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대왕 시녀의 이야기
알렉산더 대왕 시녀의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나의 주인님이 돌아가신 지도 벌써 10년이나 되었다.
그 후 나는 주인님에게서 받은 물건을 팔아 그 돈으로 조그맣지만 기름진 데살로니카의 토지를 사 여기서 나는 과일이나 야채를 페라의 거리에 내다 팔며 생활하고 있었다. 이제 50세를 넘긴 내가 고명한 분을 모시며 그분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생활한다는 것은 무리였으니까. 아니, 나는 보통 사람들이 일생에 걸쳐 살 것을 주인님을 섬기며 살아온 17년 동안 한꺼번에 살았는지도 모른다.
나의 주인님은...글쎄,뭐라고 말해야 좋을지...그 분은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외모는 물론 굉장히 아름다우셨다. 다른 사람들보다 키가 크지는 않았지만 균형 잡힌 몸매에 지나치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머리, 두꺼워서 안정된 느낌을 주는 목, 그리고 얼글은 갸름한 편이지만 뚜렷한 이목구비 때문에 빈약하기보다는 당당한 느낌을 주었다. 머리카락은 흑갈색이고 길게 째진 눈매가 희노애락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시는 분이셨다.
나는 주인님이 16세 때부터 3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곁에서 시중을 들었는데 그분의 몸은 평소 운동으로 단련해서라기보다는 신께서 젊어서 일찍 죽을 운명을 타고난 그분에게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지칠 줄 모르는 건강한 신체를 가지도록 배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십대에는 부드럽고 갸날픈 몸매로 목욕을 마친 후에 향유를 발라 주면 내 손의 움직임이 튕겨질 듯한 탄력이 느껴지더니 30세가 지나자 속된 표현으로 살이 붙었는지 감촉이 단단해지면서 성숙기에 들어선 남자의 육체를 풍겼다.
향유를 바르지 않아도 그분의 몸에서는 좋은 향기가 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이 불처럼 뜨거운 체온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사람의 말을 빌면 좋은 향기란 습기가 열에 의해 따뜻해짐으로써 생겨나는 것으로 그 때문에 건조하고 화기가 많은 지방에서 나는 향수가 가장 질이 좋다고 한다. 왜냐하면 태양이 부패의 원인이 되는 물체 표면에 습기를 제거하는 이치로 다른 사람들보다 체온이 높은 대왕님의 몸에서 좋은 향기가 풍겨 나오는 것도 이 원리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어려운 원리는 잘 모른다.하지만 체육 경기나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주인님의 옷이나 갑옷을 벗기다 보면 그때마다 풍기는 냄새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 주인님의 체취는 불쾌한 땀 냄새가 아니라 글쎄, 뭐라 말해야 할지, 태양을 한껏 빨아들인 마른 풀 향기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에게서 불쾌하지 않은 남자의 체취가 풍겼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물론 주인님도 다른 그리스 영주들처럼 밖에서 돌아오면 바로 목욕을 하고 내게 수건으로 자신의 알몸을 닦게 한 후 침대에 누워 향유를 바르게 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그 독특한 체취는 그때쯤이면 완전히 사라졌다.
주인님의 아버지와의 관계?
노예 신분인 내가 마케도니아의 왕인 필리포스에 대해 자세히 알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들 알렉산더를 후계자로 삼기에 적합하다며 자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 동안 16살밖에 되지 않은 아들에게 통치를 맡겼을 리가 없을 테니까.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긴 하지만 그에게서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아들 이야기를 떠들며 자랑하다가도 왠지 모르게 불안한 표정으로 곰곰이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것은 아마 필리포스 님이 알렉산더의 어머니인 올림피아와 이혼하고 젊은 여인을 아내로 맞아 그녀가 아이를 낳았을 무렵부터였다고 생각된다. 알렉산더 님도 자존심 상한 어머니의 고뇌를 무심하게 넘길 수가 없는 분이셨다. 그러므로 어쩌면 선왕이 알렉산더가 20세가 되던 해에 암살된 것이 오히려 잘 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았다면 언젠가 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났을 테니까.
그래도 필리포스 님이 좋은 아버지로서 충분히 그 책임을 다하셨다는 것은 누구나가 인정한다. 레오니다스 선생님을 발탁해 알렉산더 님이 장래의 군주로서 필요한 엄격한 교육을 받게 한 것도 그분이셨으며 청년기에 접어들자마자 유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불러와 알렉산더 님에게 철학이나 정치학, 윤리학, 그리고 의학까지 가르치게 한 것도 아버지의 배려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지금도 볼 수 있는 리시포스가 만든 조각상은 알렉산더 님을 가장 충실하게 표현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 예술가가 주인님이 턱을 약간 왼쪽으로 돌리는 버릇이나 눈에 글썽이는 모습은 정확하게 표현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분의 온몸에서 풍겨 나오는 위엄과 활기찬 생명력까지는 표현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생명력까지는 표현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뿐 아니라 그것이 알렉산더의 조각상이란 것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아테네의 상류층 젊은이를 표현한 것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러나 실제의 주인님에게서는 도저히 도시에서 자란 청년으로는 여겨지지 않는 일종의 야만적인 기백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이것은 왕의 아들로 태어나 제왕에 적합한 교육을 받아도 지워지지 않는, 갑옷을 벗길 때마다 날 취하게 했던 그 오후의 햇살과도 비슷한 주인님 특유의 체취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고명한 철학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리스인들이면 누구나 바라는 것보다 훨씬 혜택받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어도 주인님은 그것에 열중하지는 않았다. 그분이 진정으로 사랑한 책은 제목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찬탄을 받을 만한 철학도, 윤리학도 아닌 바로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드였다. 주인님은 이 책을 가장 쓸모 있는 전술 교과서라며 항상 단검과 함께 베개 밑에 넣고 주무셨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 그 책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다 기억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일리아드에 나오는 영웅들 중에서는 특히 아킬레우스를 좋아했던 것 같다. 좋아한다기보다 자신과 일체화시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시아로 원정갔을 때에도 맨 먼저 들른 곳이 트로이였는데 그곳에서 전군을 멈추게 하고 여신 아테네에게 제물을 바치며 영웅들의 명복을 빌었을 때에도 특별히 아킬레우스의 묘비에는 자기 손으로 직접 향유를 발랐다. 그리고 관습에 따라 자신도 알몸으로 사람들과 경기를 한 후에 화환까지 바치며 평소와 달리 조용한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페트로클로스라는 친구가 있었고 죽어서는 호메로스라는 위대한 보고자를 얻은 아킬레우스는 행운아였다."
내가 보기에도 주인님과 호메로스의 영웅과는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다. 아니, 나뿐만 아니라 그리스인들은 모두 알렉산더 대왕을 아킬레우스의 화신으로 여겼다. 둘 다 미남이었고 용기가 있었으며 위험을 경멸하는 점에서도 비슷했다. 또 자신보다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했다는 것도, 폐쇄적이지 않아 금방 친구로 만들었다는 것도, 너그러워서 무엇이든 다른 사람들에게 주기 좋아했다는 점도 비슷했다. 갑자기 기분이 변하거나 거칠고 버릇없는 행동을 하고 분노가 폭발하면 그것을 진정시킬 수 없는 단점까지도. 그리고 두 사람 다 젊은 나이에 죽음의 신의 부름을 받은 영웅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명예에 민감했다는 점과 야망에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아버지인 필리로스왕이 시도하신 사업, 페르시아 원정이란 대사업에 착수한 것은 아버지의 위를 이어 그리스 왕위에 오른, 20세가 되던 해였다. 그리고 실제로 군대가 아시아로 건너간 것은 2년 후였다. 원정에는 스파르타를 제외한 전 그리스가 참가했다. 보병 3만여 명, 기병 5천 명이란 대군이었으며 주인님이 그들을 총지휘하였다.
천막 안에서 주인님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던 나는 싸움의 정황 같은 건 자세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싸움을 끝내고 천막으로 돌아오는 주인님의 환한 표정이 승리를 말해 주고 있었다. 페르시아 왕 다레이오스와 최전선은 대성공으로 끝났다. 그리스군들은 천막을 접고 아시아의 깊숙한 안쪽까지 페르시아 왕을 쫓아갈 준비를 했다.
진로를 가로막는 마을들을 차례로 정복하며 진군하던 때의 일이다. 고르기온이란 마을을 점령했을 때 그곳 사람들은 관목에 껍질로 묶여 있는 마차를 주인님 앞에 끌고 나왔다. 페르시아인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매듭을 푸는 사람은 전 세계의 왕이 될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이다. 주인님에게 정복당한 이 마을 사람들은 그리스인인 알렉산더 대왕이 어디가 끝인지도 모르는 매듭을 어떻게 풀 것인지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주인님은 페르시아인들의 이런 책략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주인님은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은 채 날 불러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검을 가져오너라."
나는 그가 말하는 검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전장에 들고 나가는 날이 길고 큰 황금검을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 복잡한 매듭을 어떻게 풀려고 하는지도 나는 알고 있었다.
높이 쳐들어 올린 검이 매듭을 향해 내려쳐졌을 때, 몇백 년 동안이나 많은 사람들을 고민에 빠뜨렸던 그것은 가운데 부분이 뚝 끊겨져 나갔다. 그야말로 알렉산더 대왕다운 행동이었다. 천재의 발상은 평범한 사람들의 것과는 다르다. 불가피하게 전장을 볼 수밖에 없었던 나조차도 그럴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그분은 반드시 전투도 이와 같은 생각으로 지휘하셨기 때문이다.
이것도 원정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주인님은 큐도스강에서 목욕을 하신 후 열이 심하게 났다. 행군을 따르던 의사들은 어떤 치료를 해야 할지 모른다기보다 섣불리 손을 댔다가 실패해 대왕이 죽기라도 한다면 그의 부하들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모두들 핑계를 대며 주인님의 병상에서 멀어지려고만 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인도 아닌 한 그리스 의사만은 이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의사로서 수치라며 용기를 내어 약을 조제해서 대왕님에게 가지고 갔다. 그런데 마침 그때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 중 한 장군이 이 필리포스라는 이름의 의사는 페르시아 왕 다레이오스로부터 왕녀와 결혼시켜 주겠다는 조건 하에 알렉산더 대왕을 독살하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이 편지를 읽은 주인님은 그것을 베개 밑에 넣은 후 약병을 들고 들어온 그 의사를 맞이했다.
그 후의 광경은 연극에서도 볼 수 없을 만큼 극적이었다. 의사는 약병을 내밀며 빨리 건강을 회복해 전장에 나가고 싶으시다면 이 약을 국 참고 드시라고 말했다. 그에게서 약병을 받아 쥔 대왕은 베개 밑에서 편지를 꺼내 의사에게 건네주었다. 주인님이 병 속의 약을 마시는 것과 의사가 그 편지를 읽는 것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대왕님이 그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듯 약을 다 마시는 동안 이 사람의 얼굴빛은 하얗게 변했다.
약을 다 마시고 자리에 누워 푹 잠든 주인님은 조금씩 기력을 회복해 갔으며,
그동안 병실 안의 공기는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을 질식하게 할 정도였다. 결국 치료에 성공한 의사가 대왕님에게서 감사의 인사를 들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이 의사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때까지 상당히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드디어 페르시아 전쟁을 야기시킨 이소스 전쟁이 다가왔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이것으로 전쟁이 끝나리라고는 어느 한 사람도 예상치 못했다. 나중에 돌이켜봤을 때 ‘아, 그날 결말지어졌던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그날 내게는 다음 날 전투를 앞두고서도 푹 잠들 수 있는 주인님이 깨어나실 때까지 곁에서 지켜보고 싶다는 것과 출진에 필요한 것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다레이오스와의 전투는 알렉산더 대왕 군의 완승으로 끝났다. 비록 수로는 열세했지만 그리스군은 11만을 넘는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대담하고 치밀한 작전을 펴 승리를 거둔 것이다. 페르시아 왕은 도망쳐 버렸지만 주인님은 왕의 마차와 활을 들고 천막으로 되돌아왔다. 그날 주인님은 젊음과 자부심으로 빛나고 있었으며 노예인 나도 그를 정신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아직 23세밖에 되지 않은 젊은 왕이었으니까.
그 무렵부터 알렉산더 대왕이 아시아 문명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게 아니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글쎄, 페르시아 왕은 전투에 임할 즈음에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소지품의 대부분을 다마스쿠스에 두고 왔다고 했지만 그래도 왕이 버려두고 간 천막 안의 호화로운 물건들은 마케도니아에서 온 사람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욕조나 술병, 향유의 용기 등 모든 것이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 섬세한 세공에는 주인님마저도 경탄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고는 잠시 후 주인님은 한마디 던졌다.
"과연 이런 게 왕의 생활이라는 걸까?"
물론 그 후부터 알렉산더 대왕은 호화로운 물건에 싸여 있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인님은 전투의 천재는 아니었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섬세한 감각도 유달리 뛰어난 분이셨다.
그토록 아름다운 것을 사랑했던 분이 왜 페르시아 왕비나 공주들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지, 혹시 왕은 여자보다도 소년을 더 좋아했기 때문은 아니냐구?
주인님은 패자에 대해 승자로서 행동하려 하셨다. 그렇지 않아도 승리에 취해 있는 부하 장병들에게 왕 스스로 모범을 보인 것이다. 페르시아 여자들, 특히 왕의 두 공주가 아름답다는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에 "페르시아 여자들은 보면 해롭다." 하는 농담을 들어본 적은 있다. 하지만 거기에 몰두해 있는 모습을 보이면 부하 장병들의 욕망을 누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또 주인님은 페르시아 해군 장교의 딸 바르시네를 연인으로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풍의 교육을 받은 그 정숙한 여인에게 푹 빠져 있어서인지 다른 여자들에게는 별로 흥미를 갖지 않았다.
아름다운 소년에 대해서도 보통 다른 그리스 군주들 이상의 사랑은 아니셨다. 모든 면에서 아킬레우스와 비슷했던 주인님은 소년에도 그리고 쇠퇴하기 쉬운 젊음을 한창일 때 감상하려는 섬세한 감각 또한 부족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결국 알렉산더 대왕이란 분은 감상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6년 후 연회 자리에서 춤추던 박트리아 귀족의 딸 롯사네를 사랑하고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까지 했을 이유가 없지 않았을까? 세상 사람들은 이 결혼에 대해 대왕이 부하 장병과 정복지의 딸을 결혼시켜 대제국의 기반을 굳히려고 한 정치적 배려를 자신이 먼저 선례를 만들어 장려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분을 가까이서 지켜본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주인님이 롯사네를 정말로 사랑하셨다는 것을. 정치상의 한 대책으로 그러셨다면 미모와 신분에서 롯사네보다 훨씬 뛰어난 다레이오스 왕의 딸과 결혼하는 것이 이치에 더 맞지 않을까? 그리스 여자가 아닌 페르시아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 것은 정복지의 합체를 계획했다기보다 한눈에 반한 상대가 우연히 정치적으로도 조건이 맞았을 뿐이다. 물론 사령관이 취한 선례를 따른 그리스 장병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 남자들이 알렉산더 대왕의 어머니인 올림피아 님처럼 기승스러운 여장부 타입에 영리한 체하는 그리스 여자들과 달리 조용하고 정숙하면서도 관능적인 페르시아 여자들을 더 사랑스러워한 것도 사실이었다.
시리아나 이집트를 정복했을 무렵의 알렉산더 대왕은 또 어땠는지 궁금할 것이다.
25세로 젊음에 성숙미가 조금씩 더해지기 시작했을 무렵 알렉산더 대왕은 모든 것이 쉽지 않은 전투에 자신감과 용기만으로 장병들을 억지로 끌고 가는 듯했다. 이집트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그리스풍의 거리를 건설하려고 결심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지중해에 접한 토지를 조사한 후, 당시 파로스라는 땅을 눈여겨 두셨다. 이 땅은 바다 위로 튀어나온 리본 모양으로 나일강 지류 중 하나인 하구 근처에 있으며 넓은 만을 감싸고 있는 지형이므로 누가 보더라도 큰 항구도시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었다. 주인님은 여기에 거리를 만들고 그것을 알렉산드리아라고 이름 붙이도록 명령했다.
사람들은 이집트에 자신의 이름을 딴 거리를 건설하는 것은 그리스가 아닌 아시아 땅에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려는 의도에서 일 거라며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는 다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어느 날 페르시아 왕의 재산 중에서 가장 호화로운, 황금과 수많은 보석으로 장식된 작은 상자가 주인님에게 전해졌다. 아름다움과 화려함에 놀란 사람들은 과연 여기에 무엇을 넣어야 가장 어울리까 하고 저마다 소곤거렸다. 아마 이 상자의 소유자였던 다레이오스 왕이라면 호화롭고 왕의 신분에 어울리는 장식품을 넣어 두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때 알렉산더 대왕은 이제는 자신의 소유가 된 이 작은 상자의 뚜껑을 열고 항상 베개 밑에 넣어 두던 책을 집어 넣었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일리아드를 넣어 두겠다."하고 선언했다.
이처럼 그리스인다운 행동이 있을까?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한 후 다시 동정을 시작했을 무렵 대왕님은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아시아의 전제 군주로 변해 버렸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사실 주인님은 정복지의 사람들이 공순을 표하러 올 때마다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앞에 엎드려 머리를 숙이게 했다. 하지만 아시아 사람들이 어떤 인종이며 그들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를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그리스인들이라면 민주주의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시아인들에게 있어서의 통치자는 신 같은 존재여야 한다.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들은 따르지 않을 테니까.
특히 주인님이 25세의 젊은 나이로 페르시아와 다레이오스를 3번의 전쟁으로 패배시키고 아시아 제일의 왕이 된 후에는 군사력에 의한 정복과 함께 정복지의 통치도 큰 문제가 되었다. 군대의 압력만으로는 통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인님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민심을 잡는 것. 이것이 수십만 명의 병사보다도 뛰어난 무기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그것을 활용하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분명 그리스인들에게 아시아 사람들과 똑같은 행동을 강요한 것은 주인님답지 않은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주인님도 곧 그 사실을 깨닫고는 아시아인들에게는 자신을 신의 아들로 부르게 했지만 그리스인들에게는 결코 강요하지 않았다.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을 넘은 곳에서 우리들은 그리스에서는 본 적도 없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검게 빛나는 기름으로 땅의 갈라진 틈에서 끊임없이 솟아 나왔다. 불을 붙이기 쉬운 액체로, 가까이 대기만 해도 순식간에 타올랐다. 이 지방 사람들은 대왕님을 환영하기 위해 대왕님의 천막 근처까지 이 검은 액체를 흘려보내고 밤이 되자 그것에 불을 붙였기 때문에 천막은 그 불기운을 받아 밤에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런 신기한 일이 많아 알렉산더 대왕의 동정은 나 같은 사람에게까지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 무렵부터 그동안 절제하고 있는 대왕님의 주량이 조금씩 늘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분노에 몸을 내맡기는 때도 많아졌다. 주인님이 변한 건지 아니면 부하 장군들이 변한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바로 그때 그 불행한 클레이토스 사건이 일어났다. 술에 취한 주인님과 클레이토스 사이에 언쟁이 벌어지고, 순간 흥분한 주인님은 그를 찔러 죽였다.
자신이 저지른 친구의 죽음은 주인님을 매우 슬프게 했고 그날 밤 그는 고뇌와 비탄에 빠져 한숨도 이루지 못했다. 왕으로서의 지위가 높아질수록 점점 고독해지는 듯했다. 그래선지 음주의 양은 이전보다 더욱 많아졌다.
주인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떤 질문을 하든 난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다. 말하고 싶지 않아서라기보다 주인님이 바빌론에서 병상에 누워 계신 동안 내 머릿속은 온통 그를 간병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고 그것이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을 안 20일째 되던 날 저녁에도, 나는 눈앞에 누워있는 33세의 영혼 없는 젊은 육체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나를 난폭하게 떠밀었던 것도, 그 후 사람들이 부른 애도의 합창 소리도 내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어떻게 아시아를 가로질러 그리스로 돌아왔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롯사네 님은 그 아이와 함께 살해되었다고 들었다.
주인님이 12년에 걸쳐 정복한 지역은 당연한 결과겠지만 주인님이 돌아가신 직후부터 분열하기 시작해 오늘날에는 전설 속에 묻혀 버렸다. 그러한 위업도 결국 하잘 것 없고 덧없는 것일 뿐일까? 얼마 전까지는 신들의 사람을 한 몸에 받기라도 하듯 눈부시게 빛나던 젊은 육체가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희고 차가운 대리석으로 변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