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소는 여관으로 들어온다 가끔

Bollnow 2024. 4. 5. 07:14

 

소는 여관으로 들어온다 가끔

윤대녕

 

흐린 봄날......비 내리는 오후

 

1

"흐린 봄철 어느 오후의 무거운 일기(日氣)처럼, 그만한 우울이 또한 필요하다. 세상을 속지 않고 걸어가기 위하여 나는 담배를 끄고 누구에게든지 신경질을 피우고 싶다"(김수영, 바뀌어진 지평선). 전국이 대체로 흐리고, 중서부 지방에는 낮부터 한두 차례 비가 오겠다. 남부 지방은 오후 늦게나 밤에 비가 조금 오겠다.

57일 자 조선일보는 일기 예보를 이렇게 적고 있다.

그 옆에는 담배꽁초를 버리며 비가 내리고 있는 지평선을 향해 걷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해 뜨는 시각은 05:30, 해 지는 시각은 19:28. 그리고 달이 뜨고 지는 시각은 각각 20:5405:59이다. 내일 새벽에도 해 뜨는 시각이 오늘과 비슷하다면 해가 뜨고 나서도 약 30분이 지나야 달이 지게 된다. 비 올 확률은 서울과 춘천이 모두 60%, 지역별 예상 기온은 서울이 1620, 춘천이 1321. 구름 사진을 보니 나이테처럼 생긴 저기압선이 만주 벌판에서 서서히 한반도 쪽으로 내려오고 있다. 중국 동북부와 일본 열도는 고기압 세력권에 놓여 있다.

오늘 춘천으로 가면 서울에서보다 조금 일찍 비를 맞겠다. 하지만 내일 새벽 달이 지는 것을 볼 수 있을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15:35에 청량리역에서 춘천행 통일호 열차를 탄다.

그녀가 경남 양산에 있는 통도사의 말사인 내원사에서 행자로 머물다 사미니계를 받고 집으로 내려온 것은 일 주일 전의 일이다. 봄은 갓 낳은 달걀과도 같았다. 군데군데 피가 묻어 있고 따뜻하고 애잔한 생각마저 들었다. 지난 가을 홀연히 사라지고 나서 그녀는 팔 개월 만에 그렇게 초란(初卵) 같은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 나는 한 달여 비구니가 수행하는 절을 뒤지고 돌아다니다 포기한 채 집으로 돌아온 터였다. 지쳤던 탓이 아니다. 제 길을 미리 알고 질러간 사람은 찾아지는 법이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저 막연하게 돌아오길 바라고 있었으나 그때쯤해선 그 또한 부질없는 기대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혹여 돌아온들, 전과 달라질 그녀가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가까이 가면 갈수록 멀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남루한 승복에 바랑을 걸머진 행색으로 그녀는 대문을 밀고 슬쩍 들어섰다. 갸웃이 열린 문틈으로 꽃수레가 덜렁덜렁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마루에 앉아 있던 그녀의 어머니가 무엇을 먼저 목격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히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웬 새파란 비구니가 마당에 들어와 합장을 하고 서 있었다. 이내 마루에서 뛰어내리려 했으나, 그녀의 어머니는 웬일인지 옴짝도 못한 채 그저 몸만 덜덜 떨고 있었다. 마음이 너무 앞서갔던 모양이다. 비구니는 태연한 얼굴로 마루에 와 걸터앉으며 전생(前生)의 제 어미를 보고 말했다.

"그냥 지나는 길에 들렀습니다."

말문이 막혔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뭐라든 입을 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 어데를 가는데?"

"운수납자(雲水衲子)가 어딜 가겠어요. 법당을 찾아가지요. 내친김에 청평사에 들러 볼까 해요."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바랑을 추스르며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까지도 떨고만 앉아 있던 그녀의 어머니는 어떻게든 그녀를 잡아 볼 요량으로 그냥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하룻밤만 보시하고 가도록 하세요, 스님!"

보시,라는 말에 그녀는 물끄러미 제 어미를 쳐다보며 내일을 믿고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저녁, 그녀의 어머니는 찬거리를 마련하러 시장에 다녀오다 집 앞에서 지나던 택시에 받히고 말았다. 요추 두 개가 내려앉고 갈비뼈에 금이 갔다. 가까운 한의원에서 사람을 불러 쑥뜸을 하고 정수리에서부터 발가락까지 수십개의 침을 꽂고 누워 그녀는 부러 그러는지 헛소리를 해댔다.

"탈상도 하지 않았는데 너마저 가면 나는 어쩌냐, 어쩌냐."

밤에 사람들이 물러가고 나서 그녀는 제 어미에게 바투 앉아 귀에다 대고 말했다.

"부러 그러셨다는 걸 알아요. 쓸데없는 일인 줄 아시면서."

그러고 나서 아침이 되자 그녀는 아침 공양을 마치기가 무섭게 다시 바랑을 짊어지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안방에 누워 고즈넉이 밖을 내다보고 있던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대문을 막 나서려는 찰나에 매를 치는 듯한 소리로 외쳤다.

"이년아, 여기기 네 법당이야!"

그녀는 움찔하며 그 자리에 붙박여 섰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못 들은 척 내처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잠시 후에 그녀는 도로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마치 무얼 놓고 나갔다 그걸 가지러 들어오는 사람의 표정을 하고서.

그녀는 그렇게 환속한 것이다. 그러기에 어디 길을 가다 주저앉는 게 아니다.

그녀의 속명(俗名)은 금영(今映)이다. 소양댐 공사로 지금은 수몰 지구가 돼버린 강원도 춘성군 북산면 청평리에서 태어났다. 1966년생 말띠니까 올해 우리 나이로 스물아홉이 되겠다. 두 살 나던 해 댐 공사가 시작되고 그녀는 제 아비 품에 안겨 서울로 왔다. 금영의 생모는 그후 춘천 샘밭으로 이주해 살다가 금영이 다섯 살 나던 해 봄에 원천강(지금의 소양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어머니는 금영의 양모(養母)가 되겠다. 그녀는 선천적인 불임으로 금영을 제 자식처럼 알고 키웠다고 한다. 금영의 생모에 관한 것은 그녀의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함구하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알 도리가 없다.

그녀의 아버지는 한때 소설을 썼던 사람으로 결혼을 전후하여 결핵을 앓는 바람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꽤 알려졌을 거라는 게 주위의 말이다. 물려받은 재산은 웬만큼 있었던 모양으로 책이나 실컷 읽자고 서점을 차렸으나 말년에는 전적으로 책방에서 나오는 수입에 기대 생활을 꾸려 나가야만 했다. 작년 여름 지병인 간경화로 세상을 뜰 때까지 그는 여기저기 풍광(風光)을 기웃대며 떠돌아다니다 죽기 며칠 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제 딸이 소설을 쓰기 바랐다고 한다. 4.19세대의 한 사람으로, 지금은 비록 붓을 꺾고 있으나 한때 문단에서 필명을 날렸던 제 친구에게 금영을 초등학교 때부터 사숙케 했다고 한다. 금영의 스승이 되는 그 사람은 내 외숙뻘 되는 친척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태 전 무슨 일인가로 외숙이 사는 세검정에 갔다가 나는 그녀를 만났던 것이다.

당장 그다음 날, 나는 청평사에 가는 그녀와 함께 춘천행 기차를 타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그녀의 춘천행이 무얼 뜻하는지는 물론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무턱대고 그녀를 따라나섰을 뿐이었던 것이다.

기차가 느릿한 속도로 하계동을 지나 서서히 서울을 벗어나고 있었다. 잿빛으로 낮게 내려앉은 하늘 밑으로 노란 꽃들이 섬처럼 부옇게 떠올라 있었다. 점점이 스쳐 지나가고 있는 노란 섬들......을 암암히 바라보면서 다시 나는 춘천을 향해 먼저 질러갔을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환속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사흘인가가 더 지나서였다. 전화기에다 대고 그녀는 심상한 말투로 그저 돌아왔어요,라고 남의 일을 말하듯 내뱉었다. 봄날 저녁의 서글픈 사양(斜陽)이 비낀 창문을 비스듬히 끼고 들어와 내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팔 개월 만에 들어보는 그녀의 목소리는 조율이 안 된 피아노 소리처럼 확실히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전과 같이 마음을 풀어놓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주 먼 곳에서 내 전화를 받고 있는 것만 같았다. 돌아오긴 했으되, 마음마저 회향(回向)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라도 하듯이.

"금요일에 청평사를 다녀올 참예요. 그런 담엔 어떻게든 다시 살아 볼 궁리를 해야겠죠......여태 소는 찾지 못했어요. 어디에도 소는 없었어요. 지금 와선 그게 구원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요. 아직도 내가 찾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게 말이죠."

그녀는 끝내 함께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으나, 그보다도 나는 전화를 끊으면서 예기치 못했던 불안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 뒤에서 울려 나오는 차갑고 축축하고 어두운 빛깔의 묘한 떨림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음습한 느낌은 불길한 예감으로 변해 곧바로 뇌수에 꽂혀 들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청평사 극락보전의 십우도(十牛圖), 수몰 지구가 되어 버린 청평리를, 소떼를, 제 아비의 등에 업혀 절에 찾아가던 금영의 모습을 아득히 떠올리고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금영의 부친은 죽을 때 방문을 닫아걸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때 금영은 밖에서 방문을 두드리며 제 생모에 관한 것을 물었다는 이야기였다. 제 아비의 입을 통하지 않고는 영영 들을 수 없는 얘기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 에미는 소가 되어 물속으로 갔다. 그뿐이다!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말아라. 누구나 먼 것이 있어야만 산다."

날이 캄캄해지며 창 밖으로 비가 후득후득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밤 아홉 시쯤.

"이 애비는 다음 세상을 믿는다. 거기서 네 에미와 함께 보자."

문틈으로 이 말을 남기고 그녀의 부친은 제 입에다 생쌀을 우겨 넣은 채 숨을 거두었다.

그녀가 입산한 것은 부친의 장례식이 끝난 다음날이었다. 신새벽, 불현간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는 어디 간다는 말도 없이 홀연히 집을 나서 버렸다.

 

2

그녀는 리본처럼 생긴 자주색 띠의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모자 안으로 머리칼을 말아 올렸는지 매끈한 목덜미가 하얗게 드러나 보였다. 귀 밑으로 머리칼 몇 올이 커피 향처럼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얼굴의 나이테를 보니 스물 다섯 가량. 그쪽으로 자꾸 시선이 갔던 것은 아마 그녀가 쓴 모자 때문이었을 터였다. 그것을 봄으로 해서 비로소 나는 금영이 삭발했으리란 것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오늘 어떤 행색을 하고 춘천으로 향했을까.

그녀는 내가 청량리에서 기차를 탈 때 내 맞은편 자리에 미리 와 앉아 있던 여자였다. 그녀는 토마스 알비노니의 현과 오르간을 위한 아다지오 G단조를 듣다가 막스 브루흐의 콜 니드라이로 테이프를 갈아 끼우고 있었다. 창틀에 테이프가 놓여 있었으므로 나는 그녀가 듣고 있는 음악이 무언가를 알 수 있었다. 나 또한 혼자 있게 되는 밤이면 가끔 듣는 음악들이었다. 각자 옆자리가 비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와 나는 단둘이 마주보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무심코 두어 번 눈길이 마주치긴 했으나 상대는 눈인사도 필요 없는 다만 낯모르는 여행객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던 건 아니었다. 그리고 기차가 강촌역(江村驛)을 지날 때까지 한두 번 더 눈이 마주쳤다. 그렇지만 서로가 타인임을 빌미로 방관하고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냥 무()에서 무로 이어지는 적막한 시간의 기나긴 연속.

그런데 어떤 땐, 나와 가까운 곳에 누가 앉아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도감을 갖게 하는가. 그녀의 얼굴에도 그 같은 안도감이 엿보였다고 하면 글쎄 착각이었을까. 어떻든 간에 그녀의 얼굴에서 타인과 마주하고 있을 때 나타나는 미세한 긴장이나 동요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이 요람처럼 흔들리는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지금 내가 무한 궤도를 순환하고 있는 열차에 훌쩍 올라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제시노만이 부르는 흑인 영가에서 오쇼 라즈니쉬의 명상 음악으로 테이프를 갈아 끼웠다. 나는 검은색 바탕에 찍혀 있는 굵직한 은박 글자를 홀린 듯 쏘아보고 있었다. 소나무 그림자......하고 나는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어폰을 꽂고 있었지만 어쨌든 그 소리를 들었던가. 그녀는 얼핏,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사람의 표정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창 밖으로 돌려 버렸다.

흐린 햇살에 물든 연둣빛 들판이 끝간 데 없이 이어지고 군데군데 시럽처럼 엎질러져 있는 물줄기가 눈에 비쳐들었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하나의 상()이 떠오를 거예요. 그게 뭔지 말해 봐요."

언젠가 금영이 내게 무슨 음악인가를 들려주며 하던 소리였다. 동숭동에 있는 '책방 정신세계'에 갔다가 사 온 오쇼 라즈니쉬의 명상 음악집이었다.

"글쎄, 좀 묘한 음악이군."

그녀가 자꾸 재촉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대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풍경 소리. 아니면 방울 소리? 어쨌든 그런 소리가 들리는군. 그리고......뿔피리 소리, 깊은 우물 속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멀리서 들려 오는 징 소리, 누군가 낮은 개울을 건너가는 소리, 다시 음......뿔피리 소리."

"그래요, 그럼 그 소리들이 뒤섞여 만들어 내는 이미지가 있을 거예요. 그걸 말해 봐요. 요컨대 하나의 풍경 말예요."

"풍경?"

"그래요, 아주 장려한 풍경이에요."

"장려한......."

"그러니까 지금 뿔피리 소리가 들려 오고 있어요. 물 속에서 무엇이 걸어 나오고 있구요. 그리고는 방울 소리를 쩔렁대며 젖은 새벽 길을 걸어가고 있어요."

"전에 어디 영화나 텔레비전 같은 데서 본 장면이 떠오르는군."

안개가 뿌옇게 일어서고 있는 강에서 흰 물소들이 푸우푸우, 머리를 흔들며 걸어 나오고 있었지......하고 나는 말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인도 기행이란 프로그램에서 본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는 걸 나는 벌써부터, 정확히 말하면 그녀와 처음 청평사를 다녀온 직후부터 알고 있던 터였다.

금영의 부친은 때없이 그녀를 데리고 소양호를 찾았던 모양이었다. 서울에서 춘천까지, 가깝다고는 하지만 별일도 없이 부친이 자신을 데리고 춘천으로 향할 때 그녀는 직감적으로 제 생전의 일을 건너짚고 있었다. 샘밭을 지날 때마다 그녀의 부친은 매양 같은 말을 되풀이하곤 했다.

"지금은 여기에 오이밭이 들어섰지만 옛날엔 온통 배추밭뿐이었더니라. 이 애비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이 한때 머물던 곳이기도 하고."

그러나 그게 누구인가는 말하는 법이 없었다. 금영이 다그쳐 물어도 핀잔을 줄 뿐으로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안개 서린 소양호에 올라와서도 금영의 부친은 뜻 모를 소리만 혼자 중얼거릴 뿐, 금영이 묻는 말에 대꾸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저 왼쪽으로 물길을 타고 가면 청평사, 오른편으로 올라가면 추곡에 이르게 되고 거기서 양구, 인제로 물길이 갈리지. 전에는 이 물 밑에 제법 큰 마을이 있었더니라. 그땐 청평사도 마을을 지나서 갔단 말이지. 집집마다 소들을 키웠지. 조석으로 안개가 올라오면 물가에 있던 소들이 한바탕 울어대곤 했어. 장엄했느니라. 어느 핸가 우연히 이곳에 들렀다 그 소의 무리를 보고 그만 주저앉고 말았지. 그때 웬 수국 같던 처자를 만나 가연을 맺었더니라. 끝내는 절연하고 말았지만 멀리 갔던 건 아니야. 바로 이 아래로 갔으니 말이야. 하지만 그런 일이 물 속에 잠겼다고 해서 다 끝난 건 아니다."

금영의 부친은 그녀가 다섯 살 나던 해 제 딸을 업고 청평사에 찾아갔다고 한다. 가서는 주지 스님에게 부녀가 함께 출가하러 왔다고 했다.

"지금 등에 부처를 업고 어데 와서 부처를 찾습니까? 하처래하처거(何處來何處去)라 했으니 그저 하룻밤만 요사채에서 머물고 내려가도록 하세요."

오는 사람 막지 않는다는 불가의 말이 있으나 주지 스님은 이들을 불문에 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다음날 새벽에 그들은 올 때와 같은 모습으로 산을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가 궁금했어요. 결국 그 이유를 알게 되었지만 어떻게 어린 딸을 업고 절에 찾아가 중이 되겠다고 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예요."

청평사로 올라가는 산자락을 끼고 돌며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지곤 했다.

청평사는 댐의 북쪽에 솟아 있는 오봉산(五峯山)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데 신라 진덕여왕 때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무량한 세월이 지난 뒤, 금영과 내가 처음 청평사를 찾았을 때는 공사중인 듯 여기저기 석재들이 굴러 있었다. 경내 풀밭에는 달걀을 심어 놓은 듯 주춧돌이 비죽비죽 솟아나와 있었는데, 무겁(無怯)한 세월의 잔해로 스산히 남아 초저녁 바람 속에서 조용히 닳아지고 있었다. 때마침 가사불사(袈裟佛事)를 하다가 공양 때가 되어 스님들이 몰려나오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극락보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기서 우리는 극락보전의 외벽 삼 면을 둘러치고 있는 십우도를 발견했다. 굼뜬 얼굴로 벽 그림을 올려다보고 있는 나에게 금영은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았다.

"십우도는 선을 닦아 마음을 수련하는 과정을 뜻하는 그림이에요. 불교에서는 사람의 진면목을 소에 비유해요. 십우는 심우(尋牛), 즉 소를 찾아 나선다로 시작해요. 다음엔 견적(見迹), 소의 자취를 보았다는 뜻예요. 견우(見牛), 소를 보았다는 뜻이구요. 득우(得牛), 소를 얻구요. 그 다음은 목우(牧牛), 소를 길러요. 기우귀가(騎牛歸家),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요......이 그림은 팔상성도라고 해서 조계사 대웅전 벽화에도 있어요. 피리를 불며 흰 소를 타고 산에서 내려오는 그림이죠. 그리고 다음 것은 망우존인(忘牛存人), 소를 잊고 자기만 존재해요. 인우구망(人牛俱忘), 자기와 소를 다 잊어요. 반본환원(返本還原), 본디 자리로 돌아가요. 입전수수(入廛垂手), 마침내 궁극의 광명 자리에 드는 거예요. 결국 십우도는 마음을 찾고 얻는 순서와 얻은 뒤에 회향할 것을 말하고 있지요."

"마음이라고?"

"그래요, 소는 마음을 뜻해요."

"어렵군. 소가 달 동물이란 소리는 전에 들은 적은 있지. 그러니까 소뿔은 기운 달을 닮아서 부활과 생성을 의미한다는 거지. 뭐 이집트에선 사람이 죽으면 소의 형상을 본떠 관을 짠다지?"

"원래 소의 한자 표기는 고기 어() 자였대요. 소 우() 자와 서로 바뀌었다는 얘기죠. 고기 어 자 밑에 있는 네 개의 점은 바로 소의 네 다리를 뜻한다는 거예요."

"그럼 뭐 소가 물 속에서 살던 짐승이었나?"

"진흙 소가 바다 밑에서 북을 친다는 말도 있잖아요."

이쯤 되면 숫제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지만 어쨌든 금영의 진면목을 알자고 덤비면 이내 오리무중의 길로 들어서기가 일쑤였다. 정말이지 다가가면 갈수록 그녀는 더욱더 멀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금영의 그 깊은 마음속에 내가 한 자락 그림자라도 드리운 적이 있는지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녀가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앞이 아니라 뒤였고, 그게 소인지 뭔지는 몰라도 어쨌든 제 마음을 다잡지도 못한 채 회향을 꿈꾸고 있는 그녀를 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 청평사를 내려와 소양호 선착장으로 나오는 배의 이물에 앉아서 그녀는 무섭도록 적막한 모습으로 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제 생모가 이곳에 투신해 죽었다는 것을. 이 물 밑에서 자신의 생이 비롯됐다는 것을.

"지금 어머니가 소를 타고 청평사로 올라가고 있어요. 풀밭에 지독한 안개가 껴 있어요. 물에서 나온 소들이 음매음매 그 뒤를 따라가고 있어요."

그녀의 뒷전에 바투 서서 나는 그저 그녀의 목덜미를 낚아챌 채비나 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옛날엔 소를 뜻했다는, 고기 어 자가 되어 그녀가 물 속으로 뛰어들 것만 같아서였다.

하지만 나는 매번 그 순간을 놓쳤다고 해도 좋았다. 서로 만나고 있는 순간에도 그녀는 내가 조금만 방심하고 있으면 어느결에 슬쩍 사라져 버리곤 했다. 당장 그 처음은 소양호 선착장에 배가 도착하고 나서였다. 배에서 내려 근처 식당 매점에 들어가 담배를 사는 사이 그녀는 내 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부랴부랴 정류장으로 올라오며 좌판 술집들을 샅샅이 뒤지고 뱀골에서 가마골까지 휘둘러 본 다음, 댐 아래 마을까지 내려왔을 때서야 나는 그녀가 먼저 가버렸음을 깨달았다. 날은 이내 어두워져 버렸고 강으로부터 꾸역꾸역 안개가 몰려나오고 있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나는 춘천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공지천의 이디오피아란 카페까지 들러 보았으나 서울행 기차 안에서 나는 앞으로 그녀와의 만남이 예사롭지 않으리란 예감에 빠져 있었다. 벌써 두어 번 연애에 실패한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범속함만큼 사랑에 있어서 소중한 것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던 터였다. 없는 듯 싶으면서도 돌아보면 늘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그런 사랑을 나는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 누군가를 만나면서 끊임없이 긴장하고 동요해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경을 칠 일이 아니던가.

다음날 그녀는 태연한 목소리로 내 전화를 받았다. 아연하게도 그녀는 나와 춘천까지 동행했던 사실조차 뚜렷이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저 혼자 춘천을 다녀온 것으로 믿고 있었다. 말문이 막혀 더 이상 뭐랄 수도 없었으나 아무튼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런 일은 그후에도 자주 일어났다. 커피숍에서, 영화관에서, 전동차 안에서, 거리에서, 다시 소양호에서 그녀는 정오의 그림자처럼 그렇게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곤 했다. 말하자면 그녀는 나와 만났다는 사실은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나와 헤어졌는가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황당한 기분이 들어 상대를 탓할 양이면 그녀는 궁지에 몰린 사람처럼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하나의 타자(他者)로 간주하고 매양 그것을 찾아 다니느라 넋이 빠져 있는 사람 같았다. 그녀는 스테레오그램 같은 여자였고, 그녀 자신조차도 그 이면에 존재하는 제 모습을 보았다고는 결코 말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란 건 하나의 타자일 거예요. 내 것이 아니란 말이죠."

"글쎄 마음이란 게 있기나 한 건가? 있다고 해도 그건 누구도 볼 수 없는 공기 같은 게 아닐까."

"법당을 찾아내야만 보이는 그런 걸 거예요."

"법당? 글쎄......우리 육신이 곧 법당 아닐까."

"하지만 누가 지어 놓은지도 모르는 법당인걸요."

"사는 일을 그렇게 깊이 생각하다 보면 한도 끝도 없지. 낯익은 타인을 만나면 그래도 반갑잖아. 또 마음이란 건 그렇게 먼 곳에 있는 게 아닐지도 몰라. 내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이야. 누구 말마따나 평상심(平常心)을 길들이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

어느 순간엔가는 그녀에게서 돌아서자고 마음을 먹기도 했으나, 그때쯤 해선 그녀가 내 마음속에 굳건한 법당 하나를 지어 놓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마음이 가는 대로 따라가야지, 억지로는 될 일이 아니란 것을 안 것도 그 즈음이었다.

 

3

기차가 강촌역을 지날 때부터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들녘은 봄날 오후의 차디찬 우수를 담고 덜 마른 수채화처럼 번지고 있었다. 산은 연두색으로 막 부풀어오르면서 조산 운동을 하듯 꿈틀대고 있었다. 춥다,라는 느낌이 듦과 동시에 나는 앞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눈을 돌렸다. 아까부터 그녀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나는 느낌으로 알고 있엇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반사적으로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하늘색 반소매 재킷에 매화 무늬가 낭자한 샤넬라인 스커트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무릎 밑으로 쥐색 스타킹을 신은 길쭉한 다리와, 황색 줄무늬의 흰색 단화가 비죽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그녀의 몸이 서서히 말미잘처럼 움츠러들었다. 강촌을 지났으니 남춘천역이나 춘천역에서 내리리라. 어디를 가는 길인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모습으로 그녀는 무연히 창 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오늘 밤엔 저 먼 곳에 있는 달에도 비가 오겠다.

금영은 지금 어디쯤 질러가고 있는 겔까. 오늘 과연 만날 수 있을까. 망설이지 말고 일찍 출발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청평사 부근에서 머물리라 했으니 강을 건너가면 만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번에도 나는 무작정 그녀의 뒤만 믿고 따라온 것이다. 그녀가 무작정 그녀 자신을 뒤쫓아갔듯이 말이다.

그녀는 청평사로 간 게 아니라 청평리를 찾아갔다, 라는 생각이 든 것은 기차가 춘천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터널로 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기차 안이 돌연 컴컴해졌다. 그녀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그녀와 나는 비 내리는 저녁 나절, 불현듯 막다른 골목에서 맞닥뜨린 얼굴이 되어 서로를 쳐다보았다......애써 비켜 가고자 해도, 서로 스치지 않고서는 지나갈 수 없는 그런 길이 있다. 그러니까 서로가 원하고 원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라 도저히 피해 갈 수가 없다란 느낌이 드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런 경우에 나는 직면해 있었다.

", 어디까지 가시죠?"

그녀는 줄다리기를 하다 얼결에 잡고 있던 줄을 놓쳐 버린 사람처럼 일순 기우뚱거렸다. 잠시 후 그녀는 의외로 침착하게 내 말을 되받았다. 그러나 목소리가 사뭇 떨리고 있었다. 내가 말을 거는 순간에야 비로소 앞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남춘천역에서 내려요."

그녀는 목적지를 말하지 않고 그렇게 에둘러서 말했다.

"저는 청평사까지 갑니다."

남춘역에서 내리는 여행객의 대부분이 소양호나 청평사로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렇게 넘겨짚어 말했다. 그녀의 표정이 다시금 갈뫼빛으로 흔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쯤에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얼마 후 기차가 남춘천역에 도착하자 그녀는 숄더백을 어깨에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슬쩍 눈인사를 건넨 다음 먼저 차에서 내렸다.

광장으로 나오자 빗방울이 제법 굵어져 있었다. 그녀는 푸른 비닐 우산을 사들고 맞은편 버스 정류장으로 가고 있었다. 차부에서 표를 사고 소양댐으로 가는 12번 좌석 버스에 올라타자 뒷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그녀가 보였다. 아마도 내가 차에 올라타는 것을 보고 있었으리라. 버스는 몇몇 학생들과 촌부들이 타고 있을 뿐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545분에 버스가 출발했고 샘밭을 지나 소양댐에 도착했을 때는 6시가 좀 지나 있었다. 그리고 샘밭을 지나오면서 나는 예기치 못했던 불안을 붙안고 있는 나 자신을 목도하고 있었다.

소양호에 도착하니 쌀겨 같은 비안개가 호반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는 참이었다. 드문드문 여행객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으나 날씨 탓인지 호반 주변은 한산한 편이었다. 아무튼 그런 풍경을 일견하고 나서야 나는 뭔가 심상찮던 예감의 정체를 알아 버린 듯싶어 곧장 선착장으로 줄달음을 쳤다. 방심하고 있었다, 이렇게 늦게 배를 타본 적이 없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돌연 낭떠러지 앞에 몰린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숨이 차 있는 상태에서 배가 끊겼어요,라는 매표소 관리인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또다시 금영이 내 앞에서 훌쩍 사라져 버렸다는 낭패감에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배를 타러 왔다가 돌아가는 몇몇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날씨 탓인가요? 왜 벌써 배가 끊어졌죠?"

암암한 기분에 빠져 나는 좀 따지는 듯한 말투로 사내에게 물었다.

"날씨가 어때서요? 저기 배 시간표 보세요. 초행인가 보죠?"

이런 일에 이골이 난 듯 사내는 비죽비죽 웃는 얼굴로 태연하게 맞대거리를 해왔다. 540분이 막배였다. 제기랄. 초행일 리 없으나 전에 청평사에 가기 위해 막배를 탄 적은 없었던 것이다. 딱하다는 듯이 사내가 한마디 더 질러 넣었다.

"양구, 인제로 들어가는 배도 이 시간이면 다 끊어져요. 좀 일찍 오시지 않구서."

"다른 배는 없습니까? 이내 다녀올 수 있잖습니까."

"단속이 심해 놔서 들어가려 하질 않아요. 여긴 군사 지역인데다 댐 경비를 맡고 있는 사람들 눈을 어떻게 피하겠어요."

사내와 실랑이를 하고 있는 사이에 소양호 위에 밀빛 안개가 구름처럼 내려 덮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라고 해도 좋았다. 일시에 눈앞 풍경이 흐트러지며 금세 옷깃이 축축이 젖어 버렸다. 뒷전에서 밤꽃 향내가 낮게 깔려 내려와 안개와 몸을 뒤섞고 있었다. 시나브로 날이 어두워지며 청평사로 가는 물길은 그야말로 사막처럼 아득해 보였다. 이번에도 그녀는 나를 뒤에 떨군 채 질러가 버렸다......는 생각만 겹쳐 올 따름이었다.

그러나저러나 여기서 이렇게 주저앉으면 안될텐데.

"내일 아침에 나오십쇼. 아홉 시 반에 첫배가 뜨니까요."

그땐 이미 늦은 다음일지도 모른다. 허나 뭐라 더 대거리를 할 여지도 없었다. 캄캄한 기분으로 나는 청평사로 가는 물길을 노려보며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식당과 기념품 등속을 파는 가게 옆을 휘적휘적 지날 때 나는 밀짚모자의 여자가 내 옆을 지나,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잠시 후엔 그녀도 돌아와야 하리라.

정류장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좌판 술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함부로 소매를 잡아 끌었다. 어디나 안개가 내리고 있었고 어디에서나 한결같이 골뱅이, 옥수수, 다슬기를 팔고 있었다. 길 중간께의 좌판에서 나는 다시 소매를 붙잡히고 말았다. 주문도 받지 않고 삼십대의 여주인은 내게 소주와 삶은 골뱅이 한 접시를 내놓았다.

 

4

옛날에 나그네를 태운 소가 청평사에 와서 죽었다는 전설이 있대요."

그냥 생각나는 대로 해보는 말이 분명했을 여자의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드는 성싶었다. 여자는 밀짚모자를 벗어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머리채를 등뒤로 풀어 내렸다. 떨리는 손을 술잔으로 가져가며 나는 여자에게 되물었다.

"그게 언제죠?"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다만 전설일 뿐인데요. 춘천에서 여고를 나온 친구한테 들은 얘기예요."

뒤미처 내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사실 나도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나는 말하고 있었다.

"그건 아마 오래 된 얘기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여자가 가만가만 내 얼굴을 살폈다.

"그후 나그네는 청평리에서 한동안 살았다죠. 동네 처녀와 인연을 맺어 딸까지 하나 낳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그네는 다시 길을 놓아 가버렸지요. 그리고는 이듬핸가 댐 공사가 시작될 때 딸을 데리러 왔다지요, 아마."

여자는 먼 데 소리를 듣듯 내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둘 다 배를 놓친 처지에, 서둘러 갈 길이 없는 것도 마찬가지였고, 무엇보다도 기차를 함께 타고 왔으므로 그녀와 나는 구면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선착장에서 이쪽을 향해 비스듬히 걸어 올라오던 그녀가 나를 발견했을 때 이번엔 피하지 않고 곧장 다가왔던 것은 글쎄 나도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다만 막다른 골목에서 다시 마주쳤다, 빠져 나갈 수가 없다,란 생각을 이번엔 그녀가 했으리란 짐작 뿐이었다.

그녀는 양구로 가던 길에 나처럼 배를 놓치고 말았다. 초행이었다. 더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군 부대로 누굴 면회하러 가던 길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춘천으로 나가면 미시령을 넘어 양구로 가는 버스가 있을텐데 어째서 여기 이렇듯 주저앉아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여자가 혼곤한 얼굴로 다시 물어 왔다.

"그런 다음에는요?"

"그후 어느 해던가 나그네는 제 딸을 업고 청평사로 올라가 중이 되겠다고 했답니다. 이튿날 도로 내려오고 말았지만요."

"묘한 얘기네요. 왜 스님이 되겠다고 했을까요."

"어떻게 그 마음을 헤아리겠습니까."

마음,이라는 말에서 나는 다시금 금영을 생각했고 그리고 절망하고 있었다.

"......그럼 그 나그네와 인연을 맺었다는 처녀는 어떻게 된 거죠?"

"한동안 샘밭에 내려와 살다가 어느 날 이곳에 와서 투신했다죠."

"어디, 여기에 와서 말인가요?"

여자의 눈구멍이 하얗게 벌어졌다. 꺼끔하니 비가 그치고 있었다.

"그렇다는군요. 그들이 인연을 맺은 곳이 바로 이 물 밑이 아닙니까. 도로 그곳으로 돌아간 거죠. 아무튼 나그네를 태운 소가 청평사에 와서 죽었다는 말은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청평리엔 소가 많았다고 하니 그런 곡절이 있을 법도 한 거죠."

여자는 붉어진 눈으로 안개에 싸여 있는 소양호를 오래오래 더듬었다. 사이사이 나는 술잔으로 손을 가져갔다. 몸이 떨려 술기운이 아니면 견디기가 힘들었다.

", 이런 말 물어 봐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청평사엔 무슨 일로 가시는 길이었죠?"

한동안 나는 대꾸를 못하고 멀리 가막골 쪽에다 시선을 박고 있었다.

"제가 괜한 걸 물어 봤군요."

"아뇨. 하지만 얘길 하자면 길지요.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는 법당을 찾아 나선 셈입니다."

반문하지 않았으나 순간 여자의 눈 주름이 가늘게 떨렸다.

"아니, 어쩌면 소를 찾아 나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고 되뇌인 다음 여자는 말끝을 흐렸다.

"한데 사람의 마음이란 게 어디 그렇게 쉽게 찾아지는 건가요. 그건 아주 멀리 존재하는 혹성 같은 걸 겁니다."

여자가 내 눈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시늉을 했다. 스테레오그램을 쳐다볼 때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말이다. 약 십 초쯤이나 여자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가 침묵하는 동안에 나는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저 안개 뒤편 마을에 가 있을 금영을, 뒤따라 가다 보면 늘상 막배처럼 끊어져 버리는 우리의 관계를, 언제나 나에겐 객지인 이곳 소양호를, 이제사 어렴풋이 알게 됐지만 멀리 있음으로 해서 내게 존재한다고 믿게 된 그녀를.......

파라솔 밑으로 어둠이 켜켜이 다가오고 안개와 추위 때문에 더는 그곳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저 예사롭게 그녀를 돌아보며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다.

"실은 아까 춘천으로 나가 양구로 가는 버스를 탈 셈이었어요. 배를 타자고 생각한 건 이쪽이 지름길이었기 때문이구요. 내일 아침 일찍 배를 타고 양구로 들어갈까 해요. 여기 이러고 앉아 있는 것은 글쎄......뭐랄까요, 왜 이런 경우 있잖아요. 가야만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갈 수 없다,라고 믿게 되는 그런 경우......."

그녀는 고개를 수그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무슨 사정이 있겠거니 싶었다. 내게도 그 같은 사정은 있는 것이다.

"선생님은요?"

"저도 사정이 비슷합니다. 오늘 밤은 요 아래 여관에서 지낼 참입니다."

댐 아래쪽에 민박집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여관이 있는가는 모르고 한 말이었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뜬금없이 이런 말을 했다.

"우스운 얘기지만 어렸을 땐 늘 여관에 가보고 싶어했어요. 나그네의 집이란 말이 좋았어요. 먼 길을 가다 지친 나그네가 저녁이면 들어가 홀로 누워 있곤 하는 그런 집 말이죠."

정류장까지 오자 버스가 보이지 않았다. 택시 두어 대가 헤드라이트를 켜놓고 서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주저주저하며 택시 뒷좌석에 올라탔다. 차를 따로 타야 했을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을 땐 이미 택시가 출발하고 난 뒤였다. 운전기사가 행선지를 물었으나, 그녀는 한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가 백미러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으므로 나는 내 행선지부터 먼저 말했다. 춘천으로 나가는 택시니 그녀는 내처 가면 되리라.

차가 마을 입구 횟집 앞에 멎었다. 그리고......그녀가 택시비를 냈다.

차에서 내려 휑하니 달아나고 있는 택시의 꽁무니를 눈으로 좇으며 그녀는 지독한 안개예요, 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지독한 안개였다. 이걸 는개라고 한다던가. 횟집 담벼락에 붙어 있는 '민박'이란 나무 간판에 안개가 더께처럼 달라붙어 있어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녀는 연신 밭은기침을 해댔다. 야영을 온 학생들이 있는지 길 건너편 강 안에서 광야에서란 노래가 어둠을 타고 들려 오고 있었다. 거기 모닥불이 석류처럼 타오르고 있는 게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는데다, 아무래도 길 안내는 내 몫이지 싶어 나는 그녀를 데리고 우선 횟집 안으로 들어갔다. 방을 잡기에는 아무래도 좀 이른 시각이었다. 빙어회 한 접시와 감자 전과 경월 소주 한 병이 나왔다. 그래, 나는 지금 멀리 강원도에 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생면부지의 여자와 마주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다.

"아까 그 얘기 듣고 싶어요. 그 나그네 얘기 말예요. 그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할말이 궁색했던 탓이었을 것이다. 여자가 젓가락으로 감자 전을 뒤적이며 그렇게 말했다.

"......애초에 청평리에 왔을 때 그는 이미 결혼한 몸이었다죠."

", 나그네도 혼인을 해요?"

"애를 못 낳는 여자였지요. 나중에 청평리에서 데려간 아이를 금지옥엽처럼 키웠답니다. 나그네는 작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결혼을 하긴 했지만 평생 운수처럼 떠돌다 죽었다고 합니다."

서서히 몸 안에 술기운이 퍼지면서 무거운 피로가 몰려왔다. 그리고 그때쯤에는 더 이상 그런 얘기를 늘어놓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바로 작년에 죽었다는 말인가요?"

"......그렇답니다."

그녀는 귓볼과 눈자위가 분홍빛으로 달아올라 있었으나 아직 말 발음만은 또렷했다. 그녀는 술 주전자 안에다 오이채를 집어 넣으며 아직도 더 무슨 말을 듣고자 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그네가 데리고 온 딸은 나중에 커서 입산 출가를 하고 말았죠. 피는 속일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비록 얼마 전에 환속하긴 했지만요."

", 그랬군요......환속."

여자는 다시금 석연찮은 눈빛으로 나를 골똘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여자는 한참을 망설이는가 싶었는데 마침내는 이렇게 물어 오고야 말았다.

"선생님은 그럼......."

이제 올 데까지 다 왔다. 더 이상 내가 무슨 말을 하랴. 대답 대신 나는 안개가 쳐들어오고 있는 문 쪽께로 눈을 돌리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어쩌자고 나는 이러고 있는 겔까. 이러다간 내일 아침 청평사로 들어가는 첫배를 놓치고야 말지. 벽시계를 보니 얼추 11시가 다돼 있었다.

여자는 아주 사무친 얼굴로 이제는 제 생각에 골똘해 있는 듯싶었다. 여자에 대해 무언가를 물어 보려 했으나 나는 그만두고 말았다. 누구에게나, 남들은 들어도 알 수 없는 곡절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그리고 어느결엔가 나는 여자가 선생님, 뭐 어쩌고 하며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지만 나는 그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

금영, 나는 오늘 이 핏빛 안개 속에다 너를 묻으려나 보다.

그녀와 나는 안개의 늪 속에 들어와 있었다. 자꾸 기침이 나오려 했으나 나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용을 썼다. 가슴속에서 참을 수 없는 갈증이 목울대로 타올랐다. 안개가 아니더라도 사위는 깊은 어둠에 싸여한치 앞을 분간할 수가 없었으며 그녀와 나의 발자국 소리만 스적스적 귀에 들려 올 뿐이었다. 그녀와 나는 안개 속에 부옇게 떠 있는 '민박'이란 간판 앞을 안짱걸음으로 지나쳤다. 그녀 또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마치 무슨 소린가를 내고 나면 제 몸이 훌쩍 사라져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어디 석류나무가 있는 여관이 있을텐데.

그때 어디선가 불현듯 뿔피리 소리가 들려 왔다. 환청이겠거니 싶어 두어 번 도리질을 치다 나는 그녀에게 목쉰 소리로 물었다.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마치 뿔피리 소리 같은데."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캄캄한 안개 속에다 짐짓 귀를 들이대는 시늉을 했다.

"그래요.......무슨 소리가 들려요."

이 말은 그녀가 취해 있었기 때문에 아마 건성으로 한 소리였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안개 저편으로부터 분명 뿔피리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나는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웅얼거렸다.

"소나무 그림자!"

그녀가 우뚝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내가 한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잠에서 막 깬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종잡을 수 없다는 듯 여자는 맥없이 휘청거렸다. 그러고 나서 다시금 침묵이 버겁다고 느껴질 때 묵묵히 내 옆을 따라 걷던 그녀가 툭 끊어진 소리를 내뱉었다.

"오쇼 라즈니쉬......맞아요, 뿔피리 소리."

그녀와 나는 민박집 하나를 더 지나치고 있었다. 서서히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여관은 이런 곳에 있을 법하지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 첩첩한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말 터였다. 그녀가 잠꼬대 같은 말로 속삭였다.

"정말 저만치서 뿔피리 소리가 들려 오고 있어요. 이곳은 우리가 살던 동네가 아닌가 봐요. 우린 너무 멀리 온 것 같아요."

우리가 살던 동네? 그녀의 뜻 모를 소리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리가 들려 오는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두려운지 그녀는 어느새 내 팔을 잡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막다른 길의 끝에 다다라 있었다. 우리는 불과 서너 걸음 앞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는 싸리나무 울타리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길이 막혔나 봐요. 돌아가요."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내 팔을 잡아 끌며 속삭였다. 안개는 울타리 이쪽과 저쪽을 쉴 새 없이 넘나들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도무지 방향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울타리를 넘어서 조금만 더 올라가 보도록 하죠. 피리 소리가 여기 어디쯤에서 끊어진 것 같은데."

나는 귀를 쫑긋거리며 떨고 있는 그녀를 울타리 너머로 잡아 끌었다. 그리고 무너진 울타리 사이를 간신히 비집고 나가 조심스럽게 앞을 더듬어 나가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뒤미처 나는 그녀가 내지르는 외마디 소리를 들었다.

"여관이에요!"

나는 흘끗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보세요, 여관 간판이잖아요."

 

5

그녀와 나는 유리문을 열고 기웃기웃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소리 한 점 없이 조용했다. 누군가 청소를 해두고 돌아간 집 같았다. 실내에는 톱밥 냄새가 은은히 배어 있었다. 복도 끝까지 녹색 등이 환하게 켜져 있었으며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열대어를 키우는 커다란 어항이 놓여 있었다.

잠시 후에 살구색 원피스 차림의 사십대 아주머니가 어서 오세요, 하면서 나와 잠자리에 드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듯 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딱히 무어라 집어 말할 수는 없었으나 여주인은 국민학교 때 여자 친구의 어머니 같은 인상을 풍겼다. 방으로 들어가자 미리 준비해 둔 따듯한 물 주전자와, 아직 상표도 뜯지 않은 수건과, 습자지에 싼 청자빛 물 컵과 면도기가 경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방안에서도 역시 톱밥 냄새가 나고 있었다. 갓 풀을 먹인 듯 이불에선 바삭바삭한 소리가 났다. 원앙 자수가 놓여진 차렵 이불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정갈한 방이에요. 여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녀는 방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그렇게 넋빠진 소리를 했다. 여주인은 우리가 벗어 놓은 신발을 거꾸로 돌려 놓은 다음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이모처럼 느껴지는 사람이에요. 이상해요. 이곳에 이런 여관이 있다는 게."

대꾸하지 않았으나 나 역시 그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나는 그녀가 오래 전에 생이별을 했다가 오늘 해후한 연인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헤어지기가 싫어 이렇듯 여관으로 쫓겨 들어와 있는 것이다.

"씻지 않고 이대로 이불 속에 들어가고 싶어요. 옷을 입은 채로 말이죠."

그녀의 목소리는 사뭇 떨리고 있었다. 그러라고, 대꾸하려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창가로 다가갔다. 유리창으로 안개가 주름주름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 물어 볼 게 있는데요. 아까 정말 뿔피리 소리를 들었던 거예요?"

자정이 좀 지나 있었다. 불을 끄고 나는 그녀 옆에 누워 있었다. 나는 들었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그랬군요. 환청이 아니었군요."

"......소나무 그림자."

별 뜻없이 나는 그렇게 입엣말로 웅얼거렸다. 그러자 그녀가 화답이라도 하듯 이렇게 중얼거렸다.

"콜 니드라이."

콜 니드라이......'()의 날'이란 뜻이던가.

"아까부터 내내 소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까 십우도 얘길 하고 있다는 건 저도 알고 있었어요."

, 하고 나는 나직이 되받았다. 그러자 갑자기 코끝이 매워 왔다.

천장을 향해 반듯하게 누워 있던 여자가 내 쪽을 향해 돌아눕는 소리가 들려 왔다.

"여긴 나그네를 태운 소가 가끔 들어올 법한 그런 곳이에요."

나그네, 하고 나는 나직이 되받았다. 나는 백년 전부터 이 여자와 이렇게 누워 있는 것만 같았다. 먼지에 덮여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말이다. 나그네와 나그네로 만나서 말이다. 이번엔 내가 말했다.

"여기가 법당이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법당, 하고 여자가 나직이 되받았다. 법당......하고 다시 내가 나직이 되받았다.

그러한 어느 순간에 내 손이 저절로 그녀의 귀에 가닿았다.

......하고 되받던 여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찢어진 북처럼 떨리더니 흑, 하고 내게로 무너져 왔다.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몸이었다. 나는 아주 천천히 헤아리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양구론 이제 못 가, 그냥 서울로 돌아갈......하고 주절대는 여자의 소리를 얼핏 들었다.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나도 청평사로 갈 수 없으리라 하는. 아니, 가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갈 수 없다는 믿음이 생겼다고 하는.

 

6

새벽녘에 나는 물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지 않고 나는 가만히 소리가 나는 쪽에다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욕실에서 들려 오는 소리였다. 나는 먼지를 쓰고 누워 아득히 쏟아지는 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오랫동안 귀에 사무쳐 있던 소리였다. 그리고 나는 금영이 지척에 와 있다, 그녀가 여기에 들어와 있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한 생각 끝에, 나는 안간힘을 다해 눈을 비벼 떴다.

그때던가. 창문 가까이에서 예의 그 뿔피리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비틀 창문으로 다가갔다. 뿔피리 소리는 점점 크게 들려 왔다. 그리고 그 소리에 섞여 웬 짐승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 오는 듯싶었는데, 갑자기 멀미가 느껴지며 나는 방 한 가운데서 기우뚱하고 흔들렸다. 간신히 벽을 짚고 버티고 서서 나는 창문 밖에서 내리고 있는 새벽의 푸른 안개를 쳐다보며, 비로소 이토록 오래 나를 사로잡고 있던 것의 정체가 무엇이었던가를 곰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정말로 누가 방안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 내 등뒤에 누군가 다가와 숨을 죽이고 서 있다는 걸 안 것은 정신이 바로 돌아왔을 때였다. 나는 여인의 침실 휘장을 들치는 기분으로 조용히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내 가슴팍에다 대고 머리를 비벼대기 시작했다. 전생에도 보았음 직한 아주 낯익은 형상이었다. 나는 그녀의 귀를 잡고 그 커다란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나는 얼핏 소 울음 소리를 듣고 있었던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먼 것이, 내 가슴 안에서 이렇듯 조용히 흐느끼고 있었다. 나는 말할 수 없이 사무친 생각이 들어, 한껏 두 팔을 벌리고, 그녀의 떨고 있는 몸을 힘주어 그러안았다. 그때, 가슴 속에서 무엇이 쑤욱 빠져 나가는 듯한 차디찬 느낌이 엄습해 들었다.

''라는 하나의 공간을 남겨 두고.

히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가슴에 있던 그녀가 어느결에 문 밖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7

밀짚모자의 여자는 안개 속을 무사히 지났을까.

언젠가 소를 탄 나그네가 되어 여기 오리라.

550.

해가 떴고 상기는 달이 질 시각이었다.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