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llnow 2024. 4. 16. 05:06

골짜기

A. P. Chekhov

 

1

우클레예보 마을은 계곡에 파묻혀 있기 때문에, 신작로나 정거장에서 바라보면, 다만 종각(鍾閣)이나 염색공장의 굴뚝만 눈에 뜨일 뿐이었다. 혹시 한길을 지나가는 나그네가 어떤 마을이냐고 묻게 되면 번번이 <목사님이 장례 때에 생선알을 먹던 마을입지요>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공장주 코스츄코프의 장례 때 늙은 목사가 굵직굵직한 생선알을 맛있게 먹은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사람들은 목사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기도 하고 옷자락을 잡아당기기도 하였으나, 목사는 하도 맛이 좋아 정신없이 생선알을 먹었던 것이다. 그는 접시에 담은 생선알을 다 먹어 치우고, 통에 든 4파운드의 생선알까지도 깨끗이 처치하였다.

그 후 여러 해가 지나고, 그 목사도 세상을 떠난 지 오래지만, 생선알 이야기만은 아직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벌써 10년 전에 일어난 이 하찮은 일 이외에는 마우런 기억도 남길 수 없을 만큼 이 마을 사람들의 생활은 비참하였다. 그리고 그만큼 백성들은 단순하였다. 아무튼 사람들은 이 마을에 대하여는 달리 이야기할 건덕지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이 마을에는 언제나 열병이 돌고 있었다. 여름에도 땅이 질퍽질퍽하였으며, 특히 늙은 버드나무가 그늘을 이루어 응달진 울타리 근처는 진흙이 마를 사이가 없었다. 그리고 공장에서는 언제나 쓰레기 냄새와 무명을 염색할 때에 쓰는 시큼한 초산 냄새가 풍겨오곤 하였다.

세 개의 무명 공장과 피혁공장은 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모두가 조그마한 공장들로서 직공들의 수를 다 합쳐도 삼백 명을 넘지 못하였다. 피혁공장에서는 특히 악취가 심하게 풍겨 나오고, 목장에는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였으며, 가축들은 시베리아 페스트에 걸려 신음하였다. 현청(縣廳)에서는 공장문을 닫으라고 지시하였으나, 경찰관과 공의(公醫)가 공장주로부터 매달 10루블씩 받고 눈을 감아 주었으므로, 작업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마을 전체를 통하여 석조건물의 함석지붕을 씌운 것은 두 채밖에 없었다. 그중의 하나는 면사무소이고, 또 하나는 예피판에서 온 그리고리이·페트로비치·츠이브킨이라는 상인의 2층집으로 교회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리이는 식료품 가게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외관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보드카 술이며, 가죽, 피혁, , 심지어 도야지의 매매까지도 하고 있었다. 그는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장사를 하였다. 예컨대 외국에서 수입하는 여자 모자에 꽂는 까치털을 주문하여 두 개에 30카페이카씩 붙여서 팔기도 하고, 산림을 사서 나무를 벌채하여 팔기도 하며, 돈놀이도 하였다. 아무튼 장삿속에 빠른 영감이었다.

이 영감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맏아들 아니심은 경찰서 수사계에 근무하여 집에 돌아오지 않는 일이 많고, 둘째 아들 스체판은 가게에서 아버지 일을 거들고 있었지만, 몸이 약하고 귀까지 먹어서 별로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아내 아크시니아는 언제나 아침 일찍 일어나서는 밤이 이슥해서야 자리에 드는 것이었다. 그녀는 얼굴이 아름답고, 몸매가 날씬하며, 명절에는 언제나 모자를 쓰고 양산을 받고 외출하였다. 그러나 평소에는 치맛자락을 접어 올리고 열쇠 뭉치를 짤랑거리며, 헛간에서 움으로, 움에서 가게로 하루 종일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그럴 적마다 츠이부킨 영감은 눈을 빙글빙글 굴리면서 흐뭇한 얼굴로 며느리를 바라보며, <저 애가 여자의 아름다움을 전혀 모르는 귀머거리 둘째 아들의 처가 아니라, 맏아들의 처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영감은 가정생활에 대하여 남달리 취미를 갖고 있었다. 그는 세상에서 자기 가정을 무엇보다도 사랑하였으며, 특히 형사로 있는 맏아들과 둘째 며느리를 사랑하였다.

아크시니아는 귀머거리인 이집 둘째 아들에게 시집온 후로 놀라우리만치 장사에 수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누구에게는 외상을 줘도 무방하고, 누구에게는 줘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환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열쇠 꾸러미를 맡고 있었는데, 자기 남편까지도 믿지 않았다. 수판을 튀기며 계산을 맞춰 보는가 하면, 농부들이 흔히 하듯이, 말의 이()를 검사해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하루 종일 그녀의 웃음소리와 외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녀가 무슨 언동을 취하든 영감은 언제나 단지 웃음을 머금고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그래, 그래! 참 우리 며느리 신통하지……"

영감은 오랫동안 홀아비로 지내왔으나, 며느리를 맞고 일 년이 지나자, 자기도 마누라가 없이는 못 견디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클레예보에서 40뵤르스트-1보를스트는 1,067킬로-쯤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와르바라·니콜라예브나라는 처녀가 물망에 올랐다. 꽤 나이가 들어 보였으나, 혈통이 좋고 용모가 아름답고 온순한 처녀였다. 그녀가 2층에 거처하게 되자, 마치 창문에 유리를 새로 낀 것처럼 모든 물건이 환해지는 것이었다.

성상(聖像) 앞에는 등불이 켜지고 테이블에는 눈같이 흰 카바가 씌워지고, 창문과 정원 앞에는 빨간 꽃봉오리가 달린 여러 가지 화초가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식사 때에는 식구들의 한 멤버에서 각각 떠먹는 것이 아니라 한사람 앞에 접시가 하나씩 배달되었다. 와르바라·니콜라예브나는 언제나 기분이 좋아 부드러운 눈웃음을 띄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집안의 모든 식구들도 항상 싱글벙글 웃는 듯이 보였다. 거지나 순례자들도 곧잘 안뜰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창문 아래서는 이 우클레예보 마을 아낙네들의 애처로운 노랫소리며, 술주정 때문에 공장에서 쫓겨난 사나이들의 허약하고 메마른 기침소리가 들려오곤 하였다. 와르바라는 그들에게 돈이며, 빵이며 헌 옷가지들을 곧잘 나눠 주었으며, 차츰 집안일에 익숙해지자, 그녀는 그들에게 가계에 있는 물건까지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하루는 귀머거리 스체판이 새어머니가 차 4온스를 집어내는 것을 보았다. 그는 무척 놀랐다.

"어머니가 말예요. 가게에서 차를 4온스나 몰래 집어냈어요."하고 그는 아버지한테 일러바쳤다.

"이걸 어느 장부에 기입할까요?"

영감은 아무 말 없이 눈살을 찌푸리고 한참 생각하다가 2층 마누라 방으로 올라갔다.

"와르바루슈카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가게에서 마음대로 가져와요. 사양치 말고 갖다 써요."하고 그는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귀머거리는 안뜰을 뛰어가면서 새어머니에게 큰 소리로 말하였다.

"어머니 뭐든지 필요한 게 있으면 가져가세요!"

와르바라가 불쌍한 사람들을 그처럼 도와주는 것은 마치 성상 앞에 켜진 등불이나 붉은 꽃처럼 어딘가 순결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육제(謝肉祭) 때 사흘 동안 계속되는 교회의 축제일에는, 옆에서 도저히 냄새를 맡을 수 없을 정도로 악취가 풍기는 소금에 절인 고기를 농부들에게 팔았다. 그리고 주정뱅이들한테서는 낫이며, 모자며, 혹은 여자 머플러 같은 것을 담보로 잡아두는 것이었다. 품질이 좋지 않은 워드카에 취하여 녹초가 된 공장 직공들이 진흙 속에서 뒹굴고 있을 때나 그밖에 죄가 마치 공중에 낀 안개처럼 자욱하게 느껴졌을 때에도, 소금에 절인 악취를 풍기는 고기며, 워드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 마음이 유순하고 옷매무새가 깨끗한 여자가 이 집에 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누구나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와르바라의 아름다운 마음씨는 이 괴롭고 암담한 날에도 마치 기계의 브레이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츠이부킨네 집은 젯날이 되면 언제나 분주하였다. 아크시니아는 새벽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깐에서 숨을 헐떡이며 세수를 하였다. 부엌에서는 사모봐르가 불안스러운 소리를 내며 끓고 있었다. 작달막한 키에 용모가 단정한 그리고리이 페트로프 영감은 길다란 검정 코트를 입고 무명 바지에 윤이 나는 긴 장화를 받쳐 신고는, 마치 유명한 가극 속에 나오는 시아버지처럼 그 작은 장화의 뒤꿈치로 뚜벅뚜벅 소리를 내며 방안을 거닐고 있었다. 가게 문은 열려 있었다. 동녘 하늘이 훤히 밝아오고, 사륜마차가 현관 앞에 닿자, 영감은 커다란 모자를 귀밑까지 내려쓰고 젊은이처럼 재빨리 마차 위로 뛰어올랐다. 이러한 거동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그를 쉰여섯 난 영감이라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아내와 며느리가 그를 바래다주었다. 이처럼 말쑥하고 멋진 코트를 걸치고 300루블이라는 커다란 검정말이 끄는 사륜마차에 탔을 때에, 자기에게 불평을 말하거나 청을 드리러 오는 농부들을 더욱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었다. 그는 농부들을 증오하고 멸시하였다. 그는 혹시 농부가 문 옆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화를 버럭 내면서 외치는 것이었다.

"뭣하러 거기 서 있는 거야? 저리 가지 못해!"

혹시 거지가 서 있으면, 그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하나님에게 구걸을 하렴!"

그는 밖으로 일 보러 나갈 때면 의례 마차를 타고 다녔다. 영감의 마누라는 검정 옷에 역시 검은 앞치마를 두르고 망을 치우기도 하고 부엌일을 돌보기도 하였다. 아크시니야는 가게를 보고 있었다. 안뜰에서는 병들이 부딪치는 소리하며, 짤랑짤랑 돈 만지는 소리, 크게 외치는 소리, 그녀에게서 핀잔을 당하여 손님들이 화를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으로 가게에서는 워드카를 팔기 시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귀머거리도 흔히 가게에 앉아 있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민둥머리에 두 손을 호주머니 속으로 집어넣고 농가를 우두커니 바라보기도 하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거리를 쏘다니기도 하였다. 이들 한 가족은 하루에 여섯 번씩이나 차를 마시고, 또 네 끼 식사를 하러 식탁에 마주 앉았다. 밤에는 매상고를 장부에 정리하고 나서야 잠자리에 드는 것이었다.

이 마을에 있는 세 군데 무명 공장과 공장주인 흐르이민 형제, 그리고 코스츄코프의 집 사이에는 전화가 가설되어 있었다. 면사무소에도 전화가 있었지만, 정화통 속에 빈대와 딱정벌레가 번식하여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면장은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사람이라, 서류에는 날마다 대()문자로 쓰고 있었는데, 전화가 통하지 않으면, "지금은 전화가 통하지 않아 일하기 여간 곤란하지 않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흐르이민 형제 사이에는 언제나 재판소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집안끼리 싸움을 하고는 작은 흐르이민이 때때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들은 다시 화해할 때까지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공장문을 닫아야 했다. 집안싸움이 일어날 적마다, 여러 가지 화제와 소문을 남겼으며 마을 사람들은 이 재판소동에 적지 않은 흥미를 갖고 있었다. 명절이 되면, 코스츄코프와 작은 흐르이민이 흔히 경쟁까지도 하였다. 서로 이 마을을 뛰어다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때로는 송아지를 죽이는 경쟁까지도 하였다. 그리고 화려한 옷차림을 한 아크시니아는 풀먹인 스카아트를 바삭거리면서 가게 근처의 한길을 왔다 갔다 하였다. 그러면 작은 흐르이민이 그녀의 팔을 붙잡고 억지로 끌고 가듯이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이 무렵에 츠이부킨 영감은 새로 사 온 말을 자랑하기 위해 와르바라와 함께 마차를 타고 집을 나가곤 하였다.

날이 저물어 경쟁이 끝나고 사람들이 잠자리로 들어갈 무렵이면, 작은 호르이민의 안뜰에서는 아름다운 손풍금 소리가 들려왔다. 특히 달이 밝은 밤 같은 때에는 그 멜로디가 마을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 마을도 노상 초라한 골짜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것이었다.

 

2

큰아들 아니심이 집에 돌아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큰 명절 때나 돌아오고, 평소에는 농부들 편에 선물이나 편지를 자주 보내오곤 하였다. 그 편지는 언제나 청원서 용지에 누가 훌륭한 필적으로 대필을 해서 보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편지 속에는 편소의 아니심이 아무하고도 이야기하지 않은 말투가 적혀있기도 하였다.

<친애하는 아버지, 어머니! 두 분의 건강을 바라는 의미에서 꽃차(花茶) 한 파운드를 보내 드립니다.>

그리고 편지의 마지막에는 끝이 달아 못쓰게 된 펜으로 긁어 놓은 것처럼 <아니심·츠이브킨>이라고 적혀 있었으며, 다음에는 필적을 자랑하는 듯이 대필(代筆)이라고 적어 넣는 것이었다. 편지는 몇 번이고 큰소리로 되풀이하여 읽어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감은 감격한 나머지 얼굴이 상기되어 말하였다. <그 녀석은 집에서 같이 살기를 원치 않는단 말이야. 유식한 사람들 축에 끼어 출세를 하려니까 그럴밖에. 그냥 내버려 둬야지! 사람이란 저마다 갈 길이 따로 있는 법이니까.>

사육제를 하루 앞둔 어느 날 우박이 섞인 비가 쏟아져 내렸다. 영감과 와르바라는 비 오는 것을 구경하려고 창문가에 다가섰다. 그러자 아니심이 정거장에서 썰매를 타고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그가 집에 오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어쩐지 초조하고 불안한 얼굴을 하고 방에 들어왔다. 그리고 어딘가 그의 태도는 우울하고 거칠어 보였다. 다른 때처럼 바삐 돌아가려고 서두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파면이라도 당한 것 같았다. 와르마라는 그를 반가히 맞이하며, 능청스러운 눈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고는 한숨을 쉬고 머리를 흔들었다.

"이 사람아, 아니 어떻게 된거야?……스물여덟이 되도록 총각 신세를 면치 못하니 에이구 쯧쯧……"

그녀는 부드럽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였으므로 다른 방에서는 <에에구 쯧쯧>하는 말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과 아크시니아에게 귓속말로 소근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마치 무슨 음모자들처럼 교활하게 보이고 쉬쉬하는 눈치였다.

아니심을 장가들이자는 의논을 하였던 것이다.

"에이구, 쯧쯧, 제 동생은 벌써 장가든 지가 언젠데……"

하고 아르바라는 말하였다.

"그런데 자네는 장터의 수탉처럼 아직도 짝을 얻지 못하고 있으니, 웬일이야? 어서 색시감을 구해야지. 그렇게 되면 자네는 직장엘 나가고, 안사람은 집에서 일이나 도우면 좀 좋아. 자네 같은 젊은 사람이 혼자서 멋대로 살고 있으니 될 말인가. 세상의 이치에 따라야 해. 에이구, 쯧쯧, 자네나 거리의 떠꺼머리 노총각들은 안심도 하지."

츠이부킨네 집안에서는 며느리를 삼을 때에는, 부자집에서는 의례 그렇듯이, 우선 인물이 잘생긴 아가씨를 고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아니심에게도 예쁘장한 아가시가 물망에 올랐다. 신랑감 아니심은 언 듯 보아 별로 두드러진 데가 없는 평범한 사나이였다. 키가 작고 몸은 약골이었으며, 두 볼은 바람이라도 든 것처럼, 언제나 부풀어 있었다. 눈을 좀처럼 깜박거리지 않아 항상 사람을 노려보는 듯하였으며, 불그스레한 턱수염이 거칠게 자라, 무슨 생각에 잠길 때면, 그 수염을 잘근잘근 씹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술을 좋아하여 얼굴이나 걸음걸이에도 주정꾼의 티가 나 보였다. 그는 예쁜 아가씨가 있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하였다.

"그여 당연하지. 나도 애꾸눈은 아니까. 우리 츠이부킨 집안 아들 쳐놓고 못난 사람이 있나!"

도시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트루구예보라는 마을이 있었다. 그자에 그 마을은 절반은 도시에 편입되고 나머지는 지역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 도시에 편입된 지역에 어떤 과부가 조그마한 집 한 채를 쓰고 살고 있었다. 그리고 함께 살고 있는 그녀의 딸 리파는 너무나 가난한 처지라 품팔이를 다니곤 하였다. 그런데 이 리파는 트루구에보 마을에서는 얼굴이 아름답기로 소문이 났지만, 집이 너무 가난하여 아무도 청혼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홀아비나 늙은 영감이라면 그녀의 가난을 문제시하지 않고 아내로 삼거나 첩으로 데려갈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그녀의 어머니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될 거야> 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와르바라는 중매인을 통하여 리파의 소식을 듣고 트루구예보 마을에 찾아와 그 과부의 집에서 선을 보게 되었다. 그날에는 포도주며 그 밖의 여러 가지 음식을 차려 내왔다. 리파는 선을 보이기 위해 새로 장만한 연분홍 옷을 입고, 머리에 불꽃처럼 빨간 리본을 달고 있었다. 그녀는 밖에 나가 일하기 때문에 볕에 그을긴 하였지만. 파리해진 얼굴에 몸집이 날씬하게 생긴 처녀로서, 그 용모에는 상냥스럽고 세련된 아름다움이 서려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수줍은 듯한 슬픈 미소가 떠나지 않았으며, 두 눈은 어린애처럼 순진한 호기심에 차 있었다. 그녀는 젖가슴이 여우 눈에 뜨일락 말락 할 정도의 애숭이 소녀였지만, 시집가기에 이르지는 않았다.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흠이 있다면, 축 늘어진 사내처럼 생긴 커다란 손이었다.

"지참금이 없다구요? 그런 건 우리에게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아요."하고 츠이부킨 영감은 과부에게 말하였다.

"둘째 아들 스체판의 처도 가난한 집안에서 데려왔지만, 지금 사이좋게 잘살고 있어요. 집안일에나 가게 일에 남에게 뒤지지 않지요."

리파는 문 앞에 서서 <당신들이 좋도록 하세요. 저는 당신의 말을 믿습니다>하고 말하고 싶은 듯한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품팔이를 하는 그녀의 어머니 푸라스코비아는 불안한 나머지 부엌에 숨어 있었다. 그녀가 아직 젊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어떤 상인의 집에서 마루를 훔치다가 주인한테 심한 꾸지람을 들은 일이 있었다. 그때 하도 질겁을 하여, 그 후부터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겁에 질리면 손발이 후들후들 떨리고 뺨이 바르르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녀는 부엌에 앉아서 손님들의 말을 엿듣고 있었다. 그리고는 손을 이마에 대고 성상 쪽을 향해 연방 성호를 긋고 있었다. 술에 얼근히 취한 아니심은 부엌문을 열고 거리낌 없이 말하는 것이었다.

"아니 왜 여기 앉아 계세요? 어머님이 없이는 지루해서 견디지 못하겠어요."

푸라스코비아는 어쩔 줄을 몰라 그 여윈 가슴 위에 두 손을 얹으며 대답하였다.

"원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저희들을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셔서……"

선을 보고 나서 결혼식 날가지 정하였다.

그 후부터 아니심은 으레 휘파람을 불며 집안을 이 방 저 방 돌아다니거나 그렇지 않으면 깊은 생각에 잠겨 마치 땅속까지라도 꿰뚫어 볼 듯한 눈초리로 마룻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는 부활제가 끝나는 다음 일요일에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도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으며, 약혼녀를 보고 싶어 하는 기색도 없이 언제나 혼자서 휘파람만 날리고 있었다. 그의 결혼은 순전히 아버지와 계모의 뜻에 의해 성립된 것이다. 그리고 집안일을 돌볼 여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아들에게 장가를 들이는 것이 이 고장의 풍습이기도 하였다. 아니심은 근무처로 떠나면서도 조금도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으며 여느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눈에 거슬릴 정도로 난폭한 행동을 하기도 하고, 또 실없는 말도 곧잘 지껄이는 것이었다.

 

3

쉬칼르보 마을에는 동방교(東方敎)를 믿는 자매가 양재점을 열고 있었는데, 결혼식 때에 입을 새 옷을 이 양재점에 맡겼다. 그리하여 재봉사들이 가끔 몸 치수를 재려고 찾아와서는 오랫동안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주고받곤 하였다. 와르바라는 검정 레스와 유리구슬이 달린 주황빛 옷을 맞추고, 아크시니아는 앞가슴이 노랗고 치맛자락에 무늬가 있는 연두색 옷을 맞추었다. 옷이 다 되자, 츠이브킨 영감은 옷값을 현금으로 주지 않고 자기 가게에 있는 물건으로 지불하였다. 그리하여 재봉사들은 조금도 필요하지 않는 초봉지며 정어리 조림이 들어있는 꾸러미를 안고 실망하여 돌아갔다. 그들은 마을을 벗어나 벌판에 이르자 언덕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하였다. 결혼식을 사흘 앞두고 아니심은 새 옷으로 갈아입고 집에 돌아왔다. 윤이 나는 고무 덧신을 신고, 넥타이 대신에 작은 구슬이 달린 빨간 노끈을 매고, 새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성상 앞에서 정중히 기도를 드리고 나서, 아버지에게 인사를 한 다음에, 10루블의 금화와 10루블 반짜리 온화 몇 닢을 아버지에게 주었다. 그리고 와르바라에게도 같은 금화를 주고 아크시니아에게는 5루블짜리 금화를 주었다. 이 돈들은 어디서 모았는지 모두 새로 주조된 것으로 햇빛에 반짝이고 있어 더욱 탐스러웠다.

아니심은 의젓하고 엄숙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쓰면서 얼굴을 약간 찌푸리고 있었으며, 두 볼은 바람을 넣은 듯이 불룩 나오고 입에서는 술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정거장을 지날 때마다 식당에 달려갔던가 보다. 그의 태도에는 여전히 인간으로서는 좀 과할 정도로 거친 데가 있었다. 이윽고 그는 아버지와 함게 점심을 들고 차를 마셨다. 와르바라는 새 돈을 손으로 뒤집어 보기도 하고, 도시에 가서 사는 마을 사람들의 소식을 물어보기도 하였다.

"모두들 괜찮게 살아요. 하나님의 은총으로 잘 지내고 있지요."하고 아니심은 말하였다.

"다만 이봔·예고로프네 집안에 불상사가 생겼을 뿐입니다. 그의 늙은 마누라 소피아·니키포로브나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지요. 저마다 죽은 영혼의 명복을 빌기 위해 2루블 반씩 내고 다과점에서 추도 만찬회를 열었는데, 진짜 포도주가 나왔어요. 이 마을에서 간 농부들도 역시 2루블 반씩 회비를 내기로 했어요. 그런데 그들은 체면을 차리노라고 아무것도 먹지 않더군요!"

<2루블 반!>하고 아버지는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왜 이해가 가지 않으세요? 그곳은 시골과는 달라서 음식점에 가서 식사를 하려면 으레 한두 가지는 주문하게 되고, 또 친구들이 모이면 함께 술을 나누며 날을 밝히지요. 그래서 결국은 한 사람 앞에 3루블 내지 4루블은 가져야지요. 거기에 사모로도프라도 끼게 되면 그 사람은 언제나 식사 후에는 코냑이 섞인 커피를 마셔야 한답니다. 그 코냑이 조그마한 잔돈으로 60카페이카나 하거든요."

"그 백수건달이……"

하고 영감은 흥분하여 말하였다.

"아니, 그 허풍선이가……"

"저는 요새 사모로도프와 단짝입니다. 아버지한테 써 보낸 저의 편지는 모두 그가 써준 거예요. 그 친구는 글을 잘 쓰지요. 그런데 어머니, 그의 됨됨에 대하여 말씀드려도……"

아니심은 즐거운 어굴을 하고 와르바라를 향해 말하였다.

"어머니는 얼른 곧이듣지 않을 거예요. 우리는 그 친구가 아르메니아 사람처럼 피부가 검기때문에 <코끼리 파수병>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그 친구의 일이라면 자기 손가락 보듯이 뱃속까지 환히 들여다볼 수 있어요. 그리고 그 녀석도 제 심정을 잘 알고 언제나 그림자처럼 저를 따라다니지요. 우리는 완전히 덜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어 버렸어요. 그 친구도 어쩔 수 없이 내가 없으면 살맛이 나지 않게 되었어요. 그래 내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쫓아오지요. 어머니, 아무튼 나는 눈 하나만은 아주 정확해요. 가령 시장에서 농사꾼에게 셔츠를 판다고 해요. 그때 내가 <어디 봐, 그 셔츠 훔친 거로군!>하고 말하면, 그건 영낙없이 훔친 물건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돼요."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나?"

하고 와르바라가 물었다.

"어떻게가 어디 있어요? 언뜻 보기만 하면 아는 거지요. 무심중에 그 셔츠 쪽으로 눈이 쏠리기 때문에 아는 거지요. 그것 뿐이예요. 그래서 나와 같이 근무하는 형사들은 나더러 언제나 <아니심이 또 도요 사냥을 떠나는군>하고 말하지요. <도요>란 훔친 물건이라는 뜻이에요. 누구나 훔친 물건을 어떻게 보존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거든요. 세상은 넓지만 그 물건을 훔칠 곳은 흔치 않으니까요."

"지난 주일에 군트레프네 집에 도둑이 들어 큰 양 한 마리와 새끼 양 두 마리를 훔쳐 갔는데 어디 찾아줄 사람이 있어야지……딱해서 볼 수 없더군요……"

"그래요? 제가 찾아 주지요. 걱정할 것 없어요."

결혼식 날이 가까이 다가왔다. 아직 쌀쌀하였지만 맑게 개인 상쾌한 4월이었다. 마을에는 말굴레와 갈기에 여러 가지 색깔의 리본을 장식한 삼두마차가 방울소리를 깔랑거리며 새벽부터 돌아다니고 있었다. 까치들은 이에 놀라 버드나무 가지에서 시끄럽게 깍깍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종달새는 츠이부킨 집안의 결혼식을 축하하듯이 끊임없이 우짖고 있었다.

집안에서는 여러 식탁에 길다란 생선이며, 햄 속에 양념이 든 통닭, 멸치 통조림이 든 상자, 여러 가지 소금절임, 워드카와 포도주병 등속이 벌써 즐비하게 놓여 있었고, 삶은 순대 냄새와 새우젖 냄새가 풍겨왔다. 츠이부킨 영감은 구두 뒤축을 울리며 식탁 옆에서 여러 종류의 칼을 갈아 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연방 와르바라에게 말을 물어보곤 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당황한 듯한 얼굴을 하고 코스츄코프 댁에서 온 남자 요리사와 흐르이민 댁에서 온 여자 요리사들이 아침 일찍부터 일을 보고 있는 부엌으로 뛰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크시니아는 머리는 지졌으나 아직 저고리도 걸치지 않은 채, 코르세트 바람으로 뻐득거리는 새 장화를 싣고 벌거숭이 무릎과 가슴팍을 내두르며 뜰 안을 회오리바람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집안은 온통 떠나갈 듯하였다. 고함을 치는 소리가 나는가 하면 잘못했다고 비는 소리도 들려왔다. 한길을 오가던 사람들도 활짝 열어젖힌 대문 앞에서 발길을 멈추곤 하였다. 이 모든 일들로 하여 이 집안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다는 것을 곧 느낄 수 있었다.

"새색시 데리러 간대!"

말방울 소리가 짤랑짤랑 울리더니 마을 저쪽으로 사라졌다……. 두 시가 지나 마을 사람들은 언덕 위로 뛰어 올라갔다. 말방울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새색시가 오는 것이었다.

교회에는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촛대에 불이 켜지고 성가대는 츠이부킨 영감의 청으로 찬송가를 불렀다. 눈부신 촛불과 화려한 옷차림들이 새 색시 리파를 어리둥절케 하였다.

성가대의 우렁찬 노랫소리가 그녀에게는 쇠망치로 자기의 머리통을 후려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난생처음으로 입은 코르세트와 장화로 하여 숨이 막힐 듯이 갑갑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치 기절하였다가 다시 간신히 정신을 차린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주위를 돌아보았으나 모두가 놀랍기만 하였다. 아니심은 검은 프록코트를 입고, 넥타이 대신에 빨간 노끈을 매고, 우두커니 한 곳만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성가대의 노랫소리가 갑자기 높아지자 다급히 가슴에 성호를 긋는 것이었다. 그는 감동한 나머지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 교회는 그가 어릴 적부터 드나들던 낯익은 곳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성찬을 받으러 자기를 데리고 온 적도 있었으며, 또 어린이 합창단에 끼어 노래를 부른 적도 있었다. 어느 한구석도 낯설지 않았다. 성상마다 기억이 생생하였다. 그는 바로 이곳에서 백년가약을 맺으려는 것이다. 인간된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는 결혼을 해야 하는 법이지만, 그는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완전히 결혼식 자체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성상도 분명히 볼 수 없었다. 그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였다. 미사를 드리면서 피할 길 없는 불행이, - 가뭄에 비 한 방울 뿌리지 않고 마을 위를 스쳐가는 한 점 구름처럼 무사히 지나가 주기를 하나님께 빌고 있었다. 그 불행은 금명간 닥쳐올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지금까지 자기가 저지른 여러 죄악들이 피할 수도 없으며, 또 시정할 수도 없고, 따라서 하나님에게 용서조차 빌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에게 용서를 빌며 흐느껴 울었다. 이러한 그를 유심히 바라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단지 술이 좀 과해서 그러나보다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옆에서 어린애의 울음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어머니, 저 애를 데리고 밖에 나가 주세요!"

"자 조용히들 하십시요!"하고 신부가 소리쳤다.

신랑 신부가 교회에서 나오자 구경꾼들이 뒤를 따랐다. 가게 근처와 대문깐, 정원, 들창 밑에 까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축가를 불러 줄 시골 여인들이 도착하였다. 신랑 신부는 간신히 문지방을 넘어섰다. 성가대들은 악보를 손에 쥐고 어느새 현관에 죽 늘어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도시에서 일부러 청해온 악대가 연주를 시작하였다. 술잔에는 거품이 나는 <> () 술을 가득히 따르자 청부업을 하는 목수 영감이 신랑 신부에게 말을 건네었다. 그는 엘리자로프라고 하는 영감으로, 키가 후리후리하고 빼빼 마른 몸집에, 눈이 가려질 정도로 짙은 눈썹을 달고 있었다.

"신랑 신부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지 말고 사이좋게 살아가야 해. 알겠나?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살펴 주실 것이다."

아니심은 할아버지 어깨에 멀굴을 파묻고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리이·페트로비치도 함께 우세. 너무 기쁘면 눈물이 나오는 법이라네!"

하고 영감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러자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 , ! 참 훌륭한 색시를 얻었어! 흠잡을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거든! 기계와 여러 나사못들이 잘 돌아갈 걸세."

이 영감은 예고리예브스키이 지방에서 태어났으나, 젊어서부터 우클레예보 마을과 이 근처의 공장에서 일을 해온 까닭에 그로서는 이 고장이 자기 고향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여러 해 전부터 지금과 같이 후리후리한 키에 늙고 빼빼 마른 몸집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그를 기리켜 <나무다리 할아범>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는 4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공장에서 기계를 매만지며 살아온 탓인지, 어떤 사람을 보건, 또 어떤 물건을 만지건 간에, 수리를 필요로 하는지 아닌지를 우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는 식탁에 앉기 전에 의자가 상하지 않았나 하고 살펴보기를 잊지 않았으며, 생선 같은 것도 잘 익었는가의 여부를 미리 알아보곤 하였다.

모두들 식탁에 앉아 <> 지방의 술을 마시고, 의자를 삐걱거리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성가대는 노래를 부르고, 악대는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뜰 안에서는 시골 색시들이 축가를 부르고 있었다. - 이 연주 소리와 노랫소리가 뒤섞여 시끄럽게 귀를 울리는 바람에, 사람들은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나무다리 할아범>은 의자에 앉아 몸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옆 사람의 팔꿈치를 꾹꾹 찌르며 남의 이야기를 훼방하고 있었다. 그는 눔물을 찔끔거리는가 하면 너털웃음을 치기도 하였다.

<얘들아, 얘들아……>하고 영감은 다급히 중얼거렸다.

"귀염둥이 아크시니아와 와르바라! 우리는 사이좋게 살아야 해. 우리 귀염둥아……"

그는 본래 술을 마시지 못하였다. 그런데 오늘은 영국 배갈 한잔을 마시고 완전히 녹초가 된 것이다.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이 독한 술을 마신 사람은 사지를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곯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여기저기서 혀 꼬부라진 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 자리에는 관할 신부와, 부인을 동반한 공장 사무원들, 그리고 이웃 마을에서 온 상인들이 동석하고 있었다. 동회장과 동회 서기도 나란히 앉아 있었다. 동회장은 14년 동안이나 이 마을에서 근무하면서 한 번도 서류에 서명한 일이 없으며, 동사무소에 찾아간 사람치고 그에게 기반이나 모욕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두 사람의 관리는 모두 살이 피둥피둥하고 기름이 번지르르 흘렀다. 부정과 사기가 몸에 배어 얼굴에까지 그 근성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서기 마누라는 자식들을 다 데리고 왔었다. 그녀는 빼빼마르고 사팔뜨기였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힐끔힐끔 접시를 곁눈질하다가, 닥치는 대로 집어서 자기와 아들의 호주머니에 마구 쑤셔 넣는 것이었다.

새색시는 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신랑 아니심은 그녀를 알게 된 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도 이야기를 건네 본 적이 없으므로, 아직 아내의 목소리를 모르고 있었다. 그는 새색시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말없이 영국산 배갈만 들이키더니 차츰 취기가 돌자,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에게 말을 건네었다.

"내 친구에 사모로도프라는 아주 괴상한 놈이 있는데요. 이야기도 잘하고 훌륭한 공민의 자격을 갖춘 친구지요. 나는 그 녀석의 뱃속까지 환히 들여다보고 있어요. 물론 그 녀석도 나를 잘 알구요. 아주머니, , 그 모로도프의 건강을 위해 저와 건배를 합시다!"

와를바라는 무척 피곤하였다. 그녀는 들뜬 얼굴을 하고 손님들에게 요리를 권하며 식탁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처럼 많은 음식과 요리를 제공했으니, 아무도 자기를 괄시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흐뭇해하는 눈치였다.

해가 저물었다. 그러나 잔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손님들은 이제 자기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고 있는지 분간 못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이 지껄이는 말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악대가 쉬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웬 시골 색시의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녀석들이 우리 피를 다 빨아 먹었어요! 페스트라도 걸려서 뒈져라!"

밤이 깊어지자 사람들은 악대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흐르이민의 패거리들이 포도주를 가지고 왔다. 그중에서 한 사람은 두 손에 술병을 들고 입에 술잔을 물고서 카드릴리(네 쌍의 남녀가 추는 춤)를 추어, 모든 사람들을 웃겼다. 그들은 춤을 출 때 갑자기 무릎을 꿇고 앉아서 옆으로 돌아가기도 하였다. 아크시니아는 연두색 옷을 걸치고 치맛자락으로 바람을 일으키며 날쌔게 돌아갔다. 누가 그녀의 치맛자락을 밟자 나무다리 할아범은 이렇게 외쳤다.

"얘야, 치맛자락이 떨어져 나갈라!"

좀처럼 깜빡이지 않는 앳된 잿빛 눈을 가진 아크시니아의 얼굴에는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가 서려 있었다. 그리고 그 날카로운 눈동자며, 길다란 목, 짧막한 머리, 날씬한 몸매 등이 어쩐지 뱀과 같은 인상을 주었다. 앞사금에 노란 장식을 했을 뿐, 온통 연두색 비단에 휘감겨 방긋이 웃고 있는 모습은 봄철의 보리밭 고랑에서 머리를 쳐들고 기어 나와 행인을 노리고 있는 살모사와 같았다. 흐르이민의 패거리들은 그녀와 흉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였다.

그리고 그녀가 그 패거리의 우두머리와 벌써부터 친한 사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 보였다. 그러나 귀머거리 남편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식탁에 도사리고 앉아서 마치 권총을 쏘았을 때와 같은 소리를 내며 호두를 까먹고 있었다.

한편 츠이부킨 영감은 방 한복판으로 나서면서, 자기도 러시아 춤을 추고 싶다는 표시로 손수건을 흔들었다. 그러자 집안과 뜰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와 하고 일시에 환호성을 울렸다.

"츠이부킨 영감이 춤을 추겠대! 할아버지가 춤을 춘대!"

이때 와르바라는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영감은 손수건을 흔들며 발뒤축을 뚜닥거릴 뿐이었다. 밖에 있던 머슴들은 서로 밀치고 떠밀리면서 창가에 매달려 환호성을 치며 적어도 이 한때만은 영감에 대한 불평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는 무섭게 지독을 부려 재산을 모았으며, 머슴들에 대하여 횡포가 대단했던 것이다.

"잘한다! 그리고리이·페트로비치!"

하고 외치는 소리가 군중들 틈에서 들려왔다.

"더욱 힘차게! 힘차게! 더욱 신나게……, !"

춤은 새벽 두 시까지 계속되었다. 아니심은 비틀거리며 성가대와 악사들을 바래다주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들에게 각각 반 루블씩 쥐어 주었다. 츠이부킨 영감은 비틀거리지는 않았으나, 한쪽 다리만 놀리는 듯이 쩔룩거리며, 손님을 배울 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결혼식에 2천 루블이나 들었어요."

손님들이 떠들썩하며 헤어질 때였다. 누가 자기의 헌 외투를 버리고 쉬칼로보 음식점 주인의 고급 외투를 슬쩍 입고 갔다. 아니심은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잠깐만 있어. 내 곧 찾아낼게. 누가 훔쳤는지 금방 알아낼 수 있어!"

그는 한길로 뛰어나가 어떤 사람의 뒤를 밟았다. 이윽고 그 사람의 덜미를 잡아 집까지 끌고 와서, 아주머니가 색시의 옷을 벗기고 있는 신방에 처넣고 철컥 자물쇠를 잠가 버렸다. 그는 술에 취하고 화가 난 뒤라,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4

그 후 닷새가 지났다. 아니심은 떠날 채비를 마치고, 와르바라에게 인사하러 2층으로 올라갔다. 성상 앞에는 여러 개의 등불이 켜있고, 주위에는 향냄새가 풍겨왔다. 와르바라는 창가에 앉아서 붉은 털실로 양말을 뜨고 있었다.

"아니 며칠이 지났다구 떠나는 거야. 벌써 싫증이 난 게로군……우리는 남부럽지 않게 넉넉하게 살고 있는 처지라 결혼식도 훌륭히 치렀어.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2천루블이나 썼다는 거야. 그런데 한 가지 유감스러운 것이 있어. 우리는 장사꾼의 티를 벗지 못하고 답답하게 살아가고 있단 말이야. 소작인들을 얼마나 기만하느냐 말이야. 나는 그것이 마음에 꺼려서 죽을 지경이야. , 얼마나 그들을 속이고 있는지 몰라. 말을 바꾸거나, 물건을 사들이거나, 일꾼을 고용하거나, 속이지 않을 때가 없지 뭐야. 속이고 또 속이고……가게에서 파는 기름은 쓰고 구린내가 나서 손님들은 언제나 좀 더 품질이 좋은 것을 달라고 야단이야. 이게 무슨 꼴이람. 왜 좋은 기름을 못 판단 말아야?"

"어머니, 장사꾼에게는 장사꾼의 요량이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누구나 한번은 죽어야 하는 법이야. 죽어야 한다는 것도 더러 생각해 봐야지. 그렇지 않아? 그러니 아버지에게 입바른 소리를 해 들려 드려야 하는 거야."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면 되지 않아요?"

"벌써 얼마나 말했는데 그래. 아버지도 번번이 자네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더군그래. <장사꾼에게는 장사꾼의 요량이 있는 법>이라고 말이지. 자네는 저세상에 가서 우리가 장사한 내막이 드러나지 않을 줄 아나? 하나님의 심판은 에누리가 없어."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고 아니심은 말하고 나서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님은 없어요. 어머니, 그리니 그런 생각을 할 사람도 없구요."

와르바라는 손뼉을 치며 한바탕 웃고 나서, 놀라운 얼굴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가 매우 괴상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아니심은 어리둥절하여 말하였다.

"아니 하나님은 계실지 모르지만, 믿음이 없는 건 사실입니다. 저의 결혼식 때만 해도 저는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그때 저도 양심이 찔려 눈물이 났어요. 마치 암탉의 품에 안긴 달걀 속에서 병아리가 삐약삐약 울기 시작하는 듯이 말씀이예요. 그리하여 결혼식을 올리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교회에서 한 발짝 밖으로 나오자 그런 생각은 다 사라져 버렸어요. 그런데 실상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분명히 알 수 있어요. 저희들은 어릴 적부터 그런 것을 별로 모르고 자랐어요. 그 대신 어머니의 젖을 빨 때부터 <장사꾼에게는 장사꾼의 요량이 있다>는 것만 배워 왔어요. 아버님도 역시 하나님을 믿지 않아요. 어머니는 군트레프가 양 몇 마리를 도둑맞았다고 하셨지요?……제가 그걸 찾아내었어요. 쉬칼로보의 농부가 그걸 훔쳤더군요. 그 녀석은 양을 훔쳤지만 그 양털은 아버지한테 돌아오고 말았어요……. 바로 이런 것이 신앙이 아니겠어요."

아니심은 눈을 껌벅이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말을 계속하였다.

"목사도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장로나 집사는 물론이고요. 그들이 교회에 나가고 계명을 지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에 대하여 나쁜 소문을 퍼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예요. 그리고 어쩌면 심판의 날이 정말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요즘은 모두를 인간이 점점 연약해지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 등으로 해서 말세가 되었다고 떠들어 대지만 모두가 부질없는 소리예요. 어머니, 저는 인간들이 양심을 조금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불행이 일어난다고 봐요. 저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어요. 가령 어떤 사람이 셔츠를 훔쳤을 경우에 저는 곧 알아낼 수 있어요.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 음식점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은 차를 마시고 있다고 생각하실 테죠. 그러나 제가 보면 차 같은 것은 안중에 없고, 그 사람에게 양심이 없다는 것을 꿰뚫어 보게 돼요. 진종일 돌아다녀 봐야 양심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어요. 그 까닭은 저마다 하나님이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몸조심하십시오. 저를 과히 나쁘게 생각지 마세요."

아니심은 와르바라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였다.

"모든 일에 감사할 뿐입니다. 어머니!"

하고 말을 이었다.

"어머니는 우리 집안의 큰 보배입니다. 어머니에게는 흠잡을 데가 없거든요. 저는 만족하고 있어요."

아니심은 크게 감동을 느끼며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다시 돌아와서 말하였다.

"저는 사모르도프와 함께 계획하고 있는 일이 있어요. 제가 부자가 될지 망하게 될지 알 수는 없지만,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머니께서는 아버지를 잘 위로해 드리세요."

"거 무슨 실없는 소리야. 그 저……하나님께 기도나 드려. 그리고 처를 사랑해야 해. 그렇게 서로 뚱한 얼굴을 하지 말고 좀 웃어보란 말이야."

", 하긴 좀 이상한 여자인 것 같아요……"

아니심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한숨을 쉬었다.

"아무것도 몰라요. 수째 입을 봉한 채 통 말을 안 하는걸요. 아직은 애숭이가 돼서 그러나 봐요. 좀 더 자랄 때까지 내버려 둬야겠어요."

키가 큼직하고 피둥피둥 살찐 백마가 벌써 마차를 끌고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츠이부킨 영감은 재빨리 마차에 올라타고 고삐를 잡았다. 아니심은 와르바라와 아크시니아, 그리고 동생에게 키스를 하였다. 아내도 현관에 나와 서 있었다. 그녀는 멍하니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어, 남편을 전송하러 나온 것이 아니라, 우연히 밖으로 나온 듯이 보였다. 아님심은 아내의 곁으로 다가가서 그 뺨에 살짝 입술을 갔다 댔다.

"잘 있어!"하고 그는 말하였다.

아내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은 저마다 그녀를 가엾게 생각하였다. 아니심은 마차에 겅충 뛰어올랐다. 그는 자기를 호남아나 되는 것처럼 어깨를 뒤로 젖히고 두 손을 허리에 얹었다.

아니심은 마차가 골짜기를 더듬어 올라가는 동안에 줄곧 마을 쪽을 돌아다보았다. 맑게 개인 따뜻한 날이었다. 가축들은 오늘 처음으로 넓은 들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명절 옷을 걸친 아낙네와 처녀들이 가축을 뒤쫓고 있었다. 다갈색 황소는 들에 나온 것이 기분 좋아 음매! 음매!하고 울면서 앞발로 땅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곳곳에서 종달새가 울고 있었다. 아니심은 아름다운 흰 교회를 바라보았다. 며칠 전에 하얗게 칠을 하였던 것이다. 그는 닷새 전에 자기가 그곳에서 드린 기도를 생각해 보았다. 이어서 그는 지붕이 파란 학교를 바라보고, 옛날에 헤엄을 치며 고기잡이를 하던 시냇물을 굽어보았다. 그러자 마음속에서 기쁨이 치솟아올랐다. 그는 갑자기 담벽이라도 솟아올라 자기 앞길을 가로막아 준마면 얼마나 좋으랴 싶었다.…… 그리고 자기 생애에 오늘까지의 과거만 남아 준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정거장에 이르자 두 부자는 식당에 가서 삣찌 술을 한 잔씩 마셨다. 아버지가 술값을 치르려고 호주머니 속에 손을 넣자, 아니심은 말하였다.

"제가 내지요."

영감은 감동된 어조로 아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자 어때? 훌륭한 아들을 두었지?>하고 자랑이라도 하는 듯한 눈으로 식당 주인에게 눈을 껌벅여 보였다.

"네가 집에 남아서 일을 거들어 주면 오죽 좋겠느냐."

하고 영감은 말하였다.

"나는 그 이상 바랄 게 없다. 그렇게만 해 주면 너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금으로 휘감아 주지."

"아버지 그건 안 돼요."

삣지 술은 새콤하고 초 냄새가 났지만 두 사람은 한 잔씩 더 마셨다.

츠이부킨 영감이 정거장에서 돌아왔을 때, 새 며느리를 잘 알아보지 못하였다. 리파는 남편을 태운 마차가 뜰에서 떠나자 갑자기 사람이 달라진 듯이 명랑해졌다. 그리하여 맨발에다 떨어진 낡은 치마를 걸치고 손매를 어깨까지 걷어 올리고는, 은방울 울리는 것 같은 가냘픈 목소리로 현관 층층대를 훔치고 있었다. 그리고 구정물이 담긴 커다란 통을 들고 밖에 나와, 앳된 웃음을 띄우고 태양을 바라보는 모습은 마치 종달새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현관 앞을 지나가던 어던 늙은 직공은 고개를 설레설레 자어며 말하였다.

"그리고리이·페트로비치! 당신의 새 며느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 분명해요. 시골뜨기가 아니라 큰 보물단지거든요!"

 

5

68일 금요일 - <나무다리>라는 별명을 가진 엘리자르프 영감과 리파는 카장의 성모에게 예배하기 위하여 어느 교회에 갔다가 카잔스코예 마을에서 함께 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훨씬 떨어져서 리파의 어머니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녀는 몸이 아픈데다가 숨이 차서 점점 뒤떨어지게 되었다.

날이 어둡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아이 깜짝이야!"

하고 나무다리 영감은 놀란 듯이 말하였다.

"아니……그래?"

"할아버지 저는 쨤을 퍽 좋아해요."

하고 리파는 말하였다.

"저는 방구석에 앉아 언제나 쨤을 섞어서 차를 마시지요. 때로는 어머니와 함께 마시기도 하구요. 그럴 때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세요. 저희 집에는 쨤이 않아요 - 네 통이나 돼요. 집안 식구들은 저더러 사양치 말고 마음대로 먹으라는 거예요."

"으흠……네 통이나 된다구?"

"모두들 잘 살아요. 흰 빵에 차와 고기를 마음대로 먹어요. 그런데 웬일인지 그네들이 무서워서 못 견디겠군요. 정말 무서워요."

"무섭긴 뭐가 무섭단 말이냐?"

나무다리 영감은 어렇게 묻고 나서, 푸라스코비야가 얼마나 뒤떨어졌나 하고 뒤를 돌아다 보았다.

"결혼식 땐, 아니심이 무서웠어요. 그분은 저에게 별로 말도 건네지 않고 잔소리를 한 적도 없지만, 옆에 오기만 하면 소름이 끼쳐요. 뱃속까지 얼어붙는 것 같았어요. 저는 밤새도록 한잠도 자지 못하고 벌벌 떨면서 하나님에게 기도를 드렸어요. 할아버지, 그런데 지금은 아크시니아가 또 무서워지는군요. 그렇다고 그분이 저더러 뭐라고 하는 건 아녜요. 언제나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가끔 창문을 내다볼 때면 그 눈초리에는 마치 우리에 갇힌 양처럼 시퍼런 노기가 번뜩여요. 작은 흐르이민 그분을 꼬이고 있거든요. <당신네 할아버지는 부초키노에 120에이커의 땅을 갖고 있어요. 그 땅엔 모래도 많고 물도 넉넉하니 아크시니아. 그곳에 벽돌공장을 세우도록 해요. 우리도 한몫 낄 테니까>라고요. 요즘 벽돌값은 천 장에 25루블 정도 하니까 수지맞는 사업일 테지요. 그래 어제 저녁 식사 때, 아크시니아는 아버지에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저는 부초키노에다 벽돌공장을 세우고 저 혼자의 힘으로 운영하고 싶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얼굴을 찌푸리는 것이었어요. 못 마땅한가 보죠.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가족들이 헤어져서는 안 돼. 다 함께 뭉쳐서 살아야 하는 거야> 하고 말씀하셨어요. 그러자 아크시니아는 눈을 부라리며 이를 부드득 가는 것이었어요.……기름과자를 내놓았으나 입에 대지도 않더군요."

"하하……"

하고 나무다리 영감은 놀라는 얼굴을 하였다.

"그래 먹지도 않았어!"

"그리고 그분은 잠을 통 자지 않아요."

하고 리파는 말을 이었다.

"반 시간 자고는 벌떡 일어나서, 일꾼들이 어디다 불을 지르지나 않나, 무엇을 훔쳐 가지나 않나 하고 언제나 두루 살피면서 돌아다녀요. 할아버지 저는 그분이 무서워 못 견디겠어요. 그리고 작은 흐르이민 패거리들은 결혼식이 끝난 다음부터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재판소로 쏘다니고 있어요. 모두가 아크시니아 때문인가 봐요. 삼형제 중에서 두 형제는 아크시니아에게 공장을 세워 주겠다고 약속을 하였지만, 셋째 동생이 말을 듣지 않는대요. 그래서 공장이 달포나 쉬는 바람에 저의 삼촌 푸로호르는 일터를 잃고 구걸하러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지 뭐예요.

제가 <삼촌, 그동안에 밭에 나가 김을 매든지 산에 가서 나무를 베든지 하세요. 제가 딱해서 못 보겠어요.> 하고 말했더니 <나무 농사를 어떻게 짓는 건지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니……>하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두 사람은 푸라스코비아를 기다리며 쉬려고 사시나무 숲에 가서 멈춰섰다.

엘리자로프는 오래전부터 청부업을 하고 있었지만 말을 타고 다니는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언제나 빵과 마늘이 든 자그마한 배낭을 걸머지고 여러 지방을 돌아다녔다. 그는 손을 흔들며 성큼성큼 발을 떼어놓았으므로 그와 동행하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숲에 이르는 곳에 이정표가 서 있었다. 엘리자로프는 그 이정표에 손을 얹고 읽어내려갔다. 푸라스코비아는 숨을 헐떡이며 쫓아왔다. 언제나 물 안에 싸인 듯한 구름이 많은 그녀의 얼굴도 오늘은 행복에 빛나고 있었다. 오늘은 그녀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교회에 갔다가 시장에 들러 배로 만든 크바스(러시아의 음료수)를 마시고 온 것이다. 이것은 그녀에게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오늘을 난생처음으로 사는 보람을 느끼는 듯이 생각되었다. 세 사람은 잠시 쉰 후에 나란히 서서 걸었다.

해는 이미 저물어가고 있었다. 저녁 햇살이 숲속까지 스며들어 나뭇가지들을 붉에 물들여 놓았다. 숲 저쪽에서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훨씬 앞질러 간 우클레예보 아가씨들이 숲속에서 버섯을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얘들아!"

하고 엘리지로프는 큰 소리로 불렀다.

"어이, 이뿐이들아!"

그러자 대답 대신에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나무다리가 왔어. 그 나무다리 영감쟁이 말이야."

그 메아리 소리도 웃으며 숲을 지나갔다. 어느새 굴뚝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종각 위의 십자가가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바로 그곳이 <목사님이 장례식 때 생선알을 먹었다>는 마을이었다. 이제 집까지의 거리는 얼마 남지 않았다. 다만 그 깊숙한 골짜기 속으로 내려가기만 하면 되었다. 지금까지 맨발로 걸어온 리파와 푸라스코비야는 장화를 신으려고 풀밭 위에 주저앉았다. 나무다리 영감도 따라 앉았다.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죽 늘어선 무성한 버드나무며, 하얗게 칠한 교회, 가느다란 냇물이 흘러 내리는 우클레예보 마을은 평화스럽고 아름답게 보였다. 다만 헐값을 들여 칠한 음침하고 초라한 공장 지붕만은 이 아름다운 그립을 더럽히고 있었다. 저쪽 비탈진 곳에는 보리들 - 노적가리로 쌓아올린 것, 짚으로 묶은것, 비바람에 불려서 흩어진 것처럼 여기저기 널려있는 것, 방금 낫으로 베인 채 나란히 놓여 있는 것 등이 보였다. 그리고 귀리 이삭도 어느새 여물어서 진주알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지금은 한창 보리의 수확기였다. 오늘은 명절이지만 내일(토요일)이면 농부들은 다시 보리를 베어들이고 풀을 운반해 갈 것이다. 이어서 일요일의 휴식이 찾아오는 것이다. 날마다 멀리서 천둥이 울려왔다. 날씨는 찌는 듯 무더워 금방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그러나 농부들은 밭을 돌아보며, 이와 같이 때를 맞추어 보리를 베어들이게 된 것을 하나님께서 보살펴 주신 덕택이라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차 있었다.

"요새 보리 베는 데 품삯은 꽤 비싸죠?"

하고 푸라스코비야가 물었다.

"하루 40카페이카라우."

시골 아낙네들이며, 새 모자를 눌러 쓴 공장 직공들, 거지 아이들이 떼를 지어 카잔스코예 장터에서 오고 있었다. 말은 자기가 펄려 가지 않게 된 것을 무척 기뻐하는 듯이 보였다. 이어서 심술 궂은 황소가 끌려가고, 그 뒤를 술 취한 농부들을 태운 달구지가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웬 할머니가 소년을 데리고 오고 있었다. 그 소면은 커다란 모자를 쓰고 긴 장화를 신고 있었는데, 찌는 듯한 더위와 무릎을 굽힐 수 없는 장화 때문에 지칠대로 지쳐 있었으나, 장난감 나팔을 힘껏 불어대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벌써 골짜기를 지나 큰길에 들어섰다. 나팔 소리는 여전히 들려왔다.

"이곳 공장주인들은 몰상식하기 짝이 없단 말이야."

하고 엘리자로프는 말하였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야. 글쎄 코스츄코프 녀석이 처마를 고치는데 재목을 많이 썼다고 투덜대지 않아. 그래 나는 <뭐가 많단 말예요? 다 필요해서 쓴 건데……와실리·다닐르잇치……그럼 내가 재목으로 국이라도 끓여 먹었단 말인가요?>하고 대어들었지. 그랬더니<네가 감히 그렇게 지꺼릴 수 있어? 망할 녀석 같으니! 자기 분수를 지킬 줄 알아야지! 너 누구 덕에 청부업자가 되었나? 다 내 덕이 아니냐?>라고 하길래 <그까짓 거 고맙지 않아요. 나는 청부업자가 되기 전에도 날마다 차를 마실 수 있었어요> 했더니 나에게 <이 고얀 놈 같으니……>하고 버럭 화를 내는 거야. 나는 잠자코 <그래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얀 놈이지만 너는 저세상에 가서 고얀 놈이 될 줄 알아. , , !>하고 마음속으로 웃어주었지. 이튿날 녀석은 마음이 풀려 이렇게 말하지 않겠어. <여보게,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화낼 거야 없지 않나. 말이 좀 거칠어졌기로 양해하게. 이래 뵈어도 나는 협동조합 간부란 말이야. 자네 따위는 어림도 없어……그러니 꾹 참아 나가야 해.> 그래 나는 <당신은 조합의 간부고 저는 목수에요. 그렇지만 성도 요셉도 목수였다는 걸 아셔야 해요. 우리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좇아 일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이 저보다 지위가 높다고 뽐내고 싶으면, 뽐내 보세요.> 하고 몰아세웠지. 나는 한참 협동조합 간부와 목수의 지위를 비교하고 누가 더 높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네. 그런데 아무래도 목수가 더 높아야 할 것 같아."

나무다리 영감은 잠시 생각에 잠기고 나서 말을 이었다.

"왜냐 하면 말이야. 일하는 사람이나 고통을 참는 자가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이니까……"

해도 어느덧 저물어, 짙은 잿빛 안개가 냇가며 교회 뜰 안, 그리고 공장 부근의 공지에 덮여 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갑자기 어둠이 찾아와 아래서는 등불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처럼 안개가 끝없는 골짜기를 뒤덮고 있을 때에는, 리파와 그녀의 어머니는 비록 가난한 집에 태어나 언제나 양순한 마음을 품고 가난에 쪼들리면서 살아왔으나, 한동안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 이 넓고 신비스러운 세상의 다양한 생활 속에서 자기네도 인간 축에 낄지 모르며, 이 세상에는 자기들보다 못한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고. 세 사람은 언덕에 앉아 있는 것이 무척 즐거웠다. 그들은 통쾌하게 웃으면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까지도 잊어버리고 앉아 있었다.

이윽고 이들은 집에 돌아왔다. 문 앞과 가게 옆에는 품팔이 일꾼들이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이 마을 농부들은 츠이부킨 영감의 집에서 일하기를 꺼려하였으므로 다른 동네에 가서 일군들을 데려와야 했었다. 지금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것은, 길다란 검은 수염이 달린 사람인 듯하였다. 가게는 열려 있었다. 귀머거리 스체판은 어떤 소년과 장기를 두고 있었다. 일꾼들 가운데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고, 어제의 품값을 달라고 떠드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츠이부킨은 내일까지 그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 품값을 주지 않았다.

츠이부킨 영감은 웃저고리를 벗어붙이고 조끼 바람으로 벗나무 그늘에서 아크시니아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식탁에는 등불이 켜져 있었다.

"영감님……"하고 한 사람의 일꾼이 문밖에서 빈정대었다.

"그럼 반만이라도 주시오."

그러자 밖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윽고 그들은 다시 나지막한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나무다리 영감은 차를 마시려고 자리에 앉았다.

"방금 시장에 다녀왔네."

하고 그는 입을 열었다.

"여보게들! 그 길로 즐거운 기분으로 교회에 들렀지.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이 생겼어. 대장깐 사쉬카가 담배를 사고 반 루블짜리 금화를 주인에게 내주었더니, 그게 가짜 돈이었단 말이야."

나무다리 영감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하려고 애쓰면서도 목이 쉬어 여러 사람들의 귀에 잘 들리지 않았다.

"그 반 루블의 금화가 가짜란 말일세쎄. 어디서 받았느냐고 물었더니, 아니심·추이부킨의 결혼식에 갔을 때에, 아니심한테서 받았다는 거야. 사람들은 경관을 불러 고발을 하데그려……그리고리이·페트로비치, 이 일에 걸려들지 않도록 하게. 입을 다물어야 해……."

"영감님!"

아까와 같은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영감님!"

침묵이 흘렀다.

", 여보게들! 여보게들……"

나무다리 영감은 중얼거리면서 일어났다. 졸려서 못 견딜 지경이었던 것이다.

"여보게들, 차와 설탕은 먹었겠다, 이제 잘 때가 됐어. 나도 이제는 썩은 나무토막이 되어 버렸어. 손발이 썩어가니……, , !"

그는 밖으로 나가면서 덧붙였다.

"죽을 날이 가까운가 보지!"

그의 입에서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츠이부킨 영감은 차를 마시다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길로 사라진 나무다리 영감의 발자국소리를 듣고 있는 듯싶었다.

"대장쟁이 사쉬카가 거짓말을 했나 보죠."

아크시니아는 노인의 생각을 짐작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영감은 집에 들어가 조그마한 꾸러미를 갖고 나왔다. 그 속에는 몇 닢의 새 금화가 반짝이고 있었다. 영감은 금화를 깨물어 보기도 하고, 쟁반 위에 던져 보기도 하였다.

"이거 분명히 가짠걸……"

영감은 아크시니아를 바라보면서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이 금화는……그때 아니심이 선물로 갖고 온 거다. 이걸 갖고 가서……"

영감은 그 꾸러미를 아크시니아에게 내주면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우물에 던져 넣어……보기도 싫다. 그러나 이건 비밀이야. 무슨 밀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사모와르도 가져가고 불을 꺼라……"

헛간에 앉아 있던 리파와 푸라스코비야는 등불이 꺼져가는 것이 보였다. 다만 이 층 와르바라의 방에만 붉은 등불이 켜져 있었다. 거기에는 고요하고 아늑한 행복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푸라스코비야는 딸이 부잣집에 출가한 사실에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집에 왔을 때, 황송한 듯이 미소만 머금고 문깐방에 불안한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리파도 새 생활에 잘 익숙해지지 못하였다.

남편이 집을 떠난 후로는 침실에서 자지 않고 헛간이나 부엌에서 자곤 하였다. 그녀는 마루를 닦고 빨래를 하는 것이 일과였으므로 식모나 나름이 없다고 스스로 느끼는 것이었다.

오늘도 교회에서 돌아온 모녀는 부엌에서 요리사들과 함께 차를 마시고 나서 헛간에 가서 썰매와 바람벽 사이의 마룻바닥에 드러누웠다. 헛간은 어둠컴컴하고 말먹이 냄새가 풍겨왔다. 집안에 등불이 점점 꺼져가고 귀머거리가 가게 문을 닫았다. 일군들이 뜰 안에서 잠자리를 찾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작은 흐르이민네 집에서는 아름다운 아코디온 소리가 들려왔다. 푸라스코비야와 리파는 곧 잠들어버렸다.

잠결에 무슨 발자국소리가 들려와, 눈을 뜨고 보니 달빛이 누리 위에 넘쳐흐르고, 헛간 입구에 아크시니아가 침구를 안고 서 있었다.

"여기는 좀 서늘할 테지……"

하며 아크시니아는 헛간에 들어가 문지방 옆에 누웠다. 달빛이 그녀의 은 몸을 애무하였다.

그녀는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더위 때문이었는지 옷을 홀랑 벗어 버리고, 한숨을 내쉬며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었다. 달빛으로 하여 그녀의 모습은 한결 아름답고 우아하게 보였다. 이윽고 다시 발자국소리가 들리더니 츠이부킨 영감이 흰 잠옷 바람으로 문 앞에 나타났다.

"아크시니아, 여기 있냐!"하고 영감은 물었다.

"."

그녀는 화가 치민 듯이 대꾸하였다.

"우물에 돈을 집어넣어!"

"우물에 집어넣다니요? 그게 될 말이에요. 일꾼들에게 주어버렸어요……."

"저런!"

영감은 깜짝 놀라 외쳤다.

"아니, 아니, 저 망할 것이……"

영감은 손을 내저으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는 길을 가면서도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얼마 후에 아크시니아는 길게 한숨을 쉬더니, 침구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는 왜 이런 집에 저를 시집보냈어요?"하고 리파가 말하였다.

"여자란 누구나 시집을 가야 하는 법이야. 그리고 네가 이 집으로 오게 된 것은 내가 우겨서 한 일은 아니냐."

모녀는 걷잡을 수 없는 비애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저 높은 하늘에서, 아니 그보다 더 높은 별나라에서 누군가 이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살펴 주리라고 믿는 것이었다. 어쨌든 지상에서는 아무리 큰 죄악이 번식하고 있어도 밤은 역시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저 하나님의 세계도 밤이면 그러하리라. 거기에는 진리와 정의가 있으리라. 그리하여 지상의 모든 것은 밤이면 달빛에 녹아 버리듯이, 인간도 그 정의와 진리에 동화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모녀는 서로 몸을 의지한 채 고요히 잠들어버렸다.

 

6

아니심이 금화를 위조한 죄로 감옥에 갇혔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한 것은 오래전부터의 일이었다. 어느새 반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겨울도 지나고 봄이 돌아왔다. 집안사람이나 마을 사람 할 것 없이 그가 감옥살이를 하는 것을 벌써 잊어 버리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간혹 밤에 이 집 앞을 지나가거나 가게를 지나가게 되면, 문득 그가 감옥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떠오르곤 하였다. 그리고 교회에서 기도를 드릴 때도 그가 감옥에서 재판 날을 기다리고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집안에 검은 그림자가 감돌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어느 때보다도 분위기가 침울하고 지붕에는 녹이 슬고, 가게로 통하는 쇠로 비장을 만든 무거운 녹색 문에는 여러 곳에 금이 가 있었다. 츠이부킨 영감도 몹시 우울해 보였다. 그는 머리와 수염도 깎지 않아 언제나 텁수룩하였다. 인제는 날쌔게 마차에 뛰어오르거나 거지에게 <하나님한테 가서 구걸해!>하고 외치는 일도 없었다. 그는 몸이 점점 쇠약해졌다. 뿐만 아니라 일꾼들은 전처럼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경관은 뇌물을 받아먹어 가면 조서를 꾸몄다. 그리하여 영감은 술 밀매에 대한 취조를 받기 위해 세 번이나 불려갔다. 증인은 나타나지 않아 사건처리가 하루하루 연기되어 갔다. 그러니 영감이 날로 쇠약해질 수밖에.

그는 때때로 아들을 면회하러 가기도 하고, 사람을 고용하기도 하고, 누구에게 탄원서를 내기도 하고, 교회에 성기(聖旗)를 기증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아니심이 갇힌 감옥의 간수에게 <이성의 소리를 알아들을지어다>라고 에나멜로 새겨진 은잔과 길다란 수저를 선사하였다.

"우리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하고 와르바라는 말하였다.

", 거시기, 여보! 장관에게 편지를 낼 만한 사람을 찾아보아요……재판할 때까지 보석이라도 되게요……그 애는 얼마나 고생이겠어요?"

와르바라는 애가 타기는 했지만, 근자에 와서는 피둥피둥 살이 찌고 얼굴도 희멀겋게 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자기 방에 등불을 많이 켜놓고, 집안이 말쑥하게 보이도록 감독하였다.

그리고 손님들이 오면, 으레 쨤과 사과와 치즈를 대접하곤 하였다. 귀머거리와 아크시니아는 가게를 돌보고 있었다. 한편 부초키노의 벽돌공장이 세워지고 있어, 아크시니아 손수 마차를 몰고 한 번씩 그리로 가 보곤 하였다. 혹시 도중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보리밭에서 고개를 치켜든 뱀처럼 목을 빼 들고 천진스러우면서도 엉큼한 미소를 던지는 것이었다.

리파는 사순제(四旬祭) 전에 낳은 갓난 어린애를 보살피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어린애는 몸집이 작고 메말라 불쌍하게 보였다. 그리하여 그 애가 소리를 지르거나, 주위를 둘러보거나, 어엿이 한 인간으로서 니키포르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어린애는 언제나 요람 속에 누워있었다. 리파는 가까이 다가가서 말을 건네곤 하였다.

"안녕하세요, 니키포르·아니시미치!"

그리고는 다급히 아기에게 입을 맞춘 다음에, 문 쪽으로 물러서서 다시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니키포르·아니시미치!"

그러나 아기는 발을 버둥거리며 엘리자르프 할아버지처럼 울음과 웃음이 뒤섞인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드디어 재판 날짜가 결정되었다. 츠이부킨 영감은 닷새 전에 시로 떠났다. 집에는 증인으로 일꾼 몇 사람이 불려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어떤 늙은 직공도 호출장을 받고 떠났다.

재판은 목요일에 있었다. 그러나 츠이부킨 영감은 일요일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고, 아무 소식도 없었다. 화요일 저녁 와르바라는 열린 들창가에 앉아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옆방에서는 리파가 갓난아기를 달래고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고,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듯이 말하였다.

"너도 곧 이만큼 크게 자랄 테지. 그리고 밭에 나가 나와 함께 일해요!"

<, !> 와르바라는 언짢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 애와 함께 일을 하다니. 무슨 못난 노리냐? 그 애는 장사를 해야 해……"

리파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방금 한 말을 잊어버리고 다시 이렇게 얼러대는 것이었다.

"이제 이만큼 크게 자라면 밭에서 나와 함께 일해요."

"저 애는 또 그런 소리를 하고 있어!"

리파는 니키포르를 안고 문 옆에 서서 물었다.

"어머니, 저는 이 애가 왜 이렇게 귀여워요?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왜 이렇게 또 불쌍해요?"

그녀는 눈물이 글썽하여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아이 좀 보세요. 새 날개나 빵부스러기처럼 가벼워요. 그렇지만 저는 이 아이가 좋아요. 벌써 어른이 다 된 것 같아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입도 떼지 못하지만, 저는 이 아이의 작은 눈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있어요."

와르바라의 귀에는 저녁차가 정거장에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인이 타고 오지 않았을까, 그녀는 리파의 말을 귀 밖으로 흘려 버렸다. 수째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그리고 두렵다기보다는 커다란 호기심에서, 전신이 떨려왔다. 그녀는 일꾼들을 가득 실은 마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증인으로 불려간 사람들이 정거장에서 돌아오는 것이었다. 마차가 가게 옆을 지나갈 때 어떤 늙은 직공이 마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와, 사람들과 인사를 하며 말을 주고받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재산과 권리를 빼앗기고"하며 그는 큰 소리로 말하였다.

"7년 동안 시베리아에 유형(流刑)이래요."

아크시니아가 가게 뒷문으로 나왔다. 그녀는 방금 석유를 팔고 있던 참이라, 한족 손에는 성유병을 들고 다른 손에는 깔대기를 든 채, 입에는 몇 잎의 은화를 물고 있었다.

"아버님은 어데 계세요?"하고 그녀는 은화를 입에 문 채 물었다.

"정거장에 계세요."

일꾼이 대답하였다.

"좀 더 어두워지면 오신대요."

아니심이 유형의 선고를 받았다는 말이 집안에 퍼지자 부엌에서 일하던 요리인은 자기 처지로 보아서 울어야겠다고 생각했던지, 장례 때처럼 엉엉 울기 시작하였다.

"아니심! 당신이 가시면 우리는 누구를 믿고 살겠어요. 독수리처럼 훌륭한 분이었는데"

개들이 놀라서 짖기 시작하였다. 와르바라는 창가에 뛰어가서 슬픔에 겨운 목 매인 소리로 요리인을 나무랬다.

"스체파니다, 조용히 해! 제발 남의 마음을 괴롭히지 말아!"

모두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사모바르를 끓이는 것까지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다만 리파만은 아무것도 모르고 아기와 희롱을 하고 있었다.

츠이부킨 영감이 정거장에서 돌아왔다.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는 식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말없이 이방 저방을 돌아다녔다. 아직 저녁 식사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무도 봐주는 사람이 없었군요!"

와르바라는 영감과 단둘이 되자 말을 꺼내었다.

"제가 뭐랬어요? 높은 사람을 찾아봐야 한다니까요. 당신이 제 말을 듣지 않아서 그래요……탄원서라도 냈더라면……"

"나도 여러모로 애써봤지만……"영감은 손을 내저으며 말하였다.

"재판할 때 그 애를 변호해 준 사람한테도 가봤지만 인제는 도저히 손댈 여지가 없다고 말하는 거야. 그리고 그 애도 역시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고 하더군. 그래도 나는 재판을 할 때마다 변호사를 찾아가 선금을 쥐어주곤 했지. 한 주일이 지나 다시 한번 가 볼 테야.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될 테지……"

영감은 다시 집안을 돌아보러 나갔다가 들어와서 마누라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아무래도 나는 병이 날 것 같군.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 같아서 통 생각을 할 수 없군그래."

그는 리파가 듣지 못하도록 문을 닫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나도 돈복은 꽤 없는 놈이야. 아니심이 장가들기 전인 부활제 전 주일에, 그 녀석이 금화를 나한테 갖다준 것을 당신도 보았지? 그때 한 보따리는 감춰 두었지만, 또 한 보따리는 내 돈에 섞어버렸어…… 그런데, 내 숙부가 아직 살아 있을 때, 그분은 장사를 위해 모스크바나 크림으로 돌아다녔었지 - 주여, 그분의 영혼을 구하소서! 숙부는 글쎄, 주인이 장사를 떠난 동안에 다른 남자하고 살았다지 뭐요. 숙부는 자식이 반 타나 있었지만, 술에 취하면 우스게소리로 어느 놈이 내 자식이고, 어느 놈이 남의 자식인지 모르겠다고 곧잘 말했다는군. 성미도 그쯤 되면 뱃속이 편할 테지. 그처럼 나는 지금 어느 돈이 진짜이고 어느 돈이 가짜인지 알 수 없어. 그래 내 눈엔 모두가 가짜로만 보이는군."

"그럴 리가 있어요?"

"정거장에서 차표를 사고 3루블 주었는데 그것까지도 가짜 돈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아. 가슴이 다 뛰더군그래. 아무래도 병이 날 것 같애……"

"모든 걸 하나님의 뜻에 맡길 수밖에 없어요……그런데 여보……"

와르바라는 머리를 살레살레 흔들면서 말하였다.

"당신은 잘 생각해 두셔야 해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그리고 당신도 이제는 꽤 늙으셨으니까, 만일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집안 식구들이 저 손자를 얼마나 업신여기겠어요. 나는 그 생각을 하면 몸서리가 나요. 그 애는 애비 없는 자식이나 마찬가지지 뭐예요. 에미는 어린데다가 아둔하고……그러니 당신은 손주 앞으로 재산이라도 남겨둬야 하지 않겠어요? 부초키노의 땅이라도 주도록 했으면 좋겠어요. 아무튼 잘 생각해서 하세요!"

와르바라는 영감을 설득시키기 위해 말을 이었다.

"저 귀여운 자식이 불쌍해 못 보겠어요. 내일이라도 가서 유언장을 쓰세요. 지체할 게 뭐 있어요?" ", 그 녀석을 깜박 잊었군그래……녀석을 좀 봐야겠어. 그래 잘 노나? 아무튼 잘 키워야 할 텐데……"

영감은 문을 열고 구부러진 손가락으로 리파를 불렀다. 그녀는 아기를 안고 시아버지 옆으로 다가왔다.

"얘 리핀카야! 뭐든지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도록 해!"

하고 여감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사양 말고 먹어라. 조금도 아깝지 않다. 언제나 육신은 건강해야 한다……"

영감은 손자의 머리 위에 성호를 그었다.

"이 애를 잘 돌봐 줘. 애비 없는 자식이나 다름이 없으니……"

영감의 두 볼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울먹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침소에 가서 깊이 잠들어 버렸다. 그는 한 주일 동안이나 뜬 눈으로 보냈던 것이다.

 

7

츠이부킨 영감이 거리에 나갔다가 얼마 후에 돌아왔다. 누가 아크시니아에게 - 영감이 공증인을 찾아간 것은 유언장을 쓰기 위해서이며, 아크시니아가 벽돌공장을 세운 부초키노 땅을 손자에게 넘겨주려고 한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그것은 아침나절이었으며, 그때 영감은 마누라와 층계 다리 옆의 벗나무 밑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크시니아는 거리와 뜰에 면한 가게의 문을 닫고, 자기가 맡은 열쇠를 모두 모아서 시아버지 발밑에 동댕이치며 말하였다.

"당신들을 위해 이 이상 더 일하기가 싫어요!"

그녀는 앙칼진 목소리로 내뱉고는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저는 이 집 며느리가 아니라 식모지 뭐예요! 동네 사람들은 저를 비웃으며 저마다 츠이부킨네 집에서는 좋은 식모를 뒀다고 말하지 뭐예요. 저는 이 집에서 고용살이를 하고 있는 게 아네요. 저는 거지도 아니고, 노예도 아녜요. 저에게도 버젓이 아버지, 어머니가 있어요."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채 눈을 부라리며 시아버지를 노려봤다. 얼굴과 목덜미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는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저는 더 이상 일하지 않겠어요! 저도 이젠 지쳤어요. 날마다 가게 방에 앉혀 두고, 밤이면 술 때문에 쏘다니게 하고……, 집안일은 온통 저한테 다 떠맡겼다가, 땅은 저 유형수의 여편네나 애새끼에게 물려 주다니……그년은 이 집 주인이고 저는 종년이군요! 뭐든지 다 주세요. 그 대신 목을 졸려 뒈질 날이 있을 거라고 말하세요. 저는 친정으로 가겠어요. 저 대신 다른 년을 앉혀 두세요. 에이 더러워!"

츠이부킨 영감은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식들을 꾸짖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자기 식구한테서 이런 난폭한 소리를 들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영감은 너무나도 놀라와 집안에 뛰어들어 가서 찬장 뒤에 숨어 버렸다. 와르바라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없을 정도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벌이라도 쫓듯이 두 손을 코밑에 대고 흔드는 것이었다.

"아니 저게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녀는 겁에 질린 듯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아니 대체 무엇 때문에 저 야단일까? 저런 얘야!……남이 들을라! 좀 조용해라……조용해!"

"부초키노 땅을 죄수의 여편네에게 준다면서요?"하고 아크시니아는 큰소리로 외쳤다.

"뭐든지 몽땅 줘 버리세요. 저는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까요! 모두들 뒈져 버려라지! 당신네들은 모두가 악당이에요! 제가 이 눈으로 본걸요! 당신네는 손님들의 돈을 빨아먹는 도둑놈들이에요. 늙은이나 젊은이나 다 마찬가지예요! 세금을 내지 않고 워드카를 팔고 있는 건 누구예요? 그리고 당신네들은 위조 금화를 상자로 하나 잔뜩 갖고 계시지요! 좋아요! 저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아요!"

활짝 열린 대문밖에는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뜰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남들이 보면 어때요?"

아크시니아는 큰소리로 외쳤다.

"저는 톡톡히 망신을 줘야 속이 후련하겠어요. 당신네들은 불에 타 죽어도 무방해요! 차라리 제 발밑에 꿇어앉으세요! 여보 스체파!"

그녀는 귀머거리 남편을 불렀다.

"빨리 이 집을 나가요! 친정엘 가요. 저는 이 죄인들과 함께 살고 싶지 않아요! 어서 떠날 차비나 하세요!"

뜰 안에 매여 놓은 여러 개의 줄에는 옷가지가 널려 있었다. 아크시니아는 아직 덜 마른 자기 치마며 쟈켓 등속을 걷어서 귀머거리의 손에 던졌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그녀는 빨랫줄 옆을 뛰어다니며 옷가지들을 모조리 나꿔채며, 남의 것은 내던지고 발로 마구 짓밟아 버렸다.

", 저 애를 데리고 가요!"

와르바라는 괴로운 목소리로 말하였다.

"무슨 여자가 저래! 부초키노를 줘 버리세요. 하나님을 위해 줘버리세요!"

"어디서 저따위 것이 있어!"

대문깐에서 구경꾼들이 말하였다.

"저것도 여자야? 아이구, 저 성난 꼴 좀 봐 - 지독하군!"

아크시니아는 빨래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다. 거기서 리파가 혼자 빨래를 하고 있었다. 식모는 냇가로 옷을 빨러 나가고 없었던 것이다. 난로 옆에 놓아둔 대야와 솥에서는 김이 올라 부엌 안은 안개라도 낀 듯이 자욱하고 무더웠다. 마루 위에는 아직 빨지 않은 옷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갓난아기는 떨어져도 다치지 않도록 옆에 있는 벤치 위에 눕혀 놓았다. 그리하여 아기는 벌거숭이 발을 버둥거리고 있었다. 아크시니아가 들어섰을 때, 라파는 바로 아크시니아의 속옷을 빨랫감에서 끄집어내어 대야에 담그고, 상위에 놓아둔 커다란 국자로 끓는 물을 퍼부어려는 참이었다.

"이리 줘!"

아크시니아는 표독한 눈초리로 리파를 바라보고 대야에서 자기 옷을 끄집어내었다.

"네년에게 내 속옷을 맡길 줄 알아? 넌 유형수의 여편네야. 자기 주제나 똑똑히 알아!"

리파는 아크시니아의 얼굴을 쳐다보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처음에는 무슨 영문인지 몰랐으나, 아크시니아가 갓난애를 노려보는 사나운 눈초리를 깨닫자, 그 까닭을 알고 온몸이 새파랗게 질리는 것이었다.

"네 놈이 내 땅을 빼앗았지!"

아크시니아는 이렇게 말하며, 끓는 물이 들어있는 국자를 잡고 갓난애에게 마구 퍼붓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 마을에는 뜻밖에도 생전 들어보지 못한 비명 소리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리파와 같이 작고 연약한 여자가 어떻게 그런 비명을 지를 수 있나 하고 의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윽고 뜰 안도 조용해졌다.

아크시니아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눈웃음을 치며 잠자코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귀머거리는 옷가지를 한 아름 안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더니, 다시 줄에 널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식모가 돌아올 때까지 아무도 부엌에 들어가 보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8

니키포르는 마을의 병원에 운반되었으나 그날 밤으로 죽어 버렸다. 리파는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죽은 아이를 싸 안고 집으로 향하였다.

바로 얼마 전에 세운 커다란 창문이 달린 병원은 언덕 위에 높이 솟아 있었다.

병원 유리창에 저녁노을이 비쳐 마치 불이라도 일어난 듯이 이글거렸다. 그 아래에는 조그마한 마을이 있었다. 리파는 언덕길로 내려가 마을로 들어가기 전에, 어느 작은 연못에 가 앉았다. 마침 어떤 아낙네가 말을 끌고 와서 물을 먹이려고 하였으나, 말은 물을 먹으려 하지 않았다.

"뭐가 먹고 싶어?"

하고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뭐가 먹고 싶어?"

빨간 셔츠를 입은 소년이 연못가에서 아버지의 장화를 씻고 있었다. 그 밖에는 마을에나 언덕이네 인기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물을 먹으려고 하지 않는군요……"

라파는 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윽고 그 아낙네도 집에 돌아가고, 소년도 장화를 들고 내려갔다. 이제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태양도 금빛과 자줏빛 비단을 휘감고 제 잠자리로 들어갔다. 붉은빛과 연자줏빛으로 물든 가느다란 구름은 태양의 안면(安眠)을 보고하려는 듯이 하늘에 흩어져 있었다. 멀리서 해오라기의 울음소리가 마치 외양깐에 갇힌 암소의 울음소리와 같이 구슬프게 들려왔다.

이 괴상한 새 소리는 밤이면 언제나 들려왔으나, 그것은 어떤 새이며, 살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병원이 있는 언덕 위와 바로 연못가의 숲속, 그리고 마을의 저쪽 벌판에서는 꾀꼬리가 울고 있었다. 그리고 뻐꾸기가 누구의 나이를 잘못 세어 다시 세기 시작하였다. 연못 속에서는 개구리들이 찢어지는 듯한 심술궂은 목청으로 극성스럽게 울어댔다. 그 소리는 이렇게 지껄여대는 것 같았다. <너 같은 건 그럴 수밖에 없어! 너 같은 건 그럴 수밖에 없어!> 소란한 밤이었다. 이 동물들은 이런 밤에는 아무도 가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큰 소리로 노래 부르는 것 같았다. 심술궂은 개구리들까지도 <인생은 허망하다. 일 분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인생을 찬미하고 노래하라!>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하늘에는 달빛이 은은하고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리파는 오랫동안 연못가에 앉아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일어나 발길을 옮겨 놓았을 때에는 마을은 잠들어 등불 하나 눈에 뜨이지 않았다. 집까지는 2, 3십 리밖에 되지 않지만, 거기까지 갈 힘이 없었다. 아니, 가 보려고 생각할 기력조차 없었다. 지금까지 환하던 달이 오른편으로 기울어졌다. 뻐꾹새는 목매인 소리로 <조심해라, 길을 잘못 들라!>하고 리파를 비웃는 듯이 외치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걷기 시작하였다. 어느새 머플러가 날라가 버리고 없었다. - 그녀는 하늘을 쳐다보며 - 지금쯤 아기의 영혼은 어디 있을까, 자기 뒤를 따라오고 있을까, 혹은 별이 반짝이는 저 높은 하늘을 헤메고 있을까, 그리고 벌써 자기 어머니를 잊어버리지나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이런 밤중에 광막한 벌판에서 우울할 때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거나, 어떤 즐거운 외침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 일인가. 봄과 여름을 가리지 않고, 인간이 살아 있건 말건, 언제나 밤하늘에서 굽어보는 달을 쳐다볼 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가슴속에 슬픔을 지니고 혼자 남아있다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일까? 이럴 때 어머니 푸라스코비아가 곁에 계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 않으면 나무다리 영감이라도, 식모라도, 일꾼이라도 옆에 있어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부우!>해오라기가 울었다.

<부우!>

그러자 갑자기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에게 마차를 메우게, 와빌라!"

바로 앞 한길가에서 모닥불이 타고 있었다. 불꽃은 꺼졌으나 남은 숫덩이가 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말이 풀을 뜯는 소리가 들리고 어둠 속에 두 대의 마차가 어렴풋이 눈에 보였다. 한쪽 마차에는 통을 싣고, 다른 마차에는 여러 개의 자루를 싣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사나이 모습도 보였다. 한 사람은 말에게 멍에를 메우고, 다른 사람은 뒷짐을 지고 모닥불 옆에 서 있었다. 마차 옆에서 개가 으르렁거렸다. 말을 끌던 사람이 멈칫하며 말하였다.

"누가 이리로 오나 보군!"

", , 샤리크 잠자코 있어!" 하고 다른 사람이 개에게 소리쳤다.

그것은 늙은이의 목소리 같았다. 리파는 걸음을 멈추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옵소서!>

늙은이는 리파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저 개가 물지 않을까요?"

"괜찮아요. 그냥 지나가세요, 달려들지 않을 테니까……."

"저는 병원에서 오는 길이에요."하고 리파는 말하고 나서, 잠시 후에 이렇게 덧붙였다.

"애기가 죽어서요, 지금 집으로 안고 가는 길이에요."

늙은이는 기분 언짢았던지 뒤로 물러서며 말하였다.

"너무 상심마오.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니까요."

늙은이는 이렇게 말하면서 말을 잡은 사람을 향해 외쳤다.

"뭘 그렇게 꾸물거려. 빨리 해!"

"지름대가 보이지 않는군요."

"또 네놈의 버릇이 튀어나왔구나."

늙은이는 숯덩이를 들고 후 불었다. 그의 눈과 코가 빨갛게 비쳤다. 이윽고 그는 지름대를 찬은 다음에 불을 들고 리파의 얼굴을 비쳐 보더니 동정하는 듯한 어조로 말하였다.

"애기 어머니로군! 어머니는 으레 자기 자식 때문에 고생하게 마련이지요."

늙은이는 이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와빌라는 불덩어리 위에 무엇을 내던지고 발로 짓밟아 버렸다. 그러자 주위는 갑자기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거기에는 다시 벌판과 별이 반짝이는 하늘만이 남아있고, 한편 단잠을 방해하는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모닥불이 피어오르던 자리에서 뜸북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이윽고 리파는 다시 두 대의 마차와 늙은이와 키가 후리후리한 와빌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두 대의 마차는 삐걱거리며 한길로 나섰다.

"할아버지는 이 마을에 사세요?"

하고 리파는 늙은이에게 물었다.

"아니요. 우리는 피루사노보에서 왔오."

"아까 할아버지를 보고 저는 마음이 놓였어요. 그리고 저분도 친절한 분이시군요. 저는 이 마을 사람인 줄 알았어요."

"어디까지 가여?"

"우클레예보까지요."

"그럼 이 마차를 타시오. 크지메노크까지 데려다 즐 테니까. 당신은 거기서 곧장 가면 될 테고, 우리는 왼쪽으로 돌아가고."

와빌라는 통을 실은 마차 위에 앉고 늙은이와 리파는 다른 마차에 올라탔다. 와빌라는 앞장을 서고 마차는 느릿느릿 길을 떠났다.

"이 아이는 온종일 괴로워했어요. 그 조그마한 두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어요. 말하고 싶었을 테지만 말할 수 없었겠지요. ,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저는 슬픔에 못 이겨 그만 마루에 쓰러져 버렸어요. 이윽고 다시 일어났다가 또 침대 앞에 쓰러졌어요. 할아버지 저 어린 것이 왜 죽기 전에 그렇게 괴로워했을까요. 어른이 괴로워하는 것은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아무 죄도 없는 갓난아기가 왜 그렇게 괴로워할까요?"

"그걸 누가 알 수 있나."

하고 늙은이는 대답하였다.

그들은 말없이 반 시진쯤 마차를 타고 왔다.

"우리는 모든 일에 왜 그런가를 알 수 없는 거야."하고 늙은이는 대답하였다.

"어떤 새든지 날개가 둘 달렸지, 넷 달린 것은 없거든. 그건 두 개의 날개로 날게끔 되어 있기 때문이야. 인간에 대하여도 전부는 알 수 없어. 그 절반이나 4분의 1 정도밖에 알 수 없게 되어 있어. 그러나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알아야 할 것만 알게 마련이지."

"할아버지, 저는 걸어가는 편이 낫겠어요. 가슴이 울려서 못 견디겠어요."

"괜찮을 테니 앉아 있어."

그녀는 하품을 하고 성호를 그었다.

"걱정말아요……" 늙은이는 되풀이해서 말하였다.

"조금도 상심말아요. 앞길이 창창한데……아직 앞으로 좋은 일도 생기고 궂은일도 생길 거요. 우리 러시아는 큰 나라니까 별일이 다 일어나지요."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사방을 돌아보았다.

"러시아에는 내가 못 가 본 데가 없어요. 또 여러 가지 일도 당했지요. 그러니 내 말은 허튼소리가 아니요. 일생동안에는 좋은 일도 있고, 궂은일도 있지요. 나는 남의 부탁으로 시베리아에 가 본 적도 있오. 흑룡강에도 가 보고 알타이의 산간벽지에도 가 봤어요. 시베리아에서 밭을 갈며 살아간 적도 있고요. 그러나 고향이 그리워서 돌아와 버렸지요. 우리는 도보로 왔어요. 도중에 배를 타고요. 그때의 일이 눈에 선해요. 빼빼 마른 나는 맨발에 누더길 걸치고 추위에 떨면서 빵조각을 씹었지요. 그런데 그 배에 타고 있던 어떤 신사가 나를 보고 가엾어서 눈물까지 흘리며……<당신 빵도 검지만 당신 신세도 검구려.>하지 않겠어요. 그 신사가 세상을 떠났다면 하나님이여 은총을 베푸소서!

집에 돌아와 보니 말뚝 하나 없고 장작개비 하나 구경할 수 없군요. 마누라는 시베리아에 남겨 놓고 왔더니 거기서 죽고 말았어요. 그래 지금은 머슴살이를 하고 있지요. 나에게도 좋은 일도 있고 궂은일도 있지요. 그래 그런지 죽고 싶지는 않아요. 앞으로 20년쯤 더 살고 싶어요. 결국 따지고 보면 좋은 일이 더 많았어요. 우리 러시아는 아주 넓은 고장이니까."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늙은이는 다시 사방을 돌아보았다.

"할아버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며칠 동안이나 이 세상에 머물러 있어요?"

하고 리파는 물었다.

"그걸 우가 아나? 저 와빌라한테 물어보지그래. 저 녀석은 학교에 다녔으니까. 요새는 학교에서 안 가르치는 것이 없다더군 그래. 이봐 와빌라!"

늙은이는 와빌라를 불렀다.

"왜요?"

"사람이 죽으면 며칠이나 그 영혼이 세상에 남아있나?"

"아흐레쯤 되지요. 제 삼촌이 죽었을 때에는 열사흘 동안이나 집에 남아있었어요."

"그걸 어떻게 알아?"

"난로 속에서 열사흘 동안이나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났거든요."

"응 그럼 알았어. 이제 그만 가세."

늙은이는 이렇게 말하였으나 그의 말을 조금도 믿는 것 같지 않았다.

마차는 쿠지메노크 근처에서 다른 길로 접어들고, 리파는 걸어갔다. 벌써 동이 트기 시작하였다. 리파가 골짜기로 내려섰을 때 우클레예보의 농가와 교회는 안개 속에 묻혀 있었다. 싸늘한 기분이 감돌았다. 뻐꾸기의 울음소리가 아직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리파는 집에 돌아왔다. 식구들은 아직 가축을 풀어 놓지도 않은 채 모두들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층계에 앉아서 기다렸다. 츠이부킨 영감이 맨 먼저 나타났다. 리파를 보고 영감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곧 알아차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쭈삣거리다가 이렇게 말하였다.

", 리파, 그 어린것을 잘 돌봐 주지 않고……"

와르바라도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두 손을 부비며 흐느껴 울었다.

죽은 아이는 자리에 눕혀 놓았다.

"정말 착한 아이었는데,……하나밖에 없는 핏덩이를……네가 좀더 잘 보살펴 주었던들"

아침저녁으로 진혼제를 올렸다. 장례는 이튿날 치뤘다. 장례를 치루고 나서 손님들과 목사는 오래 굶은 사람처럼 음식들을 맛있게 먹는 것이었다. 리파는 식탁을 돌보고 있었다. 목사가 소금에 절인 고기를 포크로 찍어 들고 리파에게 말하였다.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요. 어린애 일로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손님들이 다 집에 돌아간 후에야 비로소 리파는 니키포르가 세사에서 없어졌다는 것과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어느 방에 가서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기가 죽고 나서는 자기 방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마치 너는 이 집에 아무 소용도 없는 거추장스러운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닌 게 아니라 식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니, 왜 눈물을 짜고 있는 거야?"

아트시니아가 문 앞에 나타나며 앙칼지게 말하였다. 그녀는 장례식의 예법대로 새것을 갈아입고 얼굴에는 분을 바르고 있었다.

"좀 조용히 하지 못해!"

리파는 울음을 멈출 수가 없어 더욱 크게 흐느껴 울었다.

"내 말이 안 들려?"

아크시니아는 화를 버럭 내며 말을 동동 굴렀다.

"내 말이 안 들려? 밖으로 썩 나가! 다시는 이 집에 얼씬도 말아. 죄수의 여편네라 할 수 없군. 저리 썩 나가!"

"왜들 이래?"

"아크시니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애를 잃었으니 오죽할까……우는 것이 당연하지……"

", 우는 것이 당연해요……"

하고 아크시니아는 영감의 말을 흉내 내었다.

"오늘 밤까지는 집안에 둬 두지만 내일부터는 얼씬도 못 하게 해 주세요. 이것도 당연한 일이에요……"

그녀는 한 번 더 흉내를 내고, 쓴웃음을 지으며 가게 쪽으로 사라졌다. 이튿날 리파는 아침 일찌감치 친정어머니가 있는 토루구예보 마을을 향해 길을 떠났다.

 

9

가게의 지붕과 문에 칠을 했더니 새집처럼 윤기가 흘렀다. 창가에는 전이나 다름없이 양아욱꽃이 놓여 있었다.

츠이부킨네 집과 뜰 안에서 일어난 사건도 3년이 지나니 저의 잊혀져 가는 것이었다.

츠이부킨 영감은 지금도 주인으로 자처하고 있었지만, 실권은 아크시니아가 쥐고 있었다. 물건을 사고파는 것도 그녀였다. 그녀의 동의가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벽돌공장도 잘 돌아갔다. 철도를 시설하는데 벽돌이 필요했으므로, 천 개에 24루블까지 값이 뛰었다. 시골 여자들이 정거장까지 벽돌을 날라다가 화차에 싣고 있었다. 그녀들의 품값은 하루에 25카페이에 불과하였다.

아크시니아도 호르이민 조합에 한몫 들어있었으며, 지금 그 공장은 <호르이민 회사>라고 불렀다. 그들은 정거장 옆에 술집도 내었다. 그리하여 근자에 아름다운 아코디온 소리가 공장에서가 아니라 이 술집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이 술집에는 우체국장도 자주 출입하였다. 그와 역장은 어떤 긴밀한 거래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작은 호르이민은 어느 날 귀머거리 스체판에게 금시계를 하나 선사하였다. 귀머거리는 언제나 그 시계를 호주머니에서 꺼내서는 귀에 갖다 대보는 것이었다.

아크시니아가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졌다. 그녀가 화려한 옷을 걸치고, 아침마다 즐거운 얼굴로 미소를 띄우며 공장을 향해 마차를 말리는 모습이며, 공장에서 이것저것 지시를 하는 것으로 보아, 아닌 게 아니라,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그리하여 지금은 집안 식구들뿐만 아니라, 공장 사람들과 마을 사람들까지도 그녀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녀가 우편국에 들리면 국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서 오세요. 이리 앉으십시오."

아크시니아에게 어떤 멋쟁이 지주가 말 한 필을 판 일이 있었다. 그는 나이가 지긋하면서 나사(羅紗)로 지은 웃저고리를 걸치고 에나멜 칠을 한 굽이 높은 장화를 신고 있었다. 지구는 말을 흥정할 때, 아크시니아의 미모에 반하여 그녀가 원하는 값에 순순히 응하였다. 그는 한참이나 그녀의 옷을 잡고, 명랑하고 교활한 그녀의 눈초리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어떤 편의라도 보아 드리겠습니다. 언제 좀 조용히 만날 기회를 가질 수 없을까요?"

"저는 어제라도 괜찮아요."

그 후부터 이 멋쟁이 지주는 맥주를 마시러 거의 날마다 가게에 들리곤 하였다. 맥주는 쑥처럼 씁쓸하였으나, 그는 머리를 내저으면서도 즐겨 마시는 것이었다.

츠이부킨 영감은 벌써 장사에서 손을 떼어 버렸다. 그는 어느 것이 진짜 돈이고, 또 어느 것이 가짜 돈인지 분간할 수 없어 돈을 모으는 재미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입을 다물고 이러한 자기 약점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기억력이 점점 쇠퇴하여 갔다. 그리고 식사를 제때 주지 않아도 독촉하는 법이 없었다. 인제는 식구들도 영감을 젖혀놓고 식사하는 데 익숙해졌다.

와르바라는 가금 이렇게 말하였다.

"저 영감은 어제저녁에도 밤참을 안 잡숫고 주무셨지 뭐야."

그녀는 이런 말을 태연스럽게 입 밖에 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영감은 겨울은 물론 여름에도 언제나 털외투를 걸치고 다녔다. 몹시 무더운 날만은 밖에 나가지 않고, 집 안에 있었지만 언제나 털외투를 걸친 그는 깃을 추켜세우고 마을을 산책하기도 하고, 정거장에 이르는 한길을 거닐기도 하였다. 그리고 때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교회 문 앞의 벤치에 잠자코 앉아 있는 것이었다. 길가는 사람들이 인사를 해도 별로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농부들을 싫어하였기 때문이다. 혹시 누가 무슨 말을 묻기라도 하면, 점잖게 몇 마디 대답하곤 하였다. 마을에서는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내쫓고 끼니도 제대로 주지 않아 영감은 구걸하러 다닌다는 소문이 퍼졌다. 어떤 사람들은 이 소문을 재미있게 듣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가엾게 생각하기도 하였다.

와르바라는 날로 피둥피둥 살이 찌고 희멀건 얼굴을 하고, 여전히 자선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아크시니아도 이 시어머니한테는 아무 간섭도 하지 않았다. 집에는 쨤이 많이 저장되어있었다. 햇과일은 미처 못할 정도였다. 와르바라는 날로 굳어가는 쨤을 처치하는 것이 큰 두통거리였다.

아니심에 대하여는 모두들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에게서 한 장의 편지가 왔다. 무슨 청원서 같은 커다란 용지에 전처럼 훌륭한 글씨로 된 운문(韻文) 편지였다. 아마 그의 친구 사모로도프도 함께 징역살이를 하는 모양이었다. 편지 끝에는 겨우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서투른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저는 언제나 앓고 있어요. 괴로워 죽을 지경입니다. 어서 구해 주십시오.>

맑게 개인 어느 가을날 저녁이었다. 츠이부킨 영감은 교회의 정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털외투의 깃을 높이 세우고 있었으므로, 코와 모자챙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길다란 나무 벤치의 한끝에는 청부업자인 엘리자로프 영감과 올해 나이 70인 학교 수위 야코프 영감이 함께 앉아, 이런 말을 주고받는 것이었다.

"자식들은 늙은이를 모셔야 해! 부모를 공경할 줄 알아야지!"

야코프 영감이 볼멘소리로 말하였다.

"저 집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내쫓았다지 않아. 지금 저 사람은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했으니 어디로 가겠나? 사흘이나 굶었대."

"뭐 사흘이나 굶었어?"

나무다리 영감은 깜짝 놀라며 말하였다.

"저 사람은 말없이 저렇게 앉아만 있으니 탈이야. 몸이 말이 아닌데도 왜 가만히 있느냐 말이야. 고소를 할 일이지 재판소에서도 그런 며느리는 칭찬하지 않을 텐데?"

"뭘 누굴 칭찬한다고?"

나무다리 영감은 말귀를 미처 알아듣지 못하고 이렇게 물었다.

"?"

"뭐니 뭐니 해도 그 며느리는 일꾼이지. 그 며느리가 없이 장사가 될 줄 아슈……그 여자에겐 죄가 없어요……"

"그렇다고 시아버지를 내쫓는 데가 어디 있어?"

야코프 영감은 성난 어조로 말하였다.

"자기가 벌어서 산 집이라면 또 모르지만……원 세상에 그런 년 처음 봤어, 도둑년이냐!"

츠이부킨 영감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자기 집이건 남의 집이건 따스하기만 하면 그만이야. 여편네가 바가지를 긁지 않고 잠자코 있으면 모두가 마찬가지지……"

나무다리 영감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나는 젊었을 때 마누라를 무척 사랑했지. 마누라는 양순한 여자였지만 언제나 입버릇처럼 집 한 채 사내라고 졸라대지 않겠나. 그리고 죽을 때가 임박해서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네. <여보 당신도 인제 걸어 다니지 않게 마차 한 대 사세요.> 그러나 나는 마누라에게 푸랴니크(과자의 이름)밖에는 아무것도 사주는 것이 없었거든."

"그 귀머거리 녀석이 바보야."

야코프 영감은 나무다리 영감의 말을 귀 밖으로 들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바보란 말이야. 거위처럼 아무것도 모르거든. 거위 대가리를 몽둥이로 때려봤댔자 소용 있나."

나무다리 영감은 공장으로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코프 여감도 따라서 일어났다. 두 영감은 길을 가면서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들이 약 50보쯤 걸어갔을 때 츠이부킨 영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마치 미끄러운 얼음판을 걷기라도 하는 듯이 비틀거리며 두 늙은이의 뒤를 따랐다. 마을에는 어느새 황혼이 깔려 있었다. 비탈진 언덕을 따라 뱀처럼 꾸불구불 기어오른 한길 이쪽에만은 아직도 저녁 햇빛이 남아있었다.

할머니들이 아이들과 함께 산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저마다 손에 버섯을 든 광주리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농가의 아낙네들과 처녀들도 정거장에서 떼를 지어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들은 정거장에서 벽돌을 화차에 싣는 일을 하고 있었으므로, 뺨이며 코가 붉은 벽돌가루로 덮여 있었다. 그녀들은 노래를 불렀다. 그녀들의 맨 앞에는 리파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편히 쉬려는 기쁨과 즐거움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들 사리에는 리파의 어머니도 끼어 있었다. 그녀는 한 손에 보자기를 들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숨을 몰아쉬며 걸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마카르이치!"

리파는 나무다리 영감을 보고 인사를 하였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오 잘 있었어. 리프잉카!"

나무다리 영감은 매우 기뻐하였다.

"얘들아, 이 돈 많은 목수를 사랑해다오! , ! 내 귀여운 것들아(나무다리 영감은 눈물을 찔끔거렸다) 내 귀여운 것들아!"

나무다리 영감과 야코프는 멀리 지나갔으나, 말소리는 아직도 들려오고 있었다. 이윽고 얼마 안 가서 츠이부킨 영감을 만났다. 모두들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렸다. 리파와 그 어머니는 뒤로 물러섰다. 영감이 가까이 다가오자 리파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그녀의 어머니도 인사를 하였다. 영감은 멈춰서서 모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입술을 바르르 떨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리파는 어머니의 보자기에서 빵조각을 꺼내어 영감에게 주었다. 영감은 그것을 받아서 씹어먹기 시작하였다. 날이 저물었다. 한길 위에 남아있던 저녁 햇살도 사라졌다. 사방에 어둠이 깃들고 싸늘한 공기가 감돌기 시작하였다. 리파와 그 어머니는 다시 걷기 시작하면서, 가슴에 연달아 성호를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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