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llnow 2024. 4. 11. 06:45

만세전

염상섭

 

 술이 얼큰하게 취하여, 문간으로 나오는 나를, 앞서 따라 나오던 정자는, 거진 입이 닿도록 내 귀에다 대고,

 “정말 밤차로 가세요?”

하며 소곤거렸다.

 “왜? 생각나는 대로 하지…….”

 “글쎄요…….”

하고 나서 정자는 무슨 말을 할 듯 할 듯하다가, P자가 쫓아 나오는 것을 보고 한 걸음 물러섰다.

 “하여간 갈 길이니까 어서 가야지. 그럼 한 달즘 있다가 올 테니까, 그때 또 만납시다.”

 나는 이같이 한마디 남겨놓고 길거리로 나섰다.

 거리는 아직 초저녁이지만, 첫추위인 데다가, 낮부터 음산했던 일기는 마치 눈이나 오려는 듯이, 밤이 들어갈수록 쌀쌀해졌다. 사람 자취도 점점 성기어가고, 길바닥에 부딪히는 나막신 소리는 한층 더 요란히 들린다. 여기저기 점두에 매달린 전등 불빛까지 졸린 듯 살얼음이 잡히어가는 듯 보유스름하게 비치는 것이, 더욱 쓸쓸해 보였다.

 나는 곧 차에 뛰어오르려다가, 사람이 붐비는 갑갑한 차 속으로 기어들어갈 생각을 하니까 얼근한 김에 차마 올라설 용기가 나지를 앉아서 그대로 돌쳐서서, O교 방면으로 꼽들었다.

 화끈화끈 다는 뺨을, 살금살금 핥고 달아나는 저녁 바람에, 정신이 반짝 날 듯하면서도, 마음은 어찌하여 그렇다고, 꼭 집어 말할 수 없이, 조비비듯 조바심이 나서 못 견딜 지경이다. 자기 자신에게 대한 반항인지, 자기 이외의 무엇에 대한 반항인지, 그것조차 명료히 깨닫지 못하면서, 덮어놓고 앞에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지 해내려는 듯한 터무니없는 울분이, 가슴속에서 용심지같이 치밀어 올라왔다. 컴컴한 속에서 열병에나 띄운 놈 모양으로, 포켓에 찔렀던 두 손을 꺼내가지고, 뿌리쳐보기도 하고, 입었던 외투나 윗저고리를 벗어서, O교 다리 밑으로 보기 좋게 던져버렸으면, 하는 공상도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발은 기계적으로 움직여 O교 정거장을 지나 S교를 향하고 돌쳐서서 여전히 컴컴한 천변가로 헤매며 내려갔다.

 이러한 공상이 한참 계속된 뒤에는, 별안간에 눈물이 비집어 나올 만치, 지향할 수 없이 애처로운 생각이 물밀듯하여, 참을 수 없는 공허와 고독을 감하면서, 눈물이나 마음껏 흘려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에는,

 ‘무슨 때문에 눈물이 필요하단 말이냐. 공허와 고독에 대한 캠퍼 주사가 새큼한 눈물 맛인가! 흠 정말 자유는 공허와 고독에 있지 않은가?’

 나는 속으로 이같이 변명해보았다.

 그것은 마치 종로에서 뺨 맞은 놈이, 행랑 뒷골에서 눈을 흘기다가, 자기의 약한 것을 분개하여보기도 하고, 혼자 변명하기도 해보는 셈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겁겁증이 나서, 몸부림을 하는 일종의 발작적 상태는, 자기의 내면에 깊게 파고들어 앉은 ‘결박된 자기’를 해방하려는 욕구가, 맹렬하면 맹렬할수록, 그 발작의 정도가 한층 더하였다. 말하자면, 유형무형한 모든 기반, 모든 모순, 모든 계루에서, 자기를 구원해내지 않으면 질식하겠다는 자각이 분명하면서도, 그것을 실행할 수 없는 자기의 약점에 대한 분만(憤懣)과 연민과 변명이었다.

 나는 참을 수 없어서 포병공창 앞으로 달아나는 전차에 뛰어올랐다. 이러한 때에 미인의 얼굴이라도 쳐다보면, 캠퍼 주사만 한 효과가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었으나, 나의 이지(理智)는 그것조차 조소한다.

 그러나저러나, 노역과 기한에, 오그라진 피부가 뒤틀린 얼굴밖에, 내 눈에는 비치지 않았다. 그들은 시든 얼굴을 서로 쳐들고 물끄럼말끄럼 마주 건너다보기도 하고, 곁의 사람을 기웃이 들여다보기도 하고 앉았다. 나도, 그들이 얼굴을 이 사람 저 사람 쳐다보다가,

 ‘여러분, 장히 점잖구 무섭소이다그려!’

 이렇게 한마디 하고, 일부러 허허허 하며 웃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나서, 나 혼자 제풀에 빙긋해버렸다.

 이렇게 안 나오는 거드름을 빼고, 될 수 있는 대로 우자한 태도로 좌우를 주시하는 것은, 비단 일본 사람이 조선 사람에게만 한한 무의식한 관습이 아니라, 사람의 공통한 성질인 동시에 사람이란 동물이, 얼마나 약한가를 유감없이 반영한 것이다. 약하기 때문에 조그만 승리와 조그만 자랑을 갈구하고, 약하기 때문에 성세(聲勢)를 허장(虛張)하며, 약하기 때문에 자기의 주위에 경계망을 쳐놓고 다른 사람을 주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상대자의 용모나 의복 행동 언사를 면밀히 응시하고 음미함으로써, 자기의 비열한 호기심을, 만족시키려는 본능적 요구가 있는 것도 물론이겠지만, 상대자에게 대한 일체를 탐구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의미로 필요한 조건이 있다. 우선 자기 방어상, 상대자의 강약과 빈부의 정도와 계급의 고하를 감정할 필요가 있고, 그다음에는 의복 언어 거조 등이 시속적 유행에 낙오가 됨은 현대 생활상, 그중에도 도회 생활을 하는 자에게 대하여 일대 수치요 고통이기 때문에 또한 필요한 것이다. 만일에 일보를 진하여 비교적 협소한 범위의 사교나 상업상 거래가 있는, 소위 신사 계급이라든지 상인 간에는 한층 더한 것을 볼 수 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은, 자기의 생명인 애(愛)를, 얻으려는 또 한 가지의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으로 보면, 제일 진순하고 아리따운 것은, 전차나 집회나 가로 상에서, 청년 남녀가 정열에 타는 아미로 서로 도적질을 해보는 것과, 소위 하층 사회의 부박한 기풍이다. 이성을 동경하는 청년 남녀에게는 불결한 욕심이 없다. 적어도 물질적 욕심이 없다. 아첨할 필요도 없고 경계할 이유도 없고 우월하거나 농락하려는 야심도 없고 방어하고 반발하려는 적대심이란 손톱만큼도 없다. 다만 미를 동경하고 모색하며 이에 감격한다. 더구나 그러한 심리가, 영원히 흐르는 물결에 뿌려지는, 월광의 은박같이, 아무 더러운 집착 없이 순간순간에 반짝이며, 스러져버리는 것이, 더욱이, 방순하고 정결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선 없이 살지 못하리라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운명이다. 그리하여 인생의 움[芽] 같은 그들도 미인의 얼굴을 결코 정시하는 일은 없다. 절도질을 한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고약한 버릇이다.

 그다음에 노동자에 이르러서는, 자랑할 것도 없고 숨길 것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는 대신에 적나라한 자기와, 동정과, 방위적 단결이 있을 따름이다. 생활의 양식으로는 제일 진실되고 아름답다. 하므로 그들은 사람과 사람끼리 만날 때에, 결코 응시하거나 음미하거나 탐색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병은, 무지한 것이다.

 하고 보면 결국 사람은, 소위 영리하고 교양이 있으면 있을수록(정도의 차는 있을지 모르나), 허위를 반복하면서 자기 이외의 일체에 대해, 동의와 타협 없이는, 손 하나도 움직이지 못하는 이기적 동물이다. 물적 자기라는 좌안(左岸)과 물적 타인이라는 우안(右岸)에, 한 발씩 걸쳐놓고, 빙글빙글 뛰며 도는 것이, 소위 근대인의 생활이요, 그렇게 하는 어릿광대가 사람이라는 동물이다. 만일에 아무 편에든지 두 발을 모으고 선다면, 위선 어떠한 표준하에, 선인이나 악인이 될 것이요, 한층 더 철저히 그 양안의 사이로 흐르는 진정한 생활이라는 청류에, 용감히 뛰어들어가서 전아적(全我的)으로 몰입한다면, 거기에는 세속적으로는 낙오자에 자적(自適)하겠다는 각오를 필요조건으로 한다…….

 나는 이러한 생각을 하며 역시 이 사람 저 사람 쳐다보고 앉았다가, 정자의 지금의 생활을 생각해보았다. 그 애가 반역자라는 점은 찬성이다. 그러나 자기의 생활을, 자율하여 나갈 힘이 있을까. 자기 생활의 중류에 뛰어들어갈 용기가 있을까? 다소의 자각도 있고 영리는 하지만. ……그러나 허영심이 앞을 서기 때문에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전차는 종일 노역에 기진하여, 허덕허덕 다리를 끌면서, 잠이 들어가는 집집의 적막을 깨뜨리려는 듯이, 빽빽 기쓰는 듯한 외마디소리를 치며, E가도의 암흑 속을 겨우 기어 나와서, 대낮같이 전등이 달린 차고 앞에 와서, 한숨을 휘 쉬며 우뚝 섰다. 졸음 졸듯이 고요하던 찻간 안은, 급작스레 왁자해지면서 우중우중 내려왔다.

 나도, 검은 양복바지에 푸른 저고리를 입고, 벤또갑을 든 사오 인의 직공 뒤를 따라 내려왔다. 쌀쌀한 바람이 확 끼쳤다.

 “아, 요새도 밤일을 하슈? 오늘은 제법 춥지요.”

 “에, 인제 참 겨울인데요.”

 “이리 들어와, 좀 녹여 가시구려.”

 차고 문간에 섰던 차장과 이같이 수작을 하며, 따뜻해 보이는 차장 휴게실로 끌려 들어가는 직공들의 뒤를, 부러운 듯이 건너다보며, 나는 그 사이 골짜기로 들어섰다.

 하숙으로 휘돌아 들어오는 길에 뒷집에 있는 X군을 들여다볼까 하며 한참 망설이다가, 결심하고 들어가보았다. X군은, 내가 이 밤으로 귀국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당자인 나보다도 놀라며, 진정으로 가엾어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사람 좋은 X군을, 도리어 웃으면서 하숙으로 돌아왔다.

 뒤미처 따라온 X군과 같이, 짐을 수습하여 주인에게 맡긴 후에, 인사 받을 새도 없이 총총히 가방을 들고, 우리 둘이서 동경역으로 향한 것은, 그럭저럭 열 시가 넘은 뒤였다. X군이 재촉을 하는 대로 나는,

 “늦으면 내일 떠났지, 하는 수 있나!”

하면서도 허둥허둥 동경역에 도착해 보니까, 내 시계가 틀렸던지, 그래도 십 분가량이나 여유가 있었다.

 가방을 뒤에 서 있는 X군에게 맡겨놓고 차표를 사려고 출찰구 앞에 들어가서 있으려니까 곁에서 누가 살짝 건드리며,

 “이상!”

하는 귀에 익은 소리가 들린다.

 나는 깜짝 놀라서 돌아보았다. 역시 정자다. 자줏빛 보자에다가 네모진 것을 싸서 들고 옆에 선 X군의 시선을 꺼리는 듯이, 옆을 흘겨보고 섰다.

 “웬일이야? 이 추운 밤에.”

 나는 의외인 데에 놀라며, 위무하는 듯이 한마디 했다.

 “난, 안 가시는 줄 알았지!”

 “한참 기다렸어?”

 “아뇨, 난 늦을까 봐 허둥지둥 나왔더니…….”

 “미안하구려. 어서 들어가지, 그럼…….”

 정자는 거기에는 대답도 안 하고, 맞은편 출찰구로 총총걸음을 걸어갔다.

 X군이 자리를 잡으려고 앞서 들어간 뒤에, 정자는 입장권을 사가지고 와서, 맨 끝으로 둘이 나란히 서서 걸으며 입을 벌렸다.

 “오래 되실 모양이에요?”

 “뭘, 고작해야 이 주일쯤이지.”

 “오래 되시건 편지라도 해주세요. 그동안에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왜, 어딜 가게?”

 “글쎄요, 밤낮 이 모양으로만 하고 있을 수도 없으니까…….”

 정자는 말을 끊고, 잠깐 고개를 기울이고 걷다가, 가까이 와서 매달리듯이 몸을 살짝 실리며,

 “이렇게 급하지만 않았다면, 나도 같이 경도(京都)까지라도 가는 것을…….” 하며 나를 쳐다보며 웃었다. 나는 잼처 무엇을 물으려다가, X군이 황망히 손짓을 하며 부르는 바람에, 정자와는 총총히 인사를 하고 차에 올라서, X군과 바꾸어 앉았다.

 친구에게 전송을 받거나, 물건을 받는 일은 별로 없었기도 하려니와, 도리어 귀찮은 일이지만, 정자가 무엇인지 보자에 싼 채 창으로 디밀며, 지금 펴볼 것 없다 하기에, 나는 그대로 받아서 선반에 얹을 새도 없이, 차는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반 칸통쯤 떨어져서, 오도커니 섰던 정자의 똑바로 뜬 방울 같은 두 눈이, 힐끗하더니 물려 나가는 전송인 틈에 사라져버렸다.

 

 2

 반찬 찬합같이 각다구니를 여기저기 함부로 벌여놓고 꼭꼭 끼어 앉은 틈에서, 겨우 잠이랍시고 눈을 붙였다가 깨니까, 아직 동이 트려면 한두 시간이나 있어야 할 모양. 찻간은 야기에 선선하면서도, 입김과 궐련 연기에 혼탁했다. 다시 눈을 감아보았으나 좀처럼 잠이 들 것 같지도 않고, 외투 자락을 걸친 어깨가 으스스하여, 일어나 앉으며 담배 한 개를 피워 물고 나서, 선반에 얹은 정자가 준 보자를 끌어 내렸다. 아까 받아 얹을 때에 잠깐 보니까 과자 상자 위에 술병 같은 것이, 두두룩이 얹혀 있는 것 같아서 그리한 것이다. 네 귀를 살짝 접어서 싼 자주 모사 보자의 귀를 들치고 보니까, 과연 갑에 넣은 위스키 중병이 얹혀 있다. 어한 겸 한잔할 작정으로 병을 쑥 빼려니까, 갸름한 연보랏빛 양봉투가 끌려 나왔다.

 ‘별안간에 편지는 무슨 편지인구. 응 그래서 아까 풀지 말라구 한 게로군…….’

 나는 혼자 속으로 이렇게 생각을 하며, 꺼내서 옆에 놓은 모자 밑에 찔러 넣어놓은 뒤에, 한 잔 위선 따라서 한숨에 켰다.

 영리한 계집애다. 동정할 만한 카페의 웨이트리스로는 아까운 계집애다라고 생각은 했어도 이때껏 내 차지로 해보겠다는 정열을 경험한 때는 없다고 해도 거짓말이 아니다. 원래가 이지적, 타산적으로 생긴 나는, 일시 손을 댔다가, 옴칠 수도 없고 내칠 수도 없게 되는 때에는, 그 머릿살 아픈 것을 어떻게 조처를 하나, 하는 생각이 앞을 서는 동시에, 무슨 민족적 거구(渠溝)가 앞을 가리는 것은 아니라도, 이왕 외국 계집애를 얻어가지고, 아깝게 스러져가려는 청춘을 향락하려면, 자기에게 맞는 타입을 구하겠다는 몽롱한 생각도 없지 않아서 그리하였다. 그러나 숄 한 개가 인연이 되어, 편지까지 받게 되고 보니, 불쾌할 것은 없으나 다소 예상외인 감이 없지 않았다. 물론 어떠한 정도의 애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곧 생명의 내용인 연애도 아니려니와, 설혹 연애에 끌려 들어간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공연히 자기의 생활에 파란을 일으키고, 공연한 고생을 벌어가며, 안가(安價)한 눈물과 환멸의 비애를 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내가 많지 않은 학비나 여비 속에서, 특별히 생각하고 숄을 사다가 준 것도, 그 애에게 폐를 많이 끼친 사례도 되고 또는 기뻐하는 양을 보고 향락하겠다는 의미에서 지나지 않았다. 만일 정자의 사랑을 바란다 할 지경이면 나는 구차히 물질에게 중매 들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두어 잔 더 마시고 나서, 편지를 꺼내서 피봉을 들여다보았다. 침착하고도 생생하고 정돈된 필적은, 그 애의 용모와 같이 재기가 발려 보였다. 나는, 앞사람은 졸고 앉았지만, 누가 보지나 않을까 하고, 그대로 포켓에다가 집어넣으려다가 그래도 궁금증이 나서 쭉 뜯어보았다.

 지금은 이런 편지를 올릴 기회가 아닌지도 모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나는 물질로써 좌우되는 천열한 계집이라고 생각하실 것이, 너무도 창피하고 원통하기 때문이외다. 그러나 그러할수록에……

 이렇게 허두를 낸 나의 위선적 태도에 대한 예리한 비판과 공격, 자기의 절망적 술회, 자기의 장래에 대한 희망 등을 간단간단히 요령만 쓴 뒤에, 형편 따라서는 세말쯤, 혹은 경도의 고모 집으로 갈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한번 쭉 보고 나서, 혼자 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조소거나, 나에게 대한 신뢰에 대하여 만족한 미소는 아니었다. 애를 써 설명하자면, 그 계집애의 조리가 정연한 이론과, 이지적이요 명민한 그 애의 두뇌에 만족이었다.

 나는 곧 답장을 써볼까 하다가, 하나 둘씩 일어나 앉는 사람들의 시선이 귀찮아서 그만두어버리고, 또다시 잔을 들었다.

 ……왜 우롱을 하세요? 무슨 까닭에 농락을 하세요? P자와 저를 놓고 희롱하시는 것은 유쾌하시겠지요. 그러나 너무 참혹하지 않습니까. 물론 당신도, 애(愛)는 유희가 아니라는 것은 아시겠지요.

 ……누가 당신께서 손톱만큼이라도,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혹시는 모욕입니다. 당신의 태도가, 그 외에는 어떻게 할 수 없으시다면 우리는 이 이상 교섭을 끊는 것이 정당한 일이겠지요…….

 이것이 정자의 최대 불평이었다. 나는 술병을 싸서 놓고, 가만히 드러누어서 편지 사연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정자가 과거의 쓴 경험─╴글로 말미암은 현재우 경우에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헤어나려는 자각과 진실되이 자기의 생활을 인도하려는 노력 그것을 생각할 제, 나는 감상적으로 그 애를 위하여 울고 싶었다. 옆에 앉았을 지경이면, 그대로 답삭 껴안고, 네 눈에서 흘러나오는 쓴 눈물을 같이 맛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그 순간뿐이었다.

 ‘계집애하고 키스를 하면서도 침맛을 분석하는 놈에게, 애(愛)가 있다는 것부터 틀린 수작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며, 아까 M헌 이층의 광경을 머리에 그려보았다. 그때 정자는 어떠했을까? 모욕이란 의식부터 머리에 떠올랐을까? ……그러나 자기 말마따나, 이때껏 한 남자의 입밖에는 몰랐었다면, 그리고 나에게 대한 애욕이 있다 하면 확실히 몽중(夢中)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정자도 아직 행복하다.

 이런 생각을 할 제, 사람의 행복은─╴적어도 사람다운 정열은, 정조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자기는, 이때껏 연애다운 연애를 해본 일도 없으면서, 청춘의 자랑이요 색채라 할 만한 정열이 고갈한 것은 웨 까닭인가. 하여간 성격이 기형적으로 성장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정열을 소각시킨 제일 원인이지만, 동시에 인간성의 타락이다. 하지만 자기를 살리기 위하여, 어떠한 경우에는 이 정열을 억제해야 할 필요도 있으니까, 반드시 성격이 뒤틀렸다거나 인간성이 타락하여 그렇다고만도 할 수 없지…….’

 그러나 자기를 살린다는 것이, 자기의 비열한 쾌락을 만족시킨다는 것이 아닌 이상, 사람을 우롱한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게는 사람을 우롱할 권리도 없거니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을 우롱하는 것은, 인생을 유희함이라는 의미로서 결국에 자기 자신을 우롱하고 유희함이다.

 무슨 까닭에, 자기는 굳세고 높게 살리겠다면서, 가련한 일개 여성을 농락하려는가? 사실 말하자면 오늘까지 나의 정자에 대한 태도는 그런 공박을 받을 만도 하다. 정자 앞에서도 P자를 귀여워하는 체하고, P자의 손을 잡은 뒤에는, P자가 보는 데서 정자의 비위를 맞추려 하는 체하는 그런 더러운 심리는, 창부보다 낫다 하면 얼마나 나을까. 자기에게 창부적 근성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창부시하는 것이 아닌가. 정신적 창부! 그것이 타락이 아니고 무엇일까. 일 여성을 사랑할 수 없을 만치 타락하였다. 그리고 정신적 타락은 육체적 타락보다도 한층 더 무서운 것이다. 타락이라는 것이 어폐가 있다 하면, 그만큼 사람 냄새가 없어졌다고 하는 것이 옳을까. ……하지만, 사랑이니 무어니 머릿살 아프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누웠다가, 숨이 괴로워서 벌떡 일어나 데크로 나왔다.

 차 안의 전등은 아직 안 나갔으나, 젖빛 같은 하늘이 하얘져가며, 인기척 없이 꼭꼭 닫은 촌가가 가끔가끔 눈앞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면, 동은 벌써 튼 모양이었다. 아침 바람이 너무도 세어서, 나는 무심코 외투 깃을 올리며 이삼 분 섰다가, 그래도 견딜 수가 없어서 다시 들어와 자기 자리에 드러누웠다.

 한 두어 시간이나 잤을지, 사람이 너무 붐비는 바람에 잠이 깨어서 눈을 뜨고 내다보니, 기차는 플랫폼에서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가는 모양. 나는 일어나기가 싫기에, 지금 바꾸어 들어와 앉은 앞자리의 사람더러 예가 어디냐고 물어보았다.

 “나고야예요.”

 “에? 인제야 나고야?”

 나는 이같이 놀란 듯이 반문을 하고, 암만해도 중도에서 하루 묵어가야 하겠군 하는 생각을 채 결심도 못하고 또 잠이 들어버렸다.

 한잠 늘어지게 자고 나서 보니까, 기차는 아직도 기내 지방(畿內地方) 어귀에서 헤매는 모양. 시간표를 들추어 보니 경도에서 내리려면 아직도 세 시간, 신호(神戶)에서 묵어간다면 다섯 시간가량이나 있어야 할 터이다.

 ‘을라(乙羅)나 가서 볼까?’

 내년 신학기에는 동경 음악학교로 전학을 하겠다고, 규칙서를 얻어 보내라고 한 을라의 부탁을 이때껏 월여(月餘)나 되도록 답장도 안 한 것을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나의 태만도 태만이거니와, 만 일 년간이나 음신(音信)이 격절한 오늘날에, 불쑥 편지를 하는 것도 이상하고, 또다시 서신을 왕복하는 것은 피차에 머릿살 아픈 일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만나면 어떤 얼굴로 볼꾸?’

 창턱에 기대어 앉아서, 방울방울 방울을 지어 올라가는 담배 연기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가장 정숙한 듯이 가장 부끄러운 듯이 꾸미는 을라의 팔초한1) 하얀 얼굴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요샌 히스테리가 좀 나았나? 병화하고는 여전한가? 그러나 내게 또 불쑥 규칙서를 얻어 보내란 핑계로 편지를 한 것을 보면, 그동안 또 무슨 풍파가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생각을 할 제, 별안간에, 이왕이면 신호에서 내려서 을라를 찾아보려는 호기심이 와락 일어나서, 또다시 시간표를 뒤적거리며 누웠다.

 도지개를 틀면서, 그럭저럭 네 시간 동안을 멀미를 내고, 겨우 감방 속 같은 삼등 찻간에서 해방이 되어 신호 역두에 내려선 것은, 은빛같이 비치는 저녁해가 육갑산(六甲山) 산등성이에 걸렸을 때였다. 큰 가방은 역에다가 맡겨두고, 오글오글 끓는 정거장에서 빠져나와 한숨을 돌리니 사람이 살 것 같았다.

 전차에 올라탈까 하다가, 저녁이나 먹고 나서 을라에게 찾아가리라 하고, 원 정통으로 향했다. 작년 초여름 일을 생각하고, A카페의 아래층으로 들어가서, 여기저기 옹기옹기 앉아 있는 다른 손들을 피하여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두세 접시나 다 먹도록 작년에 보던, 두 팔을 옴켜쥐고 아기족아기족 돌아다니던 그때의 그 계집애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차를 가지고 온 계집애더러 물어보니까,

 “왜요?”

하고 의미 있는 듯이 웃을 뿐이다.

 “왜, 어딜 갔나? 그저 여기 있긴 있겠지?”

 “흥! 언제 만나보셨어요? 아세요?”

 “글쎄 말이야!”

 “벌써 천당 갔답니다!”

 “응? 무슨 병으로?”

 “폭발탄 정사(情死)2)라는 파천황의 죽음을 하였답니다.”

하며 깔깔 웃다가, 다른 손님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뛰어 달아난다.

 폭발탄 정사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여서, 그 계집애가 다시 오기만 어느 때까지 기다려도 돌아본 체도 안 하고 분주히 돌아다닌다. 기다리다 못하여 불러가지고 셈을 하면서,

 “누구하고 그랬어?”

하며 물어보았으나, 내 얼굴만 말끄러미 쳐다보다가,

 “누가 압니까. 요다음 오세요. 이야기를 할게요.”

하고 바쁜 듯이 팔딱팔딱 신소리를 내며 뛰어 들어가 버렸다.

 ‘사실, 그것은 알아 무얼 하나!’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일어나 나오면서도 어떤 놈하고 어떻게 하였누? 하는 호기심이 없지 않았다.

 카페에서 나온 나는 영정사정목(榮町四丁目)에서 산수(山手) 방면으로 꼽들어, 잊어버린 길을 이리저리 헤매면서, C음악학교로 찾아갔다.

 시간은 아직 늦지 않았으나 밤은 들어가는 것 같았다. 저녁 뒤의 연습인지 아래층 저 구석에서 은근하고도 화려하게 울려 나오는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기숙사 문간에 서 있으려니까, 을라는 기별하러 들어간 하녀의 앞을 서서, 발을 벗은 채 통통거리며 이층에서 내려왔다.

 “이게 웬일예요, 참 오래간만이올시다 그려! 어서 올라오세요.”

 인사할 말을 미리 생각하였던 사람처럼 이렇게 한마디 한 을라는 미소가 어린 그 옴폭한 눈으로 힐끗 나를 쳐다본 후에, 부끄럽다는 듯이 눈을 내리깔며, 태연히 문설주에 기대어 섰다. 나는 빨간 끈이 달린 발 째진 짚신 위에 가벼이 얹어놓은 하얀 조그만 발을 들여다보며, 구두끈을 풀고 올라서서 을라의 뒤로 따라섰다.

 “응접실은 추우니까, 내 방으로 가시지요.”

 을라는 이렇게 한마디 하고 아까 내려오던 층계를 지나서 끌고 들어가다가, 잠깐 서 있으라고 하고 누구의 방인지 뛰어 들어갔다. 방문을 열어놓은 채 꿇어앉아서 무어라고 한참 재깔재깔하더니, 생글생글 웃으며 나와서 이층으로 나를 데리고 올라갔다.

 “사내를 함부루 끌어들여도 상관없나요?”

 나는, 자리를 한구석으로 뚤뚤 말아서 밀어놓은 것을 돌려다보며 이렇게 물었다.

 “아무 염려 없에요. ……그렇지만, 혹시 이따가 사감이 들어오더라도, 서울서 오는 오빠라고 하세요.”

 “그런 꿔다 박은 오빠 노릇은 어려운데…….”

 이런 실없는 소리를 정색으로 하며, 을라가 권하는 대로 책상 앞에 앉았다.

 “옳지, 오빠 행세를 하려면, 싫어도 이렇게 상좌에 앉아야 하겠군…….”

 농도 아니요 빈정대는 것도 아닌, 이런 소리를 또 한마디 하며, 펴놓았던 책이며 버선짝 옷가지를 부산히 치우는, 을라를 건너다보았다.

 을라는, 치우던 것을 한편으로 몰아놓고, 책상 모퉁이에 비스듬히 꿇어앉아서, 윤광 있는 쌍거풀진 눈귀를 처뜨리며, 약간 힐책하는 어조로,

 “그 왜 그러세요. 일 년 만에 퍽도 변하셨습니다 그려.”

하며, 수기(羞氣)가 있는 듯이 고개를 숙여버렸다.

 “글쎄요, 내가 그렇게 변했을까. 그러나 을라씨의 얼굴이야말로 참 변하셨소 그려! 그래도 그 눈만은 여전하지만! 하하하.”

 나는 일부러 이런 소리를 기탄없이 해보았다. 어찌한 까닭인지, 아까 올 때에는 퍽 망설이기도 하고, 만나면 어떠한 태도로 대해야 할지 어금니에 무엇이 끼인 것같이 이상하게 근질근질하더니, 지금 여기 들어와서 이렇게 마주 앉고 보니, 어디까지든지 조롱을 해주겠다는 생각이, 반성할 여유도 없이 머리를 압도했다.

 “차차 늙어가니까, 그렇지요. 그렇게 내 얼굴이 변했을까요?”

 의외에 내가, 파탈한 태도로 수작을 하는 데에 안심한 을라는, 책상 위에 버텨놓았던 큼직한 석경을 들어서 들여다보며, 또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벌써 방학이에요? 나두, 이번에는 나갔다가 들어올 텐데, 동행하실까요?”

 “작히나 좋겠소. 그러나 이 밤으로 준비하겠소?”

 “이 밤으루?”

 “난, 내일 아침차로 떠날 텐데요.”

 “이틀만 연기하시면 되지, 내일이 토요일이지요. 적어도 내일까지만 묵으세요.”

 “무어 할 일이 있나요. 모처럼 만나러 왔던 사람은 정사를 해버렸고!……나도 정사나 하겠다는 사람이나 있으면 묵을지 모르겠지만…….”

 “참 변한다 변한다 하니 이선생같이 변하신 양반이 어디 계세요. 아아, 참…….”

 을라는 갑작스레 무엇에 감격한 듯이, 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을 직각한 나는, 얄밉기도 하고, 일종의 모욕 같은 생각이 나서,

 “그래, 그 변한 원인이 어디 있단 말씀이오? 아마 을라씨에게 있겠지? 그렇다면 책을 져야 하지 않소?”

 나는, 말끝에 ‘되지 않게!’라는 한마디가 혀끝까지 나오는 것을, 입술로 비벼 버렸기 때문에, 애를 써 한 말이 내 얼굴의 표정도 쳐다보지 않는 을라에게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혹 알고도 모르는 체하는 버릇도, 이 계집애에게는 항용 수단이지만, 하여간 을라는 내 말에 잠깐 얼굴을 붉히는 듯하더니, 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그런 소린, 해 무엇 하세요. 그러나 참 정말 모레쯤, 나하고 같이 가세요. 같이 못 가시더라도, 내일 오후부터는 자유니까 이야기할 것도 있고, 구경도 시켜드릴게…… 하여간 그리 급한 볼일은 없지요?”

 단조와 적막과 이성에 대한 기갈에 고민하던 그때의 을라에게는, 나의 방문은 의외일 뿐 아니라, 진심으로 반가웠던 모양이었다.

 “글쎄 그래도 좋지만, 신호는, 멀미가 나도록 구경을 했는데, 또 무슨 구경을 해요?”

 “아 참, ……그러면 어차피 대판 공회당의 음악회에 갈까 하는데요, 거기에라도 가시지. 토요일하구 일요일하군, 이 근방 학생들은 죄다 제 집에 나가서 자기두 하구…….”

 ‘말도 잘하지만 수완도 할 만하다.’─╴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작년 가을에 기숙사로 들어가기 전에, 여염집 하숙 주인인지 어떤 절간의 중인지 하는 일본놈하고 관계가 있었다는 소문을 생각하며, 또다시 을라의 희고 동글납대대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무려나 되어가는 대로 합시다. 그러나 요새 병화군은 어데 있나요?”

 “그걸 왜 날더러 물어보세요? 아시면 당신이 더 잘 아시겠지요.”

 을라는 병화의 말을 듣더니, 별안간에 얼굴을 붉히고, 독기 있는 소리로 톡 쏘았다.

 ‘나도 퍽 대담하게 되었지만, 너도 참 대담하구나’ 하며 나는 천연히,

 “아뇨. 요샌 서울 있는지 몰라서 물어본 것이에요. 그러나 그다지 놀라실 게 무엇이에요?”

하고 대답하였다.

 을라도 지금 자기의 말이, 오히려 우스웠다고 후회하는 듯이, 소리를 낮추며,

 “글쎄, 병화씨하고 무슨 깊은 관계가 있는 듯이, 늘 오해를 하시지만…….”

 “누가 오해는 무슨 오해를 해요. 사람에게 러브를 할 자유조차 없다면, 죽어야 마땅하지…… 오해를 하거나 육해를 하거나 아주 육회(肉膾)를 하거나, 그까짓 게 다 무어예요. 하하하. 참 너무 늦어서 미안하외다. 인젠 차차 가봐야지…….”

하고 나는 모자를 들어서 만적만적하다가,

 “에잇 실미적지근해 못 살겠다.”

 이같이 토하듯이 혼잣말처럼, 한마디 하고 와락 일어났다.

 “왜 그러세요. 그렇게 달음박질 가시려면, 왜 내리셨에요…… 그런데 무엇이 실미적지근하시단 말씀이에요?”

 을라는 실미적지근하다는 말에, 무슨 활로나 얻은 듯이 반기는 낯빛으로, 그대로 앉아서 나를 만류한다.

 “누가 을라씨 보려구 내린 줄 아슈? 다 만날 사람이 있어서, 불원천리하고 온 것이라서 마음에두 없는 놈하고, 폭발탄을 지고, 불구덩이루 들어갔더니, 세상은 고르지도 않아. 대체 날더런 어쩌란 말인구!”

 “참 정말이에요? ……누구에요? ……일본 여자 조선 여자?”

 어리광하듯이 생글생글 웃으며 쳐다보는 을라의 얼굴은, 아무리 보아도 이십오륙 세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건 알아 뭘 하시려우. 그러나 참 어서 가야지! 또 뵙시다.”

하고 나는 어쩌나 보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래도 손을 내어줄 용기는 없었던지, 을라는 물끄러미 내 얼굴만 쳐다보다가,

 “지금 가시면 어데로 가실 작정이에요? 내일 떠나시진 않을 테지요?”

 “되어가는 대로 하지요. 여관에 가서 생각을 해봐서 마음 내키는 대로 하지요.”

 “내일 음악회는, 참 좋아요. 동경서 일류들만 와서 한다는데…….”

 “일류인지 이류인지, 송장을 뻐듯드려놓고, 음악회란 다 뭐예요. 이에 가겠습니다. 사감이나 나오면 누님 소리까지 하면서 예 있을 필요가 있나!”

하고, 나는 방문을 열고 훌쩍 나섰다. 을라도 하는 수 없이 쫓아 나오며,

 “왜, 날더러 누이라구 못하실 게 뭐야. 그런데 송장이란 무슨 소리세요? 왜그리 이상스럽게만 구세요. 수수께끼 같은 소리만 하시고, 난 무엇에 홀린 것 같습니다 그려.”

 나는 나란히 서서 층계로 내려오며, 지금 나가는 이유를 이야기해 들려주었다. 을라는 깜짝 놀라는 듯한 표정으로,

 “그거 안되었습니다 그려! 그러면서 여긴 왜 들르셨에요? 남자란 참 무정도 하지, 어쩌면 부인이 돌아가셨는데…….”

하며, 책망을 하는 듯한 을라의 얼굴에는, 그럴듯하게 보아서 그런지, 이때껏 멋모르고 만류한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일편으로는 분하기도 하다는 낯빛이 돌며, 눈가 입이 샐록해졌다. 그러나 내가 불쑥 온 것이 무슨 의미가 없지는 않은가 하는 일종의 기대가 있는 듯도 하다.

 “그러기에 남자하고는, 잇새도 어우르질 마슈. 더구나 나같은 놈하군. 자, 그러면…….”

 나는 이같이 한마디 던져두고, 인사하는 소리도 채 다 듣기 전에, 캄캄한 문밖으로 휙휙 나와버렸다.

 깔깔 웃고 싶으니만치 인사 사나운 유쾌를 감하면, 을라와 작별하고 나온 나는, 그날 밤은 신호 역전의 조고만 여관 뒷방에서 고요히 새우고, 그 이튿날 저녁에야 연락선을 타게 되었다.

 방축이 처져 나오듯 별안간에 꾸역꾸역 토해 나오는 시꺼먼 사람 떼에 섞여서 나는 연락선 대합실 앞까지 왔다.

 하관에 도착하면 그 머릿살 아픈 으레 하는 승강이를 받기가 싫기에, 배로 바로 들어갈까 했으나, 배에는 아직 들이지 않는 모양, 나는 하는 수 없이 대합실로 들어갔다. 벤또나 살까 하고 매점 앞에 가서 서 있으려니까 어느 틈에 벌써 눈치를 챘던지, 인버네스3)를 입은 낯선 친구가 와서, 모자를 벗으며 국적이 어디냐고 묻는다. 나는 암말 안 하고 쳐다보다가, 명함을 꺼내서 내밀고 훌쩍 가게로 돌아서버렸다.

 “본적은?”

 내 명함을 받아들고, 내가 흥정을 다 하기까지, 기다리고 있던 인버네스는 또 괴롭게 군다. 나는 그래도 역시 잠자코, 그 명함을 도로 빼앗아서 주소를 기입해서 주고 나서, 사놓았던 물건을 들고 짐 놓은 자리로 와서 앉았다. 궐자는 또 쫓아와서,

 “연세는? 학교는? 무슨 일로? 어디까지…….”

하며, 짓궃게 승강이를 부린다. 나는 실없이 화가 나서, 그까짓 건 물어 무엇에 쓰려느냐고 소리를 지르려다가, 외마디소리로 간단간단히 대답을 해주고, 부리나케 짐을 들고 대합실 밖으로 나와 버렸다.

 “미안합니다 그려.”

하며 좀 비웃는 듯이 인사를 하는 궐자의 흘겨 뜨는 눈에는 뱃속에서 바지랑대가 치밀어 올라온다는 것이 역력히 보였으나, 내 뱃속도 제게 지지 않을 만큼 썩 불편했다.

 승객들은 우글우글하며 배에 걸어놓은 층층다리 앞에 일렬로 늘어섰다. 나도 틈을 비집고 그 속에 끼었다.

 아스팔트 칠(漆) 한 통에 석탄산수를 담고 썩은 생선을 절이는 듯한 형언할 수 없는 악취에, 구역질이 날 듯한 것을 참으며, 제가끔 앞을 서려고 우당퉁탕 대는 틈을 빠져서, 겨우 삼등실로 들어갔다. 참외 원두막으로서는, 너무도 몰취미하고 더러운 이층 침대 위에다가 짐을 얹어놓고 옷을 갈아입은 후에, 나는 우선 목욕탕으로 뛰어 들어갔다.

 내가 제일착이려니 하였더니, 벌써 삼사 인의 욕객이 욕탕 속에 들어앉아서 떠들어댄다.

 “오늘은 제법 까불릴걸!”

 “뭘, 이게 해변가니까 그렇지, 그리 세찬 바람은 아니야.”

 시골서 갓 잡아 올라오는 농군인 듯한 자가, 온유해 보이는 커다란 눈이 쉴새없이 디굴디굴하는 검고 우악한 상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로 돌리면서 말을 꺼내니까, 상인인 듯한 동행자가 이렇게 대꾸를 하였다.

 “조선은 지금쯤 꽤 추울걸?”

 “그렇지만 온돌이 있으니까, 방 안에만 들어엎디었으면 십상이지.”

 조선 사정에 익은 듯한 상인 비슷한 사람이 설명을 했다.

 “응, 참 온돌이란 게 있다지.”

 촌뜨기가 이렇게 말을 하니까, 나하고 마주 앉아 있는 자가, 암상스러운 눈으로 그자를 말끔히 쳐다보더니,

 “노형 처음이슈?”

하며 말참례를 하기 시작했다. 남을 멸시하고 위압하려는 듯한 어투며, 뾰족한 조동아리가, 물어보지 않아도 빚놀이쟁이의 거간이거나 그따위 종류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이 추위에, 어째 나섰소? 어딜 가기에?”

 “대구에 형님이 계신데, 어머님이 편치 않으셔서…….”

 “마침 잘되었소그려. 나도 대구까지 가는 길인데. ……백씨께선 무얼 하슈?”

 “헌병대에 계시죠.”

 “네? 바로 대구 분대에 계셔요? 네…… 그러면 실례입니다만, 백씨께서는 누구세요? 뭘로 계셔요?”

 시골자의 형이 헌병대에 있다는 말에, 나하고 마주 앉은 자는 반색을 하면서, 금시로 말씨가 달라진다. 나는 그자의 대추씨 같은 얼굴을 또 한 번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네, X라고 하지요…… 아직 군조(軍曹)예요. 혹 형공도 아십니까? 그런데 노형은 조선엔 오래 계신가요?”

 “네.”

 궐자는 시골자를 한참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암, 알구말구요. 그 양반은 나를 모르실지 모르지만…… 아, 참 나요? 그럭저럭 오륙 년이나 ‘요보’ 틈에서 지냈습니다.”

 “에구, 그럼 한밑천 잡으셨겠쇠다 그려.”

 이번에는 상인 비슷한 자가 입을 벌렸다.

 “웬걸요, 이젠 조선도 밝아져서, 좀처럼 한밑천 잡기는…….”

 “그러나 조선 사람들은 어때요?”

 “요보 말씀이에요? 젊은 놈들은 그래도 제법들이지마는, 촌에 들어가면 대만(臺灣)의 생번(生蕃)보다는 낫다면 나을까. 인제 가서 보슈…… 하하하.”

 ‘대만의 생번’이란 말에, 그 욕탕에 들어앉았던 사람들이, 나만 빼놓고는 모두 킥킥 웃었다. 나는 가만히 앉았다가, 무심코 입술을 악물고 쳐다보았으나, 더운 김에 가려서, 궐자들에게는 자세히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실 말이지, 나는 그 소위 우국지사는 아니다. 자기가 망국 민족의 일 분자라는 사실은 자기도 간혹은 명료히 의식하는 바요, 따라서 고통을 감하는 때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이때껏 망국 민족의 일 분자가 된 지 벌써 칠 년 동안이나 되는 오늘날까지는, 사실 무관심으로 지냈고, 또 사위가 그러하게, 나에게는 관대하게 내버려두었었다. 도리어 소학교 시대에는, 일본 교사와 충돌을 하여 퇴학을 하고, 사립학교로 전학을 한다는 둥, 순결한 어린 마음에 애국심이 비교적 열렬하였지만, 차차 지각이 나자마자 동경으로 건너간 뒤에는, 간혹 심사 틀리는 일을 당하거나, 일 년에 한 번씩 귀국하는 길에, 하관에서나 부산·경성에서 조사를 당할 때에는 귀찮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지만 그때뿐이요, 그리 적개심이나 반항심을 일으킬 기회가 적었었다. 적개심이나 반항심이란 것은 압박과 학대에 정비례하는 것이요, 또한 활로를 얻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러나 칠 년이나 가까이 동경에 있는 동안에, 경찰관 이외에는 나에게 그다지 민족 관념을 굳게 의식하게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원래 정치 문제에 대해 무취미한 나는, 이때껏 별로 그런 문제로 머리를 썩여본 일이 전연히 없었다 해도 가할 만했다. 그러나 이 년 이 년 세월이 갈수록, 나의 신경은 점점 흥분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것을 보면 적개심이라든지 반항심이라는 것은, 보통 경우에 자동적, 이지적이라는 것보다는 피동적, 감정적으로 유발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본 사람은, 소소한 언사와 행동으로 말미암아, 조선 사람의 억제할 수 없는 반감을 비등케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민족적 타락에서 스스로 구해야겠다는 자각을 주는 가장 긴요한 동인이 될 뿐이다.

 지금도 목욕탕 속에서 듣는 말마다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것이 없지만, 그것은 독약이 고구(苦口)나 이어병(利於病)이라는 격으로, 될 수 있으면 많은 조선 사람이 듣고, 오랜 몽유병에서 깨어날 기회를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없지 않다.

 그들은 여전히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그래 촌에 들어가면 위험하진 않은가요?”

 처음 간다는 시골자가 또다시 입을 벌렸다.

 “뭘요, 어딜 가든지 조금도 염려 없쇠다 생번이라 해도, 요보는 온순한 데다가, 도처에 순사요 헌병인데, 손 하나 꼼짝할 수 있나요. 그걸 보면 데라우치(寺內)상이 참 손아귀 힘도 세지만 인물은 인물이야!”

 매우 감격한 모양이다.

 “그래 촌에 들어가서 할 게 뭐예요?”

 “할 것이야 많지요. 어딜 가기로 굶어 죽을 염려는 없지만, 요새 돈 모을 것이 똑 하나 있지요. 자본 없이 힘 안 들고…… 하하하.”

 “그런 벌이가 어디 있어요?”

 촌뜨기 선생은 그 큰 눈을 더 둥그렇게 뜨고, 일종의 기대와 호기심을 가지고 마주 쳐다보는 모양이다.

 “왜요, 한번 해보시려우?”

 그는 이렇게 한마디 충동이며, 무슨 의미나있는 듯이 그 악독해 보이는 얼굴에 교활한 웃음을 띠고 한참 마주 보다가,

 “시골서 죽도록 땅이나 파먹다가 거꾸러지는 것보다는 편하고 재미있습니다.……게다가 돈은 쓰고 싶은 대로 쓸 수 있고…….”

 여전히 뱅글뱅글 웃으면서, 이 순실한,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그대로 있는 듯한 촌뜨기를 꾄다.

 “그런 선반의 떡 같은 장사가 있으면 하다뿐이겠소.”

 촌뜨기는 차차 침이 말라온다.

 “그러나 밑천이 아주 안 드는 것은 아니지요. ……우선 얼마 안 되지만 보증금을 들여놓아야 하고, 양복이나 한 벌 장만하여야 할 터이니까…… 그러나 노형이야, 형님이 헌병대에 계시다니까 신분은 염려 없을 터인 고로 보증금은 없어도 좋겠지.”

 제 딴은 누구나 그 직업을 얻으려면, 보증금을 내놓는 법인데, 특별히 그것만은 면제해주겠다는 듯이, 오만한 태도로 어깨를 뒤틀며, 지나가는 말처럼 또 한마디 했다. 그러나 정작 그 직업의 종류가 무엇인가는 용이히 가르쳐주지 않는다. 실상 곁에서 엿듣고 앉아 있는 나 역시 궁금하지만, 이러한 소리를 듣는 시골 궐자는, 더한층 호기의 눈을 번쩍이며 앉아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을 토설치 않는 것은, 나와 그 외의 두세 사람이 들을까 꺼려서 그러는 것 같기도 하고, 또는 그 시골뜨기가, 더욱더욱 열(熱)해진 뒤에 자기의 부하가 되겠다는 다짐까지 받고서 이야기하려는 수단 같기도 하였다.

 “그래 그런 훌륭한 직업이 무엇인데, 어디 있어요?”

 이번에는 그 시골자의 동행인 듯한 사람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욕탕에서 시뻘겋게 단 몸뚱어리를 무거운 듯이 끌어내며 물었다. 그자도 물속에서 불쑥 일어서서 수건을 등 뒤로 넘겨서, 가로잡고 문지르며, 한번 목욕탕 속을 휘 돌아다보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네의 대화에는 무심히 한구석에 앉아 있는 것을 살펴본 뒤에, 안심한 듯이 비로소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벌렸다.

 “실상은 쉬운 일이에요. 나도 이번에 가서 해 오면 세 번째나 되오마는, 내지의 각 회사와 연락해가지고, 요보들을 붙들어 오는 것인데…… 즉 조선 쿠리(苦力) 말씀요. 노동자요. 그런데 그것은 대개 경상남북도나, 그렇지 않으면 함경, 강원, 그다음에는 평안도에서 모집을 해야 하지만, 그중에도 경상남도가 제일 쉽습니다. 하하하.”

 그자는 여기 와서 말을 끊고 교활한 듯이 웃어버렸다.

 나는 여기까지 듣고 깜짝 놀랐다. 그 가련한 조선 노동자들이 속아서, 지상의 지옥 같은 일본 각지의 공장으로 몸이 팔려가는 것이, 모두 이런 도적놈 같은 협잡 부랑배의 술중(術中)에 빠져서 그러는구나 하는 생각을 할 제, 나는 다시 한번 그자의 상판대기를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옳지! 그래서 이자의 형이 헌병 군조라는 것을 듣고 이용할 작정으로 이러는 게로군!’

 나는 이런 생각도 하여보며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앉았었다.

 궐자는 벙벙히 듣고 앉아 있는 그 두 사람의 얼굴을 등분(等分)해 보고 빙긋 웃고 나서, 또다시 말을 계속한다.

 “왜 남선 지방에 응모자가 많고 북으로 갈수록 적은고 하니, 이 남쪽은 내지인이 제일 많이 들어가서 모든 세력을 잡기 때문에, 북으로 쫓겨서 남만주로 기어들어 가거나, 남으로 현해탄을 건너서거나 두 가지 중에 한 가지 길밖에 없는데, 누구나 그늘보다는 양지가 좋으니까, ‘제미 붙을, 일 년 열두 달 죽도록 농사를 지어야 주린 배를 불리긴 고사하고 반년짝은 강냉이나 시래기로 부증이 나서 뒈질 지경이면, 번화한 대판, 동경에 가서 흥청망청 살아보겠다’ 수작으로, 나두 나두 하고 청을 하다시피 해오는 터인데, 그러나 북선 지방은 인구도 적거니와 아직 우리 내지인의 세력이 여기같이는 미치지를 못했으니까, 비교적 그놈들은 편안히 살지만, 그것도 미구에는 동냥 쪽박을 차고 나서게 되리다. 하하하.”

 자기 강설에 열복하는 듯이, 연해 ‘옳지! 옳지! 옳지!’ 하며 들어주는 것이, 유쾌하기도 하고 자기의 견문에 자기도 만족하다는 듯이, 또 한 번 깔깔깔 웃었다.

 “그래 그렇게 모집을 해 가면, 얼마나 생기나요?”

 촌뜨기는 구수하다는 듯이 침을 흘리며 묻는다.

 “얼마가 뭐요. 여비가 있지, 일당이 또 있지, 게다가 한 사람 모집하는 데에 일 원 내지 이 원이니까─╴그건, 회사와 일의 종류에 따라서 다르지만, 가령 방적회사의 여공 같은 것은 임금도 싼 데다가 모집원의 수수료도 제일 헐하고, 광부 같은 것은 지금 시세로도 일 원 오십 전으로 이 원 오십 전까지라우. 가령 지금 천 명만 맡아가지고 와서 보구려. 이삼 삭 동안에 여비나 일당에서 남는 것은, 그까짓 것 다 제하고라도, 일천삼사백 원, 잘만 되면 근 이천 원은 간데 없는 것일 게니, ……하하하, 나도 맨 처음에─╴그건 제주도에서 모집해 갔지만─╴그때에 오백 명 모아다 주고 실살고로 남긴 것이 팔구백 근 천 원이었고, 둘째 번에는 올 가을에 팔백 명이나 북해도 탄광에 보내고, 근 이천 원 돈이 들어왔다우.”

 노동자 모집원이라는 자는 입의 침이 마르게 천 원, 이천 원을 신이 나서 뇌며 목욕탕 속에서 나왔다.

 “예에, 예에.”

하며, 일평생에 들어보지도 못하던 천 원 이천 원 소리에 누을 휘둥그렇게 뜨고 귀를 기울이고 앉았던 시골자는, 때를 다 밀었는지, 그 장대한 동색(銅色) 거구를 벌떡 일으켜 다시 욕탕 속에 출렁 집어넣으면서, 만족한 듯이 또다시 말을 붙였다.

 “그래 조선 농군들이 가서, 그런 공사일을 잘들 하나요?”

 “잘하구 못하는 것은 내가 상관할 것 무엇 있소마는, 하여간 요보는 말을 잘 듣고 힘드는 일을 잘하는 데다가, 임은(賃銀)이 헐하니까 안성맞춤이지. ……그야 처음 데려갈 때에는 품삯도 많고, 일은 드러누워서 떡 먹기라고 푹 삶아야 하긴 하지만, 그래도 갈 노자며, 처자까지 데리고 가게 하고, 게다가 빚까지 갚아주는데야 제아무런 놈이기로 안 따라나설 놈이 있겠소. 한번 따라나서기만 하면야, 전차(前借)가 있는데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지. 일이 고되거나 품이 헐하긴 고사하고 굶어 뒈진다기루 하는 수 있나, 하하하.”

 벌써 부하가 되었다는 듯이, 득의만면하여 모집 방법의 비술까지 도도히 설명을 해주고 앉았다.

 나는 좀더 들으려고 일부러 머뭇머뭇하며 앉아 있으려니까, 승객이 다 올라탔는지, 별안간에 욕객의 한 떼가 디밀어 들어오기에, 금시초문의 그 무서운 이야기를, 곰곰 생각하며 몸을 훔치기 시작하였다.

 스물두셋쯤 된 책상도련님인 그때의 나로서는,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인생이 어떠하니 인간성이 어떠하니 사회가 어떠하니 해야, 다만 심심파적으로 하는 탁상의 공론에 불고ᄒᆞᆫ 것은 물론이다. 아버지나, 그렇지 않으면, 코빼기도 보지 못한 조상의 덕택으로, 글자나 얻어 배웠거나 소설 권이나 들춰 보았다고, 인생이니 자연이니 시니 소설이니 한 대야 결국은 배가 불러서, 포만의 비애를 호소함일 따름이요, 실인생, 실사회의 이면의 이면, 진상의 진상과는 아무 계관도 연락도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지금 하는 것, 이로부터 하려는 일이 결국 무엇인가 하는 의문과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 년 열두달 죽도록 애를 쓰고도, 반년짝은 시래기로 목숨을 이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으니까……’ 하는 말을 들을 제, 그것이 과연 사실일까 하는 의심이 날 만치, 나는 귀가 번쩍하였다. 나도 팔구 세 전까지는 부모의 고향인 충청도 촌 속에서 자라났고, 그 후에 일 년에 한두 번씩은 촌락에 발을 들여놓아보았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소작인의 생활이 참혹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시를 짓는 것보다는 밭을 갈라고 한다. 그러나 밭을 가는 그것이 벌써 시가 아니냐. 사람은 흙에서 나와서 흙에 돌아간다. 흙의 방순한 냄새에 취할 수 있는 자의 행복이여! 흙의 북돋아 오르는 생기야말로, 너 인간의 끊임없는 새 생명이니라…….’

 이러한 의미로 올봄에 산문시를 쓰던, 자기의 공상과 천려(淺慮)가 도리어 부끄러웠다. 흙의 냄새가 방순치 않다는 것도 아니다. 그 향기에 취할 수 있는 자가 행복스럽지 않다는 것도 아니다. ‘조반 후의 낮잠은 위약(胃弱)’이라는 고등 유민의 유행병에 걸릴까 보아서 대팻밥모자에 연경이나 쓰고, 아침저녁으로 호미 자루를 잡는 것이 행복스럽지 않고 시적(詩的)이 아니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저러나, 일 년 열두 달, 우마(牛馬) 이상의 죽을 고역을 다 하고도, 시래기죽에 얼굴이 붓는 것도 시일까? 그들이 삼복의 끓는 햇빛에, 손등을 데면서 호미 자루를 놀릴 때, 그들은 행복을 느끼는가? 그들은 흙의 노예다. 자기 자신의 생명의 노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는 것은 다만 땀과 피뿐이다. 그리고 주림뿐이다. 그들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뛰어나오기 전에, 벌써 확정된 유일한 사실은, 그들의 모공이 막히고 혈청이 마르기까지, 흙에 그 땀과 피를 쏟으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열 방울의 땀과 백 방울의 피는 한 톨의 나락을 기른다. 그러나 그 한 톨의 나락은 누구의 입으로 들어가는가? 그에게 지불되는 보수는 무엇인가─╴주림만이 무엇보다도 확실한 그의 받을 품삯이다.

 나는 몸을 다 훔치고 옷 입는 터전으로 나왔다.

 나는 사람, 드는 사람, 한참 복작대는 틈에서, 부리나케 양복바지를 꿰며 서 있으려니까, 어떤 보지 못하던 친구가, 문을 반쯤 열고 중절모자를 쓴 대가리를 불쑥 디밀며, 황당한 안색으로 방 안을 휘휘 둘러보더니,

 “실례올시다만, 여기 이인화란 이가 계십니까?”

하고 묻는다.

 “네에, 나요. 왜 그러우?”

 나는 궐자의 앞으로 두어 발짝 나서며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궐자는 한참 찾아다니다가 겨우 만난 것이 반갑다는 듯이 빙글빙글 웃으며,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서서 이리 좀 나오라고 명령하듯이 소리를 친다. 학생복에 망토를 두른 체격이며, 제 딴은 유창하게 한답시는 일어의 어조가, 묻지 않아도 조선 사람이 분명하다. 그래도 짓궂게 일어를 사용하고 도리어 자기의 본색이 탄로될까 봐 염려하는 듯한 침착지 못한 행색이, 나의 눈에는 더욱 수상쩍기도 하고, 근질근질해 보이기도 하였다. 나의 성명과 그 사람의 어조를 듣고, 우리가 조선 사람인 것을 짐작한 여러 일인의 시선은, 나에게서 그자에게, 그자에게서 나에게로 올지 갈지 하는 모양이었다. 말하자면 우리 두 사람은, 일본 사람 앞에서 희극을 연작(連作)하는 앵무새의 격이었다.

 “무슨 이야긴지, 할 말 있건 예서 하구려.”

 나는 기연가미연가하며, 역시 일어로 대답하였다.

 “하여간 이리 좀 나오슈.”

 말씨가 벌써 그러한 종류의 위인인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그 언사의 오만한 것이 첫째 귀에 거슬려서, 다소 불쾌한 어조로,

 “그럼 문을 닫고 나가서 기다리우.”

하며 소리를 지르고, 다시 내 자리로 와서 주섬주섬 옷을 마저 입기 시작하였다. 여러 사람의 경멸하는 듯한 시선은, 여전히 내 얼굴에 거미줄 늘이듯이 어리는 것을 깨달았다. 더구나 아까 이야기하던 세 사람은, 힐끔힐끔 곁눈질을 하는 것이 분명했으나, 나는 도리어 그 시선을 피했다. 불쾌한 생각이 목구멍 밑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을 뿐 아니라, 어쩐지 기운이 줄고 어깨가 처지는 것 같았다.

 옷을 다 입고 문밖으로 나오니까, 궐자는 맞은편에 기대어 웅숭그리고 서서 기다리는 모양이다.

 “미안합니다만, 나하고 짐을 가지고 저리 좀 나가십시다.”

 뒤를 쫓아오면서 애원하듯이 말을 붙이는 양이, 아까와는 태도가 일변하였다.

 “댁이 누구길래, 어딜 가잔 말요?”

 “에에, 참, 나는 ××서(署)에서 왔는데, 잠깐 파출소로 가십시다.”

 자기의 직무도 명언하지 않고 엎어놓고 가자고 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듯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기가 일인 행세를 하는 것이 내심으로 부끄럽고, 또한 나에게 ‘노형이 조선 양반이 아니오?’ 하고, 탄로나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어서 앞이 굽는다는 듯이, 언사와 태도는 점점 풀이 죽고 공손해졌다. 이것을 본 나는 도리어 불쌍하고 가엾은 생각이 나서, 층계를 느런히 서서 내려가다가 궐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무 의미 없이 빙글빙글 웃는 그 얼굴에는, 어색해하는 빛이 역력히 보였다. 나는 잠자코 자기 자리로 가서 순탄한 말로,

 “나는 나갈 새도 없고, 짐이라곤 이것밖에 없으니, 혼자 가지고 가서 조사할 게 있건 조사하고, 갖다주슈.”

하고 가방 두 개를 들어내서 주었다.

 “안 돼요, 그건. 입회를 해저야 이걸 열죠. 그러지 마시고 잠깐만 나가주세요. 이건 내가 들고 갈 테니.”

 선실 내의 수백의 눈은, 모두 나에게로 모여들었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얼굴이 화끈화끈해 더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도적질이나 한 혐의가 있단 말이오? 가지고 가서 마음대로 하라는데 야, 또 어쩌란 말이오. 정 그럴 테면 이리로 들어와서 조사를 하라고 하구려. 배는 떠나게 되었는데 나가자는 사람도 염치가 있지.”

 나는 분이 치밀어 올라와서 이렇게 볼멘소리를 질렀다.

 “그러지 마시고 오늘 이 배로 꼭 떠나시게 할 테니, 제발 잠깐만 나가주세요. 자꾸 시간만 갑니다. ……여기선 창피하실까 봐 그러는 것입니다.”

 “창피하다? 흥, 창피? 얼마나 창피하면 예서 더 창피할까. 그런 사폐 볼 것 없이 마음대로 하슈!”

 홧김에 이렇게 소리는 질렀으나, 그 애걸하는 양이 밉살스러운 중에도 가엾어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요, 어느 때까지 승강이만 하다가는 궐자 말마따나, 이로울 것도 없고 시간만 바락바락 가겠기에, 나가기로 결심하고 윗저고리를 집어 입고 나서, 어떻게 될지 사람의 일을 몰라서, 아까 사가지고 들어온 벤또 그릇까지 가지고, 가방을 들고 앞서 나가는 형사의 뒤를 따라섰다.

 형사가 큰 성공이나 한 듯이 득의만면하여,

 “진작 그러시지요…….”

하며 웃는 그 얼굴에는, 달래는 듯하기도 하고 빈정대는 듯한 빛이 보였다. 나는 무심중에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깨달았다.

 갑판으로 나와서, 승강구까지 불러다가 조사를 하라 해보았으나, 그것도 들어주지 않아서 화가 나는 것을 참고, 결국 잔교(棧橋)로 내려섰다.

 대합실 앞까지 오니까, 아까 내 명함을 빼앗아간 인버네스가 양복에 외투를 입은 또 한 사람과 무시무시하게 경계를 하고 섰다가, 우리를 보더니 아무 말 안 하고 기선 화물을 집채같이 쌓아놓은 뒤로 앞서 들어갔다. 가방을 가진 자도 아무 말 안 하고 따라섰다. 나는 가슴이 선뜩하는 것을 참고, 아무 반항할 힘도 없이, 관에 들어가는 소같이 뒤를 대어 섰다. 네 사람이 예정한 행동을 취하는 것처럼, 묵묵하고 침중한 가운데에 모든 행동을 경쾌하게 하는 것이, 마치 활동사진에서 보는 강도단이나, 그것을 추격하는 탐정 같았다. 네 사람은 하물에 가려 행인에게 보이지 않을 만한 곳에 와서 우뚝우뚝 섰다. 대합실의 유리창에서 흘러나오는 전광만은, 양복쟁이의 안경테에 소리 없이 반짝 비쳤다.

 “오늘 하루 예서 묵지 못하겠소.”

 양복쟁이가 우선 입을 벌리며 가방을 빼앗아 들었다. 좁은 골짜기에서 나직하게 내는 거세고도 굵은 목소리는, 이 세상에서 들어본 목소리 같지 않았다. 나는 얼빠진 놈 모양으로, 아무 생각 없이 안경알이 하얗게 어룽어룽하는 그자의 퉁퉁하고 둥근 상을 쳐다보며 섰었다. 그자도 나의 표정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입술을 악물고, 위협하는 태도로 노려보다가 별안간에 은근한 어조로,

 “하루 쉬어서 가시구려.”

하는 양이, 마치 정다운 진객을 만류하는 것 같았다. 무슨 죄가 있는 것은 아니나, 이같이 으슥한 골짜기에서, 을러보았다 달래보았다 하는 것을 당하는 것은 나의 수명이 줄어들어가는 것 같았다. 만일 내가 부호로서 이런 꼴을 당했다며, 여부없이 강도나 맞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대답을 하려 하였으나, 참 정말 기구멍이 막혀서 입을 벌릴 기운이 없었다.

 “묵긴 어디서 묵으란 말이오? 유치장에나 가잔 말씀요? 이 배에 떠나게 한다는 약조를 하였기 때문에 나왔으니까 약조대로 합시다.”

 이렇게 강경히 주장은 하면서도, 마음은 평형을 잃고, 신경은 극도로 긴장했다. 대체 나 같은 위인은 경찰서의 신세를 지기에는 너무도 평범하지만, 그래도 이 배만 놓치면 참 정말 유치장에서 욕을 볼 것은 뻔한 일, 하늘이 두 쪽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 배를 놓쳐서는 큰일이라고 결심을 단단히 하고서도 웬일인지 가슴은 여전히 두근두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예서 잠깐 할까?”

 양복쟁이가 나와 인버네스를 등분해 보며, 저희끼리 의논을 한다. 나는 우선 마음을 놓았다.

 “네, 그러지요.”

 인버네스가 찬성을 하니까 양복쟁이는 나에게로 향하여,

 “이것 좀 열어보아도 상관없겠지요?”

하고 열쇠를 내라고 청한다. 나는 곧 승낙을 했다. ……가방은 양복쟁이의 손에서 용이히 열렸다.

 어린아이 관(棺) 같은 긴 모양의 트렁크를, 유리창 그림자가 환히 비치는 하물 쌓인 밑에다가 열어놓고 들쑤시는 동안에, 그 옆에서 인버네스는 조그만 손가방을 조사하고 앉았다. 나는 이편에 느런히 서 있는 학생복 입은 자와 함께, 두 사람이 네 손길만 내려다보고 섰었다. 큰 트렁크를 맡은 자는 잠깐 쑤석쑤석하여보더니, 그 위에 얹어놓은 양복이며 화복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휙휙 집어서, 내 옆에 선 형사에게 주섬주섬 던져주고 나서, 그 밑에 깔렸던 서류 뭉텅이와 서적 몇 권을 분주히 들척거리고 앉았다. 조그만 트렁크 속에서 소득이 없었던지 그대로 뚜껑을 닫아서 옆에 놓고 인버네스도 다시 큰 가방으로 달려들어서 들여다보고 앉았다가, 양복쟁이의 분부대로 서적을 한 권씩 들어 보아가며, 일일이 책명을 수첩에 기입하며 앉았다. 가방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형사의 네 손은, 일 분 이 분 시간이 갈수록 가속도로 움직인다. 나는 또 무슨 망령이나 부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의혹을 가지고, 전광에 벌겋게 번쩍이는 양복쟁이의 곁뺨을 노려보고 섰었다.

 여덟 눈과 네 개의의 손은 앞에 뉘어놓은 트렁크 한 개에 모든 정력을 집중하고, 일 초간의 빈틈 없이 극도로 긴장했으면서도 여덟 입술은 풀로 붙인 듯이, 아무도 입을 벌리려는 사람이 없었다. 절대 침묵이 한 칸통쯤 되는 컴컴한 골짜기에 밀운(密雲)같이 가득히 찼다. 비릿한 해기(海氣)를 품은 차디찬 저녁 바람이 귓가로 솔솔 지날 때마다, 바삭바삭하는 종잇장 구기는 소리밖에 나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보다 큰 배에 짐 싣는 인부의 소리도, 잔교 밑에 와서 부딪는 출렁출렁하는 파도 소리도, 아마 이 네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무겁고 찌뿌드드한 침묵 속에 흐릿한 불빛에 싸여서 서고 앉고 하여 꾸물꾸물하는 양이, 마치 바다에 빠진 시체를 건져놓고 검시(檢屍)나 하는 것 같이 처량하고 비장하며 엄숙히 보였다. 그러나 1분, 2분, 3분, 5분, 10분…… 시간이 갈수록 나의 머릿속은 귀와 반비례로 욱신욱신해졌다. 그 세 사람들이 일부러 느럭느럭하는 것은 아니건만, 뺏어가지고 내 손으로 하고 싶을 만치 초초했다. 나는 참다못해 시계를 꺼내들고,

 “이제 이 분밖에 안 남았소. 난 갈 테요.”

하고 재촉했다. 그제야 양복쟁이는 눈에 불이 나게 놀이던 손을 쉬고 서류 뭉치를 들어 뵈면서,

 “이것만은 잠깐 내가 갖다가 보고, 댁으로 보내드려도 관계없겠지요?”

하고 일어선다.

 나는 언하(言下)에 쾌락하였다. 사실 그 속에는, 집에서 온 최근의 편지 몇 장과 소설 초고와 몇 가지 원고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애를 써서 기록한 서적이래야, 원래 나에게는 사회주의라는, ‘사’자나 레닌이라는 ‘레’자는 물론이려니와, 독립이라는 ‘독’자도 없을 것은, 나의 전공하는 학과만 보아도 알 것이었다. 아니, 설령 내가 볼셰비키에 관한 서적을 몇백 권 가졌거나 사회주의를 연구하거나, 그것은 학문의 연구라 물론 자유일 것이요, 비록 독립 사상을 가진 나의 뇌 속을 X광선 같은 것으로나 심사법(心寫法)으로 알았다 할지라도, 실행이 없는 다음에야 조사하기로 소용이 무엇인가─╴이러한 생각은 나중에 한 것이지만, 그 당장에는 하여간 무사히 방면되어 배에 오르게 된 것만 다행히 여겨, 궐자들과 같이 허둥지둥 행구를 수습하여 가지고 나섰다.

 집을 가볍게 해준 트렁크를 두 손에 둘고, 어서 올라오라는 선원의 꾸지람을 들어가며 겨우 갑판 위에 올라서자, 기를 쓰는 듯한 경적과 말 울음소리 같은 기적 소리가 나며, 신경이 자릿자릿한 징소리가 교향적으로, 호젓이 암흑에 싸인 부두 일판에 처량하고도 요란하게 울렸다. 배는 소리 없이 미끄러져 벌써 두어 칸통이나 잔교에서 떨어졌다. 전송하러 온 여관 하인들이며 인부들의 그림자가 쓸쓸한 벌판에 성기성기 차차 조그맣게 눈에 띄고, 잔교 위에서 휘두르며 가는 등불이 쓸쓸한 바람에 불리어 길어졌다 짧아졌다 한다.

 나는 선실로 들어갈 생각도 없이 으스름한 갑판 위에, 찬 바람을 쐬어가며 웅숭그리고 섰었다 격심한 노역과 추위에 피곤하여 깊은 잠에 들어가는 항구는, 소리 없이 암흑 속에 누웠을 뿐이요, 전시(全市)의 안식을 지키는 야광주는, 벌써부터 졸린 듯이 점점 불빛이 적어가고 수효가 줄어가면서 깜박깜박 졸고 있다. 나는 인간계를 떠나서 방랑의 몸이 된 자와 같이, 그 불빛의 낱낱이 어떠한 평화로운 가정의 대문을 지키고 있으려니 하는 생각을 할 제, 선뜩선뜩하게 별보다도 점점 멀리 흐려가는 불빛이 따뜻이 보였다. 나의 머릿속은 단지 혼돈하였을 뿐이요, 눈은 화끈화끈할 뿐이다.

 외투 포켓에다가 두 손을 찌르고 어느 때까지 우두커니 섰는 내 눈에는, 어느덧 뜨끈뜨끈한 눈물이 비어져 나와서, 상기가 된 좌우 뺨으로 흘러내렸다. 찬 바람에 산뜩산뜩 스며들어가는 것을, 나는 씻으려고도 안 하고 여전히 섰었다.


1) 팔초하다 얼굴이 좁고 아래턱이 뾰족하다.

2) 정사(情死) 사랑하는 남녀가 사랑을 이루지 못해 함께 자살하는 일.

3) 인버네스 소매 대신에 망토가 달린 남자용 외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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