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시대
서정시대
은희경
누군가 가볍게 건드리는 기척이 느껴진다.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대신 어깨 위에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온다. 그것을 손가락으로 집어 들고 한참을 들여다본다. 나이가 들어가니 그것을 손가락으로 집어 들고 한참을 들여다본다. 나이가 들어가니 두피의 장력이 약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까짓 머리카락 한 올 떨구는 일까지 일일이 느끼면서 사는 내가 과민한 것뿐이다. 나는 머리카락을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리고 나의 과민함에 대해 조금 더 똘똘히 생각해본다. 과민한 자의식, 자의식과 긴장, 긴장과 소심함, 진지함... 정작 머리카락이 유난히 많이 빠지는 데에는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내 머릿속은 언제나 수많은 분석으로 터질 듯이 복잡하지만 실제로 인생에 효용이 되는 것은 별로 없었다.
내가 원형탈모에 걸렸다는 것은 며칠 안 가 드러난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던 나는 정수리께 한 부분이 아무리 빗어도 검은색으로 덮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도 별 생가 없이 습관적으로 빗질만 계속하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나는 오백 원짜리 동전만 한 그 빈터가 바로 머리카락 몽땅 빠져버려 드러난 밋밋한 두피임을 안다.
얼굴을 바짝 거울 앞으로 들이민다. 두 팔을 쳐들어 머릿속을 이리저리 헤집어보는 내 손길은 몹시 다급하다. 원 세상ㅇㅇ에, 내 머릿속에 땜통이라니!
나는 울상을 짓고 허겁지겁 K에게 전화를 한다.
"큰일났어. 머리 한복판에 땜통이 생겼는데 원형탈모인가 봐."
K의 대답은 미리 준비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거침없이 나온다.
"뭐? 그럼 곧 대머리 되겠네? 거, 비 맞으면 딱딱 소리 나서 안 좋을 텐데. 박 부장 알지? 박 부장이 그러는데 자기 대머리 의에 빗방울 떨어지면 말야, 그 소리가 군대 벙커 위에 떨어지던 시끄러운 빗소리는 비교할 바가 아니라더라. 참, 너 밥 먹었냐?"
대답하는 내 목소리는 풀이 죽어 있다.
"왜?"
"회사 옆에 주꾸미 잘하는 집이 생겼는데 초고추장 맛이 죽여줘."
"... 근데?"
"나와서 점심이나 사라."
그가 나를 위로하는 방식은 언제나 이렇게 방만하다. 그러나 고지식한 나는 그런 냉정하고 뻔뻔스러운 위로를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뭐야, 지금? 나는 심각해서 죽겠는데 말 몇마디 해주고 결국 점심 한 끼 해결하자는 거였어? 인간이 어떻게 그러냐."
"야, 인간이니까 그런 거지. 인간이 뭐 대단한 건 줄 알아? 오디세우스도 사랑하는 부하들이 다 죽었는데도 밥부터 먹었고, 배가 부르니까 그제야 눈물이 나왔다잖아."
내가 늘 작은 일에 상처를 받는 것이 예민함보다는 진지함 탓임을 잘 알고 있는 그는 한마디 더 덧붙인다. 너도 이제 인생에 대해 서정적 태도를 버릴 나이가 안 됐던가?
나의 진지함은 기억력이 허락하는 한도인 여섯 살 때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자 나는 나 자신이 인격자로 인정받고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바로 전날까지 코흘리게 어린애였던 나는 그날도 전날의 연속인줄로만 알고 식구들이 아침 밥상을 물린 뒤까지도 철없이 자고 있었다. 그러나 전날과 달리 부모님은 나를 째우거나 꾸중을 하지 않았다.
"아무개는 아직도 자니?"
"놔두세요, 내년이면 학교 갈 애인데 제가 다 알아서 할 거예요."
라는 대화로 나의 각성을 촉구할 뿐이었다. 그 상황에서 차마 눈을 번쩍 뜨지는 못했지만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아, 어른이란 이렇게 갑자기 되는 거구나.
그때부터 세수하면서 목을 안 씻었다고 도로 우물가로 쫓아내고 밥을 흘리면서 먹는다고 야단치는 일도 없어졌다. 말끝마다 "차암, 너도 이제 어 른이지?"하면서 철없어도 되는 어린애로서의 권능을 완전히 박탈했다. 그것이 교육학자들이 <책임이론>이라는 용어로 정리한 바 있는, 아이들을 일찍 철들게 하기 위한 어른들의 획책임을 알 리 없는 나는 죄의식에 빠졌다. 내가 생각하기로 나는 아직 어린애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나를 과분하게 평가하고 믿어주시는 순진한 부모님들!
당시로서는 배운 게 별로 없는 나는 고지식했다. 그래서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다소 부족하나마 어른 행세를 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나는 어른스럽게 생각하고 말하고, 삶이 별 것 아님을 이해하는 데에 안간힘을 바쳐야 했다.
입학 적령에서 한 살이 모자란 데다 생일도 10월 말인 나는 정식으로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손을 써서, 며칠 뒤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아이들의 대오에 헐떡거리며 끼여들어 같이 뛰면서 학교생활을 시작했다.그때부터 나는 언제나 친구들보다 한 살이 어렸다. 병도 앓지 않고 재수도 하지 않고 군대도 가지 않은 내가 박사과정 시험에 응시했을 때는 (비록 떨어졌지만) 장하게도 겨우 스물네 살이었다. 나는 내가 조숙하다는 것을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내 인생의 비밀 중에 비밀인 그 사실을 누구한테나 은근히 털어놓았다. 진지한 조숙 속에 지금 내 머리통 한가운데에 박혀 있는 원형탈모의 땜통처럼 속이 내다보이고 우스꽝스러운 빈터가 있음을 알 턱이 없었다.
아버지는 달변과 과묵과 독설을 삼분의 일씩 나누어 가진 분이었다. 말썽쟁이 소년 시절 전기 실험을 하겠다고 전봇대에 올라가 전선을 끊는 바람에 온 읍내를 암흑천지로 만들었다는 아버지는 사업을 하는 대에도 그 아이디어와 개척정신을 살려서 이층 건물에 초가지붕을 얹는다든지 하는 신선한 발상 및 근성으로 변변한 자본 없이 토건회사를 일으킨 청년 사업가였다. 읍내의 아스팔트 포장을 하고 경찰서와 군청을 짓는 건설의 역군으로서 감사패를 받는 모습이 종종 지방 신문과 군청 게시판에 실리곤 했다. 하청업자인지라 갱 영화에나 등장하는 <청부업자>라는 무시무시한 직함으로 불렸지만 기타로 뽕짝 반주를 애절하게 뜯는가 하면 <러브 이즈 매니 스프렌더드 싱>이나 <새드 무비>를 잘 불렀고 북도 잘 치는 낭만적인 <한량>이었다. 또 직접 사용하는 것을 본 일은 없지만 아버지의 책상에는 측량기구와 설계도, T자 같은 멋진 물건들이 갖춰져 있었다. 텔레비전도 동네에서 가장 먼저 샀다.
늘 바빴지만 아버지는 나와 동생에게는 언제나 자상하고 멋진 아버지로 인식되고 싶어 했다. 특히 내게는 전혀 야단을 치는 일이 없었다. 공부 잘하라는 꾸지람도 <아빠는 초등학교 6년 동안 시험에서 틀린 것이라고는 한 개뿐인데 그것도 1학년 때 받아쓰기에서 군밤을 구운 밤으로 잘못 써 실수한 것이다>라는 말씀을 수없이 되풀이하는 일로 대신했다. 그러고는 마지막에는 늘 <우리 아무개는 아빠의 자존심이다> <인간은 자존심으로 산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너는 고개 숙이는 벼가 되어라> 등 소중한 인생의 금언을 곁들인 인격적 대화로써 나를 감복시키는 것이다.
내가 아홉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는 변두리의 싼 땅을 사서 이층 양옥집을 지었다. 커다란 당산나무를 중심으로 이엉이 썩어가는 초가집이 몰려있고 아이들이 아랫도리를 벗고 돌아다니는 가난한 동네에 처음 생기는 양옥이었다. 모름지기 아이들은 뜨는 해를 바라보며 자라야 한다는 아버지의 소신에 따라 우리 방의 창을 남향으로 냈고 입식 부엌과 지하실까지 만들었다. 마당에는 장미꽃 칠십 그루를 심고 이층에는 널찍한 서재와 가족 휴게실을 만들 계획이라고 했다. 동네 아이들은 우리가 부자라고 생각했다. 아마 우리 집 마당에 우람한 덤프트럭이 하천 모래 따위를 가득 싣고 물을 질질 흘리며 들락거리고 또 조그마한 토막만 가져가도 엿장수가 입이 찢어질 만큼 엿을 듬뿍 주는 철근이 엄청나게 긴 똬리를 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절대 부자가 아니며 아버지의 말 가운데 믿지 못 할 말이 반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회의론자 가운데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있었다. 선운사나 내장사에 놀러 가자고 해서 온 식구가 소풍 준비를 다 해놓고 아버지만 기다리고 있다가 결국 밤이 으슥해져서 찬합을 풀고 그것을 저녁 대신 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만 봐도 그렇다는 것이다. 변산 옆의 채석장에 놀러 갔을 때 카메라를 멘 아버지가 사진을 찍게 그늘에서 나오라고 몇 번이나 채근하자 외할머니는 혼잣말을 하셨다. "그놈의 사진, 찍기만 하면 나오는 걸 당최 못 봤어." 그 말을 듣고 나는 아버지가 바쁘다는 것은 제대로 이해할 만한 어른은 세상에 나뿐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그 집을 떠나는 5년 후까지 결국 집은 제대로 꼴을 갖추지 못했다. 겉을 봐서는 이층 양옥이었지만 일층에 방 세 개와 마루와 부엌만 내장이 되어 있을 뿐 나머지는 그냥 골조와 베니어판이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이해했다. 아버지 사업이 실패했기 때문인데 이해 못 할 게 없지 않은가. 인생이 어디 다 계획대로 되는 것인가.
언젠가 나는 유네스코라는, 이국적인 이름으로 보아 보나마나 훌륭한 일만 도맡아 할 게 분명한 단체로부터 상을 받게 되었다. <유네스코 주최 어린이 미술전을 보고>라는 감상문 모집에서 2등을 했던 것이다. 나는 그 미술전이 열리는 전주에 가지 않았으므로 미술전을 보았을 리는 없었다. 그 미술전의 팸플릿을 보았다는 미술반 선생님의 막연한 설명만 듣고 지은 감상문이었다. 주최측인 유네스코에서 <학생과 지도교사는 전주에 올라와 시상식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고 선생님은 나를 크게 칭찬했다. 보지도 않은 미술전을 보았다고 거짓말을 하게 하고, 그 거짓말로 상을 받게 되었는데 정직하지 않다고 꾸중하기는커녕 학교의 명예를 드높였다고 칭찬을 하는 어른들에게 나는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나도 그런 어른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글이란 게 결국은 다 지어낸 거짓말 아니던가>라고 합리화함으로써 한 단계 앞서갈 정도였다.
나는 어른스럽다 못해 조금은 타락하기까지 했다. 백일장에서 상을 탄 날이었다. 아버지는 사업상 <조양관> <관수정> 같은 <관>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날 기분이 좋은 나머지 지도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 그리고 나까지를 <관>으로 모셨다. 기생들이 나와서 <미스 아무개>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아버지는 앞자리에 앉은 기생의 성을 번번이 기억 못 했다. 선생님들과 한참 얘기를 주고받다가 옆자리를 돌아보며 "참, 뭐라고 했지? 미스 정인가 강인가" 하곤 했다. 내가 참다 못 해 "아빠, 미스 장이라니까"라고 말해주었다. 좌중에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교육상 좋지 않은 분위기임을 불현 듯 실감한 아버지와 선생님이 무안함과 후회를 감추려고 부러 웃음소리를 호방하게 내는 것도 모르고 나는 어른의 타락한 세계에서 당당히 어깨를 마주한 게 만족스러워 함께 소리높여 웃었다.
내게도 삶의 진실을 깨치게 해줄 시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업이 커지면서 바빠진 부모님 대신 내게 맹목적인 가족애를 가르쳐준 외할머니가 매일 대야에 초록색 물을 하나 가득 토해내며 암으로 죽어갈 때, 내 고자질에 상처를 입은 남동생이 가출했을 때, 아니면 구둣발로 안방까지 들어온 남자들이 장롱과 텔레비젼에 빨간 도장이 찍힌 딱지를 붙이고 가던 날, 그날 나는 언제나 <간조>날이면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가 한밤중에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나 가죽 점퍼 안주머니에서 신문지로 싼 돈 뭉치를 척, 소리가 날 듯이 후련하게 꺼내주는 순간을 기다렸지만 며칠 전 나간 아버지는 끝내 오지 않았다.
트럭에 짐을 싣고 야반도주하듯 고향을 떠나 뒤, 낯선 도시에서 아버지는 외지에 나가고 어머니는 앓아누웠던 그 시절, 나는 열다섯 살이었다. 그 나이라면 불행을 느껴도 되고 어쩌면 약간 빗나가도 될 만큼은 문제 의식도 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내 방식대로만 진지했다. 현실적인 고생에는 불행하지 않았고 이제는 사춘기가 되었으니만큼 오직 <절대고독>과 <영혼의 오손>과 <치희의 상흔>과 <세련된 태타> 따위로만 고민할 뿐이었다. 사르트르와 칼 힐티와 토마스 울프를 억지로 읽으며 박계형보다 재미없다는 불온한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치는 바람에 소스라쳐 놀라곤 했던 그 시절의 나는 용돈을 쪼개 정음사와 을유문고의 전집을 할부로 들여놓은 일로써 인생을 이미 지적인 일에 투자하며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꼈다. 당연히 그런 나를 웃기게 생각하거나 역겨워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지금이라면 나도 마땅히 같은 애를 역겨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나는 그런 친구들을 의식할 때마다 우수어린 표정으로 먼 산을 바라보았다.
진지함은 내가 계속 삶을 철저히 오해하도록 도왔고 고지식함은 그 오해를 바꾸지 못하도록 벽을 쌓았다. 나는 스스로를 이지적이고 성숙한 여성이라고 믿었으며 이따금 나를 순진하게 보는 사람이 있는 걸로 보아 내가 제법 교활하리까지 하다고 생각했다. 타락을 감추고 세상을 속이는 데 대해 나는 원초적인 죄의식에 시달리기도 했다. 한때는 성당에 나가 열심히 기도를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너무나 진지하게 수행하다가 꽃샘추위가 살을 에던 날 여대 기숙사의 삼층에 짐을 풀고 열아홉 살의 대학생으로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던 것이다.
원형탈모가 점점 심해져 간다. 동전만 하던 땜통이 화장품 병뚜껑 정도로 커졌다. 얼굴의 점은 세어볼수록 많아진다는데 이것도 내가 너무 들여다보는 바람에 더 커진 것은 아닐까.
그동안 땜통은 나를 번번이 괴롭혔다. 술자리에서 나는 인생이 별거 아니라고 잔뜩 코웃음을 친 다음 냉소를 띠고 술잔으로 고개를 숙이는 순간, 머릿속의 벌건 땜통이 드러났음을 깨닫고 얼른 고개를 젖히곤 했다. 머리의 땜통을 흔들며 문학을 위해 혼을 불사르겠노라 열변을 토하는 꼴은 또 얼마나 장관일까, 하고 <작가와의 대화>같은 행사장에서는 더욱 조심스러웠다. 거지 꼬마들이 나오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며 깔깔거리다가 그 애들의 머리에서 내 것과 비슷한 땜통을 발견하고는 슬그머니 얼굴이 굳어져 곁눈으로 가족들 표정을 살핀 적도 있었다. 게다가 그런 내가 우스워 웃는 웃음을 참을 때의 우스꽝스러운 기분이란.
또 K에게 전화를 한다.
"있잖아. 대학 때 써클 같이 했던 남자한테 전화왔더라."
"왜?"
"신문에서 날 봤다고. 좋은 글 많이 쓰래. 다음 주쯤에 만나기로 했어."
"뭐하러?"
"모르겠어. 그냥 한번 만나보고 싶더라구."
"거첨. 별일이네."
"그리고 말야. 나 오늘 김제로 문상 가기로 했는데, 머리 때문에 어떡하지?"
"뭐 어때, 레만호에 떨어진 보름달 같다고 생각할 거야."
"장난이 아니란말야. 머리 이래갖고 사람 많이 모이는 데 가도 될까?"
"누가 니 머리통만 보냐?"
"잘 보이고 싶은 남자도 몇 명 있다구. 땜통 때문에 이쁜 척할 수도 없잖아."
"그건 그래. 내가 봐도 그건 영 안 되겠더라. 그럼 가지 말든가."
"안 돼. 안 가면 인사가 아니야."
"그럼 가"
"누가 가기 싫어서 그러나? 머리 때문에 그러지."
"그럼 안 가면 되잖아."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래도."
"뭐가 복잡하다는 거야. 가든지 말든지 둘 중 하나야. 나 지금 바빠. 끊어."
"뭐? 자기 일 아니라 이거지?"
"바빠서 바쁘다고 말하는데 애들같이 자기 일 남의 일은 또 뭐야?"
"암튼 못됐어."
"못됐다구?"
"아니 잘 됐어!"
내가 먼저 끊으려는 데 전화기에서 그의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다시 전화기룰 귀에 갖다댄다.
"정 마음에 걸리면 미장원에라도 가보든지."
나는 볼멘소리로 대꾸한다.
"나도 바쁘니까 끊어!"
이곳이 바로 미장원이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미용사가 분무기로 머리에 물을 뿌리다가 호들갑스럽게 놀란다.
"어머, 원형 탈모신가 봐요."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한다.
"그러게요. 생긴 지 한참 됐는데 머리가 날 생각을 안 하네요. 이런 손님들 가끔 있어요. 피부과에는 가보셨어요? 이제 가봐야죠. 시간이 별로 없어서. 무슨 말씀이세요."
여자는 피부하고 머리카락이 생명인데 아무리 바빠도 그렇죠 몇 마디 더 나무란 다음 미용사는 드라이를 하기 시작한다.
"어떻게 해드려요? 머리 빠진 데부터 가려야죠? 어머 자세히 보니 더 크다. 손님, 빨리 피부과부터 가보세요. 그냥 두면 더 커져요."
미용사가 너무 걱정을 해주는 바람에 미안해진 나는 되려 그녀를 위로하듯 한마디 한다.
"핀을 잘 꽂으면 안 보일 때도 있어요."
드라이를 마친 미용사가 헤어 스프레이를 가져온다. 헤어 스프레이를 뿌리면 머리가 빳빳하게 엉키므로 분명 땜통이 더 크게 드러날 것 같다. 나는 한껏 조심스럽게 미용사에게 내 견해를 말해본다. 미용사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아, 아녜요. 스프레이로 딱 붙여서 고정시키는게 나아요."
미용사가 지금까지 보여준 애정을 배신할 수 없는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그녀의 의견에 따른다.
문상 떠날 대절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대학로. 내가 다가가자 버스 앞에서 있던 몇 사람이 알은 척을 한다. 다행히 머리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눈치다. 버스에 올라탄 나는 정수리 왼쪽에 있는 땜통을 조금이라도 덜 보이려고 왼쪽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는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으면 싶다. 그러나 눈치 빠르고 자상한 A가 나를 자기 자리로 부른다. 어디 머리 좀 봐요. 우리 마누라도 전에 이랬는데 곧 낫더라구. 나는 당장 손을 올려 가리고 싶었지만 그곳이 치부임을 그렇게 노골적으로 인정할 배짱은 없었기에 오히려 명랑하게 대꾸한다.
"그랬어요? 그럼 불치병은 아닌 게 확실하네?"
그런 다음에는 이런 때 얼굴이라도 묽어져 있으면 민망하다 싶어서 짐짓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옆자리에 앉은 B에게 나는 땜통 얘기를 꺼낸다. 숨기지 못할 바에야 조금 더 뻔뻔스럽게 나가는 편이 나을 것 같다. B는 이마를 찡그리며, "걱정되겠어요. 아프진 않아요?" 하고 말해준다. 나는 "하하, 낫겠죠 뭐," 하는데 순간 겨드랑이에서 땀 한 줄기가 허리까지 흘러내린다. 헤어스프레이를 하지 말았어야 한다. 아마 그랬어도 미용사는 그다지 실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 생각이 난다. 어머니는 서울에 올라오면 언제나 친구들에게 이런 전화를 한다. "아이고, 아무개야. 나 지금 금방 도착해서 엉덩이 붙이자마자 너한테 전화부터 하는 참이다. 터미널에서 하려고 했는데 동전이 없어서 말야, 마침 전화카드도 없지 뭐냐. 카드 파는 데는 다 문을 닫았고. 야구르트라도 사서 잔돈을 바꾸려고 하는데 우리 딸 그것이 나 데리러 나왔다가 주차비 많이 나온다고 어찌나 잔소리를 하는지 그냥 와버렸어. 나 금방 도착해서 지금 신발도 한쪽밖에 안 벗었단다..." 서울 온 지 사흘이 지나나 열흘이 지나나, 그리고 그 친구가 경자든 말자든 경순이든 금방 도착했다는 어머니의 말은 언제나 똑같다. 듣다 못한 내가, "엄마, 뭐 그런 일로 나까지 팔아가면서 그렇게 신경을 써요? 그분들은 엄마가 서울 도착하자마자 전화 안 했다고 실망하지 않아. 엄마 전화만 기다리느라고 전화통 앞에 붙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러나 어머니는 요즘도 여전히 똑같은 전화를 한다. 그런 어머니에게 신경질을 내려다가 나는 내가 왜 그 모습을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이유를 깨닫고 씁쓸히 웃곤 한다.
버스가 상가에 도착한 것은 이미 날이 어두워진 뒤이다. 빈소에 절을 하고 저녁상을 겸한 술상 앞에 얹았을 때 나는 단단히 긴장한다. 술자리의 의기투합을 경계하자. 오늘만은 사해동포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땜통을 허옇게 드러낸 채 술잔을 치켜들고 거나하게 떠들어대는 여자가 있다면 이 자리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잊지 못할 강렬한 인상을 남기겠는가. 나는 하나뿐인 여자 동료인 B옆에 바짝 붙어 앉으며 입속으로 연습한다.
"저요, 술 별로 못 마셔요. 저요, 이 잔 그냥 받아만 둘게요."
그런데 저쪽 자리에서 누군가가 건너오더니 내게 술을 권한다.
"나 전주 사는 아무개요."
"어머, 안녕하세요, 저도 전주에서 고등학교 나왔어요."
나는 동창회에도 한 번 나가지 않는 고등학교를 들먹인다. 고향이나 출신학교로 편 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나이지만 상냥함은 진지함의 한 변형인 것이다.
"그래요? 나는 고등학교 오십이 회인데."
"그러세요? 저는 그 여고 사십팔 회예요." 그것이 그밤의 시작이었다.
선배가 권하는데 술을 안 마시겠다고 쭝뿔나게 구는 것은 여간 송구스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나한테 내숭이 있다고 볼까 봐 두려워진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내 통지표에 이렇게 썼다. <온순하고 극히 여성적이며... > 여덟 살 때 나는 극히 여성적이었던 것이다. <어른스럽다>는 것과 함께 <여성답다>는 평판은 나를 진지하게 만든 또 하나의 <원형탈모>였다. 나는 술잔을 거절하지 않고 받기 시작한다. 누군가 인생이나 문학, 혹 사랑에 대해 말할 때마다 끼어들어 한마디씩 거들고 논평을 하기 시작한다. 인물평에는 특히 적극적이다.
"C씨가 잘생겼다구요? 그게 뭐 잘생긴 거예요? 순 소녀 취향이지. 소녀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 거예요. 총각 선생님을 세상의 전부로 알고 존경하는 철부지 소녀가 있는가 하면 자기가 나이 들어가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는 딱한 늙은 소녀도 있어요. 그런 소녀들은 미소년을 좋아하죠. 만약 C씨가 그런 각종 소녀들의 환호성을 별생각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단순한 사람이었다면 그저 그런 바람둥이가 되었을 거고 인생은 그럭저럭 평화로웠겠죠. 하지만 인생은 그보다는 훨씬 짓궂고 복잡한 거예요. 삶은 C씨에게 소녀의 환호성을 의식할 만큼의 자기도취도 주었지만 한편 그것을 대단찮게 생각하고 심지어 그것으로만 자기의 존재 증명이 되는 것을 경멸하도록 약간의 자의식도 주었단 말예요. 그는 보통은 자기의 미모를 의식하지만 미모가 사람의 완성을 보장해주지 않는 것을 알고 있는 정도의 통찰을 가진 집단 속에서는 자신의 미모를 불편해할 줄도 알지요. 그러나 속마음은 또 안 그럴걸요. 그는 자기에게 환호하는 소녀들의 머릿속이 함량 미달인 것과 그들의 환호성이 자기의 본질성과 별 관련이 없는 이미지에 의한 것임을 알지만 어쩐지 그 환호성이 없이는 허전하게 되어버렸거든요. 소녀의 환호를 받는 다른 미소년, 혹은 우상을 질투하기까지 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O씨를 바난 할 수 있나요? 인간이란 불완전한 존재잖아요. 누구에게나 약점과 흉은 있는 거죠. 저도 사실 C씨를 좋아해요. 저도 소녀 취향인 가봐요. 근데 참, 저만 너무 길게 말했나요?"
내게 오는 술잔은 자꾸 많아진다. 술이 들어갈수록 나는 사람들이 참 친절하다고 생각하다. 열변을 할 때마다 땜통이 끄덕끄덕 흔들리고 다들 그걸 보며 웃음을 참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나의 소녀시대는 꽤 길었다. 열아홉 살에야 두말할 필요도 없다.
기숙사에 들었던 첫날, 같은 방 식구인 2학년의 뒤를 따라 식당에 간 나는 난생처음 식판이라는 데에 밥을 먹었다. 2학년이 높은 목소리로 반찬 타박을 했다.
"이 정구지 쫌 바라. 꺼시만쿠로 에다야."
그녀의 젓가락은 부추 나물을 헤집고 있었다. 내가 자란 전라도에서 <솔>이라고 한껏 점잖게 부르는 부추를 경상도에서는 테니스 코트처럼 발랄하게 부르는 모양이었다. 이곳에서는 모든 게 다르구나. 이제 나는 혼자서 새로운 생활을 배워나가야 한다. 나는 낯선 생활에 대한 불안과 다짐을 삭이기 위해 숨을 들이쉬었다. 그때 2학년의 친구 하나가 식판을 들고 옆에 와 앉더니 나를 보고 쿡 웃었다.
"너거 방 일랑년이가? 어, 착하게 생겼제. 그래, 일랑년이라고 얼굴에 써가 다니네." 하더니 자기들끼리 귀엣말을 하고는 다시 킥킥거리는 것이었다. 방으로 돌아와서 2학년이 말했다.
"니, 그 알라같은 머리삔 좀 뺄 수 없나? 인자 막 가아가 일랑년들 미팅 주선할라 하는데 니보고 중학생 같다고 끼줄 건지 말 건지 갈등 생긴다 안 하나."
나는 얼굴을 붉히며 핀을 뺐다. 촌티를 벗으려면 퍼머부터 하라는 등 파트너에게 <쫄리지 안 하고 소치지 안 하려면> 반드시 굽이 높은 구두를 신어야 한다는 등 미팅 때의 옷차림에 대해 한참 동안 충고를 늘어놓고 2학년이 방에서 나간 뒤 거울 앞에서 다시 핀을 꽂아보았는데 아무리 봐도 핀을 꽂는 편이 깜찍해 보였다. 드디어 미팅을 하는 날 <숙 다방>의 계단을 올라가며 얼른 주머니에서 핀을 꺼내 머리 양쪽에 꽂았음은 물론이다.
내 파트너는 검은 남방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고 구석자리에 비스듬히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던 서울 남학생이었다. 흰 얼굴과 시니컬한 말투, 반항적인 표정, 고2 때 휴학을 하고 보컬그룹을 만든 적도 있다는 그가 종로통에서 재수를 할 때도 수업 팽개치고 파고다 아케이드에 가서 악기 구경을 하는 것이 더 좋았다고 말할 때 나는 기껏 두 살 많은 그에게서 엄청난 인생의 방황과 깊이를 느꼈다. 그가 말했다. "어제는 말예요. 학교 잔디밭에 누워있다가 강의에 안 들어갔어요." "왜요? 하늘이 너무 파랗더라구요."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동안 내가 대학 생활에서 발견한 문제점이라고는 학교에 오면 뭘 어떻게 하라고 일일이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 정도였다. 왜 조회와 종례가 없는 것인지 불편했다. 그러니 대학 강의를 시시하게 여기는 사람을 멋있게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가 고등학교 때의 여자친구와 헤어진 이야기를 각별한 이해심을 갖고 들어주었다. 그에게 걸맞는 여성으로서의 성숙함과 지적 길이를 보여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다. 애프터를 신청하지 않을까 내심 조마조마했던 나는 그가, "내일 전화해도 돼요?" 하고 묻자 이마를 약간 찡그리며, "뭐, 그러세요,"라고 시큰둥하게 말하고는 탁자 밑에서 떨리는 두 손을 힘껏 맞잡았다. 49국 7079. 그가 자기 전화번호를 적어 전네줄 때에는 먼저 땀이 밴 손바닥을 청바지에 문질러야 했다.
애프터는 1주일 뒤였다. 모자가 달린 토끼 무늬의 스웨터를 입고 나는 또 머리핀으로 모양을 냈다. 그는 30분이나 늦게 왔다. 그는 미안해하며 미팅을 하느라고 늦었는데 억지로 한 미팅이라고 해명을 했다. 이해심이 많은 내가, 미팅을 한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 나와 미팅을 한 느낌이 좋아서 미팅을 또 한 게 아니겠느냐. 그러니 또 미팅을 한 것은 나를 좋아한다는 뜻이다.라고 말해주자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를 만족시켰다는 사실이 대견해서 나도 따라 웃었다.
나의 안타까움은 그가 너무 어둡다는 데 있었다. 걸핏하면 휴학하겠다고 말하는가 하면 자기는 변두리 술집에서 드럼을 두드리다 마감했어야 할 인생이라고 자조적으로 말하곤 했다. 얼굴도 점점 더 창백해지는 것 같았다. 매일 밤 헤드폰을 끼고 듣는다는 딥퍼플의 <솔저 오브 포츈>을 빼고도 그가 좋아하는 음악은 죄다 <에피타프> <에이스 오브 소로우>처럼 음산하거나 우울한 곡이었다. 그를 보고 있으면 이따금 한숨이 나왔다. 왜 나를 통해서 인생의 기쁨을 찾으려 하지 않는지. 스스로 구원이 여성으로서의 태세를 완전히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나는 그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기숙사 생활이 즐거운 이유 중 하나는 365일 내내 도마에 올리고도 남을 만큼 사람이 많다는 점이다. 1학년 중에는 누가 제일 예쁘다. 2학년 중에는 누구다. 근데 누구는 청강생으로 들어왔고 누구는 남자관계가 복잡하다. 매일같이 아홉 시 점호시간 직전에야 헬레벌떡 뛰어 들어오는데 바래다주는 남자가 늘 바뀐다 등등. 세련되고 머리 나쁘고 끼 많다고 꼽히는 1학년 중에 혜란이라는 애가 있었다. 혜란은 나를 기숙사에 바래다주고 돌아가는 그를 본 다음부터, 내 파트너가 멋있는 걸로 보아 친구도 괜찮겠다며 소개팅을 주선하면 응할 용의가 있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그를 위한 기분전환이 될지도 모른다 싶어서 그 일을 적극 추진했다.
더블 데이트를 하기로 한 날 혜란은 달랑거리는 귀고리를 달고 목이 패인 티셔츠에 스카프를 했으며 펄시스터즈 같은 판탈롱 바지를 입었다. 팔에는 청바지가 걸쳤다. 나는 약간 불안해져서 블라우스에 달린 분홍색 리본을 몇 번이나 바로 잡았지만 혜란이같이 경박한 애에게 주눅들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 두 쌍은 <지지배배>라는 경양식집의 붉은 등 아래 마주 앉았다. 웨이터가 오자 나는 언제나처럼 주스를 주문했다. 그러나 혜란은 노블와인을 시켰다. 혜란은 계속 노숙하게 굴었다. 화제도 주로 남녀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이끌어갔고 간간이 콧소리와 웃음을 섞을 줄도 알았다. 남자 둘의 시선은 혜란에게만 쏠렸다. 나를 상대해주는 것은 그들 셋이 함께 건배를 하면서 형식적으로 내 주스 잔을 건드릴 때뿐이었다.
혜란의 제안으로 조금 후에는 팔씨름이 시작되었다. 혜란은 제 파트너의 손목을 살짝 잡더니 <아야야!> 하면서 어이없이 싱겁게 져버렸다. 반면 나는 얼굴까지 벌개져가며 있는 힘을 다해 아슬아슬한 접전을 벌였는데, 내가 너무나 열심히 하는 설 보고 파트너가 슬며시 힘을 빼주어서 결국 그의 손등을 바닥에 메꽂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모두들 그 승리를 장하게 여기기는커녕 웃음을 참는 눈치여서 나는 여간 억울한 게 아니었다.
그때부터 나는 등받이에 기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나를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 "왜, 재미없어요? 그럼 우리, 성냥개비 수수께끼 해볼래요?" 그럼 그렇지, 나는 그가 나를 배려하는 데에 조금 마음이 풀려 탁자 쪽으로 몸을 숙인 채 그의 희고 신 손가락이 성냥개비를 이리저리 늘어놓는 것을, 무슨 문제가 나올지 너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성심성의껏 쳐다보았다. 그는 성냥개비로 도형을 만드는 데 번번이 실패했다. 앞에 놓았던 것을 다시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몇 번이나 도형을 고쳤다. 수수께끼 문제가 잘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라 나는 안타까워하며 응원의 뜻으로 더욱 얼굴을 탁자에 바짝 가져다가 집중하는 모양을 보였다. 이윽고 고개를 번쩍 든 그가 내게 말했다. "하, 참! 얼굴 좀 처리 치워봐요. 콧김 때문에 성냥이 자꾸 흩어지잖아요."
기숙사 점호시간에 가까워졌으므로 우리는 그곳을 나왔다. <삼강 분식> 앞을 지나가다가 그가 말했다. "이대로 들어가면 저녁 굶을 텐데 뭘 좀 먹고 가죠." 분식집에 들어가자 혜란은 제멋대로 내 것까지 포함하여 유부 국수 네 그릇을 시켰다. 다 먹고 나서 입을 닦는데 혜란의 파트너가 내 얼굴을 똑바로 보며 놀리듯 말했다. "거기, 앞니에 고춧가루 큰 거 꼈어요. 거울 좀 보세요." 순간 나는 당황했다. 부산 애인 혜란이가 어색한 서울 억양으로 거들었다. "정말이야. 얘, 그걸 어떻게 알아?" 재미있어 죽겠다는 혜란의 목소리. 나는 국수 그릇을 가리키며 안간힘을 다해 말했다. "여기 고춧가루가 없는데 어떻게 이 사이에 고춧가루가 들어간다는 거야?" 다음 순간 그들 셋은 웃음을 터트렸다. "너 머리 좋다 얘." 혜란의 말에 그가 뭐라고 동의하는 말을 던졌지만 재 귀에는 웃음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남자를 이해하는 일에는 얼마든지 가진 재능과 시간을 동원하는, 진지함이라는 이름의 순정이 있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그를 이해했다. 그가 나를 우습게 불 리는 없어. 지난달 내가 집에 내려갈 때는 전주에 같이 가주겠다며 자기 집에 들러서 옷까지 갈아입고 나왔었잖아. 기차표를 사지 못해 서울역에서 배웅만 하고 돌아갔지만 말야, 그리고 명동의 <몽셀통통>이다 <오비스 캐빈>이다. 무교동 <약속>이다 좋은 데는 열심히 데려가고 음악 테이프도 선물하고 나는 그의 전화를 기다렸다. 신입생들은 문무대 들어가느라고 머리를 다 깎았다는데 아마 그런 모습을 내게 보이기 싫어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는 대학 생활이 석 달이나 지나간 것을 알았고 불현듯 엄청난 삶의 시련을 겪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실연을 괴로워할 시간은 그닥 없었다. 바빠졌기 때문이다. 교내 신문사에 들어간 나는 총장 퇴진 운동이다 뭐다 멋 모르고 어깨에 힘을 주느라고 바빴고 잔디밭에 앉아서 <이 어두운 시대에 문학을 하겠다는 일이 나약한 선택이 아니겠는가>라며 주제넘은 백수의 탄식을 하느라 바빴고 <뜻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스터디 하느라 바빴고 나중에는 어떻게 하면 그 모임에서 빠질까 궁리하느라고 바빴고 그런 틈틈이 미팅을 하느라고 바빴던 것이다.
바쁜 내가 다시 나의 진지함의 돛을 연애풍 쪽으로 돌린 것은 그해 가을이었다. 상대는 애향심을 빌미로 만나서 독서를 구실로 친목을 도모하는 한 서클에서 알게 된 남학생이었다. 여학생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게다가 그것을 자기 스스로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 그에게 약간 아니꼬운 마음을 품었던 것이 그에 대한 첫 관심이었다. 그는 그대로 자기가 <난 여자에 대한 원칙이 뚜렷해요. 첫째 명랑, 둘째 솔직, 셋째 겸선... > 하는데 내가 넷째까지 듣자마자 "뭐야, 그럼 나잖아?"라고 말하는 걸 보고는 마음속으로 <저런 발칙한... > 하면서 나를 똑바로 쳐다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와 나는 얼마 후 비밀 데이트를 시작했다. 우리의 만남이 비밀스러웠던 것은 순전히 남자 쪽 사정이었다. 눈에 띄는 수려한 용모와 총명으로 고등학교 때 이미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 전력을 가진 그가 이러쿵저러쿵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함께 본 날 그는 <인간과 자유>에 대한 철학적인 식견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경북궁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는 흔히 T는 말이지만 미처 어원까지는 몰랐던 <미중유>, 그리고 제갈공명이 큰 뜻을 위해서 사사로운 정을 버렸다는 <읍참마속>의 고사 같은 것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렇게 똑똑하고 포부가 큰 사람이 고등학생 때 소설까지 썼다는 말을 듣고 나는 그의 다양한 재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음날 서클 모임에 가서는 나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그를 행해, 저는 ‘사람의 아들’에 대한 아무개씨 의견이 지나친 독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고 해가면서 시치미를 떼고 독서토론을 해야 했다.
점점 그의 애매한 태도에 불만이 쌓여갔다. 나는 그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고 싶었고 또 당연히 그것을 세상에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서 서클 여학생 하나가 그에 대한 연정을 주체하지 못해 내게 상담을 해 온 일도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여자관계를 둘러싼 소문과는 달리 그는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재능 혹은 성의가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덤덤한 성격이었다. 한번 만나면 몇 시간이 지나도록 한자리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일어날 때는 다리가 펴지지 않아 한참 주물러줘야 했다. 규칙적으로 내게 전화를 하고 약속을 잘 지키고 친절했지만 나는 뭔가고 부족했다. 나는 열아홉 살이었고 지금 첫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몇 달째 영화를 보고 차를 마시고 바래다주는 일만 되풀이될 뿐 달콤하다거나 애틋한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용기를 내서 물어본 적이 있다. "모르겠어요. 내가 아무개씨의 서클 동료인지 여자친구인지 데이트 상대인지 아니면 애인인지." 그는 문어체로 건조하게 대답했다. "만약 내가 그 결정에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다면, 마지막 번호에 표를 했으면 어떨까 싶은데요."
한 2주일 만에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1주일 두어 번씩 만나도 가까워지지 않는다 싶었는데 오랜만에 만나니 더욱 서먹했다. 그가 무슨 얘기인가를 했다. 그러나 <세실 다방>의 음악이 너무 시끄러워 잘 들리지 않았다. 우리의 대화를 방해하는 그 시끄러운 음악은 ‘눈으로 말해요’라는 노래였다. 나는 웃으며 그 노래 제목을 그에게 말해주었다. "뭐라구요? 시끄러워서 안 들려요!" "눈으로 말해요,라구요!" "네?" "이 노래 말예요, 권태수의 눈으로 말해요‘예요." "무슨 말 하는 거예요?" "내 말 안 들려요?" "안 들리는데요!" 짧은 침묵이 흐른 뒤 사태를 수습하는 데 보다 적극적인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제길 되게 시끄럽네,"라고 혼자말을 하더니 짜증을 참는 얼굴로 찻잔만 노려보았다. 우리는 둘 다 입을 다물었다. 조금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리로 나와서도 그는 말이 없었다. 그의 예민함에 나도 약간 피로를 느꼈다.
<숲새>라는 경양식집에서 돈까스를 다 먹는 동안에도 그는 별로 말이 없었다. 웨이터가 접시를 치우자 담배를 피워물며 그가 무겁게 입을 뗐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스피커에서는 ’스프링 섬머 윈터 앤 폴‘이 터져 나왔다. 그는 서로에게 인연이 있다면 만난 것이 우연이듯이 또 언젠가는 우연히 만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말이 멋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이해했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미련을 갖지 않는 대범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더욱 명랑하게 떠들고 팝송의 제목을 아는 체하고, 그가 기숙사까지 바래다주는 길에 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의 수를 맞춰보기까지 했다. 밤엔 룸메이트와 함께 ’오텀 리브스‘란 명화극장을 보며 울었다.
약 사흘 동안 나는 살기가 싫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더 새디스트 씽’과 ‘디 앤드 오브 더 월드’만 들었다. 이따금 일어나서 창밖을 보며 중얼거리기도 했다. 왜 저 새들은 여전히 노래부르고 있을까. 세상이 끝났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다행히 사흘 뒤에 그에게서 편지가 왔다. 나를 보내고 나서 포장마차에 가봤지만 취하지 않았고 강바람을 쐬도 시원찮더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우리는 다시 만났고 제법 다정한 사이가 되었다. 손도 잡았다. 기숙사 앞 공원에서였다. 그날 내 19세 일기를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어두운 허공에 기댄 그의 얼굴은 조금 허전했다. 그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남자가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이는 모습은 언제나 보기 좋다. 더구나 두 손을 모아 얼굴 가까이 붉은빛을 쥘 때면 난 꼭 그 사람이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곤 한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아직 타고 있는 성냥을 발밑으로 던졌다. 난 남자들이 담배를 붙이고 나서 성냥을 미련 없이 버릴 때 배신감을 느껴요. 내가 말하자 그는 가볍게 웃었다. 그의 담배가 타들어 가는 동안 우리는 그네에 몸을 기대고 나란히 하늘을 보았다. 한 개비의 담배가 재로 바뀌는 시간 동안, 자못 별인 듯 서로를 조용하게 의식하는 그 순간이 나는 조금 행복했다. 담배를 거칠게 비벼 끄며 그가 <갑시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네>하고 대답하려던 내 목소리가 목에서 얼어붙었다. 갑자기 그가 내 손을 잡은 것이다. <난 세상에서 손처럼 예민한 게 없다는 걸 처음 알았다.>
솔직하자면 <손처럼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게 없다는 걸 처음 알았다.>고 써야 했다. 멋부려서 쓴 문장일 뿐 사실 나는 너무나 거북해서 기숙사를 향한 걸음이 나도 모르게 빨라졌던 것이다. 그 역시 <자못 별인 듯> 조용히 담배를 피우고 있었지만 이 여자와 어떻게 자연스럽게 손을 잡을까 하는 궁리 때문에 머릿속이 그리 조용하지 않았으리라는 것도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겨울이 되면서 우리는 자주 만났지만 고작 손을 잡는다는 것은 빼고는 맨 처음 만났을 때 보다 그다지 진전된 점은 없었다. 이런 식이었다. 그가 전화를 한다. 내일 좀 볼 수 있을까요? 내가 대답한다. ...뭐, 그러죠. 그가 사려 깊고 예의 바르게 말한다. 아니 뭘, 무리해서 그러지는 말고요. 나는 웃으며 <무리 안 해요>라고 대답하고, 그러면 그는 <알았어요. 다시 전 화할게요>라고 끊는다. 나는 끊어진 전화통에 대고 소리친다. 내 참, 좋아하는 사람을 안 만나는 게 무리면 무리지, 만나는 게 어떻게 무리가 되냔 말이다.
눈이 많이 오던 날 우리는 서울역 앞을 걷고 있었다. 길이 미끄러워서 나는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엉금엉금 걸음을 옮기며 한사코 입을 앙 다물었지만 한번은 어어어, 하며 두 팔을 내젓다가 엉덩방아를 찧기 직전에야 겨우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이십 분쯤 그렇게 사투를 벌였더니 도저히 못 보겠던지 겨우 그가 이렇게 한마디 했다. 괜찮다면, 내 팔을 잡아도 좋습니다.라고
어찌 됐든 팔을 끼는 바람에 부쩍 가깝게 느껴서인지 그날 그는 백화점에서 내게 장갑을 사주었다. 우리 둘이 너무나 어색했으므로 판매원 아가씨는 장갑을 골라주고 포장을 하는 내내 한 손으로 웃는 입을 가리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 겨울이 다 가도록 털실로 된 그 손가락장갑을 죽자 살자 끼고 다녔다. 우리는 언제나 <랑>자에 불이 꺼져 있는 <명랑 여관> 앞을 지나고 붉은 십자가가 두 개 있는 <복자 교회> 앞길로 해서 삼사십 분씩 걷곤 했다. 아는 사람을 만날까 봐 떨어져 걸었지만 좀 어두운 곳에서는 팔짱을 끼는 일도 있었다. 서로 말을 놓기로 하고서는 십 분이 넘도록 심하게 싸운 사람처럼 한마디 않고 터벅터벅 걷기도 했다. 그 겨울 어쩌면 우리는 더욱 가까워질 수도 있었다. 12월 31일 그 춥던 날. 스무 살이 되기 하루 전날 그때 내가 조금만 덜 진지했어도 말이다.
공원 벤치라는 것이 한겨울에는 좋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더구나 연못을 끼고 있는 공원이라 바람이 사방에서 몰아쳐 우리의 무릎은 달달 떨렸다. 망년회다 송년회다 떠들썩한 시내를 두고 그런 을씨년스러운 곳에서 떨고 있는 미욱한 커플은 우리 말고는 없었다. 연말 분위기를 내느라 연못 한가운데 있는 전각을 빙 둘러서 작은 등이 달려 있었지만 그저 춥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도 일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옆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마 나는 또 별이라든지 연못이라든지 아니면 무슨 한 해의 마지막이라든지에 대해 감상적이고도 진지한 잔소리를 지껄이고 있었을 것이다. 한참 얘기를 하는데 벤치 옆자리의 그가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도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왜요? 하려다가 갑자기 얼굴이 굳어졌다. 그가 천천히 한 손을 들어 내 뺨을 감싸는 것이 아닌가. 내 몸은 구석구석 갑자기 신경이 바짝 긴장하며 옴짝달싹 못 하게 얼어붙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경황 중에도 구원의 여성으로서의 내 시문에 대한 자각이 들었다. 체통을 잃어서는 안 된다. 첫 키스 정도에 벌벌 떠는 것은 순진한 애들이나 하는 유치한 짓 아니던가. 그리하여 나는 긴장을 억누르며 애써 또박또박 말했던 것이다. 아무개씨, 이러면 앞으로 어색해서 나 어떻게 보려고 그래요. 거부하는 게 절대 아니었다. 그냥 나는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듣자마자 그가 아 참! 그렇지, 하면서 얼른 손을 내리고 다시 연못 쪽을 향해 고쳐 앉는 걸 보고 오히려 어리둥절하고 그리고 허전해졌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흐지부지 헤어졌다. 어느 날 헤아려보니까 한 달 가까이 그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둘 다 고지식하고 진지하고 점잖고 자존심 강해서, 그래서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지 못했던 거라고 짐작했지만 어디까지나 짐작이었다. 후회도 없지 않았다. 운명적인 첫 키스가 이루어지려는 순간 거기 대한 논평을 해가며 잘난 체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그 겨울이 지나고 나는 2학년이 되었다. 또 바빠지기 시작했다. 월요일 여섯 시를 기다려 텔레비젼 만화영화 ‘캔디’를 봐야 했고 세종문화회관 앞의 집회에도 기웃거려야 했고 나와는 별 상관없는 연고전이니 남의 학교 축제니 실없이 쫓아다녀야 했고 대학합창대회에 대비한 노래 연습도 해야 했고 2년에 걸친 짝사랑도 해야 했고 충청도로 봉사활동 가서 제방도 쌓아야 했고 손가락 두 개가 없는 선생에게 기타도 배워야 했고 립그로스와 실크 블라우스를 사러 다녀야 했고 <모제>와 <보케뷸러리 2000>을 배우러 학원에 다녀야 했고 국문과 친구 여섯 명과 함께 <날빛>이란 모임을 만들어 시를 쓴답시고 몰려다니다가 문집 두 권을 내고 또 우리끼리 문학상을 만들어 내가 받아야 했고 ‘록키’와 ‘빠삐용’과 ‘라 미네즈’와 ‘취권’ 같은 영화 및 ‘에쿠우스’와 ‘돼지 꿈’ 같은 연극을 봐야 했고 논장 서적에서 은밀히 노란 표지의 ‘리얼리즘 인 아우어 타임스’를 사다가 불온한 <학습>을 받아야 했고 가족들과 밤낚시를 가야 했고 텔레비젼에서 열심히 읽어대는 김대중 공소장을 들어야 했고 동해와 부산과 제주도를 여행해야 했고 김민기와 조동진과 전영의 노래를 불러야 했고 해변 시인학교에도 가야 했고 휴교령이 내린 날 맥주 두 잔 반을 마셔야 했고 정독도서관에서 과제물 처리로 여름을 보내야 했고... 이쯤 바쁘다 보니 나는 어느덧 대학을 졸업할 때가 되어 있었다.
그사이 그를 전혀 만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군대 가기 전 나를 찾아왔었다. 그때 그는 말했다. <나한테 아무개씨가 필요 없을 것 같았어요? 아니에요.>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한번 상처를 받았던 사람이 믿고 받아들이기에는 그의 말투가 너무 건조했다. 그리고 그때 내게는 속 썩이는 남자가 하나 있었다. 콤플렉스 많고 똑똑했던 그 남자는 그와는 실패한 첫 키스를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당시 나에게 중요한 존재였다(1학년 때 겪은 첫 키스의 실패를 설욕할 기회는 어이없게도 4학년이 되어서야 찾아왔던 것이다.) 나는 끝내 그가 적어준 번호로 전화를 하지 못했다. 손색없는 첫사랑으로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 거기까지가 그와 허락된 인연일 듯싶었다.
몇 년 후 또 한 번 그를 만난 일이 있었다. 서울역 앞 지하 건물의 화장실 앞에서 우연히. 그때 나는 출장 가는 애인을 서울역으로 배웅나왔던 길이었다. 애인이 화장실에서 나오기를 기다리고 서 있는데 누군가, 아무개씨 아녜요? 해서 쳐다보니 바로 그였다. 유행가 가사에나 있는 일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첫사랑과 우연히 재회한 내 가슴은 마구 뛰었다. 애인이 화장실에서 늦게 나왔으면 싶었고 영원히 안 나와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는 약간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우선 볼일을 좀 보고 나와서 얘기하자>고 말한 다음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교대라도 하듯이 그의 어깨를 스치며 애인이 나왔다. 그리고 조금 후 그는 나와 함께 서 있는 애인을 보고 당황했고 내가 어색하게 소개를 하자 그답게 짧고 교양 있는 인사를 마친 뒤 사라졌다. 일껏 애틋한 마음으로 단 하루 떠나는 출장길을 배웅나왔던 나는 그날 몇 번이나 눈을 흘겨가며 시시콜콜 애인을 트집 잡아서 결국 화나게 만들었고 다음 날 돌아오자마자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어야 했다.
그러고도 세월이 꽤 흘렀다. 내가 그와 함께 겨울을 보낸 것도 20년 전의 일이 되었다. 이따금 나는 그를 생각했다. 늦가을 덕수궁 앞을 지나거나 바바리코트를 입은 잘생긴 남자를 보면 그리고 누군가 첫사랑에 대해 물었을 때, 삶이 고단하고 꾀죄죄해서 쓸쓸할 때와 내가 아주 늙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란 구절이 떠오를 때마다. 그때 열아홉 살 때 첫 키스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내 첫사랑은 완성되었을까, 하고 이 나이가 되면 대학생 때 같은 서클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아무런 용건 없이 선뜻 남자친구를 만나게 되는 걸까. 십몇 년만의 어색한 만남인데. 게다가 머릿속에는 원형탈모로 땜통까지 있으면서... 그러나 약속장소에 먼저 도착해 자리를 잡고 앉으며 나는 불현듯 깨닫는다. 지금 만날 남자 친구는 내 첫사랑과 친한 친구였다는 것을. 그랬구나.
얼마 기다리지 않아 남자친구가 나타난다. 예전에도 동안이었던 그는 인상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 조용한 것인지 냉소적인 것인지 어쨌든 대학생 때는 어딘지 소극적으로 보였는데 나이가 들어서 여유 있는 표정이 되었다. 내게 던지는 말씨도 활달하다, "야아, 아무개 너는 하나도 안 늙은 것 같다. 더 예뻐졌는데?"
"안 늙기는 왜 안 늙어. 나는 구구하게 설명한다. 언뜻 봐서 그렇지 자세히 보면 주름살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젊어 보이는 것은 진짜 안 늙어서가 아니고 스타일이 그래서일 뿐이야. 나도 정장 같은 것 입으면 제 나이 다 들어 보여. 내가 체격이 작고 정장이 안 어울려 그냥 캐주얼하게 입으니까 분위기가 그래서 좀 젊어 보이는 거라구. 예뻐지다니, 이 나이에 말이나 되냐? 그건 있어. 확실한 내 일을 갖고 몰두하다 보니까 인생에 좀 자신감이 생긴 것 같아. 그때부터 남 의식 별로 안 하고 표정도 밝아지고, 그 덕분에 전보다 생기 있어 보이는 걸 거야."
그러고는 제풀에 급히 입을 다문다. 그냥 해본 인사치레일 텐데 무슨 심각한 사안이라고 이렇게 일일이 분석해가며 진지하게 진실을 규명하고 있는 것인지! K라면 ‘안 늙었다구? 그럼 요새 늙는 사람도 있나?’ 하거나 ‘다들 젊어지는데 나만 그대고 안 늙고 멈춰 있어서 큰일이야’라고 간단히 눙칠 것이다. 꼭 k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이다. 나도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는 농담에 적극적으로 응전하는 편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긴장하면 이처럼 남몰래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농담에까지도 정면 대결을 하려 드는 것이다.
남자친구와 나는 점심을 먹고 자리를 옮겨 차를 마신다. 나는 첫인사에서의 진지한 대응을 사과하는 뜻으로 계속 농담만 해댄다. 그럭저럭 우리는 옛친구답게 허물없이 옛날이야기를 하게 된다. "D는 어떻게 됐어? E를 좋아했었잖아." "D 그 자식, 군대 가서까지 매일 하루에 한 통씩 E한테 편지 보냈지. E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지만 펜글씨를 아주 잘 쓰게 되어서 덕분에 군대 생활 편하게 마쳤어." "참 F는 어떻게 됐어?" "개는 말야." "참, G는? 걔?" 그렇게 이어지던 얘기 속에 한순간 수상한 긴장이 감돈다. 드디어 내 첫사랑의 얘기가 나온 것이다.
"외국 나가 있다가 얼마 전에 들어왔어. 좋은 직장에다 집도 강남의 널찍한 아파트이고 그만하면 출세한 셈이지. 결혼은 어떤 사람하고 했는데? 그 자식이 원래 화려하고 야한 여자를 좋아했잖아." "그래?" 좀 뜻밖이다. 나는 정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 짐작처럼 보수적인 사람이 아니었나? 하지만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내지는 않는다. "아무튼 걔는 목표를 세워놓고 사는 놈이니까 결혼도 제 인생 설계에 들어맞는 여자하고 했지. 똑똑하고 미인이야. 돈도 잘 벌고." 그랬었구나 나는 고개까지 끄덕인다. 그리고는 조금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말해본다. 나하고 좀 친했다는 거 알고 있었어? 그가 씩 웃는다. 거기 대해서라면 할 말이 있다는 표정이다.
"그거야 다 알았지. 그때 나도 충고깨나 했었는데. 그 자식도 고민 많았어. 아무개가 순진하고 귀엽긴 하지만 말야. 걔는 계획은 그게 아니었거든. 인물도 그렇고 학벌, 집안도 그저 그렇고, 또 의대 약대도 아닌 국문과생이었잖아. 한마디로 자기 인생에 별 도움은 못 주는 조건이라구. 결혼 상대는 아니라고 생각했지. 그래도 마음에 드니까 만나긴 만났지만 늘 이럴까 저럴까 하더니 나중에 그러더라. 괜히 감정 키우면 골치 아플 것 같아서 헤어졌다고. 야, 그때야 아무개가 소설가까지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그때 나는 첫사랑인 그를 위해서 기꺼이 구원의 여성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방황하고 상처 입은 영혼 같은 불필요한 것은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서정적인 의미의 구원 따위도 필요 없었다. 그가 원하는 구원의 여성은 실제적으로 뭔가를 갖춘 여자였다.
열아홉 때, 워낙 진지함으로 무장을 한 탓에 내게는 실연조차 먹혀들지 않았다. 대신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첫사랑의 남자에게 보기 좋게 차여 버린 것이다.
나는 20년 동안 지녀온 첫사랑의 순결을 훼손당한 사람치고 뜻밖에 담담하다
"그랬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남자가 왜 그렇게 자신감이 없는지 참 안타까워했는데."
나는 재미있다는 듯 큰 소리로 웃는다. 속으로 생각한다. <그래, M 얘기가 그렇게 되어야 맞는 거였어. 나도 삶이란 바로 이런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나,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구.>
그다음부터는 남자친구의 얘기를 건성으로 들으며 혼자 소설 구상까지 한다. ...남자는 못생기고 순진한 그녀를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완곡하게 따돌리려 한다. 그러나 이를 눈치채지 못하는 여자는 그의 구원의 여성이 되기를 자처하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노트북을 켠다. 제목을 쳐본다. <소설 첫사랑>.
그때 불현듯 기억 저편에서 ‘솔저 오브 포츈’을 좋아했던 남자가 떠오른다. 그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지금도 그렇게 마르고 검은 셔츠를 즐겨 입고 입담배를 멋있게 피울까. 보컬그룹을 만들긴 만들었을까. 그 대목에서 나는 갑자기 이맛살을 모은다.
잠깐! 내가 혹 지금까지 첫사랑을 잘못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지나가 버린 날의 일이라고 해서 의미를 바꾸지 말란 법은 없다. 첫사랑에 대한 해석을 새롭게 하면 첫사라의 대상은 바뀔 수도 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난 다음 나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일어선다.
손을 씻고 나서 거울을 본다. 정수리께에 자리 잡은 휑한 구멍이 굳이 머리카락을 들추고 살펴볼 필요도 없이 그대로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거울 앞으로 바짝 한 걸은 다가간다. 불빛을 받아 훤히 드러난 동그란 탈모 자리를 한참 동안 쳐다본다.
노트북 앞으로 돌아왔지만 새 소설에 대한 흥미는 이미 사라진 뒤이다. 나는 생각에 잠긴 채 한 글자씩 띄엄띄엄 글자를 쳐간다. 모니터 화면에 문장 몇 개가 나타난다. <인간에게는 다 약점이 있다. 누구에게나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점은 있다. 내 탈모증의 환부처럼. 그리고 성숙하지 않고 건너뛴 내 유년처럼.>
K에게 전화를 건다.
"지금 안 바빠? 전화 길게 해도 괜찮겠어?" "응, 상관없어. 무슨 할 얘기 있냐?" "아니 별건 아니고, 대학 때 알던 서클 남자친구 만나기로 했다고 했었잖아." "그랬지." "아까 만나고 왔거든." "근데?" "나, 옛날에는 왜 그렇게 철이 없었나 몰라." "왜?" "남들이 날 우스꽝스럽게 본다는 걸 나만 몰랐어. 혼자만 진지해갖고 말야." "..." "생각해보면 얼마나 푼수 같았는지." "요즘은 안 그렇다고 생각해?" "요즘이야 너무 속을 잘 감춰서 문제지. 푼수같이 안 보이려고 얼마나 긴장을 하는데." "네가 그렇게 생각하면 됐지 뭐."
나는 K답지 않은 우호적인 대답이 못마땅하다. 갑자기 내 목소리가 커진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말야. 내 땜통처럼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주제에 저 혼자만 진지해 갖고 설치던 20년 전이나, 그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한사코 감추려고 하는 지금이나 우스운 건 마찬가지야. 나도 알아. 근데 말야. 그냥 우스운 존재로 살면 그만인데 난 그게 잘 안돼. 왜 그럴까?"
K는 불쑥 말을 돌린다.
"너, 어제 보니까 땜통이 더 커졌더라. 근데 사람들은 네가 일부러 드러내놓고 다니는 줄 알아. 널 냉소적이고 위약적인 여자라고 하더라니까. 네 소설 주인공같이 시건방지고 독하다고 말야."
"그게 정말이야?"
K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나는 웃기 시작한다. 눈물이 나도록 깔깔 웃어젖힌다. 송화기에 침이 튈가봐 거기에서 입을 조금 뗀 다음 더욱 마음껏 웃는다.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아 의자에 앉아서 웃는다. 아아, 너무 웃긴다. 웃겨. 내가 농담을 좀 안다는 거, 그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