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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마음의 기록

Bollnow 2024. 4. 15. 06:29

어느 마음의 기록

왕멍

 

내가 성위의 제1 초대소(처음엔 꽝화호텔로 호칭)의 이발소에서 근무한 지도 어언 30년이나 된다. 해방되던 해 내 나이 열입곱 살 때, 군에 입대하기도 전에 이리로 옮겨온 것이다. 1949년 이래 30년이라는 세월이 그럭저럭 흘러 나는 전 초대소의 유일한 '원로'가 된 것이다.

사방이 밝게 빛나는 큰 거울과 천장의 형광등, 백열등이 휘황하게 비치고, 머릿기름, 샴푸, 스킨로션, 크림 등의 향기가 가득한 속에, 찰각찰각하는 가위 소리, 깍둑깍둑하는 이발기 소리, 웅웅하는 드라이기 소리, 솨솨하는 물소리 등이 마치 교향곡처럼 서로 어울려 있다. 벌써 이런 생활을 한 지도 30년이나 된 것이다. 삶이란 결국 이렇게 단조롭고 평범한 것이 행복한 건가 하여 만족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것이 부끄럽게 느껴져서 가끔 당혹스러워지기도 한다.

작은 이발소이지만 나는 그곳에서 인생의 무상을 반영이나 하듯이 수많은 인물들을 만나 보기도 했다. 해방 후의 칠팔 년 남짓은 천당과도 같은 서광이 비치기도 하였다. 이발이나 면도하러 오는 사람들이 모두 동지이거나 전우였던 것이다. 그런 어느 날, 샤오왕이 휴가 중인데다가 고객이 밀려서 사람들이 긴 의자에 줄지어 기다려야 할 지경이 되었다. 이때, 군복을 입은 키다리 하나가 지나가다가 샤오왕의 빈자리를 가리키며 나를 사부라고 부르는 게 아닌가. 그때에 나는 겨우 스무살배기여서 이 칭호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내가 좀 해보면 어떨까요? 왕년에 나도 배운 적이 있다구요."

그 키 큰 군인은 이렇게 말하고는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이 중에 누가 제일 담이 큰가요?"

그때, 회색 제복을 입은 한 뚱보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내 머리를 가지고 기술을 좀 시험해 볼까..."

그 키 큰 군인은 정말 이발을 할 줄 알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새로 부임한 군구사령이었고, 자신의 머리로 기술을 시험해 보라고 솔선하여 나선 사람은 중앙XX부의 부부장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나는 은근히 지도급 동지를 많이 알게 되었다. 짱 서기는 나의 입당을 독려하기도 했고(나는 1954년에 당에 가입하여 복무조의 당소조장을 다년간 지냈다.) 리 정위는 내가 눈병에 걸린 걸 보고 거리에서 빠이찡위 안약을 두 통이나 사다 준 적도 있었다. 리우 청장은 이발 순서를 기다리면서 엉성한 소파를 단단히 손봐 주기도 하였다. 늘상 하급 간부들과 시민들이 지도층 동지를 만나려고 이 초대소로 찾아오곤 하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 이발소에도 찾아왔다.

나는 아주 유능한 한 소선대 보도원이--긴 변발의 처녀인데, 화술이 기관총처럼 예리하고 파를 섞은 두부처럼 분명하였다--몇 명의 어깨에 깃표식을 한 홍두건을 데리고 면도를 하고 있던 성위 제1서기를 둘러싸고서 그에게 6.1 어린이날의 중요 행사에 참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조르던 일도 목격한 적이 있다. 결국 그 제1서기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 몇 년간에 상하, 좌우, 그리고 너와 나, 그가 서로 얼마나 평등하고 친밀히 지내왔던가? 공산당과 해방군은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산신령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신사회를 좋아하였고 혁명에 매료되어서 각국 공산당 지도자들의 사진을 높이 받쳐 들기도 하였고 마르크스나 마오쩌둥 그리고 성우와 우리 초대소의 당지부 서기까지도 진심으로 애호하였으며, "인민일보"와 성보, 지부총결, 애국공약 및 위생 수칙상의 글과 표점 부호 하나하나까지도 정말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 후에 우리는 공장 준공이나 대교 개통식을 경축하고 사회주의 개조의 승리도 축하해 주었다. 도시와 우리 초대소도 공기를 불어 넣은 듯 분위기가 고조되고 팽배되어 있었다. 때맞추어 오늘은 어느 고등관이 양가죽을 쓴 늑대라는 말이 들리기도 하고, 내일은 전국 경작지의 4분의 1이 개량된다든가, 또 오늘은 전국 농촌의 3분의 1의 소유권이 여전히 국민당의 황스런의 손에 있다느니, 내일은 밧줄로 중국을 공산주의에다 꽁꽁 묶어 놓게 된다느니 하는 등의 이야기가 뒤숭숭하게 들려 오곤 하였다. 항상 사람을 놀라게 하는 선고니 논단이니 장거니 하는 일들이 줄지어 이어졌다. 놀랍고도 의아스러워 눈이 어찔어찔 거리지만 분발과 격려도 있었고 놀라서 펄쩍 뛸 만한 사건이 늘어나기도 하였다. 이처럼 정신이 없을 만큼 변화무쌍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전진의 기상을 직감하고 승리를 예측하면서 호탕한 감정과 의기에 불타 있어서 그 대가가 어떨까 하고 헤아릴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즈음에, 늘 오던 노고객이 한 분 보이지 않으면서 사정이 있다는 등, 문제가 생겼다는 등 수군대는 말이 들려 왔다. 그 당시에는 이발하러 오는 사람 중에 얼굴결이 부드럽지 않다든가, 이러저리 두리번거린다든가, 양미간이 굳었다든가, 기침 소리가 거칠다든가 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날이 갈수록 바빠지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어느 노고객의 잠적이 무슨 사정이나 문제 때문인지도 모르고, 또 우리가 해준 머리 색깔이나 두발 모양을 가지고 무슨 낌새를 챌 수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도 학습회에서 타깃이 된 낯선 고객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xxx의 죄목을 들으니 우리 가슴이 터진다!"라고 내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곤 했던 것이다.

역사상 전례가 없는 그 한 해가 실로 시끄러웠다. 내가 늘상 가꾸어 주던 그들의 머리는 모두 '개대가리'로 변하였고, 불에 태워지고 기름에 튀겨지며 부스러지기도 하였다. 호텔은 한 좌파에 점령되어 이발소는 초소로 바뀌었고, 그 위엔 고성 나팔과 경기관총이 설치되었다. 다른 좌파가 들어오면서 나는 직접 이발소를 운영할 수 없게 되었다. 매달 임금을 받게 되니 형편은 자연히 어려워졌다. 1974년에 신생의 홍색 정권이 성립되자 사령부의 근무단은 퇴주하고 말았다. 내가 이발소에 들어서자 거울과 등불의 파편이며 탄피와 긴 창, 그리고 방망이가 널려 있었다. 또 더운 수건을 담아 놓던 보온통엔 누가 오줌을 싸놓았는지 두 마리의 회충이 들어 있었다. 사실 화장실은 바로 벽을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람에 따라 더러워질 수도 있고 깨끗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많은 돈을 들여 초대소를 수리하는 데 넉 달이나 걸렸다. 수리 후에 초대소를 공농비관으로 개명하고 앞엔 긴 철책을 새로 설치하였지만, 사실 농공인들은 근본적으로 들어올 수 없는 실정이었다. 공농빈관은 성 및 군의 비자본주의 노선을 따르는 당권파들의 특실이 되어서 그들의 수면이나 식사, 배설의 제 조건을 개선함으로써 심신이 유쾌한 가운데에서 농공대중을 영도하고 자본주의와 수정주의의 잠식을 억제토록 하고 있었다. 식사는 여덟 명이 한 테이블을 차지하는 걸로 하고, 네 가지 요리와 국 한 종류인 41탕이 31탕으로 바뀌었다. 이발하러 오는 새로운 우두머리 중에는 안약 따위를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웃는 모습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사람, 풍기, 세도가 변했는가? 나는 갈수록 사는 것이 쓸쓸하고 재미가 없었다.

1975년 여름에 한 부부가 이사 왔다. 남자는 쉰 살쯤 되어 보였는데 희끗한 머리, 큰 얼굴, 두툼한 입술에, 눈엔 정기가 들어 있었고 항상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 표정 속에서는 자부심과 비통함이 엿보였다. 여자는 작은 키에 쌍꺼풀이 진 큰 눈을 뜨고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깨끗한 복장을 하고 있었으며, 동작은 민첩하고 얼굴은 엄정해 보였다. 그들은 가방과 캔을 좀 가지고 초대소의 최고층인 6층의 일년 내내 햇빛이 들지 않는 저장실을 개조한 방에 들었다. 그들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시간은 대부분의 손님들이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치울 즈음이었는데, 그들은 슬쩍 와서 남은 것을 있는 대로 먹곤 하였다. 누구와도 얘기를 나누지 않았으며 한 젊은 공인 차림의 심부름꾼이 매주 토요일에 들르는 것 외에는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매일 아침 남자는 뒤뜰의 큰 합환수를 돌면서 운동하였으며, 저녁 식사 후엔 부부가 한 시간 이상 매일 산보하였다. 그 외엔 그들이 방을 나서는 것을 전혀 볼 수 없었다. 극히 적은 일이지만, 그 남자의 호탕하고 힘찬 웃음 소리가 간혹 들리곤 하였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 손님이 없으면 흑색 카키 제복의 여 복무원이 입구에 늘 상냥하게 대기하고 있는데도 그들은 오르내릴 때에 몸소 걸어 다녔으니, 이런 것도 나의 호감을 사기에 족하였다.

이날 아침, 나는 출근하는 길에 허리와 발 운동을 하려고 뒤뜰로 갔다. 여전히 이 장기투숙 손님이 일찌감치 거기서 몸을 풀고 있어야 할 텐데 이날 따라 보이지 않았다. 합환수 아래에 서서 오른발 끝을 들어 반걸음을 내디디려는데 문득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에 나는 온몸이 오싹해졌다. 나는 서둘러 더듬거리며 찾기 시작했다. 분수지를 둘러보고 측백나무 담을 헤쳐 가다가 아궁이 문 앞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한 사람이 엎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뛰어가 보니 바로 그 남자였다. 그의 얼굴엔 피가 흘러내렸고 그의 입은 검은 연탄가루와 붉은 피로 범벅이 되었으며 윗입술까지 벗겨져 있었다. 내가 가서 부축을 하려고 했으나 그의 온몸은 늘어져 있었다. 겨우 어깨를 일으켜 수송대로 옮기고서, 졸고 있던 당직 기사를 불렀다.

"이 손님이 다쳤어. 병이 났나 봐! 빨리 병원으로 이송해야 해!"

당직 기사는 내 선배의 아들인 샤오뿌였다. 그는 와서 살펴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소리를 질렀다.

"이자는 반혁명자예요. 그를 돌봐서 어쩌겠다는 겁니까?"

"반혁명자라고?"

나는 매우 놀랐지만 내 몸에 기댄 노인이 더욱 연약하고 안쓰럽게 여겨졌다. 혁명의 존엄으로 더럽혀진 그해에 '반혁명'이란 석 자는 가증스럽고도 비루한 것이 되어 사라져 버렸었다.

"아무 말 마라. 반혁명이 여기에 또 있다고?"

"모르세요? 그가 바로 탕찌우웬이에요!"

탕찌우웬? 바로 당신이구만! 1967년에 이 성의 대로와 골목, 식당 기둥과 공중 화장실에까지도 역청과 백호, 그리고 각색의 페인트로 씌어진 표어, "결단코 진압하자", "전제정치를 실행하자", "죄책을 면키 어렵다", "그를 죽이자", "개대가리를 부수자" 등의 혁명 구호는 탕찌우웬이라는 이름과 연관되어 있어서, '당구원'이란 이름 석 자는 '당구원'이라고 씌어져서 팽개쳐져 있었다. 어떤 이는 이 이름에 붉은 붓으로 x표시하여 사형에 처할 것을 판시하기도 하였었다. 또 전의 꽝화빈관 쟁탈 싸움 중에 눈이 빨게 가지고 살인까지도 마다 않던 쌍방 모두가 사진과 복사자료를 삐라로 인쇄하여 탕찌우웬이 상대방의 막후조종자라고 폭로 비판하고는 결국 1970년에 탕찌우웬에게 15년형을 정식으로 선고하였던 것이다. 그의 죄명은 중앙문혁에 대한 공격이었다. 지금 그 사람이 내 가슴에 엎드려 신음하며 두 눈을 감고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이다.

이 피, 이 신음, 이 쇠약한 신체, 누런 안색과 굳게 닫힌 눈동자... 한편으로 그의 빛나면서 쓸쓸한, 그러면서 자부심으로 가득 찬 눈빛 거침없는 행동을 연상하고, 다른 한편으로 반혁명자, 15년의 형벌, 짓밟힌 이름을 연상하면서 왠지 모르게 내 마음은 격동하기 시작하였다.

"이 몹쓸 놈아!"

나는 샤오뿌에게 욕을 퍼부었다.

"죽어 가는 생명을 보고 어찌 구하지 않겠니? 그가 반혁명자라도 병원으로 보내야 한다. 알겠니? 네가 이송하지 않아서 생기는 모든 문제는 네가 책임져라!"

샤오뿌는 원래 간교한 녀석이어서 아버지에게까지 입질 손질을 하는데, 갑자기 나에게 한바탕 야단맞고는 눈을 멀끔히 뜨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중얼거렸다.

", 어떻게..."

"그러면 내가 차를 쓰는 걸로 해! 내가 비용을 대고 일체 책임을 지겠다. 이 바보 천치 같은 놈! 어서 차를 대지 못하겠니?"

오늘따라 왜 한 생면부지의 반혁명자에게 이렇게 동정이 가는지 모르겠다. 진실로 일을 발전시키는 데엔 그만큼 반대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다. 근년에 여러 강조할 점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 즉 분명히 한계의 무란 결과를 낳고, 투쟁은 우의. 의기. 간계의 고귀성을 깨닫게 하며, 정치의 결과는 정치에의 권태를 낳고, '사구(4가지 구습)'의 타파는 구풍속. 구습관의 대회전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샤오뿌는 다 낡은 지프에 발동을 걸어 탕찌우웬을 병원으로 이송하였다. 그의 병은 메니에르 증후군이라고 했다. 그는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가벼운 뇌진탕을 일으킨 것인데, 며칠 입원하고서 회복되었다. 어느 날 저녁, 탕찌우웬 부부가 옷을 단정히 입고 이발소에 와서 정중히 식사 초대를 하며 나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테이블 하나에 차려 놓은 음식은 대부분이 인스턴트 식품이었다. 그중에는 한 근에 7원이 넘는 큰 새우도 있었고, 북경 반점 요리사가 만든 것으로 20원이 넘는 여행 야식도 있었다. 이것들은 그리 신선하지는 않았지만, 매우 귀한 음식들이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은 감사의 뜻을 표할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어서, 값비싼 인스턴트 식품으로 정중히 그 뜻을 대신하고자 했던 것이다.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난 후에 탕씨는 말문을 열기 시작했는데, 그의 목소리는 밝고 호탕하였다.

"나는 금년에 쉰넷으로, 1938년인 17세 때는 팔로군에 입대하고 1949년에는 포단의 단정이 되었습니다. 그 후 지방으로 전속되어 N전구당 지위 서기로 약 18년간 지냈지요. 나는 하나의 못처럼 지위 서기의 자리에 못 박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967, 마침내 공산당 자체에 연관된 지 어언 8년이나 되었습니다."

"이분과 국민당의 행정요원이 한 감옥에 갇혀 있어서 제가 식사를 넣어 줄 때에, 그 요원의 가족도 식사를 넣다가 저와 마주쳤어요."

탕찌우웬의 부인이 괴롭게 입을 오므렸다.

", ..."

나는 머리를 끄덕였지만 등허리에 냉기를 느꼈다.

"드세요, 드세요. 나는 전혀 못 먹겠어요. 지금은 안 되겠어요...나 탕찌우웬이 살아 있는 한 언젠가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게 될 겁니다."

탕찌우웬이 말했다.

"그날 뤄 사부님이 아니었으면 당신은 목숨을 보전하지 못했어요! 기사가 차를 못 내주겠다고 했다면서요? 이런 천할 데가! 언젠가는..."

"그만, 그만둬요."

탕지우웬은 부인의 말을 끊고 화제를 바꾸었다.

"내가 정식 수감되기 전에 격리되어 반성할 때가 한 번 있었는데,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나는 주범이라고 해서 단독 격리되었는데, 그 격리실이라는 곳이 제법 쓸 만해서 겨울에도 춥지 않았어요. 그런데 한 젊은 간수 동지가 반혁명자에게 편안히 자게 할 수 없다면서 총으로 격리실 문살을 부수어서 큰 구멍을 내고 말았습니다. 겨울바람이 어찌나 차고 매서운지 나는 그만 폐렴에 걸렸어요. 열이 40도나 되는데, 병원에 가려 해도 보내 주질 않아서 한바탕 싸웠습니다. 그년은 한 반혁명자를 위해 귀한 페니실린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무슨 방법이든 강구해야 했지요."

그는 그 공포 어린 일을 말하면서도 표정과 어조가 오히려 매우 상냥한 데가 때로는 웃음소리까지 섞어서 이야기하는 등 실로 강인한 사람이었다. 그 부인은 화가 나면 안색이 변했고, 한이 되면 이를 악물면서 말을 이었다.

"뤼 사부께서 말씀 좀 해보세요. 어찌된 일입니까? 강산은 우리가 닦은 것이고, 가업도 우리가 이룬 것인데, 이제 머리를 돌리고 우릴 반역이라 하니 말예요! 누가 반역을 했습니까? 지주도, 악인도, 반혁명자도 아니고 순전히 계급 보복입니다!"

탕찌우웬은 연거푸 술 몇 잔을 들이켰다. 나는 과음하지 말라고 권했다. 그러자 그의 부인이 말을 받았다.

"마시게 놔두세요. 오랫동안 속 시원히 말도 못 해 봤어요. 마시고 떠들게 놔두세요. 죽지나 않을 정도로..."

탕찌우웬은 얼굴이 빨개진 채 눈물을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8년간의 감옥생활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름대로 결산해 보는 좋은 기회가 되어서

몇 년 동안 당교에서 지내는 거소다 더 강해졌습니다. 옥에서 나는 혁명에 참가한 이래, 특히 지위 서기로서 한일과 득과 실을 하루하루 하나하나 손꼽아 보았습니다. 내가 굴욕을 받으면 나는 남을 모욕하지 않았는지, 내가 남에게 박해를 당하면 내가 권세 있을 때 몽둥이 맞은 사람이나 없는지를 말입니다. 어째서 범인에게 이렇게 가혹합니까? 진정 반혁명자라면 총을 쏘아 죽이든지, 노역을 시키든지 할 것이지 법률 외적인 모욕과 고역으로 뭘 하겠다는 겁니까? 누가 나에게 찬바람을 넣어 준 그 동지와 같이 법률도 외면하는 극좌적인 열광자를 길렀습니까?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닙니까?"

그는 테이블을 치며 흥분한 탓에 목이 쉬어 있었다.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내가 다시 새 업무를 맡는다면, 첫째 대인의 처리에 신중할 것이며, 둘째 감옥의 상황을 개선하고 범인의 인격을 존중하며 그들이 누릴 생활환경을 보증할 것입니다. 셋째는 극좌의 인물을 중용하거나 뽑지 않을 것입니다.!"

8년 동안 감금 생활을 한 그는 나 같은 일반 노동자에 대해서도 마음을 쓸 수 있게 되었으며, 말끝마다 적극적이고 진실하였다. 사회의 변화 무쌍하고 흉악 야만한 것에 마비되고 말라 버린 나의 심령이 돌연 한 줄기 봄비를 맞은 듯 녹아 내렸다. 응결된 굳은 덩이가 부드러워지고 갈라진 금이 붙기 시작한 듯하여 그의 이야기가 나와 어떤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음에도 나는 울고 말았다. 까닭 없이 울고 있었다. 몇 년 동안 신문, 방송, 무대, 회장 등에서 목이 쉬도록 떠들고 거짓으로 작태하는 고성에 귀가 멍해 있었는데, 이때 한 지위 서기를 지낸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 토로하는 소리를 듣고서, 사람의 말이 이렇게 진실하며 또 묻혀진 모든 진리가 아직 사람의 마음에 남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고독하고 적막한 가운데 그와의 우정은 등이고, 불이었다. 만약 밤중에 환난을 당해도 존경하고 신뢰할 만한 강한 친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될 것이다. 또한 그가 지원과 보호를 자신에게 요청해 오면, 친구에 대한 따뜻한 온정으로 반가울 것이며 자신이 더욱 가치 있는 존재로 느껴질 것이다. 나는 어디서 이런 온정과 힘이 솟는지 모르겠지만, 온 힘을 다해 탕씨를 위로하고 좀 더 잘 지내도록 해주고 싶었다.

식사 일을 맡은 이 중에 잘 아는 사람이 있어서 시중에서도 보기 힘든 물건들, 5월의 신선한 참외부터 금실의 펑티사며, 오량예, 산 잉어, 비누 등을 구할 수 있었는데, 나는 구하는 대로 먼저 탕씨에게 보냈다. 내 아들이 신화서점에서 근무하므로 "동주열국지""전재풍운"도 가져다 주었다. 춘절(음력설)이 지나고서 그를 집으로 초대하여 함께 만두도 빚고 화파오도 넣고 탕웬도 끓이면서 찌우짜오로우와 쑹화딴을 먹었다. 내가 작은방을 꾸밀 때 그는 자기 아들을 보내 도와주기도 하였다. 우리 두 집의 아이들도 친구가 되어, 같이 수영도 하고 기타도 쳤으며 몰래 금서를 바꾸어 읽기도 하였다.

"뤼 형, 성위 짜오 서기의 온 가족이 당신에게 이발을 한다던데, 언제 오게 되면 나에게 알려 주면 어떻겠소? 그를 좀 만나 보렵니다."

어느 날 저녁, 그가 나에게 한 말이다.

"그를 만난다고요?"

나는 놀랐다. 짜오 모씨는 갑자기 신흥귀족에 붙어 명성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만나서 뭘 하려고요? 어느 묘의 보살입니까?"

탕 부인이 입을 삐죽거렸다.

탕찌우웬은 고개를 돌리며 나에게 말했다.

"내가 중앙문혁을 공격했다고 하는데, 사실 난 그런 배짱도 없어요. 완전히 남들이 억지로 날조한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나는 내가 도대체 뭘 공격했다는건지 모르겠어요. 한 당원으로서 오직 당을 위해 일한 것뿐인데..."

"그래, 그래요. 당을 위해 일했으니 말이라도 듣기 좋아요."

그의 부인은 왠지 모르지만 대단히 성이 나서 입을 삐죽거렸다.

"넉 량 무게의 오사모(옛날 말단 관리의 모자)라도 구해 쓰면 좋겠군요. 오늘 조직부에서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자수공장 당지부 부서기를 하래요. ! 억울하게 8년을 죽었다 살아났더니...당신도 말단 관리예요!"

우리의 내왕이 매우 친밀해져서, 그는 부인의 쪼아대는 말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난감하게 여기지도 않고 도리어 나에게 해석해 주었다.

"이런 마음은 어쩔 수 없어요. 당원이라면 언제나 당의 보살핌을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도 아들이 있고 일찍 출가한 큰딸도 있어요. 지금 나 때문에 외손녀까지 홍위병에 들지 못했어요. 내가 짜오 서기를 찾아가지 않고 뻣뻣이 여기서 버티고 있으면, 되는 일이 있습니까?"

유사한 논쟁을 난 한 번만 들은 게 아니었다. 탕 부인이 입으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사실 자수공장 당지부 부서기라는 오사모는 너무 작다고 할 것이다. 전에 말한 바로 그녀의 직급과 문화대혁명 이전의 직무로 보면 적어도 경공업국의 부국장은 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탕씨의 직무가 회복되지 않으면 그녀도 일할 도리가 없다고 했었다. 이러한 말이 우리 서민에겐 좀 생소하지만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들이 말한 것은 모두 실화였기 때문이다. 만일 한 국장급의 간부가 작은 공장에서 말단 관직을 맡았다면 참으로 불유쾌하고 부자연스런 입장에 처할 것이니, 어디 이발사나 갓 배운 실습공이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이런 관직에의 중시가 처음엔 내게 반감을 일으켰지만, 곧 나도 이해하게 되었다.

탕지우웬은 혁명을 위해 많은 공헌을 했고, 또 세 가지 구상도 있었다. 즉 세 가지 정강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 세 가지만이라면 나도 그가 관직에 오르는 것을 옹호할 만했다. 사실 관리가 되지 않고서 어떻게 이 세 정강을 실천하겠는가? 지도적 지위가 아니라면 그들이 어떻게 힘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탕찌우웬의 아들, , 자손의 전도를 고려하니 동정이 갔던 것이다. 그들은 산신령이 아니므로 오곡 식량을 먹고 칠정육욕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경력과 지도 경험이 있으며 또 문화대혁명 중에 정리하고 사색해 본 노동자이므로 나의 국가와 당과 개인에 대한 전도와 희망을 그들에게 걸어 보기로 한 것이다.

여기서 나는 탕찌우웬이 자신의 능력을 펼 기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에 그들이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말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얼마 안 되어서 탕찌우웬을 공소사의 제8부 주임으로 안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무엇에 의거해서 지위서기 동상이 되게 한단 말이오(당시에 고실화영화 "8이 동상이다"가 있었다.)?"

탕 부인이 분하다는 듯이 말했다. 탕씨는 웃을 뿐 대답이 없었으나 '동상'이라도 좋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해 말부터 상황이 달라져 도처에서 숙청인 등용 반대가 일어나 4인방이 분쇄된다 해도 탕씨는 '동상' 자리조차 맡을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19761, 우리는 탕씨 부부와 같이 총리를 애도하는 비애에 잠겨 함께 울고, 함께 주먹을 쳤다. 그들은 종일 인민광장에서 군중의 자발적인 추도 활동에 참가했다.

"이것은 추도이며, 시위입니다!"

탕씨는 흥분하여 나에게 말하였다. 그의 눈엔 지난날 포단 단장 시절의 노기 어린 불이 일고 있었다. 나는 그가 한바탕 전투 준비를 하려고 착각하는가 하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같이 국가 대사를 이야기하는 가운데, 근심 걱정이 불같이 솟아났다. 그러나 197647일 이후 그는 입을 꼭 다물었고, 심지어 내가 야단을 피우면 정색을 하며 경고해 주었다.

"이런 큰일에는 엄숙한 태도를 지녀야 해요. 처음엔 나도 사상적으로 굴곡이 없었으나 중앙의 공문을 학습하면서 점점 "비등(등소평 비판)""우격번안풍의 반격"의 의의를 인식하게 되었소. 잔소문은 듣지 말고 자유주의를 범하지도 말아요!"

그의 말이 나를 실망시키고 어리둥절하게 했지만 그의 입장을 고려해 보면 이런 말이 부득이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197610월에 4인방이 무너졌다. 19772월에 성위 제1서기인 짜오xx4인방과의 연관으로 물러났고, 3월엔 새로운 성위 지도자가 천인대회를 개최하고 대대적으로 탕찌우웬을 위해 보도 선전하기 시작했다. 즉 탕찌우웬 동지는 린피아오와 4인방의 만행에 대해 침봉을 잡고 투쟁하다가 잔혹한 박해를 받았다는 것이다. 성위 지도자도(자오xx를 가리킴) 탕찌우웬을 배척하고 박해했는데, 그의 모습은 한 그루 고결한 청송이 우뚝 대지에 서서 서리와 눈을 이기는 것 같다고 보도한 것이다. 평반대회 후 일주일 만에, 탕찌우웬은 성 관할인 S시의 시위서기로 임명되었다. 나는 그가 바쁘기 때문에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의 일에 너무 기뻐서 직무 회복을 축하하면서 홀로 축배를 들었다. 그는 부임 전에 부인과 자녀를 데리고 나를 찾아와서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우리를 S시로 초청하겠다느니, 무슨 긴요한 일이 있으면 찾아오라느니 하며 당부하였다. 그는 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그의 부인이 재촉하였다. 5분 후에 모정위가 전송하기로 되어 있다면서 그를 잡아끌었다. 차가 떠날 때까지도 그는 내 손을 놓지 못하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S시에 와야 하오!"

이 정분에 나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탕씨가 문에 들어서자 아들은 화장실에 가는 척하고 노닐다가 잠잘 즈음에야 돌아왔다. 그 녀석을 나무랐더니 "!"라고 하면서 한 마디 내뱉었다.

"감히 높이 오를 생각 마세요."

"그게 무슨 말이냐?"

나는 화가 났다.

"우리는 동지요, 친구다. 그분이 조사받은 반혁명자든 시위 서기든지 간에 우리는 그런 관계다. 나는 그분이 복권되었다고 해서 아첨하려는 게 결코 아니다. 네 아비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그분이 서기가 되었다고 해서 그분을 일부러 피할 수는 더욱 없는 거야!"

아들은 담담히 싱긋 웃었다. 근년에 그 아이는 나의 훈계에 늘상 이같이 담담히 싱긋 웃는 습관이 생겼다.

"너 왜 웃어?"

고함치면서 나는 스스로 모욕감을 느꼈다. 아들은 나를 보지도 않고 피곤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버지 말씀을 들으니, 아버진 정말 곧으세요. 천진하시단 말예요! 예컨대, 그분이 정말 투쟁했습니까? 그분이 고결한 청송입니까? 8의 동상이란 말은 어찌된 일입니까?"

아들의 말은 내 말문을 잠시 막았으나, 난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 넌 어찌 최하의 계급의식도 없냐? 4인방이 노동자를 박해하고 너도 노간부에 눈살을 돋우니... 너 참으로 위험한 애구나!"

아들은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나는 기분이 상한 채로 생각해 보았다. 우리 세대의 대단히 유효하고 감동적이며 위력 있는 논증적인 방법과 어조가 이 아이에겐 아무런 효용이 없었단 말인가.

1978년 신년에 탕씨에게서 편지와 함께 S시 특산인 계화 과자 한 상자가 소포로 왔다. 편지엔 틈나는 대로 S시에 놀러 오기 바란다는 뜻을 재차 표하였다. 마음에 작정하진 않았지만, 그분들이 일이 바빠 시간이 소중한데다 그분들을 도와 드릴 만한 것도 없다고 생각하던 차에 아내는 멋모르고 춘절 휴가를 이용해서 한번 다녀오자고 졸라댔다. 말인즉슨 그분들이 우릴 접대할 시간이 없다손 쳐도, 우리가 먼저 그분들에 냉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 정말 가시려고요?"

아들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분은 시위 서기란 걸 잊지 마세요!"

'시위 서기'란 이 넉 자는 내 고개를 떨구게 했으나, 두 성실한 마음의 거리를 계급과 지위의 거리로 잴 수 있을까? 나는 달갑지 않았다.

나는 가기로 결심하고 아내에게 손수 만든 찌우짜오로우와 쑹화딴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이 두 가지는 탕씨가 가장 즐겨 먹는 것이었다. 구랍 28, 출발을 하루 앞둔 날 저녁에 초대소의 기사 ㅆ오뿌가 왔다. 과자 한 상자와 빠이아예 두 병을 들고 찾아와서는 의자에 앉아 이 얘기 저 얘기로 시간을 보냈다.

"나중에 차 쓰실 일 있으면 찾으세요... 이 테이블에 덮개를 씌우면 더 예쁠 겁니다. , 저에게 하나 있는데 잘 맞겠네요...이 자전거는 땜질 좀 해야겠네요. 제가 해 드릴게요."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그가 왜 그러는지를 생각해 보았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우린 평소에 전혀 아무런 왕래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한참 우물쭈물거리다가 겨우 본심을 드러냈다.

"아저씨, 저는 감복했습니다. 안광이 정말 원대하십니다! 탕씨가 아주 어려운 지경에 있을 때 그분을 잘 모셨으니, 쓸모 있는 친구가 되실 겁니다. 우린 모두 가난한 노동자이니 저를 잘 좀 돌봐 주시고 아껴 주십시오. 제 나이 올해 28세입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짝을 구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다가 다행히 얼마 전에 구했는데 매우 흡족합니다. 여자쪽은 S시 교구 모직공장에 근무하는데, 옷장이나 텔레비전 등은 원치 않고 다만 그녀를 교구에서 시구로 옮겨 주고 일도 직포보다는 정방을 원할 따름입니다. 이러저리 생각하다가, 아저씨께 부탁하려고요. 내일 S시에 가신다기에..."

그는 과자 상자와 술병을 내 손에 쥐어 주었다.

",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당황하였다.

"아저씨를 믿습니다. 아저씨는 탕씨를 잘 아시고, 탕씨는 지금 시위 서기이니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나는 얼굴에서 귀뿌리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 ,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가 뭔가 말하려는데 아들이 들어왔다. 아들은 과자 상자와 술병을 발견하고는 그것들을 집어 문밖으로 들고 나가면서 문을 열고 말했다.

"다른 데 가보세요. 우리 아버진 S시에 안 가십니다."

그러고는 샤오뿌를 밖으로 밀어냈다.

"아이, 이럴 때 봐주셔야지. 내가 필요할 때도 있을 텐데..."

샤오뿌는 계속 변명하고 있었다.

아들은 문을 닫고 돌아서서 말없이 나를 나무라듯 바라봤다. 나는 긴 한숨을 쉬고서 말했다.

"차표를 물려."

이해 6월에 성도읍에서 재무 전선 학대 축전 및 학대제회의가 열렸는데, 나는 복무 대표로 뽑혀 회의에 참가하였다가 마침 S시 대표단과 가까이 투숙하게 되었다. 내가 조심스레 탕씨에 대한 그들의 반응을 타진해 보았더니,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탕 서기는(공문상 누차 당 내에서 동지의 호칭을 강조하였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여전히 관명을 부르고 있음) 일을 잘하십니다. 부임하자마자 시정정돈, 애국위생, 교통질서, 녹화 및 4인방파의 정돈체계 등 박력이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게 탕씨가 업무에 철저하며, 작은 일에도 엄격하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더욱이 춘절기간에는 '사복시찰'을 하여 뒷거래하는 품행 나쁜 부식점 경리의 내막을 조사하고 수습하여 구사회의 청백리 같다는 말에는 나도 진심으로 기쁨을 금할 수 없었다. S시 시위업무의 좋고 나쁨이 나의 한 일부같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면 탕 서기 부임 후에 그곳의 감옥 사정은 뭐 좀 개선됐습니까?"

나의 질문에 그들은 대답은커녕 눈을 치뜨고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비로소 알아차렸다. 이런 질문은 무슨 혐의와 관련된 것이라는 점을.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탕 서기에 관해 뭐 나쁜 반응이라도 없습니까?"

나는 또 물었다.

"나쁜 반응이라뇨?"

S시의 쌍학 대표가 말을 이었다.

"문제는 그분의 부인이지요. 그 부인은 참 대단하십니다. 누구도 훈도를 못 하지요. 위아래 가릴 것 없이 성질을 내니까요. 미용실에 가면 미용사를 욕하고, 물품을 사면 판매원을 욕하시니, 그분이 상점에 들어왔다 하면 모두들 두려워하죠."

"호랑이라고들 하지만, 사실은 성품이 곧으셔서 그 성품을 잘 맞추기만 하면 남에게도 잘하신답니다."

사람마다 관점이 같지 않았다.

"탕 서기는 호화주택에 살고 있다더군요. 그의 아들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또 50여 평방미터 짜리를 요구한대요. 듣자니까, 딸도 Y진에서 S시로 옮겨 왔는데 지금 탕 서기의 부인이 마침 그 딸과 사위를 위해서 집을 구하고 있대요..."

감시하는 사람도 없는데 작은 소리로 말하는 것은 습관된 조건반사인가. 이런 얘기를 듣고 난 후, 나는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녀가 어떻다고? 그들이 어떻다고? 그들은 많이 고생하였고 인민들은 그들을 동정했었다. 그녀는 자신의 권력으로 4인방이 준 손실을 뺏어 오려는 걸까? 그럴 수 없지! 아니야, 그녀는 권력이 없어. 그들은 이런 권력이 없다구! 인민이 그들을 냉철히 지켜보고 있는데...그들이 군중을 이탈한다면...하늘이여!

나는 즉시 S시로 가고 싶었다. 탕씨와 그 부인에게로 달려가서 내가 들은 반응을 일일이 알려 주고 싶었다. 그들이 관직에 있는 한 진실을 말해 주는 사람이 많을 것 같지는 않았다. 다급하여 견딜 수 없었다. 회의의 정식절차를 마친 후, 대회의 마지막 이틀간의 참관, 촬영, 영화감상, 회식에 불참하고 휴가를 얻어 S시로 떠났다.

4시간 동안 야간열차를 타고 S시에 도착하여 아침 식사를 하는데, 옛날 학교 선배 한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선배는 내가 탕씨를 만나러 왔다는 말을 듣고는 놀라며 물었다.

"탕 서기를 찾아왔어? 상소하려구? 자네, 전부터 문제를 일으키는 자 아냐?"

"아닙니다. 우린 그냥 알고 지내는 사이죠. 놀러 오라고 했어요."

"놀러 오라고 했다구?"

선배는 큰 눈을 더욱 크게 뜨고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크게 깨달은 듯이 말하였다.

"정말 미처 몰랐네! 착실한 자네도 교제술을 배웠군. 그것도 큰 인물하고 말야! 능력 있군, 능력 있어!"

그는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더니, 내 귀에 대고 말하였다.

"내일 성위가 S시에서 업무회의를 소집한다고 해서 지금 온 시내의 최고 상품을 준비하고, 최고 요리사, 최고 연예인이 모두 회의를 위해 일하는 중이라구. 회의를 지원하기 위해 큰 시가의 냉식점이 모두 영업 중지야. 이보게! 귀빈관에 들어가서 좋은 물건을 사게 되면 우릴 잊지 말라구. 자네, 가진 돈은 넉넉한가? 머물 곳이 마땅치 않으면 내 집에서 머물라구."

선배의 말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어, 나는 휴식을 취할 틈도 없이 화급히 S시 시위로 달려갔다. 시위의 한 동지가 탕찌우웬이 초대소에 있다고 일러 주었다. 나는 지체 않고 속칭 '귀빈관'이라 하는 제1초대소로 달려갔다. 초대소에서 200미터 밖에 증원된 교통순경과 순찰하는 군인이 보였다. 초대소에서 50미터 밖에서는 조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어디 갑니까?"

순경과 군인이 물었다. 동지라고 부르진 않았다. 대문으로부터 10미터 밖에서는 신분증 검사가 시작되었는데, 다행히 나는 쌍학회의 출석증을 휴대하고 있어서 대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문 입구에 이르자, 초소에 있는 이가 내게 전달실로 찾아가라고 하였다. 전달실 문은 꼭 닫혀 있었고 유리창도 전부 신문지로 밀폐되어 있어 움직이지도 않을 뿐더러 무엇이 있는지 볼 수도 없었다. 어떻게 전달자를 찾을까? 본래 전달실 한 옆의 두터운 벽에 작은 네모 구멍을 뚫어 놓고 들어오려는 사람이 이곳을 통과하려면 자기의 신분과 사유를 밝히고 검사를 받은 후에 허락을 기다리도록 되어 있었다.

네모 구멍은 상당히 높은 곳에 뚫려 있어 2미터 이상은 족히 되어 보였다. 창구멍이 작은데다 3분의 1은 닫혀 있었다. 나는 발꿈치를 들은 채 목을 빼고는 "동지!"하고 불렀다.

목을 빼느라 좀 아팠지만, 한 뚱뚱하게 배가 불룩 나온 사람의 두텁고 살찐 등허리가 겨우 보였다. 마침 전달실의 근무원은 등허리로 창구를 가리고 있었다.

"동지! 동지! 동지!"

내가 목을 세우며 여러 번 부르니까 그제야 뚱뚱보 근무원이 머리를 숙여 흘끗 보고는 다시 머리를 돌려 버렸다.

"동지!"

나는 크게 불렀다.

"말할 줄 몰라요?"

실내에서 쏘아댄 이 한마디 말은 탄환처럼 나의 귀, 얼굴, 마음에 박혔다. ? 말할 줄 모르냐구? 내가 벙어리인가? 나는 중국인이 아닌가? 나의 얼굴은 귀뿌리까지 빨개졌다.

"나는 라오탕을 찾습니다! 탕찌우웬을 찾아요!"

나의 함성이 초소를 놀라게 했는지 초소병이 경고를 했다.

"소리 지르지 말아요!"

이 이름과 나의 고함이 좀 효험이 있어서인지 전달자가 고개를 돌려 창구로 다가와서 머리에서 발, 또 발에서 머리까지 나를 훑어보는데, 그 눈빛에 나는 온몸이 떨렸다. 맙소사! 나는 원수의 피맺힌 증오에 찬 눈초리를 받을지언정, 이 동지의 눈매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 후, 그는 나의 경력을 확인한 후에 차갑게 말하였다.

"회의 중엔 면회 사절이요."

"회의는 내일 있는 줄 아는데요. 시위로 갔더니 날 이리로 가라고 합디다."

"면회 사절이요."

그의 대답 소리가 더 작게 들렸다. 동시에 두툼한 등허리가 보였다. 이때에 한 부인이 문을 두드리자, 그는 즉시 뛰어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그의 온몸의 피부와 자세와 표정이 즉시 기적 같은 변화를 일으켜서, 마치 관음대사의 버들가지에 맺힌 정수가 나무통에 떨어지듯, 도 왕자의 애정이 두꺼비로 하여금 아름다운 여자로 변케 한 것처럼 그 뚱뚱보 근무원은 달콤하고, 애교 있고, 유식하고, 예의 있고, 부드럽고, 쾌활하고, 친절한 태도로 잠긴 자물쇠를 돌려 문을 열었다.

"저녁에 우리 아이의 친구 몇 명이 영화를 보러 올 테니 들여보내도록 해요."

탕찌우웬 부인의 음성이었다.

"거 말할 나위 있습니까! 제가 아니깐요, 오시기만 하면..."

"그들이 잘 모를 텐데..."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이름만 일러 주신다면..."

이 뚱뚱보 근무원의 어조가 어떻게 이렇게 애교 있고 정답게 변할 수 있을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나를 들여보내지 않네요!"

나는 소리를 질렀다. 탕 부인의 음성을 듣고서 나는 담이 켜졌다.

"어머! 뤼 사부시군요. 웬 바람이 불어 오셨어요?"

탕 부인이 나를 알아보고 반가이 인사하며 동시에 손으로 가볍게 가리켰다. 전달자가 즉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출입증을 건네주었다.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은 방금 멸시의 눈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훑어보던 때와는 너무도 판이하였다. 나는 서둘러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대문에 들어섰다. 나는 탕 부인에게 전달자의 태도가 불량하고 수문이 너무 삼엄한 것을 탓하며 말했다.

"이 귀빈관은 너무 고급스럽군요."

그러자 부인은 크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래요? 저 성도읍의 공농빈관이 더 좋을걸요? 여기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답니다. 지금 내방객이 너무 많아서 삼엄하게 하지 않으면 일을 할 수가 없어요."

그녀는 친절하고도 편안하게 가까이 다가오며 말하였다.

"우린 은혜를 갚지도 못하고 있어요. 춘절에 오셨으면 하고 생각했지요. 저는 그이에게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뤼 사부는 정말 좋은 동지이니 돌봐 드려야 한다고요. 그이가 시위 서기가 된 후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나 문 난간이 부서질 정도랍니다. 옛동료, 부하, 동창생,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척... 모두 오는 거예요. 참 이상해요. 그 동안 어디에들 있었는지. 내가 그이의 옥바라지를 할 때, 어느 한 사람 와서 위로해 준 줄 아십니까?

탕 부인은 또 화가 나서 안색이 변해갔다.

"지금은 좋지요."

내가 말했다.

"그래요, 그래요."

그녀는 다시 안색이 밝아졌다.

"S시에서 며칠 쉬세요. 급히 돌아가시지 말구요. 제가 모시고 구경시켜 드릴 테니까요. 사실 물건이나 약, 그리고 기타 무슨 일이든 제가 해드리겠어요. 더 큰 일이라면 그이를 만나시고요...정말 우릴 이해해 주시고 우리도 이해하고요..."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불려 나가면서 "그이는 삼호원에 계시니까, 만나 보세요."라고 말하고 나에게 손을 펴서 가리켰다.

"저녁엔 여기서 주무세요. 내부 영화도 있습니다."

그녀는 한참 가다가 고개를 돌리고서 외쳐 댔다.

나는 부인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소매부를 지나려니 상품선전물이 나의 주의를 끌었다. 털실(처리가격에 의거), 텔레비전(시험가격에 의거), 가죽구두(할인가격에 의거) ... 모두 인기품이었다. 내가 미간을 찡그리니 마음도 어두워졌다. 소매부 옆에는 냉식부가 있었다. 전달실 창구에서 발꿈치를 들고 목을 빼서 고함을 지른 탓인지 온몸에 땀이 나서 아이스케이크 생각이 절로 났다. 냉식부에 들어가서야 아이스케이크까지도 특제품이란 것을 알았다. 시장에서는 과일 아이스케이크가 3, 우유 아이스케이크가 5문인데, 여기서 파는 것은 '우질 아이스케이크'라고 불리어 개당 6문이었고 질과 양도 시장에서 10문씩 하는 따쉐까오보다 훨씬 좋았다. 내가 성도읍의 큰 초대소에서 반평생을 일했어도 이런 '복지'는 보지 못했었다. 찬 것을 먹으니 입에서 배까지, 몸에서 마음까지 모두 서늘하게 느껴졌다.

'탕씨를 만나 얘기해야 한다. 회의가 열리니 어떻게 하지? 밖으로 나가자니 경비가 엄한데. 그에게 물어봐야지. 그 세 가지 정강이 어떻게 실행되고 있느냐고.'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냉식부를 나와 삼호원으로 찾아갔다. 원 안에는 몇 대의 소형차가 주차되어 있었는데, 하나는 '홍지', 하나는 '도요다', 다른 하나는 '벤츠'차였다. 단번에 보통 지도자가 타는 것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탕씨는 용의주도하게 임시 교통순경을 배치하고, 이들 기사에게 고급승용차를 그늘지고 조용하면서 길 입구의 인근한 곳에 대놓도록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모직옷을 입었는데 단추가 풀어져서 희고 깨끗한 와이셔츠 칼라가 드러났다. 차를 배치한 후 기사와 일일이 악수하는데, 오만한 태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초대소의 근무원에게 기사들을 모시고 휴식하도록 일러두기도 하였다. 기사들을 보내 놓은 후, 그가 머리를 돌리다가 눈빛이 나를 투사하였다. 내가 손을 들어 부르려는데, 한 안경 낀 간부가 달려와서 자료를 탕씨에게 건네주었다.

탕씨는 한편으로는 자료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안경을 끼고 머리가 회백색인 그 간부에게 지시하였다.

"일호원 쪽의 욕조를 재검하시오. 이 초대소 사람은 정말로 게을러요. 내가 어제 가 보았더니, 만지는 데마다 손이 검습니다. 지저분해서 눈을 감아야 할 정도이고 물도 고르게 나오지 않아요. 어제 그들을 나무랐는데..."

갈수록 더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데도 탕지우웬은 성심으로 지시하고 있었다.

"자네, 소강당에 한번 가 보게."

"자네는 주방에 한번 가 보라구. 꼭 산시라오 천의 식초를 써야 해..."

"자네는 소매부에 한번 가 보고..."

"자넨 의무실에 가보고..."

"맞아, 오늘 브리핑해야 하네. ? 내용이 없다고? , 오늘 성위가 여기에서 삼간회를 소집한 행사를 S시의 많은 군중들은 시의 행정에 대한 큰 관심과 촉진의 뜻으로 생각한다고 써요. 이런 것까지도 가르쳐 줘야 하나!"

"그에게 꼭 오라고 해요. 지금 S시의 업무는 이 회의의 지원이 중심이 되고 있어요."

"이런 일들은 후에 다시 얘기하자구. 급하지 않으니까. 나도 4인방 덕에 8년 동안 갇혀 있었다구!"

"이거 시간이 없군요. 교육국으로 가시도록 해요."

한 무리가 가면 다른 한 무리가 둘러사 모두들 지시, 보고를 원하였는데, 그들은 타 서기와의 면담을 즐거운 일로 여기고 있었다.

반 시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서야 그 주위의 사람이 점차 적어졌다. 그는 피로한 기색으로 몸을 돌려 가려고 하였다.

"라오탕!"

나는 그를 불렀다. 그는 나를 보면서도 피로가 그의 몸과 눈을 압박하고 있었는지 망연히 바라보다가 눈을 번쩍 뜨고서 말했다.

", , 쉬 형, 오셨소?"

그러고는 다가와서 힘없이 내 손을 잡았다.

"내 성을 잊으셨나요?"

나는 나무라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맞아, 맞아! , 맞아 리 형! 아니, 뤼 형이야, 뤼 사부! 나 좀 봐, 정말 늙은 모양이군."

그는 자신을 원망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이마의 깊은 주름과 늘어난 백발이 더욱 눈에 띄었다.

"안녕하십니까? 머리 어지러운 증세는 좀..."

"좋아요, 좋아. 바빠서, 너무 바빠서 정말 어쩔 수 없네요..."

원문으로 들어오던 네댓 명의 사람들 중에서 회색 제복을 입고 발엔 검은 새 구두를 신은 사람이 느긋한 남방 어조로 말하였다.

"라오탕, 우리 산보 좀 합시다..."

나는 이들이 성위의 지도동지들임을 간파하였다. 탕씨는 응낙하고 바쁘게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좀 계시오. 다시 얘기합시다."

나는 앞으로 한 걸음 걸어갔다. 탕씨를 놓칠까 심히 두려운 듯이.

"라오탕, 나 한 마디만 얘기할 게 있습니다."

나의 음성은 떨렸다.

탕씨는 머리를 되돌려 친절하고 정성껏 나를 바라보았다.

"여러분, 소매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손짓으로 한 젊은 동지를 불렀다.

"이분에게 물품구입증 두 개 발급해 드리고 거처를 안내해 드려..."

그가 가 버리자 나는 정신이 멍해졌다. 나도 가 버리려고 나를 잡은 그 젊은 동지의 손을 뿌리쳤다.

성도읍으로 돌아와서 가까운 친구들에게 탕씨를 보러 갔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다들 나를 위로해 주었다.

"자네 정말 그랬군! 그분도 나이가 있으시니까. 게다가 바쁘시니까 한가하실 때 다시 한번 뵙는 게 좋겠네."

그러나 내 아들(죽어야 할 놈)의 반응은 석 자뿐이었다.

"아무렴!"

1979년 춘절에 탕씨 부부는 사람을 통해 우리에게 편지와 비닐포장한 미젠꿔푸(꿀에 절여 말린 과일)를 보내왔다. 물론 편지 봉투에는 틀림없이 '뤼 사부 귀하'라고 씌여 있었고, 편지에는 재차 우리를 S시로 놀러 오라고 초청하였으며, 지난번 회의로 바빠서 즐거이 환담할 수조차 없었던 일을 깊이 사과하는 말도 씌여 있었다. 글씨를 보니 그의 친필인 것을 알겠고, 그의 진실하고 친절하며 공평한 접대에 깊이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의 불유쾌한 방문을 회상하면서 나 자신을 원망하였다. 어찌 그렇게 조급하며 문제를 파악하는 것이 단편적이고 표면적일 수 있을까? 바쁜 것이 그분들의 결점일까? 상관의 기사에게 관심을 두는 것도 나쁜 일이 아니다. 그의 부인이 화내는 것은 그 부인 본인의 사정이다. 내가 그를 온당치 않게 보았던 것은 아이스케이크의 가격 건인데-나 자신도 하나 먹었으면서. 최근 중앙에서 공고되기를, 각급에 기율 검사위원회를 설립토록 했으니 S시의 초대소에서 아마 다신 이런 6문짜리 아이스케이크를 팔지 않겠지? 나는 생각한다. 한 사회는 ''이 없을 수 없는 것이며, ''을 전부 타도하면 도처가 대변과 회충으로 찰 것이다. 그러면 누가 ''을 맡을까? 나는 짜오 모씨를 반대하고 부패한 '사령''근무원'을 반대하며, 나 자신은 감당할 수도, 결코''을 맡을 생각도 없다. 나는 탕지우웬을 옹호한다. 그분을 이해해야 한다. 세 가지 '정강'도 그분에게 실행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나는 '사령'처럼 ''을 박해할 수 없으며, 샤오뿌와 선배처럼 ''을 이용할 수도 없으며, S시의 모대표가 말하는 것처럼 ''에 무조건 순종할 수도 없으나, 아들처럼 관을 소원시 하고 심지어 ''을 적시할 순 없다. 피가 흘러 강을 이루고, 백골이 산을 이루면서 큰 대가를 지불했는데도 국민당의 ''이나 4인방의 ''은 쉽게 타도하지 못하였다. 누구든 가까이 접근을 하여 그들에게 마음속의 말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 친애하는 당은 어떻게 될 것인가? 여러가지 생각하노라니, 나의 두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틀 후에 나는 또 S시에 가서 탕씨와 그 부인을 만나게 될 것이다. 찌우짜오로우와 불에 잘 익힌 쑹화딴을 가지고...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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