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로 황제의 쌍둥이 형
네로 황제의 쌍둥이 형
시오노 나나미
결국 역사가들 중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다. 네로 황제의 쌍둥이 형인 나란 존재가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나와 네로는 서기 37년 12월 15일 태어났다.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가 죽고 여러 달이 지난 후였다. 나의 아버지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누나의 손자 격인 드미티우스이며 어머니는 아그리피나이다. 그녀는 티베리우스 황제 남동생의 아들이며 용맹스런 장군으로 잘 알려진 게르마니쿠스의 딸이다. 그녀의 어머니, 즉 나의 외할머니의 이름도 아그리피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를 작은 아그리파나라고 불렀다.
우리들이 태어났을 무렵에는 게르마니크스의 아들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 황제의 뒤를 이어 제3대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나와 네로는 현 황제의 조카로 이 세상에 첫발을 내딛었다.
어머니 아그리피나조차 쌍둥이가 태어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힘든 출산 후에도 또 한 명의 아이가 더 남아 있었으므로 산파도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런 탓에 산파는 날 들어 올리려다 실수로 그만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때의 통증은 왠지 낯설지 않았다. "이런 제기럴!"이라고 외친 것도, 갓 태어난 아이가 설마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이 나의 솔직한 감정이었다. 이런 이유로 나는 화를 내면서 인생의 첫걸음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쌍둥이의 탄생을 아버지 드미티우스는 크게 기뻐하며 맞아주었다. 하지만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세인의 이목이 좋지 않을 거라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녀는 원래 허세부리기를 좋아하는데다 이제는 황제의 친누나이기도 했으므로 로마 사교계의 꽃인 셈인 자신이 쌍둥이 엄마로서는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예였던 산파를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고 충분한 연금과 땅이 붙어 있는 집도 주겠다는 조건으로 쌍둥이 중 한 아이를 그녀에게 맡기겠다며 아버지의 허락까지 받아냈다.
이렇게 해서 쌍둥이가 태어났다는 비리는 나의 부모와 세 명의 산파들만이 알게 되었던 것이다.
집을 나오게 된 아이는 형인 나였다. 태어났을 때 땅에 떨어진 것이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지도 모를 신분으로서는 왠지 석연치 않다는 것과 우는 소리가 너무 시끄럽다는 것이 어머니 아그리파나가 주장한 이유였다. 네로는 젖을 먹을때 왜에는 항상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얌전한 아이였으니까. 이렇게 해서 나는 태어나자마자 로마와 나폴리 사이에 펼쳐져 있는 캄파니아 평야에서 양을 쫓거나 근처 아이들의 골목대장 노릇을 하며 자랐다.
그래도 아버지 드미티우스는 이따금씩 나를 걱정해 주셨던 것 같다. 환절기마다 이것저것 선물을 든 하인들이 산파를 찾아왔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도 내가 3살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그때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아직 25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녀는 결국 4년 후에 재혼하게 되었다. 상대는 그녀와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나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죽으면서 네로에게는 유산을 남겼지만 내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으니까.
어머니의 재혼으로 성가신 존재가 된 네로는 백모인 레피다에게 맡겨졌다. 레피다의 집은 나를 키운 산파의 집과 가까웠기 때문에 그 당시 나는 종종 네로와 함께 놀곤 했다. 언뜻 보기에 가정환경이 좋아 보이고 얌전했던 네로는 놀이 상대로는 조금도 재미있지 않았다. 하지만 산파에게서 출생의 비밀을 전해 듣고부터는 일부러 그와 함께 놀며 나의 쌍둥이 동생을 관찰해보고 싶은 호기심도 있었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이 10살이 되던 해에 그를 숲속의 시원한 생과로 데려가 모든 이야기를 다 털어놓았다.
내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네로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착한 아들이기도 했던 네로는 그날 있었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오히려 어머니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행동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후 네로는 내가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어 주었다.
로마에서는 칼리굴라 황제가 죽은 후 숙부 클라우디우스가 그 자리에 앉았다. 그는 나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숙부이기도 했다. 그 무렵 아그리피나도 두 번째 남편을 여의고 또다시 미망인이 되었으며 그 덕분에 네로더 로마의 어머니 곁에서 다시 생활할 수 있었다.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결혼할 때마다 미망인이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늘 전보다 더 나은 상대를 만나는 운 좋은 여자였다. 그것은 그녀가 아름답고 자존심이 강하며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그녀의 출생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아내에게 무시당하기만 하는 남자로 평판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유능한 황제였다. 역대 로마의 왕 중에 신군(神君)이라는 존칭이 붙여진 것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그리고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였다. 관료제도를 완비하고 거리를 정비하고 식민지 통치에도 소홀함이 없었으며 군정에도 상당한 공적을 세웠다. 단지 어려서부터 열등감이 강하고 그림자 같은 존재로 생활한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화려한 생활에 서툴렀던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여자에게 들볶이는 것을 귀찮아 해 결국 여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마는 약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가 화려하고 방탕한 여자로 유명했던 황후 멧사리나에게 쉽게 조종당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영리하다고 생각하는 여자는 대개 어리석기 때문에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는 이러쿵저러쿵 참견하고 싶어 하지만 정작 중요한 사항에는 무관심하다는 사실을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며 의외로 능숙하게 제국 통치의 대임을 다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도 결국에는 여자와 마찬가지인 존재라 그런 요령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아내 멧사리나가 죽자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홀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걱정거리였다. 만일 황후 자리가 비어 있는 동안 황제가 이상한 여자에게 속아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한다면 로마에 큰 손실을 가져올 터였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친 원로원은 황제가 빨리 재혼하도록 계략을 꾸몄다. 멧사리나와의 사이에 블리타니쿠스라는 사내아이가 있어 후계자에 대한 문제는 없었지만 여하튼 여자에 관해서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믿고 맡길 수가 없었다.
로마의 상류층 여자들은 황후 자리를 노리며 그야말로 대대적인 운동을 개시했다. 물론 야심만만한 나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재혼한 남편을 잃고 또다시 미망인이 되어 있던 것을 다행스러워하며 온갖 계략을 다 동원해 숙부인 황제에게 접근했다.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출생과 미모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황제의 누나나 조카딸이 되어 보기는 했지만 아직 황후는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나이도 벌써 33세, 로마 대제국의 퍼스트레이디가 되려면 이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출생이나 품위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아그리피나도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는 조카딸이었다. 역시나 숙부와 조카딸의 결혼을 인정하는 데는 주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혈통이 고귀하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라이벌들의 존재를 희미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또 타고난 매력과 집요한 설득으로 결국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아그리피나는 파라티움 언덕 위에 세워진 황궁으로 아들 네로를 데려갔다. 그리고 황제 클라우디우스에게는 의붓자식인 네로를 양자로 삼게 했다. 황궁에는 네로보다 3살 어린 블리타니쿠스와 옥타비아리는 클라우디우스의 친자식들이 있어 의붓아들인 네로를 황자로 삼는 데에는 옥타비아와의 혼인이라는 조건이 따랐다. 실제로 결혼한 것은 그로부터 5년 후인 네로가 16살이 되던 해였지만.
나는 네로가 왕자가 된 후에도 가끔씩 만났다. 아니, 내가 한밤중에 몰래 불러낼 때면 그는 파라티움 언덕을 내려와 대경기장의 관객석 아래에서 나와 만났다. 그의 약혼녀인 옥타비아는 자신의 품위만을 자랑스럽게 여겨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가 좋아지지 않는다는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 두 사람은 몰래 만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똑같이 생겼으며 둘 다 그리 숱이 많지 않은 곱슬곱슬한 금발에 흐리멍텅한 푸른 눈동자, 피부에는 주근깨가 나 있었으며 키도 비슷한데다 어려서부터 비만 체질인 것까지도 서로 닮았다. 아무도 우리 두 사람을 한눈에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어머니 아그리피나조차 우리를 나란히 세워놓고 비교해 보지 않는 한 구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17세가 되던 해에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세상을 떠났다. 모든 사람들은 야심에 불타는 황후가 황제를 독살했다고 믿고 있었으며 역사가 타키투스나 스웨트니우스도 자신들의 책에 그렇게 썼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주도해서 저지른 일이다.
2년쯤 전부터 네로의 연줄로 나는 어머니 아그리피나와 가끔씩 만나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려서 버린 것과 다름없는 내게 털끝만큼의 애처로움이나 애정도 느끼지 않는 둣했지만 나와 만나는 것은 거절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만날 때마다 나는 조금씩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어 중대사를 결행하도록 부추겼다.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로마의 한 귀족 여자에게 반해서 숙부와 조카딸과의 결혼이란 부자연스런 관계에서 벗어나려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여자를 황후로 맞이해 아그리피나와 네로와는 인연을 끊으려 하는 것 같다고 입김을 불어 넣었다. 아그리피나는 처음부터 숙부와 조카딸의 관계로 이루어진 이 결혼을 내심 불안하게 느끼고 있었던 데다 내가 지명한 그 로마 귀족 여자에게는 그녀의 출생과 아름다움 때문에 적개심을 품고 있었으므로 내 말을 쉽게 믿어 버린 것이다.
나는 아그리피나의 불안과 두려움이 절정에 달했을 시기를 틈 타 캄파니아 평양에 사는 유대인 여자를 시켜 조제한 독을 작은 명에 넣어 황후의 손에 살짝 밀어 넣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좋아하는 버섯요리에 섯으면 아무도 모를 거라는 말과 함께.
독살은 내가 생각했던 대로 성공했다. 식탁에서 바로 효과가 나타난 것이 아니므로 식사를 마친 황제가 침실로 들어간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죽은 것처럼 보였다. 나의 쌍둥이 동생 네로는 이 일로 대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황제에 즉위한 당초의 네로는 굉장히 평판이 좋았다. 원로원에서의 취임 연설에서 자신의 치세는 관용과 인내의 정신으로 특색 지어질 것이라며 선언했다. 그리고 열일곱 살이란 어린 나이로 황제의 자리에 앉은 자신을 원로원이나 로마 시민들 모두가 도와주길 바란다고 말해 그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실제로 즉위 직후 동방 식민지에 일어난 반란에도 적절하게 대처했으며 군단의 재편성이나 식민지 통치도 결단력 있게 판가름했기 때문에 선제의 죽음에 의문을 감추지 않았던 사람들도 그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나도 시가와 음악에만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던 네로의 새로운 면을 보고는 좀 놀랐다.
내 마음 목표는 선제 클라우디우스의 친아들 블리타니쿠스를 없애는 것이었다. 이 소년은 영리할 뿐만 아니라 황제의 친아들인데다 황위 계승에서 제외되어 로마 시민의 동정과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로의 황위를 확고히 하는 데 있어 블리타니쿠스는 걸림돌이었다. 재앙은 처음부터 제거해야만 한다.
이번에도 나는 독을 사용했다. 블리타니쿠스는 아버지 클라우디우스처럼 술을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독의 효과가 빨리 나타났는지 식탁에 앉아 있는 동안에 이미 전신경련을 일으켰다. 그래서 공모자였던 황태후 아그리피나가 늘 그렇듯이 간질병 발작을 일으킨 거라며 그 상황을 대충 얼버무렸다. 성년식을 맞기 직전의 죽음이었으므로 황태자의 장례식이라고는 해도 간단하게 치뤄졌으며 화장도 이러쿵저러쿵 방해받기 전에 해치워 버렸다.
네로는 그 일로 심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남동생이 없었던 그는 블리타니쿠스를 친동생처럼 사랑해 주었다. 죽은 동생에게 바치는 네로의 조사는 나처럼 사랑해 주었다. 죽은 동생에게 바치는 네로의 조사는 나처럼 속사정을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진심을 토로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네로가 블리타니쿠스의 인기를 질투해 의붓동생을 죽인 거라고 믿는 대중들은 뻔뻔스런 거짓말에 불과하다며 수군거렸다.
블리타니쿠스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고 생각된다. 네로는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자신의이 품위만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옥타비아와의 결혼 생활은 처음부터 좋지는 않았지만 남동생의 죽음이 옥타비아를 이전보다 더 뻔뻔스러운 여자로 만들었다. 심지어는 네로와 잠자리를 하는 것조차 공공연히 거부하게 되었다. 네로는 블리타니쿠스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데다 매일같이 황제가 된 것은 다 자신의 덕분이라며 생색내는 교만한 어머니에게 시달리며 나라는 존재가 점점 부담스러워 견디기 힘들었던 듯했다. 그래서 아내의 시녀인 아크테는 아시아 출신의 여잘 해방노예였다. 게다가 그 무렵 수도까지 침투하기 시작했던 동방의 새로운 종교인 크리스트교에 정신을 빼앗긴 여자이기도 했다.
어느 날 네로는 내게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아크테와 정식으로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해 본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나만 믿으라고 대답했다. 내게는 계획이 있었다. 그리고 옥타비나가 황후로 있으면 그것을 확실하게 하는 데에 있어 조히지 않은 상황으로 전개될 위험이 있었다. 그 무렵부터 나는 대낮에도 당당하게 황궁을 드나들게 되었다. 물론 황제의 쌍둥이 형으로서는 아니었다. 나와 네로가 똑같이 생겼다는 점을 이용해 종종 바꿔 들어간 것뿐이다. 대경기장에서 4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달려 우승한 것은 네로가 아니라 나였다. 네로는 말을 타는 것조차 싫어하는 성격이었지만 나는 캄파니아 평야에서 자랐기 때문에 말에 있어서는 로마 명가 자제들의 코를 납작하게 할 자신이 있었다. 민중은 무술에 뛰어난 황제를 내우 만족스러워했다.
네로도 가끔씩 이렇게 역할을 바꾸는 것을 좋아했다. 내가 황제의 역할을 하고 있는 동안 그는 우리 둘과 어머니 아그리피나 그리고 아크테만이 아는 비밀의 장소에 숨어 들어가 그롯에서 정무에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아크테와 함께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앙이 깊은 아크테는 때로는 네로를 로아 성 밖에 있는 지하 묘소 카타콤베로 데려가 그곳에서 행해지는 크리스트교도들의 예배까지 보게 했던 것 같다. 나는 네로가 황제의 자리에 있는 동안에는 변장한 모습으로 로마 시내를 돌아다녔다. 두 번씩이나 남편을 바꿔 불미스런 평판이 난 폿페아 사바나라는 여자를 만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폿페아는 정사에 자유로운 아름답고 교만한 여자였지만 내가 황제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자신을 비싸게 팔아넘길 결심을 했던 것 같았다. 다른 남자들에게는 쉽게 몸을 허락했으면서도 내 앞에서만은 베일도 벗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처음으로 여자를 나만의 것으로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에 싸여 밤낮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폿페아는 나와 만날 때마다 황후가 되게 해주면 이라는 말을 속삭여댔다. 내 머릿속은 온통 어떻게 하면 이 여자를 소유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가장 큰 방해물은 황태후 아그리피나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 무렵 어머니는 내 영향력이 강해진 데 불안감을 느꼈는지 내 말이라면 순순히 따르는 네로와는 달리 나의 잦은 황궁 출입을 은근히 못마땅해하는 눈치였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좋아하는 여자를 황후 자리에 앉히는 것을 결코 찬성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한 번도 어머니라고 느껴본 적이 없는 여자를 없애는 일은 내게 그리 힘들지도 않았다. 나는 그녀가 황제 네로를 거역하도록 수도 경비군을 선동했다고 조작했다. 또 자신의 아들에게 암살자를 보낸 적이 있다는 소문도 퍼뜨렸다.
이번의 음모에는 검을 사용했다. 내 머릿속에는 아들의 목숨을 노린 황태후에게 황제 네로가 체포령을 내렸지만 황태후는 이를 거역해서 결국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시나리오가 미리 짜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그리피나는 내 밀명을 받고 찾아간 두 명의 암살자에게 저항했지만 이내 체념한 듯했다. 목을 찌르려고 검을 뽑아 들자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배를 내밀며 소리쳤다고 한다.
"여기를 찔러라. 이곳에서 황제가 태어나셨으니까."
그리고 이내 그녀의 숨이 끊어졌다.
네로가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어떤 때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앉아 지새는가 하면 또 때로는 공포에 쫓기듯 벌떡 일어나 착란 상태로 마치 최후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아침이 밝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헌신적인 아크테가 옆에 없었다면 아마 그는 실성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네로를 보면 로마 시민들은 죄를 저지른 뒤 처음으로 자신이 범한 죗값을 알았나 보다며 수군거렸다.
이런 네로에게 아크테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을거라는 이유를 들먹이며 옥타비아와의 이혼을 승낙케 하기란 쉬웠다. 황후는 네로를 만날 때마다 소리쳤다.
"아버지와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까지 죽인 살인자."
네로는 옥타비아와 이혼한 후에도 아크테가 아닌 폿페아와 재혼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리석지 않은 네로는 해방노예를 황후로 앉힐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단순히 옥타비아와 얼굴을 마주치지만 않는다면 황후는 누가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옥타비아는 이혼당했을 뿐만 아니라 판텔레리아섬으로 추방당했다.
하지만 이혼이나 추방에 찬성했던 네로도 그녀를 죽이기까지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녀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나였다. 나는 언젠가 그녀가 자신에게 구애한 나를 마치 돼지를 내쫓기라도 하듯 취급했던 일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돼지를 죽이듯 그녀를 죽여 주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22살의 젊은 옥타비아는 섬에 상륙한 병사들에 의해 사지의 혈관이 모두 잘려졌다. 하지만 공포심으로 혈관이 조여 있었는지 피가 뚝뚝 떨어질 뿐이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열기를 쏘여 혈관이 벌어지게 했다. 선 황제의 딸이었으며 현 황제의 전처였던 그녀는 이렇게 해서 출혈과 열기에 의한 질식으로 죽었다. 잘린 그녀의 목은 로마로 옮겨졌고 그것을 본 네로는 기절해버렸다.
팔의 동맥을 잘라 죽는 것은 로마 귀족이 죽는 방법이지만 자살이든 황제의 명령에 의한 사형이든 높은 신분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죽음이 허용되었다. 네로가 어렸을 적부터 그의 가정 교사였던, 당대 일류의 철학자 세네카도 이렇게 생을 마감했다. 네로가 시라도 읊고 있는 편이 더 나았기 때문에 세네카의 존재가 거추장스러워졌다. 그래서 불쌍하게도 성실한 나의 동생 네로는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 아내, 그리고 자신의 스승까지 죽인 살인자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쓰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 뭐니 뭐니 해도 황제 네로의 이름을 후세에까지 유명해지게 한 것은 네로 황제 치세 10년째에 일어난 로마의 대화재 사건과 그에 연이은 크리스트교도의 대학살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내가 계획한 일이었다.
더 이상 죽일 사람도 없어져 따분해 있던 나는 제국의 수도 로마에 불을 질러야겠다는 생각을 해냈다. 그 무렵의 로마는 여기저기 좁은 길이 구불구불 구부러져 있었고 집들은 불규칙하게 늘어서 있었으므로 세계적인 도시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나는 모조리 태워 버린 후에 도시계획에 따라 길을 새로 만들고 집과 건물도 규칙적으로 지어 로마를 세계의 수도에 적합한 도시로 완전히 바꿔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경기장과 파라티움 언덕이 카일리우스 언덕과 접한 지점에서 몰래 불을 질렀다. 그곳에는 불에 타기 쉬운 상품을 진열한 가게들 뿐이었고 그 주위에는 돌담에 둘러싸인 대저택이나 외벽에 싸인 신전 등 불이 번지지 못하도록 막아줄 만한 장애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때마침 부는 바람에 불길은 순식간에 이 일대를 몽땅 태워 버렸으며 낮은 지대를 전부 불태운 뒤에도 그 불기운은 사그라들지 않은 채 파라티움 언덕의 황궁까지 재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도 불기운은 점점 퍼져갈 뿐이었다. 로마는 6일 동안이나 불길에 싸여 있었다. 14구로 나뉘어져 있던 로마에 남은 것이라곤 4구뿐이었으며 3구는 허허벌판이 되었고 나머지 7구는 무너지거나 쓰러진 집들의 잔해만이 남아 있었다. 불에 타죽은 사람들, 도망가려고 갈팡질팡하다 민가에 깔려 죽은 사람, 부상 당한 사람들의 수는 후에도 정확한 수치를 알 수 없었다. 그때까지 로마를 엄습한 화재 중에서도 가장 피해가 큰 불이었다.
불이 나던 날, 네로는 아크디움에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는 서둘러 로마로 돌아와 대책을 세웠다. 갈 곳이 없어진 이재민들에게는 마르스 공원이나 아그리파 기념 건조물, 황제 전용 정원까지 개방하고 그곳에 임시 건물을 세워 그들을 수용하고 무일푼이 된 사람들에게 식사와 침구를 무료로 지급했다. 또 오스티아 근교에서 식량을 운반해 집을 잃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반액에 팔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활활 타오르는 로마를 바라보며 시를 읊었다. 그것은 로마를 향한 비가였다. 네로는 해야 할 일을 정확히 다 해 놓고 잠깐 쉬는 동안 시를 읊었을 뿐이었지만 로마의 민중들은 네로가 시를 읊기 위해 불을 질렀다고 믿고 있었다.
네로는 화재가 진화된 후의 로마 부흥에도 크게 힘썼다. 집들을 정돈하고 도로의 폭도 넓혔으며 건물의 높이도 60보로 제한했다. 공동 주택에는 안뜰과 주랑을 만들도록 규정했다. 또 원조금 제도에 의해 사람들에게 목재보다는 석재를 이용해 집을 짓도록 장려했으며 건물의 소유주에게는 소화용 기구를 준비할 것을 의무화했다.
그래도 민중들이 진정될 것 같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분노를 황제에게서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민중에 의해 네로가 살해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황제가 된다면 내게도 이로울 게 없었으므로 나는 열심히 새로운 희생물을 찾아다녔다.
크리스트교를 희생물로 삼아야겠다고 마음먹기까지는 그리 힘들지 않았다. 그들은 음울한 종교를 열심히 믿었고 이전부터 사람들의 증오와 경멸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크리스트교도들을 경기장에서 야수들에게 잡아 먹히게 하거나 십자가 모양의 기둥에 묶어 밤에 불태우기도 했는데 그런 방법을 생각해 낸 사람도 바로 나였다. 네로는 그들을 죽여야 한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그들을 죽일 여러 가지 방법들을 생각해 내기에는 너무 마음이 여렸다. 그런 크리스트교도들의 처형을 구경거리로 만든 것은 민중들의 분노를 다른 데로 옮길 뿐 아니라 그 기억을 잊게 하는 데에도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로부터 4년 후, 네로 황제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군단의 궐기에 몰려 변장하고 로마를 빠져나갔지만 뒤를 따르는 병사가 한 명도 없어 결국 검으로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한 것은 네로가 아니라 나였다. 이제 하고 싶은 일은 다 해보았기 때문에 황제로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30년 인생이었다.
그럼, 네로는 어떻게 되었을까?
네로는 도망쳤다. 아크테의 안내로 숨어 지내던 크리스챤 무리가 들어가 그 속에서 시를 만들
어 읊는다는 것 외에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차이가 없는 서민의 한 사람으로 살아남았다. 사람들은 내 무덤 앞에 누가 가져왔는지 모를 꽃이 끊인 적이 없다며 아상하게 생각했지만 그것은 네로와 아크테가 바친 꽃이었다.
역사가들은 스웨토니우스가 쓴 '12황제 열전' 중 네로에 대해 쓰여진 장의 마지막 몇 줄에는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진실을 알지 못한 것이다. 스웨토니우스는 이렇게 썼다.
"내가 어렸을 적, 네로가 죽은 지 20년이 지난 후였는데 멀리 파르티아 땅에 쉰 살 정도 되어
보이는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나타나 자신이 바로 네로 황제라고 자칭하고 다닌 사건이 있었다.
파르티아인들은 네로 황제가 죽은 후, 새로운 황제 갈바에게 죽은 네로 황제를 기념할 행사를 열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을 정도였으므로 이 남자의 출현에 매우 기뻐하며 그를 마치 황제인 양 정중히 대접했다. 그래서 그 남자를 넘겨 달라는 로마의 요구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때에는 큰 고통과 슬픔을 견뎌야만 했다."
왜 네로는 20년이나 지난 후에 새삼스럽게 자신이 네로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했을까? 계속 그대로 숨어 살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로마 병사들에게 넘겨져 사형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왜 자신의 존재를 밝히고 나섰을까? 진심으로 사랑했던 아크테도 죽고 그로 인해 모든 의욕이 사라진 그는 황제로서 최후를 맞고 싶었던 것일까? 하지만 어쨌든 이렇게 해서 네로는 두 사람 다 죽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