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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봉투

Bollnow 2024. 4. 11. 05:39

노란 봉투

최일남

 

아주 이름 없는 집도 아니고, 전에도 두어 본 온 기억이 나는데도 기형(基衡)은 도무지 남도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 골목만 들어서면 되려니 싶어 몇 발자국 가다 보면, 이내 막다른 길이든가 아니면 큰길로 나서곤 했다. 동창회 통지서에는 약도 대신 대강의 위치와 전화번호만 적혀 있을 뿐이어서 더 힘이 들었다. 시간은 벌써 약속보다 삼십 분도 더 지나 있었다. 그냥 돌아가 버릴까 했으나 그러기에는 추운 골목길을 반 시간이나 헤맨 발품이 아까웠다. 소집책인 재수(在洙)가 두 번씩이나 전화로 다짐하던 일이 생각나 쉬 돌아설 수만도 없었다.

"야 야 한번 나와보면 어때서 잔뜩 도사리고만 있냐? 한번 나와보라구, 괜찮다구!"

재수는 그런 모임에 여간해서 잘 나가지 않는 기형의 성미를 이해한다면서도, 기어코 참석시키려고 애썼다. 단체든 조직이든 어디에나 재수 같은 사람이 있어서 그 단체나 조직이 움직여나간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그런 사람이 그런 조직의 리더는 아니다. 리더는 아닌데, 그리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더러는 제 돈까지 들여가면서 발 벗고 나서는 것이다. 심지어는 네댓 사람이 모인 자리에도 그런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재수가 곧 그랬다. 애초에 동창회를 조직해서 모임의 이름을 정하고 정관까지 만든 장본인인데, 동창회 장소를 새로 생긴 큰 목욕탕으로 정해서 회원들을 깜짝 놀라게 한 일조차 있다. 별 희한한 장소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나갔던 기형이도, 막상 현장에 가보고는 정말 그럴듯하다고 여겼다. 그 목욕탕은 말이 목욕탕이지 웬만한 호텔과 진배없었다. 거의 삼사십 명을 수용할 만한 휴게실을 하루저녁 전세낸 모양이었는데, 들어오는 동창마다 우선 옷부터 벗어야 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우리 모두 다같이 발가숭이 어린 시절로 돌아가자는 빤한 설명이 그런대로 우스꽝스러웠다. 휴게실에는 옷장이 있고, 옷장 밑에 캐시미어 이불과 요가 깔려 있어 마냥 뒹굴어도 좋았다. 바로 옆이 탕이었으므로 들어가고 싶은 사람은 아무 때나 들락거렸다. 동기동창들은 세월이 주는 간극을 일순에 뛰어넘어 희희덕거렸다. 사십이 다 된 친구들이 팬티 하나만 걸치고 수작들을 부리는 꼴이, 가관이었다. 어떻게 보면 다소 징그러웠다. 그들은 그런 자세로 끼리끼리 진을 치고 앉아서 포커, 나이롱뻥, 섰다 등을 놀았다. 물론 술도 시켜다가 마셨다. 제물에 흥이 난 친구는 벽에 등을 기대고 지그시 눈을 감아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전에도 몇 번 통지는 받았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나가지 않다가 처음으로 괴상한 모임에 맞닥뜨린 기형은 한편 놀라고 한편 어색했다. 타인끼리는 아무렇지 않던 알몸이, 동류끼리 오히려 쑥스러운 시간이 퍽 난감했다. 술이 거나해지자 몇몇 친구는 서로 물건들을 꺼내놓고 크기를 대보았다. 학교 다닐 때는 네 것이 컸느니 내 것이 컸느니 킬킬대었다.

이런 동창회가 있은 후에도 재수는 몇 번 더 모임을 주재했을 것이다. 그게 벌써 오륙 년 전이었으니까, 오늘 밤의 동창회라고 해서 별다른 것은 없을 것이었다. 모임에 자주 나오는 핵심 맴버가 몇몇 끼고, 나머지는 그때그때 적당한 수의 얼굴이 엇바뀌어 나올 터였다. 그런데도 재수는 뻥을 떨었다. 이번에는 동창회를 더 좀 알차게 꾸미는 문제를 의논할 작정이니까 꼭 참석해야 한다고 성화였다. 해서 나선 길이었다. 기형이는 항상 재수를 통해서만 그 연장선상에 동창회를 의식했고, 그를 제쳐놓고는 그 모임을 상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저러나 남도집은 여간해서 나타나지 않았다. 골목길을 한껏 돌다 보면 도로 제자리였다. 기형이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큰 발견이라도 한 듯 근처의 다방으로 들어섰다. 남도집으로 전화를 걸려는 것이었다. 그리 큰 집도 아닌데 다방 안은 초저녁이라선지 빈자리가 별로 없이 북적거렸다. 우선 공중전화가 걸려 있는지부터 살폈다. 남자 하나 여자 하나, 벌써 두 사람이 그 앞에 줄을 서 있었다. 커피를 시켜놓고 전화통이 비기만을 기다렸다. 카운터에 놓여 있는 전화 좀 쓰자니까 오기만 하는 전화란다. 돈 받는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고 그렇게 내뱉듯이 말했다. 공중전화기 옆에서 기다리는 것이 빠를 것 같았다. 차례가 되어 동전을 넣고 통지서를 들여다보며 다이얼을 돌리자 마침 통화 중이었다. 두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기형은 슬며시 짜증이 났다. 자기가 앉았던 자리는 이미 어울리지도 않는 모자를 쓴 여자 손님이 차지하고 있었다. 몇 사람이 통화를 하고 난 뒤에 겨우 전화가 걸리고 상대방에 재수가 나타나자 기형이는 다짜고짜 화풀이부터 했다.

"이새끼야 장소를 알려주려면 똑똑히 알려줘야 할 게 아냐?"

"어 어 너 기형이냐?"

재수는 얼결에 당하는 욕이라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기형이고 뭐고 지금 이 근처에서만 한 시간을 헤맸다구. 어디야 어디?"

재수는 기형이가 있는 다방을 확인하자 동창회 장소가 바로 그 근처라고 자세히 설명하면서 마중을 나가랴? 야살을 떨었다. 기형이는 두말 없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남도집을 다시 찾아나섰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전화통에 대고 이새끼 저새끼 소리를 한 것이 미안했다. 하지만 재수 자신도 그걸 섭섭하게 생각할 위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마다 사귀는 친구도 많지만, 아무리 술이 취한 후라도 이새끼야 소리를 할 수 있는 처지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렇다고 그런 욕을 해댈 수 있는 사이라야만 더 좀 가깝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느낀다. 누구에게나 만나자마자 그런 욕을 흉허물 없이 할 수 있는 친구가 한두 사람은 있는 법이고 그래서 나쁠 것은 없다고 여긴다. 따지고 보면 재수와는 일 년에 한두 번 아니면 몇 년에 한 번 정도밖에 만나지 못한다. 한데도 그런 상욕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어릴 적 친구였다는 사실 외에 별다른 까닭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 한편으로 주위에 한두 사람쯤 이새끼 소리를 마음대로 지를 수 있는 친구를 갖고 싶은 것이 사람들의 속마음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야 사람에 따라서는 자기 간을 내줄 것 같이 친할수록 서로 존대어를 써서 피차를 위하는 이들도 많지만 말이다.

남도집에 들어서자 이제 막 음식을 차려놓고 일하는 애들이 술주전자를 여기저기 놓고 있는 중이었다. 기형을 보자 몇 군데서 여 여 소리가 들려왔고, 재수가 빈자리로 안내해줘서 앉자마자 또 몇 군데서 알은체를 해왔다. 그의 옆이나 앞에 있던 친구들은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잘 아는 얼굴이 대부분이었지만 전혀 모르겠거나 아름아름한 얼굴도 꽤 되었다. 분위기가 서먹한 것까지는 아니라도, 초장인 탓인지 별로 마들이 없이 조금은 처져 있었다. 자주 만나는 사람끼리 그리 크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로 얘기를 나누다가, 이따금 하하하 웃었다.

재수가 메모쪽지 같은 것을 들고 일어서더니 사회를 보기 시작했다. 대충 올 사람은 온 것 같으니 이제부터 동창회를 시작하겠다는 것과, 불초 소성이 일어서기는 했지만 개뿔도 뭐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다, 모임을 소집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노라고 서두를 꺼냈다. 그러고는 몇 가지 안건이 있긴 있지만 그것은 서서히 술을 드시면서 의논할 것이고, 우선 건배부터 하자고 좌중을 둘러보며 먼저 술잔을 들었다. 모두들 촐촐하던 판이라 일제히 그에 화답했다. 기형이도 옆의 친구가 따라준 술잔을 들었다. 단숨에 잔을 비운 친구들은 서로서로 부지런히 술잔을 바꿨다. 술이 몇 순배 돌아가자 기형이는 자기와 엇비슷이 앉은 끝자리에 광순(廣淳)이를 발견했다. 옆자리의 필진(弼鎭)이와 한참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기형이는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광순이도 이런 자리에는 별로 나오지 않는 편이어서 무척 오랜만이었다. 일부러 그쪽까지 가자니 그렇고, 눈이라도 맞추려고 한참을 쳐다보았으나 광순이는 좀처럼 이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기형은 그가 자기보다 먼저 왔는지 어쨌는지를 생각해보았다. 자기가 들어온 다음에 온 사람이 별로 없었으니까, 그는 아마 자기보다 먼저 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광순이는 자기가 들어오는 걸 눈여겨봤음에 틀림없을 것이었다. 좌중은 서서히 술렁이기 시작했다. 초장의 서먹함은 잠깐이었다. 술 힘도 있었겠지만 애써 떠들썩한 하룻밤을 보내려는 듯, 모두 큰소리로 함께 한 옛날을 향해 달렸다. 야 깡쇠, 야 민대가리, 야 쥐불알, 야 왕방울…… 오랫동안 잊었던 별명들을 되살려냈다. 같은 처지 같은 환경 속에서 한 시대를 더불어 호흡하고 살았다는 사실은, 피차를 그처럼 흉허물없게 만드는가. 벌써 이십 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과거를 우습게만, 재미있게만 받아들이려는 중늙은이들. 돌아서면 내일의 생활을 걱정하고 직장에서 있었던 사소한 사건으로 다시 마음을 빼앗길, 적당히 망가진 분별 있는 시정(市井)인들.

"야 민대가리, 너 나하고 생물반일 때 개구리 해부를 하는데 선생님더러 개구리는 페니스가 없습니까 했다가 치도곤을 맞은 일 생각나니?"

"야 생물 가르치던 그 개똥모자가 동대문 시장에서 장사한다더라."

"야 야 쥐불알, 나 요전에 극장에서 네 여동생 만났다. 여전히 예쁘더구나. 소리 소문 없이 시집가더니 놈팽이하고 같이 왔던데."

"야 임마 네 여편네가 바로 ×여고 왈패이던 민숙이라면서?"

여기저기서 큰 소리가 오고 갔다.

이윽고 재수가 일어서서 입들의 소요를 막았다.

"에 잠깐. 잠깐만 조용히. 우리들이 이렇게 뜻깊게 모이기는 했지만 편입학이 심한 때라서 피차 모르는 사람이 적잖아요. 본인의 현재 상황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는 것이 너무나 많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내가 저쪽 끝에서부터 한 사람 한 사람 소개를 해올리겠습니다. 나도 잘 모르는 대목이 있겠지만, 그럴 때는 본인 자신이 보충 설명을 해주도록……."

한쪽에서 그런 구질구질한 얘기는 집어치우고 술이나 마시자는 얘기가 나왔지만 재수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일이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이쪽에 앉은 게 짱구 김도식, 대개 짱구들이 공부는 잘하는데 김 짱구는 글쎄─╴별로 못했지요오? 그러나 인생은 공부로만 좌우되는 게 아니어서 지금은 대도실업 수출과장으로 민완을 휘두르고 있고오─╴그 옆이 뭐드라? 옳지 서생원 서영덕. 키 큰 놈치고 속 찬 친구 없다고 조금 헐렐레지만 마음은 비단결같이 곱다구. 지금 세운상가에서 전기제품 장사를 하고 있으니까 텔레비전이나 전축, 전기밥솥 같은 것을 사고 싶은 사람은 기왕이며 서생원네 가게에서 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서생원 옆이 검사로 날리고 있는 팽도식. 학교 다닐 때 별명이 없이 공부만 파고들더니 역시 고시에 합격해서 공안 검사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바이올시다. 동창이 결려들면 좀 바주겠지? 어기 걸레, 좀 조용히 해. 술 좀 잠깐 멈추고. ! 이 걸레 송만천은 지금 산호물산의……."

재수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송만천이라는 친구가 얼른 일어나더니 뒤를 받았다.

"수위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잘 좀 돌봐줘서 좋은 자리 하나 마련해줘."

하고는 꾸뻑 하고 앉았다.

"아아……."

여럿은 잠시 멈칫했다. 이내 환호하면서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재수는 이런 식으로 한참을 소개해나가다가 필진이 차례가 오자 그쪽을 보고 피식 한번 웃으며 목청을 돋우었다.

"여러분, 다음은 왕년의 투사 방필진이를 소개합니다. 별명 진돗개. 이 토종 맹견은 우리 H고등학교의 스트라이크 주모자로 항상 선두에 서서 싸워왔던 투사입니다. 지금은 당대의 실력자 김탄식 의원의 정무 비서관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장차 이 나라의 대재상을 꿈꾸며……."

재수가 그를 쳐다보고 또 웃으며 말을 맺자 필진이는 "고만 고만" 하면서 머리를 감싸고 삥 돌아 앉아버렸다.

재수가 "다음은……" 하고 광순이를 소개하려고 하자 그는 앉은 채로 손을 내저었다.

"야 야 고만둬라 고만둬. 네가 말 안해도 각자 서로 알고 있다구. 쑥스럽게 무슨 소개냐. 소개가. 술이나 마셔."

그러고 보면 맨 처음에 동창 소개를 반대하고 나선 것도 광순이었던가 보다. 제지를 당한 재수는 말을 계속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다는 듯, 잠시 멍청히 서 있더니 좌중을 주욱 둘러보았다. 대개는 옆 사람과 잡담을 나누기 쉬웠다. 재수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눈치였다. 그런 가운데에 몇 사람이, 하던 끝이니 계속하라고 외쳤다. 재수가 그 말에 용기를 얻어 말을 꺼내려고 하자 광순이는 또 손사래를 치며 필요 없다고 우겼다. 그러자 재수도 "좋았어" 하면서 제자리에 주저앉고 목이 말랐는지 술을 죽 들이켰다.

기형은 광순이가 자기소개를 한사코 마다고 하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학교 때부터 여느 급우들과는 좀 다른 특출난 데가 있었다. 학과 공부 같은 것은 별로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기 또래 친구들을 한발 아래다 놓고 대하는 것 같았다. 항상 우수에 젖은 듯한 눈으로 조용조용 걷고, 공부 시간에도 이따금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선생님한테 야단맞기도 했다. 기형이와는 비교적 가까운 사이여서 자주 어울리는 편이었는데, 이따금 이쪽이 이해하지 못할 엉뚱한 소리를 해서 기형이를 난감하게 만들기도 했다. 책가방을 들고 다니는 일도 별로 없었다. 책을 몇 번 보자기에 싸가지고 다녔는데, 아침에 책상 속에 넣어 두었다가 저녁때 그대로 들고 가기 일쑤였다. 그러나 기형에게만은 어느 때, 그것도 우연히 보여주는 수가 있었다. 영어 또는 불어로 된 시집이거나 어려운 한문이 많은 문학 평론집 등속이어서 기형이를 더욱 야코죽게 만들었다. 자신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어쨌든 고등학교 학생 신분으로는 범접하기 어려운 세계였다. 그는 가끔 기형이를 학교 뒷산으로 끌고 올라가기도 했는데 좀처럼 이야기를 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냥 한참을 앉아 있다간 말없이 혼자 터덜터덜 앞서 내려가기 쉬웠다. 어느 날은 팔베개를 하고 하늘을 쳐다보다 말고 불쑥 묻는 수도 있었다.

"기형이. 넌 하늘에 구름이 떠가는 걸 보면 뭐가 생각나니?"

너무 어처구니없는 물음에 기형이가 당황해서 그를 말똥히 쳐다보면, 그는 어이없게도 피식 웃으며 딴전을 피웠다. 너한테 그런 걸 묻는 내가 잘못이라는 태도였다. 시를 쓴다는 소문 또한 돌았거늘, 도무지 그런 걸 볼 수가 없었고, 기형이 엇비슷이 물러볼라치면 크게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았다. 뭐 그까짓 것 어쩌고 하면서 어물쩡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기형이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때까지 아무도 그의 집을 가보았다는 사람이 없고 보면, 그가 기형이를 자기 집까지 끌고 간 것은 조그마한 사건이라면 사건이었다. 물론 작은 지방 도시였으므로, 그의 집안이 어떻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었지만, 그 집안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아는 친구는 드물었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시대에 동경 유학을 한 분으로 고장에서도 꽤 쳐주는 인텔리였으나 해방이 되자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일찍 세상을 떴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남겨놓은 유산이 튼튼하여 생활은 유복한 편이었다.

광순네 집은 오래된 고가답게 그 안도 우중충하리만큼 분위기가 착 가라앉고 잔잔했다. 전체적으로 무겁고 끈끈한, 기운이 감돌았다. 기형이가 제일 놀란 것은 광순네 아버지가 썼다는 서재였다. 그의 아버지는 경제학을 했던지, 대부분 일본 말로 된 그쪽 서적들이 네 벽을 거의 차지하고 남았다. 그중의 상당 부분은 문학 서적들이었다. 광순이는 특별히 서재에 안내해주겠다는 표정을 감추고, 극히 천연스럽게 그 방으로 기형이를 데리고 들어갔다. 대수로운 것이 못 된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그 앞에 앉기를 권했다. 일단 길이 트이자 광순이는 기형이를 자주 집에 초대했고, 어떤 때는 한 이불 속에서 같이 자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광순이는 많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으나, 도무지 자기 주변엔 같이 얘기를 나눌 만한 친구가 없다는 것과, 있다고 해도 생각하는 것들이 너무 범속해서 사귈 생각이 없다는 말을 했다. 기형이는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쩐지 겸연쩍고 그런 그가 무슨 맘으로 자기를 그처럼 대해주는지 다소 송구스럽기조차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온 기형이는, 대학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광순이를 자주 만나지 못했다. 들리는 소문대로라면 여전히 시를 끼고 사는 모양이었다. 그럴 만한 친구들과 오가면서 나름의 활약을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면에 어두워서 그런지는 몰라도 기형이는 그의 이름 석 자가 활자화되는 것을 보기 어려웠다. 대학생 시절은 그렇다 치고, 졸업 후에도 그의 이름은 여간해서 눈에 띄지 않았다. 대학 졸업을 전후해서 한두 번 만나기는 했지만 기형이 쪽에서 먼저 사정을 물어볼 형편이 못 되었고 광순이 역시 자신의 근황에 대한 언급을 꺼렸다. 다만 탈속(脫俗)한 듯한, 좀 느끼한 분위기는 여전히 풍기고 있었다. 말은 별로 않지만 모든 것이 시시하고 데데해서 상대할 흥미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의 몸 전체가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형이는 세월이 꽤 지나간 후에도 그의 그처럼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가 대견하고, 한편 든든했다. 지금 어느 판국이라고 그런 도도함과 오기를 그토록 오래 지닐 수 있으랴 싶어서, 너무 일찍 흙탕물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자신이 부끄럽기조차 하였다. 그런 광순이였으므로 이런 자리에는 기형이 이상으로 도통 나오지를 않았던 것이다. 한데 오늘은 어떤 바람이 불었나?

어느새 술좌석은 노래판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흘러간 노래부터 시작하더니 차츰 요즘 노래로 옮겨졌다. 처음에는 숙기 좋은 친구가 먼저 선창을 하더니 차츰 합창으로 변했다. 처음에는 조용조용 부르더니 차츰 젓가락으로 상을 두들기며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방안에는 사내들의 고리한 열기가 후끈거렸다. 적당히 사리 분별을 할 줄 알고 약간씩은 찌들기 시작한 사내들은, 한 시대의 호흡을 같이 하고 이해 상관없이 성장을 함께해온 친구들과의 밤을 되도록 과거로만 채색하기 위해 없는 감정마저 일으켜 세우고자 애썼다. 십여 년이라는 세월이 가져다준 피차간의 간격을 조금씩은 의식하면서도, 되도록 거기서 헤어나려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런 열기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냉랭한 기운이 자리를 메우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기형이는 노래를 따라 부르는 척하면서 흘끔흘끔 광순이를 멀리 바라보았다. 그는 노래하지 않았다. 배시시 웃음을 띤 채 잔을 기울이기 바빴다. 이따금 옆 사람을 보고 하하 웃었다. 역시 유행가를 부르는 그를 상상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던 그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기형이 쪽으로 잔을 들고 건너왔다. 그도 처음부터 기형이를 의식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오랜만이군."

기형이가 먼저 손을 내밀어 인사를 했다.

"출판사에 나간다고?"

광순이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앉자마자 물었다. 둘은 이런 자리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말들을 별로 하지 않고 잠자코 술 한 잔씩을 우선 주고받았다. 재미가 어떠냐라든가, 아이가 몇이냐라든가, 이게 얼마만이냐라든가 하는 따위의 인사치레를 말이다. 아니 그것은 광순이라는 친구가 그런 말을 꺼낼 수 있는 틈새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게 옳을 것이었다. 그는 본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방금도 그는 음식물을 튀기며 목의 힘줄을 드러내고 노래하고 있는 치들을 향해 하품이 나온다는 투로 권태스런 눈초리를 보냈다. 기형이는 그런 광순이 앞에서 왠지 초라했던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과 그의 집에서 본 그 많은 책들이 다시 눈앞에 떠올랐다. 발레리의 라 르메를 원어로 줄줄 암송하던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생각이 났다. 어차피 자기와는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있고 항상 저만치 서 있는 그인데, 새삼스럽게 주눅이 들 필요가 없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그런데도 어느 한구석엔가 남아 있는 반발성 외경심을 달랠 수가 없었다. 노래는 어느덧 옛날의 교가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봉출산 기슭에

우뚝 솟은 배움터,

슬기를 자랑하는 건아들아.

…….

용케도 가사를 기억하는 친구가 있어 먼저 운을 떼자, 이쪽저쪽에서 가사의 앞뒤를 혼동하면서도 그런대로 귀 익은 멜로디가 되어 흘러나왔다. 광순이는 어느새 제자리에 되돌아가 있었다.

광순이가 기형의 사무실을 찾아온 것은 동창회가 있은 지 열흘쯤 지나서였다. 그날 전화번호는 물론, 사무실의 위치도 얘기해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찾아왔는지 잠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보다도, 별로 내왕이 없던 그가 갑자기 찾아온 것이 너무 뜻밖이라면 뜻밖이었다. 기형이는 일이 조금 바쁜 시간이었지만 그렇다고 사무실에 앉혀놓을 수도 없어 이웃 다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요전 동창회 때는 참 반가웠네. 하도 오랜만이었으니까."

기형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애들 여전하더군. 그런 애들은 안 만나는 게 좋은데. 너무 때들이 끼었다."

"그래? 그렇지만 그런 기회가 자주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그렇게 어울리는 것도 좋지 않은가. 서로 부담이 없는 자리니까."

"글쎄. 그저 그런 거지 뭐."

광순이는 그런 얘기 자체가 시들하다는 듯이, 짧게 입맛을 다시며 괜히 찻잔을 한옆으로 밀어놓았다. 그는 특별한 용건이 없는 듯 별말이 없었다. 원래가 그런 사람이라서 신경 쓸 건 없었으나 갑자기 부담스런 느낌이 들었다. 그는 옷도 단정히 입고 그로서는 드물게 밝은 분홍빛 계통의 넥타이를 매고 있었는데,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눈밑 살이 처져 있는 등 다소 피로해 보였다. 사무실에 들어올 때 옆에 끼고 온 크고 빳빳한 노란 봉투는 탁자 위에 놓은 채였는데,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제법 배가 불룩했다.

광순이가 기형을 다시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한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서랍을 대충 정리하고 막 퇴근하려고 하는데 그가 불쑥 나타났다. 워낙 작은 사무실이라 누구를 통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지만, 그는 그때나 이때나 이렇다 할 기척을 하지 않고 홀연히 나타났다.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오른손을 살짝 들어 인사에 대신했다. 마침 때가 때여서 가까운 술집으로 데리고 갔다. 허름한 대폿집이라 들어가기 전에 잠깐 이런 데라도 괜찮겠느냐는 투로 그를 한번 쳐다보았으나 그는 아무 내색이 없었다. 술주전자 하나를 거의 비울 무렵에서야 기형이가 물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나. 뭣 좀 쓰나?"

덤덤한 말이기는 했으나 사실 그가 무얼하고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 이 바닥에서 무얼 어쩌고 한다는 게 우스운 일 아닌가. 차라리 잠자코 앉아 있는 거지."

한옆에 놓아두었던 노란 봉투를 아무렇지도 않게 뒤집었다. 유명한 국영기업체의 이름이 큰 활자로 적혀 있었다. 아 이 친구 그 회사에 나가고 있나? 기형이는 혼자 생각했다. 그러나 묻지는 않았다.

"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한참 만에 광순이가 입을 떼었다.

"부탁?"

기형은 너무 뜻밖이라 잔을 들다 말고 물었다. 그가 자기 따위에게 무슨 부탁을 해온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노란 봉투에서 잔글씨를 잔뜩 늘어놓은 종이쪽지를 꺼내더니 조용히 설명을 시작했다. 어디까지나 품위 있게, 차근차근 얘기를 시작했다.

"지금 우리나라의 여러 가지 예술 활동 주에서 가장 시급하면서도 뒤떨어져 있는 게 공예 부문이라고 보내, 나야 직접 그런 걸 하는 쟁이는 아니고, 뭔가 측면에서 도와주고 싶은데 그럴 만한 재정적인 능력이 결핍되어 있네. 그래서 곰곰 궁리한 끝에 그 관계의 전문지를 하나 내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걸 자네와 상의하려는 건데……."

이렇게 허두를 뗀 이야기는, 그가 언제 이런 것을 알아뒀을까 싶을 정도로 상당히 구체적인 것이었다. 국판 2백 페이지가량의 잡지를 만들 작정이라고 했다. 권두에 아트지 화보 십여 페이지가량의 잡지를 만들 작정이라고 했다. 권두에 아트지 화보 십여 페이지를 잡되 원색을 네댓 페이지만 넣고 나머지를 흑백 화보로 하면 제작 코스트가 싸게 먹힐 거라는 것이었다. 발행 부수는 우선 오륙천으로 하는데 전국 초등학교의 미술 공작 담당자만 해도 그보다 훨씬 많을 테니 판로는 어려울 게 없으며, 그럴 경우 한 달 제작비가 대략 백만 원 조금 넘을까 말까 한다는 것이었다. 정가를 권당 3백 원으로 잡되 도매 서점에 정가의 7할을 내준다 치면, 그럭저럭 유지가 될 게 아니냐고 계수까지 뽑아주었다. 그걸 해서 이를 남길 생각은 없고, 현상 유지만 되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만한 사명감을 가지고 돈을 대줄 동업자를 구해줄 수 없느냐는 것이 그의 용건이고 결론이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자네는 출판사에 있으니까 잘 알아보면 그런 사람을 쉬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무엇보다도 내가 나 혼자 돈벌이하고자 해서 하는 게 아니라, 공예 예술 분야를 지원해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니까……."

너무 의외여서 기형은 얼른 대답을 못했다.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알아는 보겠노라 어물어물해놓고도 속으로는 이 친구가 어쩌자고 이런 계획을 세웠을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원고 같은 것은 일본 것을 적당히 옮겨다 놓으면 고료 지출 또한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광순이답지 않은 태도였고, 솔직히 그가 그런 발상을 하는 것 자체가 못마땅했다. 지금까지 자기 마음속에 있던 그에 대한 인상이 기우뚱거리는 것을 느꼈다. 정이 가거나 마음이 끌리는 사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까닭 없는 반발 같은 것을 느껴오면서도, 흉내 내기 어려운 구석을 지닌 무서운 상대로 생각해왔던 그가, 털썩 땅 위로 끌려 내려진 기분이었다. 어차피 그렇게들 살망정 어느 한쪽에 철저히 이쪽을 무시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은, 그것대로 듬직하기까지 한 것이었는데 말이다. 물론 그가 그런 일을 하겠다는데 반대할 까닭도 없고 다행히 잘되면 그런대로 좋은 일이긴 했지만, 그 밑에 깔려 있는 잔재주꾼 같은 계산이 싫었다. 피차 사는 데 쫓기다 보면 누군가를 오래 잊어버리는 수도 있고,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그가 생각나면 자기 생활을 이어가는 꼬투리로서 그 친구를 생각해내고 새삼스레 찾아가곤 한다. 하지만 나쁠 것은 없다. 다만 그것이 지난날의 관계를 더 호전시키는 용건이었을 때 반가운 것이지, 나이와 함께 추해진 어떤 방편상의 만남은 따분하다. 서로 돕고 기대는 문제와는 차원이 다르다. 지난날의 관계가 선할수록 감정의 침하 굴절이 예사롭지 않다. 광순이가 기형을 찾아온 것이 꼭 이런 예에 합당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적어도 지금까지의 그의 이미지에 많은 정정(訂正)을 요구하는 짓임에 틀림없다.

광순이는 그 뒤에도 기형이를 찾아왔다. 이번에 끼고 온 노란 봉투는 그전 것보다 더 빳빳했다. 다방에 앉아서도 봉투를 뒤집지 않기 때문에 어느 회사의 봉투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모양으로 미루어 요전의 국영기업체 봉투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형은 그가 또 잡지 건을 꺼낼까 봐 내심 조마조마했다. 그 일을 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이 될성싶지 않은 데다, 그런 걸 맡고 나설 사람을 손쉽게 찾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다행히 그 얘기를 하지 않았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은 깨끗이 잊어버린 것 같은 눈치였다. 웬만하면 기형이 쪽에서 물어볼까도 했으나, 그가 너무나 천연스럽게 앉아 있는 바람에 먼저 말을 붙이기도 멋쩍었다.

"자네 월급 얼마씩 받고 있나?"

담배를 한 대 후 내뿜고 난 광순이는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내뱉고 천장을 쳐다보았다. 기형이는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서 그를 말끔히 응시했다.

"아니 그냥…… 사실은 내 친척뻘 되는 사람이 이번에 무역회사를 하나 차렸어. 그런데 섭외과장을 맡을 사람을 하나 구해달라는 거야."

"자네더러."

"그렇지."

"그거 잘됐군. 자네가 직접 들어가지 그래."

"에 이 사람. 내가 무역회사 과장 나부랭이나 하고 있을 성싶은가."

광순이는 기형이를 가볍게 나무라며 짐짓 정색을 해보였다.

"그래서 나는 자네를 생각했지. 어느 모로 보나 자네라면 적임일 것 같아. 아무렴 지금 출판사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런데……."

"그런데?"

"좀 뭣한 소리지만 아무래도 밑천이 좀 들어야 할 것 같아. 저쪽에서는 사람만 든든하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세상일이 어디 그런가. 성의를 보여야지."

요컨대 돈을 써서 한자리하지 않겠느냐는 뜻인 듯했다. 기형이는 이 친구가 이처럼 무너질 수가 있을까 싶어 그의 면상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실제로 그런 자리가 있는지도 의문이거니와, 있다손 치더라도 감히 광순이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올 수 있을까. 너무 빤히 보이는 얕은수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기껏 생각한다는 게 이 정도인가 싶어 오히려 섭섭했다. 허세라도 좋고 아이들 문자대로 똥폼도 좋았다. 왜 더 좀 그럴듯하게 사술을 쓰지 못할까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지금까지 기형이 생각해온 광순이는 더 좀 오기 덩어리라야 했다. 무시하고, 재고, 웬만한 건 깔아뭉개야 했던 것이다. 소영웅(小英雄)이라도 좋았다. 조금은 때려주고 싶도록 도도하고, 얄밉도록 심술을 부리는 대목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랬는데 기껏 영세 출판사에서 밥 빌어먹고 있는 자기 따위를 상대로 수를 부리려드는 것이 싫었다. 진짜든 가짜든 무시당하고 경멸당하는 게 기분 좋은 것은 아니지만, 상대방에게 어떤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철저하게 도도한 사람을 보고 싶은 것이다. 적당히 친절하고, 적당히 인정 있고, 적당히 예의 바른 사람들이 천지에 깔린 형편에, 광순이 같은 존재는 제법 돋보였다. 한데 그것도 한때뿐, 끝내 자기를 견디어내지 못하고 세월의 풍화 작용에 적당히 치사해지고 만 것인가. 몸 전체로 풍겨주던 세속에 대한 반골이 이제는 겨우 입술 끝에만 남아, 가볍게 나발거릴 뿐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지금까지의 모습 역시 알맹이 없는 허상(虛像)이었던 셈이다. 겉으로 그렇게 보였을 뿐, 사실은 바람 한번에 팍삭 무너질 성질의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광순이를 보는 것은 기형에게 여간 서운한 것이 아니었다. 광순이가 재삼 재사 기형이를 찾아온 것은 막 가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이날 따라 노란 봉투를 들지 않고 있었는데 평소보다 퍽 말이 많았다. 전번처럼 뚜렷한 부탁이 없이 그냥 지나가다가 들른 모양이었는데, 요즘은 매우 바쁘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먼저 꺼냈다. 엉뚱하게도 일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요새 일본 애들이 많이 오는 모양이야. 한국에서 쫓겨갈 때 십 년 후에 보자고 했다더니 과연 일어났지 뭔가. 그건 그렇다 쳐. 그들만 보면 쫓아가서 잘 혀가 돌지도 않는 일본 말로 아양을 떨곤 하는 속물들이 문제야. 그까짓 것들이 뭔데. 여기 오는 치들이 도쿄나 오사카에서 오는 줄 알아. 맨날 규슈 아니면 시코쿠 지방의 촌놈들이라구. 그런 촌놈들한테 주책없이 달라붙다니 얘기를 해도 좀 그럴듯한 놈들하구 해야지."

기형이는 이런 광순이가 좀 의외라고는 생각하면서도 달리 대꾸를 않고 그냥 듣기만 했다.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는 그저 그런 잡담으로 여겼다. 도쿄 오사카 같은 국제 도시라면 모를까, 변방의 일본인들과 사귀어서 뭣 하겠느냐는 대목에서 광순이 본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구나 생각할 따름이었다.

광순이가 다녀간 지 며칠 후, 기형은 볼일이 있어 백화점에 들렀다가 뜻밖의 장면을 목격했다. 백화점 같은 데는 일 년 내내 발을 들여놓지 않는 기형이었으나, 그날은 등산모를 사기 위해 불가불 찾았다. 그리고 2층 양품부에서 광순이를 만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둘이 동시에 맞닥뜨린 것이 아니라, 우연히 기형이 먼저 광순이를 본 것이었다. 얼른 알은체를 하려고 했던 그는 주춤 멈춰 서고 말았다. 광순이는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몇 사람과 함께 진열장을 왔다갔다 하면서 뭐라고 한참 설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를 에워싼 일군의 남녀가 한눈에도 금방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틀림없는 일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여행사에서 나누어준 듯한 배지를 달고, 카메라들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광순이는 그들 앞에서 서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였다. 그 구역은 선물용 공예품 등을 파는 가게가 모여 있는 곳이었는데, 그들은 그 주변에서만 주로 서성거렸다. 기형은 슬며시 호기심이 생겨 광순이의 눈에 안 띄게 조심하며 그들을 살폈다. 광순이는 그들의 안내역을 맡은 듯, 일본 말로 얘기를 주고받고 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평소 다방에서 기형이를 만났을 때와는 달리 그는 몸짓이 무척도 사근사근해 보였다. 연방 "하이 하이"를 되풀이하면서 더할 수 없이 상냥하게 그들과 씨부리고 있었다.

기형은 얼른 몸을 돌려 후닥닥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그것은 쇼크였다.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그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었다. 일본인들이라고 보이는 사람들이 우리말을 못하는 재일교포들일 수도 있다. 설사 일본 사람들이라 치더라도 누구의 부탁을 받고 그럴 수 있다고도 생각되었으나 마음 한구석이 꺼림칙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니 다 그래도 광순이만은 그래서는 안 될 것이었다. 그만은 그런 것을 사양했어야 옳았다. 더구나 며칠 전에 그가 다방에서 한 말은 어디로 가란 말인가.

한층 놀라운 일은 그로부터 불과 일주일 후에 나타났다. 출근하자마자 차 한 잔을 시켜 마시고 조간신문을 뒤적이던 기형은, 사회면 한구석에 실린 일단짜리 기사를 보고 정말로 깜짝 놀랐다. 일본인 관광객을 속여 어쩌고 한 조그마한 기사에 의하면, 차광순(40)이란 자가 일본인 관광 안내를 자청, 그들에게 귀금속을 싸게 사준다고 돈을 모은 후(20만원) 도망쳤다가 경찰에 잡혔다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넘겨버리고 말 8, 9행짜리 단신이었다. 기형은 백화점에서 일인들을 끌고 다니던 광순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신문을 덮고 의자에 깊숙이 기대었다. 허망한 생각이 들었다. 입맛이 썼다.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인가. 동창회에서 그를 만나지 않고, 옛날에 그런 친구가 있었거니 치부하고 있었던 것만 못한 생각이 들었다. 동창회에서 만나는 것으로 끝났어도 될 뻔했다고 공연히 뉘우쳤다. 그의 고향집에서 본 엄청난 장서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환상이 눈에 어른거렸다. 하늘을 떠가는 구름을 보면 무엇이 생각나느냐고 했던 그의 말이 귀에 간지러웠다.

기형은 한동안 광순이의 일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뒤 그가 어찌 되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을 꾸미기 좋아하는 재수가, 동창 몇이서 면회라도 가보자고 전화를 걸어왔으나, 바빠서 못 가겠다고 거절하고 난 뒤 재수에게서도 더는 소식이 없었다. 아마 흐지부지되지 않았는가 싶다. 그러나 세상에는 항상 우연이라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기형이 그 사건이 있은 지 한 달 후쯤 지나서 광순이를 또 만난 것도 그렇다. 해질녘이었다. 기형이 하루 일을 마치고 누구와 만날 약속이 있어 급히 무교동 골목길을 걸어가는데, 몇 발자국 앞 사람이 틀림없이 광순이였다. 기형은 순간 발길을 멈추었다. 쫓아가서 등이라도 두들기지 않고 왜 우뚝 서버렸는지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반갑기는 했다. 같이 대폿집에라도 들어가서 얘기를 나누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인가가 자기의 그런 행동에 제동을 걸어왔다. 무엇이 그랬는지 설명하기 힘들었다. 어느새 무너져버린 광순이를 보기도 싫었고, 이미 흐트러진 자세를 다시 바로잡으려는 그의 안간힘도 아직은 대하기 거북했으랴. 그는 여전히 노란 봉투를 끼고 있었다. 석양빛 탓인지 이번 것은 빳빳하지가 않고 많이 후줄근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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