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이아
리지이아
Edgar Allan Poe
그 이면에는 의지(意志)가 있는데 그것은 결코 죽어 버리지 않는다. 누가 이 의지의 신비로움과 활기를 알 수 있겠는가? 즉, 의지란 신(神)이 스스로 모든 것에 침투시키고 있는 바로 그것이며, 이간이 천사들이나 또는 죽음에 굴복하는 것은 의지가 약하기 때문이다. - 조셉·그렌빌
나는 언제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하여서 리지이아를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튼 몇 해 전에 있었던 일로서, 내 기억력은 병에 시달리고 고민에 싸여 상당히 못쓰게 되어 버렸다. 그것은 특히 그녀의 성격- 그 뛰어난 학식이나 침착한 아름다움이나, 나지막하고 음악적인 목소리의 약동이나, 매력 잇는 모습 때문에 이제 와서는 그런 장소나 시간에 대하여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후에 우리가 자주 얼굴을 대한 곳은 라인강 가에 있는 어느 크고 오랜 황폐한 도시였다고 기억된다. 그녀의 가족에 대해서는 그녀가 분명히 나한테 이야기를 하여 준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녀의 집이 상당한 고옥이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리지이아, 리지이아! 나는 연구에 너무나 몰두하고 있었기 외부 세계의 인상을 거의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리하여 저 리지이아라는 아름다운 말은, 이미 세상을 떠난 그녀의 이미지를 나의 가슴에 소생시켜 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생각이 떠올랐지만, 내 친구여, 얼마 안 가서 나와 약혼하여 내 연구를 도와주고, 이윽고 나의 아내가 된 그녀를, 나는 끝내 성도 알지 못하고 말았다.
그것은 그녀가 장난삼아 나에게 준 일종의 조건이었는지, 아니면 그녀가 내 사랑을 시험하기 위해 내가 이에 대하여 모르고 있기를 바라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혹시 그것을 내 마음이 어지러워 가장 열렬한 사랑이 표시로 내가 바라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혹시 그것은 내 마음이 어지러워 가장 열렬한 사랑의 표시로 내가 결정한 매우 낭만적인 행위였을까?
나로서는 그것마저도 어렴풋이 기억될 뿐, 그 유례나 그 밖의 일에 관한 사정은 이상하게도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낭만적인 정신이- 달리 말해서 이교(異敎)를 숨기는 이집트에서 짙은 안개 속에 파닥거리는 날개를 단, 얼굴이 창백한 여신 아아쉬토페트가 전해 주고 있는 바와 같이, 일찍이 불길한 결혼의 신이 되어 버렸다면, 우리의 약혼이 바로 그 보기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기억에 지금도 분명히 남아 있는 것은 리지이아의 모습이다. 그녀는 몸집이 좀 마른 편이고 키가 후리후리하며 말년에 가서는 깡마른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행동에 나타나는 품위나 그 정숙한 모습이나, 또 신가할 정도로 가볍고 탄력 있는 발걸음 등은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녀는 내 앞에 그림자처럼 다가왔다가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녀가 내 어깨 위에 그 대리석 같은 손을 얹고 음악적인 나직한 목소리로 말할 때까지는, 그녀가 문이 닫힌 나의 서재에 들어오는 것을 모르고 있기가 일쑤였다. 그녀의 얼굴은 어던 여자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것은 아편쟁이의 꿈처럼 화려하고, 테로스의 무녀(巫女)들이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느끼는 환상보다 더 거룩하며,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의 그 마음을 일깨워 별천지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이를테면 바듯한 모습-고전 시대의 이교도들이 그린 것을 칭찬하는 그릇된 관념을 우리에게 전해 준-은 아니었다. 베이컨은 말하기를 <모든 뛰어난 아름다움에는 어딘가 기이한 면이 있게 마련이다>라고 했지만, 이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하나의 일반적인 사실을 두고 한 말이다.
나는 리지이아의 얼굴이 판에 박힌 고전적인 모습을 하지 않고, 그 아름다움이 뛰어나고 그것이 기이한 느낌을 준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녀의 얼굴이 정상적인 모습에서 벗어난 점을 찾아내지 못하였으므로 나는 그 얼굴을 기이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그녀의 넓고 흰 이마의 윤곽이나 그 이마의 상아와도 같은 뽀얀 살결이나, 그 초연한 넓이와 고요함, -그것은 너무나 완벽하므로 이렇게 말해도 그 기품을 표현하기에 부족함을 느낀다.-그리고 관자놀이에 완만하게 붙어 있는 살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풍부한 머리칼은 새까맣고 윤기가 흘렀으며, 자연스럽게 곱슬거려, 호머가 말한 <머리칼의 장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 또한 그녀의 코는 미묘한 선을 보였지만, 그와 비슷한 코는 유대 민족이 남긴 품위 있는 기념패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코는 이 기념패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매끈하고 볼록한 표면과 다소 모습이 매부리코의 경향을 띠어 활달한 성격을 나타내 보이는, 그런 균형 잡힌 콧구멍이 특색이다. 그리고 그녀의 입은, 옷 입술의 짤막한 보기 좋은 모습이나, 아랫입술의 그린 듯한 매끈하고 날씬한 곡선이나, 또는 보조개와 입술 자체의 빛깔이나, 그녀가 잔잔하고 밝은 미소를 띨 때 눈부시게 반짝이는 이빨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또 그녀의 턱에는 특색있는 희랍인의 얼굴에서 찾아볼 수 있는 우아하고 폭넓은 유연한, 품위 있는 성실성이 엿보여, 그 윤곽은 마치 아폴로가 꿈속에서 아테네인의 아들 크레오메네스에게 보도록 허락한 것과 같은 똑 닮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음에 리지이아의 커다란 두 눈을 주목해 보았다. 우리는 고대인들이 어떤 눈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베이컨이 지적한 아름다움의 비결은 어쩌면 리지이아의 눈에서 찾아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마도 보통 사람의 눈보다 훨씬 컸을 것이며, 누루자핫의 골짜기에서 살고 있는 종족들 가운데서 가장 큰 눈을 가진 여자도 리지이아의 눈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이와 같은 특징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매우 흥분했을 때에만 그런 큰 눈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이건 어쩌면 내가 너무나 흥분하여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르지만-그녀의 아름다움은 어쩐지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나는 그 눈으로 하여, 터키인들이 신봉하는 종교에서 천국에 살고 있다는 미인들을 연상하였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눈은 한결 검게 빛나고, 속눈썹은 또한 무척 길고 검게 보였다. 그 속눈썹은 다소 들쑥날쑥하기는 하였지만 역시 검은 빛깔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의 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기이한 아름다움은, 그 형태나 색깔이나 윤기와는 관계없이 오직 그 표정에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무의미인가.
우리는 실로 많은 정신적인 문제에 관한 무지를 이 막연한 말속에 숨기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리지이아의 눈동자의 표정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는가. 나는 그 표정에 대하여 생각하느라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했던가. 그리고 여름밤을 지새우며 그 의미를 찾아내려고 얼마나 애썼던가. 그녀의 눈이 데모크리토스의 샘물보다도 더 깊은 느낌을 주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것을 파악하려는 정열에 이끌렸다. 그 눈,그 빛나는 눈! 그것은 나에게는 레다의 쌍둥이인 두 별과도 같았으며, 또한 나는 그 연구에 일생을 바친 하나의 점성가(占星家)에 불과하였다.
정신 연구에서 봉착하게 되는 여러 가지 불가결의 현상 중에서,-전문가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테지만,-우리가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던 일을 상기하려고 할 때, 조금만 주의를 집중하면 생각나겠지만, 결국 그 기억이 되살아나지 않는 결과가 되는 것보다 흥미 있는 일은 없다. 리지이아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는 그 의미를 완전히 알 수 있다는 자의식을 갖게 되면서도 결국은 알지 못하여, 끝내는 그 느낌까지도 사라져 버린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특히 가장 신기한 일은, 내가 평범한 물체에서도 리지이아의 눈의 표정과 비슷한 것을 찾아내게 된 것이었다. 즉, 리지이아의 아름다움이 내 마음을 사로잡은 다음부터는, 그녀의 빛나는 커다란 눈을 바라볼 때마다, 내 주위와 내 속에서 일어나는 듯싶은 어떤 쾌적한 느낌을, 외부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사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감정에 어떤 정의를 내리거나 그 감정을 분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분명히 파악하지도 못했다. 예컨대, 나는 급속히 자라나는 포도 넝쿨이나, 모기와 나비, 번데기, 또는 시냇물의 흐름을 바라볼 때에도, 거기서 그러한 인상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인상을 바다나 유성(流星)에서도 느끼는 것이었다. 무척 늙은 사람의 눈초리에서도 그것을 느꼈다. 그리고 천체 망원경으로 한둘의 별을 관찰할 때에도 이런 느낌을 갖게 되었다. 또한 현악기에서 나오는 어떤 소리나, 가끔 내가 읽고 있는 책의 한구절 같은 것도 나로 하여금 이 감정에 젖게 하였다. 나는 지금도 기억하지만 책에는 그런 문장들이 얼마든지 있어, 특히 조셉· 그렌빌이 쓴 책에서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으레 그런 인상을 받아왔다.
그의 글이 특히 내게 그런 느낌을 갖게 한 것은 색다른 문장력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아무도 단정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그 이면에는 의지가 있는데 그것은 결코 죽어 버리지 않는다. 누가 이 의지의 신비로움과 활기를 알 수 있겠는가. 즉 의지란 신이 스스로 모든 것에 침투시키고 있는 바로 그것이며, 인간이 천사들이나 또는 죽음에 굴복하는 것은 의지가 약하기 때문이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나도 이제는 이 영국의 윤리학자가 쓴 것과 라지이아의 성격의 일부를 고찰해 보고, 이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그녀의 사상이나 언행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일종의 집념은 우리의 오랜 생활에서, 보다 더 직접적인 다른 형태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이면에서 어떤 절대적인 의지의 힘이 작용한 결과나, 또는 적어도 그 징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알고 있는 여자 중에서 리지이아처럼 외모로는 침착성을 잃으면서도 내면으로는 격정의 동요에 괴로워하는 여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나를 기쁘게 하면서도 불안하게 하지 않고서는 못 견디겠다는 듯이 이상하게 확대되는 그녀의 눈이나, 그 나직한 목소리에서 울려오는 기적적인 가락이며 악센트, 그리고 그 분명하고 온화한 모습, 끊임없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활력이 깃들어 있는 말에 의해, 나는 그녀의 내부에서 정열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추측하는 부밖에 없었다.
나는, 리지이아의 학식에 대하여 전에 언급한 적이 있지만, 그처럼 광범위한 학식을 가진 여자를 본 적이 없다. 그녀는 고전 시대의 모든 언어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으며, 또 내가 아는 한, 오늘날 유럽의 모든 언어에 대해서도 정통해 있었다. 그리고 모든 학문에 있어서, 아무리 난해한 문제에 대해서도, 그녀는 막히는 일이 없었다. 내 아내가 이처럼 풍부한 학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희한하고 또 얼마나 매혹적인가를 나는 오늘에 이르러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그녀보다 더 박식한 여자를 본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남자들 중에서도, 정신세계나 물리, 수학에 관해서까지 그녀처럼 정통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그 당시에는 그녀의 학식이 완벽하고 광범위하여 놀라운 것임을 잘 알지 못했다. 그래도 우리가 결혼한 당시에 내가 전념하고 있던 형이상학적인 혼돈된 세계를 개척해 나가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내가 그녀에 대하여 아이들과 같은 전폭적인 신뢰를 갖고 그녀의 지도를 받게 된 것은, 그녀의 헤아릴 수 없는 실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의 곁에서 그녀가 지시하는 대로, 인간으로서는 거의 회복할 수 없고, 또 인간에게는 그의 알려져있지 않은 연구를 계속해 나가면서, 나의 앞날이 가슴 벅찬 광명으로 서서히 밝아오는 것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 기나긴 영광스러운 미답(未踏)의 길을 감으로써 너무나 소중히 여겨 결국 금단의 열매가 아닐 수 없는 저 궁극의 지식에 도달하는 것을 얼마나 큰 영광-다른 말로 표시하면, 환희 또는 순수한 희망을 느끼게 되었던가.
그러므로 몇 해 후에 나의 근거 있는 기대가 허물어졌을 때, 내가 얼마나 큰 비통에 사로잡혔는가에 대해서는 설명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나는 리지이아가 없으면 어두운 밤길을 헤매는 어린이와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몰두하고 있던 신비주의적인 연구는, 그녀가 내리는 해석에 의해서만 생기와 여비를 갖게 되는 것이었다. 만일 그녀가 내 곁에서 눈을 반짝여 주지 않는다면 금빛을 발하던 문자는 금새 잿빛으로 변해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내가 책을 펴놓을 때를 제외하고는 나와 마주 앉는 기회가 점점 줄어들었다. 리지이아가 병들었던 것이다. 그녀의 눈은 너무나 빛나고 그녀의 창백한 손가락은 시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속속들이 투명하게 보였으며, 넓은 이마의 정맥은 감정이 조금만 격하여도 곧 위로 튀어 올랐다가 다시 가라앉곤 하였다. 나는 그녀가 죽으리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절망에 사로잡히면서도 이 죽음의 관념과 싸워나갔다.
나는 아내가 생에 크게 집착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준엄한 기질로 보아 그녀에겐 죽음이 공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지만, 나의 이와 같은 견해는 잘못된 것이었다. 그녀가 죽음에 대해 악착같이 저항하는 모습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그녀의 이런 비참한 모습을 보고 차마 견딜 수 없어 신음 소리를 내게 되었다.
나는 되도록 그녀를 위로하고, 그녀의 이성에 호소해 보기도 하였지만, 삶에 대한 그녀의 강렬한 욕구는 나의 설득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겉보기에는, 그 가장 착잡한 미래에도 곧잘 견디고 끝까지 평온과 정숙함을 잃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더욱 조용해지고 낮아졌다. 그처럼 조용한 말이 지닌 특수한 내용에 대하여 나는 지금 생각만 해도 견딜 수 없다. 나는 인간의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선율로 하여, -일찍이 인간에게 알려진 적이 없는 가정이나 욕구를 듣고 도취되어 졸도할 것만 같았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평범한 방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죽음을 향해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서, 나는 비로소 나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뜨거운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몇 시간 동안이나 내 손을 붙잡고 정열적으로 무조건 숭배에 가가운 심정을 나에게 털어놓았다. 내가 어찌 그녀의 그러한 고백을 들을 만한 자격이 있겠는가.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여자에게서 그런 고백을 듣게 되었을 때 그녀와 헤어져야만 하는 엄청난 형벌이 무엇 때문에 나한테 내려졌을까?
그러나 내가 이에 대하여 더 이상 이야기한다면 이 괴로움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녀의 너무나 여자다운, 더구나 불행을 초래할 뿐 조금도 보잘것없고, 따라서 잘못 택하여졌다고밖에는 할 수 없는 납편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과 그녀로부터 급속히 떠나가고 있는 삶에 대하여, 그처럼 안타까와 하는 그녀의 끈질긴 집착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지, 내가 간신히 알아차린 것을 기록할 뿐이다. 나는 살아간다는 이와 같은 광적인 갈망-그토록 삶에 강한 의욕을 보인 그녀의 태도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그녀가 죽던 날 밤, 그녀는 급히 나를 자기 곁으로 불러들이더니, 며칠 전에 그녀가 쓴 시를 나더러 암송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시였다.
보라, 그는 쓸쓸한 노년에 접어들었다.
축제를 올리는 날 밤
베일로 가려진 얼굴은 눈물에 젖어 있고
날개가 달린 아름다운 천사들
그리고 극장에 앉아 있는 자들은
연극을 보고 희망과 두려움에 엇갈리는데,
때때로 관현악은
천체의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리라.
하늘나라의 신을 본 딴 광대는,
나지막한 소리로 중얼거리며,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그들은 인형처럼 모습을 가리고
마음이 내키는 대로 내왕하며
배경을 마구 흔들고
그 억센 날개를 퍼덕이며
감춰진 재난을 털어 버린다.
사람들은 결코 잊지 않으리,
저 아롱진 연극을.
그 환영(幻影)을 끊임없이 뒤쫓는 군중들은
같은 곳을 맴돌며
월을 그리고 돌아다니리.
여기 광란(狂亂)과 조악이 더욱
범람하여
비극은 공포를 낳는다.
그러나 보라, 이들 군중 뒤에
어떤 자가 몰래 침입함을.
그는 배경에 그린 황야에서
기어 나온 빨간 베일을 쓰고
사방을 전전한다.
광대들은 죽을 고뇌를 느끼며, 그 희생이 된다.
천사들은 인간의 피로 물든
이빨을 바라보고 흐느껴 운다.
등불은 다 꺼지고
흔들리는 모든 송장에는
관을 뒤덮는 포장이
회오리바람에 실려 내려오도다.
얼굴이 창백한 천사들은
베일을 벗고 일어나 언명한다.
이 비극의 제목은 <인간>이며
그 주인공인 승리자는 구더기라고.
내가 이 시를 암송하고 나자, 그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높이 쳐들고 온몸을 부를 떨며, "신이여!"하고 외쳤다. "신이여, 아버지시여,-여기에도 이런 것들밖에 있을 수 없습니까?-이 승리자는 아무도 결코 넘어뜨릴 수는 없습니까?-누가 의지의 비밀과 그 힘을 알 수 있습니까? 인간이 천사나 죽음에 굴복하는 것은 의지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격정에 사로잡힌 듯이, 흰 팔을 내리고 침대로 돌아갔다. 그녀가 무엇인가 중얼거리면서 마지막으로 탄식하기에, 내가 그녀의 입술에 귀를 대자, 그렌빌의 말이 다시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인간이 천사들이나 또는 죽음에 굴복하는 것은 의지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드디어 숨을 거두었다. 나는 비통에 잠겨, 이 멀고 외떨어진 라인강 가에 있는 집에서 견딜 수 없는 쓸쓸함을 맛보았다. 나도 경제적인 면에서는 부자유를 느끼지 않았다. 리지이아는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재산을 나에게 남겨 주었다.
나는 몇 달 동안 무모하게 돈만 낭비하며 나날을 보내고 나서, 영국에 있는 사람(여기서 그 이름을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으로부터 가장 낯선 황폐한 구석진 곳의 어떤 사원(寺院)을 사서 어지간히 수리한 후에 그곳에 숨어 살기로 하였다. 그런데 음침하고 넓고 웅장한 그 건물이 거기 딸린 땅과 함께 아주 황폐해 있을 뿐만 아니라, 땅과 건물에 얽힌 여러 가지 어두운 과거의 추억으로 하여 나도 그처럼 인적이 드문 곳에서 자포자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덩굴에 뒤덮인 사원의 겉모양은 거의 보래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어린애 같은 심정과 이에 따르는 슬픔을 몰아내기 위해, 사원 내부를 왕자라도 사는 듯이 호화롭게 장식하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 어리석은 일을 곧잘 하여, 마치 슬픔을 이기기 위해 한결 빨리 늙은 것처럼 그런 어렸을 때의 취미가 금세 되살아났던 것이다.
나는 사원의 장식에 사용한 화려하고 진귀한 커튼과 이집트의 장엄한 조각이나 이상야릇한 코오니스나 가구, 금테가 달린 화려한 융단의 무늬 등에 대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실지로 미친 짓을 한 것이 아닌가 하고 서글픈 마음으로 반성하였다.
나는 당시에 아편을 먹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상태였으며, 내가 생각한 것이나 그것에 근거하여 발송한 주문은, 아편 작용으로 꿈속에 반영되곤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 부조리한 일들을 세밀히 이야기하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나로서는 잊을 수 없던 리지이아의 후계자로서 제정신을 똑바로 갖고 있지 못했을 때의 금발의 파란 눈을 가진 로웨나·트레바니온의 이야기만 전하고 싶다. 나는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자 그녀를 데리고 돌아와 사원의 저주받은 방을 비워 살게 하였던 것이다.
이 방의 구조나 장식들은, 어느 하나도 빠짐없이, 오늘날, 그대로 나의 눈앞에 있는 것만 같다. 그런데 돈이 탐나 사랑하는 딸을 그런 방에 들여보낸 그녀의 양친이나, 그밖에 오랜 가풍을 자랑하는 그 집안사람들이 과연 제정신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방의 구석구석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다고 분명히 말했지만-그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사건은, 나는 금세 잊어버렸을 뿐 아니라, 더구나 이방 안의 이상한 장식들은 이렇다 할 통일된 양식을 찾아볼 수 없도록 혼란되어 있었다. 이런 것은 이 성곽처럼 세워진 사원의 높다란 탑 안에 있는 상당히 넓은 오각형을 이루고 있는 방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이 오각형의 남쪽은 모두 창문으로, 베니스 제품인 큰 판유리 한 장을 끼웠으며, 이 판유리는 납빛으로 색칠을 하여, 해나 달이 비치면 방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물건들을 불쾌한 색깔로 비치어 주었다. 그리고 그 큰 창문 윗부분은, 탑의 두터운 벽을 기어오른 묵은 덩굴로 덮여 있었다. 이 방의 천장은 음침한 기분이 나는 떡갈나무로 되어 있었으며, 상당히 높고 둥글어, 절반은 고딕식이고, 절반은 드루이드식으로 된 괴상하고 망측한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는 기다란 둥근 고리로 된 금사슬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역시 금으로 된 커다란 사라센식 향로가 달려 있고, 거기에는 무수한 구멍이 뚫려 있어서 그 구멍을 통하여 여러 가지 색깔의 불빛이 언제나 타오르도록 만들어져, 마치 뱀이 그 구멍으로 들락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방안에는 여기저기 동양식으로 된 몇 개의 안락의자와 금으로 만든 촛대가 놓여 있고, 로웨나를 맞아들인 인디언식 디자인의 침대는 나직하게 흑단으로 만들어져 있고,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침대 위에는 관을 덮을 때 쓰는 덮개처럼 보이는 카바가 씌워 있었다.
그리고 방구석마다 세워놓은 검은 화강암으로 된 커다란 석관(石棺)은, 룩소오에 있는 이집트 왕들의 무덤에서 파내 온 것으로, 이 석관들의 뚜껑에는 당대의 조각들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이 방에서 가장 환상적인 것은, 그 장식으로 사용된 천이었다. 이방에 어울리지 않는 높다란 벽은, 두텁고 묵직한 색실을 짜 넣어서 그림 무늬를 나타낸 천으로 여러겹이나 주름잡혀 위에서 아래까지 감추어져 있고, 바닥에도 같은 천이 깔려 있으며, 소파나 침대 덮개의 천도 창문 한족에 화려한 모습으로 늘어진 커튼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호화로운 금실로 짰으며, 불규칙한 간격으로 지름 일 피트쯤 되는 당초(唐草) 무늬가 새까만 실로 가득 수놓여져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늬는 어느 한 곳에서 바라볼 때에만 그런 모양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흔히 볼 수 있는 취미이며, 옛날부터 있어 온 방법에 때라 그 형태는 여러모로 변화하였다. 그리하여 방 입구에 서 있으면 어떤 이상한 형태로 보이지만, 방 안에 들어갈수록 차츰 처음 본 보습은 사라지고 한 발짝 옮길 적마다 관점이 달라지면서 옛날 미신에 사로잡혔던 노르만인을 놀라게 한 듯싶은 모습을 띠기도 하고, 또는 승려가 자기의 악덕을 고민하여 괴상한 꿈을 꾸는 것처럼 불쾌한 괴물이 서로 엉켜 있는 형태를 이룬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환상적인 효과는 벽에 걸린 방장 뒷면에서 강한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와 전체적으로 살아 있는 듯한 동요를 일으켜 더욱 처참하게 보였다.
그런 건물의 그와 같은 방에서 나는 결혼 직후의 한 달을 로웨나와 함께 살면서 하루하루 별로 불안한 줄 모르고 지냈다. 아내가 나의 억센 성격을 무서워하여 나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하는 것을 나는 눈치챘지만, 나는 그것을 고소하게 생각하였다. 나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악마에 가까운 감정으로 그녀를 미워하였다. 나는 끊임없이(그것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되어 더욱 견디기 어려운 애석한 생각으로), 지금은 땅에 묻힌 아름답고 품위 있는 리지이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순결과 학식과 숭고한 성격, 그리고 정열적이고 맹목적인 사랑에 대한 추억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하여 그제서야 나는 그녀보다 더 열렬한 정열에 불타게 되었다.
나는 아편의 힘으로(나는 벌써 아편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중독이 되어 있었다) 밤의 적막 속에서나, 또 낮에는 골짜기의 깊숙한 나무 그늘에서 큰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죽은 자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애절한 그리움과 몸을 불태울 듯한 뜨거운 사랑으로 하여 그녀가 사라진 지상에-그녀는 정말 영원히 사라져 버렸을까-그녀를 다시 살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결혼하여 한 달쯤 지나자, 로웨나는 갑자기 병들어 좀처롬 회복되지 못하였다. 그녀는 열에 들떠 잠을 이루지 못하고, 꿈인지 생기인지 알 수 없는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리하여 방안이나 주위에서 무슨 소리가 나기만 하면, 무엇이 움직이고 있다고 했으나, 나는 다만 그것이 그녀의 상상이나 또는 방안의 환상적인 분위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하였다.
이윽고 그녀는 차츰 나아지더니 드디어 완치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병은 다시 도져 전보다 더욱 심한 증상을 나타내었다. 별로 건강한 편이 못되던 그녀는 이로 말미암아 죽음을 피할 길이 없었으며, 다시는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로웨나의 병은 날이 갈수록 더하여 증세가 험악해졌으며, 의사들의 지식도, 그들의 정성스러운 치료도 별로 효과가 없었다. 그리하여 병은 크게 악화되어, 이제는 인간의 힘으로는 그녀 몸에 뿌리박은 병을 어떻게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그녀의 신경이 매우 흥분되어 소소한 일에도 두려움을 느끼는 경향이 더욱 심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로웨나는, 전에도 말한, 벽에 걸린 커튼의 이상한 움직임에 대하여 더욱 집요하게, 그러나 나직한 소리로 자주 이야기하였다.
9월 하순의 어느 날 밤, 그녀는 전보다 더 진지하게 그 일에 그 일에 대해 내 주의를 끌게 했다. 로웨나는 자다가 괴로움에 못 이겨 깨어나곤 했다. 그녀가 잠들어 있는 동안 나는 그녀의 침대 곁에 놓인 소파에 앉아, 걱정과 두려움이 뒤섞인 막연한 감정을 갖고 그녀의 여윈 얼굴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로웨나는 반쯤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는 들리지만 나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그리고 그녀에게는 보이지만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 어떤 움직임에 대해 나직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하였다. 그녀의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 어떤 움직임에 대해 나직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하였다. 그녀의 이야기는 커튼 뒤에서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 소리 때문에 거의 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커튼의 무늬가 다소 색다르게 보이는 것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불어닥치는 바람 때문이라는 것을(그러나 나 역시 그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녀에게 납득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녀 얼굴에 점점 핏기가 없어지는 것을 보자, 나는 그런 식으로 그녀를 위로하려는 것이 무익한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로웨나는 금세 기절이라도 할 듯싶었으나, 그녀 곁에는 나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의사가 그녀를 위해 처방한, 도수가 약한 술을 넣어 둔 병이 놓여 있는 곳을 상기하고 그 병을 가지러 얼른 방을 가로질러 갔다. 그런데 내가 향로 밑을 지나갈 때, 두 가지 이상한 사건이 네 주의를 끌었다. 나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곳에 무엇이 내 곁을 스친 것을 느꼈으며, 이어서 금빛 융단이 향로의 맑은 빛을 받아 반짝이는 가운데 어떤 그림자-희미하고 막연하지만 천사의 모습이 아닌가 하고 착가을 일으킬 만하였다.-이를테면 그림자의 그림자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나타났다.
그러나 나는 그날 밤에 아편을 과음하여 매우 흥분해 있었으므로 그런 일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아내에게는 일체 말하지 않았다. 단지 술을 찾아서 침대 쪽으로 돌아와서 잔에 따라, 제정신을 잃어버린 로웨나의 입술에 대어 줬다.
그녀는 이에 정신을 차리고 내 잔을 받아들었다. 나는 옆에 놓인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누워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침대 근처의 양탄자에서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분명히 들려 오더니 이어서 어떤 생물이 마치 방 안 공기 속에라도 숨어 있는 듯이, 그것에서 떨어진 듯싶은 새빨간 액체가 몇 방울 로웨나의 입에 가져간 술잔에 떨어졌는데, 그것을 나는 보았거나, 적어도 본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런데 실제로 보았다고 하여도 로웨나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술을 마시게 하고 나는 방금 있은 일에 대해, 그것은 로웨나에 대한 불안과 내가 마시는 아편의 자극과 밤의 고요로 말미암아 그런 공상을 했을 것이라고 고쳐 생각하고는, 로웨나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잔에 빨간 액체가 떨어지자 로웨나의 병세가 갑자기 나빠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후 3일째 되는 날 밤에는 하인들의 손으로 그녀 시체를 관에 넣을 준비를 하게 되었고, 4일째 되는 말 밤에는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던 때와 같은 괴상한 방에서 세마포(細麻布)에 사인 그녀의 시체 곁에 나는 혼자 앉아 있었다. 내 눈앞에는 아편을 마신 영향으로 기묘한 환영이 스쳐 갔다. 나는 방구석에 놓인 석탄이나 벽에 걸린 커튼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습과 머리 위의 향로에서 비치는 여러 가지 색깔의 불꽃을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서 며칠 전에 있었던 사건을 상기하면서 향로의 불빛이 반사하는 속에서 희미한 그림자가 비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어느새 사라졌으므로, 나는 다소 마음이 놓여 침대에 빳빳이 누워 있는 창백한 시체를 바라보았다. 나에게는 리지이아와 함께 보낸 몇 가지 추억이 갑자기 되살아났으며-현재 눈앞에 사늘하게 누워 있는 시체를 눈여겨 바라보니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홍수처럼 밀어닥치는 것이었다. 빔은 점점 깊어갔다. 나는 내가 사랑하던 유일한 여자에 대한 뼈아픈 추억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으면서도 로웨나의 시체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시간의 흐름에 대하여 유의하지 않았으므로, 그때가 한밤중인지, 혹은 그 전후인지 확실한 시간을 알 수 없었지만, 누가 나직하고 조심스럽게, 그러나 매우 분명하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왔으므로, 나는 깊이 잠겨 있는 몽상에서 깜짝 놀라 깨어났다. 나는 그 소리가 시체를 눕혀놓은 침대 쪽에서 들려 온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미신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우고 귀를 기울였지만, 그 소리는 이미 들리지 않았다. 나는 시체를 자세히 살펴보고 아무 이상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그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미약하나마 내 귀를 거쳐 내 정신에 전달되었던 것이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끈덕지게 시체를 바라보았다. 아무 일도 없이 몇 분이 흘러갔으나, 얼마 후에 시체의 뺨과 눈꺼풀의 가느다란 정맥에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게 핏기가 도는 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전율과 두려움을 느꼈다. 심장이 멈추어지고 전신이 굳어 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의무감으로 하여 침착성을 되찾았다.
나는 로웨나가 죽었다고 경솔하게 판단했지만 그녀는 실은 아직 살아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얼른 어떤 조치를 취해야 했지만, 그 탑은 하인들이 거처하는 사원과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잠시 방을 비우지 않으면 사람을 부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혼자서 로웨나에게 약간 남아 있는 생기를 북돋워 주려고 애썼으나 허사였다. 뺨과 눈꺼풀에서 핏기가 사라져 대리석보다도 더 창백한 빛으로 변했으며 입술은 전보다 더욱 움츠러져 시체의 모습이 불쾌하게 드러나고, 온몸에 메스꺼운 습기와 냉기가 재빨리 찾아와, 시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전신이 빳빳이 굳어 버렸다. 나는 몸서리치면서 의자에서 쓰러져 다시금 리지이아를 열렬히 추억하게 되었다.
한 시간쯤 지나자 침대 쪽에서 또다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어떻게 된 영문일까?) 나는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혀 귀를 기울였다. 그 소리는 다시 들려 왔는데, 그것은 분명히 탄식에 가까웠다. 나는 시체 옆으로 뛰어갔다. 이번에는 분명히 입술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이윽고 그 입술이 잠시 아래위로 열리고 지주처럼 빛나는 이빨이 나타났다. 나는 나를 억누르고 있던 경건하고도 두려운 감정과 방금 일어난 놀라운 일 때문에 정신을 가눌 수가 없었다. 내 눈은 흐리멍텅해지고 머리가 혼란하여, 나는 겨우 의무감 때문에 해야 할 일을 수행했을 뿐이었다.
로웨나는 분명히 살아 있었으므로, 나는 전보다 두 갑절의 힘을 들여 그녀를 소생시키려고 애를 썼다. 나는 그녀의 이마와 손을 문질러 주고 거기에 잦은 헝겁을 대어 주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경험하여 배워서 알고 있던 의학지식을 총동원하였다. 그러나 결국 아무 효과도 얻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갑자기 핏기가 가셔지고, 심장의 고동은 멈추었으며, 입술은 또다시 송장의 그것이 되었다. 이어서 그녀는 몸이 얼음장처럼 싸늘해지고 창백해졌으며, 몸 전체가 빳빳이 굳어 버리고 한결 수축되어, 며칠씩 무덤에 묻혀 있던 시체의 그 무서운 특징을 순식간에 나타내 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리지이아를 생각하였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몸서리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어서 침대 쪽에서 또다시 나직한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이제 그날 밤에 일어난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날 밤부터 새벽녘까지 그런 현상이 몇 번이고 되풀이되었는데, 번번이 전보다 더욱 분명한 송장의 모습을 나타내었다. 죽음의 괴로움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적과 싸우는 듯한 양상을 나타내고, 그와 같은 싸움이 되풀이됨에 따라 시체에 어떤 이상한 변화가 일어난 사실에 대하여 여기서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는 서둘러 이야기의 매듭을 지어야겠다.
이 무서운 밤이 거의 다 지나가자, 죽었던 그녀는 다시 한번 움직이고 나서 전보다도 더욱 분명한 송장의 모습을 띄었지만 한결 활기가 있어 보였다. 나는 얼마 후에 전부터 모든 노력을 포기하고 극도의 두려움과(이것은 그곳에서는 가장 참기 쉬운 것이었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격정에 사로잡혀 소파에 딱딱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러자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시체는 한번 활기 있게 몸부림쳤다. 얼굴에선 생기가 솟아나고, 전신이 말랑말랑하게 되엇다. 아직 눈은 감고 있어 시체에 감겨 있는 붕대니 세마포와 같은 것이 제법 어울린다고 생각되지 않았던들, 나는 이번엔 로웨나가 분명히 소생하였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내 눈이 착각을 일으켰는지는 모르지만, 세마포에 싸인 그녀가 눈을 감은 채 침대에서 일어나 연약한 발걸음으로 꿈속을 헤매는 듯한 모습으로 방 한가운데를 걸어 다니고 있는 보자 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나는 몸서리칠 수도 없고 하여, 그녀의 모습과 체격, 그리고 그 동작과 관련된 이상한 몇 가지 망상에 사로잡혀 그 자리에 꼼작 못하고 앉아 있었다. 나는 잡자코 그녀를 노려보았다. 나는 생각이 극도로 혼란되어 좀처럼 머리를 정리할 수가 없었다. 눈앞에 서 있는 것은 분명히 살아 있는 로웨나였을까? 그것은 금발의 파란 눈의 트레메인의 로웨나·트레바니온이었을까? 아직도 그녀의 입은 붕태로 가려져 있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트레메인의 딸의 입이라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그리고 뺨은, 그녀가 일찍이 살아 있을 때와 같이 장밋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살아 있는 로웨나의 뺨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가 건강했을 때 곧잘 보조개를 지어 보이던 턱도 역시 그녀의 것이 아닐까? -그런데 그녀는 앓고 있는 동안에 키가 커진 것일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자마자 그런 광적인 망상이 엄습했는지도 알 수 없다.
나는 그녀 앞으로 뛰어갔다. 그녀가 나를 피하려고 하다가 머리에 두른 천이 풀려 방바닥에 떨어지고, 방안에 일어난 바람결에 그녀의 길게 헝클어진 머리칼이 곤두섰다. 그것은 캄캄한 밤중보다도 더 짙은 검은 머리칼이었다. 그때 내 앞에 서 있던 여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인제-인제는 의심할 수 없다."
하고 나는 큰소리로 외쳤다.
"이처럼 크고 검은 이상한 눈은 분명히 내가 전에 사랑한 리지이아의 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