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
타락
郁達夫(Yu Tafu)
1
최근 들어 그는 가련할 정도로 싸늘한 고독감을 느꼈다. 그의 조숙한 성품이 그를 세상 사람들과 전혀 어울리지 못할 지경으로까지 몰아넣어, 세상 사람들과 그 사이에 가로놓인 담장이 갈수록 높아져만 갔다.
날씨가 날로 서늘해졌다. 그의 학교가 개학한 지도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 그날이 바로 9월 22일이었다.
만 리까지 구름 한 점 없이 온통 푸르른 맑은 하늘에 영원토록 항상 새로운 밝은 태양이 변함없이 그 궤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남쪽에서 불어온 미풍이 술을 깨게 하는 미주처럼 일종의 향기를 머금고 언뜻언뜻 위로 스쳐 왔다. 아직 익지 않은 녹색의 벼 팬 논 가운데 흰 실의 선처럼 꾸불꾸불하게 난 시골길 위를 그 혼자서 여섯 치 길이의 워즈워스 시집 한 권을 손에 들고 천천히 걸어갔다. 이 널따란 들녘에는 사방에 사람의 그림자라곤 없었으며, 다만 어디에서 들려 오는지 개 짖는 소리가 아련히 그의 고막에 와 닿았다. 책에서 눈을 떼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곳을 꿈꾸듯이 바라보니, 한 무더기 잡목 숲 사이로 몇몇 민가가 보였는데, 고기비늘 같은 기와 위로 한 겹의 엷은 신기루가 가벼운 비단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오, 너 해맑은 비단이여! 너 아름다운 비단이여!(Oh, you serene gossamer! You beautiful gossamer!)"
이렇게 한 번 외치자 무엇 때문인지 그 자신도 모르지만 그의 눈에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멍하니 한참을 바라보다가 그는 갑자기 등 뒤에서 언뜻 보랏빛 숨결이 들려 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사그락 소리를 내는 길가의 한 포기 작은 풀이 그의 몽환경을 깨버렸다. 그가 머리를 돌려 보니 그 작은 풀은 아직도 끊임없이 한들거리고 있었으며, 오랑캐꽃 숨결을 띤 온화한 바람이 그의 창백한 얼굴 위로 다사롭게 불어왔다. 이렇게 맑고 온화한 초가을의 세계에서, 이렇게 청정하고 투명한 대기 속에서 그는 온몸이 도취된 듯이 나른해짐을 느꼈다. 그는 마침 인자한 어머니의 품에서 자는 것 같았다. 그는 마치 꿈속에서 도화원에 이른 것 같았다. 그는 마치 남유럽의 해안에서 애인의 무릎에 누워 달콤한 낮잠을 즐기는 것만 같았다.
그가 사방을 둘러보니 주위의 초목들이 모두 그에게 미소 짓고 있는 듯했다. 또한 창공을 바라보니 영원불변한 대자연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듯했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보니, 하늘에 한 무리의 천사들이 등에 날개를 꽂고 어깨에 화살을 맨 채 춤추며 뛰노는 듯했다. 그는 너무나도 즐거워 자기도 모르는 새에 입을 열어 혼자 중얼거렸다.
"여기가 바로 너의 피난처이다. 세상의 범인들이 모두 너를 시기하고, 너를 경멸하며, 너를 우롱하지만, 이 대자연, 이 만고토록 항상 새로운 창공의 밝은 태양, 이 늦여름의 미풍, 이 초가을의 맑은 기운만은 너의 친구요, 너의 인자한 어머니요, 너의 애인이다. 그러니 너는 더 이상 세상으로 가서 저 경박한 남녀들과 함께 거처할 필요가 없다. 너는 이 대자연의 품 안에서, 순박한 시골에서 일생을 마치거라."
이렇게 한바탕 말하고 나자 그는 스스로 가련해짐을 느꼈다. 마치 천만 가지 슬픔과 원망이 가슴에 가로놓여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두 눈 가득 눈물을 머금고서 그의 눈을 다시 손에 든 책 위로 옮겨 바라보았다.
Behold her, single in the field.
You solitary highland lass!
Reaping and singing by herself,
Stop here, or gently pass!
Alone she cuts, and binds the grain.
And sings a melancholy strain.
oh, listen! for the vale profound,
Is overflowing with the sound.
이 제1절을 읽고 나서 그는 다시 홀연 한 장을 넘겨 아무 생각 없이 제3절로 시선을 옮겼다.
Will no one tell me what she sings?
Perhaps the plaintive numbers flow.
For old, unhappy far~off things.
And battle long ago.
Or is it some more humble lay,
Familiar matter of today?
Some natural sorrow, loss, or pain?
That has been and may be again!
이것 또한 그의 요즈음의 일종의 습관으로, 그는 책을 볼 때마다 결코 차례가 없었다. 수백 페이지의 큰 책은 말할 것도 없고, 에머슨(Emerson)의 "자연론"이나 소로(Thoreau)의 "소요유" 같은 류의 수십 페이지밖에 안 되는 작은 책도 완전히 처음부터 끝까지 한 편을 다 읽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책 한 권을 펴서 처음 네댓 줄이나 한 두 페이지를 읽고 나면 다시 아쉬운 마음이 들어 속에서 이렇게 얘기하는 듯했다.
'이처럼 훌륭한 책은 단숨에 읽어 버려서는 안 되고 모름지기 자세히 되씹어 보아야 한다. 한 번에 다 읽어 버리고 나면 나의 열망도 곧 사그라져 버리고 만다. 그렇게 되면 나에겐 희망도 없어지고 몽상도 없어지게 될 것이니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는 머릿속으로는 비록 이렇게 생각을 했지만 사실 그의 마음속에선 벌써부터 약간의 싫증을 느꼈는데, 그럴 때면 그는 그 책을 한편으로 제쳐놓고 다시는 읽지 않았다. 그러다가 며칠이 지나거나 혹은 몇 시간이 지나면 그는 다시 가슴속에 가득 찬 정열로 처음 책을 읽을 때처럼 다른 책을 읽어 보지만, 며칠 혹은 몇 시간 전에만 해도 그를 그렇게 감동시켰던 그 책을 도리 없이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큰 소리로 워즈워스의 시 두 절을 읽고 나자 그는 갑자기 중국어로 이 시를 번역해 보고 싶어졌다.
"적막한 고원의 벼 베는 사람". 그는 곰곰이 생각해 보니 "The solitary highland reaper"라는 제목을 이와 같이 번역할 수밖에 없었다.
보라, 저 여인을. 홀로 밭에 있네.
보라, 저 고원의 여인을. 홀로 쓸쓸하구나!
벼를 베면서 쉼 없이 노래하면서,
멈췄다가 지나가는 아름다운 자태, 고운 살결!
그녀 홀로 베며 묶네.
그녀의 노래엔 서글픈 정이 담겨 있구나.
들어 보라! 이 깊고 깊은 골짜기에,
충만한 그녀의 맑은 노랫소리를.
누가 말해 주려나, 그녀가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
천만 가지 애처로운 사랑 노래일까?
오래 된 슬픈 노래일까?
옛 왕조의 천병만마 전쟁 이야기일까?
아니면 항간의 유행곡,
누구나 다 아는 요즘 노래일까?
늘 지닌 슬픔, 꼭 오는 이별, 절로 생긴 고통의 노래일까?
과거의 회상이자 장차 누군가가 다시 겪게 될.
그는 단숨에 번역해 놓고 보니 문득 허전함을 느껴 스스로를 조롱하면서 말했다.
"이게 뭐란 말인가? 교회당의 찬송가처럼 무미하지 않은가? 영국 시는 영국 시이고 중국 시는 중국 시일 따름이니 어찌 번역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가만히 웃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태양이 이미 기울어 가고 있었다. 대평원의 저 건너편, 서쪽 지평선 위에 높은 산 하나가 온 하늘의 석양을 흠뻑 받은 채 떠 있는데, 산의 주위에는 한 층의 몽롱한 산 안개가 어리어 있어 일종의 자줏빛도 아니고 붉은빛도 아닌 그런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가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 '에헴'하는 기침 소리와 함께 그의 등 뒤에서 갑자기 한 농부가 나타났다. 그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웃고 있던 얼굴 표정을 우울한 표정으로 바꾸었는데, 마치 그의 웃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는 게 두려운 듯한 눈치였다.
2
그의 우울증은 더욱 심해져만 갔다. 그는 학교의 교과서가 초를 씹는 맛처럼 조금도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날씨가 청명할 때면 그는 매번 애독하는 책 한 권을 들고서 인적이 드문 산굽이나 호수로 달려가 고독의 깊은 맛을 즐기곤 하였다. 자연의 온갖 소리가 적막한 순간에 하늘과 땅이 서로 비치는 곳에서 그는 풀, 나무, 벌레, 물고기를 바라보고, 그리고 흰 구름과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이 고고하고 오만한 현인이나 초연히 홀로 선 은자처럼 느껴졌다. 어떤 때 산속에서 한 농부를 만나면 그는 스스로를 자라투스트라(Zaratustra)라 여기고서 자라투스트라가 한 말을 마음속으로 그 농부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그의 메갈로마니아(megalomania, 과대망상)도 그의 하이포콘트리아(hypochondria, 우울증)와 정비례해서 하루하루 더 심해져 갔다. 그는 사오일을 계속해서 학교 강의를 빼먹기도 했다.
어쩌다 학교에 나가면 모두들 자기를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이리저리 학우들을 피하려 하였지만 어느 곳으로 가든지 학우들의 눈빛이 늘 악의를 품은 채 그의 등 뒤를 쏘아보는 것 같았다.
수업할 때에도 그는 반 학생들의 사이에 앉아 있었지만 언제나 심한 고독을 느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느끼는 고독은 쓸쓸한 곳에서 홀로 느끼는 고독보다 더욱 참기가 어려웠다. 학우들을 둘러보면 모두들 신이 나서 열심히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강의실을 벗어나 날아가는 구름이나 지나가는 번개처럼 끝없이 끝없이 공상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가까스로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가 울렸다. 선생님이 나가신 후 학우들은 서로 우스갯소리와 잡담을 하면서 모두들 봄날의 제비처럼 즐거워하였지만, 그 혼자만은 근심스러운 듯이 눈썹을 찌푸리며 마치 혀끝에 천근이나 되는 큰 돌추가 달려 있는 것처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도 학우들이 그에게 다가와서 말을 걸어 주기를 바랐으나 그의 학우들은 모두 자기네끼리만 시시덕거렸다. 어쩌다 그의 근심 어린 얼굴과 마주치면 모두들 고개를 돌리고 피했다. 그래서 그는 그의 학우들을 더욱더 원망하였다.
'그들은 모두 일본 사람이다. 그들은 모두 나의 원수이다. 내 언젠가는 복수할 테다. 그들에게 꼭 복수하고 말 테다.'
비분이 북받칠 때마다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하였지만, 안정이 되고 나면 그는 다시 자신을 조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일본 사람이므로 그들이 나를 동정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내가 그들의 동정을 얻기 위해서 그들을 원망한다면 어찌 내 스스로의 착오가 아니겠는가?'
일 만들기 좋아하는 학우들 중에서 누군가가 어쩌다 그에게 웃으며 말을 걸어오면, 그는 마음속으로는 비록 매우 감격하여 그 사람과 함께 가슴속의 말을 몇 마디 나누고 싶었지만 입에서는 도무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뜻을 이해하던 몇몇 사람들도 그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일본인 학우들이 웃으며 기뻐할 때면 언제나 그들이 자기들 비웃는다고 생각하여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지곤 하였다. 그들이 잡담할 때에 누군가가 우연히 그를 쳐다보기만 해도 그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그들 사이의 거리는 계속 멀어져만 갔다. 그의 학우들은 모두 그가 고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여겨서 누구도 감히 그의 곁에 가까이 가려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방과 후에 그가 책가방을 옆에 끼고 그의 하숙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일본 학생 세 명도 그와 같은 길을 걸어갔다. 그가 거처하는 하숙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맞은편에서 갑자기 붉은 치마를 입은 여학생 두 명이 걸어오는 것이었다. 이런 시외의 변두리 지역에서는 여학생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는 그 두 여학생을 보자마자 곧 호흡이 가빠졌다. 그 두 명의 여학생들이 스쳐 지나갈 때 세 명의 일본인 학생들이 그녀들에게 물었다.
"너희들 어디 가니?"
그 두 여학생들은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몰라!"
"몰라!"
그 일본 학생 세 명은 모두 큰 소리로 웃으면서 마치 매우 만족한 듯 했지만, 그 혼자만은 자기가 직접 그녀들에게 말이라도 건넨 것처럼 몹시 부끄러워하면서 총총히 하숙집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책가방을 다다미 위에다 힘껏 던지고는 다다미 위에 벌렁 드러 누웠다. 그의 가슴은 아직도 마구 뛰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베개를 삼고 한 손으로는 가슴을 만지면서 그는 스스로를 조소하고 꾸짖어 말하였다.
"이 비겁자야! 너는 이미 부끄러워했으면서 왜 후회하려 하지? 후회하려면, 왜 그때 너는 그만한 담력도 없었느냐구. 그녀들에게 말 한 마디도 건네지 못했잖아? Oh, coward, coward!(오, 겁쟁이, 겁쟁이!)"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나서 그는 문득 방금 본 그 두 여학생들의 눈짓을 떠올렸다.
그 두 쌍의 발랄한 눈! 그 두 쌍의 눈 속엔 확실히 놀라면서도 기뻐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자세히 생각해 보고 나서 그는 또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멍청이! 멍청이! 그녀들에게 비록 뜻이 있었다 하더라도 너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그녀들이 보낸 추파는 단지 일본인에게 보낸 것이었잖아. 아! 아! 그녀들은 이미 알고 있었어. 내가 중국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어.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들이 왜 나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겠어? 복수, 복수. 나는 언젠가 그녀들에게 복수하고 말 테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자 화끈 달아오른 그의 뺨 위로 문득 차가운 눈물이 몇 방울 굴러 떨어졌다. 그는 무척 상심했다. 그날 밤 그가 기록한 일기는 다음과 같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일본에 와서, 무엇 때문에 학문을 하나. 이미 일본에 왔으니 자연히 그들 일본인의 경멸을 받지 않을 수 없는 법. 중국이여! 중국이여! 너는 어째서 부강해지지 않느냐? 나는 더 이상 참아낼 수가 없구나.
고향에 어찌 아름다운 산하가 없으리오? 나는 무엇 때문에 이 동해의 섬나라에 왔는가!
일본에 왔으면 그만이지 나는 무엇 때문에 또 이 죽을 것 같은 학교에 진학했나? 그들, 다섯 달 동안 남아서 공부하고 돌아간 사람들은 어찌 여기에서 영화와 안락을 누리지 않았는가? 이 오륙 년의 세월을 나는 어떻게 견디어낼 수 있을까? 천신만고 끝에 십수 년 동안 학식을 쌓아 귀국한다 해도 내가 그들 시끌벅적하던 유학생들에 비하여 반드시 더 낫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인생 백년 중에 젊은 날은 다만 칠판 년의 세월 뿐. 이 가장 순수하고 가장 아름다운 칠팔 년을 나는 이 무정한 섬나라 안에서 헛되이 보내야만 한다. 가련하게도 나는 올해 이미 스물한 살이 되었다.
고목 같은 스물한 해!
식어 버린 잿더미와도 같은 스물한 해!
나는 진정 광물질로 변하는 편이 차라리 낫겠다. 나에게는 아마도 꽃 피는 날이 없을 게다.
지식도 필요 없고 명예도 필요 없다. 나는 다만 나를 위로해 주고 나를 이해해 주는 '마음' 하나만이 필요하다. 백열하는 심장! 그 심장에서 생겨나는 동정! 동정에서 나오는 사랑!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만약 한 미인이 있어 나의 고통을 이해해 주기만 한다면, 그녀가 나더러 죽으라 한다 해도 나는 기끼이 따를 것이다.
만약 한 부인이 있어 그녀가 아름답든지 추하든지 상관없이 진심으로 진정으로 나를 사랑해 주기만 한다면, 나 또한 그녀를 위해 죽고 싶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이성 간의 사랑이다!
하늘이시여! 하늘이시여! 나는 지식도 필요치 않고, 명예도 필요치 않으며, 그 무용한 금전도 필요치 않습니다. 당신이 만약에 에덴 동산의 '이브' 하나를 나에게 내려 주시어 그녀의 육체와 영혼을 온전히 저에게 귀속시켜 주신다면 저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3
그의 고향은 부춘강 옆의 작은 도시로서 항주에서 물길로 팔구십 리밖에 안 떨어져 있었다. 이 한 줄기 강물은 안휘에서 발원하여 절강 전 지역을 관통하여 흐르는데, 강 모양이 굽이져 있고 풍경이 항상 새로워서 당나라의 한 시인이 이 강을 "한 냇물이 그림 같도다."하고 찬탄했었다. 그는 열네 살 때 선생님에게 그 글을 써달라고 청해서 그의 서재에 붙여 놓았는데, 그의 서재의 작은 창이 강쪽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재는 비록 그다지 크지 않았으나 비 오거나, 구름 끼거나, 흐리거나, 맑거나, 봄가을, 아침저녁의 풍경은 등왕각에 못지않았다. 이 자그마한 서재에서 십여 번의 봄가을을 보내고 나서 그는 그의 형을 따라 일본에 공부하러 온 것이었다.
그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그때 그의 집은 몹시 곤궁했었다. 용케도 그의 큰형이 일본 W대학을 졸업하고 북경으로 돌아와 진사에 합격하여 법무부의 관리로 배속되었으나, 2년이 채 못 되어 무창의 혁명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때에 그는 이미 현립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리저리 중학교를 옮겨 다니고 있었다. 그의 집안사람들은 모두 그의 끈기 없음을 이상히 여기고 그의 생각이 너무 제멋대로임을 나무랐다. 그러나 그 자신의 말에 의하면, 자기는 다른 학생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그들과 함께 공부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K현의 중학교에 들어간 후, 반년도 못 되어서 다시 갑자기 H현의 중학교로 전학하였는데, H현의 중학교에 다닌 지 석 달만에 혁명이 일어났다. H현의 중학교가 휴교된 후 그는 예전대로 그의 자그마한 서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다음 해 봄 그가 열일곱 살 되던 때, 그는 대학 진학을 위한 예비학교에 진학하였다. 이 학교는 항주성 밖에 있었는데, 본래 미국 장호회의 기부금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그래서 학교 안에 일종의 전제적인 폐풍이 스며들어 있어서 학생들의 자유가 거의 바늘구멍처럼 작게 위축되어 있었다. 수요일 저녁마다 무슨 기도회가 있었으며, 일요일에는 밖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숙사 안에서 다른 책을 보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찬송가를 부르거나 기도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신, 구약서를 보는 것만 허락되었다. 매일 아침 9시부터 9시 20분까지는 반드시 예배보러 가야 하였으며, 예배보러 가지 않으면 감점을 당하였다. 그는 비록 그 학교 근방의 산수풍경을 매우 사랑하였지만, 마음속에는 반항의 뜻을 품고 있었다. 그는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미신적인 속박에 대해서는 도저히 달게 복종할 수가 없었다. 입학한 지 반년이 채 못 되었을 때, 그 학교의 요리사가 교장의 기세를 믿고 학생을 구타한 사건이 일어났다. 학생들 중에 몇몇 복종하지 않는 이들이 곧장 교장에게 호소하였으나 교장은 도리어 학생들이 잘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주시하고 사실 너무나도 터무니없었으므로 곧장 자퇴를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그 작은 서재에 머물렀다. 그때가 6월 초순이었다.
집에서 석 달 남짓 지낸 후 가을 바람이 부춘강 위로 불어와 양쪽 언덕의 푸른 나무가 낙엽을 떨굴 때, 그는 돛단배를 타고 부춘강을 내려가 항주로 갔다. 때마침 그때 석패루의 W중학교에서 편입생을 모집하고 있었는데, 교장인 M씨는 그의 경력을 듣더니 곧 그를 최고급반에 편입시켜 주었다. 이 W중학교도 원래 교회학교였으며, 교장 M씨도 멍청한 미국 선교사였다. 그가 보기에 이 학교의 수준은 H중학교보다도 못하였다. 그래서 한 저속한 교무주임~원래 이 선생은 H중학교의 졸업생이었다~과 한바탕 싸운 뒤 그 다음해 봄에 그는 곧 그곳을 나와 버렸다. W중학교를 나와서 그는 항주의 다른 학교들을 둘러보았으나 모두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더 이상 다른 학교에 입학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바로 이때 그의 큰형도 북경에서 남들에게 배척당했다. 원래 그의 큰형은 사람됨이 매우 정직하여 법무부에서 일을 처리할 때 공평무사하였으며, 또한 부내의 일반 동료들보다도 학식이 더 많았으므로 부내의 상하 사람들이 모두 그를 기피하고 꺼려하였다. 하루는 모 차장의 아는 사람이 와서 그에게 자리 하나를 부탁했는데, 그는 완강히 거부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차장과 한바탕 언쟁을 하였으며, 며칠이 지난 후 그는 곧 법무부의 관직을 사퇴하고 사법부로 옮겨가서 사법관이 되었다. 그의 둘째 형은 그때 소흥 군대에서 장교로 있었는데, 이 둘째 형은 군인 기질이 다분하여 돈을 물 쓰듯 하였으며, 의협심이 많은 친구들과 사귀기를 좋아하였다. 그들 세 형제들은 그때에 모두 뜻대로 일을 할 수가 없었으므로 그 작은 도시의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운세가 다했다고들 말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온 후 온종일 그의 작은 서재에 칩거하였다.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그의 큰형이 소장했던 서적이 그의 좋은 스승과 유익한 벗이 되어 주었다. 그의 일기장에는 날마다 시가 기록되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화려한 문장으로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소설 속에서 그는 자신을 아주 다정한 용사로 만들었고, 이웃집 과부의 두 딸을 귀족의 후예로 만들었으며, 그의 고향의 풍경을 전편에 흐르는 전원의 아름다운 경치로 삼았다. 흥이 날 때는 자기 자신의 소설을 단순한 외국어로 번역해 보기로 했다. 그의 환상은 더욱더 크게 펼쳐져 갔다. 그의 우울증의 싹은 아마도 이때에 배양되었던 것 같다.
집에서 반년을 지낸 뒤 7월 중순에 그는 큰형이 보낸 편지를 받았다.
법원 안에서 요즈음 나를 일본에 파견하여 사법 사무를 시찰케 하자는 의견이 있어서 나는 이미 원장에게 일본행을 승낙했다. 아마도 며칠 안으로 명령이 있을 것 같다. 일본으로 건너가기에 앞서 잠시 고향에 돌아가 머무르려고 한다. 막내도 집에 있는 것만이 상책이 아닐 테니 이번에 나와 함께 일본에 갔으면 한다.
그는 이 한 통의 편지를 받고서 마음속으로 날마다 그의 큰형이 내려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는데, 9월 하순에야 그의 큰형과 형수가 집에 도착했다. 한 달을 지낸 후에 그는 그의 큰형, 큰형수와 함께 일본으로 갔다.
일본에 도착한 후에도 그는 낭만적인 시절의 꿈들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 어물어물 반년을 보내고 나서 그는 동경 제일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가 바로 그가 열아홉 살 되던 해의 가을이었다.
제일고등학교가 개학할 무렵에 그의 큰형은 귀국하라는 원장의 명령을 받았다. 그의 큰형은 곧 그를 한 일본인의 집에 기숙시켜 놓고는 며칠 후에 큰형수와 갓난아이인 그의 여자 조카를 데리고 귀국해 버렸다.
동경의 제일고등학교에는 예과가 있었는데, 그것은 중국 학생을 위하여 특별히 설치된 것이었다. 이 예과에서 1년 동안 공부한 후에야 비로소 각지 고등학교의 정과에 입학하여 일본 학생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었다. 그가 예과에 들어갈 때에는 본래 문과를 지망했었는데, 나중에 예과를 졸업할 무렵에 그의 큰형이 그에게 의과로 바꾸라고 하자 그는 당시 아무런 주관도 없었던 터라 큰형의 말을 듣고 의과로 바꾸어 버렸다.
예과를 졸업한 후, 그는 N시의 고등학교가 가장 신식이며 또한 N시가 일본에서 미인이 많은 곳이라고 해서 곧 N시의 고등학교로 가겠다고 했다.
4
그의 나이 스무 살 되던 해 8월 29일 저녁에 그는 혼자 동경의 중앙역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N시로 갔다.
그날은 아마도 음력 초사흘인 것 같았다. 남색에 자줏빛이 도는 융단 같은 하늘 가득히 별들이 반짝거렸다. 반쯤 이지러진 초생달이 서쪽 하늘 모퉁이에 걸려 있었는데, 마치 아직 취대(눈썹을 그리는 데 쓰는 푸른빛의 먹)를 칠하지 않은 선녀의 아미 같았다. 그는 혼자 삼등칸의 차창에 기대어 묵묵히 창밖 인가의 등불을 세었다. 기차가 까만 밤 속에서 한 바퀴 한 바퀴 나아가자 그 대도시의 반짝이는 등불도 한점 한점 몽롱해져 갔다. 그의 가슴에 갑자기 천만 가지 슬픈 감정이 일어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Sentimental, too Sentimental!(감상적인, 너무나 감상적인!)"
이렇게 소리치며 눈물을 한 번 훔치고 나서 그는 도리어 자신을 비웃었다.
'너는 동경에 두고 온 애인도 없으며, 동경에 사는 형제나 친한 벗도 없는데,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거지? 혹 너의 과거 생활에 대한 슬픈 감정인가? 아니면 그동안의 네 생활에 대해 남아 있는 정인가? 하지만 너는 평소에 동경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더냐?'
'아, 1년여 동안 사람이 살았으니 어찌 정이 없을손가?'
'꾀꼬리와 서로 오래 지내니 서로 알아봐, 떠나려 하니 자주 우짖네.(황앵주구호상식, 욕별빈제사오성)'
어지럽게 이것저것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 그는 신대륙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었던 청교도들의 신세를 문득 떠올렸다.
'그 십자가를 짊어진 유랑민들이 그의 고향 해안을 떠나왔을 때도 아마 나처럼 비장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겠지.'
기차가 요코하마를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감정이 점점 평온해졌다. 멍하니 잠시 앉아 있다가 그는 곧 엽서 한 장을 꺼내어 하이네(Heine)의 시집 위에다 놓고 연필로 동경의 친구에게 보내는 시 한 수를 썼다.
아미 같은 달, 버들가지 끝에 솟아오를 때,
또 하늘가를 향해 옛집을 떠나네.
사방 기정(술집, 요릿집)에서는 술 내기를 다투고,
온 거리의 등불은 멀리 수레를 따르네.
어지러이 떠남에 나이 어려 눈물 많지 않고,
보따리엔 집이 가난해 옛 책뿐이네.
훗날 밤 갈대 뿌리에 가을 물 찰 때,
그대에게 의지해 남포에서 상어를 찾으려네.
몽롱한 전등불 아래서 한참 동안 조용히 않아 있다가 그는 다시 하이네의 시집을 펼쳐 보았다.
Lebet wohl, ihr glatten saele.
Glatte herren, glatte frauen!
Auf die berge will ich steigen.
Lachend auf euch niederschauen!
부박한 속세, 무정한 남녀.
보라, 저 은은한 청산을!
내 바람 타고 날아가,
잠시 머물러, 잠시 머물러,
그 정상의 고봉에서,
너희들이 결국 어디로 돌아가는지 웃으며 보리라!
단조로운 바퀴 소리가 덜컹덜컹 끊임없이 그의 고막에 날아 들어왔다. 30분도 못 되어서 그는 결국 졸음을 재촉하는 기차바퀴 소리에 이끌려 몽환적인 선경으로 들어갔다.
아침 6시가 되자 하늘이 점점 밝아오기 시작했다. 차창 안에서 밖을 바라보니 한 선을 이룬 푸른 하늘이 아직 밤빛에 싸여 있었다. 머리를 내밀고 바라보니 한 겹의 얇은 운무가 한 폭의 천연적인 그림을 덮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오늘은 아주 맑은 가을 날씨군. 나의 복도 그다지 적다고 볼 수는 없겠어.'
한 시간쯤 지나자 기차가 N시의 정거장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려 정거장에서 우연히 한 일본 학생을 만났다. 그는 그 학생의 교모 위에 두 줄의 흰 선이 있는 것을 보고서 그도 역시 고등학교 학생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앞으로 걸어가서 그 학생의 향해 모자를 벗고 물었다.
"X고등학교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학생이 대답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그는 그 학생을 따라 기차역을 빠져나와 역 앞에서 전차를 탔다.
이른 아침이었으므로 N시의 상점들은 모두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그는 그 일본 학생과 함께 전차를 타고서 몇 군데 한적한 거리를 지나 학무공원 앞에서 내렸다. 그는 일본 학생에게 물었다.
"아직 멀었습니까?"
"아직 2리쯤 남았습니다."
공원을 통과하여 논밭 가운데 있는 가느다란 길 위를 걸을 때 그는 태양이 이미 떠오른 것을 보았다. 벼 위에 맺힌 이슬방울이 아직 투명한 구슬처럼 거기에 매달려 있었다. 앞에는 숲이 하나 있었는데 우거진 나무 그늘 속으로 드문드문 몇 채의 농가가 보였다. 두서너 개의 굴뚝에서 나온 연기가 농가 위로 솟아 나와 맑은 새벽 공기 속에서 은은하게 떠 있었다. 한 오라기, 두 오라기 푸른 연기가 향료의 연기처럼 떠다니는 것을 보고 그는 농가에서 이미 아침밥을 짓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학교 부근의 하숙집에 가서 물어보았더니 그가 일주일 전에 부쳤던 몇 가지 짐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원래 그 집은 중국 유학생이 머물렀던 곳이어서 주인이 잘 대해 주었다. 그 하숙집에 머물게 된 뒤부터 그는 마치 앞날에 수많은 환희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앞날에 대한 희망은 첫날밤에 눈앞의 현실에 의하여 조롱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 그의 고향도 작은 도시였다. 동경에 도착한 후 인산인해 속에서 그는 비록 항상 고독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곳에서의 생활은 그의 어릴 적 습관과 그다지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그러나 이 N시에 와서 보니 그의 하숙집은 고립된 집이었다. 사방에 이웃이라고는 없었고 왼쪽 문밖은 한 가닥 머리채 같은 큰길이었으며 앞뒤는 모두 논밭, 그리고 서쪽에는 네모난 저수지 하나가 있었다. 게다가 학교가 아직 개학하지 않아서 다른 학생들도 오지 않았다. 이 넓디넓은 하숙집에 손님이라고는 그 혼자뿐이었다. 낮에는 그래도 견딜 만하였으나 일단 밤이 되어 창을 열면 사방이 모두 컴컴한 검은 그림자뿐이었다. 또한 N시의 부근은 대평원이었으므로 눈을 들어 하늘까지 바라봐도 사방에 가리는 곳이라고는 없었으며, 저 멀리 한 점 불빛이 무심히 깜박거려 귀신이 나올 것 같이 스산했다. 천장에서는 여러 마리의 쥐들이 찍찍거리며 먹이를 다투었다. 창밖에 있는 몇 그루의 오동나무가 미풍에 잎사귀를 흔들며 끊임없이 스억스억 소리를 냈는데, 그의 방은 2층에 있었으므로 오동잎 흔들리는 소리가 그의 귓가에 더욱 가까이 들렸다. 그는 무서워서 거의 울음이 나올 지경이 되었다. 도시에 대한 그의 향수병(Nostalgia)이 일찍이 이날 밤보다 더 심한 적은 없었다.
학교가 개학하자 그의 친구들도 점점 많아졌다. 감수성이 매우 강렬한 그의 성품도 천지 수목과 융화되어 갔다. 반년도 못 되어서 그는 결국 대자연의 총아로 변하여 잠시도 그 천연의 풍취를 떠날 수가 없었다.
그의 학교는 N시의 교외에 있었는데, N시의 부근은 대평원이어서 사방의 지평선은 그 경계가 광대하였다. 그때는 일본의 공업이 아직 충분히 발달되지 않았으며 인구도 지금처럼 증가되지 않았으므로 그의 학교 부근은 대부분 숲이나 공터, 낮은 구릉들이었다. 학생을 상대로 장사하는 몇몇 문방구나 음식점 외에는 부근에 주민도 없었다. 거친 들녘에는 학생을 상대로 생겨난 하숙집 몇 채가 새벽하늘의 별처럼 보리밭과 오이밭 가운데에 흩어져 있었다. 저녁을 먹은 후 검은 모직 망토를 걸치고 애독하는 책을 든 채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의 낙조를 받으며 한가로이 산책하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그의 전원적인 취미는 대개 이 전원적인 산책(Idylic Wanderings)속에서 길러진 것이었다.
생활환경이 그다지 맹렬하지도 않고 자유로이 소요할 수 있는, 이처럼 한가롭게 아담한 곳에서 지낸다는 것은 정말 꿈만 같았다. 그가 N시로 온 후 순식간에 어언 반년이 넘게 지나갔다.
훈풍이 밤낮으로 불어오자 풀빛이 점점 푸르러 갔다. 하숙집 근방 보리밭의 보리 이삭도 한치 한치 커갔다. 풀, 나무, 벌레, 물고기들이 모두 천지 자연의 이치에 따라 성장함에 그의 조상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민도 날마다 늘어만 갔다. 그가 매일 아침 이불 속에서 저지르는 죄악도 한 차례 한 차례 늘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본래 고상함과 청결함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나, 일단 사념이 일어났다 하면 그의 지력도 소용이 없었고 그의 양심도 마비되어 버렸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마음속에 지켜 왔던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감히 훼상해서는 안 된다(신체발부 불감훼상)."는 성훈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그는 죄를 저지른 후 매번 깊이 후회하면서 결코 다시는 저지르지 않겠다고 이를 갈며 말하지만, 그다음 날 그때가 되면 여러 가지 환상이 다시 눈앞에 강하게 다가왔다. 그가 평소에 보아 왔던 '이브'의 후예가 모두 완전한 나체로 그를 유혹하였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중년을 넘은 부인의 육체가 처녀보다도 더욱 그의 욕정을 유발케 하는 쪽이었다. 그는 한바탕 고민을 하고 심하게 투쟁을 하지만, 결국은 그녀들의 포로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한 번이 두 번이 되었으며 두 번이 된 후엔 곧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는 죄를 지은 후엔 매번 도서관에 가서 의학서적을 펼쳐 보았는데 의학서적에는 모두 천편일률적으로 몸에 가장 해로운 것이며 이것도 일종의 범죄라고 씌어 있었다. 그 후로 그의 공포심은 날마다 증가되어 갔다. 어느 날 그는 어디에서 들었는지도 모르지만, 러시아 근대문학의 창시자인 고골리도 이런 병에 걸려서 죽을 때까지 고치지 못했다는 사실이 어느 책에 씌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고골리를 생각하자 마음이 다소 느긋해졌는데, "죽은 영혼"의 저자도 그와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에 대한 위안에 불과했을 뿐이며, 그의 가슴에는 항상 일종의 남다른 근심이 존재했다.
그는 정결한 것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매일 한 번씩 꼭 목욕을 했으며, 또한 몸을 매우 아끼는 편이었으므로 매일 몇 개의 생계란과 우유를 먹었다. 그러나 그는 목욕하거나 우유와 달걀을 먹을 때마다 매우 부끄러움을 느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모두 그의 범죄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몸이 날로 쇠약해져 가고 기억력도 날로 감퇴되어 감을 느꼈다. 그는 다시 남의 얼굴 대하기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겨났으며, 특히 부녀자를 볼 때면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그는 학교의 교과서는 점점 멀리했으나, 프랑스의 자연파 소설이나 중국의 유명한 몇몇 회음소설 등은 읽고 또 읽어서 거의 다 외우고 있었다.
어떤 때 문득 좋은 시라도 한 수 지으면 그는 아주 기쁨에 넘쳐 그의 머리가 아직은 망가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때마다 그는 자신에게 맹세하여 말하곤 했다.
"나의 머리는 아직도 쓸 수가 있어. 아직도 이런 시를 지을 수 있다구. 이제부터는 결코 죄를 짓지 않겠어. 과거의 일은 어찌할 수 없지만 이후에는 더 이상 죄를 짓지 말아야지. 만약에 이제부터라도 스스로를 쇄신하면 나의 머리도 괜찮아질 거야."
그러나 일단 긴박한 때가 닥치면 그의 맹세는 곧 잊혀지고 말았다. 매주 목요일이나 금요일, 혹은 매월 26일이나 27일경이면 그는 마음껏 환락을 탐하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다음 주 월요일이나 혹은 다음 달 초하루부터는 결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떤 때는 토요일이나 월말의 저녁이 되었을 때, 머리를 깎고 목욕을 하는 등 허물을 고치고 스스로 새로워지는 표시로 삼기도 했으나, 며칠이 지나고 나면 그는 다시 계란과 우유를 먹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죄책감과 공포심으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그의 우울증도 이때부터 심해져 갔다. 이러한 상태로 한두 달 계속되는 중에 그의 학교가 여름방학을 했다. 여름 방학 두 달 동안 그의 고민은 평상시보다 더욱 심했다. 학교가 개학한 후, 그의 양 볼의 광대뼈는 더욱 튀어나왔으며 그의 청회색의 눈두덩도 더욱 쾡해졌다. 그의 영활했던 한 쌍의 눈동자는 죽은 고기의 눈알처럼 변해 버렸다.
5
가을이 또 왔다. 드넓은 창공이 하루하루 높아져 갔으며, 하숙집 부근의 논밭은 황금빛으로 일렁였다.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싸늘한 바람이 사람의 심골을 날카롭게 찌르는 것을 보니 가을, 겨울의 좋은 날이 오는 것도 멀지 않은 것 같았다.
일주일 전 어느 날 오후에 그는 워즈워스의 시집 한 권을 들고 밭둑길을 반나절 동안 한가로이 산책하였는데, 이날 이후부터 그의 순환성 우울증은 그의 몸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우연히 길에서 만났던 그 두 여학생이 항상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어서 그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날의 일을 떠올리면 그는 아직도 혼자 얼굴을 붉혔다.
그는 요즈음 어느 곳을 가든지 늘 편안함을 느끼기 어려웠다. 학교에 갈 때도 그의 일본인 학우들이 모두 자기를 배척하는 것같이 느껴졌다. 몇몇 중국인 학우를 찾아가 보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는데, 왜냐하면 찾아가 보고 돌아오면 그의 마음이 도리어 공허해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의 몇몇 중국인 학우들은 그의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했다. 그는 어느 정도의 이해와 위안을 얻고 싶어 그들을 찾아가지만, 그곳에 도착해서 몇 마디 말을 나누고 나면 찾아간 게 잘못이었다고 스스로 다시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때 친구와 의기투합하여 얘기할 때면 그는 곧 일시적인 열기에 휩싸여 그의 안팎 생활을 모두 친구에게 말해 주지만, 돌아올 때 그는 실언했음을 느끼고 스스로 후회하여 심리적인 자책이 친구를 찾아가지 않을 때보다 도리어 훨씬 더 심했다. 그의 몇몇 중국인 학우들은 이로 인하여 모두들 그가 신경쇠약증에 걸렸다고 하였다. 그는 이 말을 듣고 난 후, 그 몇몇 중국인 학우들에 대해서도 일본 학생들에 대한 것처럼 일종의 복수심이 일어났다. 그래서 그는 중국인 학우들과도 날로 멀어져 갔다. 그 뒤로는 길에서나 혹은 학교 안에서 만나더라도 그 중국인 학우들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중국 유학생 회의가 열릴 때에도 물론 참석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그는 그의 몇몇 동포들과도 완전히 두 집안의 원수처럼 되어 버렸다.
그 중국인 학우들 속에도 매우 기이한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결혼에 어떤 도덕적인 죄책감이 있었는지 남의 추한 일을 들추어내서 자기의 좋지 못한 점을 감추기를 좋아했다. 그가 신경쇠약증에 걸렸다고 말한 것도 그 학우가 말한 것이었다.
그는 그들과 교재를 끊은 후 고독에 사무쳐 거의 죽을 지경에까지 갔으나, 다행히 그가 살고 있던 하숙집 주인에게 딸이 하나 있어서 그의 마음을 끌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정말 자살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 하숙집 주인의 딸은 올해 열일곱 살로 갸름한 얼굴에 눈이 컸다. 웃을 때는 얼굴에 양쪽 보조개가 들어갔으며 입속에 있는 금니 하나가 드러났다. 그녀는 자신의 웃는 얼굴이 매우 아름답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평상시에 늘 웃고 다녔다.
그는 마음속으로 그녀를 매우 사랑하였지만, 그녀가 밥상을 가져오거나 이불을 깔아 줄 때, 짐짓 일종의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모습을 지어 보였다. 그는 마음속으로는 그녀에게 몇 마디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으나 그녀를 보기만 하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녀가 그의 방에 들어올 때면 그는 호흡이 가빠져서 숨도 내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는 그녀의 면전에서는 사실상 괴로움을 참아낼 수 없었으므로, 그녀가 방으로 들어올 때면 방 밖으로 뛰어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사모하는 그의 심정은 하루하루 깊어만 갔다. 어느 토요일 밤, 하숙집의 학생들은 모두 N시로 놀러 나갔으나 그는 경제 사정이 곤란했으므로 저녁을 먹고 난 후 서쪽 연못가를 한 바퀴 돌고 나서 곧장 하숙집으로 돌아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한참을 앉아 있자니, 그는 그 텅 빈 2층에 자기 혼자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조용히 앉아 있다가 더 이상 고민을 참을 수 없자 다시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어졌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려면 현관문 옆에 있는 주인집 방문 앞을 지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조금 전에 들어올 때 주인과 그 딸이 밥을 먹고 있던 것을 기억했다. 그는 그녀의 앞으로 지나갈 때의 고통을 생각하자 곧 밖으로 나가겠다는 생각이 달아나 버렸다.
조지 기싱(G.Gissing)의 소설 한 권을 꺼내어 서너 페이지를 읽었을 때, 적막한 공기를 통해 갑자기 '쏴아'하고 물 끼얹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가만히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호흡이 순식간에 가빠지고 얼굴색도 붉어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그는 살며시 방문을 열고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발소리를 죽이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는 슬그머니 변소 문을 열고 들어가 변소 유리창 가에 꼼짝않고 서서 훔쳐보았다. 원래 그 하숙집의 욕실은 변소와 벽을 사이에 두고 있었으므로 변소 유리창으로 들여다보면 욕실 안의 동정을 훤히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그저 한 번 들여다보고 돌아오려고 했으나 일단 보고 나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 눈 같은 두 젖 봉오리!
그 토실토실한 흰 두 다리!
그 온몸의 곡선!
숨도 쉬지 않고 한참을 자세히 보고 있자니 그의 얼굴 근육이 모두 경련을 일으켰다. 보면 볼수록 더욱 심하게 떨렸다. 그러다가 그의 떨리는 앞 이마가 마침내 유리창에 쾅 부딪혔다. 김에 싸여 있던 알몸의 '이브'가 곧 아리따운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세요?"
그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황급히 변소를 빠져나와 허겁지겁 2층으로 올라갔다.
방으로 뛰어들어오자 그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고 입도 바싹 말랐다. 그는 자신의 뺨을 때리면서 이불을 꺼내 잠자리에 들었다. 그는 이불 속에서 뒤척거리다가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아 곧 귀를 세우고서 아래층의 동정을 살폈다. 그가 듣자니, 물 뿌리는 소리가 그치고 욕실의 문이 열린 후 그녀의 발소리가 마치 2층으로 올라오는 것 같아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의 마음속에서 분명하게 그에게 말하였다.
'그녀는 이미 문밖에 서 있어.'
그는 전신의 피가 모두 위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마음속으로 매우 두렵고 부끄러웠으나 한편으로는 매우 기쁘기도 했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어보았더라면 그는 어쨌든 그때에 그가 기뻤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숨을 죽이고 한참 동안 귀를 곤두세워 들어보았지만 문밖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일부러 헛기침도 해보았지만 문밖에서는 역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 아래층에서 아버지와 얘기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그녀의 말소리를 들으려 했으나 아무리 노력해도 똑똑히 들리지 않았다. 한참 있다가 그녀의 아버지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는 이불을 온통 뒤집어쓰고서 이를 꽉 문 채 생각했다.
'그녀가 아버지에게 일러바치는 거야! 그녀가 아버지에게 일러바치는 거라구!'
그날 밤 그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 다음날 아침에 날이 밝자마자 그는 가슴을 조이며 간이 콩알만 해져서 아래층으로 내려와 세수하고 나서 주인과 딸이 일어나기 전에 도망치듯이 하숙집을 빠져나와 밖으로 뛰어나갔다.
길 위에 있는 먼지는 아침 이슬에 젖어 아직 마르지 않았고 태양은 이미 떠올라 있었다. 그는 무턱대고 동쪽으로 걸어갔다. 한 농부가 지나가며 그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그는 깜짝 놀라 그 바싹 마른 얼굴이 붉어지며 가슴도 마구 뛰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설마 이 농부도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는 정신없이 얼마 동안 달리다가 고개를 돌려 그의 학교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학교는 이미 저 멀리에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태양도 높이 떠 있었다. 그는 더듬어 시계를 찾아보았으나 전병 만한 크기의 은시계는 몸에 없었다. 태양의 각도로 재보니 대강 9시쯤 된 것 같았다. 그는 몹시 배가 고팠지만 하숙집으로 다시 돌아가 주인과 그 딸을 마주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먹을 것을 좀 사서 허기를 채우려고 주머니를 뒤져 보았으나 주머니 속에는 겨우 동전 몇 개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는 어느 시골 가게에 들어가서 그 동전들을 털어 주고 약간의 먹을 것을 사서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을 찾아가 먹으려 했다. 두 길이 교차되는 네거리에 이르러 남쪽을 바라보았더니 그가 걸어왔던 길과 가로로 교차되는, 북에서 남으로 향한 길이 보였는데 행인이 거의 없었다. 그 길은 남쪽으로 경사져 있었는데 길 양옆으로 높은 절벽이 있었으므로 그는 그 길이 작은 산을 끊어서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방금 걸어왔던 그 큰길은 바로 이 산의 능선이었다. 네거리를 중심으로 하여 산능선 위의 큰길과 서로 교차하는 가로 길은 양쪽이 경사져 있었다. 네거리 입구에서 잠시 머뭇거린 뒤 그는 곧 남쪽으로 경사진 길을 따라 걸어갔다. 높은 절벽 사잇길을 지나자 그가 가는 길은 곧장 대평원을 끼고 들어가 저 건너편의 시내로 직통해 있었다. 평원의 저 건너편 푸른 하늘 아래에는 유난히 수풀이 우거진 곳이 보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저것이 아마도 A신궁인가 보다.'
양쪽의 높은 절벽 사이를 지나 왼쪽의 경사진 곳을 바라보니 높은 절벽에 인접해 있는 산 위에 낮은 담장 하나가 보였다. 그 담장은 몇 채의 집을 둘러싸고 있었으며, 그 집 문 위에는 '향설해'라고 씌어진 편액이 걸려 있었다. 큰길에서 벗어나 얼마쯤 걸어 올라가자 문이 나왔다. 살며시 손을 내밀어 문을 밀자 그 두 쪽의 사립문이 저절로 열렸다. 그는 마음대로 걸어 들어갔다. 문 앞에 한 가닥 굽은 오솔길이 있었는데, 그 길을 따라 문 입구에서 비탈진 곳을 올라가면 곧장 산 위로 갈 수 있었다. 오솔길의 양옆으로 수많은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었으므로 그는 이곳이 바로 매화나무 숲인 것을 알았다. 그 오솔길을 따라 북쪽으로 가서 비탈진 곳으로부터 산마루에 이르렀을 때, 한 조각 그림 같은 평지가 그의 눈앞에 전개되었다. 이 동산은 산기슭에서부터 시작되어 남쪽을 향한 한쪽 산비탈에 걸쳐 있었는데, 정상의 평지와 함께 매우 그윽하고 아담하게 펼쳐져 있었다.
산마루 평지의 서쪽으로 천 길이나 되는 절벽이 건너편 절벽과 서로 대치하고 있었으며, 두 절벽 사이에는 바로 그가 방금 걸어왔던 북에서 남으로 뻗은 한 가닥 통로가 있었다. 그 절벽을 등지고 한 채의 2층집과 몇 채의 단층집이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이 집들의 문이 모두 닫혀져 있었으므로 그는 그곳이 매화꽃이 필 때만 술과 음식을 파는 데라는 것을 알았다. 2층집 앞에는 잔디밭이 있었고, 잔디밭 안에는 몇 개의 흰돌이 꽃밭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으며, 그 울타리 안에는 오래된 매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 잔디밭의 남쪽 끝머리, 곧 산마루의 평지가 막 남쪽으로 경사지기 시작하는 곳에 매화나무 숲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비석 하나가 서 있었다. 그는 이 비석 앞의 잔디밭에 앉아서 아까 사온 간식을 꺼내어 먹었다.
다 먹은 후 그는 우두커니 잔디밭에 한동안 앉아 있었다. 사방에 사람 소리는 없고 저 멀리 있는 나뭇가지 위에서 때때로 새 우는 소리가 한두 번 날아왔다. 그는 고개를 들어 티 없이 깨끗한 푸른 하늘과 해맑은 태양을 바라보면서 사방의 나뭇가지와 집, 작은 풀과 새들이 모두 한결같이 화평한 태양빛 아래서 대자연의 화육을 받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가 어젯밤에 저질렀던 죄의 기억은 먼바다의 돛단배 그림자처럼 자기도 모르는 새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이 매화나무 숲의 평지와 비탈진 곳에는 이리저리 많은 오솔길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는 일어나서 한참을 걷다가 비탈진 곳의 매화나무 사이에 또 한 채의 단층집이 서 있음을 알았다. 이 단층집에서 동쪽으로 몇 발짝 걸어가자 솔잎에 파묻힌 옛 우물이 하나 있었다. 그는 우물의 펌프를 눌러 보았으나 삐걱삐걱 소리만 날 뿐 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 동산은 아마도 매화꽃이 필 때만 문을 열고 평상시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것 같군.'
이렇게 생각하고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기왕 비어 있다면 내가 동산 주인에게 빌려 달라고 물어 봐도 괜찮겠지."
생각을 정하고 나자 그는 동산 주인을 찾아갈 셈으로 산에서 뛰어 내려왔다. 그가 거의 입구에 다다랐을 때, 마침 동산으로 들어오고 있던 쉰 살쯤 되어 보이는 농부를 우연히 만났다. 그는 농부에게 양해를 구한 뒤에 물었다.
"이 동산이 누구의 것인지 당신은 알고 계십니까?"
"이 동산은 내가 관리하오만."
"당신은 어디에 사십니까?"
"나는 길 저쪽에 살고 있소."
이렇게 말하면서 그 농부는 통로 서쪽에 있는 작은 집을 가리켰다. 그가 서쪽을 보자 과연 서쪽 절벽 끝에 자그마한 집 한 채가 있었다. 그는 머리를 끄덕이며 또 물었다.
"동산에 있는 그 2층집을 저에게 세 내주실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있소만 당신 혼자뿐이오?"
"저 혼자뿐입니다."
"그렇다면 이사 올 필요가 없을 것 같소."
"그건 무슨 이유에선가요?"
"당신네 학교 학생이 이미 몇 차례 이사 왔었지만 모두들 쓸쓸함을 견디지 못하여 열흘도 채 못 살고 이사 가곤 했었소."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저에게 세 내주시기만 한다면 저는 쓸쓸함 따위는 걱정 없습니다."
"그렇다면 세를 못 내줄 이유가 어디 있겠소. 언제쯤 이사 오겠소?"
"당장 오늘 오후에 오겠습니다."
"좋소, 좋아요."
"그럼 저 대신 청소 좀 해주십시오. 이사한 뒤에 바쁘지 않게 말입니다."
"좋소, 좋소. 그럼 또 봅시다."
"안녕히 계십시오."
6
산 위의 매화 동산으로 이사온 후 그의 우울증은 그 형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북경에 있는 그의 큰형과 사소한 일로 틈이 벌어졌다. 그래서 그는 장문의 편지 한 통을 보내 큰형과 의를 끊었다. 그 편지를 보내고 난 후 그는 2층집 앞 잔디밭에 멍하니 앉아 오랜 시간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는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번 결렬은 그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집안 식구끼리의 싸움은 다른 성씨끼리 싸우는 것보다 훨씬 심한 법이어서 이 일이 있은 후로 그는 그의 큰형을 뱀만큼이나 미워하였다. 그는 남들에게 모욕을 당할 때마다 그의 큰형을 끌어다 비유하곤 하였다.
"친형제 간에도 그러한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야!"
그는 이러한 결론에 도달할 때마다 큰형이 그에게 가혹하게 대했던 일을 하나하나 회상하였다. 여러 가지 과거의 일들을 열거한 후, 그는 큰형은 나쁜 사람이고 자기는 좋은 사람이라고 판결을 내렸다. 그는 또 자기의 좋은 점을 열거해 보기도 하고 그가 받았던 고통을 과장해서 자세히 세어 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나자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가 울고 있을 때 공중에서 마치 어떤 부드러운 음성이 그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아, 울고 있는 이가 너냐? 넌 참 억울하게 되었구나. 너처럼 이렇게 착한 사람이 세상 사람들의 학대를 받다니 넌 정말 억울하겠구나. 그만두어라, 그만둬. 이것도 천명이니 이제 다시는 울지 말아라. 네 몸을 해칠까 걱정이 되는구나.'
그는 마음속으로 이러한 음성을 듣고 나자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는 슬픔과 고통 가운데서도 끝없는 감미로움이 있음을 느꼈다.
그는 큰형에게 복수할 셈으로 의과에서 문과로 전과하였다. 그의 생각으로는, 외과에 들어간 것은 큰형이 바꾸라고 했기 때문이었으므로 다시 문과로 돌아간다는 것은 바로 그의 큰형에 대한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게다가 그가 의과에서 문과로 전과하면 고등학교 졸업이 1년 늦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는 1년을 늦게 졸업하면 1년 일찍 죽는 것이므로 만약에 이로 인하여 1년이 늦어지게 되면 죽을 때까지 그의 큰형에 대하여 일종의 적개심을 품을 수 있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일이 년 후에 그들 두 형제의 감정이 예전처럼 좋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이번의 전과는 바로 그가 영원히 큰형을 적대시하도록 도와주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기 시작했다. 그가 산 위로 이사온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요 며칠 동안 날씨가 음울하여 회색빛의 두터운 구름이 날마다 하늘에 걸려 있었다. 썰렁한 북풍이 불어오자 매화나무 숲의 나뭇잎이 마냥 뚝뚝 떨어져 내렸다.
처음 이사 올 때 그는 헌책을 팔아 여러 가지 취사도구를 사서 한 달 남짓 스스로 밥을 해 먹었으나 날씨가 추워지자 그도 게을러졌다. 그는 매일 식사를 전적으로 산기슭 아래에 사는 동산 관리인에게 맡겼다. 그래서 그는 요즈음 남을 원망하거나 자기를 욕하는 것 외에는 절을 떠난 한가로운 승려처럼 별다른 일이 없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일찍 일어나 동쪽으로 난 창을 열었더니 앞에 바라보이는 지평선 위에 몇 줄기 붉은 구름이 떠다니고 있었으며, 동쪽 하늘 절반이 안홍의 회색으로 비치고 있었다. 어제 하루 종일 가랑비가 내렸으므로 그는 그 떠오르는 청신한 해를 보자 평상시보다 기쁨이 훨씬 더하였다. 그는 산비탈을 걸어 내려가 옛우물에서 물을 길어 세수하고 나자 온몸의 기력이 순식간에 모두 회복되는 것 같았다. 그는 곧장 2층으로 뛰어 올라가서 황중측(송나라의 무인 황정견을 말함)의 시집 한 권을 가지고 나와 큰 소리로 읊으면서 매화나무 숲의 오솔길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얼마 후에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살고 있는 산마루에서 남쪽을 바라보자 대평원이 나타났다. 들판 안의 논밭은 아직 수확을 하지 않았으므로 황금빛 들녘이 감청색의 하늘을 배경 삼아 온 하늘 가득 아침 햇살을 반사하고 있었는데, 그 풍경이 바로 밀레의 아름다운 전원풍경화와 흡사했다. 그는 자기가 마치 몇천 년 전의 원시기독교도라도 된 것처럼 생각하며 이 자연의 묵시 앞에서 자신의 도량이 좁음을 비웃었다.
'용서하리라! 용서하리라! 너희들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 지은 죄를 내 모두 용서해 주리라. 오라, 너희들 오라. 모두들 와서 나하고 평화를 얘기하자.'
손에 시집 한 권을 들고 눈에는 두 줄기 눈물을 흘리면서 그 평원의 가을빛을 대한 채 멍하니 서서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는 갑자기 그의 옆에서 두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당신, 오늘 밤에 꼭 오는 거야!"
이것은 분명히 남자의 목소리였다.
"나도 정말 오고 싶지만 두려워서..."
그는 이 애교가 뚝뚝 흐르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나자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이 혈액 순환이 모두 멈춰 버리는 것 같았다. 그의 곁에는 크게 자란 갈대숲이 우거져 있었는데, 그는 갈대숲의 오른쪽에 서 있었고 그 남녀는 갈대숲의 왼쪽에 있었으므로 그들 두 사람은 갈대숲이 건너편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 남자가 다시 말했다.
"오늘 밤에 꼭 오도록 해. 우리는 지금까지 이불 속에서 같이 자본 적이 없잖아."
"..."
그는 문득 쪽쪽거리며 입술을 빠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그는 먹을 것을 훔치는 들개처럼 가슴을 졸이면서 몸을 낮추었다.
'죽어라! 죽어! 어쩌다가 이런 지경에까지 빠져들었니!'
비록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통렬히 자신을 욕하였지만, 그의 곤두선 두 귀는 오히려 한 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온 정신을 다 쏟아 듣고 있었다.
땅 위의 낙엽이 바스락 바스락 소리를 낸다.
허리띠를 푸는 소리.
남자는 씩씩거리며 숨을 토해 낸다.
혀끝을 빠는 소리.
여자는 약하게 강하게, 끊어질 듯 이어질 듯 말하였다.
"당신!...당신!...당신 빨리... 그만...그만...남에게...남에게 들켜서는 안 돼요."
그의 얼굴빛이 회색으로 변하였다. 그의 눈은 불꽃처럼 벌게 졌으며, 그의 턱은 딱딱 소리를 내며 떨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어서 뛰쳐나가려고 했으나 그의 두 다리가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두 사람이 떠나는 소리를 듣고 난 후에야 비로소 물에 빠진 고양이처럼 2층 방으로 돌아가 이불을 펴고 잠들어 버렸다.
7
그는 밥도 먹지 않고 줄곧 이불 속에서 오후 4시까지 있다가 겨우 일어났다. 석양이 온 주위를 가득 비추고 있었으며 들녘 저 건너편의 숲속엔 푸른 연기가 아스라이 덮여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산에서 걸어 내려와 그 북에서 남으로 향한 큰길로 나와서 들녘을 가로질러 밑도 끝도 없이 그저 남쪽을 향하여 걸어갔다. 들녘을 다 지나오자 그는 어느새 신궁 앞의 전차 정류장에 와 있었다. 그때 마침 남쪽에서 전차 한 대가 도착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올라탔으나, 도대체 이 전차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도 몰랐다.
십오륙 분쯤 가자 전차가 멈춰 섰는데, 운전수가 갈아타라고 해서 그는 다른 전차로 갈아탔다. 이삼십 분쯤 가자 전차가 다시 섰다. 종점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서 내렸더니 바로 축향이었다.
앞에 보이는 망망한 대해가 오후의 태양 빛 아래에 길게 누워서 미소 짓고 있었으며, 바다 너머 남쪽에는 푸른 산 하나가 투명한 공기 속에서 은은히 떠 있었다. 서쪽에는 길다란 방파제가 해안의 중심부에까지 곧장 뻗어 있었으며, 방파제 밖에는 등대 하나가 거인처럼 서 있었다. 몇 척의 빈 배와 몇 척의 삼판선이 매여져 있는 곳에서 가볍게 떠 있었다. 해안에서 가까운 바다에는 수많은 부표가 석양을 흠뻑 받은 채 붉게 떠 있었다.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이 몇 마디 단조로운 말소리를 실어 왔으나, 무슨 말인지 똑똑하게 들리지도 않았으며 어디에서 들려 오는지도 몰랐다.
그는 해안가를 한참 동안 왔다 갔다 하다가 문득 한바탕 경쇠 치는 소리를 들었다. 뛰어가서 보았더니 다름 아닌 도선을 부르려고 친 것이었다. 한동안 서 있자 작은 발동선 한 척이 건너편 해안에서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오십쯤 되어 보이는 노동자를 따라 그도 작은 발동선에 올라 타 앉았다.
동쪽 해안으로 건너간 뒤 앞으로 몇 걸음을 올라가니 해안가에 큰 별장 한 채가 있었는데, 대문이 활짝 열려져 있었고 정원 안에는 인공산과 화초가 썩 보기 좋게 꾸며져 있었다. 그는 다짜고짜로 성큼 들어갔다. 몇 걸음도 채 못 가서 그는 집안에서 여인의 애교스런 목소리가 그를 부르는 것을 들었다.
"어서 오세요."
그는 무심결에 깜짝 놀라 우두커니 서 있다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곳은 아마도 술과 음식을 파는 집인가 보다. 내가 듣기로는 이런 곳에는 대개 기생이 있다던데.'
이렇게 생각하자 그의 정신은 마치 한 통의 냉수를 몸에 끼얹은 것처럼 덜덜 떨렸다. 그의 얼굴빛도 금방 변하였다.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갈 수가 없었으며 나가려고 해도 역시 나갈 수가 없었다. 가련하게도 그의 토끼 같은 담력과 원숭이 같은 음란한 마음이 마침내 그를 커다란 곤경에 빠뜨리고 말았다.
"들어오세요! 자, 들어오시라니까요!"
안에서 다시 애교가 뚝뚝 흐르는 소리로 웃음까지 띠고서 불러 댔다.
"얄미운 것들 같으니. 너희들이 감히 나의 담력이 작다고 비웃는 거냐?"
이렇게 화를 내자 그의 얼굴빛이 더욱 불꽃처럼 달아올랐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발을 땅에 가볍게 내디디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앞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은 마치 그 젊은 기녀들에게 선전포고라도 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의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빛과 가볍게 진동하는 얼굴 근육은 도무지 감출 수가 없었다. 그 기녀들 앞에 다다랐을 때 그는 어린애처럼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 버렸다.
"올라오세요!"
그는 뻔뻔스럽게 열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한 기녀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는데, 그때 그의 정신은 다소 진정되어 있었다. 몇 발짝 걸어가서 컴컴하고 좁은 복도를 지나갈 때, 사람을 어지럽게 하는 화장품 냄새가 일본 여인 특유의 체취와 머리카락의 향유 냄새와 한데 섞이어 그의 콧구멍을 확 파고들었다. 그는 순간 머리가 핑 돌고 눈에서는 별이 보여 뒤로 자빠질 듯이 한 걸음 물러났다. 다시 눈을 똑바로 뜨고 보니 그의 앞쪽 컴컴한 가운데서 화장을 한 동그란 얼굴의 주인공이 미소를 머금고서 그에게 물었다.
"당신도 바다 쪽 방으로 가실 거예요? 아니면 어떤?"
그는 여자의 입에서 토해내는 숨결이 후끈하게 그의 얼굴로 뿜어 오는 것을 느꼈을 때, 자기도 모르게 그 숨결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의 의식이 이러한 행동을 자각했을 때, 그의 얼굴빛이 다시 금세 붉어졌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어물어물 그녀에게 대답하였다.
"바다 쪽 방으로 가지."
바다 쪽의 자그마한 방으로 들어가자 그 기녀는 그에게 무슨 음식을 시킬 것인지를 물었다.
"마음대로 몇 가지 가져와요."
"술은 시킬까요, 말까요?"
"시켜야지."
그 기녀가 나간 후 그는 일어나서 종이 창문을 열어 밖에서 신선한 공기가 쏴 들어오게 하였다. 방 안의 공기가 너무 탁해서 방금 그가 좁다란 복도에서 맡았던 그 여자들의 향내가 아직도 거기에 남아 있었으므로 그는 정말 그 냄새에 짓눌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대해가 고요히 그의 앞에 떠 있었다. 밖에는 마치 미풍이 부는 듯 조각 조각의 파도가 태양빛의 반사를 받아 금붕어 비늘처럼 잔잔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창 앞에 한참 동안 서 있다가 낮은 목소리로 시 한 구절을 읊었다.
"해변의 누각에 석양이 붉게 타오르네."
그가 서쪽을 바라보자 태양이 서남쪽의 지평선 위로 겨우 한 길 정도의 높이에 떠 있었다.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으나 그의 생각은 방금 전의 그 기녀에게서 떠나지 못하였다. 그녀의 입에서, 머리에서, 몸에서 풍기는 향기가 그의 마음으로 하여금 다른 것을 도무지 생각도 못 하게 해버렸다. 그는 자기가 시를 읊고자 하는 마음은 거짓이며 여인의 육체를 생각하는 마음이 진짜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잠시 후에 그 기녀가 술과 안주를 들고 들어와 그의 앞에 꿇어앉아 공손하게 그에게 술을 따랐다. 그는 자세히 그녀를 보면서 그의 마음속 고민을 모두 그녀에게 털어놓으려고 생각했지만, 그의 눈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으며 그의 혀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마치 벙어리처럼 그녀의 무릎 위에 놓여진 섬섬옥수와 옷 틈으로 언뜻 보이는 분홍색 앞 속치마 자락만 훔쳐보고 있었다.
원래 일본의 여인네들은 모두 고쟁이를 입지 않고 맨몸에 그냥 짧은 앞 속치마 한 장만을 두른다. 겉에는 긴 소매의 옷을 걸치는데, 옷에는 단추가 없으며 허리에는 한 자 정도 넓이의 허리띠를 둘러 뒤에다 네모 난 매듭을 짓는다. 그래서 그녀들이 한 발짝 한 발짝 걸을 때마다 앞 옷이 걷어 올라가서 붉은색의 앞 속치마와 포동포동한 흰 다리를 훔쳐볼 수 있다. 이것이 일본 여자 특유의 아름다운 곳이다. 그가 길가에서 여자를 만났을 때 주의해서 보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가 이를 갈면서 자신에게 "이 짐승아! 개 같은 놈아! 비겁한 놈아!"라고 꾸짖는 것도 바로 이때였다.
그는 그 기녀의 앞 속치마 자락을 보자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녀와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그 기녀가 참을 수 없었던지 슬며시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댁이 어디예요?"
이 한마디를 듣자마자 그의 깡마르고 창백한 얼굴이 또다시 붉어졌다. 그는 어물어물 겨우 대답은 했으나 더듬거려서 도무지 분명한 말대답은 하지 못하였다. 가련하게도 그는 또 단두대에 올라선 것이었다.
원래 일본인은 우리들이 개, 돼지를 멸시하듯이 중국인을 멸시하였다. 일본인들은 중국인을 '지나인'이라고 불렀는데, 이 '지나인'이라는 석 자는 우리들이 남을 욕할 때 쓰는 '천한 도적놈'이라는 말보다도 더 듣기 싫었다. 그는 이제 이 꽃 같은 소녀 앞에서 자신은 지나인이라고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이여! 중국이여! 너는 어찌하여 강대해지지 않느냐?'
그는 온몸을 떨며 눈물을 흘렸다.
그 기녀는 그가 더 떠는 것을 보자 그 혼자 남아서 술을 마시게 함으로써 그의 신경을 안정시켜 보려고 그에게 말하였다.
"술이 금방 떨어지겠어요. 제가 가서 한 병 더 가지고 오겠어요."
잠시 후에 그는 그 기녀의 발소리가 다시 2층으로 올라오고 있는 것을 들었다. 그는 그녀가 자기에게 오는 줄로 알고 곧 옷을 단정히 하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속고 말았다. 그녀는 두세 명의 다른 손님을 데리고 바로 벽 너머 옆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두세 명의 손님들이 모두 그녀를 놀려댔고 그 기녀도 아양을 떨면서 말하였다.
"떠들지들 마세요. 옆방에 손님이 계시단 말이에요."
그는 이 말을 듣자마자 곧장 화가 치밀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그들에게 욕하며 말하였다.
'개자식! 속물들! 네놈들이 나를 등신 취급하는 거냐? 복수다! 복수! 내 기어코 너희들에게 복수하리라. 세상 어디에 진실한 마음을 지닌 여자가 있더냐? 그녀도 나를 배신했다. 내가 감히 나를 버려 두는 거냐? 그만두어라. 그만둬. 다시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으리라. 다시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으리라. 나는 나의 조국을 사랑한다. 나는 나의 조국을 애인으로 삼으련다.'
그는 즉시 돌아가서 발분하여 열심히 공부하려고 했으나 그의 마음은 도리어 옆방의 그 속물들을 부러워하였다. 그의 마음속 한 곳에서는 아직도 그 기녀가 자기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화를 가라앉히고 묵묵히 술 몇 잔을 비우고 나니 몸이 후끈해짐을 느꼈다. 창문을 열고 보니 태양이 막 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연거푸 몇 잔을 들이키고 나자 그 앞의 바다 풍경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다. 서쪽 방파제 밖 등대의 검은 그림자가 길다랗게 드리워져 있었다. 한 겹 망망한 엷은 안개가 바다와 하늘을 하나로 뒤섞어 버렸다. 이 혼돈스러운 얇은 비단 그림자 속에서 서쪽으로 절 듯 말 듯한 태양이 마치 이별을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그는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나 웃음이 나오려 했다. 껄껄껄 한바탕 웃고 나서 그는 손으로 자기의 달아오른 두 뺨을 문지르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취한다. 취해!"
그 기녀가 들어오더니 그가 발개진 얼굴로 창가에 서서 멍청히 웃고 있는 것을 보고서 그에게 물었다.
"창을 이렇게 활짝 열어 놓다니 당신은 춥지도 않아요?"
"춥지 않소. 춥지 않아. 이렇게 아름다운 낙조를 누군들 보지 않겠소?"
"당신은 시인이시군요! 술 가져왔어요."
"시인! 나는 본래 시인이오. 가서 종이와 붓을 가져오시오. 내 당장 시를 한 수 써서 당신에게 보여 주겠소."
그 기녀가 나간 후 그는 스스로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대담해질 수 있을까?'
새로 가져온 더운 술을 몇 잔 통쾌하게 마시자 그는 더욱 쾌활해짐을 느꼈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껄껄껄 한바탕 다시 웃어댔다. 옆방에 있는 그 속물들이 큰 소리로 일본 노래를 부르자, 그도 목청을 돋우어 시를 읊었다.
취박란간주의한, 강호 우동잔.
극린앵무중천골, 미배장사태전관.
이여천금도보역, 범인오희출관난.
망망연수회두망, 지위신천저암강.
취하여 난간 두드리니 술 취한 뜻 차갑고,
강호에 쓸쓸히 떠도나니 또한 겨울이 저무네.
몹시도 가련구나 앵무중주의 뼈,
아직도 장사태전 벼슬에 제수되지 못하였네.
밥 한 그릇에 천금으로 보답하기는 쉬워도,
오희가 부르며 관문 나서기는 어렵네.
망망히 안개 낀 물 고개 돌려 보라보며,
다시 신주 위해 눈물 지으며 나몰래 노래하네.
큰 소리로 몇 번 읊고 나서 그는 곧 취하여 자리에 쓰러졌다.
8
술이 깨자 그는 붉은 비단 이불 속에서 자고 났음을 알았다. 이불에서는 이상한 향기가 났다. 이 방은 그리 크지는 않았으나 낮의 그 방이 아니었다. 방에는 십 촉 짜리 전등이 걸려 있었으며 베갯머리에는 차 한 병과 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는 두세 잔의 차를 따라 마신 후 곧 비틀거리면서 방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가 문을 열자 마침 낮의 그 기녀가 뛰어왔다. 그녀가 그에게 물었다.
"깨어나셨어요?"
그는 머리를 끄덕이며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서 대답하였다.
"깨어났소. 한데, 변소는 어디에 있소?"
"제가 모시고 가지요."
그는 그녀를 따라갔다. 그가 낮에 지나왔던 그 좁은 복도에는 전등이 매우 밝게 켜져 있었다. 여기저기서 수많은 노랫소리와 삼현 소리와 큰 웃음소리가 그의 귓전에 들려 왔다. 그는 낮의 일을 모두 생각해 보았다. 술 취한 후 그가 그 기녀에게 한 말이 생각났을 때, 그는 얼굴이 또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변소에서 방으로 돌아온 후, 그는 그 기녀에게 물었다.
"이 이불은 당신 거요?"
"그래요."
"지금 몇 시쯤 되었소?"
"아마 8시 40분쯤 되었을 겁니다."
"가서 계산서 가져오시오."
"그러지요."
그는 계산을 끝내고 지폐 한 장을 꺼내어 그 기녀에게 주었는데, 그의 손이 약간 떨렸다.
"저는 괜찮아요."
그는 그녀가 적어서 사양하는 줄로 알았다. 그의 얼굴빛이 다시 붉어졌다. 그가 주머니 속을 다시 뒤적거려 보았더니 지폐 한 장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얼른 그것을 꺼내어 그녀에게 주면서 말했다.
"적다고 사양 말고 받아 두시오."
그의 손은 더욱 심하게 떨렸으며 목소리까지 떨리기 시작하였다. 그 기녀가 그를 한 번 쳐다보더니 곧 낮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감사합니다."
그는 곧장 2층에서 뛰어 내려와 구두를 신자마자 밖으로 나왔다. 밖은 매우 추웠다. 아마도 이날이 음력으로 초 팔구 일쯤 되는 것 같았다. 차가운 반달이 왼쪽 하늘가에 높이 걸려 있었다. 푸르스름하고 둥그런 하늘에는 몇몇 별들이 드물게 흩어져 있었다.
그가 해변을 한 차례 거닐면서 바라보니 저 멀리 해안의 불빛이 도깨비불처럼 그를 유인하고 있었다. 잔잔한 물결 속에 비치는 은색 달빛은 마치 산도깨비의 눈짓이 깜박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그는 갑자기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가 죽고 싶었다.
그는 몸을 더듬어 보았으나 전차 탈 돈도 없었다. 낮의 일을 생각해 보니 자신을 심하게 꾸짖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어쩌다가 그런 곳에 갔었지? 나는 이미 가장 열등한 인간으로 변해 버렸구나. 후회해도 소용없어. 후회해도 소용없다구. 나는 여기서 죽는 거야. 내가 구하는 사랑은 아마 얻지 못할 거야. 사랑이 없는 생애는 어찌 식어 버린 재와 같지 않으리오? 아! 이 메마른 생애. 이 메마른 생애. 세상 사람들은 모두 나를 원수처럼 보고, 나를 바보 취급했지. 내 친형제마저도, 나의 수족마저도 모두 나를 이 세상 밖으로 몰아냈어. 나는 장차 어떻게 살아갈까? 나는 왜 이렇게 고통 많은 세상에서 살아야 하나?'
이렇게 생각하자 그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의 창백한 얼굴빛은 마치 죽은 사람의 얼굴빛과 같았다. 그는 눈물을 닦지 않은 채로 있었기에 달빛이 그의 얼굴에 비치자 두 줄기 눈물이 마치 나뭇잎에 맺힌 아침 이슬처럼 반짝거렸다. 고개를 돌려 자신의 그 여위고 긴 그림자를 보자 마음이 아파옴을 느꼈다.
'가련하구나, 너 그림자야. 나를 따른 지 스무한 해. 이제 이 큰 바다가 바로 너의 몸을 묻을 곳이다. 나의 몸은 비록 남들에게 모욕을 당해도 너만큼은 이렇게까지 쇠약한 지경으로 몰아넣어서는 안 되는데. 그림자여! 그림자여! 나를 용서해다오!'
그가 서쪽을 바라보니 등대의 불빛이 순간순간 붉어졌다 파래졌다 하면서 그 직분을 다하고 있었다. 그 푸른빛이 바다 위를 비출 때는 바다 위에 한 가닥 길이 나타나곤 했다. 다시 서쪽 하늘을 바라보니 짙푸른 하늘 아래에 한 떨기 밝은 별이 움직이고 있었다.
'저 쉼 없이 움직이는 한 떨기 밝은 별 아래가 바로 나의 고국이요, 또한 내가 태어난 곳이다. 나는 저 한 떨기 별 아래에서 일찍이 열 여덟 번의 가을과 겨울을 보냈다. 나의 고향아! 나는 이제 다시는 너를 볼 수 없겠구나.'
그는 걸어가면서 줄곧 이렇게 처량하고 슬픈 말만 떠올렸다.
한참을 걷다가 다시 서쪽의 그 밝은 별을 쳐다보자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는 사방의 경치가 모두 훤해진 것을 느꼈다. 눈물을 닦고 멈춰 서서 긴 탄식을 하면서 그는 이렇게 뇌까렸다.
"조국이여! 조국이여! 나의 죽음은 바로 네가 나를 해친 것!"
"너는 빨리 부강해지거라!"
"너에게는 아직도 고통받고 있는 수많은 젊은이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19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