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llnow 2024. 4. 11. 05:22

가족

최인호

 

결혼식

내가 우리 여편네에게 빠져 버린 것은 우리 여편네가 남달리 이쁘다거나 시세말로 육체파가 되어놔서 남달리 몸이 좋다거나, 하다못해 지참금이 두둑해서 어쩌면 처가 덕이나 좀 볼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은 아니올습니다. 그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데 그 망할 놈의 군대에서 사람 환장하게 지루한 생활을 보내다가 가끔 입대하기 전 학교 앞 다방에서 커피나 나누던 인연이라는 것을 핑계 삼아 소위 남녀 만나면 손목이나 쥐어 보게 되고 그 손목이 점점 대담해져 뽀뽀도 하게 되고 그러다가 도둑놈의 심보로 싸구려 여관 같은 곳에서 최면술로 눈 깜짝할 사이에 겁탈 비슷한 짓도 해보았더니 에라 이제는 다른 여자 꼬셔서 커피 마시고, 영화 구경 가고, T.S 엘리어트의 작품 어떻게 생각하세요, 무슨 색깔 좋아하세요, 무슨 책을 감명 깊게 보셨나요, 영화배우 누구를 좋아하세요, 하는 식의 과정이 귀찮아져서 억울하지만 대강대강 이 정도의 여자면 괜찮겠다 싶어 그럼 어디 한번 사랑이라는 것을 해볼까 결심해서 그러다가 소위 부부가 되어 버린 것 올습니다.

사실 여자란 남자에게 가택수색 당하고 불법침입 당하면 몸도 마음도 시들어 이제는 다른 남자 앞에서 생처녀 행세한들 누가 믿어 주거나, 속아 주지 않는 것이 뻔하기 때문에 우리 여편네는 필사적으로 내게 매달린 것 올습니다.

내가 비록 잘 생기지 못했고, 키까지 작고, 돈도 없고, 부모덕도 없는 자식이지만 사람이야 틀림없이 그야말로 똑똑한 똘똘이 정도는 되어 보이는 사람이니까 나한테 달라붙는다고 해서 밑져야 본전은 되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너무 내 자랑만 하고 말았지만 아니꼽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고, 얘기인즉은 이렇게 해서 소위 애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처음에 몇 달간은 눈이 벌개져서 반찬 투정하는 아이처럼 만나면 반말이나 하려고 입바른 소리로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하고 부도수표를 남발하였지만 실상 서너달 만나고 나니 공연히 짜증이 나고 공연히 이 여자한테 물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길거리의 다른 여자들이 너무나 예뻐 보였고 그래서, 에라 좀 미안한 얘기이지만 미친 척하고 우리 헤어지자 하는 절교의 선언을 해 버리고 말까 하고도 생각했었습니다.

사실 언젠가 실제로 심각하게 양미간을 찌푸리면서 우리 이제 헤어집시다, 하고 말을 했더니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여편네는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다 팽개치고 눈물 뚝뚝 흘리더니 아 길거리에서 십 년 전에 곗돈 떼먹고 도망간 빚쟁이 만난 것처럼 나를 붙들고 '그럼 나는 죽어요. 아시겠어요. 그럼 나는 타락한단 말이에요' 하고 반공갈 적인 협박을 했다는 말입니다.

나는 이런 돌발한 태도에 혼이 나가서 '아니다. 어디 농담 한번 해보았다, 내가 어떻게 너를 버릴 수가 있는가' 하고 무마를 시켰건만 그날 밤 집에 들어와서 생각하니 야야, 큰일 났다. 물려도 되게 물렸다. 빼도 박도 못하겠다. 젊은 나이에, 스물여섯이란 젊은 나이에 이게 무슨 꼴이람. 한심스러워서 애꿎은 담배나 한 갑 피워댔던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여편네는 결혼을 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저 자식 평소에 봐도 난봉기는 있는 편이고, 자칫 내버려 두다간 어디론가 도망쳐 버릴지 모르니 아예 결혼이라는 그물로 묶어 두겠다고 이를 악물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것이 어디 불알 두 쪽 가지고 되는 것입니까.

군대에서 제대하고 학교에 복교한 대학교 3학년 학생인 주제에,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이나 배우고 교수 찾아다니면서 늙은 학생 행세하며 학점 구걸이나 해대는 내가 결혼이라니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지 그게 될 법이나 한 소리입니까. 물론 나는 소설을 쓴다고 하지만 그게 밥벌이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란 책 몇 권, 러닝샤쓰 두 벌, 무명 빤쓰 세벌, 형이 입던 옷 불하 맡아 입고 다니던 낡은 신사복 한 벌 따위로 결혼식이라니 될 법이나 한 소리입니까.

나는 여편네에게서 그런 제안을 들었을 때 눈앞이 캄캄하였습니다.

, 이게 무슨 소리야. 무슨 개수작이야. 일생일대의 딱 한 번 있는 결혼식이 무슨 주택복권 사는 일이지 아니냐, 하고 타이르는 식의 말을 했더니 여편네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해 버리자는 것입니다.

그동안 취직해서 십만 원 적금 들어 놓은 게 있으니까 그것으로 새 버리자는 것입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석달 열흘은 아니지만 일주일 밤낮을 궁리궁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중대한 단안을 내렸습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아무래도 살다 보면 해야 할 것인데 해 버리고 말자고 결심했던 것입니다. 물론 나는 친구들의 결혼식이나 친척들의 결혼식에 참가해 본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면사포 쓴 신부와 갓 면도해서 어딘지 이발관 면도사처럼 보이는 신랑이 웨딩마치에 맞추어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내게는 참 요원한 것처럼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마치 강 건너 불 보듯이 생각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그것이 나의 문제로 다가왔을 때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더 기다려 본댔자 어디 부잣집 무남독녀가 생길 처지도 아니고 그러니까 이런 기회에 얼렁뚱땅 해치우는 게 낫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집안 식구들 모인 자리에서 밥을 먹다 말고 지나가는 말 비슷하게 타진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다들 이게 무슨 꿩 구워 먹는 소리냐는 식의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너 미쳤냐"

어머니가 틀니를 오물대면서 물으셨습니다.

"너 돌았니."

이건 형의 말씀.

"형 어디 불편한 것 아니요"

이건 동생의 말이었습니다.

"아닙니다."

나는 자기의 친자식의, 동생의, 형의 말을 그런 식으로 들어 주는 형제들이 아니꼬와서 꾸역꾸역 밥을 퍼먹기 시작했습니다.

"난 미치지 않았소. 멀쩡하요"

"상대는 누구냐"

어머니가 미친 소리이긴 하지만 자식 입에서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결혼 얘기가 나오니 기특도 해 보였고, 또 잘하면 며느리 하나 데려다 밥 짓게 하고 시장 보내고, 저 자식 고린 양말 대충 빨게 하면 어쩌면 손해는 아닐 것이다, 하고 생각하셨는지 조심스럽게 전당포 주인처럼 물었습니다.

나는 더듬더듬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여편네 자랑을 시작하였습니다.

"아아, 너 해치웠구나. 해치웠어"

얘기를 다 듣고 나시더니 어머니가 점장이 같은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지금 임신한 모양이구나"

"?"

나는 놀라서 반문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네가 그렇게 서두를 리 없지 않니"

나는 어이가 벙벙해서 대꾸할 말을 잊었습니다.

그러자 형이 한마디 했습니다.

"그래 니놈이 결혼한다고 치자, 그렇지만 도대체 뭘 먹고 살 작정이냐?"

형은 나이 먹은 사람 특유의 신중론과, 경제 이론을 얘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알다시피 우리 집은 니가 장가간다고 해서 뭘 해준다거나, 남들처럼 뚝 떼어 줄 돈도 없어"

"각오했습니다."

나는 내친걸음이라 신병처럼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먹구 살 게 없으면 가정교사를 하겠습니다. 그저 밑진 셈치고 이십만 원만 만들어 주쇼. 그거야 나 장가보내지 않더라도 매일 용돈 주는 액수와 같지 않습니까. 아랫방에 세를 주고 이십만 원만 적선하쇼."

"미쳤군"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아까운 나이에 미쳤어"

"난 미치지 않았소"

나는 항의하였습니다.

"정신이 멀쩡합니다."

"남자애들은 저래요. 키워만 놓으면 저런 식으로 나온다니까. 그건 그렇구 니 색시감 얼굴이라도 봐야 할 게 아니야"

"좋습니다. 내일 데리고 오겠습니다."

다음 날 나는 여편네를 만나자 우리 오마니가 너를 보겠다는 것을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여편네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습니다. 장래 시어머니 될 사람이 알현을 하겠다니 겁에 질리기도 하련마는 아내는 그보다도 노인네 같은 사람 앞에서 잘 보이는 스타일이 아닌 자신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인들이 좋아하는 며느리감이란 두덕두덕 살찌고 엉덩이가 커서 애쯤이야 쑤욱쑤욱 생산하고 입이 커서 식복 타고 났겠고, 몸이 튼튼해 이것저것 부려 먹어도 감기 몸살은 안 걸리게 생겼고, 그런 여인을 좋아하는 번이라는 것을 어느 주간지에서 읽은 여편네는 이미 만나기도 전에 주눅이 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아무래도 언젠가는 어머니나 집안 식구들에게 선을 보야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편네는 미장원에 간다, 어쩐다 수선을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좋아하는 중국 과자까지 사 들고 우리는 우리 집으로 향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어제저녁,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저 자식 평소에 식은 죽먹는 소리 노상 하는 자식이라 설마 설마 하였다가 어떤 여자 꿰어차고 들어오는 나를 보자 당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인사드려, 어머니한테. 인사드려. 어머니, 며느리 왔습니다. 둘째 며느리 왔어요."

나는 기세 좋게 소리를 빽빽 질렀습니다.

"안녕하세요."

여편네가 제법 공손하게 고등하교 가정 시간에 배운 대로 인사를 드렸습니다. 갑자기 방안이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시집간 누이를 전화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시집간 누이는 똥똥하고 대부분의 딸들이 그러하듯 어머니와 짝자꿍이 맞아 집안일에는 모두 간섭하고 참견하야만 직성이 풀리는 민비 같은 독재자였습니다. 형과 동생과 형수는 창경원의 원숭이 보는 식으로 여편네를 평면도로, 측면도로, 입면도로, 투시도로 노려보기 시작했습니다. 안보는 척 실눈을 뜨고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난한 우리 집 사람들은 물건 하나 사려고 시장을 한 바퀴 도는 버릇이 있는데 그렇게 산 물건이라도 어딘가엔 치명적이 약점이 있었던 경험이 있었으므로 혹 이 여자가 첫눈엔 쓸만하지만 실은 어딘가 결점이 있는 게 아닌가 전당포 주인처럼 물건값을 매기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시집 간 누이가 오자 이 집 수색작전은 가열되었습니다. 누이는 여편네의 걸음걸이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 부엌에 나가서 물 한그릇 떠오라고 명령했습니다. 혹시 안짱다리가 아닌가 어쩐가 보려는 듯 말입니다.

동생은 여편네를 장래 형수님으로 가끔 용돈 탈 수 있게 길들이기 위해서 천연스럽게 위엄을 가자 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형수만이 자기의 동서감이 나왔으므로 싱글벙글 웃으면서 신바람이 나 있었습니다.

이 회견이 끝나고 여편네를 집에 가는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주고 집에 오자 집안에는 다들 모여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역적모의하는 모리배들처럼 안방에 자리 깔고 앉아서 내가 들어가자 한마디 말도 없이 적대시하였습니다.

"어때요. 괜찮죠. 괜찮죠"

"좋아하네."

동생이 한마디 했습니다.

", 틀렸다"

어머니가 중대 발언을 하셨습니다. 언제 오셨는지 매형까지 와서 앉아 계셨습니다.

"넌 어떻게 생각하니"

어머니가 누이를 돌아보셨습니다.

"틀렸어. 곁눈질하는 버릇이 있더구나. 건강한 얼굴빛이 아니야. 여자는 콧날이 오똑해야 좋은데 콧날이 죽었어. 아무리 수줍다 하더래도 말을 할 때는 사람의 얼굴을 쳐다봐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가정교육이 틀려먹었더군."

어머니가 한 마디 첨가하셨습니다.

"예쁘지도 못해"

동생이 말했습니다.

"깍정이 같아"

"철부지더군. 그렇게 철이 없어 가지고 가정생활이라는 중대한 일을 감당해 낼 수 있을까."

형이 한마디 했습니다. 나는 야코가 푹 죽었습니다.

"여보쇼. , 뭐 난 잘난 사람이요. 아들도 신통치 않은데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닥쳐라 이놈"

누군가 호령을 하였습니다. 놀라서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보니 돌아가신 아버지의 초상이 나를 보고 눈을 부릅뜨고 계셨습니다.

"네 이놈,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잘못했습니다."

"그럼 어째

"떼어 버려."

매형이 말씀하셨습니다.

""

나는 놀라서 고개를 쳐들었습니다.

"차 버리란 말야."

동생이 통역을 했습니다.

"할 수 없다. 투표를 해야겠다. 오늘 여기 모인 사람은 나, 너희 누이, 매형, , 동생 그리고 형수 이렇게 여섯 명인데 잠시 후에 투표로써 결정하겠다."

동네 반장이신 어머니가 자못 민주주의의 기수 같은 발언을 하셨습니다.

"넌 투표권이 없다. 그리고 가족 여러분께 미리 말해두겠다. 이건 중대한 문제니까 잘 생각해서 투표해 주기 바란다. 투표는 삼십 분 후에 실시하겠다."

나는 기가 막히고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삼십 분 후에 있을 투표에 대비 동분서주하기로 했습니다. 우선 나는 형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형수님은 부엌에서 반찬을 만들고 계셨습니다.

"형수님, 난 형수님을 믿습니다."

나는 아부를 했습니다.

"형수님은 형수님이 시집올 때 나의 찬동표에 힘입어 합격하셨던 과거를 잊지는 않으셨죠. 난 형수님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형수님의 은혜 때문에 살이 3킬로 늘었습니다."

"염려 마세요. 난 도련님 편이니까요. 다른 사람이나 찾아보세요."

나는 기뻐서 형수님의 얼굴에 키스를 하려고 했는데, 문득 이 여자는 형 여편네지 내 여편네가 아니므로 그따위 짓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아 그냥 인사만 드리고 동생을 찾아갔습니다.

동생은 자기 방에서 기타를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봐줘. 임마. 봐줘"

"안 되겠다면."

"이 쌔끼가"

나는 주먹으로 한 대 때릴 것처럼 흥분했습니다. 그러나 들었던 주먹을 놓으면서 이래서는 안 되지, 이렇게 흥분할 때가 아니지, 이 자식도 엄연한 참정권이 있으니까, 하고 마음을 진정하였습니다.

", 높은 자리 있을 때 봐주라"

"안 되겠어"

"아니 왜"

"맨입으로는 안 되겠어"

"그럼."

"내놔."

"뭘 내놔."

"돈 좀 내놔."

", 너도 알다시피 내가 무슨 돈이 있니"

나는 사정하기 시작했습니다.

", 내가 무슨 돈 있어. 주머니를 뒤져 볼께 봐라."

나는 입으로 동전을 먹고 귀에서 그것을 꺼내는 마술사처럼 주머니를 뒤져 돈이 없음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럼 안 되겠는데."

", 봐줘. 임마. 이다음에 떼돈 벌면 너 봐줄께"

"그걸 어떻게 믿어."

"이 새끼가."

나는 또 주먹이 앞섰습니다. 그러나 참아야지.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은 저의 것이요,

"봐주라. 봐줘."

그럼 행세해."

"후불로 하겠다고."

"그래 행세한다. 행세해."

"그럼 됐어, 가봐."

"난 널 믿는다."

"난 널 믿는다."

나는 악수를 청했습니다.

"난 누구보다도 널 사랑하고 있어."

"좋아하네."

동생은 웃었습니다.

두 표 확보.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나는 뛰어서 형에게로 갔습니다. 형은 녹음테이프를 가져다 놓고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안녕하쇼."

"빠쁘다, 바뻐. 무슨 소리하러 왔는지 알겠다. 알겠어."

", 난 형 믿소."

"믿어봐라. 나 안 찍을 테니."

""

"귀찮아 임마. 방해하지 말어."

""

"이 자식이 귀찮대두"

"형은 내 은덕 잊었소. 형이 결혼할 때 내가 찍은 한 표 때문에 과반수 넘은 것을 잊었소"

"안 잊었다"

"그럼 봐주쇼"

나는 두 손을 싹싹 빌었습니다.

"그래서 니놈이 봐줬기 때문에 못찍겠다."

"아니 이건 또 무슨 해괴망칙한 소리요"

"이 자식아. 니놈이 한표 찍어서 난 잡혔어. 잡혔다구. 너 지금은 후끈 달아서 이러는 모양이데 해 봐라. 결혼해 봐. 임마, 본전 생각난다니까. 내 원망한다구. 난 차라리 니몸이 나를 안 찍어주어서 그때 결혼식이 성사 안되었길 바래. 알겠니"

"모르겠소

"찍어주마"

한참 후에 형은 길게 한숨을 쉬셨습니다.

"내가 왜 반대하겠냐마는 니가 불쌍해. 남자는 일찍 장가가면 파이다 파이. 찍어주마"

"만세. 형 만세"

나는 만세삼창 하였습니다. 물론 속으로. 이제는 한 표만, 한 표만 더 확보하면 문제는 없었습니다. 나는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 이제는 누구를 설득할 것인가. 어머니를, 누이를 그리고 매형을. 그러나 세 사람은 다 같이 난공불락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역할, 즉 가정을 돌보고, 가꾸고, 이끌어 나가는 일에 기가 막힌 고집과 보수주의를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청렴결백하였습니다. 뇌물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눈앞이 캄캄하였습니다. 내가 홰 이러는 것일까. 내가 왜 이렇게 봄닭처럼 뛰고 있는 것일까.

장가가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이처럼 아부하고, 치사스럽게 행동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우울한 모습으로 어머니를 찾아뵈었습니다.

어머니는 벽을 보고 누워 계셨습니다.

"누구냐."

"접니다. 둘째 아들입니다."

"앉아라. 다리를 주물러 다오."

""

나는 이게 왠 떡이냐, 하며 어머니를 앞에 두고 앉아서 어머니의 주름진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누우신 채로 가늘게 노래를 부르고 계셨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헤어졌으나

어머님 무릎 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이 책 중에 있으니

나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님이 불러 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나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가늘었지만 부드럽고 편물기 속에서 직조되는 실처럼 탄력이 있었습니다.

"걔가 어디가 좋더냐"

벽쪽을 향해 노래를 부르시다 말고 어머니가 웃으셨습니다.

"착합니다. 그 앤 착해요"

어머니는 점잖게 말을 막았습니다.

"그 애가 어떻게 너 같은 바보 자식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더라. 니가 어디 잘 났냐, 돈이 있냐. 철없는 불한당 같은 녀석을 말이야"

나는 부끄러워서 힛히히 웃었습니다.

"살 자신 있냐?"

""

나는 이를 악물었습니다.

"실은 그 애가 썩 마음에 들었단다. 아주 여간 마음에 들지 않았어."

"아니 뭐라고요"

나는 놀라서 기절할 뻔하였습니다.

"젊었을 때의 나같이 예쁘더라, 난 여자가 예뻐야 된다고 생각한다. 예쁘면 마음도 예뻐. 손도 이쁘고. 발도 보니까 예쁘더라"

"감사합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태산을 넘어 현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나아가면

주께서 아니 버리신다는 약속한 말씀 생각나네.

하늘의 영광. 하늘의 영광 내 마음 속에 차고 넘치네.

나는 어머니의 다리를 주무르면서 나의 핏줄 사이로 어머니의 피가 스며드는 착각을 받았습니다.

내 아버지가 어머니를 가졌듯, 내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가졌듯, 증조할아버지가 증조할머니를 가졌듯, 그가 그녀를 가지고, 그녀가 그를 가지고, 그가 그를 낳고, 그가 그녀를 낳고, 낳고 낳아서 이곳에 앉은 나는 그녀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으며, 언젠가는 재가 그녀를 가지고 그녀 또한 나를 가지고 있으며 그리하여 내가 그를 낳으면 그는 나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겠고, 또 그는 그를 낳은 것이므로 우리의 생은 이어지고 이어져 그 끝간데를 모르겠으니, 우리는 실은 혼자서 우리가 소유한 우리의 생은 단순히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터득하였던 것입니다.

그날 밤 나는 만장일치로 결혼을 승낙받았습니다. 참으로 이상하고 이상한 결론이었습니다.

한 달 뒤 나는 싸구려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가장 싸구려 선물용 플라스틱 세트를 구비하고 축의금을 받아서 식장비를 내고 존경하는 선생님을 주례로 모시고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난생처음 머리를 가르마 타고 기름까지 바르고 신부 측에서 얻어 입은 제일모직 양복을 입고, 손에 모범 운전수처럼 흰 장갑까지 끼고 엄숙하게 결혼식을 진행하였습니다. 신부는 식장에서 빌린 때 묻은 드레스를 입고, 인근 미장원에서 신부 화장을 하고 결사적으로 예뻐야겠다는 식으로 만면에 웃음까지 띄우고 아주 여유 있게 웃었습니다.

나는 그날 감기에 걸려 기침을 하면서 생전 처음 연습도 못 한 결혼식을 별 큰 실수 없이 치르고 말았습니다.

식이 끝나고 형 친구에게 빌린 차에 올라타고서야 나는 긴장이 풀려 아, 이제 결혼식을 올렸다 올렸어, 하는 실감이 들어오고 뭔가 진짜 어른이 되었으니 어딘가 달라져야 되는데 일테면 머리를 상투 틀어 올리거나 키가 부쩍 크는 식으로 만져서 확인할 수 있는 뚜렷한 차이가 있어야 할텐데 그냥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으므로 이게 결혼식인가, 남들이 하고 싶어하는 결혼식인가. 어쩐지 씁쓸하고 우울해서 달리는 신혼차를 세우고 소변보러 가는 척 어디론가 도망가서 숨어버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기

아내가 애를 밴 것은 결혼하고 3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물론 당연하게도 피임을 하였습니다. 내가 무어 용감하다고 다른 사람들처럼 결혼하기가 무섭게 떡두꺼비 같은 자식을 낳을 재주도 없거니와 실상 애를 키울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처음 1년간은 그냥 지냈지만 차츰 주위에서 놀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고 우장춘 박사가 발명한 씨 없는 수박이라느니 어쩌구 하는 놀림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합법적으로 뽀뽀하고 합법적으로 애 낳기 위한 것인데 애를 안 낳으려면 무엇 때문에 서둘러서 결혼을 했느냐는 얘기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애를 낳기로 결심하고 가족계획협회와 등졌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기다리는 님은 오지 않는 법이랬다고 진짜, 기다리는 꽃 소식은 감감소식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정말 씨 없는 수박이 아닌가 의심스러워졌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초조하고 또 불안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아내의 조심스러운 임신 고백을 들었을 때 나는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고 기뻐했지만 한편 겁이 덜컥덜컥 났습니다.

어쩌다 들여오는 돈으로 열 달 후에 있을 아기를 위해서 기저귀다 뭐다 장만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날로 불러 가는 아내의 배를 보면서 저속에서 애가 과연 나오는가 어쩐가, 나온다면 재수 없는 얘기지만 멀쩡한 녀석이 나올까, 어쩌다 바보 같은 자식 나오는 게 아닌가. 나도 모르는 우리 집 가계에 몹쓸 유전병이 있어서 어쩌다 괴상한 녀석 나오는 게 아닌가 어쩐가 염려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입덧을 웩웩하면 무어 맛있는 거 사다 주는 것보다도 일부러 여자들은 임신했을 때 오히려 움직이는 편이 낫다는 말을 신봉해서 임신하기 전보다 더 부려먹고 나중에는 머리맡에 있는 담뱃갑 집어 오라고 부엌에 있는 아내에게 심부름을 시키곤 했습니다. 겁이 나는 것은 또 재수 없는 얘기이지만 혹시 제왕절개 수술인가 뭔가 하고 나오거나 어쩌다 제 낳을 날보다 미리 나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아예 움직이게 하는 편이 낫다고 나는 태엽만 잔뜩 주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까칠까칠 말라갔습니다. 조그만 몸에 책상 위의 오뚜기 우습구나야 하는 식으로 배만 오뚝 튀어나와서 뒤뚱뒤뚱하는 품이 알 낳으러 가는 오리와 같아 보였습니다.

낳을 달이 임박해서는 제법 뱃속의 아기가 꿈틀꿈틀 대고 그래서 한번 나보고 만져보라고 해서 슬쩍 만져보았더니 과연 그 안에 무언가 살아서 맹렬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나는 우리가 사는 것은 바로 이런 평범한 진리, 즉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 만에 나왔다는 진리를 되새김질하는 것에 불과하구나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을 뿐이지 별다른 감동은 받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 소가 송아지를 낳는 것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소가 송아지 낳을 때 임박해서의 그 느린 몸짓, 본능적으로의 경계심을 어렸을 때지만 이상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내도 마찬가지여서 낳을 때 임박해서는 잘 웃지도 않고 어디서 들었는지 태교인가 뭔가를 한답시고 마리아상 앞에서 얌전히 누워만 있었습니다.

아내는 미신처럼 고운 그림, 고운 얘기를 들어야만 뱃속에 있는 애의 성품이 좋을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쌍욕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아내는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했습니다. 배가 왜 아프냐 먹은 게 체했냐 하고 나는 소위 진통제는 먹을 수 없으니 사이다나 먹으라고 말을 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소위 진통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참을성이 있는 아내는 끙끙대면서 잠 곤히 자는 나를 깨우려 들지 않았지만 나 역시 강심장은 아니어서 밤을 꼴까닥 세웠습니다. 나는 정말 열 달 만에 애기가 나올 바엔 십 년 만에 애가 뱃속에서 유아기고 뭐고 다 지내고 나와 나오자마자 아빠, 돈 줘. 아빠 학교 가야겠어. 하는 말을 듣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편이 훨씬 낫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우리 부부가 닭띠라서 쥐해에 아기를 낳으면 쥐가 닭을 해치기 잘해 나쁠 것이라고 걱정하였고 이제 12월이니 좀 늦게 애를 낳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였지만 애가 나오려고 한 것은 12월 초순이었습니다.

날이 새자마자 짐을 꾸려 들고 병원으로 가는 길에는 눈이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임산부인 아내 옆에 가는 게 약간 창피해서 죄진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째 애가 길바닥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염려스럽고 애가 타서 빠르게 걸었는데 병원 측에서는 방을 하나 잡아 주더니 느릿느릿 뭐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하였습니다. 아내가 애를 낳을 때 남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옛날에는 아내가 산통을 하면 남편은 지붕에 올라가서 기었다고 하지만 나는 그냥 담배만 뻐끔뻐끔 피워대고 있었습니다. 12시쯤 아내는 분만실로 갔습니다. 포로처럼 푸른 입원복을 입고, 걸어서 갔습니다. 분만실은 긴 복도 끝에 있었는데 나는 그곳까지 따라가 보았습니다. 펄펄펄 눈이 내릴 때 소리가 나는지 어떤지 잘 모르지만 하여튼 눈이 펄펄 날리고 있었습니다.

"잘 해봐"

나는 권투 시합 직전에 공이 울려 튀어 나가는 선수의 귓전에 대고 말하는 세컨드처럼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잘해보라니. 이게 무슨 말라죽은 소립니까. 분만실 앞 벤치에 앉아 있던 여자들이 나를 힐끔힐끔 봤으므로 더 이상 따라갈 수도 없었습니다.

아내는 각오가 다 된 듯 보였습니다. 글쎄 고게 웃기게도 왕년에 애 열둘 낳아 본 폼으로 자못 침착하였습니다.

문이 덜컹 열리고 덜컹 닫혔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에게 비나이다. 그저 아들 하나만, 하고 빌다가 나는 미친 새끼야 아들 딸이 뭐야. 그저 멀쩡한 것 하나만 낳으면 됐지 하고 생각을 정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사실 아들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건 왜냐하면 아들을 키워주면 제가 나가서 부잣집 무남독녀 하나 꿰어 차고 들어오면 그만이지만 여자야 길러주면 늑대같은 남자한테 따라갈 생각이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아닙니까. 이자 안나오는 투자는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눈이 펄펄 날리는 문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배가 고팠으므로 근처 식당에 가서 국수를 먹었습니다. 누이에게 전화를 걸고 장모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도저히 분만실 앞에서 대기할 수는 없고 또 창피한 노릇이고 그래서 나는 그녀들에게 인계시키고 어디 영화 구경이라도 할 생각이었습니다.

내가 애를 낳는다. 내가 애를 낳는다. 거참 신통도 하다. 신통도 해. , 어린애 같은 내가 애를 낳는다. 지화자 좋을씨고. 그러나 12시에 분만실로 들어간 아내는 3시가 되어도 소식이 없고 깜깜했습니다. 기다리는 장모만 불안해서 의자에 참다랗게 앉아 있었습니다. 의사와 간호원이 들락날락거리고 나는 그들의 굳은 얼굴에서 자꾸 재수 없는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견디다 못해 밖으로 나와 술도 한 잔 들이키고 우동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친구에게 전화도 걸고 그래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서 하기도 싫은 목욕탕에 들어가 목욕까지 했습니다.

늙은이처럼 더운 욕탕 물 속에서 2천번까지 세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또 무엇 할 것이 없는가 궁리궁리 하다가 빠찡꼬까지 해서 5백원 날리고는 이제는 낳았겠지 들어가자 하고 병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아직 아기는 나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기다리던 사람들도 다 가고 이제는 복도에서 우리들 식구만 남아서 서로의 시선이 마주 닿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면서 분만실을 넘나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보초 서듯 긴 복도를 끝에서부터 끝까지 걸었습니다. 온 길로 또 가고 간 길을 또 오고, 그래서 상당히 많은 길을 걸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덜컹 분만실 문이 열리면서 간호원이 가슴에 아기를 안고 나왔습니다.

"뭐예요. "

앉아 있던 장모님이 대뜸 그것부터 물었습니다.

"딸이에요. 따알"

"아이구머니나. 어때요. 애기 엄마는"

"순산이세요"

"어디 좀 보자. 어디 좀 봐"

나는 우두커니 멀찌감치 서 있었습니다. 공연히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세상 모든 것이 부끄럽고 죄스러웠습니다.

"여보게 와서 봄 보게"

나는 주춤주춤 그리고 갔습니다. 조그만 아기가, 도저히 사람이라고 상상할 수 없는 조그만 고깃덩어리가 간호원의 손에 안겨 있었습니다.

여린 핏자국까지 얼굴에 묻어 있었습니다.

"아빠 닮았지"

나는 가만히 아기를 보았습니다. 갈 길이 바쁜 간호원을 붙들고 보았는데 문득 나는 29년 전의 나를 그것에서 보았습니다. 내가 거기에 안겨져 있었습니다. 눈도 뜨지 못한 채 세상 보기 싫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안녕. 나는 인사를 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나온 아기와 나와의 최초의 말입니다.

나는 긴 복도로 줄곧 걸었습니다. 복도는 끝이 어디인지 출구가 어디인지 막막해서 마치 미로에 빠진 것 같았습니다.

이제 아기는 크겠지. 그래서 재롱을 피울 것이다. 봐라. 나는 키운다. 한번 멋지게 키울 것이다. 화초에 물 주듯 나는 아기를 키울 것이다.

아기가 장난감이 필요할 때면 때 맞추어 사다 줄 것이다. 난 절대로 절대로 이 아기가 궁색하게는 키우지 않을 것이다. ,맹세한다. 맹세해. 나도 남들처럼 피아노를 배우게 할 것이다. 남들처럼 어린이 합창단에도 집어넣어 노래를 부르게 할테다. 두고 봐라. 두고 봐. ,맹세한다. 맹세해.

나는 눈이 녹아 질퍽이는 거리로 나섰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결혼 신고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래가 게을러서 아직까지 결혼 신고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제서야 내가 비로소 결혼한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늦은 시간이었으므로 우선 어디 조용한 곳에 살짝 숨어서 허락되는 대로 마음껏 웃으리라 작정하였습니다.

 

신혼기

내가 나의 아내와 결혼하고 나서 제일 먼저 얻은 방은 15만 원짜리 전세방이었다.

내가 나의 집식구들에게 아무래도 결혼을 해야겠습니다. 하고 선언하였을 때 나의 집에서는 놀라고 펄쩍 뛰었다. 이 녀석아, 아 글쎄 결혼이라는 게 불안 두 쪽 가지고 되는 것인 줄 아느냐. 사는 게 그리 쉬운 것인 줄 아느냐 하고 공갈 협박을 놓았다.

그러나 나는 꼭 결혼식은 올려야겠다고 결심하고 집에서 미친 척하고 20만 원만 꾸어줍쇼, 나중에 갚아 드리겠쉬다 하고 우리 집 아랫방에 전세들여 20만 원을 갈취하였다.

이리하여 결혼식은 시작되었다. 군대 제대하고 복교한 소설가 지망생인 나와 나이는 동갑내기로 이미 몸도 마음도 그 알량한 소설가 지망생에게 불법침입 당해 이제 아무리 생처녀 행세를 한다 해도 팔릴 것 같지 않은 노처녀인 애인은 그것도 감지덕지해서 제일 싸구려 청첩장을 돌리고 싸구려 도떼기 시장 같은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가난한 애인은 그래도 신랑에게 선물이라고 제일모직 신사복 한 벌 해 주었고 신랑은 아내에게 싸구려 루비반지 하나 해 주었다.

그리고 결혼했는데 신혼여행은 안갈 수 없어서 워커힐인가 스카치힐인가 하는 호텔에서 하룻밤 잤다. 날씨가 어찌나 추운지 호텔 안에서 피가 나도록 뽀뽀만 하고, 뽀뽀만 했다.

식장비는 그래도 친구랍시고 백원, 5백원 코 묻은 돈 가져다 준 부조금 합쳐보니 식장비와 신혼여행비 정도 되고도 한 2만원 남아 우선 한 달은 먹고 살 수 있겠다고 환호작약하였다. 그리고 입주한 곳이 바로 그 문제의 방인데 이 방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예사의 방이 아니라 도깨비 방이라는 말씀이다.

남의 집을 전세로 드나드는 분은 잘 아시겠지만 빨래 하나 하려 해도 주인 눈치 봐야 하고, 변소에서 소변보려 해도 눈총받는 판이어서 명색이 대학 출신 부부는 그 알량한 문화인답게 15만 원 정도로 남의 눈치 안 보고 배짱 편하게 살 수 있는 그 무엇이 없을까 전전긍긍하다가 구한 것이 바로 그 방이었다.

이 방은 남의 집 문간방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아파트와 같았다. 15만 원짜리 아파트라 하면 놀라 자빠지시겠지만 무언가 하면 여관 2층 방이라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혹 여자 좋아하고 오입께나 한 사람들이면 1주일에 한 번은 가게 되는 소위 독탕이라는 곳인데 들어가면 공중전화통 같은 목욕탕이 있고 목욕탕 앞에 침대가 놓여 있는 5평짜리 방이라는 말씀이다.

맨 아랫층은 대중탕이어서 남탕. 여탕이 분리되어 있고 23층은 오입쟁이들이 드나들고, 창부 서넛 대기시켰다가 그 방에 들여보내는 말하자면 일종의 창부집인데 목하 성업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날조 아파트로 변하게 된 것은 그 목욕탕 부근에 고등학교가 있기 때문이었다.

학교 선생들이 교육의 전당 부근에 창녀집이 웬말이냐 비분강개해서 진정한 것이 주효해서 배부른 목욕탕 주인이 궁여지책,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전세 아파트(?)였던 것이다

나는 그 아파트 2층에서 생활하였다. 그래도 문화인답게 스팀이 들어오고 더운물 찬물이 틀면 나와서 나는 목욕 따위는 배포 유하게 하루에도 서너 번해야 직성이 풀리곤 하였다.

그러나 말이 방이지 급조한 방이라 옆집의 숨소리까지 다 들려오고 밑바닥은 콘크리트라 별수 없이 서대문 로터리에서 유도 도장에서나 쓰는 싸구려 밀짚을 사다가 밑에 깔고 그야말로 초가삼간 외양간 같은 기분을 내고 눈만 뜨면 그 방에서 이젠 결혼도 했으니 안심하고 합법적인 뽀뽀만 하였다.

우리 부부가 사는 방은 여탕 2층이라 밤이면 물 끼얹는 소리, 어린애 우는 소리(왜 여탕에서는 애 우는 소리가 그리 극성스러운지 나는 모르겠다.) 여기 더운물 더 주세요, 어쩌구 하는 소리가 선연히 들려와서 일테면 나는 희멀겋게 벌거벗은 여자들을 그의 엉덩이 밑에 깔고 사는 주지육림의 의자왕쯤 되는 기분이어서 에라 콘크리트 벽을 뚫어 심심풀이 여체 감상이나 할까 어쩔까 궁리하곤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 집에 입주하게 되고 아침저녁 '여관, 목욕탕'이라고 팻말 붙은 그 아파트를 자주 오가게 되자 하루는 여관 앞에 있는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는데 이발소 주인이 낄낄대는 것이었다.

"여보, 젊은이, 나도 여자 좋아하지만 젊은이 몸 생각하셔야겠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그 목욕탕에 드나드는 모양인데 몸 생각해야지. 힛히히...."

나는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어서 그냥 있었지만 내심 이 무지몽매한 자식아, 오입이라면 니놈이나 할 것이지 왜 꿎은 나를 들먹이냐고 투덜대었던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집 앞을 드나들 때에는 주위를 휘둘러 보게 되었고, 아내가 시장갈 때도 그 망할 놈의 이발관 주인이 아내를 마치 목욕탕에 전속된 새로온 제법 예쁜 색골 창녀쯤으로 볼 것이 아닌가 우려되어서 끙끙 앓았던 것이다.

아시다시피 목욕탕에서는 물을 저장해 두기 위해 옥상 꼭대기에 물을 저장하는 물탱크를 비치해 두는 모양인데 어느 날 밤 내가 술에 취해서 들어와 곤히 자다가 냉수나 한사발 멀어야겠다고 일어나서 그 가스실 같은 목욕탕에 들어가 냉수를 먹고 다시 자리에 누우려다가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놀라지 마시라. 심장 약한 분은 이 아래를 읽지 마시오(작가 백).

우리는 아무리 밑에 밀짚을 깔았지만 물기가 있으므로 그 위에 삼절요를 깔고 잤는데 아, 글쎄 방안에 물이 가득 차서 베니스 수중도시처럼 온 방 안이 강을 이루고 성냥개비들이 뗏목처럼 둥둥 떠 있고, 이제 막 우리가 깔고 있는 삼절요 스폰지는 물기가 먹어 들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나는 놀라서 잠든 아내를 깨웠고, 아내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꿈이라면 분명 길조다 꿈에 물을 보았으니, 어쩌구 아직 철이 없어서 깔깔깔 웃고 말았는데 귀 기울여 들어본즉 아, 천지는 까마득하고 무슨 소리인가 폭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에라, 바지를 걷고 복도로 뛰어나가 보니 아, 글쎄 3층 옥상에 있는 물탱크가 터져 물이 계단을 타고 설악산의 계단 폭포처럼 물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무슨 네로 대왕이라고 그냥 그 오물에 잠기는 로마여 어쩌구 시를 읊을 수 없어 잠든 관리인을 깨우고 수소문해서 여관 주인이 달려오고 그래서 대비책을 강구하였지만 이미 물은 거의 다 쏟아졌고 속수무책이라 두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창 밖은 새벽이라 어둡고 거기에다 비까지 오고 있었다.

방 안에 들어와 보니 완전히 물이 발목까지 차서 내가 아끼는 책들은 담수어처럼 물 속을 헤엄치고 있었으며 부엌(실은 욕탕)의 파들이 뱀장어처럼 꿈틀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웃었다. 그러자 쌍놈의 눈물이 한 방울 툭 튀져 나왔다.

"가자"

나는 이범선의 <오발탄>처럼 소리를 질렀다.

"어디로요? 이 밤중에"

"북아현동에 약수터가 있다더군, 거기 가서 약수나 마시자"

"좋아요"

아내는 비닐 우산을 들고 나섰다. 우리들은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왔다.

나는 하품을 했다. 그리고 도대체 어찌 살 것인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막연하고 한심해서 한숨만 푸욱푸욱 쉬었다. 그러자 철부지 아내는 집이야 떠나가든 말든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수 있는가 하는 식으로 이 새벽에 남편과 우중 데이트를 즐기는 속 좁은 소견에서(?) 다정스럽게 내 팔짱을 끼고 우산을 두드리는 봄비 소리를 들으면서 몸을 기대면서 화알짝 웃었다.

그래서 나와 아내는 새벽에 자기들이 무슨 건강을 위한다고 비까지 맞아가면서 북아현동 약수터에서 약수를 마시고, 그리고 남이 안 볼세라 볼세라 뽀뽀까지 나누고 불쌍한 소설 지망생은 서울이 터져 나가라고 에야호 에야호, 죽어라 죽어, 지금 자고 있는 새끼들 죽어라 죽어 ,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발성연습을 하였다는 얘기이다.

 

아내의 머리칼

신혼 초에 아내는 내게 물었던 적이 있다.

"저 머리를 짜를까요, 아니면 그냥 그대로 놔 둘까요"

그 말은 무슨 소린고 하니 이제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라 시집온 나는 당신의 몸이므로 당신의 뜻대로 당신이 하자는 대로 다 하겠으니 머리칼은 어떻게 할깝쇼 하고 묻는 소리였던 것이다.

이를테면 저녁 반찬은 무엇으로 할까요. 라면은 무슨 라면으로 할까요. 소고기 라면, 짜장 라면, 카레 라면 무슨 라면으로 할까요, 하고 묻는 식이었던 것이다.

머리칼,나는 아내의 머리칼을 들여다보면서 웃었다.

아내의 머리칼.

아내의 머리칼은 심심울창하였다. 대학교 3학년 때 커트 한번 하고 내리 길렀던 머리는 어깨를 뒤덮을 정도로 무성하였다.

왜 아내가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다니는가. 내가 물으면 아내는 파마값이 아까와서 그런다고 대답하였다.

머리를 짧게 기르면 때맞춰 머리를 지지고 볶고 해야 하는데 한꺼번에 기르면 제멋대로 늘어뜨리고 다녀도 폼은 폼대로 나고 돈은 돈대로 안 들어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하는 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떤 편이냐 하면 아내의 긴 머리칼에 대해서 반대의 입장은 아니었다. 나는 여자의 포니 테일 스타일을 좋아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긴 머리칼 긴 부분을 빛깔 고운 손수건이나 핀으로 묶어 올린 말꼬랑지 같은 머리칼을 좋아하고 있었고 또 은근히 아내의 긴 아침밥을 먹다가 나는 아내의 긴 머리칼이 밥 속에 묻혀 있던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원래 나는 신경이 예민한 편이지만 밥 속에 머리칼이 섞여 있거나 돌이 섞여 있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이 무딘 편이다.

그래서 무심코 밥을 막다가 아내의 머리칼(아내의 머리칼 빛깔은 검지 않고 금빛이다)을 들어 올리면서, 오 빛나는군 빛난다, 밥 속에서 사금파리가 빛나고 있구나 하고 감탄사를 발하자 아내는 남의 농담을 전적으로 자기식으로 받아들이곤 어쩌나, 어쩌나 저걸 어쩌나 하고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머리칼이 길어서 그래요.

머리칼이요, 하고 머리칼 탓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아내는 내게 물어왔다.

"어떻게 할까요, 머리칼을 짜를까요. 아니면 그냥 놔둘까요" 나는 신문을 들여다보면서 대답하였다.

"자네 맘대로 해"

"아무래두 짤라야죠?"

"글쎄"

"아니면 그냥 놔둘까요"

"글쎄"

"안 돼요. 이런 건 남자가 정해 주는 법이에요"

"글쎄"

그날은 유야무야로 이야기가 끝났는데 며칠 지난 후에 아내는 또 물어왔다.

"머리를 짜를까요. 아니면 놔 둘까요"

"아니 여태 안 짤랐나"

"그럼 짜를까요"

"글쎄"

며칠 후 나는 임시로 교정을 보고 있던 출판사에서 전화를 받았다.

"웬일이야"

나는 좀체로 아내가 전화를 걸어오지 않는데 그날따라 전화를 걸어 왔으므로 볼멘 소리로 물었다.

"저 머리땜에요"

"머리가 왜. 아파"

"아니 머리를 어떻게 할까요"

"글쎄"

"대답하세요"

"거기 어디야"

"미장원에요"

"그런데"

"머리를 짜르러 왔는데요. 지금 짜를까 말까 고민중이에요""그럼 맘대로 하지 뭐"

전화를 끊었다.

그날 집에 가니 아내는 머리를 베지 않았다.

긴 머리를 그대로 무성하게 내려뜨리고 있었다.

"아니 왜 안 짤았어"

"아까워서요. 어쩔까요. 정말 짜를까요"

"세상 고민할게 많구"

1주일 후 나는 부산에 무슨 일 때문에 내려가서 2주일을 묵을 일이 있었다.

굉장히 바쁜 일이었다. 정신 없이 뛰어다니는데 편지가 날아왔다.

여보.

그 동안 어떻게 지내시죠. 저는 요새 잘 있어요. 날씨가 찬데 몸 주의하세요. 그런데 어쩔까요. 머리를 짜를까요 말까요. 편지해 주세요.

편지를 받고나서 나는 웃었다. 젠장, 더럽게 집요하군. 머리칼 하나 가지구 더럽게 야단이군. 머리칼쯤이야 맘에 안들면 자를 것이구 때가 되면 자라기 마련인데 머리칼 하나 가지구 지랄이냐, 지랄은.

편지를 꾸깃꾸깃 꾸겨서 쓰레기통에 집어 넣었다.

지방에서 돌아왔을 때 아내의 머리칼은 그냥 그대로였다. 그냥 그대로 무성하였다.

"웬일이야, 머리 말이야"

"아무래두 마음이 정해지지 않아서요"

"그래. 그냥 놔 주지. "

"어쩜 그럴 수가 있어요. 그렇게 무심할 수가 있어요"

"무심하다니. 뭐가 아내의 일이야. 머리칼이, 머리칼. 그렇군" 나는 웃었다.

그렇다. 아내의 일은 머리칼인 것이다. 머리칼. 머리칼을 자르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아내에게 있어서는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좋아. 짤라"

"짤라요!"

"그래. 결단을 내리자. 나가자"

"어디로요"

"머리칼을 베러"

"그럴까요"

"일어서. 마음 변하기 전에 옷 입어"

그리하여 둘은 거리로 나왔다.

나는 아내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그녀를 데리고 강제적으로 거리의 미장원으로 끌고 갔다.

"들어가. 가서 짤러"

"그동안 뭐하시겠어요?"

"다방에 가 있겠어. 아 앞 다방에 앉아 있겠어"

나는 다방에 들어갔다. 혼자 앉아서 커피를 시켜 마셨다. 다방 텔레비전에서는 권투 중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그 중계를 재미는 하나도 없었지만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들여다보고 있었다.

얼마 후 아내가 다방에 나타났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아내는 마치 흑인처럼 머리를 곱슬곱슬하게 지지고 볶고 있었다. 그것은 머리칼의 경지를 벗어나 있었다. 머리에 매어달린 몇 가닥의 곱슬곱슬한 털이라고나 할까.

저렇게 자르기 위해서 저렇게 오랜동안 고심하였다니.

나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어때요"

아내는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내 앞자리에 앉으면서 물었다.

"뭐가 어때"

"머리말이에요"

"그게 뭐야"

"이게 유행이래요"

"유행. 유행 좋아하네"

"그럼 어떻게 해요"

"가서 물러. 짤라진 머리칼 도로 붙여 달라고 해. 젠장"갑자기 아내가 울기 시작하였다.

나는 아내의 눈물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좀 지나쳤구나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일단 부렸던 남편으로서의 허세를 당장 거두어 버릴 수는 없었다.

"울지마. 세상 울 것도 많다. 머리칼 하나 때문에 울 것도 많다" 그날 우리 부부는 팔짱을 끼고 영화 구경을 하였다.

몇 달 후. 아내의 머리칼은 무성히 자랐다. 그러더니 하루는 내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머리말이에요. 머리요. 짜를까요 말까요"

"글쎄"

"놔둘까요"

"글쎄"

, , 머리칼. 귀찮은 머리칼. 산다는 것이, 부부와의 관계라는 것이 머리칼 하나로, 무성하게 자라는 머리칼 하나로 대화가 이어지고 있구나. 아아, 머리칼. 귀찮은 머리칼.

 

아내의 자장가

나는 스물여섯살 때 결혼해서 햇수로는 결혼한지 어느덧 6년째가 되어 가는데 아직까지 한번도 아내의 노래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나 그뿐이냐.

연애를 한 삼년 걸었으니 거의 십년은 아내에게서 노래소리를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물론 결혼하고 나면 결혼하기까지 용케도 숨겨왔던 버릇이나 개인들의 약점이 서서히 드러나기 마련인 것이다.

일테면 아내의 이빨이 틀니라거나, 아내의 젖가슴이 실상 큰 것처럼 보여 왔지만 알고보니 과장된 브래지어 덕분에 크게 보였었다는 것이거나, 남편의 체격이 좋아만 보였지만 알고 보니 내복을 껴입은 덕분이라거나, 아내의 발바닥이 지독히도 못생겼다거나, 남편의 술버릇이 도가 지나치다거나 하는 것이 발각되기 마련인데 내가 아내에게 속았던 것은 딱 두 가지가 있다.

외모상으로 따진다면 그 하나는 발이 무지무지 못 생겼다는 겻이요(이 이유를 아내는 다음과 같이 변명하곤 한다. 기성구두를 사 신으면 그렇게 되곤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젖가슴이 절벽 위에 꽂힌 압핀 정도로 작다는 것이었다.

어느편이냐 하면 솔직히 말해서 나는 여인의 젖가슴은 크면 클수록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내로서 신혼 첫날밤 아내의 젖가슴을 확인하고 난 후 나는 절망절망절망 망절망절망절 하였던 것이다.

이 사실을 어느 날 아내는 눈치챘는지 다음과 같이 변명하였다.

"이봐요, 젖가슴의 크기는 아이큐에 반비례한다구요. 해외토픽 못 봤어요. 젖가슴이 크면 아이큐가 나쁘다구요"

그야 물론 인생을 같이 살 여편네가 아이큐가 다소 나쁘더라도 젖가슴이 큰 것이 좋으냐, 머리는 좋지만 젖가슴이 작은 것이 좋으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후자를 택하긴 하겠지만, 그렇다면 내용물은 별 볼일 없는 과자의 포장지가 크듯 그 자그마한 젖가슴은 도대체 뭣 때문에 우람한 싸이즈의 젖싸개로써 내 눈을 속여야만 했는지 기분 더럽게 야속했더란 말이다 또 하나 속은 것이 바로 문제의 그 노래 솜씨였는데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내가 아내에게 속았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처녀랍니다'라고 시치미 떼던 여인이 첫날밤 알고보니 처녀는 커녕 산전수전 다 겪은 여인이었다는 식으로 아내가 내게 자칭'나는 노래를 잘 불러요'하고 한번도 공갈을 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아내가 막연하게 노래를 잘 부를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아내에게 속았다기 보다는 결혼생활 하다보니 자연 아내의 이상한 버릇을 알게 되었다는 것뿐이다.

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여행 갔다 오면 으례 상 하나 차려 놓고 5백원, 천원 갖다 준 자식들 불러다가 술 주는 것이 예의로 되어 있어서 나도 신혼여행 갔다 와서 친구들을 불러다가 저녁을 내었었는데 어는 술상이 다 그렇듯 이 녀석 저 녀석 술마시고 취하더니 짓궂게도 '이 봐 신랑 노래 불러 신랑 노래 불러'하고 혀꼬부라진 소리로 부탁을 해 오기 시작하였다.

노래 부르는 게 뭐 어려우랴.

나는 돼지 멱따는 소리로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 눈물로 달래보는....'을 한 곡조 꽝 불렀다.

노래가 끝나고 나니 이 녀석들 이번에는 '신부 부르세요. 신부요, -옳소, 신부 불러요'하고 아우성치기 시작하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술상에 앉아서 간혹 짓궂은 친구 녀석들이 건네주던 술을 야금 야금 받아오던 아내가 그 무렵에는 없었으므로 밖으로 나가보니 할 일도 없이 부엌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어. 들어와, 친구들이 부르고 있어"

"안 가요"

의의로 강경하게 아내는 소리쳤다.

"노래 안 불러요"

"이봐, 한번만 부르면 될텐데 왜 그래. 다들 그런다구. 부르는 법이라구"

"안 가요, 안 간다니까요"

"허어 참, 왜 그래, 한 곡만 불러"

"신부 어디 갔나"

방쪽에서 친구들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첫날부터 신부 도망갔나"

"이것 봐"

나는 당황해졌다.

나는 은연 중에 친구들에게 나는 여인 하나 쥐어 잡는 것쯤 자신이 있다, 마누라는 내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한다고 큰 소리로 공갈을 하고 있었으므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 가수가 아니에요"

"누가 너보러 가수래"

"안 불러요"

"찌르릉 찌르릉이나 불러, 그럼 되잖아"

"안 부른다니까요. 아는 노래도 없어요"

"그럼 송아지도 몰라.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 엄마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

"난 지금까지 한 번도 노래 불러 본 적이 없어요. 남 앞에서요"

"허 참, 미치겠네"

"신부 어디 갔어"

"죽었어"

친구들의 빈정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은근히 부아가 났다. 그래서 아내의 손을 나꾸어 챘다. 잴 것 없잖아, 노래 하나 부르는 것 가지구.

"이리 와"

"못가요"

"이리 오라니까"

"못간다니까요"

"정말 이러기야"

"뭘 말이예요"

"노래 하나 가지구 이렇게 흥을 깰 필요는 없잖아"

"난 말이에요"

아내는 시집올 때 해 입은 한복이 아깝지 않은지 구공탄 쌓아 놓은 땅바닥에 털석 주저앉았다.

"노래를 한 번도 부른 적이 없다니까요"

정말 아내의 눈에서는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나는 너무나 의외라서 멍하니 아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게 뭐냐.

노래 하곡 부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큰 어려운 일이라서 신혼 초부터 눈물을 흘릴 수 있단 말이냐.

"왜 울어"

"난 못 부른다니까요. 노래를 못 부른다니까요"

"그럼 안 부르면 되지. 울긴 왜 울어. 젠장"

그날 나는 아내의 몫까지 노래를 서너번 더 부르고 위기를 모면하였다.

결혼하고 나서 4년쯤 지난 후 아내는 내게 고백한 적이 있다.

남 앞에서 노래를 한 번도 불러 본 적이 없다. 노래를 부르려면 목소리가 떨려 나온다. 가사도 잊어버리고, 국민학교 때 음악 선생에게 노래를 안 부른다고 매 맞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도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다. 엉터리라도 노래를 부르면 80점 이상 맞는 음악 점수를 늘 60점 맞은 이유는 노래를 안 불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근의 일이었다. 내겐 딸이 하나 있다. 두 돌이 조금 지난 계집애인데 요즈음 한창 말을 배우고 있다. 노래도 조금씩 텔레비전에서 배우고 있다. 어느 날 나는 밤늦게까지 글을 쓰고 늦잠을 자고 있었는데 아내는 그 애를 무릎에 앉히우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자장 자장 우리 악 자장 수선화 만발한 맑은 물 위에 아기배를 띄워놓고 어기야 더기야 용궁을 갈까."

꿈속인지 생시인지 비몽사몽 속에서 나는 아내의 노래소리를 들은 순간 귀를 기울였다.

구슬처럼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계집아이도 아내의 목소리에 서투르게 따라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내가 자장자장 하면 아이도 자장자장 따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칭얼대던 아이가 조금씩 아내가 부르는 자장가 소리에 잦아들더니 뜸이 들듯 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었다.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자장. 수선화 만발한 맑은 물 위에 아기배를 띄워놓고 어기야 더기야 용궁을 갈까

아내의 노래소리. 그 노래소리는 기대 이상으로 맑고 윤택이 흐르고 있었으며 고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나는 눈을 뜨고 아내의 노래 솜씨를 칭찬해 줄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다면 아내는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않을 것이 뻔하므로, 나는 그저 눈을 감고 아내의 노래가 끝날 때까지 자는 척만 하로 있을 뿐이다.

 

아내의 눈물

결혼하고 나서 나는 우리 집 아내가 예쁘다고 생각했던 적이 정확히 세 번 있었다.

그야 물론 제 눈에 안경이라고 예쁘지 않으면 어떻게 데리고 살겠는가마는 결혼을 하고 나니 사는 게 시들시들해지고 탄력성을 잃어가고 그 얼굴을 보기만 해도 닙다 선하품이 아, , , 나오는 판이었는데, 어쩌다 부부싸움이란 것을 하고 나면 더럽다 더러워 내가 어디서 저따위 무우꼬랑지 같은 여자와 결혼하게 되었던고 후회막급이고, 무를 수 있다면 웃돈 덧붙여 어디 싸구려로라도 물러 버리고 싶은 것이 결혼생활이었는데, 그래도 결혼생활 5년에 딱 세번은 아내가 남달리 예뻐 보였던 적이 있다.

그 하나는 첫 딸애를 배고 있을 땐데 그때 우리는 십오만 원짜리 목욕탕 이층집, 가끔 오입장이들이 잘 가는 독탕에 세들어서 라면만 끓여 먹고 살 때였다. 하루는 정말 고리 동전 한 푼 없이 딱 돈이 떨어져 먹을 것이라고는 고추장에 비벼 먹다 남은 찬밥뿐으로 나오느니 한숨이어서 에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칠 판이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꾸역꾸역 찬밥 나눠 먹고 일찌감치 불 끄고 잠이나 자자 하고 누워 있었는데 아내는 갑자기 무언가 부시럭부시럭 오려서 벽에 얌전히 붙이는 것이 아닌가.

"그게 뭐야"

나는 아내가 목욕탕 습기 낀 흰 벽에 무엇을 붙이는가 의아해 묻자 아내는 엄숙하게 아무런 대꾸 없이 오린 종이를 붙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게 뭐냐니깐"

나는 뉘었던 몸을 일으켜서 그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서양 잡지에서 오려낸 예쁜 애기의 그림이었다. 무슨 명화의 그림이 아니라 단순한 서양 아기의 사진으로 나는 멍하니 저 여자가 지금 가난에 찌들어 정신이 돌아버린 게 아닌가, 고추장에 비빈 찬밥 몇 술 먹더니 저따위 사진을 왜 오려 붙이는가 괴이해서 옆구리 꿀 찌르며 재차 물었다.

"저게 뭐야, ? 저게 뭐야"

"당신은 몰라두 돼요"

아주 오랜 뒤 아내는 그 사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게 이야기해 주었다.

""빗속에 이를 비고 있을 땐 늘 좋은 생각을 하고 있어야만 한대요, 그래야만 태어나는 애기가 순하고 예뻐진대요. 난 저 사진을 보고 저아이 닮은 애를 낳아주솝사 늘 빌었답니다." 두 번째는 결혼하고 한 2년쯤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 무렵 나는 사는 게 귀찮아서 그저 눈만 뜨면 술 퍼마시고 집에는 열두 시 오 분 전에 들어가곤 했었는데, 하루는 그날도 술에 취해 고래 고래 노래까지 부르며 집에 도착해 문을 두드리자 오랜동안 안에서 대답이 없었다.

"문 열어라, 문 열어. 내 돌아왔도다"

온 방 안이 꺼질세라 문을 쾅쾅 두들겨 부쉈더니 한참 후에 나오시는데 어렵쇼, 비틀비틀 흔들거리고 있지 않은가.

"뭐야"

"술 먹었지"

"뭐라구"

"술 먹었다구"

"어렵소, 너 미쳤구나"

"그래, 미쳤다. "

방안에는 며칠 전 친구들이 마시다 남긴 소주 한 병이 그대로 작살난 채 딩굴고 있었다.

". 너 정신차려라"

"너나 차려"

그날 밤 아내는 밤새도록 토했다. 나는 잠 한잠 못자고 아내가 변소로 기어갈 때마다 따라 나가 등을 두들겨 주곤 했었는데 다음날 술이 깨자 아내는 내게 말했다.

"그런 맛대가리 없는 걸 남자들은 뭐 좋다구 매일 마시고 있죠"

"사는 게 괴로워서 그런 거야"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세 번째는 최근의 일인데 하루는 일찍 집에 들어갔더니 아내가 줄줄 울고 앉아 있었다.

"아니, 왜 울어"

나는 순간 불길한 생각이 들어 다급히 물었다.

두 아이놈은 제 에미 앞에 나란히 마늘쪽처럼 앉아 제 에미 우는 얼굴을 심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왜 우느냐니까"

아내가 이야기해 준 것은 다음과 같았다.

오후에 무슨 시교육위원회인가 뭔가에서 나온 젊은 아가씨가 들렀다는 것이었다. 들르더니 집에 애기가 있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그래 있다고 했더니 아이구 그래요, 애들은 어릴 때부터 지능개발을 시켜야 하는데 어디 봐요. 얘가 큰 앤가요. 이름이 뭐예요. 다혜요. 어머 이름이 예쁘네요. 다혜야 다혜야 이리와, 이리와 봐(이때 그녀는 뭔가 그림책을 꺼내 펼쳐 보였다). 다혜야 다혜야. 여기 그림 있지. 이 그림에서 모자 쓴 사람이 몇 사람이게. 몇 사람이게. 모자. 모자. 머리에 쓰는 모자. 옴마. 너 모자도 모르니. 모자도 몰라. 얘 큰일났네. 얘 몇살에요. 네살이라구요. 근데 모자두 몰라요. 만으로 26개월밖에 안됐다구요. 그래두 알아야죠. 알아야 한다구요. 그럼 다혜야 다혜야. 냉장고에 뭐가 들었니. 사과, 옳지 사과 사과 . , 몰라. 요건 뭐니. 아니 이것도 몰라.

얘 야단났어요. 지능이 남들보다 좀 덜 발달됐군요. 어머, 바나나도 모르니. 큰일났어요, 하더라는 것이다.

그 여인이 다녀간 후 줄곧 아내는 울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니 울긴 왜 울어"

나는 울화통이 터져서 소리를 질렀다.

"저 애가 남들보다 머리가 모자란대요"

"뭐야. 머리가 모자라. , 그것들이 뭐하는 것들인지 몰라. 책팔아먹는 나쁜 것이라구. 그래 그 책 샀어"

"샀어요"

"얼만데"

"2만 원"

"오우, 오우, 망할"

"다혜는 바나나두 몰랐어요. 모자두 몰랐어요"

"그거야 안 먹어 봤으니까 모르는 것 아냐. 으이구, 이 멀때야. 그것들은 악질적인 것들이야.

애들한텐 어느 부모든지 약한 것을 알고 사기친 거야. 다혜는 겨우 년 5개월밖에 안된 애야. 걔가 왜 모자라. 웃기자 말라구 해. 그앤 '피리부는 사나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부를 줄 아는 애라구.

그런 애 봤어. 당신 친구 딸 중에 다혜만큼 똑똑한 애 봤냐구. 다혜는 또 하나 둘 셋에서 일곱까지두 셀 줄 알고 있다구. 걔가 왜 바보야"

그때였다. 눈치 빠른 우리 딸년은 우는 제 엄마 앞에서 줄곧 주눅이 들어 있다가 갑자기 생기발랄해져서, 그러나 부끄러운지 저만큼 층계를 올라가 딴청을 하면서 생각난 듯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눈 비리부는 사나이

걱정 하나엄는 더도리

은빗비리 하나 가꼬 다니지

모진 비바라미 불어도

거센 누보라가 다쳐도 언제나 운는 머쟁이

우리는 멍하니 층계 위의 우리 딸년을 올려다보았다. , , 애가 크고 있다. 우리의 애가.

나는 너무나 놀라서 뛰어가 고년을 핫하 글쎄 고년을 껴안고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러나 갑자기 아내는 눈물 번진 얼굴로 쉬엣-나를 향해 입을 가렸다. 그 순간 바로 그 순간 나는 세 번째로 우리 아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어머니와 노인학교

어머니가 최근에 눈에 띄게 멋을 부리기 시작하셨다. 내년이면 우리나라 나이로 일흔이 되시는 어머니께서 멋을 부리면 얼마나 부리시겠는가마는 그래도 간혹 볼 때마다 어머니의 몸맵시는 조금씩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언제라고 딱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흰 머리칼을 감추기 위해서 머리에 검은 물을 들이시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안경도 빛깔 없는 테를 두른 안경을 일부러 골라 쓰시는가 하면, 머리는 실핀을 많이 꽂아 얼핏 보면 파마라도 하신 게 아닐까 싶게도 정성 들여 빗은 흔적이 역력할 정도이다.

그뿐인가 하면 미국의 누이가 보내 주신 미제 핸드백을 들고 다니시는데, 그 속에는 노인네 손수건답지 않은 꽃무늬 손수건이 짙은 향수냄새와 더불어 얌전히 접혀 있으며, 먼 친척이 한다는 양장점에서 맞춘 원피스를 입고 다니신다.

물론 어머니를 모시고 살지 않는 차남인 나로서는 내가 어머니를 찾아뵙지 못하는 이유로 걸핏하면 바빠서라는 거짓말로 위장할 수 있지만, 때문에 어머니께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나를 만나러 오시는데 그때마다 나는 어머니가 점점 멋을 부리시는 것을 볼 때마다 한편으로는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도대체 어머니는 어디를 나다니시고 계시는 것일까. 도대체 어머니는 하루하루를 무엇으로 소일하시고 계시는 것일까.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일요일마다 성당에 나가시고, 가끔 국도극장에 가셔서 국산 영화 구경 하시고, 또 가끔 방청권 타서는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공개방송에 나가 앉으셔서 될 수 있는대로 많이 웃으라는 pd의 부탁에 으핫핫핫 틀니가 빠지시도록 웃으시는 것이 고작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것도 어떻게 알았는가 하면, 언젠가 어머니께서 내게 ', 웃으면 복이 와요 볼 때 누가 크게 웃는 소리가 나거들랑 내가 웃는 줄만 알아라'라고 귀띔을 해 주셨기 때문에 아, 어머니는 가끔 공개방송 같은 데 나가셔서 박수치고 웃고 그러시는구나 하고 눈치를 챘을 뿐인 것이다.

어머니는 원래 성격이 까다로우셔서 친구도 별로 없으시고 사실 몇몇 있던 친구들은 이미 다 돌아가셔서 막말로 몇몇 패를 이뤄 팔자 좋은 노인네들처럼 설악산이다, 속리산이다 돌아다니시지도 않는 것을 잘 아는 나로서는 어머니가 저렇게 멋을 부리시며 어디를 돌아다니시는가 가끔 어머니를 뵐 때마다 의아해하곤 한다.

가끔 어머니는 내게 은근히 부탁하시는 수가 있다.

"돈 좀 다오"

내가 부시럭 부시럭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드리면 어머니는 애교를 피우시며 '니 색시한테는 얘기하지 말어' 하시는데 그거는 우리집 마누라에게 타는 한달 용돈 이외에다 부정기적 수입을 마련해 보자는 노인네의 꾀인 것은 분명하나 도대체 노인네께서 무엇을 하시는가 그것은 짐작도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 노인들에게도 생활은 있다.

노인의 은빛 빛나는 머리칼 뒤로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이 마주 닿아 있고 아침 저녁 노인네의 그림자가 죽음으로 가는 길을 빗질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어머니에겐 어머니의 생활이 있는 것이다. 참빗 빗질할 때마다 듬성듬성 머리칼이 빠진다 해도 초저녁 일찍 잠드는 그 꿈속에 우리들 젊은이가 감히 짐작할 수 없는 노인의 슬픔이 젖어 있다 해도 어머니는 어머니대로의 기쁨이, 생활이 있는 것이다.

그 낡은 장롱을 열어보면 내가 입던 고등학교 때의 교복 단추라든지, 그 옛날 아버님이 사 오셨던 부엉이 시계 부속품이라든지, 돌아가시기 전에 찍은 법복 입은 아버지의 낡은 사진이라든지 그런 것이 나프탈린 냄새와 더불어 잘 정리되어있는 것처럼 어머니에겐 어머니대로의 은밀한 생활이 있는 것이다.

며칠 전 비 오는 날 어머니는 우리집에 오셨었다. 새로 맞춘 원피스를 입으시고, 큰 가죽제품 미제 핸드백을 드시고, 미국 누이가 쓰다 보내주신 구제품 우산을 받으시고 노인네가 아침 일찍 오신 것이다.

내게는 아침이지만 어머니에게는 점심인 식사를 같이 하면서 나는 물끄러미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근래 나는 어머니를 영원히 돌아가시지 않을 분, 내가 늘 필요로 할 때, 일테면 유난히 어머니가 뵙고 싶다는 충동적 요구에는 늘 내 곁에 있는 분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일주일 만에 오셔도 '오셨어요'하고 낮잠이나 자대고 그랬는데 그날 보았을 때 나는 문득 쓸쓸한 생각이 들어 '요즈음 뭐하고 지내세요' 하고 물었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무슨 국민학교인가 중학교인가에서 만든 노인학교에 나가신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노인학교 하는 명칭은 익히 들어왔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외로운 노인들을 위해 학교도 만들었다는 뉴스 필름도 보았었는데 나는 막연히 우리 어머니는 장수 무대 같은 프로에는 나가지 않는 어머니, 그런 학교에는 어울리지 않는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머니께서 노인학교에 나가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어머니가 양로원에 가셨다는 말처럼 충격적으로 들었다.

어머니가, 내 어머니가 노인학교에 나가신다니.

"재미있으세요"

"재미는 뭐. 노인들끼리 모여서 노래 배우는 거지 뭐"

"아니 무슨 노래요"

"유행가도 배우고 옛날 노래도 부르지 뭐"

"남자분도 있어요?"

"난 싫다. 남자 있는 학교 싫어서 여자만 있는 학교에 나간다."

"뭐해요. 거기서"

"어제껜 국립묘지 가서 육여사도 만나고 이대통령 무덤에도 갔다왔지 뭐"

"그리구요"

"참 어제 우리 학교에서 방위성금 냈어. 오늘 저녁 문화방송 텔레비전에 우리 얼굴도 나온다. 445분에 나오니까 한 번 봐라. "

그날 어머니가 큰 집으로 돌아가실 때 나는 어머니를 골목길까지 바래도 드렸다. 어머니는 놀라웁게도 굽이 높은, 시장에서 파는 비닐로 만든 싸구려 하이힐(?)을 능숙하게 신고계셨다. 그 굽 높은 신발이, 아주 큰 핸드백을 들고 버스에 타시는 어머니의 그 작은 다리 밑의 굽 높은 신발이 내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아아. 어머니는 외로우신 것이다.

머리에 물들이시며 굽높은 비닐 구두를 신은 어머니는 외로우셔서 무덤가, 국가에서도 무슨 행사 날 때만 찾는 국립묘지를 서성이며 죽은 이들을 추모하며 자기들끼리, 버림받은 자기들끼리 노래 부르시며 소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을 아들인 내게까지도 부끄러워하고 계신 것이다.

아아. 가엾은 어머니.

 

함잡이

며칠 전이었다.

이제 나이도 거의 서른을 훨씬 넘어 중년기로 접어든 우리 나이 또래의 대부분은 이미 장가를 들어 애 둘 정도 있는 것은 보통이고 늦게 간 축이라도 돐 지난 애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가장들인데 그중 맨 마지막으로 아직 결혼하지 못한 동창 녀석 하나가 전화를 걸어오는 26일 결혼식을 하는데 내게 신부한테 보낼 함을 져 달라는 전갈이 왔었다.

지난겨울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는 괴짜 친구 녀석 하나는 부모도 모르게, 더구나 절친한 친구들인 우리도 모르게 왠 아가씨와 동거생활까지 하고는 토끼 같은 백일 지난 딸 아이 하나 낳고서야 떠억 부모님께 고백하고 행차 뒤의 나팔 같은 결혼식을 올렸었다.

그때 함을 지고 떠들썩하게 신부집을 쳐들어가던 우리들은 이게 일생 마지막 져 볼 함이라고 감회가 무량하였었다. 왜냐하면 친구들은 그녀석만 빼어 놓고는 이미 모두 장가를 가버린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미 함을 지고 갈 때 소주 두어병 미리 퍼마시고 오늘 신부집에서 돈이나 왕창 뜯어내야겠다는 오기와 소동으로 신부집 골목 입구에서부터 함 사요, 함 사요를 외치는 철딱서니 없는 젊은 신랑 친구도 아니고 다들 주눅이 들고 애를 두어씩 낳은 친구들이라 생각같아서는 함 사쇼, 함 사를 외치지도 않고 신부집에서 동원된 힘께나 쓰는 신부 남동생과 씨름하지도 않고 그저 5백 원짜리 돈이 두둑히 든 봉투나 한 장 받으면 냅다 신부집으로 함을 팔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명색이 함이요, 신랑 친구들인데 그 동리 새악시 시집가게 되었다는 나발통을 불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니가 해라, 니가 해라, 서로 미루다가 단연 목소리 우렁차고 다소는 철면피인 내가 빼갈 두 잔 마신 것을 기화로 동리가 떠날세라 함 사쇼, 함 사 하고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물론 한때 친구녀석들은 대부분 나를 함잡이로 하기 꺼려 했을 정도였었다.

덩치가 작고 힘도 없지만 나는 함만 지면 최씨에, 옥니에, 곱슬머리 근성이 발휘되어서 한번은 우리 친구들 중에서 뭐가 급했던지 스물세 살에 결혼한 녀석 함을 내가 지게 되었는데 얼마나 떼를 썼으면 내 잠바의 지퍼가 망가지고 팔꿈치가 떨어져나갈 정도였었다.

말이 신랑 친구였었으니까 그래도 내버려 뒀지, 동리 술주정뱅이였다면 나는 된통 얻어맞았을 것이다.

그래도 내 친구 녀석들은 모두 이 자식 어디 두고 보다, 니 자식 장가갈 땐 처가집 기둥 빼버리겠다고 악담을 하는 판이었다.

괴이하게도 함 지러 갈 땐, 평소 친한 녀석들도 벌써 자기 처갓집 편이 되어서 우리가 함 파는데 흥정을 오래 할 것 같으면 먼발치에서 나타나 공연히 애꿎은 담배만 피워대며 우리들의 동정을 구하기 일쑤였는데 대부분 신랑의 동정 작전에 말려들어 그만 고집을 꺾기 마련이나 유독 나만은 임전무퇴 독종 근성을 바락바락 발휘하곤 했었다.

"오냐, 두고 보자"

친구 녀석 중의 하나는 노골적으로 대어 놓고 내게 공갈을 했었다.

"니 자식 장가갈 때 두고 보자"

"안가"

나는 친구 녀석들이 그런 말 할 때마다 엿 먹어라 하는 심사로 빈정대곤 했었다.

"장가는 안 갈테니 걱정마라"

하지만 처녀 시집 안 간다는 말과 장사 밑진다는 장사치 말과 늙으면 죽어야지 하는 노인네 말처럼 정확한 거짓말은 없는 법이랬다고 나 역시 장가를 가는 때가 도래하였던 것이다. 마치 낙동강 하구에 철따라 철새가 도래하듯이.

날짜를 받아놓고 보니 단연 결혼식 이틀 전에 함을 가져가야 했다.

뭐 물건이나 있어야 말이지, 어머니가 큰누이와 동대문 포목점에 들러 끊은 한복 두어 벌과 양장지 두어 벌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트렁크에 넣고 나니 책가방보다도 가벼웠으니까.

, 이렇게 되고 보니 친구들에게 함을 져줘야겠다는 부탁을 해야만 했다. 나는 한 이틀 걱정하다가 기상천외의 결론을 내렸다.

, 함을 친구들에게 지울 것이 아니라 아예 내가 들고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었다.

그 이유는 절대 평소 공갈을 쳤던 친구들의 복수를 두려워했음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것은 솔직히 말해서 아내를 위함이었다.

그 당시 아내와 나는 찢어지게 가난했었다.

아내는 장인어른 없이 장모님과 처남, 처제 도합 다섯 식구가 남의 집 셋방을 빌어 오글오글 살고 있었다. 가난은 수치가 아니었으므로 뭐 창피해서가 아니라 단지 평소 자존심이 강한 아내를 위해서라도 친구들에게는 아무래도 이야기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내와 나는 가난하긴 했지만 절대로 가난을 표시해 보이는 편은 아니었었다.

친구들에게 함을 지게 한다고 해도 뭐 수치스러울 일은 없었지만 당장 그 많은 친구들 상을 볼 방도 여의치 않았고 오히려 잔뜩 벼르고 벼른 친구들의 마음에 부담을 주는 일이 되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추운 겨울 결혼을 이틀 앞둔 밤중에 혼자서 함이 든 트렁크를 들고 집을 나섰다. 마치 고속버스 타러 떠나는 여행자처럼.

나는 버스를 타고 혼자 이문동까지 갔다. 딱 한 번 간 적이 있던 처가집을 찾아 골목길을 꼬불꼬불 올라갔다. 처가집 앞에는 외등이 켜져 있었고 나를 맞기 위한 처남 녀석 둘이 진을 치고 있었다.

나는 함 사쇼, 함 사 라고 소리를 지를까 생각해 보았지만 자기의 처가집에 자기 함을 들고 찾아가는 신랑 녀석이 함 사라고 고함 지른다는 말은 못들었으므로 침묵하고 처가집 안으로 들어서려니까 장모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함잡이는 어디 갔나"

"접니다"

나는 대답했었다.

"제가 함잡이입니다."

장모님과 처남 녀석들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봉투에 5백 원짜리를 넣고 있던 처남 녀석들은 무언가 김이 빠진 모양이었고 나는 구두를 벗고 상이 차려진 술상 앞에 앉아 터억 정종을 마시기 시작했었다.

웬지 슬퍼서 공연히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반찬은 내가 좋아하는 멍게, 해삼, 도미 온갖 바다 해물이었는데 나는 먹고 또 마셨다.

여편네는 한참 만에 한복을 입고 살포시 들어와 내 옆에 앉아 내 가슴에 오가는 마음을 다아 알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양을 떨고 내게 술을 따라 주었다.

그날 밤 나는 정신없이 취해서 밤 늦게야 혼자 잡으로 돌아왔다. 나를 바래다주러 나온 아내는 골목길 어두운 남의 집 담벼락에서 갑자기 내게 뽀뽀를 해달라고 했었는데 남의 눈 피할 새라 달려드는 내 가슴 안에서 아내의 눈에 반짝반짝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그 이후 내 친구 녀석들은 모두 나를 미친 녀석으로 취급하였으며, 나를 비겁한 도망자라고 비난하였었다. 나는 8년이 자나도록 그 사실에 대해 한 번도 친구 녀석들에게 처가집 돈 몇 푼 아끼기 위해 자기 함을 자기가 들고 간 자린고비라는 누명을 듣고서도 한 번도 변명하지 않았다.

나는 그때의 그 이유를 그 녀석 함지러 가는 시장길 골목에서 이야기했었다.

이제 나이들이 들어 웬만한 일에 흥분하지 않는 친구들은 으응, 그랬었구나 미친 자식 하며 혀를 깔깔 차는 것이 고작이었다.

며칠 전 마지막 남은 친구 녀석의 함을 져달라는 부탁을 받고서 내 머리속에 떠오른 생각은 8년 전의 그 기억이었다. 아내의 집을 찾아 골목골목을 기웃거리던 트렁크를 든 나는 지금 얼마만큼 그때 내 가슴을 파고들며 울던 아내와 같이 떠나오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얼마만큼 멀리 온 것일까.

때로는 싸우며 때로는 울며 때로는 의지하며 때로는 서로가 서로를 부축하며, 우리의 발은 네 개이지만 마치 이인삼각의 보행 경기처럼 같은 보조로 지내왔다.

그때의 그 어두운 골목길을 기웃거리던 주름살 하나 없고 가슴에는 야망에 불타던 무우청처럼 새파란 내 청춘의 그림자는 지금 어디서 너울거리고 있을 것인가.

나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나서 오랫동안 생각했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이제 나는 악명 높은 함잡이 노릇을 마지막으로 장식하려 한다. 이 마지막 함잡이 노릇을 나는 예술적인 차원까지 승화시켜야 한다. 그것은 내가 전보다 더 높고 큰소리로 함 사려, 함 사려 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껏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분장을 해보리라는 것이다. 원래 함잡이는 얼굴에 붉은 연지곤지 바르는 법이라는 것을 나는 어디선가 들었었다. 짓궂긴 하지만 여지껏 한 번도 해보지 못했었는데 이제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할 것이다. 연지곤지 바를 것이다. 그리고 마치 처용무를 추는 잡귀처럼 광기에 젖어 내 청춘의 마지막을 토하는 광란의 춤을 출 것이다. 온 동리가 다 떠나가게 다글 모여 구경하라. 물렀거라, 구신 나가신다. 물렀거라, 대신 나가신다. 물렀거라, 미친 함잡이 나가신다.

내 가는 길에 돈을 놓지 말고 정연히 가는 길을 빗자루로 곱게 쓸어라. 에잇 온갖 것 다 물렀거라. 온 동리 다 깨어나고 동리꼬마 조무라기 나와 웃어라. 개들도 짖어라. 불을 밝히고 깔깔대고 웃어라.

에잇 에잇 물렀거라. 미친 함잡이 나가신다. 연지곤지 찍고 분단장 곱게 하고 나아가신다.

 

처제의 결혼

며칠 전 처제가 시집을 갔다. 내 아내와는 달리 조금 활발한 데도 있고, 평소 눈여겨보면 명랑하고 엉뚱한 데도 있고, 평소 눈여겨보면 명랑하고 엉뚱한 데도 있는 모양이어서, 별로 밉지도 않은 눈을 째고 쌍꺼풀 수술까지 해치울 만큼 진취적인 아가씨인데 나이가 제법 들 때까지 시집갈 생각일랑 하지 않은 눈치여서 은근히 주위에서 걱정하였는데 그 체제가 벼락치기로 지난 주말에 면사포 쓰고 그리고 남의 부인이 된 것이다

처제의 남편 되는 사람은 나보다 두살 위인 사람으로 언젠가 나와 저녁 식사를 하다 내게 이런 말을 하였다.

"이런, 정말 이럴 수가 있습니까요. 저 모르는 사이에 저의 동리에 와서 혹시 제가 어디 본마누라 놓고 이중 장가 들지 않나 주민등록등본까지 몰래 떼어 보지 않나, 고향에서 호적등본 조회해 보지 않나, 이거 나잇살이나 먹은 녀석 의심 안 받고 장가나 갈 수 있습니까요. 헛허허허"

물론 그 사람의 말이야 백번 옳다.

나도 처음에 군대에서 갓 제대하고 학교에 복교한 후 아내와 같이 장모될 분을 만났을 때 아니꼽고 치사해 했던 적이 물론 있었다.

그때 장모님은 내 꼬락서니가 춘향 옥살이 뒷바라지하며 기다리던 월, 이도령 거지꼬락서니 만났을 때만큼이나 한심했던 모양이었던지 그렇다고 이미 결딴난(?) 딸의 신세를 생각한다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모양이라 대뜸 묻는단 말씀이,

"이봐, 자넨 도대체 뭘 먹고 살 작정인가"

대갈이성하였는데 그때 나도 더럽고 메스꺼웠거늘 하물며 나이 서른세 살의 장년이 자기를 못믿겠다고 몰래 주민등록 떼어 보고 또 호적등본 열람해 보았다면 그야 물론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요즈음 나는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아버지는 내 나이 아홉 살 때 돌아가셨고 장인어른 역시 얼굴조차 뵙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는 윗어른은 처가로도 우리 집으로도 모셔보지 못하였다. 내 결혼식 때 우리 청첩장에는 어머니와 장모님 이름만 나란히 찍혀 있었고, 신부 입장식 떼에는 아내의 큰아버지뻘 되는 분이 아내를 이끌고 식장에 들어왔었는데......그렇다, 딸은 영원한 아버지의 것이다.

아버지 없는 딸이 시집간다면 어머니로서는 일단 이것저것 다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어쨌든 처제는 지난 주말 시집을 갔다. 그 복잡한 종로예식장 2층 봉황실이라든가 청룡실이라든가 하는 그곳에서.

머리 단정히 하고 흰 넥타이 맨 신랑은 흰 장갑까지 끼고 식장에 나와 있었고, 아내는 아침부터 자기가 시집가는 것도 아닌데도, 또 그렇다고 누가 신부의 언니라는 것을 인정하거나 특별히 봐주는 것도 아닌데도 그날을 위해 산 투피스를 입고 딸년 색동저고리까지 입히고는 신부화장 하는 데 들었다가 들른 김에 자기도 파말한다고 한 게 12시 결혼식 거행에 1215분이 지나도록 식장에 도착하지 않았고, 결혼식장 측에서는 1230분에도 결혼식이 있는데 이렇게 늦는다면 다섯 시 이후라구요. 다섯 시 이후에 하는 결혼식 보셨나요. 그래두 별수 없다구요. 이때 신부가 자기가 급해서인지 자기 드레스를 자기 손으로 쳐들고 뛰어 들어와서는 신부 화장이고 뭐고 얼굴엔 땀투성이가 되고, 생전 처음하는 결혼식 부도수표 나는게 아닌가 멍청히 서있던 신랑은 그제야 신랑 입장해서 들어가고, 나는 구석진 자리에서 아내에게 으이구 이 우라질. 으이구 이 게으름뱅이. 내 그럴 줄 알았어. 그럴 줄 알았어. 어디든 늦더니 결론식장에도 늦게 나오는군. 으이구 으이구 신경질을 부리고 있었고, 사람들은 목을 빼어 결혼식을 구경하고 있었고, 복도에는 1230분 거행의 결혼식을 앞당겨온 손님들로 벌써 꽉 차 있었고, 아내는 콧등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자기 잘못으로 늦은 이 결혼식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는 벌 서는 아이처럼 벽을 보고 서 있었고, 딸년은 철에 맞지 않은 색동저고리를 입고 가나 초콜렛을 연신 빨고 있어서 입가가 지저분했고, 그러는 중에도 딴딴따따안 딴딴따따안 하더니 체제가 수업시간에 늦어서 미안하다는 듯 눈을 내리깔고 그러나 황홀하게 예뻐서 자기 큰아버니뻘 되는 사람 손에 이끌려서 고등학교 체조 시간에 배운 왈츠 스텝으로 식장에 들어섰고, 신랑은 헛기침 한번 했고, 사회는 평소에 친구간에 말잘하는 사람이기 마련이라 이 날을 위해 고르고 고른 유우머를 자주 쓰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시간이 바쁜 주례선생님의 간단한 주례말씀이 있었고, 벌써 복도에는 사람들로 꽉 차서 자기와도 상관이 없는 결혼식을 공연스레 국군의 날 시가행진하는 군인보듯 어깨너머로 보면서 신랑이 밑지네, 신부가 밑지네 점심내기를 하고 있었고, 장모님은 조금조금 울고 있었고, 얼핏 본 아내의 표정엔 맏딸의 표정, 그 울 밑에 선 봉선화 같은 맏딸의 표정이 서려 있었고, 결혼식이 끝나더니, 나와요 나와, 철이 엄마 나와요, 훈이 엄마도 나오라니까요, 다혜 아빠도 나오게, 그래서 나도 나갔고, 다혜는 화단의 채송화처럼 가족들 앞에 서서 피었고, 나는 맥없이 사진사를 쳐다보았고, 웃으세요, 신부 조금 이쪽으로 이쪽으로 됐습니다. 자 다들 여기 보세요, 여기 보세요 하더니 사진이 찍혀졌고, 그리하여 결혼식이 끝났고 다들 인사도 없이 사라졌는데 그 날 체제는 제주도로 신혼여행 간다던가.

딸년의 손을 쥐고 걷던 나는 문득 이런 젠장 이것이 인생이로군 하는 생각이 생선가시처럼 목구멍에 박히는 것을 느꼈다.

내가 쥔 요년의 요딸년도 자라고 나서는 예쁘게 나이가 차면 어디서 말뼉다귀 같은 것한테 반해서(왜냐하면 여자들이 좀 병적인 것에게 몰리는 멍텅구리들이니까) 아빠 나 이 사람 아니면 죽어버릴테야용 하면서 그리하여 결혼이 시작되면 내가 지금 요년의 손을 쥐고 걸어 가듯 그때도 요년의 손을 쥐고 걸어가겠지.

젠장 뭐 다른 게 있어야 말이지.

아내는 문득 이럴 때 본전 뽑겠다는 듯 내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넣더니 눈을 깜빡거리며 말을 하였다.

"그애들 잘 살까요"

""

"우리 모처럼 나온김에 한일관 가서 불고기나 먹읍시다."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