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란의 파도
광란의 파도
샤오ㅉ
탄알 자국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여, 흙담이 노인의 이 빠진 잇몸처럼 힘없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사방은 짚더미로 어지럽고, 지붕에는 구멍이 수없이 나 있었다. 태양은 그 구멍을 통해 방바닥에 죽어 나자빠진 시체 위에 햇살을 내리 비쳤다. 어린아이의 두개골이 뜰에 나뒹굴었다. 겨우 살아 남은 개들은 꼬리를 가랑이 속에 바싹 말아 놓은 채 흙담 밑을 거닐다가, 애나 어른의 시신을 발견하면 정신없이 달려들어 물어뜯었다. 정오가 되어도 산양들의 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수탉 한 마리조차 얼씬하지 않았다. 다만 참새떼들만이 외롭게 하늘을 날아다닐 뿐이었다.
마을 동편 산꼭대기 위의 아주 높은 장대에 매달려 휘날리던 붉은 깃발은 이제 보이지 않고 대신 일장기만 나부꼈다. 마을 뒤편 사원의 깃대 위에서도 일장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그 아래 주둔한 일개 중대 병력의 반 정도 되는 일본군은 대위의 지휘 아래 움직이고 있었다. 뜰에서 수건을 목에 걸치고 일하던 사병들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한곳에 둘러앉아 잡담이나 욕설을 하거나, 입에 담기 어려운 음담 패설을 늘어 놓거나, 거친 시골 민요를 흥얼거리곤 했다.
스무 살밖에 안 된 마쓰하라는 군복을 쫙 빼 입고 군도를 찬 채 사원 앞 돌계단에 앉아 있었다. 그는 군화를 벗어 군화 밑창으로 돌계단을 탁탁 치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그는 짙고 까만 눈썹을 가졌고, 턱수염은 방금 면도를 끝낸 탓인지 붉다 못해 푸르스름하였다. 마쓰하라는 철모를 벗어 안쪽의 땀을 닦아 낸 다음 반듯하게 고쳐 쓰고 유유히 걸어 나왔다.
"어딜 가는 거야?"
"나갔다 금방 들어올게."
마쓰하라는 위병에게 한쪽 눈을 감아 보였으나, 위병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또 계집질하러 가는 거야? 잠시 후에 중대장의 점호가 있을 텐데..."
마쓰하라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벌써 담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었다. 손에는 대검이 들려 있었다. 그는 유유히 휘파람을 불었다. 휘파람 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구성지게 들렸다. 그는 휘파람 소리에 맞추어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이제껏 한 번도 중국 여자를 건드린 적이 없음을 생각해 보았다. 어떻게 해치운담? 동료들이 계집질하는 것을 수없이 보아 왔지만, 그는 그런 것이 부끄러웠다. 새로 입대한 신병인지라 고참들만큼 익숙하지 못했고, 전선으로 떠날 때 애인인 호오꼬가 거듭 당부하지 않았던가.
"전쟁에 나서더라도 중국 여자는 건드리지 말아요! 그건 너무 비극이에요."
만주에 오기 전에 마쓰하라는 이미 만주에서 돌아온 병사들의 입을 통해 중국인을 살해하고 여자를 건드리는 방법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중국인들을 죽이는 이야기는 참으로 실감났다.
"스스로 무릎을 꿇게 하고 옷을 벗겨 젖가슴을 대검으로 몇 번이고 지르는 거야. 대검이 푹푹 박히지. 중국 여자를 건드리는 건..."
그는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더욱 귀를 기울였는데, 때로는 일부러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른 고참병들에게 물어 보기도 했다.
"어떻게 중국 여자들을 건드렸습니까?"
"누워서 떡 먹기야! 대검을 눈앞에 대고 흔들면 뭐든지 하라는 대로 하다니까. 말 안 들으면 죽여 버리지."
"지휘관이 그냥 내버려둡니까?"
"아, 전쟁이 한창인 만주에서 지휘관이 그런 거 감시할 새가 어딨어. 자기들도 마찬가지인데."
마쓰하라는 학창 시절에 '청년단'에서 활동했으며, '충군애국'을 자신의 신조로 삼아 왔다. 그는 일찍이 '노끼 장군' 같은 사람이 되리라 꿈꾸었고, '정충탑' 위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지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호오꼬는 대놓고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그런 생각은 버려요! 왜냐구요? 그건 비열한 생각이니까요! 나는 비열한 생각을 가진 남자를 사랑할 수 없어요."
"너, 너는 나라의 반역자야. 천황 앞에 죄인이고 사회주의자야!"
그는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세우며 도리어 그녀를 욕했다. 그들은 그런 문제로 몇 번이나 헤어질 뻔한 고비를 넘겼다.
"싸우는 것은 좋지만 제발 중국 여자만은 건드리지 마세요! 몹쓸 짓이에요! 도대체 어느 나라의 행위인가요? 저주받을 군벌, 수천 수만의 아까운 젊은이들을 만주에 보내 개죽음시키다니."
전선으로 돌아올 때 마쓰하라는 호오꼬의 슬픔에 잠긴 얼굴을 보았다. 동시에 비탄에 젖은 수천 수만의 얼굴들이 플랫폼의 난간 밖에서 한결같이 모자와 수건을 흔드는 모습도 보았다. 노인들은 야위어 뼈만 남은 앙상한 손을 흔들며 만주로 가는 아들을 전송했다. 천황께 충성하고, 대화 민족의 영광을 위해...
만주로 향하는 병사는 날로 증가했지만, 돌아가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었다. 유독 만주의 관리들만 배불러 갔다. '충혼탑'이 곳곳에 세워지고, 출전 후에는 언제나 위령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사실들은 마쓰하라의 생각을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충군애국'의 사상 깊숙한 곳에 '반역'이 자리잡고 있었다. 마쓰하라는 거리에 쓰러진 시체들을 늘상 볼 수 있었다. 여인들의 젖꼭지는 도려지고, 바지는 찢기고, 하체에서 흘러 나온 피는 햇빛에 타 검게 변색되었다. 쉬파리가 몰려들고...생전에 노동으로 거칠어진 여인의 손가락을 땅속 깊이 박혀 있었다. 순간 호오꼬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 비극이에요!"
그는 지금 중국 여자를 찾아 나서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겁이 났다. 휘파람을 불다 말고 발걸음을 멈춰 쉬파리가 들끓고 있는 부패해 가는 시신을 멍청히 내려다보았다. 등골이 오싹하니 식은땀이 흐르며 속이 메스꺼웠다.
'여자가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지 않으면 나도 여자를 저 꼴로 만들어 놔야 하나? 정말 비참한 일이야. 아, 저 여인의 마음은 어땠을까? 돌아가자! 귀국하거든 호오꼬에게 일본 제국의 군대가 만주에서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말해 주어야지!'
그는 면도한 턱을 한 손으로 감싸 쥐며, 한 손으로는 대검을 꺼내 길가의 돌멩이를 탁탁 쳐 보았다. 돌멩이는 대검에 맞아 하얀 얼이 났다. 돌조각이 그의 눈 속으로 튀어 들어갔다. 통증에 대검을 놓아 버리고 수건으로 눈을 비볐다. 그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 나왔다.
서쪽에서 술에 취한 병사 서넛이 어깨동무를 하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혁대는 옆으로 비스듬히 걸치고 대검을 손에 쥔 채, 음정도 맞지 않는 노래를 목청껏 불러대고 있었다. 어떤 병사는 소변을 본 뒤 단추를 잠그는 것도 잊어버려 밖으로 나온 물건이 축 늘어져서 걸을 때마다 흐느적거렸다.
마쓰하라는 그들과 맞닥뜨리기가 무서워 재빨리 다른 길로 피했다. 누군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모른 체하고 얼른 담 뒤로 숨어 버렸다. 군화에 자갈 부딪히는 소리와 너털웃음, 그리고 음정이 전혀 맞지 않는 노랫소리가 시끄럽게 들려 왔다. 그는 대검을 다시 주워 들고서도 칼집에 꽂지 않았다. 아니 꽂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목에 대검을 갖다 대었다. 이렇게 자살해 버리면 얼마나 편할까. 만취한 병사들은 점점 멀어져 갔다. 그제야 그는 담 뒤에서 나왔다. 그는 왔던 길을 되돌아 가고 싶지 않았다. 넋이 나간 듯 멍해져서 그는 이곳 저곳을 방황했다.
'어딜 가면 여자를 찾을 수 있을까?'
이제 그의 머릿속은 다시 여자 생각으로 어지러웠다.
'여자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그는 대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고는 힘껏 휘둘러 보았다. 한자 남짓한 대검을 흠집 하나 없이 날이 서 있었다.
'이렇게 한 번 휘두르면 곧 말을 잘 듣겠지? 그런 다음 옷을 벗으라고 명령해야지. 내 손으로 벗길까? 아니면 칼로 찢어 버릴까? 그 다음, 아, 그 다음엔...누구나 다 하는 짓인데...만주에 온 대일본 제국의 군인들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판에, 그까짓 것쯤은 일도 아니지! 게다가 있던 애인도 잃어버리는 이 마당에 아무러면 어때! 다들 하는 짓인데... 대장도 마찬가지잖아.‘
마쓰하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변화된 것이 있다면 시체와 탄흔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갑자기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마쓰하라는 깜짝 놀랐다. 대체 여기가 어딜까? 아직도 어린아이가 남아 있다니... 남자들은 물론 어린아이, 늙은 여자들까지도 모조리 죽여 버렸던 것이다. 살려 둔 사람이라곤 처녀나 부인들밖에 없었다. 여기가 어딜까? 아이가 울다니 그는 몸을 낮춰 수숫잎이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했다. 아이가 우는 곳엔 반드시 여자가 있으리라. 어떤 여잘까? 제발 늙은 여자나 못생긴 여자가 아니었으면... 자세를 낮추고 소리 나는 쪽을 살펴보았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 아래로 오랜 세월 동안 흘러온 물에 움푹 패인 곳이 있었다. 개울물이 말라 붙어 이젠 그곳으로 흐르지 않고 한쪽으로 비껴서 흘러가고 있었다. 바로 그 오목한 바위에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아니, 저렇게 젊을 수가!'
그 동안 여자 구경을 하지 못한 마쓰하라의 심장은 격하게 뛰었고 호흡도 가빠졌다. 손에 쥔 대검을 힘껏 쥐어 보며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가...착한 아가야...울지 마라. 일본군이 들으면...엄마는 죽는단다. 아가야...누가 널 돌봐 주겠니...조금만 기다리면 당씨 아저씨가 와서 일본놈들을 내쫓을 거란다...아가야..."
마쓰하라는 여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짐작이 갔다.
'지금 당장 달려간다면 저 여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비명을 지를까? 도망갈까? 아니면 암탉처럼 얌전하게 말을 들을까...'
불현듯 호오꼬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 비극이에요!"
그는 반박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사회주의자, 천황의 반역자라는 말을 들어서는 안 돼. 저 여자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풍만한 저 젖가슴... 일본 여자와 다름없이 아름다운 머릿결... 일본 제국의 군인들이라면 누구나 다 하는 짓인데... 지휘관도 대장도, 아무리 하늘 같은 천황이라도 마누라가 보지 않으면... 아무도 보지 않으면 그럴 거야...'
마쓰하라는 자신의 음탕한 마음을 천황에게 책임 전가시켰다. 처음에는 본능적으로 전율했다. 그러나 수수밭에 엎드려 있는 자신과 자신의 감시하에 놓여 있는, 손만 뻗으면 얻을 수 있는 연약한 토끼에 생각이 미치자 자신이야말로 이 자리의 주재자이며 권위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황 따위가 대체 뭔가? 그는 머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곧 자존심이 회복되는 것 같았다. 동시에 그들 부대 앞에 주둔하고 있는 만주국 군대를 생각해 보았다. 중국 병사들도 일본 천황을 위해서 늘 목숨을 버리지 않는가? 그러나 그의 일본국에는 천황을 위해 싸우고 싶어 하지 않는 소년병도 많았다. 그들은 비록 사회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고생하는 고용농과 소비에트 정부를 동정하며, 때로는 우리의 적인 인민혁명군을 동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명령이 떨어지면 소총을 들고 전선으로 나갔다. 그러나 전투가 끝난 후엔 죄책감에 빠져들었으며 심지어 자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마쓰하라는 지휘관들도 중국의 혁명군을 두려워하면서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우리 천황 폐하께 충성하자." 는 말은 마쓰하라가 소학교 다닐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이다.
"대일본 제국의 군인은 죽을 때까지 우리 천황 폐하께 충성을 다 바쳐야 한다!"
군에 입대하여 선서할 때도 대장은 이렇게 훈시했었다.
"아가야...잘 자라. 당씨 아저씨가 와서 일본놈들을 몰아낼 거야..."
칠수댁의 눈은 초점을 잃고 있었다. 아이는 울다 지쳤는지 다시 잠이 들었다. 그녀는 몽롱한 가운데, 우람한 어깨를 흔들며 소총을 든 혹부리가 돌아오는 꿈을 꾸었다. 그의 뒤에는 혁명군, 여인, 아이들... 그리고 죽은 남편도 있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달려갔다.
"야, 이년아!"
칠수댁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산과 들도, 붉은 깃발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우람한 어깨를 가진 혹부리가 아니라 눈웃음치며 다가오는 어린 일본군 병사였다. 그녀는 자신의 최후가 임박했음을 직감하고는 아이를 품속에 꼭 안았다. 심장의 박동조차 멎은 듯 고요했다. 그녀는 놀란 것도 잊은 듯 조용히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갈 마귀를 쏘아보았다. 그녀의 눈은 금강석처럼 단호했다. 시냇물은 옆의 풀섶으로 졸졸졸 흐르고 아이의 숨소리가 쌔근쌔근 들려 왔다.
"아! 아가야...저리 가자. 넌...살아야 할 텐데!"
그녀는 앳된 일본군 병사를 쳐다보았다. 손에 쥔 대검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 입술 밖으로 튀어나온 이빨, 탐욕으로 상기된 얼굴... 그는 철모를 벗어 던지고 걸리적거리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조그만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칠수댁의 몸과 마음은 견딜 수 없는 아픔으로 전율했다.
"개 같은 자식, 저리 비키지 못해!"
일어나려고 몸부림쳤지만 며칠 밤낮을 굶주림과 피로와 공포와 초조한 기다림으로 보낸 그녀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온 천지가 그녀의 눈앞에서 빙빙 돌기 시작했다. 칠흑 같은 어둠과 질식할 것만 같은 중압감에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개울 아래 돌 위에 내팽개쳐져 으스러진 아이의 머리에서 흐르는 피가 개울로 뚝뚝 떨어져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그녀는 벌렁 드러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옷은 갈기갈기 찢기고 온몸이 쑤셔 왔다. 높은 하늘의 태양도, 그 아래에 떠도는 흰 구름도 칠수댁의 고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듯이 무상하기만 했다. 그녀는 혹시 아주 몹쓸 악몽을 꾼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현실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아이의 두개골이 개울가 바위에 으스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가슴은 복수심으로 불탔다. 하지만 어디 간단 말인가? 한 자루의 칼도 없는데. 우람한 어깨를 가진 젊은 혹부리도, 용맹한 혁명군도 지금 곁에 없었다. 그들은 모두 투쟁하기 위해 떠났다. 그녀는 투쟁하다 죽은 남편을 떠올렸다. 나약한 그녀는 그저 한없는 슬픔에 눈물만 흘렸다.
바람과 함께 가끔씩 설익은 오곡의 내음이 풍겨 왔다. 수수와 콩과... 매년 9월이 되면 논밭은 추수하는 농부들의 소박한 웃음꽃으로 가득했고, 수레에는 추수한 곡식이 높이 쌓였었다. 추수한 곡식을 싣는 동안 가축들은 땅에 흘린 이삭들을 부지런히 주워 먹었지만, 사람들은 화낼 줄을 몰랐다. 아이들은 지난 겨울에 입던 솜옷을 그대로 걸치고 맨발로 소리치며 뛰놀았다. 농부들은 붉은 수수 이삭을 주워 자기네 가축들에게 먹였다. 자기 논밭이 없는 노인네들은 등에 자루를 메고 다니며 가축들이 먹다 남긴 이삭들을 줍거나, 자르고 남은 수숫대 속에서 어쩌다 빠뜨린 이삭을 찾아내곤 했다. 그것은 지주들의 추수이자 가난한 사람들의 추수이기도 했다. 하지만 올해는 사정이 달랐다. 논밭의 곡식은 그대로 내버려져 있었다. 혁명에 가담한 젊은이들은 오랫동안 고대하고 있었던 것처럼 거기에 미쳐 버렸다. 노인들은 황제가 다시 서게 된다는 말을 들었다. 황제의 뒤에는 영원한 '태평성대'가 와야 했다. 그러나 황제는 일본인을 위한 황제이며, 결국 일본 놈들의 세상이 될 것이라 했다. 이에 노인들은 점차 황제에 대한 희망을 잃어 갔다. 게다가 정초부터 마음이 평온하지 못했다.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노인들은 젊은이들을 막을 수도, 도울 수도 없었다. 마을에 남아 있던 노인들을 일본군의 포화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칠수댁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끝없는 슬픔에 빠져들어 갔다. 머리가 으스러진 채 바위 위에 내던져진 아이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딱 벌어진 어깨를 가진 젊은 농부, 혹부리가 원망스러웠다. 왜 그이는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모를까? 싸우느라고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린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도 잊어버리다니... 그를 찾아가야 한다. 그가 없는 삶은 희미하고 의미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그녀는 아이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만날 기약도 없는 혹부리에게 희망을 걸고 있다. 혁명군 무리 속에서 끊임없이 활약하고 있는 혹부리에게...
'나도 가야지. 나도 가야지. 그들과 함께 죽더라도, 그이와 함께 싸우다가 죽어야지!'
복수심과 한으로 응어리진 어떤 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그녀를 흥분시켰다. 그러나 무심코 아이의 시체를 보는 순간, 그녀는 또다시 나약해져서 눈을 감았다. 분노와 원한이 슬픔에 묻혀 버렸다. 황혼이 질 무렵에야 그 비참한 그림자는 미친 듯이, 으스러진 어린아이의 시체를 안고 비틀거리며 들판으로 내달렸다.
마쓰하라는 휘파람 부는 것도 잊고 있었다. 힘이 빠져 축 늘어진 발걸음으로 온 길을 되돌아갔다. 젖꼭지가 도려진 여자의 시체 옆을 지났다. 그 위에 새까맣게 붙어 있는 파리는 아까보다도 더 많이 불어나 제멋대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가 영내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저녁 어스름이 깔린 뒤였다. 연병장에서는 아무런 잡음도 들리지 않고, 다만 대위의 훈시 소리만이 크게 울릴 뿐이었다. 병사들은 가슴을 앞으로 내민 채 꼿꼿한 부동 자세로 서 있었다. 일렬로 도열한 사병들의 발뒤꿈치가 질긴 고깃덩어리처럼 보였다.
"보고합니다!"
마쓰하라의 음성은 절도가 있었다. 자신이 용맹한 용사임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몸을 약간 앞으로 향한 자세에서 네 손가락을 쫙 펴 철모 모서리에 갖다 댔다. 대위는 마쓰하라의 보고에도 아랑곳없이 계속해서 훈시를 하고 있었다. 마구 내뱉는 욕설과 잔소리 같은 지루한 연설이 병사들을 괴롭혔다. 그는 천황 폐하께 충성하고 빨갱이 토벌에 힘쓰는 것이 대일본 제국 군인의 본분이라고 했다. 아울러 한시라도 적의 반격에 대한 대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대오는 여전히 부동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중대장인 대위가 마쓰하라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얼굴과 온몸을, 그리고 하찮은 단추 하나까지도... 그러고 나서 다시 그의 얼굴을 심문하듯 노려보았다. 마쓰하라는 눈을 내리깔았다. 상관의 답례를 받지 못한 마쓰하라는 여전히 거수 경례를 한 자세이다.
"어디 갔다 왔나?"
"..."
마쓰하라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 행위가 군기를 그다지 어긴 것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대장도 중국 여자를 건드린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다른 병사나 대장들이 다 그러하듯이 나도 중국 여자를 건드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동료들의 뜨거운 시선이 그의 얼굴과 전신에 쏠렸다.
"너, 이 새끼!"
대위가 다가왔다. 온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매서운 눈초리는 엄하다 못해 차가웠다. 마치 어두컴컴하고 무시무시한 동굴처럼. 얼굴을 들 수 없는 마쓰하라의 두 뺨이 화끈거렸다.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칠 것만 같았다.
"이렇게 늦게 귀대하고서도 아무런 이유가 없단 말인가?"
'철썩'하고 따귀가 올라갔다. 그 순간 마쓰하라의 철모가 머리 위로 솟구쳤다가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마스하라는 비틀거리면서도 다시 부동 자세를 취하려 안간힘을 썼다. 두 번, 세 번... 마쓰하라는 여전히 거수 경례를 한 자세이다. 아직까지 상관의 답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대위는 거의 반사적으로 여러 번 따귀를 올려 붙였다. 어느덧 마쓰하라의 입가에 찝찔한 피가 고여 들며, 두 뺨이 빨갛게 부어 올랐다. 중대장은 획 돌아서서 가 버렸다. 도열했던 병사들도 따라서 해산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마쓰하라에게 다가와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이것은 규율이었다. 철모를 땅에 떨어뜨린 채 홀로 서 있는 그의 입에선 연신 피가 흘렀고, 뺨은 심한 통증으로 얼얼했다. 그는 연병장 한가운데 서서 기압을 받아야 했다. 밤바람이 일 때마다 추녀에 매달린 풍경이 청아한 소리를 내며 흔들거렸다. 사립문은 벌써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고, 진흙으로 빚은 조상들이 위엄을 잃고 배를 찢긴 채 사방에 널려 있었다. 사원의 한쪽은 포탄에 깨끗이 날아가 버렸다. 마쓰하라는 곰곰이 생각했다. 대장이 그렇게 까지 구타했어야 옳은가? 구타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는가? 그는 다른 동료가 따귀 맞는 것을 늘 보아 왔지만 그때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따귀 맞는 사람들을 속으로 조롱하지 않았던가. 이제까지 누구를 위로해 본 적이 없는 자신이 이제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대장 제놈은 하지 않았나? 계집질하다가 좀 늦게 돌아왔기로서니 이렇게 무자비하게 구타할 수가...'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조국과 천황과 애인 호오꼬, 바위에 내동댕이쳐진 어린아이와 강간당한 여자, 그리고 젖꼭지가 도려진 여자 시체...
눈시울이 갑자기 뜨거워졌다. 야간에 초병들이 근무 교대를 위해 출발 준비를 하고 있다. 마쓰하라도 그 속에 끼였다. 모두들 비웃으며 한 마디씩 던졌다.
"계집질한 기분이 어때?"
"마쓰하라, 계집질하는 것과 따귀 맞는 기분이 영 딴판이지!"
"경험 없는 절름발이 개라도 토끼 사냥은 해야지."
낮에 마을에서 술을 퍼먹고 물건이 밖으로 나온 것도 모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고참병이 그를 조롱했다. 그들은 모두 중대장이나 된 것처럼 위세를 부렸다. 마쓰하라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배낭과 수통, 소총, 야전 장구 등을 점검했다.
"출발!"
이윽고 조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갑자기 그가 달려와 마쓰하라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멍청한 자식, 빨리 안 가고 뭘 꾸물거리는 거야?"
그들은 몸을 최대한으로 낮추고 산기슭을 따라 산등성이로 기어올라 가서 전 근무조와 교대했다. 전 근무조는 새 근무조에게 주의사항과 경계구역과 표적물을 알려 주었다. 조장은 전 근무조와 다른 초소로 가서 교대할 조를 데리고 산을 내려갔다. 마쓰하라의 동료는 쌈지담배를 피워 물었다. 담배 연기는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다가 담 위로 피워 오르며 급히 날아가 버렸다.
"흡연은 좋지 않아! 적에게 발각된다구!"
마쓰하라가 주의를 주었지만 동료는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유만만하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마쓰하라에게 있어서 조금 전의 일은 한 들판, 구불구불한 개울은 잠들어 있었다. 자작나무 숲, 고요한 들판... 인가가 있는 곳에서 밥 짓는 연기가 보이지 않은 지도 오래였다. 풀벌레 소리마저 처량하게 들렸다. 풀숲에서, 돌 틈에서...울고 또 울었다. 이곳은 마쓰하라의 고국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대륙이 경치는 낯선 것이었다.
엷은 구름층 뒤로 반쯤 이지러진 달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마쓰하라, 너 도대체 어떤 여자를 건드렸냐?"
어느새 담배 한 대를 또 피워 문 동료가 유유히 연기를 내뿜으며 지나가는 소리로 물었다.
"어떤 여자냐고? 묻지 마라!"
동료의 물음에 마쓰하라는 벌컥 화를 내며 소총의 개머리판을 바위에 힘껏 내리쳤다. 그의 눈빛은 격투라도 할 기세이다. 동료는 이러한 그의 위협에도 아랑곳없이 그저 눈을 들었다가는 다시 내리깔았다. 그러고는 편안한 듯 유유히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연기는 곧바로 공중으로 흩어졌고 뻑뻑 빨 때마다 불꽃은 섬광처럼 빛났다.
"아무것도 아닌데 뭘 그래? 누구라도 마찬가지야. 상관들은 안 그런가?"
"글쎄, 묻지 말라니깐."
동료는 씩 웃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그의 웃음은 해괴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마쓰하라는 자신도 모르게 대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마쓰하라는 줄곧 생각에 잠겨 건너편 산등성이와 개울을 주시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떠오르는 것은 불쾌하고 무시무시한 환상뿐이었다. 젖꼭지가 도려진 시체, 머리가 으스러진 채 바위 위에 내동댕이쳐진 아이, 여인의 몸부림, 중대장... 그는 자신의 뺨을 만져 보았다. 부어 오른 뺨이 아직도 얼얼했다.
마쓰하라의 동료는 잠이 들었다. 머리를 비스듬히 숙이고, 두 다리 사이에 소총을 끼운 채 모든 것이 귀찮다는 듯이.
'직무에 충실하지도, 천황 폐하께 충성하지도 않는 사람!'
마쓰하라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누구나 마찬가지야. 상관들도 다 그러니까.'
마음속 깊이 숨죽이고 있던 불만이 고개를 들고 일어섰다.
'오늘밤엔 아무 일 없을 거야. 설마 놈들이 올라고? 아무 움직임도 없잖아. 30분, 기껏해야 한 시간 정도만 더 기다리면 될 거야. 그러면 교대할 수 있겠지.'
건너편 산등성이도, 개울도...적의 습격...천황...상관...이 모든 것들이 더러운 벌레처럼 스물스물 기어나갔다.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에게 접근하였다. 그가 소총에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꼼짝 마!"
적의 총구는 그와 동료의 가슴을 겨냥하고 있었다. 키가 훤칠하고 권총을 든 남자가 호령을 했다.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허튼 수작 했다가는 총탄 세례를 받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동료는 고분고분하게 몸에 찬 탄띠를 풀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의 태도는 담배를 피울 때처럼 자연스럽고 여유가 있었다.
"너도!"
매부리코의 키 큰 남자가 권총을 들이대며 소리쳤다.
"이 새끼야, 빨리! 뭘 꾸물대고 있어!"
누군가 욕을 퍼부었다.
그는 서둘러 탄띠를 풀어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키 큰 남자는 총을 들지 않은 뒷사람에게 탄띠와 소총을 건네 주었다.
"동지는 여기에 남으시오. 누군든지 반항하면 쏴 버리시오."
키 큰 남자는 나머지 사람들을 데리고 떠났다. 잠시 후에 총성이 연거푸 울렸다. 교대하러 오던 초병과 총격전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젠장, 비참하구나!"
총살이나 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감시자를 힐끔 쳐다보았다. 어깨가 딱 벌어지고 야무지게 생긴 놈이었다.
혹부리는 총성을 들으며 칠수댁을 떠올렸다. 독수리 대장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칠수댁은 어떻게 되었을까? 개죽음을 당했을 거야!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몰라...살아 있다면 혹시 일본군에게 무참하게 당했을지도...'
갑자기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그는 당장 이 두 놈을 죽여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먼저 포로 한 놈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다.
"나니, 나니(무, 무엇하는 거요)?"
포로가 겁에 질려 소리쳤다.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며 처참한 모습으로 벌벌 떨었다. 혹부리는 방아쇠에서 손을 떼고, 총신을 제자리로 가져왔다 그리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담 밑에 웅크린 채 파르르 경련하는 두 가련한 인간을 쳐다보았다. 그는 쏠 수 없었다. 그것은 연민 때문이 아니라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독수리 대장의 명령이 떠올랐다.
"누구든지 반항하면 쏴 버리시오."
지금 그들은 이처럼 온순하지 않은가. 그들을 쏠 이유가 없었다. 인민 혁명군의 규율은 저항하지 않는 포로들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사령관도 늘 이렇게 말했다.
"나쁜 놈들은 사병들의 피를 빨아먹는 군관놈들이오. 우린 그놈들을 용서해서는 안 되오. 일본군이나 그 앞잡이들이나 다 마찬가지요. 그들은 사병들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지. 하지만 사병들은 우리와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의 형제나 마찬가지오. 우린 총만 뺏으면 되는 것이오. 물론 우릴 방해하는 놈들은 없애 버려야지. 어쨌든 사병들은 앞으로 우리와 협력하게 될 거요. 사병은 사병을 치지 않는다는 말도 있소. 앞으로 부득이한 경우에만 쏘시오. 동지들, 이 말을 명심하도록!"
총성이 요란했다. 머리 위로 포탄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려 왔다.
독수리 대장은, 긴 칼을 휘두르며 불빛 속에서 제복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채 허겁지겁 도망치는 중대장을 뒤쫓고 있었다. 쫓기고 쫓는 다급한 상황이 혹부리의 눈앞에 또렷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는 소총을 움켜쥐었다. 동이 틀 무렵에야 대원들은 피투성이가 된 채,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산등성이를 기어올라왔다.
"그 두 놈을 묶어 눈을 가리고 입에 재갈을 물려! 자, 가자!"
혹부리는 독수리 대장이 들고 있는 군도를 보았다. 군도에는 피가 얼룩져 있었다. 50명의 대원 모두가 한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전체 인원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총도 없이 따라나섰던 십여 명의 어깨에는 어느 틈엔가 소총이 하나씩 들려 있고, 허리엔 탄띠도 두르고 있었다. 탄띠를 두른 모습이 어딘가 어설프게 보였다. 어떤 대원은 총을 두 자루씩이나 메고 있었다. 대원들은 하나 둘 산등성이를 내려가 개울을 건너서 골짜기 입구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왕씨 마을에서 피어 오르던 연기가 아직도 나무들 사이로 구불구불 번져 나오고 있었다.
이삼은 혹부리에게 전부터 이 골짜기를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일곱 사람은 이곳을 지나 왕씨 마을로 갔었지. 산등성이에 꽂힌 흉기를 처음 보는 순간 노래가 절로 나오더군."
혹부리는 칠수댁을, 이삼은 죽은 꺽다리와 추이 노인을 각각 생각하고 있었다.
대원들은 지친 몸을 끌다시피 하며 걸었다. 오늘 죽어간 사람들을 잊고 있듯이, 사흘 전에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기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독수리 대장도 평소처럼 민첩하지 못했다. 산을 오르면서 계속 어깨를 늘어뜨린 것이 매우 지친 모습이다.
자작나무 숲을 거의 지나왔을 때 이삼이 소리쳤다.
"저것 봐! 사람 아니야?"
"가 보자!"
"칠수댁이야. 아일 안고 있잖아. 으윽!... 머리가 다 으스러졌군!"
제일 먼저 달려간 것은 혹부리였다. 그 순간 그는 제정신을 잃고 칠수댁 앞에 털썩 꿇어앉았다. 그녀는 자작나무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두 손은 죽은 듯이 아이의 시체를 꼭 감싸 안고 있었다. 그녀의 바지는 갈기갈기 찢기고, 한쪽 젖꼭지는 피범벅이 된 아이의 작은 입술에 물려 있었다. 대원들은 어찌할 줄 몰라 넋을 잃고 있었다. 독수리 대장조차 그 자리에 멀거니 서서 울부짖는 혹부리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누가 주워 온 일본놈 철모로 개울에 가서 물좀 떠 와."
나이 든 한 대원이 입을 열었다.
누군가가 물을 떠다가 그녀의 머리 위에 붓는 순간, 숨소리가 들렸다. 혹부리는 그녀를 어떻게 불러야 좋을 지 몰라 주위를 둘러싼 대원들을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대원들도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서 불러 봐! 뭘 망설이고 있어?"
"어때, 우린 다 형제들이잖아. 뭐가 부끄러워서 그래?"
대원들이 딱하다는 듯 한 마디씩 했다. 모두들 고개를 내밀고 바라보았다. 그때 독수리 대장이 팔을 휘저으며 명령했다.
"저리 가! 모두들 저쪽에 가서 집합해!"
대원들은 칠수댁이 어떤 모습으로 깨어날지 궁금했다. 그러나 독수리 대장의 명령은 지상 명령이었다. 집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지들, 우린 여기서 시간을 허비할 수 없소! 우리는 저 여자를 포기해야 하오. 적이 곧 우릴 추격해 올 거요."
독수리 대장의 눈길이 혹부리의 눈길과 마주쳤다.
"그 여자를 두고 가시오!"
그 말은 가까운 곳에서 터진 수류탄의 파열음처럼 혹부리의 의식을 산산조각이 나게 했다. 그는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소리쳤다.
"안 됩니다. 대장 동지! 이 여자를 버릴 순 없소."
"이유가 뭔가?"
독수리 대장이 쏘아보듯 혹부리를 쳐다보았다. 대원들은 숨을 죽이고 대답을 기다렸다.
"이유는 없소...아무 이유도 없소. 총을 드릴 테니 가져가시오. 난 이제 혁명을 그만두겠소...이 여자와 여기 남을 테요. 일본놈 대검에 난자 당해도 좋소...가시오. 안 된다면 날 죽이시오...이 여자와 함께..."
그는 나무에 기댄 채 깊은 잠에 빠진 칠수댁 앞으로 달려가 어깨를 부여잡고 흔들었다.
"자, 이 여자와 함께 총살하시오. 나... 나는 반혁명 분자요. 동지들...미안하오. 맘대로 하시오. 대장 동지..."
그는 소총을 땅바닥에 내던지고는 탄알 주머니까지 그 옆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주저앉아 얼굴을 양 무릎 속에 파묻은 채 엉엉 울었다. 독수리 대장의 마음은 무겁고 우울했다. 슬픔의 침묵이 흘렀다. 햇살은 자작나무 숲을 스치고 저편 들판을 비추었다. 들판의 이삭들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동지들,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겠소! 3분의 여유를 주겠소."
독수리 대장의 단호하게 말했다.
3분이 자났건만 대원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혹부리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고 있었다.
"동지들!"
독수리 대장은 입을 다문 채 땅바닥에 주저앉은 혹부리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옆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는 칠수댁에게는 절대로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
"동지, 이게 혁명 대원의 정신이오? 마누라를 얻기 위해서 다른 동지들은 죽어도 좋단 말이오? 왕씨 마을이 습격 당한 사실을 알게 되면 일본군이 당장 우리를 추격해 올 거요. 우리의 임무가 무엇이오? 지난번에 혼자 대오를 이탈했을 때도 이 여자 때문이었고... 지금도 그러려 하고 있소...동지들은 싸울 때마다 죽어 가고 있소. 오늘도 5명의 동지가 죽었소! 동지들이 무얼 위해서 죽은 거요? 우리가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소? ...당신은 혁명 대원이라는 사실을 잊었소?...오늘 당신은 우리들의 심판을 요구했소. 좋소! 사양하지 않겠소!"
독수릴 대장의 안색을 더욱 어두워졌다. 권총을 천천히 뽑아 드는 그의 광대뼈가 눈에 띄게 불거졌다.
"우리 동지들을 기억하시오! 일본군과 그 앞잡이들에게 죽음을 당한 동지들을! 먼저 간 동지들의 복수를 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요...동지...마음을 굳게 먹으시오!"
그 말은 혹부리에게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었다. 그는 그저 흐느낄 뿐이었다.
골짜기 밖에서 웅웅거리는 비행기의 엔진 소리가 들려 왔다. 비행기는 머리 위를 지나 길을 따라서 날아가고 있었다. 놈들은 혁명군이 멀리 달아났으리라 믿고 숲 위를 한 번 선회한 뒤 아무 목표도 없이 폭탄 하나를 떨어뜨리고 날아가 버렸다.
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숲속으로 숨었다. 포성이 뚜렷하게 들렸다. 마을을 향해 사격하는 듯했다. 마을 안에 적이 숨어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혹부리는 누가 말하기도 전에 칠수댁을 끌고 수풀로 기어가 엎드렸다. 이윽고 칠수댁이 눈을 떴다. 아, 그렇게도 그리던 혹부리가 옆에 있는 것이 아닌가!
"어머나! 정말로 당...당신이에요?"
그녀의 입술은 피로 엉겨 붙어 있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혹부리의 가슴으로 달려들었다.
"..."
"꿈인가요, 생신가요? 꿈이지요? 아! 내 아가는..."
"..."
그녀는 눈만 크게 뜰 뿐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다. 너무 놀란 것이 틀림없었다. 정신이 없는 중에도 그녀는 혹부리에게 총이 없음을 발견했다.
"당신의 총은? 총은 어디 있어요? 왜 총이 없나요? 일본군에게 빼앗겼나요?"
혹부리는 그제서야 자신이 아까 총과 탄알 주머니를 땅바닥에 내려놓았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죽자! 우리 같이 죽자! 우린 끝장이야! 대장이 당신을 못 데리고 가게 해. 당신이 걷지 못한다고. 대장은 날 총살시킬 거야. 우릴 같이 죽여 달라고 했어. 그래서 총을 내던졌지. 날 죽이면...우린 함께 여기서 잠들게 되는 거야. 누, 누가 우릴 함께 묻어 줄까..."
혹부리는 어린애처럼 가슴 아프게 울었다.
"왜 동지에게 죽여 달라고 하나요? 동지가 어떻게 당신을 죽일 수 있어요? 어서 가서 총을 들어요. 나도 당신들을 따라 나서겠어요. 내가 그토록 나약해 보여요?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자신이 나약하지 않음을 보여 주려는 듯이 필사적으로 일어서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너무나 심한 통증에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눈을 부릅뜨고 손을 허공을 향한 채, 입으로 무엇인가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물을 잃은 고기처럼...
"다...당신, 어서 총을 잡으세요...나, 나는 안 되겠어요..."
총성이 온 숲을 뒤흔들었다. 대원들은 일제히 반격을 시작했다. 풀빛 철모의 일본군과 회색 철모의 만주국 군인들이 숲속으로 기어 들어와 물고기떼처럼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적은 점점 포위망을 좁혀 들어왔다. 기관총이 계속 불을 내뿜었다. 탄알은 나무와 수풀을 스치면서 가지를 부러뜨리거나, 온갖 들풀들을 뒤흔들어 놓았다.
"동지들! 우리의 깃발을 들고 전진!"
수풀 속에서 튀어나온 독수리 대장이 권총을 휘두르며 대원들을 지휘했다. 돌격 호루라기 소리에 이어 대원들의 전진이 시작되었다. 화약 연기가 자욱했다. 허공을 가르던 총성은 이제 거친 부르짖음과 비명에 파묻혀 버렸다.
"전진하지 않으면 죽음뿐이다. 투쟁하지 않으면 파멸뿐이다."
홍기를 따라 대원들은 광란의 파도처럼 적을 향해 돌진했다.
(193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