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약속
천년의 약속
윤후명
새벽 다섯시, 옆의 여자는 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퍼뜩 눈을 뜨고서도 옆에 여자가 있다는 생각은 채 못하다가, 그랬었지, 하고 그 존재를 인식했었다. 모닝콜을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새벽에 시간 맞춰 눈이 떠진 게 신기하기도 했다. 누운 채 손목시계를 집어 희미한 야광침을 들여다보고 나서야 나는 안심이 되었다. 한겨울의 캄캄한 밤시간은 꿈속인 듯 모호하기만 한 것이었다. 옆의 여자와 간밤에 어울렸다는 사실도 그랬다. 술집에서 만났고, 새벽에 선창에 함께 나가자는 약속을 하고 그 여관에 들었었다는 사실이 뒤따라 알려져왔다.
"바다가 보이는 쪽으로 방을 주시오."
어두운 여관 복도에 내 목소리가 울렸다. 그 장면은 또렷했다. 바다가 보이는 쪽이란 실상 아무 소용도 없었다. 지난 보름은 1999년의 마지막 보름이었고, 그 12월 22일은 이미 지난 세기의 날짜로 사라져버렸다. <새 천 년>의 막이 열린 지도 며칠이 지나 있었고, 달은 없었다. 쓸개처럼 검은 바다가 창문 밖에서 무겁게 출렁이고 있는데 지나지 않았다. 달 말이지. 낮에 나온 반달은 햇님이 쓰다 버린 쪽박이란 거, 너무하잖어? 갑자기 밤하늘을 쳐다보며 나는 오래 전 한 여자의 말을 떠올렸다. 달도 없는 밤에 왜 하필이면 그 말인지 모를 일이었다. 꼽아보면 달에 얽힌 사연이 웬만큼 없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그러나 추억 속에서 달은 불길하고도 음험한 섹스처럼 구름에 가려 있었다. 그 여관으로 오는 동안, 나는 온갖 추억 속을 헤엄쳐 지나는 느낌이었다. 그 추억의 바다마다 내가 주인공이라고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을 듯싶었다. 나는 어리둥절하게 내 과거를 돌아다보았다.
"바다, 지겨워요. 좆같이."
여자는 그러더니 방에 들어가자마자 침대 위에 모로 고꾸라졌다. 무엇 때문에 술집에서 여자와 함께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새벽에 선창에 함께 나가자는 건 별다른 약속도 아니었다. 모든 게 술 탓일 텐데, 구태여 꼬투리를 달자면 여자가 섬에서 도망쳐 나왔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졌다. 그랬을 것이다. 그것밖에는 달리 대답을 얻을 수 없었다. 미로의 막다른 골목을 우연처럼 간신히 빠져나오곤 했던 지난 인생이었지만, 길거리 여자와의 관계는 거의 없었다. 나름대로 해석하자면, 나 역시 오랫동안 명예롭지 못한 수배자로서 쫓겨 다닌 나머지 그렇게 되었을 뿐, 뭐 특별히 결벽증이 있다거나 해서는 아니었다. 쫓겨 다니는 남자에게는 보호해줄 여자, 특히 혼자 쓰는 방을 가진 여자만이 절실했다. 그래서 모든 쫓겨 다니는 남자에게는 여자 같은 방, 혹은 방 같은 여자가 필요하다. 생각의 꼬리를 물고 들어가 보니 거기에 납득할 만한 대답이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 여자가 섬에서 도망쳐 나왔기에 함께 여관으로 온 게 아니라, 여자가 있는 방이 필요했던 것이다. 오래전에 이미 나는 쫓겨 다니는 신세를 면했는데도 의식은 아직 나를 놔주지 않고 있는 꼴이었다. 무의식으로 남아 있는 잔재나 관성이 더러운 굴복을 요구하는 게 인생의 한계였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그래도 나았다. 그대, 언젠가 나를 차버리고 떠난 여자를 닮았어. 지난 세기에, 1900년대식 사랑이었지. 정말 천년이 지나갔어. 나는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여자는 아무려나 상관없는 얼굴이었다. 섬에서 도망쳐 나왔다고 말하는 얼굴이 어두운 바다를 축소해놓은 것처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세수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물소리에 여자가 깰까 봐서였다. 그 작은 도시에서 선창으로 가는 길을 못 찾을 리는 없었다. 그 도시로 향하기 위하여 택시를 탔을 때, 애초에 나는 선창 가까운 어디에 대달라고 했었다. 새벽 선창가를 어슬렁거리다가 허름한 술집으로 기어 들어가 국물을 앞에 놓고 한잔 술을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행복이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말끔히 단장된 식당에서, 아무리 잘 조리된 음식을 먹는다 해도 못 미칠 행복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밑바닥 인생 행로가 내게는 적합하게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행복을 찾아 나는 그곳에 이른 것이었다. 이른바 <새천년>을 맞아 다들 야단법석으로 치른 행사도 나름대로 치렀으나, 이제야 비로소 내 나름의 행사를 치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몇십 년 전의 그 도시를 알고 있었다. 간밤에도 나는 여자에게 말했었다. 그 햇수를 짚어 말하자 여자는 갑자기 귓속으로 기차가 지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여자는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었다. 그 몇십 년 전, 내 나이 열아홉 때, 나는 그 도시로 한 소녀를 만나러 갔었다. 그때도 나는 우연히 어시장을 지나갔었다. 소녀는, 칠면조가 붉은 목살을 길게 늘어뜨리고 방문객을 불안하게 기웃기웃 살피는 집에 살고 있었다. 여기가 문화동 46번진가요? 그러자 어머니인 듯싶은 어른 뒤로 소녀가 흰 얼굴을 빼꼼 내밀고, 누군가, 하고 나타났다. 어머.
어머. 그 짧은 놀람의 소리는 그 뒤 몇십 년 동안 내 귀에 남아 있었다. 그날 우리는 공원으로 가서 꽤 긴 시간을 보냈다. 그때까지 나는 사람들이 공원이라는 델 왜 가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공원에 무엇이 있는지 가보았지만, 특별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풋복숭아를 사서 소녀의 입에 물려주는 내 손은 긴장되어 떨렸다. 튕겨져 나온 철심처럼 내 가슴도 쇳소리를 냈다. 특별한 아무것도 없는 공원에서 특별한 아무것도 없는 얘기를 나누면서도 머릿속이 매미처럼 기승을 부리고 울고 있는 게 그때의 사랑이었다. 소녀는 손수건으로 연신 목덜미의 땀을 닦으며 무엇인가 어렵게, 어렵게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우린 아직 너무 어리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 그 내용은 어디로 가고 그 형식만 남는다. 마음은 어디로 가고 풍경만 남는다. 주관은 어디로 가고 객관만 남는다.
어머. 소녀의 입에서는 처음 관계를 시도하여 삽입이 되었을 때도 그런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렇게 소녀와의 만남은 1년 넘게 이어졌다. 칠면조와 풋복숭아와 <어머> 소리로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헤어지면서 소녀는 말했었다. 2000년이 되면, 우린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그때 가서 한번 만나자고도 했다. 나는 그 말뜻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헤어지는 마당에 아득한 미래인 2000년은 무슨 지랄 맞은 2,000년이란 말인가.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사랑은 아득한 시간을 담보로 멀어져갔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는 결코 불가능한 시간의 담보가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약속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소녀는 얼마 뒤 결혼하여 내게서 멀어져갔지만, 시간이 갈수록 내게는 2000년이 새로워졌다. 어차피 다가오게 되어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말았다. 대망의 2,000년을 얼마 앞두고 그만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지 그 약속을 지키고야 말겠다는 듯, 여러 번의 죽을 고비도 용케 넘기고 살아온 나로서는 야속하기 그지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에 약간의 어폐는 있다. 소녀, 그렇다, 내게는 여전한 소녀가 세상을 뜰 무렵 나는 외국에 있었으며, 한국으로 돌아올 구체적인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소녀의 모습을 이제 이 세상에서 영원히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더라면 나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영원히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으로 급히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소녀가 내내 살다가 떠난 그 도시로 오고야 말았다. 무엇 때문일까. 범죄를 저지른 자는 반드시 그 범죄 현장을 찾는다는 말이 떠올랐으나, 그건 내게 적용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역시 약속 때문일까. 알 수 없었다. <새천년>을 뜻깊게 맞이하려는 행사가 끝나고 나자 나도 모르게 그러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그러려니 했던 그 생각은 문득 사막 위에 몰려온 구름처럼 내 앞을 가로막았다. 뭉실거리는 어지러움에 나는 순식간에 눈이 멀 지경이었다. 그리고 하나의 약속이 금강저(金剛杵)처럼 머리를 깨고 들어왔다. 그 여자는 죽었을지 몰라도 그 소녀는 죽지 않았다!
사실 나는 세상이 어떻게 되든 그곳에 꼼짝 않고 쑤셔박혀 있을 작정이었다. 그곳은 러시아 연방에 속하는 작은 불교 국가로서, 애초에 그곳에 가려고 계획했던 것은 5년 전이었다. 그래서 나는 문예진흥원에 지원신청서까지 냈었다. 그러나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어서 이리저리 어긋나다가 겨우 6개월 전에야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애초의 계획이 거의 5년이 되어서야 실현된 셈이었다. 그러다가 그만 급히 돌아오게 되었으니, 그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해서 잘못된 말이 아니었다. 물론 나는 그곳에서 만난 우리 사람들 몇몇에게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해두기는 했다. 그러나 그건 나도 모를 일이었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못마땅하기는 해도 역시 한국은 내 고향인 것이었다. 한국에서의 가치관의 실종은 내게는 분노를 지나 허탈에까지 이르게 하기에 족했다. 고등학교 때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을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른 채 외웠었는데, 아마도 그 말은 이놈의 세기말 한국의 실정에 딱 들어맞는 듯싶었다. 한국의 신문, 방송, 잡지 등 매스컴이 보여주는 짓거리는 한마디로 <악화>를 붙좇는 일일 뿐이었다. 그 나라를 택한 것은 러시아 여행 중에 사귄 우리 동포 한 사람이 새로 그곳에 정착하여 살게 된 때문이었다. 그는 화가이면서 소설가이기도 했다. 그가 한국에 오는 데는 초청장이 필요하다고 해서 내가 이리저리 뛰어다닌 끝에 마련해 보내준 적이 있었고, 그는 그 초청장으로 한국에 와서 인사동에서 전람회까지 열었었다. 그 무렵 나는 다음과 같은 글도 남겼다.
푸쉬킨 거리의 어느 날 나는 그를 만났다. 사연을 듣고 본즉 여러 곳을 전전하며 살아온 그도 난민의 한 사람으로 볼 수 있겠는데, 그림을 그리며 소설을 쓰고 있었다. 일찍이 한반도를 떠나 북쪽으로 유랑해간 우리 민족 누구나 다 그렇듯이 그도 유랑인으로서 험난한 인생 역정을 걸어 거기까지 온 것이었다. 하지만 강조되어 마땅한 것은, 그에게 어떠한 고난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그의 예술혼을 꺾을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깊은 색감과 강렬한 이미지들로 삶의 갈등에서 조화를 창출해내려는 몸부림이었다. 현실은 이상을 향하여 날개를 달되, 그 이상은 또한 현실에 발붙이고 있어야 한다. 그 사이에서 감각은 영생을 얻는다. 그의 예술에서의 둔중한 우수(憂愁)는 다분히 중앙아시아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절박함이 우리 민족의 옛 정서에 닿아 있음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 기교보다도 본질에 집착하고 있는 정신도 건강한 힘을 간직하고 있다. 개인의 고뇌를 우주화하려는 노력 속에 자연이 있고, 문화가 있다. 그리하여 삶이 있고, 꿈이 있다.
다시 읽어보면 상당히 피상적인 헌사(獻詞)였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내가 그의 신세를 질 차례였다. 그가 한국에서 돌아가 어떤 경로로 그 작은 불교 국가로 갔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가 전화를 걸어오기 전까지 나는 그런 나라가 있는지조차 잘 모르고 있었다. 하기야 특별히 알 까닭도 없었다. 카스피 바다 옆, 거기를 보시오. 그 나라에 우리 사람들도 많이 살아요. 그렇게 많은 건 아니지만. 전화로 들으니 처음 만났을 때보다 부쩍 는 한국 말 실력이 귀를 울렸다. 그제야 나는 그에게 봉은사를 보여주러 갔던 어느 날 그가 그런 나라를 얼핏 얘기했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내가 불교, 부처, 붓다, 부디즘 운운하며 절에 대해 설명하자 한참 동안 듣고 있던 그는 러시아에도 이런 곳이 있는 나라가 있다고 대꾸했던 것 같았다. 그의 대꾸를 건성으로 들었던 것이, 그가 그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고 함으로써 다시 귀에 들어왔다. 내 언제 한번 가리다. 말해놓고 나서 그가 <가리다>라는 말을 알아들을까 싶었으나 그는 꼭 오시오, 꼭 오시오 하고 다짐하고 있었다.
과연, 카스피 해를 끼고 북서쪽에 작은 공화국이 하나 있었다. 칼미크. 티베트에서 전래된 황모파(黃帽派) 라마 불교를 믿는 칼미크 사람들의 자치 공화국. 그리고 칼미크 사람들이란 몽골족의 일파라고 되어 있었다. 얼마 전부터 텔레비전에서 티베트에 대해 여러 번 보여주어서 황모파말고 흑모파(黑帽派)도 있다고는 알고 있었으나, 노란 모자든 까만 모자든 하여튼 그런 곳에 몽골족의 불교 나라가 있다는 건 흥미로운 사실이었다. 그곳은 카프카즈 산맥이나 볼가강으로 잘 알려진 지역인데다 최근에는 체첸의 독립운동으로 전세계의 눈길이 쏠리는 지역이기도 했다. 그런 곳에 그런 나라가 있었으며, 또한 그런 나라에 우리 민족이 살고 있었다. 아닌게아니라 다른 나라의 잘 알려지지도 않은 구석에 우리나라 사람이 어느 틈에 쑤시고 들어가 있는 걸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카스피해 언저리의 라마 불교 나라를 더듬고 있던 나는 뒤늦게야 한국의 한 라마불교 양식의 탑에까지 이르렀다.
서둘러 고백하자면, 그 탑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그가 꼭 오시오를 거듭했다고 해도 나는 그 나라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탑이 있었다. 소녀를 만나고 왔던 해의 가을에 소녀와 함께 공주의 마곡사에 가서 보았던 탑이었다. 그 탑이 라마 불교 양식이라고 들었던 기억이 신기하게도 되살아났다. 특별히 기억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다. 설명을 듣고 그냥 그런 것도 있구나 하고 잊어버렸다는 게 옳을 것이었다. 그런데 몇십 년이 지나 카스피해 언저리의 이상한 나라를 거쳐 마치 환생(還生)처럼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해 가을 학기가 되어 서울로 올라온 소녀의 자취방은 슬그머니 소녀와 나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가을, 여행을 가서 우리는 그 탑 앞에 고즈넉이 섰었다. 젊은 열락의 시간들이 회오리바람처럼 탑을 휘돌아 잠깐 차디찬 석영같이 빛나고 있는 게 내 눈에 비쳤다.
"탑은 안에 뭘 집어넣어 두는 창고래."
"창고? 뭘?"
"뭐겠어?"
소녀는 대답하지 못했고, 웬일인지 나도 더 이상 무슨 말을 하지 않았다. 탑을 한 바퀴 돌아 나왔다는 것뿐, 기억은 거기에서 끊어졌다. 그 가을에 우리는 헤어졌다. 우리의 헤어짐에서 탑이 뜻하는 게 무엇인지 신탁(神託)처럼 어떤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으나, 나는 아무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렇지만 나는 탑이 그것을 알고 있다고 믿었다. 우리가 탑 앞에 섰을 때의 그 차디찬 석영빛이 우리의 운명을 예견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그 당시는 몰랐더라도 전조는 어떤 방식으로든 얼굴을 드러내는 법이니까 말이다. 탑은 이별을 예견하고, 또 증명하며 거기에 서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만남이 그 탑 안에 넣어두고 떠난 것은 없었을까. 창고에 뭘 집어넣었는지 소녀와 나는 물음만 던진 결과가 되고 만 셈이었다. 그게 뭐였을까.
"거기에 탑이 있는 절도 있어요?"
나는 물었다.
"말을… 뜻을… 모르겠어요."
그는 머뭇거렸다.
"아, 거, 왜 스투파… 그전에 서울에서 절에 갔을 때…."
나는 전화로 손짓발짓을 했다. 곰곰 머리를 쓰는 그의 표정이 전화로 전해져왔다.
"아, 있어요. 그런 거 있어요."
이윽고 그의 대답이 씩씩하게 들려왔다. 나는 멀리 멀리 가서 탑을 보고 싶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멀리 있는 라마 형식의 탑을 보고 싶었다. 실질적으로는 그가 한국에서 또 한 번의 전람회를 열었으면 하고 희망했기 때문에 그 상담이 더 절실했지만, 나는 탑을 보고 싶었다. 세월이 이다지도 지나 새삼스럽게 풋복숭아의 추억을 더듬자는 것은 아니었다. 소녀와 헤어지고 나서 내가 가졌던, 어두운 바깥 계단으로 구둣발을 더듬어 내딛는 느낌이야말로 내 인생의 시작이었음을 아는 나로서는, 가장 멀리 있는 탑을 봄으로써 내 인생을 가장 뜻 깊게 해석할 수 있다고 불현듯 생각되었던 것이다. 거역할 수 없는 쏠림이었다. 이제 탑은 소녀와의 만남이 어떻느니 하는 어릴 적 얘기를 떠나 내 과거, 현재, 미래의 문제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러시아 사람의 시골 별장을 빌려 생활하고 있었다. 나는 노트북 컴퓨터와 불경 몇 권이 다인 짐을 풀어놓고, 옛날 혜초가 그랬던 것처럼 내 고향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합장했다. 나는 몇 년이고 썩으면서 무슨 생각인가를 하고 그리고 상황이 허락된다면 무슨 기록인가를 남길 것이었다. 상황이 허락된다면… 술에다 담배에다, 많이 나빠진 몸도 몸이지만, 그보다 한국의 얄팍해진 문화 풍토에서 어떻게든 비비고 사느라고 내 정신은 황폐하기 그지없게 되어버렸다. 대중인지 민중인지 민초인지 표현이 무엇이든지 간에 거기 맞추어진 상술의 문화밖에는 살길이 없는 풍토에서, 정화될 기회를 잃은 정신은 잠 못 이루고 악귀처럼 헤맬 뿐이었다. 소녀와 헤어진 뒤, 다른 여자들과 동거도 했고 결혼도 했으나 나는 적응할 수 없었다. 그런 내게 상황이 어떻게 허락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수도인 엘리타스는 물론 아스트라한이며 볼고그라드 등 도시들을 돌았고, 나중에는 아르메니아 공화국의 수도 예레반까지도 갔다. 그곳에도 옛적 공산 시절이 더 좋았다고 한숨짓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상황이 허락된다면… 라마 불교의 탑 앞에서 고향을 바라보며 나는 노스트라다무스처럼 한숨지었다.
"꼭 참석해야 돼. 니가 우리 모임의 괴수였잖아. 동해안에서 새천년을 맞자구."
모처럼 걸어본 전화에서 그들은 말했다. 몇 년이고 썩는다고 해놓고 전화를 건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새천년은 무슨… 하루하루는 일상인데…."
"너 말한 거 잊었어? 이천년까지만 살면 그만 아니냐구."
"그야… 글쎄…."
나는 돌아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 비행기 사정을 방패막이로 둘러대면 쉽게 뿌리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우선 내가 와 있는 이곳의 카프카즈 산맥을 여행하고 와서 푸쉬킨의 『카프카즈의 노예』를 원어로 더듬더듬 읽어야 한다. 푸쉬킨이 그곳에 유배되었다가 그런 소설을 쓴 것은 오래전에 알고 있었다. 그 제목을 톨스토이가 다시 인용하여 쓴 것도 알고 있었다. 푸쉬킨이 마지막 숨을 거둔 집에는 카프카즈의 산을 그린 그림과 카프카즈의 칼이 걸려 있었다. 나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싶었다. 가장 먼 곳에서, 오랜 내 화두인 외로움과 그리움으로 나를 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곡사의 탑과 연결된 탑이 있고, 편히 누울 침대가 있고, 푸쉬킨을 가르쳐줄 선생이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와 달리 밤마다, 티베트고원에서 조장(鳥葬)을 기다리는 주검처럼 편히 쉴 수 있다는 생각에 잠 못 이루었다. 그런데 한국에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말야, 그 애, 걔가 죽었다더라. 우리도 몸조심해야지. 나이가 이렇게 되니까…."
"누구?"
대학 때부터의 친구들이 주축이 된 모임이므로 나와 관련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 전갈은 부수적이고 우연적인 것이었다. 소녀의 죽음은 그렇게 내 귀에 전해져왔다. 오랜만에 청어 통조림을 뜯어놓고 붉은 포도주를 마시며 『벽암록(碧巖錄)』을 건성으로 읽고 있던 나는, 순간 마곡사의 탑 앞에 내동댕이쳐진 내 모습을 보았다. 포도주의 아지랑이 같던 취기가 어두운 구름으로 돌변하여 험상궂게 달려들었다. 주름진 대뇌의 기억 장치에서 창자의 연동운동을 보는 듯 과거는 단숨에 꿈틀거리며 다가왔다. 우리의 만남은 일본의 식민통치 기간에 거의 맞먹는 긴 시간 저쪽의 일이었다. 어렸을 적에, 도대체 늙은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궁금하던 그 늙은이의 시간에 내가 와 있음직도 한데, 나는 이제야 그 대답을 확실히 찾은 듯싶었다. 그래, 나는 그 궁금증의 시절을 돌이켜보고 있는 것이다. 인생은 그렇게 과거, 현재, 미래가 둥글게 꼬리를 물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 시대의 무덤 벽화에 용이며 현무며 하는 짐승들이 입으로 꼬리를 물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나이를 먹는다는 건, 아무리 짧은 한 순간의 만남이라도 몇십 년의 만남보다 더 소중할 수 있음을 아는 거란다. 그 만남이 삶의 꼬리를 물고 환생하고 있는 만남이라면….
창밖의 풍경은 정지되었다. 멀리서 툴툴거리며 달려가던 트럭도 고장나 멈춰 선 듯하였다. 그 흔하던 까마귀들도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해바라기의 마른 대궁이 씨앗판의 말라 쪼그라진 얼굴을 푹 꺾고 교수목처럼 서 있었다. 나무들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놓은 것처럼 뻗대고 섰을 뿐이었다. 여기가 어디더라… 그리고 나는 내가 과거와 너무 떨어진 곳에 와 있다는 사실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삶의 꼬리를 물기는커녕 잘못하다간 쥐고 있던 새끼줄마저 삭아 끊어져 영원한 미아가 된다.
한국은 <새천년>을 맞이하느라 부산을 떨고 있었다. 신문을 보니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고 했다. 남태평양의 어디던가, 날짜 변경선에 가까운 섬이 가장 먼저 2000년의 해를 볼 수 있다고, 그곳까지 각광을 받고 있었다. 1월 1일의 해돋이를 보러 가는 열차는 일찍이 표가 매진되어 있었다. <밀레니엄 열차>라고 이름 지어진 이들 열차는 강원도의 정동진을 비롯해서 부산 해운대, 태종대, 송정과 충남의 춘장대, 전남의 향일암 등등 여러 곳으로 가고 있었다. 어떤 열차는 1000년대의 마지막 해넘이와 2000년대의 첫 해돋이를 보는 <선셋-선라이즈 열차>라고도 했다. 우리 모임도 <밀레니엄 열차>를 탔다. 나는 열차를 타고서도 <새천년>은 무슨 <새 천 년>, 그저 언제나처럼 한 해가 가는 거지, 하는 말을 되뇌었다. 그러나 천년은 몰라도 한 세기가 간다는 데는 어떤 감회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백 년 전인 1899년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철도가 생겨 기차가 달렸다고 신문은 전하고 있었다.
어쨌든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 동해안으로 가서 <새천년>의 해맞이 행사에 참가했다. 그리고 일행과 신정연휴까지 알뜰하게 보내고 난 뒤 헤어져 소녀가 살았던 작은 도시로 왔다. 전화로 소녀의 죽음을 알려준 친구가 웬일인지 다시는 그 얘기를 꺼내지도 않아주어서, 그것은 다행이었다. 그리고 밤을 지내고 새벽이 채 오기도 전에 나는 선창가로 가고 있었다. 나는 몇십 년 전 그때와 똑같은 길을 더듬어 걷고 싶었다. 바다가 보이는 방이라고 했으나, 골목을 돌아 나와서야 바다였다. 외등이 밝혀진 낯선 도시의 낯선 길이 내 발짝소리에 깨어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바다는 커다란 잠든 고래를 안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처럼 낮게 움직이고 있었다. 멀리 등대에서 불빛이 번쩍, 하고 비쳤다가 빠르게 꼬리를 감추곤 했다. 나는 길고 긴 표류 끝에 혼자 무인도에 도착한 사람인 듯 경계심과 호기심과 안도감이 뒤섞인 채 걸음을 옮겼다. 얼마를 걸어가자 너무 일찍 나왔나 하는 생각은 잘못된 것임이 쉽게 판명되었다. 길은 내 발짝소리에 깨어난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발짝소리에 이미 깨어나 있었으나 아직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사람들이 차에서 채소를 내려 쌓고 있었다.
"선창이 멉니까? 공원은 어느 쪽입니까?"
그 사람들은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나는 그들이 나를 신고하지 않나 걱정부터 앞섰을 터였다. 그 시간에 어디선가 나타나 길을 물으며 두리번거리는 사람을 신고하지 않으면 누구를 신고한단 말인가.
"다 왔어요. 조오기로 가시오. 공원은 이쪽 위고."
남자가 교통순경처럼 한쪽 팔은 뻗치고 한쪽 팔은 위로 들었다.
"고맙습니다."
내가 묻는 곳은 서로 반대쪽에 있었지만, 작은 도시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어림짐작은 하고 있었던 위치였다. 나는 몇십 년 전과 똑같이 선창가를 둘러 공원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었던가. 그렇다면, 예전에 선창가까지는 혼자였던 나는 공원을 오를 때는 소녀와 함께가 아니었던가. 겉으로나마 그때의 광경이 재연되기는 틀린 일이었다. 칠면조는 반드시 죽었을 것이며 풋복숭아의 계절도 아니었다. <어머> 소리를 낼 사람도 이 세상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왜 여기에 있지? 그렇다면 잘못된 것은 전적으로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올 데가 아닌 풍경 속에 내가 들어와 있는 것이었다. 어쩌다 교장 관사로 잘못 들어간 중학생처럼 나는 주뼛거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방파제가 어렴풋이 윤곽을 드러내고 바깥 바다를 건너 먼 곶이 하늘로 뭉툭하게 머리를 치받고 있었다. 그 치받힌 쪽이 잉크 빛으로 물들며 먼동이 트고 있었다. 별들이 소지(燒紙)를 사르고 난 뒤의 재처럼 바다로 흩어져 내리고, 한결 약해진 등대 불빛이 가여운 초혼(招魂) 소리처럼 허공에서 사그라지고 있었다. 문득 어시장의 좌판들이 눈앞에 나타났는가 했더니 어디서 모여들었는지 사람들이 복닥거렸다. 현실은 그렇게 무작위로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내곤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현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게 민망한 듯 슬며시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도미, 광어, 도다리, 민어, 장어, 가오리, 바다메기… 생선들은 예전 그대로였다. 예전에… 소녀와의 공인되지 않은 생활은 알려지는 만큼 또한 은닉되었었다. 나는 수배자처럼 그 방을 드나들었다. 한창 유행하던 불온 서적을 그 방에서 읽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 방으로 가기 위해 사람들 속으로 몸을 숨긴 것처럼 나는 어시장을 지났다. 죽은 물고기들이 가지런히 누워 있는 옆에 아직도 살아 있는 물고기들은 플라스틱 함지 안에서 힘겹게 아가미를 부풀리고 있었다. 비린내가 뭉글뭉글 풍기며 생명의 또 다른 냄새를 일깨웠다. 어느 날, 소녀와 함께 수족관을 구경하고 있을 때, 상어와 가오리가 다가왔었다. 둘 다 입이 아래쪽에 달린 이들 물고기의 이상한 화합이 아름다워서 우리는 놀랐다. 세상은 이렇게도 다른 모습으로 어울려 살 수도 있는 것이었다. 우리도 저런 이상한 화합이 아닐까, 나는 슬펐다.
선창가에 뱃사람들이 들리는 간이음식점이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들어가 장어를 넣고 끓인 해장국에 막걸리 한 잔을 시켰다. 이제 소녀를 찾아가는 순례는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다. 아직도 그곳 어디 자취방에 소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야만 그 만남은 완성되는 것이었다. 나는 기약도 없이 오랜 항해에서 돌아온 듯 마음이 스산하게 설레었다. 오래 전의 그 약속은 그대로 살아 있는가. 살아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그토록 오랜 헤맴 끝에 그곳에 앉아 있을 까닭이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새 천 년>이라고 해서 내가 소녀의 자취를 찾아 아무도 없는 그곳까지 왔을 까닭이 없었다. 주머니에 만 원짜리 지폐를 두둑이 넣어가지고 들어온 뱃사람, 몇 마리 생선을 들고 들어와 스스로 회를 뜨는 뱃사람, 오뎅 국물을 마시는 뱃사람 들 틈에 나는 얼마 동안 앉아 있었다. 날은 어느덧 환히 밝아 있었다.
어시장 한 귀퉁이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꽃장수 아낙네가 눈에 띄었다. 비닐을 둘러친 좌판 안쪽에 꽃을 꽂은 통이 놓여 있고 몇 명의 아낙네들이 어울려 국수를 먹고 있었다. 여러 가지 국화다발 속에 백합과 양란 송이가 수줍게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 꽃을 사러 거기까지 갔던 듯싶었다. <새 천 년>의 내 행적이 모두 정해진 스케줄대로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때때로 삶이 정해진 궤적을 따라 움직인다고 여겨질 때, 어리둥절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될 때, 이것은 필연이다 하고 숙연해질 때, 운명이 거미줄같이 섬세하게 얽혀 있음을 느낄 때, 나는 머리를 스쳐가는 섬광에 그만 망연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꽃장수 아낙네가 셀로판 종이에 말아주는 꽃다발의 의미였다. 그 꽃다발을 사기 위해 나는 오랜 항해에서 돌아온 뱃사람이었다.
말했다시피 길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꽃다발을 들고 공원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꽃다발을 든 내 발걸음은 빨라졌다. 모든 이치는 정해진 대로였다. 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은 바닷가 벼랑을 끼고 나 있었다. 예전 기억을 더듬었으나, 그 길은 새로 단장된 듯 낯설었다. 하지만 나는 내 옆을 따라 걷는 소녀의 발짝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였다. 벼랑 아래서 파도가 희게 일어 다가와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 위로 겨울 아침 공기를 가르며 급히 방향을 바꾸는 갈매기의 날갯짓 소리, 시가지의 어떤 건물에서 유리창을 되쏘아 비춰오는 햇살의 날카로운 소리, 멀리 다도해로 향하는 어선의 발동기 소리, 바닷물 속에서 조용히 깨어나는 물고기의 기지개 소리….
나는 소녀의 발짝소리가 이끄는 대로 길을 벗어나 벼랑 아래로 내려갔다. 돌들이 주르르 구르고 나뭇가지가 옷에 걸려 툭툭 부러졌다. 바다가 넘실거리며 몰려들고 있었다.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무엇 하나 변한 건 없다는 편안함이 마음에 잦아들었다. 나는 더 이상은 내려갈 수 없는 장소에 멈춰 서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정해진 이치대로, 정해진 길을 따라 올 데까지 왔음을 나는 알았다. 누군가 그런 나를 보았더라면 위쪽 길에서 내려온 게 아니라 아래쪽 바다에서 벼랑을 타고 올라온 것처럼 보이리라 싶었다. 나는 벼랑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현기증이 일었다. 그러더니, 풍경이 빙그르르 도는가 하면서, 바닷바람으로 차가워진 눈망울에 하나의 모습이 얼음처럼 들어와 박혔다. 뭐더라? 하는 순간, 나는 놀랐다. 그것은 오래 전에 보았던 탑이었다. 오랜 세월을 항해해오는 동안에도 저 바다 밑에서 변함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탑이 분명했다. 나는 놀라움으로 꽃다발을 바다로 향해 던졌다. 꽃다발은 벼랑 한쪽에 부딪혔다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어머, 소리가 <새천년>의 하늘을 가르고 있다고 들렸다.
"탑 속에 뭐가 있는지 알겠어?"
나는 예전의 내가 되어 소녀에게 물었다.
"뭐가 있어?"
"뭐겠어?"
나는 되묻고 나서 소녀를 보았다. 그리고 꽃이라고 말하려던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약속>이라는 말이 신음처럼 뱉어져나왔다. 그 말이 어떻게 나왔는지 어리둥절한 가운데서도 나는 탑의 모습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래, 맞아, 약속."
다시 매듭짓듯 나는 말했다. 그와 함께 과거, 현재, 미래가 둥글게 꼬리를 물고 탑 속에서 나와 한 마리 날짐승처럼 퍼덕이며 허공을 날고 있는 모습이 눈에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