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The Stranger)
이방인(The Stranger)
Albert Camus
제1부
1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가 온 것이다. '모친 별세, 명일 장례' 이것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양로원은 알제리에서 약 20킬로미터쯤 떨어진 마랑고에 있다. 2시에 버스를 타면 해지기 전에 도착할 것이다. 그러면 밤샘할 수도 있고 내일 저녁에는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사장에게 이틀간 휴가를 청했다. 사장은 이유가 이유이니 만큼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못마땅해 하는 눈치였다. 나는 이런 말까지 했다. "그건 제 탓이 아닙니다." 사장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때에야 나는 그런 소리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변명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가 나에게 조문이라도 해주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아마 모레, 내가 복상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무슨 말이 있겠지. 지금은 어쩐지 어머니가 죽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장례식이 지난 다음에는 기정사실이 되어 모든 것은 보다 공적인 격식을 갖추게 될 것이다.
2시에 버스를 탔다. 날씨가 몹시 더웠다. 나는 늘 하는 버릇대로 셀레스트네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레스토랑 사람들은 모두 나를 측은하게 여겨 슬퍼해주었고, 셀레스트는 나에게 "어머니란 하나밖에 없는 것이니 오죽하겠나!"라고 말했다. 내가 나올 때는 모두들 문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나는 좀 허둥거렸다. 왜냐하면 도중에서야 생각이 나서 엠마뉴엘의 집에 들러 검은 넥타이와 완장을 빌려야 했기 때문이다. 엠마뉴엘은 몇 달 전에 그의 아저씨를 잃었다. 나는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뛰어갔다. 이렇게 서두르고, 달음박질을 치고, 버스에 흔들리고, 게다가 가솔린 냄새, 하늘과 길 위에 반사하는 빛, 그러한 모든 것 때문에 아마 나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버스 속에서 거의 내내 잤다. 눈을 떴을 때는 어떤 군인이 어깨에 기대어 있었는데, 그는 나에게 웃어 보이며 먼데서 오느냐고 물었다. 나는 더 말하기가 싫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양로원은 마을에서 2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다. 나는 걸어서 갔다. 곧 어머니를 보려고 했으나 수위는 먼저 원장을 만나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원장은 바빠서 조금 기다려야 했다. 그동안 수위는 줄곧 이야기를 했다. 이윽고 나는 원장을 만났다. 원장은 나를 자기 사무실로 맞아들였다. 레종 도뇌르 훈장을 달았는데 키가 작은 노인이었다. 그는 맑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내가 내민 손을 붙들고 하도 오랫동안 놓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 손을 거두어야 할지 매우 난처했다. 원장은 서류를 뒤적이고 나서 말했다.
"뫼르소 부인은 3년 전에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당신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그가 나를 나무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정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나의 말을 가로막고 이렇게 말했다.
"변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당신 어머니의 서류를 읽어보았는데 어머님을 부양하실 수가 없더군요. 어머님을 돌보아줄 사람이 필요했겠지만 당신의 월급은 적었지요. 어쨌든 어머님께서는 여기 계셔서 더 행복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원장님"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덧붙여 말했다.
"어머님에게는 같은 연배의 친구들이 계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지나간 옛날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젊으니까 당신과 함께 살면 아무래도 적적해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집에 있었을 때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하며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양로원으로 들어가고 난 처음 며칠 동안은 가끔 우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타성 때문이었다. 몇 달 후에 양로원에서 모셔오겠다고 했더라도 역시 타성 때문에 울었을 것이다. 마지막 해에 내가 별로 양로원에 가지 않은 것은 그러한 이유도 약간 있었다. 그것은 또 일요일을 허비해야 하고, 버스 정류장까지 가서 차표를 사 가지고 두 시간 동안이나 여행을 해야 하는 것이 귀찮기 때문이기도 했다.
원장은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나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랬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어머니를 보고 싶으실 테지요."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일어섰다. 그랬더니 그는 문쪽으로 갔다. 계단으로 나서며 그는 설명했다.
"시체는 조그만 빈소로 옮겨 놓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원내에서 사망자가 생길 때마다 다른 사람들은 2, 3일 동안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거북한 일이 많답니다."
우리는 안마당을 지나갔는데 거기에는 늙은 사람들이 많이 보이고, 두세 명씩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지나갈 때에는 잠시 말이 없다가 지나간 뒤에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치 앵무새들이 재잘거리는 소리와 같았다. 어느 작은 건물의 문 앞에 와서 원장은 나를 두고 가버렸다.
"그럼 나는 가겠습니다. 뫼르소 씨,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사무실로 오십시오. 장례식은 아침 10시로 정해져 있습니다. 밤샘하실 것을 생각해서 그렇게 정한 것입니다. 끝으로 한 말씀 드리겠는데 어머님께서는 가끔 친구 분들에게 장례식은 종교장으로 해주었으면 하는 희망을 말씀하셨던 모양입니다. 종교장에 필요한 모든 준비는 해놓았습니다. 미리 알려드립니다."
나는 원장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어머니는 무신론자는 아니었지만 생전에 종교를 생각한 적은 없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하얗게 회칠을 하고 천장에 유리창이 달린 매우 밝은 방이었다. 의자 몇 개와 X자 모양의 틀들이 놓여 있었다. 방 한가운데 있는 두 개의 틀 위에는 뚜껑이 덮인 관이 가로놓여 있었다. 호두 기름을 칠한 널빤지 위에 대충 박은 번쩍거리는 나사못만이 드러나 보였다. 관 옆에는 흰 가운을 입고 머리에 짙은 빛깔의 스카프를 쓴 간호사가 있었다. 그때 수위가 내 뒤로 들어왔다. 뛰어온 모양이었다. 그는 좀 더듬거리며 말했다. "입관을 했습니다만 보실 수 있도록 뚜껑을 열어드려야죠." 그러면서 관으로 가까이 가려기에 나는 그를 제지했다. 그는 말했다.
"안 보시렵니까?"
"그만 두겠습니다"
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도 입을 다물어버렸다. 나는 그런 소리는 하지 않았어야 할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 난처했다. 조금 후에 그는 나를 쳐다보고 물었다.
"왜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나무라는 말투는 아니었고 그저 이유를 알아보려는 것 같았다.
"글쎄, 모르겠습니다."
나는 말했다. 그러자 그는 흰 수염을 비비꼬면서 나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하긴 그러실 겁니다."
푸르고 맑은 그의 눈은 아름다웠으며 얼굴빛은 조금 붉었다. 그는 나에게 의자를 권하고 자기도 내 뒤에 조금 떨어져서 앉았다. 간호사가 일어서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수위가 나에게 말했다. "종기가 나서 저렇답니다."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채지 못하고 간호사를 쳐다보았다. 간호사는 눈 밑을 붕대로 감고 있었는데 붕대를 머리까지 둘러쌌다. 코끝 언저리에도 붕대가 감겨 붕대가 평평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흰 붕대만이 보였다.
간호사가 가버리자 수위는 말했다.
"저도 가보겠습니다."
내가 어떤 몸짓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는 자리에서 일어선 채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내 등 뒤에 서 있는 것이 나로서는 거북했다. 방안에는 저녁이 가까운 오후의 아름다운 빛이 가득 차 있었다. 말벌 두 마리가 그림 유리창에 부딪치며 윙윙거렸다. 나는 졸음이 왔다. 수위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나는 말했다.
"여기 오신 지 오래 되십니까?"
"5년 됐습니다."
하고 그는 얼른 대답했다. 마치 처음부터 그 물음을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그리고 그는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마랑고 양로원에서 그가 수위로 일생을 끝마치게 될 것이라고 말했더라면, 아마 그는 매우 놀랐을 것이다. 그의 나이는 예순 살이며 파리 태생이라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그의 이야기를 가로막고 말했다.
"그래요? 이 고장 사람이 아니시군요."
그러고는 그가 나를 원장실로 안내하기 전에 어머니 이야기를 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산이 없는 평지에서는, 더구나 이 지방은 몹시 더워 속히 매장해야 한다고 했다. 그가 파리에 살았었고, 파리는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한 것도 그때였다. 파리에서는 시체는 사흘이고 나흘이고 두는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서둘러야 한다. 실감날 겨를도 없이 곧 영구차 뒤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그의 아내가 말했다.
"여보, 그만 둬요. 그런 이야기는 이분에게 할 게 아니에요."
영감은 낯을 붉히고 사과했다. 나는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어,
"아니요, 괜찮습니다."
하고 말했다. 수위의 이야기는 그럴듯하고 재미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수위는 조그만 빈소에서 그가 양로원에 극빈자의 자격으로 들어왔다는 말을 했다. 그는 건강하여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수위 자리를 자원했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당신도 역시 재원자냐고 물었더니 그는 아니라고 했다. 나는 그가 재원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 '그네들' 또 혹은 어쩌다가는 '늙은이들'이라는 말투를 쓰는 것을 듣고 놀랐다. 재원자 중에는 그보다 나이가 많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물론 그들과는 같지 않다. 그는 수위니까 어느 정도 그들에 대해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간호사가 들어왔다. 갑자기 땅거미가 내렸다. 곧 이어 유리창 위에 밤이 짙어갔다. 수위가 전등 스위치를 올렸을 때 갑자기 쏟아지는 불빛 때문에 나는 앞이 캄캄하도록 눈이 부셨다. 그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오라고 권했다. 내가 먹고 싶지 않다고 했더니 그는 밀크커피를 한 잔 가져오겠다고 말했다. 밀크커피를 매우 좋아하는 나는 가져오라고 했다. 조금 뒤에 그는 쟁반을 하나 들고 돌아왔다. 나는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시고 나니 담배가 피우고 싶었으나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 담배를 피워도 좋은지 어떨지 몰라 주저했다. 생각해 보니 조금도 꺼릴 이유는 없었다. 나는 수위에게 담배 한 대를 권하고 둘이서 함께 피웠다.
잠시 후 그는 말했다.
"어머니의 친구들도 밤샘하러 올 겁니다. 관습이 그러니까요. 의자와 커피를 가져와야겠습니다."
나는 전등 두 개 중 하나를 끌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흰 벽에 반사되는 불빛이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다. 수위는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전기가설이 그렇게 되어 있어서, 다 켜든지 아주 꺼버리든지 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는 나갔다가 들어와서 의자들을 늘어놓고 한 의자 위에다가 커피 주전자와 그 둘레에 찻잔을 두 개 놓았다. 그러고 나서 어머니 쪽으로 가서 나와 마주앉았다. 간호사도 방구석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으나 팔을 놀리는 것으로 보아 뜨개질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방안은 훈훈했고 커피를 마셔선지 덥게 느껴졌다. 열린 창문으로 그윽한 밤의 꽃향기가 들어왔다. 나는 좀 졸았던 모양이다.
무엇인가 스치는 소리에 눈을 떴다. 눈을 감았던 탓으로 방안의 흰빛은 더욱 눈부셨다. 내 앞에는 그림자 하나 없었고 모서리 하나하나 곡선 하나하나가 눈에 아프게 새겨질 정도로 뚜렷이 드러나 보였다. 그때 어머니의 친구들이 들어왔다. 모두 10명이었는데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그 눈부신 빛 속으로 살며시 걸어 들어왔다. 그들은 의자 하나 삐걱거리지 않고 앉았다. 나는 그때 그들을 본 것처럼 사람을 자세히 본 적은 예전에 없었다. 그들의 얼굴, 옷차림의 사소한 모양 하나까지도 내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도 말이 없어 이 세상 사람들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여자들은 거의 모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는데 허리에 졸라맨 끈이 불룩 나온 배를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나는 그때처럼 늙은 여자들의 배가 얼마나 커질 수 있는 것인가를 목격한 일이 없었다. 남자들은 거의 모두 몹시 여위고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을 보고 놀란 것은 눈은 보이지 않고 다만 주름살 한가운데에서 희미한 빛만이 보였다. 그들이 앉았을 때 거의 모두가 나를 바라보며 머리를 흔들었는데 이가 빠져 입술이 입속으로 오그라들었는데 그것이 내게 대한 인사인지 혹은 그들의 버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에게 인사를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들이 모두 수위를 둘러싸고 나와 마주앉아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 것을 내가 본 것은 바로 그때였다. 한순간 나는 그들이 나를 심판하기 위하여 거기에 와서 앉아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인상을 받았다.
잠시 후 한 여자가 울기 시작했다. 둘째 줄에 앉은 여자였는데 앞에 앉은 다른 여자에게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한결같이 짧은 소리로 우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언제까지나 그녀가 울음을 그치지 않을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도 않은 듯했다. 그들은 맥없이 침울한 낯으로 묵묵히 앉아 있었다. 모두들 관이라든지 지팡이라든지 무엇을 들여다보고 있었으며 그저 그 한 가지만을 보고 있었다. 여자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고 있는 여자가 나에게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매우 이상했다. 나는 그 울음소리가 듣기 싫었다. 그렇다고 그런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수위는 그 여자에게로 고개를 숙이고 무슨 말을 했으나, 그녀는 머리를 흔들고 뭐라고 중얼거리고는 다시 아까와 같은 템포로 계속 울었다. 수위가 그때 내 곁으로 와서 앉았다. 잠시 아무 말 없이 있더니, 내 얼굴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저 사람은 어머니와 매우 가깝게 지냈답니다. 어머니는 원내에서 그녀의 유일한 벗이었는데 이제는 그야말로 혼자가 됐다는군요."
우리들은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여자의 한숨과 흐느낌은 차츰 사이가 떴다. 그녀는 몹시 훌쩍거리더니 마침내 울음을 그쳤다. 졸음은 오지 않았으나 나는 고단하고 허리가 아팠다. 오직 대면하고 있기가 거북한 그 모든 사람들의 침묵이 있을 뿐이었다. 다만 때때로 이상한 소리가 들렸는데 나는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알고 보니 그것은 그중의 어떤 늙은이들이 볼의 안쪽을 빨아서 내는 야릇한 입 소리였다. 그들 자신은 그런 소리가 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제각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앞에 누워 있는 그 사자는 그들의 눈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인상까지 나는 받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잘못된 느낌이었다.
우리들은 모두 수위가 따라준 커피를 마셨다. 그러고는 무슨 일이 있었던지 모르겠다. 밤이 계속되었다. 어느 순간 눈을 떴을 때 노인들은 모두 쭈그린 채 잠이 들어 있었는데 한 사람만은 지팡이를 그러쥔 손등 위에 턱을 괴고 마치 내가 깨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나는 허리가 점점 심하게 아파서 눈을 떴다. 유리창 위로는 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조금 뒤에 노인 한 사람이 잠이 깨어 기침을 했다. 그는 체크무늬의 커다란 손수건에 침을 뱉고 있었는데 객담을 할 적마다 그것은 토한다기보다는 마치 잡아 뽑는 듯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깨웠고, 수위는 갈 시간이 되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들은 일어섰다. 피곤한 밤샘 탓으로 그들의 얼굴은 부옇게 보였다. 매우 놀라운 일이었지만 방문을 나서면서 그들은 모두 내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 마치 서로 이야기를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은 그날 밤이 우리의 친밀감을 두텁게 할 수 있었다는 것처럼.
나는 피곤했다. 수위가 자기 방으로 안내해주어 나는 간단히 세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밀크커피를 마셨는데 매우 맛이 좋았다. 밖으로 나왔을 때는 해가 높이 떠 있었다. 바다와 마랑고 사이에 있는 언덕들 위로 하늘 가득히 붉은 빛이 퍼지고 있었다. 언덕 위로 부는 바람은 소금 냄새를 실어오고 있었다. 아름다운 하루가 시작되려는 것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야외에 가본 일이 없었으므로, 어머니만 아니면 산책하기 얼마나 즐거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마당의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서 기다렸다. 신선한 흙냄새를 들이마셨고 이제는 졸립지 않았다. 회사의 동료들 생각이 났다. 바로 이 시간에 그들은 일터로 가려고 일어날 것이다. 나에게는 언제나 그것이 가장 어려운 시간이다. 나는 그러한 것을 좀 더 생각하는데 건물 안에서 울린 종소리에 주의가 끌렸다. 창문 위에서 한동안 소란한 소리가 나더니 다시 잠잠해졌다. 해는 좀더 높이 떠올랐다. 햇빛이 내 발을 쬐기 시작했다. 수위가 마당을 건너와서 원장이 나를 부른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원장실로 갔다. 원장이 시키는 대로 여러 가지 서류에다 서명을 했다. 나는 그가 줄무늬 있는 바지에 검은 웃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전화기를 손에 들고 나에게 말했다.
"장의사 사람들이 조금 전에 왔습니다. 관을 닫아야겠습니다만 그 전에 한 번 더 어머님을 보시겠습니까?"
나는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원장은 수화기에다 대고 목소리를 낮추어서 명령했다.
"피자크, 인부들에게 일을 하라고 말하게"
그러고는 장례식에 참석하겠다기에 나는 그에게 고맙다고 했다. 그는 자기 책상 뒤에 걸터앉아 짧은 다리를 포갰다. 우리 두 사람 외에 당번 간호사도 참석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덧붙여 말했다. 원칙적으로 재원자들은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고 밤샘만 시킨다는 것이었다.
"그건 인정에 관한 문제입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특별히 어머니와 절친한 친구였던 토마 페레라는 노인에게 장지까지 따라가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그때 원장은 빙그레 웃고 나서 말했다.
"그야 좀 어린애 같은 감정이지요. 그와 어머님은 떨어져 있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원내에서 놀리느라고 페레에게 '당신의 약혼자로군'하면 그는 웃곤 했어요. 그렇게 말해주는 것이 그들에게 좋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뫼르소 부인이 세상을 떠난 것을 그는 몹시 슬퍼합니다. 그래서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했지요. 그러나 왕진 의사의 권고에 따라 어젯밤에 밤샘만은 금했습니다."
우리들은 꽤 오랫동안 말없이 있었다. 원장은 일어서서 사무실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문득 그가 말했다.
"마랑고 신부님이 벌써 오시는군요."
마을에 있는 교회까지 가려면 적어도 45분은 걸릴 것이라고 그는 알려주었다. 우리는 내려갔다. 빈소가 있는 건물 앞에는 신부와 두 명의 어린 복사가 있었다. 한 아이는 향로를 들고 있었는데 신부는 은줄의 길이를 조절하려고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우리가 앞으로 가자 신부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나를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몇 마디 말을 건네고 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뒤를 따랐다.
방안에는 나사못이 박힌 관과 인부 네 사람이 있었다. 영구차가 길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원장의 말과 기도를 시작하는 신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나서는 모든 것이 매우 빨리 진행되었다. 인부들은 큰 보자기를 들고 관 앞으로 나섰고 신부와 그를 뒤따르는 어린이들과 원장과 나는 밖으로 나왔다. 내가 모르는 한 부인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뫼르소 씨입니다."
원장이 말했다. 나는 그 부인의 이름을 알아듣지 못했고, 다만 그녀가 당번 간호사임을 알았을 뿐이다. 그녀는 웃는 기색도 없이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길쭉한 얼굴을 숙였다. 그리고 우리들은 시체가 지나갈 수 있도록 나란히 비켜섰다. 우리는 인부들을 따라 양로원을 나왔다. 문 앞에 영구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란 모양에 니스 칠을 해서 번쩍거리는 것이 필통을 연상시켰다. 영구차 앞에는 장례를 진행하는 사람이 서 있었는데 그는 괴상한 옷차림을 한 키가 작은 사나이였다. 그리고 행색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노인 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가 페레 씨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위가 둥글고 태가 넓은 소프트 모자를 썼으며, 구두를 휘감은 듯한 바지를 입고 커다란 흰 칼라가 달린 셔츠에 지나치게 작은 검은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검은 점이 박힌 코밑에서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극히 가느다란 머리카락은 축 늘어져 가장자리가 못생긴 야릇한 귀밑으로 흘러내려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선지피처럼 새빨간 귀가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다. 장례지휘자가 우리들에게 자리를 정해주었다. 신부가 앞장을 서고 영구차 둘레로 인부 네 사람이 서고 그 뒤로 원장과 나, 끝으로 당번 간호사와 페레 씨가 따르기로 되었다.
하늘에는 벌써 햇빛이 가득히 퍼져 있었다. 햇빛은 땅 위로 무겁게 내리쬐기 시작했고 더위는 어느덧 심해졌다. 길을 떠나기 전에 왜 우리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모르겠다. 검은 옷을 입은 나는 더웠다. 모자를 썼던 노인은 모자를 벗었다. 고개를 돌리고 그를 보니 원장이 내게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머니와 페레 씨는 저녁마다 간호사와 함께 마을까지 산책을 나갔었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주위의 벌판을 바라보았다. 하늘 가까이 언덕에까지 줄지어 선 삼나무 숲이며, 검붉고 푸른 땅, 드문드문 있는 그린 듯한 집들을 통해, 나는 어머니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없이 서글픈 휴식시간과도 같았을 것이다. 오늘 대기에 넘치고 있는 햇빛으로 말미암아 떠는 듯 어른거리는 풍경은 보기에도 허탈하고 답답했다.
우리는 길을 떠났다. 그때 나는 페레가 약간 다리를 전다는 것을 알았다. 영구차의 속도가 점점 빨라져서 영감은 뒤떨어졌다. 영구차 곁을 따라가던 인부 한 사람도 지금은 뒤에 처져서 나와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태양이 하늘로 그렇게 빨리 떠오르는 것을 보고 놀랐다. 벌써 오래전부터 벌판에는 윙윙거리는 벌레 소리와 바스락거리는 풀잎 소리가 소란스럽게 들리고 있었다. 뺨 위로 땀이 흘러내렸다. 나는 모자를 가지고 있지 않아 손수건으로 부채질을 했다. 옆에서 걸어가던 인부가 그때 나에게 뭐라고 말을 했으나 듣지 못했다. 그러면서 그 인부는 오른손으로 모자 가장자리를 치켜 올리고 왼손에 들고 있던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았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뭐라구요?"
그는 하늘을 가리키며 되풀이 말했다.
"무던히도 내리쬔다구요."
나는 "네"하고 말했다.
조금 뒤에 그는 다시 물었다.
"어머님이 돌아가셨어요?"
나는 또 "네" 하고 대답했다.
"연세가 많으셨습니까?"
"꽤 많았습니다"
정확한 나이를 몰라서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는 말이 없었다. 뒤돌아보았더니 영감이 뒤에서 한 50미터나 떨어져서 따라오고 있었다. 그는 모자를 벗어 들고 팔을 휘저으며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눈을 돌려 원장을 보았다. 그는 필요 없는 몸짓을 전혀 하지 않고 매우 점잖게 걷고 있었다. 이마 위에는 땀이 몇 방울 흐르고 있었으나 그걸 닦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내 생각에는 행렬이 좀 빠른 것 같았다. 주위에는 한결같이 햇빛을 머금어 눈부시게 빛나는 별관만 보일 뿐,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은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자 새로 포장한 길을 지나게 되었다. 뜨거운 햇볕에 아스팔트가 녹아 발이 빠져 들어가서는 번쩍거리는 바닥에 자국이 났다. 영구차 위로 드러나 보이는 운전사의 가죽 모자는 마치 검은 역청 속에 넣어서 이긴 것 같았다. 푸르고 흰 하늘과 그 단조로운 빛깔들, 끈적거리는 갈라진 아스팔트의 검은 빛깔, 거무스름한 상복 빛깔, 니스 칠한 영구차의 까만 빛깔들 사이에서 머리가 혼란해졌다. 햇빛, 가죽 냄새, 영구차에서 풍기는 말똥 냄새, 니스 냄새, 향냄새, 잠 못 이루었던 밤이 가져오는 피로, 그러한 모든 것 때문에 눈과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는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다보았다. 구름처럼 드리운 무더운 공기 속으로 페레 영감이 까마득하게 멀리 나타났다 다시 사라졌다. 찾아보니, 길을 벗어나서 벌판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길이 좀더 가서 구부러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페레가 그 지방을 잘 아니까 우리들을 따라오려고 지름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길이 구부러진 곳에 이르렀을 때, 그는 우리들을 따라왔다. 그러고는 또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벌판을 가로질러 갔고 그러기를 여러 차례나 했다. 나는 관자놀이에서 피가 뛰는 것을 느꼈다.
그 다음으로는 모든 것이 하도 빠르고 순조롭고 또 자연스럽게 진행되었으므로 나의 기억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단지 한 가지 기억에 남은 것은 마을 어귀에서 당번 간호사가 나에게 한 말이었다.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야릇한 목소리, 아름답고 떠는 듯한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천천히 가면 더위를 먹을 염려가 있고 너무 빨리 가도 땀이 나서 교회에 들어가면 오한이 납니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밖에 그 날의 몇 가지 광경이 머릿속에 남아 있다. 가령 페레가 마지막으로 마을 근처에서 우리들을 따라왔을 때의 그 얼굴. 어쩌지 못하는 듯한 슬픔의 눈물이 그의 뺨 위에서 번뜩이고 있었다. 그러나 주름살 때문에 흘러내리는 눈물이 보이지 않았다. 눈물은 맺혔다가 그 쭈그러진 얼굴 위에 물 칠 해놓은 것 같았다. 그 밖에 생각나는 것으로는 교회와 보도 위에 서 있던 마을 사람들, 묘지 무덤 위의 제라늄, 페레의 기절(마치 인형이 해체되어 쓰러지듯 했다), 어머니의 관 위로 떨어진 붉은 흙, 그 속에 섞이던 흰 나무뿌리, 또 사람들의 목소리, 어느 카페 앞에서 기다리던 일, 끊임없는 엔진 소리, 버스가 마침내 빛나는 알제리 시가지에 다다라서 이제는 실컷 잠잘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때의 나의 기쁨, 그러한 것들이다.
2
잠이 깨자 나는 이틀 동안 휴가를 신청했을 때 왜 사장의 기색이 좋지 않았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오늘이 바로 토요일인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 사장은 자연히 내가 일요일까지 나흘 동안 쉬게 될 것을 생각했을 것이므로 그것이 그의 마음에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어머니의 장례식을 오늘 하지 않고 어저께 한 것은 내 탓이 아니었고, 또 한편으로는 어차피 나는 토요일과 일요일은 쉬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장의 심경을 이해할 수 없는 바도 아니다.
어제 하루 일로 피곤했기 때문에 일어나기가 괴로웠다. 수염을 깎으면서 오늘은 무엇을 할까 생각한 끝에 해수욕을 하러 가기로 했다. 항구에 있는 해수욕장으로 가려고 나는 전차를 탔다. 거기서 즉시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젊은이들이 많았다. 전에 우리 회사의 타이피스트로 있었던 마리 카르도나를 거기서 만났다.
당시 나는 그녀에게 마음이 있었다. 그녀 역시 그런 것 같았다. 그러나 얼마 뒤에 그녀는 회사를 그만두어 우리는 만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나는 그녀가 부표 위로 오르는 것을 거들어주었는데 그러면서 내 손이 그녀의 가슴에 가 닿았다. 그녀가 부표 위에서 배를 깔고 엎드렸을 때도 나는 그냥 물속에 있었다. 그녀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머리카락이 눈 밑으로 흐트러졌는데 그녀는 웃고 있었다. 나는 부표 위에 있는 그녀의 곁으로 올라갔다. 왜 그런지 그저 좋았고 희롱을 하는 것처럼 나는 머리를 뒤로 젖혀 그녀의 배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기에 나는 그대로 그렇게 하고 있었다. 온 하늘이 나의 눈 속에 들어왔다. 푸른 하늘은 황금빛이 돌고 있었다. 목덜미 밑에서 마리의 배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내게 느껴졌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렇게 부표 위에서 어렴풋이 잠이 들어 있었다. 햇볕이 너무 뜨거워지자 마리가 물속으로 뛰어들어 나도 따라 들어갔다. 나는 그녀의 곁으로 가서 팔로 허리를 감고 같이 헤엄을 쳤다. 마리는 줄곧 웃고 있었다. 물가로 나와 우리들이 몸을 말리고 있을 동안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당신보다도 내가 더 검은데요." 나는 그녀에게 저녁에 영화 구경을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페르낭델이 주연한 영화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들이 옷을 다 입었을 때 내가 검은 넥타이를 매고 있는 것을 보고 마리는 매우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상중이냐고 물었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대답했다. 언제 그렇게 되었는가 알고 싶어하기에 나는 "어제" 라고 대답했다. 그런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할까 했으나 그런 소리를 사장에게도 한 일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고 그만 두었다. 그런 말을 해보았자 무의미한 일이었다. 어차피 말이란 좀 틀어지게 마련이다. 마리는 저녁에는 모든 일을 다 잊어버렸다.
영화는 때때로 웃기기는 했지만 너무나 싱거웠다. 마리는 다리를 내 다리에 기대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젖가슴을 어루만졌다. 영화가 끝날 무렵 키스를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영화관을 나와 그녀는 내 집으로 왔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마리는 가고 없었다. 그녀는 아주머니한테 가야 한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날이 일요일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기분이 언짢았다. 그래서 나는 자리 속에서 몸을 뒤치락거리며 마리의 머리카락이 남겨두고 간 소금 냄새를 기다란 베게 속에서 찾아보려고 했다. 그러고는 10시까지 잤다. 그러고 나서 침대에 누운 채 담배를 피우면서 12시까지 있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셀레스트네 레스토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싶지 않았다. 레스토랑 사람들이 던절 여러 가지 질문에 대꾸하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달걀을 부쳐도 빵도 없이 접시에다 입을 대고 먹었다. 빵이 없는 걸 알면서도 사러 내려가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고 나니 심심해서 집안을 서성거렸다. 어머니가 있을 때는 알맞은 아파트였다. 그러나 지금 내게 너무 커서 식당의 테이블을 내 방으로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방만 사용한다. 약간 찌그러진 의자들과 유리가 누렇게 된 옷장과 화장대와 그리고 구리 침대 사이에서 살고 있을 뿐이다. 그 외에는 모두 버려둔 채로 있다. 조금 뒤에 나는 할 일이 없어서 묵은 신문을 한 장 들고 읽었다. 류센 향염 광고를 오려서 재미있는 기사들을 모아두는 공책에다 그것을 붙였다. 나는 또 손을 씻고는 발코니에 나가 앉았다.
내 방은 교외의 한길로 향하고 있다. 오후의 날씨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길은 끈적거렸고 행인들은 적었으나 빨리 걷고 있었다. 먼저 산책 가는 가족들이 지나갔다. 바지가 무릎 밑까지 내려와 덮인 해군복을 입고, 풀기를 먹인 옷 때문에 두 소년은 거북해 보였다. 다음으로는 커다란 리본을 달고 칠피구두를 신은 소녀와 그 뒤로 자줏빛 옷을 입은 뚱뚱한 어머니와, 후리후리한 키의 남자로 얼굴만은 나도 알고 있는 그의 아버지가 따랐다. 그는 나비 모양의 끈이 달린 밀짚 모자를 쓰고 손에는 단장을 짚고 있었다. 그의 아내와 함께 그를 보면서 사람들이 왜 그를 보고 신수가 훤한 사람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조금 뒤에 교외의 젊은이들이 지나갔다. 모두들 머리에는 기름을 바르고, 붉은 넥타이에 몸에 꼭 맞는 웃옷에는 수를 놓은 장식 손수건을 꽂고 코가 네모진 구두를 신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시내로 영화구경을 가는 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일찍 길을 떠나 소리 높여 웃으면서 전차를 타고 서둘러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지나간 뒤에 길에는 점점 인기척이 없어졌다. 아마 어디에서나 구경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이제 길에는 가게를 보는 주인들과 고양이들이 있을 뿐이었다. 길가에 늘어선 가로수 위로 보이는 하늘은 맑았으나 빛이 쏟아지지는 않았다. 맞은편 인도 위에는 담뱃가게 주인이 의자를 거꾸로 타고 앉아 등받이 위에 두 팔을 괴고 있었다. 조금 전에는 터질 듯이 들어찼던 전차들도 지금은 거의 비었다. 담뱃가게 주인 옆에 있는 조그만 카페 '피에로'에서는 보이가 텅 빈 가게 안을 쓸고 있었다. 정말 일요일이었다.
나도 의자를 돌려서 담뱃가게 주인처럼 놓았다. 그것이 더 편하게 생각됐기 때문이다. 나는 담배를 두 대 피우고 나서 방안으로 들어가 초콜릿을 한 조각 가지고 창 앞으로 돌아와 먹었다. 점점 어두워져서 여름 소나기가 올 것 같았다. 그러나 하늘은 다시 차차 개었다. 그래도 구름이 지나가며 길 위에 비를 예고하는 듯한 빛을 남겨 놓아 거리는 어스름했다. 나는 오랫동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5시에 전차들이 요란하게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발판이며 난간에까지 매달린 구경꾼들이 야외 경기장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 다음 전차는 운동선수들을 싣고 왔는데 손에 든 보스턴백으로 미루어 그들이 운동선수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고함을 지르며, 그들의 팀은 결코 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있는 힘을 다해 소리 높이 노래를 불렀다. 몇몇 사람은 나에게 손짓을 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우리가 이겼어!" 하고 나에게 소리치기까지 했다. 그래서 나는 머리를 끄덕여 그러냐는 표시를 했다. 그때부터 버스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해는 조금 더 기울어졌다. 저녁이 되면서 지붕들 위에서 하늘은 불그스름해지고 시가지는 활기를 띠었다.
행인들은 점점 늘어났다. 사람들 속에서도 그 기품 있는 신사가 눈에 띄었다. 어린애들은 울거나 손목을 잡혀 끌려오고 있었다. 뒤이어 영화관에서 구경꾼들이 왁 쏟아져 나왔다. 구경꾼들 가운데 젊은이들은 여느 때보다 대담한 몸짓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활극영화를 구경하고 나오는 것이로구나 생각했다. 시내 영화관으로부터 돌아오는 사람들은 조금 뒤에 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까보다 좀 신중해 보였다. 아직도 웃고는 있었으나 이따금 그랬을 뿐, 피로해 보이고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그들은 맞은편 인도 위를 서성거렸다. 모자를 쓰지 않은 이 동네의 젊은 여자들이 서로 팔짱을 끼고 걸어왔다. 젊은이들이 나란히 서서 그녀들과 마주 지나치며 희롱을 하자, 여자들은 고개를 돌리고 웃었다. 그중 내가 아는 몇몇 여자들은 나에게 손짓을 했다.
그때 갑자기 가로등이 켜지며, 어둠 속에 떠오르던 첫 별들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그처럼 사람들과 빛깔이 바뀌는 인도를 바라보고 있으니 눈이 피로했다. 가로등은 눅진한 보도를 비추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전차들은 반짝거리는 머리카락, 웃음 띤 얼굴, 혹은 은팔목 시계에서 반짝거리는 빛을 반사시켰다. 조금 뒤에 전차들의 간격이 점점 뜸해지고, 밤이 나무들과 가로등 위에 이미 드러워짐에 따라 거리는 차츰 텅 비어 갔다. 다시 쓸쓸해진 길을 고양이가 천천히 건너가는 시각이 되었다. 그때야 나는 저녁을 먹어야 할 것을 생각했다. 오랫동안 의자 등받이에 턱을 괴고 있었기 때문에 목이 좀 아팠다. 나는 빵과 젤리를 사 가지고 올라와서 요리를 해서 서서 먹었다. 다시 창 앞으로 가서 담배를 한 대 피우려고 했으나 바람이 차가워 좀 싸늘했다. 나는 창문을 닫고 방안으로 들어오며 거울 속으로 알코올램프와 빵조각이 놓여 있는 테이블 한끝을 보았다. 그때 나에겐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어머니의 장례식도 이제는 끝나고, 내일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고, 그러니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3
오늘 나는 회사에서 일을 많이 했다. 사장은 친절했다. 그는 나에게 너무 피곤하지 않으냐고 물었고, 어머니의 나이를 알고 싶어 했다. 나는 틀리게 대답하지 않으려고, "한 60정도"라고 말했다. 왜 그런지 알 수는 없었으나 사장은 한시름 덜었다는 듯한, 그리고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눈치였다.
나의 사무책상 위에는 선하증권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는데 일일이 읽어보아야만 했다. 점심을 먹으러 회사를 나오기 전에 나는 손을 씻었다. 정오의 이 시간을 나는 좋아한다. 저녁때에는 수건이 눅눅해져서 불쾌하다. 온종일 같은 수건을 쓰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느 날 나는 그러한 이야기를 사장에게 한 일이 있었다. 사장의 대답은 그도 그것을 유감스럽게 생각은 하지만 그러나 그건 지엽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나는 평소보다 조금 늦은 12시 30분에 운송과에 근무하는 엠마누엘과 함께 회사를 나왔다. 회사는 바다로 향해 있어서 우리들은 잠시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항구에 머물러 있는 화물선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화물 자동차 한 대가 쇠사슬 소리와 엔진 소리를 요란스럽게 내면서 달려왔다. 엠마누엘이 나에게 저기에 탈까!" 하고 물었다. 그래서 나도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자동차가 우리들을 지나쳐버리자 우리는 뒤를 따라 달려갔다.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다만 기중기, 또 다른 기계들, 수평선 위에서 춤추는 돛대 옆을 지나치는 선체들 가운데서 그저 막 달리는 육체의 약동을 느낄 뿐이었다. 내가 먼저 매달려가면서 뛰어 올라탔다. 그러고는 엠마누엘이 올라오는 것을 거들어주었다. 우리들은 숨이 찼다. 자동차는 부두의 고르지 못한 보도 위로 먼지가 자욱한 햇빛 속을 흔들거리며 달렸다. 엠마누엘은 허리가 끊어지게 웃었다.
우리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셀레스트네 레스토랑에 이르렀다. 흰 수염을 기른 셀레스트는 뚱뚱한 배에다 앞치마를 두르고 변함없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나에게 "많이 상심했지?" 하고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대답하고, 배가 고프다고 말했다. 나는 얼른 먹고 나서 커피를 마셨다.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와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셨던 탓으로 잠깐 잠이 들었다. 잠이 깨니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늦어서 전차를 타러 뛰어갔다. 오후 내내 일을 했다. 회사 안은 몹시 더웠다. 저녁에 퇴근하면서 부둣가를 따라 천천히 걸어 돌아올 때는 유쾌했다. 하늘은 푸르고 마음은 즐거웠다. 그러나 나는 삶은 감자 음식을 준비하려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컴컴한 계단을 올라가다가 나와 같은 층에 사는 살라마노 영감과 부딪쳤다. 영감은 개를 데리고 있었다. 8년 번부터 영감과 개는 늘 함께 보인다. 그 스파니엘 종 개는 내가 알기에는 피부병을 앓아 털이 거의 다 빠지고 온몸이 반점과 누르스름한 부스럼투성이었다. 그 개와 단둘이 조그만 방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탓인지 살라마노 영감은 개와 모습이 비슷했다. 그의 얼굴에는 불그스름한 딱지가 있고 누런 털이 성기게 났다. 개는 구부정한 걸음걸이와 앞으로 내민 주둥이, 처진 목이 주인을 닮았다. 그들은 아무래도 한 족속 같은데 서로 미워한다. 하루에 두 번씩 11시와 6시에 영감은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선다. 8년 전부터 그들은 한 번도 산책길을 바꿔본 적이 없다. 언제나 리용 가에서 개가 늙은이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기어코 살라마노 영감의 발부리가 땅에 부딪혀버리고 만다. 그러면 영감은 개를 때리고 욕지거리를 하는 것이다. 개는 무서워서 설설 기며 끌려간다. 이번에는 영감이 개를 끌고 갈 차례다. 개가 잊어버렸다가 다시금 앞서서 주인을 끌고, 그러면 또 매를 맞고 욕을 먹는다. 그때는 둘이 다 멈춰 서서 개는 공포에 떨며, 주인은 화가 나서 서로 노려본다. 매일처럼 그 모양이다. 개가 오줌을 싸고 싶어 할 때면 영감은 시간을 주지 않고 끌어당겨 개는 오줌방울을 찔끔찔끔 흘리면서 따라간다. 어쩌다가 개가 방안에서 오줌을 싸면 또 매를 맞는다. 그러기를 이제는 8년이나 한 것이다. 셀레스트는 늘 하는 말이 "가엾다"고 하지만 사실은 아무도 영문을 모른다. 내가 계단에서 그를 만났을 때, 살라마노는 개에게 욕지거리를 퍼붓고 있었다. "빌어먹을! 망할 자식!" 야단을 치고 개는 끙끙거렸다. 나는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했으나, 영감은 그냥 욕지거리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개가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이 없었다. 영감은 다만 "빌어먹을! 망할 자식!" 하고 말할 뿐이었다. 그는 개에게 몸을 굽히고 있었는데 목걸이의 무엇인가를 고쳐주고 있었다. 나는 목소리를 높여서 말해보았다. 그때야 그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복받치는 역정을 억지로 삼키는 듯이, "아직도 안 가고 있군" 하고 대꾸했다. 그러고는 개를 잡아끌고 가버렸다. 개는 네 발로 끌려가면서 끙끙거렸다.
바로 그때, 나와 같은 층에 사는 또 한 명의 다른 이웃 사람이 들어왔다. 동네에서는 그가 여자들을 뜯어먹고 산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는 "창고감독"이라고 대답한다. 대체로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가끔 그는 나에게 말도 걸고, 또 내가 그의 말을 들어주는 탓으로 내 방에 잠깐 들어와 있을 때도 있다. 그의 이야기를 나는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와 말을 하지 않을 하등의 이유도 없다. 그의 이름은 레이몽 생테스라고 하는데 키가 퍽 작고 어깨가 바라졌으며 코는 마치 권투 선수 코 같다. 옷차림은 언제나 말쑥하다. 그도 역시 살라마노의 이야기를 하며 "참 가엾기 짝이 없어요!" 하고 말했다. 그 꼴을 보면 넌더리가 나지 않느냐고 묻기에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우리들의 계단을 다 올라와서 막 헤어지려고 할 때, 그는 나에게 말했다. "저희 집에 소시지와 술이 있는데 같이 좀 들지 않겠어요?" 나는 그러면 음식을 준비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라 생각되어 승낙했다. 그도 역시 방은 하나밖에 없고 창문 없는 부엌만을 쓰고 있었다. 그의 침대 위에는 희불그름한 석고로 만든 천사와, 운동선수들의 사진과, 여자의 나체 사진이 두서너 장 걸려 있었다. 방안은 더럽고 침대는 어질러져 있었다. 그는 먼저 석유램프를 켠 다음 호주머니에서 몹시 허름한 붕대 하나를 꺼내어 오른손을 싸맸다. 내가 그에게 손을 다쳤느냐고 물었더니 어떤 녀석이 시비를 걸어서 그 녀석과 싸움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건 말입니다. 뫼르소 씨"
하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내가 마음이 악해서가 아니라 성미가 급해섭니다. 그 녀석이 나에게 하는 말이, '사나이라면 전차에서 내려라' 그러지 않겠어요. 나는 '괜한 쓸데없는 소리 말아' 하고 말했지요. 녀석이 나더러 사나이답지 못하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나는 내려가서 말했어요. '듣기 싫어. 잔소리 말아. 그렇지 않으면 본때를 보여줄 테니' '본때는 무슨 본때야' 하고 녀석은 대꾸를 하더군요. 그래서 한 대 갈겼지요. 그랬더니 나자빠지길래 일으켜주려니까 녀석은 땅에 자빠져서 발길질을 합디다. 그래 무릎다짐을 한 번 하고 두어 번 발길질을 했지요. 녀석은 얼굴이 피투성이가 됐어요. 나는 그 녀석에게 '그만큼 혼났으면 됐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런 말을 하면서 생테스는 붕대를 감고 있었다. 나는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싸움을 건 게 아니었어요. 그 녀석이 버릇없이 굴다가 그랬던 겁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정말 그렇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마침 나에게 그 사건에 관해서 충고를 청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나는 사나이다워서 세상 물정을 잘 알 테니 자기를 도와줄 수 있겠느냐면서 그렇게 되면 그는 나의 친구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나에게 자기와 친구가 되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그래도 좋다고 말했더니 그는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그는 소시지를 꺼내서 굽고, 컵, 접시, 스푼, 그리고 포도주 두 병을 늘어놓았다. 이 일을 하는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고 나서 우리들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먹으면서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약간 망설이는 말투였다.
"어떤 여자를 내가 알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나의 정부였지요"
그와 싸움을 한 사나이는 그 여자의 오라비라는 것이었다. 그가 여자의 살림을 대주었다는 말도 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으나, 그는 곧 덧붙여 동네 사람들이 자기를 뭐라고 말하는지 알고 있지만 양심에 거리낄 것은 조금도 없고 자기는 창고감독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내가 속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는 손수 여자의 방세를 치러주고, 식사비로 하루에 20프랑씩 주고 있었다.
"방세가 300프랑, 식비가 600프랑, 이따금 양말 한 켤레도 사주니까 한 1,000프랑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년은 일도 하지 않고 내게 한다는 말이, 그것으로는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을 뿐이어서 내가 대주는 것으로는 도저히 생활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그렇지만 나는 이렇게 말했어요. '왜 반나절이라도 일을 안 해? 그러면 내 부담도 퍽 덜겠는데, 이 달에 소용될 것은 모두 사주었고 하루에 20프랑씩 용돈도 주고 방세도 지불했잖아. 그런데 너는 오후에 친구들과 커피나 마셔대고 있어. 네 친구들에게 커피와 설탕을 내놓는 건 너지만, 돈은 내가 낸단 말야. 난 너에게 잘해주었는데 너는 내게 그렇질 못하단 말이야. 그래도 그년은 일을 하지 않고 생활할 수가 없다고 그냥 고집을 부리고 있었어요. 그러던 끝에 내가 속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여자의 핸드백 속에서 복권 한 장을 발견했는데, 여자는 그것을 어떻게 샀는지 자기에게 설명하지 않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조금 뒤에는 여자의 방에서 전당표 쪽지를 한 장 발견했는데 그걸 보면 팔찌 두 개를 잡힌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그는 그 팔찌들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속고 있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어요. 그래서 그 여자와 관계를 끊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그년을 때려주었지요. 그리고 사실대로 죄다 이야기를 했습니다. 네까짓 건 그걸 가지고 노는 것밖엔 바라지 않는 년이라고 말해주었어요. '네가 내게서 받는 행복을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있는 것을 몰라. 좀 있으면 지난날의 행복을 알게 될 테니 두고 봐'"
그는 피가 나도록 여자를 때렸다고 했다. 그 전에는 여자를 때리는 일이란 없었다는 것이다.
"전혀 손을 안 댄 것은 아니지만, 말하자면 부드럽게 톡톡 건드리는 정도였어요. 그러면 그년은 소리를 지르곤 했지요. 나는 문을 닫아버리고 결국은 늘 마찬가지로 끝나곤 했어요. 그렇지만 이번엔 본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로서는 그년을 좀 더 혼을 내줘야겠어요."
그러더니 그는 나에게 그렇기 때문에 충고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러고는 그을음이 나는 램프의 심지를 조절하려고 일어섰다. 나는 줄곧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술을 거의 한 병이나 마셨기 때문에 관자놀이가 몹시 달아올랐다. 내 담배가 떨어져서 나는 레이몽의 담배를 피웠다. 마지막 전차들이 교외로 가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레이몽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를 난처하게 만드는 일은 '그가 아직도 그 여자와의 정사에 약간 미련을 갖고 있다'고 말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혼을 내주어야겠다는 것이었다. 먼저 그는 계집을 호텔로 데려다놓고 풍기 단속 순경을 불러다가 스캔들을 일으켜서 계집을 카드에 오르게 할 생각을 했었다. 그러고 나서 그의 친구인 난봉꾼들에게 이야기를 해봤지만 그들은 별로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사실 레이몽이 나에게 말한 것처럼 난봉꾼이란 위인들이 그런 것 하나쯤 몰라서야 말도 안 되었다. 레이몽이 그런 말을 하니까 그들은 여자의 '얼굴을 찢어버리면 어떠냐'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좀 더 잘 생각해봐야겠다고 했다. 그러나 먼저 나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것을 물어보기 전에 그 이야기를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나는 별로 생각하는 바도 없지만 어쨌든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대답했다. 그가 자신이 속고 있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묻기에 생각을 해보니 과연 속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혼을 내주어야 하는데 그럴 경우 나 같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물음에 나는 어떻게 할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여자를 혼내주겠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또 술을 마셨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서 자기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그는 여자에게 '발길로 차버리는 뜻의 그러나 동시에 여자의 육욕을 도발시킬 만한 사연을 섞어서' 쓴 편지를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여자가 돌아오게 될 테니까 그때는 여자와 함께 잠자리에 들고는 '일이 바로 끝나갈 무렵에' 여자의 낯짝에다 침을 뱉어주고는 밖으로 내쫓아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정말 여자에게는 벌주는 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레이몽은 자기는 적당한 편지를 쓸 수가 없을 것 같아서 편지를 꾸미는 것을 나에게 부탁할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니까 그는 나에게 지금 당장 그 편지를 쓰는 것은 귀찮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지도 않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술을 한 잔 마시고 일어서서 접시들과 먹다 남은 소시지를 옆으로 밀어놓았다. 그러고는 탁자의 고무받이 천을 정성스럽게 닦고 나서 나이트 테이블 서랍에서 원고지 한 장과 노란 봉투, 붉은 나무 철필과 보랏빛 잉크가 든 네모진 잉크병을 꺼냈다. 여자의 이름을 들어보니 무어인이었다. 나는 편지를 썼다. 되는 대로 쓰기는 했지만 그래도 레이몽의 마음에 들도록 애썼다. 왜냐하면 나는 레이몽의 마음에 들지 않게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리를 높여 그것을 읽었다. 레이몽은 담배를 피우며 머리를 끄덕거리면서 듣고 있더니 다시 한 번 읽어달라고 했다. 그는 매우 흡족해했다.
"자네가 세상 물정에 밝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어"
하고 그는 말했다. 처음엔 그가 나에게 자네라고 말한 것을 무심히 듣고 있었으나 "이제 자넨 내 친구야" 하고 그가 말했을 때에야 나는 비로소 그 말에 놀랐다. 그는 거듭 그렇게 말했고, 나는 "그야 그렇지" 하고 대답했다. 나로서는 그의 친구라고 해도 무방한 일이었고, 그는 정말로 나와 친구가 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는 편지를 봉하고 우리는 남은 술을 마저 마셨다. 그러고는 잠시 서로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밖은 쥐죽은 듯이 고요하여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너무 늦었는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시간이 빨리 지나가버린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어떤 의미로는 그렇다고도 할 수 있었다. 나는 졸음이 왔지만 일어서기가 거북했다. 내가 피곤하게 보였던지, 레이몽은 나에게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말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나에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알았다는 이야기와 그러나 그것은 어차피 한 번은 당해야 할 일이라는 말을 했다. 내 의견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일어섰다. 레이몽은 굳게 내 손을 움켜쥐고, 사나이끼리는 언제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방을 나서자 나는 문을 닫고 층계참 위 어둠 속에 잠시 서 있었다. 집안은 고요하고, 계단 밑으로부터 우중충하고 습한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귀밑의 핏줄이 뛰는 소리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그냥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살라마노 영감 방에서 개가 끙끙거리는 소리가 나직이 들려왔다.
4
한 주일 동안 나는 줄곧 일을 많이 했다. 레이몽이 와서 그 편지를 보냈다고 말했다. 엠마뉴엘과 함께 영화구경을 두 번 갔는데, 엠마뉴엘은 스크린 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이해 못하는 때가 가끔 있다.
그러면 설명을 해주어야 한다. 어제는 토요일이라 약속대로 마리가 찾아왔다. 나는 심한 성욕을 느꼈다. 마리가 붉고 흰 줄무늬 있는 아름다운 옷을 입고 가죽 샌들을 신고 있었기 때문이다. 탄력이 있어 보이는 젖가슴이 완연히 드러나 보이고, 햇볕에 그을은 얼굴이 꽃처럼 아름다웠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알제리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바닷가로 갔다. 그곳은 사방이 바위가 솟고 기슭에는 갈대가 우거진 바닷가였다. 4시의 태양은 그다지 뜨겁지는 않았으나 물은 미지근했고 길고 게으른 듯하게 퍼지는 물결이 나직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마리가 놀이를 하나 가르쳐주었다. 헤엄을 치며 파도가 치는 꼭대기에서 물을 들이마셔 입속에 거품을 가득 채운 다음, 똑바로 누워서 하늘을 향해 그것을 내뿜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물거품으로 만든 레이스가 되어서 공중으로 사라지기도 하고, 미지근한 보슬비처럼 얼굴 위로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잠시 후에는 입 속이 짜서 얼얼해졌다. 그러자 마리가 다가와 물속에서 나에게 달라붙었다. 마리는 자기의 입술을 내 입에 갖다 댔다. 그녀의 혀가 내 입술에 산뜻하게 닿았다. 잠시 동안 우리는 물속에서 뒹굴었다.
바닷가로 나와서 옷을 갈아입을 때 마리는 빛나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러고는 급히 버스를 잡아타고 돌아왔다. 우리는 방안으로 들어서자 곧 침대 위로 뛰어들었다. 나는 창문을 열어놓았었다. 여름밤이 우리들의 검게 그을은 육체 위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어 참으로 유쾌했다.
오늘 아침, 마리는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 나는 아침을 같이 먹자고 말해놓고 고기를 사러 내려갔다. 돌아오니, 레이몽의 방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뒤에는 살라마노 영감이 개에게 욕지거리를 해대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계단 위에서 구두창 소리와 개 발톱 소리가 나더니 "빌어먹을, 망할자식!"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거리로 나갔다. 영감 이야기를 마리에게 해주었더니 마리는 웃었다. 마리는 내 파자마를 입고 소매를 걷어 올리고 있었다. 그녀가 웃었을 때 나는 또 성욕을 느꼈다. 조금 뒤에 마리는 나에게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그런 것은 아무 쓸데 없는 말이지만 사랑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나는 대답했다. 마리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침을 준비하면서 아무 이유도 없이 허리가 끊어지게 웃기에 나는 또 키스를 했다. 바로 그때 레이몽의 방에서 말다툼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먼저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리더니, 레이몽이 "네가 나를 골탕먹이려고 했지, 나를 골탕먹였어. 골탕먹이려다가 맛이 어떤가 좀 봐." 하는 소리가 들렸다. 툭툭 무슨 소리가 나고, 여자 비명 소리가 들렸는데 하도 처참한 소리여서 층계참에는 곧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마리와 나는 복도로 나갔다. 여자는 그냥 소리를 지르고 레이몽은 그냥 때리는 것이었다. 마리는 사태가 험악하다고 말했으나,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에게 경찰을 불러오라고 했으나, 나는 경찰이 싫다고 말했다. 그러나 3층에 사는 납땜쟁이와 함께 경찰 한 사람이 들어왔다. 경찰이 문을 두드렸으나 아무 대답도 없었다. 더 크게 두드리자 조금 있더니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레이몽이 문을 열었다. 그는 입에 담배를 물고 유순한 태도였다. 여자가 문으로 뛰어나와 경찰에게 레이몽이 때렸다고 말했다. "이름이 뭐지?" 하고 경찰이 물었다. 레이몽은 망설이고 나서 나를 쳐다보더니 담배를 입에 문 채 서 있었다. 그러자 경찰은 두꺼운 손바닥으로 레이몽의 따귀를 힘껏 후려갈겼다. 레이몽은 안색이 변했으나 당장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공손한 목소리로 꽁초를 주워도 괜찮으냐고 물었다. 경찰은 그러라고 하면서 "다음부터는 경찰이 웃음거리가 아니라는 걸 알도록 해."하고 덧붙여 말했다. 그동안 여자는 계속해서 울면서 "날 때렸어요. 아주 망나니에요." 하고 몇 번이나 말했다. "경찰관님" 하고 이번에는 레이몽이 말했다. "남자에게 망나니라는 말을 해도 된다는 게 법률에 있습니까?" 경찰은 "잔소리 말아!" 하고 호통을 쳤다. 그러자 레이몽은 여자에게로 고개를 돌리고는 "가만있어, 이년아, 다시 만나지 않을 줄 알아?" 하고 말했다. 경찰은 레이몽에게 잔소리를 그치라고 한 다음, 여자보고는 가라고 하고 레이몽은 방으로 가서 경찰서의 소환을 기다리라고 말했다. 그는 덧붙여서 레이몽에게 그렇게 몸이 떨리도록 술에 취했으면 부끄럽게 생각하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레이몽은 해명을 했다.
"나리, 나는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나리 앞에 서 있으니 떨릴 뿐이죠. 별도리가 있습니까?"
그는 문을 닫아버렸고 구경꾼들도 다 가버렸다. 마리와 나는 아침 준비를 끝마쳤으나, 그녀는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해서 나 혼자서 거의 다 먹었다. 마리는 1시에 가 버리고 나는 잠깐 잠을 잤다.
3시경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레이몽이 들어왔다. 나는 누워 있었다. 레이몽은 내 침대가에 앉았다.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그의 일이 어찌되었는가 물었다. 그는 계획대로 했는데 그년이 따귀를 때리기에 패준 것이라고 말했다. 그 뒤의 일은 내가 목격한 대로였다. 나는 그에게, 이제는 여자가 혼이 났을 테니까 그것으로 만족하라고 말하자 그의 의견도 역시 그렇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제아무리 경찰이 뭐라고 해보았댔자 계집이 당한 꼴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는 또 자기는 경찰들의 심리를 알고 있는데 그들을 대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고는 경찰이 따귀를 붙인 것에 그가 응수하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다고 대답했고 도대체 경찰이란 것을 나는 싫어한다고 말했다. 레이몽은 매우 만족한 눈치였다. 그가 함께 나가지 않겠느냐고 하기에 나는 일어나서 머리를 빗었다. 그때 그는 자기의 증인이 되어주어야 되겠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좋았으나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레이몽에 의하면 여자가 그에게 버릇없이 굴었다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증인이 되기를 승낙했다.
우리는 밖으로 나갔다. 레이몽이 권하여 브랜디를 마셨다. 그러고는 당구를 한 판 쳤는데 나는 잘 되지 않았다. 그 다음에는 창녀 집에 가자고 했지만 나는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 까닭에 싫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천천히 집으로 돌아왔다. 레이몽은 여자를 혼내줄 수 있어서 참으로 만족하게 여기고 있다는 말을 했다. 나에게는 그가 매우 다정스럽게 대해주는 것 같았고 그렇게 지내는 시간이 유쾌하게 여겨졌다.
멀리서 살라마노 영감이 흥분한 듯한 모양으로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가니 그는 개를 데리고 있지 않았다. 그는 이리저리 사방을 둘러보더니 두서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컴컴한 복도를 들여다보고는 다시 그 충혈된 눈을 두리번거리며 길가를 훑어보는 것이었다. 레이몽이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망할자식!"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개가 어디 있느냐고 내가 물으니까 느닷없이 달아났다고 대답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도 그 놈을 연병장에 데리고 갔었지요. 노점들 근처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요. 나는 '탈주왕'이라는 간판이 붙은 것을 보려고 잠시 멈추었습니다. 보고 나서 가려고 하니 그놈이 없어졌어요. 미리 좀 꽉 끼는 목걸이를 사주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 빌어먹을 자식이 그렇게 도망쳐버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레이몽이 개가 아마 길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르니까 그러면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고, 주인을 찾아오기 위해서 수십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온 개가 있었다는 예까지 들어서 설명을 했지만 영감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잡혀버리고 말 것이오. 누가 그걸 갖다 길러준다면 또 몰라도, 그럴 수도 없을걸. 그렇게 헌데투성이니까 어디 좋아할 사람이 있을라구? 경찰에게 잡히고 말 겁니다. 틀림없어요."
나는 그에게 경찰서의 계류장으로 가보는 것이 좋겠다는 것과 벌금을 내면 개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영감은 돈을 많이 내야 되냐고 물었으나 나는 알 리가 없다. 그러더니 영감은 성을 내며 "그 빌어먹을 자식 때문에 돈을 내다니. 아아, 죽어버리라지!" 하며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레이몽은 웃으며 집으로 들어섰다. 나도 그의 뒤를 따라 우리는 이층 층계참 위에서 헤어졌다.
조금 뒤에 영감의 발소리가 나더니 내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 주니까, 그는 잠시 문간에 서 있다가 "용서하십시오, 용서하세요." 하고 말했다. 안으로 들어오라고 권했으나, 그는 들어오려고 하지 않고 구두 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흠집투성이 손이 떨렸다. 얼굴을 숙인 채 그는 나에게 물었다.
"개를 빼앗진 않겠지요, 뫼르소 씨. 돌려줄 테지요. 그렇지 않으면 난 어떻게 되겠어요?"
나는 계류장에는 주인이 찾아갈 수 있도록 사흘 동안 개를 묶어두는데, 사흘이 지나면 적당히 처분해버린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말했다. 그는 자기 방문을 닫았다. 영감이 자기 방안에서 왔다 갔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침대가 삐걱거렸다. 벽을 통해 들려오는 어렴풋한 야릇한 소리로 나는 그가 울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왜 어머니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야 했다.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 나는 저녁도 먹지 않고 잤다.
5
레이몽이 회사로 전화를 했다. 그의 친구의 한 사람이(그 친구에게 내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알제리 근처의 조그만 별장에서 일요일 하루를 지내는데 나를 초대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그러고 싶지만 여자 친구와 만날 약속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레이몽은 그 여자친구도 같이 오라는 것이었다. 그 친구의 부인은 남자들 가운데 여자라곤 자기 혼자뿐이기 때문에 매우 좋아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들에게 전화가 걸려오는 것을 사장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그러나 레이몽은 조금 기다리라고 하더니 이런 초대는 저녁에라도 전할 수 있지만, 그보다도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그런다고 했다. 그는 하루 종일 옛날 정부의 오빠가 섞인 아랍인 패에게 미행당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오늘 저녁 퇴근하는 길에 집 근처에서 그놈들을 보거든 내게 좀 알려줘."하고 말했다. 나는 그러마고 대답했다.
조금 뒤에 사장이 나를 불렀다. 전화는 좀 삼가고 좀더 열심히 일하라는 말이겠지 생각하니 갑자기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아직 막연하지만 어떤 계획에 대해서 나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는 다만 그 문제에 관해서 내 의견을 들어볼 생각이었다. 파리에다 출장소를 설치하여 현지에서 직접 큰 회사들과 거래하려고 하는데 그리로 갈 생각은 없느냐고 내 의향을 타진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파리에서 생활할 수 있을 것이고 일 년에 얼마 동안은 여행을 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자넨 젊으니까, 그런 생활이 자네 마음에 들 걸세."
나는 그렇기는 하지만 결국 이러나저러나 내게는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사장은 생활의 변화에 흥미를 느끼지 않느냐고 묻기에, 사람이란 생활을 바꿀 수는 결코 없는 노릇이고, 어쨌든 어떤 생활이든지 다 그게 그거고, 또 나는 이곳에서의 생활을 조금도 불만스럽게 생각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는 좋아하지 않는 눈치를 보이며 하는 말이, 나는 대답을 한다는 것이 언제나 딴전이고, 나에게는 야심이 없어서 사업에 큰 지장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을 하려고 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사장의 비위를 거스르고 싶지는 않았으나, 내 생활을 바꿔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봐도 나는 불행하진 않았다. 학생 때에는 그런 종류의 야심도 많이 있었지만 학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을 때 그러한 것이 실제로는 아무런 중요성도 없다는 것을 나는 곧 깨달았던 것이다.
저녁에 마리가 찾아와서 자기와 결혼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건 아무래도 좋지만 마리가 원한다면 결혼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어떤지 알고 싶어 했다. 나는 이미 한 번 말했던 것처럼 그건 아무 뜻도 없는 말이지만 아마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왜 나하고 결혼을 해요?"
하고 마리는 말했다. 나는 그건 아무 중요성도 없는 것이지만 정 원한다면 결혼해도 좋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결혼을 요구한 것은 그편이고 나는 승낙을 했을 뿐이다. 그때 마리는 "결혼은 중대한 일이에요."라고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잠시 말없이 나를 쳐다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자기처럼 관계를 가진 다른 여자가 같은 청혼을 해도 승낙을 했을 것인가를 그녀는 알고 싶어 했다. 나는 "물론"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마리는 자기가 나를 사랑하는지 어떤지를 생각해보는 듯했으나, 나는 그 점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 길이 없었다. 잠시 또 묵묵히 있다가 그녀는, 나를 이상한 사람이고 아마 그 때문에 자기는 나를 사랑하지만 바로 그같은 이유로 내가 싫어질 때가 올지도 모른다고 했다. 더 할 말이 없어 덤덤히 있으니까 마리는 웃으면서 내 팔을 붙들고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언제든지 그녀가 원하면 곧 결혼을 하자고 대답했다. 그리고 사장의 제안을 이야기해주니까 마리는 파리를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잠시 파리에서 살아본 일이 있다고 말했더니 어떻더냐고 물었다.
"더러워. 비둘기들이 많고 안뜰들은 어둡고 사람들은 모두 피부가 희지."
그러고 나서 우리들은 한길을 택하여 거리를 거닐었다. 여자들은 아름다웠다. 나는 마리에게 그렇게 생각지 않느냐고 물었다. 마리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잠시 동안 우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그녀가 나와 함께 있어 주었으면 싶어서, 셀레스트네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같이 먹으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마리는 그러고 싶지만 볼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내 집 근처에서 나는 그녀에게 잘 가라고 인사를 했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무슨 볼일이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아요?"
그것을 알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생각을 미처 못했을 뿐이었는데 마리는 그것을 나무라는 눈치였다. 그러고는 어색한 내 표정을 보고 다시 웃더니 불쑥 앞으로 다가오며 나에게로 입술을 내밀었다.
나는 셀레스트네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막 먹기 시작했을 때 어떤 이상하고 키 작은 여자가 들어와서 내 테이블에 앉아도 되느냐고 물었다. 물론 앉아도 좋다고 나는 말했다. 몸짓은 앙증스럽고, 사과 같은 얼굴에 눈이 빛나고 있었다. 자켓을 벗어버리고 열에 들뜬 듯이 메뉴를 살펴보더니 셀레스트를 불러 곧 명확하고 빠른 목소리로 음식을 주문했다. 그러고는 오르되브르를 기다리면서 핸드백을 열고 네모난 종이 한 장과 연필을 꺼내 미리 계산을 하고는 지갑에서 팁까지 덧붙여 정확한 금액을 앞에 내놓았다. 오르되브르가 나오자 그녀는 서둘러서 먹었다. 다음 요리를 기다리며 또 핸드백에서 파란 연필과 이 주일의 라디오 프로그램이 실려 있는 잡지를 꺼내 정성스럽게 하나씩 하나씩 거의 모든 방송에 표를 했다. 잡지는 12페이지나 되었으므로 그녀는 식사를 하는 동안 끝까지 세밀하게 그 일을 계속했다. 내가 식사를 끝마쳤을 때도, 그녀는 여전히 열심히 표시를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일어서서 꼭두각시 같은 몸짓으로 자켓을 입고 나가버렸다. 별로 할 일이 없었으므로, 나도 밖으로 나가서 여자의 뒤를 잠시 따라갔다. 그녀는 보도 가장자리를 따라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와 정확한 걸음으로 옆으로 비키지도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으면서 제 갈 길만 가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여자들 시야에서 놓쳐버려 갔던 길을 되돌아왔다. 이상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내 문 앞에 살라마노 영감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방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영감은, 개 보호소에 가봤는데도 없으니 개는 결국 잃어버리고 만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그곳 사무원들은 아마 차에 치었을 거라고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경찰서측에서 그런 것도 모르냐고 하니까 매일처럼 있는 일이라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다고 대답하더라는 것이었다. 나는 살라마노 영감에게 다른 개를 기르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지만 영감은 그 개와 정이 들었다고 말했는데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침대 위에 웅크리고, 살라마노는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노인은 나와 얼굴을 마주하고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낡은 소프트를 쓴 채로였다. 누런 수염 밑으로 말을 씹어삼키듯이 중얼거렸다.
그와 대면하고 있기는 좀 거북했으나 그렇다고 별로 할 일도 없었고 졸음도 오지 않았다. 무엇이든지 이야기하려고 나는 그의 개에 대해 물어보았다. 개를 기른 것은 그의 아내가 죽은 뒤부터라고 영감은 대답했다.
그는 꽤 늦게 결혼했다. 젊었을 적에는 연극을 하고 싶어 했다. 군에 있었을 때는 군인극 '보드빌'에 출연도 하곤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철도국에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적으나마 지금은 연금을 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내와의 관계가 그리 행복하지는 못했으나 대체로 보아 익숙하여 정이 들었던 편이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외로웠다. 그래서 개 한 마리를 작업장 동료에게 부탁해 아주 어린놈을 얻어왔었다. 처음에는 우유를 먹여서 길렀다. 그러나 개의 수명은 사람의 수명보다 짧아 그들은 함께 늙게 된 것이다.
"그놈은 성미가 못돼서 가끔 입에다 부리망을 씌우곤 했었지요."
하고 살라마노는 말했다.
"그렇지만 좋은 개였어요."
혈통이 좋은 개였다고 내가 말했더니 살라마노는 만족해했다.
"게다가,"
하고 덧붙였다.
"병에 걸리기 전에 보신 일이 없으시죠. 털이 정말 아름다웠어요."
개가 피부병에 걸린 다음부터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살라마노는 고약을 발라주었다. 그러나 그가 한 말에 의하면 사실은 노쇠한 것인데 노쇠란 고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때 내가 하품을 하자 노인은 가겠다고 말했다. 나는 좀 더 있어도 괜찮다고 말하고, 개가 그렇게 된 것을 딱하게 생각한다고 했더니 그는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그 개를 귀여워했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불쌍한 어머니" 하고 말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 내가 매우 섭섭할 것이라고 그는 말했지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빠른 어조로 어색한 낯을 보이며, 동네에서는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낸 탓으로 나를 나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며 내가 어머니를 퍽 사랑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 때문에 내가 악평을 받고 있다는 것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나에게는 어머니를 돌보아드릴 만한 돈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양로원에 보낸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어머니는 나와 할 말이 없어서 외롭고 적적해했는걸요."하고 덧붙였더니, 그는 "그럼요, 양로원에선 친구라도 생기지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서 자려는 것이었다. 이제 그의 생활은 변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는 모르는 것 같았다. 그와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그는 슬그머니 나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내 손에 그의 피부가 비늘처럼 느껴졌다. 그는 약간 웃어 보이고 방을 나서려다가 이렇게 말했다. "오늘밤은 개들이 제발 짖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 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늘 들어서요."
6
일요일은 좀처럼 잠에서 깨어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마리가 와서 내 이름을 부르고 흔들어 깨워야만 했다. 우리는 일찍 해수욕을 하고 싶어서 아침도 먹지 않았다. 나는 속이 텅 빈 것 같고 머리가 조금 아팠다. 담배를 피워도 맛이 썼다. 마리는 나더러 '초상집에 간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고 놀려댔다. 마리는 흰옷을 입고 머리카락을 풀어놓았다. 예쁘다고 말하니까 그녀는 기뻐하며 웃었다.
내려오는 길에 우리는 레이몽의 방문을 두드렸다. 레이몽은 곧 내려온다고 대답했다. 길가에 나서자 피로했던 탓과 또 덧문을 열어두지 않았던 탓으로 벌써 퍼질 대로 퍼진 햇볕이 마치 따귀를 때리듯 후려쳤다. 마리는 기뻐서 깡총거리며 날씨가 좋다고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말했다. 나는 기분이 좀 나아졌고 배고프다는 것도 느꼈다. 그런 이야기를 마리에게 했더니, 그녀는 우리들 두 사람의 수영복과 수건만 들어 있는 헝겊가방을 열어보였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레이몽이 그의 방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푸른 바지와 소매가 짧은 흰 셔츠를 입고 있었다. 게다가 밀짚모자를 쓰고 있어서 마리는 우습다고 야단이었다. 그의 팔목은 희었으나 시커먼 털로 덮여 있었다. 나는 그것이 좀 보기 싫었다. 그는 휘파람을 불면서 내려왔는데 아주 만족해하는 듯한 눈치였다. 레이몽은 나에게 "안녕한가" 하고 말한 다음, 마리를 "아가씨" 하고 불렀다.
그 전날 우리는 경찰서에 함께 갔었다. 나는 그 여자가 레이몽에게 버릇없이 굴었다고 증언을 했다. 레이몽은 경고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내 진술을 트집 잡는 사람은 없었다. 문 앞에서 레이몽과 의논해서 우리는 버스를 타기로 결정했다. 바닷가는 그다지 멀지는 않았으나 그렇게 하면 더 빨리 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레이몽은 그의 친구도 우리가 일찍 오는 것을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가 막 길을 떠나려던 참에 갑자기 레이몽이 맞은편을 보라는 시늉을 했다. 아랍인들 한 패가 담뱃가게 진열장에 기대어 서 있었다. 묵묵히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마치 우리들을 돌이나 죽은 나무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는다는 투였다.
레이몽이 왼편에서 두 번째 녀석이 그놈이라고 말해주었는데 그는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그렇지만 그건 이젠 끝나버린 이야기라고 덧붙였다. 마리는 영문을 몰라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아랍인들이 레이몽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대답했다. 마리는 곧 출발하기를 원했다. 레이몽은 몸을 젖히고 서둘러야겠다고 말하면서 웃었다.
우리들은 조금 떨어진 정류장으로 갔다. 레이몽은 아랍인들은 따라오지 않는다고 내게 일러주었다. 나는 돌아다보았다. 그들은 있던 자리에 그대로 서서 우리들이 떠나온 곳을 여전히 무심한 태도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버스에 올랐다. 레이몽은 아주 안심한 빛으로 마리에게 줄곧 농담을 했다. 마리가 마음에 든 눈치였는데 마리는 거의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이따금 웃으면서 레이몽을 쳐다볼 뿐이었다.
우리는 알제리 교외에 내렸다. 바닷가는 정류장에서 멀지 않았다. 그러나 바다가 내려다보이고 해변가로 경사진 언덕을 가로질러 가야 했다. 언덕에는 이미 새파래진 하늘을 향해 노르스름한 돌들과 하얀 수선화들로 뒤덮여 있었다. 마리는 헝겊가방을 휘둘러 꽃잎을 떨어뜨리는 장난을 했다. 우리는 녹색이나 흰 울타리가 쳐진 작은 별장들이 늘어서 있는 사이를 걸어갔다. 어떤 별장은 베란다까지 위성류 속에 파묻히고, 어떤 것들은 바위 한가운데서 덩그렇게 서 있었다. 언덕 끝에 이르기 전에 벌써 잠잠한 바다가 눈앞에 나타나고 멀리 맑은 물속에 조는 듯 육중한 곳이 내뻗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경쾌한 모터 소리가 고요한 대기 속에서 우리가 있는 곳까지 들려왔다. 저 멀리 작은 트롤선 한 척이 반짝이는 바다 가운데로 서서히 미끄러지듯 가고 있었다. 마리는 붓꽃을 몇 송이 꺾었다. 바다로 내려가는 언덕길에서 바라다보니 벌써 바닷가에는 수영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레이몽의 친구는 해변 기슭의 조그만 목조 별장에 살았다. 집은 바위를 등지고 있었는데 앞쪽 밑을 버틴 기둥들은 물속에 잠겨 있었다. 레이몽이 우리를 소개했다. 친구는 마송이라고 하는데 덩치가 크고 어깨가 바라진 키가 큰 사람이었고, 동그랗고 예쁘장하게 생긴 파리 말씨를 쓰는 조그만 여자와 함께 있었다. 그는 곧 우리들에게 거리낌 없이 편하게 있으라고 권하고, 바로 그날 아침에 낚아온 생선을 프라이한 것이 있다고 말했다. 내가 그의 집이 참 아담하다고 말했더니, 그는 토요일과 일요일, 그리고 휴일마다 그 별장에 와서 지낸다고 말했다.
"제 아내하고라면 누구든지 의좋게 지낼 수 있습니다."
하고 그는 덧붙였다. 그의 아내는 마리와 웃고 있었다. 아마 그 때 처음으로 나는 마리와 결혼할 것을 진정으로 생각해본 것 같다.
마송은 수영하러 가고 싶어 했으나, 그의 아내와 레이몽은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우리 셋이서만 바닷가로 내려갔다. 마리는 곧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마송과 나는 잠시 동안 기다렸다. 그는 천천히 말을 했는데 말끝마다 "그뿐만 아니라," 하고 덧붙이는 버릇이 있었다. 실제로 그의 이야기의 뜻에는 보충하는 것이 없을 때에도 그러는 버릇이 있었다. 마리에 관해서는, "아주 그만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매력도 있고요." 하고 말했다. 이윽고 나는 햇볕이 기분 좋게 전신에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그것에 정신이 팔려서 그의 말버릇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발밑에서 모래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물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을 좀 더 참았다가 나는 마송에게 "들어가볼까요?" 하고 말한 다음 뛰어들었다. 마송은 천천히 물속으로 들어가 발이 땅에 닿지 않게 되어서야 몸을 던졌다. 그는 평영으로 헤엄쳤으나, 퍽 서툴러서 나는 그를 남겨두고 마리에게로 쫓아갔다. 물은 차가웠고 헤엄을 치니 유쾌했다. 마리와 함께 멀리 갔는데 우리는 몸짓과 만족감이 서로 일치하는 것을 느꼈다.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서 우리는 몸을 띄웠다. 하늘로 향한 얼굴 위로, 태양은 입으로 흘러내리는 물의 장막을 걷어주었다. 마송이 모래사장으로 나가서 햇볕을 쬐려고 눕는 것이 보였다. 그는 멀리서도 큼직하게 보였다. 마리는 나와 함께 헤엄을 치고 싶어 했다. 나는 뒤로 돌아가 마리의 허리를 붙들고 마리가 팔을 놀려 앞으로 나가는 것을 발장구를 쳐서 도와주었다. 고요한 아침에 철썩거리는 물소리가 우리가 지칠 때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마리를 남겨두고 숨을 크게 쉬면서 규칙적으로 헤엄을 쳐서 돌아왔다. 물가로 올라와서 나는 마송 앞에 배를 깔고 엎드려 모래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기분이 괜찮군요." 하고 말했더니 그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다. 잠시 후에 마리가 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마리가 걸어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소금물에 젖은 몸은 미끈거려 보였으며 머리카락을 뒤로 묶어 버렸다. 마리와 나는 나란히 누웠는데 그녀의 체온과 뜨거운 햇볕 때문에 나는 깜박 잠이 들었다.
마리가 나를 흔들어 깨우며 마송은 벌써 집으로 돌아갔고 이젠 점심을 먹어야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나는 배가 고파 얼른 일어섰다. 그러나 마리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키스를 해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었고 나도 키스를 하고 싶었다. "물로 들어가요." 하고 마리가 말했다. 우리는 뛰어가서 곧 잔물결 속에 드러누웠다. 몇 번 팔을 저어 헤엄쳐 가다가 마리는 나에게 달라붙었다. 그녀의 다리가 내 다리에 휘감기는 것을 느끼고 나는 그녀에게 성욕을 느꼈다. 우리들이 돌아오자 마송이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배가 고프다고 말했더니 마송은 곧 내가 자기의 마음에 들었다고 그의 아내에게 말했다. 빵은 맛있었고 나는 내 몫의 생선을 급히 먹었다. 다음으로는 고기와 튀긴 감자가 나왔다. 우리는 모두 아무 말 없이 먹었다. 마송은 자주 술을 마시고 나에게도 줄곧 따라 주었다. 커피를 가져왔을 때는 머리가 좀 무거웠다. 나는 담배도 많이 피웠다. 마송과 레이몽 그리고 나는 공동비용으로 8월을 해변에서 함께 지낼 것을 의논했다. 마리가 갑자기 말했다. "지금 몇 신지 아세요? 11시 반이에요." 우리는 모두 놀랐다. 그러나 마송은 너무 일찍 식사를 했지만 배가 고플 때가 결국 식사시간이니까 별로 이상할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마리가 왜 웃었는지 나는 모른다.
아마 술을 좀 지나치게 마신 탓이었을 것이다. 그러더니 마송은 함께 바닷가를 산책하지 않겠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제 아내는 점심을 먹은 뒤엔 반드시 낮잠을 자는데 나는 그게 싫어요. 난 걸어야 합니다. 건강에는 그것이 좋다고 내가 늘 그럽니다만 어쨌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밖에 없지요." 마리는 마송 부인을 거들어서 설거지를 하기 위해 남아 있겠다고 했다. 그러자면 남자들을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키가 작은 파리 여자는 말했다. 우리는 셋이서 바닷가로 내려갔다.
햇볕은 거의 직각으로 모래 위에 쏟아져 내려서 바다 위에 반사하는 그 빛은 견디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바닷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언덕을 따라 바다 위로 솟은 작은 별장들 안에서는 접시며 포크, 스푼 따위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땅에서 올라오는 돌의 열기로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처음에는 레이몽과 마송이 내가 모르는 일과 사람들 이야기를 했다. 그들이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라는 것과 한때 그들은 함께 산 일도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았다. 우리들은 물가로 가서 바다를 끼고 걸었다. 때때로 잔물결이 길게 밀려와서 우리들의 헝겊신발을 적시기도 했다. 나는 맨머리 위로 내리쬐는 태양 때문에 한 번쯤 잠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때 레이몽이 마송에게 뭐라고 말했으나 나는 잘 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나는 바닷가 저편 끝 멀리서 푸른 작업복을 입은 아랍인 둘이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레이몽을 쳐다보니 그는 "그놈이야" 하고 말했다. 우리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송은 그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우리를 따라올 수 있었는지 이상하게 여겼다. 우리들이 해수욕 가방을 가지고 버스를 타는 것을 그들이 보았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랍인들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는데 벌써 훨씬 거리가 가까워졌다. 우리들은 걸음을 달리하지 않았다.
레이몽은
"싸움이 벌어지면 마송 자넨 둘째 번 녀석을 맡아. 저 녀석은 내가 맡을 테니까. 뫼르소 자넨 또 다른 놈이 오면 맡게."
하고 말했다. 나는 "그러지." 하고 말했다. 마송은 두 손을 주머니 속에 넣었다. 뜨겁게 단 모래가 지금 나에게는 붉게 보였다. 우리는 일정한 걸음으로 아랍인들에게 걸어갔다. 그들과 우리들 사이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몇 걸음 되지 않은 간격을 두고 서로 가까워졌을 때 아랍인들이 멈춰 섰다. 마송과 나는 걸음을 늦추었다. 레이몽은 바로 그가 맡은 녀석에게로 갔다. 나는 그가 뭐라고 했는지는 못 들었으나 아랍인 녀석이 머리로 받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레이몽은 먼저 한 대 때려놓고 곧 마송을 불렀다. 마송은 미리 지목했던 녀석에게로 가서 힘껏 두 번 후려갈겼다. 상대편 녀석은 얼굴을 바닥에 처박고 물속에 나둥그레졌다. 그는 잠시 그대로 있었는데 머리께로부터 거품이 물 위로 꿀럭거렸다. 그러는 동안에 레이몽이 또 갈겨서 그 아랍인 녀석은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다. 레이몽은 나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자식 꼬락서니 좀 봐." 하고 말했다. 나는 "조심해, 그놈 칼을 가졌어!" 하고 말했으나 레이몽은 이미 팔을 찔리고 입을 찢겼다.
마송은 후다닥 뛰어갔으나 또 다른 아랍인도 일어나서 칼을 가진 녀석 뒤로 가서 섰다. 우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칼로 위협하면서 천천히 뒷걸음질 쳐서 충분한 거리를 가지게 되자 부리나케 달아났다. 그동안 우리들은 태양 아래 못 박힌 듯 우두커니 서 있었고 레이몽은 피가 흐르는 팔을 움켜쥐고 있었다.
마송이 얼른 일요일마다 언덕 별장으로 와서 지내는 의사가 있다고 말했다. 레이몽은 빨리 가자고 했으나 말을 할 때마다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입 속에서 거품을 일으켰다. 우리는 그를 부축해 급히 별장으로 돌아왔다. 거기서 레이몽이 상처는 가벼우니까 의사에게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마송과 함께 가기로 하고, 나는 남아서 여자들에게 사건 이야기를 해주었다. 마송 부인은 울고 있었고, 마리는 파랗게 질려 있었다. 나는 그녀들에게 설명을 하는 게 귀찮아져서 이야기를 그만두고 담배를 피우면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1시경에 레이몽이 마송과 함께 돌아왔다. 그는 팔에 붕대를 감고 입가에는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다. 의사는 대수롭지 않다고 했으나 레이몽은 침울한 낯을 하고 있었다. 마송이 웃기려고 애를 써봤지만 레이몽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바닷가로 내려간다고 하기에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바람을 쐬고 싶다고 대답했다. 마송과 나도 함께 가겠다고 하니까 레이몽은 화를 내며 우리들에게 욕지거리를 했다. 그의 비위를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고 마송이 말했으나 나는 그래도 그의 뒤를 따라갔다.
우리들은 오랫동안 해변을 거닐었다. 태양은 찍어 누르는 듯했다. 햇빛은 모래와 바다 위에 부서져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레이몽이 가는 곳을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마 꼭 그렇지는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바닷가 끝까지 가서 우리는 커다란 바위 뒤에서 바다로 향해 모래사장으로 흐르고 있는 조그만 샘가에 이르렀다. 우리는 거기서 그 아랍인 둘을 다시 만났다. 그들은 기름이 밴 푸른 작업복을 입고 누워 있었다. 마음은 거의 가라앉은 듯 아주 태연스러운 빛이었다. 레이몽을 찌른 녀석도 아무 말 없이 레이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 한 녀석은 조그만 갈대로 피리를 불고 있었는데 곁눈으로 우리들을 바라보며 그 악기로 낼 수 있는 세 가지 소리를 되풀이했다.
그동안 거기에는 다만 햇볕과 침묵, 그리고 졸졸 흐르는 샘물 소리와 피리의 세 가지 음향이 들릴 뿐이었다. 그러자 레이몽이 권총 주머니에 손을 갔다댔으나 상대편은 움직이지 않고 둘은 서로 마주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피리를 불고 있는 녀석의 발가락이 몹시 벌어진 것을 보았다. 레이몽은 상대편에게 눈을 떼지 않고
"쏘아버릴까!"
하고 물었다. 그만두라고 하면 그는 제풀에 화를 내 기어코 쏘고야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저
"저 녀석은 아직 아무 말도 없는데 이대로 쏘아버린다는 건 비겁할 걸."
하고 말해주었다. 침묵과 무더운 햇볕 한가운데서 여전히 물과 피리의 호젓한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레이몽이,
"그럼 저 녀석에게 욕을 해야겠군. 그때 대꾸하면 쏘지."
하고 말했다.
"그래, 하지만 녀석이 칼을 뽑지 않으면 쏠 수는 없을 걸."
나는 대답했다. 레이몽은 좀 화를 내기 시작했는데 상대편은 여전히 피리를 불고 있었고 둘 다 레이몽의 거동을 일일이 살피고 있었다.
"안 되겠어. 사나이답게 맞상대를 해. 그리고 그 권총은 이리 줘. 만약에 다른 녀석이 뛰어들든지, 저 녀석이 칼을 뽑든지 하면 내가 쏠 테니까."
레이몽이 권총을 나에게 주었을 때 그 위로 햇빛이 반사하여 번쩍거렸다. 그러나 우리들은 마치 모든 것이 우리들의 주위를 둘러막은 듯이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우리들은 눈을 까딱도 하지 않고 서로 마주 노려보고 있었으며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바다와 모래와 태양, 피리 소리와 물소리로 인해 더욱 두드러진 이중의 침묵 가운데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권총을 쏠 수도 있고 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갑자기 아랍인들이 뒷걸음질 하며 바위 뒤로 달아나버렸다. 레이몽과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레이몽은 기분이 좀 가라앉은 듯 집으로 돌아갈 버스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와 함께 별장까지 갔다. 레이몽이 나무 층계를 올라가는 동안 나는 첫 계단 앞에 서 있었다. 햇볕으로 머리가 어지러운데다 그 나무 층계를 올라가야 하며 다시 여자들과 대면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맥이 풀렸던 것이다. 그러나 더위가 너무 심해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볕 아래 우두커니 서 있기도 괴로운 일이었다. 더구나 머무르거나 어디로 가버리거나 결국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에 나는 바닷가 쪽으로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아까와 다름없이 붉은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모래 위로 바다는 잔물결에 복받쳐 가쁜 숨결을 다하여 헐떡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바위 근처로 걸어갔는데, 뜨거운 햇빛 때문에 머리가 부풀어오르는 것 같았다. 더위 전체가 내 위를 억눌러 나의 걸음을 막았다. 그래서 얼굴 위에 무더운 바람이 와 닿을 때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주머니 속에 주먹을 불끈 쥐고 태양과 태양이 쏟아부어주는 짙은 취기를 견디어내려고 전력을 다하여 몸을 버텼다. 모래나 흰 조개껍질이나 유리조각에서 빛이 칼날처럼 번쩍거릴 때마다 턱은 경련을 일으켰다. 나는 오랫동안 걸었다.
햇볕과 바다의 포말로 눈부신 후광에 둘러싸인 거무스름한 바윗덩어리가 조그맣게 멀리 바라다 보였다. 나는 바위 뒤의 서늘한 샘을 생각했다. 나는 그 물의 속삭임을 다시 듣고 싶었고, 태양과 더위와 싸우는 노력과 여자의 울음소리를 피하고 싶었으며, 그리고 그늘과 휴식을 그곳에서 찾고 싶었다. 그러나 가까이 갔을 때 나는 레이몽과 맞섰던 녀석이 다시 돌아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혼자였다. 번듯이 드러누워 있었는데 두 손을 턱밑에 괴고 얼굴만 바위 그늘 속에 넣고 전신은 햇볕을 받고 있었다.
푸른 작업복이 더위 속에서 김을 내고 있었다. 나는 좀 당황했다. 나로서는 그 사건은 이미 끝난 것으로 믿었으므로 그 일은 생각지도 않고 그리로 왔던 것이었다.
그는 나를 보자 조금 몸을 쳐들어 올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물론 나도 웃옷 속에 들어 있던 레이몽의 권총을 거머쥐었다. 그러더니 그는 다시 몸을 젖혀 누워버렸으나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는 않았다. 나는 그에게 퍽 멀리, 10여 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한 절반 감은 그의 눈꺼풀 사이로 이따금 그의 시선이 새어나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그의 모습이 타는 듯한 대기 속에서 나의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파도 소리는 정오 때보다도 더욱 게으르고 더욱 가라앉았다. 그때나 다름없는 모래 위에 다름없는 태양, 다름없는 빛이 그대로 여기에도 연장되고 있었다. 한낮은 벌써 두 시간 전부터 흐름을 멈추었고, 끓어오르는 금속 같은 태양에 닻을 내린 지도 두 시간이나 되었다. 수평선 위로 조그만 증기선이 지나갔다. 내가 한눈에 그것을 검은 얼룩처럼 느낀 것은 아랍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뒤로 돌아서기만 하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햇볕에 떠는 해변이 내 뒤를 압박하고 있었다. 나는 샘을 향해 몇 걸음 앞으로 갔다. 아랍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그래도 아직 내게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아마도 얼굴 위에 덮인 그늘 탓이었던지 웃고 있는 듯했다. 나는 기다렸다. 뜨거운 태양이 내 뺨에 와 닿았고 땀방울이 눈썹에 맺히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른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다. 그날처럼 특히 머리가 아프고 이마의 모든 혈관이 피부 밑에서 지끈거리고 있었다. 그 햇볕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여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며 한 걸음 몸을 옮겨보았댔자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 걸음, 다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던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인이 몸을 일으키지는 않고 칼을 뽑아서 태양에 비치며 나에게로 겨누었다. 빛이 강철 위에 반사하자 번쩍거리는 길쭉한 칼날이 내 이마에 와서 부딪히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눈썹에 맺혔던 땀이 한꺼번에 눈꺼풀 위로 흘러내려 미지근하고 두꺼운 막으로 덮어버렸다. 눈물과 소금의 장막에 가려져 내 눈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마 위에 울리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와, 칼로부터 여전히 내 앞으로 다가오는 칼날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 타는 듯한 칼은 내 속눈썹을 찌르고 고통스러운 눈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모든 것이 흔들린 것은. 바다는 무겁고 뜨거운 바람을 실어왔다. 하늘은 활짝 열리며 불을 쏟는 듯했다. 나는 온몸이 긴장되어 권총을 힘있게 거머쥐었다. 방아쇠가 꺾였고 나는 권총자루의 미근한 배를 만졌다. 그리하여 짤막하고도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나는 밤과 태양을 떨쳐버렸다. 한낮은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닷가의 특이한 침묵을 깨뜨린 것을 나는 느꼈다. 이어서 나는 그 굳어진 몸뚱어리에 다시 네 방을 쏘았다. 총탄은 보이지도 않게 깊이 박혔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린 네 번의 노크 소리와도 같았다.
제2부
1
나는 체포되자 여러 번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신원 확인을 위한 심문이어서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처음 경찰에서는 아무도 나의 사건에 흥미를 느끼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일주일 후에 예심판사는 유심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처음에는 다만 나의 이름과 주소와 직업, 출생 날짜와 장소를 물었을 따름이다. 그러고는 내가 변호사를 선임했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나는 선임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변호사를 반드시 내세워야만 하느냐고 물었다.
"왜 그러시오?"
하고 그는 물었다. 나는 내 사건은 매우 간단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건 하나의 의견이지만 법률이라는 게 있어서 당신이 변호사를 택하지 않으면 우리들이 직권으로 임명할 것입니다"
나는 법 제도가 그러한 세부적인 일까지 해주는 것은 매우 편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말을 판사에게 하니까 그도 내 말에 동의하고 법률은 참으로 잘 되어 있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처음에는 그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커튼을 둘러친 방에서 나를 맞아들였는데 그의 테이블 위에 등불이 하나 놓여 있어, 그것은 내가 앉은 의자만을 비추고 있었을 뿐 그는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그러한 묘사를 이전에 나는 책에서 읽은 일이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이 어린애 장난만 같았다. 나는 이야기가 끝난 뒤에 그를 살펴보았다. 그 얼굴 모습이 단정했고 푸른 눈은 깊숙이 패였으며 키가 크고 회색 수염을 길게 길렀고 숱이 많은 머리카락이 거의 백발에 가까웠다. 그는 착실해 보였고, 입을 일그러뜨리는 신경질적인 버릇이 있기는 했으나 어쨌든 호감을 가질 수 있을 듯이 보였다. 방을 나서면서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이튿날 변호사 한 사람이 형무소로 찾아왔다. 키가 작고 똥똥했는데 머리를 정성스럽게 빗어 붙인 매우 젊은 사람이었다. 날씨가 더웠음에도 불구하고 - 나는 셔츠바람으로 있었다 - 검은 양복을 입었으며 빳빳한 칼라에 검고 흰 줄무늬가 있는 이상한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겨드랑이에 끼고 들어온 가방을 내 침대 위에 놓고 나서, 그는 자기소개를 하고 내 서류를 검토해 보았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어렵긴 하지만 내가 그를 신뢰한다면 재판에 이길 것을 의심치 않는다고 했다. 내가 감사하다고 하니까, 그는 "문제의 요점으로 들어갑시다" 하고 말했다.
그는 침대 위에 앉은 다음 내 사생활에 관하여 여러 가지 정보를 수집했다고 말했다. 최근 양로원에서 어머니가 사망한 사실을 알게 되어 마랑고로 조사를 갔었다는 것과 어머니 장례식 날 '내가 냉정한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을 예심판사들이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당신에게 이런 것을 묻는 것은 거북한 일이지만 이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내가 거기에 답변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기소의 중대한 논거가 될 것입니다." 하고 변호사는 말했다. 내가 그에게 협력해줄 것을 그는 요구했다. 그날 슬퍼했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이 질문에 나는 몹시 놀랐다. 만약에 내가 그런 질문을 해야만 할 처지라면 나는 매우 어색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나는 자문해보는 습관을 잃어버려서 정확한 사실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물론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으나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건전한 사람은 누구나 다소간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바라는 일이 있는 법이다. 그러자 변호사는 내 말을 가로막았다. 매우 흥분한 것 같았다. 그런 말은 법정에서나 예심판사의 방에서는 하지 말라고 내게 다짐했다. 그러나 나는 육체적 요구가 흔히 감정을 방해하는 성질이 있다고 그에게 설명해주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있던 날 나는 매우 피곤해서 잠이 왔었다. 그래서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가 죽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변호사는 불만스러운 눈치였다.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하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그날 내가 자연적 감정을 억제했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건 사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는 내가 밉살스러운 듯이 이상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양로원의 원장과 사무원들은 증인으로서 심문을 받을 것이오. 그러면 당신에게 퍽 불리한 결과가 될지도 모를 것이오."
하고 모질게 말했다. 그런 이야기가 내 사건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을 나는 지적했으나, 그는 다만 내가 재판소와 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다는 것은 그만하면 뻔히 알 수 있겠다고만 대답했다.
그는 화가 난 태도로 나가버렸다. 나는 그를 좀 더 머물게 하고, 그의 호감을 얻고 싶다는 설명을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것은 더 잘 변호해주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이를테면 자연히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무엇보다도 내가 그의 처지를 어색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좀 원망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다는 것, 조금도 틀림없이 똑같다는 것을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은 결국 별로 효과도 없는 일이어서 나는 게으른 탓으로 그것을 단념하고 말았다.
조금 뒤에 다시 예심판사 앞으로 끌려갔다. 오후 2시였는데 이번에는 그의 사무실은 엷은 커튼을 뚫고 새어드는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매우 무더웠다. 그는 나를 앉으라고 한 다음 퍽 정중하게 내 변호사는 '사고가 생겨서' 오지 못했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심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되고, 변호사의 도움을 기다릴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혼자서라도 대답할 수 있다고 말했더니, 그는 책상 위의 벨을 눌렀다. 젊은 서기가 와서 바로 내 등 뒤에 자리 잡고 앉았다.
우리들은 반듯이 안락의자에 푹 파묻혀 앉았다. 그러고는 심문이 시작되었다. 판사는 먼저, 사람들은 내가 말이 적고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별로 할 말이 없어서입니다. 그래서 말을 안 하는 겁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는 첫 심문 때처럼 빙그레 웃으면서 그건 참 당연한 이유라고 말한 다음,
"그리고 그건 대수롭지 않은 일입니다."
하고 덧붙였다. 그는 입을 다물고 나를 보더니 갑자기 어깨를 으쓱하면서,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당신입니다."
하고 빠른 어조로 말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 수 없으므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어서
"당신의 행동에는 나로선 이해하기 곤란한 점들이 있는데 당신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하고 말했다. 나는 모든 것은 간단한 일들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날 사건을 이야기하라고 판사는 재촉했다. 나는 벌써 그에게 한 번 이야기한 것을 다시 요약하여 되풀이했다. 레이몽, 바닷가, 해수욕, 싸움, 다시 바닷가, 조그만 샘, 태양, 다섯 방의 권총. 한 마디 할 때마다 그는 "네, 네." 하고 대답했다. 쓰러진 시체에까지 이야기가 미치자, 그는 "좋습니다." 하면서 내 이야기를 확인했다. 나는 그처럼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에 지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한 적은 여태까지 없었던 것처럼 생각되었다.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그는 일어서서 나를 도와주겠다고 하면서, 나는 퍽 특이한 사람이고, 하느님의 도움을 얻어 나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먼저 그는 나에게 몇 가지 더 질문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어머니를 사랑했느냐고 물었다.
"네, 다른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로 사랑했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규칙적으로 타이프를 치고 있던 서기가 키를 잘못 눌렀는지 당황해하더니 다시 고쳤다. 여전히 명백하게 논리적이지 못한 판사가 이번엔 연달아서 권총을 다섯 방 쏘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을 하고 나서, 처음 한 방 쏘고, 몇 초 후에 다시 네 방을 쏘았다고 설명했다.
"첫 방과 둘째 방 사이에 왜 사이를 두었습니까?"
하고 그는 물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붉은 바닷가가 눈앞에 나타나고 뜨거운 햇볕이 이마 위에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뒤로 침묵이 계속되는 동안 판사는 흥분한 눈치였다. 의자에 걸터앉아 머리를 벅벅 긁고 책상 위에 팔꿈치를 괜 다음, 야릇한 표정으로 나에게 약간 몸을 굽히면서 물었다.
"왜, 왜 당신은 땅에 쓰러진 시체를 쏘았습니까?"
그 물음에도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판사는 두 손으로 이마를 짚고 목소리조차 약간 변해서 되물었다.
"왜 그랬어요? 그것을 말해야 합니다. 왜 그랬습니까?"
나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그는 일어서서 사무실 한구석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서류함의 서랍을 열었다. 거기에서 은으로 만든 십자가를 꺼내 가지고 그것을 휘두르며 나에게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여느 때와는 아주 다른 거의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이것을, 이 사람을 압니까?"
"물론 압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자 그는 흥분해서 빠른 어조로 자기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과, 하느님이 용서하지 않을 만큼 죄가 많은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용서를 받으려면 사람은 뉘우치는 마음으로 어린애처럼 되어서 넋을 깨끗이 비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의 신념을 말했다. 그는 몸을 책상 너머로 기울이고 십자가를 거의 내 머리 위에서 흔들어댔다. 사실 나는 그의 이론을 따르기가 매우 어려웠다. 첫째로 나는 몹시 더웠고, 그의 사무실에는 커다란 파리들이 있어서 그것들이 내 얼굴에 붙었기 때문이고, 또 나는 그의 태도에 좀 겁이 나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판사의 하는 짓이 우스워 보였다. 왜냐하면 결국 죄를 지은 사람은 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가 대강 알아들은 것에 의하면, 그의 의견으로서는 내 고백에 오직 한 가지만 모호한 점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두 번째로 권총을 쏘기 전에 사이를 두었다는 사실이다. 그 밖의 다른 것들은 잘 알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은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고집을 부리는 것은 잘못이고, 그 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나는 그에게 말할까 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말하려는 것을 가로막고, 다시 벌떡 일어나 나더러 하느님을 믿느냐고 물으면서 훈계를 했다. 나는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는 화가 나서 앉아버렸다. 그럴 수는 없다고 하며, 누구나 비록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않고 외면하는 사람일지라도 하느님을 믿는 법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그의 신념으로 만약 그것을 의심해야 한다면, 그의 생애는 무의미해지고 말 것이라는 것이었다.
"내 생애가 무의미하게 되기를 당신은 바랍니까?"
하고 그는 외쳤다. 내 생각으로는 그것은 나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어서 그에게 그렇다고 말했다. 그러나 책상 너머로 그는 벌써 그리스도 십자가상을 내 눈 밑에 내밀고 터무니없는 말투로 소리를 질렀다.
"나는 기독교 신자야. 나는 이분에게 그대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있어, 어째서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괴로움을 당하셨다는 것을 믿지 않는단 말인가?"
나는 그가 나에게 반말을 쓰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나는 이제는 진절머리가 났다. 더위는 더욱 심해졌다. 별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때 내가 늘 하는 것처럼 나는 그의 말을 수긍하는 체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는 승리한 듯이
"그것 봐. 그래도 믿지 않아? 하느님께 마음을 바치겠지?"
하고 말했다. 물론 나는 다시 한 번 아니라고 했다. 그는 다시 안락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매우 피곤해 보였다. 잠시 그는 아무 말도 없었으나, 그동안에도 타이프는 대화를 따르기를 멈추지 않고, 마지막 이야기를 계속해서 치고 있었다. 그는 나를 약간 슬픈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나서
"당신처럼 고집 센 사람은 처음 봅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내 앞으로 온 죄인들은 이 고뇌의 형상을 보고는 모두 울었어요."
나는 그것은 바로 그들이 죄인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대답하려 했다. 그러나 나도 그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그것은 나로서는 믿을 수 없는 생각이었다. 그때 판사가 일어섰다. 심문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했다. 그는 여전히 좀 피곤한 표정으로 내가 한 일을 후회하고 있느냐고 물을 뿐이었다. 나는 생각을 하고 나서 진정 후회라기보다는 차라리 일종의 성가심을 느낀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날은 그것으로 그치고 이야기는 더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 뒤 나는 여러 번 예심판사를 만났다. 만날 때마다 나는 변호사와 동반했다. 이야기는 다만 나로 하여금 먼젓번에 한 나의 진술의 어떤 점을 좀 더 자세히 말하게 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렇지 않으면 판사는 내 변호사와 직무에 관한 토론을 했다. 그러나 사실 그때마다 그들은 나를 조금도 돌보지 않았다. 어쨌든 차츰차츰 심문의 방식이 달라졌다. 판사는 이미 나에게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고, 이를테면 그는 내 사건의 성격을 규정지은 모양이었다. 그는 다시는 나에게 하느님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며, 먼젓번처럼 흥분한 그를 다시 볼 수도 없었다. 그 결과, 우리들의 대화는 점점 진지해졌다. 몇 번의 질문이 있고, 내 변호사와 좀 이야기를 하고 나면 심문은 끝나는 것이었다. 내 사건은, 판사 자신의 말에 의하면 착착 진전되어가고 있었다. 어떤 때는 대화가 일반적인 범주에 들어가면 나도 거기에 가담했다. 나는 그제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런 때에는 아무도 나에게 심하게 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규칙적이고 침착하게 꾸며져서, 나는 '가족들 사이에 끼여 있는 것 같은' 어처구니없는 인상을 받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1개월 동안이나 계속된 예심을 치르고 나서, 나는 이따금 판사가 그의 방문까지 나를 배웅하고 어깨를 두드리며,
"오늘은 끝났습니다. 무신자 선생."
하고 다정스럽게 이야기해주던 그 순간을 무엇보다도 즐겼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판사의 방문을 나서면 나는 다시 헌병의 손에 맡겨졌다.
2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있었다. 형무소에 들어오고 나서 며칠이 지난 후 나는 나의 생애의 그 시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 그러한 혐오감에 대해서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사실, 처음에는 형무소에 있다는 실감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막연한 무슨 새로운 사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은 다만 마리의 처음이자 단 한 번의 방문을 받은 다음부터였다. 마리의 편지를 받은 날부터 - 내 아내가 아니라고 해서 이제는 면회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마리는 그 편지에서 썼다 - 나는 내가 있는 감방이 내 집이고 내 생활은 그 속에 한정되어 있음을 느꼈다.
체포되던 날, 우선 나는 이미 여러 사람이 들어 있는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는데 대부분이 아랍인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보고 웃더니 무엇을 했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아랍인을 한 명 죽였다고 대답하니까, 그들은 잠잠해졌다. 이윽고 저녁의 장막이 내렸다. 그들은 누워서 잘 돗자리를 펴는 법을 설명해주었다. 한끝을 말아서 베개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밤새도록 빈대가 얼굴 위를 기어다녔다. 며칠 후에 나는 독방으로 격리되어 판자 위에서 자게 되었다. 변기와 쇠로 만든 대야가 있었다. 형무소는 도시 맨 꼭대기에 있었으므로 조그만 창문으로 바다가 보였다. 어느 날 철창에 달라붙어 햇빛을 향해 얼굴을 내밀려는 바로 그때 간수가 들어와서 면회하러 온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마리려니 하고 나는 생각했다. 과연 마리였다.
면회실로 가기 위하여 긴 복도를 거쳐서 계단을 지나 마지막으로 다른 복도를 걸어갔다. 넓게 뚫린 창으로 빛이 들어오는 큰방에 들어섰다. 방은 세로로 막고 있는 커다란 두 개의 쇠창살에 의해 길게 나누어져 있었다. 쇠창살 사이에는 8미터 내지 10미터 가량 되는 간격이 있어서 면회인과 죄수를 갈라놓고 있었다. 내 앞에 줄무늬가 있는 옷을 입고 햇볕에 얼굴이 그을은 마리가 보였다. 내가 서 있는 쪽에는 죄수들이 10여 명 있었는데 대부분은 아랍인들이었다. 마리는 무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2명의 여자 면회인 사이에 끼여 있었다.
하나는 입술을 꼭 다물고 검은 옷을 입은 키가 자그마한 노파였고, 또 하나는 모자를 쓰지 않은 뚱뚱한 여자였는데 손짓을 많이 하며 큰소리로 지껄이고 있었다. 쇠창살 사이의 거리 때문에 면회인이나 죄수들은 큰 목소리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방안에 들어섰을 때 커다랗고 장식이 없는 벽 때문에 울리는 소란한 목소리와 하늘로부터 유리창 위에 쏟아져서 방안으로 퍼지는 거센 빛으로 말미암아 나는 얼떨떨했다.
내가 있는 감방은 보다 더 조용하고 어두웠다. 그곳에 익숙하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마침내 나는 밝은 빛에 드러난 얼굴들을 똑똑히 볼 수 있게 되었다. 간수 한 사람이 쇠창살 사이의 복도 끝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대부분의 아랍인 죄수들과 그 가족들은 서로 마주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그처럼 소란스러운 가운데서도 나직이 말을 하며 서로 의사소통을 했다. 아래로부터 울려오는 그들의 희미한 속삭임은 그들의 머리 위에서 교차하는 말소리에 대하여 줄곧 일종의 저음부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마리에게로 다가가며 그러한 모든 것을 순식간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마리는 벌써 쇠창살에 달라붙어서 있는 힘을 다해 웃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했으나 그런 말을 그녀에게 하지는 못했다.
"어떠세요?"
하고 마리는 큰소리로 말했다.
"별일 없어."
"불편하지는 않으세요? 뭐 필요한 건 없구요?"
"아무것도 없어."
우리들은 말을 끊었다. 마리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뚱뚱한 여자는 내 옆의 사나이를 향해서 울부짖고 있었다. 아마 그녀의 남편인 듯 솔직한 눈매를 가진 키가 큼직한 금발의 사나이였다. 무슨 말인지 시작한 대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쟌느가 그를 돌보려고 하질 않아요."
하고 여자는 소리소리 지르고 있었다.
"응, 그래?"
하고 사나이는 말했다.
"당신이 나오면 그를 데려올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맡으려고 하지 않아요."
마리도 그때 레이몽이 안부를 전하더라고 소리를 질러서 나는 고맙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내 말은 "그 녀석은 잘 있나?" 하고 묻는 내 옆의 사나이는 목소리에 뒤덮여버리고 말았다. 그의 아내는
"더할 나위 없이 몸이 좋아졌다."
고 말하면서 웃었다. 내 왼편에 있던, 손이 가냘프고 키가 작은 청년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자그마한 노파와 마주서서 뚫어지게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더 관찰할 여유가 없었다.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마리가 외쳤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 하고 대답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마리를 바라보고 옷 위로 그녀의 어깨를 껴안고 싶었다. 나는 그 엷은 천에 욕정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 외에 무엇에 희망을 가져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마리가 하고 싶은 말도 아마 그런 뜻이었으리라. 왜냐하면 마리는 줄곧 웃음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나에게는 그녀의 반짝이는 치아와 눈가에 잡히는 잔주름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마리는 다시 외쳤다.
"나오시면 우리 결혼해요."
"글세"
하고 나는 대답했으나 그것은 무엇이고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마리는 아주 빨리 그리고 여전히 높은 음성으로 정말이라고 하며 석방되면 또 해수욕을 하러 가자고 말했다. 곁에 있던 여자도 고함을 지르며 사무실에 바구니를 맡겼다고 말하고 그 속에 넣은 것을 일일이 주워섬겼다. 돈이 많이 든 것이니 없어진 게 없나 검사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내 왼쪽에 있던 청년과 어머니는 여전히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아랍인들의 웅얼거리는 소리는 우리들의 발밑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밖에서는 빛이 창문에 부딪혀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빛이 모든 사람들의 얼굴 위를 새로운 즙처럼 흘렀다.
나는 몸이 좀 피곤한 것 같아 밖으로 나오고 싶었다.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기분이 언짢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마리를 좀 더 보고 싶었다. 그 뒤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른다. 마리는 자기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끊임없이 웃고 있었다. 속살거리는 소리, 외치는 소리, 주고받는 이야기 소리가 서로 교차했다. 내 옆에서 서로 마주 바라보고 있던 젊은이와 노파 두 사람만이 침묵의 고도를 이루고 있었다. 하나씩 하나씩 아랍인들이 끌려 나갔다. 맨 앞 사람이 나가버리자 거의 모든 사람이 일시에 말을 끊었다. 키가 작은 노파가 쇠창살로 다가섰다. 그와 동시에 간수가 그의 아들에게 몸짓을 했다. 청년이
"안녕히 가세요, 어머니."
하고 말하자, 노파는 두 쇠창살 사이로 손을 들이밀어 아들에게 천천히 손짓을 했다.
노파가 나가자 남자 한 사람이 손에 모자를 들고 들어와서 자기 자리에 들어섰다. 그러자 죄수 한 사람이 끌려 들어왔으며, 그들은 낮은 목소리로 열심히 이야기를 했다. 방안이 다시 조용해졌기 때문이었다. 내 오른쪽에 있던 사나이가 불려나갈 차례가 되자 그의 아내는 마치 소리를 크게 지를 필요가 없어진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이 여전히 큰소리로 말했다.
"건강에 주의하시고 조심하세요."
내 차례가 되었다. 마리는 키스하는 시늉을 했다. 나는 방을 나서기 전에 돌아다보았다. 마리는 얼굴을 쇠창살에 비벼대고 여전히 일그러지고 굳어 보이는 미소를 띠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리가 편지를 보낸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의 일이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 시작된 것은 그 때부터였다. 어쨌든 무엇이나 과장은 하지 말아야 하는 법인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나에게는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형무소에 수감되어서 처음에 가장 괴로웠던 일은 내가 자유로운 사람이 갖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가령 바닷가로 가서 물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 솟곤 했다. 발밑의 풀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 물속에 몸이 잠길 때의 촉감, 그리고 해방감 같은 것들을 상상할 때 갑자기 나는 감옥 담이 그 얼마나 답답하게 나를 둘러싸고 있는가를 느꼈다. 그것이 몇 달 동안 계속되었다. 그 다음에는 죄수로서의 생각밖에 없었다. 나는 매일 안마당에서 산책을 하지 않으면 변호사의 방문을 기다리곤 했다. 나머지 시간은 그럭저럭 보냈다. 그 당시 나는 만약 마른 나무 둥지 속에 들어가 살게 되어, 머리 위 하늘에 피는 꽃을 바라보는 것밖에 다른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게 된다고 하더라도 차츰 그런 생활에 익숙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나는 지나가는 새들이나 마주치는 구름들을 기다렸을 것이다. 마치 여기서 변호사의 야릇한 넥타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듯이. 또 저 바깥세상에서 마리의 육체를 껴안을 것을 기다리며 토요일까지 참고 지내듯이, 그런데 결국 생각해보면 나는 마른 나무 둥지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도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생각도 그랬다. 어머니는 늘 사람은 무엇에나 결국은 익숙해지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보통 나는 그런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처음 몇 달 동안은 괴롭기는 했지만 바로 그것을 억제하려는 노력이 그 몇 달 동안을 지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예를 들어 여자에 대한 욕망으로 고통스러웠다. 나는 젊었으니까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별히 마리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여자, 여러 여자들, 내가 알았던 모든 여자들을 생각했기 때문에, 나의 감방은 그들 여자들의 얼굴로 가득 들어차고 욕망으로 가득 찼다. 한편으로는 그것들을 내 마음을 어지럽게 했으나 또 한편으로는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나는 마침내 식사시간에 취사장의 보이와 같이 오곤 하던 간수장의 동정을 얻게 되었다. 처음 여자 이야기를 한 것은 그였다. 다른 사람들도 첫째로 못 견뎌 호소하는 것이 그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그에게 나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여서 그런 대우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신네들을 감옥에 가두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오."
하고 그는 말했다.
"아니, 그 때문이라니?"
"아무렴, 자유라는 것, 그것을 당신네들에게서 빼앗는 거란 말이오."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나는 그에게 동의를 표시하여,
"참 그렇긴 해. 그렇지 않다면 징벌이라는 게 무엇이겠소?"
하고 말했다.
"그렇고말고, 당신은 참 이해성이 많군 그래.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해요. 그렇지만 결국 그네들도 스스로 만족을 채우게 된답니다."
또 담배도 고통거리였다. 형무소로 들어왔을 때 나는 허리띠, 구두끈, 넥타이, 그리고 주머니에 지니고 있던 모든 것, 특히 담배를 빼앗겼다. 감방으로 옮겨와서 담배를 돌려달라고 해보았지만 그것은 금지되어 있다는 것이다. 처음 며칠 동안은 매우 괴로웠다. 내가 가장 고통을 당한 것은 아마 이것이었을 것이다. 침대 판자를 뜯어서 그 나뭇조각을 빨곤 했다. 온종일 구역질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그것을 왜 빼앗아버리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뒤에 나는 그것도 징벌의 일부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때는 벌써 담배를 피우지 않는 일에 익숙해져서 그것은 이미 나에게는 아무 징벌도 되지 못했다.
그러한 불편을 제외하면 나는 그다지 불행하지도 않았다. 거듭 말하자면 문제는 다만 시간을 보내는 일이었다. 과거를 추억하는 것을 배운 때부터는 심심해서 못 견디는 일은 없게 되었다. 이따금 나는 내 방을 생각했다. 그 한 모퉁이에서 출발하여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것인데 그러면서 도중에 있는 것을 모두 머릿속으로 새겨보곤 했다. 처음에는 아주 빨리 끝났는데 그 뒤로 다시 되풀이할 때마다 조금씩 길어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있는 가구를 전부 하나씩 생각했고, 또 그 물건마다 그 세밀한 점들을 생각하고 그러한 세밀한 점들, 조각이라든가, 흠이라든가, 이가 빠진 가장 자리라든가 그런 것들에 관해서는 그 빛깔 또는 결 같은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나는 내 재산목록에 무엇 하나 빠짐없이 일람표를 만들도록 힘썼다. 그리하여 몇 주일 후에는 내 방안에 있는 것들을 따져보는 것만으로 여러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처럼 생각을 하면 할수록 나는 등한히 했던 것, 잊어버렸던 것들을 기억으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단 하루만 산 사람이라도 감옥에서 100년쯤은 쉽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추억할 거리가 있어 심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건 편리한 일이었다.
또 잠도 고통거리였다. 처음에는 밤에도 잘 수 없었고, 더군다나 낮에는 조금도 잘 수 없었다. 차츰 밤에 자는데 익숙해졌으며 낮에도 잘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 수개월 동안은 하루에 16시간 내지 18시간씩 잤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남는 것은 6시간이었는데 그것을 식사며, 대소변이며, 추억이며,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읽으면 되는 것이었다.
짚을 넣은 매트와 침대 판자 사이에서 사실 나는 한 장의 옛 신문을 발견했던 것이다. 천에 들러붙어서 노랗게 빛이 바래고 앞뒤가 비쳐 보였다. 첫 대목은 없었으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듯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어떤 사나이가 체코의 어떤 마을에서 돈벌이를 떠났다가, 25년 후에 부자가 되어서 아내와 아이 하나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누이와 함께 고향에서 호텔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들을 놀라게 해주려고 사나이는 아내와 자식을 다른 여관에 남겨두고 어머니의 집으로 갔는데, 그가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장난을 할 셈으로 방을 하나 잡고 돈을 보여주었다. 밤중에 그의 어머니와 누이는 그를 망치로 때려죽이고 돈을 훔친 다음 시체를 강물 속에 던져버렸다. 아침이 되자, 사나이의 아내가 와서 그런 사실을 모르고 길손의 신분을 밝혔다. 어머니는 목을 매고, 누이는 우물 속에 빠져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아마 수천 번 읽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것은 사실 같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럴 법도 한 이야기였다. 어쨌든 그런 결과에 대해서는 길손에게도 좀 책임이 있고 장난이란 함부로 할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처럼 잠을 자고, 지나간 일을 생각하고, 삼면기사를 읽는 동안 빛과 어둠은 바뀌고 시간은 흘러갔다. 감옥에 있으면 시간관념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나는 읽은 일이 있었지만, 그때는 그러한 것이 별로 나에게는 의미를 갖지 못했었다. 한나절이 얼마나 길고 동시에 짧을 수 있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지내기는 물론 길지만, 하도 길게 늘어져서 하루하루는 넘치고 마는 것이었다. 세월은 그 속에서 이름을 잃어버린다. 어제 혹은 내일이라는 말만이 나에게는 의미를 잃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들어온 지 다섯 달이 지났다고 하는 말을 어느 날 간수로부터 들었을 때 나는 그의 말을 믿었으나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로서는 언제나 같은 날이 내 감방으로 밀려오고, 언제나 같은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날 간수가 가버린 뒤에 나는 쇠로 만든 밥그릇에 비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내 모습은 아무리 웃으려고 해도 무뚝뚝한 채로 있는 듯했다. 나는 빙그레 웃었으나 비춰진 얼굴은 여전히 무뚝뚝하고 슬픈 표정이었다.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나에게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때였다. 형무소 아래층의 여기저기에서 저녁의 소리가 침묵의 행렬을 지어 올라오는 그러한 때였다. 나는 천장에 뚫린 창문으로 다가가서 마지막 빛 속에 내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이었지만 그다지 놀라울 것도 없었다. 나는 그때 사실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여러 달 전 이후 처음으로 나는 내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나는 그것이 오래전부터 내 귀에 울리고 있던 소리임을 알아차리고 그동안 나는 혼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어머니의 장례식 날, 간호사가 했던 이야기를 생각했다. 정말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형무소 안의 저녁이 어떤 것인지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다.
3
결국 여름이 빨리 지나가고 다시 여름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첫더위가 심해짐에 따라 내게 무슨 새로운 일이 생기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 사건은 중죄재판소의 맨 마지막 회기에 심의될 예정으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 회기는 6월로 끝나는 것이었다. 변론이 시작되었을 때, 밖에서는 햇볕이 무르녹고 있었다.
변론은 2, 3일 이상은 끌지 않을 것이라고 변호사는 확언했다.
"그리고 당신의 사건이 이번 회기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재판정에서도 서두를 겁니다. 뒤이어서 부모 살해사건을 심의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그는 덧붙였다.
나는 아침 7시 30분에 불려나가 호송차로 재판소까지 이송되었다. 그리하여 헌병 두 사람의 지시에 따라 어둠침침한 조그만 방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거기 앉아 기다렸는데 옆으로 문이 하나 있었다. 그 뒤에서는 말소리, 호명 소리, 의자 소리, 그리고 동네 축제 놀이에서 전주가 끝나고 춤을 출 수 있도록 방안을 정리할 때를 연상케 하는 소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재판이 열리기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헌병들은 말하고, 그들 중의 하나는 담배 한 대를 나에게 권했다. 나는 거절했다. 조금 뒤에 그가 나더러
"겁이 나느냐?"
고 묻기에,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어떤 의미로는, 재판 사건을 본다는 것이 흥미 있는 일이기까지 했다. 나는 여태까지 그런 기회를 가져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야 볼 만하지. 그렇지만 나중엔 싫증이 나고 말아요."
하고 다른 헌병이 말했다.
이윽고 짧은 벨 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헌병들은 내 수갑을 풀어 주고 문을 열어 나를 피고석으로 들여보냈다. 법정에는 사람들이 꽉 들어찼다. 커튼이 쳐져 있었으나, 햇빛이 여기저기서 새어 들어와 공기는 숨 막힐 지경이었다. 유리창은 닫혀 있었다. 나는 의자에 걸터앉았고, 헌병들도 내 양쪽에 자리를 잡았다. 내 앞에 나란히 줄지어 있는 얼굴들이 눈에 띈 것은 바로 그때였다.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배심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얼굴들을 구별할 수 있는 특징을 나는 말할 수가 없다. 내가 받은 인상은 다만 하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나는 전차 안의 좌석을 눈앞에 보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 그 이름 모를 승객들이 웃음거리를 찾아보려고 새로 오르는 승객을 훑어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 배심원이 찾고 있던 것은 웃음거리가 아니라 죄였으니까. 다만 그 차이는 그다지 큰 것이 아니고, 어쨌든 내 머리를 스친 것은 그러한 생각이었다.
나는 또 그 닫힌 방안에 들어찬 사람들 때문에 좀 어리둥절했다. 재판소 안을 둘러보았으나 어느 얼굴 하나 식별할 수 없었다. 처음 나는 그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려고 모여들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듯하다. 여태까지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그러한 법석거림의 원인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했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까?" 하고 한 사람이 헌병에게 말하자 헌병은 심문 때문이라고 대답하고, 배심원석 밑의 책상 옆에 자리 잡은 한 패를 가리켰다.
"저기들 와 있소."
하고 그는 말했다.
"누구 말이오?"
하고 내가 묻자
"신문기자들 말이지."
하고 그는 대답했다. 헌병은 기자 한 사람을 알고 있어서, 그 기자가 그때 헌병을 보고 우리들에게로 걸어왔다. 꽤 나이가 많아 보였는데 얼굴은 약간 찡그리고 있었으나 호감 가는 남자였다. 그는 매우 다정스럽게 헌병의 손을 잡았다. 그때 나는 마치 클럽에서 같은 또래의 사람들끼리 서로 만나서 즐거워하듯, 모든 사람들이 서로 아는 얼굴을 찾아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보았다. 또 나는 어쩐지 침입자 같고, 필요 없는 존재라는 기묘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신문기자는 웃음을 띠면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모든 것이 나에게 유리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내가 고맙다고 하자
"우리들은 당신의 사건을 좀 선전했습니다. 여름철은 신문으로서는 경기가 없는 때입니다. 기삿거리가 될 만한 것이라곤 당신의 사건하고 부모 살해사건밖엔 없어요."
하고 그는 덧붙였다. 그러고는 그가 방금 같이 앉아 있다가 온 그 사람들 가운데 뚱뚱한 두더지처럼 생기고 큼직한 검은 테 안경을 쓴 키가 자그마한 사나이를 가리키며 '파리 신문'의 특파원이라고 말했다.
"당신 사건 때문에 온 것은 아니고 부모살해사건에 관한 보고를 하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왔는데 당신의 사건도 기사로 만들어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 말에 대해서도 나는 하마터면 고맙다고 할 뻔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스운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는 내게 다정스러운 손짓을 해보이고 가 버렸다. 우리는 또 몇 분 동안 더 기다렸다.
내 변호사는 법복을 입고 여러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들어왔다. 그는 신문기자들에게로 가서 악수를 했다. 그들은 농담을 하고 웃고 하며 아무 일도 없는 듯한 태도였는데 마침내 법정 안에 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모두들 자기 자리에 앉았다. 내 변호사는 내게 와서 손을 잡고 흔들며 질문을 받으면 짤막하게 대답하고, 이쪽에서 먼저 뭐라고 말하지 말고, 그 밖의 일은 자기에게 맡기라고 일렀다.
왼쪽에서 의자를 뒤로 당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붉은 법복을 입고 코안경을 쓴,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사나이가 조심스럽게 옷을 당겨 올리면서 앉는 것이 보였다. 그가 검사였다. 서기 한 사람이 개정을 알렸다. 동시에 커다란 선풍기 두 대가 부르릉거리기 시작했다. 판사 세 사람이 들어왔다. 둘은 검은 옷을 입고, 하나는 붉은 옷을 입었는데 서류를 가지고 들어와서 실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단으로 빨리 걸어갔다. 붉은 옷을 입은 남자는 중앙에 자리 잡고 앉아서 법모를 자기 앞에 벗어놓고 벗겨진 대머리를 손수건으로 닦고 나서 재판 개시를 선언했다.
신문기자들은 벌써 만년필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무심하고 비웃는 태도였다. 그러나 프란넬 옷을 입고 하늘색 넥타이를 맨 아주 젊은 청년 하나만이 만년필을 앞에 놓은 채 나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약간 균형이 잡히지 않는 듯한 그 얼굴에서 매우 맑은 두 눈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 눈은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었는데, 이렇다 할 아무것도 표현하고 있지 않았다. 나 자신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야릇한 인상을 받았다. 아마도 그 때문에, 그리고 또 내가 그곳의 풍습을 몰랐기 때문에, 나는 뒤이어 일어난 모든 일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배심원들의 추첨과 변호사, 검사, 배심원에 대한 재판정의 질문 - 질문을 받을 때마다 배심원의 머리들이 일제히 재판정석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 기소장의 빠른 낭독 - 그 속에서 나는 지명들과 인명들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 그리고 다시 변호사에 대한 질문. 재판장은 증인 호출을 하겠다고 말했다. 서기는 이름을 불렀다. 그것은 내 주의를 끌었다. 여태까지 혼잡하던 방청객들 속에서, 한 사람씩 일어서서 옆문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양로원 원장, 수위, 페레 영감, 레이몽, 마송, 살라마노, 마리. 마리는 나에게 살짝 근심스러운 시늉을 해보였다. 나는 그들이 여태까지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끝으로 이름을 불린 셀레스트가 일어섰다. 그의 곁에 언젠가 레스토랑에서 보았던 키가 자그마한 여자가 그 자켓을 입고 정확하고 결단성 있는 그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뚫어지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재판장이 또 이야기를 시작하여, 나는 생각해볼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했다. 정식 변론이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말하고 나서 방청인들에게 조용하기를 요청할 필요조차 없을 줄 안다고 말했다. 그는 사건의 변론을 공명정대하게 진행시키는 것이 자기의 직분이며, 자기는 사건을 객관적인 눈으로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배심원들의 결정은 정의의 정신에 입각하여 내려져야 할 것이며, 어쨌든 조그만 사고라도 있으면 방청객들에게 퇴장을 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더위는 점점 심해져서 방청객들이 신문으로 부채질하는 것이 보였다. 종이 구기는 소리가 잇달아 났다. 재판장이 손짓을 하자 서기가 짚으로 엮은 부채 세 개를 가져왔다. 세 사람의 판사가 그것으로 부채질을 했다.
곧 심문이 시작되었다. 재판장은 나에게 부드럽게, 다정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어조로 질문을 했다. 다시 내 신분에 관해 질문을 했다. 나는 귀찮았으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잘못 알고 재판을 한다면 그건 너무나 중대한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더니 재판장이 내가 한 일을 얘기했는데 두서너 마디 하고는 줄곧
"그렇지요?"
하고 내게 확인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변호사의 지시에 따라
"네,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재판장은 매우 세밀히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동안 줄곧 신문기자들은 받아쓰고 있었다. 나는 젊은 기자와 그 키가 작고 꼭두각시 같은 여자의 시선을 느꼈다. 전차 안의 좌석에 앉은 것 같이 사람들은 모두 재판장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는 기침을 하고 서류를 뒤지고 나서 부채질을 하며 내게로 몸을 돌렸다.
재판장은 나에게 겉으로는 내 사건과 아무 관계도 없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아마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 문제를 심의해야겠다고 말했다. 또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려니 생각하고, 동시에 몹시도 그것이 나에게는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왜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냈느냐고 재판장이 물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부양할 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것은 나로선 마음 아픈 일이었느냐고 묻기에, 어머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우리는 이미 서로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었고, 또 누구에게도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으며, 그리고 우리는 각기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졌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재판장은 그 점에 관해서는 더 논의하지 않겠다고 말한 다음 검사에게 다른 질문이 없느냐고 물었다.
검사는 반쯤 나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는데, 그는 나를 보지 않고 재판장의 허락을 얻어, 내가 아랍인을 죽일 생각으로 혼자서 샘으로 되돌아갔는지 어떤지 알고 싶다고 말했다.
"아닙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다면 무기는 왜 가지고 있었으며, 그곳으로 바로 돌아간 이유는 무엇이오?"
그것은 우연이었다고 나는 대답했다. 검사는 딱딱한 어조로
"지금은 그만하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고는 모든 것이 좀 애매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그러나 잠시 의논을 하고 나서 재판정은 폐정을 선언하고, 오후에는 증인심문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생각을 해볼 겨를도 없었다. 끌려 나와서 호송차에 실려 형무소로 돌아와서 점심을 먹었다. 매우 짧은 시간, 노곤해지려는 바로 그때 나는 다시 불려나갔다.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어 나는 같은 방안에, 같은 얼굴들 앞에 앉게 되었다. 다만 더위가 훨씬 더 심해져서 마치 기적이나 일어난 듯 모든 배심원들, 검사, 변호사, 그리고 몇몇 신문기자들까지도 밀짚 부채를 손에 들고 있었다. 젊은 기자와 자그마한 그 여자도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부채질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없이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리고 양로원 원장의 이름이 불리는 것을 들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곳과 나 자신에 대한 의식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나에 대한 불평을 말하더냐는 질문에 원장은 그렇다고 대답하고, 그러나 친근자들에 대한 불평을 한다는 것은 재원자들의 일종의 괴벽이라고 말했다. 내가 양로원에 보낸 것을 어머니가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느냐고 재판장이 따져 묻자 원장은 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다. 또 다른 질문에 대해, 그는 장례식 날 내가 냉정한 것을 보고 놀랐다고 대답했다. 냉정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물으니까, 원장은 발끝을 내려다보고 나서, 내가 어머니를 보려고 하지 않고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장례식이 끝난 뒤에도 무덤 앞에서 묵도를 하지 않고 곧 물러났다고 말했다. 그를 놀라게 한 일이 또 하나 있었다. 장의사의 일꾼 한 사람에게 내가 어머니의 나이를 모르더란 말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재판장은 위원장에게, 여태까지 한 말이 확실히 나에 관한 것이 틀림없냐고 물었다. 원장이 그 질문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 것으로 안 재판장은
"법률상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리고 재판장이 차석검사에게 증인에 대한 질문이 없냐고 묻자, 검사는
"아, 없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고 외쳤다. 그 목소리가 하도 억세고, 나에게로 향한 그 승리의 표정을 지닌 눈초리가 하도 의기양양해서, 나는 여러 해 만에 처음으로 울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모든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미워하는가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배심원들과 내 변호사에게 질문이 없는가 묻고 나서, 재판장은 수위의 진술을 들었다. 그에게도 다른 모든 증인들이나 마찬가지로 같은 격식의 절차가 되풀이되었다. 자리에 나와 서며 수위는 나를 바라보고 눈길을 돌렸다. 그는 질문에 대답했다. 내가 어머니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 담배를 피웠다는 것, 잠을 자고 밀크커피를 마셨다는 것을 말했다. 그때 나는 온 장내를 솟구치게 하는 그 무엇을 느끼고 새삼스럽게 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재판장은 수위에게 밀크커피 이야기와 담배 이야기를 한 번 더 시켰다. 차석검사는 조소의 빛을 띠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 내 변호사가 수위에게, 그도 나와 함께 담배를 피우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이 질문을 듣자, 검사는 벌떡 일어서더니
"도대체 누가 죄인입니까? 증언의 불리함을 은폐하기 위하여 죄과를 증인에게 뒤집어씌우는
방법은 언어도단입니다. 아무래도 증언이 치명적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고 외쳤다. 그렇지만 재판장은 질문에 대답하라고 수위에게 말했다. 영감은 당황한 빛으로
"제가 잘못했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저 분이 권하는 담배를 거절하기가 미안해서 그랬습죠."
하고 말했다. 끝으로 나에게 덧붙여 할 말이 없느냐고 묻기에, 나는
"없습니다. 다만 증인의 말이 옳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내가 그에게 담배를 권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수위는 그때 약간의 놀라움과 일종의 감사의 뜻이 포함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망설이더니 그는 밀크커피를 권한 것은 자기였다고 말했다. 내 변호사는 의기양양해서 외치며, 배심원들은 그것을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검사는 우리들의 머리 위로 벼락같은 소리를 질렀다.
"물론 배심원들께서는 그것을 고려하실 겁니다. 그리고 배심원들께서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으로서는 커피를 권할 수도 있었지만, 아들로서는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의 시체 앞에서 모름지기 그것을 사양해야 할 것이었다고 결론을 내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수위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토마 페레의 차례가 되었을 때는 서기가 그를 증언대까지 부축해야 했다. 그는 특히 어머니를 잘 알고 있었고, 나는 장례식 날 한 번 만났을 뿐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날 내가 무엇을 했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했다.
"저는 그날 너무 슬퍼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가슴속의 슬픔 때문에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에게는 매우 슬픈 일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기절까지 했지요. 그래서 저분은 보질 못했습니다."
차석검사는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이라도 보았느냐고 물었다. 페레는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검사가
"배심원들께서는 이 점을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나 내 변호사는 화를 내며 지나쳐 보일 만큼 큰소리로 페레에게, 내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페레는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방청객들이 웃었다. 나의 변호사는 한쪽 소매를 걷어붙이면서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이 사건은 전부가 이 모양입니다. 모든 것이 사실이라지만, 사실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검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기록문서의 제목을 연필로 짚고 있었다.
5분 동안 쉬는 사이에 변호사는 모두 잘 되어 간다고 말했다. 휴식이 끝나자 피고측의 요구로 출두한 셀레스트의 진술이 있었다. 내 처지를 변호하기 위해서였다. 셀레스트는 때때로 나에게 시선을 던지며 두 손으로 파나마 모자를 돌리고 있었다. 그는 새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은 가끔 일요일에 나와 함께 경마구경 갈 때 입던 것이었다. 그러나 칼라는 달 수가 없었던지, 셔츠를 구리단추로 채웠을 따름이었다. 내가 그의 손님이었느냐고 하는 질문에 그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또 친구이기도 합니다."
하고 말했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대하여, 나는 사나이라고 그는 대답했다. 사나이란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까, 그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누구나 다 안다고 말했다. 내가 내성적인 성격이냐는 질문에는, 다만 나는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말했다. 내가 식비는 어김없이 치렀느냐고 차석검사가 묻자, 셀레스트는 웃고 나서
"그건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사사로운 일입니다."
하고 말했다. 다시 나의 범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자, 그는 증언대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할 말을 미리 준비한 것 같았다.
"내 생각으로는 그건 하나의 불행입니다. 불행이 어떤 것인지는 누구나 압니다. 불행이라는 건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확실히 내 생각으로는 그건 하나의 불행입니다."
그는 더 계속하려고 했으나 재판장이 그만하면 좋다고 말하고 수고했다고 말했다.
셀레스트는 약간 당황했다. 그러나 그는 좀 더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재판장은 짧게 이야기하도록 요청했다. 셀레스트는 또다시 그것은 하나의 불행이라고 되풀이했다. 그러니까 재판장은
"네, 그것은 알았어요. 그러나 우리의 할 일은 그러한 불행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말했다. 성의껏 했으나 그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셀레스트는 내게 고개를 돌렸다. 눈은 번쩍이고 입술은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좀 더 나를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나에게 묻고 있는 듯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런 몸짓도 하지 않았으나, 한 인간을 껴안고 싶은 마음이 우러난 것은 그때가 생전 처음이었다. 재판장은 증언대에서 물러가라고 그에게 명령했다. 셀레스트는 법정 좌석에 가서 앉았다. 나머지 심문이 끝나도록 그는 우두커니 몸을 앞으로 약간 기울여 무릎에 팔꿈치를 괴고 파나마 모자를 두 손으로 잡고 모든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마리가 들어왔다.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역시 아름다웠다. 그러나 머리카락을 풀어놓았을 때가 나는 더 좋았다. 내가 앉아 있는 곳에서도 그녀의 볼록한 젖가슴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아랫입술이 조금 부푼 듯한 것도 여전했다. 매우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곧 그녀는 언제부터 나를 알았느냐고 하는 질문을 받고 우리 회사에서 같이 일하던 시기를 말했다. 재판장은 나와의 사이가 어떤 것인가를 알고 싶어 했다. 마리는 친구라고 말했다. 또 다른 질문에 대하여, 나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대답했다. 서류를 뒤적이고 있던 검사가, 갑자기 언제부터 우리들의 관계가 시작되었느냐고 물었다. 마리는 그 날짜를 말했다. 검사는 태연한 기색으로, 그것은 어머니의 장례식이 있은 다음날인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러고는 약간 비웃는 말투로, 그 같은 미묘한 사정을 더 캐묻고 싶지는 않지만, 또 그녀의 염려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러나 - 여기에서 그의 어조는 무뚝뚝했다 - 그는 자기의 의무상 부득이 에의를 초월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검사는 마리에게 나와 관계를 맺게 된 그날 하루의 일들을 요약해서 말하라고 했다. 마리는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았으나, 검사의 강권에 못 이겨 해수욕 갔던 일, 영화구경 갔던 일, 그리고 둘이서 나의 집으로 돌아온 일을 말했다. 차석검사는 예심에서 마리의 진술을 듣고, 그 날 영화의 프로그램을 조사해보았다고 말한 다음, 그날 무슨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는지 마리 자신의 입으로 말해주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과연 마리는 거의 질린 목소리로, 그것은 '페르낭델'의 영화였다고 말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장내는 잠잠해졌다. 그러자 검사는 일어서서 심각하게 참으로 감동된 듯한 목소리로, 나에게도 손가락질을 하면서 천천히 또박또박 끊어 말했다.
"배심원 여러분, 어머니가 사망한 바로 그 다음날에 이 사람은 해수욕을 하고, 부정한 관계를 맺고, 희극영화를 보고 좋아한 것입니다. 더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여전히 조용한 가운데 검사는 말을 끝맺었다. 갑자기 마리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사실인즉 사람들이 억지로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 이야기를 시킨 것이다, 자기는 나를 잘 알고 있으며 나는 아무것도 나쁜 일을 한 게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재판장이 손짓을 했고 서기가 그녀를 데려갔고 심문은 다시 계속되었다.
마송이 나서서 나는 얌전한 사람이며, '그뿐만 아니라 성실한 사람이다'라고 말했으나, 거의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살라마노도 내가 그의 개의 일로 퍽 친절했다는 것을 말하고, 나와 어머니에 관한 질문에 대하여 나는 어머니에게 할 말이 아무것도 없었고, 그 때문에 내가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낸 것이라고 대답했으나 역시 들어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알아주셔야 합니다.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살라마노는 말했지만 알아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도 이끌려 나갔다.
뒤이어 레이몽의 차례가 되었다. 그가 마지막 증인이었다. 레이몽은 나에게 슬쩍 손짓을 해보이고 다짜고짜로 나에게는 죄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판정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재판장이 말했다. 재판장은 그에게, 질문을 기다려서 대답을 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와 피해자와 어떤 관계에 있었느냐 하는 질문이 있었다. 레이몽은 그 기회를 타서, 자기가 피해자의 누이의 뺨을 때린 다음부터 피해자가 미워하고 있던 것은 자기라고 말했다. 그러나 재판장은 피해자가 나를 미워할 이유가 없었는가라고 물었다. 레이몽은 내가 바닷가에 같이 있었던 것은 우연의 결과였다고 대답했다. 검사는, 그러면 어째서 사건의 발단이 된 그 편지가 내 손으로 씌어졌느냐고 물었다. 레이몽은 그것도 우연이었다고 대답했다. 검사는 이 사건은 이미 여러 번 우연이 진상을 왜곡했다고 반박했다. 레이몽이 그의 정부의 뺨을 때렸을 때 내가 말리지 않은 것도 우연인가, 내가 경찰서에 가서 증인이 되었던 것도 우연인가, 그때 내 증언이 순전히 호의적이었던 것도 우연인가 알고 싶다고 했다. 그는 끝으로 직업이 무엇이냐고 레이몽에게 물었다. '창고감독'이라고 레이몽이 대답하자 차석검사는 배심원들에게 증인이 기둥서방 노릇을 업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공범자고 친구다. 그러므로 내 사건은 가장 천한 종류의 음란한 범죄 사건이며, 더욱이 피고는 흉악하기 짝 없는 파렴치한이라는 것이었다. 레이몽이 변명을 하려 했고, 내 변호사도 항의했으나, 재판장은 검사의 이야기를 끝마치게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검사는
"나는 더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한 다음, 레이몽에게
"피고는 당신의 친구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레이몽은
"그렇습니다. 나의 친구였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검사는 나에게 같은 질문을 하여 나는 레이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에게 눈을 돌리지 않았다.
"나는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검사는 그때 배심원에게로 돌아서며 말했다.
"어머니가 죽은 다음날 가장 수치스러운 정사에 몰두한 그 사람은 대수롭지도 않은 이유로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풍기 사건의 결말을 지으려고 살인을 한 것입니다."
검사는 이야기를 끝마치고 앉았다. 그러나 내 변호사는 참다못해, 두 팔을 높이 쳐들며 외쳤다. 그 때문에 소매가 흘러내려, 풀 먹인 셔츠의 주름이 드러나 보였다.
"도대체 피고는 어머니를 매장한 것 때문에 기소된 것입니까?"
방청객들이 웃었다. 그러나 검사는 다시 일어서서 법복을 고쳐 입고 나서 존경하는 변호인이 순진성을 갖지 않고서는 그 두 종류의 사실 사이에 근본적이고 감동적이며 본질적인 관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언명했다.
"그렇습니다."
하고 그는 힘차게 외쳤다.
"범죄인의 마음을 가지고 자기의 어머니를 매장했으므로 나는 이 사람의 죄를 논고하는 것입니다."
그 논고는 방청객들로부터 커다란 효과를 거둔 듯했다. 변호사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러나 그 자신 동요된 빛을 보였고 사태는 나에게 결코 유리하지 못하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러고는 모든 것이 빨리 진행되었다. 심문이 끝나고, 재판소에서 나와 차를 타러가면서, 나는 매우 짧은 동안 여름 저녁의 냄새와 빛을 느꼈다. 어두컴컴한 호송차 속에서 나는 내가 좋아하던 어떤 도회지의 거리며, 이따금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던 어떤 시간의 귀에 익은 소리들을, 마치 자신의 피로한 마음속으로부터 찾아내듯이 하나씩 다시 들을 수 있었다. 이미 더위가 수그러진 공중에서 들려오는 신문장수들의 고함 소리, 공원에서 마지막까지 놀던 새 소리, 샌드위치 장수의 부르짖음, 높은 시가지의 휘어진 길목에서 울리는 전차의 삑삑대는 소리, 그리고 항구 위로 밤이 내릴 무렵, 하늘에 반향하는 어렴풋한 소리 - 그러한 모든 것이 나에게 소경의 길잡이같이 이루고 있었다. 그 길은 형무소로 들어오기 전에 내가 잘 알고 있던 것이었다. 그렇다, 그것은 이미 오랜 옛날, 내가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던 시간이었다. 그러한 때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언제나 가볍고 꿈도 없는 수면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인가 달라진 것이 있었다. 왜냐하면, 내일을 기다리고 있었던 나는 나의 감방에 다시 들어가게 된 까닭이다. 마치 여름 하늘 속에 그려진 낯익은 길이 죄 없는 수면으로 이끌어갈 수도 있고, 감옥으로 이끌어갈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4
피고석에서라도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언제나 흥미 있는 일이다. 검사와 변호사간의 토론이 있는 동안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많이 했다. 아마 내 범죄 이야기보다도 더 많이 내 이야기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논고와 변론이 그다지 차이가 있었을까? 변호사는 팔을 쳐들고 범죄를 인정하되 변명을 붙였고, 검사는 손가락질을 하며 죄를 고발하여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았을 따름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좀 난처한 일이 하나 있었다. 나는 스스로의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었으나 때로는 나도 한마디 하고 싶었다.
그러면 변호사는
"가만있어요. 그래야 일이 잘 됩니다."
하고 말했다. 이를테면 사건이 나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다루어진 셈이었다. 나는 참여도 안 시키고 모든 것이 진행되었다. 내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은 채 내 운명이 결정되었다. 때때로 나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가로막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도대체 누가 피고입니까? 피고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나에게는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해보면 아무 할 이야기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차지하는 흥미는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어 검사의 변론도 나에게는 곧 싱거워졌다. 내 관심을 끌거나 흥미를 일으킨 것은 다만 단편적인 말들, 몸짓들, 혹은 전체와는 동떨어진 한 토막의 변설, 그러한 것들이었다.
내가 옳게 이해한 것이라면, 검사의 생각의 요점은 내가 범죄를 미리 계획했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그는 그것을 증명하려고 했으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을 증명하겠습니다. 그것을 나는 이중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는 명백한 사실에 비추어서, 둘째로는 이 악한 마음씨의 음흉한 심리 상태에 비추어서 증명할 수 있습니다."
검사는 어머니가 죽은 뒤의 사실들을 요약했다. 내가 냉담했다는 것, 어머니의 나이를 몰랐다는 것, 이튿날 여자와 함께 해수욕을 하러갔다는 것, 페르낭델의 영화구경을 하고, 끝으로 마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때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기까지 퍽 시간이 걸렸다. 그가 '정부'란 말을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마리였을 따름이다. 그리고 검사는 레이몽 이야기를 했다. 사건을 보는 그의 방법은 여간 명석한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의 이야기는 그럴 듯했다. 내가 레이몽과 합의하여 그의 정부를 꾀어내서 '성품이 횡포한' 사나이의 흉악한 행위에 맡기려고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바닷가에서는 내가 레이몽의 적들에게 대들었다는 것이다. 레이몽은 다쳤다. 나는 레이몽에게서 권총을 달래가지고 혼자서 그것을 사용할 생각으로 되돌아갔다. 그래서 계획대로 아랍인을 쏘아죽인 것이다. 조금 기다렸다가 '일이 잘 되었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다시 네 방의 총알을 태연자약하게, 말하자면 확실히 명확한 의식을 가지고 쏘았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습니다."
하고 검사는 말했다.
"나는 여러분께 이 사람이 뻔히 알면서 살인을 하게 된 사건의 경위를 말씀드렸습니다. 나는 이 점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보통의 살인, 정상에 의하여 관대하게 보아줄 수도 있는 그런 반사적 행동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 사람은 교양도 있습니다. 이 사람의 진술을 여러분도 들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는 대답할 줄도 알고 말의 뜻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행동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귀를 기울이고 있던 나는 나를 교양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능력이 어떻게 한 사람의 범인에게는 매우 불리한 조건이 되는 것인지 나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나를 놀라게 한 점은 그러한 점이었다. 그 뒤로는 더 이상 검사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러한 말이 들려올 때까지.
"후회하는 빛이라도 보였습니까? 여러분, 조금도 없었습니다. 예심 때에도 이 사람은 자기의 가증스러운 범행을 뉘우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고는 나에게로 돌아서서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계속해서 열 번을 토했는데, 사실 나는 그 이유를 잘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이야기가 옳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는 했다. 나는 내 행동을 그다지 뉘우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노발대발한다는 것이 나는 놀라웠다. 그에게 나는 다정스럽게 거의 애정을 기울여 나로서는 정말로 후회할 게 없다고 설명을 해주고 싶었다. 나는 항상 앞으로 나에게 일어날 일, 오늘의 일, 또는 내일의 일에 마음이 팔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물론 내 처지로서는 누구에게도 그러한 투로 말할 수는 없었다. 나에게는 다정스러운 태도를 취하거나, 선의를 가질 권리가 없는 것이다.
검사가 다시 내 영혼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여 나는 귀를 기울였다. 검사는 내 영혼을 들여다보았으나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배심원들에게 말했다. 사실 넋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도무지 없고, 인간다운 점이 조금도 없으며, 인간의 마음을 보전하는 모든 도덕적 원리가 나와는 인연이 멀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하고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는 그것을 비난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가질 수 없는 것이 그에게 없다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법정에서는, 소극적인 관용의 의기는 그보다 더 어렵기는 하지만, 더 높은 의기로 바뀌어야 합니다. 특히 이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심리의 공허가 사회 전체를 삼켜버릴 수도 있는 심연이 되는 경우에는 더욱이 그러합니다." 그러고는 어머니에 대한 내 태도를 뇌까렸다. 변론중에 한 말을 그는 다시 되풀이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 범죄를 이야기했을 때보다도 더 길었다. 너무나 길어서, 마침내 그날 아침의 더위밖에는 아무것도 나는 느끼지 못했다. 잠시 후에 차석검사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매우 낮고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법정은 내일 가장 가증스러운 범죄, 부모를 살해한 범행을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잔학한 범죄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인간사회의 율법이 엄중한 처단을 내리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범행이 일으키는 전율감은 내 무감각에 대하여 느끼는 전율감보다는 차라리 덜하다는 것을 서슴지 않고 말할 수 있다고 지껄였다. 또 그의 말에 의하면 정신적으로 어머니를 죽이는 사람은 아버지를 자기의 손으로 죽이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로부터 말살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전자는 후자의 행위를 준비하는 것이며, 말하자면 그러한 행위를 예고하고 승인한다는 것이었다.
"여러분, 나는 확신합니다."
하고 그는 언성을 높여서 덧붙였다.
"이 의자에 앉아 있는 이 사람은 이 법정이 내일 판결을 내리게 될 살인죄를 또다시 범할 것이라고 말해도 여러분은 내 생각이 지나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처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검사는 땀으로 번뜩이는 얼굴을 닦았다. 끝으로 그는 자기의 의무는 괴로운 것이지만 단호히 그것을 수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법칙을 무시하고 있으므로 사회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반응도 모르는 사람이므로 인정에 호소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사람에 대해 사형을 요구합니다. 사형을 요구해도 내 마음은 가볍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짧지 않은 재직기간 중, 나는 여러 번 사형을 요구한 일이 있었지만 오늘처럼 이 괴로운 의무가 신성한 지상명령이란 의식과 흉악 이외에는 아무것도 엿볼 수 없는 한 사람의 얼굴을 놓고 느끼는 전율감에 의해 보상을 받아 평온하고 명랑하게 된 적은 일찍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검사가 자리에 앉자 상당히 오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더위와 놀라움으로 어리둥절했다. 재판장이 잔기침을 하고 나서 낮은 목소리로 덧붙여 할 말은 없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이야기하고 싶었으므로 일어서서 그저 생각나는 대로 아랍인을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말했다. 재판장은 그건 하나의 주장일 뿐이라고 말하고 아직 나의 변호 내용을 잘 알 수 없으니 변호사의 말을 듣기 전에 내가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된 동기를 명확히 말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빠른 어조로 말을 좀 뒤섞이며 내 자신이 우습게 보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장내에는 웃음이 일었다. 내 변호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곧 이어 그는 발언의 지명을 받았으나 시간도 늦고 자기의 진술은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므로 오후로 미루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법정은 거기에 동의했다.
오후에도 커다란 선풍기가 여전히 실내의 무더운 공기를 휘젓고, 배심원들의 가지각색의 조그만 부채들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변호사의 변론은 언제나 끝이 날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문득 나는 귀를 기울였다.
"피고가 사람을 죽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고 그가 말했기 때문이다. 뒤이어 그는 그런 투로 이야기를 하며, 내 말을 할 적마다 '피고'라고 했다. 나는 매우 놀랐다. 나는 헌병에게로 몸을 굽혀 그 이유를 물었다. 헌병은 가만있으라고 말하고 조금 있더니
"변호사들은 모두 그렇다."
고 덧붙였다. 나로서는 그것은 또한 나를 사건으로부터 제쳐놓고, 나를 제로로 만들어버리는 것이고 이를테면 그가 내 신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주의는 어느새 그 법정에서 매우 멀어져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변호사는 우스워 보였다. 그는 빠른 어조로 내 가해행위를 변호하고 나서, 그도 역시 나의 영혼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그러나 검사에 비하여 그 솜씨가 훨씬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나도 역시 피고의 영혼을 들여다보았습니다만 탁월하신 검사의 의견과는 반대로 나는 무엇인가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펼친 책을 읽듯 환히 볼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내가 성실한 인간이며 규칙적이고 근면하고, 일하고 있던 회사에 충실했으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다른 사람의 불행을 동정하는 사람인 것을 읽었다는 것이었다. 그의 의견에 의하면 나는 힘이 자라는 한 정성껏 오랫동안 어머니를 부양한 모범적 아들이었다. 나중에 내가 내 능력으로는 시켜드릴 수 없는 안락한 생활을 양로원이 대신 늙은 어머니에게 시켜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는 것이다
"여러분, 그 양로원에 관하여 이러니저러니 그렇게도 많은 논의가 있었다는 것을 나는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만일에 그러한 시설의 유익함과 고귀함의 증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라면 국가 자체가 그런 시설을 보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그는 덧붙였다. 다만 장례식에 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것이 그의 결론의 결함이라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러나 그러한 장광설들, 여러 날 동안 내 영혼에 관해 이야기를 한 그 한없이 긴 시간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이 빛깔 없는 물처럼 되어버려 그 속에서 현기증이 나는 느낌을 받았다.
끝으로 변호사가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 동안, 거리에서 들리는 아이스크림의 장수의 나팔 소리가 다른 방들과 법정의 온 공간에 울려 퍼지며, 내 귀까지 울려온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을 따름이다. 나는 이미 내 것이 아닌 생애, 그러나 거기서 내가 지극히 빈약하나마 집요한 기쁨을 얻었던 생애의 추억에 사로잡혔다. 여름철의 냄새, 내가 좋아하던 거리, 어느 날 저녁의 하늘, 마리의 웃음과 옷차림. 그곳에서 내가 하고 있던 중요하지 않은 그 모든 것에 대한 역증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 나는 다만 그것이 어서 끝나서 나의 감방으로 들어가 잠잘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내 변호사가 끝으로 배심원들은 일시적 실수로 소행을 그르친 성실한 직업인을 사형에 처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외치고, 내가 이미 가장 확실한 벌로써 영원한 뉘우침을 걸머지고 있는 범죄에 대하여 정상의 참작을 요구하는 것도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법정은 심문을 중지하고 변호사는 피곤한 빛을 보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그의 동료들이 달려와서 그의 손을 잡았다.
"참 훌륭했어."
하는 말이 들렸고, 그 중의 한 사람은 내게 동조를 구하려는 듯이
"그렇지요?"
하고 말하기까지 했다. 나는 동의했으나 나의 찬사는 충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었다. 너무나 피곤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밖의 더위가 좀 가셨다. 한길에서 들려오는 소리들로 나는 저녁의 부드러움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들은 모두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나 한 사람에 관계되는 일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장내를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첫날과 똑같은 상태에 있었다. 나는 회색 웃옷을 입은 신문기자, 그리고 꼭두각시 같은 여자와 눈길이 마주쳤다. 그것이 재판 중에 내가 한 번도 눈으로 마리를 찾아보지 않았다는 생각을 나에게 일으켜주었다. 나는 마리를 잊어버리지는 않았으나 할 일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마리는 셀레스트와 레이몽 사이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제야 끝났어요' 하는 듯이 나에게 조그맣게 손짓했다. 얼굴에는 약간 근심 어린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닫혀 있음을 느끼며 그의 미소에 답례조차 할 수 없었다.
공판이 재개되었다. 매우 빠른 어조로 배심원들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의 낭독이 있었다. '살인죄', '가해행위' 그러한 말들이 들렸다. 배심원들이 나가버리자, 나는 앞서 기다렸던 방으로 끌려갔다. 내 변호사가 따라와서 매우 수다스럽게 여느 때보다도 더욱 자신 있고 다정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므로 몇 년 동안의 금고나 혹은 징역을 치르면 그만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에 판결이 불리할 경우에는 파기할 수도 있느냐고 나는 물었다. 그럴 수는 없다고 그는 대답했다. 배심원측의 악감정을 사지 않기 위해서, 이편의 결론적 요구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전술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아무 이유도 없이 판결을 파기하지는 못하는 법이라고 설명했다. 그것은 나에게도 납득이 되어 그의 이론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따져보면,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숱한 서류가 쓸데없을 것이다.
"어쨌든 항소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나쁘지 않으리라고 확신합니다."
내 변호사는 말했다. 우리들은 매우 오랫동안, 아마 거의 4, 50분이나 기다렸다. 시간이 되자 종이 울렸다. 변호사는
"배심원측의 답신을 재판장이 읽습니다. 당신은 판결을 언도할 때에야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하고 말하면서 나를 두고 가버렸다.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계단을 뛰어가고 있었으나 멀고 가까움을 분간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 법정으로부터 나직한 목소리로 무엇인지 읽는 것이 들렸다. 다시 종이 울리고 피고석의 문이 열렸을 때, 나에게로 밀려온 것은 장내의 침묵, 그리고 그 젊은 신문기자가 시선을 나에게서 돌리는 것을 보았을 때의 그 야릇한 느낌이었다. 나는 마리가 있는 쪽을 보지 못했다. 시간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재판장이 이상스러운 말투로, 피고는 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 광장에서 목이 잘릴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 위에 나타난 감정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경이였다고 생각된다. 헌병들은 나에게 친절했고, 변호사는 내 손목에 그의 손을 올려놓았다.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재판장이, 무엇이든지 덧붙여 말할 것은 없느냐고 묻기에 나는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나는 곧 끌려나왔다.
5
나는 형무소 소속 신부의 면회를 세 번째 거절했다. 그에게 말할 것도 없고 이야기하기도 싫어, 서둘러서 만나야 할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의 나의 관심거리는 메카닉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불가피한 것으로부터 빠져나갈 길이 있을 수 있는가를 알아보는 일이다. 감방이 바뀌었다. 지금 이 감방에서는 반듯이 누우면 하늘이 보인다. 하늘밖엔 보이지 않는다. 하늘 모습에서 낮이 밤으로 옮겨가는 빛깔의 조락을 바라보는 것으로 하루하루가 지나간다. 누워서 머리 밑에 손을 괴고 나는 기다린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으로서 그 무자비한 메카니즘으로부터 벗어난 예가, 처형되기 전에 종적을 감추었다든가 경계선을 돌파한 예가 있었을까 하고 나는 몇 번이나 자문해보았는지 모른다. 그럴 때마다 사형집행에 관한 이야기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 후회되었다. 그러한 문제에는 언제나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어떤 일을 당하게 될는지 알 수 없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신문기사를 읽은 일이 있긴 하다. 그러나 특별한 저서들이 확실히 있었을 텐데, 나는 그것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호기심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책들 속에서라면 탈출에 관한 이야기도 찾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한 번쯤은, 바퀴가 멎어 그 거스를 수 없는 전락 속에서 우연과 행운이 한 번쯤은 무슨 변동을 일으킨 일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단 한 번만... 어느 의미로는 그것만으로 내게는 충분하리라고 생각한다. 나머지는 내 마음으로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신문들은 흔히 사회에 대한 죄과를 운운한다. 신문에 의하면 그것을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말은 상상력을 불러일으켜주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탈출의 가능성, 무자비한 의식 밖으로의 도약, 희망의 무한한 기회를 주는 미친 듯한 질주였다. 물론 희망이라고 해도 길모퉁이에서 달리던 도중에 날아오는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것뿐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러한 호사를 나에게 허락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두가 나에게는 그것을 금지하고 메카닉한 것이 나를 다시 붙드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러한 턱도 없는 확실성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어쨌든 그 확실성에 근거를 둔 판결과, 판결의 언도가 내려진 순간부터의 그 어쩔 수 없는 결말 사이에는 어처구니없는 불균형이 있었기 때문이다. 판결문이 5시가 아니라 8시에 낭독되었다는 사실, 그 판결문이 전혀 다를 수도 있으리라는 사실, 그것이 속옷을 갈아입는 인간들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사실, 그것이 프랑스 국민 - 혹은 독일 국민, 중국 국민이든 - 이란 지극히 모호한 관념에 의거하여 언도되었다는 사실, 그러한 모든 것은 그 같은 결정으로부터 많은 준엄성을 제거하는 것으로 나에게는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 선고가 내려진 순간부터 그 결과는 내가 몸뚱이를 비벼대고 있던 그 담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확실하고 준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때, 나는 어머니에게서 들은 아버지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나는 아버지를 알지 못했다. 아버지에 관하여 내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으로는 아마 어머니가 그때 이야기해준 것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어느 살인범의 사형집행을 보러갔었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러갈 생각만 해도 아버지는 병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갔었고, 돌아오던 길에는 아침 먹은 것을 토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아버지가 좀 싫어졌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형집행보다 더 중대한 일은 없으며, 어떤 의미로는 그것이야말로 사람에게는 참으로 흥미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것을 어째서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만약에 내가 이 감옥으로부터 나가는 일이 있다면 나는 모든 사형집행을 빠짐없이 보러가겠다.
그러한 가능성을 생각해보는 것은 잘못이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어느 날 이른 아침 경계선 뒤에서, 말하자면 저쪽에서 자유스러울 자기 자신을 생각할 때 구경하러 갔다가 토할 수 있을 것을 생각할 때 억눌렸던 기쁨의 물결이 가슴으로 복받쳐 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러한 가정에 이끌린다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 뒤로 곧 나는 너무나 추워 이불 밑에서 몸을 웅크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참다못해 턱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러나 물론 언제나 이치에 맞는 생각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법률의 초안을 만들어보는 때도 있었다. 형법 체계를 개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점은 사형선고를 받은 자에게 기회를 준다는 것이었다. 천 번에 한 번쯤, 그것이면 여러 가지 일을 해결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그것을 먹으면 사형수가 - 나는 사형수라는 말을 생각했었다 - 열 번에 아홉 번 죽는 그런 화학약품의 배합을 고안해 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형자에게 그런 사실을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조건이었다. 왜냐하면 곰곰이 냉정하게 일을 생각해보면, 단두대의 칼날의 결함이라면 아무런 기회도, 절대로 아무런 기회도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결국 어쩔수없이 사형수의 죽음은 결정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확정된 조치고 기정사실이어서 그것을 취소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만약에 목이 잘 베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으면 다시 할 뿐이다. 그러므로 기막힌 일은 사형수로서는 기계가 아무 고장 없이 움직여주기만 바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것이 결함이라고 나는 말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로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로는 그 훌륭한 조직의 모든 비결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나는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컨대 사형수는 정신적으로 협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것이 지장 없이 진행된다는 것이 그에게도 이로운 것이다. 나는 또한 그러한 문제에 관해서, 여태까지 정확하지 못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 나는 -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 단두대로 올라가려면 계단을 밟고 교수대 위로 걸어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1789년의 대혁명, 다시 말하면 그러한 문제에 관해서 사람들이 가르쳐주고, 또 보여준 모든 것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소문이 자자했던 어느 사형집행이 있었을 때 신문에 실렸던 사진 한 장이 생각났다. 사실 그 기계는 땅바닥에 지극히 간단하게 놓여 있었고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폭이 좁았다. 좀 더 일찍이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스러웠다. 사진에 나타난 그 기계는 무엇보다도 정밀한 제품답게 그 규모 있고 번쩍이는 모양이 내 인상에 깊이 남았었다. 사람이란 모르는 것에 관해서는 과장된 생각을 품는 법이다. 그런데도 실상은 모든 것이 매우 간단하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계는 그쪽을 향해서 걸어가는 사람의 키만 하다. 마치 누구를 만나러가는 것처럼 가다가 기계와 마주치게 마련이다. 어떤 의미로는 그것도 또한 기가 막히는 노릇이다. 단두대로 올라간다면 하늘 속으로 승천을 하는 것이라는 방향으로 상상력이 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점에서도 메카닉한 것이 모든 것을 짓눌러버린다. 그저 좀 부끄러움을 느끼며 대단히 정확하게 목숨이 슬그머니 끊어지는 것이다.
그 밖에 또 내 머리에서 줄곧 떠나지 않는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새벽과 상소가 그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을 타일러 그러한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며 거기에만 관심을 갖으려고 했다. 하늘은 초록빛으로 변했다. 저녁때가 된 것이다. 나는 생각의 방향을 돌리려고 더욱 애썼다. 나는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렇게도 오래전부터 나를 따르던 그 소리가 멎을 때가 있으리라고는 아무리 해도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진정한 상상력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래도 나는 이 심장의 고동이 내 머리에 울리지 않게 될 순간을 생각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새벽녘 또는 상소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마침내 내 마음을 억제하려 들지 않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이 오는 것은 새벽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결국 나는 밤마다 그 새벽을 기다리며 지낸 셈이다.
갑자기 놀라는 것을 나는 언제나 싫어한다. 무슨 일이 생기든 간에 마음의 준비를 해두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나는 마침내 낮 동안에 좀 자두었다가 밤에는 끝끝내 새벽빛이 천장 유리창 위에 훤히 밝아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가장 괴로운 것은 그들이 보통 그 일을 하러 오는 때라는 것을 내가 알고 있던 그 분간키 어려운 시간이었다. 자정이 지나면 나는 기다리면서 지켜본다. 내 귀가 그처럼 많은 소리, 그렇게도 조그만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동안 발소리는 한 번도 듣지 않았으니 어지간히 나는 운수가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란 아주 불행하게 되는 법은 없는 거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하늘이 빛을 띠어 새로운 하루가 내 감방으로 새어들 때 나는 어머니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발소리가 들려와서 내 심장이 터질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스락 소리만 나도 문으로 달려가서 판자에 귀를 대고 얼빠진 듯이 기다리면, 나중에는 내 자신의 숨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숨소리는 거칠기가 마치 허덕이는 개의 숨결과도 같아서 깜짝 놀라는 일이 있었다. 결국 내 심장은 터지지 않고 다시 한 번 나는 24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낮 동안에는 언제나 상소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이 항소에 대한 생각을 가장 적절하게 이용했다고 믿는다. 효과를 면밀히 따져보니 생각으로부터 최대의 능률을 얻도록 한 것이다. 나는 늘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곤 했다. 상소 각하가 그것이었다. '그땐 죽을 수밖에는 없다'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죽을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러나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결국 서른 살에 죽든지 예순 살에 죽든지 별로 다름이 없다는 것을 나도 모르지는 않는다. 그 어떤 경우든지 그 뒤엔 다른 남자들, 다른 여자들이 살아갈 것은 마찬가지다. 그리고 수천 년 동안 그럴 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지극히 명백한 일이었다. 지금이나 20년 후나 나는 죽을 것이다. 그때 그러한 내 이론이 좀 거북한 것은 앞으로 20년 후의 생활을 생각할 때 내 마음속에 느껴지는 무서운 용솟음이었다. 그러나 20년 후에 어차피 그러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내가 가지게 될 생각을 상상함으로써 그것도 눌러버리면 그만이었다. 죽는 바에야 어떻게 죽든 언제 죽든 그런 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명백한 일이다. 그러므로 - 그리고 어려운 일은 이 '그러므로'라는 말이 표시하는 모든 추론을 시야에서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 그러므로 나는 내 상소의 각하를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두 번째 가정을 생각해볼 권리를 가질 수 있었는데 말하자면 나 자신에게 그것을 용인하는 것이었다. 그 두 번째 가정은 무죄 석방이었다. 거북스러운 것은 턱없는 기쁨으로 눈을 찌르는 그 피와 육신의 충동을 진정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이다. 그 부르짖음을 억누르고 그것을 타일러야만 했다. 첫 번째 가정에 대해서 내 단념을 더욱 적절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이 두 번째 가정에 대해서도 나는 태연스러워야만 했던 것이다. 그럴 수 있을 때에는 한 시간쯤 가라앉은 마음을 가질 수가 있었다. 그만하면 어쨌든 대단한 일이었다.
그럴 무렵 나는 또다시 소속 신부의 면회를 거절했다. 나는 누워서 하늘이 황금빛으로 물드는 것을 보며, 여름 저녁이 가까워짐을 알고 있었다. 바로 내 상소를 각하하고 난 참이라 나는 혈액의 파동이 규칙적으로 내 몸속을 순환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굳이 신부를 만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마리를 생각했다. 퍽 오래전부터 마리로부터 편지가 없었다. 그날 저녁 나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아마 사형수의 정부라는 것에 그만 지쳐버렸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병이 났거나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서로 떨어져 있는 우리들의 두 육체밖에는 이제 우리들을 연결시키고 서로 생각케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 어떻게 내가 그러한 사정을 알 수 있었을 것인가? 하긴 그때부터 이미 마리의 추억은 나에게는 아무런 흥미도 없었다. 죽었다면 마리에게 나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내가 죽은 뒤에는 사람들이 나를 잊어버린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죽고 나면 사람들은 나와 아무 관계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 일은 생각하기 괴로운 일이라고 할 수도 없다. 결국 무슨 생각이든지 사람이란 결국에는 익숙해지고 마는 법이다.
신부가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를 보자 나는 몸이 약간 떨렸다. 신부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평소에는 다른 시간에 오지 않았느냐고 말했더니, 그는 이번 면회는 순전히 친구로서 온 것이고 내 상소와는 아무 관계도 없으며, 상소에 관해서는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는 내 침대 위에 앉은 다음 나더러 가까이 오라고 권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매우 다정스러워 보였다.
잠시 동안 그는 앉아서 두 팔목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머리를 숙여 자기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손은 가냘팠는데 힘줄이 드러나 보였으며, 두 마리의 무슨 민첩한 짐승을 연상케 했다. 신부는 천천히 두 손을 비볐다. 그러고는 여전히 머리를 숙이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하도 오랫동안 그대로 있어서 나는 잠시 그를 잊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그는 머리를 쳐들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왜 내 면회를 거절하십니까?"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 점에 대해서 확신을 가질 수 있느냐고 묻기에, 나는 그러한 것을 자문해볼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런 것은 내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몸을 뒤로 젖히고 손을 펴 넓적다리에 대고 벽에 등을 기대었다. 그는 나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빛을 거의 보이지 않으면서 사람이란 자기로서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쳐다보고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럴 수도 있는 것이라고 나는 대답했다. 어쨌든 진정으로 내 관심을 끄는 것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르겠으나, 내 관심을 끌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명백히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내 관심을 끌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눈을 돌렸으나, 여전히 그 자세를 고치지 않고, 내가 절망한 나머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절망한 것이 아니라고 그에게 설명했다. 다만 나는 두려울 뿐이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당신과 같은 처지에 있던 사람으로서 내가 안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께로 돌아갔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권리라고 나는 시인했다. 그것은 또한 그들이 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를 가졌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로 말하면 도움을 받기가 싫었고, 또 관심이 가지 않는 것에 관심을 기울일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그의 손은 역정이 난 듯한 시늉을 했으나, 곧 그는 몸을 일으키고 옷주름을 바로잡았다. 그러고 나서 나를 '벗'이라고 부르며 이야기를 했다. 그가 그렇게 나에게 말하는 것은 내가 사형선고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의견에 의하면 우리들은 모두 사형선고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말을 가로막고 그것은 사정이 다르고 또 어쨌든 그것이 위안이 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야 그렇지요."
그는 내 말에 동의했다.
"그렇지만 당신은 오늘 죽지 않는다고 해도, 장차는 죽을 것입니다. 그때 똑같은 문제가 생길 것이오. 그 무서운 시련을 당신은 어떻게 받을 것입니까?"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나는 그 시련을 받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자, 그는 일어서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것은 내가 잘 알고 있는 장난이었다. 나는 흔히 엠마뉴엘이나 셀레스트와 그 놀음을 했는데, 대개는 그들이 먼저 눈을 돌려버리곤 했다. 신부도 그 장난을 알고 있다는 것을 나는 곧 알 수 있었다. 그의 눈길은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당신은 그럼 아무 희망도 없고, 죽으면 완전히 없어져버린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하고 말할 때 그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머리를 숙이고 다시 걸터앉았다. 나를 불쌍히 여긴다고 그는 말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로 생각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만 그가 귀찮아지는 것을 느꼈을 따름이다. 이번에는 내가 돌아서서 천장으로 난 창밑으로 갔다. 나는 어깨를 벽에 기대고 있었다. 귀담아듣지는 않았으나, 그가 또다시 나에게 뭐라고 묻는 것이 들려왔다. 그는 불안하고 간곡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가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좀 더 귀를 기울였다.
그는 그의 신념을 피력하여 내 상소는 수락될 것이지만, 그러나 나는 죄의 짐을 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씻어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의견에 의하면, 인간의 심판은 아무것도 아니고 하느님의 심판이 전부라는 것이었다. 나에게 사형을 준 것은 인간의 심판이라고 지적했더니, 그렇지만 그것으로는 내 죄가 씻긴 것이 아니라고 그는 대답했다. 죄가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고 말했다. 내가 범인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나에게 가르쳐주었을 뿐이다. 나는 범인으로 형벌을 받는 것이니 그 이상 더 내게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신부는 다시 일어섰다. 워낙 좁은 감방이라 그가 움직이려고 해도 선택의 여지는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앉아 있든지 일어서든지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땅바닥을 보고 있었다. 그는 한걸음 나에게로 다가서더니 더 앞으로 나설 용기가 없는 듯이 멈춰 섰다. 그러고는 창살 너머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의 생각은 잘못이오."
하고 그는 말했다.
"당신에게 그 이상 더 요구할 수가 있어요. 요구할 겁니다."
"무엇을 요구한단 말입니까?"
"보기를 요구할 것이오."
"무엇을 봅니까?"
신부는 주위를 둘러보고 갑자기 지친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모든 돌들에는 괴로움이 배어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압니다. 나는 고뇌 없이 이것들을 바라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마음속 깊이, 당신들 중의 가장 비참한 사람들일지라도 이 돌들의 어둠으로부터 성스러운 얼굴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보기를 요구하는 것은 바로 그 얼굴입니다."
나는 좀 흥분했다. 여러 달 전부터 나는 그 벽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 세상에서 내가 그보다 더 잘 아는 것은 아무것도, 아무도 없었다. 오래전부터 나는 거기에 하나의 얼굴을 찾아보려 했었다. 그러나 그 얼굴은 태양의 빛과 욕정의 불길을 가졌을 뿐이었다. 그것은 마리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것을 찾으려 했었으나 허사였다. 이제는 그것도 지나간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 축축한 돌에서 아무것도 솟아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신부는 어딘가 슬픈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지금 나는 벽에 등을 완전히 기대고 있었으므로 빛이 내 이마 위로 흐르고 있었다. 그는 무어라고 몇 마디 말했으나 나는 듣지 못했다. 그러더니 그는 매우 빠른 어조로 나를 껴안는 것을 허락해주겠느냐고 물었다.
"싫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는 돌아서서 벽으로 걸어가 천천히 거기에 손을 갖다 대고
"그래 그렇게도 이 땅을 사랑하십니까?"
하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꽤 오랫동안 돌아서 있었다. 방안에 그가 있는 것이 마음에 언짢고 성가셨다. 그에게 혼자 있고 싶으니 가달라고 말하려는데, 그때 그는 다시 내게로 돌아서면서 갑자기 큰소리로 외쳤다. "정말 나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도 다른 생애를 바란 적이 있으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야 있지만 그것은 부자가 된다든가, 헤엄을 빨리 칠 수 있게 된다든가, 더 잘생긴 입을 가지게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나 별다름이 없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것도 그와 같은 종류의 일이다. 그러나 그는 내 말을 가로막고 내세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지금의 이 생애를 회상할 수 있는 그러한 생애"
라고 외치고, 곧 이어서 이제 그런 이야기는 더 듣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하느님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나, 나는 그에게로 다가서며 나에게는 남은 시간이 조금밖에 없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설명하려 했다. 그는 화제를 바꾸려고, 왜 자기를 '나의 아버지(신부님)'라고 부르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냐고 물었다. 나는 화가 나서, 당신은 나의 아버지가 아니며,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라고 대답했다.
"아닙니다, 나의 아들이여"
그는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고 말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이 어두워서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당신을 위하여 기도를 드리리다."
그때 왜 그랬는지 몰라도 내 마음속에서 그 무엇이 터지고 말았다. 나는 있는 목청을 다해 외치며, 그에게 욕설을 퍼붓고 기도는 그만두라고 말한 다음 사라지지 않으면 불살라 죽여 버리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신부복 깃을 움켜잡았다. 기쁨과 분노가 섞인 용솟음과 함께 마음속을 송두리째 그에게 쏟아버렸다. 그는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그렇지 않고 뭐냐? 그러나 너의 신념이란 건 모두 여자의 머리카락만한 가치도 없다. 너는 죽은 사람 모양으로 살고 있고,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없지 않느냐? 나는 보기에는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다.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것은 너보다 더 강하다. 내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명확한 의식이 내게는 있다. 그렇다. 내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언제나 또 옳으리라. 나는 이처럼 살았으니 또 다르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을 하고 저런 것을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마치 저 순간, 내 정당함이 인정될 저 새벽을 여태까지 기다리며 살아온 셈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그 까닭을 알고 있다. 너도 그 까닭을 알고 있다. 내가 살아온 이 허망한 생애에선 미래의 구렁 속으로부터 항상 한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해들을 거쳐서 거슬러 올라와 그 바람이 도중에 내가 살고 있던 때, 미래나 다름없이 현실적이라 할 수 없는 그때에 나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모두 아무 차이도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는가? 너의 하느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생활, 사람들이 선택하는 숙명, 그런 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말인가? 단지 하나의 숙명이 나 자신을 사로잡고 나와 더불어 너처럼 형제라고 하는 수많은 특권을 가진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이 아니냐? 누구나 다 특권을 가지고 있다. 특권을 가진 사람들밖에는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또한 장차 사형을 받을 것이다. 살인범으로 고발된 자가 어머니의 장례식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고 해서 사형을 받는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말인가? 살라마노의 개나 그의 마누라나 그 가치를 따지면 매한가지다. 꼭두각시 같은 그 자그마한 여자도, 마송과 결혼한 그 파리 여자도, 또 나와 결혼하고 싶어하던 마리나 마찬가지로 죄인인 것이다. 셀레스트는 그 성품이 레이몽보다 낫지만, 셀레스트나 마찬가지로 레이몽도 내 친구라고 해서 그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는가? 마리가 오늘 또 다른 한 사람의 뫼르소에게 입술을 내밀고 있다 한들 그것이 어떻다는 말인가? 사형 선고를 받은 녀석, 이놈아! 너는 도대체 아느냐? 미래의 구렁 속으로부터... 이 모든 것을 외치며, 나는 숨이 막혔다. 벌써 신부는 내 손에서 떼어지고 간수들이 나를 흘겨보고 있었다. 그러나 신부는 그들을 진정시키고, 잠시 묵묵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괴어 있었다. 그는 돌아서서 가버렸다.
신부가 나가버린 뒤에 내 마음은 다시 가라앉았다. 나는 기운이 없어 자리 위에 몸을 던졌다. 그러고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눈을 뜨자 별들이 보였으니 말이다. 들판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이 내가 있는 곳까지 들려왔다. 밤냄새, 흙냄새, 소금냄새가 관자놀이를 시원하게 해주었다. 잠든 여름의 그 희한한 평화가 조수처럼 내 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때 한밤의 끝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에게는 영원히 관계없는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는 것이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어머니를 생각했다. 만년에 왜 어머니가 '약혼자'를 가졌었는지, 왜 생애를 다시 꾸며보는 놀이를 했는지 나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곳 생명들이 꺼져가는 그 양로원 근처에서도 저녁은 서글픈 휴식시간 같았다. 그처럼 죽음 가까이서 어머니는 해방감을 느끼며,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마음이 생긴 것임에 틀림없었다. 아무도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내 괴로움을 씻어주고 희망을 안겨 준 것처럼, 나는 이 징후와 별들이 드리운 밤 앞에서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스러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었다. 그처럼 세계가 나와 다름없고 형제 같음을 느끼며 나는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성취되고 내가 외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 위하여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증오의 함성을 울리며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