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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사냥

Bollnow 2024. 4. 5. 07:33

여우 사냥

윤후명

 

조계사 앞 길모퉁이를 지나다가 문득 발견한 러시아 문자에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러시아 문자에 상당한 조예라도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므로 이 점에 대해서는 미리 밝혀두기로 한다. , 지난 겨울에 두 달 가량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겨우겨우 알파벳 정도만 더듬거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러시아 문자라고는 해도 정확하게는 키릴문자에서 온 것으로, 가령 중앙아시아 쪽에서는 오래 전부터 쓰여지던 아랍문자를 소련 시대에 러시아 문자로 바꾸면서 그곳의 독특한 토착어를 효율적으로 표기하기 위해 본디 없는 알파벳까지 만든 경우도 있는 까닭에, 나로서는 여간 헷갈리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가게 진열창에 붙어 있는 포스터의 러시아 문자를 보는 순간 마치 신기한 무엇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발걸음을 멈추었던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그것은 내가 서울의 길거리에서 처음 본 러시아 문자이기도 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문자가 무슨 특별한 내용이라도 담고 있는 것이었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한 화가의 이름을 표기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한 폭의 그림을 구상과 추상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그리는 방법을 구사하고 있는 그 나이 지긋한 화가의 이름을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내가 그 이름 표기에서 러시아를 떠올렸다는 사실 그것만이 중요하지 그밖의 것은 아무 상관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그 얼마 전에 그 화가가 러시아 모스크바의 푸슈킨 기념 미술관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개인전시회를 열게 되었다는 신문기사를 보았던 기억도 되살아났다. 불과 2년 전에 저 북방 나라의 정체(正體)가 변하고 그 사이에 세월은 변해서 우리와는 도무지 같은 하늘 아래 살 수조차 없으리라 했던 저들과의 교류가 여기까지 이르렀나 하는 감회가 새삼스러웠다. 그와 함께 순식간에 내 생각은 러시아의 공간 속으로 달려가서, 푸슈킨기념 미술관을 먼저 떠올리고 곧 뒤이어 발간 갈리나 열매가 익어가는 숲 속을 지나고 있는 나를 그려보고 있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화가의 개인전 포스터이고 또 러시아 민속공예품의 그림에 너무도 흔히 그려지는 것이 갈리나 나무와 그 빨간 열매여서 일어난 단순한 연장작용만은 아니다. 나는 지난 겨울에 모스크바에서 푸슈킨 기념 미술관을 보았고,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친구를 만나 우리는 함께 얼어붙은 북쪽 호숫가로 갔었던 것이다. 그 호숫가의 숲 속에도 갈리나의 빨간 열매는 나뭇잎이 떨어진 벗은 나뭇가지에 송알송알 매달려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본 적이 없는 나무였으나 친구는 사전에 까마귀밥나무라고 되어 있더라고 가르쳐주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나는 마치 아이비가 우리말로는 담쟁이덩굴로 된다 하더라도 서양의 아이비가 우리의 담쟁이덩굴은 결코 아니듯이 러시아의 갈리나도 우리의 까마귀밥나무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물론, 러시아에서 욜카라고 하는 전나무는 우리의 전나무와 같고 사스나라고 하는 소나무는 우리의 소나무과 같고, 베료자라고 하는 자작나무는 우리의 자작나무와 같았다. 그렇지만 까마귀밥나무에는 까마귀가 들어 있는데, 그곳 까마귀가 우리의 까마귀보다 훨씬 크고 어딘가 더 의뭉스러워서 갈리나를 우리의 까마귀밥나무로 부를 수가 없다고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야 아무려면 무슨 상관인가. 지금 돌이켜보건대 그와 내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났으며, 예기치도 않게 그곳에서 몇 백리나 먼 북쪽의 호숫가까지 갔었다는 그 사실만이 중요한 추억으로 남아 있을 뿐인 것이다. 아니, 이렇게 돌이켜 보니 그와의 그 겨울 만남이 마치 우리들 삶의 갈리나 열매처럼 어떠한 혹한에도 생명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음을 확인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넌 여전히 원예반 학생이구나. 식물에 대해 그렇게 러시아 숲은 실히 굉장해 화가들이 그린 자작나무숲도 좋은데. 좋은데 어떻다는 것일까. 나는 지굴리 승용차의 핸들을 잡고 앞을 응시하고 있는 그를 곁눈질했었다. 그리고 나를 고등학교 시절 원예반원이었다고 해서 지금도 여전히 원예반원이라고 한다면 그는 무엇일까 하고 묻고 싶은 충동이 일었었다. 그렇다면 그는 아직도 여전히 혁명을 신봉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물어야 하는 것이었다. 고등학교를 같이 졸업하고 또 학과는 다르더라고 대학에 들어간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꽤나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오랜 세월을 알아 왔었다. 하지만 그와 나는 대학 시절부터 벌써 다른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점에서 고등학교의 동창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어울리지 못했을 사람들이었다. 때론 함께 술 마시고 밤을 지샌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사회의 개혁을 내게 역설했고, 그의 뜻에 전폭적으로 다르지 않는 나를 안타까워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른바 투쟁의 현장에 직접 몸던져 싸우지 못하는 나약한 자기 자신의 태도를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나는 이상주의자라고 명명하고 있었는데,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몹시 불쾌한 표정을 짓곤 했었다.

그를 만나자마자 바로 그 다음날로 북쪽 호숫가를 향하여 가게 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이야기만으로는 서로가 괴로울 뿐이었을 것이다. 프리발치스카야호텔에서 그에게 전화하고, 로비에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것이 걱정이었었다. 차라리 만나지도 말고 내 일정대로 떠나가고 말았을 것을, 하는 후회조차 일었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지. 우선 푸슈킨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거다.

나는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집착을 보였던 러시아혁명에 대해서는 이제 새삼스럽게 이야기할 계제도 아닐 듯했다. 그가 이태전에 서울을 떠날 때도 그것은 개방이 시작되었을 뿐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포기하지 않은 나라였다. 그 나라에 갈 길이 빠꼼히 열린다는 것을 알자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이리저리 뛰어 다녔으며 마침내 러시아어 연수를 명분으로 서울을 떠났던 것이다. 그가 배우고자 했던 것이 단순히 어학이 아니었다는 것은 너무도 확실했으나, 언제부터인가 별거에 들어간 부부생활이 그를 떠나가게 한 것에 어느 정도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나이 40을 훨씬 넘어서도 그가 새로운 세계를 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존경할 만한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이상주의자가 틀림없었다.

호텔 뒤로 보이는 저 바다는 발틱해일까, 핀란드만일까. 하고

나는 눈이 오락가락하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푸슈킨이라는 한 시인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를 만나면 왜 그 시인을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는지 모르겠지만, 여행자 일행이 버스를 타고 핀란드로 떠나기 위해 사라져가고부터 나는 그런 대안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졌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겨울 날씨는 거의 매일 하루종일 잔뜩 찌푸려 있고 눈이 오락가락한다. 그 눈속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나는 엉뚱하게도 모스크바에서의 푸슈킨 기념 미술관부터 머리에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로서는 그 위치가 정확하게 모스크바의 어디쯤인지를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한겨울에도 김이 무럭무럭 나는 그 노천 수영장이 있는 부근이었다는 것만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미술관에 들어가기 전에 수영장 앞을 지나가는 인투리스트 버스 안에서 안내자는 밤에 그 수영장에 오면 좋은 구경을 많이 할거라며 싱겁을 떨었었다. 그야 수영장에서 좋은 구경거리라면 사람의 벗은 몸이 아니겠는가만, 그러자 곧 푸슈킨 미술관 앞이었다. 푸슈킨이라는 시인의 이름이 러시아에서는 얼마나 큰 이름인지는 그 나라에 가본 사람만이 안다. 나 역시 러시아 땅을 밟기 이전에는 푸슈킨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와 <대위의 딸>이라는 소설로서만 그럭저럭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주 오래 전에, 시내버스에 차장 아가씨들이 있어서 요금을 받던 시절에, 버스 안 문짝 위에는 어김없이 그 시가 손바닥 반 만한 거울과 함께 나란히 붙어 있었다. 그 무렵, 늘 만원버스에 올라탈 때마다 그 시가 적힌 종이쪽지가 바로 코앞에 들이밀듯이 있는 것이어서,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도 그 시를 욀 수가 있는 것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은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오늘은 언제나 슬픈 것--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지나가는 것,

지나간 것은 또 다시 그리워지느니.

그 시절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시가 얼마나 위안이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어도, 웬일인지 지금은 잘 눈에 띄지 않는 걸 보면 세월은 그만큼 좋아졌고, 따라서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이 그만큼 줄어들었음을 방증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그 시절 어린 나이에도 이 시가 시로서 별 묘미가 없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무엇일까, 시란 감미롭고 애절한 노래 여야 하지 않을까 여기고 있었던 듯싶다. 다시 부연하면 그것은 내가 시란 언어 미학이 무엇보다도 돋보여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 되겠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럼 이 시가 언어 미학의 측면에서 문제가 많다. 즉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어눌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는 나로서는 매우 어렵게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러시아에 가서 듣고 본 결과, 푸슈킨은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로 가장 위대한 한 시성(詩聖)의 위치에까지 올라있는 사람이었고, 그 시는 번역해서는 도무지 맛을 알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운()을 그대로 옮겨 놓은 수 없을 때는 더욱 그렇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누군가 말했던 대로 역시 번역은 반역(反逆)인가 하고 참담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어쨌든 좋다. 나는 지금 푸슈킨의 시를 더 이상 이야기할 실력이 없는 것과 아울러 다행히 그럴 마음도 없다. 다만 한국의 한 화가가 푸슈킨기념 미술관에서 그림 전시회를 열었다는 사실과 연관하여 내가 그전에 그곳에 가서 보았던 여러 그림들이 선명하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곳에는 어느 미술관이나 마찬가지로 많은 화가들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프랑스 쪽의 것이 유난히 많다는 사실로서, 2,3층 전시실에는 대충 꼽아도 들라크르와나 밀레, 모네를 비롯하여 푸생, 쿠르베, 코로, 피사로, 르느와르, 드가, 고흐, 고갱, 세잔, 루소, 시냑, 드니, 뭉크, 위트릴로, 동겐, 루오 등등에 피카소도 있었다. 거기서 나는 비로소 루소의 <시인과 뮤즈>를 보았다고, 고흐의 ,<오베르 풍경>을 보았고, 피카소의 <청색시대>를 보았다.

러시아에서는 식당이나 극장이나 미술관이나 한겨울이든 언제든 입구 가까운 방에서 외투를 벗어 맡기고 들어가도록 되어 있어서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그것이 귀찮아서 나는 그만 하마터면 그 미술관의 관람을 놓칠 뻔하기도 했었다. 그 숱한 명소들도 어차피 다 둘러보지 못하는 판국에 미술관마다 일일이 들를 시간적 여유가 없기도 했었다. 아니, 실상 솔직히 말해 미술관이란 예전부터 내게는 들르게 되면 마지못해 들르는 곳에 지나지 않앗다. 그러니까 러시아에서는 세계 3대 미술관의 하나라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만을 수박 겉핥기로 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던 것도 속일 수 없는 일이다. 푸슈킨이 시인인데 그 이름이 붙은 미술관이 뭐 그리 대단하랴 하는 선입관도 충분히 작용했었다. 그런 것이 싫었었다. 나는 그때 싸구려 모자까지 사 쓰고 있었다. 북국의 겨울에는 모자가 필수였다.

그런데 몇 가지 일정이 어긋나면서 그 미술관이 끼어들게 된 것이었다. 소련이 무너지고 나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 그 사회는 여기저기서 삐걱거리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역력했다. 그래서인지 몇 군데 방문을 하려 하면 한두 군데는 까닭 모르게 문이 닫혀 있기 일쑤였다.그러므로 부득이 행선지를 그때그때 바꿀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어느 날 오후, 나는 그 미술관 앞에 내려놓아졌고, 느닷없이 많은 프랑스 화가들 앞으로 안내되기에 이르렀다. 안내자의 설명에 따르면 그 미술관에는 유명한 옛 조각품들도 엄청나게 많은데 실은 이것들을 미술 교육을 위해 새로 만들어놓은 복제품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림들은 모두 진짜 라고 그는 덧붙였다. 북한에서 꽤 오랫동안 무슨 공부인가 했다는 그 러시아인 안내자가 진짜라고 우리말을 하는 것에 어떤 함정이 있었는지 모른다. 아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다른 것이 가짜라는 데 더욱 함정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나는 비너스며 다비드며 1,2층의 가짜들을 건성으로 지나쳐 곧장 3층으로 뛰어 올라가다시피하여 그 진짜 들을 보고 있다는 감동에 사로잡히기 시작했으니, 이는 나 자신도 믿지 못할 강렬한 충격이기도 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세계적인 명작이라는 그림 앞에서도 내가 그토록 감동에 사로잡히기는 처음이었다. 그 많은 그림들이 하나같이 살아 움직이는 주체로서 내게로 다가와 나름대로의 진실을 속속들이 전달해주고 있지 않은가. 화폭에 그려진 집들과 나무들과 사람들과 짐승들이 너무도 생생한 현실인 것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상징으로 그린 대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고 나는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이를테면, 루소의 [재규어의 공격을 받는 말]에서처럼 괴기스러운 잎사귀나 나무줄기들이 뻗어 있는 숲조차 가장 현실적인 숲으로 다가왔다는 뜻이 된다. 그런 점에서 그림을 직접 제시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으나, 간단히 설명하면, 그림의 중앙에는 옆으로 앞발을 든 말이 갈기를 날리며 머리를 앞으로 향해 있고 그 목덜미 아래로 재규어가 거꾸로 달려들어 붙어 있다. 재규어의 오른쪽 앞발은 말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있는 가운데 말의 검은 눈과 코가 당황하고도 슬픈 표정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역시 화가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것은 초록색의 길고 삐죽한 잎사귀들의 기괴함이다. 고생대나 중생대의 무슨 식물들 같은 이 잎사귀들은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듯이 보이며 그 숲 사이에 원색적으로 빨갛고 노랗고 흰 꽃이 강조되어 있다. 다시 말하건대, 굳이 이렇게 돼먹지도 않은 설명을 늘어놓는 것은 기괴한, 비현실적 숲조차 마치 이 세상 현실의 숲처럼 내게 다가왔다고 풀이하고 싶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여기서 왜 잘 알지도 못하는 미술이라는 것을 붙잡고 이 따위 설명을 늘어놓는 것일까. 여기에는 위에 든 화가들의 개개의 작품을 떠나서 한마디로 미술에의 눈뜸을 말하고자 하는 욕구가 무엇보다도 크게 도사리고 있음을 고백해야 한다. 누가 그것을 유도하지도 않았고 나 또한 의도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이야말로 갑작스럽고 뜻밖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것에 감히 돈오(頓悟)라는 낱말은 갖다 붙여도 좋다고 이제 말한다.

그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림 앞에 서면 웬지 주눅이 들어 움츠려들곤 했었다. 그래서 머쓱해져서는 그림이란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느낌이 우선이다라는 말을 배경으로 흠, 제법 그럴 듯하군 하는 표정을 짓곤 했던 것이다. 무엇이든 모르면서 짐짓 안다는 몸짓을 지어야 하는 것처럼 비참하고 구역질나는 일은 없는 것이다. 특히 그것이 자기 자신일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말한다 해서, 미술에의 눈뜸이라거나 돈오라거나 하고 설명을 늘어 놓는다해서, 내가 그 세계를 속속들이 알았다고 하는 것은 아님은 물론이다. 그것은 그런 내가 스스로 대견하고 가상하여 끌어다 붙인 표현이라는 편이 오히려 솔직하다. 그러므로 그림의 세계가 확고하게 있음을 인정하는 선에서 여전히 문외한일 수밖에 없는 나를 이끌고 그 미술관을 나왔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푸슈킨 기념 미술관이었다.

 

이야기를 다시 푸슈킨으로 되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미술관 안에 어떠한 그림이 있든, 그것이 실제로 가짜 든 진짜 든, 또 내가 어떠한 충격을 받았든, 애초부터 그것을 이야기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는 그 경험 때문에 푸슈킨이라는 이름을 새로이 받아들이게 되었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뒤 며칠 동안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푸슈킨의 박물관이나 기념관을 돌아보는데 남다른 정성을 기울였다. 좀더 정확하게 밝히면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단체 여행자 일행이 서울로 되돌아갈 때 거기서 떨어져나와 드디어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여행사 사람에게 푸슈킨에 관한 것을 볼 수 있는 대로 다 보자고 귀찮도록 졸라댔던 것이다. 여행사에서 임의로 모아온 여행자들의 눈총이 때로 곱지는 못했으나, 그들은 푸슈킨이 러시아에서는 표트르 대제와 레닌과 함께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라는 내 설명에 마지못해 못들은 척하고 따라 주었었다. 하기는 그들은 러시아를 한 번 둘러본다는 게 중요할 뿐 무엇을 꼭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런 그들도 푸슈킨이 귀족으로서 시인이며, 또 이름난 바람등이었다는 등, 여기저기서 종합해 얻어듣고 나서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었다.

이렇게 푸슈킨 기념 미술관은 나로 하여금 푸슈킨의 세계로 인도한 첫 관문이었던 셈이다. 그 푸슈킨 기념 미술관 이 서울의 조계사 앞 길모퉁이를 지나다가 문득 발견한 러시아 문자를 보고 먼저 머리에 떠올랐다고 나는 앞에서 밝힌 바 있다. 분명히 '먼저'라고 밝힌 것이다. 그러니까 그 밝힘에는 '먼저'에 대응되는 '나중' 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말이 그렇지 여기서 '먼저''나중'은 거의 시차가 없었다고 해도 좋다. 푸슈킨 기념 미술관과 북쪽의 호숫가는 그렇게 동시에 내게 다시금 환기되었던 것이다.

그가 이태 전에 러시아로 훌쩍 떠나버린 것도 몇몇 친구들 사이에서는 쉽게 믿기지 않는 일이었으니, 그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시간이 지나서 내가 러시아로 그를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은 나로서도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왕래가 무척 빈번해진 최근에 와서는 이런 느낌은 그야말로 촌티가 난다고도 말해질 수 있다. 그러나 갓 수교를 한 지난해까지만 해도 아직은 그곳은 미지의 나라였다. 우리에게 러시아가 어떤 나라인가 말이다. 지금껏 우리는 남북으로 나라가 갈려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으며, 예전에 북쪽의 후견자 노릇을 하던 그 붉은 소련을 위해 외치던 만세라는 뜻의 러시아말 '우라'가 나이든 사람들의 귀에는 아직도 쟁쟁하다고 하는 게 아니던가 말이다.

'우라, 레닌! 우라, 스탈린'

불과 네댓 살의 나이에 육이오 전쟁을 겪어야 했던 내게도 붉은 군대의 만행은 귀에 익은 것이었다. 그들은 아무 집이나 들이닥쳐서는 밥을 요강에 퍼담아 먹는가 하면 물건을 빼앗고 여자들을 겁탈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빵을 글쎄 홀레바리라고 한단다. 어머니는 몇 번이나 그렇게 말했었다. 그것은 짐승들의 교미를 일컫는 낱말인 홀레와 연관짓는 말이었다. 먹는 빵을 홀레바리라고 하는 판이니 그들이 홀레붙기를 얼마나 밝히겠느냐는 암시가 그 말에는 깃들어 있었다. 러시아에 가서 상점에 줄을 서서 빵을 사려고 했을 때 예전에 어머니로부터 들은 홀레바리라는 말이 자꾸만 입밖으로 나오려고 하는 걸 나는 애써 참아야 했다. 하지만 정식으로 그는 빵을 홀레브라고 하니까 홀레바리라고 해도 아주 먼 발음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자기네들도 골치 아프다고 머리를 흔드는 그 문법의 어렵기 짝이 없는 격()변화를 염두에 둔다면 홀레브든 홀레바리든 문제가 차라리 안되었다. 요컨대 문제는 빵을 무엇이라고 하느냐가 아니라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무엇이냐는 데 있으며, 바로 그 점에서 러시아가 우리에게 무엇이었느냐 하는 물음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은 내가 지금 거론할 문제는 아님을 나는 안다. 나는 대한민국의 군정이 드디어 종식되려고 할 무렵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다가오고 있던 어느 초 겨울날, 서울을 떠나 러시아로 향했고, 공부를 하겠다고 미리 그곳에 와서 머물러 있는 친구를 만나게 되었을 뿐인 것이었다.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내가 푸슈킨의 자취를 찾아다녔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그런 중에 나는 부지런해 이름난 묘지들도 둘러보아야 했으며 또 서민생활의 이모저모도 살펴야 했다. 그 여행은 일종의 수학여행과도 같았다.

10년 전에 외국에 난생 처음 나갔다 돌아오던 때는 비행기가 소련의 영공을 통과하지 못하는 관계로 알래스카를 거쳐 이른바 로미오20 항로를 날아왔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기에도 같이 있고, 그 항로에 로미오20이라는 고유명칭이 붙여져 있다는 것을 안 것은, 내가 그 항로로 돌아온 지불과 일주일 뒤에 역시 그 항로로 오던 비행기가 끔찍한 사고를 당한 일이 있고서였다. 사고 비행기는 어찌된 셈인지 항로를 이탈해 소련 영공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민간 비행기임에도 불구하고 그만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을 받아 모네론이라는 섬 부근 바다에 격추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수수께끼같은 사건은 그 뒤에도 여러 번 신문과 방송에서 떠들썩했으나 내내 전모가 밝혀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그 비행기는 내가 타고온 비행기와 불과 일주일 상관으로 같은 시간에 같은 항로를 날아오던 같은 항공사의 것이었다. 어쩌면 바로 그 비행기일지도 몰랐다. 나는 공연히 운명이라는 낱말을 머릿속에 굴려보며 어줍잖게 심각한 척하곤 했었다. 어림없는 일인 것이다. 나는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었던 데 지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자 과연 세월은 바뀌었음을 여실히 알 수 있었다. 비행기는 비록 중국이나 북한을 지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당당하게 시베리아 동토지대를 지나고 우랄산맥을 넘어서 북유럽 평원을 날아갔다. 그리고 나는 그림들을 보았고, 푸슈킨을 다시 알았다. 그런데 프리발치승카야 호텔의 로비에 모습을 나타낸 그는 나와 악수를 나누고 나서 느닷없이 내게 내일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데 같이 가겠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여우 사냥을 가기로 돼서 말아.

그는 이빨을 드러내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여우, 여우라니?

나는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해서 마주 보며 웃었다. 아마 나도 그처럼 이빨을 드러냈을 것이다. 물론 그 조금 전에 전화를 통해 서로 간단한 안부를 묻기는 했어도 만나자마자 그의 입에서 나온 여우 는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여우 는 순식간에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여우를 잡으러 가자고 주차장지기가 날짜를 정했어. 벌써 며칠 전부터 나왔던 얘긴데 그게 내일이 됐어. 아무튼 나 있는 데로 가자.

그가 호텔 앞 경사진 시멘트 길을 앞장서 걸어 내려와서 작은 승용차 앞에 이르기까지 나는 주차장지기가 누구를 말하는지, 그게 무슨 뜻인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가 러시아에서 승용차를 굴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치 못한 일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차에 올라타고 나서 그가 처음 설명한 것이 문제였다. 러시아에서는 승용차를 한 번 사면 20년이고 30년이고 굴리는데 인플레가 어찌나 심한지 차는 고물이 돼도 값은 더 오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차를 가지고 편리를 도모할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손해를 안 보니 일석이조가 아니냐는 지론이었다. 그 말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그가 이런 말을 예사로 하고 있는 것에 나는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인플레를 이용해서 편리를 도모하고 손해를 안 보겠다는 말을 하고 있단 말인가? 그것이 과연 그란 말인가?

돈도 못 버는 나약한 봉급쟁이로서의 한 자본주의자인 내게 혁명을 이야기하며, 자본이 자본을 낳은 자본주의의 못된 속성을 매도하던 그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지난 60년대의 어느 날, 이규호 선생이 비밀스럽게 나누어준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의 독일어 원본을 그에게 갖다준 것도 나였는데, 그때 철학과도 4학년이나 되어서야 이제 겨우 이걸 읽으라고 나누어 주더냐고 비웃던 그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그이 부부관계가 아마도 경제 문제로 비롯하여 삐걱거리기 시작했을 때, 어쩔 수 없이 중간에 섰던 나에게 쁘미브르즈와 끼리 잘들 해보라고 막말을 하던 그가 아니었던가 그 말이다. 그는 가져온 몇 푼 돈이 다 떨어지면 나중에 그 차를 팔아서 얼마 더 견딜 수 있겠다고까지 덧붙였다.

차를 주차장에 안 갖다 놓으면 밤중에 바퀴도 빼 가. 유리를 깨고 차안을 뒤지기도 하거든. 그래서 주차비가 들어도 갖다 놓지.

그 주차장을 지키는 경비원 중에 볼로자라는 퇴역군인이 있어서 그로부터 여우 사냥을 제의받았다고 그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거기까지의 이야기 중에서 내가 못 알아들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가 차를 사서 몰고 다니는데 그 차를 놔두는 주차장의 볼로자라는 사내가 내일 여우 사냥을 가자고 했다는 것이었다.

여우 사냥은 많이 가는 건가?

나는 궁금해서 물었다. 여우 사냥 그 자체도 궁금하기 짝이 없는 일인 데다가 그와 내가 그곳에서 만나서 진정 나누어야 할 첫 대화가 그것이어야 하는지 못내 얼떨떨하기만 한 것이었다.

많이들 간다고 해. 난 이번이 처음이지만.

어디로 가는데?

그렇게 멀진 않다는데 어때? 같이 가는 거지? 며칠 여유는 있다고 했지?

여유야 있지.

서울을 떠나올 때부터 그런 시간적인 여유는 가지고 있었다. 어디서 며칠을 어떻게 보낸다는 일정은 다른 여행자 일행에서 떨어져 나온 몇 시간 전부터 내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제는 돈이 허락하는 한 내가 정하기에 달려 있었다. 러시아 당국에서 내게 발급한 비자는 우선 2개월 동안의 체재를 허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여우 사냥을 위한 여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마당에 그를 따라나서지 못할 까닭 또한 없는 것이었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북위 60도에 자리잡고 있는 도시이다. 이것은 거울에는 태양이 뜨는 시간이 몹시 짧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 대신 여름에는 거의 하루 종일 해가 뜨는 백야(白夜)가 계속된다. 프리발치스카야 호텔에서 만난 우리는 먼저 주유소에 들렀고, 몇 군데 가게에 들러 보드카와 말보로 담배와 쇠고기와 야채를 샀다. 그는 나를 위해 자취방에서 안주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그러는 동안에 벌써 네바강 위로 짧은 겨울 햇빛은 스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유빙(流氷) 조각들이 떠서 하류로 밀려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왜 도착하자마자 전화하지 않았느냐고 물었고, 그동안 볼 만할 곳은 다 보았는냐고 물었다. 나는 몇 개의 궁전과 몇 개의 박물관을 헤아렸다. 그 중에는 물론 푸슈킨 기념 미술관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꼭 말해야 할 곳을 말하지 않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말리프로스펙트() 한 모퉁이에 있는 아파트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나는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가 한국식 찌개를 끓이겠다고 가스렌지에 성냥불을 긋는 것을 보며 나는 먼지 보드카 병마개를 열었다. 그 보드카는 라스푸틴이라는 제정 러시아 지대의 괴승(怪僧)의 이름을 상표로 프랑스에서 만든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에게 말하고 싶은 그 한 곳의 장소를 혼자 생각하고 있었다.

그저께 저녁, 여행자 몇 명은 즉흥적으로 핀란드 국경 쪽으로 택시를 몰아 갔었다. 근교의 숲과 호수를 보자는 것이었는데 안내자가 느닷없이 레닌의 은신처를 가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던 것이다. 그곳은 눈이 뒤덮인 숲과 호수가 있는 곳이라고 했다. 마침 혁명기념일인 117일이 처음으로 아무런 기념행사 없이 지난 지 한달 정보밖에 되지 않았고, 우리는 레닌에 대해 뭔가 호기심과 부담감을 여전히 씻어 버리지 못하고 있는 참이었다. 아니, 우리라고 하는 표현에는 조금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아니라면 나 혼자라고 하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레닌이 상트 페테르부르크 근교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혁명을 지휘하고 있었다면 그것이 언제였을까? 그는 오랫동안 외국을 전전하며 황제에 대항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혁명에 승세를 잡아 핀란드역으로 개선하였다. 그러나 여기까지의 과정도 복잡하기 그지없으며, 그 뒤의 과정도 그전에 못지 않게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아마도 혁명 세력 사이의 알력으로 숨막히는 투쟁이 벌어졌을 무렵 그곳에 은신처를 마련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되었다.

그 근교의 땅은 표트르 대제가 핀란드로부터 빼앗은 땅으로, 어딘지 모르게 핀란드의 색채가 짙다고 했다. 이를테면 네바강의 네바부터가 핀란드어로 새롭다는 말이었다. 눈은 줄기차게 쏟아지며 차창 밖을 흐려놓았고 오른쪽으로 서행해 가는 열차가 숲가를 달려가고 있었다.

높은 전나무들의 우듬지에서 하늘은 경계 없이 뿌옇게 사라지고 있었다. 열차 건널목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지자 칙칙한 숲속 길이 뻗어나갔다. 그 숲 속에 버섯이 잘 자라서 다른 계절에는 그걸 따러들 나온다고 안내자는 말했으나 끝도 보이지 않는 그 어두운 숲 속에는 이상하고 무시무시한 짐승들이 들끓고 있을 것만 같았다.

날은 어느덧 어두워졌다. 그리고 곧 왼쪽 길로 접어들자 앞에 단층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괴괴한 어둠에 휩싸여 있는 집은 한눈에 보아도 폐가처럼 버려져 있었다. 앞의 작은 광장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방문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던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곳은 이제 지키는 사람조차 없이 버려져 있는 어둠의 집이었다. 나는 왠지 어리둥절하고 씁쓸한 느낌에 사로잡혀 이곳저곳 기웃거리다가 앞쪽 계단에서 독사진 한 장을 부탁해 찍고는 뒤돌아서는 수밖에 없었다. 혁명의 흔적조차도 엿볼수 없는 혁명 유적지는 서글프기조차 한 곳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역사의 실체란 말인가. 살아 있다는 그 사실밖에 역사의 실체는 허상이란 말인가. 과연 그렇게 밖에 아닐 것인가 하고 내 관념 앞에 나는 허둥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저 레닌의 후계자들은 무엇 때문에 극동의 작은 나라에까지 엄청난 비극을 강요했단 말인가.

그곳에서 더 나아가 숲 속까지 갔다가 돌아오면서도 나는 시종일관 의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가 그곳에 다녀왔다는 것을 그에게 말하지 않은 까닭은 사실 단순한데 있을 것이다. 그가 바라보았던 세계가 그토록 참담하게 부서져 있는 것을 내가 새삼스럽게 환기시킬 필요는 없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것을 우정이라고 굳이 말할 수 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 나는 그를 만난 것이 잘한 일인지 어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독한 보드카만 연신 들이켰다. 그와 나눌 대화는 얼마든지 쌓여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만난 순간부터 내 마음이 열리지 않고 있다는 생각에 괴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중에 푸슈킨에 대한 평가를 그를 통해서 다시 확인할 수 있던 것이 그날 저녁의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다른 이야기에는 얼마쯤 열을 올렸다. 그러면서 <청동의 기사>라는 시를 몇 줄 해석해주는 친절도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내일 아침에는 일찍 서둘러야 된다고 말하고는 며칠 여유는 있다고 했지? 하고 다시 물었다.

그를 만나면 첫날밤부터 많은 이야기를 나눌 것같이 여겨졌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튿날 여우 사냥은 가기로 했다는 것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한다면 얼마든지 핑계는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핑계일 뿐인 것이다. 과거에 우리는 다음날 학기말 시험을 앞두고도 밤새워 무슨 이야기인가로 날을 밝히지 않았던가 말이다.

언젠가는 그 무렵 서로가 쫓아다니던 여자애들의 이야기로도 그 밤을 새워졌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 세계의 몰락을 놓고서도 여우 사냥 때문에 일찌감치 잠을 청하게 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나중에 여자 문제에 실패자라는 공통분모를 갖게 된 것이 그 여자애들 때문은 결코 아니었으나 그 여자애들의 문제는 한동안 우리의 운명에 어떤 예언처럼 작용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 간단한 실연이 우리의 우정을 묶어주는 구실을 했던 것이다. 우리가 서로 친구였던 것처럼 그 여자애들도 서로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와 나는 그때 서로를 갱생회(更生會)회원이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이튿날 우리는 북쪽의 호숫가로 떠난 것이었다. 일행은 우리 둘과 주차장지기 볼로자와 그 친구 유라였다. 북쪽의 호숫가라고 단숨에 말하고는 있지만, 그렇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우리가 알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볼로자는 여우 사냥의 목적지가 근교 아니라고만 말했었다고 했다. 그래서 친구도 얕잡아 보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시를 빠져나오기 전에 볼라자가 휘발유통을 하나 더 준비해야 된다고 했을 때부터 근교라는 말의 뜻은 수정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제 하나의 속담이 동원되어야 한다. 그것은 러시아에서는 알콜 40도짜리 술은 술이 아니며 400킬로미터 거리는 거리가 아니다 라는 속담인 것이다.

모스크바까지도 가보긴 했는데 기름을 저렇게 또 싣자는 걸 보니 여간 거리가 아니겠는걸. 친구도 그제서야 안색이 달라졌다. 러시아에는 도시 바깥에는 주유소가 없어서 멀리 여행하자면 휘발유를 그렇게 싣고 간다는 것이었다.

위험하지 않을까?

나는 걱정이 앞섰다. 내가 이렇게 물은 것은 눈길을 달려가는 그 자체보다도 실은 여러 가지 포괄적인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러시아에 발을 딛고 나서 곳곳에서 듣는 것이 그곳 상황의 불안에 대해서였다. 여행자들, 특히 한국 여행자들이 처하는 위험은 강조되었다. 한국에 있을 때도 갖가지 불상사들이 보도되었었다. 한국 여행자들은 달러를 많이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행자로서 지켜야 할 점을 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그곳은 남의 나라였다. 문화와 관습이 다른 것이었다. 특히 집시들은 어디서나 어려운 상대로 이름나 있었다. 모스크바에서는 여행자 일행이 집시들한테 둘러싸여서 봉변을 당하는 것을 직접 목격한 일도 있었다. 여우 사냥을 함께 가는 사람들이 비록 집시들은 아닐지라도 그들은 이국인이었다. 볼로자와 유라는 모두 퇴역 장교라고 했다.

나는 그 순간 예전에 한반도에 와서 홀레바리 를 퍼뜨린 그 군대를 연상했는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그들은 엽총을 한 자루씩 절거덕거리며 들고 있지 않은가.

믿어 보는 거지, .

하기야 우리는 이미 떠나온 것이었다. 나 또한 이제껏 살아오면서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마다 이것은 운명이다 하고 의외로 쉽게 체념하는 동시에 그만큼의 오기로 무장하는 버릇을 키워왔음을 상기했다. 그렇다. 우리는 이미 떠나온 것이었다. 이런 비장한 심정은 이제는 우스꽝스럽게 들릴 테지만 그때로서는 너무도 절박한 것이었다. 이런 배경에 러시아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자리잡고 있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어려운 경제 사정도 충분한 정황 설명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아니, 우리나라에서도 나는 서울 뒷골목에서 깡패들에게 위협받고 주머니를 털린 부끄러운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볼로자를 길안내로 운전석 옆에 앉히고 나와 유라를 뒷좌석에 앉힌 채 자동차는 북쪽으로 달려갔다. 도시를 벗어나자마자 2차대전 대 이른바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으로 알려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을 지나고 있다고 볼로자가 말하는 것을 친구가 내게 옮겨주었다. 눈이 또 뿌리기 시작해서 시야가 흐려 있었다. 높은 나무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그 뒤의 풍경을 하늘까지 가로막고 있었다. 눈발 속에서는 그 나무들도 아득한 방책 같기만 했다. 그곳에서 독일군을 맞아 싸우던 양쪽 병사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고 했다. 그런 말끝에 나는 담배를 꺼내 볼로자와 유라에게 권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담배를 너무 부족하게 가지고 왔음을 깨달았다. 담배가 골초인 나는 거기에는 꽤나 신경을 쓰는 편이지만, 그때까지 벌써 다른 두 사람에게 몇 대씩을 권했는지 몰랐다. 그들도 나 못지 않은 골초였고, 내가 권할 때마다 한 번도 사양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동차가 유럽 최대의 호수인 라드가 호수 옆을 지날 때쯤은 눈발이 더욱 거세어졌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친구는 그날 기온이 영하 23도를 기록했다고 말했었다. 길은 얼어서 미끄럽기 짝이 없었고 그 위에 다시 눈이 쌓이고 있었다. 그 길을 작은 승용차로 달려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모험인가는 겪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그 실상을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 눈길은 자동차 바퀴로 자국이 나게 되어 있는데 가는 차와 오는 차가 그 좁은 길에 바퀴자국을 세 줄로밖에 내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가는 차와 오는 차가 마주쳐 비켜갈 때는 가운데는 한 줄밖에 없는 바퀴자국을 간신히 스치다시피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 눈길에서 차들은 마주쳐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간다. 다른 차가 앞에서 달려올 때마다 친구는 진땀이 바짝바짝 난다고 했다. 게다가 러시아에서는 웬일로 바퀴에 체인을 감은 차를 거의 보기 힘들다. 우리의 작은 승용차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태에서 라드가 호수를 지나고 머지 않아 볼로프 강을 건너 오른쪽으로 꺾어들었다. 더욱 오지로 접어드는 것이었다.

티흐빈까지 가면 무슨 휴게소라도 나올까?

나는 지도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시계는 벌써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말 애초부터 그토록 무모한 여행길은 없었음이 점점 여실하게 드러났다.

휴게실? 러시아에서는 아무리 달라도 그런 건 없는데.

친구도 여간 난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러시아의 광활한 벌판길을 가면서 우리 식의 휴게소 같은 게 어딘가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것은 어림없는 오산이었다. 그곳에는 작은 상자집 가게인 키오스크 하나 없었다. 나는 우리나라의 전국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토종닭집 같은 곳을 떠올리고 있었던 내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가 고소를 짓씹어야 했다. 목적지가 근교라는 데 그만 모든 일은 뒤틀려버린 것이었다. 아니었다. 러시아 사람들의 생활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들은 끼니도 안 찾아 먹니?

나는 두 사람을 흘끔거렸다.

흔히 그래. 아무튼 어디 가서 오줌이나 누도록 하지.

그도 뾰족한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가 볼로자에게 몇 마디 말을 던졌고, 얼마쯤 지나자 볼로자가 준 이라고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앞쪽의 숲가를 손으로 가리켰다. 친구의 이름의 가운데 글자는 중이었으나, 러시아어 발음으로 받침 아를 말할 수가 없으므로 준이 된 것이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이 상트도 실은 산크트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전나무와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그 숲가에 거친 나무토막으로 만들어 놓은 나무의자가 있었다. 몇 시간을 줄기차게 달리면서도 길가에 그런 곳이 있는 것은 처음이었으나 볼로자가 미리 그 장소를 머리에 그려놓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무의자라고는 해도 그것은 지나치게 약식이어서 굳이 거기까지 와서 머물 까닭은 없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에서 내린 볼로자는 익숙하게 그 나무의자로 가방을 들고 다가가서 거기에 무엇인가 꺼내놓았다. 가방 속에서 나온 것은 종이로 싼 흑빵 한 뭉텅이였다.

, 홀레바리.

나는 저절로 그렇게 말이 나왔다. 친구가 그 말을 자세히 알아들였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내 말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는 아마도 약간의 허기를 달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두께는 꽤 두툼해도 길이가 한 뼘쯤 되어 보이는 그 빵은 넷이서 먹기에는 한눈에도 부족한 것이었다. 그 빵을 꺼내놓은 볼로자는 가방에서 다시 칼을 꺼내 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조각씩 우리에게 권했다. 딱딱한 빵이었을 뿐 발라먹을 것이라곤 아예 없었다. 그 나무의자는 그러니까 나무식탁이 되는 셈이었다. 눈발은 많이 드문드문해져서 희끗희끗 흩날렸다. 저녁 숲가에 서서 우리 네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그 딱딱한 빵을 씹었다. 아무리 경제 상태가 어렵다고는 해도 그렇게 멀리 와서 딱딱한 맨빵만을 씹고 있다는 것은 그네들의 습속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전나무와 소나무의 가지에서 눈덩이들이 후르르 후르르 떨어져 내렸다. 지나가는 차량도 한 대 보이지 않고 다만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길은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멀리멀리 뻗어 있을 뿐이었다. 지도에 의하면 티흐빈을 지나 피칼례보를 향한 길목 어디였다. 날은 그새 어둑어둑 해지고 흰 눈이 내비치는 검은 숲 한쪽으로 갈리나의 빨간 열매들이 마치 흰토끼의 빨간 눈빛처럼 익어 있었다. 딱딱하고 약간 시큼한 흑빵도 자꾸만 씹어감에 따라 들큰한 맛을 내고, 나는 내 생애에 그런 식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믿을 수 없이 고맙게 여겨졌다. 저 전쟁의 참화 밑에서 밀기울로 만든 개떡도 먹고 술지개미도 먹으며 연명한 적은 있지만 그토록 딱딱한 빵 한 조각으로 한 끼의 식사를 한 것은 내 생애에 처음이었다. 게다가 해가 기울면서 날씨가 다시 추워지는지 빵을 씹고 있는 위아래 잇마디가 따그락거리며 부딪치기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 행복했다. 친구는 벌써 200킬로미터를 족히 달려왔다고 했는데도 눈치를 보면 갈 길은 아직 먼 듯했다.

행복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며 수통 속의 차거운 물 한 모금으로 식사를 끝냈다. 그리고 우리는 담배 한 개피씩을 피워 물고 각기 적당한 자리에 뒤돌아 서서 오줌을 누고는 차에 올랐다.

다시 말하거니와 그 여행은 너무나 무모한 것이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 생각은 차츰 공포로 변해 다가왔다. 좀전의 행복감은 금방 어디로 사라지고 피곤이 밀려오며 숲속으로는 이탄(泥炭) 냄새처럼 어둠이 내려 덮이고 있었다. 저쪽 러시아 동토지대의 이탄 속에 죽어 묻혀 있는 아득한 세월 속의 매머드가 어디선가 다시 살아나 움직인다는 생각도 들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동물 박물관에는 엄청나게 많은 종류의 새들과 곤충들과 파충류들, 그리고 공룡의 뼈들과 함께 많은 매머드의 유해들이 생시의 그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시베리아의 만년병 속에 묻혀 옛 화석동물은 죽어서도 썩지 않고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대하고 긴 털이 나있고 크고 굽은 엄니가 뻗어 있는 이 코끼리의 선조가 발견되어 처음 전시되었을 때 구경하러 온 황후는 그 냄새 때문에 손수건으로 코를 싸맸다고 하지 않았던가.

여우를 얼마나 잡으려고 이렇게 먼 길을 가는가 짜증이 난 것은 오래 전부터였다. 하지만 그 짜증이 곧 어떤 의혹으로 바뀌곤 하는 것을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이들의 목적이 어디 있는가, 새삼스럽게 솟는 의구심을 잠재우는 데는 상당한 인내가 요구되었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러시아의 남자들은 직장일 말고 또 무슨 돈벌이라도 해야 하고 여우 사냥은 꽤 괜찮은 돈벌이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한술 더 뜨듯 볼로자는 곰이라도 한 마리 잡으면 그야말로 횡재를 한다고 덧붙였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 밤길을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아득한 일이었다.

그런 어느 순간이었다. 갑자기 차체가 미끈하더니 앞쪽으로 흙 언덕이 다가오고 곧이어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 쿵하는 소리가 나면서 모든 것은 어둠 속에 멎어버렸다. 아찔하여 나는 머리를 들었다 살펴보니 다른 사람들도 얼떨떨한 모습으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언뜻 보아 다행이라 싶었다. 우리는 주섬주섬 밖으로 나가 차체부터 돌아보았다. 라이터 불빛으로 비춰보니 앞의 범퍼 부분이 생각보다 훨씬 많이 망가져 있었다. 얼음길에 미끄러져 차가 거의 한 바퀴 가량 돌아가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말짱한 것과 함께 그만 해도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서 만약 차를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면 꼼짝없이 얼어죽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역시 주차장지기인 볼로자가 함께 했길래 그의 솜씨를 빌린 결과 차는 앞이 잔뜩 우그러진 꼴이나마 용케도 움직일 수가 있었다. 이렇게 하여 다시 차를 몰고 가는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는가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그로부터도 목적지까지는 몇 시간이나 더 달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 그나마 포장된 길을 벗어나 울퉁불퉁한 길로 접어들어 달리게 되었을 때는 드디어 올 데까지 왔다는 마지막 느낌이었다.

친구도 말 그대로 죽을 맛인 모양이었다. 사위는 완전히 칠흑 같은 어둠 속이었다.

오지, 오지, 하지만 이런 데도 있어. 이거야 원.

그 길에서는 그는 아예 얼마나 더 남았느냐는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내가 러시아어로 앞으로라는 뜻이 되는 말이 쁘랴마 라는 것을 안 것은 그 울퉁불퉁한 길을 가는 동안이었다. 그것은 볼로자의 입에 아예 붙어 있는 말이었다. 샛길로 접어들었으니 곧 어딘가 마을이 나타나야만 할 텐데 도무지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목이 타고 속도 쓰렸다.

그렇게 얼마를 또 갔을까. 그제서야 마침내 볼로자가 차를 멈추도록 했다. 그러나 그곳이 마을이라는 느낌은 어디서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 차의 엔진 소리를 들었는지 앞쪽에서 빠꼼히 불빛이 비치고 사람 소리가 들여왔다. 드디어 목적지에 이르렀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허탈감이 밀려왔다. 오기는 왔는데 앞으로 또 무슨 일이 남아 있는지 걱정이 앞섰다. 내가 어찌하여 그런 곳까지 오게 되었는가 한심한 지경이었다. 그것은 마을이 아니라 외딴집 한 채였다.

두 사내가 어둠 속의 집에서 등불을 들고 나오고 커다란 개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집에서 나온 사내 중 하나는 눈에 띄는 텁석부리였다. 러시아 사내들은 서로 아는 체를 하고는 그 집으로 우리를 안내해 들였다. 그것은 굵직굵직한 통나무로만 지은 집이었다. 먼저 나무 층계를 올라가서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 집안 구조는 방 하나에 식탁이며 페치카며 침대가 다 놓여 있는 것이었고, 그런 방이 또 하나 옆으로 나란히 붙어 있는 것이었다.

백년 전에 농도들이 살던 집이라는데.

친구가 볼로자의 말을 통역해주었다. 나는 그 말에 방안 구석구석을 비로소 찬찬히 살펴보았다. 나는 지금 저 제정 러시아의 농노의 집에까지 와 있는 것이었다. 혁명이 일어나고 7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창문 옆에 걸어놓은 램프는 내가 어릴 적 그 안에 짚쑤세미를 넣어 등피를 닦던 그 남포와 같은 것으로, 거기서 비쳐 나오는 흐린 불빛은 방안을 간신히 비춰주고 있었다. 전기나 가스가 흔한 나라에도 그런 생활을 하는 곳이 있었다. 얼핏 보아 식탁이며 페치카며 대강 다 놓여있는 방이라고 했지만 그냥 그렇게 말해서는 피상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낡고 때에 찌들었고, 무엇보다도 방안 전체에는 고약하게 퀴퀴한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동물 박물관에서 맡던 그런 냄새였다. 온통 모든 것이 나무로 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페치카만은 흙으로 부뚜막처럼 만들어졌고 쇠뚜껑이 덮여 있으며 흙 굴뚝이 천정 밖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페치카 덕분에 통나무집 안은 그 추위에도 온기가 훈훈하게 감돌고있는 것이었다.

그 페치카 옆에는 그 방안 풍경 중에 가장 가지런하게 장작더미가 놓여 있었고, 그 앞으로 검은 고양이 한마리가 웅크리고도 있었다. 장작은 자작나무라고 했다. 그리고 벽에는 여러가지 연장들이며 옷가지들이 제멋대로 걸려 있었다.

내가 방안을 곁눈질로 살펴보고 있는 동안에 페치카 앞에서는 늦은 저녁식사가 재빨리 준비되고 있었다.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산다는 텁석부리의 집주인이 먼저 바께쓰 같은 양철통에 감자와 쇠고기 통조림을 섞어넣고 삶다가는 이름모를 들풀을 말린 향료를 집어넣고 얼마동안 더 삶는 것으로 가장 중요한 요리는 장만되었다.그리고 예의 흑빵을 식탁위에 올려놓은 다음집안의 나무바닥 문을 들어올리고는 그 안에서 몇가지 병조림들을 꺼내 놓았다. 오이와 버섯과 토마토에 설탕과 식초와 향료를 넣어 절인 것이었다. 생선 통조림이 오르고 이어서 보드카 병마개가 열렸다.

그것은 훌륭한 식사였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다시금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때까지 말끔히 가시지 않고 있었던 그 의구심과 연관된 것이다. 실제로 나는 여전히 그들에게 완벽한 신뢰를 보내지 않고 있었다. '혹시나 이들이.....?'하는 그 마음은 어쩌면 인류공동으로 이 민족에 대해 갖고 있는 이질감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친구와 함께이고 또 처음에 운명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무 멀리 오지로 와 버렸다는 두려움이 쉽사리 가라앉지를 않는 것이었다

"감자요리에다 넣은 풀이 크콥체카라는 거래. 니가 아까 흥미를 보이는 거 같아서 물어봤어. 맛이 독특하군."

"크롭체카, 크롭체카"

나는 되받아 익혔다.

아닌게 아니라 그랬다. 나는 그의 말대로 원예반원으로서 거기에 흥를 가졌었고, 잎사귀와 줄기와 꽃이 그대로 붙은 그 마른 쑥부쟁이같은 풀을 넣은 감자요리는 놀랍게도 향기로웠다.

그가 내 마음을 읽고 무엇인가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모처럼 말을 건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그도 러시아 사람들의 대화에는 잘 끼어들지 않고 주로 경청하는 입장인걸 보면 얼마쯤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는 것같기도 했다. 자작나무 장작이 탁탁 경쾌한 소리를 내며 불붙고 있는 페치카 위에는 쇠주전자의 물이 끓는 소리가 쉭쉭 들려왔다.

서울을 떠나오기 전 오랬만에 고향친구들을 만난 자리에서 감자를 화에 올리고 웃던 일이 기억에 되살아났다. 어릴 적 그릇에 든 팍팍한 감자가 먹기 싫어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밥알만 고르던 일은 이른바 감자바위로서의 공통된 경험이었다. 말이 밥그릇이지 주먹만한 감자가 두 알쯤 들어가 앉으면 그것은 감자그릇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그때 우리고향에 크롭체카 같은 향료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그 저녁을 먹으며 옛 생각에 젖었다. 어쨌든 어려운 전화의 시절을 우리 식구는 감자와 옥수수에 의지해 살아 넘겼다. 한번은 공습을 피해 변두리 마을로 갔다가 무슨 보따리를 안고 죽어 있는 남자를 보았는데, 그 보따리 속에 감자가 삐죽히 들어 있는 게 보여서 염치 불구하고 그걸 가져와 한동안 신세를 진 일도 있었던 것이다. 그때 그 보따리의 감자가 유난히 알이 잔 것을 보면 그 남자도 아직 캘 때가 되지 않은 다른 집 밭의 것을 살짝 캐 가던 것이었을 게라고 우리식구는 이상한 결론을 내리고 있었던 기억도 새로웠다.

보드카가 한 순배씩 돌고 나자 식탁은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감자기 기를 띄어갔다. 러시아 사람들의 언성이 갑자기 높아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하여 옆의 친구에게 곁눈질을 했더니 본디 이들은 밥 먹으면서도 논쟁하듯 토론을 하는 통에 그렇다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해주었다. 그러나 그런 시간 속에서 나는 그들이 혹시나 '우라, 레닌!'같은 말이라도 외치지나 않을까 은근히 마음을 졸였음을 고백한다. 그 이념의 세계가 무너진 지는 그때 겨우 1년도 되지 않았고, 아직도 그 추종세력은 데모를 계속하고 있다고 했었다. 이들 가운데 그런 사람이 없다고 단정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렇게 말하면 지나치게 우회적인 표현이라는 데서 나는 잠깐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이미 충분히 말했거니와 내 친구가 앉아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는 나를 비웃으며 한국을 떠났었다. 비록 전과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단연코 그 이념의 신봉자가 아니었던가.

그러고 보니 내가 그 북쪽 통나무집을 향해 오는 동안 은연중에 가지고 있었던 의구심의 바탕에는 그 이념의 세계라는 것도 자리잡고 있었음이 유된다. 숨길 수 없이 그랬었던 같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재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대상에는 내가 이역만리까지 찾아온 친구가 어김없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추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어서, 그것을 꼭 집어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난처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그를 향한 내 우정이 그토록 처절하지 못하다는 반증 또한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나를 전전긍긍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아침부터의 그 의구심이 친구 문제와도 결부되었다고 말하지 않으면 않된다. 비극일지라도,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따위 말을 결코 그에게 직접 꺼내지는 않겠다고 속으로 게 마음먹고 있었다. 그점은 레닌의 은신처에 갔다온 일을 말하지 않는 것에서도 이미 밝혀졌을 줄 믿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었다. 술을 좋아하는 내가 그곳에서 그들과 술잔을 맞부딪치지 않고 있었던 것도 거기서 연유된 몸조심이었다. 독주를 마시다 보면 어느 결에 자제심이 무너질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나도 나지만 그들이 나로 인하여 부추김을 받아 어떤 감당 못할 사태를 일으킬 위험도 생각해야 했다.

그런데 한창 대화에 열을 올리던 러시아 사람들이 어느 틈에 제각기 단도 한 자루씩을 뽑아들고 서로에게 자랑을 하게 된 데 이르러서 나는 아연 질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향료가 든 식사를 하고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칼을 뽑아들고 있다니? 보드카 탓이 아닐까 ? 나는 놀라서 그들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혹시 어떤 위협의 조짐은 아닐까 ? 그것은 여전히 말끔히 가셔 버리지 못한 의구심과 경계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거지에서 악의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액면 그대로 자기 자신의 칼을 상대방에게 자랑하고 있을 뿐으로 보였다. 특히 통나무집 덥석부리 주인은 자기의 칼을 스스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고 했다. 흑단(黑檀)같이 검은 손잡이에 예리한 칼날이었다.

그 칼이 품평회에서는 으뜸의 것으로 자타에 의해 공인되는 것이었다. 사냥감의 껍질을 벗길 칼들인 모양이었다. 으뜸의 것이라고 하는 칼은 그것의 만듦새를 위주로 말하는 것이지 흐린 램프 불빛에 모두가 예리한 날을 빛내고 있었다. 저 우즈베크 사람들이 호전적으로 차고 다니는 단검과 같은 칼도 있었다. 옛 티무르 제국의 영화를 자랑하는 그들은 오늘날에도 흔히 단검을 차고 다니며 서로 다투며 상대방에게 들이댄다는 것이었다. 중앙 아시아를 거쳐올 때 길거리의 상점에서 나도 그 칼을 하나 기념으로 샀었다. 황금빛 칼집과 손잡이에 보석처럼 빨갛고 파란 유리알이 장식으로 박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친구의 집에 놓아둔 가방 속에 있었다. 아니, 무슨 소리인가 ? 그것을 내가 지금 가지고 있어야 할 까닭이라도 있단 말인가 ? 가지고 있다 한들 어쩌겠단 말인가 ? 나는 잠깐동안이나마 어이없는 상황으로 몰고간 내가 가엾기조차 했다. 만약에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저 꼼짝없이 당할 뿐인 것이다.

그 무렵 모스크바의 한국인 사회에서는 별스런 풍문이 떠돌고 있었다. 모스크바와 상트페데부르크 사이를 오가는 야간 열차에서 누군가 돈을 빼앗기고 칼에 맞아 열차 밖으로 던져져 끔찍한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한국인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터무니없는 낭설로 밝혀지긴 했어도, 무시무시한 풍문이 선량한 사람들의 마음에 드리워놓은 검은 그림자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 4공화국 시절 사회를 풍미하던 것은 흔히 '유비통신'이라고 불리던 유언비어였다. 그 아래 사람들은 잔뜩 움츠러들었다. 그것은 실제의 시절보다도 더 우리를 괴롭혔었다. 친구끼리 만나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나서 ", 박통이 말야. 색골중의 색골이래...."하고 소근거리던 지난 시절은 그래도 좋았었다. 유언비어의 검은 그림자에 눌리자 우리는 입을 닫았다. 밤새 8시간동안 어둠 속을 달리는 모스크바-상트 페테부르크 침대열차는 그래서인지 두 사람이 든 칸칸마다 위험하고 수상한 어둠만을 싣고 달리는 듯했다. 우리 여행가 일행이 탄 열차에는 문을 똑똑 두드리고 중앙아시아에서 온 동포라는 사내가 들어와 품속에서 은밀하게 웅담과 사향을 꺼내놓고 시베리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사지 않겠느냐고 하기도 했었는데, 거기에도 거기에는 그런 그림자는 깃들어 있었다.

통나무집의 램프 불빛은 열차 안의 흐린 전등 불빛을 연상시켰다. 사람들의 칼 이야기는 내 감정과는 아랑곳없이 길게 계속 되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내 긴장과 조바심은 도를 더해갔다. 그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뜻하지 않았더라도 술 취한 사람들의 마음은 어떻게 돌변할지 할 수 없다는 경험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소리 없이 식탁 주위를 맴돌던 고양이도 언제부터인가 가르릉 가르릉 목젖소리를 내고 있었다. 페치카의 자작나무는 더 이상 탁탁 타오르는 소리를 내지 않고 쇠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흐린 불빛에 비치는 사내들의 얼굴은 상당히 불콰해져 있었다. 피곤이 엄습해 온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어디 가서 좀 쉬겠다고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 통나무집 어느 구석에 마땅히 쉴 만한 공간도 없었다. 어차피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맡기는 도리밖에는 뽀죡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친구에게 무엇인가 조언을 구할 계제도 아니었다. 친구도 그저 그들이 하는 대로 별말도 못하고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그 자신도 모르리라고 여겨졌다. 우리 둘은 영락없이 퇴역 소련군의 포로인 셈이었다. 저러다가 느닷없이 '우라!'를 외치며 달려들어 각을 뜰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은근히 고개를 들곤 했다. 무너진 허상의 이데올로기도 그 검은 그림자가 아직 이토록 공포를 던지고 있는가. 나는 스스로를 비웃으며 또한 달래야 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모든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창조한 사람만의 것이지 다른 사람의 것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이데올로기는 그 창조자의 삶 속에서만 구현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결코 다른 사람의 삶을 살 수도 없고 또 살아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예수의 이데올로기의 계시를 받았다 해도 그것은 예수의 것일 뿐이며, 가섭이 부처의 이데올로기의 꽃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해도 그것은 부처의 것일 뿐이다. 그래서 레닌의 이데올로기와 스탈린의 이데올로기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이데올로기는 하나이면서 무수하다.

이것이 이데올로기의 비극인 것이다. 비극의 포로로서 잡혀 있다는 느낌이 갑작스럽게 빙글빙글 돌다가 비극이라는 말에 이르러 나는 퍼뜩 정신을 되돌렸다. 그리고 진정한 비극이란 이 재앙의 소멸이 아닐까 아득한 생각에 젖었다. 모든 이데올로기와 같은 우리도 결국은 소멸하고 말며, 이 지구도 소멸할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별의 생성과 소멸을 천체망원경으로 찍은 사진을 볼 때의 느낌이었다. 이에 이르러 무엇을 말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노릇이었다. 문득 방 한구석에서 철커덕 하고 쇳소리가 났다.

조심스럽게 반잔만 받아 마신 보드카에 내 긴장된 생각은 러시아 북의 딴 통나무집의 흐린 불빛처럼 먼 은하계의 어떤 흐린 별빛까지 가버렸던 것일까. 그러다가 그 철커덕 소리가 나를 퍼뜩 현실로 되돌아오게 했던 것이다. 볼로자가 한쪽에 떨어져 앉아 엽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엽총은 본디 기름기가 반질반질한 가죽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는데, 아침에 차를 타고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우리들에게 슬쩍 열어 보여준 적이 있던 것이었다. 가죽주머니 속에서 나온 엽총은 총신과 개머리판이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서, 지금 볼로자는 그것을 서로 맞추고 있는 중임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건데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가슴이 그 엽총의 철커덕 소리에 맞추듯 철렁 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런 행동 중에도 나는 신중해야 된다고 나를 타일었다. 그의 마음이 아직은 확고하지 않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돌발적인 행동이 그의 망설이는 마음을 격발시키는 경우를 염두에 두어야 했다. 나는 그의 눈에 안 띄게끔 몸을 일으켜 페치카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신통한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임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을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전혀 선량한 마음뿐인 사람으로 내일의 여우 사냥의 꿈에 부풀어 마치 소풍 전날에 륙색을 만지작거리던 어린 날의 나와 똑같은 심정으로 엽총을 만지작거리고 있다해도 그것을 별개의 문제였다.

나는 페치카가 꽤 괜찮군 하는 표정을 지으며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는데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나 자신이 우습고 연민스러웠다. 일상에서도 나는 짐짓 그런 연기를 하고는 견딜 수 없는 자기 혐오감에 또 다른 자기 변명을 하느라 진저리를 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위난이 닥쳤던 현실 앞에서 나는 이런 일을 겪는다는 사실이 왠지 서먹서먹하고 내 일이 아닌 것 같아 실실 웃음을 던져야 했던 적도 있었음을 기억했다. 왜 하필 나란 말인가. 하고 어디론가 꽁무니를 빼려던 심사가 거기에는 없었다.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람도 그러리라 하는 것에 생각이 미치면 내가 공연히 기가 찬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꽤나 심각하고 절박했다. 그들이 누구이며, 거기가 어디인가 말이다. 단체 여행중에도 함부로 호텔 밖에 나가 얼정거리지 말라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주의를 받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곳은 호텔 밖이라는 정도가 아니라 어디인지 알 수도 없는 산골의, 농노의 외단 통나무 집 안이었다. 친구의 무신경에는 부아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빵 조각을 생선 통조림 국물에 적셔 고양이에게 던져주거나 보드카를 홀작 거리거나, 그들의 칼자루를 감상하기까지 했다. 일부러 그 멀리까지 가서 그와의 괴리감을 다시금 확인하고 있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이상에 불과하다는 내 말에 그는 이상을 꿈꾸는 자 만이 세상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내게 얼마나 희떠운 경멸의 눈길을 보냈는지 모른다. 그래. 그 이상이 겨우 농노의 통나무집에 갇힌 신세가 되는 것이었더냐고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버럭 지를 뻔하였다. 빌어먹을 놈의 여우사냥. 아니, 그러고보니 여우란 우리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침착하게 벽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램프 불빛은 더욱 어둡다. 한옆에 헝겊조각의 가리개로 가려놓은 곳이 침상이었고 거기에 퀴퀴한 냄새는 더 짙게 메에 있었다. 그 통나무집에 오랜 세월 살다가 죽어간 여러 농노들의 땀과 피와 눈물이 한데 삼아 풍기는 처절한 냄새였겠지만 그때는 음산한 살의의 냄새라고 느끼며 내 몸은 잔뜩 움츠러들기만 했었다.

그때였다. 벽 쪽을 무심코 바라보던 내가 구석 선반 위에 놓인 몇 권의 책을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처음에는 그 외딴 통나무집에도 책이 있다는 사실만이 뜻밖으로 받아들여져서 내 눈은 크게 떠졌다. 더군다나 그것은 전기도 안 들어오는 농노의 집이었다. 나는 맨 위에 놓인 책의 제목을 읽으려고 내 나쁜 시력에 힘을 모았다. 무슨 책이 여기에 있단 말인가. 여행을 떠나기 전 겨우 읽기만을 몇 번 해본 러시아어 알파벳 실력에 그 동안의 경험이 합쳐졌어도 그 글자는 여전히 낯설었다. 누구의 우스개에 의하면 처음에 러시아에 이 알파벴을 가져다 쓰기 시작한 사람이 지독히 머리가 나빠서 그만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자 한자 또박또박 더듬어 읽었다. (T).....(RAK).....(TO)....(P)....트락토르... 트락토르가 영어로 트렉터인 것을 우리나라 신문의 북한소식을 보면서 알았던 것이었다. 책을 발견했기에 그토록 열심히 들여다본 것은 무었인가에 대한 희망 때문일 것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때 트락토르는 내 희망이 아니었다. 나는 맥이 빠졌다. 그런 책이 있는 것 보면 그 텁석부리 사내는 트락토르를 몰고 농사를 짓거나 그럴 계획으로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나는 힘없이 그 밑의 책으로 눈가를 가져갔다. ............ 푸슈킨이라... 이것이 무엇일까... 하는 순가 머릿속을 섬광같이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푸슈킨. 그것은 저 시인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 , , , , , , , ....

나는 몇 번 그 글자를 읽고 나서 책을 뽑아 들었다. 표지를 들여다보니 역시 푸슈킨이라는 이름 밖에는 다른 것들은 뜻을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러시아어의 같은 글자들은 우리가 배은 세계의 글자에는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배운 외국 글자와 모양이 같더라도 소리가 다른 것들도 여럿 있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것은 저 푸슈킨의 시집이었다. 거친 숲에서 잡아왔을 짐승의 뿔로 칼을 만들고, 감자 농사를 지으며 사는 그 수염 텁석부리. 이제야 밝히지만 지금 엽총을 만지고 있는 볼거지보다 더 수상쩍게 여겨지던 저 텁석부리가 자작나무를 넣은 페치카 옆에서 흐린 등불을 벗삼아 들여다보고 있던 것은 푸슈킨의 시집이었다.

알렉산드르 세프세에비치 푸슈킨.

알렉산드르 세프세에비치 푸슈킨.

이렇게, 이야기는 여기까지 이르렀다. 나는 푸슈킨의 시집을 전날 음 친구의 집에서 본 이래 다시 그 시골 농노의 집에서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게 되자마자 내 마음은 즉시 어떤 다른 상황으로 급회전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내 마음의 불안은 그야말로 눈녹듯이 녹아 사라졌다. 그것은 일종의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오랜 세월 페치카와 램프의 그을음에 찌든 벽 구석선반에 놓여있는 한 권의 시집이 내 마음을 그렇게 평온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은 나로서도 진귀한 경험이었다. 그 시집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집이었다. 거기에 푸슈킨의 이름이 있었다.

알렉산드르 세르게에비치 푸슈킨.

감자 농사를 짓든 양귀비 농사를 짓든 밤이면 외롭게 고양이를 벗삼아 시집을 읽고 있는 사내가 흉악한 강도 따위로 돌변할 수는 없다는 믿음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알렉산드르 세르게에비치 푸슈킨.

나는 그 시집을 외며 시집을 들고 친구에게 가서 내밀었다. 볼로자는 아직도 엽총을 만지고 있었고 유라와 텁석부리 사내는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차를 마시는 것은 우리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들은 차를 마시며 잽을 조금씩 떠먹거나 쨈이 없으면 설탕이라도 조금씩 떠먹는 것이다. 그리고 차를 몇 번이고 거푸 따라 마신다. 방안풍경과 분위기는 아까와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것은 내 마음이었다.

"이런 게 여기 다 있어."

나는 말했다. 조금 전까지의 나는 그 러시아 사내들을 의심했었고, 어느 의미로는 얕잡아 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한 권의 시집으로 불식되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푸슈킨이로군"

친구가 말했다. 그 말에는 어느 정도 그럴 수 있다는 수긍의 뜻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 다음 그는 "이 사람들은 이렇다니까. 푸슈킨을 안 읽는 사람이 없으니"하고 덧붙였다. 유라가 "푸슈킨, 푸슈킨"하면서 나를 행해서 당신도 그 시인을 아느냐는 투로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대응할 만한 러시아 말을 알 재간이 없는 나로서는 그저 좋다라는 뜻의 "하랴쇼"라는 말 만으로 대꾸하는 수밖에 없었다. 모스크바의 푸슈킨 기념 미술관이 기억에 되살아났다. 그곳의 많은 그림들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처럼 되살아났다. 그 생명력은 그것을 처음 보았을 당시보다 더욱 큰 감동으로 내게 전해져 왔다. 나뭇잎들, 풀잎들, 꽃들, 사람들, 짐승들과 하물며 햇빛과 그 아래 산과 강과 집들까지도 살아 있는 생명의 풍경으로서 내 앞에 전개되었다. 그 속을 매머드와 곰과 여우들이 뛰어다니며 대자연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욜가, 사스나, 베료자의 가지들이 눈을 털며 하늘을 행해 팔을 벌리고 하나의 시를 창조하고 있었다. 크롭체카의 향기 속에 빨간 갈리나 열매는 나날이 영롱하게 여물어 가고 있었다.

내가 그 시집을 꺼내봄으로서 해서 그 방안에는 때아닌 푸슈킨 이야기가 만발하기 시작했다. 내용은 알 수 없어도 그 시집을 뒤적이며 하는 대화였다. 때문에 나는 나대로 시정(詩情)에 젖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시인의 시는 그러나 번역으로는 도저히 맛이 전달되지 않는다는 안타까움을 유라가 말했고, 친구가 내게 통역해 주었다. 그 말을 듣자 나는 그 시집이 나로 하여금 해방시켜준 마음이야말로 그 원시(原詩)의 위대함을 말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기껏해야 '하라쇼''매우'라는 뜻의 '오첸'을 붙여 대꾸하는 내가 오히려 안타까울 뿐 이었다.

"오첸 하라쇼"

이로서 내 의구심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여기에 모스크바의 미술관에서부터 비롯되어 북쪽 오지의 옛 농노의 통나무집에서 만난 시집에 이어지는 한 사람의 이름이 있음을 뜻깊게 기억하는 것이다.

알렉산드르 세르게에비치 푸슈킨.

그는 어머니가 아프리카 한니발 장군의 가계를 이는 사람이라는 특이한 혈통을 가졌었다. 러시아 대귀족이었던 그는 그러나 독재에 대항하는 정신으로 유배를 당하기도 한 시인 이었다. 어려서부터 많은 작품을 써서 러시아 문학의 시조로 추앙받는 그는 아름다운 아내를 둘러싼 모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결투를 하게 되어 38세의 아까운 나이에 죽고 말았다.

볼로자도 끼어들어 이야기는 상당히 오래 계속 되었다. 오로지 나만이 국외자였다. 그렇더라도 그날 밤 나는 그 시인에 대해 누구보다도 많은 느낌을 가지고 그들 옆에 앉자 있었다.그날 밤 나를 안정시켜준 것만으로도 그 시인은 위대했다. 위대한 시은 그 이름만으로도 뭇 영혼을 구제한다. 어릴 적 그 시인의 시를 펴놓고 있는 차장 누나의 얼굴이 환하게 미소짓고 있는 느낌이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이윽고 러시아 사내들이 식탁 앞에서 일어나 옆방으로 걸어가고 그 방 우리들만의 것이 되었다. 옆방으로 걸어가기 전에 텁석부리 사내가 간이 침대 위에 슬리핑백을 펼쳐놓고 그 안에 제법 하얗게 빨아놓은 시트를 넣어 주었다. 그러나 그 하얀 시트는 정말로 걸맞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슬리핑백이라고 말한 그것은 실로 백년 전부터 빨래한번 안하고 사용하던 것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때에 찌들고 냄새에 찌든 것이었다. 애초에 짐승가죽 빛깔이었다고 보여지는 그것은 이 세상의 어떤 넝마보다도 지저분했고 냄새가 지독했다. 나중에 본 바로는 아침에 세수조차 하지 않는 그들이었다. 나는 몇 번의 구역질을 참으며 쉐타와 바지를 입은 체 그 안에 들어가 누워야만 했다.

"저 개 이름이 아무르라는군. 아무르. 사랑이라고 말야."

"아무르, 사랑?"

"."

바깥에 오줌을 누러 갔다온 친구가 후후 얕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램프의 등피 위를 훅 불어 불을 껐다. 창문으로 바깥의 눈빛이 야광처럼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한밤은 틀림없이 어두운데 눈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그도 나와 똑같은 슬리핑 백 속에 몸을 누였다.

"여기서 자란 말이지? 정말 지독하군. 그런데 감자요린 독특해. 우크라이나 사람들도 감자요리가 좋아. 큰 찜통에 감자 한 켜 놓고, 파 한 켜 놓고, 고기 한 켜 놓고, 또 감자 한 켜, 무슨 야채 한 켜. 고기 한 켜.... 이렇게 쌓듯이 놓고 푹 찌는 거야. 그럼 국물도 저절로 생겨. 정말 먹을만해."

그가 몸을 뒤척이며 말했다. 나는 프랑스말로 사랑을 아무르라고 하지 않느냐고 말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그의 감자 요리 이야기가 어쩐지 감자요리 이야기 그 자체로 들리지 않고 먼 옛날 추억 속의 고백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나를 만나서 이렇게 외딴 통나무집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지금 그도 여러 생각에 잠겨 있을 것이다. 특히 떠나온 제 나라의 모습들이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을 것이가. 한국과 러시아가 국교까지 맺은 지금.... 레닌의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지금.... 그러나 나는 이에 알맞은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공부는 잘 되가?"

나는 엉겁결에 물었다. 그런 말은 묻고 싶지 않았었다. 그쪽에서 응당 물어올 말인 국내 정치에 대해서도 이러쿵저러쿵 대답하리라 하지 않았다. 다행히 그는 한국의 사정이 어떠한지는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당연히 군사 독재가 어떻고, 민주주의가 어떻고, 미국이 어떻고, 늘어놓아야만 하건만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진정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공부라.. 그런 거 묻지 말자. 내가 뭐 이 나이에 공부하러 여기 왔나..

그는 문득 말을 끊고 담배를 찾아 물었다. 그것은 뜻밖의 대답이었다. 무엇인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한데 담배연기를 뿜는 소리만 길게 들려왔다. 나는 그럼 뭐하러 왔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물음은 내 입에서 말이 되어 나오지를 않았다. 그가 얼마나 답답하고 막막한 처지에 있는지 그의 담배 연기 뿜는 소리가 다 말해주는 듯 싶었다. 그는 우리나라에 있을 때부터 행동과 실천에는 도무지 젬병인 사내였다. 대학 때야 몇 번 이른바 가투에 나선 적이 있기는 했지만, 졸업하고 나서부터는 이론가에 지나지 않았다. 이 사회가 싫다고 공공연히 말하면서도 지식인으로서의 한계를 무엇보다도 괴로워했던 그였다. 나는 그가 현실적으로 어떠한 노선에도 가담할 수 없는 이상주의자임에 가슴 아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상주의란 무엇이었을까? 허생의 무인도 나라와 홍길동의 율도국이나 토마스 무어의 유토피아 섬도 그에게는 가당찮은 것이었다. 그가 꿈꾼 것은 진정한 사회주의 이상향 이하는 것뿐. 나는 그와 더 이상의 대화를 진척시키지 못하고 오랜 세월 건성으로 친구라고 지내왔을 뿐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말하고 있는 대로 그가 단순히 마르크시즘을 공부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이제 이 세상에 그런 것을 공부할 나라가 있을까 ? 그러나 그가 적어도 한국을 떠나야 했던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되었다.

"여우는 언제 잡으러 가나 ?"

나는 궁여지책으로 화제를 바꾸었다. 묻고 싶은 말은 여럿 있었으나 그것이 그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닿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었다. 서울에 두고 온 그의 아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그가 먼저 꺼내주어야 할 문제였다. 아내 문제라면 나 역시 실패자로서 우리가 20몇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갱생회' 회원이 되어 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 치고는 고약한 우연의 일치였다.

"내일 아침에 일찍 간대. 러시아 남자들 큰일이야. 소련이 무너진 뒤 군인들이 다들 돌아와서 말야. 할 일들이 없는걸. 아프카니스탄이다 어디다 해서 돌아들 오니까 여긴 일자린 없지. 마누라들은 들볶지."

그가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혼란기니까 그렇겠지"

나는 그를 만나서부터 무엇보다 언제쯤 공부를 끝낼 것이며 우리나라에는 언제 돌아가겠느냐를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 물음은 입 속에 뱅뱅 돌기만 할 뿐이었다. 돈이 떨어지면 어련히 안 오랴 하는 추측은 그에 관한 한 부질없는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곳 사람들의 월급이 우리돈 1만원도 안되던 것이었다. 나는 공연히 몸을 뒤척였다.

"모를 일이야"

그는 다시 담배연기를 후욱 내뿜었다. 페치카의 자작나무 장작도 불이 사위어 가는지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가끔 들려 오는 것은 고양이가 가르릉거리는 소리뿐이었다. 그렇다면 그와 함께 나란히 누워 있는 그것만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난 인연은 다 끝나야 하는 것인가 나는 또 다른 의구심에 사로 잡혔다.

"피곤하니 그만 자자. 내일 또 일찍 일어나야 한다며."

"그러지"

나 스스로 대화를 계속하기가 힘들었다. 그가 "모를 일이야"하고 어속에서 고개를 흔들고 있는 것은 어찌보면 커다란 변화였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를 추궁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가 나를 뭐라고 하던 우리는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는 한도 안에서의 친구였다. 담배를 비벼끄고 가르릉 거리는 고양이 소리를 듣고 있는 잠깐 사이에 그는 벌써 잠든 숨소리를 냈다. 다음날 아침은 보기 드물게 맑은 아침이 보였다. 아침이라고는 해도 어떤 시계는 10시를 넘어 있었다. 무슨 새인가 한 마리 창문에 와서 날개를 부딪고 있는 소리에 나는 눈을 뜨고 바깥으로 나갔던 것이다. 친구는 물론 다른 사람들도 모두들 일어나 제각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 외딴 집 옆에 다른 집이 두 채나 더 있는 것을 보았으나 그 집들은 모두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으로 반쯤 허물어져 있었다. 집에서 반쯤 떨어진 곳이 호수였다.

볼로자와 텁석부리가 눈길을 헤치며 호수 옆에 서 있었다. 곧 볼로자는 호수 위로 걸어가 얼음구멍을 뚫었고 텁석부리는 물을 길었다. 집 앞에서 볼 때는 그리 큰 것 같지 않던 호수는 끝간 데 없이 멀리 뻗어 있었다. 호숫가를 뒤덮고 있는 숲은 역사 이래로 그랬던 듯이 여겨졌다.

눈은 얼어붙은 호수 위를 하얗게 덮고 있었다. 침옆수림 사이사이로 잔뜩 마른 잎사귀를 달고 있는 갈잎 나무가 황갈색으로 불타오르듯 솟아 있었다.

아침 식사 역시 지난 저녁과 같이 감자 요리였다.

크롭체카의 향긋한 냄새가 통나무집의 퀴퀴한 냄새를 몰아내고 코끝을 자극하면 식사준비는 다 된 것이었다. 우리는 똑같은 요리. 즉 감자와 빵에 버섯과 오이와 토마토 절임을 곁들여 식사를 끝냈다.

"이걸 입고 장화를 신으래"

친구의 말과 함께 유라가 내게 점퍼와 장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곳 위가 엔간하기에 내가 걸치고 있는 점퍼도 두둑한 것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 털달린 점퍼는 내 것과는 비교 할 수 없이 드껍고 무거운 것 이었다. 거기에다 안감을 얹은 방한 장화는 무릅까지 올라왔다. 모자는 여분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내가 쓰고 간 그대로 털실모자를 써야 했다. 눈속을 헤매 다니자면 그렇게 감싸지 않고는 안된다고, 유라는 차를 마시며 말했다. 나는 전날 푸슈킨을 보기 전까지 가졌던 감정 때문에 러시아 사내들을 마음놓고 쳐다보기가 뭐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누구의 표현대로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통나무집을 나서고 있는 것이었다. 여우를 잡기 위해서. 그곳 도시의 백화점에는 아닌게 아니라 여우 모피가 많았다. 러시아에서는 겨울이면 온몸을 온통 모피로 감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여자들에게는 모피는 절대적인 것이다.

곰털, 밍크털, 수달털, 여우털, 양털, 토끼털 등 갖가지 모피들이 진열대에 쌓인다. 많은 사람들이 기웃거리건만 양털이나 토끼털말고 비싼 것은 쉽사리 사지는 못한다. 모피를 파는 상점을 비롯하여 비싼 물건을 파는 상점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들여보내지도 않고 차례대로 한 사람씩 들여보내 구경시킨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여우털을 통째 목에 두른 마나님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 시절 여무 목도리는 어느 만큼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여우는 교활하고 간사한 짐승으로 옛이야기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짐승인데 여인네들의 목도리로 애용된 것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우리말에서 여우란 교활하고 변덕이 심한 여자를 일컫는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여쁜 여자로 둔갑한 수많은 구미호들. 무덤에 구멍을 파고 드나들며 해골바가지를 달그락거리는 여우들이 있었다. 그런 이야기들 탓에 나는 예전에 한복으로 단장한 여자를 보면 혹시 치맛자락 밑으로 여우꼬리가 드러나지 않나 무의식중에 흘낏 보곤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것 또한 허황한 옛 이야기의 쓰잘데 없는 그림자가 끼치고 있는 해독이었다. 그런데도 예전의 여자들은 여우 목도리를 줄기차게 선호했었다. 나중에 좀더 나이가 들어 야릇한 글들을 읽게 되었을 때, 거기에는 궁중의 여자들이나 한다하는 여념의 아낙들이 남편 바람나는걸 방지한다고 암여우의 그것을 차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었다. 상트 페데부르크 행 야간열차에서 팔러 다니던 사향노루의 배꼽이라면 또 몰라도 암여우의 그것이 어떤 효과를 가졌는지 아직까지도 나는 수수께끼일 뿐이다. 나아가 여우 목도리와 여우 그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도 여겨진다. 단지 여우 목도리가 족제비 목도리보다는 좀더 모양이 나고 따뜻한 때문에 선호했으리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우 목도리에서 옛 여자들이 암여우의 그것을 차는 행위를 엿보곤 하였다. 암여우의 그것을 차면 남자들이 사족을 못쓰고 좋아한다고 하였다.

이윽고 우리는 통나무집을 나섰다. 텁석부리가 앞장을 서고 그 뒤를 볼자와 유라가, 그뒤를 한 사람의 러시아 사내가 섰다. 다시 그 뒤를 친구가 서고 맨 뒤가 나였다. 러시아 사내들은 모두 엽총을 한 자루씩 메고 칼도 옆구리에 여며 찼다. 친구와 나만이 장갑 낀 맨손이었다. 쉐퍼트 종의 사냥개 아무르는 일행의 앞뒤를 맴돌며 겅중거렸다. 좀 전에 텁석부리가 물을 긷던 호숫가가 아닌, 작은 잡목들이 엉겨 있는 눈길을 더듬어 들어가자 곧 버려진 우물이 나타나고 거기서부터 호수는 오른쪽을 향하여 까마득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우물이라고 해서 우리 식의 것을 연상해서는 안 된다. 물을 길러 올리는 두레박이 매달려 있는 것이 끈이 아 니라 사람 키 서너길쯤의 기다란 막대기로 되어 있으며 그 위의 버팀목 또 한 굵은 나무로 커다란 시이소오처럼 되어 있어서, 나무 막대기를 위로 올리면 무게 중심 뒤쪽의 나무의 무게로 한결 쉽게 두레박이 올라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 우물을 지나 우리는 호수의 얼음 위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말했듯이 날씨는 보기 드물게 좋았다. 그렇다고 햇빛이 마냥 내리 비치는 것은 아니었으나, 늘 머리 위까지 무겁게 내려와 있는 듯하던 낮은 하늘은 멀리 높아져 있었다. 호수 가장자리의 천고의 숲속에는 어김없이 갈리나의 빨간 열매가 송알송알 맺혀 있었다. 도시 근교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까마귀가 그곳에는 오히려 눈에 띄지 않았다. 갈리나가 러시아의 까마귀밥 나무라는 것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잘 확인한 바 있었다. 어느 수도원 뜰에 들어섰을 때 까마귀들이 그 나무에 까맣게 달라붙어 열매를 쪼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까마귀들은 우리나라의 까마귀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바로 가까이에서 벌어지는 그 광경은 괴기스럽기조차 했다.

갈 때는 프랑스로 해서 간다고 했나?

호수 위의 눈을 밟으며 그가 새삼스럽게 물었다. 내가 언제 그렇게 밝혔던가, 기억이 되지 않았다. 아마 한국을 떠나오기 전에 나와 통화하면서 계획을 밝혔던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르포르타주를 쓰는 일을 맡아 있었고 그 일의 목적지를 프랑스로 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그에게 자세히 밝히기는 싫었었다. 너는 여전히 우스운 일만 맡아가지고 살아가는구나. 그가 비웃을 게 뻔했다. 그때까지 나를 먹여 살려온 것은 회사들의 사보와 꼴사나운 잡지에서 맡아온 일들이 주종이기는 했다.

. 프랑스로 해서 선거나 끝나면 돌아가려고.

나는 얼버무렸다.

?

프랑스로 가는 게 왜 인지 선거가 끝나면 가겠다는 게 왜 인지 모를 질문이었다.

사람들에 신물이 나. 아무튼 누군가 되겠지.

나는 편한 대로 대답했다. 떠나올 때 대통령 선거 유세는 두 김씨에 정씨까지 끼어들어 온통 아우성이던 생각이 났다. 30년에 걸친 군부의 통치가 드디어 끝난다고들 하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유신 시절에 나는 병역 문제로 여간 고생을 겪은 게 아니었다. 나는 오랜 세월을 숲 속에 숨어 지냈다.

어떤 사랑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고 표면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진실한 이유는 내 탓이었을 것이다. 탓이었을 것이다 가 아니라 내 탓이었다. 나는 항상 개인이 함몰되는 사회에 견디기 힘든 공포감과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조립기계에서 하나의 나사가 아니라 그 기계 전체여야 했다. 이런 뜻에서 보면 나라는 인간은 사회 구성원으로서는 완전한 실격자였다. 무엇보다도 나는 사회계약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불행한 개체로서 술병 속에 갇혀 있었다. 견자(見者)나 각자(覺者)가 아니고서는 그런 삶은 표본실의 변이종 견본일 뿐이었다. 남의 사정이야 어찌됐든 친구는 그때 내게 나야말로 이놈의 체제에 근본적인 도전을 하고 있는 거라고 말하며 은밀한 눈빛을 빛냈었다. 무서운 논리였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현실과 이상의 괴리였다. 그 황당무계한 추론 앞에 나는 괴로운 술잔만 들이켰다. 세월은 흘렀고 문제는 해소되었어도 그 망령의 그림자는 나를 끈질기게 술병 속에 가두어 두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렇다. 그것도 예의 그 그림자와 같은 족속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러시아로 떠나가기 불과 얼마 전에 스스로 병원으로 들어가서 새로운 삶을 획책했던 것이다. 그 떠남은 그 일련의 획책의 마무리 단계로 마련된 것이었다. 어떻게든 삶을 되찾아야 했다.

사냥꾼 일행은 말없이 걷고 있었다. 그는 무엇인가 더 물어와야 하는데 갑자기 말문을 닫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서는 아마도 더 많은 질문들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하는 지레짐작이 나를 붙잡아매어, 내 머리는 어지럽기만 했다. 너는 아직도 공산주의를 떠받드느냐 하면 그는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한국에 있을 때도 그는 그런 질문에는 정색을 하고 공박했었다. 그가 믿는 것은 차리리 무슨무슨 주의가 아니라 진정한 삶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을 공산주의, 사회주의로 연관짓는 선에서 멈출 뿐 어찌할 수 없었던 도지한 사상이었다. 그것을 젖혀 두고라도 여러 질문이 있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그리고 가정은? 그렇지만 이 모두 내가 섣불리 어찌할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이 내 입을 막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아내 문제도 그가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호수는 길이로 길게 뻗어 있었고 우리는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10월부터 줄기차게 눈이 내린 깜냥으로는 쌓여 있는 게 그리 많지는 않은 편이었다. 그곳도 어쩌다 포근한 날씨가 있고 그럴라치면 속의 눈이 질퍽해지면서 녹았다가 밤에 얼음으로 변해버리는 모양이었다. 얼음이 꺼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내게 볼로자는 그 위로 커다란 탱크도 지날 수 있다고 안심시켜 주었다. 모두들 무장을 했는데 한국사람 둘이 무엇 때문에 맨손으로 그 뒤를 따르고 있는지 우습기도 했다. 아침에 감자를 먹으며 들은 바로는 여우 사냥에는 사냥개의 역할이 무엇보다 크다고 했다. 엽총은 오히려 보조 수단이거나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여우를 잡아오는 것은 사냥개라고 했다. 영국에서의 여우 사냥을 영화에서 몇 번인가 보았던 기억이 났다. 거기서는 말을 탄 일단의 사냥꾼들이 여러 마리의 사냥개와 함께 달려나가는 것으로 여우 사냥은 시작되고 있었다. 말 탄 사람은 여우를 쫓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로 미루어 그 날의 여우 사냥은 엽총을 메었든 안 메었든 사람들은 여우를 쫓아 궁지로 몰아넣는 역할을 하게되어 있는 모양이었고 결정적인 것은 아무르에게 맡기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우리 일행이 일렬종대로 걸어가는 모습은 사냥꾼이라기보다는 군인을 연상시켰다. 예전 어느날 시냇가 둔덕에 엎드려 숨죽이고 보았던 광경이 생생하게 되살아 났다. 10여명의 인민군들이 그렇게 일렬 종대로 야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마을에 들어와 먹을 것을 거두어가기 위해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얼마 전까지도 적군(亦軍)이었던 이들과 함께 줄을 지어 호수를 건너가고 있지 않은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더군다나 두 퇴역적군 볼로자와 유라의 털모자는 앞이마에 별표가 붙어 있는 군모였다. 전날 품었던 의구심은 푸슈킨에 의해 그렇게 해소되었어도 그들과 일행이 되어 호수 건너 러시아의 숲 속으로 향하고 있다는 이상한 경험 앞에 나는 긴장됨을 어쩔 수 없었다.

오른쪽으로 멀리 전개되고 있는 호수의 희디흰 눈밭이 호수 주의를 둘러싸고 있는 숲을 환하게 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앞의 숲 뒤쪽에 어떤 세계가 있는지, 그곳은 희미한 하늘빛이 내려와 가물가물 흐려지고 있었다. 사냥개 아무르는 혼자서 멀리까지 달려갔다가 되돌아오곤 하기를 되풀이했다. 사막의 모래를 밟으며 갈 때와 마찬가지로 눈 속을 걸을 때는 앞사람이 밟은 자국을 따라 밟으며 가는 것이 요령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호수를 건너 대안의 숲가에 이르렀다. 지형상으로 북유럽 일대는 늪이나 호수가 많은 소택지대가 넓게 분포되어 있고, 어딘가 음산하다. 청명한 날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원시의 느낌이 짙어, 말하자면 괴괴한 청명함으로 어딘가 음산하다.

몇몇 사냥꾼들이 들락거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숲은 사람 발자국이 별로 닿지 않은 태고의 정적에 감싸여 있었다. 나무 아래로는 마른 풀덤불들이 우거졌고 어쩌다 새들이 푸드득 거리며 날았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동물박물관의 그 많은 새들, 곤충들, 파충류들이 실제로 살고 있는 숲속 같았다.

자야츠!

작은 둔덕을 넘어 덤불을 헤치고 나아갔을 때 문득 볼로자가 손으로 가리켰다.

자야츠, 여우래. 저게 여우 발자국인가봐.

친구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작은 공터의 눈 위로 개발자국과 똑같은 발자국이 나무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긴장한 것은 나뿐이었는지, 나머지 사람들은 그게 뭐 어떻다는 거냐는 듯 좀 전과 다름없이 숲 속의 눈길을 헤쳐 가고 있었다. 어디엔가 여우의 소굴이 있는 것을 알고 있어서 거기까지 무작정 간다는 것처럼 보였다. 호수에서와는 달리 내가 행렬의 맨 뒤라는 사실이 슬슬 켕기는 느낌이었다. 러시아 숲 속에 떼지어 다니는 늑대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재규어가 사는 지역이 아님을 알면서도 어디선가 재규어가 뛰쳐나와 내 목덜미를 물어뜯는 얼토당토않은 광경도 그려졌다. 그리고 그 숲 속에 요정들 뿐만 아니라 마녀들도 살고 있다고 옛날 이야기는 전하고 있었다. 여름이 오면 저 호수에는 큰 고니들이 날아와 백조의 호수 가 되며, 이 숲에는 어떤 마술의 힘이 깃들어 잠자는 숲 속의 마녀가 있게 되리라.

나는 무엇인가 아름다운 상상으로 내 머리를 채우려 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내 마음 한구석은 마치 빗장을 지른 듯 막혀 있었다. 내게는 분명히 무엇인가 할 말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와 마음을 열어놓을 겨를이 없다는 것이 나를 끈질기게 괴롭히고 있는 것이었다. 서로 마음을 열어 놓는다? 이 문제에는 내가 그에 대해서 느끼고 있는 벽을 그도 내게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을 것이었다. 이 벽은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이에 퇴적물처럼 쌓이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허물려면 아예 우리 관계는 처음부터 새로 맺어져야 하는지도 몰랐다. 이것이 내가 러시아로 향할 때부터 내 가슴을 짓눌러온 빗장이었다.

우리는 다시 숲을 지나고 작은 구릉을 넘기 시작했다. 구릉이라고 해봤자 눈 덮인 흙더미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한 것이다. 러시아는 아시아 쪽과유럽 쪽을 갈라놓는 우랄산맥을 빼고는 한마디로 대평원의 땅이어서 산이란 아예 없다시피하다. 모스크바에서 제일 높은 곳인 참새언덕은 과거에는 레닌 언덕으로 불렸던 곳인데 기껏해야 미아리 고개 높이보다 낮을 것이며, 상트 페테르부르크 근교에서 제일 높다는 곳은 한강에서 바라보는 강둑 높이 정도인 것이다. 그 숲 속은 그래도 호숫가라서 약간의 기복이 있는 모양이었다.

숲은 점점 깊어지는데 행군은 변함 없이 계속되었다. 여기서도 그 러시아식이라는 게 적용된다는 걸 미쳐 생각하지 못했었다. 아까부터 발이 시려오는 게 걱정스러웠다. 장화를 신은 발의 보온에 대해서는 말할 기회가 없었는데 부끄럽지만 나는 난생 처음으로 무려 네 켤레의 양말을 겹쳐 신고 있었다. 그래도 이미 시려오는 발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세 켤레도 아니고 무려 네 켤레였는데도 말이다. 그러자 우리 두 한국인은 러시아 병사들에 이끌려 머나먼 극지로 유형을 떠나는 신세라는 생각도 들었다. 구릉을 넘으니 그곳은 침엽수들보다 자작나무가 자욱하게 우거져 있었다. 중국에서 자작나무는 평지에 곧게 자란 것을 백화(白樺)나무라 하고 높은 산에 구불구불 자란 것을 악화(岳樺)나무라 하여 구분하지만 그곳에서는 어린 나무는 베료시카, 큰 나무는 베료자일 뿐이다. 줄기의 흰껍질이 눈에 반사되어 더욱 희게 비쳤다. 그러나 높았던 하늘은 그때부터 다시 낮아지며 세상은 회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어느 어두운 숲이었었다. 더 이상 어두워지기 전에 시내로 가서 저녁이나 먹고 헤어지자고 우리는 합의했었다. 내가 그녀와 함께 그 숲으로 간 것은 두 번째였다. 그녀는 아이를 데리고 먹고살기가 쉬운 일은 아니라고 말했고, 나에게 혼자 사는 게 어떠냐고 물었었다. 그야 뭐 라면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것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하는 내 대답이었다. 그 뜻은 끓여 먹기 간단하고 돈이 안 든다는 두 가지를 아울러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커다란 상수리나무 아래 이르러 나는 그녀에게 우리 함께 살면 어떨까하고 지나가는 말처럼 건넸다. 결코 지나가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밖에는 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게 말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도 저녁 내내 숲가를 빙빙 돌았고 그런 만큼 실상 그것은 용의주도한 제안이었다. 그녀가 결혼하기 전에 처음 만났던 것은 누구보다도 나였다. 어떤 모임의 선배로서 1년에 한 번 여는 정기총회에 참석했다가 그녀를 만났던 것이다. 너무나 오래 전 일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녀의 주변을 맴돌고만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그 상수리나무 아래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녀는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시치미를 뗀다는 것은 그녀도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그녀가 그때까지 잡고 있던 손을 빼내려고 했다. 어둠 아래서 혹시 돌부리에 채여 넘어질 우려가 있다는 듯 나는 그 손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의 땀인지 몰라도 두 손은 땀이 배어 미끈거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상수리나무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숲을 빠져나와 아랫동네의 식당을 찾아 들어갈 때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말을 잘못했다가는 상수리나무에 사랑의 박동소리로 새겨둔 소중한 기억이 흐려지리라. 그런데 식당에서 순두부와 된장찌개를 시켜놓고 먹으려 했을 때 문득 그녀의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나는 보았다. ? 하고 나는 물어보아야 했으나 입을 다물었다. 그 눈물을 보는 순간 나도 가슴이 터질 듯 북받치며 눈물이 핑 돌았던 것이다. 내가 그녀를 동정했던 것일까? 동정은 아닐 것이다.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가 바로 지금 러시아의 숲 속에서 내 앞을 걸어가고 있는 친구의 아내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그와 그녀가 별거에 들어갔을 때만해도 나는 내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알량한 우정 때문이라고 해도 좋겠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결말도 짓지 않고 다시 러시아로 떠나갔던 것이다. 내가 그녀와 어떤 관계를 맺기를 원한다면 우선 그와 그녀의 관계부터 정리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그에게 나는 할 말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하려고 그를 찾아 만난 것은 맹세코 아니었다. 그것은 변함 없이 그의 독자적인 몫이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나는 그를 만나고 있단 말인가? 나는 그의 발자국이 놓였던 자리를 되밟으며 숲 속의 눈길을 가고 있다. 그러자 나는 그와 내가 어디서, 어떻게 만나질 수 있는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것을 그전에는 왜 몰랐을까 싶었다. 그것은 무엇이 어찌되었든 간에 우리는 같은 세계에서 같은 길을 헤쳐 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냐고, 지금 여우 사냥에 우연히 같이 좇아가는데 불과하지 않느냐고 윽발질러도 하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 러시아의 숲에서 하나의 생각에 도달했음을 자랑스럽게 말한다.

하나의 생각, 그것이 어떠한 계기로 내게 깨달음처럼 찾아들었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내가 그것을 위해 마치 참선을 하듯 면벽(面壁)궁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와의 화해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내가 특별한 제스처를 쓰려 한 것도 아니었다. 그 따위는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은 오랜 세월 우리 사이에 증명되었던 것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라 했었고, 아무 말도 할 처지가 아니었다. 다만 지나가는 길이므로 오랜 친구를 만나 본다는 거기에 목적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그 누구라도 그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는 제발 개입시키지 말기를 바란다. 그 상수리나무 밑의 일은 우리의 미지수의 시간, 유예의 시간 속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 인간의 일이라기보다는 그 상수리나무의 일이라고 하는 편이 옳다. 유예된 삶 속의 이야기는 당연히 유예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랑이란 유예의 시간 속에서만 스스로의 얼굴을 본다. 거울에 비친 그 얼굴이 희미해지면서 마침내 지워져 버리면 그 사랑은 헛된 것이었음이 스스로 밝혀진다.

하나의 생각, 그것이 비록 미숙한 것일지라도 나는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러시아 숲 속에 가서 사냥꾼이 되기까지의 역경, 우리의 여정에 별다른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눈길과 숲들과 감자 요리와 푸슈킨이 있었다. 농노들의 생활과 고양이의 가르릉거리는 소리와 그리고 내발에 신겨진 네 켤레의 양말.

그리고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와 내가 어떠한 경로를 밟아 무엇을 찾아 헤매어 가든, 찾아 헤매는 그 몸부림만은 서로 닮아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우스꽝스러운 타협이라고 매도하지는 말기 바란다. , 그가 이상을 찾기 위해 허위적거리는 것이나 내가 현실에 발붙이기 위해 허위적거리는 것이나 결국은 삶의 유예를 담보로 하지 않았으면 성립될 수 없었다는 것, 그 것이었다. 그것은 엄청난 담보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사랑의 얼굴을 보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에게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떠남은 그 마무리 확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틀림없었다. 그리하여 결코 지워져 버리지 않는 그 어떤 얼굴을 보고자 한 것이었다.

어디선가 크롭체카의 향내가 풍겨오고 있었다. 우리는 경사진 공터의 한 귀퉁이에 도달해 있었다. 이미 말했다시피 러시아의 서북 평원은 저지의 소택지가 많다.

그리고 숲이 우거졌는데 그 사이사이로 풀들만 우거진 땅이 숨어 있다. 하늘은 이제 곧 눈이라도 흩뿌릴 듯 낮아 있었다. 경사진 공터라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역시 낮은 구릉이 저쪽으로 이어졌다. 어느 미술관이었던가, 포프코프라는 화가가 그린 푸슈킨의 모습 몇 점이 있었다. 그는 어떤 집의 현관에서 바깥의 전원 풍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뒷모습일 뿐 향기로운 전원 풍경이 현관을 통해 나에게도 전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그림은 그의 옆으로 누운 얼굴이 꽃 속에 잠겨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 배경이 바로 저 앞에 펼쳐져 있다는 환상에 빠졌다. 크롭체카의 향내도 그냥 숲 속의 냄새일지 몰랐다. 유예된 시간 속에 나는, 우리는 어떤 환상의 숲 속에 있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자야츠!

누군가가 소리쳤다.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소리친 사람이 볼로자였는지 유라였는지 텁석부리였는지 알 수 없었다. 또 그것은 누구라도 상관이 없었다. 그와 함께 아무르가 뛰는 것을 보았다.

!

그리고 그와 함께 엽총이 발사되는 소리를 들었다. 그와 함께 라고 나는 쓰고 있다. 그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자야츠! 라는 소리가 들린 것과 아무르가 뛴 것과 탕! 엽총 소리가 들린 것은 그러니까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바쁘게 눈을 움직였다. 이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와 함께 라는 말을 나는 다시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소리들과 함께 아무르가 뛰자 느닷없이 내 앞의 친구가 따라서 뛰기 시작했던 것이다. 왜 그랬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자야츠! 여우다!

그가 뛰쳐나가면서 지른 소리였다. 그를 만나서 사귀어온 오랜 세월 동안 그가 그처럼 맹렬하게 뛰쳐나가서 돌진하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 무엇 때문이든 말이다. 그가 왜 뛰쳐나가는지는 몰라도 좋았다. 다만 나는 그가 그렇게 뛰쳐나가는 것을 본 것만으로도 충격이었다. 사냥꾼들은 벌써 여기저기로 흩어졌으며 저기 구릉 쪽으로 아무르가 눈 속을 크게 뛰어오르면서 달려가고 그 뒤로 그가 뒤뚱거리며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모든 것이 순간적이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뒤이은 내 행동은 내가 주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로서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가 필사적으로 달려가고 있는 모습을 보는 그 순간 나 또한 그를 뒤따라 앞을 뛰쳐나간 것이었다. 나는 네 켤레의 양말을 신고도 시린 발로 눈 속의 대지를 힘차게 딛고 뛰기 시작했던 것이다. 크롭체카의 향내는 더욱 짙어지고 나무들의 잎사귀는 하나하나 미술관의 그림처럼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이 덮인 땅도 살아 있는 대지였다. 지난해에 마른 풀잎들도 살아서 숨쉬며 향내를 뿜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는 하얀 눈에 덮이고, 모든 의혹은 사라져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되었다. 나는 그가 새로운 삶을 향해 그렇게 내닫고 있다고 여겨졌다. 유예되었던 시간은 끝났다고 누군가 소리치는 것을 나는 들었다. 그것은 그의 이상이 참다운 이상으로 현실 속에 구현됨을 꿈꾸는 소리였으며, 나의 현실이 참다운 현실로서 이상 속에 구현됨을 꿈꾸는 소리였다.

조심해!

나는 목청껏 소리쳤다. 그림 속의 모든 사물들이 살아서 움직였듯이 모든 무생물과 생물들이 한데 어울려 살아나 소리치는 느낌이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그의 뒤를 따라 달려가며 한 뜀 차례마다 조심해! 를 가슴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 욜카여, 사스나여, 베료자여, 러시아의 숲이여, 크롭체카의 향내여, 갈리나의 열매여,

그림 속에 갇혀 있는 옛 풍물들이여, 사람들이여, 유예된 시간 속에 갇혀 있는 모든 사연들이여, 너 러시아의 자야츠여, 한국의 여우여.

나는 외쳤다.

조심해!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눈을 헤치고 달려나갔다. 침엽수의 바늘잎들이 커다란 노처럼 하늘의 배를 젓고, ()가 꽃잎처럼 흩뿌려지며 향내가 대기에 가득찼다. 나뭇가지가 팔을 벌려 우리를 받아들이는 곳에 대자연은 춤추고, 모든 삶은 호수의 거울 속에 새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두가 하나됨을 노래하는 세계가 거기에 있었다.

, 숲이여, 강물이여, 호수여. 엽총을 들고 칼을 찬 사냥꾼들이여, 통나무집이여, 흐린 램프여, 땅속의 매머드여, 땅위의 짐승들이여, 하늘의 새들이여, 호수 속의 물고기들이여,

러시아의 아무르여, 한국의 사랑이여.

달려가는 내 몸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힘이 넘치고 있었다. 눈발이 한 꽃잎 두 꽃잎 흩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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