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아내
이무영
[1]
"그래, 어떻게 됐수? 오늘은 뭬랍디까?"
대문턱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불도 못 땐 냉방에서 화롯전을 끼고 새우잠을 자던 인숙이가 뛰어나와서 이렇게 물을 것을 생각하자 그의 발은 가끔 가다가 우뚝우뚝 멈춰졌다. 날씨는 춥다 못해서 매웠다. 한시를 지난 종로통에는 인적조차 끊겼다. 가끔 쟁반만 한 두 눈을 부라리며 기생을 실은 자동차가 기가 나서 거리를 질주할 뿐이다. 상점 문도 다 닫힌 밤의 서울에서 파란불을 켠 카페만이 아가리를 딱 벌리고 지나가는 사람을 집어삼킨다.
그러나 충노만은 동대문 통에서 종로 앞까지 오도록 한 곳도 부르는 집이 없었다. 하얀 에이프런 속에 손을 감춘 여급들이 빼꼼 빼꼼 내어다보고는 깰깰거리기만 한다. 그의 주머니 속은 동전 서 푼만이 짤랑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종일토록 굶었다. 아침에 ××회관에 갔다가 친구한테 지당가우 한 개를 얻어먹고 쫄쫄 굶었다. 그래도 저녁때까지는 속이 쓰린 것이 깔딱 죽을 것같이 시장하더니 인제는 배가 고픈지 만 지조차 요량할 수 없었다.
"내가 주책없는 짓이지! 내게 결혼이 당한 겐가."
충노는 종묘 앞을 지나서며 곰곰 생각하였다. 아침에 나와서 이때까지 ××회에서 딴짓 한 줄 모르고 오늘쯤은 결정이 난다는 바람에 큰 수나 나는 듯이 눈이 짓무르게 기다리고 있을 아내를 생각할 때 안타까운 생각이 더럭 났다. 그것은 두 달째 끌어오던 취직 문제였다. 그 자신 고의로 속이잔 것은 아니었지마는 직업을 주선해주는 P씨가 내일, 모레, 글피 하고 엿가래 늘리듯 미뤄오는 바람에 그는 거의 날마다 한 번씩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굶기에 넌더리를 낸 아내는 이것저것 모르고 그가 번뜻만 하면 꼬치꼬치 캔다.
"어떻게 됐수? 오늘은 또 뭬랍디까?"
그래도 처음 몇 번은 사실대로 전달하였지마는 그것도 한두 번이다. 차마 낯이 간지러워서 말에 궁하면 성을 팩 내어서 아내의 말문을 콱 막아버린 적도 있었다.
"이건 우물에 가서 숭늉 달라잖겠나. 취직이 그렇게도 쉬운가?"
그러면 아내도 잠자코 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이다. ‘똥 싼 놈이 성낸다.’는 격으로 주책없이 아내만 몰아세울 수도, 하기는 염치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집을 나오며 ‘결정을 내고 오마’ 하고 나온 것이다.
"빌어먹을! 또 미루거든 그만두라고 그러지. 뒤 보고 밑 안 씻은 격으로 턱 걸고만 있으니까 사람이 감질이 나서.“
그러나 결정을 짓는 것은 충노 자신이 아니라 주선하는 P씨다. 오늘도 찾아갔을 때 미안하다는 말을 연해하며 일주일만 더 참아주면 어떻게든지 주선해보겠다는 말을 들을 때 품고 갔던 결심도 홱 풀어졌다. 다시 뒷 부탁만 하고 돌아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충노는 묵묵히 걸었다. 전주에 기대어 서서 꾸벅꾸벅 조는 파수 순사를 곁눈질하며 창경원 길로 접어들었다.
카페 따리아에서는 동경 행진곡이 흘러나왔다. 파란 커튼을 살짝 젖히고 칠삼으로 머리를 가른 일본 계집애가 빼꼼히 내어다보고 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았다. 차디찬 동전만이 얼은 손가락에 만져졌다.
충노는 그래도 묵묵히 걸었다. 영원히 부합할 수 없는 선로(線路)를 따라서 걸음에도 지친 다리를 격려시키며 걸었다.
미친개 눈에는 ×만 뵌다는 말이 있다. 굶주린 충노의 발이 호떡가게 앞에 멈춰지는 것도 나무랄 수 없는 본능적 충동이리라. 구수한 호떡 냄새에 도리깨침을 삼키며 충노는 한참이나 그 앞에 서서 쟁반만큼한 호떡, 지당가우, 현미빵, 만두 같은 것을 번갈아 노려보며 한참이나 섰었다. 그는 다시 포켓에 손을 넣어보았다. 싸늘한 감촉을 주는 동전 서 푼이 또 만져진다. 그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쓱 들어갔다.
"이 전짜리 있어?"
"이 전짜리? 어부서."
충노는 뒤통수를 털고 나왔다. 그래도 코에 배인 구수한 호떡 냄새는 싸늘한 바람결에도 날아가지 않는다. 그는 뜨끈뜨끈한 호떡을 둘둘 말아서 한입 덥썩 베어물 때의 생각을 하며 처적처적 걸어갔다. 삼킬 새 없이 침은 그득히 괴어졌다.
‘내가 주책없는 짓이야! 결혼이 내게 당한 겐가.’
집이 가까워올수록 또 딴 걱정이 생겼다. 종일토록 쫄쫄 굶고 앉아서 태산이나 떠올 듯이 ‘남편’을 기다리고 있을 아내를 생각만 하여도 상이 찌푸려졌다.
"오늘은 어떻게 됐수? 그래 뭬라고 합디까?…“
판에 박은 듯이 이렇게 묻는 아내의 말소리가 그러지 않아도 조착거리는 그의 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충노가 경학원 앞을 지나서 개천가에 떼를 쓰듯이 기울어져 가는 자기 집 대문 앞에 선 것은 거의 두시나 되어서다. 대문 밑으로 손을 넣어 살며시 고리를 벗기고 문짝을 반짝 들어서 빗장을 질렀다. 달각 소리만 나도 톡 튀어나오던 인숙이가 방에 들어가도록 정신 잃고 잠이 들었다. 팔을 베고는 말라빠진 새우 모양으로 꼬부리고 자는 꼴을 볼 때 측은한 생각보다는 얄미운 생각이 앞섰다. 아니 공연히 분한 생각이 버럭 났다. 그러나 이것이 나의 아내다! 하고 생각할 때 어쩐지 눈등이 화끈했다.
그는 솜도 다 뭉친 이불을 깨지 않도록 조심성스럽게 덮어주었다. 그러고 자기도 살며시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2]
충노는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아렴풋이 잠이 오다가도 무엇에 놀란 듯이 깜짝 깨졌다. 그러다가 취하는 듯이 잠이 솔곳이 온다.
한 십 분이나 잤을까? 생각될 때에 충노는 잠이 또다시 깨었다. 깨어보니 인숙이가 자기의 손을 쥐고는 홀짝홀짝 울고 있다.
그도 처음에는 가엾은 생각이 났다. 인숙이에게 무슨 죄가 있으랴. 나의 못난 탓이다. 이렇게 돌리다가도 화가 버럭 났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며 고함을 쳤다.
"듣기 싫여! 그렇게도 섧거든 가지 누가 붙잡더냐?"
인숙이는 주춤하고 물러앉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흑흑 느껴 운다.
"가고 싶건 가거라. 붙들지 않는다! 아침저녁으로 요리상이나 물리고 택시나 타고 돌아다닐 놈이 그립거든 자 당장이라도 가거라!"
충노는 결혼한 지 반삭이 넘도록 이렇게 말한 적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는 타이르듯이 다시 말을 이었다.
"첫째 나는 너의 남편 될 자격이 없다. 돈, 학식, 지위 - 이 여러 가지 중에서 나는 한 가지도 가진 것이 없다. 나뿐이 아니다. 너도 나의 아내 될 자격이 없다. 내가 요구하는 것은 적심뿐이다. 그러나 네게는 그것이 없다. 내가 너의 남편 될 자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네게로 나의 아내 될 자격이 없다. 자, 너의 남편을 찾아가거라."
인숙이는 흑흑 느끼고만 앉았었다.
"내가 어리석었다!"
충노는 담배꽁초를 빨다 버리고는 또다시 푸념을 하였다.
"생각하면 내가 천치였다. 너 - 뿐 아니지, 허울 좋은 신여성들이 구한바 남편은 내가 아니었다. 돈, 학식, 지위를 갖춘 완전한 - 아니 이상적 남편을 구하다 구하다 못하니까 큰 부조나 하는 셈치고 나 같은 놈을 구한 것이다. 그것을 나는 몰랐다. 나도 사내자식이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그따위 턱없는 동정은 받기 싫다…"
"당신은… 당신은…"
인숙이는 말을 못하고 느끼기만 하였다.
"그래, 나는 너를 굶겼다. 헐벗겼다. 그러나 나는 너를 사랑하였었다."
사실 그는 인숙이를 사랑하였다. 굶기고 헐벗기는 대신 그를 사랑하였다. 그러나 언제든지 한번은 이런 파탄(破綻)이 생길 것을 예감하여왔다.
그들은 연애(- 그것이 연애였던가?) 결혼을 하였다. 인숙이는 부르주아의 딸이다. 그리고 응당 로맨스까지 전하던 역시 부르주아 청년 M과 결혼할 것이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인숙은 M을 버리고 충노에게 몸을 맡겼던 것이다.
"내게는 당신네 신여성이 요구하는 그 아무것도 없습니다. 재산? 재산이라고는 내 알몸밖에 없습니다. 학식? 흥, 나는 소학교도 못 다녔소. 그리고 지위라야 경찰서 인물록에 빨간 점 찍힌 것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좋습니까?“
"박 선생님! 저를 그런 여자로 아십니까? 저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나는 남편에게서 돈을 요구하는 계집은 아닙니다. 학식? 그까짓 것이 무엇입니까. 명예? 그것도 저는 구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만 당신에게 ‘동지’를 요구할 뿐입니다.“
날이 거듭 갈수록 사건은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어느 점으로 본다면 좀 무리하다고 할 만한 조건, 첫째는 본가와 절교할 것, 둘째는 굶주림과 헐벗음을 달게 여길 것, 그리고 가정에서든지 나가서든지 침묵을 지킬 것 등을 무조건 하에 승인하고 결혼한 것이었다.
약속과 같이 인숙이는 본가와 절교했다. 굶음도 달게 여겼다. 가정에 있어서는 규모 있는 주부였고 남편에게는 충실한 아내였다. 그리고 열렬하고도 이해 있는 애인이었다. 그러나 이만큼이나 신뢰하는 아내였지마는 항상 그에게는 불안이 있었다. 막다른 골목에 가서는 인숙이가 자기를 버릴 것 같았다. 남편보다도, 가정보다도 돈을 찾아서 기뻐서 집을 나갈 신여성이다. 십 년 동안 알지 못하게 배태된 교육의 감화력이 자기로부터 인숙을 빼앗아갈 것 같았다.
"그 막다른 골목이 닥쳐온 것이다!"
충노는 이를 악물고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충노는 무심코 이불 위에 눈이 갔다. 거기에는 벗어놓았던 두루마기와 부대쪽 같은 외투가 덮여 있었다. 그것을 보니 불현듯 안타까운 생각이 났다. 자기는 알몸으로 자면서도 포갬포갬 덮어놓은 아내의 심정이 갸륵하다느니보다도 눈물겨웠다.
‘나의 과민성(過敏性)이다, 신경과민이다. 나의 착각이었다!’
충노는 전례에 없이 센티멘틀하게 눈물을 머금었다.
"여보셔요, 당신은 나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인숙이는 겨우 얼굴을 들고 말하였다.
그는 잠자코 있었다. 입을 열면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나를 그런 뜨내기 계집으로 아슈. 굶는 게 서러워서 우는 줄 아슈?… 그런 계집은 아닙니다. 양복이나 반즈르하게 빼뜨리고 택시나 몰고 다니는 그네들이 당신을…“
"아오. 잘 아오.“
충노는 부끄러운 듯이 대답하였다.
"인제 그만둡시다."
안채 집에서 시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충노는 속으로 시계 소리를 세다가 인숙이를 담신 안아 올렸다. 그리고 품안에 꼭 끼어 안았다.
모든 것이 자기의 신경과민인 것 같았다. 그만큼이나 아내를 이해하면서도 오히려 불안을 품은 것은 인숙에게 대하여 미안한 일이었다. 그보다도 그 자신 이러한 파탄이 생길 것을 예감은 하면서도 오히려 무서워하였던 것이다. 적어도 자기네의 결혼생활만은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인숙이만은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셰익스피어는 ‘약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니라.’고 하였다. 인숙이를 ‘여자’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과도기에 있는 조선의 신여성을 아내로서보다도, 모성으로서보다도 좀 더 건실한 의미로서의 ‘신여성’을 만들고 싶었다. 사이비류(似而非類)의 신여성이 되는 것을 무엇보다도 그는 두려워하였다.
"인숙이, 그만두시오. 그만 해도 잘 알아듣겠소.“
충노는 아내의 머리에다 키스를 했다.
"그보다도 시장해서 어떻게 하우?"
그는 차마 아내를 보기가 면구해서 보지도 않고 말을 했다.
"괜찮아요. 어쩐 일인지 처음에는 고픈 것 같더니 지나니까 심상해요. 아마 학교 다닐 때 동무들하고 모여만 앉으면 시집가는 이야기인데 걸핏하면들, 이상만 맞으면 배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도 좋다더니 우리가 그런가 봐요. 그때 생각엔 배가 고픈데 이상이 다 무엇에 말러비틀어진 거냐고 그랬더니…"
인숙이도 대번 풀어졌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열댓 된 계집애같이 깔깔 웃었다. 충노도 겉으로는 웃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또다시 내일 일이 캄캄하였다.
[3]
그러고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에도 그들은 거의 굶듯이 지났다. 단 두 개밖에 없는 놋그릇, 인숙의 여름옷, 때 묻은 세루치마. 한 가지 한 가지 전당국에다 끊었다.
하루는 하도 못 견디겠던지 빤히 충노의 결벽(潔癖)을 알면서도 한번 떠보느라고 본가에 가서 돈푼이나 얻어오겠다고 말을 냈다가 싸움만 푸덕지게 하고 말았다.
그래도 그날 아침만은 모두 생기가 있었다. P씨가 주선하던 취직 문제가 결정 나는 날이다. P씨의 말로 미루어보아 낙관하여도 무관하였던 것이다.
"요보시우, 오늘 결정이 나거든 몸뚱이라도 잡혀다가 고실고실하게 밥 짓고 고기 좀 사다가 맛있게 볶아 먹읍시다.“
아내는 조밥덩이에 소금을 찍어서 먹으며 이런 말을 하였다.
"그래! 나두 출출한걸. 하긴 사람이란 먹잖으면 죽는 게야.“
"호호호. 참 영악한 소리 하슈.“
충노도 재미있게 웃었다.
아침상을 물리고 충노는 오월의 태양같이 빛나는 아내의 얼굴에 키스를 하고 집을 나섰다.
이전에는 까맣게 생각되던 P씨의 집이 퍽 가까운 것 같았다.
"취직이 되거든 한턱 톡톡히 해야 하오.“
지난번 갔을 때의 P씨의 농담을 생각하고 마음으로 웃었다. 그러나 실패라면? 하는 불안한 생각에 두세 번이나 컴컴한 마음으로 발을 멈추었다. 그러나 요전번에 낙관하던 P씨의 말을 생각하고 신이 나서 걸어갔다.
취직! 그것은 모름지기 한 선망이었다! 오십 원! 그만하면 생활은 된다. 이십 원 가지고 밥이나 끓이고 삼십 원은 달리 쓸 수도 있다. 그것으로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P씨의 대답은 그의 상상과 너무나 거리가 떴다. P씨 문간에 들어설 때부터 뛰기 시작한 가슴의 고동은 다른 의미로 뛰기를 계속하였다.
"박 군 볼 낯이 없소.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가망이 없소.“
- 이것이 P씨의 대답이었다. 야속한 생각이 들지 않음도 아니나 P씨의 무성의로 실패된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그 자신 인정치 않을 수 없었다.
충노는 P씨 집을 나섰다. 아내의 낙망을 상상만 하여도 집으로는 발이 옮겨지지 않는다.
그는 종일토록 친구를 찾아 헤매다가 해가 져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다가 동관 있는 친구에게서 일원 한 장을 얻어가지고 집에 들어섰을 때 인숙이는 다짜고짜 턱밑에 들이댔다.
"어떻게 됐수, 응?"
"틀렸소.“
하려다가 아내의 얼굴을 쳐다봤다. 차마 말이 안 나온다. 모든 희망을 내 말 한 마디에 걸고 있는 아내다! 이렇게 생각하자 차마 그를 낙망시키기가 싫었다. 그래서 나오는 대로,
"됐소."
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아내의 기쁨은 여간한 것이 아니었다. 어미 찾은 강아지 모양으로 밤새도록 팔랑팔랑하였다.
"그럼 언제부터 가슈?"
"하룻날부터."
하루라면 아직도 일주일이나 남았다. 그동안에 어떻든지 조철 하자는 것이다.
"아이고 좋아라!"
인숙이는 어린 계집애같이 기뻐서 날뛰었다.
"인제 잡지도 발행하는구려. 참, 원고를 써야지. 당신은 자서전을 하나 쓰시우, 응?"
"쓰지."
충노는 컴컴한 마음으로 말적게 대답할 뿐이었다.
일주일은 지났다. 오늘부터 샐러리맨의 아내가 된 인숙이는 아침부터 법석이었다. 어떻게 주선을 하였는지 벤또를 싸서 내준다. 그는 인형 모양으로 싸주는 벤또를 받아가지고 집을 나섰다.
벤또를 받으면서도 아내의 눈치를 슬쩍 훔쳤으나 그저 기쁜 모양이다. 흥이 나지 않는 것을 눈치 못 채는 인숙이가 이상하였다. 야속한 생각도 났다.
하여튼 충노는 집을 나섰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다가 ××회관으로 갔다. 회관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S의 집으로 가보았다. 과연 거기서는 여러 친구가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
밤 열시에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여전히 반갑게 맞아주었다.
"시장하시지 않으셔요?"
"아니."
충노는 빈 벤또를 내던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저녁을 먹으면서도 인숙이는 연해 기쁜 얼굴로 재재거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밥을 먹다 말고,
"여보셔요.“
하고 빼꼼히 쳐다본다.
"응?"
"저기! 그까짓 회사 그만두시우!"
충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왜? 그건 무슨 소리여?"
"그런 치사한 직업보단 같이 나가서 법시다. 그럼 좋잖아요. 아침에는 같이 나갔다가 저녁에는 또 만나서 같이 오구 -"
충노는 잠자코 말았다.
왜 인숙이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나 하고 궁금증이 났을 때 책상 귀퉁이에 비져보이는 명함 한 장이 있다. 그는 깜짝 놀랐다. ‘P’라고 보니 틀림없이 낯익은 명함이다. 낮 동안에 P씨가 다녀간 것이 분명하다.
충노는 모든 것을 짐작하였다. 그리고 아내의 진정이 엿보이어 충동적으로 아내를 담신 안았다.
"인숙이, 용서하오!"
충노는 앙바틈한 어깨에 얼굴을 대고 겨우 이것만 말하였다. 인숙이도 그의 목에 매달렸다. 그리고 흥분된 말소리로 속삭이었다.
"우리의 정말 취직은 요번 일의 성공에 달렸어요."
충노는 겨우 대답하였다. 쥐구멍이라도 파고들고 싶었다.
"P씨가 그럽디다. 아무데도 취직할 생각 말라고. 빨간 점이 찍혀서 어렵다고."
충노는 잠자코 들었다. 아내의 손목이 손아귀에 쥐어져도 잡을 염치가 없었다.
"인숙이, 그래도 당신이 학교 다닐 때 구하던 남편은 나 따위는 아니었겠지?"
충노는 웬일인지 이렇게 물어보고 싶었다.
"또 그런 소리를 하셔, 하긴 철이 없었지. 그때 우리는 결혼을 하거든 피아노만은 꼭 사논다고 그랬다우 - 호호호호.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그만둡시다. 그보다도 우리 뽀뽀나 한 번 -"
"뽀뽀? 뽀뽀 하면 배가 안 고플까? 하하하."
충노는 커다랗게 웃었다.
그러나 그 자신 누구를 웃었는지 몰랐을 것이다.
<신여성> 1930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