그는 서슴치 않고 말하였어요.

<로제트, 나는 20년 동안 당신에게 해마다 35천 프랑씩 제공하였소. 이걸 모두 치면 100만 프랑도 더 되오. 당신은 이와 같이 내 덕에 돈의 아쉬움을 느끼지 않고 사랑을 받으면서 행복하게 살아오지 않았소. 나는 이런 부랑배의 생활을 책임질 수는 없소. 저놈은 이 몇 해 동안 우리 생활을 번번이 망쳐 놓기만 하였소. 나는 한 푼도 줄 수 없으니, 더는 아무 말도 마오. 당신이 정 소원이라면 그 사람의 이름을 대어 주구려. 난 이제 그 일엔 관여하지 않을 테니까.>

그 녀석은 이렇게 대답하지 않겠어요. 그러자 어머니는 나를 향해 앉았어요. 나는 마음속으로 옳지 됐구나 싶었어요. 이제 아버지를 찾게 되나보다 해서 말예요. 만일 그가 돈 있는 사람이라면 난 살 수 있거든요. 어머니는 말을 이었어요.

<네 아버지는 빌브와 남작이야. 지금은 신부가 되어 투울롱 근처에 있는 가랑두의 사제로 계시다. 저분 때문에 난 아버지와 헤어졌어.>

어머니는 이어서 모든 것을 나한테 이야기해 주었어요. 그러나 임신 문제에 대하여 당신을 속인 것만은 저에게 감쪽같이 숨겼군요. 하긴 워낙 여자란 진실을 입 밖에 내지 않는 법이니까요. 그렇지 않아요?"

젊은이는 무의식중에 마음속에 간직한 모든 추잡한 정체를 드러내면 쓴웃음을 웃었다. 그는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역시 얼굴을 번들거리며 말을 계속하였다.

"어머니는 이틀 후에 세상을 떠났어요. 우리는 묘지까지 따라갔어요. 그자와 나와……기구한 일이지요.……그자와 저하구 이렇게 셋이었지요.……그자는 소처럼 엉엉 울었어요.……우리는 나란히 서 있었어요. 누가 보아도 아마 부자지간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둘이서 집으로 돌아왔어요. 저는 속으로, 한 푼도 안 주고 내쫓다니 그럴 법이 있나, 하고 생각했지요. 그때 저에게는 50프랑밖에 없었어요. 그래 저놈을 어떻게 복수할까 하고 궁리해 보았지요. 그때 별안간 내 팔을 툭 치며 하는 소리가

<너한테 할 말이 있다.>

하지 않겠어요.

그래 저는 서재로 뒤쫓아 갔어요. 그러자 책상 앞에 앉더니 울음 섞인 목소리로, 실은 전에 어머니에게 하던 말대로 그렇게 저한테 심술궂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제발 그 신부를 너무 괴롭히지 말아 달라는 거예요. 그렇지만 이건 우리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겠어요. 그는 저한테 천 프랑을 주더군요. 천 프랑……그까짓 천 프랑을 갖고 제가 뭘 하겠어요. 제가……저 같은 위인(爲人)이 말에요. 저는 서랍 속에 돈이 가득 들어 있는 걸 눈으로 똑똑이 보았어요. 그 돈뭉치를 보자, 저는 놈을 한칼에 찔러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그놈이 주는 돈을 받으려고 손을 내밀다가 별안간 놈에게 달려들어 마룻바닥에 엎어놓고 눈알을 굴릴 때까지 목을 졸랐지요. 놈이 거의 죽은 것 같기에 입을 틀어막고 단단히 결박한 다음에 옷을 홀딱 벗겨가지고 뒤굴뒤굴 굴리다가 아, ! ! !……아주 후련하게 당신의 원수를 갚았지요."

필립·오규스트는 기쁨으로 목이 메여 잔기침을 연달아 하였다. 신부는 다시 한번 이 젊은이의 흉악하고 들뜬 빛이 떠도는, 약간 헤벌어진 입술에서 옛날에 자기 정신을 잃게 하던 그 여자의 미소를 새삼스러이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는 물었다.

"그래, 다음은 어떨게 됐어?"

"그러고 나서는……!!!……난로를 바라다보니 시뻘겋게 달아 있지 않겠어요……섣달이었으니까요……그 추위 때문에 어머니도 결국 돌아갔지요.……시뻘건 석탄불이……저는 화저깔을 시뻘겋게 달궈서……그래가지고……녀석의 잔등에 열십자를 북 북 그어주었지요. 여덟 개였던지, 열 개였든지, 그 수는 잘 알 수 없지만……다음에는 다시 자식을 젖혀놓고 배때기에 그 정도 그어 주었지요. 어때요, 재미있지요? 옛날에는 죄인들에게 그런 표시를 찍어 주었다죠? 그 녀석은 뱀장어처럼 몸을 꿈틀꿈틀 뒤틀지 않겠어요.……그러나 입을 꽉 틀어막았으니, 소리를 지를 수도 없지요. 그리고 나서 저는 천 프랑 뭉치를 호주머니에 움켜 넣었지요. 열두 뭉치예요.……그러니까 제가 받은 것까지 합치면 열세 뭉치지요. 그러나 그 돈으로 별로 도움은 받지 못했어요. 저는 하인들에게 백작께서 주무시니까 식사 시간까지 깨우지 말라고 일렀어요. 저는 그가 상원의원이므로 뒷소문이 두려워서 아무 소리도 못할 줄만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어요. 저는 나흘 후에 파리의 어느 음식점에서 검거되었어요. 그래서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였지요. 그 때문에 신부님을 이제야 찾아뵙게 된 거예요."

그는 또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간신히 알아들을 만한 빠른 어조로 이렇게 말을 이었다.

"인제 아버지……신부 아버지……신부를 아버지로 갖다니 참 기구한 일이로군요. !! 아버지는 이 어린 자식을 귀여워해 주셔야지요. 워낙 이놈이 보통이 아니니까요. 게다가 원수를 훌륭히 갚지 않았어요? 아주 후련하게……그놈에게……"

신부는 옛날에 자기를 배반한 정부 앞에서 그토록 미치광이처럼 타오르던 그 분노의 불길이 또다시 이 추잡한 젊은 놈 앞에서 전신을 휩쓰는 것을 느꼈다.

신비스러운 참회실(懺悔室)에서 속삭이는 여러 가지 숨은 추행(醜行)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수히 용서 해 주곤 한 그도, 지금 그의 죄상은 인정도 용서도 받을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제 저 구원과 자비의 하나님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는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이토록 처참한 자를 구해 내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동안 성직(聖職)을 통하여 간신히 눌러있던 그 가슴속의 격정과 미칠 듯한 혈기(血氣)가 모조리 억제할 수 없는 분노로 변해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기 자식인 이 우악한 사나이-자기의 피를 나누고, 또 자기와 똑같은 자식을 낳아 놓은 그 몰염치한 그 에미의 피를 나눈 이 사나이에 대한 분노요, 또한 마치 죄수의 발목에 채워놓은 쇠고랑이 모양, 이 부랑자를 아비와 자식이라는 쇠사슬로 묶어 놓은 그 운명에 대한 분노였던 것이다.

그는 이제 모든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으며, 앞날을 내다볼 수 있었다. 이 충격은 과거 25년 동안이나 키워온 깊은 신앙과 안식에서 깨어나게 하였다. 그는 이 악한에게 넘어가지 않으려면 억세게 나와야 하며, 대뜸 놈의 기를 죽여놔야 한다고 즉석에서 깨닫게 되었다. 그는 격분한 나머지 이를 악물었다. 상대방이 취해 있건 말건 이렇게 명령하였다.

"이제 네 이야기가 끝났으니, 다음에는 내 이야기를 들어. 내가 너에게 살 곳을 정하여 줄 터이니 거기 가서 살아야 해. 그리고 내 명령이 없는 한 그곳을 떠나서는 안 돼. 생활비는 내가 부담할 터이니 염려 말아. 살아가는 데는 궁색하지 않으리만큼 줄 테다. 그러나 많은 돈은 줄 수 없어. 내게 무슨 돈이 있겠나. 만일 내 말을 한 번이라도 어기면 그때는 그만인 줄 알아! 그땐 큰일이 날 테니까……."

필립·오규스트는 술에 취해 머리가 마비되었으나 신부가 자기를 위협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속에 숨어 있던 마귀가 튀어나왔다. 그는 딸국질을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만두세요. 나한테는 그런 수법이 통하지 않아요……신부님이라도 내 손아귀에 들면……딴 놈들과 다름없이 순순하게 들어야죠……딴 놈들처럼 말에요……."

신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비록 늙었으나, 그 억센 팔로 놈을 붙잡아 나뭇가지 꺾듯이 기를 꺾어 놓아야겠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는 식탁을 젊은이의 가슴 앞으로 떠밀며 소리를 질렀다.

"말조심하지 못해! 나도 무서워하는 놈이 없어!"

술에 만취된 젊은이는 몸의 중심을 잃고 의자 위에서 비틀거렸다. 그는 자기가 쓰러진 것만 같고, 또한 신부를 당해낼 수 없다고 느끼게 되자, 살인자(殺人者)의 눈초리를 하고 식탁 위에서 칼을 집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신부는 식탁을 힘껏 떠밀었다. 젊은이는 방바닥에 쓰러지고 램프가 동시에 굴러떨어지면서 불이 꺼졌다.

한동안 유리컵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방바닥을 젊은이의 몸뚱아리가 슬슬 기어 다니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곧 잠잠해졌다.

램프가 깨어지자 두 사람을 어둠이 덮어 버렸다. 너무나 급작스레 또 너무나 뜻밖의 캄캄한 어둠이 닥쳐 왔으므로, 두 사람은 무서운 일이라도 당한 것처럼 질겁을 하여 놀라는 것이었다.

주정뱅이는 벽에 몸을 기대고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신부는 분노를 가라앉혀 주는 어둠에 묻혀서 잠자코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를 덮고 있는 이 검은 장막은 노기를 식혀 주는 동시에 마음속에서 치솟는 성급한 충동을 막아 주었다. 그리하여 어둠처럼 시커멓고 비통한 감정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침묵이 계속되었다. 무덤처럼 깊은 침묵-생물이라고는 모조리 숨져 버릴 듯한 그런 침묵이었다. 소리라고는 밖에서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멀리서 마차가 달리는 소리나, 개 짖는 소리, 그리고 나뭇가지나 벽을 스쳐 가는 바람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

침묵은 오랫동안, 아마도 한 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이윽고 별안간 꽹가리 소리가 들려왔다. 단 한 번 힘차게 때린 무거운 소리였다. 이어서 무엇이 방바닥에 떨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대기하고 있던 마그리트가 뛰어왔다. 그녀는 문을 열자 캄캄한 어둠에 놀라 주춤하고 뒤로 물러섰다. 몸이 떨리고 가슴이 뛰었다.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러보았다.

"신부님! 신부님!"

아무 기척도 대답도 없었다.

"아이 이를 어떡하면 좋아! 웬 영문이야?"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녀는 앞으로 다가갈 용기도 없고, 불을 가지러 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미칠 것만 같아서 자리를 도망치고 싶은 욕망,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만을 느낄 뿐이었다. 다리가 떨리면서 기운이 빠져 막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다시 불러보았다.

"신부님! 신부님! 저 마그리트예요!"

그때 그녀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주인을 구해내야겠다는 본능적인 욕구가 불현듯 일어났다. 그리하여 마음이 담대해져 얼른 부엌으로 뛰어가 등불을 갖고 돌아왔다.

그녀는 방 문턱에 멈춰 섰다. 먼저 부랑자의 몸뚱아리가 눈에 띄었다. 벽 밑에 네 활개를 펴고 자빠져 잠들어 있었다. 적어도 잠을 자는 것처럼 보였다. 다음에 깨어진 램프 등이 보이고, 이어서 식탁 밑으로 검은 양말을 신은 빌브와 신부의 두 다리가 보였다. 그가 뒤로 넘어지면서 머리가 꽹과리에 부딪힌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더럭 겁이 났다. 그리하여 가슴이 설레어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이, 어떡하면 좋아! 어떡하면 좋아! 웬일이야!"

그녀는 조심조심 발을 옮겨 놓았다. 그러자 무슨 기름과 같은 것이 미끄러져 넘어질 뻔하였다.

그녀는 허리를 굽혀 내려다보았다. 마룻바닥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붉은 액체가 말 밑에서 사방으로 퍼져 문 쪽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피였다.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정신없이 줄 도망을 쳤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고 등불도 동댕이쳤다. 무작정 마을을 향해 뛰었다. 나무에 부딪히면서 멀리 바라보이는 등불을 보고 고함을 지르며 뛰고 또 뛰었다.

그녀의 찢어지는 목소리는 밤하늘의 불길한 올빼미의 울음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녀는 끊임없이 외쳤다.

"불한당이야……불한당……불한당……"

그녀는 마을의 맨 첫째 집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뛰어나와 그녀를 삥 둘러쌌다. 그녀는 묻는 말에 대꾸도 하지 못하고 손짓과 발짓만 하는 것이었다. 제 정신을 완전히 잃고 있었다.

사람들은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신부의 별장에서 일어난 줄 알고 저마다 무기를 들고 신부를 구하러 갔다.

올리브 숲속에 묻혀 있는 장미빛 작은 별장은 말없이 캄캄한 어둠에 싸여 보이지도 않았다. 등불이 놓여 있던 창문이 눈을 감은 듯 꺼진 후로 집은 어둠에 잠겨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찾아낼 도리가 없었다.

얼마 후에 몇 개의 등불이 나무 사이를 뚫고 땅 위를 기는 듯, 집을 향해 오고 있었다. 풀밭 위에 노란 불 그림자가 움직였다. 이 불빛으로 올리브 나무의 뒤틀린 줄기들은, 때때로 괴물처럼 서로 엉킨 지옥의 땜같이 보였다. 멀리 비치는 등불에 갑자기 희끄무레한 것이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이윽고 그 작은 별장의 낮고 네모난 장밋빛 담벽이 보였다. 네댓 되는 농부들이 등불을 들고, 권총을 든 두 사람의 헌병과 산림 간수, 면장, 그리고 마그리트 일행이 뒤쫓아왔다. 정신을 잃은 마그리트를 두 사람의 남자가 양쪽에서 부축하고 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다. 일행은 소름 끼치는 문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헌병의 우두머리가 커다란 등불을 들고 문 앞에 들어서자 모두들 그 뒤를 따랐다.

하녀의 말이 사실이었다. 방바닥은 피가 엉겨 흡사 양탄자를 깐 것 같았다. 피는 부랑자가 누워 있는 곳까지 흘러가, 그의 한쪽 손과 다리를 적시고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잠들어 있었다.-하나는 목이 찔려 영원히 잠들고, 또 하나는 술에 취해 잠들어 있었다. 헌병 두 사람은 술 취한 사나이에게 잠도 깨기 전에 수갑을 채웠다. 그러자 그는 눈을 부비며 부시시 일어났으나,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하였다. 아직도 술에서 완전히 깨이지 않아 멍하니 앉아 있다가 신부의 시체를 바라보자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면장이 말하였다.

"왜 도망치지 않았을까?"

헌병이 대답했다.

"워낙 술에 녹초가 된 때문이지요."

모두들 동감이었다. 아무도 빌브와 신부가 자살하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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