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만(1946~1988)
가을 모서리
가을의 끝판
겨울 속의 봄 이야기
겨울 저녁의 시(詩)
그리운 사람
그리운 저 무덤
그리움 또 그리움
그해의 가을
그 햇볕
나는 네 눈동자 속에서 살고 싶어
낮은 목소리로
낮은 천장은 숨 쉬기에 불편하다
내 너에게 이르기를
내 무덤 위에 앉아 쉬리니
너의 옷고름
녹두빛으로
누이를 위한 소곡(小曲)
다비(茶毘) 후
다시 도봉(道峰)에 살면서
대장장이
대청에 누워
도미가(都彌歌)
도봉(道峰)을 떠나며
돌아온 추억
등(燈)
등반
떠도는 항간
떨어진 꽃잎
마지막 편지
매화
맹꽁이는 언제 우는가
몽돌의 꿈
무슨 까닭이었을까
벙어리의 말
보리개떡
봉천(奉天)에 살면서
부러진 약속
분수 곁에서
비는 줄창 내리고
비엔나의 밤
빛나는 별
사라진 너에게
사랑의 몫
사월과 오월 사이
사향가(思鄕歌)
산 아래 앉아
살아가는 법
새로운 강물
수상한 세월
술 노래
스무 살 이전(以前)
슬픈 일만 나에게
쓸쓸한 봄날
아담한 고독
아득한 그대
아름다운 죄
아사녀의 편지
아편꽃
애원성 하나
앵초꽃 사랑
어느 악공(樂工)의 생애
어느 흐린 날
어디선가 들려오는
어떤 비가(悲歌)
어떤 흐린 날
어머니의 길
어혈(瘀血)을 채우며
엉뚱한 심사
영원한 약속
오늘의 병
오월의 유서
오지 않는 꿈
오후 두 시
오후의 기억
외로운 풀벌레
요령잡이의 죽음
요즈음의 날씨
용암사에 가서
우리들의 산수(山水)
우후풍경초(雨後風景抄)
웃자란 어둠
유향(遺香)
육자(六字)배기
이 밝은 등불이 온 누리를 비추소서
이야기
작약(芍藥)꽃밭에서
작은 사랑의 송가
작은 연가(戀歌)
잠자는 돌
저 가을 속으로
저 높푸른 하늘
저 무화(無花)의 꽃상여
저 젖빛 유리로
저 첫사랑의 때
저 하늘이 끝이라면
정읍별사(井邑別訶)
정읍후사(井邑後詞)
종시(終詩)
죽음을 위하여
지금도 가랑비
지랄병의 샴푸
청과(靑果) 장수
청산별곡(靑山別曲)
초봄의 약속
추심가(秋心歌)
타령조(打令調)
토라진 겨울
풍장(風藏)
피어린 산하
한 떨기 꽃
한 마리 새처럼
한 소식
한해살이풀
헤매는 벌판
해지는 쪽으로
행복한 잠덧
형언할 수 없는
호적 속의 사람
홍엽(紅葉) 하나가
흐르는 눈물
가을 모서리
박정만
슬픔이 서리기둥처럼 하얗게 섰다.
천하(天下)의 가을 모서리,
기(氣)도 옆으로 팍 꺾이고
참깨 다발만 사선(斜線)으로 묶여 있는 오후.
네로 황제 목소리로 내리는 어둠.
가을의 끝판
박정만
봄 여름 갈 겨울을
누가 요령좋게 구분해 놓고
매사에 허물없이 살라 하는가.
이름 모를 풀꽃들의 그림자
빈 들의 어스름 속으로 파묻혀 가고
내 몸도 가볍게 축이나
황혼녘의 산그늘 속으로 지워져 간다.
삼경의 물소리도 저 홀로 깊어지고
산도 절도 절로 잠들어
세상이 천길 물속처럼 깊어지면
서역으로 가는 길이 환히 보일까.
빈 들과 빈 산과 빈 강에
비엔나 왈츠로 산뜻하게 내리는 가을,
큰 목소리의 대사님도 반쯤 눈을 감고
관음전(觀音殿)에 조용히 드시었구나.
이제 대범하게 내 몫의 죽음을 맞자.
겨울 속의 봄 이야기
박정만
1
귓울안에 눈이 온다.
죽은 그림자 머언 기억 밖에서
무수한 어둠을 쓸어내리는
구원한 하늘의 설화.
나는 지금 어둠이 잘려 나가는
순간의
분분한 낙하 속에서
눈뜨는 하나의 나무
눈을 뜨는 풀꽃들의
건강한 죽음의 소생을 듣는다.
무수히 작은
아이들의 손뼉 소리가 사무쳐 있는
암흑의 깊은 땅속에서
몸살난 회충들은 얼마나 앓고
있는가.
사방에 사유의 충치를 거느리고
밋밋한 수해를 건너오는
찬란한 아침 광선.
수태한 여자의 방문 앞에서
나는,
청솔과 반짝이는 동전 몇 잎을
흔들며
자꾸만 서성대고 있다.
2
아침 한 때 순금의 부리로
빨갛게
새들은 남은 잔설을 쪼아대고
그때 무어라 귓속말로 읽고 가는
바람의 전언.
수런거리며 은빛 비늘이 돋아
나는
수피의 깊은 안쪽에서부터
몇개 새순이 자라나고 있는가.
사람의 품사들로 점점이
물들어 가는 나의 눈과 목소리처럼
예지의 광채가 가지 끝에 앵기어
비쭉비쭉 푸른 혈관이 일어서면,
저 유난히 커 오르는 숨소리를
내 아내의 어린 살빛은 듣고 있다.
자꾸만 바람 뜨거운 나뭇가지 끝에서
까치들은 한 소절의 노랠 부르며 있고.
3
홀연 도련님 눈 섶 위에 내려앉는
청아한 뻐꾸기 울음소리.
봄의 젖줄을 잡아당기는
따스한 모정의 촉감을 한줄기씩 내리어
꽃대의 등심을 밝히고 섰는
어머니의 축복을 누가 알까.
가가호호 문전마다
신춘대길이라 방을 붙이고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옮겨 앉는 메아리.
시간은 상처 난 손을 떨어뜨리며 지나가고
겨울 냉기는 땅강아지 발목 앞에서
바쁘게 무너지고 있었다.
겨울 저녁의 시(詩)
박정만
새파랗게 얼어붙은 하늘에도
흰 재채기나 조금씩 토해 내면서
이제 우리 모두 돌아갈 시간이다.
안티플라민 시린 코를 감싸 쥐고서
눈물 어린 눈을 끔벅이면서
그리운 사람
박정만
그리움이여, 그립고 서럽다.
사람 사는 일에 큰 산 하나를 대어
그리움 없어지면 산을 볼 일이다.
그러나 이 땅의 일 없어지면
하나의 큰길과 숲을 사랑하시고
이 세상의 먹구름도 부단히 살펴보시라.
꿈 없는 꿈 가운데 나를 버리지 말고
저문 저자거리에 눈물로 나를 놓아라.
생 하나 없을 때 생을 찾을 일이니
생 없어도 그것으로 한 생을 삼아라.
참으로 말하노니
기억하라, 고통의 슬픔의 때를.
일 없는 것이 아니라 눈물이 너무 커서
눈물 너무 많았었음을.
아직도 더 많은 날을 가야지
홀로 있어도 언제나 죽어 살았다.
그래도 풀잎이 그리워 말을 못 했지.
말은 못 했어도 그리움의 기억은 있었다.
나의 하루는 늘 슬픔으로 강을 이루었다.
명목상으로 강을 이루고 슬픔을 이루는 강,
그 강도 필요했고 우울도 필요했다.
하지만 강은 느릅나무 숲이며 바다이다.
우울과 정적이 함께 있는 바다,
그 바다를 위하여 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세월과 중이염을 치유해 주는 시간,
그것이 내게 필요했고 고통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눈물의 가락으로.
그것을 나는 다시 본다.
그리운 저 무덤
박정만
마지막 한 분(盆)의 사랑마저
해거름 쏠리는 서산에 주고
나 그림자만 남아서 어디로 가나.
길은 천 갈래
어둠 속에 저마다 깊이 저물고
제 피로 초롱에 불을 밝혀도
그리움은 캄캄한 숯으로 필 뿐.
슬픔은 찔레꽃처럼 찬란할 뿐.
차라리 바늘쌈에 목을 놓고
소리 없는 울음이나 울고 살 것을.
눈썹 끝에 시름처럼 어리는
한 조각 노을이나 이고 살 것을.
아무리 달려가고 달려가도
어긋나고 어긋나고 어긋나는 길,
나 같은 것 그렇게 가다 지쳐서
가시덤불 쑥굴헝에 묻혀나지길.
묻혀져서 한 세월 지나면 잊혀나지길.
헛되어 살아온 목숨 하나가
죽어서도 못 만날 너를 그리며
오늘도 무덤가에 창처럼 꽂혀 있어라.
그리움 또 그리움
박정만
누이야, 봄날엔 네게 슬픔을 주마.
씻어도 씻어도 씻어지지 않고
버리고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옥(玉)처럼 깨끗한 하나의 슬픔을.
누이야, 너는 가슴에 슬픔을 품고
머언 하늘 한끝을 바라보아도 좋다.
꽃잎같이 꽃잎같이 입을 봉(封)하고
머언 봄을 생각해도 좋다 아주 머언 봄을.
누이야, 이 봄엔 네게 피리를 주마.
옥(玉)처럼 깨끗하고 슬픈 하나의 피리를.
불어도 울지 않고 울어도 닿지 않는
저 하늘의 아지랭이 같은 아지랭이 같은.....
그해의 가을
박정만
저 고구마 순 길어나는 때의
쇠비름풀 순마다 마른 땅에 뿌리 내리고
억척으로 얼어서던 일을 기억하는가.
땅은 비록 척박한 땅이었지만.
어머니는 그저 고구마 밭고랑을 돋우며
호미질로 먼 산천 헤아려가고
그때마다 앞산 선영에선 부엉이가 울었네.
울어도 별수 없는 부엉이었지만.
고추밭엔 고추가 너무 익어서
썩어 문드러진 몸짓으로 새앙쥐를 부르고
목화밭엔 목화꽃도 너무 피어서
일손 놓고 그저 앞산만 멍하게 바라보았네.
그 산 아래 할애비의 무덤이 있어
청솔가지 사이로 언뜻 보이고
나는 언제나 정이 없어서
그냥 산꿩 나는 소리나 퍼뜩 들으며
비탈길 수수밭의 수수 모가지만 바라보았네.
산비탈 이쪽 켠엔 서숙(조)도 자라
고개 숙인 모가지가 무궁화 같고
한 마디로 툭 꺾으면 저문 날의 햇볕이어서
산굽이의 칡뿌리 하나마저 캐지 못했네.
떨이감으로는 형편없는 추억이지만
그 가을의 모지락스럽던 밤은 지나고
벌써 인근의 사람들을 걱정할 때가 왔으나,
잔정만 주름살을 짚고 있어서
무엇 하나 보태 줄 건덕지가 없어서.
소름 끼치게 아름다운 그해의 가을.
그 햇볕
박정만
불편한 사랑은 다아 끝나고
이제 여름에서 가을로 간다.
질서정연하고, 가을빛으로 물들은 사람들.
고개를 조금만 들면
가로수와 하늘 끝에 닿을 만한데
분홍 손수건 하나로도 산을 덮지 못한다.
나는 네 눈동자 속에서 살고 싶어
박정만
나는 네 눈동자 속에서 살고 싶어.
네 눈이 보는 것을 나도 보고
네 눈에 흐르는 눈물로 나도 흐르고 싶어.
어쩌다 웃고도 싶어.
밤이면 네 눈 속에 뜨는 별처럼
나도 네 눈 속에서 별로 뜨고 싶어.
간혹 꿈도 꾸고 싶어.
네 눈 속에 꿈꾸는 길이 있으면
나도 네 눈 속에 꿈꾸는 길이 되고 싶어.
끝없이 걸어가는 길이 되고 싶어.
어쩌면 그 길에서 나그네도 보겠지.
그러면 나도 네 눈 속에서
먼 길을 걸어가는 나그네가 되고 싶어.
풀밭에 주저앉아 가끔가끔 쉬어도 가는.
나는 네 눈동자 속에서 살고 싶어.
네 눈이 가리키는 방향을 나도 보고
네 마음의 풍향계도 바라보고 싶어.
저기, 키 큰 미루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군.
네 눈 속에는 바람이 지나고 있어.
나도 네 눈속을 지나는 바람이고 싶어.
네가 보는 것을 나도 볼 수 있지.
왜냐하면 나는 네 눈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
네 눈 속에는 멧새가 살고 있어.
갓 움이 돋은 고란초도 살고 있어.
그 날은 비 갠 오후 저녁 때
네 눈동자 속에는 무지개가 걸려 있었지.
나도 네 눈동자 속에 무지개로 내리고 싶어.
그리하여 네 가장 아름다운 젖무덤에
어린 양처럼 유순한 코를 박고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꽃잎의 모습으로 죽고 싶어.
나는 끝끝내 네 눈동자 속에서 살고 싶어.
낮은 목소리로
박정만
산정에 올라오면 먼저 머물 자리를 마련한다.
금년의 나는 지난해의 내가 아니므로
지리도 새 자리가 되어야 한다.
이번에는 억새밭에 자릴 잡았다.
먼 산정에는 어느덧 억새꽃이 무성하다.
간단히 저녁을 때우고 나서
해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득한 산 너머로 해는 지고
장엄한 어둠이 살에 스미는 것을 느낀다.
삽시간에 별들이 돋았다.
사람의 눈매가 그렇듯이
어떤 별은 글썽글썽 눈물을 머금고 있다.
이러한 별밤엔 혼자서 무엇을 하나.
나는 나직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낮은 목소리로 더욱 낮게
풀뿌리까지 닿도록
목청껏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낮은 천장은 숨쉬기에 불편하다
박정만
단지 하나의 골격(骨格)만 남아
사막의 끝으로 갔다 끝은 보이지 않고
하늘보다도 더 먼 곳에서
은빛 모래의 잠만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비틀린 초목(草木)의 마른 가지 끝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붉은 열매들,
건조한 바람이 불고
손바닥만 한 크기로 누워있는 선인장들.
바람도 없는데
푸른 꽃잎 하나가 지고 있었다.
지는 꽃잎 사이로
누군가 한 사람의 슬픈 꿈도 지고 있었다.
꿈도 눈물도 말라비틀어지고
신기루와 같은 병(病)만 쳐졌구나.
그런데 이상하고 이상하다.
살 속을 파고드는 한 촉의 뿌리들.
나는 민초(民草)들의 거시기야.
혁명도 없고 기다릴 시간도 없으니까
땅 속으로 땅 속으로 파고들어
어둠과 하나로 동화(同化)되어 새끼를 치는 거야.
어둠에 겨운 밤마다 책장을 넘기며
부러진 활자들의 꿈을 바로세우고
한 나라의 선(禪)으로 좌정(坐定)하는 거야.
무력하고 따분한 혼수 속에서.
숨 쉬는 것이라곤 그저 없는 시간뿐.
내 너에게 이르기를
박정만
내 너에게 이르기를
꽃 지는 저녁은 보지 말라
향이 어려
눈부신 밤이 오면 눈물 나리
이젠 잦아지리
보글보글 끓는 탕약 속으로
사랑이건 목숨이건 다 주어버리고
이젠 사라지리
때론 저물녘도 기억하리
노을이 물결처럼 지고
어떤 나그네가 죽자살자 걸어가는데
(산문적으로)
딸기꽃 있지
내 너에게 이르기를
저녁 때의 슬픔으 ㄴ갖지 말자
뒤가 켕겨
눈부신 밤이 오면 눈물 나리
내 무덤 위에 앉아 쉬리니
박정만
사랑이여,
이 세상 가장 순결한 꽃잎의 이름으로
저 하늘에 내 이름이 적히리니
그때에 이르기를 인생은 한마당 꿈이라 하라.
나는 사망의 검불이요
그 무덤을 덮는 한 촉의 풀잎이니
이제 뿌리째 들어내어
저 오뉴월 땡볕 아래 가차 없이 던지시라.
그리하여 마르고 마른 땅에
마른 줄거리같이 육신의 뼈가 놓일 때
아득하고 어두운 저 적소 위에
내 생도 사라지고 풀잎 또한 시든 것을.
그러나 아낌없는 세월이 또 흘러
어느 황량한 빈 벌판 길에
목마른 황혼의 계절이 찾아오면
한 나그네가 내 무덤 위에 앉아 쉬리니
그때에 거듭 이르기를 인생은 한마당 꿈이라 하라.
가는 길 없음을 나는 아노니.
너의 옷고름
박정만
자줏빛 너의 옷고름,
풀 길이 영원히 없어 영원히 없어
문설주에 짝귀 대고 바라보았네.
산빛에 햇빛이 앵돌아진 때였었지만.
그래도 너무 감사한 일,
바구니엔 그냥 밤참이 오고
혀짤배기 소리로 그리운 밤이 내려서
현고조고(顯高祖考) 적당한 사투리 말로
네 푸른 옷고름을 풀고 싶었네.
우리가 죽어서 다시 만날 때.
녹두빛으로
박정만
산도 기다림이 남은 양 봄을 앞에 하고 꽃을 기른다.
저 녹두꽃이 다 지고 나면
저 녹두꽃만 한 녹두 속에 녹두꽃은 또 녹두빛으로 피어나리라.
비. 바람. 번개. 불을 품고서
누이를 위한 소곡(小曲)
박정만
누이여, 나는 아주 이상하게 방황(彷徨)하였다.
수천 년 동안 아주 이상하게
죽음 저편의 건너 세상까지를
막연한 명칭 앞에 나는 방황하였다.
나의 방에 빗나간 변혁,
빗나간 자유,
아무것도 분별할 수 없는 나의 방에는
죽은 언어의 시체만이 누워 있었다.
나는 웬지 울화가 치밀어 오르고
하나 있는 나의 목숨이 싫고 싫었다.
부질없이 엎디어 울고 울었다.
그리하여 간혹 아무런 방향도 없는
일종의 세월이 필요하였다.
그때는 내가 너무 미신적(未信的)이었으므로.
다비(茶毘) 후
박정만
생겨날 것 다 생겨나고
사라질 것 다 사라진 후,
그대는 연화대 그늘에
꽃처럼 잠드시어
대저 무슨 꿈을 꾸시는가.
적광전(寂光殿) 수려한 눈썹 밑으로
탁발승 하나
오늘도 고요히 지나고 있다.
무주사(無住寺) 큰스님은 산에 가시고
다시 도봉(道峰)에 살면서
박정만
물굽이 눈에 돌고
귀울음 새로 돋아나는 나날이여.
잠 아니 오는 밤 날로 길어지고
풀섶에 무서리 깊어지면 어이하리.
기러기 짝하여
스스로 흘러가는 하늘 위의 때,
서러운 어린것들
제 품에 품에 가는 우리들의 때,
아내여,
물 젖은 네 낯바닥의 주근깨에
두릅나무 새순 같은 어린것을 붙이고
말없이 돌아서서 도봉을 본다.
청수장 맞은편 그늘목의
내가 앉던 그 자리,
햇발에 그늘이 조금씩 넓어졌으니
아내여, 서리 묻은 울음발
발아래 두고
발걸음 새로 하여 산에 들어라.
이윽고 해거름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산자락이 단정히 품(品)으로 깃을 접으면
사랑이 제철을 품어보는
달무리 허리 두른 우리들의 옥빛 꿈자리.
내 또래의 젊은것들 의좋게 산에 오르듯
도봉과 짝하여 마주 서는
너와 나
우리들 길동무의 짝,
어린것들 쑥잎처럼 새로이 짙어 오리니.
대장장이
박정만
풍구는 똑같은 속도로 바람을 뽑아 올리고
쾅당 쾅당 쾅당 쾅당
그는 맨살의 시우쇠를 잽싸게 두드리며
비수처럼 번쩍이는 불을 캔다.
검은 이탄의 거죽에서는 자꾸만
먹장 같은 불꽃이 튀어 오르고 또다시 튀어 오른다.
화력은 끓는 勞役(노역)의 피다.
시간은 쉿쉿거리며 증기처럼 산화하고
더 먼 곳에서는 순식간에 몇 세기가 죽어버렸다.
천지간에 불붙는 일요일의 피.
달아오른 살. 완강한 투혼(鬪魂).
그는 왕명(王命)처럼 받들고 그의 업을 지킨다.
보이지 않는 등불이며 질병의 한끝까지
세상을 지키고 세상의 한끝까지 지킨다.
무거운 형벌들이 솟아오르고 스러지고
또다시 솟아오르는 저 시뻘건 용암의 굴.
아으! 저 혓바닥. 저 목구멍.
그는 이탄만 한 검은 대가리를 던지고
꾀 많은 저 졸병들도 가차 없이 던져 버린다.
풍구 속에서 바람은 스스로 빠져나오고
불을 캐는 그의 손바닥은 바로 熱風(열풍)이었다.
숨 쉬는 건 그야말로 영원이다.
그의 손끝에서 끝없이 비수는 날아오르고
날아올라 이 시대의 정곡을 찌르고 찌른다.
산악(山嶽)같이 다가서는 밤의 모서리를
말없이 소리치고 소리치는 어둠을,
죽어버린 침묵의 기둥들도 찔러버린다.
찌르고 찌를 것은 모두 찌른다.
빠르게 칼을 거두어 피를 간다.
쓱싹 쓱싹 쓱싹 쓱싹
열심히 열심히 피를 간다.
대청에 누워
박정만
나 이 세상에 있을 땐 한 칸 방 없어서 서러웠으나
이제 저세상의 구중궁궐 대청에 누워
청모시 적삼으로 한 낮잠을 뻐드러져서
산뻐꾸기 울음도 큰댓자로 들을 참이네.
어차피 한참이면 오시는 세상
그곳 대청마루 화문석도 찬물로 씻고
언뜻언뜻 보이는 죽순도 따다 놓을 터이니
딸기 잎 사이로 빨간 노을이 질 때
그냥 빈 손으로 방문하시게.
우리들 생은 다 정답고 아름다웠지.
어깨동무 들판 길에 소나기 오고
꼴망태 지고 가던 저녁나절 그리운 마음,
어찌 이승의 무지개로 다할 것인가.
신발 부서져서 낡고 험해도
한 산 떼밀고 올라가는 겨울 눈도 있었고
마늘밭에 북새더미 있는 한철은
뒤엄 속의 김 하나로 맘을 달랬지.
이것이 다 내 생의 밑거름 되어
저 세상의 육간대청 툇마루까지 이어져 있네.
우리 나날의 저문 일로 다시 만날 때
기필코 서러운 손으로는 만나지 말고
마음 속 꽃그늘로 다시 만나세.
어차피 저세상의 봄날은 우리들 세상.
도미가(都彌歌)
박정만
꽃 같은 눈보라 저리 내리고
죽음보다 눈부신 어둠이 세상에 차면
눈먼 우리들의 사랑은 아디로 가나.
오늘도 낯선 땅을 헤매 돌며
오금 박힌 무릎으로 어둠을 짚어가는
불쌍한 거렁뱅이 도미의 아내.
시퍼런 칼을 문 동짓달 하늘가에
기러기는 기러기의 길을 가고
조각달은 조각달의 길을 가는데
없는 길만이 길 위에 남아
저 홀로 오라고 오라고 부르는구나.
잠들어라, 슬프고 외로운 거렁뱅이 사랑이여.
죽음보다 눈부신 어듬 속에 코를 박고
밤잠 같이 자듯 그렇게 잠이 들어라.
잠이 들면 때로 꿈속에서
행복했던 나날의 단꿈도 꾸게 되리라.
철마다 꽃등에 불 밝히던
서러운 서러운 햇볕도 만날 수 있으리라.
원수놈의 사랑이여, 창맹(蒼氓)의 나라여,
오늘은 눈먼 네 눈의 옥잠(玉簪) 위에
불타는 한 송이 장미를 놓으리니
부디 무덤 속의 하늘의 길을 열어서
꽃다운 시절의 가시판도 드리우소서.
나는 기꺼이 네 몸의 눈이 되리니
언제나 다함 없는 네 눈의 불이 되리니.
도봉(道峰)을 떠나며
박정만
간밤 모질게 쏟아지던 소낙비에
내가 쓸쓸히 기르던 채소밭의
갓 핀 쑥갓들이 모로 쓰러졌구나.
쓰러진 것이 어찌 그것뿐이랴.
너와 내가 기르던
사랑의 무등(無等)의 저 옥돌들도
진흙밭에 코를 박고
목까지 빠지는 슬픔에 잠겨 있구나.
돌아가자, 없는 땅을 찾아서
눈물 많던 나날의
우리들 눈그늘에 어리던 저 근심의 날로.
없는 길을 더듬어 완전한 맨발이 될 때까지
걷고 또 걸어서.
때로 기억하리라.
바늘귀로 한세상 들여다보며
한 자루의 선향(線香)으로 뜸을 들이며
선혈(鮮血)의 붉은 꽃잎에 입 맞추던
우리들 문신(文身)의 저 지극하던 때를.
인적 끊긴 산마루에
나를 대신 울며 날아가는 한 마리의 작은 새여,
해 저물고
인가의 불빛 멀리 사라져
내 마음의 꿈빛깔도 이렇게 캄캄하구나.
잘 있거라, 정다운 내 이웃들.
늦은 귀가의 골목길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어둠의 떼와,
일기불순(日氣不順)과,
어린 것들의 잔기침 소리와...
아내여, 꽃마중 가듯이
그렇게는 가지 못해도
모둠발로 땅을 딛고 하늘을 보면
전주집 큰애기의 젖멍울도 좋이 풀리고
내일은 먼 어디메 추석장이 서는 곳에
풋과일도 한 광주리 나와 돌리라.
돌아온 추억
박정만
갑니다. 내 갑니다.
이 고통, 이 설움 참지 못하고
그냥 가고 맙니다.
서러워하지 마세요.
가는 길은 가는 길, 남는 길은 남는 길,
길 위에 한떨기 꽃도 피게 하지 마세요.
길을 덮어주셔요, 길을.
길은 너무 멀고 아득하여서
꽃으로는 덮을 수 없어요. 꽃으로는요.
바람이 불어요.
그대 가고 없는 눈부신 바람이.
가라 하지요, 바람 부니까.
그럼 이담에 어떻게 해요.
그래도 가라 합니다.
슬픔이 너무 크니까. 너무 크니까.
그러면 인제 이렇게 합시다.
저녁 잠은 무사합니까.
꿈꾸는 봄날, 나는 어리석어서
잠만이 깊어가고 깊어갑니다.
내 잠 이 곳에 두고 가니
어리석다, 어리석다 말을 맙시다.
갑니다, 이 세상 사는 일 너무 아름다워서
등(燈)
박정만
아무도 보는 이 없는 세상을
등이 하나 맹목으로 빛나고 있다.
가는 이 오는 이도 없는 밤을
나 홀로 되짚어오는 길을
먼 후문(後門) 밖에서 천년을
의위(儀衛)처럼 기다리고 있던 등.
나의 병(病)이 있었던 지난달에도
하나의 등이 있었고
내 발이 닿지 못한 저 도중에도
분명하게 분명하게 있었다.
늘 근심 없이 근심 없이 하던
그러나 말을 타고 역병(疫病)을 앞세우고 가는
당신이었거나 먼 당신의 마을.
세상에는 당신이 결코 듣지 못하는
더 큰 바다도 있고
당신이 결코 보지 못하는 무명(無明)도 있다.
오, 바람 씻긴 마애(磨崖)를 보며
내 죽은 몇천 년의 뒤에서
저 등불 하나 홀로 보는 이 있어
돌에 삶의 부호(符號)를 쪼고 있음이여.
등반
박정만
산에 가도 산은 안 보이고
산줄기 밀어가는 황국(黃菊)의 혼만 보인다
귀를 열면 어디선가
더 큰 귀들이 심장에 와 눕고
소리도 없는 곳에서
문득 메아리 하나가 허공(虛空)에 길을 낸다.
그러면 내가 떠난 뒤끝에 누가 남아서
이 길로 소리도 없이 지나가리라
누구는 또 눈감고 조용히 지켜보리라.
눈을 감을수록 더 큰 눈들이
우리들 가슴에 남아서 지켜보리라.
산에 든 내 안에
또 하나 볼 수 없는 산이 들어서.
떠도는 항간
박정만
근자에는 사람이 드물었어.
어쩌다 폭죽처럼 찬란하게 터지는
말 없는 바라밀(波羅密)의 사람도 있긴 하였지만
대부분의 우리에겐
망월(望月)의 구름이고 시든 풀이며 죽은 중이야.
등사판으로 이 시대의 말을 밀어
소리도 밀고 항간에 떠도는 소문도 밀어
밀고 밀어서 유비통신(流蜚通信)으로
거리마다 골목마다 급하게 전파해버려.
나는 이 나라 이 강산의 따라지야.
따라지들의 형이고 따라지들의 아우야.
뒤웅박 차고 쓸데없이 바람이나 잡는
맹랑하고 허황한 뒝벌 따라지.
하늘이 손풍금 같이 맑게 갠 날은
유난히 청결한 사람이 그리웠어.
맨손과 맨주먹으로 적심(赤心)을 쌓으며
변천하는 역사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며
덧없는 세상의 뜬소문도 귀담아듣고
그런데 사람들은 다 달창이 났어.
좋은 시절은 달음박질치듯이 달아나고
일 년내 수상하고 미심쩍은 비만 내렸어.
사람을 유혹하며 알맞게 감미로운 비.
오, 이 알맞게 달콤새콤한 사랑,
달도 기울고 참새우도 등허리를 굽혔어.
박씨도 죽고 첨지와 참봉도
영원 속의 하나님 앞에서 참살당했어.
이제 꽃쌈 같은 목숨으로 하늘을 보자.
떨어진 꽃잎
박정만
앞섶의 꽃 단추같이
쥐도 새도 모르게 떨어진 꽃잎.
잉크 빛으로 하늘만 푸르러가고
생쥐 같은 눈을 뜨고 뜰에 떨어진 봄빛.
싸리비로 한참만 쓸어 보고파
마지막 편지
박정만
그대에게 주노라
쓸쓸하고 못내 외로운 이 편지를
몇 글자 적노니
서럽다는 말은 말기를
그러나 이 슬픔 또한 없기를
사람이 살아 있을 때
그 사람 볼 일이요
그 사람 없을 때 또한 잊을 일이다
언제 우리가 사랑했던가
그 사랑 저물면
날 기우는 줄 알 일이요,
날 기울면 사랑도 끝날 일이다
하루 일 다 끝날 때 끝남이로다
매화
박정만
매화는 다른 봄꽃처럼 성급히 서둘지 않습니다
그 몸가짐이 어느댁 규수처럼 아주 신중합니다
햇볕을 가장 많이 받은 가지 쪽에서부터
한 송이가 문득 피어나면 잇따라 두 송이, 세송이..
다섯 송이, 열 송이 ..
이렇게 꽃차례 서듯이 무수한 꽃숭어리들이
수런수런 열립니다
이때 비로소 봄기운도 차고 넘치고,
먼 산자락 뻐꾹새 울음소리도 풀빛을 물고 와서
앉습니다 먼 산자락 밑의 풀빛을 물고 와서
매화꽃 속에 앉아 서러운 한나절을 울다 갑니다.
맹꽁이는 언제 우는가
박정만
날이 저문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꿈이라도 꿀 일이요
애통한 자는 하루종일 밖에 나가
그의 별이라도 바라볼 일이다.
그러나 꿈꾸는 사람은 길을 잃었고
없는 길을 헤메도는
누군가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동풍이 건듯 불고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어 몇 달째 궂은 날이
계속되었다.
하늘은 캄캄한 서녘으로 고개를 눕히고
어둠 속에서 별들은 자개처럼
얼어붙었다.
나아갈 길도
돌아갈 집도 이제는 없다.
몇날 며칠을 두고두고 비가 내리고
비가 내리면 굳은 땅에도 물이 고일까.
물 고인 땅에는 눈물이 없다.
가물 끝은 있어도 장마 끝은 없다는데
이 장마 그치면 맹꽁이는 우는가.
캄캄한 이 시대의 정수리에 코를 박고
기별도 없이 큰 낮잠 주무시는 사람아.
오늘도 날 저물고 비가 내린다.
몽돌의 꿈
박정만
저 시퍼런 하늘 속에
천년 묵은 바다의 돌거북이 있어,
그 돌거북의 등판을 타고 앉아
머나먼 하늘의 꽃잔등을 넘어가는
푸른 눈썹의 여인이 있어,
때로 메아리 영감님도 따라오셔서
쿵더쿵 쿵더쿵 연자나 방아를 찧고
더러 냇가의 소금쟁이 같은 것도
깐죽깐죽 물레나 방아를 돌린다누만.
이제 나 어찌하리오.
꽃순처럼 이글대는 저녁 강에
던져버린 술잔과 기나긴 하루 해와
붙었다 떨어지고 떨어졌다 다시 붙는
저 캄캄한 몽돌과의 獨行千里(독행천리)를.
별수 없지, 그 곁에 붙어 서서
나는 그저 담배나 뻐끔뻐끔 피울 수밖에!
무슨 까닭이었을까
박정만
무슨 까닭이었을까
사랑도 그리움도 마른 풀잎에 눕고
기다리는 사람은 종내 소식이 없고
나는 덧난 상처로 남아
빨갛게 익어터진 종기(腫氣)를 보노라.
내 생의 우기(雨期)를 재촉하는 바람만
막무가내로 불어와
벌판을 쓰러뜨리고 나를 쓰러뜨렸다.
이제 사랑도 알아보게 축(縮)이 났다.
꿈꾸는 자의 기다림은 서녘에 지고
적승(赤繩)의 때도 지나갔으나
옷고름처럼 나부끼는 달빛은 살아
초개(草芥)같은 목숨을 저 산하에 주라 하누나.
남루하지만 아직은 평화롭다.
병은 산보다 깊고 육신은 들보다 멀다.
제비꽃 꽃잎에 이슬이 지고
몽당솔 잎에도 무시로 바람이 분다.
아직은 한 수를 더 바라보는 때.
벙어리의 말
박정만
1
사랑이여,
소리 없는 말로 말하는 괴로움도
말 못하는 이 괴로움도
이제는 모두가 말할 일이 아니다.
하늘을 우러러
내가 키운 내 가슴속의 벙어리,
나는 죽고 벙어리는 살아서
날더러 잠자는 돌이 되라고 한다.
어저 내 일이여,
말할 줄을 내가 아니 왜 모르던가.
벙어리의 가슴 속엔 잠자는 돌,
곤(困)한 잠에서 내가 깨거든
내 죄를 저 하늘에 고(告)하리라.
3
돌을 깍으며 깍으며
벙어리는 그나마도 말을 버린다
구슬픈 노랫소리 세상에 차고
말을 버린 말 속의 언어의 뿌리
혼자서 듣고 혼자서 버리는
끌과 망치의 힘
(바늘 한쌈이 목에 걸리어
고요로 들끓는 아우성 소리)
듣지도 않고 보지도 않고
살이 살을 버리고
피가 피를 버리고
말이 말을 마저 버릴 때
혓바닥을 맴도는 말씨 하나가
이 세상을 밝히는
수정(水晶)의 푸른 초석이 된다
보리개떡
박정만
앞산의 푸른빛도 언필칭 기울어 갈 때
늦은 저녁잠을 슬쩍 달래어
가마솥에 댓바리로 쪄 주던 보리개떡,
멍석 옆의 모깃불도 꺼져버리고
하늘엔 그녘 땅의 별빛만 총총하게
미리내 건너가는 다리를 놓았었지만
어머니와 나는 맞받이로 앉아서
맞은바래기로 하늘을 보며
보리개떡에다 별무늬의 잇자국도 남기며
수알치새 같은 어둠도 보며
두 벌 잠 자고 난 누에같이 이야기했네.
지등롱(紙燈籠)은 문밖에 내걸리어
지란(芝蘭)과 귀엣말도 주고받았고
돌쩌귀엔 가타부타 귀뚜리 울음도 살아
지르르 여름밤을 속여 놓았네.
대싸리엔 어둠을 몸에 달고
담록색 꽃이 닥지닥지 피어서
한 무더기 기름떡처럼 뭉쳐 있었고,
겹사돈하듯이 맺어진 이웃집 담장 너머
배나무 몇 그루와 살구나무들.
보리개떡으로 불러 보는 입찬 말소리
봉천(奉天)에 살면서
박정만
한 평의 마당귀
그 푸른 칠월의 등나무 아래
한 조각 하늘을 받들고 서서
시름과 눈물과 아픔의 매듭을 푼다.
관악산 저 너머 어디쯤에는
그 관악의 푸른 멧부리를 머리에 인 채
한 채의 절을 품은
소슬한 하늘의 극락전(極樂殿))이 있을 법도 한데
아득타 경(經)에도 없는 나라여,
낮 뻐꾸기도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온 하루에 지친 밤이 와서
내 육신의 뼈마디를 가리우도다.
이제 무엇으로 하늘을 삼고
무엇으로 목숨의 가물 끝을 보겠는가.
천년 묵은 시왕님도
다만 한 조각 푸른 하늘을 받들고 서서
저 하늘에 가로되 내 몰라라 한다.
저어기, 무심한 바람만 지고 있다.
부러진 약속(約束)
박정만
사랑이여,
불타는 녹음, 불타는 대불(大佛)의 내 심장 위에
거친 피로 내리쏟는 가을과 같이
그 가을 속을 흐르는 캄캄한 선지피같이
이제 바람이 불어오면 어이하리.
가을 강의 그 짙푸른 하늘 속으로
네 뒷모습의 그림자 사라져가고
사라져간 것들만이 남아서 모닥불같이
아, 스러지고 반짝이는 오밤중의 모닥불같이
사그라져 재로 남는 목숨의 불씨,
이제 그 불씨마저 잦아들면 어이하리.
꿈속에 다시 보자 하던 언약의
지지난 봄날의 금강의 하늘도
그 하늘 속의 어리디 어린 잔별까지도
내 가슴 깊이 골을 타 내리는데
그대가 남기고 간 곡옥(曲玉)의 눈물처럼
이제 무서리 깊어지면 어이하리.
짧은 날의 가을비 마냥 내리고
산색 또한 저홀로 깊어지면
먼 길을 걸어가는 나그네의 길은 저물고
어느 찬란한 그믐밤,
촛대에 이우는 꽃잎과 같이
그 꽃잎 속을 건너서 걸어오는 그리움같이
이제 새 병이 돋아오면 어이하리.
가을 강의 그 짙푸른 하늘 속으로
저홀로 찾아왔다 저홀로 떠나가는
사랑은 한갓 떠돌이별의 비유일 뿐,
사랑이여, 별 같은 너와 나,
눈물어린 눈으로 기르던 꽃밭 속의 수정돌같이
그 수정돌에 얼비치는 비비새의 울음과 같이
이제 한 목숨 땅에 지면 어이하리.
하늘에서 하늘로 사라지면 어이하리.
분수 곁에서
박정만
무서워라, 무서워라, 여름날 청석(靑石) 푸른 그늘 위에 앉아 세상을 보면 세상은 바다 속같이 잠잠하더라. 바닷속 물굽이같이 흘러가더라.
어제 꾼 내일의 꿈도 오늘 이렇게 흘러가더라. 사랑이여, 그대 수정(水晶)의 이마 위에 어디로 향한 길이 있어서 안개꽃 희미한 물보라 속을 누가 또 오고 있는가.
사랑아, 또한 그렇더라. 세상은 가도 가도 멀기만 하더라. 아득하더라.
깍지 끼고 눈 감고 입 맞추고 돌아가는 우리들의 성(性) 낑낑거리는 복슬강아지.
그대 이마의 푸른 잠을 들여다보는 안개꽃 물보라 속 복슬강아지.
이렇게들 살아가더라. 한 사람은 한 사람의 기둥이 되고 한 사람은 그 기둥을 받드는 반석이 되어 한평생을 걸어가는 세월. 어둠. 죄. 슬픔 앞에서 피어나라, 피어나라, 영롱한 저 무지개.
모두들 사라지더라. 허공중에 피어서 허공중으로 사라지더라.
사라져간 자리에 남아 있는 보이지 않는 안개의 모서리, 그곳에서 솟아나더라.
한목숨 질기고 질긴 것이 새로이 솟아나더라. 그러더라. 솟아났다 사라지더라, 사라지더라.
비는 줄창 내리고
박정만
비는 눈물같이 줄창 내리고
창은 보랏빛으로 젖어 있다.
나는 저 산쪽
외로운 한 사람을 생각하노라.
그대 생은 어디 있는가.
가고 없는 사람은 생각 말고
돌아올 사람도 생각지 말자.
한 떨기 풀잎을 바라보자.
그냥 그 뜻대로 지고
산천도 언제나 조용하게 저물었다.
인간은 다 어디로 갔나.
비엔나의 밤
박정만
참 장관이었어.
모차르트와 베토벤과 슈베르트가 하나로 나와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로 기울어져서
장송곡으로 전원의 하늘에다 물레방아도 돌리고.
그러나 그것이 어찌 우리 하늘의
동편제 서편제에 비할 것인가.
날씨 꾸물거려도
산천초목 제 모가지로 하늘에 닿고
끊임없는 귓속말로 흐르던 것을.
참 기분 나쁜 비엔나의 밤
세컨드 끼고 가듯 그 밤을 나는 지나왔지만
저쪽 오리나무 숲에서는 자귀가 울어
아주 힘찬 물결이 오고
타령조의 기막힌 소식도 왔다.
한풀이로 식어가는 비엔나의 밤.
빛나는 별
박정만
오늘도 단 하나의 별이 그리웠다.
별은 별이 없는 하늘에 있는데
무슨 까닭일까,
별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취가 없었다.
아, 참으로 신선하고 이상하다.
인생은 이처럼 가득한 그리움이야.
나는 밑도 없는 독에 사랑을 디밀며
철없이 중얼거리고,
아 그렇지, 글쎄 그렇다니까 하고
정식으로 탄원하였다. 행복이니까.
저문 날의 우리들 작은 원망들이여.
가라앉으라니까. 더 낮게. 더 낮게.
그리고 세월이 저쪽 하늘에 있어.
그건 멋지고 즐거운 괴로움이야. 흐흠.
사라진 너에게
박정만
안개꽃으로 너를 불러본다.
아침부터 어둠이 내리는 저녁까지.
돌아올 까닭이야 물론 없지만
그래도 불러 본다, 따스한 입김으로.
영구히 이룩하지 못할 사라진 너에게.
(1987년 9월 8일 아침 7시 45분)
사랑의 몫
박정만
내가 하나의 갈대라면
그대는 다만 바람이어야 했다
흔들리는 것은 내가 아니라
바람이 바람을 몰고 오는
바람의 속,
그대는 나의 바람이어야 했다
그래야 했다.
내가 강가에 피어난
한 포기의 여린 풀로 있을 때
그대는 거대한 숲을 흔들고 지나가는
끝없는 강풍이어야 했다.
바람도 없고
바람이 흔드는 소리도 없는
이 미친 돌개바람의 속,
그대는 무풍의 바람이어야 했다.
그래야 했다.
내가 이름 없는 별이 되어
한줄기 어둠으로 화하고 있을 때
흔들리며 바로잡는 조그마한 죄,
그대는 나의 형벌
영원한 나의 바람이어야 했다.
사월과 오월 사이
박정만
사월과 오월 사이, 사랑아,
봄꽃보다 찬란하게 사라져간 너를 그린다.
그린 듯이 그린 듯이
너는 라일락 꽃잎 속에 숨어서
라일락 꽃잎 같은 얼굴로 웃고 있지만
사월과 오월 사이, 사랑아,
너는 나를 그리며 더 큰 웃음을 웃고 있지만
네가 던진 함성도 돌멩이도 꿈 밖에 지고
모호한 안개, 모호한 슬픔 속으로
저 첫새벽의 단꿈도 사라지는 것을.
사라지는 것은 언제나 사라진다.
사월과 오월 사이, 사랑아,
세월의 앙금처럼 가라앉아
그것이 거대한 나무의 뿌리가 되고
그 뿌리 속에 묻어둔 불씨가 되는 너를 그린다
그린 듯이 그린 듯이
너는 라일락 꽃잎 속에 숨어서
라일락 꽃잎 같은 얼굴로 웃고 있지만
파아란 보랏빛 얼굴로 웃고 있지만.
사향가(思鄕歌)
박정만
십리(十里)를 가도 십리(十里)가 다시 남는
빈 달구지 소리,
고향은 연두색 풍경 뒤에서
빈 달구지 끄는 죽음의 소리를 낸다.
꿈속에 한 발짝, 꿈을 깨고 한 발짝,
가면 갈수록
뒷짐 지고 돌아앉는 황토 묏부리.
뻐꾹새 울음 속에 녹아
서릿발 쉰 목청은 십리(十里) 밖에 머물고
발이 빠른 슬픔이 지름길로 달려와
언제나 나의 앞을 막는다.
방앗간 양철 지붕 위에서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나는 빗소리.
난타(亂打)하며 떨어지는 아픔의 화살.
ZZZZ ZZZZ
귀뚜라미 한창 피가 끓는 때
신열(身熱)에 녹아나는 긴긴 밤을 우는 어머니,
공명실(共鳴室)에 붙어서 내 두 귀가 울고
밤은 피같이 진하게 살아서
내 마음 둘레의 주(主)가 되어 선다.
산 아래 앉아
박정만
메아리도 살지 않는 산 아래 앉아
그리운 이름 하나 불러봅니다
먼 산이 물소리에 녹을 때까지
입속말로 입속말로 불러 봅니다
내 귀가 산보다 더 깊어집니다.
살아가는 법
박정만
저 하늘을 바라 보아라
저 푸른 하늘을,
우리는 저렇게 살아가고 있다.
저 산을 바라 보아라.
저 푸른 산을,
우리는 저렇게 살아가고 있다.
저 바다를 바라 보아라.
저 푸른 바다를,
우리는 저렇게 살아가고 있다.
하늘, 산, 바다와 같이
우리는 저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강물
박정만
강물은 아무런 생각도 없는 데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흘러와서
아무런 생각도 없는 곳으로
또 흘러갔다.
단지 서럽게 사는 사람들이
그곳에다 산빛도 주고
노을빛도 주었을 뿐.
자연스럽게 강물 속으로
흘러가는 목숨.
수상한 세월
박정만
그 막막하고 깊은 어둠 속에서
군화 신은 아이들이 내 몸뚱아리에
뼛속까지 스며드는 상처를 내고
나이팅게일 그려진 안티플라민을 주었어
1981년 5월 국풍(國風)이 여의도에서 흐느끼던 날
술 노래
박정만
꼬이고 꼬인 새끼줄처럼
어둠이 내 목을 쓸어안고 진(陣)을 치는 밤
독사여 죽음의 불꽃이여 잠든 혼이여
불을 질러 불을 질러
불달은 꼬챙이로 심장을 찔러
서리서리 목을 감고
밤보다 깊고 천 년보다 아득한 정을 맺어라.
쇠하고 쇠한 몸이 사약을 받쳐들고
기둥처럼 서서
바치는 법, 법을 잡아먹는 망할 자식아.
아으! 불먹은 저 놈의 혓바닥,
게거품 입에 물고 토해놓은 욕지거리,
나를 보며 날름대는 저 놈의 욕지거리,
독사여 죽음의 불꽃이여 잠든 魂이여
암컷은 두었다 약에 쓰고
오늘밤은 한 목숨이 악으로 지자.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고
창(唱)이며 끄덕이는 고갯짓은 두었다 하고
버려라,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하라, 취할 것은 취하고
취하고 취하여 강술에 파김치같이
저 마지막 한 방울의 고요 속으로
시들어져라, 시들어져라, 시들어져라
스무 살 이전(以前)
박정만
등꽃 아래 앉으면 보랏빛 눈물,
시름 곁에 앉으면 다시 또 시름의 눈물,
그때는 왜 그렇게
눈물이 흔했는지 몰라.
한 모금의 소주와
푸르게 넘쳐나는 정열의 돛폭 높이 달고
한숨의 떼 무리 지어 밀려올 때도
마음(사랑의 마음)
금쪽같이 금쪽같이 나누어 썼네.
슬픈 일만 나에게
박정만
사랑이여, 슬픈 일만 내게 있어다오.
바람도 조금 불고
하얀 대추꽃도 맘대로 떨어져서
이제는 그리운 꽃바람으로 정처(定處)를 정해다오.
세상에 무슨 수로
열매도 맺고 저승꽃으로 어우러져
서러운 한 세상을 건너다 볼 것인가.
오기로는 살지 말자.
봄이 오면 봄이 오는 대로
가을이 오면 가을이 오는 대로
새 울고 꽃 피는 역사도 보고
한겨울 신설(新雪)이 내리는 골목길도 보자.
참으로 두려웠다.
육신이 없는 마음으로 하늘도 보며
그 하늘을 믿었기로 산천(山川)도 보며
산빛깔 하나로 대국(大國)도 보았다.
빌어먹을, 꿈은 아직 살아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역(西域)에 자고
그 꿈자리마다 잠만 곤하여
녹두꽃빛으로 세월만 다 저물어갔다.
사랑이여, 정작 슬픈 일만 내게 있어다오.
쓸쓸한 봄날
박정만
길도 없는 길 위에 주저앉아서
노방(路傍)에 피는 꽃을 바라보노니
내 생의 한나절도 저와 같아라.
한창때는 나도 열병처럼 떠도는 꽃의 화염에 젖어
내 온몸을 다 던졌더니라.
피에 젖은 꽃향기에 코를 박고
내 한몸을 다 적셨더니라.
때로 바람소리 밀리는 잔솔밭에서
청옥(靑玉) 같은 하늘도 보았더니라.
또한 잠 없는 한 사람의 머리맡에서
한밤내 좋은 꿈도 꾸었더니라.
햇볕이 아까운 가을 양지녘에서는
풍문(風聞)처럼 떠도는 그리운 시를 읽고
어쩌다 찾아온 친구에게는
속절없는 내 사랑의 말씀도 전했더니라.
이제 날 저물고
팔이 짧아 내 품에 뜨는 것도
부피 없고 무게 없고 다 지친 것뿐.
가슴의 애도 제물에 삭고
긴 밤의 괴로움도 제물에 축이 났어라.
이제 모질고 설운 날은 지나갔어라.
빈집에 홀로 남은 옛날 아이는
따뜻한 오월의 어느 해 하루
툇마루를 적시는 산을 벗삼아
잔주름 풀어 가는 강물을 본다
아담한 고독
박정만
산수국(山水菊) 한 가지로
이 세상 산빛을 모두 받드는 저녁
이 빠진 사기잔에 차를 따르며
찻잔 속에 어리는 그대 뒷 모습을 보노니.
아서라.
슬픔은 오래오래 간직했다 약에 쓰고
오늘밤은 그저 창밖의 별이나 세며
일없이 눈끔적이 신세나 되자.
멍하니 눈뜬 장님 행세나 하자.
하마 지금쯤
너와 내가 기대앉던 그 꽃자리에
패랭이꽃이라도 한 두엇 피어나서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죄로 살겠지.
아따, 늬 몸뗑이에서는
무신 놈의 땀냄새가 이리 난당가.
사투리로 스무살 적 곤한 때를 이야기하며
젊은 마음 꼬여대는 저녁 물소리.
이런 날은 강낭콩이나 까먹고 싶어
사랑도 미움도 시름시름 까먹고 싶어.
그리하여 마지막 십원짜리 하나까지 다 까먹고
빈 껍데기로 남고 싶어.
빈 찻잔 속에 떠도는 향기로 남고 싶어.
아득한 그대
박정만
첫사랑의 앵화도화
울 밑으로 시들어지고
먼 산허리에
기우는 봄빛,
엉터리로 불러보는
아득한 그대,
막차의 불빛으로 자옥하게 피어난 그대.
이 봄빛 다하면
저승꽃만
착실히 피리
아름다운 죄(罪)
박정만
사랑이여, 굶주린 발톱으로
성난 매의 하늘을 다 제압하기까지는
그대 젖꽃판에 늘어붙어 풋잠이나 청할 수밖에.
그리운 내 마음의 천칭(天秤) 위에
그리운 그대 마음의 무등(無等)의 옥돌이나 놓을 수밖에.
어쩌다 바람은 초록의 잎새 위에
그대 대마(大麻)의 속곳만 뒤집어놓고......
나는 불타는 눈으로
그대 눈부신 살결이나 어루만지고......
오, 사랑의 모기둥에 못을 박으며
영혼도 살에 붙어 피륙을 짜고
걸립패(乞粒牌) 어깨춤에 피가 돌아
지고 새는 나날의 이 슬픈 사랑놀이.
그대 머리의 국화판(菊花板)에 하늘이 앉아
하늘의 손짓으로 나를 불러도
나는 바람을 안고 모로 걸으며
피보다 붉은 네 살의 꽃잎 위에
코를 박고 쓰러지는 초개(草芥)인 것을.
오늘도 잠 못 드는 하늘 아래
꿈마저 오지 않는 석 달 열흘을
십 리 뻘 물들이는 축축한 소금기의 암내에 젖어
나는 끝도 없이 헤매 도는 한갓 외로운 털복숭이여.
아사녀의 편지
박정만
서방님,
제게 약(藥) 한 첨만 지어주세요.
바람편에 쉬이 오는 기별
좋으나 나쁘나 잘 계시다는
한 두어 자 소식만 들으면
얼마쯤 속이 冷해질 것 같은데요.
서라벌이 얼마나 먼지는 모르지마는
머리털 엮어가는 저승의
별에서 여기 오는 거리만큼
되지는 못하겠지요.
시샘하는 초봄의 꽃망울같이
서라벌에서 저 아닌 또 누가 있어서
못 가리다 못 가리다 붙잡는가요.
독사와 같이 아아 독사와 같이
그대 발목 물어 뜯고
칭칭칭 목이라도 휘감는가요.
어제도 산바람에 귀 대이고
하늘 한 번 바라보고 돌아서고
오늘도 산바람에 귀를 대이고
하늘 한 번 바라보고 돌아섰지요.
제 그림자 제가 밟고 돌아왔지요.
아편꽃
박정만
저만큼 나를 놓고 달아나는 첫사랑이여.
내 피의 아득한 급류의 산맥 위에
오늘은 초롱의 꽃 그림자 자지러지고
속마음 타넘고 일렁이는 능구렁이,
짙은 아내의 푸른 불로 타오르도다.
이 내 몸도 징그러운 꿈이 되어
또한 푸른 불 한가지로 타오르도다.
애원성 하나
박정만
사랑하는 사람아,
내 반분(半分)의 피와 살을 네게 주리니
네 반분의 피와 살을 여기 섞어서
그리운 저 봉분 위의 하늘로 던져주시라.
바람타는 수지니는 산을 넘어서
내 손이 닿지 않는 하늘로 가고
나는 살아 나는 살아
무구한 어둠만이 등을 밝히는
무덤 아래 자빠져서 삭아 가노니
어찌하랴, 어찌하랴, 어찌하랴,
애젊은 나이의 타는 간장과
꼭두서니빛으로 일어서는 애원성(哀怨聲)하나.
푸르디 푸른 목숨 위에
제 죽음 제가 묶는 제(祭)의 사슬이 내려
한 자루 향불에 목아드는 애원성 하나.
하도나 밤이 깊어
귀머거리 귀에도 귀가 열리면
한마당 새남굿의 악머구리 소리로도
내 잠의 깊은 꿈을 가릴 수 없고
하도나 꿈이 깊어
반벙어리 가슴에도 바다가 들면
한바탕 사랑굿의 악다구니 소리로도
꿈길로 가는 길을 지울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아,
내 반분의 낮과 밤을 네게 주리니
네 반분의 낮과 밤을 여기 섞어서
그리운 저 태양 어래 배를 깔고 누워라.
앵초꽃 사랑
박정만
앵초꽃 사랑 꽃피어라,
꽃만 피어라,
꽃 노다지로 한목숨 주어버리자.
동편 꽃도 서편 꽃도
참벌 나는 하늘의 저녁참에 주어버리자.
물 머금은 이 땅의 앵초꽃 하나.
어느 악공(樂工)의 생애
박정만
목을 감고 징징징 우는 병(病)이여,
아무도 듣는 이 없이
현을 하나 고르는 데 십 년이 흘러갔거니
누가 꿈결 같은 십 년을 다 기억하리요.
눈멀고 귀멀어
팍팍한 가슴팍에 잔별도 내려
손끝에 도끼날 시퍼렇게 티눈도 박여
원수의 칼로써 아픔도 구했었거니,
아아 아무도 보는 이 없이
한 가락 잡는 데 바친 나머지 십 년을
누가 또 기억하리요.
손과 손이 유암(幽暗)의 현을 통하여 통하여
목을 감고 징징징 우는 병이여,
다만 악기, 하나의 울림을 위하여
온몸이 현을 차고 뜨는 피리의 소리.
목에 목을 감고 뜨는 피리의 소리.
하늘까지 닿아 있는 한 가닥의 죽음.
오, 노래를 부르면서
노래를 불러도 들리지 않게
그렇게 일생을 꼬옥 껴안으면서.
그렇게 하늘 끝으로 하늘 끝으로 사라지면서.
어느 흐린 날
박정만
눈앞에 어지러이 진(陳)을 치는
하루살이 떼, 하루살이 떼,
소금발로 눈을 씻고
하늘을 보면,
하늘엔 온 하늘 가리우는
하늘 속의 서녘 무지개.
산 아래 마을마다
낮은 音의 불이 켜지고
마음은 슬픔의 향내에
코를 박고 잠들어
어디선가 들려오는
박정만
배꽃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흐르고
이 밤이 깊을수록 외로움도 깊어 가는데
가만히 귀 기울이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나직한 음성.
사람의 아들아,
나지 말지어다, 나는 것 괴롭도다
청솔가지 반쯤 가리고 별이 흐르고
가을이 깊을수록 그리움도 깊어 가는데
조용히 귀 기울이면
어디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음성,
이 사람의 아들아
죽지 말지어다 죽는 것 괴롭도다
어떤 비가(悲歌)
박정만
1
그대여, 마지막 사연은 조금 늦게 부치고
전날에 안 웃던 웃음을 웃어 보아라
섬돌 밑 귀뚜리는 아직도 곧잘 우는지
자주빛 꽃신 속에는 벌써 사랑이 반쯤 비어 있다
그대여, 떠나가는 것들, 말로 말고는 안 돌아오느니
세월의 손을 한 번쯤 붙잡아도 좋다
지금 세상에는 온갖 슬픔이 떠돌아다니다가
몇몇 잎사귀 끝에 다한 눈물로 쉬고
때로 멍든 바람도 합세하여 따라다닌다
너 어디 가슴 한 부분이라도 상처받을지 몰라
나 이렇게 네 눈그늘에 앉아 근심하노니
내 소리 들리거든 빈 손바닥에 비춰보아라
그대여, 빈 뜰에 내리는 달빛은 잠들지 않고
병풍 속의 산수도 깨어서 흐르고 있다
흐르는 저 물을 마음 다하여 멈춰 보아도
물결은 마냥 바다로 바다로 떠내려가고
오늘은 오늘을 이루지 못하고 망각 속에 잠드느니
미래는 다만 끝없는 죄 속에 묻혀버린다
그대여, 마지막 사연은 조금 늦게 부치고
전날에 안 울던 울음을 울어 보아라
5
그대를 기다리는 내 자유의 의자에
산발한 저녁연기처럼
가늘게 슬픔의 떼들이 내려앉을 적,
내 떨리는 손가락은
비가의 흐느끼는 현을 골라 짚고서
그저 하염없었다 한들.
이윽고 잠 아니 오는 한밤의 적막 속으로
내 의식의 불씨들은 꺼져 들고
흐느끼는 현마저 어둠 속으로 잦아들어
그저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 한들.
그러나 언제나 전하시라,
내 외로운 기대의 손바닥에 놓인
조용한 기다림의 의미를.
패랭이꽃 눈 뜨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대 없는 빈 그림자를 지키고 서서
이렇게 바람처럼 지나가는 내 생각은
그저 부질 없었다 한들
어떤 흐린 날
박정만
내 마음의 어느 모래밭에
꽃잎처럼 찍혀진 발자국 하나,
사랑의 잔물결 마냥 꽃무동 서니
날 저물고 비 내리면 어찌하나.
꿈은 오지 않을 길처럼 사라지고
사랑은
금단의 열매처럼 떨어졌으니
어머니의 길
박정만
저 휘황한 등잔불의 갓머리,
삼십 대 후반에 소슬한 머리칼로 밤잠을 함께 해버린
그분의 잔정도 눈에 보이고
그 겨울의 차디찬 설날, 바늘귀에 눈을 붙이고
내 옥색 조끼 만들던 기억도 눈에 선한데.
너무 쉽게 세상과 작별을 했네.
내 새 어머니 오시어 무던한 고생도 했고
어린 동생 코풀고 새우잠 자는 것 사랑했지만
저 못 말리는 꽃구름 어떻게 하리.
모든 일 다 가슴 속에 바늘로 남아
저세상 가는 길엔 타진 옷솔기 하나라도
물굽이 잘 흐르듯이 꿰맬 일인데
손톱만 한 단추 한 알 내겐 없으니.
그립다, 내 사랑, 내 어머니,
볼품없이 이 세상에 한 목숨 누워 살다가
풀꽃들의 어린 키만 보고 살다가
속절없이 저세상의 한켠으로 돌아갔으니.
아마, 세상은 자고로 이럴 거야.
착한 이는 선으로 이 세상 마지막 별꿈을 꾸고
한밤 내 별의 꿈만 내처 꾸다가
한숨만 머리채에 이고 가는 것은 아닌지.
오늘 밤은 너무 눈물이 흔해빠져서
존댓말로 내 어머님 무덤가에 홀로 앉아서
가던 길 한참은 멈추고 먼 산도 보고
산굽이의 찔레꽃도 다시 한 번 보고 싶구나.
나 또한 예정대로 그 길에 들어섰으니.
어혈(瘀血)을 채우며
박정만
어혈을 풀기 위해
한약 한 제를 지어 왔다
코 위에 안경을 걸친
한약방 주인이
물에다 끓이지 말고
막걸리를 부어 끓이라 한다.
술 먹고 대한민국처럼 망가진
내 몸뚱이의 내력을
소상히 알고 있는 듯한 말투다.
참 용타고 생각하며
아내는 탕기에 술을 넣어
약을 달인다.
펄펄 끓는 물솥에 수건을 적셔
내 몸의 어혈 위에 찜질도 하고
탕기에선 한밤내 부글부글
죽음이 들끓는 소리
절명하라, 절명하라, 절명하라,
이를 갈다, 이를 갈다
가슴도 부글부글 소리를 내고
분노도 피딱지도 약에 녹아
하나가 되고/ 어혈은 풀어져서
내 몸의 피와 살과 뼈에 스미고
엉뚱한 심사
박정만
그대에게 비처럼 가려고 했지
산 높고 물 깊어 폭이 넓은데
그래도 그 산천 건너뛰어 마냥 가려고 했지
말도 되지 않는 말이었지만
하지만 그리움 풀잎에 누워
그 풀잎에 달맞이꽃 마냥 어리니
어찌한담 어찌한담 그냥 맘만 깊어서
아니 가고 배길 수는 끝내 없었지
그대여, 내 소리 들녘에 지면
냉이꽃 피는 소리로 한바탕만 귀담아듣고
잔 시름 풀어 가는 새벽이 되면
청솔밭 산까치의 울음소리로
그냥 지나가는 진정으로 받아 주소서
매양 태양은 동편 숲에서 떠서
매양 서산으로 지고 마는 법
내 그대 생각하고 한숨짓고 눈 뜨고 눈 감는 것도
그렇듯이 그냥 그런 것
그것은 삶에서 죽음까지 그런 것이라
오늘도 엉뚱한 마음으로 술잔만 본다
영원한 약속
박정만
나는 몰랐네.
슬픔이 슬픔으로 떠도는 것을.
그 이전 절대적인 생각으로 만났던
사랑과 미움의 한 가지 뜻을.
그때 분명히 이야기했지.
저물녘의 산빛깔도 나의 몫이고
기원사 가는 길의 달맞이꽃도
내 생의 가는 길도 나의 몫이라.
그런데 다 어디로 갔나.
살피꽃밭 꽃거리의 꽃들도 바람에 지고
밤꽃나무 아래의 패랭이꽃도
슬픈 잠을 자는지 보이지 않네.
그러면 이제 저 무덤이나 보자.
무덤은 소슬바람 불어오는 산에 막혀서
한 소절 피리마저 불어 주지 않고
막막한 생각으로 젖어 있구나.
가자. 사람이 사는 마을로
더러운 화살로 풀빛을 건드리지 말고
이제 또 한 번만 영원한 약속을 하자.
그리운 세월을 내 품으로 품기 위하여
오늘의 병
박정만
어제도 세 병 반의 술을 비웠다
비우고 비워도 마음은 비워지지
않았다 병만 깊어 가고
늘어가는 병을 바라보며
깊어 가는 병을 생각했다 봄꿈처럼
허망한 일에 꿈을 걸고 다시 봄이 오리라고
기다리는 일처럼 부질없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일 초에 천 번도 넘는 죽음을
그리워하며, 그리워하며, 그리워하며,
그래도 기다릴 것이 남아 있는 법이라고
퀭한 눈에 힘을 주고 술잔을 기울이면서
백 번도 넘게 길을 떠났다
오월의 유서
박정만
하늘을 바라고 하늘을 바라고
울지 말아라 벙어리야
마친 오월의 돌개바람이
자지러지게 지지러지게 네 울음도 울어도
말하지 말아라 벙어리야
아무도 기다리고 기다려도
아무도 저 한을 보려 하지 않는구나.
불먹은 하루해의 봉분 위에
풀잎처럼 쓰러져간 우리네 목숨,
벙어리야 벙어리야
하늘을 바라고 하늘을 바라고
이제 우리 기꺼이 푸른 제의 사슬이 되자.
오지 않는 꿈
박정만
초롱의 불빛도 제풀에 잦아들고
어둠이 처마 밑에 제물로 깃을 치는 밤,
머언 산 뻐꾹새 울음 속을 달려와
누군가 자꾸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
문을 열고 내어다보면
천지는 아득한 흰 눈발로 가리워지고
보이는 건 흰 눈이 흰 눈으로 소리 없이 오는 소리뿐
한 마장 거리의 기원사(祈願寺) 가는 길도
산허리 중간쯤에서 빈 하늘을 감고 있다.
허공의 저 너머엔 무엇이 있는가.
행복한 사람들은 모두 다 풀뿌리같이
저마다 더 깊은 잠에 곯아떨어지고
나는 꿈마저 오지 않는 폭설에 갇혀
빈 산이 우는 소리를 저 홀로 듣고 있다.
아마도 삶이 그러하리라.
은밀한 꿈들이 순금의 등불을 켜고
어느 쓸쓸한 벌판길을 지날 때마다
그것이 비록 빈 들에 놓여 상할지라도
내 육신의 허물과 부스러기와 청춘의 저 푸른 때가
어찌 그리 따뜻하고 눈물겹지 않았더냐.
사랑이여,
그대 아직도 저승까지 가려면 멀었는가.
제아무리 밤이 깊어도 잠은 오지 아니하고
제아무리 잠이 깊어도 꿈은 아니 오는 밤,
그칠 새 없이 내리는 눈발은
부칠 곳 없는 한 사람의 꿈 없는 꿈을 덮노라.
오후 두 시
박정만
바람이 잠든 날의 오후 두 시.
어디선가 허공을 무너뜨리면서
마치 산악과 같은 조수가 밀려와서는
두 시의 내 영혼을 흔들어 놓았다.
나는 급히급히 침몰당했다.
마음 한쪽 구석에서 살짝 꺾여진 여름날의
두 시의 빛의 매장.
당신도 그것을 보았으리라.
고요함이 고요함으로 무너지고
빈 소리가 빈 소리로 요란하던 것을.
그러나 세상은 세상.
반쯤은 병(病).
바람이 잠든 날의 오후 두 시.
병(病)을 일으키며 바람이 조용히 다가와서는
내 귀를 지하(地下)로 내리게 하는
그러나 폭풍(暴風)은 폭풍.
당신도 그것을 보았으리라.
칼이 칼로써 무너지고
반쯤은 죽음.
죽음을 일으키며 바람이 조용히 다가와서는.
오후의 기억
박정만
오후 한때 저물녘
비 내리고 서러워서 사람 그리워
그렇지. 그렇게도 가슴 아플 때,
아서라, 이놈의 인간사,
가슴만 저물어서 혼곤해질 때
어제에 해 기울어 산은 잠들어
산골물 그림자처럼 지워져 가고
희망은 가이없다, 바람은 자고
흔해빠진 말로 사랑은 가 버렸다.
무릉 너머 무릉 너머 배암의 길로
그 길의 끝에 자줏빛 노을이 왔다.
언제 우리가 이 길로 되돌아갈까.
사랑은 덧난 이로 오금을 물고
그림 같은 별 사이로
미리내의 오죽순은 한 침으로 일어섰다.
이 세상 가야 할 길이 있다면
정말로 참죽 같은 한 길을 보여다오.
세상살이 서러워 정말 눈물이 날 때
그렇지, 슬픔은 다정한 병이 되어서.
저 별을 어찌 내가 가지랴.
외로운 풀벌레
박정만
까닭 없이 눈에 눈물이 돌고
진종일 사랑에 배고프던 철없는 봄날,
나는 그대의 젖동생같이 아아 젖동생같이
울다 말다 울다 말다 잠에 지쳐서
눈물 어린 꿈 하나를 꾸었습니다
정향(丁香)나무 밑이었지요
이따금 생각처럼 바람이 불고
어디선가 날아온 풀벌레 울음소리가
내 목청에 금강처럼 어렸습니다
그러자 내 몸의 어디에서도
풀벌레 울음 소리가 금강처럼 새어나기 시작했지요.
하나, 둘,
그것들은 수없이 내리고 쌓여
수천의 풀벌레 울음 소리가 되었었지요.
눈물은 봄꽃보다 깊어 푸른 강물이 되고
강에는 수천의 풀벌레가
내 울음을 대신 울며 떠나갔지요.
흐느끼는 나의 피도 물결따라 그냥 떠나갔지요.
때는 철없는 봄,
정향(丁香)나무 푸른 그늘 밑이었지요.
요령잡이의 죽음
박정만
요령잡이가 살던 마을의
그 요령잡이가 죽은 날 아침에는
수번(首番)꾼이 되어 바람이 대신 따라나섰다.
일찌감치 매화꽃도 뒤뜰에서 따라나서고
야음을 타 마실가던 신발들도
섬돌에서 내려와 저만치 앞장서서 걸었다.
천리 밖 구름떼도 몰려와 차례로 눕고
문안차 나왔던 저 산새들도
소식 전해 듣고 소리 죽였다.
외줄기 비탈길을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태산을 기어오르고 태산은
북향재배(北向再拜)한 뒤 말없이 돌아앉았다.
가시풀은 고달픈 손바닥을 내밀며
하얀 돈전을 주는대로 받고 받아서
무심히 바람결에 다시 되흘려 날려 보냈다.
먼 해로성(薤露聲) 소리만이 떠돌아다니다가
아득히 산간에 묻혀버리고
이따금 상행(喪行)의 어지러운 발자욱 소리만
되살아난다.
솔밭을 흔들며 바람이 울면
유별 없이 모든 것이 답창(答唱)을 뽑았으리.
상수리나무에서 상수리는
상수리나무의 哭(곡)을 하고
따라서 멥새는 멥새의 읍(泣)을 하였으리.
다문다문 다박솔이 피었다 사라진 자리
독버섯도 머리 숙여 명찰(暝察)에 잠기었으리.
공포(功布)로 관을 닦고 한줌 흙을 묻으면
드디어 캄캄한 이승의 문은 닫히고
눈을 들면 가마득한 북녘 끝을
까마귀 한 마리가 점같이 휘저어간다.
도광지(塗壙紙) 귀퉁이에 전생에 그가 보낸
저 무수히 많은 享年(향년) 90세의 잠이 깃든다.
돌아보면 상갓집 마당귀에
어느새 앞서가던 바람이 내려앉아서
모닥불에 엉겨 붙어 한참들 신명이 났다.
이 귀신 저 귀신 차례로 둘러앉아
가고 오는 저승의 숨 가쁜 밤이 익는다.
찢어진 화투짝 귀퉁이에서는
송학(松鶴)이 푸드득거리며 날아오르고
무주공산(無主空山)에도 명원리 드높이 떴다.
* 수번 : 상여꾼의 선도자
* 도광지 : 장사지낼 때 네 벽에 대는 흰 종이
요즈음의 날씨
박정만
모든 것이 부질없구나.
잠자는 남명(南冥)의 바다 위에 눈꽃은 지고
젊은 날의 내 야심도
저 바다의 꽃잎같이 스러졌구나.
한창때는 나는
불같이 뜨거운 사랑을 품었는데요,
눈에도 가슴에도
불같이 뜨거은 사랑을 품었는데요.
내가 탐한 하늘은 어디로 지고
가슴에는 한 평의 적막만 살아
아서라, 이 몹쓸 놈의 병(病).
한 바다 뒤채는 고요의 병을 얻어
몇 점(點) 새소리로 애간장을 삭이는도다.
내게는 이제 바람뿐
바람 앞에 스러지는 눈보라뿐
눈보라 잠재우는 끝없는 기다림뿐
기다림 끝난 곳에 타는 모닥불뿐.
이제 모든 것이 부질없구나.
잠은 갈수록 고요하고
맑은 이마에는 수정(水晶)의 그늘이 피어
어둠 속에 보이느니 어둠의 나라.
사랑이여,
나는 피에 젖은 꽃향기에 코를 박고
눈 부신 태양 아래 용(龍)의 얼굴을 하고
오늘도 속절없이
꿀 같은 한나절을 기다리노라.
용암사에 가서
박정만
용암사 뒤꼍엔 대밭이 있어,
바다에 들어앉은
하늘만 한 넓이의 푸른 대밭이 있어.
그 대밭에서
밤이면 푸른 바람이 일어,
한 바다의 하늘을 다 뒤집어놓는
이내의 푸른 돌개바람이 일어,
때로 거대한 바위가 되고
승천하는 용도 되던 것을,
한 마리 푸른 용이 되어
대웅전(大雄殿)의 하늘로도 오르던 것을,
가타부타 말도 없이
꿈쩍 않는 바위를 타고 앉아
한 바다의 하늘을 죄 가리는
부처님의 크낙한 손바닥도 되던 것을,
불기 이천오백삼십이 년 칠 월 초이틀
전라남도 화순의 용암사에 가서
- 내가 보았다.
우리들의 산수(山水)
박정만
오동꽃 피는 밤의 수틀 속으로 초롱의 불빛이 화사하게 피어오를 때 숙(淑)아, 다홍치마 붉은 네 살빛 속에 내 마음의 홍초꽃도 점점이 불을 켜 갔다. 밤이 저 홀로 녹아, 소쩍새 울믐 속에 밤이 찌르르 저 홀로 녹아 마당귀 고란초 꽃잎만 건드려 놓고…… 그러면 나는 속으로 속으로 마냥 애가 터져서 문설주에 귀를 놓고 울음 울었다. 얼굴 하얀 숙(淑)이, 너의 박하분 냄새, 긴 모가지며 뽀오얀 버선발과 둘레둘레 사방을 살피는 모양이며 둬둬둬 돼지를 몰거나 쫓는 소리. 뒤란에 때 없이 바람이 불고 바람이 끝난 뒤엔 으레 적막이 뒤덮여 꽃 수풀을 이루고, 그 꽃 수풀 위로는 어김없이 초록의 귀뚜라미가 기어갔다. 그런데도 너는 죽도록 말이 없어서 밤이 가고 아침이 올 때까지 꾸역꾸역 먹구름만 밀려왔다. 너로 인하여.
우후풍경초(雨後風景抄)
박정만
비 온 뒤 끝에
무지개 새로 생겨나듯이
맑은 산의 이마 위에
생략된 언어의 토씨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그 속에 기억 밖의 종소리도
푸른 귀를 열고 앉아 있었다.
맨살을 드러낸 강변에는
수복표(壽福標)의 돌들이
저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채마밭엔 콩새가 먹다 버린
햇살이 하나,
양지꽃 노오란 오판화에 기어오르고,
그 너머 회양목 울타리 밑엔
허리춤을 드러내고 뒤를 씻는
패랭이꽃 두서너 포기,
쓸데없이 부끄럼을 타고 있었다.
우듬지가 잘려나간
청대콩 연한 대궁이엔
초경(初經)하는 아이의 비린내 몇 점,
생살 돋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미루나무 가지 끝엔
정든 말로 언치새가 울고 있었다.
이따금 생각처럼 바람이 불고
한국은행 발행 새 지폐처럼
빠스락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생각에 앞뒤로 귀가 열리고
흐린 날도 맑은 날도 한가지로
하늘의 은혜로다.
웃자란 어둠
박정만
그 수수로이 해맑은 저녁,
연자방앗간 옆 도랑에 조약돌이 수런거리고
어머니의 늦은 머릿수건에
먼 산빛이 독사진으로 어리던 그때.
아버지는 수수미틀 일거리로
반백의 머리칼로 돌아오시어
밀주 한 대접으로 도적(桃赤)게처럼 얼굴 불콰해져서
시시부지 사라지는 하늘을 보며
뜰앞의 난초순을 바라보셨지.
어머니의 앞치마에 어리던 장작불도
해 저문 저녁참을 거들어주고
울타리 밑의 토란잎에 듣는 이슬방울은
한마디로 별빛이 모이는 장소였어.
웃자란 어둠이 모여서 별이 되는 곳
호박순과 우엉잎과 모란의 꽃잎,
그 하나하나에 나는 눈길을 주며
엔간히 초저녁 초록별을 바라보았지.
키 크고 바람 불고 비 내리는 지금도 역시.
유향(遺香)
박정만
파초잎으로 걸어가는 저물 때의
저 이상한 어둠 속으로
콸콸거리는 물소리 듣긴 들었었네만
내 마지막 저녁잠을 누가 지키랴.
콩풀 따던 서녘 창엔
쾌남아 몸짓으로 비가 내리고
푸르대콩 대궁이에도 시시각각 봄빛이 누워
아참, 암담하고 암담하구나.
콩탕국을 조금은 먹고 싶었는데
수연증(手軟症)이 너무 심해
발록구니처럼 그냥 하릴없이 돌아다니며
덧저고리에 코피도 흘려버렸네.
이것이 나의 데드 엔드(막다른 골목),
산 후취(後娶)로 모질게 살(煞) 받으며
우적우적 통김치나 씹어서 먹는
나는 더럽고 천대받은 우졸(愚拙)한 사람.
차월피월(此月彼月) 죽음을 미루긴 하나
낭떠러지 험한 바위산에 놓인 셈이고
때 만나서 반듯한 세월이 오면
지(紙)반자에 가로세로 틀을 놓아서
종잇장 하나로 용마루에 오를 셈이네.
그 향기를 나머지 사람에게 주게.
육자(六字)배기
박정만
옛집은 이미 저물고 노래를 뜯나니
한 가락은 끝나고 한 가락은 남는다.
바람도 달도 물결도 다 가고 비었는데
손끝에서 손끝으로
피만 남아 피만 남아 폭풍을 탄다.
싸움 혹은 패배,
화살처럼 꽂히는 내 살의 아픔.
누가 무생(無生)을 말하는가,
누가 살아 있는 10년을,
누가 긴 이별 뒤의 기쁨을 말하는가.
한없이 탁하고
한없이 구슬프고 단순하고 푸르른
애매한 이 맛, 끓는 불의 곡조여
한 구슬 안에 다른 구슬의 그림자
구름같이 비쳐 있고
그 그림자의 구슬마다
내 살 속 깊이 램프를 켠다.
마지막 곡조여, 세월이야 있건 없건
간담(肝膽)이야 끓건 말건
불이 켜지고 다시 꺼질 때까지 내 살을
비틀어라, 비틀어라, 비틀어라.
이 밝은 등불이 온 누리를 비추소서
박정만
허물 많은 사바의 세계여,
오늘 아주 작은 사람 하나가
마음속에 작은 집 한 채를 품고
대웅전(大雄殿) 처마 밑에 제등을 매다노니
그 등불의 그림자가 시방
사천의 어느 땅 어느 끝까지 다 비치리오.
말없이 말도 없이 먼 산만 바라보며
모란꽃만 만지던 大師(대사)님은 보이지 않고
절채만한 침묵만이 무시로 쌓이는데
합장하는 두 손의 마음이여,
그대는 대저 무엇을 바라는가.
원을 돌다 원을 돌다
은환(銀環)의 고리에 고리를 물고
그 원 속으로 사라지는 목숨의 꽃 그림자.
저 홀로 피었다 저 홀로 사라지는
쥐뿔같은 목숨의 저 꽃 그림자.
겁에서 겁으로 흘러내린 죄업은
흐르고 흘러서 죄 바다로 가고
환(幻)의 물안개만 꽃잎처럼 피어나
또다시 부질없는 몸짓으로 스러지는데
눈 감은 두 눈의 마음이여,
그대는 대저 무엇을 원하는가.
모든 일이 다 마찬가지,
오개(五蓋)를 덮고 무소의 뿔처럼 걸어가도
보이는 것은 막막한 높이의 어둠뿐.
어둠 속을 따라오는 그림자뿐.
그림자 끝난 곳에 타는 모닥불뿐.
타오르는 고통 속에 죄악의 적심돌뿐.
대불(大佛)의 무릎 아래 낮은 키를 더욱 낮추고
이마를 땅에 대고 발원해도
제석천(帝釋天)의 하늘을 가로막는 구름이 일어
꿈길 같은 길 하나 내어주지 않는데
침묵하는 두 입술의 마음이여,
그대는 대저 무엇을 말하는가.
한 수저 바리때에 두절개(二寺狗)는 배가 고파
이 구석 저 구석 헤매었으니
이제는 손가락에 똥칠한 팔부대중(八部大衆)의
귀먹은 욕이라도 받아먹을 것인가.
그도 저도 아니라면 암수 함께하듯
부처님과 한 몸으로 딱 붙어먹을 것인가.
허물 많은 사바의 세계여,
오늘은 아주 작은 사람 하나가
마음속에 작은 절 한 채를 품고
대웅전 처마 밑에 제등을 매다노니
기울어진 노천불 저 돌탑에도
우담발화 하듯 부처꽃이 피어나서
바늘귀 하나로 이 세상의 바다를 다 품게 하시라.
한술 밥에 배부른 불국(佛國)은 어디 있는가.
이야기
박정만
장미밭 타는 놀 붉은 또아리,
마음 자욱이 슬픔이 슬어
마당귀 복사꽃 멍울이 피어
동박골 가시내, 물 돋는 가시내,
주근깨 얼굴에 시샘이 피어
빨래터 비눗물 눈을 쏘는데
수정 하늘 맑은 공기 너무 높아서
용용 죽겠지, 용용 죽겠지,
두 팔에 두 눈에 약(藥)이 올라서.
작약(芍藥)꽃밭에서
박정만
헤어지자,
이 지상에서,
저무는 해와 같이.
오래오래 숨겨온 눈물의 흔적
허공에 주어버리고
마른 약뿌리같이
인제는 맨정신으로 헤어져버리자.
오래오래 간직해온
우리들 사랑의 순금의 눈시울,
저 버림받은 나날과
헛맹세와
이우는 꽃잎 같은 젊은 물머리.
질근질근 손톱을 깨물며 깨물며
들끓는 어둠 속을 달리며 달리며
나 죽음 곁에 엎디었노라 - 꽃비에 젖어
꽃같이 나 죽음에 엎디었노라.
오, 불타는 눈그늘에
다시금 꽃잎은 지고......
네발 달린 짐승의 울음 위에
피 먹은 가슴으로 자지러진 저녁답.
눈을 떠라,
눈물 어린 종의 아들아,
눈감고 깨어 있는 꽃밭과 같이.
작은 사랑의 송가
박정만
사랑이 진하여 꽃이 되거든
그 꽃자리에 누운 한 작은 종자가 되라.
그리하여 다시 오는 세상에서는
새나 나무나 풀이나
그런 우리들의 영원한 그리움이 되라
작은 연가(戀歌)
박정만
사랑이여, 보아라
꽃초롱 하나가 불을 밝힌다.
꽃초롱 하나로 천리 밖까지
너와 나의 사랑을 모두 밝히고
해 질 녘엔 저무는 강가에 와 닿는다.
저녁 어스름 내리는 서쪽으로
유수와 같이 흘러가는 별이 보인다.
우리도 별을 하나 얻어서
꽃초롱 불꽃 눈을 밝힐까.
눈 밝히고 기다리다 밤이 와
우리가 마지막 어둠이 되면
바람도 풀도 땅에 눕고
사랑아, 그러면 저 초롱을 누가 끄리.
저녁 어스름 내리는 서쪽으로
우리가 하나의 어둠이 되어
또는 물 위에 뜬 별이 되어
꽃초롱 앞세우고 가야 한다면
꽃초롱 하나로 천 리 밖까지
눈 밝히고 가야 한다면.
잠자는 돌
박정만
이마를 짚어다오,
산허리에 걸린 꽃 같은 무지개의
술에 젖으며
잠자는 돌처럼 나도 눕고 싶구나.
가시풀 지천으로 흐드러진 이승의
단근질 세월에 두 눈이 멀고
뿌리없는 어금니로 어둠을 짚어가는
마을마다 떠다니는 슬픈 귀동냥.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는데
반벙어리 가슴으로 하늘을 보면
밤눈도 눈에 들어 꽃처럼 지고
하늘 위의 하늘의 초록별도 이슥하여라.
내 손을 잡아다오,
눈부신 그대 살결도 정다운 목소리도
해와 함께 저물어서
머나먼 놀빛 숯이 되는 곳.
애오라지 내가 죽고
그대 옥비녀 끝머리에 잠이 물들어
밤이면 눈시울에 꿈이 선해도
빛나는 대리석 기둥 위에
한 눈물로 그대의 인(印)을 파더라도
무덤에서 하늘까지 등불을 다는
눈감고 천 년을 깨어 있는 봉황(鳳凰)의 나라,
말이 죽고 한 침묵(沈默)이 살아
그것이 더 큰 침묵이 되더라도
이제 내 눈을 감겨다오,
이 세상 마지막 산, 마지막 선(禪) 모양으로
저 가을 속으로
박정만
사랑한다, 사랑한다,
눈부신 꽃잎만 던져놓고 돌아서는
들끓는 마음 속 벙어리같이.
나는 오늘도
담 너머 먼 발치로 꽃을 던지며
가랑잎 떨어지는 소리를 낸다.
내사 짓밟히고 묻히기로
어차피 작정하고 떠나온 사람.
외기러기 눈썹줄에 길을 놓아
평생 실낱같은 울음을 이어 갈 것을
사랑의 높은 뜻은 비록 몰라도
어둠 속 눈썰미로 길을 짚어서
지나가는 길섶마다 한 방울
청옥 같은 눈물을 놓고 갈 것을.
머나먼 서역 만리
저 눈부신 실크로드의
가을이 기우뚱 기우는 저 어둠 속으로.
저 무화(無花)의 꽃상여
박정만
내 가는 길섶에는
한 송이 복사꽃도 피지 말아라.
눈물겨운 새소리 하나라도
청송(靑松) 높은 가지 위에 앉지 말아라.
바람도 불지 말고
그저 앉은 채로 살아 있는 돌멩이 같이
그렇게 내 생의 그림자만 보아라.
산도 그냥 울지 말아라.
꽃 피면 서러웁고
달 뜨면 아득한 인간의 하루,
물소리 가득하여 나는 못내 못 참아라.
그러니 이 뒤에 나를 보시라.
정작 한 소리 마음을 내노니
저쪽 한 사람 외로운 이도 볼 일이요,
날 기울면 이편 쪽 마음도 줄 일이다.
가는 길 없음을 나는 아노니.
저 높푸른 하늘
박정만
저 높푸른 하늘이 있었는지 나는 몰라
그것은 나에게 군말만 있었기 때문,
이제 철 지난 눈으로 저 하늘의 푸른 땅을 보나니
버리라 하면 다 버릴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 기다려보자.
왜 생의 한나절은 내게 없으며
걸어가는 길섶에는 좋은 꽃도 없는지.
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아, 이제 알겠어.
나는 언제나 되돌아오는 나그네가 되고 싶었지.
바람과 달과 구름은 끝이 없는데
난 그저 오금 박힌 걸음으로 걸어온 거야.
저 높푸른 하늘을 좀 봐,
세상의 물그림자가 수틀처럼 걸려 있어.
미리내는 한 별을 이 땅에 주고
별은 다시 또 하늘로 솟구쳐 날아오르지.
아무렴 저 꼭두서니 빛을 보라니까.
저녁 산의 이마 위에
높푸른 하늘의 맑은 빛이 마냥 걸려서
내 꿈과 저승길로 걸어오는 걸.
걸어와서 슬픔의 한 빛깔로 물드는 것을
그래도 아직은 이것이 아닌 것 같아.
저 젖빛 유리로
박정만
저 젖빛 유리로
태양의 한쪽 편만 바라보던 우리들 봄날,
어찌 그리 멍석위의 새 떼는 많고
파리 잠에 기울은 낮잠도 깊었었던지.
감꽃 피어나는 뒤울안에 하염없이 매미만 울고
장독대엔 끝없는 난초순만 자라서
임자 없는 내 집의 고요를 가려 주었네.
그렇지, 그건 하늘이 주신 봄의 뜻인데,
어이타 그런 것 다 내팽개치고
서울 밑구멍의 월계동 산천에 와서
버림받은 이웃들의 외로운 꿈이나 보며
이렇게 한 목숨 내던지며 살고 있는지.
이제 눈 감고 그 곳으로 찾아가려네.
젖빛 유리로 한나절 태양도 보고
고욤나무 밑으로 고욤씨처럼 흩어지던 새 떼도 보고
삼밭 사이 그늘로 이어지던
저 앵초꽃의 서늘한 눈매도 가져야겠네.
내 말씀 톡톡히 길어졌으나
논밭의 독새기풀 비름풀 어찌 아니 그립고
저 쪽 추자나무 그늘 밑의 수건 머리
그 어찌 한 말로 버릴 수 있나.
지금 생각하니 그건 그냥 한 폭의 그림이었어.
저 첫사랑의 때
박정만
그대 마음 속의
꽃접시나 은쟁반에 올려 놓은
햇물의 능금처럼
잘못도 없이
괜히 가슴만 두근거리는
저 눈부신 한 떼의 프락치 사건.
열도 없이
병도 없이
주사기도 없이.
저 하늘이 끝이라면
박정만
저 하늘이 끝이라면
내 생의 돌팔매질 이젠 없을 것이며
뒹구는 저녁산과 외로운 까치밥과
흐르는 시내의 몸살도 없을 것이다.
산 연기 피어나는 초저녁 밤에
군불 피는 손 하나로 무엇을 가질 것이며
난초순 걷어가는 빗소리를 들으며
울타리 나팔꽃 꽃잎 하나 어이 가지랴.
이 세상 슬픈 일로 예까지 내가 왔으니
사랑, 사랑, 끝끝내 내 사랑아
이제 청천 하늘에 한 시름 끌며
내 빠른 걸음으로 무찔러 가야 하리.
생각사록 아름답고 애련하지만
그립다는 이야기는 이 다음에나 진실로 주고받자.
세상 넉넉하면 참깻잎도 별을 받고
산머루 하나라도 하늘빛을 받는 것을.
저 하늘이 끝이라면
사람의 일 덧없어 새우잠만 잘 일인데,
마파람 부는 東西(동서)의 일 서로 깊어서
아마 그렇지는 아니 하겠지.
그래도 웬지 자꾸 눈물이 난다.
정읍별사(井邑別訶) - 아내에게
박정만
네 반달 같은 눈썹 가에
가승(歌僧) 하나가 참(斬)하듯 늘어붙어서
옛 누래 한 가락 오늘에 이르노니
뉘라서 그 목울대의 떨림을 알까.
바람은 다 가고 비었는데
참등나무 여린 꽃이 무시로 떨어지고
무덤 같은 사원의 뒤뜰에는
들끓는 고요의 떼가 시퍼런 칼을 쓰고
한 적막을 베고 있다.
허물 많은 목숨을 땅에 놓고
우리 모두 바람같이 돌아가는 사람들.
기다림 끝난 곳에 새순이 돋아나도
눈에는 참하듯 눈물이 늘어붙어
한 묶음의 죄를 받쳐들고
죽은 꽃잎의 수를 세는 무지개의 밤,
오오 너만 남고 모두 다 가버렸구나.
풀잎 같은 인간사, 뜨내기 사랑들은.
내 죽어 네가 없으면
내 몸의 능소화나무 위에 뭐가 있으랴.
너 살아 내가 없으면
네 몸의 마름풀 꽃잎 위에 뭐가 남으랴.
곤한 세상 막간에
나는 한갓 이름없는 별로 태어나
너로 인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한 점 어둠인 것을.
어둠 속에서 태어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별의 새끼, 별의 아들인 것을.
2
민들레 작은 꽃씨 하나가
만리 허공 밖을 헤매이다가
어디메 묵정밭에 떨어져서
눈부시게 눈부시게 피어나거든
그게 바로 너인가고 여길지니
내 가슴 한편에
봄꿈 함께 끄듯 그렇게 누워 있다가
바람 자고 운우(雲雨) 잘 내리거든
찬란한 사랑의 꽃말 마구
퍼뜨려 놓고 퍼뜨려 놓고 퍼뜨려 놓고
날아가라, 적막한 사월의 뜰,
인생의 싹수 노오랗게 사라진 대지 끝으로,
간혹 부질없는 목숨이 금단추같이 피어
길섶에 ㅜ저앉아 울음 울거든
그것이 또한 싹수 노오란 나인 것을.
인생의 저마다 외로운 섬과 같은 것,
안개 속에 가뭇없이 사라져서
끝끝내 보이지 않는다 해도.
흘러가는 곳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해도
점점점.... 사라진다 해도..... .
3
사랑이여,
이제 곧 날 저물고 밤이 오리니
그대 마음의 남끝동 한 천으로
내 육신의 허물을 잘 가리워 다오
그리하여 저 바람편에 날 묻어다오
햇볕이야 그대처럼 올 리 없지만
때로 새도 울고 꽃도 피어서
언제나 사계절을 볼 수 있는 곳,
그런 곳에 부디 내 생을 거두워 다오.
어쩌다 야국(野菊)이라도 한 송이 피면
그것이 당신을 스쳐가는 서러운 내 몸짓이었음을.
어쩌다 물새라도 한 마리 울면,
그것이 당신을 그리는 외로운 내 목소리였음을.
사랑이여,
구름도 흘러가서 오지 않고
바람도 지나가서 오지 않는 곳,
부디 그런 곳에 내 꿈을 덮어 다오.
살아서 못 가졌던 한 평의 땅을
나는 죽어서 비로소 내 것으로 가질지니
인간의 뼈와 살도 다 삭고 나면
흙과 대지의 이름으로 날 불러 다오.
오늘도 밤새가 저리 울고
웃자란 어둠만이 내 키보다 더 깊어지는데
너는 한번 가서 소식이 없고
이제 내 생이 눈물보다 더 깊이 저물었음을.
정읍후사(井邑後詞)
박정만
내 이마의 땀으로
몇 평의 밭을 얻었느냐 하늘이냐
몇 되의 술을 얻었느냐 땅이냐
네가 얻은 자수정 푸른 모서리에
내비친 일생의 그늘.
너의 밭에 다아 추수는 끝나고
빈 손으로 깊이 머리 짚을 때
가거라, 가거라, 가거라,
석양이 야산마루에 걸리고
손이여, 나 또한 그렇게 가야 한다면
날 위해 널[棺] 위에
하나의 들꽃도 던지지 말라.
예나 지금이나 혹은
그 이후의 마지막 한 차례,
나머지는 너의 잠이며 달
너의 흙, 무궁한 한 평의 허공뿐이다.
허공중에 홀로 빛나는 달하.
종시(終詩)
박정만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죽음을 위하여
박정만
간이 점점 무거워온다.
검푸른 저녁연기 사라진 하늘 끝으로
오늘은 저승새가 날아와서
하루내 내 울음을 대신 울다 갔다.
오랜만에 일어나 냉수를 마시고,
한 생각을 잊기 위해 뜻없이 책을 읽고,
일없이 고향에 돌아갈 꿈을 꾸고,
그러다가 가슴의 통증을 잊기 위해
요 위에 배를 깔고 주검처럼 납작 엎드리었다.
여봅시요, 여봅시요,
하늘 위의 하늘의 목소리로
누군가 문밖에서 자꾸만 날 부르는 소리.
혼곤한 잠의 머리맡에
또 저승새가 내려와 우는가 보다.
나 죽으면 슬픈 꿈을 하나 가지리.
저기 저 끝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애간장이 다 녹아나서
흐르고 흘러도 언제나 은빛 기러기가 되는 곳,
그곳에서 반짝이는 홍역 같은 사랑을.
아픔이 너무 깊어 또 눈을 뜬다.
아무도 없는 방에
누군지 알 수 없는 흰 이마가 떠오르고
돌멩이 같은 것이 자꾸 가라앉는다.
어서 오렴, 나의 사랑아.
신열 복숭아 꽃잎처럼 온몸에 피어올라
밤새 헛소리에 시달릴 때도,
오동잎 그늘 아래
찬 기러기 꽃등처럼 떠갈 때에도
분홍빛 너의 베개 끌어안듯 기다리었다.
한세상 살다 보니 병도 홑적삼 같다.
지금도 가랑비
박정만
사라져 간 가랑비
나만 늦도록 젖고
들판에 지금도 가랑비.
지랄병의 샴푸
박정만
산빛으로 문질러 간 지릿내의 오후,
가지는 자줏빛으로 자지가 되어
한 여자의 질 속으로 그냥 흘러나가고
고추밭의 고추는 된서리에 젖어서
치사하고 더럽게 핏대를 세우기도 하고,
썩어 문드러질 이 피리젓대.
샴푸라니, 물방울에 녹아나는 샴푸,
꼼짝없이 방에 갇혀 하룻밤을 세우는 샴푸,
지랄병의 샴푸,
때때로 머리칼을 쥐어뜯기도 하는 샴푸,
겁 없이 도리질로 잔도 받으며
이 시대와 저녁 잠을 함께 하지만
눈구멍엔 허황한 바람이 일고
엉겁결에 팔베게로 곤한 잠도 청해 보지만
보지만 보지만 보지만 보지만
샴푸로 머리 감고 샴푸가 되는 샴푸.
청과 장수
박정만
아침마다 빈 수레를 끌고 나간 그가
저녁이면 저만치 홍옥(紅玉)을 앞세우고 돌아왔다.
그의 이마에 맺힌 영롱한 땀방울은
아슬한 하늘의 깊이를 헤아리고 있었다.
그것은 이따금 은하를 이루기도 하고
이루었다가는 다시 부서지곤 하였다.
그의 혼곤한 이마의 주름살을 헤치며
밤마다 수많은 별들이 쏟아져 나왔다.
별들은 창틈으로 그의 잠을 몰래 엿듣다가도
샐녘이면 저마다 뿔뿔이 달려 나갔다.
동등(同等)한 시간, 그 저녁이 오면
그는 또 그득히 홍옥을 앞세우고 돌아올 것이다.
흰 고무신 밑바닥에 그물처럼 걸려있는
저 끝없는 이수(里數)를 데불고
저 흰 고무신 밑바닥에 붙어있는 홍진(紅塵)도 함께
날이면 날마다 골목길을 차례로
등불인 듯 등불인 듯 오고 있을 것이다.
청산별곡(靑山別曲)
박정만
폭풍(暴風)을 마주하고,
당신의 법(法)과 금언도 다아 버리고
범(犯)한 여자도 농담도 다아 버리고
내 마침내 은거의 좌(座)에 오른다.
모든 무덤 속에서
모든 만물(萬物)이 저희 집을 짓는다.
시간이 가고 시든 꽃이 떠날 때
갈 길을 묻고 저희집을 묻는다.
서(西)쪽으로! 내가 만난 얼굴들이
서(西)쪽으로 가는 나를 따른다.
내 마침내 상하(上下)를 잊고
하아프와 그의 국가(國家)도 다아 버리고
죽고 죽고 또 죽어서
드디어 내가 나를 다아 버린다.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어둠이 온다.
그 어둠 뒤에 또 어둠이 온다.
산과 들과 바다가 차례차례 저물고
모든 만물(萬物)이 저마다 깊이 저물고
저문 길의 등 뒤에
더 큰 어둠이 홀로 와서 밝힌다.
오, 태산(泰山)도 늘 보고 있으면
없는 것처럼 보이는가.
초봄의 약속
박정만
겨울 가면 아득한 길이 있다고,
이 말씀 없었으면 나는 죽었지.
그런데 산뻐꾸기 저물어 봄날이 가도
가야 할 길은 산속으로 묻혀 갔으니.
그냥 하루해도 저물어갔네.
물론 애달프고 서러웁게 지고 샜지만
간다는 저쪽 길이 너무 아득하여서
꿈길 밖으로 꿈길 밖으로 걸아만 갔네.
누구 죽었다는 혼령이여,
왜 나는 미친 듯이 걸아야 하고
들창 밖 새소리 하나마저 놓쳐야 하나.
새소리는 그토록 어여쁜 무지개를 가지고 있는데.
저쪽 숲에서였지.
어둠이 꼬리를 감추는 저녁 무렵,
내 고요한 창변을 흔들고 지나가는
귀울림의 지독한 하늘에 앞서
만산이 무너지는 산비둘기 울음을 들었던 것은.
물론 행운이었어.
온다 하던 그대 초봄의 옥색 치마에
바람꽃 무늬 하얗게 처질러지고
없는 길은 그렇게 또 맞물려 갔지.
때 없이 생각만 빗물에 누워
이 소리 저 소리로 야국 한 송이를 다 적셔도
국화꽃 피는 때는 너무나 멀고
잠결에 있는 것은 매화 한 틀,
서늘한 적삼으로 뒤꽂이 선연한 매화잠만 보았지.
가다가 외로우면 새벽잠을 깨소서.
추심가(秋心歌)
박정만
영산홍 꽃떨기 속에
영산홍 꽃떨기만 한 귀로 앉아서
산간물 흔드는 해거름 발자취 소리
일자 마음에 새겨 듣노니,
청천에 뜬 뭇별의 저 시름을
누구의 어둠으로 마냥 다 덮으리오.
캄캄할수록 시름 또록또록 밝아지고
밝아질수록 실꾸리 시름 더하나니
어찌 광명에 눈멀 듯 눈멀 듯 덮으리오
타령조(打令調)
박정만
욕(辱) 하나 던지면 욕(辱) 하나 받아먹고
돌 하나 던지면 돌 하나 받아먹고
손가락질 또 던지면 마저 다 받아먹고
내 일평생을 죄(罪)처럼 살았네 말도 없이
세상에 말도 없이 바로 이것이,
길이길이 지키고 지킬 것을 더듬어
말도 없이 걸어서 바로 내 이것이,
다만 길이길이 지키고 지킬 것을 더듬어
걷고 걸어서 당도한 저문 바다
해그늘 내리는 저 바닷가에나 나가
이제는 떠날 일 하나로서 하늘 한 번 보고
받아 먹은 죄 던지며 마저 다 던지며
그래도 빨갛게 손가락을 깨물어
사투리로 돌팔매를 던지며 바로 이것이,
이것이 해저문 저 아득한 바다가 되어서
이제는 싸투리꺼정 죄 받아 먹은 바다.
울음을 묻고 울음 끝을 따라가는
참으로 캄캄하고 참으로 경쾌한 바다.
오, 바다를 포함한 또 바다!
토라진 겨울
박정만
겨울잠에 시들어진 삼밭 속에서
대궁이도 없는 것이 한바탕 순을 내밀어
싸가지 반 푼어치도 없는 말로 말을 하는데
추우면 솜바지를 껴입어야지
하고는 내 배꼽에다 깔깔거리고 웃는 거였어.
그때는 영 춥고 배고픈 시절이어서
떨어진 고무신도 새끼줄로 동여매고
눈밭길로, 눈밭길의 얼음길로 귀때기에 찬바람 쐬며
십 리고 이십 리고 가던 시절이었는데
강추위에 초가 처마 밑엔
두 자 세 치쯤의 오동통한 고드름도 열리고
장대로 두드려 패서
그것들 토담 밑에 모로 쓰러지게 만들었는데
그 토라진 겨울,
겨울잠에 시들어진 삼밭 속에서
영 글러먹은 삼 싹이 고개 내밀고
옘병할, 거지발싸개 같은 말로
자지 내놓고 오줌 싸면 그냥 고드름 되지
하고는 내 터진 바짓가랑이 보는 거였어.
낄낄낄, 앵돌아진 그 겨울의 따뜻한 햇볕.
풍장(風藏)
박정만
1
청천(晴天) 하늘 아래
목마른 자의 풀은 끝없이 시들어지고
한순간의 불볕 위에
모지라진 긴 소멸의 시간.
하늘 기울고
목숨을 겁(劫)이라 이름하여도
숯불에 삭은 뼈 하나로
누구의 한 목숨을 다 비취볼 수 있으랴.
잔등(殘燈) 높이 돋우고
젊은 날 내 불면을 밝혀주던
능금나무 열매의 능금 향기와
소매 끝을 적시던 눈물의 홍옥(紅玉).
기울어진 가지 끝에서
다만 간직한 귀로 듣던
수정(水晶)의 푸른 씨앗조차 사그라지고
돌아가는 물소리에 물이 어리어
꿈길 같은 꿈길 같은 길이 흐를 뿐.
한 평의 땅도 가진 것 없이
삭은 뼈도 삭아서
맑은 햇볕 속
흔들리는 바람같이 민들레처럼.
3
무명(無明)의 촛불 위에서
어둠의 그림자 어둠 속에 자지러지고
뜨락 배꽃 위에
눈부신 소금처럼 달빛이 차다
무덤같이 행복했던 자(者).
그 끝없는 발자국 소리도 멀어져 가고
풀벌레의 울음조차 곤한 잠에 떨어졌다.
잠시 가랑잎 하나가 뜰을 흔들고
뿌리 없는 밤이 물속처럼 깊어진다.
서역(西域) 하늘
고요 속에 흔들리는 풀잎이 되어
풀잎으로
이 세상의 곤한 잠을 어찌 깨우랴.
어둠을 대하여 나의 귀를 대하면
어둠 속에 이르는 소리뿐으로
어둠이 어둠을 부르는 소리 들리고
어둠 뒤에 더 큰 어둠이 온다.
청맹(靑盲)의 바람이여
이제 나를 묻어 주시라.
산빛이 제 목숨 놓아 가는 영마루
그 너머 하늘가에
내 모든 욕망과 허물을 다 덮어주시라.
없는 무덤 위를 지나서
명부(冥府)에 떠다니는 불의 티끌,
불의 어둠 불의 사랑 불의 잠이여.
내 눈의 티로써/ 저세상의 곤한 잠을 어찌 깨우랴.
4
흰 우모(羽毛)를 털며
산을 뜨는 산 소리에 산이 잠기고
돌아가는 물소리에
물소리 돌아가는 물이 고인다.
돌아보면 내가 살던 마을도
푸른 잠 기우는 산그늘에 묻히고
나아갈 길도 돌아갈 길도
어두운 돌 속으로 깊이 스며버렸다.
한 하늘의 폭풍과
한 바다의 해일이 놓인 돌이여,
유리등 푸른 불을 끄고
돌을 열고
어둠으로 내 생애의 길을 삼아도
미량의 마른 소금으로
돌에 스민 폭풍과 해일을 어이 지키랴.
설레이는 잠의 머리맡에
끝없이 떠도는 별이 보이고
모래 속으로
누군가의 고단한 길이 눕는다.
마른 풀잎 위에 빛나는
한 평의 어둠이여,
한때 초록의 잎새 위에
삶이 하나의 죽음을 놓고 간 뒤에
한 포기 풀뿌리의 밑동에/ 죽음이 또한 한 목숨 놓고 갔을 줄이야
피 어린 산하
박정만
너 하나의 사랑을 위해
피와 땀과 눈물로 내가 왔다.
버림받자고.
나는 북으로나 갈까.
서러워, 서러워, 서러워,
기러기 마음도 서러워.
속상하게 아지랭이 마음도 피어
마구 마구 마구 어지럽게 피어
그렇게 나를 놓고 달아날 때에
저쪽 산허리 그리운 얼굴,
사랑하자고.
한 떨기 꽃
박정만
한 떨기 꽃 같은 그림자
내 창에 와서
버림받았지, 하고,
돌아서서 바라볼 때에
눈물겨웠지, 사랑하니까,
몰라, 몰라, 몰라,
나의 모든 것 나는 몰라,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죽어버렸으면.
눈 꼭 감고 자지도 감고
그렇게 눈 뜨고 죽어버렸으면.
이 세상일 나는 몰라.
한 마리 새처럼
박정만
내가 한 마리 새가 되어
그 새의 잎이나 뿌리라면 좋겠다.
그리하여 봄이나 여름이면
텃밭을 이루고 넓은 그늘을 이루어서
밭두렁에도 앉아 보고
찬란한 그늘 아래에서 쉬어가기도 했으면.
일월이면 아직 동혼(凍婚)의 철이지만
노을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서 棺(관)도 꿈꾸고
슬픔에 표착(漂着)도 하고
나뭇가지에 떨어지는 햇살도 보았으면.
풀빛을 덮을 세월은 아직 없지만
지나가는 소리로 그냥 한번 울고
더러 가랑잎 같은 정이 남아서
세월도 캘린더의 날짜처럼 잘 지나갔으면.
고향으로 가는 늘 푸른 잔디.
생은 여뀌풀처럼 푸르르고
너무 푸르러서 봄날처럼 쓸쓸하고 황량하지만,
꽃구름처럼 가뜩이나 처절하지만,
그래도 섬같이 떠도는 혼이라도 남았으면.
새처럼 조용히 날아가는 일월.
한 소식
박정만
묵은 밭을 일구듯
내 속뜰을 다시 경작합니다.
스스로를 텅텅 비웁니다.
텅텅 비워버려야
새로운 메아리가 울려옵니다.
소리 없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묵묵히 앉아서
안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며칠 전부터
숲에서는 휘파람새가 울고
구구구구 산비둘기 우는 소리도 들립니다.
밤으로는 무당개구리 우는 소리도 들립니다.
잠든 숲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촉촉이 봄비가 내리는데 올봄 내 뜰에는
매화꽃을 보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간밤 갑자기 몰아닥친 설한풍에
꽃망울이 죄다 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한해살이풀
박정만
패랭이꽃 눈뜨는 아침부터
산메아리 잠드는 저물녘까지
비루먹은 시간의 하늘 속을
앉은뱅이 시늉으로 걸었습니다.
오뉴월 소금 맛도 잃어버린 채
밑도 없고 끝도 없는 당신을 찾아
앉은뱅이 시늉으로 걸었습니다.
한 생을 하루해에 던져놓은 채.
헤매는 벌판
박정만
누이여, 벌판에서는 새소리 들리고
수수밭 머리에는
아직도 바람 소리 끝나지 않았다.
바람을 흔드는 것은 바람이다.
너는 너의 무게로 고개를 숙이고
철새마저 다 떠나가고 말면
세상(世上)에는 무엇이 남아 벌판을 흔드랴.
땅거미 짙어가는 어둠을 골라 짚고
끝없는 벌판길을 걸어가며
누이여, 나는 수수 모가지에 매달린
작은 씨앗의 촛불 같은 것을 생각하였다.
가고 가는 우리들 생(生)의 벌판길에는
문드러진 살점이 하나, 피가 하나,
버린 대로 자라나서
이제 벌판을 흔들고 지나가는
무풍(無風)의 바람이 되려고 한다.
마지막 네 뒷모습을 비추는
작은 촛불의 그림자가 되려고 한다.
저무는 십이월의 저녁답,
자지러진 꿈, 꿈 밖의 누이여.
해지는 쪽으로
박정만
해 지는 쪽으로 가고 싶다
들판에 꽃잎은 시들고.
나마저 없는 저쪽 산마루.
행복한 잠덧
박정만
희미한 초롱불 창호지에 어리던 저녁,
먼 대숲마을의 바람 소리도 봉창에 들어
앙갚음 같이 앙갚음 같이 봉창에 들어
안방 웃녘에 왕골로 수놓은
돗자리의 꽃잎에 앙금앙금 기어가 앉고
띠톱 같은 소리로 귀울음도 돋아나
내 어린 잠덧 속으로 파고들었지.
나는 귀산(歸山)의 몸짓으로 깊이 잠들어
갈매나무 잎사귀의 어린 별빛도 보며
뭉게뭉게 그냥 잠에 취해서
못질하듯 그냥 깊은 잠에 취해서.
삼월삼짇날 밤은 으례히 봄비.
우리 동네 이쁜 처녀 윗고을로 시집을 갈 때
의패잡이 어깨에 한숨으로 내리던 봄비,
잘 자거라, 내 어렸을 적
꿈이며 조약돌이며 수수깡 같은 것들.
밤마다 뒤척이며 바라보는 행복한 잠덧
형언할 수 없는
박정만
어떻게 깨꽃으로도 말할 수 없는
어둠의 산천초목 있단 말이지.
들판에 한나절 마파람 지나가듯이
먹구름 속 마른번개 지나가듯이
어떻게도 그럴 수 없는 산이 있단 말이지.
그 어깨 좁은 산을 내가 가지고
거닐던 손목으로 잡고 있단 말이지.
말이 좋아 손목이지
그냥 바람 아니면 비 설치는 저녁 때
한두 마디 무지개면 족한 것이지.
참으로 별것이기나 한 듯이
돌맹이 하나도 줍지 못한 목벌리 근처,
마을 끼고 도는 산허리나 부둥켜 안고
이 허한 마음의 병을 다 주어야 하리.
정처가 한군데도 없어.
세상은 저무는 저녁잠의 작은 팔베개,
꽃피는 잠덧도 너에게 주고
어리석은 잠덧도 그대에게 바칠 일인데.
아, 아직은 눈썹 끝의 달이 서러워
냇가 물밑돌에 얼굴 붉히며
한나절 독새풀로 이지러진 마음을 풀며
단 한 마디 저녁 말도 하진 못해라.
저것이 근심의 하루해나 될 것인지.
호적 속의 사람
박정만
차조처럼 많은 여자가 거리를 걸어간다
그중에 한 여자가 밤마다 내 방에 와서
팔목에다 주사기를 꽂고 내 목숨의
푸르고 푸르른 피를 역(逆)으로 돌려 놓았다
지금은 떠나간 호적 속의 사람이지만
홍엽(紅葉) 하나가
박정만
홍엽 하나가 산을 덮는다.
홍엽 하나로
이 세상의 가을을 모두 가리고
캄캄한 밤에는 벌판으로 나간다.
기다려라, 기다려라,
국화꽃 꽃더미를 떠메고
누군가 돌 속으로 들어간다.
나도 국화꽃 한 송이를 얻어서
창밖의 별소리를 듣다가
새벽에는 또 하나의 산을 얻는다.
저문 어느 집에서는
눈부신 국화꽃 웃음소리 들리고
승천하는 자의 말소리도 들린다.
홍엽은 죽어서 산이 되고
산은 자라서 국화꽃이 된다.
별아, 대낮이 오면 나의 혼을
너의 큰 하늘에 덮어나다오.
흐르는 눈물
박정만
마음에 시퍼런 독을 품고
자살하듯 술 사발만 들이키는 날,
하늘엔 저승으로 가로놓인
애틋하고 선연한 서녘 무지개.
눈 시려, 눈 시려, 눈이 시려,
눈 감고 눈을 감고 바라보는 맘.
내 피는 오금 박혀 가지 못하고
눈물만 저승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