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정
치정
유진오
이튿날 희경은 아침부터 S라는 사람이 은근히 마음에 거리꼈으나 별다른 일없이 지냈다. 오후 한 시가 되니까 언제나 일반으로 남작이라는 〈하이칼라〉 청년이 나타나 해태 한 갑을 사 가지고는 희경의 눈앞 테이블에서도 한 번 돌아다 보는 일 없이 얼굴만 보이고 앉았는 모양이 새삼스레 우습게 보인다. 그러나 그도 삼십분이 지나니까 양복 먼지를 털며 일어나 가버렸다. 오후 네 시. 희경은 손님이 좀 빠진 틈을 타 회계를 닦고 앉았는데,
"여봐!』
〈마유미〉가 와서 별안간 하얀 종이에 싼 꽃다발을 내밀며,
"또 사랑의 선물."
편지와 함께 카운터 위에 올려놓고,
"흥 굉장헌데. 카네이션에다가 글라디올러스, 어쩌면-"
"무슨 소리야."
말은 했으나 희경은 또 까닭도 없이 얼굴이 붉어지며,
"도루 보내 줘, 이런 것 난 몰라."
"나는 아나. 돌려보낼 템 자기 손으로 보내지 그래."
〈마유미〉는 입술을 삐죽이 내민다. 좋으면 거저 좋다고 하라는 듯도 하고 이런 것을 도로 보내라니 분수에 넘치는 수작은 고만두라는 의미도 품은 입이다. 물으니 꽃과 편지를 가지고 온 아이는 벌써 아까 내빼버렸다 한다. 마침 희경의 등 뒷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며 ,
"〈아라 매니저〉."
〈마유미〉가 시침을 떼고 제자리로 가려는데,
"무얼 그렇게 떠들어-"
약간 퉁명스런 M의 목소리다. 희경은 도둑질하다가 들킨 놈처럼 얼른 편지를 집어 품에 넣고 꽃다발을 만적만적하고 있는데,
"그건 뭐야!"
바로 등뒤에서 또 M의 소리다.
"저-"
무엇이라 해야 좋을는지를 몰라 더듬거리다가 흘깃 뒤를 쳐다보았더니 의외에도 M이 노려보고 있는 것은 〈마유미〉였다. 〈마유미〉는 겸연쩍은 듯이,
"뭔지 전 몰라요. 메신저가 가지고 와서 〈리에상〉한테 갖다주라고 허기에 갖다 전했을 뿐이에요."
"자기 헐 일이나 헐 것이지 누가 그런 거 전하랬어!"
〈마유미〉는 그만 입이 부어 제자리로 갔다.
"〈리에상〉두 그런 거 누가 보낸다구 그대로 받으면 어떡허우."
이번에는 훨씬 부드러운 목소리다. 그 말만 하고 매니저는 화장실로 갔다. 희경은 무슨 큰일이나 치르고 난 것 같아 등에 땀이 났다. 매니저가 도로 사무실로 들어가기를 기다려 마침 홀에 손님도 없었으므로 사층 위 옥상으로 갔다. 거리 한복판에 있는 빌딩이건만 옥상에 올라가면 일상 탁 터진 들판에나 나간 것 같다. 가을 바람이 소리 없이 흐르는 맑은 하늘. 황금색으로 빛나는 찬란한 햇빛. 북한연산이 수정거울처럼 들여다보는 듯이 눈앞에 보인다. 건너편 M백화점 옥상에는 사람이 제법 웅성웅성한다.
전화교환국 옥상에도 젊은 여자가 몇. S외과의원 옥상에도 흰옷을 입은 간호부가 둘. 모두들 휴식의 한 시각을 가을 해 밑에 즐기고 있는 것이다 . 멀리 M극장의 애드벌룬이 지금 흔들흔들 공중으로 올라가는 것이 보인다. 기구는 한참 올라 가다가는 바람에 불려 떨어지는 듯이 옆으로 흐르고 그러다가는 도로 올라가고. 다음 주일부터 상연한다는 〈안나ㆍ까레리나〉의 애드벌룬이다. 난간을 집고 섰다가 희경은 문득 아까 허둥지둥 품에 집어넣었던 편지를 생각하였다. S에 대해서는 불쾌한 생각을 가졌을 뿐이었으나 편지는 어쨌든 뜯어보고 싶었다. 원고지 일곱 장에 가득하게 쓴 편지 내용은 어제는 별안간 실례했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자기로서는 오랜 동안을 두고 번민 번민하던 끝에 최후적으로 용기를 낸 것이라는 것, 처음으로 희경을 보던 날부터 몹시도 그녀를 흠모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자기 소개였다.
의외에도 건너편 M백화점 점원이었다. 나이는 스물넷, 상업학교 출신. 물론 미혼이요 집에는 어머니가 한 분 계실 뿐, 자기는 무슨 희생을 해서라도 희경을 행복하게 해 줄 터이니 꼭 자기와 결혼을 해달라는 것이다. 훑어 읽어 내려가며 희경은 비실비실 웃었다. 과자를 사 보내고 꽃을 보내고 되지도 않는 미문으로 편지를 쓴 것은 몹시 천박한 짓이었지만 편지 속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진실이 느껴졌다. 아마도 S라는 사람은 이런 행동을 활동사진이나 소설로만 보았을 뿐이요 실지로 행하는 것은 처음인 성싶다. 그렇듯 그의 편지는 반감보다도 도리어 미소를 자아내는 성질의 것이었다. 한참 빙글빙글 웃고 있는데,
"무얼 그렇게 보시오."
별안간 등뒤에서 M의 소리다. 깜짝 놀라 획 돌아서니 M은 어느 틈엔가 바로 희경 뒤에 와 서 있는 것이었다.
"아이 깜짝야."
"허허허 용서하시우. 즐거운 꿈을 깨뜨려서."
희경은 대답이 안 나와 M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빙글빙글 웃고는 있었으나 무엇인가 보는 사람이 가슴이 섬쩍지근 하도록 진실을 품은 표정이다.
"러브레터요? 어저께 무어 보낸 사람이 또 보낸게죠."
M은 희경의 손에 들린 채로 있는 편지와 희경의 얼굴과를 번갈아 보면서 묻는다. 전후 사정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희경은 생각했으나 무슨 심문이나 당하는 것 같아서 얼른 입이 떨어지자 않았다. "누구요? 애인?" 그제서야 희경은,
"천만에요!"
"나는 남편이 있는 여자요."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으나 참았다.
"그럼?"
"몰라요. 전 알지두 못하는 사람이에요. 원 참!"
"짝사랑이로군. 허허허, 허지만 당신 얼굴에는 그렇게 써 있지 않은데요. 그렇게두 기쁩니까?"
"기뻐요? 호호호 이걸 보세요. 하두 우스우니까 웃었을 뿐이지요."
읽던 편지를 M에게 건네주며,
"과자를 보낸다, 꽃을 사 보낸다 어린애 같은 행동이 우습지 않아요? 그런데다 이 미문!"
그러나 편지를 읽는 M의 얼굴은 돌같이 단단했다. 약간 캉캉하면서도 표한한 빛이 흐르는 얼굴. 희경은 M에게서는 일상 일종의 위압을 느끼고 있었다. 나이는 아직 삼십 밖에 안됐다면서 동경서 벌써 십 년이나 이런 생활을 해 왔다는 M. 카메라를 주무르고 탱고를 추고 〈마유미〉의 말을 들으면 여자를 후려서 짓밟는 데는 대가라는 M. M을 대하면 희경은 일상 이런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 한데 되어 이상스런 일종의 압도감을 느끼던 판이라 지금도 공연히 마음이 졸렸다.
"그래 〈리에상〉은?"
M은 편지를 다 읽고도 직성이 풀리지 않은 듯이 희경을 건너다본다.
"어떻게 할 테냔 말씀이에요? 호호호, 우습다니까요. 그 뿐이어요."
"이 사람은 문제도 안 삼는단 말이지."
"인젠 덕택에 이름도 주소도 알았으니까 다시는 그런 짓 말라고 편지를 하겠어요."
M은 「미친놈」하고 그제서야 웃는 낯이 되었다. 겨우 안심을 하고 편지를 도로 받아 봉투 속에 접어 넣는데
"〈리에상〉!"
별안간 어조를 고치며 M이 희경에게로 다가섰다.
"네."
M은 빙긋이 웃으며
"우리 언제 어디 놀러 갈까?"
"어디요?"
"아무 데나, 〈리에상〉이 정하는 데루."
"글세요."
"글쎄가 아니라‥‥‥‥"
M은 슬며시 희경의 손을 쥐며
"어디 한 번 놀러 갑시다 그려. 단 둘이 응, 사실을 말하면 난 당신을 처음 보던 날부터 사모해 왔다오. 〈매니저〉라는 지위가 지위여서 섣불리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은."
"아이, 그런 말씀은-"
희경이 가만히 M에게 잡힌 손을 뺐다.
"왜, 애인이 있소?"
"호호호."
희경은 소리를 내 웃었다. 그것을 자기에 대한 호의의 표명으로 안 M은,
"그러면 언제쯤 할까. 요담 당신 노는 날쯤 할까?"
〈J그릴〉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종업원에게 돌려 가며 노는 날을 주는 것이다. 희경은 딱 잡아떼기도 어렵고 또 지금 열이 나게 거절할 필요도 없어서,
"글세요."
하고 애매하게 말끝을 흐려버렸다. M은 빙그레 웃음을 띠우고 희경의 얼굴을 잠깐 들여다보더니,
"자 그럼."
하고 다시 희경의 손을 쥐며,
"오늘 일은 우리 둘이만 알고 있습시다. 아무한테두 말씀 마시오."
해 놓고 썩썩 걸어 층다리를 내려갔다. 무슨 말이 더 있을 것 같은데 어째 고만두는 것인가. 희경은 얘기하던 것이 중등치기가 된 것 같아 층다리를 내려가는 M의 뒷모양을 정신 나간 사람 모양으로 보고 있었다. M이란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다. 금방 그에게 잡혔던 손에 아직도 그의 체온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한참이나 있다가 희경은 꿈을 깬 사람 모양으로 정신이 나며 언뜻 보니 건너편 M백화점 옥상에서 젊은 사람이 하나 이편을 뚫어지게 건너다보고 있다. 저 사람이 S라는 사람인가?
그날 밤, 희경은 S의 편지를 남편 앞에 내놓고 깔깔거려 웃으며 결혼 거절의 답장을 썼다. M이야기도 해야 할 텐데 하고 생각했으나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아 결국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어느날 밤, 희경이 회계를 마치고 〈마유미〉와 함께 화장실에 가서 얼굴을 고치고 나오는데 M이 옆으로 지나가며 무엇인지 납작한 상자를 쑥 내밀었다. 으레히 전할 물건, 아무에게도 감출 필요 없는 물건을 전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가슴이 잠깐 덜렁 하긴 했지만 희경도 시치미를 뚝 떼고 받는 수밖에 없었다.
"뭐지 그거?"
문간을 나오며 〈마유미〉가 묻는다.
"아무 것도 아냐."
"수상한 걸."
"수상헐 건 무어 있어."
"그래두 요새 매니저 태도가 이상스럽지 않어?"
"그래?"
"그래가 뭐야. 〈리에상〉을 뚫어지게 볼 때의 그 눈이라니-."
"듣기 싫어. 난 몰라."
"흥, 〈리에상〉도 꽤 뻔뻔허군. 왼 홀 안에 웅성웅성들 허는데."
"그래두 허는 수 없지. 난 정말 모르는 노릇이니까."
희경은 웃음 소리하듯이 대답했으나 그런 대답을 천연스레 하기까지 된 자기가 무서웠다. 희경에 대한 M의 태도가 날이 갈수록 달라 가는 것은 희경도 물론 잘 알고 있었다. M은 섣불리 손을 내밀지는 않았으나 잠자코 있어도 그의 속심은 이편에도 느껴지는 것이었다. 연애도 한 기교라면 M은 확실히 그 방면의 대가에 틀림없었다. 아까 주던 물건만 해도 그렇다. 희경에게 주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몰래 전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는데 M은 일부러 〈마유미〉있는 데서 그것을 내밀었다.
그렇게 해야만 아무 소리 못하고 받을 것을 M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마유미〉와 갈린 후 희경은 M에게 받은 상자 때문에 마음이 조바심해 그대로 집으로 갈 수 없었다. 섣불리 그대로 집에 가지고 가서 인환 앞에 내놨다가는 잘못하면 무슨 소동이 일어날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내내 희경은 길 위에서 겉을 싼 종이를 풀었다. 속에서 나온 것은 적어도 삼십 원은 함직한 악어가죽 핸드백이었다. 가슴이 새삼스레 내려앉는다. 그러나 어쨌든 미리 끌러 보기를 잘했다고 생각하였다.
그대로 집으로 가지고 갔으면 아무리 사실을 사실대로 말해도 인환은 또 한참 마음을 괴롭혔을 것이다. 이왕 돌려보낼 것인 이상에는 인환에게 알리지 않고 돌려보내리라. 인환을 속이는 것은 미안하나 그것도 또한 할 수 없는 노릇이라 생각하였다. 인환은 언제나 한 모양으로 책상머리에 앉았다가 희경을 쳐다보고는 도로 고개를 책상으로 돌렸다. 그 틈에 희경은 재빠르게 옷장을 열고 가지고 온 핸드백 상자를 옷 갈피에 감춰버렸다. 아! 나는 나쁜 짓을 하는 것이다,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핑핑 돌았으나 감추고 나니까 그래도 숨이 휘 돌았다.
인환은 여전히 지글지글 속이 끓는 그날 그날을 보내고 있었다. 희경의 외모와 말솜씨가 세련되어 가는 것은 그에게도 즐거웠고 또 그로서는 희경의 숨김없는 마음을 믿었으므로 좀처럼 희경이 발을 헛디디는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나 날마다 집에 와서 들려주는 여러 사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산란스러워 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고운 여자에게는 유혹이 많은 법이고 총명한 사람은 우둔한 사람으로서는 상상치도 못할 대담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언젠가 〈지드〉의 책을 읽다가 그 속에 인용된 〈괴테〉의 말에 붉은 줄을 쳤던 것도 그 말이 그런 불안을 품을 그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후려 때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악마는 신보다는 우둔해도 사람보다는 총명한 것이니까-.
인환의 그런 고민은 눈치도 못 차리고 킬킬거려 웃으며 그릴에 오는 사내들 이야기를 하는 희경을 대하면 어떤 때는 얄미운 생각이 버썩 들기도 했다. 날마다 해태 사는 남작 이야기, 우습게도 풀이 죽어 버린 S 이야기, 이유 없이 돈을 쥐여 주는 중년신사 이야기‥‥ 희경으로서는 남편에게 숨김없이 하노라고 하는 것이겠지 만은 인환으로서는 그렇게 만은 들어 넘길 수가 없었다. 정말 희경이 사내들과 그런 유혹을 다만 미워하고 업신여긴다면 이야기에 그렇게 흥이 날 리가 없지 않은가. 흥이 나는 것은 요컨대 마음 어느 구석에 그것을 기뻐하는 군데가 있는 까닭이다. 낮에 취직 운동을 돌아다니다가 마음대로 되지 않고 속이 상한 채 집으로 돌아오면 인환은 앉도 서도 못하도록 화가 날 때가 있다. 그런 때 희경이 무슨 큰 공명담이나 하듯이 누가 어째고 하고 이야기를 꺼내면 고만 그의 야들야들한 뺨을 후려 갈기고 싶은 충동까지 느낄 때도 있었다. 언젠가는 희경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참 우스워서."
한 마디 하고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 킬킬한다. 뭐가 그리 우스우냐고 얼굴을 드는 인환을 보고
"글쎄 그 남작이 말이요. 오늘은 처음으로 말을 걸겠지. 날이 매우 추워졌습니다-고. 담밸 사구 나선 공연히 멈칫멈칫하더니 기껏 하는 소리가 그 소리야. 그 왼 얼굴에 억지로 웃음을 맨들어 가지구 애교를 부리는 꼴이란 원 그 양복 값이나 해야지."
"게 뭬 그리 웃어."
인환은 통명스레 쏴 붙였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양복 값을 하라니 추근추근 연애나 청해 줬으면 좋겠단 말인가."
고만 희경의 얼굴에서는 웃음은 사라지고 루즈로 단장한 입술이 삐죽하게 나왔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면 그런 것은 모두 그때 뿐이었다. 인환에게는 어쩐 일인지 M이라는 매니저 일이 일상 심중에 불안하였다. M에 대해서는 희경은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에게 핸드백을 받았던 것도 그 후에 여러 날 머뭇거리다가 끝내 그것을 돌려보낸 것도, 그래도 M은 단념하지 않고 기회 있을 때마다 눈치를 보인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인환을 보고 M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어쩐지 싫은 것이다. 그러나 인환은 스스로도 이상스럽게 생각될 만큼 M의 일이 일상 마음에 거리꼈다. 언젠가 〈마유미〉의 이야기라고 M이 여자에게 대해서는 기막힌 수완가라고 희경이 잠깐 하던 말까지 암만해도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M의 이야기를 할 때면 억지로 무관심한 태도를 만들고 그나마도 조금 꺼내다가는 얼른 집어치우는 희경의 태도가 도리어 인환에게 그런 감정을 일으킨 것인지도 모른다. 인환은 남는 시간과 쓸데없는 잡념을 지워 버리려고 원고지를 사다 놓고 소설이라는 것을 쓰기 시작했다.
문학에는 학생 시절에도 상당히 흥미를 갖고 있었고 지금도 신문소설은 거의 빼놓지 않고 읽으면서 그런 정도의 것이면 자기도 넉넉히 쓸 수 있다고 생각해 오던 것이다. 혹시 이러고 있다가 좋은 소설을 써서 소설가로서 출세를 하고 그것으로 먹고살게 되었으면 하는 실낱같은 희망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 딴은 꽤 자신이 있는 소설을 둘이나 써서 C와 T 두 신문사로 보낸 결과는 열흘이 지나고 스무 날이 지나도 받았다는 엽서 한 장 없었다. 그리고 보니 신문에 나는 남의 소설을 읽어도 공연히 반감 밖에는 나는 것이 없다.
"이까짓 것을 소설이라구."
그는 읽고 나서는 신문을 내던진다. 그래도 할 일이 없어 밤이면 역시 원고지를 펴놓고 앉았는데 어느날 밤 희경이 돌아와서 "어때요 이 머리." 하며 뒤통수를 둘러댔다. 보니 아침에 집을 나갈 때까지 올라 앉았던 〈심프손〉 머리는 간 곳 없고 바싹 잘린 머리에 전기로 지진 웨이브만이 산란하다.
"뭐야 건."
인환은 소설 안되는 분풀이를 희경에게 하려는 듯이 단번에 달려든다.
"퍼머넌트."
"핏!"
"왜 그래. 지금 이렇지만 내일 아침에 풀면 아주 달러진다우."
희경은 인환의 불평이 머리 모양에 있는 것으로 해석한 모양이다.
"이 모양이 동경 최신유행이라는데. 그릴 위층에 있는 〈허리우드〉 미용원에 동경서 미용사가 새루 왔는데 퍼머넌트엔 동경서두 유명한 이래요. 그릴 매니저하군 동경서부터 친한 이래서 그릴에 있는 애들이-"
동경 동경 하는 것도 듣기 싫었으나 매니저 하는데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매니저?"
"M 말이야."
그래도 희경은 인환의 눈치를 모르는 모양으로,
"그래 그릴에 있는 애들이 모두들 한다기에 나두 했는데, 오 원이면 헐 허지 않우."
"오 원!"
"싸지 뭐. 보통이면 칠 원인데 것두 M이 말해서 특별히 싸게 헌 것이라우."
"M이 왜 남의 머리까지 참견하는 거야."
그것에는 상관없이
"오 원이래두 생각해 보면 싸지 뭐유. 한 번만 이렇게 해 놓으면 반년은 간다니까 반 년 동안 머리 치장하자면 오 원만 들우. 싸구 편허구 신식이구."
그러나 인환은 그런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M에게로만 신경이 끌렸다. 지금 이 가난한 살림에 오 원이나 되는 큰돈을 낭비한 것이 괘씸하다는 것이 아니다. 퍼머넌트를 한 희경의 자태는 사실 인환의 감각에도 「신식」으로 보였다. 그러니 만큼 M이 희경에게 퍼머넌트를 권하고 희경을 위해 값까지 깎아 주고 희경은 또 M의 말을 듣고 그대로 한 것을 생각하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M은 자기 취미대로 희경을 변화시키려 하고 희경은 M의 취미에 맞도록 변해 가는 것이 아닌가 .
"그래도 오 원이면 얼마야!"
인환은 그러나 M에 대한 질투를 돈에 대한 불평으로 바꿔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다 할 까닭도 없이 질투를 가지고 아내에게 대드는 것은 남편으로서의 수치라고 밖에 생각 안되는 그의 「결벽」때문에-. 그런 일이 있은지 며칠 후 희경은 그 날 그릴에서 종업원 위로회가 있기 때문에 밤에 좀 늦게 되겠다고 말해 놓고 집을 나갔다. 열 시에 가게문을 닫고 그제서부터 회를 시작해 여흥까지 한다니까 자정은 되어야 집에 돌아오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열두 시까지 인환은 별 잡념 없이 앉아 기다렸으나 열두 시가 지난지 삼십분은 되어도 희경은 돌아오지 않았다. 끝내 마지막 전차가 전속력으로 달아나는 소리가 들린다. 웬일일까. 인환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조바심 나기 시작하였다. -위안회가 의외로 늦는 것이겠지. 원고지 나부랑이를 치우고 이불을 쓰고 누웠으나 점점 눈이 말똥말똥 해질 뿐이다. 혼인한지 삼 년, 희경은 한 번도 혼자 밖에 나가 자정을 지낸 일이 없는 것이었다. 안방 벽시계가 한시를 친다. 참다 못해 일어나 안국동 자동전화로 가서 〈J그릴〉로 전화를 걸었다. 찌르르‥‥‥ 하고 저쪽에 가 종 울리는 소리가 수화기로 들리는데도 좀처럼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교환수가 암만 불러도 나오지 않는다고 끊으라는 것을 인환은 끊고 또 걸고, 끊고 또 걸고 그럴리 없으니 더 불러보라고 싸우다시피 해 십 분은 된 후에 겨우 통했다. 〈리에상〉을 불러 달랬더니 하품 섞인 퉁명스런 소리로 지금 몇 신 줄 아느냐, 〈리에상〉은 열 시면 나간다는 대답이다.
"아니 오늘 저녁엔 종업원 위안회가 있지 않았소?"
인환이 숨이 가쁘게 물으니까,
"벌써 파한 지가 옛날이요."
하고 더 말할 사이도 없이 탁 끊어버렸다. 전화로 모욕당한 것만 해도 엔간히 분했지만 그보다도 희경에 대한 근심이 더 컸다. 대체 희경은 어디로 간 것인가. 그 자의 말로 봐서 종업원 위안회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벌써 옛날에 파했다면‥‥‥ 자동전화 옆 파출소를 들여다보니 시계는 벌써 한시 반을 지났다. 이불 속으로 들?載Т?, 일어났다, 담배를 피웠다 했으나 희경은 종시 돌아오지 않는다. 두 시가 지난 것도 벌써 옛날, 다시 세시 치는 소리가 들린다.
희경을 믿으려는 노력도 어지간히 했으나 그와 정비례해서 아니 그보다는 무한히 큰 속도로 불안과 의심이 각각으로 자라갔다. 인제는 나지 않는 생각이 없다. 술에 취해 어디 가 쓰러졌나. 자기를 버리고 도망을 간 것인가, 그렇다면 상대자는 M? S? 보통 때 무심코 넘겼던 가지가지 일까지 모두 무슨 의미가 있던 것으로 생각된다. 언젠가 본 〈괴테〉의 말. 아, 무서운 악마의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슨 일이 있다면 희경을 오늘 저녁에 무사히 돌려보내 주소서. 희경이 돌아온 것은 네 시가 거의 다 되었을 때였다. 삐걱 하고 일각문 소리가 들리자 지금까지의 초조는 단번에 사라지고 기쁨과 분노가 동시에 폭발했다.
아, 인제 왔다는 기쁨. 왜 인제서야 왔느냐는 노염. 그러나 술 취한 다리를 비틀거리며 희경이 드르륵 미닫이를 열었을 때에는 인환은 무서운 노기로만 얼굴을 채웠다.
"어디 갔다 인제 와. 아주 내일 아침에 들어오지."
먹을 줄 모르는 술을 먹은 데다가 밤을 세워 창백하게 질린 얼굴. 함부로 엉클어진 퍼머넌트 머리. 구기구기한 양복. 희경은 인환에게는 아무 대답도 않고 자기 딴은 조심조심하는 모양이나 옷장으로 가는 다리가 휘청휘청한다 .
"어디 갔다 왔느냐니까?"
인환은 노기를 억지로 누르고 또 한 번 물었다. 희경은 인환 쪽은 향하지도 않고 블라우스를 벗어 걸고 스커트의 호크를 딴다.
"이차회?"
"모두들 가자구 자꾸 끌어서."
돌아앉아 넓적다리까지 올라간 양말을 벗는다.
"누구들이?"
"〈마유미〉랑 〈쯔바기〉랑-"
왜 대답을 시원스럽게 못하는가! 인환은 속이 우글우글 끓는다.
"여자들끼리만?"
"매니저가 한 턱 쓴다고 자꾸 끄는데 〈마유미〉랑 그 애들이 자꾸 가자구 가자구 그래서."
시미즈는 벗도 않고 그 위에 그냥 자리옷을 뒤집어쓰고 자리로 온다.
"회계 보는 Y-"
"왜 말을 시원스럽게 못해!"
내내 말소리가 커졌다.
"그래 어딜 갔어?"
"뭐라던가 애국장이라던가."
말하고 희경은 더 말하기가 귀찮다는 듯이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눕는다.
귀찮다느니 보다도 대답할 말이 없어서 우정 그러는 것 같기도 하다.
"애국장? 뭐하는 데야?"
"술 파는 데지!"
이번에는 역습이다.
"어디 있는 거야?"
너무 짓궂게 묻는 것 같기도 하고 묻다가 희경의 입에서 불길한 말이 나오지 않도록 인환은 하나님한테라도 부탁하는 마음이다.
"시그문 밖."
"시그문 밖 어디."
"어딘지 누가 알우. 자동찰 타구 산 속으로 꼬불꼬불 얼말 갔으니까."
"산 속으루?"
"ㅡㅡ"
희경의 대답은 인환이 바라지 않는 방향으로 나간다. 자정이 넘어 젊은 남자와 여자가 산 속 요리집으로 간다. -더구나 M같이 정평 있는 남자가.
그러다가 생각하니 애국장이란 언젠가 누구한테 들은 법한 이름이다.
"애국장이라너 〈마찌아이〉 말이지?"
"마찌아인지 뭔지 누가 알우."
희경은 하품을 한 번 하고 눈을 감으려 한다.
"왜 말을 시원스레 못해! 밤중에 늦게 왔으면 어찌어찌 됐단 말을 해야잖어?"
"그러게 말하지 않었우."
"거기 가서는 어떻게 됐어. 뭘 하게 여태까지 있는 게야?"
"올라구 해두 자동차두 안 불러 주구 자꾸 붙들어서."
"그래?"
희경은 하품을 또 한 번 하고,
"술을 어떻게 퍼멕이는지."
"좀 말을 똑똑히 해요!"
"그저 그렇지 뭐."
그 이상은 말하기 싫다는 눈치다.
"M이 뭐라구 헙디까?"
"뭔 뭐요."
"여럿이 한테서들 놀았소?4 "-"
그래도 대답이 없다. 인환은 잠들려는 희경을 흔들어서라도 깨워 가지고 더 꼬치꼬치 캐물어 보고 싶었으나 어째 무서웠다. 그만큼 안 것으로도 마음의 괴로움은 컸다. 그 이상 다시 더 무슨 말이 나온다면-. 그러나 눈을 감고 누운 희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생각은 점점 더 황당한 방향으로 달음질쳤다. 〈마찌아이〉라는 데는 인환은 근처도 못 가본 곳이지만 어떤 곳인지 대강 짐작은 된다. 여자와 단둘이 주고받고 하는 깨끗한 방, 옆엣 간에는 벌써 하녀가 음탕한 남녀를 위해 비단금침을 펴놓고 머리맡에는 냉수까지 떠다 놓고. 오늘 저녁에는 여럿이 같이 갔다 하지만 가기는 같이 가도 따로따로 놀 수도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희경이 다만 M과 단 둘이서 여태까지 놀고 온 것이라면- 아, 무서운 생각이다. 그러고 보니 벽에 걸린 파김치같이 꾸긴 스커트가 눈으로 가뜩 들어온다.
눈을 자는 희경에게로 옮긴다. 수세미가 된 머리. 창백한 안색. 분 벗겨진 뺨. 반쯤 벌린 입술. 아아, 만일 M이 저 뺨 저 입에다가 후끈후끈 한 술내 나는 입김을 들어 부운 것이라면-. 별안간 울음이 참을 수 없기 북받쳐 올라왔다. 동시에 맹렬한 애욕과 미움이 함께 폭발하였다. 그대로 있다가는 미친 동물처럼 자는 희경에게로 덤벼들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그런 위경을 벗어나기 위한 다만 한 개의 길은 거치른 폭력의 행사 밖에는 없었다. 쩔걱 하고 희경의 뺨을 후려갈겼다. 잇달아 또 한 번, 잇달아 또 한 번 더. 그러다 보니 마음이 진정되기는커녕 점점 더 들끓어 올랐다. 만일 여기서 희경이 일어나 대어든다면 당장에 죽여버릴 수라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희경은 가만히 눈을 뜨고 "이 이가 미쳤나." 한 마디 하였을 뿐 저편으로 돌아누워 이불을 푹 뒤집어 써 버렸다.