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전설
3월의 전설
윤대녕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그럼 화개 쪽에 가보셔요. 그 참에 산수유와 매화 벚꽃도 구경하시구요. 그때쯤이면 섬진강으로 은어 떼가 올라오잖아요."
화개(花開).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마음이 되게 어지러웠다.
어디든 많이 다녀본 길인데 어째 그쪽만큼은 여태 초행이었다. 다시금 넝마 같은 짐을 꾸리고 쌍계사가 있는 화개 석문마을로 갈 요량에 달력을 훔쳐보니 그새 3월 15일이었다.
내게 화개를 귀띔해 준 이는 지난 2월 강원도 홍천에서 만난 20대 후반의 여자였다. 고향이 마산이란 소릴 들었다. 하지만 미미한 남도 억양만 재첩국 속의 소금 알갱이처럼 간혹 남아 있을 뿐 사투리는 쓰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내게 이런 얘기를 하나 들려주었다.
"여고 사춘기 때 고약하게 사랑에 빠졌다 그만 화순에 있는 운주사로 출가한 여자가 있었답니다. 거개 10년 전쯤의 일이지요. 1년 만에 수계도 받고 몇 년 공부도 잘 했는데 어느 봄날 화개 그쪽을 도반도 없이 혼자 지나게 되었다고 하죠? 지리산 하동엔 쌍계사가 있고 구례엔 화엄사가 있고 또 주변에 연곡사, 천은사, 칠불사가 다닥다닥 모여 있는 곳이니 글쎄 어느 절쯤을 찾아가고 있었겠지요. 그러다 저녁이 닥쳐올 무렵 비구니는 마침 산수유 마을을 지나고 있었답니다."
"산수유 마을?"
"네, 그쪽 어디에 봄이 되면 산수유 꽃에 노랗게 묻혀 버리는 마을이 하나 있다 합니다."
하긴 화개라니 어지간한 꽃들은 다 피겠지. 펴서 어떤 것들은 못내 지쳐 울기도 하겠지.
"아무튼 그곳을 지나면서 비구니는 서울에서 내려온 웬 신사와 발걸음이 맞아 나란히 걷게 됩니다. 그리고 서로 어렵사리 말문을 트며 걷는데 날이 아주 저물어 버렸지요. 안 되겠다 싶어 비구니는 총총 앞서 걸었겠지요. 한데 뒤미처 어둑한 길을 따라온 신사한테 그만 슬그머니 손목이 잡히게 됩니다."
"저런!"
"찰나 정이 통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절이 가차워질 즈음 서울 신사가 비구니에게 기어이 이랬답니다. 내일은 구례장이니 장터 어디에서 만나 서울로 함께 숨어가자구요."
"그래서요?"
"한참을 말이 없다가 비구니는 쉰 소리가 되어 다만 이랬답니다. 꽃들이 참 부산스럽게도 폈네요. 지붕 끝엔 그새 달도 걸렸구요."
나 원, 비구니도 참.
"그러고요?"
"산수유 마을 끝에서 둘은 길이 갈려 헤어졌습니다. 그다음 밤새의 일은 저도 모릅니다. 명일 비구니는 파계를 작하고 신사와 약조한 장턴지 차분지에서 종일을 돌처럼 서 있었답니다. 노랗게 물든 승복을 입고요. 하지만 신사는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죠."
"못된 사람."
"...... 꼭 그런 것만은 아닐 테죠. 그이도 밤새 오죽이나 생각에 시달렸겠어요. 어쨌든 더 들어 봐요. 장터에 밤이 왔건만 비구니는 어데 갈 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산수유 마을로 가서 거길 한바퀴 빙 돌아보고는 다시 구례로 나와 직행버스를 타고 서울로 아예 올라와 버렸답니다. 부처님께 거듭 귀의할 수 없으니 환속해 버린 것이지요."
"그게 답니까?"
"다는 아니지요. 그 후 해마다 3월이면 그녀는 직행버스를 타고 남행 산수유 마을과 구례 장터를 서성이다 오곤 한답니다."
"여태껏?"
"네, 여태껏. 그러니 화개 섬진강에 가실 요량이면 구례장이 서는 날에 맞춰 그쪽 어디도 하루쯤 서성여 보든지요. 혹 압니까? 뉘든 옛날 비구니 하나가 서성대는 꼴을 보게 될는지요."
이 말을 듣고 나는 또 겹겹이 마음이 어지러웠다. 화개로 떠나 오기 보름 전의 일이었다.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구례 거쳐 하동까지 가는 오후 2시 30분발 직행버스를 타고 중간 화개에 내리니 7시가 넘어 있었다. 구례를 지나서부터 오는 길 중간중간에 차창 밖으로 산수유가 듬성듬성 피어 있는 게 보였다. 버스에서 내려 곧장 택시를 타고 두 개의 큰 바위 사이를 지나야 들어갈 수 있는 석문(石門)마을에 도착하니 쌍계사 입구의 매표소가 나타났다. 거기서 차를 내려 경내에 있는 〈청운산장〉으로 간다고 하자 매표원은 표 값을 받지도 않고 안으로 나를 들여보내 주었다. 이미 사위가 어둑해 더듬더듬 길을 밟고 한 10분 올라가자 산장의 간판이 쉽게 눈에 띄었다.
청운 산방(山房)은 한지문 밖으로 밤새 개울이 흘러내려 새벽까지 잠이 들었다 깼다 했다. 그런 사이사이 나는 이런 꿈을 꾸고 있었다. 베갯머리 지척에서 고요하고 장려한 빛깔의 소리가 왔다 갔다 하는 꿈을. 그것은 수십여 두의 소들이 방울 소리를 쩔렁대며 꾸물꾸물 숲을 헤쳐 가고 있는 소리 같았다.
머리맡에 절이 있어 그러려니 하고 몸을 뒤척거리다가 아침녘에야 설핏 잠이 들었는데, 이번에는 푸득푸득 날갯짓 소리가 나며 타다다다 하고 무엇을 쪼아 대는 소리가 방문 바로 밖에서 들려왔다. 그 참에 눈을 뜨고 한지문을 여니 소리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개울 건너편에 환하게 피어 있는 매화 한 그루가 눈에 확 튀어 들어왔다. 어제 방에 들 때는 캄캄해서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다.
산장 식당에서 재첩국으로 이른 아침을 먹는데 밥을 내온 할머니가 무슨 일로 왔냐고 넌지시 물었다. 나는 숟가락을 든 채로 얼버무렸다.
"은어가 올라올 때가 됐다죠?"
"어디 예, 벚꽃 필 때까진 기다려야제."
벚꽃이 피는 시기는 매년 4월 초순인데 올해는 날씨가 미리 따뜻해 3월 말경이라고 했다. 수저를 놓고 일어서려다 나는 잠을 깨운 아침녘의 그 새소리에 대해 물어 보았다. 한데 그니의 대답이 몹시 수상쩍었다. 한 일주일 전부터 새 한 마리가 아침녘에 와서 마루에 붙어 있는 거울을 그리 부산스럽게 쪼아 댄다는 말이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나가보니 과연 방문 옆에 차창만 한 흐린 거울이 하나 붙어 있었다.
거울 안을 살피니 무섭게도 아침에 문을 열고 본 매화가 들어앉아 있었다.
몸을 씻고 불일폭포에 다녀올 작정으로 쌍계사로 들어가니 마당 옆에 가득 피어 있는 동백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또 매화, 산수유가 팔영루(八詠樓) 까만 기와지붕 끝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며 희고 노랗게 치솟아 있었다.
대웅전에서 삼배를 올리고 내처 불일폭포 가는 길을 오르려다 나는 팔영루? 하고 도로 계단을 내려와 마당의 스테인리스판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엔─이곳은 우리 나라 불교음악의 창시자인 진감선사(眞鑑禪師)가 중국에서 불교음악을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 민족에 맞는 불교음악(범패 梵唄)을 만든 불교음악의 발상지이며 훌륭한 범패 명인들을 배출한 교육장이다. 진감선사가 섬진강에서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팔음률로써 魚山(어산) 범패를 작곡했다고 해서 팔영루라고 전한다. 신라 문성왕 2년(840) 진감선사가 창건하였고 조선 인조(仁祖) 19년(1641) 벽암(碧岩) 스님이 중수한 후 1978년 고산(古山) 스님이 완전히 중수사였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밤새 뒤척이며 들은 소리가 바로 어산 범패 소리였던가. 그러하고 진감선사가 섬진강에서 건져 올린 팔음률의 정체는 혹 은어가 뛰노는 모양이 아니었을까.
이런저런 생각들에 시달리며 나는 불일폭포에 다녀와 오후엔 버스를 타고 쌍계사 10리 벚꽃 길을 달려나가 저녁때까지 섬진강 둑을 내내 서성거렸다. 강에는 서까래처럼 생긴 쇠판으로 바닥을 긁어올려 재첩을 잡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는데 그때에도 구례 상류에서 내려온 물은 모래와 몸을 다투며 하동 하구 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겨울을 시퍼렇게 견뎌 낸 강 건너편의 전라도 대나무 숲이 벚나무들을 킬킬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이슥한 밤에 돌아와 나는 화개로 나를 내려보낸 여자를 잠시 생각하고 있었다. 내일이나 모레쯤엔 산수유 마을을 찾아보리라 생각하며. 그러자면 먼저 구례장이 서는 날부터 알아봐야 하리라.
그녀를 만난 것은 홍천에 있는 대명콘도에서였다. 작정을 하고 간 것이 아니라 어찌어찌한 일로 경기도 광주 퇴촌에 사는 어떤 여류화가를 만나러 가는 길에 누가 콘도 회원권을 빌려줘 하루 묵고 온 것이었다. 퇴촌에서 홍천까지는 한 시간 거리인데다 가까운 곳에 온천이 있었다. 철이 바뀔 때마다 피부로 고생을 해 온 터라 순전히 온천에 귀가 쏠려 그곳까지 가게 된 것이었다. 읍에 도착해 표지판만 보고 산 구비구비를 따라 올라가 콘도에 도착했을 때는 그새 저녁 참이어서 나는 방에다 가방만 집어던진 채 지하에 있는 식당부터 찾았다. 쇼핑센터과 위락시설이 골고루 갖춰진 지하 아케이드에는 스키를 타러 온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혼자 식탁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게 거북스러워 나는 곰탕 한 그릇으로 서둘러 배를 채우고 식당문을 나왔다. 그런 다음 여기저기를 슬슬 기웃거리며 6층 방으로 올라가려는데 의류 할인매장 옆에 〈세계 희귀 화석전〉이라고 쓰여 있는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화석? 나는 끌리듯 전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아닌게 아니라 거기엔 쥐라기, 신생대, 고생대 등등의 연대를 두루 아우르는 많은─이를테면 삼엽충, 나무, 나뭇잎, 조개, 물고기, 모기 따위의 벌레, 공룡 알과 뼈─화석들이 수백여 점이나 아름답게 전시돼 있었다 남미 브라질과 아프리카와 미국과 중국과 유럽 등지에서 다양하게 출토된 것들이었다. 한쪽 코너에서는 아프리카 인형전이 더불어 열리고 있었다. 그래도 되는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가격표를 붙여 놓은 것으로 봐서 판매까지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 시간쯤 그 안에서 시간을 잊고 서성이다 나는 나무 받침대 위에 올려져 있는 약 30센티미터 크기의 물고기 화석에 눈이 박혀 버렸다.
그것은 한 뼘 정도 크기의 물고기 두 마리가 서로 만나려는 찰나에 안타깝게도 굳어 버린 모양을 하고 있었다. 밑에 쓰여 있는 설명을 보니 신생대 5천만 년경의 것으로 미국 와이오밍 주에서 출토된 것이었다. 신생대 5천만 년이면 얼른 계산은 안 되지만 아마도 불가에서 말하는 진묵겁(塵墨劫)의 세월쯤이 될 터이었다. 그러니까 그토록 오래 전에 이 두 마리의 물고기는 한껏 주둥이를 벌리고 막상 만나려다 지각변동인지 화산폭발인지 모를 천재에 의해 화석이 돼 버린 것이었다. 그 앞에서 나는 얼마를 그토록 〈오래 전〉처럼 서 있었던가. 그 물고기 중의 한 마리라도 되는 양 붙박여 있다가 나는 아프게 돌비늘을 투둑 털어 내며 간신히 깨어났다. 전시실 안에는 몇몇 관람객만 남아 있었고 이미 문닫을 시간이 되어 여자 점원 둘이 카운터를 정리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누가 나를 골똘히 눈여겨보고 있었던가. 그 느낌은 사위의 공기 속에 머물고 있다가 물살의 여운처럼 내게로 일렁여 왔다. 돌아보니 아프리카 인형들 틈에서 웬 머리 긴 여자가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뻔뻔한 것이 눈을 피하지도 않은 채로 말이다.
먼저 슬쩍 눈을 돌린 채 나는 전시실을 나와 1층 로비로 통하는 계단을 디뎌 올라갔다. 그런데 순간 온몸으로 거센 물살이 그야말로 천재(天災)처럼 몰아쳐 왔다. 그러하고 낸 눈에는 거센 물살을 역류해 가고 잇는 하얀 물고기 떼가 섬광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나는 흐느적흐느적 전시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곧장 두 마리의 물고기가 박혀있는 화석을 집어들고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점원이 뒤에서 소매를 잡아끌지만 않았다면 나는 계산도 하지 않은 채 그걸 가지고 내 방으로 올라왔을 터였다. 포장을 하는 사이 고개를 돌려 보니 아프리카 인형들 틈에 서 있던 여자는 그새 온데간데가 없었다
그녀는 그때 유리문 밖에 서 있었다.
엠보싱 비닐에 두텁게 싸인 화석을 들고 밖으로 나오는데 그녀가 문 옆에 서 있다가 저어, 하고 내게 말을 걸어왔다. 반사적으로 나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몸에 열이 많은지 루주를 칠하지 않았는데도 입술이 유난히 붉어 보였다.
그렇게 입술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저, 그거 재작년에 압구정동에 있는 현대백화점에서 이미 팔리고 남은 건데요."
뭐?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두 유심히 보길래 그냥 이상하게 여겨져서요."
"이상하다니요?"
"모습이 말씀입니다. 그런데다 아까 저기 계단을 올라가다 어째 넘어질 듯하더니 도로 이쪽으로 들이닥쳐 한편 놀라기까지 했죠. 마침 저는 나가는 길이었거든요."
나는 그녀의 사다리식 말투에 차츰 끌려들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한손에 화석을 들고 삐걱거리는 사다리를 주춤주춤 기어 올라갔다.
"그런 모습에는 암만해도 연유가 깃들여 있는 법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제가 겉넘은 소릴 하고 있는 걸 겁니다."
"연유는 무슨."
로비 옆에 붙어 있는 커피숍에서 그녀와 나는 이런 말을 하며 어느덧 마주 앉아 있었다. 그녀의 일행은 방에서 술추렴을 하고 있었다. 스키를 타러 왔냐고 묻자 그녀는 화닥 놀라는 시늉을 하며 아니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누가 끌길래 따라온 것뿐예요. 저야 술도 못하고 시끄러운 것은 딱 못참아서 시간을 없애려고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하고 있었던 거죠."
서른도 안 된 여자의 말투가 어째 가끔 의고체인데다 경상도 억양까지 섞여 있어 귀에 탁탁 들어와 박혔다. 그러나 아까 전시실 입구에서 부딪쳤을 때 느꼈던 어쩐지 심상찮고 어수선해 보이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피나무 바둑판에 조갯돌을 내려놓을 때처럼 억양이 짱짱하고 여간해서 빈틈이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해서 사대가 수작을 걸었으려니 하는 의뭉스런 마음도 이내 사라지고 오히려 이쪽에서 먼저 말을 청한 듯한 분위기로 자리가 바뀌어 있었다.
오래전에 이런 정갈한 분위기의 여자를 만난 적이 있다. 늘 반대편 당둑에 마주 앉아 있는 듯한 여자. 좀처럼 뒤를 보이지 않던 여자. 어쩌다 다가갈라 치면 눈앞에 시퍼런 물이 보여 아차 하고 발을 빼곤 하던 순간들. 그래, 남현주라는 이름이었지. 눈이 봄 물빛으로 되게 맑았었다.
얘기는 화석으로 돌아와 있었다. 억양으로 보아 고향이 그쪽 어디려니 넘겨짚고 나는 되도 않게 이런 말까지 함부로 지껄여 대고 있었다.
"섬진강을 자주 보셨겠습니다."
"섬진강요? 네, 그러믄요."
"아까 저는 이게 어디 그쯤에서 출토된 화석인 줄로 알았던 겁니다."
그러자 그녀의 눈빛이 반짝 하더니 붉은 아가미 사이에 총총 박혀 있는 흰 이빨뼈들이 드러났다. 그녀가 화개 어쩌구 하는 말을 꺼낸 것은 그때였다.
"그게 그런 거였군요."
잠깐 사이 그녀는 맑은 눈빛을 잃고 마주 앉아 있는 나를 슬쩍슬쩍 훔쳐보고 있었다. 그녀가 내게서 무얼 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거기서 바둑 한 판이 다 끝나고 그녀와 나느 ㄴ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둑에서 무승부란 있을 수 없지만 둘 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로비로 나와 숙박계를 쓰는 척하며 나는 어물쩡하게 뒤에 서 있던 그녀에게 내 전화번호를 적어 내밀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더니 분명 노려보는 눈빛으로 내 손에 들려 있는 숙박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게 방 번호가 아니고 전화번호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그것을 건네받았다.
"이것을 혹 인과(因果)라고도 하나 봅니다. 먼저 말을 빌렸으니 안 받을 수 없게 돼 버렸다는 뜻입니다. 언제나 그렇게 틈을 노리고 사시는 분인가 봅니다."
불계패를 당해 돌을 던지는 얼굴로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결코 틈을 노렸던 게 아니었다. 전화 따위는 결코 기다리지도 않을 테고 왠지 그래야 뒤가 무난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녀의 연락처를 물은 것도 아니었다. 몹시 창피한 얼굴로 그녀는 입술을 붉히더니 별 인사말도 없이 돌아서 엘리베이터 앞까지 박자를 놓친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먼저 올라가기를 기다렸다가 나는 화석을 껴안고 내 방으로 올라갔다.
서울에서 화개까지 오는 다섯 시간 동안 나는 줄곧 스무 살 때 만나 헤어진 여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늘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남들에겐 어디에도 없는 여자였다. 학교엔 왜 들어왔는지, 항상 못올 데 불려온 사람처럼 무표정하게 앉아 있다가 조용히 사라지곤 해서 대개는 그녀가 강의실에 있는지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알기도 했겠지만 애초에 저쪽에서 확연한 거리를 두고 있으니 이쪽에서도 차츰 무시하게 됐을 것이다. 한동안은 그녀가 다른 과 학생인 줄로 알았을 정도였다. 흰 얼굴에 머리칼을 곱슬곱슬하게 어깨까지 말아 내려뜨리고 다니는 키 작은 여자였다. 그런데도 늘 원피스에 단화 차림이었다. 강의가 시작되는 시각에 정확히 맞춰 들어와 수업이 끝나자마자 소리없이 곧장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쪽으로 자꾸 눈이 갔지만 좀처럼 말을 건넬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와 마주친 것은 다음해 목련이 필 무렵이었다. 얼굴을 익히고 무려 1년 만에 나느 좁은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어둑한 도서관의 계단을 내려오는 그녀와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그녀는 고적한 얼굴로 흘끗 나를 바라보고는 내 옆을 흔적 없이 비껴 지나갔다. 혼자 산길을 가듯 그렇게.
그때 내가 그녀의 지나가는 어깨에다 대고 글쎄 왜 이랬는지 모른다.
"스님, 가끔은 바랑도 쉬었다 내처 가세요."
그녀가 두어 걸음 걷는 듯하더니 고개를 틀어 먼데 보듯 나를 쳐다 보았다. 저녁 산길을 가다 뒷전에서 무슨 소리를 들은 듯 그렇게. 그녀의 어깨 너머 목련에 걸쳐진 노을이 보랏빛으로 마구 흩어지고 있었다. 비아냥 따위가 아니었다는 것은 그녀도 내 얼굴을 보고 눈치챈 듯했다. 그녀가 어깨를 바로 하고 앞으로 걷다가 문득 발을 돌려 또박또박 내게로 다가왔다. 와서 턱을 조금 비껴 들고 내 눈을 깊숙이 바라보며 말했다.
"누가 방금 저한테 말을 걸어온 건가요?"
높낮이 없이 미미미미 음계로 이어지는 고른 어조였다. 또한 처마 끝에 내리는 초저녁 부슬비가 생각나는 목소리. 그러니까 미미미미로 내리는 초저녁 부슬비 소리. 도서관에서 나온 그녀와 함께 학교 정문을 걸어 나가면서 내가 조심스럽게 그런 얘기를 하자 그녀는 덧없이 잠깐 웃기만 했다. 3월의 어느 금요일이었다.
생맥주 집에 앉아 그녀는 열번도 더 본 동화책을 읽는 투로 초등학교 때 죽은 남동생과 그때부터 말을 잃고 사는 아버지, 어머니 얘기를 했다. 그러나 자신에 관해서는 그 후로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귀에다 가끔 이어폰을 꽂고 다녀 그래도 음악은 듣는 모양이다 싶은 게 그녀의 유일한 의사 반응 표식이었다. 강의를 빼먹고 여름날의 뜨거운 철길을 함께 걸어갔다 오기도 했지만 그것도 다만 그뿐이었다. 그녀는 단 한 권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책을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모레도 또 읽어야 하는 생을 살고 있는 사람 같았다. 한데 한 권밖에 없는 책을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읽어 왔다고 생각해 보라. 고약한 것은 그것만으로도 생이 어떻든 가능하고 마침내 그게 생의 전부가 돼버린다는 것이다.
그 비밀 책자를 한 번쯤 대여받고자 나는 그녀를 1년 내내 따라다녔다. 하지만 모든 짓이 다 공염불이었다. 그녀는 한 그루 나무인 양 매양 무심한 모습 그대로였다. 바라보게는 하되 결코 다가오게는 하지 않았다. 그녀도 괴로워한다고 어렴풋이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 내가 안 보이면 조용조용 찾아다닌다는 것도 알았다. 창문 이쪽에서 가끔 그녀의 그런 모습을 엿본 적이 있었다.
그 가을에 그녀와 1박 2일로 낙산사에 다녀왔다. 그날 밤 왠지 그래야만 되는 것처럼 낮선 여관에서 서로 알몸의 인연을 맺었다. 그녀와 나는 마치 낮에 혼례를 치른 신랑 신부 같았다. 그녀는 봄날에 한줄기 바람에 떨어져 내리는 목련인 듯 아무 힘없이 내게로 툭 떨어져 내렸다. 그래서 알았다. 알몸이었으되 서로 뜻이 다른 일이었다는 것을. 처음인 일이어서 당황했을 법도 한데 그는 아무런 아픔도 슬픔도 노여움도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작해야 방바닥에 떨어진 한 점 핏방울을 흰 손수건을 들고 엎드려 닦아 낸 정도의 모습이었다. 그런 다음 착착 접은 손수건을 가방에 넣어버리고는 아예 그만인 것이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그녀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말이 없었다. 줄곧 차창 밖에 눈을 던져 둔 채 세상의 마지막 풍경을 관람하고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곧 학기말 고사를 치르고 기나긴 겨울 방학에 들어가 간신히 해를 넘기고 돌아와 보니 어디에도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며칠 뒤에야 휴학했다는 사실을 학과 조교한테 전해들었다. 나는 그녀의 소식을 기다리며 1년을 학교에서 더 보내고 3학년을 마친 다음에 으레 그러하듯 군에 입대했다.
그녀의 소식을 들은 것은 군대를 제대하고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취직한 다음 어느 날 어찌어찌 서로 전화번호를 알아내 만나게 된 동창회 모임에서였다. 거기서 나는 이런 소리를 들었다.
"걔 머리 깎고 출가했다더라. 남쪽에 있는 어느 절로 말이야. 어쩐지 그때부터 영 비구니 같더라니."
그렇게 말한 녀석도 어디서 그 얘기를 건네 들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남쪽 비구니 절은 앞뜰 수국이 좋다는 청도의 운문사와 연꽃모란의 금릉 청암사와 그리고 와불로 유명한 화순의 운주사밖엔 없었다. 또 승주에 있는 선암사가 그렇다나 어쨌다나. 하지만 나는 그녀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래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때 그녀는 바랑을 벗고 잠시 내게서 쉬고 난 다음 내처 길을 가 버린 것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출가(出家). 오래 전부터 이미 예정돼 있었고 자신도 그렇게 알고 있었던 듯 그녀는 슬그머니 입산 불제자가 돼 버린 건이었다. 연유야 일일이 알 수 없으나 그런 인생의 경우도 우리 주위엔 종종 있는 것이다.
저놈의 새는 아침 7시부터 거의 30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거울을 쪼아 대고 있다. 얘야, 고만 좀 쪼아라. 그새 매화 다 떨어질라.
"구례 산동이 마 그런 데 아입니꺼."
16일은 화개장. 17일은 하동장이고 오늘은 구례장이 서는 날이라고 쌍계사 입구의 <무향>이란 찻집 주인이 알려주었다. 허나 구례 하동의 중간이어서 법석이던 옛적 화개장은 이미 자휘가 사라진 지 오래며 하동장도 이젠 볼 게 없고 구례장만 기껏 사람들이 모인다고 했다. 산수유 마을이 어디냐고 물으니 그녀의 입에서 냉큼 구례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무, 화개가 아니고 구례라고? 잠시 허방에 발을 빠뜨린 기분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녀가 내 낯빛을 살피며 한마디를 더 끼워 넣었다.
"그라캐도 화개서 한 30분이모 바로 구례 아인교."
나는 찻집을 나와 곧장 길 건너편 정류장에서 구례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는 벚나무 길을 지나 화개 읍내를 거텨 섬진강 상류로 이어지는 19번 도로로 들어섰다. 길에는 듬성듬성 매화만 꽃을 들고 있을 뿐 벚나무는 기껏 가지나 받쳐들고 학학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화개 벚꽃은 순토종 우리 왕벚꽃이라는 말도 찻집 주인에게서 들었다. 섬진강을 끼고 군데군데 산수유가 피어 있는 길을 달려 구례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쯤이었다. 거기서 산동까지는 그리 멀지가 않았다. 지리산 만복대 기슭에 있는 상위마을이 바로 산수유의 고장이라는 차부 슈퍼마켓 아낙의 말이었다.
구례읍에서 다시 털털거리는 완행버스를 타고 온천 지대로 들어서자 아득한 산수유의 마을이었다. 온천 입구에서부터 도로 양쪽으로 노란 꽃구름들이 새털처럼 잔잔히 흩어져 있었다. 도로가 포장되기 전에는 사람만 겨우 마주 다닐 수 있는 길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나는 구례군 산동면 하위마을에서 차를 내렸다. 상위마을은 온천 지대가 끝나는 곳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거기서부터는 집집마다가 산수유요 골목과 밭들과 산자락 모두가 산수유여서 현기증을 보듯 눈앞이 어지러웠다.
여기서 비구니는 그"때 서울 사내와 만나고 있었을 것이다. 저녁이 닥쳐 추녀에 딸린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는 그때 비구니는 밥 익는 냄새를 몰래 킁킁거리며 속세를 그리워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한 때에 옆을 가차이 따라온 사내에게 불쑥 손목이 잡혀 버린 것이다.
낙산에서 돌아온 그녀는 왜 그 길로 곧장 출가해 버린 것일까. 도서관에서 내려오던 그녀에게 내가 무심코 내뱉은 말이 덜컥 빌미가 된 것은 아니었는지. 또한 수년 전 서울 사내와 함께 이곳을 지났다던 비구니가 혹 그녀는 아니었는지.
마을을 돌아 나오면서 나는 홍천에서 만난 여자가 내게 귀띔해 준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화개에 가실 요량이면 구례장이 서는 날에 맞춰 그쪽 어디를 한번쯤 서성여 보시든지요. 혹 압니까? 뉘든 비구니 하나가 거기서 서성대는 꼴을 보게 될는지요.
구례장도 볼 게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비지땀을 흘리며 빨갛게 달궈진 쇠를 두드린다거나 처마 밑에서 고무신을 때운다거나 튀밥을 터뜨린다거나 짚끈에 발목이 묶인 닭이나 오리를 보는 일조차 어이없는 상상에 불과했다. 파장 때인 탓도 있었지만 현대식 건물이 잇닿아 서 있는 장터에서 옛 자취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기껏해야 개불이나 멍게, 홍합 전어, 석굴 따위와 민물에서 나는 갖가지 조개들을 늘어놓고 파는 어물전에 눈이 갈 뿐이었다. 물론 등에 바랑을 걸친 비구니가 차부 한모퉁이에 초조하게 서 있는 모습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옛적 짜디짠 풍경들은 죄 세월에 씻겨 가 있었다.
산장으로 돌아오니 웬 키 큰 사내가 식당에 앉아 혼자 파전에 동동주를 마시고 있었다. 한 칸 건너 자리에서 밥을 먹는데 그가 더듬더듬 말을 붙여와 들으니 부천에 산다고 했다. 그는 인천에 재무 구조가 제법 튼튼한 자동차 부름 공장을 가지고 있었다. 스물아홉에 만난 여자를 서른에 잃고 그는 12년 동안 세상을 헤매고 다닌다고 했다. 옛 장터는 사라졌어도 세상엔 아직 그런 사람들이 골동품처럼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홍천에서 만난 여자한테서 전화가 걸려 온 것은 2월의 마지막 토요일이었다. 날짜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다른 예기치 못했던 일이 그날 더불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바둑판에 돌을 얹어 놓는 신중한 말투였다. 전화를 드린 건, 하고 그녀는 그 다음 말을 한동안 손에 틀켜 쥐고 있었다. 그러다 무슨 큰 결심이라도 한 듯 큼, 예쁜 기침을 하며 엉뚱하게도 화석 얘기를 꺼냈다.
"그걸 어디다 뒀는지 못내 궁금하여 끝내 이런 일을 범하고야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맙소사였다. 이건 꼭 초등학생 수준이었다. 나는 거실 장식장 위에 잘 올려놓았다고 짐짓 진지하게 대꾸했다. 그녀는 얼마를 또 목욕탕에 처음 온 처녀처럼 손에 옷을 들고 탕 안을 기웃거리기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또 겨우.
"화개엔 아직 안 가셨군요. 산수유가 곧 필 텐데 말예요. 아니, 이미 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요."
그제야 나는 곧장 가로지르는 말을 저쪽에다 집어넣었다. 그녀는 이미 패착 상태였다.
"한번 뵙고 가려고 나날이 기다리고 있던 중입니다."
"...... 어찌 함부로 그런 말씀을!"
무엄하단 뜻인가. 나는 못 들은 척 다시 질러갔다.
"암만해도 그쪽을 잘 아시는 거 같으니 더 들을 만한 얘기가 없겠나 싶었던 겁니다.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그런 얘기 말입니다."
"전설의 고향이라구요?"
이렇게 반문하며 그녀는 귀에서 수화기를 떼고 잠깐 웃었다. 웃음이 그치기가 무섭게 나는 내일쯤에는 떠날지도 모르겠다고 눙치며 오늘 저녁에 만났으면 한다고 했다. 또 머뭇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척하다가 그녀는 앞으로 도로 다가와 그러마고 가까스로 응낙을 했다. 저녁 7시에 신촌 복지다방에서 그녀를 만나기로 하고 나는 샤워를 하고 옷을 골라 입고 6시에 집을 나섰다.
그날 저녁 6시 50분경에 나는 약속 장소를 전방 백 미터쯤 남겨 둔 지점에서 예기치 못했던 덫에 걸려들고 만다.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태림레코드점 앞까지 왔다가 나는 발길을 돌려 방금 지나쳐 온 곳으로 회향(回向)했다. 시계를 보니 그녀와 만나기로 한 시간에서 딱 10분이 남아 있었다.
나는 길가에 리어카를 세워 놓고 구형 음반들을 파는 곳으로 다가갔다. 시원찮은 성능의 스피커에서는 그때 그룹 아프로디테스 차일드가 부른 「봄, 여름, 겨울 그리고 가을」이란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렇기는 해도 저녁나절에 그것도 길 가다 말고 그 특유의 허스키한 보이스를 듣게 되다니. 나는 불쑥 미늘에 꿰인 것처럼 목이 아팠다.
거기엔 잉글버트 험퍼딩크, 칼리 사이먼, 메리 홉킨, 앤디 윌리엄스, 핑크 플로이드, 레이 찰스 따위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먼지에 더럽혀지고 재킷의 네 귀퉁이가 이미 닳았거나 찢겨나간 그 검은 플라스틱판 안에. 나는 한 장에 2,500원 하는 레코드판을 몇 장 골라서 비닐봉지 안에 담아 가지고 이미 10분이나 늦어진 약속 장소로 서둘러 갔다.
머저 와 있던 그녀는 고무 타는 냄새를 맡는 것처럼 양미간을 찌푸린채 나를 쳐다보았다. 오다가 어디서 걸려 넘어졌다는 사실을 그녀는 가만히 눈치채고 있었다. 조금 늦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도착하기 불과 1, 20분 전에 내 낮짝에 심상찮은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그녀는 읽어 내고 있었다. 내가 평상시의 모습을 되찾을 때까지 그녀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내가 주섬주섬 비닐봉지까지 들어 보이며 사실대로 얘기하자 그녀는 입술만 가볍게 웃어 보였다.
"이번엔 레코드판이군요."
네? 하고 되묻자 그녀가 말했다.
"지난번엔 화석이고 이번엔 그 검은 지지미 같은 물건이란 것입니다."
다분다분 얘기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화가 나 있었다. 그녀의 눈살 아래로 낙담을 뜻하는 한 올의 서글픈 그림자가 언뜻 스치고 지나가는 게 보였다. 무척이나 예민하고 까다로운 여자였다. 미처 차를 마실 여유도 없이 나는 어색하게 그녀를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나이가 그새 몇인데 여직 이런 시끄러운 데를 즐겨 다니시는 모양입니다."
그때는 나도 조금씩 신경이 비쭉비쭉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덩달아 신경을 드러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까 왔던 태림레코드점 앞을 지나며 목이 좀 막힌 소리로 그녀에게 무얼 먹겠냐고 물어보자 의외로 쉽게 대답이 나왔다.
"초식입니다."
초식? 아, 초식(草食).
초식집을 찾아 그녀의 동작에 맞춰 느리게 식사를 끝내고 나자 그 다음 일이 또 걱정이었다. 깨끗하게 밥그릇을 비우고 수저를 나란히 나란히 탁자에 내려좋고 나서 그녀는 얼른 상황 판단을 하고 쥐고 있던 고삐의 힘을 슬쩍 풀었다.
"그 다음은 아무데고 상관 않겠습니다. 술집에라도 가자면 가야겠죠."
나는 걸음이 느린 그녀를 데리고 <70년대 스튜디오>라는 카페로 갔다. 50년대부터 70년대에 이르는 국내외 팝 음악을 LP음반으로 틀어주는 곳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두 눈만 끔벅거리고 있던 그녀는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중심을 다잡고 또박또박 이야기를 풀어 놓고 있었다. 맥주잔을 들어 입술을 몇 번 적시기도 하면서.
거기서 나는 산수유 마을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된다. 몇 해 전에 그곳을 지나다 느닷없이 사람의 돌부리에 채어 환속하게 된 비구니 스님 얘기도 듣게 된다. 그때부터 내 면상은 다시금 명태처럼 변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프로디테스 차일드의 음반. 그것은 낙산에 가기 얼마 전인가 후에 그녀가 내게 준 음반이었다. 이미 10년도 더 된 일이고 여기저기 숱하게 짐을 옮겨다니다 보니 어느 결에 사라져 버린 그 음반(혹은 내 손으로 버렸을지도 모를). 비록 남이 가지고 있다 내다 버린 것이라고 해도 거기엔 그녀가 늘 듣던 「봄, 여름, 겨울 그리고 가을」이란 노래가 수록돼 있었다.
왜 하필 그날 아프로디테스 차일드의 음반이 내 손에 들어왔을까. 홍천에서 만난 여자와 재회하던 날에 말이다. 다시금 얼이 빠져 있는 나를 기웃기웃 살펴보던 그녀는 마침내 낙담을 한 얼굴로 그만 돌아갔으면 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11시에 그녀와 나는 카페에서 나와 신촌 전철역 앞에서 헤어졌다. 우수에 찬 얼굴로 그녀는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하다가 끝내 입술을 다물어 버렸다. 뭔가를 힘들여 참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하긴 늘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상대가 무얼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덛욱 혼자서 속을 태우고 사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의외로 많다는 얘기다.
잠실 장미아파트에 산다는 그녀를 전철역 안으로 들여보내고 나는 좌석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와서 자정이 넘은 시각에 아프로디테스 차일드를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베란다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포도주를 꺼내 소파에 앉아 마셨다. 그러다 나는 앨범 재킷에 적혀 있는 이런 색 바랜 볼펜 메모를 발견했다.
밤마다 여기로 전화해 줄래? 더군다나 수요일 자정엔 꼭꼭 말이야. 수요일의 빨간 장미와 함께. -난희
메모 밑에는 전화번호와 레코드판을 누구한테 선물한 날짜까지 적혀 있었다. 1989년 4월 19일 수요일이었다. 아무튼 「봄, 여름, 겨울 그리고 가을」을 되풀이해서 듣는 동안 포도주 한 병이 다 비어 버렸고 나는 좀 취해 있었을 것이다. 나는 무심결에 송수화기를 집어들고 전화번호를 누르려다 그런 자신에게 깜짝 놀라 화닥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시계를 보니 얼추 새벽 1시가 다 돼 있었다. 그녀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암만 생각해도 당찮은 취중 발상임에 틀림없었지만 나는 전화를 걸어 보고 싶은 충동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하여 1시 정각에 나느 다시 수솨기를 들고 레코드판 뒤에 적혀 있는 전화번호를 하나씩 눌렀다.
그 전화는 이미 국번이 변경된 상태였다. 내친김이라 생각하고 나는 지역 교환원을 찾아 변경된 국번을 물었다.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간단하게 새 번호가 튀어나왔다. 이쯤 되고 보니 그 다음엔 좀처럼 수화기를 손에서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여보세요, 하고 잠결의 여자 목소리가 한참 만에 흘러나왔다. 30대 초반으로 짐작되는 목소리. 화석에 박혀 있던 물고기가 꿈틀, 하고 움직이는 것을 목격한 듯한 순간이었다. 그너나 상대가 난희라는 여자인가는 아직 확인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이름부터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재빨리 스피커 쪽으로 수화기를 돌려놓고 듣고 있던 음악을 틀어 놓았다. 스프링 서머 윈터 엔 포오올......하고 거실에 노래가 울려 퍼지는 동안 나는 범행을 저지르는 일그러진 얼굴로 송수화기만 굳게 노려보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고 난 뒤에도 나는 수화기만 귀에 갖다 댄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술기운은 그새 싹 가셔 있었다. 저쪽 또한 약 10호 동안이나 지루하게 입을 닫고 있었다. 그러다가.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미세하게 떨고 있었으나 차분하게 가라앉은 어조였다. 어쩐지 사고를 친 학생을 다독거리는 여선생의 말투였다. 여전히 내가 말을 못 잇고 있자 그녀가 뜻밖에도 이런 주문을 해 왔다.
"그럼, 판을 뒤로 돌려 놓고 「비와 눈물」까지 들려주든지요."
그녀가 시키는대로 나는 고분고분 음반을 엎어 놓고 바늘을 갖다 댔다.
노래가 또 끝났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녀가 먼저 이쪽에다 입김을 불어 넣었다.
"언제 들어도 시금털털한 명곡이에요. 그렇죠? 하지만 오늘은 수요일이 아니잖아요."
큰일이었다. 이쯤이면 지금 통화중인 상대가 난희라는 여자임이 틀림없다는 뜻이었다. 참으로 난처하게 됐다. 라고 생각하며 어떻게 뒤를 수습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레코드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알려 줘야 마땅할 터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침대 속에서 전화통을 붙들고 있는 상태였다. 예기치 못한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라고 나는 시금털털한 소리로 겨우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그저 듣고만 있었다.
"저는, 분명, 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뭡니까, 이 음반의주인이 아니란 뜻입니다."
횡설수설에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었다. 누가 억지로 시킨 것도 아닌데 야심한 시각에 어째서 이런 짓을 일삼고 있단 말인가. 후후 웃고 나더니 그녀가 다시 나타났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니. 그렇다면 왜 생면부지인 남자한테 판까지 뒤집게 하고 「비와 눈물」을 들으며 태연하게 누워 있었단 말인가.
"근데 그거 어디서 났어요?"
대답을 안 할 수 없는 처지임을 깨닫고 나는 사실대로 죄 얘기했다. 그녀는 다 듣고 나더니 2,500원요? 하고 또 푸푸 웃었다.
"그런데요, 왜 하필이면 그걸 살 생각을 했어요?"
영락없이 궁지에 몰린 꼴이 되어 나는 딱한 추억 어쩌구 하며 되는대로 얼버무렸다.
"네, 딱한 추억이군요. 고작해야 일금 2,500원짜리 하는 추억 말예요."
"......"
한동한 정전이 된 듯 저쪽과 이쪽 사이에 기며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제야 나는 언뜻 정신을 차리고 실례 많았습니다, 그럼 편히 주무십시오, 하며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그때 저쪽에서 다급히 잡아채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잠깐만요!"
나는 잠깐 동안 그대로 있었다.
"미안한 얘기지만 그 LP 저한테 돌려주실 수 없을까요?"
돌려달라.
"부탁입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몰라 나는 좀더 그대로 있었다.
"값은 후하게 쳐 드리겠습니다. 25,000원이면 되겠어요? 아니 250,000원이라도 상관없겠는데요...... 오해는 마시구요."
오해라니. 도대체 사람을 뭘로 보고 하는 소린가. 얼마간 생각하는 척하다가 나는 돌려주겠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닌 것이다.
"고맙습니다."
조금 아쉽긴 해도 뭐 어쩔 수 없게 돼 버린 일이었다. 취중에 함부로 전화를 건 이쪽이 당연 치러야 할 대가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용케 선이 닿았지만 이 전화로는 더 이상 연락이 안 될 거에요. 시간 나시는 대로 여기로 연락 주시면 제가 나가겠습니다."
무슨 뜻인지를 몰랐으나 나는 그녀가 불러 주는 전화번호를 그녀의 색바랜 메모 밑에 볼펜으로 꾹꾹 눌러 적었다.
그녀와 통화하는 동안 어느덧 2월이 지나고 3월이 돼 있었다.
그녀를 만난 것은 3월 둘째 주의 수쇼일이었다. 약속을 하고 나서 열흘이 지난 다음에야 이쪽에서 연락을 한 셈이었다. 분망해서 그랬던 게 아니라 웬일인지 서먹한 일이어서 하루하루 지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서울에도 산수유꽃이 폈다는 저녁 뉴스를 보게 되었고 서둘러 화개에 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가기 전에 그녀에게 음반을 돌려줘야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녀는 반갑게 전화를 받으며 우선 내가 우편으로 부쳐 준다고 하자, 아니 저녁이라도 사고 싶다고 간곡하게 말했다. 그렇게 까지 말하는데 거절하자니 막상 야박한 느낌이 들어 나는 그러마 하고 다시금 신촌에 있는 복지다방에서 7시에 그녀와 만나기로 하고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목련빛 원피스에 까만 핸드백을 무릎에 올려놓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이번에는 약속 시간에 꼭 맞춰 나갔는데도 저쪽이 먼저 와 있었다. 봄 옷을 입고 나와서 그런지 유난히 환하고 깔끔해 보이는 여자였다. 약간 살이 찐 몸매였지만 얼굴은 작은 편이었고 눈코입이 조목조목 뚜렷했다. 서른둘이나 혹은 셋. 초면이긴 해도 일전에 통화를 한 일이 있었으므로 서먹한 느낌도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사회 생활을 하는 여자인 듯 초면임에도 자연스럽게 말을 풀어 나갔다. 내가 음반을 돌려주자 그녀는 뒷면에 적어 놓은 자기 메모를 눈썹 속에서 얼마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완전히 잃어버린 줄로만 알고 있던 10년 전의 자기 흔적을 내려다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솔직히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어요. 우습잖게도 기분이 참 묘하고 어수선하네요."
딱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하며 그녀는 채 마시지도 않은 커피잔을 놓고 자리에서 훌쩍 일어났다. 그러고는 약속한 대로 저녁을 사고 싶다며 뭘 먹겠냐고 물어 왔다. 나는 얼결에 이렇게 대꾸하고 있었다.
"육식(肉食)이면 됩니다."
"육식요? 아, 고기요. 네, 그럼 고기 먹어요."
어째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는 흘끗 나를 쳐다보고는 그럼 <형제갈비>로 가자며 태림레코드 방향으로 올라갔다. 이왕 가는 일이었으므로 나는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음반을 산 곳을 그녀에게 알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데 그 리어카가 어디로 갔는지 그새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나는 거기 어디쯤에 멈춰 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녀가 왜요? 하더니 옆에서 나를 쳐다보았다.
"바로 여기였는데요."
"네?"
"그 음반을 구한 곳 말입니다."
그녀의 얼굴에 아주 잠깐 쓸쓸한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이 숙이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저씨도 참."
아저씨. 말도 안 되는 소리 였지만 어쨌든 그렇게 내뱉는 목소리에도 분명 애조가 깃들여 있었다.
"모두가 그렇게 훌쩍훌쩍 사라져가 버리는 거예요. 여직 그것도 모르셨나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그녀와 나는 형제갈비집으로 들어가 불고기 3인분을 시켜 먹었다. 도중에 내가 먹을 양으로 소주 한 병까지 곁들이는데 그녀가 상 위로 잔을 내밀며 한잔 주세요, 하며 내 얼굴을 살폈다. 아까 보았던 애수의 옅은 그림자는 아직도 그녀의 눈 속에서 혼령처럼 어른거리고 있었다. 희고 가는 손목을 무심결에 눈여겨보며 나는 그녀의 잔에 소주를 찰찰 따랐다. 잔을 잡은 손가락의 모양새며 입으로 가져가는 동작으로 봐서 마셔 본 술이었다. 그런데다 석 잔, 넉 잔을 받아 먹고도 얼굴이 붉어진다거나 말이 흐트러진다거나 하는 일이 없이 모든 게 처음처럼 단정하고 똑발랐다. 문득 지나가는 말로 자신은 적십자산지 녹십자산지에 근무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주 두 병을 비우고 나니 불판의 고기도 없어져 그녀와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계산은 그녀가 맡아 했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길을 잃은 듯 한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손에서 낡은 음반 한 장이 들어 있는 까만 비닐봉투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모처럼 입은 양장에 고기 냄새가 잔뜩 뱄어요. 오늘 처음 꺼내 입은 건데요."
고깃집으로 오자고 한 것을 이제 와서 탓하는 소리 같았다.
"버스 타면 냄새 나서 다들 쳐다보니까 좀 걸으면 안 될까요? 아니면 어디 통풍이 잘 되는 집에 가서 맥주 한잔 더 하든지요. 게다가 250,000원 예정하고 나왔는데 아직 반도 못 썼어요."
농담 같지는 않은 소리였다. 9시. 딱히 아는 집이 없었으므로 나는 그녀를 데리고 70년대 스튜디오로 또 갔다. 가서 맥주를 마시는 동안 나는 레이 찰스와 메리 홉킨과 칼리 사이먼을 뮤직박스에 신청해 들었다. 그녀는 술을 매우 잘 마시는 여자였다. 도대체 계속 마셔도 아무런 징후나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돌려준 음반을 꺼내들고 뮤직박스로 가서 주인에게 틀어 달라고 부탁까지 하고 돌아왔다. 비특스의 「Because」가 끝나고 나서 이윽고 아프로디테스 차일드의 「봄, 여름, 겨울 그리고 가을」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남쪽에 있는 절로 출가한 그녀를 다시금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비와 눈물」까지 끝나고 났을 때 그녀가 허리를 탁자 위로 구부리고 이런 말을 넌지시 속삭여 왔다.
"딱한 추억이군요. 그렇죠?"
그녀는 남녘의 산수유 마을을 더듬고 있는 내 얼굴을 엿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도 사정이 비슷하니 어거 어쩌죠?"
술기운이 도는지 말본새가 어느덧 신파조로 변해 있었다. 나느 정신을 가다듬고 곧장 화살을 날렸다.
"상기 레코드 주인은 어디에 계옵신데요?"
그녀도 그닥 만만치가 않았다.
"바로 앞에 앉아 있잖아요."
그녀는 별로 고르잖은 치열까지 드러내놓고 깔깔거리며 웃더니 내게로 화살을 되쏘았다.
"그럼 그쪽 딱한 추억은요?"
"...... 전생 인연이 지금 어디 있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인과경』에 따르자면 아까 우리가 형제갈비에서 잡아먹은 소가 그 사람일는지도 모르지요. 말하자면 그렇다는 뜻입니다."
이런 끔찍한 얘기를 하는데도 그녀는 아하, 하고 감탄사 비슷하게 내뱉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자신은 음반의 주인공에 대해 일언반구가 없으면서 내 딱한 추억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물고늘어졌다. 될 것도 안 될 것도 없었지만 나는 그런저런 얘기를 대충 엮어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몇 해 전 산수유 마을에 출몰했다던 비구니 스님 얘기도 했다. 그녀는 이따금씩 저런, 저런요, 하는 간투사까지 뱉어 내며 듣고 있다가 어느덧 눈자위가 발갛게 변해 참 안됐어요, 하고는 맥주잔을 집어들었다.
"그래서 화개에 가시는 모양이죠? 자취라도 더듬어 보려구요."
그것까지는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아 나는 에둘러서 대꾸했다.
"아니올시다, 섬진강 은어를 구경하러 갑니다."
"은어요? 아, 그게 이때 올라오나요?:"
"곧 큰비가 내리고 꽃샘바람이 불어 가면 벚꽃이 피겠죠. 그때쯤부터 하얗게 꼬리쳐 올라온다고 합니다."
"저도 그때쯤 내려가 볼까 싶네요. 몇 해 전 쌍계사에 벚꽃을 보러 한 번 다녀오긴 했지만 은어는 여직 몰랐거든요.:
몽롱한 어조로 그녀는 한번 들르면 안 되나요? 하고 어깨뼈를 축 늘어뜨리고 물었다. 내가 거기 주인도 아닌데 어찌 오라 마라 하겠는가. 올 테면 오고 갈 테면 가고 다들 그러하는 것이다.
"아 참, 저도 한 가지 알려드릴께요. 쌍계사 경내에 청운산장이라고 민박집이 하나 있는데요, 옆으로 개울물이 졸졸졸 흘러내려 밤새 주워서 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인데요, 이왕이면 거기서 묵으세요. 주인 할머니도 되게 좋고 음식맛도 꽤 괜찮은 편예요."
누워 듣는 물소리. 몇 년 전에 그녀는 누구와 거기서 함께 묵은 것일까. 하긴 알 필요가 도대체 없는 일이다.
문닫을 시간이 되어 나는 비틀거리는 그녀를 신촌 로터리에서 택시에 태워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그대로 잠에 곯아떨어졌다.
화개로 내려오기 나흘 전의 일이었다.
부천에서 내려온 키 큰 이는 산장에서 일주일을 더 묵고 회향했다. 거울 속의 매화는 그놈의 방정맞은 새부리 탓인지 이내 져 버리면서 붉은 꽃 끝만 남긴 채 잎새를 준비하고 있었다. 물가 갯버들도 다 지고 옆에 싸리나무와 함께 끙끙거리며 연둣빛 잎새를 막 틔워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쌍계사 10리 벚꽃은 아침마다 산자락에 올라가 내려다봐도 연신 학학거리기만 할 뿐 그 환하디환한 입술을 영 벌리지 않았다.
매화가 다 지던 날 나는 그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부산 기장에 있는 대변항에 가서 어부들이 그물 터는 걸 하염없이 구경하다 소주에 멸치회를 먹고 돌아왔다. 또 그가 떠나기 전날엔 속절없이 남해금산에 함께 다녀오기도 했다. 화개 지나 섬진강을 옆구리에 끼고 하동도 지나 남해로 가는 차 안에서 그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생면부지였던 내게 올 가을쯤 결혼을 할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어쩌면 그게 더 아름다운 일이 될는지도 몰랐다. 몰랐다. 나처럼 깨달음이 모자라고 매양 터득이 더딘 사람은 그런 생각조차 못하고 사는 것이다. 남해금산 보리암에 와서 그는 자신에게 하듯 이런 소릴 중얼거렸다. 먼데 흐린 바다를 내려다보며,
"오늘 나는 저기 먼 바다에 너를 버린다. 기어이 버리고 간다. 멀리멀리 변치 않고 있다가 그때 도로 만나자.:
돌아오는 길에 나는 그에게 경북 청도와 금릉이 여기서 어디고 전남 화순과 승주가 여기서 얼마냐고 거푸 물었으나 그는 왜요? 왜요? 할 뿐 막상 대답이 없었다. 산장으로 돌아와 남해대교 밑에서 사 온 전어를 붉은 석쇠에 올려놓고 그와 나는 밤늦게 소주를 마셨다.
그녀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여태도 절에 있다면 당연 딴 세상 사람이어서 만날 수 없을 테고 혹 세속에 있다 해도 사람이 많아 당최 찾아지지 않을 거였다.
다음날 흙먼지에 뒤덮인 승용차를 끌고 떠나는 그를 산장 앞에서 보내고 나니 오후부터 큰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는 이틀을 쉼 없이 내려 나는 낮에도 꼼짝을 못한 채 방 안에 처박혀 쉰내 나는 몸만 뒤척이고 있었다. 밤에는 또 온몸에서 돌비늘이 툭툭 떨어져 나가는 아픈 꿈만 계속되었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벚나무도 더 이상 버티질 못하고 하얀 거품을 정신없이 토해 낼 터이었다. 방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나는 때때로 홍천에서 만난 여자를 생각했고 운주사로 출가했다 환속한 비구니를 생각했고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또 내 서글픈 첫사랑을 떠올리고 있었다.
만닝 환속을 했다면 쌍계사 왕벚꽃 필 때 한번 구경이나 오실 일이지. 그러면 맨발에라도 뛰쳐나가 반갑게 마중할 터인데.
천우사화(天雨四花). 날짜로는 3월 28일 토요일에 밖으로 나가 보니 산 아랫녘이 갑자기 환해져 있었다. 하늘에 떠 있던 구름들이 일제히 골짜기로 몰려 내려와 있는 듯했다. 하늘에 떠 있던 구름들이 일제히 골짜기로 몰려 내려와 있는 듯했다. 그 사이로 울긋불긋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줄을 지어 쌍계사로 꾸물꾸물 올라오고 있었다. 꽃이 아니고 되레 사람이 장관인 풍경이었다. 불현 듯 생각이 나서 매화가 져 버린 마루의 거울 안을 들여다보니 산벚꽃 몇 그로가 때를 맞춰 하얗게 피어 있었다.
산장 할머니에게 들으니 토요일과 일요일은 화개 장터에서 벚꽃 축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그리하여 점심때부터 일찌감치 산장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더니 비어 있던 방 네 개가 금방 차 버렸고 등산화 소리에 냄비 소리에 마당이 소란스러워 나는 신발을 신고 쌍계사 밖으로 나가 보았다.
벚꽃 길은 큰물이 흘러들어와 햇빛에 반사되고 있는 성싶었고 그 사이로 숱한 사람들이 저마다 부신 그림자를 끌고 줄지어 올라오고 있었다. 차를 마실까 하고 무향의 문을 열어 보니 거기도 사람들로 가득해 발을 들이밀 수조차 없었다. 해서 어디 갈 데가 없나 싶어 두리번거리고 있는 터에 구례로 가는 버스가 눈에 들어왔다. 나느 s막 출발하려는 버스에 서둘러 올라탔다. 손가락을 꼽아 보니 마침 구례장이 서는 날이었다. 비록 작정했던 일은 아니지만 옳다 싶어 나는 벚꽃 길을 달려 다시 지리산 기슭의 상위마을을 찾았다.
불과 열흘 만인데 산수유는 이미 데쳐 내고 삶아 낸 것처럼 색이 빠져 맥없이 지고 있었다. 매화가 질 때면 산수유도 따라 지는 모양이었다. 봄날의 거지꼴로 하릴없이 마을을 서성이다 나는 구례 장터로 갔다. 그러나 그날 장도 볼 게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터덜터덜 터미널 근처를 기웃거려 보니 고나광객들만 버스에서 꾸역꾸역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 어깨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나느 s아직 저녁 참이 멀길래 가까운 화엄사를 찾았다.
경내는 벌써부터 초파일을 준비하는 연등으로 가득 덮여 있었다. 마당 한쪽에서 기와불사를 하고 개금불사(부처님 옷을 다시 입힌다)를 하고 있는 대웅전에서 삼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장엄한 각황전 옆에 한 그루 피어 있는 홍매화가 번쩍 눈에 들어왔다. 그야말로 장관이어서 저절로 입이 쩍 벌어졌다. 순간 나는 운주사도 운문사도 아닌 구례 화엄사에 와서야 퍼뜩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홍천에서 만났던 여자가 바로 운주사로 출가했다던 비구니는 아닐까. 그러니까 내가 들은 말은 모두 자신의 얘기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대명콘도에서 내가 화석을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그녀는 내 등짝에 매달려 있던 다른 비구니 하나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한데 나더러 구례 장터를 한번쯤 서성여 보라던 말은 대체 무슨 뜻이었던가. 또 그녀는 산수유 마을이 어디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을 텐데 왜 나한테는 구태여 화개 어디라고 말을 흐린 걸까.
화개로 가기 위해 구례로 나왔지만 나는 그날도 그녀를 볼 수 없었다. 다만 무심히 만났으므로 나는 그녀의 연락처도 모르고 있었다.
땅거미가 질 무렵 쌍계사 입구의 다리를 건너가고 있는데 중년의 시골 아낙네 둘이 밤 벚꽃 아래서 술에 취해 떠드는 걸 보았다. 자매간인지 이웃간인지 모를 모습이었다. 신발 한짝이 벗겨진 아낙네의 겨드랑이를 일으켜 세우며 옆의 아낙이 이랬다.
"냐, 우리 손 꼭 잡고 어데 가서 쏘주 한잔 더 할리?"
"그카지 모, 까짓, 몬할 것 없다 아이가."
그니들의 모습이 못내 서글퍼 차라리 어여뻐 보였다. 머리에 묻은 꽃잎을 서로 털어 주며 세속의 두 아낙네는 환한 어둠 속으로 비틀거리며 사라져 갔다. 저녁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 오던 때였다.
그녀가 나를 찾아온 것은 하루이틀 참에 서울로 돌아가리라 생각하고 있던 3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3월이 시작되자마자 알게 된 사이인데 다시 4월이 시작되려는 참에 그녀와 또 만나게 된 것이었다. 묘한 일이었다. 벚꽃은 흐벅지게 피어 밤에 물소리를 듣고 누워 있으면 상기도 팔음률로 거슬러 오르고 있는 은어 떼만 눈에 자꾸 어른거렸다.
오후 2시쯤이었을 것이다. 마루에 앉아 녹차를 마시며 산바라기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마당으로 통하게 되어 있는 식당문을 열고 들어섰다. 하루에도 여러 번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드나들곤 했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누군가 나를 찾아왔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시냇물 소리마저 잊고 산벚꽃에 눈을 팔고 있다가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미리 올 줄 알고 있던 손님이라도 맞듯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마당 쪽으로 돌아섰다.
찾아온 손님이 누구라는 걸 알고 나는 직감과는 상관없이 무척 당황하고 있었다.
이번엔 그녀가 큰일을 저지른 것처럼 나와 눈빛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마당 한가운데 우뚝 멈춰 섰다. 한사코 밀어 냈는데도 기어이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의 얼굴을 하고서. 신촌에서 만났을 때 입었던 목련빛 원피스에 까만 핸드백 차림이었다. 식당 안에서 할머니가 마당을 기웃거리는 것을 못 본 체하며 나는 마당 한가운데 서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차라리 울상인 얼굴로 몸을 떨기까지 하고 있었다. 마루로 올라오라고 무심코 팔을 잡아끄는데 뒤꿈치만 들렸다 말뿐 웬일인지 고집스럽게 버티고 있었다.
"이왕 오셨으니 마루에서 차라도 한잔 하죠. 마침 녹차를 마시고 있던 참입니다."
그제야 그녀는 겹겹이 목이 막힌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가도 돼요?"
가도 되는 게 아니라 마루까지는 불과 대여섯 걸음이었다.
마루에 앉아 구두를 벗고 나서 그녀는 종아리를 꾹꾹 손가락으로 눌러 댔다.
"화개에서 여기까지 걸어왔더니 발이 아파요."
화개에서 쌍계사까지는 정확히 5킬로였다. 10리가 넘는 것이다. 그 길을 방금 핸드백을 들고 구둣발로 걸어서 왔다는 것이다. 한데 왜?
"벚꽃 길이잖아요."
벚꽃 길. 뭐 그렇다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차피 꽃구경 삼아 왔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휴일도 아닌데 적십잔지 녹십자는 어떻게 하고 왔다는 것인가. 종아리 누르던 손가락을 멈추고 고개를 비스듬히 외튼 채 그녀가 시큼하게 되받았다.
"괜히 그런 거 묻지 말아요. 휴일이면 더 못왔을 거예요."
묻지 말라니 더 물을 수가 없었다.
"말만 들었는데 우전차(雨前茶)라는 게 뭐죠?:
"곡우(穀雨)를 기준으로 그 전에 딴 차를 그리 부른답니다. 그 해에 처음 딴거라죠. 그 다음 것은 세작(細雀), 중작(中雀), 대작(大雀) 순입니다."
"그럼 작설은요?"
"작설(雀舌)은 야생차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랍니다. 글자 그대로 참새 혓바닥인데 물에 풀어진 찻잎 모양이 꼭 그렇다는 겁니다."
이런 건성인 말을 주고받으며 녹차를 다 마시고 난 다음에 그녀는 우물가에서 손수건에 물을 묻혀 이마와 목덜미의 땀을 씻어 냈다. 마루로 돌아온 그녀에게 수선을 내줄 양으로 방으로 들어가는데 그리고 그녀가 발을 한번 헛디디며 뒤를 따라 들어왔다.
그녀는 한지문 손잡이를 고리에 걸고 얼른 방구석으로 옮겨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얼굴엔 아직도 물 기가 남아 있었고 땀인지 물인지에 젖은 머리칼 몇 올이 관자놀이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는 엉거주춤 방 한가운데 서 있는 나를 부산스런 눈빛으로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숨차 하는 소리가 귀에 뜨겁게 감겨들었다.
"제가 지금 잘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죠?"
무얼 말하고 있음인가.
"화개부터 저 괜히 걸어왔나 봐요. 그렇게 꽃들을 함부로 훔쳐보며 오는 게 아닌데요. 서울에서 차를 탈 땐 이런 마음이 아니었거든요."
그녀의 얼굴은 그새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옷 밖으로 드러난 손이며 발이며 목덜미의 살도 어느덧 숨찬 분홍으로 변해 있었다. 어쩌지를 못하고 내가 눈을 아래로 떨어뜨리자 그녀가 옆으로 핸드백을 내려놓더니 등을 돌리고 않아 목 밑의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말려도 지금은 안 될 거예요."
나는 엉거주훔한 자세로 그냥 방바닥에 서 있었다. 그러한데 이런 소리가 벽에 부딪쳐 귓전에 와 닿았다.
"그렇게 멀뚱하게 서 있지만 말고 와서 등단추라도 풀러 줘야죠."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목 뒤에 세로로 붙어 있는 단추 다섯 개를 장님처럼 더듬어 풀었다.
누워 듣는 물소리. 자리에 눕자 잊고 있던 물소리가 다시금 귓전에 쏟아져 들어왔다. 그녀의 몸은 이미 더워질 대로 더워져 위아래가 번질하게 젖어 있었다. 얼마를 엎치락뒤치락하다 나는 그녀에게 머리끄덩이가 잡혀 급기야 안으로 들어갔다. 금세 낮잠에 곯아떨어질 것 같은 편안한 몸이었다. 술 먹는 솜씨처럼 처음엔 더디더니 그녀는 차차 익숙하게 몸을 움직였다. 나는 쏟아지는 잠을 억지로 쫓으며 깊게깊게 그녀의 안으로 쳐들어가고 있었다. 무심결에도 저 팔음률로써.
그러한 사이 그놈의 새가 다시 날아와 거울을 타다다다 쪼아 대기 시작했다. 나는 덜컥 산에 피어 있는 벚꽃이 걱정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방문을 열고 나가 새를 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그녀의 위에서 눈을 부릅뜬 채 손가락에 침을 발라 한지문을 뚫고 밖을 희미하게 내다보았다.
산벚꽃 가지가 흔들흔들하고 있었다. 학학거리는 소리로 그녀가 뭘 그렇게 엿봐요, 하며 내 머리통을 자꾸만 아래로 끌어당겼다. 그 통에 동공 속에서 벚꽃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했다.
은어 떼는 지금 먼데서 강을 헤엄쳐 올라오고 있는 중일 거였다.
밖에 내말린 빨래를 털고 접어서 개켜 놓듯이 그녀는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옷을 차분하게 하나씩 걷어 입었다. 그러고 나서 손거울을 꺼내 머리칼을 다듬어 올리고는 슬그머니 방문 옆에 가 앉았다. 나는 우멍하게 앉아 그녀의 모습만 지켜보고 있었다. 까닭 모를 분노와 서글픔이 그때 내 턱 밑을 잠깐 쓸고 지나갔다. 나는 본능적으로 낙담을 한 채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난 다음에 그녀가 눈을 내리깔고 밭은 소리를 냈다.
"저, 그만 가야 해요."
가야 한다. 살 섞인 냄새가 방에서 다 빠져 나가기도 전에 가야 한다 그 말이지. 언제나 사람 관계에 있어서 잡거나 말리지를 못하는 나는 그럼 그러라고 했다. 대개는 제멋대로들 왔다 제멋대로 가곤 하는 것이다.
"염치 때문에라도 좀더 머물고 싶지만 그게 안 돼요."
안 되는 것이다. 내가 끝내 입을 다물고 있자 그녀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고는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바래다주실 거예요?"
먼데서 온 손님이니 그래야만 하리라. 나는 옷을 주섬주섬 꿰 입고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어색하니 말을 잃고 석문을 지나 쌍계사 입구까지 나와서 화개 구례로 가는 버스를 잡아타려고 하자 그녀가 팔소매를 잡아 끌었다.
"화개까지 함께 걸어가요."
그 말에 나는 버스를 눈앞에서 놓치고 아까 그녀가 걸어왔던 벚꽃 길을 돌아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발이 아플 텐데. 신천 다리를 지날 때 그녀가 구두를 벗어 손에 들었다. 스타킹의 올이 나갈 텐데.
그녀와 나는 입을 다물고 벚꽃이 하늘을 가린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한 5리쯤 가고 있을 때 그녀가 쩍 마른 한숨을 몰아쉬고 나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올 때는 그저 덤덤하게 얼굴만 살피고 가려 했던 거예요."
그건 아까 방에서도 한 얘기가 아닌가.
"근데 그게 그렇게 만만하게 안 될 때가 있는 모양입니다."
나이가 몇인데 그럼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는가.
"그 고물 LP 한 장 때문에 이렇게 될 줄은 미처 몰랐어요...... 후회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후회는 아닐지 몰라도 그녀는 오늘 일로 큰 부담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나도 그쯤은 눈치가 있는 것이다.
"견디기 힘들면 없던 일로 해도 됩니다. 물론 다시 보자고도 않겠습니다. 화개에 도착하는 대로 뿔뿔이 헤어지는 겁니다."
그녀가 갑자기 울먹이는 소리로 그게 아니에요, 하며 우뚝 멈춰 섰다 다시 앞으로 걸으며 말했다.
"하필 친정에 다니러 왔다 그쪽 전화를 받는 바람에."
친정이라니. 아뿔싸!
화개까지 올 동안 그녀와 나는 발뒤꿈치에 총상을 입은 사람들처럼 내내 절룩거리고 있었다. 나분분하던 꽃길이 차츰 뒤로 물러나고 있을 때 그녀가 어깨를 툭 부딪쳐 오며 한 번 도 엉뚱한 소리를 했다.
"자신한텐 지금 무참하지만 아깐 그래도 더럭 기뻤어요."
".........."
"이 봄에 제가 무슨 사나운 꿈을 꾸고 있는 건가요."
꿈에 치인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 봄에 도대체 내가 무슨 딴 세상을 보고 있는 거냔 말이다. 나는 속으로 치를 떨며 그녀와 걸어왔던 뒷전을 슬그머니 돌아보고 있었다.
화개에서 보내려다 나는 그녀를 따라 구례까지 갔다. 그녀가 또 그렇게 원했던 것이다. 구례발 서울행 막차는 5시 10분이었다. 그걸 탄다해도 홍은동 집에 도착하려면 아마 자정은 돼야 할 것이었다. 버스에 앉아 그녀는 섬진강 쪽으로 고개를 모로 틀고 손수건을 꺼내 이따금씩 눈가를 찍어 내고 있었다.
서울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그녀와 나는 대기실 차디찬 의자에 한 뼘 사이를 두고 앉아 있었다. 거기서 그녀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짚 썩은 물을 받아 마시고 싶어요."
그런가.
그녀를 보내고 쌍계사로 가는 버스를 타려다 두 명의 비구니가 바랑을 지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내가 급히 몇 걸음 뒤를 밟자 그중 하나가 무심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옆에 가는 비구니의 팔을 끼고 총총 걸음을 재촉했다.
쌍계사 팔영루에서 보살계 수계법회가 시작되던 4월 1일 나는 화개를 떠났다. 그날은 수요일이었고 다음날은 구례장이었으나 더 머무를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돌아온 밤에 무심코 홍천에서 사 온 화석을 들여다보다 나는 두 마리 물고기 옆에 산수유인지 벚꽃인지 모를 꽃무늬 두어 개가 더 박혀 있음을 보고 그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